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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 박인희
(지금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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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 (+) 세월이 가면 – 노래 가사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
Source: www.lyrics.co.kr
Date Published: 1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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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 박인환 시/박인희 노래 – 라라와복래
*이 가사는 박인환의 시와 조금 다르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원시와 노래 가사가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을 “사랑은 …
Source: spdjcj.tistory.com
Date Published: 10/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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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 세월이 가면 가사 – Jet Lyrics
LYRICS TO SONG “세월이 가면” PERFORMED BY 박인희. 박인희 세월이 가면 lyrics are property and copyright of it’s owners.
Source: lyrics.jetmute.com
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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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 / 세월이 가면 가사 악보 – 다음블로그
https://youtu.be/JWvaZRfaYNQ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 박인희 / 세월이 가면 가사 악보.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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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 – 세월이 가면 가사 노래 듣기 – K-POP Lyrics Song
박인희 –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에 밤을 잊지 못하지
Source: allklyrics.com
Date Published: 10/21/2022
View: 81
박인희 – 세월이 가면 – 옐로우의 세계
박인환은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에 멋도 부려 명동의 백작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 가사는 다음과 같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
Source: yellow.kr
Date Published: 1/8/2021
View: 9156
박인환의 가사 ‘세월이 가면’ – 네이버 블로그
마도로스파이프로 유명했던 조병화 시인도 2003년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훗날 맑고 애잔한 음색의 대중가수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을 리바이벌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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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박인희 세월이 가면 가사
- Author: Ki Young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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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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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박인희 노래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
박인희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 가사는 박인환의 시와 조금 다르지만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원시와 노래 가사가 눈에 띄게 다른 부분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바꾼 것과, 원시 맨 마지막 행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로 바꾸어 가사 마지막 행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시 후반부를 후렴처럼 반복했다.
이 노래는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뒤인 1956년 초봄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환갑’이 넘은 오래된 노래인 셈. 이야기 버전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사연은 이렇다.
명동에 ‘경상도집’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예술인들이 들락날락하는 술집이었다. 어느 날 시인 박인환을 비롯해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이 모여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부르라고 졸랐다. 나애심이 부를 노래가 없다고 꽁무니를 뺐다.
이때 박인환이 종이에 뭔가 끄적이더니 합석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세월이 가면’이란 제목이 붙은 시였다. 이 시를 읽고 샹송에 일가견이 있고 작곡도 할 줄 아는 팔방미인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 나애심이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가락을 따라 불렀다. 뒤늦게 테너 임만섭이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노랫소리에 끌려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
이 노래를 나애심이 처음 불렀다고도 하고 테너 임만섭이 처음 불렀다는 얘기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라의 달밤’ 현인이 이 노래를 부른 최초의 가수이다. 그러나 당시엔 히트를 하지 못했다. 바이브레이션이 독특한 현인만의 창법이 애상조의 이 노래에는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혔던 이 노래를 1970년대에 통기타 가수인 박인희가 되살려 크게 히트를 쳤던 것이다. 노래는 어떤 가수가 어떤 창법으로 부르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박인희의 청음(淸音)이 시의 정서와 잘 어울렸다고 하겠다.
이 시를 쓰던 그날 박인환의 표정이 어두웠다는데, 낮에 망우리에 있는 그의 첫사랑 여인의 묘소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자신의 시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던 여인과 피난통에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다고 하면서 시를 썼다는 얘기도 있다.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쓴 일주일 뒤쯤 세상을 떠났다. 1956년 3월 20일 밤이었다. 세상 떠나기 사흘 전인 3월 17일에 시인 이상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그 당시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다. 끼니를 거르기까지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술을 내리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세상을 떠난 그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 밤 8시 30분쯤 집에 들어온 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다가 심장마비로 별안간 숨을 거두었다. 부인 이정숙이 의사를 부르러 나간 사이였다. 향년 31세.
1948년 이른 봄 박인환과 이정숙은 많은 문우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용모였다. 친구와 영화, 스카치위스키와 조니워커를 좋아했다. 장례식 날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왔다.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관 속에 그가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고 흙을 덮었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그해 추석에 가까운 선후배들이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 앞면에는 ‘세월이 가면’ 첫 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다. 박인환은 태어나서 11살까지 강원도 인제에서 살았다. 2012년 10월 인제군은 고장 출신의 박인환 시인을 기리기 위해 ‘박인환문학관’을 건립하였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1955)에는 없고,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1976)에 실렸다.
정리 : 라라와복래
꽃무릇 천연비누 공방(박봉춘 꽃차 연구원)
https://youtu.be/JWvaZRfaYNQ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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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에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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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희 – 세월이 가면 – 옐로우의 블로그
※ 옐로우의 K-Pop : http://yellow.kr/lifeView.jsp?s=yellowKpop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박인희 ‘세월이 가면’
박인희의 노래로 익숙한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朴寅煥)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여서 1956년에 세상에 나왔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시를 쓴 박인환은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다. 1926년에 태어난 시인 박인환은 만 서른이 안 된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은 동료 시인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되었다. 돌연한 그의 죽음은 문화예술계에 깊은 충격과 슬픔이었다. 불과 얼마 전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명동 술집 거리를 잔잔한 감동으로 적셨던 참이라, 박인환이 그렇게 세상을 버릴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주만큼 명을 타고나지 못한 요절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깊었기 때문인지, 박인환의 마지막 작품 <세월이 가면>은 이미 1956년 당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붙여져 전설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설의 대표적인 예로 이 노래가 즉석에서 작사, 작곡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근년 몇몇 서지 연구의 성과로 그러한 전설의 오류는 다행히 상당 부분 바로잡히게 되었다.
첫 번째 음반 녹음에 관해서는 확실한 실물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그간 계속해서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다. 명동 술집에서 처음 발표될 당시 테너 가수 임만섭 또는 배우 겸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다는 기록에 따라 나애심이 처음 녹음을 했다는 설이 있고,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이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는 설도 있었다.
1956년 4월 중순에 간행된 주간지 기사에서 “여배우이며 가수인 나애심양이 자진 부르고 싶다고 해서 그 후 나양의 오빠인 작곡가 전오승씨의 편곡지휘로 서울방송국을 통해서 방송하는 동시에 레코드에 취입하게 되었다고 한다”는 대목이 확인되기도 한다.
<세월이 가면>은 나애심의 첫 번째 음반 이후 여러 가수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거듭 녹음해 발표했다. 1959년 현인 곡 외에 1968년 현미 곡, 1972년 조용필 곡, 1976년 박인희 곡 등이 잘 알려져 있는 경우이다.
박인희(朴麟姬, 1945년 ~ )는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 중 하나로 방송인으로 재능을 떨쳤다. 차분하고 청아한 음색의 소유자로 히트곡 〈목마와 숙녀〉, 〈모닥불〉,<방랑자> <세월이 가면> 등이 있다.
– 조용필
– 최백호
– 이동원
– 양하영
– 알리 (불후의 명곡2)
– EBS 명동백작
박인환은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에 멋도 부려 명동의 백작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 가사는 다음과 같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 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관련자료 및 참고자료>
위키백과 : 박인환
위키백과 : 박인희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 박인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334
박인환의 가사 ‘세월이 가면’
29세에 요절한
지독히 가난한 미남 시인 박인환
‘세월이 가면‘은
‘신시론’과 ‘후반기’ 등 1950년대 문단의 모더니스트 그룹을 이끌던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이 쓴 시다. 이 시는 해설이 필요없는 시다. 읽는 대로 가슴에 그대로 들어와 박히는 시다.
진실로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름을 잊었다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한 ‘그 눈동자, 입술’이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명언이다. 그 과거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에 남아 있고, ‘그 눈동자, 입술’은 서늘한 시인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절한 정한(情恨)을 읊은 시다.
이 시에는 소설 같은 사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나고 3년쯤 지난 1956년 3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 거리 곳곳은 물론 목로주점 안에도 6․25전쟁의 상흔이 어지러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명동 뒷골목 자그마한 목로주점 은성에 시인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李眞燮), 국제신보 주필이자 소설가 송지영(宋志英) 등 몇몇은 초저녁부터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가수 겸 영화배우 나애심(羅愛心, 본명 전봉선)도 있었다.
이들이 술을 마신 목로주점은 은성이 아니라 경상도집이었다는 설도 있다. 은성이든 경상도집이든 아무러면 어떤가! 박인환과 벗들은 은성, 경상도집 외에도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 유명옥, 해방 이후 명동 인근에 최초로 문을 연 고전음악 전문 봉선화다방, 한국전쟁 이후 명동에 최초로 문을 연 모나리자다방을 즐겨 찾았다. 차와 술, 간단한 안주를 팔던 동방싸롱,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포엠도 이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술이 거나해지자 이진섭은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하지만 나애심은 딴청만 부리고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나애심은 삶의 고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인환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박인환이 주모에게 종이 한 장을 갖다 달라고 했다. 주모에게서 받아든 누런 종이를 받아든 그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눈으로 박인환이 끄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진섭은 갑자기 정신이라도 든 듯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마치 무엇에도 홀힌 사람처럼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로 시작되는 시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박인환의 명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를 읽고 있던 이진섭의 머리에 불현듯 곡조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악보를 그려 박인환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 그리고는 나애심에게 한 번 불러보기를 청했다. 나애심은 악보를 보며 건성으로 노래를 한번 부르고는 송지영과 함께 자리를 떴다. 불멸의 대표곡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만 셈이었다.
잠시 뒤 성악가로 배우가 된 임만섭(林萬燮)과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주점으로 들어섰다. 이봉구는 당시 ‘명동백작’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인환과 이진섭은 늦게 온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후래자삼배(後來者三杯) 벌칙으로 찌그러진 양은술잔에 연거푸 막걸리 대포 석 잔씩을 권했다. 이진섭이 술잔을 비운 임만섭에게 악보를 건네주었다.
몇 번이나 악보를 찬찬히 읽어보던 임만섭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슴을 울리는 그윽한 테너로 ‘세월이 가면’을 열창했다. 그 노래에 끌려 명동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은성’ 앞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앵콜을 연호하자 임만섭은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 다음 ‘세월이 가면’을 다시 한번 열창했다.
명곡 ‘세월이 가면’은 또 그렇게 탄생했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고 금새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사람들에게는’명동엘레지’로 알려졌다.
‘은성’에서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첫사랑 여인의 기일을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를 다녀왔다. 가랑잎이 나뒹구는 옛 연인의 헐벗은 묘지를 바라보던 청년 박인환의 가슴 저 밑에서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구절이 저절로 솟구쳐 올라왔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그의 첫사랑에 얽힌 애절한 추억을 피를 토하듯 써내린 가슴 아픈 정한의 시였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남긴 박인환은 며칠 뒤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 자택에서 잠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30세의 나이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박인환은 그렇게 먼저 간 연인 곁으로 하늘나라 여행을 떠났다. 한국 모더니즘의 큰별이 진 것이다.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놀란 친구, 동료 문인들은 21일 박인환의 세종로 집으로 황망하게 모여들었다. 송지영은 그의 치뜬 눈을 감겨 주었고, 다른 친구는 그의 주검에 생전에 좋아하던 조니워커를 부었다.
박인환의 장례식인 시인장으로 치러졌다. 박인환과 함께 명동의 목로주점을 드나들던 5년 연상 친구 조병화(趙炳華) 시인은 발인 때
‘……참으로 너는 정들다 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가는구나’ 하고 조시를 읊었다. ‘정들다 만 애인…..’이란 표현에서 진하고 애닯은 마음이 묻어난다. 동료 문인들은 미망인의 양해를 얻어 박인환을 망우리 공동묘지 옛 연인의 묘 옆에 나란히 묻었다.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주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화 비평가, 영화 감독 장 콕토를 선망했고, 러시아의 농촌시인 세르게이 에세닌을 좋아했던 박인환은 춥고 배고픈 시절임에도 언제나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명동을 누볐던 명동신사였다. 그는 도시풍의 시를 쓰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남긴 명동의 ‘댄디 보이’였다.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 박인환은 그렇게 가고, 이루지 못한 그의 애절한 사랑은 ‘세월이 가면’이란 시로 남아 시공을 뛰어넘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마도로스파이프로 유명했던 조병화 시인도 2003년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훗날 맑고 애잔한 음색의 대중가수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을 리바이벌해서 크게 히트시켰다.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 외에도 박인환의 대표시 ‘목마와 숙녀’도 노래로 불렀다. 사람도 가고, 사랑도 가고, 시와 노래만 그렇게 남았다.
박인환은 해방 뒤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일컬어지던 오장환(吳章煥)이 서울 낙원동에서 운영하던 서점을 인수했다. 서점 이름은 마리서사(茉莉書肆)라 지었다. 마리서사는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마리서사는 문학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으로 자리잡았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김광균과 김광주, 김기림, 오장환, 이봉구, 장만영, 정지용 등 시인들과 몇몇 소설가, ‘신시론’ 동인 김수영과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후반기’ 동인 조향과 이봉래, 화가 최재덕과 길영주 등이 드나들었다. 김수영과 박인환은 함께 어울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박인환은 국내 시인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그는 3월 17일만 되면 이상의 기일이라면서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이상의 생애와 문학을 기리며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다. 하지만 이상이 실제로 죽은 날짜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였다.
글씨는 김성장이 신영복 민체로 쓴 것이다. 직직 갈겨서 쓴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공들여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민체는 민중체를 말한다. 민중을 지향하는 글씨체라는 의미가 있다. (펌)
명동백작_15부_#001 박인환
https://www.youtube.com/watch?v=qhg2KU0uO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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