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의 첫 열매 | 예수소망교회 곽선희 목사 – 부활의 첫 열매 188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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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채널]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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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4/1/2018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그리스도 – 나성영락교회

[주일] 4/1/2018 부활의 첫 열매, 예수 그리스도 말씀: 박은성 목사 고린도전서 15장 19`22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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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ngnak.com

Date Published: 9/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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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 케임브리지 연합장로교회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체로 소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나심은 다시는 죽음에 의하여 무너지지 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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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urchboston.org

Date Published: 5/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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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부활의 첫 열매” – 시카고 한국일보 – Korea Times

이제 우리는 첫 열매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 축복이며 은혜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올 때나 떠나갈 때 그 시기는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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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icagokoreatimes.com

Date Published: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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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이미지. 201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하신 말씀에서 발췌.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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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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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는 누구인가요? – 크리스천투데이

만약에 성도가 시간적으로 먼저 부활했다 할지라도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부활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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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8/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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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 mission

부활주일.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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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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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과 관련이 있는 자 그와 연합한 자, 예수님 안에 있는 자, 예수님을 영접한 자만이 그 첫 열매 뒤를 따라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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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eongok.org

Date Published: 1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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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라는 의미 – 네이버 블로그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그 단어 하나만의 의미보다 인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 전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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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5/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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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 기독교대한감리회

부활의 첫 열매 · 날 짜 : 2022년 4월 17일 주일 · 찬 송 : 160장 무덤에 머물러 · 성 경 : 고린도전서 15:20~26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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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mc.or.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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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채널방송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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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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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 또는 길입니다.

이미지 삽화: 야하이라 라모스

나사렛 예수의 참된 정체성과 인생에 대한 중대한 철학적 논쟁 및 질문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부활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말하는 부활을 하셨다면, 그분은 반드시 신성한 존재여야만 합니다. 평범한 인간은 죽은 후에 생명을 되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단지 목수, 교사, 랍비, 또는 선지자로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곧 아버지의 독생자이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가르침은 참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지구의 창조자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천국과 지옥은 실재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방문하신 영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분은 다시 오셔서 천사들이 말했듯이 “친히 지상에서 다스리실 것”입니다.[신앙개조 제10조].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한 부활과 마지막 심판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기에, 세상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전지, 전능, 자비심에 대한 의혹은 근거가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의혹도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 또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실재하므로,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고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실제로 상상이나 심리적 발명 이상의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으며,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객관적이고 변하지 않는 도덕적 표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율법과 계명을 범한 것에 대한 회개는 가능하며, 그것도 시급히 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그들도 구주와 같은 일을 하며 나아가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분께서 약속하셨듯이 그분의 기적은 실제였습니다. 그분의 신권은 “복음을 베풀며, 왕국의 비밀의 열쇠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지[닌]” 실제적인 힘이며, “그러므로 그것의 의식으로 경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교리와 성약 84:19~20]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며, 비록 우리의 몸이 썩어 없어져도 우리는 육체를 입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욥기 19:26 참조]

부활의 첫 열매는 누구인가요?

본지는 [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의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질문]

목사님, 개인적으로 무척 난해한 구절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분에게도 질문을 드려서 아주 좋은 견해를 답변 받기는 했지만, 궁금증을 완전하게 해소하기에는 약간 미흡 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답변 주신 분의 요점은, 예수님 운명 시 부활한 성도들의 사례는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된 소생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 견해에 승복치 않고 재차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목사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요지: 마27:52-53절은 마치 예수님보다 앞선 부활 성도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만약 그렇다면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운명 시 부활한 성도들이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지요?

의문:

1) 본문 기사는 성도들의 부활사건인가? 만약 그렇다면, 영적 의미는 무엇이며, 부활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인가 또는 이후인가, 그리고 만약 예수님 부활 이전의 사건이라면 부활의 첫 열매는 이들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2) 만약 본문 기사가 부활 사건이라면, 클라렌스 라킨 목사의 견해처럼 이들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첫 열매로 대우해야만 하는가?

3) 만약 본문 기사가 소생 사건이라면 그 해석의 준거는 무엇인가?

[답변]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에 관해 질문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도 난해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시간적 순서가 분명하지 않아서 지적하신 대로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사복음서 중에도 마태만이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다 그 기록마저 과학적, 객관적, 사실적 기록이 되지 못해 더욱 해석에 혼선을 빚게 만듭니다.

따라서 제가 드리는 설명도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하나의 의견으로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추적이 더 이상 불가능한 부분은 성경의 기록 이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무리 학술적으로 뛰어나고 영성이 깊은 신학자라해도 취할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소생(蘇生-reanimation)인가 부활(復活-resurrection)인가?

무덤에서 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사건이 만약 소생이었다면 아무 문제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이미 죽은 자도 여러 번 살렸고 또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런 이적들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라면 왜 자던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또 그 성도들이 언제 부활했으며,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인가라는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소생은 완전히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또 죽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을 제외한 신구약을 망라해 성경에서 죽었다 살아난 자는 전부 소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나, 옐리사가 살린 과부의 아들이나, 바울이 살린 청년 모두 그렇습니다.

본문의 경우에는 무덤에서 나온 성도들이 그 후에 죽었는지 영원토록 살았는지에 관해선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함께 하늘로 올라 간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고, 또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에 부활이 아니라 소생으로 보기도 합니다.

소생은 비록 육신은 썩기 시작하겠지만 항상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자들이 되 살아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형체도 없이 사라진 이후에 일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에는 조금 그 사정이 다릅니다. 우선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저자 마태는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의 사상으로는 죽은 후에는 음부로 가서 메시야가 올 때까지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자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던 성도들이란 이미 죽은 후에 한참 지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그들은 죽은 지 사흘이 지나면 그 영혼마저 완전히 육신을 떠난다고 봅니다. 나아가 죽은 후 오래 된 시체에서 뼈를 추려서 돌로 된 납골상자(Ossuary)에 옮겨 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자던 성도들이 일어나 나올만한 오랜 무덤 안에는 소생이 될만한 혼이나 중요한 뼈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오면 부활이 있을 것이라 믿고 기대했던 유대인 저자 마태로선 진정한 부활로 인식하고 기록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신구약 합쳐서) 마지막 때에 가서야 그것도 신령한 육체를 덧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 하는 모습이어야만 부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승천한 것도 아니고, 신령한 육체를 입었다는 표현도 없고, 나아가 영원토록 살았다는 기록이 없으니 완전한 부활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알기 쉽게 추론하면 부활은 반드시 새로운 육체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것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예수님 때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심판을 받은 불완전하고 부패한 모습입니다. 부활한 신령한 육체가 살 수 있는 여건이 아직 안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이 영원토록 살 수 있으려면 두 가지 길뿐입니다. 사단이나 천사처럼 영의 존재 양식을 가지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 승천을 했던지 해야 합니다. 전자는 완전한 부활이 아니고, 후자는 성경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후대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넘어서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소생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다른 모든 소생과는 전혀 양태가 다르며 한 차원 높은 소생이었고, 부활이라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완전한 부활에는 부족한 부활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뤄진 구원의 완성으로 죽은 성도는 반드시 부활한다는 완전한 예표 -실례(實例)는 아직 아님-로 죽음에서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이하 부활로 표기함)

부활의 시간적 순서

마태복음에 따르면 무덤에서 자던 자들이 일어난 시간이 마치 성전 휘장이 찢어지던 것과 동시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상으로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27:51-53)라고 했습니다.

우선 “무덤들이 열리며”와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를 연결하여 한 문장처럼 기록했기에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입니다. 또 ‘일어나되”라고 앞뒤의 문장을 대칭되는 내용으로 연결했기에 부활한 것과 무덤에서 나온 것이 별개의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부활은 먼저 일어났는데, 삼일간 무덤에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로 살펴봐도 한글 성경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애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And behold, the veil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and the earth shook; and the rocks were split, and the tombs were opened; and many bodies of the saints who had fallen asleep were raised; and coming out of the tombs after His resurrection they entered the holy city and appeared to many.”(NASV)

언뜻 보면 and라는 등위 접속사로 별개 사건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각 사건들이 세미콜론[:]으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미콜론은 마침표와 쉼표의 중간적 의미입니다. 마침표로 구별되어야 할만큼 완전히 별개의 사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시에 한 장소에서 계속 연결되어 일어난 사건들로 쉼표로 이어서 표현할 내용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중간인 의미, 즉 동일 주제로 연관된 사건이지만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after His resurrection”(예수의 부활 후에)라는 수식구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적용되느냐는 애매합니다. 즉 자던 자들이 그전에 일어났지만 단지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자던 자들이 일어난 것도 예수의 부활 후로 보아야 하느냐가 명석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질문자님께서 지적한대로 헬라어 원문을 참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헬라 원문에 따르면 “무덤들이 열리며”에서 구두점으로 앞 문장이 종결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52절 후반부의 무덤(tombs)과 후에(after) 사이에는 ‘and’나 다른 어떤 구두점으로든 쉼이 없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그 부분이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야 맞습니다.

따라서 영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 … tombs broke open. And the bodies of many holy people who had died were raised to life, and, having come out of the tombs after Jesus’ resurrection, they went into the Holy city.”가 되어야 합니다.(J. W. Wenham, “When Were the Saints Raised?” 1981, 150-52) 즉 “예수의 부활 후에”가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에도 함께 걸리는 수식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이런 시차 상의 구분이 없이 죽 연결되어 번역된 까닭은 아마도 영어 역본을 우선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운명함과 동시에 지진이라는 자연적 재앙이 일어났고 그 재앙으로 두 가지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성전에서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덤이 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자는 성전의 막힌 담이 무너지는 복된 사건이기도 하지만(엡2:14) 마태복음 23, 24장에서 경고된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의 의미도 있습니다. 후자는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죽음이 정복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본의 문법적 분석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풍습대로 바위 굴을 막는 둥그런 돌이 지진으로 터졌거나 굴러 벗겨지긴 했지만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 부활 전까지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부활의 시간적 순서를 따질 때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는 유월절 절기 중이라 어떤 유대인들도 무덤 곁에 가려 하거나 혹시라도 무덤이 열린 것을 알아도 그 속을 살펴 보거나 무덤을 다시 닫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것은 율례를 어겨 부정해질 뿐만 아니라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고 당연히 마태도 시간적 순서를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개연성이 더 많았다는 뜻이 됩니다.

누가 부활의 첫 열매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사실은 시간적 순서로 따질 이유도 없습니다. 완전한 헬라어 성경 원본과 당시 목격자가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부활의 시간적 순서를 아무도 모른다 쳐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성도가 시간적으로 먼저 부활했다 할지라도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부활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없이는 절대로 성도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인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여 공적인 장소에 나타난 후라는 마태의 기록이 이 사실을 더 확증해줍니다. 즉 만에 하나 성도들이 먼저 부활했다 할지라도 삼일 동안 무덤에 머무르게 한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박진호 목사

그들은 무덤에서 자다 일어난 자라 예수님에 대해서 또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몰랐을 수 있습니다. 성경도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들을 죽음에서 일으켰고 그런 부활은 메시야가 도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는 확신했을 것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는데 그 구원의 궁극적 모습은 부활로 이뤄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인데 구세주 당신이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고선 그 부활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삼일 간 성도들의 무덤이 열린 채 빈 무덤으로 있었다는 것(앞에서 설명한대로 무덤 안에는 시체의 잔존물이 거의 없음)이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과 일치하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저자 마태가 후대인들이 혼동할 정도로 시간적인 엄격한 구분 없이 기록한 이유는 부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뜻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부활로 이땅에 일어난 여러 생명력 넘치는 상황들을 한데 묶어서 표현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연결해서 서술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이 세미콜론으로 연결되어서 번역되었고 그에 따라 한글 성경이 한 문장으로 죽 연결된 채 번역된 것이 결과적으로 저자가 의도한 고유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기록에 대해 마지막으로 신자들이 갖는 몇 가지 의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성도들에게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왜 다른 성도들은 함께 일어나지 못했는가? 그 해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예수 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때에 분명히 영육간에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다는 예표로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했을지라도 성령의 유기적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당신의 말씀에 근거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15:22,23)

2006/01/02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부활의 ‘첫 열매’라는 의미

질문 :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첫 열매는 수확의 과정 중 하나입니다. 우리말의 추수(秋收)는 ‘가을걷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수확기는 5월경이므로 ‘추수’보다 ‘수확’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첫 열매 명절’은 초실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흔드는 빵 두 개를 가져올지니 그것들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구운 것이요, 주께 드리는 첫 열매니라. (레 23:17)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바로 초실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구원을 상징하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43~46절의 유월절 규례에 따라 모든 예언의 성취를 위해 뼈를 꺾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즉 그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 ) 이에 군사들이 가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그분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니라. (요 19:31~33)

이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요 19:36)

그리고 3일 후는 초실절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첫 열매를 먹은 날이며 구원의 상징인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의 산들에 안착한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들이 살아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그분의 부활 뒤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 27:51~53)

이것이 첫 열매 성도들입니다.

이후로는 알곡의 수확이 있을 텐데 이것이 공중 재림, 휴거로 성도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열립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중에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 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 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고전 15:19~23)

그러나 이삭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땅의 수확물을 거둘 때에 너는 네 밭모퉁이를 수확하면서 깨끗이 거두지 말며 네 수확물의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하여 그것들을 남겨 둘지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 23:32)

알곡 수확 이후로는 대환난이 닥치고, 그 끝에 뒤늦게 믿은 자들인 환난 성도들이 올라가는 이삭줍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주로 뒤늦게 돌아온 유대인들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너는 끝이 이를 때까지 네 길로 가라. 네가 안식하다가 그 날들의 끝에 네 몫으로 정한 곳에 서리라. (단 12:13)

다음으로는 쭉정이를 모아 불에 태우는 흰 왕좌의 심판, 즉 백보좌심판이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계 20:11~12)

그러므로 아직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는 알곡의 수확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그 단어 하나만의 의미보다 인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 전체를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말이며,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소망의 신호탄과 같은 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

고등학생 시절 집에 레몬나무가 있었습니다. 화분을 처음 선물받았을 때, 잎만 보아서는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조그만 열매가 열렸는데 금귤 같기도 하고 오렌지 같기도 했습니다. 열매가 노랗게 다 큰 다음에야 레몬인 줄 알았습니다. 첫 열매를 따던 날, 온 가족이 함께 새콤한 레몬을 맛보았습니다. 향기도 참 좋았습니다. 레몬 껍질을 버리려다가 ‘성경책 갈피에 꽂아 두면 성경에서 레몬 향기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예쁘게 오려서 꽂아 두었습니다. 정말로 한동안 성경책에서 레몬 향기가 났습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실수했음을 알았습니다. 레몬 껍질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덩달아 레몬에 닿은 성경책 몇 장이 함께 썩어 버렸습니다. 내 손으로처음 산 성경이었는데,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소중한 책일수록 책갈피에 썩지 않을 것을 끼워 두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사망이 거하게 된 이유는 우리 삶이 아담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썩은 것이 조금만 안에 있어도 온통 곰팡이가 피는데, 하물며 우리가 죽고 썩을 아담 안에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땅히 우리도 죽고 썩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죽은 아담이 아닌 생명의 그리스도 안에 살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따라 삶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 안에 사는 것은 무엇이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삶만 바라지 말고 부활 너머의 삶을 바라며 살라고 말합니다(고전 15:19). 이 말씀대로라면 세상의 삶만 바라는 것은 아담 안에 사는 삶이요, 이 세상 너머 부활을 바라며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믿음의 삶이며, 참된 삶을 얻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부활절을 지내면서 나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혹시 지금 나는 이 세상의 삶만 바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삶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바라는 삶,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이 목숨을 바쳐 우리에게 주신 참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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