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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마태복음 17강
본문 : 마태복음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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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빛과 소금인가, 소금과 빛인가 – 국민일보

또한 ‘소금’과 ‘빛’이 붙어서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 5장이 유일합니다. 여기엔 저자 마태의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빛이 아닌 소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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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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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칼럼 (송영일 목사) – 소금과 빛에 대하여 바로 알기

내가 빛이면 내가 있는 곳에는 어둠이 떠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소금이고 빛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빛으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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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uston.kjhou.com

Date Published: 11/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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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6) – 빛과 소금에 대한 강해

세상은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게 해 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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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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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나무위키:대문

예수가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 나온 비유 중의 하나로 “너희는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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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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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 (3) < 교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3) 마 5:13-16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 엿보기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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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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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의 비밀 2

빛의 헬라어는 포스(PHOS)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오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드러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 안에 생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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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cc567.kr

Date Published: 2/5/2022

View: 382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빛 – 설교원고

빛은 스스로 자신을 태워야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녹아야 하듯이 빛이 되려면 타야만 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소금이 되고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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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church.kr

Date Published: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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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

소금과 빛. – 에버하르트 아놀드. {0} Stars on Goodreads 서평. 지금 이 땅에서 산상수훈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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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lough.com

Date Published: 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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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 마태복음 17강 세상 속의 소금과 빛
송태근 목사 마태복음 17강 세상 속의 소금과 빛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소금 과 빛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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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0.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iqu5cDmPQs

[오늘의 설교] 빛과 소금인가, 소금과 빛인가

오늘 본문은 흔히 ‘빛과 소금’으로 알려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확하게 본문의 내용을 보면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 순서로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소금’과 ‘빛’이 붙어서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 5장이 유일합니다. 여기엔 저자 마태의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빛이 아닌 소금에 강조를 두고서 이를 빛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소금과 빛’이라고 해야 명확하게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소금과 빛’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5장 팔복(八福)의 이야기 구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팔복은 모두 ‘너희가 ~하면 복이 있나니, ~할 것이다’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조에서 앞부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면 ‘심령이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림’,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 ‘박해받는’ 등입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 세상 속 성도들의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입니다. 이 역할 후에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이 여덟 가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기준에서는 복을 받는 과정이 전혀 아닙니다. 세상은 그 복의 기준을 재물의 복, 성공의 복으로 매우 좁혀 놓았습니다. 재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입니다. 건강 유지도, 가정의 화목도 재물로 가능하다고 믿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세속적 복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먼저 어떻게든 성공하고 나서 소금처럼 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기꺼이 소금처럼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이 드러나게 되거나 높아지게 되려고 할 때, 예수님은 군중들을 일부러 흩어버리거나 그들을 벗어나서 홀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끝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소금과 같이 살아내신 후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소금의 역할을 할 때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바꾸신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이처럼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엔 소금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빛이 되겠다는 이들은 많이 있는데 소금이 되겠다는 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이 가지 않는 소금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함이 필요하며 의에 주렸고 긍휼한, 그리고 마음의 청결함과 화평함이 필요한, 박해받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것에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꺼이 소금의 자리를 감당하는 이들이 빛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과 위로, 기업과 배부름, 긍휼히 여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하셨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금으로 살아야 마침내 빛이 됩니다. ‘소금과 빛’의 본문을 묵상하며 먼저 소금으로서의 삶을 기꺼이 살아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이주헌 김포 무지개교회 목사◇김포 무지개교회의 담임목사이자 미션카선교회 대표 디렉터로 섬기는 이주헌 목사는 김포한강신도시에 교회를 개척해 여러 선교적 활동을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미션카선교회는 중고승합차와 승용차를 기증받아서 작고 어려운 교회에 무상으로 기증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Korean Journal Houston

마태복음 5:13-14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런 뜻이 아니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빛이 되라”가 아니고 “너희는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소금이 되라”고 아니고 “너희는 소금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Identity(본분)이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녹여 다른 사람들을 썩지 않도록 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음을 아셨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빛이 될 수 있음을 아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두고 말씀하셨다. 그 십자가 사건은 반드시 있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목적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고 헌신을 한다고 세상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을까? 어떤 성도가 비록 자기자신을 소금처럼 녹여 희생하고 불이 되어 소멸할지라도 악한 자는 계속해서 더욱 악을 행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존재라”는 뜻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먼저 내 자신이 소금의 존재로 살면 내가 있는 곳에 소금의 맛이 낼 수 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소금 덩어리라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당연히 썩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처한 곳에서 먼저 내 자신이 등불이라면 당연히 어둠은 사라지고 내가 있는 곳에 빛을 비췰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내가 빛이면 내가 있는 곳에는 어둠이 떠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소금이고 빛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그 빛 안으로 불러 모으면 그 빛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세상의 빛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세상의 빛이 되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빛을 비추시는 빛의 본체시라면, 우리는 그 빛을 받아 비취는 반사빛이다. 빛을 받으면 빛을 반사하게 되어 있다. 어둠 속에 있으면 어둠이 되고 빛을 따라가면 빛이 된다.

초등학교 다닐 때 교실마다 까만 구공탄을 넣어 커다란 난로를 땠다. 구공탄 난로세대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러면 앞쪽에 앉은 친구들은 홍시감처럼 얼굴이 불그레하게 된다. 난로의 열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의 빛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함께 연합하게 산다면 우리는 모두 세상의 빛이다.

이제 누구든지 빛으로 오신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연합하여 따를 때에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오 이제는 어둠의 자녀,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께서는 다음으로 구원받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그의 빛을 받아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빛은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존귀하고 가장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빛으로 오신 그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세상의 빛이다. 생명의 빛을 얻어 세상의 빛이 된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빛이면 빛이 날것이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공존하지 못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었으므로 어두운 세상을 비출 수 있다.

인디언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해는 항상 빛을 발한다. 해가 어둠이 무엇인지를 이해가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컴컴한 굴로 갔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 마자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어둠을 보여줄 수 없었다. 해가 있는 곳에 어둠은 전혀 공존할 수 없다. 해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해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일 뿐이다. 해가 지면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오지만, 어두움은 빛이 있을 때 사라진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낮이 되면 밤은 사라진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

하나님은 모든 빛의 근원이시다. 빛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 따라서 그가 계신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깜깜한 밤에도 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는 반대편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다. 밤에 뜨는 달을 보면서 우리는 밤에도 해가 빛나고 있음을 안다. 이런 자연의 원리는 곧바로 영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빛은 영원하지만 어둠은 일시적이다. 하나님의 빛의 역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가리는 악의 어둠의 세력은 일시적이며, 결국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우리를 방해하는 환난 근심이 없을 수 없으나 그건 반드시 일시적일 뿐이다. 그렇다. 먼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먼저 소금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먼저 빛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먼저 빛의 존재가 되면 빛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송영일목사

새생명교회 담임목사

[email protected]

솔리데오G 작은사랑

제 목 :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6)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많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늘날은/ 교회가 아닌 세상이/ 이 말씀으로 교회를 질타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치 못하니까 욕을 먹는다’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한번쯤 들어본 소리 아닌가요. 그리고 이렇게 비판하는 소리에 가슴이 뜨끔한 적은 없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세상이 읽고 듣고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세상이 이해하고 공감할 내용이었다면 성경을 읽고 들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핵심진리를 세상이 알아듣던가요? 절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은 인간적인 논리나 이성과는 다른 시선으로 기록된 말씀이 이니까요. 그래서 성경말씀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들을 귀를 주셔야 보고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으로 세상이 교회를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의 소금과 빛을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인 삶’으로 알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소금같이 빛같이 살아야 한다’는데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역할이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데 방점을 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에 내포된 진의가/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와 도덕 정도라면 성경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시간을 통하여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금과 빛’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이/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라는 프레임에 매여 있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의를 함께 살피고자 하오니 부디 명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잠깐 졸거나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집중하셔야 합니다. 부디 여기 모인 길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듣고 깨달아지는 은혜가 넘쳐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나 지식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대다수 분들이 오늘 본문을 ‘착한행실을 통하여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는 율법식 설교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동안 들었던 세상적인 관점의 설교는 깨끗하게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게 말씀하시는 올바른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상의 의’라는 옛 프레임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진의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의는 인간들의 논리와 관점으로 선악을 판단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악의 기준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항상 한 문장만으로 그 본문의 진의를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내용은 항상 앞뒤 문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한 문장에 포함된 진짜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앞뒤 문맥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말씀을 확인하려면 앞에 나오는 팔복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확인하기에 앞서서 팔복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팔복의 내용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마 5:3-10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제가 읽었던 본문에서 전반부의 내용만 한번 잘라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그리고 이것을 축약하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라고 기록한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복 있는 사람들로 보이십니까? never~ 복 있는 자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복과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이 팔복의 내용은 각 어절마다 전반부는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후반부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후반부의 내용만 보면 복이 맞는 것 같은데/ 전반부의 내용은 전혀 복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렇게 살면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 있는 자는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인 것이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결국에는 팔복의 내용과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여기까지만 듣고도 ‘아~ 오늘 설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에 대한 내용과는 많이 다르겠네’라고 추론했을 것입니다. 네 당연합니다. 만약 빛과 소금의 역할이 착한행실과 이어져 도덕과 윤리로 결말을 내린다면 제가 이렇게 설교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본문의 내용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내용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소금이 어디서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소금언약이라는 말씀으로 소금이 등장합니다.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지요.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란 말씀은 민18장과 대하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같이 찾아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민수기 18:19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다음은 역대하13:5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기록된 두 말씀은 모두가 소금을 ‘영원불변성’과 ‘세상과 구별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레위기 2장에서도 소금이 등장합니다. 소제에 대한 규례를 언급한 곳이지요. 구약의 모든 제사는 피 제사입니다. 피 흘림이 동반된 제물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소제입니다. 오직 소제만은 피 흘림이 없는 제물/ 즉 빻은 곡식을 제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이 소제를 드릴 때 제물(곡물)에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소금이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우리들은 창세전 언약을 확인해야 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바로 언약의 후손들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란’ 우주가 창조되기도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여/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값없이 구원해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창조된 이유도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은 제물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생명의 피’와 동일한 효력으로 의미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는 진짜 생명의 피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말씀하지요. 그러니까 진짜 소금은 예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소제물을 드릴 때 치는 소금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예수님의 피, 생명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는 ‘너희는 세상과는 구별된 생명의 피를 가진 자’‘언약의 백성’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소금언약과 창세전 언약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 뒤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금이라는 그 자체로서의 본질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소금에 대한 정체성의 이야기이지 부패방지나 어떻게 세상을 개혁하는지와 같은 역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많은 교회나 세상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오해해서/ 오늘 본문을 ‘교회가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교화시켜야 하고/ 구제와 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들의 논리는 소금과 빛의 의미를 세상 속에서 도덕적, 윤리적 역할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구제나 복지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오늘 본문은 소금의 정체성 즉, 그 고유한 짠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지/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소금의 맛을 냅니다. 열심을 내고 노력해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니까 소금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이지요.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 모습이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 짠맛으로 인하여 비난과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으로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세상은 인간적인 판단과 논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보는 안목은 하늘 시선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 종교, 저 종교를 모두 인정해 주는 종교다원주의가 선(善이)고/ 동성애도 성소수자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본주의자라고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라는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종교다원주의는 타락이고 동성애는 추악하고 가증한 죄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는 독선적이라고 한다면 그 독선이 바로 소금이 맛을 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다수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의로울 수 없으며/ 세상에서 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의 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선이고/ 악이라고 하는 것이 악이다’가/ 바로 선악과 사건에서 주는 교훈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것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품고 살아가는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과/ 성도로서의 짠맛은 세상의 그 어떤 논리나 유혹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성도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야만 진짜 소금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다름/ 즉, 세상과 구별되는 그 짠맛을 통하여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고 정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소금이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면/ 빛은 창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빛은 첫 창조가 시작되는 창세기 1장과 새 창조가 시작되는 요한복음 1장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의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지요.

그래서 빛은 의(義)와 하늘(天)을 상징하고 어둠은 죄(罪)와 땅(地)을 상징합니다. 빛은 생명이고 어둠은 사망이지요. 따라서 빛은 하늘과 생명에 속해 있습니다. 반면에 어둠은 땅과 사망에 속해 있지요. 그래서 빛이 비치면 어둠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가 드러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참(眞) 빛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창조의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바로 어둠에 속한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구별하시고 불러내어 교회를 탄생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의 새 창조의 모습이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창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교회탄생의 모습이 온전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첫째 날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불러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듯이/ 둘째 날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궁창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궁창의 히브리원어는 ‘라키아’는/ ‘(금속을) 두들겨 펴다’를 뜻을 가진 ‘라카’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하늘과 땅을 십자가로 연결해 화목케 하신 모습이 궁창을 만드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져(할례, 세례) 죽으셨듯이/ 셋째 날에는 흑암의 깊음의 저주의 바다에서 뭍(육지)가 올라옵니다. 뭍이 어떻게 바다에서 올라올 수 있었나요? 예수님께서 저주의 바다 속에 들어가 생명을 품은 뭍(육지)을 끌어 올리시고/ 당신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하신 죽음으로 교회가 생명으로 살아났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탄생한 교회는 생명이며 빛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넷째 날 밤하늘에 광명체를 만드시어 땅을 비추게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천지창조와 예수님의 새 창조 사역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일치하는 모습으로 포개어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일맥상통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죽음으로 교회가 탄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들에게 ‘빛이 되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서 어둠을 드러내고 정죄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 다음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산 위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산은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시온하면 바로 떠오르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율법으로 제사지내면서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이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 있었던 형식적인 제사와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차 없이 부정해 버리십니다. 너희들이 드리는 제사, 너희들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 모두 가짜라고 말입니다. 진짜가 오면 가짜는 일언지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폐는 진짜 화폐와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들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삶으로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는 자라는 의미이지요. 빛이 비치면 어둠은 드러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그 빛으로 인하여 드러나듯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하여 어둠에 속한 세상은 정죄되고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면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고요. 많은 성도들이 헷갈리는 것이 바로 ‘착한 행실’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착한’이라는 단어 ‘칼로스’는/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나 도덕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다를 뜻하는 ‘토브’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위 즉, 예수님의 의로 행하는 행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착한 행실은 ‘소금의 맛을 내고 빛이 어둠을 드러냄’으로서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제 말씀이 좀 이해가 되시나요? 진리의 말씀은 세상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논리도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지요. 그러다보니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신 분들에게만 믿음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매 맞고 구덩이에 갇혔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진리는 결코 변질되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비진리가 모방하고 흉내 내어도 세상이 감추려고 아무리 덮어도/ 진리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 그래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길 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분들은 거룩을 세상에서 규정하는 도덕이나 윤리, 선하고 착한 모습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세상기준을 쫓아서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소금과 빛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입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맛을 냅니다. 굳이 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 비치므로 어둠을 드러냅니다. 빛을 비추려고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밝히게 해 달라’고 잘못된 지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고 열심을 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미 빛과 소금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시면서 우리들은 빛으로 소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시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세상이 자신들과 다름을 발견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오고 멸시, 천대가 찾아오더라도/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세상과 구별되는 바로 그 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근거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부디 길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솔리데오G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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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특징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소금과 빛은 편만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소금은 바다에 편만해 있고, 빛은 온 세상에 편만해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온 세상에 편만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함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끼리 모이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모였을지라도 다시금 흩어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허무신 이유를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으려고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흩어져서 그곳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는 본질을 지키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은 그 자체의 본질이 있다. 소금은 짜게 하는 성분이 있고, 빛은 밝히는 본질이 있다. 바로 이것을 잃어버리면 소금으로 빛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도 본질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마음(심령)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언행 심사가 다르다고 말이다. 나아가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르고,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본질을 소유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영향력을 미치라는 것이다.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존 맥스웰은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에게 대한 영향력’이라고 말했다. 즉 쉽게 말해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누가 리더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한다. 과연 누가 리더가 될 수 있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리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향력은 영향력인데,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가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미쳐야 한다. 선한 영향력이란 한마디로 다른 이들이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면 본받고 싶고, 따르고 싶고, 나아가 복음을 알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희생(섬김)하라는 것이다.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희생이다. 즉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한번 보자. 소금과 빛은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며, 무엇인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희생 곧 죽음의 삶을 사셨다.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도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지키고, 영향력을 미치며, 희생(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삶을 통하여 이 세상은 점점 더 하나님나라화해 갈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소금과 빛의 비밀 2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정체성, 소금과 빛

1) 소금과 빛의 모순적 정체성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짠 맛을 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맛으로 존재를 드러냅니다. 산상수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입니다. 사라진 듯 한 소금처럼 가진 것을 빼앗기는 듯 할지라도, 십자가의 방법으로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빛은 드러나야 합니다. 감춰진 존재가 아니라, 어둠 위로 번쩍 들려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금처럼 녹아져야 할 정체성만 주신 것이 아니라, 빛처럼 분명히 드러나야 할 정체성으로도 부르셨습니다. 세상이 어두울 때, 그래서 생명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빛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지듯 빛을 내지 않는 성도 역시 세상에 짓밟히는 비참한 꼴이 될 것입니다.

2) 소금과 빛의 위치

소금과 빛은 드러나는 방식 뿐 아니라,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칭하신 본문 13절 말씀에서, ‘세상’은 ‘테스게스’란 원어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지구, 인간 세상을 뜻합니다. 즉, 소금의 자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십자가를 살아냄으로 짠 맛을 발산하는 사명입니다. 이것이 소금이 뜻하는 대사회적 관계로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빛은 자리는 이 땅과 인간사를 넘은 대우주적 관계로 확장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14절 본문의 세상은 ‘코스무’란 원어로, 공중권세가 역사하는 하늘, 우주, 영적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우주와 영적 세계의 빛으로도 존재해야 합니다. 보이는 인간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뿐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도 빛으로 어둠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빛으로의 역할 -하나님을 보이라

빛의 헬라어는 포스(PHOS)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오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드러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세상의 근본이 되는 빛. 우리가 밟은 이 땅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고 영향을 미치는 빛. 이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빛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안의 빛이 세상을 비춤으로 하나님의 존귀함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을 드러낼 때, 하늘의 역사가 작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2. 빛을 가로막는 요소

1) 전통과 인습-산

본문에서,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막고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산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여기서 산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을 뜻합니다. 유대인이 사랑하는 장소, 하나님의 성전과 성산의 자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그 곳입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산이 어떻게 하나님의 빛을 방해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우리가 지켜왔던 ‘종교성’, ‘율법적 요인’이 생명의 빛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전통과 율법에 묶인 종교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 안에 체질화 되어버린 종교적 전통과 율법적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인습과 전통의 종교적 틀에 예수님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틀을 깨뜨리고 율법적 행위를 버림으로 진리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2) 육의 기질

두 번째 빛을 가리는 요소는 ‘말’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여기서 말은 약 9리터의 곡식이 들어가는 흙 항아리 그릇으로, 빛을 가로막는 우리의 육신, 육적 기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르가 발하여지도록 자신의 한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부어진 포스가 감추어지지 않도록, 의지적으로 육의 항아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예배와 금식의 삶이 중요합니다. 내 육적 기질을 깨뜨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3. 빛의 결과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는 착한 행실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집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에서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칭찬과 칭송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2) 착한 행실

성경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착한 행실’을 도덕적인 행위라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행4:9).”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11:24).”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착한 일은 병을 고치고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가 끊어지는 역사가 착함의 역사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자가 착한 자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빛으로 ‘착한 일’을 함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냄을 뜻합니다. 그 때 세상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

책 소개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는 독일 할라(Halle)에서 1907년 부흥운동을 통해 회심하였고, 신학과 철학과 교육학을 공부했으며 학생집회와 여러 가지 모임의 연사로 널리 초빙되었다. 1920년에 작가로서 장래가 보장된 직업과 베를린의 중간 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아놀드는 가족과 함께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자나츠(Sannerz)로 옮겨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산상수훈에 바탕을 둔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 결과로 탄생한 공동체 운동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펴져나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 산상수훈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전한 말씀이다. 그러나 이천 년이 흐르면서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이 중요한 말씀은 해부되었고 분석되어왔다. 그러면서 그의 강력한 요청과 가르침은 상징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에버하르트는 그렇게 생명을 잃어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리기 위해 애써왔다. 그는 산상수훈의 자기 희생적인 요청을 껴안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 그의 강연과 에세이를 모은 이 모음집은 생생하게 매일의 삶 속에서 그대의 어깨 위에 얹어진 짐들과 상처들이 어떻게 치유되고 새롭게 출발될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에버하르트는 우리에게 산상수훈의 말씀이 최종적인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불의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만연된 이 세상이 사랑으로 평화롭게 건설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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