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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5 (화) [하루 한 장]“아버지에게 하듯” (딤전5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디모데전서 5장은 사도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에 있어서 성도들을 대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조언입니다
또한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전제는 모든 이들을 대할 때
내 가족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교인들 한 명 한 명을 만날 때
관리의 대상이나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진정한 가족으로
성도들을 대해야 목회입니다
또한 그래야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한 교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지체들을 돌보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먼저는 가정 안에서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하십니다
효도하고 사랑하는 것부터
우리의 가정에서 진정한
경건생활은 시작됩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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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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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전서 5장 주석 – 옥중목회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수 있다. …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uthrie). … 으로는 죽은 것을 뜻한다(Lenski). … 함한다. … 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 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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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디모데전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즉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은 처음에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본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므로 경솔한 판단을 삼가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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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디모데전서 05장 – HANGL NOCR
5:1 권고 방법에 대한 교훈(디모데 전서 5:1,2) 위의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를 통하여 또다른 복음 사역자에게도 책망하는 일에 대한 규칙을 말하고 있다.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4/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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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주석 5장 – 네이버 블로그
디모데전서 주석 5장 · 1.참과부 힘없고 외롭도다. 마음과 소망을 둘데없네. 하늘의 하나님 내세에 두도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도다 · 2.참과부 선행을 일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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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강해설교] 목양의 자세(딤전 5:1-25) – 알쓸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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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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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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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해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다른 교훈을 경계함.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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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딤전 5:3-16) · 설교 분류 · 최근 설교 · 전략 전쟁 “승리자들에게 이기는 방법을 배워서 싸움” · 문화 전쟁 “이 세대를 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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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6(수) “디모데전서 5:1-16” / 작성: 최현준
[본문] 디모데전서 5:1-16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 이에 바울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다양한 연령 …Source: 100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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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무시되지 말아야 할 목양의 원칙들 – 벧샬롬교회
디모데전서 5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5-10-27. 설교본문; 음성설교; 음성다운 …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는 다양한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1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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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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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2.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6rjZf2hdKE
디모데 전서 5장 주석
디모데전서 제 5장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 ‘늙은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
)는 다른 곳에서 교회의 직책을 나타내는 ‘장로'(elder,
presbyter)로 사용되었으나(17, 19절 ; 딛 1:5) 여기서는 문자적인 의미가 그대로 적
용되어 ‘노인'(older man, NIV)을 뜻한다. 또한 ‘꾸짖지’의 헬라어 ‘에피플렉세스'(*
)는 본래 ‘주먹으로 치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말로써 때리
다’는 뜻으로 공격적인 심한 질책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비록 연소하였으나(4:12),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연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온유한 태도로 권할 것을 충고하
였다. ‘권하되’의 헬라어 ‘파라칼레이'(* )는 ‘올 것을 요구
하다’, ‘충고하다’, ‘위로하다’의 뜻으로 자신에게 오게 하여 충고하며 위로하는 따뜻
한 권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면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디모데가 그의 교인들을
향해 지녀야 할 태도로서 2절까지 이어진다.
아비에게 하듯 하며 – 연장자를 권면할 때에는 모든 예의와 겸손함을 갖추고 신중
히 해야 함을 말한다. 인간적인 예의 범절은 종교나 시대, 공간을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영속적인 규범이며 특별히 노인을 존대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와 마찬가지로 기
독교의 기본적인 윤리이다(레 19:32).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 ‘형제'(* , 아델푸스)라는 말
속에는 기독교의 ‘평등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Hendriksen). 또한 교회 내에서 누구를
불문하고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교회의 구성
상태를 가장 적합하게 나타내는 말이다(고전 12:26, 27).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한 형제이며 따라서 서로간에 분열과 반목(反目)을 피하고 선을 이뤄야
한다.
=====5:2
늙은 여자 – 이것은 1절의 ‘늙은이’와 서로 짝을 이루는 말로서 그 말이 ‘장로’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노인’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 ‘깨끗함'(* ,
하그네이아)은 ‘성적 순결’을 뜻하는 말로 바울이 디모데가 젊은 여자를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Lenski).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성
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를 통틀어 아무 흠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포괄적
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Guthrie).
=====5:3
참과부인 과부 – ‘참과부’에서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온토스'(* )
는 ‘실제로’, ‘진실로’라는 뜻으로 ‘참과부’란 남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돌보
아줄 사람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Guthrie, Hanson). 당시에는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과
더불어, 일부 다처제(一夫多妻制)의 성행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려져 혼자된 여인들도
많았으며 당시 교회는 이들을 돕는데 적극 참여하였다(행 6:1). 성경에서는 이곳뿐 아
니라 과부를 보살펴 줄 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과부를 억울
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으며(신 10:18 ; 24:17 ; 시 68:5). 특별히 하나님은 그들
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하였다(사 1:17). 신약성경에서도 과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
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막 12:42, 43 ; 눅 7:11-17 ;
18:3-5). 더욱이 초대 교회안에 집사 제도가 생기게 된 큰 원인으로서 과부를 보살피
는 일을 들 수 있다(행 6:1-6). 그런데 때로는 과부를 돕는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
생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므로(행 6:1) 교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
대한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경대하라 – 헬라어 ‘티마'(* )는 ‘존경하다’의 뜻으로 명사 ‘티메'(*
)에서 파생되었다. ‘티메’는 ‘가치’ 혹은 ‘값’을 의미하며 영어의 ‘사례
금'(honorarium)은 이에서 파생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에서 과부들의 당연한 권리로서
그들이 받아야 할 연금(pension)을 바울이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Scott). 따라서 본
구절은 과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존경하라는 의미와 아울러 그들에게 필요한 경제적
도움을 주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5:4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 본절의 ‘과부’는 ‘참과부’가 아닌 자들로
서 자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손자’의 헬라어 ‘에크고나'(*
)는 칠십인역(LXX)에서는 자주 언급되나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온
다. KJV에서는 이 단어를 ‘조카'(nephew)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17세기 이전의 용법
으로 그 당시에는 ‘조카’가 일반적으로 ‘손자’를 뜻하는 말이었다(Guthrie).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 ‘먼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은 ‘첫째로'(first of all, NIV)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이것은 집안에서 효
를 행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야 할 중요한 일임을 나타낸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 ‘부모’의 헬라어 ‘프로고노이스'(*
)는 부모 이상의 조상들을 포함한다. 또한 ‘보답하기를’에 해당하는 헬
라어 ‘아모이바스 아포디도나이'(* )의
문자적인 뜻은 ‘되돌려 줄 것을 주다’이다. 이러한 의미에 따라 ‘그들이 자신들의 부
모로부터 받은 것을 보상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Scott). 특히 ‘되돌려 주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아포디도나이’는 현재 능동 부정사로서 되돌려 주는 행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5:5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 – ‘외로운’에 해당하는 ‘메모노메네'(*
)는 ‘모노스'(* , ‘홀로’)의 완료 수동 분사로 ‘홀로 남겨진’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참과부’의 특성으로서 돌보아줄 자녀나 친척도 없음을 의미한
다. 혹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어린 자녀를 둔 과부도 여기에 포함시킨다(Lenski).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 바울은 참과부의 또
다른 자격을 제시한다. 그것은 육신적으로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
과부의 실례는 눅 2:36, 37에 성전에서 주야(晝夜)로 금식하며 기도한 과부 안나를 들
수 있다.
=====5:6
일락을 좋아하는 이 – ‘일락을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파탈로사'(*
)는 ‘방탕하게 살다’의 뜻이다.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였으며 고용의 기회도 거의 없었던 때이므로 많은 과부들은 매춘(賣春)
등의 부도덕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바울이 ‘스파탈로사’를
사용한 것은 당시 생활이 궁핍했던 과부들이 매춘의 유혹을 받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uthrie).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영적
으로는 죽은 것을 뜻한다(Lenski).
=====5: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 ‘또한'(* , 카이)은 본절이 6절과 연결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이것을'(* , 타우타,’이것들’)이 6절에만 국
한(局限)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3-4절의 내용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Hendriksen). 즉 참과부를 존경하며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과(3절), 자녀들이나 손자
들은 과부인 어머니나 할머니를 잘 봉양(奉養)할 것과(4절)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참
과부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별할 것(5, 6절) 등을 포
함한다.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 ‘자기 친족'(*
, 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
, 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 )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
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
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
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
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
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 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
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
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5: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 – ‘명부에 올릴’로 번역된 헬라어 ‘카탈레게스도'(*
)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서 당시의 과부들에 대
한 물질적 원조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음을 나타낸다. 명부에 이름이 올라 제도적으로
생계를 보장받은 과부들은 특별한 자격을 구비(具備)한 자들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Ellicott, Robertson, Scott). 또한 혹자는 당시 과부 제도가 있었
을 것이라고 주장하며(Bernard, Hendriksen), 이성간의 접촉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상
황 속에서 교회에서 남자들이 하기 곤란한 일들을 이들 과부들이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Hendriksen).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 나이를 육십으로 제한한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재
혼할 의도나 재혼할 가능성이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또한 노령으로
인해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규정을 두었을 가능
성이 높다.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 – 본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고대에는 과부들에게 특별한 정절(貞節)을 요구하여 재혼을 삼가하
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눅 2:36, 37의 과부 안나가 84년 동안 재혼하
지 않고 혼자 지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한 남편 외에는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Scott, Guthrie). (2) 혹자는 바울이 14절에서 젊은 과부에게 다시 시집갈 것
을 권면하면서 본절에서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만을 참과부의 명단에 올리라는 것은
모순이 되므로 (1) 의 견해에 반대한다(Hendriksen). 여기서는 (2) 의 견해가 전후 문
맥상 타당성을 가진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결혼 생활중에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관
계가 없던 자로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자를 뜻한다.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 과부의 명단에 올려 구제해야 할 참과부의 조건으로는
구체적 선행이 제시된다.
자녀를 양육하며 – 본절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어머니다운 품성을 지녔는가 하는 점
을 강조한다. 혹자는 바울이 참다운 모성애를 실천하는 것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Lenski). 또
다른 견해로는 명부에 등록된 과부의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이었
다는 주장이 있다(Scott). 여기서는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 초대 교회에서는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이 하나의 공식적인 일
이었으므로 이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필요하였다. 나그네를 대접한 과부의
실례로서 사르밧의 과부(왕상 17:9), 수넴 여자(왕하 4:8-11), 루디아(행 16:40) 등을
들 수 있다.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 이것은 종이나 하는 천한 일로서 여기서는 이웃과 나그네
를 위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Hendriksen). 이러한
정신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통해 가르치신 바이다(요 13:14).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 ‘환난’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앙으로 인해 받은 박
해를 가리킨다(살전 1:6 ; 살후 1:4).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 ‘좇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콜루데
센'(* )은 ‘추구하다’, ‘헌신하다’의 뜻이다. 결국
‘선한 일을 좇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양심과 신앙을 갖는다기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선행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 ‘젊은 과부’는 60세 이하의 과부들을 지칭한다. 바울이 이
들을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일단 명부에 이름이 오른 과부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온전한 헌신이 요구되었는데 젊은 과부는 다시 재혼할 가능성
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 ‘정욕으로’의 헬라어
‘카타스트레니아소신'(* )은 ‘성적인 욕망에 사로
잡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Robertson). 젊은 과부가 남편을 원하여 재혼하는 그 자체
는 죄가 아니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
된다.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 과부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재
혼하지 않고 평생 동안 그리스도께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을 것이다(Robertson,
Rocke). 혹자에 의하면 후대에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배우자'(the spouse of
christ)라고 불렀다고 한다(Hanson). 따라서 본절의 ‘처음 믿음'(*
, 텐 프로텐 피스틴)이란 ‘젊은 과부들의 처음 서약’을 가리
키는 것으로 보는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저버렸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
어 ‘에데테산'(* )의 문자적인 뜻은 계약이나 법률 따위를 ‘폐기
하다’, ‘위반하다’, ‘따로 떼어두다’ 등이다.결국 이 말은 젊은 과부가 그리스도께 헌
신하겠다는 서약을 파기(破棄)한다는 의미이다.
심판을 받느니라 – ‘심판'(* , 크리마)은 KJV에서 ‘저주'(damnation)
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옳
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심판'(judgment, NIV)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잘못을 책망받
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Guthrie).
=====5:13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 ‘게으름을 익혀’에 해당하는 ‘아르가이 만다누신'(*
)을 혹자는 ‘게으름을 배워 게으름뱅이들이 되
었다’로 번역하여 젊은 과부들의 게으름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인 습관이 아니라 의
도적으로 배운 것임을 나타낸다(Scott).
집집에 돌아다니고 – 이것은 (1) 명부에 올라 있는 과부들의 임무 중에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신앙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악용(惡用)한 것으
로 볼 수도 있으며(Earle, Guthrie), (2) 그들이 가정에 매이지 않은 홀몸으로서 시간
적인 여유가 많았기 때문에 행해진 쓸데없는 방문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1)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 ‘망령된 폄론’에 해
당하는 헬라어 ‘플뤼아로이'(* )는 혹자에 의하면 ‘음식 등이 끓어
거품이 오르다’를 의미하는 ‘플뤼오'(* )에서 파생된 말로서(Robertson),
‘쓸데없는 말을 경박하게 늘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을 만들며’의 헬라어
‘페리에르고이'(* )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들에 간섭하기 좋아
한다’는 의미이다(Earle). 그러나 혹자는 이 단어가 행 19:19의 ‘마술을 행하던’의 헬
라어 ‘페리에르가'(* )와 동일한 단어이므로 본절의 ‘일을 만들
며’는 ‘마술적인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며, ‘마땅히 아니할 말’ 역시 ‘마술의 주문’
(呪文)이라고 주장하나(Hanson)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다. 여기서 ‘마땅히 아니할 말’
이란 교회에 덕이 안 되는 해로운 말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바울은 젊은 과부들
이 모두 게으름을 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 중의 일부는 신앙 생활
과 자신의 일상 생활을 게을리 하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긴장되어있지 못하고 쉽게 남
의 말이나 교회 전체의 문란을 초래하는 악담을 하고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사적인 이
야기들을 집집마다 하여 교회 내에 문제를 야기시켰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5:14
그러므로 젊은이는 – 본절이 접속사 ‘그러므로'(* , 운)로 이어지는 것으
로 보아서 바울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1절
의 ‘젊은 과부'(* , 네오테라스 케라스)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젊은이'(* , 네오테라스)는 ‘젊은 과부’
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시집가서 – 바울은 여기서 젊은 과부들에게 재혼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고전
7:25-29의 내용에서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26)고 한 말과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할 때와는
달리 지금 본 서신을 쓸 때에는 그의 인생의 말년으로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신념
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Scott). (2) 이와는 다른 견해로 본절의 ‘젊은이’는
이미 자제심(自制心)을 잃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Guthrie).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왜냐하면 후대 교회, 즉 2, 3세기의 교회에서는 금욕주
의의 결과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였으나 바울은 금욕주의에 반대
(4:3)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출산하는 일과 집안을 관할하는 일을 바울은 적극 추천하였다. 혹자는 ‘집
을 다스리고'(* , 오이코데스포테인)라는 말에서 아
내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영향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Liddon).
대적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케이메노'(* )는 ‘반
대자’, ‘대항자’의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Hendriksen, Earle). 그러나 ‘대적’ 앞에 관사 ‘토'(* )가 붙었다고 하여 이
단어가 ‘마귀’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Lenski). 그런데 후자의 경우도 마
귀가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는 해설을 덧붙여 말함으로써 두 견해가 궁극적으로는 동
일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 ‘훼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이
도리아스'(* )는 ‘욕하다’, ‘매도하다’, ‘조롱하다’의 강한 뜻
을 갖는 말로서 젊은 과부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수 있는 비난에 대
한 바울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기회’의 헬라어 ‘아포르멘'(*
)은 ‘진격 기지’를 뜻하는 군사 용어로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롬 7:8, 11 ; 고후 5:12 ; 11:12 ; 갈 5:13). 그는 늘 교회가 외부 세계로부터 악평
의 대상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해 왔는데 그당시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
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성도
들의 사랑과 변화된 생활이었다(약 2:7, 8 ; 벧전 2:12 ; 4:4, 14, 15).
=====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 ‘사단’에 대하여 글자 그대로 ‘대적자’의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11절의 ‘그리스도’와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Lenski). 그러나 혹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젊은 과
부들이 천박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Scott, Guthrie). 따라
서 본 구절은 젊은 과부 중에 일부는 이미 ‘처음 믿음'(12절)을 저버리고 여러 부도덕
한 행위에 빠져 교회에 물의(物議)를 일으켰음을 나타내며, 아울러 믿음의 생활을 떠
난 자는 반드시 사단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5:16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
‘믿는 여자'(* , 피스테)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
다. 왜냐하면 앞의 8절에서 ‘누구든지…돌보지 아니하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에 본절에서는 ‘믿는 여자’로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런데 몇몇 후기 헬라
어 사본들에서 ‘피스토스'(* , ‘믿는 남자’)를 첨가시켜 ‘피스토스
에 피스테'(* , ‘믿는 남자와 믿는 여자’)로 표기
하고 있으며 흠정역(KJV)도 이에 준해 ‘남자나 여자’로 번역하고 있다. 심프슨
(Simpson)이나 거스리(Guthrie)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2) 그러나 대부분의 본문 비
평가들(Alford, Ellicott, Speaker, Moffat)은 보다 짧은 본문인 ‘피스테’만을 택하고
있다. 혹자는 몇몇 사본에서 ‘믿는 남자’를 삽입시킨 것은 필사자(筆寫者)들이 바울의
뜻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여기서의 ‘믿는 여자’란 신자가 아닌 남편을
둔 여자 교인이거나, 개인적인 경쟁력을 갖춘 과부나 미혼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Lenski). (3) 또다른 견해로는 ‘믿는 여자’가 14절에서 언급한 ‘젊은 과부’를 가리키
는 말로서 비록 그들이 교회에서 공식적인 일은 맡지 못하였으나 가정에 소속되어 다
른 과부를 도움으로써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을 하도록 바울이 권면한 것으로 본다
(Scott). 이상과 같이 ‘믿는 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
으나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친척 중에 과부가 있는 자로서 친척 과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여자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움을
줄 능력이 있는 여자가 자기 친척 과부를 도와줌으로써, 교회는 아무 연고가 없어서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참과부’를 도울 수 있었다.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 ‘다스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스토테스'(*
)는 교회의 감독권을 시사하며 주로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管掌)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장로’의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이'(*
)는 딛 1:7에 나오는 ‘에피스코폰'(* , ‘감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혹자는 이에 대해 교회의 행정적인 임무를 강조할때는 ‘감독’이라
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나이든 어른으로서 받아야 할 존경을 강조할 때는 ‘장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Hendriksen).
배나 존경해 자로 알되 – ‘존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스'(* )는
원래 ‘가치’, ‘가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보상’으로 번역되거나(White) ‘사례금’으로
번역될 수 있다(Liddon).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여기서는 물질
적인 ‘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보고 정신적인 ‘존경'(honor)만을 주장한다(Lenski).
(2) 물질적인 의미와 정신적인 의미를 함께 수용하는 견해도 있다(Hendriksen). 후자
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배’의 헬라어 ‘디플레스'(* )에
대하여 몇 가지 주장이 있다. (1) 존경과 보상의 이중적인 의미. (2) 과부들보다 두
배의 존경과 보수(Calvin, Rocke).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는 장로
들에대한 특별한 존경심과 풍족한 물질적인 공급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
럽다(Guthrie, Scott).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 ‘말씀과 가르침’에 대하여 혹자는 ‘전도와 가르
치는 일’로 해석한다(Robertson). 본 구절은 교회를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장로들과 말
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장로들이 초대 교회에 있었음을 시사한
다. 이들은 아마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 본 구절
은 신 25:4로부터 인용된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작방법은 곡식단을 풀
어 타작마당에 펴 놓고 그 위를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소가 끄는 타작 기구가 지나가
게 하였다. 그때 주인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고 일하는 동안 그 곡식을 마음대로
먹게 하였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본 구절은 눅 10:7의 인용이다.
마 10:10에도 동일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먹을 것'(*
, 테스 트로페스)으로 나온 반면 여기서는 ‘삯'(*
, 투 미스두)으로 기록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바울은 누가복음을 인용하였다고 본
다. 특히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처음 투옥되었을 때 그와
함께 있었다(골 4:14 ; 몬 1:24). 또한 혹자는 누가복음이 그때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바울이 그것을 인용하였거나 그것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Hendriksen). 결국 본절의 요지는 일하는 짐승에게도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데 하물
며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고전 9:9, 14).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 모세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죄를 판결(判決)할 수 있었다(신 19:15 ; 민 35:30). 이와
같은 규정은 초대 교회에서도 적용되었다(고후 13:1). 특히 장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교회 안과 밖에서 늘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惡意)와 근거없
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두 세 명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 ‘범죄한 자들’은 장로들을 가리킨다(19
절). ‘모든 사람 앞에’로 번역된 헬라어 ‘에노피온 판톤'(*
)은 ‘모든 장로들 앞에’를 뜻할 수도 있고(Earle), 혹은 ‘온 교회 앞에’
를 뜻할 수도 있다(Guthrie). 일단 장로의 범죄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징계를
공개적으로 행하여야 했다.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 이와 같은 표현은 예배
의식적인 표현으로서, 여기에 언급된 것은 이 세 존재가 최후 심판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상에서 기인한다(눅 9:26 ; 계 14:10). 특히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란 말은 바울
특유의 표현으로 자기 초소를 떠난 타락한 천사들(계 18:1 ; 19:17 ; 20:1 ; 21:9)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내가 엄히 명하노니 –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
)는 ‘엄숙히 단언하다’, ‘엄숙히 선언하다’의 뜻을 갖는 강의 복합어로서 교회 지
도자들의 징계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중해야 함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명령은 바울
개인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하는 엄숙한 것이었다.
편벽되이 하지 말며 – ‘편벽'(偏僻)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클리신'(*
)은 ‘저울을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다’는 뜻의 동사 ‘프로스클리
노'(* )에서 파생된 말로 ‘편애'(favoritism, NIV)로 번역될
수 있다. 즉 디모데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개인적인 편견이나 편애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랑과 의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을 하여야 했다.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 본절의 ‘안수'(* , 에피
티데이)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 타락한 장로들을 다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으로서의 안수이다(Rocke, White, Robertson). (2) 장로를
비롯한 다른 성직을 임명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것이다(Earle, Kelly, Theodoret).
(3) 본절은 장로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장로를 임명할 때 행한 공개적인 의
식 이었다(Lenski). 위 의견들 중에 두번째 것이 가장 지배적이다. 교회의 중요한 직
분을 맡기기위해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품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중직자들
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 ‘간섭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네이'(*
)는 ‘함께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의 뜻을 갖는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타락한 일부 장로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한 것으로 보는 견해(Lenski)와 (2) 어떤 사람을 안수하여 장로로 임명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증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Earle).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
하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 안수의 중요성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5:23
물만 마시지 말고…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금욕주의적인 계
율이 있었다. 즉 나실인 서약자는 포도주나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않았으며(민
6:1-21), 레갑인들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렘 35:5-8). 따라서 디모데는 이러한 유
대 계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22절에서 바울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정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Scott). 그 결과 그는 나름대로 금기(禁忌) 사항을
마련해 두고 오직 물만 마시고 포도주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근동 지방의 물
들은 대개 병균들로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끓이지 않고 계속 마실 경우 이질이나 위장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의 ‘비위'(* , 스토마콘)는
‘위장’을 뜻한다. 즉 디모데는 위장병과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바울
은 그의 질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당시의 포도주는 도
수가 약하였고 특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포도주는 흔히 물이 섞인 포도주였다
(Earle).
=====5: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 바울은 본절에서 다시 17절 이후에서 그가 다루어 왔던 문제
로 돌아가 장로의 임직(任職)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혹자는 23
절에 기록된 대로 디모데가 병약하였으므로 교회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미비한 점
이 있었을 것으로 가정한 바울이 처리에 도움이 되는 말을 디모데에게 한 것으로 생각
한다(Alford).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 ‘밝히’의
헬라어 ‘프로델로이'(* )는 ‘이미 알려진’ 혹은 ‘명백한’이란 뜻
으로서 그들의 죄는 판단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명백한 죄들이다. 또한 ‘좇나니’의 헬
라어 ‘에파콜루두신'(* )은 ‘뒤를 따라 가다’의 뜻
으로 ‘어떤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죄임을 나타낸다(Hendriksen). 그
러나 이것 역시 앞의 ‘밝히 드러난 죄’의 전철(前轍)을 밟아 밝혀지게 된다.
=====5: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급한 판단을 피하라는 의미로 본 구절을 쓴 것으로 본다
(Alford). 즉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은 처음에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본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므로 경솔한 판단을 삼가하라는 뜻
이다.
헬라어 디모데전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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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뷔테로 메 에피플렠세스 알라 파라칼레이 호스 파테라 네오테루스 호스 아델푸스
개역개정,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새번역,1 ㉠나이가 많은 이를 나무라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젊은 남자는 형제를 대하듯이 권면하십시오. / ㉠또는 ‘장로를’
우리말성경,1 그대는 나이가 많은 남자를 꾸짖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 권면하여라. 청년들에게는 형제들을 대하듯이 권면하여라.
가톨릭성경,1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나무라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권고하십시오. 젊은 남자는 형제처럼,
영어NIV,1 Do not rebuke an older man harshly, but exhort him as if he were your father. Treat younger men as brothers,
영어NASB,1 Do not sharply rebuke an older man, but rather appeal to him as a father, to the younger men as brothers,
영어MSG,1 Don’t be harsh or impatient with an older man. Talk to him as you would your own father, and to the younger men as your brothers.
영어NRSV,1 Do not speak harshly to an older man, but speak to him as to a father, to younger men as br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1 πρεσβυτερω μη επιπληξης αλλα παρακαλει ως πατερα νεωτερους ως αδελφους
라틴어Vulgate,1 seniorem ne increpaveris sed obsecra ut patrem iuvenes ut fratres
히브리어Modern,1 אל תגער בזקן כי אם תזהירנו כאב לך ואת הצעירים כאחים׃
성 경: [딤전5:1]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 ‘늙은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는 다른 곳에서 교회의 직책을 나타내는 ‘장로'(elder,presbyter)로 사용되었으나(17, 19절; 딛 1:5) 여기서는 문자적인 의미가 그대로 적용되어 ‘노인'(older man, NIV)을 뜻한다. 또한 ‘꾸짖지’의 헬라어 ‘에피플렉세스'(*)는 본래 ‘주먹으로 치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말로써 때리다’는 뜻으로 공격적인 심한 질책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비록 연소하였으나(4:12), 한교회의 목회자로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연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온유한 태도로 권할 것을 충고하였다. ‘권하되’의 헬라어 ‘파라칼레이'(*)는 ‘올 것을 요구하다’, ‘충고하다’, ‘위로하다’의 뜻으로 자신에게 오게 하여 충고하며 위로하는 따뜻한 권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면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디모데가 그의 교인들을 향해 지녀야 할 태도로서 2절까지 이어진다.
아비에게 하듯 하며 – 연장자를 권면할 때에는 모든 예의와 겸손함을 갖추고 신중히 해야 함을 말한다. 인간적인 예의 범절은 종교나 시대, 공간을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영속적인 규범이며 특별히 노인을 존대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윤리이다(레 19:32).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 ‘형제'(*, 아델푸스)라는 말속에는 기독교의 ‘평등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Hendriksen). 또한 교회 내에서 누구를 불문하고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교회의 구성 상태를 가장 적합하게 나타내는 말이다(고전 12:26, 27).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한 형제이며 따라서 서로간에 분열과 반목(反目)을 피하고 선을 이뤄야 한다.
프레스뷔테라스 호스 메테라스 네오테라스 호스 아델파스 엔 파세 하그네이아
개역개정,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새번역,2 나이가 많은 여자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권면하십시오.
우리말성경,2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여자들에게는 자매를 대하듯이 오직 순수함으로 권면하여라.
가톨릭성경,2 나이 많은 여자는 어머니처럼, 젊은 여자는 누이처럼,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영어NIV,2 older women as mothers, and younger women as sisters, with absolute purity.
영어NASB,2 the older women as mothers, and the younger women as sisters, in all purity.
영어MSG,2 Reverently honor an older woman as you would your mother, and the younger women as sisters.
영어NRSV,2 to older women as mothers, to younger women as sisters–with absolute purity.
헬라어신약Stephanos,2 πρεσβυτερας ως μητερας νεωτερας ως αδελφας εν παση αγνεια
라틴어Vulgate,2 anus ut matres iuvenculas ut sorores in omni castitate
히브리어Modern,2 את הזקנות כאמות ואת הצעירות כאחיות ובכל טהרה׃
성 경: [딤전5:2]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늙은 여자 – 이것은 1절의 ‘늙은이’와 서로 짝을 이루는 말로서 그 말이 ‘장로’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노인’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 ‘깨끗함'(*, 하그네이아)은 ‘성적 순결’을 뜻하는 말로 바울이 디모데가 젊은 여자를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Lenski).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성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를 통틀어 아무 흠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Guthrie).
케라스 티마 타스 온토스 케라스
개역개정,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새번역,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십시오.
우리말성경,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여라.
가톨릭성경,3 무의탁 과부들을 존대하십시오.
영어NIV,3 Give proper recognition to those widows who are really in need.
영어NASB,3 Honor widows who are widows indeed;
영어MSG,3 Take care of widows who are destitute.
영어NRSV,3 Honor widows who are really widows.
헬라어신약Stephanos,3 χηρας τιμα τας οντως χηρας
라틴어Vulgate,3 viduas honora quae vere viduae sunt
히브리어Modern,3 כבד את האלמנות אשר באמת אלמנות הנה׃
성 경: [딤전5:3]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참과부인 과부 – ‘참과부’에서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온토스'(*)는 ‘실제로’, ‘진실로’라는 뜻으로 ‘참과부’란 남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Guthrie, Hanson). 당시에는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과 더불어, 일부 다처제(一夫多妻制)의 성행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려져 혼자된 여인들도 많았으며 당시 교회는 이들을 돕는데 적극 참여하였다(행 6:1). 성경에서는 이곳뿐 아니라 과부를 보살펴 줄 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으며(신 10:18; 24:17; 시 68:5). 특별히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하였다(사 1:17). 신약성경에서도 과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막 12:42, 43; 눅 7:11-17 ;18:3-5). 더욱이 초대 교회안에 집사 제도가 생기게 된 큰 원인으로서 과부를 보살피는 일을 들 수 있다(행 6:1-6). 그런데 때로는 과부를 돕는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므로(행 6:1) 교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 대한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경대하라 – 헬라어 ‘티마'(*)는 ‘존경하다’의 뜻으로 명사 ‘티메'(*)에서 파생되었다. ‘티메’는 ‘가치’ 혹은 ‘값’을 의미하며 영어의 ‘사례금'(honorarium)은 이에서 파생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에서 과부들의 당연한 권리로서 그들이 받아야 할 연금(pension)을 바울이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Scott). 따라서 본구절은 과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존경하라는 의미와 아울러 그들에게 필요한 경제적 도움을 주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에이 데 티스 케라 테크나 에 엨고나 에케이 안다네토산 프로톤 톤 이디온 오이콘 유세베인 카이 아모이바스 아포디도나이 토이스 프로고노이스 투토 가르 에스틴 아포뎈톤 에노피온 투 데우
개역개정,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새번역,4 어떤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말성경,4 그러나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먼저 자기 집에서 신앙적 의무를 다하는 것과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우게 하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가톨릭성경,4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기 가정에 헌신하고 어버이에게 보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영어NIV,4 But if a widow has children or grandchildren, these should learn first of all to put their religion into practice by caring for their own family and so repaying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for this is pleasing to God.
영어NASB,4 but if any widow has children or grandchildren, let them first learn to practice piety in regard to their own family, and to make some return to their parents; for this is acceptable in the sight of God.
영어MSG,4 If a widow has family members to take care of her, let them learn that religion begins at their own doorstep and that they should pay back with gratitude some of what they have received. This pleases God immensely.
영어NRSV,4 If a widow has children or grandchildren, they should first learn their religious duty to their own family and make some repayment to their parents; for this is pleasing in God’s sight.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ι δε τις χηρα τεκνα η εκγονα εχει μανθανετωσαν πρωτον τον ιδιον οικον ευσεβειν και αμοιβας αποδιδοναι τοις προγονοις τουτο γαρ εστιν καλον και αποδεκτον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4 si qua autem vidua filios aut nepotes habet discant primum domum suam regere et mutuam vicem reddere parentibus hoc enim acceptum est coram Deo
히브리어Modern,4 וכי יהיו לאלמנה בנים או בני בנים הם ילמדו לראשונה לעשות חסד עם ביתם ולשלם גמול לאבותם כי זה הוא טוב ורצוי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딤전5:4]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 본절의 ‘과부’는 ‘참과부’가 아닌 자들로서 자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손자’의 헬라어 ‘에크고나'(*)는 칠십인역(LXX)에서는 자주 언급되나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온다. KJV에서는 이 단어를 ‘조카'(nephew)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17세기 이전의 용법으로 그 당시에는 ‘조카’가 일반적으로 ‘손자’를 뜻하는 말이었다(Guthrie).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 ‘먼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은 ‘첫째로'(first of all, NIV)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이것은 집안에서 효를 행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야 할 중요한 일임을 나타낸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 ‘부모’의 헬라어 ‘프로고노이스'(*)는 부모 이상의 조상들을 포함한다. 또한 ‘보답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이바스 아포디도나이'(*)의 문자적인 뜻은 ‘되돌려 줄 것을 주다’이다. 이러한 의미에 따라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보상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Scott). 특히 ‘되돌려 주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아포디도나이’는 현재 능동 부정사로서 되돌려 주는 행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헤 데 온토스 케라 카이 메모노메네 엘피켄 에피 데온 카이 프로스메네이 타이스 데에세신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 뉰토스 카이 헤메라스
개역개정,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새번역,5 참 과부로서 의지할 데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말성경,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사람은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밤낮으로 기도와 간구에 전념한다.
가톨릭성경,5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영어NIV,5 The widow who is really in need and left all alone puts her hope in God and continues night and day to pray and to ask God for help.
영어NASB,5 Now she who is a widow indeed, and who has been left alone has fixed her hope on God, and continues in entreaties and prayers night and day.
영어MSG,5 You can tell a legitimate widow by the way she has put all her hope in God, praying to him constantly for the needs of others as well as her own.
영어NRSV,5 The real widow, left alone, has set her hope on God and continues in supplications and prayers night and day;
헬라어신약Stephanos,5 η δε οντως χηρα και μεμονωμενη ηλπικεν επι τον θεον και προσμενει ταις δεησεσιν και ταις προσευχαις νυκτος και ημερας
라틴어Vulgate,5 quae autem vere vidua est et desolata speravit in Deum et instat obsecrationibus et orationibus nocte ac die
히브리어Modern,5 אבל האלמנה באמת אשר נשארה יחידה שמה אלהים מבטחה ומתמדת בתפלות ובתחנות לילה ויומם׃
성 경: [딤전5:5]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 – ‘외로운’에 해당하는 ‘메모노메네'(*)는 ‘모노스'(*, ‘홀로’)의 완료 수동 분사로 ‘홀로 남겨진’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참과부’의 특성으로서 돌보아줄 자녀나 친척도 없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어린 자녀를 둔 과부도 여기에 포함시킨다(Lenski).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 바울은 참과부의 또다른 자격을 제시한다. 그것은 육신적으로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과부의 실례는 눅 2:36, 37에 성전에서 주야(晝夜)로 금식하며 기도한 과부 안나를 들수 있다.
헤 데 스파탈로사 조사 테드네켄
개역개정,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새번역,6 향락에 빠져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 ㉡그, ‘여자는’
우리말성경,6 향락을 좋아하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다.
가톨릭성경,6 그러나 자기 욕심대로 사는 과부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몸입니다.
영어NIV,6 But the widow who lives for pleasure is dead even while she lives.
영어NASB,6 But she who gives herself to wanton pleasure is dead even while she lives.
영어MSG,6 But a widow who exploits people’s emotions and pocketbooks–well, there’s nothing to her.
영어NRSV,6 but the widow who lives for pleasure is dead even while she lives.
헬라어신약Stephanos,6 η δε σπαταλωσα ζωσα τεθνηκεν
라틴어Vulgate,6 nam quae in deliciis est vivens mortua est
히브리어Modern,6 אך המענגה מתה היא בחייה׃
성 경: [딤전5:6]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일락을 좋아하는 이 – ‘일락을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파탈로사'(*)는 ‘방탕하게 살다’의 뜻이다.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풍요롭지 못하였으며 고용의 기회도 거의 없었던 때이므로 많은 과부들은 매춘(賣春)등의 부도덕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바울이 ‘스파탈로사’를 사용한 것은 당시 생활이 궁핍했던 과부들이 매춘의 유혹을 받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uthrie).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을 뜻한다(Lenski).
카이 타우타 파랑겔레 히나 아네필렘프토이 오신
개역개정,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새번역,7 그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여, 그들이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7 또한 그대는 이것들을 명령해서 그들로 비난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가톨릭성경,7 이러한 것들을 타일러 그들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십시오.
영어NIV,7 Give the people these instructions, too, so that no one may be open to blame.
영어NASB,7 Prescribe these things as well, so that they may be above reproach.
영어MSG,7 Tell these things to the people so that they will do the right thing in their extended family.
영어NRSV,7 Give these commands as well, so that they may be above reproach.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ταυτα παραγγελλε ινα ανεπιληπτοι ωσιν
라틴어Vulgate,7 et hoc praecipe ut inreprehensibiles sint
히브리어Modern,7 וזאת תצוה למען תהיינה בלא דפי׃
성 경: [딤전5:7]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 ‘또한'(*, 카이)은 본절이 6절과 연결됨을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이것을'(*, 타우타; ‘이것들’)이 6절에만 국한(局限)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3-4절의 내용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endriksen). 즉 참과부를 존경하며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과(3절), 자녀들이나 손자들은 과부인 어머니나 할머니를 잘 봉양(奉養)할 것과(4절)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참과부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별할 것(5, 6절) 등을 포함한다.
에이 데 티스 톤 이디온 카이 말리스타 오이케이온 우 프로노에이 텐 피스틴 에르네타이 카이 에스틴 아피스투 케이론
개역개정,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새번역,8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말성경,8 누구든지 자기 친척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다.
가톨릭성경,8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영어NIV,8 If anyone does not provide for his relatives, and especially for his immediate family, he has denied the faith and is worse than an unbeliever.
영어NASB,8 But if anyone does not provide for his own, and especially for those of his household, he has denied the faith, and is worse than an unbeliever.
영어MSG,8 Anyone who neglects to care for family members in need repudiates the faith. That’s worse than refusing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영어NRSV,8 And whoever does not provide for relatives, and especially for family members, has denied the faith and is worse than an unbeliever.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 δε τις των ιδιων και μαλιστα των οικειων ου προνοει την πιστιν ηρνηται και εστιν απιστου χειρων
라틴어Vulgate,8 si quis autem suorum et maxime domesticorum curam non habet fidem negavit et est infideli deterior
히브리어Modern,8 אבל מי שלא יפרנס את קרוביו וביותר את בני ביתו כפר באמונה והוא גרוע מאשר איננו מאמין׃
성 경: [딤전5:8]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 ‘자기 친족'(*, 톤 이디온)은 구체적인 범주를 정하기는 어려우나 ‘자기 가족'(*, 오이케이온)은 ‘직계 가족’을 의미한다(Guthrie). ‘돌아보지’의 헬라어 ‘프로노에이'(*)는 문자적으로 ‘미리 생각하다’, ‘준비하다’, ‘공급하다’의 뜻을 갖는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Scott).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 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케라 카탈레게스도 메 엘랕톤 에톤 헼세콘타 게고뉘아 헤노스 안드로스 귀네
개역개정,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새번역,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이는, 예순 살이 덜 되어서는 안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이라야 합니다.
우리말성경,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사람은 60세 이상이어야 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이어야 한다.
가톨릭성경,9 과부 명단에 오를 수 있는 이는 예순 살 이상으로 한 남편의 충실한 아내였고,
영어NIV,9 No widow may be put on the list of widows unless she is over sixty, has been faithful to her husband,
영어NASB,9 Let a widow be put on the list only if she is not less than sixty years old, having been the wife of one man,
영어MSG,9 Sign some widows up for the special ministry of offering assistance. They will in turn receive support from the church. They must be over sixty, married only once,
영어NRSV,9 Let a widow be put on the list if she is not less than sixty years old and has been married only once;
헬라어신약Stephanos,9 χηρα καταλεγεσθω μη ελαττον ετων εξηκοντα γεγονυια ενος ανδρος γυνη
라틴어Vulgate,9 vidua eligatur non minus sexaginta annorum quae fuerit unius viri uxor
히브리어Modern,9 אלמנה אל תבחר זולתי בת ששים שנה ואשר היתה אשת איש אחד׃
성 경: [딤전5:9]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 – ‘명부에 올릴’로 번역된 헬라어 ‘카탈레게스도'(*)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서 당시의 과부들에 대한 물질적 원조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음을 나타낸다. 명부에 이름이 올라 제도적으로생계를 보장받은 과부들은 특별한 자격을 구비(具備)한 자들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Ellicott, Robertson, Scott). 또한 혹자는 당시 과부 제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Bernard, Hendriksen), 이성간의 접촉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상황 속에서 교회에서 남자들이 하기 곤란한 일들을 이들 과부들이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Hendriksen).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 나이를 육십으로 제한한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재혼할 의도나 재혼할 가능성이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또한 노령으로인해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규정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 – 본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고대에는 과부들에게 특별한 정절(貞節)을 요구하여 재혼을 삼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눅 2:36, 37의 과부 안나가 84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한 남편 외에는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Scott, Guthrie). (2) 혹자는 바울이 14절에서 젊은 과부에게 다시 시집갈 것을 권면하면서 본절에서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만을 참과부의 명단에 올리라는 것은 모순이 되므로 (1) 의 견해에 반대한다(Hendriksen). 여기서는 (2)의 견해가 전후 문맥상 타당성을 가진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결혼 생활중에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가 없던 자로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자를 뜻한다.
엔 에르고이스 칼로이스 마르튀루메네 에이 에텤노트로페센 에이 엨세노도케센 에이 하기온 포다스 에닢센 에이 들리보메노이스 에페르케센 에이 판티 에르고 아가도 에페콜루데센
개역개정,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새번역,10 그는 착한 행실을 인정받는 사람이라야 하는데, 자녀를 잘 기르거나, 나그네를 잘 대접하거나, ㉢성도들을 자기 집에 모시거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모든 선한 일에 몸을 바친 사람이라야 합니다. / ㉢그,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거나’
우리말성경,10 또 그는 선한 행실들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곧 자녀를 잘 부양했든지 나그네를 잘 대접했든지 성도들의 발을 씻겼든지 환난당한 사람들을 구제했든지 모든 선한 일에 헌신한 사람이어야 한다.
가톨릭성경,10 선행으로 좋은 평판을 받는 여자여야 합니다. 자녀들을 잘 길러 내고 나그네를 후대하고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온갖 선행에 몸을 바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어NIV,10 and is well known for her good deeds, such as bringing up children, showing hospitality, washing the feet of the saints, helping those in trouble and devoting herself to all kinds of good deeds.
영어NASB,10 having a reputation for good works; and if she has brought up children, if she has shown hospitality to strangers, if she has washed the saints’ feet, if she has assisted those in distress, and if she has devoted herself to every good work.
영어MSG,10 and have a reputation for helping out with children, strangers, tired Christians, the hurt and troubled.
영어NRSV,10 she must be well attested for her good works, as one who has brought up children, shown hospitality, washed the saints’ feet, helped the afflicted, and devoted herself to doing good in every way.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ν εργοις καλοις μαρτυρουμενη ει ετεκνοτροφησεν ει εξενοδοχησεν ει αγιων ποδας ενιψεν ει θλιβομενοις επηρκεσεν ει παντι εργω αγαθω επηκολουθησεν
라틴어Vulgate,10 in operibus bonis testimonium habens si filios educavit si hospitio recepit si sanctorum pedes lavit si tribulationem patientibus subministravit si omne opus bonum subsecuta est
히브리어Modern,10 ויש לה עדות על מעשיה הטובים שגדלה בנים והכניסה ארחים ירחצה את רגלי הקדשים ותמכה את העשוקים ורדפה כל מעשה טוב׃
성 경: [딤전5:10]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 과부의 명단에 올려 구제해야 할 참과부의 조건으로는 구체적 선행이 제시된다.
자녀를 양육하며 – 본절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어머니다운 품성을 지녔는가 하는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바울이 참다운 모성애를 실천하는 것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큰 일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Lenski). 또다른 견해로는 명부에 등록된 과부의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Scott). 여기서는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 초대 교회에서는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이 하나의 공식적인 일이었으므로 이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필요하였다. 나그네를 대접한 과부의 실례로서 사르밧의 과부(왕상 17:9), 수넴 여자(왕하 4:8-11), 루디아(행 16:40) 등을 들 수 있다.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 이것은 종이나 하는 천한 일로서 여기서는 이웃과 나그네를 위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Hendriksen). 이러한 정신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통해 가르치신 바이다(요 13:14).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 ‘환난’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앙으로 인해 받은 박해를 가리킨다(살전 1:6; 살후 1:4).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 ‘좇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콜루데센'(*)은 ‘추구하다’, ‘헌신하다’의 뜻이다. 결국’선한 일을 좇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양심과 신앙을 갖는다기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선행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네오테라스 데 케라스 파라이투 호탄 가르 카타스트레니아소신 투 크리스투 가메인 델루신
개역개정,11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새번역,11 젊은 과부는 명단에 올리는 것을 거절하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정욕에 이끌리면 결혼을 하고 싶어할 것이고,
우리말성경,11 그러나 젊은 과부는 거절하여라.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슬러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이고
가톨릭성경,11 그러나 젊은 과부는 제외하십시오. 정욕에 겨워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면 혼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1 As for younger widows, do not put them on such a list. For when their sensual desires overcome their dedication to Christ, they want to marry.
영어NASB,11 But refuse to put younger widows on the list, for when they feel sensual desires in disregard of Christ, they want to get married,
영어MSG,11 Don’t put young widows on this list. No sooner will they get on than they’ll want to get off, obsessed with wanting to get a husband rather than serving Christ in this way.
영어NRSV,11 But refuse to put younger widows on the list; for when their sensual desires alienate them from Christ, they want to marry,
헬라어신약Stephanos,11 νεωτερας δε χηρας παραιτου οταν γαρ καταστρηνιασωσιν του χριστου γαμειν θελουσιν
라틴어Vulgate,11 adulescentiores autem viduas devita cum enim luxuriatae fuerint in Christo nubere volunt
히브리어Modern,11 אבל האלמנות הצעירות אל תקבל כי בהטות יצרן את לבן מן המשיח חשקות הן להיות לאיש׃
성 경: [딤전5:11]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 ‘젊은 과부’는 60세 이하의 과부들을 지칭한다. 바울이 이들을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일단 명부에 이름이 오른 과부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온전한 헌신이 요구되었는데 젊은 과부는 다시 재혼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 ‘정욕으로’의 헬라어 ‘카타스트레니아소신'(*)은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Robertson). 젊은 과부가 남편을 원하여 재혼하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된다.
에쿠사이 크리마 호티 텐 프로텐 피스틴 에데테산
개역개정,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새번역,12 처음 서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2 그럴 경우 처음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2 그러면 처음의 서약을 깨뜨린 것이 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영어NIV,12 Thus they bring judgment on themselves, because they have broken their first pledge.
영어NASB,12 thus incurring condemnation, because they have set aside their previous pledge.
영어MSG,12 By breaking their word, they’re liable to go from bad to worse,
영어NRSV,12 and so they incur condemnation for having violated their first pledg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εχουσαι κριμα οτι την πρωτην πιστιν ηθετησαν
라틴어Vulgate,12 habentes damnationem quia primam fidem irritam fecerunt
히브리어Modern,12 ודינן עליהן כי בגדו באמונתן הראשונה׃
성 경: [딤전5:12]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 과부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재혼하지 않고 평생 동안 그리스도께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을 것이다(Robertson, Rocke). 혹자에 의하면 후대에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배우자'(the spouse ofchrist)라고 불렀다고 한다(Hanson). 따라서 본절의 ‘처음 믿음'(*, 텐 프로텐 피스틴)이란 ‘젊은 과부들의 처음 서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저버렸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테산'(*)의 문자적인 뜻은 계약이나 법률 따위를 ‘폐기하다’, ‘위반하다’, ‘따로 떼어두다’ 등이다.결국 이 말은 젊은 과부가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서약을 파기(破棄)한다는 의미이다.
심판을 받느니라 – ‘심판'(*, 크리마)은 KJV에서 ‘저주'(damnation)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심판'(judgment, NIV)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잘못을 책망받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Guthrie).
하마 데 카이 아르가이 만다누신 페리에르코메나이 타스 오이키아스 우 모논 데 아르가이 알라 카이 플뤼아로이 카이 페리에르고이 랄루사이 타 메 데온타
개역개정,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새번역,13 또한 그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빈둥거리는 것을 익힐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빈둥거릴 뿐만 아니라, 수다를 떨고, 남의 일에 참견하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또한 그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게으름을 배우고 게으를 뿐 아니라 수다를 떨며 남의 일을 참견하고 마땅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게다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빈둥거리는 버릇을 익힐 것입니다. 빈둥거릴 뿐만 아니라,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며 수다나 떨고 남의 일에 참견이나 할 것입니다.
영어NIV,13 Besides, they get into the habit of being idle and going about from house to house. And not only do they become idlers, but also gossips and busybodies, saying things they ought not to.
영어NASB,13 And at the same time they also learn to be idle, as they go around from house to house; and not merely idle, but also gossips and busybodies, talking about things not proper to mention.
영어MSG,13 frittering away their days on empty talk, gossip, and trivialities.
영어NRSV,13 Besides that, they learn to be idle, gadding about from house to house; and they are not merely idle, but also gossips and busybodies, saying what they should not say.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μα δε και αργαι μανθανουσιν περιερχομεναι τας οικιας ου μονον δε αργαι αλλα και φλυαροι και περιεργοι λαλουσαι τα μη δεοντα
라틴어Vulgate,13 simul autem et otiosae discunt circumire domos non solum otiosae sed et verbosae et curiosae loquentes quae non oportet
히브리어Modern,13 ועוד בהיותן עצלות למדו לשוטט מבית לבית ולא לבד עצלות כי אף מפטפטות ורדפות אחר חדשות ומדברות את אשר לא יתכן׃
성 경: [딤전5:13]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 ‘게으름을 익혀’에 해당하는 ‘아르가이 만다누신'(*)을 혹자는 ‘게으름을 배워 게으름뱅이들이 되었다’로 번역하여 젊은 과부들의 게으름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인 습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배운 것임을 나타낸다(Scott).
집집에 돌아다니고 – 이것은 (1) 명부에 올라 있는 과부들의 임무 중에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신앙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악용(惡用)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Earle, Guthrie), (2) 그들이 가정에 매이지 않은 홀몸으로서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기 때문에 행해진 쓸데없는 방문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1)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 ‘망령된 폄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아로이'(*)는 혹자에 의하면 ‘음식 등이 끓어거품이 오르다’를 의미하는 ‘플뤼오'(*)에서 파생된 말로서(Robertson),’쓸데없는 말을 경박하게 늘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일을 만들며’의 헬라어 ‘페리에르고이'(*)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들에 간섭하기 좋아한다’는 의미이다(Earle). 그러나 혹자는 이 단어가 행 19:19의 ‘마술을 행하던’의 헬라어 ‘페리에르가'(*)와 동일한 단어이므로 본절의 ‘일을 만들며’는 ‘마술적인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며, ‘마땅히 아니할 말’ 역시 ‘마술의 주문'(呪文)이라고 주장하나(Hanson)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다. 여기서 ‘마땅히 아니할 말’이란 교회에 덕이 안되는 해로운 말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모두 게으름을 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 중의 일부는 신앙 생활과 자신의 일상 생활을 게을리 하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긴장되어 있지 못하고 쉽게 남의 말이나 교회 전체의 문란을 초래하는 악담을 하고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집집마다 하여 교회 내에 문제를 야기시켰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불로마이 운 네오테라스 가메인 텤노고네인 오이코데스포테인 메데미안 아포르멘 디도나이 토 안티케이메노 로이도리아스 카린
개역개정,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새번역,14 그러므로 젊은 과부들은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다스려서, 적대자들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말성경,14 그러므로 나는 젊은 과부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돌봄으로 대적자에게 비난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기를 바란다.
가톨릭성경,14 그러므로 나는 젊은 과부들이 재혼하여 자녀를 낳고 집안을 꾸려 나가, 적대자에게 우리를 헐뜯는 기회를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어NIV,14 So I counsel younger widows to marry, to have children, to manage their homes and to give the enemy no opportunity for slander.
영어NASB,14 Therefore, I want younger widows to get married, bear children, keep house, and give the enemy no occasion for reproach;
영어MSG,14 No, I’d rather the young widows go ahead and get married in the first place, have children, manage their homes, and not give critics any foothold for finding fault.
영어NRSV,14 So I would have younger widows marry, bear children, and manage their households, so as to give the adversary no occasion to revile u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βουλομαι ουν νεωτερας γαμειν τεκνογονειν οικοδεσποτειν μηδεμιαν αφορμην διδοναι τω αντικειμενω λοιδοριας χαριν
라틴어Vulgate,14 volo ergo iuveniores nubere filios procreare matres familias esse nullam occasionem dare adversario maledicti gratia
히브리어Modern,14 על כן רצוני כי הצעירות תהיינה לאיש ללדת בנים ולהנהיג את בתיהן ולא לתת לאיב תאנה לחרף׃
성 경: [딤전5:14]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그러므로 젊은이는 – 본절이 접속사 ‘그러므로'(*, 운)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바울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1절의 ‘젊은 과부'(*, 네오테라스 케라스)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젊은이'(*, 네오테라스)는 ‘젊은 과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시집가서 – 바울은 여기서 젊은 과부들에게 재혼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고전7:25-29의 내용에서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26)고 한 말과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할 때와는 달리 지금 본 서신을 쓸 때에는 그의 인생의 말년으로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Scott). (2) 이와는 다른 견해로 본절의 ‘젊은이’는 이미 자제심(自制心)을 잃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Guthrie). 두 견해 중 (1)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왜냐하면 후대 교회, 즉 2, 3세기의 교회에서는 금욕주의의 결과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였으나 바울은 금욕주의에 반대(4:3)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출산하는 일과 집안을 관할하는 일을 바울은 적극 추천하였다. 혹자는 ‘집을 다스리고'(*, 오이코데스포테인)라는 말에서 아내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영향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Liddon).
대적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케이메노'(*)는 ‘반대자’, ‘대항자’의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Hendriksen, Earle). 그러나 ‘대적’ 앞에 관사 ‘토'(*)가 붙었다고 하여 이 단어가 ‘마귀’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Lenski). 그런데 후자의 경우도 마귀가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는 해설을 덧붙여 말함으로써 두 견해가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견해임을 알 수 있다.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 ‘훼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이도리아스'(*)는 ‘욕하다’, ‘매도하다’, ‘조롱하다’의 강한 뜻을 갖는 말로서 젊은 과부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수 있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기회’의 헬라어 ‘아포르멘'(*)은 ‘진격 기지’를 뜻하는 군사 용어로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롬 7:8, 11; 고후 5:12; 11:12; 갈 5:13). 그는 늘 교회가 외부 세계로부터 악평의 대상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해 왔는데 그당시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고 참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성도들의 사랑과 변화된 생활이었다(약 2:7, 8; 벧전 2:12; 4:4, 14, 15).
에데 가르 티네스 엨세트라페산 오피소 투 사타나
개역개정,15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새번역,15 어떤 과부들은 이미 곁길로 나가서, 사탄을 따라갔습니다.
우리말성경,15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미 떠나 사탄에게로 갔다.
가톨릭성경,15 사실 어떤 젊은 과부들은 이미 돌아서서 사탄을 따르고 있습니다.
영어NIV,15 Some have in fact already turned away to follow Satan.
영어NASB,15 for some have already turned aside to follow Satan.
영어MSG,15 Some of them have already left and gone after Satan.
영어NRSV,15 For some have already turned away to follow Sata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ηδη γαρ τινες εξετραπησαν οπισω του σατανα
라틴어Vulgate,15 iam enim quaedam conversae sunt retro Satanan
히브리어Modern,15 כי יש מהן אשר כבר סרו אחרי השטן׃
성 경: [딤전5:15]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 ‘사단’에 대하여 글자 그대로 ‘대적자’의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11절의 ‘그리스도’와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Lenski). 그러나 혹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젊은 과부들이 천박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Scott, Guthrie). 따라서 본 구절은 젊은 과부 중에 일부는 이미 ‘처음 믿음'(12절)을 저버리고 여러 부도덕한 행위에 빠져 교회에 물의(物議)를 일으켰음을 나타내며, 아울러 믿음의 생활을 떠난 자는 반드시 사단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이 티스 피스테 에케이 케라스 에파르케이토 아우타이스 카이 메 바레이스도 헤 엨클레시아 히나 타이스 온토스 케라이스 에파르케세
개역개정,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6 어떤 ㉣여신도의 집안에 과부들이 있거든, 그 여신도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요, 교회에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교회가 참 과부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남신도나 여신도’ 또는 ‘남신도’
우리말성경,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다면 자기가 그 과부를 도와주고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여라. 이는 교회가 참 과부를 도와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가톨릭성경,16 어떤 여신자의 집안에 과부들이 있으면, 그 여자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의탁 과부들을 도울 수 있도록 교회에는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영어NIV,16 If any woman who is a believer has widows in her family, she should help them and not let the church be burdened with them, so that the church can help those widows who are really in need.
영어NASB,16 If any woman who is a believer has dependent widows, let her assist them, and let not the church be burdened, so that it may assist those who are widows indeed.
영어MSG,16 Any Christian woman who has widows in her family is responsible for them. They shouldn’t be dumped on the church. The church has its hands full already with widows who need help.
영어NRSV,16 If any believing woman has relatives who are really widows, let her assist them; let the church not be burdened, so that it can assist those who are real widow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ι τις πιστος η πιστη εχει χηρας επαρκειτω αυταις και μη βαρεισθω η εκκλησια ινα ταις οντως χηραις επαρκεση
라틴어Vulgate,16 si qua fidelis habet viduas subministret illis et non gravetur ecclesia ut his quae vere viduae sunt sufficiat
히브리어Modern,16 בן אמונה או בת אמונה שיש להם אלמנות יעזרו אתן ולא תהיינה למשא על הקהל כדי שיוכל להספיק לאלה אשר הנה אלמנות באמת׃
성 경: [딤전5:16]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과부를 대하는 태도]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 ‘믿는 여자'(*, 피스테)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앞의 8절에서 ‘누구든지…돌보지 아니하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믿는 여자’로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런데 몇몇 후기 헬라어 사본들에서 ‘피스토스'(*, ‘믿는 남자’)를 첨가시켜 ‘피스토스에 피스테'(*, ‘믿는 남자와 믿는 여자’)로 표기하고 있으며 흠정역(KJV)도 이에 준해 ‘남자나 여자’로 번역하고 있다. 심프슨(Simpson)이나 거스리(Guthrie)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2) 그러나 대부분의 본문 비평가들(Alford, Ellicott, Speaker, Moffat)은 보다 짧은 본문인 ‘피스테’만을 택하고있다. 혹자는 몇몇 사본에서 ‘믿는 남자’를 삽입시킨 것은 필사자(筆寫者)들이 바울의 뜻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여기서의 ‘믿는 여자’란 신자가 아닌 남편을 둔 여자 교인이거나, 개인적인 경쟁력을 갖춘 과부나 미혼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3) 또다른 견해로는 ‘믿는 여자’가 14절에서 언급한 ‘젊은 과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비록 그들이 교회에서 공식적인 일은 맡지 못하였으나 가정에 소속되어 다른 과부를 도움으로써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을 하도록 바울이 권면한 것으로 본다(Scott). 이상과 같이 ‘믿는 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으나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친척 중에 과부가 있는 자로서 친척 과부를 돌보아 줄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여자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도움을 줄 능력이 있는 여자가 자기 친척 과부를 도와줌으로써, 교회는 아무 연고가 없어서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참과부’를 도울 수 있었다.
호이 칼로스 프로에스토테스 프레스뷔테로이 디플레스 티메스 앜시우스도산 말리스타 호이 코피온테스 엔 로고 카이 디다스칼리아
개역개정,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새번역,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 / ㉤또는 ‘보상’ 또는 ‘보수’
우리말성경,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나 존경을 받게 하여라. 특히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사람들을 더욱 그렇게 하여라.
가톨릭성경,17 지도자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는 원로들은 이중으로 존대를 받아 마땅합니다.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애쓰는 이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영어NIV,17 The elders who direct the affairs of the church well are worthy of double honor, especially those whose work is preaching and teaching.
영어NASB,17 Let the elders who rule well be considered worthy of double honor, especially those who work hard at preaching and teaching.
영어MSG,17 Give a bonus to leaders who do a good job, especially the ones who work hard at preaching and teaching.
영어NRSV,17 Let the elders who rule well be considered worthy of double honor, especially those who labor in preaching and teaching;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ι καλως προεστωτες πρεσβυτεροι διπλης τιμης αξιουσθωσαν μαλιστα οι κοπιωντες εν λογω και διδασκαλια
라틴어Vulgate,17 qui bene praesunt presbyteri duplici honore digni habeantur maxime qui laborant in verbo et doctrina
히브리어Modern,17 הזקנים המיטיבים לנהל ראוים הם למשנה כבוד וביותר העמלים בדבר ובהוראה׃
성 경: [딤전5:17]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 ‘다스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스토테스'(*)는 교회의 감독권을 시사하며 주로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管掌)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장로’의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이'(*)는 딛 1:7에 나오는 ‘에피스코폰'(*, ‘감독’)과 같은뜻으로 사용되었다. 혹자는 이에 대해 교회의 행정적인 임무를 강조할때는 ‘감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나이든 어른으로서 받아야 할 존경을 강조할 때는 ‘장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Hendriksen).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 ‘존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스'(*)는원래 ‘가치’, ‘가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보상’으로 번역되거나(White) ‘사례금’으로번역될 수 있다(Liddon).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여기서는 물질적인 ‘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보고 정신적인 ‘존경'(honor)만을 주장한다(Lenski).(2) 물질적인 의미와 정신적인 의미를 함께 수용하는 견해도 있다(Hendriksen).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배’의 헬라어 ‘디플레스'(*)에 대하여 몇 가지 주장이 있다. (1) 존경과 보상의 이중적인 의미. (2) 과부들보다 두배의 존경과 보수(Calvin, Rocke).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는 장로들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과 풍족한 물질적인 공급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Guthrie, Scott).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 ‘말씀과 가르침’에 대하여 혹자는 ‘전도와 가르치는 일’로 해석한다(Robertson). 본 구절은 교회를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장로들과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장로들이 초대 교회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아마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레게이 가르 헤 그라페 분 알로온타 우 피모세이스 카이 앜시오스 호 에르가테스 투 미스두 아우투
개역개정,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새번역,18 성경에 이르기를, ㉥”타작 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 ㉥신 25:4 ㉦민 18:31; 대하 15:7
우리말성경,18 성경에서 말하기를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고, “일꾼이 자기의 품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했다. 민18:31;신25:4;대하15:7;눅10:7
가톨릭성경,18 사실 성경도 ”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 , 또 ”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고 말합니다.
영어NIV,18 For the Scripture says, “Do not muzzle the ox while it is treading out the grain,” and “The worker deserves his wages.”
영어NASB,18 For the Scripture says, “YOU SHALL NOT MUZZLE THE OX WHILE HE IS THRESHING,” and “The laborer is worthy of his wages.”
영어MSG,18 Scripture tells us, “Don’t muzzle a working ox,” and, “A worker deserves his pay.”
영어NRSV,18 for the scripture says, “You shall not muzzle an ox while it is treading out the grain,” and, “The laborer deserves to be pai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λεγει γαρ η γραφη βουν αλοωντα ου φιμωσεις και αξιος ο εργατης του μισθ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18 dicit enim scriptura non infrenabis os bovi trituranti et dignus operarius mercede sua
히브리어Modern,18 כי הכתוב אמר לא תחסם שור בדישו ועוד נאמר הפעל שוה בשכרו׃
성 경: [딤전5:18]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 본 구절은 신 25:4로부터 인용된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작방법은 곡식단을 풀어 타작마당에 펴 놓고 그 위를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소가 끄는 타작 기구가 지나가게 하였다. 그때 주인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고 일하는 동안 그 곡식을 마음대로 먹게 하였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본 구절은 눅 10:7의 인용이다. 마 10:10에도 동일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먹을 것'(*, 테스 트로페스)으로 나온 반면 여기서는 ‘삯'(*, 투 미스두)으로 기록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바울은 누가복음을 인용하였다고 본다. 특히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처음 투옥되었을 때 그와함께 있었다(골 4:14; 몬 1:24). 또한 혹자는 누가복음이 그때에 기록되었을 것으로보고 바울이 그것을 인용하였거나 그것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Hendriksen). 결국 본절의 요지는 일하는 짐승에게도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고전 9:9, 14).
카타 프레스뷔테루 카테고리안 메 파라데쿠 엨토스 에이 메 에피 뒤오 에 트리온 마르튀론
개역개정,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새번역,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 ㉧신 19:15
우리말성경,19 장로에 대한 고소는 두세 사람의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마라. 신19:15
가톨릭성경,19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이 없으면 원로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영어NIV,19 Do not entertain an accusation against an elder unless it is brought by two or three witnesses.
영어NASB,19 Do not receive an accusation against an elder except on the basis of two or three witnesses.
영어MSG,19 Don’t listen to a complaint against a leader that isn’t backed up by two or three responsible witnesses.
영어NRSV,19 Never accept any accusation against an elder except on the evidence of two or three witnesse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τα πρεσβυτερου κατηγοριαν μη παραδεχου εκτος ει μη επι δυο η τριων μαρτυρων
라틴어Vulgate,19 adversus presbyterum accusationem noli recipere nisi sub duobus et tribus testibus
히브리어Modern,19 אל תקבל שטנה על הזקן בלתי אם על פי שנים או שלשה עדים׃
성 경: [딤전5:19]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 모세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죄를 판결(判決)할 수 있었다(신 19:15; 민 35:30). 이와같은 규정은 초대 교회에서도 적용되었다(고후 13:1). 특히 장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교회 안과 밖에서 늘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惡意)와 근거없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두 세 명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투스 하마르타논타스 에노피온 판톤 엘렝케 히나 카이 호이 로이포이 포본 에코신
개역개정,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새번역,20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
우리말성경,20 죄를 지은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여라.
가톨릭성경,20 줄곧 죄를 짓는 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움을 가지게 하십시오.
영어NIV,20 Those who sin are to be rebuked publicly, so that the others may take warning.
영어NASB,20 Those who continue in sin, rebuke in the presence of all, so that the rest also may be fearful of sinning.
영어MSG,20 If anyone falls into sin, call that person on the carpet. Those who are inclined that way will know right off they can’t get by with it.
영어NRSV,20 As for those who persist in sin, rebuke them in the presence of all, so that the rest also may stand in fear.
헬라어신약Stephanos,20 τους αμαρτανοντας ενωπιον παντων ελεγχε ινα και οι λοιποι φοβον εχωσιν
라틴어Vulgate,20 peccantes coram omnibus argue ut et ceteri timorem habeant
히브리어Modern,20 את החטאים תוכיח בפני כל למען ייראו גם האחרים׃
성 경: [딤전5:20]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 ‘범죄한 자들’은 장로들을 가리킨다(19절). ‘모든 사람 앞에’로 번역된 헬라어 ‘에노피온 판톤'(*)은 ‘모든 장로들 앞에’를 뜻할 수도 있고(Earle), 혹은 ‘온 교회 앞에’를 뜻할 수도 있다(Guthrie). 일단 장로의 범죄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징계를 공개적으로 행하여야 했다.
디아마르튀로마이 에노피온 투 데우 카이 크리스투 예수 카이 톤 에클렠톤 앙겔론 히나 타우타 퓔랔세스 코리스 프로크리마토스 메덴 포이온 카타 프로스클리신
개역개정,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새번역,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하십시오.
우리말성경,21 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숙히 명령한다. 그대는 이것들을 편견 없이 지키고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마라.
가톨릭성경,21 나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선택된 천사들 앞에서 엄숙히 경고합니다. 선입견 없이 이 모든 것을 지키고, 무슨 일이든 편견에 따라 하지 마십시오.
영어NIV,21 I charge you, in the sight of God and Christ Jesus and the elect angels, to keep these instructions without partiality, and to do nothing out of favoritism.
영어NASB,21 I solemnly cha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and of Christ Jesus and of His chosen angels, to maintain these principles without bias, doing nothing in a spirit of partiality.
영어MSG,21 God and Jesus and angels all back me up in these instructions. Carry them out without favoritism, without taking sides.
영어NRSV,21 In the presence of God and of Christ Jesus and of the elect angels, I warn you to keep these instructions without prejudice, doing nothing on the basis of partiality.
헬라어신약Stephanos,21 διαμαρτυρομαι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και κυρι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και των εκλεκτων αγγελων ινα ταυτα φυλαξης χωρις προκριματος μηδεν ποιων κατα προσκλισιν
라틴어Vulgate,21 testor coram Deo et Christo Iesu et electis angelis ut haec custodias sine praeiudicio nihil faciens in aliam partem declinando
히브리어Modern,21 הנני מעיד בך נגד האלהים ואדנינו ישוע המשיח ונגד בחירי המלאכים אשר שמור תשמר את זאת בלי משפט נמהר ולא תעשה דבר במשא פנים׃
성 경: [딤전5:21]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 이와 같은 표현은 예배의식적인 표현으로서, 여기에 언급된 것은 이 세 존재가 최후 심판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상에서 기인한다(눅 9:26; 계 14:10). 특히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란 말은 바울 특유의 표현으로 자기 초소를 떠난 타락한 천사들(계 18:1; 19:17; 20:1; 21:9)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내가 엄히 명하노니 –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엄숙히 단언하다’, ‘엄숙히 선언하다’의 뜻을 갖는 강의 복합어로서 교회 지도자들의 징계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중해야 함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명령은 바울개인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하는 엄숙한 것이었다.
편벽되이 하지 말며 – ‘편벽'(偏僻)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클리신'(*)은 ‘저울을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다’는 뜻의 동사 ‘프로스클리노'(*)에서 파생된 말로 ‘편애'(favoritism, NIV)로 번역될수 있다. 즉 디모데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개인적인 편견이나 편애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랑과 의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을 하여야 했다.
케이라스 타케오스 메데니 에피티데이 메데 코이노네이 하마르티아이스 알로트리아이스 세아우톤 하그논 테레이
개역개정,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새번역,22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마십시오. 남의 죄에 끼여들지 말고,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 ㉨또는 ‘아무나 성직에 임명하지 마십시오’
우리말성경,22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동참하지 말고 그대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라.
가톨릭성경,22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 남의 죄에 연루되지 마십시오. 자신을 결백하게 지켜 가십시오.
영어NIV,22 Do not be hasty in the laying on of hands, and do not share in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pure.
영어NASB,22 Do not lay hands upon anyone too hastily and thus share responsibility for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free from sin.
영어MSG,22 Don’t appoint people to church leadership positions too hastily. If a person is involved in some serious sins, you don’t want to become an unwitting accomplice. In any event, keep a close check on yourself.
영어NRSV,22 Do not ordain anyone hastily, and do not participate in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pure.
헬라어신약Stephanos,22 χειρας ταχεως μηδενι επιτιθει μηδε κοινωνει αμαρτιαις αλλοτριαις σεαυτον αγνον τηρει
라틴어Vulgate,22 manus cito nemini inposueris neque communicaveris peccatis alienis te ipsum castum custodi
히브리어Modern,22 אל תהי נמהר בסמיכת ידיך על אדם ולא תשתתף לחטאת אחרים שמר את נפשך בטהרה׃
성 경: [딤전5:22]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 본절의 ‘안수'(*, 에피티데이)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 타락한 장로들을 다시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으로서의 안수이다(Rocke, White, Robertson). (2) 장로를 비롯한 다른 성직을 임명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것이다(Earle, Kelly, Theodoret). (3) 본절은 장로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장로를 임명할 때 행한 공개적인 의식이었다(Lenski). 위 의견들 중에 두번째 것이 가장 지배적이다.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기기 위해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품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중직자들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 ‘간섭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네이'(*)는 ‘함께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의 뜻을 갖는다. 이에 대해 (1)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타락한 일부 장로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한 것으로 보는 견해(Lenski)와 (2) 어떤 사람을 안수하여 장로로 임명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증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Earle).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 안수의 중요성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메케티 휘드로포테이 알라 오이노 올리고 크로 디아 톤 스토마콘 카이 타스 퓌크나스 수 아스데네이아스
개역개정,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새번역,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십시오.
우리말성경,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그대의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 포도주도 조금씩 먹도록 하여라.
가톨릭성경,23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그대의 위장이나 잦은 병을 생각하여 포도주도 좀 마시십시오.
영어NIV,23 Stop drinking only water, and use a little wine because of your stomach and your frequent illnesses.
영어NASB,23 No longer drink water exclusively, but use a little wine for the sake of your stomach and your frequent ailments.
영어MSG,23 And don’t worry too much about what the critics will say. Go ahead and drink a little wine, for instance; it’s good for your digestion, good medicine for what ails you.
영어NRSV,23 No longer drink only water, but take a little wine for the sake of your stomach and your frequent ailment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μηκετι υδροποτει αλλ οινω ολιγω χρω δια τον στομαχον σου και τας πυκνας σου ασθενειας
라틴어Vulgate,23 noli adhuc aquam bibere sed vino modico utere propter stomachum tuum et frequentes tuas infirmitates
히브리어Modern,23 אל תרבה לשתות עוד מים כי אם קח מעט יין בעבור בטנך ואשר פעמים רבות חלה אתה׃
성 경: [딤전5:23]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물만 마시지 말고…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금욕주의적인 계율이 있었다. 즉 나실인 서약자는 포도주나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않았으며(민6:1-21), 레갑인들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렘 35:5-8). 따라서 디모데는 이러한 유대 계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22절에서 바울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정결을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Scott). 그 결과 그는 나름대로 금기(禁忌) 사항을 마련해 두고 오직 물만 마시고 포도주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근동 지방의 물들은 대개 병균들로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끓이지 않고 계속 마실 경우 이질이나 위장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의 ‘비위'(*, 스토마콘)는 ‘위장’을 뜻한다. 즉 디모데는 위장병과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바울은 그의 질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당시의 포도주는 도수가 약하였고 특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포도주는 흔히 물이 섞인 포도주였다(Earle).
티논 안드로폰 하이 하마르티아이 프로델로이 에이신 프로아구사이 에이스 크리신 티신 데 카이 에파콜루두신
개역개정,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새번역,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
우리말성경,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분명해서 먼저 심판을 받고 또한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다음에 심판을 받는다.
가톨릭성경,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하여 재판 전에 드러나고, 어떤 이들의 죄는 재판 때에야 드러납니다.
영어NIV,24 The sins of some men are obvious, reaching the place of judgment ahead of them; the sins of others trail behind them.
영어NASB,24 The sins of some men are quite evident, going before them to judgment; for others, their sins follow after.
영어MSG,24 The sins of some people are blatant and march them right into court. The sins of others don’t show up until much later.
영어NRSV,24 The sins of some people are conspicuous and precede them to judgment, while the sins of others follow them there.
헬라어신약Stephanos,24 τινων ανθρωπων αι αμαρτιαι προδηλοι εισιν προαγουσαι εις κρισιν τισιν δε και επακολουθουσιν
라틴어Vulgate,24 quorundam hominum peccata manifesta sunt praecedentia ad iudicium quosdam autem et subsequuntur
히브리어Modern,24 יש בני אדם אשר חטאתיהם גלויות ומקדימות לדין ויש מהם אשר הנה הלכות אחריהם׃
성 경: [딤전5:24]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어떤 사람들의 죄는 – 바울은 본절에서 다시 17절 이후에서 그가 다루어 왔던 문제로 돌아가 장로의 임직(任職)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혹자는 23절에 기록된 대로 디모데가 병약하였으므로 교회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미비한 점이 있었을 것으로 가정한 바울이 처리에 도움이 되는 말을 디모데에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Alford).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 ‘밝히’의 헬라어 ‘프로델로이'(*)는 ‘이미 알려진’ 혹은 ‘명백한’이란 뜻으로서 그들의 죄는 판단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명백한 죄들이다. 또한 ‘좇나니’의 헬라어 ‘에파콜루두신'(*)은 ‘뒤를 따라 가다’의 뜻으로 ‘어떤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죄임을 나타낸다(Hendriksen). 그러나 이것 역시 앞의 ‘밝히 드러난 죄’의 전철(前轍)을 밟아 밝혀지게 된다.
호사우토스 카이 타 에르가 타 칼라 프로델라 카이 타 알로스 에콘타 크뤼베나이 우 뒤난타이
개역개정,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새번역,25 이와 마찬가지로, 착한 행실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언제까지나 감추어져 있지는 못합니다.
우리말성경,25 이와 같이 선한 일들도 명백히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숨길 수 없다.
가톨릭성경,25 마찬가지로 선행 역시 명백한 것으로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언제까지나 숨겨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영어NIV,25 In the same way, good deeds are obvious, and even those that are not cannot be hidden.
영어NASB,25 Likewise also, deeds that are good are quite evident, and those which are otherwise cannot be concealed.
영어MSG,25 The same with good deeds. Some you see right off, but none are hidden forever.
영어NRSV,25 So also good works are conspicuous; and even when they are not, they cannot remain hidden.
헬라어신약Stephanos,25 ωσαυτως και τα καλα εργα προδηλα εστιν και τα αλλως εχοντα κρυβηναι ου δυναται
라틴어Vulgate,25 similiter et facta bona manifesta sunt et quae aliter se habent abscondi non possunt
히브리어Modern,25 וככה גם המעשים הטובים גלוים המה ואשר אינם כן לא יוכלו להסתר׃
성 경: [딤전5:25]
주제1: [교회 질서에 대한 권고]
주제2: [장로를 대하는 태도]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급한 판단을 피하라는 의미로 본 구절을 쓴 것으로 본다(Alford). 즉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은 처음에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본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므로 경솔한 판단을 삼가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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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디모데전서 05장
5:1 권고 방법에 대한 교훈(디모데 전서 5:1,2) 위의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를 통하여 또다른 복음 사역자에게도 책망하는 일에 대한 규칙을 말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직분상 꾸짖는 사람이다. 징계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역자의 직무의 일분야를 이루고 있다. 복음 사역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책망하고 꾸짖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딤후 4:2). 우리가 경계할 때는 책망받을 사람의 나이와 성품과 기타 조건에 따라서 요령있게 해야만 한다. 나이 많은 분들에게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같이 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긍휼히 여기라”(유 1:22)고 하였다. 그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늙은이, 즉 나이 많은 분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꾸짖을 때는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나이와 직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즉 날카롭게 꾸짖거나 전제 군주와 같은 고압적 자체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 자신이 복음 전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아버지와 같이 대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이끌어 주고 설득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2. 젊은이들은 형제와 같이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의 드러내어 싸움을 일으키려는 욕망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가장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책망해야 한다. 책망받을 사람을 책망하기는 하되 책망은 마음을 써서 부드러움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나이 많은 여인이 꾸짖음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는 어머니를 대하듯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호세야 2장 2절에 “너희 어미에게 간청하고 간청하라”고 하였다(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4. 젊은 여인을 꾸짖을 때는 “자매에게 대하듯 일절 깨끗함으로”대하여야 한다. 디모데가 이 세상과 육신과 정욕에 대해 그렇게 금욕적인 사람 이였는데도 이와 같은 주의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필요하다. 늙은이, 즉 나이 많은 분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꾸짖을 때는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나이와 직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즉 날카롭게 꾸짖거나 전제 군주와 같은 고압적 자체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 자신이 복음 전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아버지와 같이 대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이끌어 주고 설득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젊은이들은 형제와 같이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의 드러내어 싸움을 일으키려는 욕망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가장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책망해야 한다. 책망받을 사람을 책망하기는 하되 책망은 마음을 써서 부드러움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나이 많은 여인이 꾸짖음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는 어머니를 대하듯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호세야 2장 2절에 “너희 어미에게 간청하고 간청하라”고 하였다(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젊은 여인을 꾸짖을 때는 “자매에게 대하듯 일절 깨끗함으로”대하여야 한다. 디모데가 이 세상과 육신과 정욕에 대해 그렇게 금욕적인 사람 이였는데도 이와 같은 주의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필요하다.
5:3 과부들에 관한 지시(디모데 전서 5:3-16) 본문에서는 교회에 속하여 있고 교회가 부양하고 있는 많은 수의 과부들에 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먼저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3절)고 하였다. 그들을 경대하라는 것은 그들을 도와주고, 직분을 주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 당시 교회에는 과부들이 종사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그 직책은 집사들의 지시에 의하여 병든 자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촐 교회가 형성되던 때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던 것을 직접 읽어볼 수 있는데(행 6:1) 그곳에 보면 헬라파 교인들이 자기의 피부들이 매일 구제받는 데서 제외되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들을 원망했다고 하였다. 과부들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은 참과부를 경대하여 그들을 돌보아 주고 존경과 친절함으로 구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Ⅰ. 열락을 좋아하는 방종한 과부가 아니라 경건하고 헌신한 과부들만을 교회가 구제하도록 명하였다(5,6절). 홀로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자라야 참과부로 인정되며 교회의 부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홀로 된 의무요 또 위안인 것임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끔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러한 곤경을 당하도록 그의 백성들에게 시련을 내리신다. 그런데 이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과부는 외로운 신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라”(렘 49:11)라고 하였고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들을 기뻐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과부들은 “기도를 계속하여야 하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기도는”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안나는 참과부였는데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눅 2:37) “금식하며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봉사하였던 여자였다.” 그러나 연락으로 살거나 방종하게 사는 여자는 참 과부가 아니다(6절). 쾌활을 탐하는 과부는 과부가 아니며 교회의 도움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러한 여자들은 교회의 살아있는 일원(一員)이 아니라 교회 안에 시체와 같고 또는 교회를 망신케 하는 일원(一員)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좀더 넓게 적용시켜 보자.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허물과 죄로 죽어 있도록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목적이 없이 이 세상에는 사는 자들이요 인생의 참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로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Ⅱ. 바울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과부들의 생계를 교회가 돌보지 아니하도록 또다른 규칙을 세워 주었다. 이것은 여러 번 언급되었다(4절), “만약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즉 그들에게 자녀들이나 가까운 연관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그 과부들을 도와 주고 교회에 짐이 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16절). 교인들은 먼저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의 가족에게 신앙의 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돌보아 드림으로써 나타내는 효를 본문에서는 신앙의 행위로 취급하였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아무리 부모를 공경한다 할지라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돌보아 주고 갖은 고생을 한 것에 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자녀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이다. 만약 부모를 돌보아야만 하며 자녀가 부모를 봉양할 능력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봉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가련한 부모들을 봉양하는 것보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이 더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일이라고 가르쳤다(마 15:5). 그러나 “번제나 희생을 드리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더욱 하나님께 용납받을 말한 일이다”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다시 말하기를 “만약 누구든지 자기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라고 하였다(8절). 만약 어떤 남자나 여인이나 자기에게 속한 불쌍한 가족이나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다섯 번째 계명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그는 중히 여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자와 더욱이 자기의 몸의 일부와도 같은 자기 아내나 자녀들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는 자인 것이다. 만약 자기의 가족을 돌보는 수고를 게을리 한다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된다. 가나한 친척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이 그 친척을 돌보고 교회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한 가지 이유는(16절) 교회가 구제받지 않을 사람은 구제하고 더 많은 참과부를 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정작 구제받을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구제의 본연의 목적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구제를 베풀어 부는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 조심성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동정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제외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받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Ⅲ. 바울은 교회의 구제를 받을 만한 과부들의 특징에 관하여 지시하였다. 즉 60세 이하여서도 아니 되며 남편과 이혼을 하였거나 이혼하였다가 다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남편의 아내였으며, 가정의 주부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능력이 있을 때 남을 위하여 선행을 한 사람은 늙어서 힘이 없을 때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여기 주부들이 행하기에 적절한 선행의 몇 가지 실례가 열거되어 있다. 먼저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라고 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녀를 출산하며”라고 말하지 않았다(어린이는 여호와의 뜻에 의하여 출산되는 것이지 사람이 잘나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출산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여인이 자신의 자녀를 낳지 못하였어도(남의 자녀라도) “자녀를 양육하며”이란 말씀이라고 하겠다. 또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음 씻기며”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10절)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여행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들의 친구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환영을 표하는 한 방법이 된다. 혹은 “환란당한 자를 구제하며”라고 하였다. 결국 본문의 요지는 피부가 능력이 있을 때 이러한 모든 선한 일을 행했으면 이제 그녀가 힘이 없을 때 그녀를 쉽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궁핍할 때에 자비를 입은 자는 자기가 풍성할 때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Ⅳ. 바울을 신빙할 만한 점이 없는 과부들을 참과부의 서열에 들여 놓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11절). 이에 대해 본문은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에서의 맡은 일에 싫증을 낼 것이며 그들이 행하여만 하는 규칙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집가고자 하여 그들의 처음 가졌던 믿음을 저버릴 것이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계시록 2장 4절에서 읽어 볼 수 있고 처음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은 여기 본문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즉 처음 믿음이란 선행을 하기로 교회에 맹세하고 교회는 그것들을 신임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믿음이란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서약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항목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만약 그들이 서약한 것을 깨트릴 염려가 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젊은 과부들은 결혼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휘트비 박사는 “만약 이 처음 믿음이 교회에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서약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처음 믿음이라고 불리울 수 없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 또 본문은 젊은 과부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나면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한다”(13절)고 지적하였다. 게으른 사람은 단지 게으른 것으로만 그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망령된 폄론을 배우게 되고 일을 만들며 이웃간에 불화를 만들고 형제간에 불화를 조성한다. 교회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위엄있게 처신하지 못하므로 집사직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면(또는 교회의 구제받을 과부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다면) 본문은 그들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낳도록 하라”(14절)고 권하였다. 만약 주부가 가사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지 않고 망령된 폄론을 한다면 15절에 나타나는 대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비난하는 기회를 주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워야 한다. 1. 초대 교회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위하여 양식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최선을 다하여 초대 교회의 좋은 본을 받아야 한다.
2. 교회의 구제의 분배에 있어서는 가장 필요하고 가장 자격있는 사람들에게 공적(公的)으로 나누어 주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자기를 돌볼 만한 친척이 있는 과부들과 선한 행실의 증거가 없는 자나 일락으로 사는 피부들을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11절).
3. 교회의 공신력과 신앙의 신빙성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사례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집사직과 같이)낮은 성격의 직책을 맡거나 교회의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제직들이 행동을 조심해서 하지 않고 폄론이나 하며 일만 만들고 다니면 교회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비난의 꼬투리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성도들도 하여금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도록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난한 과부를 도와주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나 조카나 손자 등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곤란한 이웃들을 부유한 이웃 사람들이 돌보지 아니하므로 교회가 그들을 돌보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부유한 이웃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위하여 양식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최선을 다하여 초대 교회의 좋은 본을 받아야 한다.교회의 구제의 분배에 있어서는 가장 필요하고 가장 자격있는 사람들에게 공적(公的)으로 나누어 주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자기를 돌볼 만한 친척이 있는 과부들과 선한 행실의 증거가 없는 자나 일락으로 사는 피부들을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11절).교회의 공신력과 신앙의 신빙성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사례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집사직과 같이)낮은 성격의 직책을 맡거나 교회의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제직들이 행동을 조심해서 하지 않고 폄론이나 하며 일만 만들고 다니면 교회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비난의 꼬투리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성도들도 하여금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도록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난한 과부를 도와주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나 조카나 손자 등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곤란한 이웃들을 부유한 이웃 사람들이 돌보지 아니하므로 교회가 그들을 돌보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부유한 이웃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5:17 장로들에 관한 지시(디모데 전서 5:17-25)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시되고 있다. Ⅰ.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일에 관한 지시. 잘 다스리는 자들은 돌보아야져야 한다(17절), 그러므로 “잘 다스리는 장소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즉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함으로 더 존경할 자로 알라는 말씀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사람을 치리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다 같은 한 사람에 의해 수행 되었다. 어떤 주석자는 사도 바울의 “잘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씀은 말씀을 가르치지는 않고 교회를 다스리는 일만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는 문제는 관여하지 않고 교회 처리만을 주로 맡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본문을 보면 그런 견해가 타당성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보았겠느냐 하는 데는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세례를 베푸는 것보다도 복음 전하는 일을 우위에 두었고 따라서 그가 복음 전하는 일을 교회 처리하는 일보다 월등한 것으로 여겼으리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교회 치리자들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하였으면서 복음 전도자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이상스러운 일인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초대 교회에서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스리고 가르치고 하였던 것이다. 다만 다름 사람들보다도 더욱 말씀과 가르침에 힘을 쓴 사람들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목회자의 할 일. 그것은 주로 두 가지로 구성된다. 즉 잘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그 두 가지 일이 장로들이 맡은 바 주된 직분이었다.
2. 게으르지 않고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에 수고한 자들이 의당 받을 존경. 그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들인 것이다. 즉 그들은 존중되어야 하고 또 생계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부양하도록 하는데 관한 명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 구절은 복음 사역자를 부양하는 일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준다. 즉 그 내용은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는 것이었다.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짐승에게는(유대인들은 짐승을 부려서 탈곡하는 일을 하였다) 그것들이 일하는 동안 곡식을 먹는 것을 금하지 않았는데 이는 곡식을 먹고 일을 더욱 잘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의 생계를 충분히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이르기를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마 10:10). 이같이 복음 사역자가 그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배울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서나 복음 아래에서나 자기의 사역자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황소를 돌보시는데 하물며 주의 종을 돌보시지 않을 것인가? 황소는 오직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곡식을 떨지만 목회자는 영원히 지속하는 생명의 양식을 탈곡하는 것이다.
(2)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생계 문제로 염려하지 않도록 적절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례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보수를 받는 것처럼 목회자들도 당연히 보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충분할 정도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목회자의 할 일. 그것은 주로 두 가지로 구성된다. 즉 잘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그 두 가지 일이 장로들이 맡은 바 주된 직분이었다.게으르지 않고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에 수고한 자들이 의당 받을 존경. 그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들인 것이다. 즉 그들은 존중되어야 하고 또 생계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부양하도록 하는데 관한 명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 구절은 복음 사역자를 부양하는 일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준다. 즉 그 내용은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는 것이었다.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짐승에게는(유대인들은 짐승을 부려서 탈곡하는 일을 하였다) 그것들이 일하는 동안 곡식을 먹는 것을 금하지 않았는데 이는 곡식을 먹고 일을 더욱 잘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의 생계를 충분히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이르기를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마 10:10). 이같이 복음 사역자가 그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배울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서나 복음 아래에서나 자기의 사역자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황소를 돌보시는데 하물며 주의 종을 돌보시지 않을 것인가? 황소는 오직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곡식을 떨지만 목회자는 영원히 지속하는 생명의 양식을 탈곡하는 것이다.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생계 문제로 염려하지 않도록 적절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례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보수를 받는 것처럼 목회자들도 당연히 보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충분할 정도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Ⅱ. 목회자들에 대한 송사에 관한 지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다”(19절). 본문은 장로들이 무슨 죄가 있어 송사를 할 필요가 있을 때의 성서적인 절차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먼저 소송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불확실하게 떠다니는 소문이 아니고 확실한 증인이 있는 소송이어야만 한다. 더욱이 부당한 재판 방법에 의해 그를 재판해서도 안 된다. 현대적인 소송절차에 의하면 죄의 유무에 따라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에 따르면 장로에 대해서는 반드시 먼저 “고소”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2. 이 소송은 두세 사람의 확실한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송사는 증인들이 직접 참석해서 증거해야 접수가 된다. 즉 피고와 원고가 맞대면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위신이 관계되는 문제는 특별히 조심히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나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하며 추측으로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 꾸짖으라”(20절)고 했다. 즉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체면을 염려 할 필요없이 공중 앞에서 그들을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 죄를 지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는 것은 상처난 자리를 다 반창고로 바르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책망은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였다. 다음 사항을 명심하자.
(1) 공공연한 추문을 일으킨 죄인들은 공중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공중에 대한 것이며, 또 많은 사람 앞에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또는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 꾸짖음 공적(公的)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
(2) 공적(公的)인 책망은 책망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즉 그들도 두려워하게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범죄한 사람은 공적으로 처벌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든 이스라엘의 이를 보고 두려워하고 더 이상 악을 행치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먼저 소송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불확실하게 떠다니는 소문이 아니고 확실한 증인이 있는 소송이어야만 한다. 더욱이 부당한 재판 방법에 의해 그를 재판해서도 안 된다. 현대적인 소송절차에 의하면 죄의 유무에 따라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에 따르면 장로에 대해서는 반드시 먼저 “고소”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다.이 소송은 두세 사람의 확실한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송사는 증인들이 직접 참석해서 증거해야 접수가 된다. 즉 피고와 원고가 맞대면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위신이 관계되는 문제는 특별히 조심히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나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하며 추측으로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 꾸짖으라”(20절)고 했다. 즉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체면을 염려 할 필요없이 공중 앞에서 그들을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 죄를 지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는 것은 상처난 자리를 다 반창고로 바르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책망은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였다. 다음 사항을 명심하자.공공연한 추문을 일으킨 죄인들은 공중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공중에 대한 것이며, 또 많은 사람 앞에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또는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 꾸짖음 공적(公的)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공적(公的)인 책망은 책망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즉 그들도 두려워하게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범죄한 사람은 공적으로 처벌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든 이스라엘의 이를 보고 두려워하고 더 이상 악을 행치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Ⅲ. 복음 사역자 임명에 관한 지시(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본문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일에 대한 권고의 말씀으로 보여진다. 즉 성직 수임은 그 당해자의 받은 은사나 은혜를 시험해 보지 않고 또 그들이 능력이나 자격을 시험해 보지 않고 경솔하고 분별없이 행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보인다. 또 어떤 해석자는 이 구절을 죄에 대한 사면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누구에게든지 조급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말을 책망받는 사람의 회개와 성실함이 증명될 때까지는 교회의 징계를 사면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본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란 말을 “교회가 내린 책망을 쉽게 용서하여 준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죄를 대담하게 행하도록 선동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들로 죄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즉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인 것이다. “순결을 보존하라. 당신 자신이 그 같은 죄를 짖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의 죄를 어떤 길로도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같이 볼 때 본문에 대해서는 위의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경솔히 성직자들을 세우거나 또는 교회의 견책을 받은 사람에 대한 성급한 용서를 조심하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본문에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2. 무슨 일이고 경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만일 우리가 흠없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흠없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보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우리 자신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경솔히 성직자들을 세우거나 또는 교회의 견책을 받은 사람에 대한 성급한 용서를 조심하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본문에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무슨 일이고 경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만일 우리가 흠없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흠없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보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우리 자신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Ⅳ. 사면에 관한 지시(24,25절).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난다.” 목회자들은 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범죄자와 범죄의 경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대단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의 죄는 너무도 평범하고 명백하면서 은밀히 찾지 않아도 찾아 낼 수 있다. 그들은 교회가 책망하는데 아무런 논쟁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죄는 재판 전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난다.” 즉 그들의 악은 당장에 드러나지 않고, 그 일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연후에야 드러난다는 말이다. 또는 본문은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어떤 사람들의 죄는 견책을 받은 후에도 계속된다. 그들은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아니한다. 그런 사람은 결코 사면될 수 없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회개한 증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즉 “착한 행실도 속히 드러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아니한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쉽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들의 회개하지 않은 죄는 결국 알려지는 것이므로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용서하지 말 것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죄에는 은닉된 죄와 드러난 죄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죄는 미리 밝히 들어나므로 금방 심판에 붙여지고 어떤 사람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나는 것이다.
2. 교회에서 죄인들을 다룰 때에는 특별히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역주: 여기서는 교회법을 특별히 어긴 특수 죄인을 뜻하고 있다).
3. 교회의 견책을 받을 결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인하여 겸손하여지며 회개하게 되고 따라서 개준의 빛이 밝히 들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4. 중죄는 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겨진 일들을 밝히 들어내시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밝혀 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는 은닉된 죄와 드러난 죄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죄는 미리 밝히 들어나므로 금방 심판에 붙여지고 어떤 사람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나는 것이다.교회에서 죄인들을 다룰 때에는 특별히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역주: 여기서는 교회법을 특별히 어긴 특수 죄인을 뜻하고 있다).교회의 견책을 받을 결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인하여 겸손하여지며 회개하게 되고 따라서 개준의 빛이 밝히 들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중죄는 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겨진 일들을 밝히 들어내시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밝혀 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Ⅴ. 디모데 자신의 문제에 관한 지시. 1.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21절)고 하였다. 목회자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세속적인 이해 관계 때문에 이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하자. 바울은 충심으로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편벽된 일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목회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 또 그 일들을 어떻게 행하였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들이 세속적인 수단에 의해 사역을 편벽되이 한다면 그들에게 화가 주어진 것이다.
2. 바울은 디모데에게 건강을 유의하라고 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23절). 디모데는 세상 쾌락에 대해 금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물을 마시고 술 같은 것은 마시지 않았다. 또한 그는 건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가 위장의 건강을 도웁고 신체의 허약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쓸 것을 권하였다. 여기 “조금씩 쓰라”고 한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복음 사역자들은 많은 술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셔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포도주를 기억하자.
(1) 인간들이 자기의 몸을 주의 깊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체를 자기의 주인처럼 섬겨도 안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가장 유의하도록 몸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2) 포도주는 병들고 허약한 사람에게 좋은 치료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위장 장애가 있거나 허약한 체질에 좋다. 그래서 잠언서에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 31:6)라고 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들어야 하며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건강에 해롭도록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21절)고 하였다. 목회자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세속적인 이해 관계 때문에 이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하자. 바울은 충심으로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편벽된 일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목회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 또 그 일들을 어떻게 행하였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들이 세속적인 수단에 의해 사역을 편벽되이 한다면 그들에게 화가 주어진 것이다.바울은 디모데에게 건강을 유의하라고 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23절). 디모데는 세상 쾌락에 대해 금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물을 마시고 술 같은 것은 마시지 않았다. 또한 그는 건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가 위장의 건강을 도웁고 신체의 허약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쓸 것을 권하였다. 여기 “조금씩 쓰라”고 한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복음 사역자들은 많은 술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셔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포도주를 기억하자.인간들이 자기의 몸을 주의 깊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체를 자기의 주인처럼 섬겨도 안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가장 유의하도록 몸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포도주는 병들고 허약한 사람에게 좋은 치료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위장 장애가 있거나 허약한 체질에 좋다. 그래서 잠언서에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 31:6)라고 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들어야 하며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건강에 해롭도록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디모데전서 주석 5장
1~2절 /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1. 5장은 진리의 기둥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에서 디모데가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4장에 이어서 교훈하며, 4장에서는 디모데 개인에게 교훈하여 디모데를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진리의 터와 기둥으로 서게 하고, 5장은 이어서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안의 참 과부들의 문제와 장로에 관한 것들 대하여 바르게 풀어가도록 기준을 주어 교훈하는 장이다.
2. 1~2절은, 각 계층의 연령대의 사람들을 대하는 기준을 주고, 공의와 이웃사랑으로,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행하게 하고 있다.
3~7절 / 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1. 3절의 참 과부는 재혼하여 그리스도를 떠나는 자가 아닌 자로, 참 과부는 특성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이며, 봉사하는 자이니 존대하라 말하는 것이며,
2. 교회는 먼저 말씀을 증거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집이므로,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사역 등은 집사들이 행하되, 먼저는 가족과 친족이 행하도록 가르쳐야할 것을 교훈하고 있으며, 구제나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사역 등은 경우에 합당하며,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알게 하고 있다.
3. 한편 6절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하여서, 먼저는 과부는 향락에 대하여 죽은 자이며, 소망이 끊어진 자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며, 진리의 집에서 진리의 포도주로 취하여 살아가도록 택함을 입은 것과 같고, 이에 비하여 세상의 잔치와 자주 빛 옷에 마음이 있는 자들은 살았어도 죽은 자이며, 이는 영혼이 죽은 것이며, 그 본성과 이성이 사망이라 이름 하는 원죄이기 때문이다.
4. 7절은,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하여서, 교회는 진리의 집이므로 마땅한 공의와 사랑과 진리를 계속적으로 가르쳐야하며, 특히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가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여호와의 새 일을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8~10절 /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1. 8절은,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닐 터이며, 진리의 사람으로 살게 하고, 진리의 아들을 낳는 사람으로 살게 하며, 진리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며, 그 진리는 반드시 육체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연히 가지게 하는 흉악의 결박을 끊는 힘이니, 오늘날에 예수를 믿는다는 빙자로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들을 크게 경계하고, 크게 책망하여야 할 것이며, 또 예수를 믿는 다하나 자기가 죽지 않은 자는 참으로 믿는 자인가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2. 9~10절은,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하여서, 교회는 참 과부를 돌보기 위하여 그 기준을 정하되, 공의에 합당한 기준으로 정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러한 기준을 볼 때에, 참 과부를 존대하여야만 할 것을 깨닫게 되며, 젊은 자들과 교회가 힘써 경대하면서, 참 과부들과 함께, 참 과부같이 되어서, 하나님께 마음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며, 결코 향락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11~12절 / 11.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 젊은 과부는 참 과부로 검증되는 기간이 필요하고, 과부는 세상에 대하여 소망을 거두고 오히려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며, 일락에 대하여 죽으며, 가난한 자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때이며, 기간이니 이를 잘 통과하여야 할 것이며,
교회는 이러한 분별기준을 가지고 잘 도우며 잘 검증하여야 할 것이다.
2. 한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의 본성과 이성에서 나오는 육체의 악하고도, 거짓되고도 허무한 정체성은 부인되지 않으면, 마침내 본성과 이성이라는 원죄의 종이 되어서, 혹은 옛 뱀의 새끼로 살아가는 것이니, 육체의 정욕을 부인하고, 제어하며, 이겨 가는 힘을 기르고, 이기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또 육체는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있으며, 일곱 번 완전하게 배반한 것이니, 에베소교회처럼 으뜸 되는 진리와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며, 얼마든지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며, 사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 먼저는 십자가에서 못 박으므로 그 머리를 발로 밟는 것이 중요하며,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갈 때에 끝없이 육체의 정욕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하고, 이 습관의 몸을 잘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함은 자기의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가난한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남을 이해하고 정죄하지 않으며,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자연히 배워가게 될 것이며, 잘 못하더라도 마땅한 것이니 계속하고, 배워가며, 이러한 몸을 만드는 것이 의는 아니나, 마땅한 것으로 여겨 잘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3. 12절은,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하여서, 육체의 정욕을 따르고, 본성과 이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며, 정죄를 당하고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처음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믿음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3~14절 / 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 13절은 육체가 어떤 습관으로 어떤 몸을 만들어 가는가를 잘 보여주되, 게으름을 익힐 수 있으며, 집집으로 돌아 다니며,…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며 살아가는 몸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일반의 예일 것이며, 교회가 이처럼 마귀의 몸을 만들어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니,
정욕을 이기기 어렵다면 차라리 결혼하고, 참 과부처럼 가난함을 가지고 자기를 부끄럽게 여겨 미말에 두는 것을 배워가야 하며, 대적인 마귀를 이겨가도록 교훈 받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매사에 있어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의 본성과 이성에 관한 모든 것들을 부인하는 습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 하겠다.
2.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으로 행하는 습관과 익히고 배우는 학습활동을 다 망라하여 말하는 말이나, 교회는 늘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리스도의 믿음, 곧 처음믿음을 저버리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니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이는 요술카드이며, 마법의 카드가 확실한 뱀의 것이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열매라는 것은 기간을 두고 맺어지는 것이며, 반드시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니, 어떤 몸을 입고자 했고, 만들어 갔는가는 그 날에 다 들어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며, 육체의 정욕으로 옷을 입어간 자들이 자기를 부끄러워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잔치의 상석에 앉으려 한다면, 그 날에 큰 부끄러움을 입게 될 것이다.
이는 믿는 자가 자기 안에 어떤 사상을 가졌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행하고, 어떤 길을 다녔고, 어떤 집에 살아가며, 무엇을 바라보았고, 어떤 기준으로 행하였는가가 곧 그 사람이며, 그가 장차 들어갈 집인 것이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심판 날에 마귀는, 처음의 믿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예수 믿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는 것이다 하며, 육체의 정욕으로 살아간 자들을 비방하고, 대적하여 정죄를 당하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이러함을 합당한 공의로 여기시어 영원한 형벌인 그들의 어두운 집에 던져 넣으실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15절 / 15.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으로 뱀과 같은 것이며, 일곱 번 은혜를 받아도 일곱 번 반역과 패역으로 갚는 생명체이며, 죽은 것과 같은 가증한 것이니, 십자가에서 죽게 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마귀와 하나 되어서 살아가고, 옛 날로 돌아가고, 애굽으로 기어들어가고, 소돔에서 판사 되고, 높은 벼슬을 얻어 호화롭게 살려 하는 것이니, 홍수로 쓸어버려야 하고, 이제는 불로 살라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썩은 무화과 같아서 먹을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물러 터지고 상하여 악취가 나고, 먹게 되면 반드시 탈이 나는 악한 열매이니 갖다 버려야만 할 것이며, 불에 태워야만 할 것이다.
2. 그러므로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역사가 구약의 역사이며, 예수님의 증언이기도 하며, 현재와 미래의 육체뿐인 자들의 역사인 것이니,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따라가야 할 것이며, 반드시 자기를 죽여 땅에 장사 지내고 영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 주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육은 그의 아비와 신인 사탄에게로 가며, 성령으로 태어난 영은 그의 아버지인 영이시고 진리이신 아버지와 의와 진리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불의, 거짓, 속임 등으로 길을 다니다가 멸망을 당하지 말고, 불의를 버리고 의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또한 자기가 악하고 거짓된 육체로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 자기목숨을 미워하면서, 미말에 앉아 주의 긍휼을 바라야만 할 것이다.
16절 /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1. 이는 상식이며, 높은 윤리이며, 하나님의 마땅한 의라 하겠으며 배우고, 익히고, 자기의 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17~18절 /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짓선생의 거짓교훈을 따랐으므로 패망을 당하는 역사였으므로, 교회는 바른 교훈으로, 바른 복음으로 가르치는 제자들의 필요성이 우선이며, 중심이므로,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하고 교훈하고,
이어서, 18절은,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하여서, 교회의 존경을 받아야 됨을 말하고 있다.
19~21절 / 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1. 19절은, 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하여서, 장로의 존귀함을 다시금 말하되, 혹 있을 수 있는 고발에 대하여 신중하도록 교훈하며,
20~21절은,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하여서, 교회가 빛처럼 공명정대하되, 죄를 경계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힘써 지켜가도록 교훈하고 있다.
22~25절 /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1. 22절 전 반절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하여서, 경솔함은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신중하여야 함은 당연한 것이며, 특히 안수 같은 종교 행위는 미신으로 흘러갈 수 있으므로 가볍게 생각하지 말도록 교훈하고 있고,
또 안수는 사상의 전수이며, 전가인 것이니,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마음과 같은 사상을 가져야만, 전하는 자의 사상이 전수되고 전가되는 것이니, 듣는 자는 이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강해설교] 목양의 자세(딤전 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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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디모데전서 5장 강해설교 중에서 목양의 자세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목양의 자세” (딤전 5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디모데전서 5:1-25
요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알며,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딤전 5:17)
주제: 목양하는 방법에 대한 권면과 목회자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권면하다.
오늘은 디모데 전서 5장을 강해합니다. 목양의 자세를 가르치며 특히 연세 많으신 여성들과 목회자들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참 과부를 공경하라(딤전 5:1-8)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면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2 늙은 여인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인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도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밤낮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받을 것이 없게 하라.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1-2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면하되 아버지에게 하 듯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 듯하고, 늙은 여인에게는 어머니에게 하 듯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 듯하라.”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교훈하며 권면할 때 기본적인 예절과 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나이 많은 성도님들에게는 꾸짖지 말고 자기의 아버지에게 하듯이 대하고, 젊은 성도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나이든 여성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이 대하고, 젊은 여성들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처신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성추행이나 성적 문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사람을 사람다워지게 하는 것이지, 사람으로 비상식적이고 예절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예절 있고 덕스러운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말씀 사역자들은 더더욱 높은 마음을 가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예절 있게 말하며 선한 품행의 행동해야 합니다.
3절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Honour widows that are widows indeed.” ‘존대(尊敬待)하다’ 즉 경대(敬待)란 원어(티마오 τίμαω timao)는 ‘공경하다, 존경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참 과부’는 나이가 회갑을 넘긴 과부로서 그녀를 돌아볼 자녀나 친척이 없고 평소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환자들을 돌보는 일 등의 선한 일들을 행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를 공경하고 물질적으로 도우며 존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도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부모나 조부모를 공경하며 보답하기를 배우게 해야 합니다. 효도(유세베인 εὐσεβεῖν “to show piety towards”)는 제 5계명으로 부모에게 경건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존경하는 마음과 태도로 품위를 갖춘 언행, 책임지는 삶, 비중과 무게를 두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행 17:23에서 유세베인 동사는 우상을 섬기는 것 “너희들이 위하는 것들 ye ignorantly worship”으로 사용됩니다. 부모들이 별세하시고 나서 신으로 숭배하거나 섬기는 일이 제사로 연관되어 이해되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 마음 편하게 해 드리고 존경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자녀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시는 부모님이라면 그분들의 믿음을 본받아 살아가며 자녀들의 후손에게도 이 믿음을 전수하는 것이 효도이며, 믿지 아니하는 부모님이라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하여 천국으로 가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효자, 효녀가 되게 하셔야 하며, 자녀들은 부모님의 믿음을 본받아 효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5-6절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두 종류의 과부(widow)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종류의 과부로서 외롭기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외롭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늘 교제함으로 은혜 풍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만일 그녀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나님과 천국을 사모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남편이 없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오히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할 뿐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을 선용할 지혜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런 과부는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합니다.
7-8절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7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책망받을 것이 없게(blameless, 아네피렙토이 ἀνεπίληπτοι) 살라고 합니다. 육신에 치우쳐 세상의 헛된 향락을 구하며 살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며 천국을 소망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8절에서 가족과 친족들에 신앙의 본을 보이라는 권면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녀나 손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외로운 부모님이나 어떤 가족이나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차적으로 자기 가족을 사랑하고 돌아볼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의 빛을 가정에서 비취는 빛의 자녀로서 본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과부에 대한 규례(딤전 5:9-16)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만일 자녀를 양육하며 만약 나그네를 대접하며 만약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만약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만약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11 젊은 과부들은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가 짐 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
9-10절에서 3절에 언급한 참 과부의 자격을 논하고 있습니다. ① 환갑이 넘은 여인(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under threescore years old) ②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having been the wife of one man) ③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well reported of for good works) 만일 자녀를 양육하며(if she have brought up children), 만일 나그네를 대접하며(if she have lodged strangers) 만일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if she have washed the saints’ feet) 만일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if she have relieved the afflicted), 만일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if she have diligently followed every good work.)”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물질적으로 공급해야 할 과부들의 명부를 작성하였음을 보입니다. 여성 나이가 60세라는 것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공급하기 어렵고 또 그들이 재혼할 만하지도 않은 나이를 가리킨 것 같습니다. 또한 합법적이지 않게 이혼하고 재혼한 자를 제외합니다. 60세가 되기까지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라면 그녀는 충실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한 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이어야 했습니다. 선한 행실의 예로 자녀들을 양육한 일이나 나그네들을 대접한 것이나 성도들의 발을 씻긴 것이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한 일 등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존경을 받을 신앙의 여성이 참 과부의 자격이 있습니다.
11-15절 젊은 과부들(the younger widows)은 돌보아주어야 할 과부 명단에 올리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이유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배반한다’는 원어(카타스트레니아소시 καταστρηνιάσωσι katastreniasosi)는 ‘음탕하게 된다, 정욕적이게 된다 to wax wanton’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젊은 과부들이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자들이 생기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과부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환갑 전의 과부들은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는데도 스스로 독신(獨身)을 서약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15절에 어떤 과부는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탄(Σαταν)에게 돌아갔다’는 원어(엑세트라페산 오피소 ἐξετράπησαν ὀπίσω, turned aside)는 ‘사탄을 따라 치우쳤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혹 사탄의 시험을 잠시 받을 수 있을지라도 결코 사탄의 지배를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건져 자기의 품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사탄을 따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며 진리의 정로(正路)에서 치우쳐 나갑니다.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여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16절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let not the church be charged).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라.” 믿는 성도에게 과부 친척이 있으면 그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 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 목회자에 대한 태도(딤전 5:17-25)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 왜냐하면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기 때문이라. 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17-18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왜냐하면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기 때문이라.” 교인들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을 해야 하는데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회자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권면합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목회자들로 더욱 존경하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인들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회자들을 더욱 존경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복음의 일꾼들을 물질적으로 공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라는 말(the scripture 헤 그라페 ἡ γραφή he graphe)는 단수명사로서 여러 개의 책들로 구성된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합니다(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구약 39권의 책들과 신약 27권의 책들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한 권의 성경”으로 성경의 저자는 한분이신 성령님이시며 이를 40여 구약 인물과 10여 신약 인물을 통해 주신 생명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일렀으되’(For the scripture saith, 레게이 헤 그라페 λέγει ἡ γραφή, legei he graphe) 즉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성경을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입니다. 실상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성경이 말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Thou shalt not muzzle the ox when he treadeth out the corn.’는 말씀은 신명기 25:4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물론 일차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복음 사역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인데 눅 10:7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과 짝을 이룹니다. 목회자에게 반드시 사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 사역자들에게 드리는 재정 지원을 월급이나 연봉(salary)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사례금(gratuity)이라 합니다. 목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월급은 일을 다한 후 받는 삯인데, 사례비는 ‘목양을 잘해 주세요’며 미리 드립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이를 감사히 받고 열과 성을 다해 목회를 해야 합니다. 사례비에서 혹시 남으면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만약 목회자에게 사례비를 드리지 못하면 목회자는 생활 때문에 목양 대신 세상의 직업이나 일을 하여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목양을 하시지 못하기에 영적 양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목회자는 마땅히 사례비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일하는 소에게 먹을 것을 시간마다 제공해야 하는 것으로 예증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도 재정적인 후원으로 복음을 전하며 선교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직원들이나 노동자에게도 반드시 임금을 그때그때 지급해야 합니다.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고 먹을 양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19-20절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목사와 장로는 중요한 직분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송사(lawsuit)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장로들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송사는 경솔히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신중하게 또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20절에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범죄한 자들’(투스 하마르타논타스 τοὺς ἁμαρτάνοντας tous hamartavnontas)의 원어는 현재분사로서 ‘계속 범죄하는 자들’이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현재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다른 이들에게 그 죄가 전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는 공개적으로 책망받아 회개하게 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그 책망을 인신공격이나 인격모독으로 생각하여 불쾌하게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입니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책망받는 그 죄를 즉시 회개하며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범죄할 수 있습니다. 창피를 당하며 정죄당할 때 오히려 좋은 기회를 삼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도 나단 대언자의 방문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고범죄(알고 지은 죄 presumptuous sins)를 용서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님의 인자를 따라 제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의 많은 긍휼을 따라 제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저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우슬초로 저를 정결하게 하소서. 제가 정하리이다. 저의 죄를 씻어 주소서. 제가 눈보다 희리이다…주님의 얼굴을 제 죄에서 돌이키시고 제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제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제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2, 7, 9-10)
21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천사들 중에는 타락한 천사들도 있지만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천사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일을 받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들은 아무 일에도 편견이 없어야 하고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일꾼들은 정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범사에 공명정대하며 공평해야 하며, 모든 불의와 불공정 및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의 재판 회의는 바르고 공평하며 양심에 기초한 회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원고와 피고가 다 충분히 발언할 기회를 얻어야 하며 충분한 소명의 기회를 주어 억울함이 없어야 합니다. 잠 18:17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He that is first in his own cause seemeth just; but his neighbour cometh and searcheth him.”고 가르칩니다.
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안수 lay hands’는 안수받는 자를 성별되이 구별하며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축복하는 기도입니다. 안수할 때 안수하는 자는 자기의 영과 혼을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쏟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심장한 행위가 경솔하게(suddenly)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수하기 전에 철저하게 회개하도록 해야 하며, 자격을 엄격하게 심사하며, 검증한 후 하자가 없을 때 귀한 직분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 neither be partaker of other men’s sins”는 말씀(메데 코이노네이 하마르티아이스 알로트리아이스 μηδὲ κοινώνει ἁμαρτίαις ἀλλοτρίαις)은 ‘다른 이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뜻입니다. 죄는 전염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시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를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자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죄에 참여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친한 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범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keep thyself pure”는 말씀은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 적용이 되는 권면입니다. 이 세상에는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이단 사설들이 많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악된 풍조들과 일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이미 법적으로 깨끗케 되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23절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이 아마 위병으로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고후 12:7), 만성적 질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목회자나 성도에게 고난은 결코 불행의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와 복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며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되며 더욱 성결해지며 더욱 천국만 바라보게 됩니다. 위장병 치료를 위해 포도주(wine 오이노스 οἶνος)를 권합니다. 약주의 개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적당량의 포도주를 마시면 위액분비가 증가하므로, 감정적인 긴장에 의해 위액분비가 안 되는 환자에게는 식전의 포도주가 효과적이랍니다. 거기다 포도주의 페놀 화합물은 살균작용이 있어서 경련성 변비, 대장염, 설사 등 위장관의 감염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포도주의 산도는 위산과 비슷하고, 적은 양으로 타액 분비를 촉진하고 위장운동을 자극하며 변비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들도 음주를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홍수 후 포도주로 인해 실수를 하였고(창 9:20-21) 솔로몬의 잠언에서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잠 23:31-32) 권면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24-25절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사람들의 죄는 먼저 혹은 나중에 드러나 재판정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전 12:14)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은밀한 구제도, 무익한 말 한마디도 다 갚음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3-4; 12:3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관리를 합시다. 고후 13:5의 말씀대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선한 행실의 증거를 날마다 실천하며 사탄, 시험, 죄악에서 벗어나 진리, 빛, 사랑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시며, 또한 말씀과 가르침에 전념하시는 목회자를 잘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1-42) 말씀을 기억하며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사랑과 정의 주님, 저희들로 하여금 매일 매 순간 경건과 성별의 생활로 인도하옵소서. 무궁한 태양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는 말씀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게 하시며 신실하고 착한 청지기로 주님만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8월을 마무리 짓고 9월을 맞이하여 “믿음의 달”로 지키며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한복음 12제자 성경공부] 신중한 사람 빌립(요한복음 1:43-46)반응형
디모데전서 강해
디모데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2년 3월 16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다른 교훈을 경계함 2장: 기도와 선행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6장: 자족하는 생활
서론 디모데전서의 저자 는 바울이다(1: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본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Stromata , 2. 11; 3. 6). 터툴리안도 본서를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의 말이라고 말했다( On Prescription against Heresies , 25). 본 서신의 저작 연대 는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만일 바울이 주후 62년경에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에베소 부근에서 약 1년간 일하고 그 후 서바나에서 약 2년간 일하였다면, 그는 마게도냐로 돌아오는 길에 어디에서 본 서신을 썼을 것이다(딤전 1:3). 디모데전서의 특징적 주제 는 목회 교훈이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와 디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목회서신’으로 불린다. 그것은 이 서신들이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특히 이 서신들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좋은 일꾼, 충실한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서신들은 목회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많은 진리와 교훈을 준다. 디모데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1장, 다른 교훈을 경계함 2장, 기도와 선행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일들 6장, 자족하는 생활 1장: 다른 교훈을 경계함 1-11절, 다른 교훈을 경계함 [1-2절]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이사야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시지만,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도 구주이시다. 세상에는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돈이나 세상 권세는 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말했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라고 말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과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이며 사람은 죄의 결과로 온갖 불행한 일들과 사망과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죄와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 다른 그 어떤 이도 우리를 죄와 불행에서 건져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우리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우리 소망이신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증거하신 후 승천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악인들은 공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것이나, 의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골 1:28)이시며 ‘복스러운 소망’이시다(딛 2:13).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주 예수께만 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빨리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늙고 병들고 쇠약한 시간이 곧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거나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인데(롬 1:1) 하나님께서 ‘너는 사도가 되어라’고 명령하시자 그는 곧 순종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한 것처럼(사 6:8), 베드로가 갈릴리 해변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를 따른 것처럼(마 4:19-20), 바울도 그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자인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라고 말하였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엡 2:8).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다.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혹은 믿음 안에서 아들로 여겨졌다는 뜻일 것이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하다. 육신적 가족관계보다 영적 가족관계는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3:33, 35). 교회는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날마다 부족과 실수를 씻음 받고 신앙생활하며 조금씩 조금씩 성화(聖化)를 이루어 간다. ‘평안’은 죄씻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며 또 거기에 더하여 주시는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도 포함한다. 사도 바울의 축복의 기도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복이며 우리 모두가 항상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바이다. [3-4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오이코노미아 )[경영, 섭리, 뜻]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다. 교사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했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른 교훈은 금지되어야 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교훈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교훈에 있다. 교회는 교훈의 통일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을 말한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과의 일치이다. 바른 교훈의 기준은 성경이다. 신구약성경만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다. 물론, 성경이 유일한 규범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객관성 있는 바른 해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신화나 족보 이야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즉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과 사실들의 말씀들이다. 그것은 신화나 허구가 아니고 사실들이다. 족보는 육신적 혈통을 말한다. 그것이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으나, 진리의 보존을 보장하지 못한다.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르지만, 진리 사상으로 말하면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였고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교훈의 계대(繼代)이다. 사실상, 육신적 족보는 헛되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는 사도적 교훈을 가진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참 계승자이다. 사도 바울은 신화나 족보 이야기 같은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죄인들을 향한 구원의 뜻을 가리킨다. 그 뜻이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진행됨을 말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구원 얻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 얻은 성도가 믿음에 굳게 서고 온전한 성화에 이르는 것이다. 참된 교훈은 우리로 믿음에 굳게 서게 한다. 그러나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믿음에 유익을 주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다. 변론은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한다. 그런 변론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고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5-7절] 경계( 파랑겔리아 )[명령,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경계의 목적’ 즉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다.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하고 죄를 씻음 받은 마음을 가리킨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힌다. 그러나 회개와 죄씻음을 통해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고 또 계속 씻음 받음으로 깨끗함을 유지한다.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력을 가리킨다. 양심은 죄로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진실한 순종생활로 선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거짓 없는 믿음이란 모양만이 아니고 작을지라도 진실하게 믿기 시작한 믿음을 가리킨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참 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이웃사랑은 도덕법의 완성이다. 구원 얻은 자의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와 교훈의 목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바른 말에서 떠나 헛된 말들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 아니고 잘못된 교사들이었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위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다. [8-11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베벨로스 )[속된](pro- fane)(KJV, NASB) 자며 아비를 치는 자( 파 트롤로아스 )[아비를 죽이는 자](patricide)와 어미를 치는 자( 메트롤로아스 )[어미를 죽이는 자](matricide)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동성애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인신매매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건전한] 교훈을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저 율법교사들처럼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 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 진리에 맞게 적용한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다 유익하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의인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롬 3:20). 바울은 열다섯 가지의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불법한 자 즉 율법을 거슬러 행하는 자, 복종치 않는 자 즉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않은 자, 망령된 자 즉 세속적인 자, 아비를 죽이는 자와 어미를 죽이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동성애자,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죄인들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바른 교훈 곧 건전한 교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이다. 그러나 불건전한 율법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충돌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의의 표준으로서 또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의를 통해 왔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을 따라 섬긴다(롬 7:6; 8:4, 13-14).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구원의 목표가 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구해야 한다. 2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얻었으며 평안을 얻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의 확신과 소망의 견고함과 성화를 이루며 고난과 수고의 세상 현실에서 낙심치 않고 평안을 유지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교훈을 조심해야 한다 (3절). 바른 교훈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으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의 교훈이다. 다른 교훈은 이 교훈 안에 거하지 않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문제 같은 것으로 변론하는 것이다. 신학적 토론은 필요하지만,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교훈 안에서 경건과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바른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5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구원 얻은 신약성도들에게도 경건과 의와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특히 율법을 잘못 사용하지 말고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생활의 바른 지침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고, 반율법주의는 도덕법이 여전히 성도가 지켜야 할 생활 규칙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이다. 12-20절, 감사와 찬송과 당부 [12-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暴行者)[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불신앙 중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비방하고 핍박하고 폭행했던 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폭행했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불신앙 중에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하였었다.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주의 긍휼과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주셨다. 구원의 은혜는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또 주 예수님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죄인 바울이 구원을 얻었고 사도의 직분까지 받았다는 것은 주 예수님의 크신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는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마음을 가졌었다. 주께서는 충성된 마음을 좋게 여기시는 것 같다. 주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신 후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는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충성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직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자기의 직분과 직무를 잘 이해하고 겸손히 충성하는 것이다. [15절] 미쁘다[믿을 만하도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 )[전적으로 받을 만한](KJV, NASB, NIV)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우두머리]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 신실한 말씀이요 사람들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에 참으로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유대인 청년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 곧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신적인 구주를 약속하였다(사 9:6; 미 5:2). 바로 그 약속된 신적 구주께서 오신 것이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셔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사 53:5) 그들을 위해 그 몸이 찔리시고 상하시는 고난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비방하였고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모든 죄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죄 중에도 큰 죄이다.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때문에’라는 말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라는 뜻 같다. 구주 예수께서 죄인들의 우두머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주께서 그에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죄인들의 괴수 같은 큰 죄인이 주의 긍휼을 입어 구원 얻었으므로,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다. 어떤 크고 심각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17절] 만세의[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전통사본)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섭리자 곧 통치자이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원하시는 모든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그는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썩지 않으신다. 모든 피조물은 다 죽고 썩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보이지 않으신다. 그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다. 그는 모든 존재 세계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홀로 하나이시다.’ 세상에는 한 하나님께서 계신다. 다른 신들은 모두 가짜이며 헛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 거짓된 우상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열거한 후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다. [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KJV, NASB, NIV). ‘그것들로’라는 말은 그가 전에 그에게 주었던 예언들이라는 뜻이다. ‘예언들’은 하나님의 권위로 주신 교훈들을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진리와 의를 위한 싸움이며 교회를 위한 싸움이다. 우리의 몸에 있는 죄악성(갈 5:17)은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며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이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도 싸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도 당한다(요 16:33; 딤후 3:12). 더욱이, 사탄과 악령들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대적한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과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에베소서 6:17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검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구약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마귀를 물리치셨다(마 4:4, 7, 10). [19-20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 싸움에 지면 믿음을 잃고 불신앙과 죄에 떨어진다. 이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했다. 그것은 개인적 배교와 변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 복음 신앙, 성경적 신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착한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음으로써 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인신 공격이 아니다. 이미 시행된 권징을 알리며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 출교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이지만, 교회 밖은 사탄이 활개치는 사탄의 세계이다. 요한일서 5:19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지만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고 말했다.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보이며 권징을 집행한 자가 그 자신임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당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주신 영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이 권위를 가지고 권징을 시행한다. 권징의 목적은 그들로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징계를 받는다’는 원어( 파이듀도시 )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배운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KJV, NASB, NIV ). 그들은 진리를 비방하고 참된 믿음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좁은 길보다 포용주의를 좋아하고 타협적인 길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제명 출교의 권징을 통해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시다.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만세의 왕, 영원하신 왕,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썩지 않고 보이지 않고 홀로 하나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철학자들과 같다. 철학은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삶의 의미, 죽음과 그 너머 등에 대해 질문하지만, 참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믿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그런 물음들에 대해 대답을 얻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구주이시다. 15절, “믿을 만하도다, 전적으로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의 괴수 바울을 구원하셨다. 그는 그가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것이다. 또 그는 핍박자 사울을 불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는 오늘 우리도 그의 긍휼과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영적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18-19절,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었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우리는 믿음에서 떠난 배교와 변절에 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죄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싸워 이겨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잘 지켜야 한다. 특히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지켜야 한다. 2장: 기도와 선행 1-8절, 기도에 대한 교훈 [1-2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앞장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에 연결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측면들을 표현한다. 특히 ‘도고’라는 원어( 엔튜크시스 )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이든지 모르는 사람이든지 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즉 오늘날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 등을 위해, 그들의 구원과 그들의 바른 직무 수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셨다(렘 29:7). 사람이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나라가 경제만 성장하면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경건과 도덕성이 중요하다. 나라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 받고 구원 얻어 새 사람이 될 때, 그들을 통해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정치, 의롭고 선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때 나라가 평안하게 될 것이다. [3-4절] [이는](전통사본)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것임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사람이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공의로 판단하시되, 그 가운데서 그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율법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증거한다. 에스겔 33:11도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아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제한적이다. 그는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 그 선택된 수는 확실하고 고정되어 있고 불변적이다. 그는 그들만 구원하기를 뜻하시며 또 그들만 구원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3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5절] [이는] 1)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예수이심이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밝히 계시된 진리이다(출 20:3; 신 6:4; 사 43:10-11; 44:24; 46:9; 고전 8:6; 엡 4:6). 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뿐이시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다(행 4:12). [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증거될 것이었도다]. ‘속전’(贖錢)이라는 원어( 안티뤼트론 )는 ‘대속물’과 같은 뜻으로 죗값을 의미한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토 말튀리온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 )는 원문은 ‘정한 때에 증거될 것이었다’라는 뜻이다. 그 정한 때는 예수께서 오시는 때 곧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실이 예언적으로, 예표적으로, 암시적으로 증거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가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실제로 지불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다는 표현에 대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께서는 택한 자들의 죗값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과 충돌되는 생각이다. 성경은 선택과 예정의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요 6:39, 44; 롬 9:10-18; 엡 1:4-5, 11).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택한 자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면, 이제 악인들을 위한 지옥 형벌이 남아 있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결국 다 구원 얻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서 영생에 이를 자들이 적으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서 멸망에 이를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그러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贖錢)으로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은 대략적, 제한적 의미로 본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에서 ‘모든’은 항상 완전한 의미에서 ‘모든’이 아니라, 대략적, 제한적 의미의 ‘모든’일 경우가 많다. 예배가 끝난 후 교우들이 돌아가고 몇 명이 남았을 때, 우리는 다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또 물병에 물이 조금 남았을 때 우리는 물을 다 마셨다고 표현한다.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사용한 ‘모든’이라는 말은 완전한 의미가 아니고 대략적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의 ‘모든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어렵다. 4절의 ‘모든 사람’도 대략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4:15이나 5:20과 디모데후서 1:15의 ‘모든 사람’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대략적, 제한적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들, 오직 그들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다는 복음 진리를 위하여라는 뜻이라고 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전파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선포자, 설교자라는 뜻이다. 그는 특히 이방인들을 위해 이 진리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8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거나 죄를 품고 기도하면(사 1:15; 59:2)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또 우리는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교회를 위해, 목사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 국회의원들과 법관들과 온 백성을 위해, 또 우리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원하신다 (4절). 이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5절,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얻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전(贖錢)이 되셨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1절).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장관들과 국회의원들과 법관들과 온 백성을 위해 또 우리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9-15절, 여자들에 대한 교훈 [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코스미오스 )[단정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바른 정신, 절제]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성도는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절제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단정한 옷은 음란하거나 혹은 호화로운 복장과 대조된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움과 대조된다. ‘정절’이라는 원어( 소프로쉬네 )는 ‘바른 정신과 절제’를 뜻한다. 그것은 생각 없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자의 인격적 아름다움은 단정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정신과 절제심 있는 말과 행동에 있다. 잠언 11:22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또 여성도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자신을 단장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여성도는 외적인 단장에 힘쓰지 말라는 교훈이다. 성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또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실, 외적인 단장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머리와 몸을 지나치게 단장하는,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단장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성도의 참된 단장은 선행의 단장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적 단장이며 인격적 단장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선한 인격이 되어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단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오직 육신적인, 물질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아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헛되며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11-12절] 여자는 일절[일체] 순종함으로( 파세 휘포타게 )[온전한 순종으로] 종용히[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조용]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내들이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엡 6:24). 순종은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아름다운 덕목이다. 물론, 남편이 자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편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이지만, 여자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여자로서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야 한다.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순종을 실천하는 방식을 보인다. ‘조용히’라는 말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순종은 조용히 행하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불평과 불만의 말을 하기 쉽고 그것은 순종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순종은 자신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과 순종은 다르다. 토론하고 변론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고 순종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성도들은 조용히 배우며 범사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여성도들이 교회에서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은 목사의 직과 장로의 직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여성도들이 목사의 직과 장로의 직에서 제외됨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 전해진 교훈, 즉 하나님의 명백하고 영속적인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했다(고전 14:34-38). 성인 여성도들을 위한 권찰들이나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사들은 목사와 당회의 감독 아래 있는 보조자들이므로 이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이런 목회 협력자들은 목사의 성경적 교훈과 당회의 바른 치리의 권위를 거슬러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질서이며 목사와 장로들에게 주신 권위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의 교훈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는 교회들과 교단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은 어떤 이유와 변명을 든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기는 잘못된 일이다. [13-14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고 또 그가 여자를 만드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창조의 질서와 여자 창조의 목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 하지 말고 조용히 배우며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 때문에 왔다.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했고, 그 열매를 자기 남편에게도 줌으로 남자도 범죄케 되었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류의 타락은 첫 사람 아담의 아내 하와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여자는 그 일에 큰 책임을 가진다. 그러므로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고 또 자기 남편을 범죄케 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다. 즉 여자는 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바른 정신, 절제]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자녀 출산은 여자의 의무이며 특권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매우 복된 일이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자는 창조의 질서 때문에 또 범죄의 책임 때문에 조용히 배우며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여자가 만일 바른 정신과 절제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좋은 자녀들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자녀들과 남자들을 길러낸다. 이 사실은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증거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성도들은 머리나 장신구들로의 외모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을 힘써야 한다. 그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절제로 또 선행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둘째로, 여자의 목사직과 장로직은 허용되지 않는다. 교회에서 여자가 성경말씀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 즉 목사직과 장로직을 행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 때문에와 범죄의 책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이다. 여자들은 오직 조용히 배우며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여자는 절제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여자가 자녀를 출산하여 키우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훌륭한 남자의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1-7절, 감독의 자격 [1절] 미쁘다[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오레고 [사모한다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그는 선한 일을 열망하는 것이라]. ‘감독’은 ‘장로’와 동일한 직분이며(행 20:17, 28; 딛 1:5, 7) 목사와 치리 장로를 다 포함한다(딤전 5:17).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교인들을 돌보며 다스리는 직분이다. 교회의 목회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장로들과 함께 교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하며 심방에 힘써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선한 일을 열망할 것이다. 감독의 직분을 사모하는 자는 선한 일을 열망하는 것이다. 또 목사와 장로들의 직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지교회들은 목사를 청빙할 때나 장로들을 세울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2절부터 7절은 감독 즉 목사와 장로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16가지를 말한다. [2절]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네팔레오스 )[맑은 정신을 가지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소프론 )[건전한 정신을 가지며] 아담하며( 코스미오스 )[품행이 단정하며, 존경할 만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원문에는 데이 dei’ 라는 말이 맨 앞에 나온다. 그것은 “[감독은] 이러 이러한 자이어야 한다(must be)”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는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첫째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여러 요건들을 포괄하는 뜻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사상적인 면에서나 인격적이고 생활적인 면에서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격적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윤리적으로 온전한 인격자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다. 감독은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결혼이 감독의 자격요건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감독은 창세기 2장에 계시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하나님의 뜻과 결혼 서약에 충실한 인격이어야 할 것이다. 부부관계가 좋은 것은 확실히 좋은 인격자의 모습이다. 감독은 또 맑고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절제해야 한다. 감독은 또 품행이 단정하여 존경할 만하여야 하고 또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자라야 한다. 나그네들에게 후한 사람은 확실히 좋은 인격일 것이다. 감독은 또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 감독은 교인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 자이므로 가르치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감독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고 잘 배우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디도서 1:9는, 장로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3절]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남을 때리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전통사본) 오직 관용하며( 에피에이케스 )[온유하며, 친절하며, 예의가 있으며,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감독은 또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술을 즐기면 술 취하기 쉽고 술 취하면 건전한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고 범죄하기 쉽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일이며 술 취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엡 5:18; 고전 6:10; 갈 5:21). 감독은 또 남을 때리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부모가 자녀에게 벌을 주는 것은 이런 범주에 들지 않지만, 부당한, 지나친, 비인격적 체벌은 학대이며 나쁜 일이다. 감독은 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 더러운 이익은 뇌물이나 탈세 등처럼 불의하고 불법한 방법으로 얻는 물질적 이익을 말한다. 적은 소득이 의(義)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 성도는 정당한 방식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감독은 또 관용하고 온유하며 친절하고 예의가 있어야 한다. 온유함과 친절함은 예수님의 성품이며 성도가 갖추어야 할 좋은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감독은 또 다투지 않아야 한다. 다툼은 교만과 욕심과 시기와 오해에서 나온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는다. 디모데후서 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물론, 진리 문제에 관해서는 선한 싸움이 필요하다. 감독은 또한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4).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했고(골 3:5) 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4-5절]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 셈노테스 )[엄숙함, 진지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감독은 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진지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 십계명 중에서 인간 관계의 첫 계명은 부모 공경에 관한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바르게 된 가정의 모습이다. 가정은 사람의 일차적인 인격 훈련장이다. 가정은 작은 교회와 같다. 사람이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하여금 진지하게 복종하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자격이 부족하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 목회를 하기 전에 먼저 자기 가정 목회를 잘해야 할 것이다. [6절]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감독은 또 새로 입교한 자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 입교한 자’라는 말은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 신앙생활은 연륜이 필요하다. 신앙 인격은 최소한 몇 년 간의 단련이 필요할 것이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는 것은 그가 교만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만은 매우 무서운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를 정죄하는 죄악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치명적 해가 된다. 사람은 교만하면 망한다(잠 16:18). 신앙 훈련은 겸손 훈련이다. 겸손은 성도에게 매우 귀한 덕이다. 그러나 겸손한 인격은 몇 년 간의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성화(聖化)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과정이다. 성숙한 신자는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인다. [7절]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감독은 또 외인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 ‘외인’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 곧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감독은 그 인격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믿지 않는 주위의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그는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다”라는 증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신이나 그가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인들과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마귀의 올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문은 감독 곧 목사와 장로의 자격 요건에 대해 16가지를 열거하였다. 그것은 목사와 장로의 직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목표와 교훈이 된다. 첫째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인격의 성숙함을 가리킨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화의 목표는 온전함이다. 둘째로, 감독은 한 아내를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어야 한다. 셋째로, 감독은 맑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넷째로, 감독은 말과 행동에 자제심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다섯째로, 감독은 품행이 단정하고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여섯째로, 감독은 나그네들을 대접할 줄 하는 자이어야 한다. 일곱째로, 감독은 성경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여덟째로,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아홉째로, 감독은 다른 사람을 때리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열째로, 감독은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열한째로, 감독은 온유하고 친절하고 관용하는 자이어야 한다. 열두째로, 감독은 다투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는 교만하지 않고 사사로운 욕심과 남에 대한 시기와 오해를 버려야 한다. 열셋째로, 감독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열넷째로, 감독은 먼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진지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 사람이 자기 가정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믿는 가정들의 모임인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자격이 없다. 열다섯째로, 감독은 새로 입교한 자이어서는 안 된다. 새로 입교한 자는 교만하기 쉽다. 감독은 수년 간 신앙 훈련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 열여섯째로, 감독은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증거를 얻은 자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감독, 즉 목사와 장로는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직분이므로 그 자격이 엄격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해야 하고 이런 점들을 우리의 생활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8-13절, 집사의 자격 [8절]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셈노스 )[진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하고](Thayer, BDAG) 일구이언(一口二言)[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이익]를 탐하지 아니하고. ‘집사’는 재정 지출의 일을 하고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하는 직분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었으나(행 2:41, 4:4) 단지 일곱 명의 집사들을 세웠다(행 6:3). 그들의 협력으로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8-10절과 12절은 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7가지를 말한다. 집사는 우선 진지하고 (KJV) 품위가 있고 (NASB) 존경할 만한 (NIV) 자이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을 추천하였다(행 6:3). 집사는 다른 성도들에게서 칭찬을 듣고 좋은 평판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집사는 또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않는 자, 즉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성도들의 기본적 덕목이어야 한다. 성도들의 말은 한결같아야 한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일구이언하는 자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 집사는 또 술에 인박이지 않은 자이어야 한다. 사람이 술에 인박이면 술 취하게 된다. 술 취함은 그에게서 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빼앗아가고 그로 하여금 실수하고 범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함을 엄격히 금했고,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일이며(엡 5:18)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죄라고 정죄하였다(고전 6:10; 갈 5:21). 집사는 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건전한 인격은 돈 관계에서 깨끗한 자이다. 돈 계산이 흐리거나, 돈을 꾸고 갚지 않는 자는 인격에 결함이 있는 자이다. 특히, 집사는 헌금을 계수하고 지출을 처리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돈 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한다. 도둑질은 큰 죄악이며 인격의 큰 결함이다. [9절]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집사는 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깨끗한 양심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죄씻음과 함께 생긴다. 믿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 믿음은 자기 자신만 아는 것이다. 물론 그 믿음은 그의 인품과 행실로 나타날 것이다. 모든 성도는 이러한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10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사도 바울은 교회가 집사 후보자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한다. 사람은 겉보기와 속이 다를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은 외모로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험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집사로 세우기 전에 교회는 먼저 그 후보자들에게 임시로 이런 저런 일들을 맡겨보고 그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서리집사’직의 설립 동기이었을 것이다. 그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여 그들의 신앙사상의 건전함과 도덕성과 인격의 덕스러움이 확인되면, 교회는 그들을 집사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11절] 여자들( 귀나이카스 )[아내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셈노스 )[진지하며, 품위가 있으며, 존경할 만하며]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맑은 정신을 가지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여자들’ (NASB) 은 장로들과 집사들의 ‘아내들’ (KJV, NIV) 을 가리킨다고 본다. 직분자의 직무 수행에는 남자들의 믿음과 인격성뿐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의 헌신과 덕스러운 협조가 매우 필요하다. 우선, 아내들은 진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그들은 또 참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참소하는 것은 남을 악하고 거짓되게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인격의 모습이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에 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생활에서 말의 부덕함은 직분자의 신임성을 손상시킬 큰 문제이다. 그들은 또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아내들은 맑은 정신과 절제심을 가지고 남편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들은 또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 충성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충성은 믿을 만함이다. 교회봉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필요로 한다.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그런데 남자들의 충성은 아내들의 충성스러운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 아내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충성스러울 때 남자들은 하나님께 더욱 힘있게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 사도 바울은 집사의 자격 요건을 다시 말한다.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것은 집사가 남편으로서 오직 한 아내에게 마음을 두고 그를 사랑해야 함을 말한다. 부부관계의 순결과 사랑은 좋은 인격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음란은 인격의 큰 결함이며 큰 죄악이다. 집사는 또 자녀들과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부모들의 바른 교훈과 모범이 요구되는 일이다. 성경말씀으로 자녀들을 교훈하고 경건하고 선한 모범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집사가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서 존경을 받는 자라면, 그는 좋은 신자요 좋은 인격자일 것이다. [13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 밧모스 ) [지위, 단계, 등급]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집사직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등급을 얻는다. 즉 그들은 주 안에서 더욱 인정받는 자들이 된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 영적 성장은 믿음의 성장이다. 모든 신자들이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선한 봉사를 통하여 큰 담력을 얻은 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좋은 지위와 큰 담력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문은 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7가지를 열거한다. 그것은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에게 생활과 봉사의 목표와 교훈이 된다. 첫째로, 집사는 진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집사는 성도로서의 진지함과 품위를 갖춘 자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집사는 일구이언(一口二言) 즉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 하지 않는 자, 그의 말이 늘 한결같은 자, 늘 진실한 말만 하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로,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 술 취함은 실수하고 범죄하는 큰 죄악이다. 넷째로, 집사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 그는 돈 사랑의 마음을 버린 자, 적게 벌어도 정직하게 버는 자이어야 한다. 다섯째로, 집사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속죄 신앙을 가진 자, 중생의 체험을 한 자이어야 한다. 여섯째로,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일곱째로, 집사는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 집사직을 잘한 자는 아름다운 지위와 주께 대한 믿음의 큰 담력을 얻을 것이다. 또 본문은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서도 4가지를 열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진지하고 품위가 있고 존경할 만한 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남을 악하고 거짓되이 비난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로, 그들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넷째로, 그들은 모든 일에 충성된 자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도 좋은 인격이어야 한다. 14-16절, 경건의 비밀 [14-15절]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헤드라이오마 )[지주(支柱)(stay, prop, support)이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지주(支柱)]’라고 표현된다. 지주는 지탱하는 것(줄, 기둥)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집, 곧 그가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집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또 이 집은 하나님께서 계신 집이다. 고린도전서 3:16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성도 개개인 속에도, 또 회중 전체 속에도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뜻과 의향과 규례와 방침대로 운영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과 방침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는 교인들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수단에 불과하지 성경의 진리와 독립하여 사람들의 의견와 뜻을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모으신 모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죄와 파멸에서 불러내신 구주이시고 우리를 만세 전에 그의 백성, 그의 양,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때가 되어 구원하셨다.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지주 支柱]이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과 임무를 보인다. 기둥과 지주는 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기둥과 지주가 약해지면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교회가 약해지면 하나님의 진리가 약하게 증거될 것이다. 교회가 흔들리면 하나님의 진리가 흔들릴 것이다. 교회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진리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하며 진리를 철저하게 보수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인 신구약성경 66권의 말씀을 조금도 양보하거나 가감치 말고 다 믿고 확신하고 소망하며 실천해야 하며 또 다 충실하게 선포하며 가르쳐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교회가 아닐 것이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참된 말씀을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계속 양보한다면, 마침내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배교적인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하나님께서는] 2)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교회가 지키고 전파해야 할 진리는 ‘경건의 비밀’이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귀한 진리들은 참 종교의 내용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할 내용을 이치에 맞게 제시하는 종교이다. 그 진리의 내용들은 크고 놀라우며 사람들에게 논쟁의 여지가 없다. 경건의 비밀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구약성경의 중심이시요 우리의 종교의 중심이시다. 그는 모든 질문의 해답이시요 그 안에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그는 과연 우리의 지혜요 의(義)요 구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 이것이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가장 큰 신비이다.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예수님, 교회가 보존하고 전파하는 진리의 내용인 예수님, 위대한 경건의 비밀의 내용인 예수께서는 본래 신적 인격이신데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영으로’라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성령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KJV, NASB, NIV ). 그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삼일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그의 죄 없으심과 의로우심을 증거하셨다. 그는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의 죽음과 부활이 천사들에게 증거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베드로의 증거대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는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다. 그의 탄생 때에도, 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때에도, 그의 부활 때에도, 그리고 그의 승천 때에도 천사들이 나타나 수종들었다. 그의 재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살후 1:7). 그는 만국에서 전파되셨다. 천사들에게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증거될 복음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벌써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증거하였다(골 1:24).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그는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 그는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시고 온 인류의 구주,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주로 믿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대 민족만을 차별적으로 사랑하시던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온 세계 만민들에게 활짝 열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영혼들을 각 민족, 각 나라에서 수없이 많이 구원해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 부활하신 그는 40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데서 천사들의 증거를 받으며 하늘로 올리우셨다(행 1:9-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은 (1) 그가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과, (2) 그가 지금도 그의 신성(神性)으로, 성령을 통하여 땅 위에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과, (3) 그가 장차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과, (4)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약속대로 성도들을 부활시키며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해준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들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나 하늘의 천사들도 확실히 알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며 친히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이며 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경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인도하시는 교회이다. 둘째로, 교회가 가진 경건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이다. 온 세상에 전파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영광 중에 올리우셨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지주(支柱)이다.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진리들을 세상 끝날까지 굳게 지키고 믿고 실천하며 가감 없이, 주저함 없이 온 세상 만민에게 증거해야 한다.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1-5절, 귀신들의 교훈들을 조심하라 [1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속이는 영들]과 귀신의 가르침[귀신들의 교훈들]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경건의 비밀과 반대되는 것은 배교(背敎) 곧 진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날 것이라는 성령의 분명한 말씀을 전한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 자들이었다. 사도들의 교훈은 성령의 교훈이다. 그러나 사도시대 말기에 이미 배교의 징조가 나타났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하였다(요일 2:18). 배교자들이 따르는 교훈은 ‘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교훈들’이다. 세상에는 항상 악령들의 활동들이 있어 왔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여 아담을 범죄하게 한 자는 바로 사탄이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은 사탄이다(엡 2:2).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자가 사탄이다(고후 4:4). 이단은 속이는 영들의 활동이다.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들과 이념들과 종교들은 귀신들의 교훈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의 교훈들을 좇을 것이지만,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비적 체험을 의존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 교훈에 근거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다. [2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성도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1:5, 19) 범사에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양심이 화인(火印) 맞는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보다 더 심한 상태다. 이런 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고,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분간치 못하게 될 것이다. 양심이 마비된 자는 외식하며 거짓말한다. 이단자들은 그들의 양심이 마비되어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외식은 이중적인 것을 말한다.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것,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척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순종하는 척하는 것, 하나님 없는 세속적 삶을 살면서 경건한 척하는 것, 돈과 쾌락을 크게 여기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척하는 것, 진리를 대항하면서 진리 안에 거하는 척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자들은 귀신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며 성령의 교훈을 저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은 진실하며 진실한 말을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어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시지만, 귀신들은 사람들을 거짓되고 불신앙적이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한다. [3-5절]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사도 바울은 귀신들의 교훈들의 예로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교훈을 들었다. 이것은 금욕주의 사상이다. 그러나 결혼과 음식 먹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일들이며 결코 죄가 아니다. 결혼 제도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신 후에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부부가 되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창세기 1:27-2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 후에도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고 말씀하셨고(창 9:7), 후에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2:17).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하고 복된 제도이다. 먹는 음식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선하다. 창세기 1:29, 31,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산 동물을 채소같이 식물로 사람들에게 주셨다(창 9:3). 예수께서는 무리를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셨다(마 14:19). 율법 아래서는 정결, 부정결의 음식이 구별되었으나, 복음 아래서는 그 구별도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고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고 버릴 것이 없다. 금욕주의는 잘못된 교훈이다. 그것은 구원의 길도, 성화의 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반대되는 불건전한 자기 학대에 불과하다. 절제는 좋은 덕이지만, 금욕주의는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감사함으로 먹고 마시며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한 금욕생활은 죄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골 2:21-23).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몸의 욕심과 죄성을 죽일 수 있다(갈 5:16).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다. 성도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 안에서 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세상에는 귀신들의 교훈들이 항상 있어 왔다. 말세에 배교의 시대에는 그것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것들은 성경 진리에서 떠났거나 성경 진리와 다른 잘못된 사상들과 이념들과 종교들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책인 성경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감치 말고(신 4:2; 계 22:18-19) 오직 성경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교훈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양심에 화인(火印) 맞아 외식하며 거짓말하는 자들, 즉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각종 이단종파들, 특히 오늘날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둘째로, 우리는 결혼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금욕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성도의 성화는 금욕주의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몸의 죄성을 이김으로써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셋째로, 우리는 오직 성경적 교리들과 생활 교훈들 안에 거해야 한다. 신구약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6-10절, 경건 훈련 [6절]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믿음과 좋은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리라]. 디모데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교훈이 귀신의 교훈이라는 분별력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지식을 가지고 한다면, 믿음과 좋은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좋은 교훈의 말씀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성경말씀으로 양육받는 몇 년의 혹은 긴 세월들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7절] 망령되고( 베벨로스 )[속되고, 세상적이고] 허탄한( 그라오데스 )[나이 많은 여자들이 말하는]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귐나제 )[훈련하라]. ‘신화’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 사건들은 신화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속되고 어리석은 신화적 이야기들은, 비록 그것이 육신의 재미와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일지라도,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참된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경건은 곧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경건 훈련이 필요하다. 경건은 훈련이 필요하다. 경건생활은 성도에게 당연한 생활이며 또 진실한 성도라면 다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성도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없다. 아무리 성도라 하더라도, 경건의 훈련을 힘쓰지 않으면 세상 사람처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성경 읽기, 기도 생활, 가정예배,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 예배 시간에 늦지 않는 것, 십일조 생활, 수요일 밤과 금요일 밤 예배나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것, 권찰이나 교사나 찬양대 봉사하기, 전도하기 등은 다 훈련을 통해 더 잘하게 되는 것이다. [8절] 육체의 연습[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은 유익하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빨리 걷기나 달리기나 등산 등을 한다. 몸의 훈련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삶에 국한되고 이 세상의 평안한 생활도 보장하지 못한다. 건강 관리를 잘하던 사람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무서운 질병에 침입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금생의 약속’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평안 등을 가리킨다. 신명기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9:1, 165,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잠언 3:1-2, 7-10,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건강, 치료]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생의 약속’은 영생 복락을 가리킨다. 우리가 경건 생활에 힘쓰면 미래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고린도전서 15: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베드로전서 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후서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9절] 미쁘다, 이 말이여[이 말은 신실하며], 모든 사람들이[전적으로] 받을 만하도다. 경건이 중요하고 복되며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는 말은 신실하고 전적으로 받을 만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섬기는 것이 영생이요 행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복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근본적 진리를 의심치 말고 더디 믿지 말고 전적으로 받아서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경건 훈련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훈련이다. [10절] [이는]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盡力)하는[모욕을 당하는](전통본문) 3)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를 위하여’는 ‘경건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도록 하는 이 일을 위해 수고하고 모욕도 당하였다. 그것은 그와 그의 일행들이 그들의 소망을 돈이나 육신의 쾌락 같은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오늘 우리도 구원하셨고 양육하고 계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경건 훈련을 힘써야 한다. 경건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새벽에든지 밤중에든지 성경 읽고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둘째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몸의 훈련도 약간 유익하지만, 경건은 범사에 그리고 현세와 내세에 유익하다.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현세에서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를 주고 내세에서 확실히 영생을 보장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돈이나 육신의 쾌락 같은 이 세상의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구주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세상적인 것들,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일시적이며 우리가 죽을 때 허무해지고 또 생전에도 재앙의 날에 허무해진다. 하나님만 영원하시다. 11-16절, 목사의 자기 훈련 [11절]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이것들’은 본 서신의 앞에서 가르친 내용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특히 바로 앞에서 말한 금욕주의의 미혹을 받지 말고 참된 경건 훈련에 힘쓰라는 교훈을 포함한다. 본 서신에 주신 하나님의 교훈들은 디모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디모데는 그 진리들을 또 다른 성도들에게 명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다. 특히 ‘명하라’는 말은 이 진리가 신적 권위를 가진 것임을 잘 보인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인간적 권위를 가진 말이라면 명령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는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명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명령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12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전통사본)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청년은 보통 지식과 인격에 부족이 없지 않겠지만, 젊은 사역자인 디모데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하였다. 오늘날에도 모든 말씀 사역자들은 자기 훈련의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로, 말씀 사역자는 말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말은 사람이 가장 실수가 많은 영역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1-2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씀 사역자는 말에 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말씀 사역자는 행실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생명은 삶이다. 참된 신앙은 의롭고 선한 행위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17, 26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말씀 사역자는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이다. 십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네 마음과 네 성품과 네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다. 또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말씀 사역자는 이 일에 본을 보여야 한다. 넷째로, 말씀 사역자는 심령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심령’이라는 말은 생각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말씀 사역자는 생각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말씀 사역자는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성도의 기본적 덕이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믿음이 없으면 죄사함도 구원도 영생도 없다. 이 믿음은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해 강해진다. 말씀 사역자는 믿음이 견고한 자이어야 한다. 여섯째로, 말씀 사역자는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정절’이라는 말은 순결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성 관계에 있어서 깨끗함을 뜻한다. 말씀 사역자는 이성 관계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말씀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통해 받는 모든 교훈에 신임성을 두고 그것을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착념하다’는 말은 ‘집중하다, 전념하다’는 뜻이다. 디모데는 아직 젊어서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지 않을지라도 그의 현재의 상태에서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전념해야 했다. 우선 그는 성경 읽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공적으로 읽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 읽는 일은 자신을 위해 또 교인들을 위해 유익한 일이다. 또 그는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권하고 가르쳐야 한다. ‘권하는 것’은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가리키며, ‘가르치는 것’은 성경말씀을 해석하며 그 중요한 교훈을 설명하고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14절]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소홀히 여기지] 말라. ‘장로의 회’는 오늘날의 노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가 말씀 사역자로 안수받을 때 특별한 은사를 그에게 주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각 사역자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신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이에게는 해외선교의 은사를, 해외선교도 어떤 이에게는 이슬람 지역의 사명을, 어떤 이에게는 공산권 지역의 사명을, 어떤 이에게는 국내의 농어촌 전도사역, 장애인 전도사역, 군 부대 전도사역, 전문인 전도사역 등을 주신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사명을 따라 각각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모든 일’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것과, 성경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말씀 사역에 전념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말씀 사역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 즉 지식의 진보, 입장과 분별력의 진보, 인격과 생활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참된 일꾼은 성화와 직무 수행에 진보를 나타내어야 한다. [16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 자신을 삼가라’는 것은 말씀 사역자의 자기 훈련을 말한다. 이것은 넓게는 모든 성도의 자기 훈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또 ‘가르침을 삼가라’는 것은 말씀 사역자에게 중요한 것이 그의 가르치는 것임을 보인다. 가르침은 단지 가르치는 방법보다 가르치는 내용이 중요하다. ‘이 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앞에서 한 교훈들이 한 번 실천하고 중단될 것이 아니고 계속 실천되어야 할 것임을 보인다.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말씀 사역자의 자기 훈련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것이라고 뜻이다.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느니라.” 말씀사역의 결실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지만 또한 상당히 말씀 사역자의 자기 훈련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말씀 사역자의 꾸준하고 부지런한 자기 훈련이 없다면 영혼 구원의 일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말씀 사역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온전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말씀 사역자는 개인적으로 또 공적으로 성경 읽기와 연구와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 성경 강해를 들음으로 믿음과 인격이 온전해져야 한다. 셋째로, 말씀 사역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 즉 지식과 분별력과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진보를 다른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 생활에 전심전력하여 지식과 분별력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진보를 나타내어야 한다.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1-16절, 과부에 대한 규례 [1-2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말씀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교훈하며 권면할 때 예절과 덕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나이 많은 성도들에게는 꾸짖지 말고 자기의 아버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성도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이 하고, 나이든 여성도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이 하고, 젊은 여성도들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 말씀 사역자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겸손하고 덕스럽고 깨끗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사람을 사람다워지게 하는 것이지, 사람으로 비상식적이고 예절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예절 있고 덕스러운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말씀 사역자들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들은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예절 있게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 [3절]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敬待)하라. ‘참 과부’는 나이가 60세가 넘은 과부로서 그를 돌아볼 자녀나 친척이 없고 평소에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들을 섬기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등의 선한 일들을 행한 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9-10절). ‘경대(敬待)한다’는 원어( 티마오 )는 ‘공경한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물질적 필요를 공급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본문은 교회가 그런 자를 공경하고 물질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교훈한다(16절).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유세베인 )[공경하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부모나 조부모를 공경하며 보답하기를 배우게 해야 하였다. 효도는 제5계명이 가르친 중요한 덕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한 보답이며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일이다. 자녀들은 마땅히 집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는 의와 선을 실천해야 한다. [5-6절]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과부들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한 종류는 과부가 되어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이었다. 이런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외롭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늘 교제함으로 은혜 풍성한 삶을 사는 자이었다. 만일 그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하나님과 천국을 사모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과부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에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사는 자’이다. 그의 처지는 그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남편이 없는 것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할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을 최선용할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이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말한다. 그는 영적 생명, 곧 구원 얻은 생명을 갖지 못한 자이다. [7절]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위의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교훈이 된다. 구원 얻은 우리는 육신에 치우쳐 세상의 헛된 쾌락을 구하며 살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며 천국을 소망하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할 자들이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소망을 저버리고 이 세상에만 치우쳐 산다면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도무지 모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그런 세상적이고 쾌락적인 헛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8절]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것도 중요한 교훈이다. 본절은 신앙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잘 증거한다. 사람이 자기 가족과 친척을 돌아보는 것은 기본적 의무이다. 어떤 자녀나 손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외로운 부모님이나 어떤 가족이나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이다. 그런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이다.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기의 가족을 사랑하고 돌아볼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이런 인간 관계의 의무와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사람들에게 본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9-10절]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초대교회는 구제해야 할 과부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적어도 세 가지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하였다. 첫째로, 나이는 60세 이상이 되어야 하였다. 60세라는 나이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스스로 생활하기 어렵고 또 재혼할 만한 나이도 지났음을 가리킨 것 같다. 둘째로,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이어야 했다. ‘한 남편의 아내’라는 말은 합법적이지 않게 이혼하고 재혼한 자를 제외하는 말일 것이다. 60세가 되기까지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라면 그는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한 자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여러 가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이어야 했다. 본문은 선한 행실들의 예로 자녀들을 양육한 일이나 나그네들을 대접한 것이나 성도들의 발을 씻긴 것, 즉 섬기는 일이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한 일 등을 들었다. [11-15절]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결혼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욕으로 배반한다’는 원어( 카타스트레니아오 katastrhniavw )는 ‘음탕하게 된다, 정욕적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젊은 과부가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들 중에 그런 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보인다. 그런 자들은 처음 믿음, 곧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었을 때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하며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에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첫 신앙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 일에 충실하지 않고 게을러 일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며 해서는 안 될, 남을 비난하는 말이나 한다. 이런 자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꾼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참으로 믿고 구원 얻은 자는 세상적으로 정욕적이고 음란하게 살 수 없다. 세상적으로 정욕적이고 음란한 자는 회개하고 죄를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여 이제부터 예수님만 믿고 섬기며 따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또 참으로 구원 얻은 자는 말에 덕을 세워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지 말고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재혼할 수 있으면 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돌보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정욕적인 죄를 범치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 된다. 남편이나 아내의 사별로 인한 재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정당한 일이다. 성도는 정욕의 죄를 범하는 것보다 재혼하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는 데도 스스로 독신(獨身)을 서약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다. 결혼할 수 있을 때는 하는 것이 좋다. 15절에 ‘사단에게 돌아갔다’는 원어( 엑세트라페산 오피소 투 사타나 )는 ‘사탄을 따라 치우쳤다’는 뜻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는 자는 사탄뿐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혹 사탄의 시험을 잠시 받을 수 있을지라도 결코 사탄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건져 자기 품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사탄을 따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며 진리의 바른 길에서 치우쳐 나간다. 사도 시대에도 가룟 유다처럼 이미 사탄을 따라 바른 길에서 치우쳐 나간 자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여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절]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또 말하기를, 믿는 성도에게 과부 친척이 있으면 그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 과부 곧 아무에게서도 물질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돌아보며 도와주게 하려 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은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들 등 모든 연령층의 교인들을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 1-2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한 가족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큰 가정이다. 둘째로, 교회는 참 과부들을 공경해야 한다. 3절,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敬待)하라.” 참 과부는 나이가 60세가 넘은 자로서 한 남편의 아내이었고 자녀를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거나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등의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이어야 했다(9-10절). 교회는 참 과부들을 도와주고 구제해야 했다(16절). 셋째로, 젊은 과부는 명부에서 제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 정욕에 이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15절). 성도는 처음 믿은 대로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고 육신적 쾌락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정욕적이게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넷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자기 가족들과 친족들을 돌아보아야 하며 자녀들이나 손자, 손녀들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공경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8절,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16절,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17-25절, 목사와 장로에 대한 교훈 [17-18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이는]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하였음이니라]. 본문은 교인들이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란 장로교회 헌법이 말하는 ‘설교 장로들’ 즉 목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본문은 교인들이 그들에게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복음의 일꾼들을 물질적으로 공급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이라는 말( 헤 그라페 )은 단수명사로 여러 개의 책들로 구성된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함을 보인다. 구약 39권의 책들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되며 신약시대에는 신약 27권의 책들도 포함되었다. ‘성경에 일렀으되’라는 원어( 레게이 헤 그라페 )는 ‘성경이 말하되’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을 인격적 존재처럼 표현한 것이다. 실상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이 말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이 말씀은 물론 일차적으로 문자적 의미를 가진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복음사역자들에게 적용한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들 중 누가복음에 나온다. 누가복음 10:7,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 ‘성경에 일렀으되’라고 말하며 인용한 것은 그가 디모데전서를 쓸 당시 이미 복음서들이 성경으로 인정된 것을 보이는 것 같다. [19절]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목사와 장로는 가장 중요한 직분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아야 했다. 신명기 19:15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였다면,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송사는 경솔히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신중하게 또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절] 범죄한 자들( 투스 하마르타논타스 )[계속 범죄하는 자들, 죄 가운데 있는 자들](현재분사)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계속 범죄하는 자들 혹은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문맥상 장로들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꼭 그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현재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다른 이들에게 그 죄가 전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개적으로 책망하여 회개하게 해야 했다. 만일 그가 그 책망을 인신공격이나 인격모독으로 생각하여 불쾌하게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책망받는 죄를 즉시 회개하며 고쳐야 할 것이다. [21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천사들 가운데는 타락한 천사들도 있지만 택하심을 받은 선하고 거룩한 천사들도 있다. 거룩한 천사들은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의 일을 받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말하고 행해야 한다. 주의 종들은 아무 일에도 편견이 없어야 하고 편벽 되지 않게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같이, 주의 일꾼들은 공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범사에 공명정대하며 공정해야 하며, 모든 불의와 불공정을 버려야 한다. 교회에서 재판할 때에는 바르고 공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원고와 피고가 다 충분히 발언할 기회를 얻어야 할 것이다. 잠언 18:17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한다. [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성급히](NASB)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참여하지](KJV, NASB, NIV)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안수’는 안수받는 자를 구별하며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그를 축복하는 행위이다. 안수할 때에, 안수하는 자는 안수받는 자에게 심령을 쏟는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심장한 행위가 성급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안수는 성급히 행해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라”는 말씀( 메데 코이노네이 하마르티아이스 알로트리아이스 )은 ‘다른 이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뜻이다. 죄는 전염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시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자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죄에 참여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친한 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범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말씀은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 적용해야 할 교훈이다. 이 세상에는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이단사설들이 많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악된 풍조들과 일들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 있다. 구원 얻은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이미 법적으로 깨끗케 되었으나 또한 실제적으로도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23절]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 아마 위병은, 사도 바울의 몸의 가시처럼(고후 12:7), 만성적 질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이었을 것이다. 성도에게 고난은 결코 불행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와 복이 된다.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며 더욱 주님만 믿고 의지하게 되며 더욱 성결해지며 더욱 내세 곧 복된 천국을 바라보게 된다. [24-25절]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사람들의 죄는 먼저 혹은 나중에 드러나 심판에 나아간다. 그것들이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전 12:14)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지막 심판자로 오실 우리 주께서는 은밀한 구제나 무익한 말 한 마디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다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4; 12:36).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며 특히 성경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자들을 더욱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말씀을 존중하는 자는 그들을 존중할 것이다. 둘째로, 목사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목사는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고 성급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이의 죄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그는 거룩하고 온전해야 한다. 6장: 자족하는 생활 1-10절, 자족하는 마음 [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주인]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은 종으로서의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의 위치는 ‘자기 주인을 범사에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종의 위치이다. 물론 주인은 종들을 공의로 다스리고 그들을 사랑하며 배려해야 한다. 종이 믿는 성도인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주인에게 더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을 더 존경하고 도우며 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그 제도의 폐지는 오랜 세월을 요했다. 그러나 사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본문의 교훈은 오늘날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도 적용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범사에 존경하며 그의 지시를 즐거이 순종해야 한다. [2] 믿는 상전[주인]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주인]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믿는 성도인 종은 자기의 주인이 믿는 성도일 경우 그를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유익을 받는 자가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직장에서나 어떤 조직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는 물론이고 믿는 성도들 간에 서로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 [3-5절]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휘기아이논 )[건전한]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테 캇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 )[경건에 일치하는 교훈에](KJV, NASB)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전통본문). 4) 본문은 ‘바른 말’과 ‘다른 교훈’을 대조시킨다. 바른 말은 건전하고 유익한 말이다. 바른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나 경건에 일치하는 교훈 즉 경건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사상과 교훈은 성경적으로 바르고 경건한 사상과 교훈이어야 한다.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에 생각을 두지 않는 자는 교만하며 무지하고 싸움을 일으킨다. 그는 변론하고 언쟁하고 투기하고 분쟁하고 남을 비방하고 다툰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그는 생각과 마음이 부패하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 즉 사욕(私慾)을 품은 자이다. 싸움은 결국 사람의 욕심에서 발생한다. 야고보도 말하기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욕심]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하였다(약 4:1-2). 바울은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첨가하여 말했다. 교제의 문제는 중요하다. 악은 누룩처럼 퍼진다. 악을 용인하며 악한 자들과 자꾸 교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에 물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땅의 것을 탐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들과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한 자들은 우리의 전도와 권면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6-8절]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분명히] 5)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지족(知足)한다는 것은 욕심을 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정상적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미 4: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증거하였었다. 경건을 물질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악하고 헛된 일이지만, 자족하는 참 경건은 큰 유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라는 경건한 성도에게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고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성도가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가 출생 시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고 별세 시 역시 분명히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 묻힐 때 이 세상에서 모았던 재물을 가져갈 수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이며 백년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가진 자 즉 부자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고 덜 가진 자 즉 가난한 자가 믿음에 부요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관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탐욕을 품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잠언 30:8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며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삶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도의 삶은 경건하며 자족하는 삶으로 요약된다. 경건과 자족함–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생활 원리이다. [9절]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욕망]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경건하고 자족하는 삶과 대조하여, 이 세상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 많다. 부하려는 마음 즉 무엇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 탐심이다. 이런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부하려는 마음, 즉 탐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10절] [이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모든] 악의 뿌리가 되나니[됨이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고통]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하려 하는 자들이 파멸케 되는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탐심과 돈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야고보서 1:15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하였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크고 작은 죄악들이 돈 때문에 일어난다. 공직자 부정부패도, 여성들의 윤락행위도, 사람의 납치나 살해 사건도 보통 돈 사랑에서 비롯된다.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드는지! 특히 성도가 돈을 사랑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고통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된다. 탐심은 돈을 하나님 대신에 혹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즉 우상숭배이기 때문에(골 3:5)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마 6:24).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 이것은 오늘날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도 적용된다. 직장이나 어떤 조직에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도우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물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공정하게 다스리며 배려하고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항상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7-8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떠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그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며 살아야 하며 여기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나온다. 예수님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하려 하거나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9-10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고통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11-16절, 다섯 가지 명령 [11-12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굳게 붙들라](KJV, NASB, NIV).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그 곁에 두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 그의 일에 쓰시는 자라는 뜻이라고 본다(신 33:1; 왕상 17:24; 왕하 4:7, 9, 25). 복음 사역자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신약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벧전 2:9).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에게 우선 네 가지 명령을 하였다. 첫째로,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했다. ‘이것들’이란 경건과 자족함 대신에 돈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돈 사랑의 마음을 버려야 했다. 왜냐하면 돈 사랑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말했다. 그는 범사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는 또 경건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 순종해야 하며 또 성경을 읽고 거기에 증거된 모든 진리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꽃이요 열매이다. 또 그는 오래 참고 온유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다(고전 13:4). 이것들은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셋째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했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며,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그는 자기 죄성과 세상의 악한 풍조와 사탄의 시험과 더불어 날마다 싸워야 한다. 의심과 불신앙은 큰 원수이다. 영적 싸움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그 길에는 때때로 실패와 낙심과 두려움과 회개의 눈물도 있으나 승리의 기쁨도 있다. 디모데뿐 아니라, 우리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넷째로, “영생을 굳게 붙들라”고 말했다. 영생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성도는 영생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영생의 소망은 복음 진리의 핵심적 내용이다(요 3:16; 딛 1:1-3). 디모데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굳건한 믿음으로 영생을 굳게 붙들어 영생에 이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3-14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들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의 근원이시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셨고 죽은 자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밝히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숙하게 명령하였다. 디모데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온전하게 이 네 가지 명령을 지켜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15-16절]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마지막 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성경에서 그의 재림은 그의 오심 혹은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세계 역사의 완성이 있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의인들과 악인들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런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증거하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시다. ‘능하신 자’라는 원어( 뒤나스테스 )는 ‘주권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서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실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는 존재 혹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누구에 의하여 생명을 얻으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계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모든 생물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아계시고 영원히 죽지 않고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것이 그의 거룩이며 그의 영광이다. 그는 이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르시다. 그는 이 피조 세계를 초월해 저 하늘 높이 빛 가운데 계시다. 그의 빛은 그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유한(有限)하고 불완전하지만,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그의 빛은 또한 그의 도덕성을 나타내신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무한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곧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사람은 그의 초월하시고 완전하신 영광 앞에 감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이 그의 영광을 보면 눈이 멀거나 죽을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신 자이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요 4:24). 이 세상에서 물질들은 대체로 볼 수 있다. 물론, 공기나 전기나 전파같이 볼 수 없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영은 전기나 전파같이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영이시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복이요 영원한 생명(요 17:3)이다. [17-18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아델로테스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전통본문) 6)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후한,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한 가지를 더 명했다(다섯째 명령). 그것은 부자들에게 명해야 할 교훈이다. 첫째는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재물이 많으면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牛羊)이 번성하며 네 은금(銀金)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가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고 부유함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유함을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잠 30:8). 둘째는 정함이 없는[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재물은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잠언 23: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한다. 대형 화재나 붕괴 사고나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암이나 뇌졸증 같은 중병에 걸리는 경우, 짧은 기간에 수천만원, 수억원을 날릴 수 있다. 재물은 참으로 허무하고 불확실하다. 셋째는 오직 소망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신다. ‘모든 것’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다 포함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시 23:1).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다 시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바른 길이다. 넷째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는 것이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며(엡 2:10; 딛 2:14) 구원 얻은 모든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무엇이 선한 일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가지 선한 일은 전도와 구제의 일이다.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일, 즉 전도와 구제의 일에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잠언 21:26은 의인은 아끼지 않고 구제한다고 말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처럼(행 2:45), 우리는 선한 일에 부유하고 서로 나눠주며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후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영원한] 7)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성도들의 선한 행실은 장래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마 7:24-25). 반면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선행이 동반되면 그 진실함이 증거되며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현실에서의 선한 행실들을 통해 그 구원이 확실해지는 것이다(벧후 1:10-11). [20절]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그의 서신들 속에 기록된 교훈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길이며 바른 길이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도,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참 지식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모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지식은 망령되고 헛된 말과 변론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러한 말과 변론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유익케 하는 바른 지식, 곧 성경적 교훈의 지식을 붙잡아야 한다. [21절]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너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8) 교회 안에는 잘못된 지식과 이단사설을 좇는 자들 즉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 있다. 우리가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생각하면,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고 사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참된 믿음, 곧 성경적 믿음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우리는 그런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돈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또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야 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 대신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즉 성도다운 경건함과 지식과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장난들이 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져서 범죄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과 기도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요 우리의 소망인 영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불러 믿게 하셨고 우리 죄를 다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광스런 천국에서의 영생을 굳게 붙들어야 하고 다 받아 누려야 한다. 영생은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요 복된 소망이다. 다섯째로, 부자들은 다음 몇 가지들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마음이 높아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질적 부요는 교만에 떨어지기 쉽다. 둘째, 정함 없는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헛되며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기쁨과 생명과 소망이시다. 셋째,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의 확실한 증표가 될 것이다. 미주 1) Byz it vg syr 등에 있음. 2) Byz vg ms Ignatius 등이 그러함. 3) Byz it d vg syr p cop sa bo arm 등이 그러함. 4) Byz vg mss syr p arm Irenaeus lat Cyprian 등에 있음. 5) Byz vg syr p 등에 있음. 6) Byz it d vg cl syr p cop bo-ms 등에 있음. 7) Byz vg ms cop bo-ms 등이 그러함. 8) Byz (048 vid it d ) vg cl, ww, (st) syr p cop bo-mss arm ms (ms) 등.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딤전 5:3-16)
제목: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본문: 디모데전서 5장 3~16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상은 과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가 과부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통해서 교회가 어려운 성도를 돕는 방법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과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과부로 사는 것, 어떠했을까요?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보더라도 과부는 소외되기 쉽고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서비스가 있어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경제적인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의해서 사회적 위치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함께 사회적 위치도 잃어버립니다. 당시 문화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유용한가? 얼마나 쓸모가 있는 사람인가? 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준에서 과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돌볼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가 되는 것은 살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쓸모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할 때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재판장으로 말씀합니다(시68:5). 또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신10:18). 하나님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백성인 우리도 그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본을 좇아서 약자를 돌아보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고 이 일을 위해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부로 대표할 수 있는 어려운 성도를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일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먼저 생각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익이 되도록 돕는 일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의로 도움을 줬는데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도울지, 어떻게 도울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에 따라 합당하게 실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기준과 지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3-8절까지 첫 번째 단락이고, 9-16절까지 두 번째 단락입니다. 그리고 각 단락은 핵심이 되는 명령으로 시작이 됩니다. 3절은 “과부를 존대하라”는 명령이고, 9절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성경은 9절이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명부에 올린다는 동사가 명령입니다.
그럼 본문에 나오는 두 명령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명령입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3)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부 중에서 참 과부를 존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 존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 참 과부는 누구인가?
먼저 존대한다는 것은 가치를 둔다는 말인데 존중한다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는 보다 실제적인 의미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존대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존중히 예의를 갖추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명령입니다. 가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과부를 돌아보고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부에 대해서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존대하라”
다음 질문으로 교회가 존대해야 할 참 과부는 누구입니까? 참 과부라는 말은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라는 말입니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참 과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4)
참 과부는, 다시 말해 교회가 돌아보고 도움을 주어야하는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들이 없는 과부입니다. 가족이 없는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 경우에는 교회가 아니라 자녀가 과부를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효”를 행하는 것이고 부모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효를 행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뜻이 우리에게 더 친숙합니다. 디모데전서에도 여러 번 나오는 ‘경건’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대하는 것, 그래서 재정적인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과부를 돌볼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우선은 자녀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간이 흘러서는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정을 바로 세우도록 권면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맡겨진 의무를 다 하는 것이 경건임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 거짓 교사는 가정을 무너뜨리고 왜곡된 경건을 가르칩니다. 신천지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거짓을 가르치며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면서도 신앙으로 포장하고 왜곡된 경건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과 다른, 참으로 악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가정을 바로 세웁니다.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 효를 행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과부에 대한 책임의 일 순위는 그 가족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에 대한 기준입니다. 참 과부는 자녀나 손자가 없는 과부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는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라고 말씀합니다. 외로운 자라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외롭다는 말이 아니라, 참 과부는 홀로 있어서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과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은 가족의 유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이 나옵니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5-6)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합니다. 참 과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건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과부에 대한 내적인 기준은 과부 자신의 경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안나가 성전에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며 섬겼던 것처럼, 그래서 때가 되어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그러한 경건한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즐거움을 좇는 자는 참 과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교회가 도와야 하는 참 과부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이 없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경건을 추구하는 과부입니다. 디모데는 교회가 참 과부를 돌보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고 그렇게 수고함으로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명령을 따르는 않는다면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8)
무서운 책망입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가족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믿지 않는 자도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하물며 믿는 자로서 우리는 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이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명령입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9-10)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명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부에 올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명부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한 참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같은 대상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부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참 과부와 명부에 올리는 과부는 중복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견해가 더 나은지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견해를 두고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래도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구별된 과부의 명단으로 보는 것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분명한 답은 천국에 가서 물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여기 말씀의 명부를 섬김을 위한 명부로 이해하면 9절과 10절에 나오는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기준은 교회 사역을 위한 자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는 과부의 자격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이는 육십이 넘어야 했습니다. 재혼을 하지 않는 나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 결혼 생활에서 신실했던 자여야 했습니다.
셋째,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겸손으로 성도를 섬겼던 과부에게 교회의 사역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과부를 돕는 일은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과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격 있는 과부에 대해서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명부에 올림으로 섬김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을 돌아보는 일에 매여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를 얻어서 그 자유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부에 올리라는 명령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과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가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러한 모델을 볼 수 있는데, 과부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비다입니다. 그녀는 과부들을 섬기며 구제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과부에게 섬김의 기회를 주는데 있어서 제외되는 대상도 있었습니다. 특별히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11-12)
당시에 과부로서 명부에 올리는 일은 계속 독신으로 남아서 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과부의 경우, 재혼을 선택함으로 이 서약을 저버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14절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처럼 나쁜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집을 잘 다스리며 새로 맡겨진 가정을 잘 돌보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명부에 올린 후에 재혼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처음 믿음을, 그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젊은 과부는 명부에 올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젊은 과부를 명부에 올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13)
젊은 과부의 경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서 교회의 어려움을 줄 수 있기에 연륜이 있는 과부가 이 일을 감당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제가 자칫 잘못하여 방향을 잃어버리면 다른 성도에 대한 험담이나 불만을 공유하는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모임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형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남녀 구분 없습니다.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 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건강을 위해 마스크를 합니다. 혹시 모르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조심하고 막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쓸데없는 말, 악하고 죄가 되는 말들입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해서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의 유혹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귀한 일을 정말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교회가 서로를 돌아보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를 돕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물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성도를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도를 돕는 이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명령은 교회가 모든 과부에게 똑같이 도움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되는 것이 교회의 도움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족이 우선적으로 그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먼저는 도움이 필요한 성도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고 가지고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형편을 살펴서 선택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귀한 일이 낭비되지 않도록 형편에 따라 합당하게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풀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별하셔서 그 뜻에 따라 합당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차별이 아니라 선별입니다.
둘째, 귀한 일을 지혜롭게 하려면, 목적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귀한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목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른 성도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흔들거나 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를 도울 때 성도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도를 돕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가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도록 성도를 세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도록,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계속 수고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성도가 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는 모든 수고는 결국 주님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돕는 귀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함께 하고 있고 여러분이 교회의 지체로서 여러 모양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성도를 돌아보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계속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 목적을 생각하시고,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형편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수고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것을 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1/05/26(수) “디모데전서 5:1-16” / 작성: 최현준
[본문] 디모데전서 5:1-16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바울은 서신을 통해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와 안부를 나누며 목회자의 직무 및 자세에 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교훈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에베소에 거주한 기간에 따라 일반적인 이민자들이 겪는 세대별 정체성의 차이와 갈등을 겪었을 것이며 에베소가 항구도시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이방인들의 언어적, 민족적 배경은 굉장히 다양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다양한 연령의 남녀 교우님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교훈하며 특별히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님들을 교회가 어떻게 도울 것인지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형제에게 하듯 하고(1-2)]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늙은이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동일한 단어가 교회 안에서 사용 될 때는 ‘장로’를 의미하였습니다. 1절에 사용 된 ‘늙은이’는 전체 문맥상 ‘장로’라는 특정 직분을 의미하기 보다는 교회 안에 나이가 많은 남자 교우님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정교한 법과 군대 조직으로 운영 되었으며 조직 문화는 로마 제국 전역에 자연스레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 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쉬운 에베소의 문화적 배경을 감안할 때 교회 안에 나이 많은 남자 교우님들에게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는 바울의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교회가 어떻게 교회 밖의 공동체나 조직과 차별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교회가 뿌리 내린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 1절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1세기 로마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사로서 성례를 주관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등 여러 사역을 감당할 때 자연스레 교우님들 보다 주도적이며 일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독점적 사역은 목사가 교우들 보다 영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 안주할 위험을 안고 있으며, 목사의 일방적인 소통이 빚어내는 수직적 관계는 교회 안에 역할의 우열과 경중이 있는 것처럼 유혹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과 역할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섬김의 방향을 따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상대적 우위를 누리고 싶은 죄의 관성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본을 따라 나이가 많은 남자 교우님들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고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교회를 이 땅에 심으셔서 뿌리 내리게 하셨지만, 뿌리 내린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힘입어 뿌리 내린 토양에 생명을 공급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형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같은 자궁’이라는 의미로 혈연 공동체인 가족, 형제를 의미하였지만, 에베소교회 안에서는 젊은 남자 교우들이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눠 받은 하늘 가족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담임목사인 디모데와 젊은 남자 교우들과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동등한 형제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교회 안에 나이가 많은 여자 교우들을 대할 때에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롬1:13). 고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로 공동체 안에서 독립적인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법률인 로물루스 법에 따르면 로마의 남성들은 아들과 첫째 딸만 양육할 수 있었기에 많은 여자 아이들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여자 교우들이 남자 교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나이 많은 남자 교우들의 아내들을 어머니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나이 많은 모든 여자 교우들을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젊은 여자 교우들에게는 젊은 남자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에서의 결혼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신뢰는 매우 낮았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결혼은 공식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기 보다는 양가 아버지들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었기에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아내가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다른 남자에게 가면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부는 서로의 동의하에 부부 관계 밖에서 성생활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가정은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허락하신 성적 친밀함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삼아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 성적 방종과 타락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 여자 교우들을 대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성문화를 경계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교회 안에서 남자 교우들과 여자 교우들은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된 믿음의 교제를 누리면서도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고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성소의 등이 단 하루도 꺼지지 않고 성소를 밝혔던 것처럼 말씀의 빛으로 죄가 교회 안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교회 밖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3-8)]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1세기 에베소는 남편과 사별한 아내는 배우자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일관되게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와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세상과 구별된 관심과 돌봄을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68:5)이라고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아를 돌아보며 과부를 도와야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16절까지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교회가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8절까지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이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교훈하며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자녀들이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16절은 과부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6)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 중에 ‘참 과부’를 구별하는 이유는 남편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나 결혼 지참금의 유무, 그리고 도와줄 가족이 얼마나 있는지를 기준으로 교회가 직접적으로 도와줄 여자 교우들을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는 표현은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당시 일반적으로 당해야 했던 차별과 억압이 교회 안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존대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가치’, ‘존경’의 뜻으로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합당한 인정을 의미하였고 물건의 ‘가격’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과부를 존대하라’는 표현을 통해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동시에 재정적인 도움을 통해 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실천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결혼 지참금 제도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에게 경제적인 보호 장치가 되었습니다. 신부는 친정 아버지가 준비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으며 이것은 결혼의 법적 구성 요소였습니다. 남편의 사망 시에 이 지참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과부를 돌보아야 했는데 미망인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있을 경우 아들이 지참금을 관리하며 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고 또 다른 선택은 지참금을 가지고 친정에 돌아가서 친정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참금에 여유가 있는 과부는 가족의 돌봄을 받을 수 있었기에 교회가 도와야하는 ‘참 과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먼저’라는 부사를 통해 과부를 돌볼 우선순위가 가정에 있음을 일깨웠던 것입니다. 과부가 된 여인을 돌볼 일차적인 책임이 자녀에게 있었는데 이는 부모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참 과부’는 자신을 돌봐줄 가정이 없는 외로운 인생이었기에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5절에 ‘외로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하나’, ‘혼자’라는 뜻으로 곁에 도울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서적 고립과 경제적 위기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과부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으로 육체적 쾌락을 도피처로 삼았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들이 마주한 현실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사랑하셨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핑계삼아 육체적 쾌락에 빠져있던 과부들을 향해 살았으나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고난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Dopamine)은 쾌감, 즐거움 등에 관련한 신호를 전달해 인간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파민 자체가 인간을 중독에 빠지게 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주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순간적인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샌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순간적인 즐거움에 깊이 빠져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상황을 마주하였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상황에 더 쉽게 유혹을 받습니다.
[(7-8)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쾌락에 빠져 살았으나 죽은자 처럼 살아가는 과부들은 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본인에게 있지만, 남편과 사별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죄의 유혹 앞에 약해진 상태를 돕는 것은 공동체의 역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라는 표현을 통해 위기에 처한 가족을 돌보지 않고 죄의 길을 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며 그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9-16)] [(9-10)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참 과부들은 명부에 등록하여 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조건은 60세 이상으로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 중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11-15)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반면에 젊은 과부는 교회가 직접 돌봐야할 과부 명단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향한 서약을 파기하고 재혼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게으른 생활에 빠져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과부들에게는 처음부터 교회의 재정적인 돌봄을 의지하기 보다는 재혼을 함으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봄으로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고 죄에 대하여 깨어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어려운 상황들을 혼자 해결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은혜를 따라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돌보아야 하며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지체들의 삶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은 혼자 남았다는 정서적 고립으로 절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의 기름을 공급 받아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며 영원한 신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늘 소망으로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주심을 신뢰함으로 모든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약할 때나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행진하십시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주한 어려운 상황 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은혜를 따라 어려움에 처한 가족과 교우들을 돌보게 하시고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이 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조명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기름을 항상 공급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1. 바울은 교우들의 나이와 성별에 따라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의 가족이 된 교회는 어떻게 세상의 모임과 차별 됩니까?
3.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를 돌보아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4.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죄와 타협하기 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기를 소망하며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5. 세상의 빛, 말씀의 빛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최현준)
디모데전서 5장. 무시되지 말아야 할 목양의 원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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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5장 무시되지 말아야 할 목양의 원칙들
1. 본문에서 사도는 교인들을 대하는 목회자의 태도를 다룬다(1~2).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는 다양한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특별히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남자 노인들을 대한 태도이다. 디모데는 젊은 목회자였고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며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32)”는 말씀이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그들을 가르쳐야 했고 잘못을 바로잡아야만 할 책임도 있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상황에서,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고 말한다. 여기 꾸짖는다는 말은 “때리다, 징계하다”는 강한 어감을 전달하는 단어다. 권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찾아가거나 불러서 부드럽게 훈계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책망을 하거나 부끄럼을 주지 말라는 말이다. 원리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8:15~17에서 가르쳐주신 것을 따라야 한다. 젊은 남자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역시 권하되, 친 형제에게 하듯 해야 한다. 디모데 자신이 나이의 연소함을 인하여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되듯이, 교회 안의 젊은 사람들도 나이로 무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 젊은 사람이라고 해서 디모데가 함부로 꾸짖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마치 아랫 사람을 책망하듯 혹 상사가 부하 직원을 대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벧전 5:2~3). 세째로 연세가 든 여성도들을 향해서는 어머니에게 하듯 해야 한다. 이것은 남자 노인들을 향한 태도와 같다. 마지막으로 젊은 여성도들을 향해서 젊은 디모데는 특별히 ‘온전히 깨끗함으로’ 친 자매에게 하듯 해야 한다. ‘온전히 깨끗함’은 ‘절대 순결’(absolute purity)을 말하는데 단지 성적 순결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까지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교훈을 디도서에서 다시 상세하게 언급하였다(딛 2:2~6).
2. 사도가 초대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난 한 가지 이슈를 다루는데 그것은 과부에 대한 문제였다. 여기서 사도가 ‘참 과부’라는 말은 세 번 쓰는데(3,5,16), 부양할 친척이 아무도 없는 과부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교회가 부양의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이 있다. 첫째는 과부의 자녀나 손자들, 친척들의 책임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철저하게 과부가 된 어머니나 할머니 또는 과부가 된 친척을 감당해야 한다(4,16). 이것은 신자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이런 책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사도는 강력한 선언을 한다(8). 그런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 둘째로 참 과부 중에는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60세가 넘었고 한 남편의 아내였으며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사람이다(9~10). 선한 행실이란 자녀를 양육했거나 나그네를 대접했거나 성도들의 발을 씻기거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선한 행실로써 신앙의 분명한 증거를 드러내며 살던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지만, 한편 ‘경건한 어른들’로서 많은 젊은 여인들의 신앙의 모범이 될 자들이다. 세째로 과부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사도는 말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들이다(5). 그녀는 의지할데가 없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간다. 한편 세상의 쾌락을 즐거워하는 과부들도 있는데 이들은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6). 디모데는 이들에게 책망 받는 삶을 살지 말라고 명해야 한다(7). 넷째로 ‘젊은 과부’의 이슈다(11~15). 이들은 과부의 명부에 올릴 수 없다. 과부의 명부에 들어가려면 재혼을 하지 않고 주님만 섬긴다는 서약이 요구되었는데, 젊은 과부들은 그 서약을 버리고 재혼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11). 사도는 과부의 재혼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권장하는 듯 하다(14). 그러나 서약을 어기고 재혼하는 것, 더 심각하게는 불신자와 결혼함으로써 믿음 자체를 저버리는 경우를 언급한 것이다(11~12). 또 재혼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저들이 과부의 명부에 들어서 사람들을 심방하며 섬기게 되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도움과 기쁨 보다는 해를 주게 되고 주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어서 사도는 장로들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17~25). 장로의 조건은 이미 3장에서 언급했다. 이렇게 장로로 임명된 자들, 즉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마땅히 두 배로 존경하라고 한다(17).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오늘날의 목사)들을 향해서는 더욱 그래야 한다. 사도는 신명기 25:4을 인용하여 전임으로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주로 목사)은 마땅히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18). 이것은 17절에 말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입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지도자들이 비난을 받을 경우를 사도는 다룬다. 그것이 공식적인 비난이나 송사의 경우일 때,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아서는 안 된다. 지도자이기 때문에 공연히 받을 수 있는 비난과 혐의를 다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군인이 적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만일 그 송사가 사실로 드러나면 디모데는 그 사람(장로)을 공개적으로 회중 앞에서 꾸짖어야(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 모두가 죄를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20). 지도자들의 범죄 문제를 대강 덮고 넘어가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며 명백한 불순종이다. 그 결과는 교인들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교회는 타락하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한다”고 말한다(21). 그러므로 목회자는 편견 없이, 누구의 편을 봐줌이 없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이 원리를 순종해야 한다. 지도자가 이렇게 중요하기에 사도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말한다(22). 그것은 성경의 기준에 따라 신중하게 해야 한다. 함부로 지도자를 세운 자들은(지교회 목사, 노회와 신학교 관계자) 후일 그 자격 없는 지도자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지도자를 세우는 문제는 목회자가 자신의 정결을 지키는 문제다! 사도는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디모데에게 약간의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한다(23). 사도는 재차 장로 지도자를 뽑는 문제에 신중을 기할 것을 부탁한다(24~25).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서 먼저 심판(판단)을 받지만, 어떤 사람들의 죄는 시간이 지나서야 드러나는데 지도자들을 선출할 때도 나중에 나타날 잘못과 죄를 고려하여 신중하라는 말씀이다.
4. 사도는 성도들과 목회자의 관계, 특히 과부들에 대한 돌봄의 원리, 마지막으로 장로들에 대한 문제를 교훈했다. 이 원리들은 오늘날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이 원리와 권면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너무 많은 원리들이 무시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말씀의 원리 특히 이 목양의 원리들을 온전하게 순종하는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5.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신 교회와 목양의 원리들을 저희가 온전히 순종하게 하사 주님의 영광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교회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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