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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0 [하루 한 장]“우연히 마침” (룻2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http://sungminch.com
룻기 1장이 온통 절망과
희망 없음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면
룻기 2장은 현실을 이겨낼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를 회복시켜줄
보아스의 등장입니다
모압땅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차례로 잃고 겨우 돌아온
나오미와 며느리 룻은
이제 보리추수의 때에
이삭을 줍는 일로 연명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나오미의 친족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보아스가
자기 밭으로 와서 이삭을 줍는
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우연히,
마침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우연처럼 다가오십니다
마침 그때 그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그 우연히와 마침을
우리에게 선사할 주님을
찬양하며 기대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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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룻기 2 장 설교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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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6. 11. 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h4kEUw_D2g
[룻기 2장 주석 설교말씀] 룻과 보아스의 만남(룻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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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주석 설교말씀 중에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먹고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과부의 삶이 쉽지 않았습니다. 룻은 이삭을 주워서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밭에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연히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나중에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속사 관점에서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룻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룻 2:1-23)
2장: 보아스를 만남
모압 땅에 이민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함께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1-3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 . .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한 유력한 자가 있었다. ‘유력한 자’라는 원어(이쉬 깁보르 카일)는 ‘힘 있고 부요한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었다. 또 전장에 이어서(1:4, 22) 본장에서도 룻을 ‘모압 여인 룻’이라고 3번이나 표현한다(2, 6, 21절). 룻기는 룻이 모압 여인 즉 이방 여인이며 그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을 강조한다.
룻은 나오미에게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추수기에 이삭을 줍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하는 일이었다. 룻은 자존심을 버리고 무슨 일이든지 하려 하였다. 나오미는 그에게 “내 딸아, 갈지어다”라고 말했다. 그는 며느리를 딸이라고 불렀고 그의 선한 소원을 존중했다.
룻은 가서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 밭에서 이삭을 주웠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 룻기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조상인 오벳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보아스와의 인연은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우연한 일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이 작정된 일이며 그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4-7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 . .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곡식 베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자, 그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보아스’는 후에 솔로몬 성전 앞 두 기둥 중 하나와 같은 이름으로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보아스는 그 이름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또 그의 밭에서 일하는 자들도 그러하였던 것 같다. 보아스는 룻을 보고 곡식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물었다. “이는 뉘 소녀냐?” 곡식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은 대답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 사환의 증거대로, 룻은 성실하고 근면한 여자이었다.
[8-10절]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 . . .보아스는 룻에게 말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보아스는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룻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말했다. 땅에 엎드려 절한 것은 그의 겸손함과 예절 있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보아스에게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그는 자신이 이방인임을 인식하면서 보아스의 호의에 대해 감사하였다.
[11-13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 . . .보아스는 그에게 대답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의 선한 성품과 행위는 보아스에게도 이미 들려졌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의 선행에 대해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 대해 상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룻은 말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계속 은혜를 얻게 하소서(원문).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은 보아스에게 겸손한 마음과 말로 감사를 표현하였다.
[14-16절]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 . . .식사할 때에 보아스는 룻에게 말했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들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그에게 주었고 룻은 배불리 먹고 남았다. 보아스는 룻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였다.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17-19절]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 . . .룻은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다. 한 에바는 약 22리터(1말 1되)이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시어머니는 그에게 말하였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은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어머니께 알게 하여 말하였다.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20-23절]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 . .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보아스는 나오미가 말한 대로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선한 사람이었다. 나오미는 또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가까운 친척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기업 무를 자’라는 원어(고엘)는 가난한 자의 팔린 기업을 그를 대신해 사서 회복시켜 줄 자를 가리킨다. 레위기 25:25,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모압 여인 룻은 말했다.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내 소년들’이라는 말은 그의 밭에서 일하는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NASB, NIV).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말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므로 룻은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어머니와 함께 거했다. 보리 추수는 무교절 때이며 밀 추수는 맥추절 때이니 추수기간은 약 한 달 반 이상이 될 것이다.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줄곧 이삭을 주웠다. 그는 자신과 시어머니를 위해 그 한 달 반 동안 끈기 있게 봉사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 우리는 착한 자가 되자 . 룻은 자신과 시어머니를 위해 이삭을 줍는 힘든 일을 자원하였다. 그는 잠시 집에서 쉰 것 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울 정도로 성실하고 근면하였다. 또 그는 겸손하여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보아스에게 땅에 엎드려 절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에게 한 선한 행위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은 보아스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는 추수기간이 끝날 때까지 끈기 있게 일하였다. 우리는 본장에서 착한 룻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아모스 5:14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한다. 디도서 2:1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였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고 착한 자에게 좋은 상을 주신다 . 룻은 비록 모압 여인 즉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고 착한 그에게 좋은 상을 주셨다. 우선, 룻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만났다. 룻이 우연히 한 추수하는 밭에 갔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보아스는 힘이 있고 부요한 자이었을 뿐 아니라, 경건하고 자비심이 많은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방 여인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그는 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 그는 얼마 후 룻과 결혼하게 될 자이었다. 보아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시며 이방인인 우리를 구원하신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보아스를 상으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사도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했다(갈 6:7). 우리가 하나님의 복 받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항상 믿음으로 살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자.
[잠언 13장 히브리어 강해]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과 비교(잠 13:14-25)반응형
룻기 2장, 우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 구조 새벽설교주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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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적응해 나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룻은 신실함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으며,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룻의 신실한 삶은 보아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룻기 2장의 구조와 새벽 설교 주제 그리고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룻기 2장, 우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룻기 2장의 구조 새벽설교주제 해설
룻기 2장의 구조
1절-4절, 우연일 수 없습니다
룻기 2장에서는 모압 여인 룻이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하여 밭에서 이삭을 줍기로 결단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룻이 가서 일한 밭은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성경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연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필연입니다.
5절-13절, 보아스를 통해 룻을 기억하신 하나님
보아스는 못보던 여성인 룻이 자기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따뜻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마실 물을 허락할 뿐 아니라, 이삭도 풍족하게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보아스가 처음 본 룻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푼 이유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만 룻의 선행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룻이 행한 모든 일들을 보고 계셨고, 보아스의 입을 통하여 룻의 선한 행실들을 언급하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14절-19절, 보아스의 배려와 룻의 신실함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가 따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을 위해 이삭을 일부러 더 떨어지게 하였고, 혹시나 종들이 이방인인 룻을 배척할까 봐 미리 경고하고 또 확인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룻의 모습 역시 따뜻하고 친밀합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20절-23절, 나오미가 가진 새 희망
보아스가 베푼 배려와 룻의 따뜻한 행동을 보면서 나오미는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족이었기에 그를 통하여 자신의 집안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룻기 2장의 새벽설교주제
1-9절,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
고향을 떠나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은 생계가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추수하는 보리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족이며 무너진 그녀의 집안을 세워 줄 유력한 친족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룻기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오미와 룻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17절-19절, 변함이 없는 룻의 신실함
룻은 보아스의 배려로 밭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이삭도 풍성하게 주울 수 있었고 물도 마음대로 마시며 밭에서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베들레헴에서 유력하고 부유한 보아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그녀의 삶은 변함이 억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하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하며 말동무가 됩니다. 룻은 나오미를 쉽게 여기지 않고 여전히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되어도 변함없는 마음과 태도로 사람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룻기 2장의 해설
4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밭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일상적인 인사에 사용했던 단순한 ‘샬롬'(평안을 바랍니다)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예를 들어, 삿 6:23; 삼상 25:6). 이와 같은 양식의 표현은 인사이자 축복이기도 한데, 아마도 수확기와 같은 농사철과 연관된 특별한 인사일 것입니다. 그 인사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는 말을 상기시켜 줍니다(잠 18:21). 우리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의 영성 개발을 위해서도 중요한데, 지혜로운 자의 말은 기쁨과 치료를 주기 때문입니다(잠 12:18, 25). 이 모든 것은 혀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한 영성 훈련이 영성 개발에 중요한 부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일에 실패하면 우리의 ‘경건은 헛것’이기 때문입니다(약 1:26).
10절,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보아스의 관대함에 반응하는 룻의 말과 자세는(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이스라엘 남자와 모압 여인의 사회적 신분차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됩니다. 룻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사회 구조에서 ‘거류자’나 ‘영주 외국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종교에 있어서 외부인이요, 과부, 고아, 영주외국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불우한 자들에게 제공된 언약의 특권들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같이, 보아스의 친절도 편견이 없습니다(대하 19:7; 참조. 약 2:1). 보아스는 우리로 하여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둘째 계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마 22:39).
20절,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와 룻에게 ‘친족인 구원자'(kinsman redeemer)가 되는 보아스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키도록 한 ‘참된 금식’의 실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며 친척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돕는 것을 말합니다(사 58:7). 오늘날에도 ‘친족인 구원자'(kinsman redeemer)들이 소외당한 어린이들, 병들고 약한 자들, 잊혀져 버린 연로한 자들과 같은 그들의 친척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23절,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룻은 자신과 나오미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 추수 때가 다할 때까지 날마다 밭에서 성실하게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러한 노동 윤리를 보면서 우리 또한 나태해지지 말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조용히 행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살전 2:9, 12; 참조. 골 3:23). 영성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이 여정에 혼자가 아니라 성령과 신앙 공동체와 동행하면서 도움받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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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삶으로 드러나다 (룻 2:8-16)
주제 : 신앙, 삶으로 드러나다
본문 : 룻기 2장 8-16절
설교자 : 이병권
룻 2:8-16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저는 오늘 “신앙, 삶으로 드러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의 말씀을 잠깐 복습하겠습니다. 룻기 1장에서는 과부가 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2장에 와서 왠지 모르게 든든한 남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보아스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절에서 “엘리멜렉의 친족 유력한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력한 자’라는 것은 단순히 돈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도덕적인 힘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유력한 자, 보아스에게 초점을 맞춰서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그에 대한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과 이어지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에 나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이삭을 줍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보아스가 밭에 와서 룻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 두 사람의 드라마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8-9). 보아스는 룻을 향해 “내 딸아”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내 딸아”라는 말은 나이 많은 어른이 젊은 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부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밭주인이나 일꾼들에게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귀찮은 존재일 것입니다. 사실 환영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불렀고,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를 격려합니다. 그녀를 배려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보아스가 어떤 은혜를 베풀었을까요? 8절과 9절에 나오는 보아스의 말을 통해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느 날 여러분 집에 갑자기 가난한 사람이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다른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으로만 오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밥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밭에서만 주워도 충분한 양식을 얻도록 할 테니, 다른 밭으로 가지 말 것을, 자신의 밭에서 떠나지 말 것을 말합니다. 보아스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밭을 가지고 있음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보아스는 룻에게 그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합니다. 룻이 낯선 곳에서 혼자 이삭을 줍다 보면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여자 일꾼들과 함께 있으면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함께 있으라”고 말한 이 단어는 룻이 시어머니와 절대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룻은 여자 일꾼들과 함께함으로써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일하는 외로움도 달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룻을 건들지 못하도록 명령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건드린다는 말은 ‘추근거리다, 괴롭히다’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보호하고 지켜주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힘이 없고 가난한 이방 여자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런 룻을 생각함으로 보아스는 미리 자신의 사람들을 단속시킨 것입니다. 보아스의 보살핌이 얼마나 자상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넷째, 보아스는 룻에게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당연히 갈증이 나서 물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은혜로 이 밭, 저 밭을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일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밭을 찾아다니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이런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룻기를 읽어가면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은 룻은 어떻게 했을까요?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10). 이러한 보아스의 친절에 대해서 룻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룻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이런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에이, 저 사람 재산이 좀 되는 거 같은데. 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네’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은 엎드리며 보아스가 베푼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런 룻에게 보아스가 다시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1-12). 보아스는 룻이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리고 홀로된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이스라엘까지 온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위로합니다. 그녀가 시어머니를 보필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온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사실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지만, 이미 룻의 소식은 베들레헴 동네에 두루 알려졌기 때문에 룻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보아스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격려하고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금,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이 기회에 그녀를 격려하고 베들레헴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기로 한 것입니다. 룻이 밭에 나오기 전에 시어머니에게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이라고 소망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연’을 사용하여 하신 일입니다.
보아스는 더 나아가 룻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일에 따라 그녀에게 보상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보아스는 룻을 축복하면서 모압 사람인 그녀가 모압의 신 그모스가 아니라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 “날개”란 말은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룻은 힘없고 연약한 ‘아기 새’와 같지만, 하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어미 새’가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왔고,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를 덮어줄 것입니다.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축복과 격려에 매우 감격합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13). 룻은 겸손한 태도로 다시 보아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감사하는데,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스라엘을 찾은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보아스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에 감사합니다. 보아스는 그녀의 형편을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룻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가운데 있습니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정착해야 하는 룻에게 보아스가 베푼 은혜와 배려는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축복된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14). 이미 룻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었던 보아스가 또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샀는데 특별 할인혜택을 해줍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덤으로 사은품을 주고 보너스로 상품권까지 주는 겁니다. 은혜 위에, 또 은혜를 얹어주는 것입니다. 관대한 보아스가 또 어떤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녀를 초청해서 음식을 주고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던 룻은 무지하게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룻은 집에서 먹을 것을 챙겨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이제 이삭줍기를 시작한 룻입니다. 혹시 챙겨왔다 하더라도 그녀가 무엇을 얼마나 준비했겠습니까? 이런 룻에게 보아스는 일꾼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이리 와서 떡을 먹으라고 권하며, 그냥 떡만이 아니라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정말 센스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주는데,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넉넉히 줍니다. 볶은 곡식을 그냥 푸욱 퍼준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 덕분에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습니다.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 일, 룻이 이와 같은 일을 얼마 만에 경험했을까요? 또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보아스는 이 일을 일꾼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가 가장 낮은 이방인 과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보아스가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부터 그의 인격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처럼 탁월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이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삭을 주우러 갈 때, 보아스는 자신의 남자 일꾼들에게 당부합니다.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5-16). 보아스는 룻이 땅에 떨어진 이삭뿐만 아니라 곡식 단 사이에서도 주울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당시 밭주인들이 일반적으로 했던 일과는 반대되는 일입니다. 밭주인들은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단 사이에 다니는 것을 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서 주인 몰래 곡식 단에서 이삭을 뽑을까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보통 세워둔 곡식 단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버리라고 합니다. 이 같은 호의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손해를 보면서까지 룻을 배려하며 돕겠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모든 일을 일꾼들에게 당부하며 거듭해서 말합니다. “책망하지 말라, 꾸짖지 말라” 보아스는 진심으로 룻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천한 처지에 있는 가련한 이방 여인 룻을 너그럽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거나, 여자들이거나, 이방인들이다 보니 추수하는 일꾼들도 이들을 무시하고 책망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아줌마 같으면 좀 책망을 받더라도, ‘에이 다같이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그러지 말자고’ 가볍게 받아 넘기겠지만, 의지할 곳 없는 이방 여인 룻은 다를 것입니다. 보아스의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보아스는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이타적인, 품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보아스는 율법의 규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사람 됨됨이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실천하는 헤세드, 그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렇게 룻이 하루 동안 주운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20kg 정도 되는 양입니다. 룻은 정말 풍성한 은혜를, 넉넉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룻의 마음은 보아스로 인해 부요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가운데 룻이 나오미에게 행한 헤세드를 기억하시고, 보아스를 통해 다시 룻에게 헤세드로 갚아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 만남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또 어떻게 전개되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에게 고용된 일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모압 여인 룻에게 어떻게 말하고 행하는지, 보아스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유력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유력한 자가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는 겁니다. 보아스는 부자였고,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나이가 많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남자였습니다. 반면에 룻은 가난했고, 모압 사람이었고, 여자였으며,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위치에 있는 룻에게 먼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관대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어려움 없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격려하며 위로하며 축복했습니다. 풍성한 음식을 베풀었고, 일부러 이삭을 뽑아 버리기까지 하도록 합니다. 그녀에게 넘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한 가련한 여인에게 삶의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말과 행동은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의 성품은 보아스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한 번만 하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평소에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상시에 늘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런 삶을 살기 때문에 유력한 자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자신을 잠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보아스와 같은 유력한 자입니까?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의 삶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다른 기준과 다른 태도와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 주일 중심의 신앙으로, 교회와 주일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갇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교회를 넘어서 삶의 현장에까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잔인하고 살벌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으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으로 살기를 명하십니다. 세상의 상식이나 관습이나, 세상의 문화가 아니라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기를 명령하십니다. 단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불렀지, 교회의 빛과 소금으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배당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와 회사와 사회에서 믿는 자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지킵시다. 말씀의 원리를 존중하고 그 원리에 따라 삽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삶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각자가 속해있는 어딘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그분의 성품을 드러낸다면, 세상은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할 때 우리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힘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되고, 신뢰를 얻으며,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입니다. 유력한 자가 될 것입니다. 외적인 겉치레와 예배당의 중심의 신앙을 극복하고, 말뿐인 위선과 정답만 말하는 가식들을 내어버리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믿음과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어디 있든지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 모두가 그런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룻기 2장 주일설교말씀] 새로운 인생(룻기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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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2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새로운 인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기근이 있다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모압으로 떠났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모압 여인인 룻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시적 관점에서 볼 때 성도가 베들레헴과 같은 떡집의 교회를 떠나니 결국 세상에서 고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받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평생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올라가는 귀한 인물이 됩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인생(룻기 2:1-7)
룻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유력한 자가 친족으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룻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룻 2: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룻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유대나라의 절기 가운데 큰 절기가 셋 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또 하나는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유대 나라의 부활절로서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부활절로 대신되었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로 바뀌어졌지만 그 근본적인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나라의 맥추감사절과 같은 오순절을 지키면서 그때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룻기를 읽는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우리의 인생을 구원하시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시고 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순절을 보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룻기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여러 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패를 통하여, 때로는 우리가 범한 지난날의 죄악을 통하여 혹은 우리들 가정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장에서 하나님은 기근을 통하여 나오미의 가정에,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하나님을 피해 남의 나라로 도망을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피하지 마십시오. 성도들 가운데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자꾸 피합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과 싸웁니다. 내면적으로 끊임없이 피하고 다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전 실존을 다 맡겨놓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작은 머릿속에 하나님을 내포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머셸 퀘스트’가 쓴 신앙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는 `네’하기가 두렵습니다.
주님은 나를 어딜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나는 허탕 칠까 두렵습니다.
나는 덮어놓고 백지에 도장을 찍기가 두렵습니다.
나는 한번 `네’하면 자꾸만 `네’해야 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닙니다.
주여 당신은 내가 어디를 가나 뒤쫓아 오시고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잡음을 불러들이지만
주님은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 내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나는 주님을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만나지 않으려고 길을 비켜 갔지만
주님은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어디로 가야 숨을 쉴 수 있습니까.
나는 주님께 손을 내어 드리기가 두렵습니다.
주님의 손에 한번 잡히면 놓여 날 수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나는 주님의 눈과 마주치기가 두렵습니다.
말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 막혀서 올 데 갈 데 없어서 이대로 숨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붙잡히기가 싫어 반항하고 있습니다.
질 줄을 뻔히 알면서도 주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눈앞에 사물을 붙들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것들은 나에게서 이미 사라지고 맙니다.
주여, 나는 기분이 과히 좋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꺾은 꽃은 내 손 안에서 이미 시들고
나의 웃음도 입가에서 맴돌다 사라집니다.
내가 추는 춤도 내 마음을 슬픔으로 울먹이게 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해 보이고 모든 것이 속절없어 보입니다.
주님은 내 주위에 사막을 만드셔서
나는 배 고픕니다. 나는 목마릅니다.
이 세상은 나를 먹여주고 만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껏 주님을 위해 일도 했고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린다고 드렸는데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아들아, 나는 너를 위해서도, 이 세상을 위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너는 지금까지 네 마음 내키는 데로 해 왔지만
그런 행동이 이제는 다 쓸모가 없구나.
너는 나에게 안정과 지지를 받으려 했고,
네 일에 나를 부단히 관여시키려 애써 왔다.
그러나 아들아 너는 내가 하여야 할 일을 뒤집어 놓고 말았구나.
그동안 나는 너를 눈여겨보았고 네 선도 다 지켜보았다.
그러기에 나는 너에게 더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다.
이제부터 너는 너의 뜻을 버리고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받아들여라.
아들아 `네’하고 말해다오.
나는 이 세상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네’가 필요했듯이
너의 `네’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네 일터에 내가 있어야 하고
너의 가정에도 내가 있어야 하고
네가 사는 구역에도 내가 있어야지 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쳐다보는 눈도 내 눈이어야지 네 눈은 안 된다.
주어야 할 말은 내 말이지 네 말이 아니다.
변화시킬 생명도 내 생명이지 네 생명이 아니다.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다오.
모든 것을 내게 다 맡겨다오.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너의 `네’하는 대답이 필요하다.
오! 주여, 주님의 요구는 너무나 집요하십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을 거역할 수가 있습니까.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네’하게 하소서.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오미는 자기의 가정에, 사는 동네에 기근이 닥쳐오자 피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기근을 견디면서 기근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나오미와 그의 가정은 모압으로 피했습니다. 거기서 모압 여인 둘을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자기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 년을 채 넘기지 못해서 나오미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젊은 두 아들도 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고국을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둘째 며느리인 룻은 그녀의 친정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나라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뛰어들어 그 품에 안겨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죽기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또 2장 12절 말씀을 보면 룻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려고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깨어지고 허점이 생겼습니까. 다 이룬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다 내 손안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런데 잡힌 것이라고는 없는 그런 인생이십니까.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두 여인, 나오미와 룻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절망, 냉소, 궁핍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마라’라고 불러주기를 원할 만큼 냉소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룻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가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언가 하려고 작정했습니다. 들에 나가 이삭을 줍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룻이 얼마나 열심히 이삭을 주웠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깐 쉬고는 계속해서 보리 이삭을 주웠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실망과 낙담을 치유하는 최상의 방법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여러분 자신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더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십시오. 여러분보다 더 건강하지 못한,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십시오. 인생이 늘 우울하십니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은 많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한국신학대학장을 했고 우리나라 구약의 권위자이신 김정준 박사님의 `삶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폐결핵을 앓아서 20일 이상을 더 살 수 없는 죽음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습니다. 마산 요양소에서 죽음 직전의 사람들만 모아 둔 방에 수용되었습니다. 김목사님은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이 20일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껏 주위의 사람들을 고생만 시키고 남을 위해서 한 일이 없는데 이제 남은 20여 일 동안이라도 무언가 남을 위해서 일을 하고 죽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는 성령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피를 토하여 옆자리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피를 닦아 주고 눈을 부릅뜨고 죽는 사람들의 눈도 감겨주며, 기도해 주고, 그렇게 하는 가운에 20일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죽지 않고 오히려 핼쑥한 얼굴에 핏기가 돌며 50일, 100일을 지나며 한 단계씩 더 양호한 방으로 옮겨 마침내는 건강을 회복하여 박사가 되고 또 한국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룻은 자기의 비참함 가운데서도 시어머니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방향도, 장소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그는 능력이 있고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나오미의 가정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를 만남으로 인하여 룻의 인생은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보아스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상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신앙입니다. 룻의 인생은 전부가 우연이었습니다. 모압 땅에 이민 온 나오미의 가정에 며느리가 된 것, 남편의 죽음, 그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먼 외국에 온 것, 그것도 보리를 추수할 때 오게 된 것, 보아스의 농장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나오미에게는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모든 것은 우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그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냈으며 신학자요, 저널리스트며, 예술가인 아브라함 카이프는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 가운데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 께서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인간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단 한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은 주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주님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고 주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태어났고 우연히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사별하게 되고 우연히 인생을 살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알게 되고 우연히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우연이라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룻의 깨어진 인생, 산산조각 난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종과`네’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룻의 인생을 섭리하셔서 놀라운 인생으로 새롭게 짜 맞추셨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화려하게 산다고 할지언정, 주님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가난뱅이 나오미와 룻과 같은 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참하게 깨어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옷 입게 되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궁전의 여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네’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짧은 한마디로 우리의 믿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피하며 주님과 늘 다투던 우리의 인생을 청산하고 우리들의 작은 인생을 크신 하나님의 섭리와 그 품 안에 맡겨놓고 사는 우리들의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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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룻기 2:1~13
권영국 목사 (대흥교회)
룻기서는 전체가 4장, 85절로 이루어진 짧은 책입니다. 룻기의 시작은 1:1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시작됩니다. 매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사시대의 대표적 현상이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면 타락하고, 고통을 겪게 되면 회개하고, 사사를 보내어 회복시키시고 태평성대를 이루면 또 타락하고……. 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흉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룻기서를 보면 엘리멜렉이라는 가정이 소개되는데, 그는 베들레헴에 살다가 흉년을 맞게 되자,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찾기 보다는 자신의 방법으로 흉년을 피해보고자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버린 가정입니다. 그곳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 말룐과 기룐이 죽음으로 그 집은 3 과부만 남았습니다. 시어미과부 나오미와 두 자부 오르바와 룻입니다.
룻기 1장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흉년 중에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풍성한 이방의 땅을 선택함으로 실패했다는 것, 두 자부 오르바와 룻이 처음에는 시어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가 결국은 오르바는 모압을 선택해서 헤어졌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그 하나님을 선택해서 동행하여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훗날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증조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되는 축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늘날 무엇보다 잘 감당해야 할 것이 “선택”입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 선택을 잘 못해서 고통과 후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어도 선택에 관한한 분명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선택한 일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하고 선택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선택하면 후회뿐입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도 이 교회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시는 분은 정말 참된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분입니다. 부부에 대해서도 후회하고 살아가는 분은 인생의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분입니다. 어쩌면 룻보다는 오르바의 선택이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훨씬 잘한 것 같습니다. 오르바는 좋은 신랑을 만날 것이고 , 룻의 길은 험하고 험한 길을 걸어야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룻의 선택은 영원한 축복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롯이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 땅은 훨씬 기름지고 풍성한 땅이기에 잘 한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모든 결정의 선택을 택합시다. 그리고 선택한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후회하지 않는 축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나눌 룻기 2장에서 말씀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선택과 더불어 “우리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극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죽게 된 여인도,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만났기 때문에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룻은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밭에 나가서 이삭줍기를 하러 나가게 되었고,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와의 만남이 축복이었고, 또한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는 사환들도 축복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추수 일군들과 인사하는 말이 4절에 나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인사는 초대교회 때부터 성도들이 나눈 인사입니다. 보아스가 한 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모든 회중이 “당신에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원어 히브리어로 인사하는 교회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아도나이 임마헴 – 여바레흐아 아도나이” ((헬라어로 교회들이 많이 인사한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습니다) – 알레소스 아네스티 (정말로 부활하셨습니다) ((* 히브리어, 헬라어 교회 인사의 전통입니다 )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만남이 아름답고, 하나님의 축복들로 연결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만남, 교회와 성도의 만남, 목회자와의 만남, 형제와 이웃과의 모든 만남이 축복의 통로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의 만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3절)
룻은 이삭줍기를 하러 밭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줍기를 하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보아스에 밭을 목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분명히 우연히 일하러 나갔는데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 룻은 우연히 가게 되었지만, 룻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 속에서 롯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롯은 우연이었지만, 하나님은 롯의 목자가 되셔서 롯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시편23:에 보면, 다윗은 자신을 한 마리의 양으로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양은 그냥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는 거지만, 목자는 양의 갈 길을 미리 계획세우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계획이시고 축복의 섭리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왔지만, 보아스로부터 듣게 된 축복의 음성들이 있습니다. (1) 8절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2) 소년들이 건드리지 아니하고 너를 보호할 것과 (3) 목마르거든 소년들이 길어온 물들을 마시고 (4)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라(14절). 우리 예수님께 우리는 우연히 온 것 같지만, 우리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생수와 생명의 떡을 먹이시고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4:19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의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그 풍성한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노사연이 부른 “만남”이라는 곡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 이었소 잊기에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혼을 태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도 알고 있어요. 우리의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미국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의 물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보다 더 좋은 변함없는 자산은 없습니다. ”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해 가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까? 우리는 만남을 축복으로 이루어가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룻이 부지런히 이른 아침부터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하였던 것처럼 부지런히 쉼 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만남을 우리가 맘대로 이루어갈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삶속에 쉼 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남을 축복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비즈니스를 하는데, 왜 나는 좋은 사람을 못 만나는 거야? 남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하다만, 나는 왜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는 거야?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쉼 없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축복의 만남을 주시기 위해 이런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두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할 때에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할지라도 온전하게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평생 감사해도 부족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입니다. 룻이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하여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선조가 될 수 있었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주를 만났기 때문에 다 된 것입니까? 주님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할 때에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와 남편으로 맞았으니까, 이젠 그 만남이 축복으로 인도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착각입니다. 최선을 다하며 사랑하고 순종하고 쉬지 않고 노력할 때에 서로에게 최고의 축복의 만남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겸손함으로 이루어진 만남
축복된 만남은 겸손함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룻은 2절에서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일터에 나가면서, 그것도 대단한 것을 벌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도 잘 안 통하는 베들레헴에서 이삭줍기를 나가면서, 그것도 은혜를 입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 당시에 이삭줍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삭을 줍는다는 것도 은혜로 여겼습니다. 룻이 이삭줍기를 하면서, 3가지를 고백합니다. (1) 7절에서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레위기19:9-10에 보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삭줍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한이었지만, 룻은 복종의 자세로 이삭을 줍기를 간청하였습니다. (2) 10절에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 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베푼 물 한 모급에도 룻은 진심으로 몸을 굽힐 줄 알았습니다. (3) 13절에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슨 말씀을 하셨나이다” 다른 시녀만도 못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만남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욥기25:6에서 인생에 대해서 빌닷은 고백하기를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22:6에서 다윗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벌레로 고백합니다. 겸손한 만남이 그리스도인의 만남입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교만한 마음으로 아무리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할지라도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야할 근본적이고 진실한 관계는 잃어버린 겸손의 회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부모의 잔소리입니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듣기 싫은 것은 왕년에 나는 안 그랬는데, 넌 왜 그러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부 못한 부모는 한사람도 없어요. 다 왕년에 1등 했다고 합니다. 부모가 다 밀어주지 못했어도 반딧불 잡아 불피워놓고 공부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그 모양이라면 안한다.…….속으로 그렇게 아이들이 생각합니다. 오히려 솔직한 대화일 때에 아이들이 변합니다. 나는 이래서 실패했고, 나는 너만큼도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단다.……. 아이들이 더 기쁘게 공부합니다.
세계사의 흥망성쇠를 보면, 겸손할 때에 발전했습니다. 우리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 그러나 교만할 때에 모두 망했습니다. 로마가 그랬고, 바벨론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왜 망합니까? 처음엔 일천번제를 쌓으며 지혜를 구한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다 누릴 때에는 세상적인 것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때에 보면, 세계 축구 강국이라고 말하는 국가, 우승 후보라는 국가는 다 떨어집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4강안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프랑스의 지단이라는 선수가 1년에 받는 연봉이 160억이었고, 한국 선수의 총 연봉이 90억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선에서 지는지 아십니까? 교만하면 망합니다. 세상에 직업이 약 3만개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직업이든지 공통적으로 분명한 것은 겸손한 자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가져오는 것은 자랑이지만, 겸손한 마음이 가져오는 것은 감사입니다. 룻이 모두에게 감사하였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겸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삭줍기는 하루 먹을 끼니를 겨우 주워 오는 일입니다. 그래도 롯은 겸손과 감사함으로 감당했습니다.
미국 이민 생활 속에서 우리도 한 끼니의 이삭줍기라도 , 혹은 그 이상으로 먹을 것 걱정 없이 살아간다면 감사함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장사하면서 돈받이고 물건 파는데 무슨 감사인가? 그래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겸손한 만남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3. 아름다운 만남을 통한 축복들
세 번째로 나눌 말씀은 보아스를 만남으로 누리게 되는 축복들입니다.
(1) 추수의 주인을 만나라(룻2:4-7) – 우리가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살아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땀 흘려 일하는 우리 삶의 추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9:3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자들, 추수를 하되 추수의 주인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열매를 받으실 추수의 주인을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참된 안식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룻2:9,14절) – 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14절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보아스는 룻에게 풍성한 먹고 마심을 공급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온전한 만남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생명의 떡과 생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목마르고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참된 풍성함이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11:28에서 예수님은 보아스가 룻을 초대하듯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3) 필요의 충족함을 베푸십니다. (룻2:15-20절) – 15절 이하에 보면, 계속적으로 보아스는 굶주리고 힘든 룻과 나오미를 위하여 베풀어 줍니다. 추수하는 자들에게 명령하기를 곡식 단 사이에서 줍고 있는 룻을 꾸짖지 말고, 단에서 한줌씩 일부러 이삭을 빼어 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룻이 이삭줍기를 할 때에 한에바쯤 주웠고, 이것으로 시어미 나오미와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수고하는 자들에게 충족함을 베풀어주십니다. 구하는 이에게 주시며, 찾는 자에게 찾도록 해주시며,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주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4) 은혜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룻2:10,12절) – 룻이 이삭줍기를 하면서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12절에 “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가 값없이 은혜를 베푼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 25:26에 게으른 한 달란트를 맡은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놀고 쉬고 하는 자에게 풍성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룻과 같이 쉬지 않고 노력할 때에, 밀레의 만종 그림과 같이 하루 종일 밭에서 수고하고 주신은혜에 감사할 때에 풍성하고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말에 만남은 참 좋은 뜻이 있습니다. 만난다는 것과 맛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이 축복이 되고 맛있는 만남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도에게 주신 축복의 비결 첫째가 선택이라면 두 번째가 만남입니다. 우리의 모든 만남이 크신 하나님의 축복들로 가득하여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매일말씀묵상. 8월 9일. 룻기 2장. > 매일말씀묵상
룻기 2장. 섭리적인 만남: 보아스를 만나다.
1. 2 장의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게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로 보여집니다 . 룻기는 다시 영적 흉년의 시대 , 사사시대 , 불경건한 사회 속에 살았던 또 한 사람의 경건한 인물인 보아스를 조명합니다 .
2.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마침 보리추수가 시작할 때였습니다(1:22). 보리추수는 3~4월에 하는데, 룻은 시어머니를 부양하고 자신도 살기 위해서 추수 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룻이 다다른 곳은 마침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적인 인도하심입니다 .
3. 보아스란 인물은 여러가지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 축복 , 우리의 사정을 보고 들으시는 전지하심 , 풍성한 은혜와 사랑 등 많은 면에서 보아스는 이런 모습을 반영합니다 .
4.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 율법 ) 을 마음으로 지키는 사람 이었습니다(4~7). 당시 베들레헴의 형편이 불경건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음란하였음에도 보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삭을 추수할 때 다 베지 말고 남겨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 이었음을 본문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레19:9~10). 그는 말 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사람 이었습니다(4). 그는 단지 인사만이 아니라 그의 품꾼들과의 관계가 특별했던 사람이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품꾼들은 자기들의 주인인 보아스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4).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5. 또한 그는 인자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자 였습니다(8~9). 룻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최고의 배려를 보여줍니다. 남자들이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였고(당시 베들레헴의 부도덕을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배려였다), 물을 따로 길지 않아도 되도록, 자기의 품꾼들이 길은 것을 먹도록 배려하였습니다.
6. 보아스는 사려 깊은 사람 이었습니다(10~13). 이미 보아스는 자기 친족인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와 모압 며느리 룻이 함께 돌아온 소식과 함께, 룻이 어떤 여인이었는지에 대하여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을 알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이런 분이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알지 못하고 행하였어도, 하나님은 모두 아시고, 이미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소식이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7. 그리고 보아스는 풍성한 사람 입니다(14~16). 보아스는 룻에게 먹고 남길 만큼 풍성한 식사를 베풀었고(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식사의 규례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보아스가 나오미의 며느리인 모압 여인을 식사자리로 가까이오라고 한 것은 충격적으로 은혜로운 사건이다), 이것은 아마도 나오미를 향한 배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베는 품꾼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조금씩 뽑아버려서 주울 것이 많게 하라고 명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에게 충분히 많은 이삭을 걷어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런 성품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룻은 마치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았을 것입니다 .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 시어머니의 나라 이스라엘로 들어왔는데 ,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를 만난 것입니다 .
8. 보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그를 ‘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 자라고 말합니다 (20). 사망한 자는 엘리멜렉을 가리키며, 그 가족을 돌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 놀라운 표현이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칭호에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 이 점에서 보아스는 놀라운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9. 영적 흉년의 시대 , 이 불경건한 사회에서 보아스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 1장이 나오미의 신앙을 통해 도전을 준다면, 2장은 보아스의 신앙을 통해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 이제 회심하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 룻이라는 모압 여인의 믿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 보아스의 말,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12) 는 말은 , 룻의 신앙에 대한 찬사이기 때문 입니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에게 있어서 그들의 상황은 다 달랐지만, 이들의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음을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상황이 이래서 , 형편이 저래서 ,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사실 상황과 형편은 모두 핑계일 뿐입니다 .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을 신뢰하느냐고 묻고 계시며 , 우리는 그 물음에 응답해야만 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변 환경이 어떠하든지, 제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아무 핑계 없이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견고히 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버지의 온전하신 성품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룻기 2장. 섭리적인 만남: 보아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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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2장. 섭리적인 만남: 보아스를 만나다 (찬 455)
1.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에게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보여준다. 룻기는 불경건한 사회 속에 살았던 또 한 사람의 경건한 인물 보아스를 소개한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은 보리추수가 시작할 때였다(1:22). 보리추수는 3~4월에 있게 되는데 룻은 시어머니를 부양하고 살기 위해 이삭을 주우러 추수 밭으로 나간다. 룻이 다다른 곳은 마침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3).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적 인도하심이다.
2. 보아스란 인물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아스의 삶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축복, 우리의 사정을 보고 들으시는 전지하심, 풍성한 은혜와 사랑 등을 반영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는 사람이었다(4~7). 당시 베들레헴이 불경건하고 폭력이 난무하며 음란하였음에도 보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삭을 추수할 때 다 베지 말고 남겨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레 19:9~10). 그는 말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사람이었다(4). 그는 자신의 품꾼들과 관계가 특별했던 사람이었던 것을 전반적으로 보여준다. 품꾼들은 자기들의 주인인 보아스를 진심으로 축복한다(4). 그의 신앙이 말이 아니라 삶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인자한 사랑을 베푸는 자였다(8~9). 룻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최고의 배려를 보여준다. 남자들이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고(당시 베들레헴의 부도덕을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배려였다), 물을 따로 길지 않고 자기 품꾼들이 길은 것을 먹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보아스는 배후에서 다 보고 듣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10~13). 보아스는 자기 친족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와 모압 자부 룻이 함께 돌아왔다는 소식과 룻이 어떤 여인이었는지에 대하여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소식이며 위로인가! 보아스는 풍성한 사람이었다(14~16). 보아스는 룻에게 먹고 남길만큼 풍성한 식사를 베풀었고(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식사의 규례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보아스가 나오미의 자부인 모압 여인을 식사자리로 가까이오라고 한 것은 충격적으로 은혜로운 사건이다) 이것은 아마도 나오미를 향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삭을 베는 품꾼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조금씩 뽑아버려서 주울 것이 많게 하라고 명한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에게 충분히 많은 이삭을 걷어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보아스의 성품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3. 보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나오미는 그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한다(20).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 얼마나 놀라운 표현이고 영광스러운 칭호인가? 궁극적으로 이 칭호에 합당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이 점에서 보아스는 놀라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4. 불경건한 세상에서 보아스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가? 1장이 나오미의 신앙을 통한 도전이었다면 2장은 보아스의 신앙을 통한 도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이제 회심하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 룻이라는 모압 여인의 믿음이 예사롭지 않다. 보아스의 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는 말은 룻의 신앙에 대한 찬사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에게 있어서 그들의 상황은 다 달랐지만,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음을 본문은 보여준다.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오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전한다.
5. “하나님 아버지, 환경과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핑계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견고히 하고 살게 하옵소서. 저희의 모든 일을 아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온전하신 성품이 보아스와 같이 저희 안에 충만하여 흘러가게 하사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룻기 2장 강해 설교말씀] 고엘의 은혜 (룻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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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2장 강해 설교말씀 중에서 고엘의 은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엘의 은혜 (룻 2:1-5)
룻 2:1-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 말기쯤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고 이방민족들에게 계속 공격당합니다. 그러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고 다시 우상을 섬기면서 300년 동안 사이클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게 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와, 말론과, 기룐이 모압 지방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베들레헴’ בית לחם(베이트 레헴 1035) 집과 떡(빵)이라는 말이 합쳐서 생긴 바로 빵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어 주기 위하여 이미 예언된 장소입니다.
시 132:5-6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엘리멜렉’ אלימלך(엘리멜렉크 458)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 נעמי(나오미 5281) ‘나의 기쁨, 나의 기뻐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말론’ מחלון(마흘론 4248) ‘병들다, 슬퍼하다, 병든 자’ 라는 뜻입니다.
‘기룐’ כליון(킬론 3630) ‘파멸, 쇠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이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자 모든 재산을 팔아버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처소를 떠나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엘리멜렉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서 죽고, 두 아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나오미 혼자만 모압 땅에 남았는데 베들레헴에서 풍년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모압으로 간 엘리멜렉은 두 아들을 모압의 여인들과 결혼을 시킵니다.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모압 땅으로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 룻은 רות(루트 7327) ‘우정, 친구’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말할 때에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마라’ מרא(마라 4755) ‘쓴, 괴로움’ 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사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기업을 버리고 잠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가면, 모든 재산을 잃고, 자식도 잃고,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룻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친척으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엘레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보아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유’ חיל(하일 2428) 힘, 능력, 부, 재산, 이라는 뜻입니다. ‘력한’ גבור(깁보르 1368) 강력한 자, 용사, ‘보아스’ בועז(보아즈 1162) 민첩, 재빠름, 이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민첩하여 재빠르게 부와 재산을 모았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강력한 자인 용사였습니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보아스는 아버지가 살몬이고 어머니가 라합입니다. 살몬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들어갔던 사람 중에 한 명이며, 유다지파입니다유다 지파입니다.라합이 살몬을 여리고에서 숨겨줌으로 살려주었습니다. 살몬은 구속사적으로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이방인인 라합과 결혼함으로 이방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원전에 있는 단어지만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는 ‘친척으로’ ידע(야다 3045) 동침하다, 깨닫다, 알게 하다,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주는 고엘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주는 고엘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룻과 나오미는 과부이며 가난하기 때문에 추수 때에 이삭을 주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일꾼들이 작업하는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었는데, 이 모습을 보아스가 보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서 주우라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의로운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과부를 돌보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병든 자와, 죄인의 친구이며,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보아스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래의 영상과 함께 보시면 참고가 됩니다.
룻 3:2-5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라고 명령을 합니다.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고 잠을 잘 때에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이불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를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보아스는 고엘로서 가장 유력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대를 잇지 못하면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입니다.
창 38:12-18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도 대를 잇기 위해서 유다의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렸지만 유다가 주지 않자 다말은 대를 잇기 위해서 유다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자녀를 갖지 못하고 대를 잇지 못하면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로 유력한 보아스를 통해서 대를 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신부되는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רחץ(라하츠 7364) 씻다, 목욕하다, 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씻김 받아야 합니다. 원죄를 씻김 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욕을 한 자는 손과 발만 씻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2. 기름을 발라야 합니다.
‘기름을 바르고’ סוך(수크 5480) 기름을 바르다, 기름을 붓다, 라는 뜻입니다. 신부로서 화장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신랑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하면서 준비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자 범죄를 청산하라는 의미입니다. 원죄를 목욕함으로 완전히 씻은 사람은 기름을 바르면서 자신의 행동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맞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3. 의복을 입어야 한다.
‘의복을 입고’ שמלה(시믈라 8071) 의복, 외투, 싸는 것, 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반드시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주님을 기다리면서 맞이해야 합니다. 자신의 행위의 옷을 입고 주님을 맞이한다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피 흘리신 의의 옷을 입으면 수치를 당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부가 해야 될 일입니다. 이것을 나오미는 룻에게 준비시키고 보아스를 만나게 했습니다. 타작마당에서 보아스가 잠을 자고 있을 때에 룻이 살짝 들어가 누운 것입니다. 이때에 보아스는 자신이 룻을 통해서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기업을 무를 자가 자신보다 더 먼저인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유보시킵니다. 그래서 먼저 기업 무를 자가 포기하면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룻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룻 3: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보아스는 새벽에 일어나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왜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었을까요? 보리는 양식입니다.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주식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너에게 양식을 채워줄 것이다. 라는 의미가 속해 있습니다. 보아스는 부자이고 권세도 있습니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라고 하는 의미로 보리를 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 주시겠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왜 여섯 번일까요? 숫자 6은 불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7은 완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7번을 주어서 완전하게 채워주지 않고 6번을 불완전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보리 여섯 대를 주고 나머지 한 대는 바로 내가 너에게 기업을 무를 것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6은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채워야 합니다. 계시록에서도 666은 사람의 숫자라고 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부족한 1을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신랑이 되어 주시면서 완전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고엘이라는 제도는 무엇인가요? 기업 무를 자는 גאל(가알 1350) 되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은 무엇인가요?
1. 결혼한 형제가 무자한 채 사망한 경우(종족보존)
신 25: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종족을 보존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드시 고엘은 후손을 잇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하지 않으면 침 뱉음을 받았습니다.
신 25: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2. 가난한 친족이 땅을 팔았을 경우
레 25: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친족이 가난하여 땅을 팔았다면 가까운 고엘이 이 땅을 사주어야 합니다. 책임이 고엘에게 있었습니다.
3. 가난한 친족이 노예로 팔렸을 경우
레 25:47-48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가난한 친족이 노예로 팔렸을 경우에 고엘이 대신 돈을 주고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고엘 제도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고엘 제도가 없다면 구속사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 대가 끊겨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을 때에 대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원래 부요하신 분인데 우리의 가난을 가져가시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먼저 율법에 친족인 기업 무를 자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절대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어기시거나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업을 무르는 사람은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기업을 이어주는 자의 것입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엘입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남을 위해서 대를 이어주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희생은 자신의 재산과, 명예와, 씨를 넘겨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형의 씨가 될까봐! 땅에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 기업을 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 기업을 무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גאל(가알 1350)의 히브리적 의미는 진리의 말씀을 날라서 하나님께 통제함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 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통제하시고, 가르치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기업 무를 자가 욕심이 생겨 기업을 무르지 않으면 가장 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침을 뱉고 신발을 벗어서 증표를 삼았습니다.
엡 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신은 복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겠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거부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이는 누구도 자신의 죄를 대속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고엘의 사명을 다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께 통제함을 받아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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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2장)(룻2장5-13절)하나님 품안에 거하는 은혜(섬김의교회 룻기 강해설교)
(룻2장5-13절)하나님 품안에 거하는 은혜(룻기 강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19년 6월 5일 수요 예배설교 오후 7시30분>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섭리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은혜와 복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보아스라는 사람을 준비하사 많은 아픔을 겪었던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새롭게 하시려는 선한 계획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삭을 주으러 가는 룻의 발걸음을 주장하사 보아스의 밭으로 갈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언제 어디서나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의 삶을 붙잡고 계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계십니다. 때론 그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너무 은밀하여 눈에 잘 띄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것 같고, 침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가 침묵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 백성과 자녀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을 주으러 갔던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내용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긍휼히 여기사 보아스라는 사람을 예비하사 새로운 가정을 세우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룻의 가정이 다윗의 조상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매우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습니다.오늘 본문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룻과 보아스의 만남과 그들이 나눈 대화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삭을 줍는 룻에게, 자신의 민족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오게 된 그녀의 아름다운 믿음의 결심을 보면서 칭찬과 복을 빌어주는 장면이 바로 12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민족과 자신들의 원래 섬겼던 우상들을 모두 뒤로한체 이스라엘 민족 안으로 들어온 것과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한 룻의 결정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날개 아래 보호받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룻은 안정적으로 모압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거할 수도 있었고, 조상 때부터 자신의 민족이 섬겼던 우상들을 의지하며 그것들로부터 안정과 보호를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만 의지하기로 선택을 합니다. 오직 하나님 품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품안에 거하기를 바랬던 룻에게 하나님은 그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도록 놀라운 은혜를 계획하시고 준비하십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분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그분 품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하나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기를 소망했던 룻의 인생과 운명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인생과 운명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으로 룻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룻에게 어떠한 은혜를 부어주시는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어떻게 책임지시고 그들의 삶과 인생을 이끄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인도하심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인도하심에 은혜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자세하게 배웠습니다. 룻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이삭을 주으러 나섰는데, 하나님은 이 과정가운데 미래의 남편이 될 보아스를 만날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익숙하지 못한 낯선 땅, 낯선 길을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걸어가야 했던 룻의 떨리는 발걸음을 하나님은 주장하여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이삭을 줍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옮기던 룻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놀라운 섭리가운데 보아스의 밭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시각, 그 장소에 보아스가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우연인 것 같아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철저하게 준비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 많고 많은 밭 중에서 보아스의 밭을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룻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고, 많고 많은 시간 중에서 보아스를 만날 수 있도록 시간과 상황을 주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까지도 하나님이 부어주셨습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보면 과부로서 힘들게 살아가는 룻을 불쌍히 여긴 보아스가 자기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하고, 아무도 룻을 방해하거나 괴롭히지 못하도록 손을 써놓습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이처럼 하나님은 보아스의 마음에 룻을 긍휼히 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보아스의 출신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보아스의 가문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보아스는 유다지파의 사람이었고, 가장 가까운 조상 중에 대표적인 사람에는 라합이 있습니다. 라합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가운데 여리고 성에서 만난 여인이 아닙니까?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에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나중에 구원받은 이방여인이 바로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멸망당할 때 라합과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대했고, 하나님을 믿었기에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라합은 나중에 유다지파의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식을 낳게 되고, 그 자식의 후손이 바로 보아스였습니다.(마1:5)
그러니깐 라합이 보아스의 조상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라합은 순수 이스라엘 혈통의 남자가 아니라 가나안 거주민의 피가 섞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조상 할머니인 라합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아스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라합이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기에 당당히 이스라엘 민족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통이나 가문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혜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아스는 구약시대 사람이었지만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직접 경험했던 보아스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룻에 대해서도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여리고 성의 여인인 이었던 기생 라합의 후손 보아스를 룻을 위해 준비시키시고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분 품안에 거하기를 소망하는 그분의 자녀들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은혜의 길을 준비해 놓으십니다.인도하심의 은혜는 하나님 백성과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차별 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가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의 인생길을 책임지시고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깊이 경험하고 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하나님은 위로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민족성이 아주 강하고 이방인들을 향한 배타성이 심했던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보아스는 아주 남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합이라는 가나안 원주민을 할머니 조상으로 두고 있던 보아스는 어찌보면 룻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가장 합당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아스에게 긍휼한 마음을 품게 하사 룻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를 주도록 섭리하십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2절에서의 룻을 향한 위로의 말은 보아스 개인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아스의 입술을 통하여 룻에게 하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포기했던 룻에게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하나님이 그녀의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스의 입술을 통해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룻은 보아스의 말로 인해 마음이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방여인이자 과부였던 룻을 홀대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배려해 준 보아스의 모습과 룻의 고생을 알아준 보아스의 위로의 말이 룻의 마음에 기쁨으로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진정으로 자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룻의 고난은 물질의 어려움, 먹고 사는 일의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고 아픔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아스의 입술을 통해서 ‘너의 모든 고생을 다 알고 있다’라고 위로케 하십니다. 보아스의 위로는 곧 룻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5장 4절과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여기서 보면 하나님을 가리켜 인내와 위로의 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보아스 처럼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으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과 자녀들에게 참된 안위와 소망을 갖게 하심으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시오, 그분을 믿고, 그분의 품안에 거하기를 소망하는 이들의 위로자가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인도하심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위로의 은혜 역시도 하나님 백성과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차별 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속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계속해서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 한숨과 탄식의 길을 걸어갈 때, 밤잠을 이룰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의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 순간에도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의 함께하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아픔과 눈물과 한숨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통하여 이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에게 가장 선하고 유익한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보호와 채움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룻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필요는 당장에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으로서 다른 이들의 차별과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함과 이삭을 줍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이 모두 굶는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낯선 베들레헴 땅을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룻에게 보아스는 위로의 말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룻에게 당장 필요한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16절에 보니깐 룻이 더 많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일꾼들에게 멀쩡한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바닥에 버리라고 지시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이 더 많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보아스가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룻이 자신이 이러한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보아스가 지혜롭게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습니다. 유력한 자라는 것은 부자이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품과 인품이 훌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력한 자가 룻을 배려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 룻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보아스의 이러한 태도와 말은 다른 이들이 룻을 깔보거나 얕잡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하여 룻의 필요를 채우게 하시고, 그녀를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아스라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룻의 생애 속에 어떻게 베풀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 돕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도록 섭리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환경과 상황을 주관하여 은혜를 베푸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보호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닙니까?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우리는 많은 사건과 상황들을 경험합니다. 무엇보다 룻처럼 당장 무언가가 필요한 급박한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더 이상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을 정도의 큰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급박한 문제가 해결되었거나, 혹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당시의 그런 절박한 문제들, 위기의 순간들을 잘 넘기고 지금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었을 까요?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를 그 위기 상황가운데서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을 구체적으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채움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들에게, 그리고 하나님 품안에 거하기를 소망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부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이유와 조건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언제나 하나님 품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이 은혜들을 풍성이 누리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들어오기를 소원하는 자들을 기꺼이 품으시고 받아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과거 룻에게 인도하심의 은혜, 위로의 은혜, 채움과 보호하심의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분의 백성과 자녀인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그녀의 인생을 책임지신 하나님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책임지고 계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어찌 보면 하나님은 과거 룻에게 베푸셨던 은혜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룻에게는 보아스를 예비하셨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보아스 보다 더 위대한 예수그리스도를 예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룻에게 베푸셨던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외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에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떠한 존재가 하나님의 이러한 지극히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만큼 우리가 하나님에게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까지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고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롬5:5)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갈망하는 성도들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의 그들의 인생과 운명을 붙드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룻기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룻을 향해 부어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목격하고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는 은혜가 룻에게 부어졌던 은혜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영원히 계속 부어지는 한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떠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룻기 2장. 룻과 보아스의 필연적 만남.
[성경. 룻기 2장] 율법은 구속이고 제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법은 은혜와 자비의 통로였다. 율법이 구속이요 제한이라고 여겼던 자들은 강한자요 부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들의 힘과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자 연약한 자들에게는 율법은 은혜의 통로였고, 그들이 살 수 있는 숨통이었다. 오늘날의 복지 정책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1. 룻이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2) 룻은 나오미에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얻으면 그를 따라 이삭을 줍겠다고 하자, 나오미는 이를 허락한다.
3) 룻은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우연히 들어간 그 밭은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다.
4) 보아스는 때마침 그곳을 방문하여 일하는 농부들에게 축복의 말을 인사로 했다.
5)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일하는 낯선 소녀를 보게 되고 그 종 중에 하나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6) 종은 룻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왔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말을 해주다.
1)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으러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말해준다.
2) 보아스는 일하는 일꾼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목이 마르면 일꾼들이 떠온 물을 마시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3) 룻은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함을 표현했고,(나는 이방여인인데 어찌 은혜를 베풀어주시나이까?) 룻이 자신의 시모를 위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왔다는 사실을 안 보아스는 하나님의 날게 아래에 보호 받으러 온 너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축복했다.
4)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에게 그런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고백했고, 보아스의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다.
3.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호의
1) 식사할 때에
(1) 이리 와서 떡을 먹고,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어 먹으라. 좋은 자리에 앉아 볶은 곡식을 주매 배불리 먹었다.
2)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3) 그를 위해서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벌셔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했다.
4. 보아스에게 얻은 호의를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다.
1) 룻이 그 날 하루 이삭을 주워 모은 양이 보리 한 에바쯤 되었다. 또한 자신의 먹고 남은 양식을 보여드렸다.
2) 나오미는 어디에서 이런 은혜를 얻었는지를 묻자, 룻은 보아스 라는 사람의 밭에서 일했다고 했다.
3)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말에 그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고백하고, 그가 자신들과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 무를 자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4) 나오미는 룻에게 추수가 마칠 때까지 다른 밭에 가지 말고 그 밭에서만 일하라고 했고, 룻은 결국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였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룻은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나간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곳이 보아스 라는 유력한 사람의 밭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모른채 룻은 아침부터 보아스가 자신의 밭을 둘러보러 오는 시간까지 열심히 일했다.
마침 자신의 밭을 둘러보기 위해서 온 보아스는 낯 선 소녀를 보게 된다. 종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묻자 나오미와 함께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 룻이라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아스도 소문을 통해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터고 자신의 시모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젊은 여인의 모습이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아스는 룻에게 위로의 말과 축복의 말을 한다. 하나님은 그 날개 아래 피하는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로. 더불어 자신의 남종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음식과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 룻은 보아스의 이와 같은 호의에 감사하며, 큰 위로를 받는다.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감사한 것이었다.
보아스가 베푼 배려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도록 한다든지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서 룻이 주울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룻은 한 에바나 되는 양의 이삭을 얻었고, 충분히 먹은 음식의 남은 것을 가지고 나오미에게로 갔다. 나오미는 룻이 들고 온 이삭의 양과 음식을 보고, 누구에게 호의를 입었다는 것을 금새 알게 된다. 룻은 그 사람이 보아스라는 것을 알려주고,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신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인지를 간파한다. 기업을 물어줄만큼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계속 그 밭에서 일하도록 지시한다. 룻은 보리추수와 밀추수가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이삭을 주으며 지내게 된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1. 하나님은 룻과 보아스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만나게 하셨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의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보아스는 마침 자기의 밭에 찾아 왔다. 그리고 유독 룻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만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 필연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가 가신다. 우리는 일상에서 눈을 떠서 우연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필연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파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며 살수 있게 된다
2. 보아스는 룻의 행실을 보고 칭찬하고 축복했으며 많은 혜택을 주었고, 룻은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감사했다.
보아스는 룻의 행실에 대한 소식을 알 고 있었다. 자기 민족과 신을 버리고 나오미를 좇아 온 룻의 귀한 충성을 들었다. 보아스는 그것을 좋게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룻을 보게 된 것이고, 룻이 성실하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보아스는 룻의 행실을 칭찬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축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와 은혜를 배풀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큰 위로를 얻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그런 선한 행실에 대한 복을 빌어주며 현실적으로 따듯한 대우를 해주는 보아스로부터 큰 격려를 얻은 것이다.
나오미의 배려는 룻의 충성으로 나타났다. 룻의 충성은 보아스의 마음에 좋은 이미지를 주었고, 보아스는 그 충성을 축복했다. 그리고 다시 룻은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얻게 된다. 선한 헌신이 하나님의 위로로 나타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우리의 선한 수고와 헌신은 하나님 안에서 인정과 상급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3. 나오미는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기업 물어줌을 통해서 얻는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오미는 룻의 생각 밖 수확에 놀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에 보아스라는 친족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기업무를 자>의 법에 대한 잊고 있던 율법이 생각나게 되었다. 즉, 이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자신들에게는 은혜로운 법을 의지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가장 민첩하게 본 사람이 바로 나오미다. 나오미는 많이 세속화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이 있고, 그 법은 그들에게 유효했던 것이다. 이제 나오미는 그 길을 열어가는 사람이 된다.
율법이란 강하고 부한자들에게는 제한이 된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은혜와 복지가 된다. 율법을 제한으로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강한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때에는 율법이 은혜의 통로가 된 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약한 자가 강한 자로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의 강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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