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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갈라디아서 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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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4 KRV – Bible.com
갈라디아서 6:14 KRV.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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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4절-16절 그러나 내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
갈라디아서 6. 14-16 그러나 내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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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랑 십자가 갈6장14절 – 기독정보넷
십자가가 여러분의 자랑하는 말을 변화시켜서 오직 십자가 자랑만 하시기를 원 합니다. 오직 내 입술이 십자가를 말하고 내 영혼이 십자가를 노래하고 내 몸이 십자가를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3/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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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자랑할까? (갈라디아서 6:14) < 설교 < 오피니언 < 기사 ...
본문 갈 6:14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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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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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갈라디아서 6장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잠1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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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 갈라디아서 6장 14절 / 오늘의 …
갈라디아서 6장 14절 (갈라디아서 6:14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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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 6:14)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라디아서 6장 14절] 14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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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4 — 오늘의 말씀묵상 – Verse of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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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만 자랑하리 (갈 6:14) – 목회자료 – 기멀전
“모든 우주 법칙은 저항의 법칙이다. 비행기의 원리는 저항으로 인하여 물체가 뜬다는 것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다. 높이 나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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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갈 6 14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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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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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KRV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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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4절-16절 그러나 내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 14-16 그러나 내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바로 앞 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치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랑은 십자가가 아니라 육체, 그것도 할례를 받은 육체를 자랑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자랑은 그들만에 멈춘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현혹시켜 할례를 받게 하고, 이것을 통해 그들의 자랑으로 삼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도 면하고자 하는 신앙의 왜곡된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사도는 자신을 고백하면서, 14절에서 “그러나”(δὲ)라고 시작을 한다. 우리 모두 잘 아는 바와 같이, 여기서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다르다는 역접 상황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일까?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Ἐμοὶ δὲ, μὴ γένοιτο καυχᾶσθαι, εἰ μὴ ἐν τῷ σταυρῷ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라고 한다. 즉, 앞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들의 육체를 자랑하고 할례를 자랑하였지만, 사도는 이와 반대로 그들이 거치는 십자가를 자랑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도 자신 때문에 자랑 할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μὴ(never)라는 말을 두 번 쓰고 있는데, 이는 자신에게는 “전혀” 없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의 대상이 됨을 결연히 확인시켜 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대상이었다면, 사도에게는 영광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고 높였다면 사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랑을 하였다. 그래서 여기 “십자가”(σταυρῷ)는 그리스도의 속죄로(2:20 참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사도에 대하여, 그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로서 사도는 세상을 그 모든 유혹과 죄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종교들과 더불어 떨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세상은 영적으로 신자들에 대하여 죽은 것이고, 신자들 역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상태를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δι’ οὗ ἐμοὶ κόσμος ἐσταύρωται, κἀγὼ κόσμῳ) 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15절에서 할례(περιτομή)와 무할례(ἀκροβυστία)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 대신에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ἀλλὰ καινὴ κτίσις)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새로 지으심”이라는 “새 창조”(a new creation)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세상에 대한 신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어떠한 종교적 상징의 존재유무도 구원의 방도가 될 수 없고, 구원의 유일한 문제는 바로 새 창조, 즉 거듭남이라는 중생을 의미한다(고후 5:17 참조). 이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된 자를 여기서 “새 창조”, 즉,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한다(요3:3, 5).
그리고 사도는 거의 결말에 이르는 말로 16절에서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한다. 즉,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라고 한다. 여기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ὅσοι τῷ κανόνι τούτῳ στοιχήσουσιν)란 바로 앞에서 말한 “새 창조자”, “거듭난 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바로 이 규례를 행하는 기독신자(성도)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는 이제 “평강과 긍휼”(εἰρήνη καὶ ἔλεος)을 기원한다. 이 평강과 긍휼은 새상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서 평강은 신자가 하나님과 맺게 되는 새로운 관계(롬 5:1, 8:6; 골 3:15)이며, 긍휼은 신자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종결시키심을 의미한다(시 25:6; 단 9:18; 마 5:7; 눅 1:50; 롬 12:1; 엡 2:4; 딛 3:5).
그런데 우리는 여기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καὶ ἐπὶ τὸν Ἰσραὴλ τοῦ Θεοῦ)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살피고 이 구절을 끝맺고자 한다. 이 관련하여 NIV는 “심지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까지”라고 번역을 한 반면에, NASB는 “또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고 번역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이 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구약에서 말하는, 그리고 유대주의 이스라엘인 모두들 지칭한다거나 또는 모든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신자들을 말한다고 보기 보다는 돌아온 유대인 이스라엘인을 두고 말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도는 앞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인 거듭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돌아온 유대인들을 향하여 축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방인 거듭난 자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 중 복음으로 돌아온 자들이 매우 귀하고 복된 자들이기에 이들을 향하여 깊은 사랑과 관심을 표명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무엇을 자랑할까? (갈라디아서 6:14)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랑”의 종류는 무궁무진한 게 “자랑”인 것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욥 1:8과 2:3에서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 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는 세상에서 없느니라”고 사탄에게 두 번씩이나 욥의 믿음에 대하여 자 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대는 가정이든, 국가이든 혹은 회사이든 사람이 모인 곳에는 자기 자랑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랑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자랑은 계속 샘에서 샘물이 끊임없이 나 오듯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솟아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하여 자랑을 해주면 그 기분이 묘하리만큼 성취감 있 게 기쁘고 좋아집니다.
그것은 곧 교만의 선봉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사 람들처럼 육신의 자랑거리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가문에 대한 자랑, 학벌에 대한 자랑, 재물에 대한 자랑, 명예와 권세에 대한 자랑 등등, 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의 바울 사도의 자랑은 육신의 것들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에 대한 자랑뿐이었습니다.
본문 갈 6:14에서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 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자랑하는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가 왜 자신의 인생에 자랑거리가 되었을까요?
첫째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로 얼룩져 있는 우리들의 죄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는 인간으 로서는 하기 힘든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들 의 죄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요 13:34에서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매달려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이기에 그 것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십자가 자랑 외에 다른 것들은 배설물로 여겼 던 것입니다.
둘째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희생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형수에게 가해지는 십자가형은 로마의 사형방법 중에 제일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하는 최악의 형벌이므로 당시의 사형수 중 에도 제일 악한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제일 고통스런 형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주님께서 순전히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 다.
막 10:45에서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주님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며 희생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평생 자랑이 주님의 희생의 상 징인 십자가의 자랑뿐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섬김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마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 변 화 받은 후에는 롬 15:25에서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 렘에 가노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깨닫게 된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는 온전히 우리들을 섬기기 위한 십자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기에 자식 자랑, 옷 자랑, 재물 자랑, 명 예 자랑, 권세 자랑 등등 닥치는 대로 자랑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자랑의 차원이 달라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께서 지셨던 사랑 과 희생과 섬김의 십자가를 자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 12:9~10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 라, 이는 내 능력이 약한대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 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고백하고 있습 니다.
예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부터 입술을 열어서 자 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죄 를 위해 지셨던 십자가의 자랑 밖에는 결코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음 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 갈라디아서 6장 14절 /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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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4절 (갈라디아서 6:14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 인생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를 아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섭리와 경륜과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만큼 성경의 모든 비밀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피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했고,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피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했으며,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죄인인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예수 그리스도 알고 그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요 6:53~54)
이 세상에는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 그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진 않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3:11~15)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행 4:12)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의미를 모르고서 믿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붙잡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피”를 앞세우고 나오지 않는 것은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는 것만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기부를 많이 하고, 누가 가난한 이를 많이 도우며 착하게 선하게 살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누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지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것만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의 때 기준이 됩니다.
이는 곧 그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느냐, 믿지 안 했느냐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오직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9)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믿는 일이 곧 의로움이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일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갈 6:14)
“내가 복음(십자가)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말하며,
그는 평생을 십자가 자랑하며 증거하다가 순교함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자랑하며 전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이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천국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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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 6:14)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라디아서 6장 14절]14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늘은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편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는 줄 압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은혜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크리스챤이며 훌륭한 설교가이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날이 가까웠을 때 그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며 고백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훌륭한 가문도 자랑할 수 있었고 그의 많은 학문과 지식, 혹은 각처에 오르내리며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과 많은 교회를 세운 것 등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위대한 문필가로서 신약성경의 삼분의 이 이상이나 기록하여 다가오는 후대의 많은 사람을 감동하여 은혜를 받게 했으므로 이것도 자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내세울 수 있었던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바울은 물론 믿었지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훌륭한 설교를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중심 사건에다 마음을 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그러면 우리가 왜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설교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가장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후 십자가는 전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이룬 최대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능력은 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되었고 그날 갈보리 산상에서 태우신 작은 빛이 온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 아래 겸손히 무릎을 끓고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깊이를 나타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를 조금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보도되는 끔찍한 사건들이나 우리 주변에서 보게되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이며 비양심적인 행위들로부터 인간의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죄인 취급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근본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인간의 죄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죄의 흉악함과 그 깊이를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분을 바라보고 ‘이 분이 누구며, 왜 죽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에서 대답이 들려 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이요,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그 아버지의 품에서 빼앗아 이 세상으로 끌어내려 잔혹한 로마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고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실 만큼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전에 시카고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켜 많은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애를 썼지만 별로 진전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최후로 20,000불짜리 수표를 끊어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의사 로렌스씨를 초청해 그분에게 수술을 부탁했습니다. 그 결과 그 의사의 치료가 성공해서 그의 어린 딸이 회복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그 딸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엄청난 대가를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죄는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죄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깨달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독생자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어마나 크고 깊은가를 알게 해 줍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깊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심으로써 그 깊고 큰 인간의 죄를 도말하여 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천지간에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대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될 뿐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육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적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옛날 말수레를 타고 다닐 때, 미국의 어느 청년이 약혼자를 태우고 가다가 어떤 언덕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말이 그의 애인을 태운 채 언덕 밑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청년은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매달려 수레를 멈추고 애인을 구출했으나 그는 말발굽에 밟히고 수레 바퀴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그 애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청년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일으키려 했더니 그는 ‘내가 너를 무척 사랑했어, 그렇지’하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이 죄악의 검은 말을 탄 채 죽음의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 내려와 갈보리 산상에서 우리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나는 너희를 무척 사랑했지, 그렇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고독한 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메시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목사님들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그 신앙의 사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십자가가 우리 목회의 중심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일치합니다. 십자가가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도 일치합니다. 모든 제자들의 설교의 중심도 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룬 주님의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우리 기독교의 속죄와 부활의 복음에 있어서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모든 로프에는 전부 그 가운데 붉은 실이 들어 있어서 그 밧줄이 힘이 있고 일치성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목사의 모든 목회와 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의 붉은 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름받고 보내심을 받은 모든 전도자의 복음적 메시지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이어야 합니다.
4. 십자가는 전 인류에게 참된 만족을 줍니다.
여러분, 큰 슬픔을 당하거나 마음이 상하는 비극을 당한 때가 있습니까? 권하노니, 그때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고통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나를 이 환난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평안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리 커다란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치아가 상해 치과에 가서 이를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전기로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발로 밟아 가면서 재봉틀 밟듯이 어떤 기구를 사용해서 이를 뽑았는데 그만 뽑다가 이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 속의 뿌리를 뽑아 내려고 칼로 마구 째어서 집게로 뽑다가 그래도 안되겠던지 그 다음에는 구멍을 뚫는데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파했던지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30분 동안 피를 흘리게 하고 갖가지 방법을 다 쓰고도 못뽑겠는지 여기서는 못뽑겠으니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래 어찌나 화가 나던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기진맥진해 있는 터라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뽑으라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망치와 정을 가져다가 입 안에 정을 탁 갔다가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드리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한 번씩 칠 때마다 눈에서는 북두칠성이 번쩍번쩍 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어금니 하나를 뽑는데도 이렇게 아프거늘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양손과 양발에 못이 꽝꽝 박히고 옆구리엔 창이 들어 갔으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셨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고통의 십자가를 마음 속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고통과 시험이 와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능히 감당할 위로와 힘과 용기가 솟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힘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마음 속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의문의 해답이 되시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됩니다.
그 전에 한 젊은 부부가 어린 딸을 하나 두고 결혼 생활을 하다가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 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린 딸의 장례식에 아빠도 엄마도 함께 한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맞지 않아도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일치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그들 부부의 사랑의 공통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이혼했던 부부는 모든 차이점을 버리고 서로 재결합하기로 결심하고 새출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미워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 있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아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 모든 차이점을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 아래로 가져 오십시오. 그러면 모든 다툼과 미움이 다 사라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약함을, 모든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전에 런던 거리에서 점자 성경을 읽으며 구걸해 먹던 소경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도행전을 읽다가 읽던 곳을 잊어버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다시 찾으려고 오르락 내리락 손가락을 옮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읽던 한 부분이 생각나서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를 반복해서 읽으며 찾노라니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청년은 웃지 않고 그 소경이 외우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구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소경은 그 말씀을 듣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침대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그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얻을 수 없습니다. 구제 사업을 많이 했다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이나 그밖에 어떤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 앞에서 철저히 회개할 때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서양 한가운데서 배가 한 척 파선하여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엔 구명대가 충분하지 못해서 죽을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아버지가 구명대를 자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하나씩 채워 주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나는 물속 무덤으로 들어가오. 그러나 당신과 아들은 구조받기 바라오. 그리고 이 다음에 내 아들이 커서 알아들을만 하거든 아빠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었다고 말해 주구려’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해 지나서 아빠의 사랑으로 구조되어 건강하게 성장한 그 아들이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에 대해서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때 엄마는 배가 파선되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서 ‘아버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바로 당신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냐, 안 믿느냐에 따라 우리들 자신이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느냐 아니면 구원받지 못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느냐 하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요 3:36절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부부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딸을 데리고 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딸이 기도할 때 가만히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 강대상 뒤에 커다란 더하기 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에게 왜 저렇게 큰 더하기 표를 세워 놓았느냐고 물으니까 엄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얘야, 저것은 십자가라는 것인데 영원한 더하기 표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을 더해 주시고, 축복을 더해 주시고, 믿음을 더해 주시고, 소망을 더해 주시고, 영생을 더해 주시는 우리의 더하기 표란다’라고 딸에게 설명해 주었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값이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십니다. 이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시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꼭 깨닫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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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 14절(2월27일 토요일)
오늘의 말씀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오늘의 말씀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오늘의 말씀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오늘의 말씀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오늘의 말씀 – 갈라디아서 6장 14절(2월27일 토요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힘은?
‘자랑’이라 함은 자기나 자기와 관계있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어 뽐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랑한 것은 오직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과거 율법주의자로써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음의 사도가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밝히는 세상이란 헬라어로 ‘코스모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세상적인 삶을 말한다.
즉 대지나 땅, 그리고 창조의 조화로운 세계가 아님을 말한다.
고전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상의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러므로 자신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이 아무리 좋게 다가와도, 심한 고통과 고난을 준다해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들이 세상의 관심을 버려야 한다.
즉 세상에 대해 나를 못박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즉 진리의 말씀, 성령이 내주하시는 삶에서 오직 주님께서 베푸신 영생과 구원에 대한 것만을 소유해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기 이전에는 세상의 쾌락과 세상의 미혹 속에 현혹되어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이 죄악에 가득함을 깨닫게 되므로 세상에 대해 못 박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 안에 거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세상 관심과 미혹에 벗어나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 즉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과 연합한 사람인 간음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스스로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간음한 여인은 세상을 자랑하게 된다.
세상의 가치, 자신의 생각의 존재감, 자신의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것은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의 도를 따라 하늘의 보배롭고
영원한 가치만을 추구하고 자랑해야 한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어떤 고난과 환난이 닥쳐도 영광으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능히 세상을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이 미혹하는 쾌락과 고난, 그리고 환란에 어쩌할 줄 몰라 방황해서는 안되며
오직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믿음을 의지하여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으로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14 — 오늘의 말씀묵상 — 2012년 06월 14일
오늘의 묵상
자랑한 근거를 갖고 계신가요? 당신의 자랑할 만한 자랑거리가 무엇인가요? 우리들에게 “오직 하나뿐이고, 진실하며 의존할 만한 자랑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말고는 없다”고 사도 바울은 상기시켜 줍니다. 오직 하나의 이 자랑거리는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행한 일, 도달한 업적, 달성한 것들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다른 자랑의 이유들은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안에서 함께하는 기쁨과 확신에 비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공허한 명성일 뿐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리 (갈 6:14)
십자가만 자랑하리 (갈 6:14)
코카콜라 사장은 코카콜라의 사람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핏줄속에서 피를 빼고 콜라를 넣고 싶다. 내 심장은 피를 품어내게 하고 싶다.”
그는 늘 코카콜라만 자랑합니다.그러나 진정으로 코카콜라는 자랑할 만한 것일까요? 조금 마시는 것은 몰라도 많이 마시는 것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여자 집사님 한 분이 제게 간청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 바로 옆에 언니가 살고 있습니다. 교사입니다. 나 혼자 천국가면 안 되요. 같이 가고 싶어요. 전도해 주세요.”
그리고 언니 전화 번호와 주소를 주었습니다. 얼마나 언니 영혼을 사랑하는지 감동이 되었습니다. 돌아 와서 전화를 드리고 만났습니다. 조금 다니다가 지방으로 발영을 받아 전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네 잎 크로바의 사람이었습니다. 40년동안 네 잎 크로바만 모았습니다. 지금까지 3만개 이상을 모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기네스북에 자기 이름이 오르도록 신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겨울이면 여름을 기다렸고, 여름이면 발벗고 나서서 온통 네 잎 크로바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는 네 잎 크로바만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잎 크로바는 자랑할만한 것일까요? 기네스북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그렇게 가치있는 것일가요?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가브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같이 편지를 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편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종은 어디를 쳐도 종소리만 내는 것처럼 바울은 어디를 쳐도 십자가 소리만 나왔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을 가요?
1. 십자가는 구원이기 때문에
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를 로마인들이 보면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들이 보면 우리를 구원시켜 주는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구원입니다.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래서 죄의 값은 사망이 되었습니다. 벌금형도, 감옥형도 아니었습니다. 사형이었습니다.그래서 모든 죄인은 죄의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짐승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이 된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중심에 우쭉 서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카나다 토론토 한 호수에서 오리 한 마리가 먹이를 먹다가 부리에 깡통따개가 씌워졌습니다. 그래서 부리를 벌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리는 먹지 못 하여 아사상태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리를 잡아 그것을 벗겨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리는 도무지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사적으로 도망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드려서 큰 그물을 짰습니다. 그러나 어찌나 잽싸게 도망치는 지 그 오리를 잡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스카이 다이버를 동원시켜서 물속으로 들어가 땅으로 오리를 쫓아내 보았으나 번번히 실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리 전문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오리들을 맛있는 먹이로 유인하였습니다. 그 호수에 있는 다른 오리들은 모두 모여 맛있는 것을 먹었는 데 유독 그 오리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오리를 한 마리를 잡으려고 수 억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얼마 후 그 오리는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살려 주려는 사람들의 진심을 조금도 알아 주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심을 알아 주지 못 하고 자꾸만 도망치다가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동물은 거북이입니다.
5천년 된 거북이를 신귀(神龜)라고 하고 1만년 된 거북이를 영귀(靈龜)라고 한답니다. 거북이가 그렇게 장수하는 이유는 그렇게 무겁고 딱딱한 등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다니며 긴장하고 운동하니까 제일 오래 사는 동물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하와이 바다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거북이를 발견하고 한참을 같이 놀았습니다. 정말 심청이가 거북이 등을 타고 바다에서 살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순한 동물이었습니다. 즐겁게 자기도 같이 놀아 주었습니다.
십자가를 평생 지고 사는 이에게는 장수의 축복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당당히 말한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 나면 영수증을 주고 받습니다. 사랑하는 남녀도 사랑한다는 표시로 사랑의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약혼식에 반지를 서로 끼워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십자가에서 아들을 주신 이가 무엇을 못 주시겠느냐고 바울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십만원을 줄 수 있다고 1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억을 줄 수 있는 이는 십만원을 줄 수 있습니다.
100개를 줄 수 있는 이는 하나 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줄 수 있다고 100개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이가 무엇을 주지 못 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야.”
바울은 로마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30년 동안 성극을 하면서 예수역을 맡은 배우가 있습니다. 안톤 레이지입니다.
어느 날 그의 연극을 보고 감동을 받은 부부가 그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연극에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한번 빌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가 물었습니다.
“연극인데 구태여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었습니까?”
안톤 레이지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못 한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물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일로일로에 갔을 때 강요한 선교사는 나에게 조그만 카드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곳 경찰서장이 써준 카드입니다. 교통경찰에 걸리면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카드를 가지고 있는 강 요한 선교사를 잡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강 선교사는 서장이 자기를 사랑하는 표시라면서 자랑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말씀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강 요한 목사가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목회하였던 춘천지방 발산교회가 있습니다. 나는 그 곳에 한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콘도같은 것을 여기 저기 강가에 만들어 놓고 분양하기도 하고 임대하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를 내려다 보이는 곳에 많은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을 결코 떠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홍수가 극심하던 어느 날 그 강을 건너다가 배가 뒤집혔습니다. 그 배에는 아들과 딸 그리고 자기 세 명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두 자녀를 양 손에 붙들고 급류에 휘말려 발버둥쳤습니다.둘 다 살리려고 하다가는 둘 다 죽일 것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를 놓아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를 놓겠습니까? 누구를 붙들겠습니까?
그는 아들을 붙들고 딸의 손목을 놓았습니다. 급류에 휘말리며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내 손을 놓으셨군요.”
아우성치며 떠내려가 죽은 딸의 모습 때문에 이 강가에서 넋을 잃고 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이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놓았으면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에게 늘 감사하면서 죽은 누나를 생각하면서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알려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석탄으로 알콜을 얻는 방법을 쓰시요.>
그 학생은 아무리 생각을 짜내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학공식이나 부호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썼습니다. 장난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석탄을 팔아서 알콜을 사면 됩니다.>
그 후 그 학생은 교수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낙제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담당교수는 그 학생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는 석탄으로 알콜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찾아 냈다.”
그리고 웃으면서 충분한 점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그러움과 사랑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그 후 늘 그 교수의 사랑을 전하며 다녔습니다. 낙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교수님의 사랑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영수증입니다.
3. 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에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요 지혜이십니다. 능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마귀로부터의 승리입니다. 마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무기인 사망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매어 있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마귀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승리라는 말은 전쟁이 있다는 말입니다. 전쟁없이 승리는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서구 영화 가운데 드라큐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피를 빨아 먹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귀신 이야기가 유럽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중에 하나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드라큐라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이면 그는 맥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쓰여지게 된 것은 로마 황제 콘스탄틴 황제때부터입니다. 그가 전쟁에 나가려고 할 때 십자가를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가지고 나가 전쟁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 후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마크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국기는 십자가입니다.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지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아놀드 본 윙크라이드(Arnold Von Winklereid)는 스위스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적국이 스위스로 쳐들어 와서 한 도시 한 도시 점령하여 나갔습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군사수도 엄청나게 적었습니다. 스위스 군대는 아예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모두가 포기 상태일 때 아놀드는 십자가를 높이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며 말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오. 여기는 나의 집과 조국과 나의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 군사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무서워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적을 물리치고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내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적진으로 쏜살같이 달리며 또 외쳤습니다.
“자유를 달라. 자유를 달라.”
적군이 아놀드의 가슴에 창을 댔습니다. 그리고 눌렀습니다. 피를 토하며 죽었습니다. 그 때 온 스위스 군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 돌진하였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스위스를 위기에서 구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십자가가 스위스 국기에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어렵고 힘들때마다 십자가에 의지하며 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회자들의 무덤’이라 일컫는 곳이었습니다. 처음 테드 해거드 목사가 이곳에 갔을 때는, 칼로 찌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마다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이 들끓어 죽은 개나 고양이의 머리를 소포로 부쳐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테드 해거드는 물러서지 않고 영적 전쟁을 벌였습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전화번호부를 5명 단위로 오려 그 이름을 불러가며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동산 매물이 나오면,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많은 선교단체가 이곳으로 이사 오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는 많은 선교단체의 본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윌리암 헨리워드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업적이 있으면 댓가가 있다. 목표가 있으면 적대자가 있다. 승리가 있으면 문제가 있다. 성공이 있으면 희생이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우주 법칙은 저항의 법칙이다. 비행기의 원리는 저항으로 인하여 물체가 뜬다는 것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다. 높이 나르려고 할수록 공기의 저항이 크고, 공기의 저항이 클수록 비행기 부력은 커져서 높이 나를 수 있다.”
구약의 최고 사역의 사람은 모세입니다. 신약의 최고 복음의 사람은 바울입니다.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일을 하였고 방해하는 막힘이 가장 많았던 사람입니다.
가다보면 막힘이 있고 막히면 뚫고 나가고, 가다보면 또 막히고 그러면 또 기도하고 매달려 뚫고 나가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나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바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의 비판자들은 일생 안디옥에서 마케도니아 해안까지, 소아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평생 그가 가는 곳마다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바울에게는 평생 반대자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하였는 데 정말 십자가는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십자가는 구원이기 때문에
2. 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에
3. 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화상으로 얼굴이 귀신처럼 이그러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하여 누구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건강하였습니다. 마음도 예뻤습니다. 어느 날 맹인을 만났습니다. 어느 처녀도 맹인과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흉한 처녀는 맹인이 너무나 불쌍하여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서로 사이에 사랑이 싹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둘만 사는 것처럼 행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맹인에게 눈을 주겠다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수술하게 되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내일이면 수술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왜그런지 모르게 우울한 것을 남편이 느꼈습니다.
“여보! 내가 눈을 뜨게 된다는 데 당신은 왜 그렇게 우울해요.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느끼지 못 하겠어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워요. 내 얼굴은 화상으로 흉측해요. 당신이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덜 할 것만 같아요. 우리의 사랑이 식어질 것만 같아요.”
이 말을 듣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며 살았지요. 내가 눈을 뜬 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할 것을 당신이 두려워하는 군요. 나는 내일 수술받는 것을 포기할 거예요. 당신을 이대로 사랑하고, 당신의 사랑을 이대로 받고 싶어요.”
맹인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평생 수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맹인 남편은 눈을 뜨지 않고 평생 아내만 사랑하고 자랑하였습니다.
우리는 평생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사랑하며 나가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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