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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73. 73.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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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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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13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시편 73편 · 몸과 마음은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며 내가 필요로 하는 전체입니다. ·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주께 신실치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4/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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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 KLB – 제 3 권 – (73-89)잘 사는
제 3 권 – (73-89)잘 사는 악인들의 종말 – (아삽의 시) 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선을 베푸시며 그 중에서도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구나.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3/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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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편) – 유평교회
제목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본문 : 시편 73편. 설교자 : 최종혁.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를 다루는 시편은 자주 ‘복’에 대해서 말한다.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3/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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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편 & 성경주석
시편 73편 & 성경주석 ·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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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3편 아삽의 시 – 다음블로그
오늘 시편73편 아삽의 시를 읽으니 성경 기자도 우리와 똑같이 믿음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유난히 좀 친근하게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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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5월 20일. 시편 73편. – 하늘품은교회
1. 73편부터 시편 제 3권이 시작됩니다. 73편부터 83편까지 열 한 편의 시에는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73편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
Source: www.hapoom.or.kr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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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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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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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시편 73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1)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2)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편)
제목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본문 : 시편 73편
설교자 : 최종혁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를 다루는 시편은 자주 ‘복’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말에서 ‘복’은 뜻하지 않았는데 만나게 되는 좋은 일, 행운과 같은 뉘앙스를 갖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그런 우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그런 복을 누릴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복된 길, 즉 좋은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나쁜 길이 있다. 더 나은 선택이 있고 더 나쁜 선택이 있다. 시편 1편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길을 말하면서 어떻게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교훈해준다. 간단히 말해 복의 길로 인도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거절하는 악인들의 말이 있는데, 그 중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여 그 길로 행하는 자가 복 있는 자고 복 있는 삶을 사는 자다. 그런 사람이 의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악인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신다.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한 원리다.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전혀 없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게 정말 맞나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을 보고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많은 시편이 그런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배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만나는 것이다.
시편 73편의 저자인 아삽도 바로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고(3절),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한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했다(13-14절). 그가 알고 있는 원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난 것이다.
욥도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일들을 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었는데, 그런 일을 자신이 당하게 되자 욥은 하나님 앞에서 답답함을 토로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가?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가? 선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가?
신학 용어로는 ‘신정론’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런 주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믿는 사람들, 특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직한 의문이기도 하지만 믿음을 흔들 수 있는 의심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질문에 대해서 바른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삽이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시편 73편을 통해 함께 그 답을 찾아보자.
시편 73편
•3권의 시작 •73-89편 : 총 17편 •저자: 아삽, 시편 50편의 저자이고 3권의 주저자라고 할 수 있다(73-83편, 11편)
“아삽의 시”
아삽은 다윗이 임명한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레위 사람 중 하나였다. 헤만, 에단과 함께 성전의 음악 사역자 역할을 했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 노래하는 사람으로 직분을 받았고, 그 후에도 찬양대의 리더로서 역할을 했다(대상 16:5). 시편 50편에서 그는 하나님을 잊은 예배자들에게 감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게 앞장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삽이었지만, 73편에서 그는 솔직한 마음을 기록했다. 거의 믿음을 버릴 뻔 했던 그가 어떻게 마음을 다잡았는지를 정직하게 기록했다. 정직한 아삽의 솔직한 질문과 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함께 살펴보다.
아삽의 질문(1-16절) – 정결한 자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의심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1절)
아삽은 먼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심을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라고 말씀하셔서 “선함”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임을 말씀하셨다. 시편 119:68은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도 모두 선하다는 말이다. 이런 본질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 사랑은 상황에 따라 긍휼, 은혜, 인내, 인자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은 비참한 상황에 있는 자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죄인에게, 또한 의인에게 골고루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아삽도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신다고 그가 이해하는 사실을 먼저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베푸시는 선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에 아삽은 주목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과 악인에게 베푸시는 선을 대조하여 보고 있다. 그는 그 결과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했다.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절)
아삽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말한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올바른 길을 버리고 악인들의 길을 따를 뻔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렇게 할 뻔했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고 그것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선을 마음이 정결한 자들이 아니라 악인과 오만한 자들이 훨씬 더 경험하는 것 같았다. 아삽은 4-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말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5절)
먼저 아삽은 악인들의 고통 없는 삶을 봤다. 그들은 어디 아프지도 않고 잘 살다가 아주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조차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특별한 재앙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앙과 같은 일도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가 어렵고 힘들어져도 여전히 가진 자들은 잘 사는 것처럼, 아삽이 보고 있던 악인들도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악인들의 길은 멸망의 길이고 의인의 길이 형통한 길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럼, 이렇게 고통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의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6절)
목걸이와 옷은 그들의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들은 누가 봐도 형통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순종할 때 내려주시겠다고 했던 그 복을 이 사람들만 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의로운 삶의 결과가 아니라 교만과 강포의 결과였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의 아름다운 목걸이와 옷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오히려 드러낸다. 이들은 누가 봐도 악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7절)
아삽은 악인들의 외적인 모습이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계속해서 표현한다. 살찐 것은 오늘날 미적 기준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살찐 것이 곧 부의 상징이었다.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난 모습, 즉 약간 돌출된 그 모습이 그들의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을텐데, 아삽은 거기서 그들의 교만을 보았다. 그들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뛰어넘어 탐욕이 되었고 그들의 많은 소유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삽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8-9절)
그들은 다른 사람을 모욕한다. 압제한다. 거만하게 말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며 그런 사상을 세상에 퍼뜨린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라면 최소한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쓸쓸히 돈만 만지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10절)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에게로 몰려와 함께 그 풍요로움을 즐기기 원한다. 물론 악한 그들과 함께하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이 가진 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앤더슨은 “그들의 풍요로운 삶이 인상적이어서 그들의 악조차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Anderson, Psalms 73-150, 532).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악인의 꾀가 효과가 있고 죄인들의 길이 형통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먹을 것이 많은 것을 보고는 넘어진 것시다. 의로운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3절에서 말했는데, 그만큼 그들의 형통함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악인들은 이렇게 그들의 풍요로운 삶의 비결을 알려주었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절)
하나님에 대해서 이들도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봤을 때 하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분” 혹은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그들이 아무리 악한 말을 하고 위력을 행사해도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설 수 있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삽은 이렇게 정리한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절)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삽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절)
이런 일들을 보니 자기가 지금까지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이 참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에 순종해온 삶이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느껴졌다는 말이다. 공허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아삽이 경험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절)
다른 사람이 잘 되는거야 그렇다고쳐도, 최소한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재난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떻게 신실한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징벌을 받는 것처럼 매일을 살게 할 수 있을까? 선하고 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아삽의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아삽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자신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은 형통하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3절에서 그는 자신이 ‘질투’했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그가 악인과 같은 형통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악인의 상황과 비교했다. 그들의 건강, 그들의 부, 그들의 풍요로움이 자신과 대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악인들이 누리는 좋은 것이 나의 것이기를 바랐다. 그것이 질투다.
선에 대한 보상은 없고 형벌만 있는 것 같은 삶, 악에 대한 형벌은 없고 보상만 있는 것 같은 삶, 아삽으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지, 의로운 자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도 괜찮은건지, 아삽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아삽은 예배를 인도하는 리더였다. 그는 책임감있는 리더로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성도들을 죄에 빠뜨리는 악행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절)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아삽이 한 일이었지만, 그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더욱 심한 고통이 되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16절)
여기까지가 아삽의 솔직한 질문이다. 아삽은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찾을 때까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답을 찾게 된다. 어떤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늘상 하던대로 성소에 들어갔을때, 그는 모든 의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삽의 답변(17-28절) – 언제나 해답은 하나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절)
성소에게 아삽은 깨달음을 얻었다. 성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가랴처럼 천사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수도 있다. 어떤 선지자나 지혜자를 만나 좋은 충고를 들었을 수도 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본문이 전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아삽은 단지 자기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깨닫게 된 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삽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뭔가 새로운 전에 없던 뛰어난 통찰력 같은 것은 아니다. 아삽 자신도 이미 익히 알고 있었을 내용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소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다기 보다는 평소처럼 예배를 드렸지만,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고통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여셔서 삶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키드너, “빛이 그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은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임을 깨우치게 되었다.”(키드너, 17).
의심이,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삼키려 할 때, 거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뻔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바라봤을 때, 그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해답은 깨닫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무지한 짐승으로 표현할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아삽은 회복되었다.
그가 깨달은 사실은 두 가지다. 먼저는 악인들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8-19절)
너무나 형통한 것 같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악인들이지만 결국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아삽은 깨닫게 되었다. 악인들은 너무나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가, 갑작스럽고 철저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도 놀라겠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놀랄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의 파멸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그렇게 된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절)
아삽은 악인들이 이미 멸망 당한 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악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분처럼 계신다. 하지만 이제 아삽이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깨시면 악인들을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제가 되든 상관없다. 지금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이 우리 삶의 결론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삶을 순차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지나간 과거는 희미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에게 선명한 것은 현재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가 전부인냥 살 때가 많다. 아삽도 그랬던 것이다. 자신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 같은 삶을 사는데, 악인들은 형통하고 고통도 없이 잘 사니,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지, 선을 행하시는지 의심이 생겼다.
그런 아삽을 비난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우리 삶의 바뀔 수 없는 결론인 것처럼 산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께 지금 악인의 형통함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진짜 주무시고 계셔도 아무 상관없다.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하나님은 이미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볼 때, 아삽은 ‘나도 참 불쌍하지’라는 자기 연민에서 ‘나도 참 어리석지’라는 자기 비판으로 시각이 바뀌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21-22절)
아삽은 그 마음이 상했었고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은 실제였지만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어리석은 짐승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이 당연한 진리를 왜 모르고 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악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질투하기까지 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아마 천국에 가면 우리가 이런 고백을 동일하게 할지 모르겠다. 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세상의 것에 매여서 그것을 추구하며 죽기 살기로 살았는지, 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없으면 안될 것처럼 살았는지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혹 그 때 후회할 것 같다면, 지금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 그 어리석은 질투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을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다.
아삽의 깨달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더욱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23-24절)
아삽은 그래도 자기가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것, 이렇게 깨달음으로 나아온 것을 자기 공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삽은 주님께 고백한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교훈하셔서 인도하시며 끝내는 영광으로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악인들은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을 풍족하게 누리며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기 때문에 아삽과 같은 신실한 사람도 넘어질 뻔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함께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에게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가졌어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삽은 이렇게 고백한다.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세상에 속한 그 어떤 좋아 보이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늘 위에는 땅 아래든, 하나님이시면 충분하다. 우리가 간절히 바랄 분은 하나님이셔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복에 대해서 아삽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시편을 마무리 한다.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7-28절)
하나님의 가까우심이,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복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멸망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다.
그런 삶이 세상에서 보기에 풍요롭고 넉넉한 삶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되는 삶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전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지, 왜 선한 사람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신정론과 관련된 질문들은 사실 우리 입장에서 생기는 질문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 모든 일을 다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언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까?
1. 세상이 부러울 때 그렇게 해야 한다. 살다보면 우리도 아삽처럼 세상이 부러울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나는 힘들기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편하고 더 잘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받은 복을 세어 보아야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세상에 속한 것의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곳을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교정해야 하는 것이다.
2. 어려움 중에 그렇게 해야 한다. 아삽이 고통 중에 성소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이다.
성경을 펴는 것도 힘들고, 기도조차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이 쇠약해질 때가 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진짜 모르겠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가 있다. 차라리 하나님을 내가 모른다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사실 그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고 성경을 펼쳐야할 때다.
우리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이곳 저곳을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내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쇠약한 내 마음과 육체에 반석이 되시고 영원한 분깃이 되어주신다.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라. 목 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3. 평소에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 없어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일상은 없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별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디있느냐고 묻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언제나 내게 복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편 73편 & 성경주석
<시편 73편 서론>
아삽의 시.
시 73편은 37편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핍박받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73편은 37편보다 그 해답에서 더 진전을 보인다. 시 73편은 우리를 이생을 넘어 영광스러운 영원 속으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궁극적인 해답과 궁극적인 만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시편처럼 먼저 결론이 진술되고 그 다음에 문제와 그에 관한 해답이 균등하게 양분되고 있다. 혼란에 빠진 시인은 실제로 하나님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가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얻으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는 거기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는다. 이 시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대한 온전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거룩한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웅변적으로 기원하고 있는데, 그 거룩한 예배는 우리 영혼을 혼란케 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장소이다. 욥기처럼 이 시는 정직하게 의심하는 자에게 인내의 교과를 가르친다.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믿었으나 인간의 필요에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정직하게 탐구한 결과, 그는 승리를 거둔 믿음의 빛 가운데로 나왔다.
<시편 73편 개역한글>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편 73편 성경주석>
73:1 하나님이…선을 행하시나.
겉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그렇다.
“아직 사태는 미칠 듯한 혼란에 빠져 있고
폭풍과 홍수에 시달리나
변치 아니하시는 한 분께 내 영혼이 매달리노니
나는 아노라, 하나님은 선하심을!”
73:1 참으로.
히브리어 아크(’ak). 참조 시 62:1 주석. 아크는 13절(“실로”라고 번역되었다)과 18절(“참으로”라고 번역되었다)에도 나온다.
73:1 마음이 정결한.
곧 “마음이 맑은”(참조 시 24:4; 51:10; 73:13; 마 5:8).
73:2 나는.
이 구절은 이 시의 문제에 대한 해답에 시인이 도달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과 시인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 문제는 왜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받는가 하는 것이다.
73:2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시인이 자기 믿음을 잃을 뻔했다는 의미의 인상적인 비유이다(참조 시 44:18).
73:2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참조 시 17:5. 시인은 믿음의 반석에서 회의의 웅덩이로 미끄러지기 직전에 있었다.
73:3 형통함을.
문자적으로 “평온함을.”
73:3 질시.
참조 시 37:1 주석.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이 세상의 물질에 더 중점을 두고 있음이 그러한 질투를 통하여 드러난다.
73:4 고통.
곧 “격통(激痛).” 시인에게 악인들은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고 평온한 종말에 이르는 것처럼 보였다(참조 욥 21:13, 23).
73:4 건강하며.
“살찐”이 더 낫다.
73:5 타인과 같은(as other men).
히브리어 에노쉬(’enos∨),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을 번역한 말이다(참조 시 8:4 주석).
73:5 고난.
그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운명이라 간주되는 것을 피하는 듯하다(참조 욥 5:7).
타인과 같은(like other men). 히브리어 아담(’adam), “인류”(참조 시 8:4 주석).
73:6 목걸이.
장식품인 “목걸이”(참조 잠 1:9; 3:22).
73:6 옷이며.
강포(참조 창 6:11)가 그들에게는 옷입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이다(참조 시 109:18, 19).
73:7 살찜(으로).
여느 사람들처럼 힘든 일로 인하여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높은 생활수준 때문에 살이 찐다.
73:7 저희 소득은.
그들은 맘먹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유한다. 그들은 무엇이든 가지기를 원하기만 하면 그 소원이 충족되며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충족된다.
73:8 압제하여.
이 절,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압제하여 거만히 말하며”는 악인들에게 배어 있는 거만한 분위기를 얼마나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가!
73:9 하늘에.
이 말은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라는 뜻이 있다. 이 구절은 동의대구를 이루는 두 번째 절의 “땅에 두루”(문자적으로는 “땅에”)와 균형을 이룬다. 그들은 거짓으로 꾸민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악하게”(8절) 말하기에 분주하다.
73:10 그 백성이.
이 절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70인역」은 다르게 번역한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여기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충분한 날들이 발견될 것이다.” 「개정표준역」은 히브리 본문의 변화에 따라 번역한다. 이 히브리어는 이제껏 다양하게 번역되어 왔다. 대명사 “그(의)”(his)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번역도 있고 또 악한 자를 가리키는 번역도 있다. 만약 의인들이 이 절의 주어가 된다면 “이리로 돌아와서”라는 구절은 이 시에서 눈에 띄는 문제를 재차 거론되게 할 수도 있으며 만약 악한 자들이 주어가 되면 이 구절은 악인들이 그들의 악한 지도자와 결합하기 위하여 돌아오는 것을 묘사할 수도 있다.
73:11 하나님이 어찌 알랴.
참조 시 10:4, 11, 13; 14:1.
73:12 평안하고.
참조 욥 21:7~15.
73:13 실로.
히브리어 아크(’ak). 참조 1절 주석.
73:13 내 손을 씻어.
무죄 혹은 정결함의 상징이다(참조 욥 9:30).
73:13 헛되도다.
시인이 관찰한 바에 비추어 보면(3~12절)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됨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느낀다(참조 욥 9:27~31).
73:14 재앙을.
시인은 악인들이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앞에서 주장한 바 있다(5절).
73:14 아침마다.
시인에게 재앙은 새 날이 와도 날마다 되풀이된다(참조 욥 7:18).
73:15 내가 만일…이르기를.
곧 “만일 내가 말했었다면.” 아마 자신에게 말하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의 승리가 시작된다.
73:15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만일 내가 생각한 것을 다 표현한다면.
73:15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그들을 다치게 했을 것이며 그들에게 진실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고상한 과묵함이여!(참조 약 3:2).
73:16 심히 곤란하더니.
시인은 하나님 나라의 정부에 명백히 존재하는 불의에 대한 이유를 캐면서 그 문제를 심사숙고하였지만 결과는 다만 혼란뿐이었다. 그 문제는 그가 풀기에 너무 심오한 것이었다.
73:17 성소.
시인은 그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논하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성소로 들어갔다(참조 왕하 19:14). 삶의 진짜 문제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만 풀린다.
73:17 때에야.
그 문제가 바야흐로 풀리려고 한다.
73:17 결국을.
아무리 악인들이 겉으로는 형통한 것 같아도 그들의 위치는 불안정하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발판이 없어 어떤 순간에 추락할지 모를 일이다. 악인들의 궁극적 멸절이 적용되는 그때에 이 논점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계 20:9, 14, 15).
73:17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인의 의문들이 성소의 고요함 속에 녹아들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 문제에 대한 참해답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는 올바른 견해에서 벗어나 악인들의 형통을 과장시켰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73:18 파멸.
시인의 믿음을 회복시킨 것은 이 세상 악인들의 종말, 곧 그들이 형통한 중에 몰락할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관점을 상실함으로써 시인은 악인들에게 종종 내리는 징벌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부터 온 불로 멸망한 것을 잊고 있었다. 바로의 땅이 전염병으로 황폐하게 되었고 그의 군대는 바다에 빠졌음을 잊고 있었다.
73:19 졸지에.
악인들의 형통 혹은 악한 정부의 형통함은 종종 졸지에 무너진다. 이 시에 드러난 문제는 졸지에 이르러올 악인들의 종말을 바라볼 때에야 풀렸다.
73:19 놀람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는 재난(참조 욥 18:11; 24:17; 27:20).
73:20 꿈을…같이.
형통함은 꿈과 같다(참조 사 29:7, 8). 잠자는 자들이 깨어날 때 현실로 돌아온다.
73:20 저희 형상을.
영원의 고요함 속에 있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꿈 같은 인간의 존재를 무시한다. 영원은 사람의 참품성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
73:21 [그래서].
(「제임스왕역」에는 “thus”로 되어 있음-역자 주). 곧 “이는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은 문제를 차분하게 숙고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산란”, 곧 문자적으로 “꽤 까다로워”졌는데, 이 히브리어 낱말은 발효라는 의미에 사용되었다(참조 출 12:34, 39). 그의 마음은 마치 효소의 작용 아래 있는 것처럼 단맛을 잃었다. 풀이 죽은 영혼은 사람의 판단에 손상을 준다. 시인은 영원한 가치가 아닌 겉모습에 따라 한층 비참해진 마음 상태에서 그 문제를 풀려고 노력을 기울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73:21 심장.
참조 시 7:9 주석.
73:22 내가.
이 절에서 이 히브리어 대명사는 맨 앞에 위치해, 강조를 하고 있다.
73:22 우매.
참조 시 92:6; 잠 30:2. 시인은 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73:22 주의 앞에.
만일 시인이 좀 더 혼자 있었다면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는 매우 위험할 뻔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다(참조 시 51:4).
73:23 내가.
이 말이 22절에서처럼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공의를 불평하고 의심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와 함께한다. 그는 내게 머물러 계실 것이다.
23~28절에서 시인은 이 시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을 표명한다. 그 해답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그의 임재와 이생과 영원한 삶을 통한 그의 인도를 인식하는 데 있다. 이 정묘한 구절에 담긴 절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사상과 말 그 어느 것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다.
73:23 내 오른손.
참조 시 18:35; 63:8.
73:24 주의 교훈으로.
시인은 이생에서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와 교훈을 바라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거의 의심할 뻔하였다(참조 시 48:14).
73:24 후에는.
이 생이 마쳐질 때에는.
73:24 영광으로.
시인은 여기서 미래의 삶을 자신이 신뢰하고 있음을 내비친다. 하늘의 영광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원한 삶의 참된 광채, 곧 영광은 악한 사람의 존재 방식인 “형상”, “꿈”, “헛된 과시”와 대조적이다.
73:25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비교될 자가 하늘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내게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Barnes).
땅에서는 주밖에…없나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주는 분이다. 나의 모든 행복은 그분 안에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 몰입됨이 시편의 기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이다(참조 시 42:1, 2; 63:1).
73:26 반석.
문자적으로 “반석”(「제임스왕역」에는 “strength”[힘]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73:26 분깃.
친구도 명예도 부도 그 어떤 지상적인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시인의 행복의 근원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전부였다. 이 절에 자극을 받은 찰스 웨슬리(1707~1788)는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이 지은 6,500개의 찬미가 중 하나를 아내에게 받아 적게 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스러져가는 내 육신과 마음의 힘이시라.”
73:27 주를 멀리하는 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생명이며 그를 멀리하는 것이 죽음이다. 시인은 이런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였다(참조 3~12절).
73:27 음녀같이…떠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종종 결혼 관계와 비교되었다(참조 시 45편; 렘 3:8, 9, 14; 5:7; 13:27; 고후 11:2; 엡 5:25; 약 4:4).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과 사이가 틀어질 때 그들은 결혼 서약에 성실치 못한 것이다. 「제임스왕역」의 “a whoring”(음행 중에)은 전치사 “a”(~하고 있는 중에)와 동명사 “whoring”(음행)으로 구성되었다.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참조 히 10:22.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다(참조 약 4:8).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아름다운 상호 관계가 놓여 있다.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은 더욱 완전히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
73:28 주 여호와를.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야훼(’Adonay Yahweh)인데, 이것은 흔치 않은 결합이다. 시인이 의심 아래 있을 때에는 항상 하나님을 적당히 신뢰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더 이상의 의심은 없고 다만 평온한 신뢰만 있을 뿐이었다.
73:28 전파하리이다.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의심에서 신뢰로 나아갔는지, 시편의 주제인 그 문제를 주 여호와 안에서 어떻게 풀었는지를 남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책임을 깨닫는다. 이 시는 이런 엄숙한 서원으로 끝맺는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시편73편 아삽의 시
오늘 시편73편 아삽의 시를 읽으니 성경 기자도 우리와 똑같이 믿음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유난히 좀 친근하게 느껴지시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세상살이도 해야지, 내세도 준비해야지, 좋게 말하면 대단하지만 솔직히 고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서도 형통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을 기록한 아삽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특권이어야 할 그 형통을 악인들이 더 누리더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고 속이 상했는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걸음이 미끄러질뻔 했다고 말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악인들은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데,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그렇지 않아 시험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혹시 아삽 같은 마음으로 낙심하지는 않으셨나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는 것 같나요, 착한 사람이 잘 되는 것 같나요?
인터넷에 어떤 사람이 이걸 놓고 투표를 하고 있더군요.
시작한지 얼마된지 모르겠지만 18명이 악인이 잘 된다에 표를 던졌습니다.
착한 사람이 잘된다에는 몇명이 표를 던졌을 것 같습니까?
단 1명이었습니다.
재미로 해 본 것이겠지만 사람들이 다 세상이 정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아삽이 미끄러질 뻔 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모를까 계신데 어째서 악인이 잘되는 걸 보고만 계시냐는 것입니다.
아삽은 처음 1절에서 이렇게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니
그는 이런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잖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참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를 쓰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고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믿음이 현실을 보며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2절부터 바로 아삽의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악인이 잘 사는 걸 보고 이해가 안됐지만, 그래도 분명히 끝이 안 좋을거다 생각했는 데 그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죽을 때에도 고통도 없고 그 힘이 강건하더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말로가 비참해야 하는 데 끝까지 형통하다 편안하게 죽더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가운데 몰아넣고는 재앙도 없이 죽더니 지금도 꽃으로 둘러싸여 누워있지 않습니까?
5절부터 9절까지 아삽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의 형통에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남들 다 당하는 고난과 재앙도 없습니다.
교만하고 강포하지만 대개 상임자다 보니 그걸 제재할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나 잘 먹고 살이 쪘는지 눈까지 소복하게 솟아오를 정도입니다.
정말 기분 나쁜 것은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기사에 보니 공직자들 중 1년 만에 1억이 넘게 재산이 불은 사람들이 꽤 많았죠?
작년에 재산 좀 불으신 분 있으십니까?
국민들은 가계빚이 작년 말 3개월 동안 27조원이 늘어나서 가계빚 천조원이 넘어섰다는 데, 이런 기사를 보면 좀 씁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삽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 사람들을 능욕할 뿐 아니라 하늘을 향해 교만한 말을 해도 천벌도 안받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냥 형통한 악인을 보고 몰려드는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 세력도 늘어갑니다.
11절에 보니 그들이 이젠 기세등등해서 이렇게 불경스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초월자일 뿐이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이게 결국 현대인의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삼천년 쯤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죄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지금 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침묵하는 하나님은 결국 인격체가 아니라 우주에 충만한 기운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해석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뉴에이지운동이 동양의 명상 같은 것을 통해서 초월자인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신이 되자 이런 것입니다.
관상기도, 향심기도 같은 것들이 다 뉴에이지와 통하는 것들입니다.
아삽은 이런 지경이 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게 그냥 두시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다보면 세상사가 공평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권선징악이 세상의 원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적으로 악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하루에도 몇 건씩 벌어지니 자식 내놓기도 두렵지 않습니까?
범죄한 악인은 뻔뻔하게 세상을 활보하고,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고도 원통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최근에 나온 영화들이 그런 주제들이 많은 것은 그런 사건들을 보며 우리 마음에도 두려움과 분노가 쌓여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언제 내가 저런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죠.
악덕 기업주는 천문학적으로 재산이 불어가도 만성피로에 쌓여 일하는 근로자들은 집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게 이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다 악인들에게 박해당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 달에 북한에서 또 지하교회 신자들이 33명이나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공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믿는 성도에게 형통한 축복을 주시고, 악인을 좀 징벌하시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왜 이런 부조리와 악덕을 방임하시냐는 게 아삽의 불만이고 우리들의 불만이기도 하죠.
오늘 시편73편에서 그 정답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정답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으니 우리가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 모든 부조리와 혼란과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 곳곳에 이 질문에 대한 단편적인 힌트를 던져 놓으셨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장 28절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악인들이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밀어내니 그냥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2장 4절은 말씀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그러면서 하나님은 회개할 때까지 길이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잡한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까지 인간의 역사를 어느 정도 인간에게 맡겨두십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지만 지구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 안에 자신을 제한하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삽이 분명히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의 마지막 결말입니다.
20절에 보면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고 악인이 망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실 때, 하나님의 인내와 계획된 시간이 다 끝났을 때, 그 때 세상의 모든 악은 심판을 받고 의인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왜 하나님께서 놔두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선한 자의 하나님 뿐 아니라 악한 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악으로 재물을 모으고 그것으로 교만과 패악을 일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결말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하나님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 외면하실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아삽이 어쩌다 악인들로 인해 시험에 들게 되었는지 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삽과 같이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아삽은 보통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역대상16장3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얼마나 그 신실한 믿음이 인정받았으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항상 섬기도록 맡겼겠습니까?
아삽은 성전찬양대의 수장이었고 또 선견자였다고 다른 성경에서 기록합니다.
이 정도 신앙경력을 가진 사람도 실족하여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삽은 그 탁월한 믿음에서 이렇게 미끄러지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악인의 형통에 너무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잘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악인의 형통을 질투하는 마음에 지나치게 그 일만 생각하다 결국 시험에 들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 일에만 너무 주목할 때 믿음에 실족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에만 집중할 때도 점점 믿음은 쇠약해집니다.
현실엔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하나 이상 걸려 있습니다.
그 문제에 집착하면 염려가 엄습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다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점점 침체에 빠지게 되는 걸 번번이 느끼면서도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제만을 묵상하면 필연코 믿음에서 미끄러질 게 확실합니다.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세상일에만 정신을 쏟아도 퇴근 무렵엔 이미 믿음이 허약해지게 됩니다.
너무 바쁘게 하루가 돌아가다 보니 말씀보고 기도할 시간을 낸다는 것이 힘들죠.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보면 믿음이 흔들거리고 뭐가 슬쩍 발을 걸어도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삽의 영적 침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삽에게 고통이 있었다는 것이죠.
26절에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아마도 몸은 병에 시달리고 하루 종일 신경 쓸 일로 심신이 곤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신앙적으로 시험을 당하기 쉽습니다.
내가 힘들 때 주변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다 나아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잘 믿으려고 바둥대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하나님께 화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13절처럼 푸념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했던 시간과 노력들이 다 헛되게 느껴지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날 돌봐주시지 않으면 이제 막 살고 싶다는 유혹도 듭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한 내 삶이 실로 헛되도다.
이 말에서 아삽이 세상과 자신을 보고 얼마나 깊이 낙망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에 낙망하고 미끄러질 일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자주 있겠습니까?
이런 위기를 잘 넘기지 못하면 영적으로 깊이 침체되고 점점 하나님을 멀리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힘들여 교회를 나오고 봉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다 점점 가나안성도들이 되는 것이죠.
내가 믿음이 좀 침체되고 영적 생명이 시들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힘써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삽이 이렇게 미끄러질 뻔하다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아삽은 자기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아무리 머리를 짜내서 문제에 집중해도 오히려 고통만 점점 더해졌다고 합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가정과 직장과 사람 사이의 문제들이 머리를 짜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될 것 같으면 벌써 되었어야죠.
이런 고질적인 환경의 문제들은 쉽게 벗어나지지 않습니다.
전전긍긍하던 아삽은 17절에서 드디어 이렇게 시원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에 시험이 오면 일단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짐이 되고, 말씀과 기도 같은 경건생활도 시큰둥해집니다.
아삽은 어떻게 그 상태를 이기고 성소로 나갔을까요?
아삽의 직업이 성전찬양대 수석이었기 때문에 안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가대원이고 봉사자이니 예배를 빠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하나님께 우리를 묶어두는 장치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크고 작은 봉사를 맡는 것은 교회 지체들을 위해서도 유익이지만 내 믿음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한 주간 힘들고 지치더라도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우리가 삽니다.
그러면 아삽은 구체적으로 성소에서 무엇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를 보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삽이 지은 다른 시인 시편50편을 보면 이 73편과 짝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50편엔 특히 아삽이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특히 제사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을 봐서 제사를 보고 깨달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양을 잡아 상번제라는 번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삽은 성소에 나가 양의 목이 끊어지고 몸이 처참하게 각이 떠져 번제단 에서 불타는 제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는 이 제사를 바라볼 때 그가 깨닫는 것입니다.
시편50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제사로 맺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죄값을 치를 제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아삽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 이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21절과 22절을 보면 거기서 자기의 죄를 통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의인이고 저 악인들만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인 줄 알았는 데 자기의 죄를 대신해서 불타는 제물을 볼 때 자기도 역시 짐승 같은 죄인이었다는 것 알고 양심이 찔렸다고 하지요?
그때서야 속죄할 어린 양이 준비되지 않은 악인의 결말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50편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향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찢는다는 것은 제물이 각으로 떠져 찢겨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속죄의 제물이 없으니 자신의 죄를 자기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죠.
성소에 나갔을 때 아삽은 하나님을 만나고 악인의 종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의 답답한 문제가 드디어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무거운 짐에 짓눌리고 실망과 절망이 몰려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악이 가득하고 어둠과 절망에 빠진 이 세상에 홀로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생명의 길을 환히 열어놓으셨습니다.
아삽이 성소에서 불타는 제물을 볼 때 인생의 결말을 깨달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결말이 깨달아집니다.
이 짧은 꿈같은 인생이 끝나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다는 확신이 들 때 바윗덩이 같이 누르던 내 문제들이 별거 아니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럼 할렐루야하며 천국 가는 것이죠.
아삽의 시를 보면 그가 탄성을 지르며 노래하지 않습니까?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이 없나이다.
이 땅에서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후에 영광으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런 감사와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침체와 절망의 늪에서 쑥 빠져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 순간 마음이 날아갈 듯하며 문제를 털어내고 당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자녀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향해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의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기도가 소중하게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기도를 하나님께서 왜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도의 눈물이 뿌려진 기도를 하나님은 절대 외면하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아이들 어릴 때 어버이 날 가져온 삐뚤 비뚤 글씨로 쓴 편지하나 버리기 힘들지 않습니까?
제 경험으로는 무엇이든 기도한 것은 다 쌓였다 양이 차면 응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다 그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기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음 결혼문제로 기도할 때 반드시 먼저 기도가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이제까지 구한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목표하는 것을 위해 성패에 상관없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신뢰하면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기도는 없습니다
크론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한 젊은 전도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크론병은 원인을 모르게 창자가 부패되어 썩는 병이라고 합니다.
창자 어느 한 군데 염증이 생겨 창자가 터지면 독소가 온 몸에 퍼져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고 합니다.
몇 개월씩 병원에 입원하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고 직장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몸은 꼬챙이 처럼 마르고 나오는 게 한탄과 원망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를 반복하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망만 하고 주저 앉아 있을 일이 아니다, 분명히 이 가운데도 감사할 일이 있을 것이다. 불행을 보지 말고 감사한 것만 찾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그러고 나니 숟가락 들을 힘이 남아있는 것도 감사하고 잠자는 것도 감사하고 매 순간 감사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다 보니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고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저절로 크론병이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성소로 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현실을 이길 능력도 주시지만 기적적인 하나님의 인도도 있다는 것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전도사님처럼 작은 일에 하나님을 향해 자꾸 감사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동행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지난 한 주도 여러 번 미끄러질 뻔 하셨죠?
23절에 아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부족한 믿음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며 찾는 우리를 주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기에 우리가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아삽은 28절에서 이렇게 시를 마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이런 복된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년4월15일
매일말씀묵상. 5월 20일. 시편 73편.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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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편. 믿음이 시험을 받을 때.
1. 73편부터 시편 제 3권이 시작됩니다. 73 편부터 83 편까지 열 한 편의 시에는 [ 아삽의 시 ] 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 73 편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관한 질문들을 다룹니다 . 왜 악인은 형통하고 ,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은 늘 고난가운데 있는가 ! 이것은 이 땅을 사는 모든 성도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
2. 성도의 믿음을 시험하는 현실은 존재합니다 (1~14). 여기서 시인은 악인이 형통하고 고난이나 재앙도 없으며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실족할 뻔했습니다(2).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3).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산다고 했으나 돌아온 것은 고난과 재앙이었습니다(14). 이런 일이 우리 일상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되며,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모두 이 고민을 겪었고 욥의 고통스런 질문을 안고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신실한 성경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에 근거하는 믿음이 아니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인위적 믿음이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고민은 신앙적으로 정당하며 자연스런 믿음의 표현입니다.
3. 시인의 당혹스러움이 해결됩니다 (15~17). 시인은 자기의 고민을 말하려고 했지만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 만일 하고 싶은 말을 다했었더라면 주의 백성들에게 해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5). 말은 중요합니다 . 일단 내뱉은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자기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을 때, 감정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더라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상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형제들에게 하는 말 한 마디가 어떤 영향을 줄지를 알고 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힘들 때 일수록 ,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
4. 그 깊은 고민 속에서 결국 시인은 깨닫게 되는 때는 ,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 즉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깨달은 후에야 , 비로소 이런 일들이 자기 믿음을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과 행하시는 일의 이유와 목적을 다 알아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그분의 전능한 주권과 선하신 성품에 신뢰와 의존을 드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들의 종말’(their destiny)이었습니다. 그들의 결말, 악인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18~20). 악인은 졸지에 망하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5. 회개와 찬송에 이어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21~28).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생각과 고민 때문에 아파하면서(21,22)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이것은 욥과 비슷합니다. 그토록 어리석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 손을 붙잡아주시고 교훈을 가르치시며 마지막에는 영광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6. 이제 시인은 자신이 잠깐 현혹되었던 세상의 부귀와 영광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 하늘에서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정한 보화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 이런 고백은 노래를 부르듯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 이런 고백은 마치 진주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듯 , 깊은 절망과 근심 속에서 나오는 값진 고백입니다 . 세월이 흘러갈수록 육신의 힘은 쇠하고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하나님을 최고의 보화로 알고 살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소망 가운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는 망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선언하면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 아무리 힘든 현실을 만나더라도 , 어떤 악조건이 있다고 할지라도 , 끝까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 복에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일상에서, 믿음이 흔들리는 시험을 받을 때가 무수히 많지만, 힘든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거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저희의 마음과 입술을 지켜주옵소서. 다만 모든 순간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는 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인 것을 늘 기억하며, 피난처가 되시고, 안식이 되시는 주님을 오늘도 변함없이 찾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폭풍 중에도 위로와 평화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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