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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왕 I Prince Of Peace 인터뷰
[뉴 크리에이션 워십 New Creation Worship]예배 공동체 [뉴 크리에이션 워십]의
\”자급자족 프로젝트\” 3탄
우리 손으로 앨범 만들기,라는 결심 아래 시작된 자급자족 앨범 제작 프로젝트의 세 번째 디지털 싱글앨범 [평강의 왕 (Prince Of Peace)]이번 앨범도 역시 연주부터 녹음,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팀원들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의미있는 앨범이다.
특별히 이번에 발표한 [평강의 왕 (Prince Of Peace)]은 부흥한국의 김수동 님이 작사/작곡한 미발표곡으로 뉴 크리에이션 워십의 음악적 색채를 더하여 완성되어 첫 공개된다.
모든 나라와 민족 가운데 다시 오실 어린 양 예수를 예배할 때, 이 땅 가운데 있을 평강을 바라본다.
[평강의 왕]평강의 왕 우리 주님
이 땅에 곧 오시리
모든 나라 모든 민족
주 오실 길 예비하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땅 끝에서 뵈오리
하늘 향해 깃발을 들고
모든 민족 외치네
호산나 호산나 왕이 오시네
호산나 호산나 어린 양 예수
영광의 왕 우리 주님을
모든 민족 경배해
만왕의 왕 우리 주님께
모든 열방 찬양해
2015(c) 김수동. All rights reserved
* Credit
Produced by Sungbin”Daniel” Hong 홍성빈, Kookhwa Cho 조국화
Mixed and Mastered by Sungbin”Daniel” Hong 홍성빈 at Curious Sound 큐리어스 사운드
Recorded at Headbang Studio 헤드뱅 스튜디오, Curious Sound 큐리어스 사운드 and Suwon Media Center 수원 영상 미디어 센터
Editing by Kookhwa Cho 조국화, Sungbin”Daniel” Hong 홍성빈
Drums by Kookhwa Cho 조국화
Guitars by Hongseob Lee 이홍섭 and Sungbin”Daniel” Hong 홍성빈
Bass by Shinil Jeon 전신일
Keyboards by Bonseung Ku 구본승 and Jaehun Kang 강재훈
Vocal by Sungbin”Daniel” Hong 홍성빈
Background Vocals by Sunah Kim 김선아, Shinil Jeon 전신일
Design : David DG Kim 김동근
뉴 크리에이션 워십은 선교적 예배 공동체 (Missional Worship Community)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고 명령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그 분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치라(메세지)”고 하셨습니다-
먼저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공부하여 뉴 크리에이션의 핵심 가치를 세우고 영성 훈련을 통해 삶의 예배를 세웁니다-
노래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예배를 통해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삶으로 살게 하자는 표어를 가지고
정기 예배,국내/해외 집회,음반,영상 등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7장의 ‘모든 민족과 백성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예배하는’그 날의 비전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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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96708: 그 이름, 평강의 왕 – 유평교회
이사야96708: 그 이름, 평강의 왕. 2018년 12월 20일 by 조정의.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4/9/2021
View: 9147
평강의 왕(사9:6) – 다음블로그
“기묘자라-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 1)제일 먼저 예수님은 기묘자와 모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지금도 다스리고 …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9/7/2021
View: 6757
예수 그리스도 – 평강의 왕 – Church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 – 평강의 왕. 러셀 엠 넬슨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음악은 장엄했고 연사들의 말씀으로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13/2022
View: 5483
평강의 왕 – 말씀의 실재
평강의 왕. The Champion Of Peace.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
Source: rorkr.com
Date Published: 3/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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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 시카고 한국일보 – Korea Times
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태어나던 날, 한 밤중에 양을 치던 목동들에 찿아온 천사가 이런 메시지 …
Source: chicagokoreatimes.com
Date Published: 5/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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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히 7:1~3) – 기멀전
예수 그리스도는 살렘왕 즉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버리시므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로 인해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8/8/2022
View: 6016
평강의 왕을 약속하십니다 | 기독교대한감리회
오늘 말씀은 오실 하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세의 침입 …
Source: kmc.or.kr
Date Published: 12/4/2021
View: 7139
성탄절 설교-평강의 왕(사9:1~7) < 교단 < 뉴스 < 기사본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가이사 아우구스도 황제(BC 34~AD 14)가 평화의 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는 권력에서 나온다’ ‘평화는 재물에서 나온다 …
Source: kehcnews.co.kr
Date Published: 7/1/2022
View: 7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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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평강 의 왕
- Author: 뉴 크리에이션 워십New Creation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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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5. 11.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pTdyFzK_N0
이사야96708: 그 이름, 평강의 왕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평강”은 히브리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샬롬이다. 구약성경에만 무려 209번이 사용될 정도로 평강 혹은 평안은 성경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당신은 언제 평강을 느끼는가?
인터넷 검색엔진에 “평안”을 검색해보면 여러 이미지가 나온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동산, 잔잔한 바다, 평온한 바다를 비추는 태양, 해변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 양을 치는 목자, 기도하는 손… 이 이미지들은 사람이 각자 갈망하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공통점은 누구나 평온하고 자유로운 심적 안정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일상의 염려에 흔들리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요동친다. 사람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치, 경제, 사회의 문제가 불안을 조장한다. 말 한마디에도 쉽게 평정심을 잃어버릴 수 있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앞날에 대해 염려를 한다. 때로는 자식이나 부모, 친구의 문제 때문에 평안을 쉽게 잃어버린다. 한 마디로 사람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평안을 잃어버린다. 평안함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고 느끼는 찰나에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심신의 수양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는 불안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훈련하고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절대적 평안을 내적으로 갖추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불교에서는 모든 불안과 염려로부터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평안을 얻어야 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자기 힘으로 평안을 지켜내야 한다. 결국 불교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얻는 방법은 스스로 절대적인 능력을 갖춰 심신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사람은 절대자가 될 수 있는가?
잠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정직하게 자신을 점검해 보라. 외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가? 경제적 위기를 늦출 수 있는가?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 이렇게 거시적인 일은 둘째치고, 눈앞의 생활을 개선할 능력은 있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그 어떤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낼 힘이 있는가?
불가능하다. 사람은 외부 환경도, 내적인 상태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지금이라도 한 통의 전화로 마음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나마 있던 평안함조차 언제 어떤 일로든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다. 사람의 능력에 기댄 평안은 안개와 같이 허황되고 일시적이다.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안을 줄 수 있는 절대적인 대상을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이 바로 그 절대적 대상이다.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은 외부 환경을 완전히 통제하는 전능하신 분이다(시 50:1; 147:5; 마 10:30; 요일 3:20). 또한 그분은 빌립보서 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다. 사람의 염려와 불안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기 마련인데,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다.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욥 37:16). 모든 것을 아신다(요일 3:20). 온 천하에 일어나는 일을 다 아시고(욥 28:24), 어떤 일이 시작할 때 그 일의 마지막을 보시는 분이다(사 46:9-10). 이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에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 그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라는 것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실 때,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하였는데, 예수님의 나심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외쳤다(눅 2:14).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세상이 약속한 평안은 쉽게 사라지는 평안이다. 환난을 당하면 거꾸러질 평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다. 세상보다 큰 하나님, 세상을 이긴 그분이 주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평강을 주시는 절대적인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되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먼 데에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6-17)
가까운데 있는 자들(유대인)과 먼 데 있는 자들(이방인)에게 평안의 소식을 전한 분은 같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기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 그들이 비교적 하나님과 가까운 데 있었든지, 멀리 있었든지, 유대인으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을 받는 특권을 누렸든지, 상대적으로 덜 알고 있어서 외부인으로 취급되었든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자들에게 주어진다. 막혔던 관계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원히 맺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원수로서 받아야 할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셨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누렸던 모든 친밀함과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받게 되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온다.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아버지가 억만장자라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줄 만큼 자식을 사랑한다면, 생활의 염려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가 뛰어난 의술을 갖춘 최고의 병원 원장이라면, 과장해서 말하자면 죽은 자도 살릴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식을 눈동자처럼 보고 있고 머리칼을 셀 정도로 돌보고 있다면,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가 현자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혜롭게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현명하게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계획한 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면, 그 자녀는 앞날을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평안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 염려되는 일을 만날 때 동요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누군지 기억할 때, 그의 마음과 생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함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허락된 평안이 바로 그러한 평안이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택하신 방법을 생각해 보자.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하늘 보좌와 비교하여 너무나 불편한 구유에 태어나셨다. 부유한 가정에서 평안한 삶을 살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름 없이 불편한 삶을 사셨다. 인기를 얻고 대우를 받아 편안하게 사역하기보다는 수많은 배척과 거절을 당하면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역하셨다. 평화의 왕으로 보좌에 앉아 높임을 받기보다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찔리고, 상하고, 매 맞고, 피 흘리고, 결국 죽임을 당하셨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 평안한 환경을 찾거나 평안한 방법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근심과 염려가 가득할 수 있는 환경과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위해,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분이 고난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평안에 감사하자. 예수님의 탄생, 희생적인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셨다.
형제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엡 6:2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지켜지기를 간구하자.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염려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분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지 않으셨는가? 그분이 만물보다 크시고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자. 오직 그분을 믿고 구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지키실 것이다.
평강의 왕(사9:6)
오늘 본문 6절을 제가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실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어깨위에 정사를 메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라는 말은 “통치권을 가졌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십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4가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묘자라-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
1)제일 먼저 예수님은 기묘자와 모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6절 말씀에서 기묘자와 모사라는 말이 떨어진 말이 아니라 같이 붙어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묘자란 영어로 “wonderfull, 놀라운” 이라는 말입니다. 또 “모사”란 영어로 “counseller” 라는 말로서 “상담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묘자와 모사란 말은 “놀라운 상담자-또는 최고의 상담가”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놀라운 상담가. 최고의 상담가”로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무조건 자신의 힘과 권으로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놀라운 상담가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의 최고의 상담가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격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가 어렵고 힘들어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도 이 땅에 있을 때 나도 너와 같은 고난을 다 격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대 김난도교수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책이 베스터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에 나이 많은 교수님이 그 교수님께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왜 아프니까 청춘이라 합니까? 청춘들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책을 쓴다면 이런 제목의 책을 써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늙으니까 더 아프다”
청년만 아픔니까? 중년도 아픔니다. 노년도 더 아픕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우리의 이 아픔을 함께 공감해줄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아픔을 다 격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최고의 상담가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상담가로서 우리와 소통하시면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십니까?
2)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상담가들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래 나도 그랬어-그럴 수 있어-너 때문이 아니야-넌 괜찬아-너는 아무 문제가 없어”라고 하면서 우리를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상담가는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상담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럴 수 있어—사랑하면 죄를 저어도 괜찮아-”라고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요즘 심리학의 문제고, 상담학의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상담가로서 우리를 위로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주십니다.
그래서 음란의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먼저 너희 죄를 내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그 음란의 죄 문제를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이런 죄의 문제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과 환난의 문제들에 대해서 위로만 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과 환난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여 주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하시는 상담가로,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3)또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는 아버지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아버지란 자녀가 구하기 전에도 미리 아시는 분이십니다.
또 성경에서 아버지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성경에서 아버지란 자녀들의 모든 삶을 책임지는 분이십니다.
또 자녀를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주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4)또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자신들의 평안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평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 14:27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과의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갈수 있는 유일하신 다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황과 목마름과 불만족은 끝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들과의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막한 담을 허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새 계명을 주심으로 우리에 사이에 이 평화를 더 풍성히 누리며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 사이에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사이에 아직 조금이라도 서로 막힌 담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속에서 그 사람과 서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서로 손을 내 밀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진정한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의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염려가 있다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더 염려가 된다면 더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또 염려를 가지고 염려하며 기도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시는 하나님께서 염려하는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염염려 하는 우리 생각에 평강을 주십니다.
–이 사탄과 마귀와 이 세상의 통치는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또 이 평강이 계속해서 영원 무궁히 지속되는 평강입니다. 또 날마다 더하여 가는 평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7. 그 정사통치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이 평강을 날마다 더 풍성히 누리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 평강의 왕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음악은 장엄했고 연사들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은 따뜻해졌습니다. 성탄절의 영이 우리 영혼을 고양해주었습니다!
성탄 절기에는 가족과 선물, 타인에게 하는 봉사가 생각납니다. 그것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이유, 즉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선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
구주와 영원한 삶에 초점을 맞추면 성탄절 때뿐만이 아니라 이 필멸의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다른 불완전한 사람들과 함께 이 지구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타락하여서 과도한 부채와 전쟁, 자연 재해, 질병, 사망이 만연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실직했을 수도 있습니다. 젊은 어머니가 심각한 질병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길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로 걱정하던 간에 우리 각자는 내면의 평안을 염원합니다.
저는 오늘 저녁 영속적이면서도 참된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평강의 왕2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이 명칭과 더불어 그분은 예임에 따라 다른 명칭들로도 불리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세상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 두 가지 명칭, 즉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그렇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분이 가지신 책임을 잘 나타내 줍니다.3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이 세상과 다른 세상들의 창조주가 되셨습니다.4 예수님은 아버지의 대변자이십니다.5 예수님은 약속된 임마누엘6이시며 구약의 위대한 자존자이자 여호와이십니다.7
아버지께서는 모든 인류의 역사 중 중심이 되는 행위인 속죄를 이루기 위해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속죄로 불멸이 모든 이들에게 현실이 되었고, 영생은 그분을 따르기로 한 이들에게 이룰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8 이 목적들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이자 영광입니다.9
우리의 위대한 모범이신 예수님은 이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하며 배워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고, 기도하고 용서하며 끝까지 견디는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10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보살피는 방법과 자비와 친절을 가르치셨으며,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 삶에 진정한 변화가 일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가슴과 마음의 평안을 얻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공정하신 심판자이자 자비로운 선생이신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11
우리는 그렇게 성스러운 책임을 지신 그분을 우리의 개인적이면서도 영원한 평강의 왕으로 경배합니다. 우리는 부모와 조부모, 자녀들의 교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그분을 찬양합니다.
성탄절은 가족들의 소중한 시간입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은 성스러운 시간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구주께 향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음악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주 예수를 닮으려고”12를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13
그분은 전쟁으로 삶이 파괴된 사람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실 수 있습니다. 병역 의무로 어려움을 겪은 가족들에게는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을 텐데 제 마음에도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현시대의 전쟁은 더 복잡하지만 여전히 가족들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을 겪는 분들은 주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이 지상에는 평화를, 사람들에게는 선한 뜻을 전해줍니다.14
몸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도 평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부상을 입은 분들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다른 정서적 외상으로 영적인 고통을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평강의 왕을 믿는 신앙을 키울 때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에 깃들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너희에게 저는 자나, 맹인이나, 다리 불편한 자나, 장애인이나, …… 어떻게든지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내가 그들을 고쳐 주리라.”15
“이는 너희의 신앙이 내가 너희를 고치기에 족한 줄 내가 앎이니라.”16
평안은 슬픔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 슬픔의 원인이 실수이든 죄이든 상관없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진정한 회개뿐입니다. 경전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라.]”17 그러면 그분의 감미로운 “길르앗[의] 유향”이 죄로 고통을 겪는 영혼일지라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18
1725년에 런던에서 태어난 존 뉴턴에게 있었던 변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노예 무역상이라는 죄로 가득 찬 삶을 청산하고 영국 성교회의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큰 변화를 겪은 존은 찬송가 “놀라우신 은총”의 가사를 지었습니다.
놀라우신 은총이여! 그 따뜻하고 감미로운 음성이여 그 은총은 나 같은 비참한 자를 구하셨네. 한 때 길 잃고 방황하였으나 이제 길 찾았네. 한 때 눈 멀었으나 이제 보게 되었네.19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 기뻐하[리라.]”20
일이 고된 자들에게도 평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1
애통하는 자들에게도 평안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22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견디어 낼 때라도 영의 속삭임을 통해 주님의 평안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니. 이는 죽음이 그들에게 달 것임이니라.”2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
평안은 평강의 왕을 진심으로 찾는 모든 이들에게 올 수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전하는 감미로운 구원의 메시지가 바로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선교사들은 그분이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26 선교사들은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다음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27
평안은 주님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모든 이들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이 담긴 이 세 단어에 그분의 권유가 담겨 있습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28
우리는 평강의 왕을 찬송할 것입니다.29 그분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입니다.]”30 복천년의 메시야인 그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31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필멸의 삶에서 많은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맺은 성약에 충실하고 끝까지 견딘다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 가운데서 가장 큰 은사인 영생을 얻을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32 그분의 거룩한 면전에서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과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토록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말씀의 실재
평강의 왕
The Champion Of Peace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 모사라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사 9:6)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평강의 왕이십니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평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요한복음 14:2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위안이 됩니다. 그분이 당신의 삶을 그분의 평강으로 충만케 하셨기 때문에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평강은 그저 소란 가운데 잠잠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안함이 없는 평강, 충만한 평안함과 풍요, 삶의 위기에 대한 통치권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분의 평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의 정부들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당신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당신에게 영원한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당신에게 그러한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동요하지 마십시오. 자신감으로 충만하십시오. 평강의 왕이 당신의 삶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격렬하게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분은 조용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당신의 삶에 나타난 위기 중에 그분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허둥거리지 마십시오. 당신은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과 상관없이 그분의 말씀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아주 잠잠해질” 것입니다(마 8:26).
고백
평강의 왕이 내 심령 안에 살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영원한 기쁨, 위안, 번영, 위기에 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므로 삶의 도전들을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나의 길은 빛나는 빛 같이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날에 이릅니다. 나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 성경
빌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1년 성경읽기
벧전 4, 겔 33-34
2년 성경읽기
요 14:22-31, 대상 25
THE CHAMPION OF PEACE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Isaiah 9:6).
How wonderful this is! Jesus is our Prince of Peace; the champion of peace. You can’t find peace anywhere else, no matter how you try, except in Christ Jesus. In John 14:27, He said,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The foregoing words of Jesus are just so comforting! He makes it clear that under no circumstances should you allow your heart be troubled, because He’s filled your life with His peace. He wasn’t just referring to the peace of being quiet from disturbance, but peace without agitation, full of rest and prosperity; dominion over the crises of life!
Notice He didn’t say, “my peace I will give unto you” No! He said, “My peace I give unto you.” You have His peace now. You have what the governments of this world can’t provide; not even your family and friends can give you lasting peace, happiness, and joy; only Jesus.
In your life, no matter what happens, be unperturbed; be full of confidence, because the Champion of Peace is in your life. Remember what He did to the raging, tempestuous sea? He hushed it to sleep. There’s no crisis in your life that’s beyond Him.
Don’t be flustered by whatever may be going on around you; you have the peace of Jesus Christ in your heart. Irrespective of the turmoil, speak forth His Word, and there’ll be “a great calm.” Praise God!
CONFESSION
The Prince of Peace lives in my heart, and He’s granted me eternal joy, comfort, prosperity and power over crisis. I reign and rule over life’s challenges because my heart is stayed on His Word. My path is as the shining light that shines more and more unto the prefect day! My victories are guaranteed, in Jesus’ Name. Amen.
FURTHER STUDY:
Philippians 4:6-7; 2 Corinthians 4:16-18; John 16:33
1-YEAR BIBLE READING PLAN
1 Peter 4 & Ezekiel 33-34
2-YEAR BIBLE READING PLAN
John 14:22-31 & 1 Chronicles 25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히 7:1~3)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히 7:1~3)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사할 때마다 평화를 비는 내용의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만났을 때“안녕하셨습니까?”라고 하며, 헤어질 때도“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고 해어질 때“샬롬”이라고 하는데“평화”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약성경의 서신들을 쓸 때에, 서신의 첫머리나 끝을 맺을 때 항상“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두렌트(Durants)라는 사람이“역사의 교훈”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인류의 역사란 전쟁의 계속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기록된 이래 3,401년 동안 전쟁 없이 지나온 해는 불과 268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평화를 염원하면서도 전쟁이 그칠 날 없는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며, 최초로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서 7장 2절에“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페샤트(Peshat)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레마즈(Remaz)로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암시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영감을 주셔서 그 사람을 말씀으로 붙들어 그 사람을 쓰시려는 원대한 계획 속에 레마즈를 주십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정교회를 지을 때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9장 62절의“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평범한 말씀 같지만 이 말씀이 그 아름다운 성전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 임한 암시의 말씀 즉 레마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데레쉬(Derush)로서 신중히 검토한 후에 알아 낼 수 있는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연구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은혜가 성격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넷째, 소드(Sod)로서 비유적인 내면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유로 심어 놓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기도하므로 영감을 얻어야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보는 안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감을 따는 것과 같다. 흔들면 떨어지는 감이 많이 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은혜 되는 말씀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감이 있다. 이런 감은 하나 하나 정성을 들여서 따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는 심혈을 기울여 한 구절 한 구절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목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멜기세덱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나타내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공통점이 많은 멜기세덱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9장 6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누가복음 2장 14절에 천사들이 찬양하기를“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평안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니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얻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들은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2절~16절,19절에 기록하시기를“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하셨습니다.
참된 평화를 원하십니까? 참된 평안을 원하십니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구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은 평화를 얻어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모리무라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하면서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청소부 아줌마만 하루에 한 번씩 들어와서 청소를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큰 부자인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고, 생활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리무라를 지켜본 청소부 아줌마는 그를 만날 때마다“내 마음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나누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기던 모리무라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청소부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청소부로 있으면서 그렇게 평화가 가득한 비결이 무엇입니까?”그는 말하기를“내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이 말 한마디에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 스패포드(Spafford)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변호사이며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네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11월 22일 여행 중 여객선 하브레호가 영국 선박 로천호와 충돌하여 승객 226명이 익사하는 대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사고 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습니다. 아내는 이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여보, 딸들은 지금 천국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바다에서 한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13장 가사입니다. 극한 슬픔을 만나 좌절의 늪을 헤맬 때 어디에서 위로를 받으며, 무엇으로부터 새 힘을 얻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겠습니까? 궁극적 위로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세상 것과 같지 않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가 우리들의 심령 속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을 때 값없이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평화가 이룩되었습니다. 사람을 농기구처럼 사고팔았던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그 노예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람을 차별하는 봉건제도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 땅위의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습니다. 양반과 상민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평화, 둘째, 민주주의, 셋째, 자유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과 불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러한 것으로 채워졌습니다.
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삶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평화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5절에“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 언제나 신을 신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국의 리처드슨 선교사였습니다. 당시 자바 섬에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족들 간에는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들은 화해할 땐 늘 갓난아이 한 명을 상대편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이 자바섬에서 생활한지 2년째 되던 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부족들의 분쟁은 점점 심해져 도무지 화해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백인 부부가 갓난아기를 안고 싸움터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였습니다. 선교사는 자신들의 한 살 된 아이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제 아이를 평화의 제물로 바칩니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악습과 서로를 증오하는 부질없는 싸움을 중단하십시오.”두 추장은 선교사의 사랑에 눈물을 글썽이며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자바 족들은 백인부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식인의 악습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바섬은 굳게 닫혔던 복음의 문이 열렸고 평화의 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복음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2절에“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하셨습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에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그때 이사야는 말하기를“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우리 모두도 이처럼 평화의 복음에 대한 성령님의 감동에 민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내가 머문 곳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곧 화평케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이탈리아의 성자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양보해야 합니다.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기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렘왕 즉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버리시므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평화가 이룩되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차별과 반목과 질시는 사라지고 화평이 이룩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우리들은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 자신이 평화의 사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서도 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화평이 만들어지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구원받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평강의 왕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은 오실 하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세의 침입도 많고 전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소중한 것들을 잃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된 하루 인사는 샬롬, 안녕, 평강이었습니다. 게다가 국내적으로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폭력과 착취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왕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6) 한 아기에게 주어진 다양한 명칭 속에는 오실 메시아의 주된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메시아의 이름 중 끝자락에서는 오실 구원자를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약속은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 평화로다.”(눅 2:14)라는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는 분열과 다툼이 사라집니다. 막힌 담도 무너집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이 하나 됩니다. 미움을 끝내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평강은 힘과 권력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으로 로마의 평화 시대를 이루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힘으로 평화를 얻었지만 반면 많은 이들이 억압받아야 했습니다. 평강은 결코 힘이나 재물이나 지식에서 오지 않습니다. 참 평화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렸습니다.(사 53:5)
우리의 환경을 둘러싼 그 어떤 문제보다 크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강이 임합니다. 주님이 계시면 가정에도, 교회 공동체와 국가에도 평강이 임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셨고 또한 앞으로도 이루실 것입니다.(7)
우리가 섬기는 메시아 예수님의 이름이 평강의 왕이심이 매우 기쁩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탄절 설교-평강의 왕(사9:1~7)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와 내전과 불화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지도자들이 왔다갔지만 여전히 싸움뿐이요, 불의와 압제와 불안과 절망과 죄악이 만연합니다. 그러나 이 오만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해결은 한 아기를 통해서 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군대와 학자들과 성인들이 할 수 없었던 문제를 한 아들을 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해결하십니다. 그 한 아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고…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사 9:4~5) 살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왕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왕으로 오시는 한 아이는 우리를 위해서(for us),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with us),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나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승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메시아는 다른 왕들의 취임과는 달리 외견상 초라하고 나약한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어떤 제왕보다 위대한 타이틀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본문은 새로 오실 왕,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앞으로 행할 사역과 관련하여 4가지 일련의 신적 타이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명칭은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lor)
우리말 성경의 “기묘자라, 모사라”는 “훌륭한 상담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왕은 이전의 세속 군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강요하거나, 짐을 지우는 일반 통치자와는 달리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상담하여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녀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대면하셨을 때, 그녀는 모든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셨을 때, 그는 새로운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아시고 상담해 주십니다. 육신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이십니다. 생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 어떤 문제든지 주님께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물어 보십시오. 주님은 놀라운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
예수님은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능력 있는 역사를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한센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만져 주실 때,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실 때, 굶주렸던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풍랑 이는 바다를 향해 명령하실 때, 바다가 잔잔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한 일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요 14:12)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받아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물론 영생은 ‘긴 시간’이 아니라 무시간성 내지는 시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은 시간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유한하며, 쇠하며, 소멸됩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시간 가운데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가운데 계시면서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면서 시간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고,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본문은 영원에 대한 강조보다는 부성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영원’은 ‘부성’을 꾸미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영생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
‘팍스 로마’(Pax Romana)는 로마가 평화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 가이사 아우구스도 황제(BC 34~AD 14)가 평화의 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는 권력에서 나온다’ ‘평화는 재물에서 나온다’ ‘평화는 지식에서 나온다’ ‘평화는 정의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임합니다. 고난의 길, 희생의 길, 섬김의 길을 걸어야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가이사의 길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일할 때 평화가 옵니다.
사람들은 아우구스도 황제를 온 세상에 평화를 주는 황제로 신격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계의 평화의 왕임을 전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겉으로 보기에 이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고 평화를 추구하는 듯해도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평화를 파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평화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겁니다.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으로 전쟁에 돌입하지 않은 상황을 평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언제라도 깨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평화도 평화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평화를 주십니다. 힘의 균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힘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스리는 힘에서 섬기는 힘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고, 평화를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골 1:20).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샬롬(shalom)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가면 안데스 높은 산(3832m 고지)에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거대한 예수상이 서 있습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에 국경분쟁으로 오랫동안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00년 부활절에 아르헨티나 목사가 국경을 따라 배치되어 있던 대포들을 녹여 예수 상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이 양국에 받아들여져 평화의 상징으로 예수 상을 세우고 1904년 3월 13일 제막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나라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시는 분입니다. 명판 중 하나에는 스페인어로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다시 전쟁을 한다면 이 산의 바위들은 산산이 부서지리라”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상담자로 지혜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능력을, 영원한 아버지로 영생을, 평화의 왕으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여기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전능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성을, 훌륭한 상담자와 평화의 왕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상담자이시지만 자신은 무고하게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이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아버지이시지만 죽기까지 순종하는 아들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이 모든 역사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사 9:7)에 의해 은혜로 주어집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예수님을 이 땅에 지혜와 능력과 영생과 평화의 주로 오게 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가정과 나라와 세계에 풍성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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