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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출생과 순교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소아시아의 동남쪽에 있는 로마제국의 지방 행정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행 22:3). 또한, 바울은 출생할 때부터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6/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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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순교한 오스티아(딤후 4:9-13을 묵상하며)
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문을 나가 에우르(Eur) 방향으로 가면 바울의 순교한 장소를 만납니다. 이곳은 로마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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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 다음블로그
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한낱 죄수로써의 로마에서의 바울의 재판은 선뜻 고소자가 나타나지 아니한데다가 네로는 물론 그 재판관들 마저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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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순교 장면 – 네이버 블로그
바울의 순교 장면 … 우리의 믿음을 저울에 측정할 수 있다면 부족함의 양을 보고 분투할 수 있을까? … 다름 문항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라이프는 어떤 것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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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 이야기(7) > 교회와목회 | (재)기독교서회
현재 대략 정립된 것은 바울 사도의 죽음이 베드로 사도의 죽음 보다 이태 정도 늦은 것으로 본다. 대략 베드로 사도가 A. D. 65년경에 순교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바울 …
Source: www.clsk.org
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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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울로(바울, 바오로, 바울로스, 고대 그리스어: Παῦλος 파울로스, 라틴어: Paulus 파울루스)는 … 바오로, 바울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 6월 29일 (순교).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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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탐방]사도 바울이 걸은 마지막 길 – 뉴스파워
사도 바울의 참수터를 찾아가는 나의 마음에도 애통하고 안타까운 비가 내렸다. … 사도 바울 순교 교회와 바울이 마지막 걸었던 로마 도로.
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7/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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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순교장소 위해 세워진 세 샘터교회 – 아이굿뉴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네로 박해 시에 로마의 포룸 근처에 있는 마머틴 감옥에 갇혔다가 이 곳 세 샘터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성 밖 퓨오리데 뮤라(지금의 …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5/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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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66년 6월 29일, 사도 바울 (Paul, 5년경 ~ 65년)의 순교일로 …
바울 (Paul, 5년경 ~ 64/66년 6월 29일 순교 추정; 바오로, 바울로스, 고 그: Παυλος, 라: Paulus)은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주요 부분인 바울 …
Source: chedulife.com.au
Date Published: 11/15/2022
View: 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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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바울 의 순교
- Author: 여호와로이2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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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1.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fBjhxj0iD0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소아시아의 동남쪽에 있는 로마제국의 지방 행정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행 22:3). 또한, 바울은 출생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22:28). 이는 곧 그의 가족이 로마 사회의 특권층에 속했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학문을 섭렵한 자였다.
아마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전문적인 율법학자인 랍비가 되는 훈련을 받으며 지낸 것 같다. 특히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이는 곧 그가 힐렐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유는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전 10년경에 유대교에는 두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힐렐 학파’였고, 또 하나는 ‘샴마이 학파’였다.
이들은 바리새파 구전 율법의 계승자들로서 장로들의 유전을 전하였다. 그러나 율법의 해석에는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힐렐 학파는 대체로 부드럽고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반면에 샴마이 학파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전문적인 유대교의 훈련을 받은 바울은 아마도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되는 과정 중에 있었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의 활동은 종교적인 일에 집중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자청인지 아니면 공의회가 요구해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매우 열심을 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 1:13, 고전 15:9).”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에도 그를 돌로 치는 일에 공모하였고(행 7:58),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도 공모하였으며(행 8:3), 주님의 제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떠나기도 했다(행 9:1~2).
그런데 바로 그때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결정적으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다메섹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핍박자 사울에서 예수의 제자 곧 사도바울로 변화되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바울은 이후 선교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바울은 힘든 선교 여정 속에서도 교회들을 위해 많은 서신서를 써 보내어 위로와 격려, 권면과 책망, 교훈과 경고 등을 전달하였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한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대략 33년 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주후 34~67). 그가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난 시점은 주후 47년경이다. 그는 자기의 서신서에서 자신의 1차 선교 여행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누가의 저술인 사도행전을 토대로 그의 1차 선교 여행의 행적을 재구성해 보면 바울은 구브로 – 남소아시아 – 안디옥의 경로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선교 여행은 주후 49년경으로 남소아시아 지방을 거쳐 마케도니아의 여러 도시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다시 아가야 지방을 가서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갔고 그곳에서 대략 1년 6개월 정도 거하며 복음을 증거하였다(행 18:11).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은 안디옥에 얼마간 머물다가 갈라디아와 부루기아 지역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격려하였다(행 13:23). 이후 그는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는 그가 2차 선교 여행 시에 방문한 곳이다.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시에 이곳에서 3년을 머물렀다. 선교 여행 중에 가장 긴 시간을 이곳 에베소에서 보냈다.
결국,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의 허락하에 영문 층계에 서서 스스로 변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행 22:30~23:10). 특히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베스도에 의해 심문을 받을 때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노라고 호소하였다(행 25:11).
로마로 압송된 바울은 가이사 앞에서 재판받을 날을 기다리며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었다(행 28:30~31). 그 가운데서도 그는 상당한 자유를 허용받았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유스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심지어 방문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도 하였다. 후에 바울은 다시금 체포되어 로마에서 두 번째 구금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바울은 구금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는 주후 67년경이다.
지암(知岩) 박용덕의 행복한 세상 만들기
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한낱 죄수로써의 로마에서의 바울의 재판은 선뜻 고소자가 나타나지 아니한데다가 네로는 물론
그 재판관들 마저 향락에 빠져 긴급한 일 외에는 재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리하여 서기 61-
62년까지 2년동안 재판은 무기연기되었으며 바울이 있는 그의 감옥인 자유로운 샛집은 바울 사
도의 복음사역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집의 형편을 알리고 디모데는 마게도냐를 다녀오고 두기고는 에베소
에서 아시아의 소식을 전해오고 또한 바울의 편지를 가져갔습니다.애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세
우고 소식을 전해왔으며 마가는 로마에 와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상이 걸려있는 셈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이르러 바울은 1차 재판을 받았지만 논증과 변호가 성공한 셈이 되어 무죄석방되었
고 바울은 자유한 몸이 되어 63-66년까지 마게도냐전도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런 시기에 로마시에 대화재가 일어나 시가의 14구 중 3구가 9일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리는 사
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네로는 백성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자기의 책임을 엉뚱하게 그리스도인들에
게 돌려댔습니다. 이리하여 누명과 오해를 받은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의 가죽을 둘러 쓴
다든지 들개에게 끌리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고 더러는 사람에게 기름을 붙여 횃불을 만들기도
하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사도 베드로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 마게도냐의 총독이 바울을
잡아가면 큰 공을 세우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여 사도 바울을 붙잡아 로마로 호송했습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쇠사슬에 매이고 1차의 자유로운 감옥살이 때와는 달리 엄혹한 감방에 갇히
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오네시모는 바울을 찾아가다가 형을 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누
가는 바울의 수종자(당시에 죄수가 자기를 수발하는 종을 둘 수 있었음)라는 사실로 가까스로
죽음의 화를 면했습니다.
바울의 2차 재판이 있었는데 그의 죄목은 로마성 화재의 음모죄였던 것입니다.또한 바울이 설
파한 종교는 기괴망측한 종교로 백성을 혼란케 하는 인도를 무시한 죄라고 덮어씌워 사형선고
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바울에 대한 Donald G Miller의 진술에 의하면 ‘바울은 이미 늙어 허리가 약간 굽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잡혔으며 여러날 동안의 엄혹한 감옥살이로 인하여 병색이 가득하였다. 그
러나 그는 승리자만 가질 수 있는 기상으로 씩씩하게 사형 장소까지 나아갔다.’고 썼습니다.
당시의 사형 집행장소는 로마시의 교외가 되는 오스틴거리였는데 지금 거기는 로마시내의 번
화가 거리가 된 셈입니다.
이때 사형관은 사도 바울에게 마지막으로 바울의 마음을 회유했지만 실패했고 바울은 그리스
도와 그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재확인 당한 후 사도 바울은 단두대 위에서 교수형의 이슬로 사
라졌습니다.
바로 이 사형집행 장소에는 오직 누가만 있었습니다. 누가는 너무 슬퍼서 잠시 머리를 아래로
떨구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을 때 이미 바울 사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
니다.
바울이 살아 생전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한
바 있는데 이것이 실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가게 되면 사도 바울의 순교의 이유
를 확실하고도 선명하게 알게 되어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한지 거의 2,000년이 지났을 때 이.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
니다. ‘오늘날 이같은 위기에 있어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울과 같은 자로 하나님의 사물
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가진 자와 그리고 진지함과 영성으로 충일한 군대이다. 성화된 사람, 자기
희생의 사람이 필요되나니 용감하고 진실한 사람, 그의 마음 가운데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
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한 불로 감동함을 받은 입술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는 일꾼이 요구된
다.'(복음사역자 61)
참고: 사도 바울은 평생에 3차에 걸처 아시아와 유럽대륙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차는 45-
47년 사이에 아시아(행 13:4-14:28)에, 2차는 49-52년 사이에 유럽(행 15:36-18:22)에,
그리고 3차는 53-58년 사이에 역시 유럽(행 18:23-21:16)에 복음을 전했습니다.[끝]
바울의 순교 장면
우리의 믿음을 저울에 측정할 수 있다면 부족함의 양을 보고 분투할 수 있을까?
저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순복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요한은 측정기구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계 11:1)
성전은 가장 거룩한 지성소와 성소와 제단과 뜰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신자들의 영적인 신앙의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자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모든 면에서 진실하고 거룩한 성전인지 측량해봐야 한다
순결하고 흠이 없는 14만 4천명의 영적 상태부터
성전 바깥마당만 밟고 다니는 형식적인 신자들과 오히려 교회에 해악으로 이끄는 가라지까지 수준이 다양할 것이다
다름 문항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라이프는 어떤 것입니까?
① 솔로몬처럼 호화로운 부유층으로 살고 싶다
② 부유층과 중산층 사이지만 하고 싶은 것은 다할 정도의 상위층으로 살고 싶다
③ 매년 외국여행을 한두 번 하고 한 달에 맛 집을 서너 번 다닐 수 있는 중산층의 라이프를 원한다
④ 라이프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신앙의 폭을 높인 수준으로 사는 것이다
⑤ 바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마다하며 올인하고 싶다
위로 올라가는 라이프는 재물이 주인되는 삶으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한다
바울은 주님께 직접 훈련을 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크게 쓰임을 받았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크게 쓰임을 받았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
성경에서 크게 쓰임을 받은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해서 사용하셨다
모세와 아브라함, 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세례요한이 다 그렇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여 누구보다 수고하였고 일생을 걸었다
그는 많은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했다
포기한 만큼 100배, 60배, 30배로 하늘에 보상으로 쌓인다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교회에서 보수도 받지 않았다
그의 삶은 부유하거나 풍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24보좌에 앉는 영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럴만하다
불신자들은 문항에서 최대한 성공한 부자의 라이프를 추구할 것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나님의 방식에 의하면 위로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이 작아진다고 볼수 있다
땅에서 자신이 누리는 자리가 커질수록 하나님 나라에서 자리는 작아진다
따라서 어떤 신자들은 중간 정도의 라이프를 기대한다
바울은 61년경 그의 나이 65세 정도 되었을 때 로마에서 2년 동안 연금 상태로 살았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 간의 종교분쟁으로 제국의 법정과는 관계가 없다는 무죄 판결이 나와 63년 여름 바울은 석방되었다
석방 후 바울은 디도와 함께 터키 서쪽의 그레데 섬과 아가야, 마케도니아 등 아시아 각 교회를 방문하고 스페인까지 찾았다
그런데 64년 7월 18일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7일간 맹위를 떨쳐 로마시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시내로 번지면서 대화재로 악화되었다
당시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고는 휴가를 중단하고, 로마에 와서 이재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등 참사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재앙에 시민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네로 황제의 방화설까지 나돌았다.
그러자 네로 황제와 집권 세력은 이에 대한 민심 수습책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었다
심지어 성찬식을 두고 어린아이의 고기와 피를 마신다는 소문까지 퍼뜨리고 기독교도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그 후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박해의 현장에 베드로와 바울은 왜 로마로 간 것일까?
그들은 모두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67년 봄 베드로와 바울은 고린도에서 만나 박해를 당하는 로마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로마로 갔다는 것이다
2세기경 리마스가 썼다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록”에 의하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티베르강의 아레느라의 상가에 숙소를 정하고 오스디아문 가까운 곡물창고에서 설교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밀고자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그는 쇠사슬에 매여 마메르디노 감옥에 갇혔고 신자들의 면회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 상황에서 누가만이 바울 곁에서 시중을 들었고 에베소의 오네시모가 방문했다 (딤후 1:15~18)
늙고 지친 바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그가 유익하다고 옥중서신 빌레몬서에 기록했다(빌 1:9~17)
그의 첫 공판이 로마법정에서 열렸는데 이때의 심정이 담긴 마지막 서신을 디모데에게 남겼다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딤후 4:16)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6~7)
바울은 2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 선고 후 2~3일 후 형장으로 끌려갔다
규정에 따라 참수 전에 채찍을 맞아야 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노구의 몸에 사정없이 내리치는 채찍을 맞은 상처에서 피가 흥건했다
마침내 베일로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리고 목을 내밀게 했다
일격의 칼로 바람소리와 함께 순교의 꽃으로 지고 말았다
로마 신자와 부인 몇 명이 순교의 장면을 지켜보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곳에 베일로 얼굴을 가린 한 부인이 바울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바울을 보자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렸다
“바울이여! 하나님의 사람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베일을 벗어 눈가리개로 사용해 달라고 주었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바울의 시체를 그곳에서 약 3km 떨어진 루디나 부인 소유의 묘에 장사하였다
성서고고학 이야기(7) > 교회와목회
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Home > 기독교사상 > 교회와목회 > 성서고고학 이야기(7) 교회와목회 (2011년 8월호) 사도 바울의 행적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4)
본문 -순교자 바울 사도의 죽음-
우리는 바울 사도가 한 사역의 마지막 부분을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제는 그의 순교에 관하여 서술하여 보려고 한다.
1. 순교의 현장에 등장한 사울(바울)
바울 사도는 처음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바울 사도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테판을 유대교인들이 돌로 쳐 죽일 때에 그들을 도우며 스테판이 살해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다.(7:58; 8:1)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의 공식 허가를 받고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서 극적으로 회심을 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여, 다마스커스에 있는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교하였다.(행 9) 그때부터 죽음은 바울의 곁을 바짝 따라 붙었다. 바울을 변심한 것으로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행 9:23) 다마스커스를 탈출한 바울은 그때부터 죄수로 로마 도시에 들어 올 때까지 줄곧 죽음의 협박에 시달렸다.
스테판의 순교가 A. D. 32년경이라고 단정 한다면, 바울 사도는 그 후 약 35년 동안 전도길에서 이런저런 죽음의 위기를 셀 수 없이 많이 넘기면서 고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도시 근교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사역은 예루살렘에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 로마에 있는 순교의 현장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2. 순교를 예견한 바울 사도
로마에서 옥살이를 하는 바울 사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추론이 가능하다.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 간 때를 A. D. 62년이나 그 근처로 본다면, 그는 2년간 거기에 있었는데, 재판이 실행되지는 않은 것 같다. 로마법에는 고소인이 법정에 나와서 고소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로마는 근거 없이 고소하여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소인이 정확한 범법사실을 확실하게 법정에 제출하는 법을 A. D. 61년에 원로원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므로 유대에서 고소인들은 로마에 와야만 재판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다시피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18-20)
그들의 대답은 유대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에 편지를 보내거나 사람이 오거나 해서 바울을 고소하거나 나쁘게 말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행 28:18-21)
이로 미루어 보아서 유대에 있는 유대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유대를 떠나 죄인이 되어 로마로 간 후에 그를 죽이려는 의지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국내의 복잡한 일들 때문에 바울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년 간 지내는 동안에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A. D. 60년대 초반이 지나면서 유대에서는 열혈당이 득세를 하고 로마와 대항하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협을 하였고 결국 A. D. 68년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A. D. 7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 즈음에 완공된 예루살렘 성전이 5년 정도 서 있다가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의 시초에서 유대교인들이 로마에서 바울 사도의 재판을 진행하기에는 벅찬 일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바울은 아마 A. D. 64년쯤에는 로마에서 풀려 나 다시 선교활동을 한 것 같다. 디도서가 기록된 것이 A. D. 66년경이고, 바울이 크레테 섬을 다녀갔고 디도를 임명하여 거기에서 교회들을 세우도록 한 것이라면 바울의 사역은 로마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딛 1:5)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니코폴리스에 있는 자기에게로 오라고 했다.(딛 3:12)
그랬는데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자신의 순교를 예견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쓴 글에서 그가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개역개정)
순교를 예견하고 있는 그의 글은 짧지만 분명하고 비장하며 그리스도를 만날 확신에 차 있다. 이것은 바울이 다시 한 번 로마에서 죄수로 감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에서 두 번 죄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디도서와 디모데후서는 A. D. 64년 이후에, 즉, 바울이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쓴 것이라는 결론을 가진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순교에 대한 자료는 성경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로마 주변에서 고고학 자료를 섭렵하고 현장을 답사하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바울 사도의 순교에 대한 기록
바울 사도의 순교나 무덤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이나 기록은 희귀하고 성경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순교했다고 하는 말은 바울이 죽고 나서 40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인 A. D. 100년경에 쓰인 클레멘트의 편지에 처음으로 나온다. 클레멘트는 바울의 순교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저 바울이 순교했다고만 기록했다.
바울의 순교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한 첫 문서는 『바울의 행전』(Acts of Paul)이다. 이 책은 칼이 바울의 목을 내리치자 목에서 우유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고 바울은 살아났다고 한다. 이 책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4. 바울 사도의 순교 시기
바울 사도는 A. D. 60-62년 어간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 후 네로 황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사도들이 같은 해 같은 날 순교하였다는 구전(口傳)과 날은 같은데 년도는 바울의 순교가 늦다는 설도 있고 거의 비슷한 때라는 설도 있다. 현재 대략 정립된 것은 바울 사도의 죽음이 베드로 사도의 죽음 보다 이태 정도 늦은 것으로 본다.
대략 베드로 사도가 A. D. 65년경에 순교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바울 사도가 67년이나 68년경에 순교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이다. 4세기에 활동했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책에서 로마에서 네로 황제 때에 바울 사도가 목 베임을 당하고 순교하였다는 구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5. 바울 사도의 순교 장소
바울의 순교 장소로는 일반적으로 로마 도시 근교에 있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이라는 교회 터로 보고 있다.(사진 1)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는 죄수들에게 십자가형을 많이 내렸는데, 그것은 주로 로마 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행한 처형 방법이었다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울 사도가 목베임을 당한 것은 그가 로마 국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망나니가 바울 사도의 목을 치자 땅에 떨어진 머리는 세 번이나 튀어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마다 기적적으로 분수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분수들을 라틴어로 ‘Aquae Salviae’(물의 현자)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세 분수는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있었고 고고학 발굴로 모자이크 바닥이 드러났다. 이미 바울 사도의 순교 전에 여기에 물분수와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바울의 순교와 이미 있던 지리적 특징이 결합되어 생긴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지방에는 바울이 순교 당한 곳에 소나무가 있었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그 소나무는 영어로는 ‘stone pine tree’라고 하는데 가지들이 뻗어 올라가서 우산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 자라는 소나무이다. 그런 소나무가 바울이 순교를 당하는 장소에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1857년에 그 곳에서 고고학 발굴을 할 때에 그런 소나무의 솔방울들이 고대에 떨어져서 묻힌 것을 발굴하게 되어 그 구전의 사실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A. D. 5세기였다. 그 건물을 1599년에 추기경 알도브란디니의 명으로 중건하였다. 현재 교회는 트래피스트 수도원에 속해 있다. 세 분수들은 식수원이 오염되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교회 안에는 바울의 목을 칼로 치기 위해서 그의 목을 얹어 놓았었다는 기둥이 있다. 이것이 당시의 돌기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교회 근처에 있는 로마시대 유적에 있던 건물의 기둥을 가져다 놓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회 입구의 왼쪽 벽에는 바울 사도를 죽이는 장면이 대리석으로 부조되어 있고(사진 2), 오른쪽 벽에는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처형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교회의 회중석 바닥에는 로마시대 모자이크 바닥이 있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시대에 로마의 항구도시였던 오스티아에서 가져다가 교황 파이우스 9세가 헌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순교 장소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 교회가 있는 곳이다. 그 장소에 있는 세 분수들이나 바울을 처형할 때에 쓴 돌기둥 따위는 후에 교회의 구전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 바울 사도의 무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들의 무덤들이 유세비우스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존재했고 무덤에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그러한 사실을 카이우스라는 경건한 사람이 자기가 그 무덤들을 직접 보고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을 인용해서 그의 교회역사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순교장소라고 하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마에서는 두 번째로 큰 바실리카 교회가 있다.(제일 큰 것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바실리카이다.) 이 바실리카의 이름은 성 바울 바실리카이다.(사진 3) 이 교회의 문에는 돌기둥 위에 바울의 목을 놓고 망나니가 긴 칼로 내려친 직후의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사진 4)
구전에 의하면, A. D. 65년경에 타르수스의 바울이 로마에서 투옥되었고, 얼마 있다가 참수되었으며, 경건한 귀족이었던 마트로나 루씰라의 가족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한다. 그 무덤 위에 콘스탄틴 황제 때인 A. D. 325년에 교회를 지었고, A. D.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 교회를 증축하였고 바울의 유해를 석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A. D. 433년에 지진이 나서 교회가 무너졌고, 교회를 재건하면서 교회의 바닥이 높아졌으나 석관은 그 밑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1823년에 불이 나서 교회가 완전히 타버리자 새로운 건물을 지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탈리아 여행을 가면 보게 되는 성 바울 바실리카이다.(공식명칭은, 로마 성 밖에 있다고 하여, St. Paul’s outside-the-walls이다.)
성 바울 바실리카 안에 들어가면 본당의 밑바닥 보다 낮은 곳에 석관이 안장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현재 제단보다 1.37 미터 낮게 대리석 무덤 돌이 있다.(크기는 2.12m x 1.27m) 그 돌에 라틴어로 ‘PAULO APOSTOLO MART’(순교자 사도 바울)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무덤 돌 밑에 석관이 있다. 석관(sarchophagus)은 2.55미터 길이에 1.25미터 넓이와 0.97미터 높이인 대단히 크고 무거운 관이다. 지금은 제단 밑에 철망으로 가려 놓고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사진 5)
1823년에 교회를 다 태워버린 화재가 났을 때에 석관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났다. 구전에는 바울의 두개골의 뼈 조각들과 몸의 뼈들은 다른 바실리카인 성 요한 라테란 바실리카에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2002년에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서 실시된 고고학 발굴에서 그 석관 안에는 인골과 예배 의식 때 피우는 분향 가루, 금으로 만든 장식이 달린 값비싼 보라색 천, 아마 실로 짠 청색 천, 따위가 들어 있었다.
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들은 이 석관이 인공적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원래의 유적 환경에서 보존되어 있었다고 보고했다. 교회의 바닥 밑에 있던 이 석관은 1,600년 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다.
석관 위의 제단에는 ‘바울 사도가 차고 있던 쇠사슬’이라는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다.(사진 6) 사슬은 고리가 아홉 개가 연결된 것이다. 각 고리는 8자 모양인데 동그란 쇠고리를 비틀어서 8자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양쪽을 눌러서 8자 모양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런 쇠고리 형식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이 쇠사슬이 바울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과연 바울이 차고 있던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 바울 바실리카의 자리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A. D. 325년이고 석관이 안치된 것은 A. D. 390년이다. 바울의 순교 당시 보다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에는 그래도 퍽 이르게 바울에 대한 사실들이 확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거리나 거주지가 유적이 있는 자리 보다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난 호에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석관이 있는 곳이 원초적으로 2-3세기의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바울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목이 잘린 바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고 구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고학 발굴은 석관 안에 있는 인물이 바울이라고 단정 지어 주지는 못한다.
7. 결론
스테판 집사가 당하는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울은 바울 사도가 되어서 스테판이 하던 복음 전도를 감당하며 약 35년 정도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에는 스테판처럼 순교를 당하였다. 스테판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긴 바울은 자신의 순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 제공: 고세진 교수)
고세진 l 교수는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으며(M. A.), 미국 Wesley Bibl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고 이스라엘 Jerusalem University College에서 히브리어로 석사학위(M. A.)를 취득하였다. 미국 University of Chicago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M. A., Ph. D.) Jerusalem University College에서 고고학연구소장과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스라엘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0년을 포함하여 20여 년 동안 성지에서 벧샨, 레호브, 도르, 팀나, 하르 투브, 길로, 라맡 라헬, 야쿠시, 등 주로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유적지들을 발굴하였다. 한국에 귀국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성서고고학회 회장 및 월드비전 운영위원이다.
2022년 7월호(통권 7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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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바울, 바오로, 바울로스, 고대 그리스어: Παῦλος 파울로스[*] , 라틴어: Paulus 파울루스[*] )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바울로 서신을 저술한 인물이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앞장서서 박해하였으나, 예수의 음성을 들은 이후 회심하여 이후 기독교의 초기 신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2][3] 회심하기 전의 이름은 왕의 이름인 ‘요청받은 자’라는 뜻의 ‘사울'(שָׁאוּל)이었다. 고대 로마의 속주였던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수스(다소) 출신이다. 천주교 및 정교회에서는 성인으로 기리며,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천주교), 7월 12일(정교회)이다.
개요 [ 편집 ]
바울로는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했다.[4] 그렇게 그는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지성 없이 열정만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5] 바울로 사상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로도 없었겠지만 바울로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름 [ 편집 ]
바울로는 로마제국의 라틴어 이름을 헬라어로 음차한 이름으로 신약성경에는 ‘파울로스’로 기록되었고,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히브리어: שאול)’이다. 이름에 대해서는 주장이 둘로 나뉜다. 먼저 로마제국 시대 시민권을 지닌 자로 두 개의 이름을 활용했다는 주장과 둘째로 이름의 의미의 차이에서 의도적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사울’은 구약성서 최초 이스라엘 왕의 이름이었고 요청할 수 있는 자인데, ‘바울로’는 ‘작은 자’라는 의미로, 의미의 대비가 커서 바울로가 회심 이후 사울에서 바울로로 변경하였으리라는 주장이다.
우선, 바울로가 두 개의 이름을 지녔다는 주장이 있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6]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그리스말로 ‘흩어진’을 뜻하는 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헬라어나 라틴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도 헬라어식 이름인 바울로와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했다. 특히 바울로의 경우 로마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로마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한때 기독교인들이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주장은 사도 바울로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7]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라고도 불리는 사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8] 바울로는 라틴어로 ‘작은’, ‘낮은’이라는 뜻인 형용사 ‘파울로'(paulo)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둘째로 사울이 베드로처럼 기념적인 두 번째 이름인 바울로라는 이름을 활용했으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배경으로 이름의 의미가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당시 굳이 2개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고, 히브리어 이름을 번역하여 사용한 기록도 있다. 그리고 바울로라는 이름 자체가 라틴어 권역인 이탈리아 지역에서도 극히 일부만 사용하던 이름이었고, 헬라어 권역인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9]. 이스라엘의 왕 이름이었던 사울은 히브리어에서 사울은 ‘간구함’ 또는 ‘요청’의 의미를 지닌 ‘요청하는 자’로 히브리어의 동사로 요청하다라는 뜻의 ‘샤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 이스라엘 왕국 첫 임금의 이름이었던 반면, 라틴어에서 유래한 바울로는 ‘작은 자, 낮은 자’라는 의미로 베냐민 지파 출신 율법학자였던 사울의 이름이었다. 바울로는 너무나 대비되는 두 개의 이름을 굳이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를 사용했다면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 로마제국 이전부터 유대 지역의 헬라화가 진행된 상황이었던 1세기에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어식으로 음차하거나 번역했고, 헬라어식 이름을 유대지역에서 그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유대인인 예수의 12 사도들 중에 히브리어나 아람어 관련 이름이 아니라 헬라어식 이름을 사용하는 사도들이 있다.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대표적이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유대인이었고, 필립보 역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 출신으로 유대인이었다. 그런데도 유대 지역 내에서 헬라어식 이름만을 그대로 사용했고 굳이 아람어와 헬라어로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으나 예수를 만난 이후 ‘바위’를 뜻하는 아람어 ‘게파’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를 번역해 바위를 뜻하는 헬라어 ‘베드로’가 그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세기에 두 개 이름을 굳이 사용하지 않기도 했으며, 아람어나 히브리어 이름을 사용할 경우에는 번역하거나 음차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사울은 발음하기 편한 헬라어식 음차 ‘사울로스’나 사울을 번역한 라틴어 이름이나 헬라어 이름으로 사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히브리 왕의 이름에 정반대인 헬라 종의 이름인 바울로를 사용했다. 바울로의 경우 회심 이전에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기보다 회심 이후 자신의 이름을 헬라어로 음차하거나 번역하지 않고,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로라는 이름을 추가적으로 변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어 성서 번역본의 음역 차이 [ 편집 ]
1900년 완역한 신약성경 전서 음역을 따른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은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바오로’라고 한다. 성공회는 바울로를 ‘바우로’라고 음역하는데, 그 실례로 1965년판 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 바울로를 바우로로 음역하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는 바우로를 신명(信名) 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이다.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1세기 이후 등장한 성화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바울로의 이름은, 현재의 한국 기독교에서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성서의 ‘바울로’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공동번역성서를 따라 ‘바울로’라고 칭하며,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로, 천주교회에서는 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로 칭한다. 성공회에서는 공동번역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라고 하는데, ‘바울’, ‘바우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애 [ 편집 ]
로마 제국 치하의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10] 출생 연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7] 그의 출생 지역과 연대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11] 여하튼 바울로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12], 게다가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13]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14]. 바울로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배경을 오물에 빗댄다.[12]
학식 [ 편집 ]
바울로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의 바리새파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교육을 받았는데[10],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15]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 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주었다. 사도 바울로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새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바울로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 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로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도 밝았는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인을 인용하여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사도행전, 17:28, 공동번역성서[16][17]
사도행전에는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다. 지식인들의 지성에 맞게 전도한 성 바울로의 전도는 지혜로운 전도였던 것이다.
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 사도행전, 17:34, 공동번역성서
주요 연대 [ 편집 ] [18][19] 제위트의 연대기 구성 [ 편집 ]
34년 다마스쿠스 사건
41년 제1차 예루살렘 방문
51년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선교, 제2차 예루살렘 방문
59년-60년 로마로의 송환
62년 사망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 편집 ]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바울로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 중 예수의 현현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 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종교가 아닌 유대교 세계 안의 이단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선교활동 [ 편집 ]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20] 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21] 인 마르코[22]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바울로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 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 — 사도행전, 15:36-39, 공동번역성서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그리스어: παροξυσμὸς paroxusmos[*] )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바울로와 바르나바 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23] 이들의 분쟁에 대해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신학자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줄 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이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바울로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아내)와 아퀼라(남편)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로마에서는 셋방살이를 하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와 예수 이야기를 담대히 들려주었고, 필리포스 대왕의 이름을 딴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에서는 리디아(루디아)라는 여성 상인의 도움을 받아 교회공동체를 조직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성 루가는 리디아는 티아디라에서 나고 자란 자색 옷감 장사라고 했는데,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자색 옷감은 왕이나 부자들만 입을 수 있는 귀한 옷이었다. 실제 예수의 수난 복음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자색 옷감을 입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왕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자 함이다. 리디아는 자색 옷감을 사고팔 정도로 부유한 여성 상인으로서 자신이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교회공동체에서 사용했음을 사도 루가는 전하고 있다. 이는 초기 교회에서 여성들이 사도 바울로의 전도여행에 후원자로서 참여했음을 뜻한다.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믿음 안에서 동등한 구원을 얻는다는 탈율법적인 신학을 주장한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24]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청교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던 존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 편집 ]
베드로와 바울로-엘 그레코
사도권을 둘러싼 갈등 [ 편집 ]
사도(apostle)는 ‘그리스어: απόστολος’의 음역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어간은 파생어에서 접두사나 접미사가 아닌 본디말을 가리킨다. 맨몸이라는 말에서 맨이 접두어 또는 접두사이며, 몸이 어간이다.)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25]
사도 자격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바울로는 다마스커스에서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예수가 사도로 임명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 바울로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26]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 편집 ]
김득중[27] 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 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 기독교 지도자 바울로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28], 거짓 형제[29]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바울로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30]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지만 바울로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존중하였으며, 모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10, 공동번역성서
육체 노동자 바울로 [ 편집 ]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로는 육체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 노동자였다. 즉 자비량 목회를 한 대표적인 사도라 할 수 있다.
그 뒤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고린토로 왔는데 거기에서 그는 본도 출신인 아퀼라라는 유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퀼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자기 아내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온 사람이었다. 바울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 사도행전, 18:1-3/공동번역성서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바울로는 사례비를 받아서 생활하던 대다수의 순회 설교자들과는 달리, 육적 노동자로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복음 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였으며, 그리스도 신앙과 일치되게 하였다.[31] 김회권도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을 지배하던 악한 귀신들을 쫓아낸 바울로의 능력[32] 은 노동자로서의 정직한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33]
바울로의 사회 문화적 정황 [ 편집 ]
바울의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34]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의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35] 이를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36]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 12:1-5), 공동번역성서.
바울로의 신학 [ 편집 ]
바울로의 예수상과 교회 [ 편집 ]
예수상 [ 편집 ]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바울로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 예수에게 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바울로 서신서 속의 언급들[37]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 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로 서신서도 예수 전승을 바울로가 자신의 신학으로 해석한 신학문서인 것이다.[38] 물론 바울로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만찬(Holy Communion) 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예수의 성만찬 제정 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39]
교회관 [ 편집 ]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40], 바울로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41]로 해석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해석 [ 편집 ]
구원론 [ 편집 ]
이방기독교 지도자 바울로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바울로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42]
성례전 해석 [ 편집 ]
성만찬 [ 편집 ]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만찬은 사회통합을 위한 성례전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 때마다 부유층 교인들이 빈곤층 교인들과 밥상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성 목요일)에 성만찬을 제정하시어 그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과 성만찬을 나누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가난한 교우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이라고 비판했다.
바울로의 편지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바울로 서신 입니다.
편지의 작성자 문제 [ 편집 ]
신약성서에서 실제 바울로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오로 서간은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43]
확실히 바울로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44],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바울로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바울로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45], 에베소서[46] 바울로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45], 디도서 바울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
각주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현장 탐방]사도 바울이 걸은 마지막 길: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 사도 바울 순교 교회와 바울이 마지막 걸었던 로마 도로. 길을 보존하기 위해 줄로 막아져 있다. © 이동근 그날 로마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도 이처럼 비가 왔을까? 사도 바울의 참수터를 찾아가는 나의 마음에도 애통하고 안타까운 비가 내렸다.
지난 9월 꿈에 그리던 서유럽을 여행사 투어로 다녀왔다. 영국, 파리, 스위스, 이태리 일정 12일 동안 내내 날씨가 좋았는데 마지막 날 로마 일정에는 비가 내렸다.
이날은 마침 주일이어서 아내와 나는 호텔방에서 찬양과 말씀 묵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로마 관광을 떠났다. 첫 방문지가 사도바울이 순교한 참수터였다.
사도행전 등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회 앞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후 58년경 체포되어 가이샤라에 호송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바울의 가슴에는 주님께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이르신 것처럼 로마 선교 열정이 있었고.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하며 로마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요청했다. (행 25:11)
이로인해 사도 바울은 바다의 풍랑으로 배가 깨어져 멜리데 섬으로 구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AD 61년경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2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운데 군사가 그를 지키고 있었지만 방문자를 만나고 복음을 전파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수감생활을 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 28:16)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이 기간 바울은 4개의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으며 63년경에는 잠시 석방되어 성도들을 둘러보기 위해 소아시아로 갔다.
▲ 사도 바울이 참수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 조각 © 이동근 그러나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이로인해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 바울은 제 1순위로 소아시아에서 체포되어 왔다.
갑자기 체포된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의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마메르티(mamertimum) 감옥에 갇혔는데 베드로 역시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는 이 감옥은 훨씬 악조건 환경이었고 죄수들은 혹독한 구금 생활을 보내야 했다.
우리 일행은 직접 이 감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다.
바울도 자신의 마지막이 임박한 것을 알고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써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며 자기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리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로니라.”(딤후4:6-8)
결국 사도바울은 반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인 로마에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
그 당시는 성 안을 신성시하였기에 성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바울의 목이 참수되었을 때 떨어진 목이 세 번 튀었고, 그 튀어 오른 자리마다 샘이 터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뜨레 포타네 (Tre Pontana) 세 분수 교회가 세워져 있다.
또 그의 무덤은 성 밖에 있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또는 성 바오로 대성당 (St. Paul’s outside-the-walls)에 묻혀있는데 로마 베드로 성당에 이어 가장 큰 기념 성당이라고 한다.
그날 우리 일행들은 관광버스에서 내려 내가 살고 있는 시애틀의 비 같은 가랑비를 맞으며 참수터로 향했다. 먼저 놀랜 것은 그동안 유럽 관광지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행객들과 관광버스들이 몰려있었는데 이곳에는 우리 일행 외에 다른 10여명 정도만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참수 교회가 있는 수도원 입구는 Via Acque Salvie 길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만 서 있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양옆으로 가로수가 서있는 조그만 시골길 같은 조용한 길을 걸어가니 입구에 하얀 대리석 조각으로 한 인물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사도바울을 먼저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이 조각상은 바울이 아니고 수도사인 St. Benedict 였다. 조각상 밑에는 이곳은 평화와 기도의 장소라고 경고하고 있다.
▲ 바울이 참수당한 후 목이 3번 튀긴 곳에 샘이 터지는 그림 © 이동근
복잡한 도심을 벗어난 수도원은 정말 들어오자마자 적막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주었다. Acque Salvie 길을 따라 더 들어가니 정식 수도원 입구인 Arch of Charlemagne 아치 문이 서 있었다.
이 아치는 샤를마뉴 서로마 제국 황제 기념 수도원 아치이고 수도원 안에는 바울 참수 교회를 포함 3개 건물이 있었다. 마침 아치 입구 길바닥에 젊은 집시 여성이 빈 깡통을 들고 구걸하고 있었는데 다른 관광지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어서 동정심이 더 큰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수도원 3개의 건물 중 왼편은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수도원이고 오른편은 ‘천국의 계단 교회’로 불리는 Church of Santa Maria Scala Coeli 교회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황제의 목욕탕을 건축한 후 건축에 참가했던 1만여명의 그리스도 군인들과 노예들이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수도원 3개 건물 중 가장 작은 이 교회는 1138년 성인 베르나르도 클레르보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다가 천사가 수많은 영혼들을 계단을 통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려가는 형상을 보았다고 하여 이런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교회 지하로 내려가니 16세기에 지은 San Zenone과 순교한 군인들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 특히 이 제단 벽에는 두 개의 작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왼쪽은 Dia 여신을 위한 작은 이교도 제단을 볼 수 있고 오른쪽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이 참수되기 전에 죄수로서 수감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San Zeno와 순교 군인들 그리고 수감된 사도 바울의 프레스코화가 있었으나 이제는 바울 그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곳이 바울이 수감되어 옥중 서신을 썼던 감옥이라고 까지 잘못 알고 있으나 수도원 웹사이트 설명에서도 이곳은 바울이 참수 전 대기하던 곳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앞에서 설명한 마메르티(mamertimum) 감옥 입구에는 분명히 바울과 베드로가 수감되어 있던 곳이라고 입구에 새겨져 있다.
참수를 앞두고 바울이 대기했던 곳이라면 바울이 마지막 기도하던 곳일 것이다. 바울은 이때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
▲ 입구조차 초라한 수도원 입구 © 이동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8)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원하며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기쁘게 고대하던 바울을 생각하면서 나도 감히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원했다.
드디어 두 번째 교회를 지나 다시 조금 더 걸어가니 세 번째로 맨 끝에 바울 순교교회 (Church of the martyrdom of St. Paul)가 나왔다. 이곳이 바로 AD 67년 6월 29 일 바울이 참수 당한 곳이다.
특히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이며 영적인 장소인 바울 순교 교회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10미터 정도는 옛 로마 도로로 보존되어 밟지 못하게 줄로 막아져 있어 우리는 옆으로 피해 가야 했다.
이 도로를 보며 당시 사도 바울이 사형수의 몸으로 이 로마 도로를 마지막으로 걸어서 사형장에 끌려갔다고 생각하니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걸었다.
▲ 바울 참수 교회 내부. 왼쪽 아래 철망으로 가려져 있는 곳에 참수 돌기둥이 있다. 그 왼쪽 옆으로 머리가 튀어 샘이 솟아난 기념 제단이 3개가 있다. © 이동근
순교 교회당에 들어가니 오른쪽 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죽는 그림과 대리석 부조가 있고 왼쪽 벽에는 바울의 목이 베이는 장면이 생생히 조각되어 있었다. 또 바울의 목이 떨어진 후 3번 튄 곳에서 물이 터지는 그림도 있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어서 훨씬 고통스럽고 잔인한 십자가형을 당했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여서 그래도 쉽게 죽는 참수형을 당했다.
특히 부조 조각에서는 두 손이 뒤로 결박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돌기둥 위에 바울의 목이 올려져 칼로 참수 되는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정말 끔찍했다.
교회 안은 한쪽으로 참수 돌기둥이 쇠창살로 둘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 3개의 샘터 기념 제단이 정렬되어 있는데 서로 같은 거리이나 바닥 높이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샘물이 나온 샘터 기념 제단에는 잘라진 바울 머리 조각도 있었다.
수도원 설명에 따르면 바울의 순교로 3개의 샘이 터진 것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또 출처가 미상이지만 신빙성 있는 보고서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참수 당시 눈이 가려졌고 양 무릎이 땅에 꿇렸으며 목이 참수 돌기둥 위에 올려진 후 참수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큰 소리로 3번 히브리어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의 목과 머리에서 우유 같은 액체가 터져 나와 사형집행인 옷과 땅을 적셨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교회 안에 있는 예배당 좌석에서 기도시간을 갖는 바람에 좀 늦게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우리 곁에 있던 외국인 2명과 우리들에게 직원이 쇠창살을 열어주어 무시무시한 참수 돌기둥을 직접 보고 어루만질 수 있었다. 정말 바울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사람 키보다 적은 돌기둥을 자세히 보니 한쪽이 마모가 돼 있었다. 그 이유는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죽일 때 목을 그 돌기둥에 얹고 큰 칼이나 도끼로 내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형 묘사 조각에서도 망나니의 칼이 조금 밖에 없었는데 큰 칼이 부러져 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 바울이 참수당한 돌기둥, 한쪽이 많이 마모되어 있다. © 이동근
아내 이은배 전도사와 나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그 장면 앞에서 다시한번 사도 바울의 목 베임이 헛되지 않도록, 그 피가 이 땅에서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작은 바울이 되어 오직 믿음 안에서만 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왕성하고 견고하게 세워 나가기를 소원해 보았다.
정말 끔찍하고도 안타깝게 바울은 참수되었지만 그 흘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이렇게 뿌려진 바울의 피의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 제국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바울을 참수했던 로마제국이었으나 그후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기독교 문화가 꽃 피우게 되었으며 특히 이방인인 우리들까지 그 귀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2000년 전에 세워진 로마라는 제국은 막상 돌아보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로마 한 셋집 가택연금과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에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당시엔 겨자씨처럼 작았지만 이제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고 확장되는 하나님의 뜻이 바울의 순교로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바울의 그 피의 복음은 2000년 이라는 시간을 지나 대륙과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까지 접해진 것처럼 사도행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대와 중세기에 세계를 호령하였던 유럽을 돌아보면서 영국 박물관, 프랑스 루블 박물관, 베르사이유 궁전, 에펠 탑, 개선문, 바티칸, 베드로성당,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미켈란젤로 그림 등 화려한 성당이나 미술, 조각 작품들과 르네상스 발상지 피렌체, 물의 도시 베니스와 폼페이 그리고 카프리 섬보다도 나는 바울의 초라한 참수터에서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렸고 더 큰 감동과 도전이 밀려와 그곳에서 복음 열정으로 펄펄 뛰던 바울의 심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이고 큰 축복이었다.
▲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이동근
로마에서 사도 바울 순교 교회를 돌아보면서 사도바울이 유라굴라 광풍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여 복음을 외친 로마와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생전에 가야할 로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가야할 로마는 어디인가? 그곳은 지난해 내가 단기 선교로 다녀왔던 멀리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지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로마가 있다.
특히 이번 여행 일행들 중에는 믿지 않거나 교회를 다니다 중단 한 분들이 많아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 이들 뿐만 아니라 많은 여행객들이 사도 바울 참수터를 방문하고 고귀한 사도바울의 순교를 통해 구세주인 예수님을 믿기 바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바울 순교 교회를 떠나니 바로 앞에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걸었던 로마 도로가 다시 펼쳐졌다.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가 우리에게도 가야할 마지막 길이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마지막 길을 걸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하고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한다.
다시한번 내가 좋아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해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동근: 뉴스파워 시애틀 본부장. 시애틀 뉴비전 교회(담임 천우석 목사) 시무장로. 전 중앙일보 시애틀지사 편집국장. 전 월간 신앙지 ‘새하늘 새 땅’ 발행인 저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 상,하권. 서북미 여행가이드(2018), ‘아름다운 오리건’, ‘아름다운 워싱턴’, ‘비,눈,바람 그리고 튤립’. 대한민국 국전, 일본 아사히 신문 국제 사진전, 홍콩, 한국 국제 사진전 입선, 오리건주 오리거니안 신문 사진전 1위. 미국 개인 사진전 개최. 이메일:[email protected] ▲ 바울의 목이 튕겨서 샘이 터진 곳에 세워진 기념 재단. 중앙에 바울 머리 조각이 있다. © 이동근 ▲ 천국 계단 교회 지하에 있는 기념 제단. 철망 창문 뒤는 바울이 수감된 감옥이 아니고 사형자에 끌려간 바울이 대기하며 마지막 기도를 했던 곳이다. © 이동근 ▲ 수도원 입구 아치 문 아래 젊은 집시여성이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 © 이동근
바울의 순교장소 위해 세워진 세 샘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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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받았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었던 탓인지 광장 뜰을 빠져 나왔어도 두 망막 속에 깊이 새겨진 수많은 장면들은 한 동안 머릿속에서 비디오 필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귀한 예술품들의 화려함과 위압적인 교황청의 건축물들이 오히려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면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루터가 성스런 계단(Scala Santa)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ꡐ파테르 노스테르ꡑ(Pater Noster)를 암송하다가 벌떡 일어났을 때 느꼈던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답답한 것이 아니었을까?바티칸 교황청을 쫓기듯이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바울이 순교했던 지점에 세워졌다는 세 샘터(Tre Fontana) 기념 교회를 향해 서둘러 달려 나갔다. 창가 너머로 특이한 옷차림을 한 집시 남녀들이 가끔 손을 흔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동구라파의 집시들처럼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늘진 뒷골목의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들은 로마의 현대 문명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생아일른지 모른다. 누군가가 로마에서 돈이나 물건을 도적 맞거나 강탈당한 적이 없다면 이태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사실상 이태리는 국민의 대다수가 카톨릭 신자들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총본산이지만 마피아와 같은 암흑 조직이 날뛰고 있고 범죄율도 거의 세계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추한 것이 된다고 했던가! 이태리 로마의 두 야누스 얼굴은 믿음의 의미가 급속도로 변질되어져 가는 현대인에게 던져주는 차라리 충격적인 메시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한참을 달려가던 버스는 로마 서쪽에 있는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아름드리 정원수로 뒤덮힌 교회 뜰 안으로 들어서자 오랜 세월로 빛 바랜 회색 건물 하나가 낡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였다.세 샘터 교회 안은 대낮이었는데도 어둑컴컴했고 음산한 분위기가 방안 곳곳에 물씬 배어 있었다. 건물 안벽에는 사도 바울이 목 베임을 받던 순간의 섬뜩한 장면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베드로의 처참한 모습이 부조 형식의 조각품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 쪽의 빈 공간에는 참수 당할 때 그의 목을 얹어 놓았다는 받침대와 머리가 세 번 튄 곳에서 솟아 나왔다는 샘터들이 보존되어져 있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한 시기에 대해서는 주후 67년(유세비우스), 68년(제롬) 등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둘 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네로 박해 시에 로마의 포룸 근처에 있는 마머틴 감옥에 갇혔다가 이 곳 세 샘터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성 밖 퓨오리데 뮤라(지금의 성 바울 대 성당)에 묻혀졌다고 한다. 대 성당 마당에는 야자수 네 그루가 있고 그 앞에는 왼 손에 긴 칼을 들고 머리를 깊이 숙인 바울의 모습을 새긴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울이 굳게 붙잡고 있는 칼은 정의와 확신을 의미하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고뇌하고 있다는 것이다.로마의 클레멘트(A.D. 95년)는 그의 서신에서 바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ꡒ마침내 바울은 승리의 면류관을 썼다. 일곱 번 고랑에 채워졌고 도망자가 되었으며 돌에 맞으면서 헤롯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활동하는 사이에 바울은 영광스런 신앙의 명예를 얻었다. 그는 전 세계에 의를 가르쳤고 권력자 앞에서 신앙 고백을 내어 보이고 그 후 세상에서 해방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리웠다.ꡓ 여위고 구부러진 다리에 곱슬머리와 대머리,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었다(바울행전)는 바리새파의 유대인 바울, 다메섹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가 너무나도 좋아서 온 생애를 내던져 온갖 핍박과 고난까지 기꺼히 받으려 했던 다소의 복음 전도자 바울, 죽음의 날을 앞두고 가죽 종이에 쓴 성경과 외투 한 벌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히브리의 영웅 바울, 그의 육신은 예리한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28장도 순교의 붉은 핏방울로 마침표가 찍혀졌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역사는 바울이라는 이름 두 자를 빼어 놓고는 그 흐름의 방향과 목표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할 만큼 그는 실로 B.C.와 A.D.의 역사 전환기에 기독교의 뉴 프런티어 역할을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수행한 최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려면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떠하든지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간절히 구하였지만(롬 1:10) 그 때마다 사탄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살전 2:18). 가난한 복음 전도자였던 바울이 로마로 가려면 무엇보다도 엄청난 배삯과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의 칼날을 막아줄 수행원들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호송됨으로써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비록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서 끝내 순교의 제단에 관제처럼 부음이 되었지만, 그의 놀라운 선교의 꿈은 정녕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영광의 금 면류관을 쓰고 천국에서 환하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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