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이 가난한 자는 복 이 있나 니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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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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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12 KRV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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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8/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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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 – 대한성서공회

개역한글 ·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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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korea.or.kr

Date Published: 5/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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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 – 국민일보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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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2/28/2021

View: 990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아티클 / 성경 주석 …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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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10/12/2022

View: 9842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Faithlife Sermons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주님이 안 계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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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4/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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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경남도민신문

그러면 이제 답이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 그런 허심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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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ndomin.com

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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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 브런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 성경에 나오는 ‘8가지 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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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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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목사칼럼 – 팔복 해설(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해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칼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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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auri.org

Date Published: 5/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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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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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음 이 가난한 자는 복 이 있나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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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5.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NAYLbYynlI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마태복음 5:3-12 KRV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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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 ]

제 5 장

복이 있는 사람(눅 6:20-2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와 율법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노하지 말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출 20:13, 신 5:17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 는 히브리 인의 욕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출 20:14, 신 5:1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신 24:1, 3 또 일렀으되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맹세하지 말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레 19:12, 민 30:2, 신 23:21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 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혹 악한 자로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출 21:24, 레 24:20, 신 19:21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혹 악을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레 19:1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가.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다는 말 자체가 실제적으로 돈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부자와 가난을 구분하는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은 물질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현재 물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다. 반면에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로 인해 비교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아가 부서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한계와 불가능을 깨달은 자다. 이 땅을 살면서 자신이 가진 물질로도, 명예로도, 사람으로도, 권세로도 행복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심령의 가난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은 영혼의 탄식을 하는 상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無) 사상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덕(德)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내 안에 있는 것이 죄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왜냐하면, 팔복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겸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도덕적 겸양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여기까지, 바로 이 끝을 경험한 자만이 내 영혼의 깊숙한 외침으로 ‘나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읊조림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정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외치는 간절함이다.사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다르다. 그들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복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이 자리로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다.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만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것이 팔복의 복을 온전히 누리는 열쇠다.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인정한다.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사람은 세리였다(눅 18:9-14).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미덕이 전혀 없는 자라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그것은 거만의 반대다.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형태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야만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충족할 수 없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해 주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창조 목적에 맞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산상수훈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런 축복된 상태를 획득할 수 있으리 라는 자기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산상수훈은 우리 안에 진짜 영적인 가난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복이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심령이 가난해지면, 우리는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력서를 부풀리거나 직책을 자랑하지 않게 된다. 부풀려진 자기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배우고 성장하고 남의 충고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일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정직해진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나무를 다듬으며 일을 시작하셨을 때 누군가의 안내와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으셨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도우실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매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힘을 추구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주 빠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마.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과, “우린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분발해서 일해야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 중에 과연 누가 끝에 가서 더 성공할 것 같은가? 거만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지도자가 겸손하고 힘을 실어 주는 지도자보다 더 위대해 보인 적이 혹시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최고의 조직에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유명한 연구에 의하면 꾸준히 위대함을 유지해 나가는 회사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그 회사에 겸손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부풀리는 구 시대적인 모습 안에 고착된 지도자와 일터도 아직 많다. 이직하는 것이 항상 가능할 순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일 수도 있다. 또 직장을 떠나는 게 가능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조직에 크리스천으로 남는 것이 선을 위해 중요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주변 사람에게 더욱더 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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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주간 동안 평안 하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복 많이 못받으셨어요?

우리는 새해가 되면 으레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새해 인사를 나눕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문화 속에는 이 복의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음 말해줍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큼 이 복에 대하여 독특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있는 민족도 드물어 보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대문 손잡이로부터, 문갑, 은수저, 옷의 무늬, 베게 모, 방석 등에 복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가구들이나 침구에서 복자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복에 대한 개념은 사실 우리의 전통 무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칠성당에서 냉수 떠다 놓고 빌고, 시골에 가면 마을마다 칠성당이 있죠. 이 칠성당은 북두칠성을 모신 사당이죠. 또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칠성각은 우리민족의 토속신앙이었던 칠성신앙이 불교라는 외래종교 속에 녹아 든 자취입니다. 이와 같이 이 전통무속신앙은 불교나 유교, 도교등과 함께 혼합되었고, 다원화된 종교 속에서 혼합된 복의 개념이 우리 선조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의 개념은 무의식적으로 후대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조상의 무속신앙과 그 밖의 불교나 유교에 기반한 복의 개념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사를 갈 때 좋은 날을 정해서 이사해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손 없는 날? 이라고 하죠 아마. 네, 그런 날이 복 있는 날에 이사를 가야한다고하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와 같은 날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복은 어떤 시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묘지를 정 할 때나, 집을 살 때 그 집터와도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인 가정에서 조차 결혼을 할 때 궁합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좋은 배필 만나서 복을 받고 잘 살길 위해서 라고 합니다.

하여간 복은 우리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 복은 일반적으로 아주 실제적(물질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황금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이 물든 사회 속에서 이 한국적 복의 개념은 더욱 물질적인 축복에 치우쳐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복은 “[ 福 ] 복(福)[명사] 1.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 좋은 운수. 복조(福祚). 행복. ¶복을 듬뿍 타고난 사람./신불(神佛)에 복을 빌다. 2.좋은 운수로 얻게 되는 기회나 몫. ¶먹을 복을 타고나다./자식 복이 많다.

******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사전적 의미의 복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좀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복은 너무나도 물질적인 것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물질적인 가치관에 치우친 한국적 복의 개념이 성경적 복의 개념을 오해 하게해서 결국 믿음과 신앙체계를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된 복의 개념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 한해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성경에서 제일 처음 인간과 관계하여 복이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계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손들의 선물”이라는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옷도 신발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복의 개념으로 그들은 복받은 사람들입니까?

성경에서 두 번째 언급되는 복은 안식일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신 것(창2:3)것이다. 이것 역시 한국적인 복에 대한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쉼 자체를 복으로 말씀합니다.

또 성경에서 복에 대한 선명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에서와 야곱이 복을 두고 싸우는 장면에서도, 야곱이 결국 복을 쟁취하지만 야곱이 에서에 비해서 더 큰 물질을 가지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지거나 더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볼 때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물질적인 복의 개념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작년에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한 사람을 추적한 기사가 뉴스에 방영되었습니다. 당첨된 이후 1년 동안 은밀히 추적을 해서 그 사람의 삶을 기사화한 것이었습니다. 복권당첨 이후 1년 동안 이 사람이 겪은 일들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여러 번 돈을 강탈당하였고, 쫒겨다녀야 했고, 나중에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결국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겨서 이혼하게 되고 온갖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로또복권에 당첨된 한 경찰관이 결국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했다는 기사가 났었지요. 친구도 친척도 다 버리고 고국땅을 떠나서 살아가야 하는 이 사람은 과연 복받은 사람입니까?

얼마전 삼성그룹 총수의 셋째 딸이 자살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불행한 일이고 안된 일이지만, 세인들은 그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 딸이 갖고 있던 재산이 2000억을 넘는다고 하죠.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죽어? 그 돈 갖고 행복하게 살면 되지, 결혼 반대한다고 죽나…

그러나 그녀에게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행복을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녀에게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인격적이며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복 역시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행복, 그 첫 번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적 복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복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세상의 복은 언제나 소유의 개념입니다. 물질이 많을 때 복이 있습니다. 좋은 집과 차가 있을 때 복이 있습니다. 먼가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을 때 복이 있다고 합니다. 또 옛날에는 자식이 많으면 또 다복하다고 했습니다. 먼가 소유할 때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소유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잘 아는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즉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여덞 가지 복에 대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산상수훈의 팔복을 다룰 때 복의 개념으로부터 우리는 세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는,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다시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둘째는,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다면,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복을 주시겠다는 것인가? 어떤 복을 약속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도 그와 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복을 우리도 받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복이 있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지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럼 심령이 부자인 사람도 있겠네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그리고 심령이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니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품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행복을 이루어가는 기초를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혹자는 심령이 가난한 것을 경제적 빈곤, 가난과 혼동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가난이 복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빈곤인 가난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부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보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였던 바나바가 자기가 가진 재물로 주의 몸된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또 두아디라의 자주장사 루디아도 부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과 실라를 만난 뒤로 자신의 부유함을 가지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이오라는 사람도 나오고 빌레몬이라는 사람도 나오고, 전부 그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선천적으로, 체질적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도 있고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들도 있고 내향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내향적인 사람들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태어난 우리의 개성, 체질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없음도 아니고, 선천적인 개성이나 체질과도 관계가 없다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 가난하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보고 가난하다고 이야기합니까? 가난하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내 힘으로 조달이 안 될 때 그 사람보고 가난하다고 합니다. “핸드폰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 그런 것보고는 가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 속에서, 특히 의식주의 면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기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외부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난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외부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아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가난은 결핍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이야기합니까? 심령이 가난함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영혼의 결핍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외부적 도움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외부적 도움 없이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I have nothing.(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I can do nothing.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외부적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외부적 도움이 뭐냐면 우리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아니하시면 나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얼굴 들고 다닐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열심히 마음만 먹으면 기어코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는 정도 재물도 소유하였다고 교만하십니까?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은 절대로 심령이 가난함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주님이 안 계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요, 내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렵고 떨림”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세리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자기 가슴만 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그저 내가 문제 있을 때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내 문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과 관계없이 “주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고백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믿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의 그 바닥에 가서 보면, 문제는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이 없어도, 주님이 안 계셔도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거기서부터 모든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복의 가장 첫 출발은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질 때 비로소 모든 복이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자에게 복이 있다면,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천국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이란 무엇입니까? 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국은 보통 미래적인 면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흔히들 죽으면 천당간다고 말하지요.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천국, 아니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비로소 임하게 될 미래적 천국, 그 이후에는 예수님이 영원하게 왕노릇하고 예수님께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노릇하게 될 그 천국, 그것은 미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미래적인 면 말고도 이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그 때에 이루신 천국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임한 천국, 이미 천국이 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했다.” 라고 과거 형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이미 임하고 확정되는 그러한 천국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이 있습니다. 믿는 백성들이 실제 삶에서 누리고 영유해 나가는 천국, 바로 이 천국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조건들이 맞을 때 그 천국을 갖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팔복이 바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의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팔복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얻게 될 현재적 의미의 천국의 근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팔복의 조건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 현재적으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팔복이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주님이 재림하실 그날에 천국갈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금 현재 여기서 누리는 천국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이번 주에도 금년에도 여러분이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천국, 영원한 안식과 평안이 있는 여러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재적 의미의 천국을 여러분이 누리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무엇이냐면, ‘심령이 가난한 자’ 라는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우리도 그와 같은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복을 우리도 받을까요?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를 주십니까? 수없이 많은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고통과 환난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 고통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통하여 고통을 주시고, 어떤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 고통을 주시고, 머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전도를 해보면 압니다. 어떤 때 전도가 잘 됩니까? 그 사람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순간순간에 전도가 제일 잘 됩니다. 그 때가 심령이 가난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환경이 어려울 때, 금전적으로 어려울 때, 여러분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실직했을 때, 앞날이 불투명할 때, 내 삶 속에 뭔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보이는 순간순간에, 내게 크나큰 질병이 드는 순간순간에, 그 때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믿을 것이 많다-돈이 많다, 건강하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재물이 갑자기 날아가 버렸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건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 사람이 여러분을 배신했을 때,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여러분으로부터 따나갈 때,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연약한 모습, 자신의 추한 모습, 별수없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이런 친구가 없습니까?

제게 참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 형님이 한국의 재벌 집 사위가 됐습니다. 머리도 정말 비상하고, 정말 얼마나 잘생겼는지 몰라요. 키도 186에 대학에서 조정, 작은 배를 젓는 것, 그런 운동을 해서 체격도 정말 멋집니다. 집안도 좋아요. 54번 버스, 혁성운순가 하는 운수회사도 하고, 여행사도 하고, 머 부러울 것이 없는 집안입니다. 학교 다닐 때 그 형님 주변에는 늘 많은 여학생들이 쫓아다니고 그랬습니다. 늘 보면 그 형님은 이 세상이 자기 것같이 행동합니다. 머 못할게 없이 보여요. 자신만만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형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열심은 아니더라도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늘 형님을 걱정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던 그 형님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렸어요. 대우라고 한국의 재벌그룹이 파산하면서 그 회사와 연관된 수백억이 하루아침에 날라가버린 겁니다. 저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작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형 죽었어. 자살했어. 불쌍한 놈.—- 그리고 이 친구 그제서야 뼈 절이게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을 통해서 내게 깨달음을 주셨어. 교회 열심히 나갈꺼야…열심히 살아야지..

지금 저는 그 친구가 기쁨을 회복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던 재물, 건강, 친구, 모든 것들을 잃고 나서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종종하는 말이 하나님이 내가 교만해서 따귀를 때리셔서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다, 나는 이것을 일생동안 가지고 갈거다.”

환난으로 모든 교만을 벗기시는 순간에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만이 나의 갈급함을 풀어주실 분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그 환난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시고 최종적으로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 속에 살아갈 때 환난이 닥치기 전에, 따귀맞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인가하는 고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축복과 미래의 소망을 함께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심령이 가난해 질 수 있는 비결이 멀까요?

첫째로 우리의 삶 속에 절제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먼가를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마음대로 우리 뜻대로 그냥 막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유하지만, 그 중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절제하는 뭔가는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각각 다 다를 수 있어요. 스스로, 내가 주님을 믿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삶 중에서 이 부분은 뭔가 절제를 하겠습니다. 그걸 하나씩 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뭐하고 같냐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을 때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하나는 못 먹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을, 내 삶 속에 선악과 하나를 두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뭔가 여러분이 범접치 않는 그 어떤 한 가지를 두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 면만은 내가 분명히 지키겠다.” 하는 한 면을 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절제하는 그 한 가지 면이 여러분의 신앙이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절제가 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겸손해야 합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습니다. 환경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겸허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비울수록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순수한 신앙고백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자기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가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

그래서 제자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교만이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은 아주 유명합니다.

교만이란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국의 훌륭한 목회자였던 Andrew Murray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이미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더 선하다, 좀더 낫다, 좀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임을 늘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복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 거기에서부터 애통함도 있고 온유도 있고, 다 그 다음에 있습니다. 출발점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면에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연초부터 가난한 심령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며 이 금년 한해도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침을 열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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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Matt. 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虚心的人有福了,因为天国是他们的。马太福音 5:3)예수의 이른바 ‘산상수훈’에 맨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른바 8복 중의 하나다. 내식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가치론’에 해당한다. 나는 이 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선전을 좀 하고 싶다. 민들레 씨앗처럼 공중에 흩날려 퍼뜨리고 싶다.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 말의 핵심인 ‘심령이 가난한 자’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 어떤 상태의 사람인지 (그 표현 때문에) 의미가 불명료한 것이다. 철학은 이런 불명료함을 잘 용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해’와 ‘해석’이 필요해진다. 철학공부를 조금 하다보면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접하게 된다. 소개하자면,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하나로 융합되는 이른바 ‘지평융합’이 곧 이해이고 그 이해의 완성이 곧 해석이라는 것이다. ‘지평’이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리킨다. 딱딱한 철학적 단어들을 나열해 송구하다. 쉽게 풀자면, 책에 쓰인 난해한 말을 나 자신의 의식-지식-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해 ‘아하 이거구나’ 하고 통하게 되면 그게 바로 ‘이해’라는 말이다.‘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도 그런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 원어를 알면 좀 낫겠지만, 그쪽 전문가가 아니라 찾아보진 못했다. 이것도 송구하다. 그러나 중국어 번역을 보면 조금은 이해에 도움이 된다. 위에서 굳이 중국어를 병기한 까닭이다. ‘허심한 사람’ 즉 마음을 비운,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이건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허심이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의 이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 좀 정체불명이다. 이걸 논하자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란다. 하나의 학문분야가 필요하다. 그러나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이게 욕망의 덩어리라는 게 부각된다. 대표적인 것이 돈을 탐하는 것, 지위 내지 권력을 탐하는 것, 공적을 탐하는 것, 명성을 탐하는 것, 이른바 부귀공명에 대한 욕망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다. 온갖 희로애락이 다 이것들과 얽혀 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도 다 이 욕망들이 지휘하고 연주하는 교향곡이다. (심지어 그것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전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누구나 다 알겠지만, 이게 결코 우아하고 감미롭지만은 않다. 욕망은 쓰디쓴 뒷맛을 동반한다. 부-귀-공-명, 생각해보라, 그 뒷맛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져본 사람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어떤 영광에도 그 장막 뒤엔 검은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 고(苦)가, 고통이, 괴로움이 마치 그림자처럼 동반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지극한 사랑 끝에 생활고가 있거나 자식이 속을 썩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다. 마음이, 심령이, 즉 욕망이, 욕심이, 우리 인간을 지옥행 열차에 몰아넣는다. 우리 대부분 인간들의 여실한 삶의 모습이다.그러면 이제 답이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 그런 허심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상태가 된다(blessed)는 말이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도 다른 말이 아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면, 즉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니 (혹은 덜게 되니) 그게 곧 천국이라는 말이다. 욕망은 고통의 원인이니, 원인인 욕망이 비워지면 결과인 고통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불교의 이른바 인연법이다. 예수도 이미 이것을 통찰하고 있었던 셈이다.물론 ‘천국’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건 하나의 신학적 과제다. 이미 고백했지만, 나는 그 정체를 잘 모른다. 그것이 구름 위에 있는지 죽음 뒤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고통이 사라진, 그리하여 평온한 상태가 되면 그게 ‘거의 천국’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그러니 굳이 고통이 씀바귀처럼 맛있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마음을 비우자. ‘허심한 사람’이 되자. 욕심을 덜자. 거기에 작은 천국, 소박한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의 이 말은 진리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1~3

성경에 나오는 ‘8가지 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받고,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물려받고, 정의에 굶주린 사람이 정의를 성취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이 천국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만 빼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는 사람과 같은 상(천국을 가지게 됨)을 받게 되는 것일까.

명상을 공부하는 중에 비슷한 말씀을 만났다.

“마음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가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로부터 명상 스승들은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라는 가르침을 남겨왔다.

출퇴근 길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노숙자 할머니 두 분이 있다. 주렁주렁 들고 있는 비닐 봉지에는 한 여름에도 겨울 옷이 잔뜩 들어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가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가난은 힘들고 불편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가난은 최선을 다해서 벗어나야 할 상황이지 애써 추구해야 할 상태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자.

가난한 사람은 욕구에 솔직하다. 배고픔과 추위를 스스로 속일 수는 없다.

가난하면 절박해진다. 어떻게 돈을 벌어 끼니를 이어갈지 늘 걱정이다. 주저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다.

가난하면 작은 것에 만족하게 된다. 따뜻한 밥 한 끼, 깨끗한 옷 한 벌이면 족하다. 잠시 동안이지만, 세상 행복하다.

가난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다. 옷은 낡고 배는 고프고 집도 없이 떠도는 인생이라면 잘난 척 있는 척할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은 꼭 필요한 일에 집중한다. 꼭 필요한 일이란 먹고 입고 머무는 것이다. 그 밖의 일은 관심 밖이다.

이제 어렴풋이 감이 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혼의 양식, 즉 평화와 진리에 갈급하다. 나는 왜 사는지,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외롭고 우울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빈둥거릴 여유가 없다. 명상과 기도를 뒤로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 허영이나 사치에 무관심하다. 허세나 아는 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소소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에도 행복을 느낀다. 아마도 그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에게 꼭 필요한 일은 따로 있으니까.

여러분은 가난이라면 몸서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보세요.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욕망도 내지 않고 두려움도 내지 않고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떠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철저히 자기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는 것은

먹고 입고 머무는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적게 가지며 즐길 줄 알면 크게 얻을 수 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도 그것을 즐길 줄 알면

온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쉬고, 쉬고 또 쉬고> 中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특별기고-8복 해설(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팔복의 서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이르시되”(마 5:1-2)

설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입술은 꿀벌 집처럼 달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떨어뜨려 주신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의 하신 일은 이적이요, 그의 생활은 우리의 모범이 되며,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다. 그는 한량없는 성령을 가지셨으며, 필요할 때 어떤 말씀을 하실 것인가, 언제 겸손하실까, 언제 위로하실 것인가를 아신다. 그분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신다.

그는 권능 있는 설교자이셨다.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 7:29) 그는 그들의 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양심에다 호소하시는 설교자이시다. “마치 그분은 사람 속에 들어가 계신 것 같다.”(루터) 그분은 두 날 가진 검으로 돌 같은 마음도 찔러 쪼갤 수 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영혼을 회개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2) ‘관리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요 12:42)

그의 설교단은 산이었다. 율법을 산에서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해설하셨다. 다볼산이라 한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신다. 가난은 부를 축출하지만, 여기서는 가난이 부를 낳는다. 애통은 기쁨을 쫓아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애통이 기쁨을 낳는다. “저희가 위로를 낳을 것이요.” 물이 불꽃을 끄는 것이 상식이지만, 눈물은 기쁨의 불꽃을 불 붙인다. 핍박은 행복을 축출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핍박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 신성한 역설이다.

제1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스도의 계산서와 세상의 계산서는 맞지 않는다. 세상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뀌는 재주를 가진 자를 복 있는 자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세상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복 있다 하나 주님은 산골짜기에 있는 자를 복된 자라 하신다. 모든 성도는 십자가의 상속자들이다.(루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천국에 가 있는 것처럼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 의무와 보상을 함께 묶으셨다. 영적인 은혜는 연결되어 있고 묶여져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 하는 자이며,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이며, 온유한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다. 성령의 은혜들은 한 줄의 진주와 같이 한 줄에 매달려 있고 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장식해 준다.

심령 가난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마귀의 가난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몰지각과 악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결핍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또 구별해야 할 것은 은혜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지,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알지 못하도다.”(계 3:17) ‘가난한 심령을 가진 것과’ ‘심령이 가난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천박하고 낮은 심령을 가지고 수준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난한 심령을 가졌다고 말한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여 구두쇠로 사는 사람이다. 겉모양만 번드르르한 신앙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들 안에 아무런 선함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서 전폭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탄원하는 사람이다.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해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칼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눅 18:13) 세리의 기도다. 심령가난이 모든 것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서두로 말씀하신 것이다. 심령 가난으로 낮아지면 거룩한 슬픔의 샘물이 거기에 흐르게 된다. 헬라어의 가난에 페네스가 있다. 노동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물질의 가난이다. 또 하나의 가난은 푸트코스로 자기의 무능함을 깨닫고 무릎 꿇어 구걸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사는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은혜를 받을 능력이 없다. 스스로 탁월하다고 부풀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적합하지 않다. 손에 자갈을 쥔 채 황금을 받을 수는 없다. 먼저 비워야 한다.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그리스도가 귀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천국 문은 너무 좁아 가난한 심령으로, 적게 하고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야 들어간다.

역의 원리로, 심령이 교만하면 저주가 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생각에 감탄한다. 세상에는 너무 선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물건이 넉넉하여, 그리스도에게 은총을 입고 꾸어서 사는 자들을 경멸한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마귀가 교만으로 부풀려 놓아서 자기의 선을 늘어놓는 가운데 병은 더 깊어진다. 독선보다 더 위태로운 낭떠러지는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격이다. 벌거벗은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다. 결국 버림받아 주님의 입에서 토함을 받는다.(계 3:16) 세네카의 계집종이 장님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 했다. 집이 원래 어두운 곳이지 자기는 장님이 아니라 고집했다. “유다는 돈을 받고 그의 구원을 팔아버렸고 바리새인들은 그 돈으로 저주를 샀다.”(어거스틴) 자신이 가난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복 있는 자다. “가난이란 보석”을 가진 자다. 어떤 부를 얻기보다는 가난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 받는다. “주님! 저에게 그리스도를 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죽습니다.”라 말한다. 그는 자신과는 이혼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중심이 젖 뗀 어린아이와 같은(시 131:2) 심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충만함을 흠모한다. 그리스도 예찬론자다. 자신이 상한 것을 깨달을 때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생명수인 주의 보혈을 갈망한다. 그는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피난처로 날아간다. 그분의 피에 자신을 씻는다. 자신을 가장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여긴다. 더 많은 은혜가 없는 것을 슬퍼한다. 위선자는 언제나 그가 받은 은혜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부족한 점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악함을 슬퍼한다. 더 나아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겸손하다. 그리고 유순하다. 죄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존경받음도 거절한다.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빠른 진척을 본 것도 성령의 바람 때문이란 것을 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의 탁월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본다. 그는 기도를 쉬지 않지만 기도를 많이 했고, 눈물 흘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수고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는 천국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가지기 전에는 그 문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려한다. 더 많은 은혜를 애걸하고 영적인 자비를 간구한다. 그는 식탁에 떨어지는 조그마한 부스러기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프리카에 선교훈련을 받으러 가는 젊은이가 무슨 준비를 해가지고 가야 하는가의 질문에 선교사는 가난한 마음이면 된다고 말했다.

2) 복이 있나니

①복이 존재하지 않는 곳

행복은 어떤 화학 기술로도 뽑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한 자가 복이 있나니, 고상한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재물을 우상화하고 있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별 의견을 다 내놓았지만 모두 과녁의 변두리를 맞혔을 뿐이다. 타락으로 사람들은 그 면류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두뇌까지도 잃어버렸다. 어떤 이교 철학자가 생계수단을 넉넉히 가지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았으니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그 날 밤 주님은 그를 호출할 수 있는데.. 복의 나무는 땅의 낙원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셨다. 저주에서 복을 끌어내려고 한다. 솔로몬 왕은 가장 재물을 많이 가진 화려한 왕이었다. 호사스러운 음식, 장엄한 건물, 포도원, 물고기 연못, 황홀케 해주는 각종 음악, 기쁨의 향수를 뿌린 물에 목욕을 하였다. 그의 지혜는 세상 지혜자의 으뜸이어서 천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 예물을 싣고 와서 드렸다. 영광의 극치였으나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8)란 결론을 맺었다.

②복은 겉모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덧없는 것들은 영혼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할 수 없고.”(전 5:10) 이것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금으로 그 마음을 채우기보다는 은혜로 채워야 된다. 별들 사이에 집을 지어주어도 만족을 모르는 마음과 쉴 줄 모르는 눈은 여전히 더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은 생명 강에 목욕하고 참된 복에 도달할 때까지는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폭풍속의 마음을 잠잠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에게 복을 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외형적인 것들은 양심의 번민을 치료할 수가 없다. 왕 사울이 마음에 괴로운 상처가 있을 때 왕관의 보석들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종의 방패가 총을 막을 수 없듯이, 세상의 것들은 영혼의 괴로움에서 지켜줄 수 없다.

잠시 동안인 것은 인간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세상의 기쁨은 참새 떼가 잠시 머물며 떠들다가 후루룩 날아버리는 것과 같다.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향내를 맡는 동안에 시들어져 가는 꽃다발 같고, 손에 있는 동안에 녹는 얼음과 같다.

“나는 너를 떠나겠다.” 고함지르고 가버린다.(버나드)

괴롭히는 것과 저주 받도록 하는 것은 복 받도록 할 수 없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그 재물로 인하여 네가 교만하였도다.”(겔 28:5)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렘 5:7) 부는 올가미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딤전 6:9) 재산을 쌓아 모으려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영혼을 무너뜨렸는가? 부는 모을 때에는 가시가 되어 근심으로 찌르며,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다친다. 지상의 음료수가 낙원의 음료수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교훈이다.

③복이 있는 곳

복은 어디에 있는가? 영혼이 원천이 되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은 완전한 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도취할 만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어거스틴) 하나님의 입으로 입 맞춰 주실 때 영혼은 거룩한 황홀경에 들어가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외치게 된다. 물 몇 방울이 아니고 복락의 강물로 마시우게 하신다.(시 36:8) 복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복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이 영원성이 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④복의 실체

많은 진리들이 머릿속에서 헤엄치는데 마음으로는 내려가지 않아서 유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들에게도 금과 은을 잔뜩 실어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는 주신 자에게 감사를 잃고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지옥에 내려간다. 복된 삶을 살 때, 내려주시는 그 복을 확실히 믿으며 우리의 눈을 거기에 고정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뭇 반대 방향의 코스로 조종하고 있다. 마귀가 그들의 조종사이며 지옥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비틀거릴 것이 아니라 울면서 가야 한다. 사람이 독약에서 건강을 마실 수 없는 것 같이 죄에서 복을 뽑아낼 수 없다. 비록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행복의 항구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의 피의 바다위로 그곳을 인도하시며 성령의 강풍을 돛에 불어 주신다. 우리가 쓰러질 때에는 한 단계 높여 올려 주신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우리의 곁을 지나시며 바라보고 계시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쓴 대접 아래 놓여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잔치 집에 인도하시고 천국의 좋은 것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시는지 감격할 뿐이다.

⑤믿음이 깊은 자는 벌써 복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이도 어른과 함께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요일 3:9) 이제 시작한 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의 복을 같이 누리는 자가 되었다. 빚 장부는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지워져서 마치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같이 되고, 처음부터 아무 빚이 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이기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기분 좋은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특권을 누린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면 하나님이 총애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와 긴밀한 관계에서 산다.

하늘나라를 상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옥 상속이 면제 된 사람이다. 천국 상속권을 손에 쥐고 있다. 지상에서부터 누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서 복을 시식하고 천국을 맛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실제로 소유하기 전에 포도송이를 맛본 것처럼 성령의 비밀스러운 맛을 본다. 그들 자신이 때로는 천국에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성도들을 위한 높은 승진이 있다. 왕국에까지 올라간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복의 극치이며 영예를 갖는다. 왕들이 된다. 죄와 죽음은 완전히 정복되고 하나님의 천사와 더불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영광을 누린다.

① 성도들은 왕들로 비유된다.

왕관을 가지고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믿는 자는 죄의 용서함을 받을 뿐 아니라 면류관까지 받는다. 면류관은 아무 머리에나 맞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몫이다.

순수한 관이다. 이 왕관은 다윗의 수금과 같이 슬픔과 불안의 악령을 몰아낸다. 지옥에서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천국에선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왕들이 쓰는 왕관은 비록 순금으로 만든 것일지라도 고민거리가 생기고 두통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근심을 섞어 만든 합금이다.

이 왕관은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윗의 친 아들들은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세상의 왕관은 탈취하려는 야망을 일으킨다. 성도들이 쓸 왕관은 자기 머리에 맞는 것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 것이 더 크더라도 시기할 수 없다.

결코 쇠하지 않는 왕관이다. “장미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터틀리안) 다른 왕관들은 빨리 낡고 달아서 쓰레기 속으로 던져 버리게 된다. 이 왕관을 탐내는 많은 상속자와 후계자가 있다. 죽음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벌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받는다.(벧전 5:4)

② 왕복을 가지고 있다.

“이 일후에 내가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계 7:9) 성도들의 옷은 그들의 영광과 찬란함을 나타내고 흰 옷은 그들의 성결을 뜻한다. 그들의 옷을 얼룩지게 하거나 더럽힐 죄가 없다. 이 옷을 입으면 그들은 천사들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③ 왕의 홀을 가진다.

통치의 위대함의 표로서 왕 홀을 가진다. 손에 종려가지를 가진다. 승리와 개선의 상징이다. 죄와 지옥을 이긴 승리자들이다.

④ 왕들은 그들의 보좌를 가진다.

높은 보좌다. 땅위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는다. 이 보좌는 안전한 보좌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지금은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설지라도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된다.

⑤ 하늘의 왕국은 뛰어나다.

창건자가 뛰어나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셨다. 천국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고후 5:1) 사람도 천사도 하나도 이 건물에 돌 하나도 놓을 수 없다. 탁월하다.

⑥ 부요함에 뛰어나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계 21:19) 진주 문들이다.

⑦ 완전함에 뛰어나다.

여기에는 기쁨과 진품으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움과 지혜, 영광, 장엄함이 있다. 낙원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다. 죄와 슬픔을 찾을 수 없다. 왕국의 충만함이 있다.

⑧ 안전성에 뛰어나다.

세상 나라는 외부의 침략이나 내부의 분열을 두려워한다. 여기는 마귀는 결박하여 가두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평온하다.

⑨ 견고함에 뛰어나다. 앗수르, 헬라, 바벨론, 로마 등 세계에 명성을 날렸던 강국들은 다 뒤집혀지고 티끌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그 위에 ‘영원’이라고 써 붙였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다.(히 12:28)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계 22:5) 우리에게 이 영원한 나라를 주셨다.

⑩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수고를 가로채고 보상을 무시하는 분이 아니시다. 회개의 교훈을 듣고, 죄를 슬퍼하는 비판의 눈물에 적시며, 고행의 교훈을 듣고 마음의 오른 눈을 뽑고 죄의 왕을 목 자르게 될 때, 이 쓴 약을 삼키기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왕국이 따라오고 거기서 모든 보상을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정탐꾼들이 좋은 땅에 나쁜 보고를 한 것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방법에 헐뜯었음이 탄로 날 것이다. 벌레들이(시 22:6) 왕이 되는 셈이다. 바로 왕이 요셉에게 영예를 주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지만 왕국만은 자기가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주시고 보좌에 앉히신다. 영광으로 끝을 맺으신다. 세상의 비난을 머리 둘레에다 면류관으로 묶으라. 그들의 비난을 그들의 칭찬과 마찬가지로 경멸하라. 죄는 지옥으로 이끌지만 은혜는 면류관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왕국으로 올라가게 하는 계단이다.

⑪ 하늘에 속했는지? 정밀 검사를 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은혜의 왕국이 마음에 세워졌는가? 교만과 정욕 그리고 불신앙을 억제하는 왕인가? 은혜의 왕국이 있어야 영광의 왕국에 들어간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아랫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는 말씀대로 사는가? 용감하고 당당한 영, 거룩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의 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가? 천국이 여러분의 눈에,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이 여러분의 발아래 있는가? 왕 같은 영을 가진 사람은 높은 곳에 살게 될 것이다.

⑫ 진지한 권면

천한 정욕에 도취하여 왕국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쾌락을 핥아 먹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 마라. 죄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그 결말을 보아라. 왕국을 버리느라고 정신없이 서두를 만큼 어리석은 바보짓을 했을 때, 마지막 날에 마귀가 그 사람을 오히려 꾸짖고 비웃지 않겠는가? 그것은 인디안들이 그림 몇 장이나 유리구슬을 얻으려고 그들의 금덩이를 내 주는 것과 같다.

왕국을 얻었는가? 이제부터는 주님께 마음껏 쓰임을 받아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보여라.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얼마나 적은 것임을 깨닫고 울고 울어라.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라. 은혜 받기 알맞은 환경과 봉사의 기회를 만들라. 일을 더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영광을 더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더 봉사할수록 그의 왕국이 더 커질 것이다. 지옥의 왕국에도 등급이 있다.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눅 20:47) 그렇다면 천국의 등급에도 그럴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면류관이 더 빛나게, 왕국이 더 크게, 종려나무가지가 더 무성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투자를 하면 하나님은 비축을 하신다.

이 왕국에 어울리게 걸으라. 왕답게 살라. 거룩한 위엄이 얼굴에 나타나게 하라. 천사의 얼굴과 같아라.(행 6:15) 천사의 밝음이 스데반의 용모에 보였다. 지금 세상에 누더기 옷을 입고 산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얼마 안 되어 생명수를 마시리라. 천국이 내 것이 될 것이다.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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