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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주석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11장 =====11:1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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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1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즉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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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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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40-마태복음 11장 – 네이버 블로그
마태복음 11장. Ⅰ.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리스도의 대답 11:1-6. 어떤 학자들은 이 장의 1절을 앞장에 연결시켜 앞장의 끝부분으로 삼는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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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은 예수님께서 선교훈화(10장)를 마치신 다음(11:1)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갈리리 도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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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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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1장 – HANGL NOCR
11:1 분주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마태복음 11:1-6) 어떤 사람은 이 장(章)의 첫 절을 앞 장(10장)과 연결시켜 그 끝 절이라고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1.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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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해석
마태복음 11장 해석. 11.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 … 일반적인 주석에 의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사용 가능한 수준의 폭행 내지 …
Source: biblestudynoteblog.wordpress.com
Date Published: 5/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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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마태복음 11장 흐름정리>. 복음서에서 침례 요한만큼 예수님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도 드물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천국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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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예수님 말씀] 종말의 믿음 없는 세상(마 11:1-30)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신 일들에 대해 무지하게 불평하지 말고, 지혜의 자녀들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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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부르심(마태 11: 28-30) 칼빈의 주석
마태복음 11장 28에서 30절 말씀이 회개의 부르심이라는 칼빈의 가르침이 너무도 소중해서 붙들고 기도하며 나눕니다. 은혜받고 회개하여, …
Source: kwctu.org
Date Published: 8/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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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하나님께 이르는 길 – Godmade
마태복음 11장: 하나님께 이르는 길. 1. 1-15절: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열두 제자에 대한 훈련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십니다.
Source: godmade.tistory.com
Date Published: 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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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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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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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주석
마태복음 제 11장
=====11:1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
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
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
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
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저희 여러 동네 – 여기서 ‘저희'(* , 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
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
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
(report)하게 된다(막 6:30).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
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
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
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 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
을 전하는 것(* , 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11:2
요한이 옥에서 –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세례 요한
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
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
(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
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
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
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
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
로 선포했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 –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
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잇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
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
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
(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세례 요
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제자들을 보내어 –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
(9:14). 그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 , 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
에는 ‘디아’를 ‘뒤오'(* , 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
어보면 (1) 메시야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
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
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
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
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
이 분명하다.
=====11:3
오실 그이(* , 호 에르코메노스) –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
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
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야가 ‘오실그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
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
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
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야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오니이까 –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
(* , 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
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 , 그 오시
는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를 –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
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
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야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
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
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
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야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야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
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야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다리오리이까(* , 프로스도코멘) – 이는 막연히, 수동
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
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
을 읽을 수 있다.
=====11:4
듣고 보는 것을 –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
신의 메시야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
(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
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
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
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
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
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
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
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야
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
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
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
자 하셨던 것이다.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
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
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
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5
소경이 보며 –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
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
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
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
시야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 이적 중 ‘소
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
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
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앉은뱅이, 귀머거리 – 메시야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
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
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
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며 –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
(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야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
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
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
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
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
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
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문둥병자
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
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
(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11:6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
(* )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
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
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
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
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
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
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
(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에수의 약하고 볼
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
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
거가 된다(요 20:31).
=====11:7
저희가 떠나매(* , 투톤 포류오메몬)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
다.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
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
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
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
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
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
신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
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
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
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 , 칼라몬)
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
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
(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
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
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
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
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
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11:8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 , 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
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
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
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
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
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
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
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11:9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
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
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
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
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
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
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
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
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
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
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
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11:10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
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
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
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
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
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
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
(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 , 카타스큐아조)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
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11:11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 ,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
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
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
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
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
(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
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천국에서는 –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
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
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
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
을 의미하기도 한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
(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
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
하는 것이었다(3:2).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
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
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
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
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에수
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
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
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
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
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
(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
을 것 같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
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
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
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
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
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
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
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
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
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
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
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
느니라'(* ,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
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
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
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눅 7:28-30). 실
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
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
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
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
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
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
임을 뜻한다.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
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
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
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
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1:14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 )는 ‘좋
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
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
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
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
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
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
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
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
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
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
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
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
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
(messenger)였던 것이다.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
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
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
다'(* , 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
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
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
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
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11:16
이 세대를 – ‘세대'(* , 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
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
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
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 , 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
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
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 )는 원
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
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
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에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
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제 동무를 불러 –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
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11:17
피리를 불어도…춤추지 않고 –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
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
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
던 것 같다.
애곡하여도…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
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함과 같도다 –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
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
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
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세례 요한에 대해
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
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
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
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
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11:18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
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
다.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
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
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11:19
인자는 와서 –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
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란(단 7:13) 사
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먹고 마시매 –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
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
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먹기를 탐하고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
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
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
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
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
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
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죄인의 친구로다 –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
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
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이런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
본, Vulgate역 등). 아마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점에
서 본 구절은 ‘지헤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
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
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눅 7:29, 30;
Marshall).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
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
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
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한
편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욥 28장; 잠 1:8등), 유대 전승들에
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는 그리스
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지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
의 원천이 되는(잠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
는 것이 적절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
바른 방법이 아닌것 같다.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
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
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
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
이다.
=====11:20
권능(* , 뒤나미스) –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
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
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
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
었다. 에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야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
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
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
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 –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
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
(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망하시되 –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
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
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신
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
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
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11:21
화가 있을진저 – 이 말의 원어 ‘우아이'(* )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
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고라신 –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
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벱새다’에서의 활동
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벱새다 –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
(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
던 것 같다(눅 9:10).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
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
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
(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
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베옷을 입고 –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
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
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재에 앉아 –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
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에 앉
거나 하였으며(욘 3:6), 또 그 위에 눕기도 하고(에 4:3) 심지어는 그 위에서 구르기
도 했다(렘 6:26; 미 1:10). 여하튼 이 두 행위는 모두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것
이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이방인의 도시들에게,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
대 고을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같은 이적과 회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
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제공치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해 보내셨던
것이다(10:6).
=====11:22
심판 날에 – 이는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는데(Bengel), 이때 예수께서는 심판주
(審判主)로 임하실 것이다(10:15; 행 17:31; 벧후 2:9). 한편 예수께서는 이방 도시
보다는 유대인의 성읍인 고라신과 벱새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 이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께서 고라신과 벱새다에 베푼 이적들을 두로와 시돈에다 베푸셨더라면 그 도
시들의 주민은 회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은 이 점을 참작(consideration)하실
것이다. 그리고 (2)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만큼
심판 때에도 아주 공평(公平)하게 판단하실 것이며, 하늘나라의 축복 뿐만 아니라 지
옥의 형벌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롬 1:20-2:16). (3) 많이 받
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이다(눅 12:47, 48).
견디기 쉬우리라(* , 안네크토테론 에스타이)
– 직역하면 ‘훨씬 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로, 그들의 도덕적 태도의 결과로 인한
보다 가벼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11:23
가버나움아 –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리이며(9:1) 활동 무대(4:13)로서 예수께서
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어 어느 성읍들에서보다 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
공하셨다(4:13).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 이 말은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 표현으
로 볼 수 있다. 즉 가버나움은 여태까지 수많은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목격하고 그
영예를 누려왔던 것이다. 실로 하늘나라가 바로 이 성읍에서 역동적으로 확산되고 있
는 시점에서 그들 가버나움은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표현은 바벧론 멸망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한 것으로서 결국
그들의 처참한 멸망을 비소(誹笑)하고 있는 것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하데스'(* )는
히브리어로는 ‘스올'(* )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靈)들의 세계를 뜻했다(눅 16:23;
계 1:18). 따라서 이 말을 저주받은 자들만이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원어의 뜻을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된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늘과 대조를 이루
면서 앞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된다. 한편 예수의 이 예언은 영적 의미에서뿐 아
니라 역사적으로도 성취되었다. 즉 이 두 도시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 되고 말았던 것이다.
=====11:24
심판 날에 소돔 땅이 – 소돔은 그들의 악한 죄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이다(창 19
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
면 그 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그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가버
나움 주민들의 죄악이 엄청난 특권을 부여(附與)받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
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무런 이적도 보지 않았던 소돔의 죄악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는 뜻이다.
=====11:25
그 때에 –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
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
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
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
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 ,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
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
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
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
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
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
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
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
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
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이것을 –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
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숨기시고 –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
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
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
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 –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
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반면 어린아
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감사하나이다(* , 여소몰로구마이 소이) –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
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
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
내고 계신 것이다.
=====11:26
옳소이다 –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
‘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
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 –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
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
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
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
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
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
(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
(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
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
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 ,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
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
케이'(* )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 , 기
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
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 여기서 ‘소원대로'(* , 부레타이)
란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
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
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
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
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11:28
수고하고 –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 )는 현재 분사 능
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
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 –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 )는 현
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
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
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
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다 내게로 오라 –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
(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
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
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
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
던 것이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
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
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
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
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
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
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게 배우라 –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
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너희 마음이 – 여기서 ‘마음'(* ,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
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
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쉼을 얻으리니 –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
으리니'(* ,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
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
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
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
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
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11:30
내 멍에는 쉽고…가벼움이라 – ‘쉽고'(* , 크레스토스)란 ‘부드
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실로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
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
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
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1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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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에게네토 호테 에텔레센 호 예수스 디아타쏜 토이스 도데카 마데타이스 아우투 메테베 에케이덴 투 디다스케인 카이 케뤼쎄인 엔 타이스 폴레신 아우톤
개역개정,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새번역,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지시하기를 마치고, 거기에서 떠나셔서, ㉠유대 사람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셨다. / ㉠그, ‘그들의’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가르치시기를 끝마친 후에 여러 마을에서도 가르치시고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그곳을 떠나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영어NIV,1 After Jesus had finished instructing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n from there to teach and preach in the towns of Galilee.
영어NASB,1 When Jesus had finished giving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 He departed from there to teach and preach in their cities.
영어MSG,1 When Jesus finished placing this charge before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n to teach and preach in their villages.
영어NRSV,1 Now when Jesus had finished instructing his twelve disciples, he went on from there to teach and proclaim his message in their cities.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εγενετο οτε ετελεσεν ο ιησους διατασσων τοις δωδεκα μαθηταις αυτου μετεβη εκειθεν του διδασκειν και κηρυσσειν εν ταις πολεσι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1 et factum est cum consummasset Iesus praecipiens duodecim discipulis suis transiit inde ut doceret et praedicaret in civitatibus eorum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ככלות ישוע לצות את שנים עשר תלמידיו וילך משם ללמד ולקרא בעריהם׃
성 경: [마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제자 파송]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저희 여러 동네 – 여기서 ‘저희'(*, 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report)하게 된다(막 6:30).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호 데 요안네스 아쿠사스 엔 토 데스모테리오 타 에르가 투 크리스투 펨프사스 디아 톤 마데톤 아우투
개역개정,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새번역,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두 제자를’
우리말성경,2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듣고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가톨릭성경,2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영어NIV,2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Christ was doing, he sent his disciples
영어NASB,2 Now when John, while imprisoned, heard of the works of Christ, he sent word by his disciples
영어MSG,2 John, meanwhile, had been locked up in prison. When he got wind of what Jesus was doing, he sent his own disciples
영어NRSV,2 When John heard in prison what the Messiah was doing, he sent word by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2 ο δε ιωαννης ακουσας εν τω δεσμωτηριω τα εργα του χριστου πεμψας δυο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Iohannes autem cum audisset in vinculis opera Christi mittens duos de discipulis suis
히브리어Modern,2 ויוחנן שמע בבית הסהר את מעשי המשיח וישלח שנים מתלמידיו׃
성 경: [마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요한이 옥에서 –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세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로 선포했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 –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있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세례 요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제자들을 보내어 –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 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에는 ‘디아’를 ‘뒤오'(*, 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어보면 (1) 메시야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에이펜 아우토 쉬 에이 호 에르코메노스 에 헤테론 프로스도코멘
개역개정,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새번역,3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말성경,3 예수께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가톨릭성경,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3 to ask him,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영어NASB,3 and said to Him, “Are You the Expected One, or shall we look for someone else?”
영어MSG,3 to ask, “Are you the One we’ve been expecting, or are we still waiting?”
영어NRSV,3 and said to him,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are we to wait for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ιπεν αυτω συ ει ο ερχομενος η ετερον προσδοκωμεν
라틴어Vulgate,3 ait illi tu es qui venturus es an alium expectamus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אליו האתה הוא הבא אם נחכה לאחר׃
성 경: [마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오실 그이(*, 호 에르코메노스) –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야가 ‘오실 그 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야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오니이까 –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 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 그 오시는 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를 –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야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야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야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야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기다리오리이까(*, 프로스도코멘) –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을 읽을 수 있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예수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포류덴테스 아팡게일라테 요안네 하 아쿠에테 카이 블레페테
개역개정,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새번역,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우리말성경,4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너희가 여기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
가톨릭성경,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영어NIV,4 Jesus replied,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
영어NASB,4 Jesus answered and said to them, “Go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ear and see:
영어MSG,4 Jesus told them, “Go back and tell John what’s going on:
영어NRSV,4 Jesus answered them, “Go and tell John what you hear and see: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οις πορευθεντες απαγγειλατε ιωαννη α ακουετε και βλεπετε
라틴어Vulgate,4 et respondens Iesus ait illis euntes renuntiate Iohanni quae auditis et videtis
히브리어Modern,4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להם לכו הגידו ליוחנן את אשר שמעתם וראיתם׃
성 경: [마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듣고 보는 것을 –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튀플로이 아나블레푸신 카이 콜로이 페리파투신 레프로이 카다리존타이 카이 코포이 아쿠우신 카이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 카이 프토코이 유앙겔리존타이
개역개정,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새번역,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 ㉣나병을 포함한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을 말함
우리말성경,5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가톨릭성경,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영어NIV,5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
영어NASB,5 the BLIND RECEIVE SIGHT and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up, and the POOR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영어MSG,5 The blind see, The lame walk,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he wretched of the earth learn that God is on their side.
영어NRSV,5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τυφλοι αναβλεπουσιν και χωλοι περιπατουσιν λεπροι καθαριζονται και κωφοι ακουουσιν νεκροι εγειρονται και πτωχοι ευαγγελιζονται
라틴어Vulgate,5 caeci vident claudi ambulant leprosi mundantur surdi audiunt mortui resurgunt pauperes evangelizantur
히브리어Modern,5 עורים ראים ופסחים מתהלכים מצרעים מטהרים וחרשים שומעין ומתים קמים ועניים מתבשרי ישועה הם׃
성 경: [마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소경이 보며 –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야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 이적 중 ‘소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앉은뱅이, 귀머거리 – 메시야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살아나며 –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야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문둥병자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카이 마카리오스 에스틴 호스 에안 메 스칸달리스데 엔 에모이
개역개정,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새번역,6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또는 ‘의심을 품지 않는’
우리말성경,6 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가톨릭성경,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영어NIV,6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영어NASB,6 “And blessed is he who does not take offense at Me.”
영어MSG,6 “Is this what you were expecting? Then count yourselves most blessed!”
영어NRSV,6 And blessed is anyone who takes no offense at me.”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μακαριος εστιν ος εαν μη σκανδαλισθη εν εμοι
라틴어Vulgate,6 et beatus est qui non fuerit scandalizatus in me
히브리어Modern,6 ואשרי אשר לא יכשל בי׃
성 경: [마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요 20:31).
투톤 데 포류오메논 에릌사토 호 예수스 레게인 토이스 오클로이스 페리 요안누 티 엨셀다테 에이스 텐 에레몬 데아사스다이 칼라몬 휘포 아네무 살류오메논
개역개정,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새번역,7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우리말성경,7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가톨릭성경,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영어NIV,7 As John’s disciples were leaving,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desert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
영어NASB,7 As these men were going away,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s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see? A reed shaken by the wind?
영어MSG,7 When John’s disciples left to report, Jesus started talking to the crowd about John. “What did you expect when you went out to see him in the wild? A weekend camper?
영어NRSV,7 As they went away,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s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look at? A reed shaken by the wind?
헬라어신약Stephanos,7 τουτων δε πορευομενων ηρξατο ο ιησους λεγειν τοις οχλοις περι ιωαννου τι εξηλθετε εις την ερημον θεασασθαι καλαμον υπο ανεμου σαλευομενον
라틴어Vulgate,7 illis autem abeuntibus coepit Iesus dicere ad turbas de Iohanne quid existis in desertum videre harundinem vento agitatam
히브리어Modern,7 המה הלכו להם וישוע החל לדבר אל המון העם על אדות יוחנן ויאמר מה זה יצאתם המדברה לראות הקנה אשר ינוע ברוח׃
성 경: [마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저희가 떠나매(*, 투톤 포류오메몬)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신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 칼라몬)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알라 티 엨셀다테 이데인 안드로폰 엔 말라코이스 엠피에스메논 이두 호이 타 말라카 포룬테스 엔 토이스 오이코이스 톤 바실레온 에이신
개역개정,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새번역,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는 왜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더냐?’
우리말성경,8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냐? 아니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가톨릭성경,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영어NIV,8 If no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fine clothes? No, those who wear fine clothes are in kings’ palaces.
영어NASB,8 “Bu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soft clothing? Those who wear soft clothing are in kings’ palaces!
영어MSG,8 Hardly. What then? A sheik in silk pajamas? Not in the wilderness, not by a long shot.
영어NRSV,8 What then did you go out to see? Someone dressed in soft robes? Look, those who wear soft robes are in royal palaces.
헬라어신약Stephanos,8 αλλα τι εξηλθετε ιδειν ανθρωπον εν μαλακοις ιματιοις ημφιεσμενον ιδου οι τα μαλακα φορουντες εν τοις οικοις των βασιλεων εισιν
라틴어Vulgate,8 sed quid existis videre hominem mollibus vestitum ecce qui mollibus vestiuntur in domibus regum sunt
히브리어Modern,8 ואם לא מה זה יצאתם לראות האיש לבוש בגדי עדנים הנה הלבשים עדנים בבתי המלכים המה׃
성 경: [마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 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 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알라 티 엨셀다테 이데인 프로페텐 나이 레고 휘민 카이 페리쏘테론 프로페투
개역개정,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새번역,9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는 왜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러 나갔더냐?’
우리말성경,9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가톨릭성경,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영어NIV,9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영어NASB,9 “Bu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one who is more than a prophet.
영어MSG,9 What then? A prophet? That’s right, a prophet! Probably the best prophet you’ll ever hear.
영어NRSV,9 What then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헬라어신약Stephanos,9 αλλα τι εξηλθετε ιδειν προφητην ναι λεγω υμιν και περισσοτερον προφητου
라틴어Vulgate,9 sed quid existis videre prophetam etiam dico vobis et plus quam prophetam
히브리어Modern,9 ואם לא מה זה יצאתם לראות אם איש נביא הן אני אמר לכם כי גם גדול הוא מנביא׃
성 경: [마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후토스 에스틴 페리 후 게그랖타이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톤 앙겔론 무 프로 프로소푸 수 호스 카타스큐아세이 텐 호돈 수 엠프로스덴 수
개역개정,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새번역,10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 ㉧말 3:1
우리말성경,10 이 사람에 대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네 앞서 준비할 것이다.’ 말3:1
가톨릭성경,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영어NIV,10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영어NASB,10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BEHOLD, I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영어MSG,10 He is the prophet that Malachi announced when he wrote, ‘I’m sending my prophet ahead of you, to make the road smooth for you.’
영어NRSV,10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See,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υτος γαρ εστιν περι ου γεγραπται ιδου εγω αποστελλω τον αγγελον μου προ προσωπου σου ος κατασκευασει την οδον σου εμπροσθεν σου
라틴어Vulgate,10 hic enim est de quo scriptum est ecce ego mitto angelum meum ante faciem tuam qui praeparabit viam tuam ante te
히브리어Modern,10 כי זה הוא אשר כתוב עליו הנני שלח מלאכי לפניך ופנה רדכך לפניך׃
성 경: [마11:1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예비하리라(*, 카타스큐아조)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아멘 레고 휘민 우크 에게게르타이 엔 겐네토이스 귀나이콘 메이존 요안누 투 밮티스투 호 데 미크로테로스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메이존 아우투 에스틴
개역개정,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새번역,1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여인에게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일어난 적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
가톨릭성경,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영어NIV,11 I tell you the truth: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영어NASB,11 “Truly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not arisen any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the on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영어MSG,11 “Let me tell you what’s going on here: No one in history surpasses John the Baptizer; but in the kingdom he prepared you for, the lowliest person is ahead of him.
영어NRSV,11 Truly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no one has arisen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the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υκ εγηγερται εν γεννητοις γυναικων μειζων ιωαννου του βαπτιστου ο δε μικροτερος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μειζων αυτ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11 amen dico vobis non surrexit inter natos mulierum maior Iohanne Baptista qui autem minor est in regno caelorum maior est illo
히브리어Modern,11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לא קם בילודי אשה איש גדול מיוחנן המטביל אך הקטן במלכות השמים גדול הוא ממנו׃
성 경: [마1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천국에서는 –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3:2).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예수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 이가 당신이냐’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아포 데 톤 헤메론 요안누 투 밮티스투 헤오스 아르티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비아제타이 카이 비아스타이 하르파주신 아우텐
개역개정,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새번역,12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 ㉩또는 ‘침례자’ ㉪또는 ‘폭행을 당한다’ ㉫또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약탈한다’
우리말성경,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침략당하고 있으니 침략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2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영어NIV,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영어NASB,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영어MSG,12 For a long time now people have tried to force themselves into God’s kingdom.
영어NRSV,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απο δε των ημερων ιωαννου του βαπτιστου εως αρτι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βιαζεται και βιασται αρπαζουσιν αυτην
라틴어Vulgate,12 a diebus autem Iohannis Baptistae usque nunc regnum caelorum vim patitur et violenti rapiunt illud
히브리어Modern,12 ומימי יוחנן המטביל עד הנה מלכות השמים נתפשה בחזקה והמתחזקים יחטפוה׃
성 경: [마1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눅 7:28-30).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판테스 가르 호이 프로페타이 카이 호 노모스 헤오스 요안누 에프로페튜산
개역개정,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새번역,13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우리말성경,13 모든 예언자들과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다.
가톨릭성경,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영어NIV,13 For all the Prophets and the Law prophesied until John.
영어NASB,13 “For all the prophets and the Law prophesied until John.
영어MSG,13 But if you read the books of the Prophets and God’s Law closely, you will see them culminate in John, teaming up with him in preparing the way for the Messiah of the kingdom.
영어NRSV,13 For all the prophets and the law prophesied until John came;
헬라어신약Stephanos,13 παντες γαρ οι προφηται και ο νομος εως ιωαννου προεφητευσαν
라틴어Vulgate,13 omnes enim prophetae et lex usque ad Iohannem prophetaverunt
히브리어Modern,13 כי כל הנביאים והתורה עדי יוחנן נבאו׃
성 경: [마1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카이 에이 델레테 뎈사스다이 아우토스 에스틴 엘리아스 호 멜론 에르케스다이
개역개정,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새번역,14 너희가 그 예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면, 요한, 바로 그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우리말성경,14 만약 너희가 이 예언을 받아들이기 원한다면 요한 그 사람이 바로 엘리야다.
가톨릭성경,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영어NIV,14 An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he is the Elijah who was to come.
영어NASB,14 “An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John himself is Elijah who was to come.
영어MSG,14 Looked at in this way, John is the ‘Elijah’ you’ve all been expecting to arrive and introduce the Messiah.
영어NRSV,14 an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he is Elijah who is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ει θελετε δεξασθαι αυτος εστιν ηλιας ο μελλων ερχεσθαι
라틴어Vulgate,14 et si vultis recipere ipse est Helias qui venturus est
히브리어Modern,14 ואם תרצו לקבל הנה הוא אליה העתיד לבוא׃
성 경: [마1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는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messenger)였던 것이다.
호 에콘 오타 아쿠에토
개역개정,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새번역,15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말성경,15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가톨릭성경,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영어NIV,15 He who has ears, let him hear.
영어NASB,15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영어MSG,15 “Are you listening to me? Really listening?
영어NRSV,15 Let anyone with ears liste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 εχων ωτα ακουειν ακουετω
라틴어Vulgate,15 qui habet aures audiendi audiat
히브리어Modern,15 מי אשר אזנים לו לשמע ישמע׃
성 경: [마1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다'(*, 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티니 데 호모이오소 텐 게네안 타우텐 호모이아 에스틴 파이디오이스 카데메노이스 엔 타이스 아고라이스 하 프로스포눈타 토이스 헤테로이스
개역개정,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새번역,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말성경,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들은 마치 장터에 앉아 다른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는 아이들과 같다.
가톨릭성경,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영어NIV,16 “To what can I compare this generation? They are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s and calling out to others:
영어NASB,16 “But to what shall I compare this generation? It is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 places, who call out to the other children,
영어MSG,16 “How can I account for this generation? The people have been like spoiled children whining to their parents,
영어NRSV,16 “But to what will I compare this generation? It is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s and calling to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6 τινι δε ομοιωσω την γενεαν ταυτην ομοια εστιν παιδαριοις εν αγοραις καθημενοις και προσφωνουσιν τοις εταιροι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16 cui autem similem aestimabo generationem istam similis est pueris sedentibus in foro qui clamantes coaequalibus
히브리어Modern,16 ואל מי אדמה את הדור הזה דומה הוא לילדים הישבים בשוקים וקראים לחבריהם לאמר׃
성 경: [마1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이 세대를 – ‘세대'(*, 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 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는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제 동무를 불러 –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레구신 에윌레사멘 휘민 카이 우크 오르케사스데 에드레네사멘 카이 우크 에콮사스데
개역개정,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새번역,17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우리말성경,17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도하는 노래를 불러도 너희는 슬피 울지 않았다.’
가톨릭성경,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영어NIV,17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mourn.’
영어NASB,17 and say,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mourn.’
영어MSG,17 ‘We wanted to skip rope, and you were always too tired; we wanted to talk, but you were always too busy.’
영어NRSV,17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wailed, and you did not mourn.’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λεγουσιν ηυλησαμεν υμιν και ουκ ωρχησασθε εθρηνησαμεν υμιν και ουκ εκοψασθε
라틴어Vulgate,17 dicunt cecinimus vobis et non saltastis lamentavimus et non planxistis
히브리어Modern,17 חללנו לכם בחלילים ולא רקדתם קוננו לכם קינה ולא ספדתם׃
성 경: [마1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피리를 불어도…춤추지 않고 –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던 것 같다.
애곡하여도…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함과 같도다 –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엘덴 가르 요안네스 메테 에스디온 메테 피논 카이 레구신 다이모니온 에케이
개역개정,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새번역,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우리말성경,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때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귀신 들렸다’ 하더니
가톨릭성경,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영어NIV,18 For John came neither eating nor drinking, and they say, ‘He has a demon.’
영어NASB,18 “For John came neither eating nor drinking, and they say, ‘ He has a demon!’
영어MSG,18 John came fasting and they called him crazy.
영어NRSV,18 For John came neither eating nor drinking, and they say, ‘He has a demon’;
헬라어신약Stephanos,18 ηλθεν γαρ ιωαννης μητε εσθιων μητε πινων και λεγουσιν δαιμονιον εχει
라틴어Vulgate,18 venit enim Iohannes neque manducans neque bibens et dicunt daemonium habet
히브리어Modern,18 כי בא יוחנן לא אכל ולא שתה ויאמרו שד בו׃
성 경: [마1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엘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스디온 카이 피논 카이 레구신 이두 안드로포스 파고스 카이 오이노포테스 텔로논 필로스 카이 하마르톨론 카이 에디카이오데 헤 소피아 아포 톤 에르곤 아우테스
개역개정,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새번역,19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자녀들로’
우리말성경,19 인자가 와서 이렇게 먹고 마시니 ‘여기 먹보에다 술꾼 좀 보라. 게다가 세리와 죄인과도 친구가 아닌가?’ 하는구나.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법이다.”
가톨릭성경,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영어NIV,19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they say, ‘Here is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But wisdom is proved right by her actions.”
영어NASB,19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they say, ‘Behold, a gluttonous ma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Yet wisdom is vindicated by her deeds.”
영어MSG,19 I came feasting and they called me a lush, a friend of the riff-raff. Opinion polls don’t count for much, do they? 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
영어NRSV,19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they say, ‘Look,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Yet wisdom is vindicated by her deed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ηλθεν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σθιων και πινων και λεγουσιν ιδου ανθρωπος φαγος και οινοποτης τελωνων φιλος και αμαρτωλων και εδικαιωθη η σοφια απο των τεκνων αυτης
라틴어Vulgate,19 venit Filius hominis manducans et bibens et dicunt ecce homo vorax et potator vini publicanorum et peccatorum amicus et iustificata est sapientia a filiis suis
히브리어Modern,19 ויבא בן האדם והוא אכל ושתה ויאמרו הנה איש זולל וסבא ואהב מוכסים וחטאים ונצדקה החכמה מאת בניה׃
성 경: [마1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인자는 와서 –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란(단 7:13)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먹고 마시매 –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먹기를 탐하고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죄인의 친구로다 –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이런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본, Vulgate역 등). 아마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점에서 본 구절은 ‘지헤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눅 7:29, 30; Marshall).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한편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욥 28장; 잠 1:8등), 유대 전승들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지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잠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것 같다.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토테 에릌사토 오네이디제인 타스 폴레이스 엔 하이스 에게논토 하이 플레이스타이 뒤나메이스 아우투 호티 우 메테노에산
개역개정,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새번역,20 그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우리말성경,20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이 보여 주신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NIV,20 Then Jesus began to denounce the cities in which most of his miracles had been performed, because they did not repent.
영어NASB,20 Then He began to denounce the cities in which most of His miracles were done, because they did not repent.
영어MSG,20 Next Jesus let fly on the cities where he had worked the hardest but whose people had responded the least, shrugging their shoulders and going their own way.
영어NRSV,20 Then he began to reproach the cities in which most of his deeds of power had been done, because they did not repent.
헬라어신약Stephanos,20 τοτε ηρξατο ονειδιζειν τας πολεις εν αις εγενοντο αι πλεισται δυναμεις αυτου οτι ου μετενοησαν
라틴어Vulgate,20 tunc coepit exprobrare civitatibus in quibus factae sunt plurimae virtutes eius quia non egissent paenitentiam
히브리어Modern,20 אז החל לגער בערים אשר רב גבורותיו נעשו בתוכן ולא שבו׃
성 경: [마11:2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권능(*, 뒤나미스) –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야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 –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책망하시되 –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우아이 소이 코라진 우아이 소이 벧사이다 호티 에이 엔 튀로 카이 시도니 에게논토 하이 뒤나메이스 하이 게노메나이 엔 휘민 팔라이 안 엔 샄코 카이 스포도 메테노에산
개역개정,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새번역,21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1 “고라신아! 네게 화가 있을 것이다. 벳새다야! 네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이 두로와 시돈에서 나타났다면 그들은 벌써 오래전에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영어NIV,21 “Woe to you, Korazin! Woe to you, Bethsaida!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영어NASB,21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racles had occurred in Tyre and Sidon which occurred in you,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영어MSG,21 “Doom to you, Chorazin! Doom, Bethsaida! If Tyre and Sidon had seen half of the powerful miracles you have seen, they would have been on their knees in a minute.
영어NRSV,21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deeds of power done in you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υαι σοι χοραζιν ουαι σοι βηθσαιδαν οτι ει εν τυρω και σιδωνι εγενοντο αι δυναμεις αι γενομεναι εν υμιν παλαι αν εν σακκω και σποδω μετενοησαν
라틴어Vulgate,21 vae tibi Corazain vae tibi Bethsaida quia si in Tyro et Sidone factae essent virtutes quae factae sunt in vobis olim in cilicio et cinere paenitentiam egissent
히브리어Modern,21 אוי לך כורזין אוי לך בית צידה כי הגבורות אשר נעשו בקרבכן לו בצור ובצידון נעשו הלא כבר שבו בשק ואפר׃
성 경: [마11:2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화가 있을진저 – 이 말의 원어 ‘우아이'(*)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고라신 –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벳새다 –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던 것 같다(눅 9:10).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베옷을 입고 –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재에 앉아 –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에 앉거나 하였으며(욘 3:6), 또 그 위에 눕기도 하고(에 4:3) 심지어는 그 위에서 구르기도 했다(렘 6:26; 미 1:10). 여하튼 이 두 행위는 모두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이방인의 도시들에게,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대 고을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같은 이적과 회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제공치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해 보내셨던 것이다(10:6).
플렌 레고 휘민 튀로 카이 시도니 아넼토테론 에스타이 엔 헤메라 크리세오스 에 휘민
개역개정,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새번역,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우리말성경,2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더 쉬울 것이다.
가톨릭성경,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영어NIV,22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영어NASB,22 “Nevertheless I say to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i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영어MSG,22 At Judgment Day they’ll get off easy compared to you.
영어NRSV,22 But I tell you, on the day of judgment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than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2 πλην λεγω υμιν τυρω και σιδωνι ανεκτοτερον εσται εν ημερα κρισεως η υμιν
라틴어Vulgate,22 verumtamen dico vobis Tyro et Sidoni remissius erit in die iudicii quam vobis
히브리어Modern,22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י ביום הדין יקל לצור וצידון יותר מכם׃
성 경: [마11:2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심판 날에 – 이는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는데(Bengel), 이때 예수께서는 심판주(審判主)로 임하실 것이다(10:15; 행 17:31; 벧후 2:9). 한편 예수께서는 이방 도시보다는 유대인의 성읍인 고라신과 벱새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 이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께서 고라신과 벱새다에 베푼 이적들을 두로와 시돈에다 베푸셨더라면 그 도시들의 주민은 회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은 이 점을 참작(consideration)하실 것이다. 그리고 (2)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만큼 심판 때에도 아주 공평(公平)하게 판단하실 것이며, 하늘나라의 축복 뿐만 아니라 지옥의 형벌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롬 1:20-2:16). (3)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이다(눅 12:47, 48).
견디기 쉬우리라(*, 안네크토테론 에스타이) – 직역하면 ‘훨씬 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로, 그들의 도덕적 태도의 결과로 인한 보다 가벼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카이 쉬 카파르나움 메 헤오스 우라누 휲소데세 헤오스 하두 카타베세 호티 에이 엔 소도모이스 에게네데산 하이 뒤나메이스 하이 게노메나이 엔 소이 에메이넨 안 메크리 테스 세메론
개역개정,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새번역,23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 ㉭그, ‘하데스’
우리말성경,23 그리고 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들려 올라갈 것 같으냐? 아니다. 너는 저 음부에까지 내려갈 것이다! 네게 베푼 기적들이 소돔에서 나타났다면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영어NIV,23 And you, Capernaum, will you be lifted up to the skies? No, you will go down to the depths.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Sodom, it would have remained to this day.
영어NASB,23 “And you, Capernaum, will not be exalted to heaven, will you? You will descend to Hades; for if the miracles had occurred in Sodom which occurred in you, it would have remained to this day.
영어MSG,23 And Capernaum! With all your peacock strutting, you are going to end up in the abyss. If the people of Sodom had had your chances, the city would still be around.
영어NRSV,23 And you, Capernaum, will you be exalted to heaven? No, you will be brought down to Hades. For if the deeds of power done in you had been done in Sodom, it would have remained until this day.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συ καπερναουμ η εως του ουρανου υψωθεισα εως αδου καταβιβασθηση οτι ει εν σοδομοις εγενοντο αι δυναμεις αι γενομεναι εν σοι εμειναν αν μεχρι της σημερον
라틴어Vulgate,23 et tu Capharnaum numquid usque in caelum exaltaberis usque in infernum descendes quia si in Sodomis factae fuissent virtutes quae factae sunt in te forte mansissent usque in hunc diem
히브리어Modern,23 ואת כפר נחום המרוממה עד השמים עד שאול תורדי כי הגבורות אשר נעשו בתוכך לו בסדום נעשו כי עתה עמדה על תלה עד היום הזה׃
성 경: [마11:2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가버나움아 –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리이며(9:1) 활동 무대(4:13)로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어 어느 성읍들에서보다 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셨다(4:13).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 이 말은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가버나움은 여태까지 수많은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목격하고 그 영예를 누려왔던 것이다. 실로 하늘나라가 바로 이 성읍에서 역동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 가버나움은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표현은 바벧론 멸망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한 것으로서 결국 그들의 처참한 멸망을 비소(誹笑)하고 있는 것이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스올'(*)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靈)들의 세계를 뜻했다(눅 16:23; 계 1:18). 따라서 이 말을 저주받은 자들만이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원어의 뜻을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된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늘과 대조를 이루면서 앞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된다. 한편 예수의 이 예언은 영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성취되었다. 즉 이 두 도시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 되고 말았던 것이다.
플렌 레고 휘민 호티 게 소도몬 아넼토테론 에스타이 엔 헤메라 크리세오스 에 소이
개역개정,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새번역,24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우리말성경,2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가톨릭성경,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영어NIV,24 But I tell you that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Sodom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영어NASB,24 “Nevertheless I say to you that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he land of Sodom i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영어MSG,24 At Judgment Day they’ll get off easy compared to you.”
영어NRSV,24 But I tell you that on the day of judgment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he land of Sodom than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4 πλ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γη σοδομων ανεκτοτερον εσται εν ημερα κρισεως η σοι
라틴어Vulgate,24 verumtamen dico vobis quia terrae Sodomorum remissius erit in die iudicii quam tibi
히브리어Modern,24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י ביום הדין יקל לאדמת סדום ממך׃
성 경: [마11:2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 소돔은 그들의 악한 죄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이다(창 19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그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가버나움 주민들의 죄악이 엄청난 특권을 부여(附與)받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무런 이적도 보지 않았던 소돔의 죄악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는 뜻이다.
엔 에케이노 토 카이로 아포크리데이스 호 예수스 에이펜 엨소몰로구마이 소이 파테르 퀴리에 투 우라누 카이 테스 게스 호티 에크륖사스 타우타 아포 소폰 카이 쉬네톤 카이 아페칼륖사스 아우타 네피오이스
개역개정,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새번역,25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 ㉠또는 ‘찬양합니다’
우리말성경,25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제가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을 지혜롭고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영어NIV,25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영어NASB,25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that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intelligent and have revealed them to infants.
영어MSG,25 Abruptly Jesus broke into prayer: “Thank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You’ve concealed your ways from sophisticates and know-it-alls, but spelled them out clearly to ordinary people.
영어NRSV,25 At that time Jesus said, “I thank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intelligent and have revealed them to infant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ν εκεινω τω καιρω αποκριθεις ο ιησους ειπεν εξομολογουμαι σοι πατερ κυριε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της γης οτι απεκρυψας ταυτα απο σοφων και συνετων και απεκαλυψας αυτα νηπιοις
라틴어Vulgate,25 in illo tempore respondens Iesus dixit confiteor tibi Pater Domine caeli et terrae quia abscondisti haec a sapientibus et prudentibus et revelasti ea parvulis
히브리어Modern,25 בעת ההיא ענה ישוע ואמר אודך אבי אדון השמים והארץ כי הסתרת את אלה מן החכמים והנבונים וגליתם לעוללים׃
성 경: [마11:2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그 때에 –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이것을 –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숨기시고 –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 –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 반면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감사하나이다(*, 여소몰로구마이 소이) –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계신 것이다.
나이 호 파테르 호티 후토스 유도키아 에게네토 엠프로스덴 수
개역개정,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새번역,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우리말성경,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가톨릭성경,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영어NIV,26 Yes, Father, for this was your good pleasure.
영어NASB,26 “Yes, Father, for this way was well-pleasing in Your sight.
영어MSG,26 Yes, Father, that’s the way you like to work.”
영어NRSV,26 yes, Father, for such was your gracious will.
헬라어신약Stephanos,26 ναι ο πατηρ οτι ουτως εγενετο ευδοκια εμπροσθεν σου
라틴어Vulgate,26 ita Pater quoniam sic fuit placitum ante te
히브리어Modern,26 הן אבי כי כן היה רצון לפניך׃
성 경: [마11:2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옳소이다 –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 –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판타 모이 파레도데 휘포 투 파트로스 무 카이 우데이스 에피기노스케이 톤 휘온 에이 메 호 파테르 우데 톤 파테라 티스 에피기노스케이 에이 메 호 휘오스 카이 호 에안 불레타이 호 휘오스 아포칼륖사이
개역개정,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새번역,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택해 계시해 준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영어NIV,27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영어NASB,27 “All things have been handed over to Me by My Father; and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nor does anyone know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anyone to whom the Son wills to reveal Him.
영어MSG,27 Jesus resumed talking to the people, but now tenderly. “The Father has given me all these things to do and say. This is a unique Father-Son operation, coming out of Father and Son intimacies and knowledge. No one knows the Son the way the Father does, nor the Father the way the Son does. But I’m not keeping it to myself; I’m ready to go over it line by line with anyone willing to listen.
영어NRSV,27 All things have been handed over to me by my Father; and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anyon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7 παντα μοι παρεδοθη υπο του πατρος μου και ουδεις επιγινωσκει τον υιον ει μη ο πατηρ ουδε τον πατερα τις επιγινωσκει ει μη ο υιος και ω εαν βουληται ο υιος αποκαλυψαι
라틴어Vulgate,27 omnia mihi tradita sunt a Patre meo et nemo novit Filium nisi Pater neque Patrem quis novit nisi Filius et cui voluerit Filius revelare
히브리어Modern,27 הכל נמסר לי מאת אבי ואין מכיר את הבן בלתי האב ואין מכיר את האב בלתי הבן ואשר יחפץ הבן לגלותו לו׃
성 경: [마11:2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케이'(*)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 기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 여기서 ‘소원대로'(*, 부레타이)란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듀테 프로스 메 판테스 호이 코피온테스 카이 페포르티스메노이 카고 아나파우소 휘마스
개역개정,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새번역,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우리말성경,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영어NIV,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영어NASB,28 “Come to Me, all who are weary and heavy-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영어MSG,28 “Are you tired? Worn out? Burned out on religion? Come to me. Get away with me and you’ll recover your life. I’ll show you how to take a real rest.
영어NRSV,28 “Come to me, all you that are weary and are carrying heavy burdens, and I will give you res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δευτε προς με παντες οι κοπιωντες και πεφορτισμενοι καγω αναπαυσω υμας
라틴어Vulgate,28 venite ad me omnes qui laboratis et onerati estis et ego reficiam vos
히브리어Modern,28 לכו אלי כל העמלים והטעונים ואני אניח לכם׃
성 경: [마11:2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수고하고 –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무거운 짐진 자 –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는 현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다 내게로 오라 –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아라테 톤 쥐곤 무 엪 휘마스 카이 마데테 앞 에무 호티 프라우스 에이미 카이 타페이노스 테 카르디아 카이 휴레세테 아나파우신 타이스 프쉬카이스 휘몬
개역개정,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새번역,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영어NIV,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영어NASB,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영어MSG,29 Walk with me and work with me–watch how I do it. Learn the unforced rhythms of grace. I won’t lay anything heavy or ill-fitting on you.
영어NRSV,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헬라어신약Stephanos,29 αρατε τον ζυγον μου εφ υμας και μαθετε απ εμου οτι πραος ειμι και ταπεινος τη καρδια και ευρησετε αναπαυσιν ταις ψυχαις υμων
라틴어Vulgate,29 tollite iugum meum super vos et discite a me quia mitis sum et humilis corde et invenietis requiem animabus vestris
히브리어Modern,29 קבלו עליכם את עלי ולמדו ממני כי ענו ושפל רוח אנכי ותמצאו מרגוע לנפשתיכם׃
성 경: [마11:2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내게 배우라 –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너희 마음이 – 여기서 ‘마음'(*,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쉼을 얻으리니 –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으리니'(*,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호 가르 쥐고스 무 크레스토스 카이 토 포르티온 무 엘라프론 에스틴
개역개정,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새번역,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말성경,30 내 멍에는 메기 쉽고 내 짐은 가볍다.”
가톨릭성경,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어NIV,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영어NASB,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영어MSG,30 Keep company with me and you’ll learn to live freely and lightly.”
영어NRSV,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 γαρ ζυγος μου χρηστος και το φορτιον μου ελαφρο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30 iugum enim meum suave est et onus meum leve est
히브리어Modern,30 כי עלי נעים הוא וקל משאי׃
성 경: [마11:3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내 멍에는 쉽고…가벼움이라 – ‘쉽고'(*,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실로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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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40-마태복음 11장
마태복음 11장
Ⅰ.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리스도의 대답 11:1-6
어떤 학자들은 이 장의 1절을 앞장에 연결시켜 앞장의 끝부분으로 삼는다.
(1) 그리스도께서 앞장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행하신 성직 수임식 설교가 여기에서는 그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으로 언급된다. 그들의 복음전파는 그들에게 단지 허락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명령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부득불 해야 했다'(고전 9:16).
(2)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전해야 할 것을 마치시자 ‘거기서 떠나셨다'(1절). 아무래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 헤어질 때까지 그들의 선생을 떠나기를 몹시 싫어했던 것 같다. 아이가 혼자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부모가 아이에게서 손을 떼듯이 그리스도는 그의 육체적인 임재 없이도 살아가며 활동하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잠시 떠나가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3) 그리스도는 그에 앞서 제자들을 보내어 ‘니적을 행하고'(마 10:1-8)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기대를 일으키며 그를 영접할 준비를 시킨 성읍들로 ‘가르치며 전파하시기 위해’ 떠나셨다. 이렇게해서 ‘주의 길이 예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을 때 그는 이적을 행하는 것보다는 ‘가르치고 전파하시는’ 일이 더 영광스러운 일인 것처럼 그 일에 종사하셨다. 이적을 행하는 것은 단지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육신을 구원하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셨다(마 10:7). 그럴지라도 그 자신이 복음 전파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멍에를 씌우는 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합당치 않다. 주의 일에 참여하는 일군들이 많고 그 수가 증가함이 우리의 게으름을 핑계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우리의 근면을 자극하는 격려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바쁘면 바쁠수록 우리도 바빠져야 한다. 그러면 그만큼 행해지는 일도 많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가셨다. 그는 잡힐 고기가 아주 많은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셨다.
다음으로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기록되었다(2-6절). 우리는 앞에서 예수께서 요한의 고난을 들으셨다는 기록을 보았다(마 4:12). 이제 우리는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는 것을 본다. 그는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들었다.’ 틀림없이 그는 그 일들을 듣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곤경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듣는 것보다, 특히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 일들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이것은 감옥을 궁전으로 변화시킨다. 그리스도는 양심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사랑을 알리신다.
이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듣고서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냈다. 여기서 그의 제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 보자.
1.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제기한 질문(2,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절). 이것은 진지하고 중요한 질문이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의 말은, 만일 이 사람이 ‘그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겠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데 지쳐서는 안된다. 비록 그가 더디더라도 그를 기다리라. 우리 때에 오시지 않을지라도 오실 그이가 반드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말은, 만일 그들이 이 사람이 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면 의심하지 않고 만족히 여겨 다른 이를 결코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이 그이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요 1:20).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귀중한 증거를 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요 1:33)며 ‘하나님의 보내신 이'(요 3:34)라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으로 더욱더 완전하게 확신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문제들에서 확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외적인 화려함과 권능을 입고서 나타나시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사실에서 걸려 넘어졌다. 그리스도는 이 질문 속에 어느 정도 이런 점이 숨겨 있는 것을 아시고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다(6절). 훌륭한 사람들이라도 일반적인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요한의 의심은 아마도 그 자신의 현재 상황으로부터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죄수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그가 참으로 메시야라면 어째서 그의 친구요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난에 떨어져 이렇게 오랫동안 이 속에 버려져 있게 되는가 하고 의심하도록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께서 옥에 있는 요한에게 가보시지 않은 데는 틀림없이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 이 생각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에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1)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 불신앙이 섞일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신앙이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들, 특별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고난들은 때때로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한다. (3) 선한 사람들 속에 남아 있는 불신앙은 때때로 시련의 때에 믿음을 뿌리째 흔들며 굳게 확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들이라도 불신앙으로 이끄는 시험들에 대해서 자신을 무장시키고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한 최상의 도움들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이 질문과 함께 그리스도께 보낸 것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제자들의 만족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가 비록 죄수로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를 지지하며 시중을 들었다. 그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그래서 그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은 약하고 그들의 믿음은 불안하였기 때문에 가르침과 확증이 필요하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다소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생을 위하여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생을 시기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기를 싫어하였다. 그가 요한의 명성을 가리웠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도 자기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갖기 쉽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도 자기처럼 만족하게 되기를 바랐다. 요한은 처음부터 그의 제자들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보내듯이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려고 애썼다. 사역자들의 하는 일이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의 확실성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그에게 전념해야 한다. 은혜 안에서 장성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알려고 해야 한다.
2.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4-6)
그것은 실로 참된 답변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적 진리에 대한 설득력있는 증거들을 분명하게 설명하도록 하시고 지식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게 하실 것이다.
(1) 그리스도는 그들이 듣고 본 것 중에서 요한에게 고해야 할 것을 그들에게 지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신다.
1)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적의 권능에 대해 본 것을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 너희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눈먼 자가 보고 앉은뱅이가 걷는지를 보았다.”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신적인 권능의 행위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같이 자연의 능력을 지배하며 능가할 수 없다. 소경의 눈을 여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특권으로 이야기되었다(시 146:8). 그러므로 이적들은 분명한 하늘의 보증이며, 이적이 첨부된 교훈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틀림없다. 거짓 기적은 거짓 교훈의 보증으로 이용되지만 참된 이적은 신적 사명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신적 사명을 나타내는 참된 이적들이었다. 그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이적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이 오시리라는 것과 그 때에는 ‘소경들의 눈이 열리리라’는 것이 예언되었었다(사 35:5,6).
2) “그의 복음 전파에 대해 너희가 듣는 것을 그에게 고하라.” 믿음은 비록 봄으로써 확증되지만 들음에서 나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5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로 왕이나 군주들에게로 보냄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겸손과 동정은, 세상에 우리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를 가져 오실 분이 바로 그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 말을 세상의 가난한 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다(사 61:1).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겸비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그의 교훈이 복음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복음은 자기부인을 통해 참으로 겸비해진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그런 자들에게 제공되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자들을 위하여 자비를 쌓아 두신다고 선언하셨다.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고 복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복음을 받고 그것을 마음에 품는다. 복음의 놀라운 효력은 복음의 신적 기원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가난한 자들은 복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2) 그리스도는 ‘그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6절). 고의적으로 그에 대해서 편견을 갖거나 그를 중상하지(그 말의 뜻이 그렇다) 않는 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러므로써 그에게서 복을 받는다. 그리스도에게는 무지하고 생각이 깊지 못한 자들이 실족하기 쉬운 것들이 많이 있다. 그의 외모의 비천함, 나사렛에서의 성장, 그의 생활의 빈곤, 그의 추종자들의 조야함, 높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멸시들, 그의 교훈의 엄격함, 그의 교훈이 가르치는 혈육에 대한 부인,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데에 따르는 고통들, 이런 것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심지어 이스라엘 안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의 넘어짐을 위하여 세워졌다. 이 말은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기가 어려우며, 극복하지 않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Ⅱ. 세례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예로운 증거 11:7-15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몇몇은 요한이 보낸 그 질문을 듣고서 그를 자신과 같이 연약하고 불안하며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같은 명예를 주시는 것을 말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 있는대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 특히 더러는 약점을 보이는 그런 사람들을 좋게 말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숨어서 은거하고 계실 때 무대위에 나타나 그에 대하여 증거하셨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공적으로 나타나 그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고(요 3:29,30; 마 3:11),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이러한 명예를 주신다. 스스로 겸비한 자들이 높아질 것이고, 그리스도는 자기를 명예롭게 하는 자들을 명예롭게 하실 것이다. 요한이 자기의 증거를 마치자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이 자기들의 일을 다 마쳤을 때를 위하여 그들의 명예를 아껴 두신다(요 12:26).
(1)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이 듣는 데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이 떠나자’ 즉 그들이 간 후에 곧바로(눅 7:24) 그에 대하여 이같이 명예로운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볼 때, 그는 요한에게 빈 말을 하시려는 것 같지도 않고 그에 대한 이러한 칭찬을 그에게 알리려고도 하시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에게 합당한 모든 칭찬을 하는데 앞장서야 하지만 빈 말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한다. 자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나 우리에게서나 키워서는 안되는 타락한 성질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단지 그를 칭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요한의 사역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던가를 생각해 보라 너희 스스로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라.” 이점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요한은 광야에서 전파하였다. 만일 선생들이 구석으로 물러난다면 그들 없이 지내기보다는 계속해서 그들을 좇아가는 것이 더 낫다. 만일 그의 가르침이 그렇게 많은 수고를 들여서라도 들을만큼 가치가 있었다면 아주 주의해서 그 가르침을 회상하는 것 또한 틀림없이 가치있는 일이었다. 난관이 많을수록 말씀의 유익은 더 큰 법이다.
2)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그에게 나아갔다. 그런데 양심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호기심을 채우려고 그에게 나아갔다. 말씀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가르침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보고 보여지기 위해 나오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말할 거리를 얻기 위해 나온다. 그리스도는 그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우리는 설교가 끝나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때에 가장 큰 관심이 시작된다. “무엇이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갔느냐?” 그것은 습관이나 친구들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가져 왔느냐? 무슨 지식이나 은혜나 위로였는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절).”
(3) 세례 요한에 대한 칭찬(9-15절) : 이제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너희에게 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 보자.
1)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굳세고 결연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원칙들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었고 말에 있어서 변덕스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박수 갈채의 바람이 신선하고 공정하게 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롯의 격노의 폭풍이 사납고 거세어졌을 때에는 요한은 여전히 똑같았다. 날씨가 어떻든지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증거는 갈대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변덕장이의 증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가 갈대와 같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구하지도 않고 그들의 찌푸린 얼굴을 두려워 하지도 않으면서 계속해서 우리의 일을 수행해 가려는 굳은 결심을 가지면 결국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2)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더냐?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가지 않고 ‘왕궁’에 갔을 것이다. 너희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사람을 보려고 갔다. 그의 의복은 그가 생활하던 광야에 알맞는 것이었고 그가 거기에서 전파한 교훈은 회개의 가르침이었다. 사실 왕궁의 즐거움을 그렇게 모르는 그가 감옥의 공포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바꾸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고행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신앙에서 물러나는 것 같지 않다. 요한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궁에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특성과 지위에 맞게 외모를 꾸미는 것이 합당하다. 복음 전파자들은 왕궁의 대신들처럼 보이게 자신을 꾸며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벌 옷으로 족하는 검약을 배워야 한다.
3) 그에 대한 최대의 칭찬은 그 임무와 사역이었다.
① 그는 선지자였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자기는 그 선지자 그 위대한 선지자 곧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 (매우 유능한 심사원이신)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하셨다(9절). 그리스도의 선구자는 왕이 아니라 선지자이되 구약의 선지자보다 나은 탁월한 선지자였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그 날이 새는 것을 보았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말하였지만 요한을 그를 가리켰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였다.
②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10절). ‘이 사람은 기록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보다 더 위대하다. 말라기 선지자는 요한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그리스도의 선구자라는 사실은 요한을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높이는 큰 우선권이었다. 그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보내진 사자이다. 그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한(요 1:23) 이 말을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섭리들 가운데 많은 아름다움은 그 섭리들의 상호 연결과 통일에 있다.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높인 것은 그가 그리스도 바로 앞에서 갔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은 더욱더 영예스러운 존재들이다.
③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었다'(11절). 그리스도는 그들의 가치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들을 평가하는 법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는 앞선 모든 자들보다 요한을 더 높이신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그의 교회안에서 무슨일이든지 하도록 부르신 자들 가운데서 요한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여자에게서 난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보다 요한을 앞세우신다. 위대함이 외모나 외적인 화려함에 의해 측적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가장 훌륭한 성도들 가장 복받은 자들 즉 요한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들이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천국에는 정도가 각기 다른 영광이 있다. 어떤 영광은 다른 영광보다 더 적다. 모든 그릇이 다 똑같이 완전하지만 크기 용량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성도라도 세상에서 가장 큰 자보다 크며 그보다 더 하나님을 알고 더 사랑하며 더 많이 그를 찬양하고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는다. 여기서 천국이란 말은 다소 은혜의 나라 즉 완전하게 그 나라의 능력과 순결함이 나타나는 복음 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호 미크 로테로스” 즉 그 시대 안에 있는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다'(요 1:15).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tlsidr의 사도들과 사역자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 뿐만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화롭게 계신 사실도 전파하였다. 요한은 복음 시대의 새벽에 왔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의 정오 전에 즉 휘장이 찢어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전에, 성령이 부어지기 전에 물러갔다. 그래서 더 큰 사실들을 발견하고 더 큰 임무에 고용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된 위대함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명시로부터 나오며 그것에 의해 이름 붙여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그처럼 유리하게 빛과 사랑을 받는 ‘천국’의 시대 속에 던져졌다는 사실에 대해 당연히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면 특권이 크면 클수록 그 심판도 클 것이다.
④ 세례 요한에 대한 큰 칭찬은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인정하시고 그가 사역을 시작함으로써 천국을 위하여 주의 백성을 예비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성공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마치 사람들이 무력으로 성을 강탈하고 군중의 힘을 빌어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듯이 ‘침노를 당하나니’ 그와 같이 ‘침노하는 자는 강제로 천국을 빼앗는다.’ 많은 무리가 요한의 사역 영향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첫째, 그들은 천국에 있을 법 하지 않은 무리들이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만한 권리나 자격이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자들로서 거기에서 한 자리를 얻기 위해 분투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침노하는 자들이라고 불려지는 것 같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거기에서 쫓겨나고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올 때, 그때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세리들과 창기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배척한 세례 요한을 믿으므로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우리보다 나은 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훌륭한 예절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전혀 가망이 없는 듯한 많은 사람들을 거룩한 생활로 인도하였다는 사실은 복음 시대의 초기부터 복음이 받은 커다란 칭찬이었다.
둘째, 그들은 끈질긴 무리들이다. 이 침노란 요한의 사역을 따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활력 그리고 그들의 열망과 노력의 진지함을 의미한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자기의 신앙으로 천국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열정과 열심히 요구되는가를 보여 준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은 들어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서 천국은 거룩한 침노를 당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상을 얻기 위해 그리고 안팎으로부터는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달리고 씨름하며 싸우고 몸부림쳐야 한다. 침노하는 자가 강제로 빼앗는다. 큰 구원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은 강한 열망을 가지고 그것에로 향하며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고 구원을 얻으려 하고 그 대가들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축복을 받지 않고서는 그 붙잡은 것을 결코 놓지 않을 것이다(창 32:26). 천국은 결코 빈둥거리는 자들의 안일을 만족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수고하는 자들의 안식이 되도록 계획되었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한 싸움에 뛰어드는 수많은 무리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⑤ 요한의 사역은 복음의 시작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구약 시대가 요한에게서 끝나기 시작하였다(13절). 구약 시대의 계시들은 가까이 온 천국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13절)’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먼저 우리에게 구약의 빛이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가르치신다. 그 빛은 비록 희미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말한 율법과 선지자들 안에서 비추어졌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들을 설명해 주는 신약의 교훈과, 신약의 교훈을 확증하고 설명해 주는 구약의 예언들을 모두 가진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히 11:1). 두 그룹처럼 구약과 신약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성경은, 비록 그 필자들은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가르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죽었고 사도들과 복음서 기자들도 죽었다(슥 1:5).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 1:25). 다음으로 주님의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구약의 빛이 어떻게 치워졌는가를 가르치신다.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도 아침 빛은 촛불을 무색하게 만든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요한이 그가 오신다고 말했을 때 이미 케케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
둘째, 신약 시대가 요한에게서 동트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곧 오리라고 한 엘리야였기'(14절) 때문이다. 요한은 두 언약들을 연결짓는 고리와 같았다. 구약을 종결짓는 예언은 ‘보라 내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 4:5,6)는 것이었다. 그 말은 요한 때까지 예언되었고, 그 다음에 그것이 성취됨으로 예언하기를 그쳤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신약의 엘리야라는 사실을 중요한 진리로 말씀하신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올 자이며(눅 1:17), 특별히 예언된 대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릴’ 자였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즐겨 받을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사실이 잘 받아들여들지를 의문하신다. 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든지 않하든지 간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들의 편견에 대해서 그들을 책망하신다. “만일 ‘너희가 그를 즐겨 받을진대’ 또는 만일 너희가 요한의 사역을 약속된 엘리야의 사역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가 너희에게 엘리야가 될 것이며, 너희를 준비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에 관한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주이시고 요한은 엘리야이다.
셋째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주의를 기울이라는 엄한 명령과 함게 이 강화를 끝맺으신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절). 이 말씀은 그 사실들이지만 그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중요하며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다. 무엇이든지 들은 귀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을 듣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은 그가 이미 우리에게 주신 능력들을 바르게 사용하고 개선하는 것 되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들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독사처럼(시 58:4) 자기들의 귀를 막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
Ⅲ.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비교와 회개치 아니하는 고들들에 대한 경고 11:16-24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대하여 계속해서 칭찬하시다가 여기서 갑자기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요한의 사역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사역을 받되 헛되이 받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을 하기 시작하셨다. 우리는 그 세대에 관해서 예수께서 ‘그들을 비유하신 대상을 볼 수 있으며, (16-19절), 주께서 예로 드신 특정한 장소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가 그 장소들을 비교하신, 대상을 볼 수 있다(20-24절).
1. 그 세대에 관한 비유(16-19)
대부분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불신앙과 강퍅함 속에 머물러 있었다. 요한은 위대하고 유익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처한 세대는 말할 수 없이 무익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그래서 그에게 합당하지 않은 세대였다. 선한 사역자들이 살고 있는 곳의 나쁜 점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리스도는 요한을 칭찬하시고 나서 그와 함게 살면서도 그의 사역으로 인해 이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비유로써 설명하신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16절). 그 비유는,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어른들이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모양을 흉내낸 유대의 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행하는 어떤 풍속으로부터 취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았다. 그와 같이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의 사역 중 어느 것도 그 세대에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그 비유는 다음의 다섯 가지 관찰에서 그것을 밝히고 설명함으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영혼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다양하고 적절한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신다(17절).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신다. 비유에서는 이 사실이 그가 우리를 향하여 피리를 부는 것과 애곡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소망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복음의 귀중한 약속들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피리를 불었고,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율법의 무서운 위협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곡하셨다.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섭리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피리를 불었고, 몹시 불행하고 고통을 주는 섭리들 속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곡하셨다.
그 비유의 설명 속에서 요한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각기 다른 성향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요한은 와서 ‘먹지도않고 마시지도 않으므로 그들을 향하여 애곡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한의 행위가 틀림없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이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은 그가 전하는 교훈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말하는 바가 자신의 교훈과 일치하는 사역자가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유익을 잘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역자들의 설교라도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므로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었다.’ 그리스도는 어떤 특별한 엄격함이나 금욕적인 생활을 꾸미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귀셨다. 요한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웃는 얼굴에 이끌려질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것을 배웠다(고전 9:22).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전 6:6,7).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은사들을 받는다는 사실을 특별히 유의하라. 어떤 사람들은 보아너게 곧 우리의 아들들과 같고 다른 사람들은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들과 같다. 그럴지라도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신다'(고전 12:11). 그러므로 우리는 그 두 부류의 사역자들 중 어느 한 쪽이든지 비난해서는 안되고 그들 모두를 칭찬하고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취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효과가 없다. ‘너희가 춤추지 않고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일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장 즐거운 일들에도 이끌리지 않고 가장 두려운 일들에도 놀라지 않으며 가장 명백한 일들을 보고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경의 목소리도 듣지 않고, 이성이나 경험, 섭리, 양심, 관심의 목소리도 듣지 않는다면 대체 더 이상 어떤 일이 행해질 수 있겠는가?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들의 수고가 성취도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할 때, 바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들과 설교들에도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준다.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는가?”(사 53:1).
(3) 일반적으로 은혜의 수단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강퍅하다. 그들은 신실한 전도자들과 그들의 말에 대해 편견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다. 이 세대가 그와 같이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믿으려고 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욕하고 그들을 가장 나쁜 자들로 만들려고 애쓴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그들은 저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요한의 엄격함과 침묵을 우울증과 일종의 귀신들림 정도로 돌려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들은 그의 자유롭고 친절한 교제를 사치스럽고 육신을 기쁘게 하는 더욱 나쁜 습관으로 돌렸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떤 비난도 이보다 더 불쾌하고 터무니 없을 수 없었으며 어떤 것도 이보다 더 거짓되고 부당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마 15:3) 어떤 사람도 결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세상의 치욕과 멸시를 받는 그런 자기 부인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점의 흠도 없는 순결과 결코 비할 데가 없는 탁월함도 언제나 ‘혀의 비난을 막는’ 울타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어떤 사람의 가장 훌륭한 행동이 우리에 대한 가장 나쁜 비난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즉 그들이 이제까지 사귀었던 사람들 중의 최고의 친구였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찬이며 또한 영원히 그의 칭찬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사실을 비난하는 자들은 그 유익을 상실하였다.
(4) 그들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다.’ 그들은 아이들처럼 어리석고 고집이 세며 경솔하고 놀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지각에 있어서 자신이 어른임을 보인다면 그들에게 약간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장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게으름을 피우는 곳이며(마 20:3) 다른 사람들에게는 세상적인 일을 하는 곳이다(약 4:13).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곳은 떠들고 노는 장소이다. 그들의 머리와 손과 마음은 세상으로 가득 찼다. 즉 다시 말해서 말씀을 막아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세상의 염려들로 가득 찼다. 이와 같은 그들은 장터에 있으며 거기에 앉아 있다. 그들의 마음은 이러한 것들을 신뢰하며 그것들 곁에 머무르려고 한다.
(5) 비록 은혜의 수단들이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오용될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이용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흠정역 성경에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절).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이시다. 그 안에는 지혜의 보화들이 감추어 있다. 복음은 지혜 곧 하늘로 내려온 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낳아지고 또한 위로부터 다시 낳아진다. 그들이 곧 지혜로운 자녀들이다. 이 ‘지혜의 자녀들이 지혜를 옳다 인정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계획들에 동의한다.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환영하므로 하나님을 옳다 인정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든지간에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과 거리끼는 것이 될 때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고전 1:23,24)가 되며,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의 자녀들로 옳다 함을 받은 지혜’가 된다. 어떤 사람들의 불신앙이 그의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비난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그는 참되시며 또한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의 보증을 보임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고전 1:25). 우리가 그 일을 행하든지 행하지 않든지 간에 그 일은 행해질 것이다. 그 세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그와 같은 자들 속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 그때 있었던 것이 그 이후로 계속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더라'(행 8:24).
2. 그리스도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에 대한 경고(20-24)
‘그때에 예수께서 그 고을들을 책망하기 시작하셨다'(20절). 그는 오래 전에 그곳들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마 4:17). 그리고 지금에야 이르러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셨다. 먼저 좀더 부드러운 방법이 사용되어 오기 전에는 거칠고 싫은 방법이 취해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자주 책망하려고는 않으신다. 지혜는 먼저 초대한다. 그러나 그 초대가 무시되면 그때 지혜는 책망한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방법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책망을 받기 시작한다.
(1) 그들에게 부과된 죄 : 가장 부끄럽고 불쾌한 그들의 죄는 그들이 회개치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강퍅하여 회개치 않음은 복음을 받는 무리들이 범하는 가장 파멸적인 죄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전한 중대한 가르침은 회개였다. 피리를 불고 애곡하는 것 가운데 계획된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길을 바꾸며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이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다른 죄들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자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를 책망하고 마침내 강퍅함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절망적이며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임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그 죄에 대해 ‘그들을 책망하셨다.’
(2) 그 죄의 악화 : 그 고을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곳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능들에 의해 설득되어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의 법을 순종해야 했었다. 육신의 질병이 치유는 그들의 영혼의 치유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회개라는 권유가 강하면 강할수록 회개치 않는 죄는 더욱 사악하고 따라서 그 심판도 더욱 중하여질 것이다.
1) 여기서 고라신과 벳새다가 예로 들어진다(21,22절). 그 고을들은 각각 자기의 저주를 받는다. 화가 있을진저 화가 고라신아 있을진저 벳새다야(21절).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만일 그 복이 무시되면 그는 저주를 예비하신다. 그의 저주는 다른 모든 저주들 가운데서도 가장 두렵다. 이 두 성읍들은 부유하고 사람이 많이 살았다. 벳새다는 최근에 분봉왕 빌립에 의해 시로 승격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도들 중에서 적어도 세 명은 그 성읍에서 불러내셨다. 이 성읍들은 이처럼 크게 은혜를 입었다. 이 후에 곧 이 성읍들은 쇠퇴하여 초라하고 비천한 촌락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죄는 치명적으로 성읍들을 파멸시키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처럼 확실하게 이루어진다.
이제 고라신과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에게 비유된다. 그리스도는 그 성읍들을 겸비케 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사실들을 보여 주신다. 첫째,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그렇게 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 성읍들이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해진 이적들과 전파된 말씀을 받았다면 그들은 벌써 니느웨성이 한 것처럼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 가운데 사시며 복음을 전하셨다면 지금 계신 곳에서보다 거기에서 틀림없이 더 많은 선을 행하셨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럴지라도 그는 얼마동안 그의 계시는 곳에서 비록 그의 사역자들이, 바라는 만큼의 성공을 보지 못할지라도 그렇게 행하도록 계속해서 격려하셨다. 우리의 회개는 느리고 더디다. 그로나 그들의 회개는 신속했을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가볍고 피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을 만큼 깊고 진지했을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심판날에’ 그 성읍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2절).
2) 여기서 가버나움은 특별히 더 정죄받는다(23절). “너 가버나움아.”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일용할 양식과 같았다. 그래서 옛날의 만나처럼 멸시되고 하찮은 떡으로 불리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들려주신 달콤하고 즐거운 많은 은혜의 강화가 전연 쓸모없게 되자 여기서 그는 그들에게 두려운 진노의 강화를 들려 주신다.
우리는 여기서 가버나움의 운명을 본다.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23절). 능력과 순수함에서 복음을 받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까지 높아진다. 그들은 하늘로 들어 올려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땅에 집착해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늘로 들어 올려지지 않는 것을 감사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외적인 특권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그 특권들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단지 그에 대한 보응의 불을 붙일 것이다. 절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더욱더 치명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라신의 운명이 소돔의 운명과 비교되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만일 가버나움이 누린 은혜의 수단들을 소돔이 받았다면 소돔이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만일 이 권능들이 그들처럼 악한 소돔 사람들 가운데서 행해졌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고 그 성이 오늘날까지 용서해 주시는 자비의 기념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큰 죄라도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회개에 근거해서 용서되며 아무리 큰 파멸도 막아질 것이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4절).
Ⅳ.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청 11:25-30
(1) 그리스도는 여기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의 비밀들을 나타내신 그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25,2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말씀이 대답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 말씀이 앞에 나타난 우울한 생각들에 대해 아주 위로를 주는 회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생각을 함으로써 원기를 되찾으신다. 그리고 그 생각을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해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리신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우리를 낙담케 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커다란 격려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그 생각들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찬양의 노래는 의기소침해지는 영혼에 잘 듣는 최상의 강심제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생각들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는 이 말씀에 호소할 수 있다.
1) 예수께서 하나님께 붙이시 칭호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우리가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양에 의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자비를 아버지로 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자비를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서 받을 때 그 자비는 갑절이나 은혜롭고 능력 있게 되어서 마음으로 더욱 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든다.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고마워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합당한 태도이다. 우리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올 때 우리는 또한 그가 천지의 주재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나오게 하며, 그러면서도 모든 악에서 우리를 지키실 수 있고 또한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그에게 안심하고 나오게 만든다.
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감사한 일 :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란 ‘평화에 관한 일'(눅19:42)이다. 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일들은 옛부터 지혜롭고 슬기 있는 많은 사람들, 곧 학식과 세상적인 지략에 뛰어난 자들에게서 숨기워져 왔고 지금도 숨겨져 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 1:21).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와 상태의 신비들에 깊이 파고들 수 있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은 천국의 신비들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무지하고 잘못된 생각을 갖는다.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복음의 비밀들에 관해서는 어둠 가운데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 아이들이라도 그 비밀들의 거룩게 하는 구원의 지식을 갖는다. ‘아버지여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나이다.’ 세상의 학식 있는 자들은 복음 전도자들이 되도록 택함을 받지 못하였으나 ‘세상의 미련한 것들'(고전 1:26-29)은 택함을 받았다. 슬기로운 자들과 어린 아이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능과 학식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많은 지력을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그것들을 자랑하고 거기에 안주하고 더 이상 앞을 내다보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이러한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옳소이다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의 문제에 있어 아버지의 뜻에 동의하신다. 옳소이다. 하나님께서 즐거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수 있는 방법을 택하시게 하라. 우리는 왜 어부 베드로는 사도가 되어야 하고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 은혜와 분배 방법을 아주 감사함으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들이 나타내어졌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어졌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이 영예는 세상이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워졌다’는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 베풀어진 그 자비를 크게 돋보이게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더욱 밝게 빛나게 되었다(고전 1;27,31).
(2)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초청.
1) 이 부름 혹은 이 초청을 이끌어들이는 엄숙한 머리말이 있다.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권위를 앞에 놓으시고 다음에 신임장을 제시하신다.
그는 여기서 우리 앞에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신다(27절).
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위임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고, 그가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그런 조건 위에서 변절한 세상에 화평과 행복을 주실 권한을 위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위임 받으셨으며, 그 목적을 위해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이 사실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격려한다. 모든 능력과 보화가 그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중보자 즉 우리에게 그 두 가지 모두를 주시는 복되신 중보자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에 유의하고, 이러한 불행한 화를 막기 위하여 주 예수의 중재에 복종하며 그의 중재를 지키기 위하여 계약을 맺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가지신 친밀성 :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아주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셨다. 두 분 다 서로를 완전하게 아셨기 때문에 이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어떤 실수도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약이 뒤집어 지고, 정해진 조처가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에 그리스도는 ‘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를 덧붙이신다.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님을 앎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기 때문이다(고후 4:6).
2)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제언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하시는 제사장이시오 왕이시오 선구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초청된다.
① 우리는 우리의 안식처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 안에서 쉬어야 한다(28절). 수고하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초청 받는 사람들의 특성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다. 이것은 지쳐 있는 자에게 알맞는 말씀이다.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죄의 짐 즉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죄를 무거운 짐으로 알고 그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은 모두,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 그리스도 안에서 쉬도록 초청 받는다. 다시 말해서 죄의 악함, 즉 자기 자신의 죄의 악함을 깨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령으로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실로 자기 죄를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초청받는다. 이것은 용서와 화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이다. 용서와 화평을 얻기 전에 먼저 보혜사(흠정역은 위로자-역주)가 책망해야 한다(요 16:8). 그 초청은 ‘내게로 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끝을 붙잡음으로써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어떻게 황금홀(golden sceptre)을 내미시는가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 오는 것은 지치고 무거운 짐진 죄인들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우리는 기꺼이 그로 말미암아 그 자신의 방법대로 그리고 그 자신의 조건 위에서 값없이 구원 받으려면 그를 우리의 의사요 변호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에게 오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이다. 특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쉼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얻기 위해 산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오는 지쳐 있는 심령들에게 확실한 안식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안에, 그의 사랑 안에 “쉼”이 있다.
② 우리는 우리의 통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29절). 나의 멍에를 메라.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쉼”이란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고된 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목에 멍에를 메기도 하신다. 지쳐 있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불러 멍에를 씌우는 것은 마치 고통받는 자들에 고통을 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말씀의 타당성은 ‘나의’라는 말에 있다. “너희는 너희를 지치게 만드는 멍에를 메고 있다. 이제 그 멍에를 벗어버리고 너희를 쉬게 해 줄 내 멍에를 메어 보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다. 그리스도는 그 멍에를 이끄셨다. 왜냐하면 그가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그 멍에를 이끄신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멍에란 고된 어떤 일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일 짐승이 끈다면 멍에는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 명령은 제한되어 있다(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너희는 그 멍에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명령들이라는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 그 멍에에는 순종하는 목을 스쳐 상처를 내거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아무 것이 없다. 오히려 거기에는 우리의 힘을 새롭게 할 것이 많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연결된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들의 특성이 다 그와 같다. 그의 모든 명령은 한 마디로, 달콤한 한마디 즉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 멍에가 처음에는 약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쉽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그 멍에를 쉽게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은 가벼운, 매우 가벼운 짐이다. 이 짐 자체는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처럼 가볍다. 바울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 짐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부른다(고후 4:17). 고난이 많고 오래 갈수록 또한 위로도 많고 오래 간다.
③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그에게 배우려고 애써야 한다(29절). 그리스도는 위대한 학교를 세우시고서 우리를 그의 학생이 되도록 초청하셨다. 우리는 직접 그 학교에 들어가서 그의 학생들과 어울려 매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영으로써 가르치시는 교훈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처럼(엡 4:20)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생이시며 또한 학과(lesson)이시고 안내자이시며 또한 길이시고 만유의 만유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배워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는 온유하시므로 무지한 자들을 동정하실 수 있다. 유능한 많은 교사들이 성급하고 경솔한데, 그 점이 우둔하고 이해가 더딘 학생들에게는 큰 낙담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자들을 참으시며 그들의 지각을 열어 주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 그는 또한 ‘겸손하시다.’ 그는 불쌍한 학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초심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는 근본 원리들 즉 갓난 아이들에게 젖과 같은 그런 것들을 가르치신다. 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수용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로 자신을 낮추신다. 그와 같은 선생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영혼의 안식은 사람들이 다른 무엇보다 바라는 안식이다. 우리 마음에 쉼을 얻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안식을 얻고 거기서 크게 만족을 얻는다.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고, 그 감정에 풍성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경험한다. 그 사랑은 영구히 고요함과 확신을 준다. 이 안식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모든 자들이 그와 함께 누리게 되어 있다.
#1 Our Divine Redeemer never was weary of his labour of love; and we should not be weary of well-doing, for in due season we shall reap, if we faint not.
#2-6 Some think that John sent this inquiry for his own satisfaction.
Where there is true faith, yet there may be a mixture of unbelief.
The remaining unbelief of good men may sometimes, in an hour of temptation; call in question the most important truths.
But we hope that John’s faith did not fail in this matter, and that he only desired to have it strengthened and confirmed.
Others think that John sent his disciples to Christ for their satisfaction.
Christ points them to what they heard and saw.
Christ’s gracious condescensions and compassions to the poor, show that it was he that should bring to the world the tender mercies of our God.
Those things which men see and hear, if compared with the Scriptures, direct in what way salvation is to be found.
It is difficult to conquer prejudices, and dangerous not to conquer them; but those who believe in Christ, their faith will be found so much the more to praise, and honour, and glory.
#7-15 What Christ said concerning John, was not only for his praise, but for the people’s profit.
Those who attend on the word will be called to give an account of their improvements.
Do we think when the sermon is done, the care is over? No, then the greatest of the care begins.
John was a self-denying man, dead to all the pomps of the world and the pleasures of sense.
It becomes people, in all their appearances, to be consistent with their character and their situation.
John was a great and good man, yet not perfect; therefore he came short of glorified saints.
The least in heaven knows more, loves more, and does more in praising God, and receives more from him, than the greatest in this world.
But by the kingdom of heaven here, is rather to be understood the kingdom of grace, the gospel dispensation in its power and purity.
What reason we have to be thankful that our lot is cast in the days of the kingdom of heaven, under such advantages of light and love! Multitudes were wrought upon by the ministry of John, and became his disciples.
And those strove for a place in this kingdom, that one would think had no right nor title to it, and so seemed to be intruders.
It shows us what fervency and zeal are required of all.
Self must be denied; the bent, the frame and temper of the mind must be altered.
Those who will have an interest in the great salvation, will have it upon any terms, and not think them hard, nor quit their hold without a blessing.
The things of God are of great and common concern.
God requires no more from us than the right use of the faculties he has given us.
People are ignorant, because they will not learn.
#16-24 Christ reflects on the scribes and Pharisees, who had a proud conceit of themselves.
He likens their behaviour to children’s play, who being out of temper without reason, quarrel with all the attempts of their fellows to please them, or to get them to join in the plays for which they used to assemble.
The cavils of worldly men are often very trifling and show great malice.
Something they have to urge against every one, however excellent and holy.
Christ, who was undefiled, and separate from sinners, is here represented as in league with them, and polluted by them.
The most unspotted innocence will not always be a defence against reproach.
Christ knew that the hearts of the Jews were more bitter and hardened against his miracles and doctrines, than those of Tyre and Sidon would have been; therefore their condemnation would be the greater.
The Lord exercises his almighty power, yet he punishes none more than they deserve, and never withholds the knowledge of the truth from those who long after it.
#25-30 It becomes children to be grateful.
When we come to God as a Father, we must remember that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which obliges us to come to him with reverence as to the sovereign Lord of all; yet with confidence, as one able to defend us from evil, and to supply us with all good.
Our blessed Lord added a remarkable declaration, that the Father had delivered into his hands all power, authority, and judgment.
We are indebted to Christ for all the revelation we have of God the Father’s will and love, ever since Adam sinned.
Our Saviour has invited all that labour and are heavy-laden, to come unto him.
In some senses all men are so.
Worldly men burden themselves with fruitless cares for wealth and honours; the gay and the sensual labour in pursuit of pleasures; the slave of Satan and his own lusts, is the merest drudge on earth.
Those who labour to establish their own righteousness also labour in vain.
The convinced sinner is heavy-laden with guilt and terror; and the tempted and afflicted believer has labours and burdens.
Christ invites all to come to him for rest to their souls.
He alone gives this invitation; men come to him, when, feeling their guilt and misery, and believing his love and power to help, they seek him in fervent prayer.
Thus it is the duty and interest of weary and heavy-laden sinners, to come to Jesus Christ.
This is the gospel call; Whoever will, let him come.
All who thus come will receive rest as Christ’s gift, and obtain peace and comfort in their hearts.
But in coming to him they must take his yoke, and submit to his authority.
They must learn of him all things, as to their comfort and obedience.
He accepts the willing servant, however imperfect the services.
Here we may find rest for our souls, and here only.
Nor need we fear his yoke.
His commandments are holy, just, and good.
It requires self-denial, and exposes to difficulties, but this is abundantly repaid, even in this world, by inward peace and joy.
It is a yoke that is lined with love.
So powerful are the assistances he gives us, so suitable the encouragements, and so strong the consolations to be found in the way of duty, that we may truly say, it is a yoke of pleasantness.
The way of duty is the way of rest.
The truths Christ teaches are such as we may venture our souls upon.
Such is the Redeemer’s mercy; and why should the labouring and burdened sinner seek for rest from any other quarter? Let us come to him daily, for deliverance from wrath and guilt, from sin and Satan, from all our cares, fears, and sorrows.
But forced obedience, far from being easy and light, is a heavy burden.
In vain do we draw near to Jesus with our lips, while the heart is far from him.
Then come to Jesus to find rest for your souls.
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11장
11:1 분주하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마태복음 11:1-6) 어떤 사람은 이 장(章)의 첫 절을 앞 장(10장)과 연결시켜 그 끝 절이라고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앞장에서 전하셨던 임명식 설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대한 명령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위임은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복음 전파는 그들에게 허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령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고전 9:16). 그가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은 이 명령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은 “그가 명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105:8). 그는 “명령의 끝을 만드셨다”(명령을 끝장내신다. evvte,lesen diata,sswn). 그리스도께서 하신 교훈은 완전하신 교훈이다. 그의 일을 끝까지 해내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마치신 후 “거기서 떠나셨다.” 그가 제자들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그들의 선생을 남겨두고 떠나기를 매우 싫어했던 것 같다. 이는 마치 보모가 손을 뗄 때에야 어린아이는 비로소 자기 힘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이 함께 있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자립하고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그들을 떠나가신 것은 “제자들을 위하여 마땅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신 것은, 그가 오랫동안 떠나 있을 때를 위해 준비시키려 하심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그들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충분하도록”(신 33:7, 그들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역주)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들이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그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멀리 갔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 지방으로 가서(왜냐하면 이로부터 갈릴리에서 복음이 대부분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전파하고,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를 즉각적으로 의존하였으며 그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위대한 사역을 위해 점차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려고” 동네로 가셨는데, 이 동네는 그가 앞서 “이적을 행함으로써”(마 10:1-8) 백성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그의 환영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송 하셨던 곳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주의 길은 예비 되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이 길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적을 행하지는 않았다,”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확증을 위하여 “이것을 행하였다.”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실 때에 그는 마치 이러한 권한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보다 더 영예스러운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일을 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육신을 구원하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신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전파할 것을 명령하셨으며(마 10:7), 그 자신이 전파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네의 안위를 위하여 일하도록 그들을 보내셨으며 그들을 독려하고 고용하는데 매우 분주하셨다. 자신들이 편안하려고 게으름을 부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만 멍에를 씌우는 자는 실로 그리스도에 합당치 못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일군들이 늘어나고 많아지는 것이 우리의 태만에 대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근면함에 대한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분주하면 할수록 우리도 분주해져야 하며, 비록 수가 적더라도 많은 일이 거기에서 행해져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는 인구가 많은 “동네”로 전파하러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기가 많이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셨다. 지혜는 “동네들”(잠 1:21)과 “동네 어귀에서”(잠 8:13) 부르짖으며, 그를 경시했지만 처음 제공(first, offer 유대인들은 복음의 순서에 있어서 처음이었다-역주)의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의 성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앞장에서 전하셨던 임명식 설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대한 명령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위임은 명령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복음 전파는 그들에게 허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령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도록 규정된 것이다”(고전 9:16). 그가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은 이 명령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은혜의 언약은 “그가 명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105:8). 그는 “명령의 끝을 만드셨다”(명령을 끝장내신다. evvte,lesen diata,sswn). 그리스도께서 하신 교훈은 완전하신 교훈이다. 그의 일을 끝까지 해내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마치신 후 “거기서 떠나셨다.” 그가 제자들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그들의 선생을 남겨두고 떠나기를 매우 싫어했던 것 같다. 이는 마치 보모가 손을 뗄 때에야 어린아이는 비로소 자기 힘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이 함께 있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가 자립하고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그들을 떠나가신 것은 “제자들을 위하여 마땅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을 떠나신 것은, 그가 오랫동안 떠나 있을 때를 위해 준비시키려 하심이며 또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그들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충분하도록”(신 33:7, 그들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역주)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들이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그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멀리 갔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 지방으로 가서(왜냐하면 이로부터 갈릴리에서 복음이 대부분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전파하고,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를 즉각적으로 의존하였으며 그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위대한 사역을 위해 점차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그리스도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려고” 동네로 가셨는데, 이 동네는 그가 앞서 “이적을 행함으로써”(마 10:1-8) 백성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그의 환영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송 하셨던 곳이다. 이와 같이 하여 “주의 길은 예비 되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이 길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적을 행하지는 않았다,”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확증을 위하여 “이것을 행하였다.”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실 때에 그는 마치 이러한 권한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보다 더 영예스러운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일을 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육신을 구원하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신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전파할 것을 명령하셨으며(마 10:7), 그 자신이 전파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네의 안위를 위하여 일하도록 그들을 보내셨으며 그들을 독려하고 고용하는데 매우 분주하셨다. 자신들이 편안하려고 게으름을 부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만 멍에를 씌우는 자는 실로 그리스도에 합당치 못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일군들이 늘어나고 많아지는 것이 우리의 태만에 대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근면함에 대한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분주하면 할수록 우리도 분주해져야 하며, 비록 수가 적더라도 많은 일이 거기에서 행해져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는 인구가 많은 “동네”로 전파하러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기가 많이 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셨다. 지혜는 “동네들”(잠 1:21)과 “동네 어귀에서”(잠 8:13) 부르짖으며, 그를 경시했지만 처음 제공(first, offer 유대인들은 복음의 순서에 있어서 처음이었다-역주)의 특권을 가졌던 “유대인의 성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전파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들은 바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 목적은 그의 산상보훈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레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보내었던 메시지와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기록되었다(2-6절). 우리는 앞서 4장 12절에서 그리스도가 요한의 고난에 대해 들으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감옥에 있는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들으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은 그것들에 대해 듣는 것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랑의 참된 친구였기 때문이다(요 3:29). 하나의 유용한 도구가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 대신에 많은 사람들을 들어 올리시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비록 요한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 일은 계속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의 구속된 쇠사슬에 고통을 주지 않고 큰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특별히 그들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것들을 체험하는 것 이상의 위로는 아무 데도 없다. 이것은 감옥을 궁전으로 바꾼다. 그리스도는 여하한 방법을 써서라도 양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그의 사랑의 암시를 나타내실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즐거움으로 그것들을 대해 경청하였다.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해서도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그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었다. 그 제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오고간 대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행한 질문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이다. 이것은 심각하고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은 약속된 메시야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말씀하십시오.” 1. 메시야가 오셔야만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승인되었다. 메시야라는 칭호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시 118:26)이다. 그는 지금 와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그의 또 다른 도래(재림-역주)가 있다.
2. 그들은 암시를 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오실 그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려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는 안 되며 또한 그를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지체하시더라도 기다리라. 장차 오실 그이는 우리의 때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이 암시한 것은, 만일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오실 그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그들은 회의주의자가 되지 않고 만족을 가질 것이며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4. 따라서 그들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입장에 대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고 말하였다. 그런데,
(1)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이 질문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해 고상한 증거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요 1:34)과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33절),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자”(요 3:34)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약속되고 기대되었던 메시야라는 사실이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확증되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확증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나타낼 때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외적인 화려함과 능력을 가지지 않고 나타나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로 이것에 걸려 넘어졌으며, 아마 요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대중화된 오류에 대해 참고 견디는 것은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2) 요한의 의심은 그의 현재 환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죄수였으며 아마 시험을 받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라면 어찌하여 그의 친구요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끌려올 수 있을까? 이 감옥 속에서 그토록 오래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둘 뿐만 아니라 나를 찾지도 않고 누구를 보내어 안부도 묻지 않으며, 또한 감옥 생활을 위로하거나 돕지도 않는구나? 라고─.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께서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로 가시지 않은 것은 적절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즉 그들 사이에 어떤 계약(compact)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이유도 모르고 그의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자기를 무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신앙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참된 신앙이 있는 곳에는 불신앙의 혼합물이 있다. 최고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다. [2] 특히 오랫동안 믿어지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이라도 종종 견디어 내기가 어려운 신앙의 시련이 되고 만다. [3] 선한 사람에게 남아있는 불신앙(remaining unbelief)은 종종 시험 때에 뿌리를 건드리며, 확고히 서 있다고 생각되었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주님께서 영원히 내어버리실까?” 우리는 요한의 신앙이 이 일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신앙이 확증되고 확인되기를 소원하였을 뿐이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고의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거나 불 신앙의 유혹에서 보호함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도움들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지만 여전히 표적을 구하였으며(창 15:6, 8),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36, 37). 그러나,(3)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그는 죄수였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보살폈으며 그의 교훈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1] 그들은 지식이 박약하고 신앙이 흔들렸으며 가르침과 확증이 필요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이 일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생에 대해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선생님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을 어둡게 하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요한 자신과 그들에게 거스려 말한다고 생각하였을 때 그들 자신의 선생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그들의 관계에 의해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쉽다. 이제 세례요한은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만족했던 것처럼 만족케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강한 자는 마땅히 약한 자의 연약함을 생각해야만 하며,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자신이 도울 수 없을 때에는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보내어야 한다.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 세례 요한은 마치 초급학교에서 대학교로 보내는 것 같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보호권을 넘겨주어야 할 예수님과 더욱 친근히 사귀도록 그의 제자들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자의 임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갈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정확성을 알려고 하는 자는 이해시키려 오신 그에게 자신을 의탁해야만 한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자는 모름지기 듣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메시야가 오셔야만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승인되었다. 메시야라는 칭호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잘 알려진 이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시 118:26)이다. 그는 지금 와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그의 또 다른 도래(재림-역주)가 있다.그들은 암시를 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오실 그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려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데 지쳐서는 안 되며 또한 그를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지체하시더라도 기다리라. 장차 오실 그이는 우리의 때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이 암시한 것은, 만일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오실 그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그들은 회의주의자가 되지 않고 만족을 가질 것이며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입장에 대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고 말하였다. 그런데,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이 질문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해 고상한 증거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요 1:34)과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33절),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자”(요 3:34)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약속되고 기대되었던 메시야라는 사실이 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확증되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확증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나타낼 때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외적인 화려함과 능력을 가지지 않고 나타나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바로 이것에 걸려 넘어졌으며, 아마 요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대중화된 오류에 대해 참고 견디는 것은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요한의 의심은 그의 현재 환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는 죄수였으며 아마 시험을 받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라면 어찌하여 그의 친구요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끌려올 수 있을까? 이 감옥 속에서 그토록 오래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둘 뿐만 아니라 나를 찾지도 않고 누구를 보내어 안부도 묻지 않으며, 또한 감옥 생활을 위로하거나 돕지도 않는구나? 라고─.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께서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로 가시지 않은 것은 적절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즉 그들 사이에 어떤 계약(compact)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런 이유도 모르고 그의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자기를 무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신앙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참된 신앙이 있는 곳에는 불신앙의 혼합물이 있다. 최고라고 해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다.특히 오랫동안 믿어지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이라도 종종 견디어 내기가 어려운 신앙의 시련이 되고 만다.선한 사람에게 남아있는 불신앙(remaining unbelief)은 종종 시험 때에 뿌리를 건드리며, 확고히 서 있다고 생각되었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주님께서 영원히 내어버리실까?” 우리는 요한의 신앙이 이 일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 신앙이 확증되고 확인되기를 소원하였을 뿐이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고의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하거나 불 신앙의 유혹에서 보호함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도움들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지만 여전히 표적을 구하였으며(창 15:6, 8), 기드온도 그러하였다(삿 6:36, 37). 그러나,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 제자들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그는 죄수였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보살폈으며 그의 교훈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들은 지식이 박약하고 신앙이 흔들렸으며 가르침과 확증이 필요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이 일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생에 대해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선생님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을 어둡게 하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가 요한 자신과 그들에게 거스려 말한다고 생각하였을 때 그들 자신의 선생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그들의 관계에 의해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쉽다. 이제 세례요한은 그들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만족했던 것처럼 만족케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강한 자는 마땅히 약한 자의 연약함을 생각해야만 하며, 최선을 다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 자신이 도울 수 없을 때에는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보내어야 한다.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세례 요한은 마치 초급학교에서 대학교로 보내는 것 같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예견하고 자신의 보호권을 넘겨주어야 할 예수님과 더욱 친근히 사귀도록 그의 제자들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자의 임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갈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리의 정확성을 알려고 하는 자는 이해시키려 오신 그에게 자신을 의탁해야만 한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자는 모름지기 듣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가져야만 한다. Ⅱ. 여기에는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4-6절). 그가 “너에게 말한 내가 곧 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적인 대답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 진리의 확증적인 증거를 해석하도록 하실 것이며 지식을 캐는 수고를 하도록 하실 것이다. 1. 그는 요한에게 전해야 할 것, 곧 그들이 듣고 본 것을 지적하고 계시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으로 그것들을 보다 완전하게 가르치고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고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지각은 그것들의 적절한 대상인 것들에서 호소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지각은 분명한 목적들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뜻-역주). 그러므로 실제적인 현존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대로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듣고 본”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1)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적의 능력에 대해 본 것을 가서 요한에게 말하라. 너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어떻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가를”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적은 공개적으로 또한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행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세심하고 정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서슴치 않고 하려고 했다-역주). Veritas non quaerti agulns ─ 즉 진리는 은폐를 찾지 않는다.
[1] 그것들은 “신적 능력의 행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와 같이 자연의 능력을 지배하거나 능가할 수 없다. “소경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특권으로 언급되고 있다(시 146:8). 그러므로 이적은 하늘의 넓은 인장이며, 그것들이 찍혀진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그의 진리와 결코 모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거짓으로 그의 인장(이적)을 둘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없다. 어쨌든 “거짓된 이적 기사”는 “거짓 교훈”의 증거가 되지만, “참된 이적”은 신적인 위임을 입증한다. 그리스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또한 그의 교훈은 “그를 보낸 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2] 그것들은 “신적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실 것이며 그 때에는 “소경의 눈이 열일 것이라”고 미리 예언되었다(사 35:5, 6).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선지자의 말들과 일치가 된다면(그들이 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고대하였던 바 “보상을 가지고 오실” 분이심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분이야말로 그렇게 많이 소원하였던 바로 그이시다.(2) “너희는” 그의 이적을 수반하고 있는 “복음 전파에 대해 들은바”를 그에게 고하라. 신앙은 비록 보는 것에 의해 확증되지만 들음에서부터 비롯된다.
[1] “가난한 자가 복음을 전파한다”고 그에게 고하라.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읽고 있다.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고용했던 사람은 세상의 특권을 전혀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러므로 신적 능력에 의하여 수행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한다. [2]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고하라. 그리스도의 청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랍비들”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그 이유는 그들이 보수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개 “왕이나 군주들”에게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무리들”에게 전파하였다. “가련한 양들이 그를 청종할 것이라”(슥 11:11)고 예언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겸손과 연민은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를 세상에 가져오실 자임은 입증한다. “다윗의 후손”은 ‘가난한 자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시 72:2, 4, 12, 13). 또한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가난한 자”란 “세상의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사 61:1). 그의 교훈의 참으로 복음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를 통회하고 참으로 겸손해진 자,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데 참으로 겸손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저축된 자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신 자들에게 적용된다. [3] “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는다고 고하라. 그들은 복음화 되었으며, 복음을 듣고 환영했으며, 복음에 의해 발효되었고 옥토에 심기워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놀라운 효능은 그 신적인 기원(근원)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에 대해 불평하기를, 그들은 “주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렘 5:4).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아무런 선행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버릇없는(소박한) 마음속으로 길을 만들었다.2. 그는 “그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은 자”에게 “축복”을 선언하셨다(6절).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증거는 매우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지 않는(이 단어의 뜻이 이와 같다) 자는 그의 교훈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무지하고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지를 거절하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환경에서 범죄하기 쉬운 일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들-역주)이 많이 있다. 그의 초라한 현현, 나사렛에서의 교육, 그의 가난한 생애, 그의 추종자들의 상스러움, 그에 대한 위대한 사람들의 멸시, 그의 교훈의 엄격함, 그것이 혈육에 미치는 모순,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에 대한 핍박 등.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접근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서도(눅 2:34) “비방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가 되셨으며, “거치는 반석”(벧전 2:8)이 되셨다.
(2) 이러한 범죄들을 극복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이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는 일은 힘든 일이며 또한 그것들을 극복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더욱 “칭찬 받고 영예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요한에게 전해야 할 것, 곧 그들이 듣고 본 것을 지적하고 계시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으로 그것들을 보다 완전하게 가르치고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고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지각은 그것들의 적절한 대상인 것들에서 호소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지각은 분명한 목적들에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뜻-역주). 그러므로 실제적인 현존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대로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듣고 본”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너희가 그리스도의 이적의 능력에 대해 본 것을 가서 요한에게 말하라. 너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어떻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는가를”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적은 공개적으로 또한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행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세심하고 정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서슴치 않고 하려고 했다-역주). Veritas non quaerti agulns ─ 즉 진리는 은폐를 찾지 않는다.그것들은 “신적 능력의 행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자연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와 같이 자연의 능력을 지배하거나 능가할 수 없다. “소경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특권으로 언급되고 있다(시 146:8). 그러므로 이적은 하늘의 넓은 인장이며, 그것들이 찍혀진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그의 진리와 결코 모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거짓으로 그의 인장(이적)을 둘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없다. 어쨌든 “거짓된 이적 기사”는 “거짓 교훈”의 증거가 되지만, “참된 이적”은 신적인 위임을 입증한다. 그리스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또한 그의 교훈은 “그를 보낸 자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그것들은 “신적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실 것이며 그 때에는 “소경의 눈이 열일 것이라”고 미리 예언되었다(사 35:5, 6).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선지자의 말들과 일치가 된다면(그들이 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고대하였던 바 “보상을 가지고 오실” 분이심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분이야말로 그렇게 많이 소원하였던 바로 그이시다.”너희는” 그의 이적을 수반하고 있는 “복음 전파에 대해 들은바”를 그에게 고하라. 신앙은 비록 보는 것에 의해 확증되지만 들음에서부터 비롯된다.”가난한 자가 복음을 전파한다”고 그에게 고하라.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이 읽고 있다. 그리스도가 그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고용했던 사람은 세상의 특권을 전혀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러므로 신적 능력에 의하여 수행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한다.”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고하라. 그리스도의 청중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랍비들”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그 이유는 그들이 보수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개 “왕이나 군주들”에게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의 무리들”에게 전파하였다. “가련한 양들이 그를 청종할 것이라”(슥 11:11)고 예언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겸손과 연민은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를 세상에 가져오실 자임은 입증한다. “다윗의 후손”은 ‘가난한 자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시 72:2, 4, 12, 13). 또한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가난한 자”란 “세상의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성경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사 61:1). 그의 교훈의 참으로 복음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를 통회하고 참으로 겸손해진 자,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데 참으로 겸손한 자에게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저축된 자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신 자들에게 적용된다.”가난한 자가 복음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는다고 고하라. 그들은 복음화 되었으며, 복음을 듣고 환영했으며, 복음에 의해 발효되었고 옥토에 심기워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놀라운 효능은 그 신적인 기원(근원)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선지자들은 “가난한 자”에 대해 불평하기를, 그들은 “주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렘 5:4).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아무런 선행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의 버릇없는(소박한) 마음속으로 길을 만들었다.그는 “그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은 자”에게 “축복”을 선언하셨다(6절).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이러한 증거는 매우 분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그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지 않는(이 단어의 뜻이 이와 같다) 자는 그의 교훈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무지하고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지를 거절하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환경에서 범죄하기 쉬운 일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들-역주)이 많이 있다. 그의 초라한 현현, 나사렛에서의 교육, 그의 가난한 생애, 그의 추종자들의 상스러움, 그에 대한 위대한 사람들의 멸시, 그의 교훈의 엄격함, 그것이 혈육에 미치는 모순,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에 대한 핍박 등.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볼 수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접근치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에서도(눅 2:34) “비방을 위해 세움을 받은 자”가 되셨으며, “거치는 반석”(벧전 2:8)이 되셨다.이러한 범죄들을 극복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이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는 일은 힘든 일이며 또한 그것들을 극복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더욱 “칭찬 받고 영예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7 요한의 제자들과 대화하심 (마태복음 11:7-15) 여기에는 우리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하신 칭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명예와 사역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어떤 사람은 아마 세례 요한이 보낸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그가 연약하고 흔들리며 그 자신과 일치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추출해내려고 애를 썼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대해 이러한 특징들을 열거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질투심과 악의를 없애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그를 칭찬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연약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칭찬할 만한 사람들에 대하여 잘 말해 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손의 열매”(fruit of their hands)를 주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가 활동하고 그리스도는 조용히 물러가 계셨을 때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였다. 그리스도는 공중 앞에 나타나셨고 요한은 구름 속에 가려진 이때에 그는 요한에 대해 증거 하셨다. 확고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는, 주위의 현재 상황이나 분위기가 좋지 않더라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신임과 칭찬을 돕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것은 영예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을 낮추었으며(요 3:29, 30; 마 3:11), 그리스도가 모든 것(Ail)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 이러한 특징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자는 높여질 것이요,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자는 그가 영예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는 자를 그는 이 세상에서도 때로 “사람들 앞에서도” 시인하실 것이다. 요한은 이제 “그의 증거를 마쳤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가 그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이 “자기들의 일을 다 마쳤을 때” 그들을 위한 칭찬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요 12:26). 이제 요한에 대한 이러한 칭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이 듣는 데에서만 그에 대해 이와 같이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나고 난 직후에도 칭찬하셨다(눅 7:24). 그는 요한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에게 알리기 위해 이러한 칭찬들을 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칭찬을 해야만 하기는 하지만,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들을 거만케 할 위험이 있을 때에는 피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다른 일에 있어서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칭찬에 대해서는 잘 견딜 수 없는 법이다. 교만은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 먹여서는 안 될 썩은 체액(體液)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를 칭찬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백성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즉 한때는 잘 봉사하였으나 지금은 낯설게 잊혀져 버린(다른 일도 그렇지만) 요한의 사역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잠시동안 행하였으며, “일시 그의 빛에 즐거워하였다”(요 5:35).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이 질문을 너희 자신에게 하라.” 1. 요한은 “광야에서”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곳은 “멀고 불편한 장소였지만 사람들은 이곳으로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만일 선생들이 구석으로 옮긴다면, 그들 없이 있는 것 보다 그를 따라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그의 설교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면 정녕 그것을 유의하여 회상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헤치고 나가는 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보려고 그에게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것은 그의 온전한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려고 하기 위함보다는 그의 인격의 특출한 외모로 자신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깨닫기 위한 것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말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함보다는 보고 보여지기 위하여 그에게로 온 것이다. 구원에 대해 현명하게 되기 위함보다는 말할 주제를 가지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적용하고 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 말씀에 참석한 자는 그들의 의도와 진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가 행해질 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때에 가장 큰 관심은 기울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때에 이러한 의식에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무엇이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왔느냐? 그것은 습관이었느냐? 혹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좋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이었는가? 너희는 거시서 무엇을 가져왔느냐? 어떤 지식, 은혜, 위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갔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으려 갈 때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목표한 것을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광야에서”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곳은 “멀고 불편한 장소였지만 사람들은 이곳으로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만일 선생들이 구석으로 옮긴다면, 그들 없이 있는 것 보다 그를 따라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그의 설교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면 정녕 그것을 유의하여 회상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헤치고 나가는 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그들은 그를 보려고 그에게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것은 그의 온전한 가르침으로 자신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려고 하기 위함보다는 그의 인격의 특출한 외모로 자신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깨닫기 위한 것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말씀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배우고 가르침을 받기 위함보다는 보고 보여지기 위하여 그에게로 온 것이다. 구원에 대해 현명하게 되기 위함보다는 말할 주제를 가지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적용하고 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 말씀에 참석한 자는 그들의 의도와 진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가 행해질 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때에 가장 큰 관심은 기울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때에 이러한 의식에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무엇이 너희를 그곳으로 데려왔느냐? 그것은 습관이었느냐? 혹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고 좋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이었는가? 너희는 거시서 무엇을 가져왔느냐? 어떤 지식, 은혜, 위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갔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으려 갈 때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목표한 것을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Ⅲ. 요한에 대한 칭찬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려고 한다”고 하셨다. 1. “그는 강직하고 결단적인 사람이며 바람에 날리는 갈대는 아니다. 너희는 그를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의 생활 원칙이나 대화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불변함과 항구적인 지속성은 주목할 만하다.” “갈대와 같이 연약한 사람은 갈대와 같이 요동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심령이 강하였다”(엡 4:14). 민중의 칭찬하는 바람이 상쾌하게 기분좋게 불었을 때나, 헤롯의 분노하는 폭풍이 맹렬하고 거세게 불었을 때나, 세례 요한은 이러한 날씨에 늘 동일하였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의 증거는 “갈대,” 즉 표리부동한 사람의 증거가 아니였다. 그의 증거의 불변상은 요한복음 1장 20절에 나타나 있는데, 즉 “그는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후에도 그것을 변치 않았다(요 3:28).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내어진 이 질문은 그가 이전에 말하였던 진리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갈대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요동치 않는 결심으로 오래 계속한다고 해서 어떤 것을 잃어버리거나 웃음을 사거나 또는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을 두려워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2. 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사람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보기 위하여 광야로 가지 않고 왕궁으로 갔을 것이다. 너희는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른 자를 보려고 갔다. 그의 모습과 습관은 세상의 모든 허세와 쾌락에 대해 죽었음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의 옷은 그가 살았던 광야와 어울렸으며, 그는 거기에서 회개의 교훈을 전파하였다. 너희는 왕궁의 쾌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사람이 감옥의 공포에 질려서 마음이 변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예수가 메시야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고행으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핍박으로 인하여 그들의 종료로부터 추방된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이 “있기는 있다”(there are). 그들은 왕궁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과 상황에 맞는 외모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설교자는 마부와 같이 보여지도록 해서는 안 되며, 일반 서민은 왕궁에서 입는 부드러운 옷에 대해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분수에 맞추어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요한은 조잡하고 불유쾌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몰려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첫 열심에 대해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현재 사역을 촉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헛되게”하였으며, “헛된 달음질을” 하였으며, “헛되게” 수고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도록 하자.
3. 그는 요한의 직무와 사역에 대하여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떤 개인적인 기증이나 권한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명예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한 칭찬이라고 할 수 있다.
(1) 그는 “선지자”였으며, 아니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9절). 그러므로 그는 요한이야말로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 하였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선지자” 즉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야 그 자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매우 유능한 심판자)께서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는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고 하셨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낮은 자라고 시인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나은 자라고 시인하셨다.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왕이 아닌 선지자였던 것은 메시야 왕국이 지상적인 능력에 놓여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선구자는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우월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효과적으로”행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보다 더욱 탁월하였다. 그들은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으며, 그들의 비전(vision)은 오랜 후의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날의 여명을 보았으며, 태양이 떠오른 것을 보았으며, 백성들 가운데서 있던 자로서 그들에게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요한은 그를 지적하였다. 그들은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하였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10절). “기록된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 그는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보다 더 위대하였다. 말라기는 요한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다. “구약”의 선지자가 말하였고 썼던 그리스도의 어떤 영예가 그에게 두어졌다. 이 영예는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이 가진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것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우선권이었다. 그는 큰 사명을 가지고 파송된 “사자”였다. 그는 “천 가운데 하나”인 사자인데, 그의 영예는 그가 누구의 사자인가에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 앞에 파송된 “나의 사자”이다. 그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발견함으로써 구세주를 영접하도록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그에 대하여 말하였고(요 1:23), 지금 그리스도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메시야의 길을 만드는 요한의 사역을 영예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많은 아름다움이 그들의 상호적인 연결과 결합, 그리고 그들의 상호적인 언급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났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앞에 직접적으로 행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더욱 영예스러운 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3)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11절).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가치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을 평가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으며, 세례 요한을 앞서간 모든 사람들보다 앞에,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여자에게서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 앞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봉사를 위해 일으켜 세우시고 부르셨던 모든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은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모세보다도).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복음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 중 어느 것보다도 하늘로부터의 이적적인 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의 사역에서 큰 성공을 하였다. 거의 모든 나라가 그에게로 몰려왔다. 그 누구도 요한이 행하였던 것만큼 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게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환영하라는 외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많은 사람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을 그들 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대함은 겉모습이나 외적인 호화로움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며, 또한 위대한 성도가 위대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과 같이 “주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위대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강직하고 결단적인 사람이며 바람에 날리는 갈대는 아니다. 너희는 그를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의 생활 원칙이나 대화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불변함과 항구적인 지속성은 주목할 만하다.” “갈대와 같이 연약한 사람은 갈대와 같이 요동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심령이 강하였다”(엡 4:14). 민중의 칭찬하는 바람이 상쾌하게 기분좋게 불었을 때나, 헤롯의 분노하는 폭풍이 맹렬하고 거세게 불었을 때나, 세례 요한은 이러한 날씨에 늘 동일하였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의 증거는 “갈대,” 즉 표리부동한 사람의 증거가 아니였다. 그의 증거의 불변상은 요한복음 1장 20절에 나타나 있는데, 즉 “그는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말하였으며” 후에도 그것을 변치 않았다(요 3:28).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내어진 이 질문은 그가 이전에 말하였던 진리에 대한 의심으로 해석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갈대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요동치 않는 결심으로 오래 계속한다고 해서 어떤 것을 잃어버리거나 웃음을 사거나 또는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을 두려워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사람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느냐? 만일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보기 위하여 광야로 가지 않고 왕궁으로 갔을 것이다. 너희는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른 자를 보려고 갔다. 그의 모습과 습관은 세상의 모든 허세와 쾌락에 대해 죽었음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그의 옷은 그가 살았던 광야와 어울렸으며, 그는 거기에서 회개의 교훈을 전파하였다. 너희는 왕궁의 쾌락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 사람이 감옥의 공포에 질려서 마음이 변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예수가 메시야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게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고행으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핍박으로 인하여 그들의 종료로부터 추방된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이 “있기는 있다”(there are). 그들은 왕궁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과 상황에 맞는 외모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설교자는 마부와 같이 보여지도록 해서는 안 되며, 일반 서민은 왕궁에서 입는 부드러운 옷에 대해 탐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분수에 맞추어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요한은 조잡하고 불유쾌하게 보였지만 그들은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몰려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첫 열심에 대해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의 현재 사역을 촉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헛되게”하였으며, “헛된 달음질을” 하였으며, “헛되게” 수고하였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도록 하자.그는 요한의 직무와 사역에 대하여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떤 개인적인 기증이나 권한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명예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한 칭찬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선지자”였으며, 아니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9절). 그러므로 그는 요한이야말로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 하였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선지자” 즉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메시야 그 자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매우 유능한 심판자)께서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는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다고 하셨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낮은 자라고 시인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보다 나은 자라고 시인하셨다.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왕이 아닌 선지자였던 것은 메시야 왕국이 지상적인 능력에 놓여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선구자는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나은 “우월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효과적으로”행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보다 더욱 탁월하였다. 그들은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으며, 그들의 비전(vision)은 오랜 후의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날의 여명을 보았으며, 태양이 떠오른 것을 보았으며, 백성들 가운데서 있던 자로서 그들에게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요한은 그를 지적하였다. 그들은 “처녀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하였다.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10절). “기록된 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 그는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보다 더 위대하였다. 말라기는 요한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셨다. “구약”의 선지자가 말하였고 썼던 그리스도의 어떤 영예가 그에게 두어졌다. 이 영예는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이 가진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것은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우선권이었다. 그는 큰 사명을 가지고 파송된 “사자”였다. 그는 “천 가운데 하나”인 사자인데, 그의 영예는 그가 누구의 사자인가에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파송된, “하나님의 아들” 앞에 파송된 “나의 사자”이다. 그의 임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발견함으로써 구세주를 영접하도록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그에 대하여 말하였고(요 1:23), 지금 그리스도는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메시야의 길을 만드는 요한의 사역을 영예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많은 아름다움이 그들의 상호적인 연결과 결합, 그리고 그들의 상호적인 언급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뛰어났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앞에 직접적으로 행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갈수록 더욱 영예스러운 자가 된다는 사실이다.”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11절).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가치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을 평가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으며, 세례 요한을 앞서간 모든 사람들보다 앞에, 일반적인 출생에 의해 “여자에게서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 앞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봉사를 위해 일으켜 세우시고 부르셨던 모든 사람들 중에 세례 요한은 가장 탁월한 사람이었다(심지어 모세보다도).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사죄의 복음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 중 어느 것보다도 하늘로부터의 이적적인 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의 사역에서 큰 성공을 하였다. 거의 모든 나라가 그에게로 몰려왔다. 그 누구도 요한이 행하였던 것만큼 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게 고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환영하라는 외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많은 사람들이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을 그들 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대함은 겉모습이나 외적인 호화로움에 의해 측정되지 않으며, 또한 위대한 성도가 위대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과 같이 “주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위대한 축복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이 최고의 칭찬은 놀라운 제한을 가지고 있는데, 곧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이다.
[1] “영광”의 천국에서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이직도 그는 연약함과 불완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롭게 된 성도나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영광”의 천국에서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이직도 그는 연약함과 불완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롭게 된 성도나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천국에서는 영광의 정도가 있는데, 즉 어떤 사람도 거기에서 다른 사람보다 못산다는 사실이다. 모든 그릇들이 한 가지로 완전하지는 하지만, 그 크기나 용량은 똑 같지 않은 것이다. 둘째,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며” 더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더 찬송하며 그에게서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지상에 있는 성도는 탁월한 자들(시 16:3)이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자는 더욱 탁월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사람이 “천사보다 못하며”(시 8:5) 또한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가 다윗같이 될”(슥 12:8) 축복된 상태를 갈구하게 했던 “천사와 동등이 되는”것이다. [2] 여기에 있는 “천국”에 의하여 “은혜의 왕국,” 즉 그 능력과 순수함의 완전성에 있어서 복음적인 섭리가 더욱 잘 이해되는 것이다. 천국에서 “작은 자” (o` mikro,teroj)가 “요한보다 더 크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요한보다 더 나이 어린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언제나 그 자신에 대해 낮추어 말씀하였고, 나이가 요한보다 적으며, 또 어떤 사람 보기에는 요한보다 못했던 예수님 자신이라고 본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나, 요한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또한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말하였던,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다”(요 1:15)는 것과 일치가 된다. 여기에 있는 “천국”에 의하여 “은혜의 왕국,” 즉 그 능력과 순수함의 완전성에 있어서 복음적인 섭리가 더욱 잘 이해되는 것이다. 천국에서 “작은 자” (o` mikro,teroj)가 “요한보다 더 크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요한보다 더 나이 어린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언제나 그 자신에 대해 낮추어 말씀하였고, 나이가 요한보다 적으며, 또 어떤 사람 보기에는 요한보다 못했던 예수님 자신이라고 본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나, 요한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또한 그것은 세례 요한이 말하였던,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다”(요 1:15)는 것과 일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의 사도들과 사역자들, 즉 복음적인 선지자로 이해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들과 요한과의 비교는 그들의 개인적인 성결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무와 관계된 것이다. 요한은 오시는(comming)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요한은 복음의 날(gospel-day)이 동틀 무렵에 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선구자격인 선지자로 높여졌다. 그러나 그는 그날의 정오가 되기 전에, 베일이 벗겨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기 전에 데려감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보다 큰 발견을 하였고 보다 큰 대사로 고용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 중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큰” 것이다. 요한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 이러한 우월성의 근거는 “신약”의 섭리가 “구약”의 섭리보다 더 우월하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사역자들은 더욱 크다. 왜냐하면 그들의 임무가 큰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3:6 등). 요한은 그의 교단에서는 가장 위대한 사람(maximum quod sic)이었다. 그는 그가 처해 있는 세대가 허락하는 데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지극히 높은 교단에서 가장 작은 자도 최하의 교단에서 가장 큰 자보다 더 우월한 법이다”(minimum maximi est majus maximo minimi). 산 위에 있는 난쟁이는 골짜기에 있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의 위대함은 그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현현에서 비롯되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이다. 가장 좋은 사람은 그렇게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몫(lot)이 “천국의 때에” 빛과 사랑의 특권에로 던지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면,” 특권이 크면 클수록 그 심판도 더욱 커질 것이다.(4) 세례 요한에 대한 큰 칭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인정하셨으며 또한 그 사역을 얼음을 깨뜨리기 위해 놀랍도록 성공적이 되게 하셨으며, 사람들이 “천국”을 예비하는데 있어서 유용하도록 만드셨다. “세례 요한”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2년 이상은 아니었음)까지 많은 선행이 베풀어졌다. 그 행동은 중심자(the Centre)이신 그리스도에게 접근되었을 때 매우 빨랐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데”(Bia,xetai, vim patitur), 이는 마치 군대가 폭풍우처럼 쳐들어가 성을 빼앗는 것 같은 폭력이며,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가 “억지로 그것을 취하는 것 같은” 폭력이다. 우리는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이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 나라는 전파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그리로 들어가고 있다.” 많은 무리들이 요한의 사역에 의해 인도되었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큰 칭찬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인정하셨으며 또한 그 사역을 얼음을 깨뜨리기 위해 놀랍도록 성공적이 되게 하셨으며, 사람들이 “천국”을 예비하는데 있어서 유용하도록 만드셨다. “세례 요한”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2년 이상은 아니었음)까지 많은 선행이 베풀어졌다. 그 행동은 중심자(the Centre)이신 그리스도에게 접근되었을 때 매우 빨랐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데”(Bia,xetai, vim patitur), 이는 마치 군대가 폭풍우처럼 쳐들어가 성을 빼앗는 것 같은 폭력이며,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가 “억지로 그것을 취하는 것 같은” 폭력이다. 우리는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이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 나라는 전파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그리로 들어가고 있다.” 많은 무리들이 요한의 사역에 의해 인도되었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1] “있을법 하지 않은” 큰 무리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바 이 왕국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자들은 이것에 대한 권리나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마치 우리의 법이 “그릇되고 강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이 침입자 또는 불법적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라의 자손들”(이스라엘-역주)이 이곳에서 추방될 때 “동과 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때에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마태복음 21장 31, 32절을 비교하라. 세리들과 창녀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거절하였던 요한을 믿었으며,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천국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우습게 조롱하는 동안 “그것을 취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이 우리들보다 더 앞에 있는 자(또는 더 나은 자-역주)보다 먼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초기 때부터의 복음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이 복음은 매우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2] “끈질긴” 무리였다. 이 폭력(맹렬)은 요한의 사역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힘과 활기, 그리고 진지한 노력과 추구를 의미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것에 참석하려고 그렇게 멀리서 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를 자신들의 종교(또는 경건-역주)로 삼으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열심과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는 모름지기 “들어가기를 힘써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천국은 거룩한 침노를 당하고 있다. 자아는 부인되어야 하며 마음의 경향과 편견, 구조와 기질은 개조되어야만 한다. 어려운 봉사를 해야 하며, 어려운 고난을 당해야 한다. 또한 타락한 본성을 제어하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을 얻기 위하여, 또한 안팎에서 오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달리고 씨름하며 괴로움을 당해야만 한다. “침노하는 자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큰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자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그것을 향해 실천하게 되며, “여하튼”(upon any term) 그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것들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축복이 없이는 그 붙잡은 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창 32:26). 자신들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만들려는 자는 근면해야만 한다. 하늘 나라는 비웃는 자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수고한 자를 편히 쉬게 하려고 의도되었다. 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천국에서 내어쫓는 “성난 투쟁”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룩한 다툼”으로써 보다 큰 수효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복된 광경이다!(5) 요한의 사역은 추정된 대로 “복음의 시작”이었다(막 1:1; 행 1:22).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1] 요한에게서부터 구약 시대는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직임은 매우 오랫동안 완전하고 효과 있게 지속되었지만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모세 율법의 채무가 그리스도의 죽음때까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구약의 발견물은 “임박한 천국”의 보다 분명한 현현에 의해 폐지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자연의 빛과 같이)은 그 “법”에 우선하였으며, 그 법에 대한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그것의 교훈에 앞서 끝을 맺게 되었다(interficiens가 아니라 finis perficiens-“지속기간의 끝이 아니라 완성의 끝”).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지자의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있을법 하지 않은” 큰 무리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바 이 왕국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자들은 이것에 대한 권리나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들은 마치 우리의 법이 “그릇되고 강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이 침입자 또는 불법적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라의 자손들”(이스라엘-역주)이 이곳에서 추방될 때 “동과 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때에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마태복음 21장 31, 32절을 비교하라. 세리들과 창녀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거절하였던 요한을 믿었으며,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천국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우습게 조롱하는 동안 “그것을 취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이 우리들보다 더 앞에 있는 자(또는 더 나은 자-역주)보다 먼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 초기 때부터의 복음에 대한 칭찬이었는데 이 복음은 매우 가망이 없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끈질긴” 무리였다. 이 폭력(맹렬)은 요한의 사역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힘과 활기, 그리고 진지한 노력과 추구를 의미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것에 참석하려고 그렇게 멀리서 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를 자신들의 종교(또는 경건-역주)로 삼으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열심과 열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는 모름지기 “들어가기를 힘써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천국은 거룩한 침노를 당하고 있다. 자아는 부인되어야 하며 마음의 경향과 편견, 구조와 기질은 개조되어야만 한다. 어려운 봉사를 해야 하며, 어려운 고난을 당해야 한다. 또한 타락한 본성을 제어하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을 얻기 위하여, 또한 안팎에서 오는 이러한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달리고 씨름하며 괴로움을 당해야만 한다. “침노하는 자는 그것을 강압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큰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자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그것을 향해 실천하게 되며, “여하튼”(upon any term) 그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것들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축복이 없이는 그 붙잡은 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창 32:26). 자신들의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만들려는 자는 근면해야만 한다. 하늘 나라는 비웃는 자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수고한 자를 편히 쉬게 하려고 의도되었다. 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천국에서 내어쫓는 “성난 투쟁”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룩한 다툼”으로써 보다 큰 수효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복된 광경이다!요한의 사역은 추정된 대로 “복음의 시작”이었다(막 1:1; 행 1:22).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요한에게서부터 구약 시대는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직임은 매우 오랫동안 완전하고 효과 있게 지속되었지만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모세 율법의 채무가 그리스도의 죽음때까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구약의 발견물은 “임박한 천국”의 보다 분명한 현현에 의해 폐지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의 빛”(자연의 빛과 같이)은 그 “법”에 우선하였으며, 그 법에 대한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그것의 교훈에 앞서 끝을 맺게 되었다(interficiens가 아니라 finis perficiens-“지속기간의 끝이 아니라 완성의 끝”).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지자의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첫째, 구약의 빛이 어떻게 세워졌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다. 그것은 비록 어둡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해 말하셨던 “율법과 선지자(선지서-역주) 안에” 세워졌다. “율법”은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장차 오실 그에 관하여 예언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모세”에서 시작하셨다(눅 24:27). 그리스도는 보다 더 명료한 선지자들의 음성에 의하여 예언된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의 사역의 벙어리 시늉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는 구약의 예언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약의 교훈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신약의 교훈을 확인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언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히 1:1). 두 그룹과 같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 오래 전에 주어졌다. 그리고 요한 이전 3백년 동안에는 선지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요한까지 예언한다”고 말해진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직도 준수되었고 모세와 선지서가 여전히 읽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은 비록 그 저자가 죽었지만 이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세와 선지자는 죽었다. 사도와 복음전파자들도 죽었다(슥 1:5).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벧전 1:25). 성경은 그 저자들이 흙 속에서 잠잠하지만 “명백하게 말하고”있다. 둘째, 이 빛은 어떻게 “치워졌는가?” 그가 “그들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가 의미하는 바는 즉 그들의 영광이 더 탁월하였던 영광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요한의 증거에 의해 폐지되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도 새벽의 여명은 촛불들로 하여금 희미하게 빛나게 한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요한이 “그가 오신다”고 말하였을 때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2] 그에게서 신약 시대는 동트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리라 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요한은 두 계약(구약과 신약-역주)을 연결시킨 고리와 같았다. 마치 노아가 Fibula utriusque mundi─ 즉 두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인 것처럼 그는 utriusque Testamenti ─ 즉 두 계약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구약의 결론적인 예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를 보내리라”(말 4:5, 6)였다. 그러한 말들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 역사가 바뀌었으므로 그들은 예언하기를 그쳤다. 그에게서 신약 시대는 동트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오리라 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요한은 두 계약(구약과 신약-역주)을 연결시킨 고리와 같았다. 마치 노아가 Fibula utriusque mundi─ 즉 두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인 것처럼 그는 utriusque Testamenti ─ 즉 두 계약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구약의 결론적인 예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를 보내리라”(말 4:5, 6)였다. 그러한 말들은 요한까지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 역사가 바뀌었으므로 그들은 예언하기를 그쳤다. 첫째,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신약의 엘리야라는 사실을 위대한 진리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엘리야는 in propria persona─ 즉 그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 육적인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것과 같지 않다. 그는 그것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러나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오실 자는(눅 1:17) 성질과 대화에 있어서 그를 닮을 것이며, 또한 그는 두려움으로 회개를 촉구할 것이며, 특히 예언되어 있는 것처럼 그는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실 것이다.” 둘째, 그는 이것을 진리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진리는 그 기대가 현세적인 왕국에 고정되어 있는 자들이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의심하고 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그것은 진리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편견, 즉 그들의 생각에도 어긋난(이것은 그들의 마관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진리를 거꾸로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책망을 하였다. “만일 너희가 그를 받아들인다면, 요한의 사역을 약속된 엘리야의 사역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너희를 돌이키게 하고 주님을 위해 예비시키는 엘리야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 진리는 그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같이 생명이나 죽음의 향기(savour)이다. 그리스도와 요한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세주(Saviour)이시며 세례 요한은 엘리야이다. 마지막, 우리 주 예수님은 주의하라는 엄숙한 요구를 하심으로써 이 담화를 그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에 주의하도록 하라. 만일 세례 요한이 예언된 엘리야라면 정녕코 여기에는 이미 착수된(on foot) 위대한 혁명이 있으며, 메시야 왕국이 가까이 있으며, 세계는 머지않아 행복한 변화에 놀라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너희는 내가 말한 것을 경청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일들은 중대하고도 공통적인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가 이미 우리에게 주셨던 기능들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을 개선해 나가는 것뿐이다. 그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들을 것을, 이성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성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무지한 것은 그들의 능력이 결핍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지 못하는 것은, 전혀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같이 그들의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11:16 예수님과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16-24)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과 그의 사역에 대해 칭찬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갑자기 이를 멈추고, 요한과 그의 사역에 대한 칭찬,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에 대해 헛되이(in vain) 경청하기를 즐거워하던 자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우리는 그가 그 세대를 “그들의 비교한 것”을 살펴볼 수 있으며(16-19절), 또한 그가 예로 든 특별한 장소들(고라신, 두로와 시돈 등-역주)을 “그들과 비교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20-24절). Ⅰ. 그 세대를 그 당시의 유대 백성으로 비유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불신앙과 완고함을 계속적으로 지녔다. 요한은 위대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해야만 했던 세대는 말할 수 없이 황폐하였고 무미건조하였으며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세대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사역자들이 거주하는 장소들의 나쁜 점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위해 금박을 부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칭찬할만한 점은 그가 “그의 세대에 의로운 자”였다는 것이다. 요한을 칭찬하시고 난 후 그리스도는 그를 자기들 가운데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사역에 의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였던 자들을 향해 정죄하고 계신다. 사역자가 칭찬을 받을 가치가 더욱 있으면 있을수록, 만일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긴다면 그들은 비난을 받을 만한 가치가 더욱 더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따라서 그것은 계산하는 날에 발견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나타내시고 계시는데, 그러나 그는 마치 이 세대를 묘사하기에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한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다. 즉 “내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설교를 하지만 그것을 결코 좋게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그들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유사점(비유)은 유대인 어린아이들이 놀 때에 행하는 일반적인 습관에서 취해진 것인데, 이 어린아이들은 흔히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어른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가 장난이므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세대에 대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사역도 이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특별히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반영시키고 계시다. 따라서 그들을 낮추기 위하여 그는 그들을 어린아이에 비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을 어린이들의 놀이에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다음의 5가지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 하늘의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키려” 하시며,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을 남겨 두시지 않는다(거침돌을 주시지 않는다- 역주). 그가 목표시하는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우리의 “뜻”을 “녹이는”일이다. 또한 이를 위하여 그는 스스로 발견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여러 가지 영향력이 작용되지만 그는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는데, 이 방법들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동일한 목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은 가난한 영혼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키려” 하시며,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돌이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을 남겨 두시지 않는다(거침돌을 주시지 않는다- 역주). 그가 목표시하는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우리의 “뜻”을 “녹이는”일이다. 또한 이를 위하여 그는 스스로 발견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여러 가지 영향력이 작용되지만 그는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는데, 이 방법들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동일한 목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에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피리,” 우리에게 대한 그의 “애곡”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는 소망을 주기에 적합한 복음의 귀중한 약속에서 “우리에게 피리를 불었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죄에서 놀랍게 하여 그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 두려움을 주기에 적합한 율법의 무서운 위협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곡을 하였다. 그는 은혜스럽고 자비스러운 섭리(배려) 가운데서 “우리를 향하여” 피리를 불었으며, 비참하고 괴롭히는 섭리에서 “우리를 향하여” 애곡을 하셨다. 그리고 한편은 또 한편에 상충되는 것으로 두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바꿀 것을 가르쳤다(갈 4:20). 때로는 “시내산”에서 우뢰로 말씀하셨고, 때로는 “시온산”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설명에서는 그 시대에 두 개의 큰 빛이었던 요한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상이한 성향(temper)이 잘 나타나 있다.
(1) 한편으로,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애곡하면서” 왔으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아니하였다.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지도 않고 무리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먹지도 않았다. 오직 혼자서. “주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던 광야에 있는 독방에서 기거하며 먹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엄격하고 고행적인 생활이 그가 전파하였던 교훈과 매우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화가 그의 교훈과 일치하는 교역자는 십중팔구(most likely)선을 행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역자의 설교라고 해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은 아니다.
(2) 또 한편으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셨으며, 어떤 특별한 엄격함이나 준엄함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는 친절하고 접근하기 용이하였으며, 어떤 사람들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요한의 유보(留保)에 의해 영향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하여 종종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신 일도 있었다. 요한의 찡그린 얼굴에 의해 놀라지 않았던 자는 그리스도의 미소에 의해 이끌려질 것이다. 그에게부터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고전 9:22)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한편으로,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애곡하면서” 왔으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아니하였다.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지도 않고 무리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먹지도 않았다. 오직 혼자서. “주식”이 메뚜기와 석청이었던 광야에 있는 독방에서 기거하며 먹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엄격하고 고행적인 생활이 그가 전파하였던 교훈과 매우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화가 그의 교훈과 일치하는 교역자는 십중팔구(most likely)선을 행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역자의 설교라고 해서 언제나 효과가 있는 법은 아니다.또 한편으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대화하셨으며, 어떤 특별한 엄격함이나 준엄함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는 친절하고 접근하기 용이하였으며, 어떤 사람들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한 요한의 유보(留保)에 의해 영향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하여 종종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신 일도 있었다. 요한의 찡그린 얼굴에 의해 놀라지 않았던 자는 그리스도의 미소에 의해 이끌려질 것이다. 그에게부터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고전 9:22)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요한이 그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 이상으로, 결코 그의 임의대로 요한을 비난하지는 않았다(그들의 행동이 다르기는 했지만).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의 선함에 있어서 깨끗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다”(고전 12:6). 또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하심인 것이다”(7절). 특별히 살펴 볼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바나바(위로의 아들들)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신다”(고전 12:11).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서로가 칭찬을 해야 한다. 또한 이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성향(性向)을 가진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취급하시려고 노력하시는데, 이는 죄인들로 하여금 융통성이 있고 변명할 것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그 결과가 어떤 것 이든간에 그 자신이 영화롭게 되기 위함이다. 2.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 취하신 다양한 방법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효과가 없다..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애곡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어느 방법으로도 감동을 받지 않았다.” 크고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의약품에서와 같이 반드시 효력을 발생하리라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특별한 수단이 강구되며, 또한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수단이 수행된다(의역).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법들에 의해 묶여지지 않거나 약속들에 의해 초대되지 않거나 위협에 의해 놀라게 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일들에 의해 각성되거나 “가장 고상한” 일들에 의해 이끌리거나 “가장 두려운” 일들에 의해 놀라거나 “가장 분명한” 일들에 의해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경이나, 이성, 경험, 섭리, 양심, 관심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행해질 수 있는가?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이다”(렘 6:29, 30).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 취하신 다양한 방법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효과가 없다..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애곡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어느 방법으로도 감동을 받지 않았다.” 크고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의약품에서와 같이 반드시 효력을 발생하리라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특별한 수단이 강구되며, 또한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수단이 수행된다(의역).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법들에 의해 묶여지지 않거나 약속들에 의해 초대되지 않거나 위협에 의해 놀라게 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일들에 의해 각성되거나 “가장 고상한” 일들에 의해 이끌리거나 “가장 두려운” 일들에 의해 놀라거나 “가장 분명한” 일들에 의해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경이나, 이성, 경험, 섭리, 양심, 관심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행해질 수 있는가?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이다”(렘 6:29, 30). 사역자가 헛되이 수고하게 되는데(사 49:4),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은 그 손실이 얼마나 크겠는가 !(고후 6:1)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에서 최고의 설교자와 최고의 설교가 그 소망하였던 목표에 이르지 못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신실한 사역자들이 그들의 수고에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을 때도 그들에게 어떤 위안을 준다는 사실이다.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냐?” 만일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위대한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와 요한의 활이 종종 헛되이 돌아왔다면(삼하 1:22), 만일 우리의 것이 그러하였다고 해서 결코 놀라지 말라. 우리는 마른 뼈들에 대한 매우 적은 목적에 대해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반적으로 은혜의 수단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이며 그러한 수단을 즐거워하게 했던 교역자들을 공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씀과 그 말씀의 신실한 전파자들에 대항하여 편견을 일으키고 조장시킴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뒤쫓거나 순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와 맞서게 되며 그와는 정반대로 걸어갈 것이다. “이 세대”가 그와 같이 행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믿으려고 결심하지 않았으며, 도한 그것들을 최고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그리스도와 요한)을 학대하였으며 가장 나쁜 자들로 나타내었다.
(1) 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엄격함과 침묵(또는 유보)을 우울증이나 또는 사탄을 가진 어떠한 정도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왜 그를 유의해야만 되는가? 그는 환상에 가득 차 있고 광적인 상상력에 사로잡힌 불쌍한 우울증 환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은 그의 자유롭고 친절한 대화를 사치와 쾌락의 사악한 습관으로 돌리고 말았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로다.” 이보다 더 불쾌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비난은 없다. 배반한 아들에게 대한 비난은 “방탕하고 술에 잠긴 자라”(신 21:20)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그릇되고 불의한 비난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으며”(롬 15:3), 또한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처럼 자기부인, 고행 세상에 대한 멸시의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흠 없으시고 죄인들과는 분리되신” 분이 여기에서는 죄인들과 동류로, 또한 그들에 의해 오염된 자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흠 없는 무죄성과 가장 특출한 탁월성이 언제나 “혀의 비난을 막는” 울타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좋은 목적을 가지고 가장 잘 교화시킨 사람들의 최고 선물과 행위들이 비난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동이 다윗의 금식과 같이(시 69:10) 우리에 대한 가장 나쁜 비난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즉 그 둘이 가졌던 친구들 중에 최고의 친구였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들,” 큰 죄인들(심지어 죄인들의 괴수까지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찬이며, 영원히 그의 칭찬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그를 비난하였던 저들은 그 유익을 상실하고 말았다.
4. 은혜의 방편 아래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악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장터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고, 조심성이 없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일반적으로 은혜의 수단에 의해 유익을 얻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이며 그러한 수단을 즐거워하게 했던 교역자들을 공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씀과 그 말씀의 신실한 전파자들에 대항하여 편견을 일으키고 조장시킴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뒤쫓거나 순응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와 맞서게 되며 그와는 정반대로 걸어갈 것이다. “이 세대”가 그와 같이 행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요한을 믿으려고 결심하지 않았으며, 도한 그것들을 최고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그리스도와 요한)을 학대하였으며 가장 나쁜 자들로 나타내었다.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의 엄격함과 침묵(또는 유보)을 우울증이나 또는 사탄을 가진 어떠한 정도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왜 그를 유의해야만 되는가? 그는 환상에 가득 차 있고 광적인 상상력에 사로잡힌 불쌍한 우울증 환자이다.”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은 그의 자유롭고 친절한 대화를 사치와 쾌락의 사악한 습관으로 돌리고 말았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로다.” 이보다 더 불쾌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비난은 없다. 배반한 아들에게 대한 비난은 “방탕하고 술에 잠긴 자라”(신 21:20)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그릇되고 불의한 비난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았으며”(롬 15:3), 또한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처럼 자기부인, 고행 세상에 대한 멸시의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흠 없으시고 죄인들과는 분리되신” 분이 여기에서는 죄인들과 동류로, 또한 그들에 의해 오염된 자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흠 없는 무죄성과 가장 특출한 탁월성이 언제나 “혀의 비난을 막는” 울타리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좋은 목적을 가지고 가장 잘 교화시킨 사람들의 최고 선물과 행위들이 비난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동이 다윗의 금식과 같이(시 69:10) 우리에 대한 가장 나쁜 비난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즉 그 둘이 가졌던 친구들 중에 최고의 친구였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들,” 큰 죄인들(심지어 죄인들의 괴수까지도)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찬이며, 영원히 그의 칭찬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그를 비난하였던 저들은 그 유익을 상실하고 말았다.은혜의 방편 아래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악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장터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고, 고집이 세고, 조심성이 없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시장”은 어떤 사람에게는 게으름의 장소(마 20:3)이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상적인 사업의 장소(약 4:13)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시장은 시끄럽고 오락을 즐기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에게 시장은 시끄럽고 오락을 즐기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들에게 그들이 왜 은혜의 방편에 의해 그렇게 유익을 못 얻게 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경박하며, 수고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의 머리와 손, 그리고 마음들이 세상으로 가득차 있으며, “말씀을 막고” 끝내는 그들의 영혼을 막는 염려(겔 33:31; 암 8:5)로 가득차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진지한 모든 것에서부터 그들 자신의 생각들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이 “시장에” 있으며,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러한 것들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것들에 의해 거주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5. 비록 은혜의 방편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에 의해 경시되고 업신여김을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영혼들의 선함(the good)에로 그들을 개선해 나가며 또한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남은 자가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어떤 사본에는 “자녀들로”KJV는 이것을 취함)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리스도는 “지혜”이시다. “지혜의 보화들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 2:13). 복음은 “지혜”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그것에 의해 거듭나게 되며 역시 위로부터 나게 된다. 그들은 현명한 “자녀들”로서,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참된 관심에 있어서 현명하다. “장터에 앉은 어리석은 아이들과 같지” 않다. 비록 은혜의 방편들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부분에 의해 경시되고 업신여김을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영혼들의 선함(the good)에로 그들을 개선해 나가며 또한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남은 자가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어떤 사본에는 “자녀들로”KJV는 이것을 취함)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리스도는 “지혜”이시다. “지혜의 보화들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 2:13). 복음은 “지혜”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이다. 참된 신자들은 그것에 의해 거듭나게 되며 역시 위로부터 나게 된다. 그들은 현명한 “자녀들”로서,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참된 관심에 있어서 현명하다. “장터에 앉은 어리석은 아이들과 같지” 않다. 이러한 “지혜의 자녀들은 지혜를 옳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목적에 순응하며, 그 의도에 응답하며 그것이 취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에 의해 적절하게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법들을 취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혜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복음 7장 29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후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혜의 방편들의 성취는 어리석게 그를 비난하는 자들과 대항하여 이 방편들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의사의 질서를 준행하는 모든 환자들의 치유는 그 의사의 지혜를 옳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거침돌”이 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리우는”(고전 1:23, 24) 자들에게 있을 때, 그리하여 그들이 십자가의 지식을 그들의 최고 야심(고전 2:2)으로, 또한 그 십자가의 효능을 그들의 영광의 면류관(갈 6:14)으로 삼을 때, 바로 여기에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지혜”의 증인들이다(사 43:10). 또한 그들은 지금 “성도들에 의해 옳다 함”을 받는 “지혜”가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받게 될 그 날에 증인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살후 1:10). 어떤 사람의 불신앙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비난할 것이나, 다른 사람의 신앙이 그리스도는 참되며 “지혜롭다”(고전 1:10)는 표징을 보여 줌으로써 그를 영예롭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행하든지 행하지 않든지 그것은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과 그의 “지혜”는 “그가 말씀하실 때, 그가 판단하실 때 옳다 함을 받게 될 것이다.” 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 “세대”에 대해 하신 설명이다. 그 “세대에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똑 같은 양상이 계속적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었던 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 있어 왔으며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더라”(행 28:24). Ⅱ. 그리스도께서 대부분 이야기하셨던 특별한 “장소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그 “세대”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그는 그들에게 인상을 주기 위하여 특별히 그러한 “장소들”에 적용시켰다. “그 때에 그는 그들을 책망하시기 시작하였다”(20절). 그는 오래 전에 그들에게 전파하시기 시작하셨다(4:17).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책망하기 시작”하지는 않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고상한 방법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까지 거칠고 불쾌한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책망을 하려고” 하시지는 않는다. 그는 죄인들이 완고하게 그것을 그에게서 억지로 빼앗기까지는 “책망하시지 않는다.” “지혜”는 먼저 초청을 한다. 그러나 “그 지혜의 초청이 업신여김을 당할 때 지혜는 책망하는 것이다”(잠 1:20, 24).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으며 책망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에게 부과된 죄. 즉 도덕법에 거스리는 어떤 죄가 아니라(그때에는 구원시키려는 복음의 탓으로 호소할 것이다), 치유하는 법인 복음에 거스리는 죄(그것은 완악한 것이다)를 말한다. 그가 가장 수치스럽고 불쾌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비난했던 죄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고의적인 완악함은 복음을 즐거워하는 많은 무리들의 가장 큰 정죄(저주스러운 죄)이며, 이 죄는(다른 것 이상으로)죄인들이 영원히 책망 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또한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가장 위대한 교훈은 회개였다. “피리 부는 것”과 “애곡 하는 것”에서 의도된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길을 바꾸며 그들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들을 가지고 있었다)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그들의 생활을 개조시킬 만큼 우세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다른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시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들이 “고침 받기를” 거절한 것으로써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가 그러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책망하고, 마침내 그러한 것들이 절망적이며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죄의 악화. 그 고을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의 주요한 거주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떤 장소는 다른 장소들보다 더욱 많은 분량과 능력, 순수함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집행자이시며, 또한 그의 모든 처리에 있어서 자연의 하나님과 공통적이고 구별된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신다.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율법을 순종하게 되어져야만 한다. 육체의 질병에 대한 치유는 그들의 영혼에 대한 치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강한 동기를 가지면 가질수록 완악함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며, 그 계산은 더욱 엄격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권능,”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스러운 일들(우리는 이것들에 의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롬 2:4)에 대해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1) 고라신과 벳새다는 여기에서 실례로 보여지고 있는데(21, 22절), 그들에게는 각각의 “화”(woe)가 주어져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그리스도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만일 그 축복이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면 그는 화를 예비하시는데, 이 화는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화이다. 이 두 고을은 “갈릴리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라신은 동편에, 벳새다는 서편에 있으며, 부요하고 인구가 많은 장소들이다. 후에 벳새다는 분봉왕 빌립에 의하여 시(市)로 승격되었다.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적어도 세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셨다. 이와 같이 이 장소들은 은혜를 많이 받은 장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방문(즉 징벌, visitation)의 날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화는 그들에게 매우 임박하여 있음으로 그들은 그 후 곧 쇠퇴해졌으며 초라하고 미천한 고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죄는 도시들을 치명적으로 파괴시키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과된 죄. 즉 도덕법에 거스리는 어떤 죄가 아니라(그때에는 구원시키려는 복음의 탓으로 호소할 것이다), 치유하는 법인 복음에 거스리는 죄(그것은 완악한 것이다)를 말한다. 그가 가장 수치스럽고 불쾌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비난했던 죄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고의적인 완악함은 복음을 즐거워하는 많은 무리들의 가장 큰 정죄(저주스러운 죄)이며, 이 죄는(다른 것 이상으로)죄인들이 영원히 책망 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또한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가장 위대한 교훈은 회개였다. “피리 부는 것”과 “애곡 하는 것”에서 의도된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길을 바꾸며 그들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임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들을 가지고 있었다)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그들의 생활을 개조시킬 만큼 우세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다른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시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는 그들이 “고침 받기를” 거절한 것으로써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가 그러한 것으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책망하고, 마침내 그러한 것들이 절망적이며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죄의 악화. 그 고을들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의 주요한 거주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떤 장소는 다른 장소들보다 더욱 많은 분량과 능력, 순수함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집행자이시며, 또한 그의 모든 처리에 있어서 자연의 하나님과 공통적이고 구별된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신다.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율법을 순종하게 되어져야만 한다. 육체의 질병에 대한 치유는 그들의 영혼에 대한 치유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회개하기 위해 강한 동기를 가지면 가질수록 완악함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며, 그 계산은 더욱 엄격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권능,”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스러운 일들(우리는 이것들에 의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롬 2:4)에 대해 간주하시기 때문이다.고라신과 벳새다는 여기에서 실례로 보여지고 있는데(21, 22절), 그들에게는 각각의 “화”(woe)가 주어져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그리스도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만일 그 축복이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면 그는 화를 예비하시는데, 이 화는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화이다. 이 두 고을은 “갈릴리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라신은 동편에, 벳새다는 서편에 있으며, 부요하고 인구가 많은 장소들이다. 후에 벳새다는 분봉왕 빌립에 의하여 시(市)로 승격되었다. 그리스도는 이곳에서 적어도 세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셨다. 이와 같이 이 장소들은 은혜를 많이 받은 장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방문(즉 징벌, visitation)의 날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화는 그들에게 매우 임박하여 있음으로 그들은 그 후 곧 쇠퇴해졌으며 초라하고 미천한 고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죄는 도시들을 치명적으로 파괴시키며, 그리스도의 말씀은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라신과 벳새다는 여기에서 두로와 시돈(구약에서 많이 읽을 수 있는 해안도시. 파멸되었으나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과 비교되었다. 이 고을들은 갈릴리에 인접하여 있었으나 우상 예배와 그 밖의 사악한 일들 때문에 유대인 가운데서는 악명이 높았다. 그리스도는 종종 “두로와 시돈 지방”(마 15:21)으로 가셨다. 그러나 결코 두로와 시돈에는 가시지 않았다. 만일 그가 이곳으로 간다면 유대인들은 그것을 매우 좋지 않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깨닫게 하고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여기에서 보여 주시고 계시다.
[1]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만큼 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동일한 말씀이 전파되었다면, 또한 동일한 이적이 베풀어졌다면 그들은 니느웨가 “베옷과 재에” 앉아 회개했던 것처럼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가서 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그가 계셨던 곳보다 거기에서 더욱 많은 선행을 베푸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얼마동안 계셨던 곳에 계속 머무신 것은 비록 그의 사역자들이 원하였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함이시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쉽게 인도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동일한 은혜의 방편 아래 앉아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은혜의 방편들을 충분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겔 3:6, 7 . 역주:예를 들면, 이방인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방편들을 받아들였다면 벌써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의 완악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는 뜻). 우리의 회개는 더디고 늦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빨랐을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보잘 것 없고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베옷과 재” 가운데서 하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적인 주권에 대해 두려운 경탄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은혜의 수단을 받아들여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죄 가운데서 당연하게(justly)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역주: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멸망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 영혼이 구원받는다. 매튜 헨리의 요지는 이런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보다 “심판 날에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22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만큼 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동일한 말씀이 전파되었다면, 또한 동일한 이적이 베풀어졌다면 그들은 니느웨가 “베옷과 재에” 앉아 회개했던 것처럼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가서 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그가 계셨던 곳보다 거기에서 더욱 많은 선행을 베푸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얼마동안 계셨던 곳에 계속 머무신 것은 비록 그의 사역자들이 원하였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을 지라도 그들이 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함이시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쉽게 인도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동일한 은혜의 방편 아래 앉아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영향을 받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은혜의 방편들을 충분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완고함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겔 3:6, 7 . 역주:예를 들면, 이방인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방편들을 받아들였다면 벌써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의 완악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는 뜻). 우리의 회개는 더디고 늦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빨랐을 것이다. 그들은 오래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보잘 것 없고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베옷과 재” 가운데서 하는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적인 주권에 대해 두려운 경탄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은혜의 수단을 받아들여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죄 가운데서 당연하게(justly)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역주: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멸망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그 영혼이 구원받는다. 매튜 헨리의 요지는 이런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보다 “심판 날에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22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심판 날에” 사람들의 자녀들의 최후 상태가 틀림없고 바꿀 수 없는 판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행복이나 불행, 각 사람의 여러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한 심판”이라고 불리운다(히 6:2).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상태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심판날에는 시험(probation)의 상태에서 받아들여졌던 은혜의 모든 방편들이 확실하게 설명될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나빴는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사 5:3, 4). 셋째, 망하는 모든 자들의 악평이 참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 가장 완전하고 분명하게 발견했지만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악평은 무엇보다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의 빛과 소리는 “신적 은혜”의 부요함을 얻기 위하여 또는 (만일 그 은혜가 경시된다면) “신적인 진노”의 보다 풍부한 유출(eff usion)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기능을 개시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모든 능력을 확대시킨다. 자책이 지옥과 같은 고통이 된다면, 천국을 얻는 이러한 좋은 기회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로 지옥이 필요하다. “아들아, 이것을 기억하라.”(2) 가버나움은 여기에서 강조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23절), “그리고 너 가버나움아, 네 손을 들고 네 판결을 들으라.”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으로 머무신 곳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었다. 그곳은 옛 실로와 같이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하여 선택한 장소였으며, 또한 실로와 같이 취급되었다(렘 7:12, 1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이적은 “매일의 양식이었으며, 따라서 옛 만나와 같이 하찮은 것으로 여김을 받았고 보잘 것 없는 떡으로 불리워졌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위안을 주는 강의를 헛되이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진노에 대한 두려운 강의를 하고 계신다. 전자(은혜)를 듣지 않으려는 자는 후자(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가버나움은 여기에서 강조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23절), “그리고 너 가버나움아, 네 손을 들고 네 판결을 들으라.”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일상적으로 머무신 곳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었다. 그곳은 옛 실로와 같이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하여 선택한 장소였으며, 또한 실로와 같이 취급되었다(렘 7:12, 1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이적은 “매일의 양식이었으며, 따라서 옛 만나와 같이 하찮은 것으로 여김을 받았고 보잘 것 없는 떡으로 불리워졌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위안을 주는 강의를 헛되이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진노에 대한 두려운 강의를 하고 계신다. 전자(은혜)를 듣지 않으려는 자는 후자(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버나움의 판결이,
[1] 절대적으로 내려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너희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절대적으로 내려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너희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능력과 순수함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로써 “하늘에까지 높아지게” 된다. 그들은 그 속에 현재적인 큰 존귀와 영원적인 큰 유익을 소유하게 된다. 그들은 “하늘”에로 들어올려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세상에” 붙잡혀 있다면 아마 그들은 그들이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는지 모른다. 둘째, 악용된(abased) 복음의 유익과 진보는 죄인들로 하여금 지옥으로 더욱 낮아지게 할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특권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으므로, 만일 우리의 마음과 생활들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한낮 기대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절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곳에서 떨어지는 것은 더욱 치명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두려워하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욥기 20장 6, 7절을 보라. [2] 우리는 여기에서 가버나움이 소돔의 운명과 비교된 것을 볼 수 있다. 소돔은 아마 어떤 도시들보다 죄와 멸망이 더욱 두드러졌던 도시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는 여기에서 가버나움이 소돔의 운명과 비교된 것을 볼 수 있다. 소돔은 아마 어떤 도시들보다 죄와 멸망이 더욱 두드러졌던 도시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첫째, 가버나움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이러한 이적들이 그들처럼 사악한 소돔에서 행하여졌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것이며 “그 성은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이 지금에는 파괴시키는 공의(destroying justice.)의 기념물이 되었지만(유 7절), 목숨을 아끼는 자비의 기념물로 남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회개에 의하여 아무리 큰 죄도 용서받게 될 것이며, 소돔도 제외되지 않았던 큰 멸망이 미연에 방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사는 소돔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 성은(오늘까지-역주) 그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 성은(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에게 예속(복종)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예속된다”(히 2:5)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롯이 만일 이적을 행하였다면 “농담하였던 자”로 취급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소돔의 멸망이 심판 날에는 가버나움의 멸망보다 덜할 것이다. 소돔은 그런 심판을 받아야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버나움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죄는 범하지 않았다. 만일 복음이 “죽음의 맛”(a savour of death 또는 “죽음의 냄새”), 즉 죽이는 냄새를 가지고 있다면, 가버나움에서는 이중적으로 그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고후 2:16), 그러므로 큰 사망의 냄새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의 복음을 환영하지 않는 모든 장소들에 대해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마 10:15). “소돔땅이 너(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기록된 말씀을 지금 손에 가지고 있는 우리들, 전파된 복음과 주어진 복음의 규례들을 가지고 있고 성령의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고라신과 벳새다에 못지 않은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심판 날에는 이에 준하여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평하게 말한다면 이 시대의 신앙 고백자들은 그들이 하늘을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간에 이러한 장소들에 대하여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다. 만일 하늘로 가는 신앙 고백자들이라면, 그들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는 그러한 부요한 수단들을 위해 신적인 자비에대해 가장 큰 빚을 진 자들이며, 또한 지옥으로 가는 신앙 고백자들이라면,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부요한 수단들을 위해 신적인 공의에 대해 가장 큰 빚을 진 자인 것이다.11:25 예수님의 초청(마태복음 11:25-30)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구속 언약의 주권과 안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을 둘러보시면서 이러한 선물들(역주:28, 29절의 선물들)이 장차 주어지게 될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은혜 계약의 특권과 유익들을 제시(제공)하고 있다. Ⅰ. 그리스도는 화제를 돌려 여기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계시된)” 복음의 신비함을 가진 그들(어린 아이)에게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인하여 그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25절), 그 자신이 하신 말씀 이외에는 어떠한 말씀도 앞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대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앞에 진술된 우울한 숙고(consideration)에 대해 위로를 주는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과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독한 고을들의 범죄와 멸망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님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것처럼(눅 19:41)그들을 향해 우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생각하심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을 더욱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는 그러한 것을 감사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즉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복음에 관한 일들이 “계시되는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스라엘은 모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주위에서 실망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우러러봄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신실한 하나님께서 어쨌든 그 자신의 이익(이해 관계)을 효과적으로 확고히 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위로가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감사하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또한 그것들을 잠잠케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가는 낙심한 영혼들에 대한 특효가 있는 강심제이며,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을 협조할 것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암시들에 대해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말은 “오 아버지여, 내가 감사하나이다.” 그것보다 더 나쁘게 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러한 감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가 하나님께 대해 붙이신 칭호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다음의 사실들에 유의하라.
(1)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에 의해 하나님께로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구하거나 또는 우리가 받은 자비에 대해 감사를 드릴 때에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굳게 고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자비를 아버지의 사랑의 표식으로, 아버지의 손의 선물로 받아들여질 때, 그때에는 그 자비가 갑절로 은혜롭게 되고, 찬양의 마음을 샘솟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아버지여, 기도하오니”와 같이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드리며 말씀드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합당하다.
(2)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우리는 그가 “천지의 주재이심”을 동시에 기억해야만 한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의 주권자이신 그에게로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며,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으신 그에게로 신뢰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한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악함에서 방어하도록 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에게서(멜기세덱 안에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소유주로써, “천지의 주재”로 찬미해왔다. 우리는 시내에서 자비에 대한 감사를 드릴 때 샘 안에 있는 풍족함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드려야만 한다.
2. 그가 감사 드린 일.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These things), 그는 어떤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큰 일들, 즉 “우리의 평화에 속한 일들”(눅 19:42)을 의미하고 계시다. 그가 이렇게 “이것들”에 관하여 강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들이 그를 채웠던 일들이었고 또한 우리를 채워야 할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일들은 “이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것들(things)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적인 수단에 탁월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왔으며 또 숨겨지고 있다.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정치가들 중 어떤 사람은 복음의 비밀에는 매우 낯선 위대한 나그네였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 1:21). 아니,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에 (딤전 6:20) 의해 복음을 반대하는 일도 있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가장 익숙한 자는 흔히 영적인 일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나 상태(state)의 신비에 깊숙이 빠질 수는 있다. 그러나 천국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천국의 신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다.
(2) 세상의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이 복음의 신비의 둘레에 있는 어두움 속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은 그것들에 대한 “거룩케 하는 구원의 지식”을 가진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보잘 것 없는 태생이며 하찮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학자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무식하고 무지한 자들이었다(행 4:13). 지혜의 오묘는 이와 같으며(욥 11:6), 이것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알게 하신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고(시 8:2) 이로써 하나님의 “찬송이 완전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의 학식 있는 자는 복음의 전도자로 선택받지 못하였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고전 2:6, 8, 10)은 택함을 받았다.
(3) “슬기로운 자”요 “어린 아이”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다.
[1]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신”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들에게 직분과 학식,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이해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자만하며 거기에 만족하며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지혜와 제시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복된 소식의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그들에게 한낮 “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와 오류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그들 자신에게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는 그들의 형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그 안에서 의로우시다. 요한복음 12장 39, 40절, 로마서 11장 7,8절, 사도행전 28장 26, 27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가진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웠으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이해력을 그들의 마음에서” 숨기셨다. [2]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타난 일은 우리의 자손(어린아이들)에게 속하며(신 29:29), 또한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이해력”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약 4:6).(4) 이 세대는 신적인 지배를 받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이것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들에서의 그의 뜻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옳소이다”라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을 취하시도록 하며 또한 그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시도록 하자. 그의 은혜는 그의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기도 하신다. 우리는 왜 어부인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지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사도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그의 제자들이 듣는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구별되어진 것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분하셨다.
(5) 신적 은혜를 베푸는 이러한 방법은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감사함으로 우리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는,
[1] “이러한 일들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나타내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널리 선포되어 있다. [2] 그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지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이 구원으로 아름답게 되어진다. 또한 이러한 영예는 세상이 염려시하는 자들에게 두어진다. [3] “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겨진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대한 자비를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구별된 은혜는 가장 정중하다. 욥이 “주의 이름”을 “주실 때”와 같이 “취해질 때”도 찬미한 것(욥기 1:21 -역주)처럼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질”때도 찬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비참한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아가 낮추어지고 교만한 생각이 끌어 내져지고 모든 육체가 잠잠케 되고 신적 능력과 지혜가 더욱 빛나게 되는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장 27, 31절을 보라. 그가 하나님께 대해 붙이신 칭호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다음의 사실들에 유의하라.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에 의해 하나님께로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를 구하거나 또는 우리가 받은 자비에 대해 감사를 드릴 때에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그 관계를 굳게 고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자비를 아버지의 사랑의 표식으로, 아버지의 손의 선물로 받아들여질 때, 그때에는 그 자비가 갑절로 은혜롭게 되고, 찬양의 마음을 샘솟게 할 것이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아버지여, 기도하오니”와 같이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드리며 말씀드리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합당하다.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올 때 우리는 그가 “천지의 주재이심”을 동시에 기억해야만 한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의 주권자이신 그에게로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며,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실 수 있으신 그에게로 신뢰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한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악함에서 방어하도록 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에게서(멜기세덱 안에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소유주로써, “천지의 주재”로 찬미해왔다. 우리는 시내에서 자비에 대한 감사를 드릴 때 샘 안에 있는 풍족함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드려야만 한다.그가 감사 드린 일.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These things), 그는 어떤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큰 일들, 즉 “우리의 평화에 속한 일들”(눅 19:42)을 의미하고 계시다. 그가 이렇게 “이것들”에 관하여 강조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것들이 그를 채웠던 일들이었고 또한 우리를 채워야 할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일들은 “이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영원한 복음의 위대한 것들(things)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적인 수단에 탁월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왔으며 또 숨겨지고 있다.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정치가들 중 어떤 사람은 복음의 비밀에는 매우 낯선 위대한 나그네였다.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전 1:21). 아니,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에 (딤전 6:20) 의해 복음을 반대하는 일도 있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가장 익숙한 자는 흔히 영적인 일을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나 상태(state)의 신비에 깊숙이 빠질 수는 있다. 그러나 천국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천국의 신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또 오해하는 것이다.세상의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이 복음의 신비의 둘레에 있는 어두움 속에 있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은 그것들에 대한 “거룩케 하는 구원의 지식”을 가진다. “당신은 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이와 같은 사람들로서, 보잘 것 없는 태생이며 하찮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학자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무식하고 무지한 자들이었다(행 4:13). 지혜의 오묘는 이와 같으며(욥 11:6), 이것을 “어린아이와 젖먹이”에게 알게 하신 것은 “그들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고(시 8:2) 이로써 하나님의 “찬송이 완전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세상의 학식 있는 자는 복음의 전도자로 선택받지 못하였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고전 2:6, 8, 10)은 택함을 받았다.”슬기로운 자”요 “어린 아이”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다.”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신”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들에게 직분과 학식,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이해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하여 자만하며 거기에 만족하며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지혜와 제시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복된 소식의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그들에게 한낮 “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와 오류의 창시자는 아니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그들 자신에게 내버려두시며 그들의 죄는 그들의 형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그 안에서 의로우시다. 요한복음 12장 39, 40절, 로마서 11장 7,8절, 사도행전 28장 26, 27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가진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좋은 것들에 대한 지식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웠으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이해력을 그들의 마음에서” 숨기셨다.”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나타난 일은 우리의 자손(어린아이들)에게 속하며(신 29:29), 또한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이해력”과 그것들에 대한 생각을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약 4:6).이 세대는 신적인 지배를 받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이것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들에서의 그의 뜻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옳소이다”라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방법을 취하시도록 하며 또한 그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수단을 사용하시도록 하자. 그의 은혜는 그의 자신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주시기도 하시고 보류하기도 하신다. 우리는 왜 어부인 베드로는 사도가 되었지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는, 그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사도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그의 제자들이 듣는데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이 존귀하게 되고 구별되어진 것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분하셨다.신적 은혜를 베푸는 이러한 방법은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감사함으로 우리에 의해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는,”이러한 일들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나타내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널리 선포되어 있다.그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지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이 구원으로 아름답게 되어진다. 또한 이러한 영예는 세상이 염려시하는 자들에게 두어진다.”이것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겨진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대한 자비를 크게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구별된 은혜는 가장 정중하다. 욥이 “주의 이름”을 “주실 때”와 같이 “취해질 때”도 찬미한 것(욥기 1:21 -역주)처럼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질”때도 찬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비참한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아가 낮추어지고 교만한 생각이 끌어 내져지고 모든 육체가 잠잠케 되고 신적 능력과 지혜가 더욱 빛나게 되는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장 27, 31절을 보라. Ⅱ.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유익함을 은혜스럽게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어진” 것들이다(25절 등).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우리의 주의를 이러한 부르심과 초청에 집중하도록 명령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에 순응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이것들(부르심과 초청)을 안내하는 엄숙한 서문이다. 우리가 “우리 앞에 두어진 이러한 소망”에로 피난을 위해 날아갈 때 “강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앞세우고 있으며 그의 신임장을 제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것을 베풀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주의를 이러한 부르심과 초청에 집중하도록 명령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에 순응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이것들(부르심과 초청)을 안내하는 엄숙한 서문이다. 우리가 “우리 앞에 두어진 이러한 소망”에로 피난을 위해 날아갈 때 “강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권위를 앞세우고 있으며 그의 신임장을 제출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것을 베풀기 위해 권한을 부여받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27절).(1)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공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고 있다. 또한 “모든 심판은 그에게 맡겨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또한 패역한 세계에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이러한 조건들(terms) 에 의거하여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큰 임무(affairs)를 협의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거룩케 되셨으며 또한 유일한 전권대사로 인 쳐졌다. 이것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셨으며(마 28:18),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요 17:2)와 심판을 행하시는 권위(요 5:22, 27)를 가시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에게로 온 것을 받으시고 또 요구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이 주재이신” 분에게서 위임을 받으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모든 능력 모든 보화들이 그의 손안에 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손에 넘겨주셨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드리고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그를 우리에게 손을 두시는 위대한 심판인(Referee)과 판결자(Daysman)로 삼으셨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불행한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의 판결(언급)에 동의하고 주 예수님의 조정(중재)에 순응하는 일이며 또한 그의 판결을 고수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는 일이다.
(2) 그와 아버지 사이의 친밀성.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9절). 이 말씀은 보다 더 큰 만족과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잇다. 전권대사들은 그들이 제출할 위임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교제가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임무를 위하여 권세뿐만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계셨다. 우리의 큰 구속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는 주요하게 관계된 당사자들이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3).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는 그의 능력과 영공을 아버지께로부터 받고 있다. 또한 “모든 심판은 그에게 맡겨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또한 패역한 세계에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하여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이러한 조건들(terms) 에 의거하여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그는 이러한 큰 임무(affairs)를 협의하고 확립하기 위하여 거룩케 되셨으며 또한 유일한 전권대사로 인 쳐졌다. 이것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셨으며(마 28:18), 모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요 17:2)와 심판을 행하시는 권위(요 5:22, 27)를 가시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데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에게로 온 것을 받으시고 또 요구하는 것을 주시기 위하여 “모든 것이 주재이신” 분에게서 위임을 받으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모든 능력 모든 보화들이 그의 손안에 있다. 아버지는 그의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손에 넘겨주셨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넘겨드리고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그를 우리에게 손을 두시는 위대한 심판인(Referee)과 판결자(Daysman)로 삼으셨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불행한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의 판결(언급)에 동의하고 주 예수님의 조정(중재)에 순응하는 일이며 또한 그의 판결을 고수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는 일이다.그와 아버지 사이의 친밀성.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9절). 이 말씀은 보다 더 큰 만족과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잇다. 전권대사들은 그들이 제출할 위임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교제가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임무를 위하여 권세뿐만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계셨다. 우리의 큰 구속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는 주요하게 관계된 당사자들이다.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3). 그러므로 그들이 이 일에 있어서 서로 잘 이해하셨다는 사실, 즉 다시 말하면 성부는 성자를 아셨고 성자는 성부를 아셨으며 또한 양자를 완전하게 아셨으므로[우리는 이것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적인 자각(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일의 결정(settling)에 있어서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확증을 시키는 데 큰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 종종 사람들 가운데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약을 전복하거나 강구된 조처를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성자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그는 a. secretioribus(숨겨진 계획)이셨다. 그는 “그가 데리고 있는 자로서 그 곁에 계셨다.”(잠 8:30). 그러므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으며,” 그는 더 첨부하기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절)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이성적인 존재들의 완전성이다. [2] 하나님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기 때문이다(고후 4:6).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 즉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스러운 인간 사이의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보자 안에 있는, 중보자에 인한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이다(요 14:6).2. 여기에는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기증물(offer)과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장이 있다. 그렇게 엄숙한 서문 후에 우리는 매우 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씀”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게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받도록, 그것을 위하여 그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도록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초대를 받고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휴식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로 나아와야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휴식을 얻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초청 받은 사람들의 특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 이것은 피곤하신 그에게 적합한 말씀이다(사 50:4). 견딜 수 없는 멍에였으며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더욱 견딜 수 없는 멍에가 되었던(눅 11:46) 의식적인 법의 무거운 짐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그의 교회를 이러한 멍에에서 자유케하기 위함이며, 그러한 육적 계율들의 부담을 없애 주고 또한 보다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 방법을 소개해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죄의 짐, 즉 범죄와 그 능력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거운 짐인 죄를 깨닫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쉬도록 초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의 죄의 사악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하여 영혼 가운데서 깊이 뉘우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죄에 대해 병든 자들이며 세상과 육신의 고역에 지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죄 때문에 자신들의 상태가 슬프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며, 또한 에브라임(렘 31:18-20)과 탕자(눅 15:17), 세리(눅 18:1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행 2:37), 바울(행 9:4; 6, 9), 간수(행 16:29, 30)처럼 그것을 괴로워하고 두려워한 자들이다. 이것은 사죄와 평안에 대한 필수적인 준비이다. 보혜사는 먼저 깨닫게 해야만 한다(요 16:8). 내가 찢어질 그 때에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 [2] 초청은 “내게로 오라”이다. 우리가 지닌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위대성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황금홀”의 끝 부분을 만질 수 있고 또한 살 수 있도록 그가 어떻게 그것을 잡고 계신가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죄인들의 의무이며 권리라는 사실이다. 그를 반대하거나 그와 불화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를 의사(physician)요 대언자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들을 그의 행위와 지배에 완전히 맡겨야만 한다. 그에 의하여, 그 자신의 방법대로, 그 자신의 조건에 의거하여 구원함을 받도록 기꺼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와서,” “무거운 짐진 것”을 그에게 “맡기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이다.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 [3] 오는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아(그 이름의 뜻은 “휴식”이다)이시다. 왜냐하면 “이 동일하신 분이 우리를 쉬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창 5:29; 8:9). 참으로 “휴식은 좋은 것이다”(창 49:15).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는 그러하다(전 5:12). 예수 그리스도는 휴식을 위하여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나아오는 피곤한 영혼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된 휴식을 주실 것이다. 이 “휴식”은 죄의 두려움에서 떠나 잘 기초가 된 양심의 평안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죄의 능력에서 떠나 영혼의 정상적인 질서와 그 적절한 지배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만족함이다(시 11:6, 7).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남아있는 안식”(히 4:9)으로써, 은혜 가운데서 시작하여 영광 가운데서 완성되는 휴식이다.(2) 우리는 우리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20절).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전자와 동일한 보조를 맞추어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보좌 위에 왕과 구세주, 제사장”으로 높여지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신 “휴식”은 죄의 고역으로부터의 해방으로써, 하나님의 봉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 대한 책임으로 할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를 위해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우리의 목을 위한 “멍에”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가 기대하시는 이러한 “멍에”를 “메고”끌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설상가상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욱 고통을”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정당성(pertinency)은 “나의”(my)라는 말속에 들어있다. “너희는 너희로 하여금 피곤케 만드는 멍에 아래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떨쳐 버리고, 너희를 편하게 해 줄 나의 멍에를 시험해 보라.” 종들은 “멍에 아래에”(딤전 6:1) 놓여 있거나, 또는 예속(왕상 12:10 역주: 본문에는 멍에로 되어 있음)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자신들을 그의 종과 예속물의 관계에 두는 것이며, 그의 모든 명령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에 준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모든 처분에 즐거움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가 지시하신 “멍에”이다. 그 “멍에”는 그가 우리 앞에서 끄신 멍에이다. 왜냐하면 “그는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멍에”는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요,” 이성적인 존재들의 완전성이다.하나님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려는 자는 모름지기 그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기 때문이다(고후 4:6).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 즉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려야만 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스러운 인간 사이의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가 아니다. 그러나 중보자 안에 있는, 중보자에 인한 교제는 위안을 주는 교제이다(요 14:6).여기에는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기증물(offer)과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초청장이 있다. 그렇게 엄숙한 서문 후에 우리는 매우 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씀”이며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게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받도록, 그것을 위하여 그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도록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초대를 받고 있다.우리는 우리의 휴식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로 나아와야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휴식을 얻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초청 받은 사람들의 특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 이것은 피곤하신 그에게 적합한 말씀이다(사 50:4). 견딜 수 없는 멍에였으며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더욱 견딜 수 없는 멍에가 되었던(눅 11:46) 의식적인 법의 무거운 짐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그의 교회를 이러한 멍에에서 자유케하기 위함이며, 그러한 육적 계율들의 부담을 없애 주고 또한 보다 순수하고 영적인 예배 방법을 소개해 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죄의 짐, 즉 범죄와 그 능력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거운 짐인 죄를 깨닫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쉬도록 초청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의 죄의 사악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하여 영혼 가운데서 깊이 뉘우치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죄에 대해 병든 자들이며 세상과 육신의 고역에 지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죄 때문에 자신들의 상태가 슬프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며, 또한 에브라임(렘 31:18-20)과 탕자(눅 15:17), 세리(눅 18:1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행 2:37), 바울(행 9:4; 6, 9), 간수(행 16:29, 30)처럼 그것을 괴로워하고 두려워한 자들이다. 이것은 사죄와 평안에 대한 필수적인 준비이다. 보혜사는 먼저 깨닫게 해야만 한다(요 16:8). 내가 찢어질 그 때에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초청은 “내게로 오라”이다. 우리가 지닌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의 위대성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황금홀”의 끝 부분을 만질 수 있고 또한 살 수 있도록 그가 어떻게 그것을 잡고 계신가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죄인들의 의무이며 권리라는 사실이다. 그를 반대하거나 그와 불화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를 의사(physician)요 대언자로서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 자신들을 그의 행위와 지배에 완전히 맡겨야만 한다. 그에 의하여, 그 자신의 방법대로, 그 자신의 조건에 의거하여 구원함을 받도록 기꺼이 자신을 포기해야만 한다. “와서,” “무거운 짐진 것”을 그에게 “맡기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이것이 복음의 부르심이다.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목마른 자들아 나아오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오는 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아(그 이름의 뜻은 “휴식”이다)이시다. 왜냐하면 “이 동일하신 분이 우리를 쉬게 하실”것이기 때문이다(창 5:29; 8:9). 참으로 “휴식은 좋은 것이다”(창 49:15).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는 그러하다(전 5:12). 예수 그리스도는 휴식을 위하여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나아오는 피곤한 영혼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된 휴식을 주실 것이다. 이 “휴식”은 죄의 두려움에서 떠나 잘 기초가 된 양심의 평안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죄의 능력에서 떠나 영혼의 정상적인 질서와 그 적절한 지배 속에서 누리는 휴식이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만족함이다(시 11:6, 7).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남아있는 안식”(히 4:9)으로써, 은혜 가운데서 시작하여 영광 가운데서 완성되는 휴식이다.우리는 우리의 지배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20절).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전자와 동일한 보조를 맞추어 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보좌 위에 왕과 구세주, 제사장”으로 높여지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신 “휴식”은 죄의 고역으로부터의 해방으로써, 하나님의 봉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 대한 책임으로 할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를 위해 “면류관”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우리의 목을 위한 “멍에”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가 기대하시는 이러한 “멍에”를 “메고”끌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설상가상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욱 고통을”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정당성(pertinency)은 “나의”(my)라는 말속에 들어있다. “너희는 너희로 하여금 피곤케 만드는 멍에 아래에 있다. 너희는 그것을 떨쳐 버리고, 너희를 편하게 해 줄 나의 멍에를 시험해 보라.” 종들은 “멍에 아래에”(딤전 6:1) 놓여 있거나, 또는 예속(왕상 12:10 역주: 본문에는 멍에로 되어 있음)되어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자신들을 그의 종과 예속물의 관계에 두는 것이며, 그의 모든 명령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에 준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의 모든 처분에 즐거움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이며, 그가 지시하신 “멍에”이다. 그 “멍에”는 그가 우리 앞에서 끄신 멍에이다. 왜냐하면 “그는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멍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짐승이 끈다면 “멍에”는 그를 도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모든 것(all in our favour)이다. 우리는 이끌기 위하여 이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우리는 일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는 복종하도록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참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종(fellow-servants)과 함께 멍에가 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만 한다. “현명한 사람의 말은” 이와 같이 멍에를 멘 자들에게 “염소와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의 교훈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치가 있다(30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 그리스도의 명령들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 그것은 Crhsto,j하다. 즉 “쉬울” 뿐만 아니라 은혜스러운 것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뜻이 그와 같다. 그것은 고상하고 유쾌한 것이다. 그 속(명령들의 멍에)에는 순종하는 목에 상처를 내는 것(스쳐서 벗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다치게 하는 것도 없다. 그 반대로 우리를 더욱 상쾌하게 한다. 그것은 사랑과 이어지는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들의 성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매우 적당하고,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며, 한 마디로 그 성질을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말, 즉 사랑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은 매우 능력이 있고 그 격려는 매우 적절하며, 또한 의무의 길에서 발견되는(역주:의무를 행할 때 알게 되는) 그 위로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그것이 즐거움의 “멍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멍에는 새로운 성품을 가진 자에게는 쉬운 것이며, “이해하는 자”에게는 매우 쉬운 멍에이다(잠 14:6) 그 멍에는 맨 처음에 조금 어려울지 모르지만 후에는 쉬운 멍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멍에를 “쉽게” 만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은 매우 “가벼운 짐”이다. 이 짐은 사람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고통, 또는 기독자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를 위한(for)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후자를 의미한다. 이 “짐”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고통에 대해 잘 알았는데, 그는 이것을 “환난의 경한 것”(고후 4:17)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사 43:2)나 그리스도의 동정(사 63:9; 단 3:25), 특별히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고후 1:5)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가볍고 쉽게” 만든다. 고통이 많아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위로도 많아지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또한 우리가 일을 하거나 고난을 받게 될 때 직면하게 되는 실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 의해”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3)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하며, 또한 그에게 배워야만 한다(29절). 그리스도는 큰 학교를 세우셨으며 우리를 그의 문하생으로 초청하셨다. 우리는 들어가서 그의 학생이 되어야만 하며, 날마다 그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가져야 하며 그것을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에 순응해야 하며 또 반드시 나타나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벧전 2:21). 어떤 사람은 다음의 말씀,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실례로부터 배우도록 요구된 특별한 과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워야만 하며 또한 그에게 합당치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교만과 정욕을 억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기”(엡 4:20)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생이시요 교제이시며, 안내자이시요, 길이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명령들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 그것은 Crhsto,j하다. 즉 “쉬울” 뿐만 아니라 은혜스러운 것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뜻이 그와 같다. 그것은 고상하고 유쾌한 것이다. 그 속(명령들의 멍에)에는 순종하는 목에 상처를 내는 것(스쳐서 벗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다치게 하는 것도 없다. 그 반대로 우리를 더욱 상쾌하게 한다. 그것은 사랑과 이어지는 “멍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들의 성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매우 적당하고,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한 것이며, 한 마디로 그 성질을 종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말, 즉 사랑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은 매우 능력이 있고 그 격려는 매우 적절하며, 또한 의무의 길에서 발견되는(역주:의무를 행할 때 알게 되는) 그 위로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그것이 즐거움의 “멍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멍에는 새로운 성품을 가진 자에게는 쉬운 것이며, “이해하는 자”에게는 매우 쉬운 멍에이다(잠 14:6) 그 멍에는 맨 처음에 조금 어려울지 모르지만 후에는 쉬운 멍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멍에를 “쉽게” 만들 것이다.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짐”은 매우 “가벼운 짐”이다. 이 짐은 사람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로부터의(from) 고통, 또는 기독자인 우리에게 닥쳐오는 그리스도를 위한(for)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후자를 의미한다. 이 “짐”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고통에 대해 잘 알았는데, 그는 이것을 “환난의 경한 것”(고후 4:17)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사 43:2)나 그리스도의 동정(사 63:9; 단 3:25), 특별히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고후 1:5)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가볍고 쉽게” 만든다. 고통이 많아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위로도 많아지고 오래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난관을 극복하게 하며 또한 우리가 일을 하거나 고난을 받게 될 때 직면하게 되는 실망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 의해”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하며, 또한 그에게 배워야만 한다(29절). 그리스도는 큰 학교를 세우셨으며 우리를 그의 문하생으로 초청하셨다. 우리는 들어가서 그의 학생이 되어야만 하며, 날마다 그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가르치는 교훈의 말씀을 경청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가져야 하며 그것을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에 순응해야 하며 또 반드시 나타나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벧전 2:21). 어떤 사람은 다음의 말씀,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실례로부터 배우도록 요구된 특별한 과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워야만 하며 또한 그에게 합당치 못하도록 하는 우리의 교만과 정욕을 억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기”(엡 4:20)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생이시요 교제이시며, 안내자이시요, 길이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1]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기에 합당하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기에 합당하다. 첫째, 그는 “온유하시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게 될 “무지한 자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시실 수 있다. 유능한 많은 선생들은 열정적이고 성급하기 때문에 우둔하고 더딘 사람에게는 크게 실망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을 참고 그들의 이해심을 열어 주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열두 제자들을 향한 그의 태도는 이러한 것의 본보기였다. 그는 그들에게 온유하고 온화하였으며 또한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셨다. 비록 그들이 부주의하고 곧잘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시지는 않으셨다. 둘째, “그는 마음이 겸손하시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문하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풋내기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제자들을 궁전이나 학교가 아닌, 해변에서 선택하셨다. 그는 첫째 원리, 즉 어린 아기에게 우유와 같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가장 하찮은 자격에 자신을 낮추고 계신다. 그는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셨다(호 11:3). 그와 같이 가르칠 자가 누구냐? 우리가 이러한 선생님에게 배운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 이러한 겸손과 온유는 선생으로서의 그에게 대한 자격이었던 것처럼 그것은 그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최고의 자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5:9). [2]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6장 16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두 계약 사이의 조화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선지자의 글로 나타내시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너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6장 16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두 계약 사이의 조화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선지자의 글로 나타내시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마음의 쉼(Rest for the soul)은 가장 바람직한 쉼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편안히 쉬게”하는 것이다. 둘째, “마음이 쉼”을 얻는 오직 유일한 방법과 확실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발 곁에 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다. 의무의 방법이 곧 쉼의 방법이다. “이해”(understanding)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Knowledge) 안에서 “쉼”을 얻게 되며, 또한 모든 피조물들을 거치면서 헛되이 찾았던 지혜(욥 28:12)를 복음에서 발견함으로써 충족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맡겨볼 만한 것들이다. 고통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쉼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속에 그들에게 풍족함과 고요함, 확신을 영원히 주시는 것을 직면하게(알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족들은 천국에서 완성하고 영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고 즉각적으로 즐거워할 것이며 그가 계신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쉼(rest)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것이 복음적인 부르심과 선물(제공물, offer)의 종합이며 본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마디의 말씀으로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던 것과 일치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1장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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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 그 근방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일은 두 방법, 간접적인 방법과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천국이나 세상에서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은 간접적인 방법에 속한다. 그분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일은 직접적인 방법이다. 직접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질 경우 가장 깊은 영혼 안으로 들어가시고 그 다음 마음의 다른 방면으로 그 일을 확장해 가신다. 간접적이든 직접적인 방법에 의해서이든 우리의 거듭남이라는 그분의 의도가 결과로 나타나기 위해서 바깥쪽 수단들이 두 번째 수단으로 채용된다. 우리의 지식 내지 기타 다른 수단들이 내부로부터 발출되는 생명과 빛이 순조롭게 하강되도록, 즉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공급되어야 한다. 이런 두 겹의 작동이 본 장에서 취급되고 있다. 주님께서 내적 인간 안에서 선함과 진리라는 원리를 천국 질서로 배치하실 때가 본문의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심(안수하심)”에 해당되고 배치된 원리들이 바깥쪽 인간에로 퍼져나가 우리의 행동마저 천국 질서에 부합되게 하는 것은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어 길 잃은 양을 모으시는 것” (10:6)에 해당된다. 주님은 인간 구원이라는 유용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우리 속 깊은 곳으로부터 서도 그분 스스로 일하신다. 이것이 본문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는데 대한 의미이다. 그분이 전도하시려고 가신 마을(city)이란 교리이다. 교리는 신성의 유입을 받는 그릇에 해당되고 그분이 역사하시는 장소이다.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다.” 역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위 요한의 행동은 의아스럽다. 그 이유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1:29) 는 그의 말을 참작하면 그가 예수에게 메시아인지 또는 자기 같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러 온 사람인지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것을 반복해 본다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생략하기로 한다. 단지 모순 같이 보이는 역사적 측면에서 지혜와 관련된 어떤 교훈을 찾는 게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된다. 요한은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을 책망함으로 진리를 당당하게 증거한 탓에 감옥에 감금되었다. 헤로데의 범죄는 유대 교회의 상태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요한의 감금은 요한으로 표현되는 말씀 속의 교회가 그 당시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이런 역사물을 진정한 교회의 거듭나는 교인과 관련시켜 볼 때 위 사건은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요한은 씌어 있는 말씀 또는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를 표현하는 바, 요한이 옥에 갇힘이란 진리의 출구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이 내뿜는 적대행위로 막히면서 자유로운 진리의 행동이 박탈될 때 야기되는 시험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의 인성을 의심하는 상태가 우리 마음에서 올라오고 결국 말씀이 육이 됨으로 구원이 설비되어 있다는 것에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런 영적 시련의 상태에 휘말리면 그분은 은총을 내리시는 것을 잊으신 듯 여겨지고 심하면 주님은 안 계신 듯 여기기까지 한다. 이런 의심들은 요한으로 표현되는 말씀 자체에서 근원되는 게 아니라 의심을 부추키는 쪽으로 말씀 속의 진리를 해석하는데서 기인된다. 그러나 비록 시련이라는 매우 캄캄한 상태에서도 빛을 보는 때도 있다. 그 때란 마음이 진리의 빛을 추구하거나 그 빛을 받고자 준비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요한의 두 제자가 주님 자신에게 파견되어오듯 우리의 생각과 애착들이 마음 속에 있는 의심을 제거하고 싶어 주님을 직접 뵙고자 할 때이다. 이러면 그분의 입술로부터, 또는 직접 우리 영혼에 들어오시어 진리의 확증을 주신다.
3. 그런데 의심의 대상은 주님 자신이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이 구절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면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게 있다. 위 질문의 시대적 여건은 거듭나는 삶에 있어지는 과도기(transition)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요한의 생애와 선교사업은 개혁(reformation)의 시기를 표현한다. 따라서 요한의 공생애가 끝을 맞이함으로서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본문은 두 시기 사이에 상존하는 변화의 상태를 표현한다. 요한 자신이 말한 것,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한다”는 예언이 이제 성취되고 있는 셈이다. 이 상태는 저 상태의 거꾸로 이다. 후자가 왕성해지면 전자는 쇠한다. 새 가지가 자라 오르면 옛 가지는 시들어간다. 요한의 공생애가 표현한 것은 선 쪽으로 인도하는 진리이고 주님의 공생애는 선으로부터 파생된 진리인 바, 전자의 임무 수행이 줄어들면서 후자는 점점 증가해간다. 전자의 직무 수행을 후자가 이어 받는 것이다. 글자대로의 진리가 우리의 개혁을 인도했지만 개혁이 마무리되면 글자 속의 영이 거듭남을 인도해서 구원을 마무리 짓는다. 회개함에 뒤이어 거룩함이 우리를 감싼다. 씨뿌리는 땀흘림에 이어 수확이 있어진다. 상태 변화의 시련기에 요한 같은 의심을 우리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이런 질문이 있을는지 모른다. 영혼의 슬픔과 죄를 없애주는 어린 양이 정말 하느님 자신, 진리 자체란 말인가? 회개나 환난을 통해 영혼이 찾는 참 원리가 이것이란 말일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게 되어 있는 분의 길을 예비하는 게 고통과 고생이라는 준비 과정밖에 더 다른 게 없단 말인가?
4. 요한의 제자에게 주님이 주신 답변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는 결과적 차원에서 하신 답변이다. 위 구절을 다시 말하면 “너희가 장차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누구인지 찾되 말로 하지 말고 권능의 유무로 찾는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판단되리라.”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애착이 들은 것과 자신의 생각이 본 것에 대해 직바르게 해석을 내리고 그 해석대로 자신이 체험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 어떤 의심도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다. 우리 안에서 역사해 주시는 그분의 유용한 일보다 우리를 더 확신시켜 줄 증거가 더 있을 수 있을까? 어쨌든 감옥 속의 요한으로 표현된 시험의 상태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 구절은 더 많은 위로와 격려의 교훈을 담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위 구절은 말한다. 제아무리 우리의 외적 인간이 철장에 갇히고 고통당하고 있는 때에도, 주님이 나의 구세주인지 아닌지 몽롱한 상태라는 시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때에도 그분은 영혼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서 회복시켜주시는 선함의 기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일하시어 그들과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유익한 일들이 무엇인지 아래에서 간단히 살펴보자.
5. “소경이 보고…” 무지나 오류로 눈이 먼 이해성이 진리를 직감하도록 능력을 회복시키심이다. “…절름발이가 걷는다…” 무지와 오류 속의 악으로 삐뚤어진 삶을 곧바르게 해주심이다.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알고 있는 진리들, 그러나 비꼬인 해석으로 왜곡되고 모독된 진리가 된 퇴색한 진리를 순수해지게 해주심이다. “…귀머거리가 들으며…” 진리와 사랑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의지가 경청해서 순종하게 해주심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죽은 상태인 자연적 수준의 사랑 대신 생명 자체인 영적 수준의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심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영혼(spirit)이 가난함, 영혼이 비어 있는 상태는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서 진리의 사랑을 받는 바탕인 바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어 혼(soul)을 가득 채운다. 요한의 제자들이 보았던 위에 간략히 열거한 주님의 일은 그분이 수행하셨던 모든 종류의 기적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 마치 메시아가 수행하게 될 것을 예언자들이 미리 선포했던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요한이 의심을 지녔었다면 위와 같은 경이로운 그분의 역사는 요한으로 하여금 그분이 그리스도이다는데 대한 충분하고도 남는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처럼 감옥에 갇힌 영혼, 구원해주시는 자비의 대상과 자신과 관련해볼 때 의심을 떨치지 못해 시험 속에서 헤매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증거, 시험의 근원인 진짜 악들을 자신에게서 제거하시는 그분의 역사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의구심을 떨쳐야 하리라.
6. 요한에게 이런 일들을 보여 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두고 화를 품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많은 예언들이 주님의 일은 자비와 권능의 일이라고 미리 말해 두었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걸림돌이요 화를 일으키는 돌도 되실거라고 선포했다. 주님이 오셨던 그 때는 시련과 결정이 동시에 필요했던 시대였다. 그분은 인간 위에 떨어지는 진리라는 돌이 되어 주셨는 바 그들은 연단되어야 했다. 이 때에 악한 자 내지 죄로 범벅된 이들에게 그분은 화를 치밀게 하는 돌이 되셨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안전하게 피할 곳을 제공하는 돌이 되어 주셨다. 누군가가 자기 결점을 지적할 때 화를 품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주님의 진리가 자신의 악과 결점을 지적할 때 화를 품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큰 하늘의 축복인가! 어느 때에 이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될까? 신성한 질서의 법칙에 화를 품게 하는 모든 것을 홀연히 내던지고 오로지 순응하겠다는 거룩한 상태로 마음이 다시 다짐될 때,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심정과 이해성을 통치하도록 허용할 때, 이로부터 생활에서이든 대화 속에서이든 모든 것이 그분의 질서에 순응될 때 가능해진다.
7. 요한에게 인간 본성 안에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그분 자신에 관한 증거를 주신 뒤, 글자 의미로서의 씌어진 말씀을 표현한 요한에 관한 증거를 군중에 주시고자 그들을 향해 방향을 바꾸신다.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지상의 인간에게 내려오는 신성한 진리가 그 자체 옷입고 있는 바깥쪽 덮개와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고자 옷입으신 인간은 잘 어울리고 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유대인을 향한 이 질문은 그들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도 참으로 귀중한 질문이다. 그 이유가 요한은 계시된 말씀에 대한 모형이었기 때문이고 계시된 말씀은 아직도 수많은 견해들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간 이들은 제각기의 관념과 기대감으로 제각기 다르게 주님을 묘사해서 납득한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과 관련해서 자기 마음의 상태로 제각기의 계시를 발견한다는 말이다. 광야는 유대 교회의 계시된 말씀이 있었던 삭막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각 개인의 경우 영적 황량함 또는 시험에 부응되는 인간 마음의 상태도 뜻한다. 모든 이는 제각기의 기대감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검사한다. 가장 흔한 것은 선입견을 먼저 가지고 검사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거룩한 매개체를 통해 그분 자신 내지 그분의 나라와 교통하게 될 때 단순한 마음이 보고 듣는 것에 만족치 못할 때가 너무 많다. 본문의 주님은 인간 심정을 가지고 그 속에 교회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셨는 바 그분의 육성을 통해 제각기 다른 견해를 지닌 교인을 위 짧은 구절로 정확히 표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지혜인 그분의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우리와 그분의 관계 사항에서 뭔가 배워야 하리라.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인간의 사상 중 가장 많은 부류를 형성하는 사상을 주님께서는 위 질문으로 매우 정확하고도 강력하게 묘사해놓으시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글자에서 나타나는 의미만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고 있어 말씀의 가르침에 관한 자기 견해를 타인의 견해에 의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일 뿐이다. 말씀의 바깥쪽인 글자 의미가 말씀의 전부라고 생각할 경우 이는 속이 빈 갈대이다. 말씀의 글자 의미는 가상의 진리(apparent truth)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으므로 거기에 인간 해설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을 붙일 수 있다. 그럴 경우 각기 다른 의미를 가르치는 바 그런 의미가 정도를 넘어서면 전혀 다른 교리로 뒤틀리는 경우까지 이르른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에게 말씀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되어 있다. 계시들, 비록 신성에 그 근원이 있지만 인간 견해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게 작성되어있다. 비록 글자라는 측면에서 말씀이 지니는 특성이 이러하지만 그런 덕분에 모든 이의 상태에 잘 어울릴 수 있어, 각양각색의 해석이 튀어나오지만 이는 내적 의미를 보호하는 수단도 겸하고 있다. 마치 생명의 나무에 이르게 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장치된 돌아가는 불칼 같다. 설사 말씀의 글자가 잘못 해석된다해도 해석자가 진실한 태도로 임했었다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듯” 그들의 신앙이 파괴되거나 심각할 정도의 피해는 입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에 사악한 해석이 내려졌다면 “그것을 지팡이처럼 믿지만 그것은 부러진 갈대에 불과하다 그것을 잡았다가는 도리어 손만 베고 만다” (이사야 36:6). 더구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그 본질에 반대되게 했다면 이들은 마치 유대인이 범한 모독죄, “…사람의 아들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고…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게 해석해보려 했다면 이는 “신포도주로 적신 해면을 십자가 위의 주님께 들어올리는” (요한 19:29) 것과 같아서 그 해석은 내면의 진리가 그 진리의 적들로부터 고통당할 때 그 진리를 받드는 수단이 되어 준다.
8.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가고 있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하느님은 매우 훌륭한 분이신 바 인간의 매력을 끌어 당겨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말씀은 완전한 인간의 품위(grace)보다 더 나은 것으로 옷입고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따라서 말씀이 털옷(hairy garment)(마태 3:4)으로 옷입혀진 것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위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옷을 입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일러주신다. 왕궁이란 천국의 저택이고 그곳에는 왕 중의 왕 되시는 분의 집도 있다. 이런 부드러운 옷은 말씀의 영적 의미에 있을 뿐 글자 의미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슬기롭지 못한 사람은 낮은 수준의 세계에 이런 부드러운 옷이 있으려니 착각하는 바 결국 화가 치밀 수밖에 도리가 없다. 참으로 매끈하게 차려입은 의상에 속하는 어떤 것을 말씀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이 세상이라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천국 수준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진리는 천국의 은혜로운 어떤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 왕궁에 있는 사람이란 영적 수준의 진리로부터 파생되는 선 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 이유가 집은 의지 속의 애착을, 왕은 이해성 속의 영적 진리들인 바, 이 애착 안에 체류하는 진리들은 아름다웁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 예언자가 회개의 설교자로 나타나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을 자초하는 죄를 보여주고 나열하면서 그런 삶을 멈추라고 호통칠 때 그들의 삶이 입었던 옷, 곧 예언자의 거칠거칠한 옷을 벗어 던졌고 질서 자체로 건립된 왕궁의 사람들이 입는 매끄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시오 그분의 왕국은 정의와 평화로 규율된다고 보고 느낀다.
9. 무질서한 정신으로 말씀을 판단하여 본질을 흐려놓고 있는 위 두 부류 외에 또 다른 세 번째의 부류가 있다. 이들은 말씀의 본성에 일치하는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간주되는 부류로서 이들에 관해 주님께서 말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사실은 여느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세례자 요한이 여타 예언자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은 예언자 된다고 주님이 말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치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요한은 신성의 명령을 위촉받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인물 자체가 표현적 특성을 지니게 섭리되었다고 더 생각을 보태본다면 이해의 실마리는 풀리게 된다. 말씀 속의 교리를 가르치는 게 그들의 직분인 예언자는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교리도 의미한다. 우리가 모든 참된 교리의 근원이 하느님의 말씀이요, 그러므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얻고자 진지하게 살핀다면 말씀의 진정한 속성에서 빗나가지 않고 말씀을 읽어갈 수 있다. 어쨌든 주님께서 요한에 관해 그는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여느 예언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말씀이 모든 교리를 함유하고 있다 해서 말씀과 교리가 동등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말씀 자체는 모든 교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말씀의 글자 수준도 인간의 사용을 위해 신성한 지혜 자체가 놓여져 있어 모든 세대를 망라해서 거듭나는 삶의 모든 상태를 계몽시키고 훈육하여 인도해간다.
10. 말씀은 모든 교리보다 더 훌륭하고 여느 예언자보다 더 나은 바 말씀은 교회와 모든 교인에게 특사이요 주님에 앞선 선구자 된다. “성서에, ‘나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제3장 3절에서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요한이 표현한 말씀은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이다. 외치는 자가 누구이든 하느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은 인간 심정에 이르게 하는 주님의 길을 닦게 해준다. 주님께서는 이 문단에서 마치 주님 외 누군가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내신 듯, 마치 여호와께서 예수의 길을 준비하도록 요한을 보낸 듯 말하시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와 예수는 동일한 존재이시다. 그럼에도 따로 따로의 인물인 듯 기록하신 이유는 한 분 주님과 구세주라는 그분의 품성, 신성과 인간 측면을 지칭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를 말하신 것이다. 또는 여호와께서 예수가 등장하기 전에 그분의 특사를 보낸다고 말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말씀의 근원 측면, 보내는 주체 측면 되는 신성이시고 그 반면 말씀 전체는 하느님이 육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심, 구속자, 인간 구세주로서의 예수와 계속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 앞서(before the face of Jesus) 요한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주님의 얼굴(face of Jesus)이란 말씀의 내적 측면, 이는 과거에 계셨던 예수이다. 따라서 말씀의 글자(외적측면)와 글자의 해설자로서의 진정한 교리는 글자의 영적 의미되는 내적 측면의 진리들에 앞서 있어 마음을 준비시켜 내적 진리를 받게 해준다.
11. 여느 예언자보다 큰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여인에게 태어난 사람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말씀의 글자는 자연계로부터 얻은 형상으로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이 글자는 자연적 수준의 납득력에 잘 적응된다. 우리에게 밝혀지는 말씀 속의 진리, 설사 그 진리가 글자 의미의 수준에 머문다 해도 이 진리는 여느 인간의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진리보다 더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란 말씀은 설사 글자만 가지고 비교해도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말이다. 글자만 가지고도 인간이 작성할 수 있는 어느 문장도 비교가 불가능한 게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글자 의미를 영적 의미와 비교한다면 덜 영광스럽다. 인간이 최고도로 하느님의 진리를 납득한다 해도 이 납득력은 가장 수준 낮은 천사의 납득력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행자들이 강제로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한다.” 위 구절의 원어 번역에 대한 의문은 접어둔다 해도,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인 주석에 의하면, 거룩한 사람들이 사용 가능한 수준의 폭행 내지 무력이라는 것이다. 이 주석이 전체적으로는 올바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해지는 폭행이나 무력이 비록 천국 삶이나 하늘나라의 속성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해도 이는 교인 내지 교회에 속한 품성 속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진보해 가는 단계 중 개시 단계이고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시대로 의미되고 있다. 기독교라는 하늘 처방의 시작 단계, 물론 하늘의 여타 처방 때도 거의 비슷하지만 이 단계의 사람들이 진리를 영접하는 측면은 품행(morally) 측면보다는 지적 측면(intellectually)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믿음의 신비로 들어가는데 지력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맹렬한 욕망으로 이 진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 진리를 유용하게 만드는 선과 함께 붙잡지 못할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진리를 붙잡은 초기 단계에서는 대체로 복음이 요구한 것에 관한 지식으로 발전한 선을 수용했을는지 모른다. 누가에 따르면 복음이 요구한 것에 관한 지식으로 발전한 선을 수용했을는지 모른다. 누가에 따르면 복음의 첫 번째 수용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다. “율법과 예언은 요한 때까지였다… 그 이후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누가 16:16). 이를 달리 말하면 그 이후 사람들이 무력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뜻하고 있지는 않고 단지 억지로라도 노력했던 사람들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이 구절의 언어가 함축하는 바, 들어감(entrance)은 심각한 시련 없이는 결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 요한의 시대에서 광폭한 종류의 외적 시험을 수단으로 하늘 왕국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해주고 있다.
13. “그 이유가 모든 예언과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 예언해왔다.” 우리가 주님에 관해서 배우기만 하고 있는 때가 우리에게 있어지는 “예언하는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내적 인간 안에서 태어나실 때, 그러나 우리의 외적 인간에서 그 모습을 명백히 드러내시지는 않고 있을 때 우리에게 있어지는 “요한의 때”이다. 어쨌든 위 두 기간은 순종과 회개라는 수단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 해당되고 장차 생활 안으로 주님이 임하시는 준비단계이기도 하다.
14. “너희가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이다.” 왜 엘리야가 주의 길을 준비하러 오게 된다고(말라기 4:5) 약속되었을까? 위 구절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엘리야가 요한의 한 예징(type)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많은 예언자 중에서 엘리야가 선발된 이유는 세례자 요한처럼 그도 씌어진 말씀을 표현하는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이든 인간 마음에서이든 주님의 길은 말씀 그 자체에 의해 예비된다. 더구나 신성과 거룩함에 관한 것을 표현하는 것은 예언자라는 개인이 아니라 그 예언자의 직능인 바 엘리야라는 개인적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15. 말을 마치신 주님께서는 이 말을 더하시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이는 그분께서 말해온 사항을 주의 깊게 살피고 적극적인 태도를 지니라는 것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것 뿐만 아니라 자음이 전달하는 의미를 탐사하는 신체기관이다. 특히 눈이 이해성과 상통하듯 귀는 의지와 교류하는 기관에 해당된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란 신성한 지혜가 주는 교훈을 명심해서 순종할 뜻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지를 복종케 함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무엘상 15:22).
16, 17. 주님의 가르침이든 요한의 가르침이든 자기 귀를 들이대어 명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이를 주님께서 비유로 지적해주시고 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유대인들은 요한과 더불어 곡을 하고 예수와 더불어 기뻐하기를 거절했다. 요한은 고행자, 수도자같이 나타나 외딴 곳에 살면서 거친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면서 자아 부정(self-denial)이라는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곡을 했지만 사람들은 거절했다. 주님께서는 준엄한 어떤 표시도 하지 않고 오시어 통상적인 사람들과 섞여 보통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유대인에게 피리를 부셨지만 그들은 춤추기를 거절했다.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본 위와 같은 의미 외에도 이 비유는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사랑의 진리와 순진을 뜻한다. “동무를 부름”이란 사랑의 진리와 순진을 인간이 받을 수 있게 적용함을 뜻한다. “우리가 피리를 불었다”란 영혼이 재충전되기 위해, 또는 영감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해주는 천적 수준의 애착을 뜻한다. 그 이유가 “피리, pope, 피리 붐”는 위와 같은 애착을 뜻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춤추지 않았다”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 안에서도 천적 애착에 부응되는 기쁨이 생산되도록 높은 애착이 그 영역에 입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춤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곡을 하였다”란 애착 없는 진리이다.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란 마땅히 있었어야할 진리에의 순종이 없었음을 뜻한다. 이 비유를 각 개인의 상태에 응용하면 더욱 교훈적이다. 아이와 자기 동료 사이에 있어지는 공감(sympathy)의 결핍은 우리 마음 속에서 내적 애착과 외적 애착 사이에 있어지는 공감의 결핍을 표현한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한 아이란 영적 수준의 마음에 속한 애착이고, 이 애착이 동료를 부름이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애착들과 기쁨이든 슬픔이든 서로 주고받으려 함을 뜻한다. 그 이유가 영적 수준의 마음에 있어지는 기쁨은 자연적 수준의 마음에 있는 순수한 선과 진리와 서로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 역시 통회와 겸허를 수단으로 상호간에 교류해서 공감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마음들에서 영적 애착과 자연적 애착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 자연적 마음이 영적 마음에 응답해서 협동하게 만드는 것은 신성의 역사하심에 있는 그분의 목적중 하나이다. 이런 영적 애착의 부름에 진지하게 순종하는데 우리의 자연적 애착이 얼마나 느린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체험했었으리라. 우리의 자연적 수준은 영적 수준과 공감을 나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따라서 진리의 선으로 형성된 양심의 탄원과 부름이 있을 때 자연적 수준의 애착이 경청하도록 자신을 인도해가야 한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명심해야 하리라.
18, 19. 주님께서는 위 비유를 그분 자신과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하시어 설명하신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악마를 가졌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식도락가요 모주꾼이고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사건을 비틀고 왜곡하고 과장하는 마음씨, 결국 저주를 자초하는 그 마음씨 안에서는 미덕도 악덕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을 위 구절에서 금방 살필 수 있다. 어쨌든 위 구절에서도 거기에 담긴 영적 의미의 파악이 본 주석서의 중요한 목적이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현된 개혁이라는 작업은 자아 부정을 수단으로 악을 제거하는 게 그 본질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셨다. 그 이유는 예수의 공생애로 표현된 거듭남이라는 작업은 선을 행함이 그 본질 되기 때문이다. 자아 부정 또는 악을 단념하는 것이 영적 단식이고 선을 행함은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요한을 두고 악마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인간은 자아 부정을 악마로 간주하고 그것은 참된 모든 생명과 그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식도락가요 모주꾼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가 자연적 수준의 인간은 종교의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은 맛있게 먹으려 하지 않으므로 자연적 인간 자체의 생각만으로 정작 영혼을 채워 더 이상 어느 것도 채울 공간을 남기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헐뜯는 위의 발언은 군중이 아니라 바리사이파인들, 굉장히 성결되다는 인물로 자처하는 자들, 주님께서 악이나 위선 외의 세상에 관해서는 거절하시거나 정죄 않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세상의 어떤 인간으로 간주해버리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세리와 타인들을 친구로 삼는 것까지도 바리사이파인들에게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세리나 죄인들과 가까이 하신 이유는 그분의 목적이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분의 품새를 보아도 주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형이 되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죄인들이 경멸당하고 있다 해서, 또는 그들과의 교제로 경멸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서이든 여타 사람들 같이 죄인들을 피하시지 않았다. 그들의 영혼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너무 위대해서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했고 그분의 사랑은 너무 순수해서 그들과의 접촉으로 오염되는 것도 예방해주었다. 이렇게 말하시어 결론 내리시고 있다. “지혜는 그 자녀로 정당해진다.” 글자 의미에서 볼 때 지혜의 자녀란 슬기로운 사람이다. 지혜는 오로지 슬기로운 사람만이 옳다고 인정한다. 지혜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지혜 자체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슬기롭게 된 이들에 의해서일 뿐이다. 슬기로운 사람 외에 누가 지혜를 음미할 수 있을까? 영적 의미에서 볼 때 지혜의 자녀란 지혜 속의 선과 진리들이다. 성경이 언급하는 지혜라는 단어의 사용은 지적 측면보다는 품행 측면에 비중을 놓고 있다. 성경에서 우둔함이 악행(depravity)을 뜻하듯 지혜로움은 총명에 바탕을 둔 선함을 뜻한다. 지혜롭다 라는 결과를 생산하게 한 원리가 과연 특출한 원리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내보일 때만이 지혜는 정당해진다.
20-24. 경이로운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회개함이 없어 책망을 들어야 하는 성읍을 향해 언급하시고 있다.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성 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위 도시들은 방금 주님께서 비유로 전달하신 진리에 관한 장엄한 샘플이다. 기적과 경이로운 일들을 요구했던 이들에게 위 구절의 대답은 얼마나 심각한지! 구세주의 권능과 복된 일들은 정작 그 일이 있었던 성읍에서는 대체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곳 사람들은 수행된 적이 없던 위대하고 가장 은혜스러운 기적들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불신앙과 죄 가운데 파묻혀 있었다. 한마디로 외적 측면의 신념이나 설득이 내적 측면의 신념을 생산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내면으로 신앙이 있으려면 내면적 확신이 먼저 있어져어야만 한다. 주님의 기적들이 구원해주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정착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방법뿐이다. 영적으로 우리 혼(soul)에서 작업되는 방법이다. 주님의 기적들은 혼을 건전 상태로 회복시키는 수단들을 표현했다. 건전한 상태로 회복된 혼만이 그분의 기적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그 이유가 주님의 기적은 구세주로서의 주님에 관해 실험적인 지식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을 입증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신앙과 회개치 않은 죄로 화를 입고 있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다.
위 구절을 글자 의미로만 볼 경우 약간의 곤란한 점이 발견된다. 만일 주님의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을 회개하게 했을 것이라면 왜 그 당시에 있어지지 않았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주님이 띠로와 시돈은 구하실 수 있었다 해도 코라진과 베싸이다는 구하실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더 일찍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께서는 그 때 이후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되도록 설비하시되 완전하게는 못했을 것이다. 극도의 악까지 치료되려면 극도의 악이 출현 되어 극성을 부릴 때이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분이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주님의 자비는 미리 설비하시고 있다. 심판 날에 구세주를 거절한 사람보다 띠로와 시돈이 더 가벼운 벌을 받게 되어있다. “많은 것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되어진다.” “이것이 단죄이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도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본문을 영적 의미로 보게 되면 더 엄숙하고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지적 측면의 원리들이 띠로와 시돈으로 표현되고, 이 지적 원리 안에 있는 거짓 추론이 코라진과 베싸이다로 표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자연적 인간 속에 있는 의지 측면의 원리들이 소돔으로, 그 의지의 원리에 선천적으로 붙은 악들이 가파르나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띠로와 시돈으로 표현된 자연적 인간 속의 지적 원리 자체는 “권능의 일” 또는 구속하시는 주님의 자비로 구원될 수 있는 반면, 코라진과 베싸이다로 표현된 지적 원리 속의 거짓 추론은 주님의 신성한 진리에 정반대되는 바 거절되고 정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가 있으리라고 발표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거짓 추론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고 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그것들과 결별하는 수밖에 없다. 소돔으로 표현되는 자연적 인간의 의지 측면의 원리까지 그분의 구속하시는 권능은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가파르나움으로 표현된 그 속의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사랑에 정반대되는 바 그 악은 반드시 우리 속에서 소멸되어야만 한다. 이런 악도 화 있을 것이라고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악들, 특히 지옥으로 가라앉게 하는 자아 사랑의 악을 떠안지 않는 길만이 화를 피할 수 있다.
25, 26.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앞의 주제의 또 다른 측면 즉 신성하고 천국적인 측면이 본 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인간이 신성한 자비의 제안을 거절할 때 이 자비는 거절의 결과나 악의가 경감되는 쪽을 선택하신다. 그 방법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범죄 발생을 더 악독해지게 하는 지식을 감추시는 것이다. 그분의 전능하심은 정작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선을 그들이 완고해서 받지 않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의 자비하심은 그들을 더 죄 있게 만들기만 할 뿐인 진리를 보류하신다. 진리의 내면적 인정은 자기 생명이 되도록 보존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인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적 차원의 역사 중 하나이다. 이런 섭리의 한 가지가 본문에 실려 있다. 즉 하느님의 선하심은 슬기롭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속한 사항을 감추어두신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 즉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 심정이 순진하고 영이 단순한 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여주신다. 어떻게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진리들을 감추거나 보여주시는 일을 하실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이러하다. 말씀의 글자는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그 속의 영적 진리가 감추이게 하되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밝혀준다. 말씀의 글자는 마치 에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있었던 구름 기둥 같아서 이쪽은 밝음을, 저쪽에는 어둠이 있게 한다. 이런 조치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감추이고 드러내심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선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아버지란 신성한 사랑 측면의 주님을 의미하는 바 이 구절 같은 조치는 순수한 사랑이 하나인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이 보시기에 선이었다(its being good in his sight)”에서 선한 모든 것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사랑은 “그분이 보시기에” 적절한 지혜로만 행동된다.
27. 주님께서 이제 아버지 쪽으로부터 군중을 향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가르쳐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 감사기도가 주는 인상은 마치 아버지 보다 아들이 더 하위 서열에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함을 주장하고 있다. 본문의 “모든 것”은 “아버지가 가지신 모든 것,” 즉 신성의 특권과 모든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런 모든 것을 아들에게 전달하셨다. 사실 한 분밖에 지닐 수 없는 신성한 모든 것을 또 다른 인물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아버지란 주님의 내재하고 있는 신성이고 아들은 내재하는 신성이 거하는 인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신성에 속한 “모든 것”이 인성에 전달되는 것은 타당하고 당연하다. 마치 우리의 영혼이 가진 모든 것이 육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영혼 속의 것이 육체에 배달된다고 해서 영혼의 어떤 속성이든 그 권위성이든 어느 것도 육체에 빼앗기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신성에 속한 것을 그분의 인간 본성에 배달하심으로 인간 자체를 신성되게 만드셨다. 즉 신성한 영혼이 거주하기에 꼭 맞는 신성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은 신성의 참 형체, 신성을 명백히 나타나게 했다. 예수 안에서 신성은 인성이고 인성은 신성이시다. 그러므로 둘 다 똑같이 무한하시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밝히 알게 해주려는 사람들밖에는 아는 이가 없다.” 만일 아버지밖에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밖에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면 아들과 아버지의 서로에 대한 지식은 무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성을 통하지 않고는 신성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구절이 말하는 주님의 초대야말로 얼마나 적절한지!
28. “고생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인간의 허약한 모든 것, 슬픔을 짊어지신 분, 영적 노동의 모든 상태를 통과하신 분, 그래서 가련하고 죄 많은 피조물, 고뇌 속의 피조물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 인간 최대의 시련에서도 그 인간을 떠받혀 주실 분, 이런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가 우리 앞에 계셔서 복된 초대와 확증을 가져다주고 있다. 악과 잘못들은 압박하는 두 개의 짐이어서 인간의 열매를 썩게 하고 신음소리만을 내게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만이 위 두 짐이 영적 생명을 갖는데 방해꾼임을 안다. 이들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위해 압박하는 자신의 악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을 갖는다. 주님께 나아오는 녹초 된 영혼에 약속하신 쉼을 구하기에 앞서, 주님의 훈계에 귀를 기울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악이 죄임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죄인이 필요로 하는 것, 죄인에게 쉼이 필요해서 그 쉼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구세주 한 분뿐이시다. “사악한 자에게는 쉼이 없다.” 쉼(rest)은 정의 속에서만 획득된다. 그리고 이 정의는 정의 자체이신 그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분이 주는 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길을 단념함으로, 회개라는 열매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서 계명을 실천하는 자세로 발전해야 한다. 그 이유가 쉼의 저자이신 그분께로 끌어당겨주는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29. 짐을 지느라 허덕여 쉼을 찾는 사람을 초대하시고 그들이 그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도록 아울러 초대하시고 있다. “나는 심정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가 사탄의 멍에를 벗어 던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어야만 한다. 죄의 멍에가 정의의 멍에로 대체되어야 한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안내하는 원리로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고 그분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성에 방향을 지어주는 원리로 그분의 진리를 받는 것을 뜻한다. 주님 스스로 말하신다. “나는 심정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정확히 말해 그분은 온유와 겸손 그 자체이시다. 그분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기도 하시다. 그분은 가장 높으시지만 가장 낮으시기도 하다. “나는 섬기기 위해 너희 가운데 있다.” 이런 복된 그분의 본보기를 모방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으로 하여금 쉼을 발견하게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지옥의 모든 권세를 정복하신 분, 불일치로 얼룩진 인간 모든 원리를 던져버리신 분, 그래서 인성 안에 평화를 만드신 분, 이제 이런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원천이 되신 분, 이런 주님에게만 진정한 안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인 바 그 멍에는 편할 수밖에 없다. 그분의 짐은 진리의 짐인 바 가벼울 수밖에 없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고 사랑은 완전한 자유이다. 따라서 사랑과 진리가 있는 곳, 그분의 멍에와 짐을 진다면 압박이나 피곤에 지치는 경우가 없고 오로지 행복과 신선한 느낌만이 맴돌 뿐이다. 이 기쁨은 예수의 멍에를 메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경험이다. 많은 이들이 천국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 고달픈 삶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천국에의 길을 더 쉽게, 천국에 더 확실히 입장할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분께서는 율법의 짐과 멍에를 그분 자신으로 만드시어 이를 행하셔서 우리도 그 짐과 멍에를 거뜬히 짊어질 수 있게 하셨다. 그분이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무를 면제시켜주기 위해 우리 대신에 이루신 게 아니라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율법의 완성을 더 쉽고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해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분 스스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행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우리에게 본보기로서, 후원자로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이런 권고는 기독인과 그 구세주에 매우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네 짐을 주님께 의지해라. 그러면 그분은 너를 받쳐 주리라.” 주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짐을 짊어지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우리가 짐을 진 상태에서 그 짐을 떠받혀 주시리라고 시편은 말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요 원조자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 여정 내내 우리와 함께 가신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원조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붙잡아 주신다. 우리가 기쁨과 평화로 된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소개해줄 때까지 함께 해주신다.
마태복음 11장
<마태복음 11장 흐름정리>
복음서에서 침례 요한만큼 예수님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도 드물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침례를 베풀었다. 주님께 직접 침례를 준 자도 침례 요한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역과 메시야되심에 대해 궁금해 했을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 같은 의문점에 대한 답변을 준다.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 질문했고(2,3절), 주님은 병자의 치유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구약에서 예언한 구속자가 자신임을 우회적으로 밝히셨다. 이어 요한에 대한 칭찬과 평가로써 이 주제를 일단락 지으셨다. 본장 후반부는 안식으로 초대하는 주님의 잔잔한 호소이다.
<마태복음 11장 줄거리>
2.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냄.
7. 요한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18. 요한과 그리스도에 관한 백성들의 견해.
20.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회개치 않음과 감사치 않음을 그리스도가 책망함.
25. 복음을 단순한 아이들에게 나타낸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함.
28.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모든 자를 초청함.
<마태복음 11장 도움말>
* 7절 : 요한에 대하여.
7~19절에 기록된 요한에 대한 칭찬은 때로는 그에 대한 추도사로 불리어 왔다. 요한은 이 일 후에 약 6개월이 지난 AD 30년 유월절 며칠 전에 참수형을 당했다.
* 9절 : 선지자[예언자]보다도 나은 자.
요한은 메시야의 개인적인 전주자였다. 그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과업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는데, 이는 곧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는 일이었다. 요한은 진실한 선지자의 모든 위대한 특성을 겸비하였다.
* 11절 :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
성격이나 확신, 신실함에서 어느 선지자도 침례자 요한을 능가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선지자도 메시야의 초림의 직접적 포고자가 되는 특권보다 더 큰 특권을 누려보지 못했다. 십중팔구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중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하는 최고의 특권을 위하여,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모든 특권을 즐거이 포기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먼 데서 바라보며,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였다.
* 13절 : 선지자와 및 율법.
보통은 “율법과 선지자”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구약을 일컫는 유대인의 일반적 용어이다.
* 15절 : 귀 있는 자는.
방금 언급된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주 사용한 엄숙한 권고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귀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아마도 여기서 그리스도가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은, 마음이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로 인해 분별력을 갖게 되는 영적인 주의력이다.
* 19절 :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예수는 그들이 멸시하고 배척하는 바로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 22절 : 견디기 쉬우리라.
하나님은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실 때 그 기회를 활용했는가 아니면 소홀히 했는가를 보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빛을 사용한 정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것이다.
* 25절 : 숨기시고[감추시고].
여기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분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 어떤 백성들보다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적어도 그들만큼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예수는 그의 사역의 초기 부분을 유대 지역에 바쳐서,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예언된 메시야라는 증거를 평가할 기회를 주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반문맹인 보통 사람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연구했기 때문에 예언의 의도를 이해하고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그 예언의 성취를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늘이 그토록 은혜롭게 내려준 빛을 거절하기로 선택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편애함이 없었다.
* 28절 : 수고하고.
그리스도가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육체적인 수고가 아니라, 진정 사람을 염려로 무겁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수고”이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행함에 의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로 인해 무의미하게 계속되는 “수고”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 초청은 듣는 무리들에게 특별한 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30절 :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하는 자는 그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는 “멍에”를 메고, 그의 학교에서 “배우”려고 “오는” 자는 그가 약속한 마음의 “쉼”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보장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공로로 구원 얻으려고 애쓰는 율법적 의의 무거운 짐과 죄 자체의 훨씬 더 무거운 짐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예수님 말씀] 종말의 믿음 없는 세상(마 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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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씀하는데 세례 요한이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주어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막 종말로 갈수록 이런 현상들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선택한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복음을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종말의 믿음 없는 세상(마 11:1-30)
1-15절, 세례 요한의 질문
[1-3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 .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셨다. 예수께서는 전도하는 일에 힘쓰셨다. 그때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물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오실 그 이’란 메시아를 가리킨다.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했던 요한이지만(마 3:11-12; 요 1:29-34), 옥중에서 그에 대해 의심이 생긴 듯하다. 이제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4-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확실한 증거이었다. 그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것들을 보는 그대로 그 선생에게 전달하라고 말씀하셨다. 네 권의 복음서들에 증거된 예수님의 기적의 행위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이러한 귀한 증거들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7-11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 . . .그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문자 그대로 풀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의심하는 사람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은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즉 메시아보다 앞에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약속된 하나님의 사자이었다. 선지자들 중에 메시아를 직접 보고 그를 소개한 자는 요한밖에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메시아를 맞이하도록 길을 준비한 선지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아직 구약 교회에 속해 있었다. 본문의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신약교회 교인들은 세례 요한보다 메시아에 대해 더 나은 지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12-15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다(마 3:2).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들이 담대히 천국으로 들어감으로 이것을 ‘침노’라고 표현하신 것 같다.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끝이다.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끝에 예언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오고 있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하였다.
16-19절, 이 세대에 대해
[16-19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친구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 행한 일로 인하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그의 자녀들로 인하여’이다. 지혜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
이 세상은 믿음이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잘못되게 반응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비난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함께 악을 행하는 자도 아니시다. 지혜의 주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의로우시다는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신 일들에 대해 무지하게 불평하지 말고, 지혜의 자녀들로서 그 일들을 이해하고 사모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의 섭리의 목표인 교회와 복음 사역을 위하고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전도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후원하는 일을 위해 힘쓰자.
20-24절, 회개치 않는 마을들을 책망하심
[20-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 . . .예수께서는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여 말씀하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음부(하데스)는 지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의 권능의 일들을 가장 많이 베푸셨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들의 사람들이 회개치 않음을 책망하셨다. 외형적 기적이 내면적 회개를 항상 동반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마음은 얼마나 어둡고 둔하고 완고한지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기독교는 초자연적 은사를 전하거나 추구하는 은사주의가 아니고 죄를 떠나는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인격과 삶의 운동이다.
마지막 심판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에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모든 행위, 즉 옳고 그른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벌은 차등할 것이다. 큰 죄인은 큰 벌을, 작은 죄인은 작은 벌을 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또 기적을 보고도 회개치 않는 완고한 마음은 심판날에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어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구할 것이 아니고, 참된 회개와 믿음, 바른 인격과 삶을 구해야 할 것이다.
25-30절, 구원 계시와 초청
[25-26절]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 . . .그때에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천지의 주재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 즉 세상 지식이 적고 비교적 순진한 자들에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영광만 찬송케 하셨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맡겨주셨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직분과 권세와 영광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고, 또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시몬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6:17), 또 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또 본문에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보인다.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고 또 우리로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신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 . . .예수께서는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감각과 불신앙에 빠져 있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마을들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영육으로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들에게 그는 편히 쉬게 하시겠다는 구원의 초청을 하신 것이다. 이 초청은 초청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보인다. 이 세상에서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스스로 낮아지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는다.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가 명하신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는 제자의 길이다. 그의 멍에는 성도의 직분과 봉사자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믿음 안에 들어와 보면, 그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가벼움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식과 믿음을 얻었고 구주께서 주신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므로, 이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를 섬기며 따르며 배워야 한다.
본장의 교훈을 요약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는가? 우리는 참으로 회개했는가? 기독교는 단순히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회개 운동이며 거룩한 삶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믿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가?
둘째로, 우리는 참 안식을 누리자. 주께서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신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다. 우리는 그 평안을 누리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자.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그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길이다.
[누가복음 헬라어 강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예수라 하라(눅 1:24-31)반응형
회개의 부르심(마태 11: 28-30) 칼빈의 주석
회개의 부르심(마태 11: 28-30) 칼빈의 주석
마태복음 11장 28에서 30절 말씀이 회개의 부르심이라는 칼빈의 가르침이 너무도 소중해서 붙들고 기도하며 나눕니다. 은혜받고 회개하여,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친절하게 그에게로 그가 그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비록 그는 아버지를 모두에게 계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오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필요성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로 중독 되어 있어서, 그의 은혜를 배고파하거나 목말라 하며 찾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6). 세상에 경도된 자들은 하늘의 삶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참하고 환란을 당한 자들에게 돌이키신다. 그는 그들이 수고하고 무서운 짐 아래 신음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슬픔과 혼돈으로 눌려 있는 자들을 일반적으로 가르키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곧 그들의 죄로 인하여 어쩔줄 몰라하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놀라움으로 차서, 무거운 짐 아래 빠져 버릴 지경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을 겸손하게 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환란으로 무겁게 짐을 지더라도 아직 완고하고 반항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뜻하는 자들은, 영원한 죽음에 그들이 노출되어서 양심이 고통을 받는 자들인데, 이들은 내적으로 자신들의 슬픔에 너무 눌려서 기절할 지경이다. 바로 이렇게 기절하게 하는 것이 그들을 그의 은혜를 받아 들이도록 준비하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비웃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난을 자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이나 어리석음이 환란 당한 영혼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구원받지 못하게 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사탄의 올무에 빠져서 그리스도가 없는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설득을 당하거나, 이 세상에서 그들이 행복하다고 상상하는 자들 모두에게, 우리는 이별을 고하자. 우리의 고통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찾도록 몰아가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쉼을 즐기도록 받아 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짐에 눌려서 빠져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게으름보다 더 치명적인 독이 세상 즐거움이나 혹은 우리 자신의 의와 덕에 대한 거짓되고 속이는 의견으로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알자.
우리는 각자 자신을 일깨우도록 진지하게 수고하여, 먼저 힘차게 세상의 허영을 떨쳐 버리고, 다음으로 모든 거짓된 자신감을 내려 놓자. 그리스도께 나가려는 이 준비가 그들을 죽은 자들 같이 만들지라도, 이것이 성령의 선물이라는 것이 마땅히 견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회개의 시작이요,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으시고, 다만 우리에게 그에게 오는 사람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 주려고 하셨다.
짐과 수고를 율법의 예식에 국한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매우 좁게 제한하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이 참을 수 없이 짐스럽고 예배드리는 자들의 영혼을 어쩔줄 모르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것을 우리는 마음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을 모든 환란을 당한 자들에게 뻗치실 때, 또한 그의 제자들과 복음을 무시하는 자들을 구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표현의 보편성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모두 예외 없이 다 포함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 자신을 악한 의심으로 닫지 말아야 한다. 주목할 것은 그러한 사람들은 숫자가 적다는 것이다. 이는 멸망하는 수많은 셀 수 없는 다수의 사람들 중에, 그들이 멸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는 구원은 유일하게 평화를 우리에게 주는 값없는 죄의 용서이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멍에를 메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깨닫는 바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육신의 탐닉하는 것으로 바꾸어, 그것을 욕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비참하게 고통받는 양심들에게 즐거운 쉼을 약속한 후 동시에 그는 그들이 그의 멍에에 복종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총애를 회복하게 된 것은, 그들이 더 큰 자유로 죄를 마음대로 짓도록 속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은혜로 일으킴을 받은 그들은 또한 그의 멍에를 그들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면 그들은 육신의 부도덕함을 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는 그가 말씀하시는 쉼의 정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평안을 즐기되,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육신의 전쟁을 면제시키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훈련의 짐을 지고 그들을 단련하며, 멍에를 그들이 짊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배우라
그의 제자들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때 보통 경험하는 두려움의 영향 아래, 그의 신적 영광 때문에 그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그의 온유함을 확신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칼빈은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오히려 우리를 그 자신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완악함은 우리를 그의 멍에가 힘들고 불편한 것이라고 멀리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서 그는 30절에 덧붙인다. 나의 멍에는 쉽다고. 사람이 온유함으로 옷입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떻게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의 머리를 조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단어들의 뜻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멍에를 매라고 격려한 후에, 그것의 어려움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게 그들을 지연시킬까봐, 그는 바로 덧붙인다. 내게서 배우라. 그리고 선포한다. 그의 본보기가 우리에게 온유함과 겸손함에 익숙하게 만들면, 더 이상 그의 멍에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덧붙여,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다. 육신이 발버둥질하는 한, 우리는 반발한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자 다른 방법으로 힘쓰는 자들은, 고통하며 그들 자신을 헛되이 낭비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교황주의자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고문하면서, 조용하게 무서운 독재 아래 신음하며 견디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머리 숙이지 아니한다.
마태복음 11장: 하나님께 이르는 길
마태복음 11장: 하나님께 이르는 길
1. 1-15절: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열두 제자에 대한 훈련을 마친 다음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동안에는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 때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3절)라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실 그분” 즉 메시아는 심판하실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가 듣는 소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물은 것입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닌지.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5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온전해짐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대답은 당신이 오실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하시면서 예수님은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6절)고 하십니다. 자신의 기준 혹은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대하면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 하면 의문과 회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틀과 사고와 기대를 넘어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7-15절). 그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모든 예언자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시아를 통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은총을 입은 사람은 세례 요한보다 더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12절). 이 구절은 새번역보다 개역개정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도 그런 까닭이고, 그런 까닭에 예수님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느리고 부드럽고 조용히 역사하기에 인간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깁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 “느리고 은밀한 힘”을 의지합니다.
2. 16-24절: 눈 먼 세대에 대한 애가
예수님은 초점을 바꾸시어 세례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말씀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면서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18절). 반면, 예수님이 금식하는 모습을 숨긴 채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자 사람들은 그를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합니다. 도무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회개할 줄 모르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는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생각났습니다. 이 도시들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 형성되었던 중요한 동네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기는 할망정 회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볼 눈이 없었고 들을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운명을 생각하며 탄식하십니다.
3. 25-30절: 감사 기도와 초청
회개할 줄 모르는 교만한 세대를 두고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한 가지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25절)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두쪽 나는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같은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무시 당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아무 존재감 없던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그랬습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인 것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25-26절).
감사 기도 중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다.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신을 향해 더듬어 가려 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27절).
예수님은 이러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 몸부림 쳐 온 사람들에게 초청하십니다. 그렇게 몸부림 쳤지만 하나님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영혼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아서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28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이를 길을 모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 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분의 은총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짐을 내려 놓고 쉼을 얻습니다. 그분 안에서 새로이 지게 되는 “멍에와 짐”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입기 위해 지는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기에 기쁨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묵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과 틀과 사고에 맞추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내가 중심이고 기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에 대해 의문에 빠지고 그 의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축소시키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틀로도 담을 수 없고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차이는 백만광년보다 더 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열고 늘 새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경이감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위로와 안식과 만족이 있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 앞에 이르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그 품에서 얻은 힘으로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짊어집니다.
복 되어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이! 그 품에서 위로와 안식과 만족을 발견한 이! 그 힘으로 예수의 멍에와 짐을 짊어지고 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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