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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2 (수) [하루 한 장]“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마태복음 9장은 예수님의 치유가
반대에 부딪히는 장면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능력자가 아니라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나는 왕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살던 나는 주님을
따라 내 욕심을 포기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나와 다른
약자를 무시하고 정죄하면서
속으로 비웃는 동안 그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노라고
더 이상 너 때문이 아니라고
그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몸도 낫게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 관계도 회복되게
그를 전인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 치유를 우리도 소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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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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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복음 9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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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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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주석

마태복음 제 9장

=====9:1

배에 오르사 건너가 – 이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

를 다시 건너 되돌아 가심을 뜻한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본 사건의 평행기사를 다

루면서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막 5:18-20; 눅 8:38,

39).

본(本) 동네에 – 이는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가버나움이 갈

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문맥을 보

면 뒤이은 2-8절의 내용이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광인(狂人)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

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과 막 5:1-20 비

교). 이는 이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즉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같은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졌

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

라 마태가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뒤에 언급될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은 원문상,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

할 때 흔히 등장하는 ‘카이 이두'(* )란 어구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

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

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

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

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소자야(* ,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

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안심하라(* ,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

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

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

게 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

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

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것

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

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

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

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

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

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

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9:3

어떤 서기관들이 – 서기관이란 용어는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 필사 또는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서(2:4) 공직을 가리키는 직명(職名)

이었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守舊) 세력으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2절과 같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는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 ‘참람하다’란 말의 ‘블라스페메이’는 원래 ‘남을 욕하다’, ‘부당하게 비난한다’

(shander)는 뜻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다’,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다’로 쓰였다. 그후 이 말은 그 개념이 확

대되어 ‘신성모독'(blasphemy)의 뜻을 가졌다. 즉 어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받았다

는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

이시며(사 43:25; 44:22). 그런 이유에서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시 51:4). 이런 점에서 마가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어구를 덧붙이고 있다.

=====9:4

그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2절)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저희

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

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대상 28:9; 렘 17:10; 요 2:25; 롬 8:27; 계

2:23). 따라서 이 같은 일은 예수께서 전지(omniscience)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증거인 것이다.

악한 생각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신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이적을 베푸심과 동시에 이 이적과 함께 주어진 ‘죄 사함’의 진의를 성실하게

알아 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예수를 불신(不信)하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를 파멸시킬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9:5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는 죄 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

문하셨는데, 후자의 것, 즉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것이 분명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

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 메시야의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可視

化)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명령을 남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 사함보다는 병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둘 다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균일하게 가능한 일

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신적 일을 동시에 행하신 것은 대부분의

예수의 이적이 그렇듯이 자신의 메시야직의 진정(眞正)성과 그에 따른 권능을 보임과

아울러 자신의 메시야직의 궁극적 목적, 곧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더나아가 자신이 메시야로서 죄 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9:6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 , 여수시아)란 ‘능

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

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

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

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

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

(1:21).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

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

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

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

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

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

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

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

리스도이신 것이다.

=====9:7

그가…돌아가거늘 – 병고침 받기 위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는 의심없는 절대

적 순종을 통해(2절)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1:21) 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임마누엘(Immanuel)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까지

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선사받았다. 영육

의 동시 축복,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성경은 영혼을

우선하지만 우리의 육체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때 우리는

새육체도 가지게 될 것이다.

=====9:8

두려워하며(* , 에포베데산) – 초기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등)에는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등의 뜻을 지닌 본문

의 원어를 사용했지만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를 그저 ‘이상히 여겼다’, ‘놀랐

다’는 뜻의 ‘에다우마산'(* )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실로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

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17:6; 28:5, 10). 한편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 공관복음서 3기자 중 유일하게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 이 구절은 복

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

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

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 ‘사람에게’

(* ,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

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애매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병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

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

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

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리긴 하였지만 예수

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율법학자들은 에수의 죄사함 선포를 신성 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

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

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9:9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

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

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

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

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

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

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

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

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

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

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

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

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

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

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

미와 상통한다(4:19; 19:21).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

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

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

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

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

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9:10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

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

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마태의 집에서(* , 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

로 규정하고 있다.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

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

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

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

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

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

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

(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

(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

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

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

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

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

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

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

다.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

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

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

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

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

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

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

들이었다.

함께 잡수시느냐 –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

할 경우만은 에외였던 것 같다.

=====9:12

의원이…병든 자에게라야 –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

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었으며 또한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

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

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

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

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예수

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

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

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간

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9:13

너희는 가서…배우라 –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

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

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

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

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

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

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

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

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

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

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

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

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

문인 것이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죄인

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

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

기 때문이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

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 )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

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

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

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9:14

그 때에(* ,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

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

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

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

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

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

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

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

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

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

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

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

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

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다.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

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

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9:15

혼인집 손님들이(* , 호이 휘오이 투 뉨포

노스) – 이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

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

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

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

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

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에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

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

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

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

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

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

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

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

다.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 )는 한 번도 세탁

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

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

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

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

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

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

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

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

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

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

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

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 네

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

고 둘째번의 ‘새'(* ,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

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

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

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

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

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

인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9:1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

(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

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

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

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 ,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

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

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

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

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

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

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

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

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

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

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

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

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 이나 훌륭한 것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9:19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

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

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 )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 )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

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

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

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

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

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

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

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

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 , 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 )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

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9:21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에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

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

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

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

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

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

한 애칭이다.

안심하라(* , 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

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

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

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

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

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

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

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

해야 한다.

=====9:23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

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

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

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

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

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이

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 , 도뤼부메논)이

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

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

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9:24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

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

문이다.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

(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

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

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

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

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

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

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

웃더라'(* ,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

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

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

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

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

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

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

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

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

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

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

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

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

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9:26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

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

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

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

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

다.

=====9:27

거기서 떠나 가실새 –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소경이 –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

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

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

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다윗의 자손이여 –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

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

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야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

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

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2:23)라고 하는 점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야의 은혜를 입어 구원

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

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야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9:28

집에 –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

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

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가…할 줄을 믿느냐 –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

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

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

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

신 것이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

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

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9:29

저희 눈을 만지시며 –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

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

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대로(* , 카타 테 피스틴 휘몬)

–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

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9: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

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

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

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

(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엄히 경계하시되(* ,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

스) –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

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

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9:31

나가서…전파하니라 –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

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

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9:32

저희가 나갈 때에 –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

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귀신 들려 –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

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단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

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

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것

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벙어리 된 자(* ,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

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

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

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9:33

귀신이 쫓겨나고 –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

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벙어리가 말하거늘 –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

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

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

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

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

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귀신의 왕 – 귀신들의 괴수, 곧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단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빙자하여(* , 엔) –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단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낸다 –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더

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

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

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야의 광채를 인정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같이

악한 사단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

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9:35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

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

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

히 35-38절은, 4:23-25이 첫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번째 강론

(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

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

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가르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

속하였다.

천국 복음 –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

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병과 모든 약한 것 –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

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

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9:36

민망히 여기시니(* , 에스플랑크니스데) – 이 말은 창

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 )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

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

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

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

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목자 없는 양 –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

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

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로 보였던 것이다.

고생하며(* , 에크레뤼메노이) –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유리함이라(* , 엘림메노이) –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

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

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9:37

추수할 것은 많되 –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

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

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일군은 적으니 – 여기서 일꾼이란 예수 자신, 세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

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

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9:38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 여기서 ‘청하여'(* , 데에데테)란 공

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

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

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

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

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보내어 주소서(* , 호포스 에크발레) – 이는 강제력이 동원

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

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9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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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엠바스 에이스 플로이온 디에페라센 카이 엘덴 에이스 텐 이디안 폴린

개역개정,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새번역,1 예수께서 배에 오르셔서, 바다를 건너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자기 마을로 돌아오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영어NIV,1 Jesus stepped into a boat, crossed over and came to his own town.

영어NASB,1 Getting into a boat, Jesus crossed over the sea and came to His own city.

영어MSG,1 Back in the boat, Jesus and the disciples recrossed the sea to Jesus’ hometown.

영어NRSV,1 And after getting into a boat he crossed the sea and came to his own town.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εμβας εις το πλοιον διεπερασεν και ηλθεν εις την ιδιαν πολιν

라틴어Vulgate,1 et ascendens in naviculam transfretavit et venit in civitatem suam

히브리어Modern,1 וירד באניה ויעבר ויבא אל עירו׃

성 경: [마9: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배에 오르사 건너가 – 이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를 다시 건너 되돌아 가심을 뜻한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본 사건의 평행기사를 다루면서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막 5:18-20; 눅 8:38, 39).

󰃨 본(本) 동네에 – 이는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가버나움이 갈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문맥을 보면 뒤이은 2-8절의 내용이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광인(狂人)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과 막 5:1-20 비교). 이는 이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즉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같은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라 마태가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뒤에 언급될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은 원문상,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할 때 흔히 등장하는 ‘카이 이두'(*)란 어구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 이두 프로세페론 아우토 파랄뤼티콘 에피 클리네스 베블레메논 카이 이돈 호 예수스 텐 피스틴 아우톤 에이펜 토 파랄뤼티코 다르세이 테크논 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

개역개정,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새번역,2 사람들이 중풍병 환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 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우리말성경,2 사람들이 중풍 환자 한 사람을 자리에 눕힌 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안심하여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가톨릭성경,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영어NIV,2 Some men brought to him a paralytic, lying on a mat.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

영어NASB,2 And they brought to Him a paralytic lying on a bed. Seeing their faith, Jesus said to the paralytic, “Take courage, son; your sins are forgiven.”

영어MSG,2 They were hardly out of the boat when some men carried a paraplegic on a stretcher and set him down in front of them. Jesus, impressed by their bold belief, said to the paraplegic, “Cheer up, son. I forgive your sins.”

영어NRSV,2 And just then some people were carrying a paralyzed man lying on a bed.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ιδου προσεφερον αυτω παραλυτικον επι κλινης βεβλημενον και ιδων ο ιησους την πιστιν αυτων ειπεν τω παραλυτικω θαρσει τεκνον αφεωνται σοι αι αμαρτιαι σου

라틴어Vulgate,2 et ecce offerebant ei paralyticum iacentem in lecto et videns Iesus fidem illorum dixit paralytico confide fili remittuntur tibi peccata tua

히브리어Modern,2 והנה הם מביאים אליו איש נכה אברים והוא משכב על המטה ויהי כראות ישוע את אמונתם ויאמר אל נכה האברים חזק בני נסלחו לך חטאתיך׃

성 경: [마9: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 소자야(*,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 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카이 이두 티네스 톤 그람마테온 에이판 엔 헤아우토이스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개역개정,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새번역,3 그런데 율법학자 몇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우리말성경,3 이것을 보고 몇몇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구나.’

가톨릭성경,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영어NIV,3 At this, some of the teachers of the law said to themselves, “This fellow is blaspheming!”

영어NASB,3 And some of the scribes said to themselves, “This fellow blasphemes.”

영어MSG,3 Some religion scholars whispered, “Why, that’s blasphemy!”

영어NRSV,3 Then some of the scribes said to themselves, “This man is blaspheming.”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ιδου τινες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ειπον εν εαυτοις ουτος βλασφημει

라틴어Vulgate,3 et ecce quidam de scribis dixerunt intra se hic blasphemat

히브리어Modern,3 והנה אנשים מן הסופרים אמרו בלבבם מגדף הוא׃

성 경: [마9: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떤 서기관들이 – 서기관이란 용어는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 필사 또는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서(2:4) 공직을 가리키는 직명(職名)이었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守舊) 세력으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2절과 같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는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 ‘참람하다’란 말의 ‘블라스페메이’는 원래 ‘남을 욕하다’, ‘부당하게 비난한다'(shander)는 뜻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다’,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다’로 쓰였다. 그후 이 말은 그 개념이 확대되어 ‘신성모독'(blasphemy)의 뜻을 가졌다. 즉 어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며(사 43:25; 44:22). 그런 이유에서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시 51:4). 이런 점에서 마가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어구를 덧붙이고 있다.

카이 이돈 호 예수스 타스 엔뒤메세이스 아우톤 에이펜 히나티 엔뒤메이스데 포네라 엔 타이스 카르디아이스 휘몬

개역개정,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새번역,4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우리말성경,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가톨릭성경,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영어NIV,4 Knowing their thoughts, Jesus said, “Why do you entertain evil thoughts in your hearts?

영어NASB,4 And Jesus knowing their thoughts said, “Why are you thinking evil in your hearts?

영어MSG,4 Jesus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said, “Why this gossipy whispering?

영어NRSV,4 But Jesus, perceiving their thoughts, said, “Why do you think evil in your hearts?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ιδων ο ιησους τας ενθυμησεις αυτων ειπεν ινα τι υμεις ενθυμεισθε πονηρα 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υμων

라틴어Vulgate,4 et cum vidisset Iesus cogitationes eorum dixit ut quid cogitatis mala in cordibus vestris

히브리어Modern,4 וירא ישוע את מחשבתם ויאמר למה תחשבו רעה בלבבכם׃

성 경: [마9: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2절)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대상 28:9; 렘 17:10; 요 2:25; 롬 8:27; 계 2:23). 따라서 이 같은 일은 예수께서 전지(omniscience)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증거인 것이다.

󰃨 악한 생각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신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적을 베푸심과 동시에 이 이적과 함께 주어진 ‘죄 사함’의 진의를 성실하게 알아 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예수를 불신(不信)하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를 파멸시킬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티 가르 에스틴 유코포테론 에이페인 마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 에 에이페인 에게이레 카이 페리파테이

개역개정,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새번역,5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우리말성경,5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떤 말이 더 쉽겠느냐?

가톨릭성경,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영어NIV,5 Which is easier: to say,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walk’?

영어NASB,5 “Which is easier, to say, ‘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and walk’?

영어MSG,5 Which do you think is simpler: to say, ‘I forgive your sins,’ or, ‘Get up and walk’?

영어NRSV,5 For which is easier, to say,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Stand up and walk’?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ι γαρ εστιν ευκοπωτερον ειπειν αφεωνται σοι αι αμαρτιαι η ειπειν εγειραι και περιπατει

라틴어Vulgate,5 quid est facilius dicere dimittuntur tibi peccata aut dicere surge et ambula

히브리어Modern,5 כי מה הנקל האמר נסלחו לך חטאתיך אם אמר קום התהלך׃

성 경: [마9: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는 죄 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문하셨는데, 후자의 것, 즉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것이 분명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 메시야의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可視化)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명령을 남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 사함보다는 병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 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둘 다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균일하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신적 일을 동시에 행하신 것은 대부분의 예수의 이적이 그렇듯이 자신의 메시야직의 진정(眞正)성과 그에 따른 권능을 보임과 아울러 자신의 메시야직의 궁극적 목적, 곧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더나아가 자신이 메시야로서 죄 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히나 데 이이데테 호티 엨수시안 에케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피 테스 게스 아피에나이 하마르티아스 토테 레게이 토 파랄뤼티코 에게르데이스 아론 수 텐 클리넨 카이 휘파게 에이스 톤 오이콘 수

개역개정,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새번역,6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시니,

우리말성경,6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집으로 가거라.”

가톨릭성경,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영어NIV,6 But so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 . .” Then he said to the paralytic,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영어NASB,6 “But so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then He said to the paralytic, “Get up, pick up your bed and go home.”

영어MSG,6 Well, just so it’s clear that I’m the Son of Man and authorized to do either, or both. . . .” At this he turned to the paraplegic and said, “Get up. Take your bed and go home.”

영어NRSV,6 But so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he then said to the paralytic–“Stand up, take your bed and go to your home.”

헬라어신약Stephanos,6 ινα δε ειδητε οτι εξουσιαν εχει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πι της γης αφιεναι αμαρτιας τοτε λεγει τω παραλυτικω εγερθεις αρον σου την κλινην και υπαγε εις τον οικον σου

라틴어Vulgate,6 ut sciatis autem quoniam Filius hominis habet potestatem in terra dimittendi peccata tunc ait paralytico surge tolle lectum tuum et vade in domum tuam

히브리어Modern,6 אך למען תדעון כי בן האדם יש לו השלטן בארץ לסלח חטאים ויאמר אל נכה האברים קום שא את מטתך ולך לך אל ביתך׃

성 경: [마9: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 여수시아)란 ‘능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1:21).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카이 에게르데이스 아펠덴 에이스 톤 오이콘 아우투

개역개정,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새번역,7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말성경,7 그러자 그 사람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영어NIV,7 And the man got up and went home.

영어NASB,7 And he got up and went home.

영어MSG,7 And the man did it.

영어NRSV,7 And he stood up and went to his home.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εγερθεις απηλθεν εις τον οικ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7 et surrexit et abiit in domum suam

히브리어Modern,7 ויקם וילך לביתו׃

성 경: [마9: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가…돌아가거늘 – 병고침 받기 위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는 의심없는 절대적 순종을 통해(2절)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1:21) 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임마누엘(Immanuel)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까지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선사받았다. 영육의 동시 축복,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성경은 영혼을 우선하지만 우리의 육체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때 우리는 새육체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돈테스 데 호이 오클로이 에포베데산 카이 에돜사산 톤 데온 톤 돈타 뎈수시안 토이아우텐 토이스 안드로포이스

개역개정,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새번역,8 무리가 이 일을 보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말성경,8 이를 보고 무리는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가톨릭성경,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영어NIV,8 When the crowd saw this, they were filled with awe; and they praised God, who had given such authority to men.

영어NASB,8 But when the crowds saw this, they were awestruck, and glorified God, who had given such authority to men.

영어MSG,8 The crowd was awestruck, amazed and pleased that God had authorized Jesus to work among them this way.

영어NRSV,8 When the crowds saw it, they were filled with awe, and they glorified God, who had given such authority to human beings.

헬라어신약Stephanos,8 ιδοντες δε οι οχλοι εθαυμασαν και εδοξασαν τον θεον τον δοντα εξουσιαν τοιαυτην τοις ανθρωποις

라틴어Vulgate,8 videntes autem turbae timuerunt et glorificaverunt Deum qui dedit potestatem talem hominibus

히브리어Modern,8 והמון העם כראותם זאת השתוממו וישבחו את האלהים אשר נתן שלטן כזה לבני אדם׃

성 경: [마9: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두려워하며(*, 에포베데산) – 초기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등)에는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등의 뜻을 지닌 본문의 원어를 사용했지만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를 그저 ‘이상히 여겼다’, ‘놀랐다’는 뜻의 ‘에다우마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실로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17:6; 28:5, 10). 한편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 공관복음서 3기자 중 유일하게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 이 구절은 복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 ‘사람에게’ (*,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애매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병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리긴 하였지만 예수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

는 뜻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죄사함 선포를 신성 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카이 파라곤 호 예수스 에케이덴 에이덴 안드로폰 카데메논 에피 토 텔로니온 맏다이온 레고메논 카이 레게이 아우토 아콜루데이 모이 카이 아나스타스 에콜루데센 아우토

개역개정,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새번역,9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우리말성경,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에게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가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9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영어NIV,9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he told him, and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

영어NASB,9 As Jesus went on from there, He saw a man called Matthew, sitting in the tax collector’s booth; and He said to him, ”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영어MSG,9 Passing along, Jesus saw a man at his work collecting taxes. His name was Matthew. Jesus said, “Come along with me.” Matthew stood up and followed him.

영어NRSV,9 As Jesus was walking along, he saw a man called Matthew sitting at the tax booth; and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παραγων ο ιησους εκειθεν ειδεν ανθρωπον καθημενον επι το τελωνιον ματθαιον λεγομενον και λεγει αυτω ακολουθει μοι και αναστας ηκολουθησ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9 et cum transiret inde Iesus vidit hominem sedentem in teloneo Mattheum nomine et ait illi sequere me et surgens secutus est eum

히브리어Modern,9 ויהי בעבר ישוע משם וירא איש ישב בבית המכס ושמו מתי ויאמר אליו לכה אחרי ויקם וילך אחריך׃

성 경: [마9: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4:19; 19:21).

󰃨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아우투 아나케이메누 엔 테 오이키아 카이 이두 폴로이 텔로나이 카이 하마르톨로이 엘돈테스 쉬나네케인토 토 예수 카이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개역개정,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새번역,10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 ㉠그, ‘비스듬히 눕다’.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가지는 자세

우리말성경,10 예수께서 집에서 저녁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영어NIV,10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Matthew’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ate with him and his disciples.

영어NASB,10 Then it happened that as Jesus was reclining at the table in the house, behold,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were dining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영어MSG,10 Later when Jesus was eating supper at Matthew’s house with his close followers, a lot of disreputable characters came and joined them.

영어NRSV,10 And as he sat at dinner in the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came and were sitting with him and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εγενετο αυτου ανακειμενου εν τη οικια και ιδου πολλοι τελωναι και αμαρτωλοι ελθοντες συνανεκειντο τω ιησου και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et factum est discumbente eo in domo ecce multi publicani et peccatores venientes discumbebant cum Iesu et discipulis eius

히브리어Modern,10 ויהי בהסבו בביתו והנה מוכסים וחטאים רבים באו ויסבו עם ישוע ותלמידיו׃

성 경: [마9:1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 마태의 집에서(*, 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로 규정하고 있다.

󰃨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다.

카이 이돈테스 호이 파리사이오이 엘레곤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디아 티 메타 톤 텔로논 카이 하마르톨론 에스디에이 호 디다스칼로스 휘몬

개역개정,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새번역,11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우리말성경,11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느냐?”

가톨릭성경,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영어NIV,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영어NASB,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said to His disciples, ” Why is your Teacher eating with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영어MSG,11 When the Pharisees saw him keeping this kind of company, they had a fit, and lit into Jesus’ followers. “What kind of example is this from your Teacher, acting cozy with crooks and riff-raff?”

영어NRSV,11 When the Pharisees saw this, they said to his disciples, “Why does your teacher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ιδοντες οι φαρισαιοι ειπον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διατι μετα των τελωνων και αμαρτωλων εσθιει ο διδασκαλος υμων

라틴어Vulgate,11 et videntes Pharisaei dicebant discipulis eius quare cum publicanis et peccatoribus manducat magister vester

히브리어Modern,11 ויראו הפרושים ויאמרו אל תלמידיו מדוע עם המוכסים והחטאים אכל רבכם׃

성 경: [마9:1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다.

󰃨 함께 잡수시느냐 –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할 경우만은 에외였던 것 같다.

호 데 아쿠사스 에이펜 우 크레이안 에쿠신 호이 이스퀴온테스 이아트루 알 호이 카코스 에콘테스

개역개정,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새번역,12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우리말성경,12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가톨릭성경,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영어NIV,12 On hearing this, Jesus said,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영어NASB,12 But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It is not those who are healthy who need a physician, but those who are sick.

영어MSG,12 Jesus, overhearing, shot back, “Who needs a doctor: the healthy or the sick?

영어NRSV,12 But when he heard this, he said, “Those who are well have no need of a physician, but those who are sick.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 δε ιησους ακουσας ειπεν αυτοις ου χρειαν εχουσιν οι ισχυοντες ιατρου αλλ οι κακως εχοντες

라틴어Vulgate,12 at Iesus audiens ait non est opus valentibus medico sed male habentibus

히브리어Modern,12 וישמע זאת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ם החזקים אינם צריכים לרפא כי אם החולים׃

성 경: [마9:1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의원이…병든 자에게라야 –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었으며 또한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예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간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포류덴테스 데 마데테 티 에스틴 엘레오스 델로 카이 우 뒤시안 우 가르 엘돈 칼레사이 디카이우스 알라 하마르톨루스

개역개정,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새번역,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호 6:6

우리말성경,13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호6:6

가톨릭성경,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영어NIV,13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For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영어NASB,13 “But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COMPASSION, AND NOT SACRIFICE,’ for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영어MSG,13 Go figure out what this Scripture means: ‘I’m after mercy, not religion.’ I’m here to invite outsiders, not coddle insiders.”

영어NRSV,13 Go and learn what this mean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For I have come to call not the righteous but sinners.”

헬라어신약Stephanos,13 πορευθεντες δε μαθετε τι εστιν ελεον θελω και ου θυσιαν ου γαρ ηλθον καλεσαι δικαιους αλλ αμαρτωλους εις μετανοιαν

라틴어Vulgate,13 euntes autem discite quid est misericordiam volo et non sacrificium non enim veni vocare iustos sed peccatores

히브리어Modern,13 ואתם צאו ולמדו מה הוא חסד חפצתי ולא זבח כי לא באתי לקרא את הצדיקים כי אם את החטאים לתשובה׃

성 경: [마9:1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너희는 가서…배우라 –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 내가 긍휼을 원하고 –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죄인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토테 프로세르콘타이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요안누 레곤테스 디아 티 헤메이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네스튜오멘 폴라 호이 데 마데타이 수 우 네스튜우신

개역개정,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새번역,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자주’가 없음

우리말성경,14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가톨릭성경,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14 Then John’s disciples came and asked him, “How is it that we and the Pharisees fast,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영어NASB,14 Then the disciples of John came to Him, asking,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영어MSG,14 A little later John’s followers approached, asking, “Why is it that we and the Pharisees rigorously discipline body and spirit by fasting, but your followers don’t?”

영어NRSV,14 Then the disciples of John came to him, saying,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often,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헬라어신약Stephanos,14 τοτε προσερχονται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ιωαννου λεγοντες διατι ημεις και οι φαρισαιοι νηστευομεν πολλα οι δε μαθηται σου ου νηστευουσιν

라틴어Vulgate,14 tunc accesserunt ad eum discipuli Iohannis dicentes quare nos et Pharisaei ieiunamus frequenter discipuli autem tui non ieiunant

히브리어Modern,14 ויגשו אליו תלמידי יוחנן ויאמרו מדוע אנחנו והפרושים צמים הרבה ותלמידיך אינם צמים׃

성 경: [마9:1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그 때에(*,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다.

󰃨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메 뒤난타이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펜데인 엪 호손 멭 아우톤 에스틴 호 뉨피오스 엘류손타이 데 헤메라이 호탄 아파르데 앞 아우톤 호 뉨피오스 카이 토테 네스튜수신

개역개정,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새번역,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영어NIV,15 Jesus answered, “How can the guests of the bridegroom mourn while he is with them? The time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will be taken from them; then they will fast.

영어NASB,15 And Jesus said to them, “The attendants of the bridegroom cannot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can they? But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영어MSG,15 Jesus told them, “When you’re celebrating a wedding, you don’t skimp on the cake and wine. You feast. Later you may need to pull in your belt, but not now. No one throws cold water on a friendly bonfire. This is Kingdom Come!”

영어NRSV,15 And Jesus said to them, “The wedding guests cannot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can they?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μη δυνανται οι υιοι του νυμφωνος πενθειν εφ οσον μετ αυτων εστιν ο νυμφιος ελευσονται δε ημεραι οταν απαρθη απ αυτων ο νυμφιος και τοτε νηστευσουσιν

라틴어Vulgate,15 et ait illis Iesus numquid possunt filii sponsi lugere quamdiu cum illis est sponsus venient autem dies cum auferetur ab eis sponsus et tunc ieiunabunt

히브리어Modern,15 ויאמר אליהם ישוע איך יוכלו בני החפה להתאבל בעוד החתן עמהם הנה ימים באים ולקח מאתם החתן ואז יצומו׃

성 경: [마9:1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혼인집 손님들이(*,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우데이스 데 에피발레이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 에피 히마티오 팔라이오 아이레이 가르 토 플레로마 아우투 아포 투 히마티우 카이 케이론 스키스마 기네타이

개역개정,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번역,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

우리말성경,16 낡은 옷에 새로운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천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더 찢어지게 된다.

가톨릭성경,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영어NIV,16 “No one sews a patch of unshrunk cloth on an old garment, for the patch will pull away from the garment, making the tear worse.

영어NASB,16 “But no one puts a patch of unshrunk cloth on an old garment; for the patch pulls away from the garment, and a worse tear results.

영어MSG,16 He went on, “No one cuts up a fine silk scarf to patch old work clothes; you want fabrics that match.

영어NRSV,16 No one sews a piece of unshrunk cloth on an old cloak, for the patch pulls away from the cloak, and a worse tear is mad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δεις δε επιβαλλει επιβλημα ρακους αγναφου επι ιματιω παλαιω αιρει γαρ το πληρωμα αυτου απο του ιματιου και χειρον σχισμα γινεται

라틴어Vulgate,16 nemo autem inmittit commissuram panni rudis in vestimentum vetus tollit enim plenitudinem eius a vestimento et peior scissura fit

히브리어Modern,16 אין משים מטלית חדשה על שמלה בלה כי תנתק מלאתו מן השמלה ותרע הקריעה׃

성 경: [마9:1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데 발루신 오이논 네온 에이스 아스쿠스 팔라이우스 에이 데 메 게 레그뉜타이 호이 아스코이 카이 호 오이노스 엨케이타이 카이 호이 아스코이 아폴륀타이 알라 발루신 오이논 네온 에이스 아스쿠스 카이누스 카이 암포테로이 쉰테룬타이

개역개정,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번역,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우리말성경,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된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전된다.”

가톨릭성경,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영어NIV,17 Neither do men pour new wine into old wineskins. If they do, the skins will burst, the wine will run out and the wineskins will be ruined. No, they pour new wine into new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영어NASB,17 “Nor do people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wineskins burst, and the wine pours out and the wineskins are ruined; but they put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영어MSG,17 And you don’t put your wine in cracked bottles.”

영어NRSV,17 Neither is new wine put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and the wine is spilled, and the skins are destroyed; but new wine is put into fresh wineskins, and so both are preserv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υδε βαλλουσιν οινον νεον εις ασκους παλαιους ει δε μηγε ρηγνυνται οι ασκοι και ο οινος εκχειται και οι ασκοι απολουνται αλλα βαλλουσιν οινον νεον εις ασκους καινους και αμφοτερα συντηρουνται

라틴어Vulgate,17 neque mittunt vinum novum in utres veteres alioquin rumpuntur utres et vinum effunditur et utres pereunt sed vinum novum in utres novos mittunt et ambo conservantur

히브리어Modern,17 ואין נותנים יין חדש בנאדות בלים פן יבקעו הנאדות והיין ישפך והנאדות יאבדו אבל נותנים את היין החדש בנאדות חדשים ושניהם יחדו ישמרו׃

성 경: [마9:1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째번의 ‘새'(*,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 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타우타 아우투 랄룬토스 아우토이스 이두 아르콘 헤이스 엘돈 프로세퀴네이 아우토 레곤 호티 헤 뒤가테르 무 아르티 에텔류테센 알라 엘돈 에피데스 텐 케이라 수 엪 아우텐 카이 제세타이

개역개정,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새번역,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지도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갑자기 회당장 한 사람이 와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8 While he was saying this, a ruler came and knelt before him and said, “My daughter has just died. But come and put your hand on her, and she will live.”

영어NASB,18 While He was saying these things to them, a synagogue official came and bowed down before Him, and said, “My daughter has just died; but come and lay Your hand on her, and she will live.”

영어MSG,18 As he finished saying this, a local official appeared, bowed politely, and said, “My daughter has just now died. If you come and touch her, she will live.”

영어NRSV,18 While he was saying these things to them, suddenly a leader of the synagogue came in and knelt before him, saying, “My daughter has just died; but come and lay your hand on her, and she will live.”

헬라어신약Stephanos,18 ταυτα αυτου λαλουντος αυτοις ιδου αρχων ελθων προσεκυνει αυτω λεγων οτι η θυγατηρ μου αρτι ετελευτησεν αλλα ελθων επιθες την χειρα σου επ αυτην και ζ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8 haec illo loquente ad eos ecce princeps unus accessit et adorabat eum dicens filia mea modo defuncta est sed veni inpone manum super eam et vivet

히브리어Modern,18 ויהי הוא מדבר אליהם את אלה והנה אחד השרים בא וישתחו לו ויאמר עתה זה מתה בתי בא נא ושים את ידך עליה ותחיה׃

성 경: [마9:1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카이 에게르데이스 호 예수스 에콜루데센 아우토 카이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개역개정,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새번역,19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고,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우리말성경,19 예수께서 일어나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뒤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영어NIV,19 Jesus got up and went with him, and so did his disciples.

영어NASB,19 Jesus got up and began to follow him, and so did His disciples.

영어MSG,19 Jesus got up and went with him, his disciples following along.

영어NRSV,19 And Jesus got up and followed him, with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εγερθεις ο ιησους ηκολουθησεν αυτω και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9 et surgens Iesus sequebatur eum et discipuli eius

히브리어Modern,19 ויקם ישוע וילך אחריו הוא ותלמידיו׃

성 경: [마9:1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카이 이두 귀네 하이모르로우사 도데카 에테 프로셀두사 오피스덴 헾사토 투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 아우투

개역개정,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새번역,20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우리말성경,20 바로 그때,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이 예수 뒤로 다가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영어NIV,20 Just then a woman who had been subject to bleeding for twelve years came up behind him and touched the edge of his cloak.

영어NASB,20 And a woman who had been suffering from a hemorrhage for twelve years, came up behind Him and touched the fringe of His cloak;

영어MSG,20 Just then a woman who had hemorrhaged for twelve years slipped in from behind and lightly touched his robe.

영어NRSV,20 Then suddenly a woman who had been suffering from hemorrhages for twelve years came up behind him and touched the fringe of his cloak,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ιδου γυνη αιμορροουσα δωδεκα ετη προσελθουσα οπισθεν ηψατο του κρασπεδου του ιματι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20 et ecce mulier quae sanguinis fluxum patiebatur duodecim annis accessit retro et tetigit fimbriam vestimenti eius

히브리어Modern,20 והנה אשה זבת דם שתים עשרה שנה נגשה מאחריו ותגע בציצת בגדו׃

성 경: [마9:2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 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엘레겐 가르 엔 헤아우테 에안 모논 핲소마이 투 히마티우 아우투 소데소마이

개역개정,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새번역,21 그 여자는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텐데!” 했던 것이다.

우리말성경,21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가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어NIV,21 She said to herself, “If I only touch his cloak, I will be healed.”

영어NASB,21 for she was saying to herself, “If I only touch His garment, I will get well.”

영어MSG,21 She was thinking to herself, “If I can just put a finger on his robe, I’ll get well.” Jesus turned–caught her at it. Then he reassured her: “Courage, daughter. You took a risk of faith, and now you’re well.”

영어NRSV,21 for she said to herself, “If I only touch his cloak, I will be made well.”

헬라어신약Stephanos,21 ελεγεν γαρ εν εαυτη εαν μονον αψωμαι του ιματιου αυτου σωθησομαι

라틴어Vulgate,21 dicebat enim intra se si tetigero tantum vestimentum eius salva ero

히브리어Modern,21 כי אמרה בלבה אך אם אגע בבגדו אושע׃

성 경: [마9:2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호 데 예수스 스트라페이스 카이 이돈 아우텐 에이펜 다르세이 뒤가테르 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 카이 에소데 헤 귀네 아포 테스 호라스 에케이네스

개역개정,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새번역,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인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 순간 여인은 병이 나았습니다.

가톨릭성경,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영어NIV,22 Jesus turned and saw her. “Take heart, daughter,” he said, “your faith has healed you.” And the woman was healed from that moment.

영어NASB,22 But Jesus turning and seeing her said, “Daughter, take courage;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At once the woman was made well.

영어MSG,22 The woman was well from then on.

영어NRSV,22 Jesus turned, and seeing her he said, “Take heart, daughter;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And instantly the woman was made well.

헬라어신약Stephanos,22 ο δε ιησους επιστραφεις και ιδων αυτην ειπεν θαρσει θυγατερ η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 και εσωθη η γυνη απο της ωρας εκεινης

라틴어Vulgate,22 at Iesus conversus et videns eam dixit confide filia fides tua te salvam fecit et salva facta est mulier ex illa hora

히브리어Modern,22 ויפן ישוע וירא אותה ויאמר חזקי בתי אמונתך הושיעה לך ותושע האשה מן השעה ההיא׃

성 경: [마9:2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카이 엘돈 호 예수스 에이스 텐 오이키안 투 아르콘토스 카이 이돈 투스 아울레타스 카이 톤 오클론 도뤼부메논

개역개정,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새번역,23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이르러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우리말성경,23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영어NIV,23 When Jesus entered the ruler’s house and saw the flute players and the noisy crowd,

영어NASB,23 When Jesus came into the official’s house, and saw the flute-players and the crowd in noisy disorder,

영어MSG,23 By now they had arrived at the house of the town official, and pushed their way through the gossips looking for a story and the neighbors bringing in casseroles.

영어NRSV,23 When Jesus came to the leader’s house and saw the flute players and the crowd making a commo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ελθων ο ιησους εις την οικιαν του αρχοντος και ιδων τους αυλητας και τον οχλον θορυβουμενον

라틴어Vulgate,23 et cum venisset Iesus in domum principis et vidisset tibicines et turbam tumultuantem

히브리어Modern,23 ויבא ישוע אל בית השר וירא את המחללים בחלילים ואת העם ההומה ויאמר׃

성 경: [마9:2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이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 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엘레겐 아나코레이테 우 가르 아페다넨 토 코라시온 알라 카듀데이 카이 카테겔론 아우투

개역개정,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새번역,24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우리말성경,2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가톨릭성경,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영어NIV,24 he said, “Go away. The girl is not dead but asleep.” But they laughed at him.

영어NASB,24 He said, “Leave; for the girl has not died, but is asleep.” And they began laughing at Him.

영어MSG,24 Jesus was abrupt: “Clear out! This girl isn’t dead. She’s sleeping.” They told him he didn’t know what he was talking about.

영어NRSV,24 he said, “Go away; for the girl is not dead but sleeping.” And they laughed a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4 λεγει αυτοις αναχωρειτε ου γαρ απεθανεν το κορασιον αλλα καθευδει και κατεγελ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4 dicebat recedite non est enim mortua puella sed dormit et deridebant eum

히브리어Modern,24 סורו מפה כי לא מתה הילדה אך ישנה היא וישחקו לו׃

성 경: [마9:2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웃더라'(*,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호테 데 엨세블레데 호 오클로스 에이셀돈 에크라테센 테스 케이로스 아우테스 카이 에게르데 토 코라시온

개역개정,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새번역,25 무리를 내보낸 다음에, 예수께서 들어가셔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시고 방으로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가톨릭성경,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영어NIV,25 After the crowd had been put outside, he went in and took the girl by the hand, and she got up.

영어NASB,25 But when the crowd had been sent out, He entered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the girl got up.

영어MSG,25 But when Jesus had gotten rid of the crowd, he went in, took the girl’s hand, and pulled her to her feet–alive.

영어NRSV,25 But when the crowd had been put outside, he went in and took her by the hand, and the girl got up.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τε δε εξεβληθη ο οχλος εισελθων εκρατησεν της χειρος αυτης και ηγερθη το κορασιον

라틴어Vulgate,25 et cum eiecta esset turba intravit et tenuit manum eius et surrexit puella

히브리어Modern,25 ויהי אחרי גרש העם ויבא הביתה ויאחז בידה ותקם הנערה׃

성 경: [마9:2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카이 엨셀덴 헤 페메 하우테 에이스 홀렌 텐 겐 에케이넨

개역개정,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새번역,26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우리말성경,26 그리고 이 소문은 그 지역 온 사방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영어NIV,26 News of this spread through all that region.

영어NASB,26 This news spread throughout all that land.

영어MSG,26 The news was soon out, and traveled throughout the region.

영어NRSV,26 And the report of this spread throughout that district.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ξηλθεν η φημη αυτη εις ολην την γην εκεινην

라틴어Vulgate,26 et exiit fama haec in universam terram illam

히브리어Modern,26 ותצא השמועה הזאת בכל הארץ ההיא׃

성 경: [마9:2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카이 파라곤티 에게이덴 토 예수 에콜루데산 아우토 뒤오 튀플로이 크라존테스 카이 레곤테스 엘레에손 헤마스 휘오스 다윋

개역개정,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새번역,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예수를’이 없음

우리말성경,27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두 사람이 예수를 따라오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가톨릭성경,27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영어NIV,27 As Jesus went on from there, two blind men followed him, calling out, “Have mercy on us, Son of David!”

영어NASB,27 As Jesus went on from there, two blind men followed Him, crying out, “Have mercy on us, Son of David!”

영어MSG,27 As Jesus left the house, he was followed by two blind men crying out, “Mercy, Son of David! Mercy on us!”

영어NRSV,27 As Jesus went on from there, two blind men followed him, crying loudly, “Have mercy on us, Son of David!”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παραγοντι εκειθεν τω ιησου ηκολουθησαν αυτω δυο τυφλοι κραζοντες και λεγοντες ελεησον ημας υιε δαβιδ

라틴어Vulgate,27 et transeunte inde Iesu secuti sunt eum duo caeci clamantes et dicentes miserere nostri Fili David

히브리어Modern,27 ויעבר ישוע משם וילכו אחריו שני אנשים עורים והמה צעקעם ואמרים חננו בן דוד׃

성 경: [마9:2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거기서 떠나 가실새 –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두 소경이 –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 다윗의 자손이여 –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야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12:23)라고 하는 점이다.

󰃨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야의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야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엘돈티 데 에이스 텐 오이키안 프로셀돈 아우톤 호이 튀플로이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피스튜에테 호티 뒤나마이 투토 포이에사이 레구신 아우토 나이 퀴리에

개역개정,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새번역,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눈 먼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말성경,28 예수께서 어떤 집으로 들어가시자 눈먼 사람들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가톨릭성경,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28 When he had gone indoors, the blind men came to him, and he asked them, “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 “Yes, Lord,” they replied.

영어NASB,28 When He entered the house, the blind men came up to Him, and Jesus said to them, “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 They said to Him, “Yes, Lord.”

영어MSG,28 When Jesus got home, the blind men went in with him. Jesus said to them, “Do you really believe I can do this?” They said, “Why, yes, Master!”

영어NRSV,28 When he entered the house, the blind men came to him; and Jesus said to them, “Do you believe that I am able to do this?” They said to him, “Yes,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λθοντι δε εις την οικιαν προσηλθον αυτω οι τυφλοι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πιστευετε οτι δυναμαι τουτο ποιησαι λεγουσιν αυτω ναι κυριε

라틴어Vulgate,28 cum autem venisset domum accesserunt ad eum caeci et dicit eis Iesus creditis quia possum hoc facere vobis dicunt ei utique Domine

히브리어Modern,28 וכבואו הביתה נגשו אליו העורים ויאמר אליהם ישוע המאמינים אתם כי יש לאל ידי לעשות זאת ויאמרו אליו כן אדנינו׃

성 경: [마9:2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집에 –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내가…할 줄을 믿느냐 –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신 것이다.

󰃨 주여 그러하오이다 –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토테 헾사토 톤 옾달몬 아우톤 레곤 카타 텐 피스틴 휘몬 게네데토 휘민

개역개정,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새번역,29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우리말성경,29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가톨릭성경,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영어NIV,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According to your faith will it be done to you”;

영어NASB,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saying, “It shall be done to you according to your faith.”

영어MSG,29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Become what you believe.”

영어NRSV,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According to your faith let it be done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9 τοτε ηψατο των οφθαλμων αυτων λεγων κατα την πιστιν υμων γενηθητω υμιν

라틴어Vulgate,29 tunc tetigit oculos eorum dicens secundum fidem vestram fiat vobis

히브리어Modern,29 ויגע בעיניהם ויאמר יעשה לכם כאמונתכם׃

성 경: [마9:2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저희 눈을 만지시며 –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너희 믿음대로(*, 카타 테 피스틴 휘몬) –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카이 에네오크데산 아우톤 호이 옾달모이 카이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레곤 호가테 메데이스 기노스케토

개역개정,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새번역,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다짐하셨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우리말성경,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엄히 당부하셨습니다. “이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가톨릭성경,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영어NIV,30 and their sight was restored. Jesus warned them sternly, “See that no one knows about this.”

영어NASB,30 And their eyes were opened. And Jesus sternly warned them: “See that no one knows about this!”

영어MSG,30 It happened. They saw. Then Jesus became very stern. “Don’t let a soul know how this happened.”

영어NRSV,30 And their eyes were opened. Then Jesus sternly ordered them, “See that no one knows of this.”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ανεωχθησαν αυτων οι οφθαλμοι και ενεβριμησατο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λεγων ορατε μηδεις γινωσκετω

라틴어Vulgate,30 et aperti sunt oculi illorum et comminatus est illis Iesus dicens videte ne quis sciat

히브리어Modern,30 ותפקחנה עיניהם ויגער בם ישוע ויאמר ראו פן יודע לאיש׃

성 경: [마9:3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 엄히 경계하시되(*,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스) –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호이 데 엨셀돈테스 디에페미산 아우톤 엔 홀레 테 게 에케이네

개역개정,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새번역,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지역에 퍼뜨렸다.

우리말성경,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께 대한 소문을 그 지역 온 사방에 퍼뜨렸습니다.

가톨릭성경,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영어NIV,31 But they went out and spread the news about him all over that region.

영어NASB,31 But they went out and spread the news about Him throughout all that land.

영어MSG,31 But they were hardly out the door before they started blabbing it to everyone they met.

영어NRSV,31 But they went away and spread the news about him throughout that district.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ι δε εξελθοντες διεφημισαν αυτον εν ολη τη γη εκεινη

라틴어Vulgate,31 illi autem exeuntes diffamaverunt eum in tota terra illa

히브리어Modern,31 והמה בצאתם השמיעו את שמעו בכל הארץ ההיא׃

성 경: [마9:3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나가서…전파하니라 –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아우톤 데 엨세르코메논 이두 프로세넹칸 아우토 안드로폰 코폰 다이모니조메논

개역개정,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새번역,32 그들이 떠나간 뒤에,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다.

우리말성경,32 그들이 떠나간 뒤 사람들이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32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영어NIV,32 While they were going out, a man who was demon-possessed and could not talk was brought to Jesus.

영어NASB,32 As they were going out, a mute, demon-possessed man was brought to Him.

영어MSG,32 Right after that, as the blind men were leaving, a man who had been struck speechless by an evil spirit was brought to Jesus.

영어NRSV,32 After they had gone away, a demoniac who was mute was brought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2 αυτων δε εξερχομενων ιδου προσηνεγκαν αυτω ανθρωπον κωφον δαιμονιζομενον

라틴어Vulgate,32 egressis autem illis ecce obtulerunt ei hominem mutum daemonium habentem

히브리어Modern,32 המה יצאו והנה הביאו אליו איש אלם אחוז שד׃

성 경: [마9:3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저희가 나갈 때에 –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 귀신 들려 –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단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 벙어리 된 자(*,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카이 에크블레덴토스 투 다이모니우 엘랄레센 호 코포스 카이 에다우마산 호이 오클로이 레곤테스 우데포테 에파네 후토스 엔 토 이스라엘

개역개정,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새번역,33 귀신이 쫓겨나니, 말 못하는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무리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우리말성경,33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말 못했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

가톨릭성경,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3 And when the demon was driven out, the man who had been mute spoke. The crowd was amazed and said, “Nothing like this has ever been seen in Israel.”

영어NASB,33 After the demon was cast out, the mute man spoke; and the crowds were amazed, and were saying, ” Nothing like this has ever been seen in Israel.”

영어MSG,33 As soon as Jesus threw the evil tormenting spirit out, the man talked away just as if he’d been talking all his life. The people were up on their feet applauding: “There’s never been anything like this in Israel!”

영어NRSV,33 And when the demon had been cast out, the one who had been mute spoke; and the crowds were amazed and said, “Never has anything like this been seen in Israel.”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εκβληθεντος του δαιμονιου ελαλησεν ο κωφος και εθαυμασαν οι οχλοι λεγοντες οτι ουδεποτε εφανη ουτως εν τω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33 et eiecto daemone locutus est mutus et miratae sunt turbae dicentes numquam paruit sic in Israhel

히브리어Modern,33 וכאשר גרש השד וידבר האלם ויתמה המון האנשים ויאמרו מעולם לא נראתה כזאת בישראל׃

성 경: [마9:3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귀신이 쫓겨나고 –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 벙어리가 말하거늘 –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호이 데 파리사이오이 엘레곤 엔 토 아르콘티 톤 다이모니온 에크발레이 타 다이모니아

개역개정,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새번역,34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는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34절이 없음

우리말성경,34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가 귀신의 왕을 통해 귀신을 쫓아낸다.”

가톨릭성경,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영어NIV,34 But the Pharisees said, “It is by the prince of demons that he drives out demons.”

영어NASB,34 But the Pharisees were saying, “He casts out the demons by the ruler of the demons.”

영어MSG,34 The Pharisees were left sputtering, “Hocus pocus. It’s nothing but hocus pocus. He’s probably made a pact with the Devil.”

영어NRSV,34 But the Pharisees said, “By the ruler of the demons he casts out the demons.”

헬라어신약Stephanos,34 οι δε φαρισαιοι ελεγον εν τω αρχοντι των δαιμονιων εκβαλλει τα δαιμονια

라틴어Vulgate,34 Pharisaei autem dicebant in principe daemoniorum eicit daemones

히브리어Modern,34 והפרושים אמרו על ידי שר השדים מגרש הוא את השדים׃

성 경: [마9:3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 귀신의 왕 – 귀신들의 괴수, 곧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단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 빙자하여(*, 엔) –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단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 귀신을 쫓아낸다 –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야의 광채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같이 악한 사단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카이 페리에겐 호 예수스 타스 플레이스 파사스 카이 타스 코마스 디다스콘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카이 케뤼쏜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카이 데라퓨온 파산 노손 카이 파산 말라키안

개역개정,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새번역,35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우리말성경,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영어NIV,35 Jesus went through all the town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영어NASB,35 Jesus was going through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kind of disease and every kind of sickness.

영어MSG,35 Then Jesus made a circuit of all the towns and villages. He taught in their meeting places, reported kingdom news, and healed their diseased bodies, healed their bruised and hurt lives.

영어NRSV,35 Then Jesus went ab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curing every disease and every sic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περιηγεν ο ιησους τας πολεις πασας και τας κωμας διδασκω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αυτων και κηρυσσων το ευαγγελιον της βασιλειας και θεραπευων πασαν νοσον και πασαν μαλακιαν εν τω λαω

라틴어Vulgate,35 et circumibat Iesus civitates omnes et castella docens in synagogis eorum et praedicans evangelium regni et curans omnem languorem et omnem infirmitatem

히브리어Modern,35 ויסב ישוע בכל הערים והכפרים וילמד בבתי כנסיותיהם ויבשר בשורת המלכות וירפא כל מחלה וכל מדוה בעם׃

성 경: [마9:3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5-38절은, 4:23-25이 첫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번째 강론(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 가르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 천국 복음 –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 병과 모든 약한 것 –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에스프랑크니스데 페리 아우톤 호티 에산 에스퀼메노이 카이 에르림메노이 호세이 프로바타 메 에콘타 포이메나

개역개정,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새번역,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고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NIV,36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영어NASB,36 Seeing the people, He felt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distressed and dispirited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영어MSG,36 When he looked out over the crowds, his heart broke. So confused and aimless they were, like sheep with no shepherd.

영어NRSV,36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헬라어신약Stephanos,36 ιδων δε τους οχλους εσπλαγχνισθη περι αυτων οτι ησαν εκλελυμενοι και ερριμμενοι ωσει προβατα μη εχοντα ποιμενα

라틴어Vulgate,36 videns autem turbas misertus est eis quia erant vexati et iacentes sicut oves non habentes pastorem

히브리어Modern,36 ובראותו את ההמנים נכמרו רחמיו עליהם כי הם מתעלפים ונדחים כצאן אשר אין להם רעה׃

성 경: [마9:3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민망히 여기시니(*, 에스플랑크니스데) –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 목자 없는 양 –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로 보였던 것이다.

󰃨 고생하며(*, 에크레뤼메노이) –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 유리함이라(*, 엘림메노이) –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토테 레게이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호 멘 데리스모스 폴뤼스 호이 데 에르가타이 올리고이

개역개정,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새번역,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우리말성경,37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가톨릭성경,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영어NIV,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영어NASB,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workers are few.

영어MSG,37 “What a huge harvest!” he said to his disciples. “How few workers!

영어NRSV,37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The harvest is plentiful, but the laborers are few;

헬라어신약Stephanos,37 τοτε λεγει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ο μεν θερισμος πολυς οι δε εργαται ολιγοι

라틴어Vulgate,37 tunc dicit discipulis suis messis quidem multa operarii autem pauci

히브리어Modern,37 אז ידבר לתלמדידיו ויאמר רב הקציר והפעלים מעטים׃

성 경: [마9:3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할 것은 많되 –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 일군은 적으니 – 여기서 일군이란 예수 자신, 세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데에데테 운 투 퀴리우 투 데리스무 호포스 에크발레 에르가타스 에이스 톤 데리스몬 아우투

개역개정,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새번역,38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우리말성경,38 그러므로 추수할 주인에게 추수할 들판으로 일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

가톨릭성경,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영어NIV,38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herefore,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field.”

영어NASB,38 “Therefore beseech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out workers into His harvest.”

영어MSG,38 On your knees and pray for harvest hands!”

영어NRSV,38 therefore ask the Lord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into his harvest.”

헬라어신약Stephanos,38 δεηθητε ουν του κυριου του θερισμου οπως εκβαλη εργατας εις τον θερισμ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38 rogate ergo dominum messis ut eiciat operarios in messem suam

히브리어Modern,38 לכן התחננו אל בעל הקציר לשלח פעלים לקצירו׃

성 경: [마9:3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 여기서 ‘청하여'(*, 데에데테)란 공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 보내어 주소서(*, 호포스 에크발레) – 이는 강제력이 동원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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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마태복음 9장 흐름정리>

내용상 8장과 연결된다. 여기서도 중풍병자(1~8절), 혈루증 환자 및 죽은 야이로의 딸(18~26절), 소경과 벙어리(27~34절) 등을 고치신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이곳의 치유 사역이 8장과 다른 점은 그것이 죄를 사하는 주님의 권세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6절). 결국 주님의 치유의 목적은 죄사함을 통한 전인류의 구원임이 여기서 드러난 셈이다. 어쨌든 죄인의 질병을 추방하신 사건은, 인애의 주시며, 큰 목자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마태는 이적 기사 중간과 말미에 제자 선택과 금식 논쟁을 삽입함으로써 본격화된 천국 선포 사역과 그에 따르는 반대자들의 공세를 암시한다.

<마태복음 9장 줄거리>

2. 그리스도가 중풍병자를 치료함.

9. 세관에서 마태를 부름.

10.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음.

14.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변호함.

20.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침.

23.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킴.

27.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함.

32.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침.

36.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김.

<마태복음 9장 도움말>

* 9절 : 마태라 하는 사람.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로 불리고 있다. 아마도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라는 이름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된 후에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 13절 : 너희는 가서… 배우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제시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회당이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9:13 내가 긍휼[자비]을 원하고 제사를[희생 제물] 원하지 아니하노라.

“자비”는 품성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서 반영되기를 원하는 품성의 특징들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사”는 실제적 종교를 무색하게 하는 잘못된 경향의 형식적 종교를 대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상징하고, “제사”는 행함의 의를 상징한다. 영혼이 결여된 종교 형식은 무가치하다고 그리스도는 말한다.

* 20절 : 혈루증.

자궁의 하혈 증상으로, 종교 의식 상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 23절 : 피리 부는 자들.

당시에는 죽은 사람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곡하는 부인들과 피리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 27절 : 다윗의 자손.

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소경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였다.

* 28절 : 믿느냐.

그들 편에서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신해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적이든 영적이든 복이 주어지고 받으려면,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만나고 연합되도록 분발하여야 한다.

* 32절 : 예수께 데려오니.

어떤 사람이 몸이나 영혼의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에게 나올 힘이나 믿음이 부족할 때, 그를 예수에게 데려다 줄 만큼 그에게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행이다.

* 34절 : 바리새인들은 가로되[이르되].

그리스도를 잠잠케 하거나, 백성들로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일에 혈안이 된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 베푸시는 능력은 그가 사단과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를 나타낸다고 믿게 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마태가 예수 편에서의 아무런 대답도 기록하지 않은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주장을 예수 면전에서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백성들 사이에 그것을 퍼트리고자 했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 37절 : 일꾼은 적으니.

풍성한 추수를 앞두고 일꾼이 적다면 필연적으로 좋은 곡식들이 버려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들판에서 천국을 위하여 곡식을 수확하는 복음 추수꾼이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었고, 이제 더 폭넓은 계획들이 수립되지 않는 한, 대부분의 곡식은 갈릴리의 조그만 지역에서조차도 결코 거둬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졌다.

* 38절 : 그러므로…청하여…[기도]하라.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는 기도는 그 주인이 더 많은 일꾼의 필요를 몰랐다거나 무관심했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열두 제자는 이 필요를 기도의 목표로 삼아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추수의 주인이, 제자들의 마음에 그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그들의 개인적 책임을 깨닫게 할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는 아실 수 없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요, 다른 방법으로는 하지 않으실 것을 하시라고 설득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조절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기도회로 인도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기도회에서 작은 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예리하게 느낀 절박한 필요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들은 기도해야 했고, 그들의 기도와 부합되게, 하나님과 협력하여 믿음으로 전진하여야 했다.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9장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 – 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 하는 것이 적걸하다.

==================9:2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 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9:3

그 옷이 관채가 . .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4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 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 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 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 응답하다 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 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9:7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모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9:8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9:9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 .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9:1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 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9:12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 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 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

===================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 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 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 .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 . . 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9:17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 .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 란 부셔버리다 , 소리지르다 ,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 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 란 족속 자손 ,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 . .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9:21

언제부터. . . 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9:22

귀신이 죽이려고. . . 자주 던졌나이다 –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 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 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 . . . 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 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9:26

귀신이 . . . 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8

우리는 어찌하여. . .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9:30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 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 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 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 – 21등).

====================9:33

가버나움에 이르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 – 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 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 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 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 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 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 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 과 발 그리고 눈 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 발, 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 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 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 조엔 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 을 뜻하는 프쉬케 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 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 모스코, 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49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 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 – 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 33- 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예수께서 최초로 메시야 신분 및 그 사역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본장에서는 전장에서 계시된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변화산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나 수난 예고가 먼저 있은 연후에 변화산 사건이 등장하는 순서의 의미 등의 문맥상의 유의 사항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17장)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 두 가지의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수난과 영광. 본장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누어지며(1-13;14-32;33-50절).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문단은 각기 예수의 영광과 수난을 시사하는 두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8절은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보여 주는 반면에, 9-13절은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인 십자가 수난을 재차 예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14-2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되는 반면, 30-32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수난이 다시금 예고된다. 마가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관한 내용을 거듭 교차시킨 것은 첫째로, 앞장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함축된 역설적 진리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제자 훈련. 공생애를 결산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본장에 수록된 사건들이 결론적 교훈 및 경계 부분인 세번째 문단(33-50절)은 물론이고 본장 전체는 예수의 제자화 훈련에 대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신의 이루고자 하신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32절). 아마 그들은 예수의 변화된 일련의 태도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이 기대해왔던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메시야로서의 자기 계시와 영광스러운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항상 예수의 수난 예고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된 사실에만 집착하고 수난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의아해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하리라는 기대에만 부푼 나머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을 때를 전제한 자리 다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34절).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세상에로 집중되어 있었고 십자가 고통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었으므로, 예수의 영광과 수난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 이유들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집중적인 제자 훈련을 시행하셨다.

1. 변화산 사건(9:1-13)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신지 엿새 후에 세 제자 앞에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모하신 내용이다. 이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Ascension)과 더불어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에 해당하며,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마 17:1-13;눅 9:28-36). 마 17:1-13 강해에서는 변화산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사건의 목적 혹은 의의를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메시야되신 예수를 증거함.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선포받음 바 있거니와(1:11), 이제 공생애의 마감 시기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7절).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4절), 이는 곧,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을 암시한다. 또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골 3:4). 비록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본문은 8:29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2) 제자들을 위한 위로와 교훈. 본문은 또한 예수의 제자 훈련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예수의 행동이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에로 더욱 집중될 것이었으며, 영적 무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불과 며칠 전에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예고하셨거니와(8:31), 이 예고를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혔음직하다. 따라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그들로 장차 당신의 영광을 널리 증거하게끔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예수의 거시안적(巨視眼的) 계획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광경을 보고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14절 ff. )을 도외시한 채 영광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동등한 위상(位相)에 두었다(5절). 이처럼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실로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모든 체험들이 장래에는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게 하는 데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2. 귀신 축사(逐邪)와 두번째 수난 예고(9:14-32)

본문은 변화산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어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8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사건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점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치유 기사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개시하신 사실에 비견될 수 있다(1:14, 15).

이 사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마 17:14-20;눅 9:37;43b), 그 중에서 본서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제자들의 불신 상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마 1:14-21의 강해에서는 이 ‘믿음’의 문제에다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보존과 진보 및 믿음의 본질과 능력 등을 상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사항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의 두번째 수난 예고(30-32절)에 관한 강해는 본서에 수록된 예수의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비교하는 주제 강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1) 변화산 위와 산 아래.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 중에는 변화산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慘景)을 선명히 대조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영광의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과 환희에 도취되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사역과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잊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속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주님은 변화산상에 계시면서도 자신이 필히 완수해야 할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궁핍함을 채우고자 하는 봉사의 삶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위와 아래의 대조적인 두 광경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한 바 두 도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도들이 위로는 영화롭고 이상적인 신천 신지(新天新地)에 대한 비전을 바라 보지만, 아래로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이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두 세계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 생활의 큰 관건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인간 상호간의 모든 수평적 관계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에 충실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밀하고도 깊이 있는 영교(靈交)의 시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묵상에서 실제적 활동(praxis)으로, 서재에서 구체적 삶의 터 (field)로, 밀실에서 가두(街頭)로 그리고 주님과의 내밀한 영교에서 사단과의 전투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말로 올바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 하겠다.

(2) 예수의 권능과 제자들을 불신. 또한 본문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과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기력함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권능을 수(數)없이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마 21:22;요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믿음을 상실하고만 듯하다. 이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훈련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어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은 영적 무지와 불신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책망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41절).

불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권능을 상실해 버린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사단은 고통스러운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도들을 은혜의 보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따라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 저러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다(고전 15:58;빌 4:8;딤전 4:7, 8;벧전 3:11).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이들의 멸망을 방관하는 자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책임을 반드시 추궁받을 것이다.

* 세 차례 수난 예고의 비교.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수난당하시리라는 예고는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의 여러 말씀들 속에 암시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수난을 예고하신 때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공개 이후이다. 예수의 사역 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집중적으로 예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메시야직의 본질적 의미를 확실히 표명함과 아울러 제자들도 고난과 희생에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의 뒤를 좇게끔 교육하고자 원하셨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의 공개적 수난 예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수난 예고의 시기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직후(8:31-9:1;마 16:21-28;눅 9:22, 23), 변화산 사건 직후(9:30-32;마 17:22;눅 9:43b-45)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무렵(10:32-34;마 20:17-19;눅 18:31-34)등이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 기자들 중 유독 마태만이 마 26:1-5에서 수난 예고를 한 차례 더 수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공개적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점차적으로 그 수난 과정과 수난 상황이 구체화 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예고에는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이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주께서 잠시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종국적 승리가 제시되어 있다.

(1) 첫번째 예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 곧, 수난당하실 장소, 핍박의 주동 세력,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등을 예시하며, 예수의 고난에 제자들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것을 묘사한다.

(3) 세번째 예고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께서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쓴 잔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발적이고도 완벽한 순종을 보게 된다(요 1:29).

* 귀신들림과 축사.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데에 공생애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셨다(1:34;마 4:24;눅 4:40). 특히 여기서는 귀신 축사(逐邪)에 관해 일고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귀신의 존재와 속성 및 활동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 귀신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인정은 하되 귀신에 대한 비성경적 식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귀신의 속성과 활동. 귀신의 영적이며(9:25;마 17:18), 지적인 존재이며(딤전 4:1-4:15;마 13:25) 사단의 지배를 확장시키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된다.

(2) 귀신들림에 대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신이나(마 17:15;요 10:18-21) 몸을 (18절;마 4:24;9:32, 33;눅 11:14) 해(害)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는 미쳐 날뛰기도 하고(5:5, 15) 각종 병에 걸리기도 한다(욥 2:7;눅 4:40, 41). 하지만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불순종에 빠져 성령의 도우심을 스스로 제한시켰을 경우에는 귀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듯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3) 귀신 축사.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으로써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16:17). 축사함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능력이나 특별한 주술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권능으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한편,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귀신이 사단과 더불어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될 것이다(창 3:14;눅 10:18;계12:9;20:10).

3.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9:33-37)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혁신적인 가치관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기사가 시작되기 전에,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shekel)을 꺼내어 성전세를 내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마 17:24-27). 마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본문의 기사를 막바로 연결시켜 이를 9:1-32에 대한 결론적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유념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내면적 괴리 상태. 제자들은 예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그 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데 대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빈한(貧寒)하게 지내시며 병들고 가난한 무리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종의 모습 보다는 이적적 권능을 행하며 영광 중에 거하는 승리자의 모습만이 인상깊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그 수난의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더욱 집착해가는 제자들 간의 괴리감(乖離感)은 이후의 내용들에서 더욱 현저해져 간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예수를 따랐지만, 참된 메시야관에 대해 무지하였고 신앙의 도리의 심오한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측면에서는 갓난 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겸손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 가치관에 비할 때 실로 파격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을 지배해 왔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사슬식으로 연결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生態系) 전체가 유지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숭고한 차원의 윤리적 요구를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 소위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되면, 어떤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과 권력으로 압축되는 세상적 힘을 얻지 못하면 심히 불안해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날이 갈수록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가 더 신봉되어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패배해 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숭고한 천국 시민의 윤리는 단지 허공에서만 맴도는 추상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악인의 영화(榮華)는 실로 덧없는 것이요(시 37:2, 10, 38;75:8;잠 14:2;벧후 2:17),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와 사랑의 나라가 조만간 온 누리에 임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진 자는 본문의 교훈을 정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천군만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여길 것이다.

4. 제자들의 무지와 독선 및 범죄에 대한 경고(9:38-50)

앞 문단에 이어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헛된 야욕과 무지 및 이를 교정시키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교훈과 경고가 소개된다. 본문의 내용을 편의상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화목을 가르치심.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의 시기심과 파벌의식을 직접적 발달으로 하고 있다(38절).

이와 유사한 상황은 민 11:26-29에서도 나타난다. 즉, 여호수아(Joshua)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칠십인의 장로들 중에 피택된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예언하자 이를 금하도록 모세에게 요청하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줄로만 알고 그러한 요청을 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노출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본문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속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의 일꾼의 사역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훨씬 더 완악하고 무지하였다(38절).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그들간에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불화를 일으켰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그들과 친분 관계가 없는 자들의 활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시기하고 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지상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시에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요직(要職)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더구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14-18절)이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속적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이간과 경쟁 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앞 단락에 이어 섬김의 도를 재차 강조하면서(41절) 화목을 추구할 것을 명령하셨다(50절;잠 3:30;20:3;빌 2:3;약 3:4). 그리고 배타적 편견과 독선적 특권 의식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33-37절). 본문에서 주님이 힘주어 경계하신 당파성과 분리주의는 초대 교회와(고전 1:12)향후의 교회사 전체를 통해 나타났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실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교파로 갈라서거나 새로운 군소 교단을 만들어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예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범죄에 대한 경고. 43-49절은 범죄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직접적 경고 대상은 (1)항에 설명한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당파심이라 하겠지만 넓게는 제자들이 처한 전반적인 심령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 무지와 완악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든 불신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본문의 경고가 매우 신랄하고 엄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인류의 죄악이 심각한 성질의 것임을 시사함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이야말로 그 어떤 희생을 지불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고귀한 것임을 상기시킨다(마 13:45, 46).

또한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연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당장에는 그들이 무지와 불신 가운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용납하사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훈계하셨지만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된 요소들이 있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계신다.

* 지옥에 대하여. 여기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지옥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정의. 지옥이란 구속함 받지 못한 죄인들이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가게 될 형벌의 장소 혹은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며, 사후의 중간 상태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눅 23:43 주제 강해 ‘사후의 중간기 상태’ 참조).

(2) 구약 시대의 지옥관.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는’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사야의 진술(사 66:24)을 제외하면,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음부'(* , 스올)라는 개념 속에 지옥의 개념이 어렴풋하게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사 14:15;겔 32:23등). 구약성경에서 음부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욥 10:21, 22;시 143:3), 침묵의 장소로서(시 94:17;115:17),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시 6:5;88:10-12)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욥 14:21;전 9:5-10)이라 묘사되었다. 결국 초기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과 악인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지옥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빈약한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점차 선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비로서 지옥의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4) 신약 시대의 지옥관. 신약 시대에 이를러 음부의 개념은 더욱 발전되어 의인의 영혼들이 부활과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며 임시 대기하는 장소인 낙원(낙 23:43)과 대치되는 개념. 즉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임시 대기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눅 16:23;계 20:13).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영원한 멸망의 처소인 지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신약 시대의 특기할 만한 계시의 진전이다. 개역 성경의 ‘지옥’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엔나'(* )는 히브리어 ‘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몰렉(Molech) 우상에게 아이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곳이며(대하 28:3;33:6), 요시야(Josiah)의 개혁 때에는 불결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Jeremiah)에 의하면 그렇듯 가증스러운 인신 제사 관습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였다(렘 7:32;19:6). 이러한 개념을 확대되어서 나중에 힌놈의 골짜기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될 곳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엔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면 공관 복음서에만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예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48절), ‘풀무불'(마 13:50), ‘영원한 불'(마 25:41), ‘바깥 어두운 데'(마 8:12)등으로 묘사하였다. 기타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세에서의 혹심한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지옥과 동일한 개념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롬 2:3-9;살전 5:3;살후 1:6-9;히 10:27;벧후 2:4-9;계 14:11등).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예수는 지옥의 교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가르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경을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지옥을 묘사하는 말들이 비유적 언어이기는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두려운 현실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지옥의 구체적 위치나 구조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언급된 만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바로 전도임을 일깨워 준다(16:15;시 96:3;마 28:19).

[마태복음 9장 강해 설교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마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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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마9:14-17)

♣명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영적 회복을 위해서 금식할 때이다.

♣목적: 구원받은 나는 신랑을 잃어버렸을 때에 금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금식하면 떠오르는 것이 나의 문제가 풀어지지 않았을 때에 금식하려고 합니다. 육체인 고민과 삶에 고통이 찾아왔을 때에 금식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그런 종류의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금식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금식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무가내의 금식은 성경의 본질을 벗어난 금식이 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성경적 개념의 금식을 깨닫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이 시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마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 당시에 많은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 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에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이들은 율법적 행위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금식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전통에 묶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전통에 묶여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유대인들처럼 전통에 묶여있다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전통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선이 될 때에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이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입니다. 신랑을 잃어버릴 때에 육적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지기 위하여 육적 금식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빼앗길’ απαιρω(아파이로 522) 빼앗기다, 가져가다, 잡아채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빼앗길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고난의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핍박과 곤란의 날이 찾아올 때에는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강제로 신랑을 빼앗아 가고 물건을 강탈하듯이 잡아채 남겨두지 않고 가져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날이 와도 신랑을 빼앗기는 자가 있고 빼앗기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평소에 신랑이 없을 때마다 열심히 금식하여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이 온다고 하더라도 신랑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육적인 것에만 정신이 팔려 세상의 부귀영화만 바라보면서 금식한 자들은 마지막 날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는 신랑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만세전에 선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신랑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제는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는 신랑을 빼앗기지 않도록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나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평소에 신랑이 나와 연합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금식을 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육적으로 열심히 먹으면서 영적으로 곤핍하여져도 신경을 쓰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다가 육적인 곤핍이 오니 그때서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면서 자신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을 빼앗길 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날을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가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환란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율법에 빠져 행위적인 금식만 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평소에 깨닫고 주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금식한 자들은 이때에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신랑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금식을 하셔야 합니까? 나의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금식을 하셔야 합니까? 나의 육체의 고민이 찾아왔다고 금식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통이 끊어지고 내 안에 주님과 연합되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 때에 금식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금식을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문제를 놓고 금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단식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아들이 오토바이를 사 달라고 졸라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토바이를 사주면 사고 날 것이 불 보듯이 알기 때문에 사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 주지 않겠다고 하자 그때부터 아들은 밥도 먹지 않고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채워질 때까지 아버지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의 아들이 금식을 하면서 투쟁하듯이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는데 사주자니 사고 날 것이 확실하고 안 사주자니 배고픔에 있는 아들의 처지를 볼 수가 없고 그래서 어쩔 수없이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사 준 그 날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부딪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 이런 금식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 금식입니까? 혹시 내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투쟁하듯이 금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예수님께서는 금식 이야기를 하시면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옷인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곳에 생베 조각인 십자가 복음을 붙이면 율법과 복음이 희석이 되어 망쳐버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금식도 전통적인 금식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랑을 접붙이게 되면 희석이 되어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율법과 복음을 섞어서 혼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대인들처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현재 나의 옷은 율법이면서 한 구석에 생베 조각인 복음을 붙여놓고 이것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한 부분만 복음으로 붙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온전하게 주님과 연합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금식도 유대인의 전통에 빠져서 행위적인 금식을 하는 것처럼 율법의 금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금식도 해서는 안 됩니다. 신랑이 내 안에 없다고 생각이 될 때에 금식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있고 신랑이 있는데 금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전통에 묶여서 남들이 금식을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는 이런 식의 금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은 그대로 놔두고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혼인집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심령에 신랑이 없다면 그때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해서 영적으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께서 금식을 말씀하시면서 포도주 가죽부대의 예화를 통해 깨달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두어야 만이 둘 다 보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고대 근동에서는 부대를 만들기 위해서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다리에서 목까지 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다리를 묶어 가죽부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곳에 포도주를 넣어 보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완전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낡은 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가 되면서 가스가 나오게 됩니다. 이 가스에 의하여 팽창이 되어 낡은 가죽부대는 터지게 됩니다. 하지만 새 가죽부대는 팽창을 해도 넉넉하게 팽창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터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낡은 율법에 매여 새로운 언약의 말씀인 새 포도주를 받아들여도 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새 언약을 받아들이려면 완전히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이 하는 금식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행위만 있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사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요한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이와 같습니다.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사람을 치면서 금식한다고 거룩한 척하는 이런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금식은 십자가 복음의 말씀 안에서 새 언약의 금식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행위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이런 금식은 옛 언약에 있는 금식입니다. 이런 금식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을 수 없는 금식입니다. 금식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금식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금식입니다. 금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랑이 없는 금식은 신부로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금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금식을 할 때에 옛 언약의 낡은 부대에 묶여서 금식을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복음인 새 언약의 새 부대의 신앙을 가지고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금식이야말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한 금식이요 주님의 피의 능력을 믿고 하는 금식입니다. 이런 금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낡은 부대의 금식을 하니 금식을 자랑하면서 내가 40일 금식을 몇 번씩 했다고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금식할 때에 금식하는지도 모르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의 금식이 새 언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금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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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예수님말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마 9: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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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육적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죄를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도 고쳐주셨지만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정죄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정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겉은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더럽고 추잡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마 9:1-38)

1-8절,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3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 . . .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 본 동네, 즉 가버나움(막 2:1)에 이르셨는데,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마가복음은, 데리고 온 사람들이 네 명이었고, 또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의심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고, 끈질긴 열심으로 나타난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말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들이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하였다.

[4-6절]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숨은 생각을 다 아신다. 그는 신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들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불리는 신적 인격이실 것이 이사야 9장에 예언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서기관들의 생각은 악하고 무지하고 완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쉬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보다 영혼의 죄를 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쉬운 말 대신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그것은 중풍병뿐 아니라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 확실하였다.

그 중풍병은 죄와 관련이 있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신명기 28장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등으로 치실 것이라고 말했다(22, 27-28절). 죄가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므로 죄사함은 그 병의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죄사함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가 인생과 세상의 근본문제이므로 죄사함은 인생과 세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실상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단지 병의 치료나 경제적 안정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 문제에 관한 것이다. 죄인의 구원과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죄사함은 그의 중심적 사역이다.

그는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께서는 죄사함만 주시지 않고 죄의 결과로 온 육신의 병도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과 물질적 부족도 동정하신다. 그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 . . .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들인지!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연약을 고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9-13절,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9-1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집무 중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주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의사]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눅 5:32) 왔노라.”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단순히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중요하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그가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 곧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을 회개시키려면 우리는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자는 죄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물론 여기에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인들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긍휼한 마음이 없이는 죄인들을 접촉할 수 없고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긍휼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이라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4-17절, 금식에 관한 질문

[14-15절]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율법에 의하면, 7월 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는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시기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6-17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께서는 금식을 폐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율법에 규정된 대로 금식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비유된 복음은 율법 형식에 얽매일 수 없고 새 형식을 필요로 했다. 금식도, 율법대로 행하지 말고 복음의 자유(갈 5:1; 약 1:25)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바로 알자.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죄는 세상과 인류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내용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류는 불행과 사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미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으라.

셋째로, 신약 성도는 복음의 자유와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선을 행하자.

18-26절, 직원의 딸을 살리심과

혈루증 여자를 고치심

[18-1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며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니 제자들도 갔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회당장 야이로이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열두 살 난 외동딸이었다. 본문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라고 말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에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는 그 딸이 아파서 죽어가려고 할 때이었고 예수께서 고쳐주려 가시다가 다시 집에서 통지가 오기를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내용을 마태는 간략히 증거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그 두 증거들의 불일치나 성경의 오류가 아니고, 자세한 증거와 간략한 증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직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다. 자기 딸이 죽으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그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20-21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 . . .

직원의 딸을 살리신 사건 중에 혈루증 여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가 있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출혈병이었다. 이 병을 열두 해나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지! 마가복음에는, 그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되어 있다(막 5:26).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22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 . .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여자는 그 시간 구원을 받았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보인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하지 않은가!

[23-26절]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 . . .

예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주시기를 요청한 그 직원의 집에 들어가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잔다’는 말씀은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또 자는 자가 깨듯이 죽은 후에는 부활의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잔다고 성경에 자주 표현한 것이다. 이제 죽은 그를 깨우실 수 있는 분이 오셨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를 내어보내신 후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소문은 그 온 땅에 퍼졌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시라면, 그는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신적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자!

27-31절, 두 소경을 고쳐주심

[27-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 . . .

27-31절은 두 소경을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한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 속에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소경들이 나아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많은 건강한 자들이 교만하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았을 때, 이 소경들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고 간청하였다. 주님께 구하는 자가 무엇을 얻는다.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않는다면, 또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겸손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9-3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종종 병자들을 만지시면서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은,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병자들에 대한 관심과 긍휼과 사랑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셨고 단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이 있다. 참으로 그는, 문제가 많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도들을 돌보시고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또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였다.

32-34절,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치심

[32-34절]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 . . .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그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은 주 예수께 와서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려 말을 하였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특별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모든 종류의 병들을, 즉각적으로, 또 완전하게 치료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바로 아는 지식을 주셨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못 고칠 병이 없고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 나병도, 중풍병도, 열병도, 소경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고침을 받았다. 귀신 들린 것도 고침을 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어려운 사정들을 낱낱이 그에게 아뢰자! 그가 기뻐하시면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고, 또 그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확실히 믿자! 또 우리가 입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때 찬송과 기도와 전도에 더욱 힘쓰자!

35-38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35-38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 . .

사도 마태는 4:23에 이어 본문에서 다시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했다. 첫째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셋째는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함을 보시고 동정하시며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영혼 구원의 전도는 추수와 같다(요 4:35). 신약시대는 추수의 때이다. 주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오늘날도 이 일을 위해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2천년 동안 구원의 일이 계속되어 왔다. 비록 구원받을 자들이 이제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나, 우리는 몇 명이라도(롬 11:14; 고전 9:22) 또 최후의 한 명이라도(눅 15:7)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고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마 24:14; 행 1:8).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일할 곳이 없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을 탄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자.

주께서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많은 것 같으나, 열심 있는 성도들과 헌신한 전도자들은 많지 않다(빌 2:21-22). 또 바른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일꾼들은 더욱더 적다. 오늘날 신학교들도 많고 신학생들도 많으나, 주께서 쓰실 만한, 지식과 인격과 분별력과 능력을 갖춘 신실한 일꾼들은 얼마나 되겠는지 모르겠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추수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는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일으키시고 세우신다. 죄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신 이가 그 분이시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신 분이 그 분이시요, 성령의 주권적 은혜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는 이가 그 분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딤전 1:1). 물론 그는 인간 전도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친히 전도자들을 일으키시고 훈련시키시고 파송하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또 전도자들을 보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려주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예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증거하였다. 8장은 그가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 환자,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바다의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음을 증거하였다. 이 모든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본문은 혈루병 여인이나 두 소경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또 소경에게는 “너의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이치도 보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심과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과 병자들을 고치심이었다. 그것은 신약교회가 힘써야 할 전도와 설교의 사역과 병환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심방과 구제의 사역을 보인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께서 친히 하신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 진리와 성경의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가감 없이 선포하고 가르치는 신실한 목사들과 교사들이 많이 요청된다.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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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혈루증 여인의 치유사건(마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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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9장 헬라어 강해설교 중에서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통받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모든 방법으로 치료를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고침을 받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부정한 여인은 정상적인 사람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정하면서도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뒤에 가서 주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이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혈루증 여인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마 9:18-26)

18절은 타우타 아우투 랄룬토스 아우토이스 이두 아르콘 엘돈 프로세퀴네이 아우토 레곤 호티 헤 뒤가테르 무 아르티 에텔류테센 알라 엘돈 에피데스 텐 케이라 수 에프 아우텐 카이 제세타이입니다.

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9:18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당(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 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 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 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셔서… 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절은 카이 에게르데이스 호 이에수스 에콜루데센 아우토 카이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입니다.

마 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9:19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릅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20절은 카이 이두 귀네 하이모르로우사 도데카 에테 프로셀두사 오피스덴 헥사토 투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 아우투입니다.

마 9: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가 하여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겉옷을 만졌다고 했는데 아프토마이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혈루증 여인이 실제로 예수님의 찌찌트를 만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혈루증 여인이 지금 현재 나와서 만지고 있는데 시제는 과거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었고 이 여인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간태는 혈루증 여인이 주님의 겉옷을 만졌더니 즉시 혈루증에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1절은 엘레겐 가르 엔 헤아우테 에안 모논 하프소마이 투 히마티우 아우투 소데소마이입니다.

마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9:21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만졌다는 단어가 아프토마이인데 가정법 과거 중간태 1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 여인은 주님의 겉옷을 만지면 혈루증이 떠나갈 것을 믿고 있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 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소조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미래 수동태 단수 1인칭이다. 이 여인은 실제로 고침 받을 것을 믿고 있었다. 미래 시제는 오늘부터 혈루증에서 놓임을 받아 병에서 해방될 것을 의미한다. 수동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병이 사라질 것을 믿었다는 의미다.

22절은 호 데 이에수스 에피스트라페이스 카이 이돈 아우텐 에이펜 다르세이 뒤가테르 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 카이 에소데 헤 귀네 아포 테스 호라스 에게이네스입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안심하라(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완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 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구원받았다고 했는데 소조라는 동사이다. 직설법 과거 수동태를 사용했다. 현재 시제를 쓰지 않고 과거 시제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혈루증 여인은 이미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자가 주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수동태는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구원도 수동태로 이루어졌다. 나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23절은 카이 엘돈 호 이에수스 에이스 텐 오이키안 투 아르콘토스 카이 이돈 투스 아우레타스 카이 톤 오클론 도뤼부메논입니다.

마 9: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9:23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 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 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 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애곡 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 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 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 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혼재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4절은 레게이 아우토이스 아나코레이테 우 가르 아페다넨 토 코라시온 알라 카듀데이 카이 카테겔론 아우투입니다.

마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9:24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 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 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웃더라'(카테겔론)는 말은 직설법 미완료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25절은 호테 데 엑세블레데 호 오클로스 에이셀돈 에크라테센 테스 케이로스 아우테스 카이 에게르데 토 코라시온입니다.

마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9: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다기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부치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 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26절은 카이 엑셀덴 헤 페메 하우테 에이스 홀렌 텐 겐 에케이넨입니다.

마 9: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9:26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 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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