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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한절 Ep.4]이 영상은 베이직교회의 주일예배 설교 중에서 신앙인이 평소에 궁금해하거나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성경 구절을 한 절씩 발췌하여 엮은 것입니다.[2018년 5월 20일 주일예배 – 풀버전 보기 https://youtu.be/Q_TXYIppEyA ]* 이 영상물의 저작권은 ‘베이직교회’ 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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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 가인과 아벨 – 새벽기도 설교 | 동탄영락교회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로 얼룩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그 결과에 …
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12/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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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차이 (창 4:1-15) – 기멀전
I.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는가? 창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2/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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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상으로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제사를 드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는 … 요즘 헌금설교를 하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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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강해 – 18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 [ 4:1~7] – 온누리교회
교회에 와서 단순히 설교만 듣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 하여 죄가 가려지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어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
Source: www.onnuri.org
Date Published: 8/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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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주는 의미 – 아이굿뉴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합당하지 못했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여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7/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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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설교]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 크리스천투데이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겨냈을 때 벌거 벗은 채로 내쫓지 아니하시고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는데 짐승을 잡기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2/30/2022
View: 2063
가인의 예배를 열납지 않으신 이유 (창 4:1-9) – 기독정보넷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3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언제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0/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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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가인 과 아벨 설교
- Author: 더메시지랩The Message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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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3.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gnOF-cnoYg
창세기 4장 – 가인과 아벨 – 새벽기도 설교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로 얼룩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그 결과에 대한 기록으로 죄의 심각한 파괴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가인과 아벨은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3-5절).
가인과 아벨이 선택한 제물은 각각 그들의 직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아벨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 반면, 가인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까닭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 가지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이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는 ‘양의 첫 새끼’ 라고 기록함으로써 제물에 아벨의 깊은 정성이 담겨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단순히 ‘땅의 소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가인이 제물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본문에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제물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도 함께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하나님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자기를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정성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자의 제시를 받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신들과 같이 인간이 바치는 제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기뻐하고 화를 내는 그런 거짓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예물을 드릴 때 마지못해 하거나 형식적으로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제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1:4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자 심히 분해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은데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거짓된 제사를 드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마음에 분노를 일으켜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생에 대한 시기심만 불태운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가인의 시기심은 극에 다다라 결국 동생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8절).
특히 하나님께서는 시기심으로 이성을 잃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죄가 먹이를 덮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맹수와 같이 우리를 헤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7절).
실제로 인간은 죄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악한 생각을 조금만 가져도 즉시 충동질하여 범죄하게 함으로써 죄의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 앞에 있는 맹수를 경계하듯이 죄의 유혹과 욕망을 억제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된 반면 가언의 제사는 외면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는 반면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외면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까, 자기중심의 예배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심으로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14-15절).
여러분, 가인은 인류 최초의 ‘형제 살해’라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고, 적반하장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가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살인죄를 범한 이후에도 그에게 찾아 가셨고, 그를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그에게 보복이 가해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그것을 확증하는 표까지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한 죄인에게까지 오래 참으시며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는 끝이 없습니다(시 108:4).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멸시하는 행위로써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그 머리 위에 쌓는 것과 같습니다(롬 2:4.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모든 죄악된 행실을 끊고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지만, 또한 공의로우셔서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 날에 그에 합당한 형벌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있는 놋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6절).
여기서 ‘놋’은 ‘유리, 방황, 요동’ 이라는 뜻으로 ‘기쁨, 환희’를 의미하는 ‘에덴’과 대조되는 도망과 추방의 땅임을 암시해 줍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이 이후 늘 방황하며 불안한 삶을 살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아무리 풍부하고 견고한 안전이 보장된다 할지라도 결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따르는 삶,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삶으로써 아름답고 경건한 문화를 세워가며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오늘,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 (창 4:1-15)
I.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는가?
창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왜 죽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제사에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을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땅의 소산, 즉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짐승의 희생제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사였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양이나 송아지 혹은 염소와 같은 짐승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셨던 제사가 짐승의 희생제라는 해석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땅에서 난 곡식 제사를 아주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중에 하나인 ‘소제’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는 땅에서 난 양식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 2: 1-16; 6: 14-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짐승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곡식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물 제사만 열납하시고 식물 제사는 배척하신다는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본문 말씀을 아무리 조사해봐도 그 대답이 명확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희미한 단서가 있다면 3-5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3-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벨과 그 제물’–Abel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과 ‘가인과 그 제물’–Cain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벨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보다도 아벨이라는 사람을 먼저 열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배척하시기 전에 가인이라는 사람부터 먼저 배척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반기신 이유는 그 제사의 내용이 동물 제사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열납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신 이유가 곡식 제사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인이 동물 제사가 아닌 땅에서 난 식물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사가 거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마 두 형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쪽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쪽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봅시다.
II.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인가?
⑴ 두 형제는 인격과 삶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무엇을 제물로 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아벨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보다 먼저 그의 신앙 인격을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경우에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즉 가인이라는 인격이 문제였습니다. 이미 제사를 드리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는 동생과의 묘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잠복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의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 1서 3: 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그렇습니다. 가인의 신앙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생의 제사는 열납되었지만 자신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자 제일 먼저 안색이 변했습니다. 질투심과 분노가 마음 가득 차 올랐던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증오심을 이기지 못한 가인은 들판에서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까? 우리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함께 접목된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사 1: 11-17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무수히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않으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삶이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힐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옳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열납되지 않았습니까? 자기 동생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 증오심을 품은 채 제물만 드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물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이 삐뚤어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 23: 3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아벨을 분명히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왜 반기셨습니까? 그의 마음이 정직했고 그의 삶이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 이전에 그의 인격과 삶이 온전했기 때문에 먼저 아벨이라는 의인을 받으셨고 제물은 저절로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호 6: 6은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한 시 51: 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마음이 떠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의로운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예배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물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먼저 열납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 23-24 참조)가 되게 하십시오!
⑵ 두 형제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신앙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막연히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히 11: 4은 두 사람의 차이는 신앙의 차이였음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물을 고르는 일에 아주 신중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흠이 없고 가장 귀한 것을 골랐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선택했습니다. 양 안에서도 가장 좋은 것 중의 좋은 것 기름을 성별해서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성의가 부족했습니다. 땅에서 난 소산물을 아무렇게나 바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땅에서 얻은 곡식물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양의 첫 새끼를 잡고 그 기름을 짜내서 바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수고와 정성을 요할 것입니다. 곡식물이 훨씬 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는 장차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 36)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또한 양을 잡을 때 나오는 피는 장차 그리스도의 피를 예시(豫示)합니다. 그리하여 히 9: 2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양이 흘린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더더욱 흔쾌히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습니까? 아벨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열납하십니까? 믿음이 들어가 있는 예배입니다. 히 11: 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열납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실한 믿음으로 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반기실 것입니다!
⑶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인공은 아벨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벨에 대해서는 겨우 몇 줄 정도 밖에 설명하지 않지만 가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진짜 주제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느냐 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기에 주권(主權)을 가지고 계십니다(사 64: 8; 렘 18: 1-6 참조).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최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린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안 받으실 수 있습니다. 열납하시느냐 열납하시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사안이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제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이유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납하시고 않으시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정말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두 형제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초점을 가인에게 집중할 경우 가인은 세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가인은 대번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왜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옳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부터 먼저 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동생인 아벨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살의(殺意)를 품게 된 것입니다. 이미 얼굴에서부터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충고를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죄가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왔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 즉 정복하라고 충고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8절에 보면 들판에서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요 친형제 살해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가인은 두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가인이 “칼로 아벨의 목을 따서 죽인 것”–“sliced the throat”–으로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분노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 15: 19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가 모두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자기 형제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다음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얼마나 뻔뻔스러운 태도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아마 가인은 팔짱을 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로 하나님께 대들었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내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책임(Irresponsibility)!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가인을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원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인 것입니다!
자기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대십니다. 10절에 보면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주시는데 12절을 보십시오. 장차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아니하며 가인은 땅에서 피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를 듣고서야 가인이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 싶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에 떠는 가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절에 보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일곱 갑절이나 받게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III. 가인 편에 설 것인가? 아벨 편에 설 것인가?
결론을 맺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이후 전개될 인류 역사를 요약해줍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 가인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높이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심과 시기심과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찬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반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구의 또 한구석에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벨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 편에 서 계십니까? 가인의 편입니까? 아니면 아벨의 편입니까? 가인의 후예가 되느냐? 아니면 아벨의 후예가 되느냐는 여러분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기왕이면 아벨 편에 서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주는 의미
금주의 설교:창세기 4:2~7
제사에 대하여 가인과 아벨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담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에덴에서 쫓겨나기까지 일어난 정황은 일반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제사하는 방법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법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벨의 제사에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는 것을 기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인의 제사를 소개할 때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라고 단순하게 기록해서 가인과 아벨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물론 제사법이 모세 시대에 제도화 된 것이기 때문에 무리한 접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결코 무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제도가 모세 시대에 제도화 되었다고 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성경의 제사에서 분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제도화된 제사를 무시하면서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사의 핵심이 피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 또한 예수님의 보혈이 없이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 자기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제사의 문제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힘입지 않은 자가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요일 3:12절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하심으로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는 것은 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 11: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창 4:3~4절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합당하지 못했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여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가 예수님의 보혈에 의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새소망교회 조창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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