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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KRV
마가복음 4:35-41 KRV.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6/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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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35-41절 – 다음블로그
마가복음 4장 35-41절. Peter Ryu. 2019. 5. 16. 18:20 댓글수0 공감수0. 4장. 5/16/2019(목).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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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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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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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풍랑 속의 예수님> … 북극에는 얼음이 녹아내리고, 북극곰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 중국 상해에서는 40도 이상 폭염으로 품지도 않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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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은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나 이방인 지역으로 가고자 하심입니다. 내가 익숙한 사역의 자리를 더 벗어나 고통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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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의 성장(요12:24), 가루 속의 누룩(마13:33)은 천국 복음의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것의 성장을 의미한다. 4:35-41 풍랑을 잔잔케 하심: 마8:23-27, 눅8:22-25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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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작은 사람 / 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 오늘의 말씀
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마가복음4:35~41 / 막4:35~41)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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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형 큐티 마가복음 4:35-41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
내용관찰 그날 저물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고 우리는 저편으로 건너 가있자고 하신다 배에 예수님을 모시고 다른 배들과 함께 떠난다 그런데 광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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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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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가 복음 4 장 35 41
- Author: CGNTV하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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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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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
마가복음 4:35-41 KRV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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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200
4장
5/16/2019(목)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21.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묵상 35~41절:
‘광풍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렇게 오늘 묵상할 본문에 대해 제목이 붙여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다(호수)의 광풍과 극렬한 파도와 관련한 대표적인 기록이 두 종류가 나온다.
하나는 바로 이 본문인데, 예수님께서는 배에 함께 타고 가시다가 배 고물에서 베개까지 베시고 주무셨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데, 주님은 동행하시지 않다고 광풍으로 큰 파도가 일어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잠잠케 하여 주신 장면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 주는 예화 중의 한 단면들이다.
자연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말씀으로 다스린다는 좋은 예이다.
오늘 본문에 집중해보면, 먼저 주님의 영은 너무나도 평안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그 광풍과 거친 풍랑 중에서도 베개가지 베고 주무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주님의 육체적인 피로감은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얼마나 몸이 피곤하셨으면, 그 풍랑의 와중에서도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시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을 주무셨을까 하는 점이다.
가능한 일일까?
배를 많이 타보지도 않았고, 그렇게 거친 파도를 경험한 적도 없지만, 그래도 그 풍랑으로 인해 배가 요동을 쳤을 텐데, 어떻게 그 와중에 베개까지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사람으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영적인 평안함이 분명하고, 육체적인 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다음으로 이 사건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즉 신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은 자연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잠에서 깨어나신 후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말씀으로 다스리신 것이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중에서도 주님의 능력을 다 알 수 없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주님을 깨운 것은 파도를 이겨내도록 함께 힘을 모아 달라는 정도의 요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추정이 가능한 것은 41절의 말씀 때문이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많은 기적들을 이미 베풀었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지식은 어떠한가?
나의 주님에 대한 앎은 어떠한가?
다시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간단히 말씀으로 파도도 바람도 잠잠케 하셨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주님의 능력을 모르면, 주님에게 기대하는 것이 적어지고,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주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미리 판단하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 경우가 바로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그런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은 결국 믿음의 문제를 말씀하신다.
주님을 주님으로 믿음으로 믿음을 고백한 주님의 백성들이라면, 주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주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하며, 궁극으로 언제나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완전한 의탁과 완전한 믿음은 우리 안에 두려움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불안, 근심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오늘 하루도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해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선하심에 의탁하여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해 본다.
기도 주님! 참으로 인간인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 믿음이 온전하기를 원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말을 단호하게 하고 싶지만, 과연 다를까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믿음 오늘도 견고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순간도 주님과 분리되지 않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마가복음 4:35-41 /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35-41
흔히 세상을 바다로, 인생을 항해하는 배로 묘사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때로 거센 풍랑을 만납니다. 풍랑을 만나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예외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신 가운데서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풍랑이라고 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업적으로 풍랑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 후에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저편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한동안 군중들을 피하여 휴식하려 하셨습니다.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제자들은 군중들을 피하여 이미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떠났습니다. 배 한척으로 부족했었던지 일부는 다른 배에 타고 예수님이 타신 배를 뒤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에 예수님을 모셨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얼마 되지 않아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 저희들이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임의로 갈릴리 바다를 건넜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었더라면 폭풍을 만났을 때 갈릴리 호수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늘 인정하고 마음의 보좌에 모시고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 일에 예수님이 계시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다면 어떤 일이든 성공합니다.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광풍은 미친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위기를 만났습니다. 모든 배가 파도에 뒤흔들리고 물이 넘쳐 들어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너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했는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만사형통하고 평안해야 하는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삶에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도 시련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련은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내내 다가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별 잘못도 없이 혹독한 사련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지만 고난을 당했습니다. 다윗도,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고보는 머리가 잘려서 죽었고, 빌립은 기둥에 매달려서 죽었습니다. 마태는 창에 찔려서 죽었고, 요한은 거리에서 끌려 다니다가 죽었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곤봉에 맞아 머리가 부서져 죽었습니다.
바다를 지나면서 풍랑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고난과 시련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의 의미를 찾고 고난을 유익으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의 고난만큼 그 의미가 깊고 오묘한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을 썼지만 고난의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책은 한 권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생의 고난의 의미는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고난의 일반적인 의미는 영적 훈련과 연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것 같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적당하게 긴장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익합니다.
기타와 같은 현악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줄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팽팽해져야 맑은 소리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어느 정도는 긴장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너무 긴장하며 삽니다. 긴장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긴장이 심한 것도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동안 광풍을 만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자들이 닥쳐온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큰 광풍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상황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피곤해서 그러셨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잠드신 곳은 안락한 소파나 침대가 아닙니다. 고깃배의 딱딱한 갑판이었습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그렇지 광풍이 불고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데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예민하신 분이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군중들 속에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예수님은 즉시 능력이 빠져나간 것까지 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광풍이 부는 중에도 잠을 자신 것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평상시는 잘 모릅니다. 어두울 때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할 때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그냥 내버려 두실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큰 광풍이 일어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상시는 큰 존재가 아닙니다. 구명조끼는 바다가 잔잔할 때 필요 없습니다. 눈길도 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안할 때는 예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풍이 일어나면 그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기도의 결과로 예수님의 신성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깨어 일어나 바람을 향해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에게 명하시고, 질병을 향해 명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연을 향해 꾸짖으시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향해 꾸짖으심으로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 바람과 바다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대주재자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떨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부터 3장까지 예수님의 기적이 여섯 가지가 나오고 있습니다. 1장에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시몬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그 이후 여러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2장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3장에서는 한 편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현장에서 이 모든 기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폭풍우로 배가 뒤집힌다면 예수님도 함께 곤란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담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많은 은혜, 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위험에 처하면 과연 예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인지 의심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면 정작 어려움을 당할 때 의심하게 됩니다.
둘째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난 속에서는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극한 상황에 직면해서는 그만 인내심을 잃어버립니다.
셋째는 믿음을 잃어버리도록 역사 하는 사탄의 유혹 때문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믿음을 어리석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칭찬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었어야 할까요? 큰 폭풍우 속에서도 주께서 그들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믿고 주께서 깰 때까지 기다렸었어야 했습니다. 정말 배가 뒤집힐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이 일어나서 구원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의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불의한 재판관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고 마지막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도 인내하지 못해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의 진가는 끝까지 인내하는데서 발휘됩니다.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르신 네 제자인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 출신이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렬한 바다를 잠잠하게 한 사실은 예수님의 다른 어떤 이적들보다도 더욱 제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저희들은 처음에 큰 광풍으로 인해 크게 두려워했으나 이번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불필요하지만 영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필요합니다. 바울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즐겁게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 지존하심에 대한 자각을 통해 하나님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성화, 그리고 영화에 이르는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센 파도 속으로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심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 봐야 비로소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산다면 아무리 큰 광풍이 몰아쳐도 종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4:35-41절 (제자들의 배에 임한 풍랑)
마가복음 4:35-41절 (제자들의 배에 임한 풍랑)
그 날 저물 때에…(35절)
그날은 어떤 날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자라나는 씨, 겨자씨 등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여러 씨앗의 비밀을 통해 말씀하시던 그 날입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또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느라 수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저물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밤이 왔고 조금있으면 풍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이 왔는데도 쉬질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배에 태운 채로 건너편을 향하여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무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로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자기도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의 선지생도의 아내의 이야기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열심내던 남편이 갑자기 빚만 남기며 죽게 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노상 우상숭배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기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반드시 인과응보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세친구들은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그렇다 하며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섭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지요. 지혜자라 하는 솔로몬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일을 보며 능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 8: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신앙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당신이 잘못 믿어서 그래…라고 하면서 마치 욥의 친구들 처럼 사람들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밤이 왔을 때에, 풍랑이 왔을 때에, “왜? 하나님이 왜? 내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 계속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인생의, 밤은, 풍랑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풍랑을 맞고 어떻게 풍랑을 이기는가입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차게 되었더라 (37절)
큰 광풍(Furious squall) – 어디에서인가 모르는 고난, 폭풍…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 우리의 통치 밖의 일이다.
문제는 큰 광풍 자체에 있지 않다.
광풍이 만들어 내는 파도가 우리에게 부딪히면, 곧 그 파도가 우리를 때리고, 평안을 잃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파도가 배에 부딪치며 배를 물로 가득 채운다.
마음을 채우고 심령을 채워서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이 그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낙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광풍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릴 때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군가?
그런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오직 예수이다.
풀수 없는 자에게 가서 아무리 넉두리 하고 푸념하고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 있을 때에 대부분은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자에게 가서 푸념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물 가운데로 가득차게 된다.
제자들은 어부였다. 그것도 갈릴리 출신 어부였다.
바다와 배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들이었다.
광풍이 불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파도가 일어 배에 부딪칠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찾았는가?
배에 물이 가득차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까지 침묵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에 잠자고 계셨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자기가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운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우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왜 알아서 미리 미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 왜 거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빌립보서기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하며, 근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아니면 힘에 부치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도 하나님께 아뢰거나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이 왜 이 지경까지 우리를 내버려 주시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원망의 소리다.
우리가 주를 배에 싣고 이렇게 잘 모시고 다니는 데 왜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도 주님을 그저 잘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주님은 잠자코 계세요. 내가 다 알어서 할께요하지는 않는가?
고물은 배 후미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것처럼 예수님도 배의 선장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게를 베고 주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스스로 배를 움직이며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주님이 깨십니다.
다 늦은 것 같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늦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십니다.
광풍의 근원, 파도의 근원, 우리의 모든 염려의 근원에 대해 바로 진단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바람에게,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전문가, 배의 전문가였던 제자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고통을 단지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비록 바람과 바다를 향했지만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나를 제쳐두고 너희들끼리 힘을 쓰느냐?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절)
제자들이 지금 무서워하는 것은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시험이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닥치는 파탄, 실직, 이혼, 암, 병…..
이런 것들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광풍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광풍이 파도를 만들어 우리의 심령을 치고, 깨고 부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광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광풍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화형을 앞에 두고도, 사자들이 자기들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41절)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이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감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다.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묵상질문)
1.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다니지만 혹시 주무시게 내 버려 두시지는 않는가? 광풍과 파도 앞에서 홀로 애쓰며, 그러면서도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2. 고난이 두려운가, 광풍이 두려운가? 실패가 두려운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내 인생의 풍랑을 두려워말자: 막 4장 35-41절
2021년 3월 7일 주일예배
[내 인생의 풍랑을 두려워말자: 막 4장 35-41절]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평온이 깨어지고 매우 급박한 자리, 삶에 격랑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의젓하고 듬직한 줄 알았는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앙이 좋은 줄 알았는데, 위기 앞에 직면해서 그간에 보여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간에 갖고 있던 이미지가 깨어지고 맙니다. 당장은 감정에 요동쳐 아무 생각도 없이 막 행동하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회막급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날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 호수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제자들은 위기상황에 빠졌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밤이 되면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자주 풍랑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작은 풍랑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풍랑은 전에 제자들이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수없이 겪었고, 또 이겨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 앞에 몰아치는 풍랑은 광풍, 메가 폭풍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풍랑이었습니다. 천둥이 치며 엄청난 양의 비를 동반하고, 풍랑의 위력도 제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배의 고물, 뒷부분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피곤하셨던 걸까요? 풍랑으로 배가 요동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전혀 반응 없이 주무시고 계시니 마음이 다급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의 울부짖음은 사실 간청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향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은 두렵고 무섭고 게다가 아랑곳 하지 않고 주무시는 예수님 때문에 짜증이 난 겁니다. 뒤에 막 4장 40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질책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부르짖음의 어조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이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다의 풍랑에 경험이 많은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한 걸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해결사로 보았던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방식이든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에서부터 그들은 잘못 생각했고, 잘못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했듯이 이번에도 뭔가 해결의 방법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지 우리의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문제가 드러나면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통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그때 대응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역사의 큰 그림을 가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앞에서 나의 이익이 흔들린다고 해서, 나의 안전이 흔들린다고 해서 방방 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풍랑에는 틀림없이 무슨 뜻이 있겠지? 우리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함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거친 풍랑에도 일어나지 않으시던 예수님이 살려달라는 제자들의 고함소리에 깨어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먼저 깨어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자들이 어찌하는지 모른채 하고 누워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일어나시어 아우성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바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람을 향해 꾸짖으셨고,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자다말고 갑자기 일어나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외치는 예수님을 보면서 순간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참으로 불경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이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은 아니신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배를 집어삼킬 듯이 일렁거리던 바다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제자들이 놀라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이 말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더 정확히 하면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서 이때쯤 되면 예상 되어지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야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마땅히 열매가 없을 때 우리는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를 보시면서 열매를 찾았을 때 열매가 없었던 부분도 그와 같습니다. 무화과는 다섯 번 열매를 맺는데 첫번째 열매가 파게가 있고, 그 이후로 나오는 열매를 테에나라고 합니다. 파게가 없으면 테에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시기에 있어야 할 열매, 파게가 없었기에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과실수는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서 믿음이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왜 그렀습니까? 그것은 폭풍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두 가지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뢰입니다 . 또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해 제자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아무리 사나운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역사하실 거라는 그들의 믿음이 실상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자들은 당황하고, 반면에 이러한 확신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에 그냥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침착함 속에는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안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 이 확신만 있으면 어떤 위기 앞에서도 차분하게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신앙 부족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 속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신뢰하며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은 제자들이 가자고 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신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안전함을 담보하는 것임을 알고, 담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길이라도 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무서워했습니다. 나중에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은 영락없이 예수님 주변에서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은 신적임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폭풍 앞에서 누리는 공포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막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질문을 서로에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질문은 폭풍의 위험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재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4:41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제자들의 반응은 실제로 예수님의 질문에 부정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고백이 나와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수군거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 입술의 고백과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서 광범위한 문제들이 들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번 여정을 통해 예수님은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한 예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둘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자들을 견고하게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동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히 12장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두려워할 뿐,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게 하는 분이 과연 누구인지 그렇다면 이분은 과연 누구냐 하고 묻고만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불신앙은 그리스도인이 겁과 두려움, 불안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 위험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하여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불의에 맞서 싸웠던 교회는, 크리스천들은 이웃과 위험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믿는 사람은 고난의 어둠 속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히 13장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장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렇게 해서 믿음의 사람은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절망의 자리가 아닌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 중에서도 든든한 보장이 되시며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로마 시대 신앙의 핍박 하에 있었던 그의 독자들에게 강하게 확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박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풍랑 이는 현실의 바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고귀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모시게 될 때 이전에 우리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 주님은 우리와 그 속에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점을 약속하셨어요. 마 28:20b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의 편에서도 우리를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나라도, 개개인의 삶도 녹녹치 않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어디로 갈지 예상할 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서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함께 가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미친 듯이 달려들지도 모르는 광풍들을 멈추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뜻이 있습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어떤지를 살펴보시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어떤 일들을 펼쳐가실지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옛날 제자들처럼 자신들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제자들이 아닌, 고난의 풍랑과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또 다른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삶을 살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어깨 위에 다른 사람들을 중보하고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의 자리로 나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끌어안고 그들을 위로하고, 고난과 싸워 극복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삼아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또한 즐겁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영원한 인도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앞에 밀려오는 풍랑 앞에서 결코 작아지지 맙시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토록!!
믿음이 작은 사람 / 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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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35절 ~ 41절 (마가복음4:35~41 / 막4:35~41)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풍랑과 파도가 일어 배가 곧 뒤집힐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루종일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뱃머리에서 고요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부 출신들인 베테랑 제자들도 도무지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산 같은 파도가 계속 쳐오자 배가 뒤집혀 자신들이 죽게될 상황에 놓이게 되니 난리법썩을 떱니다.
주님이 옆에 계시는데도 제자들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 엄청난 파도만 바라보며 무서워 하다가
결국 제자들은 주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주님은 잠에서 깨어나셔서 배가 곧 뒤집히려고 하는데도 먼저 파도를 잔잔케 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먼저 꾸짖습니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꾸짖으시고
그 다음 바람을 꾸짖으시며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옆에 함께 계시는데도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실패와 우환질고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믿음 없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보다, 풍랑과 높은 파도를
더 크게 바라보고 무서워 하는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몸이 병들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않는 믿음 없음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내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이 주는 화려함과 부와 삶에 일어난 문제에 시선을 빼앗겨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삶에 일어난 문제보다 주님을 작게 여기는 사람을 보고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지금 일어난 풍랑보다, 자신의 삶에 일어난 어려운 문제보다, 주님을 더 크게 여기는 사람을 믿음이 크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문제에 크게 반응하는 사람이요,
믿음이 큰 사람은 풍랑같은 문제에 반응하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만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난 풍랑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시선을 빼앗겨서, 믿음을 잃어버려서 죽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시선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C S, 루이스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그리스도인이다”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믿음의 시선을
세상에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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