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원어적 의미 | 믿음의 본질(성경적 의미에서)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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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1~3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나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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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원어적 의미 | 믿음의 본질(성경적 의미에서) 최근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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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원어적 의미 | \”아멘\”의 성경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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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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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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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πίστις)에 대한 묵상 : IBP 일점일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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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기초적 가르침

구원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의 오랜 믿음의 여정 후, 하나님이시면서 성육신하여 … 이 구절의 의미를 밝혀줄 원어에 따라 이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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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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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관에 의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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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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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 – 기존글_백업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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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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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 하늘씨앗

다음에 나열된 신앙 생활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 … ( 성경 원어에서는 에크 피스티스 에이스 피스티스 (믿음의 시작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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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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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 David Servant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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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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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성경적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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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믿음의 원어적 의미

  • Author: 다윗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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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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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원어적 의미 | \”아멘\”의 성경적 의미: \”아멘\”을 어떻게 사용할까요? 267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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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아멘\”

\”아멘\”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아멘\”의 기원과 구약과 신약, 성경 속 아멘의 사용례를 통해서

\”아멘\”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니다

#아멘, #교회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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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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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을 그 개인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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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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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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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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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열된 신앙 생활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 … ( 성경 원어에서는 에크 피스티스 에이스 피스티스 (믿음의 시작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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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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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관에 의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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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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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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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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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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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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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능력에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 문제임을 … “성도”란 말의 성경적 의미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란 뜻이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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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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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100원 (5% 적립) … 바울이 언급한 ‘믿음’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의 사상에서 이 개념이 중심적이며 포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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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duranno.com

Date Published: 3/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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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다 같은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 그 문장 안에서의 쓰임새에 따라 의미가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서 구원받는 믿음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말씀과 성경이 그리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자신의 현재의 상태나 신분에 대한 비참함을 알아야 하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을 당하신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하고, 그분은 나의 생명의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을 그 개인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할 때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것을 가리킵니다.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야고보서 1;6절이 말하는 믿음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의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중생한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믿음과 중생한 믿음이 다른 것은 중생한 믿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으로, 중생한 신자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구하게 되지만 중생하지 않은 믿음은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행실은 그전이나 그후나 같은 것입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RP Byzantine Majority Text 2005

요한복음 3;16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구원받는 믿음은 πιστεύων 피스튜온…이라는 말인데 그 일차적인 의미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다, 확신하다, 신뢰하다, 신뢰를 두다…등의 의미라고 합니다.

Thayer’s Greek Lexicon

STRONGS NT 4100: πιστεύω

πιστεύω; imperfect ἐπίστευον; future πιστεύσω; 1 aorist ἐπίστευσα; perfect πεπίστευκα; pluperfect (without augment, cf. Winers Grammar, § 12, 9; (Buttmann, 33 (29))) πεπιστεύκειν (Acts 14:23); passive perfect πεπίστευμαι; 1 aorist ἐπιστεύθην; (πιστός); the Sept. for הֶאֱמִין; in classical Greek from Aeschyl, Sophocles, Euripides, Thucydides down; to believe, i. e.

1. intransitive, to think to be true; to be persuaded of; to credit, place confidence in;

야고보서1장의 믿음으로 구하라…에서도 결국 같은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의미하는 그 믿음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은 사회에서의 믿음과 비슷하지만 구원과 관계된 믿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신뢰,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에의 신뢰, 예수님께 나를 맡기는 결단 같은게 더 들어갑니다.

한우리 성서 놀이터

피스튜오(pisteuw)

이는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의 신앙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시 37:5)고

말함으로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권고했고,

잠언서에서도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 16:3)로

말함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

나아가서는 삶 자체를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결단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페포이데시스(pepoiqhsi”)

이는 영어의 confidence에 해당하는 말로 ‘확신’, ‘신념’, ‘신뢰’를 뜻합니다.

페포이데시스라는 말은 성경에서 주고 ‘확신’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고후 3:4; 1:15),

우리 말로는 ‘믿음’으로 번역됩니다.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며 신뢰입니다(고후 3:4).

확신은 내적 결단이요, 신뢰는 이 결단의 외적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언제나 내적 결단과 외적 결단의 행동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피스티스(pisti”)

이는 ‘믿음’, ‘충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곧 충성과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충성을 믿음과 같은 말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2장 22절의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충성’이 피스티스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내적 결단의 결과는 자연히 신실과 충성이라는 행동적 결단으로

외부에 나타나기 때문에 아예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후 3:4,5)

믿음이란? : 네이버 블로그

믿음이란?

홍성철 목사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대가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믿으면서’는 현재 시제 분사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처음 믿는 믿음의 행동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생활을 위한 지속적인 동기부여로서 믿음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이며, 어떤 믿음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어떤 요소가 포함되어야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1) 믿음의 정의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이란 무엇인가?

믿음을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 믿음이란 헬라어 원래의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은 헬라어 용어 자체의 의미에서 그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정의와 그 요소를 정확하게 알아야 참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그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 그 믿음의 내용이 정확해야 자신의 믿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지만 믿음의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때는 돌이켜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믿음은 자신의 운명과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전적 정의(피스티스, πίστις)

그러면 또한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헬라어의 어원에서 ‘믿음’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을 정의하기 정확히 알기 위해 유대문헌에서는 어근 ‘πίστ’(피스트)는 (1) 하나님과 개인적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다(Sir 2:6,8,10; 4:16; 11:21; Wid 16:26; 4 Macc 7:19, 21; 15:24; 16:22; Philo Abr. 262ff., 268ff.; Her. 90ff.; Vit. Mos. I. 83,90; All. ii.89). 유대주의에서 이 어근은 (2) 회심(Wis 12:2; Jdt 14:10; Philo Abr. 69f.)과 유대주의 율법과 관계를 나타내는 어근이었다(Sir 32:24; 33:3; 1 Esdra 7:24; 2 Bar 54:5).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과 ‘믿다’(피스튜오, πίστεύω)는 (3) 하나님과 합당한 개인적 관계를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였다.

고전 헬라어 저자들은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은 어떤 약속이나 선언이 진리임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그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믿음이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용된다: ① 믿음은 신이 준 약속을 개인적으로 신뢰한다(Hesiod, Works, 372; Soph., OT, 1445)는 의미로서, ‘피스티스’는 어려움 위험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신의 능력을 신뢰하며 믿는 것이다(Aesch., Sept., 211 f.); ② 믿음은 신의 뜻에 의심 없이, 그리고 두말없이 순종한다는 의미다; ③ 믿음은 신에 대한 지식적 확신이 아니라, 열정적인 경건을 보인다는 뜻(Plut. Pyth., Or., 18)이며, 믿음은 신의 계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믿음이란 뜻이다. 신에 대해 믿음을 가진 자는 신의 놀라운 기적과 같은 능력을 믿음으로 요청한다는 뜻이다(cf. R. Herzog, Die Wunderheilungen von Epidauros, 1931); ④ 믿음은 신과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신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었다; ⑤ 믿음이란 용어는 신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는 것, 신의 보호 아래 자기 자신을 두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란 뜻이었다(Apul., Met., 11, 25-28; P. Oxy., 11, 1380, 152); ⑥ 그리고 이런 믿음은 행동을 결정한다(Porphyr, Marc. 21ff).

구약에서 믿음에서 믿음의 개념은 히브리어로 아멘(‘aman, niph.)이며 ‘믿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히브리어로 믿음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진다. 구약에서 믿음은 창세기 15: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갈 3장). 그리고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롬 1:17; 갈 3:11; 히 10:38). 구약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말한 것을 항상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믿음은 종교적 용어로서 자기 헌신의 행동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말하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믿음은 1) 개인과 공동체의 믿음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2) 구약에서 믿음은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언약 순종을 의미한다. 믿음은 곧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매일 삶에서 완전하지 않지만 순종하는 생활방식이다. 구약에서 믿음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생활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쉽게 묘사될 수 있다. 이런 믿음의 삶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다윗의 생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들의 생활은 완전하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변화지 않고 하나님을 따랐다. 연약하여 시험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만남으로 극복되었다. 그들의 생애는 친밀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들의 믿음 생활은 헌신과 생활방식으로 증명되었다. 곧 구약에서 믿음은 헌신과 생활방식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종교적 의미로 ‘믿다’는 의미: (1) 하나님께 반응하여 ‘순종’이며, (2) 하나님을 향한 ‘경건’, (3)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함’이다. 믿는다는 종교적 의미다. 믿음은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신 7:9). (4)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이었다(왕상 8:26; 대상 17:23; 창 42:20). 구약에서 외국 군대 산헤립의 침입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 것이 믿음이었다(사 7:9). 백성들의 생존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는 것이었다. 창세기 15:6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롬 4:3, 9, 22; 갈 3:6; 약 2:23). 하나님 말씀을 믿었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약속을 이행할 (5) 믿음은 하나님과 개인적 교제를 지속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그것을 성취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다.

(2) 믿음의 3 요소

믿음이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지, 정, 그리고 의지의 요소가 포함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루었다는 진리에 대한 지적 이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정적 인 믿음, 그리고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만 따르겠다는 의지이다.

③ 바울은 구약의 믿음의 개념을 사용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난다(행 9:1-19; 22:3-16; 26:9-18). 바울은 구약에서 믿음의 새로운 이해를 동사(אמן). 창세기 15:6절에서 아브라함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신뢰한다(창 12장). 그리고 믿음의 순종하는 생활로 나타난다(창 12:12-22장). 바울은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은 믿음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사 28:16). 하나님은 시온에 한 돌을 두어 모퉁이 돌을 삼는다. 그는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9:33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박국 2:4절에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패망당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아는 자들은 신실하게 산다(cf. 렘 7:28). 바울은 로마서 1:17절과 갈라디아서 3:11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신실하게 생활하는 것을 증명한다(히 10:38).

바울에게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과 개인적 만남이며 관계이다. 하나님과 만남과 개인적 관계가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형상대로 만든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창 1:26-27). 성경적으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신학적 이해보다는 개인과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인간 타락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이름을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어 하나님을 섬기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하늘나라에 나중에 가는 것이나 매일 그리스도처럼 생활하는 믿음이다.

인간이 신실함은 하나님과 개인적 만남의 결과다. 예수를 믿는 자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나고 경험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신약에서 구원의 핵심은 인간이 그의 십자가의 은혜에 반응하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반응한다cf. 엡 2:8-9, 10). 신실하신 하나님은 믿음 없는 세상에서 신실한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만나서 신실하게 반응하며 순종하고 살길 원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유일성

바울이 사역했던 당시 로마와 세상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믿었다. 믿음이란 용어는 네로 (A.D. 54-68)가 통치할 당시 로마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용어였다. 사도 바울은 네로가 통치하던 당대에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쓸 때 로마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용어인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 복음(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평화(에이레네, εἰρήνη), 의(디카이오수네, δικαιοσύνη)란 용어들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사용하였다.

① 믿음이란 자기 구원을 위해 가장 우월한 존재로 개인적 친밀 관계로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죄인인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위해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은 배타성이 담겨 있다.

로마가 지배하던 예수님과 바울 당시에 최고의 존재는 로마 황제였다. 로마 황제는 구세주,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고, 그를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당시에 로마 황제를 최고의 존재로 믿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가 세상에 평화와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므로 황제를 믿어야 세상이 평화롭고 나라가 잘 된다는 로마의 믿음이 있었다. 로마 황제나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황제를 믿는 그 믿음(라틴어 fides, 헬라어 fistis, faith, faithfulness)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라틴어( fides, fistis, faith, faithfulness)의 믿음이 중심 주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시절 동전과 기념물이 등장한다. 아우구스투스 행전(Acta Augusta 31-33)에서 로마가 정복한 민족들은 로마 민족의 신실함(fistis)를 발견했다. 로마 황제는 신으로서 세상 이전에 선재했고, 황제가 세상을 구원했다고 선전하고(Georgi, “Upside Down, p. 149), 로마와 황제를 믿는다고 선전했다.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믿음은 로마 제국과 황제처럼 예수님을 최고의 신뢰의 대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였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E 31-14 AD)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헬라어로 기록된 아우구스투스 행전에서 믿음(pistis)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이 용어 믿음은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왕들이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에 충성(pistis)을 맹세하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 황제가 세상에 구원을 주고 평화를 준 유일한 신적 존재로 믿는 반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를 믿는다(디터 게오기는 로마 제국의 선으로서 황제를 믿는 믿음에 관해 아우구스투스 행전(the Acts of Augustus 31-33장을) 인용한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업적에 대한 세상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이 그를 믿었다(pistis)고 언급한다. 그는 그의 행전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세상의 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의 왕들은 나에게 사절들을 보내왔다. 그들은 전쟁에서 로마와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패한 적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아들들을 보내어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내가 가져온 평화의 시대를 믿음으로 신뢰했다(the Acts of Augustus 32장 후반절).

그러나 복음은 로마제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뒤집는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복음에 반응하는 자들은 주님되심(lordship)이 황제나 다른 것을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간다. 예수님이 최고의 주님이시다. 로마 당시에 예수 운동으로 알려진 크리스천 운동은 갈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했고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온다는 믿음은 당시 로마제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로마의 이데올로기를 전복하는 미신집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황제를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사교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울과 당대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진정한 구세주시며,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시며, 구약에서 전한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를 가진 2위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대속하여 죄를 용서하고,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고, 그리고 구원해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와 개인적 친밀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믿음이었다. 곧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를 최고의 존재란 의미로 주님으로 모셔서 신뢰하고 헌신하고 복종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② 믿음이란 예수님을 따르고 오직 그에게만 충성한다는 맹세 약속이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황제에게만 충성했다. 다른 이에게는 황제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바실레이아란 제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길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와 제국에게만 충성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헌신하길 요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인간의 죄에서 구속, 마귀 속박에서 해방하고, 인간을 지옥에서 건져주었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예수님에게만 충성과 헌신을 요구한 믿음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로마 황제가 세상에게 평화를 주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로마의 복음(eungellion)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을 주었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진정한 구원을 얻는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말하던 믿음은 로마 황제를 신뢰하고 따르고 맹세를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확신하는 확신을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의 심장에서 담대하게 그의 수신자들에게 편지하고 있다. 그 당시 세상은 로마 황제가 새로운 세상을 열고 네로가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과 평화를 주는 권의 복음을 전파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온 세상과 민족들이 그에게 그를 믿고 그에게 맹세를 다짐하던 세상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수도 로마에서 온 세상의 민족들이 예수를 믿고 순종하도록 그에게 사명을 부여했다고 확신한다(롬 1:5). 사도 바울은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롬 1:17). 바울 사도는 예수를 믿음으로 오직 모든 민족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롬 3:22).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믿음이란 용어를 예수님께 사용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의를 주었다는 확신으로서의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믿음은 또한 예수께 충성과 신실함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로마 사회에서 보호자와 보호를 받는 자의 관계처럼 이 믿음은 보호를 하시는 하나님과 보호를 받는 입장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형성된 관계라는 관계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셨던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해 우리가 빚진 자로서 교회와 예수님께 주어진 의무를 지속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보호자와 후원자가 되시며 손으로 만질만한 선물과 그 증거를 보여주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믿을만한 존재가 되고 그분을 신뢰하겠다는 약속이며 예수님에게 향한 충성과 헌신의 표지이다.

③ 어떤 비싼 대가를 치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로마서 배경은 로마에서 크리스천이 처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크리스천은 기원후 49년에 로마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 착취, 로마인들에게 당하는 조롱과 환란, 핍박, 죽음의 위협, 피조물과 함께 당하는 고통 중에서도(롬 8:35-38)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일관성 있게, 믿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확장되고 거룩하게 사는 성화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롬 6-7장). 따라서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겠다는 표현이다. 비록 좋지 못한 미래가 예측되어도, 자신은 다른 신들을 자신의 안전을 위해, 로마의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않겠다는 유일한 믿음인 것이다.

(4) 오직 구원자 예수를 믿는 유일한 믿음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은 이스라엘에게 오직 한 분 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요구되었던 유일 신앙과 같은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이 믿음의 고백은 예수께서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유일신을 믿는 고백인 것이다. 크리스천 용법에서 믿음이 있다.

① 믿음은 하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지하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따라서 크리스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신뢰하고 지속적으로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크리스천 믿음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 신뢰, 그의 계명에 순종, 주님을 바라보는 하늘 소망, 그리고 그에게 끝까지 신실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② 믿음의 내용은 입으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입으로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분명히 ‘고백하는 것’(호모로개새스, ὁμολογήσῃς)과 ‘믿는 것’(피스튜새스, πιστεύσῃς)은 동의어다.

③ 믿음은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처럼 같은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롬 9:33; 10:11; 벧전 2:6; 1 클레멘트 34.4).

④ 믿음은 지속적으로 믿는 연속성이 있음을 뜻한다. 회개하고 믿으라고 선포될 때 듣는 자는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행 20:21; 히 6:1). 믿음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있고 역동성이 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대상을 믿는 것이다. 말씀을 믿는 것이다(롬 10:8).

바울이 가르치는 믿음은 (1) 믿음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신 구원의 방식에 복종하는 것이다. 믿음과 고백은 함께 한다. 고백으로 신자는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과 은혜의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순종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2) 바울에게 믿음은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8; 고전 2:5; 15:14, 17).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사건을 기초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고전 15:3-11). (3) 참 헌신과 경건이 참 믿음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구원받는 참 믿음은 (1)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2)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며, (3) 주님에게 열정적 충성과 경건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며, (4) 주님과 개인적이며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5)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기초적 가르침

현재 지금의 단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영적인 기초들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런 기초들을 표면적 측면이 아니라 새로운 측면, 즉 깊은 차원으로 나누겠습니다.

함께 나누게 될 기초들은: 믿음, 기도, 깨어있음 그리고 하나됨 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성육신 절기의 금식 기간에 ‘믿음’에 대해서 나누는 것은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성한 성육신은 반대와 대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으로 인해 나타난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차서 이 신성한 성육신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가지 참고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구절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오랜 시간동안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들의 예로 시므온 장로, 선지자 안나를 말씀드렸었습니다.

시므온는 아기 예수를 팔에 앉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29-30)

성경은 선지자 안나가 84년[1]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육신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3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38)

구원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의 오랜 믿음의 여정 후, 하나님이시면서 성육신하여 나타나신 아기 예수의 이 장면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계시하셨고 이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녀의 태 안에 신성한 신비를 받을 때 까지 세대와 세대를 지나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신성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 앞에 놓인 이런 믿음의 장면들과 긴 믿음의 여정들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

이 세대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걸음을 계속 걷기 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와서 구속을 이루셨는데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수행 할 수 있는 역할이나 책임이 지금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열방을 향해 복음이 선포될 필요가 여전히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위해서 특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준비하기 위해 세례요한과 여러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막1:2)

이에 기초해서 다음의 주요 포인트에 따라 믿음에 대한 메세지를나누겠습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진실된 믿음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현 세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의 책임

1.믿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는 다양한 믿음의 종류, 또는 믿음의 측면을 신약에서 볼수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성경에 따르면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눈을 뜨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에 이르게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믿음으로 걷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walk by faith)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7)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들어온 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 그리고 모든 족장들, 선지자, 거룩한 사람들처럼 믿음의 순종을 성취하고 완수하기 위해 매일 매일 믿음으로 걷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해서 믿음의 걸음을 걷는(믿고 믿음대로 사는) 것을 배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발견하실 때 이러한 목적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다 해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 믿음의 걸음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나중에 더 명확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믿음의 신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니”(히11:1)

이것은 매우 깊고 신비한 구절입니다.

다른 성경구절에서도 믿음은 신비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 [2] (mystery) 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

우리가 믿음의 진리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실제적 의미로는 믿음이 사실 ‘신비’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참고 성경 구절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니”

이 구절의 의미를 밝혀줄 원어에 따라 이 단어들의 의미를 살펴 봅시다.

특별히 이 두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A. ‘실상(substance)’ (바라는 것들의)

B. ‘증거(evidence)’ (보이지 않는 것들의)

A. 실상(Substance)

이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는 ‘실체(realisation)’, ‘확신(ascertainment), ‘확증(assurance)’ 입니다.

헬라어로는 : ‘하이포스타시스(hypostasis)’ 입니다.

떼어 사전(Thayer dictionary: 신약성서의 가장 잘 알려진 사전 중 하나)에 따르면, 하이포스타시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을 고정시키기 위해 그 아래에 놓인 것, 건물이 세워지는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어떤 것, 혹은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실체는 우리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줍니다.

B. 증거(Evidence)

이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는 ‘증명,입증(proof)’입니다.

헬라원어로는 ‘ἔλεγχος’인데 엘-엥-크호스 라고 발음합니다.

떼어 사전에 따르면, 이 증명(proof)이라는 뜻에는 또한 ‘확신(conviction)’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거죠?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경험될 수 있나요?

이 질문에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

믿는 자들은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어떤 특정한 문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무언가가 자신 안에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체(substance)입니다.’영적인 실체(spiritual substance)’ 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 사람이 마음으로 느낄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훈련되기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믿는 자는 이 문제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먼저 확신하므로 그가 기도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자신 안에서 어떤 움직임과 신성한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이 신성한 에너지 안에는 실제로는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여 믿음의 눈으로 문제들을 보게 만드는 영적 통찰력(insight)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4:17) 분으로 믿었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 로 표현한 것이죠.

이 문구를 깊이 생각해 보면, 모순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역설처럼 보입니다. ‘입증과 확증’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단어가 ‘보지 않는 것들’이라는 문구에 따라 나옵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있을 수 있나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 있는 것을 보게하는 영적인 통찰력을 산출하는 믿음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영적인 눈 혹은 영적인 통찰력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이 영적인 눈이 요청된 문제를 보지 못한다면 믿음(영적인 실체)이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을 계시하시거나 혹은 실체와 통찰력, 증거와 확신으로 관 씌어진 기도를 완성해 가면서 계속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정해진 때에 일어날 것을 알게 됩니다 – 악한 자의 대항이나 혹은 믿음의 대적의 결과로 어느 정도 지연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은 보이지 않는 영의 영역에서 이미 그것을 보았기 때무에 그 일이 확실히 일어날 것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합시다.(그의 예언은 때때로 구약 성경에 대한 믿음의 예언이라고도 함):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이 믿음의 신비, 이 특별한 믿음의 형태를 배운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목적들, 즉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믿음의 비전들이 이 믿음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유형: 성령님의 은사로서의 믿음

믿음의 이 마지막 유형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읽을 수 있는데 사도바울은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은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9)

이런 종류의 믿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양한 상황에서 그분의 지혜와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선물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의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모카탐 산(Mokattam Mountain)이 움직임 – 콥틱 교회에서는 성탄절이 시작될 때 3일을 금식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맞는 믿음의 선물을 위해 기도하고 구합니다. 이 특별한 믿음의 선물을 통해 모카탐 산은 성자 시몬(Saint Simon, the tanner)의 기도와 믿음으로 움직였습니다. 이것은 10 세기 말 아브람함이 주교때 있었던 일입니다.

2. 두번째: 진실된 믿음의 특징들

가장 중요한 믿음의 특징들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명확하고 직접적인 성경적 진리를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지속적인 믿음의 행함이 너무나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영적인 걸음들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시대를 이해하고 분별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의 때에 나타나는 믿음에 종류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결한 믿음

거짓된 믿음

믿음의 거부

순결한 믿음은 평강의 왕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삶의 경험 위에 세워집니다. 잠시 후에 이 순결한 믿음의 본질적인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거짓된 믿음은 세상의 영과 섞인 믿음입니다.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서 지속적인 조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과 혼의 욕망과 욕정 그리고 믿는 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영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조화는 잘못된 것이며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믿음의 거부는 한 사람이 믿음과 관련된 모든 것들, 심지어 인격이신 하나님, 그분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잘했지만 나중에 그들의 등을 돌리고 믿음을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순결한 믿음의 중요한 특징들 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역동적인 믿음

믿음의 시험들

믿음의 대적들

믿음의 담대함

역동적인 믿음

진실하고 살아있는 믿음은 역동적입니다. 많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 즉 피상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정적으로 변했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런 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적 삶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멈추게 되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살아있는 교제는 영적인 자극과 지속적인 새로움으로 가득합니다. – 어떤 불확실한 상황이 그 사람을 둘러 싼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동안에도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63:1-2)

이 역동적인 믿음은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을 향해 그리고 위를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그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수행하고 완성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날들의 중요함을 깨닫숩니다. 또한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해 그 사람을 위를 향해 움직이게 합니다.

믿음의 시험들

이것은 역동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경험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정적인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역동적인 믿음은 테스트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에는 이유들과 열매들이 있습니다.

원수는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믿는 자가 나아가는 모든 믿음의 새로운 단계 마다 대항해서 강렬하게 고소과 비난을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믿음의 단계는 항상 새로운 기름 부음, 새로운 권위, 그리고 하나님과 천사들과의 교통의 새로운 차원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을 위해 이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 시험 가운데 굳게 서 있을때 원수의 고소와 정죄는 무효가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시험하는 동안 우리를 강하게 붙드십니다. 반면에, 시험 후에는 믿음이 승인됩니다. 믿음이 굳건해지고 그 일하심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하심이란 제가 위에서 언급한 기름부음, 권위, 교제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시험의 성경적 예들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아브라함의 시험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1-2)

우리 모두는 이 이야기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22:16-18)

시험에서 걸려 넘어져 다른 결과를 보인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들어가기를 원하신 약속의 땅을 정찰하라고 사람들을 보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이 돌아 왔을 때,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였고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걸려서 회중이 불평하고 두려워하게 한 나쁜 보고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민수기 13 장과 14 장에서 읽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훈들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의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책인 욥기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사밧의 이야기처럼, 때때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테스트들을 허락하십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그에게 왔을때,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역대하20:12)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찾았고 여호사밧은 이렇게 말하며 주목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주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설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엄청난 전리품들을 취했습니다.(역대하20:20-30)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히스기아 왕의 시대에 앗시리아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들 때의 일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그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이사야37:3). 이 말은 영적인 연약함과 준비가 부족한 상태를 내비치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향했을 때, 주님은 그분의 천사를 보내어 하루만에 앗시라아 진영에 있는 185,000명을 전멸시키셨고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둘러싼 포위를 무너트리셨습니다.(참고:이사야 37:36-37)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시험은 인정, 정죄 혹은 영적 깨어남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적들

이것은 참되고 순결한 믿음의 특징들 중 또 다른 측면입니다.

믿음의 비전과 관련된 대립들은 거의 불가피합니다. 원수는 믿음의 역사와 그 성취를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원수의 계획에 있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기도를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축하려는 일과 관련해 느헤미야가 직면했던 일들에 대해 읽습니다. 그가 일을 시작하자 마자 대적하는 일들도 시작되었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모양이 있었습니다: 조롱, 겁먹게 함, 그리고 방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느헤미야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느6:3). 그리고 그들이 그를 두렵게해서 도망가게 만들려고 했을 때도 느헤미야는 말했습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느6:11)

그는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는 건축을 하고 한 손에는 무기를 들라고 독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모든 일에는 영적인 전쟁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느4:17)

동시에 그는 끊임없는 기도하면 주님을 계속 신뢰했습니다.: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6:9b)

그는 또한 ‘새벽부터 정오까지(느8: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이 대적을 스가랴서 4 장의 말씀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했을 때에 믿음의 대적의 큰 그림을 봅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붙들었을때 위대한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 스가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우리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큰 산아(대적하는 산)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오실 메시야)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믿음의 저자가 인내와 그분 앞에 놓인 기쁨을 통해 승리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 ( 대적 ) 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12:2-3)

믿음의 담대함

이것은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믿음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의 말로 우리를 상기시켜 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 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3:12)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면 이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태: 회개하는 겸손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원수를 이기셨습니다.

참고 인내함으로 고통을 감내함.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12:1)”

믿음 없는 말들을 피하고 실패감이나 좌절감에 빠지는 것을 피할 것 .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3. 세번째: 현 세대 믿음의 사람들과 그들의 책임

평범한 믿는 자에게 기대되는 믿음의 걸음과 자신의 세대를 향한 책임을 깨닫고 그 일원이 되기를 소망하는 믿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믿음의 걸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마음과 의도의 진실성을 보시고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령님의 훈련을 통해 그 사람은 준비되고 믿음의 횃불을 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름부음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 시대의 역사의 얼굴을 바꿉니다.

우리는 우리의 날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목적들을 분별해야할 너무나 큰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시는 어떤 시간 이후에 오게 될 목적들 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목적들도 있습니다.

가까운, 혹은 즉각적인 목적들은 우리 세대와 그 안에 있는 악한 자의 계획, 영혼들의 상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 및 나라들의 상태를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 목적들, 혹은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길인 주님의 재림과 관려된 하나님께서 아시는 어떤 시간 후의 아직 오지 않은 목적들 입니다 –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첫 초림 전에 했던 것 처럼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하는 지를 먼저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고후6:1). 주님 한 분만이 그런 상황들에서 일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목적들을 알고 구체화한 후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해야 할 방법들을 배워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방법들은 :

중보기도 :

중보기도는 책임을 가지고 마음에 짐을 지고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희생 :

희생은 물러서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악한 자의 대적과 고통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을 신뢰함에 확고부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혼의 사랑과 그들을 섬기려는 소망에서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살아있는 모범 :

복음대로 살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포하는 모델들과 모범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는 소망하고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 위에 완전히 세워졌기 때문이며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성경에서 읽습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예언적 기름부으심이 있는 가르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지고, 이해되어 지고, 혼에 뿌리 내려지게 해서 그들을 구원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 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1:21)

맞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혼에 심어지고 뿌리내릴 때 묶임과 사단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들은 어떨가요 ?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나누었으니 이제는 그들의 몇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몇가지 특징들

믿음의 사람의 마음 :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 된 마음입니다. 다른 것에 사로 잡히지 않은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분의 뜻 외에 다른 어떤 문제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찾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구별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순종하는 것에 기초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7-39)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

그는 주님을 완전하게 신뢰함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이 예배하고, 자신의 친구가 되신,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는 주님에 대한 완전히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 (시138:8)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분별하고 마음으로 약속을 붙잡는 방법도 아는 믿음입니다.

또한 시간을 분별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보는 법도 압니다.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눅12:56)

따라서 믿음의 사람이 시간을 분별하고 사람들의 상태를 알때 그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고 섬길지를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주인처럼 인내하고 유혹받습니다 .

그는 도전 가운데서도 겸손하게 인내하며 오래 참는 법을 배웁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처럼 굴욕, 멸시 또는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의 고난과 그분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는 것임을 압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10)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겸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내해야는지 알기 위해 때때로 그들의 고통 또는 그들의 죄 까지도 동참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회개로 이끌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위대한 구원을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여기에는 매우 특별한 분별력과 인도하심이 요구됩니다.

이에 해당하는 몇가지 성격적 예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

그는 백성의 가증과 죄악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유대 법에 따르면 더럽혀진 빵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는 또한 실제로 고통스러운 육체적 제한 가운데 있도록, 심지어 그의 백성들의 상황 때문에 굶주림과 갈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스겔서 4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그는 자신의 아내가 간음을 행했을때 큰 고통을 경험했고 아내를 용서하고 회복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상처받은 마음의 사랑의 신비를 배웠고 이 상처받은 사랑의 신비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몇 예들이 있습니다 :

사도들은 모두 복음을 위해 죽음의 지경까지 고통을 감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의 메세지를 그들의 시대에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직면했던 성인들의 삶에는 다른 예들을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적 성인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가 아리아 이단으로 부터 믿음을 보존하고 보호하는데 열심이였던 것 같이 그들에게 전해진 믿음을 보존했습니다.

자신들의 시대와 장소에서 역사의 얼굴을 바꾼 수없이 많은 동방의 성인들과 서방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거룩한 믿음의 횃불을 든 믿음의 사람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면, 지금:

우리는 우리 세대를 위해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선택하고 받아들입니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b)”라고 주님에 대해 기록된것 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삼키는 진정한 거룩한 열심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신뢰를 받고 보냄받기 위해 인내하고 있습니까?

이것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으로 남아 있으며, 말로가 아닌 확신으로 우리의 대답과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다음의 구절들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전1:5)

+ 아 멘 +

[1] 원문은 그녀가 남편과 7년을 산후에 84년 동안 과부로 지냈다고 기록함

She was of a great age, and had lived with a husband seven years from her virginity; and this woman was a widow of about eighty-four years, who did not depart from the temple, but served God with fastings and prayers night and day.(Luke2:36~37 NJKV)

[2] 헬라원어의 의미는 비밀이 아니라 신비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

구약의 경우

구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만'(aman)이란 동사이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멘’이란 말이 나온 것 기억하는가? 아멘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다.

‘아만’은 본래 뜻이 ‘굳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다’는 뜻이다.

영어로 confirm이란 말로 주로 번역된다. 그래서 이 ‘confirm’ ’굳게 한다’는 동사, 우리말로는 그것을 사역형동사라고 한다. 사역형, 뭘 ‘누구한테 맡겨서 그렇게 하게 한다’는 이 단어를 ‘아만’이라는 사역형동사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을 거의 대부분이 우리말에 ‘믿는다’ 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최초로 구약에 ‘아만’의 사역형 동사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신 저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 절인데 거기 그런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 ‘아만’이란 동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믿는다’라고 번역했을 때, 그 뜻은 자기스스로가 설수 없기 때문에, 굳게 설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서있어야 하는데 자꾸 넘어지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맡겨서 결과적으로 그 손이 와서 ‘굳게 세워준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굳게 서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맡겨서 굳게 서게 한다’ 는 그 뜻이 ‘믿는다’라는 것이다. 이 ‘아만’이란 동사에서 능동형 소위 기본형으로 쓰는 단어로는 ‘믿는다’라고 번역된 말이 없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말로는 ‘내가 믿는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그런 말이 없다. ‘내가 스스로 혹은 내 힘으로 무엇을 믿는다’ 그런 개념이 없다.

다시 복습한다. ‘아만’은 ‘맡겨서 굳게 한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견고하게 한다, 굳게 선다’ 그런 말이 아만이란 동사에 쓰인 일이 없다.

그러니깐 우리가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이다. 이것을 모르면 진리에서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샘의 근원이 달라지면서 딴 샘이 나온다. 딴 샘이 생기는 것이며 전혀 다른 물이 나오는 다른 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

역대하 20장 20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함께 찾아보겠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신뢰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은 ‘아만’이라는 동사에 사역형동사이다. 그 다음을 보자.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여기 ‘견고히 서리라’는 말이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시키는 것은 사역형이다. ‘빨간 물속에 옷을 집어 넣었더니 그 빨간 물이 옷을 빨갛게 만들어서 옷이 빨갛게 되어 진다’는 이 예문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이 말씀을 잘 보자. 똑같은 ‘아만’이란 동사인데 앞에 것은 사역형 동사이고 뒤에 것은 수동형 동사이다. ‘견고히 서리라’ 이 말은 자기가 견고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맡겨서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게 되어 진다는 수동형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는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자꾸 넘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그러면 결과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 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아만’이란 동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그런 예들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 하나만 더 보자. 이사야 7장 9절 끝에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리고 끝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여기서 ‘믿지 아니하면’은 ‘아만’의 사역형 동사이다.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서다’ ‘정확하게 굳게 세워진다’ 그것은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세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자기 혼자는 넘어진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견고하게 세워진다.

사단의 거짓진리를 조심하라

‘믿음’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잘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가 6천년동안 우리인간에게 뭐라고 말했는가하면 ‘네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라. 신앙이든지 무엇이든지’다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아주 익숙해 있다. 우리가 늘 하는 이야기 있지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이 어떤 면에선 진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진리가 아니고 진리의 반대이다. 이 개념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상을 마귀가 계속 주입시켜 왔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 사다리를 놓아가지고 하늘 끝까지 사람이 올라가서 우주의 중심까지에 닿는 것이 가능한가? 영원히 해도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가지고 땅에 닿게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야곱의 사닥다리를 기억하는가?

사닥다리를 누가 내리는가?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다리를 놓아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겠는가? 태양 끝까지 가겠는가? 우주의 끝을 어떻게 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단은 끊임없이 안 되는 일을 시킨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방법이다.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단의 술책이다.

신약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믿음’을 ‘피스튜오'(pisteuo)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가 번역된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데 번역된 것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요한복음 2장 23절 24절에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23절의 ‘믿었으나’ 는 헬라어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4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거기 ‘의탁지’라는 단어도 역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3절에는 ‘믿었다’라고 번역했고, 24절로 와서 ‘의탁’즉 ‘맡기다’란 말로 번역했다. 본래 ‘믿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맡긴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굳은 믿음

좀 더 확실하게 번역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 ‘맡기겠느냐’ 이 단어가 ‘피스튜오’이다. 여기는 아주 정확하게 우리말로 ‘맡긴다’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니까 이 ‘믿는다’는 동사의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맡긴다’이다. 자기 스스로 설수 없기 때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피스튜오’가 수동태로 쓰인 한 예를 찾아보면,

로마서 3장 1절-2절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 ‘맡았다’는 말이

‘피스티오’의 수동태로 되어있다. 우리말로는 ‘맡았음’이라고 되어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경을 자기들이 떠 맡았다, 끌어 앉았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맡겨졌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가 본래 뜻이다.

그래서 ‘피스튜오’라는 동사나 ‘아만’이란 동사가 구약이나 신약에 공히 ‘맡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게 성경의 원래 뜻이다. 여기서 약간의 말의 형태가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바뀐 일이 없다.

정리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 라고 표현 할 때는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머리로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존재를 거기다가 ‘맡긴다’가 본래 뜻이다. ‘믿음’의 주체는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시도록 나를 ‘맡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스스로 ‘믿는다(굳게선다)’ 이런 말은 아예 없다. 이게 중요한 진리이다.

‘믿음’ 곧 맡기는 것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예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결혼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떤 청년과 결혼을 목표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남자 청년이 사위 감으로 영 못 마땅했다. 그래서 딸에게 교제를 중단할 것을 종용했는데 그 딸의 입장은 어머니와 전연 달랐다. 너무나 그 남자 청년이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에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계속 교제를 했다. 시간이 흘러도 중단하기는커녕 계속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장래가 불안했고 그만큼 딸을 압박했다. 딸도 양보할 수가 없다보니 모녀 사이가 갈등관계로 변해 갔다. 드디어는 어머니도 딸도 양보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되자 감정싸움이 심각하게 되어 이 어머니가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연락을 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그 남자 청년과 딸이 결혼하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하나님보다 어머니가 더 잘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보다 미래를 더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습니까?’ ‘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교제를 참견하지 마시고 그 결혼문제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보라고 조언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는지 가르쳐달라고 해서 기도로 맡기라고 하며 기도할 내용 ‘아버지 저는 그들의 이후의 미래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대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좋던 딸과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제 생각을 버리고, 제가 그들을 헤어지게 하려고 했던 생각과 노력을 버리고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신 약속의 말씀 속에 들어가서 그 약속의 말씀 속에 계신 아버지 발 앞에 저의 이 염려와 문제를 내려놓고 아버지께 맡기겠사오니 그 교제가 아버지의 뜻이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아버지 뜻이 아니면 헤어지게 해 주옵소서! 저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문제를 맡아 주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시간표대로, 아버지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했다.

1주일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그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불안하고 그 남자 청년을 보면 웬지 밉고, 보기 싫고, 딸에게는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한 그러한 상태는 아직은 맡기지 않은 증거이고, 맡겨지면 하나님이 견고케 하시므로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서

예레미야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대로 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견고히 서도록, 믿음 달라고 다시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 1주일 정도 지났는데 연락이 와서는 ‘이제는 마음에 평강이 있고, 딸에게도 잔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 남자 청년을 봐도 미운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그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신 상태인 믿음 곧 맡기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이제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하시는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시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마귀는 어떤 문제든 염려든 죄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방해 할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맡긴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시험을 하되 그 문제의 해결이 지체될 때 또 다시 염려하게 하여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시험을 한다고 조언했고 그리하여 맡기는 것 곧 믿음을 견고케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 이었으므로 이 어머니는 주의하고 계속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약 3개월 이후에 연락이 왔는데 딸이 그 남자 청년과 헤어졌다고 하며 너무 기뻐하고 감격해 했다.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믿음’은 마음으로나 생각에서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맡겨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셔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우리가 맡기게 되고 더욱 믿음을 받고 더욱 더 많이 맡기게 되어 “믿음에서 믿음으로”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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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기초를 두며,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대하신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1)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2) 하나님께 순종하고,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모두 구현되어야 한다.

이 장은 우리의 믿음의 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물질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본받기를 기대하셨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제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21:22; 약 1:5-8을 보라). 성경은 분명히 의심하는 자는 신자가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정의(Faith Defined)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히브리서 11:1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에서,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확신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의심의 여지를 둔다. 희망은 항상 “아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는 오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셔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올지 여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믿음은 항상 확실하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성경적인 정의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늘 위의 어두운 구름을 보면서 “나는 비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에는 의심의 요소가 없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외의 다른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Faith is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손에 책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당신은 그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당신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책을 잡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근처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나는 확신한다.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천사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내가 천사가 날고 있는 것을 감지했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만일 내가 천사를 보거나 듣거나 감지했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천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확신할 수 있게 할까?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시편 34:7에서 그분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말씀 외에는 내가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다. 세상 사람은 “보는 것을 믿게 된다”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믿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우리의 상황이 변화가 없으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단순히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딛 1:2).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How Do We Acquire Faith?)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듣거나 또는 읽어야 한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 믿음을 받도록 안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당신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겠다는 결단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믿음의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성경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부터 산을 옮기는 믿음까지 여러 가지 믿음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의 근육처럼 먹고 훈련하는 것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의 믿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기 위해 믿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 걱정과 우려를 대면하는 시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마 6:25-34; 빌 4:6-8:1; 벧전 5:7을 보라). 염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예로 가득하다. 우리는 나중에 이 장에서 몇 가지 예를 볼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영적 치유에 관해 고려할 것이다(기타 좋은 예들은 왕하 4:1-7; 막 5:25-34; 눅 19:1-10; 행14:7-10을 보라).

마음으로 믿는다(Faith is of the Heart)

성경적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롬 10:10상)고 썼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강조 추가).

당신이 머리로는 의심하지만, 마음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할 때, 육체적 감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영향받은 우리의 지성은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생각 대신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잘못된 믿음(Common Faith Mistakes)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받는 데 실패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믿으려고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게 그 부분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로부터 임신할 수 없다고 들은 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대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아래의 두 약속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네가 복음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이 약속은 자녀가 없는 부부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이나 딸을 낳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믿음이 효과적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만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보고,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결정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내일 재림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말씀과 다른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이 재림하실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내일 재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죽은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들도 같은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전에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은 계속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살전 4:17)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가장 먼저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사전에 나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은 이상, 내가 내일 점심에 당신의 집을 방문 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약속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한테 어느 성경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약속하셨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약속을 받지 못한 이상, 당신은 믿음에 대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Second Common Mistake)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가된 모든 조건은 충족시키지 않으면서 약속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스도인이 시편 37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만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1-5).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위의 약속에서 적어도 8가지 조건을 셀 수 있다.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빌립보서 4:19의 약속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빌립보서 4:19의 약속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약속은 구제함에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쓸것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3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에 관한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하셨으며, 그들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순종적으로 드리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말 3:8-12을 보라).

성경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약속에 따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세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Third Common Mistake)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매번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적용되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그들이 기도 응답을 보았을 때에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제 받을 것이라고 믿지 이미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기도할 때, 응당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믿고, 응답하여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응답하심을 본 후가 아닌 보기 전에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쓴 것처럼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과 일치하다. 예수님은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잘못을 범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같은 것을 반복해서 간구할 필요가 없다.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간구를 두 번 이상 하시지 않았는가?(Didn’t Jesus Make the Same Request More Than Once?)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 연속 같은 기도를 하셨다(마 26:39-44을 보라).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라. 사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세 번의 같은 기도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다.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는 종종 모든 기도의 모범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우리는 응당 모든 기도는 끝마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시는 것을 간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이 없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죄를 고백하오니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음을 알고 있다(요일 1:9).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한 뜻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마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신 적은 그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번도 예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아시면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의 뜻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말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약속의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킨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간구한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히 6:12).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패배시키려 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신이 전쟁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공격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생각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반드시 피하게 된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실례(An Example of Faith in Action)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 중 하나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가 전에도 갈리리 바다의 배에서 큰 풍랑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마 8:23-27). 그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가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신 후 풍랑을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배를 타기 전에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4:35을 보라). 그러나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흔들리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들이 다 죽을 거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그들 절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다. 그분은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 하심대로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도 분명히 그날 저녁 바람이 거스를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도전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거스르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새 갔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단지 몇 일 전에 행하신 것을 보고도 바람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지나가려고 하셨다”(막 6: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혼자 대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나는 어려움의 바람이 우리의 삶에 불어닥쳐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시는 자가 몇 번이나 우리 곁을 지나가셨는지 궁금하다.

믿음의 원리(Principles of Faith)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전에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이 말씀 전에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다면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아닌 가정으로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 다른 제자가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더라도 모두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그분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아니므로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비록 몇 초 전에 유령의 공포 때문에 소리 질렀던 그가 첫걸음을 내 디딜 때에 머리로는 의심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가 배의 돛대에 달라 붙어서 엄지 발가락을 물에 담가 보면서 물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주는지를 실험했다면, 그는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오감이 주는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시간을 겪게 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잘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걷기를 멈췄고, 다른 발작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했던 그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단 시작한 일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사람은 종종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지만, 배로 무사히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로 조금 나아가기만 원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베드로는 믿음을 잃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시지 않았지만, 곧 베드로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베드로에게 그가 의심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 베드로에게는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걱정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와 의심으로 인한 실패들로 가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의심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민 14:26-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눅 22:35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은 까닭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마 17:19-20을 보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고향 나사렛의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병에 시달렸다(막 6:5-6을 보라).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믿음이나 의심에 따라 승리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원한을 품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내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을 때, 나는 회개하고 다시 한 번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이 항상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침륜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는 축복을 받으나 의심하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 그분은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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