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 장 12 절 | [생명의 삶] 20141222 신앙은 성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골로새서 3:12~17)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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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2-17 KRV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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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9/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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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3장12절~17절(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는 성품과 삶이 …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평강을 부어주옵소서. 외인들이 교회 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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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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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수) “골로새서 3:12-17” / 작성: 오웅식

[본문] 골로새서 3:12-17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사도 바울은 5-11절까지 성도들이 벗어 버려야할 옛사람의 모습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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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3/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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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골로새서 3장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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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4/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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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골 3:12-17) – 유평교회

본문 : 골로새서 3장 12-17절 …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괴로움과 고난을 채우면서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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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9/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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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삶을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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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9/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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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12-17절 – Daum 블로그

골로새서 3장 12-17절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이는 너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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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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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완전한 사랑(골 3:12-14) – 골로새서 Colossians – 로빈박스

골로새서 3장 12절부터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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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obinbox.net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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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입어야할 옷 – 골로새서 3:12-17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1]맨 먼저 12절부터 14절까지의 사랑의 옷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권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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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nincoc.com

Date Published: 10/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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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힘 (골로새서 3장 12-14절) – Break time

[설교] 용서의 힘 (골로새서 3장 12-14절). 대디 김 2021. 6. 14. 16:29. 반응형. 어떤 노총각의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오는 신붓감마다 마음에 안 든다며 딱지를 놓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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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fru.tistory.com

Date Published: 7/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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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20141222 신앙은 성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골로새서 3:12~17)
[생명의 삶] 20141222 신앙은 성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골로새서 3:12~17)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골로새서 3 장 12 절

  • Author: 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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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4. 12.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g195pNs9jc

골로새서 3: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골로새서 3:12-17 KRV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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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3장12절~17절(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는 성품과 삶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서로 참고 용서하는 태도를 잘 견지할 것을 권면한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해하는 자까지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스데반은 죽임 당하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재현했다(행7장). 서로 참으며 용서하기 위한 첫걸음은 주님의 용서와 제자도를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의 내적 덕목을 중요시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평강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다. 우주의 주재자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며 실현할 수 있는 평안이다. 그분은 먼저 이런 평강의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인은 평강을 누려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이 또한 우리 안에 늘 있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온전히 있을 때, 그분의 다스림이 잘 살아난다. 그래야 각종 좋은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서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자라게 된다. 찬송과 교제는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實踐할 때, 주님의 말씀에 풍성히 거할 수 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더 이상 옛사람의 본성대로 살지 않게 하시고 새 사람의 덕목대로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고 천국 시민이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이제 천국 시민답게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정한 성도로 천국시민의 실재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 옷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가르침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긍휼과 자비로 사람을 대하셨고, 겸손과 온유로 순종하셨으며, 오래 참음으로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온전한 연합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평강을 부어주옵소서. 외인들이 교회 안에 임한 하나님의 平康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 두란노QT

2021/04/28(수) “골로새서 3:12-17” / 작성: 오웅식

[본문] 골로새서 3:12-17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사도 바울은 5-11절까지 성도들이 벗어 버려야할 옛사람의 모습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분함과 노여움, 악의와 비방, 부끄러운 말과 같은 악덕들은 공동체 내에서 결국 불화와 분쟁만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 분문인 12-17절 말씀은 골로새 성도들이 입어야 할 새 사람의 모습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권면하는 새 사람의 모습은 공동체의 평화와 하나 됨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새 사람의 덕목들에 관한 권면(12-14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1절 말씀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화해하게 하는 사역을 통해 이제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파와 무할례파 사이에는 차별이 없어 졌습니다. 따라서 이방인 성도들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졌던 수식어들을 사용하여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칭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사 43:20; 44:1)이요. 거룩한 백성(출 19:6)이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사 5:1)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성도들의 정체성에 적합한 삶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9절과 10절에서 성도들은 이미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새 사람에게 어울리는 옷이 12절 말씀에서 언급하는 다섯 가지 덕목입니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긍휼한 심장’, ‘긍휼한 마음’입니다. 이 ‘긍휼’은 ‘심장’등을 포함한 내장 기관을 의미하는 단어로, 인간의 속과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이 ‘긍휼’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해심 있고 따뜻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비’는 단순히 ‘자비’라는 뜻보다 ‘선함’, ‘인자함’, ‘친절함’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마음이 선하고 따뜻해서 사랑을 품고 베풀 줄 아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포함한 이 다섯 가지의 덕목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먼저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먼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우리들을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서로 그렇게 하는 새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고 명령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덧붙입니다.

요즘은 SNS와 같이 인터넷으로 자기 의사 표현을 하고 소통 할 수 있는 창구가 참 많아졌습니다. 이에 대한 순기능도 분명히 많겠지만, 그에 대한 역기능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SNS상에서 많은 팔로워를 거느리면서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인플루언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플루언서’ 중에서 작은 가게나 기업들을 상대로 괜한 트집을 잡아 협박을 하거나 과도한 협찬을 요구하는 갑질들이 문제가 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구매한 상품의 하자를 문제 삼아 과도한 피해보상금을 요구하거나 거짓으로 피해를 본 것처럼 꾸며 보상을 요구하는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들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여러 상황 속에서 정당하게 요구해야 되는 부분들은 당연히 요구를 해야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아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때로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먼저 용납하고 용서하는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어야겠습니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피차에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 위에 이제는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들을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띠라고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12-14절까지 명령하는 개인적인 윤리들이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과 쉽게 만나서 대화 할 수 없고 온라인으로만 소통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온라인으로 소통하다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또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긍휼함이 없고 정죄와 판단만 하게 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통과 관계의 갈등을 겪게 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지라도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한 번 더 고민하고 말과 행동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떤 일들보다 지금 우리들에게 사랑을 더한다면, 그 어떤 일들을 하는 것보다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강력한 띠가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권면(15-17절)]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당시의 로마는 모든 피지배 민족들에게 군사적,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줄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실제로 강력한 무력과 노예 경제에 근거한 잔혹한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황제의 동상을 로마 전역에 세우고 황제의 상을 동전에 새김으로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며 황제의 은혜로 백성이 살아가고 있다고 모두를 세뇌시키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가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입니다.

이에 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힘과 지위로 억압했던 로마의 황제와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 우리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희생과 사랑의 윤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들은 힘으로 억압해서 거짓 평화를 만들어가는 로마의 황제와 같은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하여 교회라고 하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감당하신 ‘화해의 사역’을 감당해야만 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러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지배하는 몸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체가 되어 만드신 평화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값을 치르시고 이루신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노여움이, 나의 자존심이, 나의 물질이, 나의 명예와 지위, 힘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희생하시고 헌신하셔서 우리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싸우고 경쟁하기 위해 만난 전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는 피스메이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해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라는 말씀은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와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말씀이며,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복음의 진리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들을 인도하고 주관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되면 공동체 안에서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 할 수 있고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말씀의 줄에 고리를 잘 채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직장, 교회, 인간관계 안에서나 물건을 사거나 무슨 일들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자신에게 좋은 대로만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기꺼이 그리고 담대히 살아갑니다. 이것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2-14절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옷 입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윤리에 대한 가르침은 15-17절까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발전합니다.

불이익과 소외, 모욕을 경험하며 소수집단으로 전락한 1세기의 교회 공동체는 주류 사회로 부터 다양한 형태의 압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압력으로부터 성도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강력한 신앙 공동체는 안으로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보호하지만, 밖으로는 세속적 가치관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어를 해야 합니다. 어떠한 훌륭한 그리스도인도 혼자서는 복음의 가치들을 잘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이라는 골로새서 전체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삶고 우리 모두가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도저히 우리들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결코 구원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새 사람의 신분에 맞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여전히 옛 습관에 젖어서 변화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을 스스로 잘 돌아보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 인해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이 땅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12절에 나타난 5가지 덕목 중에서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당신은 작은 손해와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적은 없었는지 생각해봅시다.

3. 최근에 주변 사람들과 온라인 소통 속에서 작은 오해로 인해 갈등이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그러한 문제들을 앞으로는 어떻게 해결하는게 좋을지 생각해봅시다.

4. 당신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당신의 마음을 주장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부터 무엇을 결단하고 실천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가정, 직장, 교회, 인간관계 등).

5. 당신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부터 무엇을 결단하고 실천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작성: 오웅식)

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골 3:12-17)

제목 : 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본문 : 골로새서 3장 12-17절

설교자 : 조정의

골로새서 강해가 이제 다섯 번 남았습니다. 다섯 번을 다 하고 나면 12월 25일 성탄절을 앞둔 12월 22일 주일이 되는데요, 총 다섯 번의 남은 설교 중 오늘부터 앞으로 네 차례 하게 될 설교는 모두 “새사람을 입는 것”과 관련된 설교입니다. 제목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주제는 모두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당신은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교회 편이고, 다음 주는 가정, 그다음 주는 직장, 마지막 네 번째는 사회 편을 다룰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한동안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사람을 입는 것에 관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육체의 죽음의 분명한 목적입니다. 골로새서 1장 22절을 보시면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괴로움과 고난을 채우면서까지 간절히 이루고자 했던 일입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 바울은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게 이 편지를 쓴 목적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을 입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고(2:3),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에(2:9),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2:10). 누구든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으면 절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2:19).

지난주에 우리는 옛사람을 벗는 것에 관해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 속했던 이 땅 곧 세상의 초등학문,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사상, 자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3:5, 9).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입던 옷을 벗는 이유가 새 옷을 입기 위함인 것처럼, 옛사람의 행위 곧 죄를 벗어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사람을 입기 위함입니다. 알콜 중독자를 치료할 때 더이상 술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처럼, 암이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내릴 때, 단지 암 조직을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검진 결과 온전히 건강한 몸이 되었다는 판단에 근거를 두는 것처럼,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과 새사람을 입는 것은 둘 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성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새사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7절까지 우리는 네 가지 입어야 할 새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 이름). 모두 “그리스도”가 붙습니다. 본문을 읽고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랑(12-14)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절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2절의 시작이 “그러므로”인 것은 옛사람을 벗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앞으로 설명할 새사람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는(2:10)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옛사람을 벗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12-1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하는데, 이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매주 월요일 저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데, 크고 작은 종이 쓰레기를 묶지 않고 들고 나가면 금방 바닥으로 하나둘 쏟아져 결국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그때 끈으로 묶으면 다양한 크기의 종이 쓰레기가 균형 있게 한 묶음으로 딱 잡혀서 쏟아지지 않고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바울이 12절에 말한 모든 덕목을 균형 있게 잡아주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바울은 앞서 옛사람의 행위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 것처럼 12절에서 다섯 가지 덕목(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다섯 가지 덕목이 사랑으로 온전히 매여 있기 때문에 저는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균형 있게 묶여있는 덕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긍휼입니다. 긍휼이라고 표현된 이 단어는 ‘창자’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데(행 1:18), 그만큼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 깊숙한 부분에서 우러나오는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며(눅 1:7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긍휼의 풍성하심에 따라 다른 사람, 특히 다른 성도를 깊이 동정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다음은 자비입니다. 자비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며, 톰 라이트의 말에 따르면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적 태도 곧 그분의 자비하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신 분이십니다(약 5:11). 예수님께 받은 친절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른 성도에게 똑같이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꼭 입어야 할 덕목, 자비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겸손을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적 태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모두가 함께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하늘부터 이 땅까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입니다(빌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각각 나보다 남을 낫게(more important) 여겨야 합니다(빌 2:3).

온유는 연약함과 부드러움을 의미하지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과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갖는 부드러운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9). 그리스도인은 다른 성도를 대할 때 항상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오래 참음은 분함과 노여움을 보이는 자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생 얻는 자들에게 오래 참음의 본이 되십니다(딤전 1:16).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많아지는데도 하나님은 주의 날이 오기 전까지 오래 참으며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벧후 3:9).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와 같은 오래 참음을 서로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살전 5:14).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이 덕목은 바울이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자기가 쓴 거의 모든 서신서에 즐겨 사용한 덕목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나오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언급한 성령의 열매에도 이 덕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과 같은 깊은 동정심을 성도에게 베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베푸신 친절과 같은 자비를 성도에게 베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겸손과 온유를 입고 성도를 대하고 있는가? 나의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고, 인정받고 대우받고 싶은 권리를 포기하고 성도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나를 낮추고 다가가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시는 것처럼 성도를 오래 참아주는가?

모든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성도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바울이 골로새 성도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옷 입고”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별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으라고 명하시는 새사람 즉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이미 충만하게 경험하고 맛보고 얻은 것으로, 우리는 단지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성도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받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다른 성도에게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다른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면, 성령 하나님께 구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일깨워주시고 맛보게 하시며 충만하게 채워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 그 충만한 사랑으로 옷 입고 성도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성도에게 베풀 수 있을까요? 13절에 그 구체적인 적용이 나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여러분, 교회는 불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불만 제로인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에 어떻게 불만이 하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한 말에 상처받습니다. 성도의 행동이 눈에 거슬립니다. 때로는 성도의 독특한 성격, 태도, 습관, 심지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의 모습일까요?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용서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히 10:17). “너 그때도 그랬잖아”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용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잊는 것입니다. 기억날 때마다 떠오를 때마다 적극적으로 신실하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도를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너 그때도 그랬지’가 아니라 ‘그때 이미 용서했지’라고 말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골 2:14).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만천하에 공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미 용서한 성도의 죄를 다른 성도에게 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용서한 죄가 그 성도의 평판을 깎아 먹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그리고 빛 가운데 다시 친밀한 사귐을 갖게 하십니다(요일 1:7).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도를 용서했다면 예전과 달라진 서먹한 관계, 용서는 했지만 피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나서 우리를 피하거나 예전과 다르게 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용서도 성도와 관계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옷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 그리스도의 평강(15)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두 번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15절의 핵심 단어는 ‘주장하다’인데, 이는 운동경기를 통제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다스리는 심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심판이 없는 축구 경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양 팀에서 반칙을 할 때마다 서로 주장하고 싸우고 완전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관계 속에도 심판이 필요합니다. 그 심판의 이름은 “평강”입니다. 성도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고 의견 차이가 분명히 있더라도 ‘평강’은 모든 성도를 중재하고 사이좋게 지내게 하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입니다(갈 3:28).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평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마음에 평강이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 4:7).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십시오(롬 12:18).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요 20:21). 그리스도의 평강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말씀(16)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입어야 할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6절에서 명령어는 ‘거하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으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렇게 하려고 매우 힘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아뢴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등 직접 방문하지 않은 교회의 성도들이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고 얼마나 힘쓰는지 그들이 알아주길 바랐습니다(골 2:1-2).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성도가 함께하는 두 가지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첫째, 성도가 서로 교제할 때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 바른 교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권면은 잘못된 것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말씀 충만한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가득한데,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적, 미신적 사상과 지혜로 채워지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 특별히 디도서 말씀에 따르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 사이에 주고받는 교제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가르침과 권면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성도가 함께 예배하는 일에 말씀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억지로 구분하기 어렵지만, 시는 성경(구약-시편, 신약)에 바탕을 둔 노래들, 찬송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노래, ‘노래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발적인 작품들(자작곡)로 구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다양한 방식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중 찬양의 매우 중요한 목적 하나를 발견합니다. 성도가 함께 찬양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풍성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바르고 풍성한 가사가 담긴 회중 찬양을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부를 때 가사가 담고 있는 풍성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른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감사와 찬양을 힘 있게 격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 가운데 말씀의 가르침과 권면이 있으려면,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말씀의 선포가 확실히 교회 가운데 울려 퍼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이블 타임, 성경 일독, 설교 시간, 개인 QT, 오디오 성경, 성경 읽기 모임, 오후 성경 공부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성히 채우시기 바랍니다. 매일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매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의 이름(17)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마지막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은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바울은 처음 세 가지 구체적인 새사람의 옷을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17절 말씀이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무엇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로마서 13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으로 옷 입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속에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의 권한을 받아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러면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그리스도의 권한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주 예수를 대표하고 있다면 정말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라는 권한을 주셨는가?”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옷 입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자녀가 되바라진 말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부모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옷 입고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오히려 빛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보배롭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영광 돌립니다. 바울은 “감사”를 계속해서 강조했는데, 15절에서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16절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독려하며, 마지막 17절에서도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하나님을 알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영화롭게도 아니했던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에나 일에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죄 많고 슬픔 많은 세상에서 수시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감사가 도저히 흘러나올 수 없는 사망의 골짜기를 만날 때도 종종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벧전 2:25).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 6)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평강,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충만하심을 맛보며 부족함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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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새로운 삶을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매일성경큐티 본문을 통하여 구원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에 걸맞는 새로운 옷을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새 옷의 디자인임을 설명하고 있음을 묵상하고 새벽예배설교로 나눕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골로새서 3장 12절-4장 1절, 너희는 이 옷을 입으라

설교 전 찬송

새 찬송가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 새 찬송가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계절에 맞는 옷

요즘과 같은 차가운 날씨를 보이는 겨울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따뜻하고 체온을 유지해 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반팔이 아니라 긴 옷을 입어야 하고, 얇은 옷이 아니라 코트와 같은 두꺼운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겨울에 반 팔에 반 바지를 입고 다니면 체온이 떨어지고 건강에 매우 해로울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계절에 맞는 옷을 입는 삶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새 사람은 새 옷을 입으라

계절에 맞는 옷을 입는 삶이 지혜로운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지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은 새 옷을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 옷은 여러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는데, 12절과 13절과 같은 재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재료들의 근본은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14절입니다.

골로새서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아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 되었다면, 이전에 입던 옷을 벗고 새로운 재료로 만들어지고 사랑으로 디자인 된 새 옷을 입어야만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새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와같이 구원 받은 새 사람이 새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전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구원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속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새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였기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사는 존재가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의인 열명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직접 확인하시고 심판하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완전히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서 여러 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심각한 범죄의 온상이었던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을 찾으면 용서하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죄인으로 가득 한 소돔과 고모라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의 결과입니다.

새 옷을 입은 성도가 됩시다

그러니,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새롭게 되었다면, 그에 걸맞는 새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우리도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살피는 새 옷을 입어야만 할 것입니다.

과거에 걸쳤던 옷이 우리의 욕심에는 즐거울 수 있지만, 구원 받은 새 사람이 입어서는 안되는 옷입니다. 과거의 옷인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이제는 사랑이라는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새 사람의 새 옷을 입음으로써, 풍성한 사랑을 주고 받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모든 일에 사랑을 매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김정로 선교사님과 박진국 선교사님의 사역에 복을 주소서. 우리 가족들이 복음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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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1161/2019(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 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 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 이 그리스도 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 이신 그리스도 께서 나타나 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리라 그러므로 땅 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니 탐심 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묵상 12~17절:

5-11절까지는 땅에 있는 지체 즉 땅에 속하는 악한 것을 죽이라는 말씀이었다.

12-17절은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행하며 살라는 말씀이다.

즉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처럼 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 속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지체된 자는 하나님의 유전자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처럼 사는 것은 당연하다.

소속이 바뀌면, 새롭게 소속된 곳/사람/환경에 맞는 사고와 행위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합한 사고와 삶을 살아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 하나님은 본래가 거룩하시다(12). 본래가 사랑이시다(12). 본래가 평강이시다(15). 그러기에 거룩할 수 없는 우리를 거룩하다 인쳐주셨다. 그러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 없는 우리를 지극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로 하여금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의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나서야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과 놀라운 자비가 없이는 어렵다는 의미이며, 내가 지극히 낮은 자리에 머무는 겸손이 결여되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전제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온유한 마음과 오래 참는 인내가 없이는 용납과 용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만큼 다른 이들 특히 나를 힘들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한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용납하고 용서하였다 할지라도 사랑이 덧잎혀지지 않고서는 참된 용서가 아니라고 다시 강조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이 말씀은 누군가를 사람이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랑없는 용납과 용서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알려 준다.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모든 것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은 어느 정도까지여야 하는가 하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13)”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하면, 주 안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행위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크리스천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맞닿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때에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고, 그 때에야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평강이 선택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그리스도로 새사람을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그 마음을 내어 주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은 언제나 평강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 평강의 마음이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예수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하면서 평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요즘 성도들에게도 이는 엄청난 도전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정말 평강을 누리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안에 있는가?

정말 평강을 위해 한 몸으로 부리심을 받았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하는 자신 안에서 평강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사랑하고, 평강을 유지하는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감사할 수 있다. 아니 감사 외에는 다른 어느 것도 그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러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새사람이 된 사람들로 구성된 예수 공동체와 그에 속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지침이다.

아니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강 안에 거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들에 관한 내용들이다.

오늘날 나에게서 다른 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는가?

오늘날 예수 공동체에게서 믿지 않는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또 다시 회개가 나온다.

기도 주님! 참으로 부족한 자입니다. 여전히 나에게서 주님의 사랑과 평강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다면, 나에게 그 사랑과 평강이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나에게서 감사하는 삶을 볼 수 없다면, 여전히 나의 감사는 제한적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과 평강 가운데 충만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사랑과 평강이 나의 삶이 되게 하옵시고, 감사가 나의 삶으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설교] 완전한 사랑(골 3:12-14)

* 설교 일시 : 2011.06.1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완전한 사랑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3장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부터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13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나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수많은 종교단체들도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사랑은 점점 식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하는 이상한 형태의 사랑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완전한 사랑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시고 우리 마음을 강하게 일으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랑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을까요? 먼저 로마서 13장 8절부터 1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9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10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사랑은 율법의 성취이며,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모든 계명을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사랑은 교육의 목표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우리가 순종하며 따라야 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비록 실제로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한다면 성경은 그것을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살인과 같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나의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함께 성경을 펴지는 않겠지만,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놀라운 지식과 뛰어난 능력과 위대한 헌신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식이나 능력이나 섬김이 부족할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을 눈으로 보며 만나는 순간부터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이고, 소망도 장차 주님을 만나는 날 모두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경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기독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대부분 “원수를 사랑하라”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랑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가르침입니다. 심지어 요한일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표시는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람

다함께 마태복음 5장을 한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5장 43절부터 48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3 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느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느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기준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사랑, 성경적 기준의 사랑, 완전한 사랑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인간적 기준의 사랑은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적 기준의 사랑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악의를 품고 미워하는 원수들에게 똑같이 미워하고 더 크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기준의 사랑은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며, 악의를 품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햇빛과 비를 공평히 주시는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랑에 대하여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면 아무 보상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심지어 강도들도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읽은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여기에서 완전한 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거나, 능력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성품에 대해서만큼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인간적인 기준에서 완전한 사람은 키도 크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절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성경말씀의 기준에서 완전한 사람은 키가 작을지라도, 못생겼을지라도, 조금 어벙하더라도, 잘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의 영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입니다. 문제가 없고 실수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하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완전한 교회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고 실수가 없는 교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뜨거운 사랑을 가진 교회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계시록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가운데 형제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필라델피아 교회는 아무런 책망도 받지 않고 오직 적은 능력으로 내 말을 지켰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교회를 찾아 방황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며, 성경 지식에서도 뛰어나고, 누가 봐도 멋지고 완벽한 교회, 그런 교회를 꿈꾸며 찾아다닙니다. 전에 제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완전한 교회를 찾으신다면 여러분은 절대 그 교회에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문제가 없는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지 않으셨고, 건강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죄 많고,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고 부족한 우리들이 모인 이 모임이 바로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완전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3장 1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을 때 우리는 완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깜짝 퀴즈를 하나 내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고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문제가 많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단순히 나와 다른 스타일로 말하고 행동하는 형제자매를 보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나와 다른 형제자매와 친절하게 대화하는 것도 어렵고, 때로는 나에게 잘못한 형제자매에 대해 참는 것도 힘든데, 더 나아가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헐뜯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려 그 부족함을 채우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문제와 허물을 흉보고 헐뜯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나의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판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연약한 지체가 아니라 비판하는 지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받는 자로서

오늘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3장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13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저는 오늘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사랑이라는 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함이 사랑이라는 점, 그리고 완전한 교회가 되는 길도 사랑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사랑을 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처럼 긍휼히 여기는 심정, 친절, 겸손한 마음, 온유함, 오래 참음, 서로 참고 용서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떻게 이러한 사랑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먼저 12절에 등장하는 “사랑받는 자로서”라는 말에 주목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명령하시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계를 정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지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 고려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욥기 15장 16절에서는 사람이 불법을 물마시듯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은 이유는 우리가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긍휼히 여기는 심정을 가지셨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겸손과 온유함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지금도 늘 주님을 거역하는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교만할 수 없으며, 감히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더럽고 추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사랑이었으며, 생명까지 기꺼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다함께 잠시 누가복음 7장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부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한 바리새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식 앞에 앉으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눈물과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속으로 여자를 정죄하면서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41절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계십니다.

41 그분께서 이르시되, 빚을 준 어떤 사람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42 그들이 전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 준 사람이 두 사람 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나니 그런즉 내게 말해 보아라. 그들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시거늘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많이 용서해 준 사람이니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판단하였도다, 하시고

또한 4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느니라.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에게 용서와 사랑의 비례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게 되며,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깜짝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적게 용서받으셨습니까 아니면 많이 용서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용서받은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그 용서,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만약 나는 솔직히 적게 용서받은 것 같다,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죄가 정말 적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들에게 침 뱉음 당하시고, 수염이 뜯기시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모든 사람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 같은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나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인한 감격과 감동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입으라

우리가 처음 읽은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성경은 사랑을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을 입으라고 표현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사랑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위에 임할 때, 우리가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을 입지 않으면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께 놀랍게 용서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의 완성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한계를 정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상대방의 모습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우리 자신의 결심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고 공급되며,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가장 분명한 표시는 오직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용서의 힘 (골로새서 3장 12-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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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총각의 어머니가 집으로 데려오는 신붓감마다 마음에 안 든다며 딱지를 놓았습니다.

보다 못한 한 친구가 노총각에게 조언을 해 줬습니다. ‘자네 어머님과 똑같은 처녀를 구해봐, 그러면 어머님도 틀림없이 좋아하실 거야’ 얼마 후 노총각은 조언해 준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네가 시킨 대로 어머니와 외모도 비슷하고, 말씨, 옷 입는 취향, 좋아하는 음식도 비슷한 여자를 소개해 주었네, 어머님도 그녀가 마음에 든다며 무척 좋아하시더군’

그럼 이제 결혼하게 되는 거야? 친구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노총각은 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더 난처하게 됐어, 이제는 아버지가 몹시 싫어하시게 되었네’

세상은 수많은 다양성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양성 때문에 우리는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으로 인해서 ‘화’와 ‘분’을 갖게 되고, 인간은 자신이 가진 ‘화’와 ‘분’을 적당한 환경과 ‘시간, ’ ‘대상’ 이 나타나면 모든 걸 쏟아붓게 됩니다.

‘분노’에.

한국 사회를 와본 외국인들이 갖는 첫인상은 ‘모두가 화난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습니다’ 웃는 얼굴은 거의 없고, 찌푸린 얼굴들이 많습니다.

또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해서 일어나는 범죄가 한국 사회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의 ‘화’와 ‘분노’ 는 사회가, 또 국가가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온전히 개인과 가정에서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도 여의치 않습니다.

왜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회적 요인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은 신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사회가 급격히 발전했지만 작은 땅덩어리,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비난해야 하고, 상대를 꺾어야 내가 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 삶에 필요한 (우리 사회가 필요한) 요소가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용서’ 라는 요소입니다.

‘용서’ 라는 것은 나와 상대를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가정과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용서’ 는 한 개인과 개인을 더 끈끈하게 묶어 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좀더 여유롭고, 안식을 줄 수 있는 사회로 만듭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화’ ‘분노’ 는 사라지고, ‘안식’ 과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반대로 용서가 없는 곳에는 ‘화’ 와 ‘분노’ 가 채워져,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과 교회, 사회와 나라가 평안하고 안식처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이 시간 ‘용서의 힘’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용서’ 가 채워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세기 ‘루 윌리스’라는 작가가 쓴 ‘벤허’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영화’ 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전차 경기’ 라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벤허’ 라는 작품은 ‘유대인 청년 벤허’ 의 이야기입니다. 부자 집에 태어난 ‘벤허’ 는 친구 ‘ 메살라’의 모함으로 가진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부모님, 동생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자신은 로마의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벤허는 노예 상선에서 ‘해적’ 들의 공격을 받지만 거기서 ‘제독’ 의 생명을 구해 주는 인연으로 로마 제독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명망 있는 실력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벤허’ 는 자신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모두 망쳐 버린 친구 ‘메살라’를 찾아가 복수합니다.

전차 경기에서 싸우는 장면이 바로 ‘로마의 장교가 된 친구 메살라’ 와의 싸움입니다.

거기서 벤허는 ‘친구 메살라’를 처참하게 죽이고,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은 복수를 했음에도 ‘허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문둥병에 걸린 어머니와 동생을 보자, 로마에 대한 불같은 복수심이 타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연히 ‘벤허’ 는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을 향해서 칼과 창을 들었던 로마 병사를 향한 주님의 용서의 장면’입니다.

그 장면 이후 ‘벤허’ 는 자신이 들고 있던 복수의 ‘칼’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안식과 평안을 찾게 됩니다.

‘벤허’라는 작품은 우리에게 ‘용서’ 가 큰 힘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용서’ 가 주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에게 안식과 평안을 허락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건강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12절)

12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어야 할 옷이란 ‘우리가 겉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성품을 뜻합니다. 그것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우선 ‘긍휼’입니다. 불쌍한 마음입니다. 불쌍한 마음을 가질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 야곱의 형 에서가 야곱과 다시 만날 때, 에서는 야곱을 다 용서해 줍니다. 서로 끌어 ‘안고, 오랫동안 나누지 못한 정을 나눕니다. 이 마음은 ‘긍휼’입니다. 고향을 떠나 살았던 동생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에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꾸게 한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여인을 구해 줍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 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이 불쌍하신 것입니다. 긍휼은 용서를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자비’ 가 필요합니다. 자비란 상대를 향한 친절을 뜻합니다. 따뜻하게 대하는 마음, 이것이 상대를 용서함에 있어서 필요한 마음입니다.

예) 어떤 부부가 부부 싸움을 했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아내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소리는 매우 날카롭게 쏟아 붙이며 말합니다.

과연 아내가 남편을 용서한 것일까요? 용서 했다고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복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괴로워 봐라…

용서하면, 친절해야 합니다. 친절하게 할 때, 용서는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고, 온유함이라,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낮은 마음이 바로 겸손과 온유함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는 낮은 마음이 필요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용서’ 는 몇 번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우리가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입니까?’

모세 율법으로는 일곱 번을 용서해 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흔번에 일곱 번이라도’용서하라…

숫자로 보면 490번인데, 이 숫자의 의미는 ‘영원히 용서’ 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래 참음’ 이것은 ‘용서’ 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몇 번 참고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오래 참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성품을 가질 때, 우리는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잠시 묵상을 해봅시다. 지금 나열한 ‘긍휼, 자비와 겸손, 온유, 오래참음’ 이것은 누구의 성품일까요? 결코 인간의 성품 같지가 않습니다. 누구의 성품일까요?

주님의 성품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11장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 합니다.

또 주님은 8복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닮아가야 할 8가지 성품을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긍휼과, 자비, 오래 참음’ 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8복도 주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용서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처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받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품이 필요한데, 그 주님의 성품은 내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저는 ‘용서 받은 자’ 가 ‘용서 할 수 있다’ 라고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랑 받은 자가 사랑 할 수 있고, 용서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 일만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 졌습니다. 그것을 갚지 못해서 감옥에 갔는데, 극적으로 그 큰돈을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뻐서 감옥에서 나오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얼릉 갚으라고 재촉을 하게 됩니다. 탕감받은 사람이 탕감을 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왕은 다시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어떤 비유일까요?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해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내가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용서받은 사실’을 깨닫고 용서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피차 용서하라 (13절)

용서의 법칙에는 중요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차 용서하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서로 용서하라’ 라는 뜻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 우리가 자주 유혹에 넘아가는 것들 중에 하나가 ‘손해 보고 있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잘 헌신하다가도, ‘나만 헌신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잘 사랑하다’ 가 ‘왜 나만 사랑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느낌’, ‘손해 본다는 생각’이 마음은 주님이 주는 마음이 아닙니다.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손해 보는 일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 함’ 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용서하고 있네’라는 마음이 들면 유혹과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함에 있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질서는 바로 ‘피차,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 하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달기 시작하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해야 내가 용서할거야,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내가 용서할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결코 ‘피차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차 서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 가 필요합니다.

조건을 달지 않고, 어떤 목적을 삼지 않고, 말 그대로 ‘용서’ 가 목적이 되어서 용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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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로 용서하는 모습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서로 불평과 정죄를 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나타납니다. 서로 비난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나타납니다. 만약 여전히 서로를 불평하고, 비난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용서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말로 용서했다면 행동으로 서로 칭찬하고, 좋은 점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서로 용서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로만 용서하지 맙시다, 조건을 달지 맙시다

용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을 더하라 (14절)

용서에 첨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4절을 보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서’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덧붙이라는 것입니다. 왜 용서에 ‘사랑’을 덧 입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골로새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복음을 외곡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율법과 또 다른 사상, 종교, 관습을 덧 붙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 전도자’ 특히 바울에게는 원수 와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힘들게 쌓아 놓은 것은 한번에 무너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골로새 교회를 이끌어 가던 복음적인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을 ‘용서’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 하라고 했을까요? ‘용서’ 로는 부족한 것일까요?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 속에는 ‘복음 전파’ 가 숨어 있습니다.

즉 그들을 용서할뿐 아니라, ‘사랑 ’함으로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라는 종교는 많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해 주라는 종교는 많지 않습니다.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 위에 사랑의 띠를 띠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에 멈추지 말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바꾸고, 관계도 바꿉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 나아가 그 용서를 통해서 복음을 전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용서는 복음의 도구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실된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전하는 도구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복음의 도구입니다.

용서의 힘을 내 삶에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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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에 대한 정보 골로새서 3 장 12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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