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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령론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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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개혁주의 성령론. 도널드 맥클라우드 (지은이), 지상우 (옮긴이) 여수룬 2004-08-30. 정가. 6,000원. 판매가. 5,400원 (10% 할인) + 마일리지 3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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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개혁 주의 성령론

  • Author: 분당한마음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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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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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령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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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령론

1.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나의 능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하는 표현(성령폭발 등)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사역에 있어서 성부께서는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성취하시며, 성령께서는 적용하신다. 성령님이 사역하지 않으시면, 일반은총도 없고, 구원도 없고, 성화도 없고, 영화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성령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며 그의 역사하심을 앙망해야 한다.

2. 성령님의 강림

성령님은 비록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며칠 후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성령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특별한 능력을 얻어서 복음을 증거했으며, 그로 인해 이 땅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은 일련의 구속사적 흐름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었다. 구속의 객관적 성취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루어졌으며, 구속의 주관적 성취는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3. 성령님의 다양한 명칭

성경에서 성령님은 그의 사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명칭은 모두 성령님을 의미한다.

명칭 : 그리스도의 영(롬 8:9), 예언의 영(계19:10), 보혜사(요 14:16, 26, 11:26, 16:7-8, 13), 살리는 영(요 6:63, 롬 8:11, 고후 3:6, 벧전 3:18), 성결의 영(롬 1:4), 생명의 성령(롬 8:2), 아들의 영(갈 4:6), 아버지의 성령(마 10:20), 영광의 영(벧전 4:14), 영원하신 성령(히 9:14),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 요일 4:6), 하나님의 신(창 1:2)

4. 성령님의 사역

1) 구원받게 하신다(성령의 내주).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의 결과이다. 성령님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그의 구원이 일평생 지속되도록 보증하신다.

① 에베소서 1:11-14

② 에베소서 2:1-2

③ 에베소서 2:8-9

④ 고린도전서 2;14

⑤ 디도서 3:5

2) 신자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성령의 충만).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성령님께서 그의 안에 거하신다(내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성령님의 큰 도움을 얻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한다.

3) 신자들을 도우신다(보혜사).

성령님은 가르치시고(요 14:26), 계시하시며(고전 2:10-11), 명령하시며(행 8:29),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창 6:3), 사람을 위로하시고(행 9:31), 때로는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하신다(요 16:8). 따라서 성경은 성령을 ‘보혜사'(도우시는 분)라고 말씀하신다.

5. 성령세례

성령세례는 중생(거듭남)시에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주(主)로 믿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는 신앙생활의 시초에 놓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중생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일부 교단(주로 순복음)과 선교단체에서는 오순절 사건이 반복되어 계속 일어나는 것이며 중생과 성령세례는 구별된 별개의 것으로서 성경의 많은 예들이 이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성경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중생 이후의 성령님의 임하심(세례라고 그들이 부르는 현상)이 있기는 하나 그들의 경우는 특별한 것으로서 옛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과도기적 현상 혹은 시대 전이적 현상으로 인한 것이었지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 성령 충만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님에 의해 강력히 지배되고 주관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는 자가 또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성령을 받은 자가 그 내주 하시는 성령의 지배를 더욱 강력하게 받으며 그 주권 하에 깊이 들어감을 뜻한다. 성령세례가 단회적, 시초적 현상임에 반하여 성령 충만은 반복적, 지속적 현상이다.

1)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안토니 후크마).

① 신자들은 특별한 임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구할 수 있다.

②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구는 어떠한 형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곤 한다.

예) 예수님(눅 4:1), 일곱 집사(행 6:3), 스데반(행 6:5, 7:55) …..

③ 우리 모두는 마땅히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2) 성령 충만의 증거(엡 5:18-21을 참고로, 죤 스토트) – ‘올바른 관계성’.

① 하나님과의 관계(예배) :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아버지께 감사한다.

② 사람과의 관계(교제) : 서로에게 복종하며, 덕을 세운다.

3) 성령 충만의 방법

‘충만’이란 단어는 수동태이다. 이것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성령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는데, 하나는 말씀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이다. 이러한 순종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힘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7. 성령의 은사

‘은사'( )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란 뜻이다. 은사의 종류는 대단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대략의 내용이 고전 12장에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겸손히 봉사하도록 하신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받은 은사로써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며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행 2:47, 고전 14:25, 엡 4:12-16 등).

* 은사에 대한 몇 가지 이해

1) 과거에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들의 사역과 연관되어 일어났다(행 14:3, 히 2:3-4). 그리고 신약성경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는 어떠한 교훈도 남기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 기적적인 은사들은 과거와 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하에 필요에 따라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2) 병고침에 관한 야고보서 5:14-16의 가르침은 의학적인 수단과 기도의 조화된 처방을 제시한다.

* 기름을 바르다(알레이포) : 의학적인 수단

3) 방언의 은사는 바벨탑 사건(창 11장)으로 분열된 언어가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됨을 상징하는 은사이다.

4) 예언의 은사에서 ‘예언’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를 의미한다.

8.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성령 충만의 결과로 생기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5:22-23에 기록된 바와 같이 9가지이다. 바울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열매를 복수형(fruits)이 아닌 단수형(fruit)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는 하나 혹은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상호 관련되어 균형 있게 나타나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육체의 열매들이 단일성과 동일성이 결여된 반면에,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은 조화와 통일된 목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열매에 대한 몇 가지 이해

1) “열매”라는 표현은 자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계속해서 더욱 좋은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2) 열매는 단일한 개체이므로 특정한 덕목만 별도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동시에 성장한다.

3) 9가지 열매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진다. 즉, 기본적인 덕목들에 속한 열매들(사랑, 희락, 화평)과 타인과 관계된 열매들(오래참음, 자비, 양선),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열매들(충성, 온유, 절제)이다.

개혁주의 성령론(Ⅰ)

개혁주의 성령론(Ⅰ)

Ⅰ. 구원의 순서와 성령의 사역

1. 정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개인에게 효력있게 작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교의학적으로 논하는 학문이다. 그러기에 구원론은 성령론이라는 명칭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학자에 따라서 구원론과 성령론 사용이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도 성령의 사역이기에 이 둘은 교대로 사용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은 ‘성령의 특별사역’과 ‘성령의 일반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과 관계있는 성령의 사역은 특별사역이고 구원과는 관계없이 창조에 관계되어 자연과 전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을 일반사역이라고 한다.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을 택자들의 심령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구원론의 시작이다. 이러한 구원론은 우선 구원의 순서를 논의하는 것을 시작한다. 루이스 벌콥은 일곱 가지 단계를 말한다. 박형룡 박사는 아홉 단계를 말한다.

2. 기독교 강요 제3권의 이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제1권 신론을 말할 때 예정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론을 논하는 제3권에서 예정을 말한다. 바빙크나 벌콥의 조직신학에서는 예정이 구원 이전에 속하게 됨으로서 신론에 들어있다. 그러나 칼빈은 예정을 구원론 속에 넣어서 바빙크나 벌콥이 갖지 못했던 성령의 역동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삶 다음에 언급한다. 바울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예정을 언급할 때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가진 상태에서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정에 대해 쓸 때는 믿는 자에게 주는 축복으로 사용해야 한다. 칼빈의 예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의 감격과 맞닿아 있다.

3. 구원의 순서의 성경적 기초

구원 순서의 성경적 기초는 로마서 8장 30절 등이다. 예정은 구원에 앞서서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이기에 구원의 순서에 들어가지 않는다. 구원의 순서는 소명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다음 중생, 칭의, 영화로 이어진다. 성화의 완성으로서 영화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웨슬리 신학과 다른 점이다.

4. 구원의 순서의 여러 견해들

구원의 순서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은 우선 칼빈의 견해로서 소명과 신앙-중생과 회심-성화-칭의-예정-부활의 순서이다. 문자대로 보면 칼빈의 주장은 알미니안적이다. 왜냐하면 중생 이전에 신앙이 있으며, 칭의 이전에 성화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카이퍼는 칭의-중생-소명-회심-신앙-성화의 순서를 말한다. 바빙크는 오늘날의 견해와 같다.(소명-신앙과 회심-칭의-성화)

루터파는 중생 앞에 소명, 조명, 회심을 넣었다.(소명-조명-회심-중생-신앙-칭의-신비적 연합-갱신-보전)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충족 은혜, 주입 은혜, 협력 은혜이다. 알미니안 파의 견해도 중생 앞에 소명과 회개와 신앙을 두었다. 알미니안은 특히 인간의 의지와 신앙이 구원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택함 받고 또 모든 사람이 유기함을 받았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Ⅱ.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의 의미

칼빈이 말하는 구원의 순서는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알미니안적이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칼빈이 말하는 중생은 알미니안 파의 중생과는 의미가 다르다. 중생 이전에 인간의 응답과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알미니안적이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중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이란 구원의 순간적인 측면 보다 우리 인생의 전 생애를 통해 일어나는 중생의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바울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그가 구원받은 순간이 훨씬 지난 그의 사역 기간 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며 하나님 앞에 서있는 감격과 은혜를 고백한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죄와 유혹의 영향을 이기기 위해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면서 일생동안 그리스도와 죽고 사는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작업을 중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Ⅲ. 성령의 사역

1. 구약의 성령 사역

칼 바르트의 역사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히스토리(historie)가 아니다. 실제 사실, 사건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게쉬히테(Geschichte)의 역사로서 실존적으로 도전해 올 때에야 의미가 있는 역사를 말한다. 그러기에 바르트에게 창조는 역사가 아닌 설화이다.

또한 구약에서는 재창조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께서 구약 시대에는 신약 시대와 같이 역사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 안에 성령은 내주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다. 다만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모습이 직분자들의 직무와 관련해서 움직이신다. 그러기에 구약에서도 신약 시대와 같은 재창조의 역사가 있었다.

2. 신약의 성령 사역

신약의 성령론은 오순절을 중심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그것은 신약의 전반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심의 성령의 역사와 대비되는 교회 중심의 성령의 역사를 구분하는 축이기 때문이다. 전반부는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는 성령사역이 중심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가장 낮고 비참한 모습의 십자가와 연결되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 동일하게 가치있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 중심의 성령사역은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이다. 그의 몸인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의 계속이며 성령을 통하여 실행된다.

개혁주의 성령론 (Ⅱ)

Ⅳ. 오순절 성령강림의 성격과 교회시대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논쟁이 있다. 우선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첫째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 역사의 차원에서 단회적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은 선교적 차원에서 오늘날 계속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박형룡 박사는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을 성령 세례보다는 성령의 충만으로 보았다. 그는 성령의 9가지 특별역사를 언급하며 성령 세례는 구원 체험과 동일시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성격에 대해 사도 시대와 교회 시대로 구분한다. 기다리고 있던 사도들을 위해 약속 성취의 문을 여신 사건으로서 단회성을 주장하지만, 성령의 내주와 선교적인 차원에서 단회성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상근 박사는 고린도전서 12장의 예언의 은사를 오늘날이 설교와 동일시하였다.

오순절 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령 세례를 중생 이후에 반드시 받아야 할 성령의 체험과 은사의 기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사람의 응답인 신앙과 회개가 있기 전에 소명과 중생, 즉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일어나는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즉 중생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몸으로 연합되는 그 순간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목사가 된 이후에 죄를 회개하고 전적인 헌신을 하게 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회심이라고 하고 완전성화라는 표현을 썼다. 웨슬리의 그러한 체험이 틀렸거나 거짓은 아니지만 그가 이해하는 회심과 성화의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회심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때 일어나는 것이며, 이 땅에 살면서 완전성화는 이룰 수 없기에 그러하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체험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체험이 제2의 축복이거나 우리가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들어가는 문일 수는 없다. 다만 일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감격하는 것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항상 그리스도로 인해 일어나며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한 삶보다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은사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잘못이다.

Ⅴ. 오순절 사건의 해석 : 구속역사적 관점과 구원순서의 관점

오순절 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구속역사적(Historie Salutis) 관점을 강조해왔다. 카이퍼, 워필드, 개핀 등은 오순절 사건을 구원순서(Ordo Salutis)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승천에 연결되는 구속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러기에 단회성을 강조한다.

반면에 오순절 교회 쪽의 신학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신자의 중생 이후에 주어지는 체험으로 강조한다.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도 있다. 안영복 교수나 차영배 교수는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과 영속성의 동시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개혁파의 구원 역사적 관점보다는 구원 순서의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을 조명하는 점에서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연속성 둘 중 한 가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교회를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적 측면과 체험적 측면을 동시에 인정하고 어느 한 쪽을 부정하고 막아서는 안된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하여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에 적절한 강조를 두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대로 드러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을 이루는 데서 발견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우리는 늘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한가를 살펴 성경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둘째, 영속성 쪽으로 기울어진 시각 때문에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 대한 기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중생과 성령 세례의 시차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 넷째, 역사적 개혁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도 성령의 여러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섯째, 경험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규명되지 않은 독단적인 주의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결론

우리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앙을 유지한다. 체험을 인정하되 체험이 우리의 신이 되거나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체험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연합이 기본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체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의 원리 안에서 측정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성령 안에서 성도의 체험은 외적인 현상이기에 앞서서, 영적 변화이며, 그 체험은 기독론적이요, 교회론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이다.

성경과 여성임직

Ⅰ.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와 여성안수 논의

미합중국 장로교회(북장로교회)는 1930년 총회에서 여성에게 시무장로를 허락한다는 결의가 있었고, 1955년 총회에서 여성목사 안수가 결의되었다. 이에 1956년에 마거릿 토우너가 처음으로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여자목사가 되었다. 1971년에는 로이스 스테어라는 여성이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미국 남장로회는 이보다 늦게 1964년 총회에서 여성안수를 허락하고, 1965년 레이첼 헨더라이트가 최초의 여성목사가 되었다. 1978년에는 사라 모즐리가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이전의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칼빈주의 신학에서 떠나 다원주의 세계 속에서 신학적 표류를 하고 있다.

이런 영향을 받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도 1933년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헌의가 있었으나, 1935년 총회에서 연구한 결과 여성임직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를 하였다. 그러나 통합측은 1994년 79회 총회에서 여성안수를 허락하였고 1995년 여성임직에 대한 법제화가 이루어졌다.

Ⅱ. 북미 기독교 개혁교회(CRC)와 미국 정통 장로교회(CPC)

여성임직과 관련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북미 기독교 개혁교회는 1996년도 63차 총회에서 1995년의 여성임직에 대한 결정을 확인하고 이 결의에 대한 검토는 2000년까지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에 반해 미국 정통 장로교회 1996년 63차 총회는 CRC교단의 결의에 따라 북미 기독교 개혁교회와의 교류를 중단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여성안수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국 정통 장로교회는 테리 그레이 박사에 대한 처리문제를 결정함으로써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침투를 단호하게 막았다. 테리 그레이 박사는 그랜드 래피즈 시의 하비스트 장로교회 장로이자 CRC 소속 칼빈대학 교수로서 진화론적인 내용을 성경에 도입해서 가르친 것 때문에 정직을 당했다. 총회에까지 상소를 올려서 총회가 이 문제를 결정해야 하게 된 것이다. CPC 총회는 그레이 씨의 견해를 거부하고 원래의 정직을 인정했다.

Ⅲ. 디모데전서 2:8-15의 교훈

여성임직과 관련된 디모데전서 2:8-15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본문에서 여자에게 금지된 두 가지를 살펴보면 가르치는 것과 남자을 주관하는 것이다. 먼저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주로 예수님의 관한 전승과 하나님의 뜻을 권위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은사의 하나로서 사용되기도 하지만(고전12:28-30), 목회와 관련지어서 생각할 때 오늘날의 설교를 포함한다. 성경과 성경 교리의 공적 교훈에 대하여서 가르치는 활동이 여자들에게 금지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뜻은 목회서신 상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장로들을 향한 내용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여자가 장로가 되어 다스리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여자가 교회 내에서 어떤 남자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과 관련하여 금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어서 바울은 이러한 교훈의 근거를 창조와 타락의 상태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이러한 금지가 단순히 문화적 사회적 상황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남녀간의 질서와 역할에 대한 창조적이며 고유한 기능을 그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구원은 동등하지만 그러한 창조적 차이는 폐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교훈은 어느 지역이나, 시간, 또는 문화적 상황에 대한 제한된 교훈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 일반에 대한 영구적인 교훈이다. 사도바울은 구원에 있어서는 어떤 것도 특권이 있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는 사실을 진리로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도 바울도 교회 안에서와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구분을 무시하지 않는다.

조직신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

서론 – 급변하는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는 시대적 상황과 함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짚어보고 다가오는 세대를 준비해 나가야 한다.

본론

1. 방향설정

우리 교단은 총회장의 명의로 ‘21세기 교단부흥 발전 기획단’을 구성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서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총신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4대 발전방향을 세우고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정체성, 국제성, 정보화, 교학협동의 4대 방향이다. 첫째,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하고 계승해 나가야 한다. 둘째, 총신의 모습을 세계 속에서 교류와 학술 활동을 통해 국제적인 신학으로 세워야 한다. 넷째, 정보화를 통해 우리 신학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들고, 행정과 학문 모두 정보화를 구축해야 한다. 넷째, 이상의 내용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단적인 협력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2. 조직신학과의 현주소

총신 조직신학과는 현재 9개 과목에 걸쳐서 연구와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변증학, 험증학, 조직신학 서론,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현대신학, 기독교 윤리 등의 11개 분야를 3년 6학기 동안 9개 과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1학년 1학기- 변증학, 신학서론, 기독교 윤리, 2학기- 인간론, 기독교 윤리, 2학년 1학기- 신론, 2학기- 기독론, 구원론, 3학년 1학기- 현대신학, 교회론, 2학기 -종말론 등으로 매 학기에 한 과목 이상 배치되어 있다.

3. 총신 신대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조직신학 과목들에 대한 사전 준비

총신의 기독교 변증학은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박아론 박사와 박형룡 박사의 변증학 등도 기본이 된다. 현대신학 과목은 현대신학자들의 소개와 함께 개혁주의 전통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조직신학은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일곱 과목이다.

4. 조직신하과 신학의 타 분야의 관계

총신은 6개 신학과를 갖고 있는데, 구약신학, 신약신학, 교의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석의의 열매를 취하여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전적 역사 속에서 추적한다.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의 열매를 사용하여 이를 한 체제 안에 묶는 일을 시도한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며, 조직신학이 성경신학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만이 본래의 기능과 목적을 완수할 수 있다.

역사신학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체계의 수용을 추적한다. 실천신학은 성경적 진리의 체계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5. 조직신학의 미래적 전망

총신의 조직신학 교육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신학적 전통과 현대성 사이에서 모색해야 한다.

결론

21세기를 맞이하는 총신의 조직신학의 미래적인 전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이다. 둘째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기치를 드높이는 것이다. 셋째, 윤리 교육의 강화를 통해서 21세기 세계를 이끄는 것이다. 넷째,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을 의지하고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직신학과 선교신학

Ⅰ. 서론

선교신학과 조직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신학의 각 분야의 통합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어떻게 통합을 이루고 발전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흥미롭고 미래지향적인 일이다.

Ⅱ. 본론

1. 역사 속에서 살펴본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모색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뿌리는 초기 근본주의 운동과 연계되어있다. 초기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8세기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18세기를 지배한 사상으로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 팽배를 들 수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모라비안 운동과 요한 웨슬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미국 제1차 각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은 슐라이엘마허의 자유주의 신학과 헤겔의 역사주의는 19세기 이후 세계 신학계를 지배하는 역사비평적인 신학을 이끌었다.

유럽에서 발생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여 이에 대응하는 보수연합운동으로 근본주의 운동은 시작하게 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유럽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물결에 대응하는 보수연합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20세기 초에 근본주의 운동은 보다 조직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은 장로교회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런 과정에서 잦은 분열과 아픔이 있었다.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부흥운동은 여러 단체들을 탄생시켰는데, 이들 단체들을 비롯하여 전도와 선교사역을 위해서 모인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 협의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후 결성된 W.C.C., N.C.C., A.C.C.C., I.C.C.C., N.A.E. 등의 단체들에 의해서 선교적 역할과 사역은 나누어졌다. 이렇게 볼 때, 1910년의 ‘세계 선교 협의회’가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위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선교 운동 뿌리들은 자유주의에 강력하게 대응해서 ‘근본주의’ 운동으로 알려진 보수연합세력으로부터 보는 것은 가능하다.

1952년 빌링겐에서 모인 I.M.C. 선교대회에서는 선교국과 피선교국의 동역의 필요성을 확인하였고, 선교사역의 가장 큰 활동은 하나님의 활동(Missio Dei)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1968년 웁살라 W.C.C. 대회에서는 이 Missio Dei 개념이 인간중심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1966년 휘튼에서는 교회를 통한 고전적인 선교의 개념을 확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중심한 일치 속에서의 연합을 토대로 한 선교의 긴급성을 논의하였다. 이후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와 1989년 로잔 Ⅱ세계 복음화 대회를 거치면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W.C.C.나 I.C.C.C. 어느 쪽과도 다른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 21세기 개혁주의 선교신학의 과제

지금까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바탕이 되어온 선교신학의 뿌리를 통해 21세기 세계 선교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대한 변함 없는 신념을 유산으로 지켜야 한다. 둘째, 한국적인 신학의 개발이 필요하다. 셋째, 통합된 분야의 한 부분으로서의 선교신학을 추구해야 한다. 넷째, 제3세계 선교지도자의양성이 시급하다. 다섯째, 복음의 사회적 관심을 잃지 않고 시행해야 한다.

Ⅲ. 결론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생애를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해야 한다.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위대한 사명을 맡은 자로 쓰임받았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교회의 개혁과 선교를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며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혁주의 성령론 서철원 교수

개혁주의 성령론 정리

(원제 : 서철원 교수의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성령신학』 요약 및 정리 )

강대훈(총신대학교)

1. 서론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은 성령 추구의 운동으로서 예수 믿음과 성령 체험을 함께 바란다. 이들은 예수 믿음 이후에 별도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 세례를 받아야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그 물리적 증거로서 방언을 하게 된다고 본다. 기성 교회들에 이 운동이 파급될 때는 방언의 은사 강조에서 예언과 신유의 은사가 함께 강조되어 은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교회에 파급되었다. 오순절에서는 성령 세례에 방언을 불변적으로 따라오는 사항이라고 확정한다. 방언이 반드시 동반하는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예수를 믿을 때 방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는 중생 후에 일어나는 별도의 과정이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행했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와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자기의 노력과 열성이 성화를 이루어 그것에 근거하여 의를 획득한다. 인간의 주도성과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를 결정한다. 성화 노력의 정도가 신자의 공로가 되어 칭의를 결정한다. 인간이 주도권이 은혜를 결정하는 완전주의 지반에서 오순절 운동이 출발했다. 인간의 선한 종교적 노력이 성령 세례를 획득하되 노력과 열성의 정도가 성령의 양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영웅적 노력을 한 사람이 넘치는 성령을 받아 분배한다. 오순절파에서는 통상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중심에 선다. 부흥운동은 일반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서 출발한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었는데, 공교회는 초기부터 성령운동에 대해 우려와 불안, 회의와 경계로 대했다. 2세기 중엽에 일어난 몬타누스의 성령 부흥운동 때부터 그런 염려를 교회에 주었다. 종교개혁 때 나타난 광신파들의 성령운동도 종교개혁 세력의 경계를 받았다. 광신파에 의해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과 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성령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을 약화하여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에서 이슈가 되는 논쟁은 성령 세례다. 성령 세례는 중생 후에 받는 별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성령 세례 논의를 중심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성령 세례가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중생후에 별도의 과정으로서 받되 예수 믿음을 넘어서는 종교적 노력들로 받는지, 은혜의 종교이므로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을 받아 가지는지에 대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논의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강림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 강림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이고 그 성취임이 바로 이해되지 않으면 성령세례가 중생 후에 온다는 오순절파의 주장을 바로 교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성령 받음이고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 믿음과 성령 세례가 동시적임을 바로 밝히기 위해 성령 강림이 그리스도의 구속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먼저 논증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은 개혁신학의 입장인데, 개혁신학의 성령 논의가 가장 바르고 성경적이라는 관점에서 성령논의를 할 것이다.

2.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 오순절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그 표로 방언해야 한다는 신학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성령 세례를 추구했다기보다는 방언을 열렬히 추구하였다. 방언이 없으면 오순절파로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방언을 하면 성령 세례를 받았음이 당연하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순절 운동은 방언을 추구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본격적인 오순절 운동은 1906년 4월 9일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가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모어(William Seymour) 목사의 부흥회에서 출발되었다. 씨모어는 방언운동을 시작한 찰스 파함(Charles Parham) 목사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1906년 보다는 더 올라가야 할 것이다. 찰스 파함은 감리교회 목사였지만 성결운동의 목사로서 일하였다. 그는 칭의의 제2역사로서 성화와 신유, 주의 재림 교리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표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한 여학생에게 안수하고 나서 중국어를 말하였고, 그 다음에는 보헤미안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이 20세기 방언이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운동이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회들의 관심을 가졌다. 주요교단들에 침투했고 주로 평신도들에게 방언의 매력으로 호소되었다. 은사운동은 성령 세례와 함께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가 강조된다. 오순절 신학의 은사 운동이 로마 교회로 퍼지면서 성령 세례 대신 영의 해방을 강조하게 되었다. 세례를 통해서 성령은 이미 받았고 견신 때나 그 후에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세례에서 출발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오순절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David D. Plessis에게서이다. 그는 1936년 영국인 오순절파 부흥사인 스미스 Smith W. Glesworth의 예언을 받고 은사 운동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에도 오순절 운동이 크게 퍼져 인도네이사에서는 1960년대 큰 부흥을 경험하여 개신교회가 1500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다. 한국에는 1950년 중반 남부 순천 지역에 오순절 운동이 들어온 이후 1970년대에는 서대문 순복음교회가 단일 교회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다. 이 성장은 다른 교회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교회 성장의 모범이 되어 오순절 교회의 교회 성장 기법들을 도입하는 교회가 급증했다. 이처럼 세계 각처에 퍼진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회와 로마 교회에 전파되어 오순절 교단을 구성하지 않고도 은사운동으로 계속되고 있다.

3. 오순절 운동의 신학: 중생후 성령세례

-방언이 세례의 증거-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세례를 중생 이후에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오순절 운동이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중생 후 성령 세례의 과정이 사도행전에서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로 사도행전을 해석한다. 사도행전을 성령 세례의 근거로 삼는 오순절주의자들은 구속사의 섭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종말론적 사건이어서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주의는 성령 세례 받는 것을 오순절의 반복으로 이해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집단 회심도 반복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는 메시야 임직식이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우리의 출생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성 확인으로 출생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니고 새 창조의 시작이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새인류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세례를 받았으므로 예수를 믿으면 곧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된다.

오순절 운동은 처음부터 성령을 추구했다. 성령 세례의 형식으로 성령을 충만히 받아 증거와 봉사를 위한 능력을 입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한 것이다. 토리는 성령 받는 조건을 일곱 가지로 강조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토리의 견해를 근거로 성령 운동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토리에게세 있어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고 믿으면 성령 세례는 조용한 현상이지만, 오순절파는 황홀한 경험과 방언을 해야 한다고 했다. 토리는 1926년 오순절 운동을 거부했다. 오순절 운동의 주요 교단들은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교리화했다. 1914년 교단을 구성한 ‘하나님의 성회’는 방언을 성령 세례의 초기 증거로 확정지었다.

오순절 운동은 19세기 미국 성결 운동에서 발생하였다. 성결 운동은 감리 교회 뿌리에서 시작했으나 성결 운동의 순간 성화가 감리교와 달라 성결 교단으로 출발했다. 웨슬리의 감리교 신학이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계기로 장로교 신학 속으로 들어 왔다. 그러다보니 미국 신학은 알미니안적으로 변화되었다. 웨슬리의 신학에서 믿음은 칭의를 위한 유일한 조건이며 완전 성화의 유일 조건이라고 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교리는 성화이다. 이 성화는 인간의 주도적 노력과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 성화에 의해서 최종 칭의가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기의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회개와 함께 선행들은 성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칭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칭의는 법정적 칭의가 아니라 도덕적 의가 된다.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가 이루어지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요소가 된다. 웨슬리 신학은 인간의 주도적 노력 없이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지 않으며, 구원하시지 않으신다고 본다. 구원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경험이 최종 표준이 된다. 성경도 표준이 되지만 경험이 마지막 결정권을 갖는다. 이처럼 ‘경험’의 신학이 오순절의 경험주의적 성령운동에 영향을 준다. 오순절주의는 중생/구원 다음의 경험으로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이 세례에는 방언이 수반된다. 이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오순절파는 유대교처럼 신약의 은혜를 공로로 바꾸었다.

4.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성령을 받아서 구원이 성취되는데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얻어지는 것이다. 성령은 새 인류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다. 성령께서 그의 몸인 교회에 부어지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 사역이 선행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령 파송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후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만 가능하다(요 7:37-39).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후에는 믿으면 다 믿음의 약속인 성령을 받게 되어 있다(갈 1:14,22). 예수 믿는 자는 다 성령을 받게 작정되었고 약속되었다(요 7:37-39).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은 존재가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하셔서 구속을 위해 오셨다. 성령 강림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성령강림이 없었고, 불가능하였다. 바로 이 진리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 받지 못한 이유이다. 예수 믿으면 다 아버지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게 되어 있지만(갈 3:14), 예수 재세 기간 에는 성령 받을 수 없었다.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가능해졌고 또 실제로 그 구속 때문에 성령 파송이 이루어졌다. 성령은 보혜사로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성령 강림의 근본 목적은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데 있다. 성령의 내주가 그의 사역의 일차적 목표이다. 그러나 오순절파는 성령의 보혜사 직임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에 관심을 둔다.

5. 신약의 증거들: 믿음으로 성령 받음=예수 믿음=성령 받음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과정이 아니고 예수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는 것이 구원의 과정이다.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키시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중생을 주시며 그들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세례로 신앙 고백하여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였다. 오순절에 세례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한 자들은 그 고백과 함께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과 성령 세례를 분리한다. 그들은 중생 후 성령 세례를 받는 도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은 빌립의 전도를 받아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아서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신약 교회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예수 믿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바울이 예수를 만난 시각과 성령을 받은 시각 차이에는 3일간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 혹은 예수 믿음 후 성령 세례 받는 것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3일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다. 세례 받은 것은 바로 신앙 고백이다. 바울은 자기의 경험과 갈라디아 교회 설립 시 경험에 근거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갈 3:2-5). 오순절주의자들은 아볼로도 제자들의 전도로 중생을 얻고 바울에 의해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볼로는 전도하여 세례를 주었지만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다. 그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남았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못했으므로 성령 세례가 임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들의 개종과 성령 세례를 분리하는 것은 분명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온 잘못이다.

6. 성령 세례=성령 받음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셔서 예수의 성령 파송 약속(요 15:26; 16:7), 성령 받으라는 명령(요 20:22), 성령 세례(행 1:5)가 성취되었다. 오순절에 성령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20명의 육체에 부어졌다(행 2:1-4). 그 전에는 예수의 육체에만 거주하였던 성령(요 1:33-34; 3:34)이 많은 사람들의 육체에 부어져 내렸다.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의 임직에 적용된다.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다(행 2:38). 성령 강림 후에는 더 이상 성령 세례는 적용되지 않았다.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번 반복함밖에 없다(행 11:16). 성령 세례는 성령 강림 이후에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았다. 대신에 받는 것,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등으로 나타났다.

7. 성령 받음=선물로 받음

복음 선포가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선포된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한다. 들음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 은혜이어서 믿음의 들음이 바로 은혜이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므로 아들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청구하면 성령이 오사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인간의 종교적 노력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다.

8. 성령 강림의 목적=하나님의 거소 마련

하나님 혼자 계심을 만족하지 않고 백성을 지으사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조성하사고 언약을 체결하사 그들을 자기의 백성 삼으셨으므로 그들 가운데 오사 거하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가 아니고 언약의 주로서 백성들에게 오시고 섬김을 받으셨다. 백성들과 교제하시며 실제로 그들 가운데 사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여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그들에게 임하여 오사 내주하신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하나님의 거소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의 거소 조성이 성령 강림의 목적이다. 성령의 거주가 하나님 자신의 거주이다. 예수의 피로 구속되었으므로 이렇게 성령의 내주가 그리스도인 각자 안에 이루어진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거룩해져야 한다.

9. 성령의 내주=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맺음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신자들 안에 거주하신다. 기독교 구원의 신비는 성령의 내주로 시작하고 진행된다. 하나님의 영이 오사 친히 신자들 안에 거주하신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성도와 함께 하심이다. 신자와 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육체 안에 거하신다, 곧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비를 기독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보혜사이신데, 예수 그리스도 보혜사이시다. 연약한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이끌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께서도 행하시기 때문에 백성들은 위로와 새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원보혜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께서 행하신다.

10. 성령 충만=성령의 지배

성령의 인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한 백성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감화하고 역사하여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어 온전한 순종을 이루게 역사함이 성령의 인도이고 지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백성 되어야 하므로 성령이 역사해야 한다. 바울은 성령 충만을 에베소서 5:18에서 한번 사용하였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에서 말하는 충만은 문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렇다: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 바울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을 사용하여 성령을 충만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계속 충만케 되어져 있어야 할 당위를 표시한다. 전체 문맥으로 보아 이 구절은 성령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됨 곧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됨을 뜻한다. 성령의 인도는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적으로 죄악을 벗고 거룩해진다. 성령의 지배받는 자들만이 죄를 죄로 알고 죄를 벗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 때만 살 수 있다.

11. 성령으로 인침=구원의 보장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다고 할 때 그것은 백성이나 장소를 자기의 것으로 택하심을 못하고 자기의 소유로 확정함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한 장소를 택하여 그 곳을 자기의 전으로 삼음을 나타내었으나 신약에서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둠으로 그들을 택하여 자기 백성을 삼았음을 지시한다. 택함 받은 자들 곧 구원받은 자들의 이마에 어린양이 자기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두셨다. 그리하여 확실하게 구원받은 자들임을 표시한다.

12. 성령 받았음의 증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성령을 받아 가진 자들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성령은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성령은 선자에게 내주하설 때부터 죄를 제거하고 또 계속하여 죄와 투쟁하게 역사한다. 죄를 책망함으로 죄에서 돌이켜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그리하여 죄를 벗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역사한다. 예수를 주라고 하는 신앙 고백은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가장 친근한 호칭인 아빠로 불렀다. 하나님께서 믿어 아들들인 자들의 마음에 성령 곧 자기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여 믿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3. 성령의 사역: 전도와 성화

성령께서는 전도의 영이시다. 증거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선포를 받아들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의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한다. 이것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복음의 선포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복음 선포에 역사하여 성령은 사람들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한다.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면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음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성령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중생시킨 영혼들에게 내주하사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게 한다. 칼빈은 성화가 바로 중생의 열매들로서 성령 내주의 증거라고 보았다.

14. 성령의 능력: 복음전도의 능력

믿는 지들은 죄를 벗고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아 영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존재가 된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진리에 이르는 길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깨닫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기적과 신유 능력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증거를 힘 있게 이루는 능력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사람들의 예수 믿음을 위해 능력을 행사한다. 성령은 그의 모든 능력을 이 두 가지 일에 집중하였고, 전도와 신앙을 위해 능력이 행사되게 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 복음의 선포와 사람들의 예수 믿음은 발생하지 않고, 또 선포는 이루어질지라도 효과는 없다.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로 믿음에 이름은 능력과 성령으로 된다.

15. 능력의 길: 기도

그리스도 자신이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통하여 큰 능력을 행사하였다.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리스도 임재이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에게 약속된 주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임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

16. 능력의 소실

성령의 역사는 기도로 나타난다. 성령을 전적으로 유지할 능력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기도로 성령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능력을 얻어도 능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육체의 욕망들을 추구하고 살면 능력을 소실한다. 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데, 이는 기도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므로 기도를 통해서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17. 성령의 은사들

은사에 관련된 내용들은 고전 12:8-10; 12:28; 12:29-30; 롬 12:6-8; 엡 4:11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봉사를 하고 위로하고 구제하는 일, 치리는 계속되고 있으나, 나머지 은사는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계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의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방언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은 계시나 권면의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자기 과시를 위해서 오용되었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이러한 은사는 은혜의 표현이므로, 은혜가 주어지면 은사들이 나타난다. 은사들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몸의 지체들에게 배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주문해서 은사를 받을 수 없다. 은사는 인간의 공로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선물이다. 성령께서 주신대로 받는다.

18.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인류 역사상 예수만이 성령을 전유적으로 소유하셨고 담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로 임명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새로운 시대를 도입하였다. 구약의 역사에 선지자들과 왕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예수의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예수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메시야, 그리스도가 되므로 여호와의 종일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고 하나님 나라를 도입한 그의 나라의 왕이 되신 것이다. 예수는 그의 부활 후 성령을 자기의 백성들에게로 파송하였다. 예수는 구속 사역과 구원의 적용 과정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을 자신을 위해서 담지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담지자이시면서 동시에 성령의 파송자이시다. 예수가 성령 파송자가 된 이유는 부활로 인한 그의 구속사역의 완성 때문이다. 이 부활로 예수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었고, 그에 의해 보내어졌고, 그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많은 변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성령론이 기독론적으로 전개해야 하고, 또 바로 그 조망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실 때 그리스도에 의해 담지 되었던 영이지만 또 인성이 부착된 위격을 통해서 오셨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과 신격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인성이 성령 오심이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있어서 대전기이다. 그의 인성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살 수 있으므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는 새로운 질적 관계이고, 종말에서 신인 연합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부활 후 우리에게 파송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긴밀히 연락된다. 보혜사로서 오신 성령은 원보혜사의 일을 대신함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지키고 인도하며, 가르치고 또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 보혜사도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달아 알고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를 증거하고 가르친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 오시는데(요 14:17; 15:26; 16:13), 예수가 바로 진리이다(요 14:6). 자기가 메시야임을 가르치고, 세상의 구속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셨다. 보혜사는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왔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원보혜사 예수의 이름을 지닌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승계한 성령께서도 많은 은사들을 활용하시는데 그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지체들에게 주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신다. 즉 그의 이름의 권세와 그의 구원을 증거하여 확장되게 하고 구원이 나타나게 하신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의 권세로 사는 일이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

무엇이 대표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인가?

첨부 1

무엇이 대표적인 개혁주의 성령론인가?

C 님이 ‘개혁주의 신학’과 지방교회 신학을 비교하는 작업을 시작하심으로, 그렇다면 지방교회 신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개혁신학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절대적인 판단기준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C 님은 성령론과 관련하여 요한복음 7:39 등 구체적인 성경본문 해석에 관련된 위트니스 리의 관점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 해당 구절에 대한 관점을 포함하여, 과연 ‘통일된 개혁주의 성령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개혁주의 신학 내에는 다양한 신학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 개혁주의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소위 ‘개혁주의 성령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래 인용문들은 장로교 고신교단 소속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변종길 교수께서 자신의 저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생명의 말씀사, 2003)이란 책에서 개혁주의의 본산인 화란 개혁교단 내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성령론을 비판한 것입니다. 개혁주의 성령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1. 아브라함 카이퍼 성령론

” 카이퍼의 성령론은 대개 ‘저수지설’ 또는 ‘상수도 이론’이라고 불리는데 ,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 책, 316쪽)

“그러나 카이퍼는 이런 주석적인 설명은 거의없이, 그저 성경 한 구절을 읽어 놓고는 자기 나름대로 사색의 나래를 펼쳐 간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끝내버린다. 그러고는 이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따라서 성령의 부어주심이 우리 가운데 반복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카이퍼의 주장에 대해 차영배 교수가 많은 비판을 가했는데, 물론 그의 비판에는 지나친 것도 많지만 카이퍼의 성령론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카이퍼의 이러한 성령론은 그의 수많은 책들 중에 나오는 한 부분에 불과하며, 화란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화란개혁교회가 성령론을 특별히 체계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총회에서 그의 성령론을 받아들인 적도 없다.(322쪽)”

위 내용에 따르면 1) 화란개혁교회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하나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은 ‘저수지론’으로 함축되는데, 그것은 문제가 많다. 2) 화란 개혁교회는 성령론을 카이퍼의 성령론을 공식 교리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외에 특별히 체계화된 성령론이 있지도 않다 는 것이 이 책 저자의 판단입니다.

2. 헤르만 바빙크의 성령론

“헤르만 바빙크는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사변적으로 성령론을 전개하지도 않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전문적으로 성령론을 다룬 것도 아니다….그는 그의 전체 교의학 체계 안에서 성령에 대해 조금 언급하고 있을 따름이다 .”(323쪽)

“뿐만 아니라 앞의 바빙크의 설명 중에서,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을 마치 그리스도의 현현처럼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본 것은 성령의 ‘외적 사역’에 속한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내적 사역’이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성령의 내주’가 있었다고 본다면, 바빙크의 이러한 비유는 타당성을 잃고 만다. 물론 바빙크는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긴 하지만, 그 당시는 아직 성령의 사역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 .그에게는 아직 성령의 ‘외적 사역’과 ‘내적 사역’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부족했으며,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아직 깊은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326-327쪽).

” 그(바빙크)가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고 한 것은 성령의 외적 사역을 본 것이다. (중략)…그렇다면 앞에 나온 바빙크의 구별은 비록 개혁교회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견해라고 할지라도, 그 타당성을 잃고 만다.”(329쪽)

위 내용에 따르면, 1) 헤르만 바빙크는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이지만 성령론을 전문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2) 그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약에서의 성령의 활동에 대한 견해는 개혁교회 목사들과 성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으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입니다.

3. 헤르만 리덜보스

“우리나라에서 헤르만 리덜보스는 대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표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 물론 리덜보스는 이러한 명성을 얻기에 합당한 요소가 많다.”(330쪽)

“화란 내에서는 헤르만 리덜보스가 성경 본문에 대해서 종종 왜곡된 해석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보다 ‘그리스도의 몸’이 먼저 온다는데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합되면, ‘자동적으로’-물론 리덜보스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임을 당하는 것인데, 그는 이와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결국 리덜보스의 견해를 따르게 되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때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참여하게 되는 역사, 곧 신약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가 거의 무시되고 만다. 왜냐하면 리덜보스에 의하면, 성령을 받는 것은 교회에 가입하면 자연히 참여케 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340-341쪽).

4. (화란) 개혁교회의 상황

” 그러면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개혁교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그리고 교인증가의 대부분은 유아세례를 통해 이루어졌다.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경우는 1990년 전후 기준으로 1%도 안 된다. “(341쪽)

“… 유아세례를 받으면 자연히 성령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342쪽)

“이러한 것은 헤르만 리덜보스가 갑자기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퍼의 사상의 중심주제는 ‘중생’이라고 할수 있는데, 유아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근거는 그 유아에게 ‘중생의 씨’가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씨’란 말은 화란어로 ‘자트'(zaad)인데, 이것이 카이퍼의 신학에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342쪽)

” 카이퍼의 주장에 의하면, 유아세례받은 아이에게는 중생의 씨가 이미 들어 있음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되므로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카이퍼의 중생전제설과 성령론에 의해 목회를 하다보니 실제로 문제가 많이 생기에 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오” 라고 촉구할 근거가 약해지고 말았다. 중생의 씨가 들어 있으니 때가 되면 자연히 열매를 맺을건데 뭐” 하면서 젊은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343쪽).

“그래서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상당히 ‘정체적'(static)이며, 교회에 가입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사실상 로마 카톨릭의 성령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344쪽)

지금까지 한국 내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나름대로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장로교 고신교단 신학자의 눈으로 본 (소개한)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성령론의 단편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들은 또 다른 유형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인 클라스 스킬더, 차영배 박사 등에 의해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를 망라하는 ‘통일된 개혁주의 성령론’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C 님이 지방교회 신학과의 비교를 시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에서 소개된 유아세례를 받으면 자연히 성령에 참여한다는 ‘아브라함 카이퍼 식 개혁신학 성령론(또는 구원관)’을 C 님이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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