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주석 | [하루 한 장] 마가복음9장_ 볼 자들도 있느니라 22036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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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4 (화) [하루 한 장]“볼 자들도 있느니라” (막9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마가복음 9장은 변화산 위에서
광채 가운데 매우 흰 모습으로
영광중에 변화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이제 닥칠
십자가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이
얼마나 굉장한 신적 영광이
충만한 사건인지를 맛보기로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입니다
이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부활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당부하신 바 있었는데
이것이 단순히 고난의 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에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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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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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마가복음9장_ 볼 자들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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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가복음 9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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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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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주석

마가복음 제 9장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 하는 것이 적걸하다.

==================9:2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9:3

그 옷이 관채가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4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와‘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응답하다’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9:7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모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9:8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9:9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9:1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9:12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9:17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란 ‘부셔버리다’,‘소리지르다’,‘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세대‘란 ’족속‘’자손‘,’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9:21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9:22

귀신이 죽이려고…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9:26

귀신이 … 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8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9:30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21등).

====================9:33

가버나움에 이르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 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9:43 – 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과 ‘발’그리고 ‘눈’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발,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이라는 형용사‘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조엔‘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모스코,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49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헬라어 마가복음 9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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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아멘 레고 휘민 호티 에이신 티네스 호데 톤 헤스테코톤 호이티네스 우 메 규손타이 다나투 헤오스 안 이도신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엘렐뤼뒤이안 엔 뒤나메이

개역개정,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1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능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어NIV,1 And he said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some who are standing here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come with power.”

영어NASB,1 And Jesus was saying to them, “Truly I say to you, there are some of those who ar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after it has come with power.”

영어MSG,1 Then he drove it home by saying, “This isn’t pie in the sky by and by. Some of you who are standing here are going to see it happen, see the kingdom of God arrive in full force.”

영어NRSV,1 And he said to them, “Truly I tell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with power.”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εισιν τινες των ωδε εστηκοτων οιτινες ου μη γευσωνται θανατου εως αν ιδωσι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εληλυθυιαν εν δυναμει

라틴어Vulgate,1 et post dies sex adsumit Iesus Petrum et Iacobum et Iohannem et ducit illos in montem excelsum seorsum solos et transfiguratus est coram ipsis

히브리어Modern,1 ויאמר אליהם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יש מן העמדים פה אשר לא יטעמו מות עד כי יראו מלכות האלהים באה בגבורה׃

성 경: [막9:1]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걸하다.

카이 메타 헤메라스 헼스 파랄람바네이 호 예수스 톤 페트론 카이 톤 야코본 카이 톤 요안넨 카이 아나페레이 아우투스 에이스 오로스 휲셀론 캍 이디안 모누스 카이 메테모르포데 엠프로스덴 아우톤

개역개정,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새번역,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우리말성경,2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영어NIV,2 After six days Jesus took Peter, James and John with him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where they were all alone. There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영어NASB,2 Six days later, Jesus took with Him Peter and James and John, and brought them up on a high mountain by themselves.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영어MSG,2 Six days later, three of them did see it. Jesus took Peter, James, and John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His appearance changed from the inside out, right before their eyes.

영어NRSV,2 Six days later, Jesus took with him Peter and James and John,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apart, by themselves.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μεθ ημερας εξ παραλαμβανει ο ιησους τον πετρον και τον ιακωβον και τον ιωαννην και αναφερει αυτους εις ορος υψηλον κατ ιδιαν μονους και μετεμορφωθη εμπροσθε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2 et vestimenta eius facta sunt splendentia candida nimis velut nix qualia fullo super terram non potest candida facere

히브리어Modern,2 ואחרי ששת ימים לקח ישוע את פטרוס ואת יעקב ואת יוחנן ויעלם על הר גבה אתו לבדם וישתנה לעיניהם׃

성 경: [막9:2]

󰃨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카이 타 히마티아 아우투 에게네토 스틸본타 류카 리안 호스 키온 호이아 그나퓨스 에피 테스 게스 우 뒤나타이 류카나이

개역개정,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새번역,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우리말성경,3 예수의 옷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희고 광채가 났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영어NIV,3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whiter than anyone in the world could bleach them.

영어NASB,3 and His garments became radiant and exceedingly white, as no launderer on earth can whiten them.

영어MSG,3 His clothes shimmered, glistening white, whiter than any bleach could make them.

영어NRSV,3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such as no one on earth could bleac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τα ιματια αυτου εγενετο στιλβοντα λευκα λιαν ως χιων οια γναφευς επι της γης ου δυναται λευκαναι

라틴어Vulgate,3 et apparuit illis Helias cum Mose et erant loquentes cum Iesu

히브리어Modern,3 ובגדיו נהיו מזהירים לבנים מאד כשלג אשר לא יוכל כובס בארץ להלבין כמוהם׃

성 경: [막9:3]

󰃨 그 옷이 광채가…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카이 옾데 아우토이스 엘리아스 쉰 모세이 카이 에산 쉴랄룬테스 토 예수

개역개정,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새번역,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말성경,4 그리고 거기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톨릭성경,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어NIV,4 And there appeared before them Elijah and Moses, who were talking with Jesus.

영어NASB,4 Elijah appeared to them along with Moses; and they were talking with Jesus.

영어MSG,4 Elijah, along with Moses, came into view, in deep conversation with Jesus.

영어NRSV,4 And there appeared to them Elijah with Moses, who were talking with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ωφθη αυτοις ηλιας συν μωσει και ησαν συλλαλουντες τω ιησου

라틴어Vulgate,4 et respondens Petrus ait Iesu rabbi bonum est hic nos esse et faciamus tria tabernacula tibi unum et Mosi unum et Heliae unum

히브리어Modern,4 וירא אליהם אליהו ומשה מדברים עם ישוע׃

성 경: [막9:4]

󰃨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페트로스 레게이 토 예수 랍비 칼론 에스틴 헤마스 호데 에이나이 카이 포이에소멘 트레이스 스케나스 소이 미안 카이 모위세이 미안 카이 엘리아 미안

개역개정,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새번역,5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 ㉠’스승’

우리말성경,5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세 개를 만들어 하나에는 주를,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영어NIV,5 Peter said to Jesus, “Rabbi,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put up three shelters–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영어NASB,5 Peter said to Jesus, “Rabbi,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tabernacles, one for You, and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영어MSG,5 Peter interrupted, “Rabbi, this is a great moment! Let’s build three memorials–one for you, one for Moses, one for Elijah.”

영어NRSV,5 Then Peter said to Jesus, “Rabbi,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dwelling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πετρος λεγει τω ιησου ραββι καλον εστιν ημας ωδε ειναι και ποιησωμεν σκηνας τρεις σοι μιαν και μωσει μιαν και ηλια μιαν

라틴어Vulgate,5 non enim sciebat quid diceret erant enim timore exterriti

히브리어Modern,5 ויען פטרוס ויאמר אל ישוע רבי טוב היותנו פה נעשה נא שלש סכות לך אחת ולמשה אחת ולאליהו אחת׃

성 경: [막9:5]

󰃨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응답하다’의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우 가르 에데이 티 랄레세 헤산 가르 에크포보이

개역개정,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새번역,6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6 모두들 몹시 두려웠기 때문에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NIV,6 (He did not know what to say, they were so frightened.)

영어NASB,6 For he did not know what to answer; for they became terrified.

영어MSG,6 He blurted this out without thinking, stunned as they all were by what they were seeing.

영어NRSV,6 He did not know what to say, for they were terrifi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υ γαρ ηδει τι λαληση ησαν γαρ εκφοβοι

라틴어Vulgate,6 et facta est nubes obumbrans eos et venit vox de nube dicens hic est Filius meus carissimus audite illum

히브리어Modern,6 כי לא ידע מה ידבר כי היו נבהלים׃

성 경: [막9:6]

󰃨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카이 에게네토 네펠레 에피스키아주사 아우토이스 카이 엘덴 포네 에크 테스 네펠레스 렐루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아우투 아쿠에테

개역개정,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새번역,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또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7 그때 구름이 나타나 그들 위를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

가톨릭성경,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영어NIV,7 Then a cloud appeared and enveloped them, and a voice came from the cloud: “This is my Son, whom I love. Listen to him!”

영어NASB,7 Then a cloud formed, overshadowing them, and a voice came out of the cloud, “This is My beloved Son, listen to Him!”

영어MSG,7 Just then a light-radiant cloud enveloped them, and from deep in the cloud, a voice: “This is my Son, marked by my love. Listen to him.”

영어NRSV,7 Then a cloud overshadowed them, and from the cloud there came a voice, “This is my Son, the Beloved; listen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εγενετο νεφελη επισκιαζουσα αυτοις και ηλθεν φωνη εκ της νεφελης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αυτου ακουετε

라틴어Vulgate,7 et statim circumspicientes neminem amplius viderunt nisi Iesum tantum secum

히브리어Modern,7 ויהי ענן סוכך עליהם ויצא מן הענן קול א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ליו שמעו׃

성 경: [막9:7]

󰃨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몰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카이 엨사피나 페리블렢사메노이 우케티 우데나 에이돈 알라 톤 예순 모논 멛 헤아우톤

개역개정,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새번역,8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우리말성경,8 그 순간 그들은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영어NIV,8 Suddenly, when they looked around, they no longer saw anyone with them except Jesus.

영어NASB,8 All at once they looked around and saw no one with them anymore, except Jesus alone.

영어MSG,8 The next minute the disciples were looking around, rubbing their eyes, seeing nothing but Jesus, only Jesus.

영어NRSV,8 Suddenly when they looked around, they saw no one with them any more, but only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εξαπινα περιβλεψαμενοι ουκετι ουδενα ειδον αλλα τον ιησουν μονον μεθ εαυτων

라틴어Vulgate,8 et descendentibus illis de monte praecepit illis ne cui quae vidissent narrarent nisi cum Filius hominis a mortuis resurrexerit

히브리어Modern,8 והמה הביטו כה וכה פתאם ולא ראו עוד איש בלתי את ישוע לבדו אתם׃

성 경: [막9:8]

󰃨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카이 카타바이논톤 아우톤 에크 투 오루스 디에스테일라토 아우토이스 히나 메데니 하 에이돈 디에게손타이 에이 메 호탄 호 위오스 투 안드로푸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

개역개정,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새번역,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말성경,9 산을 내려오시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가톨릭성경,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영어NIV,9 As they were coming down the mountain, Jesus gave them orders not to tell anyone what they had seen until the Son of Man had risen from the dead.

영어NASB,9 As they were coming down from the mountain, He gave them orders not to relate to anyone what they had seen, until the Son of Man rose from the dead.

영어MSG,9 Coming down the mountain, Jesus swore them to secrecy. “Don’t tell a soul what you saw. After the Son of Man rises from the dead, you’re free to talk.”

영어NRSV,9 As they were coming down the mountain, he ordered them to tell no one about what they had seen, until after the Son of Man had risen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ταβαινοντων δε αυτων απο του ορους διεστειλατο αυτοις ινα μηδενι διηγησωνται α ειδον ει μη οταν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κ νεκρων αναστη

라틴어Vulgate,9 et verbum continuerunt apud se conquirentes quid esset cum a mortuis resurrexerit

히브리어Modern,9 וירדו מן ההר ויזהירם לבלתי הגיד לאיש את אשר ראו עד כי יקום בן האדם מן המתים׃

성 경: [막9:9]

󰃨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카이 톤 로곤 에크라테산 프로스 헤아우투스 쉬제툰테스 티 에스틴 토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나이

개역개정,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새번역,10 그들은 이 말씀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서로 물었다.

우리말성경,10 제자들은 이 일을 마음에 새겨 두면서도 ‘죽은 사람 가운데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물어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영어NIV,10 They kept the matter to themselves, discussing what “rising from the dead” meant.

영어NASB,10 They seized upon that statement, discussing with one another what rising from the dead meant.

영어MSG,10 They puzzled over that, wondering what on earth “rising from the dead” meant.

영어NRSV,10 So they kept the matter to themselves, questioning what this rising from the dead could mea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τον λογον εκρατησαν προς εαυτους συζητουντες τι εστιν το εκ νεκρων αναστηναι

라틴어Vulgate,10 et interrogabant eum dicentes quid ergo dicunt Pharisaei et scribae quia Heliam oporteat venire primum

히브리어Modern,10 וישמרו את הדבר בלבבם וידרשו לדעת מה היא התקומה מן המתים׃

성 경: [막9:10]

󰃨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카이 에페로톤 아우톤 레곤테스 호티 레구신 호이 그람마테이스 호티 엘리안 데이 엘데인 프로톤

개역개정,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새번역,11 그들이 예수께 묻기를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하니,

우리말성경,11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까?”

가톨릭성경,11 제자들이 예수님께 “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11 And they asked him, “Why do the teachers of the law say that Elijah must come first?”

영어NASB,11 They asked Him, saying, “Why is it that the scribes say that Elijah must come first?”

영어MSG,11 Meanwhile they were asking, “Why do the religion scholars say that Elijah has to come first?”

영어NRSV,11 Then they asked him, “Why do the scribes say that Elijah must come first?”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επηρωτων αυτον λεγοντες οτι λεγουσιν οι γραμματεις οτι ηλιαν δει ελθειν πρωτον

라틴어Vulgate,11 qui respondens ait illis Helias cum venerit primo restituet omnia et quomodo scriptum est in Filium hominis ut multa patiatur et contemnatur

히브리어Modern,11 וישאלהו לאמר מה זה אמרים הסופרים כי אליהו בוא יבוא בראשונה׃

성 경: [막9:11]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호 데 에페 아우토이스 엘리아스 멘 엔돈 프로톤 아포카디스타네이 판타 카이 포스 게그랖타이 에피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히나 폴라 파데 카이 엨수데네데

개역개정,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새번역,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런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찌 된 일이냐?

우리말성경,1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참으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 그런데 왜 성경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기록된 것이냐?

가톨릭성경,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영어NIV,12 Jesus replied, “To be sure, Elijah does come first, and restores all things. Why then is it written that the Son of Man must suffer much and be rejected?

영어NASB,12 And He said to them, “Elijah does first come and restore all things. And yet how is it written of the Son of Man that He will suffer many things and be treated with contempt?

영어MSG,12 Jesus replied, “Elijah does come first and get everything ready for the coming of the Son of Man. They treated this Elijah like dirt, much like they will treat the Son of Man, who will, according to Scripture, suffer terribly and be kicked around contemptibly.”

영어NRSV,12 He said to them, “Elijah is indeed coming first to restore all things. How then is it written about the Son of Man, that he is to go through many sufferings and be treated with contemp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 δε αποκριθεις ειπεν αυτοις ηλιας μεν ελθων πρωτον αποκαθιστα παντα και πως γεγραπται επ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 ινα πολλα παθη και εξουδενωθη

라틴어Vulgate,12 sed dico vobis quia et Helias venit et fecerunt illi quaecumque voluerunt sicut scriptum est de eo

히브리어Modern,12 ויען ויאמר להם הנה אליהו בא בראשונה וישיב את הכל ומה כתוב על בן האדם הלא כי יענה הרבה וימאס׃

성 경: [막9:12]

󰃨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알라 레고 휘민 호티 카이 엘리아스 엘렐뤼덴 카이 에포이에산 아우토 호사 에델레산 카도스 게그랖타이 엪 아우톤

개역개정,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그를 두고 기록한 대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우리말성경,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성경에 기록돼 있는 대로 그를 자기들 마음대로 대했다.”

가톨릭성경,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영어NIV,13 But I tell you, Elijah has come, and they have done to him everything they wished, just as it is written about him.”

영어NASB,13 “But I say to you that Elijah has indeed come, and they did to him whatever they wished, just as it is written of him.”

영어MSG,13 (SEE 9:12)

영어NRSV,13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come, and they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as it is written abou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λλα λεγω υμιν οτι και ηλιας εληλυθεν και εποιησαν αυτω οσα ηθελησαν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3 et veniens ad discipulos suos vidit turbam magnam circa eos et scribas conquirentes cum illis

히브리어Modern,13 אבל אמר אני לכם גם בא אליהו וגם עשו לו כרצונם כאשר כתוב עליו׃

성 경: [막9:13]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말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카이 엘돈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에이돈 오클론 폴륀 페리 아우투스 카이 그람마테이스 쉬제툰타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새번역,14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고, 율법학자들이 그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우리말성경,14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그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4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영어NIV,14 When they came to the other disciples, they saw a large crowd around them and the teachers of the law arguing with them.

영어NASB,14 When they came back to the disciples, they saw a large crowd around them, and some scribes arguing with them.

영어MSG,14 When they came back down the mountain to the other disciples, they saw a huge crowd around them, and the religion scholars cross-examining them.

영어NRSV,14 When they came to the disciples, they saw a great crowd around them, and some scribes arguing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ελθων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ειδεν οχλον πολυν περι αυτους και γραμματεις συζητουντας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14 et confestim omnis populus videns eum stupefactus est et adcurrentes salutabant eum

히브리어Modern,14 ויהי כבואו אל התלמידים וירא עם רב סביבותם וסופרים מתוכחים אתם׃

성 경: [막9:14]

󰃨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 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카이 유데오스 파스 호 오클로스 이돈 아우톤 엨세담베데 카이 프로스트레콘테스 에스파존토 아우톤

개역개정,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새번역,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서는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하였다.

우리말성경,15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보자마자 몹시 놀라며 달려와 맞이했습니다.

가톨릭성경,15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영어NIV,15 As soon as all the people saw Jesus, they were overwhelmed with wonder and ran to greet him.

영어NASB,15 Immediately, when the entire crowd saw Him, they were amazed and began running up to greet Him.

영어MSG,15 As soon as the people in the crowd saw Jesus, admiring excitement stirred them. They ran and greeted him.

영어NRSV,15 When the whole crowd saw him, they were immediately overcome with awe, and they ran forward to gree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υθεως πας ο οχλος ιδων αυτον εξεθαμβηθη και προστρεχοντες ησπαζοντο αυτον

라틴어Vulgate,15 et interrogavit eos quid inter vos conquiritis

히브리어Modern,15 וכל העם כראותם אתו כן תמהו וירוצי אליו וישאלו לו לשלום׃

성 경: [막9:15]

󰃨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카이 에페로테센 투스 그람마테이스 티 쉬제테이테 프로스 아우투스

개역개정,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새번역,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논쟁하고 있느냐?”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영어NIV,16 “What are you arguing with them about?” he asked.

영어NASB,16 And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with them?”

영어MSG,16 He asked, “What’s going on? What’s all the commotion?”

영어NRSV,16 He asked them, “What are you arguing about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επηρωτησεν τους γραμματεις τι συζητειτε προς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16 et respondens unus de turba dixit magister adtuli filium meum ad te habentem spiritum mutum

히브리어Modern,16 וישאל את הסופרים מה אתם מתוכחים עמהם׃

성 경: [막9:16]

󰃨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 무엇을…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헤이스 에크 투 오클루 에이펜 디다스칼레 에넹카 톤 휘온 무 프로스 세 에콘타 프뉴마 알랄론

개역개정,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새번역,17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7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말 못하게 하는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7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영어NIV,17 A man in the crowd answered, “Teacher, I brought you my son, who is possessed by a spirit that has robbed him of speech.

영어NASB,17 And one of the crowd answered Him, “Teacher, I brought You my son, possessed with a spirit which makes him mute;

영어MSG,17 A man out of the crowd answered, “Teacher, I brought my mute son, made speechless by a demon, to you.

영어NRSV,17 Someone from the crowd answered him, “Teacher, I brought you my son; he has a spirit that makes him unable to speak;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εις εκ του οχλου ειπεν διδασκαλε ηνεγκα τον υιον μου προς σε εχοντα πνευμα αλαλον

라틴어Vulgate,17 qui ubicumque eum adprehenderit adlidit eum et spumat et stridet dentibus et arescit et dixi discipulis tuis ut eicerent illum et non potuerunt

히브리어Modern,17 ויען אחד מן העם ויאמר רבי הבאתי אליך את בני אשר רוח אלם בקרבו׃

성 경: [막9:17]

󰃨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 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카이 호푸 에안 아우톤 카탈라베 레쎄이 아우톤 카이 아프리제이 트리제이 투스 오돈타스 카이 크라이네타이 카이 에이파 토이스 마데타이스 수 히나 아우토 에크발로신 카이 우크 이스퀴산

개역개정,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새번역,18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귀신이 한번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가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러면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면서 몸이 뻣뻣하게 굳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18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18 Whenever it seizes him, it throws him to the ground. He foams at the mouth, gnashes his teeth and becomes rigid. I asked your disciples to drive out the spirit, but they could not.”

영어NASB,18 and whenever it seizes him, it slams him to the ground and he foams at the mouth, and grinds his teeth and stiffens out. I tol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and they could not do it.”

영어MSG,18 Whenever it seizes him, it throws him to the ground. He foams at the mouth, grinds his teeth, and goes stiff as a board. I told your disciples, hoping they could deliver him, but they couldn’t.”

영어NRSV,18 and whenever it seizes him, it dashes him down; and he foams and grinds his teeth and becomes rigid; and I aske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but they could not do so.”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οπου αν αυτον καταλαβη ρησσει αυτον και αφριζει και τριζει τους οδοντας αυτου και ξηραινεται και ειπον τοις μαθηταις σου ινα αυτο εκβαλωσιν και ουκ ισχυσαν

라틴어Vulgate,18 qui respondens eis dicit o generatio incredula quamdiu apud vos ero quamdiu vos patiar adferte illum ad me

히브리어Modern,18 והיה בכל מקום אשר יאחזהו הוא מרצץ אתו וירד רירו וחרק את שניו ויבש גופו ואמר אל תלמידיך לגרשו ולא יכלו׃

성 경: [막9:18]

󰃨 귀신이 어디서 든지…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란 ‘부셔버리다’, ‘소리지르다’,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아우토 레게이 호 게네아 아피스토스 헤오스 포테 프로스 휘마스 에소마이 헤오스 포테 아넼소마이 휘몬 페레테 아우톤 프로스 메

개역개정,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새번역,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우리말성경,1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데려오라.”

가톨릭성경,19 그러자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영어NIV,19 “O unbelieving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to me.”

영어NASB,19 And He answered them and said, “O unbelieving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him to Me!”

영어MSG,19 Jesus said, “What a generation! No sense of God! How many times do I have to go over these things? How much longer do I have to put up with this? Bring the boy here.”

영어NRSV,19 He answered them, “You faithless generation, how much longer must I be among you? How much longer must I put up with you? Bring him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 δε αποκριθεις αυτω λεγει ω γενεα απιστος εως ποτε προς υμας εσομαι εως ποτε ανεξομαι υμων φερετε αυτον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19 et adtulerunt eum et cum vidisset illum statim spiritus conturbavit eum et elisus in terram volutabatur spumans

히브리어Modern,19 ויען ויאמר להם הוי דור בלתי מאמין עד מתי אהיה עמכם עד מתי אסבל אתכם הביאו אתו לפני׃

성 경: [막9:19]

󰃨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 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란 ‘족속’ ‘자손’,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카이 에넹칸 아우톤 프로스 아우톤 카이 이돈 아우톤 유데오스 토 프뉴마 에스파랔센 아우톤 카이 페손 에피 테스 게스 에퀼리에토 아프리존

개역개정,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새번역,20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

우리말성경,20 그러자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를 보더니 곧 아이의 몸에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는 땅에 거꾸러지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뒹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영어NIV,20 So they brought him. When the spirit saw Jesus, it immediately threw the boy into a convulsion. He fell to the ground and rolled around, foaming at the mouth.

영어NASB,20 They brought the boy to Him. When he saw Him, immediately the spirit threw him into a convulsion, and falling to the ground, he began rolling around and foaming at the mouth.

영어MSG,20 They brought him. When the demon saw Jesus, it threw the boy into a seizure, causing him to writhe on the ground and foam at the mouth.

영어NRSV,20 And they brought the boy to him. When the spirit saw him, immediately it convulsed the boy, and he fell on the ground and rolled about, foaming at the mouth.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ηνεγκαν αυτον προς αυτον και ιδων αυτον ευθεως το πνευμα εσπαραξεν αυτον και πεσων επι της γης εκυλιετο αφριζων

라틴어Vulgate,20 et interrogavit patrem eius quantum temporis est ex quo hoc ei accidit at ille ait ab infantia

히브리어Modern,20 ויביאהו לפניו ויהי כאשר ראהו הרוח וירוצצנו פתאם ויפל ארצה ויתגולל ויורד רירו׃

성 경: [막9:20]

󰃨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카이 에페로테센 톤 파테라 아우투 포소스 크로노스 에스틴 호스 투토 게고넨 아우토 호 데 에이펜 파이디오덴

개역개정,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새번역,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입니다“.

가톨릭성경,21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 어릴 적부터입니다.

영어NIV,21 Jesus asked the boy’s father, “How long has he been like this?” “From childhood,” he answered.

영어NASB,21 And He asked his father, “How long has this been happening to him?” And he said,”From childhood.

영어MSG,21 He asked the boy’s father,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Ever since he was a little boy.

영어NRSV,21 Jesus asked the father, “How long has this been happening to him?” And he said, “From childhoo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επηρωτησεν τον πατερα αυτου ποσος χρονος εστιν ως τουτο γεγονεν αυτω ο δε ειπεν παιδιοθεν

라틴어Vulgate,21 et frequenter eum et in ignem et in aquas misit ut eum perderet sed si quid potes adiuva nos misertus nostri

히브리어Modern,21 וישאל את אביו כמה ימים היתה לו זאת ויאמר מימי נעוריו׃

성 경: [막9:21]

󰃨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카이 폴라키스 아우톤 카이 에이스 퓌르 에발렌 카이 에이스 휘다타 히나 아폴레세 아우톤 알 에이 티 뒤나사이 보에데손 헤민 스플랑크니스데이스 엪 헤마스

개역개정,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새번역,22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우리말성경,22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 내던지고 물속에도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하실 수 있다면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가톨릭성경,22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영어NIV,22 “It has often thrown him into fire or water to kill him. But if you can do anything, take pity on us and help us.”

영어NASB,22 “It has often thrown him both into the fire and into the water to destroy him. But if You can do anything, take pity on us and help us!”

영어MSG,22 Many times it pitches him into fire or the river to do away with him. If you can do anything, do it. Have a heart and help us!”

영어NRSV,22 It has often cast him into the fire and into the water, to destroy him; but if you are able to do anything, have pity on us and help u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πολλακις αυτον και εις πυρ εβαλεν και εις υδατα ινα απολεση αυτον αλλ ει τι δυνασαι βοηθησον ημιν σπλαγχνισθεις εφ ημας

라틴어Vulgate,22 Iesus autem ait illi si potes credere omnia possibilia credenti

히브리어Modern,22 ופעמים רבות הפיל אתו גם באש גם במים להאבידו אך אם יכל תוכל רחם עלינו ועזרנו׃

성 경: [막9:22]

󰃨 귀신이 죽이려고…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호 데 예수스 에이펜 아우토 토 에이 뒤나사이 피스튜사이 판타 뒤나타 토 피스튜온티

개역개정,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새번역,2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우리말성경,2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실 수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 그에게 “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영어NIV,23 “‘If you can’?” said Jesus.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영어NASB,23 And Jesus said to him, ” ‘If You can?’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believes.”

영어MSG,23 Jesus said, “If? There are no ‘ifs’ among believers. Anything can happen.”

영어NRSV,23 Jesus said to him, “If you are able!–All things can be done for the one who believe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 δε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ω το ει δυνασαι πιστευσαι παντα δυνατα τω πιστευοντι

라틴어Vulgate,23 et continuo exclamans pater pueri cum lacrimis aiebat credo adiuva incredulitatem meam

히브리어Modern,23 ויאמר אליו ישוע לאמר אם תוכל להאמין כל יוכל המאמין׃

성 경: [막9:23]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카이 유데오스 크랔사스 호 파테르 투 파이디우 메타 다크뤼온 엘레겐 피스튜오 퀴리에 보에데이 무 테 아피스티아

개역개정,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새번역,24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울면서 큰소리로’

우리말성경,24 그러자 곧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쳤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나를 도와주십시오!”

가톨릭성경,24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영어NIV,24 Immediately the boy’s father exclaimed, “I do believe;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영어NASB,24 Immediately the boy’s father cried out and said, “I do believe; help my unbelief.”

영어MSG,24 No sooner were the words out of his mouth than the father cried, “Then I believe. Help me with my doubts!”

영어NRSV,24 Immediately the father of the child cried out, “I believe; help my unbelief!”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ευθεως κραξας ο πατηρ του παιδιου μετα δακρυων ελεγεν πιστευω κυριε βοηθει μου τη απιστια

라틴어Vulgate,24 et cum videret Iesus concurrentem turbam comminatus est spiritui inmundo dicens illi surde et mute spiritus ego tibi praecipio exi ab eo et amplius ne introeas in eum

히브리어Modern,24 ויתן אבי הילד את קלו בבכי ויאמר אני מאמין עזר נא לחסרון אמונתי׃

성 경: [막9:24]

󰃨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이돈 데 호 예수스 호티 에피쉰트레케이 오클로스 에페티메센 토 프뉴마티 토 아카다르토 레곤 아우토 토 알랄론 카이 코폰 프뉴마 에고 에피타쏘 소이 엨셀데 엨스 아우투 카이 메케티 에이셀데스 에이스 아우톤

개역개정,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새번역,25 예수께서 무리가 어울려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25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듣지 못하게 하고 말 못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령한다! 이 아이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마라!”

가톨릭성경,25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영어NIV,25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unning to the scene, he rebuked the evil spirit. “You deaf and mute spirit,” he said,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영어NASB,25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apidly gathering, He rebuked the unclean spirit, saying to it, “You deaf and mute spirit,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do not enter him again.”

영어MSG,25 Seeing that the crowd was forming fast, Jesus gave the vile spirit its marching orders: “Dumb and deaf spirit, I command you–Out of him, and stay out!”

영어NRSV,25 When Jesus saw that a crowd came running together, he rebuked the unclean spirit, saying to it, “You spirit that keeps this boy from speaking and hearing,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ιδων δε ο ιησους οτι επισυντρεχει οχλος επετιμησεν τω πνευματι τω ακαθαρτω λεγων αυτω το πνευμα το αλαλον και κωφον εγω σοι επιτασσω εξελθε εξ αυτου και μηκετι εισελθης ει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25 et clamans et multum discerpens eum exiit ab eo et factus est sicut mortuus ita ut multi dicerent quia mortuus est

히브리어Modern,25 וירא ישוע את העם מתקבץ אליו ויגער ברוח הטמא לאמר רוח אלם וחרש אני מצוך צא ממנו ואל תסף לבוא בו עוד׃

성 경: [막9:25]

󰃨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카이 크랔산 카이 폴라 스파랔산 아우톤 엨셀덴 카이 에게네토 호세이 네크로스 호스테 폴루스 레게인 호티 아페다넨

개역개정,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새번역,26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 아이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 하였다.

우리말성경,26 더러운 귀신은 소리 지르며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나갔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같이 돼 누워 있자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아이가 죽었나 보다.”

가톨릭성경,26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영어NIV,26 The spirit shrieked, convulsed him violently and came out. The boy looked so much like a corpse that many said, “He’s dead.”

영어NASB,26 After crying out and throwing him into terrible convulsions, it came out; and the boy became so much like a corpse that most of them said, “He is dead!”

영어MSG,26 Screaming, and with much thrashing about, it left. The boy was pale as a corpse, so people started saying, “He’s dead.”

영어NRSV,26 After crying out and convulsing him terribly, it came out, and the boy was like a corpse, so that most of them said, “He is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κραξαν και πολλα σπαραξαν αυτον εξηλθεν και εγενετο ωσει νεκρος ωστε πολλους λεγειν οτι απεθανεν

라틴어Vulgate,26 Iesus autem tenens manum eius elevavit illum et surrexit

히브리어Modern,26 ויצעק וירצץ אתו מאד ויצא ויהי כמת עד אשר אמרו רבים כי גוע׃

성 경: [막9:26]

󰃨 귀신이…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귀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호 데 예수스 크라테사스 아우톤 테스 케이로스 에게이렌 아우톤 카이 아네스테

개역개정,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새번역,27 그런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다.

우리말성경,27 그때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가톨릭성경,27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영어NIV,27 But Jesus took him by the hand and lifted him to his feet, and he stood up.

영어NASB,27 But Jesus took him by the hand and raised him; and he got up.

영어MSG,27 But Jesus, taking his hand, raised him. The boy stood up.

영어NRSV,27 But Jesus took him by the hand and lifted him up, and he was able to stand.

헬라어신약Stephanos,27 ο δε ιησους κρατησας αυτον της χειρος ηγειρεν αυτον και ανεστη

라틴어Vulgate,27 et cum introisset in domum discipuli eius secreto interrogabant eum quare nos non potuimus eicere eum

히브리어Modern,27 ויחזק ישוע בידו ויניעהו ויקם׃

성 경: [막9:27]

󰃨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카이 에이셀돈타 아우톤 에이스 오이콘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에페로톤 아우톤 캍 이디안 호티 헤메이스 우크 에뒤네데멘 에크발레인 아우토

개역개정,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새번역,28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우리말성경,28 예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신 후에 제자들이 따로 물어보았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가톨릭성경,2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28 After Jesus had gone indoors, his disciples asked him privately, “Why couldn’t we drive it out?”

영어NASB,28 When He came into the house, His disciples began questioning Him privately, “Why could we not drive it out?”

영어MSG,28 After arriving back home, his disciples cornered Jesus and asked, “Why couldn’t we throw the demon out?”

영어NRSV,28 When he had entered the house, his disciples asked him privately, “Why could we not cast it ou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εισελθοντα αυτον εις οικον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επηρωτων αυτον κατ ιδιαν οτι ημεις ουκ ηδυνηθημεν εκβαλειν αυτο

라틴어Vulgate,28 et dixit illis hoc genus in nullo potest exire nisi in oratione et ieiunio

히브리어Modern,28 ויהי כאשר בא הביתה וישאלהו תלמידיו בהיותם לבדם אתו מדוע אנחנו לא יכלנו לגרשו׃

성 경: [막9:28]

󰃨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투토 토 게노스 엔 우데니 뒤나타이 엨셀데인 에이 메 엔 프로슈케 카이 네스테이아

개역개정,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말성경,29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귀신은 오직 기도로만 쫓아낼 수 있다.”

가톨릭성경,2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영어NIV,29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영어NASB,29 And He said to them, “This kind cannot come out by anything but prayer.”

영어MSG,29 He answered, “There is no way to get rid of this kind of demon except by prayer.”

영어NRSV,29 He said to them, “This kind can come out only through prayer.”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τουτο το γενος εν ουδενι δυναται εξελθειν ει μη εν προσευχη και νηστεια

라틴어Vulgate,29 et inde profecti praetergrediebantur Galilaeam nec volebat quemquam scire

히브리어Modern,29 ויאמר אליהם המין הזה יצא לא יצא כי אם בתפלה ובצום׃

성 경: [막9:29]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카이 에케이덴 엨셀돈테스 파레포류온토 디아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우크 에델렌 히나 티스 그노

개역개정,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새번역,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우리말성경,30 그들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를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 일행이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이 모르기를 바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영어NIV,30 They left that place and passed through Galilee. Jesus did not want anyone to know where they were,

영어NASB,30 From there they went out and began to go through Galilee, and He did not want anyone to know about it.

영어MSG,30 Leaving there, they went through Galilee. He didn’t want anyone to know their whereabouts,

영어NRSV,30 They went on from there and passed through Galilee. He did not want anyone to know i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κειθεν εξελθοντες παρεπορευοντο δια της γαλιλαιας και ουκ ηθελεν ινα τις γνω

라틴어Vulgate,30 docebat autem discipulos suos et dicebat illis quoniam Filius hominis tradetur in manus hominum et occident eum et occisus tertia die resurget

히브리어Modern,30 ויצאו משם ויעברו בגליל ולא אבה להודע לאיש׃

성 경: [막9:30]

󰃨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에디다스켄 가르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카이 엘레겐 아우토이스 호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파라디도타이 에이스 케이라스 안드로폰 카이 아포크테누신 아우톤 카이 아포크탄데이스 메타 트레이스 헤메라스 아나스테세타이

개역개정,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새번역,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1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배반을 당하고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 당할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가톨릭성경,31 그분께서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영어NIV,31 because he was teaching his disciples. He said to them,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They will kill him, and after three days he will rise.”

영어NASB,31 For He was teaching His disciples and telling them, “The Son of Man is to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men, and they will kill Him; and when He has been killed, He will rise three days later.”

영어MSG,31 for he wanted to teach his disciples. He told them, “The Son of Man is about to be betrayed to some people who want nothing to do with God. They will murder him. Three days after his murder, he will rise, alive.”

영어NRSV,31 for he was teaching his disciples, saying to them, “The Son of Man is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and they will kill him, and three days after being killed, he will rise again.”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διδασκεν γαρ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και ελεγεν αυτοις οτι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παραδιδοται εις χειρας ανθρωπων και αποκτενουσιν αυτον και αποκτανθεις τη τριτη ημερα αναστησεται

라틴어Vulgate,31 at illi ignorabant verbum et timebant eum interrogare

히브리어Modern,31 כי היה מלמד את תלמידיו לאמר אליהם כי עתיד בן האדם להמסר בידי בני אדם ויהרגהו ואחרי אשר נהרג יקום ביום השלישי׃

성 경: [막9:31]

󰃨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호이 데 에그노운 토 레마 카이 에포분토 아우톤 에페로테사이

개역개정,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새번역,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고 두려워서 예수께 묻지도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영어NIV,32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meant and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it.

영어NASB,32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tatemen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영어MSG,32 They didn’t know what he was talking about, but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it.

영어NRSV,32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he was saying and were afraid to ask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ι δε ηγνοουν το ρημα και εφοβουντο αυτον επερωτησαι

라틴어Vulgate,32 et venerunt Capharnaum qui cum domi esset interrogabat eos quid in via tractabatis

히브리어Modern,32 והם לא הבינו את הדבר וייראו לשאל אותו׃

성 경: [막9:32]

󰃨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21등).

카이 엘덴 에이스 카페르나움 카이 엔 테 오이키아 게노메노스 에페로타 아우투스 티 엔 테 호도 프로스 헤아우투스 디엘로기제스데

개역개정,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새번역,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우리말성경,33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집 안에 계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오는 길에 너희끼리 왜 논쟁했느냐?”

가톨릭성경,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NIV,33 They came to Capernaum. When he was in the house, he asked them,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road?”

영어NASB,33 They came to Capernaum; and when He was in the house, He began to question them, “What were you discussing on the way?”

영어MSG,33 They came to Capernaum. When he was safe at home, he asked them, “What were you discussing on the road?”

영어NRSV,33 Then they came to Capernaum; and when he was in the house he asked them, “What were you arguing about on the way?”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ηλθεν εις καπερναουμ και εν τη οικια γενομενος επηρωτα αυτους τι εν τη οδω προς εαυτους διελογιζεσθε

라틴어Vulgate,33 at illi tacebant siquidem inter se in via disputaverant quis esset illorum maior

히브리어Modern,33 ויבא אל כפר נחום ובהיותו בבית וישאל אותם מה התוכחתם איש עם רעהו בדרך׃

성 경: [막9:33]

󰃨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호이 데 에시오폰 프로스 알렐루스 가르 디엘레크데산 엔 테 호도 티스 메이존

개역개정,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새번역,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우리말성경,34 그러자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영어NIV,34 But they kept quiet because on the way they had argued about who was the greatest.

영어NASB,34 But they kept silent, for on the way they had discussed with one another which of them was the greatest.

영어MSG,34 The silence was deafening–they had been arguing with one another over who among them was greatest.

영어NRSV,34 But they were silent, for on the way they had argued with one another who wa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34 οι δε εσιωπων προς αλληλους γαρ διελεχθησαν εν τη οδω τις μειζων

라틴어Vulgate,34 et residens vocavit duodecim et ait illis si quis vult primus esse erit omnium novissimus et omnium minister

히브리어Modern,34 ויחרישו כי התעשקו בדרך מי הוא הגדול בהם׃

성 경: [막9:34]

󰃨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 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카이 카디사스 에포네센 투스 도데카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이 티스 델레이 프로토스 에이나이 에스타이 판톤 에스카토스 카이 판톤 디아코노스

개역개정,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새번역,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우리말성경,35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서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돼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 한다.”

가톨릭성경,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영어NIV,35 Sitting down, Jesus called the Twelve and said, “If anyone wants to be first, he must be the very last, and the servant of all.”

영어NASB,35 Sitting down, He called the twelve and said to them, ” If anyone wants to be first, he shall be last of all and servant of all.”

영어MSG,35 He sat down and summoned the Twelve. “So you want first place? Then take the last place. Be the servant of all.”

영어NRSV,35 He sat down, called the twelve, and said to them,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last of all and servant of all.”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καθισας εφωνησεν τους δωδεκα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 τις θελει πρωτος ειναι εσται παντων εσχατος και παντων διακονος

라틴어Vulgate,35 et accipiens puerum statuit eum in medio eorum quem cum conplexus esset ait illis

히브리어Modern,35 וישב ויקרא אל שנים העשר ויאמר אליהם איש כי יחפץ להיות הראשון הוא יהיה האחרון לכלם ומשרת כלם׃

성 경: [막9:35]

󰃨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카이 라본 파이디온 에스테센 아우토 엔 메소 아우톤 카이 에낭칼리사메노스 아우토 에이펜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새번역,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36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그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팔로 껴안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영어NIV,36 He took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among them. Taking him in his arms, he said to them,

영어NASB,36 Taking a child, He set him before them, and taking him in His arms, He said to them,

영어MSG,36 He put a child in the middle of the room. Then, cradling the little one in his arms, he said,

영어NRSV,36 Then he took a little child and put it among them; and taking it in his arms, he sai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λαβων παιδιον εστησεν αυτο εν μεσω αυτων και εναγκαλισαμενος αυτο ειπε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6 quisquis unum ex huiusmodi pueris receperit in nomine meo me recipit et quicumque me susceperit non me suscipit sed eum qui me misit

히브리어Modern,36 ויקח ילד ויעמידהו בתוכם ויחבקהו ויאמר להם׃

성 경: [막9:36]

󰃨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스 안 헨 톤 토이우톤 파이디온 뎈세타이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에메 데케타이 카이 호스 안 에메 데케타이 우크 에메 데케타이 알라 톤 아포스테일란타 메

개역개정,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새번역,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가톨릭성경,37 “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어NIV,37 “Whoever welcomes one of these little children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does not welcome me but the one who sent me.”

영어NASB,37 “Whoever receives one child like this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does not receive Me, but Him who sent Me.”

영어MSG,37 “Whoever embraces one of these children as I do embraces me, and far more than me–God who sent me.”

영어NRSV,37 “Whoever welcomes one such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not me but the one who sent m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ος εαν εν των τοιουτων παιδιων δεξηται επι τω ονοματι μου εμε δεχεται και ος εαν εμε δεξηται ουκ εμε δεχεται αλλα τον αποστειλαντα με

라틴어Vulgate,37 respondit illi Iohannes dicens magister vidimus quendam in nomine tuo eicientem daemonia qui non sequitur nos et prohibuimus eum

히브리어Modern,37 כל אשר יקבל בשמי ילד אחד כזה הוא מקבל אותי וכל אשר אותי יקבל איננו מקבל אותי כי אם את אשר שלחני׃

성 경: [막9:37]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에페 아우토 호 요안네스 디다스칼레 에이도멘 티나 엔 토 오노마티 수 에크발론타 다이모니아 카이 에콜뤼오멘 아우톤 호티 우크 에콜루데이 헤민

개역개정,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새번역,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우리말성경,38 요한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를 따르는 자가 아니어서 우리가 그에게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영어NIV,38 “Teacher,” said John, “we saw a man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old him to stop, because he was not one of us.”

영어NASB,38 John said to Him, “Teach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prevent him because he was not following us.”

영어MSG,38 John spoke up, “Teacher, we saw a man using your name to expel demons and we stopped him because he wasn’t in our group.”

영어NRSV,38 John said to him, “Teach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was not following us.”

헬라어신약Stephanos,38 απεκριθη δε αυτω ο ιωαννης λεγων διδασκαλε ειδομεν τινα τω ονοματι σου εκβαλλοντα δαιμονια ος ουκ ακολουθει ημιν και εκωλυσαμεν αυτον οτι ουκ ακολουθει ημιν

라틴어Vulgate,38 Iesus autem ait nolite prohibere eum nemo est enim qui faciat virtutem in nomine meo et possit cito male loqui de me

히브리어Modern,38 ויען יוחנן ויאמר אליו רבי ראינו איש מגרש שדים בשמך ואיננו הולך אחרינו ונכלאנו יען אשר לא הלך אחרינו׃

성 경: [막9:38]

󰃨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 데 예수스 에이펜 메 콜뤼에테 아우톤 우데이스 가르 에스틴 호스 포이에세이 뒤나민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카이 뒤네세타이 타퀴 카콜로게사이 메

개역개정,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새번역,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못하게 하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가톨릭성경,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어NIV,39 “Do not stop him,” Jesus said. “No one who does a miracle in my name can in the next moment say anything bad about me,

영어NASB,39 But Jesus said, “Do not hinder him, for there is no one who will perform a miracle in My name, and be able soon afterward to speak evil of Me.

영어MSG,39 Jesus wasn’t pleased. “Don’t stop him. No one can use my name to do something good and powerful, and in the next breath cut me down.

영어NRSV,39 But Jesus said, “Do not stop him; for no one who does a deed of power in my name will be able soon afterward to speak evil of me.

헬라어신약Stephanos,39 ο δε ιησους ειπεν μη κωλυετε αυτον ουδεις γαρ εστιν ος ποιησει δυναμιν επι τω ονοματι μου και δυνησεται ταχυ κακολογησαι με

라틴어Vulgate,39 qui enim non est adversum vos pro vobis est

히브리어Modern,39 ויאמר ישוע אל תכלאהו כי אין איש עשה גבורה בשמי ויוכל במהרה לדבר בי רעה׃

성 경: [막9:39]

󰃨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호스 가르 우크 에스틴 칻 휘몬 휘페르 휘몬 에스틴

개역개정,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새번역,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성경,40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다.

가톨릭성경,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영어NIV,40 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영어NASB,40 “For he who is not against us is for us.

영어MSG,40 If he’s not an enemy, he’s an ally.

영어NRSV,40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헬라어신약Stephanos,40 ος γαρ ουκ εστιν καθ υμων υπερ υμω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40 quisquis enim potum dederit vobis calicem aquae in nomine meo quia Christi estis amen dico vobis non perdet mercedem suam

히브리어Modern,40 כי כל אשר איננו נגדנו הוא בעדנו׃

성 경: [막9:40]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 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호스 가르 안 포티세 휘마스 포테리온 휘다토스 엔 토 오노마티 무 호티 크리스투 에스테 아멘 레고 휘민 후 메 아폴레세 톤 미스돈 아우투

개역개정,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새번역,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성경,41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알고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영어NIV,41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gives you a cup of water in my name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will certainly not lose his reward.

영어NASB,41 “For whoever gives you a cup of water to drink because of your name as followers of Christ, truly I say to you, he will not lose his reward.

영어MSG,41 Why, anyone by just giving you a cup of water in my name is on our side. Count on it that God will notice.

영어NRSV,41 For truly I tell you, whoever gives you a cup of water to drink because you bear the name of Christ will by no means lose the reward.

헬라어신약Stephanos,41 ος γαρ αν ποτιση υμας ποτηριον υδατος εν τω ονοματι μου οτι χριστου εστε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υ μη απολεση τον μισθ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41 et quisquis scandalizaverit unum ex his pusillis credentibus in me bonum est ei magis si circumdaretur mola asinaria collo eius et in mare mitteretur

히브리어Modern,41 כי כל המשקה אתכם כוס מים בשמי על אשר אתם למשיח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כי לא יאבד שכרו׃

성 경: [막9:41]

󰃨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카이 호스 안 스칸달리세 헤나 톤 미크론 투톤 톤 피스튜온톤 에이스 에메 칼론 에스틴 아우토 말론 에이 페리케이타이 뮐로스 오니코스 페리 톤 트라켈론 아우투 카이 베블레타이 에이스 텐 달라싼

개역개정,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새번역,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나를’이 없음 ㉧그, ‘넘어지게’

우리말성경,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2 “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영어NIV,42 “And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to be thrown into the sea with a large millstone tied around his neck.

영어NASB,42 “Wh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to stumble, it would be better for him if, with a heavy millstone hung around his neck, he had been cast into the sea.

영어MSG,42 “On the other hand, if you give one of these simple, childlike believers a hard time, bullying or taking advantage of their simple trust, you’ll soon wish you hadn’t. You’d be better off dropped in the middle of the lake with a millstone around your neck.

영어NRSV,42 “If any of you put a stumbling block before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it would be better for you if a great millstone were hung around your neck and you were thrown into the sea.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ος αν σκανδαλιση ενα των μικρ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εις εμε καλον εστιν αυτω μαλλον ει περικειται λιθος μυλικος περι τον τραχηλον αυτου και βεβληται εις την θαλασσαν

라틴어Vulgate,42 et si scandalizaverit te manus tua abscide illam bonum est tibi debilem introire in vitam quam duas manus habentem ire in gehennam in ignem inextinguibilem

히브리어Modern,42 וכל המכשיל אחד הקטנים המאמינים בי טוב לו שיתלה פלח רכב על צוארו והשלך בים׃

성 경: [막9:42]

󰃨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카이 에안 스칸달리제 세 헤 케이르 수 아포콮손 아우텐 칼론 에스틴 세 퀼론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에 타스 뒤오 케이라스 에콘타 아펠데인 에이스 텐 게엔난 에이스 토 퓌르 토 아스베스톤

개역개정,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그, ‘넘어지게’

우리말성경,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떨어지느니 성하지 않은 몸이 되더라도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영어NIV,43 If your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than with two hands to go into hell, where the fire never goes out.

영어NASB,43 “If your hand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crippled, than, having your two hands, to go into hell, into the unquenchable fire,

영어MSG,43 “If your hand or your foot gets in God’s way, chop it off and throw it away. You’re better off maimed or lame and alive than the proud owner of two hands and two feet, godless in a furnace of eternal fire.

영어NRSV,43 If your hand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than to have two hands and to go to hell, to the unquenchabl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εαν σκανδαλιζη σε η χειρ σου αποκοψον αυτην καλον σοι εστιν κυλλον εις την ζωην εισελθειν η τας δυο χειρας εχοντα απελθειν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εις το πυρ το ασβεστον

라틴어Vulgate,43 ubi vermis eorum non moritur et ignis non extinguitur

히브리어Modern,43 ואם ידך תכשילך קצץ אתה טוב לך לבוא קטע לחיים מהיות לך שתי ידים ותלך אל גיהנם אל האש אשר לא תכבה׃

성 경: [막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과 ‘발’그리고 ‘눈’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발,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이라는 형용사‘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 된다. 물론 이’조엔‘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모스코,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 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 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개역개정,44 (없음)

새번역,44 (없음) / 권위있는 고대의 사본들에는 44절과 46절이 없음. 후대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본문이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44 (없음)

가톨릭성경,44

영어NIV,44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NASB,44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MSG,44 (SEE 9:43)

영어NRSV,44 [없음]

헬라어신약Stephanos,44 οπου ο σκωληξ αυτων ου τελευτα και το πυρ ου σβεννυται

라틴어Vulgate,44 et si pes tuus te scandalizat amputa illum bonum est tibi claudum introire in vitam aeternam quam duos pedes habentem mitti in gehennam ignis inextinguibilis

히브리어Modern,44 אשר שם תולעתם לא תמות ואשם לא תכבה׃

카이 에안 호 푸스 수 스칸달리제 세 아포콮손 아우톤 칼론 에스틴 세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조엔 코론 에 투스 뒤오 포다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텐 게엔난

개역개정,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그, ‘넘어지게’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45 또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느니 저는 다리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영어NIV,45 And if your foot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crippled than to have two feet and be thrown into hell.

영어NASB,45 “If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lame, than, having your two feet, to be cast into hell,

영어MSG,45 (SEE 9:43)

영어NRSV,45 And if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lame than to have two feet and to be thrown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45 και εαν ο πους σου σκανδαλιζη σε αποκοψον αυτον καλον εστιν σοι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ζωην χωλον η τους δυο ποδας εχοντα βληθηναι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εις το πυρ το ασβεστον

라틴어Vulgate,45 ubi vermis eorum non moritur et ignis non extinguitur

히브리어Modern,45 ואם רגלך תכשילך קצץ אתה טוב לך לבוא פסח לחיים מהיות לך שתי רגלים ותשלך לגיהנם אל האש אשר לא תכבה׃

개역개정,46 (없음)

새번역,46 (없음) / 권위있는 고대의 사본들에는 44절과 46절이 없음. 후대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본문이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46 (없음)

가톨릭성경,46

영어NIV,46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NASB,46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MSG,46 (SEE 9:43)

영어NRSV,46 [없음]

헬라어신약Stephanos,46 οπου ο σκωληξ αυτων ου τελευτα και το πυρ ου σβεννυται

라틴어Vulgate,46 quod si oculus tuus scandalizat te eice eum bonum est tibi luscum introire in regnum Dei quam duos oculos habentem mitti in gehennam ignis

히브리어Modern,46 אשר שם תולעתם לא תמות ואשם לא תכבה׃

카이 에안 호 옾달모스 수 스칸달리제 세 에크발레 아우톤 칼론 세 에스틴 모높달몬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에 뒤오 옾달무스 에콘타 블레데나이 에이스 텐 게엔난

개역개정,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새번역,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그, ‘넘어지게’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뽑아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느니 한 눈만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영어NIV,47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in, pluck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be thrown into hell,

영어NASB,47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throw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영어MSG,47 And if your eye distracts you from God, pull it out and throw it away.

영어NRSV,47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tear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to be thrown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47 και εαν ο οφθαλμος σου σκανδαλιζη σε εκβαλε αυτον καλον σοι εστιν μονοφθαλμον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η δυο οφθαλμους εχοντα βληθηναι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του πυρος

라틴어Vulgate,47 ubi vermis eorum non moritur et ignis non extinguitur

히브리어Modern,47 ואם עינך תכשילך עקר אתה טוב לך לבוא אל מלכות האלהים בעין אחת מהיות לך שתי עינים ותשלך לגיהנם׃

호푸 호 스콜렠스 아우톤 우 텔류타 카이 토 퓌르 우 스벤뉘타이

개역개정,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그, ‘게헨나’ ㉢사 66:24 ㉣그, ‘그들의 벌레들’

우리말성경,48 지옥은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곳이다. 사66:24

가톨릭성경,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영어NIV,48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NASB,48 where THEIR WORM DOES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영어MSG,48 You’re better off one-eyed and alive than exercising your twenty-twenty vision from inside the fire of hell.

영어NRSV,48 where their worm never dies, and the fire is never quenched.

헬라어신약Stephanos,48 οπου ο σκωληξ αυτων ου τελευτα και το πυρ ου σβεννυται

라틴어Vulgate,48 omnis enim igne sallietur et omnis victima sallietur

히브리어Modern,48 אשר שם תולעתם לא תמות ואשם לא תכבה׃

파스 가르 퓌리 할리스데세타이 카이 파사 뒤시아 할리 할리스데세타이

개역개정,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새번역,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우리말성경,49 모든 사람이 소금에 절여지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가톨릭성경,49 모두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영어NIV,49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영어NASB,49 “For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영어MSG,49 “Everyone’s going through a refining fire sooner or later,

영어NRSV,49 “For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49 πας γαρ πυρι αλισθησεται και πασα θυσια αλι αλισ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49 bonum est sal quod si sal insulsum fuerit in quo illud condietis habete in vobis sal et pacem habete inter vos

히브리어Modern,49 כי כל איש באש ימלח וכל קרבן במלח ימלח׃

성 경: [막9:49]

󰃨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칼론 토 할라스 에안 데 토 할라스 아날론 게네타이 엔 티니 아우토 아르튀세테 에케테 엔 헤아우토이스 할라스 카이 에이레뉴에테 엔 알렐로이스

개역개정,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새번역,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우리말성경,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가톨릭성경,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영어NIV,50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영어NASB,50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becomes unsalty, with what will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

영어MSG,50 but you’ll be well-preserved, protected from the eternal flames. Be preservatives yourselves. Preserve the peace.”

영어NRSV,50 Salt is good; but if salt has lost its saltiness, how can you season it?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λον το αλα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αναλον γενηται εν τινι αυτο αρτυσετε εχετε εν εαυτοις αλας και ειρηνευετε εν αλληλοις

라틴어Vulgate,50 (없음)

히브리어Modern,50 טוב המלח ואם המלח יהיה תפל במה תתקנו אותו יהי לכם מלח בקרבכם ויהי שלום ביניכם׃

성 경: [막9:50]

󰃨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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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9장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 – 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 하는 것이 적걸하다.

==================9:2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 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9:3

그 옷이 관채가 . .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4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 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 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 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 응답하다 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 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9:7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모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9:8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9:9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 .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9:1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 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9:12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 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 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

===================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 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 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 .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 . . 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9:17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 .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 란 부셔버리다 , 소리지르다 ,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 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 란 족속 자손 ,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 . .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9:21

언제부터. . . 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9:22

귀신이 죽이려고. . . 자주 던졌나이다 –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 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 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 . . . 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 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9:26

귀신이 . . . 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8

우리는 어찌하여. . .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9:30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 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 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 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 – 21등).

====================9:33

가버나움에 이르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 – 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 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 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 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 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 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 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 과 발 그리고 눈 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 발, 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 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 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 조엔 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 을 뜻하는 프쉬케 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 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 모스코, 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49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 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 – 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 33- 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예수께서 최초로 메시야 신분 및 그 사역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본장에서는 전장에서 계시된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변화산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나 수난 예고가 먼저 있은 연후에 변화산 사건이 등장하는 순서의 의미 등의 문맥상의 유의 사항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17장)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 두 가지의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수난과 영광. 본장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누어지며(1-13;14-32;33-50절).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문단은 각기 예수의 영광과 수난을 시사하는 두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8절은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보여 주는 반면에, 9-13절은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인 십자가 수난을 재차 예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14-2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되는 반면, 30-32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수난이 다시금 예고된다. 마가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관한 내용을 거듭 교차시킨 것은 첫째로, 앞장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함축된 역설적 진리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제자 훈련. 공생애를 결산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본장에 수록된 사건들이 결론적 교훈 및 경계 부분인 세번째 문단(33-50절)은 물론이고 본장 전체는 예수의 제자화 훈련에 대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신의 이루고자 하신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32절). 아마 그들은 예수의 변화된 일련의 태도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이 기대해왔던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메시야로서의 자기 계시와 영광스러운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항상 예수의 수난 예고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된 사실에만 집착하고 수난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의아해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하리라는 기대에만 부푼 나머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을 때를 전제한 자리 다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34절).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세상에로 집중되어 있었고 십자가 고통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었으므로, 예수의 영광과 수난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 이유들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집중적인 제자 훈련을 시행하셨다.

1. 변화산 사건(9:1-13)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신지 엿새 후에 세 제자 앞에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모하신 내용이다. 이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Ascension)과 더불어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에 해당하며,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마 17:1-13;눅 9:28-36). 마 17:1-13 강해에서는 변화산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사건의 목적 혹은 의의를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메시야되신 예수를 증거함.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선포받음 바 있거니와(1:11), 이제 공생애의 마감 시기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7절).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4절), 이는 곧,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을 암시한다. 또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골 3:4). 비록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본문은 8:29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2) 제자들을 위한 위로와 교훈. 본문은 또한 예수의 제자 훈련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예수의 행동이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에로 더욱 집중될 것이었으며, 영적 무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불과 며칠 전에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예고하셨거니와(8:31), 이 예고를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혔음직하다. 따라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그들로 장차 당신의 영광을 널리 증거하게끔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예수의 거시안적(巨視眼的) 계획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광경을 보고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14절 ff. )을 도외시한 채 영광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동등한 위상(位相)에 두었다(5절). 이처럼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실로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모든 체험들이 장래에는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게 하는 데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2. 귀신 축사(逐邪)와 두번째 수난 예고(9:14-32)

본문은 변화산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어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8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사건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점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치유 기사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개시하신 사실에 비견될 수 있다(1:14, 15).

이 사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마 17:14-20;눅 9:37;43b), 그 중에서 본서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제자들의 불신 상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마 1:14-21의 강해에서는 이 ‘믿음’의 문제에다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보존과 진보 및 믿음의 본질과 능력 등을 상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사항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의 두번째 수난 예고(30-32절)에 관한 강해는 본서에 수록된 예수의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비교하는 주제 강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1) 변화산 위와 산 아래.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 중에는 변화산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慘景)을 선명히 대조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영광의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과 환희에 도취되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사역과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잊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속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주님은 변화산상에 계시면서도 자신이 필히 완수해야 할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궁핍함을 채우고자 하는 봉사의 삶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위와 아래의 대조적인 두 광경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한 바 두 도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도들이 위로는 영화롭고 이상적인 신천 신지(新天新地)에 대한 비전을 바라 보지만, 아래로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이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두 세계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 생활의 큰 관건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인간 상호간의 모든 수평적 관계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에 충실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밀하고도 깊이 있는 영교(靈交)의 시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묵상에서 실제적 활동(praxis)으로, 서재에서 구체적 삶의 터 (field)로, 밀실에서 가두(街頭)로 그리고 주님과의 내밀한 영교에서 사단과의 전투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말로 올바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 하겠다.

(2) 예수의 권능과 제자들을 불신. 또한 본문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과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기력함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권능을 수(數)없이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마 21:22;요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믿음을 상실하고만 듯하다. 이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훈련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어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은 영적 무지와 불신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책망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41절).

불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권능을 상실해 버린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사단은 고통스러운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도들을 은혜의 보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따라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 저러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다(고전 15:58;빌 4:8;딤전 4:7, 8;벧전 3:11).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이들의 멸망을 방관하는 자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책임을 반드시 추궁받을 것이다.

* 세 차례 수난 예고의 비교.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수난당하시리라는 예고는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의 여러 말씀들 속에 암시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수난을 예고하신 때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공개 이후이다. 예수의 사역 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집중적으로 예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메시야직의 본질적 의미를 확실히 표명함과 아울러 제자들도 고난과 희생에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의 뒤를 좇게끔 교육하고자 원하셨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의 공개적 수난 예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수난 예고의 시기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직후(8:31-9:1;마 16:21-28;눅 9:22, 23), 변화산 사건 직후(9:30-32;마 17:22;눅 9:43b-45)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무렵(10:32-34;마 20:17-19;눅 18:31-34)등이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 기자들 중 유독 마태만이 마 26:1-5에서 수난 예고를 한 차례 더 수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공개적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점차적으로 그 수난 과정과 수난 상황이 구체화 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예고에는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이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주께서 잠시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종국적 승리가 제시되어 있다.

(1) 첫번째 예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 곧, 수난당하실 장소, 핍박의 주동 세력,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등을 예시하며, 예수의 고난에 제자들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것을 묘사한다.

(3) 세번째 예고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께서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쓴 잔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발적이고도 완벽한 순종을 보게 된다(요 1:29).

* 귀신들림과 축사.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데에 공생애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셨다(1:34;마 4:24;눅 4:40). 특히 여기서는 귀신 축사(逐邪)에 관해 일고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귀신의 존재와 속성 및 활동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 귀신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인정은 하되 귀신에 대한 비성경적 식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귀신의 속성과 활동. 귀신의 영적이며(9:25;마 17:18), 지적인 존재이며(딤전 4:1-4:15;마 13:25) 사단의 지배를 확장시키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된다.

(2) 귀신들림에 대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신이나(마 17:15;요 10:18-21) 몸을 (18절;마 4:24;9:32, 33;눅 11:14) 해(害)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는 미쳐 날뛰기도 하고(5:5, 15) 각종 병에 걸리기도 한다(욥 2:7;눅 4:40, 41). 하지만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불순종에 빠져 성령의 도우심을 스스로 제한시켰을 경우에는 귀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듯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3) 귀신 축사.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으로써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16:17). 축사함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능력이나 특별한 주술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권능으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한편,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귀신이 사단과 더불어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될 것이다(창 3:14;눅 10:18;계12:9;20:10).

3.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9:33-37)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혁신적인 가치관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기사가 시작되기 전에,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shekel)을 꺼내어 성전세를 내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마 17:24-27). 마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본문의 기사를 막바로 연결시켜 이를 9:1-32에 대한 결론적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유념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내면적 괴리 상태. 제자들은 예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그 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데 대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빈한(貧寒)하게 지내시며 병들고 가난한 무리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종의 모습 보다는 이적적 권능을 행하며 영광 중에 거하는 승리자의 모습만이 인상깊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그 수난의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더욱 집착해가는 제자들 간의 괴리감(乖離感)은 이후의 내용들에서 더욱 현저해져 간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예수를 따랐지만, 참된 메시야관에 대해 무지하였고 신앙의 도리의 심오한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측면에서는 갓난 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겸손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 가치관에 비할 때 실로 파격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을 지배해 왔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사슬식으로 연결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生態系) 전체가 유지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숭고한 차원의 윤리적 요구를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 소위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되면, 어떤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과 권력으로 압축되는 세상적 힘을 얻지 못하면 심히 불안해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날이 갈수록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가 더 신봉되어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패배해 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숭고한 천국 시민의 윤리는 단지 허공에서만 맴도는 추상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악인의 영화(榮華)는 실로 덧없는 것이요(시 37:2, 10, 38;75:8;잠 14:2;벧후 2:17),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와 사랑의 나라가 조만간 온 누리에 임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진 자는 본문의 교훈을 정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천군만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여길 것이다.

4. 제자들의 무지와 독선 및 범죄에 대한 경고(9:38-50)

앞 문단에 이어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헛된 야욕과 무지 및 이를 교정시키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교훈과 경고가 소개된다. 본문의 내용을 편의상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화목을 가르치심.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의 시기심과 파벌의식을 직접적 발달으로 하고 있다(38절).

이와 유사한 상황은 민 11:26-29에서도 나타난다. 즉, 여호수아(Joshua)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칠십인의 장로들 중에 피택된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예언하자 이를 금하도록 모세에게 요청하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줄로만 알고 그러한 요청을 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노출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본문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속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의 일꾼의 사역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훨씬 더 완악하고 무지하였다(38절).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그들간에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불화를 일으켰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그들과 친분 관계가 없는 자들의 활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시기하고 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지상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시에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요직(要職)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더구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14-18절)이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속적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이간과 경쟁 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앞 단락에 이어 섬김의 도를 재차 강조하면서(41절) 화목을 추구할 것을 명령하셨다(50절;잠 3:30;20:3;빌 2:3;약 3:4). 그리고 배타적 편견과 독선적 특권 의식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33-37절). 본문에서 주님이 힘주어 경계하신 당파성과 분리주의는 초대 교회와(고전 1:12)향후의 교회사 전체를 통해 나타났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실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교파로 갈라서거나 새로운 군소 교단을 만들어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예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범죄에 대한 경고. 43-49절은 범죄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직접적 경고 대상은 (1)항에 설명한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당파심이라 하겠지만 넓게는 제자들이 처한 전반적인 심령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 무지와 완악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든 불신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본문의 경고가 매우 신랄하고 엄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인류의 죄악이 심각한 성질의 것임을 시사함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이야말로 그 어떤 희생을 지불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고귀한 것임을 상기시킨다(마 13:45, 46).

또한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연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당장에는 그들이 무지와 불신 가운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용납하사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훈계하셨지만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된 요소들이 있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계신다.

* 지옥에 대하여. 여기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지옥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정의. 지옥이란 구속함 받지 못한 죄인들이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가게 될 형벌의 장소 혹은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며, 사후의 중간 상태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눅 23:43 주제 강해 ‘사후의 중간기 상태’ 참조).

(2) 구약 시대의 지옥관.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는’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사야의 진술(사 66:24)을 제외하면,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음부'(* , 스올)라는 개념 속에 지옥의 개념이 어렴풋하게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사 14:15;겔 32:23등). 구약성경에서 음부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욥 10:21, 22;시 143:3), 침묵의 장소로서(시 94:17;115:17),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시 6:5;88:10-12)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욥 14:21;전 9:5-10)이라 묘사되었다. 결국 초기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과 악인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지옥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빈약한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점차 선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비로서 지옥의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4) 신약 시대의 지옥관. 신약 시대에 이를러 음부의 개념은 더욱 발전되어 의인의 영혼들이 부활과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며 임시 대기하는 장소인 낙원(낙 23:43)과 대치되는 개념. 즉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임시 대기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눅 16:23;계 20:13).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영원한 멸망의 처소인 지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신약 시대의 특기할 만한 계시의 진전이다. 개역 성경의 ‘지옥’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엔나'(* )는 히브리어 ‘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몰렉(Molech) 우상에게 아이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곳이며(대하 28:3;33:6), 요시야(Josiah)의 개혁 때에는 불결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Jeremiah)에 의하면 그렇듯 가증스러운 인신 제사 관습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였다(렘 7:32;19:6). 이러한 개념을 확대되어서 나중에 힌놈의 골짜기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될 곳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엔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면 공관 복음서에만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예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48절), ‘풀무불'(마 13:50), ‘영원한 불'(마 25:41), ‘바깥 어두운 데'(마 8:12)등으로 묘사하였다. 기타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세에서의 혹심한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지옥과 동일한 개념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롬 2:3-9;살전 5:3;살후 1:6-9;히 10:27;벧후 2:4-9;계 14:11등).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예수는 지옥의 교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가르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경을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지옥을 묘사하는 말들이 비유적 언어이기는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두려운 현실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지옥의 구체적 위치나 구조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언급된 만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바로 전도임을 일깨워 준다(16:15;시 96:3;마 28:19).

마가복음 9장 : 네이버 블로그

마가복음 9장

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사람 중에. 9장의 첫 절은 8장을 맺는 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참조 마 16:28; 눅 9:27).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엿새 후에. [변형됨, 막 9:2~13=마 17:1~13=눅 9:28~36. 주요 주석: 마태복음].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희게. 또는 “표백하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예수께서 변형하심―변형산에 나타난 모세는 죄와 사망을 이기실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증거였다. 그는 의인의 부활 때에 무덤에서 나올 자들을 표상하였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변화되어 올라간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지상에 살 자들, 곧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될 무리들을 상징하였다(고전 15:51-53).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두번째” 오실 때에 나타내실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늘의 빛을 입으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히 9:28; 막 8:38). 제자들에게 하신 구주의 허락은 이제 성취되었다. 산 위에서 미래의 영광의 나라가 축소판으로 나타난 바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는 왕이요 모세는 부활한 성도들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변화된 자들을 상징하였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 광경을 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이리 저리 의지할 데 없는 나그네로 방황하신 인내의 교사,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께서 하늘의 총애를 받은 자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엘리야가 메시야의 통치를 선언하러 왔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에 세워지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공포와 실망의 기억을 영원히 쫓아버리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이 곳에서 저들은 머물러 있기를 갈망하였다.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저희 주를 보호하고 왕으로서의 그 권위를 세우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면류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와야 한다. 그들이 예수와 더불어 협의한 주제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즉위하시는 일이 아니요 예루살렘에서 있을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시고 그 슬픔과 죄짐을 지신 예수께서는 사람들 사이를 홀로 걸으셨다. 다가올 시련의 흑암이 그를 억누를 때에 그는 자기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고독함을 느끼셨다.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저들의 의심과 야망에 빠져서 그의 사명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는 하늘에서 사랑과 정의(情誼)속에서 거하셨었으나 그가 지으신 세상에서는 고독하셨다. 이제 하늘은 그 사자들을 예수께 보냈다. 그들은 천사가 아니요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들, 그러므로 지상 생애에서 시련을 당하시는 구주를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동역자였었다. 그들은 예수와 같이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졌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탄원하기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도말하옵소서”하였다(출 32:32). 엘리야는 삼 년 반의 기근 동안에 민족의 증오와 그 재앙의 책임을 져야 하였으므로 고독감을 맛본 사람이었다. 그는 홀로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섰었다. 그는 홀로 고뇌와 절망 속에서 고독감에서 광야로 도피하였었다. 이 두 사람이 보좌에 둘려 있는 모든 천사 중에서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 고난의 광경에 관하여 예수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늘이 동정한다는 보증을 가지고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소망 422-425).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이 경험으로부터 배울 그들의 특권을 대부분 놓쳤지만, 제자들은 분명히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감동하였다. 하지만 고난받는 메시야라는 생각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위대한 정복자 메시야라는 통속적 관념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다(참조 눅 4:19 주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이 같은 사건이 그들이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있는 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인자. 예수는 여기서 보통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친숙한 칭호를 사용한다(참조 마 1:1; 막 2:10 주석).

기록하기를. 참조 눅 24:26 주석; 시 22장; 멸시를 당하리라. 즉 “우롱을 당하리라.”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와서. [귀신 들린 소년, 막 9:14~29=마 17:14~21=눅 9:37~43상단. 주요 주석: 마가복음.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8; 도표 7; 119~126]. 변형산 사건 그 다음날에 예수와 세 제자는 변형산에서 다른 아홉 제자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래 평지로 내려 왔다(참조 눅 9:37; 시대의 소망, 426). 성경에 특별히 언급된 갈릴리의 두 “평지들”, 게네사렛 평지(참조 눅 5:1 주석) 아니면 에스드랠론(Esdraelon) 골짜기가 변형산 부근의 지방으로 간주된다. 그 밝혀지지 않은 산은 이 “평지들” 중의 어느 하나에서 멀지 않았다(참조 마 17:1 주석).

서기관들. 참조 제10권, 참고 논문 “기독교 첫 세기의 유대인.”

더불어 변론하더니. 즉 문맥이 명시하듯이, 그들과 더불어 논쟁하더니 또는 그들을 조롱하더니. 서기관들의 태도는 분명히 적의에 찬 것이었다. 이것은 마가만이 자세히 진술했다. 이 적의에 찬 서기관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를 향한 백성들의 존경심을 따돌리고 그의 언행을 보고할 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이었을 것이다(참조 마 16:1; 막 7:1 주석). 전에도 자주 그랬듯이, 그들은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를 공격했다(참조 2:16; 18, 24; 7:5). 이 경우에도 제자들이 귀신에게 무능력했음을 크게 들추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사기꾼이라 주장하려 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427).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심히 놀라며. 예수가 가까이 온 것을 보고 놀란 이유는 분명히 변형산 사건을 목격한 이들의 얼굴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 영광의 흔적을 본 무리들의 반응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참조 출 34:29~35; 시대의 소망, 427).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시되. 예수가 가까이 오니 서기관들이 조용해진 것 같다. 서기관들의 출현으로 감돌던 긴장된 분위기 자체가 그들이 아홉 명의 제자를 겁나게 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무리 중에 하나가. 과거에 그들이 예수의 명예를 훼손시키려 할 때마다 예수로 인해 말문이 막히고 난처하게 된 까닭에, 서기관들은 논쟁에서 물러섰다(참조 마 16:1~4; 막 2:19; 7:11~13 주석; 시대의 소망, 427). 그래서 이 불쌍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원을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벙어리 귀신. 귀신 들림에 대한 논의는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보라.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누가(눅 9:38)는 그 아버지가 예수에게 자신의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라고 요청했다고 말한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진료를 요청하는 일반적 관용어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파리하여 가는지라. 헬라어 크세라이노(xe-raino-). “말라 버리다” 또는 “시들다.” 약 1:11에서는 크세라이노가 “풀을 말린다”로 쓰였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여기서 아이의 건강 상태가 점차 악화되는 것을 말했든지, 아니면 아이의 몸이 굳어지는 발병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하지” 대신에 “그를 쫓아내지”란 구절이 삽입되는 독법을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제자들의 경험과 게하시의 경험(왕하 4:31)을 비교해 보라.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믿음이 없는. 즉 “신앙심이 없는” 또는 “믿지 않는.”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비교하라(참조 민 14:27; 히 3:17~19). 예수가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아버지의 믿음이 그의 아들을 치유하는 데 유일한 방해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제자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참조 9:29 주석), 구주는 특별히 그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들만을 가려내어 공중 앞에서 견책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들이 비난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무리들은 또한 얼마나 믿음이 없었겠는가!

얼마나. (“얼마나”는 헬라어로는 “언제까지”, “얼마나 오래”임-역자 주). 이 말은 여기서 예수가 임시로 인간의 모양을 취한 하나님으로서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너희를 참으리요. 문자적으로는 “너희를 견디다” 또는 “너희를 참고 견디다.”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같은 체험을 거듭했다(참조 민 20:10).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굴며. 즉 “데굴데굴 구르며.” 이 소년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다.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마가만이 상세히 기록함.

언제부터. 이것은 예수가 치유한 질병의 내력을 특별히 물었다고 기록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가 왜 이 경우에 그렇게 했는지 이유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이 소년의 위독한 상태를 관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아버지에게 질병의 상태와 결과를 묘사하도록 요구했을 것이다(참조 18절 주석).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악한 귀신이 나갈 때 그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그냥 두었을 것이다(참조 26절 주석).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저를 죽이려고. 이것은 만성 질병이었으므로 인간의 관점에서는 더욱 다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헬라어로(참조 마 17:15) “심히 고생하여”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기술로는 완화시킬 수 없었던 질병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하실 수 있거든. 참조 1:40 주석.

도와주옵소서. 이 아버지는 소년의 상황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참조 마 15:22, 25).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나의 믿음 없는 것을. 그에게 얼마간의 믿음이 없었다면 이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요 4:43~54 주석).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무리. 문자적으로 “무리”(crowd, 「제임스왕역」에는 “사람들”[people]이라 기록되었으나 「개역한글판」에는 “무리”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이 사건은 분명히 공중 사역에서 물러난 기간에 일어났으며, 이 기간 동안 예수는 널리 알려지는 것을 피하고 그가 충족시키기를 원치 아니하는 열망을 야기시키지 않으려 했다(참조 마 15:21 주석). 그러므로 예수는 지체하지 않고 완치시켰다.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귀신이 이 아이의 신체상태의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는 원인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었다(참조 눅 9:42).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즉 “몹시 그에게 경련을 일으켰다” 또는 “그에게 격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제임스왕역」에는 “아이를 몹시 비틀고”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아이의 처참한 상태와 귀신으로부터 놓임받은 상태의 대조가 더욱 명백하도록 예수는 사단의 능력의 마지막 행사를 허락하였을 것이다.

죽은 것같이. 그를 발작하게 한 경련이 극심했기 때문에 아이는 완전히 지쳤다.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께서…잡아. 귀신이 떠나가고, 이제는 예수가 손을 대 아이의 힘이 회복되었다(참조 5:27 주석).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집 (the house). 정관사 “the”(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집으로 간주했던 특별한 집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은 어쩌면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으로서(참조 1:29; 2:1 주석), 예수가 갈릴리에 체류하고 있을 동안 그의 임시 처소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432).

우리는 어찌하여…못하였나이까. 열두 제자는 세 번째 갈릴리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귀신들을 쫓아냈다(참조 6:13). 그들은 예수가 나누어 준 능력이 그들에게서 떠났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매우 난처했다.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그리스도는 여기서 귀신을 내어쫓기 위해 드려지는 기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순간적인 기도가 아니라, 기도에 의하여 영위되는 생활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리스도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함께 없는 동안에, 아홉 명의 제자는 세 제자에게 나타낸 호의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실망과 사사로운 불만에 잠겨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31). 그들의 정신과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실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유. 서기관들은 아홉 제자의 무능력함을 귀신들의 능력이 더 우수한 탓으로 돌렸으며, 예수의 통제력은 능력이 좀 더 약한 귀신들에게 한정되었다고 역설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427). 그러나 실제 문제는 귀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무능력함에 있었다.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비밀리에 여행함, 막 9:30~32=마 17:22, 23=눅 9:43~45. 주요 주석: 마가복음.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8]. 즉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친 변형산 기슭을 떠나(참조 14절 주석).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아마 가버나움에 이르는 우회로로 감(참조 마 17:24 주석). 갈릴리를 지나가는 이 비밀리에 한 여행의 기간은, 십자가에 못박히기 약 7, 8개월 전인 AD 30년 늦은 여름의 며칠간이었을 것이다.

아니하시니. 예수가 한 지방에 오래 머물면, 즉시 소문이 퍼져서 군중이 몰려오고, 그러면 그가 제자들에게 나눠 주려던 중요한 교훈이 방해받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이번 여행 2, 3개월 전에 그의 능력 있는 사역을 증거했던 도시들과 마을들을 피하여, 갈릴리 여기저기를 다닌 것 같다. 도시들과 읍들을 피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조차도 그가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였다. 만일 믿는 자들 가운데 특별한 측근들조차도 영적인 깨달음이 없었다면, 더욱이 일반 백성들은 이때 그리스도가 말씀해야 했던 것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가르치시며. 문자적으로는 “그가 가르치고 있었으며.” 즉 그가 계속 가르치고 있었다는 뜻. 그의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예수가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말한 일이 적어도 세 번 있었는데, 이것은 그중 두 번째 경우이다(참조 마 16:21; 20:17~19 주석). 마 16:21이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가 유사한 가르침을 그들에게 주신 일이 다른 때에도 틀림없이 있었다. 그가 이 기별을 그들에게 명확하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그의 제자들과만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이 예수가 지금 비밀리에 갈릴리를 돌아다니는 이유였다(참조 9:30 주석; 시대의 소망, 432).

인자. 참조 마 1:1; 막 2:10 주석.

삼 일 만에. 참조 제10권, 참고 논문 “신약 연대기의 기초.”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가 알기 쉬운 말로(참조 31절 주석) 그들에게 그만큼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참조 눅 9:45 주석).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주요 원인은 메시야가 필히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참조 마 16:22, 23 주석). 그와 같은 생각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참조 눅 4:19 주석). 그들은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현세의 왕으로서 군림할 것이라 기대했으며, 그때가 이르면 그와 함께 누릴, 그들이 고대한 존귀에 대한 이글거리는 기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참조 시대의 소망, 415, 417,; 눅 4:19 주석).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아마 자기들도 베드로가 근자에 제안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아는 고로, 그들이 지금 말을 한다면 같은 생각을 표현할 뿐임을 알고(참조 마 16:22, 23 주석), 침묵을 지켰음에 틀림없다. 마 17:23에 따르면 그들은 “심히 근심하더라”, 즉 “심히 괴로워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가버나움에 이르러. [겸비, 화해, 용서, 막 9:33~50=마 18:1~35=눅 9:46~50. 주요 주석: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8; 도표 7]. 가버나움으로 돌아오게 된 상황과 강론에 대한 마가와 마태의 보고를 비교하려면 마 18:1 주석을 참조하라.

34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저희가 잠잠하니. 문자적으로는 “여전히 말 없이 있으니” 또는 “침묵을 지키니.”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33절).

쟁론하였음이라. 헬라어 디알레고마이(dialegomai). “논쟁하다” 또는 “다투다.”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첫째가 되고자 하면. 여기서 예수는 문제의 핵심-열두 제자는 저마다 주님이 머지않아 건설하리라고 기대하는 왕국에서 첫째가 되기를 바랐다(참조 마 18:1 주석)-을 거론한다. 진정한 위대함은 위대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람이 위대하게 되려고 하는 순간 그 인물의 작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 23:8~12; 막 10:43, 44; 눅 22:24~26을 비교하라.

섬기는 자.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 이 단어에서 “deacon”(집사)이란 영어가 유래한다(참조 빌 1:1; 딤전 3:8, 12). 디아코노스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결핍을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서, 단어는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를 의미하나 “종”일 수도 자유인일 수도 있다. 보통 “종”으로 번역된 다른 헬라어 둘로스(doulos)의 통상적인 뜻은 “노예”이다. 신약에서 디아코노스는 보통 복음의 “사역자”(minister)로 사용되었다(참조 고전 3:5; 엡 3:7; 살전 3:2). 하늘 왕국은 본질상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기는 곳이지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다. 참된 사랑은 본질상 사랑을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주는 것이다(참조 마 5:43 주석). 가장 큰 자는 하나님과 그의 동료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또한 그들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다.

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참조 요 12:44, 45 주석.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예수의 특정한 질문에 대답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조금 전에 한 말에 대해 소견을 말한다는 뜻이다(「제임스왕역」에는 “예수께 대답하되”로 되어 있음-역자 주). 이 말씀들이 요한의 마음에,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사람에게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가 이전에 한 견책이 합당치 않았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참조 시대의 소망, 437).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 그는 정당하게 인정된 예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고. 이 사건이 요한과 야고보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지적된 사실은 이 일이 두 형제가 함께 나갔던 세 번째 갈릴리 여행 동안에 일어났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참조 마 10:5; 막 3:14 주석).

금하였나이다. 즉 “못하게 막았다.” 이 일 후 얼마 안 되어 다른 경우에 나타난 야고보와 요한의 관용성이 없는 비슷한 태도에 대해서는 눅 9:54 주석을 참조하라. 이번 일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선생의 명예를 위한 열성을 근거로 그들의 행실을 변명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이런 행동을 유발시켰다(참조 시대의 소망, 437). 그들은 자기들만이 그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견책하였다(참조 마 10:8 주석). 비록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들이었고 또 왕국의 “열쇠들”을 손에 쥐고 있다 할지라도(참조 마 16:19; 18:18 주석),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권리는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주어진 명령을 이행하는 일에 열성적이어야 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할 권리는 없었다. 종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신앙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는 악한 자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금하지 말라. 즉 못하게 막지 말라.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생각과 의견에 동조하도록 강요하거나, 우리가 일하는 방법을 따르도록 강요할 권리는 없다(참조 시대의 소망, 438; 민 11:27~29).

내 이름을 의탁하여. 베드로(참조 행 3:6~8)와 바울(참조 행 16:16~18) 그리고 다른 모든 제자도 이적을 행할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능한 일.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 참조 119).

즉시로. 헬라어 타퀴(tachu). “곧”, “신속하게”, “당장에” 또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은 그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한 사람은 그가 이적을 행하기 위하여 의존했던 바로 그 능력을 즉시로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같은 진리를 거꾸로 말한 마태복음(참조 12:30 주석)을 비교해 보라. 이 둘은 서로 상반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충하는 것이다. 분명히 한 사람이 예수의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반대자일 수는 없다. 만일 야고보와 요한이 꾸짖은 사람이 예수가 한 일과 같은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통해서 역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를 위하는. 즉 우리를 지지하는 또는 우리 편의.

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너희를…속한 자라 하여. 참조 마 5:11; 10:18, 42 주석. 행위의 특색은 그것을 유발시키는 동기에 의하여 결정된다.

한 그릇. 참조 마 10:42 주석.

진실로. 헬라어 아멘(ame-n, 참조 마 5:18 주석).

상을 잃지 않으리라. 참조 마 5:12; 19:29 주석.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누구든지…실족케 하면. 참조 마 18:6 주석.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손이…범죄케 하거든. 참조 마 5:29, 30; 18:8 주석.

꺼지지 않는. 참조 사 66:24; 마 3:12 주석. “꺼지지 않는 불”은 마태복음에 있는 평행 구절(참조 마 5:22 주석; 18:8)인 “영원한 불”과 같은 뜻이다.

44 (없음)

[거기는 구더기도]. 44, 46절의 생략을 지지하는 중요한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참조 48절 주석(「제임스왕역」 44, 46절에는 48절과 동일한 내용이 삽입되어 있고, 「개역한글판」에는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레기우스 사본 등과 같이 44, 46절이 생략되어 있음-역자 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범죄케 하거든. 참조 마 5:29, 30; 18:8 주석.

46 (없음)

[거기는 구더기도]. 참조 44, 48절 주석.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범죄케 하거든. 참조 마 5:29, 30; 18:8, 9 주석.

하나님의 나라. 참조 마 3:2; 4:17; 5:3; 눅 4:19 주석.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구더기. 헬라어 스콜렉스(sko-le-x). “구더기” 또는 “벌레.” 메이저(Major), 메이슨(Mason) 그리고 라이트(Wright)의 주석(예수의 사명과 기별[The Mission and Message of Jesus], 123)처럼 “죽지 않는 구더기는 죽을 수 없는 영혼(soul)의 표상이 아니라 제거될 수 없는 부패의 표상이다.” 43절에 “영생”이 “꺼지지 않는 불”과 대조되어 쓰였다. 롬 6:23 및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서도 “영생”은 “사망”과 대조되어 있다. 요 3:16에서는 “영생”과 “멸망”을 대조시킨다. 예수는 여기서도 그와 같은 대조를 시도한 것이 분명하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구더기가 죽지 않는다”와 평행되어 있어 대등한 표현이다. 하지만 구더기들이 불 속에서 그들의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모순되게 여겨진다. 스콜렉스, “벌레”란 단어에는 “벌레”를 “영혼”과 동일시하는 통속적인 설명을 어렴풋이라도 정당화하는 의미가 없으며(참조 사 66:24 주석), 사람의 죽은 상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지 간에, 이 사실은 거의 모든 주석가에게 인정되고 있다.

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불로써 소금 치듯 함. 방부제로서의 소금에 대하여는 마 5:13 주석을 참조하라. 불은 정화제나 마지막 심판의 표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참조 마 3:10 주석). 불가해한 본 구절의 뜻은 전혀 분명치 않으며, 만족할 만한 설명은 인접한 문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이 되는 것은 아마도 “사람마다” 이 생에서 정결케 하는 불을 통과할 것이라는 뜻이거나(참조 욥 23:10 주석) 마지막 날의 불을 통과할 것이라는 뜻이다. 불은 현재의 삶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마지막 그 큰 날에 생명 자체를 소멸한다. 소금은 좋은 것을 보존한다(참조 마 9:50 주석).

[모든 제물]. 고대 성소 봉사에서는 모든 제물에 소금을 뿌렸다(참조 레 2:13 주석). 소금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시대의 소망, 439. 「제임스왕역」에는 49절 하단에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가 삽입되어 있음-역자 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좋은 것. 참조 마 5:13 주석.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만일 제자들이 “언약의 소금”(레 2:13)을 가졌더라면, 그것이 하늘 왕국에서 누가 제일 크냐라는 토론을 하도록 하는 한심스러운 성향을 제지했을 것이다.

화목하라. 강론의 적절한 절정(絶頂),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논쟁을 삼가라는 훈계, 시기와 경쟁 의식에 대한 경고이다.

~마라나타~

마가복음 9장: 뒤집어진 나라

마가복음 9장: 뒤집어진 나라

1. 1-29장: 산 위와 산 아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1절)고 말씀하신 다음 엿새 뒤에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늘 그랬듯이 기도하러 올라 가신 것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세 제자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합니다. 기도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변하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3-4절). 제자들은 엘리야와 모세를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을 보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영적 세계의 신비입니다. 세 제자는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지어 모시겠다고 말합니다(5절). 그러자 갑자기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엎어졌다가 고개를 드니 다시 현실로 돌아 왔습니다. 엿새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9절)고 말씀하십니다. 세 제자는 그 말씀을 새겨 들었지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10절). 그것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산 위에서 보았던 엘리야를 생각하고는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11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생각하시면서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답하십니다(13절).

산 아래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아홉 제자에게 가니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니 모두가 예수님께 몰려 왔습니다(14-15절). 제자들에게 무슨 일로 논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아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심한 경련과 발작 증세로 인해 고통 받아 왔는데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했더니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17-18절).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탄식한 다음 그 아이를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그 아이의 상태는 아주 심각했습니다(20-22절). 그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22절)라고 간청했고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23절)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 주십시오”(24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에게 “나가서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명하셨고 귀신은 그 아이를 심하게 발작하게 만들고 떠납니다(25-26절). 귀신에게서 풀려나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그 아이를 예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27절).

예수께서 그 아이의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따로 다가와 왜 자신들은 그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느냐고 여쭙니다(28절). 그러자 예수님은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29절)고 답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을 경험했습니다(6:13). 그들은 과거에 있던 능력이 지금도 통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영적 능력은 한 번 소유하면 언제나 사용 가능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할 때 드러나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사라집니다. 예수께서 산 아래에서 권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산 위에서 깊이 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산 아래(일상의 현실)에서의 능력 있는 삶을 위해 산 위(영적 훈련)에 머물러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2. 30-37절: 가장 큰 사람

그곳을 떠나 예수님은 “갈릴리를 가로질러”(30절) 가십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31절)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32절). 사실,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깨닫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진담으로 하시는 말씀이고 뭔가 불길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묻기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일로 길에서 다투었느냐고 물으십니다(33절).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34절)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알고도 모른 척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로 다투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 놓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35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 질서와 반대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구경하고 있던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앞에 세우시고는 껴안아 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3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은 당시 사회에서 존재감을 인정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어린이는 사회 계층 중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 강한 사람, 잘난 사람에게 줄을 대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은 사람, 약한 사람, 못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람, 강한 사람, 잘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 땅의 질서와 이토록 다릅니다.

3. 38-50절: 지극히 작은 한 사람

그 때 요한이, 낯 모르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에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보고합니다(38절). 예수님께 칭찬 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그렇게 행한다면 막을 일이 아니라고 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 해를 끼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통제 안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네 편, 내 편이 없습니다. 진리 안에서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죄짓게 하는 것”(42절)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42절)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존재감이 없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같은 값으로 대접받는 곳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진심으로 그리고 성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죄짓게” 혹은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겁고 무서운 죄입니다.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42절)는 말은 그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어법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 하라고 하십니다. 손이든(43절), 발이든(45절), 눈이든(47절) 죄 짓게 하는 것은 제거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닙니다. 마음의 죄성이 손과 발과 눈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음에 있는 죄성입니다. 그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게헨나” 즉 하늘의 소각장에 버려지게 됩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쓰레기 소각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그것에 비유하십니다. 쓰레기 소각장에는 구더기들이 득실댑니다. 그것처럼 지옥에서도 끔찍한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48절). 또한 지옥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49절)입니다. 지옥은 생각하기 싫은 대상입니다. 성경에서 지우고 싶은 혐오스러운 장소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거북하고 불편하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은 말씀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지옥불에 대한 비유로 소금을 언급하신 다음, 예수님은 소금을 다른 비유로 사용하십니다(50절). 제자들은 소금처럼 짠 맛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배우고 그 정신대로 사는 것이 제자들이 내야 할 짠 맛입니다. 제자들에게 짠 맛이 든다면 그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지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낮아져서 섬기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묵상:

하나님 나라는 땅의 나라가 뒤집어진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통하는 원리가 통하지 않고 이 땅에서 귀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더 이상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에 눈 떠야 합니다. 그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나라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야만 그 나라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그 나라를 제대로 알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세 제자도 산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의 선물을 받은 후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논쟁하는 미숙한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서는 서로 낮은 자리에 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를 만나든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짠 맛이었습니다.

우리의 짠 맛은 얼마나 진합니까? 짠 맛 나는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 되어라,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어 그것을 사는 이!

마가복음 9장

<마가복음 9장 흐름정리>

주님은 공생애 사역 직전의 침례를 통해 당신의 신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셨다. 이제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변화산 사건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확증 받으셨다. 이는 당시 수난 예고에 직면하여 여러모로 심약해져 있었던 제자들에게 용기와 담력을 주는 고무적인 사건이 되었다. 한편 14~29절은 본서에 나타나는 귀신 사건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기사이다. 변화된 주님의 영광과 사악한 영을 제압하는 권능을 경험하면서도 내부적인 갈등을 청산하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참 제자도를 교훈하시면서(33~50절) 그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한편,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셨다.

<마가복음 9장 줄거리>

2. 예수가 변형됨.

11. 엘리야가 올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침.

14.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내어쫓음.

20. 그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함.

33. 제자에게 겸손을 권고함.

38.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를 금하지 말며 또 믿는 자는 누구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 명함.

<마가복음 9장 도움말>

* 4절 : 엘리야, 모세.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로서, 두 사람은 구약을 대표한다.

* 5절 : 랍비.

문자적으로는 ‘나의 위대한 분’이란 뜻으로, ‘선생’을 가리켰다. 서기관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랍비'(선생님), 또는 ‘압바'(아버지)라 부르며 인사했다. 랍비는 모세의 율법에 학식이 있는 사람을 구별하는 칭호였다.

* 19절 : 믿음이 없는.

예수가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아버지의 믿음이 그의 아들을 치유하는 데 유일한 방해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제자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구주는 특별히 그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들만을 가려내어 공중 앞에서 견책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들이 비난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무리들은 또한 얼마나 믿음이 없었겠는가!

* 21절 : 언제부터.

이것은 예수가 치유한 질병의 내력을 특별히 물었다고 기록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가 왜 이 경우에 그렇게 했는지 이유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이 소년의 위독한 상태를 관중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아버지에게 질병의 상태와 결과를 묘사하도록 요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악한 귀신이 나갈 때 그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그냥 두었을 것이다.

* 29절 : 기도 외에.

그리스도는 여기서 귀신을 내어쫓기 위해 드려지는 기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순간적인 기도가 아니라, 기도에 의하여 영위되는 생활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리스도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함께 없는 동안에, 아홉 명의 제자는 세 제자에게 나타낸 호의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실망과 사사로운 불만에 잠겨 있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431). 그들의 정신과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일하실 수 없게 만들었다.

* 50절 : 화목하라.

강론의 적절한 절정,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논쟁을 삼가라는 훈계, 시기와 경쟁 의식에 대한 경고이다.

<마가복음 9:1-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마가복음 9:1-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07/24/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마가복음 9: 1 - 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마가복음 9:1-13]

1.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9.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오늘 말씀 마가 복음 9장은 우리 잘 아는 < 변화산에 예수님의 제자 3인방 >과 함께 올라가서 거기서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관경을 목격하면서도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 변화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있었느냐 ?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9장 1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조금더 정확히 번역하면 < 여기 서 있는 자들 중의 몇사람은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또는 임하여 있음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게 위해서 쓰여진 시제는 < 목적격의 완료 능동 분사 3인칭 단수>가 쓰여졌습니다.

실제로 오늘 마가복음 9장 1절은 변화산 사건이전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절에 마가복음 8장 27절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복음 선언, 복음적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도 자신이 숨겨두었던 고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여기 있는 자들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음을 느끼는 자들..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와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본다 >는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통해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도래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식은 바로 <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 >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을 의미하며 그들의 해방자로써의 메시아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땅에오심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으며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다스림이 시작되었고 승리가 선언되는 그런 놀라운 사건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볼품없이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합니다.

참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모습속에서 오늘 그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모습들은 황당하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신앙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정겹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이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대해서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자기식으로 믿고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은 있었지만 그 고백에 어울리는 삶의 결단은 없었습니다.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위에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럴싸한 고백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믿음의 행동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변화산에 사건에서 제자들이 한일은 그 관경속에서 여전히 < 두려워하고... 초막셋을 짓겠다... 진짜 엘리야는 언제 오느냐 ?>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셔서 그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는지?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를 눈으로 목격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그 변화산 사건이후에 내일 본문이지만 < 악령에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의 행동 >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정확한 이해와 그때 따르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중에 참으로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드먼 < 제자는 행동한다. aha 법칙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이며 [팬인가, 제자인가], [거짓 신들의 전쟁]의 저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깨달으라, 정직하라, 행동하라!!

더 이상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라

진짜 제자에게는 반드시 변화된 삶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 읽어라! 이제 그만 구경하라!

이제 그만 말하라! 이제 그만 놀아라!

행동할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삶에서 ‘아하’ (AHA, 각성 Awakening, 정직 Honesty, 행동 Action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저자가 만든 단어)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제자는 더 이상 믿는다고 알고 있다고 고백만 하지 말고 그 믿고 고백한데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변화산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도취되어서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일에 이루는 것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위 < 변화산 변형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소위 3인방 베드로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을 데리고 산에가셔서 예수님이 어떻게 변화되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 복음 9장 2절 에 < 엿새 후에 예수 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와 요한 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던 엿새후에.. 그리고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마다 그때가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고 급하게 뭔가 그날의 감흥을 말하면서 < 초막 셋을 짓겠다 >고 하는 말을 보면서 아마도 < 초막절 전 >이 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데리고 가셨으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왜? 성경의 많은 인물중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광 >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로 올라운 < 시내산 > 사건과 아주 비슷합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엿새후에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오를 때 3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 아론 나답 아비후 >를 데리고 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3명의 제자들 대리고 갑니다. 그리고 임재의 구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 모세 모형론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 십계명을 주시고 그 영광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을 보여주고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경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해 볼 때 < 신약의 시내산 사건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에 중심에 시내산이 있었듣이 신약의 예수님의 구원사건과 연결고리 연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의 등장이 주는 의미는 구약의 대표자, 한사람은 구원의 대표자, 한사람은 선지자의 대표자 역할을 한 두사람이 예수님과 어울려 있는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으면 동시에 과거의 모세의 역할,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이 동시에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사건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의 반응은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은 뭔가 이 느낌을 말해야 하기에 < 초막셋을 짓겠다는 어이없는 발언 >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대한 고백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한 고백도 잘 하지만 대단한 실언도 잘합니다. 나머지 두 제자는 여전히 심히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립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어라 >는 소리가 들입니다. 이장면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

저는 <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다라 >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오직 예수와 우리 자신들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오직 예수와 그 믿음대로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 자신들…

예수님의 보여주신 변화산의 모습을 잠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의 장면의 도취될 즈음에 그리고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은 < 부활이 무엇인지 ? 엘리야가 누구였는지 ?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는 말라기의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의문은 < 왜?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어야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숨은 욕심은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누리는 것은 우리안에 < 쉽게 무너질 믿음 >만 만들어 냅니다.

여실히 제자들의 모습에서 < 고난없이 영광 >을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라 거짓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 저들이 알지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에 대해서 말씀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했다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다 알고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사건은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이후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변화산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제자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변화산의 어떤 신기한 해프닝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할 때 주어질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핵심주제이며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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