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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오신 예수 (누가복음 2:1-14)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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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주석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2장 …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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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0/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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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2장 주석
[스크랩] 누가복음 2장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9/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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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2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2:1 구유에 나신 메시야 (누가복음 2:1-7) “때가 차게”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사,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하신 그 때가 온 …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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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 옛신앙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
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7/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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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강해설교 – 블로그
예수의 탄생 눅2:1-7 본문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 아기는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탄생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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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 누가복음 2:1~14 호크마 주석 – 족자 한국교회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 …
Source: koreanchurch.blogspot.com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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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누가복음 2장 흐름정리>. 오늘 본문은 1장에서 예언된 예수 탄생이 성취된다. 목자들이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는 제사장과 랍비가 아닌 …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2/19/2021
View: 7177
눅 2 장 | 누가복음 2장 상위 254개 베스트 답변
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2:11.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Source: you.maxfit.vn
Date Published: 12/13/2022
View: 3086
누가복음 2장 – 밤중소리
(누가복음 2 : 1 – 11) 서 론 :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류의 구속사임을 믿는 것입니다. 창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밝혀진 메시야의 언약 …
Source: www.bamjoongsori.org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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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2 장 주석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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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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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주석
누가복음 제 2장
=====2:1
이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
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
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 ,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
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
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
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
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
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
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
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
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
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
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
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영(* , 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
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
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
로 사용되었다(행 11:28;17:6).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
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 )는 ‘등록하다’, ‘기
록하다'(2:3, 5;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
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
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2
구레뇨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
(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
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
세푸스의 저서(Antiq. , 26 . 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
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
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
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 )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
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
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2:3
모든 사람이…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
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
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
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1:1-4)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4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
인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
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
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
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
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
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
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
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얄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
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
내로 맞이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
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
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
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
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
(시 136:8-26).
=====2:6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
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
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
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한편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다.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
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
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
리스마스날로 지킨다.
=====2:7
맏아들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
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8:19, 20;마 12:46, 47;13:55,
56;막 3:31, 32;요 2:12;7:3, 5, 10;행 1:14).
사관(舍館)(* , 카탈뤼마) – 이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
역되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
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
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 , ‘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것없는 가족에게 허락 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
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구유(* , 파트네) –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
(7, 12, 16절;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
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게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
11, 14절),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
난을 상징한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
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
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H.
Hengel, TDNT. , 49-55).
=====2:8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
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
이 하는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
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져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
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
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
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
의 뜻인 ‘퓔라쏘'(* )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
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귀절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
을 묘사한다. 팔레스틴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
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했다. 한편
본문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
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
신 사실 그 자체이다.
=====2:9
주의 영광 – ‘영광'(* ,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
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
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워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
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
(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
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두루 비추매(* ,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 ‘주위에’)와 ‘람포'(* ,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
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
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
=====2:10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
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
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
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 )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
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
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41:27;52:7). 한편 본문에서
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
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2:11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
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구주(* ,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2:12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 부터 보호하
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
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
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
=====2:13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
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 )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
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
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
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
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
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
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
(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
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
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2:15
하늘로 올라가니 –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
라갔다’고 말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24:51;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
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 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승천
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제(* , 데) – 강조를 위한 접두사로서 특히 명령형 문장과 더불어 사용되며
여기서는 긴급성을 강조한다.
=====2:16
빨리 가서 –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벱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
시킨다(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선
다.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
단이 요구된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
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신다.
찾아서(* , 아뉴란) – 원어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이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
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2:17
보고…말한 것을 고하니 –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
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
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된
다.
=====2:18
기이(奇異)히 여기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 )는 ‘이
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
적인 혹은 신적인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시사한다. 누가는 메시아에 대
하여 선포하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
는데 본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리아와 요셉도 시므온이 예수께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며(33절) 47절에 보면 성전에서 답변하는 어린 예수의 말을 들었
던 모든 이들이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또한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가 사 61
장의 어떤 부분을 읽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
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4:22;8:25;9:43;11:14, 38;20:26;24:12). 이외에도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을 설명해주는 여러가지 어휘가 사용되었다(4:15,
36;5:26). 사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롬 1:20).
=====2:19
지키어 생각하니라 – ‘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쉰테레오'(*
)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
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 )의 주격 분사 현
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
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
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
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2:20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
(* , 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
(5:25;7:16;13;17:15;18:43;23:47). 그리고 본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
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
다.
=====2:21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온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예수(마 1:25)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예수라는 이름이 명명된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것 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
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22
결례(潔禮)의 날 –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
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
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
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찬(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
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
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
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Marshall). 여기서 아기 예수
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
제사장이시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
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2:23
주의 율법에…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
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22:29;34:19;민 3:11-13;40-51;8:16-18;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
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
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결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
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
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
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
이었다.
=====2:24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둘로 제사하려 –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
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
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
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
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
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
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
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
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
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
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것이 분명하다.
=====2:25
시므온 –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
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
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야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
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의롭고 경건하여 –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
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
)는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자에게 있어서 무엇보
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
(* )는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
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
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로 –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
(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
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
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
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
야 할 것이다.
=====2: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
논'(* )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
시야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
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보
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2:27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
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2:28
성령의 감동으로(* ,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
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 71, 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못
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
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
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
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
겠는가!
=====2:31
만민 앞에 –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
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
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45:6;49:12;미 4:1,2;슥 8:20-23). 이
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
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요 1:5;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
(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
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
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주의 백성…영광이니이다 –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게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
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
시야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2:33
기이히 여기더라 –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벱,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
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
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2:34
많은 사람의…세움을 입었고 –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
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
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거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
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
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
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22:63-65;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
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사 50:6;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
러한 예언은 엘리사벱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
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적 사역의 진면
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2:35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
)는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
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야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
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
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드러내려 함이니 –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
)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
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2:36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
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
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벧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
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
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
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
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
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
( )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
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
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2:37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
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
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
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
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2:38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
)’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뱄하
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
(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
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롬 3:24;엡 1:7;골 1:14).
=====2:39
주의 율법을 좇아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
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
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
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자들을 구속하시
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갈릴리로…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
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
시기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
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
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2:40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
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
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
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2:41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
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
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
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
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
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수가 있다. 어린 예
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
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이다.
=====2:43
그 날들을 마치고 –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레
23:6-8;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 예수는…알지 못하고 –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
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
르는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
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
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
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
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
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
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해맨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게속해서 염두에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
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야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2:44
동행 중에…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
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
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
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
아 나섰다.
=====2:45
찾으면서 – 헬라어 ‘아나제툰테스'(* )는 현재 분사형으로
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
다.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
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
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
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선생들 중에 앉으사…묻기도 하시니 –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
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
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
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
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
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2:47
듣는 자가 다…기이히 여기더라 – ‘기이히 여기더라'(* , 여시
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
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 )는 ‘이해’라는 뜻이다. 여
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
(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너를 찾았노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
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
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
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
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더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2:49
어찌하여…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
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
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
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
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
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 순위는 절대적으
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신 33:9;마 6:33). (2) 예
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
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 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는 마음 간의 양자 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내 아버지 집에 –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23:46;마 11:25;막 14:36;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
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2:50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
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
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
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51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세
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
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
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
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모친은…마음에 두니라 –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
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
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
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2:52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
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
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
는 헬라어 ‘헬리키아'(* )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
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
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
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
헬라어 누가복음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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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네토 데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엨셀덴 도그마 파라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아포그라페스다이 파산 텐 오이쿠메넨
개역개정,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새번역,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말성경,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전 로마 통치 지역은 호적 등록을 하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영어NIV,1 In those days Caesar Augustus issued a decree that a census should be taken of the entire Roman world.
영어NASB,1 Now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Caesar Augustus, that a census be taken of all the inhabited earth.
영어MSG,1 About that time Caesar Augustus ordered a census to be taken throughout the Empire.
영어NRSV,1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Emperor Augustus that all the world should be registered.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γενετο δε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εκειναις εξηλθεν δογμα παρα καισαρος αυγουστου απογραφεσθαι πασαν την οικουμενην
라틴어Vulgate,1 factum est autem in diebus illis exiit edictum a Caesare Augusto ut describeretur universus orbi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בימים ההם ותצא דת מאת הקיסר אוגוסטוס לספר את כל ישבי תבל׃
성 경: [눅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이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영(*, 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행 11:28;17:6).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2:3, 5;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우테 아포그라페 프로테 에게네토 헤게모뉴온토스 테스 쉬리아스 퀴레니우
개역개정,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새번역,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우리말성경,2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영어NIV,2 (This was the first census that took place while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영어NASB,2 This was the first census taken while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영어MSG,2 This was the first census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영어NRSV,2 This was the first registration and was taken while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헬라어신약Stephanos,2 αυτη η απογραφη πρωτη εγενετο ηγεμονευοντος της συριας κυρηνιου
라틴어Vulgate,2 haec descriptio prima facta est praeside Syriae Cyrino
히브리어Modern,2 וזה המפקד היה הראשון בהיות קוריניוס שליט בסוריא׃
성 경: [눅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구레뇨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세푸스의 저서(Antiq. , 26.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카이 에포류온토 판테스 아포그라페스다이 헤카스토스 에이스 텐 헤아우투 폴린
개역개정,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새번역,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우리말성경,3 그래서 모든 사람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영어NIV,3 And everyone went to his own town to register.
영어NASB,3 And everyone was on his way to register for the census, each to his own city.
영어MSG,3 Everyone had to travel to his own ancestral hometown to be accounted for.
영어NRSV,3 All went to their own towns to be registered.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πορευοντο παντες απογραφεσθαι εκαστος εις την ιδιαν πολιν
라틴어Vulgate,3 et ibant omnes ut profiterentur singuli in suam civitatem
히브리어Modern,3 וילכו כלם להתפקד איש לעירו׃
성 경: [눅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모든 사람이…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1:1-4)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네베 데 카이 요세프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크 폴레오스 나자렏 에이스 텐 유다이안 에이스 폴린 다윋 헤티스 칼레이타이 베들레엠 디아 토 에이나이 아우톤 엨스 오이투 카이 파트리아스 다윋
개역개정,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새번역,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우리말성경,4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4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영어NIV,4 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because he belonged to the house and line of David.
영어NASB,4 Joseph also went up from Galilee, from the city of Nazareth, to Judea, to the city of David which is called Bethlehem, because he was of the house and family of David,
영어MSG,4 So Joseph went from the Galilean town of Nazareth up to Bethlehem in Judah, David’s town, for the census. As a descendant of David, he had to go there.
영어NRSV,4 Joseph also went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the city of David called Bethlehem, because he was descended from the house and family of David.
헬라어신약Stephanos,4 ανεβη δε και ιωσηφ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εκ πολεως ναζαρετ εις την ιουδαιαν εις πολιν δαβιδ ητις καλειται βηθλεεμ δια το ειναι αυτον εξ οικου και πατριας δαβιδ
라틴어Vulgate,4 ascendit autem et Ioseph a Galilaea de civitate Nazareth in Iudaeam civitatem David quae vocatur Bethleem eo quod esset de domo et familia David
히브리어Modern,4 ויעל גם יוסף מן הגליל מעיר נצרת אל יהודה לעיר דוד הנקראה בית לחם כי היה מבית דוד וממשפחתו׃
성 경: [눅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포그랖사스다이 쉰 마리암 테 엠네스튜메네 아우토 우세 엥퀴오
개역개정,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새번역,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우리말성경,5 그는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영어NIV,5 He went there to register with Mary, who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him and was expecting a child.
영어NASB,5 in order to register along with Mary, who was engaged to him, and was with child.
영어MSG,5 He went with Mary, his fianc?, who was pregnant.
영어NRSV,5 He went to be registered with Mary, to whom he was engaged and who was expecting a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5 απογραψασθαι συν μαριαμ τη μεμνηστευμενη αυτω γυναικι ουση εγκυω
라틴어Vulgate,5 ut profiteretur cum Maria desponsata sibi uxore praegnate
히브리어Modern,5 להתפקד עם מרים המארשה לו והיא הרה׃
성 경: [눅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시 136:8-26).
에게네토 데 엔 토 에이나이 아우투스 에케이 에플레스데산 하이 헤메라이 투 테케인 아우텐
개역개정,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새번역,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우리말성경,6 그들이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해산할 때가 돼
가톨릭성경,6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영어NIV,6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the baby to be born,
영어NASB,6 While they were there, the days were completed for her to give birth.
영어MSG,6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to give birth.
영어NRSV,6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to deliver her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γενετο δε εν τω ειναι αυτους εκει επλησθησαν αι ημεραι του τεκειν αυτην
라틴어Vulgate,6 factum est autem cum essent ibi impleti sunt dies ut pareret
히브리어Modern,6 ויהי בהיותם שם וימלאו ימיה ללדת׃
성 경: [눅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한편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다. 12월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날로 지킨다.
카이 에테켄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카이 에스파르가노센 아우톤 카이 아네클리넨 아우톤 엔 파트네 디오티 우크 엔 아우토이스 토포스 엔 토 카탈뤼마티
개역개정,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새번역,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7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고는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영어NIV,7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a son. She wrapped him in cloths and place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room for them in the inn.
영어NASB,7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she wrapped Him in cloths,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room for them in the inn.
영어MSG,7 She gave birth to a son, her firstborn. She wrapped him in a blanket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room in the hostel.
영어NRSV,7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wrapped him in bands of cloth,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place for them in the inn.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ετεκεν τον υιον αυτης τον πρωτοτοκον και εσπαργανωσεν αυτον και ανεκλινεν αυτον εν τη φατνη διοτι ουκ ην αυτοις τοπος εν τω καταλυματι
라틴어Vulgate,7 et peperit filium suum primogenitum et pannis eum involvit et reclinavit eum in praesepio quia non erat eis locus in diversorio
히브리어Modern,7 ותלד את בנה הבכור ותחתלהו ותשכיבהו באבוס כי לא היה להם מקום במלון׃
성 경: [눅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맏아들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8:19, 20;마 12:46, 47;13:55, 56;막 3:31, 32;요 2:12;7:3, 5, 10;행 1:14).
사관(舍館)(*, 카탈뤼마) – 이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 ‘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 것없는 가족에게 허락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 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구유(*, 파트네) –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7, 12, 16절;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 11, 14절),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한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H. Hengel, TDNT. , 49-55).
카이 포이메네스 에산 엔 테 코라 테 아우테 아그라울룬테스 카이 퓔라쏜테스 퓔라카스 테스 뉰토스 에피 텐 포임넨 아우톤
개역개정,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새번역,8 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말성경,8 한편 목자들은 바로 그 지역 들판에서 살며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영어NIV,8 And there were shepherds living out in the fields nearby,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s at night.
영어NASB,8 In the same region there were some shepherds staying out in the fields and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 by night.
영어MSG,8 There were sheepherders camping in the neighborhood. They had set night watches over their sheep.
영어NRSV,8 In that region there were shepherds living in the fields,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 by night.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ποιμενες ησαν εν τη χωρα τη αυτη αγραυλουντες και φυλασσοντες φυλακας της νυκτος επι την ποιμνη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8 et pastores erant in regione eadem vigilantes et custodientes vigilias noctis supra gregem suum
히브리어Modern,8 ורעים היו בארץ ההיא לנים בשדה ושמרים את משמרות הלילה בעדרם׃
성 경: [눅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져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의 뜻인 ‘퓔라쏘'(*)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귀절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을 묘사한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했다. 한편 본문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그 자체이다.
카이 앙겔로스 퀴리우 에페스테 아우토이스 카이 돜사 퀴리우 페리엘람프센 아우투스 카이 에포베데산 포본 메간
개역개정,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새번역,9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9 주의 천사가 그들 앞에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환하게 둘러 비춰서 그들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영어NIV,9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them, and the glory of the Lord shone around them, and they were terrified.
영어NASB,9 And an angel of the Lord suddenly stood before them, and the glory of the Lord shone around them; and they were terribly frightened.
영어MSG,9 Suddenly, God’s angel stood among them and God’s glory blazed around them. They were terrified.
영어NRSV,9 Then an angel of the Lord stood before them, and the glory of the Lord shone around them, and they were terrified.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ιδου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επεστη αυτοις και δοξα κυριου περιελαμψεν αυτους και εφοβηθησαν φοβον μεγαν
라틴어Vulgate,9 et ecce angelus Domini stetit iuxta illos et claritas Dei circumfulsit illos et timuerunt timore magno
히브리어Modern,9 והנה מלאך יהוה נצב עליהם וכבוד יהוה הופיע עליהם מסביב וייראו יראה גדולה׃
성 경: [눅2: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주의 영광 – ‘영광'(*,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워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두루 비추매(*,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주위에’)와 ‘람포'(*,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 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앙겔로스 메 포베이스데 이두 가르 유앙겔리조마이 휘민 카란 메갈렌 헤티스 에스타이 판티 토 라오
개역개정,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새번역,10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우리말성경,10 천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알려 준다.
가톨릭성경,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영어NIV,10 But the angel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that will be for all the people.
영어NASB,10 But the angel said to them, ” Do not be afraid; for behold,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which will be for all the people;
영어MSG,10 The angel said, “Don’t be afraid. I’m here to announce a great and joyful event that is meant for everybody, worldwide:
영어NRSV,10 But the angel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for see–I am bring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for all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 αγγελος μη φοβεισθε ιδου γαρ ευαγγελιζομαι υμιν χαραν μεγαλην ητις εσται παντι τω λαω
라틴어Vulgate,10 et dixit illis angelus nolite timere ecce enim evangelizo vobis gaudium magnum quod erit omni populo
히브리어Modern,10 ויאמר אליהם המלאך אל תיראו כי הנני מבשר אתכם שמחה גדולה אשר תהיה לכל העם׃
성 경: [눅2:1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 41:27;52:7). 한편 본문에서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호티 에텤데 휘민 세메론 소테르 호스 에스틴 크리스토스 퀴리오스 엔 폴레이 다윋
개역개정,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새번역,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11 오늘 구주이신 주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셨다.
가톨릭성경,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영어NIV,11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영어NASB,11 for today in the city of David there has been born for you a Savior, who is Christ the Lord.
영어MSG,11 A Savior has just been born in David’s town, a Savior who is Messiah and Master.
영어NRSV,11 to you is born this day in the city of David a Savior, who is the Messiah,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τι ετεχθη υμιν σημερον σωτηρ ος εστιν χριστος κυριος εν πολει δαβιδ
라틴어Vulgate,11 quia natus est vobis hodie salvator qui est Christus Dominus in civitate David
히브리어Modern,11 כי היום ילד לכם בעיר דוד מושיע אשר הוא המשיח האדון׃
성 경: [눅2:1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구주(*,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 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카이 투토 휘민 토 세메이온 휴레세테 브레포스 에스파르가노메논 카이 케이메논 엔 파트네
개역개정,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새번역,12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우리말성경,12 너희가 천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그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영어NIV,12 This will be a sign to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
영어NASB,12 “This will be a sign for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
영어MSG,12 This is what you’re to look for: a baby wrapped in a blanket and lying in a manger.”
영어NRSV,12 This will be a sign for you: you will find a child wrapped in bands of cloth and lying in a manger.”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τουτο υμιν το σημειον ευρησετε βρεφος εσπαργανωμενον κειμενον εν τη φατνη
라틴어Vulgate,12 et hoc vobis signum invenietis infantem pannis involutum et positum in praesepio
히브리어Modern,12 וזה לכם האות תמצאון ילד מחתל ומנח באבוס׃
성 경: [눅2:12]
주제1: [8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부터 보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
카이 엨사이프네스 에게네토 쉰 토 앙겔로 플레도스 스트라티아스 우라니우 아이눈톤 톤 데온 카이 레곤톤
개역개정,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새번역,13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우리말성경,13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하늘의 군대가 큰 무리를 이루며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영어NIV,13 Suddenly a great company of the heavenly host appeared with the angel, praising God and saying,
영어NASB,13 And suddenly there appeared with the angel a multitude of the heavenly host praising God and saying,
영어MSG,13 At once the angel was joined by a huge angelic choir singing God’s praises:
영어NRSV,13 And suddenly there was with the angel a multitude of the heavenly host, praising God and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εξαιφνης εγενετο συν τω αγγελω πληθος στρατιας ουρανιου αινουντων τον θεον και λεγοντων
라틴어Vulgate,13 et subito facta est cum angelo multitudo militiae caelestis laudantium Deum et dicentium
히브리어Modern,13 ויהי פתאם אצל המלאך המון צבא השמים והם משבחים את האלהים ואמרים׃
성 경: [눅2:1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 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
돜사 엔 휲시스토이스 데오 카이 에피 게스 에이레네 엔 안드로포이스 유도키아스
개역개정,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새번역,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우리말성경,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가톨릭성경,14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영어NIV,14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s.”
영어NASB,14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among men with whom He is pleased.”
영어MSG,14 Glory to God in the heavenly heights, Peace to all men and women on earth who please him.
영어NRSV,14 “Glory to God in the highest heaven, and on earth peace among those whom he favor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δοξα εν υψιστοις θεω και επι γης ειρηνη εν ανθρωποις ευδοκια
라틴어Vulgate,14 gloria in altissimis Deo et in terra pax in hominibus bonae voluntatis
히브리어Modern,14 כבוד במרומים לאלהים ובארץ שלום בבני אדם רצונו׃
성 경: [눅2:1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카이 에게네토 호스 아펠돈 앞 아우톤 에이스 톤 우라논 호이 앙겔로이 호이 포이메네스 엘랄룬 프로스 알렐루스 디엘도멘 데 헤오스 베들레엠 카이 이도멘 토 레마 투토 토 게고노스 호 호 퀴리오스 에그노리센 헤민
개역개정,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새번역,15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우리말성경,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일이 정말 일어났는지 보자.”
가톨릭성경,15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영어NIV,15 When the angels had left them and gone into heaven, the shepherds said to one another, “Let’s go to Bethlehem and see this thing that has happened, which the Lord has told us about.”
영어NASB,15 When the angels had gone away from them into heaven, the shepherds began saying to one another, “Let us go straight to Bethlehem then, and see this thing that has happened which the Lord has made known to us.”
영어MSG,15 As the angel choir withdrew into heaven, the sheepherders talked it over. “Let’s get over to Bethlehem as fast as we can and see for ourselves what God has revealed to us.”
영어NRSV,15 When the angels had left them and gone into heaven, the shepherds said to one another, “Let us go now to Bethlehem and see this thing that has taken place, which the Lord has made known to us.”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γενετο ως απηλθον απ αυτων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οι αγγελοι και οι ανθρωποι οι ποιμενες ειπον προς αλληλους διελθωμεν δη εως βηθλεεμ και ιδωμεν το ρημα τουτο το γεγονος ο ο κυριος εγνωρισεν ημιν
라틴어Vulgate,15 et factum est ut discesserunt ab eis angeli in caelum pastores loquebantur ad invicem transeamus usque Bethleem et videamus hoc verbum quod factum est quod fecit Dominus et ostendit nobis
히브리어Modern,15 ויהי כאשר עלו מעליהם המלאכים השמימה ויאמרו הרעים איש אל רעהו נעברה נא עד בית לחם ונראה המעשה הזה אשר הודיענו יהוה׃
성 경: [눅2:1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하늘로 올라가니 –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24:51;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 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승천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제(*, 데) – 강조를 위한 접두사로서 특히 명령형 문장과 더불어 사용되며 여기서는 긴급성을 강조한다.
카이 엘단 스퓨산테스 카이 아뉴란 텐 테 마리암 카이 톤 요세프 카이 토 브레포스 케이메논 엔 테 파트네
개역개정,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새번역,16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우리말성경,16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과연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영어NIV,16 So they hurried off and found Mary and Joseph, and the baby, who was lying in the manger.
영어NASB,16 So they came in a hurry and found their way to Mary and Joseph, and the baby as He lay in the manger.
영어MSG,16 They left, running, and found Mary and Joseph, and the baby lying in the manger.
영어NRSV,16 So they went with haste and found Mary and Joseph, and the child lying in the manger.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ηλθον σπευσαντες και ανευρον την τε μαριαμ και τον ιωσηφ και το βρεφος κειμενον εν τη φατνη
라틴어Vulgate,16 et venerunt festinantes et invenerunt Mariam et Ioseph et infantem positum in praesepio
히브리어Modern,16 וימהרו לבוא וימצאו את מרים ואת יוסף ואת הילד שכב באבוס׃
성 경: [눅2:1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빨리 가서 –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시킨다(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선다.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단이 요구된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신다.
찾아서(*, 아뉴란) – 원어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이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이돈테스 데 에그노리산 페리 투 레마토스 투 랄레덴토스 아우토이스 페리 투 파이디우 투투
개역개정,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새번역,17 그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우리말성경,17 그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이에 관해 들은 말을 알려 주었고
가톨릭성경,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영어NIV,17 When they had seen him, they spread the word concerning w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영어NASB,17 When they had seen this, they made known the statement which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영어MSG,17 Seeing was believing. They told everyone they met what the angels had said about this child.
영어NRSV,17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w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ιδοντες δε διεγνωρισαν περι του ρηματος του λαληθεντος αυτοις περι του παιδιου τουτου
라틴어Vulgate,17 videntes autem cognoverunt de verbo quod dictum erat illis de puero hoc
히브리어Modern,17 ויראו וישמיעו את הדבר הנאמר אליהם על הגער הזה׃
성 경: [눅2:1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보고…말한 것을 고하니 –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된다.
카이 판테스 호이 아쿠산테스 에다우마산 페리 톤 랄레덴톤 휘포 톤 포이메논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새번역,18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준 말을 이상히 여겼다.
우리말성경,18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목자들이 한 말에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영어NIV,18 an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at what the shepherds said to them.
영어NASB,18 And all who heard it wondered at the things which were told them by the shepherds.
영어MSG,18 All who heard the sheepherders were impressed.
영어NRSV,18 an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at what the shepherds told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παντες οι ακουσαντες εθαυμασαν περι των λαληθεντων υπο των ποιμενων προς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18 et omnes qui audierunt mirati sunt et de his quae dicta erant a pastoribus ad ipsos
히브리어Modern,18 וכל השמעים תמהו על הדברים אשר דברו אליהם הרעים׃
성 경: [눅2:1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기이(奇異)히 여기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이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인 혹은 신적인 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시사한다. 누가는 메시아에 대하여 선포하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는데 본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리아와 요셉도 시므온이 예수께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며(33절) 47절에 보면 성전에서 답변하는 어린 예수의 말을 들었던 모든 이들이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또한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가 사 61장의 어떤 부분을 읽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4:22;8:25;9:43;11:14, 38;20:26;24:12). 이외에도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을 설명해주는 여러가지 어휘가 사용되었다(4:15, 36;5:26). 사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롬 1:20).
헤 데 마리암 판타 쉬네테레이 타 레마타 타우타 쉼발루사 엔 테 카르디아 아우테스
개역개정,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새번역,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우리말성경,19 그러나 마리아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가톨릭성경,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영어NIV,19 But Mary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
영어NASB,19 But Mary treasured all these things, pondering them in her heart.
영어MSG,19 Mary kept all these things to herself, holding them dear, deep within herself.
영어NRSV,19 But Mary treasured all these word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19 η δε μαριαμ παντα συνετηρει τα ρηματα ταυτα συμβαλλουσα εν τη καρδια αυτης
라틴어Vulgate,19 Maria autem conservabat omnia verba haec conferens in corde suo
히브리어Modern,19 ומרים שמרה את הדברים האלה ותחשבם בלבה׃
성 경: [눅2:1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지키어 생각하니라 – ‘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 ‘쉰테레오'(*)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의 주격 분사 현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카이 휘페스트렢산 호이 포이메네스 옼사존테스 카이 아이눈테스 톤 데온 에피 파신 호이스 에쿠산 캉키 에이돈 카도스 엘랄레데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새번역,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우리말성경,20 목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듣고 본 모든 일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영어NIV,20 The shepherds returned, glorifying and praising God for all the things they had heard and seen, which were just as they had been told.
영어NASB,20 The shepherds went back, glorifying and praising God for all that they had heard and seen, just as had been told them.
영어MSG,20 The sheepherders returned and let loose, glorifying and praising God for everything they had heard and seen. It turned out exactly the way they’d been told!
영어NRSV,20 The shepherds returned, glorifying and praising God for all they had heard and seen, as it had been told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επεστρεψαν οι ποιμενες δοξαζοντες και αινουντες τον θεον επι πασιν οις ηκουσαν και ειδον καθως ελαληθη προς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20 et reversi sunt pastores glorificantes et laudantes Deum in omnibus quae audierant et viderant sicut dictum est ad illos
히브리어Modern,20 וישובו הרעים מהללים ומשבחים את האלהים על כל אשר שמעו וראו כפי אשר נאמר אליהם׃
성 경: [눅2:2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 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5:25;7:16;13;17:15; 18:43;23:47). 그리고 본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카이 호테 에플레스데산 헤메라이 옼토 투 페리테메인 아우톤 카이 에클레데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수스 토 클레덴 휘포 투 앙겔루 프로 투 쉴렘프데나이 아우톤 엔 테 코일리아
개역개정,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새번역,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수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다.
우리말성경,21 8일째 되는 날 할례 할 때가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 지었습니다.
가톨릭성경,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영어NIV,21 On the eighth day, when it was time to circumcise him, he was named Jesus, the name the angel had given him before he had been conceived.
영어NASB,21 And when eight days had passed, before His circumcision, His name was then called Jesus, the name given by the angel before He was conceived in the womb.
영어MSG,21 When the eighth day arrived, the day of circumcision, the child was named Jesus, the name given by the angel before he was conceived.
영어NRSV,21 After eight days had passed, it was time to circumcise the child; and he was called Jesus, the name given by the angel before he was conceived in the womb.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οτε επλησθησαν ημεραι οκτω του περιτεμειν το παιδιον και εκληθη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ς το κληθεν υπο του αγγελου προ του συλληφθηναι αυτον εν τη κοιλια
라틴어Vulgate,21 et postquam consummati sunt dies octo ut circumcideretur vocatum est nomen eius Iesus quod vocatum est ab angelo priusquam in utero conciperetur
히브리어Modern,21 ויהי במלאת לנער שמנה ימים וימול ויקרא שמו ישוע כשם אשר קרא לו המלאך בטרם הרה בבטן׃
성 경: [눅2: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온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예수(마 1:25)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예수라는 이름이 명명된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것 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이 호테 에플레스데산 하이 헤메라이 투 카다리스무 아우톤 카타 톤 노몬 모위세오스 아네가곤 아우톤 에이스 히에로솔뤼마 파라스테사이 토 퀴리오
개역개정,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새번역,22 모세의 법대로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날이 차서, 그들은 아기를 주님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우리말성경,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 의식을 치를 때가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가톨릭성경,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영어NIV,22 When the time of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had been completed, Joseph and Mary took him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영어NASB,22 And when the days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were completed, they brought Him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영어MSG,22 Then when the days stipulated by Moses for purification were complete, they took him up to Jerusalem to offer him to God
영어NRSV,22 When the time came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they brought him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οτε επλησθησαν αι ημεραι του καθαρισμου αυτων κατα τον νομον μωσεως ανηγαγον αυτον εις ιεροσολυμα παραστησαι τω κυριω
라틴어Vulgate,22 et postquam impleti sunt dies purgationis eius secundum legem Mosi tulerunt illum in Hierusalem ut sisterent eum Domino
히브리어Modern,22 וימלאו ימי טהרה לפי תורת משה ויעלהו לירושלים להעמידו לפני יהוה׃
성 경: [눅2: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결례(潔禮)의 날 –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찬(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Marshall).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카도스 게그랖타이 엔 노모 퀴리우 호티 판 아르센 디아노이곤 메트란 하기온 토 퀴리오 클레데세타이
개역개정,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새번역,23 그것은 주님의 율법에 기록된 바 ㉡”어머니의 태를 처음 여는 사내아이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한 대로 한 것이요, / ㉡출 13:2; 12
우리말성경,23 이것은 주의 율법에 “첫 번째 태어나는 모든 남자 아기는 하나님께 거룩한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출13:2;출13:12
가톨릭성경,23 주님의 율법에 “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영어NIV,23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the Lord, “Every firstborn male is to be consecrated to the Lord”),
영어NASB,23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the Lord, ” EVERY firstborn MALE THAT OPENS THE WOMB SHALL BE CALLED HOLY TO THE LORD”),
영어MSG,23 as commanded in God’s Law: “Every male who opens the womb shall be a holy offering to God,”
영어NRSV,23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the Lord, “Every firstborn male shall be designated as holy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εν νομω κυριου οτι παν αρσεν διανοιγον μητραν αγιον τω κυριω κλη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3 sicut scriptum est in lege Domini quia omne masculinum adaperiens vulvam sanctum Domino vocabitur
히브리어Modern,23 כאשר כתוב בתורת יהוה כל זכר פטר רחם יקרא קדש ליהוה׃
성 경: [눅2: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주의 율법에…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22:29;34:19;민 3:11-13;40-51;8:16-18;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 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다.
카이 투 두나이 뒤시안 카타 토 에이레메논 엔 토 노모 퀴리우 쥬고스 트뤼고논 에 뒤오 노쑤스 페리스테론
개역개정,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새번역,24 또 주님의 율법에 이르신 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 한 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 ㉢레 12:8
우리말성경,24 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라고 한 주의 율법을 지켜 희생제물을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레12:8
가톨릭성경,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영어NIV,24 and to offer a sacrifice in keeping with what is said in the Law of the Lord: “a pair of doves or two young pigeons.”
영어NASB,24 and to offer a sacrifice according to what was said in the Law of the Lord, “A PAIR OF TURTLEDOVES OR TWO YOUNG PIGEONS.”
영어MSG,24 and also to sacrifice the “pair of doves or two young pigeons” prescribed in God’s Law.
영어NRSV,24 and they offered a sacrifice according to what is stated in the law of the Lord, “a pair of turtledoves or two young pigeon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του δουναι θυσιαν κατα το ειρημενον εν νομω κυριου ζευγος τρυγονων η δυο νεοσσους περιστερων
라틴어Vulgate,24 et ut darent hostiam secundum quod dictum est in lege Domini par turturum aut duos pullos columbarum
히브리어Modern,24 ולתת קרבן כאמור בתורת יהוה שתי תרים או שני בני יונה׃
성 경: [눅2: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둘로 제사하려 –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카이 이두 안드로포스 엔 엔 예루살렘 호 오노마 쉬메온 카이 호 안드로포스 후토스 디카이오스 카이 율라베스 프로스데코메노스 파라클레신 투 이스라엘 카이 프뉴마 엔 하기온 엪 아우톤
개역개정,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새번역,25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
우리말성경,25 당시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영어NIV,25 Now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called Simeon, who was righteous and devout. He was wait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upon him.
영어NASB,25 And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whose name was Simeon; and this man was righteous and devout, look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upon him.
영어MSG,25 In Jerusalem at the time, there was a man, Simeon by name, a good man, a man who lived in the prayerful expectancy of help for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on him.
영어NRSV,25 Now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whose name was Simeon; this man was righteous and devout, looking forward to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rested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ιδου ην ανθρωπος εν ιερουσαλημ ω ονομα συμεων και ο ανθρωπος ουτος δικαιος και ευλαβης προσδεχομενος παρακλησιν του ισραηλ και πνευμα αγιον η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25 et ecce homo erat in Hierusalem cui nomen Symeon et homo iste iustus et timoratus expectans consolationem Israhel et Spiritus Sanctus erat in eo
히브리어Modern,25 והנה איש היה בירושלים ושמו שמעון והוא איש צדיק וחסיד מחכה לנחמת ישראל ורוח הקדש היה עליו׃
성 경: [눅2: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시므온 –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야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의롭고 경건하여 –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는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는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로 –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카이 엔 아우토 케크레마티스메논 휘포 투 프뉴마토스 투 하기우 메 이데인 다나톤 프린 에 안 이데 톤 크리스톤 퀴리우
개역개정,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새번역,26 그는 주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26 그에게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영어NIV,26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Christ.
영어NASB,26 And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see death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Christ.
영어MSG,26 The Holy Spirit had shown him that he would see the Messiah of God before he died.
영어NRSV,26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see death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Messiah.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ην αυτω κεχρηματισμενον υπο του πνευματος του αγιου μη ιδειν θανατον πριν η ιδη τον χριστον κυριου
라틴어Vulgate,26 et responsum acceperat ab Spiritu Sancto non visurum se mortem nisi prius videret Christum Domini
히브리어Modern,26 ולו נגלה ברוח הקדש כי לא יראה מות עד ראותו את משיח יהוה׃
성 경: [눅2: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시야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보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카이 엘덴 엔 토 프뉴마티 에이스 토 히에론 카이 엔 토 에이사가게인 투스 고네이스 토 파이디온 예순 투 포이에사이 아우투스 카타 토 에이디스메논 투 노무 페리 아우투
개역개정,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새번역,27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우리말성경,27 시므온이 성령에 이끌려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갈 때 아기의 부모가 율법의 규정대로 행하기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가톨릭성경,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영어NIV,27 Moved by the Spirit, he went into the temple courts. When the parents brought in the child Jesus to do for him what the custom of the Law required,
영어NASB,27 And he came in the Spirit into the temple; and when the parents brought in the child Jesus, to carry out for Him the custom of the Law,
영어MSG,27 Led by the Spirit, he entered the Temple. As the parents of the child Jesus brought him in to carry out the rituals of the Law,
영어NRSV,27 Guided by the Spirit, Simeon came into the temple; and when the parents brought in the child Jesus, to do for him what was customary under the law,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ηλθεν εν τω πνευματι εις το ιερον και εν τω εισαγαγειν τους γονεις το παιδιον ιησουν του ποιησαι αυτους κατα το ειθισμενον του νομου πε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27 et venit in Spiritu in templum et cum inducerent puerum Iesum parentes eius ut facerent secundum consuetudinem legis pro eo
히브리어Modern,27 ויבא ברוח אל המקדש ויהי כאשר הביאו הוריו את הנער ישוע לעשות עליו כמשפט התורה׃
성 경: [눅2: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성령의 감동으로(*,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카이 아우토스 에뎈사토 아우토 에이스 타스 앙칼라스 카이 율로게센 톤 데온 카이 에이펜
개역개정,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새번역,28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8 그러자 시므온이 아기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영어NIV,28 Simeon took him in his arms and praised God, saying:
영어NASB,28 then he took Him into his arms, and blessed God, and said,
영어MSG,28 Simeon took him into his arms and blessed God:
영어NRSV,28 Simeon took him in his arms and praised God,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αυτος εδεξατο αυτο εις τας αγκαλας αυτου και ευλογησεν τον θεον και ειπεν
라틴어Vulgate,28 et ipse accepit eum in ulnas suas et benedixit Deum et dixit
히브리어Modern,28 ויקחהו על זרעותיו ויברך את האלהים ויאמר׃
성 경: [눅2: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찬송하여 – 아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시므온은 그를 알아보고 안아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시므온은 율법에 따라 결례와 번제와 속전을 드리러오는 많은 사람, 많은 아이 가운데(그 중에는 품위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 출신의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를 보자 곧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되었다. 이는 오직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분명하다. ‘찬송하여’에 해당하는 ‘율로게센'(*)은 ‘좋게 이야기 하다’, ‘축복하다'(bless, KJV) 등의 뜻을 나타낸다.
뉜 아폴뤼에이스 톤 둘론 수 데스포타 카타 토 레마 수 엔 에이레네
개역개정,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새번역,29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우리말성경,29 “다스리시는 주여, 이제 주께서는 주의 종이 평안히 가게 해 주십니다.
가톨릭성경,29 “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영어NIV,29 “Sovereign Lord, as you have promised, you now dismiss your servant in peace.
영어NASB,29 “Now Lord, You are releasing Your bond-servant to depart in peace, According to Your word;
영어MSG,29 God, you can now release your servant; release me in peace as you promised.
영어NRSV,29 “Master, now you are dismissing your servant in peace, according to your word;
헬라어신약Stephanos,29 νυν απολυεις τον δουλον σου δεσποτα κατα το ρημα σου εν ειρηνη
라틴어Vulgate,29 nunc dimittis servum tuum Domine secundum verbum tuum in pace
히브리어Modern,29 עתה תפטר את עבדך כדברך אדני בשלום׃
호티 에이돈 호이 옾달모이 무 투 소테리온 수
개역개정,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새번역,30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우리말성경,30 제 두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영어NIV,30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영어NASB,30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영어MSG,30 With my own eyes I’ve seen your salvation;
영어NRSV,30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τι ειδον οι οφθαλμοι μου το σωτηριον σου
라틴어Vulgate,30 quia viderunt oculi mei salutare tuum
히브리어Modern,30 כי ראו עיני את ישועתך׃
성 경: [눅2:3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71,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겠는가!
호 헤토이마사스 카타 프로소폰 판톤 톤 라온
개역개정,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새번역,31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우리말성경,31 이 구원은 주께서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신 것으로
가톨릭성경,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영어NIV,31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sight of all people,
영어NASB,31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presence of all peoples,
영어MSG,31 it’s now out in the open for everyone to see:
영어NRSV,31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presence of all peoples,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 ητοιμασας κατα προσωπον παντων των λαων
라틴어Vulgate,31 quod parasti ante faciem omnium populorum
히브리어Modern,31 אשר הכינות לפני כל העמים׃
성 경: [눅2:3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만민 앞에 –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45:6;49:12;미 4:1,2;슥 8:20-23). 이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포스 에이스 아포칼륖신 에드논 카이 돜산 라우 수 이스라엘
개역개정,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새번역,32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말성경,32 이방 사람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가톨릭성경,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영어NIV,32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영어NASB,32 A LIGHT OF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the glory of Your people Israel.”
영어MSG,32 A God-revealing light to the non-Jewish nations, and of glory for your people Israel.
영어NRSV,32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헬라어신약Stephanos,32 φως εις αποκαλυψιν εθνων και δοξαν λαου σου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32 lumen ad revelationem gentium et gloriam plebis tuae Israhel
히브리어Modern,32 אור לגלות עיני הגוים ותפארת ישראל עמך׃
성 경: [눅2:3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요 1:5;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주의 백성…영광이니이다 –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시야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카이 엔 호 파테르 아우투 카이 헤 메테르 다우마존테스 에피 토이스 랄루메노이스 페리 아우투
개역개정,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새번역,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우리말성경,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에 대한 이 말에 무척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영어NIV,33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marveled at what was said about him.
영어NASB,33 And His father and mother were amazed at the things which were being said about Him.
영어MSG,33 Jesus’ father and mother were speechless with surprise at these words.
영어NRSV,33 And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were amazed at what was being said abou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ην ιωσηφ και η μητηρ αυτου θαυμαζοντες επι τοις λαλουμενοις πε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33 et erat pater eius et mater mirantes super his quae dicebantur de illo
히브리어Modern,33 ויוסף ואמו תמהים על הדברים הנאמרים עליו׃
성 경: [눅2:3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기이히 여기더라 –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카이 율로게센 아우투스 쉬메온 카이 에이펜 프로스 마리암 텐 메테라 아우투 이두 후토스 케이타이 에이스 프토신 카이 아나스타신 폴론 엔 토 이스라엘 카이 에이스 세메이온 안틸레고메논
개역개정,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새번역,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하여 하는 이 말을 듣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우리말성경,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에 대한 이 말에 무척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영어NIV,33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marveled at what was said about him.
영어NASB,33 And His father and mother were amazed at the things which were being said about Him.
영어MSG,33 Jesus’ father and mother were speechless with surprise at these words.
영어NRSV,33 And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were amazed at what was being said abou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ην ιωσηφ και η μητηρ αυτου θαυμαζοντες επι τοις λαλουμενοις πε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33 et erat pater eius et mater mirantes super his quae dicebantur de illo
히브리어Modern,33 ויוסף ואמו תמהים על הדברים הנאמרים עליו׃
성 경: [눅2:3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많은 사람의…세움을 입었고 –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22:63-65;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사 50:6;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러한 예언은 엘리사벳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적 사역의 진면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카이 수 데 아우테스 텐 프쉬켄 디엘류세타이 롬파이아 호포스 안 아포칼륖도신 에크 폴론 카르디온 디알로기스모이
개역개정,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새번역,35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5 칼이 당신의 마음도 찌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영어NIV,35 so that the thoughts of many hearts will be revealed.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영어NASB,35 and a sword will pierce even your own soul–to the end that thoughts from many hearts may be revealed.”
영어MSG,35 the pain of a sword-thrust through you– But the rejection will force honesty, as God reveals who they really are.
영어NRSV,35 so that the inner thoughts of many will be revealed–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σου δε αυτης την ψυχην διελευσεται ρομφαια οπως αν αποκαλυφθωσιν εκ πολλων καρδιων διαλογισμοι
라틴어Vulgate,35 et tuam ipsius animam pertransiet gladius ut revelentur ex multis cordibus cogitationes
히브리어Modern,35 וגם בנפשך תחתר חרב למען תגלינה מחשבות לבב רבים׃
성 경: [눅2:3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는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야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 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드러내려 함이니 –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카이 엔 한나 프로페티스 뒤가테르 파누엘 에크 퓔레스 아세르 하우테 프로베베퀴이아 엔 헤메라이스 폴라이스 제사사 메타 안드로스 에테 헾타 아포 테스 파르데니아스 아우테스
개역개정,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새번역,36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안나라는 여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그는 처녀 시절을 끝내고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 ㉤그, ‘한나’
우리말성경,36 또 아셀 지파의 바누엘의 딸인 안나라는 여자 예언자도 있었습니다. 안나는 나이가 많았는데 결혼해서 남편과 7년 동안 살다가
가톨릭성경,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영어NIV,36 There was also a prophetess, Anna,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her. She was very old; she had lived with her husband seven years after her marriage,
영어NASB,36 And there was a prophetess, Anna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her. She was advanced in years and had lived with her husband seven years after her marriage,
영어MSG,36 Anna the prophetess was also there, a daughter of Phanuel from the tribe of Asher. She was by now a very old woman. She had been married seven years
영어NRSV,36 There was also a prophet, Anna the daughter of Phanuel, of the tribe of Asher. She was of a great age, having lived with her husband seven years after her marriag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ην αννα προφητις θυγατηρ φανουηλ εκ φυλης ασηρ αυτη προβεβηκυια εν ημεραις πολλαις ζησασα ετη μετα ανδρος επτα απο της παρθενιας αυτης
라틴어Vulgate,36 et erat Anna prophetissa filia Phanuhel de tribu Aser haec processerat in diebus multis et vixerat cum viro suo annis septem a virginitate sua
히브리어Modern,36 ותהי שם חנה אשה נביאה בת פנואל משבט אשר והיא באה בימים וחיתה עם בעלה שבע שנים אחרי בתוליה׃
성 경: [눅2:3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벧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카이 아우테 케라 헤오스 에톤 옥도에콘타 테싸론 헤 우크 아피스타토 투 히에루 네스테이아이스 카이 데에세신 라트류우사 뉰타 카이 헤메란
개역개정,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새번역,37 과부가 되어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우리말성경,37 그 후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가톨릭성경,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영어NIV,37 and then was a widow until she was eighty-four. She never left the temple but worshiped night and day, fasting and praying.
영어NASB,37 and then as a widow to the age of eighty-four. She never left the temple, serving night and day with fastings and prayers.
영어MSG,37 and a widow for eighty-four. She never left the Temple area, worshiping night and day with her fastings and prayers.
영어NRSV,37 then as a widow to the age of eighty-four. She never left the temple but worshiped there with fasting and prayer night and day.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αυτη χηρα ως ετων ογδοηκοντατεσσαρων η ουκ αφιστατο απο του ιερου νηστειαις και δεησεσιν λατρευουσα νυκτα και ημεραν
라틴어Vulgate,37 et haec vidua usque ad annos octoginta quattuor quae non discedebat de templo ieiuniis et obsecrationibus serviens nocte ac die
히브리어Modern,37 והיא אלמנה כארבע ושמנים שנה ולא משה מן המקדש ובצום ובתחנונים עבדה את האלהים לילה ויום׃
성 경: [눅2:3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카이 아우테 테 호라 에피스타사 안도몰로게이토 토 데오 카이 엘랄레이 페리 아우투 파신 토이스 프로스데코메노이스 뤼트로신 예루살렘
개역개정,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새번역,38 바로 이 때에 그가 다가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우리말성경,38 바로 그때 안나가 그들에게 다가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간절히 고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아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성경,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영어NIV,38 Coming up to them at that very moment, she gave thanks to God and spoke about the child to all who were looking forward to the redemption of Jerusalem.
영어NASB,38 At that very moment she came up and began giving thanks to God, and continued to speak of Him to all those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영어MSG,38 At the very time Simeon was praying, she showed up, broke into an anthem of praise to God, and talked about the child to all who were waiting expectantly for the freeing of Jerusalem.
영어NRSV,38 At that moment she came, and began to praise God and to speak about the child to all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αυτη αυτη τη ωρα επιστασα ανθωμολογειτο τω κυριω και ελαλει περι αυτου πασιν τοις προσδεχομενοις λυτρωσιν εν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38 et haec ipsa hora superveniens confitebatur Domino et loquebatur de illo omnibus qui expectabant redemptionem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38 ותקם בשעה ההיא ותגש להדות ליהוה ותדבר עליו באזני כל המחכים לגאלה בירושלים׃
성 경: [눅2:3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백하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롬 3:24;엡 1:7;골 1:14).
카이 호스 에펠레산 판타 타 카타 톤 노몬 퀴리우 에페스트렢산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에이스 폴린 헤아우톤 나자렏
개역개정,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새번역,39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일을 마친 뒤에, 갈릴리의 자기네 고향 동네 나사렛에 돌아왔다.
우리말성경,39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 갈릴리에 있는 자기 마을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가톨릭성경,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영어NIV,39 When Joseph and Mary had done everything required by the Law of the Lord, they returned to Galilee to their own town of Nazareth.
영어NASB,39 When they had performed everything according to the Law of the Lord, they returned to Galilee, to their own city of Nazareth.
영어MSG,39 When they finished everything required by God in the Law, they returned to Galilee and their own town, Nazareth.
영어NRSV,39 When they had finished everything required by the law of the Lord, they returned to Galilee, to their own town of Nazareth.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ως ετελεσαν απαντα τα κατα τον νομον κυριου υπεστρεψαν εις την γαλιλαιαν εις την πολιν αυτων ναζαρετ
라틴어Vulgate,39 et ut perfecerunt omnia secundum legem Domini reversi sunt in Galilaeam in civitatem suam Nazareth
히브리어Modern,39 ויכלו את הכל כפי תורת יהוה וישובו הגלילה אל נצרת עירם׃
성 경: [눅2:3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주의 율법을 좇아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갈릴리로…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토 데 파이디온 에윜사넨 카이 에크라타이우토 플레루메논 소피아 카이 카리스 데우 엔 엪 아우토
개역개정,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새번역,40 아기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
우리말성경,40 아이는 점점 자라 가며 강해지고 지혜가 충만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영어NIV,40 And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he was filled with wisdom, and the grace of God was upon him.
영어NASB,40 The Child continued to grow and become strong, increasing in wisdom; and the grace of God was upon Him.
영어MSG,40 There the child grew strong in body and wise in spirit. And the grace of God was on him.
영어NRSV,40 The child grew and became strong, filled with wisdom; and the favor of God was up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0 το δε παιδιον ηυξανεν και εκραταιουτο πνευματι πληρουμενον σοφιας και χαρις θεου ην επ αυτο
라틴어Vulgate,40 puer autem crescebat et confortabatur plenus sapientia et gratia Dei erat in illo
히브리어Modern,40 ויגדל הנער ויחזק ברוח וימלא חכמה וחסד אלהים עמו׃
성 경: [눅2:4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카이 에포류온토 호이 고네이스 아우투 캍 에토스 에이스 예루살렘 테 헤오르테 투 파스카
개역개정,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새번역,41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41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가톨릭성경,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영어NIV,41 Every year his parents went to Jerusalem for the Feast of the Passover.
영어NASB,41 Now His parents went to Jerusalem every year at the Feast of the Passover.
영어MSG,41 Every year Jesus’ parents traveled to Jerusalem for the Feast of Passover.
영어NRSV,41 Now every year his parents went to Jerusalem for the festival of the Passover.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επορευοντο οι γονεις αυτου κατ ετος εις ιερουσαλημ τη εορτη του πασχα
라틴어Vulgate,41 et ibant parentes eius per omnes annos in Hierusalem in die sollemni paschae
히브리어Modern,41 ועלו הוריו ירושלים שנה בשנה לחג הפסח׃
성 경: [눅2:4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수가 있다.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이다.
카이 호테 에게네토 에톤 도데카 아나바이논톤 아우톤 카타 토 에도스 테스 헤오르테스
개역개정,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새번역,42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 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 ㉦출 12:13; 21-28을 볼 것
우리말성경,42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그들은 관례에 따라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영어NIV,42 When he was twelve years old, they went up to the Feast, according to the custom.
영어NASB,42 And when He became twelve, they went up there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Feast;
영어MSG,42 When he was twelve years old, they went up as they always did for the Feast.
영어NRSV,42 And when he was twelve years old, they went up as usual for the festival.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οτε εγενετο ετων δωδεκα αναβαντων αυτων εις ιεροσολυμα κατα το εθος της εορτης
라틴어Vulgate,42 et cum factus esset annorum duodecim ascendentibus illis in Hierosolymam secundum consuetudinem diei festi
히브리어Modern,42 ויהי בהיותו בן שתים עשרה שנה ויעלו ירושלים כמשפט החג׃
카이 텔레이오산톤 타스 헤메라스 엔 토 휘포스트레페인 아우투스 휘페메이넨 예수스 호 파이스 엔 예루살렘 카이 우크 에그노산 호이 고네이스 아우투
개역개정,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새번역,43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우리말성경,43 기간이 끝나 그 부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영어NIV,43 After the Feast was over, while his parents were returning home,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they were unaware of it.
영어NASB,43 and as they were returning, after spending the full number of days,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His parents were unaware of it,
영어MSG,43 When it was over and they left for home, the child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his parents didn’t know it.
영어NRSV,43 When the festival was ended and they started to return,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his parents did not know it.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τελειωσαντων τας ημερας εν τω υποστρεφειν αυτους υπεμεινεν ιησους ο παις εν ιερουσαλημ και ουκ εγνω ιωσηφ και η μητηρ αυτου
라틴어Vulgate,43 consummatisque diebus cum redirent remansit puer Iesus in Hierusalem et non cognoverunt parentes eius
히브리어Modern,43 וימלאו את הימים וישובו ויותר ישוע הנער בירושלים ויוסף ואמו לא ידעו׃
성 경: [눅2:4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그 날들을 마치고 –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레 23:6-8;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 예수는…알지 못하고 –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해맨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계속해서 염두에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노미산테스 데 아우톤 에이나이 엔 테 쉬노디아 엘돈 헤메라스 호돈 카이 아네케툰 아우톤 엔 토이스 슁게뉴신 카이 토이스 그노스토이스
개역개정,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새번역,44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 뒤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았으나,
우리말성경,44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영어NIV,44 Thinking he was in their company, they traveled on for a day. Then they began looking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friends.
영어NASB,44 but supposed Him to be in the caravan, and went a day’s journey; and they began looking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acquaintances.
영어MSG,44 Thinking he was somewhere in the company of pilgrims, they journeyed for a whole day and then began looking for him among relatives and neighbors.
영어NRSV,44 Assuming that he was in the group of travelers, they went a day’s journey. Then they started to look for him among their relatives and friends.
헬라어신약Stephanos,44 νομισαντες δε αυτον εν τη συνοδια ειναι ηλθον ημερας οδον και ανεζητουν αυτον εν τοις συγγενεσιν και εν τοις γνωστοις
라틴어Vulgate,44 existimantes autem illum esse in comitatu venerunt iter diei et requirebant eum inter cognatos et notos
히브리어Modern,44 ויחשבו כי עם חבל הארחים הוא וילכו כדרך יום ויבקשהו בין הקרובים והמידעים׃
성 경: [눅2:4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동행 중에…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섰다.
카이 메 휴론테스 휘페스트렢산 에이스 예루살렘 아나제툰테스 아우톤
개역개정,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새번역,45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찾아다녔다.
우리말성경,45 그러나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가톨릭성경,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영어NIV,45 When they did not find him, they went back to Jerusalem to look for him.
영어NASB,45 When they did not find Him, they returned to Jerusalem looking for Him.
영어MSG,45 When they didn’t find him, they went back to Jerusalem looking for him.
영어NRSV,45 When they did not find him, they returned to Jerusalem to search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5 και μη ευροντες αυτον υπεστρεψα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ζητουντε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45 et non invenientes regressi sunt in Hierusalem requirentes eum
히브리어Modern,45 ולא מצאהו וישבו ירושלים לבקשו׃
성 경: [눅2:4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찾으면서 – 헬라어 ‘아나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다.
카이 에게네토 메타 헤메라스 트레이스 휴론 아우톤 엔 토 히에로 카데조메논 엔 메소 톤 디다스칼론 카이 아쿠온타 아우톤 카이 에페로톤타 아우투스
개역개정,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새번역,46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우리말성경,46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전 뜰에서 예수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영어NIV,46 After three days they found him in the temple courts, sitting among the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영어NASB,46 Then, after three days they found Him in the temple, sitting in the midst of the teachers, both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영어MSG,46 The next day they found him in the Temple seated among the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questions.
영어NRSV,46 After three days they found him in the temple, sitting among the teachers, listening to them and asking them questions.
헬라어신약Stephanos,46 και εγενετο μεθ ημερας τρεις ευρον αυτον εν τω ιερω καθεζομενον εν μεσω των διδασκαλων και ακουοντα αυτων και επερωτωντα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46 et factum est post triduum invenerunt illum in templo sedentem in medio doctorum audientem illos et interrogantem
히브리어Modern,46 ויהי אחרי שלשת ימים וימצאהו במקדש ישב בתוך המורים שמע אליהם ושאל אתם׃
성 경: [눅2:4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선생들 중에 앉으사…묻기도 하시니 –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엨시스탄토 데 판테스 호이 아쿠온테스 아우투 에피 테 쉬네세이 카이 타이스 아포크리세신 아우투
개역개정,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새번역,47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우리말성경,47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마다 그가 깨닫고 대답하는 것에 몹시 감탄했습니다.
가톨릭성경,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영어NIV,47 Everyone who heard him was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영어NASB,47 And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영어MSG,47 The teachers were all quite taken with him, impressed with the sharpness of his answers.
영어NRSV,47 And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헬라어신약Stephanos,47 εξισταντο δε παντες οι ακουοντες αυτου επι τη συνεσει και ταις αποκρισεσι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47 stupebant autem omnes qui eum audiebant super prudentia et responsis eius
히브리어Modern,47 וכל השמעים אליו השתוממו על שכלו ועל תשובתיו׃
성 경: [눅2:4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듣는 자가 다…기이히 여기더라 – ‘기이히 여기더라'(*, 여시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는 ‘이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카이 이돈테스 아우톤 엨세플라게산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헤 메테르 아우투 테크논 티 에포이에사스 헤민 후토스 이두 호 파테르 수 카고 오뒤노메노이 에제투멘 세
개역개정,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새번역,48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우리말성경,48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
가톨릭성경,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영어NIV,48 When his parents saw him, they were astonished. His mother said to him, “Son, why have you treated us like this? Your father and I have been anxiously searching for you.”
영어NASB,48 When they saw Him, they were astonished; and His mother said to Him, “Son, why have You treated us this way? Behold, Your father and I have been anxiously looking for You.”
영어MSG,48 But his parents were not impressed; they were upset and hurt. His mother said, “Young man, why have you done this to us? Your father and I have been half out of our minds looking for you.”
영어NRSV,48 When his parents saw him they were astonished; and his mother said to him, “Child, why have you treated us like this? Look, your father and I have been searching for you in great anxiety.”
헬라어신약Stephanos,48 και ιδοντες αυτον εξεπλαγησαν και προς αυτον η μητηρ αυτου ειπεν τεκνον τι εποιησας ημιν ουτως ιδου ο πατηρ σου καγω οδυνωμενοι εζητουμεν σε
라틴어Vulgate,48 et videntes admirati sunt et dixit mater eius ad illum fili quid fecisti nobis sic ecce pater tuus et ego dolentes quaerebamus te
히브리어Modern,48 ויהי כראותם אתו ויחרדו ותאמר אליו אמו בני מדוע ככה עשית לנו הנה אביך ואנכי בעצבת לב בקשנוך׃
성 경: [눅2:4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너를 찾았노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티 호티 에제테이테 메 우크 에데이테 호티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데이 에이나이 메
개역개정,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새번역,49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우리말성경,49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가톨릭성경,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영어NIV,49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he asked.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영어NASB,49 And He said to them, “Why is it that you were look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영어MSG,49 He said, “Why were you looking for me? Didn’t you know that I had to be here, dealing with the things of my Father?”
영어NRSV,49 He said to them,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49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τι οτι εζητειτε με ουκ ηδειτε οτι εν τοις του πατρος μου δει ειναι με
라틴어Vulgate,49 et ait ad illos quid est quod me quaerebatis nesciebatis quia in his quae Patris mei sunt oportet me esse
히브리어Modern,49 ויאמר אליהם למה זה בקשתם אתי הלא ידעתם כי עלי להיות באשר לאבי׃
성 경: [눅2:4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어찌하여…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 순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신 33:9;마 6:33). (2) 예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 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간의 양자 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내 아버지 집에 –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23:46;마 11:25;막 14:36;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카이 아우토이 우 쉬네칸 토 레마 호 엘랄레센 아우토이스
개역개정,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새번역,50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50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영어NIV,50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was saying to them.
영어NASB,50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tatement which He had made to them.
영어MSG,50 But they had no idea what he was talking about.
영어NRSV,50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αυτοι ου συνηκαν το ρημα ο ελαλησε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50 et ipsi non intellexerunt verbum quod locutus est ad illos
히브리어Modern,50 והם לא הבינו את הדבר אשר דבר אליהם׃
성 경: [눅2:5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 카테베 멭 아우톤 카이 엘덴 에이스 나자렏 카이 엔 휘포타쏘메노스 아우토이스 카이 헤 메테르 아우투 디에테레이 판타 타 레마타 엔 테 카르디아 아우테스
개역개정,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새번역,51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우리말성경,51 그러고 나서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가톨릭성경,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영어NIV,51 Then he went down to Nazareth with them and was obedient to them. But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영어NASB,51 And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He continued in subjection to them; and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영어MSG,51 So he went back to Nazareth with them, and lived obediently with them. His mother held these things dearly, deep within herself.
영어NRSV,51 Then he went down with them and came to Nazareth, and was obedient to them.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51 και κατεβη μετ αυτων και ηλθεν εις ναζαρετ και ην υποτασσομενος αυτοις και η μητηρ αυτου διετηρει παντα τα ρηματα ταυτα εν τη καρδια αυτης
라틴어Vulgate,51 et descendit cum eis et venit Nazareth et erat subditus illis et mater eius conservabat omnia verba haec in corde suo
히브리어Modern,51 וירד אתם ויבא אל נצרת ויכנע להם ואמו שמרה בלבה את כל הדברים האלה׃
성 경: [눅2:5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모친은…마음에 두니라 –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카이 예수스 프로에콮텐 엔 테 소피아 카이 헬리키아 카이 카리티 파라 데오 카이 안드로포이스
개역개정,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새번역,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우리말성경,52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영어NIV,52 And Jesus grew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en.
영어NASB,52 And Jesus kept increasing in wisdom and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en.
영어MSG,52 And Jesus matured, growing up in both body and spirit, blessed by both God and people.
영어NRSV,52 And Jesus increased in wisdom and in years, and in divine and human favor.
헬라어신약Stephanos,52 και ιησους προεκοπτεν σοφια και ηλικια και χαριτι παρα θεω και ανθρωποις
라틴어Vulgate,52 et Iesus proficiebat sapientia aetate et gratia apud Deum et homines
히브리어Modern,52 וישוע הלך וגדל בחכמה ומקומה ובחן עם אלהים ועם אנשים׃
성 경: [눅2:5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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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2장
2:1 구유에 나신 메시야 (누가복음 2:1-7) “때가 차게”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사,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하신 그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베들레헴에서 나리라는 사실이 예고되어 있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출생의 시기, 장소, 방식을 살펴보자. Ⅰ. 우리 주 예수께서 출생하신 때를 보자. 이 대목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는 바를 종합하면, 그 때는 “적당한 때”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 그가 태어난 때는 “제 4의 군주 국가”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이다. 즉 이전의 3 군주 국가보다 이 제4의 군주 국가야말로 “세계적인 국가”가 이제 막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구스도 황제 “시대에” 태어났다. 그 때는 로마 제국이 그 어느 때보다는 영토를 확장해서, 한쪽으로는 페르샤와 다른 한쪽으로는 영국에까지 그 힘이 뻗쳤을 때이다. 따라서 당시의 로마는 Terrarum orbis imperium – 온 지상의 제국이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여기서도 로마를 “온 세계”라고 칭했다(1절). 왜냐하면 로마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를 빼놓고는 문명이 개화된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제 다니엘의 예언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할 시기인 것이다(단 2:44). “이 왕들의 시대에,” 즉 제4의 군주 국가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파괴되지 않을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했다.
2. 그는 유대가 제국의 한 도(道)요 부속국으로 되어 버린때에 탄생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 전체가 국세 조사를 받을 때에 유대인들도 역시 국세 조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에 이해서, 이 일이 있기 전 약 60년 전에 점령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교회의 치리권은 힐가누스(대제사장)에게 맡겼다. 그러나 국가의 치리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국가의 치리권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대는 수리아의 로마인 총독 구레뇨가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2절). 바로 이 때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해야 될 시기였다. 야곱의 유언 예언이 바로 그렇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실로가 오실 터인데, 그가 오시면, “홀(왕권의 상징)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율법 수여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창 49:10). 그가 태어난 때는 “제 4의 군주 국가”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이다. 즉 이전의 3 군주 국가보다 이 제4의 군주 국가야말로 “세계적인 국가”가 이제 막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구스도 황제 “시대에” 태어났다. 그 때는 로마 제국이 그 어느 때보다는 영토를 확장해서, 한쪽으로는 페르샤와 다른 한쪽으로는 영국에까지 그 힘이 뻗쳤을 때이다. 따라서 당시의 로마는 Terrarum orbis imperium – 온 지상의 제국이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여기서도 로마를 “온 세계”라고 칭했다(1절). 왜냐하면 로마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를 빼놓고는 문명이 개화된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제 다니엘의 예언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할 시기인 것이다(단 2:44). “이 왕들의 시대에,” 즉 제4의 군주 국가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파괴되지 않을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했다.그는 유대가 제국의 한 도(道)요 부속국으로 되어 버린때에 탄생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 전체가 국세 조사를 받을 때에 유대인들도 역시 국세 조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에 이해서, 이 일이 있기 전 약 60년 전에 점령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교회의 치리권은 힐가누스(대제사장)에게 맡겼다. 그러나 국가의 치리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국가의 치리권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대는 수리아의 로마인 총독 구레뇨가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2절). 바로 이 때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해야 될 시기였다. 야곱의 유언 예언이 바로 그렇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실로가 오실 터인데, 그가 오시면, “홀(왕권의 상징)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율법 수여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창 49:10). 이 호적 조사는 유대에 “처음 있는 호적”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예성을 말해 주는 첫 신호였다. 그러므로 이제 실로가 와서 자기의 나라를 세워야 된다. 3. 그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사정이 엿보인다. 그것은 로마의 시민 전체가 등록을 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그 제국에 현재로서는 세계적인 평화가 존립해 있다는 뜻이다. 야누스의 성전은 이제 닫혔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전쟁이 발발했더라도 결코 문이 닫힌 적이 없던 성전이다. 그리고 이제 “검을 쳐 쟁기를 만들어야 할” 때를 초래할 평화의 임금이 나실 적합한 시기가 된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사정이 엿보인다. 그것은 로마의 시민 전체가 등록을 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그 제국에 현재로서는 세계적인 평화가 존립해 있다는 뜻이다. 야누스의 성전은 이제 닫혔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전쟁이 발발했더라도 결코 문이 닫힌 적이 없던 성전이다. 그리고 이제 “검을 쳐 쟁기를 만들어야 할” 때를 초래할 평화의 임금이 나실 적합한 시기가 된 것이다. Ⅱ. 우리 주 예수의 탄생 장소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다(미 5:2). 서기관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마 2:5, 6). 또 일반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요 7:42). 그 지명에는 의미 있는 뜻이 들어 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신 분이 출생하기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었다. 즉 그가 태어난 곳이요, 따라서 “다윗의 자손”인 “그”는 거기서 출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시온도 역시 “다윗 성”이라고 불렸다(삼하 5:7).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기서 탄생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비천한 모습으로 하나의 “목자”로서 태어난 그 다윗 성은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리의 구주는 그가 스스로 겸비해지셨을 때, 자기의 출생지를 그곳으로 정하셨던 것이다. 출생지는 시온이 아니었다. 시온은 그가 권능과 번영을 누리며 통치하던 곳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모형이 될 곳, 곧 “시온 산”이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임신했을 때, 해산의 때가 가까워 오자. 섭리자는 황제로부터 발령된 명령을 통해서 그런 일을 명령하시사,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적 하게”하였다. 즉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름을” 정해진 관서에다 가족별로 “등록하고” “기록해야”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매우 적합하다. 그들이 “호적을 올리”는 일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그 국세조사는 그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에서 신하로서의 고백을 하게 할 목적이었다. 즉 어떤 정해진 짧은 공식문을 통해서나 최소한 어떤 소작료와 같은 자기들의 충성의 표시로서 작은 공물을 바치게 함으로써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등록된 종이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 “영(令)”에 따라서(자기들의 가문이나 족보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등록되게 될 때 특별한 신경을 써서 족보나 가문이 잘 보존되도록 대비했다. 이와 같이 어리석게도 저들은 “본체”를 잃고 나서도, “그림자”라고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던 것이다. 아구스도의 계획은 자기 백성의 숫자를 알아서 그것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을 “자랑”하고픈 교만심에서 나왔었든가, “정책”적으로 했을 것이다. 즉 자기의 권세를 보강하고, 자기의 정권이 더욱 막강하게 보이도록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섭리자는 그 일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계획하셨다. 요셉과 마리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호적”하느라고 고생을 겪어야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올라와야 했다. 그들은 “다윗 집 족속”이었기 때문이었다(4,5절). 그리고 아마 그들은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자들이었으므로, 자기들의 혈통이 왕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으로보다는 부담과 비용이 드는 일로 여겼으리라. 왜냐하면, (남자는 물론이나 여자도) 모든 유대인은 자기들의 선조들이 살던 성읍에 가야 했고, 지금으로서는 자기들의 지파의 경계를 지키고 있지도 않으면서, 거기에서 호적을 해야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다윗 족속”에게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으며, 그 족속에게는 아주 정확성이 기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다윗 족속은 왕족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들이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래서 황제는 그들의 숫자와 힘을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여러 가지 목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 이로써 “이미 잉태하고”있던 동정녀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예언에 따라서 거기서 아기를 “낳게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으려 계획했던 것이다. 실로 “계획은 인간이 하나 그 성사(成事)는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자. 또한 섭리자는 만물을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도록 명령하시며, 인간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세운 계획까지도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섭리자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에 속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무엇이 그의 모친을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겠는가? 그녀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는 사실밖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이로써 “이미 잉태하고”있던 동정녀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예언에 따라서 거기서 아기를 “낳게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으려 계획했던 것이다. 실로 “계획은 인간이 하나 그 성사(成事)는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자. 또한 섭리자는 만물을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도록 명령하시며, 인간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세운 계획까지도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섭리자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에 속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무엇이 그의 모친을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겠는가? 그녀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는 사실밖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이것은 입증되어야 할 실질적인 일이요, 이와 같이 신빙성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문제였다. 기독교 신앙을 위한 가장 초기의 대변자들이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와 터툴리안(Tertulliam)은 (그리스도의 혈통이 다윗家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위해서) “로마 제국”의 호적 또는 “기록”을 들었다. 3.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이 밝혀졌다. 그는 나자마자 로마 제국의 신하, 곧 “관원들의 종”(사 49:7)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이 밝혀졌다. 그는 나자마자 로마 제국의 신하, 곧 “관원들의 종”(사 49:7)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는 국세 조사 기간 중에 출생했으므로, 그의 부모와 같이 호적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아무런 명예도 취하지 아니하며,” “종의 형체를 취하였다”는 점을 보여 줄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왕들의 그에게 공물을 바쳤어야 하는데, 그 대신 그가 세상에 왔을 때는 친히 공물을 바치는 자(종)가 되었다. Ⅲ. 그의 탄생의 주위 사정을 보자. 그것은 지극히 비천했고, 온갖 멸시의 표지가 다 붙어 있었다. 그는 실로 “장자”였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이 그렇게 초라한 여인의 장자가 되는 것은 아무런 영예가 못되었다. 그녀에게는 장자가 될 자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었다. 단지 “선천적인” 것밖에는 없었다. 1.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으로 당하는 비천한 모습을 지녔다. “그는 강보에 싸였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갓 태어났을 때는 그런 법이다. 마치 그리스도를 단단히 지켜야 하고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듯이었다. 암흑 에”바다를 싸매는 강보로” 삼았던 바로 그분이 이제 “강보에” 싸이게 된 것이다(욥 38:9).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으로 당하는 비천한 모습을 지녔다. “그는 강보에 싸였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갓 태어났을 때는 그런 법이다. 마치 그리스도를 단단히 지켜야 하고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듯이었다. 암흑 에”바다를 싸매는 강보로” 삼았던 바로 그분이 이제 “강보에” 싸이게 된 것이다(욥 38:9). 저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시간의 아기가 되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영원에 기원을 두고 있는 분을 보고, “우리는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고 있다(요 7:27)고 했다. 상제(上帝·날들의 태고)께서 잠시 동안의 시간의 어린아이가 되셨다. 2. 그에게는 특유하게 비천한 면이 있었다.
(1) 그는 “사관(舍館)에서” 났다. 아버지의 집에서 영광을 누리던 다윗의 아들에게 그가 주장할 만한 유산이 없었다. 다윗 성에서도 없었고, 곤경에 처한 그의 모친을 데려다가 높히는 편의를 제공할 친구도 하나 없었다. 그리스도가 “사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관(여인숙)에 들르는 것처럼 잠시 동안 체류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일이요, 또한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에게는 특유하게 비천한 면이 있었다.그는 “사관(舍館)에서” 났다. 아버지의 집에서 영광을 누리던 다윗의 아들에게 그가 주장할 만한 유산이 없었다. 다윗 성에서도 없었고, 곤경에 처한 그의 모친을 데려다가 높히는 편의를 제공할 친구도 하나 없었다. 그리스도가 “사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관(여인숙)에 들르는 것처럼 잠시 동안 체류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일이요, 또한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인숙은 오는 사람 모두를 받는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다. 그는 사랑의 깃발을 자기의 상징으로 내걸었고,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결코 박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돈 없이 값없이” 오는 자들을 환영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무료이다.
(2) 그는 “구유에서” 났다. “구유”로 번역된 원어는 가축이 들어가서 먹이를 먹는 장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관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시설이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요람에 눕게 되는 대신에 “구유에” 눕게 된 것이다. 그는 “구유에서” 났다. “구유”로 번역된 원어는 가축이 들어가서 먹이를 먹는 장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관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시설이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요람에 눕게 되는 대신에 “구유에” 눕게 된 것이다. “강보”라고 번역된 원어는 “찢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 말은 그리스도에게는 아기들이 입는 고운 의복 따위는 전혀 없었고, 단지 그의 강보는 넝마 조각이나 헤어진 옷 조각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구유에서 났다는 것은
[1] 그의 부모의 극빈성을 예시해 준다. 그들이 부자였더라면, 방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전진해야”했다. [2] 그것은 또한 그 당시인들의 도덕이 부패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렇게 덕과 영예로 존경받는 여인이 그토록 가혹한 처분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만일 상식적인 인간미라고 있었더라면, 여인을 구유로 보내는 고생은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3] 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겸비를 나타낸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버림을 받고 절망에 처해 있으며, 고독에 빠져 있는 젖먹이 같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꼴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세, 곧 저 위대한 구약 성서의 예언자요, 율법수여자인 모세가 보여 준 모형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모세는 젖먹이었을 때 갈대 상자 속에 버려졌었고, 이제 그리스도도 “구유에” 버려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멸시하고자 했고, 우리들도 그것을 중시하지 않도록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우리도 영접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그의 부모의 극빈성을 예시해 준다. 그들이 부자였더라면, 방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전진해야”했다.그것은 또한 그 당시인들의 도덕이 부패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렇게 덕과 영예로 존경받는 여인이 그토록 가혹한 처분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만일 상식적인 인간미라고 있었더라면, 여인을 구유로 보내는 고생은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겸비를 나타낸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버림을 받고 절망에 처해 있으며, 고독에 빠져 있는 젖먹이 같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꼴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세, 곧 저 위대한 구약 성서의 예언자요, 율법수여자인 모세가 보여 준 모형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모세는 젖먹이었을 때 갈대 상자 속에 버려졌었고, 이제 그리스도도 “구유에” 버려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멸시하고자 했고, 우리들도 그것을 중시하지 않도록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우리도 영접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2:8 목자와 천사의 방문 (누가복음 2:8-20) 그리스도의 겸비에 따른 가장 비천한 사정에는 모두 그의 영광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여건들이 동반되었고, 그 영광은 그 비천함을 상쇄하는 것이요, 그 굴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바로 그 4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를 굳게 하려 했고, 그가 장차 높이 들리우게 되리라는 전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그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게”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이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는 대로, 그의 출생에는 천사의 합창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한다고 했다”(히 1:6). 마태복음에는 이 사실, 이 하늘의 임금의 도래가 이방인들인 현자들에게도 별을 통해서 알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사건이 천사 통해서 유대 목자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각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제일 잘 아는 언어를 선택하여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Ⅰ. 어떻게 이 목자들이 개입되었는지를 보자. 그들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들에서 유하면서,”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8절). 그 천사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그들은 이 소식을 받을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에게로 가지 않고, 야곱과 같이 “장막에 거하는 평민들”이요, 에서와 같이 “교활한 사냥꾼들”인 초라한 목자들의 무리에게로 보내졌다. 적장들도 목자들이었다. 모세와 다윗은 특별한 의미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저 순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소식이 모세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아마 지극히 경건했을 이 목자들에게 “큰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소식이 전해지던 그 때에, 그들은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비록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하늘의 지식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들에서 유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깨우고” 있어야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던 그 때에, 그들은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비록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하늘의 지식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들에서 유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깨우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바짝 깨어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보고 듣는 것을 잘 못 알아서 졸고 있는 자들처럼 기만을 당할 수는 없었다. 2. 이제 그들은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업을 이행해 나가고 있는 중에 받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면서,” 도적이나 죽음의 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있었다. 아마 여름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처럼 양떼들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정직한 직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유한다만,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길은 결코 막히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제 그들은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업을 이행해 나가고 있는 중에 받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면서,” 도적이나 죽음의 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있었다. 아마 여름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처럼 양떼들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정직한 직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유한다만,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길은 결코 막히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그들은 천사의 출현에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9절). “보라. 주의 천사가” 홀연히 “그들 위에 임했도다” 즉 evpe,sth – 그들 위에 섰도다. 아마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와서, 그들의 머리 위 공중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지극히 크다. (영어) 성경에는 “그 천사”라고 했으므로, 앞에서(1장) 나왔던 천사가 다시 한 번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급속히 날아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불확실하다. 천사가 “그들에게 임했다”(곁에 섰다-한글)는 것은, 그들이 그런 일을 거의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은총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앞선” 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천사가 하늘에서 온 천사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 주위에 주의 영광이 둘러”있음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밤을 낮과 같이 밝게 하는 영광이요, 하나님의 현현에 동반되곤 하던 영광이요, “하늘의 영광” 즉 “지극히 큰 영광”이요,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밝은 영광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크게 무서워하게”되었다. 마치 어떤 불길한 소식을 듣고 놀라듯이 겁에 질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죄책 의식이 그 만큼 분명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징조는 진노의 사자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의당 느끼게 된다. Ⅲ. 천사가 그 목자들에게 전해 준 전갈은 무엇이었는가?(10-12절). 1. 천사는 그들의 “두려움”을 “중지하라는 영장”을 가져왔다 – “두려워 말라. 너희들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너희의 친구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2. 그는 그들에게 풍요한 기쁨의 제목을 주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내가 엄숙히 선언하노라. 너희에게는 그것을 영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느니라.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기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식이란, 너희에게 오늘, 이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구원주,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다윗 성에 나셨다는 것이니라”(11절).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구세주)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그는 “주”시다. 만민의 주이시다. 그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임금이시다. 아니 그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성서에서는 “주”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영어 성경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하나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주”라고 했으나, 우리 성경은 “여호와”로 나옴 -역주). 그는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구주가 되실 것이다. 천사는 그들의 “두려움”을 “중지하라는 영장”을 가져왔다 – “두려워 말라. 너희들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너희의 친구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그는 그들에게 풍요한 기쁨의 제목을 주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내가 엄숙히 선언하노라. 너희에게는 그것을 영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느니라.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기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식이란, 너희에게 오늘, 이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구원주,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다윗 성에 나셨다는 것이니라”(11절).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구세주)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그는 “주”시다. 만민의 주이시다. 그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임금이시다. 아니 그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성서에서는 “주”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영어 성경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하나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주”라고 했으나, 우리 성경은 “여호와”로 나옴 -역주). 그는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구주가 되실 것이다. “구주가 탄생하셨다. 그는 오늘 나셨다. 그리고 그것이 온 백성에 큰 기쁨의 제목이 되므로, 비밀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이 소식을 선포해야 하며, 너희가 원하는 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는 미리 예고된 곳, 곧 다윗 성에 나셨다. 그리고 그는 너희에게 나셨다. 너희 유대인에게 그가 먼저 보내지셨으니, 너희들, 곧 비록 세상에서는 천하고 가난하지만 너희 목자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보내지셨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도다”고 했다. “너희 인간들에게이지, 우리 천사들에게 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천사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제목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마침내 오신 것이다. 하늘과 땅이여, 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그가 오시기 때문이니라.” 3. 천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있는 이 아기를 찾을 수 있나이까? 지금 베들레헴에는 다윗의 후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천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있는 이 아기를 찾을 수 있나이까? 지금 베들레헴에는 다윗의 후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너희는 이 표적을 보고 찾으라. 그는 구유에 누워 있느니라. 구유에는 분명코 다른 어떤 갓난아기도 눕혀 있지 않느니라.” 그들은 아마 “너희는, 그가 비록 어린아기이지만 법의를 입고, 그 동네에서 제일 멋 있는 집에 위풍 당당히 누워 있으며, 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아기를 보리라”는 말이 나올 줄로 기대했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너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오셨을 때는, 그가 자신을 스스로 구별하셨다. 눈에 현저히 드러나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겸비함을 보여줌으로써였다. Ⅳ. 천사는 이 엄숙한 시기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찬송(doxology)”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냈다(13, 14절). 그 전갈이 한 천사의 입에 의해서 전해지자마자(이 소식이야말로 아주 급속히 전해졌다). 갑자기 “하늘의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했다. 분명히 그 목자들이 들은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노래는 “아무 사람도 배울 수 없는” 저 노래(계 14:3)와는 달랐을 것이다.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1. 이 역사(役事)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지극히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자기들이 비록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시지는 않았지만 – 그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할 것이다(계 5:11, 12). 이러한 은혜를 정하신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또 하나님의 한 속성이 다른 한 속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속성의 영광이 실질적으로 더욱 확실히 되고 더욱 뛰어나게 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하나님의 다른 여러 작품(솜씨)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심은 “지극히 높은 그의 영광”을 위함이다.
2. 사람들이여, 그것을 기뻐하자. “땅 위에는 평화요, 사람들에게는 자비(good-will)로다”(한글과는 후반부가 다소 다름-역주).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이 낮은 세상에 평화를 도입했고, 그 사이에 평화로운 왕래를 개설하였다. 하나님께서 평화로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면, 모든 평화가 거기서 유래되어 나온다. 즉, 양심의 평화, 천사들과의 평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평화가 온다. 이 역사(役事)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지극히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자기들이 비록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시지는 않았지만 – 그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할 것이다(계 5:11, 12). 이러한 은혜를 정하신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또 하나님의 한 속성이 다른 한 속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속성의 영광이 실질적으로 더욱 확실히 되고 더욱 뛰어나게 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하나님의 다른 여러 작품(솜씨)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심은 “지극히 높은 그의 영광”을 위함이다.사람들이여, 그것을 기뻐하자. “땅 위에는 평화요, 사람들에게는 자비(good-will)로다”(한글과는 후반부가 다소 다름-역주).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이 낮은 세상에 평화를 도입했고, 그 사이에 평화로운 왕래를 개설하였다. 하나님께서 평화로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면, 모든 평화가 거기서 유래되어 나온다. 즉, 양심의 평화, 천사들과의 평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평화가 온다. 여기에서의 평화란 “모든 선”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쳐 나오는 모든 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희망하고 있는 모든 “선”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비의 위안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조화되는 길에서는 어떤 “평화”도 “선”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의 길에도, 또 중보자에 의하지 아니하는 모든 길에도 평화나 선은 없다. 여기에 보면, 지극히 엄숙하게 “선포된 평화”가 있다. 원하는 모든 자는 와서 그 평화를 향유하게 하라. 땅 위에 평화가 있는 것은 “선의(善意)의 사람”(어떤 사본은 그렇게 되었다)에게이다 ─ evn avnqrw,poij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는 자요, 기꺼이 화해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평화가 있다. 또는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의를 가지신 그들에게이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는 비록 천사들의 성질을 벗어버리고 오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얼마나 기뻐하는가를 보라. 그렇다면, 우리들이야말로 이 사건으로 크게 감동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하는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가 실증한 바요, “모두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이다. Ⅴ. 목자들이 갓난 구주를 방문했다. 1. 그들은 의논을 했다(15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동안은, 그들은 오직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천사들은 나타나서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용무를 마치면 즉시 돌아간다), “목자들은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의논을 했다(15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동안은, 그들은 오직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천사들은 나타나서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용무를 마치면 즉시 돌아간다), “목자들은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이야기했다.” 윗 세상에서 온 특별한 전갈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에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갈로 스스로 노력하여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도록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관찰과 경험으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전갈(메시지)을 확증한다는 것은, 결코 천사들의 증언이나 거룩한 증언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목자들은 의심쩍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즉 “가서 정말인지 아닌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가서 이루어진 이 일을 봅시다”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렇게 “그것을 그들에게 알리셨거늘,” 거기에 또 무슨 의심의 여지가 있겠는가? “천사들에 의해서 되어진 말은 견고하고” 틀림없는 진실이다. 2. 그들은 즉시 방문했다(16절). 지체없이 그 장소로 “빨리 갔다.” 아마 천사가 성경에 기록된 것(사관의 구유로 가라는 따위) 이상으로 그들에게 자세히 일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을,”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그리스도 주”의 빈한하고 초라한 모습이 그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빈천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락한 생활을 직접 체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시 방문했다(16절). 지체없이 그 장소로 “빨리 갔다.” 아마 천사가 성경에 기록된 것(사관의 구유로 가라는 따위) 이상으로 그들에게 자세히 일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을,”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그리스도 주”의 빈한하고 초라한 모습이 그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빈천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락한 생활을 직접 체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보았던 천사들의 환상을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고, 자기들이 들은 천사들의 노래도 말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 동네에서 제일가는 귀부인이 찾아오는 것 이상의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이 그 아이에 관해서 보았던 환상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경험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신앙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Ⅵ. 목자들은 이 보도를 퍼뜨리려고 애썼다(17절). “그들이 그것을 보고” 즉 “그리스도 주”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을 그 아기에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지극히 만족했다. 그 아기의 사정이 비록 자기들처럼 초라했지만,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일러 준 사실과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치 문둥이들이 주장했듯이(왕하 7:9 에 보면, “오늘은 좋은 소식의 날이로다. 우리가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리라”).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이야기의 전모를 “널리 알렸다.” 즉 “천사”와 요셉과 마리아가 “이 아기에 관하여” 알려 준 것, 곧 그가 구주요, “그리스도 주”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게는 “땅의 평화”가 있고,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었던” 자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 등을 알렸다. 그들은 이 소식을 모든 자들에게 고했고, 그것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세상에 와” 있는 이 때에도, 세상이 비록 그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충분한 통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 진실로 왜 “사람들 모두가 목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히 여겼는가?”말이다(18줄어들). 목자들은 솔직담백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남을 속이리라는 의심을 받을 위인들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믿을 만하며, 그들의 말이 참이라면, 메시야가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났다는 사실을 듣는 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천사들이 그 소식을 그렇게 “초라한 목자들”에게 알려 주면서 대제사장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실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구주와 구주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 또는 그로 인해 얻을 자기들의 유익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을 “9일간의 기사(奇事)”처럼 방울져 떨어지게 했다. 오. 그 세대들의 경이로운 어리석음이여 ! 그들이 그토록 고의적으로 “자기들의 눈을 담아버렸으니,” 그때 그들의 평화에 속하는 일이 그들에 논에 숨겨졌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Ⅶ. 그들의 말을 믿고, 그것을 이용하고 그들의 인상을 받아들인 자들도 있다. 1. 동정녀 마리아는 그들의 말을 자기의 “개인적인 명상”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했다”(19절). 그녀는 증거를 종합하고 소중히 생가하며, 그녀에게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사실들과 비교하려 했다. 그녀의 자기의 정절이 의심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절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침묵하고 기다렸듯이, 이제는 자기의 영예로 드러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영예를 공표하기를 맡기고 침묵을 지켰다. 자기가 해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천사들만 알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충분한 만족이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그들의 말을 자기의 “개인적인 명상”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했다”(19절). 그녀는 증거를 종합하고 소중히 생가하며, 그녀에게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사실들과 비교하려 했다. 그녀의 자기의 정절이 의심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절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침묵하고 기다렸듯이, 이제는 자기의 영예로 드러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영예를 공표하기를 맡기고 침묵을 지켰다. 자기가 해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천사들만 알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충분한 만족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은 간직할 값어치가 있고, 그것을 안전히 지키는 길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명상이란 기억을 돕는 최선의 도움이 된다. 2. 목자들은 그 사실들을 자기들의 보다 더 “공개적인 찬양”의 제목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달랐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20절). 그들이 알려 준 보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린 감사를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하여,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그들이 본”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막 들었을 때 듣던 바대로 그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 비록 그는 극단의 겸비의 상태에 있었지만 ─를 본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그의 “구유”가 어떤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이나, 또 어떤 자들에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탄과 찬송을 보낸다. 목자들은 그 사실들을 자기들의 보다 더 “공개적인 찬양”의 제목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달랐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20절). 그들이 알려 준 보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린 감사를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하여,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그들이 본”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막 들었을 때 듣던 바대로 그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 비록 그는 극단의 겸비의 상태에 있었지만 ─를 본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그의 “구유”가 어떤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이나, 또 어떤 자들에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탄과 찬송을 보낸다.
2:21 성전에 현신(現身)한 그리스도 (누가복음 2:21-24)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낳으므로”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갈 4:4). 그는 아담의 딸의 아들이므로 “모세”의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목에 그 멍에를 메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무거운 멍에였고, “장차 올 선한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율법의 제도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약하고 천한 세상의 초등 학문”(갈 4:9)이지만, 그리스도는 거기에 복종하셨으니, 그것은 그가 더 좋은 은총을 가지고 그것을 취소시켜, 우리에게서 제거하려 함이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저 “율법 아래 있게” 되시고 거기에 순복한 모습을 두 가지 볼 수 있다. Ⅰ. 그는 율법이 지정한 날에 “할례를 받았다”(21절). 곧 “제 8일이 다 되었을 때”, 곧 그가 난 지 7 밤이 지난 그날에 그들은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1. 그 의식은 “고통스런” 수술이었다(“필경 당신의 피의<잔인한> 남편이니이다.” 출 4:25).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순복하사, 그의 초기의 복종, 곧 피 흘리기까지 견디는 복종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 때 그는 방울방울 자기의 피를 흘렸다. 그러나 후에도 그는 그 피를 붉은 시냇물처럼 흘렸다.
2. 그 할례는 본래 “이방인”을 전제로 하고, 그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의식이었으나, 그는 항상 그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죄인”을 상대로 하는 의식이지만 ─ 죄인의 그 의식으로 그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된다 ─ 그에게는 잘라버려야 할 아무런 불순함이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복종했다. 즉 “육체”의 모양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롬 8:3).
3. 그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 “율법 전체에 빚진 자”가 되지만(갈 9:3), 그는 복종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종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종의 형체를 지고 싶어서였다. 그 의식은 “고통스런” 수술이었다(“필경 당신의 피의 남편이니이다.” 출 4:25).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순복하사, 그의 초기의 복종, 곧 피 흘리기까지 견디는 복종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 때 그는 방울방울 자기의 피를 흘렸다. 그러나 후에도 그는 그 피를 붉은 시냇물처럼 흘렸다.그 할례는 본래 “이방인”을 전제로 하고, 그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의식이었으나, 그는 항상 그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죄인”을 상대로 하는 의식이지만 ─ 죄인의 그 의식으로 그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된다 ─ 그에게는 잘라버려야 할 아무런 불순함이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복종했다. 즉 “육체”의 모양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롬 8:3).그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 “율법 전체에 빚진 자”가 되지만(갈 9:3), 그는 복종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종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종의 형체를 지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가 할례를 받은 이유는 이렇다.
(1) 자기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고, “육체로는 그리스도가” 그 민족의 “태생임”을 입증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친히 붙들어 주려” 함에서였다(히 2:16).
(2) 그가 친히 우리들의 죄의 담보물이 되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구드윈(Goodwin) 박사의 말에 의하면, 할례는 우리의 “끈”인데,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율법에 빚진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말하자면 자기의 손을 할례에 대시고, “우리를 위한 죄(속죄제물)가 되셨다.” 자기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고, “육체로는 그리스도가” 그 민족의 “태생임”을 입증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친히 붙들어 주려” 함에서였다(히 2:16).그가 친히 우리들의 죄의 담보물이 되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구드윈(Goodwin) 박사의 말에 의하면, 할례는 우리의 “끈”인데,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율법에 빚진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말하자면 자기의 손을 할례에 대시고, “우리를 위한 죄(속죄제물)가 되셨다.” 의식(儀式)의 율법이 제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소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바칠 수 있게 끔 한 것이다. 제물은 미리 할례를 받지 않고는 바쳐질 수 없는 법이다.
(3) 그는 교회의 어린 자손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였다. 이 규례는 계약의 인을 치는 제도요, 할례와 마찬가지요(롬 4:11), 오늘날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해서 생기는 의에 인을 치는 제도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제 8일에 할례를 받음은 그가 30세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음 있는 자들의 자녀들의 세례를 그들이 성장하기까지 미루어 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식들을 유아기에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가 실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는 교회의 어린 자손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였다. 이 규례는 계약의 인을 치는 제도요, 할례와 마찬가지요(롬 4:11), 오늘날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해서 생기는 의에 인을 치는 제도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제 8일에 할례를 받음은 그가 30세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음 있는 자들의 자녀들의 세례를 그들이 성장하기까지 미루어 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식들을 유아기에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가 실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관례에 따라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명명식이 있었다. 그는 “예수” 혹은 “요수아”로 호칭되었다. “그가 모태에 있기 전에”(1:31) “그 천사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렇게 이름지어 준”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나중에, 상정된 아버지 요셉에게도 말해 주었었다(마 1:21).
[1] 그것은 요한이란 이름처럼(골 4:11)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 됨”을 취하시고자 하셨다. [2] 그것은 구약 성서에서 그를 상징해 주는 위대한 두 인물의 이름이었다. 즉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같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령관이었고, 가나안 정복자였다. 또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이다. 그는 대제사장이므로 관을 쓰기에 적합했고 “자기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슥 6:11, 13). [3] 그 이름은 그의 과업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주었다. 예수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신성의 영광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은혜로운 작정으로부터 중보자가 되기로 지명된 자였다. 그는 “구원을 가져온다.” 그것은 요한이란 이름처럼(골 4:11)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 됨”을 취하시고자 하셨다.그것은 구약 성서에서 그를 상징해 주는 위대한 두 인물의 이름이었다. 즉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같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령관이었고, 가나안 정복자였다. 또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이다. 그는 대제사장이므로 관을 쓰기에 적합했고 “자기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슥 6:11, 13).그 이름은 그의 과업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주었다. 예수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신성의 영광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은혜로운 작정으로부터 중보자가 되기로 지명된 자였다. 그는 “구원을 가져온다.” Ⅱ. 그는 정전에 “현신(現身)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결례의 날이 찼을 때”(22절), 율법을 염두에 두고, 또 율법이 지정한 시기에, 그가 난 지 40일이 되는 날에 있었다. 많은 사본들과 신빙성 있는 사본들은 auvth/j를 auvtw/n으로 읽어서, “그들의 결례 날” 곧 어머니와 아기의 결례 날로 읽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는 씻어야 할 불순함이 없었지만, 할례를 받았듯이 결례식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할례”로 ─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교제하는 밀을 빌어 또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골 2:11) 영적 할례로 ─ 우리가 “할례 받게” 되듯이, 역시 그리스도의 “정결함”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들어온 더러움과 부패에서 “영적으로 정결함”을 받게 된다. 이제 율법에 따라서, 1. 아기 예수는 장자이므로 “주께 드려졌다”(현신되었다). 즉 성전의 한 뜰에서 바쳐졌다. 그 율법이 여기에 인용되어 있다. “첫 해에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칭하여야 하리라”(23절).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의 첫 태생을 죽일 때, 이스라엘의 첫 태생들은 특별히 보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첫 해에 난자이므로, 그는 아론의 집의 후손 이상으로 확실한 권한에 의해서 제사장이었다. 아기 예수는 장자이므로 “주께 드려졌다”(현신되었다). 즉 성전의 한 뜰에서 바쳐졌다. 그 율법이 여기에 인용되어 있다. “첫 해에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칭하여야 하리라”(23절).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의 첫 태생을 죽일 때, 이스라엘의 첫 태생들은 특별히 보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첫 해에 난자이므로, 그는 아론의 집의 후손 이상으로 확실한 권한에 의해서 제사장이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요, “주께 거룩한 자라고 칭함”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장자들처럼, “주께 드려졌다.” 비록 그는 이제 막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 왔지만, 제사장의 손으로 아버지에게 “드려졌다.” 제사장이 그 아버지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그가 “주께 바쳐졌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때 그는 “주께로 이끌리고 나아가게” 된다(렘 30:21). 그러나 그는 율법에 따라 “대속을 보았다”(민 18:15). “처음 난 남자는 대속함을 받아야 하리니.” 그 값은 “5 세겔”이었다(레 27:6; 민 18:16) 그러나 가난한 자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값을 감해 주든가 안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전(贖錢)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주께 드려졌다.” 그것은 그가 “되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귀”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문설주”에 대고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처럼 거기서 섬기기 위해 성전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사무엘처럼 “그가 사는 날 동안” “주께 바쳐졌다”. 또 “손으로 만들지 않은” 참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2. 그 어머니는 자기의 예물을 바쳤다(24절). 그녀가 장차 대(大) 제물이 될 자기의 아들을 주께 드렸으니, 다른 예물은 드리지 않아도 변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지금은 효력이 없지만) “율법에 쓴 바대로”, 그녀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비둘기들”을 바쳐야 했다.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번제물로 어린양을 드리고, “속제물로 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하다면, 그래서 어린양을 살 돈이 없다면, 그녀는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 각각 한 마리씩 “두 마리의 비둘기”를 드려야 한다(레 12:6, 8).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그에게 대해 죄를 졌을 경우에는 슬픔과 수치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두 경우에 모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나 죄로 인한 슬픔, 그 두 가지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은 적이 없다. 그 어머니는 자기의 예물을 바쳤다(24절). 그녀가 장차 대(大) 제물이 될 자기의 아들을 주께 드렸으니, 다른 예물은 드리지 않아도 변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지금은 효력이 없지만) “율법에 쓴 바대로”, 그녀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비둘기들”을 바쳐야 했다.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번제물로 어린양을 드리고, “속제물로 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하다면, 그래서 어린양을 살 돈이 없다면, 그녀는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 각각 한 마리씩 “두 마리의 비둘기”를 드려야 한다(레 12:6, 8).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그에게 대해 죄를 졌을 경우에는 슬픔과 수치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두 경우에 모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나 죄로 인한 슬픔, 그 두 가지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은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사정은 우리들의 사정과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 있게 되었으므로, 율법에 동의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에게 모든 의를 이룸이 되었다.” 죄의 고백에 연합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다. 그러므로 “누가 ‘내가 나의 마음을 깨끗케 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으리요?”2:25 그리스도를 맞은 시므온과 안나 (누가복음 2:25-40)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춘 때에도, 그 겸비의 수치를 상쇄할 만한 영예를 여전히 받았다. “그의 태생의 비천함” 때문에 우리로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번에는 “천사들”이 그에게 찬양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죄에서 출생한 다른 아기들처럼 성전에 바쳐진 것을 보고 우리로 불쾌히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에게 찬양을 돌리고 있다.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에게는 어떤 남다른 엄숙한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침묵을 지키고 다른 아이들과 숲에 그냥 있었던 것이다. Ⅰ. 시므온은 그에게 아주 영예로운 증언을 보냈다. 그 증언은 그 아기에게는 명예가 되었고, 그 부모에게는 격려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제사장들이 구주를 알게 되는 행복한 서두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만일 “파수꾼”들이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이제 살펴 볼 것이 있다. 1. 시므온 혹은 시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기록이 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그의 경건심과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에 이름난 자였다. 유대 학자들과 오랫동안 교제해 오던 어떤 학자들은, 이 때에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시므온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헬렐의 아들이요, 유대인들이 “라반” ─ 학자들에게 붙여 주는 최고의 칭호 ─ 이란 호칭을 최초로 받게 된 자라고 한다(그리고 그 칭호는 7명에게만 주어졌다고 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대(大) 산헤드린의 한회원이었다고 한다. 시므온 혹은 시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기록이 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그의 경건심과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에 이름난 자였다. 유대 학자들과 오랫동안 교제해 오던 어떤 학자들은, 이 때에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시므온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헬렐의 아들이요, 유대인들이 “라반” ─ 학자들에게 붙여 주는 최고의 칭호 ─ 이란 호칭을 최초로 받게 된 자라고 한다(그리고 그 칭호는 7명에게만 주어졌다고 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대(大) 산헤드린의 한회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예언자의” 영을 받은 자요, 더욱이 메시야의 현세적 왕국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던 견해와는 반대되는 증언을 했기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승을 실은 책 미슈냐에는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그들은 지적한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부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당시에 그의 아버지 힐렐이 생존해 있었고, 더구나 유대 역사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므온 자신이 이 사건 훨씬 후대까지 살았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에 나온 시므온이 나이 많았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말, “주의 종을 이제 평안히 하소서”는 그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뜻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빨리 죽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법이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왔다고 말해 놓고도 여러 해를 더 살았다(행 20:25). 그 생각에 대한 또 하나의 이의는, 시므온의 아들은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고, 기독교의 적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심 깊은 자가 바리새인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하면,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자이다. 곧 인간에 대해서는 “의롭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경건했던” 자이다. 이 둘은 항상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는 없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즉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 것인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지금 학대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는 위로의 저작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의 대상이요 근원이다. 그가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희망한다.” 나는 다소 “성급한” 기다림 때문에 그것이 오기 전에 말을 해버릴 뻔 했도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자이다. 곧 인간에 대해서는 “의롭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경건했던” 자이다. 이 둘은 항상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는 없다.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즉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 것인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지금 학대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는 위로의 저작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의 대상이요 근원이다. 그가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희망한다.” 나는 다소 “성급한” 기다림 때문에 그것이 오기 전에 말을 해버릴 뻔 했도다. 시므온은, 다니엘처럼. “책을 보고 깨달았다.” 즉 그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큰 대망 중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오신 자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불신 유대인들은 “이제껏 나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기를 희망하노라”라는 말을 맹세나 엄숙한 주장으로 사용한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기다려야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또 기다릴 값어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기다린” 자들에게, 계속 기다리는 그 기다림에 큰 기쁨을 주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3)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다. 성결의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언의 영으로서 임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래서 그 자신이 위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4) 성령은 그에게 은혜로운 약속을 주었다. 즉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목격하리라고 했다(26절). 그는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상징했던 “그 시기”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가까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탁”(원문의 뜻은 그렇다)을 받았다. 즉 메시야,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신탁이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다. 성결의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언의 영으로서 임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래서 그 자신이 위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성령은 그에게 은혜로운 약속을 주었다. 즉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목격하리라고 했다(26절). 그는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상징했던 “그 시기”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가까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탁”(원문의 뜻은 그렇다)을 받았다. 즉 메시야,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신탁이다.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죽음을” 용감하게, 두려움이 없이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가 성전에 바쳐져 있을 그 때에, 때맞추어 시므온이 들어왔다(27절). 바로 그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말하자면, 아기를 교회에 있는 장자의 명부에 등록시키려고 데리고 들어왔던 그때에, “성령의” 인도로 시므온이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시므온의 희망을 지원해 주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그의 기쁨을 절정에 달하게 해줄 것이다. 그의 귀에 속삭임이 있었다. “이제 곧 성전으로 가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자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성전에 바쳐져 있을 그 때에, 때맞추어 시므온이 들어왔다(27절). 바로 그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말하자면, 아기를 교회에 있는 장자의 명부에 등록시키려고 데리고 들어왔던 그때에, “성령의” 인도로 시므온이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시므온의 희망을 지원해 주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그의 기쁨을 절정에 달하게 해줄 것이다. 그의 귀에 속삭임이 있었다. “이제 곧 성전으로 가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자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성전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거기에 가면 “너희가 찾고 있는 주”께서 홀연히 다가와서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거기서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3. 그는 이 사실을 목격함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가졌다. “시므온이 그 아기를 안았다”(28절). 즉 그는 최대의 애정을 가지고 아기를 “포용했고,” 자기의 품에 안았으니, 최대로 자기의 심장 가까이로 끌어안았고, 이것이야말로 기쁨이 충만했던 일이다. 그는 “아기를 안고” 그 아기를 주께 드렸다고 어떤 자는 생각한다. 또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든가 부모를 대신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옛 사본들은 시므온 자신이 한 제사장이었다고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목격함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가졌다. “시므온이 그 아기를 안았다”(28절). 즉 그는 최대의 애정을 가지고 아기를 “포용했고,” 자기의 품에 안았으니, 최대로 자기의 심장 가까이로 끌어안았고, 이것이야말로 기쁨이 충만했던 일이다. 그는 “아기를 안고” 그 아기를 주께 드렸다고 어떤 자는 생각한다. 또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든가 부모를 대신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옛 사본들은 시므온 자신이 한 제사장이었다고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우리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게 대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볼 자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약속” 것보다는 “실현된” 것이 더 위대하다. 그는 자기의 팔로 그리스도를 안았다. 4. 시므온은 이에 엄숙한 선언을 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래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편안히 놓아주옵소서”라고 했다(29-32절).
(1)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쁨에 넘치는 전망을 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게 되었다(이것은 큰 수확이다). 아니, 생을 경건히 경멸할 수 있게 되었고, 죽음을 소망하게까지 되었다. “주여, 당신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나의 눈이 죽기 전에 보리라고 약속된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이다.”
[1] 여기에 하나님은 “그의 말에 신실한” 분임에 대한 인정이 있다. 솔로몬도 고백했듯이(왕상 8:56), 하나님의 선한 약속은 한 조각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다 희망을 걸었던 사람치고 그 희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는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한 그 구원을 자기의 팔에 안아 보게 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3] 신앙의 고백이 있다. 즉 자기의 품에 안긴 이 아기는 “구원자”, 곧 “구원” 자체임을 고백했다. 그는 “당신(우리 성경에는 ‘주’)의 구원”, 당신이 지시하신 구원, 즉 깊은 계획으로 “당신이 예비하신 그” 구원이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오기”까지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것은 아직도 “예비”되는 중임을 고백했다. [4]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작별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제 나의 눈이 이 광경을 보는 축복을 받았사오니, 눈을 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것을 더 이상이 보지 않게 하옵소서.” 눈은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1:8). 그런데 지금이 그 만족을 찾은 때이다.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고, 그 눈으로 구원을 보는 자에게야 이 세상이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 이제 나의 모든 친구, 친척들,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모든 즐거움과 직업, 심지어는 성전까지라도 작별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5] 그것은 죽음에 대한 환영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소서.” 죽음이란 작별이란 것, 즉 영혼이 몸을 벗어나고, 이 감각의 세계를 떠나 여의 세례로 가는 작별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임을 명하기까지는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종”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다 채우기 전에는 그의 일을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므온은 이에 엄숙한 선언을 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래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편안히 놓아주옵소서”라고 했다(29-32절).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쁨에 넘치는 전망을 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게 되었다(이것은 큰 수확이다). 아니, 생을 경건히 경멸할 수 있게 되었고, 죽음을 소망하게까지 되었다. “주여, 당신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나의 눈이 죽기 전에 보리라고 약속된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이다.”여기에 하나님은 “그의 말에 신실한” 분임에 대한 인정이 있다. 솔로몬도 고백했듯이(왕상 8:56), 하나님의 선한 약속은 한 조각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다 희망을 걸었던 사람치고 그 희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그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는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한 그 구원을 자기의 팔에 안아 보게 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신앙의 고백이 있다. 즉 자기의 품에 안긴 이 아기는 “구원자”, 곧 “구원” 자체임을 고백했다. 그는 “당신(우리 성경에는 ‘주’)의 구원”, 당신이 지시하신 구원, 즉 깊은 계획으로 “당신이 예비하신 그” 구원이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오기”까지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것은 아직도 “예비”되는 중임을 고백했다.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작별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제 나의 눈이 이 광경을 보는 축복을 받았사오니, 눈을 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것을 더 이상이 보지 않게 하옵소서.” 눈은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1:8). 그런데 지금이 그 만족을 찾은 때이다.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고, 그 눈으로 구원을 보는 자에게야 이 세상이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 이제 나의 모든 친구, 친척들,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모든 즐거움과 직업, 심지어는 성전까지라도 작별을 고하리라는 것이다.그것은 죽음에 대한 환영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소서.” 죽음이란 작별이란 것, 즉 영혼이 몸을 벗어나고, 이 감각의 세계를 떠나 여의 세례로 가는 작별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임을 명하기까지는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종”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다 채우기 전에는 그의 일을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에게는 가나안을 보리라는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보게 되면 “죽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변경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신 3:24, 25). 시므온에게는,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이 겉으로 표현된 것을 넘어서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죽게 되리라고 암시적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주여, 이제 되었습니다. 나를(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이 있다. 첫째, 선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위안을 주는”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자격을 그대로 가지고) 수고로운 곳을 떠나 쉬는 곳으로 떠난다. 그는 “평안히” 떠난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화목), 자신의 양심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떠난다. 또한 죽음과의 “평화” 속에서, 죽음과 잘 화목하고서, 그것을 잘 알고서 떠난다는 것이다. 그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떠났듯이(신 34:5),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떠난다. 하나님의 계율의 말씀은, “올라가라, 그리고 죽으라”는 것이었다(모세의 경우). 그런데 약속의 말씀은 “내가 다시 와서 너를 내게로 영접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위안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야곱이 “이제 나를 죽게 하옵소서. 내가 주의 얼굴을 뵈었음이니이다”라고 말했듯이, 그 광경에 대한 큰 만족감, 그 이상의 것을 뜻해 준다.(시므온의) 말은 죽음 저편에 있는 행복상에 대해 믿음에 찬 대망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구원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았던 것이며, 그것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죽음을 “유익하게” 만들었다(빌 1:21).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죽음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2) 그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 아름다운 전망을 했다. 이 구원은,
[1] 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었다. 그 구원은 한 쪽 구석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얼굴 앞에 예비(준비)되어” 있는 것이요, 알려질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흑암에 앉아 있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될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를 통하여 저 세상을 알게 된다. 이 본문은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라”는 이사야 49장 6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촛대의 초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의의 태양”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교회에도 축복이 된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다. 메시야가 자기들의 지파 중에서 연원되었고, 그들 중에서 났고, 살았다는 사실이 유대 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는 참으로 영적으로 이스라엘인인 사람들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사 60:19).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주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리라”(사 45:25). 그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 아름다운 전망을 했다. 이 구원은,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었다. 그 구원은 한 쪽 구석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얼굴 앞에 예비(준비)되어” 있는 것이요, 알려질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흑암에 앉아 있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될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를 통하여 저 세상을 알게 된다. 이 본문은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라”는 이사야 49장 6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촛대의 초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의의 태양”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그것은 교회에도 축복이 된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다. 메시야가 자기들의 지파 중에서 연원되었고, 그들 중에서 났고, 살았다는 사실이 유대 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는 참으로 영적으로 이스라엘인인 사람들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사 60:19).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주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리라”(사 45:2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친히 되셨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신 그 때에, 그는 친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셨다. 5. 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찬양을 보냄으로써, 그 아기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들은 이 아기에 관해서 그가 아주 자세하고도 명백한 말로 한 “모든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53절). 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찬양을 보냄으로써, 그 아기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들은 이 아기에 관해서 그가 아주 자세하고도 명백한 말로 한 “모든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53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그 말에 감동을 받았고, 그것으로써 자기들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했으므로, 여기에 그들에 대한 말이 나온다.(1) 시므온은 그들이 왜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을 축복했다”(34절)고 했으므로, 그는 이 아기와 관계를 맺는 영광을 누린 자들에게, 그리고 그를 양육할 책임을 받은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 줍시사”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시므온은 그들이 왜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을 축복했다”(34절)고 했으므로, 그는 이 아기와 관계를 맺는 영광을 누린 자들에게, 그리고 그를 양육할 책임을 받은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 줍시사”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 아기가 자기들에게 위로와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자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아기는 “이스라엘 중에서 다시 일어나는 많은 자들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 즉 죄에서 죽어 매장되었던 많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박해받고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많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왔다. 그는 또한 “다시 흥하는(일어나는)” 자들에게와 똑같이 “패하는” 많은 자들을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그는 eivj ptw/sin kai. avna,stasin ─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패함이 되고자 하여” 세움을 입었다. 그들을 낮추고 비열하게 하고, 자신(自信)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굳게 되게 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그가 상처를 입히시고 다시 고치시며, 바울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2) 시므온은 또한 그들이 왜 “두려워하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메시야의 나라를 두고 옛부터 전해오던 충고에 따른 것이다(시 2:11). 요셉과 특히 마리아가, 이 풍성한 계시 때문에 “자고(自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그들을 위한 “육체의 가시,” 그들의 기쁨에 대한 완화제가 있다.
[1]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는(패하는) 자들을 위해 세우심을 받았으므로,” 이스라엘 중에는 넘어질 자들도 있다. 그들의 타락이 그를 자극시키고 괴롭히고 분노하게 되어, 그들의 죄와 패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길르앗의 향료로 자기들에게 유해한 독을 제조하고, 구원의 반석에다 자기들의 영혼을 메어치는 많은 자들에게는 이 진귀한 주춧돌이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그들이 왜 “두려워하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메시야의 나라를 두고 옛부터 전해오던 충고에 따른 것이다(시 2:11). 요셉과 특히 마리아가, 이 풍성한 계시 때문에 “자고(自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그들을 위한 “육체의 가시,” 그들의 기쁨에 대한 완화제가 있다.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는(패하는) 자들을 위해 세우심을 받았으므로,” 이스라엘 중에는 넘어질 자들도 있다. 그들의 타락이 그를 자극시키고 괴롭히고 분노하게 되어, 그들의 죄와 패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길르앗의 향료로 자기들에게 유해한 독을 제조하고, 구원의 반석에다 자기들의 영혼을 메어치는 많은 자들에게는 이 진귀한 주춧돌이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저 예언을 가리키는 말이다(사 8:14, 15). 즉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피난처가 되나 어떤 자들에게는 덫이 된다”고 했다(벧전 2:7, 8).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자기들에게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될 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즐겁듯이, 그와 그의 복음이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하나의 표적(a sign)”으로, 즉 어떤 자에게는 경탄의 대상으로, 또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는 비방의 대상으로 세워졌다. 그의 공적 사역 중에는 많은 “눈이 그를”보았고, 그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거스르는 혀”가 많이 있었다. 즉 죄인들의 박해와 비난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트집잡히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많은 사람들의 속생각이 밝혀지고 만다(35절). 즉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밝히 폭로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가까이함으로써 자기들의 은밀하고 착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없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에게 적대심을 가지며, 그에게 분노함으로서 자기들의 은밀한 타락과 악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마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되리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의 “대적자들”인가? 이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별자요,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알게 되고, 후에는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 [2]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에게 위안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지니, “그대의 심령을 칼이 찌르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또한 수난 받는 예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에게 위안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지니, “그대의 심령을 칼이 찌르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또한 수난 받는 예수이다. 그리고, 첫째, “너(마리아)는 그의 다른 어떤 친구들보다도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리다. 그것은 네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 관계가 가깝고,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가 학대를 받는 때가 그녀에게는 “골수에 칼”이 다니다. 그녀가 그의 십자가 곁에 서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그 때에, 그녀의 내적 비탄은 너무나 커서, “칼이 내 마음을 찔렀도다”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너는 “그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마리아의 순교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어떤 옛 학자들은 그녀의 순교로써 이 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인간의 가장 큰 희열과 이 세상에서의 출세, 그 한가운데 인간을 속박하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Ⅱ. “안나” 혹은 “안”이라고 하는 “여(女)예언자”가 그(예수)를 알아보았다. “남자”나 “여자”나 그를 믿기로 초대받은 자들은 그를 증거 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안나란 여인에 대해서 나온 본문의 기사를 보자.(1) 그녀는 “여(女)예언자”였다. 이제 예언의 영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3백년 이상이나 예언의 영이 끊어졌었다. 아마 이 구절은,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젊은 여인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일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일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 시절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증언이 없이” 세상을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2) 그녀는 “바누엘의 딸”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의 “바누엘” 혹은 “브누엘”(창 32:30)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즉 그 말의 신비가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 이때에도 우리의 목숨이 보존되었으니, 지금에서야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란 뜻이다.
(3) 그녀는 “아셀 지파”의 출신이었다. 아셀 지파는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자는 이 사실을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논박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야말로 예언이 다시 소생되자마자 즉시 예언자가 난 셈이다.
(4) 그녀는 “나이가 많았다.” 84년을 과부로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84년을 과부로 지낸 것을 보아, 그녀는 젖어도 100세가 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여인이 안나 처럼 나이가 많으면 안나와 같은 금식기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나이는 실상 84세이고, 긴 기간을 과부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만에 젊은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그냥 과부로 지냈다. 이 사실은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5) 그녀는 항상 성전 “안에서”, 적어도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기숙을 했다고 한다. 즉 성전 뜰의 구빈원에 살면서 성전의 자선으로 연명했거나, 여(女)예언자로서 거기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과 상의하고 충고를 받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가 예배 시간에만은 항상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선한 사업을 할 필요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그 일에 도움을 주곤 했다는 것이다. 이 안나란 여인에 대해서 나온 본문의 기사를 보자.그녀는 “여(女)예언자”였다. 이제 예언의 영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3백년 이상이나 예언의 영이 끊어졌었다. 아마 이 구절은,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젊은 여인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일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일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 시절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증언이 없이” 세상을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그녀는 “바누엘의 딸”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의 “바누엘” 혹은 “브누엘”(창 32:30)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즉 그 말의 신비가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 이때에도 우리의 목숨이 보존되었으니, 지금에서야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란 뜻이다.그녀는 “아셀 지파”의 출신이었다. 아셀 지파는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자는 이 사실을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논박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야말로 예언이 다시 소생되자마자 즉시 예언자가 난 셈이다.그녀는 “나이가 많았다.” 84년을 과부로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84년을 과부로 지낸 것을 보아, 그녀는 젖어도 100세가 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여인이 안나 처럼 나이가 많으면 안나와 같은 금식기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나이는 실상 84세이고, 긴 기간을 과부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만에 젊은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그냥 과부로 지냈다. 이 사실은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그녀는 항상 성전 “안에서”, 적어도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기숙을 했다고 한다. 즉 성전 뜰의 구빈원에 살면서 성전의 자선으로 연명했거나, 여(女)예언자로서 거기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과 상의하고 충고를 받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가 예배 시간에만은 항상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선한 사업을 할 필요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그 일에 도움을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외곽 건물 중의 어느 하나에 그녀의 방을 마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공중 예배에 그녀는 빠짐 없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경건 생활도 많이 가졌다. 왜냐하면, 그녀가 “주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해야 할 세속의 일이 없었거나 다 마쳤으므로, 온전히 경건 생활에만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 “일 주일에 두 번씩”만이 아니라 항상 고행적인 생활을 살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데 보내는 시간을 그녀는 종교적 실행에 다 바쳤다. 또 그녀는 “기도의 시간”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주야로” 기도했다.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기도의 생활을 했으며, 자신을 기도에 바쳤고, 종종 절규했고, 대부분은 엄숙한 기도를 드렸으며, 중재 기도를 특히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값있게 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점이 바로 이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따금씩 금식한다.” 그리고 “긴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섬기고, 금식과 기도로 자기들의 교만심과 탐욕을 섬긴다. 그러나 이 착은 여인은 착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정신에 입각해서 했고, 착한 목적을 두고 했다. 즉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금식과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았다. 명심해 둘 것이 있다.
[1] 경건 생활이란 우리가 항상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의무는 때를 따라 이따금씩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항상” 해야 한다. [2] 경건한 행실에 전념하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다. 그들은 “선을 행하기에 싫증” 내지 않으며, 자기들이 그러한 행실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은 “다 마쳤다”고 생각지 않고, 갈수록 그런 일을 즐거워하며 그 필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하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자들과 같다. [3] 지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과 방편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더 많이 받고 또 발견하게 된다. 안나 그녀는 성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보상을 이제 마침내 풍성히 받은 셈이다.2. 그녀는 우리 주 예수께 증언을 했다(38절). 아기가 바쳐져 있을 때에, “그녀는 마침 그 때에 나아왔다.” 또 그때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때였다. “항상” 성전에 있던 그녀가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1) 그녀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아마 시므온과 같이 이제 평안히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면서, “주께 역시 감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가 “알려진 바 된” 자들은 그 큰 은혜로 인하여 “주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는 남이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분발하여 우리도 그 의무를 행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이요, 우리도 “역시 감사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경건 생활이란 우리가 항상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의무는 때를 따라 이따금씩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항상” 해야 한다.경건한 행실에 전념하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다. 그들은 “선을 행하기에 싫증” 내지 않으며, 자기들이 그러한 행실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은 “다 마쳤다”고 생각지 않고, 갈수록 그런 일을 즐거워하며 그 필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하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자들과 같다.지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과 방편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더 많이 받고 또 발견하게 된다. 안나 그녀는 성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보상을 이제 마침내 풍성히 받은 셈이다.그녀는 우리 주 예수께 증언을 했다(38절). 아기가 바쳐져 있을 때에, “그녀는 마침 그 때에 나아왔다.” 또 그때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때였다. “항상” 성전에 있던 그녀가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그녀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아마 시므온과 같이 이제 평안히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면서, “주께 역시 감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가 “알려진 바 된” 자들은 그 큰 은혜로 인하여 “주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는 남이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분발하여 우리도 그 의무를 행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이요, 우리도 “역시 감사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안나는 시므온과 조화를 맞추었다. “그녀는 주께 고백했다”(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즉 그녀는 이 아기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2) 그녀는 여(女)예언자로서 남들에게도 그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녀는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은 믿었고,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 구속(救贖)이란 필요하고, 기다리던 일이요, 바라던 일이다. “주의 말씀이 발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렸다(사 2:3). 예루살렘에는 “구속을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안나가 그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들은 분명 그녀와 합심하여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면 있는지를 알았고, 그들은 안나의 소재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사실, 곧 좋은 소식을 그들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이 소식과 나중에 있을 그의 부활에 관한 소식은 실로 위대한 새 소식이었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직접”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잘 알 수 있도록 자가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녀는 여(女)예언자로서 남들에게도 그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녀는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은 믿었고,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 구속(救贖)이란 필요하고, 기다리던 일이요, 바라던 일이다. “주의 말씀이 발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렸다(사 2:3). 예루살렘에는 “구속을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안나가 그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들은 분명 그녀와 합심하여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면 있는지를 알았고, 그들은 안나의 소재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사실, 곧 좋은 소식을 그들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이 소식과 나중에 있을 그의 부활에 관한 소식은 실로 위대한 새 소식이었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직접”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잘 알 수 있도록 자가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끝으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1. 그는 “어디에서” 그 시절을 보냈는가?(39절) 아기를 바치는 의식과 그 어머니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 모두 끝나자,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누가는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의하면(2장),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동방의 현인들을 만났으며, 헤롯의 잔인한 영아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있기까지는 베들레헴에 머물었다. 그리고 헤롯이 죽자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 정든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나사렛을 떠나 있었던 걸로 되어 있다. 그는 “어디에서” 그 시절을 보냈는가?(39절) 아기를 바치는 의식과 그 어머니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 모두 끝나자,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누가는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의하면(2장),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동방의 현인들을 만났으며, 헤롯의 잔인한 영아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있기까지는 베들레헴에 머물었다. 그리고 헤롯이 죽자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 정든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나사렛을 떠나 있었던 걸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나사렛을 “그들의 본(本)동네”라고 했다. 그들이 거기서 오래 살았고, 그들의 친척들도 거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나라와 제사장직은 유대교회나 국가의 현 정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모욕을 받던 그런 고장으로 보내졌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낮추셔야 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명성도 지니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2.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가?(40절) 모든 면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함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도 다른 아기들처럼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쳤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심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의 몸은 “자랐다.” 그리고 그의 인격적 영혼 속에서는 이해력(총명)이 증가되어 갔다.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 몸은 그의 “신비한” 몸 ─ 그것 완전한 영에 의해서 원기를 받으나 그 몸은 “완전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엡 4:13, 16) ─ 의 한 표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 다른 아이들은 이해력과 결단력이 약함에 반해서, 그는 “영(정신)에 있어서 강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은 비상한 활력을 공급받았고, 그의 모든 신체 기능은 비상하게 그 직능을 다했다. 그는 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판단은 사물을 투시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가?(40절) 모든 면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함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도 다른 아기들처럼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쳤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심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의 몸은 “자랐다.” 그리고 그의 인격적 영혼 속에서는 이해력(총명)이 증가되어 갔다.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 몸은 그의 “신비한” 몸 ─ 그것 완전한 영에 의해서 원기를 받으나 그 몸은 “완전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엡 4:13, 16) ─ 의 한 표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다른 아이들은 이해력과 결단력이 약함에 반해서, 그는 “영(정신)에 있어서 강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은 비상한 활력을 공급받았고, 그의 모든 신체 기능은 비상하게 그 직능을 다했다. 그는 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판단은 사물을 투시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920 다른 아이들은 “그 마음에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지만 ─ 그것은 그들의 말과 행실에서 나타난다 ─ 그는 “지혜로 충만했다.” 교육의 덕분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하심 덕분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언행 모두는 그의 나이 이상으로 슬기로왔다.
(3)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패된 본성을 드러냈고, “죄의 가라지”가 “이성(理性)의 밀”과 더불어 자라났지만, 그는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그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그 밀은 가라지 없이 자라났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전래적으로 진노의 아들이지만, 그는 “지극히 사랑 받는” 자요, 하나님의 호의를 극진히 받는 자였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패된 본성을 드러냈고, “죄의 가라지”가 “이성(理性)의 밀”과 더불어 자라났지만, 그는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그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그 밀은 가라지 없이 자라났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전래적으로 진노의 아들이지만, 그는 “지극히 사랑 받는” 자요, 하나님의 호의를 극진히 받는 자였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2:41 소년 시절의 예수 (누가복음 2:41-52)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유아 시절에서부터 29세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드러내기까지, 그 어간에 관해 기록된 유일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해 봐야 헛일이기 때문이다. Ⅰ.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41, 42절).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록 긴 여행이고,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크게 절약해 살지 않고는 거기까지 갈비용도 부담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들은 율법에 따라 규칙적으로 예루살렘 유월절에 참여했다. 공중 규례는 종종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세상적인 일은 영적 관심사에 양보해야 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같은 집에서 아들과 같이 지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모든 랍비들 이상으로 영적인 일을 잘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로, “절기의 전례(前例)를 떠나서 올라갔다.” “주는 야곱의 모든 거처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 아마 “오순절”과 “초막절”에도 역시 요셉과 마리아는 올라갔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3번 성전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월절”에만 거기에 나타났는데, 그 절기는 3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복음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절기이다. 2. 어린 예수가 “열 두 살 때”에 그들과 함께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열두 살 된 어린이는 때때로 금식하는 것을 시작하여, 속죄일에 금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어린이는 “계명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다. 즉 교회 어른들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예수가 “열 두 살 때”에 그들과 함께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열두 살 된 어린이는 때때로 금식하는 것을 시작하여, 속죄일에 금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어린이는 “계명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다. 즉 교회 어른들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예수가 절기 때에 예배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 없다. 아마 여러 해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의 지혜와 정신이 그 나이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명으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은 공중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느 8:2). 다른 면에서 남보다 앞선 어린이는 신앙에서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송을 기뻐하신 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예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린 유아 시절에 하나님께 봉헌된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되었을 때에는, “복음의 유월절’에, 곧 주의 만찬에 초대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의 행동으로 스스로 주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들 뒤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부모들은 그것을 몰랐다. 이것으로써 그리스도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있는 지 그 초기의 전조를 보이려 하셨던 것이다. 1. 그의 부모들은 “그 날들을 마치기”까지는 돌아가지 않았다. 즉 유월절 기간 중의 첫 이틀이 지나면 ─ 그때 많은 자들이 빚으로 돌아간다 ─ 꼭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무가 없었지만, 그들은 그 절기가 계속되는 7일 간을 줄곧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모들은 “그 날들을 마치기”까지는 돌아가지 않았다. 즉 유월절 기간 중의 첫 이틀이 지나면 ─ 그때 많은 자들이 빚으로 돌아간다 ─ 꼭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무가 없었지만, 그들은 그 절기가 계속되는 7일 간을 줄곧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한 자들처럼, 규례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도엑처럼 “주님 앞에 억류된” 사람같이 서둘러 가지 않는 것이 좋다(삼상 21:7 참조). 2. 그 어린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머물렀다.” 집에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또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도 아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그들”에게 보다는 그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에 대한 그의 관계가 “그분들”에 대한 그의 무관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린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머물렀다.” 집에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또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도 아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그들”에게 보다는 그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에 대한 그의 관계가 “그분들”에 대한 그의 무관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성전에 남은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집으로 가는 날 아침에 먼저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뒤에 머물렀고,” 그들이 다시 그를 찾기까지 거기서 재미있게 지냈다. 아니면 아마 그는 부모들의 하숙하던 집, 또는 어떤 자는 친구의 집에 머물렀다고 본다(예수와 같은 어린이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귀염둥이일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그의 친구가 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되자 성전으로 갔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혼자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든 “주의 집에 거하기”를 즐거워하는 젊은이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이 때의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다. 3. 그의 부모는 어린 예수를 뒤에 두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룻길의 여행”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44절). 이 때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특히 첫 날의 여행길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가 자기들의 이웃 사람들과 섞여서 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려가다가 길에서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그를 찾았다.” 당신은 혹 우리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까? 마치 결혼한 자들의 질문같이, “그대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뇨?”라고 물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예수를 뒤에 두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룻길의 여행”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44절). 이 때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특히 첫 날의 여행길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가 자기들의 이웃 사람들과 섞여서 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려가다가 길에서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그를 찾았다.” 당신은 혹 우리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까? 마치 결혼한 자들의 질문같이, “그대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뇨?”라고 물었다. 이 사람은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보석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의 동행이 되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어린 예수는 “자기 친족과 아는 자들”중에서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만나지 못했다”(45절). 우리에게는 우리가 피할 수 없이 교제해야 할 친족과 지인(知人)들이 많이 있고,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곤 거의 아무 것도 찾아 볼 없다. 그들은 시골로 내려가는 그 길에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예수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되자, 자기들이 지난밤에 유숙하던 그 곳에 가면 필경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들은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구절과 요한복음 23장 8, 9절을 비교해 보라. 4. 그들은 지난밤의 숙소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그를 찾아 되돌아갔다.” 그들은 지난밤의 숙소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그를 찾아 되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자들은 “만날 때까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에게는 그가 만나질 것이요, 풍부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위안을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그와의 관계성을 상실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들이 그것을 누렸던 그 마지막 지점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즉 “그들이 언제 넘어졌고, 회개했느냐를 기억하고, 처음 일을 다시 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계 2:4, 5). 그리스도와의 친근성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고픈 자들은 예루살렘, 곧 “우리의 절기의 성읍,” 그가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시기로 택하신” 그 곳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규례, 그의 복음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를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5. 그들은 “제 3 일”에 “성전에서,” 즉 성전에 속한 어떤 부속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그 곳은 율법 학자들이 ─ 법정이 아니라 ─ 회의 장소나 논쟁 교실로 삼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율법 학자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는 그들의 교훈을 듣고 시험을 받는 “학생”으로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그에게서 상당한 지식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부류로 치고 자기들 중에 앉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 3 일”에 “성전에서,” 즉 성전에 속한 어떤 부속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그 곳은 율법 학자들이 ─ 법정이 아니라 ─ 회의 장소나 논쟁 교실로 삼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율법 학자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는 그들의 교훈을 듣고 시험을 받는 “학생”으로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그에게서 상당한 지식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부류로 치고 자기들 중에 앉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지혜로 충만했다”(40절)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그 지혜를 증가시키고 서로 그것을 주고받기를 바라는 자임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이 점에서 그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한 모범이다. 젊은이는 자기들에게 맞는 자들의 동료가 되어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고, 놀고 잇는 자들이 아니라 학자들 “한가운데 앉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들에게 “12세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라고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사람을 사귀게 하자. 젊은이가 교훈을 바란다면, 그것은 희망적이고 약속 있는 전조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의 많은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의 학자들”고 더불어 앉아 있었다.
(1)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은 “듣기”를 계속해야 한다.
(2)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선생으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배우는 자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만큼 겸손했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협동 구도자의 자세로 물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우호적인 질문을 통해서 탐구되어야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대답”을 했다. 그의 대담은 매우 놀라웁고 만족한 것이었다(47절). 그리고 그의 질문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대답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자들이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어린 사람, 아니 아무리 위대한 학자들에게서라도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같이, 그는 “그의 모든 선생보다 총명이 뛰어났다.” 아니 “노인들보다도 승했다”(시 119:99, 100).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은 “듣기”를 계속해야 한다.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선생으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배우는 자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만큼 겸손했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협동 구도자의 자세로 물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우호적인 질문을 통해서 탐구되어야 한다.그는 그들에게 “대답”을 했다. 그의 대담은 매우 놀라웁고 만족한 것이었다(47절). 그리고 그의 질문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대답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자들이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어린 사람, 아니 아무리 위대한 학자들에게서라도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같이, 그는 “그의 모든 선생보다 총명이 뛰어났다.” 아니 “노인들보다도 승했다”(시 119:99, 100). 이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의 빛줄기를 다소 보인 셈이다. 그는(칼빈의 말대로) “그들에게 맛을 주었다.” 곧 그이 신성한 지혜와 지식을 맛보여 주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공공연히 선생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처음에 시도했던 그 시도와 같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가리켜 해석하기를, “그는 자기 형제들이 이해하는 줄로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을 아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행 7:24, 25). 그들은 그 당시에 어떤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사업을 지금 곧 시작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기이히 여겼을” 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세와 같이 그는 다시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고,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기까지 그에 대해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6.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그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일단 그 무리들이 해산하자, 그녀는 그를 따로 불러서,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그 일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48절).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그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일단 그 무리들이 해산하자, 그녀는 그를 따로 불러서,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그 일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48절).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거기서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크게 존경을 받아 “학자들 중에 끼어 앉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또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가 명목뿐인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러나
(1) 그의 어머니는 자기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느냐? 왜 네가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만드느냐?” 그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듯, “사나운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떤 무서운 원수의 손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 무서운 원수가 헤롯이 몇 해 전에 찾던 그 어린 생명을 마침내 찾아낸 모양이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그들은 수천 가지의 상상을 했을 것이고, 갈수록 무서운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느냐? 왜 네가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만드느냐?” 그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듯, “사나운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떤 무서운 원수의 손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 무서운 원수가 헤롯이 몇 해 전에 찾던 그 어린 생명을 마침내 찾아낸 모양이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그들은 수천 가지의 상상을 했을 것이고, 갈수록 무서운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얘야, 왜 너는 우리에게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근심하며 찾았는지 아느냐?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를 잘 살펴서 데리고 가지 못한 우리 자신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들의 손해를 원망할 자격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씨뿌림”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심한 나머지 절망에 싸여 앉아 있지 않고, 근신하며 “찾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우리는 “근심하면서,” 즉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사실을 근심하며, 그를 떠나게 해 버린 우리의 죄를 근심하며, 또 더 빨리 찾으러 나서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근심하며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를 근심하며 찾는 자들은 마침내 그를 만나서 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맞게 되리라.
(2)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대해서 평상시 이상으로 조급하게 생각한 사실을 얌전하게 비난한다(49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여기서 용무를 마치면 당신들을 따라 집으로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어야 하셨을 겁니다. 난 결코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evn toi/j tsu/ patro,j me ─나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한다. “영원토록 집에 머무는 아들, 내가 그밖에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1] “내 아버지의 염려와 보호 아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게 대한 염려는 그분께 맡기시고, 스스로들 괴로워 마옵소서.”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대해서 평상시 이상으로 조급하게 생각한 사실을 얌전하게 비난한다(49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여기서 용무를 마치면 당신들을 따라 집으로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어야 하셨을 겁니다. 난 결코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evn toi/j tsu/ patro,j me ─나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한다. “영원토록 집에 머무는 아들, 내가 그밖에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내 아버지의 염려와 보호 아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게 대한 염려는 그분께 맡기시고, 스스로들 괴로워 마옵소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화살통에 재빨리 숨었다(사 49:2). 이와 같이 그는 자기의 교회를 보살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안전에 대해서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2] “내 아버지의 일에(영어 성경 KJV는 그렇게 읽었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처럼 속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내게 대하여 모르셨습니까? 즉 나는 이미 나를 신앙의 사업에 바쳤고,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집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다른 모든 일은 거기에 우선권을 양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일에(영어 성경 KJV는 그렇게 읽었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처럼 속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내게 대하여 모르셨습니까? 즉 나는 이미 나를 신앙의 사업에 바쳤고,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집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다른 모든 일은 거기에 우선권을 양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지금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언행으로 그것을 해명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마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 그이 부모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50절). 그들은 이 당시 그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들은 그가 앞으로 메시야가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장차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왕궁에서 할 일이지 성전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예언자적 직능을 “깨닫지 못했다” ─ 그러나 그에게는 예언자적 직능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광의 이러한 섬광은 순간적이었다. 이제 그 빛은 사라졌다. 그는 부모들에게 예루살렘에 이사와서 살자거나 자기만이라도 거기에 정착하겠다고 간청하지 않았다(그 곳은 교육과 출세의 도성이었고, 자기의 지혜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고장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나사렛으로 잠적하여 빛 없이 살기를 좋아했다. 말하자면 여러 해 동안 그는 거기에서 묻혀 살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1년에 3번씩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일을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다. 1. 그는 “부모에게 복종했다.” 비록 한 때는 자기가 “단순한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부모를 떠나서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있은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그 일을 자기의 계속적인 업으로 삼지 않았고, 그 몇 해 후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여,” 그들의 명령을 지키고, 그들의 지시대로 오고 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더불어 복수의 일에 종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부모에게 복종했다.” 비록 한 때는 자기가 “단순한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부모를 떠나서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있은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그 일을 자기의 계속적인 업으로 삼지 않았고, 그 몇 해 후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여,” 그들의 명령을 지키고, 그들의 지시대로 오고 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더불어 복수의 일에 종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그는 주(主) 안에서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본으로 보이셨다. 그는 “여자에게서 난 사람”인고로, 제 5 계명 아래서 났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의 “자손”들은 또한 스스로 신실한 자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비천했고, 또 그의 아버지는 “명목상”의 아버지(2:23 의 참조)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복종했다.” 그는 “심령이 강하고””지혜로 충만해” 있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자기(육신)의 부모에게 순복했다. 그렇다면, 우매하며 연약하면서도 부모에게 불복종하는 “그들”은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 2.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훗날에는 그 모든 말씀이 그녀에게 이해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때만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말씀의 유용성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말이 모호하다 하여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한다(Si non vis intelligi debes negligi─이해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애매하여, 그 말씀을 응용할 줄 몰랐던 말이라도 나중에는 아주 명백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그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요 2:22 참조). 지금 당장은 우리가 그 쓸모를 모르던 말씀도 언젠가는 그 쓸모를 깨닫게 되리라.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훗날에는 그 모든 말씀이 그녀에게 이해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때만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말씀의 유용성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말이 모호하다 하여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한다(Si non vis intelligi debes negligi─이해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애매하여, 그 말씀을 응용할 줄 몰랐던 말이라도 나중에는 아주 명백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그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요 2:22 참조). 지금 당장은 우리가 그 쓸모를 모르던 말씀도 언젠가는 그 쓸모를 깨닫게 되리라. “학생들”은 당장에 쓸모를 모르면서도 문법의 법칙들을 암기해 두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는 쓸모 있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3. 예수는 계속 발전하여 감탄할 만큼 되었다(52절). “그는 지혜와 키가 자라 나갔다”고 했다. 그의 신성(神性)의 완벽성에서 보면 더 이상의 성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키”와 “체구” 등의 몸집이 성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성장하는 연령층을 맞이하여서는 성장했다. 또 한편 그의 영혼이 “지혜에서” 그리고 인간 영혼의 재능이란 면에서 자랐다. 예수는 계속 발전하여 감탄할 만큼 되었다(52절). “그는 지혜와 키가 자라 나갔다”고 했다. 그의 신성(神性)의 완벽성에서 보면 더 이상의 성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키”와 “체구” 등의 몸집이 성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성장하는 연령층을 맞이하여서는 성장했다. 또 한편 그의 영혼이 “지혜에서” 그리고 인간 영혼의 재능이란 면에서 자랐다. 영원한 말씀이 비록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의 영혼에 연합되어 있었지만, 그분 안에 거한 신성은 점차적으로, ad modum recipientis ─ 그의 역량에 비례하여 그의 인성에 발현되었다. 그의 인간적 영혼의 기능은 점차적으로 완전해져 갔듯이, 그의 영혼이 인성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점차적으로 잘 소통되어 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 갔다.” 즉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해 주는 모든 은총(장점)이 더해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자기의 겸비한 처지에 조화시킨 것이다. 즉 그는 하나의 유아로, 어린이로, 청년으로 되기까지 낮아지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유아”와 “어린 아이”였던 시절에서보다는 청년이 되기까지 자라났을 때에 그(예수)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나게 된 것이다. 젊은이는 키가 자람에 따라서 지혜도 자라야 하고, 지혜가 자람에 따라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귀여움을 받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누가복음 2장 강해설교
누가복음 2장 강해설교 누가복음 연구 https://blog.naver.com/angellotte/221663973462 누가복음 제2장 설교
예수의 탄생
눅2:1-7
본문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 아기는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탄생하셨습니다.따라서 아기의 탄생은 단순한 탄생이 아니라 전인류의 탄생(거듭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기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역사를 타고 오신 주님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실은 주님께서는 이 땅에 초역사적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역사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1)기독교가 신화에 근거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관한 모든 것을 신화로 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롯하여 부활과 승천,재림,천지 창조 등을 모두 신화로 여길 뿐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이 가이사 아구스도에 의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겨진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의 탄생이 결코 신화가 아님을 밝히 보여 줍니다. 비단 주님의 탄생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승천등이 사실에 근거함을 가르쳐 줍니다.
2)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보면(미5:2) 가이사 아구스도가 때마침 명령을 내려 예수께서 나사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결코 그의 명령이 자의나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권세는 하나님 통치 아래 있습니다(롬13:1).
2.말씀을 응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께서 선지자의 증거를 받고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심과 동시에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낸 적도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4).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6). 그리고 최종적으로 죽음 앞에서 자기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구하셨습니다(눅22:42).
3.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
주님의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단순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야곱에 의해서 예언되고(창49:10) 발람에 의해 예언되며(민24:17),하나님에 의해 직접 약속된(삼하7:12-16)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약속된 메시야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 왕국은,①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의 나라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음에도 항상 이겼습니다. 이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삼하5:10).② 의로운 나라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다윗은 의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실 정도로 의롭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행13:22).
4.동정녀에게 탄생하신 주님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한 후에 탄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1:24,25) 누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가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이렇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강조한 이유는 ① 예수님의 무죄성(히4:15),원죄의 무유전성(창3:15)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② 주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임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요1:1)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5.구유에서 탄생하신 주님
1)그의 겸손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고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도 부리실 수 있는 엄청난 권세를 안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지위와 권세로써 이 세상 위에 군림하시고 억압하기 위해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마21:5).
2)백성들의 배척입니다.
베들레헴은 아버지 요셉의 고향으로서 주님은 사관은 물론이요 가정집에서 태어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그가 장차 자기 고향(눅4:24),자기 백성(요1:11)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배척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로서의 삶입니다.
목자들에게 임한 기쁨 소식
눅2:8-10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비천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타고난 재능도 없고,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지혜도 건강도 없는 자들을 소흘히 대하지 않으십니다.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에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에게 갖는 곱절의 관심을 가지십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소식을 알리셨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기쁨의 소식을 받은 목자들
1)성실하였습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목자들은 충실한 천국 일꾼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아기가 탄생하신 그 캄캄한 밤에 ‘들에’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낮의 피로를 씻고 잠자리에 든 그 시간에 그들은 여전히 들판에 있었습니다. 양떼를 믿고 맡겨 준 주인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있어 참으로 진실된 종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탄의 그 큰 기쁨이 가장 먼저 전해진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 영광은 기름진 배를 따뜻한 온돌방에 대고 안락하게 잠자는 게으른 지위높은 자에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들처럼 애를 태우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종에게 돌아가야 합니다(시126:5,6 ;마25:21,23).
2)깨어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타난 목자들은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실한 성도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기쁜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나 한 듯이 한밤중이 되었는데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만 전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25:1-13).
3)비천하였습니다.
본문의 목자들은 또한 천국의 영광을 소유할 준비가 이미 끝난 자들의 모형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곳간과 함께 이미 마음까지도 비워져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임재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들어가실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과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천국 복음이 가장 먼저 전파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과 같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영광을 보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또한 마음 비우기를 원한다면 물질,세상 지위 등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마6:21 ;19:22).
2.목자들이 받은 것
1)하늘 영광을 입었습니다.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목자들에게 임한 것은 세속의 재물이나,명예,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세상 임금의 영광만 보아도 그것이 큰 기쁨이요 영광인데,그들은 하늘 아버지,하늘 임금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젖을 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잠간 있다 없어질 영광을 주시기 않으십니다. 하늘의 영광,경건한 성도의 영혼이 기뻐할 신령한 복을 내리십니다.
2)두려움을 그치게 하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목자들은 거룩함을 대할 때마다 생기는 죄로 인한 두려움을 그치게 하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시리라는 암시에 가까운 소식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모든 세상 짐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고통은 모두 죄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죄인을 의인으로 선고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결정문을 가장 먼저 통고받은 것입니다.
3)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기쁨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이기적인 그들의 성품에 합당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들만 소유하고 남에게 거만하게 자랑 할 성질의 선물은 그들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선믈은 오히려 그들의 본성에 부담을 주고 양심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나눌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눅2:11,12
본문은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이야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에 의하여 메시야가 탄생될 곳으로 예언되었으며(미5:2),본문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구속사적 직분에 대하여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예수께서 탄생하신 곳
1)베들레헴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11절). 위에서 살펴본대로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로서 메시야가 탄생할 고장으로 예언된 곳입니다(미5:2). 당시에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고 나사렛에서 목수직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ㅅ게금 징수를 위한 목적으로 호적령을 내려 이들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혼한 마리아는 그때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가 해산할 기한이 차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호적령,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여행,해산 기일이 임박한 마리아의 동행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예언한 메시야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움직임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인간들의 활동,생물학적인 인간의 기능 등,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구속사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떡집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떡집’예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요6:35)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광야에서 내린 ‘만나'(요6:49)와 비교하셨습니다. 이 ‘떡’은 애굽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던 유월절로부터 상징화되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양의 피로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출12:1-11).이 떡과 피는 광야 40년 동안에는 만나와 생수로 나타나고(고전10:3,4),예수 때에 이르러 그것은 살과 피로 표현되었으며(요6:54-58),마침내 이 살과 피는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상징화되고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떡집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여 ‘참된 양식'(요6:55)으로서의 그의 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2.예수께서 탄생하신 환경
1)여행중
‘베들레헴’은 요셉의 ‘고향’이었으며,그는 지금 여행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여행’중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다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입니다. 그리고 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며,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행 중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나그네 인생에게 내리시는 축복이며 삶의 목적을 제시하는 귀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말구유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12절). 예수께서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은 그의 ‘자기 비하’의 시작이었으며,’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로부터 가장 좊은 자까지 죄악의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낮은 삶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가장 높은 곳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빌2:6-11).그의 비천한 삶의 시작은 어부와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실직자들의 친구로서의 삶의 출발이며,머리 둘 곳이 없는 가난한 삶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과 비천함을 ‘거룩함’으로 승화시킨 삶이었습니다.
3)표적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그리스도의 화육은 신비 중의 신비이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말구유에 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며 인간은 모두가 한형제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예수의 탄생과 메시야로서의 직분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구주’,’그리스도’,’주’는 모두 메시야의 구속사역적 직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구세주,그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요,제사장이요,선지자이시고,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모든 구속사역적 직분 안에 모든 진리와 은총과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눅2:13,14
천사가 목자들에게 성탄을 고지하고 나자 하늘에는 아름다운 천군 천사의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천사들은 찬양을 통하여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알립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가 됨을 알립니다. 짧은 찬양이지만 이 찬양은 기독교의 교리를 내포하고 있으며,기독교가 신본주의,하나님 우선의 종교임을 밝혀 줍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찬양이 나오게 되었는지,이 찬양의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하나님께 영광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리스도의 화육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는 근원적인 문제로 그리스도의 화육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은 손상된 의가 보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과 관련됩니다. 이 관련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는 죄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범죄와 그 이후에 계속된 범죄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손상당하신 만큼 진노를 내리셔야 했습니다. 진노를 내리셔야 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노가 인간에게 임했습니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삶에 심한 고통을 느껴야 했고,최종적으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진노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범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진노로 죽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성품인 자비의 속성과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속성에 의해 인간의 죄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의의 속성에 모순되므로 그럴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모순됨 없이 다 만족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하셨는데,그것이 바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인류를 향한 모든 진노를 다 쏟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는 사랑의 속성과 죄를 간과할 수 없는 의의 속성을 다 만족시키신 것입니다(롬3:26,30 ;5:8).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를 이루실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므로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엡2:2 ;5:6).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함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 2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자신만 ‘예’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예’하셨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을 순종하는 아들들로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해야 하나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으므로 그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땅의 평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암시합니다.
1)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손상시켜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잠시의 고통이지만 영적인 죽음은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써 이 담을 허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2)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천사들이 ‘땅에는 평화’라고 노래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만을 원수로 만들지 아니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원수 관계를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끝없는 전쟁과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위해 직접 죽으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5,36).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7,18).
비천한 무리를 위해 오신 예수
눅2:15-17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가축 우리에서 태어났으며,천사들의 찬송을 받았고,이어서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근본적으로는 온 세상 인간들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한밤중에 하늘에는 천사들이,땅에는 몇 사람의 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탄생의 비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목자들은 비천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큰 계시를 주셨습니다.
‘천사가 가로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절). 목자들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부가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입니다. 당시 그들은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신용을 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들이 먼저 주의 영광에 접하고 천사로부터 구주 탄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직업을 가진 목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과 계시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거나 비천한 직업이 천국에 관한 소식을 접하는 데 지장이 되지는 않습니다. 천국의 축복은 때때로 위대하고 부하며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숨겨지고 가난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개 교만하거나 현실에 안주할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가진 것을 잃을 것이 염려되어 새로운 사상이나 현상에 마음문을 열고 동참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2.목자들은 맡은 일에 충실하였기에 하나님의 계시와 주를 만나는 기쁨을 우선적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목자들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책임을 등한히 하여 잠자거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깨어서 양무리를 배회하며 이리와 승냥이들과 도적들로부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으므로 그곳에 임한 천사들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서 보라’는 소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자기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인물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밀 타작을 하다가,모세는 양을 치다가,엘리사는 밭을 갈다가,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각각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하는 신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네게 맡기노라’는 말씀대로,하나님은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자에게 보다 좋은 것을 보이고,보다 좋은 길로 인도하고,보다 큰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3.목자들은 천사의 계시를 믿었습니다.
천사는 ‘너흐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니라’고 했는데, 그 표적은 목자들로 하여금 믿기 어려운 것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이스라엘을 위한 구주가 나신다면 그는 분명히 비천한 구유에 누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천사의 계시를 믿었고,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유에 누인 아기’는 신이 인간의 배척과 고난의 한 중간에 그 자리를 펴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날 베들레헴에는 분명코 아기 예수 외에 어떤 갓난아기도 구유에 누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니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나시고 고운 옷을 입으시고 아름답고 화려한 방에 누워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구주 되심의 표적은 그가 헤어지고 찢어진 강보에 싸여 낮고 천한 구유에 누워 있었던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의 비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받으신 그 첫선물은 구유요,마지막 선물은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인류의 구세주로서 받으신 것은 고난과 비천이고 세상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낮고 천하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친히 동정하고 구원할 수 있는 구주시라는 것이 천사의 메시지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낮고 천한 이들의 벗이 되고 있습니까? 도시의 빈민들과 노동자 농민들의 삶에 지치고 허덕이는 생활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와 목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메시지를 대하는 자세들
눅2:18-20
목자들은 천사의 기쁜 성탄 메시지를 들은 후 지체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달려와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들려준 성탄 메시지를 아기 부모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성탄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들을 살펴봄으로써 성탄에 합당한 신앙적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불신하는 사람들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18절). 목자들은 천사의 성탄 메시지와 마굿간에 가서 확인한 사실들을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허다한 사람들에게 기쁘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라긴 했으나 구주를 경배하러 마굿간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① 메시야가 왕궁에서 출생치않고,마굿간의 말구유에서 천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것처럼 세속적 사고 방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께서 그렇게 비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인생들로 하여금 ‘종신토록 두려움 없이'(눅1:75) 자기를 섬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처사에서인데,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시9:6 ;53:1-3 ;슥9:9).② 저들은 또한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탄 소식을 거룩한 제사장들에게 알리지 않고,들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전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천하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사 스스로 지혜롭고,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고전1:26-29).오늘날도 성탄의 기쁜 메시지는 겸허하게 마음의 눈이 하늘로 열린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2.영광 돌리는 목자들
1)믿고 순종함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즉각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갔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상식적으로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천사의 메시지를 단순히 믿는 순수함 믿음과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말구유 안의 구세주를 환영할 수 없다면 십자가 위의 대속함도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고전1:18-25).
2)확신을 가짐
목자들은 천사들이 고지해 준 구유의 표적을 가서 확인함으로써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우리 중에도 성탄의 메시지를 듣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의심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의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나면 우리에게는 의심 대신 확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3)담대하게 전파함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16,17절)을 뜨거운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그들의 열정은 우리의 나태함과 배은망덕에 대한 무언의 꾸중이다.그들이 외양간의 말구유에서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까지 보고서 왜?…힘차게 헌신할 수 없을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탄하십니다(롬10:14,15).
3.생각하는 마리아
1)겸손한 순종
마리아는 자기가 구주의 모친이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전에 자기의 정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당할 때에도,침묵했듯이 이제 자기의 결백함이 드러났지만 역시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잠잠히 성탄의 섭리를 순종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이처럼 겉을 단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를 단장함에 있습니다(벧전3:3-6).
2)신중함과 진실함
본문의 ‘지켰다’라는 말은 ‘기억한다’라는 뜻이며,’생각한다’라는 말은 ‘여러 부분을 합친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성탄의 현상만을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신중하게 살피고 그 깨달은 것을 마음속에 진실하게 간직했습니다(롬12:1-3). 이것이 성탄 메시지를 접하는 우리 인생이 취해야 할 합당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4).
할례와 세례
눅2: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유대인의 할례 의식이 주는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세례 의식이 주는 교훈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둘 다 모두 육신의 부정을 씻어버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남성의 양피끝부분을 날카로운 차돌로 잘라냄으로써 훗날 구원의 피흘림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세례는 육체를 물로 씻어내는 의식을 통하여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할례는 육체적인 고통을 통하여 마음을 주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모든 남성을 난 지 팔 일 만에 그 피를 베는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언약의 표징을 삼았습니다. 이 할례 의식은 이스라엘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디오피아나 남아프리카 애굽 등지에서도 행해지던 풍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적 동기가 아니라,몸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졌던 것인데,차츰 그 의미가 정결 의식으로 바뀌어 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동에 있어서 남성들에게 할례 의식을 행하는 것은 도덕적 행실에 분명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양인들의 급한 성격을 규제하고,악한 생각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즉 나쁜 생각이 그 마음에 떠올랐다 하더라도 그가 할례의 언약을 통해 자기가 거룩하게 생활하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되새기므로 그 악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때에 흘리는 피는 개인적인 계약을 확고히 하게 했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자신의 아들의 양피를 베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4:25)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례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드는 데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고 했습니다. 이것은 할례의 본뜻이 마음의 할례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못한 사람들'(행7:51)이라고 한 말은 할례의 의미가 유대 민족의 전역사를 통해 그러한 영적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2.할례는 믿음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율법을 좇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백성과 언약을 맺기 위해 구태여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님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것은,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분으로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조금도 결격 사유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징표입니다(창17:2,4,9).이 언약은 믿음의 언약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믿음의 언약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며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언약은 모세를 통해 맺어진 사역의 언약(출24:8)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율법적이기보다 복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한 하나님의 약속은 영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라’는 언약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갈3:7)이라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8:39)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꺼이 할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속한 교회의 규례를 준수하고 순종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3.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할례에서 세례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 의식의 과정이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명백히 그 성질을 달리합니다.첫째, 예수님께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나 후에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만약 할례가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면 또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할례는 율법의 의무이지만,세례는 복음의 의무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영적 순종과의 관계이지 외적 상징에 있지 아니한 것입지다. 세째,할례는 남자에게만 한정되었지만,세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세례는 심령 속에 이루어진 외부적인 표현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마음이 세례되어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표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없고,가문이나 가족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민족,모든 백성에게 있어야 할 보편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아기 예수님의 결례
눅2:22-24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결 예법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 거룩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율법들에 참예하신 주님의 깊으신 뜻과 그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율법을 지키신 예수님
1)결례의 날
‘결례의 날'(22절)이라고 한 것은 정결함을 위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자아기를 낳은 부인은 40일간 부정하다고 여겼는데(레12:1-4) 따라서 그 날짜가 찼을 때 산모들은 순결을 위해서 번제 및 산 제물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원본에는 ‘그들의 결례의 날’이라고 기록되어 주님과 마리아가 똑같이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2)그날을 지키신 의미
예수님은 원죄이든 자범죄이든 전혀 무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정결 의식을 행한 것을 기록한 데에는 우리에게 깊은 의미와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① 복음 사역에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셨다면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 사회 같은 곳에서는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나,배교자로 낙인 찍힐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라고 한 것처럼 성도는 세속적인 규례들을 백안시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주님처럼 참예하고 또 이용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② 우리 인생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4:4,5)라고 했듯이 인생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 아래의 세계로 오신 것은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어서 율법을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우리 인생들을 해방시켜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갈3:10-13). 이 세상의 인위적인 종교들은 대개가 노력을 통해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헌신되신 예수님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아기를 주께 드리고'(23절).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인 중에 태어난 맏아들은 하나님게 바쳐야 하며(출13:2,12,15) 이 예식을 5세겔의 은으로써 대속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27:6). 이는 그들이 출애굽시 유월절의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은 이래로 지켜진 규례입니다(출13:12). 아기 예수님도 마리아와 요셉에 의해서 역시 성전에 헌신되셨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① 첫열매로 드려졌습니다. ‘첫해에 처음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23절)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장차 인류를 대신하여 부활과 구원의 첫열매로 천국에 들어가실 것을 보여 주는 예식입니다(롬11:16 ;고전15:20).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복음의 첫열매이며,하늘나라의 분깃을 얻을 백성이 되었습니다(롬16:5 ;약1:18).②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주님은 5세겔의 속죄 대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며,죄인 된 우리를 거룩하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히9:12 ;24-26,28). 이러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성도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2:9)이라고 했습니다.성도들은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화평의 다리를 놓는 중보자적 삶을 살아야겠습니다(마5:9 ;요20:23 ;고후5:20,21).
3.가난한 자가 되신 예수님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혹 어린 반구들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4절).마리아가 정결 예식의 제물로 드린 비둘기들은 당시 빈민들의 제물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입니다(레12:6-8).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가정이 매우 가난하고 궁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마리아는 가난 했지만 최고의 예물을 드린 여자가 됐습니다. 그녀는 전에 천사에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고 했듯이 여성으로서 생명 같은 처녀의 정절을 드렸으며 태의 열매인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바쳤습니다. 즉 그녀는 자기 삶의 의미와 행복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한 성도라고 해도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꿈과 삶을 산제사로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롬12:1-3). ②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영원하신 친구이십니다. 가난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누리신 분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오셨으며,또한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가난하셨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세계들을 부요하게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고후8:9).그러므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고후8:10)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
눅2:25-27
여러 주석가들이 본문에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을 유명한 힐렐의 아들이자 가말리엘의 아버지인 시므온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으며,오히려 당시의 종교 지도자층이 대개 타락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문의 시므온은 한 평민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타당하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껍데기뿐인 종교 지도자보다는 평민이지만 의롭고 경건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메시야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1.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윤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은 곧 그가 바르고 정직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유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율법의 명한 바 사랑의 원리에 서 있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를 대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바르게 가지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 그는 자신은 종교인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과의 관계도 정확하고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혼탁한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가 그러하므로 더욱 자신을 바르게 할 이유로 삼은 것입니다.
2)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의로왔다는 말씀은 그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불의에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불의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사람을 결코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의를 참지 못함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뜨거운 기도를 드렸든지,분노를 터뜨렸든지,불의를 책망했든지 그는 그의 방법으로 불의를 대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인은 불의에 의해 자신의 의를 꺾지 아니합니다.
2.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여’.시므온은 사회적인 사람,사회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인간만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관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성에 옳은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자기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3.이스라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1)자기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애굽의 종으로 있었으며,나라도 없이 광야에서 40 년간을 유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나안을 차지하고 나서도 주변의 강대국 블레셋,암몬,모압,에돔 등을 비롯하여 페르시아,앗수르,헬라,로마 등에 의해 수없이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자기 민족의 비극적인 상황을 사랑했으며,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2)선민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선민이었습니다. 선민이되 끝없이 하나님께 범죄한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한 민족일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에게는 의로운 마음과 함께 자비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자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4.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1)그리스도의 강림을 보게 될 것을 지시받았습니다.
‘주의 그리스도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성령을 받은 그는 큰 능력이나 예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혹은 세속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것은 지극히 작은 일일지 몰라도 그에게는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가장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2)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례를 행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그가 그리스도인신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이를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가버나움,벳새다,고라신의 사람들이 그 많은 이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사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성도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바로 알아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구주를 구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만큼아니 큰 불행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의인 시므온의 찬송
눅2:28-33
본문은 의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을 들린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① 메시야를 뵙게 된 것을 감사하고,② 그로 인해 자신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 것을 고백하며,③ 장차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역과 직책의 성격을 예언한 것입니다. 의인 시므온에게 임했던 구원의 은총과 감격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하게 주신 바 된 것입니다(엡1:3).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의인의 찬송을 상고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에도 속함받은 백성의 감사와 찬송이 풍성하게 흘러 넘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영원한 안식을 얻게 됨을 찬송함
시므온은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29절)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뵙기 전까지는 이 땅에 거해야만 한다고 성령님께 명령을 받았지만(26절) 이제 그 언약이 이루어졌으니 괴롭고 고독한 순례자의 삶을 청산하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성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참된 성도라면 죽음을 결코 두려운 것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성도는 자신 안에 영생이 있음과(요일5:11-13) 또 죽음 저 너머 편에 어떤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고후5:1) 내가 안다고 했으며,따라서 선교의 사명만 아니라면 어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이것이 더욱 좋다'(빌1:23)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성도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다가 시므온처럼 주님이 부르실 때 즐겁고 미련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성도의 생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시므온도 안나처럼 매우 고령이었을 것이며 36-38절,따라서 고대 식민지 세계에서 가난한 고령의 노인의 삶이란 비참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요5:1-7). 쇠잔해 가는 육체의 고통,벗들과의 슬픔의 사별,소외감과 궁핍,또한 언약을 기다리는 단조롭고도 권태로운 무미 건조한 생활과 퇴락해 가는 망국의 역사에 대한 회한 등,참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딤후4:18)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영적,도덕적,사회적으로 더욱 혼탁하여 가는 세대에 거하는 우리들도,신앙적 삶에 사망의 캄캄한 구름이 덮일지라도 불신자들처럼 두려워하므로 악과 타협하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보장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마10:27-33),인내로써 성도의 직분에 충실할 때 시므온처럼 주님께 영광과 존귀로움으로 보상받고 감사와 희열에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승리의 날이 기필코 우리 앞에 도래할 것입니다.
2.메시야의 사역과 직책을 찬송함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32절).우리들은 시므온의 찬송에서 율법 시대의 신앙인일지라도 진실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직무에 대해 복음적인 견해와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시므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의 빛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온전한 감사와 찬미로써 주님의 은혜로우신 행사를 이웃들에게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1)거룩하신 빛의 사명을 찬송했습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이방을 비추는 빛'(32절)이 될 것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제외한 우리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엡2:12) 고독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빛을 우리에게 비취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암흑 세계와 인본주의의 미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살전1:9,10).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침 빛처럼 모든 어두운 이방 세계에 비춰야만 타락하고 무지한 심성들을 참되게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의 세계 속에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 해야만 할 것입니다.
2)영광의 직책을 찬송했습니다.
시므온을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송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민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치욕의 골짜기를 거니는 역사였으며 시므온 당시도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리적이고도 현세적인 영광을 아직도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영적 이스라엘인들에게 우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주시려는 경륜이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11:25,26 ;갈6:16).
인생의 표적
눅2:34,35
기도의 사람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증언한 후에 장차 주님의 활동과 운명에 대해서도 마리아에게 엄숙한 예언을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표적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심판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
시므온은 먼저 아기 예수에게 많은 사람의 심판의 근거로 세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요12:47) 이 땅에 오셨습니다.
1)예수님은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불의하며 원수 된 죄악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신 의미를 용서의 손으로(롬10:21), 화해의 요청으로(고후5:20,21),구원의 은혜와 인생 최고의 복락인 영생의 선물로(롬6:23) 묘사했는데,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롬5:8) 하신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의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신 사랑에 응답치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심판의 표적이 되심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2)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종교관과 세계관 및 가치관들을 가지고 영원함을 추구하지만,복음을 외면한 모든 사상들은 그 발로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보려는 첫사람의 인본주의적 욕망을 근저로 하기 때문에 늘 자기 모순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고전1:18-21).그러므로 주님 양편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의 태도처럼 인생들은 진리의 푯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소속과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2.승리의 원인이 되시는 예수님
1)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을 인접함으로써 삶의 참된 의미를 얻습니다.
우리가 시므온처럼 마리아의 품에 있는 아기가 하늘에서 뛰어들어 오신 구세주임을 확신할 때 인생이란 영광의 보좌에서 뿐만 아니라 불행의 골짜기에서도 열심히 도전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2)주님의 대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삶의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바울이 고백했듯이, 성도들의 모든 삶의 원동력은 주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을 늘 재확인함으로써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롬8:31-37).
3)또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삶의 참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벧전2:7)이 되듯 인생의 행복과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원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마5:5).
4)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한 주와의 영적 교통,교우들과의 교제,교회와 이웃을 향한 봉사 및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노력 등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 위에서도 신앙인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게 합니다.
5)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확신 있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도의 특권적 소망은 온갖 모순과 부패와 갈등으로 모든 세상의 허무주의 풍조를 이기게 되는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3.마음의 거울이 되신 예수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5절)고 하듯 고난받는 예수께서 마음의 거울이 된다는 말씀은 마리아 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1)겸허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친이라는 영웅심과 세상 영광의 기대감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기 예수의 고난의 삶을 미리 말해 줌으로 바울처럼 은혜의 가시를 준 것입니다(고후12:7-10).우리가 우쭐해지고 자만해졌을 때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밑에 선다면 곧 자기의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주님과 늘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혈육이 앞으로 고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아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듯 아팠을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된 진실한 성도는 늘 주님과 한마음으로 기뻐하고 슬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어느 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신은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사랑과 진리를 질식시키며,그리스도를 자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일들을 바라보고 성도가 아무런 찔림이 없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부 안나의 축복
눅2:36-38
본문은 경건한 여인 안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고,결혼하여 남편과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 되었으며,그녀는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안나의 나이가 1백 세가 넘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나는 1백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할례를 받기 위하여 성전에 찾아온 아기 예수를 만나 그의 일생의 한을 풀고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1.안나는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결혼하였는데 남편과의 즐거운 삶이 7년 만에 끝났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한 여성의 불운한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부로 늙는 외로운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젊은 과부에게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젊은 과부의 주변에는 남성들도 기웃거리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어느 정도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력이란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늙은 과부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고,주위를 맴도는 사람도 없습니다. 눈은 이미 오래 전에 희미해졌고,머리털은 백발이 되었으며,얼굴은 몹시 쪼그라져 깊은 골이 패여 있으며,손도 투박하여서 볼품 없는 늙은 과부에게 흥미를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나는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역시 노인 문제입니다. 나이 들어 늙어감으로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소외되어 소망을 잃고 있는 노인들의 갈등이 빚어내는 사회 문제는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만년에 배우자가 없는 노인에게 더욱 쓸쓸함이 더할 것입니다. 안나는 과부된 지 84년의 긴 세월을 배우자 없이 견뎌왔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고,그녀의 소망은 예루살렘의 구속함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에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구속하고,온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안나는 많은 노인들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청년은 미래에 살고,장년은 현실에 살며,노인은 과거에 산다’는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노인은 과거의 경험만을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현실과 미래에는 필요치 않는 존재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을 쓸모없는 인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옛날에도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고려장’풍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대의 핵가족 사회가 확산되자 노인들은 이제’현대판 고려장’모습이 재현되고 있다는 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반사회적,반윤리적 작태는 한마디로 ‘노인은 쓸모가 없다’는 잘못된 풍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노인들 스스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포 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노인들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포 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노인들이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안나를 보십시오.안나는 이미 나이가 1백 세가 넘었으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난 1세기 동안 팔레스틴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과 정복과 압제 등의 슬픈 역사를 몸으로 체험해 왔습니다. 이같은 고통은 모든 유대 민족의 가슴에 오래 전에 약속된 메시야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안나도 그같은 소망을 더욱 강렬하게 갈망하며 성전에서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카나 손자들의 눈치만 보며 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난 과거만을 되뇌이며 인생을 마감할 때를 기다리고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가장 자유로운 정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그러한 삶을 제공해 줍니다.
3.안나의 경건한 삶은 모든 그리스도의 모범이 됩니다.
안나가 선택한 길은 믿는 노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나이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권사나 집사의 직분을 맡은 자들도 있고,전혀 아무런 직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권사 직분은 나이 든 여성도가 받는 직분으로서 우리는 그들을 ‘기도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대에 안나가 주야로 성전에 있어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처럼,오늘날의 나이 늙은 여성도들도 교회 안에서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며 온 교우와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일찍이 안나가 과부로 일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며 경건하게 살았던 것처럼,오늘날 나이 든 과부나 성도들도 주님께 소망을 두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성장과 가정 교육
눅2:39,40
본문에서는 누가가 예수님의 생애 중 그 성장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누가가 이 기사를 예수님의 부모가 유대의 율법을 충실히 지킨(39절) 기사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적으로 여기서 누가는 예수님의 성장과 그 부모들의 충실한 율법에의 준수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성장했으며,예수님의 성장에 그 부모들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부모들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39절). 성경적인 문헌 속에 예수님의 부모들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기는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 개인들에 대하여 그리 많은 지면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상당히 진실한 유대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에서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메시야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의식과 깨달음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은 충실한 유대 주의자들로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였고 구약의 율례를 진실한 마음으로 지켜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의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좋은 산교육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문화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을 양육하는 풍토가 조성된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 부모로서 이러한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 줄 줄 아는,자녀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정의 분위기를 조성시켜 가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2.강하여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40절). 예수는 세월이 갈수록 자라며 강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강하여졌다는 말이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인 인격적 측면에서인지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의 경우일 겁니다. 예수는 자라면 자랄수록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견고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으로 성장해 나가고 아울러 육체까지도 강건하게 성장해 갔습니다.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로서,요셉의 아들로서 건실하게 커나갔습니다. 일방적인 의미로 부모가 예수님을 가정에서 가정교육으로 양육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상당한 영향을 그 가정으로부터 받았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오늘날 믿는 우리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시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3.지혜가 충족하여짐
예수님께서는 자랄수록 지혜가 충족해졌다고 하였습니다.지혜가 날로 충족되어가는 주님은 아마 회당에서 율법도 배우시고 토론도 하시고 하는 과정 속에서 점점 더 확고한 메시야 의식,즉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의 지혜를 비롯한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지혜를 날이 가면 갈수록 체득해 갔습니다. 메시야로서 지녀야 될 기본요건들을 이때부터 하나씩 둘씩 경험하면서 깨달아 가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자녀를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돈을 잘 버는 사람으로 키우기보다는 참된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실질적인 삶 속에 투영해 가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4.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강건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한 소년으로 커갈 수 있었던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그 위에서 항상 보살피고 있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다 가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장케 한 요인 중 그 부모들의 역할도 중요하였지만,그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자녀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가꾸어 나가면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성장함에 있어서 가장 큰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키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내 자식이라는 소유 의식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빨리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본능을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는 가정과 자녀로 존재해 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
눅2:41-43
유대인 남자들은 열두 살이 되면 율법이 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또한 의무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율법의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신의 소명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본문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
1)율법을 지키신 예수님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복종하시며 율법 아래 들어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율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결코 율법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 율법은 선한 것이었으며,거룩한 것이었습니다(롬7:12,16).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마5:17,18 ;눅24:44 ;롬3:31). 본문에서 주님께서 십이 세 되던 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사실은 주님의 사역이 곧 이와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역임을 밝혀 줍니다.
2)유월절을 지키신 예수님
주님께서 본문에서 지키신 율법은 구체적으로 유월절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첫째,그것은 죽음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 유월절 양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구원하셨습니다(출12:27). 둘째,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억압과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하셨습니다(출12:11 ;신16:1). 따라서 주님께서 십이 세 때 유월절을 지키신 것은 곧 주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고전5:7).
2.예루살렘에 머무신 예수님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아이 예수님은 유월절 제사를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예수님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국한해서 거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그곳에 계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눅1: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는 부모님께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인류를 대속하실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셨던 것입니다.
3)예수님은 다윗 왕통을 잇는 유대인의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약속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던 것입니다(삼하7:12 ;마1:1 ;롬1:3).따라서 그는 다윗성,혹은 시온성이라 불리우던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하셨습니다.그가 계셔야 할 곳은 나사렛 빈촌이 아니라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 했던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3.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신 사실을 몰랐던 요셉과 마리아
1)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신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머물러 계셔야 할 이유조차도 몰랐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자신들의 아들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은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그처럼 많은 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늘 옆에 모셔 두고도 그를 잊습니다. 그가 찬양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2)세상 일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신 사실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자기 일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세상의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였습니다. 그러한 나머지 그들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너무 바쁩니다. 너무 급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예수님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뒤를 따라와 주기를 바랍니다.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반대가 됩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
눅 2:44-47
본문은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마리아와 요셉이 삼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해후한 사건과 유월절 행사 중의 하나인 산헤드린 공개 신학 토론회에 참여하신 소년 예수의 지혜로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년기의 예수님을 근간으로 한 이 단편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들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봄으로 성도의 구도적 삶의 방향과 자세를 얻고자 합니다.
1.찾아 헤매는 부모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찾되'(44절). 요셉과 마리아는 절기를 지킨 후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중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찾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유월절 명절로 인한 삶의 희열과 만족감은 갑자기 혼란과 근심과 불안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리 되신 예수를 찾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지 그것은 찾는 구도적 삶의 방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진리를 잃어버린 줄을 몰랐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동행중에'(44절) 있는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여행길에서는 남정네들보다 여성들을 앞서보냈는데,그것은 여행 속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행객의 행렬을 다 보려면 하룻길이 소요되었다고 어느 역사가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먼저 출발한 것으로 생각했고,마리아 또한 예수께서 요셉과 함께 뒤따라올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을 평범한 삶의 행렬 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맡겨진 삶을 성실하게 영위하고,이웃과 공유하며,즐기는 것이 곧 인생의 참된 도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시민적인 철학은 불치의 병이나,사회적 재난이나,죽음과 그 후의 문제 등 자기와 삶의 한계 상황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허무주의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는 자들입니다.
2)진리를 ‘인간’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친족과 아는 자 중'(44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이처럼 의식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친족 사랑,즉 인도주의를 삶의 이상과 최선의 가치고 여기고 있지만,인류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이기심 때문에 사상과 계급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만 가는 고로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치부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3)삶의 경험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45절) 갔다고 했는바 원문의 ‘찾는다’는 뜻은 오르락내리락 앞뒤를 찾으며,또한 전체를 뒤지면서 예수님을 찾아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사 이래로 오늘까지 인류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물질적,정신적,철학적 문제들의 해답을 찾고자 했으나,자기 모순과 시행 착오와 불가지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4)결국 진리는 ‘성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 후 성전에서'(46절) 공개 신학 토론회장에 있는 소년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진리를 만날 곳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 안’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며,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시행되며,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며 우리의 마음과 삶은 성전화가되고(고전3:16),진리의 영이 우리를 삶의 온갖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요8:31,32).
2.학자들과 토론하는 소년 예수님
유월절 기간 중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신학 공개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위대한 랍비들과 소년 예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그 공개 강좌의 열띤 분위기가 예수님을 사로잡은 것이었습니다(요2:17).우리는 여기서 자리를 구하는 자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 랍비들이 원하는 것은 부와 명예입니다. 공개 강좌 때 랍비들은 긴 의자에 앉아서 교육을 했으며,청중들은 땅에 앉아 가르침을 받았는데,어린 예수님도 청중으로 땅에 앉으셨을 것입니다. 랍비들은 소년 예수님의 신적인 통찰력에 대해 ‘기이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여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셨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성육신으로 인한 메시야 예언의 성취 등을 설명했습니다(49절). 그러나 세속의 부와 명예와 권위주의로 눈이 가리워진 랍비들은 감탄만 했을 뿐 앞에 계신 진리의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없었습니다(마23:2-26).그러므로 구도자인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청결한 마음입니다(마5:5).② 예수님은 믿는 자를 찾으십니다.’저희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46절) 하신 것은 이해를 위한 토론을 초월하사 구약 신학의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을 근간으로 이루어졌음을 저들에게 인식시켜,저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요5:39).
소년 예수의 의식
눅2:48-50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소년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와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1.부드러운 책망
1)요셉과 마리아를 책망하심
요셉과 마리아는 드디어 성전 안에 있는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고 하자 주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부드럽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찾는 의도와 목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평범한 부모가 미아를 찾듯,인간의 소유욕과 연민으로 예수님을 찾았느냐는 물음입니다. 저들은 이 아이가 메시야임을 한동안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소유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오직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돼야 합니다.
2)우리들을 책망하심
본문의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이란 말씀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만 함을’뜻합니다. 주님의 의식 속에는 늘 아버지 하나님의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간혹 ‘땅의 일을 생각하는'(빌4:20) 적은 없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 즉'(잠23:7)이라고 했듯,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일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2.자기 의식의 표현
1)소년 예수의 종교관
소년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며칠 전에 시행된 ‘율법의 아들의 축하식’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눅2:42).그의 의식 안에 성령으로 인각된 신성은 기어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눅1:35). 이 의식은 창조 섭리론적인 관점에서의’인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성도에게 구속 섭리로 부여하신 ‘양자의 자격’도 아닌,본질적인 관계에서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2)소년 예수의 윤리관
예수님은 늘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안에서 움직이시고 그 뜻 안에서만 멈추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명예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고 하시며 공의의 채찍을 휘두르셨고,그 아버지의 주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고 하시며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위기를 맞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엔 ‘내 원대로 마옵시고,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며 ,의지를 아버지의 주권 앞에 굴복시키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삶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을 증명하셨습니다.
3)소년 예수의 세계관
주님의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씀은 또한 모든 세계와 하나님의 권세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 속에 살아가면서 때로,모든 세계와 역사의 통치권을 사탄이 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히11:3) 움직이는 하나님의 집임을 믿는 자는 결코 모든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어둡고,막다른 자리인 십자가 위에서도,죽음의 세계마저도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하에 있음을 믿었기에 원수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해 주실수 있었고(눅23:34),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때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희망의 기도를 올릴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모든 세계가 발 하나님의 집이라는 세계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고전3:22,23).
3.신앙 교육의 중요성
우리는 본문의 소년 예수의 말씀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데,그것은 곧 신앙 교육,조기 교육의 영향력입니다.
1)부모들이 행해야만 하는 일들
소년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이끌려서 단 한번의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통하여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은 것입니다. 즉 그 동안 여명으로 비취던 메시야적 의식이 성전에 머물며 여러 신앙 교육적인 행사를 겪는 동안 확고하게 각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분복입니다. 우리의 자녀도 어릴 때부터, 유한한 내 아이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교육시켜야 하겠습니다.
2)자녀들이 행해야 할 일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이미 위대하신 결심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 있기로 말입니다. 이 결단은 빠를 수록 좋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시27:4)에 거하지 않는다면 죄악과 허무와 심판의 ‘악인의 장막'(시84:10)에 거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이 주는 교훈
눅2:51,52
본문은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언급한 단 한 곳의 증언가운데 한 절입니다. 41절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의 행적은 사복음서 중에 오직 여기에만 나타난ㄴ 특별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성장은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을지라도 다른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의 교주들이 신화적 신비 가운데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예를 들면,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몸에서 태어나자마자 동으로 일곱 발자국 서로 일곱 발자국 걸은 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태어남과 성장의 상식을 초월한 신비스럽게 꾸며 놓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정상적으로 태어나 강보에 싸여 있었으며,나 지 팔 일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장 모습에 대한 누가의 증언은’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다른 아이의 성장 과정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예수님은 열두 살 때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법에는 모든 이스라엘의 남바들은 매년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명령되어 있습니다(출23:14 ;신16:16).그것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입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지방에 있는 회당에서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 사는 유대인은 최소한 유월절만은 허용되었으나 위대한 교법사 힐레에 의하여 여성까지 참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은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므로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열두 살이 ‘율법의 아들’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어머니의 지도로 시작되어 6세가 되면 ‘쉐마'(신2:4)나 시편을 공부하게 되고,10세가 되면 율법의 해석인 ‘미쉬나’를 배우며,12세에는 ‘율법의 아들’로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을 지킬 의무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는 율법이 명하는 절기와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되매 율법에 따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그는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2.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예수께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 신약성경에는 부모에 대한 효를 말할 때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한 구절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성과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원하신 주님께서는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성과 순조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30여 년 간 부모의 보호와 권위 아래 순종하며 받들어 모셨습니다.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것은 질서 정연한 가정의 훈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작은 소망을 갖는 즐거움과 순수한 애정의 높은 가치를 배우는 곳도 가정이며,모든 도덕적 미적 안목과 순결을 유지하는 가장 튼튼한 안전 장치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렇나 가정에서 근면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던 것처럼 그 자신도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은 후에 그의 모친과 여러 동생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은 준비 기간을 끝마치고 공생애 들어감에 있어서도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모든 가치 있는 능력을 축적하고,지식과 자각 뿐만 아니라 ,조용한 자기 성찰에서 오는 자제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마을에 있는 자신의 가정에서 훗날 십자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3.예수님은 키가 자람과 함께 지혜도 자랐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모든 지식과 능력을 소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신화적 인물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으므로 인간의 성장 법칙에 따라 키가 자라고 또한 지혜도 자라갔습니다. 인간이 키만 자라고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즉 ,모자라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동시대의 어떤 유년이나 청년들보다 더 큰 지혜와 도덕적 탁월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항하기 쉬운 사춘기와 죄의 유혹을 받기 쉬운 청년기,또는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으로 인기와 외로움을 한몸에 지니고 있었던 예수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비록 연약하지만,완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몸소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쇄
누가복음 2:1~14 호크마 주석 ~ 족자 한국교회
성경 주석 – 누가복음 2:1~14 호크마 주석
성 경: [눅2:8]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 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 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의 뜻인 ‘퓔라쏘'(*)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밖에서 여러 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을 묘사한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 했다. 한편 본문 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그 자체이다.성 경: [눅2:9]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주의 영광 – ‘영광'(*,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 중 하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어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두루 비추매(*,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주위에’)와 ‘람포'(*,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 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성 경: [눅2:10]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 41:27;52:7). 한편 본문에서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성 경: [눅2:11]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구주(*,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 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성 경: [눅2:12]주제1: [8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부터 보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성 경: [눅2:13]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 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 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성 경: [눅2:14]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주제2: [천사들의 찬송]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Jogja Korean Community Church족자카르타 한국교회는 한국인 교포, 유학생, 여행자 뿐만 아니라 한국어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하는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세워진 말씀과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누가복음 2장
<누가복음 2장 흐름정리>
오늘 본문은 1장에서 예언된 예수 탄생이 성취된다. 목자들이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는 제사장과 랍비가 아닌 사실에 주목하자.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를 메시야로 정확히 인식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았는지 주의 깊에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는 소년 시절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무려 43개나 있다.
<누가복음 2장 줄거리>
1. 아구스도가 전 로마 제국에 호적령을 내림.
6. 그리스도 탄생.
8. 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탄생 소식을 전함.
13. 허다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함.
21. 그리스도가 할례를 받음.
22. 마리아가 결례를 행함.
28. 시므온과 안나가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함.
40. 그리스도의 지혜가 충족함.
46.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선생들에게 질문함.
51. 그리스도가 부모에게 순종함.
<누가복음 2장 도움말>
* 1절 : 가이사 아구스도.
BC 27년부터 AD 14년까지의 로마황제. 이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는 칭호, 이름은 옥타비아누스)는 BC 44년에 살해당한 율리우스 캐사르의 종손이다. 그의 직권 아래 내려진 영은 그가 직접 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재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절 : 구례뇨.
호적령은 B.C 4년과 A.D 7년에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시행되었으며, 여기서는 첫 번째 경우이다.
* 22절 : 결례.
정결하게 하는 예식
* 24절 : 어린 반구.
집비둘기 새끼. 요셉과 마리아가 좀 더 부요했다면, 번제를 위해 새끼 양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의 재물인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가져왔다.
* 36절 : 아셀 지파.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 흔히 왕비나 대제사장의 아내가 배출되었다.
* 41절 :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함께 연중 3대 절기 가운데 첫 번째 절기이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으므로, 유월절 행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만든 일련의 극적인 사건을 상기시키는 감동적인 행사였다. 히브리인들은 비록 어떤 일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져도 유월절 예식에는 반드시 참석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에게 유월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유월절은 1년 중 매우 중대한 시점이 되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것이 기념하는 사건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월절은 메시야를 표상하는 바 그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민족을 한 데 결속하고 대대로 보존했다.
* 47절 : 기이히 여기더라.
이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랍비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은 아이 예수가 심오한 지식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당혹스러웠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 교훈을 주셨고, 예수 자신이 예언의 두루마리를 직접 연구할 때에 가르쳤으며, 예수가 성전 뜰에서 명상할 때(참조 시대의 소망, 70, 78,) 그의 마음에 이르러오는 직접적인 진리의 감명을 통하여 친히 가르쳤다.
* 52절 : 예수는…자라가며.
예수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신체적, 지적 및 영적 능력이 조화롭게 발달한 시기였다. 그가 열망하는 목표는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반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완전한 인성이었다. 3년 반 동안의 짧은 봉사에 앞서 30년의 충실한 준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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