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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17 (화) [하루 한 장]“좋은 밭에 떨어지매” (막4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마가복음 4장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로 다니시며
회중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천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유는 계시와 은폐의 이중효과를
가진 비밀을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좋은 밭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씨가 떨어지면 그 밭이
어떤 밭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씨는 밭을 드러내 줍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길가밭,
돌짝밭, 가시떨기밭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좋은밭이 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밭이신 예수님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십니다
천국을 누리고 살게 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입니다
나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나
천국을 사는 주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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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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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가 복음 4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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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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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주석

마가복음 제 4장

=====4:1

다시(* , 파린)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비법이 돋보이는

표현이다. 헬라어 ‘파린’은 ‘간다’, ‘보낸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다시 그 행위

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또 과거의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하여 일어날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바닷가’라는 말과 연결하여

생각할 때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2:13에 보면 ‘바

닷가’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적이 있고, 3:7에는 바다로 물러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

라갔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2:13의 가르침에 이어 ‘다시’ 바닷

가에서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3:7의 경우는 가르친다는 말이 없고 단순히 ‘바다’로 물

러간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활동하신 현장 묘사라는 점에서는 3:7과 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큰 무리'(*

, 오클로스 폴뤼스),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표현함으로

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큰

무리’라고 한 개역성경의 표현보다 상황 묘사가 더 실감 있다.즉 예수께서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본

장에서 다루는 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 통해 당시 예수의

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다.

바다에 떠 앉으시고 –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마 13:2)라고 표현한

다. 공동번역 역시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이 적절

하다. 즉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

가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강론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4:2

예수께서…가르치시니(* ,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여러가지를 비유로 – 여기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다.

이절을 장소적 상황 묘사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표현읕 방법론적 설명이다. 즉 이때까

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우회적으로 혹

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본장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

(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된다. 더

욱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 있는 비유 이외에도 상당수의 비유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

음을 시사한다.

가르치시는 중에(* , 엔 테 디다케) – 직역하면 ‘그 가르

침 가운데서’라는 뜻이다.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 소개되지

않은 비유도 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4:3

들으라(* , 아쿠에테) – 이 말은 ‘듣는다'(hear), ‘순종한다’

(obey), ‘말을 듣는다'(listen), ‘깨닫는다'(understand)의 뜻인 헬라어 ‘아쿠오'(*

)의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 이해하여 ‘깨달을

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이러한 표현은 미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가

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문형이다.이러한 어법은 (1)비유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간청을 위엄 있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비

유적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켜 잘못된 이해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이러한 경고형의 명령형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청중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암시된다.따라서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警告)

일 수도있다.이 말은 9절의 표현,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

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소재가 씨뿌리는 농부로부터 얻어졌

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식, 즉 씨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성경에서도 많

이 발견된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뿌리는

자(farmer, NIV)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비유의 동기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훈계를 위한 것

임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 훈계의 주체자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게 된다. 물론 본

문의 ‘씨뿌리는 자’를 오늘에 재해석하면 곧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4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

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뒤 밭을 갈게 된다. 그런후

나귀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있도

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 이랑

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며 쟁기로

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 된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서 ‘뿌릴새’란 정확

히 표현하면 ‘흩뿌리새’가 된다(창 26:12;레 25:3).

길가(* , 텐호돈) –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

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길을

가리킨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었고 대개가 여행

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

오솔길은 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밭 주위나 혹은 그 밭을 가로질러길

이 날 경우 그 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다(2:23;마 12:1;눅 6:1). 한

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번째가 ‘길’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싹틔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눅 8:5)이러한 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

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

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되

는 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

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 복음

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뿌리면 도리어 사단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고 또 복음이 밝히어 모욕을 당하게 된다.

=====4:5,6

흙이 얇은 돌밭에…말랐고 –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

지만(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

고 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왜냐하

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 아니라 거의 돌로 이뤄

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쉽

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같은 역할을 하기 때

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박

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

고 만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습기가 없어 말랐고’라는 표현을 통해 태양열로 인한

고사(枯死)를 말한 본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4:7

가시떨기(* , 타스 아칸다스) – 이 말은 ‘첨단’, ‘뾰족

나온 끝'(apoint)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가시가 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

리키는 말이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상황

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같은 번역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주위에 이러

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적

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만

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가시떨기 ‘위에’로(마 13:7), 누가복

음은 ‘…속에’로(눅 8:7) 각각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표현하기보다

가시 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본다.

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운(氣運)을 막으므로(* , 쉬네프닢산) – 이 말은 ‘함께’라는

뜻의 헬라어 ‘쉰'(* )이라는 말과 ‘질식시키다’, ‘억누르다’는 뜻의 ‘프니고'(*

)라는 말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함께 억눌렀기 때문에

질식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

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뿌

려진 씨는 공기나 햇빛을 적당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잎이나 가지가 뻗어 나갈 수도

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해석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덤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식물의 경우에도 적용

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가시덤불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자라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

로 진행되고 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점,

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내린 점, 세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

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 문맥상 잘 어울

리는 구절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무가치함을 잘 가르치고 있다.

=====4:8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 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

가 정성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킨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잘

맺게 한다.

결실하였으니(* , 에디두카르폰) – 이는 미완료 능

동태를 취하고 있어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 같

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Lane). 비

록 온갖 역경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필코 자라서 궁

극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점이다. 한편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만난

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의 결실은 매우

감격적일 만큼 풍성한 결실인 것이다.

=====4: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

것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

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경

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오해하며 잘못 알아듣는 현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

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이다. 둘째

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다. 결국 이 두 가지 의미

모두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4:10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절의

상황 설명은 1절의 상황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

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홀로 있음을 말하

고 있다. 따라서 이 ‘때’는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다(36절 주석 참조).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을 가리

킨다. 그런데 미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

리 탐구에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

적 무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는 달

리 마가복음에서만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

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기 위한 본서 기자 마가의 진지한 노력을 넌지시 보여 준 표현이라할 것이

다. 실로 예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

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다.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언급되었음

을 암시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비

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는

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

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

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

한 진리 교육이 예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2절 주석 참조).

=====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 ,뮈

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

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는 4번 쓰였다(계 1:20;10:7;17:5,7). 이 말은 ‘전수받은 자’란 뜻을 가진 헬

라어 ‘뮈스테스'(* )와 ‘폐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뮈에오'(*

)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용어는 당시 흥행하던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내에서 외부로 전혀 노출되지

않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던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Donald W. Burdick).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

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

해 선포된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

들이다.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이에 관히 래드(G. E. Ladd)는 말

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

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

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A theology of the N.T. p. 94).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

에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외인(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

히고 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사람들

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완악(玩惡)한 마음을 지닌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비유'(*

, 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않는 의문

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된다.

=====4:12

이는 저희로…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70인역(LXX)에 의한 사 6:9, 10의 자유스런

인용이다. 그런데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는 사 6:9, 10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셈어에 있어서 명령형은 곧 결과를 표현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사 6:9은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된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성의 마음

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침

묵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

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 카이 이아소마이 아

우투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카이 아페데 아

우토이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

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보증해 준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

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

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 , ‘하기 위하여’, NIV성경은

모호하게 ‘히나’를 ‘이는’이라고 번역함) 대신에 ‘호티'(* , ‘그결과’)

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는 ‘메포테'(* , ‘…하지 않도록’)라고 기

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하다. (1) ‘히나’는 문법상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하기 위하여’

라는 뜻을 갖는데,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적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

았을 때의 경우이다. 이에 따르면 이 비유의 목적이 ‘외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

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마가가 원래의 아람말 ‘데'(* )를 오역하여 ‘히나’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 ‘데’는 ‘…하기 위하여’ (in order that)를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하는 자'(who)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해석되어야 한다(W. W. Wessel). (3)’히나’는 마태복음의 ‘호티'(*

)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

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히나’는 ‘…때

문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본문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상의 해석 모두 존중되어야 한

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로 비유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

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본절

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이유

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

시는 방법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표면적인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그 실제적

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느 것’, 즉

완악한 맹목성과 복음의 거부에 관한 정죄 및 그로 인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Roberts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완고한 불신자에게는 비유가 심판을

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그같은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제공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충격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 마

13:11-15주석을 참조하라.

=====4:13

너희가…알지 못할진대 –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입문

한(11절)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가? 만일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더

어려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섞인 책망을 하신 것이다. 한편 이같

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했다.

=====4:14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의

미가 해석된다.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그

는 분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다.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밝히

고 있는데(마 13:19) 비해 누가 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서술

한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

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말씀’, 곧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확실한 소식인 것이다. 사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11절) 이러한 해석은 적절하다.

한편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the sowing of the Word)이었

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the reception of the

Word)임에 유의해아 한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비유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사실 예수는 이미 당신의 ‘말씀을 뿌리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의 부정적 측면을 경험하신 바 있다(2, 3장).

=====4: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 본문은 4절의 중복으로서 매사를 신중하고 세밀

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가 기록의 특징이다.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 경험

과 선입관과 주의 주장으로 인해 굳어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킨다. 이들에

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이니(* , 후토이 데 에이신) – 이를 좀더 상

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이

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이다.

사단이 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 , 사타나스)이란 인간의 내면에

흩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

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수 있는 ‘악한

자'(* , 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 , 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

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주어

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이

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면서도 즉시 자기 삶으로 옮겨 천국

을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말씀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

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이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지 못하

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간다.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 – 여기서 ‘저희에게 뿌리운’은 원어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을

취한 단어로서 그들에게 넉넉하고 적절히 뿌려져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본문과 평행

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단

지 주변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뿌려졌음을 암시한다.

=====4:16

본절은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에 대한(5절) 해설이다.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 15절과의 차이점이 있다. 15절에서는 말

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受容)하

였음을 밝힌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비유는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

사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 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몰두하

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씨

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말씀이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커가 끝내 열매맺을 수 있

도록 하는 원천인 뿌리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

은 경박하고 유약하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 – 6절에 언급된 태양열이 여기서는

‘환난'(* , 드립시스)과 ‘핍박'(* ,디오그모스)으로 묘사

되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디오그모

스’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이 양자는 외부로부터 오

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킨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

라 살때, 외부로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있게 마련이

다. 또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공격해 오기도 한다(롬

1:25;2:8;약 3:14;벧후 2:2). 15절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된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다. 이러한 환난이나 핍

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생장(生長)의 크나큰

장애물로 대두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있어서

습기 만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없이는 ‘씨’

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그 ‘씨’는 ‘말씀을 인하여’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이는 결단코 풍성한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Lenski).

곧 넘어지는 자요 – 여기서 ‘넘어진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

)는 원형 ‘스칸달론'(* , ‘동물들을 잡기 위

해 설치한 덫에 있는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지칭)에서 유래한 현재 시상의 단어로서

결국 계속 그 함정에 빠져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

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 화려하고 푸르르다 하더라도 강렬한 태양 앞에 쉬 쓰러지

고 말듯이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심령은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 상실한 짐승처럼 죄의 올무, 절망과 좌절의

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딤전 3:7;6:9).

=====4:18,19

가시떨기에…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 –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

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이다. 앞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

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

로 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적 측면에서 17

절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본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

어난 옥토임에 분명하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이

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 가시

를 세경우로 묘사하고 있다. (1)’세상의 염려’이다. 여기 ‘세상'(*

, 투 아이오노스)은 문자적으로 ‘그 시대’로서 일정한 기간 내지는 인간에게 부과

된 한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종말을 고하게

될 현세대에 국한된 근심(Lenski), 현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

(Donald W. Burdick),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불안(Taylor)등이다(마

6:25, 31;눅 8:14;21:34;고전 7:33).(2)’재리(財利)의 유혹’이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

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

기 때문이다(The Pulpit Commentary , 딤전 6:10).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지

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

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Taylor,

Lenski, Burdick, 마 11:21-23).(3)’기타 욕심’이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

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

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과 평

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에 ‘이 생의…일락(逸樂)’이라 표현함으로써 하

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

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 이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운찬 가시떨기처

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버

린다.

=====4:20

말씀을 듣고 받아…결실을 하는 자 –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의 경우를

언급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이다. 실로 ‘씨'(말씀)

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

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 이같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즉 그는 말씀을 경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

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한편 여기

서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듣고'(* , 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

다’,’이해하다’는 뜻도 지님)와 ‘받아'(* ,파라데콘타이,

‘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리고 ‘결실을 하는'(*

, 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들여 계속적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

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착

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주

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소출은 그 밭(사람)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 씨(말씀)가 지닌 역동적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회

개와 겸손과 온유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변화는 그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타인에게도 옮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

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

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준다. 이는 주의 말씀

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결실 각각을 존중해야 한다.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21-25절은 두가지 내용이(21-23, 24-25절) 한 데 어우러진

일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기회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들이다.

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되고 있다(21절-마 15:15;23절-마 11:15;13:9,43;24

절-마 7:2;25절-마 25:29등).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자의

책임성(責任性)이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 다른 복음서의 평행구와는 달리 오직 마가만이

‘등불'(* , 호뤼크노스)을 ‘가져 온다'(* , 에르케타이)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등불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본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즉 등불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그 등불’ 곧 세상에

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오신’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가져 온다’

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이다. 즉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계시를 종말의

시점에 이른 이제 만인에게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 언급

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 개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Taylor). 한편 본문에

언급된 ‘등’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된 납작한 등잔으로서 그 속에는 감람유

(olive)가 채워지며 그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켜게 된다. 이 등잔은 주인이나 종에

의해 방 안으로 옮겨지며 옮거진 등잔은 주로 기다란 등대 위에 안치되어 주위를 밝게

한다.

말 아래…두려 함이냐 –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헬라어 ‘메티'(* )로

시작되는 본문은 결단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은 가루나 곡식을 되는 도량형기구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뒷박’이라고 번역하며 누

가복음의 평행구(눅 8:16)는 등불을 덮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등불

을 켜지 않을 때 이 그릇으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말'(bushel)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만드

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한다. 그리고 평상은 침상(공동번역)을 뜻하며 상징적으

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평온함과 쾌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이처럼 ‘말’과

‘평상’으로써 ‘등불’을 가리우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세상

의 유익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 여기서 ‘등경’은 등잔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서 가난

한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것 대신 흙으로 된 바람벽에 돌출구를 만들어 그곳에 등잔

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본 구절의 의도는,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집 안을 환하게 밝

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마 5:15 주석 참조) 빛이 가장 잘 퍼져나갈 수 있는 장소인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경은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계 1:20). 여기서 등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악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의 세계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

다(요 1:9). 둘째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빛이 세상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3;시 66:16;행 20:24;롬 15:19;

골 1:23).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 이 구절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

고 이와 비슷한 구절이 마 10:26과 눅 12:2에도 나오지만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

8:17이 가장 적절히 본뜻을 밝혀주고 있다고 본다. 이 비유는 ‘숨긴 것은 언제나 드러

나게 마련이다’는 뜻의 속담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아래 모든 사물이 밝히

드러난다는 경험적 상식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

을 말하고 있다. 이 의미는 21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즉 (1)빛 아

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부정직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2)심판 사상과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최후심판의 때에는 모든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다 드러나므로(고후

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회개하는 삶

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5:31-46). (3)’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11절 주석 참조) 그 천국의 비밀은 감

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

해 천국의 비밀은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다. (4)’메시야 비밀’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었지만 현재 그 사실을

숨기려 한 의도(9:9)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비밀이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

언젠가는 밝히 드러 날것이라는 암시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성이 밝히 드러났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재림(* )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 의

미의 서두가 3절에서도 언급되었다(3,9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

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문

구로 생각하면 된다(마 11:15;13:9;눅 14:35).

=====4:24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

가'(눅 8:18)로 표현한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23절의 격언구와 비슷하게 반복하여 사용한 경고적 어투

로 보면 된다. 즉 똑바로 들어 비밀을 깨달으라는 촉구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또 더 받으리니 – 이와 비슷한 문구가 마 7:2과

눅 6:38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에서는 주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을 삼가하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반해, 21절부터 이어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

용하는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된다. 즉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영

적 통찰력으로써 받아들인다면 그 마음 그릇에 풍족히 채워질 정도로 이해될 것이고

계속해서 더 크게 이해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한편 본 구절을 단지 문자적으로 직역하

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이다. 공동번역

에서는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남에게 행한 것에 따라 보상되는 응보의

개념,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갈 6:7;고후 9:6). 그러나 앞에

서도 언급했듯이 본문은 사람이 영적 지각력을 갖고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예수에 관한 진리를 밝히 알게 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실로 각자가

지닌 각각의 그릇(이해력, 지각력 등)에 따라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많이도 받

고 적게도 받을 것이다(고후 9: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복음을 수

용하는 데 따른 보상적 응보는 대등한 보상이 아니라 ‘더 받으리’라는 표현을 덧붙여

보상의 풍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의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現

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마 13:12).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구로 보인다. 누

가복음의 평행구(눅 8:18)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마 13:12;25:29;

눅 19:26). 이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과 관

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천국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며 애쓰는 자는 더 많은 비밀

을 알게 될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고 듣지도 않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리

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세째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만 나쁜 땅의 씨앗

은 열매를 못맺는 것처럼 겸손하고 말씀에 성실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풍성한 말씀

의 열매를 맺어 기쁨을 누리지만 반대로 편견과 비뚤어진 마음과 생각을 소유한 자는

오히려 현재 지니고 있는 조그마한 행복까지 빼앗긴다는 심판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

다(사 3:10; 렘 32:19). 물론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과 진리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 현

상을 의미하는 첫번째 견해가 적절하다.

=====4:26

하나님의 나라는…뿌림과 같으니 – 여기서 또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본 비유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뿌리는 자

의 비유’와는 다르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

이 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

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이

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

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철

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한다(Donald W. Burdick).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

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알

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주

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

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

는 하나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이다(고전 3:6). 둘째, 씨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

긴다.

씨가 나서 자라되…알지 못하느니라 –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원인적

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아

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못한

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져야 한다(15:43).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 그

땅과 생명있는 씨앗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

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배

제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스스로'(* ,아우토마테)란 ‘자동

적’이라는 뜻이다. 즉 열매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26절에서 씨뿌리는 자를 ‘사람'( , 안

드로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일

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는 결정적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엡 2:8).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

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요 6:28, 29;히 11:6;요일 3:23).

처음에는 싹이요…충실한 곡식이라 –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법칙처

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싹’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

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

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씨의 결과이

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

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

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 pp 152-153)라고 하였다. 한

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

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불신앙

적 사람들에게 이 교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두 철미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함

을 가르치고 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4:29

열매가 익으면…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 ,

파라도)은 제2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

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

글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

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

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뿌

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

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Cranfield).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이다.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

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잠

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 14:14-16).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

부가 (27절)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요

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

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換喩的)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

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심

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

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

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

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이다(하

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

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

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4:30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된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

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

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

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

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

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

=====4:31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

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

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

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

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

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

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

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

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4:32

자라서…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

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번역에는 ‘어떤 푸성

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

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가히 ‘나무’라 봄직하

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

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

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

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29절).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

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

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13:31).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

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

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

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 , 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4:33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

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

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

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

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늘나

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11,12절 주석을

참조하라.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

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가지의 비

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

을 암시하고 있다(13,33절 주석 참조). 사실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

들조차로 예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

더라'(* , 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

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3절) 진지하

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

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

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이다

(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

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이

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3-20절).

=====4:35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

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

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

(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

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

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

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

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

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

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

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4: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

하고 있다.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

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

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

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

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

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

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

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

(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

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

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기

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

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

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

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

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

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

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

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

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4:38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

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

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

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

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

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어쨌든 이 ‘베개'(* ,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

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

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

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

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 참 인간이심

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

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

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

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

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

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

)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現場性)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

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

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

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

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

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

을 것이다.

=====4:39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

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

실은 ‘꾸짖으시며'(* ,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

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

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

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

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

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

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

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

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

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바로 그 하나님

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4:40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

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

(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

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

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

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

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

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

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

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

에 대해 여러 번 책망하셨는데, 여기 기록된 것이 최초의 사건이다

(7:18;8:17,18,21,33; 9:19).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

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

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

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

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

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

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

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

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

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

5:7).

헬라어 마가복음 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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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팔린 에릌사토 디다케인 파라 텐 달라싼 카이 쉬나게타이 프로스 아우톤 오클로스 플레이스토스 호스테 아우톤 에이스 플로이온 엠반타 카데스다이 엔 테 달라쎄 카이 파스 호 오클로스 프로스 텐 달라싼 에피 테스 게스 에산

개역개정,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새번역,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 주위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에 올라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호숫가를 따라 앉아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영어NIV,1 Again Jesus began to teach by the lake. The crowd that gathered around him was so large that he got into a boat and sat in it out on the lake, while all the people were along the shore at the water’s edge.

영어NASB,1 He began to teach again by the sea. And such a very large crowd gathered to Him that He got into a boat in the sea and sat down; and the whole crowd was by the sea on the land.

영어MSG,1 He went back to teaching by the sea. A crowd built up to such a great size that he had to get into an offshore boat, using the boat as a pulpit as the people pushed to the water’s edge.

영어NRSV,1 Again he began to teach beside the sea. Such a very large crowd gathered around him that he got into a boat on the sea and sat there, while the whole crowd was beside the sea on the land.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παλιν ηρξατο διδασκειν παρα την θαλασσαν και συνηχθη προς αυτον οχλος πολυς ωστε αυτον εμβαντα εις το πλοιον καθησθαι εν τη θαλασση και πας ο οχλος προς την θαλασσαν επι της γης ην

라틴어Vulgate,1 et iterum coepit docere ad mare et congregata est ad eum turba multa ita ut in navem ascendens sederet in mari et omnis turba circa mare super terram erat

히브리어Modern,1 וישב אל הים ויחל ללמד ויקהלו אליו המון עם רב עד אשר ירד לשבת באניה בים וכל העם עומד על חוף הים ביבשה׃

성 경: [막4: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계속되는 갈릴리 사역]

󰃨 다시(*, 파린)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비법이 돋보이는 표현이다. 헬라어 ‘파린’은 ‘간다’, ‘보낸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다시 그 행위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또 과거의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하여 일어날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바닷가’라는 말과 연결하여 생각할 때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2:13에 보면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적이 있고, 3:7에는 바다로 물러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2:13의 가르침에 이어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3:7의 경우는 가르친다는 말이 없고 단순히 ‘바다’로 물러간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활동하신 현장 묘사라는 점에서는 3:7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큰 무리'(*, 오클로스 폴뤼스),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큰 무리’라고 한 개역성경의 표현보다 상황 묘사가 더 실감 있다.즉 예수께서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본장에서 다루는 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 통해 당시 예수의 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다.

󰃨 바다에 떠 앉으시고 –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마 13:2)라고 표현한다. 공동번역 역시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이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가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강론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카이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엔 파라볼라이스 폴라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엔 테 디다케 아우투

개역개정,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새번역,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2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영어NIV,2 He taught them many things by parables, and in his teaching said:

영어NASB,2 And He was teaching them many things in parables, and was saying to them in His teaching,

영어MSG,2 He taught by using stories, many stories.

영어NRSV,2 He began to teach them many things in parables, and in his teaching he sai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εδιδασκεν αυτους εν παραβολαις πολλα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εν τη διδαχη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et docebat eos in parabolis multa et dicebat illis in doctrina sua

히브리어Modern,2 וילמדם הרבה במשלים ויאמר אליהם בלמדו אתם׃

성 경: [막4: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계속되는 갈릴리 사역]

󰃨 예수께서… 가르치시니(*,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이는 미완료 과거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 여러가지를 비유로 – 여기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절을 장소적 상황 묘사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표현읕 방법론적 설명이다. 즉 이때까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우회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본장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된다. 더욱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 있는 비유 이외에도 상당수의 비유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음을 시사한다.

󰃨 가르치시는 중에(*, 엔 테 디다케) – 직역하면 ‘그 가르침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 소개되지 않은 비유도 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아쿠데테 이두 엨셀덴 호 스페이론 투 스페이라이

개역개정,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새번역,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우리말성경,3 “잘 들으라.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가톨릭성경,3 “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영어NIV,3 “Listen! A farmer went out to sow his seed.

영어NASB,3 “Listen to this! Behold, the sower went out to sow;

영어MSG,3 “Listen. What do you make of this? A farmer planted seed.

영어NRSV,3 “Listen! A sower went out to sow.

헬라어신약Stephanos,3 ακουετε ιδου εξηλθεν ο σπειρων του σπειραι

라틴어Vulgate,3 audite ecce exiit seminans ad seminandum

히브리어Modern,3 שמעו שמוע הנה הזרע יצא לזרע׃

성 경: [막4: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들으라(*, 아쿠에테) – 이 말은 ‘듣는다'(hear), ‘순종한다'(obey), ‘말을 듣는다'(listen), ‘깨닫는다'(understand)의 뜻인 헬라어 ‘아쿠오'(*)의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 이해하여 ‘깨달을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표현은 미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문형이다. 이러한 어법은 (1)비유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간청을 위엄 있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비유적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켜 잘못된 이해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알 수 있다. (3)이러한 경고형의 명령형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청중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암시된다. 따라서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警告)일 수도 있다. 이 말은 9절의 표현,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 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소재가 씨뿌리는 농부로부터 얻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식, 즉 씨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발견된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뿌리는 자(farmer, NIV)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비유의 동기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훈계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 훈계의 주체자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게 된다. 물론 본문의 ‘씨뿌리는 자’를 오늘에 재해석하면 곧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으로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스페이레인 호 멘 에페센 파라 텐 호돈 카이 엘덴 타 페테이나 투 우라누 카이 카테파겐 아우토

개역개정,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새번역,4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우리말성경,4 그가 씨를 뿌리고 있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모두 쪼아 먹었다.

가톨릭성경,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영어NIV,4 As he was scattering the seed, some fell along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영어NASB,4 as he was sowing, some seed fell beside the road,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영어MSG,4 As he scattered the seed, some of it fell on the road and birds ate it.

영어NRSV,4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σπειρειν ο μεν επεσεν παρα την οδον και ηλθεν τα πετεινα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κατεφαγεν αυτο

라틴어Vulgate,4 et dum seminat aliud cecidit circa viam et venerunt volucres et comederunt illud

히브리어Modern,4 ויהי בזרעו ויפל מן הזרע על יד הדרך ויבא עוף השמים ויאכלהו׃

성 경: [막4: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 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뒤 밭을 갈게 된다. 그런후 나귀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있도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 이랑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며 쟁기로 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 된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서 ‘뿌릴새’란 정확히 표현하면 ‘흩뿌리새’가 된다(창 26:12;레 25:3).

󰃨 길 가(*, 텐호돈) –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길을가리킨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었고 대개가 여행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 오솔길은 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밭 주위나 혹은 그 밭을 가로질러 길이 날 경우 그 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다(2:23;마 12:1;눅 6:1). 한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번째가 ‘길’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싹틔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눅 8:5)이러한 점을 좀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뿌리면 도리어 사단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또 복음이 밝히어 모욕을 당하게 된다.

알로 데 에페센 에피 토 페트로데스 호푸 우크 에이켄 겐 폴렌 카이 유데오스 엨사네테일렌 디아 토 메 에케인 바도스 게스

개역개정,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새번역,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우리말성경,5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얕아 싹이 금방 돋았지만

가톨릭성경,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영어NIV,5 Some fell on rocky places, where it did not have much soil. It sprang up quickly, because the soil was shallow.

영어NASB,5 “Other seed fell on the rocky ground where it did not have much soil; and immediately it sprang up because it had no depth of soil.

영어MSG,5 Some fell in the gravel; it sprouted quickly but didn’t put down roots,

영어NRSV,5 Other seed fell on rocky ground, where it did not have much soil, and it sprang up quickly, since it had no depth of soil.

헬라어신약Stephanos,5 αλλο δε επεσεν επι το πετρωδες οπου ουκ ειχεν γην πολλην και ευθεως εξανετειλεν δια το μη εχειν βαθος γης

라틴어Vulgate,5 aliud vero cecidit super petrosa ubi non habuit terram multam et statim exortum est quoniam non habebat altitudinem terrae

히브리어Modern,5 ויש אשר נפל על מקום הסלע אשר אין לו שם אדמה הרבה וימהר לצמח כי לא היה לו עמק אדמה׃

성 경: [막4:5,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흙이 얇은 돌밭에… 말랐고 –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만(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 아니라 거의 돌로 이뤄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박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고 만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습기가 없어 말랐고’라는 표현을 통해 태양열로 인한 고사(枯死)를 말한 본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헬리우 데 아나테일란토스 에카우마티스데 카이 디아 토 메 에케인 리잔 엨세란데

개역개정,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새번역,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우리말성경,6 해가 뜨자 그 싹은 말랐고 뿌리가 없어서 시들어 버렸다.

가톨릭성경,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영어NIV,6 But when the sun came up, the plants were scorched, and they withered because they had no root.

영어NASB,6 “And after the sun had risen, it was scorched; and because it had no root, it withered away.

영어MSG,6 so when the sun came up it withered just as quickly.

영어NRSV,6 And when the sun rose, it was scorched; and since it had no root, it withered away.

헬라어신약Stephanos,6 ηλιου δε ανατειλαντος εκαυματισθη και δια το μη εχειν ριζαν εξηρανθη

라틴어Vulgate,6 et quando exortus est sol exaestuavit et eo quod non haberet radicem exaruit

히브리어Modern,6 ויהי כזרח השמש ויצרב וייבש כי אין לו שרש׃

카이 알로 에페센 에이스 타스 아칸다스 카이 아네베산 하이 아칸다이 카이 쉬네프닠산 아우토 카이 카르폰 우크 에도켄

개역개정,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새번역,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7 다른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무성해져 그 기운을 막는 바람에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가톨릭성경,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영어NIV,7 Other seed fell among thorns, which grew up and choked the plants, so that they did not bear grain.

영어NASB,7 “Other seed fell among the thorns, and the thorns came up and choked it, and it yielded no crop.

영어MSG,7 Some fell in the weeds; as it came up, it was strangled among the weeds and nothing came of it.

영어NRSV,7 Other seed fell among thorns, and the thorns grew up and choked it, and it yielded no grain.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αλλο επεσεν εις τας ακανθας και ανεβησαν αι ακανθαι και συνεπνιξαν αυτο και καρπον ουκ εδωκεν

라틴어Vulgate,7 et aliud cecidit in spinas et ascenderunt spinae et offocaverunt illud et fructum non dedit

히브리어Modern,7 ויש אשר נפל בין הקצים ויעלו הקצים וימעכהו ולא נתן פרי׃

성 경: [막4: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 타스 아칸다스) – 이 말은 ‘첨단’, ‘뾰족나온 끝'(apoint)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가시가 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리키는 말이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오히려 이같은 번역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주위에 이러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만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가시떨기 ‘위에’로(마 13:7), 누가복음은 ‘… 속에’로(눅 8:7) 각각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표현하기보다가시 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본다. 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른다. 그러나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기운(氣運)을 막으므로(*, 쉬네프닢산) – 이 말은 ‘함께’라는 뜻의 헬라어 ‘쉰'(*)이라는 말과 ‘질식시키다’, ‘억누르다’는 뜻의 ‘프니고'(*)라는 말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함께 억눌렀기 때문에 질식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뿌려진 씨는 공기나 햇빛을 적당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잎이나 가지가 뻗어 나갈 수도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덤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식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가시덤불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자라날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점, 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내린 점, 세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 문맥상 잘 어울리는 구절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무가치함을 잘 가르치고 있다.

카이 알로 에페센 에이스 텐 겐 텐 칼렌 카이 에디두 카르폰 아나바이논타 카이 아웈사논타 카이 에페렌 헨 트리아콘타 카이 헨 헼세콘타 카이 헨 헤카톤

개역개정,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새번역,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우리말성경,8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들을 맺었다.”

가톨릭성경,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영어NIV,8 Still other seed fell on good soil. It came up, grew and produced a crop, multiplying 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영어NASB,8 “Other seeds fell into the good soil, and as they grew up and increased, they yielded a crop and produced thirty, sixty, and a hundredfold.”

영어MSG,8 Some fell on good earth and came up with a flourish, producing a harvest exceeding his wildest dreams.

영어NRSV,8 Other seed fell into good soil and brought forth grain, growing up and increasing and yielding thirty and sixty and a hundredfold.”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αλλο επεσεν εις την γην την καλην και εδιδου καρπον αναβαινοντα και αυξανοντα και εφερεν εν τριακοντα και εν εξηκοντα και εν εκατον

라틴어Vulgate,8 et aliud cecidit in terram bonam et dabat fructum ascendentem et crescentem et adferebat unum triginta et unum sexaginta et unum centum

히브리어Modern,8 ויש אשר נפל על האדמה הטובה ויתן פרי עלה וגדל ויעש זה שלשים שערים וזה ששים וזה מאה׃

성 경: [막4: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 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가 정성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킨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잘맺게 한다.

󰃨 결실하였으니(*, 에디두카르폰) – 이는 미완료 능동태를 취하고 있어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Lane). 비록 온갖 역경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필코 자라서 궁극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할 점이다. 한편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만난 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의 결실은 매우 감격적일 만큼 풍성한 결실인 것이다.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호 에콘 오타 아쿠에인 아쿠에토

개역개정,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새번역,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말성경,9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가톨릭성경,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영어NIV,9 Then Jesus said,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영어NASB,9 And He was saying, “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영어MSG,9 “Are you listening to this? Really listening?”

영어NRSV,9 And he said, “Let anyone with ears to hear listen!”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ο εχων ωτα ακουειν ακουετω

라틴어Vulgate,9 et dicebat qui habet aures audiendi audiat

히브리어Modern,9 ויאמר אליהם מי אשר אזנים לו לשמע ישמע׃

성 경: [막4: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 것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경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이는 오해하며 잘못 알아듣는 현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이다. 둘째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다. 결국 이 두 가지 의미모두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호테 데 에게네토 카타모나스 에로테산 아우톤 호이 페리 아우톤 쉰 토이스 도데카 텐 파라볼렌

개역개정,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새번역,10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그 비유들이 무슨 뜻인지를 예수께 물었다.

우리말성경,10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열두 제자들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비유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영어NIV,10 When he was alone, the Twelve and the others around him asked him about the parables.

영어NASB,10 As soon as He was alone, His followers, along with the twelve, began asking Him about the parables.

영어MSG,10 When they were off by themselves, those who were close to him, along with the Twelve, asked about the stories.

영어NRSV,10 When he was alone, those who were around him along with the twelve asked him about the parable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τε δε εγενετο καταμονας ηρωτησαν αυτον οι περι αυτον συν τοις δωδεκα την παραβολην

라틴어Vulgate,10 et cum esset singularis interrogaverunt eum hii qui cum eo erant cum duodecim parabolas

히브리어Modern,10 ויהי בהיותו לבדו וישאלוהו האנשים אשר סביביו עם שנים העשר על המשל׃

성 경: [막4:1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절의 상황 설명은 1절의 상황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홀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때’는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다(36절 주석 참조).

󰃨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리 탐구에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무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마가복음에서만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지적해 주기 위한 본서 기자 마가의 진지한 노력을 넌지시 보여 준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다.

󰃨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언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한 진리 교육이 예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2절 주석 참조).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휘민 데도타이 그노나이 토 뮈스테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에케이노이스 데 토이스 엨소 엔 파라볼라이스 타 판타 기네타이

개역개정,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새번역,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 ㉠그, ‘비유로’

우리말성경,1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됐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한다.

가톨릭성경,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영어NIV,11 He told them, “The secret of the kingdom of God has been given to you. But to those on the outside everything is said in parables

영어NASB,11 And He was saying to them, “To you has been given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but those who are outside get everything in parables,

영어MSG,11 He told them, “You’ve been given insight into God’s kingdom–you know how it works. But to those who can’t see it yet, everything comes in stories, creating readiness, nudging them toward receptive insight.

영어NRSV,11 And he said to them, “To you has been given the secret of the kingdom of God, but for those outside, everything comes in parable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υμιν δεδοται γνωναι το μυστηριον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 εκεινοις δε τοις εξω εν παραβολαις τα παντα γινεται

라틴어Vulgate,11 et dicebat eis vobis datum est mysterium regni Dei illis autem qui foris sunt in parabolis omnia fiunt

히브리어Modern,11 ויאמר אליהם לכם נתן לדעת סוד מלכות האלהים ואשר בחוץ להם הכל במשלים׃

성 경: [막4:1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 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는 4번 쓰였다(계 1:20;10:7;17:5,7). 이 말은 ‘전수받은 자’란 뜻을 가진 헬라어 ‘뮈스테스'(*)와 ‘폐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뮈에오'(*)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이 용어는 당시 흥행하던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내에서 외부로 전혀 노출되지 않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던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된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에 관해 래드(G. E. Ladd)는 말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A theology of the N. T. p. 94). 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 외인(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완악(玩惡)한 마음을 지닌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비유'(*, 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된다.

히나 블레폰테스 블레포신 카이 메 이도신 카이 아쿠온테스 아쿠오신 카이 메 쉬니오신 메포테 에피스트렢소신 카이 아페데 아우토이스 타 하마르테마타

개역개정,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새번역,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사 6:9; 10

우리말성경,12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6:9-10

가톨릭성경,12 ‘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12 so that, “‘they may be ever seeing but never perceiving, and ever hearing but never understanding; otherwise they might turn and be forgiven!'”

영어NASB,12 so that WHILE SEEING, THEY MAY SEE AND NOT PERCEIVE, AND WHILE HEARING, THEY MAY HEAR AND NOT UNDERSTAND, OTHERWISE THEY MIGHT RETURN AND BE FORGIVEN.”

영어MSG,12 These are people– Whose eyes are open but don’t see a thing, Whose ears are open but don’t understand a word, Who avoid making an about-face and getting forgiven.”

영어NRSV,12 in order that ‘they may indeed look, but not perceive, and may indeed listen, but not understand; so that they may not turn again and be forgiven.'”

헬라어신약Stephanos,12 ινα βλεποντες βλεπωσιν και μη ιδωσιν και ακουοντες ακουωσιν και μη συνιωσιν μηποτε επιστρεψωσιν και αφεθη αυτοις τα αμαρτηματα

라틴어Vulgate,12 ut videntes videant et non videant et audientes audiant et non intellegant nequando convertantur et dimittantur eis peccata

히브리어Modern,12 למען יראו ראו ולא ידעו ושמעו שמוע ולא יבינו פן ישובו ונסלח לחטאתם׃

성 경: [막4:1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이는 저희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70인역(LXX)에 의한 사 6:9, 10의 자유스런 인용이다. 그런데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는 사 6:9, 10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셈어에 있어서 명령형은 곧 결과를 표현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사 6:9은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된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카이 이아소마이 아우투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카이 아페데 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보증해 준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 ‘하기 위하여’, NIV성경은 모호하게 ‘히나’를 ‘이는’이라고 번역함) 대신에 ‘호티'(*, ‘그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는 ‘메포테'(*, ‘… 하지 않도록’)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해석이 분분하다. (1) ‘히나’는 문법상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데,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적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았을 때의 경우이다. 이에 따르면 이 비유의 목적이 ‘외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마가가 원래의 아람말 ‘데'(*)를 오역하여 ‘히나’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 ‘데’는 ‘… 하기 위하여’ (in order that)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하는 자'(who)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해석되어야 한다(W. W. Wessel). (3)’히나’는 마태복음의 ‘호티'(*)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히나’는 ‘… 때문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본문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상의 해석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로 비유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본절 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이유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방법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표면적인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그 실제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완악한 맹목성과 복음의 거부에 관한 정죄 및 그로 인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Roberts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완고한 불신자에게는 비유가 심판을 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그같은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제공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충격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 마13:11-15 주석을 참조하라.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우크 오이다테 텐 파라볼렌 타우텐 카이 포스 파사스 타스 파라볼라스 그노세스데

개역개정,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새번역,13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

우리말성경,13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다른 비유는 어떻게 알아듣겠느냐?

가톨릭성경,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영어NIV,13 Then Jesus said to them, “Don’t you understand this parable? How then will you understand any parable?

영어NASB,13 And He said to them, “Do you not understand this parable? And how will you understand all the parables?

영어MSG,13 He continued, “Do you see how this story works? All my stories work this way.

영어NRSV,13 And he said to them, “Do you not understand this parable? Then how will you understand all the parables?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ουκ οιδατε την παραβολην ταυτην και πως πασας τας παραβολας γνωσεσθε

라틴어Vulgate,13 et ait illis nescitis parabolam hanc et quomodo omnes parabolas cognoscetis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 להם הן לא ידעתם את המשל הזה ואיך תבינו את המשלים כלם׃

성 경: [막4:1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너희가… 알지 못할진대 –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입문한(11절)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가? 만일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더 어려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섞인 책망을 하신 것이다. 한편 이같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했다.

호 스페이론 톤 로곤 스페이레이

개역개정,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새번역,14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4 씨를 뿌리는 농부는 말씀을 뿌리는 사람이다.

가톨릭성경,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영어NIV,14 The farmer sows the word.

영어NASB,14 “The sower sows the word.

영어MSG,14 “The farmer plants the Word.

영어NRSV,14 The sower sows the wor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 σπειρων τον λογον σπειρει

라틴어Vulgate,14 qui seminat verbum seminat

히브리어Modern,14 הזרע הוא זרע את הדבר׃

성 경: [막4:1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의미가 해석된다.

󰃨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그는 분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밝히고 있는데(마 13:19) 비해 누가 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서술한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말씀’, 곧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확실한 소식인 것이다. 사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11절) 이러한 해석은 적절하다. 한편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the sowing of the Word)이었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the reception of theWord)임에 유의해아 한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비유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사실 예수는 이미 당신의 ‘말씀을 뿌리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의 부정적 측면을 경험하신 바 있다(2, 3장).

후토이 데 에이신 호이 파라 텐 호돈 호푸 스페이레타이 호 로고스 카이 호탄 아쿠소신 유뒤스 에르케타이 호 사타나스 카이 아이레이 톤 로곤 톤 에스파르메논 에이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새번역,15 길가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말씀이 뿌려질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

우리말성경,15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가로채 간다.

가톨릭성경,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영어NIV,15 Some people are like seed along the path, where the word is sown. As soon as they hear it, Satan comes and takes away the word that was sown in them.

영어NASB,15 “These are the ones who are beside the road where the word is sown; and when they hear, immediately Satan comes and takes away the word which has been sown in them.

영어MSG,15 Some people are like the seed that falls on the hardened soil of the road. No sooner do they hear the Word than Satan snatches away what has been planted in them.

영어NRSV,15 These are the ones on the path where the word is sown: when they hear, Satan immediately comes and takes away the word that is sown in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υτοι δε εισιν οι παρα την οδον οπου σπειρεται ο λογος και οταν ακουσωσιν ευθεως ερχεται ο σατανας και αιρει τον λογον τον εσπαρμενον 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15 hii autem sunt qui circa viam ubi seminatur verbum et cum audierint confestim venit Satanas et aufert verbum quod seminatum est in corda eorum

히브리어Modern,15 ואלה הם הנזרעים על יד הדרך אשר יזרע בם הדבר וכשמעם אותו מיד בא השטן וישא את הדבר הזרוע בלבבם׃

성 경: [막4:1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 본문은 4절의 중복으로서 매사를 신중하고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가 기록의 특징이다.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 경험과 선입관과 주의 주장으로 인해 굳어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이들이니(*, 후토이 데 에이신) – 이를 좀더 상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이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이다.

󰃨 사단이 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 , 사타나스)이란 인간의 내면에 흩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수 있는 ‘악한 자'(*, 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주어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이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면서도 즉시 자기 삶으로 옮겨 천국을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말씀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이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지 못하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간다.

󰃨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 – 여기서 ‘저희에게 뿌리운’은 원어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을 취한 단어로서 그들에게 넉넉하고 적절히 뿌려져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단지 주변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뿌려졌음을 암시한다.

카이 후토이 에이신 호모이오스 호이 에피 타 페트로데 스페이로메노이 호이 호탄 아쿠소신 톤 로곤 듀데오스 메타 카라스 람바누신 아우톤

개역개정,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새번역,16 돌짝밭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우리말성경,16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즉시 받아들이지만

가톨릭성경,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영어NIV,16 Others, like seed sown on rocky places, hear the word and at once receive it with joy.

영어NASB,16 “In a similar way these are the ones on whom seed was sown on the rocky places, who, when they hear the word, immediately receive it with joy;

영어MSG,16 “And some are like the seed that lands in the gravel. When they first hear the Word, they respond with great enthusiasm.

영어NRSV,16 And these are the ones sown on rocky ground: when they hear the word, they immediately receive it with joy.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ουτοι εισιν ομοιως οι επι τα πετρωδη σπειρομενοι οι οταν ακουσωσιν τον λογον ευθεως μετα χαρας λαμβανουσ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et hii sunt similiter qui super petrosa seminantur qui cum audierint verbum statim cum gaudio accipiunt illud

히브리어Modern,16 וכן הנזרעים על מקמות הסלע הם השמעים את הדבר ומהר בשמחה יקחהו׃

성 경: [막4:1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본절은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에 대한(5절) 해설이다.

󰃨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 15절과의 차이점이 있다. 15절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受容)하였음을 밝힌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비유는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 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카이 우크 에쿠신 리잔 엔 헤아우토이스 알라 프로스카이로이 에이신 에이타 게노메네스 들맆세오스 에 디오그무 디아 톤 로곤 유데오스 스칸달리존타이

개역개정,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새번역,17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우리말성경,17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고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진다.

가톨릭성경,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영어NIV,17 But since they have no root, they last only a short time. When trouble or persecution comes because of the word, they quickly fall away.

영어NASB,17 and they have no firm root in themselves, but are only temporary; then, when affliction or persecution arises because of the word, immediately they fall away.

영어MSG,17 But there is such shallow soil of character that when the emotions wear off and some difficulty arrives, there is nothing to show for it.

영어NRSV,17 But they have no root, and endure only for a while; then, when trouble or persecution arises on account of the word, immediately they fall away.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ουκ εχουσιν ριζαν εν εαυτοις αλλα προσκαιροι εισιν ειτα γενομενης θλιψεως η διωγμου δια τον λογον ευθεως σκανδαλιζονται

라틴어Vulgate,17 et non habent radicem in se sed temporales sunt deinde orta tribulatione et persecutione propter verbum confestim scandalizantur

히브리어Modern,17 אך אין להם שרש בקרבם ורק לשעה יעמדו ואחר כן בהיות צרה ורדיפה על אדות הדבר מהרה יכשלו׃

성 경: [막4:1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말씀이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커가 끝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인 뿌리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은 경박하고 유약하다.

󰃨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 – 6절에 언급된 태양열이 여기서는 ‘환난'(*, 드립시스)과 ‘핍박'(*, 디오그모스)으로 묘사되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디오그모스’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이 양자는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킨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살때, 외부로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있게 마련이다. 또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공격해 오기도 한다(롬1:25;2:8;약 3:14;벧후 2:2). 15절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된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다. 이러한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생장(生長)의 크나큰 장애물로 대두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있어서습기 만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없이는 ‘씨’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그 ‘씨’는 ‘말씀을 인하여’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이는 결단코 풍성한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Lenski).

󰃨 곧 넘어지는 자요 – 여기서 ‘넘어진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는 원형 ‘스칸달론'(*, ‘동물들을 잡기 위해 설치한 덫에 있는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지칭)에서 유래한 현재 시상의 단어로서결국 계속 그 함정에 빠져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 화려하고 푸르르다 하더라도 강렬한 태양 앞에 쉬 쓰러지고 말듯이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심령은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 상실한 짐승처럼 죄의 올무, 절망과 좌절의 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딤전 3:7;6:9).

카이 후토이 에이신 호이 에이스 타스 아칸다스 스페이로메노이 후토이 에이신 호이 톤 로곤 아쿠산테스

개역개정,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새번역,18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우리말성경,18 또 다른 사람들은 말씀이 가시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가톨릭성경,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영어NIV,18 Still others, like seed sown among thorns, hear the word;

영어NASB,18 “And others are the ones on whom seed was sown among the thorns; these are the ones who have heard the word,

영어MSG,18 “The seed cast in the weeds represents the ones who hear the kingdom news

영어NRSV,18 And others are those sown among the thorns: these are the ones who hear the wor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ουτοι εισιν οι εις τας ακανθας σπειρομενοι ουτοι εισιν οι τον λογον ακουοντες

라틴어Vulgate,18 et alii sunt qui in spinis seminantur hii sunt qui verbum audiunt

히브리어Modern,18 והאחרים הנזרעים בין הקצים הם השמעים את הדבר׃

성 경: [막4:18,1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가시떨기에…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 –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이다. 앞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적 측면에서 17절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본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어난 옥토임에 분명하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를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 가시를 세경우로 묘사하고 있다. (1)’세상의 염려’이다. 여기 ‘세상'(*, 투 아이오노스)은 문자적으로 ‘그 시대’로서 일정한 기간 내지는 인간에게 부과된 한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종말을 고하게될 현세대에 국한된 근심(Lenski), 현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Donald W. Burdick),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불안(Taylor)등이다(마6:25, 31;눅 8:14;21:34;고전 7:33). (2)’재리(財利)의 유혹’이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기 때문이다(The Pulpit Commentary , 딤전 6:10).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지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Taylor,Lenski, Burdick, 마 11:21-23). (3)’기타 욕심’이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에 ‘이 생의… 일락(逸樂)’이라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 이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운찬 가시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버린다.

카이 하이 메림나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카이 헤 아파테 투 플루투 카이 하이 페리 타 로이파 에피뒤미아이 에이스포류오메나이 쉼프니구신 톤 로곤 카이 아카르포스 기네타이

개역개정,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새번역,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리말성경,19 이 세상의 걱정, 돈의 유혹, 그 밖에 다른 많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의 기운을 막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가톨릭성경,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영어NIV,19 but the worries of this life, the deceitfulness of wealth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making it unfruitful.

영어NASB,19 but the worries of the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and the desires for other things enter in and choke the word, and it becomes unfruitful.

영어MSG,19 but are overwhelmed with worries about all the things they have to do and all the things they want to get. The stress strangles what they heard, and nothing comes of it.

영어NRSV,19 but the cares of the world, and the lure of wealth, and the desire for other things come in and choke the word, and it yields no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αι μεριμναι του αιωνος τουτου και η απατη του πλουτου και αι περι τα λοιπα επιθυμιαι εισπορευομεναι συμπνιγουσιν τον λογον και ακαρπος γινεται

라틴어Vulgate,19 et aerumnae saeculi et deceptio divitiarum et circa reliqua concupiscentiae introeuntes suffocant verbum et sine fructu efficitur

히브리어Modern,19 ודאגות העולם הזה ומרמת העשר ותאות שאר הדברים באות וממעכות את הדבר ופרי לא יהיה לו׃

카이 에케이노이 에이신 호이 에피 텐 겐 텐 칼렌 스파렌테스 호이티네스 아쿠우신 톤 로곤 카이 파라데콘타이 카이 카르포포루신 헨 트리아콘타 카이 헨 헼세콘타 카이 헨 헤카톤

개역개정,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새번역,20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말성경,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진 것과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가톨릭성경,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영어NIV,20 Others, like seed sown on good soil,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what was sown.”

영어NASB,20 “And those are the ones on whom seed was sown on the good soil; and they hear the word and accept it and bear fruit, thirty, sixty, and a hundredfold.”

영어MSG,20 “But the seed planted in the good earth represents those who hear the Word, embrace it, and produce a harvest beyond their wildest dreams.”

영어NRSV,20 And these are the ones sown on the good soil: they hear the word and accept it and bear fruit, thirty and sixty and a hundredfol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ουτοι εισιν οι επι την γην την καλην σπαρεντες οιτινες ακουουσιν τον λογον και παραδεχονται και καρποφορουσιν εν τριακοντα και εν εξηκοντα και εν εκατον

라틴어Vulgate,20 et hii sunt qui super terram bonam seminati sunt qui audiunt verbum et suscipiunt et fructificant unum triginta et unum sexaginta et unum centum

히브리어Modern,20 ואלה המזרעים על האדמה הטובה הם השמעים את הדבר ומקבלים אתו ועשים פרי לשלשים שערים ולששים ולמאה׃

성 경: [막4:2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을 하는 자 –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의 경우를 언급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이다. 실로 ‘씨'(말씀)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 이같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즉 그는 말씀을 경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듣고'(*, 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다’,’이해하다’는 뜻도 지님)와 ‘받아'(*,파라데콘타이, ‘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리고 ‘결실을 하는'(*, 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계속적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착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소출은 그 밭(사람)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 씨(말씀)가 지닌 역동적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회개와 겸손과 온유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변화는 그 속에서만 머무는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타인에게도 옮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준다. 이는 주의 말씀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결실 각각을 존중해야 한다.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메티 호 뤼크노스 에르케타이 히나 휘포 톤 모디온 테데 에 휘포 텐 클리넨 우크 히나 에피 텐 뤼크니안 에피테데

개역개정,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새번역,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와 그릇 아래 두거나 침대 밑에 숨겨 놓겠느냐? 등잔대 위에 놓지 않겠느냐?

가톨릭성경,2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영어NIV,21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

영어NASB,21 And He was saying to them, ” A lamp is not brought to be put under a basket, is it, or under a bed? Is it not brought to be put on the lampstand?

영어MSG,21 Jesus went on: “Does anyone bring a lamp home and put it under a washtub or beneath the bed? Don’t you put it up on a table or on the mantel?

영어NRSV,21 He said to them, “Is a lamp brought in to be put under the bushel basket, or under the bed, and not on the lampstan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μητι ο λυχνος ερχεται ινα υπο τον μοδιον τεθη η υπο την κλινην ουχ ινα επι την λυχνιαν επιτεθη

라틴어Vulgate,21 et dicebat illis numquid venit lucerna ut sub modio ponatur aut sub lecto nonne ut super candelabrum ponatur

히브리어Modern,21 ויאמר אליהם הכי יביאו הנר למען יושם תחת האיפה ותחת המטה ולא למען יעלהו על המנורה׃

성 경: [막4:2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21-25절은 두가지 내용이(21-23, 24-25절) 한 데 어우러진 일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기회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들이다. 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되고 있다(21절-마 15:15;23절-마 11:15;13:9,43;24절-마 7:2;25절-마 25:29등).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자의 책임성(責任性)이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 다른 복음서의 평행구와는 달리 오직 마가만이 ‘등불'(*, 호뤼크노스)을 ‘가져 온다'(*, 에르케타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등불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본 비유를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즉 등불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그 등불’ 곧 세상에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오신’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가져 온다’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이다. 즉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계시를 종말의 시점에 이른 이제 만인에게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 개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Taylor). 한편 본문에 언급된 ‘등’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된 납작한 등잔으로서 그 속에는 감람유(olive)가 채워지며 그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켜게 된다. 이 등잔은 주인이나 종에 의해 방 안으로 옮겨지며 옮겨진 등잔은 주로 기다란 등대 위에 안치되어 주위를 밝게 한다.

󰃨 말 아래… 두려 함이냐 –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헬라어 ‘메티'(*)로시작되는 본문은 결단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말은 가루나 곡식을 되는 도량형기구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뒷박’이라고 번역하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8:16)는 등불을 덮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등불을 켜지 않을 때 이 그릇으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말'(bushel)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만드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한다. 그리고 평상은 침상(공동번역)을 뜻하며 상징적으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평온함과 쾌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이처럼 ‘말’과’평상’으로써 ‘등불’을 가리우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세상의 유익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 여기서 ‘등경’은 등잔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서 가난한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것 대신 흙으로 된 바람벽에 돌출구를 만들어 그곳에 등잔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본 구절의 의도는,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마 5:15 주석 참조) 빛이 가장 잘 퍼져나갈 수 있는 장소인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경은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계 1:20). 여기서 등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악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의 세계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다(요 1:9). 둘째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빛이 세상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3;시 66:16;행 20:24;롬 15:19;골 1:23).

우 가르 에스틴 티 크륖톤 호 에안 메 파네로데 우데 에게네토 아포크뤼폰 알 히나 에이스 파네론 엘데

개역개정,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새번역,22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말성경,22 무엇이든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톨릭성경,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영어NIV,22 For whatever is hidden is meant to be disclosed, and whatever is concealed is meant to be brought out into the open.

영어NASB,22 “For nothing is hidden, except to be revealed; nor has anything been secret, but that it would come to light.

영어MSG,22 We’re not keeping secrets, we’re telling them; we’re not hiding things, we’re bringing them out into the open.

영어NRSV,22 For there is nothing hidden, except to be disclosed; nor is anything secret, except to come to light.

헬라어신약Stephanos,22 ου γαρ εστιν τι κρυπτον ο εαν μη φανερωθη ουδε εγενετο αποκρυφον αλλ ινα εις φανερον ελθη

라틴어Vulgate,22 non enim est aliquid absconditum quod non manifestetur nec factum est occultum sed ut in palam veniat

히브리어Modern,22 כי אין דבר סתום אשר לא יגלה ולא נעלם דבר כי אם למען יבא לגלוי׃

성 경: [막4:2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 이 구절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이 마 10:26과 눅 12:2에도 나오지만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8:17이 가장 적절히 본뜻을 밝혀주고 있다고 본다. 이 비유는 ‘숨긴 것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는 뜻의 속담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아래 모든 사물이 밝히 드러난다는 경험적 상식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의미는 21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즉 (1)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부정직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2)심판 사상과 연결된 것으로볼 수 있다. 즉 최후 심판의 때에는 모든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다 드러나므로(고후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회개하는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5:31-46). (3)’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있다. 즉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11절 주석 참조) 그 천국의 비밀은 감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국의 비밀은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다. (4)’메시야 비밀’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었지만 현재 그 사실을 숨기려 한 의도(9:9)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비밀이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언젠가는 밝히 드러 날것이라는 암시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성이 밝히 드러났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재림(*)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에이 티스 에케이 오타 아쿠에인 아쿠에토

개역개정,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새번역,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말성경,23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가톨릭성경,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영어NIV,23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영어NASB,23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영어MSG,23 “Are you listening to this? Really listening?

영어NRSV,23 Let anyone with ears to hear listen!”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ι τις εχει ωτα ακουειν ακουετω

라틴어Vulgate,23 si quis habet aures audiendi audiat

히브리어Modern,23 כל אשר אזנים לו לשמע ישמע׃

성 경: [막4:2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 의미의 서두가 3절에서도 언급되었다(3,9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 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문구로 생각하면 된다(마 11:15;13:9;눅 14:35).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블레페테 티 아쿠에테 엔 호 메트로 메트레이테 메트레데세타이 휘민 카이 프로스테데세타이 휘민 토이스 아쿠우신

개역개정,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새번역,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만큼 너희에게 되질하여 주실 것이요, 덤으로 더 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24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너희가 헤아려 주는 만큼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덤으로 더 헤아려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영어NIV,24 “Consider carefully what you hear,” he continue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and even more.

영어NASB,24 And He was saying to them,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By your standard of measure it will be measured to you; and more will be given you besides.

영어MSG,24 “Listen carefully to what I am saying–and be wary of the shrewd advice that tells you how to get ahead in the world on your own. Giving, not getting, is the way.

영어NRSV,24 And he said to them, “Pay attention to what you hear; the measure you give will be the measure you get, and still more will be given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βλεπετε τι ακουετε εν ω μετρω μετρειτε μετρηθησεται υμιν και προστεθησεται υμιν τοις ακουουσιν

라틴어Vulgate,24 et dicebat illis videte quid audiatis in qua mensura mensi fueritis remetietur vobis et adicietur vobis

히브리어Modern,24 ויאמר אליהם ראו מה אתם שמעים במדה אשר אתם מודדים בה ימד לכם ועוד יוסף לכם השמעים׃

성 경: [막4:2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헤아림에 관한 비유]

󰃨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눅 8:18)로 표현한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23절의 격언구와 비슷하게 반복하여 사용한 경고적 어투로 보면 된다. 즉 똑바로 들어 비밀을 깨달으라는 촉구이다.

󰃨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또 더 받으리니 – 이와 비슷한 문구가 마 7:2과 눅 6:38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에서는 주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을 삼가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반해, 21절부터 이어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된다. 즉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영적 통찰력으로써 받아들인다면 그 마음 그릇에 풍족히 채워질 정도로 이해될 것이고계속해서 더 크게 이해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한편 본 구절을 단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남에게 행한 것에 따라 보상되는 응보의 개념,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갈 6:7;고후 9:6).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문은 사람이 영적 지각력을 갖고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예수에 관한 진리를 밝히 알게 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실로 각자가 지닌 각각의 그릇(이해력, 지각력 등)에 따라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많이도 받고 적게도 받을 것이다(고후 9: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복음을 수용하는 데 따른 보상적 응보는 대등한 보상이 아니라 ‘더 받으리’라는 표현을 덧붙여보상의 풍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의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現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마 13:12).

호스 가르 안 에케 도데세타이 아우토 카이 호스 우크 에케이 카이 호 에케이 아르데세타이 앞 아우투

개역개정,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새번역,25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말성경,25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가톨릭성경,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영어NIV,25 Whoever has will be given more; whoever does not have, even what he has will be taken from him.”

영어NASB,25 “For whoever has, to him more shall be given; and whoever does not have, even what he has shall be taken away from him.”

영어MSG,25 Generosity begets generosity. Stinginess impoverishes.”

영어NRSV,25 For to those who have, more will be given; and from those who have nothing, even what they have will be taken away.”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ς γαρ αν εχη δοθησεται αυτω και ος ουκ εχει και ο εχει αρθησεται απ αυτου

라틴어Vulgate,25 qui enim habet dabitur illi et qui non habet etiam quod habet auferetur ab illo

히브리어Modern,25 כי מי שיש לו נתון ינתן לו ומי שאין לו גם את אשר יש לו יקח ממנו׃

성 경: [막4:2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헤아림에 관한 비유]

󰃨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구로 보인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8:18)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마 13:12;25:29;눅 19:26). 이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과 관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천국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며 애쓰는 자는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될 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고 듣지도 않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세째는 많은 열매를 맺게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만 나쁜 땅의 씨앗은 열매를 못맺는 것처럼 겸손하고 말씀에 성실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풍성한 말씀의 열매를 맺어 기쁨을 누리지만 반대로 편견과 비뚤어진 마음과 생각을 소유한 자는 오히려 현재 지니고 있는 조그마한 행복까지 빼앗긴다는 심판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사 3:10; 렘 32:19). 물론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과 진리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의미하는 첫번째 견해가 적절하다.

카이 엘레겐 후토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호스 에안 안드로포스 발레 톤 스포론 에피 테스 게스

개역개정,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새번역,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우리말성경,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가톨릭성경,26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영어NIV,26 He also said, “This is what the kingdom of God is like. A man scatters seed on the ground.

영어NASB,26 And He was saying, “The kingdom of God is like a man who casts seed upon the soil;

영어MSG,26 Then Jesus said, “God’s kingdom is like seed thrown on a field by a man

영어NRSV,26 He also said, “The kingdom of God is as if someone would scatter seed on the ground,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λεγεν ουτως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ως εαν ανθρωπος βαλη τον σπορον επ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26 et dicebat sic est regnum Dei quemadmodum si homo iaciat sementem in terram

히브리어Modern,26 ויאמר מלכות האלהים היא כאשר ישליך איש זרע על האדמה׃

성 경: [막4:2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하나님의 나라는… 뿌림과 같으니 – 여기서 또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본 비유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는 다르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이 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이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한다(Donald W. Burdick).

카이 카듀데 카이 에게이레타이 뉰타 카이 헤메란 카이 호 스포로스 블라스타네 카이 메퀴네타이 호스 우크 오이덴 아우토스

개역개정,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새번역,27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말성경,27 씨는 그 사람이 자고 있든 깨어 있든 밤낮없이 싹이 트고 자라난다. 그러나 그는 씨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가톨릭성경,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영어NIV,27 Night and day, whether he sleeps or gets up, the seed sprouts and grows, though he does not know how.

영어NASB,27 and he goes to bed at night and gets up by day, and the seed sprouts and grows–how, he himself does not know.

영어MSG,27 who then goes to bed and forgets about it. The seed sprouts and grows–he has no idea how it happens.

영어NRSV,27 and would sleep and rise night and day, and the seed would sprout and grow, he does not know how.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καθευδη και εγειρηται νυκτα και ημεραν και ο σπορος βλαστανη και μηκυνηται ως ουκ οιδεν αυτος

라틴어Vulgate,27 et dormiat et exsurgat nocte ac die et semen germinet et increscat dum nescit ille

히브리어Modern,27 וישן וקם לילה ויום והזרע יצמח וגדל והוא לא ידע׃

성 경: [막4:2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알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게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이다(고전 3:6). 둘째, 씨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긴다.

󰃨 씨가 나서 자라되… 알지 못하느니라 –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원인적 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져야 한다(15:43).

아우토마테 가르 헤 게 카르포포레이 프로톤 코르톤 에이타 스타퀸 에이타 플레레 시톤 엔 토 스타퀴이

개역개정,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새번역,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우리말성경,28 땅이 스스로 곡식을 길러 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곡이 맺힌다.

가톨릭성경,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영어NIV,28 All by itself the soil produces grain–first the stalk, then the head, then the full kernel in the head.

영어NASB,28 “The soil produces crops by it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head, then the mature grain in the head.

영어MSG,28 The earth does it all without his help: first a green stem of grass, then a bud, then the ripened grain.

영어NRSV,28 The earth produces of itself, first the stalk, then the head, then the full grain in the head.

헬라어신약Stephanos,28 αυτοματη γαρ η γη καρποφορει πρωτον χορτον ειτα σταχυν ειτα πληρη σιτον εν τω σταχυι

라틴어Vulgate,28 ultro enim terra fructificat primum herbam deinde spicam deinde plenum frumentum in spica

히브리어Modern,28 כי הארץ מאליה מוציאה פריה את הדשא ראשונה ואחריו את השבלת ואחרי כן את החטה המלאה בשבלת׃

성 경: [막4:2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 그땅과 생명있는 씨앗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스스로'(*,아우토마테)란 ‘자동적’이라는 뜻이다. 즉 열매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26절에서 씨뿌리는 자를 ‘사람'(*, 안드로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 일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는 결정적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엡 2:8).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것이 중요하다(요 6:28, 29;히 11:6;요일 3:23).

󰃨 처음에는 싹이요… 충실한 곡식이라 –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싹’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씨의 결과이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 pp 152-153)라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불신앙적 사람들에게 이 교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두 철미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호탄 데 파라도 호 카르포스 유데오스 아포스텔레이 토 드레파논 호티 파레스테켄 호 데리스모스

개역개정,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새번역,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29 그리고 곡식이 익는 대로 곧 농부가 낫을 댄다. 이제 추수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NIV,29 As soon as the grain is ripe, he puts the sickle to it,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영어NASB,29 “But when the crop permits, he immediately puts in the sickle,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영어MSG,29 When the grain is fully formed, he reaps–harvest time!

영어NRSV,29 But when the grain is ripe, at once he goes in with his sickle, because the harvest has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29 οταν δε παραδω ο καρπος ευθεως αποστελλει το δρεπανον οτι παρεστηκεν ο θερισμος

라틴어Vulgate,29 et cum se produxerit fructus statim mittit falcem quoniam adest messis

히브리어Modern,29 וכאשר גמל הפרי ימהר לשלח את המגל כי בשל הקציר׃

성 경: [막4:2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열매가 익으면… 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파라도)은 제2 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뿌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Cranfield).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이다.

󰃨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잠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 14:14-16).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부가 (27절)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요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換喩的)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이다(하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카이 엘레겐 티니 호모이오소멘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에 엔 포이아 파라볼레 파라발로멘 아우텐

개역개정,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새번역,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우리말성경,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어떤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톨릭성경,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영어NIV,30 Again he said, “What shall we say the kingdom of God is like, or what parable shall we use to describe it?

영어NASB,30 And He said, “How shall we picture the kingdom of God, or by what parable shall we present it?

영어MSG,30 “How can we picture God’s kingdom? What kind of story can we use?

영어NRSV,30 He also said, “With what can we compare the kingdom of God, or what parable will we use for i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λεγεν τινι ομοιωσωμε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η εν ποια παραβολη παραβαλωμεν αυτην

라틴어Vulgate,30 et dicebat cui adsimilabimus regnum Dei aut cui parabolae conparabimus illud

히브리어Modern,30 ויאמר אל מה נדמה את מלכות האלהים ובאי זה משל נמשילנה׃

성 경: [막4:3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된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 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

호스 콬코 시나페오스 호스 호탄 스파레 에피 테스 게스 미크로테로스 판톤 톤 스페르마톤 에스틴 톤 에피 테스 게스

개역개정,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새번역,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 ㉢또는 ‘겨자씨와 관련된 사정과 같으니’

우리말성경,31 하나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그 씨는 땅에 심는 것 가운데 제일 작은 씨지만

가톨릭성경,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영어NIV,31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is 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

영어NASB,31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upon the soil, though it is smaller than all the seeds that are upon the soil,

영어MSG,31 It’s like a pine nut. When it lands on the ground it is quite small as seeds go,

영어NRSV,31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upon the ground,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on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31 ως κοκκω σιναπεως ος οταν σπαρη επι της γης μικροτερος παντων των σπερματων εστιν των επ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31 sicut granum sinapis quod cum seminatum fuerit in terra minus est omnibus seminibus quae sunt in terra

히브리어Modern,31 כגרגר של חרדל אשר יזרע באדמה והוא קטן מכל הזרעים אשר על הארץ׃

성 경: [막4:3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카이 호탄 스파레 아나바이네이 카이 기네타이 판톤 톤 라카논 메이젠 카이 포이에이 클라두스 메갈루스 호스테 뒤나스다이 휘포 텐 스키안 아우투 타 페테이나 투 우라누 카타스케눈

개역개정,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새번역,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말성경,32 일단 심어 놓으면 자라나 어떤 식물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그 그늘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게 된다.”

가톨릭성경,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영어NIV,32 Yet when planted, it grows and becomes the largest of all garden plants, with such big branches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perch in its shade.”

영어NASB,32 yet when it is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larger than all the garden plants and forms large branches;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NEST UNDER ITS SHADE.”

영어MSG,32 yet once it is planted it grows into a huge pine tree with thick branches. Eagles nest in it.”

영어NRSV,32 yet when it is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greatest of all shrubs, and puts forth large branches, so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make nests in its shade.”

헬라어신약Stephanos,32 και οταν σπαρη αναβαινει και γινεται παντων των λαχανων μειζων και ποιει κλαδους μεγαλους ωστε δυνασθαι υπο την σκιαν αυτου τα πετεινα του ουρανου κατασκηνουν

라틴어Vulgate,32 et cum seminatum fuerit ascendit et fit maius omnibus holeribus et facit ramos magnos ita ut possint sub umbra eius aves caeli habitare

히브리어Modern,32 ואחרי הזרעו יעלה ויגדל על כל הירקות ועשה ענפים גדולים עד אשר יוכלו עוף השמים לקנן בצלו׃

성 경: [막4:3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 자라서…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 번역에는 ‘어떤 푸성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 가히 ‘나무’라 봄직하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29절).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13:31).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 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카이 토이아우타이스 파라볼라이스 폴라이스 엘랄레이 아우토이스 톤 로곤 카도스 에뒤난토 아쿠에인

개역개정,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새번역,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말성경,33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영어NIV,33 With many similar parables Jesus spoke the word to them, as much as they could understand.

영어NASB,33 With many such parables He was speaking the word to them, so far as they were able to hear it;

영어MSG,33 With many stories like these, he presented his message to them, fitting the stories to their experience and maturity.

영어NRSV,33 With many such parables he spoke the word to them, as they were able to hear it;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τοιαυταις παραβολαις πολλαις ελαλει αυτοις τον λογον καθως ηδυναντο ακουειν

라틴어Vulgate,33 et talibus multis parabolis loquebatur eis verbum prout poterant audire

히브리어Modern,33 ובמשלים רבים כאלה דבר אליהם את הדבר כפי אשר יכלו לשמע׃

성 경: [막4:3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많은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

󰃨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코리스 데 파라볼레스 우크 엘랄레이 아우토이스 캍 이디안 데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에펠뤼엔 판타

개역개정,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새번역,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다.

우리말성경,34 예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영어NIV,34 He did not say anything to them without using a parable. But when he was alone with his own disciples, he explained everything.

영어NASB,34 and He did not speak to them without a parable; but He was explaining everything privately to His own disciples.

영어MSG,34 He was never without a story when he spoke. When he was alone with his disciples, he went over everything, sorting out the tangles, untying the knots.

영어NRSV,34 he did not speak to them except in parables, but he explained everything in private to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34 χωρις δε παραβολης ουκ ελαλει αυτοις κατ ιδιαν δε τοις μαθηταις αυτου επελυεν παντα

라틴어Vulgate,34 sine parabola autem non loquebatur eis seorsum autem discipulis suis disserebat omnia

히브리어Modern,34 ובבלי משל לא דבר אליהם והיה בהיותו עם תלמידיו לבדם יבאר להם את הכל׃

성 경: [막4:3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많은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

󰃨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11,12절 주석을 참조하라.

󰃨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가지의 비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13,33절 주석 참조). 사실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조차로 예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더라'(*, 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3절) 진지하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이다(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이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3-20절).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 옾시아스 게노메네스 디엘도멘 에이스 토 페란

개역개정,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새번역,35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우리말성경,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가톨릭성경,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35 That day when evening came,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영어NASB,35 On that day, when evening came, He said to them,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영어MSG,35 Late that day he said to them, “Let’s go across to the other side.”

영어NRSV,35 On that day, when evening had come, he said to them, “Let us go across to the other side.”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ν εκεινη τη ημερα οψιας γενομενης διελθωμεν εις το περαν

라틴어Vulgate,35 et ait illis illa die cum sero esset factum transeamus contra

히브리어Modern,35 ויאמר אליהם ביום ההוא לפנות ערב נעברה העבר׃

성 경: [막4:3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 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 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 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카이 아펜테스 톤 오클론 파랄람바누신 아우톤 호스 엔 엔 토 플로이오 카이 알라 데 플로이아리아 엔 멭 아우투

개역개정,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새번역,36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우리말성경,36 제자들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예수를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영어NIV,36 Leaving the crowd behind, they took him along, just as he was, in the boat. There were also other boats with him.

영어NASB,36 Leaving the crowd, they took Him along with them in the boat, just as He was; and other boats were with Him.

영어MSG,36 They took him in the boat as he was. Other boats came along.

영어NRSV,36 And leaving the crowd behind, they took him with them in the boat, just as he was. Other boats were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αφεντες τον οχλον παραλαμβανουσιν αυτον ως ην εν τω πλοιω και αλλα δε πλοιαρια ην μετ αυτου

라틴어Vulgate,36 et dimittentes turbam adsumunt eum ita ut erat in navi et aliae naves erant cum illo

히브리어Modern,36 ויעזבו את המון העם ויקחו אתו כאשר הוא באניה וגם אניות אחרות הלכו עמו׃

성 경: [막4:3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 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카이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타 데 퀴마타 에페발렌 에이스 토 플로이온 호스테 아우토 에데 게미제스다이

개역개정,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새번역,37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우리말성경,37 그때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배가 물에 잠기기 직전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영어NIV,37 A furious squall came up, and the waves broke over the boat, so that it was nearly swamped.

영어NASB,37 And there arose a fierce gale of wind, and the waves were breaking over the boat so much that the boat was already filling up.

영어MSG,37 A huge storm came up. Waves poured into the boat, threatening to sink it.

영어NRSV,37 A great windstorm arose, and the waves beat into the boat, so that the boat was already being swamped.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γινεται λαιλαψ ανεμου μεγαλη τα δε κυματα επεβαλλεν εις το πλοιον ωστε αυτο ηδη γεμιζεσθαι

라틴어Vulgate,37 et facta est procella magna venti et fluctus mittebat in navem ita ut impleretur navis

히브리어Modern,37 ותקם רוח סערה גדולה וישטפו הגלים אל תוך האניה עד אשר כמעט נמלאה׃

성 경: [막4:3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큰 광풍이 일어나며(*,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 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 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 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카이 아우토스 엔 엔 테 프륌네 에피 토 프로스케팔라이온 카듀돈 카이 에게이루신 아우톤 카이 레구신 아우토 디다스칼레 우 멜레이 소이 호티 아폴뤼메다

개역개정,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새번역,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우리말성경,38 예수께서는 배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됐는데 모른 척하십니까?”

가톨릭성경,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8 Jesus was in the stern, sleeping on a cushion. The disciples woke him and said to him, “Teacher, don’t you care if we drown?”

영어NASB,38 Jesus Himself was in the stern, asleep on the cushion; and they woke Him and said to Him, “Teacher,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

영어MSG,38 And Jesus was in the stern, head on a pillow, sleeping! They roused him, saying, “Teacher, is it nothing to you that we’re going down?”

영어NRSV,38 But he was in the stern, asleep on the cushion; and they woke him up and said to him, “Teacher,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ην αυτος επι τη πρυμνη επι το προσκεφαλαιον καθευδων και διεγειρουσιν αυτον και λεγουσιν αυτω διδασκαλε ου μελει σοι οτι απολλυμεθα

라틴어Vulgate,38 et erat ipse in puppi supra cervical dormiens et excitant eum et dicunt ei magister non ad te pertinet quia perimus

히브리어Modern,38 והוא ישן על הכסת באחרי האניה ויעירו אותו ויאמרו אליו רבי האינך דאג לנו כי נאבד׃

성 경: [막4:3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 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어쨌든 이 ‘베개'(*,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 참 인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現場性)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 디에게르데이스 에페티메센 토 아네모 카이 에이펜 테 달라쎄 시오파 페피모소 카이 에코파센 호 아네모스 카이 에게네토 갈레네 메갈레

개역개정,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새번역,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우리말성경,39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고요하라! 잠잠하라!”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호수가 잔잔해졌습니다.

가톨릭성경,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영어NIV,39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영어NASB,39 And He got up and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sea, “Hush, be still.” And the wind died down and it became perfectly calm.

영어MSG,39 Awake now, he told the wind to pipe down and said to the sea, “Quiet! Settle down!” The wind ran out of breath; the sea became smooth as glass.

영어NRSV,39 He woke up and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sea, “Peace! Be still!” Then the wind ceased, and there was a dead calm.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διεγερθεις επετιμησεν τω ανεμω και ειπεν τη θαλασση σιωπα πεφιμωσο και εκοπασεν ο ανεμος και εγενετο γαληνη μεγαλη

라틴어Vulgate,39 et exsurgens comminatus est vento et dixit mari tace obmutesce et cessavit ventus et facta est tranquillitas magna

히브리어Modern,39 ויעור ויגער ברוח ויאמר אל הים הס ודם ותשך הרוח ותהי דממה גדולה׃

성 경: [막4:3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꾸짖으시며'(*,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티 데일로이 에스테 후토 포스 우크 에케테 피스틴

개역개정,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새번역,4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말성경,4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가톨릭성경,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40 He said to his disciples, “Why are you so afraid? Do you still have no faith?”

영어NASB,40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afraid? Do you still have no faith?”

영어MSG,40 Jesus reprimanded the disciples: “Why are you such cowards? Don’t you have any faith at all?”

영어NRSV,40 He said to them, “Why are you afraid? Have you still no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τι δειλοι εστε ουτως πως ουκ εχετε πιστιν

라틴어Vulgate,40 et ait illis quid timidi estis necdum habetis fidem et timuerunt magno timore et dicebant ad alterutrum quis putas est iste quia et ventus et mare oboediunt ei

히브리어Modern,40 ויאמר אליהם למה ככה אתם חרדים איך אין לכם אמונה׃

성 경: [막4:4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에 대해 여러 번 책망하셨는데, 여기 기록된 것이 최초의 사건이다(7:18;8:17,18,21,33; 9:19).

카이 에포베데산 포본 메간 카이 엘레곤 프로스 알렐루스 티스 아라 후토스 에스틴 호티 카이 호 아네모스 카이 헤 달라싸 휘파쿠우신 아우토

개역개정,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새번역,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우리말성경,41 제자들은 크게 두려워하면서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파도까지도 복종하는가?”

가톨릭성경,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영어NIV,41 They were terrified and asked each other, “Who is this? Even the wind and the waves obey him!”

영어NASB,41 They became very much afraid and said to one another, “Who then is this, that even the wind and the sea obey Him?”

영어MSG,41 They were in absolute awe, staggered. “Who is this, anyway?” they asked. “Wind and sea at his beck and call!”

영어NRSV,41 And they were filled with great awe and said to one another, “Who then is this, that even the wind and the sea obe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εφοβηθησαν φοβον μεγαν και ελεγον προς αλληλους τις αρα ουτος εστιν οτι και ο ανεμος και η θαλασσα υπακουουσιν αυτω

라틴어Vulgate,41 (없음)

히브리어Modern,41 וייראו יראה גדולה ויאמרו איש אל רעהו מי אפוא הוא אשר גם הרוח והים שמעים לו׃

성 경: [막4:4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 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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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주석 성경말씀] 씨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마 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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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4장 주석 성경말씀 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옥토 밭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이 좋은 밭이 될 때 복음의 씨가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결실을 맺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은 작은 겨자씨가 떨어진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마 4:1-41)

1-20절, 씨 뿌리는 비유

[1-8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바다 위에 배에 앉아 가르치셨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기회 있는 대로 가르치셨다. 그는 설교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셨다. 그는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비유는 일상적 사건이나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장애가 없는 일반 사람들은 들을 귀를 다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나, 육신의 귀는 가지고 있지만, 듣고 깨닫는 영적인 귀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 주시는 자들만 가질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그 비유]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라고 표현하셨고, 또 ‘너희’와 ‘외인,’ 즉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을 구별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확실히 제한적이다. 비유는 예화와 다르다. 예화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 이야기이지만, 비유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뜻이 있는 이야기이다. 비유에는 표면적 내용과 이면적 내용이 있다. 비유의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이면적 진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자들, 그래서 불신앙과 죄악으로 그 마음이 굳어진 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께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13-1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그들의 마음에]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예수께서는 그 비유를 설명해주셨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처럼 생명이 있다. 마른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듯이, 평범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마 13:37), 그의 사도들과 그 후 오늘날까지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그 직무를 이어받는다.

주께서는 씨가 뿌려진 땅을 네 종류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첫째로,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고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그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하시지만,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는 일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진지하게 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생각을 집중하고 진지하게, 졸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될 것이다.

[16-17절]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둘째로, 씨가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세상에는 질병이나 궁핍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또 특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환난과 핍박도 있다. 하나님 말씀의 뿌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환난 중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으므로(눅 1:1-4; 딤후 3:14),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18-19절]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아파테)[속이는 것](KJV, NASB)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셋째로, 씨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4는 거기에 ‘쾌락’을 추가하였다. 재물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그러나 실상 재물은 환난날에 사람들을 구원하지도 못한다(잠 11:4; 습 1:18; 겔 7:19). 돈은 어느 날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린다(잠 2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9-10).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또 세상 염려를 버리고, 성경 교훈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6, 8).

[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넷째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켰다. 누가복음 8:15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식물의 씨앗 하나는 심기어 자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한 사람은 많은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단지 인간 편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지하게 듣고 깨닫고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그것을 지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사람은 그의 충성의 정도대로 차등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성경을 통해 견고해지고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돈의 속임과 육신의 쾌락을 다 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진지하게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그 교훈대로 의와 선을 실천하여 많은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34절, 겨자씨 비유

[21-23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드러나지 않을](전통본문)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은 열 되짜리 큰 통을 뜻하고, ‘평상’은 침상을 뜻하고, ‘등경’은 등잔걸이를 뜻한다. 등불은 큰 통 아래나 침상 아래 두지 않고 등잔걸이 위에 걸어둔다. 이처럼,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질(秘傳) 것이 아니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에 기록되어 세상 만민에게 공개되어 있다.

[24-25절]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듣는 너희는] 더 받으리니 [이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빼앗길 것임이니라].

우리는 듣고 배운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취급하실 것이다.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대 하실 것이지만, 말씀에 대해 무관심하고 불신앙적이면 그는 우리를 버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있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는 자는 이미 가진 지식과 은혜도 빼앗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읽고 듣고 음미하고 간직하고 실행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들은 말씀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삼가며 굳게 지켜야 한다(히 2:1; 고전 15:1-2).

[26-29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사람이 씨를 땅에 심으면 어느새 씨에서 싹이 나와 자라서 이삭이 생기고 그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면 낫을 대어 추수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전파를 통해 세상에서 시작되며 처음에는 싹이 나듯이 작은 단체이지만 점차 성장한다. 이 비유는 천국의 성장성을 가리킨다. 세상에 심겨져 싹이 나며 성장하는 천국은 지상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지고 그의 택한 백성이 다 구원을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계복음화와 복음 전도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명령하신 최대의 사명이며 과제이다.

[30-32절]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증거된다. 겨자씨는 씨들 중에서 심히 작은 씨이지만, 심긴 후에 자라면 모든 채소보다 더 커지며 큰 가지를 내므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겨자씨 나무는 키가 3미터 이상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천국, 즉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은 처음에는 심히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랄 만큼 심히 커질 것이다. 이것은 전체 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성도 개인의 성화나 지교회나 교회들의 영적 건립과 영적, 수적 성장도 그러하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깃들인다는 말씀은 세계 교회가 심지어 마귀와 악령들이 그 안에 자리를 잡을 만큼 커질 것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점도 교회 역사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종인 많은 이단자들이 들어와 있다.

[33-34절]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들로 말씀을 가르치셨다. 비유는 그의 설교 방식의 한 특징이었다. 비유들은 표면적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나, 그 이면적 의미는 해석이 필요하였다. 예수께서는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주셨다. 이제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어려운 부분이 해석된, 이해할 만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관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성경 자체가 밝히 보이는 뜻, 특히 성경의 전체적인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경건과 도덕성의 새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의 대의를 아는 자들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은 은밀하게 전해지지 않고 세상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으며 또 간직하고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말씀의 교훈 속에서 개인의 구원의 확신과 성화를 이룰 뿐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전도자들을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35-41절,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심

[35-38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아펜테스)[보낸 후에] (KJV, BDAG)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날이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낸 후에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다른 배들도 함께하였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났고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가는데도 큰 광풍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다. 세상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KJV)[혹은 방석](NASB, NIV)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고물’은 배의 뒷쪽을 가리킨다. 육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주께서는 깊은 잠이 드셨던 것 같다. 잠이 드신 것은 그가 사람의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며 육신의 피곤을 느끼셨고 잠이 필요하셨음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그 상황을 아셨겠지만 잠잠하셨다. 주께서는 성도의 고난의 현실에서도 때때로 잠자듯이 조용하시다.

제자들은 그를 깨우며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직 알지 못하고 그를 단지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날 밤 그들은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39-41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예수께서는 깨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말씀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다. 바람과 바다가 인격이 아닌데도, 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자연 만물도 예수님께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계(靈界)와 인간계뿐 아니라 자연계도 다스리신다. 그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도 주관하신다. 사람들 가운데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큰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인생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광풍을 제어할 자가 아무도 없지만, 주께서는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고 서로 말했다. 이 사건의 중심 교훈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여 복종시키는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신성을 가지신 자, 곧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자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풍성한 증거들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연환경까지도 주관하심을 증거한다. 그는 풍랑뿐 아니라, 홍수와 가뭄, 태풍과 폭설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건강이나 가정의 일들도 주관하시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일들도 주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과 영생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도우시며 해결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일들을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교훈하였다(빌 4:6-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세상에 바람을 꾸짖고 큰 풍랑을 잔잔케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이 사건과 또 그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확신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는데 큰 광풍을 만났다. 세상에는 사람이 예기치 못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들에게도 생기며 참된 교회에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큰 광풍을 잔잔케 하셨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그는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를 자연재해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또 그는 우리의 건강과 경제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멀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감사하며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우리의 모든 소원을 아뢰어야 하고, 또 그 교훈의 말씀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 교회사 성경공부]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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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04장

4:1 씨 뿌림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앞의 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회당에 들어 가시”는(1절) 장면부터 시작하였는데 이 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이를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역사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그의 방법을 바꾸셨던 것이다. 회당에서 좌석이나 상좌를 차지한 신분이나 가문이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말해서 회당 외에는 다른 장소에서는 말씀을 듣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항상 “바닷가에” 가시어서 말씀을 전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자유스럽게 회당 안에 들어가실 수가 있었고 거기에서 복음을 가르치실 수가 있었지만 회당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중이 떠중이들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항상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하시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자들이 다 나와서 들을 수 있도록,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예수께서 전에도 바닷가에서 복음을 가르치신 일이 있지만(막 2:13) 여기에서는 새로운 편리한 방법을 알아내신 것 같다. 그것은 배를 타시고 복음을 전하신 일이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디베리야 바다는 내해(內海)이기 때문에 조수가 아니므로 썰물과 밀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지장을 받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훈의 말씀을 가지고 배 안에 들어가시어 거기에서 그 말씀을 가르치시는 일은,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의 섬들에게로 보내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아주 풍부한 짐을 배에다 싣고, 그 하늘 나라의 열매를 더 많이 맺는 나라에 보내려고 유대 나라를 출항하려는 것을 보여 주는 전조(前兆)인 듯하였다. 그럼, 아래에서 주님의 교훈의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께서 무리에게 사용한 가르침의 방법(2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들이 잘 듣게 하기 위해서 비유나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기네들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무관심한 청중들은 평범한 일들에서 인용한 평범한 비유를 즐겨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설명하고 해석하기로 계획되었던 진리를 그들이 잊어버렸거나 들은 일이 없을 때에는 그런 비유를 계속하거나 반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비유 가운데 들어 있는 진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만 그들의 귀만 즐겁게 해 주는 것이 되고 만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12절)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비유가 그들의 호기심만 충족시키게 된다며, 그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것은 빛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그들의 눈을 감는 격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다 어두운 등불의 비유를 부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그런 비유의 교훈을 그들 자신에 적응하고 그 교훈에 인도함을 받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광명한 빛이 되지만, 다만 그런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즐기는 기회로 삼는 자들에게는, 그 교훈이 이따금씩 그들에게 스쳐 지나가는 빛에 불과하고 결국 그들은 다시 어두움 가운데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지를 않는다. 그들이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 가리워 있다. 또는 그들은 아주 무관심해 가지고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고, 그들에게 평화에 관한 그런 일들에는 어떠한 관심도 안 보인다. 등등은 다만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Ⅱ.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용한 설명의 방법.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의 뜻을 예수께 물었다(10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일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열두 제자와 함께 있고, 예수와 가까운 그 제자들과 사귀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들에게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특별한 은혜가 그들에게 부여되었는가를 말씀하시었다(11절). 주님의 비밀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만 즐기는 것뿐인데 그들에게는 가르침이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비유의 말씀마다 그들의 지식을 증가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비록 지혜 있는 자라도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사용하신 그 방법과 길을 잘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이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이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한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빛과 그 빛을 볼 수 있는 시력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경 말씀을 제자들에게 열어 보여 주실 때에, 그들에게 그것을 깨닫는 마음도 열어 주시었던 것이다(눅 24:27, 45). 그러면 이하에서 본 비유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미 마태복음 13장 3절 이하에서 생각해 본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들으라”(3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주의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주의를 명령하여 주의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을 기억하라. 비록 우리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성적이고 무게가 있는 그런 말씀을 마침내는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진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주시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 한 가지를 하시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에는 나와있지 않은 질문이다(13절).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 이 질문을 하신 예수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런 평범한 비유도 알지 못한다면 더 어렵고 희미한 다른 비유들을 알 수 있겠느냐? 그 비유를 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평범하게 말씀을 전하여서 독특한 효과를 내다볼 수 있으므로, 너희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너희가 당황하고 이해를 못한다면 너희가 전혀 상상도 못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이후로 말할 비유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은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의 지식을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켜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말씀들이 많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범한 복음의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더욱 어려운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 12:5).

(2)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너희를 지도해 주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말하는 이 비유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면, 너희가 앞으로 더 듣게 될 비유의 말씀에서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 비유는 너희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 비유의 말씀을 받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비유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열쇠의 사용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말씀으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상고하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규칙에 의해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비유의 말씀을 설명하시기 전에 언급하신 바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의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그들의 경우가 얼마나 슬픈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원하나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일반적인 변화의 길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고려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기억하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절). 다만 회개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비참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들은 말씀에 대해서, 그 의미를 먼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를 보여 주시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 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이미 우리가 마태복음에서도 살펴 본 바 있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이것을 조목별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미 마태복음 13장 3절 이하에서 생각해 본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들으라”(3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주의를 요구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주의를 명령하여 주의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을 기억하라. 비록 우리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성적이고 무게가 있는 그런 말씀을 마침내는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진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주시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설명하여 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질문 한 가지를 하시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에는 나와있지 않은 질문이다(13절).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이 질문을 하신 예수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런 평범한 비유도 알지 못한다면 더 어렵고 희미한 다른 비유들을 알 수 있겠느냐? 그 비유를 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평범하게 말씀을 전하여서 독특한 효과를 내다볼 수 있으므로, 너희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너희가 당황하고 이해를 못한다면 너희가 전혀 상상도 못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이후로 말할 비유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 질문은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의 지식을 위한 노력을 불러일으켜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말씀들이 많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범한 복음의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더욱 어려운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 12:5).”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너희를 지도해 주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말하는 이 비유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면, 너희가 앞으로 더 듣게 될 비유의 말씀에서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 비유는 너희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이 비유의 말씀을 받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비유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열쇠의 사용방법을 알 수 없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말씀으로 유익을 얻기 위하여 상고하는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규칙에 의해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비유의 말씀을 설명하시기 전에 언급하신 바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의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그들의 경우가 얼마나 슬픈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을 원하나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일반적인 변화의 길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고려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기억하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절). 다만 회개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죄 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비참한 것이다.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들이 들은 말씀에 대해서, 그 의미를 먼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를 보여 주시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더 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이미 우리가 마태복음에서도 살펴 본 바 있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이것을 조목별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교회라고 하는 큰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대단히 무질서하게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4절). 씨뿌리는 자가 어디서 싹이 잘 나오고, 어떤 열매를 맺게되는 가를 모르면서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사 32:20). 모든 종류의 땅에 모험적으로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많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 나가시었을 때에, 얼마동안 당신 자신이 파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그들의 손을 통해서 파종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택한 종들은 바로 씨 뿌리는 자들이다. 파종자들은 파종의 방법과 재량이 필요한 것이다(사 28:24-26). 그들은 풍세나 구름을 살펴보지 말아야 한다(전 11:4). 그들은 다만 파종자에게 씨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고후 9:10). 둘째,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일고, 또 그 말씀을 잘 아는 자들은 비교적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좋은 결실을 내는 자들은 불과 사 분의 일에 해당한다고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대부분이 손실되고 헛되이 파종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손실된 말씀에 대하여 계산하는 날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길가에 떨어지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하여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기를 간구 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자기들의 종교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종교만을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 되며, 모래 위에 그들의 소망을 세우는 격이 된다(약 1:22; 마 7:26). 셋째, 현재는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으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못하므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영혼의 동작도 엿보이고, 그들이 무슨 말씀을 들었는가도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잠깐 비취는 불빛과 같으며 아궁이 속에서 타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안다고 자랑하는 외식자들과(사 48:2),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알고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은”헤롯과(막 6:20), 에스겔을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던 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결실을 못내는 “돌 밭”으로 표현되어 있다. 넷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들 마음에 거하지 못하고, 인상을 못 주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말씀을 받을 만큼 정돈되고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점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말씀을 잊어버리는 자들인데 이들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말씀이 그들의 한쪽 귀에 들어와서 다른 쪽 귀로 나가는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죄의 세력에 덮이어,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남긴 좋은 인상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으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다섯째, 공중에 나는 새들이 흙 위에 드러나 있는 곡식의 씨를 주어 먹으려고 바쁘게 맴도는 것처럼,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땅에다 떨어뜨리는 자들의 주위에 바쁘게 맴도는 것이다. 그리고 심령이 큰길과 같이 단단하고 겸손하지 못할 때에, 그리고 복음의 씨가 아무렇게 떨어져 있을 때에 모든 길손들에 의해 짓밟히게 되는 것이며, 마귀는 새와 같이 빠르게 나타나 우리도 모르는 동안에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들이 희생 제물 위에 앉으려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그러한 것처럼, 그것들을 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창 15:11). 새가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우리의 머리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고백을 버릴 만큼, 공적으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해도 “돌밭”에 떨어진 씨가 그러한 것처럼, 그들은 말씀에 대하여 효험을 보지만 그들도 모르게 그 말씀은 성장을 못하고 질식하게 되어 아무런 결실을 못내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속이 텅 빈 외식 적인 신앙 고백만을 되풀이하게 되므로 아무런 성장도 결실도 못 보게 되고, 분명하게 그리고 그럴 듯하게 지옥을 향하여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 말씀으로 인한 인상이 깊지 않고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시련이나 근심이 올 때에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바다의 모래사장에 남아있는 발자국들이 다음에 밀려오는 조수에게 씻겨 버리듯이, 박해의 거센 조수가 밀어닥칠 때에 모든 말씀에 의해 받은 인상이 씻겨지는 것이다. 부정한 일이 많이 행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간다. 평화의 날에 그들의 신앙고백을 지켜 오던 많은 사람들도 폭풍우가 밀어닥칠 때에 다 버리고 말게 된다. 그리고 쾌락을 즐기기 위해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바다에 바람이 일어나면 되돌아오듯이, 인생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외식하는 자들은 말씀에 대한 신앙의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곧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원리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지 않으며,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없는 종교는 헛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그들을 점령하고 있는 세상일들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겸손, 자비심, 자기 부인, 하늘의 고상한 마음 등의 많은 좋은 교훈들은 그들이 소유하기 쉽고, 그들을 미소로써 유혹하는 세상에서의 자기 만족감의 힘에 눌려 결실을 못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많은 신앙 고백 자들은 바로의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과 같은 결과밖에는 못 거두게 되는 것이다. 아홉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방해를 받지 않는 사람들도 “기타 욕심이 들어와” 그들의 신앙 고백에 의해 받은 유익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마가복음에는 “기타 욕심이 들어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말은 인간의 감각이나 공상을 즐기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나친 욕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욕망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육체의 방종에 의해서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열째, 결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달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씨의 종류에 따라서 그 결실은 마음의 성질이 될 수도 있고 인생의 진로가 될 수 있고, 복음에 일치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은혜란 매일 매일 연단을 받아야 되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올바르게 수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결실 하는 길이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 좋은 결실은 좋은 씨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에 좋은 씨가 좋은 옥토에 뿌려진다면, 만일에 씨를 받는 심령이 겸손하고, 거룩하고 하늘의 고상한 마음을 가졌다면, 좋은 결실을 내게 될 것이요, 마치 옛날에 이삭이 많은 곡식을 거둔 것처럼 백 배의 풍부한 결실을 내게 될 것이다(창 26:12).

4:21 하늘나라의 비유들 (마가복음 4:21-34) 우리의 구주께서 이 비유와 비유적인 표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가르쳐 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Ⅰ.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해야 할 그 의무가 무엇인가를 고려해 보지 않으며 안 된다. 그것은 이 앞의 비유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결실을 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베풀어주신 은사에 대해서 감사의 보답과, 우리 안에 허락하여 주신 은사에 대한 유용한 활용을 기대하시는 것이다(21절).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사도들이 임명된 것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 복음을 받도록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 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은사를 받을 때에, 사도들과 같이 자신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활용하고 섬겨야 한다. 1. 은사나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등불”과 같이 되게 한다. 빛의 아버지께서 불을 붙여 주신 “여호와의 등불”인 것이다(잠 20:27). 가장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약한 불빛을 내는 등불을 “의로운 해”(말 4:2)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등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가까운데 밖에 못 비치고 잠깐 동안 밖에 빛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쉽게 바람에 꺼지며, 기름은 점점 소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많은 사람들이 등불과 같이 빛을 받아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나타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은혜를 활용하려고도 않는다. 그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좋은 일을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좋은 손발과, 감각 기관과,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일 보다 모든 것이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남을 위해서 활용하지를 않고 있다.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작은 촛불과 같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촛불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3. 등불과 같이 빛을 받은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등경 위에 놓아 빛을 잘 비추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또, 그들이 소속해 있는 공동체를(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으로 잘 포착해서 활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을 이해서 빛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은사나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등불”과 같이 되게 한다. 빛의 아버지께서 불을 붙여 주신 “여호와의 등불”인 것이다(잠 20:27). 가장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약한 불빛을 내는 등불을 “의로운 해”(말 4:2)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등불이 빛을 낸다. 그러나 가까운데 밖에 못 비치고 잠깐 동안 밖에 빛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쉽게 바람에 꺼지며, 기름은 점점 소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이 등불과 같이 빛을 받아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나타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은혜를 활용하려고도 않는다. 그들은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좋은 일을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좋은 손발과, 감각 기관과,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이일 보다 모든 것이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을 남을 위해서 활용하지를 않고 있다.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작은 촛불과 같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촛불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등불과 같이 빛을 받은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등경 위에 놓아 빛을 잘 비추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또, 그들이 소속해 있는 공동체를(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으로 잘 포착해서 활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을 이해서 빛을 내어서는 안 된다. 이 비유를 주신 이유는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22절). 은사와 은혜를 누구에 주시는 것은 다만 쌓아 두거나 감추어 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용하고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들에게 복음이 비밀로 간직된 것도 아니고 숨겨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파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비유들을 은밀하게 설명해 주셨지만, 그것은 그 제자들로 하여금 대중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유효하게 할 계획에서 그러하신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도록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성령의 역사 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남은 우리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 함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Ⅱ. 이 비유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과 화가 그 복음의 말씀에 달려있으니 그들은 말씀을 명심하고 그 말씀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절). 이 말씀은 이 앞에서도 말씀하였는데(9절), 여기에서 반복하시었다.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어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절). 이 말씀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주의 깊게 들으라는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너희가 듣는 바를 숙고하라”고 표현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들을 때에 그것을 숙고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못 주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남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매우 주의 깊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말씀에 정확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유익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가 듣는 바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하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주의를 강권하면서 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하몬드 박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진실한 종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진실한 주가 되어 주실 것이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삼하 22:26, 27).

2. 우리가 부여받은 달란트(곧 재능)를 우리가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마치 주식 거래가 활발하게 돌아가듯이, 현저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말씀을 듣는 너희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24절 하반절 중에 우리말의 개혁판 성서에는 빠진 말씀이 있어 영어판 K.J.V.에서 역자가 옮겨 놓았음-역자 주). “있는 자는 받을 것이다”(25절). 만일에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하였다면, 그들은 주님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인도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은사와 은혜는 활용하므로 더 많이 주어지며,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의 손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었다.

3. 만일에 우리가 소유한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5절). “없는 자는” 그가 가진 것에 대해서 유익하게 활용할 줄 모르고 마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헛되이 소유하고 있으면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묻어 두는 행위는, 그것을 맡겨 주신 분의 신임에 대한 배반이요 이윤의 계산에 대해서도 모순이다. 그리고 은사와 은혜는 싫증에 견디다 못해 녹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하몬드 박사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진실한 종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진실한 주가 되어 주실 것이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삼하 22:26, 27).우리가 부여받은 달란트(곧 재능)를 우리가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마치 주식 거래가 활발하게 돌아가듯이, 현저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말씀을 듣는 너희에게는 더 많이 주어질 것이요”(24절 하반절 중에 우리말의 개혁판 성서에는 빠진 말씀이 있어 영어판 K.J.V.에서 역자가 옮겨 놓았음-역자 주). “있는 자는 받을 것이다”(25절). 만일에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하였다면, 그들은 주님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인도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은사와 은혜는 활용하므로 더 많이 주어지며,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의 손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었다.만일에 우리가 소유한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5절). “없는 자는” 그가 가진 것에 대해서 유익하게 활용할 줄 모르고 마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헛되이 소유하고 있으면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달란트를 묻어 두는 행위는, 그것을 맡겨 주신 분의 신임에 대한 배반이요 이윤의 계산에 대해서도 모순이다. 그리고 은사와 은혜는 싫증에 견디다 못해 녹슬게 되는 것이다. Ⅲ. 세상에 뿌려지고 인간의 심령에 뿌려진 복음의 좋은 씨는 점차적으로 놀라운 효과를 내게 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렇게 된다(26절). 그러므로, 좋은 땅에 심겨진 씨처럼, 하나님 나라와, 복음도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와 같이 말없이 성과를 내게 된다. 1. 뿌려진 씨는 곧 싹이 나온다. 비록 그 씨는 흙 속에 묻혀서 잃어버린 것 같지만 그 씨는 흙을 뚫고 싹을 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씨가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있게 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와 같이 “선한 말을” 하여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들에 곡식이 뿌려진 얼마 후에, 그들의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게 되는가! 그들이 파란색으로 덮이게 될 때에 얼마나 화사하고 유쾌하게 보이는가!

2. 농부는 어떻게 그 씨에서 싹이 나오는 가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의 하나인 것이다.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27절). 농부는 씨가 나서 자란 것은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 자라남과, 그 성장의 원인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 안에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딤전 3:16).

3. 농부는 씨를 땅에 뿌리고 나서, 그 씨를 나오게 하려고 한일은 아무 것도 없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그 농부는 저녁에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해 가면서도, 그가 뿌려 놓은 씨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드려다 보지도 않고, 즐거운 일이나 사업에 분주하였다. 그러나 “씨가 나서 자라”게 되었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는, 자연의 일반적인 성장 법칙에 따라 된 것이며,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말씀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에, 말씀을 전한 자는 그 말씀이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욥 33:15, 16) 또는 일어나서 다른 일을 돌보고 있을 때에도, 그 귀한 일을 수행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죽어 무덤에 묻힌 때라도,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슥 1:5, 6). 씨가 싹이 나는데 필요한 이슬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막 5:7).

4. 그 뿌린 씨는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절). 씨에서 싹이 나왔을 때에는 그 싹은 계속해서 성장을 하게 된다. 자연에는 그 성장 법칙이 있고 그 성장이 가능하도록 자연의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가지시는 그리스도의 관심은 성장에 대한 관심이 될 것이다. 즉 처음 시작은 적지만 나중 끝은 크게 번성하는 그 성장의 관심에 대해서일 것이다. 당신은 곡식의 종자를 심어서 충실한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쭉정이를 거둘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씨에게서 동일한 충실한 곡식을 거두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리 에도 시들기 쉽고 밭에도 짓눌리기도 쉬운 연한 싹이 나오게 되나, 그것은 점점 자라서 이삭이 되고, 마침내는, 충실한 곡식으로 여무는 것이다. 자연은 아무 것도 갑자기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소리 없이 은밀하게 당신의 일을 행하시지만 오래 참으시며 실수 없이 하신다.

5. 마침내 그 씨는 완전히 성장과정을 다 마치게 된다(29절). 뿌려진 씨는 곧 싹이 나온다. 비록 그 씨는 흙 속에 묻혀서 잃어버린 것 같지만 그 씨는 흙을 뚫고 싹을 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씨가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자리를 잡고 있게 하여 “위로부터 난 지혜”와 같이 “선한 말을” 하여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들에 곡식이 뿌려진 얼마 후에, 그들의 풍경은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게 되는가! 그들이 파란색으로 덮이게 될 때에 얼마나 화사하고 유쾌하게 보이는가!농부는 어떻게 그 씨에서 싹이 나오는 가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의 하나인 것이다.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27절). 농부는 씨가 나서 자란 것은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떠한 모양으로 자라남과, 그 성장의 원인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 안에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딤전 3:16).농부는 씨를 땅에 뿌리고 나서, 그 씨를 나오게 하려고 한일은 아무 것도 없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그 농부는 저녁에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해 가면서도, 그가 뿌려 놓은 씨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드려다 보지도 않고, 즐거운 일이나 사업에 분주하였다. 그러나 “씨가 나서 자라”게 되었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는, 자연의 일반적인 성장 법칙에 따라 된 것이며,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말씀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을 때에, 말씀을 전한 자는 그 말씀이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욥 33:15, 16) 또는 일어나서 다른 일을 돌보고 있을 때에도, 그 귀한 일을 수행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이 죽어 무덤에 묻힌 때라도, 싹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슥 1:5, 6). 씨가 싹이 나는데 필요한 이슬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막 5:7).그 뿌린 씨는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절). 씨에서 싹이 나왔을 때에는 그 싹은 계속해서 성장을 하게 된다. 자연에는 그 성장 법칙이 있고 그 성장이 가능하도록 자연의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가지시는 그리스도의 관심은 성장에 대한 관심이 될 것이다. 즉 처음 시작은 적지만 나중 끝은 크게 번성하는 그 성장의 관심에 대해서일 것이다. 당신은 곡식의 종자를 심어서 충실한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쭉정이를 거둘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씨에게서 동일한 충실한 곡식을 거두시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리 에도 시들기 쉽고 밭에도 짓눌리기도 쉬운 연한 싹이 나오게 되나, 그것은 점점 자라서 이삭이 되고, 마침내는, 충실한 곡식으로 여무는 것이다. 자연은 아무 것도 갑자기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소리 없이 은밀하게 당신의 일을 행하시지만 오래 참으시며 실수 없이 하신다.마침내 그 씨는 완전히 성장과정을 다 마치게 된다(29절). 그 씨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열매가 익으면” 주인에 의해서 추수할 준비를 다 갖추게 되는 것이며, 주인은 “낫을” 대어 거두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1) 정당한 원리를 따라서 솔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 그분은 이를 달게 받아 주시며, 인간의 심령에 자리를 잡고 역사하며 무르익어 가는 복음의 열매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추수 때에 당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요 4:35).

(2)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복음의 열매를 맺은 자들에게 영생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올바로 거쳐 완전히 성숙하였을 때에 추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은 익은 곡식과 같이 하나님의 곡간에 모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마 13:30). 정당한 원리를 따라서 솔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 그분은 이를 달게 받아 주시며, 인간의 심령에 자리를 잡고 역사하며 무르익어 가는 복음의 열매를,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추수 때에 당신에게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요 4:35).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복음의 열매를 맺은 자들에게 영생을 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올바로 거쳐 완전히 성숙하였을 때에 추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때에 그들은 익은 곡식과 같이 하나님의 곡간에 모아 들여지게 되는 것이다(마 13:30). Ⅳ. 은혜의 역사는 그 시작에 있어서 미약하지만 결국에는 창대하고 주목할 만하게 된다(30-32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과 같다고 할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메시야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하였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너희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적당한 비유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것처럼 아니면 당신 자신과 의논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우리가 이 비유를 태양의 활동에서 인용할까 혹은 달의 공전에서 인용해 볼까? 아니다. 이러한 비유는 이 지상에 이는 것에서 빌어와야 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비유할 수 있겠구나.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 한 알”로 천국을 비유하게 되었고 그들로 그 작은 씨를 보여 줄 것을 의도하여 아직 땅에 심겨지지 않은 씨를 들어 비유하시었다. 1. 복음의 시초에 있어서 천국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인”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대단히 작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은 한 방에도 다 수용될 수 있는 일백 이십 문도에 의해서였다(행 1: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그 수는 불과 칠십 명 정도였던 것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처음에는 “적은 일의 날”과 같고(슥 4:10),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과 같은 것이다(왕상 18:44). 사도들의 복음 전도에 의하여 나라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것과 같이, 보잘것없는 몇 사람에 의해 그와 같이 거대한 일을 착수하였던 일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처럼 미약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된 은혜의 역사가, 그처럼 큰 영광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유례도 다리는 없는 것이다.

2. 그 적은 겨자씨의 결과가 매우 위대하였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세상에서 복음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먼 땅 끝에까지 퍼져 나갈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것이다. “큰 가지를 내니.” 교회는 강하고 널리 뻗은,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은 “큰 가지들을 내었다”. 지금 성장 중에 있는 동안에도 인간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많은 열매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겨자씨 한 알”과 “큰 가지” 사이의 차이는 지상에서 새로 회개한 초신자와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 사이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요 12:24)/ 복음의 시초에 있어서 천국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인”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대단히 작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은 한 방에도 다 수용될 수 있는 일백 이십 문도에 의해서였다(행 1: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그 수는 불과 칠십 명 정도였던 것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처음에는 “적은 일의 날”과 같고(슥 4:10),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과 같은 것이다(왕상 18:44). 사도들의 복음 전도에 의하여 나라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것과 같이, 보잘것없는 몇 사람에 의해 그와 같이 거대한 일을 착수하였던 일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처럼 미약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된 은혜의 역사가, 그처럼 큰 영광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유례도 다리는 없는 것이다.그 적은 겨자씨의 결과가 매우 위대하였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세상에서 복음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먼 땅 끝에까지 퍼져 나갈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것이다. “큰 가지를 내니.” 교회는 강하고 널리 뻗은,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은 “큰 가지들을 내었다”. 지금 성장 중에 있는 동안에도 인간의 심령 안에 은혜의 역사는 많은 열매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겨자씨 한 알”과 “큰 가지” 사이의 차이는 지상에서 새로 회개한 초신자와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 사이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요 12:24)/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상세하게 비유의 말씀을 마친 뒤에, 복음서기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결론적인 말로써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었다고 하였다(33절). 아마 그렇게 표현한 그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종류의 비유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유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13장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비유로 말씀하시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많이 볼 수 있고, 생소하지 않은 그런 것들이나 그들의 수준에 알맞은 것들을 비유로 채택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표현으로 가르치시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청중들이 다 비유의 비밀을 다 알게 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표현 방법은 쉽게 하시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후로 그런 비유의 말씀을 쉽게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 주님의 영광은 구름에 가리워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인자들의” 언어로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하신 그 의미를 처음부터 바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차차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에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해석 하”여 주시었던 것이다. 우리는 씨뿌리는 비유에서처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말씀의 해석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원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많이 확장되고 번성할 때에, 우리가 더 이상 수고하지 않더라도, 바로 그 점이 이 비유의 말씀들을 우리에게 해석하여 주기 때문이다.

4:35 풍랑을 제압하심 (마가복음 4:35-41) 그리스도께서 단신의 제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폭풍을 잔잔케 역사 하신 이 기적은 우리가 전에 마태복음 8장 23절 이하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더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럼 이하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이 기적은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에서 말씀을 전하신 같은 날 이루어졌다. “그날 저물 때에”(35절) 그리스도께서 온종일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기에 수고하시었지만, 스스로 휴식을 취하시는 대신에 자신이 활동을 계속하시었음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는 이 땅에서 만족스런 참된 휴식을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는 듯하다. 수고의 결국이 풍랑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단으로 사용하였던 그 배는 바로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호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제아무리 위험에 처해 있더라도 물 속에 빠질 우려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시려고 밤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자고 제의하시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신 것은, 다음 장에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 곳에 가셔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기 위해 가시었고, 그 곳으로 가시는 노정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세대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3. “저희가 무리를 다 보내”기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들이 나온 목적을 따라 그들 각자에게 채워 주시고, 그들의 모든 요구에 따라 응답해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에게도 그들이 헛되이 참석했다고 불평을 하면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그 무리들이 엄숙한 축복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선포하러 오신 것뿐만 아니라 명령하시기 위해 오시었고, 축복하시기 위해 오시었기 때문이다.

4. 제자들은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그것을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입으셨던 의상 그대로였고, 밤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더군다나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외투를 입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의 건강에 대해서 부주의를 해도 좋다는 추론을 내리지 말고, 우리의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염려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5. 광풍이 너무 세게 불었으므로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37절). 배에 구멍이 뚫려서가 아니라, 아마 폭풍우가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폭풍우가 내린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배가 적다 하더라도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 배 안에 타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을 배에 태우고 몹시 서두르며 위험에 빠져 있는 일은 그 배에만 있었던 새로운 일이 아닌 것을 기억하라.

6. 예수께서 타신 배를 따르는 몇 척의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는”데, 배들도 틀림 없이 이와 같은 조난과 위험을 당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적은 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의 나타남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갔을 것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출발하실 때에 무리를 돌려보냈는데 몇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 바다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르기 위해,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을 바라는 자들은, 예수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예수께서 당하시는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불어닥친 폭풍을 예견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항해를 같이 하기 위해 담대하고 유쾌하게 출항할 수 있는 것이다.

7. 광풍이 불어오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었다. 여기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주무”시었다고 하였는데 이 고물은 선장의 자리인 것이다. 예수께서 조종실에 누워 계시었음은, 죠지 허버트(Mr. George Herbert)가 표현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배를 타고 바다에서 말씀을 전하신 같은 날 이루어졌다. “그날 저물 때에”(35절) 그리스도께서 온종일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기에 수고하시었지만, 스스로 휴식을 취하시는 대신에 자신이 활동을 계속하시었음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는 이 땅에서 만족스런 참된 휴식을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는 듯하다. 수고의 결국이 풍랑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강단으로 사용하였던 그 배는 바로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호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제아무리 위험에 처해 있더라도 물 속에 빠질 우려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시려고 밤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자고 제의하시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신 것은, 다음 장에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 곳에 가셔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기 위해 가시었고, 그 곳으로 가시는 노정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의 세대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저희가 무리를 다 보내”기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곧 그들이 나온 목적을 따라 그들 각자에게 채워 주시고, 그들의 모든 요구에 따라 응답해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에게도 그들이 헛되이 참석했다고 불평을 하면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그 무리들이 엄숙한 축복을 받아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선포하러 오신 것뿐만 아니라 명령하시기 위해 오시었고, 축복하시기 위해 오시었기 때문이다.제자들은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 그것을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입으셨던 의상 그대로였고, 밤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더군다나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바다로 나가시면서,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외투를 입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의 건강에 대해서 부주의를 해도 좋다는 추론을 내리지 말고, 우리의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염려를 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광풍이 너무 세게 불었으므로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37절). 배에 구멍이 뚫려서가 아니라, 아마 폭풍우가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폭풍우가 내린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배가 적다 하더라도 물결이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 배 안에 타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을 배에 태우고 몹시 서두르며 위험에 빠져 있는 일은 그 배에만 있었던 새로운 일이 아닌 것을 기억하라.예수께서 타신 배를 따르는 몇 척의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는”데, 배들도 틀림 없이 이와 같은 조난과 위험을 당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적은 배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의 나타남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갔을 것이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출발하실 때에 무리를 돌려보냈는데 몇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 바다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르기 위해,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을 바라는 자들은, 예수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예수께서 당하시는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불어닥친 폭풍을 예견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항해를 같이 하기 위해 담대하고 유쾌하게 출항할 수 있는 것이다.광풍이 불어오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었다. 여기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주무”시었다고 하였는데 이 고물은 선장의 자리인 것이다. 예수께서 조종실에 누워 계시었음은, 죠지 허버트(Mr. George Herbert)가 표현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다. 바람과 풍랑이 나의 배를 공격하여 올 때에, 주님께서 키를 잡으시고 조종하시네, 배가 몹시 흔들리는 위험한 순간에도. 폭풍은 주님의 예술의 걸작품, 비록 주님이 눈은 감으신다 해도, 주님의 마음은 늘 깨어 있으시지. 예수께서는 “베개를 베시고 주무 시”었는데, 그러한 것은 예수를 위해서 배에 구비하여 놓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무신 것은 당신의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고, 그들에게 기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풍랑을 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신앙이 약하였음이 드러났고 그들의 기도는 강하였음이 나타났다. 때때로, 교회가 풍랑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주무시는 듯이 당신의 백성들의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곧 나타나시지 않으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나이다”(사 45:15). 그러므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시 121:3, 4). 그리스도께서는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처럼, 주무시더라도 마음은 깨어 계시는 것이다(아 5:2). 8.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를 모시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길은 그들이 모시고 있는 주 예수를 의지하고, 구원을 호소하며, 배의 노를 젓는 것보다 기도의 노를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 사실에 자신을 가졌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는 배가, 제아무리 그것이 풍랑에 심하게 흔들린다 하더라도, 침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 나타나신 덤불은 제아무리 맹렬하게 불붙어 타고 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시이저(J. Caesar)는 그를 배에다 태우고 가는 선장에게 “그대는 시이저를 배에다 태웠다. 그리고 시이저의 행운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일깨웠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 주께서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아야 했다(아 2:7).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이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가운데 주무시는 것같이 보일 때에, 그분은 당신의 백성의 기도 가운데 깨어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우리의 눈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대하 20:12). 우리가 구주 예수를 모시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이른다 하여도 신앙의 곤경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말한 표현은 아주 당돌한 것이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36절). 나는 이 말이 주님을 깨우리 위한 간청이라기보다 주무시는 주님을 꾸짖는 말인 듯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대한 다름 변명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 고로 가까워진 친숙함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자유와, 그들이 그렇게 공포심에 사로잡혀 무엇을 말하는 것조차 모르게한 현재 그들의 당한 위험한 조난 등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위험한 조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무관심하신 것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마 18:14).

9. 그리스도께서 바람을 꾸짖으신 명령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으나,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다(39절). 예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는데, 원어에는 “eiw,pa”, “pefi,mwso” “잠잠하라,” “소리를 내지 말라”로 되어 있다. 바람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말고, 바다는 더 이상 노를 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주께서는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훤화까지 진정하시었던”것이다(시 65:7). 그런데 이 시편 65편 7절이나, 93편 3,4절은 바다의 “소리”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 소리가 위협을 주고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삼가기로 한다.

(1) 우리의 악한 마음이 “능히 안정치 못하고……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며,” 이 주님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거세게 파도치고 안정되지 못할 때에, 그리tm도께서 우리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

(2)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고난의 폭풍이 아무리 요란하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이것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외부로는 싸움이 계속되고, 내부로는 두려움에 싸여 있으며, 마음은 격동되어 있을 때에, “이슬의 열매를 짓는” 그리스도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명령하신다(사 57:19). 만일 그리스도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면, 곧 잠잠하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5절에 바다를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인 것처럼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바다를 명령하시는 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임을 증거 하시는 것이다. 바다를 만드신 분이 바다를 조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10.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두려워함에 대하여 책망하신 말씀이 마태복음보다 여기에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마 8:26) 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하였다. 비록 두려워할 원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무서워해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였고 여기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였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무서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므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 너희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내가 때에 알맞은 효과적인 구원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너희가 생각할 수 있겠느냐?” 자기들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어도 무관심하며 다만 그런 불행한 자리에 놓아두신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를 모시고 있는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길은 그들이 모시고 있는 주 예수를 의지하고, 구원을 호소하며, 배의 노를 젓는 것보다 기도의 노를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 사실에 자신을 가졌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는 배가, 제아무리 그것이 풍랑에 심하게 흔들린다 하더라도, 침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 나타나신 덤불은 제아무리 맹렬하게 불붙어 타고 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시이저(J. Caesar)는 그를 배에다 태우고 가는 선장에게 “그대는 시이저를 배에다 태웠다. 그리고 시이저의 행운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일깨웠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 주께서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아야 했다(아 2:7).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이 허물을 용서해 주실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가운데 주무시는 것같이 보일 때에, 그분은 당신의 백성의 기도 가운데 깨어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에, 우리의 눈이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대하 20:12). 우리가 구주 예수를 모시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이른다 하여도 신앙의 곤경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말한 표현은 아주 당돌한 것이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36절). 나는 이 말이 주님을 깨우리 위한 간청이라기보다 주무시는 주님을 꾸짖는 말인 듯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대한 다름 변명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 고로 가까워진 친숙함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자유와, 그들이 그렇게 공포심에 사로잡혀 무엇을 말하는 것조차 모르게한 현재 그들의 당한 위험한 조난 등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위험한 조난을 당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무관심하신 것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마 18:14).그리스도께서 바람을 꾸짖으신 명령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았으나,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다(39절). 예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는데, 원어에는 “eiw,pa”, “pefi,mwso” “잠잠하라,” “소리를 내지 말라”로 되어 있다. 바람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말고, 바다는 더 이상 노를 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주께서는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훤화까지 진정하시었던”것이다(시 65:7). 그런데 이 시편 65편 7절이나, 93편 3,4절은 바다의 “소리”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 소리가 위협을 주고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삼가기로 한다.우리의 악한 마음이 “능히 안정치 못하고……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며,” 이 주님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거세게 파도치고 안정되지 못할 때에, 그리tm도께서 우리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경솔하게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고난의 폭풍이 아무리 요란하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이것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외부로는 싸움이 계속되고, 내부로는 두려움에 싸여 있으며, 마음은 격동되어 있을 때에, “이슬의 열매를 짓는” 그리스도께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명령하신다(사 57:19). 만일 그리스도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시면, 곧 잠잠하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5절에 바다를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인 것처럼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바다를 명령하시는 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하나임을 증거 하시는 것이다. 바다를 만드신 분이 바다를 조용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두려워함에 대하여 책망하신 말씀이 마태복음보다 여기에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마 8:26) 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하였다. 비록 두려워할 원인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무서워해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였고 여기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였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무서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므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 너희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내가 때에 알맞은 효과적인 구원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너희가 생각할 수 있겠느냐?” 자기들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어도 무관심하며 다만 그런 불행한 자리에 놓아두신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기적이 제자들에게 준 인상에 대하여, 여기에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라고 하였고, 여기에는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였다. 이제 신앙에 의하여 그들의 공포는 사라졌던 것이다. 그들이 바람과 바다를 두려워하였을 적에,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마땅히 표시해야할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람과 바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람과 바다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예수에게 대하여 “심히 두려워하게”되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들의 불 신앙적인 공포로 말미암아 다시금 그리스도에게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에게 존귀를 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폭풍 가운데 나타난 창조주의 능력과 진노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그 안에 고뇌와 놀람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고요 속에 계시는 구속주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 두려움 안에 즐거움과 만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나를 태운 뱃사람들과 같이 두려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었다. 요나를 태웠던 배의 선원들은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5, 16). 이 두려움의 제물을 그리스도의 존귀 앞에 드리면서,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마 8:27)라는 놀라움을 나타내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사람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다.

마가복음 4장: 들을 귀와 볼 눈

마가복음 4장: 들을 귀와 볼 눈

1. 1-20절: 하나님 나라의 비밀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주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바다와 같이 넓었기에 “호수”가 아니라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와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배를 타고 호숫가에 있는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해수로부터 육지로 부는 바람 때문에 예수님의 음성은 멀리까지 전달 되었습니다(1절).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는 그 중 몇 가지를 전해 줍니다.

첫번째 비유에는 이상한 농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밭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발 닿는 곳마다 씨를 뿌립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도, 돌짝밭에도 그리고 가시덤불에도 씨를 뿌립니다. 씨를 낭비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좋은 땅에도 씨를 뿌립니다만, 더 많은 씨가 허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오직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 만이 싹을 내고 줄기를 뻗어 열매를 맺었습니다(3-8절).

왜 예수님은 이상한 농부를 등장시켰을까요? 예수님의 비유에는 항상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 이상한 점을 이해하는 것이 비유의 의미를 푸는 열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이상한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눈 감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상대를 보아가며 될법한 사람에게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주 헛수고 같아 보이는 법입니다. 하지만 한 두 사람이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모든 허비를 보상 하고도 남을만한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9절)고 말씀하십니다.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고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진실로 듣는 것이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진실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마음으로 들어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 열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에 다가와 비유의 의미를 여쭙니다(10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11절)고 말씀하십니다. 즉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해 주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한계 안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비밀입니다. 다 알 수 없는 대상입니다. 언어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집니다.

비유는 그 비밀의 한 조각을 열어 보여주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마음이 열린 사람은 그 비밀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수수께끼”(11절)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닫혀 있고 굳어져 있기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 했던 일입니다(12절).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해설해 주십니다(13-20절). 여러 종류의 밭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받아들이고 키워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씨를 허비하는 농부처럼 누구에게나 전해야 합니다. 어느 밭이 옥토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21-34절: 결국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마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몇 개 더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하나는 “등불의 비유”(21-23절)입니다. 등불을 켜서 높이 세우면 어둠이 물러나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지금은 “숨겨 둔 것” 같고 “감추어 둔 것”(22절) 같지만 결국 환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되질의 비유”(24-25절)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더 많이 깨달을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더 어두워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비밀이 원래 그렇습니다. 단서를 찾으면 너무도 쉬운데, 그것을 찾지 못하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또한 씨앗을 비유로 사용하십니다(26-29절). 씨앗은 신비롭습니다. 그 자체 안에 생명이 있어서 적당한 조건만 갖춰지면 그 생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만,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에는 씨앗이 심겨져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씨앗이 싹을 내고 줄기를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내친 김에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를 비유로 드십니다(30-32절). 겨자는 풀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처럼 크게 자랍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2절)는 말은 의미 심장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공중의 새”를 이방인에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면 이방인들도 그 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3. 35-41절: 제자들의 마음밭

호숫가에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반대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35절). 갈릴리 호수 동편은 이방땅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상의 조건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돌풍이 불어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한 동안 잔잔했던 호수에 갑자기 돌풍이 불어쳤고 그로 인해 배안에 물이 가득 찰 정도로 풍랑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38절). 제자들이 깨워 일으키자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여라”(39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마치 그분의 말씀을 알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잠잠해지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지를 거듭 경험했습니다. 그런 분이 자신들과 같이 있는데도 풍랑이 일자 그 사실을 잊고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아직도 씨앗을 품어 열매를 맺어낼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제자들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41절)라고 감탄합니다. 그동안 경험한 기적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물질세계에 말을 걸고 그 말에 물질세계가 반응하는 것은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놀라움과 감탄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야 했는데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묵상:

하나님 나라는 우리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고, 우리 사이에 있고, 우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에워싸고 있고,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허블 망원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마음의 귀를 열면 우리 안에 그 나라가 있고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 보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처럼 작고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나라가 점점 현실이 됩니다. 믿음이 싹을 내고 줄기를 뻗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복 되어라,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이!

마가복음에는 흔히 ‘행동의 복음서’라는 이름이 따를 만큼 이적기사들이 주를 이룬다. 그에 비해 비유가 차지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단지 4개의 비유만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3개가 4장 속에 들어 있다. 이 3개의 비유를 소개해 놓고도 마가는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말한다(4:33). 이는 마가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을 양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 비유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크고 중심적인지를 압축적으로, 또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부분에서의 그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I. 배경: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에 관련된 논란

1. 심각한 오해와 도전

마가복음의 전체적 흐름은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긍정적인 선언 및 고백과 부정적인 오해 및 음해들이 되풀이되는 방식으로 엮어지고 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첫 선언(1:1)에서 시작하여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백부장의 종결적 고백(15:39)으로 마쳐지는 마가복음의 전체 구도는 그 속에서의 반복되는 바른 고백들과 잘못된 오해들의 밀고 당김을 감싸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3장에서는 예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미쳤다는 친속들의 오해(3:21)뿐만 아니라,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어 그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3:30)고 말하는 서기관들의 공격이 그것이다. 4장은 이런 3장과의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오해들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대들이 생겨나는가? 이에 대한 보다 강화된 대응이 따를 것을 기대하게 되는데, 과연 마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에 대한 결정적 도전이 주어지는 곳에 예수로 말미암아 운명이 뒤바뀌며 생사가 판가름나는 결정적 중심추로서의 예수의 역할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2. 강화된 대응

마가의 대응은 3장 후반부와 4장 전체에 걸쳐 세 가지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먼저 3장 31~35절에서 새로운 관계가 규정되고 있다. 기존의 혈육 관계를 넘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3:33)이 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관계 개념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새 관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그에 대한 자세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됨을 판가름 짓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 4장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로 말미암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점에 대해서는 곧 이어서 상세한 해설을 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4장 후반부의 기사는 새로운 두려움의 대상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저가 뉘기에”(4:41)라는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모든 일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그가 이 모든 새로운 일들 속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이제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분명한 분기점이 형성되고 있다.

II. 비유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

1. 가르침의 주변 환경과 특성(4:1~2)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태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가르침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4장과 13장에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4장의 가르침이 갈릴리 사역의 중반에 놓여져 있다면, 유사하게 13장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역의 중반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점증되어 가는 반대와 오해의 배경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이 집중된 두 번의 가르침의 주된 목적을 이룬다.

4장의 가르침은 갈릴리 바닷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 무리와 다소 사이를 두는 독특한 가르침의 세팅을 만드신다. 주변의 환경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야외 교육장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 역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익숙한 소재들을 사용한다.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마가는 서론적 요약을 붙인다.

‘여러 가지 비유로’라고 번역된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들을 가르치셨다는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보다 엄밀하게 보면 ‘여러 가지 것들을’(polla) ‘비유들로’(en parabolais)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들(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심적이다)과 그 가르침의 전달 방식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비유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데 그 초점이 있지 않고, 그 가르치는 것을 ‘비유들로’(en parabolais) 가르치는 분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을 해서 이해가 되면 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적 가르침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여전히 그 귀와 눈이 닫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와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비밀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구분의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들의 특징이다. ‘비유들로’ 말씀하심은 하나님나라의 진리가 체험적 진리임을 말해준다. 깨달음 속에서 그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 가지는 기쁨과 혁명적 변화 속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는 제자들의 입장에 서서1질문하기도 하고, 아는 듯한데 여전히 몰라서 실패하기도 하는 그들을 넘어 마침내는 그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이해하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것이 ‘비유들로’ 말씀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지적 귀만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러 나가는 사람들이 될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영혼의 귀를 동원하며 온 삶이 따른 응답의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서 듣는 사람들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이 비유적 가르침들을 이끌어 가는 전체적 구조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심’과 ‘들음’에의 요청의 구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2절의 “저희에게 이르시되”(kai elegen autois)로 시작해서 9절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hos echeita akouein akouet )로 마친다. 21절의 등불에 대한 이야기도 “저희에게 이르시되”(kai elegen autois)로 시작해서 23절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ei tis echeita akouein akouet)로 마치고 있다. 24절은 이 두 요소를 함께 포함시켜서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kai elegen autois, blepete ti akouete)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하심’과 ‘들음’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비 요건이다.

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석(4:3~20)

첫 번째 비유는 사람들의 주목을 환기시키는 강한 두 단어로 시작되고 있다. ‘들으라’(akouete)와 ‘보라’(idou)가 그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말을 동시에 사용하는 예는 마가에게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귀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까지 열어서, 듣는 가운데 또한 보고 깨닫고 변화되는 반응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첫 번째 단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무리들에게 일러준 비유 자체의 부분(3~9)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부분(10~13), 그리고 비유에 대한 설명의 부분(14~20)이다. 비유 자체에도 셋의 쌍들이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을 때 그 씨들을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세 가지이다. 굳은 땅과 돌들, 그리고 가시덤불이다. 이에 비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이루는 성공적 결과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세 번 점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복음은 백 배만을 단숨에 이야기하며(눅 8:8), 마태복음은 백 배부터 시작하여 삼십 배로 감소하는 역순을 취하고 있다(마 13:8). 마가의 순서의 배열은 세 번의 실패와 대조적으로 세 번의 점증적인 성공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비유 자체 부분과 그 설명 부분 사이에는 비유의 의미를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들로’(en parabolais, 4:11)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온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인용되고 있는 이사야 6장 9~10절의 말씀은2 비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은 의미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너희’(hymin)와 ‘외인들’(ekeinois tois eks)을 구분하고 있다. 외인들에게는 씨의 풍성한 결실에 해당하는 세 가지 결과 ‘깨달음’과 ‘돌이킴’과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양자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기게 된다. 리쾨르(Ricoeur)가 말하는 것처럼 이 격차는 수량화할 수 있는 양적 간격이 아니라 도저히 잴 수 없는 질적 간격이다.3 하나님나라에 속하는 자들은 비유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얻지만, ‘외인들’의 경우에는 이 비유들 때문에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된다. 특히 씨 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앗은 이런 구분을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이 첫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의 설명 속에서 그 해석의 포인트가 제공되고 있다. 씨앗은 곧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이 전하여지는 상황과 또 그 때에 나타나는 다양한 결과들을 보다 생생히 나타내기 위해 ‘말씀은 씨앗’이라는 메타포적 알맹이를 비유적 이야기체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밭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이 비유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밭은 씨에 비해 부차적 성격을 가진다. 밭이 어떤 종류의 밭이냐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씨와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얼핏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는 땅이지만 씨가 뿌려졌을 때에 비로소 그 밭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그다지 심각한 구분이 생기지 않지만 씨가 뿌려진 이후에는 심각한 구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예 싹을 내지 못하게 되는 땅도 드러나고, 싹은 내어도 곧 말라죽게 되는 땅도 드러나며, 어느 정도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에는 이르지 못하게 되는 땅도 드러난다. 이 모든 땅들은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내는 땅과 확연히 구별되기 시작한다.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름 아닌 씨앗이다. 하나님나라의 말씀의 씨앗은 그만큼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바로 그런 말씀을 전하는 자이며 또한 말씀 자체이신 분이다. 비록 그 씨앗이 땅 속에 가만히 파묻혀 있는 것 같지만, 또 때로는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별된 좋은 밭들 속에서는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며 마침내는 상상치 못하였던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씨앗의 운명이며, 말씀의 비밀이며, 예수님 자신의 길인 것이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이것의 이해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 감추어진 메시아의 길, 그것은 결코 작은 결과를 낳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고 큰 것이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반전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이 씨 뿌리는 자와 씨와 밭에 대한 비유는 감추임과 나타남이 교차되는 마가복음의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관련해 해석돼야 할 것이다.4

3. 스스로 자라는 씨와 겨자씨 비유(4:26~32)

이어지는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과 같다’라는 형식을 취함으로 보다 분명히 비유들과 하나님나라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땅에 뿌린 씨앗은 그 스스로 자라난다.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을 내며 자라서 마침내 결실에 이르게 된다. 그 결실의 때가 이른 것을 볼 때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을 거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씨앗의 생명력과 그 활동의 현재성이다. 이미 약동하고 있는 그 놀라운 생명력은 결실의 때에 이르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땅 위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생명력으로 스스로 자라날 것이다. 그 자라는 것이 비록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이 다 자라난 뒤에는 피할 수 없는 추수의 낫이 다가옴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그것이 감추인 듯이 보이지만, 항상 그것은 감추인 채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드러날 때의 갑작스러운 결과 앞에 놀라움으로 서지 않기 위해서는 뿌려진 씨앗의 현재의 자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씨앗의 숨은 생명력에 비해, 겨자씨 비유에서는 씨앗의 작음이 강조된다. 그것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4:31)이다. 물론 이 표현의 정확성이 이 비유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생물학적 관심에 매달리는 사람이나, 이 표현 하나에 성경 무오설을 걸려고 하는 사람들은5 이 씨앗이 등장하는 비유적 맥락이나 비유가 가지는 문학적 특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6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는 마지막 번성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이 다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고도 남는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임하여 있는 것에 대해 그들은 알지 못한다. 과연 십자가에서 죽게 될 작은 한 인물 가운데서 온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큰 나무를 볼 수 있을까? 한 무리의 작은 제자들과 빈약한 교회를 통해 그런 원대하고 영광스러운 완성을 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의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조차 않는 겨자씨의 모습과 같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재에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완성된 최종적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사람들은 쉽게 이를 놓치고 만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큰 사람들이요 권위자들이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어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는 그런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나라의 기대를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야만 한다. 현재의 작은 것 속에서 하나님나라 씨앗의 생명력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큼에 대한 허황된 꿈과 함께 그들 자신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 속에서 큼을 보는 사람들은 그 큼이 온전히 펼쳐지는 순간에 진정한 영광과 기쁨을 경험할 것이다.

4. 비유들 속에 나타난 반전과 역설

이런 반전과 역설이 이 비유들 속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런 면은 그 형식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내러티브의 구성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비유적 성격을 가지는 등불에 대한 이야기와 헤아림에 대한 이야기(4:21~25)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등불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어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등불이 지금 일시적으로 감추어져 있으며 숨기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드러내어질 수밖에 없다. 등불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등불은 지금 “그 참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7 세상 속에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낭패를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에는 보잘것없이 작은 모습으로, 예상 밖에 감추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그것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결과는 나중에 그것이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질적 차이를 빚고 말 것이다. 큰 것을 주는 자는 큰 것을 되받고 작은 것을 주는 자는 작은 것을 되받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비록 현재는 작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큰 것을 담아서 주는 사람은 마침내 큰 것으로 되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점차 더 가지게 되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있는 것까지 다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작은 것 때문에 빚어지는 최종적인 결과의 차이는 이와 같이 엄청난 것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말씀의 씨앗이다. 이 작은 것이 작은 것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나중에는 100배까지의 결실을 맺음으로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반전을 이루어낸다. 크고 왕성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에 그들 가운데 주어지는 말씀의 사역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 역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반전과 역설의 중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다. 비록 당시의 ‘큰’ 사람들은 극심하게 예수를 오해하고 모함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크고 작은 것을 재는 잣대로 그들 가운데 존재한다.

이와 같은 반전의 실례는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들 속에서 예시되고 있다. 한 예로 12장 후반부에 기록된 두 렙돈 드린 과부의 일화 속에서 이 반전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큰 왕 다윗보다 더 크신 분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시고(12:35~37), 이 바탕 위에서 권세 있는 판정의 말씀을 통해 그 권위의 시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2:43~44). 큰 부자들이 갑자기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인 가난한 한 과부가 큰 자가 되는 이런 반전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판정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세상 속에 새로운 질서를 도입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세상 질서는 더 이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작은 것밖에 안 되는 씨앗 하나가 온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뒤바꾸는 큰일을 내고 있다. 반면 그 작은 씨앗을 마음의 밭에 소중히 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하였던 큰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의 핵심에는 십자가에 가리어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서 계신다.

III. 새로운 두려움(4:35~41)

1. 제자들의 강조된 두려움

비유들을 통한 가르침에 이어서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신 기적기사이다. 제자들은 이 부분에서 다시금 악역을 맡고 있다. 편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두려움에 질려 안절부절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예수님은 그들을 믿음 없는 자라고 꾸짖고 있다. 제자들의 모습은 때로는 깨달음이 있는 자들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믿음이 있는 자들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외인들’과 달리 예수님의 비유의 뜻을 남달리 설명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풍랑 이는 바다에서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가는 이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동참을 구하고 있다. 풍랑 이는 현실의 바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2. 새로운 두려움

그래서 이 기사는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41)라는 질문으로 마감된다. 본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직접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이 답해야 할 문제로 남겨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마가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다 읽은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 대답은 더욱 뚜렷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제자들의 새로운 두려움이다. 풍랑 이는 바다를 보고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아우성 쳤던 이전의 모습과 달리 이제는 그들의 속에 새로운 두려움이 형성되고 있다. 마가는 이 두려움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은 곧 이어 소개되고 있는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친 이후 사람들의 반응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5:15). 그러나 제자들의 두려움은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그들을 사로잡았던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두려움이다.

예수님의 권능을 접하는 곳에는 새로운 두려움이 형성된다. 사람들을 주체치 못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바람과 바다조차 순종하는 분 앞에 엎드리며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이전의 것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 무서운 것들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일이 되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모시게 될 때 이전 우리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한다.

IV. 오늘에의 적용

이상에서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시작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 그리고 새로운 두려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심을 발견한다. 현재에는 이 예수님이 그 참 모습이 가려진 상태로 세상 속에 계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후에 나타날 모든 결과들은 현재의 이분으로 말미암아 결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급속하게 외향적 가치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외모나 외적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회이다. 미용이나 성형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미 이것이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사회 전체가 큰 돈, 큰 집, 큰 차 등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부자’되기 위한 열망은 ‘왜’와 ‘어떻게’의 질문을 넘어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상으로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 가려지고 무시당하는 것은 작으나 위대한 것들이다. ‘부자 아빠’에게 기대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는 것에 대하여 사례는 고사하고 원망을 들어야 할 판이다. 작지만 그 위대한 것들이 사람을 바꾸고 오늘의 내가 있도록 만드는 것들이 아닌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리고서도 부자들의 큰 헌금에 가려서 그 순결하고 고귀한 믿음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던 한 과부 여인과 같이 작고 사소한 것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함정이다. 여기에 빠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주님을 알아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던 작은 것 속에 깃들인 진정한 위대함을 드러내어 주시던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이것이 이 시대의 희망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외면적 ‘큼’이나 성장 또는 성공의 신화를 과감히 벗어나서 진정한 ‘위대함’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 작은 씨앗 속에 들어 있는 ‘뒤집음의 힘’(subversive power)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결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누구의 제자인가? 우리가 아는 그분은 과연 누구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9:7)”고 한 것처럼, 과연 우리는 세상의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그의 제자들인가?

주註

1.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에 이

르게 함에 있어서 독특한 역할이 주어지고 있다. 그들의 무지나 오해, 믿음 없음이나 실패 등을 넘어 어떻

게 참 제자의 길을 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잣대의 역할을 한다. 마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참고, Pheme Perkins, “The Synoptic Gospels and Acts of the Apostl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ed. John Bart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246~48; Ernest Best, “Mark’s Narrative Technique,” JSNT 37 (1989),

43~58.

2. 마가복음에서의 구약의 인용은 대부분 예수님의 직접 담화 속에 담겨 있다. W.S. Vorster는 이것이 독자

들로 하여금 관련 인물들이나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할지를 지시해주는 주석적(narrative

commentary)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보라, Willem S. Vorster, “Meaning and Reference:

The Parables of Jesus in Mark 4,” in B.C. Lategan

and W.S. Vorster, Text and Reality: Aspects of

Reference in Biblical Texts (Atlanta: Scholars Press,

1985), 41~43.

3. Paul Ricoeur, “The Bible and the Imagination,” in

Figuring the Sacre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59. 이 논문의 첫 출전은 The Bible as a

Document of the University, ed. Hans Dieter Betz

(Chico: Scholars Press, 1981), 49~75.

4. 이에 관해서는 참고, W.H. Kelber, The Kingdom in

Mark: A New Place and a New Tim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33.

5. R.C. Sproul은 이런 사람의 실제적인 예를 언급하고 있다.

보라, 「쉽게 쓴 성경해석학」, 이세구 역 (서울: 아가페 출판

사, 1993), 52.

6. 참고, George Eldon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98.

7. Robert A. Guelich,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1989), 235.

UBF마가복음 4장 강해 3부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

UBF마가복음 4장 강해 3부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

마가복음 4장21-마가복음 4장 25

요절 마가복음 4장 2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지난 말씀에서 우리UBF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둠을 밝히는 밝은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등불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밝히십니다. 우리가 등불되신 말씀을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도 이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등불되신 말씀을 소유함으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등대 위의 등불)

2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비유를 풀어 말씀해주신 후 이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말씀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와서 말박 아래나 평상(침대) 아래에 두지 않습니다. 등불을 켜면 등경(스텐드) 위에 둡니다. 형광등은 천장에 답니다. 바다에서는 등대를 세워서 멀리서 볼 수 있게 합니다. 불을 높이 두어야 빛이 널리 비출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비유로 하시는 것은 마치 등불을 널리 비추듯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편 119:105절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둡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조차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인생들에게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불효하고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탐심을 갖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요8:12). 어두움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력입니다. 사단은 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어둠을 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죄사함을 받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의 등불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밝게 보게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인가? 그 사람인가? 부모인가?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부정적으로 어둡게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일을 하셨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UBF는 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일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등불)

하나님의 말씀만 등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한 제자들도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15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도 등불이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비치면 우리 속의 어둠이 물러갑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내면이 밝아져 우리도 등불이 됩니다. 우리는 등불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어야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둔 세상을 밝게 만들어야하빈다. 목자된 우리는 어둔 이 세상에 등불같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넓게 전파해야합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높은 영성과 도덕성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돈을 좋아하고 염려에 시달리고 사기치고 음란과 명예욕에 시달리면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사람들처럼 술마시고 담배피우면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타나야합니다. 믿는 우리UBF에게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등불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이 시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람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빛 앞에서는 숨겨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납니다. 계시록에는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보십니다. 예수님 앞에는 숨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도 드러나고 선도 드러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 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오시는 날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은밀하게 선을 행해야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은밀한 선에 대해서 크신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도 드러내야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더 드러내고 더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지만 우리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해야합니다. 나의 가정을 보고 나의 교회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알라고 해야합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살고 사랑하며 살면 우리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상시 웃으며 살고 죄를 지으면 회개하며 슬퍼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숨기지 말고 널리 드러내야합니다. 예수님은 비밀로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밝히 드러내야합니다. 예수님은 골방에서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붕 위에서 전파해야 합니다. 귀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UBF가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이 밝아질 수 있을까요?

(듣는 것을 삼가라)

23-24a절을 보십시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예수님은 반복하여 관심을 갖고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십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마음을 열어놓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말을 조심없이 들으면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쓰레기를 버리고 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열두령은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밤새 슬퍼하고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긍정적인 보고를 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불신의 말을 듣지 말고 믿음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우리가 이단의 말을 들으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삼가서 하나님의 복음만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들어야합니다. 스스로 삼가라는 것은 Consider carefully 새겨들으라 귀담아 듣고 실천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UBF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하고 순종하기까지 노력해야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어둔 내면이 밝아지고 우리의 마음에 등불이 켜집니다.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

24b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말씀을 헤아리는 것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자의 것입니다. 소가 새김질을 하듯이 말씀을 반복적으로 묵상해야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묵상할 때 비로소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깊은 세계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묵상하는 만큼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통달하며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묵상을 헤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헤아림은 말박이나 저울과 같은 측량단위입니다. 묵상은 마치 계량 단위인 말박이나 저울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말박이 크고 저울이 큰 것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가벼이 여기고 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있는 은혜마져도 빼앗기고 그 심령이 메말라 버립니다. 이는 말씀을 헤아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동일한 말씀을 공부하는데 어떤 분은 말씀을 깊이 생각함으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날로날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깊은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 년수가 짧아도 말씀을 열심히 묵상하는 사람은 그 성장이 놀랍게 빠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몇 년이 가도 별 성장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처음 가졌던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에서 퇴보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말씀을 안다는 생각으로 깊이 생각지 않고 형식적으로 공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할 것이냐? 아니면 퇴보할 것이냐? 하는 것은 신앙 연수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말씀을 헤아릴줄 모르면 우리는 결코 제자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오늘 이 순간 이 말씀이 우리 시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이 우리 캠퍼스에, 또 내 가족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하며 말씀을 헤아릴 줄 알아야합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다면 우리는 고작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아는데 그칠 것입니다. 또한 양들에게 주는 메시지 역시 진부하고 상식적으로 말씀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헤아리지 못하면 말씀의 한계를 느끼고 심령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면 이내 “어디 뭐 새로운 것 없나?” 하며 이런 저런 것을 찿다가 신비주의에 빠지고, 형식주의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UBF는 말씀을 헤아릴 줄 알아야합니다. 그럴 때 열매맺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있는 자는 더 받는다)

25절을 보십시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말씀공부는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뭉친 눈이 많으면 더 많이 뭉쳐집니다. 그러나 뭉쳐진 것이 없으면 그 있는 것도 녹아서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눈뭉치를 크게 만들어야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눈덩이가 점점 커지듯이 성경을 깨닫는 것도 더 늘어납니다. 성경 말씀에 대해서 나의 것으로 깨달은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예로 욥기를 이해한 사람이 로마서 11장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9-11장은 욥기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계시록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UBF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균형 잡힌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아는 것에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말씀은 등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빛이십니다. 말씀의 빛은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고 세상을 밝게 합니다. 우리가 이 빛을 받으려면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 말씀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암송하고 주의하고 묵상하면 말씀이 샛별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떠오릅니다. 우리의 어둔 내면이 밝아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년요절인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알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UBF가 하나님이 주신 일년 요절을 주의하여 이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UBF마가복음 4장 강해 3부 등불 같은 하나님의 말씀

마가복음 4장21-마가복음 4장 25

요절 마가복음 4장21

마가복음 4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말씀이 열매 맺는 좋은 마음 (마가복음 4:1~20)

2019.01.09. 생명의 삶 이기훈 목사

크리스찬들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이죠

‘내 삶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말씀은 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을 통해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이 열매 맺는

좋은 마음

마가복음 4장 1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본문말씀 보기

본문말씀 접기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본문말씀 접기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이 어떤 영적상태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일상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네 가지 밭의 뿌려진 씨앗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통해서 내가 오늘 날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그 씨가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그것을 와서 먹었습니다. 4절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고요

5절에서는 씨가 돌 밭에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깊지 못해서 해가나자 곧 죽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7절에 보면 가시 떨기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장하다가 그 가시에 기운에 막혀서 결실을 맺지 못 했다는 것이죠

네 번째 8절에 보면 좋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 이런 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영적으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 한가지, 한가지 상황들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설명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하나의 점검이 되는 것이죠

1. 길(道, Way)

제일 먼저 15절에 보면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길에 부러졌는데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는데 사탄의 그 말씀을 뺏어 간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듣기만 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우리가 예배를 데리러 왔을 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감동을 하고

그 말씀에 느낌을 갖기도 하고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해 보기도 하고

어떤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많은 영적 현상들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듣고 거기서 끝나는 상태 이것이 길가에 말씀이 뿌려졌던 것이죠

2. 흙이 얕은 돌밭

두 번째 16절에 보면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한마디로 말하면 뿌리가 없는 신앙인이다

그러다 보니까 환란을 당하거나, 시험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할 때 곧 넘어져 버리고 마는 자다

이런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말씀을 듣습니다

감동도 받습니다

말씀 때문에 기쁨도 얻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말씀 쫓아다니는 경우가 있어요

말씀을 듣고 깨달음 어떤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결코 건강한 증세는 아니라 하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갖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서 멈춘다고 하면 말씀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사실은 현대 크리스찬들이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말씀이 없어서 홍수가 아니에요

말씀이 곳곳에서 많이 선포되고 있고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각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안 변해요 교회가 안 변해요

왜 그럴까요?

말씀을 듣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귀에 듣기에 좋은 말씀들을 찾아 다니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맛있는 음식점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운전을 하고 가서 먹듯이

말씀이 좋다고만 하면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며 듣는 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변하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게임요 동시에 우리를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죠

나는 말씀을 빼앗기고 살고 있는가 아니면 들은 말씀을 간직하며 그 말씀에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

나는 말씀이 내 마음의 떨어졌을 때 그 말씀을 깨닫는 기쁨도 있고 또 그 말씀들이 지속적으로 내 삶에 뿌리를 내려서

어떤 시험이 오고 고난이 와도 승리하며 살게 하는가

여러분이 오늘까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점검해보는 하루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나요?

말씀을 깨닫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네 가지에 밭의 비유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기를 원하십니다

첫 번째 길가에 떨어졌으나 새들이 먹어 버린 씨앗은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사탄에게 곧 빼앗기는 사람

두 번째 돌밭에 버려졌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서 시험이 오고 곤란이 왔을 때 넘어지는 사람

여러분 신앙에는 뿌리를 내리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뿌리는 하루아침에 내려지는게 아니죠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지속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한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때

하루, 한달, 일년 세월이 지나면서 영적인 뿌리가 견고하게 내려서

살면서 어떤 시험이나 고난을 당해도 약간 흔들 수는 있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는

믿음을 견고히 지키며 살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3. 가시떨기

세 번째 예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18절 19절에 보면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시험을 당하죠 고난을 당하죠 어려운 일들을 만나죠

그런데 그와 같은 시험들을 이기고 사는게 크리스찬 들이에요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해서 주눅들고 포기하고 넘어지며 사는 것은 크리스찬에 삶이 아닌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환란과 시험과 고난과 유혹과 이와 같은 것들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은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

그런데 말씀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믿음이죠

내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행하신다는 믿음

하나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그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요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을 가지면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어 있어요

고난이 올 때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근심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생길 때 빌립보서 4장 6-7절에 말씀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로 풀어가고 시험을 만날 때 그것들을 기쁘게 여기고

이렇게 말씀대로 대처를 하면 우리는 무슨 시험을 만나든 고난을 당하든 능히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가시떨기와 같은 밭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도 부족하죠

그러다 보니까 말씀 대로 행하지 못하지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못하죠

그러니까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 할 수밖에 없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상황에 지배 받으니까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도 시험이 있고 고난이 있고 또 유혹도 있고 한데

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말씀대로 행함으로 이기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와 같은 상황에 환경에 늘 지배를 받으며 씨앗을 빼앗기며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좋은 땅

네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설명이 20절에서 쓰여져 있습니다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밭에 뿌려진 씨가 30배, 60배, 100배에 결실을 맺어 있다

이것은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그 듣고

또 깨닫기만 하지 않고 그 듣고 깨달은 말씀을 자기 삶에 실천 하는 거죠

그것을 일상으로 삼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삶의 뿌리가 깊이 영적으로 내려지게 되어 있고

또 순간 순간 시험과 고난과 환란들을 말씀대로 행함으로 이겨내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적 성숙이 오게 되고

따라서 삶의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시는 의도는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 것이고

네번째는 우리들의 대한 기대입니다

‘너희가 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행함으로 인해서 너희들의 삶이 열매가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돌아 보십시다

나는 신앙 생활을 한만큼 열매를 맺으며 성숙을 이루며 신앙 생활을 해 오고 있는가

아니면 늘 받은 은혜를 빼앗기거나 말씀을 빼앗긴 채로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밭을 점검 해 봅니다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아니면 좋은 땅인지

내 삶의 열매를 보고 내 밭에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 자기의 영적인 밭을 돌아보면서 30배 60배 100배에 결실을 맺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그렇게 만들어 가는 영적수고가 있는 하루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네 가지 땅 중에서

내 마음은 어디에 속하나요?

좋은 땅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지니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END

이 글은 청각을 잃은 제 친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전체 또는 일부가 잘못 듣고 잘못 옮겨 적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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