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성경 구절 | 예수님이야기6/오병이어의 기적(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5 Loaves And 2 Fish/Miracle/Jesus/김쌤의 말씀 속으로! 198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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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 큰 무리가 따르니 …
  •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
  •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
  • 예수께서 눈을 들어 …
  • 이렇게 말씀하심은 …
  • 빌립이 대답하되 …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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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병이어의 기적(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
성경 이야기 : 마가복음 6장 30절~44절 말씀/요한복음 6장 22절-59절
초안:최명길 강도사/그림:김종석 작가/편집\u0026나레이션:김보영
우와~~많은 사람들이 들판에 모여 있어요. 왜 모여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이나 율법교사 같은 다른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말씀과는 달랐어요. 권위 있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사람들은 알 수 있었어요.
예수님은 목자 없이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어요. 예수님은 이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더 풍성하게 들려주셨어요.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예수님 말씀을 들었어요.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마음이 급해졌어요.
“예수님 예수님 이곳은 빈들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어요.”
“이곳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우니까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서 음식을 사먹게 해야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황당한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네? 우리가 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구요? 계산 빠른 빌립이 얘기했어요.
“이 사람들을 다 먹게 하려면 2백 데나리온을 있어야 할 거예요.”
2백 데나리온은 대략 2천만원 정도 되는 큰 돈이에요.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이 때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가 말했어요. 여기 한 아이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어요. 하지만 이걸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먹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은 100명씩 50명씩 모여 앉게 하셨어요. 앉아있는 사람들 수를 세어보니 남자만 5천명쯤 되었어요. 여자들 아이들까지 만명이 넘는 엄청난 사람들이었어요.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감사기도 드리셨어요.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어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떡을 나누어 주는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계속 떼어 줘도 줄어들지 않는 거예요.!!
이 떡을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어요. 모두 배부르게 먹고 열두 개의 바구니에 가득 차게 남았어요.
제자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모여 있던 사람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우와 신난다. 우리 예수님은 진짜 엄청난 분이야.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배부르게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만 명이 넘는 엄청난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는걸.”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열심히 쫓아 다녔어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병도 고쳐주시고 먹을 것도 주셨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사람들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병 낫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갔어요.
예수님은 이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서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병 고침 받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살 게 하시려고 오신 것도 아니였어요.
예수님은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원하셨어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나에게서 구하는구나. 내가 너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줄게.” 그 양식이 무엇일까요? 다 같이 말씀을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이 되어주신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믿는 우리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생명이 떡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이 땅에서도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 친구들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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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네 복음서의 관점 – 다음블로그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공관복음의 말씀과 일치된다(마 14:16; 막 6:37; 눅 9:12). 무리들은 예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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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오병이어 성경 구절

  • Author: Kim’s BibleStory김쌤의 말씀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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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5.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9qG9G9tRLj0

오병이어 성경구절-진짜 표적이란(마태16:1~12/요한6:1~13)

마태복음 16장 1~12절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네 복음서의 관점

유상섭

(총신대학교)

1.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남자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은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유일하게 복음서에 네 번 등장한다. 이것은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예수께서 사람들과 함께한 식탁교제 중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음식의 기적적인 배가가 있었던 유일한 사건이다. 이것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기사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들은 이 기적을 익히 알고 있다.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신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작은 것이라도 드릴 수 있는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의 큰 기적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준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교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헌신과 희생을 해야 한다고 종종 강조된다. 이러한 이해는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에 대하여 오해를 했던 것과는 대조된다(막 6:52; 요 6:14-15). 복음서가 이 사건 후에 있었던, 특히 칠병이삼어 사건 후에도(마 15:32-39; 막 8:1-10)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참된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을 기록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에 의구심을 던진다(마 16:8-12; 막 8:16-21).

분명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각 복음서의 문맥과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네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네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사가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라면 왜 이것이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 유일하게 네 번 기록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각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기사 사이에 상호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독특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룰 것이다. 주목할 사실은 각 복음서의 관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들은 오병이어의 기사들 사이에 상호의존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전승배경을 밝히는데 집중하거나 이 사건의 공통적으로 종합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계시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각 복음서의 문맥과 각도에서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본 사건에 대한 네 기록 사이에 공통점과 핵심 메시지에 대하여 검토하고, 각 복음서에서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결과로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네 기록은 같은 메시지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특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네 기록에서의 공통적인 요소

네 복음서의 각 기록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여전히 동일한 기적을 다룬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공관복음의 기록과 요한복음의 기록 사이의 차이점이 더욱 현저하다는 것도 이 사실을 뒤엎지는 못한다. 네 복음서의 공통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기적은 저녁 무렵에,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었다(마 14:13; 막 6:32; 요 6:2). 예수께서는 이 기적 전에 무리들에게 치유의 사역(마 14:14)과 가르침의 사역(막 6:34)을 하셨다(눅 9:11).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하거나 그에게 요청하지 않았다(마 14:15, 17; 막 6:36-37; 눅 9:11-14; 요 6:6, 9).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주도적인 활동으로 일어났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는데 사용한 음식은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이다. 요한복음 제외하고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했음을 밝힌다(마 14:19; 막 6:41; 눅 9:16).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공관복음의 말씀과 일치된다(마 14:16; 막 6:37; 눅 9:12). 무리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자리에 앉는다. 예수께서는 빵과 생선을 받아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마 14:19; 막 6:41; 눅 9:16; 요 6:11). 무리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 14:20; 막 6:42; 눅 9:17; 요 6:12,26). 음식을 배불리 먹은 남자들은 모두 5천명 정도였다(마 14:21; 막 6:44; 눅 9:14; 요 6:10). 푸짐하게 먹고 남아 거둔 음식은 열두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마 14:20; 막 6:43; 눅 9:17; 요 6:13). 오병이어의 기적 후 제자들과 무리들은 즉시 분리되고 해산된다(마 14:22; 막 6:45; 요 6:14-15). 이 사건과 바로 연결된 기사는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다(마 14:22-33; 막 6: 45-52; 요 6:16-21). 이러한 공통점들은 네 복음서가 다루는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며 기본적인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고하게 해준다.

위에 사실을 종합할 때 오병이어의 네 기록에서 집약되는 공통분모는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5천명을 배부르게 먹였으며 남은 음식을 거둔 것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드러진 숫자는 5와 5000과 12이다. 이와 비슷한 공통분모는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세 마리로 4천명을 먹이고 남은 음식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기적에도 그대로 나온다(마 15:32-39; 막 8:1- 10). 여기서 뚜렷하게 부각되는 숫자는 7(빵의 수)과 4000과 7(남은 음식을 담은 광주리의 수)이다. 이러한 숫자배열은 예수께서 친히 두 음식 기적의 사건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질문을 할 때 생선과 관련된 내용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심으로 가능해졌다(마 16:9-10; 막 8:19-20). 더욱이 오병이어는 바구니(kofi,noj, ‘코피노스’)를, 칠병이삼어는 광주리(spuri,j, ‘스퓨리스’)을 각각 구별되게 사용한다. 두 용기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사실은 둘의 크기가 다를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릇을 서로 바꾸어서 음식을 담았다면 오병이어의 12란 숫자와 칠병이삼어의 7이란 숫자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병이어의 경우 5, 5000, 12의 배열과 칠병이삼어의 경우 7, 4000, 7의 배열이 미묘하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가능성을 더해준다.

이를 인지하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첫째, 학자들은 바구니가 유대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체적으로 지적한다. 반면 광주리는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행 9:25). 둘째로, 오병이어의 기적 대상은 유대인이고(마 14:13; 막 6:34; 눅 9:10; 요 6:23-26), 칠병이삼어의 기적 대상은 이방인들이다(마 15:31, 32; 막 7:31; 8:2). 셋째로, 첫 번째 음식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유대인의 도시 벳새다에서 멀지 않은 곳이나, 칠병이삼어가 일어난 장소는 갈릴리 바다를 접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도시 데가볼리 지역이다(막 7:31). 넷째로, 두 음식기적 사건을 기록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서로 약속한 것과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먼저 기록하고 칠병이삼어의 사건을 나중에 기록한다. 다섯째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께서 무리와 함께 한 당일에 행한 것으로 추정되나 칠병이삼어의 기적은 예수께서 무리들과 함께 한지 3일째 일어났다(마 15:32; 막 8:2). 복음서의 수난과 부활예언에서 제 삼일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언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사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마 16:21; 17:23; 20:19; 막 8:31; 9:31; 10:34; 눅 9:22; 24:7). 여섯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대상이 유대인들이라 그들의 식사문제를 걱정했지만 칠병이삼어의 대상의 식사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대인들과, 칠병이삼어의 기적이 이방인들과, 각각 관계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러면 유대인의 땅에서 유대인을 위해 베풀어진 오병이어 사건에 등장하는 숫자 5, 5,000과 12와 칠병이삼어 사건에 등장하는 7, 4,000과 7은 각각 무엇을 암시하는가? 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숫자 5는 모세오경과 시편 5권의 숫자였다. 더욱이 유대교에서 빵이 율법의 영구적인 상징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빵 다섯 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모세 오경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숫자 5,000은 숫자 5에 숫자 10을 세 번 곱한 수(5×10×10×10)로 유대인들의 배수이다. 남은 빵의 숫자 12 바구니는 쉽게 구약 이스라엘백성의 12지파를 연상하게 한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첫 번째 구속자(모세)가 광야에서 백성에게 만나를 주었던 것과 같이 마지막 구속자(메시아)도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의 백성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메시아 기대 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있었다(2 Baruch 29:8; Ecclesiates Rabbah 1:9). 이러한 내용들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구약에 약속된 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이와 비슷하게 빵의 숫자 7과 광주리 숫자 7은 일반적으로 완전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방인들의 온 세계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구약에서 가나안 족속은 작게는 다섯 개(출 13:5) 많게는 10(창 15:19-21)으로 계산되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나안 족속은 7족속이다(신 7:1; 수 3:10; 24:11).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온 땅에 퍼진 족속의 숫자는 숫자 7의 10배수인 70이다(창 10장). 당시 온 세상을 대표하는 애굽에 7년간의 기근이 있었다(창 41:26). 모세가 하나님의 온 백성의 대표자로 세운 숫자가 역시 70이다(민 11: 16,25,29). 예수께서는 복음이 온 세상에 까지 퍼질 것을 염두에 두고 친히 제자 70(2)명을 세우셨다(눅 10:1).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의 첫 도시 여리고를 정복할 때 일곱 제사장이 일곱 나팔을 불며 일곱 번 성을 일곱 번 돌았다(수 6:4). 열방의 나라들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섬긴 기간도 상징적으로 70년이다(렘 25: 11).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이방인 신자들과 관련하여 숫자 7이 등장한다(행 6:3; 20:4). 더욱이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3:1), 일곱 별, 일곱 촛대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역시 이 숫자와 연관되어 있다(1:20; 2:1).

숫자 4,000은 숫자 4에 10을 3번 곱한 수이다. 숫자 4는 땅의 네 방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수이다(사 11:12; 렘 49:36; 단 7:2-3; 슥 1:8-11; 6:5; 계 7:1).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온 땅의 네 방향으로 흐르는 네 강이 있었다(창 2:10-14).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네 뿔은 유다 백성을 헤친 열국의 뿔로 간주된다(슥 1:18-21). 계시록에서는 땅의 사방의 바람을 통제하는 네 천사가 등장한다(7:1). 이렇게 숫자 7과 4,000은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온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칠병이삼어와 관련된 숫자들은 구원의 복음이 앞으로 온 세계에 선포될 것을 예고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숫자들이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고, 칠병이삼어의 기적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 기적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한다. 예수께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백성과 함께 한 식탁교제를 통해 구원의 만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마 9:9-10; 11:19; 막 2:15; 눅 5:30; 7:34; 15:1-2) 예수님의 음식기적은 그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종말론적인 만찬을 제공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미묘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비적인 성만찬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는 마지막 만찬과 이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자연스럽게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각 복음서의 오병이어 기사는 이 계시의 세부적인 내용을 각 복음서의 각도에서 다양하고 풍성하게 드러낸다. 이에 대하여는 곧이어 다루게 될 것이다.

3. 각 기록에서의 문맥적인 위치

학자들이 공감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사건이라도 어떤 문맥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건에 대한 이해와 관점은 미묘하게 또는 분명하게 다르다. 문맥의 차별적인 또는 새로운 배치와 함께 ‘생략’과 ‘추가’와 ‘변경’등의 같은 기법은 사건을 기록하는 저자의 신학적인 관점을 분명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오병이어 기적의 기록이 각 복음서에 어떤 문맥에 등장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각 기록의 문맥에 대한 개별적인 검토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 마태와 누가의 문맥은 대체적으로 흡사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가와 누가의 문맥이 제자들의 사명의 관점에서 볼 때 상호 연결된다. 반면 요한복음의 기사는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문맥적인 배경을 가진다.

가. 마태기사의 문맥적인 위치

마태의 오병이어 기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기사와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 의 기록 사이에 위치한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배치는 마가복음에서 오병이어 기사의 문맥적인 배치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항목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세 가지 차이점을 가진다. 첫째로, 마태의 오병이어 기사에서는 전도현장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와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기사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사와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막 6:30-31; 눅 9:10).

둘째로,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사와 오병이어 기사를 아주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를 위해 마태는 요한의 죽음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그들이 와서 예수께 보고했다”(12절)와 기사의 시작부분에 “예수께서 들었을 때에”(13절)를 사용한다. 이 두 추가적인 진술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보고하는 것과 그의 들으심을 아주 긴밀하게 이어준다. 마태가 이 둘을 연결하는 의도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기사 속에 백성이 그를 선지자로 간주했다는 독특한 언급 속에 암시되어있다(14:5).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은 백성에 의해 선지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21:11, 46). 죽음과 관련된 기사에서 요한과 예수님이 백성에게 선지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기사 속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오병이어의 기사를 행하셨을 시사한다.

셋째로, 더욱이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 바로 직전에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을 배치하였고, 연결어 “그 때에”(evn evkei,nw| tw/| kairw/|, ‘엔 에케이노 토 카이로’)를 사용하여 이 두 기사를 긴밀하게 연결한다(14:1). 이러한 연결은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선지자 예수님이 결국 어떻게 될지를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를 통하여 예고한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를 통해서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예수님은 결국 세례 요한과 같이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내용을 종합할 때, 마태의 오병이어 기사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임박한 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이 표면에 드러나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셨을 것이 분명하고, 이 엄연한 사실을 의식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것이 자명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자신의 십자가 죽임이 그의 백성에게 가져다 줄 구원의 은혜(양식)를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나. 마가기사의 문맥적인 위치

마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사는 복음 사역의 현장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와 예수님의 반응(6:30-31)과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사(6:45-50) 사이에 놓여있다. 제자들의 사역보고는 마가복음 6:7- 13에 기록된 열두 제자들의 사명과 현장사역과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기록 사이에 교량역할을 하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이다(6:14-29). 마가의 이러한 배치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인 죽음 기사가 단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이를 강조하지는 않음), 사역의 현장에서 제자들의 고난과 죽음도 예고함을 미묘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한다. 이 배열의 결과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과 오병이어의 기사 사이의 연결이 더욱 긴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긴밀성은 제자들의 관점에서 예수께서 베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백성에게 베풀어준 음식은 제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백성들에게 베풀어야 할 구원의 양식이나, 우선은 그들이 먼저 누려야 할 양식이다. 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제자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려야 할 그들의 영적인 안목은 예수께서 주시는 음식에 관한 것보다는, 음식을 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제대로 이해는 데 실패한다. 오병이어 기사와 곧바로 연결된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사는 제자들의 오해와 무지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의 기록에서 마가는 유일하게 오병이어의 사건을 언급한다(6:52).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제자들이 분별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오해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오병이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이해는 열쇠였음을 알려준다. 제자들의 오해는 칠병이삼어의 기적 후에도 계속되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말씀할 때 그 극점에 도달하게 되었다(8:14-15). 그들의 마음은 완고해졌고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영적으로 심각한 무지의 상태에 놓여있었다(8:17-18). 데가볼리 지역에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중 장애인의 치유기적(7:31-37), 2차 음식기적(8:1-10), 벳세다에서 장님의 2단계 치유(8:22-26)는 모두 무지한 제자들의 영적인 시각을 열어 오병이어 사건 속에 계시된 메시아의 정체를 알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조치였다. 이러한 결과로 베드로는 마침내 부분적으로나 나마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들어있는 메시아의 정체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다(8:29).

다. 누가기사의 문맥적인 위치

누가복음에서 오병이어 기사의 배치는 마가복음에서의 그것과 대략적으로 유사하나 두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이 둘은 예수께서 누구인가에 대한 헤롯 안티바스의 고민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를 대신한다는 것과 오병이어 기사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먼저, 누가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같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를 어디에서도 상술하지 않는다. 누가는 단순하게 9장 9절에서 “내가 목을 벤 요한”이란 언급을 통해 마태와 마가의 관련 기사를 전제할 뿐이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헤롯 안티바스의 고민기사를 중앙에 배치시키고 앞뒤의 내용은 각각 마가복음의 기사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열두 제자들의 사명과 현장 사역(9:1-6)과 현장에서 돌아온 사도들의 사역보고와 예수님의 반응이다(9:10). 마태와 마가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의 초점이 선지자 예수님의 죽음(마태복음)과 복음의 증인(제자)들의 고난에 있다면, 이 기사를 대신한 누가의 헤롯의 고민 기사는 예수께서 누구인가에 그 초점을 둔다.

제자들의 핵심사명은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고(각 치유와 기적) 들려주었던 것(하나님나라 복음의 선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다(9:1-2). 이러한 사명 완수를 위해 제자들에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이해이다. 이 점에서 오병이어의 기사는 헤롯이 고민스럽게 던진 예수님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하는 제자들은 헤롯 안티바스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하여 던진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이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이해해야 했다.

위의 지적과 관련하여 여전히 주목할 점은 누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기사 직후에 세 복음서(마태, 마가, 요한)에 등장하는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사 대신에 바로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기사를 배치한다는 것이다(9:18-21). 이러한 배열은 마가복음 6:15-8:26의 생략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소위 “대 생략”(Great Omission)으로 일컬어지는 대폭적인 생략의 결과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문답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배열은 저자의 독특한 기여의 결과이다. 오병이어의 기적(9:10-17)과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질문과 제자들의 답변(9:18b-20)을 연결하는 고리는 제자들이 함께 있는 가운데 예수께서 하신 고독한 기도이다(9:18a). 이러한 혁신적인 배치로 인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기도와 이어지고 그의 기도는 곧 바로 그의 메시아 신분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각적으로 체험한 진리(오병이어)는 예수님의 기도 이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청각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시각적으로 계시된 예수님의 정체는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청각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힘입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로 깨닫게 된 제자들 중 세 제자(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형의 사건(9:28-36)을 통해 예수님을 고난 이후에 부활의 영광을 입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도록 천상의 도전을 받았다. 예수께서 하산 한 후에 더러운 영에게 사로잡혀 간질병으로 고생하던 아이에게 행한 놀라운 귀신축출과 치유(9:37-43)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누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역의 현장에 나가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에 대한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기 위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라. 요한기사의 문맥적인 위치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 기사의 배치는 두 가지 독특성을 가진다. 하나는 오병이어 기사이전에 배치된 기사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병이어 기사 이후의 기록배치이다. 전자는 공관복음의 배치와 전혀 다르고, 후자는 마태와 마가의 유사한 배치와 일맥상통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6:1에서 “이 일들 후에”(meta. tau/ta, ‘메타 타우타’)를 사용하여 앞의 기록과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지적한 후, 곧바로 앞의 내용과 장소상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바다, 곧 티베리아 바다의 건너편으로 이동했다고 말한다. 한편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이동은 갈릴리 지역 안에서 진행되나,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이동은 5장의 배경무대 예루살렘에서 6장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장소의 이동이 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강화와 6장의 오병이어 사건과 이와 관련된 생명의 떡 강화사이에 주제적인 연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5장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모세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은 6장에 언급된 만나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의 핵심 증인들 중에 하나인 모세보다 위대한 존재로 계시된다. 이러한 배치는 공관복음과 전혀 다르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직후에 배치된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마태와 마가의 배치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의 자료 배치는 공관복음과 공통점을 가진다. 이와 같은 지적은 해당 병행기사가 다른 복음서의 관련 기사와 모든 면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목할 점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 다음에 기록된 것은 독특하게 오병이어의 의의에 대한 예수님의 강화, 곧 생명의 떡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6:22-71). 이것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 B(6:16-21)를 중심에 두고 도입부인 오병이어의 기적 A(6:1-15)와 오병이어 사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는 생명의 떡 강화 A'(22-71절)로 끝나게 한다. 이와 같은 ABA’의 구조는 중간에 배치된 물위를 걸은 사건도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해석의 빛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6장 전체는 모두 오병이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사가 구조적으로 공관복음의 기록을 초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4. 각 기록에서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

오병이어 기사 사이에 공통점과 각 복음서에서의 문맥적인 배치에 관한 논의가 지금까지 있었다. 각 기사의 문맥적인 배치에 대한 논의는 크게는 오병이어 기사 전후의 기사 배치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아주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으나, 공관복음 사이에는 압도적인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그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차별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각 복음서의 기사 속에 독특한 요소를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각 저자가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밝히는데 있다.

가. 마태기사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

마태의 오병이어 기사에서의 독특한 요소들은 크게 세 각도에서 등장한다. 하나는 마태에만 등장하는 추가적인 독특한 내용이고, 두 번째는 다른 병행기록에는 등장하나 마태의 기사에는 변경되어 나오는 요소이고, 셋째는 마태의 기록에는 생략된 항목들이다. 마태는 앞서 언급된 문맥의 새로운 배치와 이 세 가지 방법, 곧 추가와 변경과 생략의 저술방식을 통하여 오병이어 기사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낸다.

먼저 추가된 요소들에 생각해보자. 앞서 지적했듯이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피신한 것으로 나온다(13절). 이것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바스에 대한 위협을 직감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피신은 예수께서 일전에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의식하고 다른 곳으로 피한 것과 흡사하다(12:14-15). 유아기 때에 헤롯 왕의 위협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했던 예수님(2:12-14)은 이제 그의 아들 헤롯 안티바스의 위협을 세례요한의 죽음에서 직감하고 일단 피하신 것이다. 둘째로, 마태는 “그들이 떠나갈 필요가 없다”는 예수님의 답변을 추가한다(14:16). 대체적으로 간략한 기술을 선호하는 저자가 이 시점에서 이 내용을 추가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 바로 앞에 “그들이 떠나갈 필요가 없다”고 덧붙인다. 이로서 무리들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떠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이 짝을 이룬다. 저자는 이 추가를 통해 제자들이 애써 당부한 제안을 예수께서 전혀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행동을 하심을 강조한다. 셋째로, “여기 내게로 그것들을 가져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마태의 기록에만 나온다(14:18). 이것도 기적을 행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한증 강조한다. 넷째로, 마태만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여자들과 아이들도 있었음을 암시한다(14:21).

마태의 기록에서 변경되어 나오는 요소는 추가된 내용보다 더 많다. 그중 의미가 있는 내용들은 대략 세 가지이다. 첫째로, 마태는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치료하셨다고 기술한다(14절). 이것은 그의 가르침만을 언급하는 마가와 비교되고(6:34), 하나님 나라의 교훈과 함께 이를 언급하는 누가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9:11). 저자가 예수님의 가르침 대신에 치유와 오병이어의 기적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기적을 교차적으로 기록하는 저작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마태의 치유 언급이 8장 16절의 치유를 상기시키신다는 점이다. 마태는 8장 17절에서 이미 이사야 53:3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모든 치유를 대속적인 짊어짐, 곧 대속적인 죽음의 결과로 예고한바 있다. 그리고 마태만 유일하게 마지막 한 주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한 병자들의 치유를 기술한다(21:14).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병자들의 치유와 오병이어의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할 가능성을 더해준다.

둘째로,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한 시점을 “저녁이 되었을 때”로 밝힌다(14:15). 이것은 마가의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6:35)와 누가의 “그날이 기울어지지 시작했다”(9:12)와 비교해 볼 때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곧 제자들의 “그 시간이 이미 지났다”표현은 저녁식사 시간이 확실하게 도래했음을 강조한다. “저녁이 되었을 때”란 이 표현 역시 8:16-17과의 연결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연결을 암시한다. 특히 이 표현은 3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언급(8:16)과 수난 기사에 등장한다(26:20; 27:57).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거나 전제하는 치유를 언급하고, 문맥적으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 기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본문에서 “저녁이 되었을 때”란 언급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할 가능성을 더욱 강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4:15의 문장 “그 시간이 이미 지났다”(h` w[ra h;dh parh/lqen, ‘헤 호라 에데 파렐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자 유다의 도착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보라 그 시간이 가까이 왔다”(ivdou. h;ggiken h` w[ra, ‘이두 엔기켄 헤 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이러한 연결을 지지한다(26:45).

셋째로, 마태는 음식 배분과 관련하여 적지 않는 변경된 요소를 제시한다. 이로서 마태의 기사는 음식을 주시는 예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마태는 마가의 “먹을 것”이란 문구 대신에 간단하게 “음식”(brw,mata)을 사용한다(14:15). 본문의 “여기 빵 다섯 개와 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는 제자들의 말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으로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이 대답이 예수께서 “너희가 음식이 얼마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말씀에 대한 보고라는 사실과 사뭇 대조된다(6:38). 음식을 자르는 행동과 관련하여 마태는 마가와 누가가 사용하는 “잘게 자르다”(katakla,w) 대신에 전치사 없이 단지 동사 “자르다”(kla,w, ‘크라오’)를 사용한다(마 14:19). 마태는 이로서 나누어준 음식이 더 컸을 것을 미묘하게 암시한다. 마태는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들을 주었고,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주었다고 언급한다(19절). 이것은 마가와 누가가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에 주었다는 논평보다 더 구체적이다. 이로서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음식을 나주어 준 사실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의 주도적이고 주권적인 역사로 제자들의 손길을 통하여 실현이 되었다.

마태의 기사에 생략된 내용들도 역시 세 가지이다. 첫째로,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14절). 이 생략을 통하여 저자는 마가가 강조하는 목자 없는 가련한 양을 대하는 목자 예수님의 동정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저자가 드러내는 예수님의 동정은 치유와 오병어의 기적을 통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마태에서 예수님의 동정은 본문을 포함하여 세 곳에서 치유(9:36; 14:14; 20:34)와 두 차례 음식 기적(14:14; 15:32)과 용서(9:13; 12:7; 18:27)에, 각각 나타난다. 둘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제자들이 오해한 것을 수록하지 않는다. 마가와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음식을 사 주라는 뜻으로 오해하였음을 보여준다(6:37; 눅 9:13-14).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를 역설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셋째로, 마가와 누가가 무리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어떻게 그룹을 지어 앉았는지 상세하게 밝히는데 반하여(막 6:39; 눅 9:14), 마태는 무리가 잔디에 앉도록 명령을 했다는 사실만 약술한다(14: 19). 이러한 약술은 마태가 제자들이 무리를 앉히는데 있어서 제자들이 한 역할을 부각시키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머지 세 기록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 무리를 질서 있게 앉히는 역할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과 사뭇 비교된다(막 6:30; 눅 9:14; 요 6:10).

결국 이러한 추가와 변경과 생략의 방식을 통해 마태는 오병이어 기적의 기록에서 특별히 부각하는 독특한 관점은 무엇인가? 오병이어 기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강조점을 이해하는데 앞서 상술된 내용을 반영하여 세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마태의 기사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적인 죽임 기사와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연결한다. 이 연결을 통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예수님의 의식은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더해준다. 더욱이 치유, “저녁이 되었을 때”, “그 시간”등의 단어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할 가능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둘째, 마태의 기사는 제자들의 부정적인(반문과 오해와 같은) 모습을 덜 반영한다. 셋째, 마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제자들의 역할을 최소화하지만 예수님의 주도적인 역할을 극대화한다. 사실 제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예수님에게서 음식을 받아 무리들에게 나누어준 것 밖에 없다. 나머지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신 일이다. 마태의 오병이어 기사에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핵심주제는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권적으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마태 기사의 주된 강조점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도적인 역할이다.

나. 마가기사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

마가의 오병이어 기사에서 독특한 내용들은 추가적인 상술에 잘 나타난다. 마가의 독특한 강조점은 대략 다섯 가지이다.

첫째, 마가는 누가와 같이 오병이어 기사를 제자들의 복음사역과 연결하면서도 사역에 지친 제자들의 휴식의 관점에서 본 기사를 기록한다(6:31- 32). 이 점에 대하서는 마가의 문맥적인 배치를 논할 때 상세하게 다루었다.

둘째, 마가는 병행기록보다 사건의 생생함을 여러 면에서 보여준다. 마가는 예수께 나아온 무리들이 모든 도시에서 온 사실을 강조한다(6:33). 마태의 병행기록과 같이 이들이 걸어서 예수께로 나온 사실만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달려서 현장에 앞서 도착한 사실을 언급한다(6:33). 이를 통해 마가는 사건의 생생함과 함께 무리들의 열정과 간절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잔디의 색깔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사건의 생생한 현장을 상기시킨다(6:39). 더욱이 마가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무리들을 50명씩과 100명씩 앉혔다고 밝힌다(6:40). 이것은 누가의 기록이 50명의 그룹만 언급하는 것을 감안해볼 때 새 내용이다(눅 9:15). 이러한 상술은 한편으로 사건의 생생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룹으로 진치고 활동한 것을 상기시킨다(출 18:21, 25; 민 31:14). 마지막으로 마가는 남아 거둔 음식 중에는 생선도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한다. 이것 역시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보여준다.

셋째, 마가의 기사는 예수께서 목자 되심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상은 여기서 한마디로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언급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가 그들이 목자가 없는 양 같기 때문이라는 마가의 언급은 그것이 목자의 활동을 암시한다(6:34). 여기서 예수님의 목자 활동은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그들을 먹이시는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마태와 누가가 소개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마 18:10-14; 눅 15:3-7)를 언급하지 않는 저자가 여기서 예수님의 목자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은 이것이 병행기사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주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나중에 그의 십자가 수난과 관련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목자로 분명하게 밝히신다(14:27). 양떼와 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에게서, 그것도 아무 음식도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풍성한 음식을 받아먹는 모습은 시편 23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이것은 또한 흩어진 양떼를 모아 먹이는 새 목자 다윗의 예언이 예수의 목자적인 활동으로 성취됨을 상기시킨다(겔 34:12-13, 23-24; 37:24).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목자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목자 메시아였다(민 27:16-17; 신 34:10). 또한 예수께서 그들에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 시작했다는 언급도 예수님의 목자 활동이다(6:34). 마가가 즐겨 사용하는 “가르치기를 시작하다”는 표현은 다른 곳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 광야에서의 가르침을 연결한다(4:1; 6:2, 34; 8:31). 이 연결은 무리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것 역시 불쌍한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넷째, 마가는 오병이어의 기사에서 제자들의 오해를 부각시킨다. 먼저 마가는 제자들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오해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힌다. 제자들의 오해는 “우리가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서 그들로 먹게 해야 합니까?”라는 즉각적인 반문에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6:37).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오해를 교정하려는 의도로 음식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씀할 때, 제자들은 확인한 후에 간략하게 “(빵) 다섯과 생선 두 마리가 있다”고 답변한다(38절). 이것도 제자들의 불성실함은 물론 오해를 보여준다. 오해의 주제는 저자가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에도 제자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오해와 연결된다(6:52).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속적인 기적(물위를 걸으심,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축출,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장애인의 치유)과 4천명을 먹인 칠병이삼어의 기적 후에도 영적인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마디로 제자들의 마음은 완고해졌고, 그들의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8:17-18). 저자가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마가는 요한의 기록과 같이 생선을 나누어준 사실도 강조한다(6:41). 여기서 “그가 모두에게 그 두 생선들도 나누어 주었다”(kai. tou.j du,o ivcqu,aj evme,risen pa/sin, ‘카이 투스 뒤오 익쑤아스 에메리센 파신’)는 문장은 주목을 요한다. 주어는 분명 3인칭 단수 “그”이고, 간접 목적어는 “모두들”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선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을 강조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문장의 문자적인 의미와 두 번째 음식 기적이 예수께서 생선을 무리들에게 베풀라고 명령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8:7) 생선은 예수께서 친히 모든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마태와 누가의 병행기록에는 없는 독특한 내용으로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사에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예수님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는 도움을 준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볼 때 마가의 오병이어 기사는 아직 목자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가장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목자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르러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부분적으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다. 누가기사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

누가의 오병이어 기사에 등장하는 독특한 요소를 생략과 변경 추가의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우선 누가의 기사에서 생략된 항목에 대하여 보자. 첫째,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신 계기나 목적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다만 사역의 현장에서 돌아온 사도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신 것만 밝힌다. 둘째,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달리 무리들이 어디에서부터 예수님에게로 따라 왔는지 밝히지 않는다. 셋째, 누가는 병행기록 중 유일하게 잔디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넷째, 누가는 무리에 대하여 예수께서 보인 동정심을 언급하지 않는다. 다섯째, 누가는 세 복음서의 병행기록과는 달리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급박하게 돌아갔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략들은 누가가 세부적인 내용들에 대체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음을 알려준다.

누가의 기록에서 변경 또는 추가된 요소가 적지 않다. 첫째, 누가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간 지명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물론 누가는 이 지역이 빈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9:12). 그가 밝히는 지명은 “벳새다라 불리는 도시”이다(9:10).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란 도시(혹은 마을)로 들어간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 도시의 방향 또는 지역으로 가신 것을 시사한다. 이곳이 마을들과 고을들에서 떨어진 빈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이해를 지지한다. 이 마을의 언급은 10장에서 회개하지 않은 벳새다에 대한 예수님의 진노 선언의 배경이 된다(10:13). 둘째, 누가는 예수님의 동정심을 언급하는 대신에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신 사실을 기록한다(9:11). 이 언급을 통해 누가는 기다리던 무리들에게 앞서 영접을 받은 예수(8:40)께서 이제는 무리들을 영접하심을 보여준다.

셋째, 누가는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행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치유의 사역을 모두 언급한다(9:11). 누가의 기록에만 “하나님 나라”란 문구는 9장에서만 무려 5번 등장한다(9:2, 11, 27, 60, 62).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라를 들려주는 것이고, 그의 치유는 자신이 친히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무리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중 사역은 그가 제자들에게 위임한 사역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9:2, 60, 62),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아 현장에서 몸소 행한 사역이었다(9:6). 더욱이 이러한 사역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백성에게 행해 오신 사역의 핵심이었다(4:43; 5:16-17; 6:17-19; 7:21-22; 8:1,10). 동일한 저자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이와 같은 사역을 지속한 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넷째, 무리를 인근 주변 마을들로 보내는 것과 관련하여 마태와 마가가 제자들을 막연하게 “그 제자들”(oi` maqhtai., ‘호이 마쎄타이’)이라고 밝히는 것과 구별되게 “그 열둘”(oi` dw,deka, ‘호이 도데카’)로 밝힌다(9:12). 여기서 “열둘”로 지칭된 제자들은 앞서 10절에서 사도들(oi` avpo,stoloi, ‘호이 아포스톨로이’)로 불렸고, 그들의 사명과 관련하여 1절에서는 “열둘”로 일컬어졌다. 같은 장에서 “열둘”과 “사도들”이란 두 표현의 연결은 일전에 산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사도들이라고도 불린 열둘”(dw,deka( ou]j kai. avposto,louj wvno,masen, ‘도데카 후스 카이 아포스톨루스 오노마센’)의 사명을 상기시킨다(6:13). 이 표현은 저자가 열두 제자들의 사명을 의식하고 본 기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제자들을 “열둘”로 명백하게 표기함으로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 “열둘”과 “열두”제자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이러한 연결로 열두 바구니는 12사도로 대표된 신약의 백성을 상징적으로 지시할 가능성을 한층 더 해준다. 유독 누가의 병행기록만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 “열둘”의 언급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은 열두 제자와 열두 바구니의 연결을 더욱 친밀하게 한다. 이 점에도 제자들이 거둔 음식은 상징적으로 신약의 영적인 12지파를 먹일 구원의 음식(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나누어 줄 준비가 되지 아니했지만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나중에 이 사역을 잘 감당할 것이다.

다섯째, 누가는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보인 관심을 마태와 마가의 경우보다 더 세심하게 표현한다. 두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관심은 단지 무리들을 보내어 필요한 음식을 사먹게 하는 것이었으나, 누가복음에 제자들의 관심은 무리들의 식사만 아니라, 숙박의 문제도 해결하는 데 있었다(9:12). 12절에 숙박이 식사보다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제자들의 관심은 그들의 숙박에 더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누가는 제자들이 돈의 액수를 말하지 않고 “우리가 가서 이 모든 백성(pa,nta to.n lao.n tou/ton, ‘판타 톤 라온 투톤’)을 위해 음식을 사지 않는다면”하고 예수께 대답한 것을 기록한다(9:13). 여기에 주목할 내용은 “모든 백성”이라는 표현과 여기에 표출된 제자들의 태도이다. “모든 백성”이란 표현은 제자들이 무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하는 긍정적인 시각을 잘 보여준다. 사실상 모든 백성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대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2:10, 31; 7:29; 8:47; 18:43; 20:45; 21:38; 24:19). 13절 중간에 나오는 문구“(아마도)…하지 않는다면”(eiv mh,ti, ‘에이 메티’)는 본문을 포함하여 신약에 단지 3번 나온다(고전 7:5; 고후 13:5). 이 문구와 연결된 항목은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 아니다(고전 7:5; 고후 13:5). 본문에서도 이러한 함의가 가능하다. 이러한 함축적인 의미를 살려 제자들이 한 말을 다시 표현하자면 “우리는 가서 이 모는 백성을 위해서 음식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빵 다섯과 생선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가 된다. 백성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는데 자기들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음을 실토하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있다. 확실하게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마가복음의 경우보다 긍정적이다. 제자들의 긍정적인 모습은 앞서 본 무리들에 대한 태도에 반영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지시에 대한 정확한 순종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50명씩 앉히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했고, 그들은 그대로 행하였다(15절, kai. evpoi,hsan ou[twj, ‘카이 에포이산 후토스’). 더욱이 예수님의 지시와 그 실행을 연결하는 같은 동사 “앉다”(kataklivnw, ‘카타크리노’)의 사용은 제자들의 순종을 재차 역설한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에 근거하여 오병이어 기사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관점을 정리해보자. 일부 내용들은 누가의 독특한 관점을 형성하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누가의 기록에 변경 또는 추가된 내용은 누가의 독특한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헤롯 안티바스의 고민스런 질문은 저자가 오병이어의 기사로 들어가는 창문과 같다. 환언하면 오병이어의 기사는 헤롯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제기한 질문에 대한 시각적인 대답이라는 것이다. 열두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주어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계시는 누구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한 예수의 자기 계시를 제대로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의 기도 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질문과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이 계시를 비로소 귀로 들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오병이어의 기사와 베드로의 고백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서 누가가 마가의 큰 단락(6:45-8:26)을 생략할 때 저자의 의도는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계시된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를 이해하기 바랐을 것이다.

사도들은 나중에 저자가 기록한 오병이어 기적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한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제자들이 어떻게 오병이어 기적의 이상을 역사 속에 어떻게 실현했는지 잘 보여준다. 누가의 오병이어 기사에 등장하는 단어들(사도들, 모든 백성, 열둘, 오천)과 내용들(가르침과 치유)이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행 2:42-43; 3:9,11; 4:4, 10, 33, 35, 37). 오병이어의 기적 이전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가 있었던 것과 같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행 3:6-8), 이 기적의 결과로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수많은 백성을 가르쳤다(3:11-26).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백성에게 가르친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약의 구원약속이 성취되었으며(3:13-18), 이제 모든 백성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 모세가 예언하였고 선지자들이 고대했던 그 선지자로 믿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3:19-26). 그 결과 복음의 양식을 먹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오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4:4). 남자 오천 명의 숫자는 명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남자의 숫자와 동일하다(9:14). 오병이어의 기사에서 백성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예수께로부터 친히 받아 주시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유일하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천상 왕으로 다스리는 예수님의 이름밖에 없었다(3:6, 16, 26). 이와 같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친히 행하셨듯이 사도행전에도 사도들의 예수 이름 선포와 말씀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께서 구원의 양식을 제공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침내 사도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이상을 제자들이 실현하게 되었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강조점이 누가의 오병이어 기사의 독특한 기여이다.

라. 요한기사의 독특한 요소와 관점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사는 현저한 차이점으로 인하여 공관복음의 병행기사와는 다르게 독립된 별개의 전승에 근거하는 것으로 간주될 정도이다. 여기서 관심은 요한의 오병이어 기사가 공관복음의 병행기사와 어떠한 차이점을 가지며 이것들이 저자의 독특한 관점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요한의 오병이어 기사에 등장하는 독특한 요소들과 관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첫째,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장소를 우선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으로 밝힌다. 요한은 여기서 갈릴리 바다를 티베리아 바다로 부른다(6:1). 이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21장에 기록된 티베리아 바다에서 있었던 사건과 연결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병이어 기사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단어들(티베리아 바다, 빵, 생선)이 21장에도 동일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1, 9-10, 13절). 이에 대하여는 나중에 좀 논의할 것이다.

둘째, 요한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6:2). 이러한 설명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선별적으로 기록한 특성을 반영한다(20:30-31). 5장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표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한 것(2:1-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린 사건(4:46-54),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 등이다(5:1-9). 더욱이 “그가 행하고 있는 표적들을 보다”(evqew,roun ta. shmei/a a] evpoi,ei, ‘쎄오룬 타 세메이아 하 에포이에이’)는 2:23의 “그가 행하시고 있었던 그의 표적들을 보고”(qewrou/ntej auvtou/ ta. shmei/a a] evpoi,ei, ‘쎄오룬테스 아우투 타 세메이아 하 에포이에이’)와 같은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록되지 않는 표적들(2:23)과 그가 행한 오병이어의 표적은 단어 ‘유월절’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결된다(6:4). 예수께서는 이 표현과 유사하게 “너희가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에”(o[ti ei;dete shmei/a, ‘호티 에이데테 세메이아’)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6:26). 또한 그들이 예수께 표적을 요구할 때 그는 오병이어의 계시를 염두에 두고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을 주시는 것이라고 하셨다(6:31-32). 이러한 사실들은 저자가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수님을 계시하는 표적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 요한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기록한다(6:3).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시기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4절). 그리고 눈을 들어 그에게로 무리가 나오는 것을 주목했다고 말한다(5절). 이러한 독특한 언급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5장에 언급된 모세를 연상시킨다(45-47절).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다면(출 24:12-13), 여기서 예수님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신다. 또한 광야에서 40년간 주어진 만나를 연상시키는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과 모세를 연결시키기에 충분하다(6: 31-34). 산과 유월절, 떡의 기적적인 공급 등은 예수께서 모세가 증거한 바로 ‘그 선지자’라는 인식을 백성에게 심어주기에 넉넉했다(6:14). 더욱이 저자는 증인 요한이 예수님을 이미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언함으로 예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임을 암시했다(1:29, 36). 나중에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을 당하신다(19:14, 36). 6장의 생명의 떡 강화에서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몸과 피를 언급하신다(55-56절). 이러한 연결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할 것을 예고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넷째, 요한은 예수님의 동정적인 태도나 가르침을 언급하는 대신에 새 내용을 추가한다. 그것은 요한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무리들이 나오는 것을 주목한 후 빌립에게 한 질문을 두 분사구를 사용하여 한 문장으로 연결하는 것과 관련된다(5절). 여기서 많은 무리가 “그에게로 나오다”(e;rcetai pro.j auvto.n, ‘엘케타이 프로스 아우톤’)란 진술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게로 오기를(evlqei/n pro,j me, ‘엘쎄인 프로스 메’) 원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과 상반된 상황을 그려준다(5:40). 이 표현은 6장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등장한다(6:6, 35, 37, 44, 45, 65). 사람들이 다 예수께 나오는 것을 저자가 기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오병이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생명의 떡 강화에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사람을 굶주리게 하지도(6:35), 추방하지도(6:37)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오는 자를 추방하지도 않았고, 또는 그들로 굶게 하지도 아니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누구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그에게 올수 없고(6:44), 다만 아버지께서 듣고 배우는 자만 그에게만 오며(6:45),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 외에는 누구도 그에게 나오지 못한다(6:65)고 천명하셨다. 이러한 연결은 예수께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을 주목하고 그들로 배불리 먹게 하신 일이 하나님에게 이끌려 그에게 나오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양식)으로 공급하는 것을 그려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섯째, 요한은 예수께서 처음서부터 무리들의 기적적인 식사와 관련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한다.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알았다”는 저자의 논평은 이 점을 잘 부각시킨다(6절). 질문을 받은 빌립은 “각 사람이 소량의 음식을 받는다고 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식량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7절). 이때 안드레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하면서 이것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이렇게 많은 자들을 위해 이것이 무엇이 되겠습니까?”고 덧붙였다. 결국 빌립과 안드레의 말은 해결의 방도를 자기들이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빌립과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의 언급은 예수님의 질문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은 예수님의 초기 제자로 그의 메시아 신분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던 자들이었다(1:41, 45). “모세가 율법에서 기록한 자”(1:45)란 표현은 나중에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모세는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다”(5:46)란 선언으로 확증되었다. 이런 정보는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염두에 두고 빌립이 대답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일 빌립이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를 눈치 챘다면 메시아는 모세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40년간 하나님 백성을 광야에서 먹인 만나를 염두에 두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섯째, 요한은 수중에 있는 음식과 관련해 새로운 정보를 세 가지 기술한다. 이것은 빵을 가진 아이와 빵의 종류(보리 빵)와 물고기의 칭호이다(9절). 어린 아이는 공관복음의 병행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막연한 빵은 여기서 보리빵으로 명시된다. 요한은 보리빵이란 사실을 두 차례나 언급한다(9절, 13절). “보리빵”(a;rtouj kri,qinoj, ‘알토스 크리씨노스’)이란 동일한 문구는 본문에서 두 번, 구약에서 기드온의 기습공격과 관련하여 한번(삿 7:13)과 선지자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100명의 선지생도를 기적적으로 먹인 20개 보리빵으로 한번 나온다(왕하 4:42). 이중 오병이어와 관련된 사건은 엘리사가 보리빵 20개와 약간의 곡식으로 100명을 먹인 사건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한 기적이 엘리사가 행한 기적보다 엄청나게 규모가 큰 사건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이 기적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로 즉각 인식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6:14).

요한이 공관복음에 나오는 단어 ivcqu,j(‘익쑤스’, ‘생선’) 대신에 ovya,rion(‘옵사리온’, ‘생선’) 사용하는 것도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단어가 21장에만 세 번 나오기 때문이다(9-10, 13절). 저자가 ‘티베리아 바다’란 표현을 통해서 오병이어와 21장의 사건을 연결할 가능성이 있음을 앞서 지적하였다. 생선과 관련된 두 단어가 21장에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때 동의어임에 틀림이 없다(8절과 11절에는 ivcqu,j, 9-10절과 13절에는 ovya,rion).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잡은 고기는 ivcqu,j로 묘사되나(8, 11절), 그의 지시에 따라 예수께 가져온 고기는 ovya,rion으로 불린다(10절). 특별히 예수께서 친히 준비하여 불에 굽고 있었던 고기 역시 ovya,rion으로 불린다(9절). 이 단어 외에도 6장의 오병이어의 사건과 2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음식 제공의 사건을 연결하는 단어들은 “취하다”, “빵”, “주다”, “이와 같이”(o`moi,wj, ‘호모이오스’) 등이 있다(6:11= 21:13). 이와 같이 저자는 6장의 오병이어의 표적과 21장에서 예수님의 음식제공을 연결한다. 저자는 이 연결을 통하여 예수께서 오병이어 표적 속에 들어있는 계시를 제자들에게 재차 확인시켰음을 보여준다.

일곱째, 요한은 무리들이 있는 장소에 “많은 풀”이 있었음을 언급한다(10절). 이것은 마태의 “풀”(14:19)과 마가의 “푸른 풀”(6:39)의 언급을 확증할 뿐 아니라, 4절의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언급과 관련된 것으로 그 시기가 3월-4월경이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어린아이, 보리빵, 고기의 구체적인 이름의 언급등과 함께 사건의 생생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덟째, 요한은 놀랍게도 예수께서 친히 빵과 고기를 나누어 준 것만 기술한다(6:11). 앞서 지적했듯이 마가의 기록만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생선을 나누어준 사실을 명시했다(6:41). 이 사실을 고려해볼 때 요한의 이러한 기술이 무엇을 역설하기 위함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음식을 나누어주었다는 언급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그의 말씀이 생략된 것과 유관하다. 더더욱 예수님의 음식 배분은 오병이어의 참 뜻을 해석하는 생명의 떡 강화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떡)으로 선포하는 것과 잘 어울린다(6:33-35, 41, 51). 저자는 예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진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 빵과 고기를 백성에게 나누어 준 것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예수의 음식배분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백성에게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는 놀라운 진리를 생생하게 그려준다. 음식을 친히 백성에게 나주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과 입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는 진리로 가득 찼을 것이다. 이 명백한 진리는 공관복음의 오병이어 기사에 부각되지 않는 내용이다.

아홉째, 요한은 예수께서 남은 음식을 모으라고 지시했다고 말한다(6:12). 특별히 목적절 “어떤 것도 버려지지 않게 하라”(i[na mh, ti avpo,lhtai, ‘히나 메티 아포레타이’)는 표현기법 상 미묘한 뉘앙스를 가진다. 이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남은 음식이 하나도 버려지는 것이 없게 하라’이다. 하지만 생명의 떡 강화의 맥락에서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양식이 썩어 없어지는 음식이 아니라(th.n brw/sin th.n avpollume,nh, ‘텐 프로오신 텐 아폴리메네’),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음식임을 미묘하게 예시한다(6:26). 그러기에 이 음식을 먹는 사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사는 것도 결과적으로 암시한다(3:16; 6: 39-40, 44, 51, 54, 58). 더 나아가 공관복음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거둔 음식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아주 소상하다. 저자는 모아 거둔 음식은 먹은 자들이 풍성하게 남긴 보리빵 다섯 개의 부스러기라는 사실과 함께 제자들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채웠다고 기록한다(13절). 특히 동사 “가득 채우다”(gemi,zw, ‘게미조’)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에만 두 번 언급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포두주의 풍성함과 남은 음식의 풍성함을 부각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2:7). 이로서 만족한 식사와 풍성하게 거둔 음식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에게 공급하시는 풍성한 생명의 넘치는 은혜를 묘사하기에 충분하다(1:14, 16; 10:10). 이러한 해석은 성만찬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더욱 타당하다.

마지막 열 번째, 요한은 마태와 마가의 기사가 침묵하는 무리 해산의 배경을 설명한다. 요한이 밝히는 새로운 내용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대한 백성의 반응과 예수께서 취한 즉각적인 조치이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로 확신하게 되었다(14절). 앞에서 지적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을 한편으로 모세와, 다른 편으로 선지자 엘리사와 연결시키는 사건임이 분명했다. 무리는 이 둘을 종합하여 예수님을 “참으로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로 어렵지 않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 깨달음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과연 그러한 선지자, 다시 말해서 모세가 처음으로 예언하였고(신 18:15- 19; 34:10; 요 1:45; 5:46-47), 모든 선지자들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던 선지자였다(요 1:45; 행 3:24; 벧전 1:10-12). 앞서 증인 요한이 자기 자신은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대답한바 있다(1:21). 게다가 “이 사람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는 그 선지자다”(ou-to,j evstin avlhqw/j o` profh,thj o` evrco,menoj eivj to.n ko,smon, ‘후토스 에스틴 알레쏘스 호 프로페테스 호 엘코메네스 에이스 톤 코스몬’)라는 고백은 한편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서로 주고받은 “이 사람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다”(ou-to,j evstin avlhqw/j o` swth.r tou/ ko,smou, ‘후토스 에스틴 알레쏘스 호 쏘텔 투 코스무’)라는 말(4:42)과, 다른 편으로는 마르다가 예수께 고백한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세상에 오시는 분입니다”(su. ei= o` cristo.j o` ui`o.j tou/ qeou/ o` eivj to.n ko,smon evrco,menoj, ‘수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쎄우 호 에이스 톤 코스몬 엘코메네스’)와도 연결된다(11:27).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o` evrco,menoj evn ovno,mati kuri,ou, ‘호 엘코메네스 엔 오노마티 퀴리우’)이다(12:13). 결정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1:1, 14), 하나님의 말씀만 하시는 아들 선지자이다(1:18; 3:34; 5:30; 8:26,40; 10:35-36; 12:49; 14:10; 17:8). 이러한 사실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본 것이 그릇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무리의 잘못은 예수께서 즉각적으로 인식하신 것과 같이 그를 강제로 끌어다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불순한 의도에 있었다. 그들은 이 대신 선지자 예수께서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고 순종해야했다. 이러한 순종은 백성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게 보여야 할 자세와 태도이기 때문이다(신 18:15).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목적은 예수께서 친히 오늘과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반복적으로 행하여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게 하기 위함이었다(6:26, 34). 분명 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사로잡은 것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지시하는 계시(진리)가 아니라, 사건 자체였다(6:26). 하지만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계시하는데 그 근본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시고 즉시 현장을 떠나 산으로 피하는 즉각적인 조치를 단행하셨던 것이다(6:15). 요한의 이러한 상술은 공관복음의 병행기사를 전제하면서 이를 보충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볼 때 요한의 오병이어 기사에서 독특한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오병이어 기사의 세부적인 내용 대부분은 곧 이어서 기록된 예수님의 생명의 떡 강화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은 마지막 유월절에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을 당함으로 그의 백성에게 자기 자신을 생명의 빵(떡)으로 주실 것을 계시한 사건이다. 이로서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신학은 공관복음의 오병이어 신학을 넘어 구원론적인 기독론의 중심으로 더욱 깊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나가는 말

오병이어의 네 기사는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는가? 아니면 한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세운 구원의 성취자 메시아로 전제하면서도 각자의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차별된 메시지를 보여주는가? 연구의 결과로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은 각각 구별된 메시지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마태의 기사는 공관복음 중에서 본 사건을 메시아에게 닥칠 고난의 관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기사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통해서 마가와 누가의 경우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해당 기사에서 예수님의 수난 기사를 상기시키는 표현들을 사용함으로 명확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오병이어의 음식은 단순하게 육적인 음식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로 그들에게 주어질 구원의 양식을 예고한다.

마가의 기사는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목자 정체와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다시 말해서 마가의 기사는 목자 없는 양을 대하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하면서 동시에 그의 참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오해를 강조한다. 이러한 주제의 연결 선상에서 마가는 한 걸음 더나가서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지속적인 무지를, 다른 편으로는 그들의 영안을 열어 주려는 예수님의 노력을, 기록함으로 제자들의 눈이 마침내 부분적으로 나마 열리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의 기사는 9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들려주고 보여주어야 할 제자들의 사명의 관점에서 독특하게 기록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를 바로 알고 깊이 체험적으로 인식할 때에만 백성들에게 구약의 모든 구원 약속을 성취한 메시아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 특히 누가는 오병이어의 사건과 사도행전 3-4장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복음사역을 연결함으로 오병이어 사건 속에 들어있는 제자들의 사역 이상이 역사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체험적으로 알게 됨에 따라 마침내 “너희가 저희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 실현하게 되었다.

요한의 오병이어 기사는 생명의 떡 강화와 연결되어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명확하게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사 내에 생명의 떡 강화에서 등장하는 내용과 연결을 강화시키는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친히 음식을 나주어 준 것을 집중 조명함으로 예수께서 친히 생명의 빵(떡)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 강화에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제공할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병이어의 네 기사가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각 복음서의 각도에 따라 독특한 메시지를 역설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각 복음서의 이러한 특성을 의식하고 오병이어의 기사를 대할 때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아의 정체와 구원사역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성격상 다른 병행기사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기에 각 병행기사에 대한 세심한 연구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 Abstract

Four Gospels’ Perspective on

Jesus’ Feeding Five Thousands

Sang Sub Yoo

(Chongshin University)

Jesus’ Feeding Five thousands with five breads and two fishes are recorded in all four Gospels. Among Jesus’ all other miracles, this miracle alone is recorded four times. This fact shows the vital importance of this miracle. Most studies on this miracle have so far been done either to find out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this fourfold story, or to draw out the common messages of these records. It naturally implies that these four stories on Jesus’ feeding are not interpreted from the perspective of each Gospel. This is the reason for studying Jesus’ miraculous feeding of the multitudes from each Gospel’s distinctive perspective. This essay intends to draw out distinctive message or theological emphasis of the same miracle from each Gospels’ particular angle.

First, Matthew clearly presents this story from the coming inevitable suffering of Jesus Christ; this is obviously seen in the direct connection between John the Baptist’s death record and Jesus’ feeding miracle. This aspect is concretely made clear in the fact that Matthew’s feeding record contains several impressions reminding us of Jesus’ passion narratives.

Secondly, Mark’s particular emphasis in the feeding story is on the identity of Jesus as the Messianic shepherd and the disciples’ utter ignorance or misunderstanding of this identity. The materials from Jesus’s feeding down to Peter’s confession of faith not only show his disciples’ continual or stubborn ignorance about Jesus’ real identity, but also Jesus’ ongoing effort to open their spiritual eyes about his identity. As a result, his disciples partially came to recognize Jesus’ identity.

Thirdly, Luke’s feeding story is uniquely writte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welve disciples’ mission to present Jesus to the world; only when they come to rightly appreciate Jesus’ messianic identity, they are capable of presenting him as the Messiah who has fulfilled all the promises of salvation in the O.T. Luke’s unique link between the feeding miracle and the apostles’ ministry in Acts 3-4 manifest how their preaching ministry began to fulfill Jesus’ ideal on their mission as contained in his feeding five thousands.

Fourthly, as well recognized, John’s feeding story, by its direct link with Jesus’ discourse of bread of life, predominantly em- phasizes that Jesus himself is the bread of life. To bring this particular theme out, John intentionally uses various expressions in the feeding record, which are also used in Jesus’ discourse on the bread of life.

In conclusion, each record of Jesus’ feeding miracle stresses each Gospels’ unique theological point. It is only when we recognize these distinctive points, that we can properly understand what this feeding miracle richly and distinctively tell us about Jesus’ messianic identity and his mission.

주제어 :

오병이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Feeding Five Thousands, Matthew, Mark, Luke, John

출처 : ???

글쓴이 : ??? 원글보기 : ???

메모 :

오병이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장 8~13절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부르게 한 내용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에 아주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공급하고 만유를 주관하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임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 당시 오병이어가 아니더라도 주 예수께서 똑같이 기적을 나타내어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묘한 행사는 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저는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읽고 오병이어의 이적과 기사 배후의 주 예수의 뜻에 대해 더욱 깊은 터득과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우리 먼저, 그 오천 명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느냐?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느냐? 틀림없이 모르고 있었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몰랐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만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거나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문으로 전해진 예수에 대해서 호기심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예수를 따랐다고는 전혀 말할 나위가 없고, 예수 자체에 대해 알고 있다고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가 그 오천 명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 그저 배불리 먹을 생각뿐이었다. 예수는 그런 배경에서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는 동시에 마음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냥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그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어떠하였을까? 여기에서, 예수의 생각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관련된다. 배가 고파서 그저 한 끼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그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에 대해 호기심으로 가득 차고 또 기대로 가득 차 있는 그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는 단지 그 표적과 기사를 통해 그 오천 명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하였을 뿐, 그 오천 명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사람들이 그저 구경하러 온 것이고 그저 떡으로 배불리 먹으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자리에서 오병이어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어 구경하기 좋아하고 표적을 보기 좋아하는 그 오천 명에게 눈을 뜨게 해 주고, 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해 준 것이다. 예수가 사실로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는 했지만, 그는 그 오천 명이 단지 떡으로 배불리려고만 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가르침도 주지 않았으며, 단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만 보게 해 주었다. 예수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 피조물이라면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눈 아래에 있는 피조물에게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를 누리게 해 줄 것이다. 설령 그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은 후에도 예수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아무런 감사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따지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는 원칙이 있기에 불신자들은 보살펴 주시지도 않고 보호해 주시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더더욱 누리지 못하게 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이 보기에 살아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라면, 다 관리해 주고 보살펴 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안배하고 주재한다. 이것이 만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이다.』

『 …… 그럼 예수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라도 했었느냐? 증오가 있었느냐? 그런 것은 다 없었다. 예수는 그저 자신을 절대 따를 리 없는 그 사람들을 더 많이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예수의 마음은 아팠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류의 타락을 보았고, 인류가 자신을 저버리는 것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그 사람들을 보고 있거나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인류의 아둔과 무지에 예수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고 또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되도록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주님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그 사람들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 사람들에게 심혈을 쏟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분명했는데, 예수는 단지 그들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만 했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에게 선대해 주고 공급해 주고, 그들을 적셔 주고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성육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나타냈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즉, 인자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하였고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 …… 비록 사람이 수천 년 동안 읽어 온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 속에서 일부 간단한 줄거리를 제시하여 간단한 현상들을 보게 했지만, 우리는 그런 간단한 줄거리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그런 어떠하심은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낼 때, 자신의 마음의 소리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한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소리 없는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오병이어’의 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읽었지만 그 가운데서 단지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인식했을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마음과 유로된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해부와 밝히심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이 너무나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단지 떡으로 배부르기만 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단지 은혜를 베풀어 배부르게 하는 것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들에 대해 어떤 요구나 증오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실질의 유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떡을 배불리 먹은 오천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따를 것을 바라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말씀을 하려고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께서는 비록 사람을 사랑하고 선대하시지만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떡으로 배부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들을 선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더욱 많은 진리를 공급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배부르게 하여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 살게 합니다.

이 단락의 말씀에서 저는 또 ‘오병이어’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왔지만 사람이 단지 떡으로 배부르기 위해, 육체의 평안이나 훗날의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칭찬을 얻을 수 없고 진리와 생명은 더욱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오직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각종 시련과 환난과 연단 속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낼 수 있고 생명 성품이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에 담긴 주 예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당신은 지금 깨달았나요?

마14:17-21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17-21)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당시에 한 사람이 한 끼의 식사로 먹는 양, 남자 어른들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차도록 남겼습니다. 여자와 남녀 아이들까지 합치면 약 2만 명입니다. 너무 황당한 기록 같습니다. 황당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일생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복음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푸신 수많은 기적들 중에 네 저자가 다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오병이어 기적 하나뿐입니다. 다른 기적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혹은 적은 무리 앞에서 이뤄져서 저자들이 그 모두를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또 복음서를 저작한 순서가 달라 다른 복음서가 먼저 기록한 내용은 생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각 저자들이 느낀 감동이나 의미가 기적마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만 네 저자가 빠트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감동이 컸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체험한 기적을 예수님의 일대기에서 빠트릴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그 수많은 증인들이 나중에 복음서를 읽고 잘못되었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참고로 복음서들은 그들 세대가 살아있을 때에 저작되어서 이미 교회마다 회람되고 있었습니다.

이 오병이어 기적을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어떤 대통령의 전기를 기록하면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락하는 꼴입니다. 실제로 이 기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이 그 엄청난 은혜와 권능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4,15)

유대인들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표현한 것은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백성들의 그런 소망을 저버린 셈인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전까지의 모든 기적은 개인적으로 이뤄졌으나 이번만은 2만 명 모두가 기적의 은혜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체로 기적을 베풀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 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다른 말로 왕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죄에서 구원해주러 온 메시아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안락과 풍요를 주러 온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인류 역사상 가장 의로운 일을 많이 행하신 의인이자, 신적 권능으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 성인 5천명의 증인이 번듯이 살아있는데 거짓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기적만큼 사실성이 가장 보장되는 기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에게 그런 정도의 기적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당시는 한두 끼 굶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설교를 듣느라 밥도 먹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겨서 간단하게 행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7대 표적 (4) : 오병이어의 기적(요6:1~15)

예수님의 7대 표적 (4) : 오병이어의 기적(요6:1~15)

경북 포항의 호미곶에 가면 「해맞이 광장」이 있는데, 거기에 대형 가마솥이 있습니다. 작년엔가 새해맞이 행사 때 2만명분의 떡국을 끓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굉장하죠. 최근에는 충북 괴산군에서 더 큰 가마솥을 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다 둘레 15m의 세계 최대의 가마솥을 만들었는데, 쌀 50 가마로 4만명분의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밥을 지으면 아마 장관일 겁니다.

그런데 본문 성경을 보니까,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놀라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부르는 것인데, 예수님의 7대 표적 중 네 번째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히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나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손에 들고 축사(감사기도)하신 후 나눠 주셨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많은 무리가 배가 부르도록 먹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의 수효가 얼마나 됐을까요? 남자만 5천명(10절)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이상이 됩니다. 병행 구절인 마14:21을 보면 이 숫자는 성인 남자만 해당됩니다. 그 외에 여자와 아이들 숫자까지 합치면 아마 1만 명,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은 것도 대단한데,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13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힘으로 수만 명을 먹이려면, 그것도 배불리 먹기보다 이벤트를 위해 조금씩 먹는 것임에도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요구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면 결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함께 살펴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찾아 피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 기적의 동기 : 긍휼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함부로 남발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꼭 필요할 때만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마음 속에 긍휼이 발동할 때입니다.

여러분, ‘긍휼’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민망히 여긴다’는 말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깨끗이 고쳐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막1:41~42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여기서 ‘민망히 여긴다’는 말이 곧 긍휼입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면, ‘민망히’ 라는 말이 with compassio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compassion은 연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com-’은 ‘함께’ ‘더불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ssion’은 ‘고난’ ‘고통’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긍휼, 연면의 정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그런 느낌이 가득 찰 때 기적을 행해서라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9:35~36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소개됩니다. 그 모든 것의 동기가 ‘긍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셨다는 것은 그냥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의 느낌까지 암시합니다. 연민의 정이요, 긍휼입니다. 병행 구절을 보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막6:34~35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때가 저물어 가매 … ” 예수님은 그 무리가 불쌍해서 말씀을 늦도록 가르쳤고, 또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자 그들이 끼니를 거를 것을 염려하시면서 기적을 행하신 겁니다.

반면에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귀찮아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이 늦도록 설교하시자 지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을 빨리 보내야 쉬기도 하고, 먹을 것도 자기들은 적은 숫자니까 해결하기 쉬우리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기적을 바랍니까? 그러면 주님께 불쌍히 보이면 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불쌍한 척 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알면 겸손히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인생이요,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늘 넘어지고 쓰러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면,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왕이었지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마지막 갈 준비를 하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죽는 것 자체도 큰일이지만 그때 상황은 아주 심각했습니다. 아직 그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외침의 위기로 불안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죽음이 닥쳐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히스기야는 모든 것을 단절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사38:2~3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 ”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긍휼이 생겼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 앞에 겸손함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큰 은혜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 자녀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쌍합니다. 그들이 먹을 게 없고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보면 연약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들, 그리고 이 민족과 세계만방의 영혼들도 마찬가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바라보면 정말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 여름 사역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잘들 하고 계십니다만,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의 마음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농어촌 선교와 해외 선교를 할 때나 한낱 이벤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보다 우리 마음속에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에 얼마 전에 방문했던 로수길(Sukrit Roy) 선교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인도인이고, 사모님 변상이 선교사님은 한국인입니다. 그분이 십수년 전 한국에 와서 유학 할 때, 한국이 너무 부러웠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그렇지만, 곳곳에 교회당이 있고 십자가가 있는 게 너무 부러웠습니다. 가난한 조국, 영적으로 죽어가는 동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돌아가서 신학교를 세웠고, 거기서 배출된 신학생들이 사역자가 되어 각지에 흩어져 개척교회를 100여개 이상 세웠습니다. 기적입니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귀환하는데, 앞으로 일반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운다고 합니다. 소요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사역도 큰데 어떻게 하려나 인간적인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마음속에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느끼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분에게 긍휼이 있구나. 이게 기적의 비결이구나.”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 기적의 동기를 많이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이웃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신앙 훈련 : 믿음을 키워주심

예수님은 무리들이 불쌍해서 먹여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만 위해서라면 당장 기적을 행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상황을 제자들을 위한 신앙 훈련의 기회로 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신앙을 키워주셨습니다.

① 빌립의 신앙 :

예수님은 먼저 빌립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5절. “ …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 ” 사실 말도 안 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 테스트입니다. 6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마음 속에 이미 기적을 행하시려고 작정하셨지만, 제자들의 신앙을 훈련하려고 그러신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빌립은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7절. “ …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금세 계산을 해보고 200데나리온 어치 떡을 사서 먹여도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라는 말이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입씩만 먹기에도(for each one to have a bite) 부족하다는 겁니다. 또 200데나리온이란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2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8개월 치 봉급에 해당합니다. 꽤 큰 돈이죠. 그런 돈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있다고 해도 어디 가서 그 많은 양의 떡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절대 불가능하니까 해산하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신앙은 빵점입니다. 그는 믿음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잣대가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역량만큼, 자기 조건 만큼만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주먹만한 하나님, 지식만한 하나님, 저금통장만한 하나님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초월하는 겁니다. 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비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신앙은 비(非)이성이 아니라 초(超)이성, 비(非)과학이 아니라 초(超)과학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입니다. 그분이 우주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연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연구해서 체계화시킨 게 과학입니다.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자연 법칙이 엄청 많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자연법칙을 총괄하십니다. 그러다가 이따금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 사항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는 게 우리의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이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런 모습을 가리켜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런 사람은 ‘무식한 박사’라는 겁니다. 자기는 똑똑한 척 하지만, 사실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또 이런 사람을 우리말로 ‘겉똑똑이’라 합니다.

② 안드레의 신앙 :

예수님은 다음으로 안드레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안드레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역시 자기 이성적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좀 달랐습니다.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성의 판단으로 을 단정 짓지 않고, 혹시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나 모색해 봅니다. 9절에 기록된 그의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일단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존중합니다. 따르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든 수가 없나 알아보니까 한 소년이 오병이어 도시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얻어 갖고 주님께 가져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데, 혹시 주님께 무슨 방법이 있나 여쭙니다. 그것은 정말 적은 믿음입니다. 비유하자면 ‘겨자씨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겨자씨 같은 믿음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마 17:20에서 주님이 무라고 말씀하십니까? “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안드레를 귀히 보십니다. 아주 적은 믿음이지만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감사함으로 축사하십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아무쪼록 이런 과정으로 큰 믿음을 키우시고 날마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의 거부 : 십자가가 빠진 기복주의 신앙

본문 14절~15절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기적을 본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열렬히 환호합니다. 급기야 구약 시대에 예언되었던 바로 ‘그 선지자’(신18:18 참조)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생각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으므로

메시아(왕, 구세주)의 출현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고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 …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도망치듯 가버렸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한참 인기가 치솟고, 왕이 되려고 하는 그때 도망가다니! 그것은 일종의 ‘거부’였습니다. 무리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아’입니다. 무리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 육신적 문제만을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관(觀)의 착오입니다. 2절 보면, 지금 몰려든 것도 병을 고쳐주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곧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축복을 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2차, 3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중요한 핵심은 영적인 축복, 즉 구원과 영생입니다. 문제는 핵심적인 것을 빼놓고 2차 3차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예수님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 결국은 찾아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매정하리만치 그들을 거부합니다. 요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 그러면서 당신을 스스로 소개합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육신을 위한 떡은 먹어도 결국 죽게 되지만,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떡은 예수님의 살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음료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요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결국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왔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사형 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육신적 축복에만 관심을 둡니다. 영적인 것이나 구원의 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그들은 결국 등을 돌립니다. 요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씁쓸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은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요6:67 “ …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히트를 칩니다.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물질적, 육신적 축복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지면 참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를 도외시한 채 물질적, 육신적 축복만 구하는 것은 ‘기복주의 신앙’이요 ‘신앙의 수단화’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유대인 2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를 당해서 간신히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합니다. 그 중 한 명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구해 주시면 재산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풍랑이 더 심해집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 그러면 3분지 2를 드리죠.”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밤새 기도했는데 그대로입니다. 아침이 되어서 다시 기도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제 재산 … ” 전부를 드린다고 말할 찰나였습니다. 그때 다른 한 명이 외칩니다. “이 봐! 저기 섬이 보인다, 보여! 그만 해!” 여러분, 이런 건 뭡니까? 일종의 ‘거래’입니다. ‘흥정’입니다. 이해타산이 맞으면 하고, 안 맞으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행태가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짧은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단 15분 남은 인생」이란 제목의 연극입니다. 주인공은 20대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학위수여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 검진을 받다가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목숨이 15분 남았다는 겁니다. 그는 고민합니다. 병상에 누워있는데 전보가 한 통 옵니다. 억만장자 삼촌이 죽었는데, 유일한 상속자이므로 수속을 밟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두 번째 전보가 왔습니다. 학교에서 온 것인데, 개교 이래 최우수논문으로 선정되었는데 큰 상을 주겠다는 겁니다. 평소 같았으면 너무 기쁜 소식이었겠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3분 남았는데, 세 번째 전보가 옵니다. 오랫동안 결혼해 달라고 졸라도 계속 거절하던 여인에게서 결혼 승낙 전보가 온 겁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그 젊은이는 세 통의 전보를 손에 쥔 채 운명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생명’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육신의 생명’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생명보다 ‘영생’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 신앙인이 됩시다.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기적을 체험합시다. 고난이 닥쳐와도 십자가 신앙만은 고수합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삶으로 승리하고, 이 세상 떠날 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병이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오병이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장 8~13절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병이어에 담긴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부르게 한 내용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에 아주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공급하고 만유를 주관하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임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 당시 오병이어가 아니더라도 주 예수께서 똑같이 기적을 나타내어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묘한 행사는 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후 저는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읽고 오병이어의 이적과 기사 배후의 주 예수의 뜻에 대해 더욱 깊은 터득과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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