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음 23 장 주석 | [하루 한 장] 누가복음23장_유대인의 왕이냐 2424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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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 (금) [하루 한 장]“유대인의 왕이냐” (눅23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23장은 예수님이 당하신
부당한 재판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시기하여 모함한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잡아
밤새도록 종교재판으로 몰아친 뒤
날이 밝자마자 빌라도에게로 가서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고발한 예수님의 죄목은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과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 그리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가 다 거짓이라 판단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인
유대의 왕과 구별된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의 왕,
이 말은 모두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그에게 찾아오신 주님과의
이 마지막 대화를 통해서도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하며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누구시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분은 내게 유대인의 왕이시며
유일하신 참 진리이십니까?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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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주석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23장 =====23:1 무리가. …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 … 廬)로 생각할 수 잇다(12절 주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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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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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2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카이 아나스탄 하판 토 플레도스 아우톤 에가곤 아우톤 에피 톤 필라톤 개역개정,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새번역,1 그들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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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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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23장 주석

[스크랩] 누가복음 23장 주석 … (눅 23: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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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96-누가복음 23장 – 네이버 블로그

즉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뿐만이 아니라 회개하며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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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3장 – HANGL NOCR

23:1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신 그리스도(누가복음 23: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법정에서 “모독자”로 정죄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법정이 의도하는 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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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26절-43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성경 배경 주석 …

누가복음 23장 26절.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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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누가복음 23장 흐름정리>. 오늘 본문은 정식 재판을 받으신 후 사형을 언도받고 무덤에 장사되기까지의 기록이다. 빌라도의 2차에 걸친 신문 중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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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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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

누가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나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로마 병사에게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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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십자가 처형과 매장 – Godmade

누가복음 23장: 십자가 처형과 매장. 1. 1-25절: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정치범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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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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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4(수) “누가복음 23:44-56” / 작성: 강요섭

본문 누가복음 23장 44-56절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잠언 14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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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23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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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rX44Y8YKL0

누가복음 23장 주석

누가복음 제 23장

=====23:1

무리가…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산헤드린 회의가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 결

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에 그 때는 이른 아침을 지난 오전의 어느

시각일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A.D. 26-36년에 걸쳐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으로

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

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해 각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끌고간 자들에 대해 누가는 언급할 뿐 그들의 정체에 대해

서 구체적으로는 말하지않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마 27:1,2; 막 15: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즉 산헤드린 대표들이 끌고 간 것으로 언급되

고 있다. 누가가 언급한 ‘무리’도 역시 문맥상 공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무리’ 앞에 ‘온’이라는 뜻의 헬라어 ‘하관'(* )을 사용

하여 ‘온 무리'(공동 번역)라고 표현한다. 또 누가는 예수를 단순히 ‘끌고 가다'(*

, 아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갔다’라고 언급한

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마가 마태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언급한 것처럼(22:63-65),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

하려는 듯한 누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23:2

고소하여…그리스도라 하더라 –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예수를 고소한 것으로

언급하는데 상황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표현이 마태와 마가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첫

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1) 민심을 현혹(眩或)

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2)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3)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

은 사회.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같은 음모는 이미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바이다(20:20). 고소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 되

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에게는 종교 문제가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

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회.정치적 이유는 총독으로서 빌라도에게

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법적인 제판이 가능하리라고 그들은 판단하여

사회.정치적 이유만을 강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11-12; 막15:2-3). 그러나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 될 죄목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

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

게 예수를 끌고 왔으면 이유를 먼저 밝히는 것이 당현하며 마태와 마가의 경우처럼 예

수를 끌고 오자마자 빌라도가 먼저 ‘네가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

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

히 유대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꾸며진 일임을 더욱 선명히 부각(浮刻)시키

고 있는 셈이다.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예수에 대한 두번째 죄목인데 터무니없는 거

짓말이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해도 민중들이 무서워 못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첫번째로 제시한 죄목인 민심 교란죄는 해당

될 수 있으나(19:42-21:38의 내용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예수가 성전을 장악하

여 혁신적인 가르침을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25에서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

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로 대답하여 대적들로 하여금 책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23:3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대표들로부터 고소를 접수하고 재판

을 진행하면서 예수를 심문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는데 고소자들이 제기한 세번째

죄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세 가지는 공히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번째 ‘왕이냐?’라는 문제만 확인하면 세 가지 죄

목에 대한 판결도 자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네 말이 옳도다 – 원문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쉬

레게이스'(* )를 마샬(I.H.Marshall)은 ‘그 말은 네 말이다’라고 번

역하며 KJV나 RSV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옮겼다(Thou sayest it, KJV; You have

said so, RSV).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인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면서 무시하는 것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산헤드린의 체포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

정성(公正性) 내지는 합법성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

이 생각하는 왕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왕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염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려고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한 듯하다. 실로 예수는 온 우

주와 만물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나

(계 17:14) 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하는 왕권이란 현세적 정치적 의미에만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22:67, 68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

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는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직접

적인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판단으로 이해하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23:4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 빌라도의 무죄 판결을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분

명하게 기록하고 잇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자라는 증거를 찾

지 못했을 것이다. 즉 예수가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武力的) 힘을 갖고 반란을 일

으켰다는 증거나 조짐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

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한층 더 뚜렷이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

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즉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였다(마

27:13-18; 막 15:4-10).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내가 꿈에서 이 재판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

입하지 않도록 종용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마태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이 합법적 공

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명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지니는 객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3: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자들이 승복하지 않

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급된 ‘더욱 굳세게’라는 헬라어 ‘에피스퀴오'(*

)는 ‘역설하다’, ‘강해지다'(grow strang) 또는 ‘고집하다'(insist)의 뜻을

가진 말로서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 예수의 활동이 고소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 이

말은 예수의 행동 반경이 유대 전체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예수의 영향력이 유대 전

역에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예수의 활동 영역은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요 4:1-42)와 갈릴리, 베레아(막 10:1), 데가볼리(막 5:20), 가이사랴 빌립보(막

8:27), 이두매, 두로, 시돈(막 3:8) 등 이방 지역까지 포함하는 팔레스틴 전역이었다.

갈릴리에서부터…소동케 하나이다 – 다시 한번 예수가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주장

하면서 예수의 활동 영역이 ‘온 유대’임을 보충하여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중앙인 예루

살렘까지 진입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된 단어인 ‘소동케 하나이다’는 헬

라어로 ‘아나세이오'(* )인데 ‘흔들다’, ‘충동하다’, ‘동요시키다’,

‘선동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막 15:11). 누가는 2절에서 ‘백성을 미혹’하였다고 표

현하여 예수가 단순히 백성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반면(*

, 디아스트레포)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고조된 표현인 ‘아나세이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도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판결에 대해 불복(不服)하고

더욱 거세게 예수를 고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임을 밝힌 것은 당시 폭력 혁명을 추구하던 헤롯당 저항 운동의 근거지인 갈릴

리와 관련지으려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를 폭력적 반란을 일으킬 선동자라는 인상을 빌

라도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23:6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 빌라도가 고소자들의 제 고소를 듣고 나나낸 반응은 새로

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놀라운 어투이다. 즉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로운

사건 전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헤롯에게로 넘길 수 있는 구

실이 되는 것이다. 즉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아래있기 때문에 갈릴리는 사람인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면 쉽게 자신의 난처함이 해결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안드로포스 갈릴라이오스(*

)는 촌놈이라는 뜻을 내포한 경멸적(輕蔑的) 표현

이다(I. H. Marshall). 빌라도는 갈릴리라는 말에 예수가 시골에서 올라온 별 것 아닌

청년쯤으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예수를 대한 듯하다. 한편 6-12절의 이야기는 사

복음서 중 본서만이 나오는데, 누가는 이미 앞에서도 두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헤롯 안티파스에 관해 언급했다(3:1; 9:7-9; 13:31).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세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예비적 언급이 있은

다음 비로소 두 천사의 말에 의해 부활이 직접적으로 선언된다. 그런데 누가는 먼저

무덤안에 예수가 없음을 전제하고 나서 부활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덤 안에 예수가 없

음을 말하였다(16:6). 즉 마가는 부활을 강조하고 그 증거로 빈무덤을 제시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 부활의 산증거로서 빈 무덤을 강조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은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은 데 대한 여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묘사

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인들이 발견한 바대로 시체가 없다는 점을 먼저

확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갈릴리에 계실 때…기억하라 –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갈릴이 여인들이었음을

23:55에 이어 두번째 언급하고 있는데 10절에 따르면 여인들의 수는 최소한 5명 이상

임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믿을 수 없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이미 예견

된 일이엇음을 평소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던 여인들

(23:55)을 통해서 확증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억하다'(* , 므네스데

테)고 요청하는 애용은 9:22에서 예수 자신이 언급하셨던 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

이라는 예언이다 . 마태와 마가는 빈 무덤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언급이 없는 데 비해

누가는 치밀한 설득을 통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성취 측면을

확연히 드러낸다.

=====23:7

헤롯의 관할 – 헤롯은 B.C.4-A.D.39까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

봉왕 안티파스(Antipas)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빌

라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했으며 그가

관연 누구인지 알고자 했었다(8절; 9:7-9).

헤롯에게 보내니 – 여깃 ‘보내니’라는 동사가 ‘아니펨포'(* )라

는 것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단어의 뜻이 ‘위로'(* , 아나)라는

뜻과 ‘보내다'(* , 펨포)라는 뜻이 결합된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즉 ‘위로

올려 보내다’라는 뜻이라면 빌라도 보다 헤롯이 상부에 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헤롯은 빌라도 총족 아래 있는 분봉왕이었다. 따라서 단어는

단순히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반대로 헤롯이 빌라도에

게 예수를 보낼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도 누가는 이 단어를 단

순히 ‘보내다'(send)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관에게 보냈

다는 주장은(Meyer, Farrar) 적절하지 못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것은

첫째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골치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헤롯의 관할 사건을 자신이 처리함으로써 헤롯을 소외시키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配

廬)로 생각할 수 잇다(12절 주석 참고).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누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관할 구역이 아

닌 예루살렘에 마침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분명

하다. 즉 종교적 이유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

다.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 빌라도가 예수를 헤룻에게 보내었을 때 헤롯

의 반응은 의외로 ‘심히 기뻐하는'(* , 에카레 리안) 것이었다.

누가는 기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누가는 이같은 헤롯의 마음을 9:9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많은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죽었던 세례 요한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말하

거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믿었다는 소문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9:7-9). 또 하나의 이유는 소문에 들은대로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누가는 덧붙이고 있다. 고대의 왕들

은 자신의 즐거움읊 만끽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재주를 공연하게 했다. 헤롯 또한 이런 류의 호기심을 갖고서 예수를 마술사 내지는

특출한 재주꾼으로 취급하였던 것 같다. 그는 예수로부터 심심풀이용 오락과 유흥을

기대했을 뿐 영적인 은혜나 심오한 사상 등에 대한 진지한 소원은 전혀 결여한 상태였

다.

=====23:9

여러 말로 물으나 – 누가는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好意的)으로 맞이했음을 언급한

후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했음을 밝히고있다. 6절에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는 ‘묻

되’라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여기서는 ‘여러 말로 물었다’고 말한다. 이는 헤롯이 예

수를 오랬동안 보고 싶어한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헤롯

이 무엇에 관해 질문하였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소 내용과 자기의 관심사

에 대해서 함께 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헤롯의 질문은 오랫동안 진행 되었고

고소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10절).

아무 말도 대잡지 아니하시니 – 어떤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마태와 마가도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가 침묵하고 있음을 강조하

고 있다(마 27:12-14; 막 15:4,5). 이 같은 예수의 침묵에 대해 사 53:7의 예언의 성

취라는 해석이나(J. Jeremias) 정직한 질문이 아닐 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원칙이 복음서 안에서 일관되고 있다는 주장(Hooker)도 설득력이 있다(22:67,68 주석

참조). 헤롯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수다스러운 질문의 홍수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조

용하고 위엄있는 침묵으로 맞서셨다. 아무튼 예수는 빌라도나 헤롯, 그리고 고소자들

의 언행에 대해 대답할 가치 조차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빌라도에게 ‘네가 말

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것도 침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3절

주석 참조).

=====23:10

힘써 고소하더라 –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했을 때 무리들이 더욱 격

렬(激烈)하게 고소한 묘사를(5절) 연상하게 하는 이 구절은 헤롯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예수를 헤롯에게 데려왔을 때 고소자들은 이미 이유를 말했을텐

데 또다시 ‘힘써'(* , 유토노스) 고소하는 것은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거세게 불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3절) 호의적인 헤롯의 심문 과

정을 고소자들이 참을 수 없어 다시 강력하게 정죄를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소

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빌라도 법정에서는 단지 ‘무리’라고 언급된 데 비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헤롯이 유대인들이라

는 사실과 또 빌라도의 심문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헤롯마저 그러하

자 온갖 허위 사실들을 총 동원하여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23:11

헤롯이…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 이같은 헤롯의 행위는 22:63-65에서 언급

된 희롱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8-10절의 내용과 15절에서 빌라도가 언급한 내용 즉 헤

롯이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는 헤롯이 정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다면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는 대상으로 삼

았을 뿐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헤롯의 태도가 8절과 달리 돌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9절에 언급된 예수의 태도에 대해 헤롯은 예수께 대해

심한 불쾌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은 예수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자

신의 질문에 대해 대답조차 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은 분봉왕이기는 하지만 권위주의적

인 통치자인 헤롯에게는 자신에 대한 무시 내지는 모독으로 생각되었을 것이 분명하

다. 둘째는 1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고소자들이 거세게 정죄하기를 촉구하였고, 특히

고소자의 신분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점이 헤롯에게 큰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

이 분명하다. 즉 최고의 종교 지도자인 자들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율법학자 서기

관들의 요구를 헤롯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신정국(神政國)

으로서의 전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정치와 종교의 밀착된

야합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이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이

예수에게 무시당했다는 굴욕감과 막강한 종교 세력의 압력 때문에 예수가 죄없음에도

멸시하고 희롱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기는 했

지만 고소자들의 요구대로 구체적 죄목을 붙여 정죄하지는 못하였다. 헤롯은 다시 빌

라도에게로 재판을 넘겨주는데 ‘빛난 옷’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이는 부자나 천사

들이 입는 옷임을 암시하기도 한다(행 10:30; 약 2:2,3; 계 15:6;19:8)(I. H.

Marshall). 무슨 색깔의 옷인지도 밝히지 않았는데 상황은 다르지만 요 19:2에 의하면

붉은 옷을 입혔다고 언급되는데 그렇다면 왕들이 입는 옷이라고도 볼 수 있다

(Klostermann). 그러나 단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빛나는 옷이 귀하고 위엄있는 옷이

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예수의 치욕적(恥辱的)인 희롱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

마도 가장 귀한 사람 복장을 갖추게 하여 멸시하고 희롱하는 효과를 극적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한 듯 하다.

=====23:12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빌라도와 헤롯이 어떻게하여 원

수지간이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서 예수를 넘긴 ‘당일'(*

, 엔 아우테 테 헤메라)에는 친구가 되어 서로 협조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3:1에서

언급한 바처럼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실에 대해 헤롯이 자기 관할에 대한 월

권으로 생각하여 빌라도를 미워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Farrar). 그렇다면 빌라도

가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준 것은(6,7절) 헤롯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하려는 빌라도의

배려로 보일 수 있으며 화해의 제스쳐라고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에게 내린 결정이 같은 내용이었다는 의미와 예수

를 서로 넘겨줌으로써 서로를 존중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마도 누가의 의도는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증으로서 원수지간이었던 빌라도와 헤롯이 공통되게 예수에 대

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학 있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의 의도와는 일치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역설적으로 비꼬아 하는 말로

서 이해하면 이제까지는 원수로 지내던 자들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서로 미루면서 책

임을 회피(回避)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강조

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 보다 설득력이 약하다.

=====23:13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 헤롯으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

는 다시 분명한 판결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동원시킨 듯 하다. 즉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이라고 표현된 일반 공직자

들 즉 관료 행정적인 지도자들(* , 아르콘) 그리고 일반 ‘백성'(*

, 라오스)을 불러 모으고 공식 재판을 열 채비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

들을 입회하다록 한 것은 자신의 판결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인식시

키고 판결 뒤에 올지 모르는 잡음을 없애고자 하는 빌라도의 숨은 의도인 것으로 보여

진다.

=====23:14

너희가 이 사람을…끌어왔도다 – 빌라도는 입회한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확인시키

고 있는데 고소 이유는 2절에서 고소자들이 언급한 세 가지 고소 이유 중 첫번째에 해

당하는 백성을 미혹한 죄이다. 즉 백성들을 거짓으로 속여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

이다. 여기서 독특한 것은 3절에서 빌라도가 문제시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문제였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현혹시킨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왕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자신이 무죄 판결을 내렸고 헤롯도 그 판결에 사실상 동의했다

는 점에서 고소자들이 제시한 다른 죄목을 다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 누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독특한 강조법 ‘보

라'(* , 이두)로 말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사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

크리노’는 기소 중인 죄수를 법적으로 심사한다는 의미의 법정 용어이다(고전 9:3).

빌라도는 입회인들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심문했던 사실(3절)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말은 4절에서 언급된 자신의 무죄판결을 다시 확인시켜줌과 아울러 이제까지의 재

판 과정을 사실대로 입회인들에게 열거하여 앞으로 있을 판결에 참고하라는 암시이다.

=====23:15

헤롯이…보내었도다 – 이 구절은 원문상 8-10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전제로하여

‘너희들이 헤롯에게로 가서 예수가 죄없음을 확인하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빌라

도는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를 선동가 내지는 모반 지도자로 선고

할 증거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판결이 초래할지도모를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헤롯을 끌어들이고 있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역시 무죄였는데

4절에서 내렸던 무죄 판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칭 왕이라는 문제에 대한 판결

때에는 무죄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데 반해 여기서는 백성을 미혹케한 죄를 언급하면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살해를 주도하는

세력들을 의식한 타협적 자세를 제시한다.

=====23:16

때려서 놓겠노라 – 빌라도가 제시한 타협안은 채찍으로 때린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

이었다. 이같은 빌라도의 결정은 고소를 해온 대제사장과 그 일파들의 비위를 맞춰주

고 이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빌라도는 무려 네 차례에 걸

쳐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죄없는 자를 벌함으로

서 로마의 영광인 공정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재판관으로서의 기본적인 공정 의

식을 갖고 있었다. 한편, 네 차례의 석방 노력이란 (1) 이 고소는 종교 문제이니 유대

인들에게 해결하라고 했던 점(요 18:31; 19:6,7) (2) 이 사건을 헤롯에게로 넘기려 했

던 점(7절) (3) 유월절 특사(特赦) 대상으로 추천한 사실(막 15:6) 그리고 (4) 태형만

내리고 석방하겠노라고 제안한 점이다.

=====23:17

대분분의 많은 사본들은 17절을 생략하고 있지만 일부 사본들에서는 언급하고 있기

도 하다. 그 내용은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절기법이 있음’을 밝히

는 것인데 이는 마 27:15과 막 15:6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M. Metzger, I. H. Marshall). 그러나 누가의 문맥에서는 17

절이 생략된 채 18절과 곧바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적으로 군중들의 반응

을 이해할 수 있어 자연스럽다.

=====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석방 제안에 대한 고소자들의 반응은 격양된

아우성으로 터져 나왔다. 여기서 언급된 ‘무리’란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빌라도가

모이게 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발자인 대제사장 일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마 27:20과

막 15:11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권하고 충동질하여 무리들이 바라바

를 석방하라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언급된다.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놓아주소서 – 무리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에 반해 그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어서 미리 준비된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의 충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마가의 말이(막 15:11) 설득력을

갖는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죽이라고 외치는 이같은 요구는 대제사장

들이 오랫동안 노려왔던 욕심이었다(19:47; 20:19; 22:2-6). 여기서 누가는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제안을 먼저 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

시키기 위해 명절 때마다 최인 하나를 놓아주던 관례를 적용하고자 제안한 것으로 언

급한다(마 27:17). 죄수 석방에 대한 결정권은 로마 총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먼저 제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는 모인 무리들이 바라바와 같은

살인범을 석방하라고 외치기보다는 차라리 예수와 같은 선량한 자의 석방을 선택하리

라고 내심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유대교 지도자들

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 심리를 자극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내고 있다.

=====23:19

이 바라바는 –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며 살인을 서슴지 않은 혁명가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

대에는 독립을 위한 반란이 많았으며 반란의 지도자들은 영웅시되었다. 따라서 유대인

들의 눈에는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물론 군중들은 예수게서 수많은 권능을 행하실 때에는

한껏 예수를 좇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당하신 처지가 되자

이내 예수를 배격하게 되었다.

=====23:20

예수를 놓고자 하여 –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

무리들에게 다시 제안하고 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며 반대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많은 죄악성을 부각시킨다.

=====23:21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 18절에서 언급된 무리의 반응처럼 또 다시 무리들의 거

센 반발을 묘사하고 있다. ‘소리질러’의 원어 ‘에페포눈'(* )은

…에게 크게 부르짖어 외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빌라도를 향해 거세게 항의하

는 것이며 미완료 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무리들이 계속하여 소리질러 항의한 것으

로 보인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 그들의 항의가 18절에서보다 더욱 거칠어 졌음을

시사하는 이 구절은 운율을 담은 연호와 같은 형식을 취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

서’라는 구절을 두번 반복한다. 따라서 무리들의 요구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거세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처음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하는 목표

를 향해 밀어붙이는 음모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같은 음모가 대제사장에 의한 것

임을 마가는 밝혔다(막 15;11). 한편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민 21:9; 시 22:15;

슥 12:10 등에 예언되어 있는 바 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허용된 것이었

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신 것이지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자들은 구세주를 살

해한 범인들 중에 속하게 된 셈이다.

=====23:22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 16,20절에 이어 빌라도가 세번째로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누가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세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같은 누가의 강조는 빌라도를 호의적으로 묘사함으

로써 로마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를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고위직의 로마인으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1:1-4).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사무적이 아닌 안타까운 주관적 감정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예수의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노력이 인간적인 정의감에 바탕되어 있음

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해야 할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는데 무리

들이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임을 시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세번째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빌라도는

다시 한번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분명하게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아'(* )은 죄가 될만한 근거 또는 원인을

말한다.

=====23:23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 세번째의 빌라도 선언 역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

혔으며 계속해서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저토록 요구

하는 십자가 처형은 본래 카르타고에서 생겨난 처형법이었는데 로마 제국에서도 중죄

인에 대해 이 형벌을 사용한 것 같으며 본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도 십자가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잔혹한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주장은 마

침내 관철되었다. 누가는 그들의 아우성이 ‘이겼다’고(* , 카티스

퀴온) 표현하는데 강조점은 빌라도가 무리들의 힘에 밀렸다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

써 누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보다는 오히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지

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23:24,25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빌라도가 대제사장 및 그 일파들의 음모와 거센 항의와

요구에 불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여 넘겨 주었다

는 말로 예수께 대한 재판은 종결되었다. 여기서 예수를 넘겨받은 자는 예수를 죽이라

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인데 비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이 총

독의 군병으로 언급되고 있다(마 27:27; 막 15:16). 이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속에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를 위한 노력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누가에게서도 군병

이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36절) 누가의 강조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했다는 점에 있다. 또 누가의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는 예수를 고소자들에게 넘

겨준 이유를 설명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마가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

수를 넘겼다고 언급하는 반면(막 15;15) 누가는 어쩔 수 없어 예수를 내어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준 동기야 어떠했든지간에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과

법의 공정성을 묵살한 채 부화뇌동했던 사실은 명백한 과오요 죄악이었다 하겠다. 그

에게 있어 예수는 비록 무죄한 자였으나 민중의 폭동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만한 가치

는 없는 자였다.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 제판이 끝난후 예수를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가는 장

면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었던 때와 같이 ‘저희’가(25절) 예수를 끌고 갔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끌고갔다’이다. 36절에 ‘군병들’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군병들인 듯하나 누가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반면에 마가는 빌

라도의 군병임을 암시하고 있으며(막 15:16) 특히 마태는 ‘총독의 군병’이라고 분명하

게 밝히고 있다(마 27:27). 이와 같이 누가가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한

것은 빌라도에게 보였던 호의적 입장과 같이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형집행에 깊이 관여

했다는 인상을 가급적 피하려고하는 의도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 27:27-31과

막 15:16-19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면, 즉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인계받은 다음 희롱하

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앞에서 언급한

누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여 준다.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

리비아의 트리폴리(tripoli)를 말한다. 세 복음서 모두 시몬이 우연히 지나다가 이 일

을 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구레네 사람들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있었고(행

6:9) 초기 기독교인들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행 2:10; 11:20) 시몬

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는 시몬이 알렉

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는데(막 15:21) 아마도 두 자녀가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또 누가와 마가는 시몬이 시골로부터 오던 중이라

고 언급하며 여기서 말한 시골(* , 아그로스)는 농촌이나 들판을 의미하는

데 아마도 성 밖에서 오던 중이라는 의미로 보이며 따라서 이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 밖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 마태와 마가는 공통되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말을 함으로

써(마 27:32; 막 15:21) 이제까지 십자가를 예수가 져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형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Plutarch) 예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군인들이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행군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밤새껏 심문당하고 희롱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좇게 하더라 – 이는 누가만의 표현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이 구절을 삽입하면서 참다운 제사장

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2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곁을 떠난 상황에서 십

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시몬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제자이며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눅 9:23 주석 참조).

=====23:27

백성과…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 – 예수가 가는 고난의 행렬을 말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내용으로 본서에만 나온다(27-32절). 여기서 여자들만

이 애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같이 애통하여, 울었다. 즉 본문 번역을 ‘백성

과 여자들의(* , 라우 카이 귀나이콘) 큰 무리

가 가슴을치며 울면서 뒤따랐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누가는 이같은 무리 속에서 특

히 여자들의 애통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가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1:26-56; 2:36-38; 7:36-50; 8:1-3, 43-48; 13:10-17;

24:1-10). 여자를 다른 복음서와 달리 부각시키고 있는 누가의 의도는 당시 천대받던

여자들이 제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천대받는 자의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막 9:35-43 주석, 눅 18:16-17과

22:24-27 주석 참조). 뿐만 아니라 이는 여성의 인격적 지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누가

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우는

것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31절까지 묘사되며 19:41-44에서 언급된 내용을 연상하게 한

다. 여기서는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많은 선지자

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사 1:8; 10:32;

37:22; 미 4:3; 슥 2:10; 9:9)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 말을 하기 전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

고 말씀하셨던 바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해야만 할 일이 전제되는 것인데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

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임을 암

시하고 있다. 둘째는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마음 아

프고 가슴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이같은 예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언급이 19:41-44에 나오고 있다. 또 십자가상에서 기도한 내용, 즉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무지

(無知)였다.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하신 단어 ‘보

라'(* , 이두)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날이 이르면’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관

한 언급 때 사용되는 상투어 ‘때가 이르리니'(17:22), ‘그 날에'(17:31; 21:23)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날’이 언제인지 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날’

을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를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그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 속에서 내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사실은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

속되는 현재적 심판의 날들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수태 못하는 이와…복이 있다 하리라 – 21:23에서 예수께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수태 못하고

해산하지 않고 젖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 선언을 하신다. 결

과적으로 21;23에서 처럼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는 저주이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쓴 것은 계속적으로 저주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저주 선언은 다산(多産)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

고 믿었던 당시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며 현재의 사고

방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지하여 전혀 새롭게 변혁된

사람만이 요구되고 살아 남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의 한 예로서 A.D.70년에 로마

장군 디도(D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여자들과 아이들이 미처 도피하

지못하여 많은 화를 입었다.

=====23:30

신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 심판과 저주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무너져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묘사의 강조점은 그날의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에 있는데 이 호소의

목적은 호 10:8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

을 가려주고 막아 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둘째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산이 무

너져 내려 자신을 덮어 죽임으로써 고통을 잊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계 6;16). 아

무튼 강조점은 심판과 저주의 무서운 고통에 있다.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28-30절까

지의 내용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푸른 나무는 싱싱하고 힘찬 것으로서(시 1:3 참조)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늙고 힘 없는 것으로서(렘 5:14; 유

12절 참조)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푸른 나무를 예수로, 마른

나무를 불의한 유대인으로 대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Bengel, Meyer,

Godet, Bruce). 혹자는 푸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융성 시기로 보고 마른 나무를 예루살

렘의 쇠퇴기로 비유하여 그 멸망을 예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Gilmour). 또한 쉥크

(Schenk)의 경우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예수를 처형하고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죄많은

유대인들을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본절은 심판의 엄

격성과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려는데 강조점을 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23:32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여 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두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39-43절).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 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

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어떤 범죄를 저

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

들은 강도였다 한다. 아마 살인과 방화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이다

(41절 참조).

=====23:33

해골이라 하는 곳 – 예수가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라 불리워지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된다. 이 어투와 같이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Bengel, Goldet, Plummer). 다만 분명

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이다(히 13:12). 부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

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 말로 ‘골고다'(* )

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니온'(*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점으로 보아 누

가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엄두에 두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누가는 예수의 양 쪽에 범법자 두명이 같이 못박

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 , 레스타이)들이 양 쪽에 못박

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

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치욕스러

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

, 카쿠르구스)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십자가에 못박고 – 마침내 예수가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박히는 모습

이다. 누가는 못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마태는 못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

에(38절) 언급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

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하

다.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

고 있으며 본문에 대한 진정성 시비가 문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본은 본문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언급하는 반면 대다수 사본은 본문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J. Weiss, Klostermann, Easton, Creed, Schenk).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인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본 구절을 28-31절에 언급된 내용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다(행 3:15). 그러나 예수는 그

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소위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첫번째에 해당한다. 가상칠언의 내용을

한마디씩으로 요악해보면 (1) 용(容, 본절) (2) 낙(樂, 43절) (3) 자(子, 요 19:26)

(4) 기(棄, 마 27:46; 막 15:34) (5) 갈(渴, 요 19:28) (6) 성(成, 요 19:30) (7) 혼

(魂, 46절) 등이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본다(Blinzler). 뿐만 아니라 시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

라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

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

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

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지

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구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

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W. Foerster).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

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기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구약의 외경 에녹서에서는 이 말이 ‘하늘의 인자’를 가리키며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봄이 타당하

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23:36

신 포도주를 주며 – 군병드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준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

지이다. (1)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

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이다. (2) 요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 마르다'(I am

thirsty, NIV)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Zahn, Farrar)도 가능하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

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

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는다. 그러나 시 69:21의 성취

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23:37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 로마 군병이 언급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 의

미에서 예수를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 상에 붙어있는 죄

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

동하던 사람 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capital punishment)으로부터 면죄

(amnesty)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하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

관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며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고 하며 희롱한 것으로 묘사한다(마

27:42-44).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을 의식하여 문제 곧 종교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또 마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23:38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 –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국어로 씌어져 있었다. 즉히브리어, 로마어, 헬러아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된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

(oaradoxical)으로 예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된다. 인

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

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이다.

=====23:39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

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

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

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

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마 27:44; 막 15:32). 범

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

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

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

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

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

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족으로부터 받은 재판

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3:41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

하면 자신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

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

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

(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

다.

=====23:42

에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

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

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

라어 전치사 ‘엔'(* )은 ‘…안으로'(into) 혹은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

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

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 )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

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

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

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 , 파라데이소스)

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

(LXX)에서는 에덴 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 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

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

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

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

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23:44

제 육세쯤 되어 – 예수의 운명에 대한 묘사에 앞서 그 시각을 언급하면서 누가는

정확한 시각을 지시하지 않고 어림잡은 시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쯤’이라는 비교 부사

‘호세이'(* )를 사용하고 있다(3:23; 9:14,28; 22:41,59 비교).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마 27:45)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막 15:33)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막 15:25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시각이 제 삼시였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못에 박힌 채 세 시간을 달려 있었던 셈이 된다.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신 시각은 제 구시

이다.

해가 빛을 잃고 – 세 복음서 모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공통되게 기록하며

누가만이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이 천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구체

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밝은 때라고 할 수 있는 제 육시경부터 제구시까지 어

둠움이 임했던 사실로 볼 때 단순히 구름이 가려 어두워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한편

이 어두움에 관해 혹자는 가견적(可見的)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는

가 하면(Luther, Calvin, Zahn), 또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한

다(Morris). 이중 전자의 견해가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세 시간에 결쳐 어두움이 깔린 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언급된 ‘휘장'(* ,

카나페타스마)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인 것으로 보인다(출

26:31-33).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출 27:21;

30:7; 레 4:7; 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2; 히

9:7).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들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레 16:2)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누가는 휘장이 찢어짐을 ‘찢어졌다'(* ,

에스키스데)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 , 메손)가 찢어졌다는 표현

을 사용하며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세 복

음의 표현은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예수의 대속하심

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22). 이

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하였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적(中保的)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히 3:1)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벧전 2:9). 또한 이는 위선과 형식주의로 부패해진 유

대교의 가증스로움에 대한 심판 경고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23:46

아버지여…부탁하나이다 – 운명 직전에 부르짖으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다. 누가

의 표현은 마태나 마가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

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7:50,51; 막 15:37,38). (2) 마태와

마가는 십자각 위에서 예수가 두번 크게 소리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첫번째는 ‘엘리 엘

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밝혔지만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럿다고 언급한다(마

27:46,50; 막 15:34,37). (3) 마태와 마가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

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사실과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마 27:47-49; 막

15:35,36) 누가의 경우 전혀 그러한 언급이 없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의

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차이는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완수(完遂)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

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같은 추측은 요 19:30에서 언급된 바처럼 ‘다 이루었

다’라고 말한 후 운명하신 사실과도 잘 어울린다. 두번째 차이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

에 나오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

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과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번째 차이 역시 희롱당하는 수치

스런 예수의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운명하시다(* , 여세프뉴센) –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만 사용된 이 단어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인데(막 15:37 주

석 참조)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 , 아페

켄 토프뉴마)라고 언급한다.

=====23:47

백부장이…정녕 의인이었도다 – 백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

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41절에서 사형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

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사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의 이같은 고백은 이제까지

당했던 예수의 수치스러움과 고난이 정당(正當)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를 의

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 , 토 게노메논)이

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과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

한다(44-46절). 한편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외에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부활하는 성도와 예수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마 27:51-53) 이같은

일을 보고 백부장외 예수를 지키던 사람까지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

고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 능력의 나

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2;20; 5:25; 7:16; 13:13; 17:15; 18:43). 또 평

행본문 마 27:54; 막 15:3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반면 누가는 ‘의

인'(* , 디카이오스)이라고 말하는 데 이방인을 주로 염두에둔 누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의인’이라는 법정 용어가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있

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23:48

구경하러 모인…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

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있다. ‘구경’에 해당하

는 헬라어 ‘데오리아'(* )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

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

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아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

추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

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행 2:22-24).’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 2:23)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행 2:37)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23: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

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

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막 15:40,41)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

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

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

라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쫓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

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

되지 않았을 것이다.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 –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태나 마가와 달리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가

는 안식일 전 날 저문 때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 가까운 시각

이라고 할 수 있다(막 15:42). 대신 누가는 장례가 끝났을 때를 ‘안식일이 거의 된’

(54절) 시각이라 밝히고 있다. 어쨌든 예수의 장례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치러진 것으

로 보이며 누가에 의하면 제 9시경부터 첫 시까지(현재 시간 개념으로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약 세 시간 동안인 듯하다. 누가는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유대 민중들로부

터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산헤드린의 회원이라 소개했다. 3년 동안 예수께 훈련을 받고

많은 권능을 목격했던 열 두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해 버린 상황에서 예수 살해 음모

의 주역이었던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내러 나타난 것 또한 의

외의 사실이다. 그는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장사를 지원하고 나섰다.

=====23: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 – 이 구절은 요셉에 대한 첫번째 언급

에서 소개된 ‘공회 의원’이라는 신분에 대해 해명(解明)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희

의 결의’는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살을 말한다(22:66-71). 그리고 ‘행

사'(* , 프랖시스)는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성사시키게 했던 공회 의

원들의 모든 음모와 실행을 뜻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셉이 공회의원이

기는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할 때 가담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에 대한

사형 결정에 반대한 공회 의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요셉이 부자이며 예수의

제자라고만 언급하고 공회의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마 27:57) 아마도 마

태는 산헤드린 전체가 이의 없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

으로 보인다(26:59).

아라마대(* ) – 요셉의 출신지인 듯한 이 지명은 유대 땅에

속한 곳으로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되며 삼상 1:1에

언급되는 사무엘의 출생지 ‘라마다임'(* )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 요셉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마

가의 표현과 동일하다(막 15:43). 마태는 이 말 대신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하는데

따라서 세 복음서 모두가 요셉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음을 공통되게 언급한

다. 그는 2:25,38에 언급된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확신하였기에, 모든 사람이 절망과 비탄 가운데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 약속에 대

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23:52

빌라도에게…시체를 달라 하여 –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형 집행 후 시체 처리에 관한 권한이 로마군 통독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53절에서

‘내린다'(* , 카다이레오)라는 표현을 볼 때 아직 시신이 십자가 위

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상태로 묘사되었

다(막 15:44-46). 또 마가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사실에 대

해 매우 용기있는 행동임을 ‘당돌하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

라고 밝혀진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2:50-62에서의 베드로의

부인(否認) 참조)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였다. 마가

에 따르면 발라도가 요셉의 요구에 대해 보인 첫 반능은 ‘벌써 주었을까?’하는 것이었

다(막 15:44). 따라서 요셉의 요구는 상식보다 빨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의 주검을 공중에 방치되도록 버려둘 수 없다는 애타는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23: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 십자가 위에 달려있던 예수의 주검을 요셉이 직접 내려

받고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세마포로 시체를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

적인 시체 처리 방법이다(요 11:44; 19:40) 세마포로 싸기 전 시체를 깨끗이 씻었을

것으로 보인다(행 9:37). 한편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대개 매장하지 않은

채 버려두어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했다. 그러나 유대법상으로는 죽을 죄를 지어 사

형단한 죄인을 나무에 매단 후 당일에 반드시 장사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한번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매우 고

급스럽고 정결한 무덤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요셉은 이 무덤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

을 위한 무덤으로 조성해 놓았던 것같다. 요 19:41에서는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이 십

자가에 못박혔던 곳에 있는 동산에 위치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의 부유층만이 가

질 수 있는 동산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23: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예수의 장례가 매우 촉박하게 끝났

음을 시간적 묘사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즉 안식일이 박두함으로 인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은 시간 때

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를 현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금요일 오후 6시경이 된다.

그러나 요 19:39-42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근쯤 갖고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유대법에 따라 여유있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언급된다. 아

마도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례도 매우 긴장속에 치러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시

간의 촉박성과 장례 과정에 중요한 향료와 향품을 준비하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장사지낸 일에 니고데모가 협력한 사실에 대

해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몰약과 침향만 가지고 왔던 사실 및 요셉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공의회 의원이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들 두 사람이 사전에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내기 위해 서로 의논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 – 장자지낸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확인한 증

인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여자들은 49절에서 언급된 인물들인 것으로 추정되며 24:5,10절에 언급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과 동일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특히 마가는 무덤을 확인했던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일한 인물들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갈릴리 여

인들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잘 안다는 점에서 예수의 시체

를 잘 알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무덤을 잘못 보았다는 말이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부활 후 빈 무덤에 대한 증언도 역시 확실한 것임을 간

접적으로 보증(保證)하게 된다. 이렇듯 예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던

까닭에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였으며 또 예수

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24:1-7).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갈릴리 여자들이 무덤으로부터 떠나 그들의 숙

소로 돌아가 시체에 바르지 못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해 두었다고 언급하면서 그 시각

이 안식일 전이었던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막 16:1에서는 안식일이 지난 뒤 향품을

샀다고 언급되고있다. 당시 상황이 매우 촉박(促迫)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가의 증

언이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거의 안식일이 다 되었다는

점(54절)과 무덤이 성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향품을

산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이다. 또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던 당시 사람들

과 특히 유월절과 무교절을 낀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안식일은 더우 엄격하게 지켜졌

을 터이므로 향품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고 봄이 합리적이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마태, 마가, 요한 모두 안식일을 건너 뛰어 이야기

를 진행시키지만 누가는 계명을 따라 하루 쉬었음을 말함으로써 하루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같은 누가의 언급은 당시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보여주고 예수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되고 급박했던 반면 부활을 앞둔 하루의 공간이 침

묵과 적막감에 휩싸인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같은 하루는 죽음을 넘어서고

부활을 앞둔 새로운 긴장의 공간이 되고 있다.

헬라어 누가복음 2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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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아나스탄 하판 토 플레도스 아우톤 에가곤 아우톤 에피 톤 필라톤

개역개정,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새번역,1 그들 온 무리가 일어나서, 예수를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우리말성경,1 온 무리가 모두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가톨릭성경,1 그리하여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영어NIV,1 Then the whole assembly rose and led him off to Pilate.

영어NASB,1 Then the whole body of them got up and brought Him before Pilate.

영어MSG,1 Then they all took Jesus to Pilate

영어NRSV,1 Then the assembly rose as a body and brought Jesus before Pilate.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ανασταν απαν το πληθος αυτων ηγαγεν αυτον επι τον πιλατον

라틴어Vulgate,1 et surgens omnis multitudo eorum duxerunt illum ad Pilatum

히브리어Modern,1 ויקם כל קהלם ויוליכהו אל פילטוס׃

성 경: [눅23: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무리가…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산헤드린 회의가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 결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에 그 때는 이른 아침을 지난 오전의 어느 시각일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A.D. 26-36년에 걸쳐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으로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해 각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끌고간 자들에 대해 누가는 언급할 뿐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말하지않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마 27:1,2; 막 15: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즉 산헤드린 대표들이 끌고 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가 언급한 ‘무리’도 역시 문맥상 공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무리’ 앞에 ‘온’이라는 뜻의 헬라어 ‘하관'(*)을 사용하여 ‘온 무리'(공동 번역)라고 표현한다. 또 누가는 예수를 단순히 ‘끌고 가다'(*, 아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갔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마가 마태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언급한 것처럼(22:63-65),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하려는 듯한 누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에릌산토 데 카테고레인 아우투 레곤테스 투톤 휴라멘 디아스트레폰타 토 에드노스 헤몬 카이 콜루온타 포루스 카이사리 디도나이 카이 레곤타 헤아우톤 크리스톤 바실레아 에이나이

개역개정,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새번역,2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2 그리고 예수께 대한 고소가 시작됐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민족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이사께 세금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며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영어NIV,2 And they began to accuse him, saying, “We have found this man subverting our nation. He opposes payment of taxes to Caesar and claims to be Christ, a king.”

영어NASB,2 And they began to accuse Him, saying, “We found this man misleading our nation and forbidding to pay taxes to Caesar, and saying that He Himself is Christ, a King.”

영어MSG,2 and began to bring up charges against him. They said, “We found this man undermining our law and order, forbidding taxes to be paid to Caesar, setting himself up as Messiah-King.”

영어NRSV,2 They began to accuse him, saying, “We found this man perverting our nation, forbidding us to pay taxes to the emperor, and saying that he himself is the Messiah, a king.”

헬라어신약Stephanos,2 ηρξαντο δε κατηγορειν αυτου λεγοντες τουτον ευρομεν διαστρεφοντα το εθνος και κωλυοντα καισαρι φορους διδοναι λεγοντα εαυτον χριστον βασιλεα ειναι

라틴어Vulgate,2 coeperunt autem accusare illum dicentes hunc invenimus subvertentem gentem nostram et prohibentem tributa dari Caesari et dicentem se Christum regem esse

히브리어Modern,2 ויחלו לדבר עליו שטנה לאמר את זה מצאנו מסית את העם ומנע אתו מתת מס אל הקיסר באמרו כי הוא מלך המשיח׃

성 경: [눅23: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고소하여…그리스도라 하더라 –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예수를 고소한 것으로 언급하는데 상황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표현이 마태와 마가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1) 민심을 현혹(眩或)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2)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3)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은 사회.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같은 음모는 이미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바이다(20:20). 고소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에게는 종교 문제가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회.정치적 이유는 총독으로서 빌라도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법적인 제판이 가능하리라고 그들은 판단하여 사회.정치적 이유만을 강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11-12; 막15:2-3). 그러나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 될 죄목 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왔으면 이유를 먼저 밝히는 것이 당현하며 마태와 마가의 경우처럼 예수를 끌고 오자마자 빌라도가 먼저 ‘네가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꾸며진 일임을 더욱 선명히 부각(浮刻)시키고 있는 셈이다.

󰃨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예수에 대한 두번째 죄목인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해도 민중들이 무서워 못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첫번째로 제시한 죄목인 민심 교란죄는 해당될 수 있으나(19:42-21:38의 내용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예수가 성전을 장악하여 혁신적인 가르침을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25에서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로 대답하여 대적들로 하여금 책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호 데 필라토스 에로테센 아우톤 레곤 쉬 테이 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아우토 에페 쉬 레게이스

개역개정,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새번역,3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대답하셨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우리말성경,3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소.”

가톨릭성경,3 빌라도가 예수님께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영어NIV,3 So Pilate asked Jesus,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Yes, it is as you say,” Jesus replied.

영어NASB,3 So Pilate asked Him, saying,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And He answered him and said, ” It is as you say.”

영어MSG,3 Pilate asked him, “Is this true that you’re ‘King of the Jews’?” “Those are your words, not mine,” Jesus replied.

영어NRSV,3 Then Pilate asked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He answered, “You say so.”

헬라어신약Stephanos,3 ο δε πιλατος επηρωτησεν αυτον λεγων συ ει ο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 ο δε αποκριθεις αυτω εφη συ λεγεις

라틴어Vulgate,3 Pilatus autem interrogavit eum dicens tu es rex Iudaeorum at ille respondens ait tu dicis

히브리어Modern,3 וישאלהו פילטוס לאמר האתה הוא מלך היהודים ויען אתו ויאמר אתה אמרת׃

성 경: [눅23: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대표들로부터 고소를 접수하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예수를 심문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는데 고소자들이 제기한 세번째 죄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세 가지는 공히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번째 ‘왕이냐?’라는 문제만 확인하면 세 가지 죄목에 대한 판결도 자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 네 말이 옳도다 – 원문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쉬 레게이스'(*)를 마샬(I.H.Marshall)은 ‘그 말은 네 말이다’라고 번역하며 KJV나 RSV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옮겼다(Thou sayest it, KJV; You have said so, RSV).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인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면서 무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산헤드린의 체포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정성(公正性) 내지는 합법성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생각하는 왕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왕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염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려고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한 듯하다. 실로 예수는 온 우주와 만물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나(계 17:14) 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하는 왕권이란 현세적 정치적 의미에만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22:67, 68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는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판단으로 이해하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호 데 필라토스 에이펜 프로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투스 오클루스 우뎅 휴리스코 아이티온 엔 토 안드로포 투토

개역개정,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새번역,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소.”

우리말성경,4 그러자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다.”

가톨릭성경,4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영어NIV,4 Then Pilate announced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crowd, “I find no basis for a charge against this man.”

영어NASB,4 Then Pilate said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crowds, “I find no guilt in this man.”

영어MSG,4 Pilate told the high priests and the accompanying crowd, “I find nothing wrong here. He seems harmless enough to me.”

영어NRSV,4 Then Pilate said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crowds, “I find no basis for an accusation against this man.”

헬라어신약Stephanos,4 ο δε πιλατος ειπεν προς τους αρχιερεις και τους οχλους ουδεν ευρισκω αιτιον εν τω ανθρωπω τουτω

라틴어Vulgate,4 ait autem Pilatus ad principes sacerdotum et turbas nihil invenio causae in hoc homine

히브리어Modern,4 ויאמר פילטוס אל ראשי הכהנים ואל המון העם לא מצאתי דבר אשם באיש הזה׃

성 경: [눅23: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 빌라도의 무죄 판결을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잇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자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즉 예수가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武力的) 힘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증거나 조짐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한층 더 뚜렷이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즉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였다(마 27:13-18; 막 15:4-10).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내가 꿈에서 이 재판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입하지 않도록 종용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마태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이 합법적 공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명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지니는 객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호이 데 에피스퀴온 레곤테스 호티 아나세이에이 톤 라온 디다스콘 칻 홀레스 테스 유다이아스 카이 아릌사메노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헤오스 호데

개역개정,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새번역,5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5 그러나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저 사람이 갈릴리에서 시작해 여기 예루살렘까지 유대 온 땅을 가르치며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영어NIV,5 But they insisted, “He stirs up the people all over Judea by his teaching. He started in Galilee and has come all the way here.”

영어NASB,5 But they kept on insisting, saying, “He stirs up the people, teaching all over Judea, starting from Galilee even as far as this place.”

영어MSG,5 But they were vehement. “He’s stirring up unrest among the people with his teaching, disturbing the peace everywhere, starting in Galilee and now all through Judea. He’s a dangerous man, endangering the peace.”

영어NRSV,5 But they were insistent and said, “He stirs up the people by teaching throughout all Judea, from Galilee where he began even to this place.”

헬라어신약Stephanos,5 οι δε επισχυον λεγοντες οτι ανασειει τον λαον διδασκων καθ ολης της ιουδαιας αρξαμενος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εως ωδε

라틴어Vulgate,5 at illi invalescebant dicentes commovet populum docens per universam Iudaeam et incipiens a Galilaea usque huc

히브리어Modern,5 והם התאמצו לדבר מדיח הוא את העם בלמדו בכל יהודה החל מן הגליל ועד הנה׃

성 경: [눅23: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자들이 승복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급된 ‘더욱 굳세게’라는 헬라어 ‘에피스퀴오'(*)는 ‘역설하다’, ‘강해지다'(grow strang) 또는 ‘고집하다'(insist)의 뜻을 가진 말로서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 예수의 활동이 고소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 이 말은 예수의 행동 반경이 유대 전체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예수의 영향력이 유대 전역에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예수의 활동 영역은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요 4:1-42)와 갈릴리, 베레아(막 10:1), 데가볼리(막 5:20), 가이사랴 빌립보(막 8:27), 이두매, 두로, 시돈(막 3:8) 등 이방 지역까지 포함하는 팔레스틴 전역이었다.

󰃨 갈릴리에서부터…소동케 하나이다 – 다시 한번 예수가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활동 영역이 ‘온 유대’임을 보충하여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중앙인 예루살렘까지 진입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된 단어인 ‘소동케 하나이다’는 헬라어로 ‘아나세이오'(*)인데 ‘흔들다’, ‘충동하다’, ‘동요시키다’, ‘선동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막 15:11). 누가는 2절에서 ‘백성을 미혹’하였다고 표현하여 예수가 단순히 백성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반면(*, 디아스트레포)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고조된 표현인 ‘아나세이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도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판결에 대해 불복(不服)하고 더욱 거세게 예수를 고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임을 밝힌 것은 당시 폭력 혁명을 추구하던 헤롯당 저항 운동의 근거지인 갈릴리와 관련지으려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를 폭력적 반란을 일으킬 선동자라는 인상을 빌라도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필라토스 데 아쿠사스 에페로테센 에이 호 안드로포스 갈릴라이오스 에스틴

개역개정,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새번역,6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서 물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오?”

우리말성경,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영어NIV,6 On hearing this, Pilate asked if the man was a Galilean.

영어NASB,6 When Pilate heard it, he asked whether the man was a Galilean.

영어MSG,6 When Pilate heard that, he asked, “So, he’s a Galilean?”

영어NRSV,6 When Pilate heard this, he asked whether the man was a Galilean.

헬라어신약Stephanos,6 πιλατος δε ακουσας γαλιλαιαν επηρωτησεν ει ο ανθρωπος γαλιλαιο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6 Pilatus autem audiens Galilaeam interrogavit si homo Galilaeus esset

히브리어Modern,6 ויהי כשמע פילטוס את שם הגליל וישאל אם הוא איש גלילי׃

성 경: [눅23: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 빌라도가 고소자들의 제 고소를 듣고 나타낸 반응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놀라운 어투이다. 즉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로운 사건 전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헤롯에게로 넘길 수 있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즉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아래있기 때문에 갈릴리는 사람인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면 쉽게 자신의 난처함이 해결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안드로포스 갈릴라이오스(*)는 촌놈이라는 뜻을 내포한 경멸적(輕蔑的) 표현이다(I. H. Marshall). 빌라도는 갈릴리라는 말에 예수가 시골에서 올라온 별 것 아닌 청년쯤으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예수를 대한 듯하다. 한편 6-12절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중 본서만이 나오는데, 누가는 이미 앞에서도 두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헤롯 안티파스에 관해 언급했다(3:1; 9:7-9; 13:31).

카이 에피그누스 호티 에크 테스 엨수시아스 헤로두 에스틴 아네펨프센 아우톤 프로스 헤로덴 온타 카이 아우톤 엔 히에로솔뤼모이스 엔 타우타이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개역개정,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새번역,7 그는 예수가 헤롯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서,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마침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우리말성경,7 빌라도는 예수께서 헤롯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에게 예수를 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영어NIV,7 When he learned that Jesus was under Herod’s jurisdiction, he sent him to Herod, who was also in Jerusalem at that time.

영어NASB,7 And when he learned that He belonged to Herod’s jurisdiction, he sent Him to Herod, who himself also was in Jerusalem at that time.

영어MSG,7 Realizing that he properly came under Herod’s jurisdiction, he passed the buck to Herod, who just happened to be in Jerusalem for a few days.

영어NRSV,7 And when he learned that he was under Herod’s jurisdiction, he sent him off to Herod, who was himself in Jerusalem at that time.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επιγνους οτι εκ της εξουσιας ηρωδου εστιν ανεπεμψεν αυτον προς ηρωδην οντα και αυτον εν ιεροσολυμοις εν ταυταις ταις ημεραις

라틴어Vulgate,7 et ut cognovit quod de Herodis potestate esset remisit eum ad Herodem qui et ipse Hierosolymis erat illis diebus

히브리어Modern,7 וכאשר ידע כי מממשלת הורדוס הוא שלחו אל הורדוס אשר היה גם הוא בירושלים בימים האלה׃

성 경: [눅23: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헤롯의 관할 – 헤롯은 B.C.4-A.D.39까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봉왕 안티파스(Antipas)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빌라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했으며 그가 관연 누구인지 알고자 했었다(8절; 9:7-9).

󰃨 헤롯에게 보내니 – 여깃 ‘보내니’라는 동사가 ‘아니펨포'(*)라는 것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단어의 뜻이 ‘위로'(*, 아나)라는 뜻과 ‘보내다'(*, 펨포)라는 뜻이 결합된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즉 ‘위로 올려 보내다’라는 뜻이라면 빌라도 보다 헤롯이 상부에 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헤롯은 빌라도 총족 아래 있는 분봉왕이었다. 따라서 단어는 단순히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반대로 헤롯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보낼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도 누가는 이 단어를 단순히 ‘보내다'(send)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관에게 보냈다는 주장은(Meyer, Farrar) 적절하지 못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것은 첫째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골치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헤롯의 관할 사건을 자신이 처리함으로써 헤롯을 소외시키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配廬)로 생각할 수 잇다(12절 주석 참고).

󰃨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누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관할 구역이 아닌 예루살렘에 마침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하다. 즉 종교적 이유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호 데 헤로데스 이돈 톤 예순 에카레 리안 엔 가르 엨스 히카논 크로논 델론 이데인 아우톤 디아 토 아쿠에인 페리 아우투 카이 엘피젠 티 세메이온 이데인 휲 아우투 기노메논

개역개정,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새번역,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하였고, 또 그는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

우리말성경,8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예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헤롯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예수께서 어떤 기적 행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NIV,8 When Herod saw Jesus, he was greatly pleased, because for a long time he had been wanting to see him. From what he had heard about him, he hoped to see him perform some miracle.

영어NASB,8 Now Herod was very glad when he saw Jesus; for he had wanted to see Him for a long time, because he had been hearing about Him and was hoping to see some sign performed by Him.

영어MSG,8 Herod was delighted when Jesus showed up. He had wanted for a long time to see him, he’d heard so much about him. He hoped to see him do something spectacular.

영어NRSV,8 When Herod saw Jesus, he was very glad, for he had been wanting to see him for a long time, because he had heard about him and was hoping to see him perform some sign.

헬라어신약Stephanos,8 ο δε ηρωδης ιδων τον ιησουν εχαρη λιαν ην γαρ θελων εξ ικανου ιδειν αυτον δια το ακουειν πολλα περι αυτου και ηλπιζεν τι σημειον ιδειν υπ αυτου γινομενον

라틴어Vulgate,8 Herodes autem viso Iesu gavisus est valde erat enim cupiens ex multo tempore videre eum eo quod audiret multa de illo et sperabat signum aliquod videre ab eo fieri

히브리어Modern,8 וישמח הורדוס עד מאד כראותו את ישוע כי מימים רבים אוה לראת אתו על כי שמע את שמעו ויקו לראת אות אשר יעשה׃

성 경: [눅23: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 빌라도가 예수를 헤룻에게 보내었을 때 헤롯의 반응은 의외로 ‘심히 기뻐하는'(*, 에카레 리안) 것이었다. 누가는 기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누가는 이같은 헤롯의 마음을 9:9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죽었던 세례 요한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말하거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믿었다는 소문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9:7-9). 또 하나의 이유는 소문에 들은대로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누가는 덧붙이고 있다. 고대의 왕들은 자신의 즐거움읊 만끽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재주를 공연하게 했다. 헤롯 또한 이런 류의 호기심을 갖고서 예수를 마술사 내지는 특출한 재주꾼으로 취급하였던 것 같다. 그는 예수로부터 심심풀이용 오락과 유흥을 기대했을 뿐 영적인 은혜나 심오한 사상 등에 대한 진지한 소원은 전혀 결여한 상태였다.

에페로타 데 아우톤 엔 로고이스 히카노이스 아우토스 데 우덴 아페크리나토 아우토

개역개정,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새번역,9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말성경,9 헤롯이 많은 질문으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영어NIV,9 He plied him with many questions, but Jesus gave him no answer.

영어NASB,9 And he questioned Him at some length; but He answered him nothing.

영어MSG,9 He peppered him with questions. Jesus didn’t answer–not one word.

영어NRSV,9 He questioned him at some length, but Jesus gave him no answer.

헬라어신약Stephanos,9 επηρωτα δε αυτον εν λογοις ικανοις αυτος δε ουδεν απεκρινατο αυτω

라틴어Vulgate,9 interrogabat autem illum multis sermonibus at ipse nihil illi respondebat

히브리어Modern,9 וירב לשאל אותו והוא לא השיב אתו דבר׃

성 경: [눅23: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여러 말로 물으나 – 누가는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好意的)으로 맞이했음을 언급한 후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6절에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는 ‘묻되’라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여기서는 ‘여러 말로 물었다’고 말한다. 이는 헤롯이 예수를 오랬동안 보고 싶어한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헤롯이 무엇에 관해 질문하였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소 내용과 자기의 관심사에 대해서 함께 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헤롯의 질문은 오랫동안 진행 되었고 고소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10절).

󰃨 아무 말도 대잡지 아니하시니 – 어떤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마태와 마가도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가 침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마 27:12-14; 막 15:4,5). 이 같은 예수의 침묵에 대해 사 53:7의 예언의 성취라는 해석이나(J. Jeremias) 정직한 질문이 아닐 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원칙이 복음서 안에서 일관되고 있다는 주장(Hooker)도 설득력이 있다(22:67,68 주석 참조). 헤롯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수다스러운 질문의 홍수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조용하고 위엄있는 침묵으로 맞서셨다. 아무튼 예수는 빌라도나 헤롯, 그리고 고소자들의 언행에 대해 대답할 가치 조차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빌라도에게 ‘네가 말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것도 침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3절 주석 참조).

헤이스테케이산 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그람마테이스 유토노스 카테고룬테스 아우투

개역개정,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새번역,1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곁에 서 있다가, 예수를 맹렬하게 고발하였다.

우리말성경,10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곁에 서서 예수를 격렬하게 고소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영어NIV,10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standing there, vehemently accusing him.

영어NASB,10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were standing there, accusing Him vehemently.

영어MSG,10 But the high priests and religion scholars were right there, saying their piece, strident and shrill in their accusations.

영어NRSV,10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stood by, vehemently accusing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ιστηκεισαν δε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γραμματεις ευτονως κατηγορουντε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stabant etiam principes sacerdotum et scribae constanter accusantes eum

히브리어Modern,10 ויעמדו 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סופרים ויתחזקו לדבר עליו שטנה׃

성 경: [눅23:1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힘써 고소하더라 –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했을 때 무리들이 더욱 격렬(激烈)하게 고소한 묘사를(5절) 연상하게 하는 이 구절은 헤롯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예수를 헤롯에게 데려왔을 때 고소자들은 이미 이유를 말했을텐데 또다시 ‘힘써'(*, 유토노스) 고소하는 것은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거세게 불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3절) 호의적인 헤롯의 심문 과정을 고소자들이 참을 수 없어 다시 강력하게 정죄를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소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빌라도 법정에서는 단지 ‘무리’라고 언급된 데 비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헤롯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과 또 빌라도의 심문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헤롯마저 그러하자 온갖 허위 사실들을 총 동원하여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엨수데네사스 데 아우톤 카이 호 헤로데스 쉰 토이스 스트라튜마신 아우투 카이 엨파잌사스 페리발론 에스데타 람프란 아네펨프센 아우톤 토 필라토

개역개정,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새번역,11 헤롯은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수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

우리말성경,11 그러자 헤롯과 그의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러고는 예수께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영어NIV,11 Then Herod and his soldiers ridiculed and mocked him. Dressing him in an elegant robe, they sent him back to Pilate.

영어NASB,11 And Herod with his soldiers, after treating Him with contempt and mocking Him, dressed Him in a gorgeous robe and sent Him back to Pilate.

영어MSG,11 Mightily offended, Herod turned on Jesus. His soldiers joined in, taunting and jeering. Then they dressed him up in an elaborate king costume and sent him back to Pilate.

영어NRSV,11 Even Herod with his soldiers treated him with contempt and mocked him; then he put an elegant robe on him, and sent him back to Pilat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ξουθενησας δε αυτον ο ηρωδης συν τοις στρατευμασιν αυτου και εμπαιξας περιβαλων αυτον εσθητα λαμπραν ανεπεμψεν αυτον τω πιλατω

라틴어Vulgate,11 sprevit autem illum Herodes cum exercitu suo et inlusit indutum veste alba et remisit ad Pilatum

히브리어Modern,11 ויבז אתו הורדוס עם צבאותיו ויהתל בו וילבש אותו בגד זהורית וישלחהו אל פילטוס׃

성 경: [눅23:1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헤롯이…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 이같은 헤롯의 행위는 22:63-65에서 언급된 희롱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8-10절의 내용과 15절에서 빌라도가 언급한 내용 즉 헤롯이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헤롯이 정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다면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는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헤롯의 태도가 8절과 달리 돌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9절에 언급된 예수의 태도에 대해 헤롯은 예수께 대해 심한 불쾌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은 예수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자신의 질문에 대해 대답조차 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은 분봉왕이기는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인 헤롯에게는 자신에 대한 무시 내지는 모독으로 생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는 1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고소자들이 거세게 정죄하기를 촉구하였고, 특히 고소자의 신분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점이 헤롯에게 큰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즉 최고의 종교 지도자인 자들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율법학자 서기관들의 요구를 헤롯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신정국(神政國)으로서의 전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정치와 종교의 밀착된 야합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이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이 예수에게 무시당했다는 굴욕감과 막강한 종교 세력의 압력 때문에 예수가 죄없음에도 멸시하고 희롱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기는 했지만 고소자들의 요구대로 구체적 죄목을 붙여 정죄하지는 못하였다.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재판을 넘겨주는데 ‘빛난 옷’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이는 부자나 천사들이 입는 옷임을 암시하기도 한다(행 10:30; 약 2:2,3; 계 15:6;19:8)(I. H. Marshall). 무슨 색깔의 옷인지도 밝히지 않았는데 상황은 다르지만 요 19:2에 의하면 붉은 옷을 입혔다고 언급되는데 그렇다면 왕들이 입는 옷이라고도 볼 수 있다(Klostermann). 그러나 단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빛나는 옷이 귀하고 위엄있는 옷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예수의 치욕적(恥辱的)인 희롱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가장 귀한 사람 복장을 갖추게 하여 멸시하고 희롱하는 효과를 극적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한 듯 하다.

에게논토 데 필로이 호 테 헤로데스 카이 호 필라토스 엔 아우테 테 헤메라 멭 알렐론 프로위페르콘 가르 엔 에크드라 온테스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새번역,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우리말성경,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처럼 지냈으나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영어NIV,12 That day Herod and Pilate became friends–before this they had been enemies.

영어NASB,12 Now Herod and Pilate became friends with one another that very day; for before they had been enemies with each other.

영어MSG,12 That day Herod and Pilate became thick as thieves. Always before they had kept their distance.

영어NRSV,12 That same day Herod and Pilate became friends with each other; before this they had been enemies.

헬라어신약Stephanos,12 εγενοντο δε φιλοι ο τε πιλατος και ο ηρωδης εν αυτη τη ημερα μετ αλληλων προυπηρχον γαρ εν εχθρα οντες προς εαυτους

라틴어Vulgate,12 et facti sunt amici Herodes et Pilatus in ipsa die nam antea inimici erant ad invicem

히브리어Modern,12 ביום ההוא נהיו פילטוס והורדוס לאהבים יחדו כי מלפנים איבה היתה בינתם׃

성 경: [눅23:1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빌라도와 헤롯이 어떻게하여 원수지간이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서 예수를 넘긴 ‘당일'(*, 엔 아우테 테 헤메라)에는 친구가 되어 서로 협조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3:1에서 언급한 바처럼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실에 대해 헤롯이 자기 관할에 대한 월권으로 생각하여 빌라도를 미워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Farrar). 그렇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준 것은(6,7절) 헤롯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빌라도의 배려로 보일 수 있으며 화해의 제스쳐라고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에게 내린 결정이 같은 내용이었다는 의미와 예수를 서로 넘겨줌으로써 서로를 존중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마도 누가의 의도는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증으로서 원수지간이었던 빌라도와 헤롯이 공통되게 예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학 있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의 의도와는 일치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역설적으로 비꼬아 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이제까지는 원수로 지내던 자들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서로 미루면서 책임을 회피(回避)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 보다 설득력이 약하다.

필라토스 데 슁칼레사메노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투스 아르콘타스 카이 톤 라온

개역개정,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새번역,13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모아 놓고서,

우리말성경,13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가톨릭성경,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영어NIV,13 Pilate called together the chief priests, the rulers and the people,

영어NASB,13 Pilate summoned the chief priests and the rulers and the people,

영어MSG,13 Then Pilate called in the high priests, rulers, and the others

영어NRSV,13 Pilate then called together the chief priests, the leaders, and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3 πιλατος δε συγκαλεσαμενος τους αρχιερεις και τους αρχοντας και τον λαον

라틴어Vulgate,13 Pilatus autem convocatis principibus sacerdotum et magistratibus et plebe

히브리어Modern,13 ויקרא פילטוס את ראשי הכהנים ואת השרים ואת העם׃

성 경: [눅23:1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 헤롯으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는 다시 분명한 판결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동원시킨 듯 하다. 즉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이라고 표현된 일반 공직자들 즉 관료 행정적인 지도자들(*, 아르콘) 그리고 일반 ‘백성'(*, 라오스)을 불러 모으고 공식 재판을 열 채비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입회하다록 한 것은 자신의 판결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인식시키고 판결 뒤에 올지 모르는 잡음을 없애고자 하는 빌라도의 숨은 의도인 것으로 보여진다.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프로세넹카테 모이 톤 안드로폰 투톤 호스 아포스트레폰타 톤 라온 카이 이두 에고 에노피온 휘몬 아나크리나스 우덴 휴론 엔 토 안드로포 투토 아이티온 혼 카테고레이테 캍 아우투

개역개정,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새번역,14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이 사람이 백성을 오도한다고 하여 내게로 끌고 왔으나, 보다시피, 내가 그대들 앞에서 친히 신문하여 보았지만, 그대들이 고발한 것과 같은 죄목은 아무것도 이 사람에게서 찾지 못하였소.

우리말성경,14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백성들을 선동한다 해서 내게로 데려왔다. 하지만 너희 앞에서 신문한 결과 너희가 고소한 것 같은 죄목을 찾지 못하겠다.

가톨릭성경,14 그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영어NIV,14 and said to them, “You brought me this man as one who was inciting the people to rebellion. I have examined him in your presence and have found no basis for your charges against him.

영어NASB,14 and said to them, “You brought this man to me as one who incites the people to rebellion, and behold, having examined Him before you, I have found no guilt in this man regarding the charges which you make against Him.

영어MSG,14 and said, “You brought this man to me as a disturber of the peace. I examined him in front of all of you and found there was nothing to your charge.

영어NRSV,14 and said to them, “You brought me this man as one who was perverting the people; and here I have examined him in your presence and have not found this man guilty of any of your charges agains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προσηνεγκατε μοι τον ανθρωπον τουτον ως αποστρεφοντα τον λαον και ιδου εγω ενωπιον υμων ανακρινας ουδεν ευρον εν τω ανθρωπω τουτω αιτιον ων κατηγορειτε κατ αυτου

라틴어Vulgate,14 dixit ad illos obtulistis mihi hunc hominem quasi avertentem populum et ecce ego coram vobis interrogans nullam causam inveni in homine isto ex his in quibus eum accusatis

히브리어Modern,14 ויאמר אליהם הבאתם לפני את האיש הזה כמסית את העם והנה אני חקרתיו לעיניכם ולא מצאתי באיש הזה אשמת מאומה מן הדברים אשר אתם טוענים עליו׃

성 경: [눅23:1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너희가 이 사람을…끌어왔도다 – 빌라도는 입회한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확인시키고 있는데 고소 이유는 2절에서 고소자들이 언급한 세 가지 고소 이유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백성을 미혹한 죄이다. 즉 백성들을 거짓으로 속여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독특한 것은 3절에서 빌라도가 문제시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문제였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현혹시킨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왕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자신이 무죄 판결을 내렸고 헤롯도 그 판결에 사실상 동의했다는 점에서 고소자들이 제시한 다른 죄목을 다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 누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독특한 강조법 ‘보라'(*, 이두)로 말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사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크리노’는 기소 중인 죄수를 법적으로 심사한다는 의미의 법정 용어이다(고전 9:3). 빌라도는 입회인들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심문했던 사실(3절)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말은 4절에서 언급된 자신의 무죄판결을 다시 확인시켜줌과 아울러 이제까지의 재판 과정을 사실대로 입회인들에게 열거하여 앞으로 있을 판결에 참고하라는 암시이다.

알 우데 헤로데스 아네펨프센 가르 아우톤 프로스 헤마스 카이 이두 우덴 앜시온 다나투 에스틴 페프라그메논 아우토

개역개정,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새번역,15 헤롯도 또한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를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이오.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우리말성경,15 헤롯도 역시 죄목을 찾을 수 없어 그를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가톨릭성경,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영어NIV,15 Neither has Herod, for he sent him back to us; as you can see, he has done nothing to deserve death.

영어NASB,15 “No, nor has Herod, for he sent Him back to us; and behold, nothing deserving death has been done by Him.

영어MSG,15 And neither did Herod, for he has sent him back here with a clean bill of health. It’s clear that he’s done nothing wrong, let alone anything deserving death.

영어NRSV,15 Neither has Herod, for he sent him back to us. Indeed, he has done nothing to deserve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λλ ουδε ηρωδης ανεπεμψα γαρ υμας προς αυτον και ιδου ουδεν αξιον θανατου εστιν πεπραγμενον αυτω

라틴어Vulgate,15 sed neque Herodes nam remisi vos ad illum et ecce nihil dignum morte actum est ei

히브리어Modern,15 וגם הורדוס לא מצא כי שלחתי אתכם אליו והנה אין בו חטא משפט מות׃

성 경: [눅23:1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헤롯이…보내었도다 – 이 구절은 원문상 8-10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전제로하여 ‘너희들이 헤롯에게로 가서 예수가 죄없음을 확인하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빌라도는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를 선동가 내지는 모반 지도자로 선고 할 증거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판결이 초래할지도모를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헤롯을 끌어들이고 있다.

󰃨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역시 무죄였는데 4절에서 내렸던 무죄 판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칭 왕이라는 문제에 대한 판결 때에는 무죄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데 반해 여기서는 백성을 미혹케한 죄를 언급하면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살해를 주도하는 세력들을 의식한 타협적 자세를 제시한다.

파이듀사스 운 아우톤 아폴뤼소

개역개정,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새번역,16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하고, 놓아주겠소.”

우리말성경,16 그러니 나는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한 후에 풀어 주겠다.”

가톨릭성경,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영어NIV,16 Therefore, I will punish him and then release him.”

영어NASB,16 “Therefore I will punish Him and release Him.”

영어MSG,16 I’m going to warn him to watch his step and let him go.”

영어NRSV,16 I will therefore have him flogged and releas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αιδευσας ουν αυτον απολυσω

라틴어Vulgate,16 emendatum ergo illum dimittam

히브리어Modern,16 על כן איסרנו ואפטרנו׃

성 경: [눅23:1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발라도의 2차 심문]

󰃨 때려서 놓겠노라 – 빌라도가 제시한 타협안은 채찍으로 때린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빌라도의 결정은 고소를 해온 대제사장과 그 일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이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빌라도는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죄없는 자를 벌함으로서 로마의 영광인 공정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재판관으로서의 기본적인 공정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편, 네 차례의 석방 노력이란 (1) 이 고소는 종교 문제이니 유대인들에게 해결하라고 했던 점(요 18:31; 19:6,7) (2) 이 사건을 헤롯에게로 넘기려 했던 점(7절) (3) 유월절 특사(特赦) 대상으로 추천한 사실(막 15:6) 그리고 (4) 태형만 내리고 석방하겠노라고 제안한 점이다.

아낭켄 데 에이켄 아폴뤼에인 아우토이스 카타 헤오르텐 헤나

개역개정,17 (없음)

새번역,17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7절이 첨가되어 있음. ’17. 명절이 되어 빌라도는 죄수 한 사람을 그들에게 놓아주어야 했다’

우리말성경,17 (없음)

가톨릭성경,17 일부 수사본에는 ‘그는 축제 때마다 그들에게 한 사람을 풀어 줄 의무가 있었다.’라는 17절이 있다.

영어NIV,17 Now he was obliged to release one man to them at the Feast.

영어NASB,17 {Now he was obliged to release to them at the feast one prisoner.}

영어MSG,17 (OMITTED TEXT)

영어NRSV,17 Now he was obliged to release someone for them at the festival.(난외)

헬라어신약Stephanos,17 αναγκην δε ειχεν απολυειν αυτοις κατα εορτην ενα

라틴어Vulgate,17 necesse autem habebat dimittere eis per diem festum unum

히브리어Modern,17 ועליו היה לפטר להם איש אחד בימי החג׃

성 경: [눅23:1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대분분의 많은 사본들은 17절을 생략하고 있지만 일부 사본들에서는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은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절기법이 있음’을 밝히는 것인데 이는 마 27:15과 막 15:6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으로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M. Metzger, I. H. Marshall). 그러나 누가의 문맥에서는 17절이 생략된 채 18절과 곧바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적으로 군중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어 자연스럽다.

아네크라곤 데 팜플레데이 레곤테스 아이레 투톤 아폴뤼손 데 헤민 톤 바랍반

개역개정,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새번역,18 그러나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말하였다. “이 자를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시오.” –

우리말성경,18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 사람을 없애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풀어 주시오!” 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영어NIV,18 With one voice they cried out, “Away with this man! Release Barabbas to us!”

영어NASB,18 But they cried out all together, saying, “Away with this man, and release for us Barabbas!”

영어MSG,18 At that, the crowd went wild: “Kill him! Give us Barabbas!”

영어NRSV,18 Then they all shouted out together, “Away with this fellow! Release Barabbas for u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νεκραξαν δε παμπληθει λεγοντες αιρε τουτον απολυσον δε ημιν τον βαραββαν

라틴어Vulgate,18 exclamavit autem simul universa turba dicens tolle hunc et dimitte nobis Barabban

히브리어Modern,18 ויצעקו כל המונם ויאמרו הסר את זה ופטר לנו את בר אבא׃

성 경: [눅23:1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석방 제안에 대한 고소자들의 반응은 격양된 아우성으로 터져 나왔다. 여기서 언급된 ‘무리’란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빌라도가 모이게 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발자인 대제사장 일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마 27:20과 막 15:11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권하고 충동질하여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언급된다.

󰃨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놓아주소서 – 무리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에 반해 그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어서 미리 준비된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의 충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마가의 말이(막 15:11) 설득력을 갖는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죽이라고 외치는 이같은 요구는 대제사장들이 오랫동안 노려왔던 욕심이었다(19:47; 20:19; 22:2-6). 여기서 누가는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제안을 먼저 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시키기 위해 명절 때마다 최인 하나를 놓아주던 관례를 적용하고자 제안한 것으로 언급한다(마 27:17). 죄수 석방에 대한 결정권은 로마 총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먼저 제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는 모인 무리들이 바라바와 같은 살인범을 석방하라고 외치기보다는 차라리 예수와 같은 선량한 자의 석방을 선택하리라고 내심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 심리를 자극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내고 있다.

호스티스 엔 디아 스타신 티나 게노메넨 엔 테 폴레이 카이 포논 블레데이스 엔 테 퓔라케

개역개정,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새번역,19 바라바는, 그 성 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다.-

우리말성경,19 바라바는 성안에서 일어난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19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영어NIV,19 (Barabbas had been thrown into prison for an insurrection in the city, and for murder.)

영어NASB,19 (He was one who had been thrown into prison for an insurrection made in the city, and for murder.)

영어MSG,19 (Barabbas had been thrown in prison for starting a riot in the city and for murder.)

영어NRSV,19 (This was a man who had been put in prison for an insurrection that had taken place in the city, and for murder.)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στις ην δια στασιν τινα γενομενην εν τη πολει και φονον βεβλημενος εις φυλακην

라틴어Vulgate,19 qui erat propter seditionem quandam factam in civitate et homicidium missus in carcerem

히브리어Modern,19 והוא היה משלך בית האסורים על דבר מרד אשר נהיה בעיר ועל דבר רצח׃

성 경: [눅23:1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이 바라바는 –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며 살인을 서슴지 않은 혁명가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에는 독립을 위한 반란이 많았으며 반란의 지도자들은 영웅시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물론 군중들은 예수께서 수많은 권능을 행하실 때에는 한껏 예수를 좇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당하신 처지가 되자 이내 예수를 배격하게 되었다.

팔린 데 호 필라토스 프로세포네센 아우토이스 델론 아폴뤼사이 톤 예순

개역개정,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새번역,20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0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호소했습니다.

가톨릭성경,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영어NIV,20 Wanting to release Jesus, Pilate appealed to them again.

영어NASB,20 Pilate, wanting to release Jesus, addressed them again,

영어MSG,20 Pilate still wanted to let Jesus go, and so spoke out again.

영어NRSV,20 Pilate, wanting to release Jesus, addressed them again;

헬라어신약Stephanos,20 παλιν ουν ο πιλατος προσεφωνησεν θελων απολυσαι τον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0 iterum autem Pilatus locutus est ad illos volens dimittere Iesum

히브리어Modern,20 ויסף פילטוס לשאת קולו כי חפץ לפטר את ישוע׃

성 경: [눅23:2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예수를 놓고자 하여 –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 무리들에게 다시 제안하고 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며 반대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많은 죄악성을 부각시킨다.

호이 데 에페포눈 레곤테스 스타우루 스타우루 아우톤

개역개정,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새번역,21 그러나 그들이 외쳤다. “그 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우리말성경,21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소리 질렀습니다.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가톨릭성경,21 그들은 “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영어NIV,21 But they kept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영어NASB,21 but they kept on calling out, saying, “Crucify, crucify Him!”

영어MSG,21 But they kept shouting back, “Crucify! Crucify him!”

영어NRSV,21 but they kept shouting, “Crucify, crucif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ι δε επεφωνουν λεγοντες σταυρωσον σταυρωσο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21 at illi succlamabant dicentes crucifige crucifige illum

히브리어Modern,21 והמה צעקו אליו לאמר הצלב אותו הצלב׃

성 경: [눅23:21]

주제1: [인자의 죽음과 수난]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 18절에서 언급된 무리의 반응처럼 또 다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을 묘사하고 있다. ‘소리질러’의 원어 ‘에페포눈'(*)은 …에게 크게 부르짖어 외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빌라도를 향해 거세게 항의하는 것이며 미완료 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무리들이 계속하여 소리질러 항의한 것으로 보인다.

󰃨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 그들의 항의가 18절에서보다 더욱 거칠어 졌음을 시사하는 이 구절은 운율을 담은 연호와 같은 형식을 취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두번 반복한다. 따라서 무리들의 요구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거세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처음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하는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음모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같은 음모가 대제사장에 의한 것임을 마가는 밝혔다(막 15;11). 한편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민 21:9; 시 22:15; 슥 12:10 등에 예언되어 있는 바 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허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신 것이지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자들은 구세주를 살해한 범인들 중에 속하게 된 셈이다.

호 데 트리톤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티 가르 카콘 에포이에센 후토스 우덴 아이티온 다나투 후론 엔 아우토 파이듀사스 운 아우톤 아폴뤼소

개역개정,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새번역,22 빌라도가 세 번째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우리말성경,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말했습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다고 그러느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풀어 줄 것이다.”

가톨릭성경,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하자,

영어NIV,22 For the third time he spoke to them: “Why? What crime has this man committed? I have found in him no grounds for the death penalty. Therefore I will have him punished and then release him.”

영어NASB,22 And he said to them the third time, “Why, what evil has this man done? I have found in Him no guilt demanding death; therefore I will punish Him and release Him.”

영어MSG,22 He tried a third time. “But for what crime? I’ve found nothing in him deserving death. I’m going to warn him to watch his step and let him go.”

영어NRSV,22 A third time he said to them, “Why, what evil has he done? I have found in him no ground for the sentence of death; I will therefore have him flogged and then releas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2 ο δε τριτον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τι γαρ κακον εποιησεν ουτος ουδεν αιτιον θανατου ευρον εν αυτω παιδευσας ουν αυτον απολυσω

라틴어Vulgate,22 ille autem tertio dixit ad illos quid enim mali fecit iste nullam causam mortis invenio in eo corripiam ergo illum et dimittam

히브리어Modern,22 ויאמר אליהם פעם שלישית מה אפוא עשה זה רעה כל אשמת מות לא מצאתי בו על כן איסרנו ואפטרנו׃

성 경: [눅23:2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 16,20절에 이어 빌라도가 세번째로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누가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세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같은 누가의 강조는 빌라도를 호의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마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를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고위직의 로마인으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1:1-4).

󰃨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사무적이 아닌 안타까운 주관적 감정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예수의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노력이 인간적인 정의감에 바탕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해야 할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는데 무리들이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세번째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빌라도는다시 한번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분명하게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아'(*)은 죄가 될만한 근거 또는 원인을 말한다.

호이 데 에페케인토 포나이스 메갈라이스 아이투메노이 아우톤 스타우로데나이 카이 카티스퀴온 하이 포나이 아우톤

개역개정,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새번역,23 그러나 그들은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우리말성경,23 그러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이기고 말았습니다.

가톨릭성경,23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영어NIV,23 But with loud shouts they insistently demanded that he be crucified, and their shouts prevailed.

영어NASB,23 But they were insistent, with loud voices asking that He be crucified. And their voices began to prevail.

영어MSG,23 But they kept at it, a shouting mob, demanding that he be crucified. And finally they shouted him down.

영어NRSV,23 But they kept urgently demanding with loud shouts that he should be crucified; and their voices prevailed.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ι δε επεκειντο φωναις μεγαλαις αιτουμενοι αυτον σταυρωθηναι και κατισχυον αι φωναι αυτων και των αρχιερεων

라틴어Vulgate,23 at illi instabant vocibus magnis postulantes ut crucifigeretur et invalescebant voces eorum

히브리어Modern,23 ויפצרו בו בקול גדול ויבקשו כי יצלב ויחזק קולם וקול הכהנים הגדולים׃

성 경: [눅23:2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 세번째의 빌라도 선언 역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으며 계속해서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저토록 요구하는 십자가 처형은 본래 카르타고에서 생겨난 처형법이었는데 로마 제국에서도 중죄인에 대해 이 형벌을 사용한 것 같으며 본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도 십자가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잔혹한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주장은 마침내 관철되었다. 누가는 그들의 아우성이 ‘이겼다’고(*, 카티스퀴온) 표현하는데 강조점은 빌라도가 무리들의 힘에 밀렸다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보다는 오히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지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카이 필라토스 에페크리넨 게네스다이 토 아이테마 아우톤

개역개정,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새번역,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말성경,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톨릭성경,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영어NIV,24 So Pilate decided to grant their demand.

영어NASB,24 And Pilate pronounced sentence that their demand be granted.

영어MSG,24 Pilate caved in and gave them what they wanted.

영어NRSV,24 So Pilate gave his verdict that their demand should be grante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 δε πιλατος επεκρινεν γενεσθαι το αιτημα αυτων

라틴어Vulgate,24 et Pilatus adiudicavit fieri petitionem eorum

히브리어Modern,24 ויגזר פילטוס כי תעשה בקשתם׃

성 경: [눅23:24,2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빌라도가 대제사장 및 그 일파들의 음모와 거센 항의와 요구에 불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여 넘겨 주었다는 말로 예수께 대한 재판은 종결되었다. 여기서 예수를 넘겨받은 자는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인데 비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이 총독의 군병으로 언급되고 있다(마 27:27; 막 15:16). 이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속에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를 위한 노력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누가에게서도 군병이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36절) 누가의 강조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했다는 점에 있다. 또 누가의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는 예수를 고소자들에게 넘겨준 이유를 설명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마가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수를 넘겼다고 언급하는 반면(막 15;15) 누가는 어쩔 수 없어 예수를 내어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준 동기야 어떠했든지간에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과 법의 공정성을 묵살한 채 부화뇌동했던 사실은 명백한 과오요 죄악이었다 하겠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비록 무죄한 자였으나 민중의 폭동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만한 가치는 없는 자였다.

아펠뤼센 데 톤 디아 스타신 카이 포논 베블레메논 에이스 퓔라켄 혼 에툰토 톤 데 예순 파레도켄 토 델레마티 아우톤

개역개정,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새번역,25 그래서 그는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놓아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다.

우리말성경,25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하게 넘겨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영어NIV,25 He released the man who had been thrown into prison for insurrection and murder, the one they asked for, and surrendered Jesus to their will.

영어NASB,25 And he released the man they were asking for who had been thrown into prison for insurrection and murder, but he delivered Jesus to their will.

영어MSG,25 He released the man thrown in prison for rioting and murder, and gave them Jesus to do whatever they wanted.

영어NRSV,25 He released the man they asked for, the one who had been put in prison for insurrection and murder, and he handed Jesus over as they wished.

헬라어신약Stephanos,25 απελυσεν δε αυτοις τον δια στασιν και φονον βεβλημενον εις την φυλακην ον ητουντο τον δε ιησουν παρεδωκεν τω θεληματι αυτων

라틴어Vulgate,25 dimisit autem illis eum qui propter homicidium et seditionem missus fuerat in carcerem quem petebant Iesum vero tradidit voluntati eorum

히브리어Modern,25 ויפטר להם את המשלך בית האסורים על דבר מרד ורצח את אשר שאלו ואת ישוע מסר לרצונם׃

카이 호스 아페가곤 아우톤 에필라보메노이 시모나 티나 퀴레나이온 에르코메논 앞 아그루 에페데칸 아우토 톤 스타우론 페레인 오피스덴 투 예수개역개정,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새번역,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들에서 오는 시몬이라는 한 구레네 사람을 붙들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우리말성경,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고 예수를 뒤따라가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영어NIV,26 As they led him away, they seized Simon from Cyrene, who was on his way in from the country, and put the cross on him and made him carry it behind Jesus.

영어NASB,26 When they led Him away, they seized a man, Simon of Cyrene, coming in from the country, and placed on him the cross to carry behind Jesus.

영어MSG,26 As they led him off, they made Simon, a man from Cyrene who happened to be coming in from the countryside, carry the cross behind Jesus.

영어NRSV,26 As they led him away, they seized a man, Simon of Cyrene, who was coming from the country, and they laid the cross on him, and made him carry it behind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ως απηγαγον αυτον επιλαβομενοι σιμωνος τινος κυρηναιου του ερχομενου απ αγρου επεθηκαν αυτω τον σταυρον φερειν οπισθεν του ιησου

라틴어Vulgate,26 et cum ducerent eum adprehenderunt Simonem quendam Cyrenensem venientem de villa et inposuerunt illi crucem portare post Iesum

히브리어Modern,26 וכאשר הוליכהו משם ויחזיקו באיש אחד הבא מן השדה ושמו שמעון איש קוריני וישימו עליו את הצלב לשאת אחרי ישוע׃

성 경: [눅23:2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 제판이 끝난후 예수를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가는 장면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었던 때와 같이 ‘저희’가(25절) 예수를 끌고 갔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끌고 갔다’이다. 36절에 ‘군병들’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군병들인 듯하나 누가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반면에 마가는 빌라도의 군병임을 암시하고 있으며(막 15:16) 특히 마태는 ‘총독의 군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마 27:27). 이와 같이 누가가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한 것은 빌라도에게 보였던 호의적 입장과 같이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형집행에 깊이 관여했다는 인상을 가급적 피하려고하는 의도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 27:27-31과막 15:16-19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면, 즉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인계받은 다음 희롱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앞에서 언급한 누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여 준다.

󰃨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 리비아의 트리폴리(tripoli)를 말한다. 세 복음서 모두 시몬이 우연히 지나다가 이 일을 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구레네 사람들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있었고(행 6:9)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행 2:10; 11:20) 시몬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는데(막 15:21) 아마도 두 자녀가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또 누가와 마가는 시몬이 시골로부터 오던 중이라고 언급하며 여기서 말한 시골(*, 아그로스)는 농촌이나 들판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성 밖에서 오던 중이라는 의미로 보이며 따라서 이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 밖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 마태와 마가는 공통되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말을 함으로써(마 27:32; 막 15:21) 이제까지 십자가를 예수가 져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형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는 점에서(Plutarch) 예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군인들이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행군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밤새껏 심문당하고 희롱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예수를 좇게 하더라 – 이는 누가만의 표현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이 구절을 삽입하면서 참다운 제사장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2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곁을 떠난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시몬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제자이며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눅 9:23 주석 참조).

에콜루데이 데 아우토 폴뤼 플레도스 투 라우 카이 귀나이콘 하이 에콮톤토 카이 에드레눈 아우톤

개역개정,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새번역,27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우리말성경,27 많은 사람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자들은 예수에 대해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가톨릭성경,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영어NIV,27 A large number of people followed him, including women who mourned and wailed for him.

영어NASB,27 And following Him was a large crowd of the people, and of women who were mourning and lamenting Him.

영어MSG,27 A huge crowd of people followed, along with women weeping and carrying on.

영어NRSV,27 A great number of the people followed him, and among them were women who were beating their breasts and wailing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7 ηκολουθει δε αυτω πολυ πληθος του λαου και γυναικων αι και εκοπτοντο και εθρηνου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27 sequebatur autem illum multa turba populi et mulierum quae plangebant et lamentabant eum

히브리어Modern,27 וילכו אחריו המון עם רב והמון נשים והנה ספדות ומקוננות עליו׃

성 경: [눅23:2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백성과…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 – 예수가 가는 고난의 행렬을 말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내용으로 본서에만 나온다(27-32절). 여기서 여자들만이 애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같이 애통하여, 울었다. 즉 본문 번역을 ‘백성과 여자들의(*, 라우 카이 귀나이콘) 큰 무리가 가슴을 치며 울면서 뒤따랐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누가는 이같은 무리 속에서 특히 여자들의 애통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가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1:26-56; 2:36-38; 7:36-50; 8:1-3, 43-48; 13:10-17; 24:1-10). 여자를 다른 복음서와 달리 부각시키고 있는 누가의 의도는 당시 천대받던 여자들이 제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천대받는 자의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막 9:35-43 주석, 눅 18:16-17과 22:24-27 주석 참조). 뿐만 아니라 이는 여성의 인격적 지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스트라페이스 데 프로스 아우타스 호 예수스 에이펜 뒤가테레스 예루살렘 메 클라이에테 엪 에메 플렌 엪 헤아우타스 클라이에테 카이 에피 타 테크나 휘몬

개역개정,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새번역,28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다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

우리말성경,28 예수께서는 뒤돌아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로 인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가톨릭성경,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영어NIV,28 Jesus turned and said to them, “Daughters of Jerusalem, do not weep for me;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영어NASB,28 But Jesus turning to them said, “Daughters of Jerusalem, stop weeping for Me, but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영어MSG,28 At one point Jesus turned to the women and said, “Daughters of Jerusalem, don’t cry for me. Cry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영어NRSV,28 But Jesus turned to them and said, “Daughters of Jerusalem, do not weep for me, but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헬라어신약Stephanos,28 στραφεις δε προς αυτας ο ιησους ειπεν θυγατερες ιερουσαλημ μη κλαιετε επ εμε πλην εφ εαυτας κλαιετε και επι τα τεκνα υμων

라틴어Vulgate,28 conversus autem ad illas Iesus dixit filiae Hierusalem nolite flere super me sed super vos ipsas flete et super filios vestros

히브리어Modern,28 ויפ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ן בנות ירושלים אל תבכינה עלי כי אם על נפשכן בכינה ועל בניכן׃

성 경: [눅23:2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예루살렘의 딸들아 –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우는 것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31절까지 묘사되며 19:41-44에서 언급된 내용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사 1:8; 10:32; 37:22; 미 4:3; 슥 2:10; 9:9)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 말을 하기 전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바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해야만 할 일이 전제되는 것인데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는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마음 아프고 가슴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이같은 예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언급이 19:41-44에 나오고 있다. 또 십자가상에서 기도한 내용, 즉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호티 이두 에르콘타이 헤메라이 엔 하이스 에루신 마카리아이 하이 스테이라이 카이 하이 코일리아이 하이 우크 에겐네산 카이 마스토이 호이 우크 에드렢산

개역개정,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새번역,29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말성경,29 보라. 너희가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과 한 번도 아기를 갖지 못한 태와 한 번도 젖을 먹이지 못한 가슴은 복이 있다’고 말할 때가 곧 올 것이다.

가톨릭성경,29 보라, ‘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영어NIV,29 For the time will come when you will say, ‘Blessed are the barren women, the wombs that never bore and the breasts that never nursed!’

영어NASB,29 “For behold, the days are coming when they will say, ‘Blessed are the barren, and the wombs that never bore, and the breasts that never nursed.’

영어MSG,29 The time is coming when they’ll say, ‘Lucky the women who never conceived! Lucky the wombs that never gave birth! Lucky the breasts that never gave milk!’

영어NRSV,29 For the days are surely coming when they will say, ‘Blessed are the barren, and the wombs that never bore, and the breasts that never nursed.’

헬라어신약Stephanos,29 οτι ιδου ερχονται ημεραι εν αις ερουσιν μακαριαι αι στειραι και κοιλιαι αι ουκ εγεννησαν και μαστοι οι ουκ εθηλασαν

라틴어Vulgate,29 quoniam ecce venient dies in quibus dicent beatae steriles et ventres qui non genuerunt et ubera quae non lactaverunt

히브리어Modern,29 כי הנה ימים באים ואמרו אשרי העקרות ואשרי המעים אשר לא ילדו והשדים אשר לא היניקו׃

성 경: [눅23:2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보라 날이 이르면 –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하신 단어 ‘보라'(*, 이두)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날이 이르면’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관한 언급 때 사용되는 상투어 ‘때가 이르리니'(17:22), ‘그 날에'(17:31; 21:23)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날’이 언제인지 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날’을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를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그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 속에서 내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사실은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속되는 현재적 심판의 날들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 수태 못하는 이와…복이 있다 하리라 – 21:23에서 예수께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수태 못하고 해산하지 않고 젖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 선언을 하신다. 결과적으로 21;23에서 처럼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저주이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쓴 것은 계속적으로 저주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저주 선언은 다산(多産)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며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지하여 전혀 새롭게 변혁된 사람만이 요구되고 살아 남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의 한 예로서 A.D.70년에 로마 장군 디도(D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여자들과 아이들이 미처 도피하지못하여 많은 화를 입었다.

토테 아릌손타이 레게인 토이스 오레신 페세테 엪 헤마스 카이 토이스 부노이스 칼륖사테 헤마스

개역개정,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새번역,30 그 때에,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하며,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 하고 말할 것이다. / ㉢호 10:8

우리말성경,30 그때 사람들이 산에다 대고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라!’ 하며 언덕에다 대고 ‘우리를 덮어 버려라!’ 할 것이다. 호10:8

가톨릭성경,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영어NIV,30 Then “‘they will say to the mountains, “Fall on us!” and to the hills, “Cover us!” ‘

영어NASB,30 “Then they will begin TO SAY TO THE MOUNTAINS, ‘FALL ON US,’ AND TO THE HILLS, ‘COVER US.’

영어MSG,30 Then they’ll start calling to the mountains, ‘Fall down on us!’ calling to the hills, ‘Cover us up!’

영어NRSV,30 Then they will begin to say to the mountains, ‘Fall on us’; and to the hills, ‘Cover us.’

헬라어신약Stephanos,30 τοτε αρξονται λεγειν τοις ορεσιν πεσετε εφ ημας και τοις βουνοις καλυψατε ημας

라틴어Vulgate,30 tunc incipient dicere montibus cadite super nos et collibus operite nos

히브리어Modern,30 אז יחלו לאמר אל ההרים נפלו עלינו ואל הגבעות כסונו׃

성 경: [눅23:3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신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 심판과 저주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무너져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묘사의 강조점은 그날의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에 있는데 이 호소의 목적은 호 10:8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려주고 막아 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둘째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산이 무너져 내려 자신을 덮어 죽임으로써 고통을 잊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계 6;16). 아무튼 강조점은 심판과 저주의 무서운 고통에 있다.

호티 에이 엔 토 휘그로 크쉴로 타우타 포이우신 엔 토 크세로 티 게네타이

개역개정,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새번역,31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우리말성경,31 나무가 푸를 때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나무가 마를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

가톨릭성경,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영어NIV,31 For if men do these things when the tree is green, what will happen when it is dry?”

영어NASB,31 “For if they do these things when the tree is green, what will happen when it is dry?”

영어MSG,31 If people do these things to a live, green tree, can you imagine what they’ll do with deadwood?”

영어NRSV,31 For if they do this when the wood is green, what will happen when it is dry?”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τι ει εν τω υγρω ξυλω ταυτα ποιουσιν εν τω ξηρω τι γενηται

라틴어Vulgate,31 quia si in viridi ligno haec faciunt in arido quid fiet

히브리어Modern,31 כי אם יעשו כזאת בעץ הלח מה יעשה ביבש׃

성 경: [눅23:3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28-30절까지의 내용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푸른 나무는 싱싱하고 힘찬 것으로서(시 1:3 참조)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늙고 힘 없는 것으로서(렘 5:14; 유 12절 참조)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푸른 나무를 예수로, 마른나무를 불의한 유대인으로 대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Bengel, Meyer, Godet, Bruce). 혹자는 푸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융성 시기로 보고 마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쇠퇴기로 비유하여 그 멸망을 예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Gilmour). 또한 쉥크(Schenk)의 경우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예수를 처형하고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죄많은 유대인들을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본절은 심판의 엄격성과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려는데 강조점을 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에곤토 데 카이 헤테로이 카쿠르고이 뒤오 쉰 아우토 아나이레데나이

개역개정,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새번역,32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우리말성경,32 죄수들인 다른 두 사람도 사형을 받기 위해 예수와 함께 끌려갔습니다.

가톨릭성경,32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영어NIV,32 Two other men, both criminals, were also led out with him to be executed.

영어NASB,32 Two others also, who were criminals, were being led away to be put to death with Him.

영어MSG,32 Two others, both criminals, were taken along with him for execution.

영어NRSV,32 Two others also, who were criminals, were led away to be put to death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2 ηγοντο δε και ετεροι δυο κακουργοι συν αυτω αναιρεθηναι

라틴어Vulgate,32 ducebantur autem et alii duo nequam cum eo ut interficerentur

히브리어Modern,32 וגם שנים אחרים אנשי בליעל מוצאים אתו למות׃

성 경: [눅23:3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여 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두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39-43절).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 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한다. 아마 살인과 방화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이다(41절 참조).

카이 호테 엘돈 에피 톤 토폰 톤 칼루메논 크라니온 에케이 에스타우로산 아우톤 카이 투스 카쿠르구스 혼 멘 에크 뎈시온 혼 데 엨스 아리스테론

개역개정,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새번역,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우리말성경,33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죄수도 하나는 그 오른쪽에, 하나는 그 왼쪽에 못 박았습니다.

가톨릭성경,33 ‘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영어NIV,33 When they came to the place called the Skull, there they crucified him, along with the criminals–one on his right, the other on his left.

영어NASB,33 When they came to the place called The Skull, there they crucified Him and the criminals, one on the right and the other on the left.

영어MSG,33 When they got to the place called Skull Hill, they crucified him, along with the criminals, one on his right, the other on his left.

영어NRSV,33 When they came to the place that is called The Skull, they crucified Jesus there with the criminals, one on his right and one on his left.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οτε απηλθον επι τον τοπον τον καλουμενον κρανιον εκει εσταυρωσαν αυτον και τους κακουργους ον μεν εκ δεξιων ον δε εξ αριστερων

라틴어Vulgate,33 et postquam venerunt in locum qui vocatur Calvariae ibi crucifixerunt eum et latrones unum a dextris et alterum a sinistris

히브리어Modern,33 ויהי כאשר באו אל המקום הנקרא גלגלתא ויצלבו אתו שם ואת אנשי הבליעל זה לימינו וזה לשמאלו׃

성 경: [눅23:3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심자가 처형]

󰃨 해골이라 하는 곳 – 예수가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라 불리워지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된다. 이 어투와 같이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Bengel, Goldet, Plummer). 다만 분명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이다(히 13:12). 부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니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점으로 보아 누가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엄두에 두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누가는 예수의 양 쪽에 범법자 두명이 같이 못박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 레스타이)들이 양 쪽에 못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치욕스러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 카쿠르구스)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 십자가에 못박고 – 마침내 예수가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박히는 모습이다. 누가는 못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마태는 못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에(38절) 언급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하다.

호 데 예수스 엘레겐 파테르 아페스 아우토이스 우 가르 오이다신 티 포이우신 디아메리조메노이 데 타 히마티아 아우투 에발론 클레루스

개역개정,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새번역,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우리말성경,3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눠 가졌습니다.

가톨릭성경,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영어NIV,34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divided up his clothes by casting lots.

영어NASB,34 But Jesus was saying,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cast lots, dividing up His garments among themselves.

영어MSG,34 Jesus prayed, “Father, forgive them; they don’t know what they’re doing.” Dividing up his clothes, they threw dice for them.

영어NRSV,34 Then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And they cast lots to divide his clo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34 ο δε ιησους ελεγεν πατερ αφες αυτοις ου γαρ οιδασιν τι ποιουσιν διαμεριζομενοι δε τα ιματια αυτου εβαλον κληρον

라틴어Vulgate,34 Iesus autem dicebat Pater dimitte illis non enim sciunt quid faciunt dividentes vero vestimenta eius miserunt sortes

히브리어Modern,34 ויאמר ישוע אבי סלח להם כי לא ידעו מה הם עשים ויחלקו בגדיו להם ויפילו גורל׃

성 경: [눅23:34]

주제1: [인자의 수단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으며 본문에 대한 진정성 시비가 문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본은 본문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언급하는 반면 대다수 사본은 본문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J. Weiss, Klostermann, Easton, Creed, Schenk).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인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본 구절을 28-31절에 언급된 내용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다(행 3:15).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소위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첫번째에 해당한다. 가상칠언의 내용을 한마디씩으로 요악해보면 (1) 용(容, 본절) (2) 낙(樂, 43절) (3) 자(子, 요 19:26) (4) 기(棄, 마 27:46; 막 15:34) (5) 갈(渴, 요 19:28) (6) 성(成, 요 19:30) (7) 혼(魂, 46절) 등이다.

󰃨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본다(Blinzler). 뿐만 아니라 시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카이 에이스테케이 호 라오스 데오론 엨세뮈크테리존 데 카이 호이 아르콘테스 레곤테스 알루스 에소센 소사토 헤아우톤 에이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 투 데우 호 에클렠토스

개역개정,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새번역,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신 분’,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

우리말성경,35 백성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심지어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다지. 자기가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라지.”

가톨릭성경,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영어NIV,35 The people stood watching, and the rulers even sneered at him. They said, “He saved others; let him save himself if he is the Christ of God, the Chosen One.”

영어NASB,35 And the people stood by, looking on. And even the rulers were sneering at Him, saying, “He saved others; let Him save Himself if this is the Christ of God, His Chosen One.”

영어MSG,35 The people stood there staring at Jesus, and the ringleaders made faces, taunting, “He saved others. Let’s see him save himself! The Messiah of God–ha! The Chosen–ha!”

영어NRSV,35 And the people stood by, watching; but the leaders scoffed at him, saying, “He saved others; let him save himself if he is the Messiah of God, his chosen one!”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ειστηκει ο λαος θεωρων εξεμυκτηριζον δε και οι αρχοντες συν αυτοις λεγοντες αλλους εσωσεν σωσατω εαυτον ει ουτος εστιν ο χριστος ο του θεου εκλεκτος

라틴어Vulgate,35 et stabat populus expectans et deridebant illum principes cum eis dicentes alios salvos fecit se salvum faciat si hic est Christus Dei electus

히브리어Modern,35 והעם עמד שם וראה וילעגו לו השרים לאמר את אחרים הושיע יושע נא את נפשו אם הוא המשיח בחיר האלהים׃

성 경: [눅23:3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지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구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W. Foerster).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기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구약의 외경 에녹서에서는 이 말이 ‘하늘의 인자’를 가리키며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에네파잌산 데 아우토 카이 호이 스트라티오타이 프로세르코메노이 옼소스 프로스페론테스 아우토

개역개정,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새번역,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우리말성경,36 군인들도 와서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가톨릭성경,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영어NIV,36 The soldiers also came up and mocked him. They offered him wine vinegar

영어NASB,36 The soldiers also mocked Him, coming up to Him, offering Him sour wine,

영어MSG,36 The soldiers also came up and poked fun at him, making a game of it. They toasted him with sour wine:

영어NRSV,36 The soldiers also mocked him, coming up and offering him sour win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ενεπαιζον δε αυτω και οι στρατιωται προσερχομενοι και οξος προσφεροντες αυτω

라틴어Vulgate,36 inludebant autem ei et milites accedentes et acetum offerentes illi

히브리어Modern,36 ויהתלו בו אנשי הצבא ויגשו ויביאו לו חמץ׃

성 경: [눅23:3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신 포도주를 주며 – 군병드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준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이다. (2) 요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 마르다'(I am thirsty, NIV)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Zahn, Farrar)도 가능하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는다. 그러나 시 69:21의 성취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카이 레곤테스 에이 쉬 에이 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 소손 세아우톤

개역개정,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새번역,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우리말성경,37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라면 어디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시지!”라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37 말하였다.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영어NIV,37 and said, “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영어NASB,37 and saying, “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영어MSG,37 “So you’r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영어NRSV,37 and saying, “If you are the King of the Jews, save yourself!”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λεγοντες ει συ ει ο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 σωσον σεαυτον

라틴어Vulgate,37 dicentes si tu es rex Iudaeorum salvum te fac

히브리어Modern,37 ויאמרו אם אתה הוא מלך היהודים הושע את נפשך׃

성 경: [눅23:3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 로마 군병이 언급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를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 상에 붙어있는 죄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사람 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capital punishment)으로부터 면죄(amnesty)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하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며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고 하며 희롱한 것으로 묘사한다(마 27:42-44).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을 의식하여 문제 곧 종교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또 마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엔 데 카이 에피그라페 엪 아우토 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 후토스

개역개정,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새번역,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쓴’

우리말성경,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적힌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영어NIV,38 There was a written notice above him, which read: THIS IS THE KING OF THE JEWS.

영어NASB,38 Now there was also an inscription above Him, “THIS IS THE KING OF THE JEWS.”

영어MSG,38 Printed over him was a sign: THIS IS THE KING OF THE JEWS.

영어NRSV,38 There was also an inscription over him, “This is the King of the Jews.”

헬라어신약Stephanos,38 ην δε και επιγραφη γεγραμμενη επ αυτω γραμμασιν ελληνικοις και ρωμαικοις και εβραικοις ουτος εστιν ο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

라틴어Vulgate,38 erat autem et superscriptio inscripta super illum litteris graecis et latinis et hebraicis hic est rex Iudaeorum

히브리어Modern,38 וגם מכתב היה ממעל לו בכתב יוני ורומי ועברי זה הוא מלך היהודים׃

성 경: [눅23:3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 –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국어로 씌어져 있었다. 즉 히브리어, 로마어, 헬러아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된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oaradoxical)으로 예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이다.

헤이스 데 톤 크레마스덴톤 카쿠르곤 에블라스페메이 아우톤 레곤 우키 쉬 에이 호 크리스토스 소손 세아우톤 카이 헤마스

개역개정,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새번역,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39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가 예수를 모독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

가톨릭성경,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영어NIV,39 One of the criminals who hung there hurled insults at him: “Aren’t you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영어NASB,39 One of the criminals who were hanged there was hurling abuse at Him, saying, “Are You not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영어MSG,39 One of the criminals hanging alongside cursed him: “Some Messiah you are! Save yourself! Save us!”

영어NRSV,39 One of the criminals who were hanged there kept deriding him and saying, “Are you not the Messiah? Save yourself and us!”

헬라어신약Stephanos,39 εις δε των κρεμασθεντων κακουργων εβλασφημει αυτον λεγων ει συ ει ο χριστος σωσον σεαυτον και ημας

라틴어Vulgate,39 unus autem de his qui pendebant latronibus blasphemabat eum dicens si tu es Christus salvum fac temet ipsum et nos

히브리어Modern,39 ואחד מאנשי הבליעל התלוים גדפו לאמר הלא אתה המשיח הושע את עצמך ואתנו׃

성 경: [눅23:3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마 27:44; 막 15:32). 범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헤테로스 에피티몬 아우토 에페 우데 포베 쉬 톤 데온 호티 엔 토 아우토 크리마티 에이

개역개정,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새번역,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말성경,40 그러나 다른 죄수는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도 똑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가톨릭성경,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영어NIV,40 But the other criminal rebuked him. “Don’t you fear God,” he sai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영어NASB,40 But the other answered, and rebuking him said, “Do you not even fear Go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of condemnation?

영어MSG,40 But the other one made him shut up: “Have you no fear of God? You’re getting the same as him.

영어NRSV,40 But the other rebuked him, saying, “Do you not fear Go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of condemn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40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ετερος επετιμα αυτω λεγων ουδε φοβη συ τον θεον οτι εν τω αυτω κριματι ει

라틴어Vulgate,40 respondens autem alter increpabat illum dicens neque tu times Deum quod in eadem damnatione es

히브리어Modern,40 ויען האחר ויגער בו לאמר האינך ירא את האלהים בהיותך בעצם הענש הזה׃

성 경: [눅23:40]

주제1: [인자와 수난의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족으로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카이 헤메이스 멘 디카이오스 앜시아 가르 혼 에프랔사멘 아폴람바노멘 후토스 데 우덴 아토폰 에프랔센

개역개정,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새번역,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말성경,41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잘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

가톨릭성경,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영어NIV,41 We are punished justly, for we are getting what our deeds deserve.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영어NASB,41 “And we indeed are suffering justly, for we are receiving what we deserve for our deeds;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영어MSG,41 We deserve this, but not him–he did nothing to deserve this.”

영어NRSV,41 And we indeed have been condemned justly, for we are getting what we deserve for our deeds,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ημεις μεν δικαιως αξια γαρ ων επραξαμεν απολαμβανομεν ουτος δε ουδεν ατοπον επραξεν

라틴어Vulgate,41 et nos quidem iuste nam digna factis recipimus hic vero nihil mali gessit

히브리어Modern,41 והן אנחנו בו כמשפט כי לקחנו כפי מעשינו אבל זה לא עשה מאומה רע׃

성 경: [눅23:4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카이 엘레겐 예수 므네스데티 무 호탄 엘데스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수

개역개정,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새번역,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말성경,42 그리고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가톨릭성경,42 그러고 나서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영어NIV,42 Then he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영어NASB,42 And he was saying,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 Your kingdom!”

영어MSG,42 Then he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enter your kingdom.”

영어NRSV,42 Then he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ελεγεν τω ιησου μνησθητι μου κυριε οταν ελθης εν τη βασιλεια σου

라틴어Vulgate,42 et dicebat ad Iesum Domine memento mei cum veneris in regnum tuum

히브리어Modern,42 ויאמר אל ישוע זכרני נא אדני בבאך במלכותך׃

성 경: [눅23:4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엔'(*)은 ‘…안으로'(into) 혹은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 아멘 소이 레고 세메론 멭 에무 에세 엔 토 파라데이소

개역개정,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새번역,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말성경,4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영어NIV,43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영어NASB,43 And He said to him,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영어MSG,43 He said, “Don’t worry, I will. Today you will join me in paradise.”

영어NRSV,43 He replied, “Truly I tell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ειπεν αυτω ο ιησους αμην λεγω σοι σημερον μετ εμου εση εν τω παραδεισω

라틴어Vulgate,43 et dixit illi Iesus amen dico tibi hodie mecum eris in paradiso

히브리어Modern,43 ויאמר ישוע אליו אמן אמר אני לך כי היום תהיה עמדי בגן עדן׃

성 경: [눅23:4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 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 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 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연관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카이 엔 에데 호세이 호라 엨테 카이 스코토스 에게네토 엪 홀렌 텐 겐 헤오스 호라스 에나테스

개역개정,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새번역,44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 ㉦그, ‘제 육시’ ㉧그, ‘제 구시’

우리말성경,44 정오쯤 돼 어둠이 온 땅을 뒤덮으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됐습니다.

가톨릭성경,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영어NIV,44 It was now about the sixth hour, and darkness came over the whole land until the ninth hour,

영어NASB,44 It was now about the sixth hour, and darkness fell over the whole land until the ninth hour,

영어MSG,44 By now it was noon. The whole earth became dark, the darkness lasting three hours–

영어NRSV,44 It was now about noon, and darkness came over the whole land until three in the afternoon,

헬라어신약Stephanos,44 ην δε ωσει ωρα εκτη και σκοτος εγενετο εφ ολην την γην εως ωρας εννατης

라틴어Vulgate,44 erat autem fere hora sexta et tenebrae factae sunt in universa terra usque in nonam horam

히브리어Modern,44 ויהי כשעה הששית והנה חשך על כל הארץ עד השעה התשיעית׃

성 경: [눅23:4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제 육세쯤 되어 – 예수의 운명에 대한 묘사에 앞서 그 시각을 언급하면서 누가는 정확한 시각을 지시하지 않고 어림잡은 시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쯤’이라는 비교 부사 ‘호세이'(*)를 사용하고 있다(3:23; 9:14,28; 22:41,59 비교).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마 27:45)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막 15:33)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막 15:25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시각이 제 삼시였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못에 박힌 채 세 시간을 달려 있었던 셈이 된다.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신 시각은 제 구시이다.

󰃨 해가 빛을 잃고 – 세 복음서 모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공통되게 기록하며 누가만이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이 천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밝은 때라고 할 수 있는 제 육시경부터 제구시까지 어둠움이 임했던 사실로 볼 때 단순히 구름이 가려 어두워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한편 이 어두움에 관해 혹자는 가견적(可見的)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는가 하면(Luther, Calvin, Zahn), 또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Morris). 이중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투 헬리우 에클리폰토스 에스키스데 데 토 카타페타스마 투 나우 메손

개역개정,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새번역,45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우리말성경,45 해가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가톨릭성경,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영어NIV,45 for the sun stopped shining. And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영어NASB,45 because the sun was obscured; and the veil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영어MSG,45 a total blackout. The Temple curtain split right down the middle.

영어NRSV,45 while the sun’s light failed; and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헬라어신약Stephanos,45 και εσκοτισθη ο ηλιος και εσχισθη το καταπετασμα του ναου μεσον

라틴어Vulgate,45 et obscuratus est sol et velum templi scissum est medium

히브리어Modern,45 ויחשך השמש ותקרע פרכת ההיכל לשנים קרעים׃

성 경: [눅23:4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세 시간에 결쳐 어두움이 깔린 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언급된 ‘휘장'(*, 카나페타스마)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인 것으로 보인다(출 26:31-33).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출 27:21; 30:7; 레 4:7; 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2; 히 9:7).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들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레 16:2)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누가는 휘장이 찢어짐을 ‘찢어졌다'(*, 에스키스데)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 메손)가 찢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세 복음의 표현은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예수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22).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하였다. 구약 시대에는제사장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적(中保的)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히 3:1)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벧전 2:9). 또한 이는 위선과 형식주의로 부패해진 유대교의 가증스로움에 대한 심판 경고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카이 포네사스 포네 메갈레 호 예수스 에이펜 파테르 에이스 케이라스 수 파라티데마이 토 프뉴마 무 투토 데 에이폰 엨세프뉴센

개역개정,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새번역,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

우리말성경,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가톨릭성경,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아버지, ‘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영어NIV,46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영어NASB,46 And Jesus, crying out with a loud voice, said,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Having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영어MSG,46 Jesus called loudly, “Father, I place my life in your hands!” Then he breathed his last.

영어NRSV,46 Then Jesus, crying with a loud voice, said,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pirit.” Having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헬라어신약Stephanos,46 και φωνησας φωνη μεγαλη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ατερ εις χειρας σου παραθησομαι το πνευμα μου και ταυτα ειπων εξεπνευσεν

라틴어Vulgate,46 et clamans voce magna Iesus ait Pater in manus tuas commendo spiritum meum et haec dicens exspiravit

히브리어Modern,46 ויקרא ישוע בקול גדול ויאמר אבי בידך אפקיד רוחי ובאמרו זאת נפח נפשו׃

성 경: [눅23:4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아버지여…부탁하나이다 – 운명 직전에 부르짖으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다. 누가의 표현은 마태나 마가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7:50,51; 막 15:37,38). (2) 마태와 마가는 십자각 위에서 예수가 두번 크게 소리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첫번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밝혔지만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럿다고 언급한다(마 27:46,50; 막 15:34,37). (3) 마태와 마가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사실과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마 27:47-49; 막 15:35,36) 누가의 경우 전혀 그러한 언급이 없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차이는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완수(完遂)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같은 추측은 요 19:30에서 언급된 바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후 운명하신 사실과도 잘 어울린다. 두번째 차이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나오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과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번째 차이 역시 희롱당하는 수치스런 예수의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 운명하시다(*, 여세프뉴센) –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만 사용된 이 단어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인데(막 15:37 주석 참조)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 아페켄 토프뉴마)라고 언급한다.

이돈 데 호 헤카톤타르케스 토 게노메논 에돜사젠 톤 데온 레곤 온토스 호 안드로포스 후토스 디카이오스 엔

개역개정,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새번역,47 그런데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 ㉨또는 ‘죄 없는’

우리말성경,47 백부장은 그 일어난 일을 지켜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의로운 분이셨다.”

가톨릭성경,47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47 The centurion, seeing what had happened, praised God and said, “Surely this was a righteous man.”

영어NASB,47 Now when the centurion saw what had happened, he began praising God, saying, “Certainly this man was innocent.”

영어MSG,47 When the captain there saw what happened, he honored God: “This man was innocent! A good man, and innocent!”

영어NRSV,47 When the centurion saw what had taken place, he praised God and said, “Certainly this man was innocent.”

헬라어신약Stephanos,47 ιδων δε ο εκατονταρχος το γενομενον εδοξασεν τον θεον λεγων οντως ο ανθρωπος ουτος δικαιος ην

라틴어Vulgate,47 videns autem centurio quod factum fuerat glorificavit Deum dicens vere hic homo iustus erat

히브리어Modern,47 וירא שר המאה את אשר נהיתה ויתן כבוד לאלהים לאמר אכן האיש הזה צדיק היה׃

성 경: [눅23:4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백부장이…정녕 의인이었도다 – 백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41절에서 사형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사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의 이같은 고백은 이제까지 당했던 예수의 수치스러움과 고난이 정당(正當)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를 의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 토 게노메논)이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과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한다(44-46절). 한편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외에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부활하는 성도와 예수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마 27:51-53) 이같은 일을 보고 백부장외 예수를 지키던 사람까지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 능력의 나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2;20; 5:25; 7:16; 13:13; 17:15; 18:43). 또 평행본문 마 27:54; 막 15:3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반면 누가는 ‘의인'(*, 디카이오스)이라고 말하는 데 이방인을 주로 염두에 둔 누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의인’이라는 법정 용어가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카이 판테스 호이 쉼파라게노메노이 오클로이 에피 텐 데오리안 타우텐 데오레산테스 타 게노메나 튚톤테스 타 스테데 휘페스트레폰

개역개정,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새번역,48 구경하러 모여든 무리도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모두 가슴을 치면서 돌아갔다.

우리말성경,48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도 모두 이 사건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48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영어NIV,48 When all the people who had gathered to witness this sight saw what took place, they beat their breasts and went away.

영어NASB,48 And all the crowds who came together for this spectacle, when they observed what had happened, began to return, beating their breasts.

영어MSG,48 All who had come around as spectators to watch the show, when they saw what actually happened, were overcome with grief and headed home.

영어NRSV,48 And when all the crowds who had gathered there for this spectacle saw what had taken place, they returned home, beating their breasts.

헬라어신약Stephanos,48 και παντες οι συμπαραγενομενοι οχλοι επι την θεωριαν ταυτην θεωρουντες τα γενομενα τυπτοντες εαυτων τα στηθη υπεστρεφον

라틴어Vulgate,48 et omnis turba eorum qui simul aderant ad spectaculum istud et videbant quae fiebant percutientes pectora sua revertebantur

히브리어Modern,48 וכל המון העם אשר התאספו יחד למראה הזה בהביטם אל כל אשר נעשה תופפו על לבביהם וישובו׃

성 경: [눅23:4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구경하러 모인…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있다. ‘구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리아'(*)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아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추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행 2:22-24).’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 2:23)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헤이스테케이산 데 판테스 호이 그노스토이 아우토 아포 마크로덴 카이 귀나이케스 하이 쉬나콜루두사이 아우토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호로사이 타우타

개역개정,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새번역,49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

우리말성경,49 그러나 예수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왔던 여인들은 멀리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영어NIV,49 But all those who knew him, including the women who had followed him from Galilee, stood at a distance, watching these things.

영어NASB,49 And all His acquaintances and the women who accompanied Him from Galilee were standing at a distance, seeing these things.

영어MSG,49 Those who knew Jesus well, along with the women who had followed him from Galilee, stood at a respectful distance and kept vigil.

영어NRSV,49 But all his acquaintances, including the women who had followed him from Galilee, stood at a distance, watching these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49 ειστηκεισαν δε παντες οι γνωστοι αυτου μακροθεν και γυναικες αι συνακολουθησασαι αυτω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ορωσαι ταυτα

라틴어Vulgate,49 stabant autem omnes noti eius a longe et mulieres quae secutae erant eum a Galilaea haec videntes

히브리어Modern,49 וכל מידעיו עמדו מרחוק וגם הנשים אשר הלכו אתו מן הגליל ועיניהן ראות את אלה׃

성 경: [눅23:4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막 15:40,41)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쫓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 이두 아네르 오노마티 요셒 불류테스 휘파르콘 카이 아네르 아가도스 카이 디카이오스

개역개정,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새번역,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공의회 의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우리말성경,50 요셉이라는 유대 공의회 회원이 있었는데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영어NIV,50 Now there was a man named Joseph, a member of the Council, a good and upright man,

영어NASB,50 And a man named Joseph, who was a member of the Council, a good and righteous man

영어MSG,50 There was a man by the name of Joseph, a member of the Jewish High Council, a man of good heart and good character.

영어NRSV,50 Now there was a good and righteous man named Joseph, who, though a member of the council,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ιδου ανηρ ονοματι ιωσηφ βουλευτης υπαρχων ανηρ αγαθος και δικαιος

라틴어Vulgate,50 et ecce vir nomine Ioseph qui erat decurio vir bonus et iustus

히브리어Modern,50 והנה איש ושמו יוסף והוא מן היעצים איש טוב וצדיק מן הרמתים עיר היהודים׃

성 경: [눅23:5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 –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태나 마가와 달리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가는 안식일 전 날 저문 때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 가까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막 15:42). 대신 누가는 장례가 끝났을 때를 ‘안식일이 거의 된'(54절) 시각이라 밝히고 있다. 어쨌든 예수의 장례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치러진 것으로 보이며 누가에 의하면 제 9시경부터 첫 시까지(현재 시간 개념으로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약 세 시간 동안인 듯하다. 누가는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유대 민중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산헤드린의 회원이라 소개했다. 3년 동안 예수께 훈련을 받고 많은 권능을 목격했던 열 두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해 버린 상황에서 예수 살해 음모의 주역이었던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내러 나타난 것 또한 의외의 사실이다. 그는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장사를 지원하고 나섰다.

후토스 우크 엔 슁카타테데이메노스 테 불레 카이 테 프랔세이 아우톤 아포 하리마다이아스 폴레오스 톤 유다이온 호스 프로세데케토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개역개정,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새번역,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 사람의 고을 아리마대 출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우리말성경,51 (그는 공의회 회원들의 결정과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의 아리마대 마을 출신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NIV,51 who had not consented to their decision and action. He came from the Judean town of Arimathea and he was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영어NASB,51 (he had not consented to their plan and action), a man from Arimathea, a city of the Jews, who was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영어MSG,51 He had not gone along with the plans and actions of the council. His hometown was the Jewish village of Arimathea.

영어NRSV,51 had not agreed to their plan and action. He came from the Jewish town of Arimathea, and he was waiting expectantly for the kingdom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51 ουτος ουκ ην συγκατατεθειμενος τη βουλη και τη πραξει αυτων απο αριμαθαιας πολεως των ιουδαιων ος και προσεδεχετο και αυτος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51 hic non consenserat consilio et actibus eorum ab Arimathia civitate Iudaeae qui expectabat et ipse regnum Dei

히브리어Modern,51 אשר לא הסכים לעצתם ולפעלם ומחכה גם הוא ל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23:5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 – 이 구절은 요셉에 대한 첫번째 언급에서 소개된 ‘공회 의원’이라는 신분에 대해 해명(解明)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희의 결의’는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살을 말한다(22:66-71). 그리고 ‘행사'(*, 프랖시스)는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성사시키게 했던 공회 의원들의 모든 음모와 실행을 뜻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셉이 공회의원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할 때 가담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에 대한 사형 결정에 반대한 공회 의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요셉이 부자이며 예수의제자라고만 언급하고 공회의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마 27:57) 아마도 마태는 산헤드린 전체가 이의 없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26:59).

󰃨 아라마대(*) – 요셉의 출신지인 듯한 이 지명은 유대 땅에 속한 곳으로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되며 삼상 1:1에 언급되는 사무엘의 출생지 ‘라마다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 요셉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마가의 표현과 동일하다(막 15:43). 마태는 이 말 대신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하는데 따라서 세 복음서 모두가 요셉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음을 공통되게 언급한다. 그는 2:25,38에 언급된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확신하였기에, 모든 사람이 절망과 비탄 가운데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후토스 프로셀돈 토 필라토 에테사토 토 소마 투 예수

개역개정,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새번역,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우리말성경,52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영어NIV,52 Going to Pilate, he asked for Jesus’ body.

영어NASB,52 this man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the body of Jesus.

영어MSG,52 He lived in alert expectation of the kingdom of God. He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the body of Jesus.

영어NRSV,52 This man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the body of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52 ουτος προσελθων τω πιλατω ητησατο το σωμα του ιησου

라틴어Vulgate,52 hic accessit ad Pilatum et petiit corpus Iesu

히브리어Modern,52 ויגש אל פילטוס וישאל ממנו את גוית ישוע׃

성 경: [눅23:5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빌라도에게…시체를 달라 하여 –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형 집행 후 시체 처리에 관한 권한이 로마군 통독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53절에서 ‘내린다'(*, 카다이레오)라는 표현을 볼 때 아직 시신이 십자가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상태로 묘사되었다(막 15:44-46). 또 마가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사실에 대해 매우 용기있는 행동임을 ‘당돌하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라고 밝혀진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2:50-62에서의 베드로의 부인(否認) 참조)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였다. 마가에 따르면 발라도가 요셉의 요구에 대해 보인 첫 반능은 ‘벌써 죽었을까?’하는 것이었다(막 15:44). 따라서 요셉의 요구는 상식보다 빨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의 주검을 공중에 방치되도록 버려둘 수 없다는 애타는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이 카델론 에네퀼맄센 아우토 신도니 카이 에데켄 아우톤 엔 므네마티 랔슈토 후 우크 엔 우데이스 우포 케이메노스

개역개정,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새번역,53 그는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삼베로 싼 다음에,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다가 모셨다. 그 무덤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말성경,53 그는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고운 삼베로 잘 싼 다음 바위로 만든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 무덤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영어NIV,53 Then he took it down, wrapped it in linen cloth and placed it in a tomb cut in the rock, one in which no one had yet been laid.

영어NASB,53 And he took it down and wrapped it in a linen cloth, and laid Him in a tomb cut into the rock, where no one had ever lain.

영어MSG,53 Taking him down, he wrapped him in a linen shroud and placed him in a tomb chiseled into the rock, a tomb never yet used.

영어NRSV,53 Then he took it down, wrapped it in a linen cloth, and laid it in a rock-hewn tomb where no one had ever been laid.

헬라어신약Stephanos,53 και καθελων αυτο ενετυλιξεν αυτο σινδονι και εθηκεν αυτο εν μνηματι λαξευτω ου ουκ ην ουδεπω ουδεις κειμενος

라틴어Vulgate,53 et depositum involvit sindone et posuit eum in monumento exciso in quo nondum quisquam positus fuerat

히브리어Modern,53 ויורד אתה ויכרכה בסדינים וישימה בקבר חצוב בסלע אשר עדן לא הושם בו אדם׃

성 경: [눅23:5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 십자가 위에 달려있던 예수의 주검을 요셉이 직접 내려받고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세마포로 시체를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시체 처리 방법이다(요 11:44; 19:40) 세마포로 싸기 전 시체를 깨끗이 씻었을 것으로 보인다(행 9:37). 한편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대개 매장하지 않은 채 버려두어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했다. 그러나 유대법상으로는 죽을 죄를 지어 사형당한 죄인을 나무에 매단 후 당일에 반드시 장사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한번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매우 고급스럽고 정결한 무덤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요셉은 이 무덤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을 위한 무덤으로 조성해 놓았던 것같다. 요 19:41에서는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곳에 있는 동산에 위치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동산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카이 헤메라 엔 파라스큐에스 카이 삽바톤 에페포스켄

개역개정,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새번역,54 그 날은 준비일이고,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우리말성경,54 그날은 안식을 준비하는 날이었고, 이제 곧 있으면 안식일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영어NIV,54 It was Preparation Day, and the Sabbath was about to begin.

영어NASB,54 It was the preparation day, and the Sabbath was about to begin.

영어MSG,54 It was the day before Sabbath, the Sabbath just about to begin.

영어NRSV,54 It was the day of Preparation, and the sabbath was beginning.

헬라어신약Stephanos,54 και ημερα ην παρασκευη και σαββατον επεφωσκεν

라틴어Vulgate,54 et dies erat parasceves et sabbatum inlucescebat

히브리어Modern,54 ויום ערב שבת היה והשבת הגיעה׃

성 경: [눅23:5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예수의 장례가 매우 촉박하게 끝났음을 시간적 묘사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즉 안식일이 박두함으로 인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은 시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를 현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금요일 오후 6시경이 된다. 그러나 요 19:39-42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근쯤 갖고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유대법에 따라 여유있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언급된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례도 매우 긴장속에 치러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시간의 촉박성과 장례 과정에 중요한 향료와 향품을 준비하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장사지낸 일에 니고데모가 협력한 사실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몰약과 침향만 가지고 왔던 사실 및 요셉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공의회 의원이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들 두 사람이 사전에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내기 위해 서로 의논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카타콜루데사사이 데 하이 귀나이케스 하이티네스 에산 쉬넬렐뤼뒤이아이 에크 테스 갈릴라이아스 아우토 에데아산토 토 므네메이온 카이 호스 에테데 토 소마 아우투

개역개정,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새번역,55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이 뒤따라가서, 그 무덤을 보고, 또 그의 시신이 어떻게 안장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우리말성경,55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왔던 여인들이 요셉을 따라가 무덤과 그 안에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 안장됐는지를 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영어NIV,55 The women who had come with Jesus from Galilee followed Joseph and saw the tomb and how his body was laid in it.

영어NASB,55 Now the women who had come with Him out of Galilee followed, and saw the tomb and how His body was laid.

영어MSG,55 The women who had been companions of Jesus from Galilee followed along. They saw the tomb where Jesus’ body was placed.

영어NRSV,55 The women who had come with him from Galilee followed, and they saw the tomb and how his body was laid.

헬라어신약Stephanos,55 κατακολουθησασαι δε και γυναικες αιτινες ησαν συνεληλυθυιαι αυτω εκ της γαλιλαιας εθεασαντο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ως ετεθη το σωμ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55 subsecutae autem mulieres quae cum ipso venerant de Galilaea viderunt monumentum et quemadmodum positum erat corpus eius

히브리어Modern,55 ותלכנה אחריו מן הנשים אשר באו אתו מן הגליל ותחזינה את הקבר ואת אשר הושם בו גויתו׃

성 경: [눅23:5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 – 장자지낸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확인한 증인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여자들은 49절에서 언급된 인물들인 것으로 추정되며 24:5,10절에 언급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과 동일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특히 마가는 무덤을 확인했던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일한 인물들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갈릴리 여인들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잘 안다는 점에서 예수의 시체를 잘 알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무덤을 잘못 보았다는 말이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부활 후 빈 무덤에 대한 증언도 역시 확실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증(保證)하게 된다. 이렇듯 예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던 까닭에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였으며 또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24:1-7).

휘포스트렢사사이 데 헤토이마산 아로마타 카이 뮈라 카이 토 멘 삽바톤 헤쉬카산 카타 텐 엔톨렌

개역개정,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새번역,56 그리고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였다.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

우리말성경,56 그리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습니다.

가톨릭성경,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영어NIV,56 Then they went home and prepared spices and perfumes. But they rested on the Sabbath in obedience to the commandment.

영어NASB,56 Then they returned and prepared spices and perfumes. And on the Sabbath they rested according to the commandment.

영어MSG,56 Then they went back to prepare burial spices and perfumes. They rested quietly on the Sabbath, as commanded.

영어NRSV,56 Then they returned, and prepared spices and ointments. On the sabbath they rested according to the commandment.

헬라어신약Stephanos,56 υποστρεψασαι δε ητοιμασαν αρωματα και μυρα και το μεν σαββατον ησυχασαν κατα την εντολην

라틴어Vulgate,56 et revertentes paraverunt aromata et unguenta et sabbato quidem siluerunt secundum mandatum

히브리어Modern,56 ואחרי שובן הכינו סמים ומרקחות ובשבת שבתו כפי המצוה׃

성 경: [눅23:5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갈릴리 여자들이 무덤으로부터 떠나 그들의 숙소로 돌아가 시체에 바르지 못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해 두었다고 언급하면서 그 시각이 안식일 전이었던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막 16:1에서는 안식일이 지난 뒤 향품을 샀다고 언급되고있다. 당시 상황이 매우 촉박(促迫)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가의 증언이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거의 안식일이 다 되었다는 점(54절)과 무덤이 성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향품을 산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이다. 또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던 당시 사람들과 특히 유월절과 무교절을 낀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안식일은 더우 엄격하게 지켜졌을 터이므로 향품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고 봄이 합리적이다.

󰃨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마태, 마가, 요한 모두 안식일을 건너 뛰어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누가는 계명을 따라 하루 쉬었음을 말함으로써 하루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같은 누가의 언급은 당시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보여주고 예수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되고 급박했던 반면 부활을 앞둔 하루의 공간이 침묵과 적막감에 휩싸인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같은 하루는 죽음을 넘어서고 부활을 앞둔 새로운 긴장의 공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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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96-누가복음 23장

누가복음 23장

Ⅰ.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신 그리스도 23:1-12

종교적인 법정에서 주 예수에게 신성모독 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예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사형에 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방도를 취했다.

1. 빌라도에게 고소함(1-5)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리고는 예수를 처벌해 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지 않고(왜냐하면 빌라도는 그런 것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했다. 그들은 속으로는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는 전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예수에 대한 고소 내용:그들은 예수에 대해 허위 진술을 했다. ①백성들로 하여금 가이사를 반역하게 했다. 로마 통치 하에 있는 백성들에게 불만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빌라도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이 예수가 백성들의 불만을 조장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2절).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백성들에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지금 그를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거짓 고발한 것이다. 깨끗한 양심은 중상모략에 대항하지 않는다. ②가이사에게 대적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바로 그가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예수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2)고소 내용에 대한 변호: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3절). 그 질문에 대해 “네 말이 옳다”고 답변하셨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가이사의 통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예수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가이사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유대인의 왕 노릇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3)빌라도의 무죄 선언: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4절).

4)고발한 사람들의 계속되는 소란: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하자 그들은 누구러지지 않고 더욱 흥분해서 굳세게 말했다. 그들에게는 내세울 만한 특별한 근거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소란을 피우고 계속 우김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5절). 그는 백성을 소동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칭찬할 만한 일을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백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공 질서를 해치는 교훈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그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2. 헤롯에게 고소함(6-12)

1)빌라도는 예수와 그의 소송을 헤롯에게 넘겼다. 그를 고소한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지방 사람이냐?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빌라도가 물었다(6절).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헤롯 관할이니 헤롯에게로 보내자”고 빌라도가 말했다. 빌라도는 그 사건 때문에 골치가 아팠으며 그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2)헤롯은 기꺼이 예수를 심문했다(8절). 헤롯은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했다. 그는 갈릴리에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며 예수를 보고 싶어한지 오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또한 이적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것도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또한 이적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것도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여러 말로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헤롯을 만족시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고난에서 건짐받기 위해 이적을 바랐던 자는 아무리 하찮은 거지라도 결코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거만한 왕은 거절당한 것이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와 그가 베푸시는 이적들을 볼 수도 있었다. 이제 이적들을 보려고 하지만 보여 주시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가 청함받은 날을 몰랐기 때문이다. 주님은 값싸게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군주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3)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헤롯 앞에 등장했다. 그들은 서서 예수를 힘써 고소했다(10절). 그 말에는 뻔뻔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4)헤롯은 예수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그는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겼다. 그 말은 예수를 멸시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를 힘을 다 잃고 이제는 보통 사람과 똑 같이 무력해진 사람처럼 취급하며 비웃었다. 헤롯은 빌라도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를 모욕했다. 헤롯은 왕이라고 조롱하려고 빛난 옷을 예수에게 입혔으며 나중에 빌라도의 군사들도 같은 모욕을 주도록 가르쳤다.

5) 헤롯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으며 이로써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헤롯은 예수에게 유죄 판결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낸 것이다(11절). 그렇게 함으로써 빌라도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같이 서로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12절). 전에 그들은 서로 원수였다.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는 자들이 예수를 대적하는 데는 하나가 되는 방법을 잘 살펴 보라.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시다. 빌라도와 헤롯은 둘 다 예수의 무죄를 인정했다. 여기서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다른 곳에서 가졌던 불화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23:13-25

여기서 복되신 예수는 군중들의 소요에 휘말려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1)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을 받거나 구속당할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가 그렇게 믿었다면 그는 곧 예수를 석방해야만 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악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화가날까봐 염려했다. 그러므로 완전을 기하려고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듣고자 하였다(14절). “너희가 이 사람을 내게 끌어 왔도다.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 심문하였으며 너희 모두 이 사람에 대해서 주장하는 바를 들었으나 나는 도저히 그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 즉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2) 빌라도는 헤롯도 같은 생각임을 백성들에게 호소한다(16절). “내가 너희를 헤롯에게로 보냈으며 헤롯은 예수를 도로 보냈다. 헤롯은 예수가 사형받을 만한 죄는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헤롯은 예수를 무력한 자라고 비웃었으나 위험 인물이라는 낙인을 찍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사형장보다 정신병원이 더 어울린다고 빌라도는 생각했다.

(3) 빌라도는 백성들이 찬성하기만 하면 예수를 놓아 주려고 했다. 백성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이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올무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소란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행하려고 한다.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빌라도는 첫째로 죄수 한 명을 부득이 놓아 주어야 하므로 죄수라는 명목으로 예수를 놓아 주려고 했다(17절). 둘째로 빌라도는 예수를 때려서 놓으려고 했다.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면서 왜 그를 때려야만 하는가?

(4) 백성들은 차라리 바리바를 놓아 달라고 한다.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 때문에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보다 이 범죄자에게 우선권을 준 것이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조서(18,19절).

(5) 빌라도가 두 번째 그리스도를 놓아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소리쳤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20,21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저를 십자가게 못 박게 하소서.”

(6)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자 그들은 더욱 포악해졌다(22절). “무엇때문인가?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는가? 그의 죄목을 대라. 나는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들에게 죄인을 놓아 주고 결백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7) 빌라도는 마침내 포기한다. 백성과 대제사장들의 소리가 이긴 것이다. 빌라도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언도했다(24절). 바라바를 놓아주는 악한 상황과 함께 이 내용이 다시 한번 나온다. 민란과 살인을 위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 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25절). 저히 뜻대로 하게 예수를 넘겨준 것 보다 더 잔인하게 예수를 다룰 수는 없었다.

Ⅲ.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는 도중의 사건 23:26-31

그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의 재판을 마쳤는지 이상하다. 날이 새자 예수는 대제사장들에게 끌려갔다(눅 2:66). 그 다음에는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헤롯에게로 끌려가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빌라도와 백성들 사이에 예수를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며 무례한 짓을 자행했다. 이런 일은 네 다섯시, 기껏해야 여섯시까지 모두 끝났다. 왜냐하면 9시에서 12시 사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당했던 것처럼 세상 밖으로 쫓겨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제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1. 십자가를 진 한 사람(26)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시몬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 하였다(26절).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 밑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이같이 편하게 해 준 것은 동정심, 잔인한 동정심에서였다.

2. 슬피우는 무리(27-31)

보통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부당하게 고난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시 흔히 있는 것처럼 이로 인해 많은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갔다. 백성 특히 여자의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27절). 그들은 또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예수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를 존중하며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가슴을 쳤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울었다. 그리스도에게는 그들의 눈물을 인식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슬퍼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스도는 돌이켜 그들을 향해 자기를 위하여 울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28절).

1)예수는 그들에게 우는 데 대해 지시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그들이 예수를 위해 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들과 자녀들을 위해서는 울라고 하셨다. 그리스도 죽음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에 대한 승리였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를 대신해 영생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 울지 말고 그를 죽게 한 우리의 죄와 우리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울자.

2)그들이 그들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성읍에 슬픔의 날이 곧 오리라.” 얼마 전에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로 꼼짝없이 울게 만든다. 두 잠언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데 둘 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참으로 끔찍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자식없이 산 후에 죽어 묻히고 싶었을 것이다. ①무자한 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가족이 없는 자를 부러워 하며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 할 것이다. ②살아서 묻히고 싶어할 것이다.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이러한 재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어두운 동굴에 숨고 싶을 것이다. 가루가 될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쨋든 숨으려고 할 것이다.

3)그리스도가 받으시는 고난에서 이러한 황폐함을 생각해 내는 것은 당연하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이시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시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다. 그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을 볼 때 그가 중재하시지 않았다면 전체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또한 그들이 번성하도록 모든 것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른 나무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혹독한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 나무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그들이라고 어찌 고난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Ⅳ. 십자가 처형 23:32-43

1. 마태 마가복음과의 공통된 내용 32-38

(1)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32절). (2) 해골이라는 곳 갈보리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3) 예수를 두 행악자 사이에 못 박았다. 이렇데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범죄자처럼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범죄자로 여겼다. (4) 사형을 집행했던 군병들이 그 대가로 예수의 옷을 취하여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34절). (5)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그들 사이에 서서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그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라고 독촉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거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35절). 그들은 예수를 희롱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 (6) 예수의 죄목을 밝혀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붙였다. 유대인의 왕 노릇을 했기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가 실제 유대인의 왕임을 선언하고자 하셨다. 즉 그는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의 십자가는 면류관을 향하는 길이다. 이 말을 고등 언어인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기록했다.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이 세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이 세 언어로 예수가 왕이심을 선포한다.

2. 누가복음의 고유한 내용(34,39-43)

주 구절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 구절의 내용은 매우 놀랍다.

1)원수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34절):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34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 돌아가실 때까지 일곱 가지의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 중 최초로 하신 말씀이다. 그는 십자가에 묶이자마자 혹은 그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을 때 이 기도를 하셨다.

①그들을 위한 간구: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셨다. 예수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중보를 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도 곁에 보이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는 자기 죽음의 의도와 의미를 설명하셨다. 즉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뿐만이 아니라 회개하며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해 죄사함이라는 놀라운 것을 획득하셨다. 예수의 피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들이 자기를 박해하며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②그들을 위한 청원: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얼마간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의 무지가 있다. 즉 교육받을 길이 없거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지도자들 때문에 무지했으며 그에 대해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선포하는 교리에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들은 동정해야 하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자. 우리 자신과 남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이다. 원수들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는 대적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우신 원칙에 따라 본을 보이셨다(마 5:4,45 네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그런 원수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지 못할 원수가 있을 수 있을까?

2)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에 미친 상이한 결과들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 강도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전조가 되었으며 다른 한 강도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조가 되었다.

①두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은 끝까지 완악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까운 곳 달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비방했다(39절).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그 강도도 지금 상당히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교만한 마음을 낮추지 못했으며 자기와 같이 고통받는 자에게까지도 착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독촉한다. 뻔뻔하게 그리스도를 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②나머지 한 강도는 마침내 마음이 녹아졌다. 이 강도는 불 속에서 타는 나무 조각을 건져내듯 간신히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한 불후의 작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를 자꾸 미루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회개라면 아무리 늦어도 괜찮지만 막판에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를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특별한 예로서 택하신 것이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견고케 하심으로써 이미 사단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트로피를 하나 더 마련하신다. 이 사건을 잘 살펴 보면 이 사건이 예외적인 사건임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 은혜의 예외적인 역사:그것은 그가 한 말에 나타난다.

우선 나머지 한 강도에게 한 말을 참조하라(40,41절) ㉠그는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꾸짖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40절). 이 말은 그가 이 같은 악을 행하는 무리를 따르지 않게 된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음을 의미한다. “네게 인정이란 것이 있다면 너와 같이 고통을 받는자를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동일한 정죄를 받았으며 같이 죽어가고 있지 않느냐.”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마땅함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41절). 진실하게 회개한 자는 죄의 대가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의를 행하셨으나 우리는 악을 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당하셨다고 생각한다. 회개한 이 강도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그가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확신한다.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행악자 중의 하나로 간주하여 두 행악자 사이에 못 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강도는 대제사장들이 깨닫지 못한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주 예수께 한 말을 보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이는 죽어가는 죄인이 죽어가는 구세주에게 드린 기도이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셨다. 또한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그 강도에게는 복이 되었다. 아마 전에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기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해 주셨다. 이 기도에 나타난 그의 신앙을 잘 살펴보라. 죄를 고백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간구하면서 그는 주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의 나라가 있으며, 곧 그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며, 그가 사랑하는 자들은 복되리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 당시 이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후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그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나머지 한 강도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구원받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이 다 끝났을 때를 잘 예비하였다. 이 기도에 나타난 겸손을 보라. 그가 청한 것이라곤 단지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를 어떻게 기억하시든 그것은 주님께 맡겼다. 그리스도는 이 강도를 기억하셨다. 이 기도 속에는 끈질긴 열의가 들어 있다. 즉 그는 이 기도 속에 온 마음을 쏟았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 할 것은 바로 그의 나라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각해주시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그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예외적 사랑: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 기도에 내가 응답하리라. 네가 구한 이상을 네게 줄것이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회개한 강도에게 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계시지만 불쌍한 회개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낙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누가 이 말씀을 하셨는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중보의 말씀으로 그가 받으시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돌아가셨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며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그가 낙원에 들어갈 것임을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면류관에 이르셨다. 우리도 다른 길로 갈 생각을 하지 말자. ㉡그리스도는 회개한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이 죽으면 그 낙원에 자기와 함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다. 여기서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는 천국이 얼마나 복된 곳인가를 살펴 보라. 그곳은 기쁨의 낙원이며 하나님의 낙원이다(계 2:7).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행복이다. 우리는 죽자마자 그곳으로 가게 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밤 우리는 낙원에 있을 것이다.

Ⅴ. 십자가 처형 23:44-49

1.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 일어난 기이한 현상들(44,45)

(1) 해가 빛을 잃음:때는 제 육시 즉 정오 쯤이었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2)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먼저 말한 것은 하늘에서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전에서 생긴 일이다. 하늘도 성전도 다 하나님의 집이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의식적인 율법이 폐기됨을 암시하였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모든 장애물이 사라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힘을 다하여 하신 말씀(46)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그렇게 나와 있다. 또한 여기서도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 같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절). 그는 이 말씀을 조상 다윗에게서 빌어 왔다(시 31:5).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대로 죽으셨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씀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버림받은 것을 하소연할 때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으나 이제 끔찍한 영혼의 고통이 끝났음을 보여 주려고 여기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특별한 의미에서 중보자이신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는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며”(사 53:10)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이다”(마 20:28). 이렇게 말씀함으로써 그는 제물을 드리셨다. 즉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셨다가 떼셨다. “이것을 바칩니다. 이것을 당신 손에 모두 드립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 대신에 내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제물을 바치는 자의 뜻이 선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 제물을 흠향하신다. 그는 자기 영혼을 낙원에 들이시며 사흘 후에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버지 손에 자기 영혼을 맡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한 이 말을 유용하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내세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자.

3.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47-49)

(1) 군병들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47절). 그 백부장은 로마인 즉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그는 참을성 있게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던 자에 대해 증언하셨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더 나아가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2) 무관심하게 구경만 하던 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만이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48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심각해져서 돌아갔다. 그들은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을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소리질렀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예수를 희롱하며 욕하던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심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감동은 곧 사라진 것 같다. 즉 그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경의의 표시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잠시 후에 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을 염려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은 감격하지만 그 감격은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은 감격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어째서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3) 예수를 아는 자들과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다가와서 그 된 일 보았다(49절). 예수의 아는 자들이 다 멀리 서있었다. 이 사실을 예수의 괴로움 중의 하나였다.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이 일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려고 세움을 입으신 것이다(눅 2:34,35)

Ⅵ. 그리스도를 장사지냄 23:50-56

1. 장사를 치른 사람(50,51)

예수를 아는 자들은 멀리 서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이라 하는 사람’을 일으키셨다(50절).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자요, 덕행이나 경건이 있어서 흠이 없다는 평판을 받던 자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던 자였다. 그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공회 의원이었고 산헤드린 회원이었으며 유대 교회의 장로였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과 같은 집단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하였다(51절). 그는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동조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크게 소란을 떠는 자들보다 훨씬 더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2. 그리스도를 장사지내기 위해 요셉이 한 일(52,53)

(1)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2)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다. 틀림없이 손수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 아기를 “배내옷”으로 싸듯이 시체를 천으로 싸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마포를 원단으로 사서 시체를 쌀 수 있도록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3. 장사지낸 곳(53)

바위에 판 무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었다.

4. 장사지낸 시기(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54절). 그들이 급하게 장사를 서두른 이유가 여기 있다. 즉 안식일이 거의 되었기 때문이다. 슬픔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지키는 데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5.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55)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고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었다(55절).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그 옆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았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께 대한 사랑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6. 그의 시체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56절). 이는 그들의 신앙이라기 보다 그들의 사랑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란 것을 기억하고 믿었더라면 그와 같은 낭비나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준비를 바삐해 놓고 안식일에 쉬었다.

#1-5 Pilate well understood the difference between armed forces and our Lord’s followers.

But instead of being softened by Pilate’s declaration of his innocence, and considering whether they were not bringing the guilt of innocent blood upon themselves, the Jews were the more angry.

The Lord brings his designs to a glorious end, even by means of those who follow the devices of their own hearts.

Thus all parties joined, so as to prove the innocence of Jesus, who was the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6-12 Herod had heard many things of Jesus in Galilee, and out of curiosity longed to see him.

The poorest beggar that asked a miracle for the relief of his necessity, was never denied; but this proud prince, who asked for a miracle only to gratify his curiosity, is refused.

He might have seen Christ and his wondrous works in Galilee, and would not, therefore it is justly said, Now he would see them, and shall not.

Herod sent Christ again to Pilate: the friendships of wicked men are often formed by union in wickedness.

They agree in little, except in enmity to God, and contempt of Christ.

#13-25 The fear of man brings many into this snare, that they will do an unjust thing, against their consciences, rather than get into trouble.

Pilate declares Jesus innocent, and has a mind to release him; yet, to please the people, he would punish him as an evil-doer.

If no fault be found in him, why chastise him? Pilate yielded at length; he had not courage to go against so strong a stream.

He delivered Jesus to their will, to be crucified.

#26-31 We have here the blessed Jesus, the Lamb of God, led as a lamb to the slaughter, to the sacrifice.

Though many reproached and reviled him, yet some pitied him.

But the death of Christ was his victory and triumph over his enemies: it was our deliverance, the purchase of eternal life for us.

Therefore weep not for him, but let us weep for our own sins, and the sins of our children, which caused his death; and weep for fear of the miseries we shall bring upon ourselves, if we slight his love, and reject his grace.

If God delivered him up to such sufferings as these, because he was made a sacrifice for sin, what will he do with sinners themselves, who make themselves a dry tree, a corrupt and wicked generation, and good for nothing! The bitter sufferings of our Lord Jesus should make us stand in awe of the justice of God.

The best saints, compared with Christ, are dry trees; if he suffer, why may not they expect to suffer? And what then shall the damnation of sinners be! Even the sufferings of Christ preach terror to obstinate transgressors.

#26-31 We have here the blessed Jesus, the Lamb of God, led as a lamb to the slaughter, to the sacrifice.

Though many reproached and reviled him, yet some pitied him.

But the death of Christ was his victory and triumph over his enemies: it was our deliverance, the purchase of eternal life for us.

Therefore weep not for him, but let us weep for our own sins, and the sins of our children, which caused his death; and weep for fear of the miseries we shall bring upon ourselves, if we slight his love, and reject his grace.

If God delivered him up to such sufferings as these, because he was made a sacrifice for sin, what will he do with sinners themselves, who make themselves a dry tree, a corrupt and wicked generation, and good for nothing! The bitter sufferings of our Lord Jesus should make us stand in awe of the justice of God.

The best saints, compared with Christ, are dry trees; if he suffer, why may not they expect to suffer? And what then shall the damnation of sinners be! Even the sufferings of Christ preach terror to obstinate transgressors.

#32-43 As soon as Christ was fastened to the cross, he prayed for those who crucified him.

The great thing he died to purchase and procure for us, is the forgiveness of sin.

This he prays for.

Jesus was crucified between two thieves; in them were shown the different effects the cross of Christ would have upon the children of men in the preaching the gospel.

One malefactor was hardened to the last.

No troubles of themselves will change a wicked heart.

The other was softened at the last: he was snatched as a brand out of the burning, and made a monument of Divine mercy.

This gives no encouragement to any to put off repentance to their death-beds, or to hope that they shall then find mercy.

It is certain that true repentance is never too late; but it is as certain that late repentance is seldom true.

None can be sure they shall have time to repent at death, but every man may be sure he cannot have the advantages this penitent thief had.

We shall see the case to be singular, if we observe the uncommon effects of God’s grace upon this man.

He reproved the other for railing on Christ.

He owned that he deserved what was done to him.

He believed Jesus to have suffered wrongfully.

Observe his faith in this prayer.

Christ was in the depth of disgrace, suffering as a deceiver, and not delivered by his Father.

He made this profession before the wonders were displayed which put honour on Christ’s sufferings, and startled the centurion.

He believed in a life to come, and desired to be happy in that life; not like the other thief, to be only saved from the cross.

Observe his humility in this prayer.

All his request is, Lord, remember me; quite referring it to Jesus in what way to remember him.

Thus he was humbled in true repentance, and he brought forth all the fruits for repentance his circumstances would admit.

Christ upon the cross, is gracious like Christ upon the throne.

Though he was in the greatest struggle and agony, yet he had pity for a poor penitent.

By this act of grace we are to understand that Jesus Christ died to open the kingdom of heaven to all penitent, obedient believers.

It is a single instance in Scripture; it should teach us to despair of none, and that none should despair of themselves; but lest it should be abused, it is contrasted with the awful state of the other thief, who died hardened in unbelief, though a crucified Saviour was so near him.

Be sure that in general men die as they live.

#44-49 We have here the death of Christ magnified by the wonders that attended it, and his death explained by the words with which he breathed out his soul.

He was willing to offer himself.

Let us seek to glorify God by true repentance and conversion; by protesting against those who crucify the Saviour; by a sober, righteous, and godly life; and by employing our talents in the service of Him who died for us and rose again.

#50-56 Many, though they do not make any show in outward profession, yet, like Joseph of Arimathea, will be far more ready to do real service, when there is occasion, than others who make a greater noise.

Christ was buried in haste, because the sabbath drew on.

Weeping must not hinder sowing.

Though they were in tears for the death of their Lord, yet they must prepare to keep holy the sabbath.

When the sabbath draws on, there must be preparation.

Our worldly affairs must be so ordered, that they may not hinder us from our sabbath work; and our holy affections so stirred up, that they may carry us on in it.

In whatever business we engage, or however our hearts may be affected, let us never fail to get ready for, and to keep holy, the day of sacred rest, which is the Lord’s day.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3장

23:1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신 그리스도(누가복음 23: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법정에서 “모독자”로 정죄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법정이 의도하는 대로하기엔 너무도 “악한 범죄”였다. 그들이 그를 “정죄”하였으나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래서 다른 방도를 구하였다. Ⅰ. 그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고소하였다. 더 이상 자기들의 법정에서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무리가 다 일어나,” 그 날은 재판하는 날도, 심문하는 날도 아닌데도 “그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모독자가 아닌(그런 죄목으로 빌라도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정권에 불만을 가진 자로 고소하며 그를 심판할 것을 요구하였다. 설혹 예수가 그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겐 그것이 죄가 될 수 없었으며 그것이 죄라 할진대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그와 같은 죄로 심판 받을 입장이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악의를 교묘하게 숨기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로마의 권세를 이용하는 이 “꾸며진 음모”야말로 “진짜” 음모로 로마 권세가 머지않아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었음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에 대한 고소 내용(2절). 그리스도를 고소하며 그들은 빌라도의 마음에 들도록 아첨하며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위는 예수를 헤하려는 “음모”외엔 전혀 다른 뜻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거짓 증언하였다.

(1) 백성들로 “가이사에게 반역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로마 통치 밑에 있던 백성들에겐 불만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단지 로마 정권이 무너지는 것 외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며 빌라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이와 같은 불만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려던 자가 바로 그 앞에 있는 예수임을 믿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규명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불만을 조성하고 야기 시키는 자들임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백성을 미혹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게 한 것을 마치 정치적인 통치에 반역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백성들을 선한 종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신실된 일군으로 삼으려는 것 이상의 다른 뜻은 없었다. 그리스도는 특히 백성들 가운데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거부하려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 것처럼 억울한 고소를 당하고 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중상에 대항할 수 없다.

(2) 그가 “가이사와 대적”하려고 했다고 거짓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배척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히려 그가 세상적인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나타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임금으로 등극하지도 않았으며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고 말하며 이런 죄목으로 씌우고 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또는 “왕”이라고 칭하였으나 이것은 가이사에게 타격을 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만약 그가 가이사와 싸울 태세만 갖춘다면 가이사라도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지만,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요 6:15) 그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2. 고소 내용에 대한 변론.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 “네 말이 옳도다.” 즉,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나는 유대 민족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문제에 있어 백성들을 탄압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적하는 왕권이지, 정치적인 관심에만 집중하는 가이사의 통치에 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써 가이사의 통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는 “네 말이 옳도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무슨 증거가 있는가?”란 의미도 담겨져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가이사의 최고 권력에 반대하며, 혹은 가이사가 보낸 통치자들에 반역하려고 “유대인의 왕”처럼 꾸민 적이 전혀 없음을,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고 있었다.

3.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5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그 재판을 방청하고 있던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가 너희 법의 어느 조항을 어겨 죄를 지었는가, 나는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보니 그는 내 법정에서 재판받을 만한 죄를 찾아 볼 수 없도다.”

4. 박해하는 자들의 끈질긴 요구와 소란(5절).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으로 이성을 되찾아 그들이 죄없는 자의 피를 흘리게 하려고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격노하여 “굳세게” 고집부렸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도 없이, 증명할 충분한 증거도 없이 고집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소란과 배짱을 가지고 증거도 없이 소리쳤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가이사에게 반역하라고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그가 백성을 소동케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인위적이고 난동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었고 고결하고 찬양할 만한 모든 일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정권을 위협하거나 미워하라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은 이상 그들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소 내용(2절). 그리스도를 고소하며 그들은 빌라도의 마음에 들도록 아첨하며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위는 예수를 헤하려는 “음모”외엔 전혀 다른 뜻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거짓 증언하였다.백성들로 “가이사에게 반역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로마 통치 밑에 있던 백성들에겐 불만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단지 로마 정권이 무너지는 것 외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며 빌라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이와 같은 불만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려던 자가 바로 그 앞에 있는 예수임을 믿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규명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불만을 조성하고 야기 시키는 자들임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백성을 미혹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게 한 것을 마치 정치적인 통치에 반역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백성들을 선한 종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신실된 일군으로 삼으려는 것 이상의 다른 뜻은 없었다. 그리스도는 특히 백성들 가운데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거부하려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 것처럼 억울한 고소를 당하고 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중상에 대항할 수 없다.그가 “가이사와 대적”하려고 했다고 거짓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배척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히려 그가 세상적인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나타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임금으로 등극하지도 않았으며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고 말하며 이런 죄목으로 씌우고 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또는 “왕”이라고 칭하였으나 이것은 가이사에게 타격을 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만약 그가 가이사와 싸울 태세만 갖춘다면 가이사라도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지만,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요 6:15) 그는 이것을 거부하였다.고소 내용에 대한 변론.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 “네 말이 옳도다.” 즉,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나는 유대 민족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문제에 있어 백성들을 탄압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적하는 왕권이지, 정치적인 관심에만 집중하는 가이사의 통치에 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써 가이사의 통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는 “네 말이 옳도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무슨 증거가 있는가?”란 의미도 담겨져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가이사의 최고 권력에 반대하며, 혹은 가이사가 보낸 통치자들에 반역하려고 “유대인의 왕”처럼 꾸민 적이 전혀 없음을,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고 있었다.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5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그 재판을 방청하고 있던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가 너희 법의 어느 조항을 어겨 죄를 지었는가, 나는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보니 그는 내 법정에서 재판받을 만한 죄를 찾아 볼 수 없도다.”박해하는 자들의 끈질긴 요구와 소란(5절).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으로 이성을 되찾아 그들이 죄없는 자의 피를 흘리게 하려고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격노하여 “굳세게” 고집부렸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도 없이, 증명할 충분한 증거도 없이 고집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소란과 배짱을 가지고 증거도 없이 소리쳤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가이사에게 반역하라고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그가 백성을 소동케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인위적이고 난동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었고 고결하고 찬양할 만한 모든 일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정권을 위협하거나 미워하라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은 이상 그들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없었다. Ⅱ. 그들은 헤롯 앞에서 그를 고소하였다. 1. 빌라도는 그를 헤롯의 법정으로 넘겼다. 이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갈릴리란 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리는 가나안 북부 지방에 속하였다. 빌라도는 “그가 그 지방 출신이냐?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 그곳이 그의 주거지입니다. 그는 거기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읍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그를 헤롯에게 보내자. 헤롯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으니 이 문제는 그가 맡는 것이 타당하다. 이 죄인은 그의 관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 사건에 식상(食傷)하였고 어떻게 하든 이것에서 손을 떼고자 하였다. 이것이 그를 헤롯에게 보내는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성서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성취하시려고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4장 26, 27절에 나타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한 다윗의 말씀(시 2:2)은 헤롯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2. 헤롯은 그를 시험하고 싶어했다(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헤롯은 예수를 죄인으로 보게 되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더 기뻤을 것이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 행한 기사 이적으로 그곳 사람들 사이엔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보고자 한지 오래였다.” 그의 교훈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가 사는 날까지 그의 이름도 오래 입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그는 “여러 말로 물어” 그가 그의 권능을 보일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하도록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아마 그는 “비밀”에 속한 것, “장차 될 일,” 혹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재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도 대답하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려 하지도 않았다. “가련하디 가련한 걸인이 빈곤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적을 요구할 때엔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단지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기적을 요구하는 자만한 왕의 요청은 거부하셨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놀라운 행적을 볼 기회가 많이 있었으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보고자 하였으나 “볼 수 없었다”는 표현은 타당한 말이다. 기적은 그의 눈에 가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방문 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생각하기를, 이제 그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적을 “명령할” 수 있겠다 하였으나 기적은 값싸게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권세가라도 전능하신 분을 그의 손으로 좌우할 수는 없다.

3. 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헤롯 앞에서도 그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지금 핍박하는 일에 눈코 뜰새 없었다. “그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10절). 말 그대로 뻔뻔스럽고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댔다. 그들은 헤롯으로 하여금 그가 치안을 방해한 죄인을 구금하고 있다는 사실로 믿게 하려고 애썼다. 정치적인 권세에 대해 현실적이며 유익한 친구가 되는 선한 사람이나 선한 목회자들이 권세에 대적하며 선동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로 어이없는 고소를 당하는 것이 새삼스런 일이 아님을 주목하자.

4. 헤롯은 그를 대단히 “못살게” 굴었다. 그는 그 “군병들”과 그의 신하들과 시종들, 고급 관리들과 함께 그를 “업신여겼다.” 그들은 그를 “무시했다.” 말 그대로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만물을 만드신 분을 업신여기다니,” 그들은 그를 바보처럼 희롱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겐 친절하게도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정도 못할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그는 자기 능력을 잃고 이젠 보통 사람들과 같게 되었다고 희롱하였을 것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헤롯은 빌라도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을 것인데도 빌라도보다 더 그를 “못살게 굴었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는 지식은 사람을 “더 교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롯은 그리스도에게 마치 가짜 왕에게 하듯 “빛난 옷,” 번지르르하게 칠한 의복을 입혔다. 그리고 빌라도의 군인들에게도 그를 계속 이런 식으로 대접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심술에는 주모자였다.

5. 헤롯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이것은 그들의 친교를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이전의 얼마 동안 그들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었다. 헤롯은 기적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범죄자로 정죄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를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11절). 이처럼 죄인을 그에게 보냄으로 빌라도에게 충성과 존경을 표시하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 사이에 서로 오고 간 서신과 상호 연락을 통하여 그들의 지금까지의 관계를 보다 친분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었다(12절). 그들은 “전에는 원수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헤롯의 관할인(눅 13:1) 갈릴리인들을 빌라도가 학살한데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고급 관리들 사이에 늘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논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싸우던 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로 다시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는 마치 그발, 암몬과 아말렉 등이 서로 불목하다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대적할 때엔 연합하는 것과 같다(시 83:7).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이다. 빌라도나 헤롯은 그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점에 그들이 서로 동의함으로 그들은 다른 일에서도 서로 화해하게 된 것이다. 빌라도는 그를 헤롯의 법정으로 넘겼다. 이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갈릴리란 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리는 가나안 북부 지방에 속하였다. 빌라도는 “그가 그 지방 출신이냐?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 그곳이 그의 주거지입니다. 그는 거기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읍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그를 헤롯에게 보내자. 헤롯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으니 이 문제는 그가 맡는 것이 타당하다. 이 죄인은 그의 관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 사건에 식상(食傷)하였고 어떻게 하든 이것에서 손을 떼고자 하였다. 이것이 그를 헤롯에게 보내는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성서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성취하시려고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4장 26, 27절에 나타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한 다윗의 말씀(시 2:2)은 헤롯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헤롯은 그를 시험하고 싶어했다(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헤롯은 예수를 죄인으로 보게 되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더 기뻤을 것이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 행한 기사 이적으로 그곳 사람들 사이엔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보고자 한지 오래였다.” 그의 교훈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가 사는 날까지 그의 이름도 오래 입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그는 “여러 말로 물어” 그가 그의 권능을 보일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하도록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아마 그는 “비밀”에 속한 것, “장차 될 일,” 혹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재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도 대답하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려 하지도 않았다. “가련하디 가련한 걸인이 빈곤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적을 요구할 때엔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단지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기적을 요구하는 자만한 왕의 요청은 거부하셨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놀라운 행적을 볼 기회가 많이 있었으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보고자 하였으나 “볼 수 없었다”는 표현은 타당한 말이다. 기적은 그의 눈에 가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방문 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생각하기를, 이제 그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적을 “명령할” 수 있겠다 하였으나 기적은 값싸게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권세가라도 전능하신 분을 그의 손으로 좌우할 수는 없다.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헤롯 앞에서도 그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지금 핍박하는 일에 눈코 뜰새 없었다. “그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10절). 말 그대로 뻔뻔스럽고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댔다. 그들은 헤롯으로 하여금 그가 치안을 방해한 죄인을 구금하고 있다는 사실로 믿게 하려고 애썼다. 정치적인 권세에 대해 현실적이며 유익한 친구가 되는 선한 사람이나 선한 목회자들이 권세에 대적하며 선동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로 어이없는 고소를 당하는 것이 새삼스런 일이 아님을 주목하자.헤롯은 그를 대단히 “못살게” 굴었다. 그는 그 “군병들”과 그의 신하들과 시종들, 고급 관리들과 함께 그를 “업신여겼다.” 그들은 그를 “무시했다.” 말 그대로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만물을 만드신 분을 업신여기다니,” 그들은 그를 바보처럼 희롱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겐 친절하게도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정도 못할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그는 자기 능력을 잃고 이젠 보통 사람들과 같게 되었다고 희롱하였을 것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헤롯은 빌라도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을 것인데도 빌라도보다 더 그를 “못살게 굴었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는 지식은 사람을 “더 교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롯은 그리스도에게 마치 가짜 왕에게 하듯 “빛난 옷,” 번지르르하게 칠한 의복을 입혔다. 그리고 빌라도의 군인들에게도 그를 계속 이런 식으로 대접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심술에는 주모자였다.헤롯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이것은 그들의 친교를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이전의 얼마 동안 그들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었다. 헤롯은 기적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범죄자로 정죄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를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11절). 이처럼 죄인을 그에게 보냄으로 빌라도에게 충성과 존경을 표시하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 사이에 서로 오고 간 서신과 상호 연락을 통하여 그들의 지금까지의 관계를 보다 친분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었다(12절). 그들은 “전에는 원수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헤롯의 관할인(눅 13:1) 갈릴리인들을 빌라도가 학살한데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고급 관리들 사이에 늘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논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싸우던 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로 다시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는 마치 그발, 암몬과 아말렉 등이 서로 불목하다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대적할 때엔 연합하는 것과 같다(시 83:7).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이다. 빌라도나 헤롯은 그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점에 그들이 서로 동의함으로 그들은 다른 일에서도 서로 화해하게 된 것이다.

23:13 그리스도보다 바라바를(누가복음 23:13-25) 우리는 여기서 군중들에 의해 쇠약해지실 대로 지셨고, 소란과 야유 속에 십자가를 지라는 외침을 들으셨고, 공중 권세의 대행자로서 “대제사장”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예수를 보게 된다. Ⅰ.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이나 구금을 당할 만한 죄는 저지른 것이 없음을 믿는다고 솔직하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를 즉시 “석방”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오합지졸 무리들의 분노로부터 그를 “보호”하며, 그들의 이와 같은 무례한 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선한 행실을 할 수 있기까지 그들을 구금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나쁜 인간이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추호도 친절을 베풀지 않았으며, 다른 일로 이미 그가 미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황제나 백성들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립성을 잃고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그는 마땅히 그들이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는” 무리이므로 그들을 해산시키고 자기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나 듣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마음속까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4절).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존중하는 고로 너희 앞에서 사실하며 그를 대적하는 너희의 모든 말을 들었으나 나로선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너희는 너희가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 Ⅱ.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일에 헤롯을 끄집어냈다(15절). “내가 저를 그에게 보냈더니, 그는 나보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을까 함이라. 그런데 그는 아무 죄도 찾지 못한 채, 어떤 불쾌한 표시도 없이 저를 우리에게 돌려 보냈도다. 그의 견해로도 그의 죄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저를 향해 약한 자로 조롱하였지 위험한 자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타이번(Tyburn; 런던에 있는 사형장. 역주) 보다는 베드렘(Bedlan; 런던에 있는 정신병자 수용소. 역주)이 그에게 더 적합한 장소라고 여겼다. Ⅲ. 그는 그들이 허락을 한다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그들에게 묻지 말고 그대로 행했어야 했다. Fiat justisia ruat coelum-즉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정의는 제 길을 가게 하라. 그러나 인간의 공포는 많은 사람에게 덫을 만들어,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 운행하며, 정의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때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양심을 거역하면서 불의한 일을 하게 만든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라고 선언하였고 그를 석방할 마음도 있었으나, 백성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였다. 1. 그는 박해자들의 이해를 얻어 그를 석방시키려 하였다. 왜냐하면 “반드시 한 사람들 놓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17절). 그래서 예수는 마땅히 누구의 덕분으로도 아닌 단지 “정의의 행위”로 놓임을 받아야 했음에도 그는 예수를 “자비의 행위”로 놓아주어 그 일로 백성들에게 신세지는 일이 없게 되기를 꾀했던 것이다.

2. 그는 그를 “때려서” 놓을 예정이었다.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그를 때릴 이유가 무엇인가?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못지 않게 죄 없는 자를 매질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며, 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는 그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그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선을 위하여 악을 행할 수는 없다. 그는 박해자들의 이해를 얻어 그를 석방시키려 하였다. 왜냐하면 “반드시 한 사람들 놓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17절). 그래서 예수는 마땅히 누구의 덕분으로도 아닌 단지 “정의의 행위”로 놓임을 받아야 했음에도 그는 예수를 “자비의 행위”로 놓아주어 그 일로 백성들에게 신세지는 일이 없게 되기를 꾀했던 것이다.그는 그를 “때려서” 놓을 예정이었다.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그를 때릴 이유가 무엇인가?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못지 않게 죄 없는 자를 매질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며, 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는 그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그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선을 위하여 악을 행할 수는 없다. Ⅳ. 백성들은 오히려 흉악범 바라바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자신은 그들의 호의를 받을 생각조차 없었고 백성들은 다만 그의 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성중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을 인하여(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갇혔는데 이는 그리스도보다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18절). 그런 자가 이와 같은 무리의 사랑을 받고 환영받는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는 애국심에서 민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란을 일으킨 자인데 민란을 일으킨 자라고 엉뚱하게 고소 당하였던 자였다. Ⅴ. 빌라도가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놓아주겠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고 외쳤다(20, 21절). 그들은 그를 죽이려 했을 뿐 아니라 아주 잔인한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였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말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를 못박으소서, 그를 못박으소서.” Ⅵ. 빌라도가 세 번째로 백성들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이해시키려고 말하자 그들은 더 큰소리로 외쳤다(22절).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 그의 죄명을 말해 보라.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 너희도 너희가 주장하는 대로 그를 죽여야 할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하니 나로선 그를 때리고 놓아주겠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란 부드럽게 대해 주면 줄수록 더 거세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큰 소란과 소동을 일으키며 “큰소리로 재촉하여” 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다.” 그들이 마치 명절에 죄인은 놓아주고 죄 없는 사람을 못박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요구하였다. Ⅶ. 빌라도는 마침내 그들의 고집에 꺾이고 말았다. 백성과 “대제사장”의 소리가 “이겼다.” 그들의 외침은 빌라도에겐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들은 빌라도를 꺾어 자기 신념과 의향을 거역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군중을 이길 만한 강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의 구하는 대로하기를 언도하였다”(24절). 여기에 군중의 분노가 두려워 “사실을 외면한 심판이, 제길을 벗어난 정의”가 있다.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려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사 59:14). “그들에게 공평을 바랐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랐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이와 같은 오류는 25절에서 바라바를 석방시키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로 되풀이된다.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이것을 계기로 바라바는 더욱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며 더 못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마찬가지로 악한 백성들이 “그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였다.” 그를 “더할 나위 없이 미워하며 잔인하게 자선을 베푸는” 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버려 둔 것이야말로 빌라도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결정이었다.

23:26 십자가(누가복음 23:26-31) 우리는 이제 거룩한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제물로 “희생되려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런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상시의 일을 하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날이 새자 대제사장들 앞에 끌려나갔고(22:66) 그후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헤롯에게, 그리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왔다. 그리고 빌라도와 백성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조롱 당하고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갖은 모욕을 당하였는데 이 모은 일이 너댓 시간, 길어야 여섯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9시에서 12시 사이에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결박한 자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였다. 왜냐하면 성의 다른 끝에 있던 그의 동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려고 달려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내쫓김을 당한 자”도 없었다. 그 자신도 “잠시동안 너희는 나를 못 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잠시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를 처형시키려 끌고 나갔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Ⅰ. “십자가를 진” 한 사람.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의 친구였거나 친구로 알려졌던 자인 것 같다. 이 때문에 그에게 화가 미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 하였다(26절).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밑에서 기절하거나 숨을 거두어 그들이 꾸민 음모에 차질이 생기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처럼 쉼을 주는 것도 자비였으나 그것은 “잔인한 자비”였다. Ⅱ. “슬피 우는” 큰 무리. 진심에서 “슬피 우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그의 친구나 지지자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적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명성을 들었고,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가 알고 있었으며 그가 아무 죄도 없이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뒤를 따르는 무리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평소에도 사형 집행이 있을 때엔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이와 같이 유별난 죄수의 사형집행엔 더 많은 무리가 뒤를 따르기 마련이었다.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특히 그들 가운데엔 여자가 많았다(27절). 측은해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고 호기심에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그의 각별한 친구나 친지들처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를 인정하고, 그를 측은히 여기며, 그를 보고 안타까와하고, 그의 고난을 함께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주 예수께서 기진맥진하여 가시는 모습을 보고 낯선 자들도 동정심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그를 위해 울었으며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던 자들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금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을 것이라고 누군가 생각이 들겠지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보실 시간과 마음을 지니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슬픔으로 기진맥진하였으나” 그들의 눈물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그는 “돌이켜 그들을 향하였다.” 그들이 낯선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그들의 슬픔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켰다. 1. 그는 그들에게 슬픈 울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시를 하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그를 위하여 울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 굳어질 대로 굳어져 그렇고 그런 사람의 그렇고 그런 고통을 보고는 좀체로 동정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그들이 그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보면서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분부하셨다. 그들 중에는 살아서 그 멸망의 광경을 보게 될 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필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겐 이 자녀들이 문제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볼 때 우리는 그를 위해서 울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함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측은히 여기는 한 평범한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도 같이 그 죽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우리의 친구의 죽음으로 보아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들에 대한 승리이며 성공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해방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값을 치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되, 그를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녀의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그리고(여기에 언급된 눈물처럼) 우리가 유대 백성들처럼 그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의 은혜를 거부할 때 유대 백성들에게 앞서 말했던 멸망의 날이 닥치듯 우리에게 닥칠 불행의 날로 인하여 울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족이나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울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육체의 짐을 벗어버리고 성결함으로 완전을 입고서 완전한 쉼과 기쁨의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죄악의 세상, 슬픔과 근심의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고 계신다. “보라, 슬픈 때가 너희 성읍에 임하고 있다. 너희 성읍은 무너질 것이고 너희는 그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되리라.”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서로 헤어지면서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속한 일”로 울 때 그는 제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며 “다시 보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라”고 말씀해 주셨다(요 16:22). 그러나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세상적인” 슬픔으로 “그를 위하여 울” 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다른 데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다른 슬픔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약 4:9). 그리스도는 얼마 전에 예루살렘 때문에 우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이 때문에 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를 울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는 시온의 딸들아, 그 안에서 기뻐하라. 그가 너희를 구하러 오시리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울면서도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가 너희를 심판하러 오심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지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 가지 암시적인 단어를 통하여 예언되었는데, 그 말이 그들에게 적시에 먹혀 들어가 그들에겐 공포의 말로 들렸으며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무자식(無子息)과 생매장 되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1) 그들은 무자식 팔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라헬이 레아를 부러워하듯, 자식이 없는 자가 자식 있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때에는 자식을 가진 자들은 도망치는데 자식이 짐이 되며 자식이 “굶어 죽거나 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얻게 되어 그들은 자식이 없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며 “살인자에게 내어 줄” 자식과 손에서 “빼앗길” 자식이 없는 자는 복되도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마 24:19) 그때에 아이를 키우거나 젖먹이고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옛날에 자식을 출산하고 젖 먹여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호 9:11-14 참조). 피조물의 덧없음과 그 위로의 불안함을 명심하라. 우리에 대한 하늘의 섭리가 이처럼 변하여 우리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더없이 큰짐이 되고 걱정과 슬픔이 되고 만다.

(2) 그들은 “생매장”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이 산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이 말씀은 호세아 10장 8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재앙의 소란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굴속에서 숨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 지방이라도 가서 그곳에 거하려 하겠지만 그곳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권세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일 것이다(계 6:16). 그리스도에게 피신해 그의 보호하심 안에 거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것이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수난을 통해 이와 같은 멸망이 예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여 주신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어떤 주석자는 이 말씀은 에스겔 20장 47절에 있는 말씀. “내가 너희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나무를 멸하리니”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1) 좀 특별한 의미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이 그를 죽임으로 그들에게 닥칠 멸망인 것이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들)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죄 없고 뛰어난 인물을 다만 선을 행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주거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실까 생각해 보라. 그는 이미 그들을 마른나무로, 패역하고 거짓된 세대로,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자들로 만드셨지 않았는가? 이것이 그들의 죄일진대 그들에게 내릴 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잖겠는가?” 혹은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인들, (로마 심판관들과 그들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나를, 그들에게는 푸른 나무로 여겨질 나를 이처럼 박해하니,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유대 민족은 그들에게 반역하여 스스로 마른나무가 되어 그들의 원한을 불지를 불쏘시개가 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같은 고난을 내게 내리도록 하시거늘, 종종 베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책망 받았던 썩은 고무들인 너희들에게 내릴 형벌은 어떤 것일까?”(마 3:10; 7:19)

(2) 죄인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죄로 인하여 희생 제물이 된 이유로 이와 같은 고난에 맡겨 두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자신에겐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 열매가 풍성한 나무였다. 그러한 그가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심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중재하지” 않았던들 온인류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며,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모든 조건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계속 마른나무인 채로 남아 있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릴 진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가 지신 죄 때문에 이처럼 하시거늘, 죄로 물든 진노의 세대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푸른 나무에 대해서도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아버지께서 마른나무라고 진노를 참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 받으신 쓰라린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정의를 발견하고 그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완전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나무”에 불과하다. 그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고난받지 않겠다는 보장을 얻을 수 있으랴? 더구나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의 저주는 어떠할 것인가?

그는 그들에게 슬픈 울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시를 하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그를 위하여 울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 굳어질 대로 굳어져 그렇고 그런 사람의 그렇고 그런 고통을 보고는 좀체로 동정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그들이 그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보면서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분부하셨다. 그들 중에는 살아서 그 멸망의 광경을 보게 될 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필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겐 이 자녀들이 문제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볼 때 우리는 그를 위해서 울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함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측은히 여기는 한 평범한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도 같이 그 죽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우리의 친구의 죽음으로 보아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들에 대한 승리이며 성공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해방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값을 치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되, 그를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녀의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그리고(여기에 언급된 눈물처럼) 우리가 유대 백성들처럼 그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의 은혜를 거부할 때 유대 백성들에게 앞서 말했던 멸망의 날이 닥치듯 우리에게 닥칠 불행의 날로 인하여 울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족이나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울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육체의 짐을 벗어버리고 성결함으로 완전을 입고서 완전한 쉼과 기쁨의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죄악의 세상, 슬픔과 근심의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고 계신다. “보라, 슬픈 때가 너희 성읍에 임하고 있다. 너희 성읍은 무너질 것이고 너희는 그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되리라.”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서로 헤어지면서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속한 일”로 울 때 그는 제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며 “다시 보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라”고 말씀해 주셨다(요 16:22). 그러나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세상적인” 슬픔으로 “그를 위하여 울” 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다른 데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다른 슬픔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약 4:9). 그리스도는 얼마 전에 예루살렘 때문에 우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이 때문에 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를 울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는 시온의 딸들아, 그 안에서 기뻐하라. 그가 너희를 구하러 오시리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울면서도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가 너희를 심판하러 오심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지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 가지 암시적인 단어를 통하여 예언되었는데, 그 말이 그들에게 적시에 먹혀 들어가 그들에겐 공포의 말로 들렸으며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무자식(無子息)과 생매장 되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그들은 무자식 팔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라헬이 레아를 부러워하듯, 자식이 없는 자가 자식 있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때에는 자식을 가진 자들은 도망치는데 자식이 짐이 되며 자식이 “굶어 죽거나 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얻게 되어 그들은 자식이 없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며 “살인자에게 내어 줄” 자식과 손에서 “빼앗길” 자식이 없는 자는 복되도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마 24:19) 그때에 아이를 키우거나 젖먹이고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옛날에 자식을 출산하고 젖 먹여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호 9:11-14 참조). 피조물의 덧없음과 그 위로의 불안함을 명심하라. 우리에 대한 하늘의 섭리가 이처럼 변하여 우리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더없이 큰짐이 되고 걱정과 슬픔이 되고 만다.그들은 “생매장”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이 산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이 말씀은 호세아 10장 8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재앙의 소란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굴속에서 숨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 지방이라도 가서 그곳에 거하려 하겠지만 그곳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권세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일 것이다(계 6:16). 그리스도에게 피신해 그의 보호하심 안에 거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것이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수난을 통해 이와 같은 멸망이 예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여 주신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어떤 주석자는 이 말씀은 에스겔 20장 47절에 있는 말씀. “내가 너희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나무를 멸하리니”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좀 특별한 의미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이 그를 죽임으로 그들에게 닥칠 멸망인 것이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들)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죄 없고 뛰어난 인물을 다만 선을 행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주거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실까 생각해 보라. 그는 이미 그들을 마른나무로, 패역하고 거짓된 세대로,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자들로 만드셨지 않았는가? 이것이 그들의 죄일진대 그들에게 내릴 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잖겠는가?” 혹은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인들, (로마 심판관들과 그들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나를, 그들에게는 푸른 나무로 여겨질 나를 이처럼 박해하니,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유대 민족은 그들에게 반역하여 스스로 마른나무가 되어 그들의 원한을 불지를 불쏘시개가 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같은 고난을 내게 내리도록 하시거늘, 종종 베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책망 받았던 썩은 고무들인 너희들에게 내릴 형벌은 어떤 것일까?”(마 3:10; 7:19)죄인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죄로 인하여 희생 제물이 된 이유로 이와 같은 고난에 맡겨 두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자신에겐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 열매가 풍성한 나무였다. 그러한 그가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심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중재하지” 않았던들 온인류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며,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모든 조건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계속 마른나무인 채로 남아 있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릴 진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가 지신 죄 때문에 이처럼 하시거늘, 죄로 물든 진노의 세대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푸른 나무에 대해서도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아버지께서 마른나무라고 진노를 참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 받으신 쓰라린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정의를 발견하고 그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완전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나무”에 불과하다. 그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고난받지 않겠다는 보장을 얻을 수 있으랴? 더구나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의 저주는 어떠할 것인가?

23:32 십자가의 처형(1) (누가복음 23:32-43)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읽게 된다. Ⅰ. 앞의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마찬가지의 여러 가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 1.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갔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사형 선고를 받고 이 날에 처형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고를 덜기 위해 그들은 부랴부랴 예수도 함께 처형시키려고 서두른 것 같다.

2. 그는 Krani,on -즉 해골 그리이스 말로 골고다─ 즉 해골의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의 수난에 수치를 더하기 위해 선택된 수모의 장소였지만 오히려 그곳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이 마치 자기 보금자리인 양 그곳에서 죽음을 물리치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를 땅에 뉘여 놓고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것을 세워 땅 속에 박았거나 혹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에 묻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3. 그는 “두 행악자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렸는데 마치 그가 가장 악한 흉악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범죄자로 취급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로 취급당하였다.

4. 사형 집행에 종사하던 군인들이 그의 옷을 자기들의 일당으로 나꿔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을쌔.” 서로 옷을 나누다보니 이제 더 이상 나누면 아무 쓸모 없는 천조각이 될 것 같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다.

5. 그가 십자가에 달려 “세워질” 때, 그는 갖은 욕설과 저주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인간 본성에 그와 같은 잔인함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그 광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즐기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관원들도,” 그들의 직분으로 볼 때 누구나 지각과 명예를 지닌 자들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그들도 무리들 가운데 서서 “비웃어,”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지어다”고 떠들어대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가 행한 선한 일로 인하여, 그것이 마치 지금 그를 “못박은 자들을 위해” 한 것처럼 그들로부터 조롱 받고 있다. 당시 그는 정복자 이상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그를 정복한 것인 양 그를 조롱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자신을 구하라고 독촉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그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오신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로서 로마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해내려 한다면(그들은 메시야란 말을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묶고 있는 로마인들의 손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할지어다.” 이처럼 유대 “관리들”은 그가 로마인들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 굴복 당한 것으로 보고 그를 조소하였다. “로마 군병들”도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였다. “그 왕에 그 백성이고, 그 백성에 그 왕이로구나.” 그들도 그를 “희롱하였다”(36, 37절). 그들은 그를 가지고 놀았다. 희롱하면서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때엔 늘 그들에게 내려지는 지독하게 신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들은 그에게 기고만장하여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자고, 그들과 함께 마시자고 떠들어대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떠들었다. 유대인들이 그를 자칭 메시야라는 죄목으로 핍박하듯 그들은 그를 자칭 왕이란 죄목으로 핍박하였다.

6. 그의 죄명을 밝히는 머리 위에 박힌 명패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져 있었다(38절).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사칭한 죄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써넣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비록 그가 이처럼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실지로 그가 “유대인의 왕”이며 교회의 왕이다. 그의 십자가는 그의 면류관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이 말은 세 개의 고등 언어,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배운 자야말로 가장 뛰어난 학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읽고 알게 하기 위해 이 말은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선 이렇게 기록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퍼지게 하실 계획이었다. 이방의 철학은 희랍어를 주로 이용하며 로마의 법과 정치는 주로 라틴어를, 히브리어는 구약을 기록함으로 이 모든 언어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 세 가지 언어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은 이 언어들을 습득함으로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갔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사형 선고를 받고 이 날에 처형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고를 덜기 위해 그들은 부랴부랴 예수도 함께 처형시키려고 서두른 것 같다.그는 Krani,on -즉 해골 그리이스 말로 골고다─ 즉 해골의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의 수난에 수치를 더하기 위해 선택된 수모의 장소였지만 오히려 그곳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이 마치 자기 보금자리인 양 그곳에서 죽음을 물리치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를 땅에 뉘여 놓고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것을 세워 땅 속에 박았거나 혹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에 묻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그는 “두 행악자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렸는데 마치 그가 가장 악한 흉악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범죄자로 취급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로 취급당하였다.사형 집행에 종사하던 군인들이 그의 옷을 자기들의 일당으로 나꿔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을쌔.” 서로 옷을 나누다보니 이제 더 이상 나누면 아무 쓸모 없는 천조각이 될 것 같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다.그가 십자가에 달려 “세워질” 때, 그는 갖은 욕설과 저주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인간 본성에 그와 같은 잔인함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그 광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즐기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관원들도,” 그들의 직분으로 볼 때 누구나 지각과 명예를 지닌 자들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그들도 무리들 가운데 서서 “비웃어,”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지어다”고 떠들어대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가 행한 선한 일로 인하여, 그것이 마치 지금 그를 “못박은 자들을 위해” 한 것처럼 그들로부터 조롱 받고 있다. 당시 그는 정복자 이상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그를 정복한 것인 양 그를 조롱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자신을 구하라고 독촉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그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오신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로서 로마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해내려 한다면(그들은 메시야란 말을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묶고 있는 로마인들의 손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할지어다.” 이처럼 유대 “관리들”은 그가 로마인들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 굴복 당한 것으로 보고 그를 조소하였다. “로마 군병들”도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였다. “그 왕에 그 백성이고, 그 백성에 그 왕이로구나.” 그들도 그를 “희롱하였다”(36, 37절). 그들은 그를 가지고 놀았다. 희롱하면서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때엔 늘 그들에게 내려지는 지독하게 신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들은 그에게 기고만장하여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자고, 그들과 함께 마시자고 떠들어대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떠들었다. 유대인들이 그를 자칭 메시야라는 죄목으로 핍박하듯 그들은 그를 자칭 왕이란 죄목으로 핍박하였다.그의 죄명을 밝히는 머리 위에 박힌 명패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져 있었다(38절).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사칭한 죄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써넣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비록 그가 이처럼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실지로 그가 “유대인의 왕”이며 교회의 왕이다. 그의 십자가는 그의 면류관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이 말은 세 개의 고등 언어,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배운 자야말로 가장 뛰어난 학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읽고 알게 하기 위해 이 말은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선 이렇게 기록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퍼지게 하실 계획이었다. 이방의 철학은 희랍어를 주로 이용하며 로마의 법과 정치는 주로 라틴어를, 히브리어는 구약을 기록함으로 이 모든 언어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 세 가지 언어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은 이 언어들을 습득함으로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Ⅱ. 다른 복음서에선 읽을 수 없던 두 가지 특별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그의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가지 유명한 말씀 중 이것이 첫 번째 말씀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최후로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게 되어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훈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서둘러 그로 십자가에 매달 때, 혹은 그를 못박을 때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 이제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1) 간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여, 저들을 멸하소서. 주께서 보고 계시니 그대로 갚아주소서” 하고 기도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성질의 것이며 또한 응분의 보상이란 명목으로 보아도 자비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데 특히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서 그는 이미 예언한 대로(사 53:12) 죄인을 위하여 중재하였으며 하늘에서도 그가 중재한다는 완전한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중보 기도를(요 17장) 하시는 것이다. 후자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라면 전자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제 보듯이 고난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하신 말씀은 그 의미하는 바가 보다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중보의 간구이며 그의 죽음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는 말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 뿐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자들도 사하여 주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명목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여, 내가 지금 고난받고 죽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함이니, 가련한 죄인들이 사함 받기를 위함이니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팔리시고 넘겨져 죽으신 중요한 목적은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러므로 그의 속량의 덕으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이 일을 하신 것이다. 그의 피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있다.

[3]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비록 그를 박해하고 죽인자들 일지라도 그는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2) 변명.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만약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그의 영광과 그들의 머리엔 두꺼운 막이 덮여 있었다. 그러니 무슨 수로 두 개나 되는 막을 뚫고 바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과 자기들의 자녀에게 그의 피가 흘려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다시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독교를 헐뜯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헐뜯게 된다.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이유이다.

[2] 부분적으로나마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성질의 무지(無知)가 있다. 교육을 못 받았거나 부주의한 성격으로 지식을 얻을 기회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무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자들이 지배자들로 인해 무지 속에 갇혀 그에 대해선 나쁜 선입관이 박혀 있고 그것이 더욱 확산되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거역하여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요 16:2). 그런 자들은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얼마가지 않아 응답받았다. 그를 죽이는데 손을 잡았던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로 상당수 회개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한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그의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가지 유명한 말씀 중 이것이 첫 번째 말씀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최후로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게 되어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훈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서둘러 그로 십자가에 매달 때, 혹은 그를 못박을 때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 이제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간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여, 저들을 멸하소서. 주께서 보고 계시니 그대로 갚아주소서” 하고 기도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성질의 것이며 또한 응분의 보상이란 명목으로 보아도 자비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데 특히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서 그는 이미 예언한 대로(사 53:12) 죄인을 위하여 중재하였으며 하늘에서도 그가 중재한다는 완전한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중보 기도를(요 17장) 하시는 것이다. 후자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라면 전자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제 보듯이 고난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하신 말씀은 그 의미하는 바가 보다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중보의 간구이며 그의 죽음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는 말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 뿐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자들도 사하여 주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명목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여, 내가 지금 고난받고 죽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함이니, 가련한 죄인들이 사함 받기를 위함이니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팔리시고 넘겨져 죽으신 중요한 목적은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다.그러므로 그의 속량의 덕으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이 일을 하신 것이다. 그의 피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있다.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비록 그를 박해하고 죽인자들 일지라도 그는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변명.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만약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그의 영광과 그들의 머리엔 두꺼운 막이 덮여 있었다. 그러니 무슨 수로 두 개나 되는 막을 뚫고 바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과 자기들의 자녀에게 그의 피가 흘려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다시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독교를 헐뜯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헐뜯게 된다.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이유이다.부분적으로나마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성질의 무지(無知)가 있다. 교육을 못 받았거나 부주의한 성격으로 지식을 얻을 기회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무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자들이 지배자들로 인해 무지 속에 갇혀 그에 대해선 나쁜 선입관이 박혀 있고 그것이 더욱 확산되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거역하여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요 16:2). 그런 자들은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얼마가지 않아 응답받았다. 그를 죽이는데 손을 잡았던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로 상당수 회개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한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첫째,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께 하듯 우리는 경외심과 신뢰로써 그에게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사하심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우리 자신에게 하듯 그들의 범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다시 말해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또한 우리는 그들의 죄, 우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명령(마 5:44, 45,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로써 그 명령을 준행하게 밀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원수들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떤 원수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 이것은 세상의 권세자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정복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특이한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에겐 복음의 전도를 통하여 그 영향에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행악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생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것이 된다. 멸망할 사람들에겐 어리석음이 되지만 구원받을 자들에겐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1) 그곳엔 “끝까지 고집을 부린” 행악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있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방하였다”(39절). “네가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죽음의 그늘에 가리운 골짜기를 헤매면서도 교만한 마음은 꺾이지 않고 자기와 함께 고난받고 있는 동료에게조차도 부드러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보를 몰타르 속에 넣고 짓밟더라도 우둔함은 걸러낼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누구나 당연히 “억제해야” 된다고 생각되는 망발을 “유발시키곤” 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과 그들을 구원하라”고 대들고 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를 비방하려는 건방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통해 구원 얻을까 기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점을 유의하자.

(2) “마지막 순간에 가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도 있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그 “강도들이 그와 함께 못 박혔으면서도 그를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그들 중 “한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또 다른 주석가들은 처음엔 그들 모두가 그를 “욕했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으로 풀이한다. 사탄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찰라에 있던 이 행악자는 불 속에서 타는 나뭇등걸을 건져내듯 하늘의 자비와 은총의 힘으로 구함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탄은 먹이를 잃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종의 순간까지 회개를 연기하거나 그때에 가서도 자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에겐 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아무리 늦더라도 상관할 바 아니지만 늦게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회개할 시간은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강도의 예처럼 자기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강도의 예는 전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에는 그리스도의 자비나 은총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가 “연약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권능의 한 예를 보이기 위하여 마련된 섭리의 한 부분이었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건지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자신이 할 마음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표시로서 이 행악자를 회개시킴으로 다시 사탄을 정복하여 승리의 트로피를 세우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이 사건이 예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외적인 은총의 역사. 이것은 그가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2] 이와 같이 짧은 시간 안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에게 내려진 은총의 변화를 여기에 찾아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 이것은 세상의 권세자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정복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특이한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에겐 복음의 전도를 통하여 그 영향에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행악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생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것이 된다. 멸망할 사람들에겐 어리석음이 되지만 구원받을 자들에겐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그곳엔 “끝까지 고집을 부린” 행악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있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방하였다”(39절). “네가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죽음의 그늘에 가리운 골짜기를 헤매면서도 교만한 마음은 꺾이지 않고 자기와 함께 고난받고 있는 동료에게조차도 부드러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보를 몰타르 속에 넣고 짓밟더라도 우둔함은 걸러낼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누구나 당연히 “억제해야” 된다고 생각되는 망발을 “유발시키곤” 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과 그들을 구원하라”고 대들고 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를 비방하려는 건방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통해 구원 얻을까 기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점을 유의하자.”마지막 순간에 가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도 있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그 “강도들이 그와 함께 못 박혔으면서도 그를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그들 중 “한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또 다른 주석가들은 처음엔 그들 모두가 그를 “욕했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으로 풀이한다. 사탄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찰라에 있던 이 행악자는 불 속에서 타는 나뭇등걸을 건져내듯 하늘의 자비와 은총의 힘으로 구함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탄은 먹이를 잃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종의 순간까지 회개를 연기하거나 그때에 가서도 자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에겐 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아무리 늦더라도 상관할 바 아니지만 늦게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회개할 시간은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강도의 예처럼 자기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강도의 예는 전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에는 그리스도의 자비나 은총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가 “연약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권능의 한 예를 보이기 위하여 마련된 섭리의 한 부분이었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건지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자신이 할 마음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표시로서 이 행악자를 회개시킴으로 다시 사탄을 정복하여 승리의 트로피를 세우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이 사건이 예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외적인 은총의 역사. 이것은 그가 한 말에서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짧은 시간 안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에게 내려진 은총의 변화를 여기에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그가 다른 행악자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40, 41절). a. 그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자기 동료를 꾸짖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앙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다른 무리와 함께 휩쓸려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임을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다. 그래서 감히 그렇게는 못하겠다. 너도 그래야 되지 않겠니?” 그들의 눈을 뜨게 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은 생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악하디 악한 마음속에도 깨닫게 된 것이다. “네 속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너와 같이 수난 받는 동료에게 그처럼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이 악한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하든 너 역시 죽어 가는 사람이므로 너조차 죽어 가는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b. 그는 자신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우리는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들은 모두 같은 한 가지 죄목으로 고난을 받고 있었음으로 그는 자신 있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덧붙여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남달리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게 된다. 이 둘은 죄악과 고통으로는 동료였으나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은 “파멸을 당하였다.” 이제까지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왔던 둘이었지만 이후로는 “한 사람은 택함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는 “너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에 대해선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하나님께선 “정당하게 행하시나” 우리는 “악하게 행하였다.” c.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믿었다. 비록 그가 두 군데 법정에서 정죄를 받고 가장 악한 범죄자처럼 취급당하였으나 이 회심한 강도는 그가 고통 중에 하는 행위를 보고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 Ouvde.n a;topon -즉 그릇되거나 그의 성품에 흠이 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그를 행악자들 “가운데” 못박게 하여 마치 그를 “그들과 같은 무리”로 여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강도는 그들보다는 그래도 양심이 있어 그는 “그들과 같은 자”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가 전에 그리스도나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은혜의 성령께서 이 사실을 그에게 깨우쳐 주어 그는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우리 주 예수께 한 말을 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이것은 “죽어가는 죄인이 죽어가는 구세주”에게 드린 기도였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비난받고 조롱 당하면서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듣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이처럼 기도”하게 된 것은 강도로서는 행운이었다. 아마 전에는 한 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 생명이 있는 한에서 희망은 있는 것이며 희망이 있는 한에서 기도할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a. 이 기도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살펴 보라.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41절)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였으며” 이 회개를 통하여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였으며, 주님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이며 지금 그 나라로 들어가고 계시며 그분만이 이 나라의 통치권을 소유하실 분으로서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는 지금 치욕의 늪에서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같은 백성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며 자기의 아버지도 구하지 못하는 위선자는 조롱당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고 백부장들을 경악하게 만든 신기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다. “진실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조차 그와 같은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는 이 생명이 끝난 후 있을 다른 생활을 믿었고 그 생활에서 행복해지길 바랐으며 다른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서 구원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모든 고통이 끝난 후 참된 복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b. 이와 같은 기도에 나타난 그의 겸손을 살펴보자.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한 것이 그가 요구한 모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쓴잔을 함께 마시며 그의 오른손이나 왼손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영광을 얻고 있었음에도 그는 “나를 먼저 택하소서” 하지 않았다. 당시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는 오히려 제자들이 그의 나라에서 좌편에 혹은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과 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마 20:21). 고난 중에 인정받는 것은 때로 이와 같은 유익을 얻게 해 준다(렘 52:31, 32).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한 것은 다만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였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 이는 마치 “요셉이 관원에게”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부탁한 것과 같은 것으로(창 40:14) 이렇게 한 것이 오히려 더 빠른 효과를 얻게 되었다. 관원은 “요셉을 잊었으나” 그리스도는 이 강도를 기억하셨다. c. 이 기도 속엔 끈질긴 요구와 열의가 담겨져 있다. 그는 당연히 이 기도 속에 자신의 온 영혼을 쏟았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나를 당신의 손으로 거두소서.” 지금은 그의 나라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기억됨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임을 명심하자.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복된 삶과 죽음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에 계시면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나를 위하여 간구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통치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소서. 죽음의 때에 나를 기억하시고 부활의 때에도 나를 기억하소서”(욥 14:13 참조).

[3] 강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외적인 자비. 그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인 내가 진실된 증인이 된 내가 네 기도에 아멘하여 그 기도를 인정하리니, 오히려 네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네게 허락하리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강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외적인 자비. 그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인 내가 진실된 증인이 된 내가 네 기도에 아멘하여 그 기도를 인정하리니, 오히려 네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네게 허락하리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 이 말씀의 대상에 대하여. 이 말씀은 회개한 강도에서 한것이지 그의 친구에겐 해당없는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심판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저주와 함께 떠나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낙원에 있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히 9:15). 이와 같은 사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높이며 반역자와 행악자들이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이처럼 택함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이 말씀을 “한 분”은 누구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또다른 중보의 말씀으로써 특별한 경우에 하신 말씀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수난의 근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 즉 그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용서”의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며(34절)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어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a.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가 지금 “하데스-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의 인간 영혼은 육을 떠난 영혼들이 머무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주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축복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 즉 낙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완성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낙원으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앞에 놓여진 기쁨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되었다. 그는 십자가를 짐으로 면류관을 얻게 되었으므로 우리 역시 고통을 겪지 않고 다른 방도로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b. 그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은 죽은 후에 그와 함께 그곳에 있게 될 것을 믿게 되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복된 은혜를 값 주고 사셨으며 왕으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때엔 언제든 그 은총을 내리도록 마련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이 우리 앞에 제공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a) 그곳은 “낙원”이다. 에덴 동산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낙원(계 2:7), 기쁨의 동산이다. 우리의 최초 조상은 죄를 짓기 전에 그 에덴 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인하여 우리는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하늘의 낙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b) 그곳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으며,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서 얻을 행복이다(요 17:24). (c) 그것은 죽음 직후에 얻게 된다. 오늘 밤, 내일이 오기 전, “오늘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신앙이 깊었던 자들의 영혼은 육체의 짐을 벗은 후에 즉시 기쁨과 행복 안에 거하게 된다.” 의로운 자들의 정신은 즉시 “완전하게 된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나자마자 “위로”를 받았다. 바울도 떠나자마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빌 1:23).

23:44 십자가 처형(2) (누가복음 23:44-49) 이 부분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에 “기이한 현상들”이 함께 일어남으로 그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여기에선 두 가지밖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우린 앞서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1.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함.” 때는 “제 육시쯤” 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시간 계산대로라면 한낮 정오 무렵인 셈이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이 어두움에 덮혀 있었다”고 했다. 해가 빛을 잃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이게 되어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더하게 하였다. 이 어두움은 애굽의 경우와 같이 “사흘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2. “성서의 휘장이 찢어짐.” 앞의 징조는 “하늘”에 나타난 것이고 이번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치욕을 당하는데 그들로서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처럼 그 슬픔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이 찢어진 것은 형식적인 율법을 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장벽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였다. 이제 그 막이 찢어졌으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함.” 때는 “제 육시쯤” 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시간 계산대로라면 한낮 정오 무렵인 셈이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이 어두움에 덮혀 있었다”고 했다. 해가 빛을 잃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이게 되어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더하게 하였다. 이 어두움은 애굽의 경우와 같이 “사흘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성서의 휘장이 찢어짐.” 앞의 징조는 “하늘”에 나타난 것이고 이번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치욕을 당하는데 그들로서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처럼 그 슬픔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이 찢어진 것은 형식적인 율법을 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장벽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였다. 이제 그 막이 찢어졌으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Ⅱ.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르짖으신 말씀으로 그의 죽으심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고 말씀하실 때엔 큰 소리로 “외치셨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이와 같이 큰 소리로 외치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또한 무리들도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외치셨다. 1. 그는 그의 조상 다윗으로부터 이 말씀을 빌려왔다(시 31:5). 입으로 옮길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말을 씀으로써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증언하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성취시키려 오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성서의 말씀을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처럼 그는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할 때 성서의 말로 할 것을 보여 주셨다.

2.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 속에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자신이 버림을 당했다고 실망하였을 때엔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으나 이제 두려웠던 영혼의 고뇌가 가시는 것을 알았을 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버리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통하여 자녀의 직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중보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한 특별한 의미로 이 말을 쓰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히 9:14)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마 20:28)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사 53:10).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며 동시에 속제물이었다. 우리의 영혼은 죄의 값으로 상실되었으니 그의 영혼으로 그 잃은 것을 회복시켜야만 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그 보상을 드려야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내용의 보상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는 “제물로 드리고” 명실공히 제사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ti,qhmi -즉 나는 손을 뗍니다. 당신의 손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을 대신하여 나의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animus offerentis-즉 바치는 자의 선한 뜻이야말로 제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시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실 뜻을 밝히셨다(히 10:9, 10). “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행하리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거룩함을 입겠나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의 영혼과 육체가 재결합하는 부활이 아버지에게 달려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져, 즉 낙원에 “받아들여졌다가” 사흘만에 “되돌아오게” 되기를 부탁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진짜 몸”을 가지셨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역시 가지고 계셨으며 그것은 육체와 구별된 상태로 있으므로 다른 형제들과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육체가 부패하기 전에, 그 육체와 “떨어진 상태로” “하데스”에 버려지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다.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다윗의 말씀을 죽어 가는 성도들에게 일러 주셨으며 그 말씀을 그렇게 씀으로 거룩한 말씀으로 삼으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우리가 가장 걱정할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영혼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 그의 성령과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지배받으며 죽음의 순간 하나님의 손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성결과 행복을 이루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보여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생이 끝난 뒤 다른 생이 있음을 확신하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말을 함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으로부터 이 말씀을 빌려왔다(시 31:5). 입으로 옮길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말을 씀으로써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증언하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성취시키려 오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성서의 말씀을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처럼 그는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할 때 성서의 말로 할 것을 보여 주셨다.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 속에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자신이 버림을 당했다고 실망하였을 때엔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으나 이제 두려웠던 영혼의 고뇌가 가시는 것을 알았을 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버리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통하여 자녀의 직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중보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한 특별한 의미로 이 말을 쓰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히 9:14)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마 20:28)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사 53:10).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며 동시에 속제물이었다. 우리의 영혼은 죄의 값으로 상실되었으니 그의 영혼으로 그 잃은 것을 회복시켜야만 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그 보상을 드려야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내용의 보상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는 “제물로 드리고” 명실공히 제사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ti,qhmi -즉 나는 손을 뗍니다. 당신의 손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을 대신하여 나의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animus offerentis-즉 바치는 자의 선한 뜻이야말로 제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시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실 뜻을 밝히셨다(히 10:9, 10). “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행하리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거룩함을 입겠나이다.”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의 영혼과 육체가 재결합하는 부활이 아버지에게 달려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져, 즉 낙원에 “받아들여졌다가” 사흘만에 “되돌아오게” 되기를 부탁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진짜 몸”을 가지셨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역시 가지고 계셨으며 그것은 육체와 구별된 상태로 있으므로 다른 형제들과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육체가 부패하기 전에, 그 육체와 “떨어진 상태로” “하데스”에 버려지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다윗의 말씀을 죽어 가는 성도들에게 일러 주셨으며 그 말씀을 그렇게 씀으로 거룩한 말씀으로 삼으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우리가 가장 걱정할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영혼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 그의 성령과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지배받으며 죽음의 순간 하나님의 손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성결과 행복을 이루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보여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생이 끝난 뒤 다른 생이 있음을 확신하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말을 함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Ⅲ.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생기게 됨. 1. 군사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47절). 그는 로마인이며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이 놀랍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그 된 일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자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도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통하여 영광 돌리게 하신 것은 그가 흠없는 인물임을 들어내는 자연스런 증거라 하겠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선 그의 증언이 더 계속되고 있다.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있어선 이 한 마디로 똑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의인”이었다면 그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그 말이 아주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엔 자신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의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 무관심했던 구경꾼들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다(48절). 그런 일이 있을 때엔 의례 모여드는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한동안 심각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1)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죄 없는 그를 죽인 것이 참으로 악한 짓이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든 그들 민족 위에 내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들일 바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그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암흑과 지진으로 놀랄 대로 놀란 데다 비범한 그의 운명 장면을 목격한 후로 열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한 일에 대해 후회하며 양심이 떨리게 되었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처럼 자신이 치욕스런 일을 당한 것같이 “자기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은 후에 그에게 지워질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한 축복의 첫 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행 2:37).

(2)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곧 사라졌다고 보아야 될 것 같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시를 더 이상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사건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을 알게 되는 자들은 많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질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돌아간다. 그들은 성례전의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를 찬양하지만 결국 그들은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고 만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아는 자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49절). “예수의 아는 자들,” 그를 직접 알거나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자들은 “다 멀리 서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그의 추종자라고 체포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욥 19:13).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시편 88편 18절 참조.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함께 “그를 따라온 여자들도 이 일을 보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몰랐으며 이 일들이 부활의 확실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 있었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시몬의 말처럼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 되었다”(눅 2:34, 35). 군사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47절). 그는 로마인이며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이 놀랍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그 된 일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자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도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통하여 영광 돌리게 하신 것은 그가 흠없는 인물임을 들어내는 자연스런 증거라 하겠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선 그의 증언이 더 계속되고 있다.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있어선 이 한 마디로 똑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의인”이었다면 그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그 말이 아주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엔 자신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의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 무관심했던 구경꾼들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다(48절). 그런 일이 있을 때엔 의례 모여드는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한동안 심각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이 일은 당분간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죄 없는 그를 죽인 것이 참으로 악한 짓이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든 그들 민족 위에 내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들일 바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그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암흑과 지진으로 놀랄 대로 놀란 데다 비범한 그의 운명 장면을 목격한 후로 열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한 일에 대해 후회하며 양심이 떨리게 되었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처럼 자신이 치욕스런 일을 당한 것같이 “자기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은 후에 그에게 지워질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한 축복의 첫 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행 2:37).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곧 사라졌다고 보아야 될 것 같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시를 더 이상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사건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을 알게 되는 자들은 많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질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돌아간다. 그들은 성례전의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를 찬양하지만 결국 그들은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고 만다.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아는 자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49절). “예수의 아는 자들,” 그를 직접 알거나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자들은 “다 멀리 서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그의 추종자라고 체포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욥 19:13).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시편 88편 18절 참조.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함께 “그를 따라온 여자들도 이 일을 보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몰랐으며 이 일들이 부활의 확실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 있었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시몬의 말처럼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 되었다”(눅 2:34, 35).

23:50 무덤에 묻힌 그리스도(누가복음 23:50-56) 이제 그리스도의 장사지내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그는 죽어야 하였을 뿐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명령에 따라(창 3:19) 사망의 진토에 묻힘을 당해야만 하였다.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Ⅰ. 묻은 사람에 대하여. 그를 아는 자들은 “멀리 서서 보고 있었다.” 그들에겐 “장사치를” 돈도 없었을 뿐더러 그를 정중하게 묻어 줌으로 받는 “비난”을 견딜 용기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돈과 용기로 겸비한 자를 세우셨으니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었다(50절). 그의 성품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였으며, 덕행으로나 자비로움에 있어 누가 되는 점이 없었던 자로서 누구에게나 “의로왔고” 그의 도움을 요구하는 자에겐 언제나 선했던 자였다(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로써 “죽은 자를 묻어 주는” 배려를 보임으로 그의 선함과 너그러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던 자였고, 행정가이며 의원이고 산헤드린의 회원이고 유대교 장로였다. 그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하더라도 여기에 덧붙여 말할 것이 있었다. 즉 그가 비록 그리스도를 죽이게 만든 무리들 중에 하나였지만 그는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可)하다 아니한 자”였다는 사실이다(51절). 비록 대중에 이끌려 사건은 진행되었지만 그는 그것에 반대하여 제동을 걸었고 악을 행하는 일에 대중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 우리가 따라서 안 될 악한 교사나 행위로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과는 비밀로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믿고 있었으며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 예수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로 그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세상엔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음을 명심하자. 그런 이들은 그 사실을 밖으로 알려 과시하지는 않지만 기회만 있으면 오히려 크게 소란을 떨며 재던 자들 보다 진심으로 헌신하는 일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Ⅱ. 그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한 일들에 대하여. 1. 그는 그리스도를 정죄한 재판관 “빌라도에게 갔다.” 그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폭력을 써서라도 시체를 가져 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하가 있었지만 그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 평화스럽게 그 일을 추진하였다.

2. 그는 자기 손으로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애들을 “배내 옷”으로 싸두듯이 유대인들의 풍습은 죽은 시체를 “싸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절엔 깨끗한 세마포단을 원단으로 샀다가 시체를 싸기 위해 그가 여러 조각을 내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요한 복음 11장 44절에 라사로의 모습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라고 묘사되어 있다. 성도들에게는 “수의”(壽衣)는 “배내 옷”과 같은 것이어서 그들이 “완전한 사람에 이르게” 되면 헤어져 버리게 될 것들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정죄한 재판관 “빌라도에게 갔다.” 그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폭력을 써서라도 시체를 가져 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하가 있었지만 그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 평화스럽게 그 일을 추진하였다.그는 자기 손으로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애들을 “배내 옷”으로 싸두듯이 유대인들의 풍습은 죽은 시체를 “싸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절엔 깨끗한 세마포단을 원단으로 샀다가 시체를 싸기 위해 그가 여러 조각을 내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요한 복음 11장 44절에 라사로의 모습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라고 묘사되어 있다. 성도들에게는 “수의”(壽衣)는 “배내 옷”과 같은 것이어서 그들이 “완전한 사람에 이르게” 되면 헤어져 버리게 될 것들이다. Ⅲ. 장사지낸 곳에 대하여. “바위에 판 무덤에.” 무덤은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견고하였을 것이다. 이는 교회가 “판 바위로 갇혀” 어둠 속에 묶이게 된 경우와 같다. 그러나 그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이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아무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에 묻힌 이유는 단지 그가 자신의 권능으로 3일만에 부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죽음을 정복함으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성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Ⅳ. 장사지낸 시기에 대하여. “이 날은 예배일이요 안식일이 기의 되었더라”(54절). 여기서 그들이 왜 그렇게 장사지내는 일을 서둘렀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다른 일에 손을 써야 되었으며, 안식일을 준비하고 맞이하기 위해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물로 씨앗을 대신할 수 없음을 유의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한편으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에 신경을 써야만 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다가오자 “준비”를 서둘러야만 하였다. 우리가 하는 세상적인 일들도 이런 식으로 명심하여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종교적인 마음을 늘 염두에 두어 차질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Ⅴ. 장례에 참여한 자들에 대하여.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다만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만” 있었다(55절).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는 동안 그 곁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그를 “따라왔고” 무덤이 어디인지, 어느 길로 가는지, “어떻게 묻혔는지” “지켜 본 것”이 틀림없다. 호기심으로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주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 온 것이다. 그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한 것”이어서 “아무리 물로 씻기지 않을 것”이었다.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그다지 장엄한 장례식은 아니었으나 “이후로 시작될 그의 앞날은 영광스런 것이었다.” Ⅵ. 장사지낸 후 그의 시체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에 대하여(56절).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증거라기보다는 사랑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가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리라”고 수차 그들에게 한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거나 믿었더라면” 그처럼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보다는 얼마 안 있어 그의 부활의 영광으로 그의 육신에 보다 큰 향기가 나게 될 것을 믿음으로 그와 같은 “낭비”나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준비로 바빴을 터이지만 그들은 “안식일에 쉬었다.” 아무도 이 일을 위하여 안식일에 뛰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 민족의 습관에 따를 뿐 아니라 시대는 바뀌더라도 그 능력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행한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

누가복음 23장 26절-43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성경 배경 주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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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26절-43절, 십자가로 가는 길

누가복음 23장 26절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사형수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했었습니다(십자가 중에 가로 부분). 그러나 본문의 경우, 시몬이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이유는, 자주 행해졌던 심한 구타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심한 구타를 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레네는 현재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지역이며, 이 곳에는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몬’이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유월절 기간에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로마 군인은 자신들의 물건을 옮기기 위하여 지나가는 유대인들 중에 아무나 붙잡고 운반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명절 기간이었으며 이 때는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몬은 농부로서 밭에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유월절 명절에 늦었던 것 같으며 구레네에서 이제 막 예루살렘에 도착했거나 아마도 임시로 머물던 예루살렘 외곽 지역에서 그날의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7절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군중들은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사형장에 모였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경건한 여성들은 처형되는 사람들을 애도하거나 희생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마약 성분의 음료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죄인이 처형을 당하여 죽은 후에는 공개적으로 죄인을 애도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의 경우, 로마에 의해 처형된 유대인 혁명가나 자신들의 동료들을 애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들보다 더 극적으로 애도를 표현하곤 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루살렘의 딸들”은 예루살렘의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판에 대한 예언을 떠오르게 합니다(사 3:16). “너희 자신을 위해 애도하라”는 주님의 말씀 역시 예언적인 뉘앙스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9절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녀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들이 하게 되는 깊은 한탄을 의미합니다. 요세푸스는 일부 어머니들은 주후 66-70년 사이에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을 때, 성 안에 심한 기근과 식량 부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때, 자신의 아이들을 식량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레 26:29; 신 28:53; 왕하 6:29).

누가복음 23장 30절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언자들은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사용하신 것과 같은 이미지를 끔찍한 심판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호 10:8; 사 2:10, 19-21).

누가복음 23장 31절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푸른 나무와 달리 마른 나무는 불을 붙이기 쉽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은 정말로 혁명가가 아닌 “푸른 나무”라는 점입니다. 마른 나무 즉 혁명가에 대한 로마의 심판이 얼마나 더 클까요? 혹은 만일 로마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살해한다면, 얼마나 더 많이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는 일이 될까요? 유대인 지도자들은 66년부터 70년 사이에 로마와도 싸웠지만 유대인들 자신들끼리도 심하게 싸웠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단순히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더욱 가까이 오고 있다는 단순한 의미의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21:24, 29-30에 있는 나무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넌지시 언급하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2절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한 번에 여러 명의 죄인들을 처형할 수 있다면, 로마 군인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덜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3절-43절, 십자가 위에서

누가복음 23장 33절-34절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복수에 대한 구약성경의 기도들의 전례(대하 24:22; 시 137:7-9; 렘 15:15; 17:18; 18:23; 20:12)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해 주시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처형을 당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의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소서’라고 외쳤었지만,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을 책임을 진 자들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일대기를 쓰는 작가들은 예수님과 다른 인물들을 비교하였으며, 누가는 그의 두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 스데반(행 7:60)의 순교 장면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장면과 유사하도록 묘사하였습니다. 로마의 일반적인 관습에 의하면,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에게 희생자들의 옷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조롱과 수치는 십자가에 벌거벗겨진 채로 매달린 죄수에 대한 또다른 고통이었습니다. 고대의 작가들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은 역설적인 내용, 즉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것과 지도자들이 사탄과 같이 말하는 두 가지의 내용들과 같은 역설적인 사실을 좋아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6절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신 포도주는 진통제의 역할과 함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음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죄수들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행위들 중에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본문에서 신 포도주 역시 조롱의 일부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7절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군인들의 조롱 속에는 유대교 자체에 대한 로마인들의 냉소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냉소는 로마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8절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사형수는 일반적으로 라틴어로는 티툴루스(titulous)라고 불리는 죄명이 쓰인 것을 집행 장소로까지 지니고 갔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9절-42절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비록 마가와는 달리 누가가 옆에 달린 행악자들을 반역자들로 명시하지 않고 “행악자들”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누가는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유대 문헌들에는 일반적으로 낙원과 지옥을 대조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비록 유대교 문헌들들이 낙원의 위치(삼층천에 있거나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낙원에 대한 견해와 같이 지구의 경계선에 있다고 하였다)에 대한 논쟁을 벌여 왔었지만, 낙원은 분명히 죽은 이후 혹은 부활 후에 의인들이 거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이 죄인은 죽은 뒤에 의인들이 거하는 곳으로 바로 갔을 것입니다.

Keener, C. S. (1993).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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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누가복음 23장 흐름정리>

오늘 본문은 정식 재판을 받으신 후 사형을 언도받고 무덤에 장사되기까지의 기록이다. 빌라도의 2차에 걸친 신문 중간에 헤롯의 심문 기사도 언급되는데 이는 분문에만 등장한다. 재판의 전과정에서 보여지는 바는 선악의 극명한 대조이다. 주님은 야멸차게 쏟아지는 비방과 핍박 속에서도 자기 길을 묵묵히 가심으로 최후까지 인류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자 하는 투철한 구속 의지를 나타내 보이셨다.

<누가복음 23장 줄거리>

1.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고 헤롯에게 넘겨짐.

8. 헤롯이 예수를 조롱함.

12. 헤롯과 빌라도가 친해짐.

13. 백성들이 바라바를 선택하여 방면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줌.

27. 예수가 자기를 위하여 우는 여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함.

34.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함.

39. 두 강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림.

46. 예수의 운명.

50. 예수를 장사 지냄.

<누가복음 23장 도움말>

* 4절 : 죄가 없도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정의를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기 때문에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 7절 : 헤롯에게 보내니.

유월절을 맞이하여 갈릴리의 영주인 헤롯 안디바도 예루살렘을 순례하러 왔다가 예수님의 재판에 관여했다. 빌라도가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 사건을 헤롯에게 떠맡기려 했기 때문이다.

* 18절 :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

유월절에는 죄수를 사면하는 관습이 있었다. 바라바는 ‘열심당’의 일원으로서 로마에 대항한 뒤 동굴에 은신하면서 강도가 되었다가 체포되었다.

* 21절 : 십자가.

로마 최악의 형벌. 로마인에게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 탈주하여 강도질을 한 노예, 대역 죄인, 내란 선동자, 살인자 등에게 십자가 형이 선고되었다.

* 33절 : 해골이라 하는 곳.

산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기에 붙여진 이름, 히브리 명칭은 ‘골고다’임

* 53절 : 세마포로 싸고.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른 것이다. 세마포로 시체를 싸고 향유를 발랐다.

[누가복음 2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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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나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로마 병사에게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못 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

1-25절, 정죄 당하심

[1-3절]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마태복음 27:1에 보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다 나라를 통치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최종적인 재판의 실권이 있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정죄하도록 머리를 썼다. 일반 대중은 로마 총독의 결정에 도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 죽이려 하였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제출한 고소 내용은, 첫째로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셋째로 그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비난이었다. ‘미혹한다’는 원어(디아스트레포)는 ‘타락시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셨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뿐이지 그들을 타락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 마음이 거짓되고 완악해서 예수가 백성을 타락시킨다고 고소한 것이다.

두 번째 고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운동을 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서 비난거리를 잡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눅 20:25).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나라에 세금을 내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롬 13:7).

세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다(사 9:6-7; 렘 23:5; 30:9; 겔 34:23-24; 호 3:5; 마 2:2).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된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그들의 세 가지 고소 내용 중 세 번째 것에 대해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셨다. 그는 유대인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엄숙히 맹세하며 증거하셨듯이 로마 총독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이 두 사건에서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세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히 그 내용이 쓰여 있다. 그의 왕국과 왕권은 영적 의미가 있었다(요 18:36). 그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며 그것은 물질적 풍요를 포함할 것이지만, 현재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하는 영적 나라이다.

[4-7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것은 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이성적이었고 더 양심적이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예수께서 죽임을 당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시한 고소 내용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가르친 것이 백성을 소동케 하고 선동한 것인가? 그 고소가 옳지 않다고 느낀 빌라도는 그 재판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며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 그 헤롯은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 안디바이었다.

[8-9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의 소문은 일반 대중 속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고 헤롯 왕궁에까지 퍼졌다. 또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눅 8:3). 요안나는 자기 남편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며 또 그 남편 구사는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했을 것이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께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헤롯의 관심은 기적 행하심 같은 데 있었고,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진리에 있지 않았다.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예수께서는 고소당할 어떤 약점이 있으셨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엄숙한 재판정을 악용하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지도자의 지위와 인간적 꾀를 가지고 의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더욱 미워하신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악하였고 타락한 교회는 참으로 가증하고 위선적이었다.

[11-12절]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런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고 그것을 참으셨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을 겪는 길이다. 그러나 그 고난들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전하게 하는 데 유익하다.

[13-23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심문]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 올려보냈음이라].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었더라)(전통본문).

빌라도는 두 번째로 예수께서 죽일 죄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빌라도의 판단은 그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바른 판단이었다.

[18-23절]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그들과 대제사장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를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였고 충동하였다(마 27:20; 막 15:11).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은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요 19:12).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교묘히 선동하였고 총독 빌라도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7:24).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 총독 빌라도를 압박하였다. 거기에는 이성도, 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24-25절]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言渡)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마가복음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했다고 증거했다(막 15:15). 백성의 뜻 배후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뜻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속에는 예수께 대한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알고 있었다(마 27:18; 막 15:10). 그러나 그는 예수를 정죄하였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고,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할 극악한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다. 빌라도의 판결은 이성대로나 양심대로나 법대로 된 판결이 아니었다. 그의 판결은 정의와는 상관없었고 단지 백성의 뜻에 맞춘 불의한 판결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대속의 주님만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죄가 없으셨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께서 죽을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판단하였고 또 세 번이나 공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의로우신 예수께서는 정죄되셨다. 그 대신 죄인인 바라바는 놓여났다. 여기에 대속의 이치가 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의인의 죽음만 남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 많은 택자들을 대속하실 수 있다. 우리는 대속의 주님만 믿자.

둘째로,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키자. 타락한 유대 지도자들의 양심은 이방인 총독 빌라도의 양심보다 더러웠다. 빌라도는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하는 일에 대해 그들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무리들도 양심을 저버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어둡고 악하였다. 바른 마음에서 바른 판단이 나오고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나 더러운 마음에서는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의롭게만 살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재판관의 위치에서 그 직권을 남용하였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거슬러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불의한 판사라는 오명을 그의 생애와 역사에 남겼다. 만국의 교회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그의 이름 아래서 예수께서 고난 당하셨음이 언급된다. 우리는 의롭게만 살자.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신구약성경의 교훈대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26-43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

[26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예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더라](원문, KJV, NASB, NIV).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예수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했다. 요한복음 19:17에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오셨다고 증거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앞쪽을 짊어지시고, 시몬은 십자가의 뒤쪽을 짊어졌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를 위해 십자가를 함께 져줄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로마 군병들이 시몬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고 말하며(마 27:32; 막 15:21) 또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음을 보인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을 계기로 그와 그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던 것 같다.

[27절]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사형장으로 가고 계셨던 저 의롭고 선하신 주님을 보고 그들은 슬픔과 애통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진실히 믿은 여자들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수많은 여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눈물과 통곡의 길이었다.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는 그들의 동정적 눈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암시하셨다.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는 공범(共犯)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인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을 현세와 내세의 죄벌은 얼마나 클 것인지!

[29-31절]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 날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일지! 아들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 죽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의 일이 오히려 큰 슬픔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어떻게든지 피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푸른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질 악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내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큰 악에 대해 엄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로부터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혔다.

[32-33절]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께서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다른 두 행악자들도 사형을 받으러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형수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들에게 심히 부당한 대접을 받으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굴골렛)로 ‘해골’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곳이 사형장이었고 해골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곳 지형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그 두 사람은 흉악범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 큰 못들이 박혔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많은 출혈로 인하여 감당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3시부터 9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막 15:25, 34).

[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예수께서는 큰 고통 중에 죽어가는 중에서도 그를 못박는 자들이 자기들의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해 그러하니 용서해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참된 사랑의 행위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지(無知)가 변명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지식을 가지고 범하는 죄보다 작은 죄일지라도, 무지의 죄도 죄이다.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그의 겉옷을 넷으로 나누어 가졌고 통으로 짜진 그의 속옷은 제비 뽑아 가졌다(요 19:23, 24). 시편 22:18은,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고 예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벗기움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35-37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그들은 의분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관원들도 비웃었고 군병들도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희롱하였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왕관도 없고 왕국도 없고 군대도 없는 가련한 왕처럼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단지 조롱거리이었다.

[38절] 그의 위에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전통본문)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한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한다(요 19:20).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으로서 사실상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 죄패가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당시에 헬라어를 쓰던 일반 대중이나 라틴어를 쓰던 지식인이나 히브리어를 쓰던 유대인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참으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아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고통과 수욕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얻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를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의 사형이라는 매우 중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둘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예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오만불손하게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였다.

[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그 사람을 꾸짖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받는 형벌이 자신들의 행위에 합당한 것임을 인정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행한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큰 악을 행해 사형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바른 반성과 뉘우침이 있었고 또 예수께 대한 바른 판단이 있었다.

이런 뉘우침과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엡 2:1).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롬 3:11).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인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42절] 가로되 예수여[예수께 가로되 주여](전통본문),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 행악자는 바른 깨달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께 자신을 의탁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자신을 맡기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세상에 다른 어느 곳에도 진리가 없지만,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며 그를 믿은 그 행악자에게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악을 행한 자들은 지옥에 던지운다(눅 16:22-23).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은 천국을 가리킨다(고후 12:2, 4). 그 행악자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주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은 열려 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그 행악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악행으로 사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옷과 같다(사 64:6).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고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

본문은 또 몇 가지 부수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울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의 죄 때문에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두려워하며 회개하고 울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눈물로 회개한다면, 우리는 심판 때에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울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 날에 재앙을 두려워하며 통곡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무지한 원수들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우리를 미워하고 해치려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자.

셋째로, 우리는 내세 천국을 소망하자. 예수께서는 회개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강도는 죽는 순간 그 영혼이 낙원에 들어갔다. 낙원은 천국이다. 의인들의 영혼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쉬며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몸이 부활하여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

44-49절, 예수께서 죽으심

[44-45절]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당시 유대인들의 제6시는 정오이다. 예수께서는 제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막 15:25)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오후 3시까지 그러하였다. 그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그때의 세상의 어두움을 잘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막 15:3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요 1:29).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다(갈 3:13).

예수께서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졌다는 사실을 보인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이 은혜를 자세히 증거한다. 특히,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에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 대가를 치루셨음으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은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내세가 있다. 사람은 죽을 때 그의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을 때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스데반은 죽을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행 7:59). 베드로전서 4:19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말했다.

[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그 된 일’이란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짐과 성소 휘장이 찢어짐 등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마 27:54; 막 15:39). 사형집행관이었을 그 백부장은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의로운 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깨달았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때에 저 이방인은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 양심적인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48-49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관원들은 비웃고 군병들은 희롱했지만(35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은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동정심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여자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리고 살로메 등이 있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7:56; 막 15:40).

[50-51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계획]와 행사에 가[可]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유대인의 공회 즉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이었다. 악한 자들이 가득했던 그 시대에 선하고 의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의’라는 원어(불레)는 ‘계획’이라는 뜻이다.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란 그들이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할 계획과 행사를 가리킨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그 악을 계획하고 행할 때 그 일에 양심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자들은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38).

[52-53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사(葬事)를 위해 요셉을 예비하셨고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5:44에 보면, 요셉의 요청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어 두었다(마 27:60). 장사(葬事)는 죽음의 확증이다. 그는 죽으셨고 장사되셨다. 삼일 후의 그의 부활은 단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다시 사신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다른 시체가 없는 새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그 무덤에서 부활하신 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장사(葬事)에는 거창한 장례 의식이 없었다. 그의 시체는 그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으로 옮겨졌고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멀찍이 따른 조촐한 장례 행렬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확실히 쓸쓸한 장례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무슨 예식이든지 거창하게 하려 하지 말고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례식도 찬송과 기도, 간단한 권면이나 말씀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54-56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이 날은 예비일이었고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주간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는 말은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은 그들의 뒤를 좇아 그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시체에 바르고 그 곁에 두기 위한 것이다. 그것들은 아마 피로 얼룩졌던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 썩는 냄새를 줄이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하게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안식일 때문에 그 일을 중단하고 계명을 좇아 쉬었다. 그들은 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활하실 주님을 기대하지 못하고 단지 그의 시체에 향품을 두고 향유를 바르려고 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성소로 들어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연약과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과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의지하여 우리의 영을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사후의 일들도 하나님께 맡기자. 예수님의 장례식은 염려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로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택하시고 사용하셔서 예수님을 위해 무덤을 준비하게 하셨고 간소한 장례식을 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쓸쓸하고 조촐했으나, 거창한 장례식보다 천국에서의 복된 안식과 영광 누림이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모든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자.

[욥기 32장 주석 성경말씀]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욥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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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 십자가 처형과 매장

누가복음 23장: 십자가 처형과 매장

1. 1-25절: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정치범으로 고발합니다(2절). 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정말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느냐고 묻습니다만,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3절)라고 대답하십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발을 의심합니다(4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보기에 예수님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자,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로부터 계속 선동을 해 왔다고 주장

합니다(5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인 것을 알고는 그 골치 아픈 문제를 갈릴리를 맡아 다스리고 있던 헤롯왕에게 떠맡기려 합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침 헤롯은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7절).

헤롯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해 듣고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던 차였습니다(9:7-9). 그는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고, 예수님이 행하신다는 기적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헤롯은 여러 가지로 말을 걸어 보았지만 예수님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습니다(9절). 같이 따라 온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맹렬한 기세로 예수님을 고발하자, 헤롯은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서”(11절) 빌라도에게 돌려 보냅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정치적으로 서로 물고 뜯는 관계에 있었지만 예수님에 관해서는 같은 입장에 있었습니다(12절).

다시 예수님을 전해 받은 빌라도는 여러 가지로 신문한 후에 십자가에 처형할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매질이나 하고 놓아 주려 했습니다(13-16절). 그러나 유대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청합니다. 빌라도가 명절 때마다 유명한 죄수 하나를 사면하여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군중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지고 맙니다 (23-24절).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에 넘겨졌고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25절)는 석방됩니다.

2. 26-56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되시다

총독의 군사들은 예수님을 심하게 고문한 후에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끌고 갑니다. 고문에 시달린 예수님이 거듭 넘어지며 지체되자 군사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만듭니다(26절). 예수님 뒤로는 여러 여자들이 울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돌아서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참담한 재앙의 날이 다가 올 것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29-30절). “나무가 푸른 계절”은 심판이 시작되지 않는 때를 말하고 “ 나무가 마른 계절”(31절)은 심판이 시작되는 때를 말합니다. 심판이 시작되지 않는 때에도 예수님처럼 무고하게 고통 받는 일이 일어난다면 심판이 시작되면 그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해골”이라고 불리던 처형장에 당도하십니다. 그 때 다른 두 죄수가 같이 끌려 옵니다. 군사들은 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를 들어 올립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십자가 처형 장면을 아주 간략하게 묘사합니다. 적어도 한 두 시간은 걸렸을 절차였을 것이고 많은 피와 고통이 뒤범벅된 시간이었을 것인데, 이렇게 간단히 묘사한 것은 상세히 서술하기에 너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처형하는데 가담한 군인들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강제한 유대 지도자들을 생각하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34절)라고 기도하십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그분은 당신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십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있었던 사랑의 속성에서 흘러나온 기도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고,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에 동참합니다(35-38절). 십자가 위에서 드려진 사랑의 기도와 십자가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던 우매함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예수님 옆에 달려 있던 죄수도 그들의 모욕에 가담하여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39절)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다른 죄수는 그를 오히려 꾸짖습니다(40-41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라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라고 응답하십니다. 그 죄수의 회개가 진실했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지 세 시간쯤 지난 정오에 갑자기 어둠이 온 땅을 뒤덮습니다(44절). 하루 중에 가장 밝은 시간에 어둠이 닥친 것입니다. 온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과정에 온 세상이 동참한 것입니다. 오후 세 시까지 어둠은 계속되었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45절). 성전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고 있던 죄의 장벽을 상징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그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절)라고 기도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이 기도는 시편 31편 5절에서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 자는 것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책임졌던 백부장은 이 모든 일들을 유심히 보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47절)고 말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강력한 깨달음의 충격이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이 그의 마음을 압도했기에 그런 독백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의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51절). 아리마대 출신의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빌라도를 은밀히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합니다(52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운명했는지를 확인하고는 요셉에게 허락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시신은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어 있었는데, 가끔 예외적으로 매장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돌무덤에 모십니다. 때는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집집마다 불을 켜는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54절).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인들이 그 모든 것을 지켜 봅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합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매장할 때 시신에 향료와 향유를 바르는 장례 절차를 생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나갈 때까지 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56절).

묵상:

오늘 기억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실천할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2020/06/24(수) “누가복음 23:44-56” / 작성: 강요섭

본문 누가복음 23장 44-56절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잠언 14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죽음, 헛된 죽음이 아닌 그 마지막 생명조차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름답게 드려진 의인의 죽음은 땅에 심겨진 한 알의 씨앗과 같이 생명의 역사를 일구어가는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며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심겨지신 예수님의 죽음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숨지시니라(44-49절)

(44-46)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낮에 임한 어둠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변환하여 낮 12시부터 오후3시까지 3시간가량 해가 빛을 잃고 어둠이 임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었음으로 이 사건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을 버리사 어두운 죽음의 터널을 향해 걸어가시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임한 어두움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분노가 어두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둠이 임할 수 없는 시간에 임한 이 어두움은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움을 가져왔고 일종의 두려움까지 들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둠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속에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실제로 그 모든 예수님의 죽으심의 일들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47-49)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십자가형을 지켜봤을 백부장이었지만 전례 없는 이 현상들은 예수님이 무죄한 의인임을 깨닫게 하여 주었습니다. 심지어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구경하러 왔던 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자신의 가슴을 치며 돌아갔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과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도 다 이 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의인임에도 불공정한 재판으로 돌아가시게 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 번째 현상은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진 사건입니다. 당시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길이가 약 15-20m, 폭이 10m, 두께는 10Cm정도 되어서 사람과 짐승의 손을 빌려도 힘으로는 찢을 수 없었으며 자연적으로 찢어지는 일이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휘장도 낮에 임한 어둠처럼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찢으신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까? 히브리서 10장 19-20절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으신 이유는 이제 휘장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휘장은 단순히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가 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거룩한 곳을 구별하기 위한 휘장에 불과했다면 새 휘장은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정결케 하는 놀라운 휘장이었습니다. 이 새 휘장은 곧 찢겨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전의 휘장과 예수님은 동시에 찢겨졌습니다. 한 휘장은 이제 역할을 다하여 찢겨졌고 한 휘장은 그 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를 정결하게 하고자 찢겨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찢겨지신 휘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고 이제 마지막 숨과 힘을 모아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여기서 부탁이라는 단어는 ‘파라티데미’라는 단어로 ‘맡기다, 의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하나님께 쓸 때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영혼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순교자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린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누구도 함께 건널 수 없고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그 때, 내 사랑하는 사람과 재산과 지위와 육신과 모든 것을 떠나 그 나라로 향할 때 내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저 물질에서 우연히 생긴 우리는 물질로 돌아갈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맡긴 예수님의 영혼에 거룩한 옷을 지어 부활의 몸을 입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부활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동일한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 하에 두십시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50-56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바라보던 구경꾼들이 돌아가고 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은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애통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용감하게 행동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50-54)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그는 사회적, 인격적, 도덕적으로 훌륭한 위치에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원이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원, 고지’를 뜻하는 ‘아리마대’ 지역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2절에 보면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정성껏 세마포로 싸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새 무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선망하던 예루살렘 가까이에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상당한 재력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한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 ‘당돌히’는 ‘톨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톨마’ 곧 ‘대담함’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감히 ~하다, 용감하다, 담대히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요셉의 행동이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었던 행동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용감하게 그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그가 권력자였기 때문에, 큰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원래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는 게 더 어렵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사실, 장례를 치룬 사실은 예루살렘에 파다히 소문이 날게 뻔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공격을 당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며 또 그 여러 사건들을 보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용기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 지내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용감한 사람으로 변한 것은 그의 자질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용기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찾아올 불이익과 편견, 공격과 희생 때문에 숨어있는 제자로 살아가곤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길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과 그 나라의 영원한 소망의 빛에 눈이 멀어 이 땅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55절에서 56절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5-5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예수님의 장례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숨어지내던 예수님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이 세마포와 무덤을 제공하였고 예수님을 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준비했으며 조용히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향유와 향품을 예비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줍니다. 지금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잘 따를 것이라는 교만함을 버려야 하며 지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봉사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끝까지 그렇게 신앙생활 할 거라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일을 하다보면 내게 힘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말 필요할 때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함께 동역하게 하시는 일들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때와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조금 열심히 봉사한다고 교만할 필요가 없으며 또 지금 내가 봉사에 열심을 내지 못할 상황이라고 하여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세워 가시며 적절하게 감독이 선수를 기용하여 교체시키듯 필요한 때에 세우실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주님이 일을 맡기실 때 겸손히 최선을 다해 달려가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 곧 도시에 임하신 예수님은 성 밖으로 내쳐져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자신들의 바벨탑을 쌓는데 온 힘을 쏟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그 탑을 쌓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모난 돌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고민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내 삶에 모난 돌처럼 여겨져 거추장스럽고 날 힘들게 하고 제한하는 분으로 느껴지신다면 우리는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도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신앙의 머릿돌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세상에서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힘없이 매어달려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었던 무능력한 분이십니까? 아니면 말씀 한 마디면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세상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제 숨어 있지 말고 당당히 나가 십자가에 매어달린 예수님을 나의 소중한 세마포로 감싸 안고 새 무덤으로 인도하여 들이십시다. 그때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쫒아낸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낭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오늘도 감격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경험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의 터널을 걸어가실 때 해는 빛을 잃고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그 어둠은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또 찢어진 휘장처럼 아들을 십자가에 찢겨지게 해야 했던 아버지의 슬픔임을 압니다. 이제 그 사랑을 알고 경험한 우리가 더 이상 숨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도시의 가치관을 벗어나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세속적 가치관의 옷을 버리고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사모하며 거룩의 옷을 입고 구별된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묵상해 봅시다.

2.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길 소리쳤던 사람,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큰 어둠이 임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지 묵상해 봅시다.

4.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생애 마지막 날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그 날을 떠올리며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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