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의 형상 이란 무엇 인가 |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58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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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형상은 말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은 사귐이다.
참고서적
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 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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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나님의 형상(히브리어: צֶלֶם אֱלֹהִים, 라틴어: Imago Dei,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 기독교의 전통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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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8/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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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 오피니언·칼럼 – 기독일보

기능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능, 특별히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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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3/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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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 다음블로그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첫째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왕적 존재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그런 왕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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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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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별하여 주며, 인간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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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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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③]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윤철호)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또는 교제로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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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emk.org

Date Published: 9/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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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노트]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 Happy 시시포스

“하느님의 형상은 고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만 실천된다… 개체화된 개인과 고독한 주체는 사람의 존재의 손상된 방식이다.” – 창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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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ishthewind.tistory.com

Date Published: 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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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 – 신학 – 뉴스앤조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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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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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 인간 – 한국인터넷신학대학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범죄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다른 동물들 에게서 발견 할수 없는 理性,과 知識과 良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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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ac.kr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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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194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형상은 말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은 사귐이다. 참고서적 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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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a.covadoc.vn

Date Published: 4/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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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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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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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하나님의 형상(히브리어: צֶלֶם אֱלֹהִים, 라틴어: Imago Dei,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1]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이자 교리이다. 이 개념은 인간론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창세 1:26-27; 1고린 11:7; 에페 4:24; 골로 3:10; 야고 3:9). 그런데 성경은 형상의 본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영으로서 육체적인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어떤 것(피조 세계에 대한 지배권, 도덕적 성품 등)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하느님의 형상은 이성적이며 자의식적이고 도덕률에 복종하며, 하느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 속성들 중에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범죄로 훼손되었던 하느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온전히 회복되었다(에페 4:24; 골로 3:10).[2]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토론하였다. 형상혹은 모상(模像)이란 모방해 만든 상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모상은 모조품, 조각품, 나아가서는 초상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3] 사아디아 가온과 필론 등 고대 유대인 학자들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것은 하느님이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피조물들 중 유일하게 인류에게만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마이모니데스는 사람이 하느님의 궁극적 실체의 본질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하도록 노력할 때, 합리적인 사고력이 배양되어 최대한 하느님 같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형상은 원죄에 대한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본래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인해 그 형상이 파괴되었고, 예수의 대속을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본다. 기독교 저술가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계급, 인종, 성별, 장애 여부와 상관 없이 누구나 근본적으로 존엄하고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담의 창조”의 작품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는 인간과 하느님을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실제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성경적 근거 [ 편집 ]

하느님의 형상이란 창세기의 다음 구절들에 근거한다.

창세기 1:26-28(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창세기 5:1-3(공동번역)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내시던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 그 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주셨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창세기 9:6(공동번역)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1장 3절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가시적인 모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공동번역)

또한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3-15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장 7절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공동번역)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29절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3장 18절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공동번역)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4장 4-7절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공동번역)

기독교 전통 신학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된 존재로 이해해 왔는데, 이는 P문서에 나오는 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 26-27절에 기반을 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 개념을 도출했는데, 하나는 형상(imago)이고, 다른 하나는 모양(similitudo)이다.[4] 지난 2천 년 동안 신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과 하느님의 모양(similitudo Dei)이라는 두 개념 간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반면,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네오 등은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와도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형상과 모양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모양은 상실되었으나 하느님의 모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유는 중세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이성과 의지의 자유로 보았고, 모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본래적인 의’로 해석했다.[5]

신학자들의 견해 [ 편집 ]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독특한 요소를 말한다. 인간의 원의, 지, 정, 의, 도덕적 이성적 요소, 영성 등이 포함된다.

아우구스티누스 – 하느님의 형상은 영혼의 지적인 특성에 모양은 영혼의 도덕적 특성에 관련되었다고 한다.

중세 로마가톨릭 신학 – 자연적 은사(dona naturalia)로서 하느님의 형상이란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적 불멸성으로 타락 후에도 잔존한다고 주장한다. 초자연적 은사(dona supernaturalia)로서 모양은 인간의 열등한 성질을 제어하는 원시적 의로, 타락 시 상실되었으나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회복된다고 한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형상이 오직 인간의 지적 본성에 있다고 한다.[6]

루터 – 형상은 인간이 창조 시 부여받은 영적 특질들로 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원시적 의라 불리는데 이 특질들은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개혁파 – 좁은(엄밀한) 의미에서 형상은 창조 시 받은 영적 특질들 곧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한다(골로 3: 10; 에페 4: 24). 타락 후 영적으로 그 순수성을 상실했다. 원의는 상실되었다. 포괄적 의미에서 형상에 대해 칼빈은 하느님의 형상의 적절한 자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한다(강요, 1.15.3). 개혁파에서는 형상은 피조물을 지배함에서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며 불멸적인 한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타락 후에도 인간은 포괄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불린다(창세 9: 6; 1고린 11: 7; 15: 49, 약 3: 9).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자(an image bearer of God)이다. 형상과 모양을 같은 의미로 본다. 하느님의 형상의 거듭남은 점진적이고 역동적이며 내세에 완성된다.

바르트 – 하느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이나 본질이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았다. 하느님의 형상은 본래 그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이고(골로 1: 15; 3: 10; 로마 8: 29), 우리는 우리의 자연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혹은 믿음의 유추(analogia relationis, analogia fidei)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형상에 관여한다고 한다. 하느님의 형상을 하느님과의 관계이며 인간 본질을 성취시키는 종말론적, 구원적인 개념으로 본다. 인간관계에서 규명하려고 한다.

브루너 – 형식적인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책임성 즉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께 대답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 존재의 궁핍성이다. 실례로 자유, 이성, 양심, 언어가 하느님의 형식적인 형상에 속한다고 한다. 죄로 상실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7] 이것은 구원의 접촉점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르트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물질적인 하느님의 형상은 하느님 경외, 영화와 존경의 반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8] 인간은 물질적인 형상은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인간은 주체(subject)와 자유(freedom)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청교도 들의 견해 [ 편집 ]

존 볼 – 아담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삼위일체로부터 생기를 받은 신적 특성을 부여받아서,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의지적으로 정확하게 순종할 수 있었다.

존 메이나드 – 하느님은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으므로, 모든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래서 창조의 언약과 율법은 모두 하느님에게 빚진 것이다.

토머스 굿윈 – 자연법은 하느

, 님이 아담과 하와의 목적 자체가 된 것임을 요구한다. 아담의 지식과 거룩함은 하느님이 최상의 선임을 알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그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하느님의 거룩하고 성화적인 원칙들을 바로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형상이 아담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져 있음을 필요로 한다.

제임스 어셔: 하나님의 형상은 이해의 완전함과 의지의 자유에서 보인다. [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아담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무를 알게 되었다.

참고문헌 [ 편집 ]

안명준, 한눈으로 보는 성경조직신학 (성경말씀사관학교: 2014), 268-269.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지난 회까지 조직신학의 구원론 분야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묵상을 나눴다. 이번 회부터는 조직신학의 인간론을 다루고자 한다. 조직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 (origin), 인간의 구성 (constitution), 인간의 본질과 본성 (nature), 인간의 목적과 운명 (purpose and destiny), 자유의지, 인간의 죄와 타락, 죄의 결과 등을 논의한다.

오늘 에세이는 인간의 기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 (첼렘)과 모양 (데무트)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창 1:26-28).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자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과 본성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이다 (human beings bear the image of God).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관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충돌한다기 보다는 보완한다고 보여진다. 둘 중에서 어느 관점을 택하든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또한 “형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성경 전체의 맥락과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의 고대근동의 문화를 고려할 때 “형상”이라는 말은 반영, 반사, 대표, 아들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반사됨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 심지어 대신하는 자로 창조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의 아들권을 가진 자 즉 왕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지배자인 왕들만이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계시는 왕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만인이 신적 왕족으로 창조되었음을 함의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신성함 그리고 그들간의 존재론적 평등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사상 즉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실체론이다 (the substantive view). 실체론에 의하면 인간이 실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 이성, 자유의지 같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본질적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는 사랑, 의, 지식 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attributes)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이다. 실체적 관점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같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이 주창해 왔던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와 여타 속성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일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짐승을 구별해 주는 표지들이다. 필자는 이 관점이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체론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두 번째 관점은 관계론이다 (the relational view). 관계론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는 성향 (relational inclination)또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 (relational capacity) 즉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론은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나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1889-1966)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특히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브루너 역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 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중핵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바르트와 브루너가 말하는 관계성은 단순히 인간이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소유적 관계성 (possessive relationship)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 (personal relationship)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이야 말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관점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매우 깊은 인격적 관계와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이해할 때, 이 관계론적 관점은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세 번째 관점은 기능론이다 (the functional view). 기능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능, 특별히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또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 바로 그 점에서 사람은 모든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부여된 통치권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통치권은 피조물을 착취하고 학대하고, 악용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도리어 피조물을 잘 관리하고, 돌보고, 지키는 권한 즉 청지기적 통치권이다.

놀랍게도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은 타락 이후에 마귀에게 넘어갔다. 마귀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찬탈한 후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삼고 지금도 착취와 학대와 폭압을 일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 본래 부여 받았던 만물 통치 기능을 부분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 실례가 바로 사람이 가축을 길들여 사육한다거나 반려동물들을 길들여서 사람에게 봉사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는 이 세가지 관점들을 통합한 관점 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사랑과 의와 같은 속성을 구유한 존재라는 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기능을 부여 받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심대하게 왜곡되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의 모든 면들이 죄로 물들게 되었고, 참된 관계의 능력은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만물에 대한 통치권은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요컨대 인간은 “폐위된 왕족” (deposed royalty)이 된 것이다.

결국 폐위된 왕족으로서 마귀와 사망에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죄인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과 구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죄인은 죄사함과 거듭남과 칭의와 영생과 하나님 자녀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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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의 기도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창세기 1장 26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형상이란 말과 모양이란 말이 병렬하여 사용되는데 이 두 단어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반복된 것이다. 예를 들면 1장 27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하고 5장1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도 한다. 동일한 의미에 형상이란 단어도 쓰고 모양이란 단어도 쓴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형상과 모양은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이 왜 중요한가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점이 사람을 사람되게 만드는 유일한 구별점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가장 근본이 될 것이다.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다스리는 목적을 위해 지어진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고대의 왕들은 자기의 통치 구역안에 자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세워서 자신의 다스림을 표현하였는데 여기 창세기에서 사용된 형상이 바로 이런 의미라는 해석에 오늘날 대부분 구약학자들이 동의한다.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다스리는 목적으로 사람이 지어졌다는 진술과 일치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세계에 드러내는 왕적 존재란 의미이다.

그런데 1장 27절과 5장2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는 말이 나타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을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은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나중에 여자를 지으셨는데 여자를 지으시면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그를 돕는 자로 여자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여자란 남자를 돕는 자로서 지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돕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일일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여자는 사로 협동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왕적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받은 것이 연관을 시키는 것일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첫째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왕적 존재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그런 왕적 직무를 수행하는데 사람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대표되는 공동체로서 그 일을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은 왕적 직무를 수행하는 공동체적 존재라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고 사람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지만 그 창조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 곧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시려는 창조계획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사람이 되게 하시어 첫째 아담이 실패하였던 창조 목적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할 때 그가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로서의 아담을 대신하는 둘째 아담이라는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말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 골1:15, 히1:13)이라고 말하는데 이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실패한 일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질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변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손으로” 그분의 일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을 모두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졌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닮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와 살을 가지셨다는 의미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몸은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지음 받았고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였습니다.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별하여 주며, 인간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에 적합하게 해 줍니다(창 1:28).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주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하나님과 닮은 부분입니다.정신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사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자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계를 발명하고, 책을 쓰고, 풍경을 그리고, 교향곡을 즐기고, 총합을 계산하고, 또는 애완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마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도덕적으로, 인간은 의롭고 완전한 결백 상태로 지어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사람을 포함하여)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 기준’은 이런 처음 상태의 흔적입니다. 누군가 법을 만들고, 악을 멀리하고, 선한 행위를 칭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 사실을 확증하여 주는 것입니다.사회적으로, 인간은 교제를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속성과 그분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창 3:8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기에”(창 2:18)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누군가 결혼하고, 친구를 사귀고, 어린이를 안아주며, 또는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실은 또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점에서 그러합니다. 아담에게 의로운 속성이 주어졌더라도,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대적하는 악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은 자신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그 손상된 모양을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롬 5:12).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9). 하지만 우리는 또한 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구원하실 때 , 그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 되면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점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합니다(엡 2:8-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양대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고후 5:17).

[인간③]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윤철호)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중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2:28)” (중략)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구약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 히브리어 어법으로는 이 둘을 동의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고대교회 이래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내용적으로는 상실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남아있다고 말했다. 브루너에 따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사회적 규범과 국가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인격적 주체로서 응답할 수 있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응답의 가능성을 “접촉점”(contact point)으로 표현했다. 접촉점은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말의 뜻은 “죄인인 인간들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으로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책임성을 가진 인격성(Humanitas)이란 뜻이다.” 브루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거부할 수도 있는) 형식적 가능성으로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용성(receptivity)을 인정했다.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2장 27절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창세기 2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뒤따르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구약학자인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 1909-2000)은 창세기 본문에서 여자의 창조가 단지 인간의 성적 분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바르트도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바르트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세 위격의 관계성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관계유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고대 교부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육체가 아닌 이성적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창세기 2장 27절에 기초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는 특히 오늘날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관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특히 양자 물리학)은 실재를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또는 구조를 서로 고립된 자기충족적인 실체(입자)로가 아니라 장(場, field)과 같은 관계의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장으로부터 분리된 근대의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 개념은 오늘날 허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웃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이웃과 타자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본능적 충동”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나온 물질적 질서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위쪽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 욕구는 하나님을 향한 숨겨진 갈망을 나타낸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공유하는 육체적 실존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실존의 본질은, 인간이 육체와 구별되는 영이란 불멸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적 관계성 안에 존재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안에서 친교적 연합(communion)을 이룬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주, 상호 침투, 상호 의존, 상호 순환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됨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고 아들의 아들 됨과 성령의 성령 됨도 각기 다른 두 위격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페리코레시스는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 위격 사이의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신다.

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우리 인간은 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이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운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의 역사적 현현으로서, 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키고 완성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내적 구조 안에 닫혀있지 않고 본유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만 인식 가능하다. 따라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분리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1]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이와 같은 관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세 위격 사이의 페리코레시스 즉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만일 아담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운명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타락하기 전의 완전한 원의(原義) 상태란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이 없으며, 최초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상실되었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과 양립하기 어렵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또는 교제로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불멸성에 참여하도록 되어있다는 데 있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영화롭게 하려는 자연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성향, 즉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특성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자연적 실존 너머가 아닌 자연적 실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운명으로 부여받은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 완결적이고 불변적인 본성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의 운명을 향해 개방된 역사적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질은 종말론적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역사적 개방성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 실현의 역사 자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에 근거해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본질을 인간이 갖는 세 가지 차원의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 세상(이웃), 미래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자기초월적 개방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믿음이다.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사랑이다. 미래와의 관계에서 자기초월적 개방성은 소망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고전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세상(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구현해야 할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다.

[1] 경세적 삼위일체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시간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란 세 위격의 영원한 내적 사귐 속에 있는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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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노트]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창 1:26-27, 개정)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다른 존재와 다른 특별함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단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 모양은 데무트입니다. 뜻은 한국말도 그렇지만 히브리어도 비슷합니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한데 첼렘은 외형, 석고상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데무트는 비슷함, 유사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첼렘과 데무트는 그냥 거의 동의어로 비슷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26절과 27절을 보면 형상이 세 번, 모양이 한 번 나옵니다. 그걸로 봐서는 모양보다는 형상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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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질을 따라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두 다리와 두 팔과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고 듣고 경험할 때 사람과 하나님은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인데 눈에 보이는 첼렘을 따라 만들었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는데요. 저는 딱 두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는 이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성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입니다. 이성의 의미를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말입니다. 20세기 이후에 이성은 주로 논리적, 분석적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논리적으로 똑똑하다는 것이고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똑똑하기 때문에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인간의 똑똑함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똑똑함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AI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성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으로 보는 것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성은 보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성은 똑똑함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을 뜻하는 말인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세상은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이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은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이성이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인간만이 복잡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몇 가지 신호를 보낼 수는 있습니다. 배고프다던가 혹은 먹을 것이 있다던가의 의사소통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식의 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인간은 말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동물들이 아담에게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죠. 이름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그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이런 관계 맺음의 방식은 아담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사귐의 관계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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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존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근원 구조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이성이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는 없고 로고스의 또 다른 의미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이성을 말로 이해한다면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관계’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1장 2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구분해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성별이 다른 두 사람으로 지었다는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서로 사귀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신학을 처음 배울 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웠는데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왜 이것을 몰랐을까,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10여 년 전에 본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 ‘관계’라는 단어에 밑줄이 막 그어져 있더라고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저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는데 그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잊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식적인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단수로 나왔다가 갑자기 복수로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우리라는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 사람은 단수로 나옵니다. 반대로 27절에서는 하나님은 단수로 나오고 사람은 남자와 여자, 이렇게 복수로 나옵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 두 구절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이 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요. 몰트만은 하나님이 갑자기 복수로 ‘우리’로 표현된 것은 신중함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즉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도 자기 자신과 말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자기 자신과 인식적 분리를 통해서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요. 2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식론적인 분리를 통해 우리가 되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존재론적인 분리를 통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적어도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이렇게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27절도 마찬가지로 세 존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남자, 여자, 이렇게 세 존재가 나타나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의 사귐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고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사귐 속에서만 실천된다… 개체화된 개인과 고독한 주체는 사람의 존재의 손상된 방식이다.”

–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p. 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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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은 사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이유가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귐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하는 기본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인간이 단지 동떨어진 개개인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귐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는 것이고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마치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밀랍 인형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죠. 정말 사람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실제 그 사람이 옆에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정교하게 창조되었는데요. 사람은 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사귀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정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되지 않고요. 타인과 사귐으로써 또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찬란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이 나누어져 있는 모든 동식물이 짝짓기를 통해서 자식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사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좁혀서 말하면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말을 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타인에게 말을 하고 타인과 사귐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괴테의 “동화”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무엇이 금보다 밝은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빛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무엇이 빛보다 더 신선한 것이냐?”라고 왕이 물었다.

“대화입니다”라고 뱀은 대답하였다.

* 참고도서

1.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 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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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고 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조물임과, 인간이 본래는 하나님과 닮은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을 상실했다면 회복해야 한다는 엄숙한 제시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한 형상과 모양에 대한 히브리어는 쩰렘(צלם)과 데무트(דמּות)이다. 쩰렘은 영어로 Form 혹은 Image로, 데무트는 Likness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쩰렘은 ‘자르다’의 어근으로 추정되고, 데무트는 ‘닮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쩰렘과 데무트가 외형적으로 사용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 낯빛을 변하고(단 3:19)”의 ‘빛(첼렘)’은 마음의 속 상태를 보여 주는 외적인 모습이며,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거기 있을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에 쓰인 ‘식양(데무트)’은 타브니트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의미로 쓰였다. 또 신명기 4장 16절의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에서는 형상(타브니트)과 우상(테무나)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양과 물질적인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형상에 대하여 신약에서는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모르페(형상), 호모이오마(형체), 스케마(모양)의 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외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형상이 없는 영적 형상의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어떤 물질적 형상이나 모양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의 특성들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유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무형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유형의 형상이 없으니 무형의 형상이라 함이 자연스럽다. 아래 성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이고 골로새서 3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형상은 하나님의 의(시 99:4), 거룩(출 15:11, 시 22:3, 사 5:15, 57:15), 선(막 10:18), 사랑(신 7:9, 요3:16)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존재론적으로는(영적 형상)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형상이요, 의미론적으로는(속성적 형상) 의와 거룩과 선과 사랑이시다. 이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타락하여 이 영적 형상을 상실해 버렸다. 육체까지 영생의 존재가 육체에 사망이 왔고 거룩해야 할 존재가 죄악 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죽지 않는 영혼마저 지옥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죗값으로 사망한 육신이 부활하게 되고 불행한 영혼이 행복한 영생과 거룩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요 점진적 성화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칭의적 회복이요, 두 번째는 삶을 통한 행함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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