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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죄의 덩어리인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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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과 생명으로 사는 것 | worldchallenge.org
피로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도움이 필요한 잃어버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Source: www.worldchallenge.org
Date Published: 3/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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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말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 경안교회
경안교회 > 주일말씀 |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고린도전서15:19-22 할렐루야 우리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부활 생명을 …
Source: www.kyongahn.net
Date Published: 12/22/2021
View: 8785
현재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 Pistos Church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해서 죽어도 다시 사는 복된 인생이 되는 사람으로 굳게 서야 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
Source: gopistos.com
Date Published: 3/4/2022
View: 4854
“부활의 삶” (Life of Resurrection) | 아포슬 한인 침례 교회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 …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 있는 믿음으로 …
Source: www.akbchurch.org
Date Published: 3/1/2022
View: 1764
부활신앙은 현재의 능력, 증인으로 힘있게 살아가자 – 기독신문
‘고난을 기뻐했던’ 사도들 역시 연약했던 인간, 부활 믿음이 영원히 사는 삶으로 변화시켜1. 시작하는 글 올해도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된다.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3/10/2022
View: 6870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 미주 크리스천 신문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박성규 목사 (주님세운교회).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던 해 무서운 전염병이 한국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콜레라가 발생하여 하루에 700명 …
Source: www.chpress.net
Date Published: 4/22/2021
View: 5321
[발행인 2021 부활절 메시지]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갑시다
박헌성 박사 (월드가스펠타임스 발행인)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갑시다 … 기쁨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뒤를 따르면 기쁨과 믿음의 삶을 살게 …
Source: worldgospeltimes.com
Date Published: 4/20/2021
View: 5305
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부활의 효과 | Desiring God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자신의 삶은 어리석고 불쌍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약 죽음으로 그냥 다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
Source: www.desiringgod.org
Date Published: 7/14/2021
View: 5517
설교 – 2017년 4월30일- 부활의 삶을 삽시다
그리고 죄의 열매인 사망을 깨뜨리고 다시 사심으로 죄 사함의 능력을 보이셨으며 실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 …
Source: oxfordkoreanchurch.org
Date Published: 8/17/2022
View: 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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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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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4.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vzOp8HernA
부활의 능력과 생명으로 사는 것
David Wilkerson
피로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도움이 필요한 잃어버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편안하게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한복음 4:32).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과 생명으로 살 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에너지입니다!
저는 제가 자주 수명이 다된 자동차 배터리같다고 느낍니다. 여러분께서 자동차의 라이트를 끄는 것을 잊는다면 그다음날 차는 죽은 기계에서 나는 땡그랑 울리는 소음을 낼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셨던 성령님이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 하시지만, 저는 오늘날의 믿는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11).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에 정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특별한 에너지를 주셔서 우리의 육신에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로새서 2:13).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새 생명과 새 힘을 얻으십시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편 103:2,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디도서 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과 성령님의 거하심과 동행에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적용하셔서 부활의 능력과 새 생명으로 사는 삶을 사십시요.
4.24 말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 주일말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고린도전서15:19-22
할렐루야 우리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부활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을 불신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1).주님께서 세상 만물 통해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십니다.
자연 만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증거 하시듯
자연 만물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증거 하십니다.
2008년 11월5일 우리나라 연합 뉴우스에 이런 보도가 났습니다.
3300년 전의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의 미라와 함께 발견됐던 완두콩 유전자원이
우리나라 국립수목원 산림자원보존과에 의해 대규모로 증식되어 수목원에 전시하고 있다.
언론은‘3300년 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완두콩이 부활했다고 했습니다.
죽은 것 같은 꽃씨와 콩의 씨앗이 2, 3천년 만에 그 생명이 다시 사는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생명에 부활이 왜 없을까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15:36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2).예수님의-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십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히9:27
역사의 위대한 왕도 다 죽어 무덤과 유골을 남겨놓고 그 죽음을 증거합니다.
종교의 창시자들도 다 죽어 뼈와 무덤을 남겼습니다.
다다음 주에 석탄일이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죽었을 때 그의 뼈를 왕 8명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사리들을 작은 뼈로 나눠 수없이 퍼뜨려서 세계 도처에 수많은 사리탑에 넣고 사리라고 자랑합니다. 분명한 증거-나는 죽었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있되 비어있습니다.
인도 선교사 스텐리 존스가 이슬람 교도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이슬람교도 청년이 선교사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호메드를 섬기는 사람들이요. 메카에 가면 아직도 마호메드를 모신
무덤이 있어요. 당신네들이 섬기는 예수는 무덤 하나 없지 않소.”
그때 스텐리 존스 선교사가 대답했습니다.
“예, 예루살렘 성 분묘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이 있긴 하지만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지요. 만약 당신네들이 섬기는 마호멧처럼 일부라도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 기독교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헛된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서 난 후손이 프랑스에 살고 있다고도 헛소리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눅24:5
주님의 부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성경의 예언과 성취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고전 15:3-8]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눅24:5-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4).보다 더 확실한 것은 제자들의 회심과 순교가 예수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잡힐 당시-열한명의 제자는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그중에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했던 사람
도마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듣고 만지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던 사람
그런데 이들 중 한둘이 아니고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에서 바벨론까지 복음 전하다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전도하다 헤롯왕에게 참수 당했습니다.(AD44) (행12:12)
안드레는 헬라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 X형에 순교 당했습니다.
빌립은 브르기아에서 전도하며 히에라폴리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바돌로메는 전설에 의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인도의 성도마 산에서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블레셋과 애굽에서 전도하다 애굽에서 순교했습니다.
예수님 동생 유다는 앗수르와 바사에서 전도하다 애굽에서 순교했습니다.
세롯인 시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제사장, 왕과 총독이 알아주던 유대인 엘리트중 엘리트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공포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고 처형했습니다.
그러던 그가-갑자기 변하여 그 모든 지식, 지위, 권세를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이방 땅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청하여 로마까지 건너가서 옥에서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의리 때문이었을까요?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증거합니다.-요일 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바울도 증거합니다. 고전 15:4-8..그리스도께서…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처럼 주님의 부활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악한사람을 선하게, 약한 사람을 강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 1:17-십자가의 도가 망하는 자에게 어리석은 것이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 삶에 여러 가지 염려 근심 걱정에 붙잡혀 있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3.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부활의 능력으로 삽니다.
고전 15:20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짐승처럼 살다 짐승처럼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어리석은 자들은 “부활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믿음 없는 자는 그렇게 의심하다 그렇게 죽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부활의 능력으로 삽니다.-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래서 성경은 온통 죽은 자들의 다시 산 이야기들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를 만나고, 신약에 예수님, 사도를 만나는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에스겔 선지자가 “너희는 살리라-” 대언하니
그들이 살아서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신약에 예수님 만나는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사도를 만난 사람도 예수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들의 속에 부활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산 것은 부활의 상징이지 부활은 아닙니다. 그들도 결국은 다 죽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진정한 주님의 부활 생명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세 가지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영혼의 부활-믿지 않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영혼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영혼이 다시 산 것이다.
영이 산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롬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
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두 번째는 정신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정신이 살고 삶이 삽니다.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사람은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선을 좆게됩니다.
하나님 미워하시는 것은 왠지 싫어지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왠지 좋아지게 된다.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헌신하고 타인을 위한 십자가의 삶을 삽니다.
소년, 다니엘과 세 친구들-누구하나 감독자도 없고,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끼리 하나님께 뜻을 정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우상에게 절한 음식-목숨걸고 거절, 기도하기를 목숨걸고 해서 하나님께 그 기적 같은 축복 받은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 째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고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탤런트 김혜자씨는 예수 믿기 전에 모두가 알아주는 골초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후 어느 날 갑자기 담배가 역겨워져 딱 끊었습니다.
그 뒤 하나님의 일에 뜨거운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왔습니다.
집사가 되어 2008년 연기대상을 수상하고,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등 여러나라를 돌며 10년을 봉사한 열정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김혜자 집사는 방송인이면 누구나 알아주는 방송국의 전도 왕입니다.
사랑하는 경안 성도여러분
우리도 오늘 십자가 앞에서 신비한 은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내 삶을 성숙한 믿음의 삶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부활의 능력은 무엇인가요
“부활의 삶” (Life of Resurrection)
“부활의 삶” (Life of Resurrection)
“부활의 삶”
(Life of resurrection)
7-29-18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5:12,13,19~22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서 론>
만일 누군가가 성도 여러분에게 ‘크리스챤은 누구인가?’ 라고 질문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어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 자’, ‘죄로부터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시민으로 사는 자’ 라고 대답할수도 있을 것 입니다. 모두 옳은 답일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크리스챤의 중요한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의 삶을 살아 가는 자’ 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의 신학적인 지식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힘없는 크리스챤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본 론>
오늘 본문말씀이 속해 있는 <고린도전서 15장> 은 흔히 ‘부활장’ 이라고 불립니다. 주석가, ‘메튜헨리’는 <고전. 15>을 다음과 같이 분석 했습니다; <1~11절/ ‘그리스도의 부활’>, <12~19절/ ‘죽은자의 부활’>, <20~34절/ ‘부활의 순서와 상태’>, <35~50절/ ‘부활의 몸’>, <51~57절/ ‘사망을 이긴 부활’>, <58절/ ‘항상 주의 일에 힘쓴 것을 권고함’> 라고 15장을 분석하여 문단 나눴습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칫 흘려 넘길수 있는 주제일수 있지만 부활만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중요한 주제는 또 없을 것 입니다. 왜 부활이 이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크리스찬에겐 우리 구원과 영생의 사활을 걸만큼 핵심적인 <믿음의 근거>이기 때문인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전. 15장>에서 이렇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v.14,17) 라고.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 났다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고, 우리 믿음도 헛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는 것 입니다. 저는 오늘 <부활장 15장>을 통하여 사도바울 뿐 아니라 모든 신실한 초대교대 성도가 고백했던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심성과 확신이 우리 성도들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이 말은 부활의 믿음이 우리 신자의 삶의 중심이 될수 밖에 없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 왜 이 부활의 믿음이 신자의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일까요? ” (Why should the faith of the resurrection be a center of our Christians’ lives?) 그것은,
첫째, ‘ 부활의 사실성’ 에 근거하기 때문 (Because it depends on the truth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입니다; 여기서 ‘부활의 사실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킵니다. 물론 성경에서 선포하는 부활의 논리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다면, 그를 주로 믿고 또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그 또한 부활한다’ 라고 선언함을 우리는 잘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성경에서 ‘부활의 사실성 (=진실성)’을 언급할때 그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근거로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수 있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계속 선포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 말하고 싶은분은 없습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부활신앙을 살펴 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계속해서 강조되고 선포될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기 때문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이 계속해서 주님의 부활의 역사성과 심각성을 고백하지 않고, 선포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역설적으로 그 침묵과 무관심을 통해 ‘주의 부활’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 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v.12) 라고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 ~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v.20) 라고 그는 선언하는 것 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교훈은 진정한 주의 제자, 그의 증인들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우리 주님의 부활을 증거 했고, 그 부활을 자랑했고, 그 부활을 강조하고 계속적으로 선포했다는 사실 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가치와 능력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 입니다. 만약 그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숭고하고 고귀할수는 있지만, 그의 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리셨다는 구원의 핵심진리는 거짓말이 되는 것 입니다. 그분은 살아나지 못했기 때문에 죄와 죽음을 이기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갇혀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결론과 같이 주님의 부활이 없을때 ‘우리 크리스챤의 부활도 죄 사함도 없기에 ‘나사렛 예수를 주’ 라고 고백함으로 모든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은 결국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요, 도리어 우리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 는 것 입니다. 지난번에 살펴 보았드시, 사도바울은 <롬. 10:9> 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주로 시인’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주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구원신앙’의 핵심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긍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나라, 이 부활을 계속 기억하고, 기념하고, 강조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자랑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내 믿음의 기초요,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이런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은 일년에 한번 ‘부활절 행사’때 사용하는 종교적인 단어도 아니며, 마음의 감동과 확신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내 뱉는 어떤 신학적 용어가 결코 될수 없는 것 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 입니까?
둘째, ‘ 부활의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 (Because it depends on the power of the resurrection) 입니다; 무엇이 부활의 능력 입니까?성경은 “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롬. 10:9),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된 능력이 부활능력> 입니다. 이 능력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의 능력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입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인간의 영원한 원수, 죄와 사망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키시고, 사단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부숴트리고 완전히 승리케 하셨음을 확증하는 것이 이 부활의 능력인 것 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비록 우리의 머리와 우리의 가슴으로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다 이해할수는 없을찌라도, 이 능력은 마치 우리 몸속에 있는 피가 수없이 퍼져있는 혈관을 통해 몸속으로 공급됨으로서 우리를 살리듯이 이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릴뿐 아니라 죄와 사망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하게 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 입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의 삶이 그러하듯 이 ‘부활의 능력’에 있어서도 내가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내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입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너무도 크고 놀랍다고, 모든 죄와 사단의 권세를 이긴다!’ 라고 말해 놓고서는 되돌아서서 과거와 달라진것이 없이 여전히 ‘염려하고, 짜증내고, 성질 부리고…’ 육신의 소욕데로 살아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진정 주의 부활의 능력이 모든 죄와 사망을 이기셨음을 믿고 신뢰 한다면 이제 그 능력을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열매를 맺고 승리해야 하는 것 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장, 고전 15장을 쓰면서 무엇이라고 고린도성도를 격려하고 도전 합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 (v.34a) 고 도전하며,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v.58) 고 그들을 격려하며 믿음장을 마감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말로만 큰소리치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 입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챤이 결코 놓쳐서는 않되는 것은 믿음을 적용해야 하는 것 입니다. 내가 승리하는 크리스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대속 죽음으로 승리하시고 그 부활로 확증하심을 믿음으로써 그의 승리를 이제 내것으로 적용하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말 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롬. 8장> 을 통해서 여러번 살펴본 성령충만한 삶으로 승리한 성도의 모습 입니다.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신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이 성령님의 힘으로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셋째, ‘ 부활의 소망’에 근거하기 때문 (Because it depends on the hope of the resurrection)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어떤 일을 문득 생각하다가 왠지 허망하고 가치 없다고 느낀적은 없습니까?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한다는 것이 가치없고 의미 없다는 생각 말 입니다. 이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이런 판단이 들게 될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일을 계속해 나갈수 없게 되는 것 입니다. 그 말은 조만간 우리는 그 일을 그만두게 되는 것 입니다. 더 이상 그 일을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 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소망스러운 것 일까요? 왜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믿음이 무의미하거나 허망한 것이 아님을 확신 시키고, 알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며 반드시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것을 소망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충성된 자를 통하여 우리가 현재가 아니라 장차 누릴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하라고 말씀 하시기 때문 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v.19) 고 사도 바울은 고백 합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 했을뿐 아니라,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수 없을찌라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께서 다시 재림하실때 함께 의로운 심판을 위해 부활하여 영원토록 주와 왕노릇하며 영광을 누릴 은혜를 소망하기 때문 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이 만든 소설도 아니며, 어떤 정신병자의 환상도 아닙니다. 비록 구원받지 못한자는 이해할수도 깨닫을수도 없을찌라도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이해하고 소망하는 신자의 미래의 상태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의 충성된 종들을 감동 시키셔서 말씀하신 소망스런 약속인 것 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에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6~18) 라고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위로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에 우리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서 그분과 누릴 영광의 삶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미래의 사실이 위로가 되십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사실이 말할수 없는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 미래의 대한 위로와 소망이 그들을 그 어떤 불의 위협과 극악한 죽음의 위협 앞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믿음의 순결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한 것 입니다. 바로 부활의 믿음으로 말 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 말은 여러분이 어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고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그 믿음을 통해 삶속에서 선한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뭔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살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깨닫은 만큼 순종함으로 삶속에서 열매 맺게 된다>는 것이 영적 원리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로만 주실수 있는 신자의 능력의 삶이요, 승리의 삶이요, 부활의 삶이라고 성경은 약속해 주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맺는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제나 신자의 믿음을 바쳐주는 근거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는 것 입니다. 이 성령의 증거하심과 그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통해 주님 만나는 날까지 열매맺고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아멘.
부활신앙은 현재의 능력, 증인으로 힘있게 살아가자
‘고난을 기뻐했던’ 사도들 역시 연약했던 인간, 부활 믿음이 영원히 사는 삶으로 변화시켜
1. 시작하는 글
한천설 교수
(총신대 부총장·신대원장)
올해도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된다. 매 주일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라면, 이 부활주일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부활주일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성도들이 이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소망과는 달리 부활주일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올해도 부활절의 상징인 형형색색의 달걀들, 부활절 칸타타, 부활절 연합예배, 그리고 특별헌금도 있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설교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글의 목적은 부활신앙을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현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을 분석하고,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란 어떤 삶인지를 살펴봄으로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있다.
2.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현 한국교회의 상황분석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교회에는 부활을 지식적으로는 인정하고, 또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부활신앙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삶으로는 분명히 나타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겸손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보자.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하늘 백성이라는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가치관과 그 날을 중심한 행복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부활신앙’을 소유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는 목회자는 얼마나 될까?
우리 목회자의 사명이 공동체의 문제를 바로 직시하고 그것을 말씀으로 치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예배시간마다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이 없는 것!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중심한 미래중심적 인생관보다는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현세주의자들로 넘쳐나는 것!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3. 부활신앙 상실의 원인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초래되고 있는가? 이 책임이 과연 성도들에게만 있을까? 혹시 우리 설교자들이 부활절 메시지를 바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설교자들이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 매년 비슷한 판에 박힌 설교, 예견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은 아닐까?
몇몇 설교자들은 절기설교만큼 쉬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절기설교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부활주일 설교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절기설교 때와 마찬가지로 부활주일이 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올해는 어떤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부활절 설교는 대개 두 가지 주제, 즉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이나 혹은 ‘부활한 몸의 성질’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런 경향은 학자들의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올 2016년 부활절 설교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설교를 듣는 성도들 역시 우리 목사님의 이번 부활절 메시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 신앙이 초대교회에 미쳤던 결정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조금은 강조점이 빗나가 있는 설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도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할 때는, ‘부활사건’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서 그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선포는 단순 명료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참조). 다시 말하면,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가운데 실제로 일어났고,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종말주의자처럼 내세만을 바라며 이 세상에서 도피와 회피의 삶을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영역주권으로 변화시키고 확장시켜 가야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있는 삶의 근거가 부활신앙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우리 설교자들이 힘있게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제자들의 부활신앙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제자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자리다툼이나 하고(마 18:1),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절망에 빠졌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졌던 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참 메시아이며(행 2:36), 생명의 주시며(행 3:15), 십자가에 못박힌 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주신다.”고 담대히 설교했다(행 3:21).
제자들을 이렇게 완전히 변화시킨 그 원인은 무엇이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부활은 초대 기독교의 중심메시지였다. 최초로 기록된 기독교의 설교는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었고(행 2:14-36), 사도들의 설교도 베드로의 설교를 시작으로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중심 메시지였다(3:14,15). 이처럼 사도들이 변화하고, 능한 일을 할 수 있고(4:10),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이들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부활신앙, 즉 하나님께서 나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5. 바울의 부활신앙
이러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생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다(행 9:1-18). 그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변화되었고, 과거에 귀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정도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의 설교와 신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의 모든 신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점에서 정립되어야 할 만큼 부활은 그의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H. Ridderbos는,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사의 중심사건이며 또한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 전체의 중심이다”라고 한다. 심지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마저도 헛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신학에 있어 핵심적 요소이며 구속사의 절정이었던 것이다(고전 15:14~17).
이러한 바울의 부활신앙은 고전 15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은 함께 서고 함께 무너지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첫째로 부활의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15:29~34), 둘째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을 때 어떤 결과들이 초래되는지를 설명하며(15:12~19), 셋째로 부활의 순서가 어떠할 것인지를 교훈하며(15:23~28), 넷째로 부활을 부인하는 악한 자들에게 속지 말 것을 권면한다(15:29~34). 그리고 다섯째로 부활한 성도의 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설명한 후(15:35~49), 끝으로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의 노래로 부활장을 마치고 있다(15:50~38).
6. 맺는 말: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부활을 부인하지도 않는데, 부활신앙이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지식적인 것으로 그치고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없는 신앙인의 모습으로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는 복음을 전하다 공회 앞에 잡혀온 사도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5:3342). 이 사건을 보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공회 앞에서 채찍에 맞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다.”(행 5:41)는 구절이다. 얼핏 생각하면 여기 나타난 사도들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욕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맞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핍박당하고 순교하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고난, 그 자체를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난을 기뻐했다.”고 하고 있다. 고난을 인내하더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난을 참고 견디었다는 말도 아니다. 고난! 그 자체를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도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었는가? 세상도, 환경도, 변한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람들을 이처럼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즉 ‘부활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같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했고,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저들에게 무엇을 말해 줬는지, 어떻게 역사한 것인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들에게 부활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나 생각해야 하는 피상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먼 미래의 피상적인 이야기 아니라, 사도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힘있는 삶을 살게 하는 현재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부활을 믿었던 사도들이 그러했고, 스데반이 그러했으며, 바울이 그런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로 살아갔던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마땅히 보여주어야 하고, 또 보여줄 수 있는 정상적인 모습인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제 우리의 시선을 다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로 돌려보자.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이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로 우리 교회 안이 채워지고 있는가? 이 세상보다는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앞에서 받게 될 평가에 더 가치를 두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능욕을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이 세상만이 전부인 것처럼 현실기복적인 신앙에 매여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성도들은 과연 죽어도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면, 이번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사도행전 5장의 사도들처럼 부활신앙으로 재무장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이런 부활의 메시지가 모든 강단에서 울려 퍼져서 세속화의 위기 앞에 직면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신앙으로 재무장함으로 이 땅위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힘있게 살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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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부활의 효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9)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수많은 위험을 겪고 날마다 죽으며 맹수같은 자들과 싸우는 등 힘들고 어려운 수많은 일들을 겪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자신의 삶은 어리석고 불쌍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만약 죽음으로 그냥 다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라고 말합니다. 이는 먹기를 탐하고 술 취하는 자가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부활이 있든 없든 불쌍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미는, 부활이 없다면 세속적인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적당한 세속적 쾌락 추구가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바울이 택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순종을 선택하기 때문에, 고난을 선택합니다. 그가 회심할 때 아나니아가 그를 향한 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사도행전 9:16). 바울은 이 말씀을 자신의 소명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철저한 순종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은 고린도전서 15:20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고, 나도 그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수고도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5:58).
부활의 소망은 바울이 사는 방법을 철저하게 뿌리에서부터 변화시켰습니다. 물질주의와 소비 지상주의에서 그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삶 속에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결혼을 할 자격이 있었지만(고린도전서 9:5), 그는 그 즐거움을 포기했습니다. 많은 고난을 견뎌야 하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소망이 우리 행동을 그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그는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누가복음 14:14).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삶이 부활의 소망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지 잘 살펴보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철저하고 근본적인 부르심입니다. 지금 우리가 내리는 어떤 결정은 과연 이 세상의 이익에 기초합니까? 아니면 다음 세상의 것에 기초합니까? 부활이 있어야만 지혜롭다고 설명될 수 있는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부활의 존재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근본에서부터 철저하게 바꾸는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생토록 재헌신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4월30일- 부활의 삶을 삽시다
제목 : 부활의 삶을 삽시다 (고린도전서 15:1-11)
지난 주일에 ‘부활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다’ 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만일 그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생략하고 그의 선행과 탁월한 가르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 강의가 될 뿐입니다. 또는 나사렛 예수의 생애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면 사회의 약자들, 탄압 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혁명가나 선구자로 기억되거나 자신이 신봉하던 신앙과 신념을 위해 헌신한 순교자 열전에 오르는 인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빼면 복음이 아니고 죽음만 부각되고 부활이 따르지 않는다면 반쪽 복음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만큼 십자가와 부활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성경이 교훈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여러분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바울은 1절에서 그것을 가리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 이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 펼쳐지고 있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베드로를 비롯하여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적으로 보이신 것 외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또 모든 사도에게 보이신 주께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 는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으려 들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파하는 성도들과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친히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과 이후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주님의 부활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은 후 그들의 삶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믿기 전에는 반신반의와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으며 골방에 숨어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스승을 배신하고 도망했던 죄책감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로부터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담겼으며 대제사장과 관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내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주님은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쑥 나타나셨다가 또 훌쩍 떠나가셨고 40일이 지난 후에는 하늘로 오르셔서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성령이 찾아 오셔서 그들 가운데 충만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자신들의 부활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활의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으며 사람들과 세상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천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살았던 부활의 삶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질까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 부활을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오늘 나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작년에 귀국해서 부산에서 살고 있는 여진실 자매가 얼마 전에 존 스토트 목사님이 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책을 보내줘서 읽는 중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부활과 관련한 내용 중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 우리 교우들과 꼭 나누고 싶어 오늘 설교 속에서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가 그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틀림없이 확실한 것이며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질문하고 ‘그렇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지탱하는 세 가지 버팀목이다’ 라고 대답하면서 부활의 중요성 세 가지를 열거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영국의 어느 큰 정신병원 원장은 “만일 우리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환자 절반을 내일 퇴원시키겠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마음 속의 비밀 또는 너무나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 대한 기억을 조금씩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정죄하고 고문하며 괴롭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 역시 그런 괴로움에 붙들렸었습니다. 예수님을 사지에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줄행랑을 쳤던 제자들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혼란에 빠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면전에 불쑥 나타나셨을 때 기겁할 정도로 두렵고 놀랐지만 자신들의 비겁하고 나약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차마 주님의 얼굴을 뵐 낯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평안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갈릴리 호수가에 숯불을 펴놓고 구운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다가 밤새 배를 타고 추위와 싸우고 뭍으로 올라온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로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큰 소리를 쳤지만 결국에는 동료들과 함께 도망을 쳤던 베드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유구무언이었으며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베드로만 그랬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생애가 죽음으로 끝나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베드로는 물론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스승을 배신한 비겁한 인간이라는 죄책을 견디지 못하고 평생을 후회와 탄식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뵌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경험했고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변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떤가요?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도리가 어리석고 황당한 이야기이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교도들의 주장이라 여기고 앞장 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으니 그의 과거 행적으로 말한다면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턱없이 부족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나에게도 찾아와 보이셨고 나같은 사람을 불러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으니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죄 사함과 화평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시던 자리에서는 포도주 잔을 두고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마26:28)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우리의 죄 사함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그 사망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죄 사함을 얻을 능력이 없는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형벌을 홀로 지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열매인 사망을 깨뜨리고 다시 사심으로 죄 사함의 능력을 보이셨으며 실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했습니다만 만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는 우리를 영원한 사망, 멸망으로 이끌어갈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죄의 삯인 사망은 여전히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을 대신할 진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 모든 짐이 벗겨졌으며 하나님의 용서가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인정하셨고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분을 믿는 사람은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케 하는 중요한 신앙의 버팀목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얼마 정도는 감동을 줄 수 있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존 스토트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마치 책장 하나 넘기는 것처럼 쉽게 말해버릴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껍데기를 한꺼풀 벗겨보면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있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데 이전보다 조금 더 종교적이 된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성경 지식이 좀 더 많아지고 신앙적 용어를 사용하는데 어색함이 줄어들었다고 하여 그런 외형적이 경건의 모양이 그리스도인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실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잔인한 사람을 친절하게 만들고, 이기적인 사람을 이타적으로 만들며, 부도덕한 사람을 자제심 있게, 그리고 심술궃은 사람을 다정하게 만드는 일을 해내실 수 있을까요? 그분은 영적 진리에 대해 죽은 사람에게 역사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게 만드실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오직 부활의 능력,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바로 그 능력 때문입니다 (엡1:18-20).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간단한 죄고백이나 감정적인 변화와 몇가지 생활습관을 고치는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신뢰하기 시작한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자신들의 부활이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삶의 자세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주는 능력을 삶 가운데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핍박과 죽음조차 그들의 믿음을 돌이킬 수 없었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고백이나 확신으로 전부가 아니라 고백한대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 믿음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말년 작품 <부활>은 심령이 변화된 사람들의 삶이 실제적으로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네흘류도프라는 귀족 청년이 자신의 욕망으로 카츄샤라는 한 여인의 삶을 망가뜨린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혼의 부활을 이룩하는 경로를 그린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카츄샤를 구명하는 과정에서 타락과 향락에 젖은 제정 러시아 귀족들의 삶과 그들의 범죄행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교회의 부정직함, 그리고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삶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면서 도덕적, 신앙적 결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비기독교도인들은 이 소설을 사회문제 고발이나 개혁, 인간 정신의 갱생과 개조라는 휴머니즘이 담긴 명작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그 능력의 근원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었음을 발견하면서 부활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에 공감이 갑니다.
자신으로 인해 절망과 타락의 인생으로 떨어져 억울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카추샤를 보고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카츄샤를 만나서 사과하자. 어린애가 하듯이 용서를 빌자” 라고 결단하며,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주소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으로만 그치지 않고,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지 않고 일어나서 찾아가 용서를 빌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자청하여 시베리아로 따라가 참회를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네흘류도프가 구명운동을 하고 청혼을 하는 행동을 위선으로 여겼던 카츄사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간 배신과 피해의식으로 자포자기하며 막 살았던 자신의 삶도 바꾸고 네흘류도프를 용서하며 그로 하여금 새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비록 카츄샤와 결혼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네흘류도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야기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미워하며 지독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는 과거에 매인 사람입니다. 어제 미워했던 사람을 오늘 여전히 미워하고 내일도 미워하리라 한다면, 어제 용서치 못한 사람을 오늘도 용서하지 않고 끝내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그 마음에 들어갈 자리는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면서 자책하고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상처 받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반복하여 사는 것은 부활의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이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이 주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증표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생명으로 전하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할 의무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부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을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며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세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게 합니다. 현대 과학과 이데올로기 등은 나름 인류사회의 발전과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불완전하고 허구성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며 소망 가운데 삽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죽음과 소멸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주셨고 또한 우리를 구해 주시는 능력이십니다.
성경이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고전 15:42-44). 왜냐하면 주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시니 우리 또한 주를 따라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작하신 일을 결국 완성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가시적이고 확실하며 공적인 증거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벧전 1:3)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은 죽었지만 그의 인격, 영과 능력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계속 살아 있다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의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몸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중요성을 설명한 존 스토트의 말을 빌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죄 사함과 권능과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게 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죄사함을 확신하게 함으로써(우리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의 과거에 직면할 수 있게 해 주고, 하나님의 능력의 충분하심을 확신하게 함으로써(현재의 삶에 아무리 유혹이 강하고 책임이 무겁다 할지라도) 우리의 현재에 직면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할지라도) 부활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임을 확신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미래를 직면하게 해 준다. 부활은 물리적인 질서 안에서 일어났고 하나님의 단호하고 공개적이며 가시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불확실했을 세상에서 우리에게 굳은 확신을 가져다 준다.”
오늘 바울이 쓴 편지에 열거된 많은 부활의 증인들은 이러한 확신으로 세상을 살았으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바울과 같은 분들에게도 허약했고 교만했으며 불신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능력이 되어주셨고 변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성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이 땅에서 있는 동안 변화된 성도로 부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능력 있는 삶으로 실천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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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설교]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 |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삶,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