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부 의 권세 | [음부의 권세를 파쇄하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과정과 비결ㅣ에스더권 선교사] 멕시코예수사랑교회 2021. 12.22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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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음부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제압하고 옥에 가둘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로마서 8:2, 사도행전 2:24). 그리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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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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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는 성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 복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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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문을 쳐부수라 – 미주 크리스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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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마태복음 16:13-20) 예수님께서 세우시기를 원했던 교회, 주님의 마음속에 있던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요? 그 교회는 상여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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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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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질문

음부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답변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이라는 문구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마태복음 16:18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그 당시는 아직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전이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서 파생되었으며, 이 단어는 “불러냄” 또는 “집회”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라고 부르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성경학자들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의 실제 의미에 대해 논쟁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한 더 나은 해석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도시는 성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투가 벌어질 때 도시의 이런 성문은 일반적으로 적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안전이 성문의 튼튼함이나 힘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은 음부의 힘을 의미합니다. “지옥(하데스)”이라는 이름은 원래 죽은 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었으며 따라서 이런 영역을 종종 “하데스의 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런 영역이 지칭하는 장소는 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상태에 관계없이 내려가는 곳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이며, 이 구절에서 하데스 또는 음부는 그 장소의 힘을 나타내는 성문이 달린 강력한 도시로 표현됩니다.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시겠지만, 이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힘이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음부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워질 것이며, 이러한 권세를 이기고 교회는 번성할 것입니다.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신체는 계속 죽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더라도,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세대가 또 일어나 교회를 이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8-20).예수님께서는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을 힘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제압하고 옥에 가둘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로마서 8:2, 사도행전 2:24). 그리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로마서 6:9), 사망은 더 이상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사탄은 사망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그 힘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러내신” 교회가 이기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음부의 권세는 성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성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6:15-18)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당시 세속의 도시, 많은 신전들이 난립해 있는 우상의 도시 가이샤라 빌립보를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신앙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포하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교회에는 반드시 음부의 권세가 있다라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음부의 권세를 헬라어 원어로 직역하면 ‘the gates of hell’ ‘음부의 대문’입니다. 우리가 성을 침략해 들어 갈려면 먼저는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생명으로 보내셨습니다. 길과 진리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게 하시며, 갈 길을 알지 못해 헤메는 영혼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며, 사망에 있는 영혼들을 생명으로 옮기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계획에 따라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비록 하늘로 올라 가시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 세워 가도록 또 다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세우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음부의 권세가 가득한 죄악의 세상을 향해 믿음으로 공격해 나아갈때 음부의 대문이 감당치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이 약속이 성취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흑암의 세력이 잡고있는 음부의 대문을 향해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전쟁도 하지 않는데, 공격하지도 않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한다면, 음부의 권세가 이긴지, 믿음이 이긴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자칫 적극적인 신앙생활 보다 소극적인 방어형, 수비형의 믿음을 때로는 좋은 믿음, 교양있는 믿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생각일뿐, 성경은 빛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하며(에베소서 5:1-21) 그렇지않을 경우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라고 경고하십니다(창4:7)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음부의 권세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찬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불법이 합법을 이기고 불의가 정의를 누르며 비진리가 진리를 위협하고 가짜와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 그러다보니 언제 어디서 어느 때에 음부의 권세인 사망이 우리를 덮칠지도 모르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우리에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소극적인 신앙 방어적인 믿음 때문은 아닌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믿음으로 재정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치열한 영적 전쟁에 임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피흘리기까지 죄의 권세와 싸우는 성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오는 빛의 자녀, 어둠의 권세에 빼앗긴 세속화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교회, 치열한 영적 전쟁을 통해서 음부의 권세를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나 자신부터 다시 한 번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워가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이 땅 가운데 든든히 세워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고린도전서 4:20) 증거하는 우리 모두로 드려지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음부(陰府)의 권세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음부의 권세(문들)이 능가하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시고자 했다(마16:18). 그런데 이 말 속에 나오는 음부라는 녀석도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음부의 권세도 대단하지만 예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한 것 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체 음부란 어떤 곳이며,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음부(陰府)’란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스올’ 에 대한 한글번역이며, 신약성경에서는 ‘하데스’ 에 대한 한글번역이다. 하지만 이번에 한글개역개정판 성경이 나오면서, 구약성경에는 ‘음부’라는 단어를 전부 원문에 따라 ‘스올’로 바꾸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음부’를 ‘하데스’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음부’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음부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 이다. 특히 악인들이 죽어서 그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 이다(계20:13, 잠9:18).

그곳의 위치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의 중심에 있다(민16:13). 즉 지구의 중심에는 마그마와 같은 용암같은 것들이 들어있는데, 그 한 가운데가 바로 음부라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지금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루시퍼가 그곳에 보좌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앉아있으면서 통치하는 사탄왕국의 본부가 있는 장소 다. 루시퍼는 원래 하나님 보좌 가장 가까이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천사장이었다. 그의 영광스러움은 대단하였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 위에 두고 자기가 하나님 위에서 통치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아시고 하늘의 군대장관인 미가엘천사장과 그의 부하들(천사들)을 시켜, 하늘에서 쫓아버리게 하였다. 그때 루시엘천사장은 자신을 따르는 천사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결국 하늘에서 내어쫓겨나 이 우주로 나오게 된다. 그때 루시엘은 루시퍼가 되었고 그의 모양이 그렇게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에서 용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를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은 날개가 뜯어지고 찢어졌으며, 그들의 얼굴은 뱀과 전갈과 같은 파충류의 흉측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먼 천사도 있었고 귀가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버린 천사들도 있었다(막9:25). 다시 말해,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이 내어쫓겨난 장소가 이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그러자 루시퍼 곧 사탄마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의 영혼들을 가두어놓는 음부에 들어가 거기어 왕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음부에 들어가는 영혼은 악인들뿐이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인류를 구원할 여자의 후손(씨)를 믿었던 자들은 천국으로 올라가지만 나머지의 악인들의 영혼은 전부가 음부에 떨어지는 곳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항상 불이 이글이글타고 있다.(신32:22 아8:6). 불로 소금치듯 하는 곳이다(막9:49). 또한 그곳에는 물이 없다 . 그래서 지극히 목마름에 시달리나 영원히 물을 먹을 수 없는 곳이다(눅16:24). 그 괴로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육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똑같이 느끼는 곳이다(눅16:28). 그러나 절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눅16:26). 거기에는 죽지 않는 구더기가 있고 죽지 않는 지렁이(사실은 실뱀들)도 있다 (사14:11, 사38:18, 막9:48). 그런데 그 구더리들에는 철이빨이 있어서 사람의 몸을 씹어먹으며 몸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도 거기에 함께 있다 .

하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나면 타락한 천사들과 거기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영혼들은 각각 분리가 되어 각 다른 곳에 가두어질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하시기 전까지 음부는 귀신의 처소이자 악한 사람의 영혼의 처소로 동시에 쓰인다. 그러므로 지금 죽어서 음부 곧 지옥에 떨어진다면 지옥의 불에서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귀신들이 주는 잔인한 고문에서 시달려야 한다. 그러므로 음부 곧 지옥은 절대 가서는 아니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부가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호13:14). 음부에 내려가는 자는 다시는 거기에서 올라올 수 없는 곳 이기 때문이다(욥7:9). 놀라운 사실은 지구 곳곳에 음부의 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마16:18). 다시 말해 죄인이 죽으면 그 즉시 그의 영혼은 음부의 구덩이(깔데기)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음부는 일종의 불신영혼의 블랙홀 내지는 불신영혼의 석션기와 같은 곳이다. 이와같은 장소가 있다는 것을 구약시대에는 히스기야왕이 알고 있었고(사38:10), 예수께서 확실하게 말씀해주셨다(마16:18, 눅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이것이 음부의 문들이요 음부의 권세다.

마18:15-17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란?

(마18:15-17)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마16:15-16) 그러자 주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이어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는데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8,19절) 주님이 교회에 부여한 권능과 특별히 기도로 실현되는 역사가 실로 엄청나지 않습니까?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땅에서 무엇이든 기도하면 하늘에서 듣고 다 이뤄주신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매일 새벽마다 열정적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 과연 주님이 약속하신 그 권능과 역사를 실현해 보이고 있습니까? 솔직히 아무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주님 약속대로 되었다는 증언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사역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 아닙니까?

상기의 마18:15-17은 교회 안에 죄를 범하는 형제를 어떻게 치리해야 할지에 관한 주님의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처음에는 그 형제가 창피하지 않도록 한 명이 비밀리에 찾아가 권면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두 사람 증인을 데리고 가서 설득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교회 전체가 나서서 권하고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당시에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간주해 유대사회에서 격리시켰기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교회에서 출교시키라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교회가 죄 중에 있는 교인을 순서를 밟아서 냉정하고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지침 같습니다. 죄인에게 몇 번 공식적으로 권고하다가 별로 고칠 생각이 없으면 아예 사탄에게 넘겨주라고 단언하신 것 같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라고 약속하신 당신의 뜻과 상충되어 보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합심 기도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큰 역사에 관한 아주 좋은 예입니다. 교회가 행할 권능의 참 모습을 이만큼 정확하게 가르치는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이 본문에 이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재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흔히 15-17절은 교회 치리에 관한 지침이고, 이어지는 18-20절은 합심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따로 떼어서 이해하고 치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연결해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은 정미하고 완전합니다. 죄인을 치리하는 첫 단계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만남이고 둘째 단계는 두세 사람이 함께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사람의 숫자를 두 번에 걸쳐 의도적으로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19절), 뒤에는 “두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처음에는 단순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만 약속했지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으므로 땅에서 매고 푸는 일이 바로 교회가 행할 합심기도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죄인을 치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므로 연결해서 부연 설명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끼리 기도한 후에 치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에서 특별히 또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말씀은 15절의 첫 부분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개역성경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죄로 인해서 피해본 사람이 먼저 찾아가 권고하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흠정역 등은 분명히 “네 형제가 네게 범죄하거든”이라고 그 뜻을 명료하게 밝혔습니다.

요컨대 가해자가 전혀 뉘우칠 기색조차 없을 때에 피해자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해 형제를 얻을 목적으로 먼저 찾아가서 먼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의 열쇠가 기도인데 음부를 이기려면 죽음을 극복해야합니다. 또 그러려면 성도들은 오직 상대의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땅에서 무엇이든 매고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새벽기도로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건물의 신축확장, 사업 번창, 질병퇴치 같은 교회 목사 성도들의 사적인 탐욕이 아닙니다. 또 반드시 교회로 나와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해야만 사탄을 묶어서 훼방 못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팎의 형제들이 죄를 범하면 그 피해를 입은 자가 먼저 가해자를 찾아가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는 기도가 바로 땅에서 묶고 풀어야 할 ‘무엇’입니다. 그것도 피해자와 가해자 두 당사자만의, 아니면 진정으로 동일한 긍휼을 품은 두세 성도의 기도만으로도 죽어가던 생명이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함께 기도할 정도라면 찾아간 성도들의, 특별히 피해자의 긍휼한 마음의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성령이 역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기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는 음부를 이기는 천국열쇠가 실은 합심기도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합심기도는 최하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는데 피해자가 찾아가 가해자와 함께 기도해야 가능합니다. 그전에 먼저 찾아가 용서해야하고, 그전에 먼저 사랑으로 품어주는 긍휼이 있어야 하고, 그 긍휼을 가해자가 순전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완전히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 교인이 때로는 죄로 넘어지더라도 두세 성도들만의 사랑으로 섬기는 기도로 그 성도가 예수 생명 안에서 새롭게 되고 더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예수님이 비로소 새로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성전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고 성전에 나와, 심지어 성전으로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여달라는 간구만 했습니다.(왕상8:31-53)

역대하에선 한 마디로 줄여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예수님은 조금 더 발전시켜 성도들끼리 서로 용서 사랑하고 함께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경제적 이권만 다투는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환전상과 장사치들의 상을 뒤엎고 크게 야단치며 쫓아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그런 꾸중을 듣지 않을 교회가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참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뿐입니다.

오늘날 과연 이런 사역에 전념하는 교회가 있을까요? 주님의 약속을 실현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나마 신앙양심이 남아 있다고 주님이 인정해주실까요? 무엇보다 교회가 예수 십자가 복음조차 순전하게 전하지 않는데 주님이 약속하신 권능이 실현될까요? 아니 천국열쇠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는 오직 예수 십자가뿐이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교회 사역의 알파요 오메가요, 성도들 모임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단순히 두세 사람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죄인을 십자가 복음으로 거듭나게 해야 하고, 그렇게 용서 받은 죄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모습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쉽게 말해 다른 죄인을, 그것도 “네 형제가 네게 범죄하거든” 그 가해자를 피해자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주어야만 합니다. 합심 기도 이전에 바로 예수 십자가 복음이, 또 성도가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천국 열쇠입니다.

3/23/2019

특집-:::::::: The Korean Christian Press ::::::::

지옥문을 쳐부수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사탄이 교회를 공격해온다고 할지라도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영원무궁토록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어떤 역경과 환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헤치고 나갈 것이다.

이 구절이 정말 그런 뜻일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에서 권세는 헬라어로 ‘pule’이다. 이 말은 개역한글 난하주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권세가 아니라 ‘성문’을 의미한다. 모든 영어 성경에서도 “gates of Hades”로 되어있다. 새번역에서도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죽음으로 번역된 ‘hades’는 죽음보다는 음부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하데스는 죽음이라고 하는 상태를 나타내기보다는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가? 문은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음부의 문들이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말이 안된다. 이 구절은 교회가 음부의 문들을 쳐들어갈 때 음부의 문들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아무리 사탄의 권세가 교회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오지 않았는가?

이 구절은 사탄의 왕국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교회가 사탄의 왕국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교회가 사탄의 왕국이 교회의 공격을 받게 되면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12:28-29).

여기서 ‘강한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탄의 세력, 어둠의 세력을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방어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 그 집을 강탈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더욱더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천국은 쳐부수고라도 들어가야 한다, 천국은 탈취하는 자가 차지하게 되어 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뜻인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천국을 차지한다는 뜻일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늘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린다. 응답해주신다. 그러나 천국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 천국문을 안 열어준다고 쾅쾅 두들기면 열어주실까? 천만에다. 천국문 앞에서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안 열어주시면 누구라도 열 수가 없다.

열 처녀의 비유에도 나오는 것처럼, 한 번 닫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천국문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니 무슨 말인가?

거의 모든 영어성경들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가 아니라 천국은 맹위를 떨치면서 힘차게 전진해나가고 있다고 옮기고 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NIV).

새번역 성경도 마찬가지다.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천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천국이 침노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사탄이 차지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강력하게 돌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지금 밀리고 있는 것이다. 퇴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성이 무너지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로다.”

이렇게 번역하게 되면 이런 뜻이 되고 만다. 교회가 사탄에 의해 계속 괴롭힘을 당한다. 사탄이 교회를 계속 위협한다. 교회가 사탄의 공격에 의해 위태위태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끝까지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다.

사탄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교회는 수세에 밀려 방어만 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교회가 무너지지 않을 지는 몰라도 교회는 항상 사탄의 위협 가운데 불안하다. 이런 교회를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서 확장시켜 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몸부림치다 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대문이 견대내지 못하리라.”

이렇게 번역하면 공격과 방어가 바뀐다. 교회가 공격하고 지옥은 방어를 한다. 교회가 지옥의 권세를 쳐부수려고 공격해 들어간다. 사탄은 지옥문을 굳게 닫고 죽을힘을 다해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옥의 문이 열리게 된다. 지옥의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수많은 영혼들이 사탄의 치하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지옥의 성이 하나님의 나라로 바뀐다. 그렇게 교회는 지옥의 성읍들을 무너뜨려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땅 끝까지 확장시켜 나간다. 이것이 성서적인 교회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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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7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20150607본문 / 마태복음 16:13~18오늘은 우리 수영로교회가 설립된 지 만 40년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부흥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그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몇몇 교회로부터 청빙 받고, 어느 교회로 가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특별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환상을 보여주시며 “이 양 떼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개척한 교회가 수영로교회입니다.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이 된다는 것을 평생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수영로교회의 첫 성전을 건축할 때에 초량교회의 정해찬 장로님께서 많은 헌금을 하셨습니다. 당시 초량교회의 제직이셨던 박동우 집사님의 가정과 강병도 집사님의 가정이 많이 수고하셨습니다.두 집사님의 가정은 첫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헌금하셨지만, 교회의 살림이 모자라지 않도록 십일조 헌금 외에도 넘치도록 헌금해주셔서 제가 마음껏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기도하며 사시는 오영섭 전도사님께서 함께해주셨는데, 오 전도사님은 기도의 능력이 있고, 간증거리가 많고, 훌륭한 전도사님이셨습니다.이렇게 좋은 팀이 구성되어 좋은 여건에서 시작된 수영로교회는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쉽게 가득 채울 수 있었고, 새신자가 계속해서 늘어났습니다.교회 부흥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이렇게 계속 부흥된다면, 머지않아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겠구나.’라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 교회는 네가 세운 것이 아니다. 내가 세웠다. 네가 설교를 잘해서, 네가 목회를 잘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백성을 모아주는 것이다.”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교회 주변에서만 우리 교회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울산과 양산, 김해, 창원, 진주, 마산 등 교회에서 먼 곳에서 2~3시간 걸리는데도 우리 교회로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우리가 보기에는 우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을 모아주시는 것이라고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여러분이 수영로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가 각자 다르겠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모아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주님께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수영로교회에 대해 제게 “이 교회는 네가 세운 것이 아니고, 내가 세웠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부름할 뿐입니다.겉으로 보면, 교회를 개척하느라고 수고를 많이 했지만, 저는 심부름했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주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셨을 때에 저는 주님께 “이제부터는 주님이 이 교회의 당회장이십니다. 저는 그저 교육전도사와 같은 마음으로 충성할 테니,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다 맡아주십시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책임져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그 후에 예배 시간마다 주위를 살펴보고 빈 자리가 보이면, 저는 속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심방 좀 하세요. 주의 백성을 빨리 모아주세요. 누가 저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오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모아주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에 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설교하다 보면, 어느새 예배실이 꽉 찹니다.그래서 1부로 드리던 예배를 2부로 드리고, 3부, 4부, 5부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와 주일저녁예배까지 합하면, 주일에만 예배를 일곱 번 드리게 되었습니다.어떤 때에는 총 일곱 번의 예배 시간마다 제가 다 설교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제가 설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기쁨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됩니다.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 교회는 아주 든든한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베드로와 같은 믿음,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메시아이시요, 구세주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에 진정한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됩니다.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십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예수님은 그 작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언제나 함께하십니다.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성도가 많이 모였든지 적게 모였든지 예수님께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그래서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머리 노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머리 자리는 비워둬야 합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교회에서 왕 노릇 하고, 머리 노릇 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교회가 부흥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보통으로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려고 합니까.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자기 고집을 내세웁니다. 자기 마음대로 교역자를 내쫓기도 하고, 다시 뽑기도 합니다. 교역자를 뽑을 때에도 나서서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하며, 자기가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말씀이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잠 16:5),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벧전 5:5). 그러므로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교회에서 머리가 되어서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드십니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업이 부도나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그렇게 해서 고생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고생합니다. 자식들도 은혜를 받지 못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우리는 교회에 나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듯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마가복음 10장 42~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섬기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고린도교회에는 파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고린도교회는 한심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늘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교회 안에 분쟁이 없도록 말할 때에도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온전히 합하라고 말했습니다.교회는 부족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람의 눈에는 연약해 보이는 교회인데, 머지않아 없어질 것 같고, 망할 것 같은데, 교회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대로 될 줄 믿습니다.주님만 이기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 즉 성도들, 주님을 교회의 머리로 하여 모인 성도인 우리도 이긴다는 의미입니다.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긴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이깁니다.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적그리스도에게 무릎 꿇고, 우상 앞에 경배하게 됩니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아무리 큰 핍박이 와도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짐승 앞에 경배하지 않습니다.요한계시록 21장 27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있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어떻게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습니다.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아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오셔서 이들과 거처를 함께하십니다. 집에 가면 집에 함께 계실 것이고, 직장에 가면 직장에 함께 계실 것이고, 언제나 거처를 함께하십니다.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고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증거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순종하게 됩니다.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말씀대로 따라갑니다.야고보서 4장 7절에 보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우리는 연약해보이지만,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기만 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고 하니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는 의미입니다.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피하는 것이지, 마귀가 우리를 보고 피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마가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막 9:28~29).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어떤 마귀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을 때, 어디서 담대함이 생겼는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나아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이로 인해 핍박을 받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길을 가든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전한 메시지를 보면, 말씀을 꿰뚫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성령 충만하시면, 성령께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말씀을 거침없이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세미나를 인도하거나 설교할 때에 성경 구절이 생각나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저도 은혜를 받습니다.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이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4).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행 7:60).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받았겠습니까. 사울은 후에 사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많아지니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몇 천 명이 몇 만 명이 되고, 나중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열심히 전도하시는 분들, 목회하는 목회자들,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성공하는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함께 사역하는 것입니다.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행 2:47).고린도전서 3장 6~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성령만이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에게 열심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부흥한다면, 세상의 모든 교회가 다 부흥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교회를 자라게 하십니다.수영로교회가 계속해서 부흥되는 복을 받은 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모아주시기 때문입니다.이 교회가 시작될 때에도 저는 주님 앞에 기도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울에 가지 않고 부산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습니다.주님은 제게 말씀하신 이후, 제가 목회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에 기록했습니다. 그 책을 읽으신 분은 주님께서 제게 어떻게 말씀해주시고, 주님의 말씀하신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주님은 때때로 제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교만해지려 하면, “니가 해? 내가 하지. 니가 해? 내가 하지. 니가 해? 내가 하지.”라고 저를 책망하시며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셨고, 주님께서 사람을 모아주는 것이지, 제가 설교를 잘해서, 목회를 잘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래서 저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모아주시지 않으시면, 이렇게 많은 성도가 모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항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성도들 중에 돈도 있고, 세력은 있으나, 믿음은 없는 분들이 저를 괴롭힐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앞에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아버지, 오늘 밤에 저를 불러 가시던지, 그 인간을 불러 가시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시던지, 그 인간을 교회에서 내쫓아주시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십시오.”라고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제가 고집이 셉니다.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새벽녘에 “니가 문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소리로 책망하셨습니다.저는 그 집사가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지금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십니다. 지금은 천사 같은 분으로 변화되었습니다.그런데 그때는 주님께서 제게 “니가 문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는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주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문제라는 것을 저는 모릅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게 “그 집사는 내가 너에게 맡긴 양이다. 이 교회가 부흥되고 부흥되지 않는 것은 너에게 달려있다. 내가 너를 붙잡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주님께서 저를 붙잡고 수영로교회를 세우시고, 수영로교회를 부흥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고, 제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를 붙잡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는 성도들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모든 문제가 제게 있다는 것을 알고, 문제가 있으면 제 자신을 살피고, 제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그 후로는 교회에 말썽꾸러기가 많아도 전혀 걱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부흥하게 하거나 교회의 부흥을 막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붙잡고 일하시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은 오직 제게 달려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직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을 믿습니다.저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그렇게 기도했더니 저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저를 안아주시고,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를 도와주는 분으로 변화되었습니다.제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낸 후에 귀국하니 성도가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헌금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게 “하나님의 일에는 반대만 없으면 다 된다.”라고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성전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지, 반대하지 않는다고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제직회 시간에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진리에 어긋나거나 죄 짓는 일이 아니라면,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여러분이 반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금하지 않아도 되고, 반대하지 않으면, 다 된다고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헌금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모두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성전 기공예배를 드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1천 평의 예배당을 6개월 만에 완공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어떻게 된 일인가 살펴보니 성도 중의 50%가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성도 수가 많으니까 성도 중에 50%가 헌금해도 성전을 넉넉히 지을 수 있었습니다.나머지 50%는 반대하지 않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하는 50%의 성도가 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수영로교회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반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저는 깨달았습니다.그 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성도들이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다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우리 교회가 많은 땅, 많은 건물을 가지고 풍족함을 누리는 비결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제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저는 수영로교회를 개척하자마자 부산을 복음화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산을 복음화하는 교회가 되려면, 성도가 수만 명이 되어야 하니까 수영로터리 전체를 우리 교회가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여리고 성을 돌 듯이 날마다 수영로터리를 돌면서 기도했습니다. 10년 정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다가 하늘을 봤습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지, 나중에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새를 본다.’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보고 있는데, 주님께서 제게 “저 새를 봐라. 저 새를 위해 예비해놓은 공간을 봐라. 얼마나 넓고, 얼마나 크냐. 저 새가 날개치는 만큼만 사용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위해 예비해놓은 땅과 모든 것이 크고 넓고 많다.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네게 얼마든지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 날 이후로는 수영로터리를 돌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수영로터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열 배, 백 배로 우리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어느 날, 예배가 끝난 후에 교회 밖으로 나갔더니 교회 밖에 주차해놓았던 성도들의 차가 다 견인되어버렸습니다. 주차장도 없는 교회에 누가 나오려고 하겠습니까.그 날, 저는 울며 기도했습니다. 마치 아이처럼 엉엉 울며 “아버지, 주차장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제게 응답을 주셨습니다.그리고 다음 날 서울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처음 저를 대접하신 분이 우리 교회가 주차장으로 쓰게 된 땅 주인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그 땅을 사려고 하니 좀 싸게 팔도록 이야기해달라고 말했습니다.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우선 그 땅을 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땅을 사기도 전에 그 땅을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은 땅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그 땅을 사서 우리 교회가 잘 사용했습니다.주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시고, 주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목회하다 보니 저는 저 혼자 목회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십니다.앞으로 우리 교회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할지 알 수 없지만, 이규현 목사님이 오신 이후, 지금은 교회가 더 부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주님의 놀라운 뜻이 다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오늘의 수영로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모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마태복음 16:13-20)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마태복음 16:13-20)

예수님께서 세우시기를 원했던 교회, 주님의 마음속에 있던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요? 그 교회는 상여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스산한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 교회는 쓸쓸하고 무력해 보이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깊은 산골 산속으로 피난 나와 숨어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는 교회는 의미있고 아름답고 늘 힘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나고 변화를 체험하고 모두들 행복에 넘치는 그런 교회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정복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그리시고 계획하셨던 그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 죄악의 도시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그리셨던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그것이 세상 속에 세워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찬 바람부는 저 세상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6장 13절은 얼른 보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단순히 지리적 위치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 바로 여기에 교회의 배경과 현주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십시다.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매듭지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고난의 걸음을 내디디며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대 장정을 시작하시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는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바로 변화산으로 알려진 헬몬산을 가시기 위함입니다. 헬몬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장 17장에 보면 주님의 얼굴이 눈부신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그곳에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누가복음 9:30-31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바로 그 대화의 내용은 인간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공생애를 매듭지으시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대 장정을 눈 앞에 두신 주님께 있어서 헬몬산을 향하신 이 순간은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헬몬산을 향하시는 도중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헬몬산을 향하시면서 주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을 통과하시게 됩니다. 이 마을은 해발 3300m에 이르는 헬몬산 자락 345m 지점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설악산이 1700m쯤 되니까 가히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헬몬산 정상이 언제나 올려다 보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골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바로 이 마을에 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과 자기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여 있는 도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시에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우선, 일정 규모이상의 도시이어야만 했습니다. 형편없는 마을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단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인구 그리고 도시의 규모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시 한 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황제의 신상을 반드시 세워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한 도시 이름에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도시가 조그마한 도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 한 가운데에는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도시를 배경삼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나를 가르쳐 누구라고 하느냐?” 이것은 결코 빈들 광야 위에서 던져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배경으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분명히 바로 여기 우상과 죄악의 도시 한복판에 세워졌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곳은 수리아의 바알 숭배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 14개나 되는 바알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에 대한 예배는 자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들이 음란한 행위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근처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 깊은 동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연의 신 판(Pan)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수리아의 바알 숭배와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죄악들이 창궐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웅대한 황제의 신상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빌립보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상황입니까?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화려한 세상 종교들 속에서, 그들의 모든 역사와 세력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모든 부도덕한 범죄들의 한 가운데서, 이제 겨우 12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집도 없고 돈도 없던 나사렛 예수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파라독스 – 역설입니까? 우리는 현대 교회가 부흥하고 번성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시대의 모든 문화는 교회에 대하여 너무 비호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질 당시의 상황은 우리의 이런 핑계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까?

세계를 정복했던 로마의 땅에서, 우상의 동굴 밑에 둘러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황제의 신상을 바라보며, 그곳 가이사랴 빌립보 땅을 함께 밟고 서서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언 듯 주님에 대한 칭송의 대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를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결코 이것이 칭송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머릿속에 지금 웅장한 로마의 가이사랴 빌립보를 그려보십시다. 그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의 몰골을 비교해 보십시다. 그들의 모습, 깡마른 몰골, 초라한 옷, 거지 일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릴리 빈민 출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색이야말로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보다 더 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잔뜩 기가 죽어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몰골을 지니고 있는 분을 로마 황제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똑같은 몰골로 이 땅에서 일했었던 유대 선지자중 한 명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일행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울며 울며 외치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각했을까요? 음란한 아내를 찾아 맨발로 뛰어 다니던 호세아를 생각했을까요?

주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신상 앞에서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벌판 위에서 행해진 인간의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향해서 드려진 고백입니다.

바로 이 베드로의 고백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베드로가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저 웅장한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 비록 초라한 몰골일망정 당신이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맨발의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외관상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추앙을 받고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 신전의 문지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을망정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목가적 시냇가에서 드려진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황제의 신전 앞에서 옹색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려졌던 인간의 고백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신앙고백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의 가치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당신의 가치관을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업적 주의, 성공 주의,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세속주의로 대등되는 황제의 가치관과 로마 제국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결단이요 각오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성취 논리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고백이 허허벌판이 아니라 황제의 신전이 있는, 황제의 도시 한복판에서 드려졌음을 기억한다면 이 고백이야말로 주님을 향해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임이 분명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 눈에 보이는 웅장한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 앞에서 눈에 보이는 황제가 아닌 거지같은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따르기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하고서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는 바로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리라 천명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화려함과 거대한 저 뒤편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커다란 손길을 보지 않고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가치관에 노예됨이 없이 그 가치관을 뛰어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논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세상의 성공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와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황제의 땅에서 황제의 가치관이나 황제가 주는 행복과 권력을 따라 가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 가겠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 또 ‘반석’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자, 이제 내가 너의 인생을 바꾸겠다. 내가 너를 변화시키겠다. 너는 이제 베드로이다. 너는 지금까지 시몬이었고, 시몬은 문제 투성이, 크고 작은 결점들 그리고 충동적인 실수들과 실패들로 가득찬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너는 교회의 밑바닥 – 그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이 교회의 반석이다. 바로 네가 교회의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베드로 위에 세워지는 교회의 비밀과 신비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약점 많고 허물 많은 베드로를 통해서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베드로, 그러나 우리가 잘 알 듯이 베드로는 금방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해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가로 막고 나섰습니다.

마16:22 우리말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took him aside) 그를 야단치기(rebuke) 시작했다.”

뒤이어 나오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별세할 것을 말씀하시지요.(눅9:31)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베드로가 뭘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너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권세로 교회를 세우겠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을 반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간의 연약함은 가려집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교회는 바로 당신 위에 세워집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당신을 통해 셀목장이 세워지고 성장되고 번식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비밀입니다. 이것은 곧 당신의 축복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의 셀목장을 세울 수 있다면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당신의 집에서 셀목장이 모였다면 당신의 집은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3.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18절) 한 신학자는 이 말씀에서 소유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지적하기를 “예수님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소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불렀던 그분의 몸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나의 아버지, 나의 교회입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커다란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나의 교회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즉 내가 계속하여 내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창설자요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사도 요한을 통해서 보내는 편지가 있습니다. 거기 모든 교회를 붙들고 보호하시는 한 주인이 나옵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 가라사대”(2:1)

여기 세상의 모든 교회를 붙들고 계신 –

이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를 향해 명하시고 충고하시고 감독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한 찬송 작사자인 「존 뉴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 위에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냐.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그렇습니다. 나라도 변합니다. 사상도 사라집니다. 사랑도 갑니다. 제왕도 영웅도 지나갑니다. 제도도 변혁됩니다. 종교도 변할 수가 있고 철학도 변질됩니다. 그런데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이 그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교회를 보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든든함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당신의 집에서 셀교회로 모이십시요. 거기 주님이 계십니다.

4.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권세」라는 말은 “대문”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음부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의 대문이 결코 교회를 흔들어 댈 수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그림을 그리십니까?

교회와 음부라는 두 커다란 성이 있습니다. 음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교회라는 성을 공격합니다. 엄청난 공격을 합니다. 교회라는 성이 그 공격 앞에 흔들거립니다. 위험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석에 세워진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공격이 거세지고 오래 지속돼도 교회는 신기하게도 잘 버팁니다. 예수님이 꼭 쥐고 계시니까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2000년 동안 버티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시나요? 이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린 교회의 그림이 아닙니다. 여러분 뭔가 잘못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그림은 이처럼 소극적이고 수비적이고 무력해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성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파성추’라는 무기를 들고 지옥 문들을 두드려 깨부숩니다.

여러분 파성추라는 것을 아시지요. 유난히 전쟁이 많은 왕건이라는 연속극을 보니까 적진의 성문을 깨뜨리기 위해 바로 파성추를 사용하더군요. 길다란 통나무 한쪽 끝을 연필처럼 뾰쪽하게 깎아서 거기에 철판을 입힙니다. 그것을 바퀴달린 수레에 싣거나 수십명의 군사들이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서 성문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복음의 파성추를 들고 세상을 공격해 나가면 세상이 그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그림이 완전히 반대지요? 교회가 세상의 공격 앞에 수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하고 음부가 수비에 나서지만 교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셀교회가 그리는 교회의 그림입니다.

성경의 해석이 바뀌면 신학이 바뀝니다. 신학이 잘못되면 우리 삶이 잘못됩니다. 우리는 이제껏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맨날 세상 앞에서 쩔쩔매는 수비적인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이제 그대로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격에 나서면 세상의 어떤 견고한 진도 깨지고 맙니다. 셀목장에서 마귀에 붙들린 사람들을 구원해 낼 때, 세상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건져낼 때, 그것은 세상을 공격하고 정복해 가는 영적전쟁입니다.

우리가 수비적 그림을 마음에 그렸을 때는 전도가 겁이 나지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격에 나서면 음부의 견고한 성문이 깨지도록 되어 있다구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믿고 이제 세상 속으로 복음의 파성추를 들고 음부의 성문들을 깨러 나서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공동체입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포로된 천국가족을 구원해 내는 구조대입니다.

이제 공격에 나서면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견고한 진은 겉보기에는 굉장해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교회가 공격에 나서기만 하면 속으로는 벌벌 떨게 되어있습니다. 예수 이름, 성령의능력, 예수의 보혈이라는 이 무기들은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핵폭탄입니다. 일순간에 마귀의 성이 무너집니다.

교회가 어딥니까? 셀이 교회 아닙니까? 그 셀교회가 세상의 견고한 진을 향해 나가기만 하면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이 고성능 무기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음 무기 들고 나가기만 하면 음부의 문들은 열릴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앞에 지옥의 문들이 부수어집니다. 보혈의 능력 앞에 견고한 진들이 보기 좋게 무너질 것입니다.

교회는 지옥의 대문을 깨뜨리는 주님의 군대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이 땅의 정복자들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존재 법칙 3가지(마태복음 16:13~19)

할렐루야!

마가복음 1장 1절 말씀을 보면 그런 가슴 벅찬 말씀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리고 마가복음 1장 14 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어서 15절 다같이 읽어보시죠.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하는 말씀입니다. 당시는 이 말씀이 더 그랬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모든 나라들이 통치를 받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에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을 선포하셨을까? 사도 바울은 후에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평강 등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경험하는 나라입니다.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역적인 것이 아닙니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연합집회를 하면 예배당에 큰 곳에서 몇 천명이 모여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가 우리에게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수백, 수천교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물리적인 것, 시간적인 것, 공간적인 것 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경험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함께 예배드리시는 모든 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 나라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모습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말씀하시는 중간 중간에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능력으로 보여주십니다.

천국의 맛을 조금씩 보게하십니다. 갑자기 음식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걸어 가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귀신을 내어 쫓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서 보여주십니다.

참 신기한 것이 제국을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펼쳐 보이시고 조직을 만드실텐 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는 어떠한 공동체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다면 예수님 역시도 뭔가 한 방향을 가지고 계속해서 무엇을 예비하시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와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드시는 사역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초점을 맞추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 바로 교회 공동체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와 싸울 수 있는 나라, 지옥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공동체, 생명과 능력을 가져오는 공동체, 예수님이 중심된 예수 마을 공동체 바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라이즈 업 뱁티스트 연합 기도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면서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을 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존재 법칙 그 첫 번째는 교회 탄생(교회 개척) : 교회를 개척하라(Plant a Chyrch)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는지를 생생 하게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는 모습들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 들은 그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는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안수할 때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능력들이 실제로 나타 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처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당국은 이 새로 운 예수 공동체에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에는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무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조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뭔가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로 남자만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한꺼번에 회개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성령이 오시면 믿는 자들은 나보다 큰 일을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예언이 제자들에게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행복했던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근데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 지역뿐만 아니라 유대지역을 떠나서 사마리아지역에도 이방인 지역에도 교회들이 개척됐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이방지역 곳곳에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결국에는 세상의 심장부인 로마에도 교회가 개척됐습니다. 개척된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포한 그 메시지는 로마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조금씩 그리고 강력하게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1400년 이상을 지켜온 유대인들의 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토요일에서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성찬식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중심에서 성령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개척되는 곳마다, 사람들의 변화되는 곳마다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사회나 그동안 로마 사회에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노예나 상류층의 사람들 구석구석에도 이 복음의 능력들이 미쳐지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기록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리 잡아다 죽여도 고문을 해도 잡아 가둬도 세상의 권력으로 교회 공동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제거하려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됩니다.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 핍박의 마침표를 찍게 됐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던 예수 마을 공동체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기도했던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결과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로마 제국이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교회 건물들은 중세 1000년 역사에 가장 아름다운 건물, 가장 웅장한 건물들이 됐습니다. 지하교회에 있다가 양지로 나온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했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정말 뼈져리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제국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00년간 핍박 속에서 교회를 존속시키고 개척시켰던 것은 건물이나 경제력이나 조직이나 인력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교회가 계속해서 개척되어지는 것과 동시에 교회는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못하는 교회의 존재 법칙 두 번째는 교회 갱신입니다. 교회여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라(Renew a Church)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경험했던 하늘과 땅을 진동했던 역사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열정을 자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사모합니까? 그런데 교회가 안정되고 옛영광에 도취하고 머물고 더 이상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역시 죽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는지를 잊어버리는 순간, 교회는 죽어갈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타락해갈 때, 교회는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을 날마다 새롭게 듣고 갱신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면서 또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있음과 동시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아직 만들어져가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과거 찬란했던 영광을 누렸지만 교회가 쇠퇴하면서 교회 갱신에 실패했습니다. 화려한 건물들과 수많은 종교적 성도들과 막강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살아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좋은 교회 건물과 전통에 만족한 채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과연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이 지나가고 태연하다보니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나면 그냥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음을 증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제자훈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태어나면 기독교인입니다.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 열정도 식어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교회는 날마다 들어야 합니다. 일곱 촛대를 가지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1a)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크기, 건물, 성도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위대함은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의 영향력과 생명을 통해서 사명을 완수하는데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초대교회 중에 정말 엉터리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기록된 분량도 제일 많은 교회,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런 고린도교회에게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저는 정말 고린도전서를 처음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교회, 문제가 많은 교회, 시기와 질투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 은사는 많은데 은사를 담을 수 있는 성령의 열매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교회, 그고린도교회를 향하여서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명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엿보게 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가 있는 교회라도 그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갱신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히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더 큰 영광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더 큰 영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존재 법칙은 교회 개척과 교회 갱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 연합입니다. 교회들이여 연합하라 (Churches, be united!)입니다.

현대교회가 반드시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배워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는 서로가 연합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연약한 교회들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걷었습니다. 늘 선교를 나갈 때마다 이 헌금으로 연약한 교회들을 도왔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나 교회를 개척할 때마다 헌금으로 힘껏 도왔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기근 가운데 고통당하는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해 헌금한 교회는 안디옥교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교회, 갈라디아교회, 아가야에 있는 사람들, 고린도교회 등이 연합해서 예루살렘교회를 도왔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 유대인들 교회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역선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러한 전염병이나 기근이나 재난이나 전쟁을 허용하실 때마다 참으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서로를 향해 연합해서 힘껏 돕고 선행과 구제에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들이 앞장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들은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례 요한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위대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말씀을 보고 따라다녔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요즘 포스트모던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 지입니다. 예수님을 석가모니나 마호메트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도 어김없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너희들은 내제자인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저는 이 질문은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에게도 주님이 하시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께서 질문하십니다. 이 질문은 우리 각자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순간에도 던져집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시면 이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닥치고 우리 삶에 고난이 올 때, 정말 삶이 뒤죽박죽인 것 같은 그런 경우에 하나님 앞에 따집니다. 호소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도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주님은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저를 이처럼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누구신데 이 고난이 끝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살아계시면 왜 제 인생이 이렇습니까?” “하나님 살아계시면 왜 제 목회가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말씀을 선포하는데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변질됩니까?” “하나님, 왜 요즘 세상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합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나님 앞에 항변하면서 우리 역시 인간 편에서 쏟아붓습니다.

기도 응답이 항상 잘 될 때, 교회가 항상 잘 성장할 때, 항상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때가 아니라 절망 가운데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산 소망이 바닥난 것 같은 그 상황 가운데에서도 질문하십니다.

욥은 결국 그렇게 정말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갑자기 불어닥친 그 고난 가운데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의 창조주, 주관자요,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우리 목회자들이,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베드로가 답변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예수님은 메시아, 단순한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그 분이십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해 주십니다. 그런 고백을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선언을 해주십니다. 18절 말씀을 다같이 합독하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이 말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위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 교회라고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 신앙의 고백에 너희들의 그 믿음 위에 즉, 나 위에 내가 그리스도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가 구원자요, 내가 창조주요 그 고백 위에, 그 신앙 위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에 오신 것이고 회개한 죄인들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기를 원하시는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비록 회개한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하지만 이 공동체 위력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은 음부의 권세, 즉 어떠한 사탄의 권세도 이길 수 없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생긴 이래 2000년 역사 속에 교회를 불태운다고, 예수님의 몸의 일부를 잡아다가 죽이고 훼손한다고 교회가 오늘날 멸망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음부의 권세는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을 없애고자 십자가에 못박고 죽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란 듯이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부활의 DNA를 받은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의 DNA를 받은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제도화되고 정치적인 힘을 얻고 국가 종교가 될 때보다 오히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지하로 들어갈수록 신앙은 더 강해지고 더욱더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향해서 나아가고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전염병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기회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게을러지셨습니까?

아니면 예배가 훨씬 더 깊어지셨습니까?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란과 핍박과 고난 가운데에서 내 영성이 깊어지고 비로소 이것이 성도의 DNA이며 교회가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DNA인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화를 마치시면서 교회의 비밀에 대해 한 가지를 덧붙이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천국이지만, 예수 님을 통해 천국의 열쇠를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열 수 있는 그 열쇠를 부여받은 유일한 이 지상에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말씀대로 약속하신 대로 천국의 열쇠를 넘겨주셨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에베소서 3장 9~10절의 말씀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비밀의 경륜, 하나님의 이 구원의 계획이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으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입니다. 그것이 드러나는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어진 교회를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에 속한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교회를 통해 이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 DNA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정리=이송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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