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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4 (화) [하루 한 장]“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눅9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사자로
각 성과 촌에 두루 보내시면서
여행을 위한 준비물들을 하나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보내신 이가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보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알도록
깨닫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이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이 친히 책임을 물을 것을
약속하는 말씀까지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이 필요한
구원의 대상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부산 성민교회 분홍목사의 설교 영상들을 통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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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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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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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4.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ozWbp785dM
누가복음 9장 주석
누가복음 제 9장
=====9:1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
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
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
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 엑수시아)에 능력(* ,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
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
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
다.
=====9:2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
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
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
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
으로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
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
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
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
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 케뤼쎄인)와 ‘고치는’
(* ,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 )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
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9:3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
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
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
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
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
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
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
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
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
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
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
지 못했다. (4)돈(* ,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
지막으로 두 벌 옷(* ,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
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
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
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
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
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9:4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
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
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
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9:5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
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
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
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
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
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
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
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
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9:6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 )는
‘디에르 코마이'(* )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
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 코마스)이라는 단어
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
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
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
)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
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
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9:7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
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
)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
하고 있는 모든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
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
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 )와 ‘길’을 뜻하는 ‘포로
스'(* )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
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
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
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
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
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
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
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
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9:8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
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
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
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
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9:9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
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
현 ‘에제테이'(* )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
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9:10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
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
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 )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
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
다.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
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
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
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
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
을 갖고자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
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
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9:11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
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
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
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
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
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
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
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
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
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
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 ,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9:12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 )은 ‘곡
식’을 뜻하는 ‘시티온'(* )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
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
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
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
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9:13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
리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
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
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
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
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
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
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
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
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
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
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
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
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
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
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
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9:14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
포시아'(* )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
스'(* )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
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 호세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
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
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
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9:15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
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9:16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
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 )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
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
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 )는 ‘디도
미'(* )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
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
다.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
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
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
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
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
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9:18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
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인 ‘…할때에’라는 ‘엔토'(* )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
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
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
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
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
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
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
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9:19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
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
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
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41-56;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
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
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
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
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
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
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
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
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
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
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
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9:21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
)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
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
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
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
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9:22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
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
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
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
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
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
마조'(* )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
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
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
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
)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 )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
‘데이'(* )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
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 프레스뷔테
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
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 아르키에류스)은 1년
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
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
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
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 그람마튜스)은 ‘랍
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
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
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
다. 유대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9:23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
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
마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부
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9:24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
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
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
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
자라 할 수 있다.
=====9:25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
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
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
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9:26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
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
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
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
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
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
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
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
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9:27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
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
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
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
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
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
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
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
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기도 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
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
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
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9:29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
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
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
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
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
)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 )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 )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
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
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
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
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다.
=====9:30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
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
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
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9:31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
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 )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
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
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
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
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9:32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
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
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
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
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
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결과를 초래했다(22:42-46).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
다.
=====9:33
<변회산>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
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
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
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9:34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
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
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
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
(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
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9:35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
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
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
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
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
(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
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
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
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
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
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
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 )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
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
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
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
막 9:9).
=====9:37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
이 밤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
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
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
었다고 한다.
=====9:38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
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
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
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
9:22)의 ‘불쌍히 여기다'(* ,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
다'(* ,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
하는 ‘에피'(* )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 )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9:39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
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
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
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9:40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
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
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
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
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이 없었기 때문이다.
=====9:4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
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
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
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
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
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
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 )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9: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
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 엘렉센 아우톤)
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
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
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
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
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
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
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9:43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
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
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
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
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
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18:31-34;22:21-23). 여기
서 ‘넘기우다'(* ,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
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
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
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9:45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
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
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 )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 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
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
자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
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
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
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
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9:46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
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 디알로
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
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
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
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
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
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9:47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
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9:48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주기 위해 간
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
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
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
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
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
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
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
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
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
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
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
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9:49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
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
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
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9:50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
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
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
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
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9:51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 아날렘프세오
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 )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
)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
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
)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
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
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
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
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
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9:52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
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
(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
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
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
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9:53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
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은 예루살렘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
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
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
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
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
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9:54
야고보와 요한이…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
(Sons of Thunder, NIV)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막 3:17), 그 까닭은 본절에서 보
는대로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하
나의 보복 조처를 제안하는데 그 내용은 아하시야 왕 당시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
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사른 사건(왕하 1:10-12)을 반영한다. 어쨌든 제자들
은 복음이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19:10;요 3:17;12:47)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9:55
꾸짖으시고 – 구체적인 내용없이 간략하게 언급된 ‘꾸짖으시고’는 제자들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셨음을 말해준다.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보복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구약적 대응방식 즉 ‘이에는 이로 눈에
는 눈으로’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꾸짖고 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방식 즉 ‘보복의 방
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방식을 말씀하심으로써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
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여기 나타난 예수의 태도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저항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에 대한 하나의 복선(伏線)이라 할 수 있다.
=====9:56
다른 촌으로 – 누가는 지리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다른 곳으로갔다
고만 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사실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루살
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보복적 행동을 취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는 먼 길로 돌아가는 비효율적 방식을 택하셨고 폭력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방식,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예수의 방
법을 따를 때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간 ‘다른 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하는데, (1)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
(Klostermann, Zahn, Plummer), (2)사마리아로부터 다시 돌아간 갈릴리의 어느 촌
(Bruce, Gilmour, Farrar), (3)베레아 접경의 촌 등이 그것이며 이중 어느 견해가 정
확한지 단정 지을수 없으나 9절과 10:10과 17:11의 본문을 참고할 때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9:57
혹이…좇으리이다 – 여기서 ‘혹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
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
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모습
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
어지는 예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마 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
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
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9:58
여우도…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
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
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
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이다(23절).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9:59
부친을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
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
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
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
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9:60
죽은 자들로…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
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
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
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
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9:61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
며 작별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
을 것이다.
=====9:62
손에 쟁기를…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
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
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하는 교훈
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데토스'(* )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
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헬라어 누가복음 9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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슁칼레사메노스 데 투스 도데카 에도켄 아우토이스 뒤나민 카이 엨수시안 에피 판타 타 다이모니아 카이 노수스 데라퓨에인
개역개정,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새번역,1 예수께서 그 열둘을 한 자리에 불러놓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들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영어NIV,1 When Jesus had called the Twelve together, he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to drive out all demons and to cure diseases,
영어NASB,1 And He called the twelve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the demons and to heal diseases.
영어MSG,1 Jesus now called the Twelve and gave them authority and power to deal with all the demons and cure diseases.
영어NRSV,1 Then Jesus called the twelve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mons and to cure diseases,
헬라어신약Stephanos,1 συγκαλεσαμενος δε τους δωδεκα μαθητας αυτου εδωκεν αυτοις δυναμιν και εξουσιαν επι παντα τα δαιμονια και νοσους θεραπευειν
라틴어Vulgate,1 convocatis autem duodecim apostolis dedit illis virtutem et potestatem super omnia daemonia et ut languores curarent
히브리어Modern,1 ויקרא אל שנים העשר ויתן להם גבורה ושלטן על כל השדים ולרפא חליים׃
성 경: [눅9: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엑수시아)에 능력(*,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카이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케뤼쎄인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카이 이아스다이 투스 아스데네이스
개역개정,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새번역,2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우리말성경,2 그리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영어NIV,2 and he sent them out to preach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영어NASB,2 And He sent them out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perform healing.
영어MSG,2 He commissioned them to preach the news of God’s kingdom and heal the sick.
영어NRSV,2 and he sent them out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απεστειλεν αυτους κηρυσσει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και ιασθαι τους ασθενουντας
라틴어Vulgate,2 et misit illos praedicare regnum Dei et sanare infirmos
히브리어Modern,2 וישלחם לקרא את מלכות האלהים ולרפא את החלים׃
성 경: [눅9: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으로 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케뤼쎄인)와 ‘고치는'(*,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메덴 아이레테 에이스 텐 호돈 메테 랍돈 메테 페란 메테 아르톤 메테 아르귀리온 메테 아나 뒤오 키토나스 에케인
개역개정,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새번역,3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우리말성경,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지팡이도 가방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가지고 가지 말라.
가톨릭성경,3 그들에게 이르셨다. “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영어NIV,3 He told them: “Take nothing for the journey–no staff, no bag, no bread, no money, no extra tunic.
영어NASB,3 And He said to them, “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neither a staff, nor a bag, nor bread, nor money; and do not even have two tunics apiece.
영어MSG,3 He said, “Don’t load yourselves up with equipment.
영어NRSV,3 He said to them, “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no staff, nor bag, nor bread, nor money–not even an extra tunic.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μηδεν αιρετε εις την οδον μητε ραβδους μητε πηραν μητε αρτον μητε αργυριον μητε ανα δυο χιτωνας εχειν
라틴어Vulgate,3 et ait ad illos nihil tuleritis in via neque virgam neque peram neque panem neque pecuniam neque duas tunicas habeatis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להם אל תקחו מאומה לדרך לא מטות ולא תרמיל ולא לחם ולא כסף ואל יהיה לאיש מכם שתי כתנות׃
성 경: [눅9: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4)돈(*,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지막으로 두 벌 옷(*,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에이스 헨 안 오이키안 에이셀데테 에케이 메네테 카이 에케이덴 엨세르케스데
개역개정,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새번역,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거라.
우리말성경,4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
가톨릭성경,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영어NIV,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until you leave that town.
영어NASB,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until you leave that city.
영어MSG,4 Keep it simple; you are the equipment. And no luxury inns–get a modest place and be content there until you leave.
영어NRSV,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and leave from there.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εις ην αν οικιαν εισελθητε εκει μενετε και εκειθεν εξερχεσθε
라틴어Vulgate,4 et in quamcumque domum intraveritis ibi manete et inde ne exeatis
히브리어Modern,4 והבית אשר תבאו בו שם שבו לכם ומשם צאו׃
성 경: [눅9: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카이 호소이 안 메 데콘타이 휘마스 엨세르코메노이 아포 테스 폴레오스 에케이네스 톤 코니오르톤 나포 톤 포돈 휘몬 아포티나쎄테 에이스 마르튀리온 엪 아우투스
개역개정,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새번역,5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우리말성경,5 만약 너희를 맞아 주지 않으면 그 마을을 떠날 때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발에 붙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
가톨릭성경,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영어NIV,5 If people do not welcome you,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when you leave their town, as a testimony against them.”
영어NASB,5 “And as for those who do not receive you, as you go out from that city,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as a testimony against them.”
영어MSG,5 If you’re not welcomed, leave town. Don’t make a scene. Shrug your shoulders and move on.”
영어NRSV,5 Wherever they do not welcome you, as you are leaving that town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as a testimony against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οσοι αν μη δεξωνται υμας εξερχομενοι απο της πολεως εκεινης και τον κονιορτον απο των ποδων υμων αποτιναξατε εις μαρτυριον επ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5 et quicumque non receperint vos exeuntes de civitate illa etiam pulverem pedum vestrorum excutite in testimonium supra illos
히브리어Modern,5 וכל אשר לא יקבלו אתכם צאו מן העיר ההיא ונערו את העפר מעל רגליכם לעדות בהם׃
성 경: [눅9: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엨세르코메노이 데 디에르콘토 카타 타스 코마스 유앙겔리조메노이 카이 데라퓨온테스 판타쿠
개역개정,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새번역,6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우리말성경,6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영어NIV,6 So they set out and went from village to village, preaching the gospel and healing people everywhere.
영어NASB,6 Departing, they began going throughout the villages, preaching the gospel and healing everywhere.
영어MSG,6 Commissioned, they left. They traveled from town to town telling the latest news of God, the Message, and curing people everywhere they went.
영어NRSV,6 They departed and went through the villages, bringing the good news and curing diseases everywhere.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ξερχομενοι δε διηρχοντο κατα τας κωμας ευαγγελιζομενοι και θεραπευοντες πανταχου
라틴어Vulgate,6 egressi autem circumibant per castella evangelizantes et curantes ubique
히브리어Modern,6 ויצאו ויעברו בכפרים מבשרים את הבשורה ומרפאים בכל מקום׃
성 경: [눅9: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는 ‘디에르 코마이'(*)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코마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에쿠센 데 헤로데스 호 테트라아르케스 타 기노메나 판타 카이 디에포레이 디아 토 레게스다이 휘포 티논 호티 요안네스 에게르데 에크 네크론
개역개정,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새번역,7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서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 ㉠그, ‘테트라아르케스’. 지위와 권위가 왕보다 밑에 있었음
우리말성경,7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영어NIV,7 Now Herod the tetrarch heard about all that was going on. And he was perplexed, because some were saying that John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영어NASB,7 Now Herod the tetrarch heard of all that was happening; and he was greatly perplexed, because it was said by some that John had risen from the dead,
영어MSG,7 Herod, the ruler, heard of these goings on and didn’t know what to think. There were people saying John had come back from the dead,
영어NRSV,7 Now Herod the ruler heard about all that had taken place, and he was perplexed, because it was said by some that John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κουσεν δε ηρωδης ο τετραρχης τα γινομενα υπ αυτου παντα και διηπορει δια το λεγεσθαι υπο τινων οτι ιωαννης εγηγερται εκ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7 audivit autem Herodes tetrarcha omnia quae fiebant ab eo et haesitabat eo quod diceretur
히브리어Modern,7 וישמע הורדוס שר הרבע את כל אשר נעשה על ידו ותפעם רוחו כי יש אשר אמרו יוחנן קם מן המתים׃
성 경: [눅9: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와 ‘길’을 뜻하는 ‘포로스'(*)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휘포 티논 데 호티 엘리아스 에파네 알론 데 호티 프로페테스 티스 톤 아르카이온 아네스테
개역개정,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새번역,8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성경,8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옛 예언자 중 하나가 되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더러는 “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영어NIV,8 others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had come back to life.
영어NASB,8 and by some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by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old had risen again.
영어MSG,8 others that Elijah had appeared, still others that some prophet of long ago had shown up.
영어NRSV,8 by some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by others that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d arisen.
헬라어신약Stephanos,8 υπο τινων δε οτι ηλιας εφανη αλλων δε οτι προφητης εις των αρχαιων ανεστη
라틴어Vulgate,8 a quibusdam quia Iohannes surrexit a mortuis a quibusdam vero quia Helias apparuit ab aliis autem quia propheta unus de antiquis surrexit
히브리어Modern,8 ויש שאמרו אליהו נראה ואחרים אמרו נביא קם מן הקדמונים׃
성 경: [눅9: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에이펜 데 헤로데스 요안넨 에고 아페케팔리사 티스 데 에스틴 후토스 페리 후 아쿠오 토이아우타 카이 에제테이 이데인 아우톤
개역개정,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새번역,9 그러나 헤롯은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게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하였다.
우리말성경,9 그러자 헤롯은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는데 이런 소문이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예수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영어NIV,9 But Herod said, “I beheaded John. Who, then, is this I hear such things about?” And he tried to see him.
영어NASB,9 Herod said, “I myself had John beheaded; but who is this man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영어MSG,9 Herod said, “But I killed John–took off his head. So who is this that I keep hearing about?” Curious, he looked for a chance to see him in action.
영어NRSV,9 Herod said, “John I beheaded; but who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tried to se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ιπεν ο ηρωδης ιωαννην εγω απεκεφαλισα τις δε εστιν ουτος περι ου εγω ακουω τοιαυτα και εζητει ιδε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9 et ait Herodes Iohannem ego decollavi quis autem est iste de quo audio ego talia et quaerebat videre eum
히브리어Modern,9 ויאמר הורדוס הן אנכי נשאתי את ראש יוחנן מעליו ומי אפוא הוא אשר אני שמע עליו כזאת ויבקש לראותו׃
성 경: [눅9: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현 ‘에제테이'(*)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카이 휘포스트렢산테스 호이 아포스톨로이 디에게산토 아우토 호사 에포이에산 ㅏ이 파랄라본 아우투스 휘페코레센 캍 이디안 에이스 폴린 칼루메넨 베드사이다
개역개정,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새번역,1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우리말성경,10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께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새다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영어NIV,10 When the apostles returned, they reported to Jesus what they had done. Then he took them with him and they withdrew by themselves to a town called Bethsaida,
영어NASB,10 When the apostles returned, they gave an account to Him of all that they had done. Taking them with Him, He withdrew by Himself to a city called Bethsaida.
영어MSG,10 The apostles returned and reported on what they had done. Jesus took them away, off by themselves, near the town called Bethsaida.
영어NRSV,10 On their return the apostles told Jesus all they had done. He took them with him and withdrew privately to a city called Bethsaida.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υποστρεψαντες οι αποστολοι διηγησαντο αυτω οσα εποιησαν και παραλαβων αυτους υπεχωρησεν κατ ιδιαν εις τοπον ερημον πολεως καλουμενης βηθσαιδα
라틴어Vulgate,10 et reversi apostoli narraverunt illi quaecumque fecerunt et adsumptis illis secessit seorsum in locum desertum qui est Bethsaida
히브리어Modern,10 וישובו השליחים ויספרו לו את כל אשר עשו ויקחם אליו ויסר לבדד אל מקום חרב אשר לעיר הנקראה בית צידה׃
성 경: [눅9:1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다.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 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갖고자 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호이 데 오클로이 그논테스 에콜루데산 아우토 카이 아포뎈사메노스 아우투스 엘랄레이 아우토이스 페리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카이 투스 크레이안 에콘타스 데라페이아스 이아토
개역개정,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새번역,11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우리말성경,11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영어NIV,11 but the crowds learned about it and followed him. He welcomed them and spoke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healed those who needed healing.
영어NASB,11 But the crowds were aware of this and followed Him; and welcoming them, He began speaking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curing those who had need of healing.
영어MSG,11 But the crowds got wind of it and followed. Jesus graciously welcomed them and talked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Those who needed healing, he healed.
영어NRSV,11 When the crowds found out about it, they followed him; and he welcomed them, and spoke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healed those who needed to be cure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ι δε οχλοι γνοντες ηκολουθησαν αυτω και δεξαμενος αυτους ελαλει αυτοις περι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 και τους χρειαν εχοντας θεραπειας ιατο
라틴어Vulgate,11 quod cum cognovissent turbae secutae sunt illum et excepit illos et loquebatur illis de regno Dei et eos qui cura indigebant sanabat
히브리어Modern,11 והמון העם כאשר ידעו את זאת הלכו אחריו ויקבלם וידבר אליהם על מלכות האלהים וירפא את הצריכים לרפואה׃
성 경: [눅9:1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 데 헤메라 에릌사토 클리네인 프로셀돈테스 데 호이 도데카 에이판 아우토 아폴뤼손 톤 오클론 히나 포류덴테스 에이스 타스 퀴클로 코마스 카이 아그루스 카탈뤼소신 카이 휴로신 에피스티스몬 호티 호데 엔 에레모 토포 에스멘
개역개정,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새번역,12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우리말성경,12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외딴 곳에 와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 주변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얻게 하십시오.”
가톨릭성경,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영어NIV,12 Late in the afternoon the Twelve came to him and said, “Send the crowd away so they can go 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and find food and lodging, because we are in a remote place here.”
영어NASB,12 Now the day was ending, and the twelve came and said to Him, “Send the crowd away, that they may go in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and find lodging and get something to eat; for here we are in a desolate place.”
영어MSG,12 As the day declined, the Twelve said, “Dismiss the crowd so they can go to the farms or villages around here and get a room for the night and a bite to eat. We’re out in the middle of nowhere.”
영어NRSV,12 The day was drawing to a close, and the twelve came to him and said, “Send the crowd away, so that they may go in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to lodge and get provisions; for we are here in a deserted plac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η δε ημερα ηρξατο κλινειν προσελθοντες δε οι δωδεκα ειπον αυτω απολυσον τον οχλον ινα απελθοντες εις τας κυκλω κωμας και τους αγρους καταλυσωσιν και ευρωσιν επισιτισμον οτι ωδε εν ερημω τοπω εσμεν
라틴어Vulgate,12 dies autem coeperat declinare et accedentes duodecim dixerunt illi dimitte turbas ut euntes in castella villasque quae circa sunt devertant et inveniant escas quia hic in loco deserto sumus
히브리어Modern,12 והיום רפה לערב ושנים העשר קרבו ויאמרו אליו שלח נא את העם וילכו אל הכפרים והחצרים אשר סביבותינו ללון שם ולמצא מזון כי פה אנחנו במקום חרבה׃
성 경: [눅9:1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은 ‘곡식’을 뜻하는 ‘시티온'(*)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투스 도테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파게인 호이 데 에이펜 우크 에이신 헤민 플레이온 에 아르토이 펜테 카이 이크뒤에스 뒤오 에이 메티 포류덴테스 헤메이스 아고라소멘 에이스 판타 톤 라온 투톤 브로마타
개역개정,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새번역,13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3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가서 먹을 것을 사 와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3 예수님께서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3 He replied,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ey answered, “We have only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unless we go and buy food for all this crowd.”
영어NASB,13 But He said to them,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And they said, “We have no more than five loaves and two fish, unless perhaps we go and buy food for all these people.”
영어MSG,13 “You feed them,” Jesus said. They said, “We couldn’t scrape up more than five loaves of bread and a couple of fish–unless, of course, you want us to go to town ourselves and buy food for everybody.”
영어NRSV,13 But he said to them,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ey said, “We have no more than five loaves and two fish–unless we are to go and buy food for all thes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υς δοτε αυτοις υμεις φαγειν οι δε ειπον ουκ εισιν ημιν πλειον η πεντε αρτοι και δυο ιχθυες ει μητι πορευθεντες ημεις αγορασωμεν εις παντα τον λαον τουτον βρωματα
라틴어Vulgate,13 ait autem ad illos vos date illis manducare at illi dixerunt non sunt nobis plus quam quinque panes et duo pisces nisi forte nos eamus et emamus in omnem hanc turbam escas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 אליהם תנו אתם להם לאכל ויאמרו אין לנו כי אם חמשת ככרות לחם ודגים שנים בלתי אם נלך ונקנה אכל לכל העם הזה׃
성 경: [눅9:1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에산 가르 호세이 안드레스 펜타키스킬리오이 에이펜 데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카타클리나테 아우투스 클리시아스 호세이 아나 펜테콘타
개역개정,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새번역,14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우리말성경,14 그곳에는 남자만 5,000명 정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50명씩 둘러앉게 하라.”
가톨릭성경,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영어NIV,14 (About five thousand men were there.) But he said to his disciples, “Have them sit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영어NASB,14 (For there were about five thousand men.) And He said to His disciples, “Have them sit down to eat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영어MSG,14 (There were more than five thousand people in the crowd.) But he went ahead and directed his disciples, “Sit them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영어NRSV,14 For there were about five thousand men. And he said to his disciples, “Make them sit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헬라어신약Stephanos,14 ησαν γαρ ωσει ανδρες πεντακισχιλιοι ειπεν δε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κατακλινατε αυτους κλισιας ανα πεντηκοντα
라틴어Vulgate,14 erant autem fere viri quinque milia ait autem ad discipulos suos facite illos discumbere per convivia quinquagenos
히브리어Modern,14 כי היו כחמשת אלפי איש ויאמר אל תלמידיו הושיבו אתם שורות שורות חמשים בשורה׃
성 경: [눅9:1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포시아'(*)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스'(*)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호세이)이라는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카이에포이에산 후토스 카이 카테클리난 하판타스
개역개정,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새번역,15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우리말성경,15 제자들은 그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혔습니다.
가톨릭성경,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영어NIV,15 The disciples did so, and everybody sat down.
영어NASB,15 They did so, and had them all sit down.
영어MSG,15 They did what he said, and soon had everyone seated.
영어NRSV,15 They did so and made them all sit dow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ποιησαν ουτως και ανεκλιναν απαντας
라틴어Vulgate,15 et ita fecerunt et discumbere fecerunt omnes
히브리어Modern,15 ויעשו כן ויושיבו את כלם׃
성 경: [눅9:1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본 데 투스 펜테 아르투스 카이 투스 뒤오 잌뒤아스 아나블렢사스 에이스 톤 우라논 율로게센 아우투스 카이 카테클레센 카이 에디두 토이스 마데타이스 파라데이나이 토 오클로
개역개정,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새번역,16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 앞에 갖다 놓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영어NIV,16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gave thanks and broke them. Then he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영어NASB,16 Then He took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blessed them, and broke them, and kept giving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영어MSG,16 He took the five loaves and two fish, lifted his face to heaven in prayer, blessed, broke, and gave the bread and fish to the disciples to hand out to the crowd.
영어NRSV,16 And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he looked up to heaven, and blessed and broke them,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crow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λαβων δε τους πεντε αρτους και τους δυο ιχθυας αναβλεψας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ευλογησεν αυτους και κατεκλασεν και εδιδου τοις μαθηταις παρατιθεναι τω οχλω
라틴어Vulgate,16 acceptis autem quinque panibus et duobus piscibus respexit in caelum et benedixit illis et fregit et distribuit discipulis suis ut ponerent ante turbas
히브리어Modern,16 ויקח את חמשת ככרות הלחם ואת שני הדגים וישא עיניו השמימה ויברך עליהם ויפרס ויתן לתלמידיו לשום לפני העם׃
성 경: [눅9:1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는 ‘디도미'(*)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다.
카이 에파곤 카이 에코르타스데산 판테스 카이 에르데 토 페리쓔산 아우토이스 클라스마톤 코피노이 도데카
개역개정,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새번역,17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우리말성경,1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보니 12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가톨릭성경,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영어NIV,17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and the disciples picked up twelve basketfuls of broken pieces that were left over.
영어NASB,17 And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and the broken pieces which they had left over were picked up, twelve baskets full.
영어MSG,17 After the people had all eaten their fill, twelve baskets of leftovers were gathered up.
영어NRSV,17 And all ate and were filled. What was left over was gathered up, twelve baskets of broken pieces.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εφαγον και εχορτασθησαν παντες και ηρθη το περισσευσαν αυτοις κλασματων κοφινοι δωδεκα
라틴어Vulgate,17 et manducaverunt omnes et saturati sunt et sublatum est quod superfuit illis fragmentorum cofini duodecim
히브리어Modern,17 ויאכלו כלם וישבעו וישאו מן הפתותים הנותרים להם שנים עשר סלים׃
성 경: [눅9:1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에이나이 아우톤 프로슈코메논 카타 모나스 쉬네산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카이 에페로테센 아우투스 레곤 티나 메 레구신 호이 오클로이 에이나이
개역개정,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새번역,18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말성경,18 한번은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톨릭성경,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NIV,18 Once when Jesus was praying in private and his disciples were with him, he asked them, “Who do the crowds say I am?”
영어NASB,18 And it happened that while He was praying alone, the disciples were with Him, and He questioned them, saying, “Who do the people say that I am?”
영어MSG,18 One time when Jesus was off praying by himself, his disciples nearby, he asked them, “What are the crowds saying about me, about who I am?”
영어NRSV,18 Once when Jesus was praying alone, with only the disciples near him, he asked them, “Who do the crowds say that I am?”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ειναι αυτον προσευχομενον καταμονας συνησαν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και επηρωτησεν αυτους λεγων τινα με λεγουσιν οι οχλοι ειναι
라틴어Vulgate,18 et factum est cum solus esset orans erant cum illo et discipuli et interrogavit illos dicens quem me dicunt esse turbae
히브리어Modern,18 ויהי הוא מתפלל לבדד ויאספו אליו תלמידיו וישאל אתם לאמר מה אמרים עלי המון העם מי אני׃
성 경: [눅9:1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할때에’라는 ‘엔토'(*)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호이 데 아포크리덴테스 에이판 요안넨 톤 밮티스텐 알로이 데 엘리안 알로이 데 호티 프로페테스 티스 톤 아르카이온 아네스테
개역개정,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새번역,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9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옛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 침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영어NIV,19 They replied, “Some say John the Baptist; others say Elijah;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has come back to life.”
영어NASB,19 They answered and said, “John the Baptist, and others say Elijah; but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old has risen again.”
영어MSG,19 They said, “John the Baptizer. Others say Elijah. Still others say that one of the prophets from long ago has come back.”
영어NRSV,19 They answered, “John the Baptist; but others, Elijah;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s arise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ι δε αποκριθεντες ειπον ιωαννην τον βαπτιστην αλλοι δε ηλιαν αλλοι δε οτι προφητης τις των αρχαιων ανεστη
라틴어Vulgate,19 at illi responderunt et dixerunt Iohannem Baptistam alii autem Heliam alii quia propheta unus de prioribus surrexit
히브리어Modern,19 ויענו ויאמרו יוחנן המטביל ואחרים אמרים אליהו ואחרים אמרים נביא קם מן הקדמונים׃
성 경: [눅9:1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에이펜 데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 페트로스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톤 크리스톤 투 데우
개역개정,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새번역,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 ㉢히브리어로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신 분’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20 그러자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십니다.”
가톨릭성경,20 예수님께서 다시,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20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Peter answered, “The Christ of God.”
영어NASB,20 And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And Peter answered and said, ” The Christ of God.”
영어MSG,20 He then asked, “And you–what are you saying about me? Who am I?” Peter answered, “The Messiah of God.”
영어NRSV,20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Peter answered, “The Messiah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πεν δε αυτοις υμεις δε τινα με λεγετε ειναι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πετρος ειπεν τον χριστο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0 dixit autem illis vos autem quem me esse dicitis respondens Simon Petrus dixit Christum Dei
히브리어Modern,20 ויאמר אליהם ואתם מה אתם אמרים מי אני ויען פטרוס ויאמר משיח האלהים אתה׃
성 경: [눅9:2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 41-56; 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호 데 에피티메사스 아우토이스 파렝게일렌 메데니 레게인 투토
개역개정,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새번역,21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셔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며
가톨릭성경,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영어NIV,21 Jesus strictly warned them not to tell this to anyone.
영어NASB,21 But He warned them and instructed them not to tell this to anyone,
영어MSG,21 Jesus then warned them to keep it quiet. They were to tell no one what Peter had said.
영어NRSV,21 He sternly ordered and commanded them not to tell anyon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 δε επιτιμησας αυτοις παρηγγειλεν μηδενι ειπειν τουτο
라틴어Vulgate,21 at ille increpans illos praecepit ne cui dicerent hoc
히브리어Modern,21 ויצו אתם בגערה לבלתי הגיד לאיש את הדבר הזה׃
성 경: [눅9:2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에이폰 호티 데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폴라 파데인 카이 아포도키마스데나이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 카이 아르키에레온 카이 그람마테온 카이 아포크탄데나이 카이 테 트리테 헤메라 에게르데나이
개역개정,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새번역,22 말씀하셨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
우리말성경,22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끝내 죽임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영어NIV,22 And he said,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teachers of the law, and he must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to life.”
영어NASB,22 saying, ”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and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be raised up on the third day.”
영어MSG,22 He went on, “It is necessary that the Son of Man proceed to an ordeal of suffering, be tried and found guilty by the religious leaders, high priests, and religion scholars,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up alive.”
영어NRSV,22 saying, “The Son of Man must undergo great suffering,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ιπων οτι δε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πολλα παθειν και αποδοκιμασθηναι απο των πρεσβυτερων και αρχιερεων και γραμματεων και αποκτανθηναι και τη τριτη ημερα εγερθηναι
라틴어Vulgate,22 dicens quia oportet Filium hominis multa pati et reprobari a senioribus et principibus sacerdotum et scribis et occidi et tertia die resurgere
히브리어Modern,22 ויאמר מן הצרך הוא אשר בן האדם יענה הרבה וימאס מן הזקנים ו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סופרים ויהרג וביום השלישי קום יקום׃
성 경: [눅9:2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마조'(*)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데이'(*)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아르키에류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그람마튜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엘레겐 데 프로스 판타스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에르케스다이 아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칻 헤메란 카이 아몰루데이토 모이
개역개정,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새번역,23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말성경,23 그러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영어NIV,23 Then he said to them all: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영어NASB,23 And He was saying to them all,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영어MSG,23 Then he told them what they could expect for themselves: “Anyone who intends to come with me has to let me lead. You’re not in the driver’s seat–I am. Don’t run from suffering; embrace it. Follow me and I’ll show you how.
영어NRSV,23 Then he said to them all, “If any want to become my followers, let them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daily and follow 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λεγεν δε προς παντας ει τις θελει οπισω μου ελθειν απαρνησασθω εαυτον και αρατω τον σταυρον αυτου καθ ημεραν και ακολουθειτω μοι
라틴어Vulgate,23 dicebat autem ad omnes si quis vult post me venire abneget se ipsum et tollat crucem suam cotidie et sequatur me
히브리어Modern,23 ואל כלם אמר איש כי יחפץ ללכת אחרי יכחש בנפשו ויום יום ישא את צלבו והלך אחרי׃
성 경: [눅9:2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호스 가르 안 델레 텐 프쉬켄 아우투 소사이 아폴레세이 아우텐 호스 드 안 아폴레세 텐 프쉬켄 아우투 헤네켄 에무 후토스 소세이 아우텐
개역개정,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새번역,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말성경,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구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영어NIV,24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will save it.
영어NASB,24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he is the one who will save it.
영어MSG,24 Self-help is no help at all. Self-sacrifice is the way, my way, to finding yourself, your true self.
영어NRSV,24 For those who want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and those who lose their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ς γαρ αν θελη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σωσαι απολεσει αυτην ος δ αν απολεση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ενεκεν εμου ουτος σωσε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24 qui enim voluerit animam suam salvam facere perdet illam nam qui perdiderit animam suam propter me salvam faciet illam
히브리어Modern,24 כי כל אשר יחפץ להושיע את נפשו תאבד נפשו ממנו וכל אשר יאבד את נפשו למעני הוא יושיענה׃
성 경: [눅9:2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자라 할 수 있다.
티 가르 오펠레이타이 안드로포스 케르데사스 톤 코스몬 홀론 헤아우톤 데 아폴레사스 에 제미오데이스
개역개정,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새번역,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우리말성경,25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가톨릭성경,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영어NIV,25 What good is it for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and yet lose or forfeit his very self?
영어NASB,25 “For what is a man profited if he gains the whole world, and loses or forfeits himself?
영어MSG,25 What good would it do to get everything you want and lose you, the real you?
영어NRSV,25 What does it profit them if they gain the whole world, but lose or forfeit them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25 τι γαρ ωφελειται ανθρωπος κερδησας τον κοσμον ολον εαυτον δε απολεσας η ζημιωθεις
라틴어Vulgate,25 quid enim proficit homo si lucretur universum mundum se autem ipsum perdat et detrimentum sui faciat
히브리어Modern,25 כי מה יועיל האדם כי יקנה את כל העולם ואבד והשחית את נפשו׃
성 경: [눅9:2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호스 가르 안 에파이스퀸데 메 카이 투스 에무스 로구스 투톤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파이스퀸데세타이 호탄 엘데 엔 테 돜세 아우투 카이 투 파트로스 카이 톤 하기온 앙겔론
개역개정,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새번역,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말성경,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가운데 올 때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영어NIV,26 If anyone is ashamed of me and my words,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him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in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영어NASB,26 “For whoever is ashamed of Me and My words,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him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영어MSG,26 If any of you is embarrassed with me and the way I’m leading you, know that the Son of Man will be far more embarrassed with you when he arrives in all his splendor in company with the Father and the holy angels. This isn’t, you realize, pie in the sky by and by.
영어NRSV,26 Those who are ashamed of me and of my words, of them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헬라어신약Stephanos,26 ος γαρ αν επαισχυνθη με και τους εμ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ν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παισχυνθησεται οταν ελθη εν τη δοξη αυτου και του πατρος και των αγιων αγγελων
라틴어Vulgate,26 nam qui me erubuerit et meos sermones hunc Filius hominis erubescet cum venerit in maiestate sua et Patris et sanctorum angelorum
히브리어Modern,26 כי כל אשר הייתי אני ודברי לו לחרפה הוא יהיה לחרפה לבן האדם כאשר יבא בכבודו ובכבוד האב והמלאכים הקדושים׃
성 경: [눅9:2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레고 데 휘민 알레도스 에이신 티네스 톤 아우투 헤스테코톤 호이 우 메 규손타이 다나투 헤오스 안 이도신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개역개정,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새번역,2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우리말성경,2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어NIV,27 I tell you the truth, some who are standing here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영어NASB,27 “But I say to you truthfully, there are some of thos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영어MSG,27 Some who have taken their stand right here are going to see it happen, see with their own eyes the kingdom of God.”
영어NRSV,27 But truly I tell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7 λεγω δε υμιν αληθως εισιν τινες των ωδε εστηκοτων οι ου μη γευσονται θανατου εως αν ιδωσι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7 dico autem vobis vere sunt aliqui hic stantes qui non gustabunt mortem donec videant regnum Dei
히브리어Modern,27 ובאמת אני אמר לכם יש מן העמדים פה אשר לא יטעמו מות עד כי יראו את 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9:2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에게네토 데 메타 투스 로구스 투투스 호세이 헤메라이 옼토 카이 파랄라본 페트론 카이 요안넨 카이 야코본 아네베 에이스 토 오로스 프로슠사스다이
개역개정,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새번역,28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우리말성경,28 이런 말씀을 하신 뒤 8일쯤 지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28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영어NIV,28 About eight days after Jesus said this, he took Peter, John and James with him and went up onto a mountain to pray.
영어NASB,28 Some eight days after these sayings, He took along Peter and John and James, and went up on the mountain to pray.
영어MSG,28 About eight days after saying this, he climbed the mountain to pray, taking Peter, John, and James along.
영어NRSV,28 Now about eight days after these sayings Jesus took with him Peter and John and James, and went up on the mountain to pray.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γενετο δε μετα τ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υς ωσει ημεραι οκτω και παραλαβων τον πετρον και ιωαννην και ιακωβον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προσευξασθαι
라틴어Vulgate,28 factum est autem post haec verba fere dies octo et adsumpsit Petrum et Iohannem et Iacobum et ascendit in montem ut oraret
히브리어Modern,28 ויהי כשמנה ימים אחרי הדברים האלה ויקח אליו את פטרוס ואת יוחנן ואת יעקב ויעל אל ההר להתפלל שם׃
성 경: [눅9:2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기도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프로슈케스다이 아우톤 토 에이도스 투 프로소푸 아우투 헤테론 카이 호 히마티스모스 아우투 류코스 엨사스트랖톤
개역개정,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새번역,29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우리말성경,29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동안 얼굴 모습이 변하셨고 옷이 하얗게 빛났습니다.
가톨릭성경,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영어NIV,29 As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as bright as a flash of lightning.
영어NASB,29 And while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became different, and His clothing became white and gleaming.
영어MSG,29 While he was in prayer,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blinding white.
영어NRSV,29 And while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προσευχεσθαι αυτον το ειδος του προσωπου αυτου ετερον και ο ιματισμος αυτου λευκος εξαστραπτων
라틴어Vulgate,29 et factum est dum oraret species vultus eius altera et vestitus eius albus refulgens
히브리어Modern,29 ויהי בהתפללו נשתנה מראה פניו ולבושו הלבין והבריק׃
성 경: [눅9:2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카이 이두 안드레스 뒤오 쉬넬랄룬 아우토 호이티네스 에산 모위세스 카이 엘리아스
개역개정,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새번역,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우리말성경,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어NIV,30 Two men, Moses and Elijah,
영어NASB,30 And behold, two men were talking with Him; and they were Moses and Elijah,
영어MSG,30 At once two men were there talking with him. They turned out to be Moses and Elijah–
영어NRSV,30 Suddenly they saw two men, Moses and Elijah, talking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ιδου ανδρες δυο συνελαλουν αυτω οιτινες ησαν μωσης και ηλιας
라틴어Vulgate,30 et ecce duo viri loquebantur cum illo erant autem Moses et Helias
히브리어Modern,30 והנה שני אנשים מדברים אתו והמה משה ואליהו׃
성 경: [눅9:3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호이 오프덴테스 엔 돜세 엘레곤 텐 엨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 엔 예루살렘
개역개정,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새번역,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세상에서 떠나가심’ 곧 ‘죽으심’
우리말성경,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분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영어NIV,31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영어NASB,31 who, appearing in glory,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영어MSG,31 and what a glorious appearance they made! They talked over his exodus, the one Jesus was about to complete in Jerusalem.
영어NRSV,31 They appeared in glory and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ι οφθεντες εν δοξη ελεγον την εξοδον αυτου ην εμελλεν πληρουν εν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31 visi in maiestate et dicebant excessum eius quem conpleturus erat in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31 אשר נראו בכבוד והגידו את אחריתו אשר ימלאנה בירושלים׃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 데 페트로스 카이 호이 쉰 아우토 에산 베바레메노이 휲노 디아그레고레산테스 데 에이돈 텐 돜산 아우투 카이 투스 뒤오 안드라스 투스 쉬네스토타스 아우토
개역개정,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새번역,32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우리말성경,32 베드로와 그 일행이 잠을 이기지 못해 졸다가 완전히 깨서 예수의 영광과 그분 곁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영어NIV,32 Peter and his companions were very sleepy, but when they became fully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NASB,32 Now Peter and his companions had been overcome with sleep; but when they were fully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MSG,32 Meanwhile, Peter and those with him were slumped over in sleep. When they came to, rubbing their eyes, they saw Jesus in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NRSV,32 Now Peter and his companions were weighed down with sleep; but since they had stayed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who stood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 δε πετρος και οι συν αυτω ησαν βεβαρημενοι υπνω διαγρηγορησαντες δε ειδον την δοξαν αυτου και τους δυο ανδρας τους συνεστωτας αυτω
라틴어Vulgate,32 Petrus vero et qui cum illo gravati erant somno et evigilantes viderunt maiestatem eius et duos viros qui stabant cum illo
히브리어Modern,32 ויהיו פטרוס ואשר אתו נרדמים ובהקיצם ראו את כבודו ואת שני האנשים העמדים עליו׃
성 경: [눅9:3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결과를 초래했다(22:42-46).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디아코리제스다이 아우투스 앞 아우투 에이펜 호 페트로스 프로스 톤 예순 에피스타타 칼론 에스틴 헤마스 호데 에이나이 카이 포이에소멘 스케나스 트레이스 미안 소이 카이 미안 모위세이 카이 미안 엘리아 메 에이도스 호 레게이
개역개정,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새번역,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우리말성경,33 두 사람이 예수를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세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세우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영어NIV,33 As the men were leaving Jesus, Peter said to him,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put up three shelters–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He did not know what he was saying.)
영어NASB,33 And as these were leaving Him, Peter said to Jesus,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tabernacles: one for You, and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not realizing what he was saying.
영어MSG,33 When Moses and Elijah had left, Peter said to Jesus, “Master, this is a great moment! Let’s build three memorial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He blurted this out without thinking.
영어NRSV,33 Just as they were leaving him, Peter said to Jesus,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dwelling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not knowing what he said.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διαχωριζεσθαι αυτους απ αυτου ειπεν ο πετρος προς τον ιησουν επιστατα καλον εστιν ημας ωδε ειναι και ποιησωμεν σκηνας τρεις μιαν σοι και μωσει μιαν και μιαν ηλια μη ειδως ο λεγει
라틴어Vulgate,33 et factum est cum discederent ab illo ait Petrus ad Iesum praeceptor bonum est nos hic esse et faciamus tria tabernacula unum tibi et unum Mosi et unum Heliae nesciens quid diceret
히브리어Modern,33 ויהי בהפרדם ממנו ויאמר פטרוס אל ישוע מורה טוב היותנו פה נעשה נא שלש סכות לך אחת ולמשה אחת ולאליהו אחת ולא ידע מה דבר׃
성 경: [눅9:3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타우타 데 아우투 레곤토스 에게네토 네펠레 카이 에페스키아젠 아우투스 에포베데산 데 엔 토 에이셀데인 아우투스 에이스 텐 네펠렌
개역개정,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새번역,34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그, ‘그들을’
우리말성경,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구름이 나와서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가톨릭성경,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영어NIV,34 While he was speaking, a cloud appeared and enveloped them, and they were afraid as they entered the cloud.
영어NASB,34 While he was saying this, a cloud formed and began to overshadow them; and they were afraid as they entered the cloud.
영어MSG,34 While he was babbling on like this, a light-radiant cloud enveloped them. As they found themselves buried in the cloud, they became deeply aware of God.
영어NRSV,34 While he was saying this, a cloud came and overshadowed them; and they were terrified as they entered the cloud.
헬라어신약Stephanos,34 ταυτα δε αυτου λεγοντος εγενετο νεφελη και επεσκιασεν αυτους εφοβηθησαν δε εν τω εκεινους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νεφελην
라틴어Vulgate,34 haec autem illo loquente facta est nubes et obumbravit eos et timuerunt intrantibus illis in nubem
히브리어Modern,34 הוא מדבר כזאת והנה ענן סכך עליהם וכבואם בענן נבעתו׃
성 경: [눅9:3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 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테스 네펠레스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에클렐레그메노스 아우투 아쿠에테
개역개정,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새번역,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35 그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그의 말을 들어라!”
가톨릭성경,35 이어 구름 속에서 “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영어NIV,35 A voice came from the cloud, saying, “This is my Son, whom I have chosen; listen to him.”
영어NASB,35 Then a voice came out of the cloud, saying, “This is My Son, My Chosen One; listen to Him!”
영어MSG,35 Then there was a voice out of the cloud: “This is my Son, the Chosen! Listen to him.”
영어NRSV,35 Then from the cloud came a voice that said, “This is my Son, my Chosen; listen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φωνη εγενετο εκ της νεφελης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αυτου ακουετε
라틴어Vulgate,35 et vox facta est de nube dicens hic est Filius meus electus ipsum audite
히브리어Modern,35 ויצא קול מן הענן א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ליו תשמעון׃
성 경: [눅9:3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카이 엔 토 게네스다이 텐 포넨 휴레데 예수스 모노스 카이 아우토이 에시게산 카이 우데니 아펭게일란 엔 에케이나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우덴 혼 헤오라칸
개역개정,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새번역,36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우리말성경,36 그 소리가 사라지고 그들이 보니 예수만 홀로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영어NIV,36 When the voice had spoken, they found that Jesus was alone. The disciples kept this to themselves, and told no one at that time what they had seen.
영어NASB,36 And when the voice had spoken, Jesus was found alone. And they kept silent, and reported to no one in those days any of the things which they had seen.
영어MSG,36 When the sound of the voice died away, they saw Jesus there alone. They were speechless. And they continued speechless, said not one thing to anyone during those days of what they had seen.
영어NRSV,36 When the voice had spoken, Jesus was found alone. And they kept silent and in those days told no one any of the things they had seen.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εν τω γενεσθαι την φωνην ευρεθη ο ιησους μονος και αυτοι εσιγησαν και ουδενι απηγγειλαν εν εκειναις ταις ημεραις ουδεν ων εωρακασιν
라틴어Vulgate,36 et dum fieret vox inventus est Iesus solus et ipsi tacuerunt et nemini dixerunt in illis diebus quicquam ex his quae viderant
히브리어Modern,36 ובהיות הקול נשאר ישוע לבדו והמה החשו ולא הגידו דבר לאיש בימים ההם מכל אשר ראו׃
성 경: [눅9:3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막 9:9).
에게네토 데 테 헼세스 헤메라 카텔돈톤 아우톤 아포 투 오루스 쉬넨테센 아우토 오클로스 폴뤼스
개역개정,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새번역,37 다음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예수를 맞이하였다.
우리말성경,37 이튿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맞았습니다.
가톨릭성경,37 다음 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가니 많은 군중이 그분께 마주 왔다.
영어NIV,37 The next day,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 large crowd met him.
영어NASB,37 On the next day,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 large crowd met Him.
영어MSG,37 When they came down off the mountain the next day, a big crowd was there to meet them.
영어NRSV,37 On the next day, when they had come down from the mountain, a great crowd me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γενετο δε εν τη εξης ημερα κατελθοντων αυτων απο του ορους συνηντησεν αυτω οχλος πολυς
라틴어Vulgate,37 factum est autem in sequenti die descendentibus illis de monte occurrit illi turba multa
히브리어Modern,37 ויהי ממחרת ברדתם מן ההר ויצא עם רב לקראתו׃
성 경: [눅9:3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이 밤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카이 이두 아네르 아포 투 오클루 에보에센 레곤 디다스칼레 데오마이 수 에피블렢사이 에피 톤 휘온 무 호티 모노게네스 모이 에스틴
개역개정,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새번역,38 그런데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그 아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우리말성경,38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제 아들 좀 봐 주십시오.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가톨릭성경,38 그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남자가 부르짖었다. “ 스승님, 청하건대 부디 제 아들을 보아 주십시오. 저의 외아들입니다.
영어NIV,38 A man in the crowd called out,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for he is my only child.
영어NASB,38 And a man from the crowd shouted, saying,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for he is my only boy,
영어MSG,38 A man called from out of the crowd, “Please, please, Teacher, take a look at my son. He’s my only child.
영어NRSV,38 Just then a man from the crowd shouted,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he is my only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ιδου ανηρ απο του οχλου ανεβοησεν λεγων διδασκαλε δεομαι σου επιβλεψον επι τον υιον μου οτι μονογενης εστιν μοι
라틴어Vulgate,38 et ecce vir de turba exclamavit dicens magister obsecro te respice in filium meum quia unicus est mihi
히브리어Modern,38 והנה איש אחד מן העם צעק לאמר אנא רבי פנה נא אל בני כי יחיד הוא לי׃
성 경: [눅9:3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9:22)의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다'(*,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하는 ‘에피'(*)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카이 이두 프뉴마 람바네이 아우톤 카이 엨사이프네스 크라제이 카이 스파라쎄이 아우톤 메타 아프루 카이 모기스 아포코레이 앞 아우투 쉰트리본 아우톤
개역개정,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새번역,39 귀신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또 귀신은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39 그런데 귀신이 이 아이를 사로잡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게 하고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켜 입에 거품을 물게도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가톨릭성경,39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온통 상처를 입히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어NIV,39 A spirit seizes him and he suddenly screams; it throws him into convulsions so that he foams at the mouth. It scarcely ever leaves him and is destroying him.
영어NASB,39 and a spirit seizes him, and he suddenly screams, and it throws him into a convulsion with foaming at the mouth; and only with difficulty does it leave him, mauling him as it leaves.
영어MSG,39 Often a spirit seizes him. Suddenly he’s screaming, thrown into convulsions, his mouth foaming. And then it beats him black and blue before it leaves.
영어NRSV,39 Suddenly a spirit seizes him, and all at once he shrieks. It convulses him until he foams at the mouth; it mauls him and will scarcely leav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ιδου πνευμα λαμβανει αυτον και εξαιφνης κραζει και σπαρασσει αυτον μετα αφρου και μογις αποχωρει απ αυτου συντριβο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39 et ecce spiritus adprehendit illum et subito clamat et elidit et dissipat eum cum spuma et vix discedit dilanians eum
히브리어Modern,39 והנה רוח אחז בו ופתאם הוא מצעק והרוח מרוצץ אתו בהוריד רירו ומקשה לסור ממנו ובסורו ידכא אתו׃
성 경: [눅9:3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카이 에데에덴 톤 마데톤 수 히나 에크발로신 아우토 카이 우크 에뒤네데산
개역개정,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새번역,40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들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말성경,40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40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drive it out, but they could not.”
영어NASB,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and they could not.”
영어MSG,40 I asked your disciples to deliver him but they couldn’t.”
영어NRSV,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but they could not.”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εδεηθην των μαθητων σου ινα εκβαλλωσιν αυτο και ουκ ηδυνηθησαν
라틴어Vulgate,40 et rogavi discipulos tuos ut eicerent illum et non potuerunt
히브리어Modern,40 ואבקש מתלמידיך לגרשו ולא יכלו׃
성 경: [눅9:4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오 게네아 아피스토스 카이 디에스트람메네 헤오스 포테 에소마이 프로스 휘마스 카이 아넼소마이 휘몬 프로사가게 호데 톤 휘온 수
개역개정,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새번역,4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우리말성경,4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참아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가톨릭성경,41 그러자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네 아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영어NIV,41 “O unbelieving and perverse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and put up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영어NASB,41 And Jesus answered and said, “You unbelieving and perverted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and put up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영어MSG,41 Jesus said, “What a generation! No sense of God! No focus to your lives! How many times do I have to go over these things? How much longer do I have to put up with this? Bring your son here.”
영어NRSV,41 Jesus answered, “You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much longer must I be with you and bear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41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ω γενεα απιστος και διεστραμμενη εως ποτε εσομαι προς υμας και ανεξομαι υμων προσαγαγε ωδε τον υιον σου
라틴어Vulgate,41 respondens autem Iesus dixit o generatio infidelis et perversa usquequo ero apud vos et patiar vos adduc huc filium tuum
히브리어Modern,41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הוי דור חסר אמונה ופתלתל עד מתי אהיה עמכם ואסבל אתכם הבא הנה את בנך׃
성 경: [눅9:4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에티 데 프로세르코메누 아우투 에르렠센 아우톤 토 다이모니온 카이 쉬네스파랔센 에페티메센 데 호 예수스 토 프뉴마티 토 아카다르토 카이 이아사토 톤 파이다 카이 아페도켄 아우톤 토 파트리 아우투
개역개정,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새번역,42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42 그 아이가 오는 중에도 귀신은 아이의 몸을 바닥에 내던지며 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그 아이를 고쳐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42 아이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마귀는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뒤흔들어 댔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을 꾸짖어 아이를 고쳐 주시고 나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영어NIV,42 Even while the boy was coming, the demon threw him to the ground in a convulsion. But Jesus rebuked the evil spirit,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NASB,42 While he was still approaching, the demon slammed him to the ground and threw him into a convulsion. But Jesus rebuked the unclean spirit, and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MSG,42 While he was coming, the demon slammed him to the ground and threw him into convulsions. Jesus stepped in, ordered the vile spirit gone, healed the boy, and handed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NRSV,42 While he was coming, the demon dashed him to the ground in convulsions. But Jesus rebuked the unclean spirit,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42 ετι δε προσερχομενου αυτου ερρηξεν αυτον το δαιμονιον και συνεσπαραξεν επετιμησεν δε ο ιησους τω πνευματι τω ακαθαρτω και ιασατο τον παιδα και απεδωκεν αυτον τω πατ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42 et cum accederet elisit illum daemonium et dissipavit
히브리어Modern,42 ויהי אך הקריב לבוא וירעצהו השד וירוצצהו וישוע גער ברוח הטמא וירפא את הנער וישיבהו לאביו׃
성 경: [눅9:4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엘렉센 아우톤)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엨세플레손토 데 판테스 에피 테 메갈레이오테티 투 데우 판톤 데 다우마존톤 에피 파신 호이스 에포이에이 에이펜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개역개정,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새번역,43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그, ‘위대하심’
우리말성경,43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모두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에 다들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그분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3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영어NIV,43 And they were all amazed at the greatness of God. While everyone was marveling at all that Jesus did, he said to his disciples,
영어NASB,43 And they were all amazed at the greatness of God. But while everyone was marveling at all that He was doing, He said to His disciples,
영어MSG,43 They all shook their heads in wonder, astonished at God’s greatness, God’s majestic greatness. While they continued to stand around exclaiming over all the things he was doing, Jesus said to his disciples,
영어NRSV,43 And all were astounded at the greatness of God. While everyone was amazed at all that he was doing, he said to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43 εξεπλησσοντο δε παντες επι τη μεγαλειοτητι του θεου παντων δε θαυμαζοντων επι πασιν οις εποιησεν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43 et increpavit Iesus spiritum inmundum et sanavit puerum et reddidit illum patri eius
히브리어Modern,43 וישתוממו כלם על גדלת האלהים ויהי בתמהם כלם על כל אשר עשה ויאמר ישוע אל תלמידיו׃
성 경: [눅9:4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데스데 휘메이스 에이스 타 오타 휘몬 투스 로구스 투투스 호 가르 휘오스 투 안드로푸 멜레이 파라디도스다이 에이스 케이라스 안드로폰
개역개정,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새번역,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말성경,44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유의해 들으라. 인자가 배반을 당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가톨릭성경,44 “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영어NIV,44 “Listen carefully to what I am about to tell you: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영어NASB,44 “Let these words sink into your ears; for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men.”
영어MSG,44 “Treasure and ponder each of these next words: The Son of Man is about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영어NRSV,44 “Let these words sink into your ears: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헬라어신약Stephanos,44 θεσθε υμεις εις τα ωτα υμων τ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υς ο γαρ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μελλει παραδιδοσθαι εις χειρας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44 stupebant autem omnes in magnitudine Dei omnibusque mirantibus in omnibus quae faciebat dixit ad discipulos suos ponite vos in cordibus vestris sermones istos Filius enim hominis futurum est ut tradatur in manus hominum
히브리어Modern,44 שימו אתם באזניכם את הדברים האלה כי עתיד בן האדם להמסר בידי בני האדם׃
성 경: [눅9:4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 18:31-34;22:21-23). 여기서 ‘넘기우다'(*,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이 데 에그노운 토 레마 투토 카이 엔 파라케칼륌메논 앞 아우톤 힌나 메 아이스돈타이 아우토 카이 에포분토 에로테사이 아우톤 페리 투 레마토스 투투
개역개정,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새번역,4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 뜻이 숨겨져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그에게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4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예수께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영어NIV,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this meant. It was hidden from them, so that they did not grasp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it.
영어NASB,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tatement, and it was concealed from them so that they would not perceive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tatement.
영어MSG,45 They didn’t get what he was saying. It was like he was speaking a foreign language and they couldn’t make heads or tails of it. But they were embarrassed to ask him what he meant.
영어NRSV,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its meaning was concealed from them, so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45 οι δε ηγνοουν το ρημα τουτο και ην παρακεκαλυμμενον απ αυτων ινα μη αισθωνται αυτο και εφοβουντο ερωτησαι αυτον περι του ρηματος τουτου
라틴어Vulgate,45 at illi ignorabant verbum istud et erat velatum ante eos ut non sentirent illud et timebant interrogare eum de hoc verbo
히브리어Modern,45 והמה לא הבינו את המאמר הזה ונעלם הוא מדעתם וייראו לשאל אתו על המאמר הזה׃
성 경: [눅9:4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에이셀덴 데 디알로기스모스 엔 아우토이스 토 티스 안 에이에 메이존 아우톤
개역개정,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새번역,46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우리말성경,46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성경,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영어NIV,46 An argument started among the disciples as to which of them would be the greatest.
영어NASB,46 An argument started among them as to which of them might be the greatest.
영어MSG,46 They started arguing over which of them would be most famous.
영어NRSV,46 An argument arose among them as to which one of them wa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46 εισηλθεν δε διαλογισμος εν αυτοις το τις αν ειη μειζω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46 intravit autem cogitatio in eos quis eorum maior esset
히브리어Modern,46 ויעל על לבבם לחשוב מי הוא הגדול בהם׃
성 경: [눅9:4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디알로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 데 예수스 에이도스 톤 디알로기스몬 테스 카르디아스 아우톤 에필라보메노스 파이디온 에스테센 아우토 파르 헤아우토
개역개정,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새번역,47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우리말성경,47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고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곁에 세우며
가톨릭성경,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영어NIV,47 Jesus, knowing their thoughts, took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beside him.
영어NASB,47 But Jesus, knowing what they were thinking in their heart, took a child and stood him by His side,
영어MSG,47 When Jesus realized how much this mattered to them, he brought a child to his side.
영어NRSV,47 But Jesus, aware of their inner thoughts, took a little child and put it by his side,
헬라어신약Stephanos,47 ο δε ιησους ιδων τον διαλογισμον της καρδιας αυτων επιλαβομενος παιδιου εστησεν αυτο παρ εαυτω
라틴어Vulgate,47 at Iesus videns cogitationes cordis illorum adprehendens puerum statuit eum secus se
히브리어Modern,47 וירא ישוע את מחשבת לבם ויקח ילד ויעמידהו אצלו׃
성 경: [눅9:4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스 에안 뎈세타이 투토 토 파이디온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에메 데케타이 카이 호스 안 에메 뎈세타이 데케타이 톤 아포스테일란타 메 호 가르 미크로테로스 엔 파신 휘민 휘파르콘 후토스 에스틴 메가스
개역개정,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새번역,48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우리말성경,48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가톨릭성경,48 그들에게 이르셨다. “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
영어NIV,48 Then he said to them, “Whoever welcomes this little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the one who sent me. For he who is least among you all–he is the greatest.”
영어NASB,48 and said to them,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for the one who is least among all of you, this is the one who is great.”
영어MSG,48 “Whoever accepts this child as if the child were me, accepts me,” he said. “And whoever accepts me, accepts the One who sent me. You become great by accepting, not asserting. Your spirit, not your size, makes the difference.”
영어NRSV,48 and said to them, “Whoever welcomes this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the one who sent me; for the least among all of you i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48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ς εαν δεξηται τουτο το παιδιον επι τω ονοματι μου εμε δεχεται και ος εαν εμε δεξηται δεχεται τον αποστειλαντα με ο γαρ μικροτερος εν πασιν υμιν υπαρχων ουτος εσται μεγας
라틴어Vulgate,48 et ait illis quicumque susceperit puerum istum in nomine meo me recipit et quicumque me recipit recipit eum qui me misit nam qui minor est inter omnes vos hic maior est
히브리어Modern,48 ויאמר אליהם כל אשר יקבל את הילד הזה לשמי אותי הוא מקבל וכל אשר יקבל אותי הוא מקבל את אשר שלחני כי הקטן בכלכם הוא יהיה הגדול׃
성 경: [눅9:4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 주기 위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 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요안네스 에이펜 에피스타타 에이도멘 티나 엔 토 오노마티 수 에크발론타 다이모니아 카이 에콜뤼오멘 아우톤 호티 우크 아콜루데이 멛 헤몬
개역개정,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새번역,49 요한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우리말성경,49 요한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못하게 막았습니다.”
가톨릭성경,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영어NIV,49 “Master,” said John, “we saw a man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is not one of us.”
영어NASB,49 John answered and said, “Mast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prevent him because he does not follow along with us.”
영어MSG,49 John spoke up, “Master, we saw a man using your name to expel demons and we stopped him because he wasn’t of our group.”
영어NRSV,49 John answered, “Mast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does not follow with us.”
헬라어신약Stephanos,49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ωαννης ειπεν επιστατα ειδομεν τινα επι τω ονοματι σου εκβαλλοντα τα δαιμονια και εκωλυσαμεν αυτον οτι ουκ ακολουθει μεθ ημων
라틴어Vulgate,49 respondens autem Iohannes dixit praeceptor vidimus quendam in nomine tuo eicientem daemonia et prohibuimus eum quia non sequitur nobiscum
히브리어Modern,49 ויען יוחנן ויאמר מורה ראינו איש מגרש שדים בשמך ונכלא אותו יען איננו הולך עמנו׃
성 경: [눅9:4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톤 호 예수스 메 콜뤼에테 호스 가르 우크 에스틴 칻 휘몬 휘페르 휘몬 에스틴
개역개정,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성경,5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막지 마라. 누구든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위하는 사람이다.”
가톨릭성경,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영어NIV,50 “Do not stop him,” Jesus said, “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영어NASB,50 But Jesus said to him, “Do not hinder him; for he who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영어MSG,50 Jesus said, “Don’t stop him. If he’s not an enemy, he’s an ally.”
영어NRSV,50 But Jesus said to him, “Do not stop him; 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ο ιησους μη κωλυετε ος γαρ ουκ εστιν καθ ημων υπερ ημω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50 et ait ad illum Iesus nolite prohibere qui enim non est adversum vos pro vobis est
히브리어Modern,50 ויאמר ישוע אליו אל תכלאו כי כל אשר איננו נגדנו בעדנו הוא׃
성 경: [눅9:5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에게네토 데 엔 토 쉼플레루스다이 타스 헤메라스 테스 아날렘프세오스 아우투 카이 아우토스 토 프로소폰 에스테리센 투 포류에스다이 에이스 예루살렘
개역개정,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새번역,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우리말성경,51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영어NIV,51 As the time approached for him to be taken up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영어NASB,51 When the days were approaching for His ascension, He was determined to go to Jerusalem;
영어MSG,51 When it came close to the time for his Ascension, he gathered up his courage and steeled himself for the journey to Jerusalem.
영어NRSV,51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taken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51 εγενετο δε εν τω συμπληρουσθαι τας ημερας της αναληψεως αυτου και αυτος το προσωπον αυτου εστηριξεν του πορευεσθαι εις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51 factum est autem dum conplerentur dies adsumptionis eius et ipse faciem suam firmavit ut iret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51 ויהי כמלאת ימי העלותו והוא שם את פניו ללכת ירושלים׃
성 경: [눅9:5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아날렘프세오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카이 아페스테일렌 앙겔루스 프로 프로소푸 아우투 카이 포류덴테스 에이셀돈 에이스 코멘 사마리톤 호스 헤토이마사이 아우토
개역개정,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새번역,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우리말성경,52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미리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가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영어NIV,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영어NASB,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of Him, and they went and entered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arrangements for Him.
영어MSG,52 He sent messengers on ahead. They came to a Samaritan village to make arrangements for his hospitality.
영어NRSV,52 And he sent messengers ahead of him. On their way they entered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ready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2 και απεστειλεν αγγελους προ προσωπου αυτου και πορευθεντες εισηλθον εις κωμην σαμαρειτων ωστε ετοιμασαι αυτω
라틴어Vulgate,52 et misit nuntios ante conspectum suum et euntes intraverunt in civitatem Samaritanorum ut pararent illi
히브리어Modern,52 וישלח מלאכים לפניו וילכו ויבאו אל אחד מכפרי השמרונים להכין לו׃
성 경: [눅9:5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카이 우크 에뎈산토 아우톤 호티 토 프로소폰 아우투 엔 포류오메논 에이스 예루살렘
개역개정,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새번역,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말성경,53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영어NIV,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영어NASB,53 But they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e was traveling toward Jerusalem.
영어MSG,53 But when the Samaritans learned that his destination was Jerusalem, they refused hospitality.
영어NRSV,53 but they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is face was set toward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53 και ουκ εδεξαντο αυτον οτι το προσωπον αυτου ην πορευομενο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53 et non receperunt eum quia facies eius erat euntis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53 ולא קבלהו על אשר היו פניו הלכים ירושלים׃
성 경: [눅9:5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이돈테스 데 호이 마데타이 야코보스 카이 요안네스 에이판 퀴리에 델
[스크랩] 누가복음 9장 주석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마17:4
매튜헨리주석982-누가복음 09장
누가복음 09장
Ⅰ. 제자들의 사명과 헤롯의 공포 9:1-9
1.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1-6)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두루 여행을 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한 번에 한 곳에만 있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을 내어 보내셨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1,2절). 그는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어’ 귀신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을 내쫓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었고, 그러한 일들을 하도록 그들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들의 호의를 얻게 하였다. 이것이 곧 제자들의 임무였다. 이 일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이 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지시하신 일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외모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며 옷을 바꿔 입어서도 새 신을 신어서도 안 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며 그들의 친구들의 돈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친절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라고 하셨다. (3) 그들은 자기들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들을 지겨워 하지나 않을까 해서 숙소를 옮겨서도 안 된다. 즉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야 한다(4절). 사람들이 그들의 있는 곳을 알 수 있도록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고, 그들에게 익숙해 진 자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다. (4) 그들은 권위를 가져야 되며,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그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을 해야 한다(5절). 만약 너희를 영접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 버려라. 그리고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2)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나(6절). 그들은 주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각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제자들의 행할 일은 그들의 주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써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전해들은 헤롯의 놀라움(7-9)
우리는 여기서 헤롯이 이 일을 듣고 당황하고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야라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적들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그리스도의 명성을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었다'(행 4:13). 각 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1)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한 자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옛 선지자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다.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7,8절).
(2) 헤롯의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겼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 모든 일을 듣고 헤롯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 “어찌 하여야 할까?” 헤롯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 사람은 누군고.” “그는 요한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왔는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점점 더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헤롯은 그를 보고자 하였다(9절). 그런데 왜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까? 헤롯은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였으나, 법정에서 만나기 전에 그를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Ⅱ. 제자들이 돌아온 일과 오천 명을 먹이신 일 9:10-17
(1) 제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예수께 고하였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10절).
(2) 그들은 잠깐 동안 은거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 가셨다. 우리의 남종과 여종을 쉬게 하라고 명하셨던 그리스도는 그의 종에게도 쉬게 하셨다. 지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명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때때로 은밀하게 은거해야 한다.
(3)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셨다.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무리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셨다(11절).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열성을 품은 자들이 그 열성으로 인하여 다소 무례를 범한다 해도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랬으며 우리 또한 이러한 자들을 허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때 아니게 찾아왔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와서 구하는 것을 주셨다. 곧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병든자를 고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치유를 필요로 하는 그의 백성들을 치료해 주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때때로 육체의 편안을 위한 치유 보다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질병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알고 계셨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그는 성도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그를 따라온 무리를 충분히 먹이셨다. 곧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 기사는 앞에서 두 번 나왔는데, 여기서 다시 대하게 된다. 우리 구주의 기적들 중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이 사건뿐이다. 이 기사를 세밀히 살펴 보자.
(1) 열심히 그리스도를 쫓아 임무를 행하며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기도, 그러내기도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는 그를 두려워하고 충실하게 섬기며 어떠한 선한 것을 바라는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2) 우리 주 예수님은 아낌없이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그의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데까지 주어서 그들이 자유로이 먹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할 것’을 가르치셨다. 적게 가진 자들은 적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많게 하는 방법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치유하실 뿐 아니라 음식이 필요한 자에게 음식도 주신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 주실 뿐 아니라 영혼을 살찌게 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힘을 주신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14절)고 말하고 계시다. (5) 우리는 우리에게 안락을 주는 것들(음식, 등등)을 받을 때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받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하며 또한 그 축복을 간구한다. (6) 그리스도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7) 그리스도가 먹인 자들은 ‘다 배가 불렀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실 수 있을 만큼 부요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다.
Ⅲ.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 9:18-27
우리는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들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따로 기도 했다’는 것과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의 물음이 시작된다(18절).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그의 아버지와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은밀하게 따로 계실 필요를 느끼셨다. 따로 계실 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셨다. 기도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따로 있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는’ 제자들이 같이 기도하고자 ‘주와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담화하셨다.
(1)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질문하셨다.
1)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그들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예수에 대한 여러 추측들을 말했다. 사역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보다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대화를 할 때 더욱 그들의 상황에 알맞게 가르치고 책망하며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의사도 환자와 많이 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환자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잘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다. 또한 엘리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2)제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활하신 후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완전히 증거되자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그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직 증거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은 감추어져야 했다.
(2)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믿게 되었고 또한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2절).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직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리스도는 자신 때문에 제자들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우리는 자기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져야 한다(23절). 또한 안일과 욕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나 궁핍, 피곤 등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자주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며 그것에 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일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행복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해 보자. ①자기 멋대로의 생활이나 재산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말할 수 없는 상실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24절). 훨씬 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영혼을 잃을 것이다. ②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면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③온 천하를 얻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결코 그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끝없는 상실과 파멸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5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 명예, 즐거움 등을 획득했다고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여 영원히 자기를 잃고 마침내 파멸해 버린다면 그렇듯 세상적으로 얻은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가장 두려운 일은 자기 영혼의 상실이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 본문에서는 그것을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잘됨과 못됨에 따라 우리 자신도 잘되거나 못 되거나 하는 것이다. 영혼이 저 세상에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몸도 편안할 수 없다. 그러나 몸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아도 영혼은 행복할 수 있다.
3)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며(26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자는, 최후의 심판 날에 그를 위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때, 그리스도가 그렇게 비겁하고 속되며 비열한 자를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 할 것이며 ‘그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 기꺼이 함께 수난을 받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그가 통치할 때 그와 더불어 통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현재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 자신과 그의 따르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재림할 때의 영광의 찬란함을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귀절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날 영광 중에 오실 복된 예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그가 그렇게 오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말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하지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7절). “여기 섰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능력으로 현 세대에 임할 것이다.” 성령이 확산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을 때,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즉 그들은 이방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목격하였다.
Ⅳ. 예수님의 변모 9:28-36
본문은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기사이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그의 영광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면서 결코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와 있다.
(1) 그런데 본문에는 상황이 위의 두 복음서의 것과는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두 복음서에는 이 말씀을 하신 지 6일 후로 되어 있는데, 누가 복음에는 말씀하신 후 8일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날은 말씀하신 후 일곱 밤 다시 말해서 만 엿새가 지난 후인 여덟째 날이었다.
(2) 본문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덧붙여져 설명되고 있다.
1)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 영광을 기도할 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8절).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29절). 그리스도는 겸비해져서 기도하였을 때 이렇게 존귀하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준비되고 약속된 은혜를 스스로 구하여 받으셔야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려 하셨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변모되고 변화되는 일이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지혜와 은혜 그리고 기쁨을 얻게 되며, 그로인해 얼굴에 광채가 날 것이다.
2)누가는 변형되었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마태와 마가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즉, 빛이 비치는 것처럼 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빛으로 온 몸을 치장하고 옷을 해 입은 것처럼 보였다.
3)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계시므로, 그들도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난 것이다.
4)여기서 그리스도와 구약의 두 선지자가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의 떠남 곧 죽음을 이야기 하였다. ①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문에서는 그의 퇴거, 나감, 세상을 떠나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 즉 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의 떠남이요 속박의 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②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결정되었으므로 변경될 수 없었다. ③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했다. ④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참조. 눅24:26,27). ⑤우리 주 예수께서는 변화하신 후에도 그의 죽음과 수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본문에서 우리는, 전에 없었던 일, 즉 제자들이 조는 모습을 볼 수 있다(32절). 아마도 죄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졸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기도할 때 그들은 그의 기도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잠자고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볼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있을 때 잠자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그리스도가 고뇌할 때에도 똑같이 잠을 잤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고뇌보다 더 관심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뇌 중에 그들은 깨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력 있게 되기 위하여 소생시키는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 후 그들은 정신을 차려 모든 영광의 장면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벧후 1:18). 우리는 지금 그들 중 한 사람이 쓴 기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6)본문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날 때 베들로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 이와 같이 우리는 축복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리고 축복이 떠난 후에야 그것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구한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였다.
7)그들은 뒤덮인 구름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구름 속으로 들어 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 하더니(34절). 이 구름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안전하게 구름 속을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8)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는 마태복음의 기사만큼 자세하지 않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 여기에는 마태복음과 베드로서에 있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귀절이 없지만, 그것은 ‘택함을 받은 자니’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당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시기가 있는가 하면 침묵을 지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차야 아름답고 쓸모있게 된다.
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9:37-4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변모와 변모 후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대화에 이어서 곧바로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있었던 일로 되어 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으며’ 그 때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아셨다. (1) 그리스도가 돌아오자 큰 무리가 그를 맞기 위해 나아왔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듯이 이 날도 큰 무리가 그를 맞았다. (2)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도와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것이 그의 요청이었다. 그리스도의 동정적인 보살핌은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해 놓기에 족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는 내 외아들이니다’라고 호소하였다. 많은 자녀에게서 받는 위안으로 무마시킬 수도 있지만, 외아들뿐일 때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3) 그 아이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39절). 그는 ‘그를 잡고 있는’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그는 ‘졸지에 부르짖었으며’ 그의 비명은 그의 온화한 아버지의 심정을 찔렀다. 이 악한 귀신은 그를 괴롭혔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들어간 곳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가! 반대로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4) 제자들의 신앙은 불완전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지배할 능력을 주었지만, 그들은 이 사악한 영을 내쫒지 못하였다(40절). 그들은 능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거니와 마땅히 해야 할 기도로써 자신을 단련시키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5) 그리스도가 이 아이에게 행한 치유는 매우 효과적이었다(42절).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할 수 없는 일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 아이를 산산조각이라도 낼 것처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그 아이를 낫게 했으며, 귀신이 그에게 입힌 손상을 보상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그 아비에게 도로 주셨다. 우리 자녀가 질병에서 회복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으로,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돌려 받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다. “자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감사해라.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해 양육하라.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유념하여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자녀들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Ⅵ.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변론 9:43-50
1.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준 영향(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그들의 놀라움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놀랐다. 각자가 놀란 원인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랐다.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는 특이하고도 놀랄 만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2. 그리스도가 다가올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예고(43-45)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여기에는 다른 복음기자들이 기록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있다.
(1) 여기 본문의 귀절은 바로 앞에 있었던 사건, 즉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찬양한 일과 관계가 있다.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3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권위와 권세로 다스릴 현세적인 왕국에 대해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그 일을 쉽게 이루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손에 넘기워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근엄하게 말문을 여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내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라”. 시리아어와 아랍어로는 “이 말을 너희 심령에 담아두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머리와 심령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유익이 없다. (3) 제자들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었다. 마가복음은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도 제자들은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잘못을 깨달으려고도 또한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부언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상하여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그 말씀이 자비로써 숨겨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심(45-48)
이 귀절은 앞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본문에서 대하게 되었다.
(1) 명예에 대한 야망, 그리고 우위에 대한 자리다툼은 걸핏하면 우리 주 예수의 제자들에게 찾아드는 죄였다. 그들은 그토록 극복해야 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던 부패에 물들게 되었다(46절). 이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자들은 높은 자리를 노린다. 그러나 그들을 높혀 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유혹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작아지는 것, 가장 작아지는 것,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러한 고통과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47절). 그에게 있어 생각은 말이고 속삭임은 큰 외침이다.
(3)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묵묵히 겸손해짐으로써 얻게 될 명예를 구하고 끊임없이 치솟는 야망에 의해서 얻어질 명예는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다(47절).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어린아이들을 애정과 친절로 대하셨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어린아이의 품성처럼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라고 하셨다. 만일 그렇게 됨으로써 유익을 끼칠 수만 있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즐거워하라. (2) 이것이 바로 높아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케 하셨다. 그들(제자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들이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사랑을 받게 하고자 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48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
4.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편협됨을 책망하심(49,50)
그리스도는 그를 존경하고 섬겼던 한 사람을 실망시킨 데 대해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 사람은 제자들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었으며, 진실한 태도로 믿고 기도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쫒은 자였다. 제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전파하는 일을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행한 일을 꾸짖으셨다. 금하지 말라(50절).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라. 그도 너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느니라. 그는 똑같은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똑같은 목적지에서 너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그러니 그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친구는 적고, 적은 많으므로 우리는 친구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비록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인정받게 될 것이다.
Ⅶ. 제자들의 그릇된 열심 9:51-56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비신자들을 죽이고 싶어 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독단과 박해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행을 결심하심(51)
속죄와 구원을 위해 고난받을 때가 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준비하시고 결심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때는 정해져 있었다. 예수께서도 그 때를 잘 알고 계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분주하게 일하셨다. 그는 자기의 죽음과 고난이 다가왔음을 알고, 그것들을 통해 뒤따라올 영광을 바라보셨다. 그 때가 되면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을’ 받게 될 것이다(딤전 3:16).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죽음은 올리움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기쁨을 예상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단념하지 않으시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는 기쁨을 가지고 용기있게 그곳에 가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의롭다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영광도 받을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리우심을 받을’ 것임을 아셨으므로 실망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셨다. 이 일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2.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52,53)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는 쉴 곳을 정하고 자기와 제자들이 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52절). 그는 그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몇 사람을 보냐 준비하게 하셨다.
(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무례하게 대했다(53절).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는 가장 큰 축복을 베푸셨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라미아인들 간의 논쟁은 예배 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이냐 시갈 근처의 그리심 산이냐 하는 문제였다(눅 4:20). 그들 사이의 반목이 극심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다(요 4:9). 사마리아인들은 특히 세상에 잘 알려진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전도여행때 그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예의를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3. 이러한 모욕에 대해 야곱과 요한이 분개함(54)
이 두 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소돔의 저주를 내리도록 그리스도께 청했다.
(1) 여기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말로써 하늘에서 물을 내려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말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그들의 선생님의 명예를 위해 열심이었다. 가는 곳에서 마다 선을 베풀었고 환영을 받았던 그들의 선생에게 하찮은 사마리아인들이 마음대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의 선의를 따랐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4) 그들에 앞서 간 선지자들의 예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할까요”라고 물었다(개역 한글 성경에는 이 말이 없다-역주).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오늘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도 훌륭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잘못 적용하기가 쉽다.
(2)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지만, 잘못된 점이 더 많았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모욕을 끝까지 참으셨다. (2)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는 더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던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은 아니다. (3) 그 말을에서 단지 몇 사람만이 그리스도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그 마을에 가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나와서 그를 환영했을 것이다. (4) 그들의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늘로서 불을 좇아 내리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보아너게 (우리의 아들 막 3:17)라고 불렀던 제자들이었다. 그 이름처럼 그들은 행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빛의 아들이 아닌가? (5) 엘리야의 예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율법의 두려움을 알리도록 보내졌지만,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법이다. 그토록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여기에 전혀 맞지 않는다.
4. 그리스도가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심(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몹시 사랑하는 만큼 꾸짖고 벌하신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 열심히라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어울리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을 했을 때 그렇게 하신다.
(1)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 “너희는 너희에게 어떠한 영이 있는지 모른다” (1) “너희는 너희 주님에 대한 열성이라는 구실 속에 감추어진 자만, 분노, 원한이 얼마나 많은 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부패가 숨어 있다. 아니 그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2) “너희는 선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배워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늘로부터 불이 아닌 은혜가 그들에게 내려오기를 구하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너희는 사랑 자유 은혜의 법 아래 있다.” 그것은 땅에는 평화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라는 선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2) 그리스도는 그의 종교의 일반적인 뜻과 취지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56절).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개역 한글 성경에는 난외에 기록되어 있음-역주).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종교를 불과 검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친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애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방법으로 전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천벌과 파괴의 기적으로가 아니라 치유의 기적을 행함으로써 전파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의를 제거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인간적인 유대나 사랑의 끈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라고 가르치셨다.
5. 그리스도가 이 마을을 떠나가심(56)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다른 촌으로 가셨다. 즉 그다지 완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례히 행동하다면 우리는 복수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우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Ⅷ. 주님을 따르려는 세 부류의 사람들 9:57-62
본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따르고자 나서는 자이다. 그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 생각도 하지 말고 앞일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
1)그는 그리스도에게 큰 약속을 하였다(57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어찌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결심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어디로 가들지 그를 따라간다.
2)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었다. 즉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는 머리 둘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①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주 비천한 상태로 계셨다. 그는 훌륭한 왕자들이 으레껏 가지고 있는 장식품을 물론 여우나 공중의 새에게 있는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자기를 위한 거처, 즉 머리 둘 곳은 만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그는 자신을 인자, 곧 육과 피를 가진 아담의 아들로 부르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도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로써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이 세상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저 세상에 대한 계속적인 소망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비천해져서 가난한 그의 백성들에게 가난을 견디기 쉽게 해주셨으며 정당화 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에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 ②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야 될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보다 더 중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아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불편하게 되며 푸대접을 받고 모욕을 당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 일에 복종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다.
(2)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59절).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이 사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부르셨던 이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나중에는 복종했던 것 같다. 원하는 것도 그가 아니고 행하는 것도 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1)그의 변명: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에게는 집에 늙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나를 필요로 합니다. 가서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하옵소서.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유혹을 볼 수 있다. ①일반적으로 제자직을 수행할 때 우리는 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일을 미해결인 채로 내버려 두게 된다. ②우리의 의무로 알고 있는 일을 연기하라는 유혹을 받게 되어 그 일을 어떤 다른 때로 연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신앙적인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속음으로써 모든 시간에 속게 되는 것이다. ③우리는 우리 친척에 대한 의무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2)그리스도의 대답: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60절).
“너에겐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 몰인정하게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가족 하나하나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선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들인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멀어지도록 방해한다면, 차라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일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3) 본문에는 기꺼이 주를 따르고자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친구들과 잠깐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1)그는 간청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절). 이 말을 “가서 가사를 정리하게 하소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①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서글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그 일이 그에게는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는 그들과 계속해서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큰 위안과 축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철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가족과 친척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주저하게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작별인사를 한 번 했었을 것이다. 떠나기가 싫어서 다시 한 번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집에서 편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③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계획이 유혹받도록 하는 데에 자진해서 뛰어들고 있다. 집에 편히 있는 자들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의 결심을 바꾸게 할 정도로 강한 유혹을 받게끔 자신을 유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을 떠나지 말라고 간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2)그리스도는 그의 간청을 듣고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렇게 되면 쟁기질을 잘못하여 쟁기질한 땅에 씨를 뿌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서도 세상적인 생활을 되돌아 보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만일 네가 무성의하게 쟁기질을 한다면 너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땅이 되지 못한다.”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묵혀진 땅을 경작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은 씨뿌리는 일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그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게 된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후퇴하게 되며 후퇴는 곧 파멸이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가 뒤돌아보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9 Christ sent his twelve disciples abroad, who by this time were able to teach others what they had received from the Lord.
They must not be anxious to commend themselves to people’s esteem by outward appearance.
They must go as they were.
The Lord Jesus is the fountain of power and authority, to whom all creatures must, in one way or another, be subject; and if he goes with the word of his ministers in power, to deliver sinners from Satan’s bondage, they may be sure that he will care for their wants.
When truth and love thus go together, and yet the message of God is rejected and despised, it leaves men without excuse, and turns to a testimony against them.
Herod’s guilty conscience was ready to conclude that John was risen from the dead.
He desired to see Jesus; and why did he not go and see him? Probably, because he thought it below him, or because he wished not to have any more reprovers of sin.
Delaying it now, his heart was hardened, and when he did see Jesus, he was as much prejudiced against him as others, #Lu 23:11|.
#10-17 The people followed Jesus, and though they came unseasonably, yet he gave them what they came for.
He spake unto them of the kingdom of God.
He healed those who had need of healing.
And with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 Christ fed five thousand men.
He will not see those that fear him, and serve him faithfully, want any good thing.
When we receive creature-comforts, we must acknowledge that we receive them from God, and that we are unworthy to receive them; that we owe them all, and all the comfort we have in them, to the mediation of Christ, by whom the curse is taken away.
The blessing of Christ will make a little go a great way.
He fills every hungry soul, abundantly satisfies it with the goodness of his house.
Here were fragments taken up: in our Father’s house there is bread enough, and to spare.
We are not straitened, nor stinted in Christ.
#18-27 It is an unspeakable comfort that our Lord Jesus is God’s Anointed; this signifies that he was both appointed to be the Messiah, and qualified for it.
Jesus discourses concerning his own sufferings and death.
And so far must his disciples be from thinking how to prevent his sufferings, that they must prepare for their own.
We often meet with crosses in the way of duty; and though we must not pull them upon our own heads, yet, when they are laid for us, we must take them up, and carry them after Christ.
It is well or ill with us, according as it is well or ill with our souls.
The body cannot be happy, if the soul be miserable in the other world; but the soul may be happy, though the body is greatly afflicted and oppressed in this world.
We must never be ashamed of Christ and his gospel.
#28-36 Christ’s transfiguration was a specimen of that glory in which he will come to judge the world; and was an encouragement to his disciples to suffer for him.
Prayer is a transfiguring, transforming duty, which makes the face to shine.
Our Lord Jesus, even in his transfiguration, was willing to speak concerning his death and sufferings.
In our greatest glories on earth, let us remember that in this world we have no continuing city.
What need we have to pray to God for quickening grace, to make us lively! Yet that the disciples might be witnesses of this sign from heaven, after awhile they became awake, so that they were able to give a full account of what passed.
But those know not what they say, that talk of making tabernacles on earth for glorified saints in heaven.
#37-42 How deplorable the case of this child! He was under the power of an evil spirit.
Disease of that nature are more frightful than such as arise merely from natural causes.
What mischief Satan does where he gets possession! But happy those that have access to Christ! He can do that for us which his disciples cannot.
A word from Christ healed the child; and when our children recover from sickness, it is comfortable to receive them as healed by the hand of Christ.
#43-50 This prediction of Christ’s sufferings was plain enough, but the disciples would not understand it, because it agreed not with their notions.
A little child is the emblem by which Christ teaches us simplicity and humility.
What greater honour can any man attain to in this world, than to be received by men as a messenger of God and Christ; and to have God and Christ own themselves received and welcomed in him! If ever any society of Christians in this world, had reason to silence those not of their own communion, the twelve disciples at this time had; yet Christ warned them not to do the like again.
Those may be found faithful followers of Christ, and may be accepted of him, who do not follow with us.
#51-56 The disciples did not consider that the conduct of the Samaritans was rather the effect of national prejudices and bigotry, than of enmity to the word and worship of God; and through they refused to receive Christ and his disciples, they did not ill use or injure them, so that the case was widely different from that of Ahaziah and Elijah.
Nor were they aware that the gospel dispensation was to be marked by miracles of mercy.
But above all, they were ignorant of the prevailing motives of their own hearts, which were pride and carnal ambition.
Of this our Lord warned them.
It is easy for us to say, Come, see our zeal for the Lord! and to think we are very faithful in his cause, when we are seeking our own objects, and even doing harm instead of good to others.
#57-62 Here is one that is forward to follow Christ, but seems to have been hasty and rash, and not to have counted the cost.
If we mean to follow Christ, we must lay aside the thoughts of great things in the world.
Let us not try to join the profession of Christianity, with seeking after worldly advantages.
Here is another that seems resolved to follow Christ, but he begs a short delay.
To this man Christ first gave the call; he said to him, Follow me.
Religion teaches us to be kind and good, to show piety at home, and to requite our parents; but we must not make these an excuse for neglecting our duty to God.
Here is another that is willing to follow Christ, but he must have a little time to talk with his friends about it, and to set in order his household affairs, and give directions concerning them.
He seemed to have worldly concerns more upon his heart than he ought to have, and he was willing to enter into a temptation leading him from his purpose of following Christ.
No one can do any business in a proper manner, if he is attending to other things.
Those who begin with the work of God, must resolve to go on, or they will make nothing of it.
Looking back, leads to drawing back, and drawing back is to perdition.
He only that endures to the end shall be saved.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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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 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 – 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 하는 것이 적걸하다.
==================9:2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 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9:3
그 옷이 관채가 . . .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9:4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 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 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9:5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 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 응답하다 으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 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9: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9:7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모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9:8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9:9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 .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9:1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 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9:12
머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 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9: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 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마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
===================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 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 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9:15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 .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9:16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엇을. . . 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9:17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9:18
귀신이 어디서 든지. . .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 란 부셔버리다 , 소리지르다 ,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 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 란 족속 자손 ,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20
귀신이 예수를 보고. . .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9:21
언제부터. . . 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9:22
귀신이 죽이려고. . . 자주 던졌나이다 –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 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 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 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 . . . 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믿는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 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9:25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9:26
귀신이 . . . 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구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9:27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9:28
우리는 어찌하여. . .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 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9:30
그 곳을 떠나 가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 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 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9:32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 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 – 21등).
====================9:33
가버나움에 이르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후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9:34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9:35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9: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9:37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 – 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내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 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 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39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 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9:41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 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9:42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 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 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 과 발 그리고 눈 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 발, 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 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 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된다. 물론 이 조엔 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 을 뜻하는 프쉬케 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 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 모스코, 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49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 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 – 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 33- 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예수께서 최초로 메시야 신분 및 그 사역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본장에서는 전장에서 계시된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변화산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나 수난 예고가 먼저 있은 연후에 변화산 사건이 등장하는 순서의 의미 등의 문맥상의 유의 사항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17장)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 두 가지의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수난과 영광. 본장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누어지며(1-13;14-32;33-50절).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문단은 각기 예수의 영광과 수난을 시사하는 두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8절은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보여 주는 반면에, 9-13절은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인 십자가 수난을 재차 예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14-2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되는 반면, 30-32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수난이 다시금 예고된다. 마가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관한 내용을 거듭 교차시킨 것은 첫째로, 앞장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함축된 역설적 진리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제자 훈련. 공생애를 결산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본장에 수록된 사건들이 결론적 교훈 및 경계 부분인 세번째 문단(33-50절)은 물론이고 본장 전체는 예수의 제자화 훈련에 대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신의 이루고자 하신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32절). 아마 그들은 예수의 변화된 일련의 태도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이 기대해왔던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메시야로서의 자기 계시와 영광스러운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항상 예수의 수난 예고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된 사실에만 집착하고 수난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의아해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하리라는 기대에만 부푼 나머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을 때를 전제한 자리 다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34절).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세상에로 집중되어 있었고 십자가 고통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었으므로, 예수의 영광과 수난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 이유들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집중적인 제자 훈련을 시행하셨다.
1. 변화산 사건(9:1-13)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신지 엿새 후에 세 제자 앞에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모하신 내용이다. 이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Ascension)과 더불어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에 해당하며,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마 17:1-13;눅 9:28-36). 마 17:1-13 강해에서는 변화산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사건의 목적 혹은 의의를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메시야되신 예수를 증거함.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선포받음 바 있거니와(1:11), 이제 공생애의 마감 시기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7절).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4절), 이는 곧,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을 암시한다. 또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골 3:4). 비록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본문은 8:29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2) 제자들을 위한 위로와 교훈. 본문은 또한 예수의 제자 훈련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예수의 행동이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에로 더욱 집중될 것이었으며, 영적 무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불과 며칠 전에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예고하셨거니와(8:31), 이 예고를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혔음직하다. 따라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그들로 장차 당신의 영광을 널리 증거하게끔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예수의 거시안적(巨視眼的) 계획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광경을 보고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14절 ff. )을 도외시한 채 영광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동등한 위상(位相)에 두었다(5절). 이처럼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실로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모든 체험들이 장래에는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게 하는 데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2. 귀신 축사(逐邪)와 두번째 수난 예고(9:14-32)
본문은 변화산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어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8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사건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점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치유 기사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개시하신 사실에 비견될 수 있다(1:14, 15).
이 사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마 17:14-20;눅 9:37;43b), 그 중에서 본서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제자들의 불신 상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마 1:14-21의 강해에서는 이 ‘믿음’의 문제에다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보존과 진보 및 믿음의 본질과 능력 등을 상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사항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의 두번째 수난 예고(30-32절)에 관한 강해는 본서에 수록된 예수의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비교하는 주제 강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1) 변화산 위와 산 아래.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 중에는 변화산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慘景)을 선명히 대조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영광의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과 환희에 도취되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사역과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잊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속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주님은 변화산상에 계시면서도 자신이 필히 완수해야 할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궁핍함을 채우고자 하는 봉사의 삶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위와 아래의 대조적인 두 광경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한 바 두 도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도들이 위로는 영화롭고 이상적인 신천 신지(新天新地)에 대한 비전을 바라 보지만, 아래로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이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두 세계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 생활의 큰 관건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인간 상호간의 모든 수평적 관계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에 충실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밀하고도 깊이 있는 영교(靈交)의 시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묵상에서 실제적 활동(praxis)으로, 서재에서 구체적 삶의 터 (field)로, 밀실에서 가두(街頭)로 그리고 주님과의 내밀한 영교에서 사단과의 전투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말로 올바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 하겠다.
(2) 예수의 권능과 제자들을 불신. 또한 본문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과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기력함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권능을 수(數)없이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마 21:22;요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믿음을 상실하고만 듯하다. 이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훈련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어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은 영적 무지와 불신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책망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41절).
불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권능을 상실해 버린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사단은 고통스러운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도들을 은혜의 보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따라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 저러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다(고전 15:58;빌 4:8;딤전 4:7, 8;벧전 3:11).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이들의 멸망을 방관하는 자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책임을 반드시 추궁받을 것이다.
* 세 차례 수난 예고의 비교.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수난당하시리라는 예고는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의 여러 말씀들 속에 암시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수난을 예고하신 때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공개 이후이다. 예수의 사역 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집중적으로 예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메시야직의 본질적 의미를 확실히 표명함과 아울러 제자들도 고난과 희생에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의 뒤를 좇게끔 교육하고자 원하셨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의 공개적 수난 예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수난 예고의 시기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직후(8:31-9:1;마 16:21-28;눅 9:22, 23), 변화산 사건 직후(9:30-32;마 17:22;눅 9:43b-45)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무렵(10:32-34;마 20:17-19;눅 18:31-34)등이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 기자들 중 유독 마태만이 마 26:1-5에서 수난 예고를 한 차례 더 수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공개적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점차적으로 그 수난 과정과 수난 상황이 구체화 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예고에는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이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주께서 잠시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종국적 승리가 제시되어 있다.
(1) 첫번째 예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 곧, 수난당하실 장소, 핍박의 주동 세력,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등을 예시하며, 예수의 고난에 제자들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것을 묘사한다.
(3) 세번째 예고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께서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쓴 잔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발적이고도 완벽한 순종을 보게 된다(요 1:29).
* 귀신들림과 축사.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데에 공생애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셨다(1:34;마 4:24;눅 4:40). 특히 여기서는 귀신 축사(逐邪)에 관해 일고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귀신의 존재와 속성 및 활동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 귀신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인정은 하되 귀신에 대한 비성경적 식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귀신의 속성과 활동. 귀신의 영적이며(9:25;마 17:18), 지적인 존재이며(딤전 4:1-4:15;마 13:25) 사단의 지배를 확장시키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된다.
(2) 귀신들림에 대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신이나(마 17:15;요 10:18-21) 몸을 (18절;마 4:24;9:32, 33;눅 11:14) 해(害)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는 미쳐 날뛰기도 하고(5:5, 15) 각종 병에 걸리기도 한다(욥 2:7;눅 4:40, 41). 하지만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불순종에 빠져 성령의 도우심을 스스로 제한시켰을 경우에는 귀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듯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3) 귀신 축사.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으로써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16:17). 축사함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능력이나 특별한 주술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권능으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한편,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귀신이 사단과 더불어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될 것이다(창 3:14;눅 10:18;계12:9;20:10).
3.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9:33-37)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혁신적인 가치관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기사가 시작되기 전에,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shekel)을 꺼내어 성전세를 내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마 17:24-27). 마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본문의 기사를 막바로 연결시켜 이를 9:1-32에 대한 결론적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유념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내면적 괴리 상태. 제자들은 예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그 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데 대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빈한(貧寒)하게 지내시며 병들고 가난한 무리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종의 모습 보다는 이적적 권능을 행하며 영광 중에 거하는 승리자의 모습만이 인상깊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그 수난의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더욱 집착해가는 제자들 간의 괴리감(乖離感)은 이후의 내용들에서 더욱 현저해져 간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예수를 따랐지만, 참된 메시야관에 대해 무지하였고 신앙의 도리의 심오한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측면에서는 갓난 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겸손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 가치관에 비할 때 실로 파격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을 지배해 왔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사슬식으로 연결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生態系) 전체가 유지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숭고한 차원의 윤리적 요구를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 소위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되면, 어떤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과 권력으로 압축되는 세상적 힘을 얻지 못하면 심히 불안해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날이 갈수록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가 더 신봉되어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패배해 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숭고한 천국 시민의 윤리는 단지 허공에서만 맴도는 추상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악인의 영화(榮華)는 실로 덧없는 것이요(시 37:2, 10, 38;75:8;잠 14:2;벧후 2:17),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와 사랑의 나라가 조만간 온 누리에 임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진 자는 본문의 교훈을 정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천군만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여길 것이다.
4. 제자들의 무지와 독선 및 범죄에 대한 경고(9:38-50)
앞 문단에 이어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헛된 야욕과 무지 및 이를 교정시키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교훈과 경고가 소개된다. 본문의 내용을 편의상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화목을 가르치심.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의 시기심과 파벌의식을 직접적 발달으로 하고 있다(38절).
이와 유사한 상황은 민 11:26-29에서도 나타난다. 즉, 여호수아(Joshua)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칠십인의 장로들 중에 피택된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예언하자 이를 금하도록 모세에게 요청하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줄로만 알고 그러한 요청을 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노출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본문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속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의 일꾼의 사역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훨씬 더 완악하고 무지하였다(38절).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그들간에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불화를 일으켰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그들과 친분 관계가 없는 자들의 활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시기하고 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지상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시에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요직(要職)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더구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14-18절)이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속적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이간과 경쟁 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앞 단락에 이어 섬김의 도를 재차 강조하면서(41절) 화목을 추구할 것을 명령하셨다(50절;잠 3:30;20:3;빌 2:3;약 3:4). 그리고 배타적 편견과 독선적 특권 의식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33-37절). 본문에서 주님이 힘주어 경계하신 당파성과 분리주의는 초대 교회와(고전 1:12)향후의 교회사 전체를 통해 나타났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실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교파로 갈라서거나 새로운 군소 교단을 만들어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예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범죄에 대한 경고. 43-49절은 범죄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직접적 경고 대상은 (1)항에 설명한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당파심이라 하겠지만 넓게는 제자들이 처한 전반적인 심령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 무지와 완악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든 불신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본문의 경고가 매우 신랄하고 엄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인류의 죄악이 심각한 성질의 것임을 시사함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이야말로 그 어떤 희생을 지불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고귀한 것임을 상기시킨다(마 13:45, 46).
또한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연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당장에는 그들이 무지와 불신 가운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용납하사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훈계하셨지만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된 요소들이 있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계신다.
* 지옥에 대하여. 여기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지옥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정의. 지옥이란 구속함 받지 못한 죄인들이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가게 될 형벌의 장소 혹은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며, 사후의 중간 상태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눅 23:43 주제 강해 ‘사후의 중간기 상태’ 참조).
(2) 구약 시대의 지옥관.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는’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이사야의 진술(사 66:24)을 제외하면,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음부'(* , 스올)라는 개념 속에 지옥의 개념이 어렴풋하게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사 14:15;겔 32:23등). 구약성경에서 음부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욥 10:21, 22;시 143:3), 침묵의 장소로서(시 94:17;115:17),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시 6:5;88:10-12)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욥 14:21;전 9:5-10)이라 묘사되었다. 결국 초기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과 악인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지옥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빈약한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점차 선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비로서 지옥의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4) 신약 시대의 지옥관. 신약 시대에 이를러 음부의 개념은 더욱 발전되어 의인의 영혼들이 부활과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며 임시 대기하는 장소인 낙원(낙 23:43)과 대치되는 개념. 즉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임시 대기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눅 16:23;계 20:13).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영원한 멸망의 처소인 지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신약 시대의 특기할 만한 계시의 진전이다. 개역 성경의 ‘지옥’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엔나'(* )는 히브리어 ‘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몰렉(Molech) 우상에게 아이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곳이며(대하 28:3;33:6), 요시야(Josiah)의 개혁 때에는 불결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Jeremiah)에 의하면 그렇듯 가증스러운 인신 제사 관습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였다(렘 7:32;19:6). 이러한 개념을 확대되어서 나중에 힌놈의 골짜기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될 곳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엔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면 공관 복음서에만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예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48절), ‘풀무불'(마 13:50), ‘영원한 불'(마 25:41), ‘바깥 어두운 데'(마 8:12)등으로 묘사하였다. 기타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세에서의 혹심한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지옥과 동일한 개념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롬 2:3-9;살전 5:3;살후 1:6-9;히 10:27;벧후 2:4-9;계 14:11등).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예수는 지옥의 교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가르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경을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지옥을 묘사하는 말들이 비유적 언어이기는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두려운 현실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지옥의 구체적 위치나 구조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언급된 만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바로 전도임을 일깨워 준다(16:15;시 96:3;마 28:19).
누가복음 9장 57-62절 주해 레포트
소개글 총신 성경해석학 심상법 교수 과제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번역
2. 구조분석
3. 양식 이해
4. 배경 이해
5. 언어학적인 이해
6. 해석학적 이해
Ⅲ. 결론
< 참고 문헌 >
본문내용 Ⅰ. 서론
누가복음 9장을 하나로 묶는 소재를 굳이 찾아내자면 ‘제자’가 될 것이다. 물론 헬라 원문의 경우는 아니지만 한글개역성경의 누가복음 총 24장 가운데 ‘제자’라는 단어가 11회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9장이다.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여 자신의 사역을 대리하게 하는 일화로 시작한 9장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제자도로 마감한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댓가라는 주제는 예수께서 즐겨 사용했다. 이는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세 사람은 관연 그들이 진정으로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는 지를 시험받았다.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예수님을 첫째로 두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함에 있다. 이 본문 말씀은 그것이 선한 의도나 처음에 갖는 열광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만 보고 전진해야한다. 제자 되는 것은 이른바 문화생활의 일부 정도로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남으면 약간 신경을 쓰는 취미 생활이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예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뜻한다. 여차하다 보면 예수가 그러했듯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될 수도 있다(57-58절). 물론 잠자리가 없다는 것은 보장된 정착에서 오는 삶의 안일을 포기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역을 위한 생활의 수단도 없을 것이라 짐작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6:33). 하지만 생활의 보장을 위해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착오다. 노숙자의 처지가 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로 제자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에게 죽은 지를 장사 지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치러야할 종교적 의무로 여겨졌다. 율법 공부도 이보다는 긴급하지 않다.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주의 자비와 나 스스로의 결정,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주석해설 새벽기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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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매일성경 큐티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았지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이신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제자가 되려던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편과 상황을 우선 처리하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말합니다.
1. 누가복음 9장 51절-56절, 예수님의 자비하심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따라 있는 요단계곡을 통과하거나 지중해변의 해안길(Via Maris)를 지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을 이용하십니다.
예전에는 족장의 길이라고도 불리었던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이 길은,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함께 서로간의 다툼이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4,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근처를 지나는 유대인 순례자들을 방해하거나 때로는 다치게 하는 일들까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마저도 배척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마을을 불태우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불을 내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꾸짖으시며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반드시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를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용서와 자비는 중요한 미덕이지만 제자들은 이러한 미덕들을 자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꾸짖으심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고수하는 믿음의 방법만이 옳다고 지나치게 확신함으로 인하여 다른 이들을 배척하거나 분쟁의 원인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여 역사해 오셨습니다. 각각의 상황과 시대적인 현실을 고려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하시고 계획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만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이 무조건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을 근거로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받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자신과 전쟁 중인 남부군들 중에 일부를 용서하고 석방하자, 주변의 참모들은 적들을 다시 돌려 보내면 또다시 총부리를 우리를 향해 겨눌 것이라며 염려하였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내가 그들을 내 친구로 만들었을 때, 나의 적을 무너뜨린 것과 같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함을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 누가복음 9장 57절-61절, 우선순위를 결정하라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남자, 당신을 따르기 위해 먼저 계산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거짓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높은 수준의 희생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길 위의 삶일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단하고 가야만 합니다.
두번째 남자, 나중에 따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도록 내버려 두고 지금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의 말의 정확한 의미는,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정을 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항상 있으며, 복음 전파를 위한 헌신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순간을 놓친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남자는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작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은 여전히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실제로 좋은 감정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합니다. 즉, 행동으로 옳기지 않고 가장 적절한 때를 놓쳐 버린다면, 두번 다시 그 순간을 맞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그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편지를 쓰지 않고 미루면 결국에는 편지를 못 쓰게 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들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누가복음 9장 62절,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일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좋았던 옛날을 생각하고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함을 강조하십니다.
먼저 해야만 하는 우선순위가 있으며,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순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쟁기를 잡고 밭을 일구는 순간에는, 집에서 누워 있던 이전의 편한 시절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일에 충실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성도들은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엇이 우선적인 일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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