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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르트 마이어의 마태복음 주석 한글번역판(서울: 진리의깃발, 2017)을 소개한다. 마이어는 경건한 독일 기독교의 상징적인 신학자이다. 역자 송다니엘 목사는 독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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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주석 – Daum 카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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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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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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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태복음 (1 : 1~2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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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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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 옛신앙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초자연적 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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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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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주석 (1장-10장)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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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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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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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4장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4:23, 갈 9:35, 24:14).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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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주석 (상, 하)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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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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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주석(하) – 부흥과개혁사

[책 소개]“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탁월한 마태복음 주석서!”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은 현재까지 한글로 출간된 마태복음 주석 가운데 분량 면에서나 신학적 깊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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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탁월한 마태복음 주석서!”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은 현재까지 한글로 출간된 마태복음 주석 가운데 분량 면에서나 신학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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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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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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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주석

마태복음 제 1장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혀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

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

대적 필요성을 느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

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

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

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

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

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

와 더불어. 선지자 아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

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

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게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

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

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

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

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 은예수야말

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

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

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

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

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자손(* , 휘오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

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

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

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

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

)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

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

서 ‘메시야’란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

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

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

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

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

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

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

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

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

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

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

(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

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

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

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

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

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블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

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

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

실히 드러난다.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

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

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

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

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

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낳고(* ,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

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

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

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

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

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

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

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

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

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

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

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

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

(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

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

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베레 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

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

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

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1:4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

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

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

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

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

(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

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

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

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1:6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

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

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

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

(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

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

입은'(* ,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

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

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1:7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을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

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1:8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

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

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

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

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

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1:9

웃시야3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

와 동일 인물이다.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

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벧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1:11

바벧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벧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

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벧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

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벧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

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벧론

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벧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

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

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

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

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

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

고냐와 바벧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

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1:12

바벧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

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

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

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

(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

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벧을 낳고 – 스룹바벧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

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

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벧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

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

(兄嫂)에게서 스룹바벧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벧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

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벧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1:13-15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

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

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

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

다.

=====1:16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

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

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

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

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

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

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

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

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 )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

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

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

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

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 )

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 )에서 유래했

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뗬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

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1:17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

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

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

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 3의박 14대는 성직 정치

(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

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

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

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

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

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

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

(* )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14(다렐<* >이4, 와우<* >가

6, 다렐<* >이 4)가 되기 때문이다.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

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

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

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

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

(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음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 후토스엔)에서 그 뜻

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

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

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

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

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

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

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

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

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예식을 끝내

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

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

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

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

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

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

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

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

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

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

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

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

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

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

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

두르지 애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

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

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

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

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

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

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

다. 그리고 ‘…하고자하여'(* ,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않기로 서서

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

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

용히 묻어버리려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

려 했던 것이다.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

)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

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 ‘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

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

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

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

도 생각지 못했율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

)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

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

(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

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

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

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

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

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

다(눅 1:26, 27).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앞에 나온 족보(族

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

)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 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

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

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고

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

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

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 텨세타이 데)

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

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

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니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

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

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

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 )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 내지는 짧은 형태

의 ‘예수아'(* ,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

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

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

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벧(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

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

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

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 ,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

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

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

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

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

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

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

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목적과 다윗

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

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

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

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

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

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

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

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

은'(* ,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

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

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1:22-23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

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

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13:35;21:4;26:56;27:9 등)는 사실과 성

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

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

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

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

(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

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

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

을 소유하게 될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

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

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

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 )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 )와

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

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

스'(* )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 ‘파르데노스'(*

)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

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

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

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 )

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

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

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

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

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

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

어이다(사 7:14). 한편’임마누엘'(* ; )은 ‘함께

‘(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 )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 )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

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

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

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

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24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

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

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

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1:25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

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 ),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 )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

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

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

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흣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

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

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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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휘우 다윋 휘우 아브라암

개역개정,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새번역,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또는 ‘나심은’

우리말성경,1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가톨릭성경,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어NIV,1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영어NASB,1 The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영어MSG,1 The family tree of Jesus Christ, David’s son, Abraham’s son:

영어NRSV,1 An account of the genealogy of Jesus the Messiah,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1 βιβλος γενε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υιου δαβιδ υιου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 liber generationis Iesu Christi filii David filii Abraham

히브리어Modern,1 ספר תולדת ישוע המשיח בן דוד בן אברהם׃

성 경: [마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계보 개관(槪觀)]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자손(*, 휘오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 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브라암 에겐네센 톤 아사앜 이사앜 데 에겐네센 톤 야콥 야콥 데 에겐네센 톤 유단 카이 투스 아델푸스 아우투

개역개정,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새번역,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우리말성경,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영어NIV,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NASB,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and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MSG,2 Abraham had Isaac, Isaac had Jacob, Jacob had Judah and his brothers,

영어NRSV,2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 and Isaac the father of Jacob, and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2 αβρααμ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σαακ ισαακ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ακωβ ιακω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ουδαν και τους αδελφ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Abraham genuit Isaac Isaac autem genuit Iacob Iacob autem genuit Iudam et fratres eius

히브리어Modern,2 אברהם הוליד את יצחק ויצחק הוליד את יעקב ויעקב הוליד את יהודה ואת אחיו׃

성 경: [마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 낳고(*,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유다스 데 에겐네센 톤 파레스 카이 톤 카라 에크 테스 다마르 파레스 데 에겐네센 톤 헤스롬 헤스롬 데 에겐네센 톤 아람

개역개정,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새번역,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우리말성경,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가톨릭성경,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영어NIV,3 Judah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whose mother was Tamar, Perez the father of Hezron, Hezron the father of Ram,

영어NASB,3 Judah was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by Tamar, Perez was the father of Hezron, and Hezron the father of Ram.

영어MSG,3 Judah had Perez and Zerah (the mother was Tamar), Perez had Hezron, Hezron had Aram,

영어NRSV,3 and Judah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by Tamar, and Perez the father of Hezron, and Hezron the father of Aram,

헬라어신약Stephanos,3 ιουδ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φαρες και τον ζαρα εκ της θαμαρ φαρε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σρωμ εσρω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ραμ

라틴어Vulgate,3 Iudas autem genuit Phares et Zara de Thamar Phares autem genuit Esrom Esrom autem genuit Aram

히브리어Modern,3 ויהודה הוליד את פרץ ואת זרח מתמר ופרץ הוליד את חצרון וחצרון הוליד את רם׃

성 경: [마1: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 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아람 데 에겐네센 톤 아미나담 아미나담 데 에겐네센 톤 나아쏜 나아쏜 데 에겐네센 톤 살몬

개역개정,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새번역,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우리말성경,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가톨릭성경,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영어NIV,4 Ram the father of Amminadab, Am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영어NASB,4 Ram was the father of Amminadab, Am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and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영어MSG,4 Aram had Amminadab, Amminadab had Nahshon, Nahshon had Salmon,

영어NRSV,4 and Aram the father of Aminadab, and Aminadab the father of Nahshon, and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ρ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μιναδαβ αμιναδα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ναασσων ναασσ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λμων

라틴어Vulgate,4 Aram autem genuit Aminadab Aminadab autem genuit Naasson Naasson autem genuit Salmon

히브리어Modern,4 ורם הוליד את עמינדב ועמינדב הוליד את נחשון ונחשון הוליד את שלמון׃

성 경: [마1: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살몬 데 에겐네센 톤 보에스 에크 테스 라카브 보에스 데 에겐네센 톤 요벧 에크 테스 룯 요벧 데 에겐네센 톤 예싸이

개역개정,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새번역,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우리말성경,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가톨릭성경,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영어NIV,5 Salmon the father of Boaz, whose mother was Rahab, Boaz the father of Obed, whose mother was Ruth, Obed the father of Jesse,

영어NASB,5 Salmon was the father of Boaz by Rahab, Boaz was the father of Obed by Ruth, and Obed the father of Jesse.

영어MSG,5 Salmon had Boaz (his mother was Rahab), Boaz had Obed (Ruth was the mother), Obed had Jesse,

영어NRSV,5 and Salmon the father of Boaz by Rahab, and Boaz the father of Obed by Ruth, and Obed the father of Jesse,

헬라어신약Stephanos,5 σαλ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βοοζ εκ της ραχαβ βοοζ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ωβηδ εκ της ρουθ ωβη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εσσαι

라틴어Vulgate,5 Salmon autem genuit Booz de Rachab Booz autem genuit Obed ex Ruth Obed autem genuit Iesse Iesse autem genuit David regem

히브리어Modern,5 ושלמון הוליד את בעז מרחב ובעז הוליד את עובד מרות ועובד הוליד את ישי׃

성 경: [마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예싸이 데 에겐네센 톤 다윋 톤 바실레아 다윋 에 에겐네센 톤 솔로모나 에크 테스 투 우리우

개역개정,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새번역,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말성경,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 다윗은 원래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가톨릭성경,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영어NIV,6 and Jesse the father of King David.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Uriah’s wife,

영어NASB,6 Jesse was the father of David the king.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by Bathsheba who had been the wife of Uriah.

영어MSG,6 Jesse had David, and David became king. David had Solomon (Uriah’s wife was the mother),

영어NRSV,6 and Jesse the father of King David. And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by the wife of Uriah,

헬라어신약Stephanos,6 ιεσσαι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δαβιδ τον βασιλεα δαβιδ δε ο βασιλευς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ολομωντα εκ της του ουριου

라틴어Vulgate,6 David autem rex genuit Salomonem ex ea quae fuit Uriae

히브리어Modern,6 וישי הוליד את דוד המלך ודוד המלך הוליד את שלמה מאשת אוריה׃

성 경: [마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솔로몬 데 에겐네센 톤 로보암 로보암 데 에겐네센 톤 아비아 아비아 데 에겐네센 톤 아샆

개역개정,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새번역,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사’

우리말성경,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가톨릭성경,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영어NIV,7 Solomon the father of Rehoboam,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bijah the father of Asa,

영어NASB,7 Solomon was the father of Rehoboam,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nd Abijah the father of Asa.

영어MSG,7 Solomon had Rehoboam, Rehoboam had Abijah, Abijah had Asa,

영어NRSV,7 and Solomon the father of Rehoboam, and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nd Abijah the father of Asaph,

헬라어신약Stephanos,7 σολο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ροβοαμ ροβο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βια αβια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σα

라틴어Vulgate,7 Salomon autem genuit Roboam Roboam autem genuit Abiam Abia autem genuit Asa

히브리어Modern,7 ושלמה הוליד את רחבעם ורחבעם הוליד את אביה ואביה הוליד את אסא׃

성 경: [마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를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샆 데 에겐네센 톤 요사팥 요사팥 데 에겐네센 톤 요람 요람 데 에겐네센 톤 오지안

개역개정,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새번역,8 ㉣아삽은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사’

우리말성경,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가톨릭성경,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영어NIV,8 Asa the father of Jehoshaphat, Jehoshaphat the father of Jehoram, Jehoram the father of Uzziah,

영어NASB,8 Asa was the father of Jehoshaphat, Jehoshaphat the father of Joram, and Joram the father of Uzziah.

영어MSG,8 Asa had Jehoshaphat, Jehoshaphat had Joram, Joram had Uzziah,

영어NRSV,8 and Asaph the father of Jehoshaphat, and Jehoshaphat the father of Joram, and Joram the father of Uzziah,

헬라어신약Stephanos,8 ασα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αφατ ιωσαφατ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ραμ ιωρ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οζιαν

라틴어Vulgate,8 Asa autem genuit Iosaphat Iosaphat autem genuit Ioram Ioram autem genuit Oziam

히브리어Modern,8 ואסא הוליד את יהושפט ויהושפט הוליד את יורם ויורם הוליד את עזיהו׃

성 경: [마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오지아스 데 에겐네센 톤 요아담 요아담 데 에겐네센 톤 아카즈 아카즈 데 에겐네센 톤 헤제키안

개역개정,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새번역,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우리말성경,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가톨릭성경,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영어NIV,9 Uzziah the father of Jotham, Jotham the father of Ahaz, Ahaz the father of Hezekiah,

영어NASB,9 Uzziah was the father of Jotham, Jotham the father of Ahaz, and Ahaz the father of Hezekiah.

영어MSG,9 Uzziah had Jotham, Jotham had Ahaz, Ahaz had Hezekiah,

영어NRSV,9 and Uzziah the father of Jotham, and Jotham the father of Ahaz, and Ahaz the father of Hezekiah,

헬라어신약Stephanos,9 οζ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αθαμ ιωαθα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χαζ αχαζ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ζεκιαν

라틴어Vulgate,9 Ozias autem genuit Ioatham Ioatham autem genuit Achaz Achaz autem genuit Ezechiam

히브리어Modern,9 ועזיהו הוליד את יותם ויותם הוליד את אחז ואחז הוליד את יחזקיהו׃

성 경: [마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전까지의 계보]

󰃨 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와 동일 인물이다.

헤제키아스 데 에겐네센 톤 마나쎄 마나쎄스 데 에겐네센 톤 아모스 아모스 데 에겐네센 톤 요시안

개역개정,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새번역,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몬’

우리말성경,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가톨릭성경,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영어NIV,10 Hezekiah the father of Manasseh, Manasseh the father of Amon, Amon the father of Josiah,

영어NASB,10 Hezekiah was the father of Manasseh, Manasseh the father of Amon, and Amon the father of Josiah.

영어MSG,10 Hezekiah had Manasseh, Manasseh had Amon, Amon had Josiah,

영어NRSV,10 and Hezekiah the father of Manasseh, and Manasseh the father of Amos, and Amos the father of Josiah,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ζεκ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μανασση μανασση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μων αμω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ιαν

라틴어Vulgate,10 Ezechias autem genuit Manassen Manasses autem genuit Amon Amon autem genuit Iosiam

히브리어Modern,10 ויחזקיהו הוליד את מנשה ומנשה הוליד את אמון ואמון הוליד את יאשיהו׃

성 경: [마1:1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벨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요시아스 데 에겐네센 톤 예코니안 카이 툿 아델푸스 아우투 에피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개역개정,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새번역,11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

우리말성경,11 요시야는 바벨론으로 잡혀 갈 무렵에 여고냐와 그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가톨릭성경,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영어NIV,11 and Josiah the father of Jec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exile to Babylon.

영어NASB,11 Josiah became the father of Jec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deportation to Babylon.

영어MSG,11 Josiah had Jehoiachin and his brothers, and then the people were taken into the Babylonian exile.

영어NRSV,11 and Josiah the father of Jech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deportation to Babylo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ιωσιας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εχονιαν και τους αδελφους αυτου επι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라틴어Vulgate,11 Iosias autem genuit Iechoniam et fratres eius in transmigratione Babylonis

히브리어Modern,11 ויאשיהו הוליד את יכניהו ואת אחיו לעת גלות בבל׃

성 경: [마1: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고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벨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벨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고냐와 바벨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메타 데 텐 메토이케시안 바뷜로노스 예코니앗 에겐네센 톤 살라디엘 살라디엘 데 에겐네센 톤 조로바벨

개역개정,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새번역,12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우리말성경,12 바벨론으로 잡혀 간 후로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가톨릭성경,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영어NIV,12 After the exile to Babylon: Jeconiah was the father of Shealtiel, Shealtiel the father of Zerubbabel,

영어NASB,12 After the deportation to Babylon: Jeconiah became the father of Shealtiel, and Shealtiel the father of Zerubbabel.

영어MSG,12 When the Babylonian exile ended, Jehoiachin had Shealtiel, Shealtiel had Zerubbabel,

영어NRSV,12 And after the deportation to Babylon: Jechoniah was the father of Salathiel, and Salathiel the father of Zerubbabel,

헬라어신약Stephanos,12 μετα δε την μετοικεσιαν βαβυλωνος ιεχονιας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λαθιηλ σαλαθιηλ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ζοροβαβελ

라틴어Vulgate,12 et post transmigrationem Babylonis Iechonias genuit Salathihel Salathihel autem genuit Zorobabel

히브리어Modern,12 ואחרי גלותם בבלה הוליד יכניה את שאלתיאל ושאלתיאל הוליד את זרבבל׃

성 경: [마1: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벨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벨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벨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조로바벨 데 에겐네센 톤 아비욷 아비욷 데 에겐네센 톤 엘리아킴 엘리아킴 데 에겐네센 톤 아조르

개역개정,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새번역,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야김을 낳고, 엘리야김은 아소르를 낳고,

우리말성경,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가톨릭성경,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영어NIV,13 Zerubbabel the father of Abiud, Abiud the father of Eliakim, Eliakim the father of Azor,

영어NASB,13 Zerubbabel was the father of Abihud, Abihud the father of Eliakim, and Eliakim the father of Azor.

영어MSG,13 Zerubbabel had Abiud, Abiud had Eliakim, Eliakim had Azor,

영어NRSV,13 and Zerubbabel the father of Abiud, and Abiud the father of Eliakim, and Eliakim the father of Azor,

헬라어신약Stephanos,13 ζοροβαβελ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βιουδ αβιου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ιακειμ ελιακει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ζωρ

라틴어Vulgate,13 Zorobabel autem genuit Abiud Abiud autem genuit Eliachim Eliachim autem genuit Azor

히브리어Modern,13 וזרבבל הוליד את אביהוד ואביהוד הוליד את אליקים ואליקים הוליד את עזור׃

성 경: [마1:13-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아조르 데 에겐네센 톤 사돜 사돜 데 에겐네센 톤 아킴 아킴 데 에겐네센 톤 엘리욷

개역개정,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새번역,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우리말성경,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가톨릭성경,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영어NIV,14 Azor the father of Zadok, Zadok the father of Akim, Akim the father of Eliud,

영어NASB,14 Azor was the father of Zadok, Zadok the father of Achim, and Achim the father of Eliud.

영어MSG,14 Azor had Zadok, Zadok had Achim, Achim had Eliud,

영어NRSV,14 and Azor the father of Zadok, and Zadok the father of Achim, and Achim the father of Eliu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αζωρ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σαδωκ σαδωκ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αχειμ αχειμ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ιουδ

라틴어Vulgate,14 Azor autem genuit Saddoc Saddoc autem genuit Achim Achim autem genuit Eliud

히브리어Modern,14 ועזור הוליד את צדוק וצדוק הוליד את יכין ויכין הוליד את אליהוד׃

엘리욷 데 에겐네센 톤 엘레아자르 엘레아자르 데 에겐네센 톤 맡단 맡단 데 에겐네센 톤 야콥

개역개정,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새번역,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우리말성경,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가톨릭성경,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영어NIV,15 Eliud the father of Eleazar,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Matthan the father of Jacob,

영어NASB,15 Eliud was the father of Eleazar,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and Matthan the father of Jacob.

영어MSG,15 Eliud had Eleazar, Eleazar had Matthan, Matthan had Jacob,

영어NRSV,15 and Eliud the father of Eleazar, and Eleazar the father of Matthan, and Matthan the father of Jacob,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λιουδ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ελεαζαρ ελεαζαρ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ματθαν ματθαν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ακωβ

라틴어Vulgate,15 Eliud autem genuit Eleazar Eleazar autem genuit Matthan Matthan autem genuit Iacob

히브리어Modern,15 ואליהוד הוליד את אלעזר ואלעזר הוליד את מתן ומתן הוליד את יעקב׃

야콥 데 에겐네센 톤 요셒 톤 안드라 마리아스 엨스 헤스 에겐네데 예수스 호 레고메노스 크리스토스

개역개정,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새번역,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우리말성경,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영어NIV,16 and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영어NASB,16 Jacob was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by whom Jesus was born, who is called the Messiah.

영어MSG,16 Jacob had Joseph, Mary’s husband, the Mary who gave birth to Jesus, the Jesus who was called Christ.

영어NRSV,16 and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Jesus was born, who is called the Messiah.

헬라어신약Stephanos,16 ιακωβ δε εγεννησεν τον ιωσηφ τον ανδρα μαριας εξ ης εγεννηθη ιησους ο λεγομενος χριστος

라틴어Vulgate,16 Iacob autem genuit Ioseph virum Mariae de qua natus est Iesus qui vocatur Christus

히브리어Modern,16 ויעקב הוליד את יוסף בעל מרים אשר ממנה נולד ישוע הנקרא משיח׃

성 경: [마1: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 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떤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파사이 운 하이 게네아이 아포 아브라암 헤오스 다윋 게네아이 데카테싸레스 카이 아포 다윋 헤오스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게네아이 에카테싸레스 카이 아포 테스 메토이케시아스 바뷜로노스 헤오스 투 크리스투 게네아이 데카테싸레스

개역개정,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새번역,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우리말성경,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모두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가 모두 14대요, 바벨론으로 잡혀 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때까지가 모두 14대입니다.

가톨릭성경,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영어NIV,17 Thus there were fourteen generations in all from Abraham to David, fourteen from David to the exile to Babylon, and fourteen from the exile to the Christ.

영어NASB,17 So all the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re fourteen generations; from David to the deportation to Babylon,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the deportation to Babylon to the Messiah, fourteen generations.

영어MSG,17 There were fourteen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nother fourteen from David to the Babylonian exile, and yet another fourteen from the Babylonian exile to Christ.

영어NRSV,17 So all the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are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David to the deportation to Babylon, fourteen generations; and from the deportation to Babylon to the Messiah, fourteen generations.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ασαι ουν αι γενεαι απο αβρααμ εως δαβιδ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και απο δαβιδ εως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και απο της μετοικεσιας βαβυλωνος εως του χριστου γενεαι δεκατεσσαρες

라틴어Vulgate,17 omnes ergo generationes ab Abraham usque ad David generationes quattuordecim et a David usque ad transmigrationem Babylonis generationes quattuordecim et a transmigratione Babylonis usque ad Christum generationes quattuordecim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כל הדרות מן אברהם עד דוד ארבעה עשר דרות ומן דוד עד גלות בבל ארבעה עשר דרות ומעת גלות בבל עד המשיח ארבעה עשר דרות׃

성 경: [마1: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3의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דוד)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 14(다렐<ד>이 4, 와우<ו>가 6, 다렐<ד>이 4)가 되기 때문이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투 데 예수 크리스투 헤 게네시스 후토스 엔 므네스튜데이세스 테스 메트로스 아우투 마리아스 토 요셒 프린 에 쉬넬데인 아우투스 휴레데 엔 가스트리 에쿠사 에크 프뉴마토스 하기우

개역개정,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새번역,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말성경,18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심은 이렇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가톨릭성경,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어NIV,18 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 His mother Mary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Joseph,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영어NASB,18 Now the birth of Jesus Christ was as follows: when His mother Mary had been betrothed to Joseph,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by the Holy Spirit.

영어MSG,18 The birth of Jesus took place like this. His mother, Mary, was engaged to be married to Joseph. Before they came to the marriage bed, Joseph discovered she was pregnant. (It was by the Holy Spirit, but he didn’t know that.)

영어NRSV,18 Now the birth of Jesus the Messiah took place in this way. When his mother Mary had been engaged to Joseph, but before they lived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from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8 του δε ιησου χριστου η γεννησις ουτως ην μνηστευθεισης γαρ της μητρος αυτου μαριας τω ιωσηφ πριν η συνελθειν αυτους ευρεθη εν γαστρι εχουσα εκ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라틴어Vulgate,18 Christi autem generatio sic erat cum esset desponsata mater eius Maria Ioseph antequam convenirent inventa est in utero habens de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18 והלדת ישוע המשיח כה היתה מרים אמו ארשה ליוסף ובטרם יבא אליה נמצאת הרה לרוח הקדש׃

성 경: [마1: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후토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 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요셒 데 호 아네르 아우테스 디카이오스 온 카이 메 델론 아우텐 데이그마티사이 에불레데 라드라 아폴뤼사이 아우텐

개역개정,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새번역,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우리말성경,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사람들 앞에 수치를 당하게 될까 봐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영어NIV,19 Because Joseph her husband was a righteous man and did not want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he had in mind to divorce her quietly.

영어NASB,19 And Joseph her husband, being a righteous man and not wanting to disgrace her, planned to send her away secretly.

영어MSG,19 Joseph, chagrined but noble, determined to take care of things quietly so Mary would not be disgraced.

영어NRSV,19 Her husband Joseph, being a righteous man and unwilling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planned to dismiss her quietl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ιωσηφ δε ο ανηρ αυτης δικαιος ων και μη θελων αυτην παραδειγματισαι εβουληθη λαθρα απολυσα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19 Ioseph autem vir eius cum esset iustus et nollet eam traducere voluit occulte dimittere eam

히브리어Modern,19 ויוסף בעלה היה איש צדיק ולא אבה לתתה לבוז ויאמר בלבו לשלחה בסתר׃

성 경: [마1: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 하여'(*,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타우타 데 아우투 엔뒤메덴토스 이두 앙겔로스 퀴리우 캍 오나르 에파네 아우토 레곤 요셒 휘오스 다윋 메 포베테스 파랄라베인 마리암 텐 귀나이카 수 토 가르 엔 아우테 겐네덴 에크 프뉴마토스 에스틴 하기우

개역개정,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새번역,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말성경,20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할 때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라. 마리아가 가진 아기는 성령으로 임신된 것이다.

가톨릭성경,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영어NIV,20 But after he had considered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영어NASB,20 But when he had considered this, behold,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saying, ”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as your wife; for the Child who has been conceived in her is of the Holy Spirit.

영어MSG,20 While he was trying to figure a way out, he had a dream. God’s angel spoke in the dream: “Joseph, son of David, don’t hesitate to get married. Mary’s pregnancy is Spirit-conceived. God’s Holy Spirit has made her pregnant.

영어NRSV,20 But just when he had resolved to do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as your wife, for the child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20 ταυτα δε αυτου ενθυμηθεντος ιδου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κατ οναρ εφανη αυτω λεγων ιωσηφ υιος δαβιδ μη φοβηθης παραλαβειν μαριαμ την γυναικα σου το γαρ εν αυτη γεννηθεν εκ πνευματος εστιν αγιου

라틴어Vulgate,20 haec autem eo cogitante ecce angelus Domini in somnis apparuit ei dicens Ioseph fili David noli timere accipere Mariam coniugem tuam quod enim in ea natum est de Spiritu Sancto est

히브리어Modern,20 הוא חשב כזאת והנה מלאך יהוה נראה אליו בחלום ויאמר יוסף בן דוד אל תירא מכנוס אליך את מרים אשתך כי אשר הרה בה מרוח הקדש הוא׃

성 경: [마1:2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텤세타이 데 위온 카이 칼레세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순 아우토스 가르 소세이 톤 라온 아우투 아포 톤 하마르티온 아우톤

개역개정,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새번역,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예수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

우리말성경,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영어NIV,21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NASB,21 “She will bear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Jesus, for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MSG,21 She will bring a son to birth, and when she does, you, Joseph, will name him Jesus–‘God saves’–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영어NRSV,21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for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εξεται δε υιον και καλεσεις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ν αυτος γαρ σωσει τον λαον αυτου απο των αμαρτιω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21 pariet autem filium et vocabis nomen eius Iesum ipse enim salvum faciet populum suum a peccatis eorum

히브리어Modern,21 והיא ילדת בן וקראת את שמו ישוע כי הוא יושיע את עמו מעונותיהם׃

성 경: [마1:2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자기 백성(*,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투토 데 홀론 게고넨 히나 플레로데 토 레덴 휘포 퀴리우 디아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개역개정,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새번역,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우리말성경,22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영어NIV,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영어NASB,22 Now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was spoken by the Lord through the prophet:

영어MSG,22 This would bring the prophet’s embryonic sermon to full term:

영어NRSV,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had been spoken by the Lord through the prophet:

헬라어신약Stephanos,22 τουτο δε ολον γεγονεν ινα πληρωθη το ρηθεν υπο του κυριου δια του προφητου λεγοντος

라틴어Vulgate,22 hoc autem totum factum est ut adimpleretur id quod dictum est a Domino per prophetam dicentem

히브리어Modern,22 ותהי כל זאת למלאת את אשר דבר יהוה ביד הנביא לאמר׃

성 경: [마1:22-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 13:35;21:4; 26:56;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성 경: [마1:2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이두 헤 파르테노스 엔 가스트리 헼세이 카이 텤세타이 휘온 카이 칼레수신 토 오노마 아우투 엠마누엘 호 에스틴 메데르메뉴오메논 멛 헤몬 호 데오스

개역개정,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새번역,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사 7:14(칠십인역)

우리말성경,23 “처녀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를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사7:14

가톨릭성경,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영어NIV,23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they will call him Immanuel”–which means, “God with us.”

영어NASB,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SHALL BEAR A SON, AND THEY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which translated means, ” GOD WITH US.”

영어MSG,23 Watch for this–a virgin will get pregnant and bear a son; They will name him Emmanuel (Hebrew for “God is with us”).

영어NRSV,23 “Look,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ιδου η παρθενος εν γαστρι εξει και τεξεται υιον και καλεσουσι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εμμανουηλ ο εστιν μεθερμηνευομενον μεθ ημων ο θεος

라틴어Vulgate,23 ecce virgo in utero habebit et pariet filium et vocabunt nomen eius Emmanuhel quod est interpretatum Nobiscum Deus

히브리어Modern,23 הנה העלמה הרה וילדת בן וקראו שמו עמנואל אשר פרושו האל עמנו׃

성 경: [마1: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에게르데이스 데 호 요셒 아포 투 휲누 에포이에센 호스 프로세탘센 아우토 호 앙겔로스 퀴리우 카이 파렐라벤 텐 귀나이카 아우투

개역개정,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새번역,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우리말성경,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가톨릭성경,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영어NIV,24 When Joseph woke up, he did what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Mary home as his wife.

영어NASB,24 And Joseph awoke from his sleep and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commanded him, and took Mary as his wife,

영어MSG,24 Then Joseph woke up. He did exactly what God’s angel commanded in the dream: He married Mary.

영어NRSV,24 When Joseph awoke from sleep,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commanded him; he took her as his wife,

헬라어신약Stephanos,24 διεγερθεις δε ο ιωσηφ απο του υπνου εποιησεν ως προσεταξεν αυτω ο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και παρελαβεν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24 exsurgens autem Ioseph a somno fecit sicut praecepit ei angelus Domini et accepit coniugem suam

히브리어Modern,24 וייקץ יוסף משנתו ויעש כאשר צוהו מלאך יהוה ויקח אליו את אשתו׃

성 경: [마1:2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카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헤오스 후 에테켄 휘온 카이 에칼레센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순

개역개정,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새번역,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첫 아들을’

우리말성경,25 그러나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영어NIV,25 But he had no union with her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gave him the name Jesus.

영어NASB,25 but kept her a virgin until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Jesus.

영어MSG,25 But he did not consummate the marriage until she had the baby. He named the baby Jesus.

영어NRSV,25 but had no marital relations with her until she had borne a son; and he named him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ουκ εγινωσκεν αυτην εως ου ετεκεν τον υιον αυτης τον πρωτοτοκον και εκαλεσε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5 et non cognoscebat eam donec peperit filium suum primogenitum et vocavit nomen eius Iesum

히브리어Modern,25 ולא ידעה עד כי ילדה בן את בכורה ויקרא את שמו ישוע׃

성 경: [마1:2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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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태복음 (1 : 1~25) 주석

마태복음 1장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ㅇ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혀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아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게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ㅇ자손(휘오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ㅇ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ㅇ세계(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 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ㅇ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

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

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

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

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

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ㅇ낳고(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

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

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

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

고 있다.

ㅇ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

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

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

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

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

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

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

(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

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

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

할 것임을 나타낸다.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ㅇ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

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

;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

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

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

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

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신

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

(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

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

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ㅇ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

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

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 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

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ㅇ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

(민 7:12).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ㅇ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

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

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

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

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

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

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ㅇ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

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

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

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 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ㅇ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

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7:12-

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

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

(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ㅇ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

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11:3)라고 표현하여 그리

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

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ㅇ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

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

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

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

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

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ㅇ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을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

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ㅇ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

: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

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

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

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

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

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

(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

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

장 타당한 듯하다(17절).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ㅇ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

:12;왕하 15:13, 17-20비교) 와 동일 인물이다.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ㅇ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

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

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벧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

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

(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

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

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ㅇ바벧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벧론 유수

(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

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

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ㅇ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

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

(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벧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

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벧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

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

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

(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

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벧론은 여호야긴 대

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

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

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

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

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

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

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

고냐와 바벧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

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ㅇ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

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

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

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

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

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

이다.

ㅇ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

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

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

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

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ㅇ스알디엘은 스룹바벧을 낳고 – 스룹바벧을 스알디엘

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

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벧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

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

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

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벧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

바벧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

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

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벧은 영광

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ㅇ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

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

(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

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

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ㅇ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런

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

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

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

(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

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

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

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

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

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ㅇ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

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

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

(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

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

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

해지고 있는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

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

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

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

라식 음역이라고도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

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뗬 것이 되었

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ㅇ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

(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ㅇ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

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

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

치(Monarchy), 제 3의박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

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

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

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

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

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

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

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

價)가 도합14(다렐이4, 와우가6, 다렐이 4)가 되기 때문이

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

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

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

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

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

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

(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

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

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

(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

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

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ㅇ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음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

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

계(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후토

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

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

인 것이다.

ㅇ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

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

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

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

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

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

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

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

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ㅇ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

(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

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예식을 끝내고 동

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

었던 것이다.

ㅇ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

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

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

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

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

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

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

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

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

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

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

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

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또

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

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

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

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

11;골 1:15-19).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ㅇ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디카

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

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

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

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애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

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ㅇ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

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

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

(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

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

(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

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

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

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메델론)가 적

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

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하여'(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

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않기로 서서히 결심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

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ㅇ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

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

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

(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 ‘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

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

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

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

각지 못했율을 것이다.

ㅇ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

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

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

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

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

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

(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

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

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

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

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

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ㅇ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

이란,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

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

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ㅇ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

자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

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

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비

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

어나게 했을 것이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ㅇ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

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

리니'(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

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 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

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니 “기묘자(奇妙者)요, 모사

(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ㅇ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

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

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

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

(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ㅇ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

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

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

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

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벧(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

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

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

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ㅇ자기 백성(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

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

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

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

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

의 백성’을 의미한다.

ㅇ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

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

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

께서 오신 근본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

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

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

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

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

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

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

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

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

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

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

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

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ㅇ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

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

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

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

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

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

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 하셨

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

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

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

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ㅇ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

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

15, 17, 23;4:14;8:17;12:17;13:35;21:4;26:56;27:9 등)는 사

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

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

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ㅇ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

(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

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

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

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

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

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

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

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

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

(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

-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

(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

하게 될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

(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

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

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

을 보존하실 것이다(9:7).

ㅇ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

(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

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

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

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

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

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

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

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

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

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

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

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

한다.

ㅇ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

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

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

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

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

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

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

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

(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

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

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

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

게 되는 것이다.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ㅇ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

(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

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

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

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

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

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ㅇ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

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

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

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

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

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

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

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

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흣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

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

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 춘천 대우인력

메모 :

마태복음 주석(상)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번에 강대훈 교수가 을 저술한 것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저자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좋은 작품을 읽게 된 기쁨을 다른 분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첫째, 이 책은 한국 교회 역사상 현재까지 한국인에 의해 저술된 마태복음에 대한 주석 가운데 양과 질, 분량과 수준 양면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1,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주석은 기존 마태복음의 중요 주석들과 논문과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관련된 모든 중요한 논제는 거의 모두 논의되고 있고, 각 주제를 다루는 정상급 전문 학자들의 해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좋은 주석을 쓰는 데 이와 같은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서론과 본문 주석의 과정 속에서 매 문장은 거의 한 땀, 한 땀 정성이 깃든 장인의 작품처럼, 학자적 열정과 학문적 성실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둘째, 이 책은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 신학과 목회의 관계, 학문과 실천의 관계에 있어 좋은 모범이 됩니다. 주석이 너무 학문적으로 전문적이기만 해서 학자들의 관심사에만 치우쳐 있다든지, 내용이 너무 설교자를 고려해서 적용 중심의 가벼운 논의에만 치우치지 않고, 학문적으로는 건실하면서도 목회자가 성경 연구를 통한 경건이나 설교에도 도움이 될 정도로 빛과 열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설교집이나 묵상집이 아닌 주석이므로 무게 중심은 성경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비중이 높지만, 그래도 언제나 교회적이고 목회적인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강대훈 교수는 마태복음으로 최근에 학위를 마친 소장 학자이면서도 이전에 선교단체 간사와 담임 목회 경험 등이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셋째, 이 책은 마태복음 주석사에 있어 NICNT 주석 시리즈의 R. T. 프랜스의 마태복음 주석, BECNT 시리즈의 데이비드 터너의 마태복음 주석 등 외국의 좋은 주석 시리즈에 나오는 세계 최고 수준의 마태복음 주석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좋은 주석입니다. 아무리 분량이 많고 수준이 국내에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세계 학계에 통용되는 마태복음 주석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좋은 주석이라 평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의 수준은 기존의 세계적인 마태복음 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유익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은 세 부류의 독자들에게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첫째, 성경학자들에게는 이 책이 주석 집필에 대한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성경 연구를 통해 학위를 받고, 또한 신학교에서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성경학자들에게 있어 자신이 전공한 성경을 중심으로 좋은 성경 주석을 집필하는 것은 일종의 꿈이자 신성한 책무라 생각됩니다. 이 마태복음 주석이 많은 신구약 성경학자들이 좋은 주석 집필을 위한 동기 부여와 자극제가 되어 66권 성경 각 권에 대한 좋은 주석이 계속 한국 성경학자들에 의해 저술되면 좋겠습니다.둘째, 목회자들에게 이 책은 마태복음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안심하고 교과서처럼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좋은 주석이 나름대로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이 책은 가장 최신에 쓰인 주석이므로 기존의 모든 주석을 참고했고, 또한 한국 학자에 의해 직접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더 한국 목회자의 상황과 정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셋째, 일반 성도들이 마태복음을 공부하고자 할 때, 마태복음에 대한 귀납적 성경공부 교재를 공부하거나 마태복음 설교를 읽어도 되지만, 이런 좋은 주석을 읽게 되면 성경공부의 질이 달라집니다. 좋은 주석을 읽는 것은 가장 좋은 성경공부 방법입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성도들의 마태복음 공부의 수준을 몇 단계 높여 줄 것입니다.강대훈 교수의 을 통해 마태복음의 진리가 조국 교회의 강단에서 더 넓고 깊게 울려 퍼지길 기대합니다. 닫기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4장

24:1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여기서 ‘성전’(히에론)은 문자적으로 성전 경내, 곧 거룩한 경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셀돈’은 제 2 과거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뒤이어 나오는 ‘가실 때에’(에포류에토, 서술적 미완료 시상)보다 앞선 시제로 볼 수 있으나 전체 문맥상 두 행동이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떠나고 계셨으며(여셀돈) 그렇게 나아가실 때 성전 건물 옆을 지나가셨다(에포류에토). 따라서 1, 2절의 내용은 성전 뜰에서 나눈 대화로 볼 수 있다. 즉 21:23에 예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성전을 ‘나왔다’함은 21:23 이후 행해진 모든 가르침은 줄곧 성전 뜰 안에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7화(禍) 선포(23장) 직후 영영히 성전 밖으로 나와 그 곳을 떠나가셨다.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평행구인 눅 21:5에서는 ‘제자’ 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킨 것으로 표현한다. 더구나 같은 평행구인 막13:1에서는 ‘제자들 증 하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켜 보인 것은 앞서 23:38에서 언급한 예수의 선언과 관계가 있다. 즉 당시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그 웅장한 성전은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선언한 성전의 ‘황폐와 버림 받음’에 대한 예언은(23:38)쉽게 믿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성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정말 황폐하고 버림받게 됩니까? ‘라는 말없는 물음을 했을 것이다(막 13:11).

성전 건물들(타스 오이코 도마스 투 히에루). 이 성전 건물은 원래 B.C.19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에(2:1) 의해 착공된 것으로 비록 제 2성전을 개축할 의도로 시작한 것이기는 하나 거의 신축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제 3성전이라고 불리운다. 즉 이 건물은 솔로몬에 의한 제 1 성전(왕상 6:1-8:11, B.C. 959-586)과 스룹바벨에 의한 제 2성전(포로기 이후 B.C. 520년경에 재건)에 이은 새 성전 건물이었다. 이 제 3성전은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의 기나긴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중간에 봉헌식(착공 9년만에)을 하는 등 나름대로는 화려(華麗)한 외모로 치장되기도 했다(요 2:20). 실로 제 3성전은 유대 출신 제자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으며 마치 눈덮인 산처럼 아름다움 것이었다(Jos, Wars 5, 6).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전은 거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졌으며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꾸며졌다고 한다.

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서는 ‘말씀하셨다’로 이 부분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절에서 질문 내용이 전혀 언급 되지 않았는데 ‘대답’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1절 주석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같은 질문을 제자들이 던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2절에서 답변하신 내용이 1절 주석 끝 부분에 가정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절하다.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예수께서는 지금 화려하고 장엄한 자태를 자랑하는 성전 건물의 외형을 사실 그대로 긍정하셨다. 그리고 이같은 인정을 통해 뒤이어지는 당신의 경고를 더욱 강렬한 뉘앙스(nuance)로 대비시키셨다. 한편 공동번역 성서는 이러한 대비적 표현에 맞추어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성전 건물에 사용된 돌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용된 돌 하나의 크기는 25×12×8 규빗 (1 규빗은 약 45.6cm)의 상당히 큰 것으로서 누가 복음에서는 ‘미석’, 즉 ‘아름다운 돌’이라고 묘사한다(눅 21:5). 그런데 이러한 돌들이 돌위에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회복 불가능의 완벽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에도 여러번 언급된 바 있다(렘 26:6, 18, 미 3:12, 학2:15). 그런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는 심판은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A.D. 63년에 제 3성전이 완공된 후 겨우 7,8년 후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성전의 허무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렇게 성전 파괴에 대한 단호한 표현을 통하여 24장에 소개될 종말에 관한 메시지의 긴박성과 그 파멸적(破滅的)인 성격을 웅변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러한 언급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있을 극렬한 심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시고 있다.

24:3 없음.

24:4 없음.

24:5 없음.

24:6 없음.

24:7 없음.

24:8 없음.

24:9 없음.

24:10 시험에 빠져(스칸달리스데손타이). ‘걸려 넘어지게 하다’, ‘죄를 짓게 하다’ 또는 ‘노하게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새번역에서는 ‘믿음을 잃고’라고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결국 박해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다(살후 2:3). 이처럼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면 교회의 외적인 풍랑과 더불어 교회 내부로부터의 분란이 발생하게 될것이다. 이때는 인내와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벧전 4:12).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새번역과 공동번역 모두 ‘서로 배반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분열의 모습이다. 여기서 ‘서로’(알렐루스)는 상호대명사로서 쌍방간의 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똑같이 배신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의 간교(奸巧)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되면 사랑과 하나됨의 공동체인(요 15:17) 교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같은 교회 내부의 분란이야말로 성도가 맞는 가장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징조이다.

24:11 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타이). 여기 이들은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과 능통한 언변(言辯)을 지녔을지라도 그 가르침과 행위가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이다(계 13:11 ff). 실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는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여러 번 주어져 왔는데(7:15, 24:5, 고후 11:13, 딤후 2:17, 18), 그들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 등의 모습으로 교회의 질서와 진리를 와해시키는데 힘을 쏟았다(행 20:30, 갈 1:7-9, 골 2:18-23). 실로 기독교회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수없이 유린(蹂躪)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특(邪慝)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살후 2:8-12).

24:12 불법(아노미아).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이라는 미명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현상’이라고 지칭한다.

사랑이 식어지리라. 여기서 ‘식어지다’(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 또는 ‘차가워지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사랑’(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과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상호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다. 여하튼 모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 만다(고전 13장).

24:13 끝까지 견디는 자. 여기서의 ‘끝’은 5절부터 나열한 여러가지 재난과 박해 그리고 공동체의 분열이 있을 고난의 기간이 끝날 때를 말한다. 그리고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은 ‘굳게 서다’, ‘참아내다’는 뜻으로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적 신앙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텨나감으로써 끝내 승리, 쟁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뢰하며 온갖 실망이 겹쳐 절대 절망에 이르렀어도 희망을 갖고, ‘아노미 현상’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곧 견디는 자이다.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견디는 자의 보상은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세상의 끝날에 얻게 되는 천국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은 곧 세상의 완성이므로 그때까지 견딘 자는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천국 백성의 자격을 갖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종말적 심판의 때에 얻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2) 현세의 구원에 대한 의미도 생각할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상 끝에 나타날 종말적 징조는 예수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았고, 또한 종말의 징조는 역사 속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지적했던 그런 징조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종말적 최후의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현실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성도에게 매일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process)으로 볼 때 날마다 겪는 새로운 여러가지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일 구원을 고대(苦待)하며 필요로 하는 자는 날마다 종말적 자세로 사는 것이다.

24:14 천국 븍음.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4:23, 갈 9:35, 24:14).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자신을 지칭한다(요 1:14, 고후 5:18). 한편 복음의 요체는 ‘천국’ 곧 모든 나라와 모든 인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이다(3:2, 4:23).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여기 ‘온 세상’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종말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라는 사상은 사도들이 계승한 사상이었고 신약 성경 안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눅 4:5, 행 11:28, 17: 6, 31, 19:27, 롬 10:18, 계 3:10, 12:9, 16:14). 한편 당시 ‘온 세상’을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영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행 1:8, 롬 15, 23). 그러나 본문에서의 ‘온 세상’이란 좀 더 포괄적이고 광의적(廣義的)인 의미로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지역, 곧 전세계의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모든 국가와 개개인들이 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해야 한다는 뜻인가? 안타깝게도 그런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고 말했을 때 온 세상 사람들 개개인에게 다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다음 언급을 보면 바울은 세계 최대 도시인 로마에 아직 간 적이 없고 서버나에도 앞으로 갈 예정이었다.

바울은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골 1:23)라고 했지만 그것은 개개인들에게 복음이 다 전파되었다거나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회개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요 지역에 복음의 거점이 마련되고 이제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 1982)에 의하면, A.D. 100년경 로마제국의 인구는 약 1억 8천만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약 백만 명 정도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총 인구의 0.6% 정도만 복음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었다고 말하였다.

21세기인 지금 과연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는가? 지난 20세기 동안에 기독교는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1세기 말의 기독교인 수는 인구 1억 6천만 중에 겨우 1백만 명에 불과했다. 일천 년 후에는 인구가 약 2억 6천9백만 명으로 늘었고 그중 5천만 명이 그리스도인으로 전체 인구 중 18%를 차지했다. 그러나 1900년에는 전체 인구의 1/3이 기독교인이었다. 20세기에 와서 기독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는데, 그래도 역시 1/3 정도에 머물러 있으며 이슬람 같은 종교와 민족적 벽을 넘지 못하고 또한 세속주의의 영향 때문에 신자의 증가율은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다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까지 기독교의 성장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몇 나라에서만 일어났다. 그러나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같은 제3세계의 기독교는 1900년도의 8천3백만 명에서 1980년도에는 6억 4천3백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불과 80년 사이에 8배가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복음이 한두 나라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제는 전 세계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상 처음으로 기독교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적이 되었으며 그 영역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국가나 지역들이 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라는 말을 “지리적으로 빠짐없이” 혹은 “모든 개인들에게”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날은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의 의미를 좀더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특별한 방법으로 삽시간에 온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결정적인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 말고 오늘 우리의 사명을 다 하라는 것이다.

24:15 다니엘의 말한 바. 본문은 단 9:27, 11:31, 12:11의 70인역(LXX)에 의한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멸망의 가증(可憎)한 것. 이는 단 11:31, 12:11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은 여호와 경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를 폐하고 우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즉 성전을 더럽히겠다는 말이다.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가증한 것’은 여호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신성 모독과 연관된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브델뤼쏘마이’으로서 원뜻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 ‘혐오스럽다’이다. 실로 하나님께 우상과 거짓 사술 등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멸망의’란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다니엘서의 이 말은 분명 .B.C.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의미한다(마카비 서 1, 54-64, Josephus, Antiq., 5:4).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통해 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거룩한 곳이 황폐되고 치욕당할 것이라 하셨다. 이런 사실로 인해 (1) 혹자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우스 갈리굴라(Caligula) 황제(A.D.37-41년)가 그의 상(像)과 기(旗)를 성전에 세우려 했던 계획을 본 예언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과 예수가 말씀하신 내용과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다. (2)또다른 학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눅 21:21, Bengel, Bruce).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같은 독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그의 경배와 동일한 차원의 경의를 그 기에 표해야 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ephus, B.F.,Ⅵ. 6) A.D.70년. 예루살렘을 훼파(毁破)한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로마군기를 성전 동편 문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미 수년간 로마 군대의 기를 보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말(一抹)의 새로운 징조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예언과 본 견해를 연관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A.D.70년 이전 열심 당원들(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Alford). 그 당시 열심 당원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하고 매일의 제사를 훼방했으며,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제사장을 임명하였(Jos., Wars, 147-57, 162-92, 334-44). 요세푸스는 그들의 만행(蠻行)이 바로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한편 당시 그들의 만행 동안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곳을 달아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Lane, Gaston). 그러나 이 견해 역시 확정적으로 인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한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처참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의 예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증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내용이 갖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9-12절) 교회 분열의 혼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때 신앙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전(殿)인 인간의 내면을 공격하며 파괴하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살후 2:4, 8).

거룩한 곳(토포하기오). 앞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예루살롑 성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사 6013, 2 Macc 1:29, 2:18). 그러나 본문에는 정관사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한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회당까지도 포함한 신앙의 중심지들로 보기도 한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都城)인 예루살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앙인의 마음속이 될 수도 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평행구를 이루는 눅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표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거룩한 성전에 대한 유린을 멸망과 연결시킨다.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언한 바를 어떤 영적 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感知)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이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그 보다는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고지(告知), 즉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단 9:25, 12:10)는 말처럼 예수께서 친히 경고적, 교훈적 메시지로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24:16 유대에 있는 자들은. 닥쳐올 재난이 단지 예루살렘에만 국한(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 구절이다.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유대인들에게는 산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시 11:1). 또한 구약시대 때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고(출 19:1-2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다(출 3:1-12). 그리고 예수의 핵심 설교인 산상 수훈도 역시 산에서 이루어졌다(5-7장), 지금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는 곳도 바로 산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산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반영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여하튼 이 경고에 의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한 적이 있다. 즉 A.D.68년 로마의 베스파시안(Vespasian)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城內)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모두 요단 강 계곡에 위치한 베레아 지역의 펠라(Pella)라는 곳으로 피신함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Euesebius, H.E., 5:3). 한편 본문의 이와같은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거룩한 곳이 더럽혀지고 성전이 유린당했을 때, 즉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속히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도망은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유대인들의 가옥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하여, 주로 기온이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場)으로 활용되었다(신 22:8, 막 2:4 행 10:9). 그리고 이 지붕에는 지상과 연결된 두 통로가 있었는데, 그하나는 지붕에서 집 외부로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붕에서 그 집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집 안에 … 내려가지말며. 이는 재난을 만난 사람이 취할 태도로서 결코 집 안 귀중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먼저 천하보다 귀한 생명부터 보존하라는 교훈이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각종 난리와 폭란이 겹쳤는뎨(6절), 이때 민첩한 도피가 필요했었다고 한다. 적어도 재난을 만난 자는 롯의 처를 생각해야만 한다(창 19:26, 눅 17:32)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거처가 있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성 밖에 마련하였다. 그리고 일터에 나갈 때는 두터운 외투는 집 안에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의복으로 나섰다고 한다. 재난의 때에는 그 겉옷을 취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을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급박(急迫)한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원을 향한 단호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다. 악으로부터의 확연한 갈라섬, 비신앙에서 돈독한 신앙으로 돌아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24:19 아이 배 자들(가스트리 에쿠사이스). 여기서 ‘가스트리’는 배를 나타내기도 하고 자궁(Womb)을 뜻하기도 한다(1:8, 2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계 12:2). 그리고 ‘여쿠사이스’는 ‘소유’, ‘보관’, ‘결혼’, ‘사랑의 소유’, ‘즐긴다’, ‘필요하다’, ‘궁핍하다’ 등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자궁’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임신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1:18, 23, 눅 21:23, 계 12:2 등). 실로 임신한 사람과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이는 홀몸이 아니다. 즉 자신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확연하다. 이는 여자에 대한 저주도, 임신부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날의 고통이 남을 돌볼 만큼 여유있게 대처할 만한 것이 못되기에 미리 미리 종말의 때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날이 오면 민첩하게 구원의 일에 몰두하도록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며, 다른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A.D. 8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미처 도피하지 못한 유아와 어머니들이 예루살렘을 가득 메웠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아사자(餓死者)와 고통받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한다(Jos, Wars, V 10:3).

화가 있으리로다. 여기서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은 저주 선언이 아니라 동 정을 표시하는 탄식문이다. 즉 ‘아 ! 안되었도다’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오 ! 슬프도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본래 ‘우아이’라는 뜻은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화를 입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불쾌하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의 표현이 더 적절하다.

24:20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과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활동하는데 가장 어려운 때이다. 겨울에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질고 식량 확보도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취약(脆弱)한 계절이었다. 또 안식일에는 종교적 행사에 주력해야 했으며, 율법적으로 1.8 km 이상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피신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B.C. 168년 수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공이 있던 날도 안식일이어서 유대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살육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본 절에서 앞으로 닥쳐올 예루살렘 멸망(A.D. 70년)과 재림시의 환난을 함께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안식일 준수가 예루살렘 멸망 때 까지는 물론이고 세상 끝 날까지 존속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안식일 계명이 폐하여졌다고 하는 주장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한편 그랜드 주석은 “아직까지 율법의 규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도망하는 것은 부적합”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을 동정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주석하고 있다. 또한 헨드릭슨 주석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에는 곤궁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야말로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의 말씀이나 행동도 중요한 의미가 없이는 행하지 않으신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폐하신 날을 다시 중요하게 취급하고 준수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마태복음은 A.D. 50년대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을 준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폐하여진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마지막 날까지 안식일 준수는 꼭 필요한 일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나 환난 중 도망하는 일이 평화스럽게 쉬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의 정신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들에게 그런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짧게는 예루살렘 멸망시까지, 길게는 세상 끝 날까지 안식일은 철저히 지켜야 하며 안식일 준수는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24:21 이는 …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본 절은 ‘이는’(가르, ‘왜냐하면’)이라는단어를 사용하여 17-20절에 걸쳐 피난하라고 권면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기 제시된 ‘환란’(둘립시스)은 단 다니엘의 내용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즉 다니엘은 ‘건국 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표현한 것에 견주어 예수께서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 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은 피상적 예고가 아니라 역사롤를 통해 밝혀진 진실이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예루살렘의 함락(陷落)에 관한 보고에서 예루살렘 함락 당시 유월절 절기에 참석키 위해 수많은 민중이 그 성내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군 침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10만명,포로가 9만 7천여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Wars, 9:3). 그에 덧붙여 그곳이 각종 질병과 기근(饑饉)으로 고통당할 뿐 아니라 진쟁의 참화로 너무나 참혹하여 장례식도 치릍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여인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끔찍한 참변(慘變)은 미래의 역사에 도래할 마지막 대환난의 전조(前兆)이자 예표가 된다(계 11:3, 11, 12:6, 14).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날들’ 앞에 나열한 환난의 날에 겪게 될 고난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감하지’에 해당하는 원어 ‘에콜로보데산’은 ‘지다’는 뜻인 ‘콜로보오’의 제 2조건문으로서 비록 미래와 시점에 와 있으나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특질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고통의 양을 큰 묶음으로 줄여 주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한 공동번역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이다. 여기서 그 환난의 날에 대한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마지막 날에 준비된 환난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이지 않는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여기서 ‘모든 육체’는 단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전 인류로도 보아야 한다. 이는 예언의 이중성(현재, 미래)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을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재난의 혹독성과 파괴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 감하시리라. 이 말은 ‘택하신 자들’을 위한 약속이다. 그렇게 무서운 환난이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환난은 유동적(流動的)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약속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상기시킨다. 즉 의인 열명만 있어도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비슷하다(창 18:32). 한편 여기서 ‘택하신 자’(에클레크토스)란 ‘뽑혀진’(chosen, selected)의 뜻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 모두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선민 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앞의 13절의 내용처럼 환난속에서 끝까지 견디며, 12절의 역설적인 의미처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변치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들로 인해 비록 세상이 파멸로 달음질 칠지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이 도리어 완성과 완전한 구원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개방적으로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앞에서 교회의 파괴를 말하면서 13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기서도 세상의 환난을 가장 무섭게 묘사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난의 예고는 멸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희망의 예언이라고 볼 수있다.

24:23 그 때에. 이 말은 앞 내용과 직접 연결되어지나, 곧바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시점에 과연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한 서언적 표헌이다(Chrysdstom). 한편 여기서부터 35절까지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제 현상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 번째 묶음이다. 특별히 이 셋째번 묶음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지금까지의 초점에서 발전하여 세상 종말이라는 큰 흐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물론 예수의 예언은 항상 이중적(현재, 미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을 절대시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환란의 때에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다(5절). 자칭 메시아가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에 재난이 많을수록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한편 본 절은 5절의 표현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5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소문에 의해서 여기저기 혼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에게 안내하는 자들의 무리가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이 바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모여들 것이나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의적이 구원 개념과 유사한 절대자를 찾아 헤맬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의 재림으로 모든 것을 밝히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교활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의 권위와 이름과 능력을 도용하여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자들이며(5절 참조), 거짓 선지자는 그릇된 영적 탁월성과 거짓 사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는 자를 가리킨다(7:15 참조). 이런 자들에게는 선택받은 자들 조차도 속을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표적(標的)과 기사(奇事)를 통해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적’(세메이온) 말은 ‘표징’, ‘표시’(sign), ‘증거’, ‘상징’(indication), ‘전조’, ‘징조’(protent) 또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증명하는 각종 이적을 가리킨다. 또한 ‘기사’(테라스) 역시 ‘경이’, ‘놀라운 일’등의 뜻으로 ‘표적’과 거의 흡사한 의미이나 ‘표적’이 주로 인간과 관계된 외형적 증거라면 ‘기사’는 주로 자연 만물과 관계된 내면적 능력이나 영향력 등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주로 같이 연결하여 쓰여졌다(요 4:48, 행 2:22, 4:30, 살후 2:9, 히 2:4). 물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잡은 자, 곧 사탄도 악의적 측면에서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이 말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활동함을 암시한다.그리고 가능하면 택하심 받은 이들도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하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 … ’라고 번역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을 속이려하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할 수만 있으면’(에이 뒤나톤)이란 미혹하는 이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만약 가능 하기만 하다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심지어 선택받은 자도 미혹(迷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성도들을 ‘반드시’ 미혹시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택한 자, 곧 예수의 참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공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엡 6:10-18).

24:25 내가 … 미리 말하였노라. 예수께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은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들로 담대하게 하려고 할뿐 아니라(요 16:4) 자기 자신에게 있는 초월적 권위를 소개하기 위함이다(신 13:1-4, 요 14:29).

24:26 광야. 여기서는 23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제시하고있다. 이 의도에 대하여는 27절의 주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향편 ‘광야’는 전통적인 유대 관념에 의하면 메시아 도래의 공개적 장소로 이해되었으며, 예언자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왔고 침례 요한 역시 ‘광야에 외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3:3). 또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과 같은 엣세네파 공동체가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요세푸스의 보고에 의하면(Jos., Wars, 5.7) 많은 사기꾼들이 광야를 주무대로 백성들을 미혹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골방은 좁고 밀폐된 비밀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대중적이고도 집단적인 단체나 집회에 주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밀한 개인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이 비유는 세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주의 재림이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 이러한 돌발적인 재림 시기는 44절에도 언급되고 있다. 또 25장의 비유들 속에서도 재림시 급작성과 돌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2)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임하신다. 번개가 순식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나타나듯이 주의 재림도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Weiss, Broadus). (3) 재림의 선명성(鮮明性)이다. 은밀하거나 교묘한, 그리고 모호하여 아리송한 형태로 재림하지 않고 번개의 섬광처럼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장엄한 방법으로 모두가 공히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와 같은 재림에 대한 선언은 앞에서(5, 23, 24, 26절) 묘사된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의 소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거짓된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5절에서 자신 있게 그리고 선언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속지 말라고 권면하셨다(26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Bengel, Bruce). 즉 주검은 유대인이요, 독수리는 로마 군인들이라는 것이다. 살육으로 예루살렘에 시체들이 쌓이고 독수리 군기를 앞세운 로마 군인들이 모여들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놓고 보면 일견 그럴듯한 해석이기는 하나 이 장면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확실한 재림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맨슨(T. W. Manson) 같은 학자들은 독수리를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시체를 보고 독수리가 그렇게 빨리 달려들 듯이 하나님의 심판도 신속히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시체에 무자비하게 덤벼드는 독수리로 표상했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인 것 같다. 또한 독수리를 심판 때 모여드는 성도나 천사의 무리들로 보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독수리를 성도로 보는 해석도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혹은 그리스도가 주는 양식을 먹으려고 몰려드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Calvin). 그러나 이 해석도 그리스도를 시체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독수리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인다. 또 다른 해석은, 본문의 말씀은 거짓 그리스도(주검)의 주장을 듣고 그것을 보려고 모여드는 그리스도인들(독수리)에 대한 경고라고 설명한다. 그럴듯하지만 바로 전 절에 재림의 확실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맥상 맞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예수께서는 재림의 확실함과 신속함, 그리고 온 세상에 공개적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이 독수리 이야기도 이 내용과 맞추어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금언들을 사용하여 재림의 확실함과 신속함과 공개적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비구름이 몰려오면 번개가 치고 그 빛이 동편에서부터 서편까지 번쩍이며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강림하실 것이다. 또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콘돌)들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처럼(욥 39:30) 재림도 그렇게 확실하며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24:29 본 절에 나오는 징조들을 이해하려면, 이 징조들과 연관되어 있는 환난이 언제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하는데(1, 2절), 이 때문에 제자들이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묻게 되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중심점 곧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끝에 대해 말한다.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은 수세기 전에 이미 다니엘에 의해 전달되었는데, 예수께서도 그 예언을 읽고 깨달으라고 촉구하셨다(마 24:15, 참조 단 9:26). 제자들은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사건이 마지막 시대를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상 역사의 마지막은 아직 먼 미래에 있었으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두 가지 별개의 질문을 하였다. (1)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2)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절).

예수님의 대답을 주의깊이 연구해 보면, 그것이 위의 두 질문에 해당하는 주요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구조는 그분의 강화의 서로 다른 두 국면에서 거짓 그리스도(5, 23, 24절)와 거짓 선지자들(11, 24절)의 출현, 환란(9, 21절), 천연계의 여러 격변 등과 같은 사건들을 반복해서 말한 데서 분명해진다. 또한 말씀의 첫 번째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끝은 아직 아니”며(6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8절)고 경고하신다. 해산의 비유는 본질적으로 두 개의 다른 시간을 시사한다. 거짓 산고는 진짜 해산 직전에 있는 마지막 산고와 비교하여 덜 중한 것 같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사건들은 단지 마지막 시대에 있을 사건들을 희미하게 예시할 뿐이다.

이 말씀의 두 부분은 각각 매우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날 심판의 기간에서 정점을 이룬다. 첫 번째 부분은 당시 신자들이 예루살렘 도성의 임박한 파멸에서 피신하기 위해 거기서 떠나라는 신호로 인식할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끝맺는다(15-20절, 참조 눅 21:20). “대 환란”의 끝으로 구별되는 두 번째 부분은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로 끝나는데, 신자들이 그것을 “마지막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 인식하여 인자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도록 할 것이다(29-31절).

대 환란 : 대 환란 및 그것을 뒤따르는 천체 현상들의 특징은 말씀의 앞부분에 있는 더 일반적인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앞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신자들에게 저들이 환란과 핍박을 당할 것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날 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9, 10절). 그러나 뒷부분에서 그분은 전에 없던 “대 환란”을 언급하신다. 사실 그 환란이 너무 혹독하여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들을 감하실” 것이다(21, 22절). 환란을 언급하는 이 두 진술은 모두 예수께 신실히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박해와 관련된다. 말씀의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환란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요한계시록에서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는 마지막 일곱 재앙이 부어지는 그분의 진노의 때와 혼동하면 안 된다. 신약에서 대부분 “환란”이라는 용어는 인간 권세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따라서 마태복음 24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환란의 첫 번째 언급은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이교로마의 황제들에 의해 자행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계 1:9, 2:9, 10). 그러나 1,260년간(기원후 538년-1798년) 제왕의 권세를 가진 교회의 종교재판을 통해 이뤄진 신실한 신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긴 박해와 비교해 볼 때(단 7:25, 계 12:6, 14) 이 환란은 산발적이고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제한적이었다. 여기서 “대 환란”이라 부르는 박해의 두 번째 기간은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박해하는 교황권의 약화 및 18세기에 미국이 확립한 정교분리 원칙에 의해 감해졌다(계 13:3, 11). 이 “대 환란”의 기간이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으로 감해졌기 때문에(참조 막 13:20), 이는 환란의 때에 악한 자들에게 임할 재앙의 심판을 가리킬 수 없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 대한 지상 세력의 박해나 환란을 가리킨다.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 : 천체의 현상들이 나타나고(마 24:29, 막 13:24) 인자의 오심을 살피는 시간이 시작된 것(마 24:42-44)은 대 환란 후이다. 대 환란이 끝나면서 나타나는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와 관련지어 볼 때 기원후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나타난 징조들을 찾아야 한다. 해-달-별의 순서가 신약에서 이 현상들이 언급되는 곳에서는 항상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마 24:29, 막 13:24, 눅 21:25, 계 6:12, 13). 이렇게 정해진 순서는 전반적인 성취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성취가 있을 것을 시사한다.

“법왕권의 큰 박해 끝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그 다음에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시대의 소망, 632)

이러한 현상들의 예기된 시기와 순서 등을 고려해 볼 때, 대낮에도 촛불이 필요하고 검은 연기가 달을 어둡게 만든 이른바 “암흑일”(1780년 5월 19일)이 해와 달이 어두워질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들어맞는다. 이 사건이 있은 지 몇 십 년 후에, 한 시간 당 약 60,000개의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유성 천문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탄생시킨 대 유성 소나기의 사건(1833년 11월 13일)이 뒤따랐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걸쳐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이런 천체 현상들은 종교적 영향과 그 강도 및 가시성 등에 비추어 볼 때 북미에서 발생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것들의 중요성 및 순서와 시기 등을 고려해 볼 때, 이것들이 마태복음 24장에 기술된 예수님의 예언을 가장 근접하게 성취시킨 것이다. 유사한 징조들이 재림 직전에 있을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있지만,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이후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 볼 때 예수께서 강화의 후반부 결론으로 하신 경고의 말씀이 더욱 더 의미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24:44).

[ 암흑일과 낙성일에 대한 재론 ]

본 절의 “그 날 환난 후”를 성도들에 대한 교황권의 박해가 실제적으로 끝난 1774년 이후로 생각하고, 암흑일은 1780년 5월 19일로, 별이 떨어진 것은 1833년 11월 13일의 유성우 현상으로 이해하는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서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780년의 암흑일 사건은 큰 산불이 나서 그 연기가 북미와 캐나다의 동부 40제곱 킬로미터를 뒤덮으면서 그 재가 해를 가려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다. 또한 겨우 수 시간 동안 계속된 그런 지엽적인 현상은 재림의 징조로는 적합하지 않다.

(2) 1833년 11월 13일 저녁에 별이 떨어진 사건도 초자연적 징조라기보다는 대략 33년 주기로 별이 많이 떨어지는 레오니드 폭풍(Leonid Storms)으로 예측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다. 더구나 1833년에 별이 가장 많이 떨어진 것도 아니다. 기네스북에 의하면 기록상 가장 두드러진 유성 현상은 1966년 11월 17일에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들을 재림의 큰 징조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3) 해와 달이 어두워지기 전의 “그 환난”(막 13:24)을 1260년 동안 로마 교황에 의해 자행되었던 성도들의 핍박으로 보고 그 환난이 끝난 후 즉 1780년에 해와 달이 어두워져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환난”을 1260년 기간 즉 중세의 기간으로 제한하지 말고 재림 전의 마지막 대 환난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래야만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는다는 본 절의 말씀이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주장들은 몇 가지 우리의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꽤 있는 것이 사실이다. 220년이 넘게 지난 암흑일과 170년이 넘게 지난 낙성일 이야기를 재림의 강력한 징조로 제시하는 것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파루시아(강림, 재림)의 장면에서 해가 어두워지고도 200년이 넘도록 인자의 구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긴장은 깨지고 만다. 더구나 해와 달이 어두워진 암흑 속에서 즉시 빛나는 별들이 떨어지지 않고 53년 후에야 떨어진다면 그 극적인 효과는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들은 몇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1) 암흑일과 별이 떨어진 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연현상일 뿐이기 때문에 재림의 징조로써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부분의 징조들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연현상들이며 이것을 적절한 시기에 복합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지진도 기근도 온역도 자연현상이다. 애굽에 암흑을 내리실 때 초자연적으로 해를 없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빽빽한 구름을 사용하셨고(사 5:30, 겔 30:18, 32:7), 홍해를 가르실 때 바람을 사용하셨다(출 14:21).

하나님께서 해를 가리고 암흑을 주실 때 구름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산불의 두꺼운 연기를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1780년 5월 19일 암흑일의 날씨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아서 산불로 인한 매연이 흩어지지 못했다. 그때 동쪽으로부터 바다 구름이 이동되어 검은 구름들이 겹쳐지게 되면서 암흑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냥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의미있는 종말적 징조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절묘한 솜씨였다. 역사상 수많은 산불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다 암흑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1780년의 암흑일처럼 광범위하게 종말적 충격을 준 현상은 없었다.

템플-터틀(Temple-Turtle) 혜성의 잔해 때문에 서기 902년 이래 33년마다 별이 떨어지는 현상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성우는 별 주목을 끌지 못하고 지나갔으며 역사상 볼 만한 유성우는 1799년과 1833년 그리고 1966년에 있었는데 1833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1998년도 그 주기에 해당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일부에서만 유성을 볼 수 있었다. 그해 11월 18일 새벽 10,000개의 별이 떨어진다는 천문대의 말과는 달리 겨우 수십 개의 유성만 볼 수 있었다. 그 정도는 맑은 여름날 밤에도 볼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833년의 유성우는 달랐다. 그렇게 재림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고 관심을 고조시킨 특별한 현상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1833년은 윌리암 밀러가 재림기별을 전한 지 2년 후였는데 때마침 일어난 유성우 때문에 재림기별은 강력한 추진력을 갖게 되었다. 그것들은 가장 적절한 때와 장소에 발생하여 재림의 징조로써의 조건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별이 주기적으로 떨어졌는가 혹은 언제 더 많이 떨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현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징조로 사용하셔서 그의 기별을 전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2) 징조가 성취된 후 200년이 지나도록 그 다음 사건 즉 재림이 오지 않았는데도 오늘날 우리들이 계속 그것을 재림의 징조로 해석하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징조들을 파루시아의 징조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징조들은 그 시대에 맞는 종말적 의미가 있었으며 그 시대에 맞는 종말적 징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 시대에 파루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징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1780년의 징조들은 1260년의 환난이 끝난 후 이 지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징조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늘날에도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으며 마침내 최후의 클라이맥스로 재림시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재림의 징조가 즉시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일어나야지 해가 어두워진 다음 53년 후에야 별이 떨어지고 다시 160년이 지나도록 재림이 없으면 그 징조를 재림의 징조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파루시아의 긴장이 다 깨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나 별이 떨어지는 것이 파루시아의 전조(前兆)로써의 기능과 파루시아 장면 자체를 구성하는 역동적 기능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이 문제도 해결된다.

즉 전조로서의 이 징조들은 시대를 따라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맥스웰은 이렇게 말한다. “재림 직전에 암흑일, 피같이 붉은 달, 유성들의 소나기 같은 현상이 또 발생할 가능성은 성경에서 부인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는 횟수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요한도 여섯째 인을 뗄 때 유사한 목록을 소개하면서도 그러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1833년 이후에도 벌써 주목할 만한 유성들의 소나기 현상이 발생했다. 1755년 이후 무서운 지진들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또 대 암흑일 이후에 수차례의 암흑일이 발생했다”(맥스웰, 요한계시록, 오만규 역, 212). 재림 전에 재림의 전조로 지역적으로 있었던 암흑과 유성은 이 마지막 장엄한 파루시아의 순간에 전 우주적인 현상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룰 것이다. 이때는 재림이 전 우주적인 것처럼 암흑과 유성도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1780년의 암흑일과 1833년의 유성우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은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었고 하나님의 뜻으로 적절한 순서를 따라 적절한 시기에 줄지어 발생하였다. 그 사건들은 그것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자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마지막 심판의 시작과 세상 종말의 도래를 경고하는 재림의 징조로써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징조들은 그 시대의 특성에 맞는 강력한 재림의 징조로써 재림기별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4) 일부 학자들은 암흑일이나 유성우의 징조에 이어서 파루시아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환난 후”도 구태여 1260년의 환난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성경에 자명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 환난은 재림 직전에 있을 대 환난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난을 예수님 당시부터 재림 직전까지 있을 모든 환난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렇게 되면 환난은 작게는 1260년의 환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크게는 재림 직전까지의 모든 환난을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천체의 징조들이 두 가지 기능, 즉 전조로써의 기능과 파루시아의 장면 그 자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전조로써의 기능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되풀이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고, “그 날 환난 후”가 1260년 환난 후라고 해석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1260년 동안 극심한 환난이 있은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또한 재림운동을 지원하시기 위해 파루시아의 징조 중 강력한 징조 몇 개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우주적 암흑과 유성 현상은 모든 환난 후 즉시, 즉 재림 때에 다시 한 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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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4 본 절은 신약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 C. S. 루이스는 이 본문을 “성경에서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구절”이라고 칭했다. 흔히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그리스도와 기독교 및 신약을 반대하는 주요 논증 가운데 하나로 이 본문을 인용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본 절의 “이 세대”(this generation)를 종말적으로 해석하여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이 세대가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아니라 “마지막 세대” 혹은 “종말적 세대”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항상 제자들 당시의 세대를 의미하였다.

예수께서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 23:35-36)고 말씀하셨을 때도 “이 세대”는 분명히 예루살렘 멸망을 포함한 그 당시의 세대였다.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나 쉬트라우스(David Strauss) 같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 묵시문학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잘못된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실망 중에 돌아가셨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한 예수께서 “실수”하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로부터 예수를 구하여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나섰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콜라니(Timothy Colani)나 불트만(Rudolt Bultmann)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마 24장의 대부분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며 초기교회가 그 당시의 상황에 맞춰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예수를 “실수”에서 구하려다가 이번에는 성경의 영감성에 상처를 입혔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사람들에 의해 삽입된 것이라면 성경은 믿을 수 없는 고대 문서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와 성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다른 학자들이 나섰다. 킥(J. M. Kik) 같은 학자는 마 24장의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고 초기교회가 삽입한 것도 아니지만 단지 그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당시에 그 모든 징조들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므로 그것을 상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징조들을 상징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해석은 재림 자체도 상징으로 만들어버리는 혼란을 가져왔다.

19세기의 많은 재림교인들은 이 본문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를 말하는 문맥에 나타난다고 이해하여(27-51절),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있었던 대 재림각성 운동과 관련하여 천체의 징조를 목격한 자들의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오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그 본문을 해석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징조들을 목격한 자들이 죽으면서 초기 재림교회 운동에 참여한 많은 이들에게 다시 자성(自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본 절의 예언은 틀린 것인가?

“이 일”의 의미 : 본 절과 24장 전체의 의미를 여는 열쇠는 1-3절의 역사적인 문맥에 사용된 단어들의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1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엄한 건물을 가리키자, 2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헬라어 타우타]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 절에서 이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타우타는 예루살렘 성전의 임박한 파멸을 말하는 문맥에서 그 성전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그런 다음 3절에서 예수께서 감람산에 앉아 성전을 내려다보실 때, 제자들이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물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헬라어 타우타]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헬라어 파루시아]과 세상 끝[헬라어 쉰텔레이아]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했음을 주목하라.

(1) 앞 절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가리키는 타우타(“이것들”)에 대하여.

(2) 주의 파루시아(“임하심”)와 세상의 쉰텔레이아(“끝”)에 대하여.

두 번째 용어들은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제자들은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없었으므로 이 두 사건을 구별하지 못했겠지만, 예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이 앞에서 사용했던 용어에 기초하여 감람산 말씀에서 그것들을 주의 깊게 구분하셨음이 분명하다. 마태복음 24장 전체를 통해 타우타라는 용어는 시종일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사건들을 가리키며, 파루시아와 쉰텔레이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일”은 그리스도 당시의 세대를 가리킴 : 24장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패턴에 비추어 34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준비가 되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타우타]이 다 이루리라.” 그렇다면 이 일(타우타)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24장 다른 곳에 나오는 용례와 일치하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파멸을 포함하여 그 파멸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34절이 세상 끝에 있을 세대가 아니라 기원후 1세기의 세대를 가리킨다는 추가적인 확증을 “이 세대”(헬라어 헤 게네아 하우테)라는 표현을 분석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 나온 이 구절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 구절은 예외 없이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나타낸다는 것이 드러난다(참조 마 11:16, 12:41, 42, 45, 23:36).

마지막으로, 본 절을 예수께서 바로 앞 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한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그분이 하신 예언의 표현에는 밀접한 평행이 존재한다. 마태복음 23장의 문맥은 사회-정치적 실체로서의 국가적인 이스라엘에게 하신 운명의 선언과 더불어 예수를 거절한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정죄를 말한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38절). 앞 절에 본 절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이 나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헬라어 텐 게네안 타우텐)에게 돌아가리라”(36절).

“이 세대”와 예루살렘의 멸망 : “이 세대”라는 구절을 예수 당시의 세대 곧 기원후 31년에 그분의 말씀을 전달받은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본다면, 그리고 성경적 사고에서 한 세대의 길이를 약 40년으로 가정한다면, 예루살렘의 멸망(기원후 70년)은 정확히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났다(31년 + 40년 = 70년).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 성취된 징조들

(1)거짓 메시아: 므나헴(Menahem), 튜다스(Theudas) 등이 일어나 수천의 동조자들을 설득시켜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2.17.8, 9, 유대고대사 20.5.1, 17.10.6, 7)

(2) 전쟁: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파다했는데, 일부는 셀롯당의 광신적인 행동들 때문이었다.

(3) 천연 재해: 행 11:28에 언급된 글라우디오 황제 때의 기근, 기원후 65년 로마에 퍼진 염병(타키투스, 연감, 16:13), 지진(행 16:26,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4:286, 287) 등.

(4) 박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스데반의 순교에서 네로 치하의 무서운 박해에 이르기까지 거듭되는 박해를 당했다(행 12, 14장 등).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본 절은 “이 세대” 곧 예수님 당시의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 곧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파멸을 포함하여 그 파멸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사건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또한 34절이 재림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예언은 잘못됨이 없고, 기원후 1세기 바로 그 시간에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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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예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가증스러운 외식을 모든 제자들과 무리 앞

에서 공개적으로 성토하셨다. 본장의 내용은 그러한 공개적 경고 뒤에 곧바로 하신 말

씀이다. 즉, 예수께서 예루살렘 멸망을 애도하는 것을 끝으로(23:37-39) 성전을 나오

시자, 제자들은 성전에로 예수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면

이 성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제자들은 의아해 했던 것 같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은 아름다운 돌로 건축되고 온갖 장식물로 치장되어 그 장관을 자랑했다고 한다(눅 21

:5). 따라서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인 그 장엄하고 아름다운 왕권이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에 가득찼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 의식상의 율

법을 친히 완성하사 그것을 폐하시고 신령과 진리로써 드리는 예배를 마련하신다는 사

실을(요 4:21-24)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이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항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성전 멸망을 단호히 선포하신 후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셨다. 본장의 예언 역시 고난 주간 중 세째날인 화요일에 주어진 것으로

25장과 더불어 마태복음의 5대 강화 중 마지막 강화이다. 이는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행하셨기 때문에 ‘감람산 강화’라고도 한다(3절).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5대 강화

의 대주제는 천국인데, 제5강화인 본장은 천국의 종말론적 도래를 다루고 있다. 본장

은 그 묵시적 내용으로 인해 해석상에 있어 각별한 유의를 요한다.

(1) 해석상의 유의점. 첫째로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본문의 예

언을 역사상의 특정 사건에 무리하게 결부시키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세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지진 혹은 많은 이단 세력의 발흥 등 말세적 징조로 간주될 만

한 사건들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이단은 예수의 재림 날짜를 정확히 예언해 놓고 막

상 당일이 되자 거짓으로 드러난 예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과 그 시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36절). 따라서 성도는 항상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되,

막연한 공초심에서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순결하고도 기쁜 마음으로 스스

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다(고후 11:2;계 19:7,8). 둘째로, 우리는 본장의 강조점

이 어디에 있는지를 유의해야 하겠다. 본장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는 종말에 관련된 어

떤 비밀스러운 현상을 알려주시려 하기 보다는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

해 더 교묘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며(4절) 끝까지 견뎌(13절)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르러야 하겠다.

(2) 내용 구성. 본장의 내용은 크게 양분된다. 1-31절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

에 관한 예언이며, 32-51절은 마지막 날을 대비하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마음 자세

를 세가지 비유로써 가르치신 내용이다. 1-31절은 다시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바, 1-

14절과 15-28절 그리고 29-31절은 각각 말세의 징조, 미지막 대환난, 그리스도의 재림

에 관한 예언이다. 특히 15-28절이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A.D. 70년)을 예언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이 부분은 마지막 대환난을 예언 한 것이기도 한다. 이

러한 ‘예언의 이중적 성취’ 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때, 1-31절은 시간적으로 질서 정연

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일깨워주는 3

2-51절의 비유들은 본장 전체의 결론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비유들은 25장에 이어

져 더욱 체계적이며 상세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본장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도달점이 어디인가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

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여 무궁한 진보와 발전을 기대하며, 흑자는

온 인류가 하나로 똘똘 뭉쳐 평화를 구가하게 될 날을 소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

의 예언에서 밝히 드러나듯 인류는 스스로 건설한 바벨탑에 의해 스스로를 점점 파멸

에로 이끌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역사는 나선형식으로 점진적으로 진보해가

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원형을 돌듯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우주적 파멸

을 향해 치닫는 비극의 역사인 것이다.이는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더이상 방치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말미암는 심판을 전제한 것이다. 사십 주야 동안

비를 내려 노아 가적을 제외한 온 인류를 심판하신 주께서(창 7장) 이제 불을 내려 심

판하실 것이다. 이러한 심판의 예언이 신실한 성도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축복의 메시

지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진리를 핍박하는 불의가 창궐한 이 세상이 끝나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동거할 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계 21:1-4).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주님의 명하신 사명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잘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1. 종말의 징조(24:1-14)

마가복음(12:41-44)및 누가복음(21:1-4)과는 달리 본서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에 관한 이야기가 생략되었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23:

37-39)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이(1,2절)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본장과 25

장이 23장에 그대로 이어지는 한 가지 강화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23장과 24,25장

은 다뤄지는 근본적 주제들에 있어서나 배경에 있어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여기

서는 본장에 수록된 강화의 전후 배경과 목적을 상고한 후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배경. 본장에 수록된 소위 ‘마지막 날들’에 관한 예언은 예수 자신의 공생애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지닌다. 이미 예수는 공

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러 메시야로서의 공적 신분과 당신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

신 바 있다(16장).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더욱 노골화되었던 대적들의 음모와 핍박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들의 위선과 탐욕을 강렬한 어조로 질책하셨다(23장). 따라서 이제

대적들의 분노는 마치 도화선에 불이 옮겨진 폭약 장치와도 같이 폭발 직전에 있었다.

이미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해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은 숨가쁜 상황속에서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의 종말과 부활의 새로

운 시작을 넘어 역사의 종말과 새 시작에 관한 비밀을 예언하신 것이다. 한편 방법상

으로 본장의 강화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형식으로 전개되어 나

간다. 제자들의 질문 속에 나오는 ‘주의 임하심’ 혹은 ‘세상 끝'(3절) 등의 말들은 우

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사실 제자들은 아직까지도 지상적 메시야 왕국에 대한 열망

을 버리지 못한 채 영적 암매 가운데 싸여 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예수의 수난 예고

와 성전 파괴라고 하는 충격적 메시지를 접한 직후였던터라,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나

역사의 종말에 관한 뚜렷한 시각을 갖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같은 사건의

도래에 대한 불가피성을 은연중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그들은 구약에 언급된 ‘여호와의 날’에 관한 묵시적 예언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많다(

사 13:6;욜 1:15;암 5:18;습 1:7;슥 14:1). 왜냐하면 본장에 수록된 말세의 징조(4-14

절), 대환난(15-28절), 그리고 예수의 재림(29-31절) 등의 시기적으로 뚜렷한 구분이

지어지지 않은 채 다소 뒤섞여 있어서,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을 동일 시점에 둔 ‘여호

와의 날’에 대한 구약적 사고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2) 목적. 본장에 수록된 강화의 목적은 결론부인 32-51절에 잘 드러나 있거니와,

본문에도 그 목적이 여기 저기 시사되어 있다(4,31절). 장(章) 강해에서도 짤막하게나

마 언급한 바와 같이 본장의 강조점은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 예언의 말씀은 비단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오고 올 모든 세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전 교회사적(敎會史的) 의의를 지니고 있는 셈이

다. 요컨대, 성도는 마지막 날의 정확한 시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항시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본 예언의 목적이라 하겠다.

(3) 내용. 먼저 1, 2절은 3절 이하에 등장하는 강화의 배경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3-14절에는 말세의 징조로서 거짓 그리스도, 난리, 전쟁, 기근, 지진, 핍박, 성도 간

의 이간, 그리고 거짓 선지자 등이 열거되어 잇으며 특히 성도들의 타락과 멸망의 길

로 인도하는 거짓된 미혹 세력이 처음과 끝에서 거듭 언급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본

문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된 사항은 성도들의 인내이다. 이 예언에서도 시사된 바와 같

이(6절), 대다수 유대인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환난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실로 산모(産母)가 아이를

얻기 위해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하듯이(사 26:17) 마지막 날 주의 재림의 순간까지 참

고 극복해 내어야 할 환난과 고통이 교회사의 흐름과 더불어 늘 상존해왔다 하겠다.

* 성경 종말론의 관심과 그 해석상의 문제점. 기독교 신앙은 우주 만물에 대한 하

나님의 창조(시작)와 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완성을 전제한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만물의 완성은 인간의 예측이나 상상에 의해 구성된 학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체적

계시에 따라 확정된 진리이다. 그런데 성경에 제시된 완성에의 진리를 다룬 교리를 흔

히 종말론(Eschatology)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원래 헬라어 ‘에스카다'(*

, 최후의 일들)에서 유래하였다. 성경에서 언급한 바 ‘최후(종말)’의 일들이 발생한

시기는 메시야의 오심을 기준으로 한 구약과 신약의 양대 시점에 맞춰 계시되고 있으

며, 또 개인 종말과 우주(역사( 종말이라는 양대 양상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마태복

음 24, 25장은 주로 후자의 측면에서 그 사건들이 다뤄지고 있다고 보겠다.

어쨌든 성경의 종말론은 창조의 원목적에서 이탈하여 그 한계 시점에 달한 인간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양상이 과연 어떠할 것인가, 또는 하나님이 시작하였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더럽혀진 만물과 역사의 회복 및 그 궁극적 완성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 것인가, 그리고 종말의 때에 필연적으로 핍박과 환난을 직면하게 될

성도의 삶의 양태가 어떠해야 하며 그 궁극적 소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상에서의

우주와 인간의 종말 이후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등의 문제에 깊은 관

심을 두고 있다.

한편 이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몇 종류의 해석적 관점이 있다.

(1) 철저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 이는 모든 관심을 세상의 종말에 두고

있으며, 성경이 시사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활동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다. 이는 주로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묵시 문학 활동을 통해)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 왜곡된 사이비 종차들에서 주장하는 바다.

(2)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도 파악

치 않고 단지 하나의 현재적 실재로만 생각한다(C.H. Dodd). 이 견해는 예수의 초림과

사역 그리고 그 이후의 성령의 활동 속에 나타나 있는 종말론적 실재를 올바르게 지적

하기는 하지만 신약에 방대하게 다뤄지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적 가르침의 진수

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단점이다.

(3) 실존론적 종말론(Existential Eschatology). 주로 불트만(Bultmann)과 그의 제

자들에 의해 지지되는 견해로서, 신약성경은 예수가 어떤 내재적인 묵시적 왕국을 가

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철저 종말론의 의견에 동참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현재

적인 실존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이를 재해석한다. 묵시 문학의 언어는 참된 의미

를 담고 있는 신화적 형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 나라는 역사의 목표로서의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을 나타낸다고 한다. 결국

실존론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역사와 대칭되는 개인의 역사

에 국한되는 편협함을 보여주고 있다.

(4) 구속사적 종말론(Heilsgeschichte Eschatology). 성경의 자료들을 가장 잘 대

변하는 가장 이상적 종말론이다. 이는 온 우주와 인류의 창조자이시며 완성자이신 하

나님의 탁월한 경륜과 의지가 이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현되며 또한 완성되어간다

는 사실을 전제한다. 특별히 종말론적 성취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

으나, 그 완성은 그의 재림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본다. 실로 종말론적 희망 중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사단의 왕국의 멸망은 그리스도의 첫번째 오심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12:28;막 3:27;눅 10:17), 그 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결정적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고(요 16:11), 그리고 그 궁극적 멸망은 예수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이다

(계 20장). 어쨌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개입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의해 이미 시작되

었다는 현재적 종말론의 성취가 기정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종말론적인 가르침

은 대부분이 여전히 미래를 향하고 있다(13:43;19:28;24:30-36;25:31;26:64). 따라서

사람들은 근심스럽게 그 날을 예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는 만인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39절;막 8:38;눅 10:13-15).

여하튼 우리는 세상 끝날과 주의 재림 등에 관련된 종말론적 교훈과 사건을 바라볼

때 단편적 시야에 고정시키지 말고 항상 예언의 복합 성취하는 열린 개념하에서 그것

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또한 인본주의적인 편협성에서 탈피하여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에 덧붙여 종말에 대해 다각적인 교훈을 제시하셨

던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종말에 관련된 어떤 비의(秘意)를 가르쳐 주시려 하시기 보

다 종말을 맞이한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가르치시는데 보다 역점을 두고 계셨음을 명

심해야 한다.

2.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 (24:15-28)

16-21절을 면밀히 살펴보건대 이 구절들은 지리적으로 매우 한정된 범위를 언급하

며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한정된 상황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이 1차적으로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이와 아울러 예언의 이중

성취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문은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땅에 들어온 이후 마

지막 대환난의 때에 일어나게 될 예루살렘의 두번째 함락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단

12장;슥 14장). 다시 말해서 예수는 예루살렘 멸망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공통 분

모로하여 가까운 장래와 먼 미래의 일을 소위 ‘예언적 원근법'(prophetic

foreshotrening)으로써 동시에 투시(透視)하셨던 것이다.

해편 본장 전체 내용 중 본문의 위치와 관련된 유의점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즉

종말에 관한 예언의 내용인 4-31절이 대략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은(4-14

절;15-28절;29-31절) 이미 주지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부분을 시기적으

로나 내용상으로 정확히 구분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는 바, 그 원인은 네가지

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시사된 ‘여호와의 날’에 관한(사 13:6-9;욜 1:15 등)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및 마지막 대환난과 심판 등을 포괄하고 있는데 이렇듯 혼합된 개념의 여

운이 본장에서도 다소나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말세(末世)의 개념 자체가 매우 포괄적이어서 세

상 끝의 마지막 한 시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

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로, 실제로 종말의 징조와 예루살렘 멸망 그리고 주의 재림 등의 내용이 뒤섞

여 있는 구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예컨대 27절은 직접적으로 주의 재림을 언급한 내

용이다).

네째로, 예언의 이중성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내용은 마지막 대환난 뿐만 아니라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키기도 하여 시기적 측면에서 전후 문맥의 혼돈을

자아낼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 멸망 예언에서의 강조점. 첫째, 도래할 환난의 불가피성이 강조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로서 다가올 것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거

민들이 취할 유일한 방도는 도망하는 것 뿐이었다(16,20절). 그러나 정작 로마 군병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왔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난공 불락

(難攻不落)을 자랑했던 예루살렘 성안으로 몰려들었으며, 결국은 포위당한 채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항복하고 말았다고 한다. 예루살렘 멸망 당시 유대인들의 저렇듯

참담한 모습을 마지막 대환난 때에도 그대로 반복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구원의

산성이신 여호와를 의뢰하며(시 31:4;37:39) 환난이 극심할수록 더욱 정금같이 단련되

어가는 믿음의 귀한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고서,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수단에 매어달리

기 급급하다가 순식간에 영원한 파멸 가운데 던져짐을 당하고 말 자들이 분명 허다할

것이다.

둘째로, 환난의 심각성이 강조되었다. 이 환난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정도로 극심할 것이라고 묘사되었다(21절). A.D. 70년 예

루살렘 멸망 당시 포로로 잡혀간 자는 97,000명에 달하였고 죽은 자만해도 1,100,000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의 인구 비율로 보건대 이는 실로 엄청남 수효(數爻)였기 때

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종말이 도래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참고로 세계 제1차 대전으로 희생된 인명은 약 850만이며 제2차 대전 동안에는 약

5천만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대환난에는 이보다 더

한 인명 피해와 공포가 닥칠 것이라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엄청난

환난을 틈타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서 거짓 안식을 미끼로 던져 허다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하셨다(23-26절).

세째로, 환난의 다급성이 강조되었다.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겉옷을 가지러 집에

돌아갈 시간도 없으며 심지어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자가 비상용품을 챙기기 위

해 집안으로 들어갈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라면(17, 18절) 그 긴박성을 가히 집작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성도는 미리 기름을 채우고 신랑맞을 준비를 하는 지혜로운 처녀와

같이(25:1-13), 기회와 여유가 주어졌을 때 이를 잘 활용하여 무시로 영혼의 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하겠다.

3. 인자의 재림에 관한 예언(24:29-31)

본문에는 창세 이래로 전개되어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는 위대한 사건이라

할 예수의 재림과 관계된 일들이 직접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본문은 불과 3절로 이루

어져 있지만 이 짧은 구절들 안에 내포된 의미는 실로 중차대하다. 이같은 예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재림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 주의 재림이 불신자에게는 파멸과 통곡의 날이지

만 신자에게는 영광과 감격의 날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계

19:11-16에서 예수는 권세 당당한 장수(將帥), 정복자 혹은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29절은 구약성경의 사 13:10,13;욜 2:30,31과 더불어 철저한 심판 상황

을 묘사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부터까지 버림받는 이와같은 극한의 고통

과 파멸의 상황 가운데도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따로 불리워 예수의 품에 안기

게 될 것이다(31절). 홍수의 날에 노아 방주가 있었고 소듬의 멸망 때에 룻에게 소알

성이 있었듯이(창 19:22), 마지막 심판 때에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도리어 영원한

안식처가 마련되어 있다.

(2) 재림의 영광. 초림의 모습과는 달리 재림의 주는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에는 낮고 천한 말 구유에서 나시고 뭇 사람의

멸시를 받으시며 섬기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두 강도 사이에서 저주(詛呪)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하지만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온 세상의 왕으로서 만주의 주로

서 찬란한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3) 재림의 확실성. 예수는 예언하신 바 그대로 부활하셨다(16:21;28:6). 마찬가지

로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주께서 재림주로 임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주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겠기 때문이다(34, 35절). 실제

로 예수의 부활을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께서 그

들 세대가 끝나기 전에 조속히 재림하시리라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4.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24:32-51)

이 부분은 본장 전체의 엄숙한 결론에 해당한다. 종말에 관한 예언을 결론지으시면

서 예수는 종말 도래의 확실성과 필연성(35절) 및 그 임박성(32-34절)을 주지시킨 후,

그 때를 위해 평소에 늘 깨어 예비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본문은 다시 세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각 단락은 일종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다.

32-41절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4-31절에 수록된 예언의 말씀에 대한 포괄적 결론을 자

연스럽게 유도하고 있으며, 42-44절의 집주인과 도적 비유는 종말에 대한 성도의 준비

자세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45-51절의 청지기 비유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성

도들이 각자 맡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감당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 풍성한 성령의 열매

들을 자랑하도록 권면한다. 특히 45-51절의 비유에 등장하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과 ‘악한 종’은 25:1-13에 나오는 ‘슬기 있는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과 대응을 이

룬다. 다시 말해서 45-51절은 25장 이하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비유들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해편 32-41절의 무화과 나무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공히 수록되었으되, 나머지 부분

(42-51절)은 공관복음서들 간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마가복음 13:34-37에서는 본서

의 42-51절 내용이 ‘깨어있는 청지기 비유’ 안에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누가복음 21:34-36에서는 비유 대신 종말에 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구체

적으로 교훈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하튼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1) 아무런 준비없이 돌발적으로 임하시는 주의 임재

를 맞이하는 어리석음에서 탈피해야 하며 (2) 작은 일에 불충하다가 영원한 상급에 참

여치 못하는 어리석음에서도 탈피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깨어 있어야 할 뿐만 아

니라, 주의 사람들을 빛과 생명에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과 책임 또한 갖고 있다. 종말

이 가까울수록 불신 풍조(不信風潮)와 이기심이 더욱 만연해갈 것인즉, 성도들은 오직

살아계신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롱 칭찬 받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 집주인과 도적 비유. 예수의 재림을 도적의 침입에 비유한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의미심장하다.

체째로, 예수의 재림이 에측 불허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침입할 날을 미리 알리고 집을 뚫고 들어가는 도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께서도 부지 불식간(不知不識間)에 임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망각하고 세상 일에만 몰두한 자들이 수치와 당혹 나아가 극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성도들 중에는 주의 재림을 믿기는 하되 그 일이 까마득히 먼 장래에 발생할 것이므로 아직 시간적 여유가 넉넉하다는 태만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주께는 천년이 하루와 같다(벧후 3:8). 따라서 성도는 항상 주님과 동거하며 이 말세에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상고하는 일에 늘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겠다.

둘째로는 예수의 재림이 불신자들에게 큰 파멸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 베드로는 본문의 말씀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의 무서운 광경을 묘사하면서, 성도들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하였다(벧후3:9-12).

마태복음 주석 (상, 하)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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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주석 (상)

출판사 리뷰

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 추천의 글

–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이번에 강대훈 교수가 『마태복음 주석』을 저술한 것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저자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좋은 작품을 읽게 된 기쁨을 다른 분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책은 한국 교회 역사상 현재까지 한국인에 의해 저술된 마태복음에 대한 주석 가운데 양과 질, 분량과 수준 양면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1,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주석은 기존 마태복음의 중요 주석들과 논문과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관련된 모든 중요한 논제는 거의 모두 논의되고 있고, 각 주제를 다루는 정상급 전문 학자들의 해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좋은 주석을 쓰는 데 이와 같은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런 노력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서론과 본문 주석의 과정 속에서 매 문장은 거의 한 땀, 한 땀 정성이 깃든 장인의 작품처럼, 학자적 열정과 학문적 성실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둘째, 이 책은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 신학과 목회의 관계, 학문과 실천의 관계에 있어 좋은 모범이 됩니다. 주석이 너무 학문적으로 전문적이기만 해서 학자들의 관심사에만 치우쳐 있다든지, 내용이 너무 설교자를 고려해서 적용 중심의 가벼운 논의에만 치우치지 않고, 학문적으로는 건실하면서도 목회자가 성경 연구를 통한 경건이나 설교에도 도움이 될 정도로 빛과 열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설교집이나 묵상집이 아닌 주석이므로 무게 중심은 성경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비중이 높지만, 그래도 언제나 교회적이고 목회적인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강대훈 교수는 마태복음으로 최근에 학위를 마친 소장 학자이면서도 이전에 선교단체 간사와 담임 목회 경험 등이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셋째, 이 책은 마태복음 주석사에 있어 NICNT 주석 시리즈의 R. T. 프랜스의 마태복음 주석, BECNT 시리즈의 데이비드 터너의 마태복음 주석 등 외국의 좋은 주석 시리즈에 나오는 세계 최고 수준의 마태복음 주석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좋은 주석입니다. 아무리 분량이 많고 수준이 국내에서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세계 학계에 통용되는 마태복음 주석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좋은 주석이라 평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의 수준은 기존의 세계적인 마태복음 주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유익

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은 세 부류의 독자들에게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성경학자들에게는 이 책이 주석 집필에 대한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성경 연구를 통해 학위를 받고, 또한 신학교에서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성경학자들에게 있어 자신이 전공한 성경을 중심으로 좋은 성경 주석을 집필하는 것은 일종의 꿈이자 신성한 책무라 생각됩니다. 이 마태복음 주석이 많은 신구약 성경학자들이 좋은 주석 집필을 위한 동기 부여와 자극제가 되어 66권 성경 각 권에 대한 좋은 주석이 계속 한국 성경학자들에 의해 저술되면 좋겠습니다.

둘째, 목회자들에게 이 책은 마태복음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안심하고 교과서처럼 사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든 좋은 주석이 나름대로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이 책은 가장 최신에 쓰인 주석이므로 기존의 모든 주석을 참고했고, 또한 한국 학자에 의해 직접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더 한국 목회자의 상황과 정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일반 성도들이 마태복음을 공부하고자 할 때, 마태복음에 대한 귀납적 성경공부 교재를 공부하거나 마태복음 설교를 읽어도 되지만, 이런 좋은 주석을 읽게 되면 성경공부의 질이 달라집니다. 좋은 주석을 읽는 것은 가장 좋은 성경공부 방법입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성도들의 마태복음 공부의 수준을 몇 단계 높여 줄 것입니다. 강대훈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을 통해 마태복음의 진리가 조국 교회의 강단에서 더 넓고 깊게 울려 퍼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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