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의 미련한 것으로 | \”전도의 미련한 것\”을 잘못 알고 계시나요? (고린도전서 1:21) 20848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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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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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다국어 성경 Holy-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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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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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 기획기사 ... - 코람데오닷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설교’와 ‘선포’가 미련한 방법이라고 하셨다. 왜 미련한 방법일까? 이 표현은 설교의 방법이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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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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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이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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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21 전도의 미련한 것 – Daum 블로그

이런 배경에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전도(케리그마)’란 우리가 전도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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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전도의 미련한 것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석기현 목사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맥아더 장군이 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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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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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본문: 고린도전서 1:18-31, P.264 제목: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교회의 분쟁을 치유하는 근본 원리를 제시하는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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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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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18-25) –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말씀을 보려고 한다. 1. 십자가의 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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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 – 늘푸른교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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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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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HolySunshine 홀리선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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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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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전도는 미련한 방법이 좋다: 노방전도의 효용성?

▲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코닷 연구위원

전도하면 떠오르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필자가 강남역 근처를 걷다가 두 사람이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은 마이크로 뭔가 소리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학원이나 기타 유흥업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판촉 행위를 할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는 것 같지 않았고 전도지를 받아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나라도 전도지를 받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분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전도자는 필자에게 전도지를 건네주지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사람들 앞에 전도지를 내밀었다가 거두는 동작을 하고 있었고 필자도 여느 사람처럼 전도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전도지를 든 손을 내밀었다가 빨리 거두어 버린 것이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 전도자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끔 큰소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본다. 지하철역이나 시장, 번화가에서 주변 사람들을 향해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당당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은 과연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노방전도의 효용성은 과연 있는가?

이렇게 전도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좀 미련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열심에 주눅이 들고 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저런 열심이 없는데……’ 더구나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전도는 너무 고상하게 해서는 안 돼! 성경에도 전도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으로 하라고 돼 있어.’라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성경 구절 때문에 우리는 전도는 미련하고 무식하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에 대한 오해

정말 전도는 미련하게 해도 되는가? 고린도전서 1장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 원어를 살펴보면 그 답이 있다.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한글 개역개정 성경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서 ‘전도’라고 번역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일단 ‘전도’는 ‘도를 전하다’의 명사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복음을 들려주는 것 혹은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책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 등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사용한 단어 ‘케리그마’(kerygma)는 ‘설교’ 혹은 ‘선포’라는 단어이다. 즉 ‘케리그마’는 전도 방법 중 하나인 설교나 선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방법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설교’와 ‘선포’가 미련한 방법이라고 하셨다. 왜 미련한 방법일까? 이 표현은 설교의 방법이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도를 전할 때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한다. 일방적으로 선포하거나 설교하는 방법으로는 감동도 없고 설득도 쉽지 않다. 이 방법은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고 그래서 교회는 도를 전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나섰다. 사람이 보기에 지혜로운 방법 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기 위해 교회는 시대마다 다른 효과 있어 보이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했고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교회는 그런 방법을 찾고 있고 이런 방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도대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인지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 설교의 본 뜻!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잘 읽어보면 ‘설교’와 ‘선포’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와 교회가 그 방법을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사도들에게 맡기셨다. 사도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잘 보존해 교회의 직분자에게 맡겼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이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를 구원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나? 그것은 ‘설교’의 미련한 방법이었다.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교하네!’ 혹은 ‘설교하지 마!’라는 말은 ‘설교’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또 이 말 속에는 말하는 사람이 손수 실천하지 않고 말만 앞세운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다. 목사 자신도 이런 표현의 영향을 받아 ‘설교’가 일방적인 ‘선포’가 되지 않도록 애를 많이 쓴다. 설교 가운데 청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함께 읽기도 하고,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한다. ‘설교’ 곧 ‘선포’라는 일방적인 방식으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설교가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종인 목사를 통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개념이 없어진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부터인가 목사도 교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눈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설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사라진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QT 쉐어링(sharing) 정도로 격하시켰음을 보게 된다. 설교자 스스로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영적인 자신감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설교(선포)의 미련한 방법’을 주셨다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3-25절을 보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게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여기서 ‘전하는 것’은 바로 ‘설교(선포)’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설교가 경홀히 여김을 받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설교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는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전도 프로그램 주창자들이 하는 공통된 말이 있다. 그것은 ‘설교로는 안 된다’이다. 어떤 전도 방법의 효용성과 유용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를 통한 전도를 평가절하한 말이다. 서울의 유력한 한 교회의 목사님도 어떤 프로그램을 몇 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시행해 소위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가 가르친 것이 바로 ‘설교로는 안 된다’였다.

이런 주장들이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 곧 십자가에 점철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단에서 정확하게 선포되지 않고 온갖 세상 신변잡기들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설교가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설교를 하나님의 뜻(사랑과 공의)의 선포가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교가 시원찮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설교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길 기뻐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사람들이 고안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교회 교인의 숫자가 증가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은 설교와 선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회복해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좋은 전도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설교’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가장 오래 애용되었고, 지금도 통하는 방법이며, 주님 오실 때까지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교회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쇠퇴해 갈 때 취해야 할 방법은 무엇인가? 교회의 무능력과 침체의 문제는 참된 복음 설교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할 일은 외부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해 ‘전도 특공대’를 조직하는 것보다 말씀을 선포하고 선포된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 우선이다. 교회가 바르게 회복될 때 가장 왕성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나 부흥기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설교)를 듣고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각성할 때 부흥이 일어났다. 바울이 초대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해야 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복음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바울은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바울이 강조한 것은 교회가 교회답게 바로 서고 성도가 성도답게 바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기초가 없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만 전하려고 하는 전도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세력을 넓히는 데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소금이 맛을 잃어 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이 없는 전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우선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선포해야 한다.

성례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방법은 성례를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 이 두 가지는 교회에서 제사 드리는 것 같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이 시간은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이다.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례는 우리가 만든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정해 주신 방법이다. 우리는 이 성례를 행함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성찬에 대해 바울이 가르친 말씀을 보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을 행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가 성찬에 참여하며 복음을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듣는다. 불신자는 성찬을 보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복음을 보고 듣는다.

교회는 의식으로 전락해 버린 성례를 회복해야 한다. 성례는 빨리 끝내 버려야 할 부담스런 행사가 아니다. 성례는 우리의 아이디어를 동원해 멋지고 그럴 듯하게 기획해 지겹지 않게 만들어야 할 잔치도 아니다. 성례는 예수님이 정해 주신 것이기에 언약의 하나님과 그 사역을 잘 드러내도록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 머물러 버린다면 핵심인 복음은 선포되지 못할 것이다.

권징을 회복해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권면과 징계라는 방법(마 16:19; 18:17-18; 고후2:6-8)도 주셨다. 오늘날 교회에 권(면)징(계)이 사라지면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권징은 하나님의 사랑의 매로서 죄를 범해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권징은 권징을 집행하는 자나 권징을 당하는 자나 피차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신 방법이다.

또 한편 권징은 교회의 성도가 죄를 범해 누룩처럼 거룩한 교회에 누룩처럼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것도 권징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 성도들이 사회에서 죄를 범해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럽힘을 당하게 되니 복음 선포를 통한 영혼구원에는 나쁜 영향이 있음을 당연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권징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방법이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어렵게 만들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은 인간보다 지혜롭다. 믿음으로 권징을 잘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살 길이며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다.

나가며

복음 전도는 ‘사람의 일’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다. 사람이 하는 전도이지만,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자칫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방법론이 지배하면서 이 부분이 헷갈린다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당신의 방법을 사용해 부르신다. 그 방법으로 교회의 ‘설교’와 ‘성례’와 ‘권징’이 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설교’가 미련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선포하신다. 신자는 그 말씀을 받아 성숙해 가며 불신자는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어 거듭난다.

고전1;21 전도의 미련한 것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전도의 방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사영리(CCC)나 브릿지(네비게이토), 어린이 전도, 노인 전도 등 맞춤 방식으로 전도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이와 같은 전도의 방법에 적용해서 생각합니다. 전도의 방식이 조금 투박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지혜’와 ‘미련한 것’을 대조합니다. 고린도 지역은 수사학이 발달했고, 사람들은 철학과 관련된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저주받은 것이고(신 21:23, 갈 3:13), 헬라인에게는 정치범이나 노예를 죽이는 수단이었습니다.

(산돌교회 포스팅 https://blog.naver.com/sandolchurch245/221676602092 )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사람이거나 정치범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헬라의 철학이 발달한 고린도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는데,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세상의 지혜를 기준으로 분파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전도(케리그마)’란 우리가 전도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방식, 즉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한 ‘십자가’라는 방식이 미련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헬라) 사람들이 미련하게 생각하는 십자가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미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지혜는 무력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고, 미련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큰 문맥은 분쟁인데, 세상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를 구별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가 진하게 베어져 있습니다. 복음 안에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를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고전1:18-2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하지만 그 분은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공개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동안 쭉 알려왔던 이름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런 예수님이 사역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많은 사람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였다. 병든 자가 낫고 장님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는 하나님이 분명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표적이었고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슈퍼스타가 되셨다. 많은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기를 삼 년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지 일주일 만에 서기관과 장로들의 음모에 의해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고 그리고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허무감을 안겨 주었다. 그 동안 예수님이 한 일은 무엇이라 말인가? 한 순간의 꿈이었던가? 이제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무엇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자랑스러웠던 예수님은 수치스러움의 상징인 십자가에 죽었다. 자신의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으시지 왜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제자들도 의아해 할 뿐이다. 자랑스럽지 못한 십자가, 감추고 싶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제는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분명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말씀을 보려고 한다.

1. 십자가의 도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죽음에 십자가의 도라고 붙인 것은 무엇인가? 도는 길을 말하고 진리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진리란 말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죽은 자를 믿는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자랑스럽지 못한 십자가의 죽음이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되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상징처럼 높이 올린 것은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십자가에 도가 있게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하는 그것이 어떻게 지혜가 되었는가? 죽음이라는 무능력을 상징하는 그 십자가가 어떻게 능력이 되었는가? 예수님은 삼 년을 공생애로 보내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며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병을 고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처럼 보여졌다. 주님은 어둠 대신에 빛을, 거짓 대신에 진리를, 불의 대신에 진리를, 율법 대신에 은혜를 선포하였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신 예수님이 굳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죽으셔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게 되리라 말씀하였고 또 부활하리라 말씀하였다. 제자들은 말렸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 되며 지금까지 예수님을 좇아간 우리들은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은 명예롭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고 거역할 수 없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비로소 모든 일이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했던 삼 년의 사역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그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미련하다고 보이는 그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 어떠하든 살아야지 죽는다고 해결되는가? 그래서 멸망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철학도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다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하나님의 지혜는 연약함 속에서 나타났고 죽음 속에서 나타났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사람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했지만 결국은 패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백신이라는 주사를 맞는다. 백신이 무엇인가? 바로 살아있는 병균이다. 병을 이기기 위해 병균을 주사 맞다니 이상하지 않는가? 에이즈 백신이 나왔을 때 과연 누가 이 실험에 참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에이즈 백신은 에이즈병균을 몸에 집어 넣는 것인데 그러다 걸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병균을 집어 넣는다는 발상이 어리석어 보이는가? 그러나 실상은 지혜인 것이다. 누구든 이 죽음의 백신을 맞으면 진짜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의 백신을 남기려는 것이고 누구든지 이 죽음의 백신을 맞는 자는 더 이상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의 백신을 맞는 자는 더 이상 죽음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2. 전도의 미련한 것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인데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전도라는 이러한 미련한 방법이 먹혀 들까? 우리는 그들에게 좀더 설득적이고 철학적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우리가 이 땅에서 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면 어떨까? ‘봐. 저기 예수 믿는 사람. 저 사람 보니까 나도 예수 믿고 싶어’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어 그들을 감동시켜 예수 믿게 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이 아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전도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 아덴에서 전도한 적이 있다. 그 때의 설교를 아레오바고 설교라고 하는데 대단히 학문적이고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성경 학자들 사이에 그것은 성공적인 설교가 아니었다고 본다. 십자가가 빠져 있는 철학적 설교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에 왔을 때는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으로 전도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미련한 방법인데 그 미련한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바울은 다르게 전도하지 않았다.’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간단한 방법이 미련해 보이지만 실상은 구원을 일으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는 지혜 있는 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능력 있는 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미련스럽게 단순하게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 가십시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전라남도 신안군에 증도라는 섬이 있다. 지금은 증도대교가 놓여 있어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 증도에는 섬주민들의 90%가 크리스천이다. 이 섬이 이런 복을 받게 된 것은 한 여성의 헌신이 밑거름이 되어서다. 고 문준경 전도사님이 그 주인공인 여성이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이 섬에 결혼하여 왔지만 첫 날밤에 소박을 맞아 절망의 자리에 떨어졌던 여인이다. 남편 되는 분이 이미 다른 여인이 있어 발 붙일 자리가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문준경 여인은 자살하여 젊은 삶을 마감하기로 작정하고는 죽을 자리는 찾아 서울로 올라 왔다. 죽을 자리를 한강으로 정하고 한 강가로 나갔는데 때마침 모래사장에 큰 천막을 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 갔더니 이성봉 목사님의 심령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그녀는 가까이 가서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예수란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버려진 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전도자가 되어 자기를 버린 땅인 증도로 찾아가 가가호호 방문하며 예수의 도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였던지 일년에 고무신이 아홉 켤례가 달아 없어진 정도로 다니며 전도하였다. 그리고 증도 뿐 아니라 가까운 섬들을 찾아 다니며 전도를 하며 100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성결 신학교를 다녀 전도사가 되었다. 문전도사의 전도로 한 국교회의 큰 목사님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정채기목사님. 이만신 목사님, 신복윤목사님, ccc의 김준곤목사님 등이다. 육이오 전쟁 당시 공산군은 증도까지 내려와 무수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그 참극이 일어나기 전 날 목포로 끌려 갔는데 다음날 문전도사 일행이 목포에 당도하니 국군이 수복해 공산당은 다 철수하고 없었다 문전도사는 일행의 만류에도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성도들이 모진 수모를 겪고 있던 증도를 향해 다시 떠났다. 공산당은 어미 닭이었던 문전도사를 때리다 안되니 총을 쏴 죽이고 말았다. 한국의 테레사, 섬마을의 어머니, 여자사도 바울은 그렇게 전도하다 순교했다. 그 결과 지금의 증도주민의 90% 이상이 크리스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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