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 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 니라 | [히브리적 관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9268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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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24-26 KRV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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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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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 네이버 블로그

이것은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죽음이다. 바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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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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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 다음블로그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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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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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 아이굿뉴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니라”(눅9:23) ‘아무든지’라고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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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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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2016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21-2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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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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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무슨 …

로마인들이 죄수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걸어가게 강제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처형 도구를 지고 내내 조롱을 받으며 죽음의 자리로 걸어간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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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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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 해석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로서 신앙 생활의 기본 자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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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ok.org

Date Published: 10/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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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관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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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 니라

  • Author: 코리아 clandestine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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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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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4-26 KRV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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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 ​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1. ​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16:24에서 하신 말씀이다(막 8:34-38, 눅 9:23-26, 고후 4:10,11 참조). 즉『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라 곧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를 현재 시점에서 재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럼,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어야만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는지 아는가?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정녕,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은 채 내게로 오면 그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눅 14:26).

오늘날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도시에 오셔서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외치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분을 따라나설 것 같은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정말로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에 합당한지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십자가에 달려 못박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피를 철철 흘리기에 합당할 뿐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요건은 절대적인 “순종”이다.

10절을 보라. 12절을 또 보라. 그리고 또 14절을 보라. 『내가 명령한 대로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들이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구원받는 일과 혼동하지 말라.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값없는 선물』(롬 5:18)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순종이라는 값을 치러야 한다.

주님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당신은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서는 안된다. 당신은 주님만을 뚫어지게 바라다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서도 절대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서는 안된다. 그분께서 한 걸음 떼어놓으시면 당신도 한 걸음 떼어놓는다. 그분께서 뛰어가시면 당신도 그분을 바짝 붙어 뛰어간다. 그분께서 멈추시면 당신도 즉각 멈춰 선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이다.

“제자”란 말을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쓴다. 이 단어를 보면 또 즉각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인가? “discipline”이라는 단어다. 이것은 “훈련하다, 단련하다, 길들이다.” 등의 뜻을 갖는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당신은 훈련을 받고 단련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길들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맨 처음 구원받는 순간은 아직 훈련되어 있지도 않고 단련되지도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답게 길들여지지도 않은 상태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때서야 주님께서는 당신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시는데, 이 훈련은 당신에게 적합한 시련과 징계를 통하여 진행된다.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이라.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가?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한 훈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말하자면, 당신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언제,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가부터 먼저 증거하게 된다. 당신이 구원받았으면 당신은 주님의 징계를 통한 훈련을 아직 받기 전이라 하더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당신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가를 증거하고 혼들을 이겨오는 구령활동을 시작할 수 있고 또, 훈련을 받았건 안 받았건 일생 동안 그렇게 구령활동을 전개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기술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전파하고 혼들을 이겨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아직 하나님의 징계를 통한 훈련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이제 막 거듭나서 아직 훈련받을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연단을 받았더라도 그렇게 극심하지 않은 징계를 통하여 가볍게 단련된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혹독한 시련과 징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단련된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혼을 이겨오는 구령활동은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해야만 하는 활동이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야 벌이게 되는 활동이 아니라는 얘기다.

모든 구령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고 그들을 현대주의적 세상 풍조와 자유주의적, 반성경적 온갖 사악한 풍조로부터 떼어놓고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로부터 분리해 내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무슨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구원만은 확실히 받아 놓은 사람이다.

2. 전개되는 말​

​마 16:24 -26 말씀은【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얻으리라.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0:38,39 의 말씀이 반복된다. ​

1) 매일의 십자가 – 당신은 그것을 지는가? (눅 9:23, 마 10:38, 16:24-28) (1) 『또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6:24,10:38).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아도 죽이고, 또 죽기까지 신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에는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십자가는 범죄자들이 받는 형벌이다. 특별히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처해지는 극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범죄자 아닌 범죄자가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은 우리도 또한 범죄자가 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들의 눈에 범죄자가 되지 않으면 주인의 제자가 될 가치가 없다. ​ 자유주의자들은 인도주의자가 되기 원하고 박애주의자가 되기 원하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범죄자”가 되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에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에서는 범죄자가 된다. ​ 때때로 그들은 분리주의자가 될 수 있고, 때때로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때때로 그들은 극단론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이 내놓은 평화계획에 동조하지 않는다. UN이나 NCC(교회협의회)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당할 것을 알기에 세상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계획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구할 단 하나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때로는 현실도피자라는 말도 듣는다. ​ 그러나 그들은 주님처럼 세상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예수님처럼 범죄자로 여겨진다. 예수님은 친히 범죄자로 여김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막 15:28).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범죄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의 잘못들로 인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벧전 2:20) (2) 막 8:34 『주께서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불러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여기에 『자기를 부인하라고 어떤 제자에게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세 개의 전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설명들이 있다.

① 전미 “기독교” 교회협의회의 현대적인 자유주의자인 랄프 소크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실된 자아’ 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②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그의 저작 <햄릿>에서 “너 ‘자신의 자아’ 에 진실하라.” 고 썼다.

③ 마호메트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당신이 로마서 7:18,24과 이런 말들을 비교해 본다면, 당신은 성경과 고등 교육을 받는 “자아를 숭배하는” 종교적인 지도자들 사이의 “신뢰도의 격차” 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 ​ 매일 죽는 것 – 당신은 믿는가? (고전 15:31). 

『또 우리가 어찌하여 매시간 위험에 처해야 하겠느냐?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지니고 있는 너희의 자랑으로써 단언하노니 나는 매일 죽노라.』(30,31절) (1)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또 시간과 돈과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겠는가?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공연히 증거하는 일은 목숨을 내어 놓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 그래서 바울은 31절에서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한다. 목숨을 내어 놓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에는 교리적인 의미의 죽음과 실천적인 의미의 죽음이 있다. 로마서 6:1-6에서는 교리적인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롬 6:1 2,4,6) ​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죽음을 교리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에 “매일”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아직 육신을 입고 있다. 구속을 기다리고 있는 육신은 아직 죄 가운데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죄의 육신을 시시각각으로 벗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죽어야만 한다. 이 죽음이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이다. ​ 이것은 『누구라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죽음이다. 바울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실천하였기에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선한 삶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매일 육신을 죽이며 살아갔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 혼은 죽은 육신 가운데 머물러 있으되 더 이상 육신에 밀착되어 있지 않고 육신에서 도려내어진 채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2)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은 것은 육신과 혼을 분리해 내는 수술을 받은 것과 같다. 구원받기 전에는 사람의 혼이 육신에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었지만, 구원받는 순간 혼은 육신으로부터 도려내어져서 육신과 밀착되어 있는 부분이 한 곳도 없이 육신의 그릇 속에 담겨져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거야말로 진짜 기적 같은 수술이다. 이것은 마치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사각 얼음틀과 같다. ​ 처음 냉동실에서 사각 얼음틀을 꺼냈을 때 보면, 얼음들이 틀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얼음틀을 살짝 비틀면 얼음들이 틀에서 떨어져 나와 음료수 컵에 담을 수 있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의 혼도 이와 같이 육신이라는 틀에서 분리된 채 육신 속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그 혼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혼 속에 있던 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혼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옛날처럼 육신을 사랑하고 육신과 밀착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혼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는 것과 같다. 육신은 항상 혼에게 싸움을 걸어 온다. 물론 혼과 육신 사이의 전쟁에서 육신이 승리를 거두고 혼으로부터 구원을 빼앗아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육신은 혼에게 항상 덤벼든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의 육신은 이미 죽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 이미 죽은 육신이기 때문에 싸움을 걸어 오더라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육신을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싸움을 걸어 오는 육신의 도전에 응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육신은 이미 죽었다고 간주하고 상대조차 하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은 승리할 수 있다. ​ 당신은 승리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육신은 이미 죽었음을 선언하고 그 죽은 육신을 상대조차 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그것으로 이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이미 죽어 버린 육신에게 신경쓰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죽은 육신을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주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3)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주를 위하여 온종일 죽임을 당하였으며 도살당할 양으로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하였느니라』(롬 8:36).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구절은 시편 44:22 말씀이거니와, 교리적으로 이것은 대환란 관련 구절로서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서술이다. 유대인들은 대환란 기간 동안 마치 양처럼 죽임을 당하여 제단 위에서 양처럼 희생 제물로 드려지고 양처럼 먹히게 된다. 이런 처지는 고난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자들보다 더 나으니라』(37절).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환난이나 곤경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기는 자들』(롬 8:37, 요일 5:4), 요컨대 모든 환난과 고통을 극복해내는 “정복자들”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나으니라.』고 이 구절은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정복자들 이상이라는 것이다. ​ 3) 날마다 지켜보는 것 – 당신은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가? (잠 8:34). 【 34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나의 문들에서 지켜보고 나의 문설주들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이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생명을 얻고 주의 은총을 받을 것임이니라. 36 그러나 나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치는 자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사랑하는 자들이라.】(34-36절)  (1) 마지막 세 구절에서(34,35,36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1611년 <킹제임스성경>의 인쇄물을 통해 걸어 나오시기라도 할 것 같다. 『… 자는 복이 있나니』(34절), 『나를 만나는 자마다 생명을 얻고…』(35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사랑하는 자들이라』(36절). 요한일서 5:10-12,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8:51, 디도서 2:11, 요한복음 3:36, 욥기 12:10, 마태복음 5:1-6과 비교하라. ​ 이로 인해 헬라 철학자들은 지혜가 하나님이며, 생명을 주는 권세가 지혜에게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구원받지 못한 이런 가련한 죄인들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대부분이 기원 전에 살았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집집마다 “심방”을 하고, 거리에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20세기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보다 훨씬 더 출중한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기원한 교육 체제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행 17:18-25 참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계시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무지를 변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에 무지했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다(롬 1:25; 2:14,15). 여느 이방의 이교도처럼 이들도 원하기만 했었다면 볼 수 있는 욥기, 전도서, 잠언, 시편이 있었다. ​ 듀이와 러셀(19, 20세기)이 66권의 완성된 계시를 가지고도 이해할 수 없었던 진리를 아비멜렉(창 20:4,5), 파라오(출 10:16), 느부살아단(렘 40:1-8)이 이해했다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몰랐다고 발뺌하며 빠져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들 모두는 성경과 양심에 성령께서 기록하신 죄에 대한 정의를 거부했던 것이다(롬 2:11-16).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진지한 사고가들”의 위대한 “진지한” 사상이라는 것이 죄에 대한 변명이며 자아를 드높이는 구실임을 즉시 인지했다. 소피스트들은 제자들에게 진지한 논쟁을 논박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옳았다. 왜냐하면 헬라 철학의 “진지한 논쟁”이란(유엔, 통합,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지한 토론처럼) 하나님을 그분의 포도원에서 내쫓고(마 21:33-41) 포도원을 차지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아인슈타인, 러셀, 듀이, 반 도렌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누가복음 15,16, 23,24장, 로마서 10,11,14장을 비웃는 사람은 연민을 받아 마땅하며, 기도해 줘야 할 대상이다. 이런 사람을 신뢰하거나, 믿거나, 확신하거나, 존경하거나, 귀하게 여기거나, 추종해서는 안 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34절, 마 13장과 비교). 매일 “문”을 파수하며(요 10:1-9), “문”(히 13:12)에서 기도로 깨어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은 빛이며, 그분은 인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요 1:1-7). 철학은 과학과 종교처럼 타락한 지성으로 잘 차려 입은 시체이다. 철학은 죽은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창시자이시고,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약 1:17)을 떠난 음악, 미술, 문학은 죽은 것이다. ​ 『향락 속에 사는 여인은… 죽은 것이라』(딤전 5:6). 매일 매시간마다 100명의 비율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묻고 있다.”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생명”을 대체시킬 만한 것은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 계명들, 성사들, 명성, 인품, 직업, 회원의 자격, 도덕성, 인간성, 사랑이나 “선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은 생명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죽었다(엡 2:1-8).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면, 생명이 있다(민 21:9). 그분을 소유하지 않으면, 정통주의, 성사들, 의식, 예배, 신조들, 강령들, 교리문답, 선행이 있다 해도 여전히 시체일 뿐이다. (3) 『주의 은총을 받을 것임이니라』(35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성도는(“카톨릭의 성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의롭게 되고(롬 5:4-8), 구속되고(골 1:14), 깨끗게 되고(요일 1:8,9), 용서되고(골 1:14), 구원받고(롬 10:13), 거듭나고(요 3:3,5), 양자되고(롬 8:15), 의롭다고 선포되고(요일 4:17), 그분의 “독생하신 분”을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엡 1:6).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주님을 송축하라, 오 내 혼아!) 『그러나 나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36절). 요한복음 15장 이후로 죄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그러한 자는 『자기 혼을 해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 자신(시 51:4)과 인간들(출 10:16)을 거스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죄를 “자멸,” “자기 부정”이라고 한 철학자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여러 개 중 “하나의” 진리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종교, 신념, 교리, 강령, 선행, 동기, 성실성, 황금률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 혼을 해치는 자』이다. 그의 혼은 귀하고 영원히 지속되며, 영원히 지속되는 보배로운 생명을 떠나서는 정당화될 수도 구속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곧 창조주께 받아들여지고, 그 창조의 말씀과 계명들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생명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 보여졌고, 만져진 바 되었으며(요일 1:1,2), 흠없이 사셨고(히 4:15),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딤전 1:15). 이 생명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고후4:1 -4). 이 사람은 합법적으로 창조주께서 소유하신 것들을 거부함으로써 창조주를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중생을 통해 변화되는 모습을 거부함으로써 이웃을 해친 것이며, 자기 자신의 혼을 살해하고(계 20:11-14), 죄 없이 온전하게 영원히 살 수 있었을 생명을 파괴시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대신 자신의 교회와 종교를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나 정죄함을 받게 된다. 그가 죄 없는 삶을 살았다 해도 이 세 가지 점에서는 유죄이다.

4) 본문의 말씀은 헌신을 위한 위대한 설교가 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제자들에게 그분의 위임사항들을 말씀하시면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 함께 면류관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영적으로 볼 때, 이 명령에는 두 가지 약속이 따른다. 첫째는 마태복음 11:29,30 에 나타난 것처럼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는 무겁지 않다는 것인데,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지상 생애 동안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를 능히 도와주실 수 있으며(히 2:17,18),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히 4:15).

둘째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롬 8:17).

(1) 『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느니라』(히 2:18).

– 주) 『도와 주실』에 해당하는 영어단어”succour”는 “돕다”(help) 혹은 “원조하다”(assist)를 의미한다.

“의미가 정확하게 번역되었다” 고 하는 “최신의 번역본들은 이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망가트려 놓고 있다. 혼란을 야기하는 이 쓰레기의 전형이 다름 아닌 NKJV 인데. 그것은 이 구절을 “주게서 천사들을 돕지 아으시고, 아브라함의 시를 도우신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천사들이나 이삭 야곱, 도는 열두 지파가 ‘어떤’ 도움을 준다.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의는 나오지 않는다. 문맥은 ‘인간'(human man)인 아담(히 2:6-8)과 ‘신적 인간(diving man)인 예수 그리스도'(히 2:9-11)를 비교하는 문맥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맛보신다(히 2:9,14-15, 빌 2:7-8).

히브리서 2:17-18절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셨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도움’ 이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이루신 『화해』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신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후 5:19-21). 즉 도움을 받는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 뿐만 아니라. 『시험받는 자들』(히 2:18절)까지 해당되는 것이다.

(2) 어떤 기독교 단체들은 소위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무슨 대단한 과정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주로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런 훈련을 꼭 받아야만 구령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심지어는 그런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만 진정으로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주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① 구원받는 일과 제자가 되는 일을 혼동하지 말라.

그리고 “제자훈련”을 구령활동의 전제적 요건으로 착각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은 당신이 구원받고 나서 주님의 말씀에 늘 거하면서(요 8:31)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갖는 동안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당신이 무슨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당신이 주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으면 당신은 확실히 구원받은 것이고, 당신이 구원받고 나서 아무런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고 밖으로 뛰쳐나가 구령활동을 전개할 수 있으며, 또 그 일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당신은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셈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그리스도인답게 살면서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순간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의 삶을 인도하는 최고의 권위와 최종적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런 사람의 가치관은 반드시 성경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요,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요건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9장을 읽어보면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② 누가복음 9장 57절부터 62절에 이르기까지 묘사되고 있는 “제자의 길”을 한 번 살펴보자.

꿈꾸는 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 일을 통해 사탄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해야만 질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기 부인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것이 자기부인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다. 예수님도 주님앞에 놓인 이 고난의 쓴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이내 다시 이렇게 기도하신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16:21-25)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의 뜻, 자신의 생각, 의지, 감정, 필요, 이런 혼의 생명을 성령님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혼이 영의 지배를 받아 육을 복종시켜 온전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시고 그것을 알게하신이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위에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감당하지 못하는 권세를 부여받았고 천국 열쇠까지 받았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러자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지금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십자가 지고 죽으시겠다는 주님을 책망하고 말린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혼의 영역에서 나온 생각이고 행동인 것이다.

‘주님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당신이 받게 될 고통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주여! 당신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이러한 생각은 사탄에게서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

예수님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이다.

또한 자기를 부인 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성령님 곧 주님의 인도를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사랑, 자기 연민, 자기 감정, 자기 뜻, 의지, 형편…이런 혼의 영역에 있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죽이고 오직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기도하셨던 주님처럼 온전히 성령님께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서 죄의 몸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 혼의 생명은 아직 살아서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마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는 죽고자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는 원리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기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요구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자기 가족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주님의 가족, 주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

….. 멀기만 한 이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을까요?

주여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의 혼의 생명을 날마다 십자가에 내어놓을 수 있는 믿음과 영성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주여! 인도하옵소서.

새벽 기도 중에 주신 깨달음 중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임석순 목사 (19)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니라”(눅9:23) ‘아무든지’라고 말씀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며 그 누구도 제자의 삶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3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늘 자신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육체가 이미 십자가에 죽었음을 인식하고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날마다 한 번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날마다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 부인해도 내일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부인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제자가 되어 져가는 것입니다. 이 삶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다 자라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살다가 죽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화석화된 사람은 자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라가는 삶, 육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 야합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 라는 것은 각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날마다 자기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너무 버겁고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일에 대해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절대로 내일의 십자가를 지면 안 됩니다.

내일의 십자가를 지면 오늘, 지금의 십자가를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사랑을 닮아가도록 끊임없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 막 선지자 말라기에 이를 때까지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없는 채로 형식만으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살면 신앙생활에도 행복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며 나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생각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셨기 때문에 말씀 외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닮아있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의 본질은 항상 그대로이지만 적용에 있어서는 성령을 통해 시간과 대상에 따라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순종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즉각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제자에게 있어서 순종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항 상 우리를 향해 옵니다. 그 생각은 생명이며 평강입니다.(말2:4~5) 지금 순종하면 결과는 ‘행복, 생명, 평강’인 것 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닮고 따라가는 제자로 성장해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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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21-25]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던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주도권을 드리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제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버려두고 갔습니다. 물고기가 가득 담긴 그물을 버렸고, 물고기를 잡는 배도 버렸습니다. 심지어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온 아버지도 버리고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자는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과 그 이후의 삶이, 내가 세운 삶의 목적과 방법보다, 세상의 어떠한 부름보다, 가장 최고의 가치가 있음을 믿으며, 맡기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제자요,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정말 흥미 있고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생전 보고 듣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올 때에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이는 풍랑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덩달아 자신들의 존재도 부각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된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심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와 그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강력하게 예수님을 저지합니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항변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항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만류하는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제자로서 어떻게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를 향하여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너 밖에 없구나, 고맙다 베드로야”가 아니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방금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던 베드로가, 갑자기 사탄과 같은 존재로 돌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은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넘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느냐 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앞서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일컬으시면서,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합니다. 곧 “내 앞에 있지 말고 제발 내 뒤로 물러와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께 항변하며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사람의 일을 구하며 사탄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탄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보다는, 예수님보다 먼저 앞서 가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 후에, 이제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하는 일이 옳고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요한다면 더 이상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제자인데, 자꾸 예수님 보다 앞서서 가려고 하니까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뒤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초점하지 않으면 내 자신이 사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자인 것이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역하려고 하는 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사탄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베드로와, 그리고 그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그 처방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라올 수 있지, 자기 자아가 뻣뻣하게 살아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문양입니다. 교회들마다 교회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 표시를 합니다. 액세서리 집에 가면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귀거리, 액세서리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몸에 십자가를 문신하신 분들을 꽤 많이 보게 됩니다. 자동차에도 십자가 스티커를 붙여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친숙한 물건이 아니라, 혐오스럽고 저주스러운 물건이었습니다. 로마사람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심각한 죄를 지은 범죄자들을 십자가를 지게 하여, 고난과 수치를 주었고, 끝내는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는 “너는 가서 죽으라”는 혐오스러운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는데, 이제는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모든 것을 버린 자기 자신조차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만 실패하는 이유 중에서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이 나와 어긋날 때입니다. 이 때에 내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최대의 걸림돌은 사실 나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잘 아시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자기부정과 십자가의 길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다 부인하시고, 곧 자기 자신을 부인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부인의 길을 감당하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지, 예수님의 자기 부인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죽은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버젓이 존재하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이 있습니다. 내 의견도 있고 내 계획도 있는데, 이러한 내 자신을 부정한다고 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내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위기까지 느끼게 됩니다. 나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하기 싫어하고, 죽기 싫어합니다. 3.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으라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고, 그 생명력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못하고 살아있으면 죄인 된 사람의 일만이 드러나지만, 내 자신이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며 고백한 사람이 있으니, 사도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비밀을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고, 그래야 내가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25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던 그 목숨을 포기하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죽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자바 섬에 한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곳에서 심한 향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외딴 섬에서 고독하게 선교하는 것을 알아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눈에 띄는 선교 열매가 보이지 않자 더욱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향수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그녀의 눈에 성냥갑 하나가 눈에 뛰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바섬에 올 때에 고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성냥갑이 꼭 자기와 같은 모습인 것처럼 느끼며, 그녀는 무심코 성냥갑을 붙들고 중얼거렸습니다. “오오, 성냥갑아 너는 이렇게 멀리 본국을 떠나 무엇하러 여기까지 왔니?” 그때 성냥갑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꼈습니다. “나는 불을 켜기 위해 아득히 멀리서 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임무가 끝나면 나는 곧 버려지고 말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내 임무는 완성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성냥갑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이곳에서 성냥불처럼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옵소서. 누가 알아주지 않을 지라도 이 일을 위해 겸손하게 말없이 희생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복되고 즐거운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됨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날마다 내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삶을 경험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허물과 죄로 있던 내 자신이 죽고, 이제 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날마다 변화됨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것을 비극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려고 할 때에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서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는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제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날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해서 사람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일어남을 체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날마다 채워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였나요?” (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질문

예수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였나요?” (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답변

예수님이 뜻하지 않으신 게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긋난 관계, 감사함이 없는 직업, 신체적인 질병 등이라고 말이죠. 자기연민적인 교만으로 이 사람들은 “그게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야”라고 말합니다. 그런 해석은 예수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뜻하신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 못박히셨을 때는 아무도 십자가가 자신이 져야 하는 짐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십자가였을 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죽음의 수단이었을 뿐이죠.2000년이 지나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대속과 용서와 은혜와 사랑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고문을 통한 사형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죄수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걸어가게 강제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처형 도구를 지고 내내 조롱을 받으며 죽음의 자리로 걸어간다는 걸 의미했습니다.따라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가복음 9:24-25; 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5-36). 이 요청은 어렵지만 그에 따르는 보상은 막대합니다.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무리를 몰고 다니셨습니다. 이 무리들이 때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해 따랐지만 이들의 메시아에 대한 관점은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자유롭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데리고 있던 제자들조차도 왕국이 곧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9:11). 예수님이 이제 곧 유대 지도자들과 이방인 권력자들의 손에 죽게 되리라고 예고하시기 시작하자 (누가복음 9:22) 예수님의 인기는 폭락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진실로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 욕망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삶이 평안할 때는 예수님을 따르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헌신은 시험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시험이 제자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 제자도에는 희생이 요구되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누가복음 9:57-62에서,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더 많은 것을 질문하시자 이들의 헌신이라는 게 기껏해야 반쪽짜리였음이 드러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수반되는 대가를 몰랐습니다. 어떤 이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자신의 관심사를 못박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이 마치 이들을 만류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복음의 제시 장면과 얼마나 다른 장면인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시면 친구와 가족과 평판과 직업과, 어쩌면 생명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라는 부르심에 대답하려 하겠습니까? 거짓 회심자의 수는 줄어들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부르심이 예수님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것입니다.자기 십자가를 지실 준비가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보세요:“당신은 가장 친한 친구를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십니까?”“당신은 가족에게서 버림받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십니까?”“당신은 평판이 나빠진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십니까?”“당신은 직업을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십니까?”“당신은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따르려 하십니까?”세상에는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따르려 하십니까?”라는 게 질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이 모든 일이 생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자기 십자가를 지려 하십니까? 만약 살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이냐 이 세상의 안락함이냐 사이에서 택해야 하는 시점이 된다면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은 자신의 소망과 꿈과 소유와 심지어 생명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드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제자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7). 그에 따르는 보상은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 죽으라는 부르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에 이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라는 선물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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