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달란트 빚진 자 | 일 만 달란트 빚진 자 / 불의한 하인 비유 / 유튜브 어린이 설교 시즌3 [7회]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7 / 마태복음 18장 21~22절 12900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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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도 1분기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시리즈로 진행됩니다.
2. 미션 성공한 친구들은 카카오톡으로 성공 소식과 느낀점을 보내주세요 🙂
카카오톡 ID : jesus861226
3. 어린이 설교 컨텐츠 제작을 후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후원계좌 ㅣ 535502 04 019487 김경훈(국민은행)
응원메일 ㅣ [email protected]
# 본문말씀 : 마태복음 18장 21~22절
# 영상제작 : 엠엔엠연구소
# 스크립트 : 김수민 작가
# 일러스트 : 봄들창작소 (작가 : 양명진)
# 엔딩 BGM : 장유나 [달콤달콤 예수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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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 – 성경의 진리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 … 우리는 이 비유를 마태복음 18:23-35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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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wordofgod.kr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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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 다음블로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등장시켜서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일만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1조 8천억원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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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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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 네이버 블로그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가 20만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입니다. 그건 갚을 수없는 무한의 빚인 ‘사망의 빚’을 상징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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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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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 기멀전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 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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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8/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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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성경에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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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odgood99.tistory.com

Date Published: 9/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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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예수님 말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 …

그러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렇게 용서를 받았으니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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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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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3월 30일(월) 마태복음 18:21-35 진정한 용서의 어려움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다. 그리고 너에게 죄를 범한 자는 백 데나리온을 빌린 자이다. 네가 너를 불쌍히 여김처럼 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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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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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주님의 큰 은혜를 입었지만

만일 구원을 받았다면 좀 굶어도 괜찮고, 죽을 위험에 처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처럼 살지 않고, 이 복음만을 위해 사시면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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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or.kr

Date Published: 3/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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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 Author: 후니티비 hooni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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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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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

성경의 진리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

우리는 이 비유를 마태복음 18:23-35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일만 달란트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그 누구도 이만한 금액을 벌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막대한 금액이 이 종이 가진 빚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인 주인이 이 빚을 탕감해주십니다. 이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과분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가 정확히 하나님의 유형인 이 주인이 한 일이었습니다: 종의 탄원을 받음에, 그는 그 종을 용서하고 이 막대한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종은 이제 자유인것입니다! 그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탄원하는 것 이외에는 빛의 용서받음을 얻기위해 다른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보기에, 이는 저와 당신 모두에게 이가 완벽한 이미지임을 확신합니다. 이 종에게 일어난 그에게 보여진 은혜와 자비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보여진 은혜와 긍휼과 동일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는 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베소서 2:1-9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의 부채는 거대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이자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종이 한 것처럼 엎드려 왕에게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빌었습니다. 그리고 왕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것처럼 그 종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로서 그는 그의 막대한 부채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저나 당신 또는 그 종이 이 부채를 지불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를 통한 믿음에 의함이며 우리의 행함에 대한 대가로 획득될 수 없으니 이는 아무런 행함도 우리의 막대한 부채를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는 그의 종이 한일을 보았습니다: 용서받은 막대한 부채에도 불과하고, 그는 그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 종의 빚을 거부하였습니다. 그 종은 용서받았지만 그는 용서받은 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런 심판을 여기에서 하지 않은것처럼 지금 왕께서 공평하실 것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는 완전히 불공평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실것으로 기대하는 바인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을 용서하기를 기대하며, 용서받은 대로 행하지 않음에도 그들이 심판 받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종을 심판하시고 근본적으로 용서받은 막대한 죽음을 되돌려 주실때 그는 은혜가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은혜는 그가 종의 막대한 부채를 근본적으로 용서하셨을때 보여주셨습니다. 이 종은 용서받은 바와 같이 행하지 않고 그의 동료 종을 억압하는 자유를 남용, 그들의 그에 대한 작은 부채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길 바랬으나, 정의가 그에게도 적용된것입니다! 그럼으로 은혜와 공의(정의)를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모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은혜와 정의이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잘못하는 자들에대한 심판을 요청하면 심판은 주어지겠지만, 이가 우리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오해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님의 기도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께서 이에 대해 14-15절에 보다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친절과 선함뿐만이 아니라 각 심각도와 함께하는 완전한 정의이며 이는 로마서 11:22에서 바울에 의해 탁월한 방법에 의해 요약되어 있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친절이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값을 지불하신 오직 한분이신 그리스도에 거하여 믿음의 좁은 길을 따라 행함을 계속한다면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를 행하지 않고 그의 친절안에서 계속하지 않으면 즉 다른 말로 그 종처럼 죄와 우리가 죽었던 것으로부터 용서받은 것과 같이 행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가 기대할 것은 친절함이 아니라 심각함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두이시며 우리가 얻는 것을 우리가 선택함이 명백합니다.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

나의 사랑하는 책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등장시켜서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일만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1조 8천억원 정도가 되는 돈이에요.

어떤 개인이 그것도 고대시대에 고만한 돈을 빚을 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거에요.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민족 전체가 로마에 냈던 일년 세금이 800달란트였어요.

한 나라 전체 세금이 800달란트였다니깐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빚졌데요.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 죄인들을 대표하는 자에요.

우리들이 그렇게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해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부채를 져서 율법이라는 그 채무증서를 가지고 영원한 감옥에서 그 댓가를 치뤄야하는 구원받기 전의 죄인들의 실존이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거에요.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 어떤 댓가가 치뤄져야 하는지 보세요.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게 하라 한데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마18:25)

자신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못 갚는게 죄의 부채라는 걸 보여주는 거에요. 그런데 그 빚진 자가 그 주인한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그래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갚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가 20만년을 매일 같이 일해서 한푼도 안써야 그 돈을 모을 수 있어요.

빚진 자는 그 주인 앞에서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리로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 앞에서 죄인들의 실존인거에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헌금 많이 한다고, 봉사 많이 한다고, 선교 많이 한다고 우리가 하나님께 그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갚긴 뭘 갚아요.

주인이 그러한 자를 불쌍히 여겨서 은혜로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줬어요.

그냥 은혜로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1조 8천억의 빚을 그냥 은혜로 없던 걸로 해버렸습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근데 그 일만 달란트 탕감 받는 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목을 조르고요 감옥에다가 쳐 넣어 버렸어요.

100데니라온은 1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에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는 요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모습인 거에요.

하나님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줬는데 구원을 줬더니 자기에게 요만큼 손해 끼친 자를 목을 졸라서 거의 죽이더라는 거에요.

이때 주인이 감옥에다가 넣고 “그 빚 다 갚을 때 까지 너 여기 있어” 라고 이야기 했어요.

20만년 갚아야 되는 그 돈을 감옥에서 갚아라라고 이야기 했어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올라라 이야기하는 거에요.

너무나 값비싼 것이라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길이 없어서, 값없이 줄 수밖에 없었던 일만 달란트짜리 구원.

값없이 준다니까 너무 싼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세상을 다 합해서 하나님 앞에 내 놓아도 한 사람의 구원의 값이 안된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값없이 줄 수 밖에 없었던 거지 그게 무슨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서 값없이 준거 아닙니다.

그 일만 달란트짜리 구원 앞에서 그 영생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은 이들이 백데나리온에 불과한 이 세상의 손해에 일희일비 하는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를 경각시켜 주는 비유인 거에요.

너희들이 정말 구원의 가치를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거져 주었다라는 것을 정말 아느냐? 라는 그런 물음인 거에요.

만일 알고 있다면 그 1조 8천억짜리 은혜 앞에서 왜 2천원짜리 손해를 그렇게 분해하느냐? 라고 그렇게 묻는 거에요 .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에요.

우리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께 다시 갚을 길이 없는 너무나 엄청난 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채무 변제를 받은 우리가 고작 백데나리온을 손해 보았다고 해서 악착같이 자기의 권리와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맞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전체에 힘과 가치를 다 합해도 백데나리온이에요 2천원이란 뜻이거든요.

예수님은 지금 구원을 일만 달란트로,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백 데나리온으로 비유하고 계신 거에요.

누군가가 사기를 쳐서 내 모든 소유를 전부 다 뺏어 갔어요 그래봐야 얼마에요? 2천원.

◈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예수님의 비유 ◈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복있는사람은 이웃추가

◈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예수님의 비유16강 중에서…)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실 때 정말 주의해야 할것은 성경 속에서 인간과 종교와 도덕과 윤리에 대한 교훈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책입니다. /

마태복음 18장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용서의 비유로 건너갑니다.

그 용서의 비유에는 세 층의 계급이 나옵니다.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입니다.

그 층과 층 사이에는 관계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되고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을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의 관계가 설정이 됩니다.

먼저 임금과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의 관계는 용서와 은혜의 영역 안에서 성립이 됩니다.

임금은 용서하는 분이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용서 받는 자입니다.

그렇게 두 층 사이에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우산 아래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관계가 등장하는데

그 관계에 임금이 개입을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탕감 받은 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까지 참견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한 것입니다.

임금은 자기가 빚을 탕감해준 어떤 존재가 독자적인 질서(선악)체계를 따로 챙겨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존재는 그 임금과의 용서(은혜)의 관계 속에서 다른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용서를 받았으므로 다른 이도 용서를 해야 한다’ 는 식의 그런 용서의 촉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가 20만 년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입니다.

그건 갚을 수없는 무한의 빚인 ‘사망의 빚’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릎을 꿇는 간절함과 가족들 모두를 동원하는 열심 등으로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채권자가 빚을 없애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임금은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소액입니다.

그런데 그 빚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에 그 소액 채무자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그는 지금 임금과 자신과의 용서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독자적인 질서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선악구조라는 것입니다.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가 그의 다른 관계와 전혀 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없는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힘을 합쳐 그 빚을 갚아 준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여 탕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늘 임금께서 거저 그리고 완전히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온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서 여전한 옛 사람의 잔재가 보입니다.

그 때 ‘자신의 멱살을 부여잡고 “네가 이러고도 구원받은 신자냐?’”하고 스스로에게 체벌을 가합니다. ‘

절망이 되고 우울해 지고 낙담이 되지요?

이 용서의 비유는 바로 하나님 은혜의 온전성을 설명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용서의 관계를 벗어나 네 독자적인 율법(선악)체계를 갖고 다른 관계(자신을 포함한 다른이)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를 듣고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날 감옥에 넣으실 지도 몰라’ 라고 초조해 하는 것이 감옥에 들어갈 일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반대지요?

우리가 주기도문을 공부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그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율법의 기각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지요?

은혜의 시대가 열려 율법대로 처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된 것처럼 우리의 죄가 그렇게 ‘은혜’로 용서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용서의 비유는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용서를 취소하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의 용서가 너희들 안으로 뚫고 들어가 버렸으므로 율법에서 자유 하라는 응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용서의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베드로가 ‘스승님 우리가 용서를 몇 번이나 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만 하면 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주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 했지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는 것은 7×7×10 즉 완전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7×7 하면 생각나는 게 있으시지요?

바로 희년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채무가 변제가 되고 노예가 풀려나 안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 희년.

그 희년의 완성자로 예수께서 오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너는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다” 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를 물으심으로 해서

‘넌 누구를 사랑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받아야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존재’

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장면과 똑같은 그림인 것입니다.

진짜 용서 영원한 용서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나의 모든 죄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게 용서가 되었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이 100 데나리온 짜리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빚을 그 어떤 조건도 자격도 묻지 않고 거저 탕감을 받은 은혜의 사람들은

그 임금과의 용서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 하고 그러한 자기부인 아래에서 진짜 용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만 비로소 사망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이

명료하게 인식이 되면 될수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백 데나리온 짜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나와 세상이 부인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오롯하게 가슴에 새겨질 때 하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여러분 같으면 얼마나 용서할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죄를 범했다는 것은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불의한 일을 하거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들이라면 한 번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누가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들거나 위험한 행동을 했을 때는 바로 크랙션을 누르거나 욕이 나오는 우리로서는 한 번 참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490번이라도 용서하라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참으라고 교훈했습니다. 랍비 요세 벤 예후다는 “사람이 한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사람이 두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 된다. 사람이 세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그러나 네 번째는 용서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여기에 두 배를 곱하고 하나를 더해 일곱 번까지 참으리이까 하고 말한 것은 대단한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이 정도 인내와 용서라면 그 사람은 가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즉 70×7=490번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주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자기에게 불의한 일을 할지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하루 일곱 번씩이나 참을 수 있는 인내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도무지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어려운 명령이 용서의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만해도 분노가 솟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듣거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당황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양보해서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들에 대해서 잘못을 행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더 힘이 들 것입니다.

지난 1988년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듀카키스 라는 민주당 후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사형제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유세를 했는데 어느날 CNN의 토크쇼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토크쇼의 앵커가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듀카키스는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다 말을 더듬기까지 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사형제 폐지가 정작 자기 일로 닥치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토크쇼 때문에 듀카키스는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용서는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49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도대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나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차라리 현실적으로 세 번까지만 참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90번까지라니요? 이것은 단지 더 많은 인내와 용서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자세를 바꿀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처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는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용서를 행할 수 있는지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1만 달란트의 빚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무엇보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들입니다. 그것도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보면 어떤 종이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이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한 달란트가 6000 데나리온입니다. 또는 1만 데나리온이라는 분(예레미야스)도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옛날 노동력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지만 대충 1만원으로 계산해도 한 달란트는 6천만 원, 1만 달란트는 6천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당시 헤롯 대왕의 한 해 세수입이 9백 달란트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한 나라의 예산을 상회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빚입니다. 주인이 25절에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렇게 자기 몸을 팔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그런 빚입니다. 당시 노예 대금이 5백에서 2천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궁 앞에 그 종이 26절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고 주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로 엄청난 빚을 진 채무자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졌습니다. 성경은 빚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엄청난 빚, 곧 죄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도대체 내가 왜 죄인이냐? 설사 죄인이라 할지라도 1만 달란트라 빚질 정도로 죄인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 생명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빚입니다. 우주에 수많은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시고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무상으로 땅을 공급받았고, 모든 능력과 함께 아름다움 인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전혀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불만합니다. 왜 자기를 더 반듯하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할 것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다 탕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범하는 것이 곧 빚입니다. 일례로 거짓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사나요? 워싱턴 타임즈 보도에 의하면 영국의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하루 동안 얼마나 거짓말하는지 조사해보니 평균 4번 이상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를 1년으로 계산하면 1460번, 60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면 8만8천 번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중에는 사소한 거짓말도 있을 것이지만 정말 심각한 거짓말도 있을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살인죄, 도둑질, 음란과 탐욕,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까지 합하면 우리의 빚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죄인인 것은 이 같은 죄들에 대해서 “인간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며 합리화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인구의 7분의1인 8억5천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있습니다. 2005년 기준으로 하루 1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갑니다.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은 3분에 1명꼴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 생산량은 인구 120억 인구가 먹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65억 정도됩니다. 우리는 먹고도 남아돌아 버리기까지 하며 다이어트 한다고 살빼기 경쟁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죄인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오래 사는 만큼 우리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

그런데 1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그 주인이 탕감해줍니다.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인이 자비를 베푼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 앞에 엎드려 애걸하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서 입니다. 아무리 해도 갚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신용불량자의 악순환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빚에 쪼들려 인간노릇 못하고 조바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인데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용불량자와 같은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었다’는 말이 헬라 어로 ‘테텔레스타이’인데 이 뜻에는 ‘빚을 갚다. 지불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인 예수의 피로 우리 모든 빚을 다 갚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우리 모든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103: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의 체험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이 하나님께 지은 빚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양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또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죄를 지은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무위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어떤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젊었을 때 자신이 생각하기에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만 그 죄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자유하질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는 자신의 교인 중에 환상을 잘 보는 나이든 부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환상 중에 그 부인은 가끔 주님과 대화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는 용기를 내어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부인께서 때때로 환상을 보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답니다.”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환상 중에 가끔은 주님과 대화한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그렇답니다.” 부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번 환상 중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저를 대신해서 한 가지 질문을 해주시겠습니까?”

부인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목사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번도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뭘 여쭈어 드릴까요?”

“부인의 교구 목사가 젊었을 때 저질렀던 죄가 무엇이었는지 한 번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호기심에 가득 차서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약속했습니다.

몇 주 후 목사는 다시금 부인을 방문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신 후 목사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최근에 환상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주님과 대화도 나누셨나요?”

“예.”

“그럼 제가 젊었을 때 저지른 죄에 대해 주님께 여쭈어 보셨습니까?”

“예, 물론이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긴장과 두려움에 가득 찬 채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부인은 목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은 자기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 변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살아온 환경이야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주 가혹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외모나 학벌 때문에 자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우한 환경이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수에 대해서, 어떤 일로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픔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놓았다가도 그 밑바닥에 있는 상처가 어쩌다 올라오면 주체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과거 자신의 실수, 불우했던 환경, 상처들, 가혹했던 운명에 대해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흘러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흘러간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면, 그 과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셨던 섭리들로 가득찬 아름다운 시간들로 바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빚기 위하여, 아, 하나님께서 주님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아픈 상처들을 허락하셨구나!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지 않는다며, 그 과거는 두고두고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싫은 데 이제 그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마저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기를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감히 누가 정죄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판단보다 전능하시고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판단이 더 올바르고,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자학하지 마십시오. 자학은 교만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적 태도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한 번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제가 과거에 많은 실수를 하였고, 아픈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1백 데나리온의 빚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지 말씀을 통해서 계속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8절입니다. 이 종이 이런 엄청난 은혜를 받고 밖으로 나가다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곧 동료를 만났습니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60만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데 이 종이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 동료는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29) 하고 탄원을 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를 본 동료들이 민망히 여겨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다 알립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2,33) 그리고는 그 무자비한 종을 옥에 가두고 1만 달란트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이 1만 달란트 받은 종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인이 자기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비의 눈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표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향한 표준은 매우 관대합니다. 자신의 잘못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격한 표준을 갖다 댑니다. 그의 의도는 악하고 그가 나에게 빚진 것은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의 용서의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바통을 받았습니다. 이 바통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 일을 포기한다면 경기는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면 나에게 발부되었던 하나님의 사면장은 이제 기소장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35절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가 용서해야 될 이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 위하여 굉장한 의지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부어주셨는지 기억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의지는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은혜를 입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가슴 아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답답하신 것은 네가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형제의 작은 잘못 하나 용서해 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슴 속에 십자가의 은혜가 살아 있느냐, 그리스도의 사죄의 피가 너희 심장 속에 흐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성숙된 인격이 나, 너그러운 인품에 기초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인격으로는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모질게 하고, 때리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십자가 앞에 설 때만, 동일하게 나에게 그런 상처를 가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썼던 코리텐붐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코리텐붐 여사는 네덜란드인입니다. 그녀와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독일에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 갇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족들은 다 죽고 코리텐붐 여사만 기적적으로 생존해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가혹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잔혹하게 핍박했던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들에게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독일의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통하여 수많은 독일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한 번은 코리텐붐 여사가 독일의 시골 도시에서 말씀을 전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코리텐붐 여사와 악수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코리텐붐 여사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원수였던 라벤스브룩 수용소의 간수가 거기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자신에게는 엄청난 모욕과 고통을 주었던 간수였습니다. 그 순간 코리 여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코리텐붐 여사는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 가운데 계속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코리텐붐 여사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 어느새 자기 눈앞에 다가온 그 사람을 향해서, 비록 자기 마음속에는 사랑의 느낌, 사랑의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그녀는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 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고 후에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는 살 수 없습니다. 분노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방을 찌르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찌르고 맙니다. 우리가 그를 미워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나 또한 하나님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490번 넘게 잘못을 범했는데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용서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용서는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성경 화폐의 단위, 달란트(Talent)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습니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성경에서는 우리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라 알려주셨습니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4~35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새 언약 유월절로 모든 죄를 탕감받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하여주셨을까요? 출애굽기에 기록된 율법을 보면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21:23). 곧 하늘에서 사형죄를 선고 받고 이 땅에 쫓겨난 우리들은 생명으로써 모든 죄를 탕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생명으로 죄를 탕감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육체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대신해 탕감해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새 언약 유월절을 허락하신 안상홍님

마태복음 27장 46-54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운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고 하나님의 살과 피를 새 언약 유월절 떡과 포도주 속에 담아두시어 믿고 먹고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없습니다. 오직 죽지 아니하시며 영생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지은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초림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새 언약 유월절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고, 325년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새 언약 유월절을 16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재림 안상홍님께서 되찾아주셔서 다시 우리가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 죄사함 받게 해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은 오직 유월절 얘기만 하냐. 유월절이 그렇게 중요하냐. 거긴 유월절 밖에 없느냐고 말합니다.네 그렇습니다. 저희들에게는 유월절이 가장 소중합니다. 유월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일만달란트 빚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빚을 탕감받는 유일한 방법이 유월절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새 언약 유월절은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이요 절기입니다. 이제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탕감받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예수님 말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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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죄의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와 같은 원죄의 빚이 있습니다. 이것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단 번에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원죄의 빚이 사라지고 홀가분해졌습니다. 이제는 영적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용서를 받았으니 백 데나리온 빚진 자들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6)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앞에서 주님이 범죄자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나왔다. 교회가 범죄자를 취급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를 교훈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여기에 이어서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리이까?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욧점은 용서라는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 하며 용서를 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천국 백성이 아닌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만이 가는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와 은총을 안다면 용서에 인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용서의 차원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형제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일만달란트” 1 달란트(헬라의 화폐단위)는 미화 960달러 – 한화 80억 원 이상

용서는 자비에 근거하고 나온다. 천국의 왕은 자비와 긍휼히 풍성하시다. 채무자를 불쌍이 여겨서 채권까지 포기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셔서 의무 이행을 요구하신다면 용서받고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치르셨다. 롬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5:1-2.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은 30절에 같은 처지의 동관이 동일한 호소를 했을 때 허락하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천국은 자비하신 왕께서 다스리시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은 그 나라 백성 되기에 합당치 않다.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잔인한 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점을 부단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큰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를 용서하되 제한 없이 용서하여야 한다.

[창세기 9장 주석성경말씀] 노아와 하나님과의 무지개 언약 사건(창 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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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3월 30일(월) 마태복음 18:21-35 진정한 용서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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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월)

마 18:21-35

진정한 용서의 어려움

[본문 읽기]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 묵상]

몇 번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은 교회가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설명하셨습니다.(마 18:15-20) 이 가르침은 땅의 삶이 곧 하늘이 삶임을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궁금했던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너무나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22절)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490번 용서하란 말일까요? 주님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빚진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종들과 결산을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러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갚을 것이 없어서 왕은 ‘그 몸과 아내와 지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종은 엎드려서 갚을 테니 제발 용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종이 길을 가다 자신이 백 데나리온 빌려준 동료를 발견합니다. 갚을 것이 없이 조금만 참아 달라고 했지만 그를 붙잡아 옥에 넣고 맙니다. 이 모습을 보된 주변 사람들이 임금에게 달려가 이야기 합니다. 결국 임금은 다시 그 사람을 불러 빚을 갚을 때가지 옥에 가둡니다.(34절)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를 알아봅시다. 1달란트는 무게로 34.2kg인데 금의 무게입니다. 현재 액수로 계산해도 20억이 넘는 돈입니다. 그런데 1달란트가 아니고 일만 달란트입니다. 무려 20조입니다. 데나리온은 1세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10만원으로 계산할 때 약 1000만 원 정도입니다. 그렇게 작은 액수는 아니지만 20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20조를 탕감 받은 사람이 고작 천 만원을 갚지 않은 친구를 옥에 넣었습니다.

성경시대의 화폐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되돌아가 봅시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어하는 걸까요? 33절을 보십시오.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향하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묻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냐를 묻는 베드로에게 주는 답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다. 그리고 너에게 죄를 범한 자는 백 데나리온을 빌린 자이다. 네가 너를 불쌍히 여김처럼 그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능하고 저주 받아 심판의 불에 던져져야할 사람입니다. 도무지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즉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은 것뿐입니다. 주님 앞에서 ‘사랑의 종’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비유를 마치시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각 형제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동일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천국의 비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23절) 여기서 중요한 천국의 원리가 등장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이 비유가 있기 전 15-20절까지의 내용은 보면 이 땅에서 범죄한 자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 그 사람과 상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대로 권면을 받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절)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

하늘의 문제는 땅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이 땅에서 서로 미워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하나님만 잘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땅의 일이 곧 하늘의 일입니다. 천국에 입성하려면 먼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곳이라며, 이 땅에서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결단과 기도

*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하소서.

*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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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주님의 큰 은혜를 입었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마음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만드실 때 변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때때로 어떤 분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서 복음을 전해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많은 분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서 그들의 마음이 변하는 걸 보면 정말 귀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느끼는 행복이 참 많은데, 성도들 가운데 죄 속에서 고통하다 죄 사함을 받은 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 제가 정말 감사합니다. 또 어떤 형제들은 구원받은 후 핍박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들딸 둘을 키웠는데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저를 돕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우리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와 달라. 하나님이 함께해’라며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저를 존경할 때 무척 행복합니다.

암에 걸려 위중한 분에게

제가 대구 파동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우리 선교회 이헌목 목사님의 사촌 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형제님이 제게 “목사님, 우리 작은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아주 위중한데 한번 만나 주세요”라고 해서 그분을 찾아갔습니다. 그 형제님이 아랫목에 앉아계신 작은아버지에게 “작은아버지,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놈, 당장 나가! 내가 지금 죽어 지옥불 속에 들어가도 너 믿는 예수는 안 믿어.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말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며칠 후 다시 한번 찾아갔습니다. “계십니까?”라고 했지만 조용했습니다. 문을 살짝 열고 보니 그분이 아랫목에 누워계시다가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갑자기 그분이 벌떡 일어서더니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셨습니다. 저는 제 뺨이라도 때리려고 다가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손을 잡으시더니 “목사님,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어린 아이들 놔두고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날 그분이 구원을 받은 후 아내와 자식들이 불과 며칠 새 구원을 받았습니다. 온가족이 구원을 받고 아쉽게도 부친님은 일 년이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현재 기쁜소식 양천교회에 계신 이헌목 목사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당시 이헌목 목사님은 큰아들로 중학교 2학년, 큰딸 선혜, 작은아들 헌덕, 그리고 작은딸 점옥, 막내딸 점숙, 그렇게 5남매를 두고 부친님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오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다가 ‘그래. 이제 내가 예수를 믿어야 겠다’라고 마음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제가 아주 젊은데도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가족 모두 기쁨과 감사로

이헌목 목사님의 어머니는 지금도 대구에서 사시는데 당시 얼마나 불도가 열심인지 팔공산 등 높은 산을 다 찾아다니셨는데 놀랍게도 자동차를 전혀 못 타시니까 걸어서 산에 다니셨습니다. 그러시던 모친님이 예수님을 믿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너무나 컸습니다. 이 목사님의 가족들은 세상말로 눈이 멀었는데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큰딸이 직장을 다니면서 받은 적은 월급으로 동생들을 학교 보내고 지냈는데 그들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얼마나 귀하게 주님을 섬겼는지 모릅니다.

우리 선교회에 귀한 하나님의 종들이 많지만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이 이헌목 목사님을 통해서 하신 일들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가 해외 나갈 때마다 수많은 일반 교회 목회자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남동생은 러시아 모스크바 선교사, 누나는 전주교회 목사의 사모, 여동생은 페루 선교사의 사모, 막내 동생은 우크라이나 선교사의 사모로 모두 귀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여러분, 오늘 읽은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죄의 빚을 진 우리의 모습인데, 어느 날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하며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가 순금 43kg이므로 일만 달란트의 빚이라면 순금 43만kg이라는 엄청난 빚입니다. 이젠 빚을 갚고 싶어도 갚을 능력이 없자 임금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마 18:22)고 말했습니다. 온가족이 종으로 팔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빚을 지었지?’ 그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이시여, 갚겠습니다. 기한을 주십시오.”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말했습니다. “듣거라. 내가 네 모든 빚을 탕감해 줄 테니 가서 편안히 살아라.” “아니? 임금이시여.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이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그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한평생 비참하게 살아야 했는데, ‘우리 임금이 내 빚을 전부 탕감해 주셨구나’ 하며 무척 감사해했습니다.

빚을 모두 탕감 받은 후

이제 그는 빚을 다 탕감 받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빚은 없으니까 뭘 하든 못살겠나?’라고 생각하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 받았지만 당장 아이들과 살아야 하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을 딱 움켜잡았어요. “야, 빚 갚아!” “아, 좀 기다려 주십시오.” “야, 빚진 놈이 먹을 거 다 먹고 입을 거 다 입고 언제 갚을 거야? 너, 지금 돈 없지!” “예,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그럼, 감옥에 가” 하고 감옥에 집어넣은 겁니다.

반대로 저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의 이런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너, 내일까지 갚을 수 있어?’ ‘예, 노력하겠습니다.’ ‘하하하. 내 얘기 잘 들어. 내가 오늘 임금 앞에 나갔는데 다 탕감 받았어. 기분이다! 너도 탕감이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자, 한번 따라해 봐. 탕감!’ ‘아우, 설마…’ ‘내가 탕감하는 거야. 내가 오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어. 기뻐해~! 내가 탕감이라고 하면 탕감인줄 알아. 따라해 봐. 탕감! 그런데 부탁이 있어. 내가 이 탕감을 우리나라에 유행시킬 거야. 내가 너를 탕감해 줬는데, 임금에게 나도 먼저 탕감을 받았지? 그러니 너도 네게 빚진 자 있으면 가서 탕감해. 결국 임금이 나를 탕감해 주고, 내가 너를 탕감해 주고, 넌 또 다른 사람을 탕감하면 탕감. 탕감. 탕감. 우리나라가 탕감으로 가득 찰 거야. 임금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잘 가.’ ‘아이, 그래도….’ ‘어허, 탕감 하라니까!’ ‘아우, 정말….’ ‘그냥, 빨리 가. 어서 가서 가족들이랑 잘 살아.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그 나라를 전부 임금의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감리교회 최고 지도자 모임

여러분,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복음이 들어온 지 200년 가까이 되는데 그동안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다는 이론은 있었지만 죄 사함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쁜소식선교회를 통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귀한 진리를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헌금의 70%를 해외 선교비로 사용하는데 교회 지출을 최소화하고 절약해서 해외 선교를 위해 땅도 얻고 건물도 짓고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지난 번 저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Fiji)에 갔다가 피지 감리교회 최고 지도자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 감리교회 메서디스트 처치(Methodist Church: 열심당원)의 일원이던 ‘웨슬레’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를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어느 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배에서 만났던 모라비언들과 계속 모임을 가졌었는데 런던 알데스게이트의 작은 교회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거듭난 후

그때부터 요한 웨슬레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설교를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요한 웨슬레가 증거하는 복음을 비난하고 그를 영국 교회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영국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자 말을 타고 다니며 두 사람만 모여도 전도하였고 마상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에게 ‘마상의 전도자’라는 대명사가 붙었고, 그는 몇 사람만 모여도 집회를 하여 ‘옥외 집회의 전도자’라고 불렸습니다. 점차 그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오늘날의 감리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나타난 복음의 큰 역사

이렇게 제가 말을 마치자 피지 감리교회 대표자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식으로 기쁜소식선교회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피지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을 배우고 싶어 해서 한국에 있는 감리교단에 문의를 했는데 이단이라고 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다 2016년에 피지 감리교회 몇몇 목사님들이 ‘기쁜소식선교회는 이단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선교회입니다’라고 말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다시 기쁜소식선교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2016년 여름 한국월드캠프에 목사님 한 분을 보냈습니다. 그분이 월드캠프와 세계기독교지도자 모임에도 참석하시면서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교단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통해 ‘세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런 복음의 큰 역사는 본 적이 없다. 부산 해운대에 갔을 때 비가 내리는데 걱정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집회 준비를 했다. 그들은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집회 30분 전에 비를 그치게 했다. 각국에서 참가한 장관들, 대학 총장들, 목사들이 복음을 듣고 다 변하는 걸 봤다’라고 발표했습니다.”

피지(Fiji)가 받은 두 가지 복(福)

그리고 감리교회 대표자가 피지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피지가 하나님께 받은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첫째, 피지는 영국의 속국이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 여왕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대영제국의 여왕이고, 피지는 우리의 속국이다. 내가 지금까지 피지를 다스려왔지만 이제 내가 피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지를 다스리면 좋겠다. 그래서 피지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겠다. 그 대신 피지 정부는 영국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 “여왕 폐하, 우리는 예수님의 다스림도 받고, 인자한 여왕 폐하의 다스림도 받고 싶습니다.” “됐다. 예수님이 너희를 다스리고 예수님과 행복하게 사는 걸 보면 기쁘다.”

대표자가 제게 “박 목사님, 그래서 우리는 온 국민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두 번째 복은 피지가 기쁜소식선교회로부터 처음 들은 복음입니다. 기쁜소식선교회에게 배우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우리 선교회는 피지 정부와 정식 MOU도 맺었고, 피지 감리교회에서는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을 전해 달라고 모든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 학생들에게

여러분, 미국 대륙에는 영국에서 미대륙 개척자가 이주해 오기 전에 원주민으로 인디언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서 인디언들이 미 대륙의 원래 주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특히 뉴욕의 맨해튼은 인디언들에게 구슬 두 상자와 엽총 두 개를 주고 산 도시입니다. 나중에 인디언들이 “우리가 손해 봤다”라며 미국 정부와 싸웠는데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을 보호했습니다. 인디언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술을 마시고, 도박하고, 마약을 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했습니다. 미국 정부도 그것을 원치 않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지난번 제가 미국의 LA와 뉴욕, 그리고 멕시코시티 세 개 도시에서 캠프를 했는데 미국 인디언 학생들 75명이 참가했습니다. 3주 동안 그 학생들과 지내면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캠프 결과 보고서에는 인디언 학생들이 아직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죄 사함 받고 변하여 기뻐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IYF가 인디언들을 다 바꾸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학자나 정치가, 청소년 지도자도 그들을 바꿀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면 인디언들도 바뀔 것을 믿습니다.

88 올림픽 모토대로

여러분, 저는 복음을 깨닫고 한 평생 복음만을 위해 살다가 죽고 싶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동안 하나님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귀한 길로 인도하시고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198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그때 올림픽 모토가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였습니다. 전 세계가 서울에 모여서 올림픽을 했기 때문에 ‘세계는 서울로’라는 모토가 이루어졌지만 ‘서울은 세계로’라는 모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89년 3월부터 정부가 처음으로 만 45세 이상 국민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때 저도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 LA와 독일 베를린 등 해외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국에 우리 교회는 30개 정도였는데 가능하면 해외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다른 선교회는 돈으로 뒷받침 하지만 저희 선교회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 말 한마디도 못하고 한 푼도 없는 사람을 비행기만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교회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 장관들과 대통령들이 우리 선교회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우리 선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모여서 복음의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감사했습니다.

탕감 받은 자가 가는 두 가지 길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두 가지 마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아 기쁘지만 앞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을 잊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나자 그로부터 돈을 받아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엄청난 복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인데 예수님이 앞으로 그의 삶도 정확하게 은혜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저는 죄를 씻으려고 밤마다 울고 기도하며 발버둥 치다가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사해진 사실을 발견했을 때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겠나?를 생각해 보니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사해주셨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선교학교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편한 길이 아닌 부담스러운 길로 이끌어서 선교학교, IYF, 그라시아스 합창단, 굿뉴스코, 마인드교육 등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잘 몰랐지만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복음이 너무나 놀라워서 복음을 위해 제 생명을 바쳐 일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일

우리 교회 안에서도 형제자매들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죄 사함의 큰 은혜를 입었지만 자기 삶에 빠져서 주인의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다시 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동관을 가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구원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만일 구원을 받았다면 좀 굶어도 괜찮고, 죽을 위험에 처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처럼 살지 않고, 이 복음만을 위해 사시면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죄 사함 받고, 네 죄도 사했어’라는 소리가 바로 ‘탕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탕감 받고 탕감해 주는 삶을 산다면 우리 삶이 복되고 교회가 복될 줄 믿습니다. ‘나’를 구속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한 평생 복음을 위해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2017. 9. 3.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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