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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9 (화) [하루 한 장]“안식에 들어갈 약속” (히4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히브리서 4장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지키던 안식일의
규례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 인간이 지킨다고
지킬 수 있는 규례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검과도 같아서 우리가 도저히
그 앞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이 다 드러나고 실패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당당히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우리를 위해 대속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우리는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에 들어갈 약속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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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히브리서 제 4장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 )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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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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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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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주석
히브리서 제 4장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
)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
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
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Lane).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
절;3: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
)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
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
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Lane). 그래
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
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
‘약속'(* , 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
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
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
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Morris).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
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
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
가 되었다(1:14;6:12,17;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 , ‘판단하다’, ‘가정하다’)를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
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
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Moffatt, Stuart).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
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Dod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
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Morris).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스메노이'(* )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조'(* )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
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
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에 해당하
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가지이다. (1)’말씀'(* ,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
인 ‘슁케케라스메노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
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저희'(* , 에케이누
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 )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
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
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한편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 )는 본서에서 ‘순종’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Morris).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
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의 헬
라어 ‘에이세르코메다'(* )는 ‘에이세르코마이'(* )
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
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
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istemaker, Lane, Montefiore). (2)혹자는 그리스도
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Bruce).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
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 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
(* , 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
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Morris, Bruce). 그
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
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
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
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H-
ewitt, Morris).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
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Bruce).
=====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
(출20:11;31:17) ‘어디 이렇게'(* , 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
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
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
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
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Hewitt).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4:5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다시’에 해당하는
‘팔린'(* )은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
는 독특한 표현방법이다(1:5;2:13;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
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
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
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Lane, Schroger).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
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4:6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페타
이'(* )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
효함을 시사한다(Lane).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
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Lane).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란 시
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13:26;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11,12;21-23). ‘순종치 아니
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3:10;롬
11:30).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 ‘오랜 후에'(* , 메타 토수톤 크
로논)는 광야 시대 이후부터 다윗의 때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Robertson). 한편
‘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윗의 글에’라는 표
현은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70인역에는 시 95편의 제목
으로 ‘아이노스 오데스 토 다우에이드'(* , ‘다윗의 찬양’)이라
고 기록되어 다윗이 지은 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70인역을 따라 ‘다윗의 글
에’라는 구절이 틀림없이 다윗이 쓴 시편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elitzsch). 그러
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
셨다는 사실이다(Bruce).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
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
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
한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
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
임을 나타낸다(Lane, Hofius).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
면한다.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
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
다(신3:20;12:9;25:19;수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21:44;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
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
이점이 발생한다(Lane).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
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
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
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 , 예수스)라
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
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 , 예수스)
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Morris).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
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Lane).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 )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
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chanan).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
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25:19), 근
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
고 주장한다(Morris, Hewitt, Rendall).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
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ustin, Hofius).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
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
(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
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
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
(마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
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
도’로 해석한다(Ebrard, Alford, KJV, LB).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
(Morris, Hewitt). 이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
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이셀돈'(* )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
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for whoever enters God’s rest, RSV, NIV, De Wette, Vince-
nt).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
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
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
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
서 누리게 될 것이다(Morris).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의 헬라어 ‘스푸다소
멘'(* )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
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Lane).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이스
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티'(* )는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
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
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
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
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
나니 – ‘혼과 영'(* ,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
골수'(* ,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
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이이크누메노스'(* )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
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
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
리티코스'(* )는 법정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
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
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5:17;갈6:15)
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헬라어 ‘아파네스'(* )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아'(* )와 ‘보이다’를 의미하는 ‘파이노'(* )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
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Lane).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
리를 상관하시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 )
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
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드러나느니라’의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나'(* )는 ‘목(* , 트라켈로스)을 뒤로 젖
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
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
(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
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
고 있다(Lane).
=====4:14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
, 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
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
함을 나타낸다(Lane).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예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
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승천하신 자’의 헬라어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
누스'(* )에서 ‘디엘렐뤼도타’는 ‘…통하여 지나가다’라
는 뜻을 지닌 동사 ‘디에르코마이'(* )의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그리스도
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
곳으로 가셨음을 뜻한다(Morris).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
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
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Hewitt).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
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Hewitt).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
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근거가
된다.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 )는 ‘고
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
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Lane, Neufeld, Bornkamm). 한편 ‘굳게 잡을지어다’의 헬라어 ‘크라토멘'(* )
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
키라는 권고이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연약
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
고 있는 표현이다(Hewitt). 한편 ‘체휼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파데사이'(*
)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 )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
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
(10:34;13:23;4Macc 4:25, Lane).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 , 우…메)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
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Schenk). 예수께
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
이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
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Lane, Cullmann)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
셨음을 나타낸다(Bruce,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
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
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혹자는 본문의 내용 즉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Buchanan, Williamson).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
(2)혹자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
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Bruce). 이 두 가
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에 해당하는 헬라
어 ‘카드 호모이오테타'(* )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
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Lane).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
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
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
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
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
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 )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 )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 )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
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
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보좌’의 헬라어 ‘드로노'(* )
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
(1:3,8)를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
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
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출25:21,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
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
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헬라어 히브리서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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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베도멘 운 메포테 카탈레이포메네스 에팡겔리아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아우투 도케 티스 엨스 휘몬 휘스테레케나이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새번역,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남아 있을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 혹 누구라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합시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영어NIV,1 Therefore, since the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still stands, let us be careful that none of you be found to have fallen short of it.
영어NASB,1 Therefore, let us fear if, while a promise remains of entering His rest, any one of you may seem to have come short of it.
영어MSG,1 For as long, then, as that promise of resting in him pulls us on to God’s goal for us, we need to be careful that we’re not disqualified.
영어NRSV,1 Therefore, while the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is still open, let us take care that none of you should seem to have failed to reach it.
헬라어신약Stephanos,1 φοβηθωμεν ουν μηποτε καταλειπομενης επαγγελιας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αυτου δοκη τις εξ υμων υστερηκεναι
라틴어Vulgate,1 timeamus ergo ne forte relicta pollicitatione introeundi in requiem eius existimetur aliqui ex vobis deesse
히브리어Modern,1 על כן נירא נא בהמצא עוד ההבטחה לבוא אל מנוחתו פן יראה איש מכם מאחר פעמיו׃
성 경: [히4:1]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Lane).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절;3: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Lane). 그래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약속'(*, 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Morris).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었다(1:14;6:12,17;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 ‘판단하다’, ‘가정하다’)를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Moffatt, Stuart).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Dod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Morris).
카이 가르 에스멘 유앙겔리스메노이 카다페르 카케이노이 알 우크 오펠레센 호 로고스 테스 아코에스 에케이누스 메 슁케케라스메누스 테 피스테이 토이스 아쿠사신
개역개정,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새번역,2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2 그들처럼 우리도 복음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무익했던 것은 그들이 들은 말씀과 믿음을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어NIV,2 For we also have had the gospel preached to us, just as they did; but the message they heard was of no value to them, 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영어NASB,2 For indeed we have had good news preached to us, just as they also; but the word they heard did not profit them, because it was not united by faith in those who heard.
영어MSG,2 We received the same promises as those people in the wilderness, but the promises didn’t do them a bit of good because they didn’t receive the promises with faith.
영어NRSV,2 For indeed the good news came to us just as to them; but the message they heard did not benefit them, because they were not united by faith with those who listened.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γαρ εσμεν ευηγγελισμενοι καθαπερ κακεινοι αλλ ουκ ωφελησεν ο λογος της ακοης εκεινους μη συγκεκραμενος τη πιστει τοις ακουσασιν
라틴어Vulgate,2 etenim et nobis nuntiatum est quemadmodum et illis sed non profuit illis sermo auditus non admixtis fidei ex his quae audierunt
히브리어Modern,2 כי גם אלינו באה הבשורה כמו אליהם אך לא הועיל להם דבר השמועה מפני אשר לא התערב באמונה לשמעים׃
성 경: [히4:2]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스메노이'(*)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유앙겔리조'(*)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 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가지이다. (1)’말씀'(*,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인 ‘슁케케라스메노스'(*)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저희'(*, 에케이누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로 읽는다. 이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Morris,Moffatt, Hewitt). 한편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는 본서에서 ‘순종’과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Morris).
에이세르코메다 가르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호이 피스튜산테스 카도스 에이레켄 호스 오모사 엔 테 오르게 무 에이 에이셀류손타이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무 카이토이 톤 에르곤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게네덴톤
개역개정,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새번역,3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때부터 안식이 있어온 것입니다. / ㉠시 95:11
우리말성경,3 그런데 믿는 우리들은 그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가 진노해 맹세한 것처럼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그분의 일들이 이뤄져 왔습니다. 시95:11
가톨릭성경,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영어NIV,3 Now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God has said, “So I declared on oath in my anger,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And yet his work has been finished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영어NASB,3 For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He has said, ” AS I SWORE IN MY WRATH,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although His works were finish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영어MSG,3 If we believe, though, we’ll experience that state of resting. But not if we don’t have faith. Remember that God said, Exasperated, I vowed, “They’ll never get where they’re going, never be able to sit down and rest.” God made that vow, even though he’d finished his part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영어NRSV,3 For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God has said, “As in my anger I swore,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though his works were finished at the foundation of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ισερχομεθα γαρ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οι πιστευσαντες καθως ειρηκεν ως ωμοσα εν τη οργη μου ει εισελευσονται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μου καιτοι των εργων απο καταβολης κοσμου γενηθεντων
라틴어Vulgate,3 ingrediemur enim in requiem qui credidimus quemadmodum dixit sicut iuravi in ira mea si introibunt in requiem meam et quidem operibus ab institutione mundi factis
히브리어Modern,3 כי באי המונה אנחנו המאמינים כמו שאמר אשר נשבעתי באפי אם יבאון אל מנוחתי אף כי נגמרו מעשי יהוה מעת הוסד העולם׃
성 경: [히4:3]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의 헬라어 ‘에이세르코메다'(*)는 ‘에이세르코마이'(*)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istemaker, Lane, Montefiore).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Bruce).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 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Morris, Bruce). 그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H-ewitt, Morris).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Bruce).
에이레켄 가르 푸 페리 테스 헵도메스 후토스 카이 카테파우센 호 데오스 엔 테 헤메라 테 헵도메 아포 판톤 톤 에르곤 아우투
개역개정,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새번역,4 일곱째 날에 관해서는 어딘가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는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하였고, / ㉡창 2:2(칠십인역)
우리말성경,4 어디엔가 제7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그분의 모든 일을 쉬셨다.” 창2:2
가톨릭성경,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영어NIV,4 For somewhere he has spoken about the seventh day in these words: “And on the seventh day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영어NASB,4 For He has thus said somewhere concerning the seventh day, “AND GOD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S”;
영어MSG,4 Somewhere it’s written, “God rested the seventh day, having completed his work,”
영어NRSV,4 For in one place it speaks about the seventh day as follows, “And God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s.”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ιρηκεν γαρ που περι της εβδομης ουτως και κατεπαυσεν ο θεος εν τη ημερα τη εβδομη απο παντων των εργ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4 dixit enim quodam loco de die septima sic et requievit Deus die septima ab omnibus operibus suis
히브리어Modern,4 כי על היום השביעי אמר במקום אחד וישבת ביום השביעי מכל מלאכתו׃
성 경: [히4:4]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출20:11;31:17) ‘어디 이렇게'(*, 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Hewitt).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카이 엔 투토 팔린 에이 에이셀류손타이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무
개역개정,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새번역,5 또 이 곳에서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시 95:11
우리말성경,5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가톨릭성경,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영어NIV,5 And again in the passage above he says,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영어NASB,5 and again in this passage,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영어MSG,5 but in this other text he says, “They’ll never be able to sit down and rest.”
영어NRSV,5 And again in this place it says,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εν τουτω παλιν ει εισελευσονται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μου
라틴어Vulgate,5 et in isto rursum si introibunt in requiem meam
히브리어Modern,5 ובמקום הזה אמר עוד אם יבאון אל מנוחתי׃
성 경: [히4:5]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은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1:5;2:13;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Lane, Schroger).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에페이 운 아폴레이페타이 티나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아우텐 카이 호이 프로테론 유앙겔리스덴테스 우크 에이셀돈 디 아페이데이안
개역개정,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새번역,6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먼저 들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말성경,6 이와 같이 이제 어떤 이들에게는 저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남아 있지만 복음을 먼저 전해 들은 사람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6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영어NIV,6 It still remains that some will enter that rest, and those who formerly had the gospel preached to them did not go in, because of their disobedience.
영어NASB,6 Since therefore it remains for some to enter it, and those who formerly had good news preached to them failed to enter because of disobedience,
영어MSG,6 So this promise has not yet been fulfilled. Those earlier ones never did get to the place of rest because they were disobedient.
영어NRSV,6 Since therefore it remains open for some to enter it, and those who formerly received the good news failed to enter because of disobedience,
헬라어신약Stephanos,6 επει ουν απολειπεται τινας εισελθειν εις αυτην και οι προτερον ευαγγελισθεντες ουκ εισηλθον δι απειθειαν
라틴어Vulgate,6 quoniam ergo superest quosdam introire in illam et hii quibus prioribus adnuntiatum est non introierunt propter incredulitatem
히브리어Modern,6 ויען כי יש עוד מקום לבוא אליה ואשר התבשרו בראשונה המה לא באו שם בעבור המרי׃
성 경: [히4:6]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페타이'(*)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효함을 시사한다(Lane).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Lane).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란 시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13:26;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11,12;21-23). ‘순종치 아니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3:10;롬11:30).
팔린 티나 호리제이 헤메라 세메론 엔 다윋 레곤 메타 토수톤 크로논 카도스 파로에이레타이 세메론 에안 테스 포네스 아우투 아쿠세테 메 스클레뤼네테 타스 카르디아스 휘몬
개역개정,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새번역,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떤 날을 정하시고, 이미 인용한 말씀대로, 오랜 뒤에 다윗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시 95:7; 8
우리말성경,7 그러므로 이미 인용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오랜 후에 어느 한 날을 정해 ‘오늘’이라 하시고 다윗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시95:7-8
가톨릭성경,7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 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 앞서 인용한 대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윗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영어NIV,7 Therefore God again set a certain day, calling it Today, when a long time later he spoke through David, as was said before: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영어NASB,7 He again fixes a certain day, “Today,” saying through David after so long a time just as has been said before,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영어MSG,7 God keeps renewing the promise and setting the date as today, just as he did in David’s psalm, centuries later than the original invitation: Today, please listen, don’t turn a deaf ear . . .
영어NRSV,7 again he sets a certain day–“today”–saying through David much later, in the words already quoted,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헬라어신약Stephanos,7 παλιν τινα οριζει ημεραν σημερον εν δαβιδ λεγων μετα τοσουτον χρονον καθως ειρηται σημερον εαν της φωνης αυτου ακουσητε μη σκληρυνητε τας καρδιας υμων
라틴어Vulgate,7 iterum terminat diem quendam hodie in David dicendo post tantum temporis sicut supra dictum est hodie si vocem eius audieritis nolite obdurare corda vestra
히브리어Modern,7 לכן הוסיף לקבוע יום באמרו היום על ידי דוד מקץ ימים רבים כמו שנאמר היום אם בקלו תשמעו אל תקשו לבבכם׃
성 경: [히4:7]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 ‘오랜 후에'(*, 메타 토수톤 크로논)는 광야 시대 이후부터 다윗의 때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Robertson). 한편’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윗의 글에’라는 표현은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70인역에는 시 95편의 제목으로 ‘아이노스 오데스 토 다우에이드'(*, ‘다윗의 찬양’)이라고 기록되어 다윗이 지은 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70인역을 따라 ‘다윗의 글에’라는 구절이 틀림없이 다윗이 쓴 시편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elitzsch).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Bruce).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한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나타낸다(Lane, Hofius).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에이 가르 아우투스 예수스 카테파우센 우크 안 페리 알레스 엘랄레이 메타 타우타 헤메라스
개역개정,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새번역,8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른 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을 안식처로 이끌었다면, 하느님께서 나중에 다른 날에 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영어NIV,8 For if Joshua had given them rest, God would not have spoken later about another day.
영어NASB,8 For if Joshua had given them rest, He would not have spoken of another day after that.
영어MSG,8 And so this is still a live promise. It wasn’t canceled at the time of Joshua; otherwise, God wouldn’t keep renewing the appointment for “today.”
영어NRSV,8 For if Joshua had given them rest, God would not speak later about another day.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 γαρ αυτους ιησους κατεπαυσεν ουκ αν περι αλλης ελαλει μετα ταυτα ημερας
라틴어Vulgate,8 nam si eis Iesus requiem praestitisset numquam de alio loqueretur posthac die
히브리어Modern,8 כי אלו יהושע הניח להם לא היה מדבר אחרי זאת על יום אחר׃
성 경: [히4:8]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다(신3:20;12:9;25:19;수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21:44;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이점이 발생한다(Lane).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 예수스)라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 예수스)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Morris).
아라 아폴레이페타이 삽바티스모스 토 라오 투 데우
개역개정,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새번역,9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아직도 참안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영어NIV,9 There remains, then, a Sabbath-rest for the people of God;
영어NASB,9 There remains therefore a Sabbath rest for the people of God.
영어MSG,9 The promise of “arrival” and “rest” is still there for God’s people.
영어NRSV,9 So then, a sabbath rest still remains for the people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αρα απολειπεται σαββατισμος τω λαω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9 itaque relinquitur sabbatismus populo Dei
히브리어Modern,9 על כן נשארה עוד מנוחת שבת לעם אלהים׃
성 경: [히4:9]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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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a절 | |
| | (아폴레이페타이 티나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아우텐) |
| |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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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절 | |
| | (아폴레이페타이 삽바티스모스 토 라오 투 데우) |
| |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chanan).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25:19),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Hewitt, Rendall).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ustin, Hofius).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마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호 가르 에이셀돈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아우투 카이 아우토스 카테파우센 아포 톤 에르곤 아우투 호스페르 아포 톤 이디온 호 데오스
개역개정,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새번역,10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이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쉬셨던 것처럼 그 자신도 자기의 일을 쉬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0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그분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이도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영어NIV,10 for anyone who enters God’s rest also rests from his own work, just as God did from his.
영어NASB,10 For the one who has entered His rest has himself also rested from his works, as God did from His.
영어MSG,10 God himself is at rest. And at the end of the journey we’ll surely rest with God.
영어NRSV,10 for those who enter God’s rest also cease from their labors as God did from hi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γαρ εισελθων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αυτου και αυτος κατεπαυσεν απο των εργων αυτου ωσπερ απο των ιδιων ο θεος
라틴어Vulgate,10 qui enim ingressus est in requiem eius etiam ipse requievit ab operibus suis sicut a suis Deus
히브리어Modern,10 כי הבא אל מנוחתו גם הוא שבת ממלאכתו כמו האלהים משלו׃
성 경: [히4:10]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한다(Ebrard, Alford, KJV, LB).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Morris, Hewitt). 이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셀돈'(*)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for whoever enters God’s rest, RSV, NIV, De Wette, Vince-nt).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Morris).
스푸다소멘 운 에이셀데인 에이스 에케이넨 텐 카타파우신 히나 메 엔 토 아우토 티스 휘포데이그마티 페세 테스 아페이데이아스
개역개정,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와 같이 불순종의 본을 따라 멸망하지 않도록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가톨릭성경,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영어NIV,11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by following their example of disobedience.
영어NASB,11 Let us therefore be diligen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through following the same example of disobedience.
영어MSG,11 So let’s keep at it and eventually arrive at the place of rest, not drop out through some sort of disobedience.
영어NRSV,11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may fall through such disobedience as theirs.
헬라어신약Stephanos,11 σπουδασωμεν ουν εισελθειν εις εκεινην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ινα μη εν τω αυτω τις υποδειγματι πεση της απειθειας
라틴어Vulgate,11 festinemus ergo ingredi in illam requiem ut ne in id ipsum quis incidat incredulitatis exemplum
히브리어Modern,11 לכן נשקדה נא לבוא אל המנוחה ההיא למען אשר לא יכשל איש והיה ממרה כמוהם׃
성 경: [히4:11]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의 헬라어 ‘스푸다소멘'(*)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Lane).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이스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티'(*)는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존 가르호 로고스 투 데우 카이 에네르게스 카이 토모테로스 휘페르 파산 마타이란 디스토몬 카이 디이크누메노스 아크리 메리스무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 카이 크리티코스 엔뒤메세온 카이 엔노이온 카르디아스
개역개정,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새번역,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우리말성경,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양날 선 어떤 칼보다도 더 예리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냅니다.
가톨릭성경,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영어NIV,12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영어NASB,12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and piercing as far as the division of soul and spirit, of both joints and marrow, and able to judge the thoughts and intentions of the heart.
영어MSG,12 God means what he says. What he says goes. His powerful Word is sharp as a surgeon’s scalpel, cutting through everything, whether doubt or defense, laying us open to listen and obey.
영어NRSV,12 Indeed,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until it divides soul from spirit, joints from marrow; it is able to judge the thoughts and intentions of the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ζων γαρ ο λογος του θεου και ενεργης και τομωτερος υπερ πασαν μαχαιραν διστομον και διικνουμενος αχρι μερισμου ψυχης τε και πνευματος αρμων τε και μυελων και κριτικος ενθυμησεων και εννοιων καρδιας
라틴어Vulgate,12 vivus est enim Dei sermo et efficax et penetrabilior omni gladio ancipiti et pertingens usque ad divisionem animae ac spiritus conpagum quoque et medullarum et discretor cogitationum et intentionum cordis
히브리어Modern,12 כי דבר האלהים חי הוא ופעל גבורות וחד מחרב פיפיות ונכנס עד להבדיל בין נפש לרוח ובין הדבקים למוח ובחן מחשבות לבב ומזמותיו׃
성 경: [히4:12]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거 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골수'(*,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이크누메노스'(*)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리티코스'(*)는 법정 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카이 우크 에스틴 크티시스 아파네스 에노피온 아우투 판타 데 귐나 카이 테트라켈리스메나 토이스 옾달모이스 아우투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
개역개정,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새번역,13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말성경,13 그러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진술을 받으실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NIV,13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영어NASB,13 And there is no creature hidden from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open and laid bare 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
영어MSG,13 Nothing and no one is impervious to God’s Word. We can’t get away from it–no matter what.
영어NRSV,13 And before him no creature is hidden, but all are naked and laid bare to the eyes of the one to whom we must render an account.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ουκ εστιν κτισις αφανης ενωπιον αυτου παντα δε γυμνα και τετραχηλισμενα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αυτου προς ον ημιν ο λογος
라틴어Vulgate,13 et non est ulla creatura invisibilis in conspectu eius omnia autem nuda et aperta sunt oculis eius ad quem nobis sermo
히브리어Modern,13 ואין כל נברא נסתר מנגדו כי הכל חשוף וגלוי לעיני בעל דברים שלנו׃
성 경: [히4:13]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5:17;갈6:15) 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헬라어 ‘아파네스'(*)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아'(*)와 ‘보이다’를 의미하는 ‘파이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Lane).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드러나느니라’의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나'(*)는 ‘목(*, 트라켈로스)을 뒤로 젖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Lane).
에콘테스 운 아르키에레아 메간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누스 예순 톤 휘온 투 데우 카르토멘 테스 호몰로기아스
개역개정,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새번역,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말성경,14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시니 우리가 고백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가톨릭성경,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영어NIV,14 Therefore,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irmly to the faith we profess.
영어NASB,14 Since then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ast our confession.
영어MSG,14 Now that we know what we have–Jesus, this great High Priest with ready access to God–let’s not let it slip through our fingers.
영어NRSV,14 Since, then,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ast to our confession.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χοντες ουν αρχιερεα μεγαν διεληλυθοτα τους ουρανους ιησουν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 κρατωμεν της ομολογιας
라틴어Vulgate,14 habentes ergo pontificem magnum qui penetraverit caelos Iesum Filium Dei teneamus confessionem
히브리어Modern,14 ועתה בהיות לנו כהן ראש גדול אשר עבר בשמים הוא ישוע בן האלהים נחזיקה בהודאתנו׃
성 경: [히4:14]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 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함을 나타낸다(Lane).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예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승천하신 자’의 헬라어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누스'(*)에서 ‘디엘렐뤼도타’는 ‘…통하여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디에르코마이'(*)의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곳으로 가셨음을 뜻한다(Morris).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Hewitt).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Hewitt).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근거가 된다.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Lane, Neufeld, Bornkamm). 한편 ‘굳게 잡을지어다’의 헬라어 ‘크라토멘'(*)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권고이다.
우 가르 에코멘 아르키에레아 메 뒤나메논 쉼파데사이 타이스 아스데네이아이스 헤몬 페페이라스메논 데 카타 판타 칻 호모이오테타 코리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새번역,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우리말성경,15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영어NIV,15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yet was without sin.
영어NASB,15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영어MSG,15 We don’t have a priest who is out of touch with our reality. He’s been through weakness and testing, experienced it all–all but the sin.
영어NRSV,15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in every respect has been tested as we are, yet without si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υ γαρ εχομεν αρχιερεα μη δυναμενον συμπαθησαι ταις ασθενειαις ημων πεπειραμενον δε κατα παντα καθ ομοιοτητα χωρις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15 non enim habemus pontificem qui non possit conpati infirmitatibus nostris temptatum autem per omnia pro similitudine absque peccato
히브리어Modern,15 כי אין לנו כהן גדול אשר לא יוכל להצטער על חליינו כי אם המנסה בכל כמונו אך בלי חטא׃
성 경: [히4:15]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Hewitt). 한편 ‘체휼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파데사이'(*)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10:34;13:23;4Macc 4:25, Lane).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Schenk).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Cullmann)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Bruce,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혹자는 본문의 내용 즉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Buchanan, Williamson).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2)혹자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Bruce).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드 호모이오테타'(*)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Lane).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프로세르코메다 운 메타 파르레시앗 토 드로노 테스 카리토스 히나 라보멘 엘레오스 카이 카린 휴로멘 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개역개정,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새번역,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자비하심을 얻고 필요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가톨릭성경,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영어NIV,16 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영어NASB,16 Let us therefore draw near with confidence to the throne of grace,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may find grace to help in time of need.
영어MSG,16 So let’s walk right up to him and get what he is so ready to give. Take the mercy, accept the help.
영어NRSV,16 Let us therefore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boldness,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in time of need.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ροσερχωμεθα ουν μετα παρρησιας τω θρονω της χαριτος ινα λαβωμεν ελεον και χαριν ευρωμεν εις ευκαιρον βοηθειαν
라틴어Vulgate,16 adeamus ergo cum fiducia ad thronum gratiae ut misericordiam consequamur et gratiam inveniamus in auxilio oportuno
히브리어Modern,16 על כן נקרבה בבטחון אל כסא החסד לשאת רחמים ולמצא חסד לעזרה בעתה׃
성 경: [히4:16]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주심을 나타낸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보좌’의 헬라어 ‘드로노'(*)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1:3,8)를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출25:21,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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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은 참된 안식이심(히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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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기자는 참 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은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참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제목: “예수님은 참된 안식이심” (히 4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히 4:1-16
요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주제: 예수님은 참된 안식을 주시기에 항상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오늘은 히브리서 4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연약을 체험하신 후 참 안식을 주시는 은혜의 보좌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히 4:1-13)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분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여러분들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이는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왜냐하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4 제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기록하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신의 일을 쉬시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니라.
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앞장 히 3:18절과 연결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한 강도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3:43). 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혹”이라는 말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교회 가운데 그런 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절에 보니 구원받은 우리도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3절에 “왜냐하면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장차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낙원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도 영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고 있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십니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시 95:11을 인용하고 있는데 원어에서는 강한 부정의 뜻을 나타냅니다. 즉 “그들이 내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또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일이 마쳤느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 2:2의 말씀에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만이 참 안식이 있습니다. 6일간 천지만물, 인간, 에덴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창조해 주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켜주십니다. 이 안식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4절에 창 2:2에서 하나님께서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절에 시 95:11에서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절에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4~6절에서 두 가지 진리를 보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는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7절에 시 95:7을 인용하여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기록하기를 “오늘날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하며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합니다. 개역이나 개역 개정에서는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Ιησοῦς) 대신에 여호수아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선재성을 약화시키고 구약에서 예수님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서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는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원문 그대로 예수님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전부터 무궁 후까지 계시는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찬송가 405장(통 458장)
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후렴)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2.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3. 주의 보좌로 나아 갈 때에 기뻐 찬미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9절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예수님의 영원하신 팔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모형적 안식을 누렸을 뿐이지, 하나님의 영원한 참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식할 때’라는 원어(삽바티스모스 sabbatismos)는 ‘안식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영원 전에 선택함을 얻고 때가 되어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은 백성들에게는 참된 안식의 상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평안입니다. 인생의 수고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습니다(창 3:17-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알버트 벤자민 심프슨(Albert B. Simpson 1843~1919) 목사님은 세계선교를 많이 하고 지원하는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C&MA)교단을 시작하신 분으로 미국 복음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분입니다.
찬송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302장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 보다 깊다” 135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어느 때든지” 441장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원한 내게” 472장 “네 병든 손 내밀라고”의 찬송시를 지으신 분입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 받을 때 흑인영가를 통해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회복되는 체험을 통해 그의 설교가 더 깊어지고 치유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출판사를 세워서 40여년간 주간 잡지를 발행했고, 무려 10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심프슨목사님의 “안식”이란 시를 강화도 생명회복개발원 가까이에 있는 해돋음 찻집(이영범목사)의 칠판에 기록되어 있어 감동있게 읽었습니다.
“안식”
한 때 저의 두 손은 항상 바빴습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힘들여 일했습니다.
이제 제 가슴은 포근한 믿음 속에 있으며
제 영혼은 안식 속에 있습니다.
한때 저의 머리는 계획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슴은 걱정으로 미어졌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끄시도록 주님께 의지합니다.
제 생명이 주님의 안식 속에 있습니다.
한때 저의 삶은 수고로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분의 멍에를 메었기에
주님께서 저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심프슨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8~29)
10-11절을 읽습니다. “이미 그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신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영혼은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눅 16:22, 25; 23:43).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됩니다(계 14:13). 또 사도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있기를 담대히 그리고 간절히 원하였습니다(고후 5:8; 빌 1:23).
11절은 1절부터 13절까지의 요약입니다.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합니다. ‘저 안식’은 이제까지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안식 즉 구원을 통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이미 받았고 장차 전인격적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입니다. 성도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화는 우리 자신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벧후 1:10, “형제들아, 더욱 힘써 여러분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여러분들이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힘써야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합니다.
12-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회복되고 안식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고 활력이 있으며 우리 인간의 전인격(영, 혼, 몸)의 문제점을 진단하여 치유하며 회복합니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말씀만이 감찰하고 찔러 쪼개기 할 수 있습니다. 13절의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는 원어(프로스혼 헤민호로고스 proshon heminhologos)는 ‘우리가 관계할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순종의 의무나 심판받을 의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 내 인격이 온전해지며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2.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자(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분 곧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시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4절에서 승천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됩니다. 행 1:9-11은 그것을 자세히 증거하는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그분을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하는데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가장 간략한 내용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매 주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도 믿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가 믿어야 할 바에 대해 21번 문답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셨으나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또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25번 문답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15절에서 ‘동정하다’는 원어(쉼파데사이sympadesai)는 ‘체휼하다, 동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참 사람(vere homo)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Vere Deus)이셨으므로, 그분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의 도움과 보호 속에 무죄 상태를 유지하십니다. 실상,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습니다.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에게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분,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eis eukairon boedeian)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위해’라는 뜻입니다. ‘담대히’라는 원어 (메타팔레시아스meta parresias)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그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6절에서 은혜의 보좌란 지성소의 언약궤 뚜껑인 시은좌/시은소(Mercy seat)을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 즉 쉐키나(Shekinah)입니다. 이 은혜의 보좌에서 대제사장이 온 제사장, 왕들, 지도자들,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곳이며 용서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새벽에는 불 구름기둥(pillar of fire and cloud, 출 14:24)이 쏟아나는 곳이 은혜의 보좌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에 두 명의 천사가 하나는 머리부분, 하나는 다리부분에 있었던 모습이 은혜의 보좌를 두 천사(그룹)이 날개를 연하여 덮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은혜의 보좌가 되신 것이고 언약궤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께 담대히 나갑시다.
[오늘의 기도]사랑의 하나님, 히브리서 4장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안식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몸이 새롭게 수술받게 하시며 은혜의 보좌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담대히 나가 회개하고 치유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벽예배 10분 설교문] 쓰임 받는 사람(갈라디아서 2:20)반응형
들어가는 말
안식이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 약 180번 정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제4계명의 안식일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신약에서는 주로 복음서에서 많이 등장하며 그 다음으로는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을 유대인의 율법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안식을 죽어서 천국에서 취하는 휴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안식과 죽음은 종종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죽음을 영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표현하는데 여기서 영면(永眠)은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휴식이라는 의미보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새로운 활동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에 관해서 가장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히브리서 4장이다. 히브리서 4:1~11에는 “안식”(katavpausi”카타파우시스)이라는 단어가 모두 11번 등장한다. 단지 2절과 7절만을 제외하고 매 절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1번 이상씩 사용되고 있다.1 그러면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히브리서는 안식에 관해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안식이란 무엇인가? 둘째,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셋째,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안식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는 안식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 안식’(Canaan Rest, 3:11, 18), ‘창조의 안식’(Creation Rest, 4:3), ‘제칠일 안식’(Sabbath Rest, 4:4, 9), ‘천상적 안식’(Heavenly Rest)이 그것이다.2 히브리서 3장에서는 안식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히브리서 3:7~11에서 시편 95:7b~11을 길게 인용한 후에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원래 시편 95편은 시편 기자가 당시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과거 출애굽 시대에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조상들의 불신앙을 답습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시편을 인용하여 1세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앙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다시 사용한다. 광야의 출애굽 백성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출애굽 백성들이 지향했던 가나안 안식 외에 그리스도인이 들어가야 할 또 다른 안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저자는 3장에서 출애굽 백성들의 불신을 경고의 메시지로 소개한 후에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은 과거 이스라엘이 들어갔던 가나안 안식과 어떻게 다른가? 우선 안식의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안식을 ‘장소적 개념’(rest as a place)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식을 ‘상태의 개념’(rest as a condi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출애굽 백성들이 지향했던 가나안 안식은 안식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안식이란, 가나안이란 특정한 장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였다. 물론 가나안이 안식의 장소라고 해서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농사를 하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 힘든 일들을 계속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제 애굽에서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었으며 땀 흘려 일한 결과도 이제 자신들이 스스로 즐기고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가나안의 안식이 기본적으로 장소적인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안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살아갈 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참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뜻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황 혹은 상태가 될 때 그들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의 안식이 기본적으로 장소적인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식을 어떤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나안은 단지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택된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곳이 안식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가나안의 안식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안식은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저자는 히브리서 4장에서 안식을 가나안의 안식과는 다소 다르게 설명한다. 먼저 1절에서 우리에게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함으로써 가나안 안식과 다른 새로운 안식이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8~9절에는 더욱 분명하게 가나안 안식과는 다른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들어갈 안식은 어떤 것인가? 3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한 후 4절에서 창세기 2:2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 후 쉬셨던 창조의 안식에 대해서 소개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이 안식을 가리켜 “제칠일 안식”(Sabbath-rest)이라고 표현한다. 개역개정의 9절에서는 그냥 “안식할 때”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신구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제칠일 안식’(sabbatismov” “a Sabbath-day rest”)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저자는 4장에서 시편 95편의 가나안 안식과 창세기 2:2의 ‘제칠일 안식’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한다. 즉 저자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던 가나안의 안식을 창조의 안식이라는 관점에서 재정의하면서 독자들에게 안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제칠일 안식’은 안식을 장소적인 관점보다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어떤 장소로 들어간다는 표현이 아니라 어떤 상태 혹은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안식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물론 안식을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고 해도 장소적인 관점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안식에 관한 장소적인 개념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시편 132:14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시온을 여호와의 영원한 안식의 장소(resting place)로 묘사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지상적 예루살렘이 아닌 천상적 예루살렘을 안식의 장소로 이해한다. 히브리서 12:22~24는 독자들이 이제 막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안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안식을 장소라는 관점과 동시에 상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한다. 장소적인 관점에서 제칠일 안식을 이해하면 그것은 천상적인 성전 혹은 천상적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히 6:20; 10:1; 12:22~24; 13:14). 반면에 안식을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안식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현실적인 세상에서부터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히 4:3). 출애굽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히 4:2).
그런데 저자는 여호수아가 광야의 제2세대를 인도해 들어갔던 가나안 안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히 4:8). 저자는 시편 95편의 증거를 통해서 가나안 안식이 아닌 다른 한 완전한 안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 그런즉 안식할 때가(제칠일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7~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참된 안식은 ‘제칠일 안식’이다. 제칠일 안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안식의 궁극적인 원형은 하나님의 안식에서 찾을 수 있다.3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서 가나안 안식과 그리스도인의 안식을 모형론적으로 서로 비교한다. 가나안의 안식은 제칠일 안식을 지향하며 그것을 예비적으로 보여 주는 모형이다(히 8:5; 10:1).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이 성취되는 것은 가나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안식의 원형)
→ 가나안의 안식(모형론적 성취): 여호수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 제칠일 안식(종말론적 성취): 예수, 지상에서 천상적 예루살렘으로
이 두 안식의 모형론적인 관계는 여호수아와 예수라는 이름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발음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 jIhsou'”)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안식도 예수(즉 여호수아)에 의해서 주어졌으며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도 예수(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저자는 ‘제칠일 안식’(sabbatismov”)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가나안 안식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인 안식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종말론적인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은 미래에 나타날 실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때부터 이미 항상 존재해 왔던 현재적인 실재라고 말한다(히 4:3). 단지 인간은 지금까지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광야의 백성들이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듯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라고 말하고 있다(히 4:1, 11).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그러면 안식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저자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한다. 안식에는 믿음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가나안의 안식이나 제칠일 안식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광야의 백성들이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히브리서 3:19에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18절에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순종하지 아니함과 믿지 아니함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흔히 이신칭의 논쟁에서 따지듯이 믿음과 행위를 서로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믿음과 순종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반대로 믿지 아니함과 순종하지 아니함도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광야의 백성들의 불신앙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하나님을 시험함”, “마음을 강퍅하게 함”, “마음이 미혹됨”, “믿지 않는 악심”, “하나님을 격노케 함”, “범죄함”, “순종치 아니함”, “믿지 아니함” 등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광야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던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광야의 40년을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이 고난과 어려움 당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공급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적으로 자신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닥친 고난만 생각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다. 이처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다.
광야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비롯한 온갖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그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시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으며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보고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다(민 14장).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불신과 반역적인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사람들은 결단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을 것이라고 맹세하여 말씀하셨다(민 14:21~24).
히브리서 3장에서 저자는 “오늘”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로 오늘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매일매일 말씀하신다. 광야에서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로 오늘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저자는 4장에서 그리스도인들도 광야의 백성들과 동일한 상황에 있다고 간주한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복음을 들은 자들이다. 그러나 만약 광야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은 복음을 듣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시간이다.
저자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광야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1세기 당시의 독자들도 날마다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여러 종류의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다. 독자들이 처했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여러 번에 걸쳐서 독자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싸웠으며, 비방과 조롱을 받고, 갇히기도 했으며, 심지어 피 흘리는 싸움까지 각오해야 했다(히 2:18; 10:32~36; 12:4). 그리스도인들도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오늘이라고 불리는 하루하루를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백성들의 불순종을 결코 답습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과 핍박과 비방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히 10:39).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간다고 할 때 이 믿음은 매우 실천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매일의 핍박과 유혹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삶에 관한 문제이며 순종을 위한 피 흘리는 투쟁이다(히 12:3~4). 믿음은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거나 교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고난을 견디는 인내이며 핍박과 유혹을 극복하고 복음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과 행동이다. 불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고난과 핍박이 두려워서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큰 은혜를 배신하는 반역과 같은 것이다(히 6:4~6).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실천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고 강조한다.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그러면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에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는가? 히브리서 4:1에서는 안식이 약속으로 남아 있으므로 미래에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곧 이어 3절에서는 이미 믿는 우리는 지금 저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실 4:1~11에는 안식이 미래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이라는 설명이 함께 뒤섞여 있다. 안식을 미래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는 1절과 더불어 5절, 9절, 11절에 등장한다. 반면에 안식을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3절, 10절이다. 특히 10절은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안식은 미래에 들어갈 약속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안식은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실재인가? 이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안식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실재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에 3절에서 현재 시제로 사용된 “들어가다”(eijsevrcomai)라는 동사가 미래적 개념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것을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sure of entering) 라는 뜻으로써 현재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미래에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강의적 용법이라고 설명한다.4
둘째, 현재 시제를 사실적인 현재로 이해하면서 안식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안식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평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대주의적 경향이 강한 학자들은 이와 유사하게 안식을 현재적 지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안식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천년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5
셋째, 안식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적인 실재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실재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링컨(Lincoln)은 히브리서의 안식을 종말론의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관점에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실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3의 현재 시제를 미래적 의미의 현재 시제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것을 진정한 현재 시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 바레트(Barrett) 역시 하나님의 안식은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이므로 인간은 그 안식에 들어가며 또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안식이 현재적인 이유는 3:1에서 독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이미 나누어 가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6:5에서 독자들이 내세의 능력(the power of the coming age)을 이미 맛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독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7
그러면 히브리서의 안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안식을 상태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과 장소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두 가지 이해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안식을 상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때 얻을 수 있는 안식이다. 마태복음 11:28에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즉 안식하게) 하리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때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안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을 통해서 죄로 인해 사탄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두려워하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히 2:14~15; 3:1).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독자들이 이미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과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2:22에는 독자들이 이미 천상적 예루살렘에 “도착했다”(proselhluvqate)라는 현재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반면에 13:14에서는 “영구한 도성”, 즉 천상적 예루살렘이 이 세상에는 없고 장차 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12:22에서 우리가 이미 천상적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것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 의롭게 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현재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13:14에서는 장소적 의미에서 영구한 도성은 현재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식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안식의 장소인 하늘의 예루살렘은 분명히 미래에 들어갈 장소이지만 그 장소에서 누릴 안식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틀에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완전한 안식을 누릴 장소는 하늘에 있는 도성이며 그곳에는 미래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 안식을 이 세상에서 미리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현재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자는 약속으로 남아 있는 미래의 안식에 들어갈 보장이 없다.
설교를 위한 가이드
1. 안식이란 무엇인가?
안식은 단순히 아무런 활동도 없는 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라는 것을 설명하라. 그리고 참된 안식이 가만히 있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임을 설명하여 성도들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동기를 부여하라.
2.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안식에 들어가는 실천적인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여 순종이 있는 믿음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히브리서의 이러한 믿음이 바울 서신에서 강조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설명하여 믿음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라. 바울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를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간의 행위를 비판했던 것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휴머니즘적 선행이나 유대인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3.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참된 믿음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라. 삭개오가 복음을 듣고 재산의 1/4을 나누어 주고도 기뻐한 것이나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기뻐하여 찬송한 것은 모두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의 순종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 6절에는 안식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5절의 안식을 선행사로 가지는 인칭대명사 aujthvn이 사용되고 있다.
2. ‘천상적 안식’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천상적 예루살렘을 안식의 장소로 이해한다. “하늘의 부르심”(heavenly calling, 3:1), “하늘의 것”(heavenly things, 9:23), “하늘에 있는 본향”(heavenly one, 11:16), “천상적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 12:22) 등은 모두 천상적인 안식 혹은 예수께서 이미 우리를 앞서서 들어가신 안식의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3. Harold W. Attridge, “Let Us Strive to Enter that Rest: The Logic of Hebrews 4:1~11,” Harvard Theological Review 73:1~2 (1980): 279~288.
4.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93), 246; Craig R. Koester, Hebrews (New York: Doubleday, 2001), 270 이하;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90), 109 이하; David A. DeSilva, Perseverance in Gratitude: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200), 163.
5. Walter Kaiser, “The Promise Theme and the Theology of Rest,” Bib Sac 130 (1973): 135~150; Stanley Toussaint, “The Eschatology of the Warning Passages in the Book of Hebrews,” GTJ 3 (1982): 67~80.
6. A. T. Lincoln, “Sabbath, Rest, and Eschatology in the New Testament,” in D. A. Carson, ed.,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205~217.
7. C. K. Barrett, “The Eschatology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W. D. Davies and D. Daube, eds., The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and Its Eschat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4), 363~393, esp. 372.
히브리서 4장 강해 :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4장 강해 :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님
히브리서 4장 강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서 론 ]1. 히브리서 4장에서는 영광의 복음을 듣고 첫째 부활의 영광에 들어 갈 자와 사람의 지식과 열심으로 인하여 도리어 버림받는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찌니 그의 안식에 들어 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1.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확실한 믿음에 있지 못하고 행함에 치우치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2.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롬10:17)
3. 말씀을 듣지 못하여도 믿지 못하고 말씀을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면 행함에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들에게는 첫째 부활에 들어 갈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1.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하여도 사람의 지혜로 판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2.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요7:46)
3.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람의 지혜로 연구한 성경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마24:11-12)
4. 육육육이 나오고 바코드가 나오고 순교자들은 공중에 휴거 한다는 새 휴거설이 미혹케 하고 있습니다.
5.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2)
6.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는 복음을 들은 것과 같이 우리는 천년 왕국에 들어가라는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2.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았으나 이 복음을 받지 못한 자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1. 그 들은 바 말씀이 유익 되지 못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1.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믿으려 하지 않고 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2. 오직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들어가게 하셨습니다.(민14:29-30)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1.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신랑 예수께서 순교의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은 이미 옥중에서 잠자고 있는 베드로의 안식에 들어가 있습니다.(행12:6-11)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셨으나”(시95:11)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2. 내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는 안식입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끝마치시고 안식하시는 그 날부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창2:2)
1.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안식하고 계십니다.
2. 실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속에서 친히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1. 또 다시 거기 (시95:11)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외에 영적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1. 거기 들어갈 자 곧 천년 왕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1. 들어가라고 하실 때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도 순종치 아니한 것이 되고 들어가지 말라고 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순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2.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 인과 가나안 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 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 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민14:39-45)
※ 믿는 자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행함을 앞세우던 자들의 비참한 결과입니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1. 오랜 후 첫 삼년 반 환난 때에 있을 일을 다윗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2. 세 번째 말씀하시는 오랜 후의 오늘날이 첫 삼년 반 환난의 날입니다.
3. 성령에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히3:7)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히3:15)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히4:7)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세 번째 말씀하시는 오늘날은 첫 삼년 반 환난의 날을 말씀하시는 영광의 복음입니다.
1.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는 오늘날이 있기 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지식을 고집하고,
2.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패역한 족속아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12:25)
3. 마음에 거짓이 있는 자들은 거짓 것들의 거짓말을 고집하여 강퍅한 자가 되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족케 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참된 안식이었다면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른 날의 안식은 천년 왕국에 들어가는 순교의 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그 안식에 참여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 순교하게 하시는 과정을 다 보고 믿음으로 의지하는 자는 야고보의 순교를 보고 잠자는 베드로와 같이 안식하고 있습니다.(행12:6-7)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1. 저 안식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순교하게 해 주시는 과정을 다 보고 그대로 이루시는 역사 안에 살고 있습니다.
2.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믿음대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사람 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성경에 기록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나타내시는 것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참 고 ◈
불법의 역사 (마24:11-12)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1.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연구하고 사람들에게서 배운 성경을 가지고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입니다.
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겔13:6)
3. 여호와의 선지자는 엘리야 한 사람 뿐이고 거짓 선지자는 850인이었습니다.(왕상18:19)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2.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3.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5-6)
4. 순교자들을 공중으로 휴거 한다는 새로운 휴거설이 나오고 있습니다.
※ 미혹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크지만 미혹을 당하는 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 하나님의 법이 아니면 모두가 불법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순교하게 하시기 위해서 환난까지 두셨는데 도리어 마귀가 환난을 주는 것으로 보게 하여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3. 환난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악한 자의 권세만 보는 자는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여 넘어지고 있습니다.
※ 많은 거짓 선지자가 많은 사람을 미혹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식어지게 합니다.
미혹의 역사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1.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에게 오는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무리들입니다.
2.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떠드는 무리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1.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로 미혹하게 합니다.
2.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계13:13)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1. 사람들의 지식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종들까지 미혹하려 할 것입니다.
2. 택하신 자 한 사람이 미혹을 받으면 그에게서 교훈을 받는 성도들이 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 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베드로의 교훈
1.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던 베드로,(마16:22) 검을 빼어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고 있습니다.(요18:10)
2.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던 베드로입니다.
3. 베드로가 멀찍이 그 결국을 보려고 따라가고 있습니다.(마26:58) 죽은 자를 살리시던 권능으로 유대 나라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 요한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예수를 알고 베드로를 데리고 대제사장의 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요18:15)
ㄱ. 아론으로부터 안나스 전까지 대제사장들에게 아들을 주어 대를 이었으나 안나스에게 아들을 주지 아니하여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물을 때에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고,(요18:16)
5. 하속들과 함께 앉아 있고,(마26:58)
ㄱ. 베드로가 불빛을 향하여 앉았고,(눅22:58)
ㄴ. 하속들과 함께 숯불을 서서 쬐고 있습니다.(요18:18)
세 번 부인
1.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네 말하는 것을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2. 베드로가 맹세하고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3. 저주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곧 두 번째 닭이 울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합니다.(눅22:61)
◎ 한때 두때 반때 세 번 부르시는 것을 나타내십니다.(단12:7)
순교하게 하시는 길
1.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 큰 다락방에서 예비하고,(눅22:7-18)
2.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눅22:39-46)
3. 가룟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습니다.(요18:2)
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뿐입니다.(마26:37)
5. 가룟 유다를 친구라고 말씀하시고,(마26:50)
6.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7. 변명 할 것을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성령이 구재와 지혜를 주십니다.(눅21:14)
8.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십니다.(계2:17)
9. 죽음의 고통의 시간도 단축하십니다.(요18:33)
※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순교의 예비처로 갈 것인가? 휴거 하는 예비 처를 따라 기름 없는 처녀의 자리로 갈 것인가?
◈ 참 고 ◈ (아가서 8:6-7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은 너는,(아4:10)
2. 너의 신랑 되신 예수를,
3. 한번 인 친 것은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니 마음에 품고 잠시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길이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길인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꿈에 보여 주신 영광을 반드시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는 요셉은 험난한 길에서 이 길이 그 길인 것을 믿었습니다.
“도장 같이 팔에 두라”
1. 도장 같이 팔에 두라는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게 하실 때에(요21:18) 반드시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어 고통을 이기게 하시는 기쁨을 주십니다.(계2:17)
2. 돌에 맞는 스데반에게 금 면류관 손에 들고 서 계신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셨습니다.(행7:56)
3. 죽음의 고통을 겪는 시간도 단축해 주십니다.(막15;44-45)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1. 신랑 예수께서 신부를 사랑하는 사랑은 천년 왕국의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잠시 동안의 죽음을 주십니다.
2. 공중 혼인 잔치 자리에서 이리로 올라오라 하시는 음성을 듣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올라가게 하시는 그의 사랑이 잠시 동안의 죽음을 두셨습니다.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여”
1. 신부가 그 영광을 버리고 음부로 달려가려 할찌라도 잔인하고 혹독하게 때려서라도 돌이켜 주십니다.
2. 한때 두때 반때를 두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3. 첫 삼년 반 환난이 시작되고 1년 후에 순교할 기회를 주시고 그 때에 주를 부인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2년 동안 갑절의 환난을 주시고 다시 부르시고,
4. 두 번이나 부인하는 그들을 마지막 반년 동안에 심하게 쳐서 기어코 순교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리라”
1.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욥1:16)
2.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욥31:12)
3. 불붙는 가운데서 꺼낸 나무 조각 같이 하십니다.(암4:11)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1. 첫째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이 사랑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으로도 꺼치지 못합니다.
2. 느브갓네살 왕의 금 신상 앞에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있고,(단3:18)
3. 국무총리가 된 다니엘 앞에는 사자 굴이 있습니다.(단6:10)
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8:35)
※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계12:15-16)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1. 이 땅위의 모든 교회가 다 세상의 치우쳐서 부귀와 영광을 자랑할지라도 천년 왕국의 영광을 덮지 못할 것이요,
2.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8)
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1.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2.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쌓은 영광과 천년 왕국에서 쌓는 영광은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20:4-6)
◎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나의 신부야 부르신 신랑 예수께서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역사를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 결 론 ]1. 오늘날 말씀하시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2. 오늘날 말씀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듣고,
3. 오랜 후에 오늘날 말씀하시는 영광의 복음을 따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부의 자리에 서게 하소서,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님
[ 서 론 ]1.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이시고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과정에서 아무도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고 오직 대제사장 되신 주님의 사랑에 붙잡히게 하십니다.
● 히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1.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들의 속 생명을 살려 주십니다.
2.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운동력이 있어”
1.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는 자들 속에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역사로 나타내십니다.
2.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53)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1. 좌우에 날선 진리의 말씀은 좌로 치우치게 하는 자도 끊어 버리고 우로 치우치게 하는 자도 끊어 버립니다.
2.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것은 아무 사람도 인정에 매여서 끊을 수 없는 것을 냉정하게 끊어 버립니다.
3. 입다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는 무남독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삿11:39)
“혼과”
1. 혼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니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영과”
1. 영은 신령한 세계를 보는 것이니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구별하고,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1. 우리 인간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감찰하여 쪼개서 드러내십니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숨은 죄를 밝히 드러내십니다.(행5:3)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1.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막2:8)
2.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6)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인지 또는 자기 뜻을 이루려 함인지를 아십니다.
4.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겔14: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1. 모든 피조물들이 조물주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3.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벧전4:5)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 나느니라”
1. 만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고,
2. 우리는 우리들의 영광을 하나라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3.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욥26:6)
※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 마귀의 악령에 붙잡혀 악을 행한 그대로 심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1. 주 예수의 구원을 믿는 우리들에게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크고 많은 죄를 대속하시는 제사장이 되십니다.
2.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1. 하나님께서부터 받은바 구속 사업을 다 끝내시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2.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 자녀들의 부활이 되고 승천하는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15:13)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히10:23)
2. 잠시 육신으로 보내심을 받아 구원해 주신 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영광된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 열매대로 영광 중에 찬송케 하시는 것이 믿음의 도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1.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으셨고,
2. 우리가 받을 마귀의 시험도 먼저 받으셨고,(마4:1-11)
3.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돌 던짐을 당하셨고,(요8:59)
4. 가시 면류관까지 쓰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막15:17)
“죄는 없으시니라”
1. 죄 없는 다른 씨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1. 모든 것을 체휼(體恤)하신 예수께서 마음에 없는 죄를 범할 때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2.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롬8:26)
2. 은혜의 보좌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습니다.(롬5:20)
3.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 결 론 ]1. 첫째 부활의 영광까지 나타내 보여 주었으나 원죄로 인하여 범죄 하는 우리들의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2. 각자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영광의 주 앞에 찬송케 하시는 그 날까지 은혜의 보좌 앞에 서게 하소서 기도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히브리서 서론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4장: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6장: 확실한 소망 7장: 더 좋은 소망 8장: 더 나은 직분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장: 믿음의 선조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서론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본서는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 46 )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고( 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들(목회서신 전에) 중에 포함시켰고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4 (빌 2:9), 2:2 (갈 3:19), 2:10 (롬 11:36), 7:18 (롬 8:3), 7:27 (엡 5:2), 10:33 (고전 4:9), 11:13 (엡 2:19), 12:22 (갈 4:25-26), 13:5 (딤전 3:3; 6: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지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이었고, 저작 연대 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4, 13; 9:4-5, 9; 10:1, 8, 11; 13: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서 8:13,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4; 6:9; 7:7, 19, 22; 8:6, 6; 9:23; 10:34; 11:16, 35, 40; 12: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린도후서 3:9, 1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구약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말한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 어떤 내용의 추가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교훈과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신약 계시의 내용이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상징(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약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난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에서는 상징적으로 또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이 신약 계시에서는 실체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계시하기를 원하신 만큼, 또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였다. [2-3절] . .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 1)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은 신약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 . .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보인다. [4-5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프로토토콘 ) 2) 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3)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 KJV, NIV ).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선한 천사는 죄가 없고 거룩하므로 죄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4)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들과 달리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신다.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 특히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자들의 구원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을 들으셨고,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내용과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는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신약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분히 다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신약성경을 넘어서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고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는 것은 극히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로, 우리는 신약계시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의 신적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죄 없는 새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것이 그가 하신 가장 큰 일이었다. 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의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은 바람 같고 불꽃같이 사용되지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소망하며 찬송하자.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3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 프로세코 )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요 3:36). 이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면으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휘페르 판토스 )[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의 내용인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5)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이라는 원어( 브라퀴 )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과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10절] 만물이 인하고( 디 호 타 판타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말은 인간 예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온전한 구주가 되셨음을 말한다. [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6) 예수께서 성도들과 같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은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함이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로,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로, 그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셨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증거되어 있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 힐라스코마이 )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로, 그것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주가 되셨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로,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도’로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요 4:34)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빌 2:8).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가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리셨다(계 1:5; 3:14). [3-4절]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가운데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쓴 자이었다. 그는 선지자들 중에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시다. 본문은 모세와 주 예수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을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음을 알듯이, 우주 만물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 놀라운 우주를 물질이 우연히 발전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다. 집은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 데라폰 )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 에피 )는 ‘위에서’라는 단어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본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담대함’이라는 원어( 파르레시아 )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나 선지서들뿐 아니라, 시가서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는 것을 증거한다(딤후 3:16).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7)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 페이라조 )이나 ‘증험한다’는 말( 도키마조 )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들이나 두려운 징계들이나 긍휼의 구원들이나,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생활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아서 몸 속에 놔두면 해롭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는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모든 성도는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격노케 하였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던 것이다. [17-19절]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었다.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과 안식을 가리켰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천국의 예표이었다.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를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존숭하며 그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자이시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며 충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존숭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굳게 믿고 순종하며 또 피차 권면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신음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출되었으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하고 또 피차 권면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눅 23:43). 또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에 낙오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절]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며 누린다(마 11:28; 요 14:27). [4-6절]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부르실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9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영원한 안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수고로운 삶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눅 16:22, 25; 23:43)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과 성화(聖化)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13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행 1:9-11).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 쉼파데사이 )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또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과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또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그의 신성(神性)의 도우심과 보호 속에서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 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는 ‘때를 따라 적절한(timely)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 메타 팔레시아스 )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거울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믿고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그를 더욱 알고 믿고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를 더욱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얻기 위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 일을 한다. 대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택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릴 때 무지하고 미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4-6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대제사장은 스스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아론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대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높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관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이 메시아 예언들은 각각 시편 2:7과 시편 110:4에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구절에서 ‘반차’라는 원어( 탁시스 tavxi” )는 ‘반열, 특질’이라는 의미이며,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 디브라 )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을 가진 혹은 그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1-44).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8-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그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함이 증거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해졌고 그의 속죄사역은 다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과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구약성경 시편 110:4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19). 그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창 14:20).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말씀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그러나 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12절] [이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되었음이라]. 본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들이 되어야 했었다. 신자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복음 진리를 듣고 거듭나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성경말씀으로 양육되어 그의 지식이 자라고 견고해지고 점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우유나 마시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다. 하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이다. 전자는 엄마의 젖이나 우유만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고, 후자는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성장한 자들과 같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 즉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교인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교리와 모든 생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교인들이다. 세례 대상자들을 위한 학습반 공부의 내용들은 전자를 위한 것이지만, 신구약성경의 자세한 강해나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 지식과 윤리적 문제들이나 여러 이단적 신학 사조들에 대한 강론은 후자를 위한 것이다. [13-14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계속 실천함으로 인해 지각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본 서신을 받는 자들은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의 내용과 목적은 의(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그것이 의이다. 성경의 목표는 의이다. 그것은, 의가 없었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복음과 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할 교훈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했다. 영적 성장은 단지 이론적 지식으로 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우리의 지각과 감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성장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또 선악을 분별하는 지각과 감각이 자람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우리를 위한 영원하신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많은 고난을,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우리의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고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자.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를 믿고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만 이해하고 어려운 말씀들을 감당치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을 가르치거나 돌볼 힘이 없고 진리를 위해 싸울 힘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감당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의 실천을 통해 지각이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 안에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에 머물지 말고 성경의 어려운 말씀도 읽고 연구하며 배워야 한다. 또 모든 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주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실천함으로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6장: 확실한 소망을 가지자 [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넘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내용으로 몇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로 죽은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숭배, 돈 사랑,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죄를 회개함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기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것은 경건의 기본적 요소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다(행 20:21). 셋째는, 세례들이다. ‘세례들’은 죄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물세례는 그것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또 성도는 실수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다. 넷째는, 안수이다. 세례식의 안수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그 직분의 구별을 나타내고, 병자에게 안수함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구하는 뜻이 있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막 9:43).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거나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성숙을 말한다.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구원적 신앙의 시작이나 그 신앙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배반한 자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 즉 소위 ‘성도의 견인(堅忍)’을 밝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10:28; 빌 1:6),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과 중보 사역의 완전함,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은 잠시 연약할 수 있으나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KJV, NASB, NIV) .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13-15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처음 주신 것은 하란에서이었다고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이었다(창 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고,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18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심으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다(창 22:16-18).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9-20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 카타페타스마 )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 7장: 더 좋은 소망 [1-2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평화, 평안]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살렘 왕으로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가서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한 신비한 인물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는 공의로 다스리실 평안의 왕이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9:6-7). [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이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신비한 베일에 감추신 것은 그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기 위하심이었던 것 같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자로서 역사상 잠시 언급된 후 언급이 없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메시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4-7절]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변론할 것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았지만, 레위 족보에 들지도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 [8-10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죽을 자들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멜기세덱은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났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은 부족하였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이 부족함이 없었다면 아론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말한 온전함은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흠과 점이 많았고 종종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부패되었고 육신적으로도 죽을 자들이었다. 또 그들의 제물들도 죄인들에게 참으로 사죄(赦罪)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실상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의 상징과 예표(豫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은 제사장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는 폐지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율법은 그의 대속 사역에 대한 상징과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즉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마 5:17). 그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롬 3:21-22; 10:4). [12-13절] [이는]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변역할 것임이니] [이는]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것임이니라].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율법 제도의 변화를 보인다. 율법에 의하면, 제단 일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맡겨진 일이고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을 메시아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여기에 신약시대의 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었다. [14-15절] [이는]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분명함이라].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를 영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지 않으시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16-17절]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구주가 되셨다. ‘무궁한 생명’이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 육신의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18-19절] [이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페하였음이라.]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못함이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보내신 이유는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여지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였다. 사람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롬 3:20).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참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나 율법 제도는 그 자체로는 연약하고 무익했다. 그것은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오셨으므로 율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義)가 되셨기 때문이다. [20-21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율법 제도 아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메시아를 제사장으로 세우셨다(시 110:4).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원어( 카타 토수톤 )는 ‘이렇게 큰 것에 의해’[이만큼]라는 뜻이다. 여기에 ‘큰 것’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더 좋은 언약’이란, 구약이 예표적 성격의 언약이었으나 신약은 실체적 성격의 언약임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23-24절] 저희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신다는 점에서도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갈리지 않는다’는 원어( 아파라바토스 )는 ‘임시적이지 않다, 변하지 않다, 영속적이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시다.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라는 말( 디 아우투 )은 ‘그를 통하여’라는 뜻이고, ‘온전히’라는 말( 에이스 토 판텔레스 )은 ‘끝까지, 영원히 (Vg, Syr, NASB) , 완전히 (Thayer, NIV) ’라는 뜻이다. ‘간구한다’는 원어( 엔튕카노 )는 ‘중재한다, 중보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26-27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고,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한 속죄사역을 이루셨고 의(義)를 이루셨다. ‘단번에’라는 말( 에파팍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의(義)는 완전한 의이다. [28절] [이는]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세우셨음이라].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속죄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였다.
히브리서 7장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때에 나타났던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며 그는 살렘 왕인데,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다 메시아의 명칭이다.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었다. 메시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으시며 족보도 없으시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인 대제사장들보다 더 높음을 보인다. 이런 모든 점들에서, 그는 메시아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인물이시다. 그는 의의 왕이시며 평안의 왕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보다, 또 율법 제도보다 더 높으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로, 구약의 율법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사람에게 도덕적 완전함 즉 의(義)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이루실 의에 대한 예표이었다. 성경이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다른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에 대해 예언한 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변경될 것을 보이며 그것은 또한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폐지되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는 실제로 속죄사역을 성취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가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이 되셨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또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사역을 하신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사역을 감사해야 한다. 8장: 더 나은 직분 [1-3절]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 레이투르고스 )[장막에서 섬기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주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셨다. 그는 땅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택자들을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4-6절] [이는]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것임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디아포로테라스 )[더 나은, 더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장막의 봉사자가 되신 까닭은 땅에서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땅에서 섬겼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 보이셨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바로 그 하늘 성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나은 직분을 얻으셨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레위 자손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도는 그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 즉 새 언약의 중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7-9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으셨던 옛 언약과 비교된다. 이 두 언약은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언약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보면(렘 31:31-34)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 예언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신 언약이다. [10-12절]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다. 옛 언약은 두 돌판에 새겨져 있고 후에 율법책에 기록되어진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 마음의 변화, 즉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새 언약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언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족속에서 택하신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다. 또 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사람이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신 6:4-7). 그러나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사 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오늘날 신약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들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다.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옛 언약에서 죄사함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대속(代贖)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 일시적이고 때가 되면 폐지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고 또 주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이제 그가 새 언약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은 옛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예언되었고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옛 언약은 폐지되고 이제 그것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본장은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서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제사장 사역을 하신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의 중보를 의미한다.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면성, 즉 중생(重生,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변화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며, 셋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며,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셋째, 옛 언약은 일시적이며 폐지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 더 나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代贖)을 굳게 믿고 담대히 그러나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5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구약시대의 성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성소(聖所, 하기아 a{gia )라고 불린다. 성소 안에는 예수님의 세상에 빛 되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상징하는 등대가 있었고, 또 예수님의 생명의 떡 되심을 상징하는 떡상과 그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은 떡(진설병 陳設餠)이 있었다. 둘째 부분은 지성소(至聖所, 하기아 하기온 )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금향로 8) 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었다.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특히,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상징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정죄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구원을 증거한다. [6-7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제사장들은 보통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0일 속죄일에 1년 1차씩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날 대제사장은 아마 3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 같다(레 16:12-15). 그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연기가 가득하게 했고, 또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상징하였다. [8-10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 하기온 )[지성소](KJV, NIV)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에이스 톤 카이론 톤 에네스테코타 )[현재의 때를 위한](원문, KJV, NASB, NIV)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 제도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 즉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구약 제도는 비유적, 예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제물들은 그 섬기는 자들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다(7:11, 19). 사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할 때까지 주신 것이었고 그 개혁의 때가 신약시대이다.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예표는 성취되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히 7:27).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장래 좋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영원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이 일을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의 속죄의 핏값은 너무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고 불린다. 또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매년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표현되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충족했고 더 이상 반복되실 필요가 없다. [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서 사람들의 몸의 부정을 깨끗케 하고 거룩케 하였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흠 없는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효력이 있겠는가? ‘영원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켰다고 본다. 무죄하신 신적 구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었다. 그 피는 효력이 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행실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섬기게 만든다. 구약 성도들도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통해 죄사함과 새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더 크고 확실하다. [15절] [그리고]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영원한 기업 곧 천국의 약속을 얻게 한다. 영원한 나라, 영생의 나라인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 [16-17절] [이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유언’이라는 원어 ( 디아데케 )는 앞절의 ‘언약’이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기업 상속을 유언했다면,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유언이 효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효력을 가지게 된다. [18-21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피를 취하여 그 책에 뿌리고 또 모든 백성에게 뿌렸고 그 책은 ‘언약서’라고 불리었고 그 피는 ‘언약의 피’라고 불리었다(7, 8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대로,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 . . [새] 언약의 피”이었다(마 26:28).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흘림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다(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성막 제도는 하늘의 원형에 대한 모형에 불과했고 짐승의 피뿌림도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성막 기구들은 짐승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성막 자체는 더 좋은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드려져야 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실제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24절]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나타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그 속죄의 피를 가지고 천국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그것은 그의 계속적 중보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 공로를 끊임없이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중보 사역을 계속하신다(롬 8:34).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드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리하면[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오셔서 자기 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그 피는 완전한 속죄의 피이다. [27-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고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재림의 주님은 죄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단번에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때까지의 예표이었다. 구약의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였다. 특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예표의 실체로 오셔서 친히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의 사역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친히 자기 몸을 드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중보 사역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효력은 크고 영속적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그가 자신에게 주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하신 자들, 성령께서 인치셔서 중생시키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연약할 때마다 아버지께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 [1-4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죄에 대한 의식, 죄책에 대한 의식]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 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 곧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는 부족했다. 율법 제도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절기 때마다 제사를 반복해 드렸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다. 여기에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 즉 구약 제도의 부족이 있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 하거나 사람들을 온전케 하지 못하였다. [5-7절]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를 원하지 않으심과 메시아를 통해 한 뜻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였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과 조금 다르다. 헬라어는 로마 시대에 공용어였다.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은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의 내용은 메시아께서 짐승의 번제물과 속죄제물로가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고(요 5:39),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였다. [8-9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오셔서 그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 제도, 제사 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 헤기아스메노이 )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되거나 진행 중인 것이 아니고 완료된 것임을 말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말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인 거룩과 의, 즉 법적인 구원인 것이다. [11-13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우데포테 oujdevpote)[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범죄자들의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제사의 행위였다. 그의 피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贖)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는 죄를 위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원수들인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때가 되면 심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 테텔레오켄 )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법적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롬 10:4). [15-18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산다. 성령의 법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물들이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하지는 못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참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인류를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고 율법이 예표한 참 형상이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법적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완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미사는 이 복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단지 순종생활에 힘써야 한다. 19-39절, 믿음의 담력과 인내가 필요함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 톤 하기온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히 9:12).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께서 성소 휘장을 찢듯이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은 구약 제도 아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 길이며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 [21-22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NASB, NIV)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크신 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죄사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 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 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우리는 소망의 고백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들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별로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는 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들 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권면해야 한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덧붙여 교훈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른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 성경말씀의 교훈을 받아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이다. 또 그것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한다. [26-27절]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 하마르타논톤 , 현재분사)는 ‘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즉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고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상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종종 경고의 말씀을 준다(마 7:21; 롬 8:13; 11:22; 히 6:4-8). [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그는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벌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이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라고 말한다. [30-31절]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앎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심히 강포했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고(창 8-10장)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셨고(창 19장) 또 모세를 거역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묻으셨다(민 16장).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32-34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갇힌 자[나의 갇힘들] 9) 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하늘에 있는] 10)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고후 4:6).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님 믿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환난을 당했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더 낫고 영구한 기업 즉 천국을 확신하였고 그 소망이 견고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동정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하였다. [35-36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확신](KJV, NASB, NIV)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함이니라].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큰 상’은 믿음의 결과인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또 성도의 믿음의 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참으로 믿는 자는 끝까지 참을 것이다. [37-39절] [이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생략) 1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음이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잠시 잠깐 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2:7, 12, 20).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막 16:15-16; 요 3:3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즉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우리 각인은 사랑과 선행을 힘쓸 뿐 아니라, 그 일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증진에 유익하다. 다섯째로, 우리는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자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거듭난 자만 이 경고를 듣고 순종할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믿음의 담력과 인내를 끝까지 가져야 한다. 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 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14) 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15) 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포르네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 16) 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13절, 믿음의 경주와 징계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17)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달리기 경주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리기에 임하듯이,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아내와 자녀들 등 가정에 대한 염려를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음란, 거짓과 탐욕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6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그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 [2절] 믿음의 주( 아르케곤 )[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텔레이오텐 )[완성자](KJV, NASB, NIV)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온전케 하실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모범을 보이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비난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고 벌거벗기어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와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그런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고 달려야 한다. [3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의 위선과 부족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지만, 그때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를 생각하며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해지거나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또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5).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엡 6:4; 딤후 3:16).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사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6-8절]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9-10절] 또( 에이타 )[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1-13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그러나 교훈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삶은 또한 ‘평안’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의 평강한 열매 즉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성도의 삶은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구원받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의 시작자와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친히 고난 중에 오래 참으신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징계를 달게 받고 잘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는 참 아들의 표이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즉 징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에 참여케 된다. 징계는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성화를 이루고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고 잘 참아야 한다. 14-29절, 화목과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또 거룩한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갈 5:20).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목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하여졌다(고전 1:30; 히 10:10, 14). 그러나 이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님을 뵈올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것인가?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뵈올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5-17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베벨로스 )[불경건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표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교회에 그런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불평, 원망을 가진 자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힌다. 셋째로, 우리는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행은 사람에게 있는 대표적 죄악이다.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자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과 바꾸려는 자가 그러하다. [18-21절]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의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시내산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 백성과 달리, 우리는 시내산 대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평안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였다. 본문은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계 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0이 말한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요 건축자이신 성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다. ‘천만’이라는 말( 뮈리아스 )은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들이 다 천국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하게 나타내신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죄성이 없는 온전케 된 영들이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다. [25-27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 랄룬타 )[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 바른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 1:4) 나라이다. [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감사하자](NASB, NIV, Thayer, BDAG).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진동치 않을 나라인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말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혹시 마음에 상한 것이 있으면 속히 풀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삶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둘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원망, 불평의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셋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떤 큰 징벌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그가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진지하게 읽고 듣고 받고 믿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 필라델피아 )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 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 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 포이킬로스 )[다양한] 다른( 크세노스 )[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 오네이디스모스 )[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4장 주일 설교문]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히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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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장에서는 말씀에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경과 상황을 체험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히 4:1-16)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한 강도를 향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 혹”이라는 말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들 중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있을 수 있음을 보인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교회 가운데 그런 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본문은 또 말한다.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장차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서도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고 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구절은 원어에서는 강한 부정의 뜻을 나타낸다. 즉 “저희가 내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또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는 말은 “그의[하나님의] 일이 마쳤느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창세기 2:2의 말씀을 가리킨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 참 안식이 있다.
히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문은 또 말한다.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문은 두 가지 진리를 보인다. 첫째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기쁜 소식이다. 둘째는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히4: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본문은 또 말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놓여나 가나안으로 들어가 자유와 안식을 얻은 것은 죄로 인해 수고로운 세상의 삶을 지나 천국에 들어가 누릴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안식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참 안식을 주신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영혼이 누리는 안식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안식할 때’(삽바티스모스)는 ‘안식의 상태’를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된 안식이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릴 평안이다. 인생의 수고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또 말한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영혼은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눅 16:22, 25; 23:43).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또 사도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있기를 담대히 그리고 간절히 원하였다(고후 5:8; 빌 1:23).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은 믿음(히 4:2-3)과 순종(히 3:18-19; 4:11)으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저 안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안식 즉 구원을 통해 정신적으로 이미 받았고 장차 영육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이다. 성도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화는 우리 자신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한다. 베드로후서 1:10,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믿음과 순종으로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본문은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는 원어(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는 ‘우리가 관계할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순종의 의무나 심판받을 의무를 가리킨다.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절부터 1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안식이 있음을 알자. 하나님께서 6일간의 천지창조 후 제7일에 쉬신 것은 그 안식의 모형이었다. 또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며 안식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이 안식은 예수께서 주신다(마 11:28). 성도는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서 이 안식을 누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천국에서 영육으로 이 안식을 영원토록 충만히 누릴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셋째로, 우리가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려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믿는 자가 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는 권면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든 죄악된 요소들을 철저히 깨달아 고침으로 불신앙과 태만과 위선의 죄 가운데 머물지 말아야 한다. 죄는 사람들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형벌에 떨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죄를 철저히 버리고 참된 믿음과 순종으로 항상 행하자.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해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 사도행전 1:9-11은 그것을 자세히 증거한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것은 그의 신적 영광과 권위를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사역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가장 간략한 내용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매주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도 믿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가 믿어야 할 바에 대해 간략히 진술한다. 21문답)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셨으나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또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25문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본문은 말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쉼파데사이)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그리고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의 도움과 보호 속에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의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에게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메타 팔레시아스)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그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 있게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 것이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구약의 대제사장은 죄인들의 죄를 씻는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속죄사역을 다 이루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니, 그의 사역은 얼마나 더욱더 효력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둘째로,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자!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그는 우리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로마서 10장 주일예배 설교문] 성도의 신앙고백(롬 10:1-21)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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