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 [하루 한 장] 고린도전서12장_신령한 것에 대하여“?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ppa.charoenmotorcycles.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ppa.charoenmotorcycles.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홍융희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4,250회 및 좋아요 119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하루 한 장] 고린도전서12장_신령한 것에 대하여 –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2020. 9. 9 (수) [하루 한 장]“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전12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고린도전서 12장은 고린도교회에
만연해 있던 신령한 은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교정해 줍니다
우리도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는
왠지 자신이 없고 남의 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이란 성령의 일이고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지식이
가장 신령한 은사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여러 직분과
사역들이 파생되기 시작됩니다
우리는 나만의 은사를 잘 알고
서로의 은사를 세워주고 격려해서
하나님이 마음껏 영광 받으시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만들어가는 주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본질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피드백은 댓글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이 많거나 개인적인 내용을 전하려면 아래의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주세요.
[email protected]
010-2741-0734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고린도 전서 12장 주석 – 바울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고린도전서 제 12장 =====12:1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 )는 고린도 교인들 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7/2022
View: 3639
헬라어 고린도전서 1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성 경: [고전12: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는 고린도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0/23/2022
View: 3531
고린도전서12장주석. 고전12:1-31 성령의 은사, 몸과 지체
+ 고린도전서주석(전권).클릭하면 열립니다 + 성령의 은사, 몸과 지체 고린도전서12:1-3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 …
Source: shmission.com
Date Published: 4/4/2022
View: 7202
메튜 헨리 주석, 고린도전서 12장
12:1 한 성령에서 나온 여러 은사(고린도 전서 12:1-11)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에 풍성히 임한 영적 은사와 은사의 남용을 취급한다. 이 장에서 이들 은사가 …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24/2022
View: 6260
매튜헨리주석1073-고린도 전서 12장 : 네이버 블로그 – NAVER
고린도 전서 12장. Ⅰ. 신령한 은사들 12:1-11 신령한 은사들, 즉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8/2022
View: 1796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와 성령 – Pensées
[장별설교]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와 성령 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주에 말쓰드린 것처럼 …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5/10/2021
View: 9226
[고린도전서 12장 – 교사용]
이럴 때 특히 필요한 은사가 무엇이었을까? 영들 분별함(10): 자칭 사도, 혹은 선지자, 교사라고 주장하고 설교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
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11/25/2022
View: 2954
고린도전서 12장 칼빈주석요약(은사론 1) – 크리스찬타임스
고린도전서12장 칼빈주석요약(은사론 1). 조창훈 목사(방배본 교회). 기사입력 2016-07-24 오후 1:11:00 | 최종수정 2016-07-24 13:11.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
Source: www.ctimes.or.kr
Date Published: 7/3/2022
View: 2742
2015/12/28(월) “고린도전서 12:12-31” / 작성: 김광욱
고린도전서 12장 이후에도 사도 바울의 여러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부터 고린도교회의 세부항목별 문제점을 언급하기 전,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4/25/2021
View: 1029
고린도전서 강해 – 옛신앙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들려 …
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4/4/2022
View: 8142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하루 한 장] 고린도전서12장_신령한 것에 대하여.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4,250회
- Likes: 좋아요 119개
- Date Published: 2020. 9.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S7DLoa2nW0
고린도 전서 12장 주석
고린도전서 제 12장
=====12:1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 )는 고린도 교인들
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 )이란 단
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37에서 ‘프뉴마티콘’이 ‘신령한
자'(* ,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문의 ‘프뉴마티
콘’ 역시 남성 명사로서 ‘신령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Hofmann, Edwards,
Holsten, Heinrici). (2) 혹자는 14: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 타 프
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Godet
, Lenski).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내용이
서로 일맥 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
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원치 아니하노니 –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 ‘내가 원하지 않는
다’)는 바울적 표현으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 ‘형제들이여’)를 수
반한다(10:1;살전 4:13).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
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한다. 사도 바
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
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12:2
래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
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
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짓고 있다.
말 못하는 우상 –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
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끄는 그대로’의 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
)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
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라어 ‘아파고메
노이'(* )는 아고(* ,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이
다.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
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12:3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저주할 자’의
헬라어 ‘아나데마'(* )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
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이다. 본래 이 단어는 신성한 장소에 저축된 것을 의미하였다
가 신에게 바쳐진 것을 뜻하게 되었고, 바쳐진 것은 바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잃어진
것이므로 ‘멸망된 것’ 곧 ‘저주받은 것’의 뜻이 되었다.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16:22;롬 9:3;갈 1:8). 본절에서 바울은 ‘저주받은 예수'(*
, 아나데마 예수스)와 ‘주 예수'(‘ ,퀴
리오스 예수스)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2절에서 이교도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본절에
서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기독교적 그
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수로 고백하는 자들을 비교하여 핵심에 접근하고 있
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
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
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삶
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
시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 ,
엔 프뉴마티 하기오)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 4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른 예수’,
‘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수’란 바
울의 증거에 위배되는 것으로 바울은 예수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
(Vere Homo)으로서 이해하였다. 본장 10절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 것이다.
=====12:4
은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 )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
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
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러 가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이레세이스'(‘ )는 원래
‘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 뜻이다. 이 단어
가 본장 11절에서는 분사형 ‘디아이룬'(* )으로 사용되어 ‘나눠주다’라
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
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웅되었다.
성령은 같고 –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
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12:5
직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온'(* )는 ‘디아코네오'(*
,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
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1)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섬김’을 뜻하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2)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
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이나 마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3) 때로는 이 단어가 연보(捐補)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롬
15:31; 고후 8:1ff.).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이다.
주는 같으며 – 직임은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
의 주(主)’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
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성 또는 우월성을 따지고 그에 치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
리되심을 잊은 처사이다.
=====12:6
역사는 여러 가지나…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역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마톤'(* )은 ‘에네르게오'(* , ‘활동하게하
다’)에서 온 말로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의 사역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
적인 힘을 가리켰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단적인 힘을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TDNT).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작용을 의미한
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일
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Mare).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
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12:7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
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 )는 목적이
나 의도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
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 )
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쓰
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1)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
신 것을 의미하고 (2) 목적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성령의 내주(來
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2)의 견해는 고후 4:2의 ‘진리를 나타냄'(*
,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스)과 연관지어
설명된다(Meyer, Hofmann).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라는 점에
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
거가 은사임을 보여준다.
=====12:8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
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먼저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는 ‘…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는 ‘…의 기준에 따라'(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지식’
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지혜와 말씀을…지식의 말씀을 – 혹자는 ‘지혜'(* , 소피아)와 ‘지식'(*
,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다. 본문에서 벵겔(Bengel)에 의하면 ‘지혜'(소피아)는 이론적인
성질을 내포하고 ‘지식'(그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본절
에서는 전자는 실제적인 적용을, 후자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예수 그리스
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 : 8)이다.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
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고전 2 : 6-13; 엡
1:8, 17; 골 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한다(Godet). 이 점을 수용 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지
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이나 ‘구원의
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12:9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카
타’였는데 본절에서는 ‘엔'(* ,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엔’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
‘카타’를 사용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자임을 표현한다(롬
9:1ff).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 1 : 17 ;3 :22) 본절의 ‘믿음’
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한다. 이는 바울이 8 : 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Godet). 본절에서의 ‘피스티스'(* , ‘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
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히 11 : 3), 기적을
행하는(마 21: 21; 고전 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일반적으로 ‘피스티스’
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있게 행사
(行使)될 수 있다.
병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 )은 복수 명
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 )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가 각기 다른 종류의 병을 치
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자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12:10
능력 행함 – 이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법
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C.P.Wagner).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
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ff.),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일
(행 13:11)등과 같이 마귀를 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는데 사용되는 능력이
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
편이 되며(Calvin)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계시하는 수단이 된다.
예언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아'(* )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말을 토하여 내다’, ‘미리 경고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는 의
미를 가진 ‘프로페튜오'(* )와 같은 어군으로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예
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언’
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다. 예
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준다. 신
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
므로 계시가 완결된 현재에 있어 ‘예언’이란,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가
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계 1 : 3).
영들 분별함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 )은 악한 영들을
의미하며, ‘분별함’의 헬라어 ‘디아크리세이스'(* )는 ‘구별’, ‘인
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많았
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영
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요일 4 : 1). 하지만 당시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다. 이 은사는 교회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다. 영들을 분별하
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인 영향력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특수한 사
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 5 : 1-10),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행 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
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
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각종 방언 말함 – ‘각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 )는 ‘혈통’, ‘민족’,
‘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하
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
지도 포함하였다.
방언들 통역함 – ‘통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메네이아'(* )는
‘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 14:26에만 나온다. 이 특
별한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다
(14:13).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것
을 권면한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12:11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진다. 6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
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12:12
몸은 하나인데…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몸’과 지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有機體)임을 이해시킨
다.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페르'(* ,’just as’, ‘꼭…처럼’)는
롬 12 : 4처럼 유사 비교를 이끌어 내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는 단지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De Wette) 단순히 교회의 머리로
서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Chrysostom, Estius, Meyer).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교회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 주체자로서 간주한다(Edwards). 몸은 단일
체이면서도 많은 지체와 더불어 유기적 연관성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많은 지체
들로 구성되어 완전성과 통일성을 이룬다.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적인 구별이나 신
분의 구분에 상관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령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
울은 ‘하나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되지 못
함에 대한 권면일 수도 있다(엡 4:4-6절). 바울은 ‘성령'(* , 프뉴마)과
‘세례'(* , 밥티스마)와 ‘몸'(* , 소마)을 하나의 관계로 본다. 즉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 곧 하나된 영적 유기체가 되었
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방법인 물
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변화시키심을 의미한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는
전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다. 즉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을 ‘마시다’는 표현으로 보충한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아 들이는
것을 가리켜 ‘생수를 마신다’라고 표현하신 바 있다(요 7:37-39). 이제 성령을 받아들
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모두 다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분열과 다툼 따위를
종식(終熄)시키고, 공동 사역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 12절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표현을 다시 사용
하여 교회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
로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
능과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면,
본절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2:15,16
바울은 몸의 지체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손과 발을 대
비시키고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비중있고 가치있는 손과 눈에 비해 덜 눈에
띄고 덜 사랑스런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가치관
을 바로잡으려 한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은사가 각기 다른 사람들
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
교하여 우월 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교
회의 건덕상 무익한 것이다. 영향력이 적고 보잘것없는 은사라 할지라도 전체적인 관
점에서 보면 귀중하다.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냄새맡는 곳은 어디뇨 – 본절은 15, 16절에 대한 연속적인
설명으로 교회의 각 구성원의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온 몸은 듣는 곳이 없이 보기만 해서도 안
되며, 냄새 맡는 곳이 없이 듣기만 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지체의 다양성은 곧 몸의
효용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지체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
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12:18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원하시는 대로’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델레센'(* )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 )
는 부정 과거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많은 지체들로 구성 되도록 지으셨다. 이렇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
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완전하므로 각 지체들이
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보여준
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
님의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12: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 17절의 내용에 대한 재설명이요 부연이다.
모두들 자기가 좋게 여기는 지체만 된다고 가정하면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
한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전
하여 전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갖는 독특한 역할을 잘 수행하여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것이다.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12절에서 몸의 단일성에서 지체와 다양
성으로 전개시켜 나가다가 본절에서는 다시 다양성에게 단일성으로 회귀(回歸)하고 있
다. 역시 강조점은 ‘하나’인 몸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 지체들의 은
사는 다양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존재한다.
=====12:21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 많은 지체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각 지체는 그 우선 순위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하여 그 존재 가치마저 없어지
는 것이 아니다. 몸에 붙은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고 한 지
체라도 없으면 다른 지체들이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12:22
더 약하게 보이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네스테라'(* )는
‘약한’, ‘병든’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중요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간주(看
做)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원문상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지체들
이 각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12:23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그리고 ‘부족한 지체'(24절)는 앞절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
체’를 다른 표현으로 설명한 동일한 의미들이다. 사람들이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에 따라 지체 상호간에는 우열이나 차등이 있다고 간주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
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12:24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존귀를 더하사 – 바울은 18절에서 언급한 대로
몸의 형성(形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되었다고 반복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전제
하는 것이므로 몸의 조화도 완벽하다. 따라서 몸과 그 몸에 붙은 모든 지체들은 함께
존귀함을 얻는다.
=====12:25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
의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지체들이 상호 대립 관계가 아니
라 상호 협력 관계임을 보여준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
어지며, 성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 의도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교
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
=====12: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 지체들은 서로 공동체
의식과 공동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각각 독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체적인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지음받은 사람의 몸이 갖고 있는 특
성을 설명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공동체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본절은 12-26절과 28절 이하의 교
량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몸과 지체에 대하여 의인법을 사용해온 바울은 이제 28
절 이하에서 다른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본격적인 지칭, 곧 ‘너희’를 사용한다. ‘너
희는'(* , 휘메이스)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인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교
회에서 은사와 직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 ,
소마 크리스투)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지만, ‘각 부분'(* , 에크 메루스)
은 ‘부분적으로'(in part)라는 의미로 각각의 구성원이 몸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여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여 전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 ‘몇’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스 멘'(*
)은 바울이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몇몇 직임과 은사들을 구분하여 설명하
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로부터 방언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
겨지는 사람과 은사만 언급하고 기타 다양하고 일반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
다.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루스'(* )는 ‘아포스텔로'(*
, ‘보내다’)에서 온 말로 초대 교회 당시에 이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매
우 중요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
았으며(눅 6:13;롬 1:1), 이 직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을 살펴보면 이 외에도 4
가지 특징을 갖는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 : 15), (2) 교회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웠고(행 13:1), (3)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4) 사도의
표로 사도직이 확고하게 증명되었다(고후 12:12).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 , ‘대변자’, ‘대리자’)
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교사 – 이들은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효과적으로 가르
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엡 3:5). 교사의 사역은 사도들
이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한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에는
필사본이 매우 귀중해서 교인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회에서 교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다(Morris).
서로 돕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틸렘프세이스'(* )는
‘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도움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교회와 연관지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도움을 시사한
다(Grosheide). 이는 포괄적으로 돕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람들
의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할 때 집사(執事)들의
직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Chrysostom, Hodge).
다스리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 )는 ‘선장’
이라는 의미로(행 27:11; 계 18:17) 배가 항해하기에 휘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
곧 치리하는 사람들(rulers)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 교회에서는 ‘세니오레스 플레비
스'(Seniores Plebis, ‘평민 장로’)라고 불리었으며(Hodge),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요한 은사로 간주되었다(딤전 5:17).
=====12:29,30
다 사도겠느냐…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바울의 이 수사적인 질문에는 다음과 같
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에 여러 지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모두
가 동일한 은사와 동일한 직임을 가진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모두 다 동일한
은사를 갖기를 원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은사를 감당해야 한
다. (3) 은사는 우열을 비교하거나 대립 관계에서가 아니라 협조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만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
들이 시기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하다.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더욱 큰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카리스
마타 타 메이조나'(* )는 ‘더욱 탁월한 은사’
라는 의미로 이는 은사들이 서로 상대적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은사들
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언급한 것과(21절ff.) 약간의 모순이 있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표준을 가지고 ‘탁월한 것’을 생각하
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에 반해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에 제일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효율성 보다는 매력적
이고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은사를 새로운 관
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헬라어 고린도전서 1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반응형
페리 데 톤 프뉴마티콘 아델포이 우 델로 휘마스 아그노에인
개역개정,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새번역,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모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가톨릭성경,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알기를 바랍니다.
영어NIV,1 Now about spiritual gifts, brothers,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영어NASB,1 Now concerning spiritual gifts, brethren, I do not want you to be unaware.
영어MSG,1 What I want to talk about now is the various ways God’s Spirit gets worked into our lives. This is complex and often misunderstood, but I want you to be informed and knowledgeable.
영어NRSV,1 Now concerning spiritual gifts, brothers and sisters, I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헬라어신약Stephanos,1 περι δε των πνευματικων αδελφοι ου θελω υμας αγνοειν
라틴어Vulgate,1 de spiritalibus autem nolo vos ignorare fratres
히브리어Modern,1 ובענין הרוחניות אחי לא אכחד מכם דבר׃
성 경: [고전12: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이란 단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37에서 ‘프뉴마티콘’이 ‘신령한 자'(*,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문의 ‘프뉴마티콘’ 역시 남성 명사로서 ‘신령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Hofmann, Edwards,Holsten, Heinrici). (2) 혹자는 14: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Godet, Lenski).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내용이 서로 일맥 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원치 아니하노니 –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바울적 표현으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형제들이여’)를 수반한다(10:1;살전 4:13).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이다테 호티 호테 에드네 에테 프로스 타 에이돌라 타 아포나 호스 안 에게스데 아파고메노이
개역개정,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새번역,2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우리말성경,2 여러분이 잘 알듯이 여러분이 이방 사람이었을 때 여러분은 말 못하는 우상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가톨릭성경,2 여러분이 이교인이었을 때에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영어NIV,2 You know that when you were pagans, somehow or other you were influenced and led astray to mute idols.
영어NASB,2 You know that when you were pagans, you were led astray to the mute idols, however you were led.
영어MSG,2 Remember how you were when you didn’t know God, led from one phony god to another, never knowing what you were doing, just doing it because everybody else did it? It’s different in this life. God wants us to use our intelligence, to seek to understand as well as we can.
영어NRSV,2 You know that when you were pagans, you were enticed and led astray to idols that could not speak.
헬라어신약Stephanos,2 οιδατε οτι εθνη ητε προς τα ειδωλα τα αφωνα ως αν ηγεσθε απαγομενοι
라틴어Vulgate,2 scitis quoniam cum gentes essetis ad simulacra muta prout ducebamini euntes
히브리어Modern,2 הלא ידעתם כי בהיתכם גוים אחרי אלילים אלמים הובלתם כאשר נמשכתם׃
성 경: [고전12: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 본절의 ‘이방인’은 ‘이교도'(Heathen)를 의미한다. 원래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짓고 있다.
말 못하는 우상 –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끄는 그대로’의 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라어 ‘아파고메노이'(*)는 아고(*,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디오 그노리조 휘민 호티 우데이스 엔 프뉴마티 데우 랄론 레게이 아나데마 예수스 카이 우데이스 뒤나타이 에이페인 퀴리오스 에수스 에이 메 엔 프뉴마티 하기오
개역개정,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새번역,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은 사람이다”라고 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영어NIV,3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영어NASB,3 Therefore I make known to you, that no one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is ac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영어MSG,3 For instance, by using your heads, you know perfectly well that the Spirit of God would never prompt anyone to say “Jesus be damned!” Nor would anyone be inclined to say “Jesus is Master!” without the insight of the Holy Spirit.
영어NRSV,3 Therefore I want you to understand that no one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ever says “Let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3 διο γνωριζω υμιν οτι ουδεις εν πνευματι θεου λαλων λεγει αναθεμα ιησουν και ουδεις δυναται ειπειν κυριον ιησουν ει μη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라틴어Vulgate,3 ideo notum vobis facio quod nemo in Spiritu Dei loquens dicit anathema Iesu et nemo potest dicere Dominus Iesus nisi in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3 לכן אודיע אתכם כי אין איש דבר ברוח אלהים אשר יאמר ישוע חרם הוא ולא יוכל איש לקרא לישוע אדון בלתי אם ברוח הקדש׃
성 경: [고전12: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저주할 자’의 헬라어 ‘아나데마'(*)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이다. 본래 이 단어는 신성한 장소에 저축된 것을 의미하였다가 신에게 바쳐진 것을 뜻하게 되었고, 바쳐진 것은 바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잃어진 것이므로 ‘멸망된 것’ 곧 ‘저주받은 것’의 뜻이 되었다.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16:22;롬 9:3;갈 1:8). 본절에서 바울은 ‘저주받은 예수'(*, 아나데마 예수스)와 ‘주 예수'(‘ ,퀴리오스 예수스)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2절에서 이교도에 대하여 언급하고나서 본절에서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기독교적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수로 고백하는 자들을 비교하여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삶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엔 프뉴마티 하기오)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 4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른 예수’,’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른 예수’란 바울의 증거에 위배되는 것으로 바울은 예수를 참 하나님(Vere Deus)인 동시에 참 인간(Vere Homo)으로서 이해하였다. 본장 10절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 것이다.
디아이레세이스 데 카리스마톤 에이신 토 데 아우토 프뉴마
개역개정,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새번역,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말성경,4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같습니다.
가톨릭성경,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영어NIV,4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영어NASB,4 Now there are varietie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영어MSG,4 God’s various gifts are handed out everywhere; but they all originate in God’s Spirit.
영어NRSV,4 Now there are varietie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4 διαιρεσεις δε χαρισματων εισιν το δε αυτο πνευμα
라틴어Vulgate,4 divisiones vero gratiarum sunt idem autem Spiritus
히브리어Modern,4 ושנות הנה המתנות אבל הרוח אחד הוא׃
성 경: [고전12: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은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러 가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이레세이스'(*)는 원래 ‘분배’ 혹은 ‘분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를 여러 갈래 나눈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본장 11절에서는 분사형 ‘디아이룬'(*)으로 사용되어 ‘나눠주다’라는 의미로 번역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지’에도 이와 동일한 헬라어가 사웅되었다.
성령은 같고 –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카이 디아이레세이스 디아코니온 에이신 카이 호 아우토스 퀴리오스
개역개정,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새번역,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말성경,5 직분상 맡은 임무는 여러 가지이나 섬기는 주는 같습니다.
가톨릭성경,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영어NIV,5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service, but the same Lord.
영어NASB,5 And there are varieties of ministries, and the same Lord.
영어MSG,5 God’s various ministries are carried out everywhere; but they all originate in God’s Spirit.
영어NRSV,5 and there are varieties of services, but the sam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διαιρεσεις διακονιων εισιν και ο αυτος κυριος
라틴어Vulgate,5 et divisiones ministrationum sunt idem autem Dominus
히브리어Modern,5 ושנים המה השמושים והאדון אחד הוא׃
성 경: [고전12:5]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직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온'(*)는 ‘디아코네오'(*,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아코니아’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1)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섬김’을 뜻하고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킨다. (2)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 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이나 마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3) 때로는 이 단어가 연보(捐補)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롬15:31; 고후 8:1ff.).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이다.
주는 같으며 – 직임은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主)’를 위한 것이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성 또는 우월성을 따지고 그에 치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잊은 처사이다.
카이 디아이레세이스 에네르게마톤 에이신 호 데 아우토스 데오스 호 에네르곤 타 판타 엔 파신
개역개정,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새번역,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말성경,6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가톨릭성경,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영어NIV,6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working, but the same God works all of them in all men.
영어NASB,6 And there are varieties of effects, but the same God who works all things in all persons.
영어MSG,6 God’s various expressions of power are in action everywhere; but God himself is behind it all.
영어NRSV,6 and there are varieties of activities, but it is the same God who activates all of them in everyone.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διαιρεσεις ενεργηματων εισιν ο δε αυτος εστιν θεος ο ενεργων τα παντα εν πασιν
라틴어Vulgate,6 et divisiones operationum sunt idem vero Deus qui operatur omnia in omnibus
히브리어Modern,6 ושנות הנה הפעלות והאלהים הוא אחד הפעל את הכל בכל׃
성 경: [고전12: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역사는 여러 가지나…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역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게마톤'(*)은 ‘에네르게오'(*, ‘활동하게 하다’)에서 온 말로 헬라 세계에서는 사람의 사역이나 세상에 감도는 우주적이거나 물리적인 힘을 가리켰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사단적인 힘을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TDNT).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작용을 의미한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일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Mare).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헤카스토 데 디도타이 헤 파네로시스 투 프뉴마토스 프로스 토 쉼페론
개역개정,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성도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영어NIV,7 Now to each one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for the common good.
영어NASB,7 But to each one is given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영어MSG,7 Each person is given something to do that shows who God is: Everyone gets in on it, everyone benefits. All kinds of things are handed out by the Spirit, and to all kinds of people!
영어NRSV,7 To each is given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헬라어신약Stephanos,7 εκαστω δε διδοται η φανερωσις του πνευματος προς το συμφερον
라틴어Vulgate,7 unicuique autem datur manifestatio Spiritus ad utilitatem
히브리어Modern,7 ולכל איש ואיש נתנה לו התגלות הרוח להועיל׃
성 경: [고전12: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는 목적이나 의도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1)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고 (2) 목적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성령의 내주(來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2)의 견해는 고후 4:2의 ‘진리를 나타냄'(*,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스)과 연관지어 설명된다(Meyer, Hofmann).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1)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거가 은사임을 보여준다.
호 멘 가르 디아 투 프뉴마토스 디도타이 로고스 소피아스 알로 데 로고스 그노세오스 카타 토 아우토 프뉴마
개역개정,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새번역,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말성경,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가톨릭성경,8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영어NIV,8 To one there is given through the Spirit the message of wisdom, to another the message of knowledge by means of the same Spirit,
영어NASB,8 For to one is given the word of wisdom through the Spirit, and to another the word of knowledge according to the same Spirit;
영어MSG,8 The variety is wonderful: wise counsel clear understanding
영어NRSV,8 To one is given through the Spirit the utterance of wisdom, and to another the utterance of knowledge according to the same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8 ω μεν γαρ δια του πνευματος διδοται λογος σοφιας αλλω δε λογος γνωσεως κατα το αυτο πνευμα
라틴어Vulgate,8 alii quidem per Spiritum datur sermo sapientiae alii autem sermo scientiae secundum eundem Spiritum
히브리어Modern,8 כי האחד נתן לו על ידי הרוח דבור החכמה ולאחד דבור הדעת כפי הרוח ההוא׃
성 경: [고전12: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먼저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는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의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는 ‘…의 기준에 따라'(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지식’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지혜와 말씀을…지식의 말씀을 – 혹자는 ‘지혜'(*, 소피아)와 ‘지식'(*,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다. 본문에서 벵겔(Bengel)에 의하면 ‘지혜'(소피아)는 이론적인성질을 내포하고 ‘지식'(그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는 실제적인 적용을, 후자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5)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이다.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고전 2:6-13; 엡1:8, 17; 골 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한다(Godet). 이 점을 수용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지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이나 ‘구원의 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헤테로 피스티스 엔 토 아우토 프뉴마티 알로 데 카리스마타 이아마톤 엔 토 헤니 프뉴마티
개역개정,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새번역,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말성경,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치유의 은사를,
가톨릭성경,9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영어NIV,9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to another gifts of healing by that one Spirit,
영어NASB,9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and to another gifts of healing by the one Spirit,
영어MSG,9 simple trust healing the sick
영어NRSV,9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to another gifts of healing by the one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9 ετερω δε πιστις εν τω αυτω πνευματι αλλω δε χαρισματα ιαματων εν τω αυτω πνευματι
라틴어Vulgate,9 alteri fides in eodem Spiritu alii gratia sanitatum in uno Spiritu
히브리어Modern,9 לאחר האמונה ברוח ההוא ולאחר מתנות הרפאות ברוח ההוא׃
성 경: [고전12:9]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카타’였는데 본절에서는 ‘엔'(*,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엔’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 ‘카타’를 사용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자임을 표현한다(롬9:1ff).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 1:17; 3:22) 본절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한다. 이는 바울이 8: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Godet). 본절에서의 ‘피스티스'(*, ‘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히 11:3), 기적을 행하는(마 21: 21; 고전 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일반적으로 ‘피스티스’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있게 행사(行使)될 수 있다.
병고치는 은사 –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은 복수 명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가 각기 다른 종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자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알로 데 에네르게마타 뒤나메온 알로 데 프로페테이아 알로 데 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헤테로 게네 글로쏜 알로 데 헤르메네이아 글로쏜
개역개정,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새번역,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
우리말성경,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하는 은사를, 또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가톨릭성경,10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영어NIV,10 to another miraculous powers, to another prophecy, to another distinguishing between spirits, to another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 and to still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영어NASB,10 and to another the effecting of miracles, and to another prophecy, and to another the distinguishing of spirits, to another various kinds of tongues, and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영어MSG,10 miraculous acts proclamation distinguishing between spirits tongues interpretation of tongues.
영어NRSV,10 to another the working of miracles, to another prophecy, to another the discernment of spirits, to another various kinds of tongues,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αλλω δε ενεργηματα δυναμεων αλλω δε προφητεια αλλω δε διακρισεις πνευματων ετερω δε γενη γλωσσων αλλω δε ερμηνεια γλωσσων
라틴어Vulgate,10 alii operatio virtutum alii prophetatio alii discretio spirituum alii genera linguarum alii interpretatio sermonum
히브리어Modern,10 ולאחר לפעל גבורות ולאחר נבואה ולאחר להבחין בין הרוחות ולאחר מיני לשנות ולאחר באור לשנות׃
성 경: [고전12:1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능력 행함 – 이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C.P.Wagner).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닌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ff.), 박수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일(행 13:11)등과 같이 마귀를 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는데 사용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 되며(Calvin)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계시하는 수단이 된다.
예언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말을 토하여 내다’, ‘미리 경고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 ‘프로페튜오'(*)와 같은 어군으로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예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언’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다. 예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준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시가 완결된 현재에 있어 ‘예언’이란,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가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계 1:3).
영들 분별함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은 악한 영들을의미하며, ‘분별함’의 헬라어 ‘디아크리세이스'(*)는 ‘구별’, ‘인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닌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많았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요일 4:1). 하지만 당시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다. 이 은사는 교회를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다.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인 영향력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 5:1-10),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다(행 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다.
각종 방언 말함 – ‘각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는 ‘혈통’, ‘민족’,’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시사한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하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다.
방언들 통역함 – ‘통역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메네이아'(*)는 ‘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 14:26에만 나온다. 이 특별한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다(14:13).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것을 권면한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판타 데 타우타 에네르게이 토 헨 카이 토 아우토 프뉴마 디아이룬 이디아 헤카스토 카도스 불레타이
개역개정,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새번역,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우리말성경,11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이는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시며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영어NIV,11 All these are the work of one and the same Spirit, and he gives them to each one, just as he determines.
영어NASB,11 But one and the same Spirit works all these things, distributing to each one individually just as He wills.
영어MSG,11 All these gifts have a common origin, but are handed out one by one by the one Spirit of God. He decides who gets what, and when.
영어NRSV,11 All these are activated by one and the same Spirit, who allots to each one individually just as the Spirit chooses.
헬라어신약Stephanos,11 παντα δε ταυτα ενεργει το εν και το αυτο πνευμα διαιρουν ιδια εκαστω καθως βουλεται
라틴어Vulgate,11 haec autem omnia operatur unus atque idem Spiritus dividens singulis prout vult
히브리어Modern,11 וכל אלה פעל הרוח האחד ההוא המחלק לאיש איש כרצונו׃
성 경: [고전12:1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성령의 은사]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진다. 6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 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필요가 없다.
타다페르 가르 토 소마 헨 에스틴 카이 멜레 폴라 에케이 판타 데 타 멜레 투 소마토스 폴라 온타 헨 에스틴 소마 후토스 카이 호 크리스토스
개역개정,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새번역,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말성경,12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또 몸에 지체가 많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으십니다.
가톨릭성경,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영어NIV,12 The body is a unit, though it is made up of many parts; and though all its parts are many, they form one body. So it is with Christ.
영어NASB,12 For even as the body is one and yet has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of the body, though they are many, are one body, so also is Christ.
영어MSG,12 You can easily enough see how this kind of thing works by looking no further than your own body. Your body has many parts–limbs, organs, cells–but no matter how many parts you can name, you’re still one body. It’s exactly the same with Christ.
영어NRSV,12 For just as the body is one and has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of the body, though many, are one body, so it is with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θαπερ γαρ το σωμα εν εστιν και μελη εχει πολλα παντα δε τα μελη του σωματος του ενος πολλα οντα εν εστιν σωμα ουτως και ο χριστος
라틴어Vulgate,12 sicut enim corpus unum est et membra habet multa omnia autem membra corporis cum sint multa unum corpus sunt ita et Christus
히브리어Modern,12 כי כאשר הגוף הוא אחד ויש בו אברים הרבה וכל אברי הגוף ההוא אף כי רבים הם כלם גוף אחד כן גם המשיח׃
성 경: [고전12:1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몸은 하나인데…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몸’과 지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유기체(有機體)임을 이해시킨다.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다페르'(*,’just as’, ‘꼭…처럼’)는 롬 12:4처럼 유사 비교를 이끌어 내고 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단지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De Wette) 단순히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Chrysostom, Estius, Meyer).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교회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 주체자로서 간주한다(Edwards). 몸은 단일체이면서도 많은 지체와 더불어 유기적 연관성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완전성과 통일성을 이룬다.
카이 가르 엔 헤니 프뉴마티 헤메이스 판테스 에이스 헨 소마 에밮티스데멘 에이테 유다이오이 에이테 헬레네스 에이테 둘로이 에이테 엘류데로이 카이 판테스 헨 프뉴마 에포티스데멘
개역개정,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새번역,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됐고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영어NIV,13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whether Jews or Greek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영어NASB,13 For by one Spirit we were all baptized into one body, whether Jews or Greeks, whether slaves or free, and we were all made to drink of one Spirit.
영어MSG,13 By means of his one Spirit, we all said good-bye to our partial and piecemeal lives. We each used to independently call our own shots, but then we entered into a large and integrated life in which he has the final say in everything. (This is what we proclaimed in word and action when we were baptized.) Each of us is now a part of his resurrection body, refreshed and sustained at one fountain–his Spirit–where we all come to drink. The old labels we once used to identify ourselves–labels like Jew or Greek, slave or free–are no longer useful. We need something larger, more comprehensive.
영어NRSV,13 For in the one Spirit we were all baptized into one body–Jews or Greeks, slaves or free–and we were all made to drink of one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γαρ εν ενι πνευματι ημεις παντες εις εν σωμα εβαπτισθημεν ειτε ιουδαιοι ειτε ελληνες ειτε δουλοι ειτε ελευθεροι και παντες εις εν πνευμα εποτισθημεν
라틴어Vulgate,13 etenim in uno Spiritu omnes nos in unum corpus baptizati sumus sive Iudaei sive gentiles sive servi sive liberi et omnes unum Spiritum potati sumus
히브리어Modern,13 כי ברוח אחד נטבלנו כלנו לגוף אחד אם יהודים אם יונים אם עבדים אם בני חורין וכלנו לרוח אחד השקינו׃
성 경: [고전12:1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그리스도 안에서 혈통적인 구별이나 신분의 구분에 상관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성령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되지 못함에 대한 권면일 수도 있다(엡 4:4-6절). 바울은 ‘성령'(*, 프뉴마)과 ‘세례'(*, 밥티스마)와 ‘몸'(*, 소마)을 하나의 관계로 본다. 즉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 곧 하나된 영적 유기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으로 세례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어떤 외적인 방법인 물로써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적으로 작용하여 변화시키심을 의미한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는전술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설명을 이끄는 접속사로 쓰였다. 즉 성령으로 세례받은 것을 ‘마시다’는 표현으로 보충한다.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아 들이는 것을 가리켜 ‘생수를 마신다’라고 표현하신 바 있다(요 7:37-39). 이제 성령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모두 다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분열과 다툼 따위를 종식(終熄)시키고, 공동 사역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카이 가르 토 소마 우크 에스틴 헨 멜로스 알라 폴라
개역개정,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새번역,14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NIV,14 Now the body is not made up of one part but of many.
영어NASB,14 For the body is not one member, but many.
영어MSG,14 I want you to think about how all this makes you more significant, not less. A body isn’t just a single part blown up into something huge. It’s all the different-but-similar parts arranged and functioning together.
영어NRSV,14 Indeed, the body does not consist of one member but of many.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γαρ το σωμα ουκ εστιν εν μελος αλλα πολλα
라틴어Vulgate,14 nam et corpus non est unum membrum sed multa
히브리어Modern,14 כי גם הגוף לא אבר אחד הוא כי אם רבים׃
성 경: [고전12:1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 12절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표현을 다시 사용하여 교회가 갖는 독특한 성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비유로 영적인 몸인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능과 역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2절에서는 지체가 많다는 점에 역점을 두었다면, 본절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에안 에이페 호 푸스 호티 우크 에이미 케이르 우크 에이미 에크 투 소마토스 우 파라 투토 우크 에스틴 에크 투 소마토스
개역개정,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새번역,15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15 만일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NIV,15 If the foot should say, “Because I am not a hand, I do not belong to the body,” it would not for that reason cease to be part of the body.
영어NASB,15 If the foot should say, “Because I am not a hand, I am not a part of the body,” it is not for this reason any the less a part of the body.
영어MSG,15 If Foot said, “I’m not elegant like Hand, embellished with rings; I guess I don’t belong to this body,” would that make it so?
영어NRSV,15 If the foot would say, “Because I am not a hand, I do not belong to the body,” that would not make it any less a part of the body.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αν ειπη ο πους οτι ουκ ειμι χειρ ουκ ειμι εκ του σωματος ου παρα τουτο ουκ εστιν εκ του σωματος
라틴어Vulgate,15 si dixerit pes quoniam non sum manus non sum de corpore non ideo non est de corpore
히브리어Modern,15 אם תאמר הרגל אינני יד על כן אינני מן הגוף הבעבור זאת איננה מן הגוף׃
성 경: [고전12:15,1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바울은 몸의 지체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손과 발을 대비시키고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비중있고 가치있는 손과 눈에 비해 덜 눈에 띄고 덜 사랑스런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으려 한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은사가 각기 다른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우월 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비난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한 것이다. 영향력이 적고 보잘것없는 은사라 할지라도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귀중하다.
카이 에안 에이페 토 우스 호티 우크 에이미 옾달모스 우크 에이미 에크 투 소마토스 우 파라 투토 우크 에스틴 에크 투 소마토스
개역개정,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새번역,16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16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NIV,16 And if the ear should say, “Because I am not an eye, I do not belong to the body,” it would not for that reason cease to be part of the body.
영어NASB,16 And if the ear should say, “Because I am not an eye, I am not a part of the body,” it is not for this reason any the less a part of the body.
영어MSG,16 If Ear said, “I’m not beautiful like Eye, limpid and expressive; I don’t deserve a place on the head,” would you want to remove it from the body?
영어NRSV,16 And if the ear would say, “Because I am not an eye, I do not belong to the body,” that would not make it any less a part of the body.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εαν ειπη το ους οτι ουκ ειμι οφθαλμος ουκ ειμι εκ του σωματος ου παρα τουτο ουκ εστιν εκ του σωματος
라틴어Vulgate,16 et si dixerit auris quia non sum oculus non sum de corpore non ideo non est de corpore
히브리어Modern,16 ואם תאמרו האזן אינני עין על כן אינני מן הגוף הבעבור זאת איננה מן הגוף׃
에이 홀론 토 소마 옾달모스 푸 헤 아코에 에이 홀론 아코에 푸 헤 오스프레시스
개역개정,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새번역,17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우리말성경,17 만일 몸 전체가 눈이라면 듣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만일 몸 전체가 듣는 곳이라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가톨릭성경,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영어NIV,17 If the whole body were an eye, where would the sense of hearing be? If the whole body were an ear, where would the sense of smell be?
영어NASB,17 If the whole body were an eye, where would the hearing be? If the whole were hearing, where would the sense of smell be?
영어MSG,17 If the body was all eye, how could it hear? If all ear, how could it smell?
영어NRSV,17 If the whole body were an eye, where would the hearing be? If the whole body were hearing, where would the sense of smell b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 ολον το σωμα οφθαλμος που η ακοη ει ολον ακοη που η οσφρησις
라틴어Vulgate,17 si totum corpus oculus ubi auditus si totum auditus ubi odoratus
히브리어Modern,17 אם הגוף כלו יהיה עין איה השמע ואם כלו יהיה שמע איה הריח׃
성 경: [고전12:1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만일 온 몸이 눈이면…냄새맡는 곳은 어디뇨 – 본절은 15, 16절에 대한 연속적인 설명으로 교회의 각 구성원의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바울은 가정법을 사용함으로써 이해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온 몸은 듣는 곳이 없이 보기만 해서도 안되며, 냄새 맡는 곳이 없이 듣기만 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지체의 다양성은 곧 몸의 효용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지체간의 관계 또한 상호 대립과 불평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뉘니 데 호 데오스 에데토 타 멜레 헨 헤카스톤 아우톤 엔 토 소마티 카도스 에델레센
개역개정,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새번역,18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지체들을 각각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몸에 두셨습니다.
가톨릭성경,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영어NIV,18 But in fact God has arranged the parts in the body, every one of them, just as he wanted them to be.
영어NASB,18 But now God has placed the members, each one of them, in the body, just as He desired.
영어MSG,18 As it is, we see that God has carefully placed each part of the body right where he wanted it.
영어NRSV,18 But as it is, God arranged the members in the body, each one of them, as he chos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νυνι δε ο θεος εθετο τα μελη εν εκαστον αυτων εν τω σωματι καθως ηθελησεν
라틴어Vulgate,18 nunc autem posuit Deus membra unumquodque eorum in corpore sicut voluit
히브리어Modern,18 ועתה האלהים שת את האברים כל אחד ואחד מהם בגוף כמי רצונו׃
성 경: [고전12:1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원하시는 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델레센'(*)과 ‘두셨으니’의 헬라어 ‘에데토'(*)는 부정 과거로서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도록 지으셨다. 이렇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완전하므로 각 지체들이 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보여준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에이 데 엔 타 판타 헨 멜로스 푸 토 소마
개역개정,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새번역,19 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말성경,19 만일 모든 것이 한 지체로 돼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어NIV,19 If they were all one part, where would the body be?
영어NASB,19 And if they were all one member, where would the body be?
영어MSG,19 But I also want you to think about how this keeps your significance from getting blown up into self-importance. For no matter how significant you are, it is only because of what you are a part of. An enormous eye or a gigantic hand wouldn’t be a body, but a monster.
영어NRSV,19 If all were a single member, where would the body b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ει δε ην τα παντα εν μελος που το σωμα
라틴어Vulgate,19 quod si essent omnia unum membrum ubi corpus
히브리어Modern,19 ואלו היו כלם אבר אחד איה הגוף׃
성 경: [고전12:19]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 17절의 내용에 대한 재설명이요 부연이다. 모두들 자기가 좋게 여기는 지체만 된다고 가정하면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발전하여 전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갖는 독특한 역할을 잘 수행하여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것이다.
뉜 데 폴라 멘 멜레 헨 데 소마
개역개정,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새번역,20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우리말성경,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입니다.
가톨릭성경,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영어NIV,20 As it is, there are many parts, but one body.
영어NASB,20 But now there are many members, but one body.
영어MSG,20 What we have is one body with many parts, each its proper size and in its proper place. No part is important on its own.
영어NRSV,20 As it is, there are many members, yet one body.
헬라어신약Stephanos,20 νυν δε πολλα μεν μελη εν δε σωμα
라틴어Vulgate,20 nunc autem multa quidem membra unum autem corpus
히브리어Modern,20 הנה רבים הם האברים והגוף אחד׃
성 경: [고전12:2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지체의 통일성]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12절에서 몸의 단일성에서 지체와 다양성으로 전개시켜 나가다가 본절에서는 다시 다양성에게 단일성으로 회귀(回歸)하고 있다. 역시 강조점은 ‘하나’인 몸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 지체들의 은사는 다양할 수 있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존재한다.
우 뒤나타이 데 호 옾달모스 에이페인 테 케이리 크레이안 수 우크 에코 에 팔린 헤 케팔레 투이스 포신 크레이안 휘만 우크 에코
개역개정,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새번역,21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1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영어NIV,21 The eye cannot say to the hand, “I don’t need you!” And the head cannot say to the feet, “I don’t need you!”
영어NASB,21 And the eye cannot say to the hand, “I have no need of you”; or again the head to the feet, “I have no need of you.”
영어MSG,21 Can you imagine Eye telling Hand, “Get lost; I don’t need you”? Or, Head telling Foot, “You’re fired; your job has been phased out”?
영어NRSV,21 The eye cannot say to the hand, “I have no need of you,” nor again the head to the feet, “I have no need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υ δυναται δε οφθαλμος ειπειν τη χειρι χρειαν σου ουκ εχω η παλιν η κεφαλη τοις ποσιν χρειαν υμων ουκ εχω
라틴어Vulgate,21 non potest dicere oculus manui opera tua non indigeo aut iterum caput pedibus non estis mihi necessarii
히브리어Modern,21 העין לא תוכל דבר אל היד לאמר לא אצטרך לך וגם הראש לא יוכל דבר אל הרגלים לאמר לא אצטרך לכן׃
성 경: [고전12:2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 많은 지체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각 지체는 그 우선 순위나 중요도가 덜하다고 하여 그 존재 가치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몸에 붙은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루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고 한 지체라도 없으면 다른 지체들이 자신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알라 폴로 말론 타 도쿤타 멜레 투 소마토스 아스데네스테라 휘파르케인 아낭카이아 에스틴
개역개정,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새번역,22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말성경,22 이뿐 아니라 더 약해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오히려 중요합니다.
가톨릭성경,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영어NIV,22 On the contrary, those parts of the body that seem to be weaker are indispensable,
영어NASB,22 On the contrary, it is much truer that the members of the body which seem to be weaker are necessary;
영어MSG,22 As a matter of fact, in practice it works the other way–the “lower” the part, the more basic, and therefore necessary. You can live without an eye, for instance, but not without a stomach.
영어NRSV,22 On the contrary, the members of the body that seem to be weaker are indispensable,
헬라어신약Stephanos,22 αλλα πολλω μαλλον τα δοκουντα μελη του σωματος ασθενεστερα υπαρχειν αναγκαια εστιν
라틴어Vulgate,22 sed multo magis quae videntur membra corporis infirmiora esse necessariora sunt
히브리어Modern,22 כי להפך אברי הגוף הנראים רפים הם לנו לצרך ביותר׃
성 경: [고전12:22]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더 약하게 보이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네스테라'(*)는 ‘약한’, ‘병든’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본절에서는 중요도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간주(看做)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은 원문상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지체들이 각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카이 하 도쿠멘 아티모테라 에이나이 투 소마토스 투토이스 티멘 페리쏘테란 페리티데멘 카이 타 아스케모나 헤몬 유스케모쉬넨 페리쏘테란 에케이
개역개정,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새번역,23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우리말성경,23 그리고 우리가 몸 가운데 덜 귀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들을 더 귀한 것으로 입혀 주어 우리의 볼품없는 지체들은 더 큰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가톨릭성경,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영어NIV,23 and the parts that we think are less honorable we treat with special honor. And the parts that are unpresentable are treated with special modesty,
영어NASB,23 and those members of the body, which we deem less honorable, on these we bestow more abundant honor, and our unseemly members come to have more abundant seemliness,
영어MSG,23 When it’s a part of your own body you are concerned with,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e part is visible or clothed, higher or lower. You give it dignity and honor just as it is, without comparisons.
영어NRSV,23 and those members of the body that we think less honorable we clothe with greater honor, and our less respectable members are treated with greater respect;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α δοκουμεν ατιμοτερα ειναι του σωματος τουτοις τιμην περισσοτεραν περιτιθεμεν και τα ασχημονα ημων ευσχημοσυνην περισσοτεραν εχει
라틴어Vulgate,23 et quae putamus ignobiliora membra esse corporis his honorem abundantiorem circumdamus et quae inhonesta sunt nostra abundantiorem honestatem habent
히브리어Modern,23 והנראים לנו נקלים בגוף אתם נלביש ביתר כבוד ואשר לבשת לנו המה כאלו ההגונים מכלם׃
성 경: [고전12:23]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그리고 ‘부족한 지체'(24절)는 앞절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를 다른 표현으로 설명한 동일한 의미들이다.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지체 상호간에는 우열이나 차등이 있다고 간주될 수 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지체들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상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타 데 유스케모나 헤몬 우 크레이안 에케이 알라 호 데오스 쉬네케라센 토 소마 토 휘스테루메노 페리쏘테란 두스 티멘
개역개정,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새번역,24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를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영어NIV,24 while our presentable parts need no special treatment. But God has combined the members of the body and has given greater honor to the parts that lacked it,
영어NASB,24 whereas our seemly members have no need of it. But God has so composed the body, giving more abundant honor to that member which lacked,
영어MSG,24 If anything, you have more concern for the lower parts than the higher. If you had to choose, wouldn’t you prefer good digestion to full-bodied hair?
영어NRSV,24 whereas our more respectable members do not need this. But God has so arranged the body, giving the greater honor to the inferior member,
헬라어신약Stephanos,24 τα δε ευσχημονα ημων ου χρειαν εχει αλλ ο θεος συνεκερασεν το σωμα τω υστερουντι περισσοτεραν δους τιμην
라틴어Vulgate,24 honesta autem nostra nullius egent sed Deus temperavit corpus ei cui deerat abundantiorem tribuendo honorem
히브리어Modern,24 כי ההגונים לנו אינם צריכים לזאת אבל האלהים מזג ככה את הגוף שנתן כבוד יותר לגרוע׃
성 경: [고전12:24]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존귀를 더하사 – 바울은 18절에서 언급한 대로 몸의 형성(形成)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되었다고 반복한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몸의 조화도 완벽하다. 따라서 몸과 그 몸에 붙은 모든 지체들은 함께 존귀함을 얻는다.
히나 메 에 스키스마 엔 토 소마티 알라 토 아우토 휘페르 알렐론 메림노신 타 멜레
개역개정,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새번역,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5 그리하여 몸에서 분열이 없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영어NIV,25 so that there should be no division in the body, but that its parts should have equal concern for each other.
영어NASB,25 that there should be no division in the body, but that the members should have the same care for one another.
영어MSG,25 The way God designed our bodies is a model for understanding our lives together as a church: every part dependent on every other part, the parts we mention and the parts we don’t,
영어NRSV,25 that there may be no dissension within the body, but the members may have the same care for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5 ινα μη η σχισμα εν τω σωματι αλλα το αυτο υπερ αλληλων μεριμνωσιν τα μελη
라틴어Vulgate,25 ut non sit scisma in corpore sed id ipsum pro invicem sollicita sint membra
히브리어Modern,25 למען לא תהיה מחלקת בגוף כי אם ידאגו כל האברים יחד זה לזה׃
성 경: [고전12:25]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본절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구성된 몸의 지체들이 상호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 관계임을 보여준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성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몸으로 세우신 의도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
카이 에이테 파스케이 헨 멜로스 쉼파스케이 판타 타 멜레 에이테 돜사제타이 헨 멜로스 슁카이레이 판타 타 멜레
개역개정,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새번역,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말성경,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가톨릭성경,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영어NIV,26 If one part suffers, every part suffers with it; if one part is honored, every part rejoices with it.
영어NASB,26 And if one member suffers, all the members suffer with it; if one member is honored, all the members rejoice with it.
영어MSG,26 the parts we see and the parts we don’t. If one part hurts, every other part is involved in the hurt, and in the healing. If one part flourishes, every other part enters into the exuberance.
영어NRSV,26 If one member suffers, all suffer together with it; if one member is honored, all rejoice together with it.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ιτε πασχει εν μελος συμπασχει παντα τα μελη ειτε δοξαζεται εν μελος συγχαιρει παντα τα μελη
라틴어Vulgate,26 et si quid patitur unum membrum conpatiuntur omnia membra sive gloriatur unum membrum congaudent omnia membra
히브리어Modern,26 ואם יכאב אבר אחד יכאבו אתו כל האברים ואם יכבד אבד אחד ישמחו אתו כל האברים׃
성 경: [고전12:26]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각 지체의 상호 보완성]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 지체들은 서로 공동체 의식과 공동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각각 독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체적인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지음받은 사람의 몸이 갖고 있는 특성을 설명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공동체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휘메이스 데 에스테 소마 크리스투 카이 멜레 에크 메루스
개역개정,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새번역,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말성경,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그 몸의 지체입니다.
가톨릭성경,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영어NIV,27 Now you are the body of Christ, and each one of you is a part of it.
영어NASB,27 Now you are Christ’s body, and individually members of it.
영어MSG,27 You are Christ’s body–that’s who you are! You must never forget this. Only as you accept your part of that body does your “part” mean anything.
영어NRSV,27 Now you are the body of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f it.
헬라어신약Stephanos,27 υμεις δε εστε σωμα χριστου και μελη εκ μερους
라틴어Vulgate,27 vos autem estis corpus Christi et membra de membro
히브리어Modern,27 אכן גוף המשיח אתם ואבריו כל אחד לפי חלקו׃
성 경: [고전12:27]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본절은 12-26절과 28절 이하의 교량적인 역할을 한다. 이제까지 몸과 지체에 대하여 의인법을 사용해온 바울은 이제 28절 이하에서 다른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본격적인 지칭, 곧 ‘너희’를 사용한다. ‘너희는'(*, 휘메이스)은 일반적으로 고린도 교인을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교회에서 은사와 직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의 몸'(*, 소마 크리스투)은 교회 전체를 가리키지만, ‘각 부분'(*, 에크 메루스)은 ‘부분적으로'(in part)라는 의미로 각각의 구성원이 몸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여 자신이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여 전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
카이 후스 멘 에데토 호 데오스 엔 테 엨클레시아 프로톤 아포스톨루스 듀테론 프로페타스 트리톤 디다스칼루스 에페이타 뒤나메이스 에페이타 카리스마타 이아마톤 안틸렘프세이스 퀴베르네세이스 게네 글로쏜
개역개정,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새번역,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몇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은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요, 셋째는 교사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남을 도와 주는 사람이요, 관리하는 사람이요, 여러 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
우리말성경,28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몇 가지 은사를 주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예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요,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각종 방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톨릭성경,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어NIV,28 And in the church God has appointed first of all apostles, second prophets, third teachers, then workers of miracles, also those having gifts of healing, those able to help others, those with gifts of administration, and those speaking in different kinds of tongues.
영어NASB,28 And God has appointed in the church, first apostles, second prophets, third teachers, then miracles, then gifts of healings, helps, administrations, various kinds of tongues.
영어MSG,28 You’re familiar with some of the parts that God has formed in his church, which is his “body”: apostles prophets teachers miracle workers healers helpers organizers those who pray in tongues.
영어NRSV,28 And God has appointed in the church first apostles, second prophets, third teachers; then deeds of power, then gifts of healing, forms of assistance, forms of leadership, various kinds of tongues.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ους μεν εθετο ο θεος εν τη εκκλησια πρωτον αποστολους δευτερον προφητας τριτον διδασκαλους επειτα δυναμεις ειτα χαρισματα ιαματων αντιληψεις κυβερνησεις γενη γλωσσων
라틴어Vulgate,28 et quosdam quidem posuit Deus in ecclesia primum apostolos secundo prophetas tertio doctores deinde virtutes exin gratias curationum opitulationes gubernationes genera linguarum
히브리어Modern,28 ומהם שם האלהים בקהל ראשונה לשליחים ושנית לנביאים ושלישית למלמדים ויתן גבורות אף מתנות הרפאות ועזרים ומנהיגים ומיני לשנות׃
성 경: [고전12:28]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 ‘몇’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스 멘'(*)은 바울이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몇몇 직임과 은사들을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로부터 방언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과 은사만 언급하고 기타 다양하고 일반적인 은사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다.
사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루스'(*)는 ‘아포스텔로'(*, ‘보내다’)에서 온 말로 초대 교회 당시에 이 직분을 가진 사람은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직분을 맡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으며(눅 6:13;롬 1:1), 이 직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을 살펴보면 이 외에도 4가지 특징을 갖는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갈 1:15), (2) 교회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웠고(행 13:1), (3) 전체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인정하고(갈 2:7), (4) 사도의 표로 사도직이 확고하게 증명되었다(고후 12:12).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스'(*, ‘대변자’, ‘대리자’)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변자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교사 – 이들은 사도나 목사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교인들을 온전히 세우는 사람들이다(고전 14:30;엡 3:5). 교사의 사역은 사도들이나 예언자들과는 달리 한 지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에는 필사본이 매우 귀중해서 교인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교회에서 교사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다(Morris).
서로 돕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틸렘프세이스'(*)는 ‘손을 거들어서 도움’의 의미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도움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교회와 연관지어 교회 안에서 베풀어지는 도움을 시사한다(Grosheide). 이는 포괄적으로 돕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 은사를 말할 때 집사(執事)들의 직무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Chrysostom, Hodge).
다스리는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베르네세이스'(*)는 ‘선장’이라는 의미로(행 27:11; 계 18:17) 배가 항해하기에 휘험한 모래톱 해안을 통과할 수 있도록 조종해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을 인도하는 자, 곧 치리하는 사람들(rulers)을 가리킨다. 이들은 고대 교회에서는 ‘세니오레스 플레비스'(Seniores Plebis, ‘평민 장로’)라고 불리었으며(Hodge), ‘다스리는 것’은 교회의 감독들이나 장로들에게 필요한 은사로 간주되었다(딤전 5:17).
메 판테스 아포스톨로이 메 판테스 프로페타이 메 판테스 디다스칼로이 메 판테스 뒤나메이스
개역개정,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새번역,29 그러니, 모두가 사도이겠습니까? 모두가 예언자이겠습니까? 모두가 교사이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말성경,29 모두가 다 사도들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예언자들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교사들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가톨릭성경,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영어NIV,29 Are all apostles? Are all prophets? Are all teachers? Do all work miracles?
영어NASB,29 All are not apostles, are they? All are not prophets, are they? All are not teachers, are they? All are not workers of miracles, are they?
영어MSG,29 But it’s obvious by now, isn’t it, that Christ’s church is a complete Body and not a gigantic, unidimensional Part? It’s not all Apostle, not all Prophet, not all Miracle Worker,
영어NRSV,29 Are all apostles? Are all prophets? Are all teachers? Do all work miracles?
헬라어신약Stephanos,29 μη παντες αποστολοι μη παντες προφηται μη παντες διδασκαλοι μη παντες δυναμεις
라틴어Vulgate,29 numquid omnes apostoli numquid omnes prophetae numquid omnes doctores
히브리어Modern,29 הכלם שליחים אם כלם נביאים או כלם מלמדים הכלם עשי גבורות׃
성 경: [고전12:29,30]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다 사도겠느냐…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 바울의 이 수사적인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몸에 여러 지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서도 모두가 동일한 은사와 동일한 직임을 가진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모두 다 동일한 은사를 갖기를 원하는 마음을 억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은사를 감당해야 한다. (3) 은사는 우열을 비교하거나 대립 관계에서가 아니라 협조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만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들이 시기하고 불만을 갖는 것은 교회의 건덕상 무익하다.
메 판테스 카리스마타 에쿠신 이아마톤 메 판테스 글로싸이스 랄루신 메 판테스 디에르메뉴우신
개역개정,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새번역,30 모두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통역하는 사람이겠습니까? /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 수 없는 말
우리말성경,30 모두가 다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습니까? 모두가 다 방언들을 말하겠습니까? 모두가 다 통역을 하겠습니까?
가톨릭성경,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영어NIV,30 Do all have gifts of healing? Do all speak in tongues? Do all interpret?
영어NASB,30 All do not have gifts of healings, do they? All do not speak with tongues, do they? All do not interpret, do they?
영어MSG,30 not all Healer, not all Prayer in Tongues, not all Interpreter of Tongues.
영어NRSV,30 Do all possess gifts of healing? Do all speak in tongues? Do all interpre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μη παντες χαρισματα εχουσιν ιαματων μη παντες γλωσσαις λαλουσιν μη παντες διερμηνευουσιν
라틴어Vulgate,30 numquid omnes virtutes numquid omnes gratiam habent curationum numquid omnes linguis loquuntur numquid omnes interpretantur
히브리어Modern,30 הלכלם מתנות רפאות הכלם מדברים בלשנות הכלם מפרשי לשנות׃
젤루테 데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 카이 에티 칻 휘페르볼렌 호돈 휘민 데잌뉘미
개역개정,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새번역,31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말성경,31 그러나 더 큰 은사들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가톨릭성경,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영어NIV,31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영어NASB,31 But earnest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I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
영어MSG,31 And yet some of you keep competing for so-called “important” parts. But now I want to lay out a far better way for you.
영어NRSV,31 But strive for the greater gifts. And I will show you a still more excellent way.
헬라어신약Stephanos,31 ζηλουτε δε τα χαρισματα τα κρειττονα και ετι καθ υπερβολην οδον υμιν δεικνυμι
라틴어Vulgate,31 aemulamini autem charismata maiora et adhuc excellentiorem viam vobis demonstro
히브리어Modern,31 ואתם התאוו המתנות המועילות ביותר ובכל זאת אראה אתכם דרך נעלה על כלנה׃
성 경: [고전12:31]
주제1: [은사에 관한 교훈]
주제2: [직분과 은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더욱 큰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카리스마타 타 메이조나'(*)는 ‘더욱 탁월한 은사’라는 의미로 이는 은사들이 서로 상대적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언급한 것과(21절ff.) 약간의 모순이 있는 듯 보일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표준을 가지고 ‘탁월한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해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특별히 방언 은사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기에 제일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효율성 보다는 매력적이고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바울은 모든 은사보다 뛰어난 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728×90
반응형
메튜 헨리 주석, 고린도전서 12장
12:1 한 성령에서 나온 여러 은사(고린도 전서 12:1-11)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에 풍성히 임한 영적 은사와 은사의 남용을 취급한다. 이 장에서 이들 은사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불신자의 회개와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초대 교회의 사역자들과 교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직책과 능력을 말한다. 은사(cari,smata)와 은혜(ca,rij)가 크게 다르다. 둘 다 하나님에게서 왔다. 구원을 위하여 은혜가 주어지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은사가 주어진다. 은혜가 없는 곳에도 은사가 있을 수 있고,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전연 떠나 있을 수가 있다. 은사가 인간에게 주어진 신령한 자비이지만 하나님을 만족할 조건은 못된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풍부하였으나 혼란에서 온 많은 잘못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이들 은사를 성령으로부터 받았다. Ⅰ. 바울은 그들이 은사의 출처와 용도를 알기를 원한다. 은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이 둘을 모르면 잘못을 범한다. 올바른 깨달음이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은사의 성질과 올바른 용도를 모르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Ⅱ.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빠져나온 옛날의 상태를 상기시킨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2절). 이방인이었을 때에 영적인 예산이나 은사들을 자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방 종교의 정신을 받고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영향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전의 이와 같은 상태를 이해한다면 모든 영적인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모를 리가 없다. 1. 그들의 전의 상태,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버린 상태로서 유지시킨 백성이었다. 선택된 유대 민족은 특별한 은총으로 세상의 다른 민족과 구별되었다. 이들에게만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과 예배가 제한되어 있었다. 세상의 남어지 백성은 약속의 계약에 낯선 사람이요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소외된 백성이다(엡 2:12). 개종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도 그러한 이방인이었다.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들을 의무와 감사를 느끼게 하며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일이다. “너희들은 이방인이었다.”
2. 그들이 행하던 행위.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헛된 상상력과 무지를 악용하는 이방 선지자들의 영향으로 큰 우상에 빠져 나무나 돌을 섬기었다. 그들의 철학자들의 사상이 무엇이든지 그들을 추종하는 대중의 행위가 이러하였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문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상을 섬기며 경의를 바쳤다(시 113:5, 6). 비참한 마음의 상태이다. 대중의 이와 같은 개념을 경멸하는 사람들도 행위로써 지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방 종교의 실망스러운 상태이다. 성령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에 임하며 그들이 이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왕이 인간을 얼마나 잘못 인도하며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가! 그들의 전의 상태,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버린 상태로서 유지시킨 백성이었다. 선택된 유대 민족은 특별한 은총으로 세상의 다른 민족과 구별되었다. 이들에게만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과 예배가 제한되어 있었다. 세상의 남어지 백성은 약속의 계약에 낯선 사람이요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소외된 백성이다(엡 2:12). 개종 전에는 고린도 교인들도 그러한 이방인이었다.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들을 의무와 감사를 느끼게 하며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일이다. “너희들은 이방인이었다.”그들이 행하던 행위.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헛된 상상력과 무지를 악용하는 이방 선지자들의 영향으로 큰 우상에 빠져 나무나 돌을 섬기었다. 그들의 철학자들의 사상이 무엇이든지 그들을 추종하는 대중의 행위가 이러하였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문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상을 섬기며 경의를 바쳤다(시 113:5, 6). 비참한 마음의 상태이다. 대중의 이와 같은 개념을 경멸하는 사람들도 행위로써 지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방 종교의 실망스러운 상태이다. 성령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에 임하며 그들이 이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왕이 인간을 얼마나 잘못 인도하며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가! Ⅲ.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참다운 영적 은사를 분별하는 방법.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 그렇다. 이방인들은 예수를 사기군으로 저주하였다. 많은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영으로 기사를 행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방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라이트푸트(Lightfoot)의 “Horoe in loc” 참조]. 그리스도를 부언하고 저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언과 기사와 부활과 교리의 선포와 영향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스도를 저주할 수가 없다. 반면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주라 함은 신앙으로 살며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사를 행한다 함이다. 사람들 앞에서 이 진리를 시인하며 죽을 때까지 유지하며 그 영향으로 살아가는 일은 성령의 성화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이 성령으로 역사되지 않고는 그에게 복종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다. 격려하고 힘을 주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시험의 날에 이 진리를 고백한 수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화해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의 성화와 견인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와 영향에 의존해야 한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 기적으로 이 진리를 증거할 수 없다. 악마의 나라에 그렇게 유해한 교리와 신앙을 악의 영이 도와주지 않는다. 바울의 주장의 진수는 기독교의 반대의 입장을 가진자의 영감과 기사는 성령에서 온 것이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증거는 용기로, 기사로 할 수 없고 성령만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특별한 역사와 능력은 하나님의 영에서 온 것이다. Ⅳ. 이들 성령의 은사들은 같은 성령에서 나왔으나 여러 가지이다. 이들은 한 창시자와 근원을 가지고 있으나 여러 종류이다. 자유로운 원인은 여러 결과를 만들고 같은 공급자가 여러 은사를 부여할 수 있다(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즉 계시와 방언과 예언과 방언 해석이다. 그러나 “성령은 같다.” 여러 직임과 규례와 제도가 있다(28-30절). 이 모든 것을 정하시는 이는 같은 주이시다(6절). “여러 역사”가 있으나 즉 기적적인 능력들이 있으나(evnergh.mata duna,mewg)(10절) “모든 역사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여러 은사와 시행과 역사가 있으나 한 하나님, 한 주, 한 영에서 나왔으며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며 모든 영적 축복과 유산의 원천에서부터 나왔다. 같은 근원과 창시자에게서 나왔다. 은사가 다르나 이전에서는 일치한다. 얼마의 종류가 여기에 언급된다(8-10절). 여러 사람이 여러 은사를 가지고 있으나 같은 성령에서 나왔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이 주어졌다. 즉 복음의 비밀에 대한 지식이다. 이 비밀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신앙의 계획과 성질과 교리의 정확한 이해라고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솔로몬의 잠언과 같이 정중한 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사도에게 나타난 계시에 의한 지혜의 말씀이라고 한정시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즉 비밀에 대한 지식이다(2:13). 구약의 예언과 모형과 역사에 싸여 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경우에 충고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기적에 대한 믿음 혹은 신령한 능력과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특이한 감동이다. 그래서 위험할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의무를 수행하며 어떤 위험이나 곤란이 있어도 진리를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안수나 기름을 붓거나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는 은사이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능력의 효력이다(evnergh.mata duna,mewg). 즉 죽은 자를 살리며 장님을 보게 하며 벙어리가 말하게 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반신불수가 걷도록 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즉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다. 혹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써 성경을 설명하는 일이다(14:24 참고). “어떤 이에게는 영을 분별함을” 즉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며 어떤 직책에 대한 어떤 사람의 내적 자격을 분별하거나 베드로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는 성령의 역사이다(행 5:3).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영감으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다. “어떤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외국의 언어를 쉽게 통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초대 사역자들과 교회들은 이런 여러 영적 은사를 받았다. Ⅴ. 이들 은사가 부여된 목적.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7절). 성령은 이들 은사의 역사로 나타나셨다. 성령의 영향과 유익이 그들 안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단지 소유자의 영광이나 유익을 위하여 분배되지 않고 교회의 유익과 덕과 복음의 전파와 발전을 위하여 주어졌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은사는 선을 행하도록 함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의 영광과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야 한다. 아무도 자기의 전유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유익을 주도록 위탁될 것이다. 남을 유익하게 할수록 자기가 이롭게 된다(빌 4:17).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과 기독교의 전파를 위하여 부여되었다. 자랑하도록 주어지지 하고 봉사하도록 주어졌다. 뽑내기 위함이 아니고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소유자가 높아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Ⅵ. 은사가 주어지는 분량. “이 모듣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주시는 이의 절대적인 기쁜 마음에 의하여 주어진다. 선물보다 더 무료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자기의 것인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을까.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그 뜻대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각양각색의 은사가 있다. 많이 받는 이도 적게 받는 이도 있다. 성령은 가장 훌륭한 판단자이시다. 사람의 생각대로 부여되지 않고 성령의 뜻대로 주어진다. 다음을 주목하자. 성령은 신령한 인격이시다. 그는 의존이나 간섭없이 자신의 뜻과 능력에 의하여 신령한 은사를 공급하신다. 은사들은 성령에 의하여 무료로 주어지지만 개인의 명예나 유익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과 몸인 교회의 덕을 위하도록 목표가 서있다.
12:12 사람의 몸과 같은 교회(고린도 전서 12:12-26) 바울은 위에서 주장한 진리를 이해시키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한다. Ⅰ. 한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으나 여러 지체는 한 몸을 만든다(12절). “몸은 하나인데 여러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즉 여러 신학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신비스러운 그리스도이다. 머리와 지체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몸이다. 여러 부분이고 여러 지체나 한 몸이다. 모든 지체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같은 위치에 있다. 같은 몸에 세례를 받고 같은 성령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로써 몸의 지체가 된다. 한 몸이 된다. 외적인 의식은 신령한 제되다. 중생의 씻음(딛 3:5)이라 불리어지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성령의 신생으로써 된다. 성령의 역사와 성찬의 분배로 지체가 된다. 잔을 마실 뿐 아니라 성령으로 마셔 교제한다. 외적인 의식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진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참 지체가 되는 것은 성령의 세례와 그의 새롭게 하여 주심과 감화의 덕분이다. 성령으로 생기를 얻어 한 몸이 된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모든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다. 한 생활 원리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같은 성령으로 생동하게 된다. Ⅱ. 각 지체는 특이한 형태와 위치와 용도를 가지고 있다. 1. 가장 비천한 지체도 몸의 한 부분을 만든다. 발과 귀는 손과 눈보다는 덜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손이 아니며 눈이 아니라고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15,16절). 신비한 몸의 모든 지체도 같은 위치와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몸과 관계가 없는가? 같은 지위나 같은 은사를 못받아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비천한 지체도 가장 고상한 지체만큼 중요하다.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에게는 귀하다.
2. 몸의 지체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17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19절). 여러 지체이고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몸은 하나다”(20절). 한 지체가 몸이 아니고 여러 지체로 구성된다. 이들은 위치와 모양과 용도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다. 그의 지체들은 다른 지위와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여러 지체가 몸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다 눈이거나 귀이거나 팔이면 어떠한 괴물이 되겠는가! 여러 은사와 직책이 있음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함이다.
3. 인간의 몸의 각 지체의 배열과 위치는 하나님의 기쁜 뜻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8절) 모든 지체의 배열의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다. 그의 뜻대로 되어 있다고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위치와 능력이 정해져 있다. 모든 것의 주께서 은총과 은사를 기뻐하시는 대로 주셨다. 누가 그에게 반대할까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불평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있지 않다고 투덜거리거나 싸워서는 안 된다.
4. 몸의 모든 지체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서로 서로 필요하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1,2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체가 서로 요긴하도록 하셨다. 남는 지체나 불필요한 지체가 없다. 모든 지체가 봉사한다. 각 지체와 전체 몸에 유익하다. 불필요한 교회의 지체가 없다. 다 필요하다. 서로 시기하거나 경멸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서로 의존하며 귀하며 관계를 맺고 요긴하도록 하셨다. 어떤 은사에게 뛰어난 사람들이 다른 부족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은사에서는 그들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지체도 가장 낮은 지체가 없으면 무용하다. 눈은 손이 필요하다.
5. 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노출하기에 부끄럽고 흉한 몸의 부분은 잘 입혀서 덮어 둔다. 아름다운 부분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나 놀라워 가장 필요한 곳에 배려와 명예가 주어진다(24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이와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 연약한 자를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덮어서 감추어 주어야 한다.
6. 하나님의 지혜는 몸의 각 지체가 분열하지 않고 서로 관계를 가지며 이웃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도록 고안하고 질서를 세웠다(25,26절). 자연적인 육체도 조정하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25절) 분열이 없으며 상호 무시가 없도록 되어 있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해야 한다. 사랑의 강한 줄로써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애정의 부패가 모든 분쟁의 씨가 된다. 이웃에 대하여 냉담하면 부주의하게 된다. 이 상호의 무관심이 분쟁의 시초이다. 자연적인 육체도 각 지체가 서로 보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몸도 같다. 각 지체는 동정해야 한다. 육체에 있어서 한 지체의 기쁨과 슬픔이 전체의 몸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동료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고통을 당하며 형제의 명예를 시기하지 말고 같이 기뻐하고 영광을 누려야 한다. 가장 비천한 지체도 몸의 한 부분을 만든다. 발과 귀는 손과 눈보다는 덜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손이 아니며 눈이 아니라고 몸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15,16절). 신비한 몸의 모든 지체도 같은 위치와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 몸과 관계가 없는가? 같은 지위나 같은 은사를 못받아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비천한 지체도 가장 고상한 지체만큼 중요하다.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에게는 귀하다.몸의 지체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17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19절). 여러 지체이고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몸은 하나다”(20절). 한 지체가 몸이 아니고 여러 지체로 구성된다. 이들은 위치와 모양과 용도가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다. 그의 지체들은 다른 지위와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여러 지체가 몸의 아름다움을 이룬다. 다 눈이거나 귀이거나 팔이면 어떠한 괴물이 되겠는가! 여러 은사와 직책이 있음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함이다.인간의 몸의 각 지체의 배열과 위치는 하나님의 기쁜 뜻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8절) 모든 지체의 배열의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다. 그의 뜻대로 되어 있다고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위치와 능력이 정해져 있다. 모든 것의 주께서 은총과 은사를 기뻐하시는 대로 주셨다. 누가 그에게 반대할까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거나 불평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있지 않다고 투덜거리거나 싸워서는 안 된다.몸의 모든 지체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서로 서로 필요하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1,22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체가 서로 요긴하도록 하셨다. 남는 지체나 불필요한 지체가 없다. 모든 지체가 봉사한다. 각 지체와 전체 몸에 유익하다. 불필요한 교회의 지체가 없다. 다 필요하다. 서로 시기하거나 경멸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서로 의존하며 귀하며 관계를 맺고 요긴하도록 하셨다. 어떤 은사에게 뛰어난 사람들이 다른 부족한 사람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은사에서는 그들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지체도 가장 낮은 지체가 없으면 무용하다. 눈은 손이 필요하다.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노출하기에 부끄럽고 흉한 몸의 부분은 잘 입혀서 덮어 둔다. 아름다운 부분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나 놀라워 가장 필요한 곳에 배려와 명예가 주어진다(24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이와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 연약한 자를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덮어서 감추어 주어야 한다.하나님의 지혜는 몸의 각 지체가 분열하지 않고 서로 관계를 가지며 이웃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도록 고안하고 질서를 세웠다(25,26절). 자연적인 육체도 조정하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25절) 분열이 없으며 상호 무시가 없도록 되어 있다. 영적인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해야 한다. 사랑의 강한 줄로써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애정의 부패가 모든 분쟁의 씨가 된다. 이웃에 대하여 냉담하면 부주의하게 된다. 이 상호의 무관심이 분쟁의 시초이다. 자연적인 육체도 각 지체가 서로 보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몸도 같다. 각 지체는 동정해야 한다. 육체에 있어서 한 지체의 기쁨과 슬픔이 전체의 몸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동료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함께 고통을 당하며 형제의 명예를 시기하지 말고 같이 기뻐하고 영광을 누려야 한다.
12:27 은사의 종류(고린도 전서 12:27-31) Ⅰ. 바울은 여기에서 자기의 주장을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비교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관계성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의 지체이며 동료로서 서로 관계가 있다(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각자는 지체이며 몸이 아니다. 몸의 일부분으로 붙어 있고 각 지체는 상호 의존과 관계를 가져 서로 돌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도 같이 배치되어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상호의 냉담과 경멸과 미움과 시기와 싸움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색한 것들이다. 그것은 몸의 지체가 서로 무관하며 싸우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울의 논지이다. 바울은 교만하는 사람과 자랑하는 사람과 성령의 은사로써 다투는 정신을 누르려고 노력했다.
2.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여러 직책과 부여된 은사와 은총들(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사도는 교회를 세울 능력과 계시를 받았다. “둘째는 선지자요” 전도자와 같이 성령의 영감으로 예언하고 성서를 해석하며 기록하는 사람이다. “세째는 교사요” 목회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말씀과 교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은 능력이요” 즉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서로 돕는 것과” 병자와 약한 자에게 동정을 가지고 돌보는 사람이다. “다스리는 것과” 교회의 사랑의 헌금을 처리하며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람들이다. “각종 방언을 하는 사람이라.” 여러말을 하는 사람이다.
(1) 풍부한 은사와 직팩. 얼마나 많을 은사인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원시 교회에 풍족히 주셨다. 그는 축복과 은총에 인색하시지 않다. 아니 부요하게 주셨다. 필요 이상으로 주셨다.
(2) 직책과 은사의 순서. 올바른 순서로 놓여 있다.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먼저 놓여 있다.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고 그들의 영적 교훈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이들이 없으면 복음의 지식도 거룩함도 증진 될 수가 없다. 나머지가 기독교에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신앙에 그처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은사의 참 가치를 정해야 한다. 용도가 가치의 가장 좋은 표준이다. 최고의 목표를 만족시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 사도의 능력이다. 기적과 병고치는 것과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병든 자를 도와 주는 것은 유용하다. 즐기고 자랑하기 위한 방언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방언은 칭찬은 받기 쉬우나 듣는 사람의 덕이나 유익이 없다. 14장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이 은사를 아주 귀하게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적당한 교만을 꺾는 방법인가. 인간은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을 가장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하여서 정신을 차리도록 한다.
(3) 은사의 고른 분배. 모든 지체와 직책은 교회에서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능력도 가지지 않았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29, 30절). 그렇다면 교회를 괴물로 만든다. 마치 몸 전체가 눈이거나 귀인 것과 똑 같다. 직책에 맞는 교인들이다. 성령께서 정해 주시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직책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높은 지위나 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경멸하면 안 된다. 각 지체가 자기의 직책을 수행하며 서로 봉사하며 시기와 멸시와 무시와 악용 없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각 지체가 자기의 의무을 수행하면 교회는 얼마나 축복된 기관일까.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관계성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의 지체이며 동료로서 서로 관계가 있다(27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각자는 지체이며 몸이 아니다. 몸의 일부분으로 붙어 있고 각 지체는 상호 의존과 관계를 가져 서로 돌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도 같이 배치되어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상호의 냉담과 경멸과 미움과 시기와 싸움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색한 것들이다. 그것은 몸의 지체가 서로 무관하며 싸우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울의 논지이다. 바울은 교만하는 사람과 자랑하는 사람과 성령의 은사로써 다투는 정신을 누르려고 노력했다.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여러 직책과 부여된 은사와 은총들(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사도는 교회를 세울 능력과 계시를 받았다. “둘째는 선지자요” 전도자와 같이 성령의 영감으로 예언하고 성서를 해석하며 기록하는 사람이다. “세째는 교사요” 목회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말씀과 교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은 능력이요” 즉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서로 돕는 것과” 병자와 약한 자에게 동정을 가지고 돌보는 사람이다. “다스리는 것과” 교회의 사랑의 헌금을 처리하며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람들이다. “각종 방언을 하는 사람이라.” 여러말을 하는 사람이다.풍부한 은사와 직팩. 얼마나 많을 은사인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원시 교회에 풍족히 주셨다. 그는 축복과 은총에 인색하시지 않다. 아니 부요하게 주셨다. 필요 이상으로 주셨다.직책과 은사의 순서. 올바른 순서로 놓여 있다.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먼저 놓여 있다.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고 그들의 영적 교훈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이들이 없으면 복음의 지식도 거룩함도 증진 될 수가 없다. 나머지가 기독교에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신앙에 그처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은사의 참 가치를 정해야 한다. 용도가 가치의 가장 좋은 표준이다. 최고의 목표를 만족시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 사도의 능력이다. 기적과 병고치는 것과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병든 자를 도와 주는 것은 유용하다. 즐기고 자랑하기 위한 방언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방언은 칭찬은 받기 쉬우나 듣는 사람의 덕이나 유익이 없다. 14장에 의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이 은사를 아주 귀하게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적당한 교만을 꺾는 방법인가. 인간은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을 가장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하여서 정신을 차리도록 한다.은사의 고른 분배. 모든 지체와 직책은 교회에서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능력도 가지지 않았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29, 30절). 그렇다면 교회를 괴물로 만든다. 마치 몸 전체가 눈이거나 귀인 것과 똑 같다. 직책에 맞는 교인들이다. 성령께서 정해 주시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직책이라도 만족해야 한다. 높은 지위나 큰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경멸하면 안 된다. 각 지체가 자기의 직책을 수행하며 서로 봉사하며 시기와 멸시와 무시와 악용 없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각 지체가 자기의 의무을 수행하면 교회는 얼마나 축복된 기관일까. Ⅱ. 바울은 충고와 암시로써 이 장을 끝맺는다. 1.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는 충고. cariuata takrei,ttona -dona potiora proestautiora 그 자체가 가장 귀하며 가장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성과 존경을 가져오는 은사를 가장 귀하게 여기지만 이것들이 가장 좋은 은사이다. 즉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의 덕에 가장 유용한 것이 제일 귀한 은사이다. 이런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는 가장 가치있고 좋은 것을 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은혜가 더 귀하다. 은사 중에도 유용한 것이 더 귀하다. 충고가 아니고 책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은사를 사모하라”(zhloavte). 13장 4절에 같은 단어가 번역되었다. 너희들이 그들에 대하여 싸우고 다투는도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교만에서 다툼이 생긴다. 고린도 교회의 다툼은 이 근원에서 생겼다. 우월에 대한 싸움이었다. 우월권은 사랑을 박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모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에 그의 형제를 떠미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은사가 유용하지만 자만과 경쟁의 화근이 될 때에 비극이다. 이것을 바울은 막으려고 하였다.
2. 더 좋은 은사 즉 사랑과 선의을 암시한다. 이것이 그들을 안정시키고 연합하는 유일의 길이며 은사가 유익하고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서로 친절하며 관심을 가지며 다툼과 우월감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참다운 사랑을 가진 사람이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 진실한 사랑이 모든 은사보다 더 사모해야 함을 주목하자. 사랑으로 마음이 빛나는 것이 자랑하는 명예나 직책이나 능력보다 더 좋은 일이다.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는 충고. cariuata takrei,ttona -dona potiora proestautiora 그 자체가 가장 귀하며 가장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성과 존경을 가져오는 은사를 가장 귀하게 여기지만 이것들이 가장 좋은 은사이다. 즉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의 덕에 가장 유용한 것이 제일 귀한 은사이다. 이런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는 가장 가치있고 좋은 것을 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은혜가 더 귀하다. 은사 중에도 유용한 것이 더 귀하다. 충고가 아니고 책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은사를 사모하라”(zhloavte). 13장 4절에 같은 단어가 번역되었다. 너희들이 그들에 대하여 싸우고 다투는도다.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교만에서 다툼이 생긴다. 고린도 교회의 다툼은 이 근원에서 생겼다. 우월에 대한 싸움이었다. 우월권은 사랑을 박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모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에 그의 형제를 떠미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은사가 유용하지만 자만과 경쟁의 화근이 될 때에 비극이다. 이것을 바울은 막으려고 하였다.더 좋은 은사 즉 사랑과 선의을 암시한다. 이것이 그들을 안정시키고 연합하는 유일의 길이며 은사가 유익하고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서로 친절하며 관심을 가지며 다툼과 우월감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참다운 사랑을 가진 사람이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 진실한 사랑이 모든 은사보다 더 사모해야 함을 주목하자. 사랑으로 마음이 빛나는 것이 자랑하는 명예나 직책이나 능력보다 더 좋은 일이다.
매튜헨리주석1073-고린도 전서 12장
매튜헨리주석1073-고린도 전서 12장 Matthew Henry 신약 / Bible Comment 주석 https://blog.naver.com/shek99/220229173169 고린도 전서 12장
Ⅰ. 신령한 은사들 12:1-11
신령한 은사들, 즉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또 은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과 구원을 주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은혜가 전혀 없는 곳에 큰 은사가 있을 수 있다. 이 고린도 교회는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지만 이것을 사용하는 데서 야기된 혼란으로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1]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한다. [2] 바울은 구원을 받기 전에 그들이 처해 있었던 비참한 상태를 상기시켰다(2절). 전에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버리신 나라의 백성이었다. 이러하였던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가! 그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를 상기시킴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감사를 느끼게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전에 그들이 한 행동은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던 것이었다. 정말 비참한 상태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도, 자기들의 실제행동에 있어서는 이런 일을 행했었다. 성령께서 이러한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들 속에 내주 할 수 있었겠는가? [3]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은사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3절). 그러나 유대인도 이방인도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협잡군이라고 모독하고 그 이름을 저주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고 또 그를 신성모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를 저주함으로써 자체 모순되는 일을 하는 일을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어진 믿음이 아니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그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 [4] 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한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4절). 교회에는 여러 직임과 직책들이 있다(28-30절). 그러나 동일한 한 분의 주님께서 이 모든 직임을 정하셨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6절). 여러 가지 은사가 그들 각자에게 주어졌지만 그 본질은 동이라고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종류들 중 몇 가지를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8-10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그는 복음의 신비스러운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할 능력을 받았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즉 신령한 것(2:13)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풀기 힘든 문제가 있을 때, 권면하고 상담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즉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믿음을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즉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즉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성경을 설명하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즉 거짓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하는 능력이다.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혹은 성령의 감화로 여러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혹은 외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은사를 말한다. [5] 이러한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7절)은 그것들은 받은 자들의 유익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떠한 은사를 내리시던 간에 그 받는 자는 그 은사를 교회의 선한 일에 사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랑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11절).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을까? 은사는 사람의 뜻으로, 혹은 그것을 사모한다는 이유로 그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자의로, 기쁘신 뜻대로 주어진다.#1-11 Spiritual gifts were extraordinary powers bestowed in the first ages, to convince unbelievers, and to spread the gospel.
Gifts and graces greatly differ.
Both were freely given of God.
But where grace is given, it is for the salvation of those who have it.
Gifts are for the advantage and salvation of others; and there may be great gifts where there is no grace.
The extraordinary gifts of the Holy Spirit were chiefly exercised in the public assemblies, where the Corinthians seem to have made displays of them, wanting in the spirit of piety, and of Christian love.
While heathens, they had not been influenced by the Spirit of Christ.
No man can call Christ Lord, with believing dependence upon him, unless that faith is wrought by the Holy Ghost.
No man could believe with his heart, or prove by a miracle, that Jesus was Christ, unless by the Holy Ghost.
There are various gifts, and various offices to perform, but all proceed from one God, one Lord, one Spirit; that is, from the Father, Son, and Holy Ghost, the origin of all spiritual blessings.
No man has them merely for himself.
The more he profits others, the more will they turn to his own account.
The gifts mentioned appear to mean exact understanding, and uttering the doctrin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he knowledge of mysteries, and skill to give advice and counsel.
Also the gift of healing the sick, the working of miracles, and to explain Scripture by a peculiar gift of the Spirit, and ability to speak and interpret languages.
If we have any knowledge of the truth, or any power to make it known, we must give all the glory of God.
The greater the gifts are, the more the possessor is exposed to temptations, and the larger is the measure of grace needed to keep him humble and spiritual; and he will meet with more painful experiences and humbling dispensations.
We have little cause to glory in any gifts bestowed on us, or to despise those who have them not.
Ⅱ. 한 몸의 많은 지체들 12:12-2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간의 몸에’비유함으로써 고린도 교인 중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1]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며 많은 지체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룬다(12절).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으니라(13절).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의 지체가 되며 한 몸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는 것이다. 잔을 마심으로 또 성령을 마시므로 그 지체로 존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세례이다.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는 성령의 세례 덕분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은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자유자든 노예든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2] 각 지체는 각기 독특한 형태와 위치한 용도를 가진다. 가장 하찮은 지체라도 몸의 한 부분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아마 발과 귀는 손과 눈보다는 덜 유용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15,16절) 또한 몸의 모든 지체는 신비스럽게도 동일한 부위에 동일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없다. 몸의 지체 중 가장 하찮은 것도 가장 귀중한 지체와 똑같은 한 지체로 한 몸에 속해 있음이 틀림없다. 모든 지체가 다 그리스도에게는 귀한 존재이다. 몸의 지체는 기능상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만 한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라(20절).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다. 몸의 지체의 다양성은 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도 그 은사의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의 각 지체의 배열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른 것이다(18절). 그리스도의 몸도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위치에서 맡겨진 임무를 완수해야하며 다른 지체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21절). 몸의 모든 지체는 상호간에 필요하며 또한 상호간에 유용하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22절). 모든 지체가 몸이나 혹은 다른 지체에 유익하다. 남은 지체도 불필요한 지체도 없으며 모든 지체가 각 지체가 몸에 유익하다. 따라서 어떤 훌륭한 은사를 지닌 교인이 좀 뒤지는 은사를 지닌 교인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눈은 손이 필요하며 머리는 발이 필요하다. 인간의 신체 구조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의 몸이야 얼마나 더 조직적이겠는가?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23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각 지체에게 이 같은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큰 지혜로 몸의 각 지체가 분열하지 않도록 질서를 세우셨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25절). 사람의 몸의 지체들은 지체 상호간 서로 도움과 보호로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큰 의무 중 하나는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이다.#12-26 Christ and his church form one body, as Head and members.
Christians become members of this body by baptism.
The outward rite is of Divine institution; it is a sign of the new birth, and is called therefore the washing of regeneration, #Tit 3:5|.
But it is by the Spirit, only by the renewing of the Holy Ghost, that we are made members of Christ’s body.
And by communion with Christ at the Lord’s supper, we are strengthened, not by drinking the wine, but by drinking into one Spirit.
Each member has its form, place, and use.
The meanest makes a part of the body.
There must be a distinction of members in the body.
So Christ’s members have different powers and different places.
We should do the duties of our own place, and not murmur, or quarrel with others.
All the members of the body are useful and necessary to each other.
Nor is there a member of the body of Christ, but may and ought to be useful to fellow-members.
As in the natural body of man, the members should be closely united by the strongest bonds of love; the good of the whole should be the object of all.
All Christians are dependent one upon another; each is to expect and receive help from the rest.
Let us then have more of the spirit of union in our religion.
Ⅲ. 은사의 종류 12:27-31
[1] 여기서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1) 기독교인과 그리스도, 그리고 기독교인들 간의 관계,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모든 지체는 다른 지체와 상호 협동의 관계가 있다.
2)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각양의 질책, 그리고 그가 부여하신 여러 은사와 은총들(28절). 이 점을 살펴보면 첫째, 이 은사들과 직책들은 매우 풍성하고 다양하다. 그리스도는 축복과 은총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남아 돌 만큼 부요하게 받았다. 둘째, 이들 직책과 은사들의 서열을 살펴보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제일 앞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우리도 그것의 참 가치를 따라서 서열을 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서열 중에서 가장 뒤에 나오는 은사가 방언을 하는 은사이다. 이 모든 은사들 중에서 그 자체로서는 가장 무용하고 무의미한 은사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은사를 아주 귀하게 여긴 것 같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꺾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 방법인가! 인간은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을 가장 자랑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러한 은사들은 다양하게 분배된다. 모든 구성원과 제직들은 모두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다(29,30절). 성령께서는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은사를 내리신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와 직책으로 만족한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상호간에 봉사를 해야 하며 몸 된 교회의 선함을 증진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
[2] 사도 바울은 권면과 암시로 이 장을 맺는다.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는 당연히 가장 좋은 가장 가치 있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보다 은혜가 더 귀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권면이 아니라 책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너희는 서로 상대방의 은사를 시기하는구나 너희는 그것들에 대하여 서로 다투고 분쟁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우월성에서 연유되는 분쟁임이 확실하다. 이런 우월성에서 형제의 사랑을 허물과 분쟁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서로 떠밀어 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성숙한 사랑으로 빛나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직책이나 능력 등 일시적인 자랑거리로 과시하는 것보다 훨씬 귀한 일이다.#27-31 Contempt, hatred, envy, and strife, are very unnatural in Christians.
It is like the members of the same body being without concern for one another, or quarrelling with each other.
The proud, contentious spirit that prevailed, as to spiritual gifts, was thus condemned.
The offices and gifts, or favours, dispensed by the Holy Spirit, are noticed.
Chief ministers; persons enabled to interpret Scripture; those who laboured in word and doctrine; those who had power to heal diseases; such as helped the sick and weak; such as disposed of the money given in charity by the church, and managed the affairs of the church; and such as could speak divers languages.
What holds the last and lowest rank in this list, is the power to speak languages; how vain, if a man does so merely to amuse or to exalt himself! See the distribution of these gifts, not to every one alike, ver.
#29,30|.
This were to make the church all one, as if the body were all ear, or all eye.
The Spirit distributes to every one as he will.
We must be content though we are lower and less than others.
We must not despise others, if we have greater gifts.
How blessed the Christian church, if all the members did their duty! Instead of coveting the highest stations, or the most splendid gifts, let us leave the appointment of his instruments to God, and those in whom he works by his providence.
Remember, those will not be approved hereafter who seek the chief places, but those who are most faithful to the trust placed in them, and most diligent in their Master’s work. 인쇄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와 성령
728×90
반응형
[장별설교]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와 성령12장부터 14장까지 세 장에 걸쳐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주에 말쓰드린 것처럼 12-14장 은사를 다루면서 가장 중요한 장은 13장으로 사랑에 대해 다룹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다 갑자기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13장을 빼고 12장에서 곧바로 14장으로 이어 읽으면 내용이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어떤 면에서 13장은 굉장히 어색한 장입니다. 어색하다는 말은 논리적이고 순리적이 것이 아니라 바울의 격앙된 감정이 드러나 감정이 통제가 잘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로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 전제된 은사입니다. 그렇다고 은사가 나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가 없다면 교회는 바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지체들에게 준 선물, 즉 은사입니다. 이제 그 이유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에서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몸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나갑니다. 저는 12장을 아래와 같이 구분했습니다.
1-3절 은사의 전제
4-11절 다양한 은사와 통일성
12-31절 몸의 비유로 본 은사
1-3절 은사의 전제
먼저 1-3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3절에서는 은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번역상의 약간의 모호함이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1절에서 ‘신령한 것’으로 표현된 것은 영어 NIV 성경에서는 ‘spiritual gifts’로 번역합니다. 즉 영적 은사를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πνευματικῶν’인데 이것은 ‘신령한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신령하다’는 표현이 신령(神靈)이란 한자어를 빌려와 번역했기 때문에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신령’이란 헬라어는 ‘프뉴마’를 말하며 ‘바람’이나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를 헬라어로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신령한 것들’을 하나님께 속한 것들로 번역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2-3절을 보겠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거듭나지 않았을 때 우상에게로 끌려갔다고 2절에서 말하고, 3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저주할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절 후반부에서는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1절의 프뉴마가 3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바울은 지금 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예수는 저주 받은 자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주가 된다고 고백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도무지 주제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2-3절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은사의 전제 또는 조건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저주할 자로 말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은 저주 받아 마땅한 자로 이해하여 십자가의 죽음이 말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대속 죽음을 무효화시킵니다. 자신이 저주 받아 죽었는데 어떻게 타인은 살릴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그 단계를 넘어 좀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하나님의 영’ 또는 ‘성령’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어진 은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즉 은사는 개인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단락에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데이비드 갈런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장은 공동선을 위해 성령께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영적 은사의 할당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롬 10:9)라는 구원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성령에 의해 이끌리며, 영적인 자들로서의 가격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출발한다.”
4-11절 다양한 은사와 통일성
4-11절은 다양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성령’에서 은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에서도 ‘주는 같으며’, 6절에서는 ‘하나님은 같으니’ 라고 말합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다양한 은사를 말하고 있지만 핵심은 바로 ‘한 성령’입니다. 궁극적으로 은사는 다양할 수 있으나 동일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종종 3절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사도행전 16:7에 의하면 ‘예수의 영’으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12-31절 몸의 비유로 본 은사
이제 세 번째 단락으로 넘어갑니다. 12-31절은 다양한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몸’이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12절에서는 ‘몸은 하나인데’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13절에서는 ‘한 몸이 되었고’ 14절, 15절, 16절, 17절 18절, 19절, 20절, 22절, 23절, 24절 계속 이어집니다. 몸은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말합니다. 한 몸에 손이나 발, 눈과 코 등 다양한 지체가 있듯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비유에서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ㄱ. 서로 필요의 원리
15-21절에서는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이 발더러 ‘넌 더러우니 몸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눈이 입에게 ‘너는 맛있는 것만 먹는 식충이야’라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입이 없다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결국 눈도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보지 못하고 온 몸은 죽고 말 것입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고 서로 삿대질 한다면 몸은 고통에 빠질 것이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은 다양한 은사를 가진 이들은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을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한 몸을 이루어 가게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ㄴ. 약자 가치의 원리
두 번째 교훈은 ‘약자 고가치의 원리’입니다. 약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월등한 가치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요긴하고, 덜 귀히 여기는 것들이 더욱 귀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한 것을 찾고, 탁월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반대로 갑니다. 약하고 추하고 어리석은 이들이 모여 있고, 그들이 함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1:26-29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ㄷ. 균등(均等)의 원리
세 번째 원리는 균등의 원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로 다르고,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균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 몸을 고르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형제끼리는 서로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부유한 아들의 재산을 가난한 딸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귀한 자녀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사랑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통해 ‘여러 지체가 서로 돌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고든 피는 은사는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마무리
은사는 한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728×90
반응형
고린도전서12장 칼빈주석요약(은사론 1)
뉴스 홈 개혁신학 주경신학 기사목록 고린도전서12장 칼빈주석요약(은사론 1) 조창훈 목사(방배본 교회) 기사입력 2016-07-24 오후 1:11:00 | 최종수정 2016-07-24 13:11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전 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중생의 은사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할 때 그들은 결과에 관한한 하나님의 성령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의 은사는 그것과 다르다. 즉 단순한 실제적인 지식의 은사와 중생의 은사와는 별개인 것이다. 가룟 유다도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그 은사를 받았던 것이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성령- 은사의 조화 개개인은 그들이 가진 것을 공동체에 공헌하도록 활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사를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은사가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성령은 모든 은사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모든 행위의 창설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창설자이신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고전 12: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삼위일체 증거구절- 회의적 교부들은 이 구절들을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증거로써 아리안파들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하였다. 성령, 주,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어서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삼위일체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기에는 불안하다고 주장했다. 고전 12: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능력의 근원- 하나님 바울은 믿는 자들이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한다. 고전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나타남은 능동태나 수동태로 취급될 수 있다. 고전 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지식과 지혜, 분별의 은사 지식이라는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은밀한 비밀과 고차원의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력은 그들 사이에 중간적인 위치를 가진다. 이것은 지식을 어떤 실제적인 목적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을 의미한다.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믿음의 은사- 기적 여기서 믿음은 특별한 종류의 믿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속주, 칭의, 성화등의 전체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그런 믿음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그런 형태의 믿음을 의미한다. 가룟 유다도 이러한 믿음을 가졌었다.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각종 은사들 능력을 행하는 능력은 마귀를 대적하며,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울이 마술사를 눈멀게 하는 것,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한 사건들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써,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영들 분별함은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참 사역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차이점을 분별해 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각종 방언 말함은 당시에 외국어를 성령의 놀라우신 계시로 받은 은사를 의미한다.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은사의 목적 아무도 자급자족할 만큼 그렇게 많은 은사를 받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없을 만큼 충분하게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를 공동 이익을 위해서 공헌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은사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다른 사람과 절교하고 혼자 살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개인 혼자 그 은사를 낭비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 각각 이라는 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를 의지하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그 뜻대로 라는 표현을 통하여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충분하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연합- 세례와 성찬을 통한 예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가 되고, 서로 지체로서 연합하기 위하여 결합되었다. 또한 한 생명으로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공동협력을 위하여 헌신해야 한다. 세례의 본질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이러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이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한 성령을 마시도록 만들어졌다”이다. 바울은 마시다는 동사를 사용하므로, 성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생명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며, 그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실 때 참으로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우월한 지체와 열등한 지체- 만족할 것 바울은 좀 우월한 지체와 그보다 조금 낮은 가치의 지체들 사이를 비교하면서 각 지체들이 자신의 직무와 적절한 위치에 만족하면서 다른 부위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한다. 눈은 몸에서 손보다 더 영예스러운 위치를 차지한다. 또 손은 발보다 조금 우월한 위치에 있다. 고전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전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고전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고전 12: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고전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영원한 직무, 일시적 직무 바울이 목록에 모든 종류의 직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그는 단지 실례를 들 뿐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직무들 중에 어떤 직무는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직무는 일시적인 것이다. 일시적인 직무들은 처음부터 교회의 기초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며, 또 이것은 얼마 후에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도 주님께서 사도들을 임명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들은 일정한 영역, 곧 자신들의 교회를 가진 목사들과 다르다. 목사들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책임으로 맡겨진 교회를 돌보는 데 있다. 선지자 선지자들은 성경을 풀이하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성경 말씀을 제시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성경에 관한 탁월한 해설자들이며, 교회에 직접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지혜와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고 적절한 말씀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는 사자들인 것이다. 선지자들은 예언과 경고, 약속, 성경의 모든 교훈을 당시의 교회의 필요성에 적절하게 적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잘 알리는 데 세련되고 경험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교사 교사들은 종교의 순수성이 교회에서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건전한 교리를 지키고 널리 전파하는 자들이다. 다스리는 것- 장로들 다스리는 것은 훈련의 책임을 진 장로들을 의미한다. 고전 12: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악한 의도와 행위들 제거위해 한 사람이 많은 은사를 받는 일이 있고, 두 가지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있고, 그 임무를 잘 감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혼자로서는 전체의 조직체를 이룰 수 없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의도하는 것은 교만이나 질투, 형제를 멸시하는 일, 이기주의등 그런 종류의 모든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데 있다.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서로를 세우도록 더욱 큰 은사는 ‘보다 가치가 높은’ 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방언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예언을 멸시하였다. 그렇다고 바울이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가 되고, 교사가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일들을 더욱 열심히 구하면서 그들이 모든 일에 자신들을 헌신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제공 : 크리스찬타임스 스폰서 링크 형람서원[크리스찬타임스] http://blog.naver.com/ktyhbgj ex fide in fidem, Sola et Tota Scriputra. 형람서원[한국성경연구원] http://cafe.daum.net/homoousion 개혁신학 탐구의 요람 네티즌 의견 전체 0 아이디 작성일 네티즌 의견 전체의견보기(0) 의견쓰기 다음기사글이 없습니다. 이전기사글이 없습니다. 주경신학 기사목록 보기 개혁신학 주요기사 [마가복음 묵상(4)] 마가복음 4장 [마가복음 묵상(5)] 마가복음 5장 [마가복음 묵상(10)]마가복음 10장 재미있는 성경읽기. 창세기(1) 첫째날 창조 [마가복음 묵상(9)]마가복음 9장 [매일성경]시편 27편 1-14절 [매일말씀묵상] 디모데전서 1장 바른 교훈이 교.. [마가복음 묵상(3)] 마가복음 3장
2015/12/28(월) “고린도전서 12:12-31” / 작성: 김광욱
본문 고린도전서 12:12-31
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졌습니다(행18:1-11). 설립 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내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는 5장의 음행에 관한 사도바울의 책망부터, 소송(6장), 결혼(7장), 우상의 제물(8장), 우상 숭배(10장), 그리고 11장의 예배와 성만찬에 이르기까지 교회 내 발생한 타락상과 교회의 제반적인 문제점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고와 가르침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이후에도 사도 바울의 여러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부터 고린도교회의 세부항목별 문제점을 언급하기 전, 고린도전서 1장부터 4장까지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 대한 인사,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그 문제점들 자체가 교회를 덕스럽게 하지 못하였지만 이외에 더 심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의 합의점이 없는 논쟁이었습니다. 교회 내 발생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인들 서로 간에 토론 내지 논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단순히 토론이나 논쟁의 수준을 넘어서 분쟁으로 비화되었습니다(고전1:10-11). 결국에는 교회에 파벌이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고전1:12). 고린도교회가 이렇게 심각한 상태로 빠져버린 것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고린도교회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목회를 했던 사도 바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전하는 편지 서두에 인사말을 마치고 했던 첫 번째 말이 고린도전서 1장 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는,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것은 제반적인 문제점들의 제거나 개선보다는 교회 내에 발생했던 분쟁이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함으로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여 교회가 분쟁으로 비화되게 하고 그로 인해 파벌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조직체나 공동체는 파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이 분쟁으로 치달았던 고린도교회에 강청했던 바가 바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하)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교회이었기에 강청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였지만 고린도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교회라면 교회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기에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될지라도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양성과 통일성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언급한 하나됨, 즉 통일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라고 일컫습니다.
교회 내 은사는 다양합니다. 은사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는 직분도 다양하고 사역도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고전12:4-6). 그렇기에 교회는 다양성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통일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12절부터는 다양성 속에 있어야 할 통일성의 필연성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인간의 몸은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몸입니다. 12절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지체’는 헬라어 ‘메로스’를 번역한 것으로 그 의미는 부분(part, member)입니다. 인간의 몸의 지체라 함은 눈, 코, 입, 귀, 손, 발 등과 같이 몸의 외관상 드러난 조직뿐만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오장육부 등도 가리킵니다. 인체의 모든 조직은 인체 각 부분인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지체들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비유에 나오는 여러 지체들은 교회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함이고 한 몸은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다양성은 교인의 수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 이외에도 교회 구성원들의 인종, 혈통, 신분, 학벌, 성별, 나이 등이 다양하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어야 함은 교회 내 모든 구성원이 한 성령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3절). 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 신자들은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 신자들의 우열의식이나 이로 인한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각기 다른 지체들에게 제 역할이 있듯이 교회 내 신자들은 각자의 제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온전한 몸이 될 수 없기에 내가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 중 어느 누구에게 ‘당신은 또는 그가 필요없다’ 라고 말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체 조직 중의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인체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인간의 몸을 창조하셨듯이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 내 구성원들 중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교회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몸에 두셨듯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교회 내 구성원을 두셨습니다. 이 분이 교회 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저 분이 교회 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 교인들이 복제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귀보고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22절 말씀처럼 교회 내 역할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교인이 오히려 교회 내 더 필요합니다. 믿는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귀중한 존재입니다. 24절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여기서 ‘고르게 하여’는 헬라어 ‘슁케란뉘미’를 번역한 것으로 그 의미는 ‘혼합하다’, ‘함께 섞다’입니다. 상징적으로는 ‘결합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몸을 고르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몸의 각 지체를 결합해서 한 몸을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해 보이는 지체와 기능적으로 중요한 지체를 결합하여 한 몸을 만드사 부족한 지체를 귀중하게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귀중한 존재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부족하다거나 못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못하면 못하는 그 자체로 모두가 귀중한 존재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귀중한 존재로 여긴다면 교회는 분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서로가 서로를 귀중한 존재로 여긴다면 서로 같이 돌보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기쁠 때 같이 즐거워하고 누군가 고통을 받을 때 같이 고통을 받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26절). 왜냐하면 믿는 우리 모두는 단순한 인간의 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모두가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교회 내 다양성을 이해하고 상대를 귀중히 여겨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는 하나가 되어야 함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8절부터 30절에 언급한 직분과 은사들보다 더 큰 은사는 결국 자신보다 다른 지체를 더 귀중히 여길 수 있고 분쟁과 파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은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해 주시는 주제이며 우리가 더욱 더 사모해야 할 큰 은사가 아니겠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체를 이루고 있는 저희들이 서로를 귀중히 여기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나로 인해 교회에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하시고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하루빨리 돌이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하나됨을 이루는데 앞장서게 하옵소서. 우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모든 지체를 두셨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지체를 결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셨음을 잊지 않고, 서로 같이 돌보며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점들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교회 내 분쟁이나 파벌의 발생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의 특징을 은사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4. 교회 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려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5. 2015년 한 해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잘 보냈다면 교회와 가정에서 어떻게 소통과 통일을 이루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십자가의 도 2장: 영적인 진리 3장: 사람을 자랑치 말라 4장: 교만치 말라 5장: 권징 6장: 몸으로 영광 돌림 7장: 결혼 생활 8장: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0장: 우상숭배치 말것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장: 성령의 은사 13장: 사랑의 덕 14장: 방언과 예언 15장: 부활 16장: 사랑의 교제 서론 고린도전서의 저자 는 사도 바울이다(고전 1:1-3; 16:21). 속사도 시대의 저작자인 로마의 클레멘트는 본 서신을 “복스러운 사도 바울의 서신”이라고 불렀고,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많이 인용하였다. 고린도 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아테네에서 약 60km 서쪽에 위치했는데, 동쪽으로 애게 바다와 서쪽으로 이오니아 바다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 도시는 매우 부요했고 매우 음란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들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을 때 그는 회당 옆에 있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의 시작이었다. 바울은 본 서신을 썼을 때 에베소에 있었고 그에게 광대하고 효력있는 전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고전 16:8-9). 그러므로 본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주후 54년 혹은 55년 봄경에 썼을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교회의 문제들’이다. 이 서신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교회 안의 분쟁, 음행한 교인의 포용, 권징, 성도의 법정 소송, 우상제물과 우상숭배, 여자의 머리 수건 문제, 성찬, 성령의 은사, 부활, 헌금 등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본 서신의 내용은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후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적용된다. 본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장: 십자가의 도 1-17절, 단합을 권면함 [1-3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헤기아스메노이스 )[거룩하여졌고] 성도라[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직분은 권위가 있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잘 계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3:2-7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부르시는 몇 가지 증표가 있다고 본다. 첫째, 그 직분을 위한 마음의 강한 소원이다(빌 2:13). 둘째, 그 직분을 위한 은사의 확인이다(롬 12:6). 셋째, 회중들의 인정과 추천과 선택이다(행 6: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를 보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핍박자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로 만드셨다(행 9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복음 전파자로 택하시고 보내셨다(롬 1:1).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였다. 신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말한다. 1) 그것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성도가 되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물임을 보인다. 그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과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다(롬 1:7).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후원을 받는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다. 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심히 부패한 죄인들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다.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음 받게 되었다. 죄씻음과 거룩하여짐이 구원이다. 죄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었고 죄씻음 받음은 영생과 행복과 평안의 원인이다. ‘성도’라는 명칭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붙여진 매우 존귀한 이름이다. ‘거룩하여졌다’( 헤기아스메노이스 )는 원어의 완료분사는 법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는 우리의 의와 거룩이 되셨다(롬 10:4; 고전 1:30).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가려졌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던 성경적 복음이며(롬 3:24; 히 10:10, 14) 여기에 참 자유와 평안이 있다(갈 5:1; 롬 5: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문안하지 않고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예수님을 약 68회 ‘주’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주인, 소유자, 하나님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고백이며 그에 대한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사람이 죄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은 표가 된다(롬 10:9).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또 평안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은 결과로 누리는 복이다. 죄인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셨다(마 11:28). 평안이라는 말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사회적 안정 등을 다 포함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이 있다(요 14:27). [4-9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口辯)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다. 그는 그가 감사한 이유를 좀더 설명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과 지식의 풍족함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증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케 되게 하셨음을 감사하였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즉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다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실들이 긴 시대적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믿어지는 이유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의 책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위에 근거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확신했다. 둘째로, 그는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모든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요소들이다(고전 13:13).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행하는 것이며, 소망은 주의 재림과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요 큰 힘과 위로이다. 셋째로, 그는 주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구속(救贖)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요 6:39; 10:28; 롬 8:30).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자들을 다 찾으실 것이며 그가 찾아 구원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는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로 훈련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담대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그가 한번 우리를 불러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셨다면,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주를 대항하며 죄 가운데 살았을 때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지금도 부족과 연약이 많을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 스키스마 )[분열]이 없이 같은 마음( 누스 )[생각 mind]과 같은 뜻( 그노메 )[판단 judgment] (KJV, NASB)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한 겸손한 호칭이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다 형제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명령하지 않고 권면하였다. 그에게는 명령할 권위가 있었으나 그는 권면하였다. 이것도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겸손한 모습이다. 바울이 권면한 내용은 그들이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것이었다. 말은 생각과 판단의 표현이다. 생각과 판단이 같으면 말이 같아지지만, 생각과 판단이 다르면 말도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하게 단합하여 진행하는 것이다. [11-12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문제가 분쟁의 문제이었다. 그 교회에는 바울을 따르는 자들과 아볼로를 따르는 자들과 게바 즉 베드로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였다. 교회가 아직 분열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인들 안에는 이미 단합된 마음이 없었고 교인들끼리 분파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답지 않았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며 나뉘실 수 없는데, 그의 몸된 교회에 어떻게 분파가 합당하겠는가? 그 교회를 개척한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바울이 죽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이름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일치단합해야 한다. 분쟁과 분열은 수치스런 죄악이다. [14-17절]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주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이며(마 28:19)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의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세례는 중요하지만 구원에 본질적이지는 않다. 즉 세례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든지 세례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은 복음 신앙뿐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를 것이다(막 16:16; 요 3:36).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을 감사하며 거룩함을 나타내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거룩함을 얻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확신한 것을 감사했고 또 주께서 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였다. 그것은 신자들의 성화의 확실함과 끝까지 견딤의 진리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을 믿고 더욱 분발하자. 둘째로,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강림하심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킨다(눅 17:30; 살전 4:16; 살후 1:7, 10; 히 9:2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대종말이 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광의 천국이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자. 셋째로, 우리는 항상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합하자. 우리는 다 같은 말을 하고 우리 가운데 분열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단합하자. 교회는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교리적 차이 때문에 교파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교파가 성경의 근본교리에서 이탈한 이단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18-31절, 십자가의 도 [18절] 십자가의 도(道)( 로고스 )[말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의 도(道)’ 즉 ‘십자가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그 죽음의 속죄적 의미가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구원 얻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키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19-21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케뤼그마 khvrugma)[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웅변과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인 전도로 구원해야 한다.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헬라인](전통사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기독교는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의 풍조를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지혜를 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사람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역사상 기독교의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현대신학은 칸트 철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들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을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의미가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여기에 성경적 기독교가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고(요 6:51), 또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고전 15:3-4). 속죄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현재의 구원의 능력인 것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또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 믿는 우리는 죄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하며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히 죄악되어서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한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들이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다(사 64:6).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와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가 바로 그 방법이었다. [24-25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다. 그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세상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사람의 웅변적 말이나 수사학적 말보다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우리는 오늘도 전도와 설교의 효력을 믿는다.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 됨을 보인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 정도를 뛰어넘는 말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신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정치적 권력이나 재력(財力)이 있는 자, 좋은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4).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어둡게 하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입문하기가 비교적 쉽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27-2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중 다수는 과거에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자들이 아니고 좋은 학교 출신도 아니고 몸이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사람의 근원을 알게 되었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고 또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산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의 이러한 지식과 삶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30-31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엑스 아우투 )[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아포 데우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중생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의 은혜와 복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우리는 과거에 지혜가 없이 정신적 혼돈 속에 살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혜가 되셔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바른 대답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 의는 율법을 다 지킨 것을 말한다. 세상은 불의하고 죄악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요구 곧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는 거룩함이 없었다. 죄악된 세상은 더럽고 불결하며 거기에 사는 죄인들은 더럽고 불결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 모든 더러움과 불결을 다 씻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구속은 값 주고 사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죗값을 다 지불하시고 죄와 그 형벌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의인된 것, 성도된 것, 천국 시민된 것, 영생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죽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 속죄 신앙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의 도는 기적주의와 은사주의나,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와 다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기적과 초자연적 은사를 추구한다. 그들은 복음 진리와 속죄신앙과 경건과 계명 순종을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적 체험, 은사 체험을 추구한다. 또 다른 이들은 사람의 이성의 판단이나 경험의 잣대로 성경의 계시 진리들을 판단한다. 그들은 성경을 신화의 책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였다. 우리는 이 두 경향을 다 경계하고 성경적 정통 기독교를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한다. 셋째로, 십자가의 도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속죄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부족한 자들을 그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 2장: 영적인 진리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영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참되며 확실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성은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사람의 달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은 그 전달 방법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 복음의 가치는 그 내용에 있다. 그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했다. 사람이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단장한다고 복음이 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효력은 사람의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그 내용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3-5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사람의] 2)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능력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린도에 머물었을 때에 사람으로서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구원의 능력으로 사용하셨으나 복음을 전하는 당사자인 바울 자신은 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그 내용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잘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스스로 약하다고 느낄 때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하며 설교할 때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했다. 여기에 전도자의 바른 자세가 있다. 복음 전도자는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전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단순한 복음 전파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신다. 그 능력은 과거에 외적으로 나타난 기적들 뿐만 아니라, 또한 어느 시대나 내면적 변화의 능력, 즉 죄인을 회개시키고 믿게 하는 구원의 능력을 가리킨다. 복음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성도의 믿음도 사람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믿음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믿게 하셨다. [6-7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성경은 ‘온전한 자’나 ‘온전함’에 대해 많이 말한다(고전 14:20; 엡 4:13; 히 5:14; 빌 3:15; 골 1:28; 4:12; 마 5:48; 약 1:4; 3:2). ‘온전한 자’란 구원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 즉 신앙 인격에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자들 가운데서는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것은 ‘비밀한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해 미리 정하셨고 오랫동안 감취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라는 말은 구원의 목표를 보인다. 그것은 영화 즉 영광스런 상태의 회복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영광스러운 자로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그 거룩하고 의롭고 영광스러운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 본래의 영광스러운 상태의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모든 일들에 대한 완전한 설계자요 계획자이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인류 구원의 일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작정하신 방법이다. [8-9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한 지혜, 감취었던 지혜를 알지 못하였다. 만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는 초라한 유대인 사형수에 불과한 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주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곧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이나 귀나 마음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 곧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하고 죄악된 삶에 빠져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사모하지만,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은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들, 곧 돈과 육신의 쾌락과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한다. [10-11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성(神性)을 가지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모든 것을 아심 즉 전지(全知)의 속성은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기운이나 세력이 아니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무엇을 아시는 분이시다. 인격적 존재가 아닌 것은 무엇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이시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구별되신 성령에 대해 증거한다(요 14:1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분명하게 구별되신다. [12-13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도 아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감취었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 진리를 사도들에게 계시해주셨다. 사도들은 ‘하나님께로 온 영’ 곧 성령을 받았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성령께서 주신 진리 곧 영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전한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그는 사도들을 통해 주신 신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깨닫게 하셨고 믿고 구원 얻게 하셨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지혜로 분별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분별할 수 있다. [14절] 육에 속한 사람[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즉 ‘육적인’( 프쉬키코스 ) 이라는 말 은 ‘영적인’ ( 프뉴마티코스 ) 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육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육적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일반 사람, 즉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다. 이단자들도 육적인 자들( 프쉬키코이 yucikoiv )이다(유 19).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고전 1:21) 깨닫지 못하고(롬 3:11) 하나님을 경외함과 섬김이 없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롬 1:21; 3:18)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롬 1:23).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치 않고 사탄과 악령들을 따라 육체의 욕심대로 온갖 죄와 부도덕에 빠져 있다(마 15:19; 롬 3:12-15; 엡 2:2-3; 4:17-19).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교훈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는 성령께서 계시하신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5-16절]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영적인 사람’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이다.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다. 사람이 중생(重生)하고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그 속에 들어오시며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시고 그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 성도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셨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주신 지식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고린도전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람의 아름다운 말이나 언변으로가 아니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복음은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오직 성령으로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이 진리를 깨달았고 믿었다. 믿는 자들은 성령의 가르치심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배워 온전함에 이르러야 하고 구원의 최종 목표는 영광의 상태의 회복이다. 셋째로,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섬김이 없고 그에게 감사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그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게 보인다. 오직 성령을 받은 영적인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깨닫고 믿고 구원을 얻는다. 3장: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사르키코이 )[육신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적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즉 영적으로 어린 성도를 가리켰다. 그는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는 하지만 아직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신의 죄성에 지배를 받는 자이다.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밥’은 ‘딱딱한 음식’을 말한다. 갓난아기는 밥을 먹지 못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은 듣기 쉬운 교훈만 받고 어려운 교훈들을 받지 못한다(히 5:12-14).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수록(엡 4:13-15; 벧전 2:1-2; 벧후 3:18)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연구하고 배우며 믿고 행하며 지식과 인격이 자라야 한다. [3절]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 3) 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영적 어린아이라고 취급하는 까닭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 분쟁, 분열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악들이다(갈 5:19-21). 성도는 그런 죄들을 다 버리고 씻음 받아야 한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한](전통본문) 4)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지도자들에 대한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했고 아볼로는 그 후에 성경말씀을 가르친 자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증거이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사람에게 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파당과 분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면 시험에 떨어지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바라며 섬기고,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생활하고 교회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5-7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복음의 일꾼들이었다. 일꾼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복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일꾼은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그를 보내신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복음 사역은 씨 심는 것과 물 주는 것에 비유되었다. 씨를 심는 것은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리켰고, 물을 주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을 양육하는 것 곧 목회하는 것을 가리켰다. 씨를 심는 것은 전도하는 것이요, 물을 주는 것은 양육하는 것이다. 심는 일도 가꾸는 일도 다 중요하듯이, 복음 사역에서는 전도도 목회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고 한 영혼도 성장시킬 수 없다. 개인의 구원과 성장이나, 교회의 설립과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복음의 일꾼 자신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셨을 뿐이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복음 사역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복음 사역자 자신은 자신의 무능하고 무익함을 인식해야 한다(눅 17:10). [8-10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복음 사역자들은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상은 구원과 다르다. 구원은 죄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하지만, 상은 선행과 봉사, 특히 복음 사역에 대해 약속된다. 구원에 차등이 있다고 말할 것은 아니나, 상에는 차등이 있다. 상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즉 자신의 선행과 봉사와 충성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성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또한 건축에 비유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초를 닦아야 한다. 바울은 터를 닦은 자요 그의 뒤에 일하는 사역자들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자들이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축해야 한다. 목회는 집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시작이요 성화(聖化)는 구원의 진행이다. 믿는 자는 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 곧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터는 없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반석은 베드로가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한 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기초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는 속죄신앙은 믿음의 핵심이다. [12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두 종류의 건축 자재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 같은 내구성(耐久性)이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 같은 내구성이 없는 것이다. 두 종류의 목회가 있다. 하나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목회요, 다른 하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목회이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지 않아서 비교적 쉽게, 크게, 또 빠르게 지을 수 있으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것은 자재 값이 비싸고 기술도 많이 필요해 집을 짓기가 힘들고 크게 짓는 일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참 목회요 그렇게 지어진 교회가 참 교회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교훈을 가리키며, 나무와 풀과 짚은 거짓된 교훈을 가리킨다. 참 교회는 바른 교훈을 통해서 세워진다. 세상적인 생각이 섞이지 않은 바르고 순수한 설교는 바른 교회 건립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혼합된 말을 전하는 자들도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보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회개를 외치기보다 평안을 선포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평안은 오지 않았다. 평안은 죄를 버릴 때에만 오기 때문이다.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라는 원어( 에르곤 )는 ‘일’이라는 뜻이다. 복음 사역자들의 사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날이 온다.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이나 그 전의 대환난 날이다. 그때 그들의 사역이 겉보기는 굉장했으나 구원과 성화가 없는 불충성된 사역이었는지, 참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양육한 충성된 사역이었는지 판별될 것이다. [14-15절]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의 일한 바가 불 시험을 통과하면 상을 받을 것이다. 즉 그가 목회했던 교인들이 불같은 환난을 잘 통과하면 그는 목회를 잘 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록 목회자 자신이 구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목회 사역에 대한 상은 없을 것이다.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고전 6:19).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령께서는 성도 개개인에게도 계시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도 계신다. 이것은 성도 개인과 신약교회에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다. [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은 큰 복이지만, 그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는 의무를 보인다.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범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특히 교인들 간에 서로 미워하고 분쟁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일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멸하시리라고 경고했다. [18-20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국한문–‘궤계’)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람의 사상들과 철학들은 실상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진리를 논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자의 지혜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스스로 속게 하시며 그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참 지혜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자기 꾀에 빠지고 자기 모순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에는 지혜와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 가운데 자신을 똑똑하고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은 창조자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자랑하는 데 있었다. 지도자 중심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문제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중요한 교훈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들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와 섭리자와 구주이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해야 한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교회를 위한 일꾼들이요 교회의 공동적 소유물과 같다. 그들은 모든 교회의 공동적 봉사자들이다. 온 세상도 교회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 교회를 위해 존재하고 다 성도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파당에 속하지 말고 교회 전체에 속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목회는 물을 주는 것과 같으며, 전도는 터를 닦는 것과 같고 목회는 그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전도자이든지 목회자이든지 복음 사역자들은 바르게 일해야 한다.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 전해야 한다. 구원을 위한 다른 길은 없다. 또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금, 은, 보석으로, 즉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 성경의 순수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자신과 교회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 개인 속에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영원히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에 관련하여 죄를 지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특히 우리가 잘못된 이단사설을 용납하거나 파당을 만들고 분쟁하고 분열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단합해야 한다. 4장: 교만치 말 것 [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종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속죄의 진리이며 구약시대에 감취었다가 이제 계시된 비밀의 말씀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복음을 충성되이 해설하고 전파하였고 신약성경들에 기록하였다. 신약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갈 5:22). 오늘날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3-4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있게 할 수 없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사탄의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힘을 빼어 하나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드러난 이단 사상이나 죄는 판단하고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과 충성의 정도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뜻이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받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다른 이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의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겨두면 된다. 주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말씀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전통사본)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하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성도들이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해 자랑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도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만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의 큰 결함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충성하는 것이다. [7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누가 성도를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별하였는가? 또 누가 직분자들을 성도들 가운데서 구별하였는가? 우리를 구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여 부르셨고 또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 교회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직분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 가운데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들이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도 우리의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우리를 떠나갈 수 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죄사함 받고 천국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성령을 받은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들과 육신적인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본래부터 우리의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은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인 것처럼 자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성도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들의 그 부요와 풍족, 그 자유와 특권은 복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바울의 형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형편과 정반대이었다.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복음의 말씀을 맡기시며 기적 행할 능력을 주신 자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직분이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었다(엡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직분자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가장 존귀한 자를 가장 미천한 위치에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상의 구경거리,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 [10-1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 일행의 비천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존귀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듯이, 주의 종들이 비천함을 당하며 이룬 사역들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복에 이르게 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일행이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증거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었고 매맞았고 거처할 곳이 없었고 손으로 일했고 비방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였고 참았고 권면했다. 바울은 자신들이 한 마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비천함에 두신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견고히 두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길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되고 무가치함과 오는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고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내세의 소망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14-16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선생들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첫째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들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17-21절]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에서 능력으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실제적 삶이 있다. 참된 교회에는 교인들의 바르고 선한 인격과 삶이 있고 또 그들의 거룩한 헌신과 사랑의 봉사가 있다.
고린도전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과 기독교 복음의 청지기들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 주의 재림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서로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과 자랑은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 넷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복음 사역을 하며 충성했던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님 자신께서 가신 길이었고 또 그가 친히 교훈하신 바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5장: 사귀지 말고 내어쫓으라 [1-2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음행한 자를 용납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라는 표현은 그 용납의 행위가 교회의 거룩함에 매우 배치된다는 것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이단뿐 아니라, 윤리적 죄악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어떤 교인이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큰 악을 용납했다. 그것은 율법에 명백히 정죄된 죄악이었다(레 18:6). 율법은 그런 범죄자를 사형시키라고 규정했다(레 20장). 하나님께서는 이런 벌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혼 관계의 성결을 중시하신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악이다. 고린도교회가 포용한 그런 행위는 심지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는 권징을 통해 그런 악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3-5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우리] 5) 주 예수 [그리스도] 6) 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전통본문)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거기에 있어서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 악한 자가 그 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였다.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단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다.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딤전 1:20도 그런 표현을 함)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세상은 사탄이 어느 정도 지배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요한일서 5:19,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된 결과 사고나 몸의 병 등으로 죽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말은 영으로는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 곧 그의 재림의 날에 구원받은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그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는 데 있다. 권징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겠지만, 권징할 때 택함 받은 죄인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교회가 주 예수의 능력으로 그런 범죄자를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교회의 권세의 원천을 증거한다. 교회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권징의 효력은 단지 교회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6-8절]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전통본문)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악을 용납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자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건전하다. 단지 한 명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자랑은 옳지 않았다. 그 한 명을 용납한 것이 문제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악은 전염성을 가진다. 범죄한 한 명 때문에 교회의 거룩함이 상실되고 기강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용납되었다면 또 다른 죄인이 용납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교회는 점점 더 부패될 것이다. 이것은 한 지교회나 한 교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표된 유월절 양이시다. 그가 우리 대신 희생되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얻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문틀에 바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묵은 누룩은 옛 죄악들을 가리킨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의 죄악된 행습을 버려야 한다.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명절과 같다. 주의 제자들은 이 날 공적 예배를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토요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인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공적 집회를 가질 때 누룩 없는 떡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것은 옛날의 죄악들을 다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주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도 거룩해야 하고 교회의 집회들도 거룩해야 한다. [9-10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과 격리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라든지 혹은 따로 공동집단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우리가 죄인들과 도무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전도 구역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 전도와 구원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나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형제라는 호칭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선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형제라고 부를 수 있다. 권징과 교제 단절에 대한 교훈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어떤 형제가 음행이나 탐람(貪婪)이나 우상숭배나 후욕(詬辱)이나 술취함이나 토색(討索) 등의 죄를 범한다면 그런 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탐람은 탐욕, 후욕은 남을 욕하는 것,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Thayer, BDAG) . 이런 일들은 명백히 죄이며 교회 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악한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들과 사귀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바른 믿음을 저버린 이단자들이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불순종자들은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2-13절] 외인들을 판단하는 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권징의 문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밝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악한 자에 대해서는 교회가 판단하고 권징해야 한다. 만일 어떤 교인이 자신이 행한 악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를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또 죄의 심각성과 전염성을 안다면, 교회는 이 교훈대로 충실하게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목사가 바른 교훈을 하고 교인들이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실천을 힘쓰고 권징이 충실히 시행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할 것이다. 참 교회는 권징을 충실히 시행하는 교회이다. 권징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리고 있는 교회이며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교회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누룩 없는 덩어리이어야 한다. 교회는 음행, 탐욕, 우상숭배, 욕설, 술취함, 강탈 등의 드러난 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어야 한다. 둘째로, 적은 누룩은 온 덩이에 퍼진다. 죄는 전염성을 가진다. 포용된 죄는 성도들의 삶을 부패시킬 것이다. 교회 안에 한 가지 죄가 포용되면 다른 죄들도 포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전염성을 알고 드러난 죄는 한 가지라도 용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드러난 범죄자와 교제하지 말고 그를 내어쫓아야 한다. 권징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권징의 대상은 교리적인 이단들뿐 아니라, 도덕적 범죄자들이다. 한두 번은 권면하고 경계하지만, 계속 회개치 않으면 그와의 개인적,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한다. 6장: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교회에는 성도간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성도가 어떤 일로 다른 성도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의인이 불의한 자 앞에 판결을 구하는 옳지 않은 일이다. 성도들 간의 갈등의 문제는 성도들 앞에서 즉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성도는 세상 법정보다 교회 법정을 더 크게 여겨야 한다. [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성도는 마지막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며 악한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상호간의 일들을 판단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 상호간의 일을 판단해야 한다.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4-5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가 성도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처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기 적절하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주실 것이다. [6-8절]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다. 죄씻음 받은 자들이 죄인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더 낫다. [9-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은 ‘속지 말라’는 뜻이다. 죄 가운데 머물러 죄의 낙을 누리면서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생각이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악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음란이다. 음란은 결혼 관계 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오늘 시대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다. 성도는 이 시대의 음란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시험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 조상의 혼령을 섬기는 제사와 차례, 점치는 것, 마리아의 무죄함, 승천, 중보자 됨을 믿고 그에게 기도함, 돈 사랑 등은 다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셋째는 간음이다.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 간음이며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악이다.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넷째는 탐색(貪色)이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이 mala- koi; )는 ‘여자 같은 남자들, 동성애자들’을 뜻하며, ‘미동(美童) 혹은 남창’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다섯째는 남색(男色)이다. ‘남색하는 자’라는 원어( 아르세노코이타이 ajrsenokoi’tai )는 남자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성경은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악으로 간주한다. 여섯째는 도적질이다. 속여 취한 재물은 사람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성도는 돈 셈이 정확해야 한다. 일곱째는 탐람[탐욕]이다. 그것은 더 가지려는 욕심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다(눅 12:15).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히 13:5). 여덟째는 술 취하는 것이다. 술 취함은 마약과 같이 바른 정신을 잃게 하고 많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이다. 아홉째는 후욕이다. 후욕은 남을 비열하게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다. 진실을 증거해야 할 경우, 부득이 정당한 비난을 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성도는 보통 다른 이에 대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열째는 토색이다.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악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런 자들은 교회 속에 있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충실한 권징으로 이런 자들을 배제하고 거룩한 회(會)가 되어야 한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본절 후반부는 원문에 “그러나 씻음을 받았고, 그러나 거룩하여졌고,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되었다. 성도는 다 과거에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씻음을 받았고 지금 거룩하여졌고 지금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불의한 행위 가운데,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구원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지배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으나 자기에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죄악되어 그에게 해를 준다. 죄악되지 않은 일들 중에도 절제하지 않으면 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과식하면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고 해가 된다. 취미 생활이나 오락도 너무 빠지면 신앙생활에 해가 된다. 성도가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돈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또 육신의 쾌락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13-14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음식은 먹기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먹을 것이 없다면, 배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만 서로를 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위장병을 주시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세상에 기근을 주셔도 위가 할 일이 없게 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에 죄성이 있어서 언제나 음란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의 사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몸은 첫째로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성을 아셨고 우리를 동정하셨고(히 4:15), 친히 우리를 위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과 같이 부활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같이 그 동일한 능력으로 모든 죽은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에 성도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 [15-16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더 놀라운 사실은,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자기 몸을 창녀와 결합하여 더럽혀서는 안 된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한다’는 말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주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고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 안에’ 혹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씀의 뜻과 같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의 인격적 구별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하나님의 실체적 연합은 불가능하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나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와 한 영이 된다는 말씀은 단지 영적, 정신적 의미일 뿐이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지체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음행에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음행을 피해야 한다. 음행은 다른 죄들과 달리 자기 몸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을 음행으로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전통본문) 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몸이다(고전 3:16; 행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을 항상 거룩하게 보존해야 하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살아야 한다. 성도의 첫 번째 생활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다. 이사야 43:7은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한다. 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하며(사 43:21),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대로 사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요일 3:23).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린도전서 6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성도간의 소송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성도는 마지막 날 세상을 판단할 것이며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사람인 법관 앞에 판단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그런 일을 판단할 만한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를 가진 자들을 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 도적질, 탐심, 술취함, 욕설, 강탈 등의 죄를 범한 자를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하실 것이며 그가 사탄과 악령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형벌은 매우 무서울 것이다. 지옥은 참으로 두려운 곳일 것이다. 우리는 다 과거에 지옥 가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죄씻음을 받았고 거룩함을 얻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든 죄악을 멀리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고 우리의 몸을 그의 지체가 되게 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 몸 속에 오셔서 우리의 몸을 그의 성전으로 삼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하고 거룩한 성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음행과 같은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고 선하게 드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즉 성경의 교훈대로 거룩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과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사용해야 한다. 7장: 독신, 결혼, 절제 [1-2절]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가까이 하다’는 원어( 합토마이 )는 ‘만지다 (KJV, NASB) , 결혼하다 (NIV) ’는 뜻을 가진다. 결혼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제도이지만(창 2:18; 잠 18:22),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은 임박한 환난 때문이었다(26절). 환난 때에는 가족 관계가 즐거움이 아니라 근심과 짐이 될 수 있다. 또 성도는 결혼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32-33절). 오늘날도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성도는 독신으로 살며 그렇게 할 수 있다. 독신의 장점이 있지만, 결혼의 필요성도 있다. 결혼 제도는 아내가 남편을 돕게 하기 위해 또 자녀 출산을 위해 주셨지만, 음행의 방지를 위해서도 주셨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정상적 결혼 생활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이 된다. [3-4절]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결혼한 사람은 자기 의무를 다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한 표정과 따뜻한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하고 경제적 책임을 다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 양육, 식사 준비 등의 집안일을 함으로써(딛 2:4-5) 남편이 바깥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그들은 부부로서의 의무도 행해야 한다. 부부는 한 몸이므로, 자기 몸을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감정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원하는 바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 부부 관계에 불만이 생기고 사랑이 식어지고 갈등이 커질 수 있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금식하고](전통본문) 8)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분방하지 말라’는 원어는 ‘서로[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로서 상대방이 원할 때 거절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금식하고 기도할 시간을 위해서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부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분방하는 것도 서로 합의해서 단지 ‘얼마 동안’ 해야 한다. 부부가 분방치 말아야 할 이유는 절제 못함을 인해 사탄으로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마귀는 사람의 약점을 엿본다. 육신적인 감정과 욕망은 사람의 공통적 약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신앙생활과 부부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부부관계도 좋아야 한다.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각방을 쓰지 말고 속히 화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6-7절]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허용]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고 허용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했다(8절). 이 말씀들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 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마 10:10-12). [8-9절]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나 과부들에게 “나와 같이 그냥[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즉시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말한다. 절제할 수 없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 사람이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신의 정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다(딤전 5:14). [10-11절]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결혼한 자는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이혼이 아닌 경우 여자가 부득이 남편을 떠나 별거하게 되면, 재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든지 그 남편과 다시 합해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을 한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남편도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음행 외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없다. [12-13절]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은 예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이런 경우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도를 통하여 이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증거된다. 부부 중에 한 쪽만 믿는 경우, 믿지 않는 쪽이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믿는 이는 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결혼한 남녀 중 한 쪽이 먼저 믿게 되었을 경우를 말한다. 물론, 성도는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고전 7:39; 신 7:1-4).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되었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부부 중에 한 쪽만 믿어도 그의 가정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구별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 가정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쪽의 구원의 가능성이 열렸다. 또 믿는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 중 한 쪽만 믿어도 거룩하다. 이것은 언약적 의미라고 본다. [15-17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영생의 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며 부부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화평을 지키는 것이 좋다. 별거는 부득이한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18-19절]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성도에게 할례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세례 의식도 그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 종교는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에 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20-24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성도는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사신 바 되어 그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25-26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판단]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사도의 판단은 신적 권위를 가진다(살후 2:15). 그는 충성된 마음으로 권하기를, 임박한 환난 때문에 처녀가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했다. 환난 중에는 의식주 문제로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7-28절]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한 자는 결혼의 의무를 짐스럽게 생각하여 거기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아내와 사별(死別)했거나 정당하게 이혼했을 경우 아내를 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은 죄 짓는 일이 아니며 단지 육신에 고통이 따를 뿐이다. [29-31절]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성도는 세상에서 맡겨진 자기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이 헛된 줄 알고 세상 위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5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결혼한 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것은 결혼한 자로서 정상적인 행위이며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자는 결혼한 자보다 더 주의 일을 위해 살 수 있다. 독신은 유익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를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이었다. 성도는 주의 일을 위해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 [36-38절]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부모가 처녀 딸을 결혼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죄짓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시키지 않고 그로 하여금 주의 일에 전적으로 힘쓸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잘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스스로 원해야 한다. [39절]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법으로] 9)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재혼할 수 있다. ‘주 안에서만 하라’는 말씀은 성도의 결혼의 기본 원리를 증거한다. 성도는 반드시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신 7:1-4; 느 13:23-27; 고후 6:14-16). [40절] 그러나 내 뜻[의견, 판단]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사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은 교훈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독신(獨身)은 유익하다. 독신은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전심전력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제의 은혜가 필요하다. 둘째로, 결혼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음행 방지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최선의 방책이다. 절제의 은사가 부족한 우리는 결혼 관계를 잘 사용함으로써 마귀가 주는 음행의 시험을 막을 수 있다. 셋째로, 결혼한 자는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부부는 각자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특히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하지 말고 상대방을 항상 배려해야 한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 외에는 서로 분방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결혼의 기본 원칙 하나는 “주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는 마음의 큰 고통이 따르고 육신의 고통도 따를 것이다. 이것은 별거나 이혼이나 재혼에도 적용된다. 8장: 우상 제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8장부터 10장까지에서 우상 제물에 대해 교훈한다. [1-3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우상 제물에 대하여는 초대교회 안에 이미 충분한 지식이 있었던 것 같다. 신앙생활에 지식은 꼭 필요하지만, 지식만으로 충분치 않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덕을 세울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함께 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아시는 자로 그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다. [4-6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마치]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있는 것 같으나](원문, KJV, NASB, NIV)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신적 존재나 초인간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이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세상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115:4-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옛날부터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아닌 많은 거짓 신들을 상상해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였고 또 땅의 나무들이나 돌이나 짐승들을 신격화하였다. 종교들의 역사와 현상만 본다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시다. 천지만물은 그가 만드셨다. 이 세상의 물질 세계나 영들의 세계는 다 그 창조자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도 그가 만드셨다.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참 신이 없다. 예레미야 10:10-11,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았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주’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고대의 헬라어 번역에서 ‘주’라고 번역되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요 1:1), 우리의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기 때문에 주라고 불리신다. [7-8절]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우상의 생각을 가지고](전통본문) 10)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지느니라. 그러나]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우상숭배는 우상을 초인간적, 신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참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사상이며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사상이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을 때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더럽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상 음식과 신앙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음식을 먹어서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지는 것은 없다. 음식은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다. 우상의 제물도 그러하다. [9-11절]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자유함’이라는 원어( 엑수시아 )는 ‘자유, 권리’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유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약한 자들로 범죄하게 하는 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아직도 우상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우상제물이 복을 가져올 것처럼 생각하는 연약한 성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지식 있는 자가 우상의 집에서 먹는 것을 보고 양심이 잘못된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생각하며 먹음으로 범죄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지식 있는 자의 행위는 그 연약한 자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식을 가진 자의 행위가 약한 형제로 범죄케 하여 그를 멸망케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선한 행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멸망케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도 그를 위하는 자가 되어야지 그를 멸망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2-13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는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므로 그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잘못을 행하는 것이다. 주께서 고난 당하시고 피흘려 사신 형제를 나도 사랑하고 그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힘쓰겠다는 마음은 바르고 선한 결심이다.
고린도전서 8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편 115:4-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이방신들은 다 허무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참 신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만 참 신이시다. 둘째로, 비록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이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우상 제물로 알고 먹으면 먹는 사람의 양심이 더러워진다.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을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우상 제물이 자기에게 복이 된다고 생각하며 먹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 제물을 먹는 자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하는 것은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된다. 이것은 술과 담배의 문제에도 적용되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교단에 머무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연약한 성도가 술과 담배에 인이 박히지 않도록 금주와 금연을 실천해야 하며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를 믿는 목사들은 자유주의 교단들을 비평하고 교제를 끊음으로써 성도들에게 바른 것을 증거해야 한다. 9장: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 [1-5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대답]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주께서 그를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자로 사용하신 한 구체적 증거가 바로 고린도교회이었다. 그는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한다. 그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먹고 마시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했고,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는 결혼하고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독신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좀더 복음 사역에 자유롭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신자에게 죄 아닌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지 포기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 [6-10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自費糧)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아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자가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에 자비(自費)로 군인이 되는 자가 없고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않고 양떼를 기르고 그 젖을 마시지 않는 자가 없다. 일꾼이 먹을것 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았고 친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필요한 돈을 벌었다(행 18:1-3). 그는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소에게 일을 시킬 때 먹이면서 시키듯이, 교회가 일꾼들에게 먹을것을 주는 것은 합당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전임사역자들에게 거처할 곳과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본다. [11-12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신령한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고,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신령한 것은 영원하지만, 육신의 것은 세상에서만 유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물질에 비교될 수 없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은 아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보화이다. 인생의 참 기쁨, 참 행복, 참 평안, 참 생명이 그 안에 있다. 이 복음은 물질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비교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현세적인 것을 양보하고 그것을 사용할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한 것이다. [13-15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 .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부분은 먹도록 되어 있었다(레 2:3; 7:14, 31, 3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9-10). 주의 일꾼들이 그 사역하는 곳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리들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으로 살았다. 그것은 복음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자원해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 오이코노미아 )[임무]을 맡았노라. 복음은 영혼 구원의 소식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이제 죄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소식이며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부득불 할 일, 즉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주께서 그에게 맡기시고 명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해야만 할 의무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모든 성도가 다 전임전도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신자 중 누가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전임전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상을 얻을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과 임무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 전도의 직분과 의무에 충실해야 했다. 오늘도 주께로부터 교회의 직분들을 받은 자들은 그 직무들에 충실해야 한다.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우리는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9-21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전통본문에는 없음) 11)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주의 교훈대로(마 20:26-27; 23:11-12)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처신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마치 자신도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자인 것처럼 처신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행 16:3). 그러나 그는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처신했다. 그 까닭은 그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22-23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했다. 그는 실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진리와 의 안에서의 처신이어야 하며 비진리와 악을 포용하는 처신이어서는 안 된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악을 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와 의 안에서, 즉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웠고 그가 처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행동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다. 이로써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복음의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영혼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포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과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려야 할 것이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달리기 경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발 지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고 달리기 시작하지만, 1등의 상은 한 명에게만 돌아간다. 그 상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치 달리기 경주와 같다. 우리는 상을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자들처럼 상급을 기대하며 힘써 달려야 한다. 성도는 경주자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이나 금메달을 목에 거는 운동 선수들은 시간을 아끼고 육신적 즐거움을 절제하였을 것이다. 영적 생활도 비슷하다. 영적 생활은 더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경쟁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는 경쟁이나, 영적 경쟁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는 경쟁이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 곧 영생이며(롬 6:22)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와 영광이다(롬 2:7).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는 것이지만, 영생은 영원히 썩지 않을 존귀하고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시간 절제, 돈 절제, 힘 절제, 의식주 절제 등 절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지 않고 바르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교회 봉사자는 단지 열심히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목표와 방법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격투하는 자가 상대를 치지 않고 열심히 허공만 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영혼 구원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목표로 삼고 전심전력하였다. 성도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라고 본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이다(롬 8:13).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영혼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고 범사에 절제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 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고린도전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잘 달음질한 사람은 상을 얻을 것이다. 달리기 경주자가 잘 달릴 때 상을 얻는 것과 같이, 신앙의 경주도 잘 할 때 상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영생의 상이라고 표현된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나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둘째로, 이기는 자가 상을 얻을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기는 것은 계명에 순종하여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요, 지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이기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셨다(계 2-3장).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중생시키신 자들은 다 이길 것이다(요일 5:3-4). 셋째로,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이기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교훈하셨다(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절제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구원받은 성도는 범사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0장: 우상숭배치 말 것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모든 인류와 신약 성도들에게 교훈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통과했던 때의 일을 말한다. 그들은 그때 다 구름 즉 구름기둥 아래 있었고 또 바다 즉 홍해 가운데로 지났다(출 13:21-22; 14:19-24). 그들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구름 아래서와 죽음의 바다에서 죄씻음의 세례를 받은 것과 같았다. 또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고(출 16:13-15; 시 78:25; 105:40) 또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출 17:5-6).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우리에게 참 양식, 곧 생명의 양식이요 참 음료,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8, 51, 55; 7:37-39). [5-6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의 남자들 약 60만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실패의 역사는 우리의 거울과 본보기가 된다. ‘거울’이라는 원어( 튀포이 tuvpoi )는 ‘예들, 본보기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보기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처럼 악을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8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며 하나님 대신 하나님 아닌 것, 곧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와 참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우리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섬기지 말아야 한다. 돈도 육신적 쾌락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오직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의 모든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간 관계의 죄들 중 첫째로 중요한 죄는 간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부 관계를 벗어난 음란 행위들을 매우 미워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큰 재앙으로 죽었다. 민수기 25:9의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는 말씀은 나무에 처형한 백성의 두령들의 수를 포함한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과 부부 관계의 순결을 중시하신다. 우리 각 사람은 가정과 부부 관계의 순결과 사랑을 잘 지켜야 한다. [9-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그리스도](전통본문) 12) 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의심했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며 원망했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하시며 도우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자는 병에 걸렸을 때나 물질적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현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지 못하였다.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교훈](NASB)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말은 신약시대가 말세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지구의 역사가 대략 6천년임을 증거한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책이다. 아담은 창조된 후 거의 천년 가량 살았고 그가 죽은 지 얼마 후 노아가 태어났다. 아담의 창조 후 2천년경에 아브라함이, 3천년경에 다윗이, 4천년경에 예수께서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자기 아들을 보내주셨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나고 있으니 확실히 지금은 말세지말(末世之末) 즉 말세의 마지막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빠져 실패자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12-13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섰다’는 말은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한다는 뜻이고 ‘넘어진다’는 말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 즉 범죄하는 삶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믿음에 섰고 순종하며 산다고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늘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앙에 떨어지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우리는 우상숭배를 피해야 한다. 우상숭배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오늘날 돈이나 자기 자신이나 육신의 쾌락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하였다(골 3:5). [15-18절]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며 그 떡을 떼어 모든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신비한 한 몸이 됨을 나타낸다. [19-20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그러나]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미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전 8:4). ‘대저’라는 원어( 알르 )는 ‘그러나’라는 뜻이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방인의 제사는 종교적 성격을 띤다. 구정이나 추석 때에 조상들을 위해 드리는 제사나 차례는 단순히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우상이나 조상신은 신이 아니고 어떤 신적 존재도 아니며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악하고 헛된 일이다. 이방인들의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의 신이나 그들의 우상을 인정하고 그 우상숭배에 빠져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1-22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성도는 이방인들의 제사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신자가 섬기는 신이나 조상신이나 우상을 인정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노여워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23-24절] 모든 것이 [내게] 13)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14)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신약성도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과 자유함이 있음을 말했다(1, 7, 9, 10, 11절). 그러나 비록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상제물에 대한 바울의 교훈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상제물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성도가 우상제물을 먹어도 되니 먹으라는 교훈이 아니고 먹을 수 있으나 먹지 말라는 교훈인 것이다. 성도가 우상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상제물 자체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아는 자라면, 우리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25-26절]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사도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치 말고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 세상에 우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상은 신이나 신적 존재가 아니다. 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 때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27-30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전통사본). 1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불신자가 식사 초청을 할 때 성도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때 그 앞에 차려진 식탁에 우상제물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함께 동참한 자들의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그냥 먹으면 된다. 그러나 어떤 이가 식탁의 음식물 중 어떤 것을 우상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는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함께 식사하는 이들 가운데 연약한 자의 양심에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먹는 일이 비방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31-33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역사는 거울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간음과 원망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벌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주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둘째로, 우리는 특히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이방인들의 제사는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그런 제사에 참여하여 귀신들과 교제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덕의 중요성이 있다. 덕이란 것은 남의 유익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숙할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남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11장: 머리 수건과 성찬 [1-2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이 된다. 위선은 구원 운동에 큰 장애물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기 생각을 따라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을 것이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사도 바울은 남녀의 지위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구원받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 남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남녀의 지위의 차이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남자가 자기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것은 남녀가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인 특권에 있어서 차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다(갈 3:28). 남녀는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인 특권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러나 남녀는 그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 다르며 여자를 주관할 자가 남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하여 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인간 예수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28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 [4-6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기도하는 것은 주로 대표기도에 적용되며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든지 아니면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 즉 오늘날 설교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교회의 집회 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공적인 집회 시 여자들이 기도나 예언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으나 바울은 본 서신의 뒷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4:34). 물론 여자들이 여성도들만의 모임이나 미성년자들의 모임에서는 기도나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때에도 여자가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친다.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가 그의 머리인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표시한다. [7절] [이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영광임이니라].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것을 가리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며,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신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 둘이 다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가지지만, 여자는 또한 남자의 영광이기도 한 것이다. [8-10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 엑수시아 ejxousiva)[권세]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남자와 여자가 그 지위와 역할에서 구별된다는 것은 사람 창조의 사건에서 잘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또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여자의 머리 수건 혹은 모자는 그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은 교회의 공적인 집회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도들과 함께 있음을 가리킨 듯하다. [11-12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녀는 이처럼 지위적, 역할적 차이가 있지만,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며 실상 상호의존적이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13-16절]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긴 머리도 합당치 않다. 그러나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되며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인정된 규례이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17-19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당파들]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교회의 모임은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들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과 인격이 부족하므로 생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통해 바른 견해가 드러날 것이다. [20-22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에는 거룩한 성찬 모임이 변질되고 있었다. 이것은 그 교회의 큰 흠이었다. 또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이었다. 그것은 고쳐져야 했다. [23-25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파레디데토 paredivdeto)[혹은 ‘배반당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전통본문). 16)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위하여 찢는] 17)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성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성찬의 떡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그것은 양손과 양발이 못에 찢어지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상한 몸이었다. 성찬의 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주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죄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찬은 새 언약의 표와 확증이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속죄의 진리를 나타낸다. 속죄란 속죄제물이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속죄도, 죄씻음도,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성찬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27-2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 크리마 )[정죄, 심판]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의 떡과 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물론 떡이나 포도즙 안에 그의 몸과 피가 있다거나 그것들이 그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살핀 후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30-32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심신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성도가 징계를 받는 것도 유익하다. 그것 때문에, 그가 회개함으로 세상과 함께 영원한 멸망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33-34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찬식이 당파적 식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하나님의 교회의 모임이 정죄받는 모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1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든지 긴 머리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남녀는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는 구별된다. 여자의 긴 머리는 머리 수건이나 모자를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기도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 해당된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시시때때로 성찬 의식을 행해야 한다 . 그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하신 바이며 우리가 주의 재림 때까지 행해야 할 의식이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씻음을 증거하는 의식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이 많지만(건강, 직장, 사업, 소득, 가정),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양식과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또 항상 성경말씀과 믿음과 지식과 성화(聖化)의 진전과 영혼의 안식처와 같은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찬 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 참여함으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며 먹고 마셔야 하고, 이런 믿음 없이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12장: 성령의 은사 [1-3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허무한 것들에게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된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이라고 바르게 믿고 고백하며 구원을 받은 자이다. [4-7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 카리스마 )는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가리키며, ‘직임’( 디아코니아 )은 봉사의 직분을 가리키고, ‘역사(役事)’ ( 엔에르게마 )는 일하심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들과 직분들과 역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은 개인의 유익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유익을 말한다. [8-11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본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언급한다. ‘지혜의 말씀’은 현실에 바르게 대처하게 하는 말씀을 가리키며,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믿음’의 은사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언함’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거나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며, ‘영들 분별함’은 사람의 생각을 분별하는 것을 가리키며, ‘각종 방언 말함’은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이고, ‘방언들 통역함’은 그 말을 통역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고 본다. ‘방언’이라는 원어( 글로싸 )는 ‘언어’라는 뜻이다(행 2:11; 계 5:9; 7:9; 10:11; 11:9; 13:7; 14:6; 17:15). 오순절에 약 15개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역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고(행 2:6)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했다(행 2:11). 또 성경에 ‘방언들’(복수명사)(행 10:46; 19:6), ‘새 방언들’(막 16:17), ‘다른 방언들’(행 2:4)이라는 표현들과,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다든지, 그것을 기도와 찬송에 사용한다든지, 그것을 통역한다는 것 등도 방언이 언어임을 보인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거두어졌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거두신 것은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그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설치된 비계들이 건물이 완성된 후 철거되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초자연적 은사들 외에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들도 나누어주심으로 교회에게 유익을 주셨다. 로마서 12:6-8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관리하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을 언급하였다. 우리는 거기에 찬양의 은사도 포함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돌아보신다.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성령께서는 개인을 중생(重生)시키시고 점점 더 거룩하게 하시고 마침내 교회 전체가 온전케 되게 하신다. [12-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하셨음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이다. 사람의 몸은 머리, 눈, 코, 귀, 입, 손, 발 등 많은 지체들과, 뇌, 위, 간, 폐, 심장 등 약 128개의 기관들과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로 구성되었고, 뇌(腦)는 약 80억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많은 지체들과 직분들이 있어 한 교회를 이룬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 된 것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성령세례는 민족, 피부 색깔, 사회적 신분, 직업, 경제 정도 등을 초월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죄씻음받아 한 몸이 되는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믿는 이들이 두 번째의 경험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받은 것이며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물을 마시듯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요 7:37-39). [14-20절]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몸은 한 지체뿐이 아니고 여러 지체이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와 다르다고 해서 자기가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과 손, 귀와 눈은 서로 달라도 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다. 또 몸의 각 지체는 다 필요한 지체이다. 몸에는 눈도 귀도 코도 다 필요하다. 한 지체만으론 몸이 될 수 없다. 한 지체만 가득한 몸은 없다.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21-27절]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는 어느 것 하나도 쓸데없는 것이 없다. 눈이 손더러 ‘너는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손이 없다면, 눈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집어올 수 없다. 또 머리가 발더러 쓸데없다고 말할 수 없다. 발이 없다면, 눈이 좋은 것을 보아도 그것을 가지러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쓸데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몸의 지체들 중에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것이 많다. 눈은 약한 지체이지만 매우 중요하며, 두뇌나 심장이나 폐 등도 약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또 몸의 지체들 중 덜 귀히 여기는 것이나 덜 아름다운 것은 옷을 입히거나 신을 신기지만, 아름다운 얼굴은 가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를 고르게 하여 부족한 것에게 존귀를 더하신다. 따라서 각 지체는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 몸의 지체 중 한 부분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 몸의 모든 지체는 그 아픔을 함께 나눈다. 모든 지체가 한 몸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는 함께 그 영광을 누리며 즐거워한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 성악가는 입과 목만 칭찬을 받지 않고 온 몸이 칭찬을 받고, 금메달을 딴 마라톤 선수는 발과 다리만 축하를 받지 않고 온 몸이 축하를 받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과 다르다고 자기는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각 지체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 지체만 가지고 몸이 될 수는 없다. 또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 지체의 고통이 모든 지체의 고통이며 한 지체의 영광이 모든 지체의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 [28-31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타 크레잇토나 )[더 유익한](전통본문)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들과 직분들을 주셨다. 몸에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또 사도 바울은 끝으로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더 유익한 은사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말하는 것 같다. 또 ‘제일 좋은 길’이란 다음 장에 말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의 원리를 따라 하라는 교훈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령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바로 깨닫고 고백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도, 자신이 멸망 받을 죄인임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둘째로, 은사들은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주신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다. 교회의 직분들도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주신 주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각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역사는 여러 가지이나 그것들을 행하시는 자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교회에 주신 여러 은사들과 직분들은 한 몸의 여러 지체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과 직분들이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는 각 지체의 기능과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한 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우리가 같이 고통을 당하게 되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우리도 같이 영광을 나누고 기뻐함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더 유익한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유익한 선물인 성경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교훈을 받고 그 내용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13장: 사랑의 중요성, 성격, 영원함 [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관해 말하는 중에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는 먼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을 뜻한다. 그것은 창조자와 섭리자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서 나온 사랑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순종하는 사랑을 가리킨다. 사도 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방언, 즉 외국어를 말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비록 성도가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방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성도가 예언하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예언과 지혜와 지식의 은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성도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지만,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다. 사랑은 믿음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사도는 비록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구제하는 놀라운 선을 행하고 또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진심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나 영웅심으로나 어떤 정치적 이념, 사회적 이념, 종교적 이념 때문에 행한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런 구제와 선행, 그런 헌신은 하나님 앞에 의(義)나 구원적 공로가 되지 못하고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KJV, NIV)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즉 사랑의 성격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오래 참는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라면 영속적 감정이다. 사랑은 머리로 잠시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그를 아내로 얻기 위하여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했으나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창세기 29:20은 말한다. 사랑은 또한 온유하다. ‘온유하다’는 원어( 크레스튜오마이 crhsteu’omai )는 ‘친절하다’는 뜻이다 (KJV, NASB, NIV) . 사랑은 거칠거나 사납지 않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에게 거칠게 대하지 않고 구타하지 않고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 있어서 친절할 것이다. 사랑은 또 투기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잘되는 것을 샘내거나 질투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축하할 것이다. 또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자랑은 그런 자랑거리가 없는 상대방을 낙심케 하거나 슬프게 한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배치된다. 사랑은 또한 교만하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사랑은 또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하다’는 원어( 아스케모네오 ajschmonevw )는 ‘보기 흉하게 행하다’는 뜻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절을 지킨다. 사랑을 가진 자는 그 인격이 아름답다. 사랑은 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유익을 위한다. 사랑은 또한 쉽게 성내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기뻐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화를 내는 경향이 있지만, 참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물론 사람이 진리와 의를 위해 정당하게 성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도 조심해야 한다. 사랑은 또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남을 위한 선한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결코 불의를 행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결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그냥 죄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에게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시키심으로써 공의롭고 정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우리가 참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진실한 성도간의 관계는, 비록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8-10절]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쇠잔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도 바울은 또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은 완전한, 이상적 인격의 특성이다. 사랑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 원리이며 영광스런 부활체들의 속성이며 행동 규칙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조하여,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일시적 성격을 말한다. 여기에서 또 한번 사랑의 가치가 드러난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간의 가치적 차이는 무한히 크다. 그러면 사랑의 중요성과 가치가 충분히 증명되며, 우리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사모해야 할 덕이 무엇인지 확실해진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일시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부분적인 것에 관계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지식의 은사는 부분적인 지식에 관계되고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인 일들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에 관계하던 은사들은 폐지될 것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시기는 온전한 것이 올 때이며, 폐지될 이유는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에 관계된 것들이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충족한 지식, 충족한 예언이 오게 되면 부분적인 지식, 부분적인 예언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전한 것’은 무엇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물론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성되는 때이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의 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성경 27권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것’이다. 사도시대에 신약성경 27권이 다 기록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와 뜻에 관한 충족한 지식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지식의 은사, 부분적인 예언의 은사 등 사도시대 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후 시대에 불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중지되고 폐지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11-12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초보적 성격을 말한다. 그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마치 사람의 어린 시절과 같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리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때는 교회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이며 그 이유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린아이에게는 젖병과 장난감이 필수품이지만 크고 나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교회의 창설시기의 것들이며 후시대에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진리의 지식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불명료하였다. 그것은 마치 놋쇠로 만든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온전하게, 충족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 27권의 완성된 계시가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온전하고 명확하고 충족한 말씀일 것을 암시하였다고 본다. 오늘날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완성된 특별계시이며 그의 명료하고 충족한 말씀이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본절은 13장의 결론이다. 믿음은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약속의 말씀들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고(20:30-31), 그의 동료들은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말했다(21:24).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받을 때 “[나는]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증거하였다(행 24:14).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 특히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영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필수적 덕목들이다. 성도에게는 믿음도 꼭 필요하고 소망도 꼭 필요하고 사랑도 꼭 필요하다. 믿음은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며, 소망은 고난과 수고가 많은 세상을 사는 동안 성도에게 계속적인 힘과 위로의 원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열매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성도들의 필수적 덕목들이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 까닭은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천국 소망의 결과요 열매요 증거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랑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은사 추구, 기적 추구의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을 바로 믿고 그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는 도이다. 둘째로,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이기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른 지식과 믿음과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보다 더 중요하다. 셋째로,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쳤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에게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은 참 믿음과 소망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다. 14장: 방언과 예언 [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사랑을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본문은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또 사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했다.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은 본장 전체에서 그의 교훈의 요지이다. ‘예언한다’는 원어( 프로페튜오 )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한다. 사도시대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가르친 줄 안다. 만일 그가 오늘날 교훈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믿고 행하고 성경으로 권면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눅 16:29-31; 계 22:18-19). [2절] [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킨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4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덕을 세운다’는 말은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교우들에게 권면이나 위로를 주는 것을 말한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방언들]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는](전통사본)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못함이니라]. 사도는 방언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므로 그들이 방언보다 예언하기를 원하였다. [6-9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성도는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10-12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하고 중요하다. [13-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 누스 )[생각, 이해력]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생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에 직접 역사하셨던 현상이라고 보인다.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찬미]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자는 통역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 [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생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 프렌 )[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생각]에 장성한[온전한] 사람이 되라.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은 모를수록 좋고 경험해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도 그러한즉.”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이지만, 생각이 온전하면 온전한 인격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온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불렀다.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모든 책들은 권위에 차등이 없다. 그는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예언을 구해야 하며 오늘날 성경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23-25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의 죄를 깨우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며 그를 믿어 구원받게 한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은 사도시대에만 있었고 그 후 시대에는 없어진 순서들로서 교훈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에는 성경 강해가 그것을 대신한다.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성경 강해로 영적 유익을 얻기를 원하신다.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많아도]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사도 시대의 집회에서도 방언을 하는 것은 세 사람을 넘지 말아야 했고 또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되었다.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사도 시대의 공예배 시 예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해야 했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면과 위로를 받아야 했다. [32-33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과 예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무질서와 혼란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주의 질서를 찾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된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전통사본) 18) 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사도는 아내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한다. 그는 몇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로, 이것은 모든 교회에서 지켜지는 규례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율법에 이른 것같이’라고 말한다. [35-38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셋째로, 이것은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사도들의 모든 교훈은 주의 권위로 주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 주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죄가 된다. [39-40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배 순서는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 교회의 공적 예배의 순서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33절).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교훈하였다(40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가 아니고 경건하고 차분하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 찬송과 기도, 특히 설교가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아내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사도는 그것이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이며, 성경에 계시된 바이며, 또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했다. 이 교훈은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더불어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보인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는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며 참 교회를 세운다면서 사도적 교훈을 무시하고 어겨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에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은 모를수록 좋으나 생각은 바르고 깊고 원만하고 온전할수록 좋다.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골 1:28). 그것이 온전한 성화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경을 힘써 읽고 배우고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회를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사도는 방언보다 예언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예언이 교회의 유익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보다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가 더 낫다고 말했다. 방언과 예언은 사도 시대 이후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그쳤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신약성경으로 완성되었고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이들처럼 예언과 방언의 계속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제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므로, 우리는 성경 읽기와 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믿고 행하며 남에게 권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5장: 죽은 자들의 부활 1-28절,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들의 부활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받았고 그 가운데 섰다. 기독교 복음은 불변적 내용으로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 주어졌다. 교회는 이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헛되이 받지 않고 굳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3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그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표된 바라는 뜻이다. ‘위하여’라는 원어( 휘페르 uJpe;r )는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속죄(贖罪)사역이며 속죄의 진리이다. 기독교 복음은 속죄의 복음이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죄 문제의 해결, 즉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4절]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또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라는 말씀은 그의 부활이 그가 묻히셨던 무덤을 비우시고 다시 사신 사건임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은 복음의 주요 내용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모든 것을 확증한다. 즉 그의 부활은 그의 무죄(無罪)하심과 그의 모든 말씀의 진실하심과 그가 친히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핵심인 그의 속죄사역을 확증하는 것이다. [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대부분]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한다. 복음서들과 달리, 여기서는 남자들만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증인들이었다. 첫째로 그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둘째로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셋째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 대부분은 그 당시까지 살아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증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수백 명이었고 주께서 부활하신 지 약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대부분 살아 있었다. 넷째로 그는 야고보에게, 다섯째로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이 정도면 그의 부활의 증인들의 명단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 정도의 증인들을 가진 사건이라면 믿을 만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와 형벌을 대속하신 자이시며 따라서 기독교는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진리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이런 증거들에 근거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 [9절] [이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자임이로라].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표현한 이유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다. [10-11절]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신자와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 그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간증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참된 모든 종들의 고백일 것이다. 바울과 모든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것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의 주요 내용이다. 속죄의 복음은 사도적 복음이며 속죄 신앙은 복음 신앙이다. [12-13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교회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성으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죽은 자들의 부활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며(사 26:19; 단 12:2; 마 22:23-33; 히 6:1-2) 그런 기본 진리를 부정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사실이며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증거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부활 진리를 증거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었다.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4-15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사도들의 전파하는 내용은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파하는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포함하였기 때문이다(행 1:22; 2:32; 3:15; 4:33; 5:30-32). 또,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헛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사활(死活)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다. 또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도들은 거짓 증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거짓말에 근거한 사기(詐欺)이며, 기독교 신자들은 거기에 미혹된 가련한 영혼들이 될 것이다. [16-19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바울은 앞에서 말한 요지를 반복하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그의 부활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죄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믿고 소망 가운데 죽었으나 그 소망이 헛되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를 위해 핍박과 순교를 당한 자들은 헛된 죽음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全) 역사를 뒤엎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은 돈, 부귀, 영화, 명예, 권세, 쾌락 등 이생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과 영생과 영원한 천국에 있다.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고난도 받고 순교도 감당한다. 만일 우리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하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 되었다! [21절] [이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말미암음이로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죗값을 받음으로 죽음을 극복해야 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22절]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얻을 것임이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엡 1:4)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다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때문이다. 그의 대속을 입은 모든 사람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39).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성취이다. [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 호이 투 크리스투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요. 부활에는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곧 그의 재림 때에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그의 재림 시 다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살전 5:16). [24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마지막이 오리니](KJV, NASB, NIV)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다. 그때 악인의 부활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악인의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셨다(요 5:29). 다니엘서에는 그것이 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을 부활로 묘사되었다(단 12:2). 요한계시록은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 보좌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증거했다(계 20:12).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또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 즉 마귀의 권세를 다 멸하실 것이다. [25-26절]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모든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세상의 악한 정권들을 가리킨다(엡 6:11-12; 단 10:20-21). 그는 모든 원수를 다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는 만왕의 왕으로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모든 원수를 복종시키실 것이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27-28절]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려] 하심이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그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마 26:3; 빌 2:8). 그때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세상과 인류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을 가지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죽음이었고 그의 부활하심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자이시며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셨음을 확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구원이 된다. 둘째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며 사람은 본래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왔다. 사람에게는 부활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이다. 의인도 악인도 다 부활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영생의
키워드에 대한 정보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다음은 Bing에서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하루 한 장] 고린도전서12장_신령한 것에 대하여
- 홍융희
- 홍융희목사
- 성민교회
- 부산성민교회
- 하루한장
- 분홍목사
- 다음세대
- 은혜로운 설교
- 은혜설교
- 들을만한설교
- 좋은 설교
- 성경적설교
- 추천설교
- 말씀을 깨닫는 기쁨
- 말씀을알아가기
- 고전 강해
- 성령의 은사
YouTube에서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한 장] 고린도전서12장_신령한 것에 대하여 | 고린도전서 12장 주석,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