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구절 | 하나님은 사랑이라 – 한효선 (햇살콩 캘리 \U0026 일러스트) 147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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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16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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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선 사역자님 싱글음반 수록곡 ‘하나님은 사랑이라’ 입니다.
노래 – 한효선
작사,곡 – 손경민
편곡 – 손경민 박정연 성철모 박종덕
디자인 – 햇살콩(김연선,김나단)
영상 – 김아영
이번 음반은 전도를 위해 만들어진 싱글음반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하고 부끄럽고 죄 많은 사람을 찾으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사랑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입니다.
부디 이 찬양이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찬양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시 회복하고 구원받기를 소망합니다.
악보는 블로그에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kyungmin0716/22222085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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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16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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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ight-of-truth.org

Date Published: 6/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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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 15가지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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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ost.naver.com

Date Published: 9/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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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 15가지 — 하나님은 사랑 … – 다음블로그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 15가지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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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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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ἀγάπη 참조 / 다음 주제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 그러면 2023년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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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ykcn.org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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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구절: 요한일서 1:4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는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성구가 있습니다. 요한의 한 가지 진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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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aithgazette.com

Date Published: 9/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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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 GotQuestions.org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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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 목회자료 – 기멀전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엄마의 사랑보다 위대하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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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0/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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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라 – 한효선 (햇살콩 캘리 \u0026 일러스트)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구절

  • Author: 손경민 (Son Kyungmin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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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BjlszFsoxA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 구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 . 요한일서 4장 16절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비슷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 구절 전체

요한일서 4:8 –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요한일서 4:7-21 요약 및 분석

에서 찾은 전체 구절 요한일서 4:7-21 에 대해 이야기하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 . 사랑은 단순히 신의 속성 , 그것은 바로 그의 메이크업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의 핵심에서 그는~이다사랑. 하나님만이 사랑의 완전성과 완전성 안에서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는 그 근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에게서 태어난 , 또한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을 배웁니다. 형제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주님은 신자들에게 다른 사람, 친구, 가족, 심지어 적에게까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의 사랑은 감정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경험하는 인간의 사랑과 매우 다릅니다. 그는 우리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를 제발 . 그분은 단순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진정한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그와의 관계 .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주고 활력을 주는 힘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ESV).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련 구절

요한복음 3:16(NLT)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13(NLT) –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로마서 5:8 (NIV)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4-5 (NIV)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요한일서 4:7-8(NLT) – 사랑하는 여러분, 계속해서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7~19(NLT) –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욱 온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의 날에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기 때문에 담대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두려우면 형벌이 두려운 것인데, 이는 우리가 그의 온전한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예레미야 31:3(NLT) – 오래 전에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아,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였다. 나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당신을 나에게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비교

이 두 유명한 성경 구절을 여러 곳에서 비교하십시오 인기있는 번역 :

요한일서 4:8

( 새로운 국제 버전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영어 표준 버전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뉴 리빙 번역 )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새로운 킹 제임스 버전 )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킹 제임스 버전 )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

(새로운 국제 버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합니다.

(영어 표준 버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뉴 리빙 번역)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뉴 킹 제임스 버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킹 제임스 버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온라인 예배는 어떻게 참석할 수 있나요

당신은 형제자매들이 보편적으로 믿음과 사랑이 식어가는 근본적 이유를 아시나요? 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고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지 못할까요? 우리에게 그 답이 있습니다. 연락 주세요.

진실한 사랑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 15가지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실까요? 또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형제자매는 또 서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사랑에 관한 구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게 해줄 것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밝혀 줄 것입니다. 함께 봅시다!

❑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고,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인간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6~1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우리가 당연히 갖춰야 할 양심이자 이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그분의 뜻에 합당할까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명기 5: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22:37~39)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ἀγάπη 참조 / 다음 주제 – 죄란 무엇인가?

파트리스교회 유투브 온라인 방송 / YouTube Patris Church(불낙지교회)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Patris+Church

불 : 불신자(不信者)를 주님 앞으로

낙 : 낙심한 자(落心者)를 주님 앞으로

지 : 지체하는 자(遲滯者)를 주님 앞으로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기본 자료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에 쫓기며 시달리는 설교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제를 갖고 4회 정도 성경에서 합당한 본문을 선택한 후에 설교를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 이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1. 창세기 3:21, 가죽 옷 사랑

2. 창세기 6:14, 역청과 사랑

3. 창세기 9:20-27, 셈과 함과 야벳의 사랑

4. 창세기 19:8,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러한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면 사랑에 대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가 가능합니다.

성경을 이러한 주제로 관찰한다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수 십회 이상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 교인 성경 읽기와 묵상을 제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의 제안)

2023년 매일 성경 읽기를 계획한다면 “사랑”이란 주제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

그러면 2023년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사랑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일 설교, 수요 성경공부 및 기도를 진행하면 목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합니다.기본 자료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시간에 쫓기며 시달리는 설교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한 주제를 갖고 4회 정도 성경에서 합당한 본문을 선택한 후에 설교를 진행합니다.예를 들면 ‘사랑’ 이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교를 준비합니다.이러한 식으로 본문을 선택하면 사랑에 대한 주제로 시리즈 설교가 가능합니다.성경을 이러한 주제로 관찰한다면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수 십회 이상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 교인 성경 읽기와 묵상을 제공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매일 성경 읽기를 계획한다면 “”이란 주제로 성경을 읽어봅시다.그리고 사랑에 대한 구절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표시합니다(예를 들면, 노랑, 파랑, 빨강…..)그러면을 마감할 때는 내가 표시한 성경의 색갈만 들추면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을 찾게 됩니다.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사랑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여 주일 설교, 수요 성경공부 및 기도를 진행하면 목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자료는 2020년 1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를 기초 자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원고를 수정하여 up grade 하여 수정 보완합니다.

설교가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소개합니다.

설교자들의 입장에서 응용하여 더 은혜롭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주요 용어 설명 #. 1 사랑

* 자료 제1차 수정 일 / 05-30-2022(월)

사랑의 정의 : 덮어주는 것이다!

암송 성구 : 베드로 사팔(베드로전서 4:8)

– 베드로전서 5장

베드로후서 3장

따라서 베드로 사팔이라고 하면 베드로전서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 자료 제1차 사용일 / 01-19-2020(주일)* 자료 제1차 수정 일 / 05-30-2022(월)사랑의 정의암송 성구- 베드로전서 5장베드로후서 3장따라서이라고 하면를 말합니다.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 God is Love.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데오스 아가패 에스틴)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성경에서 누구라고 고백하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아는 것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고백 세 가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 하나님은 빛이시라

빛의 영적 의미는 “생명(生命)”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men.

둘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의 영적 의미는 “자유(自由)”를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영적 의미는 “용서(容恕)”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Hatred stirs up dissension, but love covers over all wrongs.

빛과 영과 사랑의 공통된 특징은 “영원(永遠)”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 永生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 容恕

자유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 自由

2020년 1월 5일 신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1월 4일(토)에 읽었던 요한일서 4장의 말씀 중에서 묵상 주제로 소개했던 “하나님은 사랑”이란 주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셨을까요?

(도입 예화) 희랍의 힐루카 대왕의 이야기

고대 희랍에 전설적인 힐루카 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큰 문제는 미성년자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미성년자들의 잘못된 생활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매우 엄한 법을 공포했습니다.

그 법은 음행 하다가 붙잡힌 미성년자들은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힐루카 왕의 하나 뿐인 아들 젊은 왕자가 붙잡혀 왔습니다.

재판장은 매우 난처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자의 두 눈을 뽑으면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왕을 세워야 합니다.

왕자에게만 특혜를 주면 법의 공정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 주저하는 재판장에게 힐루카 왕은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의 오른쪽 눈이 뽑혔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왼쪽 눈을 뽑으려고 할 때 힐루카 왕은 자신의 왼쪽 눈을 뽑게 했습니다.

왕자의 잘못도 법대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법 정신은 공의에 의해서 지켜져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은 공의로운 실천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The entire law is summed up in a singl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one of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율법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을 지키지 못하면 범법자가 됩니다.

범법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눈을 뽑게 했던 힐루카 왕처럼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Therefore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rather, through the law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What shall we say, then? Is the law sin? Certainly not! Indeed I would not have known what sin was except through the law. For I would not have known what coveting really was if the law had not said, “Do not covet.”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For whoever keeps the whole law and yet stumbles at just one point is guilty of breaking all of it.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우리 말에는 “사랑” 이란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기록한 ‘코이네 헬라어’와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먼저 사랑이란 다양한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언어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의 언어가 정확한 의미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은 분명하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반면에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마치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대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음악을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

개(伴侶犬)를 사랑한다.

고양이(伴侶猫)를 사랑한다.

문학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학문을 사랑한다.

우리 말에서는 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스토르게(storge, φιλόστοργος)(5387. philostorgos)

Definition : tenderly loving

Usage : tenderly loving, kindly affectionate to.

로마서 12:10(형제를 사랑하여)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Be devoted to one another in brotherly love. Honor one another above yourselves.

둘째는 필리아(philia, φιλία)(5373)

Definition : friendship

Usage : friendship, affection, fondness, love.

야고보서 4:4(세상과 벗된 것)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셋째는 에피투미아(epithumia, ἐπιθυμία)(1939)

Definition: desire, passionate longing, lust

Usage: desire, eagerness for, inordinate desire, lust.

마가복음 4:19(욕심),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누가복음 22:15(원하고 원하였노라)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And he said to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넷째는 에로스(eors , Ἔρως)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정과 성애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모르 또는 큐피드와 같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주로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구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신격화된 것이다.

(예화)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 7. 15~ 1867. 5. 27)” 신화(mythology)에서 “아폴로와 다퓌네(Apollo and Daphne)”

희랍 신화에 아폴로와 다퓌네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큐피트는 신비한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금촉 화살입니다.

금촉의 화살을 맞으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합니다.

또 다른 화살은 납촉 화살입니다.

납촉 화살을 맞으면 사람을 증오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화살을 맞으면 맞은 사람은 어떤 화살을 맞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 아폴로가 많은 사람들의 환영으로 받으며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때 큐피트가 작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는데 아폴로는 큐피트에게 그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이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며 큐피트를 꾸짖었습니다.

비록 큐피트가 어렸지만 아폴로 장군의 으시대는 꼴을 싫어하여 아폴로에게 금촉 화살을 당겼습니다.

그리고 다퓌네는 숲의 신의 딸이었는데 다퓌네에게 납촉 화살을 쏘았습니다.

아폴로가 숲의 신의 딸 다퓌네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친듯이 다퓌네를 쫓아가면 다퓌네는 그 많은 여인들이 흠모하는 아폴로를 보기 싫다며 도망칩니다.

쫓고 쫓기는 사랑과 미움의 전쟁은 계속되면 될 수록 아폴로의 마음은 점점 더 다퓌네를 향하여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어느 날 아폴로는 오늘이 기어이 다퓌네를 붙잡겠다며 사력을 다하여 쫓아가서 드디어 다퓌네의 허리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때 다퓌네는 아버지 숲의 신에게에 도움을 청합니다.

다급한 딸의 외침을 듣고 다퓌네를 나무로 변하게 만들었지요.

아폴로가 다퓌네의 허림을 부둥켜 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다퓌네의 허리가 아니라 나무 기둥이었습니다.

얼마나 허망할까요?

다퓌네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나뭇잎이 되었고

다퓌네의 두 다리는 나무의 뿌리가 되었으며

다퓌네의 두 팔은 나무 가지가 되었습니다.

아폴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무가 되었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무가 되어라!”

(You are ever green tree forever!)

이렇게 부르는 것도 서운하여 마라톤 우승자에게 월계수나무로 만든 월계수 관을 씌워주는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아가페(agape, ἀγάπη)(26)

Definition : love, goodwill

Usage : love, benevolence, good will, esteem; plur: love-feasts

마태복음 24:12(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1:42(하나님께 대한 사랑)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요한복음 5: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but I know you.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r hearts.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 말처럼 단순하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한 단어를 사용하므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한 예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노련한 어부이었지만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여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물을 잡아 당기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구워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필리아” 라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는 “아가페”와 “필리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과 두번째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세번째는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가페라는 사랑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입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물었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주님에게 아가페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필리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셨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필리아할 수 있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예 나는 주님을 필리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예식장에서 주례와 증인들 앞에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 헤어지고 있습니까?

인간들의 사랑이란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시리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배신하고 떠나버려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st.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잎은 해가 뜨면 곧 잎이 마르고 시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의 특징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생명을 잃은 짐승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피가 없는 옷 즉 용서가 없는 옷입니다.

반면에 가죽옷은 짐승의 피가 있는 옷입니다.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합니다(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성경은 피를 용서라고 합니다(히브리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용서의 특징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가죽옷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3:21)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으로 덮어주셨습니다.

방주의 안과 밖을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6:14)

노아가 방주를 만든 나무를 ‘잣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라고 합니다. 코페르라는 단어는 “속죄” 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속죄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피로 덮는 용서가 완성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랑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제바흐 쉘라밈” 이라고 합니다.

제바흐는 제물, 쉘라밈은 평화(샬롬의 복수형)

화목제 제사의 특징

첫째는 암수 모두 바칠 수 있다.

둘째는 기름과 콩팥을 드린다.

(기름이 잘 타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은 제물은 바친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다.

(단 3일 이내에 만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넷째는 평등 의무 제사

화목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배려하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의 새끼는 제물을 받지 않는 평등의무 제사였습니다.

즉 성막을 지을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에게 똑 같은 속전을 거두시게 하신 것처럼, 평등하게 부담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제사의 근거

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he did it to demonstrate his justice at the present time, so as to be just and the one who justifies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메이어라는 랍비는 설교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그는 매주 금요일 밤이면 예배당에서 어김없이 설교를 했는데, 몇 백 명씩 한꺼번에 몰려 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그들 가운데 메이어의 설교듣기를 매우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다른 여자들은 금요일 밤이되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데, 그 여자만은 이 랍비의 설교를 들으러 나왔다.메이어는 긴 시간 동안 설교를 했고 그 여인은 그 설교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남편이 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일이 안식일인데 음식은 장만하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고 있느냐며 화를 내며 물었다.”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어!””예배당에서 메이어 랍비님의 설교를 듣고 오는 길이예요”그러자 남편은 몹시 화를 내며 소리쳤다.”그 랍비의 얼굴에다 침을 뱉고 오기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어!”집에서 쫓겨난 아내는 할 수 없이 친구 집에서 머물며 남편과 별거하였다.이 소문을 들은 메이어는 자기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에 한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몹시 후회했다.그리고는 그 여인을 불러 눈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남의 타액으로 씻으면 낫게 된다는데, 당신이 좀 씻어 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여인은 랍비의 눈에다 침을 뱉게 되었다.제자들은 랍비에게 ‘선생님께선 덕망이 높으신데, 어째서 여자가 얼굴에 침을 밷도록 허락하셨습니까?’하니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가정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보다도 더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네.”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이 화목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무섭게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시대에 기록된 말씀으로 빨리 예수님 오시기를 갈망한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 5034,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

– 시간적으로 빠른 이란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5035, 속히(타쿠, tachü) ταχύ

– 서둘러서, 빨리, 지체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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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라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설교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편에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차 설교일 / 03-31-2019

속히 될 일(요한계시록 1:1, 22:6)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The angel said to me, “These words are trustworthy and true. The Lord, the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sent his angel to show his servants the things that must soon take place.”

* 속히 될 일(What must soon take place) – 곧 일어날 일, 반드시 일어날 일

속담에 ‘구슬이 세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하나로 연결해야만 바르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일에 소개했던 설교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로만 읽어야 합니다.

프리즘(Prism)은 빛을 굴절 분산시키는 광학도구를 사용하여 햇빛을 통과시키면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은 무지개 색으로 분해되어 영롱하게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었던 성경에 관한 모든 단편적인 정보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렌즈로 통과시켜 주님 오실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일까?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계시란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계획이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이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말씀입니다. 편지는 직접 찾아가서 전할 수 없는 내용을 글로 적어 보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였고 예언하셨던 말씀을 글로 적어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속히 될 일’이란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범위를 성경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경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속히”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과 성경에서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속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가 본문을 포함하여 8구절로 소개됩니다.

(1:1, 2:6, 3:11, 11:14, 22:6, 22:7, 22:12, 22:20).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설교의 주제에 합당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속히 될 일’이란 22장 6절에서 “속히 되어질 일”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속히 될 일” 이란 3장 11절,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20절에서 “속히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가 대략 기원 후 96년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에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속히 될 일 즉 주님의 재림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시간(時間)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해서 시간 개념으로 해석하면 ‘빠르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속히 이루어질 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면 내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이 오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났던 주님에 대한 증거를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복음서를 시작으로 신약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제자들 생전에 오셨다면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실 주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인위적인 방법이므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장소(場所) 개념(槪念)

속히 될 일에 대한 해석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오실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어디에’ 오실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특별한 장소를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처럼 소개합니다.

예를 들면 과천, 피지 섬, 브라질, 계룡산과 같은 곳이 될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인물(人物)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을 시간과 장소로 해석하면 그 다음에는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1992년 시한부종말론의 이장림,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지상낙원 피지 섬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사례(은혜로교회 신옥주), 두 증인 중 한 사람이라며 영원불멸의 교주(전도관 박태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교인들은 전 재산을 정리해서 브라질에 마련한 4천만평의 땅으로 집단 이주하여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영적(靈的) 개념(槪念)

속히 될 일이란 시간과 공간과 인물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묵시문학의 특징인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시간 개념과 장소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히’라는 말은 ‘확실히’ ‘틀림없이’ 라는 속뜻으로 ‘반드시 될 일’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속히” 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면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의 특성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묵시문학에서 “속히” 라는 의미는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 라는 뜻으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일어날 일”이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속히 될 일’이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이므로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2천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기에 아마 오시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전개 이야기)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중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그녀가 살던 마을에 백인 선교사의 가족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하여 가뭄이 계속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점점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삽, 곡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를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국 출장 중이라 집에는 어머니와 어린 펄벅밖에 없어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준비하고 케이크와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을 초대한 것처럼 대문과 집안의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린 펄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하시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잡았습니다.

얼마 뒤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대문이 굳게 잠기고 집안은 깜깜할 것이라고 여기고 횃불을 들고 펄벅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문이 열려있어 마당으로 들어섰더니 모든 방문이 열려 있고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한 방마다 차와 케이크 그리고 과일이 차려진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중하게 마을 분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면서 말씀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 하는데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횃불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조금이라도 도망칠 방법이 있었다면 도망치다가 잡혀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지라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런 용기를 내어 보았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이 말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속히 될 일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으로 반드시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속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급히(ταχύ) 사화하라 – 속히(ταχύ) 사화하라

(현대인 성경) 타협하라

(공동번역) 화해하여라

(새번역) 화해하도록 하여라

‘사화하다’(유노온, 능동형)는 상처를 준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사화(사과)는 상처를 준 사람이 해야 하고, 화해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사화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합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빨리(ταχύ) – 속히(ταχύ)

성도들이 속히 해야 할 일은 부활의 소식을 빨리 가서 알려야 합니다. 종말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부활의 소식을 빨리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종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지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함께 나누며 주님 오실 그 날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속히 될 일이란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건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속히 오실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까?

20:15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21: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이름은 등과 기름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등과 기름을 예비하기 위해서 속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신앙생활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교회에 다닌다는 것뿐이지 신앙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자랑하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요한계시록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들이 “속히 될 일”에 대한 주제를 현실 세계에서 나타는 현상과 징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징조와 현상은 잘 몰라도 등과 기름을 예비한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비유의 가르침과 같이 “속히 될 일”을 말씀하신 감추어진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속히 될 일”이란 용어가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속히 될 일

22:6, 속히 되어질 일

속히 될 일 또는 속히 되어질 일은 무엇인가?

3:11,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7,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12, 속히 오리니(I am coming soon!)

22:20, 속히 오리라(I am coming soon.)

속히 될 일은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2천

년 전의 예언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언한 내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예언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 또는 90이라고 한다면 속히 오실 것이란 예언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히 오리라고 예언하셨을까요?

미래에 나타날 현상과 징조들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속히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에 소개된 말씀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치룬 줄 압니다. 시험 일자가 발표되면 모든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합니다. 시험 일자가 중요합니까? 시험을 잘 치룰 수 있는 공부가 중요합니까? 시험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히 될 일은 반드시 오실 것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오실 주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삶이 중요합니다.

속히 오시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 부활의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오실 주님의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고 증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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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아가패 사랑의 힘

첫째,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of self-discipline.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두려움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의 줄임말

(Fear ; False Evidence Appering Real)

반려견을 돌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처음에 집으로 데려오면 불안하여 부들부들 떨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집 주인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 꼬리를 흔들고

따라다니며 좋아한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이렇게 반응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둘째, 성령으로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2∼2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울이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영, 곧 인격을 가지신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 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셋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역사하는 힘(요한일서 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고 있는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버틀러(C.F. Butler) 작사

블렉( J.M. Black) 작곡

1898년에 발표한 곡입니다.

본 찬송의 작사자 버틀러(C. F. Butler)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작곡자 James Milton Black (1856- 1938)

뉴욕 사우스 힐에서 태어났으며, 조기 음악교육으로 작곡가, 성악가, 합창 지휘자,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뉴욕의 존 하워드(John Howard)와 무디 신학교의 다이넬 타운어(Daniel Brink Towner)로부터 사사하면서 음악적 기초를 든든히 쌓아나갔으며 1881년경 펜실바니주 윌리암스포트(Williamsport)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1904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의 파인스트리트 감리교회(Pine Street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로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최초의 작곡집 “영혼의 송가”(Songs of the Soul, 1894)는 2년 동안에 4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하며, 바로 이어 후속 편 Songs of the Soul, Number Two (1896)를 출간했습니다.

또한 그는 10여권의 복음 성가집을 발간해 낼 정도로 정력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는데, 그간 그가 작곡한 곡은 약 1500곡에 이릅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곡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두 곡 실려 있는,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전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곡이고

후자는 버틀러가 작사한 시에 그가 곡을 지은 것이죠.

버틀러는 누가복음 17장 20-21절,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현재적 심령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후렴의,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부분을 원시에 가깝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n

(할렐루야! 그래요, 그것은 천국이어요)

‘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천국이예요)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땅이나 바다나, 그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Where Jesus is, ’tis Heaven there.

(주님이 계신 그곳은 천국이어요)

을 올려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이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나는 역경에서도 감사를 드리자.

흐르는 눈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

중국 후한을 세운 광무제에게 호양 공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양 공주가 아끼는 노비가 있었는데 공주의 권세를 믿고 살인을 한 후에 공주의 저택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당시 낙양성의 치안을 담당했던 “동선”이라는 관리가 이 노비를 처벌 하기 위해서 공주의 대문 앞에 잠복하고 있다가 공주가 외출할 때 따라 나오는 노비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주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끼는 노비가 죽음을 당하자 오빠 광무제에게 동선이라는 관리를 처형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광무제가 동선을 불러 공주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동선은 자신은 사과하지 못하겠고 차라리 죽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호양 공주는 “오빠가 황제가 아니었을 때에는 집에다 죄 지은 사람을 숨겨 주어도 관가에서 잡아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황제가 되고나니 오빠의 힘이 줄어든 것 같다.”며 짜증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광무제는 웃으면서 “황제가 되었으니 일반 백성 때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집쟁이 관리인 동선을 풀어주고 오히려 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여동생 호양공주를 달래고 정직한 관리를 풀어줌으로써 친인척도 달래고 국정의 기강도 바로잡았다는 교훈입니다.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공신들을 잘 관리한 군주로 뽑힌다고 합니다. 광무제는 자신을 도와서 후한을 세운 공신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명예를 주었지만 건국 이후 국정에는 손을 떼도록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기도합니다.

* 1차 수정 완료 / 05-29-2022(주일 저녁)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며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서로 연구하며 말씀으로 설교자를 변화시켜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 뿐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but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 Jonathan Edwards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방탕하게 살아 멸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은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모두 구원하십니다. True Christians are chosen of God from all eternity, not only before they were born,but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Jonathan Edwards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맞는 본문은 선택하여 설교하려는 자료를 올리려고 합니다.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함께 기도하며 관심을 갖는 주제를 서로 연구하며 말씀으로 설교자를 변화시켜 교회를 진리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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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일 / 01-19-2019

가죽 옷과 어린 양의 피(창세기 3:21, 요한계시록 7:14, 19:8)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The LORD God made garments of for Adam and his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Fine

(도입 이야기)

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

“내 모습 어때?”

“정말 멋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을 지어 입히시니라.The LORD God made skin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I answered, “Sir, you know.” And he said, “These are they who have come out of the great tribulation; they have washed their robes and made them white in the blood of the Lamb.그에게 빛나고 깨끗한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옷은이로다 하더라.Fine linen , bright and clean, was given her to wear.” (Fine linen stands for the righteous acts of the saints.)덴마크의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1875. 8. 4)’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새 옷을 입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옷 갈아입기를 더 좋아했어요.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답니다.“내 모습 어때?”“정말 멋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님 앞에서는 칭찬했지만 돌아서면 흉을 보았어요.

뽐내기 좋아하는 임금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날 두 사람이 임금님을 찾아왔어요.

이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옷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그 옷감은 바보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어요.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는 임금님은 당장 이 사람들에게 궁궐의 방 하나를 주며 신하들에게 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제공하라며 당장 그 옷을 만들게 하였어요.

두 사람은 베틀 앞에 앉아 마치 옷감을 짜듯이 베틀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러 날이 지난 후 임금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내어 확인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신하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어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바보라고 말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요.

드디어 임금님이 입을 바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이 완성되었다며 두 사람은 임금님에게 그 옷을 입혀주었어요.

임금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님도 바보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사람이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은 후 그 옷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거리로 나갔답니다.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은 것을 보도 아무 말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웃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어린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고 외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이 ‘벌거벗은 임금님!’ 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심판의 날에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구원의 옷(Garments of Salvation)을 어떻게 입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방법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직접 가죽옷으로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구원의 옷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 죄를 덮어주는 옷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의 방법대로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은 “자기 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이란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예증 #.1)

노아 홍수 때에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잣나무를 개역 개정 성경에서 ‘고페르나무’ 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주 안과 밖을 ‘역청’으로 바르게 하셨습니다.

역청을 ‘코페르’ 라고 합니다.

고페르와 코페르는 같은 문자로 발음을 나타내는 모음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고페르와 코페르의 뜻에는 ‘속죄’라는 뜻이 있습니다.

애급에서 나오기 전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생축의 초태생이 죽는 일이 없었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던 집안에서는 장자의 죽음과 초태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이 임했습니다.

(현실 예증 #.1)

2019년 10월 9일은 ‘욤 키퍼(Yom Kippur)’라는 공휴일은 ‘욤(Yom)’ ‘날(Day)’을 의미하고 ‘키퍼(Kippur)’는 ‘속죄(Atoinment)’를 의미합니다. 키퍼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고페르, 코페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속죄를 받은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예증 #.2)

노아 홍수 후에 구원의 계시가 속죄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속죄제사는 개인이 바치는 제물과 백성 전체가 바치는 제물로 구분합니다. 개인적인 속죄제는 짐승의 머리에 개인이 안수하고 그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짐승을 잡은 후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그리고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6∼7).

그러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는 두 염소를 선택한 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라고 하여 광야로 보냈습니다. 이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레위기 16:15, 18∼19).

속죄소가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야만 속죄가 해결됩니다.

이러한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세마포 옷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복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 옷은 하얀 옷을 말합니다. 하얀 옷은 세탁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 후 변화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인간의 방법에 의한 인간의 의라고 한다면 가죽옷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희어진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적용)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2:16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제사장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대제사장 옷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가는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청색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홍색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금실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는 베실은 흰색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받았으므로 반드시 제사장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이란 가죽옷처럼 속죄의 피가 뿌려진 옷입니다. 가죽옷은 속죄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속죄제는 휘장 앞에 희생 제물의 피를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아세셀 염소는 광야로 보내버리고 다른 염소는 그 피를 받아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 즉 시은좌에 뿌려야만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계시하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었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의로 인정받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내가 맡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증거를 눈으로 보여주고 입으로 고백하는 구원의 증인으로 승리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에는 오른편과 왼편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왼편의 이름은 “작사자”

오른편의 이름은 “작곡자”

♪ 184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R, Rowry 작사, R, Rowry 작곡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속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중에 “두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가난한 농부와 부자 상인이 긴 세월을 두고 꿈꾸며 계획했던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납니다.며칠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중 가난한 농부가 목이 마르다며 걸음을 멈추고 부자 상인에게 “여보게 저기 마을에 잠시 들려 물을 마시고 갈테니 자네 먼저 가게나” 하고 마을 가장 가까이 있는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두드렸습니다.그러나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었으며 또 며칠을 굶었는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농부는 “우선 이것으로 먹을 것을 사세요. 그러면 힘이 날겁니다” 라며 가지고 있는 돈을 내밀었습니다.농부는 여비가 없어서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자 노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지를 둘러보고 예배도 드리며 성찬식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몇 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부자도 여비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 오다가 농부의 생각이 나서 그와 헤어졌던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그분은 참으로 성인입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부자노인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그래 과연 농부의 행위가 옳은것 이었어!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순례가 아니라 남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삶이야” 라고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소외돼 거리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에게 형제 사랑을 실천했을까?사실 가난한자들은 불합리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의 모순, 부자의 횡포 등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된 채 타인의 관심과 배려없인 살수 없다.그럼 그들을 누가 도와 주어야 할까?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약함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만 그 탓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말고 또한 조건을 붙여 배척하거나 간과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이것은 공중의 새와 들판의 폴 한포기 까지도 관심을 가지신(마 6:26-29)하나님의 뜻이며 율법의 대강령이자(마 22:36-40)하나님께서 당신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자기같이 사랑하라”(레 19:34)고 가난한자들을 맡겨 주셨기 때문이다.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태생의 침례교 목사로서 루이스버그대학 (후에 버크넬대학) 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함께 모교의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후에 모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45년에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웨스트체스터(West Chester)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뉴저지 플레인필드(Plainfield)에 있는 파크아베뉴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마쳤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목사는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그때 한손(Hanson)의 침례교회에서 시무했는데(1868 -1875) 어느 날 병든 사람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40세가 되는 1866년 부터 본격적인 찬송가를 짓기 시작합니다.

40세 이후부터 찬송가를 작사·작곡하기 시작한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목사는 스스로 찬송가 작가로 기억되기보다는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지만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ㆍ작곡하여 보급함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심령의 갈급함에 새 희망을 주게 되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훌륭한 찬송가 작시,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맥커천(Robert Guy McCutchan, 1877~1958) 목사는 “그의 설교는 불과 몇 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작사 · 작곡한 찬송은 지구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이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글로우메인(Biglow-Main) 출판사의 음악 편집자로서 일하면서 ‘Happy Voices, 1865′ 를 시작으로 20권이나 되는 찬송 책들을 출판하였고, 1868년에는 브래드버리의 후임으로 주일학교 노래 편집인이 되었으며, 500여 곡의 어린이 찬송과 복음찬송들을 작곡. 혹은 작사하여 돈(Doane)과 함께 발행한 주일학교 어린이 찬송가와 출판물에 넣었습니다.

그는《행복의 소리》’Happy Voices, 1865’ 등 17 권의 찬송가책을 펴냈는데, 그 중에는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일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 교수로도 있었고, 침례교 총회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찬송가로서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것은

1. 무덤에 머물러

2. 성자의 귀한 몸

3. 주 사랑하는 자

4. 나의 죄를 씻기는

5.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6. 날 위하여 십자가의

7.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8. 나의 갈길 다 가도록

9. 주 음성 외에는

10. 울어도 못하네

1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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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고? 약한 게 강한 거라고?’…말도 안되는 성경 속 아이러니의 비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희망 놓지 말아야’

인간관계 주제 신앙상담…김병삼·김기석·김학철 교수 답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정말 기독교인은 무조건 원수도 사랑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는 말씀대로 살다가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소위 ‘호구’가 되는 것은 아닐까.

CBS 유튜브 상담 콘텐츠인 ‘잘잘법(잘 믿고 잘사는 법)’에 소개된 신앙상담 가운데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 속 아이러니의 참뜻을 짚어봤다. 조회수가 높은 3가지 주제에 대해 김기석(청파교회) 김병삼(만나교회) 목사, 김학철(연세대) 교수가 답했다.

“하나님, 저 인간은 정말 보기 싫거든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현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이 있으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희망 없이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줍니다. 어린아이는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미숙합니다.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을 통해, 오히려 발전할 점을 기대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 뿐만 아닙니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구도 마찬가지죠. ‘저게 정말 인간이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직장 동료, 선배, 후배, 집안에 있는 골칫덩어리까지도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아 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힘든 노력이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김학철 교수)

“믿는 사람이 용서하라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까닭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로 ‘용서하다’가 포기브(forgive)잖아요.

그저 음절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위하여’라는 뜻인 ‘포(for)’와 ‘주다’라는 의미인 ‘기브(give)’가 합쳐진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은 잊어버리는 것(forget)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줬던 그 사람이 더 이상 내 삶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용서가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던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의 가능성을 한껏 살아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서 향유하게끔 하는 그분의 선물인 셈이죠.“(김기석 목사)

“8세 딸이 중도 장애를 얻었는데, 너무 힘들어요.”

“우리 삶에 제일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원하지 않은 일들을 어떻게 내 삶에서 해석해 내는지’가 중요해요.

나는 수십 년 동안 장애를 가진 딸의 아빠로 살아왔어요.

우리 딸이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시간들에 대해 ‘하나님, 이건 무엇인가요?’ 여쭤봤지만 아직까지 답이 없어요.

하지만 그 과정 중에 하나님이 나를 바꾸셨어요.

나는 그전까지 예수 믿으면 잘 돼야 되고, 노력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딸을 통해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게 ‘믿음의 역설’ 같아요. (김병삼 목사)

미용사인데 ‘갑질’ 손님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요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나의 삶의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많이 양보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들, 또 내가 인생에 세워두고 있는 내 삶의 어떤 진면목, 이런 것들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한다면 난 거기에 노(No)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그 기준은 누군가가 세워줄 순 없어요.

본인이 세워야 하는데, 그 속에서 나의 자존감이 무너질 상황이라든지,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일을 양보한다면 내가 무너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를테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인데, 어느 부자가 내게 ‘당신의 입장을 철회해라’ ‘왜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이 가난한 사람에게 있다고 얘기하느냐’ 이러면 ‘난 그건 양보 안 된다’ (라고 답한다는) 얘기인 거죠.

그런가 하면 뒷돈을 넣어주면서 ‘나를 위해 좀 증언을 해달라’ 하는 청탁을 받을 때 그건 ‘노’라고 얘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기꺼이 양보하더라도 내 자존감에 상처 입히지 않는 것들이죠.”(김기석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195796&code=6122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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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첫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쌍방이 주고 받아야 올바른 사랑입니다.

병든사랑은 일방적인 통로만 있습니다.

양방 통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거짓 사랑이 문제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넷째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 문제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관심의 단계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헌신의 단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셋째는 희생의 단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

“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

“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직도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自己愛).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스더 6:1~3, 8:1~2)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사도행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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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로마서 5:1~8)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바로 샬롬,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탕자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의 과거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쁘게 맞이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의 말에는 탕자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돌아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계속 나 자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화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평을 즐기자는 말입니다. 화평이란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돈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입니까? 내가 써야 내 것입니다. 멋진 집을 구입해서 평생 남에게 빌려 줬다면 그 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집에서 하루라도 살면서 즐겨야 비로소 내 집입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평은 즐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평을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그 화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깨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먼저 화평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깨뜨리셨습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렀습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화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평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은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를 깨닫는 순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화평한 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이웃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평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책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화평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먼 미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앎이로다!” 즉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이 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난으로 인한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맞을 때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미워해서 때린다고 생각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같은 매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는 상태에서 맞으면 그 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꼭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그 가지를 잘라 줍니다. 잘라 주어야 제대로 자랍니다. 가지를 자를 때 그 나무가 미워서 자릅니까? 우리도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것이란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도우셔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청년을 그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자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도 성령이 역사하셔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사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지 않습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으로는 참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백 구십 번의 용서란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진 요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어지자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율법이 없어서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법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죄의 유혹은 더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과 더불어 먼저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중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임하신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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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사무엘하 12:15-25)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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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시편 91:14-16)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7∼39).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

관심이란 라틴어는 인터 엣세(inter esse)한다.

라틴어에서 관심이란 “함께 생각한다” “함께 행동한다” “같은 말을 한다” 라고 합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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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로 헌신을 “마래”라고 한다.

마래는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가득 채운 곳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셋째, 희생의 단계

헌신을 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생이란 채운 것을 완전하게 비워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까?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신 7:12∼13), 위험에서 건져내시고(시 91:14),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고(시 119:165),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45:20).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잠 8:17), 기쁨을 채워주시고(사 56:6∼7),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롬 8:2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약 2:5).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어떤 사람이 삶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불렀던 찬송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질병이 닥칠 때도 있고, 죽음이 닥칠 때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1. 내가 저를 건지리라 – 구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시 91:14a)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건지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마가 젖먹이 자식을 항상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자식에게 젖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병났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항상 돌봐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결단코 이탈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과 위험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만 가지고 있으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수평적인 눈은 인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수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수평적인 눈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섭리하셨음을 깨닫고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합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서른두 살 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5∼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무려 백일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 자율신경실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당신은 기자 생활로 너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든 것이 다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나하고 세 가지만 약속합시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이사하지 말 것, 셋째, 사표 쓰지 말 것.’

이것이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그는 정말, 빌딩 옥상 같은 데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고, 다리를 지나가면 강에 뛰어들어가고 싶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내가 너에게 강권하니 넌 무조건 교회 나가라. 너는 교회 나가야 된다. 교회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냥 십자가 간판만 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나는 극심한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매일마다 성경 한 장씩을 쓰십시오. 병이 나을 때까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계속해서 쓰십시오. 이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성경을 한 장씩 계속해서 썼습니다. 한 달, 석 달, 육 개월, 일 년 동안 썼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없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돈과 자존심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울분과 분노, 질투심 때문에 견디질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게 하시고 질투심이 떠나게 하시고 증오감이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평소에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게 되었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성경 말씀을 읽자 생각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스트레스, 우울증도 없어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저를 높이리라 – 높임, 존귀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b)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므로서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단과 시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나와 신앙 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성경을 등지고 자기 혼자 삽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높인다’는 단어에는 ‘안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침략할 수 없는 높은 요새에 옮겨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높은 요새에 들어 올리셔서 아무 재앙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분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점점 높여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富)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으며,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며 부자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5:19).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23:11). 기도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행 10:2, 22). 선을 행하는 사람(롬 13:3), 전도하는 사람(고후 8:18), 순종하는 사람(히 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 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을까요?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 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 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응답하리라 – 간구, 응답

“저가 내게 간구(懇求)하리니 내가 응답(應答)하리라”(시 91:15a)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도 말못하고, 친구한테도 말 못했던 것,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얘기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얘기, 어떤 간구를 하고 부르짖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상쓰는 사람, 우울한 사람, 불안한 사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가 넘쳐납니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회사도 잘되고 축복받는 회사는 기도하는 회사입니다. 교회도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남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장사는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잡일로만 바빴지 식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내놨는데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데…. 이 가게를 팔고 뭘 할까?’하고 걱정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지?’

그는 자기가 그 동안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철야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새벽 기도의 능력, 철야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 주시고, 이 가게도 팔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점잖은 신사가 그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한 50명 되는데, 직원 식사를 이 식당에 위탁할테니 직원들의 식사를 좀 맡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선금으로 100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직원 50명이 식사를 하러 오니까 식당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식당을 팔아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식당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식당 처분 안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이 식당 안 팔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 식당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 기도 하지 않습니다. 철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 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금식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금식 기도 못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어려운 고난과 고통 닥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응답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내가 저와 함께 하리라 – 함께 하심

“저희 환난(患難)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榮華)롭게 하리라”(시 91:15b)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사업이 망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회사에 부도가 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잘났다고 떠나고, 교만해서 떠났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이 점점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환난에서 건져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정신적인 만족과 물질의 축복,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번영과 칭찬과 영광과 성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느끼고 감사해야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야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둔 어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제쳐놓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는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야단도 쳐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가출해서 아주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다, 하다 이 부부가 ‘안되겠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로선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디 가서 죄짓지 않게 하고, 사고 치지 않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너만 안타까우냐. 나도 안타깝다.’

‘뭐가요?’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아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도 집사였지만 교회에 제대로 안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불순종했던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나도 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라. 나도 너를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라. 기도만 해라.’

그래서 딸이 속썩이고 말 안 듣는 것을 통해, 자기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인내한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딸에 대해 인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안 들어오자 부부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고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교통사고였습니다. 딸이 친구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그만 전신주에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차는 불이 붙어서 전소해 버리고, 기사는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다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 바로 옆, 조수 석에 앉았던 자기 딸만 무사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은 내 딸만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피투성이가 되고 다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딸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걱정 근심 하며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위험한 교통 사고에서 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여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탈선하고 방종하던 딸이 다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딸을 살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딸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탄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안 들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 역경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회사도 직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 집사·장로·권사·성도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 장수, 만족

“내가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滿足)케 하며 나의 구원(救援)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6)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태어난 것, 부모를 만나서 김씨, 박씨, 최씨가 된 것,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의 악한 사람들 중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욕망과 죄악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편안한 가운데 장수의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면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장수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사라는 127세(창 23:1),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창 25:7∼8). 이삭은 더 오래 살아서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 35:28∼29).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6), 아론이 123세(민 33:39), 모세가 120세(신 34:7), 여호수아가 110세(수 24:29). 다 1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100세 이상 축복 받고 산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 안나는 106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눅 2:36∼37).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자는 보통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84세를 과부로 살았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106세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106세까지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도 다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건강 관리 신드롬’이 생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어야 가족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해야 된다.”라고 해서 60세, 70세, 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건강 관리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 식품을 먹어야 건강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건강 식품 제조 업체인 미국의 허벌라이프사의 창업자 마크 휴즈 회장은, 건강 보조 식품을 판매해 한해 매출이 9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좀 더 안전하고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강 식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사람에게 더 많은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해변에 있는 무려 300억 원짜리 초호화 맨션에서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건강, 건강’, ‘장수, 장수’를 외치던 건강 식품 창업자 마크 휴즈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건강 식품을 먹고 오래 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오래 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장수하게 하셔야 오래 삽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건강의 근원 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장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 식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중국산 납 꽃게뿐만이 아닙니다. 납이 들어간 복어와 병어, 물 먹인 아귀, 돌 넣은 홍어, 살충제를 쓴 인삼 등 유해 식품이 아주 많습니다. 옥수수 기름에다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로 바꾼, 황산 식용류를 만들어 30억 어치나 팔았습니다. 그밖에도 타르 색소를 넣어서 암을 유발시키고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키는 검은 깨, 발암 물질인 묵,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등 불량 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병든 소를 잡아서 소고기를 팔아먹지를 않나, 육류도 불량 식품이 참 많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량 식품, 한국의 부정부패가 빨리 떠나게 하시고, 진정한 건강 식품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사시는 95세 동갑내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병호, 송원금 씨는 결혼 생활 80년 동안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교회 때문이여. 교회 가는거 밖에 몰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며, “우리는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셋째도 교회, 교회밖에 몰라요.

교회 열심히 다녔더니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예배 시간마다 나가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신앙이 좋으니까 그 집 아들, 딸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신앙, 사랑의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시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무관심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세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보아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우주만물 즉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조물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하는 약간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하나님은 위대하셔서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무소불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지하시고(omniscient)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하나님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요. 어떻게 빅뱅에 의해서 우연히 생긴 해와 달과 별들이 질서 있게 운행될 수 있습니까?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단 5분도 늦지 않고 24시간에 자전하고 365일에 공전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인간과 생물은 다 죽을 것이고 조금만 더 멀면 우리는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또 골고루 햇빛을 비치게 하려고 지구가 23.5°가 기울어져서 회전하니까 우리가 살지 기울기가 10°만 달라도 한쪽은 타 죽고 한쪽은 얼어 죽습니다. 또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수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생물이 살 수가 있지 만일 물이 조용히 가만있으면 물이 썩어서 생물이 살 수가 없고 인력이 너무 강하면 지구가 물로 다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돌면서도 바닷물이 쏟아지지도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이 시계도 설계하고 만든 분이 있는 것같이, 이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듯이,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많은 머리칼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설명합니다.시편 139편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의 이름까지 아시고 찾아오신 분이며 남편을 여섯 번이나 갈아 살며 외롭고 왕따당한 수가성 여인이 물 길러 올 것을 아시는 세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예수님 주위에는 벼슬이 높고 막강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권세자들이나 부자는 별로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세밀하신 주님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난 자식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 정박아 자식의 손톱과 발톱 하나에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어떤 때 하나님은 꼭 실수하셨거나 깜빡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고아와 같은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는 말씀에 순종하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입니다.당시 파사와 메데의 큰 나라를 통치하는 아하수에로 왕 밑에 둘째로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만이란 교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온 국민이 엎드려 절을 했는데 신앙이 독실한 모르드개만은 우상이나 사람 앞에는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르드개만 아니라 온 유대 백성을 하루아침에 다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가지고 왕의 조서에 어인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때에 온 유대 백성이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멸절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통곡을 했겠습니까?오늘날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온갖 핍밥과 비난과 훼방을 받고 원망도 듣는 법입니다. 에스더 4장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했으니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다 몰살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욕하고 원망하고 죽일 듯이 날뛰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 때 이런 핍박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왕이 모살당할 뻔했을 그것을 발견하고 즉시 고발하여 왕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21~23절에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스더 6장 1~2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이어 3절에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요, 공을 세웠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도 바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대 역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사랑이었습니다.에스더 6장 4절에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6절)라고 하니까 하만이 왕후의 만찬에 초청도 받았던 터라 “나밖에 누가 또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7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50규빗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왕의 말에 자기가 제안한 대로 모르드개를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날 밤 잔치에 다시 초대 받았는데 에스더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하고 진멸하려는 자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할 때 끌려 나가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하나님은 “역전의 명수”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으나 포상도 못 받았고 왕이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역사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였지만 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이었습니다.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간섭하시고 60억 인구의 머리털도 다 알고 세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실수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간 것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나가거든 나를 변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까맣게 잊은 것도 도무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또는 실수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꿈 해몽 받은 사람이 나가서 잊지 않고 즉시 왕께 고하여 출감했더라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도 해몽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애굽의 국무총리도 못 되고 자기 민족과 애굽 백성을 구원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지라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세밀하셔서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때론 징계하시고 때로는 칭찬하시고 축복도 하십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대강대강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믿지 말고 섬세하시고 세밀하셔서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적당히 거짓말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생활해야 합니다.어느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십일조도 안 하고 기도생활도 안 했는데 미국에 가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같았는데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한 다음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인 생활을 한다고 간증하더랍니다. 새벽기도 한 번만 빠져도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느끼고 주일성수 한 번 안 해도 사랑의 채찍을 맞고 십일조 한 번 떼어먹어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로 손해를 보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관심 깊게 보시는 분입니다. 세밀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무슨 일이나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할 때에도 “가리이까, 말리이까?”, 또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물어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 “하나님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때로 하나님의 실수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의 말씀에서 선택한 사랑에 대한 본문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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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부터 5장을 읽으면서 ‘사랑”에 관한 설교 본문과 제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26-28) 참조 5:1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צֶלֶם tselem)”이라고 합니다.

צֶלֶם 스트롱번호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체렘’이란 단어의 의미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한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체렘의 의미 / 길가에 버려진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가 저렇게 큰 바위를 길에다 버려두었나?

이때 어느 조각가 한 사람이 그 바위를 조각실로 옮긴 후에 부지런히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조각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 이라고 합니다.

가죽옷(창세기 3:21)

옷(케토넷트, כְּתֹנֶת kethôneth)

1. 사람의 가죽, 2. 시어에서는 몸, 3. 짐승의 가죽

발음 : kethôneth

어원 : 40:14, כָּתְנוֹת, 출 39:27, 복수 연계형 כִּתְנוֹת, 창 3:21, 출 39:27, 복수 어미활용 כֻּתָּנוֹתָם, 레 10:5, ‘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옷(창 3:21), 속옷(출 28: 39, 29:8, 39:27), 겉옷(출 40:14, 레 8:7), 옷(레 10:5, 삼하 15:32, 아 5:3), 채색옷(삼하 13:18, 19), 의복(느 7:70,72).

구약 성경 : 29회 사용

가죽(오르, ʽôwr) עוֹר

어원 : 578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죽(창 3:21, 레 4:11, 욥 2:4), 살(출 22:27),꺼풀(출 34:29, 30), 피부(레 13:2, 34, 렘 13:23, 욥 18:13).

구약 성경 : 99회 사용

모두에게 잘 알려진 본문을 설교하려면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과 가죽옷의 의미를 묵상합시다.위에서 소개한 이미 설교한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01-19-2019).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 이유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의 의미를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희생 – 십자가(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둘째는 피 – 보혈(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아담과 하와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하였지요.

인위적인 방법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여전히 신앙의 울타리로 넘어오는 인위적인 가르침, 교리, 교주, 교단, 이념 등과 같은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영적인 방법 즉 신적인 방법만이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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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 지역에서 “우리농장”을 운영하는 “김은각집사님”

오래 전 여의도에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께서 북한에서 가져온 북한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부탁하기를 “이목사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은각집사님은 당시 월드비전의 북한 사업 담당을 하시던 고 박창빈목사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마침 북한 지역에 1000평 규모의 비닐 하우스를 제작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모든 자재는 남한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제품이 중국산 보다 훨씬 견고하고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 당국에서는 남한의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오면 혹시 남한 제품에 대한 우수성이 드러나므로 매우 긴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에서 모든 재료를 선적하여 배편으로 북한 원산항으로 운반하는 일을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비닐 하우스에서 첫 열매를 가져와 서울에서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참외, 오이, 깻잎…..

척박한 북한 땅에서 비닐 하우스를 제작하고 수경재배를 통하여 농산물을 생산하였을 때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감격해 하며 정말 이것이 비닐 하우스에서 생산되느냐 하며 감격했다고 합니다.

수경재배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북한 생활 13년, 윤상혁 평양의대 교수가 전한 놀라운 이야기

2000여명의 시선이 꽂힌 무대 위 스크린에는 팔이 꺾인 채 재활치료를 받으며 활짝 웃는 5세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국인 최초로 평양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윤상혁 평양의대 회복기과(재활의학과) 교수,

그는 2007년 나진 선봉 지구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2년 전 코로나로 북한 국경이 봉쇄될 때까지 평양에 상주하며 척추 신경의학 및 뇌성마비와 자폐증 어린이들의 재활 치료에 힘써왔다.

척추전문의였던 그가 북한에서 ‘어린이 재활’ 영역으로 치료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돼 준 것이 복신이와의 만남이었다.

“난로도 없는 추운 진료실에 할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경직성 사지마비를 겪고 있는 뇌성마비였는데요.

보니까 입이 다 열려 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없어 그동안 할머니가 대신 입으로 씹어 넣어줬습니다.”

양육하고 있던 네 살 막내 딸의 얼굴이 떠올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해 본 게 처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더니 몇 주 후 근육운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복신이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쥘 수도 있게 됐다. 몇 달 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 회복기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을 때도 복신이를 데려와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침상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복신이는 소아장애 증상 가운데 평양의대병원에서 받아들여진 첫 사례자가 됐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복신이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6개월여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루는 복신이 할머니가 윤 교수를 찾아와 “복신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잠시 쉬고 오겠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낫지도 못할 아이 하나 때문에 입원해야 할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었다. 당시 북한 사회에서 복신이 같은 아이들은 가망이 없는 불치병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치료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윤 교수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치료를 포기한 채 복신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뇌성마비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차도가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복신이 같은 자녀를 키우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뒤 윤 교수의 치료실 앞에는 뇌성마비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복신이가 집으로 간지 1년쯤 지나는 동안 여러 아이들이 병원을 스스로 걸어 나갔고, 증상이 호전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나와서 치료과정을 촬영하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복신이와 같은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위한 소아행동발달장애 전문병원을 같이 세우기로 했습니다.”

윤 교수는 언젠가 복신이를 병원으로 데려와 다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소문해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복신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복신이와 같은 아이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천국에서 제일 반가워할 그 일, 바로 어린이를 섬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뇌성마비 아이들의 치료센터와 전문의 교육과정도 국가의 승인을 받게 됐다. 복신이로 인해 숨겨졌던 수많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윤 교수는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사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주님 앞에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의 마음을 받길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사랑, 하나님과 내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서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은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다시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예배자로 회복되고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윤 교수는 북한 전역에 유치원 탁아소 농촌진료소를 짓는 국제 NGO ‘선양하나’의 국제대표를 맡고 있다. 선양하나는 북한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2008년 6명으로 출발해 현재는 8개국 39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다니엘기도회’와 ‘미션라이프’로 실시간 중계된 이날 집회는 동시접속자 5500여명을 기록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해 은혜와 도전을 심어줬다. 셋째 날 집회인 27일에는 김승욱 할렐루야교회 목사가 메신저로 나설 예정이다.

자료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016348&code=61221111&sid1=chr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 땅 북한에서 13년을 살아 온 50세 남성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2000여명의 시선이 꽂힌 무대 위 스크린에는 팔이 꺾인 채 재활치료를 받으며 활짝 웃는 5세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외국인 최초로 평양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그는 2007년 나진 선봉 지구에서 진료 봉사를 시작해 2년 전 코로나로 북한 국경이 봉쇄될 때까지 평양에 상주하며 척추 신경의학 및 뇌성마비와 자폐증 어린이들의 재활 치료에 힘써왔다.척추전문의였던 그가 북한에서 ‘어린이 재활’ 영역으로 치료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돼 준 것이 복신이와의 만남이었다.“난로도 없는 추운 진료실에 할머니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왔습니다.아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경직성 사지마비를 겪고 있는 뇌성마비였는데요.보니까 입이 다 열려 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없어 그동안 할머니가 대신 입으로 씹어 넣어줬습니다.”양육하고 있던 네 살 막내 딸의 얼굴이 떠올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를 치료해 본 게 처음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더니 몇 주 후 근육운동에서 변화가 보였다. 복신이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주먹을 쥘 수도 있게 됐다. 몇 달 뒤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 회복기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을 때도 복신이를 데려와 치료할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침상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복신이는 소아장애 증상 가운데 평양의대병원에서 받아들여진 첫 사례자가 됐다.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복신이 치료를 멈추지 않았지만 6개월여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루는 복신이 할머니가 윤 교수를 찾아와 “복신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잠시 쉬고 오겠다”고 전했다. 알고 보니 낫지도 못할 아이 하나 때문에 입원해야 할 다른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구절: 요한일서 1:4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인들이 알고 사랑하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요한일서 1장 4절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진술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블로그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 구절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더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논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구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종종 그것을 인간의 사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완전하고 불변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흠이 있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종종 그 순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완전히 다르며,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진 경유 믿음의 거인

그러면 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글쎄요, 무엇보다도 그분이 사랑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따라 살다 보면 참된 행복과 성취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조건 없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신 것처럼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마지막으로, 매일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하고 당신의 삶에서 그분의 셀 수 없는 축복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다 보면 참된 행복과 성취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중요한 구절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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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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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답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읽어나갈 때 혹시라도 펜이 있으신 분들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표시를 해두시기 바랍니다. 없으신 분들은 읽으시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손가락으로 한 번 헤아려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서른 번 정도 되죠? 연애편지를 쓰더라도 이렇게 사랑이 많이 반복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 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다니시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 본적이 없습니까? 왜 교회에서는 혹은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하라는 것이 별로 없을까? 물론 교회에 오면 술, 담배 하지 마라부터 성경공부 해라, 기도회 나와라, 십일조 해라 어제는 또 청소하러 나와라 등 귀찮게 하는 일들이 많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교리를 알게 되면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술, 담배 해도, 성경공부 한 번도 안 나와도, 기도회 빠지고, 십일조 안 하고, 청소하러 안 나와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깜짝 놀라시는 분들 계시네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에는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라고 합니다. 거저 주는 선물, 쉽게 말하면 공짜라는 겁니다. 그래서 좋고 고맙긴 한데 뭔가 찜찜합니다. 죽으면 천국 간다는데 안 죽어봐서 알 길은 없고,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데 지금 내 생활을 봐선 나라도 구원해주기 싫을 것 같은데… 돈을 주고 물건을 배달 시키면 그 물건을 받기 전에 영수증을 꼭 챙겨둬야죠.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 산 것도 아니고 공짜로 받은 거라 영수증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기 전에 확인도 안 되고… 한편으로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그렇게 좋은 거라면 내가 뭐라도 좀 거들어야 될텐데… 아무리 공짜라도 사람 사는 데 정이라는 게 있지, 인지상정상 또 맨 입으로 낼름 받아 먹기는 뭣 하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사람들 눈치도 있고 하니까 주일만큼은 좀 참고 거룩한 표정 좀 지어주고, 보는 사람들 있을 때만이라도 착하게 사는 척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이슬람교나 불교나 기타 다른 종교들처럼 분명하게 해 주면 좋지 않습니까? 적선! 적금처럼 선을 쌓아두는 겁니다. 죽고 나면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한 나쁜 일과 좋은 일을 양팔 저울에 달아본다는 데… 나쁜 일 많이 한 것 같으면 좋은 일도 조금 해서 균형을 맞추어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불안하면 죽을 때 재산 헌금하면서 한꺼번에 뒤집는 겁니다. 혹은 어떤 성지를 순례하고 와야 한다거나, 어떤 곳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간다든가. 비주얼이 강조되는 요즘 세대에 맞게 구원에 관한 뭔가 분명한 그림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와 보니 또 예수를 믿어보니 알면 알수록 그런 건 없습니다. 몇 년 동안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의 설교는 이러한 저의 고민과 현재까지의 해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뭔가 분명하고 거창한 일 없을까요?” 쉽게 말해 하나님을 위해 폼 나는 그 무엇을 보란 듯이 해 보이고 싶은데 그런 게 없냐 이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는지 그냥 마음의 소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너 사랑이라도 해 볼래?” 당시 저는 십대 후반이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렵고 무거운 단어인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드는 생각은 “너 사랑이라도 해 볼래?” 였습니다. 반문했죠. 아니 사랑 뭐 그런 거 말고 좀 폼 나는 거 없습니까? 선교지에 가서 순교를 할까요? 빈민촌에 가서 일생을 봉사할까요? 나병환자들에게 갈까요? 뭔가 봉사를 해도 구체적이고 번듯한 무엇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반문이었습니다. 그래 뭐 당장은 학교도 다녀야 하고, 군대도 안 갔다 왔으니까 일단 ‘사랑’ 그걸 한 번 해보자!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 지 이미 아시겠죠? 한 번 해 보려고 하는데, 그거 정말 폼 안 나고, 귀찮고, 어렵던데요? 추상적이고 먼 곳의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까운 곳에서의 사랑에 주목해 봤습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외국 어느 나라의 어린아이들의 한 끼를 해결하는 것보다 먼저 부모님, 형, 누나, 교회 지체들 그리고 친구들이 더 힘든 대상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 사랑 받기만 해 봤지 무슨 사랑을 제가 하겠습니까? 1년에 한 번 어버이날, 그리고 두 분의 생신 외에 뭐가 있었겠습니까?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는 그나마 했지만, 부모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낯 뜨거워서 못 하겠던데요? 그래 말은 둘째로 치더라도 순종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시죠? 부모님 말씀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사실 부모님 말씀만큼 저에게 도움되는 말씀이 없는데 굳이 반대로 합니다. 부모님 말씀 순종하는 거, 하려고 보니 십계명에도 있는 말씀이고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는데 하면 할수록 참 어려웠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의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숨 쉴 곳조차 없었습니다. 형, 누나. 먹을 것 가지고 싸우기나 했지 심부름 시키면 얼마나 귀찮고 짜증납니까? 사랑이라… 참 멋적더군요. 교회 지체들이요… 몇몇은 괜찮지만 조금만 범위를 넓혀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잖아요. 교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의 핑계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로 확대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다가가게 되니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랑’에 대해 추적해 보았습니다.

십계명을 크게 둘로 나누면 이렇게 구분되어진다고 합니다. 찬송가 뒷 면을 보거나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제일계명에서부터 제사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제오계명에서부터 제십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더군요.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결국 둘을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듣고, 배웠더군요. 우리가 가장 처음 암송하게 되는 구절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3장 16절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알고 나서 보게 되니 정말 온통 사랑이구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게다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좀 과하다 싶은 구절입니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제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전통 식사는 옆으로 기대어 누워서 했다고들 하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 기대어 식사하던 사람이 주로 요한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을 볼까요? 요한은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져 본 이후 예수님을 통해 본 하나님을 이렇게 결론지어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가 쓰여진 연대는 대략 AD 90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50년이 넘은 시점입니다. 요한일서를 쓰던 사도요한은 당시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일겁니다. 피 끓는 청춘남녀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서 주고 받는 연애편지도 아니고, 헤어진 지 50년도 넘은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이렇게 구구절절이 사랑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먼저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빛에 거하는 것이고 어두움에 거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드는 예가 바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2장 9절부터 11절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냐 어두운 가운데 거하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 다른 말로 구원받았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매하게 여기던 구원의 확신 어떤 증명서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말씀이죠. 반대로 오늘 읽은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게 말이야 쉽지 피를 나눈 형제, 자매도 평소에 사랑하는게 어렵습니다. 무슨 외부의 적이 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둘 사이에 결속력이 강해지기 전에 평소 밥 먹으면서 비슷한 옷을 나눠 입으면서 사랑을 나누며 확인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이렇게 떨어져 살아보니 그리고 커 보니 형제, 자매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 먹으면서 알게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 더 확대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지칭되는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일. 어떻습니까? 옆에 계신 분들 얼굴을 한 번 보시죠? 그나마 장난이라도 칠 수 있는 사이면 다행입니다. 멋적은 웃음 정도로 목례하는 사이라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더 심각한 건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제일 심각한 건 누구시더라… 입니다.

100명 남짓한 우리 적은 식구들. 물론 자주 바뀌는 어려움이 있기는 합니다만 정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서로 반갑게 얼굴 보며 인사하고 안부 나눌 수 있는 사이들인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거 큰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은커녕 인사도 안 하고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천국 확실히 가려면 이 악물고라도 웃는 척 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거죠. 이거 뭐 술, 담배 끊기 보다 힘들구요, 차라리 성지 순례를 한 번 다녀오거나 생각날 때마다 주머니에서 동전 꺼내 주는 게 낫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거 꼭 해야 된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답한 형제, 이웃 사랑하는 이야기 그만 두고 그렇다면 그나마 자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 볼까요? 하나님 제가 이웃 복이 조금 없어서 이웃 사랑하기는 참 만만치 않으니까 하나님 사랑 조금 더 하는 걸로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제가 헌금도 많이 하고, 예배도 안 빠지고, 주일학교 선생님, 식사 준비, 주방 정리 등 다른 거 열심히 하겠습니다. 예!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헛다리 짚었습니다. 쉽게 말해 선물을 할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좋아하는 거 혹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거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대학 다닐 때 받은 선물 중 가장 난감한 것이 CD였습니다. 전 CDP가 없었습니다.

성경의 몇몇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거룩함에 대해 죽음으로 엄중한 경고를 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무런 소용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없고 심지어는 지겹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야구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게 야구 글러브 선물하기, 외국 나가는 친구 수화물 부친 뒤에 나타나서 200밀리 넘는 향수병 선물하기, 수술 전 금식 중인 환자에게 먹을 거 갖다 주기라고 할 수 있겠죠. 받으시는 하나님은 필요 없어 하거나 관심 없어 하는 부분에서 용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것들인 공평, 정의 혹은 공의, 인애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그건 우리가 좀 싫습니다. 귀찮고, 폼 안 나고, 바보취급 당할 수도 있고, 하루 이틀에 끝날 것도 아니거든요.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자신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쉽지 않습니다. 어금니 꽉 물고 하는 것도 한도가 있죠. 이건 뭐 차라리 수도원 들어가서 안 부딪히고 사는 게 낮지 싶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변명이 이것입니다. 저 사람이 먼저 저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걸 콕 꼬집어서 하는 저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그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4장 10절, 11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안에서 뭔가 쥐어짜내 듯 사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일단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표현으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냐 혹은 신실하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기가 유모차를 타고 갈 때 넘어지지 않을까 꼭 잡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다. 조금 커서 걷게 되면 아빠 손을 잡고 걸어 다닐 때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 바짝 써 가면서 걸어 다니는 거 아닙니다. 아빠는 여유 있게 아이의 손을 잡으면서 이것저것 위험한 것은 없나 살피면서 걸어갑니다. 아이는 그냥 아버지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잡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겁니다. 일단 안심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2장 9절에서 11절의 말씀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게 바로 오늘의 해답이고 결론입니다. 사랑이라는 거. 머리로 하는 거 아니고, 어금니 깨물면서 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골머리 앓으시다가 결국 할 수 없어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까? 아니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금니 깨물면서 으이구 이 녀석들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게 아닙니다.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입니다. 위급한 순간에 품 안에 있는 어린 아이의 생명을 위해 몸을 던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씩 접합니다. 그 엄마가 머리 써서 혹은 어금니 깨물어 가면서 한 겁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와 그렇게 한 겁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위대하다 혹은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연구결과로도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됐습니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그 가냘프던 여인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엄마의 사랑보다 위대하며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했으니까 너희도 그 대가로 서로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후불을 전제로 하는 구입과 뭐가 다릅니까? 내가 너희를 이처럼 사랑했으니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가까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50여년이 지난 그 시점에까지 이렇게 사랑을 자랑하고, 전합니다.

사실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가장 큰 목적 중에 하나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라는 이단에 대항하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론적인 글일 것 같은 요한일서는 의외로 사랑타령으로 대부분을 채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복음의 핵심입니다. 믿음만을 중하게 여기는 것 같은 바울의 편지나 행위로 믿음으로 보이라는 야곱의 편지는 서로 상충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로 따지니까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자라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도의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이상하지만, 교리상 틀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랑’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실 그 탕자의 비유는 다른 의미가 있지만 오늘 보는 관점으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돌아와서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게 된 탕자는 다시 그런 짓을 할까요? 물론 게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열에 아홉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이런 사랑을 알고 그래 다시 나가자 그러다가 돌아오면 또 받아주시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거죠. 만 데나리온을 탕감 받고 돌아가다가 오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게 하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고 그 소식을 들은 주인에게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도 있냐구요?

오늘 날로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빚이 10억 정도 있어서 매월급에서 70프로씩 원천징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뭐 월세를 벋어날 희망도 없고, 그나마 있는 자식들도 친척집에 흩어져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제금융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탕감을 받게 되었답니다. 이제 월급 전체를 집으로 가져 올 수 있게 됐고, 흩어진 가족들이 한 상에 둘러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다가 얼마 전에 나한테 100만원 빌려 가고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10억 때문에 인생이 너무 힘들었던 그 사람이라면 오늘 그 10억에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100만원 빌려간 친구. 먼발치에서 먼저 알아보고 도망가려던 그 친구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괜찮다고 난 오늘 10억이나 탕감 받았는데 100만원은 잊어버리라고 하게 되는 거죠.

요한일서의 표현을 빌자면 10억 탕감 받았으니 100만원을 잊어버리라고 말해주는 것이 마땅하니라입니다. 바울은 10억 탕감 받은 것에 기뻐하고 이제 월셋방에서 살지 말고 흩어졌던 가족들 다 불러와서 행복하게 살아라고 하는 겁니다. 야고보는 100만원 탕감 안 해주면 10억 탕감 받은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억 탕감 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 어떻게 증거를 대거나 말할 수 없지만, 그 100만원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히 10억을 탕감 받은 것이고, 아직도 100만원 때문에 그 사람을 잡아서 경찰서에 데리고 가는 걸 봤을 때 그 사람은 10억 탕감 받지 못 한 사람이라는 거죠.

저는 항상 돌아온 탕자의 뒷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그 탕자가 남 같지 않거든요. 시기하던 형과의 관계도 궁금하구요. 아마 그 약발이 몇 일 못 갔을 겁니다. 다시 옛날처럼 흥청망청 쓰고 놀던 때가 생각나겠지요. 아~! 그 때 이것만 안 했으면 아직 나 혼자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아버지 말씀은 이제 무조건 잘 들어야지 하던 다짐도 몇 일 못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 탕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입니다. 돌아오던 그 때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사는 거죠. 우리가 받은 선물이나 좋은 소식들도 그 약효가 얼마나 갑니까? 좋은 차는 한 달 정도, 좋은 집은 서너 달 정도 간다고 합니다. 원하던 합격 소식, 기다리던 계약 체결, 승진, 결혼 득남 혹은 득녀 여러분의 지난 삶 속에 여러분을 기쁘게 했던 많은 소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정말 여러분은 너그러웠고, 여유 있었습니다. 귀찮던 동생의 장난도 어느 정도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피곤한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몇 일만이었겠죠. 그런데 그런 일들이 잊을 만 하면 생기고 잊을 만 하면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도 잘 안 다가오십니까? 매일 공돈이 100파운드씩 생기면 어떨까요? 외국에 나오니 이런 것들도 그립습니다. 하루에 세 끼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한 끼라도 따뜻한 한국밥상을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집안 일에 지친 어머니들은 매일 한 끼라도 누가 해주는 밥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여전도회수련회에서 일단 그렇게 한 끼 식사가 해결됩니다. 매일 교회 식구들 먹이시느라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는데 비록 한 끼지만 대접 받으니 좋습니다. 이렇게 뭔가 받으면 좋습니다. 잠시라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조금 너그러워집니다. 받은 게 크면 그 약발이 조금 오래 가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비밀 혹은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to be a Christian’에는 아무런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as a Christian’이죠. 그런데 그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해 나가는 일들이 예전의 방식대로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힘으로 거뜬히 해나가는 겁니다. 약발이 떨어져 간다면 다시금 받은 복을 세어보십시오. 그러면 또 새로운 사랑이 솟아 나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시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다고 하신 이유 아닙니까? 이미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선물만으로도 우리 맘 속에 끊임없이 솟는 사랑과 기쁨의 샘을 가진 것입니다. 또한 하루하루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말 할 때나 들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마침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오늘 한 번 봐 준다” 그렇게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 상대방에게 기분 쓰는 일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린 그렇게 상대방에게 베풀 수 있게 많은 것을 끊임 없이 받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금니 꽉 깨물고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닙니다. 기쁘게 순례의 길 갑니다. 우리가 가는 길, 형제 자매 이웃 사랑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엄청난 사랑을 주셨으니까 그 사랑에 감격해서, 그 약발로 남편을, 아내를, 자녀들을, 형제를, 자매를, 지체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겁니다. 남 다 주고 나는 굶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나눌수록 더욱 풍성하게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이고, 신앙의 비밀입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 아시죠? 가난한 부부는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탐스러운 머리털을 팔아서 남편이 아끼는 회중시계의 줄을 사 줍니다. 한편 남편은 비록 줄은 없지만 아끼던 회중시계를 팔아 부인의 머리빗을 삽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로의 선물을 꺼내게 되죠. 서로 순간 당황했지만 아내는 머리는 다시 길 거니까 고맙게 머리빗을 받겠다고 하고, 남편도 어색하고 당황스러움을 떨치고 함께 기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자고 합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당신 주려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하필 왜 그랬냐고, 내가 다시 이런 일을 하나 보라고 싸울 수도 있는 장면이었죠.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부부는 그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합니다. 이 소설의 결말도 감동적이지만 시작 또한 정말 경쾌하게 시작됩니다. 서로에게 선물을 사 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자신이 아끼던 것, 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남편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팔아서라도 선물을 사 줄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쁜거죠.

“더 잘 해 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 아시죠? 사실 우리는 저 사람이 나에게 더 잘해주지 않아서 아쉽죠. 그런데 서로를 보면 사실 사랑 받을 만한 사람 드뭅니다. 하지만 더 사랑 받을 만하지 않던 우리들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지금 그리 사랑 받을 만 하지 않아 보이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께 더 잘 해 드리지 못 해 죄송한 마음 또한 이웃들에게도 그 감격으로 사랑을 흘려 보내는 마음이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의무감으로 가득 찬 생활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더 잘 해 드리지 못 해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힘이 떨어질 때마다 상대방이나 주위의 상황을 탓하는 게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거뜬히 나아가는 거죠. 항상 즐겨 묵상하는 찬송가 가사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이라는 찬송인데요 그런 기쁜 순례의 길을 행하는 근원적 힘이 바로 오늘의 설교제목이기도 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404장을 마지막으로 부르실텐데요 부르시기 전에 가사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정말 명곡 중의 명곡 아닙니까? 후렴 가사에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바꿔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사랑하세.”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이제 사랑합시다라는 겁니다. 우리 일어서셔서 다 함께 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이 사랑을 주위에 흘러 넘치게 합시다. 이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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