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의 형상 3 가지 |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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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세 가지 측면으로 탐구한다. 첫째는 자연적 형상이며, 둘째는 정치적 형상, 그리고 마지막이며 가장 중요한 도덕적 형상이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에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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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 영상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개발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위임받은 공동 통치자라는 개념을 짚어 봅니다. 인간의 이 소명은 어떻게 우리의 이기심과 악에 의해 훼손되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되는 새로운 길을 여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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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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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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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인간학 : 하나님의 형상과 도덕법―하나님의 형상과 도덕법―

존 웨슬리의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그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존 웨슬리는 27세에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설교를 작성한 이후로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하나님 형상 교리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 주제로 자리를 잡았다. 웨슬리가 작성한 다수의 설교는 하나님의 형상 교리를 중심주제로 하고 있다. 웨슬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이해하면서, 그 형상은 잃어버렸지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잃어버림과 회복의 주제는 구원론적 컨텍스트 안에서 신학적 인간학을 연구하는데 탁월한 해석학적 틀을 제공한다.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 예를 들어 원죄, 선행적 은총, 칭의, 성화의 교리들은 하나님 형상 교리를 그 중심축으로 하여 설명되어진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통하여, 그의 전형적인 기독교 세계관인 창조, 타락, 구속을 탐구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을 세 가지 측면으로 탐구한다. 첫째는 자연적 형상이며, 둘째는 정치적 형상, 그리고 마지막이며 가장 중요한 도덕적 형상이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에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형상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그의 창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소통의 채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가장 주요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타락의 의미와 결과를 보여주며 구원의 포괄적 과정과 의미들을 설명한다. 웨슬리의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사변적 신학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은 은총의 수단과 기독교교육과 같은 실천신학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의 많은 의미들 중에서, 웨슬리는 사랑이 하나님의 형성의 가장 본질적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하나님 형상의 개념은 웨슬리의 도덕법에 관한 이해도 보여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도덕법은 의식법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 개념은 웨슬리의 사회윤리에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웨슬리는 여성과 노예,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이해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교리는 웨슬리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중심적 축이 되는 주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John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is crucial for his theology and ethics. After writing a sermon on the doctrine of the imago Dei at the age of 27, Wesley retained the doctrine as the central theme of his theology. Many of Wesley’s sermons deal with the doctrine of the imago Dei as a central theme. His understanding of humanity as the imago Dei, lost and restored, affords us an excellent framework for the investigation of his theological anthropology within a soteriological context. Wesley’s important theological themes such as original sin, prevenient grace,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have the imago Dei as their axial theme. For Wesley, salvation is defined as the restoration of the image of God. With the concept of the imago Dei, Wesley expounds his typical order of salvation – creation, the Fall, and restoration. Wesley explored his concept of the imago Dei from three aspects, namely, the natural, political, and moral image of God. The natural image of God has been endued with understanding and liberty. Wesley’s concept of the political image of God shows that God governs his creation through human beings who become the channels of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his creation. For Wesley, the moral image is the principle image of God. It reflects the very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God.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shows the meaning and consequence of the Fall and illustrates the comprehensive process and meaning of salvation. John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does not remain only in the area of speculative theology. His concept of the imago Dei is clearly shown in the area of practical divinity such as the means of grace and children’s education, Among the several notions of the imago Dei, for Wesley, love is the most essential character of the imago Dei. The concept is also shown in his understanding of the moral law, which is distinguished from the ceremonial law. The concept is broadly applied to his theology of social ethics. Wesley understood women, slaves, and the poor as being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In short, for Wesley, the restoration of the imago Dei is the axial theme of Wesley’s theology and ethics.

John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is crucial for his theology and ethics. After writing a sermon on the doctrine of the imago Dei at the age of 27, Wesley retained the doctrine as the central theme of his theology. Many of Wesley’s sermons deal with the doctrine of the imago Dei as a central theme. His understanding of humanity as the imago Dei, lost and restored, affords us an excellent framework for the investigation of his theological anthropology within a soteriological context. Wesley’s important theological themes such as original sin, prevenient grace,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have the imago Dei as their axial theme. For Wesley, salvation is defined as the restoration of the image of God. With the concept of the imago Dei, Wesley expounds his typical order of salvation – creation, the Fall, and restoration. Wesley explored his concept of the imago Dei from three aspects, namely, the natural, political, and moral image of God. The natural image of God has been endued with understanding and liberty. Wesley’s concept of the political image of God shows that God governs his creation through human beings who become the channels of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his creation. For Wesley, the moral image is the principle image of God. It reflects the very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God.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shows the meaning and consequence of the Fall and illustrates the comprehensive process and meaning of salvation. John Wesley’s concept of the imago Dei does not remain only in the area of speculative theology. His concept of the imago Dei is clearly shown in the area of practical divinity such as the means of grace and children’s education, Among the several notions of the imago Dei, for Wesley, love is the most essential character of the imago Dei. The concept is also shown in his understanding of the moral law, which is distinguished from the ceremonial law. The concept is broadly applied to his theology of social ethics. Wesley understood women, slaves, and the poor as being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In short, for Wesley, the restoration of the imago Dei is the axial theme of Wesley’s theology and ethic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나님의 형상(히브리어: צֶלֶם אֱלֹהִים, 라틴어: Imago Dei,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1]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이자 교리이다. 이 개념은 인간론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창세 1:26-27; 1고린 11:7; 에페 4:24; 골로 3:10; 야고 3:9). 그런데 성경은 형상의 본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영으로서 육체적인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어떤 것(피조 세계에 대한 지배권, 도덕적 성품 등)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하느님의 형상은 이성적이며 자의식적이고 도덕률에 복종하며, 하느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 속성들 중에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범죄로 훼손되었던 하느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온전히 회복되었다(에페 4:24; 골로 3:10).[2]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토론하였다. 형상혹은 모상(模像)이란 모방해 만든 상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모상은 모조품, 조각품, 나아가서는 초상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3] 사아디아 가온과 필론 등 고대 유대인 학자들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피조물들 중 유일하게 인류에게만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마이모니데스는 사람이 하느님의 궁극적 실체의 본질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하도록 노력할 때, 합리적인 사고력이 배양되어 최대한 하느님 같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형상은 원죄에 대한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본래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인해 그 형상이 파괴되었고, 예수의 대속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본다. 기독교 저술가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계급, 인종, 성별, 장애 여부와 상관 없이 누구나 근본적으로 존엄하고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담의 창조”의 작품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는 인간과 하느님을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실제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성경적 근거 [ 편집 ]

하느님의 형상이란 창세기의 다음 구절들에 근거한다.

창세기 1:26-28(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창세기 5:1-3(공동번역)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내시던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그 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주셨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창세기 9:6(공동번역)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1장 3절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가시적인 모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공동번역)

또한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3-15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장 7절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공동번역)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29절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3장 18절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4장 4-7절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공동번역)

기독교 전통 신학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존재로 이해해 왔는데, 이는 P문서에 나오는 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 26-27절에 기반을 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도출했는데, 하나는 형상(imago)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similitudo)이다.[4] 지난 2천 년 동안 신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과 하느님의 모양(similitudo Dei)이라는 두 개념 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반면,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네오 등은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도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형상과 모양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하느님의 모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는 중세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이성과 의지의 자유로 보았고,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인 의’로 해석했다.[5]

신학자들의 견해 [ 편집 ]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독특한 요소를 말한다. 인간의 원의, 지, 정, 의, 도덕적 이성적 요소, 영성 등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 – 하느님의 형상은 영혼의 지적인 특성에 모양은 영혼의 도덕적 특성에 관련되었다고 한다.

중세 로마가톨릭 신학 – 자연적 은사(dona naturalia)로서 하느님의 형상이란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적 불멸성으로 타락 후에도 잔존한다고 주장한다. 초자연적 은사(dona supernaturalia)로서 모양은 인간의 열등한 성질을 제어하는 원시적 의로, 타락 시 상실되었으나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회복된다고 한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형상이 오직 인간의 지적 본성에 있다고 한다.[6]

루터 – 형상은 인간이 창조 시 부여받은 영적 특질들로 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원시적 의라 불리는데 이 특질들은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개혁파 – 좁은(엄밀한) 의미에서 형상은 창조 시 받은 영적 특질들 곧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한다(골로 3: 10; 에페 4: 24). 타락 후 영적으로 그 순수성을 상실했다. 원의는 상실되었다. 포괄적 의미에서 형상에 대해 칼빈은 하느님의 형상의 적절한 자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한다(강요, 1.15.3). 개혁파에서는 형상은 피조물을 지배함에서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며 불멸적인 한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타락 후에도 인간은 포괄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불린다(창세 9: 6; 1고린 11: 7; 15: 49, 약 3: 9).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an image bearer of God)이다. 형상과 모양을 같은 의미로 본다. 하느님의 형상의 거듭남은 점진적이고 역동적이며 내세에 완성된다.

바르트 –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이나 본질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았다. 하느님의 형상은 본래 그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이고(골로 1: 15; 3: 10; 로마 8: 29), 우리는 우리의 자연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혹은 믿음의 유추(analogia relationis, analogia fidei)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형상에 관여한다고 한다. 하느님의 형상을 하느님과의 관계이며 인간 본질을 성취시키는 종말론적, 구원적인 개념으로 본다. 인간관계에서 규명하려고 한다.

브루너 – 형식적인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책임성 즉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께 대답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 존재의 궁핍성이다. 실례로 자유, 이성, 양심, 언어가 하느님의 형식적인 형상에 속한다고 한다. 죄로 상실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7] 이것은 구원의 접촉점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르트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물질적인 하느님의 형상은 하느님 경외, 영화와 존경의 반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8] 인간은 물질적인 형상은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인간은 주체(subject)와 자유(freedom)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청교도 들의 견해 [ 편집 ]

존 볼 –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삼위일체로부터 생기를 받은 신적 특성을 부여받아서,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의지적으로 정확하게 순종할 수 있었다.

존 메이나드 – 하느님은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으므로, 모든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래서 창조의 언약과 율법은 모두 하느님에게 빚진 것이다.

토머스 굿윈 – 자연법은 하느

, 님이 아담과 하와의 목적 자체가 된 것임을 요구한다. 아담의 지식과 거룩함은 하느님이 최상의 선임을 알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그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거룩하고 성화적인 원칙들을 바로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형상이 아담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져 있음을 필요로 한다.

제임스 어셔: 하나님의 형상은 이해의 완전함과 의지의 자유에서 보인다. [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아담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무를 알게 되었다.

참고문헌 [ 편집 ]

안명준, 한눈으로 보는 성경조직신학 (성경말씀사관학교: 2014), 268-269.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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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변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손으로” 그분의 일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을 모두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졌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닮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와 살을 가지셨다는 의미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몸은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지음 받았고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였습니다.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별하여 주며, 인간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에 적합하게 해 줍니다(창 1:28).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주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하나님과 닮은 부분입니다.정신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사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자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계를 발명하고, 책을 쓰고, 풍경을 그리고, 교향곡을 즐기고, 총합을 계산하고, 또는 애완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마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도덕적으로, 인간은 의롭고 완전한 결백 상태로 지어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사람을 포함하여)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 기준’은 이런 처음 상태의 흔적입니다. 누군가 법을 만들고, 악을 멀리하고, 선한 행위를 칭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 사실을 확증하여 주는 것입니다.사회적으로, 인간은 교제를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속성과 그분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창 3:8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기에”(창 2:18)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누군가 결혼하고, 친구를 사귀고, 어린이를 안아주며, 또는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실은 또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점에서 그러합니다. 아담에게 의로운 속성이 주어졌더라도,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대적하는 악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은 자신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그 손상된 모양을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롬 5:12).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9). 하지만 우리는 또한 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구원하실 때 , 그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 되면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점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합니다(엡 2:8-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양대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 회까지 조직신학의 구원론 분야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묵상을 나눴다. 이번 회부터는 조직신학의 인간론을 다루고자 한다. 조직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 (origin), 인간의 구성 (constitution), 인간의 본질과 본성 (nature), 인간의 목적과 운명 (purpose and destiny), 자유의지, 인간의 죄와 타락, 죄의 결과 등을 논의한다.

오늘 에세이는 인간의 기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 (첼렘)과 모양 (데무트)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창 1:26-28).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자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과 본성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이다 (human beings bear the image of God).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관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충돌한다기 보다는 보완한다고 보여진다. 둘 중에서 어느 관점을 택하든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또한 “형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성경 전체의 맥락과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의 고대근동의 문화를 고려할 때 “형상”이라는 말은 반영, 반사, 대표, 아들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반사됨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 심지어 대신하는 자로 창조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의 아들권을 가진 자 즉 왕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지배자인 왕들만이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계시는 왕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만인이 신적 왕족으로 창조되었음을 함의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신성함 그리고 그들간의 존재론적 평등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사상 즉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실체론이다 (the substantive view). 실체론에 의하면 인간이 실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 이성, 자유의지 같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본질적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는 사랑, 의, 지식 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attributes)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이다. 실체적 관점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같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이 주창해 왔던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와 여타 속성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일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짐승을 구별해 주는 표지들이다. 필자는 이 관점이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체론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두 번째 관점은 관계론이다 (the relational view). 관계론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는 성향 (relational inclination)또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 (relational capacity) 즉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론은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나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1889-1966)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특히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브루너 역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 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중핵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바르트와 브루너가 말하는 관계성은 단순히 인간이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소유적 관계성 (possessive relationship)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 (personal relationship)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이야 말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관점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매우 깊은 인격적 관계와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이해할 때, 이 관계론적 관점은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세 번째 관점은 기능론이다 (the functional view). 기능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능, 특별히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또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 바로 그 점에서 사람은 모든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부여된 통치권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통치권은 피조물을 착취하고 학대하고, 악용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도리어 피조물을 잘 관리하고, 돌보고, 지키는 권한 즉 청지기적 통치권이다.

놀랍게도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은 타락 이후에 마귀에게 넘어갔다. 마귀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찬탈한 후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삼고 지금도 착취와 학대와 폭압을 일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 본래 부여 받았던 만물 통치 기능을 부분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 실례가 바로 사람이 가축을 길들여 사육한다거나 반려동물들을 길들여서 사람에게 봉사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는 이 세가지 관점들을 통합한 관점 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사랑과 의와 같은 속성을 구유한 존재라는 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기능을 부여 받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심대하게 왜곡되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의 모든 면들이 죄로 물들게 되었고, 참된 관계의 능력은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만물에 대한 통치권은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요컨대 인간은 “폐위된 왕족” (deposed royalty)이 된 것이다.

결국 폐위된 왕족으로서 마귀와 사망에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죄인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과 구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죄인은 죄사함과 거듭남과 칭의와 영생과 하나님 자녀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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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욱

[인간③]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윤철호)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중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2:28)” (중략)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구약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 히브리어 어법으로는 이 둘을 동의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고대교회 이래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내용적으로는 상실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남아있다고 말했다. 브루너에 따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사회적 규범과 국가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인격적 주체로서 응답할 수 있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응답의 가능성을 “접촉점”(contact point)으로 표현했다. 접촉점은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말의 뜻은 “죄인인 인간들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으로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책임성을 가진 인격성(Humanitas)이란 뜻이다.” 브루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거부할 수도 있는) 형식적 가능성으로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용성(receptivity)을 인정했다.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2장 27절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창세기 2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뒤따르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구약학자인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 1909-2000)은 창세기 본문에서 여자의 창조가 단지 인간의 성적 분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바르트도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바르트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세 위격의 관계성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관계유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고대 교부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육체가 아닌 이성적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창세기 2장 27절에 기초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는 특히 오늘날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관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특히 양자 물리학)은 실재를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또는 구조를 서로 고립된 자기충족적인 실체(입자)로가 아니라 장(場, field)과 같은 관계의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장으로부터 분리된 근대의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 개념은 오늘날 허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웃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이웃과 타자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본능적 충동”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나온 물질적 질서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위쪽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 욕구는 하나님을 향한 숨겨진 갈망을 나타낸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공유하는 육체적 실존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실존의 본질은, 인간이 육체와 구별되는 영이란 불멸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적 관계성 안에 존재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안에서 친교적 연합(communion)을 이룬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주, 상호 침투, 상호 의존, 상호 순환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됨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고 아들의 아들 됨과 성령의 성령 됨도 각기 다른 두 위격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페리코레시스는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 위격 사이의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신다.

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우리 인간은 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이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운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의 역사적 현현으로서, 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키고 완성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내적 구조 안에 닫혀있지 않고 본유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만 인식 가능하다. 따라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분리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1]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이와 같은 관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세 위격 사이의 페리코레시스 즉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만일 아담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운명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타락하기 전의 완전한 원의(原義) 상태란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이 없으며, 최초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상실되었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과 양립하기 어렵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또는 교제로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불멸성에 참여하도록 되어있다는 데 있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화롭게 하려는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성향, 즉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연적 실존 너머가 아닌 자연적 실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운명으로 부여받은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완결적이고 불변적인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의 운명을 향해 개방된 역사적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질은 종말론적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역사적 개방성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 실현의 역사 자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에 근거해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인간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의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 세상(이웃), 미래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자기초월적 개방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믿음이다.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사랑이다. 미래와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소망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구현해야 할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다.

[1] 경세적 삼위일체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시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란 세 위격의 영원한 내적 사귐 속에 있는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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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 특강3] 인간의 본질 – 하나님의 형상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 한우리교회 담임목사 Senior Pastor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M. Div.)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창조하신 피조 된 인격체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 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고 합니다. 즉 신들이 해야 했던 무거운 고역의 짐을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

그러나 성경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그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 (본질의 사전적 정의는 “현상 배후에 있는 실재”이다. 그것으로 그것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없으면 더 이상 그것일 수 없게 하는 것이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이라 할 때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유일성을 본질이라 할 수 있겠다.) 인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합니까?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존재, 지혜), 호모 파브르(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퀴언스(언어를 구사하는 존재), 자기반성, 이성, 영혼, 등등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을 놓치면 사람을 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개념 속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1.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증거

기독교 인간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해의 열쇠인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성경 어디에서 증언하고 있습니까?

1)구약의 증거

구약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창세기에 세 번을(창1:26-27, 5:1, 9:6) 말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시8편이 언급합니다. 먼저 창1:26-27에서 동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곧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2)신약의 증언

약3:9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기도 하고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도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등의 구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하는 창1:26-28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형상’이 ‘첼렘’이라는 단어이고 ‘모양’은 ‘데무스’라는 단어로, 이 두 단어는 라틴교부들과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라 둘 다 ‘~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교차 사용된 단어입니다.(Keil and Delitzsch의 주석,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1, The Pentateuh, trans. James Martin, p63에서 루터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70인 역과 라틴어 번역은 형상과 모양 사이에 접속사를 삽입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이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의미적 차이가 없다. 창1:26절에서는 형상과 모양이 같이 사용되었고, 27절은 형상으로만 인간창조를 설명하고 창5:1절에는 모양이라는 단어만 사용되고(한글성경은 형상으로 번역) 또 창5:3절에는 다시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은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혼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창1:26의 형상은 신체적인 특징과 관련시키어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성품이라고 하고 모양은 영적인 성질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덧입혀주신 신성한 의복이라고 하면서 타락 시에 모양만 잃어버렸지 형상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건재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중세까지 이어져 스콜라주의적 신학자들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타락시에 상실한 것은 단지 ‘덧붙여진 은사’뿐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자연주의자들-오리겐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플라톤적인 성향을 가지고 신학 작업을 함, 희랍적이다, 이원론적 사상이 강하다)-은 창1:26-27에서 26절은 계획이고 27절은 실행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26절에 있는 모양이 27절에서 어디로 갔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이성적 존재가 되었는데 그런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순종하면 그 대가로 모양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자연주의자들에서도 형상과 모양이 다른 것으로 분리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원래 상태가 어떤 본질을 가졌는가하는 물음에 적극적으로 선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악하지도 않으며 성결하지도 불순하지도 않은 도덕적 중립의 상태로 지음 받았다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주장들이 나타났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은총 없이(자연적으로) 스스로 완전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의 영향은 그 이후 16세기 소시니안파와 17세기 알미니안파, 18세기의 이성주의자, 신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파라다이스를 인간이 창출할 수 있다는 불트만의 소망의 신학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것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같은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거울이 실체를 반영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주는 유일한 특성입니다.

바빙크는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그 전체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해되어져야 한다.”(Dogmatiek, 2:595-6)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어쩌다 덧붙여진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고 무엇이 하나님을 반영시키고 있습니까?

3.그리스도를 통해 본 하나님의 형상-삼중적 관계의 존재

성경은 인간의 어떤 점과 어떤 면이 하나님을 닮았고 반영하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형상 개념에 대한 합의가 아직까지는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고 반영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골1:15).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던 그리스도와 온전히 이웃을 향하여 서 계셨던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나올 때에 언제나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했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초자연적인 고기잡이를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을 통해 만물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적 요소 중의 하나임을 보게 됩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그리고 자연을 통치하는 행위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인간, 자연이라는 삼중적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할 때 자신의 생명을 잃게 만들 듯이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때 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참되고 옳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론은 마땅히 거짓된 인간론으로 배격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창1:27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을 떠나 홀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창2: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 것이죠.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하면서 부족을 채워 온전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떠나서 참된 인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그의 모든 재능을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과 세력 강화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완하고 풍요롭게 하는 수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창1:26-28절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인간이 땅의 자원을 찾아내어 토지를 경작하고 농업, 원예, 축산업, 학문, 과학기술, 예술 등을 발전시켜야 함을 보여줍니다. 시8:5-6절도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청지기적인 사명을 갖고 자연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모든 관계 속에 넣으셨기에 우리는 이 세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르게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며(요일4:20), 나아가 이웃사랑이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바른 지배와 돌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은 이 세 가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의 올바른 기능도 이 세 가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 형상의 두 측면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같은 것으로 보고 그 형상을 광의적인 형상(구조적)과 협의적인 형상(기능적)의 두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 측면의 형상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삼중적인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이며,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작동하게 하는 올바른 기능성으로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이 그것입니다(골3:10, 엡4:24).(안토니 A.후크마, 기독교 문서선교회, p106) 그러나 이 둘은 구분하는 것이지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5.본래적 형상과 타락하고 변질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과 온전케 될 형상

1)본래적 형상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을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이라고 부릅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그때에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으며 조금 전에 말했던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겼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피조세계를 지배하고 돌봄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죄의 가능성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했습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행로의 마지막 단계에 서있던 자가 아니라 행로의 초기에 서있는 자였다. 그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임시적인 상태였으며 그 상태로 그냥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더 높은 영광의 단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죄와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Dogmatiek, 2:606)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유보적 명령을 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2)타락이 형상에 미친 영향-변질된 형상(The Perverted Image)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할 때 두 가지의 입장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됨이 완전히 상실되었거나 중지되었다고 하는 견해와 다른 한 편에서는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루터파는 죄와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근래에는 클라스 스킬더, 베르까우워 같은 화란의 신학자들에게도 유사한 경향을 발견한다. 최홍석, 인간론, p80)

개혁파는 전적상실의 개념이 아닌 전적부패와 타락을 주장합니다(창6:5, 롬7:18, 롬3:10-13). 즉 인간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창9:5, 약3:9). 성경은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심하게 파괴되고 변질되고 일그러졌다고 말합니다. 타락을 통해 인간이 재생 불가능한 마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종노릇 하지만 인간이 마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빙크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인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능력, 재질, 재능들을 변질되었으며 방향이 너무도 크게 바뀌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육체의 법을 만족시킬 뿐이다.”(Dogmatiek, 3:137 )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있다고 말합니다. 창9:6과 약3:9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한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전적으로 부패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어느 한 부분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참된 선이나 구원 받을 만한 그 어떤 능력도 인간에게 없음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와 거룩과 참된 지식과 같은 기능적 측면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광의의 형상인 구조적인 형체마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고 왜곡되고 비뚤어지고 썩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방향이 틀어지고 그 기능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이러한 이성과 감성, 재능, 능력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한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만족과 정욕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과 심화성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나타내었으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있는 좁은 의미의 형상은 전적으로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고 그 방향이 삐뚤어져버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을 말하면서 그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없어지고, 도말되어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삶 속에는 끊임없는 무질서와 격정이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안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으며 그 흔적과 잔여물이 여전히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준다고 합니다.(기독교 강요, Ⅱ. 2.17)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기능적 측면의 구별을 통해 타락 이전과 이후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여 구조적, 혹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능적,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도 생생하게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형상인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과 능력들조차도 죄악의 불순종한 방법들로 사용해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것이 부패하여 최악의 상태가 된 것이죠.

3)새롭게 된 형상(The Renewed Image)

타락으로 변질된 형상은 갱신과 회복의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구속의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과 거룩케 하는 역사를 통해 회복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다시 나게 되고(엡4:24)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며(골3:10),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벧후1:4).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향하여도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고, 피조세계를 향하여도 바르게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 회복은 손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돌아오고 완성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형상의 갱신과 회복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온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사건이며 다가올 세상에서 그 형상의 부요함과 완전함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후7:1)고 말하고 있고 엡4:22-24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롭게 된 형상으로 온전케 될 형상인 영화를 소망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진 형상의 회복이 은총의 문제인 동시에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성화의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온전케 된 형상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은 최초의 창조상태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은 상태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짓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영화롭게 된 성도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빌3:21). 그때 우리는 인간이 창조된 삼중 관계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온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인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6.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른 견해

1)로마 카톨릭(천주교)의 견해

로마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창조 시 인간은 두 가지 은사, 자연적 은사(dona naturalia)와 초자연적 은사(dons supernaturalia)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연적 은사란 이성, 양심, 판단력, 도덕성, 의지, 자유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서로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저급한 욕구가 있어서 이성이나 양심에 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경향 자체를 죄로 보지는 않지만 의지가 여기에 굴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인간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연적인 은사 위에 추가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적 은사만으로는 초월적 세계에 들어갈 수 없으며 초자연적 은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초자연적 은사가 실제로 있었다면 아담은 범죄 하지 않았을 것이란 측면에서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개혁파가 말하는 형상의 기능적 측면과 천주교의 초자연적 은사를 구별할 수 있으신지요? 개혁파의 기능적측면의 형상은 추가로 덧붙여진 것도 아니고 경향성을 제어하기 위한 정도가 아니라 통전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로마교회의 형상견해는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아담 안에서 시작된 모든 사람들의 원죄성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키게 됩니다.

2)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되, 전적으로 상실해서 죄악 덩어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양심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참지식과 의(義) 및 거룩 등의 영적 특성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봅니다. 루터파의 견해는 로마 교회의 선행 공로주의 반동으로 나온 것으로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협성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루터파의 이러한 단조롭고 비연속적이고 단절된 주장들은 개혁파의 일반은총의 교리에 의해 완화됩니다.

3)칼 바르트의 견해

바르트는 인간 내의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유사성이 아니라 관계론적 유사성으로 파악합니다. 즉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나-너의 관계, 대면적 관계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것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타락 전의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르트는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타락의 심각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롬3:9-18).

4)기타 여러 파의 견해

소시너스파와 일부 알미니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하등피조물 위에 가진 ‘주관권’(主管權)으로 이해하였고, 자유주의자의 대부인 슐라이어마허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인격’만을 포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하나님의 형상 결론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요,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그의 형상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고 왜곡되어 전혀 하나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형적인 형상이 되었다. 셋째, 왜곡되고 부패한 형상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사역을 통해서만 회복이 가능하다. 넷째, 형상의 회복은 은총의 문제인 동시에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는 성화의 과제이며 동시에 온전케 된 형상을 입는 영화의 날을 소망하는 소망의 주제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네 가지 단계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쉽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아직껏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큰 틀에서 봐도 되겠지만 중요하기에 4 가지 단계로 세분해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1.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

에덴동산에서 타락하기 전 아담의 형상 즉 사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정도였고,

그 핵심은 무엇일까요? 크게보면 그리스도의 초림 때 범죄하지 않으며 성령이 함께 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님은 모두 인류를 대표한 인물로서 출발점이 유사합니다.

다만 아담은 피조된 존재로서 대표를 지냈고, 예수님은 신인(神人) 즉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대표입니다. 둘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짐이 없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습 입니다.

2.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타락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그 가치를 지녔기에 존중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성이 침투함으로 원시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망가졌습니다.

망가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선의 상태가 악의 상태로 변질되었고,

거룩은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의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되어서 죄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어떤 제자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합니다(요14:9).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골1:15).

초림의 예수님은 아버지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한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일까요?

이미 구약시대에 회복되었던 이스라엘에게서 어떤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4. 부활 후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두 가지 형상을 지닐 것을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15장, 부활장에서 언급한 땅에 속한 형상과 하늘에 속한 형상입니다.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부활의 형상은 외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모양입니다(요일3:2).

내적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하게 입을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되어야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곧바로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창3:5).

사탄이 거짓말을 했을까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확인해 준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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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고 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과,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과 닮은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을 상실했다면 회복해야 한다는 엄숙한 제시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쩰렘과 데무트가 외형적으로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 낯빛을 변하고(단 3:19)”의 ‘빛(첼렘)’은 마음의 속 상태를 보여 주는 외적인 모습이며,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거기 있을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에 쓰인 ‘식양(데무트)’은 타브니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의미로 쓰였다. 또 신명기 4장 16절의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에서는 형상(타브니트)과 우상(테무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과 물질적인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형상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외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형상이 없는 영적 형상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유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무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유형의 형상이 없으니 무형의 형상이라 함이 자연스럽다. 아래 성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골로새서 3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형상은 하나님의 의(시 99:4), 거룩(출 15:11, 시 22:3, 사 5:15, 57:15), 선(막 10:18), 사랑(신 7:9, 요3:16)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존재론적으로는(영적 형상)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형상이요, 의미론적으로는(속성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과 사랑이시다. 이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하여 이 영적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 육체까지 영생의 존재가 육체에 사망이 왔고 거룩해야 할 존재가 죄악 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는 영혼마저 지옥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죗값으로 사망한 육신이 부활하게 되고 불행한 영혼이 행복한 영생과 거룩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요 점진적 성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칭의적 회복이요, 두 번째는 삶을 통한 행함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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