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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4 (수) [하루 한 장]“이 마음을 품으라” (빌2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빌립보서 2장은 빌립보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쁨은 있으나
구원에 합당한 삶은 없는
공허한 믿음이었습니다
믿고 구원받은 내가 인정받고
높임 받고자 하는 욕심은 있는데
정작 남은 인정해주고 싶지 않고
나만 모든 영광을 누리고 싶으니
교회가 얼마나 엉망이었겠습니까
이것이 머리로만 믿고
마음과 삶의 행위는 따르지 않는
미성숙한 신앙의 전형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다툼과 허영에
모두가 지치고 분열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품으라는 동사는
추구하고 얻으려고 애쓰고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단순히 믿는 걸로 만족 말고
예수님의 마음을 힘써 구하고
애써서 품어 새로워집시다
그렇게 함께 교회를 세워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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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빌립보서 2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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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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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주석
빌립보서 제 2장
=====2:1
본절은 ‘에이'(* , ‘만약’)로 시작하는 네 개의 조건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이 교회안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나타낸다. 이런 덕목은 신자 개인의 윤리적 고상함
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갈 때에만
얻게 되는 것이다(Lenski).
(1) 무슨 권면이나 – 바울이 교회에 대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것
처럼(4:2;롬 12:1;15:30;16:17;고전 1:10;4:16;16:15;엡 4:1;살전 2:11,12;5:14) 그리
스도인들도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해야 한다.
(2) 사랑에 무슨 위로나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한다.
(3)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
)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의 부재(不在)를 이유로 ‘인간의 영’ 혹은 ‘마음’이라고
해석하여 본절 ‘상호간의 조화’ 혹은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Hendriksen). 그러나 관사 없이도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롬 7:6;고전 2:4;갈
3:3;5:16,18,25), 대개의 경우 ‘교제’는 영적 교제를 시사하기 때문에 ‘프뉴마토스’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본절의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
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Hawthorne).
(4)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
리키며,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의부적 표현이다(Martin). 그리스도인들은 연약
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2: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 ‘마음을 같이
하여’의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테'(* )는 문자적으로
‘생각을 같이 하여’라는 의미이나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나타낸다(Meyer, Hawthorne).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와 거의 동일한 의미의 ‘뜻을 합하며’와 ‘한 마음을 품어’
를 반복하여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일치를 권면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일치를
강조한 이유는 이교도의 핍박 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치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
라(Hendriksen) 빌립보 교회내의 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Kent).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바울은 본절에서 ‘일치’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소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허영’의 헬라어 ‘케노독
시안'(* )은 ‘케노스'(* , ‘내용 없는’)와 ‘독사'(*
, ‘영광’)의 합성어로서 ‘내용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높
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서 교회의 ‘불일치’를 초래하게 된
다. 한편 적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의 겸손으로, 이 겸손을 통해서 사람 앞에서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이룰 수 있다(벧전 5:5,6; Martin). 당시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노예 근성에서 비
롯된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하였다(Lenski, Hawthorne).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땅
에 오셔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8절;요 13:1-20)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
이 되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 서로 섬김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
을 충만케 하라 – ‘돌아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코푼테스'(*
)로 ‘목표 혹은 목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표나 목적의 내용’에 대
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것을 ‘이익’이나 ‘생활의 어려움’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이익 뿐만 아니라 다른사람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
한다(Moffatt). (2)혹자는 이것을 ‘동료 그리스도인의 은사나 자질’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은사도 잘 관찰하여 그것을 본받아라’는 의미
로 해석한다(Lightfoot).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은 교
회내에서 자신의 이익과 은사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은사를 잘 살펴
서 서로를 포용하며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Kent, Martin, Muller).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
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 )
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형체와 영광이
동일시되며(출 16:10;24:15,16;레 9:6,23;민 12:8;14:10)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
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셨기 때문에(요 17:5;고후 4:4;골 1:15), ‘본체’를 ‘영광’으로
해석한다(Behm, Fitzmyer). 그러나 이 해석은 7절의 ‘종의 형체'(*
, 모르펜 둘루)에서 나타나는 ‘고난당함’을 설명할 수 없다(Hendriksen, Hawth
orne). (2)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으로 이해한다(Muller,
Lightfoot, Kent, Hawthorne, Vincen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존제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이다. (1) 혹자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그리스도께서 장차 취하실 영광이지만 고난을
통과하기까지 유보하셨다고 해석한다(Martin, Stauffer). (2) 혹자는 본래 그리스도께
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위해 자신의 영광
을 포기하셨다고 해석한다(Muller, Hawthorne, Lightfoot).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의 영광은 하나님
과 동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2:7
자기를 비어 – ‘자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우톤'(* )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어’의 헬라어 ‘에케노센'(* )에 대해
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
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
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
님의 속성 즉 무소 부재, 전지 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
위의 견해들 중 세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
종의 형체를 가져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Hawthorne). ‘종’에 대해서 혹자는 사 52:13-53:12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J. Jeremias, Lohmeyer). 그러나
본절의 ‘종’은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주’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
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낸다(Renqstorf, Hawthorne).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
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한다(막
10:45;눅 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 )는
‘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시사한다(Kent, Lincol
-n).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에 죽으심이라 –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
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데
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포기하셔서 하
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히 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
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
소센'(* )은 ‘휘페르'(* , ‘위로’)와 ‘휩소스'(* ,
‘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이다(Kent). 이것은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Hawthorne).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 으로 무엇을 가리
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De Wette),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Vincent).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
는 ‘주’를 가리킨다(Muller, Weiss, Martin, Kent).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
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Hawthorne).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
름에 꿇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주’라는 이름을주신 목적
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여 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
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은 앞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뛰어난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를 가리킨다(Lightfoot, Michael, Moule, Plummer). 그리스도께서
‘주'(主)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할 대상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늘에 있는 자들'(*
, 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 , 에피게이온) ‘땅 아
래 있는 자들'(* , 카타크도니온)이다. 세 대상의 헬라어는 남성
과 중성 둘 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남성으로 이해해서 이성적(理
性的)이며 생물적(生物的) 존재인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nt, Muller, Martin). 이들은 ‘에푸라니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
들, ‘에피게이온’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 사단의 무리와 지옥에 있
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혹자는 중성으로 해석해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주로 경배하며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oule, Hawthorne). 이
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
느니라 –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
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
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 ,B, P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
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 )를 사용하여 ‘시인할 것이다’라는 미
래적 의미로 기술한다(A, C, D, Textus Receptus).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 )는 ‘캄프토’
(* ,’굽히다’)의 제1부정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Kent, Hawthorne).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Kent).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
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
(Muller, Kent). 본절의 권면은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
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
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
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
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
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
을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곤'(* )
은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
시는 분임을 시사한다(Hendriksen).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것을 인
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Kent).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
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교훈이다(Hawthorne
, Lenski).
=====2:14
모든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원망’은 ‘투덜대는 불평’을 의미하며 ‘시비’
는 ‘악의(惡意) 있는 논쟁’을 의미한다. 결국 사소한 일을 가지고 ‘악의있는 마음으
로 불평하는태도’를 가리킨다. 후자는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출 15-17;민 14-17)들을 염두에 두고 서로 유비(類比)시켜 기록한 것으
로 추측한다(Ken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와
같은 추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전혀없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를 빙자하여 하나님께 도전한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순수히 교회 내부의
불화(2절)이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바울은 교회내에서 불평과 싸움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기를 권면한다.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빛들로 나타내며 – ‘흠이 없고’는 타인에게 책
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순전하여’는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
이 전혀 섞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
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성품을 닮아서 세상에 빛을 나타내기를 바라
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 으로서 온 세상을 비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마
5:14;엡 5:8).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드러내야 할 ‘세
상’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현재 살고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대이다(엡 6:12).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명은
흠이 없는 자로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밝혀’의 헬라어 ‘에페콘테스'(* )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단단히 붙들다’이며, 다른 하나는 ‘제시하다’이다. ‘에
페콘테스’의 의미에 따라서 본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혹자는 본
절을 앞절의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와 대조하여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들다’
란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Moffatt) (2) 혹자는 ‘제시하다’는 의미를 받아들여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ller, Lenski, hawth-
orne).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다른 견해가 아니다. 전자의 견해는 후자를 뒷받침해 준
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으면 그것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Kent).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하려 함이라 – 빌립보 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세상
에 밝히 드러낼 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고난가운데 복음
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 헛되지않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 때에 ‘자랑’
이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
받을 것이다(Kent).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관제’는 고대 제사의 관습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제사 행위를 연상시켜 자신의 순교를 암시한다. ‘관제
로 드릴지라도’의 헬라어 ‘스펜도마이'(* )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현재 수동태로 보아서 가까운 미래의 의미를 포함하는 형태라고 해
석하여 현재나 가까운 장래에 바울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Hendriksen, Martin). (2) 혹자는 현재 중간태로 보아서 바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교의 제단에 드리려는 심정을 고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두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신약성경에서 ‘스펜도마이’는 두 번 나타나는데(17절;딤후 4:6) 모
두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Kent). 따라서 본문은 바울 자신이 가까운 장래에 순교
당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믿음의 제물과 봉사’의 헬라어 ‘테
뒤시아 카이 레이투 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
)에서 ‘제물과 봉사’는 하나의 관사 ‘테'(* )로 수식을
받고있다. 이것은 ‘제물과 봉사’가 ‘희생적 봉사’를 의미하는 중언법적 표현임을 시
사한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
위에 자신을 관제로 즉 순교로써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음과 교회를 위한 바울
의 헌신적인 열정을 시사한다(Muller).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본절은 바울 자신의 고난과 순
교가 빌립보 교인에게 슬픔과 좌절보다는 기쁨과 소망이 되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앞
절과 본절에 ‘함께 기뻐하라’가 계속 나오므로 혹자는 17절의 ‘함께 기뻐하니’를 ‘축
하하다’로 해석한다(Meyer, Lightfoot). 이미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할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절에서 두번씩이나 기뻐하라고 권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
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왜냐하면 관제로 순교를 당할 바울에게 ‘축
하를 보낸다’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기 때문이다(Kent, Muller).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
를 받으려 함이니 –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희망한다. 디모데를 보
내려는 목적은 ‘안위를 받기 위함’이다.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카고 유프쉬코'(* )에서 ‘카고'(* , ‘나도 또
한’)는 ‘에고'(* , ‘나’)와 강조형 용법의 ‘카이'(* , ‘또한’)가 합성된 것
으로 결국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려 한 목적이 두 가지였음을 나타낸다. 그 두가지 목
적은 (1) 빌립보 교인에게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며
(2)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바울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이다.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 ‘뜻
을 같이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소프쉬콘'(* )은 ‘이소스'(*
, ‘동등한’)와 ‘프쉬케'(* , ‘혼’)의 합성어이다.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시 55:13의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를 칠십인역으로 번역하는 과
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그 뜻은’친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다’를 의
미한다(RSV). (2) 문자적인 해석으로 ‘같은 심령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본절의 ‘이소
프쉬콘’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 주위에 디모데
를 제외하면 친밀하게 돌보는 자가 없음을 뜻하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의 생
각과 뜻을 같이 하는자는 디모데 뿐임을 의미한다(Lenski). 한편 ‘너희 사정을 진실
히 생각할’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빌립보 교회를 잘 목양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Kent).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 본절에서 바
울이 책망하고 있는 ‘자기 일을 구하는 자’가 구체적 으로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바
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람을 파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주변사람들에게 언급하였
으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문제와 유익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서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하고 있다(Muller, Kent).
=====2:22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견키로 한 후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디모데를 천거한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 지방
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으
며(행 16:3),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바울이 휘말려 있을 때 바
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巡廻)하며 심방하였고(행 19:22) 바울의 제3차 전
도 여행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하였다(행
20:4). 빌립보 교인들은 이러한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 디모데는 주 안에서 바울의 신실한 아들이었다(고전
4:17;딤전 1:2;딤후 1:2). 이것은 바울과 디모데 사이가 매우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한
다(Hawthorne).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 선포를 하였다(Kent, Hawthorne).
=====2:23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 ‘내 일이 어떻게
될것을 보아서’는 바울이 곧 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안 후에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겠다고 밝히고 있다
(Martin, Kent). 혹자는 이 해석에 대해 반대한다(Hawthorne). 왜냐하면 성도들을 그
토록 사랑하는 바울이 자기의 신상문제로 인해 교회의 화급한 문제를 제쳐두고 디모데
파송을 연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연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기에 우리가 알수는 없으나 재판의 문제 때문에 연
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awthorn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비
록 판결의 내용이 지극히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나 빌립보 교인 모두 결과
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아서’의 헬라어 ‘아피도'(* )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한 사실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바울의 관심이 재판 결과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재판 결과를 알리기 위해 디모데를 잠시 지체(遲滯)시
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Lenski).
=====2: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이 어떻게 풀려날 것을 확신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는 석방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1:25). 석방에 대한 그의 확신은 ‘주
안에서’이루어졌다. ‘주 안에서’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주의 계획
과 바램에 따라 결정됨을 시사한다(고전 4:19). 본문은 바울 자신의 미래 문제가 자신
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나온 고백이다(Hawthorne).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 ‘에바브로
디도’의 축약형은 ‘에바브라’이다.이 사람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된 ‘에바브라’
와는 다른 인물로(골 1:7;4:12;몬 1:23), 골로새서에서 언급된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이고 본절의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다(Muller). ‘에바브로디도’는 본서
를 빌립보 교회에 전달한 자로서(Kent) 바울은 이를 다섯 가지 칭호로 부르고 있다.
나의 형제요 –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
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는 자이다.
함께 수고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네르곤'(* )으로서
‘동역자’를 의미한다.’동역자’는 복음증거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
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Martin,Ha-
wthorne).
함께 군사된 자요 –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
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계속해서 고난당하였음을 암시한다(몬 1:2).
너희 사자로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론'(* )은 문
자적으로 ‘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보냄을 받은 자’임을 시사한
다. 에바브로디도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권위’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H
-awthorne).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 ‘돕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
)은 문자적으로 ‘봉사자’란 의미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도와 주기 위해서 보낸 자이다.
=====2:26
본절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하는 두 가지 이유이다(Ha-
wthorne, Muller).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 ‘간절히 사모하고’의 헬라어 ‘에피포돈'(*
)은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에피포톤’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
랑하는 마음과(1:8) 갓난 아이가 젖을 간절히 원하는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벧전
2:2).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고 보고 싶어했는
지를 암시한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의 열망 때문에 빌립보 교회로 보내려고 하
였다.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심히 근심한지라’의 헬
라어 ‘아데모논'(* )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건강 문제로 빌립보 교회가 염려함을 듣고 자
신의 건강 문제 보다는 교회에 대해 더 크게 염려함을 시사한다. 한편 에바브로디도가
걸린 병에 대해서 혹자는 향수병과 과로라고 추측한다(Hawthorne). 또한 혹자는 바울
의 시중에 따른 과로는 인정하나 향수병은 거부한다(Lenski). 왜냐하면 문맥상 바울의
석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에바브로디도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면서 향수병
에 빠진다는 것은 타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
며 분명히 알수는 없다.
=====2: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하여서 거의 죽게 될 뻔했으나 하
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했고 치유 과정이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병
세나 치유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의 관
심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 과정 보다는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 즉 ‘하나님이 그
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하나
님의 긍휼이 자신에게도 미쳤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바울이 주의 사역에 헌신한 종들
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았음을
의미한다(Hawthorne).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 이상을 바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에바브
로디도의 병세 악화가 빌립보 교인들을 엄청난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을 인식하
였다(Kent). 바울의 근심은 단순히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
의병세 악화나 사망이 초래할 빌립보 교인들의 충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에바
브로디도의 회복은 바울이 안고 있던 이중(二重)의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2:28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 ‘보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펨프사'(*
)는 서간체 부정과거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편지와 함께 이미 떠났음을 보여
준다. 한편 ‘더욱 급히’의 헬라어 ‘스푸다이오테로스'(*
)는 ‘보다 급하게’를 의미하는 비교급으로 중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에바
브로디도를 급하게 보냈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급하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이유는 빌
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빨리 만나봄으로 근심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다시 활기
를 찾고 바울자신도 근심을 덜기 위함이다(Hawthorne, Hendriksen, Kent).
=====2:29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 여
기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가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
의미가 달라진다. (1) 만약 동사 ‘영접하고’를 수식한다면 본절 ‘주께서 에바브로디도
를 영접하시듯이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5:7). (2)만약 ‘모
든 기쁨’을 수식한다면 본절 ‘주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인
순수한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6:2). 비록 강조하는 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 문맥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
나 주 안에서 한 형제된 동료 그리스도인을 기쁜 마음으로 존귀히 여기며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2:30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
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
지어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다. ‘돌아보지 아니한’의 헬
라어 ‘파라볼류사메노스'(* )는 본래 ‘도박사가 돈을
따기 위해 모험’을 하거나 ‘탐험가가 값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위험’을 의미
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조력자로 봉사하는 일이 이처럼 헌신적이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전해주면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대하라고 권면한다(Ha-
whorne, Hendriksen, Martin).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일’의 헬라어는 ‘레이투르
기아스'(* ,’봉사’ )로서 복음전파 사역을 의미한다.빌립보 교인
들은 바울과 함께 동참해서 복음 선포 사역을 감당해야 했으나, 할 수 없음으로 대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던 것이다(Martin, Kent).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
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만 했다.
헬라어 빌립보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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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티스 운 파라클레시스 엔 크리스토 에이 티 파라뮈디온 아가페스 에이 티스 코이노니아 프뉴마토스 에이 티스 스플랑크나 카이 오잌티르모이
개역개정,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새번역,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자비와 긍휼이 있거든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영어NIV,1 If you have any encouragement from being united with Christ, if any comfort from his love, if any fellowship with the Spirit, if any tenderness and compassion,
영어NASB,1 If therefore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if there is any consolation of love, if there is any fellowship of the Spirit, if any affection and compassion,
영어MSG,1 If you’ve gotten anything at all out of following Christ, if his love has made any difference in your life, if being in a community of the Spirit means anything to you, if you have a heart, if you care–
영어NRSV,1 If then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any consolation from love, any sharing in the Spirit, any compassion and sympathy,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ι τις ουν παρακλησις εν χριστω ει τι παραμυθιον αγαπης ει τις κοινωνια πνευματος ει τινα σπλαγχνα και οικτιρμοι
라틴어Vulgate,1 si qua ergo consolatio in Christo si quod solacium caritatis si qua societas spiritus si quid viscera et miserationes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ם יש תוכחה במשיח אם תנחומות האהבה אם התחברות הרוח אם רחמים וחמלה׃
성 경: [빌2:1]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본절은 ‘에이'(*, ‘만약’)로 시작하는 네 개의 조건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안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나타낸다. 이런 덕목은 신자 개인의 윤리적 고상함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갈 때에만얻게 되는 것이다(Lenski). (1) 무슨 권면이나 – 바울이 교회에 대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한 것처럼(4:2;롬 12:1;15:30; 16:17;고전 1:10;4:16;16:15;엡 4:1;살전 2:11,12;5:14)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권면해야 한다. (2) 사랑에 무슨 위로나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사랑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로해야 한다. (3)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토스'(*)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의 부재(不在)를 이유로 ‘인간의 영’ 혹은 ‘마음’이라고 해석하여 본절 ‘상호간의 조화’ 혹은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Hendriksen). 그러나 관사 없이도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롬 7:6;고전 2:4;갈3:3;5:16,18,25), 대개의 경우 ‘교제’는 영적 교제를 시사하기 때문에 ‘프뉴마토스’가 불필요하다. 따라서 본절의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교제를나누어야 함을 시사한다(Hawthorne). (4)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긍휼’은 사랑에서 비롯된 ‘동정’이나 ‘애정’을 가리키며, ‘자비’는 ‘긍휼’에서 비롯된 의부적 표현이다(Martin).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자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플레로사테 무 텐 카란 히나 토 아우토 프로네테 텐 아우텐 아가펜 에콘테스 쉼프쉬코이 토 헨 프로눈테스
개역개정,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새번역,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우리말성경,2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나타내며 한마음으로 같은 것을 생각함으로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십시오.
가톨릭성경,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영어NIV,2 then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purpose.
영어NASB,2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of the same mind, maintaining the same love, united in spirit, intent on one purpose.
영어MSG,2 then do me a favor: Agree with each other, love each other, be deep-spirited friends.
영어NRSV,2 make my joy complete: be of the same mind, having the same love, being in full accord and of one mind.
헬라어신약Stephanos,2 πληρωσατε μου την χαραν ινα το αυτο φρονητε την αυτην αγαπην εχοντες συμψυχοι το εν φρονουντες
라틴어Vulgate,2 implete gaudium meum ut idem sapiatis eandem caritatem habentes unianimes id ipsum sentientes
히브리어Modern,2 השלימו נא את שמחתי בהיות לכם לב אחד ואהבה אחת ונפש אחת ורצון אחד׃
성 경: [빌2:2]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 ‘마음을 같이하여’의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테'(*)는 문자적으로’생각을 같이 하여’라는 의미이나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나타낸다(Meyer, Hawthorne).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와 거의 동일한 의미의 ‘뜻을 합하며’와 ‘한 마음을 품어’를 반복하여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일치를 권면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일치를 강조한 이유는 이교도의 핍박 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일치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Hendriksen) 빌립보 교회내의 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다(Kent).
메덴 캍 에리데이안 메데 카타 케노돜시안 알라 테 타페이노프로쉬네 알렐루스 헤구메노이 휘페레콘타스 헤아우톤
개역개정,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새번역,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우리말성경,3 무엇을 하든지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가톨릭성경,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영어NIV,3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but in humility 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영어NASB,3 Do nothing from selfishness or empty conceit, but with humility of mind let each of you regard one another as more important than himself;
영어MSG,3 Don’t push your way to the front; don’t sweet-talk your way to the top. Put yourself aside, and help others get ahead.
영어NRSV,3 Do nothing from selfish ambition or conceit, but in humility regard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ηδεν κατα εριθειαν η κενοδοξιαν αλλα τη ταπεινοφροσυνη αλληλους ηγουμενοι υπερεχοντας εαυτων
라틴어Vulgate,3 nihil per contentionem neque per inanem gloriam sed in humilitate superiores sibi invicem arbitrantes
히브리어Modern,3 ולא תעשו דבר בדרך מריבה או כבוד שוא כי אם בשפלות רוח תחשבו איש את רעהו יותר מעצמו׃
성 경: [빌2:3]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바울은 본절에서 ‘일치’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소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허영’의 헬라어 ‘케노독시안'(*)은 ‘케노스'(*, ‘내용 없는’)와 ‘독사'(*, ‘영광’)의 합성어로서 ‘내용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서 교회의 ‘불일치’를 초래하게 된다. 한편 적극적 측면에서 일치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으로, 이 겸손을 통해서 사람 앞에서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이룰 수 있다(벧전 5:5,6; Martin). 당시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노예 근성에서 비롯된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하였다(Lenski, Hawthorne).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심으로(8절;요 13:1-20)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이 되었다. 이런 ‘겸손’을 통해서 서로 섬김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
메 타 헤아우톤 헤카스토스 스코푼테스 알라 카이 타 헤테론 헤카스토이
개역개정,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새번역,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말성경,4 여러분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십시오.
가톨릭성경,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영어NIV,4 Each of you should look not only to your own interests, but also to the interests of others.
영어NASB,4 do not merely look out for your own personal interests, but also for the interests of others.
영어MSG,4 Don’t be obsessed with getting your own advantage. Forget yourselves long enough to lend a helping hand.
영어NRSV,4 Let each of you look not to your own interests, but to the interests of 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η τα εαυτων εκαστος σκοπειτε αλλα και τα ετερων εκαστος
라틴어Vulgate,4 non quae sua sunt singuli considerantes sed et ea quae aliorum
히브리어Modern,4 כל אחד אל ידאג לאשר לו לבדו כי אם גם לאשר לחברו׃
성 경: [빌2:4]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돌아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코푼테스'(*)로 ‘목표 혹은 목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표나 목적의 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것을 ‘이익’이나 ‘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이익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Moffatt). (2)혹자는 이것을 ‘동료 그리스도인의 은사나 자질’ 등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은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은사도 잘 관찰하여 그것을 본받아라’는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내에서 자신의 이익과 은사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은사를 잘 살펴서 서로를 포용하며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Kent, Martin, Muller).
투토 프로네이테 엔 휘민 호 카이 엔 크리스토 예수
개역개정,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새번역,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 ㉠또는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태도입니다’
우리말성경,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성경,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영어NIV,5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영어NASB,5 Have this attitude in yourselves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영어MSG,5 Think of yourselves the way Christ Jesus thought of himself.
영어NRSV,5 Let the same mind be in you that was in Christ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ουτο γαρ φρονεισθω εν υμιν ο και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라틴어Vulgate,5 hoc enim sentite in vobis quod et in Christo Iesu
히브리어Modern,5 כי הרוח ההיא אשר היתה במשיח תהי גם בכם׃
성 경: [빌2:5]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호스 엔 모르페 데우 휲아르콘 우크 하르팍몬 헤게사토 토 에이나이 이사 데오
개역개정,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새번역,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말성경,6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가톨릭성경,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영어NIV,6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영어NASB,6 who, although He existed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영어MSG,6 He had equal status with God but didn’t think so much of himself that he had to cling to the advantages of that status no matter what.
영어NRSV,6 who,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be exploit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ς εν μορφη θεου υπαρχων ουχ αρπαγμον ηγησατο το ειναι ισα θεω
라틴어Vulgate,6 qui cum in forma Dei esset non rapinam arbitratus est esse se aequalem Deo
히브리어Modern,6 אשר אף כי היה בדמות האלהים לא חשב לו לשלל היותו שוה לאלהים׃
성 경: [빌2:6]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페'(*)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형체와 영광이 동일시되며(출 16:10;24:15,16;레 9:6,23;민 12:8;14:10)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나누셨기 때문에(요 17:5;고후 4:4;골 1:15), ‘본체’를 ‘영광’으로해석한다(Behm, Fitzmyer). 그러나 이 해석은 7절의 ‘종의 형체'(*, 모르펜 둘루)에서 나타나는 ‘고난 당함’을 설명할 수 없다(Hendriksen, Hawthorne). (2)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성품’으로 이해한다(Muller,Lightfoot, Kent, Hawthorne, Vincen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존제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과 동등됨’이 그리스도께서 장차 취하실 영광이지만 고난을 통과하기까지 유보하셨다고 해석한다(Martin, Stauffer). (2) 혹자는 본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셨다고 해석한다(Muller, Hawthorne, Lightfoo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의 영광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알라 헤아우톤 에케노센 모르펜 둘루 라본 엔 호모이오마티 안드로폰 게노메노스 카이 스케마티 휴레데이스 호스 안드로포스
개역개정,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새번역,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우리말성경,7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가톨릭성경,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영어NIV,7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영어NASB,7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영어MSG,7 Not at all. When the time came, he set aside the privileges of deity and took on the status of a slave, became human!
영어NRSV,7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lave, being born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헬라어신약Stephanos,7 αλλ εαυτον εκενωσεν μορφην δουλου λαβων εν ομοιωματι ανθρωπων γενομενος
라틴어Vulgate,7 sed semet ipsum exinanivit formam servi accipiens in similitudinem hominum factus et habitu inventus ut homo
히브리어Modern,7 כי אם הפשיט את עצמו וילבש דמות עבד וידמה לבני אדם וימצא בתכונתו כבן אדם׃
성 경: [빌2:7]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자기를 비어 – ‘자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우톤'(*)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어’의 헬라어 ‘에케노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Plummer).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Hendriksen). (3) 하나님의 대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Lightfoot).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Calvin).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 부재, 전지 전능 등을 포기하였다(Forsyth, Mackintosh, Martin).위의 견해들 중 세번째가 타당한 듯하다(Kent).
종의 형체를 가져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한다(Hawthorne). ‘종’에 대해서 혹자는 사 52:13-53:12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J. Jeremias, Lohmeyer). 그러나 본절의 ‘종’은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주’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낸다(Renqstorf, Hawthorne).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한다(막10:45;눅 22:27).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는 ‘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시사한다(Kent, Lincol-n). 그리스도는 참인간이시다.
에타페이노센 헤아우톤 게노메노스 휘페코오스 메크리 다나투 다나투 데 스타우루
개역개정,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새번역,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8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영어NIV,8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death–even death on a cross!
영어NASB,8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even death on a cross.
영어MSG,8 Having become human, he stayed human. It was an incredibly humbling process. He didn’t claim special privileges. Instead, he lived a selfless, obedient life and then died a selfless, obedient death–and the worst kind of death at that: a crucifixion.
영어NRSV,8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even death on a cross.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σχηματι ευρεθεις ως ανθρωπος εταπεινωσεν εαυτον γενομενος υπηκοος μεχρι θανατου θανατου δε σταυρου
라틴어Vulgate,8 humiliavit semet ipsum factus oboediens usque ad mortem mortem autem crucis
히브리어Modern,8 וישפל את נפשו ויכנע עד מות עד מיתת הצליבה׃
성 경: [빌2:8]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로우신 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시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심에도 불구하고 동등됨을 포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히 5:8).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Kent, Hawthorne).
디오 카이 호 데오스 아우톤 휘페륖소센 카이 에카리사토 아우토 토 오노마 토 휘페르 판 오노마
개역개정,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새번역,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영어NIV,9 Therefore God exalted him to the highest place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영어NASB,9 Therefore also God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영어MSG,9 Because of that obedience, God lifted him high and honored him far beyond anyone or anything, ever,
영어NRSV,9 Therefore God also highly exalted him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9 διο και ο θεος αυτον υπερυψωσεν και εχαρισατο αυτω ονομα το υπερ παν ονομα
라틴어Vulgate,9 propter quod et Deus illum exaltavit et donavit illi nomen super omne nomen
히브리어Modern,9 על כן גם האלהים הגביהו מאד ויתן לו שם נעלה על כל שם׃
성 경: [빌2:9]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은 ‘휘페르'(*, ‘위로’)와 ‘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지다’라는 의미이다(Kent).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시사한다(Robertson, Hawthorne).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바울은 이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라고 주장하며(De Wette),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Vincent). 그러나 문맥상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를 가리킨다(Muller, Weiss, Martin, Kent).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시사한다(Hawthorne).
히나 엔 토 오노마티 예수 판 고뉘 캄프세 에푸라니온 카이 에피게이온 카이 카타크도니온
개역개정,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새번역,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 ㉡사 45:23(칠십인역)
우리말성경,10 이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가톨릭성경,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영어NIV,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영어NASB,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of those who are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영어MSG,10 so that all created beings in heaven and on earth–even those long ago dead and buried–will bow in worship before this Jesus Christ,
영어NRSV,10 so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end,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10 ινα εν τω ονοματι ιησου παν γονυ καμψη επουρανιων και επιγειων και καταχθονιων
라틴어Vulgate,10 ut in nomine Iesu omne genu flectat caelestium et terrestrium et infernorum
히브리어Modern,10 למען אשר בשם ישוע תכרע כל ברך אשר בשמים ובארץ ומתחת לארץ׃
성 경: [빌2:10]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주’라는 이름을 주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하여 주로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은 앞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뛰어난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주’를 가리킨다(Lightfoot, Michael, Moule, Plummer). 그리스도께서 ‘주'(主)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할 대상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늘에 있는 자들'(*, 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 에피게이온) ‘땅 아래 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다. 세 대상의 헬라어는 남성과 중성 둘 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남성으로 이해해서 이성적(理性的)이며 생물적(生物的) 존재인 천사와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nt, Muller, Martin). 이들은 ‘에푸라니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 ‘에피게이온’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 ‘카타크도니온’이 사단의 무리와 지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혹자는 중성으로 해석해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주로 경배하며 복종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oule, 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카이 파사 글로싸 엨소몰로게세타이 호티 퀴리오스 예수스 크리스토스 에이스 돜산 데우 파트로스
개역개정,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새번역,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영어NIV,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영어NASB,11 and that every tongue should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영어MSG,11 and call out in praise that he is the Master of all, to the glorious honor of God the Father.
영어NRSV,11 and every tongue should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πασα γλωσσα εξομολογησηται οτι κυριος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εις δοξαν θεου πατρος
라틴어Vulgate,11 et omnis lingua confiteatur quia Dominus Iesus Christus in gloria est Dei Patris
히브리어Modern,11 וכל לשון תודה כי אדון הוא ישוע המשיח לכבוד אלהים האב׃
성 경: [빌2:11]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겸손의 촉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어떤 사본에서는 제1부정과거 가정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하였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기술한다(*,B, P )다른 사본에서는 미래 직설법인 ‘엑소몰로게세타이'(*)를 사용하여 ‘시인할 것이다’라는 미래적 의미로 기술한다(A, C, D, Textus Receptus). 두 가지 경우 중 문맥상 전자가 더타당하다. 왜냐하면 10절의 ‘꿇게 하시고’의 헬라어 ‘캄프세'(*)는 ‘캄프토'(*,’굽히다’)의 제1부정과거 가정법이기 때문이다(Kent, Hawthor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주’라는 칭호를 주심으로 모든 만물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라고 시인하게 하셨다. ‘주’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 뜻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Kent).
호스테 아가페토이 무 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 메 호스 엔 테 파루시아 무 모논 알라 뉜 폴로 말론 엔 테 아푸시아 무 메타 포부 카이 트로무 텐 헤아우톤 소테리안 카테르가제스데
개역개정,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새번역,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우리말성경,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항상 순종했던 것처럼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십시오.
가톨릭성경,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늘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영어NIV,12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영어NASB,12 So then, my beloved, just as you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영어MSG,12 What I’m getting at, friends, is that you should simply keep on doing what you’ve done from the beginning. When I was living among you, you lived in responsive obedience. Now that I’m separated from you, keep it up. Better yet, redouble your efforts. Be energetic in your life of salvation, reverent and sensitive before God.
영어NRSV,12 Therefore, my beloved, just as you have always obeyed me, not only in my presence, but much more now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헬라어신약Stephanos,12 ωστε αγαπητοι μου καθως παντοτε υπηκουσατε μη ως εν τη παρουσια μου μονον αλλα νυν πολλω μαλλον εν τη απουσια μου μετα φοβου και τρομου την εαυτων σωτηριαν κατεργαζεσθε
라틴어Vulgate,12 itaque carissimi mei sicut semper oboedistis non ut in praesentia mei tantum sed multo magis nunc in absentia mea cum metu et tremore vestram salutem operamini
히브리어Modern,12 לכן חביבי כאשר שמעתם לי בכל עת כן לא לבד בהיותי עמכם כי עוד יתר עתה אשר אני רחוק מכם תיגעו בתשועת נפשתיכם ביראה וברעדה׃
성 경: [빌2:12]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본절의 권면은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데오스 가르 에스틴 호 에네르곤 엔 휘민 카이 토 델레인 카이 토에네르게인 휘페르 테스 유도키아스
개역개정,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새번역,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말성경,13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결단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어NIV,13 for it is God who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according to his good purpose.
영어NASB,13 for it is God who is at work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영어MSG,13 That energy is God’s energy, an energy deep within you, God himself willing and working at what will give him the most pleasure.
영어NRSV,13 for it is God who is at work in you, enabling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 θεος γαρ εστιν ο ενεργων εν υμιν και το θελειν και το ενεργειν υπερ της ευδοκιας
라틴어Vulgate,13 Deus est enim qui operatur in vobis et velle et perficere pro bona voluntate
히브리어Modern,13 כי האלהים הוא הפעל בכם גם לחפץ גם לפעל כפי רצונו׃
성 경: [빌2:13]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곤'(*)은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진정한 힘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결심과 소원까지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시사한다(Hendriksen). 그렇다고 해서 본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나 책임적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계획과 성취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인도하시되 강제적인 방법이나 수단으로 하시지 않는다(Kent).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없을 만큼의 신비일지 모르지만 바울이나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교훈이다(Hawthorne, Lenski).
판타 포이에이테 코리스 공귀스몬 카이 디알로기스몬
개역개정,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새번역,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4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분은 불평이나 분쟁 없이 하십시오.
가톨릭성경,14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영어NIV,14 Do everything without complaining or arguing,
영어NASB,14 Do all things without grumbling or disputing;
영어MSG,14 Do everything readily and cheerfully–no bickering, no second-guessing allowed!
영어NRSV,14 Do all things without murmuring and arguing,
헬라어신약Stephanos,14 παντα ποιειτε χωρις γογγυσμων και διαλογισμων
라틴어Vulgate,14 omnia autem facite sine murmurationibus et haesitationibus
히브리어Modern,14 עשו כל דבר בלא תלנות ובלא מזמות׃
성 경: [빌2:14]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원망’은 ‘투덜대는 불평’을 의미하며 ‘시비’는 ‘악의(惡意) 있는 논쟁’을 의미한다. 결국 사소한 일을 가지고 ‘악의있는 마음으로 불평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후자는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출 15-17;민 14-17)들을 염두에 두고 서로 유비(類比)시켜 기록한 것으로 추측한다(Kent).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와같은 추정을 내릴 만한 근거가 전혀없으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를 빙자하여 하나님께 도전한 반면에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순수히 교회 내부의 불화(2절)이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바울은 교회내에서 불평과 싸움이 없이모든 일을 행하기를 권면한다.
히나 게네스데 아멤프토이 카이 아케라이오이 테크나 데우 아모마 메손 게네아스 스콜리아스 카이 디에스트람메네스 엔 호이스 파이네스데 호스 포스테레스 엔 코스모
개역개정,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새번역,15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5 이는 여러분이 흠 없고 순전한 사람들이 돼 뒤틀리고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책망받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에서 하늘의 별들처럼 빛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5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영어NIV,15 so that you may become blameless and pure, children of God without fault in a crooked and depraved generation, in which you shine like stars in the universe
영어NASB,15 that you may prove yourselves to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above reproac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perverse generation, among whom you appear as lights in the world,
영어MSG,15 Go out into the world uncorrupted, a breath of fresh air in this squalid and polluted society. Provide people with a glimpse of good living and of the living God. Carry the light-giving Message into the night
영어NRSV,15 so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perverse generation, in which you shine like stars in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ινα γενησθε αμεμπτοι και ακεραιοι τεκνα θεου αμωμητα εν μεσω γενεας σκολιας και διεστραμμενης εν οις φαινεσθε ως φωστηρες εν κοσμω
라틴어Vulgate,15 ut sitis sine querella et simplices filii Dei sine reprehensione in medio nationis pravae et perversae inter quos lucetis sicut luminaria in mundo
히브리어Modern,15 למען תהיו נקיים וטהורים בני אלהים לא מום בם בתוך דור עקש ופתלתל אשר תאירו ביניהם כמאורת בעולם׃
성 경: [빌2:15]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빛들로 나타내며 – ‘흠이 없고’는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순전하여’는 이질적인 것이나 온전치 못한 것이 전혀 섞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타인에게 책망받을 만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성품을 닮아서 세상에 빛을 나타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 으로서 온 세상을 비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마5:14;엡 5:8).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드러내야 할 ‘세상’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이 현재 살고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과 연합한 타락한 세대이다(엡 6:12).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명은 흠이 없는 자로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로곤 조에스 에페콘테스 에이스 카우케마 에모이 에이스 헤메란 크리스투 호티 우크 에이스 케논 에드라몬 우데 에이스 케논 에코피아사
개역개정,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6 생명의 말씀을 꼭 붙들어 그리스도의 날에 내게 자랑이 되게 하십시오. 이는 내가 헛되게 달음질하거나 헛되게 수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16 as you hold out the word of life–in order that I may boast on the day of Christ that I did not run or labor for nothing.
영어NASB,16 holding fast the word of life,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I may have cause to glory because I did not run in vain nor toil in vain.
영어MSG,16 so I’ll have good cause to be proud of you on the day that Christ returns. You’ll be living proof that I didn’t go to all this work for nothing.
영어NRSV,16 It is by your holding fast to the word of life that I can boast on the day of Christ that I did not run in vain or labor in vai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λογον ζωης επεχοντες εις καυχημα εμοι εις ημεραν χριστου οτι ουκ εις κενον εδραμον ουδε εις κενον εκοπιασα
라틴어Vulgate,16 verbum vitae continentes ad gloriam meam in die Christi quia non in vacuum cucurri neque in vacuum laboravi
히브리어Modern,16 מחזיקים בדבר החיים לתהלה לי ביום המשיח אשר לא לחנם רצתי ולא לריק יגעתי׃
성 경: [빌2:16]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밝혀’의 헬라어 ‘에페콘테스'(*)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단단히 붙들다’이며, 다른 하나는 ‘제시하다’이다. ‘에페콘테스’의 의미에 따라서 본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1) 혹자는 본절을 앞절의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와 대조하여 ‘생명의 말씀을 단단히 붙들다’란 의미로 해석한다(Lightfoot, Moffatt) (2) 혹자는 ‘제시하다’는 의미를 받아들여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ller, Lenski, hawth-orne).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다른 견해가 아니다. 전자의 견해는 후자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말씀 즉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으면 그것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Kent).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 빌립보 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세상에 밝히 드러낼 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고난가운데 복음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 헛되지 않게 되며 ‘그리스도의 날’ 즉 재림 때에 ‘자랑’이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 이 땅에서 애써 수고한 대가를 보상받을 것이다(Kent).
알라 에이 카이 스펜도마이 에피 테 뒤시아 카이 레이투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 휘몬 카이로 카이 슁카이로 파신 휘민
개역개정,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새번역,17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나의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7 이제 내가 여러분의 믿음의 제사와 예배에 내 피를 붓는 일이 있을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7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영어NIV,17 But even if I am being poured out like a drink offering on the sacrifice and service coming from your faith, I am glad and rejoice with all of you.
영어NASB,17 But even if I am being 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upon the sacrifice and service of your faith, I rejoice and share my joy with you all.
영어MSG,17 Even if I am executed here and now, I’ll rejoice in being an element in the offering of your faith that you make on Christ’s altar, a part of your rejoicing.
영어NRSV,17 But even if I am being poured out as a libation over the sacrifice and the offering of your faith, I am glad and rejoice with all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7 αλλ ει και σπενδομαι επι τη θυσια και λειτουργια της πιστεως υμων χαιρω και συγχαιρω πασιν υμιν
라틴어Vulgate,17 sed et si immolor supra sacrificium et obsequium fidei vestrae gaudeo et congratulor omnibus vobis
히브리어Modern,17 אבל אם גם אסך על זבח אמונתכם ועבודתה הנני שמח וגם שש עם כלכם׃
성 경: [빌2:17]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관제’는 고대 제사의 관습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제사 행위를 연상시켜 자신의 순교를 암시한다. ‘관제로 드릴지라도’의 헬라어 ‘스펜도마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있다. (1) 혹자는 현재 수동태로 보아서 가까운 미래의 의미를 포함하는 형태라고 해석하여 현재나 가까운 장래에 바울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Martin). (2) 혹자는 현재 중간태로 보아서 바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교의 제단에 드리려는 심정을 고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두가지 견해 중전자가 타당하다. 신약성경에서 ‘스펜도마이’는 두 번 나타나는데(17절;딤후 4:6) 모두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Kent). 따라서 본문은 바울 자신이 가까운 장래에 순교당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믿음의 제물과 봉사’의 헬라어 ‘테뒤시아 카이 레이투 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에서 ‘제물과 봉사’는 하나의 관사 ‘테'(*)로 수식을 받고 있다. 이것은 ‘제물과 봉사’가 ‘희생적 봉사’를 의미하는 중언법적 표현임을 시사한다(Kent).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위에 자신을 관제로 즉 순교로써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음과 교회를 위한 바울의 헌신적인 열정을 시사한다(Muller).
토 데 아우토 카이 휘메이스 카이레테 카이 슁카이레테 모이
개역개정,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새번역,18 여러분도 이와 같이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우리말성경,18 여러분도 함께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가톨릭성경,18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영어NIV,18 So you too should be glad and rejoice with me.
영어NASB,18 And you too, I urge you, rejoice in the same way and share your joy with me.
영어MSG,18 But turnabout’s fair play–you must join me in my rejoicing. Whatever you do, don’t feel sorry for me.
영어NRSV,18 and in the same way you also must be glad and rejoice with me.
헬라어신약Stephanos,18 το δ αυτο και υμεις χαιρετε και συγχαιρετε μοι
라틴어Vulgate,18 id ipsum autem et vos gaudete et congratulamini mihi
히브리어Modern,18 וככה שמחו אף אתם ושישו עמדי׃
성 경: [빌2:18]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성화의 촉구]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본절은 바울 자신의 고난과 순교가 빌립보 교인에게 슬픔과 좌절보다는 기쁨과 소망이 되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앞절과 본절에 ‘함께 기뻐하라’가 계속 나오므로 혹자는 17절의 ‘함께 기뻐하니’를 ‘축하하다’로 해석한다(Meyer, Lightfoot). 이미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할 내용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본절에서 두번씩이나 기뻐하라고 권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제로 순교를 당할 바울에게 ‘축하를 보낸다’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기 때문이다(Kent, Muller).
엘피조 데 엔 퀴리오 예수 티모데온 타케오스 펨프사이 휘민 히나 카고 유프쉬코 그누스 타페리 휘몬
개역개정,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새번역,19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9 내가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빨리 보내고자 하는 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알고 마음에 시원함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9 주 예수님 안에서 나는 티모테오를 여러분에게 곧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여러분의 소식을 알고 기운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영어NIV,19 I hope in the Lord Jesus to send Timothy to you soon, that I also may be cheered when I receive news about you.
영어NASB,19 But I hope in the Lord Jesus to send Timothy to you shortly, so that I also may be encouraged when I learn of your condition.
영어MSG,19 I plan (according to Jesus’ plan) to send Timothy to you very soon so he can bring back all the news of you he can gather. Oh, how that will do my heart good!
영어NRSV,19 I hope in the Lord Jesus to send Timothy to you soon, so that I may be cheered by news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9 ελπιζω δε εν κυριω ιησου τιμοθεον ταχεως πεμψαι υμιν ινα καγω ευψυχω γνους τα περι υμων
라틴어Vulgate,19 spero autem in Domino Iesu Timotheum cito me mittere ad vos ut et ego bono animo sim cognitis quae circa vos sunt
히브리어Modern,19 וקויתי בישוע אדנינו לשלח במהרה אליכם את טימותיוס למען תנוח דעתי בהודע לי דבר מעמדכם׃
성 경: [빌2:19]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희망한다. 디모데를 보내려는 목적은 ‘안위를 받기 위함’이다.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카고 유프쉬코'(*)에서 ‘카고'(*, ‘나도 또한’)는 ‘에고'(*, ‘나’)와 강조형 용법의 ‘카이'(*, ‘또한’)가 합성된 것으로 결국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려 한 목적이 두 가지였음을 나타낸다. 그 두가지 목적은 (1) 빌립보 교인에게 바울의 근황(近況)을 전하여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며(2) 디모데가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바울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이다.
우데나 가르 에코 이소프쉬콘 호스티스 그네시오스 타 페리 휘몬 메림네세이
개역개정,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새번역,20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0 디모데와 같은 마음을 품고 여러분의 형편을 진정으로 돌볼 사람이 내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0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성심껏 돌보아 줄 사람이 나에게는 티모테오밖에 없습니다.
영어NIV,20 I have no one else like him, who takes a genuine interest in your welfare.
영어NASB,20 For I have no one else of kindred spirit who will genuinely be concerned for your welfare.
영어MSG,20 I have no one quite like Timothy. He is loyal, and genuinely concerned for you.
영어NRSV,20 I have no one like him who will be genuinely concerned for your welfar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υδενα γαρ εχω ισοψυχον οστις γνησιως τα περι υμων μεριμνησει
라틴어Vulgate,20 neminem enim habeo tam unianimem qui sincera affectione pro vobis sollicitus sit
히브리어Modern,20 כי זולתו אין אתי איש כלבבי אשר בלב שלם ידאג לכם׃
성 경: [빌2:20]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 ‘뜻을 같이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소프쉬콘'(*)은 ‘이소스'(*, ‘동등한’)와 ‘프쉬케'(*, ‘혼’)의 합성어이다.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의미를 지닌다. (1) 시 55:13의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를 칠십인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다. 그 뜻은 ‘친밀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다’를 의미한다(RSV). (2) 문자적인 해석으로 ‘같은 심령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본절의 ‘이소프쉬콘’은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다.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 주위에 디모데를 제외하면 친밀하게 돌보는 자가 없음을 뜻하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바울의 생각과 뜻을 같이 하는자는 디모데 뿐임을 의미한다(Lenski). 한편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빌립보 교회를 잘 목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Kent).
호이 판테스 가르 타 헤아우톤 제투신 우 타 예수 크리스투
개역개정,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새번역,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1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1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영어NIV,21 For everyone looks out for his own interests, not those of Jesus Christ.
영어NASB,21 For they all seek after their own interests, not those of Christ Jesus.
영어MSG,21 Most people around here are looking out for themselves, with little concern for the things of Jesus.
영어NRSV,21 All of them are seeking their own interests, not those of Jesus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ι παντες γαρ τα εαυτων ζητουσιν ου τα του χριστου ιησου
라틴어Vulgate,21 omnes enim sua quaerunt non quae sunt Christi Iesu
히브리어Modern,21 כי כלם את אשר להם ידרשו ולא את אשר לישוע המשיח׃
성 경: [빌2:21]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 본절에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자기 일을 구하는 자’가 구체적 으로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사람을 파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언급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문제와 유익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서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책망을 하고 있다(Muller, Kent).
텐 데 도키멘 아우투 기노스케테 호티 호스 파트리 테크논 쉰 에모이 에둘류센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
개역개정,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새번역,22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 ㉢그, ‘그의’
우리말성경,22 여러분은 디모데의 연단을 알고 있습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하듯이 그는 복음을 위해 나를 섬겼습니다.
가톨릭성경,22 여러분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나와 함께 마치 자식과 아버지처럼 복음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어NIV,22 But you know that Timothy has proved himself, because as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the work of the gospel.
영어NASB,22 But you know of his proven worth that he served with me in the furtherance of the gospel like a child serving his father.
영어MSG,22 But you know yourselves that Timothy’s the real thing. He’s been a devoted son to me as together we’ve delivered the Message.
영어NRSV,22 But Timothy’s worth you know, how like a son with a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the work of the gospel.
헬라어신약Stephanos,22 την δε δοκιμην αυτου γινωσκετε οτι ως πατρι τεκνον συν εμοι εδουλευσεν εις το ευαγγελιον
라틴어Vulgate,22 experimentum autem eius cognoscite quoniam sicut patri filius mecum servivit in evangelium
히브리어Modern,22 ואותו ידעתם כי בחון הוא אשר כבן העבד את אביו כן היה אתי בעבודת הבשורה׃
성 경: [빌2:22]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견키로 한 후 빌립보 교인들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디모데를 천거한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디모데는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으며(행 16:3),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의 소동으로 바울이 휘말려 있을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 지역을 순회(巡廻)하며 심방하였고(행 19:22)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시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복음 전도에 동참하였다(행20:4). 빌립보 교인들은 이러한 디모데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 디모데는 주 안에서 바울의 신실한 아들이었다(고전4:17;딤전 1:2;딤후 1:2). 이것은 바울과 디모데 사이가 매우 친밀한 관계임을 시사한다(Hawthorne).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 선포를 하였다(Kent, Hawthorne).
투톤 멘 쉰 엘피조 펨프사이 호스 안 아피도 타 페리 에메 엨사우테스
개역개정,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새번역,23 그러므로 내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를 곧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말성경,23 그러므로 나는 내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즉시 그를 보내고 싶습니다.
가톨릭성경,23 그래서 내 형편이 어찌될지 아는 대로, 그를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어NIV,23 I hope, therefore, to send him as soon as I see how things go with me.
영어NASB,23 Therefore I hope to send him immediately, as soon as I see how things go with me;
영어MSG,23 As soon as I see how things are going to fall out for me here, I plan to send him off.
영어NRSV,23 I hope therefore to send him as soon as I see how things go with 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τουτον μεν ουν ελπιζω πεμψαι ως αν απιδω τα περι εμε εξαυτης
라틴어Vulgate,23 hunc igitur spero me mittere mox ut videro quae circa me sunt
히브리어Modern,23 ואתו אקוה לשלח אליכם מהר כאשר אראה מה יהיה לי׃
성 경: [빌2:23]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는 바울이 곧 재판을 받게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안 후에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겠다고 밝히고 있다(Martin, Kent). 혹자는 이 해석에 대해 반대한다(Hawthorne). 왜냐하면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바울이 자기의 신상문제로 인해 교회의 화급한 문제를 제쳐두고 디모데 파송을 연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연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기에 우리가 알수는 없으나 재판의 문제 때문에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awthorn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못하다. 비록 판결의 내용이 지극히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나 빌립보 교인 모두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 ‘보아서’의 헬라어 ‘아피도'(*)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한 사실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바울의 관심이 재판 결과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재판 결과를 알리기 위해 디모데를 잠시 지체(遲滯)시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Lenski).
페포이다 데 엔 퀴리오 호티 카이 아우토스 타케오스 엘류소마이
개역개정,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새번역,24 그리고 나도 곧 가게 되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우리말성경,24 그리고 나 자신도 곧 가게 되리라고 주 안에서 확신합니다.
가톨릭성경,24 나 자신도 곧 가게 되리라고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영어NIV,24 And I am confident in the Lord that I myself will come soon.
영어NASB,24 and I trust in the Lord that I myself also shall be coming shortly.
영어MSG,24 And then I’m hoping and praying to be right on his heels.
영어NRSV,24 and I trust in the Lord that I will also come soon.
헬라어신약Stephanos,24 πεποιθα δε εν κυριω οτι και αυτος ταχεως ελευσομαι
라틴어Vulgate,24 confido autem in Domino quoniam et ipse veniam ad vos cito
히브리어Modern,24 ובטחתי באדנינו אשר גם אנכי אבוא אליכם במהרה׃
성 경: [빌2:24]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바울이 어떻게 풀려날 것을 확신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그는 석방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1:25). 석방에 대한 그의 확신은 ‘주안에서’이루어졌다. ‘주 안에서’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주의 계획과 바램에 따라 결정됨을 시사한다(고전 4:19). 본문은 바울 자신의 미래 문제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나온 고백이다(Hawthorne).
아낭카이온 데 헤게사멘 에파프로디톤 토 아델폰 카이 쉬네르곤 카이 쉬스트라티오텐 무 휘몬 데 아포스톨론 카이 레이투르곤 테스 크레이아스 무 펨프사이 프로스 휘마스
개역개정,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새번역,25 그러나 나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그, ‘사도’
우리말성경,25 그러나 나는 내 형제이며 동역자이며 함께 군사 된 사람이며 또한 여러분의 사도이며 내 필요를 섬기는 사람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경,25 나는 에파프로디토스도 여러분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고 협력자이며 전우이고 여러분의 대표이며, 내가 곤궁할 때에 나를 도와준 봉사자입니다.
영어NIV,25 But I think it is necessary to send back to you Epaphroditus, my brother, fellow worker and fellow soldier, who is also your messenger, whom you sent to take care of my needs.
영어NASB,25 But I thought it necessary to send to you Epaphroditus, my brother and fellow worker and fellow soldier, who is also your messenger and minister to my need;
영어MSG,25 But for right now, I’m dispatching Epaphroditus, my good friend and companion in my work. You sent him to help me out; now I’m sending him to help you out.
영어NRSV,25 Still, I think it necessary to send to you Epaphroditus–my brother and co-worker and fellow soldier, your messenger and minister to my need;
헬라어신약Stephanos,25 αναγκαιον δε ηγησαμην επαφροδιτον τον αδελφον και συνεργον και συστρατιωτην μου υμων δε αποστολον και λειτουργον της χρειας μου πεμψαι προς υμας
라틴어Vulgate,25 necessarium autem existimavi Epafroditum fratrem et cooperatorem et commilitonem meum vestrum autem apostolum et ministrum necessitatis meae mittere ad vos
히브리어Modern,25 ואחשב מן הצרך לשלח אליכם את אפפרודיטוס אחי ועזרי וחברי בצבא והוא שליחכם ומשרתי בצרכי׃
성 경: [빌2:25]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 ‘에바브로디도’의 축약형은 ‘에바브라’이다. 이 사람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 언급된 ‘에바브라’와는 다른 인물로(골 1:7;4:12;몬 1:23), 골로새서에서 언급된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이고 본절의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이다(Muller). ‘에바브로디도’는 본서를 빌립보 교회에 전달한 자로서(Kent) 바울은 이를 다섯 가지 칭호로 부르고 있다.
나의 형제요 –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애정을 나누는 자이다.
함께 수고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네르곤'(*)으로서 ‘동역자’를 의미한다. ‘동역자’는 복음증거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운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Martin,Ha-wthorne).
함께 군사된 자요 –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대적자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일꾼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계속해서 고난당하였음을 암시한다(몬 1:2).
너희 사자로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론'(*)은 문자적으로 ‘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보냄을 받은 자’임을 시사한다. 에바브로디도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권위’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H-awthorne).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 ‘돕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곤'(*)은 문자적으로 ‘봉사자’란 의미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필요를 도와 주기 위해서 보낸 자이다.
에페이데 에피포돈 엔 판타스 휘마스 카이 아데모논 디오티 에쿠사테 호티 에스데네센
개역개정,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새번역,26 그는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병을 앓았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었기 때문에, 몹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보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성경,26 그는 여러분 모두를 늘 사모하며 또 자기가 아프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들은 줄 알고 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가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여러분이 듣게 되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NIV,26 For he longs for all of you and is distressed because you heard he was ill.
영어NASB,26 because he was longing for you all and was distressed because you had heard that he was sick.
영어MSG,26 He has been wanting in the worst way to get back with you. Especially since recovering from the illness you heard about, he’s been wanting to get back and reassure you that he is just fine.
영어NRSV,26 for he has been longing for all of you, and has been distressed because you heard that he was ill.
헬라어신약Stephanos,26 επειδη επιποθων ην παντας υμας και αδημονων διοτι ηκουσατε οτι ησθενησεν
라틴어Vulgate,26 quoniam quidem omnes vos desiderabat et maestus erat propterea quod audieratis illum infirmatum
히브리어Modern,26 יען היותו נכסף לכלכם ונעצב מאד על אשר שמעתם כי חלה׃
성 경: [빌2:26]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본절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하는 두 가지 이유이다(Ha-wthorne, Muller).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 ‘간절히 사모하고’의 헬라어 ‘에피포돈'(*)은 강렬한 열망을 의미한다. ‘에피포톤’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1:8) 갓난 아이가 젖을 간절히 원하는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벧전2:2).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고 보고 싶어했는지를 암시한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의 열망 때문에 빌립보 교회로 보내려고 하였다.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심히 근심한지라’의 헬라어 ‘아데모논'(*)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심한 고통’을의미하는 것으로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건강 문제로 빌립보 교회가 염려함을 듣고 자신의 건강 문제 보다는 교회에 대해 더 크게 염려함을 시사한다. 한편 에바브로디도가 걸린 병에 대해서 혹자는 향수병과 과로라고 추측한다(Hawthorne). 또한 혹자는 바울의 시중에 따른 과로는 인정하나 향수병은 거부한다(Lenski). 왜냐하면 문맥상 바울의 석방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에바브로디도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면서 향수병에 빠진다는 것은 타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단순히 추측에 불과하며 분명히 알수는 없다.
카이 가르 에스데네센 파라플레시온 다나토 알라 호 데오스 엘레에센 아우톤 우크 아우톤 데 모논 알라 카이 에메 히나 메 뤼펜 에피 뤼펜 스코
개역개정,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새번역,27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만이 아니라 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나에게 겹치는 근심이 생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27 사실 그가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내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나로 하여금 근심 위에 근심을 갖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7 사실 그는 병이 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내가 이중으로 슬픔을 겪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영어NIV,27 Indeed he was ill, and almost died.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 him only but also on me, to spare me sorrow upon sorrow.
영어NASB,27 For indeed he was sick to the point of death,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 him only but also on me, so that I would not have sorrow upon sorrow.
영어MSG,27 He nearly died, as you know,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ly on him–he had mercy on me, too. His death would have been one huge grief piled on top of all the others.
영어NRSV,27 He was indeed so ill that he nearly died. But God had mercy on him, and not only on him but on me also, so that I would not have one sorrow after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γαρ ησθενησεν παραπλησιον θανατω αλλ ο θεος αυτον ηλεησεν ουκ αυτον δε μονον αλλα και εμε ινα μη λυπην επι λυπη σχω
라틴어Vulgate,27 nam et infirmatus est usque ad mortem sed Deus misertus est eius non solum autem eius verum etiam et mei ne tristitiam super tristitiam haberem
히브리어Modern,27 אמנם חלה חלה וגם נטה למות אבל האלהים רחם עליו ולא עליו בלבד כי גם עלי רחם שלא יבוא עלי יגון על יגון׃
성 경: [빌2:27]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하여서 거의 죽게 될 뻔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가 심각했고 치유 과정이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병세나 치유 과정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의 관심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 과정 보다는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의 간섭 즉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에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에게도 미쳤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바울이 주의 사역에 헌신한 종들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에바브로디도의 치유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았음을 의미한다(Hawthorne).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단순히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 이상을 바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가 빌립보 교인들을 엄청난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될 것을 인식하였다(Kent). 바울의 근심은 단순히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의 병세 악화나 사망이 초래할 빌립보 교인들의 충격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에바브로디도의 회복은 바울이 안고 있던 이중(二重)의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스푸다이오테로스 운 에펨프사 아우톤 히나 이돈테스 아우톤 팔린 카레테 카고 알뤼포테로스 오
개역개정,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새번역,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서둘러서 그를 보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고서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며, 나도 나의 근심을 덜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8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를 다시 만나 봄으로 기뻐하고 나 또한 마음의 고통을 덜기 위해 그를 급히 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28 그래서 나는 더욱 서둘러 그를 보냅니다.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며 나도 근심을 덜려는 것입니다.
영어NIV,28 Therefore I am all the more eager to send him, so that when you see him again you may be glad and I may have less anxiety.
영어NASB,28 Therefore I have sent him all the more eagerly in order that when you see him again you may rejoice and I may be less concerned about you.
영어MSG,28 So you can see why I’m so delighted to send him on to you. When you see him again, hale and hearty, how you’ll rejoice and how relieved I’ll be.
영어NRSV,28 I am the more eager to send him, therefore, in order that you may rejoice at seeing him again, and that I may be less anxious.
헬라어신약Stephanos,28 σπουδαιοτερως ουν επεμψα αυτον ινα ιδοντες αυτον παλιν χαρητε καγω αλυποτερος ω
라틴어Vulgate,28 festinantius ergo misi illum ut viso eo iterum gaudeatis et ego sine tristitia sim
히브리어Modern,28 לכן מהרתי לשלחו אליכם למען תראהו ותשובו לשמוח וגם ימעט יגוני׃
성 경: [빌2:28]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 ‘보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펨프사'(*)는 서간체 부정과거로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편지와 함께 이미 떠났음을 보여준다. 한편 ‘더욱 급히’의 헬라어 ‘스푸다이오테로스'(*)는 ‘보다 급하게’를 의미하는 비교급으로 중병에서 회복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하게 보냈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급하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빨리 만나봄으로 근심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다시 활기를 찾고 바울 자신도 근심을 덜기 위함이다(Hawthorne, Hendriksen, Kent).
프로스데케스데 운 아우톤 엔 퀴리오 메타 파세스 카라스 카이 투스 토이우투스 엔티무스 에케테
개역개정,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새번역,29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그를 영접하십시오. 또 그와 같은 이들을 존경하십시오.
우리말성경,29 여러분은 주 안에서 큰 기쁨으로 그를 맞아 주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가톨릭성경,29 그러니 주님 안에서 그를 아주 기쁘게 맞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을 존경하십시오.
영어NIV,29 Welcome him in the Lord with great joy, and honor men like him,
영어NASB,29 Therefore receive him in the Lord with all joy, and hold men like him in high regard;
영어MSG,29 Give him a grand welcome, a joyful embrace! People like him deserve the best you can give.
영어NRSV,29 Welcome him then in the Lord with all joy, and honor such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9 προσδεχεσθε ουν αυτον εν κυριω μετα πασης χαρας και τους τοιουτους εντιμους εχετε
라틴어Vulgate,29 excipite itaque illum cum omni gaudio in Domino et eiusmodi cum honore habetote
히브리어Modern,29 על כן קבלהו באדנינו בכל שמחה והוקירוט אנשים כמהו׃
성 경: [빌2:29]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 여기서 ‘주 안에서'(*, 엔 퀴리오)가 무엇을 수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의미가 달라진다. (1) 만약 동사 ‘영접하고’를 수식한다면 본절 ‘주께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시듯이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5:7). (2)만약 ‘모든 기쁨’을 수식한다면 본절 ‘주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인 순수한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권면이 된다(롬 16:2). 비록 강조하는 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 문맥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주 안에서 한 형제된 동료 그리스도인을 기쁜 마음으로 존귀히 여기며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Hawthorne, Martin).
호티 디아 토 에르곤 크리스투 메크리 다나투 엥기센 파라볼류사메노스 테 프쉬케 히나 아나플레로세 토 휘몬 휘스테레마 테스 프로스 메 레이투르기아스
개역개정,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새번역,30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나를 위해서 여러분이 다하지 못한 봉사를 채우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
우리말성경,30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30 그는 여러분이 나를 위하여 못 다한 봉사를 마저 채우려고,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다가 죽음에까지 가까이 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어NIV,30 because he almost died for the work of Christ, risking his life to make up for the help you could not give me.
영어NASB,30 because he came close to death for the work of Christ, risking his life to complete what was deficient in your service to me.
영어MSG,30 Remember the ministry to me that you started but weren’t able to complete? Well, in the process of finishing up that work, he put his life on the line and nearly died doing it.
영어NRSV,30 because he came close to death for the work of Christ, risking his life to make up for those services that you could not give me.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τι δια το εργον του χριστου μεχρι θανατου ηγγισεν παραβουλευσαμενος τη ψυχη ινα αναπληρωση το υμων υστερημα της προς με λειτουργιας
라틴어Vulgate,30 quoniam propter opus Christi usque ad mortem accessit tradens animam suam ut impleret id quod ex vobis deerat erga meum obsequium
히브리어Modern,30 כי בעבור מעשה המשיח הגיע עד מות ותקל נפשו בעיניו למען ימלא את אשר חסרתם בשרתכם אותי׃
성 경: [빌2:30]
주제1: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
주제2: [동역자를 추천함]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헌신하였다. ‘돌아보지 아니한’의 헬라어 ‘파라볼류사메노스'(*)는 본래 ‘도박사가 돈을 따기 위해 모험’을 하거나 ‘탐험가가 값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거는 위험’을 의미한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조력자로 봉사하는 일이 이처럼 헌신적이었음을 빌립보 교회에게 전해주면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대하라고 권면한다(Ha-whorne, Hendriksen, Martin).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일’의 헬라어는 ‘레이투르기아스'(*, ‘봉사’ )로서 복음전파 사역을 의미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동참해서 복음 선포 사역을 감당해야 했으나, 할 수 없음으로 대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던 것이다(Martin, Kent).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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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주해
빌립보서 2장 주해
박애란
Ⅰ. 서 론
Ⅱ. 빌립보서의 배경과 목적
1. 빌립보의 역사적 배경
1-1. 지리적 여건
1-2. 역사적 배경
2. 빌립보의 종교적 배경
3. 빌립보 교회
3-1. 빌립보 교회의 설립
3-2. 바울과 빌립보 교회
4. 빌립보서의 기록 목적
Ⅲ. 빌립보서 2장의 내용 분석
1. 문맥과 본문 분석
2. 본문의 주해
2-1. 교회일치의 원리(1~4절)
2-2. 겸손의 표본이신 그리스도(5~11절)
2-3.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권면(12~18절)
2-4. 디모데의 빌립보 파송 계획 및 천거(19~24절)
2-5. 에바브로디도의 헌신 (25~28절)
2-6. 빌립보교회가 해야 할 자세(29~30절)
Ⅳ. 결 론
참 고 문 헌
Ⅰ. 서 론
바울의 서신은 신약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안부의 편지가 아닌 각 교회의 교리적인 문제점들을 위한 교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그가 첫 번째 로마에 투옥 되었을 당시 쓴 옥중서신에 해당한다. 본서는 그 중에서도 문체나 논리전개, 중심 사상을 볼 때 초기의 서신에 해당하며 당시의 종교적인 논쟁에 있어 하나의 전환적인 분수령을 이루며, 그릇된 종교관을 부인하고 올바른 구원관을 확립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특별히 빌립보서 2장에서는 교회의 일부 여성도들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두개가 화합하지 못함을 그들에게 서로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한마음을 품을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즉 개개인의 성격의 특징들을 주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 때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놀라운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하겠다.
Ⅱ. 빌립보서의 배경과 목적
1. 빌립보의 역사적 배경
빌립보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빌립보라는 도시의 특성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빌립보의 시민들은 헬라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시민권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매우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1-1. 지리적 여건
빌립보는 마게도냐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큰 도시이다. 빌립보는 단순한 지방도시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다(행16:12).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으므로 바울은 성읍 밖 강변에서 기도모임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고 했다. 첫 성, 첫도시란 의미는 가장 큰 성 이라는 의미라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마케도냐의 수도는 빌립보가 아니라 데살로니가였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빌립보를 마케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했을까? 거리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빌립보의 역사와 또한 빌립보의 지니고 있는 특별한 중요성 때문이다.
빌립보는 BC358년경 마케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2세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빌립보라는 이름도 빌립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진 것이다. 이 도시가 세워진 곳은 그리스 동북쪽에 위치한 크리니데스의 옛 드라시안(Thracian)이었으며, 에게해로부터 약 12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해상으로의 왕래와 교역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육로의 교통 또한 매우 원활하였다. 이 도시는 많은 수원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간기데스강이 흐름)토지가 비옥했고, 부근에는 유명한 판게우스(Mt. Pangeus)금광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다. BC168년 마케도냐가 로마의 파울루스에게 패한 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면서 로마의 땅이 되었다가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후에 로마와 동방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주는 직선도로인 에그나티아도로(Via Egratia)가 생기면서 빌립보는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1-2. 역사적 배경
빌립보가 로마제국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 곳 사람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은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보다는 역사적인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건은 BC42년 줄리어스 시저를 살해한 부루터스와 카사우스의 공화국 군대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군대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휘하의 장교들과 군사들을 이 빌립보에 정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BC31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에 유명한 악티움(Actium)해선이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어 자신을 아구스도(Augustus Octavianus)라 부르고 빌립보를 그의 중요한 군사 기지로 삼았었다. 그는 빌립보에 많은 로마군인들, 제대군인들, 이탈리아로부터 쫓겨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을 이 곳에 거주시켰다. 그래서 이 빌립보를 로마의 특별 식민지(Colonia)로 만들고, 그 곳 시민들을 로마의 시민들로 대우하며 ‘이탈리아의 벗’이라 불렀고, 이탈리아 반도내의 로마인들에게 부여했던 동일한 특권을 그들에게도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빌립보 시민들은 비록 로마 식민지의 시민들이지만, 로마 시내의 시민들과 똑같은 특권을 누리는 아주 특별한 시민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빌립보의 주민들은 개인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재판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당시 악명이 높은 인두세와 토지세를 감면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빌립보는 제2의 로마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고, 그들은 로마의 시민된 것을 자랑했으며, 로마의 관습과 정신을 따르고 로마법을 준수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2. 빌립보의 종교적 배경
빌립보 사람들은 다른 헬라도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혼합주의 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즉 다신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토착 종교인 트라키아의 트라시만을 숭배하고 있었고 애굽, 시리아,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 전래된 신들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제의적이고 고전적인 신들과 라틴의 여러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의 빌립보의 종교적 분위기를 사도행전 16장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 나타나 있다. 그 당시의 빌립보의 영적상태, 혹은 종교적 분위기는 한마디로 점쟁이가 상당히 돈을 많이 버는 그런 분위기였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숙명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점쟁이를 자주 찾는 등의 영적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문화적으로는 헬라문화와 동양의 문화를 혼합시켜 이루었던 문화인 헬레니즘의 계승자였는데, 이방 헬라세계의 대표적인 종교적 분위기는 우상숭배와 성도덕의 타락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고전 8:5에 보면,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라고 말하듯이 헬라인들은 많은 신과 많은 주를 섬긴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의 헬라의 철학학파를 보면, 아주 물질주의적인 에피쿠로스학파의 에피큐리어니즘(Epicurianism), 또한 자연에 순응하며 살 것을 가르친 스토아학파의 스토이즘(Stoicism), 또는 회의주의(Scepticism), 냉소주의(Cynicism)등이 성행하였고, 또한 각 학파마다 자기 학파들의 철학사상을 전파하는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그 당시의 분위기는 물질주의적인 사고, 회의주의적인 사고가 많이 퍼져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숙명주의적 사고였다. 즉 인간은 숙명의 힘 앞에 그저 순응할 따름이지 결코 자신의 숙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숙명주의적 사고가 사람들 사이에 지배적으로 퍼졌고, 또한 절망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신을 찾아 도움을 얻으려 했으며 또한 숙명론에 빠져 도덕적으로 무책임하게 살면서 타락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점성술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당시 빌립보를 비롯한 헬레니즘의 영적, 종교적, 도덕적 분위기는 회의주의와 숙명주의,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절망의 상태, 그리고 극심한 성적, 도덕적 타락이 지배하는 암흑의 상태로서 구원자를 간절히 바라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바울의 복음이 전달되어지자 이 복음이 헬라 문화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었다.
3. 빌립보 교회
바울의 제2차전도 여행 중 AD49년경에 설립된 유럽최초의 교회이다. 설립과정은 아시아에서 선교를 하던 바울은 비두니아 전도를 희망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아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고, 거기서 밤에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케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마케도냐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중단하고 에게해를 건너 빌립보의 관문인 네압볼리에 이르게 되었고, 이로서 로마의 국도인 에그나티아 도로를 따라 유럽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땅이 아시아 쪽에서 볼 때 마케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였다.
3-1. 빌립보 교회의 설립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 그리고 누가 등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 성에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이 되어 바울이 찾아간 곳은 회당이 아닌 문밖 강가였다. 이것은 빌립보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회당은 유대 성인남자 10명이 있어야 설립되는데 빌립보에는 유대인 성인 10명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만약에 바울이 빌립보에 회당이 있었다면 회당을 찾아갔을 것인데 그는 문밖 강가로 찾아갔다. 이는 유대교와 접해서 복음을 영접하기에 준비된 사람이 있나 찾던 중에 빨래터에서 여자를 만나 복음을 증거 한 결과 두아디라의 자주 장사인 루디아를 만나 첫 번째 그리스도인을 얻고, 이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유럽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바울 일행은 루디아 집을 선교기지로 하고 그 곳에서 많은 고난과 능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결과 간수장과 그의 가족들, 점치던 여자,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트 등의 회심자를 얻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 구성원은 이방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설립된 빌립보 교회는 헌금에 열의가 있었고, 특히 바울에 대한 사랑이 어느 교회보다 뛰어난 교회였으며, 특히 빌립보 교회는 여자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상당한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였다.
3-2. 바울과 빌립보 교회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아주 특별히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오래 바울이 빌립보에 머물지 않았음에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과 그들을 향한 기도의 내용 속에 잘 나타나있다. 빌립보서 4:1에서 그들을 부르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런가하면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또 다른 예는 바울이 극히 예외외적으로 빌립보교회로부터 자기 개인의 용도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선교원칙에 생각하면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의 선교원칙은 자비량선교였지만 빌립보교회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힘을 같이 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고 그 자신은 3차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 고린도로 가기 전에 빌립보를 다시 방문하였다.(행 20:1-3, 고후 2:13) 또 그 이듬해 봄에 빌립보를 방문하여 유월절을 보냈다(행 20:3-6). 사도바울과 빌립보교인들의 접촉은 방문뿐만 아닌 전달자를 통하여 수시로 소식이 오갔던 것을 보더라도 바울과 빌립보교회와의 관계는 서로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나누었던 특별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4. 빌립보서의 기록 목적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과 감독과 집사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 서신의 주된 이유는 바울이 옥에 갇혀있을 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빌립보교회의 사랑과 호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며,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하고 위로하며 권면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려는 목회적 목적에서 기록된 서신이다. 한천설은 빌립보서의 기록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사랑과 배려에 대한 하나의 감사장으로 쓰여 진 글이다.
둘째, 자신의 장기투옥에 대한 변명을 위해 쓰여 진 편지이다. 아마 빌립보교인들은 바울의 장기화된 투옥으로 인해 낙심하게 되거나, 혹은 복음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즉, 왜 복음을 증거 하던 바울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며, 또 이런 투옥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들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매임이 복음에 방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보가 되었음을 알리려하고 있다.
셋째, 빌립보교회내의 분쟁 상황을 바로 잡고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록되었다.
넷째, 빌립보교회 내에 들어와서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케 하던 유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록되었다.
다섯째, 계속되는 핍박아래 놓여있는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록되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울 때부터 벌써 빌립보교회는 소위 로마 시민 정신과 부딪혀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이방인의 핍박이 계속되는 속에서 성도들을 위로하며 힘 있게 믿음에 서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던 것이다.
Ⅲ. 빌립보서 2장의 내용 분석
여러 주석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구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빌립보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부분이 빌립보서 2장이라고 할 수 있다.
1. 문맥과 본문 분석
바울은 종종 그의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자신을 교회성도들이 닮아가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행동을 교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교육방법은 그 개인이나 단체에게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탁월한 윤리적 모범을 먼저 제시해주고, 그 다음에 그를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의 이론을 활용했다고 말 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 자신을 빌립보교인들이 닮아야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권면한 다음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아라.”고 권면하고 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이고,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권면하고 권면의 패러다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다시 한 번 빌립보교회에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면서 결정적인 권면으로 된 교차대구법의 형태로 문맥을 이끌어가고 있다.
본 장은 바울이 교회 공동체 생활과 관련한 교훈을 주고 있는 부분으로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11절은 내부분열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빌립보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한 비결을 제시하며(1~4절)그 비결 중 하나인 겸손의 모본으로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5~11절). 다음으로 중반부 12~18절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보다 성숙된 삶, 즉 성화를 힘쓰라고 촉구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후반부 19~30절은 일종의 삽입 단락으로서 자신의 투옥으로 인하여 어려움에 처해있을 빌립보 교회를 염려한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파송하고자 계획한 사실을 밝히고(19~24절),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가 모은 헌금을 전달하고 바울을 돕던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교회에 돌려보내게 된 사실을 알리고 있는 부분이다.(25~30절)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하면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겸손함으로 하나 되라고 교훈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귀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간되심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부활, 승천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구원사역에 있어서 구속사의 대상인 인간 구원을 위한 필연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2. 본문의 주해
2-1. 교회일치의 원리(1~4절)
헬라어 원문 상으로 보면 2:1~4절은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있다. 초두에 있는 접속부사 “그러므로”는 주절의 명령법이 선행문단에 있는 명령구절(1:27)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빌립보교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바울사도의 기쁨을 채우는 것이요 또한 빌립보교인들이 자신의 기쁨을 채우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과 항상 동일시되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립보교인들이 기쁨을 채워가기 위해서는 똑같은 생각이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첫째, 동일한 사랑을 가져야 하고, 둘째, 같은 마음으로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며, 셋째, 개인적인 이익이나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하며, 넷째는 각자 자신의 사적인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본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본서 1:27의 권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마음을 같이하여”(2절)라는 짧은 말로 집약하고 있다. 빌립보교회는 박해 가운데에서도 믿음의 뿌리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위한 열매를 맺으며 화합하고 일치하기 위하여 성도가 연합해야 할 필수요건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 요소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같은 사랑을 가지고“(2절)
진정 구원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사랑을 가지고 있다. 성도의 사랑은 단지 모양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양과 질에 있어 어떠한 주변요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하고 견고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신자의 신앙과 영적상태를 반영하는 표증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제일 조건으로 서로가 사랑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남을 이해하고 양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도 죄악 된 인간을 그 만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그리스도는 사랑을 실천 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에는 원수도 감싸주는 힘이 있으며”(롬12:20), “허다한 죄를 덮어줄 넉넉함이 있다”(벧전 4:8)
②“한 마음을 품어”(2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름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 복음은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에게로 귀속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가운데 계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는 그 몸의 지체이다. 한 몸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은 자 들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뜻이나 의지가 무시된 채 획일화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삶의 계획이 그리스도의 그것에 맞추어 자신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과 입장을 충분히 고려 함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견해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분열과 당파심은 교회 일치에 최대의 적이다.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생각이나 목적, 소망, 동기들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며 요구하시는 높은 세계의 것들과 일치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가 한마음을 품을 것을 사도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③“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4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아무런 노력 없이 입술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성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감동이라면 이웃에 대한 행동은 사랑의 외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한 몸의 지체로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 일만을 주장하고 돌아볼 것이 아니라 형제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함께 고통을 느껴야 한다. 형제의 일에 무관심한자들에게 어찌 일치된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도가 연합하기 위하여는 이기심과 교만한 마음을 근절시켜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지체를 이루고 있는 성도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2-2. 겸손의 표본이신 그리스도(5~11절)
빌립보서 2:5에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을 권면한 다음 빌립보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삶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부분은 2:6의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의 모습이고, 둘째는 2:7-8의 성육, 겸비, 고난, 십자가의 죽음 등 낮아지는 예수의 모습이며, 셋째는 9-11의 부활, 승천 등 높아지신 예수의 모습 등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첫째, 둘째 부분은 과거를 셋째 부분은 현재의 예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 본문은 종종 사도 바울의 중요한 기독론적 혹은 구원론적 교리의 선언으로 이해되며, 성육하신 예수님의 자기 비하와 그의 높아지심의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하여 빌립보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교사요,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는 삶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는 성육신하기 전에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아담처럼 그것을 자신의 높아짐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에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온 세상의 주가 되게 하셨다. 이제 빌립보교인들도 이와 같은 예수의 자기 비하, 겸손, 절대적인 순종, 고난의 모습과 삶의 자세를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제시함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성도가 그의 마땅한 삶을 사는 능력과 힘의 원천이며 성도의 온전한 삶에 대한 귀감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은 죄악 된 인간이 그 이하의 자리에 까지도 서슴없이 내려가야 한다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은 겸손의 극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동등한 자리를 마다하고 죄인이 되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은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한계의 점이기 때문이다. 신으로 인간이 되셨으며 왕으로 종이 되시고 무죄한 분이 죄인이 되셨다. 또한 세상에서의 온갖 고통과 능욕과 멸시를 한 몸에 지시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바치신 것으로서 아무도 행한 일이 없으시며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신 사건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①그리스도께서는 죄악 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므로 그 분만이 누리고 있던 온전한 율법적인 특권을 포기하셨다.
②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므로 그 분만의 모든 부요하신 것을 포기하셨다.
③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분으로 하여금 왕으로서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양도하게 하였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왕국을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종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생명을 자진해서 바치심으로 굴욕적인 죽음을 맛보셨다. 이와 같이 행하신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발적으로 행하신 행위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굴욕적이고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은 피할 수 없는 동기나 의무가 아니었으며, 또한 피조물 가운데에 어떤 종류나 희생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은 순전히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수세기 전까지 만해도 ‘종’이란 말은 매우 천하고 모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종으로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다. ‘종’이란 어떠한 재산도 소유할 수 없으며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동의 의무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종’가운데 종이셨던 그리스도는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으면서도 이 땅에 오시면서 두 가지 의무를 갖고 계셨다.
첫째, 하늘의 아버지께 대한 의무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방법대로 자신을 희생 하시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 인바, 그것은 많은 사람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둘째, 백성에 대한 의무였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 그 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전 우주의 통치자셨지만 섬기는 자로 세상에 오셨다.(마20:28)
지금까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 땅으로는 인간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거기에는 어떠한 영욕이 없었으나 종으로서의 희생적인 순종과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성도들은 겸손히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2-3.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권면(12~18절)
바울은 2:6~11절의 그리스도의 삶을 근거하여 빌립보교인들에게 삶의 강력한 행동을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명령형은 세 동사를 중심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2절의 명령형 ‘이루어가라’(κατεργάζεσθε)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2~13절의 본문이다.
둘째, 14절의 명령형 ‘행하라’(ποιειτε)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4~16절의 본문이다.
셋째, 18절의 명령형 ‘기뻐하라’(χαίρετε)를 주문장으로 삼고 있는 17~18절의 본문이다.
첫째 부분은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순종에 근거하여 빌립보교인들에게 “여러분은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십시오.”(현재 명령형)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당연히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은 또한 하나님께 대한 계속적인 순종을 당연히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하여진 일을 계속해서 완성해 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루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완성해가라는 의미의 명령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구원의 의미가 온전하게 적용되어지고 완성되어져야 할 것을 가리키는 명령법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13절)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서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라고 말함으로서 불가분성을 말하고 있다. 즉 성도에게는 그 속에 성령이 거주하므로, 바울의 ‘구원을 이루라’라는 명령법은 성령께서 너희 안에서 구원을 완성해 가도록 성령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둘째 부분은 바울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14절)는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과 원망한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와 목적은 첫째, 빌립보 교인들이 패역한 세상에서 흠과 점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 곧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을 발할 수 있는 깨끗한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요, 둘째, 빌립보교인들이 생명의 말씀을 유지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바울이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말할 수 있도록 함이라고 말한다. 셋째, 빌립보교인들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서의 삶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바울 자신이 순교를 당한다 할 찌라도 기뻐하는 것처럼 빌립보교인들도 바울처럼 기뻐하면서 생활 할 것을 명령형으로 권면을 한 것이다.
2-4. 디모데의 빌립보 파송 계획 및 천거(19~24절)
바울은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교회에 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19절)라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는 바울의 파송을 받아 빌립보로 갈 사람이었다. 디모데는 신실하고, 헌신적이며, 바울에게 있어서는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날 하나님을 위해 봉사 하는 자는 수없이 많으나 정작,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화답하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바울이 천거한 디모데는 어떠한 자였는가?
①디모데는 마음이 순전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남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꺼이 봉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어떠한 고난도 참고 감당한 만큼 믿음으로 연단을 이겨낸 자였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성경을 상고하는 자였으며(딤후3:15),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니”(행16:2)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준비되어졌던 자이다.
②디모데는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는 그의 자세에 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있을 때는 디모데가 처음 더베 에서 그를 만난이후 상당히 오랜 세월이 경과 했지만 그는 그때까지 계속 바울을 섬기고 있었다.
③디모데는 바울과의 영적인 부자 관계를 갖고 있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22절)라고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한 말로 디모데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걱정하면서 교회를 진실히 생각할 자는 디모데 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다.”(21절)고 한다. 즉 ‘자기일’ 다시 말하면 ‘세상일’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지 않음을 말하며, 삶의 잘못된 목표와 지향점을 말하면서 이러한 자에게 주의 일을 맡길 수 없음을 상기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좇지 아니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생각하는 진실한 교역자 디모데를 천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는 ‘복음을 위하여’(22절) 종노릇하였다고 한다. ‘복음을 위해’라는 것은 섬김의 대상을 말한다. 디모데의 섬김의 대상은 사도바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충성한 것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전적으로 수고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복음을 위해’헌신 할 때에 교역자와 교회 성도 간에 참다운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2-5. 에바브로디도의 헌신 (25~28절)
사도바울은 먼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디모데를 보내기 전에 급히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25절) 여기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면서 다섯 개의 문구를 보게 된다. 곧 ‘너의 형제’, ‘함께 일하는 자’, ‘함께 군사 된 자’, ‘너희 사자’, 그리고 ‘나의 쓸 것을 돕는 자’이다.
여기에 처음 나오는 ‘나의’는 첫 세 개에 다 연결되며 이 세 개는 내용상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높고 낮은 권위의식이나 계급의식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노력한다는 ‘동역자’의식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사자’란 문자적 의미 그대로 ‘너희가 보낸 자’란 뜻이다. 빌립보교회에서 봉사하다가 그 교회의 대표로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말한다. 빌립보교회는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었고,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시중들며 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해지는 ‘거룩한 섬김’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에바브로디도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 지라”(26절) 그는 먼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였다’고 한다. ‘사모한다’는 것은 심히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어린자식을 보고 싶어 하듯이 성도들을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다.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다”는 그가 병든 것을 근심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병든 것을 교회 성도들이 듣고 근심하는 것을 인하여 근심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참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7절)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시중들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살려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만 긍휼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바울도 긍휼히 여기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의 병에 대해 바울이 옆에서 몹시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걱정하며 다른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는 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28절) 이는 바울이 편지를 빌립보교회에 보낼 때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빌립보교회의 평안과 교회의 고통을 해결한 참 지도자를 통하여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바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2-6. 빌립보교회가 해야 할 자세(29~30절)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빌립보교회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 ‘영접한다’란 어떤 사람을 환영하고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당부한다. 즉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하며, 많지 않음을 말하면서 이러한 자를 위해 성도들의 격려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에는 많은 외로움과 고통과 좌절이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자를 위하여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힘써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이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절)
에바브로디도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위해 헌신과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의 헌신적인 봉사의 목적은 바울을 ‘섬기는 그들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 이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다 와서 바울을 섬기기를 원했으나 멀리 떨어진 관계로 에바브로디도가 대표로 와서 바울을 섬기게 되었는데 자기 힘에 지나도록 열심히 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지도자를 위하여 교회는 마음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며 힘써 섬겨야 함을 말하고 있다.
Ⅳ. 결 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교회가 갖추어야 하면서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들을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의 빛 된 역할을 감당하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교회도 많이 있다.
며칠 전 필자는 뉴스를 통해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3년간 “소록도의 어머니”, 또는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불리며 평생을 낯선 이국땅에서 한센 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간호사로 봉사하다가 “헤어지는 아픔을 줄까봐 말없이 떠나게 됐다”는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채 말없이 자신들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귀향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의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카톨릭 수녀였지만 그들의 헌신적이고 겸손한 삶은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기독교인들과 우리 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녀들이 돌아갈 때는 그들이 이 낯선 이국땅에 들어 올 때 가지고 왔던 낡은 가방 한 개 뿐이었다고 하였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길거리에서 또는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분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분들을 비하하거나 폄하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외치는 것도 중요하고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구원받은 크리스챤들의 삶이 저 아리따운 수녀들과 같은 모범적인 삶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 하고, 형식에 얽매인 바리새인의 생활과 다를게 없을것이다.
특별히 본장을 주해하는 과정 중 5~11절 ‘겸손의 표본이신 그리스도’의 부분을 주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다시 한 번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신으로서 인간이 되셨으며, 왕으로서 종이 되셨고, 무죄한 분이 죄인이 되셨다. 또한 세상에서의 온갖 고통과 능욕과 멸시를 한 몸에 지시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바치신 것으로서 아무도 행한 일이 없으며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구속의 일을 이루셨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죄로 얼룩지고 교만과 자만으로 가득 차 있는 내 모습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천 만 기독교인을 자랑하는 한국교회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적으로 팽창하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그 교만의 옷을 벗어던지고 그리스도의 겸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온전히 본받아 겸손의 옷으로 갈아입고 삶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옮겨진다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이 사회 전체가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 되리라 확신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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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지혜사, “신구약 강해 설교연구대계” 엑셀편저.
목양서원, “트리니티 말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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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아카데미, “그랜드종합주석”
엠마오, “인명 지명 사전”
말씀보존학회, “신구약을 관통하는 성경지도”
데이빗 앨런 블랙, “설교자를 위한 신약석의 입문”, 도서출판 솔로몬
고든 피, “신약성경 해석 방법론”, 크리스챤 출판사
메튜 헨리 주석, 빌립보서 02장
2:1 그리스도의 겸비와 그의 영광(빌립보서 2:1-11) 사도는 전장(前場)에서 못다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권고를 본장에서 계속한다. 여기에서 그는 그들에게 간청하기를 겸비와 사랑의 위대한 분이신 주 예수를 본받아 같은 마음과 겸비한 마음을 갖기를 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보자. Ⅰ. 우리에게 강요된 위대한 복음의 교훈에 대해 살펴 보자.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법도이며, 그 학교의 교과목이며 그의 가정의 제복(制服)이다. 이 사랑을 그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는 것”으로써 표현하였다(2절). 우리가 같은 사랑을 가질 때 우리는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견해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항상 그들의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제나 그들의 의무이며 그들로 심판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또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도록 요구되는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랑을 우리에게 표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호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가 사랑을 받을 것이다. 또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 하였다. 서로 괴롭히거나 방해하거나 혹은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일치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하나가 되고,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 가운데서 성령의 통일을 보존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의무에 대한 사도의 애절한 간청. 그는 그들에게 매우 끈질기게 간청한다. 우리의 의무를 다함은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보존과 교화를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인 것이다. 형제애를 가져야 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위로를 경험하였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일이 있는가? 서로 사랑으로써 그 경험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찾은 아름다운 맛은 우리의 영혼을 유쾌하게 해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안을 기대하는가? 만일 우리가 실망을 맛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면 달리 어디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은 그의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하고 영원한 위안이다(히 6:8; 살후 2:16).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2) “사랑의 위로”를 경험하였으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사랑 가운데서 또 하나님께 향한 너희의 사랑 가운데서, 혹은 우리에게 향한 너희의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서 위로를 맛보았다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여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만일 너희가 그 위로를 얻었다면, 또는 너희가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너희가 실제로 사랑의 은혜가 위로의 은사임을 믿는다면 그 사랑으로 풍성케 하라”는 말이다.
(3) “성령의 교제”를 가졌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즉 “만일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또”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그들이 생기를 받고 활력을 받음으로 성도들 사이에 교제 있다면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같은 마음을 지님이 우리로 “우리의 하나님과 형제간의 교제를 보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4) 너희를 향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은혜를 기대한다면 너희가 먼저 서로 긍휼을 베풀라. 만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또한 만일 성결하게 된 모든 자들에게는 거룩한 연민의 성향이 있다면, 이 자비와 연민을 형제애로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도의 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증이라면 가장 난폭한 자도 유순하게 할 수 있으며 가장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도 수그러지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5) 형제애를 베풀라는 또다른 근거는 이를 행함으로 사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나의 기쁨을 채우라”고 하였다. 교우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사역자들의 기쁨이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오는 도구 역할을 해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얻었다면, 만일 너희가 그 안에서 어떤 위안을 얻었다면 혹은 그것에 의해서 유익을 얻었다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해 준 너희의 가난한 사역자들의 기쁨을 채우라.”
2. 그는 형제애를 증진시킬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
(1)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3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교만과 분냄보다 더 큰 원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불쾌하게 할 일들을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우리가 교만에 빠져 무슨 일을 한다면 형제들에게 허영을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하여 비 그리스도인적인 불씨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됨을 폐하기 위해 오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적대감이 없도록 해야한다.
(2)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3절).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점에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는 자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결함과 약점들을 살피기에는 재빠르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관대히 용납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우리 안에 있는 그것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과 불완전성을 가장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호기심과 비난하는 태도를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세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동정으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4절)고 하였다. 이기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예와 평안과 안전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명예, 평안, 안전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이로 여겨야 한다. 의무에 대한 사도의 애절한 간청. 그는 그들에게 매우 끈질기게 간청한다. 우리의 의무를 다함은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보존과 교화를 위한 필수적인 매개체인 것이다. 형제애를 가져야 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위로를 경험하였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일이 있는가? 서로 사랑으로써 그 경험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찾은 아름다운 맛은 우리의 영혼을 유쾌하게 해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안을 기대하는가? 만일 우리가 실망을 맛보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면 달리 어디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는 자들은 그의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하고 영원한 위안이다(히 6:8; 살후 2:16).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사랑의 위로”를 경험하였으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사랑 가운데서 또 하나님께 향한 너희의 사랑 가운데서, 혹은 우리에게 향한 너희의 형제들이 사랑 가운데서 위로를 맛보았다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여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만일 너희가 그 위로를 얻었다면, 또는 너희가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또한 너희가 실제로 사랑의 은혜가 위로의 은사임을 믿는다면 그 사랑으로 풍성케 하라”는 말이다.”성령의 교제”를 가졌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즉 “만일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또”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그들이 생기를 받고 활력을 받음으로 성도들 사이에 교제 있다면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같은 마음을 지님이 우리로 “우리의 하나님과 형제간의 교제를 보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너희를 향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형제애를 가져야 한다. “만일 너희가 너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은혜를 기대한다면 너희가 먼저 서로 긍휼을 베풀라. 만일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있다면 또한 만일 성결하게 된 모든 자들에게는 거룩한 연민의 성향이 있다면, 이 자비와 연민을 형제애로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도의 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증이라면 가장 난폭한 자도 유순하게 할 수 있으며 가장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도 수그러지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형제애를 베풀라는 또다른 근거는 이를 행함으로 사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나의 기쁨을 채우라”고 하였다. 교우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사역자들의 기쁨이다.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오는 도구 역할을 해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얻었다면, 만일 너희가 그 안에서 어떤 위안을 얻었다면 혹은 그것에 의해서 유익을 얻었다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해 준 너희의 가난한 사역자들의 기쁨을 채우라.”그는 형제애를 증진시킬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한다.”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3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교만과 분냄보다 더 큰 원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형제들을 불쾌하게 할 일들을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우리가 교만에 빠져 무슨 일을 한다면 형제들에게 허영을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하여 비 그리스도인적인 불씨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됨을 폐하기 위해 오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적대감이 없도록 해야한다.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다”(3절).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점에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서는 자비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결함과 약점들을 살피기에는 재빠르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관대히 용납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우리 안에 있는 그것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성과 불완전성을 가장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호기심과 비난하는 태도를 혹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세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동정으로 그들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4절)고 하였다. 이기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파괴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예와 평안과 안전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명예, 평안, 안전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일을 자신의 이로 여겨야 한다. Ⅱ.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복음적 생활관이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고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음으로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의 생활을 모방해야 한다. 고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살펴 보자. 그는 뛰어나게 겸손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특별히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그는 “나를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고 말씀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자 한다면 우리가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와 동일한 정신과 동일한 보조로 걸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받기까지 스스로 낮아지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임으로 우리가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서 주 예수의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입장을 볼 수 있었다. 사도는 주 예수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마음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얻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예수의 인격을 상술하고 그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려고 함을 보게 된다. 주 예수는 기쁨을 주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사역자들이 다른 말들을 하다가 그에 대하여 말하게될 때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 예수는 그 어느 경우에나 어울리는 주제인 것이다. 1. 여기에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 있다. 즉 그의 신성과 그의 인간성이다.
(1) 그의 신성.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로서 신성에 참여하셨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일치한다. 본문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과(골 1: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취지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여기지 아니하셨다”(역주: 본문에 대해서는 희랍어avrpagmo.n을 능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수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능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로 취하는 것을 도적질로 여기지 않으셨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존 사실로 인정하셨다는 말이 된다. AV 영역판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해석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을 갖게 되며 한글 개역과 공동 번역은 이에 준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원칙적으로 흠정판 번역을 따라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같은 본문을 수동적 뜻을 지닌 것으로도 해석한다. N.B.C 주석 참조). 즉 그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권리를 침입하였다거나 다른 분의 권한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침입하였다는 자책을 느끼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라”(요 10:30)고 말한다. 단순한 인간 혹은 스스로를 “아버지와 하나”라고 공언한다면 이는 최고의 강도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물들과 십일조를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됨을 즉 본질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말 3:8). 어떤 이들은 evnmorfh|/ qeou/ u`pa,rcwn-즉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는 말씀을 구약에서 족장들과 유대인들에게 신의 위엄있는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종종 “영광”과 “쉐기나”(Shechinah)로 불리운다. “mo,rfh”란 말은 70인역(LXX)과 신약 성서에서 본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 보면 evn evte.ra morrh/|-즉 그가 두 제자들에게 다른 형체로 나타나셨다 했고 또 마태복음 17장 2절에는 Metemrfw,qh-즉 그가(그들 앞에서)변형되었다(마 17:2)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역주:여기서도 해석되기 때문에 한글 개역을 그대로 인용했음)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욕심스럽게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턱없이 탐내거나 취하러 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 있는 동안 그의 이전의 장엄한 외양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ouvk avrpagm o.n h`gh/|sato”이란 말씀이 지닌 뜻으로 생각된다.
(2) 그의 인성.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7,8절).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사람이었고. “우리의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의 본성과 관습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더구나 그는 자원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위였고 그리고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리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 본성을 입은 것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비우시고” 즉 천상의 그리고 그의 이전의 존귀와 영광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인간 본성의 누더기를 입으셨다. “그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히 2:17)
2. 그의 두 가지 상태 즉 겸비와 높임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
(1) 그의 겸비. 그는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셨을 뿐아니라 종의 형제 즉 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의 종일 뿐 아니라 그가 인간들에 대한 사역자가 되시었으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천한 종의 몸을 입으시고 봉사하셨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만일 주 예수가 인간이 되려고 하셨다면 그는 왕자가 되어 그리고 영광 중에 찬란하게 나타났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중의 형체를 취하셨다”(7절). 그는 미천하게 자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일시적인 아버지와 장사 일을 함께 했던 것 같다. 그의 전생애는 겸비와 천함과 빈곤과 불명예의 삶이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았고, “슬픔의 사람이었고, 비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외적인 거드름을 피우시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될 무슨 표식도 없었다. 그의 생의 비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최고의 겸비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고 하였다. 그는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복종하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스스로 이룬 법에 복종했고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그리고 그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갈 4:4)고 하였다. 그의 죽으심의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그의 죽으심에 온갖 겸비함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이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이었다. 또한 이 죽음은 몸에 가장 신경이 예민한 부분(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그 온 체중을 실어야 하는 고통에 가득 찬 죽음이었고 자유민의 죽음이 아니라 행악자의 노예의 죽음이었으며 공중의 구경거리로써의 죽음이었다. 축복받은 예수께서는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2) 그의 높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섰다”(9절). 그의 높임은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가 자신을 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다. 높이시되 그는 u`peru;fwse-즉 지극히 그를 높이셨다. 최고의 높이에까지 올리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전 인격 즉 신성은 물론 인성까지도 높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형체는 물론 하나님의 형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이 높임은 그의 신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새로운 영광을 부여한 것이라기 보다 그의 권리를 되찾은 것 또는 “그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요 17:5)을 다시 회복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을 받으신 것이라고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이 신성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정작 높임을 받는 것은 그의 인성이었고 그것만이 높임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높임은 본문에 영예와 권세로 구성된다. 먼저 그의 영예로움을 관찰해 보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즉 인간과 천사들보다 높은 존귀의 명칭이다. 다음 그의 권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셨다.” 즉 온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고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종하되 “예수의 이름에” 복종한다. 이것은 공허한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이름에 모든 자가 엄숙한 경의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각기 자기 언어로 높임을 받은 구속자의 우주적 왕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시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있는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는다(마 28:18). 그리스도의 왕국의 광활함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자. 그것은 하늘과 땅에 그리고 그곳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즉 인간은 물론 천사들에게 그리고 산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까지 미친다. 이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는 것”(요 5:23)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존경은 무엇이든 결국 아버지의 존귀가 된다. 고로”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고 하셨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이 있다. 즉 그의 신성과 그의 인간성이다.그의 신성.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독생자로서 신성에 참여하셨다. 이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일치한다. 본문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과(골 1:15)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취지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여기지 아니하셨다”(역주: 본문에 대해서는 희랍어avrpagmo.n을 능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수동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능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의미로 취하는 것을 도적질로 여기지 않으셨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존 사실로 인정하셨다는 말이 된다. AV 영역판은 이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해석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해도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을 갖게 되며 한글 개역과 공동 번역은 이에 준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원칙적으로 흠정판 번역을 따라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으나 뒤에서는 같은 본문을 수동적 뜻을 지닌 것으로도 해석한다. N.B.C 주석 참조). 즉 그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권리를 침입하였다거나 다른 분의 권한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침입하였다는 자책을 느끼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라”(요 10:30)고 말한다. 단순한 인간 혹은 스스로를 “아버지와 하나”라고 공언한다면 이는 최고의 강도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물들과 십일조를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됨을 즉 본질을 강탈하는 것이라고 하겠다(말 3:8). 어떤 이들은 evnmorfh|/ qeou/ u`pa,rcwn-즉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는 말씀을 구약에서 족장들과 유대인들에게 신의 위엄있는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종종 “영광”과 “쉐기나”(Shechinah)로 불리운다. “mo,rfh”란 말은 70인역(LXX)과 신약 성서에서 본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 보면 evn evte.ra morrh/|-즉 그가 두 제자들에게 다른 형체로 나타나셨다 했고 또 마태복음 17장 2절에는 Metemrfw,qh-즉 그가(그들 앞에서)변형되었다(마 17:2)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하였다(역주:여기서도 해석되기 때문에 한글 개역을 그대로 인용했음)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욕심스럽게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턱없이 탐내거나 취하러 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에 있는 동안 그의 이전의 장엄한 외양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ouvk avrpagm o.n h`gh/|sato”이란 말씀이 지닌 뜻으로 생각된다.그의 인성.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7,8절).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사람이었고. “우리의 혈육을 입으시고” 인간의 본성과 관습을 지니시고 나타나셨다. 더구나 그는 자원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의 행위였고 그리고 그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 그리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 본성을 입은 것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비우시고” 즉 천상의 그리고 그의 이전의 존귀와 영광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인간 본성의 누더기를 입으셨다. “그는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히 2:17)그의 두 가지 상태 즉 겸비와 높임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다.그의 겸비. 그는 인간의 형상과 모습을 취하셨을 뿐아니라 종의 형제 즉 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의 종일 뿐 아니라 그가 인간들에 대한 사역자가 되시었으며 그리고 그들 가운데 천한 종의 몸을 입으시고 봉사하셨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만일 주 예수가 인간이 되려고 하셨다면 그는 왕자가 되어 그리고 영광 중에 찬란하게 나타났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그의 중의 형체를 취하셨다”(7절). 그는 미천하게 자랐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일시적인 아버지와 장사 일을 함께 했던 것 같다. 그의 전생애는 겸비와 천함과 빈곤과 불명예의 삶이었다.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남의 도움을 받아 살았고, “슬픔의 사람이었고, 비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외적인 거드름을 피우시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될 무슨 표식도 없었다. 그의 생의 비천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최고의 겸비는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고 하였다. 그는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복종하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스스로 이룬 법에 복종했고 그리고 그 법에 따라 죽음을 감수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그리고 그는 “율법 아래 태어나셨다”(갈 4:4)고 하였다. 그의 죽으심의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그의 죽으심에 온갖 겸비함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이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는다)이었다. 또한 이 죽음은 몸에 가장 신경이 예민한 부분(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그 온 체중을 실어야 하는 고통에 가득 찬 죽음이었고 자유민의 죽음이 아니라 행악자의 노예의 죽음이었으며 공중의 구경거리로써의 죽음이었다. 축복받은 예수께서는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그의 높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섰다”(9절). 그의 높임은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가 자신을 추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다. 높이시되 그는 u`peru;fwse-즉 지극히 그를 높이셨다. 최고의 높이에까지 올리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전 인격 즉 신성은 물론 인성까지도 높이셨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형체는 물론 하나님의 형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이 높임은 그의 신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새로운 영광을 부여한 것이라기 보다 그의 권리를 되찾은 것 또는 “그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요 17:5)을 다시 회복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을 받으신 것이라고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 자신이 높임이 신성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정작 높임을 받는 것은 그의 인성이었고 그것만이 높임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높임은 본문에 영예와 권세로 구성된다. 먼저 그의 영예로움을 관찰해 보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즉 인간과 천사들보다 높은 존귀의 명칭이다. 다음 그의 권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셨다.” 즉 온 피조물이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고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종하되 “예수의 이름에” 복종한다. 이것은 공허한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이름에 모든 자가 엄숙한 경의를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해야 한다.” 즉 모든 민족이 각기 자기 언어로 높임을 받은 구속자의 우주적 왕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시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있는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는다(마 28:18). 그리스도의 왕국의 광활함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자. 그것은 하늘과 땅에 그리고 그곳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즉 인간은 물론 천사들에게 그리고 산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까지 미친다. 이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는 것”(요 5:23)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존경은 무엇이든 결국 아버지의 존귀가 된다. 고로”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고 하셨다.
2:12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1)(빌립보서 2:12,13) Ⅰ.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감에 있어서 근면과 진지성을 지닐 것을 그들에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은 이루라”(12절)고 한다. 곧 우리 영혼의 구원(벧전 1:9)과 우리의 영원한 구원(히 5:9)을 이루라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 왔고 우리를 거기에 들어가게 한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포함되며 우리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과 모든 선의 소유가 포함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의 안녕을 확립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것들이야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이익에 관심을 갖자. 그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 즉 우리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다름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차다. 그리고 비록 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가 전체적인 구원을 이루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그러난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어떤 이유에서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katergaxisqe-즉 우리의 구원을 이룰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루라”는 말은 어떤 일을 “철저히 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참된 수고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는 모든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 근면해야 하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것을 때때로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그리고 끝까지 견딤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해야 한다. 구원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마음을 쏟아야 할 중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고의 배려와 근면이 없이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라고 덧붙인다. 즉 매우 주의 깊게 그리고 신중하게 구원을 성취하라는 말이다. “너희가 구원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여 신앙의 제반 의무를 주의 깊게 행하며 너희가 도달할 모든 유익함에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움을 품도록 하라'(히 4:1)는 뜻이다. 두려움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며 보호해 준다. Ⅱ. 그는 그들에게 늘 복음에 복종할 자세를 갖춤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함으로”(12절)라고 말한다. 즉 너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마다 기꺼이 그것에 순응하여 왔었다. 내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내가 없을 때에도 그리하였었다. 또한 “너희는 더욱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너의 영혼을 돌보며 그리스도에 대한 표면적인 약간의 존경하는 태도보다 그로 하여금 너희를 지배하게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사도가 있을 때에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가 없을 때에 더욱 그렇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니 너희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가 일하시니 너희도 일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최선을 다 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내려 주시며 우리의 신실한 노력을 도울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비록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아가고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은혜는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일치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단순히 우리의 잘못을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활기를 띠게 하고 더욱 열심을 내도록 하여 준다. 그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 이는 그가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역사에 의존한다. “태만과 부주의에 의해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를 격노케 함으로 그가 도움을 거두어 버리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또한 너희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려움으로 일하라. 이는 그가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일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과 행하게 하는 것이 모두는 하나님의 주시는 재능이다. 선한 것에 뜻을 두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우리의 정한 도리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로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라”라고 하였다(사 26:12). 또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이 또한 우리 안에는 아무 공로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없이 행동할 수 없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척해서도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 때문에 그는 우리 안에서 그의 선한 사업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피조물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시고 다만 그가 은혜로 약속한 자들에게만이 책임을 지신다.
2:14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권고(2)(빌립보서 2:14-18) 본문 가운데서 사도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에 다가 거기에 알맞은 적절한 성품과 행위를 더할 것을 권고한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14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 즉 여러 가지의 의무를 원망이 없이 하라. 그리고 너희 의무를 행하되 흠이 없이 행하라. 너희 일을 상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쟁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대상으로 쟁론하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우리의 신앙을 돋보이게 하며 또한 우리가 선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우리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2. 서로 사랑과 평화를 베풀므로써 그렇게 하라고 한다. “시비가 없이 즉 서로 다투는일이나 논쟁함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라. 이는 종종 진리의 빛과 신앙의 생명이 열띤 논쟁의 분위기 가운데서 상실되게 때문이다.
3. 모든 사람들에 대한 흠없는 생활을 함으로써(15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탓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가 흠없고 순전하도록 하라. 그래서 너희가 말이나 행실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말아야 하며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할 뿐 아니라 흠 없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한 남에게 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혐의조차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흠없고 신실하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흠이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흠없고 순전한 자들이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 특권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는 avmw,mhta-즉 흠이 없어야 한다. 모무스(Momys: 역자주-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조롱, 비난의 신)는 헤시오드(Hesiod)와 루시안(Lucian)에 의해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희랍인들이 불평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신이었다. 자신은 내버려 두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마다 흠을 찾아내며 다녔다. 이 신의 명칭에서 다른 사람들을 혹평하며 다른 사람들의 한 일을 엄하게 비평하는 자들을 “모미(Momi)”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도가 본문에서 “흠잡힐 데가 없이 하라”고 한 말의 뜻은 “모무스(Momus)까지도 흠을 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가장 혹독한 비평가도 너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행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을 목적삼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흠없이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데메드리오와 같이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로 증거를 받아야 한다”(요삼 12장). 또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는 이방인들 그리고 외부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참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어그러짐과 거스림밖에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같이 지내는 자들이 어그러지고 거스릴수록, 그들이 공연히 헐뜯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하여 흠없고 순전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투지 말아야만 옳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13:7). 또한 세상에서 빛이시며 그리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있는 빛들이다. 하나님이 어디서든 착한 사람을 세우실 때 그는 그를 그곳에 빛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한 본문을 명령법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즉 “세상에서 너희가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5장 16절의 “너희 빛을 그와 같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것은 물론 빛을 발해야 한다. 즉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16절). 복음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를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굳게 잡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촛대가 주위의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드는 촛불을 지탱하여 그것으로 빛을 발하게 천체들처럼 세상을 밝혀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라고”말한다. 고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 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즉 너희의 견고함 뿐 아니라 너희의 유용함으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로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음”(16절)을 알리려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목양의 사명은 우리에게 전력을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울여도 목양을 위해 달리며 수고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달리는 일은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돌진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수고는 꾸준함과 대단한 열심을 요하는 것을 뜻한다.
(2)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큰 기쁨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로 인하여 회개한 자들이 그들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니라”(살전 2:19, 20)고 말 하였다. 사도는 만족스럽게 그들을 위하여 달리는 일과 수고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까지 되었음을 보여 준다(17절). 그러므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계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존귀와 교회의 육성과 그리고 인간들의 영혼의 안녕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비록 이로 인해 그가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내어 놓게 되더라고 그는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그들의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교회를 위해 약간의 고통을 받는다고 그것을 많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그의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수고를 우리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관계에 드리는 포도주처럼 드려지고 부음이 되어야 한다면”(딤후 4:6)(ape.ndomai) “나는 그렇게 드려질 준비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자기의 피로써 인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다(18절).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권한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을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훌륭한 사역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그 회중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기꺼이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바치며 또 바치어지고 있다면 그 회중들은 그 사역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이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14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일 즉 여러 가지의 의무를 원망이 없이 하라. 그리고 너희 의무를 행하되 흠이 없이 행하라. 너희 일을 상념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쟁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대상으로 쟁론하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우리의 신앙을 돋보이게 하며 또한 우리가 선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 결과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며 우리의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서로 사랑과 평화를 베풀므로써 그렇게 하라고 한다. “시비가 없이 즉 서로 다투는일이나 논쟁함이 없이 모든 일을 행하라. 이는 종종 진리의 빛과 신앙의 생명이 열띤 논쟁의 분위기 가운데서 상실되게 때문이다.모든 사람들에 대한 흠없는 생활을 함으로써(15절) 그렇게 하라고 한다. “탓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가 흠없고 순전하도록 하라. 그래서 너희가 말이나 행실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말아야 하며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할 뿐 아니라 흠 없도록 노력해야 된다. 또한 남에게 해롭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혐의조차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흠없고 신실하라”는 말씀을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흠이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흠없고 순전한 자들이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어 특권을 부여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는 avmw,mhta-즉 흠이 없어야 한다. 모무스(Momys: 역자주-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조롱, 비난의 신)는 헤시오드(Hesiod)와 루시안(Lucian)에 의해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희랍인들이 불평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신이었다. 자신은 내버려 두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마다 흠을 찾아내며 다녔다. 이 신의 명칭에서 다른 사람들을 혹평하며 다른 사람들의 한 일을 엄하게 비평하는 자들을 “모미(Momi)”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도가 본문에서 “흠잡힐 데가 없이 하라”고 한 말의 뜻은 “모무스(Momus)까지도 흠을 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가장 혹독한 비평가도 너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행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을 목적삼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흠없이 거기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데메드리오와 같이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로 증거를 받아야 한다”(요삼 12장). 또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는 이방인들 그리고 외부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참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어그러짐과 거스림밖에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같이 지내는 자들이 어그러지고 거스릴수록, 그들이 공연히 헐뜯으려고 할수록 우리는 더욱 조심하여 흠없고 순전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투지 말아야만 옳았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13:7). 또한 세상에서 빛이시며 그리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 있는 빛들이다. 하나님이 어디서든 착한 사람을 세우실 때 그는 그를 그곳에 빛으로 세우신 것이다. 또한 본문을 명령법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즉 “세상에서 너희가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5장 16절의 “너희 빛을 그와 같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신실한 것은 물론 빛을 발해야 한다. 즉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16절). 복음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를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굳게 잡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촛대가 주위의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드는 촛불을 지탱하여 그것으로 빛을 발하게 천체들처럼 세상을 밝혀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이 “그의 자랑거리라고”말한다. 고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 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즉 너희의 견고함 뿐 아니라 너희의 유용함으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그는 그들로 그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음”(16절)을 알리려 하였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목양의 사명은 우리에게 전력을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울여도 목양을 위해 달리며 수고하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달리는 일은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돌진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수고는 꾸준함과 대단한 열심을 요하는 것을 뜻한다.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고 그리고 헛되이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큰 기쁨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날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로 인하여 회개한 자들이 그들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니라”(살전 2:19, 20)고 말 하였다. 사도는 만족스럽게 그들을 위하여 달리는 일과 수고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까지 되었음을 보여 준다(17절). 그러므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계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교회의 존귀와 교회의 육성과 그리고 인간들의 영혼의 안녕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한 것으로 여겼다. 비록 이로 인해 그가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내어 놓게 되더라고 그는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그들의 제단에 희생 제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교회를 위해 약간의 고통을 받는다고 그것을 많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그의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수고를 우리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관계에 드리는 포도주처럼 드려지고 부음이 되어야 한다면”(딤후 4:6)(ape.ndomai) “나는 그렇게 드려질 준비가 되었노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자기의 피로써 인치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다(18절). 또한 그는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권한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을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훌륭한 사역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그 회중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기꺼이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바치며 또 바치어지고 있다면 그 회중들은 그 사역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이유가 되는 것이다.
2:19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칭찬(빌립보서 2:19-30) 바울은 두 선한 사역자들에게 대해 특별히 언급한다. 비록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도였고 “그들 모두 보다 더욱 많이 수고를 했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그들에 관하여 온갖 좋은 말과 천사를 아끼지 않았다. Ⅰ. 그는 디모데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디모데를 빌립보 사람들에게 보내고자 작정하고 있었고 그는 가서 자기들의 처지를 빌립보에 통지하게 되어 있었다. 바울의 교회들에 대한 염려를 보자. 그리고 그가 그들의 잘 해나가고 있음을 통하여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자. 그는 오랫 동안 그들에 대하여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괴로워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디모데를 보내어 교회 사정을 살펴 보고 그에게 소식을 가져오게 하려고 하였다. 그가 그를 보내려 한 것은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20절)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둘도 없는 적격자였다.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세심한 정성으로 기울이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신과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던 디모데와 비교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디모데를 가리켜 “너희 사정을 진실히(naturally) 생각할 자”라고 하였다(역주: 흠정판은 “진실히”를 “naturally”로 번역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의 의무가 우리에게 습관처럼 몸에서 우러나오게 될 때(naturally) 그것은 최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는 축복된 바을의 참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디모데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본문에 “몸에서 우러나는”(naturally)이란 말은 “신실하게”라는 뜻으로 하는 척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과 고결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 마음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보는 것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역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 12:14).
2. 참 마음으로 교우들을 돌보고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사역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자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뛰어나고 구분된 자라고 하겠다. 이러한 자들이 귀하므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21절)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다윗이 “모든 자가 거짓말하는 자다”(시 116:11)라고 말할 때에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바울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과연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 볼 자들을 그토록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의 사역자들 가운데 부패가 만연되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디모데만큼 교우들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자가 없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을 구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매우 큰 죄이며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 가운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과 안일과 안전을 진리와 거룩함 그리고 그의 의무보다 좋아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의 쾌락의 일들과 명성을 그리스도 왕국의 일들과 세상에서의 그의 존귀한 이익보다 더 좋아 한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자들과 같지 않았다. 고로 사도는 “너희가 그의 연단을 안다”(22절)고 말했다. 디모데는 고난을 받았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였고”(딤후 4:5)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은 그의 연단을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롬 14:18).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그의 이름과 그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진실됨을 안다. 그리고 너희의 섬김에서 그의 사랑과 충성을 경험을 했으며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을 아노라”(22절)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던 많은 곳에서 그의 조역자로 수고를 하였고 그리고 자녀가 마땅히 아버지를 존경하듯이 그러한 태도로 그는 복음 안에서 그를 섬겼고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복음 안에서 그와 함께 수고하였다. 그들의 동역은 한편은 대단한 존경으로 다른 한편은 대단한 온화함과 친절로써 서로를 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것은 같은 임무에 협동으로 수고하는 선배와 후배의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본이다. 바울은 그를 곧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란다”(23절)고 그는 말하였다. 당시 그는 죄수였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태의 추이에 따라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자신도 그들에게 가길 원했다(24절). 그러므로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곧 자유롭게 되어 그들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바울은 자기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쾌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내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겸손히 의지하고 굴복하는 자세로 그들은 보게 될 희망과 확신을 표현하였다(행 18:21; 고전 4:29; 약 4:15; 히 6:3 을 참조)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보는 것과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역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후 12:14).참 마음으로 교우들을 돌보고 그들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사역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자는 그의 형제들 중에서 뛰어나고 구분된 자라고 하겠다. 이러한 자들이 귀하므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21절)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다윗이 “모든 자가 거짓말하는 자다”(시 116:11)라고 말할 때에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바울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과연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회중의 형편을 돌 볼 자들을 그토록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의 사역자들 가운데 부패가 만연되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보편적으로 볼 때 디모데만큼 교우들에 대하여 관심이 지대한 자가 없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의 이익을 구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매우 큰 죄이며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 가운데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명성과 안일과 안전을 진리와 거룩함 그리고 그의 의무보다 좋아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의 쾌락의 일들과 명성을 그리스도 왕국의 일들과 세상에서의 그의 존귀한 이익보다 더 좋아 한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자들과 같지 않았다. 고로 사도는 “너희가 그의 연단을 안다”(22절)고 말했다. 디모데는 고난을 받았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였고”(딤후 4:5) 그리고 그는 그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닥친 모든 일에 신실하였다. 그와 교분이 있는 모든 교회들은 그의 연단을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도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았다(롬 14:18).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는 그의 이름과 그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진실됨을 안다. 그리고 너희의 섬김에서 그의 사랑과 충성을 경험을 했으며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을 아노라”(22절)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던 많은 곳에서 그의 조역자로 수고를 하였고 그리고 자녀가 마땅히 아버지를 존경하듯이 그러한 태도로 그는 복음 안에서 그를 섬겼고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복음 안에서 그와 함께 수고하였다. 그들의 동역은 한편은 대단한 존경으로 다른 한편은 대단한 온화함과 친절로써 서로를 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것은 같은 임무에 협동으로 수고하는 선배와 후배의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본이다. 바울은 그를 곧 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란다”(23절)고 그는 말하였다. 당시 그는 죄수였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태의 추이에 따라서 그는 디모데를 보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자신도 그들에게 가길 원했다(24절). 그러므로 “나도 속히 가기를 주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곧 자유롭게 되어 그들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바울은 자기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쾌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내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겸손히 의지하고 굴복하는 자세로 그들은 보게 될 희망과 확신을 표현하였다(행 18:21; 고전 4:29; 약 4:15; 히 6:3 을 참조) Ⅱ. 에바브라디도에 관하여. “그는 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그가 사랑하는 같은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복음을 위한 사역과 고난에 함께 참여한 동지로 그와 같은 수고와 고난을 겪었고 또한 그들이 보낸 사자(使者)라”고 부른다. 디모데는 빌립보인들이 그들의 교회에 관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바울에게 물어보기 위하여 보낸 사람이었든지 또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한 것을 보아 그들이 바울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해 주기 위해 보낸 사람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골로새서 4장 12절의 “에바르라”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에바브라디도는 자신도 그들에게 자기를 열렬히 원했고 바울도 그가 갈 수 있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에바브라디도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가 병든 것을 그들이 들었다”(27절)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질병은 선한 사람들이나 사역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재난이다. 그런데 죽은 자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받은 사도가 왜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행 20:10). 아마도 이러한 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고 따라서 신도들 상호간에 이를 이용할 당위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복음서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정이 따르리니, 그들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 18)고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의 임의로 그리고 언제든지 그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던 것 같고 다만 이로 인하여 어떤 큰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이 적합하다고 보실 때 만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치는 측량할 수 없는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다운 적절한 조치였다고 하겠다. 2. 빌립보 교인들은 그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 대단히 염려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에바브라디도가 아픈 만큼이나 그들도 심히 근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것 같이 보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사도에게 뽑아 보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하나님은 그를 다소 회복시키시고 또 사역을 당분간 쉬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27절)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빌립보로 돌아가는 것이 에바브라디도나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긍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당시 교회가 특별한 은사들로 축복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질병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쉬게 하기로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에바브라디도를 보내지 않아서 큰 손실이 주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는 일을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여겼다. 즉 “내가 투옥으로 당하는 슬픔에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는 말씀이다. 또는 그가 말한 그의 근심이란 최근에 그와 함께 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죽어서 그가 맛보고 있는 상심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게다가 에바브라디도까지 지금 죽으면 이것이 그에게는 새로운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방문하기를 몹시 원하였다. 그는 그가 병들었을 때, 그로 인하여 근심할 자들과 함께 위로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함이다(28절). 즉 그가 얼마나 건강이 회복되었는가를 너희들을 직접 봄으로 그로 인하여 너희로 감사함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를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위로 받는 것을 통해 자기도 위로받는 것을 말한다.
5. 바울은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고 하였다. 즉 “이같이 복음을 위한 사역에 열심이고 신실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최상의 존경과 사랑을 베풀라. 진심어린 사랑과 좋은 말로 그에 대한 너희의 기쁨과 존경을 보여 주라”는 말이다. 그가 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있어진 일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사도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30절)는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가 가진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무분별함에 대해서 그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 이유로 그들이 그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진실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육성을 증진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겨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내어 놓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2) 그들은 질병에서 거의 회복된 그를 기쁨으로 환영했다는 사실이다. 자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더 가치있는 것으로 부가되며 또한 우리는 그 자비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의 질병의 소식을 듣고 대단히 염려했다. 그 소식을 듣고 에바브라디도가 아픈 만큼이나 그들도 심히 근심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특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것 같이 보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사도에게 뽑아 보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하나님은 그를 다소 회복시키시고 또 사역을 당분간 쉬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다”(27절)고 하였다. 사도는 그가 빌립보로 돌아가는 것이 에바브라디도나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큰 긍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비록 당시 교회가 특별한 은사들로 축복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질병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쉬게 하기로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에바브라디도를 보내지 않아서 큰 손실이 주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보내는 일을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여겼다. 즉 “내가 투옥으로 당하는 슬픔에다가 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는 말씀이다. 또는 그가 말한 그의 근심이란 최근에 그와 함께 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죽어서 그가 맛보고 있는 상심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고 게다가 에바브라디도까지 지금 죽으면 이것이 그에게는 새로운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방문하기를 몹시 원하였다. 그는 그가 병들었을 때, 그로 인하여 근심할 자들과 함께 위로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함이다(28절). 즉 그가 얼마나 건강이 회복되었는가를 너희들을 직접 봄으로 그로 인하여 너희로 감사함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를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위로 받는 것을 통해 자기도 위로받는 것을 말한다.바울은 그들에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고 하였다. 즉 “이같이 복음을 위한 사역에 열심이고 신실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최상의 존경과 사랑을 베풀라. 진심어린 사랑과 좋은 말로 그에 대한 너희의 기쁨과 존경을 보여 주라”는 말이다. 그가 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있어진 일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사도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30절)는 말씀을 통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가 가진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무분별함에 대해서 그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 이유로 그들이 그를 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진실한 마음을 품은 자들은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교회의 육성을 증진시키는 일을 귀하게 여겨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내어 놓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그들은 질병에서 거의 회복된 그를 기쁨으로 환영했다는 사실이다. 자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더 가치있는 것으로 부가되며 또한 우리는 그 자비를 더욱 증진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빌립보서 2장 강해
그리스도의 겸손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핵심구절. 3절의 ‘여기다'(헤게오마이) – 생각하다, 믿다, 간주하다
1) 어떻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을까? – 나보다 못한사람, 나와 동일하게 여기는것까진 OK.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 비결은, 3절(여기다)에 있음, 6절에 예수님이 (여기다)라고 쓴 원어와 동일 – ‘보다 남을 낫게’, 휘페레코 : 능가하다, 탁월하다, 위에 있다. – ‘휘페르’ : ~의 위에, ~을 넘어서, ~을 위하여, ~에 관하여 – ‘에코’ :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 – 8절. 자기를 낮추시고 -> 나를 낮출때 남은 나보다 높아진다. 2)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 자기 일에 충실히하자
3)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 자기 일에 충실히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자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핵심구절. 6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않다. 8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11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이유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음 2) 하늘, 땅 , 땅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 이름앞에 무릎꿇게 됨 3) 모든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4)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이유 1)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받게 됨 2)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감으로 예수님을 배울 수 있음(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됨) 3) 우리가 낮아질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심.
– 우리의 목표는 현재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것이지만, 영원한 나라에서의 우리의 위치다. – 빌 3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것임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 신자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것을 행하게끔 하심 –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소원을 주심 – 하나님이 주신 Vision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뜻 안에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음 – 주신 이는 하나님 이시지만, 행하는 주체는 ‘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새생명’, ‘새로운 김동환’ – 주님이 하셨다! 의 위험성?, 반쪽만 있음. – 정확히는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소원을 품게 하셔서 주님과 함께 우리가 행하는것임 – 그러므로, 우리의 상급이 있게 되는것임.
2)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사역(모든 일)을 하는것이 중요함 – 원망과 시비가 있게 되면, 사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가 어려움 –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기를 원함 – 그리스도인들끼리 싸우는것 보다 더 세상 사람들에게 시비,논쟁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없음 – 그리스도인의 좋지 못한 간증이 NEWS에 나오는것…이것보다 부끄러운일이 있을까.. – 원망과 시비가 많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것이 더욱 아름다울 것임
3) 결론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임. –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 밝혀(굳게 잡다, 꼭 붙잡다, 주목하다) – 말씀을 꼭 붙잡는것, 말씀이 아닌 다른 사상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잡는것 중요함! – 우리의 달음질, 수고는 분명한 말씀 위에 있어야 한다. – 잘못된 교리, 잘못된 분별로 인한 열심은 오히려 성도들을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 –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계속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것이 우리의 평생에 중요한 일임 – 그리스도의 날에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 1) 말씀을 잘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것. 2) 그리고 그 바탕위에 달음질과 수고가 뒤따르는것. 3)이것의 목적지는 그리스도의 날에 평가받을것이라는 점. ※ 아직 우리의 시상식이 시작되지 않았다. 시상식을 먼저 시작하려고 하지말자!! 현재의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너무 목매지 말자!!! 우리가 주님일을 할때 항상 그리스도의 날에 있을 하나님의 칭찬만 생각하자!
17~18절.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 스펜도 -> (전제를)붓다, 바울서신에 2번 사용, 임박한 자신의 순교를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 -> 피의 희생과 대속제물과 같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표현 ‘순교자’의 영성, 순교자의 영광, 죽어버리면 이땅에서 칭찬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께만 칭찬을 받게 될 것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절.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절.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절.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 : 선물을 바울에게 전달, 바울의 편지를 빌립보 교회에게 전달
1) 디모데 또는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이 되자! 나는 어떠한 사람에 가까운가?
결론. 1)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비결 ->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낮추는것,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있을 상급과 영광을 바라보는것 2) 하나님 주신 소원을 따라서 수고와 열심을 내는것 -> 그리스도의 날을 생각하며, 바른 교리(말씀해석) 위에 우리의 수고와 열심을 더하는 삶 -> 순교적 영성이 필요한 시대!
3) 진실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는것 -> 디모데와 같은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것 같이 복음에 수고 ->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성도사랑이 넘치는 자가 되는것(사랑,물질로 도움,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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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빌립보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0년 7월 15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기쁨의 간증 2장: 기쁨의 봉사 3장: 기쁨의 이유 4장: 기쁨의 열매 서론 빌립보서의 저자 는 바울이다(1:1). 바울이 본 서신의 저자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확증된 사실이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 는 주후 61년 말경일 것이다. 본 서신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4개의 옥중 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되었던 것 같다. 빌립보서의 특징적 주제 는 기쁨이다. 본 서신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서신이다. 이 짧은 서신에 ‘기뻐한다’는 말이 8회, ‘기쁨’이라는 말이 5회나 사용되고 있다. 본서는 기쁨의 서신이다. 빌립보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1장, 기쁨의 간증 (복음의 진보) 2장, 기쁨의 봉사 (복음을 위한 고난), 일치와 겸손에 대한 교훈 3장, 기쁨의 이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 4장, 기쁨의 열매 (성도들과 헌금), 기뻐하라는 권면
1장: 기쁨의 간증 1-11절, 바울의 감사와 기도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종들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종들’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과 그의 조력자인 디모데가 항상 주님께 순종해야 하는 사역자임을 보인다.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또한 신구약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성경에 정통하고 그 모든 말씀을 믿고 그 모든 교훈을 순종하는 성도들과 직분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내졌다. 빌립보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었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여진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배롭고 귀하다. 성경은 그들을 위해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성도들에게 주신 책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대로, 모든 성도들은 성경책을 날마다 열심히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심령과 삶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해야 한다(1:8). 또 빌립보 교회에는 감독들과 집사들도 있었다. 감독은 양들을 보살피는 직분이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분이다(행 20:17, 28).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설교하는 장로라고 불린다. 집사는 헌금 수금과 지출에 관한 일을 하는 직분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기원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거듭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얻어 지식과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변화되고 실생활이 더 거룩해져야 할 것이다. 또 평안은 일차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 그리고 환경적 평화와 안정까지도 내포할 것이다.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 [3-5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함을 인함’이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그때 곧 그들이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았던 그 날부터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는 당시까지, 주후 50년경부터 61년경까지 약 11년간일 것이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원어( 테 코이노니아 휘몬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 th’/ koinwniva/ uJmw’n eij” to; eujaggevlion )는 ‘복음에 참여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NASB, NIV) .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은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하는 복음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7절).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기도하였고 또 헌금으로 후원하였다(4:15).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 속에 주신 구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가리킨다고 본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때가 되어 구원하신다. 그는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히브리서 12:2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표현하는데, ‘믿음의 주’라는 말은 ‘시작자’라는 뜻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성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또는 그의 재림의 날까지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온전케 하신다. [7-8절]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심정]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확신을 가진 근거는, 그들이 그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할 때 그들이 그와 함께 입장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단들로부터 복음을 변호하였다. 그때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과 입장을 같이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였고 또 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말하였다. [9-11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분별력]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인정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몇 가지 기도 제목을 열거하였다. 첫째로, 그는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하였다. ‘총명’이라는 원어( 아이스데시스 ai[sqhsi” )는 ‘분별력’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되 분별력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우리로 잘못된 길을 가게 하고 잘못된 열심을 갖게 한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위가 ‘얼마큼 세속적이어도 괜찮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가장 선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 가장 선한 것을 택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 세상의 일들 중에 믿음과 영혼 구원의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며 일주일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일이요 예수님을 믿는 일만 썩지 않고 영생하는 일이다.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29). 그러므로 믿음의 일은 성도의 본업이요 그 외의 일들은 다 부업이다. 세월이 빠르게 지나 우리가 죽음의 문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하였다. ‘진실하여’라는 원어( 에일리크리네스 )는 ‘햇빛에 비추어 입증된, 순수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 빛 아래서 한 점의 흠이 없을 정도로 진실하고 흠 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14에서 주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그가 주신 의(義)와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케 될 것을 확신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성화를 이룰 것이며 영광에 이를 것이다. 그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지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의 은혜에 동참하자.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위한 고난과 변명과 확정에 참여했고 또 후원도 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심정은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변호하고 복음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온전함을 위해 기도하자. 바울은 교인들이 지식과 분별력 있는 사랑의 풍성함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했다. 우리도 지식과 분별력 있는 사랑의 풍성함을 가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자. 12-19절, 기쁨의 간증 [12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이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 일을 가리킨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후퇴하지 않고 도리어 진전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에게 닥친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섭리하신다(롬 8:28). 고난은 보통 우리의 인격을 깨끗케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한다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복음의 일을 중단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복음의 진전과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13-14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시위대’( 프라이토리온 )라는 말은 로마 황제의 시위대 뜰을 가리킨다고 본다 (BDAG) . 사도 바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그가 옥에 갇힌 것이 그의 어떤 잘못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형제 중 다수’에 연결되는 말이라고 본다 (KJV, NIV) . 담대히 전도한 자들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 . . 신뢰하므로’라는 말은 형제들이 사도 바울의 매임 때문에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전한 복음의 진실성은 그의 옥에 갇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복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담력 있는 증거를 낳았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질투와 경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전통본문은 16절과 17절의 순서가 반대다 (Byz, KJV) . 전도를 하는 데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질투와 경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질투하며 그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또 참으로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전도하였다. 전자의 사람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다는 것이 의아스럽지만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경쟁심과 이기적 야망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거나 구원할 영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가 중요했다. 이런 자들이 진실한 신자이었을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했다. 복음을 변명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듯이 율법주의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켰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다.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왜곡하고 변질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전파와 변호의 일을 다 감당하여야 한다. 교리적 논쟁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의 변호가 실패하면 복음의 전파도 헛되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또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사랑하므로, 또 죄와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일 것이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떤 이들은 겉모습으로만 전도했고, 어떤 이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신다면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감옥이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고 감옥이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파된다면, 심지어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전도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 교회나 천주교회와 협력하며 전도하는 방식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후 6:14-17). 단지 본문의 뜻은, 비록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그를 바르게만 전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절] [이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영]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앎이니라]. 본문은 앞절에서 말한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도 불리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다. ‘내 구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복음이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또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곳에서 풀려날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며 또한 기뻐한다. [20-21절] [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그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 위해 살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며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게 하기를 항상 그리고 담대히 원하였다. 그것이 그의 생활 신조이었다. 그것은 모든 성도가 본받을 만한 일이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비슷하게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은 복음에 진보가 되었다. 비록 그가 옥에 갇혔지만, 복음은 시위대 안에서 확장되었고 많은 형제들이 도리어 분발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다. 요셉은 형들이 그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의 가족들을 그 기근에서 구원하셨다고 말했었다(창 50:20).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롬 8:28).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신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전도할 때 결코 경쟁심이나 외식으로 하지 말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또 멸망할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복음이 온 세계 만민에게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마 28:19; 막 16:15; 눅 24:47; 행 1:8). 비록 결함 있는 전도자나 교인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다 할지라도 바른 복음이 전해진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시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가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영혼들의 구원과 성도들의 믿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하고 복된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22-30절,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2-24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으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뜻하며, ‘내 일의 열매’라는 말은 그가 살면 주님과 복음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성도는 죽으면 즉시 천국에 들어가며 그리스도께로 간다. 주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면서 회개한 한 행악자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3:43).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8에서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성도가 죽어 천국에 들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은 참으로 사모할 만한 일이다. 천국은 이 수고로운 세상, 광야와 같고 눈물 골짜기와 같고 죽음의 그늘진 땅인 이 세상보다 더 사모할 만한 곳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국은 참된 기쁨과 평안이 넘친 곳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원어( 아낭카이오스 )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성장]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의 진보[성장]와 기쁨을 위하여’–이것이 사도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해 할 일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거할 것임을 알았다. 26절의 ‘자랑’이라는 원어( 카우케마 )는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 (KJV, NIV) . 문맥상 그것이 더 좋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자신으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쉰아들룬테스 sunaqlou’nte”)[함께 싸우는](KJV, NASB, NIV)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이것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며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의(義)에 일치하게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과,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1에서도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방향(거룩, 의, 선)이 있다. 우리는 그 방향을 거슬러 행하지 말고 그 방향대로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복음 신앙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져야 하고(고전 1:10; 빌 2:2),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는 일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2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교훈했고, 디모데후서 4:7에서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했다. 유다는 유다서 3절에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교훈하였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행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의 보수와 변호를 위해 함께 싸울 것이다. [28절]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표]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표]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또 한가지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믿으려 할 때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때때로 우리에게는 대적자들이 있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일과 전도의 일에는 환난과 핍박이 예상된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과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그런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성도가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그것을 일으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이며, 그것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표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는 말은 이렇게 진실히 믿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4:7).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도, 또 그것을 잘 이겨나가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 속에는 당연히 그를 위해 고난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삶이다.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5:11-12). 사도 바울에게는 그런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자신이 전도 사역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자세히 증거하였다(고전 4:9-13; 고후 6:4-10; 11:23-27).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교회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초대교회는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한 교회이었다. 우리나라의 초대교회도 그러하였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은 죽으면 천국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간다. 우리는 주께서 회개한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들어가 주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또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이 육신의 장막을 떠나 천국에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해야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 때문이다. 주께서는 친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믿음의 의는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된다. 둘째로, 주의 종들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지만, 사는 것이 성도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했다.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경건하게 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특히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복음 신앙을 위해 즉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변호하는 일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함께 싸워야 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천주교회와 이단 종파들뿐 아니라,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의 용납과 복음주의의 타협과 은사주의의 혼란과 세속적 교회음악 (CCM)과 열린 예배의 풍조가 교회들 속에 만연해 있다. 참된 교회들은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근본주의적 장로교회가 취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 입장을 위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함께 싸워야 한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즐거이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위해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2장: 기쁨의 봉사 1-11절,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있을진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또 그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그들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어떤 권면이나 격려나 위로가 있을 것이며 그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유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이 권면을 유념해야 한다. 바울은 우선 일심단합하라고 권면한다. ‘같이하여,’ ‘같은 사랑,’ ‘합하여,’ ‘한 마음’ 등 같은 뜻의 말이 네 번 반복되었다. 그는 에베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했다. 분열은 육신의 일이며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분열하는 자는 회개치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물론, 교회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이다. 이단과 정통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거나 교회와 세상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붙들지 않기 때문에 옛날 노아 시대 홍수 심판 후의 바벨탑 운동과 같다. 형제 사랑을 강조한 요한일서도 바른 신앙과 이단을 구별하고 형제 사랑이 바른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교훈했다(요일 4:1). 사도 바울은 또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한다. ‘다툼’이라는 원어는 당파심 혹은 이기적 야망이라는 뜻이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경쟁심은 좋지 않다. 또 우리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들며 이루기를 소원해야 한다. 또 사람이 겸손하려면,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자기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우리는 다른 이의 약점만 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주신 장점을 보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또 성도들이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일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다른 이들의 일이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이타적 마음가짐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겸손히 일치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것을 봄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한다. 목회자들의 기쁨은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요한도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며 그러한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했다(요이 4; 요삼 3-4).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이 마음이 너희 속에 있게 하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원문 직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들어 겸손을 교훈하였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이심을 믿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믿는다. 그는 이사야 9:6에서 그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불릴 한 아기로 출생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미가 5:2에서는 그의 근본이 상고에, 태초에인 인물로 예언되었다. 요한복음은 그의 신성을 풍성하게 증거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고 증거되었고(1:1)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친히 말씀하심으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고(5:17-1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연대가 영원 전부터임을 암시하셨고(8:58), 또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고(10:30), 또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고(14:9), 또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17:5). 사도 바울은 디도서 2:13에서 그를 ‘크신 하나님’이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20에서 그를 ‘참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1:17에 보면, 그는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 22:12-13에서도 그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가 그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그의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비천한 마구간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목수인 요셉의 돌봄 아래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그가 전도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 가운데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다(요 1:14).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이다.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그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후 지극히 크신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다. 하늘의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은 산 자나 죽은 자나 다 그를 주라고 고백하며 찬송을 올린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치단합하여 서로 교제하고 주의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이기적 욕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또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에 임하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마태복음 11:2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과 한 본체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대속 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셨다(마 16:24).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다. 그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다 주라고 불리시며 찬송과 영광을 받으신다. 그는 지극히 낮아지셨으나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 디모데후서 2:11-12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2-18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라는 원어( 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 )는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이다 (KJV, NASB, NIV) .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했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께 항상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의 결과는 매우 고통스런 불행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믿은 이들은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롬 3:24; 히 10:10, 14). 우리가 받은 의와 거룩함은 완전하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의 순종의 선한 행위가 구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의를 이루셨고 그 의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행할 필요도 없고 행할 수도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오직 믿음으로 감사히 받고 그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이 되고 그런 삶을 살라는 뜻이다. 즉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우리의 성화는 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이며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 우리는 완전을 목표로 한 성화를 위해 소극적이거나 게으르지 말고 날마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13절]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과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하심과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한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아 있는 죄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건하고 선한 소원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다툼]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낸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신다. 원망, 불평, 분쟁은 인격의 흠과 결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러한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를 위해 봉사할 때에 원망, 불평, 분쟁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협력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이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세상은 경건 대신 불경건을 택하고, 거룩 대신 더러움을 구하며, 의(義) 대신 불의를, 선(善) 대신 악을 따르며, 또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는 세상이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 부패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지? 성도들은 이렇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답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인 경건과 거룩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빛’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세상을 어두운 세상이라고 부른다(요 1:5;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과 슬픔을 가리킨다. 그러나 구원은 빛이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과 기쁨의 회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의 구원받은 삶, 성화의 삶, 선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원어( 에페코 )는 ‘드러낸다, 나타낸다’는 뜻이거나 (Thayer, KJV, NIV) ‘붙든다’ (BDAG, NASB) 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였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악된 옛 습관과 생활에 계속 머물러 있고 경건하고 거룩한 새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난다.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열매 없는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빛의 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그 성도들은 전도자들의 기쁨과 자랑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의 끝부분에서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4:1).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서도 그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참된 성도들은 목회자의 기쁨과 자랑이다. [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내가 붓는 제물로 드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믿음의 제물과 봉사’란 ‘믿음으로 하는 헌신과 봉사’를 가리킨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며 주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헌신과 봉사 위에 자신이 붓는 제물로 드려질지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붓는 제물로 드려진다’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과 봉사이었다. 옥에 갇혀 있는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오, 빌립보 교인들이여, 나는 나의 생명이 여러분의 믿음의 헌신과 봉사 위에 부어질지라도 기뻐하겠습니다.” 구원은 기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다윗은 시편 16:11에서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했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이다(롬 14:17).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행복한 일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이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기뻐하였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이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으로 인해, 천국 소망으로 인해, 성령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새 생명을 얻고 구원에 합당하게 주께 순종하며 흠 없는 삶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항상 이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법적인 구원, 곧 완전한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義)를 우리의 삶 속에서 흠 없는 인격과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얻은 의를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실천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구원받은 우리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다. 이것은 과거의 죄악된 습관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 세상은 악하며 마귀의 시험은 언제나 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싸움을 하며 이 싸움에서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누릴 영화는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상이 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도의 성화의 삶, 곧 순종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니고 매우 기쁜 일이다. 구원에 합당한 삶, 곧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순종하며 애쓰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항상 기뻐해야 한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30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20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귀한 동역자(同役者)이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자이었다.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생각과 정신을 같이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으며.”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 곧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이었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는 지금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디모데 외에는 없었다. 참된 일꾼은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꾼들은 많으나 충성된 일꾼은 드문 것 같다. [21-24절] [이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수고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본문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둘도 없는 귀한 동역자인 이유를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변호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성도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에는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 ‘[디모데의] 연단’이라는 원어( 도키메 )는 ‘시험된 인품, 증명된 인품’이라는 뜻이다. 디모데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충성됨과 신실함이 증명되었다. 그의 신앙 인격은 진실한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행함같이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였지만, 그의 입과 손발이 되어줄 사람이 디모데이었다.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하며 그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사도 바울에게는 에바브로디도라는 동역자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사도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자이었다. 그는 주 안에서 사도 바울의 형제이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를 ‘함께 군사된 자’라고 표현한다. 개인의 신앙생활과 영혼 구원의 전도는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며, 특히, 주의 종들과 전도자들이 그러하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훈련은 성경말씀들을 읽고 듣고 배우며 그 말씀들을 실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이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훈련과 죽음을 각오한 정신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한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바울에게 왔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었고 그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졌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간절히 사랑하고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병든 소식으로 인해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할까봐 심히 근심하였다. 사랑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염려하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에게 바로 그런 사랑의 심령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도들을 위한 이런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27절]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의 육신은 참으로 약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슬픔과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라 하더라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사도시대에 주셨던 병 고침의 은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셨다. 사람의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달려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만 한다면, 고치지 못할 병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병들었을 때에 오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그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5:14-16에서 이렇게 교훈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목사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혹시 마음에 거리끼는 실수나 부족이나 죄가 있으면 다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의약적 치료도 감사히 사용할 수 있다. [28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열심히, eagerly(NASB), eager(NIV)]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로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하자 열심히 권하여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를 봄으로써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 그들이 상심할까봐 염려했던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한다.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영접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오는 풍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영접하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만 국한해 말하지 않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충성된 일꾼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군대에서는 좋은 장교들과 지휘관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만일 그런 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바른 복음 전파의 계승과 충실한 목양 사역을 잃어버리고 쇠약해지고 변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종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그런 자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30절]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죽을병에 걸렸어도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일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는 참으로 후대의 교회를 위해 희생적 봉사의 모범이 되었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명령이며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하라고 명하신다. 무엇이 충성인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르게 살다가 바르게 죽는 것이 참된 충성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본문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모범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디모데와 같이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원한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있는 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 대신에 자기 일을 구할 때 자기 일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증명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좋은 성도와 좋은 직분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 나와 함께 군사된 자’라고 표현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군병이다. 우리의 싸우는 대상은 사탄과 악령들과 세상의 악의 풍조이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죽기까지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 활동을 돕는 일을 하다가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던 것을 가리킨 것 같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까지 우리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런 충성된 종들과 일꾼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42),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3장: 기쁨의 이유 1-9절, 내가 가진 의(義) [1절]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옥에 갇힌 바울은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기뻐했고(빌 2:17) 또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기쁨의 이유와 원천을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이시며 원천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참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건강도, 돈도, 육신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세상 권세도 다 일시적이며 어느 날 없어지는 것들이다.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들은 참 기쁨이 되지 못한다. 참 기쁨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안 가운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쁨은 기쁨 후에, 아니 기쁨 중에도, 때때로 슬픔과 허전함이 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과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이다. 모든 슬픔은 근본적으로 죄의 결과이다. 죄가 없는 천국은 기쁨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천국에서 기쁨의 삶을 영원히, 충만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 안전하다고 표현한다. 진리의 교훈은, 비록 이전부터 잘 아는 내용일지라도, 귀하고 안전하다. 새로운 교훈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에 빠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옛것, 곧 잘 아는 성경적 교훈이 안전하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은 도덕성이 없고 남을 물어뜯듯이 해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들은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표현된다. 이단자들은 사상적 변질을 줄 뿐 아니라 도덕적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정당하게 교리적 토론을 하는 자들이 아니고 형제를 거짓으로 비방하고 폭력적이다. ‘손(損)할례당’이라는 원어( 카타토메 )는 ‘절단자’라는 뜻으로 할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몸만 상하게 한 자, 즉 거짓 할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비꼬아 한 말이라고 본다. 그들은 참 경건도 도덕성도 없는 자들이었다. 성도들은 그런 이단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3절] 하나님의 성령[영]으로 봉사하며[예배하며](KJV, NASB, NIV)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의 참 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상징하였다고 본다.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이 참 할례당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도우심으로 해야 한다. 또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성도는 자신들이 죄악되고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아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기뻐하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우리의 의(義)와 거룩과 완전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우리의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저 율법주의 교사들처럼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자이었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 족속이었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외적으로는 흠 없는 자이었고 열심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한 자이었다. [7-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혹은 ‘쓰레기’]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들, 즉 유대인이라는 신분과 혈통,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의(義) 등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 혹은 쓰레기로 여긴다고 말한다. 사람의 외모, 학력, 재산, 건강, 가문, 경력, 사회 신분 등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가? 구약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그것들은 다 헛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무서운 전염병 등으로 죽거나 비천해질 때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욱이, 그것들은 신앙에 방해거리이다. 그것들은 사람을 교만케 만들고 영적인 일들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쓰레기같이 여겼다.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쓰레기같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세상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던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최고의 가치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말한다. 성도가 가진 의(義)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요 기독교의 진수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해설되고 강조된 복음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무가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상것들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17).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데마처럼 어느 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딤후 4:10). 아무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마 10:38; 눅 14:26-27, 33). 우리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갈 6:14).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자. 성도의 기쁨은 헛된 세상것들 때문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들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사상적 변질을 가져오고 구원 대신 멸망으로 이끈다. 그들은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며 사탄의 일꾼들이며(고후 11:3-4, 13-15) 신적 구주 예수님과 대속 사역을 부정한 자들이다. 그들은 저주받을 자들이며 멸망케 할 이단들이다(갈 1:6-9; 벧후 2:1). 또 그들은 도덕적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믿는 성도를 비방하고 해친다. 그것은 자신이 이단인 증거다. 당시 유대교인들, 그 후 천주교인들, 이슬람 교인들, 각종 이단들이 그러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 의이다(롬 3:21-24; 10:2-4; 갈 2: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된 의의 지식은 우리에게 가장 고상하고 가장 귀하고 복된 내용이다. 이것에 비하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길 만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들에 불과하다. 10-16절, 부름의 상을 위하여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독특한 인격, 그의 속죄사역, 그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깊고 신비하다. 사도 바울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사건이었다. 그의 부활체는 장차 성도의 부활체와 영생할 몸의 모습이었다. 장차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의 삶도 고난의 삶이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의 몸의 부활은 아직 미래의 사건이다. 그것은 육신적, 도덕적 완전 상태, 곧 완전 성화 상태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직 불완전한 성화 상태에 있다. 성도에게는 아직도 육신의 연약성이 남아 있다. 성도의 기쁨과 평안도 세상에서 때때로 흔들리고 일시적으로 위축된다. 사도 바울은 아직 부활을 얻었거나 완전 성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완성인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 곧 몸의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작정된 복이다. 성도의 삶은 부활과 영생을 향한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그 구원은 법적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의(義)는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을 보장하지만, 우리는 그 날을 위해 현재 성화(聖化)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성도들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하였다.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헨 e}n)[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1) 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신앙생활에는 많은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이다. 누가복음 10:42의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요한복음 6:27, 29에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에게 참으로 중요한 한가지 일은 앞에 있는 푯대 즉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목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이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義)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 즉 ‘완전 성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 목표를 향하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한다. 성도는 잘한 일이든지 못한 일이든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는 지나간 날들에 잘못된 일들을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씻음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오직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며 예배 시간을 귀히 여기고 성경 교훈대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15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원어( 텔레이오이 )는 ‘완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6에서도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말했다. 성도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법적 완전이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해졌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테텔레이오켄 ).” 물론, 이 완전은 실제적인 완전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1:28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성도가 법적으로 얻은 완전한 의(義)는 자만(自滿)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미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었다고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즉 도덕적 완전을 향하여 힘써 달려가야 한다(벧후 1:10). [16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같은 규칙으로 행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자](전통사본). 2)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시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화(聖化)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인격 형성이 얼마나 이루어졌든지 간에,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또한 나태하거나 해이해지지도 말고 오직 신앙의 목표인 부활과 영생을 위하여, 즉 완전 성화를 위하여 진지하게, 열심히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이며 완전 성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능력으로 영광의 부활에 이르셨다. 우리에게도 그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목표는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죄 짓지 않고 의를 행하는 완전 성화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삶을 중시하신다. 우리는 지금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 즉 과거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앞에 있는 것, 즉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하여, 주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인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완전한 의를 얻었고 거룩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의롭고 거룩한 인격과 삶을 위하여 달려가야 한다. 17-21절, 나를 본받으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스코페이테 )[주목하라].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두 가지 점을 포함할 것이다. 첫째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확신이며, 둘째는 완전 성화(聖化)를 위한 정직한 달음질이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의 구원의 내용이요 우리에게 생명적 진리이다. 또 완전 성화를 위한 정직한 달음질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이요 의로운 삶이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義)만 확신하는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난 중에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힘써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믿음과 그의 달음질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권면한다. 그는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을 본받는 자들이 있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 믿고 완전 성화를 위해 힘써 달려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 교훈대로 믿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 때문이다. [18절]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행함이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침으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또 그러면서 저 행위구원론자들은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을 핍박하였다. 저런 거짓 교사들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니고 그의 원수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언급하며 논박하였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런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의 생애는 단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바른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때때로 싸워야 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현실이었고 또한 2천년 교회의 역사이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배교자들과 또 그들과 타협하는 불신실한 종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아마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들일 것이다. 오늘날도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저 배교자들과 타협자들로 인하여 사도 바울처럼 눈물을 흘린다. [19절]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은 멸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20은 하나님의 마지막 대 심판 전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결말은 지옥 불못이다. 둘째로, 그들의 신(神)은 그들의 배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적 욕심을 최고 가치로 알고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먹는 것이 최고 가치이며 그 외에도 그들은 물질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 등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종노릇하는 자들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욕심을 섬기는 자들이다. 셋째로,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이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 결국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게 참된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실상 그들의 수치이다. 그들에게는 영광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날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땅의 일’이란 썩어질 것, 허무한 것 그리고 죄악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16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악된 것만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절] [이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있음이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본문도 17절에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시민권’이라는 원어( 폴리튜마 )는 ‘시민권’ 혹은 ‘나라’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며 천국의 시민권자이다. 이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천국은 복된 세계이다(히 11:16; 계 21:1-4). 우리는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천국에 계신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계 22:20). 우리는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이지만,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의 단계이고, 성화(聖化)는 현재의 단계이고, 영화(榮化)는 미래의 단계이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고 지금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만,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죄성과 연약성과 죽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몸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21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할 수 있는 역사로](원문, KJV, NASB, NIV)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신적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다시 오실 때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의 낮고 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영생하기 위해 가질 부활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같이 영광스러울 것이며 약하지 않고 썩지 않는 강한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여기에 성도의 영원한 기쁨의 이유가 있다.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성도의 영원한 기쁨의 이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 같은 경건한 종들을 본받고 또 우리 자신도 다른 성도들에게 본이 되기를 소원하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고 바르게 사는 자들을 주목하라고 했다. 우리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신앙과 완전 성화에 대한 정직한 열심에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딤전 4:12; 딛 2:7). 둘째로, 우리는 교회 안의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배격해야 한다. 그들은 결국 육신적 쾌락과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이다.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오늘날 그런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셋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확신하며 소망하고 즐거워하며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4장: 기쁨의 열매 1-3절, 세 가지 권면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의 끝에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 곧 천국에 있기 때문에, 주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죄와 파멸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또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함께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고 함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되었다. 천국은 거룩하게 서로 사랑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특히,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전도의 열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사랑스런 빌립보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그 교회야말로 사도 바울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였다. ‘서라’는 원어( 스테케테 )는 ‘굳게 서라’는 뜻을 가진다 (KJV, NASB, NIV) .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말은 주의 진리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복음 진리 안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완전 성화를 향해 충실히 노력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거짓 교사들과 달리 천국 소망을 가진 자이다. 성도들은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님과 그 진리를 믿는 믿음 안에, 주님을 사랑함에, 주님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님을 소망함에, 주님께 대한 충성에, 주님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모든 성도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첫 번째 권면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을 말했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골로새서 2:7, “그 안에[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보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이었지만, 그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 2:2-3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다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교훈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님의 진리 안에서, 성경의 일치된 교훈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두 번째 권면이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원어( 쉬쥐고스 )는 ‘멍에를 같이한 자’라는 뜻을 가진 사람 이름(‘쉬쥐고’라는 사람 이름)일지도 모른다( NIV 난외주).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표할 만한 감독 중 하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복음 사역에 함께 수고한 자이었던 것 같다. 또 빌립보교회에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힘썼던 여자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또 글레멘드와 그 외의 그의 동역자들을 말한다. 그는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확신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행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를 통해 확증된다. 사도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복음의 일꾼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세 번째 권면이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일꾼들을 도울 수 있는가? 첫째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울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위로자이시며 격려자이시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사역자들에게 힘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3, “그러므로 피차 권면[위로, 격려]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둘째로, 우리는 기도로 도울 수 있다. 기도는 복음의 일꾼들에게 줄 수 있는 매우 큰 도움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로, 우리는 물질로 도울 수 있다. 복음의 일꾼들은 세상의 일을포기하고 교회 일에만 전념하는 자들이다. 교회의 전임(專任) 사역자들은 교회 일에 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0-4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주의 진리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의 복음 진리 안에 굳게 서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완전 성화를 향해 충실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님과 그 진리를 믿는 믿음 안에, 주님을 사랑함에, 주님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님을 소망함에, 주님께 대한 충성에, 주님의 바른 진리를 변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각 사람의 개인적 견해를 버리고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대한 일치된 교리 사상과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주 안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고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버리고 오직 주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성도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도와야 한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와야 한다. 또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도와야 한다. 또 그들은 복음의 일꾼들을 물질로 도와야 한다.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그 가족들과 함께 의식주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고 바른 말씀을 전하고 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 4-7절, 주 안에서의 특권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는 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으로 복된 특권이다.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은택들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우리의 근본적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들인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은 주 안에서 이미 다 해결된 것과 같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롬 14:17), 지금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기쁨은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서 일하셔서 맺게 하시는 복된 열매이다(갈 5:22).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라는 원어( 토 에피에이케스 )는 ‘온유함, 친절함, 너그러움 등’의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겠는가?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와 친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부족한 자들에게도,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도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온유함과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성도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까닭은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일을 다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이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께서는 가까이 와 계신다. 주의 재림은 심히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오직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의 것들만 구하는 자들이라면 모르지만, 우리가 장차 오는 천국을 알고 천국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구하는 참 성도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 성적 문제나 진학의 염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거나 구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청년들은 취직의 염려와 결혼과 출산의 염려, 장년들은 직장과 사업 등의 경제 문제와 건강 문제와 자녀에 대한 염려, 노년들은 자녀들의 평안, 자신의 건강, 노후의 경제적 대책, 외로움, 임종 준비 등 많은 염려거리들이 있다. 인생은 염려가 많은 삶이며 이 세상은 염려가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실상, 우리의 염려거리들 중에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생활의 활기를 빼앗아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것이 믿음이며 순종이다. 염려하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또한 하나님께서 보장하실 것이다.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6:25). 그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로 예를 드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자기 백성의 의식주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느냐고 교훈하셨고, 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天父)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31-33).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무슨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살아계시고 전지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다면, 또 그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우리를 위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라도 염려하거나 당황하고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신적인 일도, 육체적, 물질적인 일도, 개인적인 일도, 가정적인 일도, 교회적인 일도, 국가적인 일도 무슨 일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이다. 믿음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감사함이야말로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하였고, 또 로마서 8:32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감사함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뢸 수 있고 또 그의 응답하심을 얻는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이해력, 지식]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평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를 경우가 많고 또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도가 금방 응답될 때도 있으나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조급한 우리는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도하며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하고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를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는 복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화이기도 하다. 실상, 참된 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죄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고난이나 질병이나 가난의 경험은 하나님의 미움이 아니고 그의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복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실을 믿음과 평안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은 마음과 생각의 평안이다.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즉각적이고 매우 귀한 응답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표현은 ‘모든 이해력과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해력과 지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기도 응답과 그 응답으로서의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을 보장한다. 그것은 내세의 천국과 부활과 영생뿐 아니라, 현세의 마음의 평안과 건강과 의식주의 공급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우리와 함께하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문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하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는 불가능하다. 주 안에서 죄사함 받고 주 안에 거하고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친절함과 관용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은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가 다시 오시면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상과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하는 중에 기도함으로 평안을 누려야 한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성도들에게 주시는 마음의 평안은 기도 응답의 시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성도들에게 주신 기쁨과 관용과 평안의 삶을 누려야 한다. 8-9절, 완전을 목표로 삼자 [8절] 종말로[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셈노스 )[존경할 만한 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칭찬]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를 증거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에게 어떤 덕이나 칭찬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속한 자들이므로 마땅히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것들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참되고 진실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위선과 거짓과 속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가 비록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자라난 가정적, 사회적 환경이 나빠서 유능한 인물이 못 된다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인물은 되어야 한다. 성도의 성도다운 덕성은 그의 진실함에 있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존경할 만하여야 한다. ‘경건하다’라고 번역된 원어( 셈노스 )는 디모데전서 3:8, 11에서 ‘단정하다’라고 번역된 말로서 ‘존경할 만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 성도들은 범사에 존경받을 만한 태도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됨을 가리킨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옳은 삶, 의로운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의하거나 불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부당한 것을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정직하고 올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한다. 죄는 더러움이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멀리하고 부정당한 욕심과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나 직위와 권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는 말은 인격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이와 같이,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의로움,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은 인격의 완전함을 잘 드러낸다. 성도들은 도덕적인 완전을 생활 목표로 삼고 이런 덕목들에 생각과 마음을 두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고 받고 들은 것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도덕적 완전함이다. 그들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존경받을 만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순결하고 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고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배웠고 그 교훈을 받았고 그 말씀을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 도덕적 완전함의 한 본을 바울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았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모범적 삶을 살았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모범이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비교적 흠이 없는 인격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행했다. 그래서 그는 3:17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3-4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간증했고, 또 고린도전서 4:16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의 교훈은 자신이 직접 실천한 바이었다. 가장 효과적 교육은 선생이 직접 실천하며 본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완전함을 생활 목표로 삼고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삶을 항상 생각하고 완전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 구원은 생활의 변화이다. 생활이 변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더러운 자가 변하여 깨끗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바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완전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요 실천 강령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사도 바울은 또 “그리하면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결과를 증거한다. 우리의 온전한 삶의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요 가장 든든한 보장이며 보증이다. 그것은 각양의 기도 응답을 포함한다. 과연 요한일서 3:21-22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하였다. 온전한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늘 들으시는 복된 삶인 것이다. 온전한 삶의 두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뜻과 같다. 성경에서 ‘평안’이라는 말( 에이레네 , 히브리어 솰롬 )은 포괄적 개념이라고 본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불안, 병, 가난, 전쟁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안녕’이라는 말과 같다. 이 평안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그에게 오고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에게서 거두어지는 것이 율법의 기본적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8:18은,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말했고 또 이사야 48:22과 57:21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말했다(사 48:22).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넘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도덕적 완전함을 우리의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한다. 도덕적 완전함은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올바름,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성경에 교훈된 성도의 생활의 규칙이며 우리의 성화의 목표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완전함이다. 우리는 흠 없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본이 되셨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본이 되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이론을 가진 실천의 종교이다. 먼저 믿은 자들은 나중에 믿는 자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평안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체험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말씀대로 도덕적 완전을 위해 힘쓰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복이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순종하기를 힘쓸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평안을 잃어버리며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면 평안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강 같은 평안을 얻을 것이다(사 48:18). 10-14절, 자족하기를 배움 [10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했으나(15-16절) 얼마 동안 중단했다가 다시 도움을 보내왔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물질적 도움은 그들이 그의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동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14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또 그들의 선교 헌금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헌금이 그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며(고후 8:8) 그들이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라고 말했었다(고후 9:1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려 성전 봉사의 일에 전념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또 레위인들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드려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민 18:28).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0:42), 또 심지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종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선행이 영생의 표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25:31-46).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 신조를 간증한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그의 기쁨이 그가 단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 선한 일이지만, 전도자들은 물질에 속박을 받지 않고 물질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9-10).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 증거하였다(9:12). 자족하는 생활은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생활이다. 염려는 탐심에서 나온다. 참된 믿음은 세상의 모든 염려를 버리고 자족하며 살게 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교훈했다(딤전 6:7-8). 자족하는 생활은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족하는 삶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배부를 줄도 알고 배고플 줄도 알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넷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미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영광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빈부 귀천의 삶에 대해 만족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과 성도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자 되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으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보장하셨다(마 6:31-33).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년 동안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주셨다(출 16:4, 35). 잠언 30:7-9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행복의 필수적 조건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고 사랑과 평안이다. 잠언 15:17,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고기]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므로 주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1).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탐욕도 염려도 버리고 날마다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13-14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 3)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운 환경여건에서도 낙심치 않고 자족하며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는 우리의 위로와 힘과 도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고기 먹기를 원하며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1개월간 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니이까라고 반문하는 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씀하셨다(민 11:23).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역대하 16:9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말하였다.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더러운 것]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피곤치 않고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다(사 40:30-31). 주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신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일은 기뻐할 만한 선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욕심과 염려를 다 버리고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현실의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다. 15-23절, 헌금의 의미와 약속 [15-16절]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카이 하팍스 카이 디스 )[‘몇 번,’ 혹은 ‘여러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때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주후 47년경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고(행 13:1-3) 주후 50년경 2차 전도여행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했다(행 16:12).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 다른 곳들에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전도 후원금으로 그를 몇 번 도왔음을 가리킨다. 그가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했을 때(행 17장), 그들은 벌써 그를 돕기 시작했었다. 그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그 교회뿐이었다.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다. 물론 전도는 국내외의 전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교회의 목회활동들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는 자체의 행사와 교제를 위해서는 헌금을 절약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17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본문은 헌금이 성도의 선한 열매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행실을 원하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헌금은 좋은 열매이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라는 말은 헌금이 헌금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됨을 보인다. 헌금은 헌금하는 자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거한다. 우리는 헌금하는 자신을 보고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헌금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한다. 구약시대 헌금의 표준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이었지만(레 27:30-33; 말 3:8), 신약시대 헌금의 표준은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십일조 이상을 의미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8:7,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구약의 십일조 규례는 의식법으로 신약 아래서는 성취되었고 폐지되었으나 축소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8절]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본문은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도 약 17번 나온다(창 8:21; 출 29:18; 레 1:9, 13, 17; 2:2, 9; 3:5, 16 등).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에서 제단에 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유화(宥和)의 향기, 즉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향기라는 뜻이다.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과 감사의 표시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들만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고후 8:5). 또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므로, 그것은 예배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와 헌금이다. 물론 이것들 중에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헌금도 예배의 한 중요한 요소이다(고전 16:2). [19-20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학개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대상 29:11, 14).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며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엘리야 시대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좋은 예이다. 기근이 왔고 요단 앞 그릿 시내가 마르자 선지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서 한 과부를 만나 떡 한 조각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는 떡이 없었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에게 떡을 만들어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와 그의 아들과 엘리야가 여러 날 먹게 하셨고 그 기근의 기간 동안에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다(왕상 17:8-16).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이다. [21-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4) ‘성도’와 ‘형제’라는 명칭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명칭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형제 자매가 되었다(엡 2:19; 마 12:50). 이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리는 복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기를 원하며 또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의 문안도 그들에게 알린다. ‘특별히 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은 놀라운 사실을 보인다. 비록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집안에까지 들어갔다. 로마 황제의 가족들 중에 믿는 이가 생겼다! 이것은 전도의 놀라운 진전이며 결실이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혔으나 복음은 갇히지 않고 확장되고 있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헌금은 우리의 신앙의 좋은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선한 행실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헌금, 특히 전도와 구제를 위한 헌금은 성도의 좋은 열매이다. 둘째로,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봉사의 삶 전체가 그렇지만(롬 12:1), 헌금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다. 셋째로,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헌금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헌금은 확실히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 복을 받을 선한 행위이다.
미주 1) ‘상’이라는 원어( 브라베이온 )는 경주장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 같은 상을 가리킨다(고전 9:24).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의 결과로 약속된 상이다. 이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빈번히 나오는 ‘보상, 삯, 대가’의 개념인 ‘상’이라는 원어( 미스도스 misqov” )와 구별되는 것 같다. 2) Byz (D * it d vg) syr (p) (arm) 등에 있음. 3) Byz syr p Origen (gr) lat 등이 그러함. 4) Byz p 46 א A it d vg syr p arm 등에 있음.
[장별설교] 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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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해하는 속도가 다릅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많았지만 어떻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아마 1년 동안 5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성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경을 5독하니 더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을 찾아가 성경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고 하니 아는 것도 없고 더 버벅거려서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 전도사님도 사역을 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저 만큼 성경에 대한 갈망이 없어서 깊이 고민하지 않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신학을 하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면서 몇 가지 방법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빠르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연대기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읽어 나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성경 통독과는 약간 다릅니다. 두 번째는 기초교리를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깊이 읽는 훈련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알게 되고, 전체로 부분을 해석하고,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이 종교개혁때 바로 세워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자증적 해석법입니다. 오늘 새벽에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하여 볼 본문은 2:1-11입니다. 특히 5-11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라는 제목으로 널려 알려진 본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본문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가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먼저 2장의 전체 구조를 살펴봅시다.
1. 1-11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라
2. 12-18절 구원을 이루어 가라
3. 19-30절 주의 일꾼을 존귀히 여기라
제가 이렇게 나누는 것은 2장 전체의 주제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지 주제가 끊어져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 단락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이해해야할까요? 먼저 1-11절까지의 내용은 빌립보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먼저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신 사건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능력으로 주님을 살리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면 주님처럼 높여 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은 낮추어야할 때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따라 3절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2:27을 보십시오.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4:22-24에서 ‘너희는 ..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말하고, 5:1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5:8에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한 마음’과 ‘한 뜻’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분쟁’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분쟁이었지만 빌립보교회의 분쟁은 약간 상황이 다릅니다. 4:2에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2:5에서 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때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셨으나 자기를 비움으로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낮추고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이를 소개합니다.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빌립보서에 몇 명의 소개되는 주의 일꾼들은 타의 모범이 될만한 귀한 자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2장에서는 두 명이 소개됩니다. 먼저 디모데입니다. 19-24절에서 디모데가 어떤 일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20-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그림자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바울 곁에서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가보니 성도가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도 복이고,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성도를 만나는 것도 복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좋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성경이나 인품의 문제일까요? 물론 성격과 인품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진정한 좋음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은 것처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죄를 책망하되 회개하고 돌아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안아주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성도를 사랑하는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입니다. 그럼 좋은 교인, 성도는 누구입니까? 저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성도라고 합니다. 진리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목회자를 잘 섬기고 순종하고,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 바울은 25절에서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라고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단지 수고를 넘어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병들었을 때 그 소식이 빌립보교회 전해지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자신 때문에 걱정할까봐 그것을 걱정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으로 자신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근심을 덜어 주었다고 말합니다.(27-28절) 2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라고 말합니다.
‘존귀하다’의 헬라어 엔티모스( ἔντιμος)는 자신과 비교해 더 탁월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누가복음 14:8을 봅시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눅 14:8)
여기서 ‘높은’이란 단어가 바로 엔티모스, 존귀한 이란 뜻입니다. 다시 2:3를 봅시다. 바울은 다툼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의 자세에서 바로 ‘자기보다 남은 낫게 여기라’는 것입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 속에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너희들을 존귀히 여기 기꺼이 자신을 낮추고 헌신한 것처럼 너희도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마땅히 낮추고 그들을 존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누가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돈이 많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학벌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명예가 많은 사람입니까? 바울은 이 모든 것은 모드 버려야할 배설물에 불과하며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수고 애쓰는 자들을 마땅히 존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이고,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경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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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주일설교말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자”(빌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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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빌립보서 2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선택받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자신을 종의 형체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를 흠 없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헌신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은 주님 때문에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자” (빌 2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빌립보서 2:1-30
요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주제: 예수님의 겸비, 순종, 사랑을 배워 실천하자
오늘은 주현절 첫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의 박사들(현인들 magi, magus의 복수)이 찾아와서 황금(gold, 믿음, 왕), 유향(frankincense, 소망, 제사장), 몰약(myrrh, 사랑, 대언자=선지자)의 예물을 드린 날을 주현절(Epiphany “주님의 나타나심”)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박사들이 몇 명 왔는지 언급이 없습니다. 세 가지 예물드렸기에 세 명으로 생각했지만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4~10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합 찬송가 116장에서는 “동방 박사 세 사람”으로 불렀는데, 새 찬송가 116장에서 “동방에서 박사들”로 바꾸었습니다. 통합 찬송가 123장 4절에서 “동방 박사 세 사람이”를 새 찬송가 123장 4절에서 “저 동방의 박사들이”로 바꾸었습니다.
오늘은 빌립보서 2장을 강해합니다. 기쁨의 봉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 받아라”라는 주제의 말씀으로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배우자(빌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을진대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을진대 일심 단합하라고 권면합니다. ‘같이하여,’ ‘같은 사랑,’ ‘합하여,’ ‘한 마음’ 등 같은 뜻의 말이 네 번 반복합니다(2절).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분열은 육신의 일이며 천국의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입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회연합운동(WCC, WEA, 종교통합, 가톨릭과 에큐메니칼)은 바벨탑 운동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요 17:21, 11). 3절에서 또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다툼 strife’이라는 원어는 당파심 혹은 이기적 야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경쟁심은 좋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다툼과 허영(헛된 영광 vainglory)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받들며 이루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또 사람이 겸손(lowliness of mind)하려면,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자기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남의 약점만 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혜로 주신 장점을 보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일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일도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이들의 일이란 다른 이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일을 말합니다. 참된 사랑은 남을 위하는 이타적 마음가짐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렇게 겸손히 일치 단합하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것을 봄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목회자들의 기쁨은 성도들이 성경 진리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요이 4; 요삼 3-4).
5-11절은 키아즘(Chiasm)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키아즘 구조란 헬라어 알파벳의 X를 크히(Chi)라고 읽는데서 나왔는데, A-B-C-B’-A’로 짝이 맞는 구조를 말합니다. C를 중심으로 좌우가 짝(연관, 관계)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 구속 디자인, 성막 디자인이 모두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DNA와 RNA구조도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우리 인체가 좌뇌는 목 아래 우측을, 우뇌는 목 아래 좌측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키아즘 구조입니다.
5절(A) – 6절(B) – 7절(C) – 8절(D) – 9절(C’) – 10절(B’) – 11절(A’)
5절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6절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사양.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심
8절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십자가]
9절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
10절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심.
11절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돌림.
8절의 십자가(Stauru) 사건이 전환점(turning point)되어, 5-7절은 점차 낮아지심(descending), 9-11절은 점차 회복되심(ascending)되는 키아즘 구조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비 kenosis=emptify”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는 역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회복하셔서 이전 영광보다 나중 영광이 더욱 크시게 하십니다. 세 단계 낮아지심과 세 단계 영광 받으심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짝을 맞추어 성경을 읽으면 초대교회 때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가현설(Decetism,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가까라는 것)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빌 2:7-8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비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하신 예수님은 가짜 예수라는 몰몬교 및 사신(신은 죽었다) 신학 및 자유 신학이 큰 잘못을 저지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Morphe)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시고 비우셔서 성육신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glorification) 더 높은 영광으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키아즘 구조를 염두해 두고 읽으시면 난해 구절이 해결되고 성경의 문서설이나 고등 비평의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6절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지, 그분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분께서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입니다. 비천한 베들레헴 짐승 밥통(구유 manger)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인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입니다(요 1:14).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9-11절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분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합니다.
2.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8)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이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이니라.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2절 ‘항상 복종하여’라는 말은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입니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께 항상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의(義)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롬 3:24; 히 10:10, 14).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의를 이루셨고 그 의는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여 얻거나 무슨 공로를 쌓을 필요도 없고 쌓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감사히 받고 그 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 합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래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뜻입니다. 즉 순종의 생활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입니다.
13절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과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피로 구속받고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 하심, 도우심,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합니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입니다.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십니다.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은 인격의 흠과 결함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봉사할 때 원망, 불평, 분쟁, 다툼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단결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15절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입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합니다. 경건 대신 불경건을 좋아하고, 거룩 대신 더러움을 구하며, 의(義) 대신 불의를, 선(善) 대신 악을 따르며,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는 세상입니다. 성도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답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인 경건과 거룩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구원은 지식과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말은 ‘드러낸다, 나타낸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며,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새 생활을 하지 않고 옛 생활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다면, 그런 구원은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고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참된 성도들은 목사의 기쁨과 자랑입니다.
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믿음의 제물과 봉사’란 ‘믿음으로 하는 희생과 봉사’를 가리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쏟아부을지라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관제(灌祭, 붓는 제사)로 드린다 be offered upon the sacrifice’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합니다. 화형 당하기 전에 기름을 붓는 순서가 바로 관제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과 봉사이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그는 죽을 각오를 하며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오, 빌립보교회여, 참된 믿음과 믿음의 삶만 나타내라. 나는 나의 생명을 그대들 위에 기름을 붓는 준비가 되어 있다.” 구원은 기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시 16:11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다”라고 고백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갈 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입니다(롬 14:17).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행복한 일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기쁨의 사도이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도 기뻐하였고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구원, 곧 완전한 의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 sanctification)입니다. 성화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우리의 흠 없는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화의 삶, 곧 순종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일입니다. 참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 곧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순종하며 애쓰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며 또 기뻐하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3.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빌 2:19-30)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이는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님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19-20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귀한 동역자(同役者, fellow, partner)입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자입니다. 주님의 일,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생각과 정신을 같이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암 3:3,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으며.”합니다. 또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 곧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입니다. 참된 일꾼은 교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자입니다. 옥에 갇힌 바울에게는 지금 뜻을 같이하여 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송하기를 원합니다.
21-24절 “이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복음 전파의 일입니다. 성도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교회 일꾼들도 그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쓰지 못하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의 연단 the proof of him’이라는 표현을 보면, 디모데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인격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진실한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디모데는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행함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의 수족(手足)이 되어줄 사람이 디모데이었습니다.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디모데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하며 그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합니다.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는 또 다른 귀한 동역자입니다. 그는 빌립보교회의 사자(使者 messenger)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 파송되어 왔던 자입니다. 그는 주 안에서 바울의 형제이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입니다. 바울은 그를 ‘함께 군사된 자 fellowsoldier’라고 부릅니다. 신앙생활과 전도는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입니다. 특히,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그러합니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훈련은 성경말씀들을 읽고 듣고 배우며 그 말씀들을 실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훈련과 목숨을 내놓는 군인 정신입니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한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26-27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바울에게 왔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었습니다. 이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해졌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병든 소식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할까 봐 근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령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근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습니다. 약 5:14-16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28-30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사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한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냅니다. 그것은 그를 봄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상심할까봐 염려했던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영접이 아니고 진심의 기쁨과 즐거움의 자세로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충성된 일꾼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군대에서 훌륭한 지휘관이 귀하고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위해 진실하게 자신을 바친 충성된 일꾼들도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런 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참된 인도자들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주님의 일은 매우 쇠잔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종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성도들도 그런 자들을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30절에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자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후대의 교회를 위해 희생적 봉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공동 분모를 찾아 한 마음이 되며, 겸손과 온유, 순종과 희생하신 주님을 본받을 때 예수님의 향기가 나며 주님을 닮아가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아 믿는 자들의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어려운 코로나 정국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다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참된 충성입니다. 아멘.
[사도행전 성경공부]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으로의 개종자 [사사기 1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여호수아 죽음과 가나안 땅 정복시작(삿 1:1-3)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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