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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30 (목) [하루 한 장]“무교절이 다가오매” (눅22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22장은 유월절과
무교절이 다가오면서 예수님의
대적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서로
모의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출애굽의 역사로 시작된 유월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얻었음을 기뻐하는 날이지만
그 다음날 시작되는 무교절은
우리 삶 속의 묵은 누룩을 찾아서
제거함을 통해 자기를 성찰하는
우리 스스로 행할 절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누룩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서로 궁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땅과 백성을
지키기 위한 집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착에 동원된 유다는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리고 맙니다
집착은 작아 보여도 점점 커져서
내 인생을 삼키는 괴물이 됩니다
유월절의 기쁨으로 만족하지 말고
무교절의 성화를 향해 나아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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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22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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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4.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lCVldJW4YQ
누가복음 22장 주석
누가복음 제 22장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 이 구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묘사하는데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의 경
우 21:38의 이야기와 무관한 듯하게 이야기를 출발시키면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
(同一)한 절기로 묘사한다. 한편 마태의 경우 앞장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유월절’ 이틀 전임을 묘사한다.(마
26:2). 그리고 무교절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아 시간적 정확성이 누가에 비해 두
드러져 보인다. 마가의 경우도 누가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언급하는데 여기
서는 앞절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유월절’ 이틀 전임을 밝히고 있다. 다
만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두 절기가 동일하다는 의미보다는 두 개의 절기가 같은 날에
있다는 듯 언급한다(막 14: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
한 구분 문제, 둘째, 시간 표현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정확한 것인가이다. 첫째, 유
월절과 무교절은 분명히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조상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해
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출 12:1-14). 유대인들은 한 해의 첫 달이 되는 1월 곧 니산
(아빕)월(태양력 4월) 10일에 어린 양을 식구 수대로 취하여 14일까지 양을 보관하였
다가 1월 14일 저녁 해질 무렵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날 밤에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
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 밤에 애굽에 내렸던 장자의 재앙
을 유대인들만은 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출애굽시 장정(長征)에 오르게 되었다. 유월
절은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러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유월절은 밤에 양
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나물을 먹는 니산월 14일 밤을 가리킨다(출 12:8-11). 한편
무교절은 출 12:15-20에 근거한 것으로서 유월절 밤 즉 니산월 14일 밤 교병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식사하면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날자 계산법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까닭으로 무교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유월절은 14일 저녁 식사와 함께 끝나고 무교절
은 그 식사 때에 무교병을 먹음으로써 시작되는 셈이다. 즉 유월절과 무교절의 시작은
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가의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표현과 마태의 ‘유
월절’이라는 표현은 서로 문제가 없고 다만 이틀이라는 시간상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란 누가의 표현은 무교절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무교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고 또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무교절이 맞물려서 시작되므로 유월절은 곧 무교절의 시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마태.마가의 시간과 누가의 시간 표현이다. 마태의 경우는 예수가
직접 이틀 후면 유월절이라고 하신 말씀을 언급하는데 이 날은 세 복음서 모두 예수를
죽일 음모가 있었던 날을 지시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마태와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니산월 빕일이 되고 누가의 경우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누가는 그 음모가 있었던 날을
정확하게 규명(糾明)하기가 어려워 ‘가까우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여겨진다.
=====22: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전전긍
긍하는 이 자들은 19:47, 48 ; 20:19에서 보여진 인물과 동일하다. 따라서 예수에 대
해 가장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은 종교 그룹 가운데서 최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
다. 물론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므로 바리새파도 포함된다.
이들은 산해드린 의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예수 살해 음모는 종교
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
성 이후부터 더욱 바짝 긴장하였고 한시바삐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며 이들의 음모가 결국은 구체적 실행 단계로 옮겨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 예수의 활동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19:37-40 ; 21:38) 염두에 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 같은 묘사가 20:19에서도 나
온다.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이 집권자들에게는 체제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
다. 그러나 섣불리 예수를 처형시켰다가는 많은 백성들로부터 거센 대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대적들은 온갖 허위 선전을 통해 군중들을 회유하고 선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3:21),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게획을 세웠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이 다가오
자 더욱 근심하였다. 유월절이 되면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군
중들의 전폭적(全幅的)인 지지를 받던 예수가 붙잡히게 되면 백성들이 순례자들과 합
세해 크나큰 폭동을 일으킬까 염려했던것이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순례자들
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전에 예수를 조용히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에 대한 묘사는 공관 복음서가
공통되게 다루고 있지만 배반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는 누가가 독특하다. 즉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스스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긴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
가는 12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감으로써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것으
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사단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장본
인이 된다. 요 13:2에서는 ‘마귀가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
더니’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반이 유다 자신
의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짓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적은 궁극적으로 사단임을 강조
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 사단은 첫 사람 아담 부처를 유혹하고 죄악에 빠뜨린 것을 비
롯하여(창 3:1-13) 인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왔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마저 멸망에 빠지게 하려고 안감힘을 다 쓰고 있다(벧전
5:8). 따라서 인류 구속의 대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야말로 사단의
눈에는 가장 무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시종일관 예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에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
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예수는 부활을 통해 피와 죽음과 세상을 정복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렸을 것이다(창 3:15).
=====22:4
군관들 – ‘군관들'(* , 스트라테고이스)이란 성전 수위대장을
지칭하는 말인데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제사장 다음가는 직책인 성전 지배인을 가리
킨다(행 4:1 ; 5:24, 26). 여기서는 복수로서 수위 대장을 가리키며 무력적 힘을 집행
할 수 있는 권력자를 지칭한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를 체
포한다는 생각에서 볼 때 누가의 진술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방책(方策)을 의논하매 – 마태의 경우를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
겨줄테니 얼마의 돈을 주겠느냐고 흥정했다(마 26:15). 방책이란 돈에 대한 흥정, 6절
의 표현처럼 민중들이 없을 때 체포할 것 혹은 48절의 언급처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
할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포함할 것이다. 어쨌든 가롯 유다의 확연한 배신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호기를 만났고 예수의 공생애는 서서히 그막을 내리
게 된다.
=====22:5
저의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 – 의논 대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표현은 마가와 동일하다(막 14:11). 그러나 마태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은 30을 달아서 유다에게 직접 주었다고 언급한다(마 26:15). 여기서 은
삼십은 구약의 예언(슥 11:12)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의 죄과를
담당하셨다는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
즉 은화 30세겔(shekel)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 제사장과 성전 수비대장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
악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태의 표현을 보면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며 예
수를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급박(急迫)하게 진행시켰던 상황과 유다의 배신이 시기적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져 이
가운데 사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알게 해준다.
=====22:6
무리가 없을 때 – 이러한 방법은 대제사장들과 의논하여 나왔을 공산이 크다. 2절
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
포할 수 있는 기회나 민중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
다. 한편 가롯 유다의 배신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유다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될 수 있다. 유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있었으며(요 12:4-6) 더욱이 그가 예수를 따른 동기는 다분히 지상적
(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 마태는 ‘무교절 첫날’이라고 언급하고(마 26:17) 마가
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고 묘사한다(막 14:12). 유월절의 끝남과
무교절의 시작은 시간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가의 진술이 가장 적
절한 것으로 보인다(1절 주석 참고). 즉 니산월(4월) 14일 해질 무렵에 양을 잡았으므
로(출 12:6) 해가지면 유대인의 계산법에 의해 15일이 시작되어 무교절의 첫날이 된
다.
=====22:8
예수께서…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서 지시하는 이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다. 이러한 묘사는 19:29에서도 나
타나듯이 누가의 독특한 의도를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주도로 일이 이루어지며 제자들
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명하시는데 10절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가라고 한 장소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보인
다. 그리고 예비해야 할 것은 식사를 할 장소와 잡아야 할 양 그리고 무교병과 쓴나물
및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도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출 12:8).
=====22:9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이 질문을 한 자는 예수의 지시를 받
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마가는 제자 중 두 명이라고 언급하였
다(막 14:13).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에 대해서였다. 유대에서
유월절 행사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유월절 음식 역시 예루살
렘 성 안에서만 먹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때만 되면 예루살렘 성 안으
로 모여들었다. 따라서 유월절때 예루살렘 성 안에서 유월절을 먹으며 거할 장소를 얻
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의 여관(旅館)은 모두 꽉 찼을 것이고 집집마다 사람으로 만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방을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22:10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 성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로 보아 현재 머무는 장소가
성 밖 어느 곳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 진다. 즉 예루살렘 성 외각 지대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감람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21:37을 보면 예수께서 밤이면 성에
서 나오셔서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 기슭의 베다니 마을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Meyer).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성
안 어느 지점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넓은 성 안에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들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만 막연하게 언급하셨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왜 비
밀스럽게 그 사람과 만나야 했는지이다. 아마도 성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유다가 배신을 한 상황에서 그리고 적
대자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행동에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식사가 사람들에게 알
려질 경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혼잡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최
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내기 위해 비밀리에 장소를 물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문은 매사의 앞을 내다보실 수 있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을 엿
보게 한다.
=====22:11
그 집 주인에게 –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제자들을 인도한 남
자와 어떤 관계인지 또는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알 수 없다. 또 그 집이 마가의
집일 것이라고 행 1:13 ; 12:12를 근거로 하여 추측하기도 하며 물동이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마가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다만 전승으로 전해질 뿐이다.
선생님이 – 이 묘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나귀 새끼를 구하러 보내면서 ‘주께
서 쓰시겠다 하라’고 지시한 장면과 비슷하다(19:31). 직접화법으로 인용되는 문장이
므로 ‘선생님’은 예수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시할 때 가상의 인물
을 가리켜 칭하면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자
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신생님이라고 호칭했다면 또는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선생이
라고 호칭했다면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비밀리에 하기 의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10
절 주석 참조).
객실이 어디있느뇨 – 마치 암호(暗號)를 전달하는 듯한 이 어투는 실상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말이다(I.H. Marshall). 이 집이 여관업을
하는 집인지 아니면 민박하는 집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객실’에 해당
하는 헬라어 ‘카탈뤼마'(* )는 여관이나 여인숙의 방보다는 개
인 주택의 객실을 의미한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2:7).
=====22:12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 집주인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는 이 묘사는 이미 유월절을 위한 준비가 갖춰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집주인이 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은 헬라어 ‘에스트로산'(* )을 번
역한 말인데 본래 자리를 펴거나 까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
이미 융단을 깔고 식탁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나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미리 부탁을 받
고 식사준비를 해두었거나 아니면 언제든지 손님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자리를 펴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방만 예비되
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예비하라’라는 지시로 볼 때 음식
까지 준비된 것이 아니라 방만 준비된 것으로 이해함이 적절할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
은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인 까닭에 예루살렘에 집이 없었으므로 잘 아는 사람의 다
락방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이 다락방의 주인은 필시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하
며 예수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을 것이다. 전하는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예수께
호의적이었던 이 사람의 방은 예수 부활 후 설령 강림 후 복음운동의 주요 기지가 되
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2:13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 예수께서 일러준대로 모든 일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묘사들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단순한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신비적 힘이 작용하여 더욱 그 엄숙함과 신비성이 고조된 최후의 만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모든 일에 신적인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22:14
때가 이르매 – 유월절 식사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 해질 때를 가리킨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식사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최후 만찬의 엄숙성과 다른 유월절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언급하면
서 ‘제자'(* , 마데케스)라는 말 대신 ‘사도'(* , 아포스
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대표, 사자 등
의 뜻을 지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누
가는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월절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에 ‘함께 앉았다’고 묘사하는 헬라어는 ‘아나피프토'(*
)의 제2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눕다’, ‘비스듬히 기
대다’이다. 아마도 식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그들의 습관에 따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일어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든채로 급히 먹는
것이었으나(출 12:11) 당시는 약식화(略式化)되어 일반 식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했다
한다.
=====22:15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지
키는 유월절 식사 때(니산월 14일 해진 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하
루 전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시간이면 이미 붙들리시
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9:14). 여기서 예수는 유월절 식
사를 자신의 고난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월
절 식사가 단순히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각오
와 결단이 서려있는 기념적인 식사임을 알 수 있다.
너희와 함께 –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의미심장한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
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자 하는 심정은 이제까지 함
께 활동해 온 지난 날의 모든 추억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되살리고 자신의 일을 제자
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과의 영원한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을 것
이다.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유월절의 식사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
에 뿌린 후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유월절을 먹는다’는 말은 ‘유월절 식사를 한다’는 말인데 ‘먹다’의 목적어인
‘유월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유월절을 식사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
냐하면 식사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I. H. Marshall). 따라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 )는 어린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C.K.
Barrett, Jeremias). 그래서 식사의 종교적 해석을 시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유월절 식사는 전체적 정황을 볼 때 기념적 성격을 갖는 식사이므로 과거 이스라엘
의 출애굽이라는 종교적 식사보다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새로운 차원의 식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식사는 다름아
닌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는바, 장차 이루어질 그의 죽음을 의식하시고 제
자들과 더불어 사전에 기념을 한 선견적 식사였다. 예수는 이 같은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간절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
께서 제자들과의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10-12절에서처럼 그는 어렵게 유월
절 식사를 준비하셨고 비밀스럽게 식사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
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요 14-16장) 성찬 예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이다.
=====22:16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예수께서 제
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 유월절 식사가 마지막 식
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
겠다고 선언 하면서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 그 기한은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
기까지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드러났듯이 유월절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 먼저 유월절의 의미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공동체 국가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아직도 유대 민족은 참다운 유월절
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
의 전 영역을 이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유월절이 아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집권자들의 착취가 민
중을 억압하는 상황에서는 유월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성이 뿌리채 뽑아져 변화된 사람이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않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참다운 유월절을 기대하도록 제자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다(Jeremias,
Ellis 등). 둘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의 친교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
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게 될 만
찬은 유대의 전통적 유월절이 아니다. 만민이 참여하게 되는 성찬식이 될 것이다. 이
런 점에서 예수의 만찬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성찬 예식의 전조
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행 10:41). 이 새로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지
금까지 실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22:17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서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
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
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
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
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
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
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
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
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
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
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
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2:18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기한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식사에 대한 것과 비슷한 어투이다. 여기
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구절 역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
째는, 유월절의 포도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
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의 포도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의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22:19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
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
오'(* )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
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 )를 사용한
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
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
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 )는 신
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
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 , 투토)은 예수가 제
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 )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
로서 온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
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
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
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
)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
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
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
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
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
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
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
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
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
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
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
, 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
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
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
케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붓다’로 번역된 헬라어 ‘여퀸노메논'(*
)은 ‘여케오'(* )에서 유래한 말인데 ‘피를 흘린다’,
‘피를 쏟는다’는 뜻과 ‘술을 붓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붓는
다’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피흘림과 그 죄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함
축하고 있다.
=====22:21
그러나 보라 –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대립되는 문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그러나'(* , 플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로 세운 계약이 지금부터 언급되는
배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즉 구원의 약속은 배반자를 제외시킨다는 말
이다.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강조하기 의해 ‘보라'(* , 이두)라는 누가만
의 강조법을 사용한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반자가 제자들 중에 있을 것이
라는 이 같은 누가의 암시는 마태와 마가의 진술과 차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배신의
예고가 마태와 마가에서는 식사 시작 또는 식사 중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된 반면(마
26:21 ; 막 14:18), 누가는 식사를 마친후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
13:26에서는 빵을 한 조각 찍어 준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식사 초반 또는 식사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이 배반
의 예고를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교적 짤막하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직접 지목하고 마태와 마가는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언급없이 암시적으로만 묘사한 점으로 보아 제자의 배신을 크게 강조하지 않
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식사 후에 배열함으로써 성만찬 예식과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을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반자는 ‘나를 파는 자'(*
, 파라디도미)로 묘사되었는데 5, 6절에 이미 언급된 유다의 배신
과 돈을 받기로 약속된 이야기를 전제한 것이다. 누가는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언급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배반자가 예수
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마태의 경우는 그릇에
예수와 함께 손을 넣은 자가 유다임을 유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힌다(마
26:25). 반해 식탁 위에 손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손을 가리킬
수 있지만(B. Lohse) 더 확장된 의미로 볼 때 식탁은 식사를 나누는 장소이므로 친교
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Rehkopf). 이는 예수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라는 시 41:9의 말과 일치되는 바, 예수의 배신당함이 구약 예언의 성취
로 이루어졌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든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로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길이 참
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인간 편에서는 다만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선택에의 책임이 뒤따른다.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앞절에서 암시한 후 여기서는 자신의 고난이 또한 예정된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한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9:22). ‘작정된 대로 가거니’라
는 말은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배신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예측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운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한대로 의
연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누가는 앞절에서처럼 예수를 팔 사람
을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라고
분명하게 저주받을 사람을 지목한다. ‘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 )
는 저주문에 사용되는 단어이다(10:13 ; 마 11:21 ; 18:7 ; 막 13:17). 이와 같은 저
주는 마 27:3-5에 보면 유다가 목매어 죽음으로써 또는 행 1:18, 19절의 언급처럼 몸
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죽음으로써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23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 예수가 특정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12명
중 어느 누구가 배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함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혼란이 온 것
을 보여준다. 12명의 제자 모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
다는 자기들 중에서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인 분위
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Surely not I.
Rabbi?, NIV)라고 자수하는 듯한 말을 하고 곧이어 예수가 긍정함으로써 논쟁하나 장
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마 26:25). 누가는 유다 한 사람보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 전체의 반응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을 유다
한 사람 뿐만아니라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누가 예수의 배반자인가에
대해 논쟁한 직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선
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누구냐는 심각한 물음에 대한 해결점 없이 갑
자기 자신들의 자리다툼으로 이야기가 전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
와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 후 곧바로 감람산으로 간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서(마 26:30 ; 막 14:26) 누가가 언급한 이 구절의 위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제
자들 간에 자리다툼이 있었다는 암시는 9:46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마가도 9:33-35
; 10:35-41에서 두 차례 인급한 점으로 보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
로 갈등(葛藤)이 여러 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의 배신에
대한 언급과 고난이 임박했다는 분위기에서 9:46과 마찬가지로 자리다툼이 있다고 보
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 접속사 ‘카이'(* )를 사용하여 앞절과 연결하고
있으며 앞절의 ‘서로 묻되'(* , 쉬제테인)라는 단어와 상응하여
‘다툼'(* , 필로네이키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매우 자연스럽
다. 그래서 이 본문을 누가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제자들간의 갈등 묘사라고 볼 수
있으며 문장의 위치에 대한 의심도 해결이 된다. ‘다툼'(dispute)이라는 단어는 22절
의 ‘서로묻되’라는 말 보다 강한 의미로서 ‘싸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같
은 강조는 제자들이 배신자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의 위치에 더 관
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소극적 논쟁에서 ‘내가
더 크다’라는 적극적 논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제가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회피하고 자신
들의 이기적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다.
=====22:25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 이 구절은 마 20:25 ; 막 10:42과 평행을 이
루고 있다.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정치 권력의
예를들면서 교훈을 베푸신다. 누가가 언급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국가의 공권력(公
權力)을 장악한 통치자와 그 관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을 언급
한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상황하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대인
들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주관하다’의 헬라어 ‘퀴리유오'(* )는 ‘주인(*
, 퀴리오스)이 된다’는 뜻으로서 주인이 노예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다
시 말하면 집권자와 민중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의 말이다.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 여기서 말하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헬라어 ‘유에르게테스'(* )는 ‘좋다’는 뜻의 ‘유'(* )와 ‘공적
행동’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 )이 합쳐져서 된 복합어로서 ‘선
한 일을 위해 힘쓰는 자’ 또는 ‘박애주의자’ 등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 같은 칭
호는 이집트나(Ptolemy , Ptolemy ) 시리아(Antiochus ) 로마(Trajain) 등
지에서 폭군적 지배자들에게 붙여졌고 유다에서도 오니아스 세 대사제(Onias )에게
이 칭호가 붙여졌다(I. H. Marshall).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의 백성 위에 군림하고 최
상의 군주로 행세하는데서 그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다. 이 말 역시 폭군이 미사여구(美辭麗
句)로 꾸며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여기서 가리키는 ‘너희’는 제자들이지만 앞절에서 말한
‘이방인들'(Gentiles)에 대칭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누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염두에 두
고 말한 것이다. 즉 세상의 인간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되어 있고 그 지배자
의 횡포가 오히려 정당화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한 것으로 25
절에서 제사한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누가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즉 이는 당시 교회 내에 자리
의 높고 낮음에 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자'(the
greatest)에 대비되는 ‘젊은 자’는 헬라어 ‘호 네오 테로스'(* )
를 번역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아주 어린 자'(youth)를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큰 자’와 대칭되어 아주 어리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 참된 지도자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의 지배 구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교회안에서 나타나는 교권적(敎權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뒤엎고 모두가 서
로 섬기는 위치에서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 같은 요청이 인간의 모든 공동체가 바르게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그냐 –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비시
킨 반문 형식의 이 비유는 앞절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큰 자가 작은 자
로, 지도자가 섬기는 자로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破格的) 명제와 현실적 가치 기준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26절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앉아서 먹는 자’는 일반적
으로 유대 생활 속에서 종을 둔 주인 또는 앞절에서 언급했던 지도자, 집권자들과 시
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뜻한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26절에서 언급된 ‘젊은 자’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와갈은 대비
적 비유를 이야기한 후 예수는 너무도 자명한 대답인 앉아 먹는자가 크다고 말하면서
대비적 효과는 고조시키고 있는데 곧이어 언급되는 문장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6절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확신시키는 이 말은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훈계의 결론에 해당된다. 특히 예수를 배우
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곧 제자들에게 규범이 되고 모범이 되는 스승을 배
워야 함과 아울러 그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
는 지금 자신이 제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먹는 비유를 들
었다는 점에서 예수가 제가들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같은 추
측은 17-20절까지의 내용을 전제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
한 예수의 역할은 섬기는 자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적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예수 사역
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I. H. Marshall, J. Weiss). 그래서 바이스
(J. Weiss)는, 예수가 시중든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
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자신은 섬김을 밭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마 20:28). 예수께서는 먼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아니라(요 13:4)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22:28
나의 모든 시험 중에…함께 한 자들인즉 – 이 구절은 마지막 작별 인사와도 같은
암시를 준다. 이제까지의 공성애 활동을 하는동안 동고 동락(同苦同樂)했던 제자들에
게 예수는 그들의 고생을 격려하고 계신다. 24절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제자들의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리켜 자신의 모든 시험 때에 함께 하여 준 고맙
고 장한 제자들로 묘사하며 제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범자들로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
들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격려 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
서 언급된 ‘시험'(* , 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이라는 단순한 의미
보다는 공생애 기간 동안 격어온 수많은 ‘위험들’ 또는 ‘고통’과 ‘시련들'(trial)을
뜻한다.
=====22:29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과 과업을 넘겨 주기
전에 그 권한과 과업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여기서 언급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이다. ‘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
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
의 통치권(統治權)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왕권을 지상에서 받았으므로 이미 하
늘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뜻하며 그 선포 내용에 대한
보증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에게 맡겨 – 이제 하늘로부터 온 그 권한과 권위가 제자들에게로 옮겨간
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위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위임이 하나님의 위임임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건설과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 뒤에도 중단되
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22:30
내 나라에 있어 – 25-29절이 섬기는 자의 도리를 말한 반면 본절은 그 역할과 사명
을 다한 제자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는 하나
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종말적 심판의 때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마
19:28절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라고 언
급되는바 이는 세상이 변혁된 새세계 곧 종말론적(eschatological)으로 완성된 하나님
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
는 잔치가 벌어진다. 16절에서 하늘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
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解放)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
게 된다. 마 19:28에서는 ‘열 두 보좌’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제자가 모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자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느 진술이 정확한 것인
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포함시킬 수 없어 슷자를 언급하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I.H. Marshall). 그러나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즉
열 두 지과는 곧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통치 구조
의 변혁이다. 즉 25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통치 구조는 사라지고 26절에서 언급된
형태의 통치 구조가 실현되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가 될 것이
라는 말이다. 이 같은 형태의 통치는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섬기
는 통치가 확장되어가고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암시되고 있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청구 하였으나 –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였듯이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와 보상에 대한 약속을 한 직후 베드로의 배신(背信)을 예고한다.
그러나 독특한 점은 유다의 배신 예고에서는 언급한 바 없는 사단의 역할에 대해서 예
수가 직접 언급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배신에 대한 저주와 경고라기 보다는 애정을
담고 있는 충고와 걱정이다. 특히 여기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두번씩 반복하
여 부름으로써 충고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단이 청구했다’는 표현은 배신의
행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적(他者的)인 악령의 힘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
을 암시한다. 한편 ‘까부르듯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니아조'(* )
는 ‘체를 흔들다’, ‘체를 치다’는 뜻이다. 본절에 은유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의 정확
한적용례(paradigm)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다음 새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
째는, 알곡과 쭉정이를 걸러내는 시련을 통하여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들을 분리한다
는 견해이다(Jeremias). 둘째는, 사단이 시련의 체를 통해 제자들을 참소(讒訴)할 증
거들을 찾고 있다는 견해이다(Foerster).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욥을 시험하여
악한 증거를 찾아 욥을 공격하고자 했던 사단의 시도를 상기케 한다(욥 1:6-12). 셋째
는, 여기서 체를 흔드는 것은 제자들을 구분하여 걸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입증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Lanrange, Fuchs, Schurimann).
이 세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곡식을 체질하는 것은 원래 쪽정이
를 날려 보내기 위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는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
제는 제자들이 시련의 와중에서 서느냐 아니면 넘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22:32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 여기서 배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배신의 책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
이 떨어지지 않고 굳세지기를 기도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믿
음이 떨어질때 예수께 대한 배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
신 것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를 시사해
준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
써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베드로에게 가장 큰 신뢰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여기서 ‘돌이
킨 후’의 헬라어 ‘에피스트레포'(* )는 ‘회개한다’, ‘돌아선
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베드로가 변절(變節)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고없이 ‘회개하
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변절을 간접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서 제자들을 향해 슥 13:7을 인용하여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
리로 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마 26:30-32 ; 막 14:26-28) 누가는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제자들의 자랑스럽지 못한 변절의 모습을 축소하고 완곡한
형태로 수정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22:33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베드로는 예수의 말 속에서
암시된 뜻을 이해하고 예수와 함께 끝까기 같은 길을 가겠다고 호언(豪言)한다. 마태
와 마가는 다른 사람이 다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남과 비교하여 강경하
게 장담한다(마 26:33 ; 막 14:29). 전체적으로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충성하겠다는
장담과 변절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베드로의 변절을 강조한다.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부드럽게 묘사한다.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매우 급한 충동적인 사람이었
다. 그는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하기를 즐겨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충성스러웠고 주를 사랑하고 남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아울러 훌륭한 통
찰력(通察力)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 과신(self-confidence)에 빠진 베드로는 끝내 난관에 부딪혀 예수를 부인하는 우
(愚)를 범하게 된다.
=====22:34
베드로야 – 요 1:42에 의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가 직접 지어준 ‘반석’이란
뜻의 이름이다. 이렇게 예수 자신이 직접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른 것은 이곳에만 나타
나는데 각별한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변할 수 없는 굳고 단단한 의지로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
자 하는 듯하다.
오늘 닭울기 전에 –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변절의 정확한 시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이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언급된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월절을 하루
넘긴 니산월 15일이다. 또 유대인의 시간 분배가 해질녘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15일 새벽 닭 울기 전이라고 보면 된다. 막 13:35에 보면 시
간을 한밤중과 닭 울 때, 그리고 새벽을 따로 구분하는데 동틀 새벽 이전의 깊은 새벽
이 닭 울 때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닭 울기 전이므로 새벽 3시경으로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시각은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는 독특하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언급한다(60절 주석 참조).
=====22:35
전대와 주어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 – 본서에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여 보낸 적
이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12제자를 파송해 보냈고(9:2-1) 또 한 번은 70인을 선택하여
두명씩 짝지어 파송했다(10:1-5).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요청하는
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신다. 즉 전대, 주머니 그리고 신이라는 어휘는 10장에서 언
급한 내용과 일치하며 9장과는 옷과 식량에 대한 언급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예수
가 지시하는 기억은 70인 파송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장에서는 12제
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제외된듯 하지만 사실 제자들이 함께 선교에 참가했을 것
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자들은 당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활동을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예수와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 말은 선교 활동
당시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친절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이며(10:7) 그
들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환영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22:36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
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
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
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
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
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
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
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
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
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
(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
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
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
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22:37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
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
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
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 )를 직역하면 ‘끝’, ‘결
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22:38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 ‘검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이 체포될 것을 언급
한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칼(sward, NIV) 두 자루를 예수께 보여 주는 것이었
다.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의 체포에 대해 칼로서 저항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
다. 또한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칼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
가 제기된다. 이 칼은 50절에서 제사장의 귀를 친 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칼의 주인은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가 된다. 그러나 칼 주인과 칼 사용자를 동일하
게 생각할 수 있는 중거는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6:15과 행1:13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 중에 갈릴리에 근거지를 둔 무력 혁명 단체인 셀롯 당원
(Zealots) 시몬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칼이 시몬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이다. 당시 여행자들이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흔
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칼은 단순한 호신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족하다 하시니라 – 칼을 내민 제자에 대한 예수의 이 대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칼 두 자루는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
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 자신이 체포와 수난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저항 의지를 보여준 것은 예수의 뜻에 반
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의 의지를 묵살하는 뜻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역설적인 꾸지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장소를 기도하는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22:40
<겟세마네과 동산에서 가장 오래된 한 나무>
그곳에 이르러 – 습관적으로 왔던 장소임을 말해주는
‘그곳’은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로 추측된다
(마 26:36 ; 막 14:32). 이곳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모여 기도하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위험을 피하여 은둔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Leaney).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준비
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제 그는 이 땅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기도를 잠으로 대신한다(45, 46절).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 여기서 시험이란
곧 닥칠 체포와 고난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신 후, 이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이미 아셨고 따라서 그들이 낙심하고 절망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를 주의시키신다. 아울러 예수 자신도 심각한 고난과 시험을 직면하여 함께 기도하신
다.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힘을 돕더라 – 예수의 고뇌에 찬 모습과 그 두려움은 심장의
파열로 죽음에 이를 지경으로 묘사한다. 마태는 예수의 고뇌를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기록한다. 예수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늘의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
리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로부터의 사자(angel,
NIV)가 예수를 도왔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다는 기사는 이
곳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언급되었다(마
4:11 ; 막 1:13).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기진하셨을 때 천사가 그를 도
와, 기력을 회복하시고 성령충만한 사역을 하셨으며 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아울러 이곳에서도 예수께서 고뇌(苦惱)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기도하시며 기진하시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도와 끝까지 고난의 길을 다 갈 수 있도록 하였다.
=====22:46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일어나’ 라는 말대
신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는 예수
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 세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와서 자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 다시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와 자고
쉬라는 말을 하신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의 체포 순간
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지 못하고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
은 모습으로 강조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모습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세 차례의 기
도와 책망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제자들은 지난 밤의 긴장되고 무거운 만찬
과 예수의 고별의 말씀들과 예수께서 배반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흥분 등으로
매우 긴장된채 밤을 맞이하여 기도에 들어갓다. 아울러 그들은 기도하며 예수의 죽음
에 대해 인식하면서 슬픔 감정과 함께 심신이 피로하였을 것이다. 이런 복합적 요인으
로 인해 그들은 기도하면서 쉽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밤은 그들이 쉽게 잠
들 만큼 평온한 밤이 아니었다. 그 밤은 온통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짖누르고 있었
으며 예수는 온몸으로 이 세력과 홀로 맞서고 계셨다. 이러한 예수를 두고 제자들은
잠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예수의 힘이 되어 주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이전에 수많은
밤을 지새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이 밤에 단 하룻밤 몇 시간 동
안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결국 이들의 잠이 그들에게 엄청난 시험과 좌절
과 절망으로 나타났으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빠지게 하였다.
=====22:47
한 무리가 오는데 – 유다가 오는데…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무리들이 유다의 인솔로 예수께 다가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을 다가오는 ‘무리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
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렸다고 언급한
다. 아울러 추측컨대 이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는 로마 병정
들과 성전을 경비하는 유대 병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가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누가는 유다에 대한 배신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온
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유다라 하는 자가’ 온다고 경멸적 표현을 함으로써 유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22:48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예수
께서는 유다의 심증을 꿰뚫어 보셨다. 덧붙여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검을 들고 따라온 병사들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한다고 약속했음을 밝힌다. 그
런데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유다는 인사와 한께 입맞춤을 하게 되고 곧
이어 예수를 체포하게 된다. 반면 누가는 입맞춤을 시작하려 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
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유다의 속임수에 넘어가 체포된 것
이 아니며 유다의 행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가 직접 유다의 이름을 부
르는 탄식조의 어투를 통해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감람나무로 인해 더욱 어둑캄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가롯 유다와 체
포자들은 예수를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는 가롯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
롯유다는 파렴치(破廉恥)한 배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22: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 ‘좌우'(jesus’ follows, NIV)란 예수 주위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보고 예수의 예언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언급 없이 무리들이 예수를
잡았다고 말한다. 역시 누가의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위험을 함께 느끼며 반응을 보
이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제자들은 예수에게 38절에서 보여 주었던 칼로 적들을
향해 대항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은 질문 형태이지만 50절에서 칼을 사용한 점으로 보
아 질문 속에 칼을 사용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같은
제자들의 행위를 의분(義憤)에 찬 긍정적 행동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22: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Malchus, NIV)였음을 밝힌다.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
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
음에서 나온 의리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
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
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
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
이 되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Jos., Antiq. 14:366).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
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
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
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
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22:51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하며 RSV는 ‘이만큼 해두라'(No more of
this)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
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즉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
투'(* )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
라’는 뜻의 ‘에아오'(* )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
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
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
하는 행위에 있다. 즉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
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
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
하는 어투로 묘사한다(마 26:47-56).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
으라'(출 21:24)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는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
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23:34).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22:52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
의 정체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무리가 등장하는 초기에 무리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한다(마 26:47 ; 막 14:43). 그러나 누가는 무리의 정체를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에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히며
서기관들 대신 성전의 군관들(the officer of themple guard, NIV)을 언급한다. 누가
가 성전의 군관들을 언급한 것은 4절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의논한 대상이 대
제사장들과 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과 일치된다. 아울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제사
장들이 직접 체포하러 오면서 성전 수비대를 이끌고 온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이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한편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몄다. 간악한 질문
을 통해 책잡으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귀신들렸다고 비방했
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그들의 비방과 함정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
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자 유대의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가장 가
까이에 있던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는 죽음의 무리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 이 구절은 37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
자신이 불법자와 동류(同類)로 취급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확인하
는 말이다. 즉 예수는 범죄자로서 공권력에 의해 체포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틈만나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고, 또 그들은 군중들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에도 정당한 근거가 없어 강도를 잡듯이 중무장
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야심(夜深)한 시각에 나타났던 것이다.
=====22:53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의 말씀대로 유대교 지도자
들은 예수께서 낮에 선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식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들이 성전에서 낮에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으며 아울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한 뒤
의 군중들의 반응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성전에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었었다. 그던데 이때 가롯유다의 배반
과 유대 지도자들의 기회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 앞에서 상기시킨 말, 즉 예수의 활
동에 열광적으로 따랐던 민중들의 열기에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이 위축되고 두려워했던
때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빛이 득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제 사태
가 역전되어 다시 어둠이 득세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성경에 기록
된 예언의 성취로서 언급하고 있는데(마 26:56 ; 막 14:49) 누가는 3절에서 유다의 배
신이 사단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 바 있듯이 예수의 체포 역시 악의 집단적 세
력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시대가 주는 고통과 치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자세는 초대 교회가 경험할 박해가 마땅히 겪게될 제
자됨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어
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승리의 심판자로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기
독교인들도 고난과 박해, 그리고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22:54
예수를…대제사장의 집으로 – 이 구절은 예수를 체포한 주동 세력이 대제사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마 26:57). 그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
투스(A.D. 18, Valeriu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비텔리우스 총독
(A.D. 36)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18년간 대제사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었다. 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
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 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
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
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체포와 연행의 순간에 아무
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였음을 묘사한다. 톡히 마가는 한 젊은이가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표현을 통해 상황
의 급박성과 제자들의 도망침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마 26:56 ; 막 14:51, 52).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누가는 베드로의 행동에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
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여 연행(連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제사장
의 집까지 그 뒤를 따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처럼
역시 베드로도 도망하였다가 멀리서 에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22:56
한 비자(婢子) –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한 일행이었음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다.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막 14:66) 요한은
문지키는 여종이었다고 언급한다(요 18:17). ‘한 비자’라는 표현은 당시에 어린아이와
여성들은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제
자들 중에서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대비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강조
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의 보도와는 순서적으로 차
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마당에 들어와 불을 쬔 후 곧이어 공회의 심문
이 있고 희롱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 다음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소개하
는데 누가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가 부인을 한 후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공회의 심문(審問)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
다. 이야기의 전개상 누가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분이 발각된 때가 예수의 심문과 희롱이 있은 후보다는 뜰 가운데 불쬐는 하인들 속
에 들어갔을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어린 여종이 다른 곳에서 불쬐는 베드로에게로 가까이 왔는지
아니면 본래 베드로가 들어가기 전부터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
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향해 앉아 있
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종은 베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하고 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어린 여종은 베드로를 지시하면서 그리고 눈을
베드로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
명사 ‘그'(* , 아우토)는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직접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여 심문하듯이 말하고 있
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말은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뜻보다는 그 이전의 활동 현
장에서 목격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22:57
베드로가 부인하여 – 베드로는 여자 하인이 폭로한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며 어린
여종이 ‘그’라고 지칭한 예수를 ‘저를'(* , 아우톤)이라는 같은 인칭 대
명사를 받아 답하고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는데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반면 마
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어린 여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
다고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가 거짓말을 매우 능청스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22: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 두번째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을 언급하는 이 구절
은 공관 복음서 전체가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첫째, 누가는 베드로가 처음 부인
을 한 후 조금의 시간이 흘렀음을 언급하는 반면 마태는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갔다고
말하며 마가는 앞뜰로 나갔다고 언급한다. 둘째, 폭로자에 대한 언급인데 누가는 ‘다
른 사람’이라고 불특정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다른 비자’라고 하여 처
음 폭로한 자와 구분하고 있으며 마가는 단순히 ‘비자’라고만 하여 첫번째 폭로자와
구분되는지 아니면 다른 비자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장소의 이동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반대로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베드로가 첫번째 공격을 받고 그 공격을
피하여 장소를 옮겨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너도 그 당이라 – 첫번째 여종과는 달리 두번째 사람은 베드로를 향해 2인칭 ‘너’
(* , 쉬)라는 말로 직접 심문하듯 폭로하고 있다.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는 처음의 누가처럼 ‘이사람’이라는 말로 베드로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를 가
리켜 ‘그 당이라'(* , 여스 아우톤)고 공격하는데 여기서 ‘여
스'(* )는 ‘에크'( )가 모음 단어 앞에 올 때 변화된 형태로서 그 뜻은 속
격으로 어디에 ‘속한’ 파당적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은 단순하게 부정만 하고 있는데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하여 부정하며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며 극구 부인을 하고 있
음을 묘사하고 있다.
=====22:59
한 시쯤 있다가 – 두번째 베드로의 부인이 있은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부인이 너무 완강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이 증거없이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사람이 – 누가는 세번째 폭로자를 두번째와 다른 또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
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73 ;
막 14:70).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을 언급하면서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 한 자가 예
수 체포 당시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임을 밝히고 있
다(요 18:26). 말고의 친척은 자신이 예수를 체포하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목격했다고
폭로한다.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 세번째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내세워 매우 구체적 증거와 함께 강경하게,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하
고 있다. ‘장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스퀴리제토'(* )라
는 말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자신있게 주장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특히 마태는
베드로의 말소리가 예수와 한 통속임을 증명한다고 증거를 대고 있는데 아마도 누가와
마가가 공통되게 예시하는 증거인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준인 듯하다.
즉 베드로는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2:60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은 마태가 언급한 첫번째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
는 사실은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베드로의 배신을 강하
게 부각시키는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가능한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노뢨했다논
검이다.
닭이 곧 울더라 – 이 구절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예언이(34절) 적중되어 완성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
는 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세 번의 부인을 닭이 울음으로써
끝마치는데 마가만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막 14:30에서 예수가 언
급한 ‘닭이 두번 울기 전’이라는 예언과 일치되고 있다.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내시니 – 예수가 돌아서 베드로를 응시한다는 이 구절
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자료이다. 여기서 ‘보다'(*
, 에네 블려센)는 ‘뚫어지게 바라보다’는 뜻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
이나 애정을 담아 응시하는 모습을 말한다. 예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때 자신이
베드로의 번절에 대해 예언했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닭 우는 소리
와 함께 베드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 보았을 것이다. 예수가 보낸 그 눈길은 베
드로에 대한 질책의 눈길보다는(Schneider) 베드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눈길이었
을 것이다.
베드로가 주의 말씀…하심이 생각나서 –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는데 그 말씀은 34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고
이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을 생각했다고 언급하
는 반면 누가는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사실을 부각하는데 아마도 누가는 베드로의 참
회가 예수와의 인격적 교감에 영향 받았음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이 같은 추측은 누가
가 베드로의 변절보다는 참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초기 기독교의 박해 가운데서 변절자에 대한 정죄보다는 참회의 회개를
통한 새사람 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막 14:72과 그대로 일치하는 이 구절은 베드로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의 마무리로서 극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베드로가 문밖으로 나와
‘통곡 했다’는 표현은 참회에 대한 더 이상 할 수 없는 극적이 표현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밖으로 나갔다’는 베드로의 행동은 세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배신했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며 변절의 과거 모습과 단
절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변절자로서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에게 베드로처럼
배신의 자리를 떠나 눈물로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누가는 전하려 한 듯하다.
=====22:63
지키는 사람들이 –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성전 수비대의 사병일 수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대제사장이라고 밝히는데(마 26:65-68 ; 막 14:63-65) 누가의
묘사가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I. H. Marshall).
=====22:64,65
선지자 노릇하라 – 예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히라고 요
구하는데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
는 말이다. 마태의 경우는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하라”고 소리치는데 당
시 민중들이 예수를 ‘그리스도’, ‘선지자’로 고백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구절이
다. 마태나 마가의 묘사처럼 주먹으로 치며 얼굴에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렸다는 말없
이 누가는 간단하게 때리고 욕했다는 말로만 표현하는데 누가는 예수의 치욕스러운 모
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공관 복음서 모두 예수가 희
롱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 53:3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수난 모습에 누가
의 묘사가 가장 잘 어울린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희롱받는 모습을 예언의 성취로
서 보았음에 틀림없다.
=====22:66
날이 새매 – 누가는 매 사건마다 시간적 구분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유월절
식사 때는 초저녁이었고 식사 후에 상당한 시간 동안 마지막 가르침을 행하셨으며 감
람산으로 이동하여 기도하는 동안 시간은 상당히 흘러 예수 체포의 시각은 한밤중이었
다. 그리고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연행되고 공의회 대표들이 모여들고 베드로가
세차례에 걸처 부인하는 동안 또다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묘사한 후 닭 울음 소리로
동틀 무렵 전의 새벽 시간을 암시했다(60절). 그 다음 베드로의 참회(懺悔)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을 암시하면서 날이 밝아왔음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날짜는 니산월
십오일로서 유월절 다음날 무교절의 첫날 아침이 된다.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 52절에 의하면 예수를 체포했던 자 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를 연행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왔을 것
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가야바의 집으로 공의회 대표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말을
언급하고 한밤 중에 가야바의 집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으로 묘사한다(마 26:57-68 ;
막 14:53-65). 그런데 누가의 표현을 보면 시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장소에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누가는 예수가 대제사장 집에서 산헤드린 곧 공회로 끌려갔음을 보도하
기 때문이다. 마태나 마가의 진술보다 누가의 사건 전개가 더 설득력을 갖는데 이유는
공회(公會)는 낮에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보도의 신빙성 문
제도, 한밤중에 심문한 내용을 예비 심문으로 마 27:1과 막 15:1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죽이기로 의논했다는 보도를 누가의 언급과 같은 정식 회의로 본다면 해결된다. 어쨌
든 누가의 이야기가 더 명료하고 사실적이다. 여기 언급된 ‘공회'(* ,
쉬네드리온)는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데 대
제사장이 의장이 되어 유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처리하지만 사형(死刑)에 관한
문제는 로마 총독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어용 기관이라고도 볼 수 있는
데 여기서 공식 회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22:67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 이미 한밤중의 회의에서 가야바가 이와 동
일한 질문을 한 바 있다(마 26:63). 따라서 이 질문은 이미 확정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재차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질문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나 마태와
마가는 의장격인 대제사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마 26:62 ; 막 14:60). 또 누가는 마
26:59-61과 막 14:55-59의 내용 즉 예수를 죽이기 위해 증인들을 동원하여 개재판하는
장면도 생략했다. 세 복음서 모두 질문의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이는 예수께
서 공생애를 통해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여김을 받으셨음을 시사
한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보고 듣고서
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는 커녕 백성들을 미혹하는 이단자라고 규정했다. 그들
은 스스로 진리의 파수꾼으로 자처했지만 실상은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진리
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나아가 일반 백성들을 선동하여 비진리쪽으로 돌아서도록 유
도하는 가증한 거짓 선생들이었다(11:52). 한편 본구절의 내용은 각 복음서마다 약간
의 표현 차이가 있다. 누가는 단순히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마
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고 있고 마가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
도냐?’라고 기록함으로써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비교적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필요성이 없음
을 예수는 질문자의 불신앙을 들어 단정하셨다. 이미 예수는 이 재판이 공정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 따라 꾸며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는 따위의 요구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그리스
도임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에 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이기로 결심하여 음모를
꾸민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명의 말도 소용없음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 실제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야와 관련된 질문을 수차례 던지신 바 있으나 그들은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
(20:3-8:41-44). 이 같은 표현은 상호간에 대화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관계
단절을 상징하는 말이다. 서로간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지는 분명하
다. 그들과 더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질문자의 말에
대하여 분명하게 긍정하신 것으로 묘사한다(마 26:64 ; 막 14:62).
=====22:69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 예수는 질문자들이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이 말씀을 하신다. 마태와 마가에서 약간의 내용상 차이
는 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고 있다. 차이점을 보면 먼저 누가는 이후에 되어
질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와 마가는 단 7:13의 내용인 하늘 구
름을 타고 올 것이라는 재림 약속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볼 것’이라는 예
언을 첨언(添言)함으로써 재림이 임박함을 시사하고 있다(마 26:64 ; 막 14:62). 누가
의 관심은 강도와 같이 불법자 취급을 당하고 이제까지 모욕받아온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 이후부터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 후로'(* , 아포 투 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후를 가
리키며 부활을 통한 승리의 확증을 지시한다.
=====22:70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 예수의 말을 들은 후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하
나같이 나타낸 반응은 예수의 말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들에게는 예수의 발언이 신성모독(神聖冒瀆)으로 들렸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 간접적인 시인이지만 예수는 분명하게 자신이 하
나님의 우편에 앉을 아들임을 시인하고 있다. 예수의 이 같은 긍정은 대적들에게 자신
을 변호하거나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드러 내는 주권적
선포의 의의를 지닌다. 예수는 지상적, 정치적 차원의 메시야가 아니라 세세토록 온
세계를 권능으로 통치하며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구속주로서의 메시야이신 것이
다.
=====22:71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 예수의 발언에 대한 공의회의 반응은 몹시 신경질적
이었는데, 누가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는 확실한 증거가 예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고
선언하는 공회의의 획신에 찬 결정을 소개하면서 공회의 회의를 마무리짓는다. 그들의
확신에 찬 증거는 신성모독적인 예수의 발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이 상황을 더욱 격렬
하고 신경질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데 대제사장이 자기의 옷을 찢고 예수가 참람한 말
을 했으므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선언한다. 이같는 언급은 레 24:16을 근
거로 한 것이다. 마 27:1과 막 15:1에서는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빌
라도에게로 끌고갔음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도 누가는 산헤드린 전체 회원이 정죄(定罪)
한 듯한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의 보도가 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산
헤드린의 권한에 있어서 사형 결정권은 로마 당국에 있으므로 산헤드린의 결정은 의미
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에서 언급한 사형에 대한 언급은
공식 선고가 아니라 그들의 희망 사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법
정으로 예수를 끌고 간다.
헬라어 누가복음 2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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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기젠 데 헤 헤오르테 톤 아쥐몬 헤 레고메네 파스카
개역개정,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새번역,1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출 12:15-20을 볼 것
우리말성경,1 유월절이라고도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습니다.
가톨릭성경,1 파스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영어NIV,1 Now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called the Passover, was approaching,
영어NASB,1 Now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which is called the Passover, was approaching.
영어MSG,1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also called Passover, drew near.
영어NRSV,1 Now 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 which is called the Passover, was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1 ηγγιζεν δε η εορτη των αζυμων η λεγομενη πασχα
라틴어Vulgate,1 adpropinquabat autem dies festus azymorum qui dicitur pascha
히브리어Modern,1 ויקרב חג המצות הנקרא פסח׃
성 경: [눅22: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 이 구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묘사하는데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의 경우 21:38의 이야기와 무관한 듯하게 이야기를 출발시키면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同一)한 절기로 묘사한다. 한편 마태의 경우 앞장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유월절’ 이틀 전임을 묘사한다.(마 26:2). 그리고 무교절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아 시간적 정확성이 누가에 비해 두드러져 보인다. 마가의 경우도 누가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앞절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유월절’ 이틀 전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두 절기가 동일하다는 의미보다는 두 개의 절기가 같은 날에 있다는 듯 언급한다(막 14: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구분 문제, 둘째, 시간 표현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정확한 것인가이다.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은 분명히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조상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출 12:1-14). 유대인들은 한 해의 첫 달이 되는 1월 곧 니산(아빕)월(태양력 4월) 10일에 어린 양을 식구 수대로 취하여 14일까지 양을 보관하였다가 1월 14일 저녁 해질 무렵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날 밤에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 밤에 애굽에 내렸던 장자의 재앙을 유대인들만은 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출애굽시 장정(長征)에 오르게 되었다. 유월절은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러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유월절은 밤에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나물을 먹는 니산월 14일 밤을 가리킨다(출 12:8-11). 한편 무교절은 출 12:15-20에 근거한 것으로서 유월절 밤 즉 니산월 14일 밤 교병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식사하면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날자 계산법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까닭으로 무교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유월절은 14일 저녁 식사와 함께 끝나고 무교절은 그 식사 때에 무교병을 먹음으로써 시작되는 셈이다. 즉 유월절과 무교절의 시작은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가의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표현과 마태의 ‘유월절’이라는 표현은 서로 문제가 없고 다만 이틀이라는 시간상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란 누가의 표현은 무교절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무교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고 또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무교절이 맞물려서 시작되므로 유월절은 곧 무교절의 시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마태.마가의 시간과 누가의 시간 표현이다. 마태의 경우는 예수가 직접 이틀 후면 유월절이라고 하신 말씀을 언급하는데 이 날은 세 복음서 모두 예수를 죽일 음모가 있었던 날을 지시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마태와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니산월 빕일이 되고 누가의 경우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누가는 그 음모가 있었던 날을 정확하게 규명(糾明)하기가 어려워 ‘가까우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여겨진다.
카이 에제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그람마테이스 토 토스 아넬로신 아우톤 에포분토 가르 톤 라온
개역개정,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새번역,2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2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백성이 두려워,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영어NIV,2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looking for some way to get rid of Jesus, for they were afraid of the people.
영어NASB,2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were seeking how they might put Him to death; for they were afraid of the people.
영어MSG,2 The high priests and religion scholars were looking for a way to do away with Jesus but, fearful of the people, they were also looking for a way to cover their tracks.
영어NRSV,2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were looking for a way to put Jesus to death, for they were afraid of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εζητουν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γραμματεις το πως ανελωσιν αυτον εφοβουντο γαρ τον λαον
라틴어Vulgate,2 et quaerebant principes sacerdotum et scribae quomodo eum interficerent timebant vero plebem
히브리어Modern,2 ו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סופרים מבקשים איך יהרגהו כי יראו מפני העם׃
성 경: [눅22:2]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 자들은 19:47, 48 ; 20:19에서 보여진 인물과 동일하다. 따라서 예수에 대해 가장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은 종교 그룹 가운데서 최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므로 바리새파도 포함된다. 이들은 산해드린 의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예수 살해 음모는 종교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부터 더욱 바짝 긴장하였고 한시바삐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며 이들의 음모가 결국은 구체적 실행 단계로 옮겨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 예수의 활동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19:37-40 ; 21:38) 염두에 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 같은 묘사가 20:19에서도 나온다.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이 집권자들에게는 체제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섣불리 예수를 처형시켰다가는 많은 백성들로부터 거센 대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대적들은 온갖 허위 선전을 통해 군중들을 회유하고 선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3:21),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이 다가오자 더욱 근심하였다. 유월절이 되면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군중들의 전폭적(全幅的)인 지지를 받던 예수가 붙잡히게 되면 백성들이 순례자들과 합세해 크나큰 폭동을 일으킬까 염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전에 예수를 조용히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
에이셀덴 데 사타나스 에이스 유단 톤 칼루메논 이스카리오텐 온타 에크 투 아리드무 톤 도데카
개역개정,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새번역,3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우리말성경,3 사탄이 그 열둘 중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런데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
영어NIV,3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영어NASB,3 And Satan entered into Judas who was called Iscariot, belonging to the number of the twelve.
영어MSG,3 That’s when Satan entered Judas, the one called Iscariot. He was one of the Twelve.
영어NRSV,3 Then Satan entered into Judas called Iscariot, who was one of the twelve;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ισηλθεν δε ο σατανας εις ιουδαν τον επικαλουμενον ισκαριωτην οντα εκ του αριθμου των δωδεκα
라틴어Vulgate,3 intravit autem Satanas in Iudam qui cognominatur Scarioth unum de duodecim
히브리어Modern,3 והשטן נכנס ביהודה המכנה איש קריות והוא במספר שנים העשר׃
성 경: [눅22:3]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에 대한 묘사는 공관 복음서가 공통되게 다루고 있지만 배반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는 누가가 독특하다. 즉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스스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긴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가는 12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감으로써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사단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요 13:2에서는 ‘마귀가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반이 유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짓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적은 궁극적으로 사단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 사단은 첫 사람 아담 부처를 유혹하고 죄악에 빠뜨린 것을 비롯하여(창 3:1-13) 인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왔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마저 멸망에 빠지게 하려고 안감힘을 다 쓰고 있다(벧전 5:8). 따라서 인류 구속의 대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야말로 사단의 눈에는 가장 무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시종일관 예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에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예수는 부활을 통해 피와 죽음과 세상을 정복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렸을 것이다(창 3:15).
카이 아펠돈 쉬넬랄레센 토이스 아르키에류신 카이 스트라테고이스 토 포스 아우토이스 파라도 아우톤
개역개정,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새번역,4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하였다.
우리말성경,4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가톨릭성경,4 그리하여 그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함께 의논하였다.
영어NIV,4 And Judas went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officers of the temple guard and discussed with them how he might betray Jesus.
영어NASB,4 And he went away and discussed with the chief priests and officers how he might betray Him to them.
영어MSG,4 Leaving the others, he conferred with the high priests and the Temple guards about how he might betray Jesus to them.
영어NRSV,4 he went away and conferred with the chief priests and officers of the temple police about how he might betray him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απελθων συνελαλησεν τοις αρχιερευσιν και τοις στρατηγοις το πως αυτον παραδω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4 et abiit et locutus est cum principibus sacerdotum et magistratibus quemadmodum illum traderet eis
히브리어Modern,4 וילך וידבר עם ראשי הכהנים ושרי החיל איך ימסרנו אל ידם׃
성 경: [눅22:4]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군관들 – ‘군관들'(*, 스트라테고이스)이란 성전 수위대장을 지칭하는 말인데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제사장 다음가는 직책인 성전 지배인을 가리킨다(행 4:1 ; 5:24, 26). 여기서는 복수로서 수위 대장을 가리키며 무력적 힘을 집행할 수 있는 권력자를 지칭한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를 체포한다는 생각에서 볼 때 누가의 진술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방책(方策)을 의논하매 – 마태의 경우를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테니 얼마의 돈을 주겠느냐고 흥정했다(마 26:15). 방책이란 돈에 대한 흥정, 6절의 표현처럼 민중들이 없을 때 체포할 것 혹은 48절의 언급처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할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포함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의 확연한 배신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호기를 만났고 예수의 공생애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카이 에카레산 카이 쉬네덴토 아우토 아르귀리온 두나이
개역개정,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새번역,5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여,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우리말성경,5 그들은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영어NIV,5 They were delighted and agreed to give him money.
영어NASB,5 They were glad and agreed to give him money.
영어MSG,5 They couldn’t believe their good luck and agreed to pay him well.
영어NRSV,5 They were greatly pleased and agreed to give him money.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εχαρησαν και συνεθεντο αυτω αργυριον δουναι
라틴어Vulgate,5 et gavisi sunt et pacti sunt pecuniam illi dare
히브리어Modern,5 וישמחו ויאתו לתת לו כסף׃
성 경: [눅22: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저의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 – 의논 대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표현은 마가와 동일하다(막 14:11). 그러나 마태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은 30을 달아서 유다에게 직접 주었다고 언급한다(마 26:15). 여기서 은 삼십은 구약의 예언(슥 11:12)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의 죄과를 담당하셨다는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 즉 은화 30세겔(shekel)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사장과 성전 수비대장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악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태의 표현을 보면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며 예수를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급박(急迫)하게 진행시켰던 상황과 유다의 배신이 시기적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져 이 가운데 사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알게 해준다.
카이 엨소몰로게센 카이 에제타이 유카이리안 투 파라두나이 아우톤 아테르 오클루 아우토이스
개역개정,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새번역,6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말성경,6 유다도 이에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유다는 그것에 동의하고,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영어NIV,6 He consented, and watched for an opportunity to hand Jesus over to them when no crowd was present.
영어NASB,6 So he consented, and began seeking a good opportunity to betray Him to them apart from the crowd.
영어MSG,6 He gave them his word and started looking for a way to betray Jesus, but out of sight of the crowd.
영어NRSV,6 So he consented and began to look for an opportunity to betray him to them when no crowd was present.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ξωμολογησεν και εζητει ευκαιριαν του παραδουναι αυτον αυτοις ατερ οχλου
라틴어Vulgate,6 et spopondit et quaerebat oportunitatem ut traderet illum sine turbis
히브리어Modern,6 ויבטח אתם ויבקש תואנה למסרו אליהם שלא לעיני ההמון׃
성 경: [눅22: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롯 유다의 배반]
무리가 없을 때 – 이러한 방법은 대제사장들과 의논하여 나왔을 공산이 크다. 2절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기회나 민중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한편 가롯 유다의 배신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유다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될 수 있다. 유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있었으며(요 12:4-6) 더욱이 그가 예수를 따른 동기는 다분히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엘덴 데 헤 헤메라 톤 아쥐몬 엔 헤 에데이 뒤에스다이 토 파스카
개역개정,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새번역,7 ㉢유월절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7 유월절 양을 희생제물로 잡는 무교절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7 파스카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다.
영어NIV,7 Then came the day of Unleavened Bread on which the Passover lamb had to be sacrificed.
영어NASB,7 Then came the first day of Unleavened Bread on which the Passover lamb had to be sacrificed.
영어MSG,7 The Day of Unleavened Bread came, the day the Passover lamb was butchered.
영어NRSV,7 Then came the day of Unleavened Bread, on which the Passover lamb had to be sacrificed.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λθεν δε η ημερα των αζυμων εν η εδει θυεσθαι το πασχα
라틴어Vulgate,7 venit autem dies azymorum in qua necesse erat occidi pascha
히브리어Modern,7 ויבא יום המצות אשר זבוח יזבח בו הפסח׃
성 경: [눅22: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 마태는 ‘무교절 첫날’이라고 언급하고(마 26:17) 마가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고 묘사한다(막 14:12). 유월절의 끝남과 무교절의 시작은 시간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가의 진술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1절 주석 참고). 즉 니산월(4월) 14일 해질 무렵에 양을 잡았으므로(출 12:6) 해가 지면 유대인의 계산법에 의해 15일이 시작되어 무교절의 첫날이 된다.
카이 아페스테일렌 페트론 카이 요안넨 에이폰 포류덴테스 헤토이마사테 헤민 토 파스카 히나 파고멘
개역개정,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새번역,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8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우리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
가톨릭성경,8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셨다. “ 가서 우리가 먹을 파스카 음식을 차려라.”
영어NIV,8 Jesus sent Peter and John, saying, “Go and make preparations for us to eat the Passover.”
영어NASB,8 And Jesus sent Peter and John, saying, “Go and prepare the Passover for us, so that we may eat it.”
영어MSG,8 Jesus sent Peter and John off, saying, “Go prepare the Passover for us so we can eat it together.”
영어NRSV,8 So Jesus sent Peter and John, saying, “Go and prepare the Passover meal for us that we may eat it.”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απεστειλεν πετρον και ιωαννην ειπων πορευθεντες ετοιμασατε ημιν το πασχα ινα φαγωμεν
라틴어Vulgate,8 et misit Petrum et Iohannem dicens euntes parate nobis pascha ut manducemus
히브리어Modern,8 וישלח את פטרוס ואת יוחנן לאמר לכו והכינו לנו את הפסח ונאכלה׃
성 경: [눅22: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예수께서…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지시하는 이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다. 이러한 묘사는 19:29에서도 나타나듯이 누가의 독특한 의도를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주도로 일이 이루어지며 제자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명하시는데 10절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가라고 한 장소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비해야 할 것은 식사를 할 장소와 잡아야 할 양 그리고 무교병과 쓴나물 및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도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출 12:8).
호이 데 에이판 아우토 푸 델레이스 헤토이마소멘
개역개정,9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새번역,9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어디에다 준비하기를 바라십니까?”
우리말성경,9 그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어디에서 준비하면 좋겠습니까?”
가톨릭성경,9 그들이 “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영어NIV,9 “Where do you want us to prepare for it?” they asked.
영어NASB,9 They said to Him, “Where do You want us to prepare it?”
영어MSG,9 They said, “Where do you want us to do this?”
영어NRSV,9 They asked him, “Where do you want us to make preparations for it?”
헬라어신약Stephanos,9 οι δε ειπον αυτω που θελεις ετοιμασωμεν
라틴어Vulgate,9 at illi dixerunt ubi vis paremus
히브리어Modern,9 ויאמרו אליו באי זה מקום תחפץ כי נכין אותו׃
성 경: [눅22: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이 질문을 한 자는 예수의 지시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마가는 제자 중 두 명이라고 언급하였다(막 14:13).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에 대해서였다. 유대에서 유월절 행사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유월절 음식 역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만 먹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때만 되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모여들었다. 따라서 유월절때 예루살렘 성 안에서 유월절을 먹으며 거할 장소를 얻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의 여관(旅館)은 모두 꽉 찼을 것이고 집집마다 사람으로 만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방을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이두 에이셀돈톤 휘몬 에이스 텐 폴린 쉬난테세이 휘민 안드로포스 케라미온 휘다토스 바스타존 아콜루데사테 아우토 에이스 텐 오이키안 에이스 헨 에이스포류에타이
개역개정,10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새번역,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가거라.
우리말성경,10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
가톨릭성경,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거라.
영어NIV,10 He replied, “As you enter the city, a man carrying a jar of water will meet you. Follow him to the house that he enters,
영어NASB,10 And He said to them, “When you have entered the city, a man will meet you carrying a pitcher of water; follow him into the house that he enters.
영어MSG,10 He said, “Keep your eyes open as you enter the city. A man carrying a water jug will meet you. Follow him home.
영어NRSV,10 “Listen,” he said to them, “when you have entered the city, a man carrying a jar of water will meet you; follow him into the house he enter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ιδου εισελθοντων υμων εις την πολιν συναντησει υμιν ανθρωπος κεραμιον υδατος βασταζων ακολουθησατε αυτω εις την οικιαν ου εισπορευεται
라틴어Vulgate,10 et dixit ad eos ecce introeuntibus vobis in civitatem occurret vobis homo amphoram aquae portans sequimini eum in domum in qua intrat
히브리어Modern,10 ויאמר אליהם הנה אתם באים העירה ופגע אתכם איש נשא צפחת מים לכו אחריו אל הבית אשר יבוא שמה׃
성 경: [눅22:1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 성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로 보아 현재 머무는 장소가 성 밖 어느 곳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 진다. 즉 예루살렘 성 외각 지대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감람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21:37을 보면 예수께서 밤이면 성에서 나오셔서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 기슭의 베다니 마을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Meyer).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성안 어느 지점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넓은 성 안에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들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만 막연하게 언급하셨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왜 비밀스럽게 그 사람과 만나야 했는지이다. 아마도 성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유다가 배신을 한 상황에서 그리고 적대자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행동에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식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혼잡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내기 위해 비밀리에 장소를 물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문은 매사의 앞을 내다보실 수 있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을 엿보게 한다.
카이 에레이테 토 오이코데스포테 테스 오이키아스 레게이 소이 호 디다스칼로스 푸 에스틴 토 카탈뤼마 호푸 토 파스카 메타 톤 마데톤 무 파고
개역개정,11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새번역,11 그리고 그 집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그 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여라.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11 그 집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냐고 물으셨습니다’라고 말하라.
가톨릭성경,11 그리고 그 집주인에게 ‘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영어NIV,11 and say to the owner of the house, ‘The Teacher asks: Where is the guest room, where I may eat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영어NASB,11 “And you shall say to the owner of the house, ‘The Teacher says to you, “Where is the guest room in which I may eat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영어MSG,11 Then speak with the owner of the house: The Teacher wants to know, ‘Where is the guest room where I can eat the Passover meal with my disciples?’
영어NRSV,11 and say to the owner of the house, ‘The teacher asks you, “Where is the guest room, where I may eat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ερειτε τω οικοδεσποτη της οικιας λεγει σοι ο διδασκαλος που εστιν το καταλυμα οπου το πασχα μετα των μαθητων μου φαγω
라틴어Vulgate,11 et dicetis patri familias domus dicit tibi magister ubi est diversorium ubi pascha cum discipulis meis manducem
히브리어Modern,11 ואמרתם אל בעל הבית כה אמר לך הרב איה המלון אשר אכלה שם את הפסח עם תלמידי׃
성 경: [눅22:1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그 집 주인에게 –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제자들을 인도한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 또는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알 수 없다. 또 그 집이 마가의 집일 것이라고 행 1:13 ; 12:12를 근거로 하여 추측하기도 하며 물동이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마가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다만 전승으로 전해질 뿐이다.
선생님이 – 이 묘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나귀 새끼를 구하러 보내면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지시한 장면과 비슷하다(19:31). 직접화법으로 인용되는 문장이므로 ‘선생님’은 예수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시할 때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칭하면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신생님이라고 호칭했다면 또는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선생이라고 호칭했다면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비밀리에 하기 의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10절 주석 참조).
객실이 어디있느뇨 – 마치 암호(暗號)를 전달하는 듯한 이 어투는 실상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말이다(I.H. Marshall). 이 집이 여관업을 하는 집인지 아니면 민박하는 집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객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뤼마'(*)는 여관이나 여인숙의 방보다는 개인 주택의 객실을 의미한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2:7).
카케이노스 휘민 데잌세이 아나가이온 메가 에스트로메논 에케이 헤토이마사테
개역개정,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새번역,12 그러면 그 사람은 자리를 깔아 놓은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니, 너희는 거기에다 준비를 하여라.”
우리말성경,12 그러면 그가 잘 정돈된 큰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다. 그곳에서 준비하라.”
가톨릭성경,12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놓은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영어NIV,12 He will show you a large upper room, all furnished. Make preparations there.”
영어NASB,12 “And he will show you a large, furnished upper room; prepare it there.”
영어MSG,12 He will show you a spacious second-story room, swept and ready. Prepare the meal there.”
영어NRSV,12 He will show you a large room upstairs, already furnished. Make preparations for us ther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κεινος υμιν δειξει ανωγεον μεγα εστρωμενον εκει ετοιμασατε
라틴어Vulgate,12 et ipse vobis ostendet cenaculum magnum stratum et ibi parate
히브리어Modern,12 והוא יראה אתכם עליה גדולה מצעה שם תכינו׃
성 경: [눅22:1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 집주인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는 이 묘사는 이미 유월절을 위한 준비가 갖춰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집주인이 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은 헬라어 ‘에스트로산'(*)을 번역한 말인데 본래 자리를 펴거나 까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 이미 융단을 깔고 식탁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나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미리 부탁을 받고 식사준비를 해두었거나 아니면 언제든지 손님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자리를 펴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방만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예비하라’라는 지시로 볼 때 음식까지 준비된 것이 아니라 방만 준비된 것으로 이해함이 적절할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인 까닭에 예루살렘에 집이 없었으므로 잘 아는 사람의 다락방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이 다락방의 주인은 필시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하며 예수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을 것이다. 전하는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예수께 호의적이었던 이 사람의 방은 예수 부활 후 설령 강림 후 복음운동의 주요 기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펠돈테스 데 휴론 카도스 에이레케이 아우토이스 카이 헤토이마산 토 파스카
개역개정,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새번역,13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였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13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가톨릭성경,13 제자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영어NIV,13 They left and found things just as Jesus had told them. So they prepared the Passover.
영어NASB,13 And they left and found everything just as He had told them; and they prepared the Passover.
영어MSG,13 They left, found everything just as he told them, and prepared the Passover meal.
영어NRSV,13 So they went and found everything as he had told them; and they prepared the Passover meal.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πελθοντες δε ευρον καθως ειρηκεν αυτοις και ητοιμασαν το πασχα
라틴어Vulgate,13 euntes autem invenerunt sicut dixit illis et paraverunt pascha
히브리어Modern,13 וילכו וימצאו כאשר דבר אליהם ויכינו את הפסח׃
성 경: [눅22:1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 예수께서 일러준대로 모든 일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묘사들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단순한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신비적 힘이 작용하여 더욱 그 엄숙함과 신비성이 고조된 최후의 만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모든 일에 신적인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카이 호테 에게네토 헤 호라 아네페센 카이 호이 아포스톨로이 쉰 아우토
개역개정,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새번역,14 시간이 되어서,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 사도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우리말성경,14 시간이 되자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영어NIV,14 When the hour came, Jesus and his apostles reclined at the table.
영어NASB,14 When the hour had come, He reclined at the table, and the apostles with Him.
영어MSG,14 When it was time, he sat down, all the apostles with him,
영어NRSV,14 When the hour came, he took his place at the table, and the apostles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οτε εγενετο η ωρα ανεπεσεν και οι δωδεκα αποστολοι συν αυτω
라틴어Vulgate,14 et cum facta esset hora discubuit et duodecim apostoli cum eo
히브리어Modern,14 ויהי כאשר הגיעה השעה ויסב הוא ושנים עשר השליחים אתו׃
성 경: [눅22:1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때가 이르매 – 유월절 식사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 해질 때를 가리킨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식사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최후 만찬의 엄숙성과 다른 유월절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제자'(*, 마데케스)라는 말 대신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대표, 사자 등의 뜻을 지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누가는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월절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에 ‘함께 앉았다’고 묘사하는 헬라어는 ‘아나피프토'(*)의 제2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눕다’, ‘비스듬히 기대다’이다. 아마도 식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그들의 습관에 따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일어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든채로 급히 먹는 것이었으나(출 12:11) 당시는 약식화(略式化)되어 일반 식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했다 한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에피뒤미아 에페뒤메사 투토 토 파스카 파게인 멛 휘몬 프로 투 메 파데인
개역개정,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새번역,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15 그러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유월절 음식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
가톨릭성경,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영어NIV,15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영어NASB,15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rnest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영어MSG,15 and said, “You’ve no idea how much I have looked forward to eating this Passover meal with you before I enter my time of suffering.
영어NRSV,15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επιθυμια επεθυμησα τουτο το πασχα φαγειν μεθ υμων προ του με παθειν
라틴어Vulgate,15 et ait illis desiderio desideravi hoc pascha manducare vobiscum antequam patiar
히브리어Modern,15 ויאמר אליהם נכסף נכספתי לאכל אתכם את הפסח הזה לפני ענותי׃
성 경: [눅22:1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식사 때(니산월 14일 해진 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하루 전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시간이면 이미 붙들리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9:14). 여기서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자신의 고난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가 단순히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각오와 결단이 서려있는 기념적인 식사임을 알 수 있다.
너희와 함께 –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의미심장한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자 하는 심정은 이제까지 함께 활동해 온 지난 날의 모든 추억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되살리고 자신의 일을 제자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과의 영원한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을 것이다.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유월절의 식사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뿌린 후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유월절을 먹는다’는 말은 ‘유월절 식사를 한다’는 말인데 ‘먹다’의 목적어인 ‘유월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유월절을 식사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식사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I. H. Marshall). 따라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는 어린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C.K. Barrett, Jeremias). 그래서 식사의 종교적 해석을 시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유월절 식사는 전체적 정황을 볼 때 기념적 성격을 갖는 식사이므로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종교적 식사보다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새로운 차원의 식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식사는 다름아닌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는바, 장차 이루어질 그의 죽음을 의식하시고 제자들과 더불어 사전에 기념을 한 선견적 식사였다. 예수는 이 같은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간절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10-12절에서처럼 그는 어렵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고 비밀스럽게 식사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요 14-16장) 성찬 예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이다.
레고 가르 휘민 호티 우 메 파고 아우토 헤오스 호투 플레로데 엔 테 바실레이아 투 데우
개역개정,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새번역,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다시는 그것을 먹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영어NIV,16 For I tell you, I will not eat it again until it finds fulfillment in the kingdom of God.”
영어NASB,16 for I say to you, I shall never again eat it until it is fulfilled in the kingdom of God.”
영어MSG,16 It’s the last one I’ll eat until we all eat it together in the kingdom of God.”
영어NRSV,16 for I tell you, I will not eat it until it is fulfilled in the kingdom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ουκετι ου μη φαγω εξ αυτου εως οτου πληρωθη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16 dico enim vobis quia ex hoc non manducabo illud donec impleatur in regno Dei
히브리어Modern,16 כי אמר אני לכם אינני אכל אותו עוד עד כי ימלא ב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22:1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 유월절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 그 기한은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기까지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드러났듯이 유월절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 먼저 유월절의 의미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공동체 국가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아직도 유대 민족은 참다운 유월절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을 이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유월절이 아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집권자들의 착취가 민중을 억압하는 상황에서는 유월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성이 뿌리채 뽑아져 변화된 사람이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않겠다는말을 함으로써 참다운 유월절을 기대하도록 제자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다(Jeremias, Ellis 등). 둘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의 친교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게 될 만찬은 유대의 전통적 유월절이 아니다. 만민이 참여하게 되는 성찬식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만찬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성찬 예식의 전조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행 10:41). 이 새로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지금까지 실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카이 뎈사메노스 포테리온 유카리스테사스 에이펜 라베테 투토 카이 디아메리사테 에이스 헤아우투스
개역개정,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새번역,17 그리고 잔을 받아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우리말성경,17 그리고 예수께서는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받아 너희가 서로 나눠 마시라.
가톨릭성경,17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영어NIV,17 After taking the cup, he gave thanks and said, “Take this and divide it among you.
영어NASB,17 And when He had taken a cup and given thanks, He said, “Take this and share it among yourselves;
영어MSG,17 Taking the cup, he blessed it, then said, “Take this and pass it among you.
영어NRSV,17 Then he took a cup, and after giving thanks he said, “Take this and divide it among your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δεξαμενος ποτηριον ευχαριστησας ειπεν λαβετε τουτο και διαμερισατε εαυτοις
라틴어Vulgate,17 et accepto calice gratias egit et dixit accipite et dividite inter vos
히브리어Modern,17 ויקח את הכוס ויברך ויאמר קחו אתה וחלקו ביניכם׃
성 경: [눅22:1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레고 가르 휘민 호티 우 메 피오 아포 투 뉜 아포 투 게네마토스 테스 암펠루 헤오스 후 헤 마실레이아 투 데우 엘데
개역개정,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새번역,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성경,18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내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영어NIV,18 For I tell you I will not drink again of the fruit of the vine until the kingdom of God comes.”
영어NASB,18 for I say to you, I will not drink of the fruit of the vine from now on until the kingdom of God comes.”
영어MSG,18 As for me, 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kingdom of God arrives.”
영어NRSV,18 for I tell you that from now on I will not drink of the fruit of the vine until the kingdom of God come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ου μη πιω απο του γεννηματος της αμπελου εως οτου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ελθη
라틴어Vulgate,18 dico enim vobis quod non bibam de generatione vitis donec regnum Dei veniat
히브리어Modern,18 כי אמר אני לכם שתה לא אשתה מעתה מתנובת הגפן עד כי תבוא 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22:1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기한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식사에 대한 것과 비슷한 어투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구절 역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유월절의 포도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의 포도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의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카이 라본 아르톤 유카리스테사스 에클라센 카이 에도켄 아우토이스 레곤 투토 에스틴 토 소마 무 토 휘페르 휘몬 디도메논 투토 포이에이테 에이스 텐 에멘 아남네신
개역개정,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새번역,19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이 없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기에서부터 20절까지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없음
우리말성경,19 그리고 예수께서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해 나를 기념하라.”
가톨릭성경,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영어NIV,19 And he took bread, gave thanks and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saying, “This is my body given for you;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영어NASB,19 And when He had taken some bread and given thanks, He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saying, “This is My body which is given for you;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영어MSG,19 Taking bread, he blessed it,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saying, “This is my body, given for you. Eat it in my memory.”
영어NRSV,19 Then he took a loaf of bread, and when he had given thanks, he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saying, “This is my body, which is given for you.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λαβων αρτον ευχαριστησας εκλασεν και εδωκεν αυτοις λεγων τουτο εστιν το σωμα μου το υπερ υμων διδομενον τουτο ποιειτε εις την εμην αναμνησιν
라틴어Vulgate,19 et accepto pane gratias egit et fregit et dedit eis dicens hoc est corpus meum quod pro vobis datur hoc facite in meam commemorationem
히브리어Modern,19 ויקח את הלחם ויברך ויבצע ויתן להם לאמר זה גופי הנתן בעדכם זאת עשו לזכרוני׃
성 경: [눅22:1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 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카이 토 포테리온 호사우토스 메타 토 데이프네사이 레곤 투토 토 포테리온 헤 카이네 디아데케 엔 토 하이마티 무 토 휘페르 휘몬 엨퀸노메논
개역개정,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번역,20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우리말성경,20 빵을 드신 후 예수께서 마찬가지로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가톨릭성경,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영어NIV,20 In the same way, after the supper he took the cup,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which is poured out for you.
영어NASB,20 And in the same way He took the cup after they had eaten, saying, “This cup which is poured out for you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영어MSG,20 He did the same with the cup after supper, saying,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written in my blood, blood poured out for you.
영어NRSV,20 And he did the same with the cup after supper, saying, “This cup that is poured out for you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ωσαυτως και το ποτηριον μετα το δειπνησαι λεγων τουτο το ποτηριον η καινη διαθηκη εν τω αιματι μου το υπερ υμων εκχυνομενον
라틴어Vulgate,20 similiter et calicem postquam cenavit dicens hic est calix novum testamentum in sanguine meo quod pro vobis funditur
히브리어Modern,20 וכן גם את הכוס אחר הסעודה לאמר זו הכוס היא הברית החדשה בדמי הנשפך בעדכם׃
성 경: [눅22:2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 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케하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붓다’로 번역된 헬라어 ‘여퀸노메논'(*)은 ‘여케오'(*)에서 유래한 말인데 ‘피를 흘린다’, ‘피를 쏟는다’는 뜻과 ‘술을 붓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붓는다’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피흘림과 그 죄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플렌 이두 헤 케이르 투 파라디돈토스 메 멭 에무 에피 테스 트라페제스
개역개정,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새번역,21 그러나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우리말성경,21 그러나 보라. 나를 배반할 자의 손이 지금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가톨릭성경,21 “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영어NIV,21 But the hand of him who is going to betray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영어NASB,21 “But behold, the hand of the one betraying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영어MSG,21 “Do you realize that the hand of the one who is betraying me is at this moment on this table?
영어NRSV,21 But see, the one who betrays me is with me, and his hand is on the table.
헬라어신약Stephanos,21 πλην ιδου η χειρ του παραδιδοντος με μετ εμου επι της τραπεζης
라틴어Vulgate,21 verumtamen ecce manus tradentis me mecum est in mensa
히브리어Modern,21 אך הנה יד המסר אותי אתי על השלחן׃
성 경: [눅22:2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그러나 보라 –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대립되는 문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그러나'(*, 플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로 세운 계약이 지금부터 언급되는 배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즉 구원의 약속은 배반자를 제외시킨다는 말이다.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강조하기 의해 ‘보라'(*, 이두)라는 누가만의 강조법을 사용한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반자가 제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는 이 같은 누가의 암시는 마태와 마가의 진술과 차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배신의 예고가 마태와 마가에서는 식사 시작 또는 식사 중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된 반면(마 26:21 ; 막 14:18), 누가는 식사를 마친후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 13:26에서는 빵을 한 조각 찍어 준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식사 초반 또는 식사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이 배반의 예고를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교적 짤막하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직접 지목하고 마태와 마가는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언급없이 암시적으로만 묘사한 점으로 보아 제자의 배신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식사 후에 배열함으로써 성만찬 예식과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을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반자는 ‘나를 파는 자'(*, 파라디도미)로 묘사되었는데 5, 6절에 이미 언급된 유다의 배신과 돈을 받기로 약속된 이야기를 전제한 것이다. 누가는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언급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배반자가 예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마태의 경우는 그릇에 예수와 함께 손을 넣은 자가 유다임을 유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힌다(마 26:25). 반해 식탁 위에 손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손을 가리킬 수 있지만(B. Lohse) 더 확장된 의미로 볼 때 식탁은 식사를 나누는 장소이므로 친교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Rehkopf). 이는 예수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라는 시 41:9의 말과 일치되는 바, 예수의 배신당함이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졌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든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길이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인간 편에서는 다만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선택에의 책임이 뒤따른다.
호티 호 휘오스 멘 투 안드로푸 카타 토 호리스메논 포류에타이 플렌 우아이 토 안드로포 에케이노 디 후 파라디도타이
개역개정,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새번역,22 인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우리말성경,22 인자는 정해진 대로 갈 것이지만 그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영어NIV,22 The Son of Man will go as it has been decreed, but woe to that man who betrays him.”
영어NASB,22 “For indeed, the Son of Man is going as it has been determined; but woe to that man by whom He is betrayed!”
영어MSG,22 It’s true that the Son of Man is going down a path already marked out–no surprises there. But for the one who turns him in, turns traitor to the Son of Man, this is doomsday.”
영어NRSV,22 For the Son of Man is going as it has been determined, but woe to that one by whom he is betraye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ο μεν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πορευεται κατα το ωρισμενον πλην ουαι τω ανθρωπω εκεινω δι ου παραδιδοται
라틴어Vulgate,22 et quidem Filius hominis secundum quod definitum est vadit verumtamen vae illi homini per quem traditur
히브리어Modern,22 כי הן בן האדם הלך לו כפי אשר נחרץ עליו אבל אוי לאיש ההוא אשר על ידו ימסר׃
성 경: [눅22:2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앞절에서 암시한 후 여기서는 자신의 고난이 또한 예정된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한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9:22). ‘작정된 대로 가거니’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배신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예측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운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한대로 의연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누가는 앞절에서처럼 예수를 팔 사람을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라고 분명하게 저주받을 사람을 지목한다. ‘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는 저주문에 사용되는 단어이다(10:13 ; 마 11:21 ; 18:7 ; 막 13:17). 이와 같은 저주는 마 27:3-5에 보면 유다가 목매어 죽음으로써 또는 행 1:18, 19절의 언급처럼 몸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죽음으로써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아우토이 에릌산토 쉬제테인 프로스 헤아우투스 토 티스 아라 에이에 엨스 아우톤 호 투토 멜론 프라쎄인
개역개정,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새번역,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자기들끼리 서로 물었다.
우리말성경,23 그들은 자기들 중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하고 서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23 그러자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영어NIV,23 They began to question among themselves which of them it might be who would do this.
영어NASB,23 And they began to discuss among themselves which one of them it might be who was going to do this thing.
영어MSG,23 They immediately became suspicious of each other and began quizzing one another, wondering who might be about to do this.
영어NRSV,23 Then they began to ask one another, which one of them it could be who would do thi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αυτοι ηρξαντο συζητειν προς εαυτους το τις αρα ειη εξ αυτων ο τουτο μελλων πρασσειν
라틴어Vulgate,23 et ipsi coeperunt quaerere inter se quis esset ex eis qui hoc facturus esset
히브리어Modern,23 והם החלו לחקר איש את רעהו מי הוא זה מהם אשר יעשה זאת׃
성 경: [눅22:2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 예수가 특정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12명 중 어느 누구가 배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함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혼란이 온 것을 보여준다. 12명의 제자 모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들 중에서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Surely not I. Rabbi?, NIV)라고 자수하는 듯한 말을 하고 곧이어 예수가 긍정함으로써 논쟁하나 장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마 26:25). 누가는 유다 한 사람보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 전체의 반응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을 유다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에게네토 데 카이 필로네이키아 엔 아우토이스 토 티스 아우톤 도케이 에이나이 메이존
개역개정,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새번역,24 제자들 가운데서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는 물음을 놓고, 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말성경,24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가톨릭성경,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영어NIV,24 Also a dispute arose among them as to which of them was considered to be greatest.
영어NASB,24 And there arose also a dispute among them as to which one of them was regarded to be greatest.
영어MSG,24 Within minutes they were bickering over who of them would end up the greatest.
영어NRSV,24 A dispute also arose among them as to which one of them was to be regarded a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εγενετο δε και φιλονεικια εν αυτοις το τις αυτων δοκει ειναι μειζων
라틴어Vulgate,24 facta est autem et contentio inter eos quis eorum videretur esse maior
히브리어Modern,24 וגם מריבה היתה ביניהם מי יחשב להיות הגדול בהם׃
성 경: [눅22:2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누가 예수의 배반자인가에 대해 논쟁한 직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누구냐는 심각한 물음에 대한 해결점 없이 갑자기 자신들의 자리다툼으로 이야기가 전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 후 곧바로 감람산으로 간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마 26:30 ; 막 14:26) 누가가 언급한 이 구절의 위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제자들 간에 자리다툼이 있었다는 암시는 9:46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마가도 9:33-35 ; 10:35-41에서 두 차례 인급한 점으로 보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로 갈등(葛藤)이 여러 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의 배신에 대한 언급과 고난이 임박했다는 분위기에서 9:46과 마찬가지로 자리 다툼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 접속사 ‘카이'(*)를 사용하여 앞절과 연결하고 있으며 앞절의 ‘서로 묻되'(*, 쉬제테인)라는 단어와 상응하여 ‘다툼'(*, 필로네이키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 본문을 누가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제자들간의 갈등 묘사라고 볼 수 있으며 문장의 위치에 대한 의심도 해결이 된다. ‘다툼'(dispute)이라는 단어는 22절의 ‘서로묻되’라는 말 보다 강한 의미로서 ‘싸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같은 강조는 제자들이 배신자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의 위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소극적 논쟁에서 ‘내가 더 크다’라는 적극적 논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제가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회피하고 자신들의 이기적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다.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이 바실레이스 톤 에드논 퀴리유우신 아우톤 카이 호이 엨수시아존테스 아우톤 유에르게타이 칼룬타이
개역개정,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새번역,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왕들은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며 권세 부리는 자들은 자칭 ‘백성들의 은인’이라고 한다.
가톨릭성경,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영어NIV,25 Jesus said to them, “The king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call themselves Benefactors.
영어NASB,25 And He said to them, “The king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who have authority over them are called ‘Benefactors.’
영어MSG,25 But Jesus intervened: “Kings like to throw their weight around and people in authority like to give themselves fancy titles.
영어NRSV,25 But he said to them, “The king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ose in authority over them are called benefactor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οι βασιλεις των εθνων κυριευουσιν αυτων και οι εξουσιαζοντες αυτων ευεργεται καλουνται
라틴어Vulgate,25 dixit autem eis reges gentium dominantur eorum et qui potestatem habent super eos benefici vocantur
히브리어Modern,25 ויאמר אליהם מלכי הגוים רדים בהם ושליטיהם יקראו עשי חסד׃
성 경: [눅22:2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 이 구절은 마 20:25 ; 막 10:42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정치 권력의 예를 들면서 교훈을 베푸신다. 누가가 언급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국가의 공권력(公權力)을 장악한 통치자와 그 관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상황하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주관하다’의 헬라어 ‘퀴리유오'(*)는 ‘주인(*, 퀴리오스)이 된다’는 뜻으로서 주인이 노예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집권자와 민중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의 말이다.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 여기서 말하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헬라어 ‘유에르게테스'(*)는 ‘좋다’는 뜻의 ‘유'(*)와 ‘공적 행동’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이 합쳐져서 된 복합어로서 ‘선한 일을 위해 힘쓰는 자’ 또는 ‘박애주의자’ 등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 같은 칭호는 이집트나(Ptolemy , Ptolemy) 시리아(Antiochus ) 로마(Trajain) 등지에서 폭군적 지배자들에게 붙여졌고 유다에서도 오니아스 세 대사제(Onias )에게 이 칭호가 붙여졌다(I. H. Marshall).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의 백성 위에 군림하고 최상의 군주로 행세하는데서 그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다. 이 말 역시 폭군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며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휘메이스 데 우크 후토스 알 호 메이존 엔 휘민 기네스도 호스 호 네오테로스 카이 호 헤구메노스 호스 호 디아코논
개역개정,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새번역,26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말성경,26 그러나 너희가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돼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돼야 한다.
가톨릭성경,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영어NIV,26 But you are not to be like that. Instead, the greatest among you should be like the youngest, and the one who rules like the one who serves.
영어NASB,26 “But it is not this way with you, but the one who is the greatest among you must become like the youngest, and the leader like the servant.
영어MSG,26 It’s not going to be that way with you. Let the senior among you become like the junior; let the leader act the part of the servant.
영어NRSV,26 But not so with you; rather the greatest among you must become like the youngest, and the leader like one who serves.
헬라어신약Stephanos,26 υμεις δε ουχ ουτως αλλ ο μειζων εν υμιν γενεσθω ως ο νεωτερος και ο ηγουμενος ως ο διακονων
라틴어Vulgate,26 vos autem non sic sed qui maior est in vobis fiat sicut iunior et qui praecessor est sicut ministrator
히브리어Modern,26 ואתם לא כן כי הגדול בכם יהיה כצעיר והמשל יהיה כמשרת׃
성 경: [눅22:2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여기서 가리키는 ‘너희’는 제자들이지만 앞절에서 말한 ‘이방인들'(Gentiles)에 대칭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누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즉 세상의 인간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되어 있고 그 지배자의 횡포가 오히려 정당화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한 것으로 25절에서 제사한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누가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즉 이는 당시 교회 내에 자리의 높고 낮음에 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자'(the greatest)에 대비되는 ‘젊은 자’는 헬라어 ‘호 네오 테로스'(*)를 번역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아주 어린 자'(youth)를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큰 자’와 대칭되어 아주 어리고 보잘 것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 참된 지도자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의 지배 구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서 나타나는 교권적(敎權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뒤엎고 모두가 서로 섬기는 위치에서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 같은 요청이 인간의 모든 공동체가 바르게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티스 가르 메이존 호 아나케이메노스 에 호 디아코논 우키 호 아나케이메노스 에고 데 엔 메소 휘몬 에이미 호스 호 디아코논
개역개정,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새번역,27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말성경,27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냐, 그를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높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가톨릭성경,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영어NIV,27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i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영어NASB,27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recline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recline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the one who serves.
영어MSG,27 “Who would you rather be: the one who eats the dinner or the one who serves the dinner? You’d rather eat and be served, right? But I’ve taken my place among you as the one who serves.
영어NRSV,27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헬라어신약Stephanos,27 τις γαρ μειζων ο ανακειμενος η ο διακονων ουχι ο ανακειμενος εγω δε ειμι εν μεσω υμων ως ο διακονων
라틴어Vulgate,27 nam quis maior est qui recumbit an qui ministrat nonne qui recumbit ego autem in medio vestrum sum sicut qui ministrat
히브리어Modern,27 כי מי הוא הגדול אם המסב או המשרת הלא המסב ואני הנני בתוככם כמו המשרת׃
성 경: [눅22:2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그냐 –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비시킨 반문 형식의 이 비유는 앞절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큰 자가 작은 자로, 지도자가 섬기는 자로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破格的) 명제와 현실적 가치 기준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26절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앉아서 먹는 자’는 일반적으로 유대 생활 속에서 종을 둔 주인 또는 앞절에서 언급했던 지도자, 집권자들과 시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뜻한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26절에서 언급된 ‘젊은 자’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와갈은 대비적 비유를 이야기한 후 예수는 너무도 자명한 대답인 앉아 먹는자가 크다고 말하면서 대비적 효과는 고조시키고 있는데 곧이어 언급되는 문장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6절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확신시키는 이 말은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훈계의 결론에 해당된다. 특히 예수를 배우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곧 제자들에게 규범이 되고 모범이 되는 스승을 배워야 함과 아울러 그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는 지금 자신이 제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먹는 비유를 들었다는 점에서 예수가 제가들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같은 추측은 17-20절까지의 내용을 전제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예수의 역할은 섬기는 자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적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예수 사역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I. H. Marshall, J. Weiss). 그래서 바이스(J. Weiss)는, 예수가 시중든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자신은 섬김을 밭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마 20:28). 예수께서는 먼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아니라(요 13:4)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휘메이스 데 에스테 호이 디아메메네코테스 멭 에무 엔 토이스 페이라스모이스 무
개역개정,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새번역,28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우리말성경,28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다.
가톨릭성경,28 “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영어NIV,28 You are those who have stood by me in my trials.
영어NASB,28 “You are those who have stood by Me in My trials;
영어MSG,28 And you’ve stuck with me through thick and thin.
영어NRSV,28 “You are those who have stood by me in my trials;
헬라어신약Stephanos,28 υμεις δε εστε οι διαμεμενηκοτες μετ εμου εν τοις πειρασμοις μου
라틴어Vulgate,28 vos autem estis qui permansistis mecum in temptationibus meis
히브리어Modern,28 ואתם הם העמדים עמדי עד עתה בנסיונתי׃
성 경: [눅22:2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나의 모든 시험 중에…함께 한 자들인즉 – 이 구절은 마지막 작별 인사와도 같은 암시를 준다. 이제까지의 공성애 활동을 하는 동안 동고 동락(同苦同樂)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들의 고생을 격려하고 계신다. 24절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제자들의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리켜 자신의 모든 시험 때에 함께 하여 준 고맙고 장한 제자들로 묘사하며 제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범자들로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들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격려 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 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이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온 수많은 ‘위험들’ 또는 ‘고통’과 ‘시련들'(trial)을 뜻한다.
카고 디아티데마이 휘민 카도스 디에데토 모이 호 파테르 무 바실레이안
개역개정,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새번역,29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우리말성경,29 그러니 내 아버지께서 내게 나라를 맡겨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맡긴다.
가톨릭성경,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영어NIV,29 And I confer on you a kingdom, just as my Father conferred one on me,
영어NASB,29 and just as My Father has granted Me a kingdom, I grant you
영어MSG,29 Now I confer on you the royal authority my Father conferred on me
영어NRSV,29 and I confer on you, just as my Father has conferred on me, a kingdom,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γω διατιθεμαι υμιν καθως διεθετο μοι ο πατηρ μου βασιλειαν
라틴어Vulgate,29 et ego dispono vobis sicut disposuit mihi Pater meus regnum
히브리어Modern,29 לכן אני מנחיל אתכם כאשר הנחילני אבי את המלכות׃
성 경: [눅22:2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과 과업을 넘겨 주기전에 그 권한과 과업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여기서 언급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다. ‘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왕권을 지상에서 받았으므로 이미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뜻하며 그 선포 내용에 대한 보증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에게 맡겨 – 이제 하늘로부터 온 그 권한과 권위가 제자들에게로 옮겨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위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위임이 하나님의 위임임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건설과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 뒤에도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히나 에스데테 카이 피네테 에피 테스 트라페제스 무 엔 테 바실레이아 무 카이 카데세스데 에피 드로논 타스 도데카 퓔라스 크리논테스 투 이스라엘
개역개정,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새번역,3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우리말성경,30 너희는 내 나라 안에 들어와 내 밥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영어NIV,30 so that you may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and sit on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영어NASB,30 that you may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and you will sit on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영어MSG,30 so you can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and be strengthened as you take up responsibilities among the congregations of God’s people.
영어NRSV,30 so that you may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and you will sit on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헬라어신약Stephanos,30 ινα εσθιητε και πινητε επι της τραπεζης μου εν τη βασιλεια μου και καθισησθε επι θρονων κρινοντες τας δωδεκα φυλας του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30 ut edatis et bibatis super mensam meam in regno et sedeatis super thronos iudicantes duodecim tribus Israhel
히브리어Modern,30 למען תאכלו ותשתו על שלחני במלכותי וישבתם על כסאות לשפט את שנים עשר שבטי ישראל׃
성 경: [눅22:3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내 나라에 있어 – 25-29절이 섬기는 자의 도리를 말한 반면 본절은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한 제자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종말적 심판의 때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마 19:28절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라고 언급되는바 이는 세상이 변혁된 새세계 곧 종말론적(eschatological)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16절에서 하늘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解放)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 마 19:28에서는 ‘열 두 보좌’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제자가 모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자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느 진술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포함시킬 수 없어 슷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I.H. Marshall). 그러나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즉 열 두 지과는 곧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통치 구조의 변혁이다. 즉 25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통치 구조는 사라지고 26절에서 언급된 형태의 통치 구조가 실현되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형태의 통치는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섬기는 통치가 확장되어가고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암시되고 있다.
시몬 시몬 이두 호 사타나스 엨세테사토 휘마스 투 시니아사이 호스 톤 시톤
개역개정,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새번역,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 ㉫또는 ‘너희를 체질할 허락을 이미 받았다’
우리말성경,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요구했다.
가톨릭성경,31 “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영어NIV,31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as wheat.
영어NASB,31 “Simon, Simon, behold, Satan has demanded permission to sift you like wheat;
영어MSG,31 “Simon, stay on your toes. Satan has tried his best to separate all of you from me, like chaff from wheat.
영어NRSV,31 “Simon, Simon, listen! Satan has demanded to sift all of you like wheat,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ιπεν δε ο κυριος σιμων σιμων ιδου ο σατανας εξητησατο υμας του σινιασαι ως τον σιτον
라틴어Vulgate,31 ait autem Dominus Simon Simon ecce Satanas expetivit vos ut cribraret sicut triticum
히브리어Modern,31 ויאמר האדון שמעון שמעון הנה תבע אתכם השטן לזרותכם כחטים׃
성 경: [눅22:3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청구 하였으나 –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였듯이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와 보상에 대한 약속을 한 직후 베드로의 배신(背信)을 예고한다. 그러나 독특한 점은 유다의 배신 예고에서는 언급한 바 없는 사단의 역할에 대해서 예수가 직접 언급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배신에 대한 저주와 경고라기 보다는 애정을 담고 있는 충고와 걱정이다. 특히 여기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두번씩 반복하여 부름으로써 충고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단이 청구했다’는 표현은 배신의 행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적(他者的)인 악령의 힘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까부르듯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니아조'(*)는 ‘체를 흔들다’, ‘체를 치다’는 뜻이다. 본절에 은유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의 정확한적용례(paradigm)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다음 새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는, 알곡과 쭉정이를 걸러내는 시련을 통하여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들을 분리한다는 견해이다(Jeremias). 둘째는, 사단이 시련의 체를 통해 제자들을 참소(讒訴)할 증거들을 찾고 있다는 견해이다(Foerster).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욥을 시험하여 악한 증거를 찾아 욥을 공격하고자 했던 사단의 시도를 상기케 한다(욥 1:6-12). 셋째는, 여기서 체를 흔드는 것은 제자들을 구분하여 걸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입증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Lanrange, Fuchs, Schurimann). 이 세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곡식을 체질하는 것은 원래 쪽정이를 날려 보내기 위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는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제는 제자들이 시련의 와중에서 서느냐 아니면 넘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에고 데 에데에덴 페리 수 히나 메 에클리페 헤 피스티스 수 카이 쉬 포테 에피스트렢사스 스테리손 투스 아델푸스 수
개역개정,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새번역,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우리말성경,32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너를 위해 기도했다. 네가 돌이키고 나면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여라.”
가톨릭성경,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영어NIV,32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영어NASB,32 but I have prayed for you,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you, when once you have turned again, strengthen your brothers.”
영어MSG,32 Simon, I’ve prayed for you in particular that you not give in or give out. When you have come through the time of testing, turn to your companions and give them a fresh start.”
영어NRSV,32 but I have prayed for you that your own faith may not fail; and you, when once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32 εγω δε εδεηθην περι σου ινα μη εκλειπη η πιστις σου και συ ποτε επιστρεψας στηριξον τους αδελφους σου
라틴어Vulgate,32 ego autem rogavi pro te ut non deficiat fides tua et tu aliquando conversus confirma fratres tuos
히브리어Modern,32 ואני התפללתי בעדך אשר לא תכלה אמונתך ואתה כאשר תשוב חזק את אחיך׃
성 경: [눅22:3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 여기서 배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배신의 책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굳세지기를 기도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믿음이 떨어질때 예수께 대한 배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를 시사해 준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베드로에게 가장 큰 신뢰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여기서 ‘돌이킨 후’의 헬라어 ‘에피스트레포'(*)는 ‘회개한다’, ‘돌아선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베드로가 변절(變節)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고없이 ‘회개하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변절을 간접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서 제자들을 향해 슥 13:7을 인용하여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마 26:30-32 ; 막 14:26-28) 누가는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제자들의 자랑스럽지 못한 변절의 모습을 축소하고 완곡한 형태로 수정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호 데 에이펜 아우토 퀴리에 메타 수 헤토이모스 에이미 카이 에이스 퓔라켄 카이 에이스 다나톤 포류에스다이
개역개정,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새번역,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33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저는 주와 함께라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각오가 돼 있습니다.”
가톨릭성경,33 베드로가 “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3 But he replied, “Lord, I am ready to go with you to prison and to death.”
영어NASB,33 But he said to Him, “Lord, with You I am ready to go both to prison and to death!”
영어MSG,33 Peter said, “Master, I’m ready for anything with you. I’d go to jail for you. I’d die for you!”
영어NRSV,33 And he said to him, “Lord, I am ready to go with you to prison and to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33 ο δε ειπεν αυτω κυριε μετα σου ετοιμος ειμι και εις φυλακην και εις θανατον πορευεσθαι
라틴어Vulgate,33 qui dixit ei Domine tecum paratus sum et in carcerem et in mortem ire
히브리어Modern,33 והוא אמר אליו אדני הנני נכון ללכת אתך גם לבית האסורים גם למות׃
성 경: [눅22:3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베드로는 예수의 말 속에서 암시된 뜻을 이해하고 예수와 함께 끝까기 같은 길을 가겠다고 호언(豪言)한다. 마태와 마가는 다른 사람이 다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남과 비교하여 강경하게 장담한다(마 26:33 ; 막 14:29). 전체적으로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충성하겠다는 장담과 변절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베드로의 변절을 강조한다.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부드럽게 묘사한다.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매우 급한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하기를 즐겨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충성스러웠고 주를 사랑하고 남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아울러 훌륭한 통찰력(通察力)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 과신(self-confidence)에 빠진 베드로는 끝내 난관에 부딪혀 예수를 부인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호 데 에이펜 레고 소이 페트레 우 포네세이 세메론 알렠토르 헤오스 트리스 메 아파르네세 에이데나이
개역개정,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새번역,3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4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3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어NIV,34 Jesus answered, “I tell you, Peter, before the rooster crows today, you will deny three times that you know me.”
영어NASB,34 And He said, “I say to you, Peter, the rooster will not crow today until you have denied three times that you know Me.”
영어MSG,34 Jesus said, “I’m sorry to have to tell you this, Peter, but before the rooster crows you will have three times denied that you know me.”
영어NRSV,34 Jesus said, “I tell you, Peter, the cock will not crow this day, until you have denied three times that you know me.”
헬라어신약Stephanos,34 ο δε ειπεν λεγω σοι πετρε ου μη φωνησει σημερον αλεκτωρ πριν η τρις απαρνηση μη ειδεναι με
라틴어Vulgate,34 et ille dixit dico tibi Petre non cantabit hodie gallus donec ter abneges nosse me
히브리어Modern,34 ויאמר אני אמר לך פטרוס לא יקרא תרנגל היום עד כי שלש פעמים כחשת בי לאמר לא ידעתיו׃
성 경: [눅22:3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베드로야 – 요 1:42에 의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가 직접 지어준 ‘반석’이란 뜻의 이름이다. 이렇게 예수 자신이 직접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른 것은 이곳에만 나타나는데 각별한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변할 수 없는 굳고 단단한 의지로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는 듯하다.
오늘 닭 울기 전에 –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변절의 정확한 시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이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언급된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월절을 하루 넘긴 니산월 15일이다. 또 유대인의 시간 분배가 해질녘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15일 새벽 닭 울기 전이라고 보면 된다. 막 13:35에 보면 시간을 한밤중과 닭 울 때, 그리고 새벽을 따로 구분하는데 동틀 새벽 이전의 깊은 새벽이 닭 울 때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닭 울기 전이므로 새벽 3시경으로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시각은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는 독특하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언급한다(60절 주석 참조).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테 아페스테일라 휘마스 아테르 발란티우 카이 페라스 카이 휘포데마톤 메 티노스 휘스테레사테 호이 데 에이판 우데노스
개역개정,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새번역,3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없었습니다.”
우리말성경,35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갑이나 가방이나 신발도 없이 내가 너희를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전혀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영어NIV,35 Then Jesus asked them, “When I sent you without purse, bag or sandals, did you lack anything?” “Nothing,” they answered.
영어NASB,35 And He said to them, “When I sent you out without money belt and bag and sandals, you did not lack anything, did you?” They said, “No, nothing.”
영어MSG,35 Then Jesus said, “When I sent you out and told you to travel light, to take only the bare necessities, did you get along all right?” “Certainly,” they said, “we got along just fine.”
영어NRSV,35 He said to them, “When I sent you out without a purse, bag, or sandals, did you lack anything?” They said, “No, not a 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τε απεστειλα υμας ατερ βαλαντιου και πηρας και υποδηματων μη τινος υστερησατε οι δε ειπον ουδενος
라틴어Vulgate,35 et dixit eis quando misi vos sine sacculo et pera et calciamentis numquid aliquid defuit vobis at illi dixerunt nihil
히브리어Modern,35 ויאמר אליהם כאשר שלחתי אתכם בלי כיס ותרמיל ונעלים החסרתם דבר ויאמרו לא חסרנו כל דבר׃
성 경: [눅22:3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검을 사라]
전대와 주어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 – 본서에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여 보낸 적이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12제자를 파송해 보냈고(9:2-1) 또 한 번은 70인을 선택하여 두명씩 짝지어 파송했다(10:1-5).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요청하는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신다. 즉 전대, 주머니 그리고 신이라는 어휘는 10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하며 9장과는 옷과 식량에 대한 언급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예수가 지시하는 기억은 70인 파송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장에서는 12제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제외된듯 하지만 사실 제자들이 함께 선교에 참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자들은 당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활동을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예수와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 말은 선교 활동 당시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친절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이며(10:7) 그들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환영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에이펜 데 아우토이스 알라 뉜 호 에콘 발란티온 아라토 호모이오스 카이 페란 카이 호 메 에콘 폴레사토 토 히마티온 아우투 카이 아고라사토 마카이란
개역개정,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새번역,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우리말성경,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갑이 있으면 그것을 지니고 가방도 챙겨라. 그리고 만약 칼이 없으면 옷을 팔아서라도 하나를 사라.
가톨릭성경,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영어NIV,36 He said to them, “But now if you have a purse, take it, and also a bag; and if you don’t have a sword, sell your cloak and buy one.
영어NASB,36 And He said to them, “But now, whoever has a money belt is to take it along, likewise also a bag, and whoever has no sword is to sell his coat and buy one.
영어MSG,36 He said, “This is different. Get ready for trouble. Look to what you’ll need; there are difficult times ahead. Pawn your coat and get a sword.
영어NRSV,36 He said to them, “But now, the one who has a purse must take it, and likewise a bag. And the one who has no sword must sell his cloak and buy on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ειπεν ουν αυτοις αλλα νυν ο εχων βαλαντιον αρατω ομοιως και πηραν και ο μη εχων πωλησατω το ιματιον αυτου και αγορασατω μαχαιραν
라틴어Vulgate,36 dixit ergo eis sed nunc qui habet sacculum tollat similiter et peram et qui non habet vendat tunicam suam et emat gladium
히브리어Modern,36 ויאמר אליהם אכן עתה אשר לו כיס ישאהו וכן גם את התרמיל ואשר אין לו הוא ימכר את בגדו ויקנה חרב׃
성 경: [눅22:3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검을 사라]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레고 가르 휘민 호티 투토 토 게그람메논 데이 텔레스데나이 엔 에모이 토 카이 메타 아노몬 엘로기스데 카이 가르 토 페리 에무 텔로스 에케이
개역개정,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새번역,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 ㉬사 53:12
우리말성경,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여겨졌다’라고 기록된 말씀이 마땅히 내게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대해 기록된 말씀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 사53:12
가톨릭성경,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영어NIV,37 It is written: ‘And he was numbered with the transgressors’; and I tell you that this must be fulfilled in me. Yes, what is written about me is reaching its fulfillment.”
영어NASB,37 “For I tell you that this which is written must be fulfilled in Me, ‘AND HE WAS NUMBERED WITH TRANSGRESSORS’; for that which refers to Me has its fulfillment.”
영어MSG,37 What was written in Scripture, ‘He was lumped in with the criminals,’ gets its final meaning in me. Everything written about me is now coming to a conclusion.”
영어NRSV,37 For I tell you, this scripture must be fulfilled in me, ‘And he was counted among the lawless’; and indeed what is written about me is being ful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37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ετι τουτο το γεγραμμενον δει τελεσθηναι εν εμοι το και μετα ανομων ελογισθη και γαρ τα περι εμου τελος εχει
라틴어Vulgate,37 dico enim vobis quoniam adhuc hoc quod scriptum est oportet impleri in me et quod cum iniustis deputatus est etenim ea quae sunt de me finem habent
히브리어Modern,37 כי אמר אני לכם אשר צריך עוד להתמלא בי הכתוב הזה ואת פשעים נמנה כי כל הכתוב עלי בא עד קצו׃
성 경: [눅22:3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자]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호이 데 에이판 퀴리에 이두 마카이라이 호데 뒤오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히카논 에스틴
개역개정,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새번역,3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넉넉하다” 하셨다.
우리말성경,38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여, 보십시오. 여기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톨릭성경,38 그들이 “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38 The disciples said, “See, Lord, here are two swords.” “That is enough,” he replied.
영어NASB,38 They said, “Lord, look, here are two swords.” And He said to them, “It is enough.”
영어MSG,38 They said, “Look, Master, two swords!” But he said, “Enough of that; no more sword talk!”
영어NRSV,38 They said, “Lord, look, here are two swords.” He replied, “It is enough.”
헬라어신약Stephanos,38 οι δε ειπον κυριε ιδου μαχαιραι ωδε δυο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ικανο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38 at illi dixerunt Domine ecce gladii duo hic at ille dixit eis satis est
히브리어Modern,38 ויאמרו אדנינו הנה פה שתי חרבות ויאמר אליהם די׃
성 경: [눅22:3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 ‘검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이 체포될 것을 언급한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칼(sward, NIV) 두 자루를 예수께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의 체포에 대해 칼로서 저항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칼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칼은 50절에서 제사장의 귀를 친 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칼의 주인은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가 된다. 그러나 칼 주인과 칼 사용자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중거는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6:15과 행1:13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 중에 갈릴리에 근거지를 둔 무력 혁명 단체인 셀롯 당원(Zealots) 시몬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칼이 시몬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이다. 당시 여행자들이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칼은 단순한 호신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족하다 하시니라 – 칼을 내민 제자에 대한 예수의 이 대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칼 두 자루는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 자신이 체포와 수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저항 의지를 보여준 것은 예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의 의지를 묵살하는 뜻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역설적인 꾸지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장소를 기도하는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카이 엨셀돈 에포류데 카타 토 에도스 에이스 토 오로스 톤 엘라이온 에콜루데산 데 아우토 카이 호이 마데타이
개역개정,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새번역,39 예수께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를 따라갔다.
우리말성경,39 예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 여느 때처럼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영어NIV,39 Jesus went ou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and his disciples followed him.
영어NASB,39 And He came out and proceeded as was His custom to the Mount of Olives; and the disciples also followed Him.
영어MSG,39 Leaving there, he went, as he so often did, to Mount Olives. The disciples followed him.
영어NRSV,39 He came out and went, as was his custom, to the Mount of Olives; and the disciples follow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εξελθων επορευθη κατα το εθος εις το ορος των ελαιων ηκολουθησαν δε αυτω και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39 et egressus ibat secundum consuetudinem in montem Olivarum secuti sunt autem illum et discipuli
히브리어Modern,39 ויצא וילך כיום ביום על הר הזיתים וילכו אחריו גם תלמידיו׃
게노메노스 데 에피 투 토푸 에이펜 아우토이스 프로슈케스데 메 에이셀데인 에이스 페이라스몬
개역개정,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새번역,40 그 곳에 이르러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신 뒤에,
우리말성경,40 그곳에 도착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가톨릭성경,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40 On reaching the place, he said to them, “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영어NASB,40 When He arrived at the place, He said to them, “Pray that you may not enter into temptation.”
영어MSG,40 When they arrived at the place, he said, “Pray that you don’t give in to temptation.”
영어NRSV,40 When he reached the place, he said to them, “Pray that you may not come into the time of trial.”
헬라어신약Stephanos,40 γενομενος δε επι του τοπου ειπεν αυτοις προσευχεσθε μη εισελθειν εις πειρασμον
라틴어Vulgate,40 et cum pervenisset ad locum dixit illis orate ne intretis in temptationem
히브리어Modern,40 ויבא אל המקום ויאמר אליהם התפללו לבלתי בוא לידי נסיון׃
성 경: [눅22:4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그곳에 이르러 – 습관적으로 왔던 장소임을 말해주는 ‘그곳’은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로 추측된다(마 26:36 ; 막 14:32). 이곳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모여 기도하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위험을 피하여 은둔하던 장소이기도 하다(Leaney).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준비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제 그는 이 땅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기도를 잠으로 대신한다(45, 46절).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 여기서 시험이란 곧 닥칠 체포와 고난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신 후, 이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이미 아셨고 따라서 그들이 낙심하고 절망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를 주의시키신다. 아울러 예수 자신도 심각한 고난과 시험을 직면하여 함께 기도하신다.
카이 아우토스 아페스파스데 앞 아우톤 호세이 리두 볼렌 카이 데이스 타 고나타 프로세위케토
개역개정,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새번역,41 그들과 헤어져서, 돌을 던져서 닿을 만한 거리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우리말성경,41 예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떨어져 돌 던지면 닿을 만한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1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영어NIV,41 He withdrew about a stone’s throw beyond them, knelt down and prayed,
영어NASB,41 And He withdrew from them about a stone’s throw, and He knelt down and began to pray,
영어MSG,41 He pulled away from them about a stone’s throw, knelt down, and prayed,
영어NRSV,41 Then he withdrew from them about a stone’s throw, knelt down, and prayed,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αυτος απεσπασθη απ αυτων ωσει λιθου βολην και θεις τα γονατα προσηυχετο
라틴어Vulgate,41 et ipse avulsus est ab eis quantum iactus est lapidis et positis genibus orabat
히브리어Modern,41 והוא נפרד מהם הרחק כקלע אבן ויכרע על ברכיו ויתפלל לאמר׃
레곤 파테르 에이 불레이 파레넹케 투토 토 포테리온 앞 에무 플렌 메 토 델레마 무 알라 토 손 기네스도
개역개정,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새번역,42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말성경,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
가톨릭성경,42 “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영어NIV,42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영어NASB,42 saying, “Father, if You are willing, remov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영어MSG,42 “Father, remove this cup from me. But please, not what I want. What do you want?”
영어NRSV,42 “Father, if you are willing, remov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헬라어신약Stephanos,42 λεγων πατερ ει βουλει παρενεγκειν το ποτηριον τουτο απ εμου πλην μη το θελημα μου αλλα το σον γενεσθω
라틴어Vulgate,42 dicens Pater si vis transfer calicem istum a me verumtamen non mea voluntas sed tua fiat
히브리어Modern,42 אבי אם רצונך להעביר מעלי את הכוס הזאת אך אל יהי כרצוני כי אם כרצונך׃
옾데 데 아우토 앙겔로스 앞 우라누 에니스퀴온 아우톤
개역개정,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새번역,43 [그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그에게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 드렸다.
우리말성경,43 그때 하늘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북돋아 드렸습니다.
가톨릭성경,43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영어NIV,43 An angel from heaven appeared to him and strengthened him.
영어NASB,43 Now an angel from heaven appeared to Him, strengthening Him.
영어MSG,43 At once an angel from heaven was at his side, strengthening him.
영어NRSV,43 Then an angel from heaven appeared to him and gave him strength.
헬라어신약Stephanos,43 ωφθη δε αυτω αγγελος απ ουρανου ενισχυω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43 apparuit autem illi angelus de caelo confortans eum et factus in agonia prolixius orabat
히브리어Modern,43 וירא אליו מלאך מן השמים ויחזקהו׃
성 경: [눅22:4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사자가 하늘로부터…힘을 돕더라 – 예수의 고뇌에 찬 모습과 그 두려움은 심장의 파열로 죽음에 이를 지경으로 묘사한다. 마태는 예수의 고뇌를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기록한다. 예수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늘의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로부터의 사자(angel, NIV)가 예수를 도왔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다는 기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언급되었다(마4:11 ; 막 1:13).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기진하셨을 때 천사가 그를 도와, 기력을 회복하시고 성령충만한 사역을 하셨으며 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아울러 이곳에서도 예수께서 고뇌(苦惱)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기도하시며 기진하시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도와 끝까지 고난의 길을 다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카이 게노메노스 엔 아고니아 에크테네스테론 프로세위케토 카이 에게네토 호 히드로스 아우투 호세이 드롬보이 하이마토스 카타바이논토스 에피 텐 겐
개역개정,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새번역,44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우리말성경,44 예수께서는 고뇌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땀이 핏방울같이 돼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
가톨릭성경,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영어NIV,44 And being in anguish, he prayed more earnestly, and his sweat was like drops of blood falling to the ground.
영어NASB,44 And being in agony He was praying very fervently; and His sweat became like drops of blood, falling down upon the ground.
영어MSG,44 He prayed on all the harder. Sweat, wrung from him like drops of blood, poured off his face.
영어NRSV,44 In his anguish he prayed more earnestly, and his sweat became like great drops of blood falling down on the ground.
헬라어신약Stephanos,44 και γενομενος εν αγωνια εκτενεστερον προσηυχετο εγενετο δε ο ιδρως αυτου ωσει θρομβοι αιματος καταβαινοντες επι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44 et factus est sudor eius sicut guttae sanguinis decurrentis in terram
히브리어Modern,44 ויבאו עליו חבלי מות ויוסף להתפלל בחזקה ותהי זעתו כנטפי דם ירדים לארץ׃
카이 아나스타스 아포 테스 프로슈케스 엘돈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휴렌 코이모메누스 아우투스 아포 테스 뤼페스
개역개정,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새번역,45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이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우리말성경,45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영어NIV,45 When he rose from prayer and went back to the disciples, he found them asleep, exhausted from sorrow.
영어NASB,45 When He rose from prayer, He came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sleeping from sorrow,
영어MSG,45 He got up from prayer, went back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asleep, drugged by grief.
영어NRSV,45 When he got up from prayer, he came to the disciples and found them sleeping because of grief,
헬라어신약Stephanos,45 και αναστας απο της προσευχης ελθων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ευρεν αυτους κοιμωμενους απο της λυπης
라틴어Vulgate,45 et cum surrexisset ab oratione et venisset ad discipulos suos invenit eos dormientes prae tristitia
히브리어Modern,45 ויקם מהתפלל ויבא אל התלמידים וימצאם ישנים מיגון׃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티 카듀데테 아나스탄테스 프로슈케스데 히나 메 에이셀데테 에이스 페이라스몬
개역개정,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새번역,46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자고 있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서 기도하여라.”
우리말성경,4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자고 있느냐? 일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가톨릭성경,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영어NIV,46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영어NASB,46 and said to them, “Why are you sleeping? Get up and pray that you may not enter into temptation.”
영어MSG,46 He said, “What business do you have sleeping? Get up. Pray so you won’t give in to temptation.”
영어NRSV,46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sleeping? Get up and pray that you may not come into the time of trial.”
헬라어신약Stephanos,46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τι καθευδετε ανασταντες προσευχεσθε ινα μη εισελθητε εις πειρασμον
라틴어Vulgate,46 et ait illis quid dormitis surgite orate ne intretis in temptationem
히브리어Modern,46 ]74-64[ ויאמר אליהם למה תישנו קומו והתפללו אשר לא תבאו לידי נסיונ, עודנו מדבר והנה המון ואחד משנים העשר הנקרא יהודה הלך לפניהם ויקרב אל ישוע לנשק לו׃
성 경: [눅22:4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일어나’ 라는 말대신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 세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와서 자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 다시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와 자고 쉬라는 말을 하신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의 체포 순간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지 못하고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강조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모습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세 차례의 기도와 책망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제자들은 지난 밤의 긴장되고 무거운 만찬과 예수의 고별의 말씀들과 예수께서 배반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흥분 등으로 매우 긴장된채 밤을 맞이하여 기도에 들어갓다. 아울러 그들은 기도하며 예수의 죽음에 대해 인식하면서 슬픔 감정과 함께 심신이 피로하였을 것이다. 이런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그들은 기도하면서 쉽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밤은 그들이 쉽게 잠들 만큼 평온한 밤이 아니었다. 그 밤은 온통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짖누르고 있었으며 예수는 온몸으로 이 세력과 홀로 맞서고 계셨다. 이러한 예수를 두고 제자들은 잠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예수의 힘이 되어 주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이전에 수많은 밤을 지새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이 밤에 단 하룻밤 몇 시간 동안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결국 이들의 잠이 그들에게 엄청난 시험과 좌절과 절망으로 나타났으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빠지게 하였다.
에티 아우투 랄룬토스 이두 오클로스 카이 호 레고메노스 유다스 헤이스 톤 도데카 프로에르케토 아우투스 카이 엥기센 토 예수 필레사이 아우톤
개역개정,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새번역,47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 한 무리가 나타났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유다라는 사람이 그들의 앞장을 서서 왔다. 그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우리말성경,47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이며 유다라 불리는 사람이 그들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가톨릭성경,47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영어NIV,47 While he was still speaking a crowd came up, and the man who was called Judas, one of the Twelve, was leading them. He approached Jesus to kiss him,
영어NASB,47 While He was still speaking, behold, a crowd came, and the one called Judas, one of the twelve, was preceding them; and he approached Jesus to kiss Him.
영어MSG,47 No sooner were the words out of his mouth than a crowd showed up, Judas, the one from the Twelve, in the lead. He came right up to Jesus to kiss him.
영어NRSV,47 While he was still speaking, suddenly a crowd came, and the one called Judas, one of the twelve, was leading them. He approached Jesus to kiss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7 ετι δε αυτου λαλουντος ιδου οχλος και ο λεγομενος ιουδας εις των δωδεκα προηρχετο αυτων και ηγγισεν τω ιησου φιλησα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47 adhuc eo loquente ecce turba et qui vocabatur Iudas unus de duodecim antecedebat eos et adpropinquavit Iesu ut oscularetur eum
히브리어Modern,47 ]74-64[׃
성 경: [눅22:4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한 무리가 오는데 – 유다가 오는데…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무리들이 유다의 인솔로 예수께 다가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을 다가오는 ‘무리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렸다고 언급한다. 아울러 추측컨대 이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는 로마 병정들과 성전을 경비하는 유대 병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가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누가는 유다에 대한 배신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온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유다라 하는 자가’ 온다고 경멸적 표현을 함으로써 유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스 데 에이펜 아우토 유다 필레마티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파라디도스
개역개정,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새번역,4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인자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우리말성경,48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려느냐?”
가톨릭성경,48 예수님께서 그에게 “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48 but Jesus asked him, “Judas, are you betraying the Son of Man with a kiss?”
영어NASB,48 But Jesus said to him, “Judas, are you betraying the Son of Man with a kiss?”
영어MSG,48 Jesus said, “Judas, you would betray the Son of Man with a kiss?”
영어NRSV,48 but Jesus said to him, “Judas, is it with a kiss that you are betraying the Son of Man?”
헬라어신약Stephanos,48 ο δε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ω ιουδα φιληματ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παραδιδως
라틴어Vulgate,48 Iesus autem dixit ei Iuda osculo Filium hominis tradis
히브리어Modern,48 ויאמר ישוע אליו יהודה הבנשיקה אתה מוסר את בן האדם׃
성 경: [눅22:4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심증을 꿰뚫어 보셨다. 덧붙여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위해 검을 들고 따라온 병사들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한다고 약속했음을 밝힌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유다는 인사와 한께 입맞춤을 하게 되고 곧이어 예수를 체포하게 된다. 반면 누가는 입맞춤을 시작하려 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유다의 속임수에 넘어가 체포된 것이 아니며 유다의 행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가 직접 유다의 이름을 부르는 탄식조의 어투를 통해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감람나무로 인해 더욱 어둑캄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체포자들은 예수를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는 가룟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룟유다는 파렴치(破廉恥)한 배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돈테스 데 호이 페리 아우톤 토 에소메논 에이판 퀴리에 에이 파탘소멘 엔 마카이레
개역개정,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새번역,49 예수의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사태를 보고서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칼을 쓸까요?”
우리말성경,49 예수 곁에 있던 제자들이 돼 가는 일을 보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49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49 When Jesus’ followers saw what was going to happen, they said, “Lord, should we strike with our swords?”
영어NASB,49 When those who were around Him saw what was going to happen, they said, “Lord, shall we strike with the sword?”
영어MSG,49 When those with him saw what was happening, they said, “Master, shall we fight?”
영어NRSV,49 When those who were around him saw what was coming, they asked, “Lord, should we strike with the sword?”
헬라어신약Stephanos,49 ιδοντες δε οι περι αυτον το εσομενον ειπον αυτω κυριε ει παταξομεν εν μαχαιρα
라틴어Vulgate,49 videntes autem hii qui circa ipsum erant quod futurum erat dixerunt ei Domine si percutimus in gladio
히브리어Modern,49 והאנשים אשר אתו ראים את אשר יהיה ויאמרו אליו אדנינו הנכה בחרב׃
성 경: [눅22:4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 ‘좌우'(jesus’ follows, NIV)란 예수 주위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보고 예수의 예언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언급 없이 무리들이 예수를 잡았다고 말한다. 역시 누가의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위험을 함께 느끼며 반응을 보이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제자들은 예수에게 38절에서 보여 주었던 칼로 적들을 향해 대항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은 질문 형태이지만 50절에서 칼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질문 속에 칼을 사용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같은 제자들의 행위를 의분(義憤)에 찬 긍정적 행동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카이 에파탘센 헤이스 티스 엨스 아우톤 투 아르키에레오스 톤 둘론 카이 아페일렌 토 우스 아우투 토 뎈시온
개역개정,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새번역,50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우리말성경,50 그러고는 그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가톨릭성경,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영어NIV,50 And one of them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right ear.
영어NASB,50 And one of them struck the slave of the high priest and cut off his right ear.
영어MSG,50 One of them took a swing at the Chief Priest’s servant and cut off his right ear.
영어NRSV,50 Then one of them struck the slave of the high priest and cut off his right ear.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επαταξεν εις τις εξ αυτων τον δουλον του αρχιερεως και αφειλεν αυτου το ους το δεξιον
라틴어Vulgate,50 et percussit unus ex illis servum principis sacerdotum et amputavit auriculam eius dextram
히브리어Modern,50 ויך אחד מהם את עבד הכהן הגדול ויקצץ את אזנו הימנית׃
성 경: [눅22:5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Malchus, NIV)였음을 밝힌다.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음에서 나온 의리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이 되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Jos., Antiq. 14:366).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에아테 헤오스 투투 카이 핲사메노스 투 오티우 이아사토 아우톤
개역개정,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새번역,51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를 만져서 고쳐 주셨다.
우리말성경,51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만둬라!” 그리고 그 종의 귀를 만져 고쳐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51 그러자 예수님께서 “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영어NIV,51 But Jesus answere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the man’s ear and healed him.
영어NASB,51 But Jesus answered and said, “Stop!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his ear and healed him.
영어MSG,51 Jesus said, “Let them be. Even in this.” Then, touching the servant’s ear, he healed him.
영어NRSV,51 But Jesus sai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his ear and heal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1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εατε εως τουτου και αψαμενος του ωτιου αυτου ιασατο αυτον
라틴어Vulgate,51 respondens autem Iesus ait sinite usque huc et cum tetigisset auriculam eius sanavit eum
히브리어Modern,51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רב עתה הרפו ויגע באזנו וירפאהו׃
성 경: [눅22:5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하며 RSV는 ‘이만큼 해두라'(No more of this)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즉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투'(*)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라’는 뜻의 ‘에아오'(*)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하는 행위에 있다. 즉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어투로 묘사한다(마 26:47-56).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출 21:24)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는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23:34).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에이펜 데 예수스 프로스 투스 파라게노메누스 엪 아우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스트라테구스 투 히에루 카이 프레스뷔테루스 호스 에피 레스텐 엨셀다테 메타 마카이론 카이 크쉴론
개역개정,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새번역,52 그런 다음에,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느냐?
우리말성경,52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느냐?
가톨릭성경,52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영어NIV,52 Then Jesus said to the chief priests, the officers of the temple guard, and the elders, who had come for him, “Am I leading a rebellion, that you have come with swords and clubs?
영어NASB,52 Then Jesus said to the chief priests and officers of the temple and elders who had come against Him, “Have you come out with swords and clubs as you would against a robber?
영어MSG,52 Jesus spoke to those who had come–high priests, Temple police, religion leaders: “What is this, jumping me with swords and clubs as if I were a dangerous criminal?
영어NRSV,52 Then Jesus said to the chief priests, the officers of the temple police, and the elders who had come for him, “Have you come out with swords and clubs as if I were a bandit?
헬라어신약Stephanos,52 ειπεν δε ο ιησους προς τους παραγενομενους επ αυτον αρχιερεις και στρατηγους του ιερου και πρεσβυτερους ως επι ληστην εξεληλυθατε μετα μαχαιρων και ξυλων
라틴어Vulgate,52 dixit autem Iesus ad eos qui venerant ad se principes sacerdotum et magistratus templi et seniores quasi ad latronem existis cum gladiis et fustibus
히브리어Modern,52 ויאמר ישוע אל ראשי הכהנים ושרי המקדש והזקנים אשר באו עליו לאמר כמו על פריץ יצאתם עלי בחרבות ובמקלות׃
성 경: [눅22:5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정체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무리가 등장하는 초기에 무리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한다(마 26:47 ; 막 14:43). 그러나 누가는 무리의 정체를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에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히며 서기관들 대신 성전의 군관들(the officer of themple guard, NIV)을 언급한다. 누가가 성전의 군관들을 언급한 것은 4절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의논한 대상이 대제사장들과 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과 일치된다. 아울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제사장들이 직접 체포하러 오면서 성전 수비대를 이끌고 온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이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한편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몄다. 간악한 질문을 통해 책잡으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귀신들렸다고 비방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그들의 비방과 함정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자 유대의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는 죽음의 무리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 이 구절은 37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 자신이 불법자와 동류(同類)로 취급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확인하는 말이다. 즉 예수는 범죄자로서 공권력에 의해 체포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틈만나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고, 또 그들은 군중들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에도 정당한 근거가 없어 강도를 잡듯이 중무장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야심(夜深)한 시각에 나타났던 것이다.
칻 헤메란 온토스 무 멛 휘몬 엔 토 히에로 우크 엨세테이나테 타스 케이라스 엪 에메 알 하우테 에스틴 휘몬 헤 호라 카이 헤 엨수시아 투 스코투스
개역개정,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새번역,53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나, 너희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요,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때다.”
우리말성경,53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나 너희는 내게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 때요, 어둠이 기세를 부릴 때다.”
가톨릭성경,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영어NIV,53 Every day I was with you in the temple courts, and you did not lay a hand on me. But this is your hour–when darkness reigns.”
영어NASB,53 “While I was with you daily in the temple, you did not lay hands on Me; but this hour and the power of darkness are yours.” ”
영어MSG,53 Day after day I’ve been with you in the Temple and you’ve not so much as lifted a hand against me. But do it your way–it’s a dark night, a dark hour.”
영어NRSV,53 When I was with you day after day in the temple, you did not lay hands on me. But this is your hour, and the power of dar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53 καθ ημεραν οντος μου μεθ υμων εν τω ιερω ουκ εξετεινατε τας χειρας επ εμε αλλ αυτη υμων εστιν η ωρα και η εξουσια του σκοτους
라틴어Vulgate,53 cum cotidie vobiscum fuerim in templo non extendistis manus in me sed haec est hora vestra et potestas tenebrarum
히브리어Modern,53 ואהי אצלכם יום יום בהיכל ולא שלחתם בי יד ואולם זאת היא שעתכם ושלטן החשך׃
성 경: [눅22:5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의 말씀대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낮에 선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식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전에서 낮에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으며 아울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한 뒤의 군중들의 반응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성전에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가룟유다의 배반과 유대 지도자들의 기회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 앞에서 상기시킨 말, 즉 예수의 활동에 열광적으로 따랐던 민중들의 열기에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이 위축되고 두려워했던 때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빛이 득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제 사태가 역전되어 다시 어둠이 득세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서 언급하고 있는데(마 26:56 ; 막 14:49) 누가는 3절에서 유다의 배신이 사단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 바 있듯이 예수의 체포 역시 악의 집단적 세력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시대가 주는 고통과 치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자세는 초대 교회가 경험할 박해가 마땅히 겪게될 제자됨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어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승리의 심판자로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고난과 박해, 그리고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쉴라본테스 데 아우톤 에가곤 카이 에이세가곤 에이스 텐 오이키안 투 아르키에레오스 호 데 페트로스 에콜루데이 마크로덴
개역개정,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새번역,54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서,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갔다.
우리말성경,54 그들은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54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영어NIV,54 Then seizing him, they led him away and took him into the house of the high priest. Peter followed at a distance.
영어NASB,54 Having arrested Him, they led Him away and brought Him to the house of the high priest; but Peter was following at a distance.
영어MSG,54 Arresting Jesus, they marched him off and took him into the house of the Chief Priest. Peter followed, but at a safe distance.
영어NRSV,54 Then they seized him and led him away, bringing him into the high priest’s house. But Peter was following at a distance.
헬라어신약Stephanos,54 συλλαβοντες δε αυτον ηγαγον και εισηγαγον αυτον εις τον οικον του αρχιερεως ο δε πετρος ηκολουθει μακροθεν
라틴어Vulgate,54 conprehendentes autem eum duxerunt ad domum principis sacerdotum Petrus vero sequebatur a longe
히브리어Modern,54 ויתפשו אותו ויוליכהו ויביאהו בית הכהן הגדול ופטרוס הלך אחריו מרחוק׃
성 경: [눅22:5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수를…대제사장의 집으로 – 이 구절은 예수를 체포한 주동 세력이 대제사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마 26:57). 그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A.D. 18, Valeriu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비텔리우스 총독(A.D. 36)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18년간 대제사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었다. 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 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체포와 연행의 순간에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음을 묘사한다. 톡히 마가는 한 젊은이가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표현을 통해 상황의 급박성과 제자들의 도망침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마 26:56 ; 막 14:51, 52).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누가는 베드로의 행동에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여 연행(連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그 뒤를 따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처럼 역시 베드로도 도망하였다가 멀리서 에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페리앞산톤 데 퓌르 엔 메소 테스 아울레스 카이 슁카디산톤 에카데토 호 페트로스 메소스 아우톤
개역개정,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새번역,55 사람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여 앉아 있었다.
우리말성경,55 사람들이 마당 가운데 불을 지피고 함께 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곁에 앉았습니다.
가톨릭성경,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영어NIV,55 But when they had kindled a fire in the middle of the courtyard and had sat down together, Peter sat down with them.
영어NASB,55 After they had kindled a fire in the middle of the courtyard and had sat down together, Peter was sitting among them.
영어MSG,55 In the middle of the courtyard some people had started a fire and were sitting around it, trying to keep warm.
영어NRSV,55 When they had kindled a fire in the middle of the courtyard and sat down together, Peter sat among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5 αψαντων δε πυρ εν μεσω της αυλης και συγκαθισαντων αυτων εκαθητο ο πετρος εν μεσω αυτων
라틴어Vulgate,55 accenso autem igni in medio atrio et circumsedentibus illis erat Petrus in medio eorum
히브리어Modern,55 ויהי כי בערו אש בתוך החצר וישבו יחדו וישב גם פטרוס בתוכם׃
이두사 데 아우톤 파이디스케 티스 카데메논 프로스 토 포스 카이 아테니사사 아우토 에이펜 카이 후토스 쉰 아우토 엔
개역개정,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새번역,56 그 때에 한 하녀가 베드로가 불빛을 안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 말하였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우리말성경,56 베드로가 불을 쬐고 앉아 있는 것을 본 한 하녀가 그를 빤히 노려보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영어NIV,56 A servant girl saw him seated there in the firelight. She looked closely at him and said, “This man was with him.”
영어NASB,56 And a servant-girl, seeing him as he sat in the firelight and looking intently at him, said, “This man was with Him too.”
영어MSG,56 One of the serving maids sitting at the fire noticed him, then took a second look and said, “This man was with him!”
영어NRSV,56 Then a servant-girl, seeing him in the firelight, stared at him and said, “This man also was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6 ιδουσα δε αυτον παιδισκη τις καθημενον προς το φως και ατενισασα αυτω ειπεν και ουτος συν αυτω ην
라틴어Vulgate,56 quem cum vidisset ancilla quaedam sedentem ad lumen et eum fuisset intuita dixit et hic cum illo erat
히브리어Modern,56 ותראהו השפחה יושב נגד האור ותבט בו ותאמר גם זה היה עמו׃
성 경: [눅22:5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한 비자(婢子) –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한 일행이었음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다.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막 14:66) 요한은 문지키는 여종이었다고 언급한다(요 18:17). ‘한 비자’라는 표현은 당시에 어린아이와 여성들은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잘 것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제자들 중에서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대비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의 보도와는 순서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마당에 들어와 불을 쬔 후 곧이어 공회의 심문이 있고 희롱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 다음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소개하는데 누가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가 부인을 한 후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공회의 심문(審問)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상 누가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분이 발각된 때가 예수의 심문과 희롱이 있은 후보다는 뜰 가운데 불쬐는 하인들 속에 들어갔을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어린 여종이 다른 곳에서 불쬐는 베드로에게로 가까이 왔는지 아니면 본래 베드로가 들어가기 전부터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종은 베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하고 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어린 여종은 베드로를 지시하면서 그리고 눈을 베드로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명사 ‘그'(*, 아우토)는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직접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여 심문하듯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말은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뜻보다는 그 이전의 활동 현장에서 목격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호 데 에르네사토 레곤 우
매튜헨리주석995-누가복음 22장
누가복음 22장
Ⅰ.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22:1-6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Ⅱ. 유월절 만찬 22:7-20
(1)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자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위한 유월절 만찬이 준비됐다(7절).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다(9,10절). 그들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사람을 따라가게 된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들을 집으로 인도할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에 의지하며 한 걸음씩 그 섭리의 인도에 따르도록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집 주인에게 방을 보여 달라고 해야하며(11절), 집 주인은 기꺼이 방을 보여 줄 것이다(12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 하신 말씀대로 그들을 인도할 사람과 집과 방을 찾았다(13절). 그들은 완벽하게 유월절 준비를 갖추었다(11절).
(2) 유월절을 엄숙하게 지내셨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다. 유다도 빠지지 않았다. 유다는 이미 공공연한 반역죄를 지은터였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나머지 제자들과 같이 앉도록 허락하신다.
1)그리스도께서는 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키게 하셨는가?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절). 예수는 이것이 자기가 받을 고난의 서곡이 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앞장 서 주신 그분을 섬기는 데 주저하지 말자. 그분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보라. 예수는 그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원하셨다.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예수는 이제 막 제자들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고난을 받기 전에 그들과 함께 일 유월절 음식 먹기를 원하신 것이다. 마치 이로 인해 자기의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도록 격려를 받으신 것 같다.
2)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유월절을 폐하셨는가?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 ①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유월절이 완성되었다. ②유월절이 완성된 복음시대의 성례인 성만찬에서 완성되었다. 그들은 만찬을 먹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었던 영적 교제 때문이었다. ③그러한 자유로운 축제는 유월절 양을 먹으면서 하신 말씀을 유월절 포도주 즉 축복의 잔 또는 감사의 잔을 드시면서 반복하신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절). 그 다음 성례전의 잔을 마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므로 특별한 주의를 요하게 하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 같다. 그러나 유월절 잔에 대해서는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8절)고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6절). 이튿날 죽어가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성취하셨다.
(3) 성만찬의 제정(19,20절). 유월절과 출애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예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에서 틀림없이 건지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제정한 것이다.
1)우리를 대신해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breaking of christ’s body)을 여기서는 떡을 떼는 것(breaking of bread)으로 기념한다. 즉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이 떡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서 주신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만족시키려고 떼어 주셨던 이 떡을 이제는 우리의 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떼어 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를 행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때를 기념한다. 또한 이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며 그와 함께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2)대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잔에 담긴 포도주로 표현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을 확보한 사실을 기념하여 그 언약의 약속을 확증한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기념하는 모든 의식을 통하여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붓는 것임에 주목하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분”
Ⅲ.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 22:21-38
여기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가 나온다. 이 설교의 대부분은 독특한 것이며 요한 복음에는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 자기를 배신할 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21,23)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배신자가 지금 그들 가운데 있으며 그들 중의 하나라고 암시하신다(21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성만찬 이전에 나오지만 여기서는 성만찬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다가 성만찬에 참석했으며 떡과 잔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한 것 같다. 즉 그 엄숙한 의식이 끝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음모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거거니와(22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따라 원수들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제로 고난 당하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배신자를 저주하신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3절).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배신 당하도록 작정하셨으며 또 그리스도 자신이 그 작정에 기꺼이 복종하신 것이지만 유다의 죄나 심판은 결코 가볍지 않다. (4) 그리스도께서 그 배신자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의심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23절).
2. 제자들의 분쟁(24-20)
1)어떠한 이유로 다툼이 일어났는가를 보라.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4절). 앞에서 한 말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앞에서는 누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를 묻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누가 제 일인자가 되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2)이 분쟁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날카롭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런 다툼이 얼마나 큰 죄이며 어리석은 일인가를 부드럽게 깨우쳐 주셨다.
①이런 다툼으로 인해 제자들은 이방인의 임금같은 자가 되었다(25절). 이방인의 임금들은 백성을 주관한다. 주관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보다는 이방 임금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집권자들은 은인이라는 칭함을 받는다. 집권자 자신이 그렇게 부르며 아첨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부러 준다. 사실은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위해 일한다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생각들을 한다. 프톨레미 왕조 중의 한 사람은 “은인”이라는 성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주목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넌지시 가르치신다. 첫째, 선을 행하는 것이 큰 자처럼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귀하다. 그들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나라의 은인이 통치자보다 훨씬 존경을 받는다. 둘째, 선을 행하는 것이 큰 자가 되는 확실한 길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장 존귀한 일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임을 믿게 하셨다. 은인이라는 더 큰 명예를 가진다고 하면 집권자라는 하찮은 명예는 버려야 한다.
②이런 다툼으로 보아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함을 알 수 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27절).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지 않고 진리와 은혜의 능력 외의 방법으로 누구를 주관하려고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주신 원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을지니라.” 나이나 명예는 안락함을 보장하는 대신 두 갑절 수고하라고 채찍질 한다.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원리의 본보기를 들어주신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27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하셨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라.
③제자들은 세상의 영예를 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제자들을 위해 예비해두신 더 귀한 영예가 있는데 제자들 모두 그것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8-30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28절). 너희는 내 곁에 서서 나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있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같이 했다. 제자들이 결코 그리스도께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함께 있었던 것을 고맙게 여기셨으며 그들의 친절을 인정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부족한 점이 많았었다. 그들에게서 많은 실수와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선생께서는 그 모든 실수들을 다 눈감아 주신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헤어지면서 이렇게 그들을 칭찬하심으로써 자기와 같이 마음이 바른 자들을 얼마나 만족해 하시는지를 보여 주신다. ㉡제자들의 충성에 대한 보상을 계획하셨다. “너희에게 나라를 맡기리라.” 첫째,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해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 중에 있는 나라 즉 복음교회를 맡기셨다. 이 나라를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복음 사역의 후계자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예비해 놓은 영광이다. 둘째, 저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라를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16,18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고와 고난의 대가로 얻으신 기쁨을 같이 누리게 될 것이다. 최고의 영광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계 3:21).
3. 그리스도를 부인할 베드로(31-34)
1)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들로와 나머지 사도들에 대한 마귀의 궤휼을 예고해 주신다. 시몬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절). 한때는 나머지 사도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 말하는 입이었던 베드로가 여기서는 나머지 사도들을 대신해서 듣는 귀가 된다. 제자들 모두에게 경고하실 말씀(나로 인하여 너희 모두가 배척을 받으리라)을 특별히 사단의 공격을 받은 베드로에게 직접 하신다. 사단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절). “그들을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특히 베드로를 시험하게 해주십시요”라고 사단은 간청한다. 사단은 그들을 까불러서 그들이 밀이 아니라 겨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그들을 청구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사단을 그들을 시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을 한 것이다. “사단은 너희가 특히 너희의 선두 주자인 베드로가 위선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도전해 왔다.”
2)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특히 격려하셨다. “가장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될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노라.” 참 신자들의 믿음에도 실수가 많이 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선 안된다. 제자들의 믿음이 때로는 비참할 정도로 흔들리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께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들을 붙잡고 계신다.
4)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형제들을 도우라고 부탁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힘쓰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되거든 다른 형제들을 격려해 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하라.” 죄를 지은 자들이지만 분명히 죄에서 돌이킬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형제들을 굳게 하며 넘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참조 시 51:11-13).
4)베드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33절).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때 베드로는 그것을 꼭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제자들은 누구라도 그가 어디를 가시든지 그를 따르고 싶어하는 것이다.
5)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약한 곳과 그리스도께서 은혜롭게 등장하셔야할 곳을 잘 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4. 제자들의 형편(35-38)
1)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형편에 대해서 물으신다(35절). 그리스도는 전에 제자들이 자기에게 매우 충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28절). “내가 너희에게 전대 없이 보내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는 자기가 전에 제자들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보내셨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같이 아무 것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내신다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자들도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없었나이다(35절). 가끔씩 하나님의 섭리를 뒤돌아보며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는 선하신 주인이시며 그의 보살핌에는 부족함이 없다. 때로 그의 종들은 빈 손으로 내보내신 다음 그들을 도와 주신다. 우리가 아무리 간신히 먹고 산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사는 데 필요한 만큼만 있다면 여유를 갖도록 하자.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곧 상황이 바뀔 것임을 경고하신다. 그들의 주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예언하신 바와 같이 이제는 고난을 받으실 때가 된 것이다(37절). “기록된 바대로 내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 그래서 나에 관한 일이 끝이 나리라. 그때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게 되리라.” 고난받을 것을 미리 예언함으로써 고난받으실 때 위로가 된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받을 때도 그것은 위로가 될 것이다. 그들은 끝을 맺게 될 것이며 영원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고 없을 때 그들은 주님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친구들이 과거에 그랬던 것 같이 친절을 베풀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제는 전대를 가져야 한다. 적들이 전보다 더 사나워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도 필요하다. 검이 없는 자는 검의 필요를 절감하게 될 것이며 겉옷을 팔아 검을 샀으면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의 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무장해야 할 무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신 것 같이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경건히 복종함으로써 갑옷을 삼자. 그러면 겉옷을 팔아 검을 산곳 보다는 더 안전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그들에게 어떤 무기가 있는가 찾아 본다. 그리고는 검 둘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38절). 그중 하나는 베드로의 검이었다. ‘족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검에 의지하라는 부탁이 아니심을 시사하신다. 검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도움이 되시며 영광의 칼이 되어 주기를 부탁해야 하는 자들에게 검 둘은 족한 것이다.
Ⅳ. 감람산의 고뇌 22:39-46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괴로워 하시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과정 속으로 들어가셨으며 결국은 그것을 정복하신다.
1. 다른 복음서와 공통된 내용(39-46)
(1) 그리스도께서 나가셨을 때 제자들도 따라 나갔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실 때도 아직까지 그와 함께 했던 그들이므로 지금도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혼자 계시기 위해 늘 가셨던 곳으로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가끔 혼자 계셨던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3) 아무리 피할 수 없는 시험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어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권면하신다. (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혼자서 기도하셨다. 그는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하고 기도했다. (5)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고난을 받아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간구한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소서 인간적인 내 생각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6)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내내 기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다(45절). 기도하신 후 일어나셔서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셨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일인데 여기서는 제자들이 잠든 것을 아주 선의로 해석하고 있다. 즉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들었다는 것이다. 어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형제들의 약점을 덮어주도록 가르친다. 만약 더 좋은 이유가 있다면 형제들의 약점을 그것으로 자비롭게 덮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7) 제자들을 깨우시고 나서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은 시험에 들려고 할 때 누구에게나 필요한 말씀이다. “주여 이 위기에 나를 도우소서”
2. 누가복음의 독특한 내용(43-46)
1)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실 때 하늘로부터 사자가 나타나 힘을 도왔다(43절).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면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사자들로부터 그에 상당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짐을 지우시든 불평해서는 안된다. 천사들은 고통받고 있는 주 예수님을 보살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의 군대로 자기를 구하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를 도와 힘을 주도록 기도만 했다.
2)예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44절). 고통이 더할수록 그는 더욱 기도에 전념하셨다. 기도할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민이 있을 때는 특히 더 기도해야 할 때이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
3)이렇게 애쓰심으로 인해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여기서 땀을 핏방울에 비유한 것뿐이냐 아니면 피가 정말 땀 속에 섞여서 피빛이 되었으며 피땀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냐는 논쟁이 비평가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땀구멍마다 피가 맺히고 옷에는 온통 피로 얼룩졌다. 이는 영혼의 고뇌를 보여 주는 것이다.
Ⅴ. 유다의 배반 22:47-53
1. 유다의 표시(48).
여기 많은 무리가 있으며 유다가 앞장서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잡도록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예수를 찾을지 몰랐으나 유다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가 있는 장소로 갔다. 그들이 거기 가서도 예수가 누구인줄 알지 못했으나 유다는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바로 예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갔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유다에게 한 질문 즉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는 질문을 주목한다(48절). 이 질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있지 않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해야만 하는가? 입맞춤으로 그를 배반해야 하는가? 그 사랑의 표시가 이렇게 더럽혀진 적이 있었는가?
2.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들의 노력(49-51)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49절). “우리에게 검 둘을 가지라고 하셨으니 이제 그 칼을 쓸까요?” 그러나 그들은 너무 성질이 급하고 불같아서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머리를 겨냥했으나 빗나가서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막았다고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사과하신 방법! 이것까지 참으라(51절). 그는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진정시켜 그 화가 제자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정중히 말씀하시고 자기 제자중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한 잘못에 대해 소위 사과하심으로써 원수에게 가지라도 선한 말로 대하라고 가르치신다. (2)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치료하신 방법: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61절). 그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셨다. ①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셨다.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원할 경우 죽게 할 수도 있다. ②자신의 자비하심을 증명하셨다. 후에 우리를 경별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미워하는 식자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자신의 규칙에 대해 본을 보이셨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충고(52,53)
그리스도는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52,53절). 그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에게 하셨다고 누가는 전한다. 그들은 성직자들이었으며 이처럼 가증한 일을 하도록 채용되어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1)그들의 행동을 설득하시는 방법:그들은 무엇 때문에 한밤 중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 그리스도께서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강도를 잡는 것 같이 나왔는가? 그리스도께서 도망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2)그들의 행동을 수용하시는 방법:앞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내게 닥친 일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에 따르리라. 왜냐하면 그렇게 결정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두움의 권세 즉 이 세상의 어두움을 지배하는 사단이 제멋대로 하도록 두어라.”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양보하며 어두움의 권세를 빛의 왕자에게 굴복하게 할 것이다.
Ⅵ. 베드로의 부인 22:54-62
여기서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우울한 이야기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갔다는 것 말고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는다(54절). 그러나 표현 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54절). 이 말로 보아 그들이 당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전에 보고들은 바로 인해 두려움이 생겨서 그를 자장 먼 길로 해서 데려갔으며 마음은 조급했다.
1. 베드로의 실족(55-60)
이는 몰래 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멀찍이 따라갔던 것이다. 베드로는 중용을 지키기로 하였다. 즉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하지만 소문내지 않고 무사하려고 멀찍이 따라갔다. 그리고는 대제사장의 종들 속에 끼었다.종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다. 베드로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인 것처럼 그 가운데 앉았다. 그리스도와의 친분을 일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 베드로의 실족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비자가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고 고발했다. 그녀는 베드로가 불가에 앉았을 때 주목해서 보았다. 그리고는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베드로에게는 그 말을 인정할 만한 용기도 없었고 그 말을 슬쩍 돌릴 만한 재치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 말을 슬쩍 돌릴 만한 재치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간단히 부인해 버렸던 것이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58절). 그는 이러한 실족을 계속 반복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58절). 한 시간 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9절). 베드로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일지 못하노라(6절). ]
2. 베드로의 회복(61,62)
베드로가 자신을 되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보라.
1)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작은 사건이 위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2)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이 장면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으나 매우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게 등을 향하신 채 재판을 받고 계셨지만 베드로가 한 말을 전부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주목하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퍽 다행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쳐다 보셨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베드로의 눈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베드로를 바라보셨으며, 베드로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①그것은 깨닫게 하는 눈빛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나를 모르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②그것은 질책하시는 눈빛이었다. ③그것은 비난하는 눈빛이었다. “베드로야 어찌된 일이냐? 나를 부인한 자가 바로 너란 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일 먼저 고백하고 결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네가 그랬단 말이냐?” ④그것은 동정어린 눈빛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셨다. “불쌍한 베드로야 내가 돕지 않으면 형편 없이 되겠구나” ⑤그것은 무엇인가 지시하는 눈빛이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물러가서 좀 생각해 보라고 눈짓하셨다. ⑥그것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닭이 울더라도 베드로는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눈빛과 함께 능력이 나와서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3)베드로에게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4)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그리스도의 눈빛은 베드로의 마음을 녹여서 죄를 회개하는 경건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Ⅶ. 그리스도의 수난 22:63-71
(1)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를 모욕한 방법: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며 때렸다(63절). 그들은 예수를 조롱했다. 예수에게는 괴로운 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즐거운 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고 얼굴을 때리되 때린 자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계속하면서(64절). 예수의 선지자직을 모욕하려 했다.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을 했다(65절).
(2) 산헤드린 공회가 그리스도를 고발하고 판결한 방법:산헤드린은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날이 새자마자 모여들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네가 그리스도냐고 그들은 예수에게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많은 말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67절).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믿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2)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당당히 항의하셨다(67,68절). “그러나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여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미리 결정해 놓고서 무엇 때문에 소송을 여는가? 내가 제시하는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들은 내게 대답도 아니할 것이며 나를 풀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내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너희는 나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둘 다 하려고 안할 것이다.”
3)그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재림이야말로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라고 물었다(70절). 그는 단 7:13,14에 나오는 것처럼 다니엘이 본 인자의 환상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만약 인자라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5)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신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80절).
6)이를 근거로 그들은 예수의 유죄를 판결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71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친히 그 입에서 들었으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는 한 그를 메시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1-6 Christ knew all men, and had wise and holy ends in taking Judas to be a disciple.
How he who knew Christ so well, came to betray him, we are here told; Satan entered into Judas.
It is hard to say whether more mischief is done to Christ’s kingdom, by the power of its open enemies, or by the treachery of its pretended friends; but without the latter, its enemies could not do so much evil as they do.
#7-18 Christ kept the ordinances of the law, particularly that of the passover, to teach us to observe his gospel institutions, and most of all that of the Lord’s supper.
Those who go upon Christ’s word, need not fear disappointment.
According to the orders given them, the disciples got all ready for the passover.
Jesus bids this passover welcome.
He desired it, though he knew his sufferings would follow, because it was in order to his Father’s glory and man’s redemption.
He takes his leave of all passovers, signifying thereby his doing away all the ordinances of the ceremonial law, of which the passover was one of the earliest and chief.
That type was laid aside, because now in the kingdom of God the substance was come.
#19,20 The Lord’s supper is a sign or memorial of Christ already come, who by dying delivered us; his death is in special manner set before us in that ordinance, by which we are reminded of it.
The breaking of Christ’s body as a sacrifice for us, is therein brought to our remembrance by the breaking of bread.
Nothing can be more nourishing and satisfying to the soul, than the doctrine of Christ’s making atonement for sin, and the assurance of an interest in that atonement.
Therefore we do this in rememberance of what He did for us, when he died for us; and for a memorial of what we do, in joining ourselves to him in an everlasting covenant.
The shedding of Christ’s blood, by which the atonement was made, is represented by the wine in the cup.
#21-38 How unbecoming is the worldly ambition of being the greatest, to the character of a follower of Jesus, who took upon him the form of a servant, and humbled himself to the death of the cross! In the way to eternal happiness, we must expect to be assaulted and sifted by Satan.
If he cannot destroy, he will try to disgrace or distress us.
Nothing more certainly forebodes a fall, in a professed follower of Christ, than self-confidence, with disregard to warnings, and contempt of danger.
Unless we watch and pray always, we may be drawn in the course of the day into those sins which we were in the morning most resolved against.
If believers were left to themselves, they would fall; but they are kept by the power of God, and the prayer of Christ.
Our Lord gave notice of a very great change of circumstances now approaching.
The disciples must not expect that their friends would be kind to them as they had been.
Therefore, he that has a purse, let him take it, for he may need it.
They must now expect that their enemies would be more fierce than they had been, and they would need weapons.
At the time the apostles understood Christ to mean real weapons, but he spake only of the weapons of the spiritual warfare.
The sword of the Spirit is the sword with which the disciples of Christ must furnish themselves.
#39-46 Every description which the evangelists give of the state of mind in which our Lord entered upon this conflict, proves the tremendous nature of the assault, and the perfect foreknowledge of its terrors possessed by the meek and lowly Jesus.
Here are three things not in the other evangelists.
1.
When Christ was in his agony, there appeared to him an angel from heaven, strengthening him.
It was a part of his humiliation that he was thus strengthened by a ministering spirit.
2.
Being in agony, he prayed more earnestly.
Prayer, though never out of season, is in a special manner seasonable when we are in an agony.
3.
In this agony his sweat was as it were great drops of blood falling down.
This showed the travail of his soul.
We should pray also to be enabled to resist unto the shedding of our blood, striving against sin, if ever called to it.
When next you dwell in imagination upon the delights of some favourite sin, think of its effects as you behold them here! See its fearful effects in the garden of Gethsemane, and desire, by the help of God, deeply to hate and to forsake that enemy, to ransom sinners from whom the Redeemer prayed, agonized, and bled.
#47-53 Nothing can be a greater affront or grief to the Lord Jesus, than to be betrayed by those who profess to be his followers, and say that they love him.
Many instances there are, of Christ’s being betrayed by those who, under the form of godliness, fight against the power of it.
Jesus here gave an illustrious example of his own rule of doing good to those that hate us, as afterwards he did of praying for those that despitefully use us.
Corrupt nature warps our conduct to extremes; we should seek for the Lord’s direction before we act in difficult circumstances.
Christ was willing to wait for his triumphs till his warfare was accomplished, and we must be so too.
But the hour and the power of darkness were short, and such the triumphs of the wicked always will be.
#54-62 Peter’s fall was his denying that he knew Christ, and was his disciple; disowning him because of distress and danger.
He that has once told a lie, is strongly tempted to persist: the beginning of that sin, like strife, is as the letting forth of water.
The Lord turned and looked upon Peter.
1.
It was a convincing look.
Jesus turned and looked upon him, as if he should say, Dost thou not know me, Peter? 2.
It was a chiding look.
Let us think with what a rebuking countenance Christ may justly look upon us when we have sinned.
3.
It was an expostulating look.
Thou who wast the most forward to confess me to be the Son of God, and didst solemnly promise thou wouldest never disown me! 4.
It was a compassionate look.
Peter, how art thou fallen and undone if I do not help thee! 5.
It was a directing look, to go and bethink himself.
6.
It was a significant look; it signified the conveying of grace to Peter’s heart, to enable him to repent.
The grace of God works in and by the word of God, brings that to mind, and sets that home upon the conscience, and so gives the soul the happy turn.
Christ looked upon the chief priests, and made no impression upon them as he did on Peter.
It was not the mere look from Christ, but the Divine grace with it, that restored Peter.
#63-71 Those that condemned Jesus for a blasphemer, were the vilest blasphemers.
He referred them to his second coming, for the full proof of his being the Christ, to their confusion, since they would not admit the proof of it to their conviction.
He owns himself to be the Son of God, though he knew he should suffer for it.
Upon this they ground his condemnation.
Their eyes being blinded, they rush on.
Let us meditate on this amazing transaction, and consider Him who endured such contradiction of sinners against himself.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2장
22:1 유다의 배반(누가복음 22:1-6) “구속자의 해(年)”가 이제 “이르렀다.” 그 때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안에 계획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위로의 고대하던 자들이 기다리던 때였다. 수많은 시대의 변혁을 거쳐 이제야 마침내 “이르렀다”(사 63:4). 그리고 그 구속이 실현될 때는 바로 그 해 “첫째 달”이기 때문에 구속자가 그처럼 서둘러 자기의 할 일을 마치고, 구속이 “완성되기”까지 그처럼 “수난” 당해야 하셨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달이 바로 그 때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그 달이며 원형(原型)이 형태로 성취된 바로 그 달이었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1절) 그리스도는 여기서 넘겨지셨다. 이미 그 유월절 훨씬 이전부터 그를 체포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우리를 위해 드려질 유월절의 희생 제물로 준비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알 수 있다. Ⅰ. 그에게 욕을 먹는 적대자들이 음모를 꾸몄다(2절). 성직의 “대제사장들”과 학문의 “서기관들”이 강제로든 아니면 계교를 써서라도 “그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였다. 그들 생각대로라면 더 일찍 처치할 수도 있었으나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하고” 게다가 이제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몰려드는 무리가 늘기만 하는 것을 보고 주저하였다. Ⅱ. 그들은 돕기 위해 한 제자가 배반하고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는 가롯이라는 불리는 유다였다. 그는 구별된 숫자라는 의미의 “열둘 중의 한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인간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배반자를 “열둘”이란 “숫자”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될 “그 숫자” 속에 포함시켜 그를 배반하도록 버려 두셨는가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유다를 제자로 삼으신 데는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처럼 잘 알고 있던 자가 어떻게 그를 배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단이 들어가니”(3절) 이것은 악마의 소행이었다. 사단은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업적을 무너뜨리고 그의 기를 꺾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누가 그리스도를 배반하든, 혹은 그의 진리와 길을 배반하든 배반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이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예수가 쉬는 곳을 잘 아는 자의 도움이 없이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계획을 진행시키게 만들었다(4절). 그리스도의 나라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무리의 권력과 계략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더 해를 입힐지 아니면 친구인 것처럼 꾸미고 자기 욕심만을 차리는 배반자가 더 해를 입힐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배반자 없이는 적대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진행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만나고 있을 땐 뭔가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Ⅲ. 그들 사이의 거래 관계.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무런 소동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만 하였다. 그들도 이것을 기뻐하였다.
2. 그들은 이 일을 하는 대가로 그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그도 이것을 기뻐하였다(5절).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아마도 그는 자기보다는 더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 교활하게 물었을 것이다. 주님이 언제 어디에 계시겠는가를, 유월절 후에는 어디로 가실 것인가를, 그들은 그를 의심할 만큼 예리하지 못하였다. 좌우간 그는 곧 알고자 하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무리가 없을 때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였을 것이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무런 소동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만 하였다. 그들도 이것을 기뻐하였다.그들은 이 일을 하는 대가로 그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그도 이것을 기뻐하였다(5절).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아마도 그는 자기보다는 더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 교활하게 물었을 것이다. 주님이 언제 어디에 계시겠는가를, 유월절 후에는 어디로 가실 것인가를, 그들은 그를 의심할 만큼 예리하지 못하였다. 좌우간 그는 곧 알고자 하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무리가 없을 때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였을 것이다.
22:7 유월절 만찬(누가복음 22:7-20) 7일 동안 계속되는 무교절 기간 동안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수없이 선한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볼 때 얼마나 희망찬 앞날이 내다보이겠는가! 백성들은 “매일” 아침, 아침 “일찍” 그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다른 일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일이 더 귀중한 것이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수난의 날이 공허한 나날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을 하셔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Ⅰ.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함. 율법에 따라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다(7절). 그리스도는 율법으로 교육받았으며 율법이 정하는 의례를 지켰다. 이는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복음의 규례를 지키며 특히 주의 만찬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지키라고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아마 그리스도는 아침에 성전으로 가르치시러 가셨고 제자들은 그 시간에 다른 길로 성내로 들어가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신 것 같다. 자기 수하에 수행원들을 데리고 세속적인 사무에 최대한으로 쓰려는 자들은 이 일이 그들에게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영적인” 사업 혹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종사하고 있다고 여겨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고용한 자들에게 어디로 갈 것인가 지시하였다(9, 10절). “그들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가도록 하였다.” 그 사람이 그들을 인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 집을 말해 줄 수도 있었다. 그 집은 아마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개의 집으로 가라, 혹은 어느 거리에 있는 그 집으로 가라, 이런 식으로 말하고 말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지시한 것은 그들에게 섭리의 은총에 의존하여 그를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따를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모르는 채 나갔다. 집에 도착해서 그들은 집주인에게 방을 보여 줄 것을 바랄 것이다(11절). 그러면 주인은 기꺼이 보여 줄 것이다(12절). 그 집이 친구의 집인지 아니면 공회당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내자를 만났고 집으로 가서 방을 보고, 주님이 그들에게 말해 준 그대로 행하게 되었다(13절).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따르는 그들은 실망할 염려가 없었다. 그들에게 내리신 지시대로 그들은 유월절 준비를 다 하였다(11절). Ⅱ. 율법에 따라 유월절을 엄숙하게 지켰다. 그들이 식사할 “때가 이르매 예수는” 아마도 식탁 끝머리에 “앉으시고 열두 제자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속이 사단으로 가득 차 있고 악한 행실로 가득 한 사람도 여전히 형식적인 신앙 고백은 할 수 있으며 외형적인 헌신의 좌석에 참여할 수는 있었다. 아직 마음속에만 있고 밖으로 드러낼 만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그의 외식적인 신앙의 외식적인 특권을 거절할 수는 없다. 유다는 이미 배반의 “공공연한 행위”로 죄를 지었지만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얼마나 “이 유월절을 고대하였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유월절, 주의 만찬을 고대하고 같은 소망으로 지켜야 한다(15절).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가장 고대하며 기다렸노라.” 그는 이것이 그의 고난의 서장(序章)임을 알았으며 그래서 이처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그를 중개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처럼 “앞장서서” 애써 주신 그를 섬기는 일에 우리는 주저할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라. 그는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는 그와 제자들이 다른 사람이 없는 그들만의 시간을 얻고 예루살렘에 온 이후로 이 기회 말고는 가질 수 없었던 사적(私的)인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들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받기 전에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 식사로 말미암아 얻은 위로로 그가 받을 고난을 즐거이 받으며 그들로 그에게 더욱 친해지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우리의 복음 유월절은 고난과 시험과 죽음 자체를 위한 놀라운 준비가 됨을 명심하라.
2. 그리스도는 어떻게 “유월절을 폐지하셨나?” 이것은 형식적인 율법의 모든 의례를 삭제해 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월절은 그러한 의례 중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의례 중의 하나였다(16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또한 내 제자들도 다시는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리라.”
(1) 그것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심으로” 완성되었다(고전 5:7).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본체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었음으로 그와 같은 형식이나 그림자는 사라져야만 했다.
(2) 그것은 “주의 만찬”으로 완성되었다. 주의 만찬은 복음의 나라에서 행하는 성례로써 그 안에 유월절이 완성을 이루었고 사도행전 2장 42, 46절에 보듯이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이 자주 지켰던 것이었다. 그들은 만찬을 먹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성례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교제에 의한 것이다. “그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였다(계 3:20).
(3) 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의 축제는 영광의 나라에서나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때엔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들이 죽음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을 먹으면서 하신 말씀을 유월절 포도주, 사례의 잔 혹은 감사의 잔을 드시면서 또다시 반복하신다. 여기에서 모인 사람들은 만찬의 주인에게 맹세를 하며 유월절 만찬을 끝맺게 되어 있다. 풍습에 따라 이 잔을 “받으사”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처음 난 것들을 보호해 주심에 대해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절) 하셨다. 이 말씀을 성례전의 잔을 드신 다음 하시지 않았다. “그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써 더 가치와 비중을 두기 위하여 그가 손수 각자의 손에 잔을 돌려주시며 각자 영혼에 대하여 일일이 훈계하시는 것이 마땅했을 성싶으나, 폐지할 유월절 잔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하라.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8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성령이 강림하기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때엔 너희가 주의 만찬에서 보다 영광스런 구원을 축하하리라. 애굽에서의 해방이나 유월절의 축하는 이 구원의 모형이며 예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날이 가까웠으니 그날이 임하기까지 너희는 더 이상 먹고 마실 필요가 없다.” 이튿날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며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만찬을 세우시기 위하여 큰 기쁨으로 모든 율법의 만찬들을(유월절 만찬도 마찬가지이다) 버리셨으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전쟁하는 교회로부터 승리하는 교회로 이동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기꺼이 영적인 양식이라도 바꾸며 영원히 만찬을 위해서는 자신의 성례 전까지라도 기쁨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이 유월절을 고대하였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유월절, 주의 만찬을 고대하고 같은 소망으로 지켜야 한다(15절).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가장 고대하며 기다렸노라.” 그는 이것이 그의 고난의 서장(序章)임을 알았으며 그래서 이처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그를 중개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면서 기뻐하였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처럼 “앞장서서” 애써 주신 그를 섬기는 일에 우리는 주저할 수 있겠는가?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라. 그는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는 그와 제자들이 다른 사람이 없는 그들만의 시간을 얻고 예루살렘에 온 이후로 이 기회 말고는 가질 수 없었던 사적(私的)인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들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받기 전에 그들과 함께 먹기를 원하였다.” 이 식사로 말미암아 얻은 위로로 그가 받을 고난을 즐거이 받으며 그들로 그에게 더욱 친해지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우리의 복음 유월절은 고난과 시험과 죽음 자체를 위한 놀라운 준비가 됨을 명심하라.그리스도는 어떻게 “유월절을 폐지하셨나?” 이것은 형식적인 율법의 모든 의례를 삭제해 버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유월절은 그러한 의례 중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의례 중의 하나였다(16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또한 내 제자들도 다시는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리라.”그것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심으로” 완성되었다(고전 5:7).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본체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었음으로 그와 같은 형식이나 그림자는 사라져야만 했다.그것은 “주의 만찬”으로 완성되었다. 주의 만찬은 복음의 나라에서 행하는 성례로써 그 안에 유월절이 완성을 이루었고 사도행전 2장 42, 46절에 보듯이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이 자주 지켰던 것이었다. 그들은 만찬을 먹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성례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교제에 의한 것이다. “그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였다(계 3:20).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의 축제는 영광의 나라에서나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때엔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들이 죽음과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을 먹으면서 하신 말씀을 유월절 포도주, 사례의 잔 혹은 감사의 잔을 드시면서 또다시 반복하신다. 여기에서 모인 사람들은 만찬의 주인에게 맹세를 하며 유월절 만찬을 끝맺게 되어 있다. 풍습에 따라 이 잔을 “받으사”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처음 난 것들을 보호해 주심에 대해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절) 하셨다. 이 말씀을 성례전의 잔을 드신 다음 하시지 않았다. “그의 피로 세운 새 언약”으로써 더 가치와 비중을 두기 위하여 그가 손수 각자의 손에 잔을 돌려주시며 각자 영혼에 대하여 일일이 훈계하시는 것이 마땅했을 성싶으나, 폐지할 유월절 잔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하라.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8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성령이 강림하기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때엔 너희가 주의 만찬에서 보다 영광스런 구원을 축하하리라. 애굽에서의 해방이나 유월절의 축하는 이 구원의 모형이며 예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날이 가까웠으니 그날이 임하기까지 너희는 더 이상 먹고 마실 필요가 없다.” 이튿날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며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만찬을 세우시기 위하여 큰 기쁨으로 모든 율법의 만찬들을(유월절 만찬도 마찬가지이다) 버리셨으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전쟁하는 교회로부터 승리하는 교회로 이동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기꺼이 영적인 양식이라도 바꾸며 영원히 만찬을 위해서는 자신의 성례 전까지라도 기쁨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Ⅲ. 주의 만찬의 구조(19, 20절). “유월절”이나 애굽에서의 “해방”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예언적인 징조”였다. 그는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 사탄의 횡포에서 구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살아 계신 주께서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해내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구원의 빛이 비췸으로 그들의 구원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주의 만찬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여 찬양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성례전을 통해 우리에게 특별히 제공된 것은 그의 죽음이다. 1. “떡을 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떼어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심을 기념하고 있다. 율법에서는 희생 제물을 “하나님의 식물”(레 21:6, 8, 17)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그 희생 제물을 우리에게 관련지으며 그 제물의 유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마련된 만찬이 있다. 우리를 위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며 그 속죄를 확신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더 우리 영혼을 기름지게 해 주고 만족하게 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죄의 값으로 “떼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떼어져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은 때를 “기념하며,” 우리 자신도 영원한 계약에 그와 함께 참여하는 “그의 동료”가 되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기억하는”행위로 삼는다. 이는 여호수와가 “증거”로 돌을 세운 것과 같다(수 24:27).
2. 구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심”(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 레 17:11)은 잔에 포도주를 담아 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 포도주 잔이 우리와 함께 세우신 새 계약, 새 언약의 상징이며 증거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을 “기념하며” 그 언약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모든 신도들은 그 안에서 언약의 약속에 “예, 아멘” 하여야 한다. 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활기를 넣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모든 의식을 통하여 오직 그 피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얻었으며, 그것의 유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사랑한 자가 자신을 내게 주었도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새 언약을 대할 때엔 “그리스도의 피”를 주목해야 한다. 그 피로 새 언약이 생겼고 생명을 얻었으며 우리를 그 언약의 약속에 붙이셨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새 언약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새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지닌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떡을 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떼어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심을 기념하고 있다. 율법에서는 희생 제물을 “하나님의 식물”(레 21:6, 8, 17)이라 불리고 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그 희생 제물을 우리에게 관련지으며 그 제물의 유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마련된 만찬이 있다. 우리를 위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며 그 속죄를 확신하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더 우리 영혼을 기름지게 해 주고 만족하게 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죄의 값으로 “떼어 주어진” 이 떡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떼어져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은 때를 “기념하며,” 우리 자신도 영원한 계약에 그와 함께 참여하는 “그의 동료”가 되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기억하는”행위로 삼는다. 이는 여호수와가 “증거”로 돌을 세운 것과 같다(수 24:27).구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심”(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 레 17:11)은 잔에 포도주를 담아 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 포도주 잔이 우리와 함께 세우신 새 계약, 새 언약의 상징이며 증거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을 “기념하며” 그 언약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모든 신도들은 그 안에서 언약의 약속에 “예, 아멘” 하여야 한다. 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활기를 넣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모든 의식을 통하여 오직 그 피는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얻었으며, 그것의 유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사랑한 자가 자신을 내게 주었도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새 언약을 대할 때엔 “그리스도의 피”를 주목해야 한다. 그 피로 새 언약이 생겼고 생명을 얻었으며 우리를 그 언약의 약속에 붙이셨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새 언약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새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지닌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22:21 제자들을 훈계하심(누가복음 22:21-38) 이제 식사 후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내용을 읽게 된다. 많은 내용이 여기에 새롭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또 다른 내용이 첨가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식탁에서 이렇게 가족과 친구들에게 훈계하고 권면하는 대화가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목회자들은 이점을 명심해 교인들에게 시도해 보도록 할 것이다. 특히 주의 만찬에 참석한 후 기독교 회의를 소집하면 서로 원만히 결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나누신 대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그 목적이 다 있었다. Ⅰ. 그는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배반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1. 그는 그들 가운데, 그들 중에 그를 팔아 넘길 자가 있음을 암시하였다(21절).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만찬 이전에 이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에선 만찬 후에 이 말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다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였고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엄숙한 장면이 끝난 뒤, 그리스도께서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한 자들 가운데 그를 배반할 자가 있었다.
2. 그는 그 음모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가 배반당할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신 계획에 따라 올라 갈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유다라도 그를 그곳으로 올라가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쫓겨서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몸소 “고통을 받으러 나가셨다.” “보라. 내가 가리라”고 말씀하셨다.
3. 그는 배반자에게 경고하셨다. “그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고통 중에도 성도들이 잘 참으며 그 고통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고통을 주는 일에 관련되었거나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도록 “예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으셨다 해서 유다의 죄와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4. 그가 그 배반자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이름을 대시지 않으심으로 제자들은 서로 놀라 의심하게 되었다(23절). “저희가 서로 묻되” 서로 질문하되, 서로 물어보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 이처럼 선한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일까?” 하였다. 그들의 질문은 “너냐?” 혹은 “그가 아닐까?”가 아니라 “저입니까?”였다. 그는 그들 가운데, 그들 중에 그를 팔아 넘길 자가 있음을 암시하였다(21절).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만찬 이전에 이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에선 만찬 후에 이 말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다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였고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엄숙한 장면이 끝난 뒤, 그리스도께서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한 자들 가운데 그를 배반할 자가 있었다.그는 그 음모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가 배반당할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신 계획에 따라 올라 갈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유다라도 그를 그곳으로 올라가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쫓겨서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몸소 “고통을 받으러 나가셨다.” “보라. 내가 가리라”고 말씀하셨다.그는 배반자에게 경고하셨다. “그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고통 중에도 성도들이 잘 참으며 그 고통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고통을 주는 일에 관련되었거나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도록 “예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으셨다 해서 유다의 죄와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그가 그 배반자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이름을 대시지 않으심으로 제자들은 서로 놀라 의심하게 되었다(23절). “저희가 서로 묻되” 서로 질문하되, 서로 물어보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 이처럼 선한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일까?” 하였다. 그들의 질문은 “너냐?” 혹은 “그가 아닐까?”가 아니라 “저입니까?”였다. Ⅱ. 제자들 가운데 우선권과 우열에 대한 분쟁이 일어남. 1. 논쟁의 내용. “그 중 누가 크냐.”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기 “전에” 이와 같은 권위와 지위에 대한 많은 다툼이 있었는데 이는 성령이 오셔서 그런 문제들을 버리라고 하신 이후라도 교회에서 자리다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바로 전에 했던 일과 이처럼 모순되는 일이 또 있을까! 바로 전에 그들은 누가 배반자가 될 것인가 서로 묻더니 지금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고 묻고 있다. 이처럼 가깝게 지내는 똑같은 사람들 입에서 자만과 허영심에 불타 우둔한 자의 소치를 들어낼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마치 한 샘에서 동시에 “맑은” 물과 “썩은”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간교한 마음이 가지는 자기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이런 논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그들을 호되게 꾸짖으실 것 같았는데(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날카롭게 책망하시곤 하셨다) 오히려 부드럽게 그 논쟁의 죄와 잘못을 깨우쳐 주셨다.
(1) 이런 논쟁은 그들을 세상 권력, 세상 명예를 탐하는 “이방인의 임금들”처럼 만들 것이다(25절). 그들은 자기 백성들을 “주관하며”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제왕들도,” 그들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자기보다 강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여지없이 그들을 주관하려 한다. 이 “주관”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보다는 “이방인의 임금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또 명심할 것은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며, 법을 만드는 그 Euverge,taj-즉 집권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아첨배들은 그들을 은인이라 부르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섬기게 된다. 그들이 “은인이었다”는 것처럼 꾸며지고 그런 이유로 그에게 “법도 소유하도록” 일임해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집권하면서 은인이 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진실로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들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프톨레미(Ptolemy; 기원 전 3, 4세기의 이집트 왕조; 역주) 왕조 중에도 Euergetes-즉 은인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왕이 있다. 이제 우리 구세주께선 이것을 아시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1] “큰 것을 구하는 것”보다 “선을 행함”이 더없이 큰 영광이다. “힘센 자의 두려움”이었던 임금들은 영광을 얻지 못했지만 오히려 “없는 자의 은인”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고백에 따른다면 자기 나라의 통치자보다는 자기 나라의 은인이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된다. [2] “선을 행함”이 크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밖에 달리 통치자가 되려는 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만이 최고의 영광을 얻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줌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은인”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와 같은 명칭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여라. 그들이 진정 그 “명칭에 합당한” 자들이 되면 누가 가장 크냐는 등의 논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보다 큰 자,” 세상에 집권하는 제왕들보다 더 큰 축복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명하게 “더 큰” 명예, 은인 되는 명예를 소유하였다면 이보다 적은 명예, 통치자가 되려는 욕심은 버리게 될 것이다.(2) 이런 논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겐 어울리지 않은 일이며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 27절), “진리와 은혜의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지배하도록 부탁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는 섬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유익과 영향을 받아 외적인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것은 자기의 직분을 남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처럼 임금을 세우려고 했던 불경스런 잘못과 같은 예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주의해야 한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통치권. “너희 중에 큰 자, 즉 나이가 많은 자”는 그 나이 때문에 당연히 우선권이 있겠지만 일이나 “행실”에서 뿐 아니라 “지위”에 있어서도 “젊은 자”와 같아야 한다(그런 자는 젊은 자와 함께 앉아 자신을 낮추며 젊은 자들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 Juniores ad labores seniores ad honores-즉 젊은 자는 일하게 하고 나이 든 자는 그들의 영광을 받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이든 자도 젊은 자와 마찬가지로 수고하여야 한다. 그들의 나이와 관록은 비록 이젠 쉬어도 된다고 보증하고 있지만 오히려 힘을 배로 내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논쟁의 내용. “그 중 누가 크냐.”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기 “전에” 이와 같은 권위와 지위에 대한 많은 다툼이 있었는데 이는 성령이 오셔서 그런 문제들을 버리라고 하신 이후라도 교회에서 자리다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바로 전에 했던 일과 이처럼 모순되는 일이 또 있을까! 바로 전에 그들은 누가 배반자가 될 것인가 서로 묻더니 지금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고 묻고 있다. 이처럼 가깝게 지내는 똑같은 사람들 입에서 자만과 허영심에 불타 우둔한 자의 소치를 들어낼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마치 한 샘에서 동시에 “맑은” 물과 “썩은”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간교한 마음이 가지는 자기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이런 논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그들을 호되게 꾸짖으실 것 같았는데(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날카롭게 책망하시곤 하셨다) 오히려 부드럽게 그 논쟁의 죄와 잘못을 깨우쳐 주셨다.이런 논쟁은 그들을 세상 권력, 세상 명예를 탐하는 “이방인의 임금들”처럼 만들 것이다(25절). 그들은 자기 백성들을 “주관하며”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제왕들도,” 그들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자기보다 강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여지없이 그들을 주관하려 한다. 이 “주관”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보다는 “이방인의 임금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또 명심할 것은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며, 법을 만드는 그 Euverge,taj-즉 집권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아첨배들은 그들을 은인이라 부르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섬기게 된다. 그들이 “은인이었다”는 것처럼 꾸며지고 그런 이유로 그에게 “법도 소유하도록” 일임해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집권하면서 은인이 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진실로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들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프톨레미(Ptolemy; 기원 전 3, 4세기의 이집트 왕조; 역주) 왕조 중에도 Euergetes-즉 은인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왕이 있다. 이제 우리 구세주께선 이것을 아시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큰 것을 구하는 것”보다 “선을 행함”이 더없이 큰 영광이다. “힘센 자의 두려움”이었던 임금들은 영광을 얻지 못했지만 오히려 “없는 자의 은인”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고백에 따른다면 자기 나라의 통치자보다는 자기 나라의 은인이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된다.”선을 행함”이 크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밖에 달리 통치자가 되려는 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만이 최고의 영광을 얻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줌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은인”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와 같은 명칭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여라. 그들이 진정 그 “명칭에 합당한” 자들이 되면 누가 가장 크냐는 등의 논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보다 큰 자,” 세상에 집권하는 제왕들보다 더 큰 축복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명하게 “더 큰” 명예, 은인 되는 명예를 소유하였다면 이보다 적은 명예, 통치자가 되려는 욕심은 버리게 될 것이다.이런 논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겐 어울리지 않은 일이며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 27절), “진리와 은혜의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지배하도록 부탁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는 섬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유익과 영향을 받아 외적인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것은 자기의 직분을 남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처럼 임금을 세우려고 했던 불경스런 잘못과 같은 예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주의해야 한다.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통치권. “너희 중에 큰 자, 즉 나이가 많은 자”는 그 나이 때문에 당연히 우선권이 있겠지만 일이나 “행실”에서 뿐 아니라 “지위”에 있어서도 “젊은 자”와 같아야 한다(그런 자는 젊은 자와 함께 앉아 자신을 낮추며 젊은 자들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 Juniores ad labores seniores ad honores-즉 젊은 자는 일하게 하고 나이 든 자는 그들의 영광을 받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이든 자도 젊은 자와 마찬가지로 수고하여야 한다. 그들의 나이와 관록은 비록 이젠 쉬어도 된다고 보증하고 있지만 오히려 힘을 배로 내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o` h`gou,menoj-즉 두목 학교나 공회의 대표자는 섬기는 자, w,j o` diakonw/n-즉 직원처럼 되어야 한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천하고 고된 봉사를 서슴치 말아야 한다. [2] 그 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모시는 자가 더 크냐? 모심을 당하는 자가 더 크냐?” 지금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처럼 하시고 있다. 그는 지금 거기 참석한 자들에게 시중들라고 명령하시며 “자리를 잡고 앉아 편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기 위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계셨다. 그들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자기들 스스로 따른다고 하는 그 주인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임금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3) 그들은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논쟁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런 것과는 반대되는, 전혀 다른 성격의 더 나은 영광, 하나님의 “나라,” “만찬,” “보좌”의 영광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영광을 공유(公有)하게 된 제자들은 앞에 말한 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28-30절).
[1]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당부. 이 믿음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므로 누가 더 크냐와 같은 것으로 다툴 필요는 없었다. 약간 칭찬하는 기분으로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내게서 등을 돌릴 때에도 내 옆에 서서 내게 의지한 자들이다” 하셨다.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사람들부터로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계속 그와 함께 머물렀으며 그가 받은 고통을 함께 받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줄 수 있는 도움이나 봉사는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계속 “그와 함께 있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은총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고맙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단히 둔하고 잊기를 잘했으며 때로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그들의 선생은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리셨다. 그는 그들의 부족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처럼 기념비적인 찬사를 하셨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이처럼 그는 헤어지는 마당에 칭찬하셨다. 이는 그가 그와 함께 굳게 설 수 있는 자들의 마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가 보여 주고 있다. [2] 충성된 자를 위해 마련된 보상.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맡기겠다. diati,qemai-즉 남기겠다.” 혹은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이 말씀의 뜻은. 첫째,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 가운데 한 나라,” 복음의 교회를 주셔서 그로 교회를 살리며, 용기를 주며, 통치할 머리로 삼으셨다. 이 “나라”를 그가 그의 제자들과 복음의 후계자들에게 “맡기셨으므로” 그들은 복음의 평안과 특권을 누리며, 복음의 성례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나누어주며, 교회의 조직적인 훈련과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직도 믿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복음의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교회의 참된 관리로써 보좌에 앉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위해 마련된 영광이다. 그 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모시는 자가 더 크냐? 모심을 당하는 자가 더 크냐?” 지금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처럼 하시고 있다. 그는 지금 거기 참석한 자들에게 시중들라고 명령하시며 “자리를 잡고 앉아 편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기 위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계셨다. 그들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자기들 스스로 따른다고 하는 그 주인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임금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그들은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논쟁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런 것과는 반대되는, 전혀 다른 성격의 더 나은 영광, 하나님의 “나라,” “만찬,” “보좌”의 영광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영광을 공유(公有)하게 된 제자들은 앞에 말한 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28-30절).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당부. 이 믿음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므로 누가 더 크냐와 같은 것으로 다툴 필요는 없었다. 약간 칭찬하는 기분으로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내게서 등을 돌릴 때에도 내 옆에 서서 내게 의지한 자들이다” 하셨다.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사람들부터로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계속 그와 함께 머물렀으며 그가 받은 고통을 함께 받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줄 수 있는 도움이나 봉사는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계속 “그와 함께 있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은총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고맙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단히 둔하고 잊기를 잘했으며 때로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그들의 선생은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리셨다. 그는 그들의 부족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처럼 기념비적인 찬사를 하셨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이처럼 그는 헤어지는 마당에 칭찬하셨다. 이는 그가 그와 함께 굳게 설 수 있는 자들의 마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가 보여 주고 있다.충성된 자를 위해 마련된 보상.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맡기겠다. diati,qemai-즉 남기겠다.” 혹은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이 말씀의 뜻은. 첫째,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 가운데 한 나라,” 복음의 교회를 주셔서 그로 교회를 살리며, 용기를 주며, 통치할 머리로 삼으셨다. 이 “나라”를 그가 그의 제자들과 복음의 후계자들에게 “맡기셨으므로” 그들은 복음의 평안과 특권을 누리며, 복음의 성례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나누어주며, 교회의 조직적인 훈련과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직도 믿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복음의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교회의 참된 관리로써 보좌에 앉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위해 마련된 영광이다. 둘째, 하늘나라에 너희를 위해 마련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섬기는 일을 다하여라. 그 보상을 하늘에서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나라를 주셨다. 그들이 그 나라에서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a. 진수성찬.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의 나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16, 18절). 그들은 그의 섬김과 고통의 보상으로 얻은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쁜 모습을 보며 영혼의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은 만찬과 같이 사랑이 완전히 성취된 최상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b. “최고의 영광.”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 앉았던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상에 앉을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거룩한 보좌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내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다(계 3:21). 그 날에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때 찬미하며 함께 할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면(고전 6:2) 교회는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베드로가 부인할 것에 대하여. 이 부분을 읽으며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미칠 사단의 궤휼에 대해 일러주신다(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내가 하려는 말을 명심하라. “사단이 밀까브르듯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모두를 손에 쥐고 흔들고자 하였으나, 다른 제자들의 입노릇을 하던 베드로가 여기서는 다른 제자들의 귀 노릇을 하고 있다. 제자들 모두에게 경고하실 말씀을(나로 인하여 너희 모두가 배척을 받으리라) 베드로에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흥분을 잘하는 특별난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로 그에게 관련된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아마도 사탄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키울 목적으로 욥을 비난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하나님께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그들은 정직한 자들이며 순결한 자들이다” 하셨고, 사탄은 “그들을 시험하게 해주시오, 특히 베드로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청구해 “밀 까부르듯 까불어” 그들이 알곡이 아닌 쭉정이들인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까불림”이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 속에 무엇이 있나 시험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그들을 까부를 뿐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그들로 죄를 짓게 만들도록 애를 쓸 것이다. 옥수수를 까부를 때 쭉정이를 제일 위에 모으듯, 아니면 알곡을 모두 골라내고 쭉정이만 남겨두듯 그들을 이런 식으로 정신 못 차리게 하여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들을 까부를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라. 사탄은 욥을 시험하고 유혹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했듯이 VExuvth,sato -즉 그들을 청구하였다. “그가 너희에게 도전하였다. 너희가 위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특히 너희 중에 제일 앞장 선 베드로에게 도전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그들이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다툼 때문에 그 벌로써 그들을 까부릴 허락을 사탄이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아마 베드로가 그 논쟁에 제일 열을 올렸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을 까부르시겠다면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요”라고 사탄이 요구했을 것이다.2. 이런 시험에 대비하여 베드로에게 베푼 특별한 배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왜냐하면 사탄은 너희 모두를 넘어뜨리고자 원하고 있으나 다만 네게만 그의 수단을 다해 시험하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가장 강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네 믿음이 송두리째 남김없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시험에 넘어갈지라도 한 시간이라도 우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사탄의 불화살도 끌 것이다.
(2) 진실된 믿음의 사람들도 수차 믿음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이 완전히 떨어지는 일은 없다. 믿음은 그들 속에 씨앗으로, 뿌리로 남아 있다.
(3) 제자들의 믿음이 때로는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지만 그대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와 간섭 때문이다. 만약 그들끼리만 버려 둔다면 그들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기도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어느 “특정한 ”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3. 베드로에게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원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우라고 분부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 굳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켜 회개한 다음에 다른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너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라. 너는 하나님의 자비가 너와 함께 있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에게도 그들 역시 자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어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죄를 지은 자들은 “죄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샛길로 나간 자들은 “돌아와야만” 한다.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처음 행실을 행해야만 한다.
(2) 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자기의 형제들이 굳게 서서 떨어지지 않게 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시 51:11-13; 딤전 1:13 참조).
4. 베드로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33절).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 말은 참으로 위대한 말이었다. 당시 그가 의미했던 뜻과 어떻게 하든 “잘해 보려”는 생각 외에 달리 생각할 수는 없다. 유다는 종종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리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베드로처럼 이렇게 완강히 항의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마음은 악한 것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었지만 유다는 완전히 악한 것에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따라 그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또 그가 어느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든지, 감옥으로든, 죽으로든 따라 갈 준비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5.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다(34절).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너는 네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이나마 네게 맡기는 것은 네가 네 마음을 알게 되어 다시는 네 마음을 신뢰하지 말기를 바람이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에 의해 나타나게 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도 우리의 약한 점을 더 잘 아셔서 충만한 은혜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시험에 들게 될 것인가 아시고 “이 정도까지 될 것인데 그 이상은 안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니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미칠 사단의 궤휼에 대해 일러주신다(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내가 하려는 말을 명심하라. “사단이 밀까브르듯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모두를 손에 쥐고 흔들고자 하였으나, 다른 제자들의 입노릇을 하던 베드로가 여기서는 다른 제자들의 귀 노릇을 하고 있다. 제자들 모두에게 경고하실 말씀을(나로 인하여 너희 모두가 배척을 받으리라) 베드로에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흥분을 잘하는 특별난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로 그에게 관련된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아마도 사탄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키울 목적으로 욥을 비난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하나님께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그들은 정직한 자들이며 순결한 자들이다” 하셨고, 사탄은 “그들을 시험하게 해주시오, 특히 베드로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청구해 “밀 까부르듯 까불어” 그들이 알곡이 아닌 쭉정이들인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까불림”이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 속에 무엇이 있나 시험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그들을 까부를 뿐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그들로 죄를 짓게 만들도록 애를 쓸 것이다. 옥수수를 까부를 때 쭉정이를 제일 위에 모으듯, 아니면 알곡을 모두 골라내고 쭉정이만 남겨두듯 그들을 이런 식으로 정신 못 차리게 하여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들을 까부를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라. 사탄은 욥을 시험하고 유혹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했듯이 VExuvth,sato -즉 그들을 청구하였다. “그가 너희에게 도전하였다. 너희가 위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특히 너희 중에 제일 앞장 선 베드로에게 도전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그들이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다툼 때문에 그 벌로써 그들을 까부릴 허락을 사탄이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아마 베드로가 그 논쟁에 제일 열을 올렸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을 까부르시겠다면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요”라고 사탄이 요구했을 것이다.이런 시험에 대비하여 베드로에게 베푼 특별한 배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왜냐하면 사탄은 너희 모두를 넘어뜨리고자 원하고 있으나 다만 네게만 그의 수단을 다해 시험하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가장 강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네 믿음이 송두리째 남김없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시험에 넘어갈지라도 한 시간이라도 우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사탄의 불화살도 끌 것이다.진실된 믿음의 사람들도 수차 믿음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이 완전히 떨어지는 일은 없다. 믿음은 그들 속에 씨앗으로, 뿌리로 남아 있다.제자들의 믿음이 때로는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지만 그대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와 간섭 때문이다. 만약 그들끼리만 버려 둔다면 그들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기도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어느 “특정한 ”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베드로에게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원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우라고 분부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 굳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켜 회개한 다음에 다른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너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라. 너는 하나님의 자비가 너와 함께 있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에게도 그들 역시 자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어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죄를 지은 자들은 “죄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샛길로 나간 자들은 “돌아와야만” 한다.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처음 행실을 행해야만 한다.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자기의 형제들이 굳게 서서 떨어지지 않게 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시 51:11-13; 딤전 1:13 참조).베드로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33절).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 말은 참으로 위대한 말이었다. 당시 그가 의미했던 뜻과 어떻게 하든 “잘해 보려”는 생각 외에 달리 생각할 수는 없다. 유다는 종종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리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베드로처럼 이렇게 완강히 항의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마음은 악한 것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었지만 유다는 완전히 악한 것에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따라 그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또 그가 어느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든지, 감옥으로든, 죽으로든 따라 갈 준비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다(34절).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너는 네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이나마 네게 맡기는 것은 네가 네 마음을 알게 되어 다시는 네 마음을 신뢰하지 말기를 바람이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에 의해 나타나게 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도 우리의 약한 점을 더 잘 아셔서 충만한 은혜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시험에 들게 될 것인가 아시고 “이 정도까지 될 것인데 그 이상은 안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니 다행스런 일이다. Ⅳ. 모든 제자들의 준비 사항. 1. 그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형편에 대하여 물으셨다(35절). 그는 제자들이 그에게 충성된 종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인정하셨다(28절). 이제 그들과 헤어지면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과연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른 이후 그들의 친절하고 다정한 주인이 되었는지 알고자 하신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1) 그는 제자들을 보낼 때 맨발로, 전대에는 돈도 없는 대단히 궁핍하고 어려운 형편으로 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먼 곳으로 가거나 오래 동안 나가 있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만을 의존하고 그 섭리 안에서 그들의 친구들의 도움에만 의존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형편으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는 우리가 시작했던 보잘 것 없는 형편에서 더 나아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때도 그들은 여전히 풍족하게, 평안하게 살았으며, 그들도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없었나이다.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였나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우리도 때때로 우리의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재고해 보며, 우리가 당했던 고란과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2] 그리스도는 선한 주인이시며 그의 보살핌은 부족함 없는 보살핌이다. 그의 종들이 때로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 갈지라도 그를 도울 것이며, 그들을 “시험”할지라도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 이레”이다. [3] 우리에게 충분한 양식의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 처지라 할지라도,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일용한 재물만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한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헌물에 의존해 살았으나 자신들의 형편이 말도 못할 정도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며 풍족했노라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2. 그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다가올 그들의 형편의 대변화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1)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되신 그리스도는 전에도 누차 말한바와 같이 이제부터 수난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37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감이니라. 그리고 이 일은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리라. 그는 범죄자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 또한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죽으리라. 이 일은 아직 이루지 못한 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짐으로 내게 관한 일이, 내게 관하여 기록된 일들이 끝을 맺으리라. 그때에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리라.”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고난이 예언된 것으로 하늘의 섭리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실을 잠시 후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된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며, “끝을 맺게 될” 것이며, 유종의 미를 거두어 영원히 남게 되리라.
(2)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예상하고 지금까지와 같이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계속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하였다. 그게 아니라, 이제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약간의 고난을 받으나, 그가 가면 그들도 선생과 “같은” 고난을 받을 예상을 하고 있어야만 되었다. 종이 그 주인보다 낫지 못한 것이다.
[1] 친구들이 예전처럼 그들을 그렇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대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며 될 수 있는 한 검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의 적들이 이제는 전보다 더 지독하게 그들을 못살게 굴 것을 예상해야 한다. 쌀뿐만 아니라 되도 필요할 것이다. 강도와 자객으로부터 자신을 지킬(고후 11:26) “검이 없는 자”는 검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며 언제라도 자기 옷을 팔아 검을 살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단지 누구나 옆에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면 목숨을 지키기 힘든 대단히 위험스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녀야 할 검은 “성령의 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한다(벧전 4:1). 우리는 다가올 고난을 예비하여 “갑옷을 입고”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며, 고난 중에 배척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팔아 검을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검 둘”을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의 것이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평소에도 검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스도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지만 그의 제자들이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금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족하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그가 검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냉소적인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열둘 중에 검이 두 개 뿐이라! 너희 적들은 지금 수없이 몰려오는데, 그것도 한 사람이 검 하나씩 들고 달려오는데 고작 이것이라니, 참으로 대담무쌍하구나.” 그러나 검이 필요없는 자들에겐 두 개라도 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손수 “그들은 돕는 방패시오 그들의 영광의 칼”이시기 때문이다(신 33:29).그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형편에 대하여 물으셨다(35절). 그는 제자들이 그에게 충성된 종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인정하셨다(28절). 이제 그들과 헤어지면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과연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른 이후 그들의 친절하고 다정한 주인이 되었는지 알고자 하신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그는 제자들을 보낼 때 맨발로, 전대에는 돈도 없는 대단히 궁핍하고 어려운 형편으로 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먼 곳으로 가거나 오래 동안 나가 있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만을 의존하고 그 섭리 안에서 그들의 친구들의 도움에만 의존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형편으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는 우리가 시작했던 보잘 것 없는 형편에서 더 나아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때도 그들은 여전히 풍족하게, 평안하게 살았으며, 그들도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없었나이다.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였나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우리도 때때로 우리의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재고해 보며, 우리가 당했던 고란과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그리스도는 선한 주인이시며 그의 보살핌은 부족함 없는 보살핌이다. 그의 종들이 때로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 갈지라도 그를 도울 것이며, 그들을 “시험”할지라도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 이레”이다.우리에게 충분한 양식의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 처지라 할지라도,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일용한 재물만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한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헌물에 의존해 살았으나 자신들의 형편이 말도 못할 정도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며 풍족했노라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그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다가올 그들의 형편의 대변화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왜냐하면 그들의 주님되신 그리스도는 전에도 누차 말한바와 같이 이제부터 수난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37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감이니라. 그리고 이 일은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리라. 그는 범죄자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 또한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죽으리라. 이 일은 아직 이루지 못한 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짐으로 내게 관한 일이, 내게 관하여 기록된 일들이 끝을 맺으리라. 그때에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리라.”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고난이 예언된 것으로 하늘의 섭리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실을 잠시 후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된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며, “끝을 맺게 될” 것이며, 유종의 미를 거두어 영원히 남게 되리라.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예상하고 지금까지와 같이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계속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하였다. 그게 아니라, 이제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약간의 고난을 받으나, 그가 가면 그들도 선생과 “같은” 고난을 받을 예상을 하고 있어야만 되었다. 종이 그 주인보다 낫지 못한 것이다.친구들이 예전처럼 그들을 그렇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대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며 될 수 있는 한 검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적들이 이제는 전보다 더 지독하게 그들을 못살게 굴 것을 예상해야 한다. 쌀뿐만 아니라 되도 필요할 것이다. 강도와 자객으로부터 자신을 지킬(고후 11:26) “검이 없는 자”는 검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며 언제라도 자기 옷을 팔아 검을 살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단지 누구나 옆에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면 목숨을 지키기 힘든 대단히 위험스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녀야 할 검은 “성령의 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한다(벧전 4:1). 우리는 다가올 고난을 예비하여 “갑옷을 입고”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며, 고난 중에 배척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팔아 검을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검 둘”을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의 것이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평소에도 검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스도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지만 그의 제자들이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금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족하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그가 검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냉소적인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열둘 중에 검이 두 개 뿐이라! 너희 적들은 지금 수없이 몰려오는데, 그것도 한 사람이 검 하나씩 들고 달려오는데 고작 이것이라니, 참으로 대담무쌍하구나.” 그러나 검이 필요없는 자들에겐 두 개라도 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손수 “그들은 돕는 방패시오 그들의 영광의 칼”이시기 때문이다(신 33:29).
22:39 감란산의 고뇌(누가복음 22:39-46)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배반당하시기 바로 전, “동산에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읽게 된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고뇌로 그리스도는 그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하나의 사업-자신의 영혼을 죄의 대속물로 바치는 일의 한 부분에 자신을 적응시키셨다. 그가 갚아야 할 (인간의) 죄로 인하여 얻은 슬픔 속에 그의 영혼은 괴로움을 겪었으며, 죄로 인하여 인간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이 미웠을 것이며,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남김없이 태우는 것이 그 제물은 흠향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므로 이제 그야말로 이와 같은 제물로 드려지기에 합당한 자임을 느꼈을 때 괴로워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력이 짜놓은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을 그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정복하고 말았다. Ⅰ. 내용. 1. 밤중이었는데도 그리스도는 나가 먼 길을 걸었고 “제자들”(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도 “그를 쫓았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한 그들이었으므로 지금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
2. 사사로운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습관적으로 쉬는 곳이 있었으며 종종 홀로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마음의 거리낌없는 대화를 위하여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에겐 등산밖에 편안히 쉴 만한 장소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찾아가 쉬셨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석한 후 특히 실천에 옮길 일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시간을 요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3. 그는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시련으로 죄를 짓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즉 그들에게 너무나도 놀랍고 위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버릴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절대로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당부하셨다. “너희가 죄를 멀리 하도록 기도하라.”
4. 그리고 그는 그들을 떠나 혼자 기도하셨다. 은혜의 자리엔 그들 각자의 용무가 있고 그리스도도 자기의 용무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들이 각기 떨어져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며 그들이 연합해서 이룰 용무가 있을 때엔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돌 던질 만큼” 더 동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 거리를 50, 60보 정도로 추산한다. 그리고 거기서 맨 땅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는 “얼굴을 땅에 대신” 후에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고통의 잔들, 이 쓴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이 말씀은 죄 없는 인간이 고통을 두려워함으로 나온 말이었다. 진정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그러나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만 하며, 현재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구속과 구원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나서 그는 그 간구를 포기하고 계속 조르지 않고 완전히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내 인간의 본능대로 마옵시고, 두루마리 책에 관해 기록한 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시 40:7, 8).
6. 그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제자들도 그때엔 각자 기도하고 있어야만 하였다(45절). 그가 “기도 후에 일어나” 보니 “제자들은” 그의 슬픔엔 관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다른 복음서에선 읽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선생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눈물겨운 이별의 슬픔으로 그들의 영혼은 지쳐 있었고 몸도 마음도 둔하게 만들어(이제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들을 잠들게 하고야 말았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으면 거기에다 약점들을 모두 전가시키도록 가르치고 있다.
7. 그들을 깨우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어찌하여 잠이 오도록 가만 두었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기도하기에 합당하도록 졸음을 떨쳐 버리라. 그리고 능히 너희가 졸음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하라.” 이 말씀은 폭풍 속에서 선장이 요나에게 한 말과 같다(욘 1:6).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외부의 환경으로나 내적인 감정으로 시험에 들려고 하면 우리는 “일어나 기도”해야만 한다. 주여, 이 “궁핍한 때”에 나를 도우소서. 밤중이었는데도 그리스도는 나가 먼 길을 걸었고 “제자들”(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도 “그를 쫓았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한 그들이었으므로 지금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사사로운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습관적으로 쉬는 곳이 있었으며 종종 홀로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마음의 거리낌없는 대화를 위하여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에겐 등산밖에 편안히 쉴 만한 장소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찾아가 쉬셨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석한 후 특히 실천에 옮길 일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시간을 요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그는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시련으로 죄를 짓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즉 그들에게 너무나도 놀랍고 위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버릴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절대로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당부하셨다. “너희가 죄를 멀리 하도록 기도하라.”그리고 그는 그들을 떠나 혼자 기도하셨다. 은혜의 자리엔 그들 각자의 용무가 있고 그리스도도 자기의 용무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들이 각기 떨어져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며 그들이 연합해서 이룰 용무가 있을 때엔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돌 던질 만큼” 더 동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 거리를 50, 60보 정도로 추산한다. 그리고 거기서 맨 땅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는 “얼굴을 땅에 대신” 후에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고통의 잔들, 이 쓴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이 말씀은 죄 없는 인간이 고통을 두려워함으로 나온 말이었다. 진정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만 하며, 현재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구속과 구원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나서 그는 그 간구를 포기하고 계속 조르지 않고 완전히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내 인간의 본능대로 마옵시고, 두루마리 책에 관해 기록한 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시 40:7, 8).그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제자들도 그때엔 각자 기도하고 있어야만 하였다(45절). 그가 “기도 후에 일어나” 보니 “제자들은” 그의 슬픔엔 관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다른 복음서에선 읽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선생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눈물겨운 이별의 슬픔으로 그들의 영혼은 지쳐 있었고 몸도 마음도 둔하게 만들어(이제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들을 잠들게 하고야 말았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으면 거기에다 약점들을 모두 전가시키도록 가르치고 있다.그들을 깨우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어찌하여 잠이 오도록 가만 두었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기도하기에 합당하도록 졸음을 떨쳐 버리라. 그리고 능히 너희가 졸음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하라.” 이 말씀은 폭풍 속에서 선장이 요나에게 한 말과 같다(욘 1:6).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외부의 환경으로나 내적인 감정으로 시험에 들려고 하면 우리는 “일어나 기도”해야만 한다. 주여, 이 “궁핍한 때”에 나를 도우소서. Ⅱ. 다른 복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사실이 세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실 때 “사자(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그의 힘을 도왔다”(43절).
(1) 우리 주 예수께서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깊은 굴욕을 나타내는 예가 된다. 당시로써는 신성(神性)의 힘이 없어졌으므로 그의 인성(人性)만으로는 “천사보다는 약간 낮은” 상태에서 천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었다.
(2) 그는 고통에서 해방되지는 않으셨지만 천사들을 통해 힘을 얻고 격려 받았다. 그 고통이나 위로는 서로 상쇄되었다. 하나님께서 각자 어깨에 짐을 지워 주실 때엔 우리로선 불평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분배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다윗은 고난받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해 주신”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시 138:3).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같은 응답을 받았다.
(3) 천사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를 돌보았다. 그는 천사들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잡으려고 찾아오는 무리들을 물리쳐 굴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군대의 힘을 단지 그의 “힘을 돕는 데”만 썼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잠들어 있고 그의 적들은 깨어 있을 그때에 슬픔 중에 있는 그를 천사들이 방문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에겐 대단한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천사)는 아마도 그에게 힘을 돕기 위하여 “무언가 말했을” 것이다. 그가 받는 고난은 그의 아버지의 영광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며, 그 앞에 기쁨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 열매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의 마음속에 일러 주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말로 천사는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계속 나갈 것을 격려하였을 것이다. 위로가 곧 힘이 되었다. 천사는 아마도 그의 힘을 돋우기 위해 “무언가 했을” 것이다. 그의 땀과 눈물을 씻어 주었다든가, 시험이 끝났을 때처럼(마 4:11 참조) 그에게 다소나마 용기를 북돋우었거나, 아니면 그의 팔을 끼고 땅에서 일어나 것을 돕거나 또는 그가 기진 하였을 때 부축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천사의 수종을 통하여 성령은 evniscu,wn auvto,n -즉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힘을 돕는다란 말의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다. “그를 상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권능으로 그를 대적하였는가?” 아니다. 시편 89편 21절, 이사야 49장 8절, 50장 7절에 약속하신 대로 오히려 그는 “그에게 힘을 넣어 주셨다”(욥 23:6).
2.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44절). 슬픔과 괴로움이 그를 덮치면 덮칠수록 그는 기도에 몰입하였다. 전에 그가 기도할 때엔 냉냉하고 성의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여느 때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 나타나고 있다. 기도란 때를 타는 것이어선 안 되지만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 하는 기도는 특히 간절해야 한다. 우리의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힘있게 자주 해야만 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듯 그는 두려움 중에 “힘쓰고 애썼다.”
3. 이와 같은 괴로움 속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같이 되었다.” 땀은 죄와 함께 생겨났고 저주의 내용이었다(창 3:1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를 지셨을 때, 그는 슬픔의 땀을 흘리게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그의 떡을 먹게 되었고 그는 우리에게 닥칠 모든 시험을 속량 하시고 갚아 주셨다. 이 구절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땀은 보통 때 흘리는 땀방울보다 더 “크거나” 평소보다 땀구멍이 더 크게 되어서 땀을 “핏방울로 비유한” 것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모세혈관이 터져 “진짜” 피가 나와 땀이 핏빛으로 보였으며 그런고로 “피땀”이라고 부른 것은 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던 때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피 흘림 없이는 용서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땀구멍은 피가 맺힌 상처처럼 되었을 것이고 그의 피가 옷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고뇌”에 빠져있는가 보여 준다. 그는 당시 쌀쌀한 계절에, 깊은 밤중에, 그것도 찬 땅 위에서 바깥 공기를 쐬며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땀을 흘린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실 때 “사자(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그의 힘을 도왔다”(43절).우리 주 예수께서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깊은 굴욕을 나타내는 예가 된다. 당시로써는 신성(神性)의 힘이 없어졌으므로 그의 인성(人性)만으로는 “천사보다는 약간 낮은” 상태에서 천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었다.그는 고통에서 해방되지는 않으셨지만 천사들을 통해 힘을 얻고 격려 받았다. 그 고통이나 위로는 서로 상쇄되었다. 하나님께서 각자 어깨에 짐을 지워 주실 때엔 우리로선 불평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분배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다윗은 고난받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해 주신”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시 138:3).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같은 응답을 받았다.천사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를 돌보았다. 그는 천사들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잡으려고 찾아오는 무리들을 물리쳐 굴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군대의 힘을 단지 그의 “힘을 돕는 데”만 썼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잠들어 있고 그의 적들은 깨어 있을 그때에 슬픔 중에 있는 그를 천사들이 방문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에겐 대단한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천사)는 아마도 그에게 힘을 돕기 위하여 “무언가 말했을” 것이다. 그가 받는 고난은 그의 아버지의 영광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며, 그 앞에 기쁨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 열매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의 마음속에 일러 주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말로 천사는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계속 나갈 것을 격려하였을 것이다. 위로가 곧 힘이 되었다. 천사는 아마도 그의 힘을 돋우기 위해 “무언가 했을” 것이다. 그의 땀과 눈물을 씻어 주었다든가, 시험이 끝났을 때처럼(마 4:11 참조) 그에게 다소나마 용기를 북돋우었거나, 아니면 그의 팔을 끼고 땅에서 일어나 것을 돕거나 또는 그가 기진 하였을 때 부축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천사의 수종을 통하여 성령은 evniscu,wn auvto,n -즉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힘을 돕는다란 말의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다. “그를 상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권능으로 그를 대적하였는가?” 아니다. 시편 89편 21절, 이사야 49장 8절, 50장 7절에 약속하신 대로 오히려 그는 “그에게 힘을 넣어 주셨다”(욥 23:6).”그는 괴로워하면서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44절). 슬픔과 괴로움이 그를 덮치면 덮칠수록 그는 기도에 몰입하였다. 전에 그가 기도할 때엔 냉냉하고 성의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여느 때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 나타나고 있다. 기도란 때를 타는 것이어선 안 되지만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 하는 기도는 특히 간절해야 한다. 우리의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힘있게 자주 해야만 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듯 그는 두려움 중에 “힘쓰고 애썼다.”이와 같은 괴로움 속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같이 되었다.” 땀은 죄와 함께 생겨났고 저주의 내용이었다(창 3:1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를 지셨을 때, 그는 슬픔의 땀을 흘리게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그의 떡을 먹게 되었고 그는 우리에게 닥칠 모든 시험을 속량 하시고 갚아 주셨다. 이 구절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땀은 보통 때 흘리는 땀방울보다 더 “크거나” 평소보다 땀구멍이 더 크게 되어서 땀을 “핏방울로 비유한” 것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모세혈관이 터져 “진짜” 피가 나와 땀이 핏빛으로 보였으며 그런고로 “피땀”이라고 부른 것은 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던 때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피 흘림 없이는 용서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땀구멍은 피가 맺힌 상처처럼 되었을 것이고 그의 피가 옷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고뇌”에 빠져있는가 보여 준다. 그는 당시 쌀쌀한 계절에, 깊은 밤중에, 그것도 찬 땅 위에서 바깥 공기를 쐬며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땀을 흘린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22:47 유다의 배반(누가복음 22:47-53) 사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렵게 하여 정신을 잃게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늘 하는 식으로)무력과 무기로 그를 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무리를 동산으로 끌어 왔다. “그들 가운데엔 사단이 있었다.” Ⅰ. 유다를 통한 식별. 그곳에 수많은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 선두엔 유다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잡으려는 무리를 인도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유다가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와서도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유다는 그들에게 자기가 키스하는 자가 바로 그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습관적인 사랑의 표시로 허락하신 그대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다가왔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질문을 주목하고 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게 뭐냐? 이것이 암호냐?(48절) 이렇게 인자에겐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인자에겐 알리지 않고 그를 해할 계획을 진행시키듯 인자는 “배반당해야만” 하느냐? 제자들에겐 못된 교사가 되었던 것같이, 제자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같이 이렇게 자기 제자에게 버림을 당해야만 하느냐? 키스로 배반을 당해야만 하느냐? 우정의 표시가 배반의 도구로 쓰여져야만 하느냐? 영원한 사랑의 표시가 이처럼 더러운 일에 쓰여져야만 하느냐? 주 예수께서는 배반당하시는 것, 그것도 그와 함께 하겠다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자로부터 키스를 받으며 배반당하시는 것보다 더한 치욕은 없으셨을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자. 이처럼 그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꾸미며 그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들,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을 행하는 것처럼 속이며 성결하고 엄격한 행실을 바탕으로부터 흔들어 버리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거룩한 듯 흉내는 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에게 키스를 받으시며 배반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예는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양심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유다에게 하신 질문.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그가 이것에 노하시지 않겠느냐?” “그가 이것에 그대로 갚으시지 않겠느냐?와 같은 질문들이 들여지게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Ⅱ.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들의 노력(49절).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무장한 자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온 것을 보고 그들은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주께서 우기가 검 두 개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셨나이다. 이제 그것을 쓸까요? 아직 한 번도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검을 쓰지 않는다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마치 자기 선생의 허락 없이는 칼을 빼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너무도 “다급하고 흥분되어” 있어서 대답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다. 그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 중에 한사람의 목을 겨냥해 휘둘렀으나 빗나가 “그의 오른편 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치심으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보여 주셨듯이, 베드로도 이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가 허락만 받는다면 선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복음서에선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르치고 있다. 1. 칼부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과. “이것까지 참으라”(51절). 휘트비(Whitby)박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으러 온 적들에게 한 말로써 그들을 무마시켜 그 일로 흥분해 제자들에게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불상사를 묵인해 달라. 내 허락 없이한 짓이었으며 다시는 칼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해치울 만한, 그들을 죽일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바와 같이 그를 따르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저지를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을 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적들에게도 좋은 말로 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부상자를 치료함. 이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 이상의 행위이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이는 그(대제사장의 종)에게 이와 같은 상처로 낙인찍힌 채 달아나도록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낙인이 그에게 찍힐 충분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
(1) 그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반격을 가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즉시 고치실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아프고 부상당한” 자를 즉각 고쳐 주실 능력이 있으니 이 작은 군대로 무슨 일인들 하실 수 없으려?
(2) 그의 자비와 선하심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는 그의 율법의 예를 보여 주셨다. 후에도 그는 “우리를 귀찮게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예도 보여 주셨다.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같이 하라. 이와 같이 관용 있는 자비를 베풀면 그들이 굴복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대단히 부끄럽게 함으로 이와 같이 선을 베푼 자를 감히 행악자로 체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칼부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과. “이것까지 참으라”(51절). 휘트비(Whitby)박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으러 온 적들에게 한 말로써 그들을 무마시켜 그 일로 흥분해 제자들에게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불상사를 묵인해 달라. 내 허락 없이한 짓이었으며 다시는 칼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해치울 만한, 그들을 죽일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바와 같이 그를 따르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저지를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을 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적들에게도 좋은 말로 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부상자를 치료함. 이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 이상의 행위이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이는 그(대제사장의 종)에게 이와 같은 상처로 낙인찍힌 채 달아나도록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낙인이 그에게 찍힐 충분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그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반격을 가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즉시 고치실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아프고 부상당한” 자를 즉각 고쳐 주실 능력이 있으니 이 작은 군대로 무슨 일인들 하실 수 없으려?그의 자비와 선하심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는 그의 율법의 예를 보여 주셨다. 후에도 그는 “우리를 귀찮게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예도 보여 주셨다.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같이 하라. 이와 같이 관용 있는 자비를 베풀면 그들이 굴복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대단히 부끄럽게 함으로 이와 같이 선을 베푼 자를 감히 행악자로 체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Ⅲ. 그를 체포하러 파견되어 온 군관들에게 하신 훈계의 말씀. 이렇게 폭도들을 몰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 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깨우쳐 주셨다(52, 53절). 마태는 이 말씀을 무리에게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전의 군관들은 제사장들로부터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왔을 것이며 그래서 여기에 “대사장들과 장로들” 사이에 언급되고 있는 성직자들로서 이와 같은 가증스런 일을 위해 채용된 자들이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도 역시 비난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 그들의 방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추종.” 이처럼 어두운 밤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연유가 무엇이냐?
(1) 그들은 그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며 무리를 선동해 그들에게 대적하게 하지 않을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
(2) 그들은 그가 “도망갈” 자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 그들 한가운데 있었으며 한 번도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고 그들도 그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의 때가 오기 전엔 그를 잡는 일이 그들에겐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제 그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이 그를 잡으려 이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났다.
2. 그들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위. 우리는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이처럼 내게 닥친 일들이 괴로운 것일지라도 나는 따르리라. 이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희가 허락을 받아 너희 맘대로 나를 대적할 때이다. 이 모든 일을 보상받을 내게 약속된 때가 따로 있다. 지금은 어두움의 권세, 이 세상 어두움의 지배자, 사탄이 여인이 난 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갖은 악을 행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따르겠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버려 두어라.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시 37:13). 교회의 적들이 기승을 부릴 때엔 그대로 버려 두어라.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멋대로 하게 두어라.
(1) 이 때의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승리가 허락된 짧은 시간, 제한된 시간이다.
(2) 지금은 “그들의 때”이다. 그들에게 약속된 시간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시험할 허락을 얻었으나(그들의 시간이 지나) 그들이 무너지게 되면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더욱 빛날 것이다.
(3) “앞장 서 달리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그 길을 비켜 주어야 한다. 어둠의 권세는 빛의 왕이 오시는 길을 더 빨리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쟁을 모두 마치고 승리의 날을 기다리셨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하리라.
그들의 방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추종.” 이처럼 어두운 밤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연유가 무엇이냐?그들은 그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며 무리를 선동해 그들에게 대적하게 하지 않을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그들은 그가 “도망갈” 자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 그들 한가운데 있었으며 한 번도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고 그들도 그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의 때가 오기 전엔 그를 잡는 일이 그들에겐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제 그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이 그를 잡으려 이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났다.그들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위. 우리는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이처럼 내게 닥친 일들이 괴로운 것일지라도 나는 따르리라. 이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희가 허락을 받아 너희 맘대로 나를 대적할 때이다. 이 모든 일을 보상받을 내게 약속된 때가 따로 있다. 지금은 어두움의 권세, 이 세상 어두움의 지배자, 사탄이 여인이 난 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갖은 악을 행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따르겠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버려 두어라.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시 37:13). 교회의 적들이 기승을 부릴 때엔 그대로 버려 두어라.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멋대로 하게 두어라.이 때의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승리가 허락된 짧은 시간, 제한된 시간이다.지금은 “그들의 때”이다. 그들에게 약속된 시간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시험할 허락을 얻었으나(그들의 시간이 지나) 그들이 무너지게 되면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더욱 빛날 것이다.”앞장 서 달리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그 길을 비켜 주어야 한다. 어둠의 권세는 빛의 왕이 오시는 길을 더 빨리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쟁을 모두 마치고 승리의 날을 기다리셨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하리라.
22:54 베드로의 타락(누가복음 22:54-62)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부인하는 슬픈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의 선생은 대제사장과 음모를 꾸민 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날만 새면” 산헤드린의 전에(66절) 그를 고소할려고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시험 당하신 것에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다”는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다(54절). 그러나 그 표현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이 말씀은 사울에 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삼상 15:12). “그는 돌이켜 행하여 내려갔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이 비록 자기들이 바랐던 포획물을 얻었지만 그들은 대단히 혼란한 지경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렵거나 또는 그들이 보고들은 바에 의해 내부의 두려움이 생겨 그를 먼길로 우회해 데려 온 것 같다. 아니면 어디로 가야 그를 재빨리 데려 갈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은 마음만 조급했을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베드로의 타락. 1. 그것은 “몰래 들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선생이 죄인으로 붙잡혀 갈 때 “그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선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위험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리서” 좇아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명예를 지킬 정도로 “멀리서” 따랐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따라갔다.
2. 계속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가 제사장의 종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 때 그는 그의 선생 바로 곁에 있었어야 할 처지임에도, “종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날 밤에 있었던 모험담을 듣기 위하여 “함께 앉았다.” 아마 말고(귀가 짧렸던 대제사장의 종)도 “그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도록 “그들 가운데” 앉았다. 그가 그리스도와의 모든 친분, 그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그가 지금 절망과 위험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그를 모른다고 한 것이 그의 타락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그 집에 속한 비자에게 그가 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이야말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불가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전에 본 적이 없던 낯선 자가 앉아 있으므로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리고 밤중 이 시각에 일없는 자가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는고로 그가 대제사장의 수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예수의 수행원으로 결론 내렸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 성전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도 함께 있어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어 그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질문을 용기있게 “인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치있게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재주도 없었으므로 엉겹결에 부인하고 말았다.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3. 그의 타락은 두 번째 반복되었다(58절). “조금 후에” 그가 자신을 돌이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당이라. 간교한 게시리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여기 앉아 있구나” 하였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 다시 “세번째 한 시쯤 있다가”(왜냐하면 유혹하던 자가 “그가 앉을 때 함께 앉자 우리가 지난날 손해 입은 것을 그로부터 다 얻어내기까지 계속 타격을 주자” 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이” 자신있게 냉담하여 말하길, “그가 아무리 부인을 하나 이 사람은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거짓말을 한 자는 계속 그 거짓말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죄의 시초는 물보를 터놓는 것과 같다.” 베드로는 이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60절).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 예수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조차 없다.” 그것은 “몰래 들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선생이 죄인으로 붙잡혀 갈 때 “그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선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위험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리서” 좇아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명예를 지킬 정도로 “멀리서” 따랐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따라갔다.계속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가 제사장의 종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 때 그는 그의 선생 바로 곁에 있었어야 할 처지임에도, “종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날 밤에 있었던 모험담을 듣기 위하여 “함께 앉았다.” 아마 말고(귀가 짧렸던 대제사장의 종)도 “그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도록 “그들 가운데” 앉았다. 그가 그리스도와의 모든 친분, 그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그가 지금 절망과 위험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그를 모른다고 한 것이 그의 타락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그 집에 속한 비자에게 그가 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이야말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불가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전에 본 적이 없던 낯선 자가 앉아 있으므로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리고 밤중 이 시각에 일없는 자가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는고로 그가 대제사장의 수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예수의 수행원으로 결론 내렸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 성전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도 함께 있어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어 그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질문을 용기있게 “인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치있게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재주도 없었으므로 엉겹결에 부인하고 말았다.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그의 타락은 두 번째 반복되었다(58절). “조금 후에” 그가 자신을 돌이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당이라. 간교한 게시리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여기 앉아 있구나” 하였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 다시 “세번째 한 시쯤 있다가”(왜냐하면 유혹하던 자가 “그가 앉을 때 함께 앉자 우리가 지난날 손해 입은 것을 그로부터 다 얻어내기까지 계속 타격을 주자” 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이” 자신있게 냉담하여 말하길, “그가 아무리 부인을 하나 이 사람은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거짓말을 한 자는 계속 그 거짓말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죄의 시초는 물보를 터놓는 것과 같다.” 베드로는 이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60절).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 예수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조차 없다.” Ⅱ. “베드로가 다시 정신을 차림.” 그가 자신을 되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보라. 그보다 그를 돌이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그 과정을 살펴보자. 1. 그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깜짝 놀라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사소한 일을 통하여 중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라.
2. “주께서 돌이켜 그를 돌아 보셨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참으로 놀라운 장면임엔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선 “주”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이 사실을 통해 그에게 하늘의 지혜와, 권능과 은혜가 풍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겐 등을 돌리시고 심문을 받고 계셨지만(당시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계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베드로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리스도도 그를 포기하고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아버지 앞에서도 그를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루듯 그리스도도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베드로가 곧 깨닫게 될 것을 의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입술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방금 대단히 중대한 죄를 지었음에도 그리스도는 그를 “부끄럽게” 하거나 그의 잘못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를 부르시지” 않고, 단지 돌아만 “보았다.” 이것은 베드로 외엔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1) 그것은 “깨닫게 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정말 나를 모르냐? 내 얼굴을 보렴, 그리고 그렇게 말해 보라”고 말씀하시듯 돌이켜 그를 보셨다.
(2) 그것은 “꾸짖는” 눈길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을” 것 같다. 그리고 약간 “불쾌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돌아보시는 그리스도의 화난 얼굴을 생각해 보자.
(3) 그것은 “훈계하며” 질책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냐,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나를 위해 와서 증인이 되어야 할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다니. 네가 제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장 자신있게 고백했고 결단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네가 아니냐?
(4) 그것은 “연민”의 눈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불쌍한 베드로, 네 마음이 이렇게 약하다니! 내가 돕지 않는다고 이렇게 넘어지고 실수하다니!”
(5) 그것은 무엇인가 “암시하는” 눈길이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은혜를 담은 눈길이었다. 닭이 울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를 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한 효력 있는 은혜가 없으면 외적인 수단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이 눈길과 함께 권능이 나갔다.
3.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 주고, 그것을 양심 안에 안착시켜 영혼에게 행복의 계기를 줌을 명심하자. Tolle et lege-즉 그 말씀을 듣고 읽어라.
4. 그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돌아보심으로 그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눈물이 쏟아졌다. 촛불은 방금 꺼졌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다시 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감명을 주시지는 않았다. 베드로에겐 다시 일어날 만한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눈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를 돌이키며 그를 올바른 상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깜짝 놀라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사소한 일을 통하여 중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라.”주께서 돌이켜 그를 돌아 보셨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참으로 놀라운 장면임엔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선 “주”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이 사실을 통해 그에게 하늘의 지혜와, 권능과 은혜가 풍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겐 등을 돌리시고 심문을 받고 계셨지만(당시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계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베드로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리스도도 그를 포기하고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아버지 앞에서도 그를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루듯 그리스도도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베드로가 곧 깨닫게 될 것을 의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입술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방금 대단히 중대한 죄를 지었음에도 그리스도는 그를 “부끄럽게” 하거나 그의 잘못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를 부르시지” 않고, 단지 돌아만 “보았다.” 이것은 베드로 외엔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그것은 “깨닫게 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정말 나를 모르냐? 내 얼굴을 보렴, 그리고 그렇게 말해 보라”고 말씀하시듯 돌이켜 그를 보셨다.그것은 “꾸짖는” 눈길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을” 것 같다. 그리고 약간 “불쾌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돌아보시는 그리스도의 화난 얼굴을 생각해 보자.그것은 “훈계하며” 질책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냐,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나를 위해 와서 증인이 되어야 할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다니. 네가 제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장 자신있게 고백했고 결단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네가 아니냐?그것은 “연민”의 눈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불쌍한 베드로, 네 마음이 이렇게 약하다니! 내가 돕지 않는다고 이렇게 넘어지고 실수하다니!”그것은 무엇인가 “암시하는” 눈길이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은혜를 담은 눈길이었다. 닭이 울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를 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한 효력 있는 은혜가 없으면 외적인 수단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이 눈길과 함께 권능이 나갔다.”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 주고, 그것을 양심 안에 안착시켜 영혼에게 행복의 계기를 줌을 명심하자. Tolle et lege-즉 그 말씀을 듣고 읽어라.그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돌아보심으로 그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눈물이 쏟아졌다. 촛불은 방금 꺼졌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다시 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감명을 주시지는 않았다. 베드로에겐 다시 일어날 만한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눈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를 돌이키며 그를 올바른 상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22:63 그리스도가 당한 수모(누가복음 22:63-71)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Ⅰ. 우리 주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당한 수모. “하인”(下人)들, 천하고 야만스런 종들이 “서로 모여 그를 대적하였다.” 그는 지난 밤 한잠도 못잤지만 그들은 그를 “쉬게” 버려두지 않았고, 급하게 재판 받아야 될 입장인데도 그들은 그가 “편히” 있도록 하지 않았으며 재판을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다. 그에겐 괴로운 이 밤이 그들에겐 즐거움의 밤이 되었다. 그리고 삼손처럼 거룩한 예수님은 놀이의 술래 역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눈을 가리우고” 어린애들이 잘 하는 놀이에 따라 그의 얼굴을 때리며 그가 자기를 때린 사람의 이름을 댈 때까지 그 놀음을 계속하였다(64절).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의 예언적인 기능과 그가 전에 말했던 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한 지식을 모욕하려는 속셈이었다. 거룩한 예수님께 이보다 더 수치스런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받은 수많은 수모 중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65절). 그를 모독자라고 정죄한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악독한 모독자였다. Ⅱ. 공회에서 산헤드린에 의해 정죄 받으심. 산헤드린은 “백성의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날이 새자마자,” 아침 5시경 때 이르게 모였다. 그들은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날이 밝자마자 그것을 행하는” 자들이었다(미 2:1). 그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회당에서 심문 받으신 내용에 대해선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그들은 그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하고 물었다. 그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totidem verbis-즉 그 많은 말로써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고 증거를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이 말을 그들 앞에서 해보라고 강요한 것이다(67절). 만약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거나 만약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납득이 갈 만큼 설명해 주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행”한 것이며 그들에게도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를 믿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를 고소하려는 목적으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2. 그에 대한 그들의 부당하고 공정치 못한 대우를 당당하게 비난하셨다(67, 68절).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지금 이 시각에”도 기다린다고 고백하였다. 다른 메시야가 나타난 적이 없다. 나타났더라도 그는 메시야를 사칭한 가짜였다. 그에게 경쟁할 자는 없었다. 그를 필적할 만한 자가 더 이상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하늘의 권능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 주었다. 그정도라면 자유롭게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할 때에도 메시야의 자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를 자기들의 공회당에 끌고 와서 그곳에서 “형사적인” 법정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메시야 “후보자”로서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1) “내가 그리스도라고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너희에게 제시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 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옳든 그르든간에 그것에 대해 이미 판결하였고 그것을 헐뜯고 정죄하기로 작정한 너희 앞에서 그 이유를 대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2) “내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너희가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는 전에 그가 그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 질문은 그들로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었다(20:5-7). 그들은 공정한 심판자도 공정한 논쟁자도 못되었다. 다만 그들이 논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될 때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침물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내게 대답도 아니할 것이요 나를 보내지도 아니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그거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며, 만약 내가 그리스도라면 너희는 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 둘을 모두 하지 않을 것이다.
3. 그들은 지금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키려, 그가 그리스도임을 더 이상의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써 재림할 것을 말씀하셨다(6, 9절).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때엔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4. 그러자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처럼 군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70절).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는 인자”의 환상을 본 다니엘(단 7:13, 14)을 인용하여 자신을 “인자”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만약 “인자”라면 역시 “하나님의 아들”도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냐? 이것을 볼 때 유대교의 신앙에선 메시야는 “인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됨을 알 수 있다.
5.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였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즉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그니라”한 마가복음(막 14:62)의 말씀과 비교해 보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받을 시험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게 하였다. 그때에 그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가 이 사실에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6. 여기서 그들은 고소의 증거를 얻었다(71절). “어째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증거는 충분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의 입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을 가지고 그를 모독자로 정죄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 그렇다면 그를 죽이므로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벌이 내릴 것인가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겐 늘 하늘의 권능과 은혜가 충만하였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상의 영광과 위엄 속에 나타나지 않은 그가 메시야가 될 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눈은 세상것에 이끌려 멀어 버렸고,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처럼 이와 같은 위험천만의 잘못에 돌진해 나가고 있다. 그들은 그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하고 물었다. 그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totidem verbis-즉 그 많은 말로써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고 증거를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이 말을 그들 앞에서 해보라고 강요한 것이다(67절). 만약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거나 만약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납득이 갈 만큼 설명해 주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행”한 것이며 그들에게도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를 믿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를 고소하려는 목적으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그에 대한 그들의 부당하고 공정치 못한 대우를 당당하게 비난하셨다(67, 68절).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지금 이 시각에”도 기다린다고 고백하였다. 다른 메시야가 나타난 적이 없다. 나타났더라도 그는 메시야를 사칭한 가짜였다. 그에게 경쟁할 자는 없었다. 그를 필적할 만한 자가 더 이상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하늘의 권능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 주었다. 그정도라면 자유롭게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할 때에도 메시야의 자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를 자기들의 공회당에 끌고 와서 그곳에서 “형사적인” 법정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메시야 “후보자”로서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내가 그리스도라고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너희에게 제시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 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옳든 그르든간에 그것에 대해 이미 판결하였고 그것을 헐뜯고 정죄하기로 작정한 너희 앞에서 그 이유를 대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내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너희가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는 전에 그가 그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 질문은 그들로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었다(20:5-7). 그들은 공정한 심판자도 공정한 논쟁자도 못되었다. 다만 그들이 논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될 때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침물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내게 대답도 아니할 것이요 나를 보내지도 아니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그거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며, 만약 내가 그리스도라면 너희는 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 둘을 모두 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지금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키려, 그가 그리스도임을 더 이상의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써 재림할 것을 말씀하셨다(6, 9절).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때엔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그러자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처럼 군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70절).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는 인자”의 환상을 본 다니엘(단 7:13, 14)을 인용하여 자신을 “인자”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만약 “인자”라면 역시 “하나님의 아들”도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냐? 이것을 볼 때 유대교의 신앙에선 메시야는 “인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됨을 알 수 있다.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였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즉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그니라”한 마가복음(막 14:62)의 말씀과 비교해 보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받을 시험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게 하였다. 그때에 그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가 이 사실에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그들은 고소의 증거를 얻었다(71절). “어째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증거는 충분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의 입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을 가지고 그를 모독자로 정죄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 그렇다면 그를 죽이므로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벌이 내릴 것인가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겐 늘 하늘의 권능과 은혜가 충만하였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상의 영광과 위엄 속에 나타나지 않은 그가 메시야가 될 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눈은 세상것에 이끌려 멀어 버렸고,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처럼 이와 같은 위험천만의 잘못에 돌진해 나가고 있다.
[누가복음 22장 설교문] “닭이 울기 전에”(눅2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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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22장 설교문 중에서 닭이 울기 전에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눅22:31-34)
♣명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목적: 나는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고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선택받은 자들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믿음은 하늘을 찌를 듯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옥에도 들어가고 죽는 데에도 들어가기를 각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너도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떠한 태도로 나오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느 곳에 가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스스로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부인할 것이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루기 위하여 선택받아 배신한 사람입니다. 결국 악역으로 쓰임 받고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께서 미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믿음이 떨어지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절대적으로 주님께서 지켜주고 있습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는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들도 밀 까부르듯 하려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까부르듯 하려고’는 σινιαζω(시니아조 4617 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소유격) 체로 치다, 체질하다, 라는 뜻입니다. 시골에서 곡식을 탈곡하고 나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내기 위하여 체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고 알곡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이 시험을 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쭉정이는 사탄에게 넘어가고 알곡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이 시험을 주는데 장소와 시간과 공간에 제약 없이 시험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사탄의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이 시험을 주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며 지금도 똑같이 사탄의 시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 시험을 주고 있는데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넘어지게 하는 시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의 연단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사탄이 넘어지게 하려는 시험이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사탄의 시험을 모두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요구하였으나’는 εξαιτεω(엑사이테오 1809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단수, 3인칭) 요구하다, 청구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εκ(에크 1537)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라는 뜻과 αιτεω(아이테오 154) 구하다, 요구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사탄은 선택받은 백성들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욥기에도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시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여 청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려고 청구서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들고 멀리 떨어져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선택받은 자들을 요구한 사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욥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구한 것은 자신의 수하로 집어넣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들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과 시험을 주어 믿음을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회개하고 너의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떨어지지 않기를’은 εκλειπω(1587, 엑클레이포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 단수, 3인칭) 잊다, 쇠하다, 없어지다, 그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믿음이 쇠약하여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시는데 지금 현재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기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가룟 유다를 위해서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였노니’는 δεομαι(데오마이 1189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1인칭) 요청하다, 기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어근은 δεω(데오 1210) 묶다, 동여매다, 차꼬를 채우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하나님께 요청의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께 청구하여 시험을 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요청하여 주님과 함께 묶이기를 원하고 십자가 복음의 끈으로 동여매어 차꼬를 차듯이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인도한 자들은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차꼬로 주님과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주님이 기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의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의지로 겟세마네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바로 누가 기도하셨습니까? 주님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인칭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금도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미 사탄이 밀을 까부르듯이 하지 못하도록 기도가 끝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 자들이 사탄의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선 다음에는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같이 원죄에 빠진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님께로 나오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먼저 신앙생활을 하면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 덕분에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눅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장소에도 가기를 각오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주님의 심문받는 장소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때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는 κυριος(퀴리오스 2962 명사, 호격, 남성, 단수) 주인, 주님,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즉시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죽음을 각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베드로의 비장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호격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제가 섭섭합니다.라는 의도입니다.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도 않고 믿음도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걱정하셔도 저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님을 부른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너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니 사탄의 시험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저는 걱정하지 말라고 자만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믿음을 자만하여 결국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아니면 절대 사탄의 시험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내가 사탄을 이긴 것이지 내 믿음이 좋아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눅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의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야’는 Πετρος(페트로스 4074 명사, 호격, 남성, 단수) 돌, 바위, 반석,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바위라는 의미입니다. 현재 베드로는 자신이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난의 시험이 오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말씀하지만 베드로는 자신 스스로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측은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는 절대 너의 힘으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표정으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호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나를 부를 때에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자만하면 측은한 마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의 힘으로는 절대 믿음이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인하리라’는 απαρνεομαι(아파르네오마이 533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디포, 단수, 2인칭) 부인하다, 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다, 포기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απο(아포 575) ~에서부터, 라는 뜻과 αρνεομαι(아르네오마이 720) 거절하다, 부인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 받고 있는 현장에서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절대 주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이 실제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실 때에 어린 여종의 말에 부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도 바로 오늘 밤에 반드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의 결과가 돌아올 것 같은 마음에서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심문을 당할지 몰랐을 때에는 죽음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고백했지만 실제 눈으로 보고 나니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중간 디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고통이 오기 전과 오고 난 후의 신앙과 믿음이 다르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주님께 죽음을 각오했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도 교만하게 고백해 놓고 막상 고통의 자리에 가니 주님을 욕하면서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가 언제 회개합니까?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입니다.
눅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아시고 주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에 말씀하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통곡을 했던 것입니다.
‘돌이켜’는 στρεφω(스트레포 4762 동사, 분사, 과거, 수동, 주격, 남성, 단수)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와 심문을 당하시고 있는 모습을 베드로가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 부인한 것을 아시고 닭이 울었을 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눈을 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빛을 통해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아섰습니다. 또한 마음을 바꾸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뉘우쳤습니다. 오직 주님이 아니면 믿음을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회개할 기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원시키고 회개시키기 위하여 돌아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잘난 맛에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까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현재 저와 여러분들에게 닭이 울 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칠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나의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 닭이 우는 소리를 기점으로 회개하십시오. 강단에서 떨어지는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닭이 우는 소리입니다. 내 멋대로 신앙생활했던 것을 고백하시고 참회해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만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기뻐합니다. 지금도 불꽃과 같은 주님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참회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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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누가복음 22장 흐름정리>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부터 산헤드린 공회에 통고되어 정식으로 재판을 받으시기까지의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주님은 유월절 만찬을 베푸시고, 성찬 예식을 직접 행하셨다. 특별히 이 두 사건에는 자신을 속죄양으로 드려 전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구속 열정이 두드러져 보인다.
<누가복음 22장 줄거리>
1.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공모함.
3. 사단이 유다로 하여금 예수를 팔도록 준비시킴.
7. 제자들이 유월절을 준비함.
19. 그리스도가 성만찬 예식을 제정함.
21. 은밀히 배반자에 대하여 예언함.
24. 다른 제자들에게 야심을 버리도록 간청함.
31. 베드로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을 것을 확인함.
34.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할 것임.
39. 예수가 산에서 기도하며 피땀을 흘림.
47. 입맞춤으로 팔림.
50. 예수가 말고의 귀를 치유함.
54.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함.
63. 굴욕적으로 학대당함.
66.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
<누가복음 22장 도움말>
* 1절 : 유월절, 무교절.
엄격히 말하면 이 두 절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최대 절기로서 애굽(이집트)에서 탈출하게 된 해방의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유대 달력으로 1월에 해당하는 니산월 14일에 지킨다. A.D 30년의 이 날은 목요일었다. 그리고 무교절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한 주간 계속하고, 이 기간 동안에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었다.
* 14~23절 : 성만찬.
성만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확실하게 체험케 하며, 또한 새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케 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희망을 확신케 해준다.
* 15절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거듭하여 예수는 자기의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했다. 종종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고난에 대하여 말했다. 예수는 우리 구원의 “주”로서 인정되기 위하여 십자가로 가는 내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있을 수 없었다. 겸손한 예수를 따라가는 자들로서, 그의 고난에 한 몫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 48절 : 입맞춤.
입맞춤은 사랑 또는 우정의 표시였다. 그러나 유다는 배신의 표시로 악용하고 있다.
* 51절 : 그 귀를 만져.
이것은 예수를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주어진 그의 신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였는데, 첫 번째 증거는 천사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다. 베드로의 성급한 행동이 즉시 무마되지 않았다면, 산헤드린과 빌라도 앞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며,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들이라는 증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국자들은 치유의 이적이 행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심문할 때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 55절 : 불을 피우고.
그때는 4월쯤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해발 780m나 되는 고지대였으므로 밤에는 추웠다.
* 56절 : 비자.
그녀는 대제사장의 종이었으며 문지기였다.
* 66절 : 공회.
산헤드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의 최고 법정. 이 산헤드린의 결정은 절대적이었으나, 사형만은 취급하지 못하였다. 사형은 로마 총독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죄명을 씌워 빌라도에게 넘기려 하였다.
박윤선 주석, 누가복음 22장
눅 22:50
그 중에 한 사람.- 이 사람은 베드로였다(요 18:10). 여기서도 베드로의 급한 성
격은 나타났다.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라고 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려 보지도 않고, 그는 검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깎아 떨어
뜨렸다. 요 18:6-8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하기 전에 예수님과 그 무리와의 사이에
몇 마디의 문답이 있었고 그 무리는 엎드러진 일이 있었다. 그 무리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이 “내로라”하시니 그들은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다. 그들은
왜 엎드러졌을까? 그들이 엎드러진 것은, 예수님께서 뜻을 정하시고 권능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사건은 순전히 예수님의 인격과 그들(무리)의 인격이 아
무런 조작없이 그대로 접촉한 때에 일어난 현상이었겠다. 이는 마치 빛 앞에서 어두
움이 물러갈 수 밖에 없이 된 것과 같다. 빛 앞에서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은 그 어두
움이 뜻을 정하고 그리함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의 본성이 그렇게 되어져서 그
리함이다. 의로운 자 앞에 섰는 불의한 자는 오히려 그 무의식한 순간에 물러가서 엎
드러질 줄은 안다. 불의한 자는 그의 의식이 분명해 질 때에는 자기를 어디까지든지
세우려 하여 불의하게도 모든 수단으로 뱃심 있게 나서며 철면피가 되어진다. 그런
자는, 무의식한 가운데서야 혹시 자기 생긴대로 정직히 행할 수 있다. 그런 자는, 꿈
가운데서나 혹시 정직한 생각을 하기도 하며 정직한 처세를 해보는 수도 있다. 빌라
도의 아내가 예수님을 옳은 사람으로 알게 된 것은 꿈 가운데서 된 일이다(마 27:19).
예수님께서 “내로라”하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들은 잠간 동안 자주 의식의 철면피를
가지기 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피조성, 죄성은, 예수님의 의와 성결 앞에서 견딜
수 없어서 물러가 엎드러졌다.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잡히신 것은 그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고, 다만 많은 사람들을 속죄하여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되신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게 붙잡히우는 법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께서 불
법한 무리에게 잡히신 일은 빛이 어두움에게 붙잡힌 일이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함에서였다.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
고”라 하였다(요 18:10). “떨어뜨린”이란 말의 헬라 원어 아페일렌(* )은, 부
분적으로만 베어지고 한 부분은 붙어 있으므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매어달려 있게 되
었다는 뜻이고, 그 귀가 완전히 끊어져(Cut off) 땅에 떨어졌다는 뜻은 아닐 듯하다.
그 이유는, 다음 귀절에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하신 것 뿐이
고, 떨어진 귀 조각을 땅에서 더듬어 찾아 얻어다가 붙이셧다는 말씀은 없기 때문이다
. 베드로가 칼을 쓴 것은, 말고의 귀를 베려는 것이 아니고 그의 목을 베려는 것이었
겠으나, 말고에게 중한 상해를 주지 않고 다만 그의 귀를 떨어 뜨린 것 뿐이다. 그것
은 가장 경한 상해이다. 일이 이만한 정도로만 되어진 것도 하나님의 묘한 섭리로 된
것이다. 그 때에 말고가 그보다 큰 상해를 받았더라면 어린 양 예수님이 잡히시는 마
당에 있어서 어린 양답지 아니하게 사나운 적대 행동을 나타낸 분위기가 보일 번하였
다.
눅 22:51
이것까지 참으라.- 이것은, 헬라 원어로 에아테 헤오스 투-투-(* )라
고 하는데 해석이 세 가지 있다. 그 첫째는, 나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것까지
(나를 잡게까지) 용납하라는 뜻이라 하고, 그 둘째는, 나로 하여금 이 사람(말고)에게
관계(만져서 고치기 위하여)하도록까지 두어두라는 뜻이라 하고, 세째는, “그만 두어
라 이만큼 하여라”(Cease so far)는 뜻이니 곧, 이 이상 더 칼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
라고 한다. 우리 한역은 이 해석을 취하였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전능하시고 지극히 자비하신
성품을 말고에게 따뜻이 나타내신 것이다. 말고는, 남의 종으로서 사람 대우도 제대
로 못받았는데 이 때에 그런 따뜻한 사랑의 대우와 및 능력의 치료는 평생 처음 받아
본 것이다. 그것을 받아 보는 그의 마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던가? 그
런 따뜻한 손으로 만져 주심을 받은 그의 귀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던
가? 파울루스(Paulus)라고 하는 합리주의자는 마록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는 말씀
을 다음과 같이 그릇되게 해석한다. 곧,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귀를 만지시며 살펴
보시고 그에게 그 귀를 고칠 수 있는 처방을 가르쳐 주신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
나 파울루스의 이 해석은 너무도 억해이다.
눅 22:52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예수님은 폭력을 가지
고 적을 대항하신 일이 전혀 없으시다. 그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온 것은 예수님을
강도 같이 취급한 불법 행동이다.
눅 22:54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간” 것이 베드로의 타락의 첫
걸음이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이 도망한 뒤에 되어진 것이다(마 26:56, 58; 막 14:50
, 54.
눅 22:55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이것은 베드로의 타락의 둘째 걸음이니 좀더 가증
스러워진 행동이다. 그는 그 자신이 예수님과 관계 없고 그 불쬐는 사람들과 한 동류
인 듯이 자처한 것이다.
눅 22:56,57
이 귀 절을 보면, 베드로가 전에 가졌던 자신심은 참으로 풀대와 같이 약하였던 것
이 알려진다. 자신심이 아주 강한 것도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믿는 마
음과는 정반대이다. 신앙은 곧,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다. 베드로의 자신심은 한 약
한 비자(여종)의 말로 인하여 두려워서 넘어지고 만다.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이것은, 거짓된 말이니 그의 타락의 세째 걸음으로 나타
난 것이다. 이것은 벌써 도망간 제자들의 죄보다 크다.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안
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수하려고 도망한 것이다. 비록 그들이 약하기는 하였지만 정직
하였다.
눅 22:58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마 26:71을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비자”라고 하였으니 이 두 가지 기록은 왜 서로 부합하지 않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
이 설명할 수 있다. 마태는 “다른 비자”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일을 고한
사실만 말하고, 누가는 그 “비자”의 고한 말을 들은 어떤 사람이 베드로에게 향하여
“너도 그 당이라”고 한 말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이 두 기자는 서로 다르게 말하면서
사실의 한 방면씩 각각 말하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마 26:72을 보면 베드로가 맹세하고 예
수님을 다시 부인하였다고 한다. 맹세는 말을 힘있게 만들어 준다. 베드로는 여기서
네째 걸음으로 더욱 타락하였다.
눅 22:59,60
이 귀절들에는 베드로가 다섯째 걸음의 깊은 타락에 들게 된 것을 표시한다. 마 2
6:74을 참고하여 보면, 이번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전번에는 맹세만 하였으나 이번에는 저주와 맹세를 겸하였다.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예언이 놀랄만하게 이루어진 것
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전에 베드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하셨다. 그 예언은 여기서 정확히 이루어진
것이다. 이 귀절에, “방금 말할 때에”라는 말은, 이 예언 성취가 정확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얼굴로 불쌍히 여기시며 바라보실 때에 그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이제 그에게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은 사라졌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히 이루어진 것을 알고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회개케 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주목으로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그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겠으니, 그것도 그의 회개를 일으킨 것이다. 회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두려워함과 및 그의 사랑스러운 임재를 느낄 때에 일어난다.
눅 22: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자기의 범한 죄를 생각할 때에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아프게 울었다. 이 회개로 말미암아 그는 죄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형제들을 인도하며 굳게 세우는 은혜를 받았다(눅 22:32). 회개는 이렇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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