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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
제 3 장.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3/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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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말라기 3. 3. 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24/2022
View: 8749
2019/11/22(금) “말라기 3:1-18” / 작성 정한조
본문 말라기 3:1-18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의 사자를 보내심(1-6절)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4/2022
View: 7924
말라기 3 KLB – 오실 사자 – 전능하신 – Bible Gateway
오실 사자 –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겠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너희가 찾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 …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1/8/2022
View: 8941
[스크랩] 말라기 3장 주석
말라기 3장. =======3:1. 여기 이른바, “내 사자”-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에 대하여 예. 언한 것이다. “길을 예비”- 한다 함은, …
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1/20/2021
View: 4770
말라기 3장 정리…
말라기 3장 정리… ·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 ·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 또한 무익하다고 하며, · 교만한 …
Source: theophil.tistory.com
Date Published: 12/16/2021
View: 6509
쉬운성경 말라기 03장 – HANGL NOCR
3:1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어 내 앞길을 닦게 하겠다. 너희가 찾던 여호와가 갑자기 여호와의 성전에 이를 것이다.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0/29/2022
View: 8942
“회개, 새로운 삶을 위한 첩경” 말라기 3장1절~6절 – 당당뉴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5~8)”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7/26/2021
View: 5253
십일조와 헌금시리즈 (6) – 말라기 3장 – 성경공부 – 양들의식탁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6) 말라기 3장 십일조를 운운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성경 본문은 말라기 3장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Source: jesuswayforyou.com
Date Published: 1/29/2021
View: 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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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말라기 3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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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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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십일조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1)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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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2019/11/22(금) “말라기 3:1-18” / 작성 정한조
본문 말라기 3:1-18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의 사자를 보내심(1-6절)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재건되고, 약 70년 만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여 성벽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과 신앙은 전혀 재건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지 100년도 넘게 지났지만 전혀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나타난 선지자가 말라기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온전한 것이어야 함에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성전에서 파는 온전하지 못한 짐승도 받아주며,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또 당시 백성들의 삶과 신앙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방신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니라 우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렸느냐며 발뺌만 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끝까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보여줍니다. 1-6절은 주의 사자가 와서 주의 백성을 연단하시고 공의롭게 행하실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두 사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자’와 ‘언약의 사자’입니다.
‘내 사자’가 히브리어로 ‘말라키’인데, 1:1의 ‘말라키’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1:1절은 고유명사로 번역하여 소리 나는 대로 ‘말라기’라고 했고, 본문은 보통명사로 번역하여 ‘내 사자’라고 했습니다.
내 사자가 하는 일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에서 ‘내 사자’로 성취된 인물이 ‘세례자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역할이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대통령께서 한 일반 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신다고 할 때에, 그냥 가서 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국가원수급의 인물이 레스토랑에서 식사가 있을 때, 그 레스토랑에 2주 전부터 매일 경호원들이 찾아와서 모든 것을 샅샅이 점검하고 준비하더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도 그렇게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행차를 앞두고는 수개월 전부터, 어떤 때는 수년 전부터 왕이 가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사자’가 임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너희가 구하는 바’가 되시고, ‘너희가 사모하는바’가 되신다고 합니다. 이 언약의 사자가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풀리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2-3)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언약의 사자로 오시는 메시아께서 무슨 일을 하실 지를 비유적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금을 연단하는 사람의 불과 표백하는 사람의 잿물에 비유합니다.
광산에서 금과 은을 캐내었다고 해도 100% 금과 은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온갖 불순물이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녹이면, 거기에서 금과 은만을 추출해 낼 수 있습니다.
또 옷에 얼룩이 묻으면, 물로 빨았다고 해서 얼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양잿물에 푹 삶아서 방망이로 두드리면, 얼룩이 빠집니다.
언약의 사자는 금과 은을 제련하듯, 자기 백성에게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잿물로 얼룩을 제거하듯, 오염된 자기 백성을 정화하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심판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점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신접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겁고 영적이지만, 신접한 사람의 말은 가볍고, 세속적입니다. 그래서 더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목적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입니다.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자신의 이익이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소유에 다른 사람의 몫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합리화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십일조를 도둑질 함(7-12절)
7-12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 지키지 않았던 십일조와 헌물 규례 위반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과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 첨예하게 대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시고, 유다 백성들은 “우리가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갑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예배)를 그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규례(말씀)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남은 ‘급성 떠남’이 아니라 ‘만성 떠남’이었습니다. 그래서 떠나 있어도 떠나 있었던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유다를 지탱하는 두 영적인 기둥은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선지자직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라면, 제사장직은 일상적인 간섭하심이었습니다.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교감을 했습니다. 그 중간에 매개체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제사 제도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첫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사병 318명으로 그돌라오멜과 함께 한 왕들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을 구하고 돌아오면서, 바쳤습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드렸습니다. 야곱도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10분의 1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무사히 돌아올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임져 주셔야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물, 헌금을 드림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고집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재물이 탐나시고, 짐승과 곡식이 탐나셔서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바침이 그들에게 더 큰 복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토지소산에 결실이 있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탐스럽게 열림은 하나님께서 메뚜기를 막아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막아 주시 않으시면 아무 것도 결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의 청지기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를 대적함과 경외함(13-18절)
13-18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평한 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3-14)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라는 뜻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지 말아야 될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심령이 살아 있어서 그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양심이 굳어서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며 화를 냅니다.
화단이 가장 망쳐진 상태는 땅이 완전히 굳어 있어서, 아무 것도 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이 굳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고,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는 것의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16-18)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아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왕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마음이 힘들 때 거기에 들어가서 그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그런 보물과 같은 존재로 삼아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거대한 두 물줄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총은 누리려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물줄기와 또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백성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바로 세우시려고 하시는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물줄기입니다. 이 두 물줄기가 거칠게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물줄기가 더 크고 강하기에 세속적인 인간의 물줄기를 덮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총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오늘 하루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며,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며 사시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도 괴롭게 하지 않았다고 몽니를 부리고,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사자’를 보내 주실 것이고, ‘언약의 사자’가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셔서 금과 은을 제련하듯이 정화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수전노 영감과 같으신 분이 아니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는 분이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 은총 속에 살아감으로 우리가 더욱 새로워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내 사자’와 ‘언약의 사자’를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언약의 사자(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만난 ‘내 사자(세례자 요한)’와 같은 분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해 주셨습니까?
2.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할 때에, 그들은 “우리가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갑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는데, 실제로는 떠나 있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그 때 어떻게 돌아가게 되었습니까?
3. 당신의 지난 삶에서 당신이 살았던 삶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많이 주신 복은 무엇입니까?
4. 오늘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스크랩] 말라기 3장 주석
말라기 3장
=======3:1
여기 이른바, “내 사자”-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에 대하여 예
언한 것이다. “길을 예비”- 한다 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
로서 회개케 할 운동이다. “너희의 구하는바 주”- 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
는데, 그가 “홀연히 임한”- 다 함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의 오심은 뜻 밖의 일과 같이 되어짐을 의미한
다. “그 전에 임”- 한다 함은, 그의 사역이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
사장의 사역과 같을 것을 이름이다. “언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
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를 가리킨다.
====3: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
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을 것이라 –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 말씀 뜻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의 인간 그대로는 초림하신 그리스도 앞에도 설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별 수 없이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시 130:4 참조. 그리스도
는 죄악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는 이가 아니고,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시고 사
람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으므로,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주시는 구원에
참예할 수 없으니, 멸망할 것 밖에 없다. 그의 회개 운동에 대하여 우리 본문은 비유
적으로 말하기를,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을 것이라”고 한
다.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은, 그의 재림 심판 때에 완전함을 이루나니 선지자 말라기
는 그것까지 생각하였을 것이다.
=======3:3,4
여기 이른바 “레위 자손”- 은 제사장들을 이름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일반 신자
들을 총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시므로 말미암은 속죄와 및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시키는 운
동을 통하여 되어진다. 이 성화 운동에 있어서 “연단”- (환난을 통하여 되어지는것)
은, 그 중요한 방편이다. 이렇게 성화되어가는 선자들이 하나님을 참되이 섬길 수 있
다.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린”- 다는 것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여
호와께 기쁨이 된”- 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대하여 말해
주는 구약식 표현이다.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
니라 – 이 말씀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정화 운동에 대하여 진술한다. 이 정화 운동
은 위에 말한 것(3절)과 같이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임한다. 곧, 모
세의 율법을 기탄 없이 범하는 자들에게 임하여 의와 불의를 갈라 놓는다. 물론 이것
이, 그리스도의 초림시에는 영적으로 숨기워서 되어지고, 그의 재림시에는 구체적으로
되어진다. 이러한 분변은 있을지언정 둘 다 심판인 것은 명백하다. “술수하는 자”는
거짓된 종교적 수단에 의하여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만드는 자이다. 레 20:6
참조.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삯에 대하여 억울케”함은,
제 7계, 제 9계, 제 8계의 위반을 염두에 두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을케”함은, 무자비한 지싱니 제 6계의 위반이다. “과부, 고아, 나그네” (이것은 외
국 사람을 의미한). 이 셋은 성경에서 흔히 함께 다닌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 긍
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 부분에 기록된
죄악의 목록에 있어서 최후의 자리를 점령 하였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악의 근본을 이렇게 말미에 두는것은,
도리어 그것을 중요한 죄라고 역설하려는 까닭이다.
“속히 증거”한다 함은, 부패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 암매한 자들에게는 돌
연히 나타나심 같이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다.
=======3:6
나 여호와는 번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
느니 – 이것은 윗 말씀의 결론으로 나온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
불어 언약하신 것을 변하지 아니하시고 필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시어,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정화 운동의 심판에 의하여 택한 백성(야곱의 자손)을 구원 하시
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 이른바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 중에 있었던
교회를 가리키나, 거기에 연속된 새 이스라엘 곧, 이방인 교회도 가리킨다.
=========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 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 여기서는 또 다시 하나
님께서 유대인들의 불회개를 통탄히 여기신다. 저들의 범죄 생활의 역사는 오래였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
리라”는 말씀은,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을 보여준다(1:3).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
히 먹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진실되이 단행하면, 그 하기 어려운 회개를 하나님이
성립시켜 주신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한히 먼 거리를 가는 불가능한 일이
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회개하는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하나님에게 있다.
곧, 하나님께서 그 회개자에게로 돌아오시겠다고 하시니, 먼 거리도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다.
이렇게 복음적 은혜인 회개를 유대인들에게 요구 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곧,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가? 하는 의미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하였다.
=======3: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
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 이다.
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아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 하셔도 합당하다. 그러나 그
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레위 족속의
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요구하셨으니 곧,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
난것 등에 대한 십일조이다(레 27:30; 민 18:20-24; 신 14:22).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
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이다.
=======3:10-12
여기 “창고”- 라고 한 것은 성전 창고를 이름이다(느 10:38, 13:12; 대하 31:11).
“나를 시험하여” – 라는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주실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이야 말로 도전적인 말씀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을 여러가지로 진술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는 대로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 확실히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풍성한 물질을 받은 자들이 있는 반면
에, 또 그렇지 못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자세히 알아 보아야
된다. (1) 십일조를 바치되 물질의 풍성한 것으로 갚음 받지 못하는 원인은, 아직도
그 바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실되지 못한 까닭이겠고, 그렇지 않으면, (2) 그가
십일조는 바치지만 다른 죄악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못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하셨다(단 9:4).
========3:13-15
이 부분 말씀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지적한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학고, 여기서도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이다.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있어서 그 특징은, 이와 같이 답
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 점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1)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슴게 행하는 것(죄 때문에 금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종하는 자에게 그가 갚아주시는 일이 없다는 패역한 주장이다. (2)그들은
주장하기를,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
는 자(그들이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성판하시는가 보자하며 의심함)가 화를 면한다
는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반대 하는 사상이다. 신자들이 말로는 이런 악
사상을 발표하지 않아도, 그 마음속에 이런 악사상을 품을 위험성이 있으며, 그 행동
면에 있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이런 악사상을 행위로 그려 놓는 일이 있을 위험
성이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런 위험을 경계하고 언제나 사언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려야 한다.
==========3:16-18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 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다. 거기
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한다. 이들의 주
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 (18절)는 담
화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 하셨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이다. “돌아와서” –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
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 대우인력 김진규
메모 :
말라기 3장 정리…
말라기 3장 정리…
1~5절 요약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는 날을 아무도 당하지 못한다. 그 날은 불과 잿물 같을 것이다. 그가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고,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은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점 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해설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내 사자는 “말라기” (מַלְאָכִ֔י)라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을 기록한 “말라기”라는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이기 보다는 보통 명사로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이 될 듯싶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앞서 보내서 “내 앞에 길을 준비하게”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임한다”고 한다. 본문에서 유의해 보아야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내 사자”와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같은 분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글과 신약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이 둘은 다른 존재라고 해야 더 옳다. “내 사자”는 하나님 앞에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너희의 구하는 바 주”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다. “내 사자”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너희의 구하는 바 주”는 메시야이다. 신약에서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내 사자”는 세례 요한을 언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은 “메시야”의 갑작스런 등장을 언급한다. 이것은 알지 못하는 때에 등장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때에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하고,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전 건축과 함께 임하게 될 메시야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분을 통해 주어질 복에 대하여 약속하셨는데, 그 메시야가 갑작스럽게 임하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임하는 날을 아무도 당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 날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임하게 될 무서운 심판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그 심판을 통해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신다고 한다. 이미 예배가 부패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레위 자손이 부정하게 되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가 전체로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위 자손부터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레위자손은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되고, 그 제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회복이 있을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레위 자손의 회복은 곧 거룩한 제사장이 세워짐을 뜻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됨을 말한다.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모든 불완전함이 극복되고, 깨끗하게 되고 정결하게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고, 완전한 예배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섬기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속이며 압제하는 자로 살게 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고, 그들이 아무리 많은 것으로 제사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라기서는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 날은 한편으로는 예배의 온전한 회복으로 복을 누리게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재앙의 때이기도 함을 말한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분이 언약과 축복의 사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함이 없다면 주의 날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모든 우상을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과부와 고아를 대접하며, 그리스도의 시대를 믿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6~12절 요약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시므로 야곱의 자손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며, 너희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한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너 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으리라. 너 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해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전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고, 그 후에 하나님의 축복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는 그런 영광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대하여 낙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 다시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의 약속은 신실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은 망하지 않고, 언약대로 놀라운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 그런 영광이 찾아오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 이유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초청하고 계신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간곡한 부르심을 듣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가리이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더이상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느냐는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헌물을 드렸고, 열심히 수고했으면 되었지 뭐가 또 필요하냐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할만큼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성전을 건축한 것이면 다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깊이 깔려 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수 있으며, 도둑질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 “너희가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다른 봉헌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들이 충분히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봉헌물을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의 창고가 비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없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온전히 제사하며 섬길 만한 양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당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으므로 성전을 통한 제사가 바르게 드려지지 않고 있었음을 뜻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먹을 것이 없어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있게 되고, 성전을 짓기는 했지만, 바른 제사가 드려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지 않음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묘사했고, 성전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 헌물을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했지만 복을 받지 못한 이유라고 하면서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 바른 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힘쓰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풍요롭게 하고, 땅에 복을 주고, 경영에 복을 주고, 모든 민족 가운데 복되다는 이름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십일조의 제도가 폐지되어야 하느냐의 여부는 오늘날 민감한 논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교회의 예배가 유지되고, 말씀사역이 계속되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함이 옳다. 예수님도 십일존가 계속되어야 함을 언급한 바가 있는 것을 볼 때에 신약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십일조의 폐지를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예배를 위한 헌신은 귀한 일이다. 예배가 계속되기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어진 귀한 것을 기꺼이 바치며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 예배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교회를 통해 거룩한 예배가 계속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 모든 권리는 결국 예배를 위해 헌신될 때에 더욱 큰 복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13~18절 요약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 또한 무익하다고 하며, 교만한 자가 복되다고 한다.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될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아들을 아낌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아끼리라
해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다. 아무런 유익이 없단은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한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유익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믿음과 삶을 돌아보지 않고, 성전을 성전되게 함이 없이, 온전한 예배가 없이 자기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나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복을 주지 않는 것같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할만큼 했는데 하나님이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헛된 짓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언약적 복을 얻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하게 사는 놈들을 봐라 저 놈들은 잘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착하게 살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잘 섬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돈 잘 벌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만 되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악이고, 또 이런 마음 가짐, 불신앙적 자세가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온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한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원함을 얻고, 생명을 얻고,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메시야 시대에 주어질 언약적 축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어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판단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서야 할 것을 요구한다.
심판과 저주가 어디에서 오는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 때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익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온당했던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신실하신 분이시므로 그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하게 된다면 반드시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심판의 때를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쉬운성경 말라기 03장
3:1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사자를 보내어 내 앞길을 닦게 하겠다. 너희가 찾던 여호와가 갑자기 여호와의 성전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바라는 언약의 사자가 이를 것이다.”
3:2 그러나 그가 오시는 날에는 아무도 견디지 못하며 그가 나타나실 때에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그는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깨끗하게 하는 비누와 같을 것이다.
3:3 그는 은을 달구어 연단하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는 레위 사람들을 연단하여 금과 은처럼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여호와께 올바른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3:4 그 때에 여호와께서 옛날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을 받으실 것이다.
3:5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 때에 내가 가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마술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일꾼들의 품삯을 떼어먹는 사람, 과부와 고아를 속이는 사람, 외국인을 학대하는 사람, 나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의 악함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겠다.”
3:6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마라> “나는 여호와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않는다.
3:7 너희 조상 때부터 너희는 내 규례를 따르지 않고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겠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
3:8 어찌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훔쳤다. 그러고도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까?’라고 하였다. 너희가 내게서 훔친 것은 십일조와 예물이다.
3:9 온 나라가 나의 것을 훔쳤으므로 너희에게 저주가 내렸다.
3:10 너희는 창고에 너희가 거둔 것의 십일조를 가져와 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공간이 넘치도록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3:11 내가 너희 작물을 해충들이 먹어치우지 못하도록 하겠으며, 너희 포도밭의 포도가 익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3:12 모든 민족이 너희를 복되다고 말할 것이며 너희가 좋은 땅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3:13 <여호와의 약속>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친 말로 나 주를 욕되게 했다. 그러고도 너희가 묻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욕되게 했습니까?’라고 하였다.
3:14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한 일을 뉘우쳐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3:15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복이 있고, 악한 사람이 성공한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람이 화를 면한다’라고 하였다.”
3:16 그 때에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을 들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와 섬기는 사람들의 이름을 책에 적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실 것이다.
3:1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들은 내 소유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듯이 내가 내 백성을 아끼겠다.
3:18 그 때, 너희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를 보게 될 것이며, 나 주를 섬기는 사람과 섬기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보게 될 것이다.”
“회개, 새로운 삶을 위한 첩경” 말라기 3장1절~6절
“회개, 새로운 삶을 위한 첩경” 말라기 3장1절~6절 세례요한과 예수그리스도 ①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타락한 성전(나라, 왕, 제사장)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내리신다. ‘언약의 사자’를 보내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그리스도, 왕, 거룩한 성전, 거룩한 대제사장)다. 언약의 사자가 오시기 전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내 사자’를 먼저 보내신다. ‘내 사자’는 세례요한이고 ‘언약의 사자’는 예수그리스도다.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초림)으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재림)으로 완성된다.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알 수 없는 때에 갑자기 오시기 때문에 그 날을 미리 예비(준비, 대비)해야 한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첩경이 ‘회개’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베푼 물세례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3:3)’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개는 새로운 삶을 위한 선행조건이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잘못된 행실을 뉘우치는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中心)을 돌이키는 회심(回心)이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종교적 의식이나 기독교인 되었다는 신고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자 탐욕에 이끌려 살던 삶에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중심을 돌이키는 회심이다. 본능을 좇던 삶에서 거룩하신 말씀을 좇아 사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3:5~8)”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한다.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첫 번째 출생이라면, 두 번째 출생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다. 세례는 거듭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며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증표다. ▶ 강림절의 유래는 세례 예비자들이 회개로 세례식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성탄절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그리스도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롬6:3~5,8)”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세례식의 본질은 욕심에 이끌려 살던 옛 자아는 물과 함께 수장되어 죽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순간이다. 결혼식이 행복한 가정을 위한 출발점이듯 세례는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구원여정의 출발이다. ② (2절 상)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 누구도 인생의 종말인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 날에 누구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업적이나 물질, 권세나 명예(직분)는 아무 소용없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 천국의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이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심판의 기준인 중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으로 드러난다. 경외와 순종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겨울이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여름에 무엇을 하였느냐고(슬로베니아격언)’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곧 우리의 중심에서 우러나온 삶대로 심판하신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반듯하게 세워나가는 것이다. ③ (2절 하~4절)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 (메시지성경) “그는 용광로 속의 맹렬한 불과 같다. 그는 가장 강력한 세정제 같다. 그는 금과 은을 정련하고 더러운 옷을 깨끗이 빨듯이, 레위 제사장들을 정련하고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자들, 의의 제물을 바치기에 합당한 자들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유다와 예루살렘은, 오래 전처럼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 기쁨을 드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거듭남의 시작은, 세례요한의 물세례이고 거듭남의 완성은 예수께서 주시는 불세례, 곧 성령세례로 완결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되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눅3:16)” 세례요한은 자신이 베푼 물세례와 구별되는 불세례, 곧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증거 한다. 물세례가 나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에 의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라면, 성령세례는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성령세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타올라서 더러운 죄악을 온통 불사르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며 우리의 더러운 삶을 씻어내는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려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마치 우리 몸을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처럼 죄가 우리를 죄악의 심연(深淵)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롬7:16~25). 이는 물세례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이 만성질환같이 완고하고 완악한 까닭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물세례와 더불어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선 회개의 물세례와 더불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2. 심판의 목적, 멸망 아닌 구원이다! ① (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 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 “너희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괴롭힌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괴롭힙니까? 하고 너희가 묻는다. 바로 이런 말로 하나님을 괴롭힌다. 하나님은 죄인도 죄도 다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뭐든지 사랑하신다. 심판이라고?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어서 심판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신다(말1:17)” 앞서 살펴본 말라기의 예언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하게 증거 한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이천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심판을 완성하신다. 중요한 점은 심판의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 말라기는 심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술수 하는 자’는 메시지성경에 마술을 부리는 자로 번역한다. 부동산투기로 거두는 불로소득은 돌로 떡을 만드는 마술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사단의 매직(magic)이다. ‘집을 두 채 가진 자 이성을 잃고 두 여인을 품은 자 영혼을 잃는 다’는 프랑스격언처럼 ‘간음하는 자’는 육체적 간음을 넘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영적 간음을 가리킨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제8계명인 ‘이웃에 대한 거짓 증언’을 일삼는 행위다.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부당한 임금착취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무주택 서민의 고통과 나라를 잃고 떠도는 난민의 눈물을 외면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모든 죄악을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통칭한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삶의 양태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심판의 기준이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는 사실이다. 일상은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기준과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곧 ‘신앙의 생활화’다. ② (6절)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시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리라” ▶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귀결된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소멸하지 않고 다시 사는 구원(생명, 삶)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나 여호와는 변역(變易, 변개)지 아니하시니’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자력구원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타력구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구원을,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변함없는 구원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단 하나의 선결조건이 있다. 그것이 ‘회개’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 같이 붉은 죄가 양털같이 희어지는 변함없는 구원의 길은 ‘회개’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사1:17~18)” 회개의 내용은 내 멋대로 거역하던 삶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으로의 변화다. 진정한 회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준행으로 드러난다. 진정한 회개는 중심을 돌이키는 회심이다. 욕심을 좇아 살던 삶에서 말씀을 좇아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른다. 이와 달리 ‘말씀’대로 준행하면 ‘의’를 이루고 의의 열매는 ‘생명(삶)’이다. 진정한 회개는 욕심에서 말씀으로 삶의 방식을 뒤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선 ‘회개’말고 다른 길은 없다. 말라기가 고발한 여섯 가지 죄보다 더 심각한 죄악은 회개하는 척을 하는 것이다. 죄를 뉘우치는 시늉을 하는 완고함은 가장 무서운 구제불능의 죄악이다.
십일조와 헌금시리즈 (6)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6) 말라기 3장
십일조를 운운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성경 본문은 말라기 3장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한 설교나 간증들은 거의 모두가 이 말라기 본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정말 복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은 까닭은 온 나라가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적질했기 때문이라면서 (말 3:9) 우리도 십일조를 안 내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복 받는 비결은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이라는 등식이 하나의 불문율처럼 우리나라 교회에 퍼져 있습니다. 그럼 과연 말라기 3장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대입 시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까요?
◐ 말라기의 시대적 배경
우리는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의 본문들을 거론하기 이전에 말라기 전체의 상황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의 말씀들이 지닌 배면적 의미를 잡아내고 그 본뜻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을 패망시킨 새로운 제국인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허락으로 제1진이 주전 538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스 1:1-3; 대하 36:23). 이들은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이 내린 성전 재건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제2성전을 주전 515년에 완공했습니다. 이 새 성전 건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성전의 건축과 관련해서 매우 고무적인 예언의 말씀들이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에 의하면 새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갖가지 복들이 임할 것이었습니다.
학개 2장을 살펴보면 제2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고, 이스라엘에 평강이 있으며, 열국의 세력이 꺾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학 2:5, 7, 9, 22).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도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함께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풍성한 복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했고 메시아의 오심과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예고했습니다(슥 1:16-17; 2:4-5, 10, 13; 8:3-15, 23; 9:9-13, 16-17).
그런데 기대에 찬 새 성전이 완공되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고 여러 면에서 오히려 더 나빠진 셈이었습니다. 우선 애써 지은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면 열등했고, 지성소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으며(말 3:1), 유다가 차지한 영토도 평방 120km 정도에 불과했으며, 계속 강대국에 눌려 사는 속주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후 백 년이 지난 말라기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형편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가뭄과 병충해가 심하여 흉작이 거듭되었고(말 3:10-11), 여호와 종교는 침체하여 제사장들은 부패하였고 백성은 영적 실체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만 드렸습니다. 여호와 종교는 미신과 뒤섞였고 적당주의와 냉소주의가 편만했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압제하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은 외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말 3: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복의 약속들이 마치 자기들의 권리라도 되듯이 당연시하였고 하나님을 채무자로 간주하는 오만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믿음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통해 주시기로 약속한 복들을 내리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성의껏 제사를 올리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말 3:14-15, 새번역).
말라기 3장 10절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십일조 헌금을 꼬박꼬박하면 하나님이 차고 넘치게 복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으로 뚝 떼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은 결코 복 받는 비결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낸다면 말라기에서 정죄하고 있는 불경스러운 예배자의 상리적이고 타산적인 행위가 됩니다. 말라기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니까 빼먹지 말고 꼭 바치라는 정도의 권면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종교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서 부각하고 십일조를 하나의 일례로써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말라기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파악하지 않고 3장 10절의 내용만 떼어서 보면 본 절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기 쉽습니다. 이제 말라기의 전체 내용을 잠시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의 죄악
말라기 1장 6절부터 2장 9절까지의 내용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은 성전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아무렇게나 하면 어떠냐고 말했습니다(말 1:7, 12). 그들은 훔쳤거나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1:8, 13).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고, 바치는 제물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9-10). 제사장들은 율법도 사람들의 형편을 보아 가면서 편파적으로 적용했으며, 율법의 원칙보다는 편법을 쓰도록 백성을 가르쳤습니다(2:8-9).
백성의 죄악
말라기 2장 10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남자들은 동족의 아내들을 버리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혼혈 이방 민족들과 잡혼을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 유대인의 언약 공동체는 아직도 매우 허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혼혈 결혼은 이스라엘의 정착된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처사였습니다. 일반 백성도 서로 속이며 신의를 지키지 않았고 성전 예배를 형식적으로 무성의하게 드렸습니다.
사회적 죄악
말라기 3장 5절부터 18절까지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음란했고 점치는 자들이 많았으며 일꾼의 노임을 떼어먹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성전에 십일조를 제대로 바쳤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고서도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 말라기 3장 10절의 오용
이제 다시 말라기 3장 1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무엇입니까? 왜 이 구절이 말라기에 언급되어 있습니까? 단순히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내리신다는 축복 공식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경건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그릇된 신앙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까?
말라기 3장 10절은 대체로 문맥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문자적인 강조와 율법적인 적용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말라기 3장 10절의 십일조 지적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갖가지 죄악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거론될 때는 적어도 말라기에서 지적된 다른 죄악들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일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십일조 한 가지만 특별히 소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한 가지만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으로 기대하면 착각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십일조만 제외하고 다른 여러 일에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언약 공동체라면, 십일조 한 가지를 놓고 강조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라면, 십일조가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되듯이 별스럽게 강조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을 단순히 상거래적인 약속으로 보고서 문자적인 적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꼭 갚아 주시고 또한 넘치게 채워 주신다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들으면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서 성도 중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십일조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성도를 칭찬해 주고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하며 무리해서라도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점에서는 십일조 교인들이 훌륭한 모법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떻게 해서라도 수입의 십 분의 일만 좌우간 채워서 내면 하나님이 넘치게 갚아 주신다는 신념으로 무슨 월부금 내듯 한다면 그릇된 행위입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자기 욕심대로 낸다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가령 백만 원 수입을 원하면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십만 원을 십일조로 내고 이백만 원 수입을 원하면 이십 만 원을 낸다는 것입니다. 없으면 빛을 내어서라도 하나님께 바쳐 보라는식의 십일조 강조를 하면서 실제로 그런 말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을 대단히 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높여 주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 의 한 교인은 목사님에게서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십일조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약속받은 물질의 복이 없자 자기 교회 목사님을 상대로 법정에 고소했다고 합니다.
물론 십일조의 강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 글도 따져보면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적용을 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맥을 떠나 균형을 잃으면 오용되기 쉽습니다.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믿음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십일조가 강조되면 하나님을 상거래의 대상으로 보는 물질주의적 신관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말라기의 주제도 이스라엘 백성의 흠 많은 제물이나 이런저런 사회적 부패 자체를 다룬다기보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따져보면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교적이었다기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소홀히 한 일들이 많았을지라도 성전 예배를 형식적으로나마 지속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실체가 없는 예배를 드리고 사랑과 순종과 감사로 채워진 언약 백성의 마음과 자세가 없이 성전을 드나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맥을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십일조 강조도 마땅히 언약 백성으로서의 영적 신분과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맥 안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영적 삶이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결핍한 데도 그런 중요한 문제들은 제쳐놓고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강조한다면 말라기 3장 10절의 배경을 무시한 오용입니다.
십일조에 집착하는 까닭의 하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오해를 떠나서,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돈입니다. 그런데 정기적인 헌금 중에서 가장 액수가 높은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교회 재정과 밀착된 헌금입니다. 만일 십일조가 돈이 아니고 성도들의 어떤 도덕적인 문제나 교리적인 문제였다면 교회에서 그처럼 중시하며 강조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백성의 십일조로 성전 제도가 존속되게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새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땅에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말라기 선지자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도 십일조의 의무를 지적했습니다(느 10:37-39; 13:10-12). 그렇지만 한 번도 십일조가 단독으로 강조된 적은 없었습니다. 예컨대 느헤미야 13장에서 느헤미야는 백성이 십일조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느 13:10-13). 그러나 느헤미야 8장과 9장을 비교해 보면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먼저 거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를 비롯한 여러 교사가 율법의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을 깨달은 백성이 깊이 회개한 것이었습니다(느 8:5-9, 18; 9:1-3).
율법의 준수는 성경 말씀을 먼저 깨닫고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이후에 지켜져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율법의 준수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겉치레가 되거나 십일조의 경우처럼 순전히 복 받기 위한 하나의 산술적인 공식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느 8:1-9; 12:26). 에스라는 학자이면서 제사장이었고(스 7:14)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비뚤어진 신앙생활을 교정하면서 새 성전 건축에 힘썼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스 5:1; 6:14). 그러니까 이들이 사역했던 당시의 사회 문제나 종교 문제가 모두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십일조 문제만을 별도로 지적하여 그것이 마치 교회의 사활 문제라도 되듯이 편파적인 강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일조 이외에도 잡혼이나 금식이나 안식일 문제들도 언급했지만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일그러진 언약 관계의 문맥에서 교훈했습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규정을 상거래의 약속으로 간주하는 불경스러운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했고, 하나님께 지은 갖가지 죄악들을 회개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실과 인애와 긍휼의 속성을 닮아 이웃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의 모습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성전에 머무시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셔서 온전한 구원이 성취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슥 7:9-10; 8:16-19; 9:9, 16; 말 3:17; 스 7:10; 10:1-17).
둘째, 본뜻이 살아나지 않는 율법적인 십일조의 적용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십자가의 구원과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수준으로 이끌어 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한 두 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온전한 십일조’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이 두 마디는 본 절의 핵심이므로 그 뜻을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의식에는 퍽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제물도 바쳤고 제사장들의 지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종교 행위들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온전하지 못한 제물들을 바쳤고(말 1:7, 13) 제사장들은 율법을 온전하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말 2:9).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말 3:10)라는 말씀은 얼핏 보면 백성이 전혀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역시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3장 8절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만일 이 구절만 살펴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뿐만 아니라 헌물도 전혀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본문에서 백성이 헌물을 분명히 했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말 1:7-14; 2:13). 그래서 헌물을 했지만 온전함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문제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떼어먹기도 했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고 했습니다(말 3:8). 떼어먹는 것은 십일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물도 할 것을 안 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일반 헌금에 대해서는 도적질한다는 말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유독 십일조 헌금에만 적용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품목을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못 박아 지적했습니다(말 3:8).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류를 불문하고 내 것처럼 빼돌리면 도적질에 해당합니다(학 2:8; 시 50:9-12).
아무튼 말라기 3장 10절은 하지 않던 십일조를 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라기 전체가 외치는 메시지의 핵심은 ‘온전한 예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바탕을 두어야만 가능합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회중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교훈한 것은 그들의 삶이 언약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모든 십일조’(the full tithe)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종류대로 다 바치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성의하고 믿음이 없는 십일조가 아닌 십일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온전한 십일조는 십 분의 일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경배자의 믿음 생활의 온전함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소산의 맏물과 십일조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했습니다(신 26:3-9). 그리고 율법이 지향한 자비와 공의에 따라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며 사는 성도의 삶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신 26:10-14).
그렇다면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입니까? 자기 수입에서 정확하게 십 분의 일을 떼어내기만 하면 될까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확실하지 못하고 복음을 바르게 깨닫지도 못하며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수입의 일정량을 교회에 매달 바치기만 하면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가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십일조 교인들에게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제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따져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헌물을 잡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헌금을 필요로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라고 하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각종 제사와 십일조를 비웃으셨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4-5).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 나서 열심을 낼지 몰라도 하나님은 전혀 기쁘시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는데 왜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자주 드리고 더 많이 드리는데 왜 싫어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 하나님께 부지런히 갖다 바치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바라본 정의와 사랑의 삶은 외면하고(암 5:7, 24) 형식적인 제사에만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암 5:21-23).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사 1:10-17).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무거운 짐”(사 1:14)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목표한 공의와 자비와 선행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교훈하셨습니다(사 1:17).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주신 말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0).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월급이나 기타 수입에서 십일조를 떼어 드리는 것이 전부입니까? 그것도 내면 도로 채워 주신다는 전제로 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만일 십일조 헌금을 내어도 채워 주시지 않으면 안 내겠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내고도 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고 ‘온전한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무슨 동기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까? 내가 바치는 십일조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 나를 시험하여 보라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이 의도하는 참뜻은 십일조의 수익을 높이려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조건으로 하나님의 복이 오간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주안점은 당시의 온전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십일조의 경우를 하나의 실례로써 지적한 것일 뿐 실제 의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생활 전반에 걸친 신뢰의 믿음을 촉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10절이야말로 말라기에서 가장 복된 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가장 슬픈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적 수준을 드러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라기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소개했습니다(1:6, 8-14; 2:2, 4, 12; 3:1, 7, 10-14, 17; 4:1, 3). 만군의 여호와는 천군 천사를 거느리시고 약인들을 극렬한 풀무 불로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위엄과 권세가 영원하신 분이시며 온 세상을 장중에 넣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으면 “나를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복에 대한 약속이기보다는 경망스럽고 유치하며 신뢰와 순종이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패역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숨입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잘 내면 복을 내리신다는 조건부 보장이 아니고 불신과 위선, 형식과 욕심에 사로잡힌 패륜의 자녀들을 향해 하늘 아버지가 비애를 머금고 토설하는 한탄입니다. 우리는 ‘나를 시험해 보라’는 말씀에 서려 있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도 만군의 여호와가 미덥지 못하고 경외하기가 싫으면 십일조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보려무나. 그러고 나서 만군의 여호와가 과연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드릴 가치가 있는 분임을 깨달아라. 나 여호와가 너희 패역한 백성에게 시험을 당할 테니 정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만군의 여호와인 내가 너희들의 유치한 수준까지 내려가 주마.”
이런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을 시험해 보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악한 자녀들입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비참한 심경을 읽고 회개할 수 없으면 비극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말라기 3장 10절을 빌미로 잡고 이 말씀을 십일조 헌금을 갹출하기 위한 증거 본문으로 삼거나,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상거려적인 십일조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허락된 시험이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을 십일조로 시험해 보면 큰 복이 분명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더라도, 우리 편에서 신뢰의 표시로 해야 할 일이 있고(사 7:11-12), 하지 말아야 할 옳은 일이 있습니다. 가령 부모가 마지못해 허락한 일을 다 해 버리는 자식이 효자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식은 어버이의 마음을 읽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착한 자녀가 아닙니다.
모세의 이혼 증서나(막 10:2-9) 이스라엘에 허락된 왕권 제도가 모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아니었듯이(삼상 8:4-9, 호 13:10-11) 십일조의 축복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철없는 자식들의 특징은 부모가 마음 아파하며 허락해 주는 것들을 무슨 권리나 되듯이 냉큼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장성한 자가 되어 부모의 뜻을 알아차리고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고전 13:11).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사실상 큰 죄악입니다. 죄악 된 인간들이 거룩하고 참되신 만군의 여호와를 시험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일들을 모두 그릇된 처사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출 17:3, 7). 시편 95편 8-9절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지적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 6:16; 출 17:6-7)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교회에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시 78:18-20).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받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듣고 노하셨다고 했습니다(시 78:21). 왜 심히 언짢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시 78:22). 그런데 노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는 대로 만나와 고기를 실컷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시 78:23-31).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먹을 것을 넘치게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왜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시 78:33) 하셨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욕심대로 받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못 받으면 신뢰할 수 없다는 식이었기에 징계를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도 기대한 복을 소욕대로 못 받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설혹 원하는 대로 받아서 본인은 좋아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섭섭해하십니다.
하나님이 차고 넘치게 주셨다고 해서 반드시 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냈더니 복을 받더라고 말하며 계속 같은 생각과 자세로 십일조를 낸다면 광야 백성처럼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시 78:41)하는 셈이 됩니다.
왜 우리를 양 떼처럼 돌보아 주시며 기르시는 선한 목자를 시험해야 합니까? (시 80:1). 욕심을 부리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3-15).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그들은 요구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메말랐습니다. 영혼이 파리한데 배가 아무리 부른들 무슨 유익입니까? 우리가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할 때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육신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복입니까?
말라기 3장 10절을 복 공식으로 사용하면 정말 큰 시험에 빠집니다. 사실이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뢰와 본심을 달아 보는 시험대였습니다.
다시 맛사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맛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며 만일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면 물을 내어 마시게 해보라고 시험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81편 7절에서는 하나님이 오히려 “므리바(맛사)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셨도다’ 라고 지적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 3장 10절에서 “나를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때는 하나님이 또한 나를 시험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마다 나는 나의 적은 믿음과 나의 기다리지 못함과 나의 악한 생각들을 그대로 노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마다, 나는 내게 어떤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신실할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율법의 모든 정죄로부터 풀려나게 하신 구속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힘써 길러가시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우리의 찬양과 신뢰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들의 형편이 어려운 지경에 빠졌더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진정 누가 누구를 시험해야 합니까? 죄 많고 허물 많은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을 시험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야 마땅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히 3:17). 하나님이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셨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좋은 믿음도 아니고 착한 자녀의 태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10절의 구차한 인용 없이도 ‘온전한 십일조’의 본뜻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온전히 되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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