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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4 (토) [하루 한 장]“하나님을 막겠느냐” (행11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사도행전 11장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가 무할례자와 겸상을 했다며
본질을 벗어난 비난을 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온 사도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성령님이 어떻게 임하셨는지,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라 같이 밥먹은 걸
책잡아 손가락질을 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아집이고 약함입니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만 있고
너에게는 없다고 차별하고 선 긋고
함부로 판단하는 고집불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베드로와
유대인과 우리를 친히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자도 여자도,
종이나 자유인이나, 누구라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친히 구원하십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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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 주석 – Daum 카페
사도행전 11장 주석 … 사도행전 제 11장 =====11:1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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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행전 11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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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7. 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7bnxPt0FETQ
사도행전 11장 주석
사도행전 제 11장
=====11:1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
서 사도들과 형제들이 언급되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한 논쟁이 매
우 심각하게 논의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사도들’은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형제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형제들을 `도를 좇는 사람'(9:2), `주의 성도'(9:13) `성도’
(9:32,41)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 `말씀을 받았다’란 말은 로넬료의 성령 체
험 사건(10:44-46)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당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며칠 머물렀다
는 점에서(10:48)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고넬료에 관한 소문이 예루살렘
까지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은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11:2
할례자들이 –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서 `할례자’들이 언
급되는데 이는 `할례받은 사람들'(* ,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로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할
례자들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에 대하여 상당한 우월 의식을 갖고 있음은 무할례자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 편
견에서 잘 입증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으로서 모두 할례자였
다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막연하게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특별히 할
례를 강조하거나 유대적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자들
(15:5)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우월감
이 잔존하여 공동체 안에서 갈등적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힐난하여 –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던 베드로의 행
위에 대해, 할례자들은 단순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단죄(斷
罪)하여 비난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힐난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
리노'(* )가 단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내
리기 위해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11:3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할례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방
인으로 언급되는 무할례자와의 식사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머무는 동
안의 행적이 10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이방인들과 식사
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할례자들의 힐란에 대해 직
접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할례자들이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만을 이유로
베드로를 힐난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본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
용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
다.
=====11:4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비난하여 문제를 제기해 오는 할례자들을 대하는 베드
로의 자세는 매우 장중(莊重)하고 권위있는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Haenchen). 특히
본 구절에서 사용된 `설명하여’라는 단어 `여세티데토'(* )는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크티데미'(*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서 어떤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분명하게 밝혀 선언하고자 하는 베드로
의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A.T.Robertson).
=====11:5
내 앞까지 드리우거늘 – 10:11에서는 `땅에 드리웠더라’로 묘사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내용물을 베드로가 볼 수 있게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
지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1:6
들짐승 – `네 발 가진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묘사인 것 같다.
=====11:7
내게 이르되 – 10:13에서 이 구절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본 구절이 베드로의 직
접적인 진술인 반면 10:13은 누가의 간접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11:8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10:14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
‘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11:9
하늘로부터 내게 대답하되 – 10:15에서 이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명해 주며 동시에 그 응답의 근원이 하나
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11:11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
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
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11:12
이 여섯 형제 – 10:23에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형제는 두어 명이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두어 형제를 합치면 모두 여섯 명 정도 된
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1절) 자기와 동행했던 사람 모두 데리
고 갔던 것이 분명하다.
=====11:14
그가 너와 온 집의 네게 이르리라 – 10장에서 이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천사에 의해 고넬료에게 주어진 내용을 요약하여 보다 강조한 것으로 짐작
된다. 그리고 10장 가운데서는 생략되었으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
로부터 들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 중에 본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 –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
이 임재한 때가 베드로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다. 그러나 10:34-44에 따르면
베드로의 설교가 한참 진행된 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났을 때쯤이라고 언급된다
(10:44 주석 참조).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의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1) 혹자는 본문의 강조점이, 예
기치 않게 갑자기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Haenchen).
따라서 본문에서는 성령이 임한 시점이 언제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2)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이미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날쯤에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고넬료의 집에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
의 설교 전체를 성령이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도 시
종일관 주장하셨음을 가리킨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했던 말이 다시 반복되지
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처음'(* , 엔 아르케)이라는 단어를 첨가시키
고 있다. 즉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을 체험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
=====11:16
주의 말씀에 세례 받으리라 – 이 말은 10:47,48에서 베드로가 자신있게 이방인에
대한 세례 선언을 하게 된 숨겨진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기억해낸 주의 말
씀은 1:5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자기 및 다른
형제들과 이방인의 성령 체험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로써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사실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성령 세례가 기독교
인 됨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는 보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11:17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은 선물 –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
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방인들도 사도된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동등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
분하지 않고 하나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 하셨던 기도의 성취
로도 이해된다(요 17:22).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본문은 10:47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말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용납하고 세례를 베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 한 형제됨을 인정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또
한 베드로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따름을 암시한다(5:29). 이러한 베드로의
선교 자세는 바울과 일치한다(갈 1:10).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표현은 베드로에게 비난섞인 공격을 하였던 자
들이 베드로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
의 설명이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간접 묘사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베드로에게 도전해 왔던 할례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표현은 베드로가 계속하여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에
대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돝사조'(* )는 일반적으로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
되지만 `찬양하다’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
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베드로가 언급했을 법한 결론적 이야기
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의
미에 대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이 반대자들이었던 할례자들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온
이견들이 통합되어 이방인 선교가 확실한 권위와 보증을 받게 되었다.
=====11:19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멘 운'(* )을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
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때’로 번역될 경우 어떤 사건의 시점을 의미하므로 18절에
서 언급된 사건과 시간적 연관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장을 접속하거나 이
야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멘'(* )은 반의적
(反意的) 의미를 연결하는 상관 접속사로서 `그러나’ 또는 `한편’ 등의 뜻을 갖고 있
다. 그리고 `운'(* )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미나 사건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그래서’ 또는 `결국’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때
에 따라서 `그러나’와 같은 반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의 접속사는 앞
의 사건과 시간적 연결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이해하여
야 한다. 여기서는 `한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 본 구절은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촉
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 후(7:54, 60)
교회에 닥친 박해(8:1-4)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이 나타나 있다. 박해의 범위가 타 지역(이방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킨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
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한다.
베니게 –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갈멜산과 레바논산 사이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
수는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
쳐준 바 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브로 –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
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
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다.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13:4-12).
안디옥-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
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
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
‘(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
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
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
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
(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이그나타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본문의 의도는 1-3
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지금까지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11: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 구브로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B.C.7세기경 설립되었으며 헬라 문화권에 속
한 지역이다. 또한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
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배타적(排他的) 우
월 의식을 버렸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헬라인에게도 – 이 말은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에게만’이라는 단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헬라인’을
뜻하는 헬라어 `헬레나스’ 대신 `헬라파’라는 의미의 `헬레니스타스'(*
)로 표현된 사본들이 있어(B, E, H, L, P)논란이 되고 있다. 즉 `헬레니스타스’라고
할 경우에는 `헬라화된 유대인’ 또는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
기 때문에(6:1)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사본을 선택하
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헬레나스'(*
)를 본문으로 인정한다(Alford, Chrysostom, Knowling, Bruce, Vincent).왜냐하면 헬
라파 유대인은 19절의 `유대인’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
인을 굳이 `헬라인’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헬라파로 구분할 때에는
`히브리파’와 대립하여 사용되는데(6:1) 여기서는 `유대인’과 (19절) 대립되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에 `헬라인’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헬레니스타스’라고 언급한 사본들은 19절과의 대립적 묘사를 피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가 바울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방 선교에 대
한 바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Haenchen).
주 예수를 전파하니 –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 내용은 예수가 `주님’임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다는 의미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구약적 표현
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삼하 3:12). 누가는 이같은 구약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의 이
방 선교 활동이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본서의 일관된 내용이기도 하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음을
표현하는 이 어투는 누가의 독특한 수사법이다(Haenchen).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왔다’는 표현은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세례를 베풀
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직 교회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세례는 시행
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1:22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8:14과 비슷한 이야기로 지방 교회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서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던 대표는 요한과 베드로였으나 여기서
는 바나바가 파견된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
를 잘하여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36). 그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
으며(4:37)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장본인으로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기도 하다(13:1). 또한 아디옥 교회가 확장되자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 가르치게 하였으며(11:26) 바울의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돕기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여 바울을 능가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흔적이 있다
(13:2;15:12)에서는 바울 이름보다 바나바 이름이 먼저 언급됨). 그는 마가를 선교 여
행에 동행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바울이 반대하므로 바울과 결별을 하게 된다
(15:36-39). 이처럼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었던 인물임에 틀
림없다. 안디옥에 바나바가 파송된 것에 대해 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베드로처럼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어 예루살렘에 부재(不在)중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
(Lenski). 그러나 헨헨(Hasnchen)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합법화할 수 있는 전권을 행사했다고 본다. 바나바를 예루
살렘 교회에서 파송했다면 그를 파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부
재중이었을 거라는 전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사람이고, 고향 사람들이 안디옥에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할 때 그곳에 파송받
는 데는 적격자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는 지방 교회를 공인하고 합법화하
는 권한을 지닌 교회임을 여기서는 암시해 주고 있다(8:14 주석 참조).
=====11: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
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
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
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
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
다는 뜻이다.
굳은 마음으로 –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한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 )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
는 것을 뜻하며(마 12:4;막 2:26;눅 6:4;히 9:2)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
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
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11:24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에 대한 누가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나바가 선언한 23절의 내용을 정당화하고 보증(保證)하기 위한 묘사라
고 할 수 있다. 즉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을 인정한 것이 정당한 것임
을 보증하고 나아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이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쇼회
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이에’라는 말은 헬라어 접속사 `호티'(*
)를 번역한 말인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원문에서 이 접속사는 본래 본절의
처음에 나와서 큰 무리가 주께 더 나오는 까닭을 말해주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따라
서 본절 전체를 직역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가 된다.
=====11:25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
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17-21).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
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Haenchen, Ramsay). 왜
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갈 2:1)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26절),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
문이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
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
해 부름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바나
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11:26
일 년간 모여 있어 –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
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제자들이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의 하나이며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 혹
자는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과 그 성격은 비유대적인 것으로서 유대적 기독교와는 구별
되는 이방적 기독교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Bickermann). 왜냐하
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붙여졌다는 점에서 유대 기도
교와는 구준되는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안디
옥의 50만 인구 중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 중에 유대
인들이 포함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에릭 피터슨(Erik Peterson)은 로마 당국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서
유대교 안의 반정부적인 정치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가 당
시 친로마적이고 로마 정부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본서를 기록했다는 개론적(槪論的)
이해와 모순되기 때문에 피터슨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Haenchen).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벧전 4:16)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기 불명예스
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
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
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
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즌받게 될 수 있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
헤롯당’, 막 3:6)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
연한 칭호였다(11:19-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참조).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
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유대
교와 완전히 구분된 종파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1)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와
같은 합법적 종교가 아니라 신흥 종교(新興宗敎)로 구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
다.(2) 구약성경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즉 구약 시대의 구원사를 이해하는 데 유
대교와 무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
고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있게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Haenchen).
이런 점에서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sect)로 이해했다.
=====11:27
그 때에 – 앞에서 언급한 바나바와 사울의 활동 기간을(일 년) 지시하는 것으로 보
인다. 이때의 황제는 글라우지오로 그는 A.D.41-5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
에 대한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 내에 심한 기근이 여러 번 있었
다고 전해진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시에도 글라우디오가 아직 황제로 있었으며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A.D.50-52년 사이에 이루어
졌다(18:1,2). 그리고 12장에 언급된 헤롯이 죽은 시기는 A.D.44년 경이다. 만약 본서
가 연대적인 순서를 철저히 따른 기록이라면 본 구절의 `그 때’는 A.D.44년을 넘지 않
는다. 특히 12:25에서 언급된 대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
으로 돌아온 시점과 헤롯의 사망 시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절은 A.D.44년경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흉년 이전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
선지자들(* , 프로페타이) – 본서와 바울 서신에만 언급
되고 있는(13:1;15:32;21:9,10;롬 12:6;고전 12:10;13:2,8;14:6;살전 5:20) 이들은 초
대 기독교에서 영감있는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성경에 관해 가르치고 예언의 은사
를 받아 예언을 하기도 하며(롬 12:6;고전 12:10) 사도 다음으로 중요한 직분으로 인
정받았다(고전 12:28;엡 2:20;4:11).
예루살렘 이르니 –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
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28절에서 예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흉년에 대한 예언을 전
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흉년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
에 있었던 헤롯의 박해(12:1)를 피해 이 곳을 찾았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11:28
아가보 –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아가보는 유대 출신 기독교
인으로 보인다. 그는 두 가지를 예언한 것으로 본서에서 언급되는데 본문 외에 21:10,
11에서 사울의 투옥에 관하여 예언하였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성취되었다.
성령으로 말하되 – `말하되’로 번역된 `세마이노'(* )는 `표시
하다’,`지시하다’,`알리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신탁(信託)을 전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동사의 명사형 `세메이온'(* )은 요한
복음에서 `표적’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세마이노’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을 나타냄을 암시한다.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 이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 당시 개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전승은 있으나 세계 전역은 아니었다. 특히 46-48년 사이에는 팔레스틴에 큰
기근이 있었지만 역시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Haenchen). 누가는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지역을 `천하’라고 했다. 특히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한 점으로 비추어 보아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극
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본절의 흉년은 A.D.46-48년 사이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큰 흉년을 지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흉년은 A.D.46년 이전과 관련된 기록이
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글라우디오(Claudius) –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12:1)의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으나 말년에 가서는 유대
인들의 종교 집회를 금지아였을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기도 했다
(18:2). 그리고 그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棄却)시켰다(18:12). 또한 그
는 황제 예배를 강요한 대표적인 로마 황제로 알려졌다. 그는 조모를 여신으로, 조부
를 신으로 모시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게 하여 유
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11:29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 유대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기근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부조(扶助)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 )는 본
래 `봉사’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구제 헌금’의 의미로 예루살렘에서 기근으
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을 위
해 헌금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롬 15:26)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 즉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이방 교
회와 유대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F.F.Bruce). 이방 교회 역시
독립된 교회로서의 위치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와 동일한 기독교 공동체로서
인정된 것이다. 이제는 유대와 이방인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와 성(聖)과 속
(俗)으로 구분짓는 배타적 분리주의도 없어졌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11:30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대
표로 사울과 바나바가 언급된다. `손으로’라는 말은 `통해’라는 단순한 의미로 70인역
에 자주 사용되었다(Haenchen).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단순히 전달된 사실을 강조하기
보다 오히려 전달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강조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을 바나바와 사
울에 두었다. 이는 이방 교회의 대표로서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들인
다면 곧 이방 쇼회가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공인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는 헌금의 수령자(受領者)가 장로로
언급됨으로써 처음으로 신약적인 의미의 장로라는 직분이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에
게 있어서 장로란 생소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장로와 신약 시대의 장로
는 차이점이 있다. 구약 시대의 `장로’는 성읍의 정신적, 행정적 지도자로서 백성들간
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하여 공의를 확립하였다. 이 외에도 장로는 사회
기강을 확립하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
했으며 간혹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수 8:10;삼상 4:3). 이에 대해 자세
한 것은 신 21:1-6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신약 시대에는 `장
로’가 목회 임무를 수행하며(벧전 5:1-4;약 5:14)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도 행했다. 일
반적으로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 그 교회의 대표자로 `장로’를 세웠다. 그런데 `
장로’란 말이 간혹 사도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했다(벧전 5:1;요이 1절; 요삼 1절). 그
리고 이 직분은 초대 교회 당시 `감독’의 직분과 별 구분이 없었으나 후에 이그나티우
스(Ignatius)에 의해 장로직과 감독직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장로직’에 대한 자세
한 내용은 6:1-6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아무튼 본절에 언급된 `장로’
가 사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6장에서 언급된 일곱 집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누가는 본서에서 사도들을 장로로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
아 장로와 사도가 동일시 될 수 없다. 누가는 구제를 위해 선출된 집사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헬라어 사도행전 1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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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산 데 호이 아포스톨로이 카이 호이 아델포이 호이 온테스 카타 텐 유다이안 호티 카이 타 에드네 에뎈산토 톤 로곤 투 데우
개역개정,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새번역,1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어NIV,1 The apostles and the brothers throughout Judea heard that the Gentiles also had received the word of God.
영어NASB,1 Now the apostles and the brethren who were throughout Judea heard that the Gentiles also had received the word of God.
영어MSG,1 The news traveled fast and in no time the leaders and friends back in Jerusalem heard about it–heard that the non-Jewish “outsiders” were now “in.”
영어NRSV,1 Now the apostles and the believers who were in Judea heard that the Gentiles had also accepted the word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 ηκουσαν δε οι αποστολοι και οι αδελφοι οι οντες κατα την ιουδαιαν οτι και τα εθνη εδεξαντο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1 audierunt autem apostoli et fratres qui erant in Iudaea quoniam et gentes receperunt verbum Dei
히브리어Modern,1 וישמעו השליחים והאחים אשר ביהודה כי קבלו גם הגוים את דבר האלהים׃
성 경: [행11: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사도들과 형제들이 – 이방인 선교에 대한 초대 교회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 사도들과 형제들이 언급되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방인 선교에 관한 논쟁이 매우 심각하게 논의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사도들’은 12사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형제들’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을 뜻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법 중 하나이다. 누가는 이 형제들을 `도를 좇는 사람'(9:2), `주의 성도'(9:13) `성도'(9:32,41)라고 다양하게 묘사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 `말씀을 받았다’란 말은 로넬료의 성령 체험 사건(10:44-46)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당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점에서(10:48)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고넬료에 관한 소문이 예루살렘까지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절은 이방인 선교에 관한 정당성을 강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시작되는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호테 데 아네베 페트로스 에이스 예루살렘 디에크리논토 프로스 아우톤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
개역개정,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새번역,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우리말성경,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를 비난하며
가톨릭성경,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영어NIV,2 So when Peter went up to Jerusalem, the circumcised believers criticized him
영어NASB,2 And when Peter came up to Jerusalem, those who were circumcised took issue with him,
영어MSG,2 When Peter got back to Jerusalem, some of his old associates, concerned about circumcision, called him on the carpet:
영어NRSV,2 So when Peter went up to Jerusalem, the circumcised believers criticiz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οτε ανεβη πετρος εις ιεροσολυμα διεκρινοντο προς αυτον οι εκ περιτομης
라틴어Vulgate,2 cum ascendisset autem Petrus in Hierosolymam disceptabant adversus illum qui erant ex circumcisione
히브리어Modern,2 ויהי כאשר עלה פטרוס ירושלים ויריבו עמו בני המילה לאמר׃
성 경: [행11: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할례자들이 – 이방인 선교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로서 `할례자’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할례받은 사람들'(*, 호이 에크 페리토메스)로서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은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에 대하여 상당한 우월 의식을 갖고 있음은 무할례자에 대한 그들의 노골적 편견에서 잘 입증된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으로서 모두 할례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여기서는 막연하게 유대 기독교인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특별히 할례를 강조하거나 유대적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자들(15:5)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우월감이 잔존하여 공동체 안에서 갈등적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힐난하여 –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던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할례자들은 단순히 문제점을 제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단죄(斷罪)하여 비난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힐난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크리노'(*)가 단순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집요하게 따지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레곤테스 호티 에이셀데스 프로스 안드라스 아크로뷔스티안 에콘타스 카이 쉬네파게스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새번역,3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우리말성경,3 “당신이 어떻게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가톨릭성경,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3 and said, “You went into the house of uncircumcised men and ate with them.”
영어NASB,3 saying, “You went to uncircumcised men and ate with them.”
영어MSG,3 “What do you think you’re doing rubbing shoulders with that crowd, eating what is prohibited and ruining our good name?”
영어NRSV,3 saying, “Why did you go to uncircumcised men and eat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 λεγοντες οτι προς ανδρας ακροβυστιαν εχοντας εισηλθες και συνεφαγες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 dicentes quare introisti ad viros praeputium habentes et manducasti cum illis
히브리어Modern,3 אל אנשים אשר להם ערלה באת ותאכל אתם לחם׃
성 경: [행11:3]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할례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방인으로 언급되는 무할례자와의 식사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머무는 동안의 행적이 10장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베드로가 실제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할례자들의 힐란에 대해 직접 베드로가 변명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넬료의 집에 며칠 머물면서 함께 식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할례자들이 무할례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만을 이유로 베드로를 힐난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본절 이후 계속된 베드로의 변론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사실에 대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릌사메노스 데 페트로스 엨세티데토 아우토이스 카뎈세스 레곤
개역개정,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새번역,4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우리말성경,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그 일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영어NIV,4 Peter began and explained everything to them precisely as it had happened:
영어NASB,4 But Peter began speaking and proceeded to explain to them in orderly sequence, saying,
영어MSG,4 So Peter, starting from the beginning, laid it out for them step-by-step:
영어NRSV,4 Then Peter began to explain it to them, step by step,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ρξαμενος δε ο πετρος εξετιθετο αυτοις καθεξης λεγων
라틴어Vulgate,4 incipiens autem Petrus exponebat illis ordinem dicens
히브리어Modern,4 ויחל פטרוס ויספר להם את כל אשר קרהו לאמר׃
성 경: [행11: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비난하여 문제를 제기해 오는 할례자들을 대하는 베드로의 자세는 매우 장중(莊重)하고 권위있는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Haenchen). 특히 본 구절에서 사용된 `설명하여’라는 단어 `여세티데토'(*)는 `선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크티데미'(*)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어떤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분명하게 밝혀 선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의지가 암시되어 있다(A.T.Robertson).
에고 에멘 엔 폴레이 옾페 프로슈코메노스 카이 에이돈 엔 엨스타세이 호라마 카타바이논 스큐오스 티 호스 오도넨 메갈렌 테싸르신 아르카이스 카디에메넨 에크 투 우라누 카이 엘덴 마크리 에무
개역개정,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새번역,5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나는 황홀경 가운데서 환상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려서 하늘에서 드리워져 내려서 내 앞에까지 왔습니다.
우리말성경,5 “내가 욥바에서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게 네 귀퉁이가 묶인 채로 내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톨릭성경,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5 “I was in the city of Joppa praying, and in a trance I saw a vision. I saw something like a large sheet being let down from heaven by its four corners, and it came down to where I was.
영어NASB,5 “I was in the city of Joppa praying; and in a trance I saw a vision, a certain object coming down like a great sheet lowered by four corners from the sky; and it came right down to me,
영어MSG,5 “Recently I was in the town of Joppa praying. I fell into a trance and saw a vision: Something like a huge blanket, lowered by ropes at its four corners, came down out of heaven and settled on the ground in front of me.
영어NRSV,5 “I was in the city of Joppa praying, and in a trance I saw a vision. There was something like a large sheet coming down from heaven, being lowered by its four corners; and it came close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γω ημην εν πολει ιοππη προσευχομενος και ειδον εν εκστασει οραμα καταβαινον σκευος τι ως οθονην μεγαλην τεσσαρσιν αρχαις καθιεμενην εκ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ηλθεν αχρις εμου
라틴어Vulgate,5 ego eram in civitate Ioppe orans et vidi in excessu mentis visionem descendens vas quoddam velut linteum magnum quattuor initiis submitti de caelo et venit usque ad me
히브리어Modern,5 מתפלל הייתי בעיר יפו וארדם וארא מראה והנה כלי כדמות מטפחת בד גדולה יורד מן השמים ותורד בארבע כנפותיה ותבא עדי׃
성 경: [행11: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내 앞까지 드리우거늘 – 10:11에서는 `땅에 드리웠더라’로 묘사되어 있다. 두 표현 다 내용물을 베드로가 볼 수 있게 광주리가 드리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가지 표현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에이스 헨 아테니사스 카테노운 카이 에이돈 타 테트라포다 테스 게스 카이 타 데리아 카이 타 헤르페타 카이 타 페테이나 투 우라누
개역개정,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새번역,6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땅 위의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말성경,6 내가 그 안을 들여다보니 네 발 달린 땅의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영어NIV,6 I looked into it and saw four-footed animals of the earth, wild beasts, reptiles, and birds of the air.
영어NASB,6 and when I had fixed my gaze upon it and was observing it I saw the four-footed animals of the earth and the wild beasts and the crawling creatures and the birds of the air.
영어MSG,6 Milling around on the blanket were farm animals, wild animals, reptiles, birds–you name it, it was there. Fascinated, I took it all in.
영어NRSV,6 As I looked at it closely I saw four-footed animals, beasts of prey, reptiles, and birds of the air.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ις ην ατενισας κατενοουν και ειδον τα τετραποδα της γης και τα θηρια και τα ερπετα και τα πετεινα του ουρανου
라틴어Vulgate,6 in quod intuens considerabam et vidi quadrupedia terrae et bestias et reptilia et volatilia caeli
히브리어Modern,6 והסתכלתי בה ואבין וארא את בהמת הארץ ואת החיה ורמש האדמה ועוף השמים׃
성 경: [행11: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들짐승 – `네 발 가진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묘사인 것 같다.
에쿠사 데 카이 포네스 레구세스 모이 아나스타스 페트레 뒤손 카이 파게
개역개정,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새번역,7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우리말성경,7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소리가 내게 들렸습니다.
가톨릭성경,7 그때에 ‘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어NIV,7 Then I heard a voice telling me, ‘Get up, Peter. Kill and eat.’
영어NASB,7 “And I also heard a voice saying to me, ‘Arise, Peter; kill and eat.’
영어MSG,7 “Then I heard a voice: ‘Go to it, Peter–kill and eat.’
영어NRSV,7 I also heard a voice saying to me, ‘Get up, Peter; kill and eat.’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κουσα δε φωνης λεγουσης μοι αναστας πετρε θυσον και φαγε
라틴어Vulgate,7 audivi autem et vocem dicentem mihi surgens Petre occide et manduca
히브리어Modern,7 ואשמע גם קול האמר אלי קום פטרוס זבח ואכל׃
성 경: [행11: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내게 이르되 – 10:13에서 이 구절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본 구절이 베드로의 직접적인 진술인 반면 10:13은 누가의 간접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에이폰 데 메다모스 퀴리에 호티 코이논 에 아카다르톤 우데포테 에이셀덴 에이스 토 스토마 무
개역개정,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새번역,8 그래서 나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8 그러나 나는 ‘말도 안 됩니다. 주님, 불결하거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나는 ‘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영어NIV,8 “I replied, ‘Surely not, Lord! Nothing impure or unclean has ever entered my mouth.’
영어NASB,8 “But I said, ‘By no means, Lord, for nothing unholy or unclean has ever entered my mouth.’
영어MSG,8 I said, ‘Oh, no, Master. I’ve never so much as tasted food that wasn’t kosher.’
영어NRSV,8 But I replied, ‘By no means, Lord; for nothing profane or unclean has ever entered my mouth.’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πον δε μηδαμως κυριε οτι παν κοινον η ακαθαρτον ουδεποτε εισηλθεν εις το στομα μου
라틴어Vulgate,8 dixi autem nequaquam Domine quia commune aut inmundum numquam introivit in os meum
히브리어Modern,8 ואמר חלילה לי אדני כי כל פגול וטמא לא בא בפי מעולם׃
성 경: [행11: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10:14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니다’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페크리데 데 포네 에크 듀테루 에크 투 우라누 하 호 데오스 에카다리센 쉬 메 코이누
개역개정,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새번역,9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런데 하늘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불결하다고 하지 마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영어NIV,9 “The voice spoke from heaven a second time, ‘Do not call anything impure that God has made clean.’
영어NASB,9 “But a voice from heaven answered a second time, ‘What God has cleansed, no longer consider unholy.’
영어MSG,9 The voice spoke again: ‘If God says it’s okay, it’s okay.’
영어NRSV,9 But a second time the voice answered from heaven, ‘What God has made clean, you must not call profane.’
헬라어신약Stephanos,9 απεκριθη δε μοι φωνη εκ δευτερου εκ του ουρανου α ο θεος εκαθαρισεν συ μη κοινου
라틴어Vulgate,9 respondit autem vox secundo de caelo quae Deus mundavit tu ne commune dixeris
히브리어Modern,9 ויענני הקול שנית מן השמים ויאמר את אשר טהר האלהים אתה אל תטמאנו׃
성 경: [행11: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하늘로부터 내게 대답하되 – 10:15에서 이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명해 주며 동시에 그 응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투토 데 에게네토 에피 트리스 카이 아네스파스데 팔린 하판타 에이스 톤 우라논
개역개정,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새번역,10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 모든 것은 다시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우리말성경,10 이런 일이 세 번 일어난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영어NIV,10 This happened three times, and then it was all pulled up to heaven again.
영어NASB,10 “And this happened three times, and everything was drawn back up into the sky.
영어MSG,10 This happened three times, and then the blanket was pulled back up into the sky.
영어NRSV,10 This happened three times; then everything was pulled up again to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τουτο δε εγενετο επι τρις και παλιν ανεσπασθη απαντα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라틴어Vulgate,10 hoc autem factum est per ter et recepta sunt rursum omnia in caelum
히브리어Modern,10 וכן היה שלש פעמים והכל שב והעלה השמימה׃
카이 이두 엨사우테스 트레이스 안드레스 에페스테산 에피 텐 오이키안 엔 헤 에멘 아페스탈메노이 아포 카이사레이아스 프로스 메
개역개정,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새번역,11 바로 그 때에 사람들 셋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내게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1 바로 그때 가이사랴에서 나를 부르러 온 세 사람이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찾아왔습니다.
가톨릭성경,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영어NIV,11 “Right then three men who had been sent to me from Caesarea stopped at the house where I was staying.
영어NASB,11 “And behold, at that moment three men appeared before the house in which we were staying, having been sent to me from Caesarea.
영어MSG,11 “Just then three men showed up at the house where I was staying, sent from Caesarea to get me.
영어NRSV,11 At that very moment three men, sent to me from Caesarea, arrived at the house where we wer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ιδου εξαυτης τρεις ανδρες επεστησαν επι την οικιαν εν η ημην απεσταλμενοι απο καισαρειας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11 et ecce confestim tres viri adstiterunt in domo in qua eram missi a Caesarea ad me
히브리어Modern,11 והנה כרגע שלשה אנשים עמדים על פתח הבית אשר אנכי שם והמה שלוחים אלי מקסרין׃
성 경: [행11:1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세 사람이 – 10:19에서 고넬료가 욥 바로 보낸 사람이 두명으로 진술되어 있으므로 본절과 숫자상의 모순이 발생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계수(計數)할 때 여자나 어린아이, 시종(노예 포함)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두 구절을 종합해 볼 때 두 사람을 수행하기 위해 시종도 함께 왔음을 알 수 있다(10:7).
에이펜 데 토 프뉴마 모이 쉬넬데인 아우토이스 메덴 디아크리난타 엘돈 데 쉰 에모이 카이 호이 엨스 아델포이 후토이 카이 에이셀도멘 에이스 톤 후토이 투 안드로스
개역개정,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새번역,12 성령이 내게,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우리는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 ㉡또는 ‘주저하지 말고’ 또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구별을 하지 말고’
우리말성경,12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가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이 여섯 명의 형제들도 나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영어NIV,12 The Spirit told me to have no hesitation about going with them. These six brothers also went with me, and we entered the man’s house.
영어NASB,12 “And the Spirit told me to go with them without misgivings. And these six brethren also went with me, and we entered the man’s house.
영어MSG,12 The Spirit told me to go with them, no questions asked. So I went with them, I and six friends, to the man who had sent for me.
영어NRSV,12 The Spirit told me to go with them and not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m and us. These six brothers also accompanied me, and we entered the man’s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ειπεν δε μοι το πνευμα συνελθειν αυτοις μηδεν διακρινομενον ηλθον δε συν εμοι και οι εξ αδελφοι ουτοι και εισηλθομεν εις τον οικον του ανδρος
라틴어Vulgate,12 dixit autem Spiritus mihi ut irem cum illis nihil haesitans venerunt autem mecum et sex fratres isti et ingressi sumus in domum viri
히브리어Modern,12 ויאמר אלי הרוח ללכת אתם ולבלתי התמהמה וילכו אתי גם ששת האחים האלה ונבוא אל בית האיש׃
성 경: [행11:1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이 여섯 형제 – 10:23에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형제는 두어 명이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베드로와 동행한 욥바의 두어 형제를 합치면 모두 여섯 명 정도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1절) 자기와 동행했던 사람 모두 데리고 갔던 것이 분명하다.
아펭게일렌 데 헤민 포스 에이덴 톤 앙겔론 엔 토 오이코 아우투 스타덴타 카이 에이폰타 아포스테일론 에이스 욮펜 카이 메타펨프사이 시모나 톤 에피칼루메논 페트론
개역개정,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새번역,13 그 사람은, 자기가 천사를 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습니다. 곧 천사가 그의 집에 와서 서더니, 그에게 말하기를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불러오너라.
우리말성경,13 고넬료는 자기 집에 천사가 나타나서 ‘욥바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찾아라.
가톨릭성경,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영어NIV,13 He told us how he had seen an angel appear in his house and say, ‘Send to Joppa for Simon who is called Peter.
영어NASB,13 “And he reported to us how he had seen the angel standing in his house, and saying, ‘Send to Joppa, and have Simon, who is also called Peter, brought here;
영어MSG,13 He told us how he had seen an angel right in his own house, real as his next-door neighbor, saying, ‘Send to Joppa and get Simon, the one they call Peter.
영어NRSV,13 He told us how he had seen the angel standing in his house and saying, ‘Send to Joppa and bring Simon, who is called Peter;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πηγγειλεν τε ημιν πως ειδεν τον αγγελον εν τω οικω αυτου σταθεντα και ειποντα αυτω αποστειλον εις ιοππην ανδρας και μεταπεμψαι σιμωνα τον επικαλουμενον πετρον
라틴어Vulgate,13 narravit autem nobis quomodo vidisset angelum in domo sua stantem et dicentem sibi mitte in Ioppen et accersi Simonem qui cognominatur Petrus
히브리어Modern,13 ויגד לנו את אשר ראה המלאך נצב בביתו ואמר אליו שלח אל יפו אנשים וקרא אליך את שמעון המכנה פטרוס׃
호스 랄레세이 레마타 프로스 세 엔 호이스 소데세 쉬 카이 파스 호 오이코스 수
개역개정,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새번역,14 그가 네게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말씀을 일러줄 것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을 구원할 말씀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14 He will bring you a message through which you and all your household will be saved.’
영어NASB,14 and he shall speak words to you by which you will be saved, you and all your household. ‘
영어MSG,14 He’ll tell you something that will save your life–in fact, you and everyone you care for.’
영어NRSV,14 he will give you a message by which you and your entire household wi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ς λαλησει ρηματα προς σε εν οις σωθηση συ και πας ο οικος σου
라틴어Vulgate,14 qui loquetur tibi verba in quibus salvus eris tu et universa domus tua
히브리어Modern,14 והוא ידבר אליך דברים אשר תושע בהם אתה וכל ביתך׃
성 경: [행11:1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그가 너와 온 집의 네게 이르리라 – 10장에서 이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천사에 의해 고넬료에게 주어진 내용을 요약하여 보다 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0장 가운데서는 생략되었으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로부터 들은 보다 자세한 이야기 중에 본 구절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엔 데 토 아릌사스다이 메 랄레인 에페페센 토 프뉴마 토 하기온 엪 아우투스 호스페르 카이 에프 헤마스 엔 아르케
개역개정,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새번역,15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우리말성경,15 내가 말을 시작하자 성령이 처음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려오셨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영어NIV,15 “As I began to speak, the Holy Spirit came on them as he had come on us at the beginning.
영어NASB,15 “And as I began to speak, the Holy Spirit fell upon them, just as He did upon us at the beginning.
영어MSG,15 “So I started in, talking. Before I’d spoken half a dozen sentences, the Holy Spirit fell on them just as he did on us the first time.
영어NRSV,15 And as I began to speak, the Holy Spirit fell upon them just as it had upon us at the beginning.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ν δε τω αρξασθαι με λαλειν επεπεσεν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ον επ αυτους ωσπερ και εφ ημας εν αρχη
라틴어Vulgate,15 cum autem coepissem loqui decidit Spiritus Sanctus super eos sicut et in nos in initio
히브리어Modern,15 וכאשר החלותי לדבר צלחה עליהם רוח הקדש כאשר צלחה עלינו בתחלה׃
성 경: [행11:1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내가 말을 시작할 때 –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재한 때가 베드로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다. 그러나 10:34-44에 따르면 베드로의 설교가 한참 진행된 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났을 때쯤이라고 언급된다(10:44 주석 참조).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의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1) 혹자는 본문의 강조점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나타난 성령 강림 현상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Haenchen). 따라서 본문에서는 성령이 임한 시점이 언제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2)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 이미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해서 설교가 끝날쯤에 오순절에 임했던 것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고넬료의 집에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는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성령이 주장하셨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듣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도 시종일관 주장하셨음을 가리킨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했던 말이 다시 반복되지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처음'(*, 엔 아르케)이라는 단어를 첨가시키고 있다. 즉 베드로와 사도들이 오순절(五旬節) 성령 강림을 체험했을 때를 가리키고 있다.
엠네스덴 데 투 레마토스 투 퀴리우 호스 엘레겐 요안네스 멘 에밮티센 휘다티 휘메이스 데 밮티스데세스데 엔 프뉴마티 하기오
개역개정,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새번역,16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6 그때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때에 나는 ‘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영어NIV,16 Then I remembered what the Lord had said: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NASB,16 “And I remembered the word of the Lord, how He used to say,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you sha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MSG,16 I remembered Jesus’ words: ‘John baptized with water;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NRSV,16 And I remembered the word of the Lord, how he had said,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μνησθην δε του ρηματος κυριου ως ελεγεν ιωαννης μεν εβαπτισεν υδατι υμεις δε βαπτισθησεσθε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라틴어Vulgate,16 recordatus sum autem verbi Domini sicut dicebat Iohannes quidem baptizavit aqua vos autem baptizabimini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16 ואזכר את דבר האדון אשר אמר יוחנן הטביל במים ואתם תטבלו ברוח הקדש׃
성 경: [행11:1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주의 말씀에 세례 받으리라 – 이 말은 10:47,48에서 베드로가 자신있게 이방인에 대한 세례 선언을 하게 된 숨겨진 배경을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가 기억해낸 주의 말씀은 1:5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자기 및 다른 형제들과 이방인의 성령 체험을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예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로써 베드로 자신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 사실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10:47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성령 세례가 기독교인 됨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권위있는 보증임을 말해주고 있다.
에이 운 텐 이센 도레안 에도켄 아우토이스 호 데오스 호스 카이 헤민 피스튜사신 에피 톤 퀴리온 예순 크리스톤 에고 티스 에멘 뒤나토스 콜뤼사이 톤 데온
개역개정,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새번역,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7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라고 감히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영어NIV,17 So if God gave them the same gift as he gave us, who believed in the Lord Jesus Christ, who was I to think that I could oppose God?”
영어NASB,17 “If God therefore gave to them the same gift as He gave to us also after believing in the Lord Jesus Christ, who was I that I could stand in God’s way?”
영어MSG,17 So I ask you: If God gave the same exact gift to them as to us when we believed in the Master Jesus Christ, how could I object to God?”
영어NRSV,17 If then God gave them the same gift that he gave us when we believed in the Lord Jesus Christ, who was I that I could hinder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 ουν την ισην δωρεαν εδωκεν αυτοις ο θεος ως και ημιν πιστευσασιν επ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εγω δε τις ημην δυνατος κωλυσαι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17 si ergo eandem gratiam dedit illis Deus sicut et nobis qui credidimus in Dominum Iesum Christum ego quis eram qui possem prohibere Deum
히브리어Modern,17 ועתה אם מתנה אחת נתן האלהים להם ולנו המאמינים באדון ישוע המשיח מי אנכי כי אעצר לאלהים׃
성 경: [행11:1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하나님이 주신 것과 같은 선물 –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해하면서 이방인들도 사도된 자신들이 받았던 것과 동등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체포되시기 전 하셨던 기도의 성취로도 이해된다(요 17:22).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본문은 10:47에서 언급한 베드로의 말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기독교인으로 용납하고 세례를 베풀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형제됨을 인정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 자신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따름을 암시한다(5:29). 이러한 베드로의 선교 자세는 바울과 일치한다(갈 1:10).
아쿠산테스 데 타우타 헤쉬카산 카이 에돜사산 톤 데온 레곤테스 아라 카이 토이스 에드네신 호 데오스 텐 메타노이안 에이스 조엔 에도켄
개역개정,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새번역,1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 것이로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영어NIV,18 When they heard this, they had no further objections and praised God, saying, “So then, God has granted even the Gentiles repentance unto life.”
영어NASB,18 And when they heard this, they quieted down, and glorified God, saying, “Well then, God has granted to the Gentiles also the repentance that leads to life.”
영어MSG,18 Hearing it all laid out like that, they quieted down. And then, as it sank in, they started praising God. “It’s really happened! God has broken through to the other nations, opened them up to Life!”
영어NRSV,18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silenced. And they praised God, saying, “Then God has given even to the Gentiles the repentance that leads to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κουσαντες δε ταυτα ησυχασαν και εδοξαζον τον θεον λεγοντες αραγε και τοις εθνεσιν ο θεος την μετανοιαν εδωκεν εις ζωην
라틴어Vulgate,18 his auditis tacuerunt et glorificaverunt Deum dicentes ergo et gentibus Deus paenitentiam ad vitam dedit
히브리어Modern,18 ויהי כשמעם זאת ויחרישו ויהללו את האלהים ויאמרו אכן גם לגוים נתן האלהים התשובה לחיים׃
성 경: [행11:1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베드로의 변론]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 이 표현은 베드로에게 비난섞인 공격을 하였던 자들이 베드로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베드로의 설명이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간접 묘사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베드로에게 도전해 왔던 할례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표현은 베드로가 계속하여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에 대한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행위이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돝사조'(*)는 일반적으로 `영광을 돌리다’로 번역되지만 `찬양하다’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감격으로 다가왔기에 기쁨으로 그 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베드로가 언급했을 법한 결론적 이야기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에 대해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이방인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음이 반대자들이었던 할례자들에 의해 선언됨으로써 초대 교회 안에 있어온 이견들이 통합되어 이방인 선교가 확실한 권위와 보증을 받게 되었다.
호이 멘 운 디아스파렌테스 아포 테스 들맆세오스 테스 게노메네스 에피 스테파노 디엘돈 헤오스 포이니케스 카이 퀴프루 카이 안티오케이아스 메데니 랄룬테스 톤 로곤 에이 메 모논 유다이오이스
개역개정,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새번역,19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우리말성경,19 그 무렵 스데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아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고 안디옥까지 건너가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영어NIV,19 Now those who had been scattered by the persecution in connection with Stephen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telling the message only to Jews.
영어NASB,19 So then those who were scattered because of the persecution that arose in connection with Stephen made their way to Phoenicia and Cyprus and Antioch, speaking the word to no one except to Jews alone.
영어MSG,19 Those who had been scattered by the persecution triggered by Stephen’s death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but they were still only speaking and dealing with their fellow Jews.
영어NRSV,19 Now those who were scattered because of the persecution that took place over Stephen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and they spoke the word to no one except Jew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ι μεν ουν διασπαρεντες απο της θλιψεως της γενομενης επι στεφανω διηλθον εως φοινικης και κυπρου και αντιοχειας μηδενι λαλουντες τον λογον ει μη μονον ιουδαιοις
라틴어Vulgate,19 et illi quidem qui dispersi fuerant a tribulatione quae facta fuerat sub Stephano perambulaverunt usque Foenicen et Cyprum et Antiochiam nemini loquentes verbum nisi solis Iudaeis
히브리어Modern,19 והנפוצים מפני הצרה אשר היתה על אודת אסטפנוס הלכו ובאו עד פינוקיא וקפרוס ואנטיוכיא ולא דברו את הדבר כי אם אל היהודים לבדם׃
성 경: [행11:1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멘 운'(*)을 `때에’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때’로 번역될 경우 어떤 사건의 시점을 의미하므로 18절에서 언급된 사건과 시간적 연관성이 강조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장을 접속하거나 이야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멘'(*)은 반의적(反意的) 의미를 연결하는 상관 접속사로서 `그러나’ 또는 `한편’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운'(*)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미나 사건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그래서’ 또는 `결국’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때에 따라서 `그러나’와 같은 반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의 접속사는 앞의 사건과 시간적 연결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접속사로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한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 본 구절은 독자로 하여금 과거의 일을 회상하도록 촉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 후(7:54, 60) 교회에 닥친 박해(8:1-4)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9장에서는 박해의 손길이 유대땅이 아닌 다메섹까지 미쳤음이 나타나 있다. 박해의 범위가 타 지역(이방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킨다. 아마 이 같은 일련의 박해로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성도들은 이방나라로까지 이주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박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게 되자 또 다시 점점 더 멀리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의 박해가 복음을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한다.
베니게 –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갈멜산과 레바논산 사이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수는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바 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브로 –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여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하고 있는 섬으로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다. 바나바는 이 섬 출신이며(4:36)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13:4-12).
안디옥-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이그나타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본문의 의도는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유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지금까지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에산 데 티네스 엨스 아우톤 안드레스 큎리오이 카이 퀴레나이오이 호이티네스 엘돈테스 에이스 안티오케이안 엘랄룬 카이 프로스 투스 헬레니스타스 유앙겔리조메노이 톤 퀴리온 예순
개역개정,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새번역,20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하여 주 예수를 전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우리말성경,20 그런데 그 가운데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인 몇 사람은 안디옥으로 들어가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영어NIV,20 Some of them, however, men from Cyprus and Cyrene, went to Antioch and began to speak to Greeks also, telling them the good news about the Lord Jesus.
영어NASB,20 But there were some of them, men of Cyprus and Cyrene, who came to Antioch and began speaking to the Greeks also, preaching the Lord Jesus.
영어MSG,20 Then some of the men from Cyprus and Cyrene who had come to Antioch started talking to Greeks, giving them the Message of the Master Jesus.
영어NRSV,20 But among them were some men of Cyprus and Cyrene who, on coming to Antioch, spoke to the Hellenists also, proclaiming the Lord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0 ησαν δε τινες εξ αυτων ανδρες κυπριοι και κυρηναιοι οιτινες εισελθοντες εις αντιοχειαν ελαλουν προς τους ελληνιστας ευαγγελιζομενοι τον κυριον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20 erant autem quidam ex eis viri cyprii et cyrenei qui cum introissent Antiochiam loquebantur et ad Graecos adnuntiantes Dominum Iesum
히브리어Modern,20 ויהי בתוכם אנשי קפרוס וקוריני אשר באו אל אנטיוכיא וידברו גם אל היונים ויבשרו אתם את האדון ישוע׃
성 경: [행11:20]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 구브로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B.C.7세기경 설립되었으며 헬라 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또한 이곳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눅 23:26). 여기서 언급된 구레네 몇 사람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의 배타적(排他的) 우월 의식을 버렸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헬라인에게도 – 이 말은 19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에게만’이라는 단어와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헬라인’을 뜻하는 헬라어 `헬레나스’ 대신 `헬라파’라는 의미의 `헬레니스타스'(*)로 표현된 사본들이 있어(B, E, H, L, P)논란이 되고 있다. 즉 `헬레니스타스’라고 할 경우에는 `헬라화된 유대인’ 또는 `헬라 지역에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 때문에(6:1)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어느 사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헬레나스'(*)를 본문으로 인정한다(Alford, Chrysostom, Knowling, Bruce, Vincent).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은 19절의 `유대인’이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을 굳이 `헬라인’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헬라파로 구분할 때에는 `히브리파’와 대립하여 사용되는데(6:1) 여기서는 `유대인’과 (19절) 대립되어 사용된 점으로 보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에 `헬라인’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헬레니스타스’라고 언급한 사본들은 19절과의 대립적 묘사를 피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가 바울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이방 선교에 대한 바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Haenchen).
주 예수를 전파하니 – 그들의 선교활동의 중심 내용은 예수가 `주님’임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다는 의미다.
카이 엔 케이르 퀴리우 멭 아우톤 폴뤼스 테 아리드모스 호 피스튜사스 에페스트렢센 에피 톤 퀴리온
개역개정,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새번역,21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말성경,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가톨릭성경,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영어NIV,21 The Lord’s hand was with them,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believed and turned to the Lord.
영어NASB,21 And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them, and a large number who believed turned to the Lord.
영어MSG,21 God was pleased with what they were doing and put his stamp of approval on it–quite a number of the Greeks believed and turned to the Master.
영어NRSV,21 The hand of the Lord was with them, and a great number became believers and turned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ην χειρ κυριου μετ αυτων πολυς τε αριθμος πιστευσας επεστρεψεν επι τον κυριον
라틴어Vulgate,21 et erat manus Domini cum eis multusque numerus credentium conversus est ad Dominum
히브리어Modern,21 ותהי עמהם יד יהוה ומספר רב האמינו וישובו אל האדון׃
성 경: [행11:21]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구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삼하 3:12). 누가는 이같은 구약적 표현을 통하여 그들의 이방 선교 활동이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여 이방 전도의 정당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본서의 일관된 내용이기도 하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기독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음을 표현하는 이 어투는 누가의 독특한 수사법이다(Haenchen). 이방인들이 `예수를 주로 믿고 돌아왔다’는 표현은 곧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세례를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아직 교회가 조직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세례는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에쿠스데 데 호 로고스 에이스 타 오타 테스 엨클레시아스 테스 우세스 엔 예루살렘 페리 아우톤 카이 엨사페스테일란 바르나반 디엘데인 헤오스 안티오케이아스
개역개정,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새번역,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서,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다.
우리말성경,22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영어NIV,22 News of this reached the ears of the church at Jerusalem, and they sent Barnabas to Antioch.
영어NASB,22 And the news about them reached the ears of the church at Jerusalem, and they sent Barnabas off to Antioch.
영어MSG,22 When the church in Jerusalem got wind of this, they sent Barnabas to Antioch to check on things.
영어NRSV,22 News of this came to the ears of the church in Jerusalem, and they sent Barnabas to Antioch.
헬라어신약Stephanos,22 ηκουσθη δε ο λογος εις τα ωτα της εκκλησιας της εν ιεροσολυμοις περι αυτων και εξαπεστειλαν βαρναβαν διελθειν εως αντιοχειας
라틴어Vulgate,22 pervenit autem sermo ad aures ecclesiae quae erat Hierosolymis super istis et miserunt Barnaban usque Antiochiam
히브리어Modern,22 וישמע הדבר באזני הקהלה אשר בירושלים וישלחו את בר נבא אל אנטיוכיא׃
성 경: [행11:22]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8:14과 비슷한 이야기로 지방 교회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표를 파견하게 된다. 사마리아에 파견되었던 대표는 요한과 베드로였으나 여기서는 바나바가 파견된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설교를 잘하여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졌다(4:36). 그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쳤으며(4:37) 회심한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장본인으로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기도 하다(13:1). 또한 아디옥 교회가 확장되자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 가르치게 하였으며(11:26) 바울의 선교 여행의 동역자로서 바울을 돕기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여 바울을 능가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흔적이 있다(13:2;15:12)에서는 바울 이름보다 바나바 이름이 먼저 언급됨). 그는 마가를 선교 여행에 동행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바울이 반대하므로 바울과 결별을 하게 된다(15:36-39). 이처럼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안디옥에 바나바가 파송된 것에 대해 혹자는 당시 모든 사도들이 베드로처럼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어 예루살렘에 부재(不在)중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한다(Lenski). 그러나 헨헨(Hasnchen)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합법화할 수 있는 전권을 행사했다고 본다.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했다면 그를 파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부재중이었을 거라는 전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사람이고, 고향 사람들이 안디옥에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할 때 그곳에 파송받는 데는 적격자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는 지방 교회를 공인하고 합법화하는 권한을 지닌 교회임을 여기서는 암시해 주고 있다(8:14 주석 참조).
호스 파라게노메노스 카이 이돈 텐 카린 텐 투 데우 에카레 카이 파레칼레이 판타스 테 프로데세이 테스 카르디아스 프로스메네인 토 퀴리오
개역개정,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새번역,23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하였다.
우리말성경,23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가톨릭성경,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영어NIV,23 When he arrived and saw the evidence of the grace of God, he was glad and encouraged them all to remain true to the Lord with all their hearts.
영어NASB,23 Then when he had come and witnessed the grace of God, he rejoiced and began to encourage them all with resolute heart to remain true to the Lord;
영어MSG,23 As soon as he arrived, he saw that God was behind and in it all. He threw himself in with them, got behind them, urging them to stay with it the rest of their lives.
영어NRSV,23 When he came and saw the grace of God, he rejoiced, and he exhorted them all to remain faithful to the Lord with steadfast devo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ς παραγενομενος και ιδων την χαριν του θεου εχαρη και παρεκαλει παντας τη προθεσει της καρδιας προσμενειν τω κυριω
라틴어Vulgate,23 qui cum pervenisset et vidisset gratiam Dei gavisus est et hortabatur omnes proposito cordis permanere in Domino
히브리어Modern,23 ויבא שמה וישמח כראתו את חסד האלהים ויזהר את כלם לדבקה באדון בלב נכון׃
성 경: [행11:23]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21절에서 언급된 이방인의 개종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21절에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들어오는 것이 `주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묘사했듯이 바나바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기뻐했다’는 말은 안디옥 교회의 선교 활동을 공인(公認)한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기독교인들을 기독교 공동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굳은 마음으로 – 이 마음은 한 목적을 향해 흔들림이 없음을 뜻한다. `굳은’으로 번역된 `프로데세이'(*)는 본래 여러 사람 앞에 차려놓고 진열하는 것을 뜻하며(마 12:4;막 2:26;눅 6:4;히 9:2) 또한 `계획, 결의,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말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 이 말은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로 예수를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가 모든 삶의 원리이며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모든 종교적 율법과 유대교적 전통들로부터 자유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오고 오직 예수만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야 함을 뜻한다.
호티 엔 아네르 아가도스 카이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 카이 프로세테데 오클로스 히카노스 토 퀴리오
개역개정,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새번역,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우리말성경,24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영어NIV,24 He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faith,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영어NASB,24 for he was a good man, and full of the Holy Spirit and of faith. And considerable numbers were brought to the Lord.
영어MSG,24 He was a good man that way, enthusiastic and confident in the Holy Spirit’s ways. The community grew large and strong in the Master.
영어NRSV,24 for he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of faith. And a great many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τι ην ανηρ αγαθος και πληρης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και πιστεως και προσετεθη οχλος ικανος τω κυριω
라틴어Vulgate,24 quia erat vir bonus et plenus Spiritu Sancto et fide et adposita est turba multa Domino
히브리어Modern,24 כי איש טוב היה ומלא רוח הקדש ואמונה ויאספו לאדון עם רב׃
성 경: [행11:24]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에 대한 누가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나바가 선언한 23절의 내용을 정당화하고 보증(保證)하기 위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을 인정한 것이 정당한 것임을 보증하고 나아가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누가의 의도이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의 안디옥 방문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확장을 가속화시켰는데, 그 이유가 바나바의 착함과 성령이 충만한 믿음 때문임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이에’라는 말은 헬라어 접속사 `호티'(*)를 번역한 말인데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원문에서 이 접속사는 본래 본절의 처음에 나와서 큰 무리가 주께 더 나오는 까닭을 말해주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따라서 본절 전체를 직역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가 된다.
엨셀덴 데 에이스 타르손 아나제테사이 사울론
개역개정,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새번역,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우리말성경,25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가톨릭성경,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영어NIV,25 Then Barnabas went to Tarsus to look for Saul,
영어NASB,25 And he left for Tarsus to look for Saul;
영어MSG,25 Then Barnabas went on to Tarsus to look for Saul.
영어NRSV,25 Then Barnabas went to Tarsus to look for Saul,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ξηλθεν δε εις ταρσον ο βαρναβας αναζητησαι σαυλον
라틴어Vulgate,25 profectus est autem Tarsum ut quaereret Saulum quem cum invenisset perduxit Antiochiam
히브리어Modern,25 וילך בר נבא משם אל טרסוס לבקש את שאול וימצא אתו ויביאהו אל אנטיוכיא׃
성 경: [행11:25]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9:30에서 사울이 다소로 보내진 사실이 언급된 후 처음으로 사울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가게 된 것은 환상 중에 받은 명령에 따른 것으로 사울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유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2:17-21). 사울이 다소로 가서 머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보인다(Haenchen, Ramsay). 왜냐하면 예루살렘 2차 방문이 14년만에 이루어졌다고 사울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갈 2:1) 안디옥에서의 1년을 빼면(26절), 약 13년 정도의 시간이 남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찾아간 다소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부름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바나바의 모습은 9:27의 내용과 함께 사울을 초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로 등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카이 유론 에가겐 에이스 안티오케이안 에게네토 데 아우토이스 카이 에니아우톤 홀론 쉬나크데나이 엔 테 엨클레시아 카이 디닼사이 오클론 히카논 크레마티사이 테 프로토스 엔 안티오케이아 투스 마데타스 크리스티아누스
개역개정,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새번역,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우리말성경,26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바나바와 사울은 1년 내내 그곳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영어NIV,26 and when he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So for a whole year Barnabas and Saul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great numbers of people. The disciples were called Christians first at Antioch.
영어NASB,26 and when he had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And it came about that for an entire year they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considerable numbers; and the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in Antioch.
영어MSG,26 He found him and brought him back to Antioch. They were there a whole year, meeting with the church and teaching a lot of people. It was in Antioch that the disciples were for the first time called Christians.
영어NRSV,26 and when he had found him, he brought him to Antioch. So it was that for an entire year they met with the church and taught a great many people, and it was in Antioch that the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υρων αυτον ηγαγεν αυτον εις αντιοχειαν εγενετο δε αυτους ενιαυτον ολον συναχθηναι εν τη εκκλησια και διδαξαι οχλον ικανον χρηματισαι τε πρωτον εν αντιοχεια τους μαθητας χριστιανους
라틴어Vulgate,26 et annum totum conversati sunt in ecclesia et docuerunt turbam multam ita ut cognominarentur primum Antiochiae discipuli Christiani
히브리어Modern,26 ויהיו ישבים יחד בקהלה שנה תמימה ומלמדים עם רב אז הוחל באנטיוכיא לקרא את התלמידים בשם משיחיים׃
성 경: [행11:26]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
일 년간 모여 있어 – 바나바와 사울이 협력하여 안디옥 교회에 사역하는 기간이 일 년으로 언급되는데 그 시기가 A.D. 43-44년경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Lenski),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일 년간’ 이란 표현은 아마 바울과 바나바가 부근의 일로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제자들이 – 여기서 언급된 제자들이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며 이방 기독교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 혹자는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과 그 성격은 비유대적인 것으로서 유대적 기독교와는 구별되는 이방적 기독교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Bickermann).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붙여졌다는 점에서 유대 기도교와는 구준되는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안디옥의 50만 인구 중 약 1/7 정도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 중에 유대인들이 포함되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 이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붙여진 고유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한다. 에릭 피터슨(Erik Peterson)은 로마 당국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서 유대교 안의 반정부적인 정치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가 당시 친로마적이고 로마 정부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본서를 기록했다는 개론적(槪論的) 이해와 모순되기 때문에 피터슨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Haenchen). 신약에서 세 번 언급되는(26:28;벧전 4:16) 이 말은 비기독교인에 의해 붙여졌다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별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에서 누가가 소개하는 어투를 보면 그렇기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쟁쟁한 사람이 이끄는 기독교인에 대해 수치스러운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상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로서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집단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안디옥 교회는 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교회의 설립에 대한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보존받게 될 수 있었다.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에서(`헤롯당’, 막 3:6)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붙여진 지극히 당연한 칭호였다(11:19-26 주제 강해 `그리스도인’참조). 따라서 이제 기독교는 안디옥에서 유대교와 전혀 구별되는 새롭고 독특한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된 종파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 두 가지로 고려된다.(1)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유대교와 같은 합법적 종교가 아니라 신흥 종교(新興宗敎)로 구분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2) 구약성경과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다. 즉 구약 시대의 구원사를 이해하는 데 유대교와 무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고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있게 연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Haenchen). 이런 점에서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sect)로 이해했다.
엔 타우타이스 데 타이스 헤메라이스 카텔돈 아포 히에로솔뤼몬 프로페타이 에이스 안티오케이안
개역개정,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새번역,27 그 무렵에 예언자 몇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내려왔다.
우리말성경,27 이 기간 동안 몇몇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27 그 무렵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
영어NIV,27 During this time some prophets came down from Jerusalem to Antioch.
영어NASB,27 Now at this time some prophets came down from Jerusalem to Antioch.
영어MSG,27 It was about this same time that some prophets came to Antioch from Jerusalem.
영어NRSV,27 At that time prophets came down from Jerusalem to Antioch.
헬라어신약Stephanos,27 εν ταυταις δε ταις ημεραις κατηλθον απο ιεροσολυμων προφηται εις αντιοχειαν
라틴어Vulgate,27 in his autem diebus supervenerunt ab Hierosolymis prophetae Antiochiam
히브리어Modern,27 ויהי בימים ההם ויבאו נביאים מירושלים אל אנטיוכיא׃
성 경: [행11:27]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그 때에 – 앞에서 언급한 바나바와 사울의 활동 기간을(일 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황제는 글라우지오로 그는 A.D.41-5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에 대한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로마 제국 내에 심한 기근이 여러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시에도 글라우디오가 아직 황제로 있었으며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한 것은 A.D.50-5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18:1,2). 그리고 12장에 언급된 헤롯이 죽은 시기는 A.D.44년 경이다. 만약 본서가 연대적인 순서를 철저히 따른 기록이라면 본 구절의 `그 때’는 A.D.44년을 넘지 않는다. 특히 12:25에서 언급된 대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扶助)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시점과 헤롯의 사망 시기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본절은 A.D.44년경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흉년 이전의 어느 때를 가리킨다.
선지자들(*, 프로페타이) – 본서와 바울 서신에만 언급되고 있는(13:1;15:32;21:9,10;롬 12:6;고전 12:10;13:2,8;14:6;살전 5:20) 이들은 초대 기독교에서 영감있는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성경에 관해 가르치고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예언을 하기도 하며(롬 12:6;고전 12:10) 사도 다음으로 중요한 직분으로 인정받았다(고전 12:28;엡 2:20;4:11).
예루살렘 이르니 –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오게 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28절에서 예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흉년에 대한 예언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흉년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이 안디옥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에 있었던 헤롯의 박해(12:1)를 피해 이 곳을 찾았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아나스타스 데 헤이스 엨스 아우톤 오노마티 하가보스 에세마넨 디아 투 프뉴마토스 리몬 메갈렌 멜레인 에세스다이 에프 홀렌 텐 오이쿠메넨 헤티스 에게네토 에피 클라우디우
개역개정,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새번역,28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일어나, 온 세계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바로 그 기근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들었다.
우리말성경,28 그들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일어나 로마 전역에 심한 기근이 들 것이라고 성령으로 예언했습니다. (이 일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다스리는 때 일어났습니다.)
가톨릭성경,28 그들 가운데 하나인 하가보스라는 이가 나서서, 장차 온 세상에 큰 기근이 들 것이라고 성령의 힘으로 예고하였다. 그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일어났다.
영어NIV,28 One of them, named Agabus, stood up and through the Spirit predicted that a severe famine would spread over the entire Roman world. (This happened during the reign of Claudius.)
영어NASB,28 And one of them named Agabus stood up and began to indicate by the Spirit that there would certainly be a great famine all over the world. And this took place in the reign of Claudius.
영어MSG,28 One of them named Agabus stood up one day and, prompted by the Spirit, warned that a severe famine was about to devastate the country. (The famine eventually came during the rule of Claudius.)
영어NRSV,28 One of them named Agabus stood up and predicted by the Spirit that there would be a severe famine over all the world; and this took place during the reign of Claudius.
헬라어신약Stephanos,28 αναστας δε εις εξ αυτων ονοματι αγαβος εσημανεν δια του πνευματος λιμον μεγαν μελλειν εσεσθαι εφ ολην την οικουμενην οστις και εγενετο επι κλαυδιου καισαρος
라틴어Vulgate,28 et surgens unus ex eis nomine Agabus significabat per Spiritum famem magnam futuram in universo orbe terrarum quae facta est sub Claudio
히브리어Modern,28 ויקם אחד מהם ושמו אגבוס ויגד על פי הרוח כי רעב גדול יבוא על כל ישבי תבל ויהי כן בימי קלודיוס׃
성 경: [행11:28]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아가보 –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아가보는 유대 출신 기독교인으로 보인다. 그는 두 가지를 예언한 것으로 본서에서 언급되는데 본문 외에 21:10, 11에서 사울의 투옥에 관하여 예언하였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성취되었다.
성령으로 말하되 – `말하되’로 번역된 `세마이노'(*)는 `표시하다’,`지시하다’, `알리다’의 뜻을 갖고 있는데 신탁(信託)을 전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Haenchen). 특히 이 동사의 명사형 `세메이온'(*)은 요한복음에서 `표적’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세마이노’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을 나타냄을 암시한다.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 이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 당시 개별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 전승은 있으나 세계 전역은 아니었다. 특히 46-48년 사이에는 팔레스틴에 큰 기근이 있었지만 역시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Haenchen). 누가는 당시 로마 제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지역을 `천하’라고 했다. 특히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한 점으로 비추어 보아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극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본절의 흉년은 A.D.46-48년 사이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큰 흉년을 지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흉년은 A.D.46년 이전과 관련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글라우디오(Claudius) – 그는 헤롯 아그립바 1세(12:1)의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등극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으나 말년에 가서는 유대인들의 종교 집회를 금지아였을뿐 아니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기도 했다(18:2). 그리고 그는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고소를 기각(棄却)시켰다(18:12). 또한 그는 황제 예배를 강요한 대표적인 로마 황제로 알려졌다. 그는 조모를 여신으로, 조부를 신으로 모시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게 하여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톤 데 마데톤 카도스 유포레이토 티스 호리산 헤카스토스 아우톤 에이스 디아코니안 펨프사이 토이스 카토이쿠신 엔 테 유다이아 아델포이스
개역개정,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새번역,29 그래서 제자들은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몫을 정하여, 유대에 사는 신도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말성경,29 제자들은 각자 자기 형편에 따라 유대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9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에 따라 유다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호 헌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영어NIV,29 The disciples,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decided to provide help for the brothers living in Judea.
영어NASB,29 And in the proportion that any of the disciples had means, each of them determined to send a contribution for the relief of the brethren living in Judea.
영어MSG,29 So the disciples decided that each of them would send whatever they could to their fellow Christians in Judea to help out.
영어NRSV,29 The disciples determined that according to their ability, each would send relief to the believers living in Judea;
헬라어신약Stephanos,29 των δε μαθητων καθως ηυπορειτο τις ωρισαν εκαστος αυτων εις διακονιαν πεμψαι τοις κατοικουσιν εν τη ιουδαια αδελφοις
라틴어Vulgate,29 discipuli autem prout quis habebat proposuerunt singuli eorum in ministerium mittere habitantibus in Iudaea fratribus
히브리어Modern,29 ויועצו התלמידים לשלח איש איש מאשר תשיג ידו לעזרת האחים הישבים ביהודה׃
성 경: [행11:29]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 유대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기근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부조(扶助)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본래 `봉사’의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구제 헌금’의 의미로 예루살렘에서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한 교회는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롬 15:26)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 즉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는 사실을 이방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F.F.Bruce). 이방 교회 역시 독립된 교회로서의 위치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유대 교회와 동일한 기독교 공동체로서 인정된 것이다. 이제는 유대와 이방인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와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짓는 배타적 분리주의도 없어졌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호 카이 에포이에산 아포스테일란테스 프로스 투스 프레스뷔테루스 디아 케이로스 바르나바 카이 사울루
개역개정,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새번역,30 그들은 그대로 실행해서, 바나바와 사울 편에 그것을 장로들에게 보냈다.
우리말성경,30 그들은 이렇게 해서 모은 헌금을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들은 그대로 실행하여 그것을 바르나바와 사울 편에 원로들에게 보냈다.
영어NIV,30 This they did, sending their gift to the elders by Barnabas and Saul.
영어NASB,30 And this they did, sending it in charge of Barnabas and Saul to the elders.
영어MSG,30 They sent Barnabas and Saul to deliver the collection to the leaders in Jerusalem.
영어NRSV,30 this they did, sending it to the elders by Barnabas and Saul.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 και εποιησαν αποστειλαντες προς τους πρεσβυτερους δια χειρος βαρναβα και σαυλου
라틴어Vulgate,30 quod et fecerunt mittentes ad seniores per manus Barnabae et Sauli
히브리어Modern,30 וכן גם עשו וישלחו אל הזקנים על ידי בר נבא ושאול׃
성 경: [행11:30]
주제1: [이방 선교에로의 발진(發進)]
주제2: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 안디옥 교회가 헌금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대표로 사울과 바나바가 언급된다. `손으로’라는 말은 `통해’라는 단순한 의미로 70인역에 자주 사용되었다(Haenchen).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단순히 전달된 사실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전달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강조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을 바나바와 사울에 두었다. 이는 이방 교회의 대표로서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들인다면 곧 이방 쇼회가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공인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는 헌금의 수령자(受領者)가 장로로 언급됨으로써 처음으로 신약적인 의미의 장로라는 직분이 나타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로란 생소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장로와 신약 시대의 장로는 차이점이 있다. 구약 시대의 `장로’는 성읍의 정신적, 행정적 지도자로서 백성들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 노릇을 하여 공의를 확립하였다. 이 외에도 장로는 사회 기강을 확립하는 제반 업무 및 중요한 정치, 종교, 사법적인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간혹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수 8:10;삼상 4:3).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신 21:1-6 주제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신약 시대에는 `장로’가 목회 임무를 수행하며(벧전 5:1-4;약 5:14)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도 행했다. 일반적으로 사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후 그 교회의 대표자로 `장로’를 세웠다. 그런데 `장로’란 말이 간혹 사도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했다(벧전 5:1;요이 1절; 요삼 1절). 그리고 이 직분은 초대 교회 당시 `감독’의 직분과 별 구분이 없었으나 후에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의해 장로직과 감독직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장로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6:1-6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아무튼 본절에 언급된 `장로’가 사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6장에서 언급된 일곱 집사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누가는 본서에서 사도들을 장로로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장로와 사도가 동일시 될 수 없다. 누가는 구제를 위해 선출된 집사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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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11장
11:1 베드로의 변명(사도행전 11:1-18)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은 우리 가련한 이방의 죄인들이 생각할 때 대단히 기쁘고 감사할 만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흑암에 앉은 우리에게도 빛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실은 유대의 비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대단히 놀라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Ⅰ.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소식이 즉시 전달되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선의로 어떤 이는 악의로 이 소문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그러므로 사도 자신이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이전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 즉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막연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확실히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신의 계시의 함축이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 19:13). 이방 나라들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법이라고 여겨졌던 바로 그 이방인들까지도 교회 공동체에 가입되었다. 즉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이 사실은 1.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명예를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시상한 것은 이 기쁜 사실이 그들도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이와 같은 거만과 고집된 편견이 신적인 진리를 가장 명백히 발견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는 것이다.
2. 또한 이 사실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그들이 기대한 이상의 역사를 그들 가운에 일으켜 놓았다.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증거가 이방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구약에서 대부분 인용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먼저 믿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신앙 생활을 하려는 마음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복음을 듣고 감명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그들이 하고자 하면 곧 순종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선행을 베풀다가 곧 좌절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명예를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나 시상한 것은 이 기쁜 사실이 그들도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특히 이와 같은 거만과 고집된 편견이 신적인 진리를 가장 명백히 발견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는 것이다.또한 이 사실은 불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그들이 기대한 이상의 역사를 그들 가운에 일으켜 놓았다.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복음에 대한 증거가 이방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구약에서 대부분 인용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먼저 믿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신앙 생활을 하려는 마음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복음을 듣고 감명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그들이 하고자 하면 곧 순종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선행을 베풀다가 곧 좌절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하자. Ⅱ. 이런 잘못을 유대 신자들이 범한다(2, 3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이들은 아직 할례에 대한 경의를 품은 자들로서 베드로를 “힐난하였다.” 그들은 그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은 것을” 범법으로 규정하였다. 이 까닭에 그들은 그의 사도권을 몰수하지 않는다면 사도직의 명예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교회 재판에 회부하려 하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또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그가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여기지도 않았다(구교의 교황절 대무오설을 전제한 논리인 것 같다:역자 주).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교회를 독점하고 교회와 교회가 수여하는 은총의 유익함에 다른 사람을 참여치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대단한 불상사이며 손실을 끼쳐 주는 것이다. 세상 재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교회에도 교회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정신을 쏟는 편협한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백성에 대한 잘못된 사람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고 그러는 자신을 합리화한 요나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공연한 적들뿐만 아니라, 또 입장을 같이하는 친구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선을 행하고 그 결과도 좋은 그런 문제로도 비난을 받고 공격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떳떳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형제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베드로처럼 동요되지 고 유유자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의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사려깊은 척하면서 실상은 냉혹하고 무관심한 자들이 비난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도량이 넓고 관대하며 자애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도 거만하고 편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이들은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고 말한다. 교회를 독점하고 교회와 교회가 수여하는 은총의 유익함에 다른 사람을 참여치 못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대단한 불상사이며 손실을 끼쳐 주는 것이다. 세상 재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교회에도 교회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정신을 쏟는 편협한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백성에 대한 잘못된 사람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고 그러는 자신을 합리화한 요나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들이다.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공연한 적들뿐만 아니라, 또 입장을 같이하는 친구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선을 행하고 그 결과도 좋은 그런 문제로도 비난을 받고 공격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떳떳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형제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베드로처럼 동요되지 고 유유자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의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사려깊은 척하면서 실상은 냉혹하고 무관심한 자들이 비난을 들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도량이 넓고 관대하며 자애로운 정신을 지닌 사람들도 거만하고 편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이들은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고 말한다. Ⅲ.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는 논쟁이나 변명이 필요 없도록 자신도 정당화시키고 그들도 만족하리 만큼 충분히 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4절). “그는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그들에게 조리있게 설명함으로 그들 스스로 그가 잘못된 여부를 판단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 모든 되어진 일은 하나님 자신의 역사였지 그의 행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 그는 그들이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이 그와 논쟁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찬성하고 그를 격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비난을 받을 때 자중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될 좋은 근거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미리 어째서 비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안에 숨겨진 원인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짓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과 논쟁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물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때는 할 수 있는 한 긍정적으로 스스로 이해하려고 하며 경솔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2. 그는 기꺼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또 그들을 설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가 수석 사도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칭 그의 계승자들이 주장하는 절대 주권 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이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니 그들이 이 문제로 공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만족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가 이방인들에 관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왜 그들과 같았던 전의 감정을 버렸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처음에는 좋지 않게 보이며 또 잘못인 것같이 여겨지는 우리의 이러한 행동들을 분명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밝힐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길을 막고 있는 거침돌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베드로가 자신을 변호하려고 무엇이라고 호소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1) 그는 환상을 통하여 의식적인 율법이 구분하던 구별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앞서 10장 9절 이하에서 보았던 환상을 말한다(5, 6절). 10장에서는 보자기가 “땅에 드리웠다”하였는데 그는 본문에서 “내 앞에까지 드리웠다”고 한다. 이 장면은 특히 그 내용이 그를 교훈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기 계시를 우리에게 보이시며 그 사실들을 믿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케 하심으로 인간의 자녀들에게도 알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장면이 본문에서는 추가된다. 그것은 보자기가 그 앞에 내려왔을 때에 “그가 주목하여 보고 생각하였다”는 내용이다(6절)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만약 우리가 신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에 이르려면 우리의 마음을 이 일에 전념하여 깊이 그 내용을 고찰해야만 한다. 그는 그들에게 양심의 거리낌으로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무슨 종류의 고기든지 구별하지 말고 먹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7절). 창세기 9장 3절에 보면 인간이 고기를 먹도록 허용된 것은 홍수 이후였던 것 같다. 이 허락은 후에 의식적인 율법에 의하여 제한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제한이 해제되고 무제한으로 다시 허용되었다. 우리에게서 육체적인 쾌락을 몰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획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없어지는 것보다 영생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함인 것이다. 그도 그들처럼 이방인들과 사귄다거나 이방인들의 호화로운 식탁에 초대받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그에게 허용된 자유를 거절하였다고 말한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8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사정이 변경되었다는 말씀을 듣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에 더러웠던 사람들과 사물들을 정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도 이것들을 속되다 할 수 없게 되었고 선택한 백성이 끼여들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했다(9절).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대상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셨으므로 그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당시의 주어지는 예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정황이 전혀 바뀌었는데도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더 나은 발견들을 수용하지 않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빌 3:15).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본 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이 사건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음을 말한다(10절). 잡아 먹으라는 같은 명령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세 번 주어졌다. 즉 하나님이 깨끗하게 그리하여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이 신적인 환상이었음을 그에게 더욱 확신시키려고 그것은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려온 장소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
(2) 그는 고넬료가 보낸 사자를 따라가라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사자들이 그에게 온 시간이 그가 환상을 본 직후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함으로 그 환상이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행동을 촉구한 것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그의 길을 지시하는 것이 불충분할까 염려하여 성령께서 “아무 의심 말고” 가이사랴에서 그에게 온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다(11, 12절). 그가 동행하는 사람도 또 그가 찾아가는 사람도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도록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3) 그가 세례를 받은 몇 명의 형제들을 함께 수행시키므로 그들도 그와 같이 의심치 않게 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그가 욥바에서 데리고 간 사람들로서 그의 입장을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로 보아 그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예견하여 주의깊이 행동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조언을 받아들여 행동하였고 성급히 하지 않고 신중히 행동하였다.
(4) 고넬료도 베드로가 본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고 그를 통하여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하였음을 보고 하였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늘 나라와 교통하며 형제들끼리 서로 자기들의 경험을 비교하고 교환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서로 서로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이 고넬료에게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고넬료는 베드로의 환상 얘기를 듣고 또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본문에는 10장에서 보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말한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10:6, 32). 10장에서 “베드로를 청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고 되어 있다(한글 개역에는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는 내용이 빠져 있음:역자 주). 그러나 본문에는 다음과 같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14절). 그러므로 그를 초청하는 일에 너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그것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말씀이다. 단순히 복음을 듣고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말씀을 믿고 복종함으로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제시하며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복음에 기록된 방법을 따르면 확실히 진노와 저주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까지도 구원으로 인도한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너와 네 자녀가 계약을 얻게 되며 구원의 방법을 취득할 것이다. 너의 집이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것인데 그들이 믿음으로 너와 같이 네 집의 가장 천한 종까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도다”(눅 19:9)라고 말씀한다. 지금까지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임한다(4:22). 이제 약속과 특권과 구원의 수단이 이제까지는 유대 민족에게만 충족하게 임하였으나 실상 모든 민족에게 충분하다고도 만족하게 이루어졌다.(5)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한 사건은 청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것임을 말한다. 이것이 완벽한 증거가 되었다. 즉 이방인들을 성도의 공동체로 영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1] 이 사실은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아마 그는 자기가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도 그는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은밀한 충동을 느꼈던 것 같다) “성령이 저희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뚜렷한 증거를 보이며 임하는지라. 이에 어떤 허위도 그 안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이같이 하나님은 이루어진 사실을 입증하셨고 자신이 그들을 시인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설교는 확실히 성령이 부여한 것이 틀림 없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변론할 때도 성령의 임재를 전제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2] 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며 남기신 말씀을 상기하였다(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6절)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명백히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그들이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이 그와 논쟁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찬성하고 그를 격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비난을 받을 때 자중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될 좋은 근거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미리 어째서 비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안에 숨겨진 원인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짓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과 논쟁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물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때는 할 수 있는 한 긍정적으로 스스로 이해하려고 하며 경솔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그는 기꺼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또 그들을 설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가 수석 사도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칭 그의 계승자들이 주장하는 절대 주권 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이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니 그들이 이 문제로 공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만족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가 이방인들에 관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희망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가 왜 그들과 같았던 전의 감정을 버렸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처음에는 좋지 않게 보이며 또 잘못인 것같이 여겨지는 우리의 이러한 행동들을 분명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밝힐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길을 막고 있는 거침돌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베드로가 자신을 변호하려고 무엇이라고 호소하였는가를 살펴 보자.그는 환상을 통하여 의식적인 율법이 구분하던 구별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우리가 앞서 10장 9절 이하에서 보았던 환상을 말한다(5, 6절). 10장에서는 보자기가 “땅에 드리웠다”하였는데 그는 본문에서 “내 앞에까지 드리웠다”고 한다. 이 장면은 특히 그 내용이 그를 교훈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기 계시를 우리에게 보이시며 그 사실들을 믿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케 하심으로 인간의 자녀들에게도 알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장면이 본문에서는 추가된다. 그것은 보자기가 그 앞에 내려왔을 때에 “그가 주목하여 보고 생각하였다”는 내용이다(6절)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만약 우리가 신적인 사물에 대한 지식에 이르려면 우리의 마음을 이 일에 전념하여 깊이 그 내용을 고찰해야만 한다. 그는 그들에게 양심의 거리낌으로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무슨 종류의 고기든지 구별하지 말고 먹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7절). 창세기 9장 3절에 보면 인간이 고기를 먹도록 허용된 것은 홍수 이후였던 것 같다. 이 허락은 후에 의식적인 율법에 의하여 제한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제한이 해제되고 무제한으로 다시 허용되었다. 우리에게서 육체적인 쾌락을 몰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획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절제하고 자제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없어지는 것보다 영생을 주는 양식을 얻기 위함인 것이다. 그도 그들처럼 이방인들과 사귄다거나 이방인들의 호화로운 식탁에 초대받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그에게 허용된 자유를 거절하였다고 말한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8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부터 “사정이 변경되었다는 말씀을 듣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에 더러웠던 사람들과 사물들을 정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도 이것들을 속되다 할 수 없게 되었고 선택한 백성이 끼여들기에는 부적당한 것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했다(9절).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대상을 질적으로 변화시키셨으므로 그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당시의 주어지는 예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정황이 전혀 바뀌었는데도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더 나은 발견들을 수용하지 않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빌 3:15).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본 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려고 이 사건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음을 말한다(10절). 잡아 먹으라는 같은 명령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세 번 주어졌다. 즉 하나님이 깨끗하게 그리하여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명령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이 신적인 환상이었음을 그에게 더욱 확신시키려고 그것은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려온 장소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그는 고넬료가 보낸 사자를 따라가라는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사자들이 그에게 온 시간이 그가 환상을 본 직후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함으로 그 환상이 이 사건에 대한 그의 행동을 촉구한 것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그의 길을 지시하는 것이 불충분할까 염려하여 성령께서 “아무 의심 말고” 가이사랴에서 그에게 온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다(11, 12절). 그가 동행하는 사람도 또 그가 찾아가는 사람도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도록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그가 세례를 받은 몇 명의 형제들을 함께 수행시키므로 그들도 그와 같이 의심치 않게 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그가 욥바에서 데리고 간 사람들로서 그의 입장을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로 보아 그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예견하여 주의깊이 행동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조언을 받아들여 행동하였고 성급히 하지 않고 신중히 행동하였다.고넬료도 베드로가 본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고 그를 통하여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였다(13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하였음을 보고 하였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늘 나라와 교통하며 형제들끼리 서로 자기들의 경험을 비교하고 교환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서로 서로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이 고넬료에게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고넬료는 베드로의 환상 얘기를 듣고 또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본문에는 10장에서 보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말한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10:6, 32). 10장에서 “베드로를 청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고 되어 있다(한글 개역에는 그가 너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할 것을 말하리라는 내용이 빠져 있음:역자 주). 그러나 본문에는 다음과 같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14절). 그러므로 그를 초청하는 일에 너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유익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그것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말씀이다. 단순히 복음을 듣고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말씀을 믿고 복종함으로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제시하며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복음에 기록된 방법을 따르면 확실히 진노와 저주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까지도 구원으로 인도한다.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너와 네 자녀가 계약을 얻게 되며 구원의 방법을 취득할 것이다. 너의 집이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것인데 그들이 믿음으로 너와 같이 네 집의 가장 천한 종까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도다”(눅 19:9)라고 말씀한다. 지금까지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임한다(4:22). 이제 약속과 특권과 구원의 수단이 이제까지는 유대 민족에게만 충족하게 임하였으나 실상 모든 민족에게 충분하다고도 만족하게 이루어졌다.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한 사건은 청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것임을 말한다. 이것이 완벽한 증거가 되었다. 즉 이방인들을 성도의 공동체로 영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이 사실은 명백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아마 그는 자기가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도 그는 복음을 전하고 싶은 은밀한 충동을 느꼈던 것 같다) “성령이 저희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뚜렷한 증거를 보이며 임하는지라. 이에 어떤 허위도 그 안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이같이 하나님은 이루어진 사실을 입증하셨고 자신이 그들을 시인하셨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설교는 확실히 성령이 부여한 것이 틀림 없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과 변론할 때도 성령의 임재를 전제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베드로는 이 자리에서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며 남기신 말씀을 상기하였다(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6절)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명백히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첫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요 그의 약속의 성취요 결과라는 것이다. 그 크신 약속은 그가 하늘 나라에 가실 때 그들에게 남기신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이 은사가 그에게서 온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도 그의 행위요 역사였다. 이는 그의 입으로 약속되었고 이제 그의 손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은 그의 가호하심의 징표였다. 둘째, 성령의 은사는 곧 일종의 세례이기도 하였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요, 이것은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세례였다. [3]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약속과 지금 협의되고 있는 은사를 비교하면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의 여부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결정지어질 문제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17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베푸신 자들을 물로 세례 주는 것을 내가 거절하겠느뇨? 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일을 베푸신 그 표적을 부인하겠느뇨? 내가 누구라고 그렇게 하겠는가? 천만에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내가 신의 뜻을 거역하며 또는 하늘의 경륜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제 하나님에게 항거하던 심령들이 회개하는 것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들은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교통하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아 일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주께서 말씀하신 약속과 지금 협의되고 있는 은사를 비교하면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 즉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의 여부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결정지어질 문제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17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베푸신 자들을 물로 세례 주는 것을 내가 거절하겠느뇨? 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미있는 일을 베푸신 그 표적을 부인하겠느뇨? 내가 누구라고 그렇게 하겠는가? 천만에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내가 신의 뜻을 거역하며 또는 하늘의 경륜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제 하나님에게 항거하던 심령들이 회개하는 것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들은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교통하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아 일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Ⅳ. 베드로의 이 문제에 대한 설명에 그들은 만족히 여겼고 만사는 잘되었다. 여호수아 22장 30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자기들끼리 요단강변에 제단을 세운 참 의도와 뜻을 비느하스와 이스라엘의 장노들에게 설명하였을 때 논쟁이 해결되고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즐겁게 여긴 것과 같은 경우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인신공격을 퍼부었는데 후에 그들의 입장이 부당하고 근거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고집을 꺾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비록 할례는 받았고 또 그들의 의견이 입장을 달리 했지만 그들이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 아래와 같이 행동하였다. 1. 그들은 비난을 멈추었다. 그들은 평정을 유지했고 베드로가 행한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공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을 행한 분이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되자 논쟁을 멈추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신들의 품격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동등하게 권한을 부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부심을 꺾으려 하심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바냐 3장 11절의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2. 그들은 돌이켜 베드로와 그 일행들을 칭송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논쟁을 그치고 화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이 교정된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그들은 비난을 멈추었다. 그들은 평정을 유지했고 베드로가 행한 것에 대하여 더 이상 공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을 행한 분이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되자 논쟁을 멈추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신들의 품격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동등하게 권한을 부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부심을 꺾으려 하심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제 스바냐 3장 11절의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그들은 돌이켜 베드로와 그 일행들을 칭송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논쟁을 그치고 화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이 교정된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불쌍한 이방인들에게 자기들보다 더 자비를 베풀어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심으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셔서 회개의 은혜도 허락하셨다. 그가 가시는 곳에서 위로자가 되시는 성령은 먼저 죄를 깨달아 알게 하시며 죄에 대해서 슬퍼하게 하시며 그 다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기쁨을 얻게 하신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참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영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참으로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삶, 거룩하고 신적인 천국 생활을 땅 위에서 실현함으로 그것을 명시해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이 까닭에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요,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삶이다.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살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되고 이것이 곧 생명이며 또한 생명 이상의 축복이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요, 참된 영생을 얻게 되며 결국은 그 기쁨을 맛보게 된다.
(2)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회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이며 또 우리 안에서 회개가 역사하게 하는 것도 그의 능력있는 은사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강퍅한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 드릴 희생은 상한 심령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 양을 준비하신다.
(3)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자 할 때는 언제나 회개케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용서의 위로를 얻고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갖는 데에, 또한 저 세상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즐길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존귀하게 하사 “이스라엘로 회개케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5:31), 이방인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셨음을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참된 회개는 생명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영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참으로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삶, 거룩하고 신적인 천국 생활을 땅 위에서 실현함으로 그것을 명시해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이 까닭에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요,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삶이다.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살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되고 이것이 곧 생명이며 또한 생명 이상의 축복이다. 그들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요, 참된 영생을 얻게 되며 결국은 그 기쁨을 맛보게 된다.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회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은혜이며 또 우리 안에서 회개가 역사하게 하는 것도 그의 능력있는 은사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강퍅한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 드릴 희생은 상한 심령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이 양을 준비하신다.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자 할 때는 언제나 회개케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용서의 위로를 얻고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갖는 데에, 또한 저 세상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즐길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존귀하게 하사 “이스라엘로 회개케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5:31), 이방인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셨음을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11:19 복음이 안디옥에 전파됨(사도행전 11:19-26) 본문에서 우리는 안디옥에 교회가 개척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수도로써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도성이었다. 안디옥 주교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주교 다음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성은 구약에서 하맛 또는 리블라라고 칭해지던 곳에 서 있었다. 이 역사책의 저자인 누가와 그가 쓰는 대상인 데오빌로도 안디옥 출신인 것같이 보여진다. 이곳에서 바울이 유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안디옥 출신이란 사실이 더욱 그로 하여금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도의 성공을 특기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안디옥 교회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자. Ⅰ. 거기에는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첫 복음 증거자들이 있었다. 이 박해는 약 5, 6년 전의 일로써(어떤 이들이 추정하는 대로) 스데반이 죽을 때 일어났던 것이었다(19절). 그 때에 그들이 “베니게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도를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박해를 당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세계 도처로 흩으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씨앗으로 숨겨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마찬가지로 교가 입은 상처는 이로 인하여 선을 이루고자 한 때문이다. 이는 야곱이 레위 지파에게(“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 49:8) 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된 것과 같다. 원수들은 그들을 흩어지게 함으로 지리멸렬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흩으시되 그들을 들어 쓰시고자 하신다. 이같이 인간의 노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자. 1. “환난을 피하여 도주한 자들은” 그렇다고 그들의 사명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 그들은 고난을 기피하였지만 아직 사명까지 기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은 일터에서 일하게 된다. 복음 전도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방 세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그러나 결국은 복음을 빨리 전파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사태를 생각지도 못하였었다.” 이 성에서 박해를 당한 사람들은 다른 성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신앙도 가지고 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으로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파하였다. 이래서 그들이 피한 것은 고통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요 자신들을 위험에서 보호함으로 더욱 사명을 수행하고자 한 것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2. 그들은 “여호와께서 기쁘하심으로 그들의 범사에 잘 되게 하심을” 알게 되자 더욱 힘을 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복음 전파가 성공하자 가나안 지경을 벗어나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시리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여행할수록 적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행을 계속하였다. Plus ultra – 즉 좀 더 멀리 가자는 것이 그들의 표어였다. 그들은 이같이 선한 사업을 하며, 주님을 받드는 아름다운 일을 함에 있어서 고통도 달게 받았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3. 그들은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유대인들은 곳곳마다 회당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이방인들도 같은 상속자이며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으로 귀화하여 교회에 입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불신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4. 그들은 특별히 안디옥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념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본문에서는 이들을 헬라인이라고 칭하고 있다(저자는 한글 개역 본문에 있는 헬라인을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으로 보지 않는다. 한글 개역 주 난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도라고 하였는데 저자는 그 사본의 입장을 따르는 것 같다. 즉 유대인에게 만이라도 하고 다시 헬라인에게도 전한다고 하면 문맥이 불일치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성서 주해나” 제롬의 단권 주석을 참고하면 본문을 이방의 헬라인으로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역자 주). 전도자들 중 대부분이 유대와 예루살렘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몇 명 즉 바나바나(4:36) 시몬(막 15:21) 같은 사람은 구브로와 구레네 태생의 유대인들로서 교육만 예루살렘에서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자기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있는 그들에게 전력을 기울였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거기서 헬라파 유대인들도 그냥 “헬라인” 또는 “그리스인”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 그들은 자치권과 참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헬라인의 도성과 같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들은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 예수가 계속 그들의 전도의 주제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이밖에 무엇을 전하겠는가. 다만 그리스도 –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분만 전해야 하리라.
5.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21절).
(1) 그들의 전도에는 신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그들의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이 일에 주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고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히 2:4)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사 그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루디아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서 열렸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명철한 이해를 주시므로 그들의 뜻을 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어난 날이야말로 능력의 날이었다. 이때에 자원자들이 주 예수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시 110:3).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사람들의 귀에밖에는 전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양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주의 손이 말씀에 함께 하사 듣는 이들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게 될 때 주의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여호와의 팔이”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날 때”(사 53:1)또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실 때”(사 8:11) 사람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믿게 된다.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역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기적을 행하였다.
(2) 선한 사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즉 그들이 수고한 외적인 악조건을 생각할 때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각종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제 모든 변화가 일어났는가 생각하여 보자.
[1] 그들이 믿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서에 기록하신 기록에 순종하였다. [2] 그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이” 그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서 주께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의에 대한 신뢰에서 돌아서 믿음으로 얻은 의인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직 의지하였다. 그들은 태만하고 부주의한 육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거룩하며 영적이며 신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겉치레와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데서 돌이켜 “신령과 진실로” 그에게 예배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한 회개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결과였다.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 체하여도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정성껏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환난을 피하여 도주한 자들은” 그렇다고 그들의 사명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 그들은 고난을 기피하였지만 아직 사명까지 기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은 일터에서 일하게 된다. 복음 전도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방 세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그러나 결국은 복음을 빨리 전파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사태를 생각지도 못하였었다.” 이 성에서 박해를 당한 사람들은 다른 성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신앙도 가지고 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으로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파하였다. 이래서 그들이 피한 것은 고통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요 자신들을 위험에서 보호함으로 더욱 사명을 수행하고자 한 것임이 나타나게 되었다.그들은 “여호와께서 기쁘하심으로 그들의 범사에 잘 되게 하심을” 알게 되자 더욱 힘을 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복음 전파가 성공하자 가나안 지경을 벗어나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시리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여행할수록 적들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행을 계속하였다. Plus ultra – 즉 좀 더 멀리 가자는 것이 그들의 표어였다. 그들은 이같이 선한 사업을 하며, 주님을 받드는 아름다운 일을 함에 있어서 고통도 달게 받았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들은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유대인들은 곳곳마다 회당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이방인들도 같은 상속자이며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으로 귀화하여 교회에 입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불신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그들은 특별히 안디옥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념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본문에서는 이들을 헬라인이라고 칭하고 있다(저자는 한글 개역 본문에 있는 헬라인을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으로 보지 않는다. 한글 개역 주 난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도라고 하였는데 저자는 그 사본의 입장을 따르는 것 같다. 즉 유대인에게 만이라도 하고 다시 헬라인에게도 전한다고 하면 문맥이 불일치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성서 주해나” 제롬의 단권 주석을 참고하면 본문을 이방의 헬라인으로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참고하기 바란다:역자 주). 전도자들 중 대부분이 유대와 예루살렘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몇 명 즉 바나바나(4:36) 시몬(막 15:21) 같은 사람은 구브로와 구레네 태생의 유대인들로서 교육만 예루살렘에서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자기들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있는 그들에게 전력을 기울였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거기서 헬라파 유대인들도 그냥 “헬라인” 또는 “그리스인”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 그들은 자치권과 참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헬라인의 도성과 같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들은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 예수가 계속 그들의 전도의 주제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이밖에 무엇을 전하겠는가. 다만 그리스도 –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분만 전해야 하리라.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21절).그들의 전도에는 신의 능력이 함께 하였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이는 이 말씀을 그들의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이 일에 주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고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히 2:4)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사 그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루디아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서 열렸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명철한 이해를 주시므로 그들의 뜻을 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어난 날이야말로 능력의 날이었다. 이때에 자원자들이 주 예수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시 110:3).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사람들의 귀에밖에는 전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양심에까지 이르게 하셨다. 주의 손이 말씀에 함께 하사 듣는 이들의 마음에 이 말씀을 새기게 될 때 주의 말씀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여호와의 팔이”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날 때”(사 53:1)또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알게 하실 때”(사 8:11) 사람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믿게 된다.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역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그들은 기적을 행하였다.선한 사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즉 그들이 수고한 외적인 악조건을 생각할 때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각종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제 모든 변화가 일어났는가 생각하여 보자.그들이 믿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서에 기록하신 기록에 순종하였다.그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이” 그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서 주께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의에 대한 신뢰에서 돌아서 믿음으로 얻은 의인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직 의지하였다. 그들은 태만하고 부주의한 육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거룩하며 영적이며 신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겉치레와 외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데서 돌이켜 “신령과 진실로” 그에게 예배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임한 회개의 역사였다. 그리고 이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결과였다. 성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 체하여도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정성껏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Ⅱ. 이렇게 하여 안디옥에서 시작한 선한 사업은 계속 수행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개척된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으로 더욱 성장하여 활기에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 바나바와 사울은 다른 전도자들이 세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운 사람들이었고 다른 전도자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한”자들이었다(요 4:37, 38). 1.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거기 새로 출범한 교회를 양육하고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의 힘이 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기 있는 교회가 명성을 얻도록 그곳에 바나바를 보냈다.(1) 사도들은 안디옥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22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주변의 지방에서 복음 사업이 어떻게 계속되는가를 늘 탐문하였다. 아마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서신 왕래를 계속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회심하였다는 소문이 곧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달된 것 같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급히 파송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서 이들의 희망찬 시작을 돕고 격려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를 사절로서 또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로서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축하하려고 보냈다. 복음이 그곳에 전파된 사실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들에게 다 같은 기쁨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 기뻐하였다. 그는 멀리 안디옥까지 가야만 했다. 그것은 먼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멀어도 그는 기꺼이 공적인 사명을 위하여 여행을 착수하였다. 아마도 바나바는 이런 사명에 특별한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고향에서 선행하기를 좋아하듯이 그는 멀리 떠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은 이사갈의 장막에서 즐거워하였으나 스블론이 나가기를 즐거워하였듯이 바나바도 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재능이 이러하였으므로 그가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하나님은 각자의 임무에 따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다.
(3) 바나바는 복음이 정착된 것과 그와 같은 고향 사람들인 구브로 사람들이(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 4:36) 복음 전파에 수고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23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안디옥 사람들을 향하신 선하신 뜻과 그들 가운데 행하신 그의 역사의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한동안 그들을 유의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중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 또 그들의 가족에서 그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는 곳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은사가 나타날 때는 그 은사를 소유해야 한다. 어떤 일에서든지 거기 선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하고 그 은혜를 주신 데 대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은혜로 말미암은 위로를 받아야하며 그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볼 때 기뻐해야 하며 더구나 우리가 기대치 않던 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더욱 기뻐해야 한다.
(4) 바나바는 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pareka,lei – 즉 그들을 교훈하였다. 바나바의 이름도 해석하면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4:36). 즉 바나바는 ui`o.j paraklh.sewi – 즉 교훈의 아들이었다. 교훈하는 일은 이처럼 그의 재능이었으므로 그는 그 일에 주력하였다. 로마서 12장 8절에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할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다. 또 그의 이름을 다르게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인데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위로하며 권고하였다”(AV에는 “위로하며”가 더 삽입되어 있음:역자 주). 그가 그들 가운데 시작된 선한 사업을 기뻐한 것만치 그는 더욱 진지하게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역사하기 시작한 선한 일을 추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위로할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고 그러므로 더욱 정성껏 그들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1]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였다.” “주님께 전향한 사람들은” 그를 따르다가 낙심하거나 기진하고 피곤하지 않도록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은 그를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에게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를 붙잡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붙잡힘을 당해야 “주님과 그의 능력있는 역사 안에서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다.” [2] 전심으로 지력을 동원하여 확고하게 그리고 결사적인 각오를 가지고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좋은 땅에 세워져야 하며 또 그 기초 위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시 108:1).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영에 굳게 결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룻처럼 “나를” 그에게서 “떠나도록 강권하지 마옵소서”라든지 또는 “그를 따르는 일을 그만두고 돌아서라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5) 본문에는 그의 훌륭한 품성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이 기회에 그의 그러한 성품이 입증되었다.
[1] 그는 자기가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예의바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이 기회에 나타냈고 또한 친절하며 남을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 즉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주의 사역자들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칭송을 통하여 자신과 그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착한 사람 즉 구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 것을 보아 이를 알 수 있다(4:37). [2] 이 사실로 보아 그에게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풍성히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의 영으로 인한 능력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본래 착한 성격을 타고 태어났어도 이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그는 믿음 즉 기독교 신앙이 충만하였으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는 믿음의 은혜가 충만하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였다. 그는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그런고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강권하였다.(6)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굳게 세울 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므로 선한 일에 도구가 되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교회가 더하여갔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많았다. “말씀대로 하였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2. 바나바가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파 사업에 그를 참여시켰다. 우리가 사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을 때 그가 자기 태어난 곳인 다소로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에 그는 거기서 계속 머물면서 선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제 바나바가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안디옥에서 일할 수 있다. 기회가 있다는 것과 그가 와서 거기서 함께 얼마동안 머물기를 요청하기 위하여 다소로 여행하였다(25, 26절). 여기서도 바나바가 두 가지 점에서 착한 종류의 사람인 것이 나타난다.
(1) 그가 은둔해 있는 사람을 들어 활동적이고 유용한 사람으로 인도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그를 경계하였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사울을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고 사울을 쫓겨간 시골 구석에서 보다 넓은 일터로 끌어낸 것도 바로 그였다. 말 아래 있는 등불을 가져다가 동경 위에 세우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다.
(2) 그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다가 “설교자”(14:12)로 삼았다. 아마도 사울은 더욱 인기있는 설교자가 된 것 같고 그가 이같이 빛을 발하므로 바나바는 여기서 인기가 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바나바는 일이 공적인 사업을 위한 것이었을 때 그가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사업을 이루고자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이 더 큰 능력과 보다 광범한 기회를 지녔고 또한 우리보다 더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우리는 이를 기쁘게 여겨야 한다.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오는 것이 자기에게는 손해였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보다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쁘게 그렇게 하였다.
3. 우리는 본문에서 더 많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울과 바나바는 일 년 동안 계속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였고 복음을 전하였다(26절).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신도들은 자주 모였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집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명예와 또한 그의 제자들이 위로를 받고 유익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주 “회막 앞에서” 모였다. 이제 집회처는 무수히 늘어났다. 그러나 비록 여러 가지 곤경과 난관이 있더라도 그들은 함께 모여야만 한다. [2] 교역자들은 이 집회의 주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들 – 이 집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한 그로부터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것인데 -을 주관하며 소송을 처리하며 또는 봉사하는 일을 한다. [3] 백성들은 가르치는 것은 교역자들이 집회를 주관할 때 그들이 해야할 임무의 하나다.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중재자이며 또한 성서를 펴서 백성들에게 주님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4] 교역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거대한 고기떼가 몰려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 [5] 설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믿게 하고 회개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는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2) 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영예는 어떤 것이었는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칭함으로써 자기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런 칭호를 붙인 것 같다. 이 칭호가 교회나 또는 교역자들의 엄숙한 선언을 통해 정해진 것인지 또는 그들이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자주 사용해서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이 거기서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두 위대한 인물들이 거기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무리들의 추종을 받고 어떤 반대에도 직면하지 않은 사실과 기독교인의 집회가 그 어느 곳보다 흥성하였고 더욱 늘어난 것을 보면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거기서 처음 기독교인이란 칭호가 생긴 것 같다. 안디옥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는 모교회가 될 수 있었다면 오히려 로마보다는 안디옥이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포기한 사람들이 “제자들 또는 생도들”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이는 그리스도 아래서 양육되어 그들이 그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기독교인이라 불리워졌다.
[1] 이같이 되어서 그들의 적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붙인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된 것 같다. 교회의 원수들은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고(24:5) 정당한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이 편벽된 생각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명칭을 정하였고 그러므로 기독교의 적들도 바르게 그들을 호칭할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2] 이렇게 해서 개종 전에 유대인 또는 이방인이라는 명칭 때문에 구분되던 그들이 개종 후에는 한 가지 같은 명칭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이러므로 전에 그들을 구분 짓던 명칭을 잊게 하는데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또 전의 구분된 명분을 교회에까지 끌고 들어와 문제를 삼게되지 않도록 되었으며 그러므로 양속의 자손들이 교회로 쉽게 들어올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나는 유대인이었노라”라든가 또는 “나는 이방인이었노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양자가 모두 “나는 기독교인이외다”라고 말해야만 하도록 되었다. [3] 이와 같이 그들은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고 그들이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플라톤의 생도들이 자기들을 플라토니스트라고 부르던 것처럼 또는 다른 위대한 사람들의 제자들이 그들을 선생의 후예임을 호칭함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듯이 그들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명칭을 그의 이름인 “예수”라는 데서 취하지 않고 그의 직능을 나타내는 칭호인”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란 명칭에서 그들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호칭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그 때문에 죽기도 하는 진리임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적들은 이 칭호를 욕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렸다. “이로써 내가 낮아진다 할지라도 내가 더 낮아지리이다”라고 그들은 겸손해하였다. [4]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그들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수납되었다. 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아신 그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자신들도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요일 2:20, 27). 그리고 고린도 후서 1장 2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들은 고백하였다. [5] 이같이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존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고백하도록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도에 복종할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책임을 부과하였고 그리스도의 본을 받으며 또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 “그에게 존귀와 찬양을 돌리도록 하였다.” 우리도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독교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존귀한 이름을 욕보일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더대왕이, 겁쟁이로서 알려진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닌 한 병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Aut nomen, aut mores muta – 즉 너의 이름을 바꾸든가 너의 태도를 바꾸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듯이 다른 사람들도 기독교인임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마음에 품은 모든 일에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인 것이다. [6] 이렇게 되어서 “성령 말씀이 성취되었다.” 복음적인 교회에 관하여 이사야 62장 2절에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 예언되었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타락하고 쇠퇴하여가는 유대 교회에 대하여는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사 5:15)함과 같이 되었다.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거기 새로 출범한 교회를 양육하고 복음 전도자들과 신자들의 힘이 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기 있는 교회가 명성을 얻도록 그곳에 바나바를 보냈다.사도들은 안디옥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22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주변의 지방에서 복음 사업이 어떻게 계속되는가를 늘 탐문하였다. 아마 그들은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서신 왕래를 계속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회심하였다는 소문이 곧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달된 것 같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그들은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급히 파송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서 이들의 희망찬 시작을 돕고 격려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를 사절로서 또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로서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축하하려고 보냈다. 복음이 그곳에 전파된 사실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들에게 다 같은 기쁨이 되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 기뻐하였다. 그는 멀리 안디옥까지 가야만 했다. 그것은 먼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멀어도 그는 기꺼이 공적인 사명을 위하여 여행을 착수하였다. 아마도 바나바는 이런 사명에 특별한 재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활동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고향에서 선행하기를 좋아하듯이 그는 멀리 떠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은 이사갈의 장막에서 즐거워하였으나 스블론이 나가기를 즐거워하였듯이 바나바도 이런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재능이 이러하였으므로 그가 이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였다. 하나님은 각자의 임무에 따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다.바나바는 복음이 정착된 것과 그와 같은 고향 사람들인 구브로 사람들이(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 4:36) 복음 전파에 수고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다(23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안디옥 사람들을 향하신 선하신 뜻과 그들 가운데 행하신 그의 역사의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한동안 그들을 유의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중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 또 그들의 가족에서 그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는 것을 보았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있는 곳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은사가 나타날 때는 그 은사를 소유해야 한다. 어떤 일에서든지 거기 선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하고 그 은혜를 주신 데 대하여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은혜로 말미암은 위로를 받아야하며 그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볼 때 기뻐해야 하며 더구나 우리가 기대치 않던 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더욱 기뻐해야 한다.바나바는 그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pareka,lei – 즉 그들을 교훈하였다. 바나바의 이름도 해석하면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4:36). 즉 바나바는 ui`o.j paraklh.sewi – 즉 교훈의 아들이었다. 교훈하는 일은 이처럼 그의 재능이었으므로 그는 그 일에 주력하였다. 로마서 12장 8절에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할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다. 또 그의 이름을 다르게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인데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위로하며 권고하였다”(AV에는 “위로하며”가 더 삽입되어 있음:역자 주). 그가 그들 가운데 시작된 선한 사업을 기뻐한 것만치 그는 더욱 진지하게 그들과 함께 거하면서 역사하기 시작한 선한 일을 추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위로할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고 그러므로 더욱 정성껏 그들에게 복음 증거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였다.” “주님께 전향한 사람들은” 그를 따르다가 낙심하거나 기진하고 피곤하지 않도록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 붙어 있는 것은 그를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에게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를 붙잡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붙잡힘을 당해야 “주님과 그의 능력있는 역사 안에서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다.”전심으로 지력을 동원하여 확고하게 그리고 결사적인 각오를 가지고 그에게 매달려야 한다. 좋은 땅에 세워져야 하며 또 그 기초 위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시 108:1).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영에 굳게 결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룻처럼 “나를” 그에게서 “떠나도록 강권하지 마옵소서”라든지 또는 “그를 따르는 일을 그만두고 돌아서라 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본문에는 그의 훌륭한 품성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이 기회에 그의 그러한 성품이 입증되었다.그는 자기가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예의바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이 기회에 나타냈고 또한 친절하며 남을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 즉 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주의 사역자들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칭송을 통하여 자신과 그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착한 사람 즉 구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 것을 보아 이를 알 수 있다(4:37).이 사실로 보아 그에게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풍성히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의 영으로 인한 능력이 충만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본래 착한 성격을 타고 태어났어도 이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는 믿음 즉 기독교 신앙이 충만하였으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는 믿음의 은혜가 충만하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가 풍성하였다. 그는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그런고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강권하였다.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굳게 세울 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므로 선한 일에 도구가 되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교회가 더하여갔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많았다. “말씀대로 하였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바나바가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에서의 복음 전파 사업에 그를 참여시켰다. 우리가 사울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을 때 그가 자기 태어난 곳인 다소로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에 그는 거기서 계속 머물면서 선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제 바나바가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안디옥에서 일할 수 있다. 기회가 있다는 것과 그가 와서 거기서 함께 얼마동안 머물기를 요청하기 위하여 다소로 여행하였다(25, 26절). 여기서도 바나바가 두 가지 점에서 착한 종류의 사람인 것이 나타난다.그가 은둔해 있는 사람을 들어 활동적이고 유용한 사람으로 인도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그를 경계하였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사울을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고 사울을 쫓겨간 시골 구석에서 보다 넓은 일터로 끌어낸 것도 바로 그였다. 말 아래 있는 등불을 가져다가 동경 위에 세우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다.그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다가 “설교자”(14:12)로 삼았다. 아마도 사울은 더욱 인기있는 설교자가 된 것 같고 그가 이같이 빛을 발하므로 바나바는 여기서 인기가 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바나바는 일이 공적인 사업을 위한 것이었을 때 그가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사업을 이루고자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이 더 큰 능력과 보다 광범한 기회를 지녔고 또한 우리보다 더 좋은 일을 많이 한다면 우리는 이를 기쁘게 여겨야 한다.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에 데려오는 것이 자기에게는 손해였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보다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쁘게 그렇게 하였다.우리는 본문에서 더 많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울과 바나바는 일 년 동안 계속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였고 복음을 전하였다(26절).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신도들은 자주 모였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집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명예와 또한 그의 제자들이 위로를 받고 유익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주 “회막 앞에서” 모였다. 이제 집회처는 무수히 늘어났다. 그러나 비록 여러 가지 곤경과 난관이 있더라도 그들은 함께 모여야만 한다.교역자들은 이 집회의 주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들 – 이 집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또한 그로부터 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것인데 -을 주관하며 소송을 처리하며 또는 봉사하는 일을 한다.백성들은 가르치는 것은 교역자들이 집회를 주관할 때 그들이 해야할 임무의 하나다. 그들은 기도와 찬양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중재자이며 또한 성서를 펴서 백성들에게 주님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이다.교역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것은 마치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거대한 고기떼가 몰려있는 곳에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설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믿게 하고 회개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는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영예는 어떤 것이었는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칭함으로써 자기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런 칭호를 붙인 것 같다. 이 칭호가 교회나 또는 교역자들의 엄숙한 선언을 통해 정해진 것인지 또는 그들이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자주 사용해서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이 거기서 생겨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두 위대한 인물들이 거기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무리들의 추종을 받고 어떤 반대에도 직면하지 않은 사실과 기독교인의 집회가 그 어느 곳보다 흥성하였고 더욱 늘어난 것을 보면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거기서 처음 기독교인이란 칭호가 생긴 것 같다. 안디옥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는 모교회가 될 수 있었다면 오히려 로마보다는 안디옥이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포기한 사람들이 “제자들 또는 생도들”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이는 그리스도 아래서 양육되어 그들이 그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기독교인이라 불리워졌다.이같이 되어서 그들의 적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붙인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된 것 같다. 교회의 원수들은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고(24:5) 정당한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게 하려고 하였다. 이 편벽된 생각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명칭을 정하였고 그러므로 기독교의 적들도 바르게 그들을 호칭할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이렇게 해서 개종 전에 유대인 또는 이방인이라는 명칭 때문에 구분되던 그들이 개종 후에는 한 가지 같은 명칭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이러므로 전에 그들을 구분 짓던 명칭을 잊게 하는데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또 전의 구분된 명분을 교회에까지 끌고 들어와 문제를 삼게되지 않도록 되었으며 그러므로 양속의 자손들이 교회로 쉽게 들어올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나는 유대인이었노라”라든가 또는 “나는 이방인이었노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양자가 모두 “나는 기독교인이외다”라고 말해야만 하도록 되었다.이와 같이 그들은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고 그들이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플라톤의 생도들이 자기들을 플라토니스트라고 부르던 것처럼 또는 다른 위대한 사람들의 제자들이 그들을 선생의 후예임을 호칭함으로 자랑스럽게 여겼듯이 그들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명칭을 그의 이름인 “예수”라는 데서 취하지 않고 그의 직능을 나타내는 칭호인”그리스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란 명칭에서 그들의 명칭을 만들었다. 이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호칭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그 때문에 죽기도 하는 진리임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적들은 이 칭호를 욕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렸다. “이로써 내가 낮아진다 할지라도 내가 더 낮아지리이다”라고 그들은 겸손해하였다.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그들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이 그에게 수납되었다. 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아신 그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자신들도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요일 2:20, 27). 그리고 고린도 후서 1장 2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들은 고백하였다.이같이 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보존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고백하도록 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법도에 복종할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책임을 부과하였고 그리스도의 본을 받으며 또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드려 “그에게 존귀와 찬양을 돌리도록 하였다.” 우리도 기독교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독교인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란 존귀한 이름을 욕보일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더대왕이, 겁쟁이로서 알려진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닌 한 병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Aut nomen, aut mores muta – 즉 너의 이름을 바꾸든가 너의 태도를 바꾸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을 듣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듯이 다른 사람들도 기독교인임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 기독교인은 마음에 품은 모든 일에 그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인 것이다.이렇게 되어서 “성령 말씀이 성취되었다.” 복음적인 교회에 관하여 이사야 62장 2절에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라” 예언되었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타락하고 쇠퇴하여가는 유대 교회에 대하여는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사 5:15)함과 같이 되었다.
11:27 안디옥에서의 바나바(사도행전 11:27-30) 우리 주님 예수께서 “승천하셨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그는 “사도나 전도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예언자들에게 부어 주셨다.” 이 예언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예견하고 또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기독교의 진리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왜냐하면 이들 예언자들이 예언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짐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신 18:22; 렘 28:9)], 교회에 대단한 유익을 끼쳤고 교회를 이끌어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제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Ⅰ. 이러한 예언자들 몇 명이 안디옥을 방문하였다(27절). “그 때에” 즉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 살고 있던 해에 “선지자들이 예수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다.” 이들의 수가 몇인지도 알 수는 없고 또한 나중에 “안디옥 교회에서”(13:1) 알게 된 몇 명의 선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1.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전처럼 존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로 그들의 사명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야할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을 농락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으므로 이제 이들 예언자들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
2. 그들은 안디옥에 왔다. 이는 그들이 교회가 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이 어떤 봉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또한 그것을 다스릴 수도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왔고 그들이 그 교훈을 잘 받아들이자 그리스도가 약속한 것처럼 “장차 되어질 일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예언자들의 보냄을 받았다(요 16:13).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일이 맡기어진다. 또한 성서의 예언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교훈을 잘 복종할 줄 아는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전처럼 존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느 정도로 그들의 사명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그들이 다른 곳으로 가야할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을 농락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으므로 이제 이들 예언자들까지 빼앗기게 된 것이다.그들은 안디옥에 왔다. 이는 그들이 교회가 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러므로 거기서 그들이 어떤 봉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또한 그것을 다스릴 수도 있어야 한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왔고 그들이 그 교훈을 잘 받아들이자 그리스도가 약속한 것처럼 “장차 되어질 일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예언자들의 보냄을 받았다(요 16:13).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일이 맡기어진다. 또한 성서의 예언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교훈을 잘 복종할 줄 아는 것이라 하겠다. Ⅱ. “아가보”라고 하는 이들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기근이 다가온다는 특별한 예언을 하였다. 우리는 그가 바울이 갇히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다시 읽게 된다(21:10, 11). 본문에 그가 일어났다 하였다. 아마도 그들의 어떤 집회처에서였던 것 같다. 거기서 그는 예언을 하였다(28절). 1. 그러면 그가 예언한 것은 무엇때문이었는가? 그가 말한 것은 자신에 대한 것이나 또는 자기의 환상을 말한 것이나 점성술적인 예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또는 현재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추정하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성령으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다.” 요셉이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바로의 꿈을 해득하고 애굽의 기근을 예고하였고 마찬가지로 아합 때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기근을 예언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그의 비밀을 나타내신다.
2. 예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기후의 불순 때문에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빵이 없어서 굶어죽으리라는 것이었다. 특징 지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천하가 즉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로마제국전체가 흉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 전의 알렉산더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천하”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근이 있을 것을” 일괄적으로 예언하셨다(마 24:7; 막 8:8; 눅 21:11). 그러나 아가보는 이제 임박한 특정 기근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3. 기근의 도래. “기근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통치 이년 째에서 시작하여 적어도 사년되는 해까지 계속하였다. 요세푸스를 포함한 몇 명의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풍성한 만나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양식인 빵을 없이하여 기근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이같이 하나님은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매 맺지 못하자 하나님은 땅이 그들에게 열매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그가 예언한 것은 무엇때문이었는가? 그가 말한 것은 자신에 대한 것이나 또는 자기의 환상을 말한 것이나 점성술적인 예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또는 현재 일어나는 일의 결과를 추정하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성령으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다.” 요셉이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바로의 꿈을 해득하고 애굽의 기근을 예고하였고 마찬가지로 아합 때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기근을 예언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그의 비밀을 나타내신다.예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기후의 불순 때문에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어” 곡식이 귀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빵이 없어서 굶어죽으리라는 것이었다. 특징 지역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천하가 즉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로마제국전체가 흉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 전의 알렉산더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천하”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근이 있을 것을” 일괄적으로 예언하셨다(마 24:7; 막 8:8; 눅 21:11). 그러나 아가보는 이제 임박한 특정 기근에 대하여 예언하였다.기근의 도래. “기근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통치 이년 째에서 시작하여 적어도 사년되는 해까지 계속하였다. 요세푸스를 포함한 몇 명의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풍성한 만나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양식인 빵을 없이하여 기근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다. 이같이 하나님은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매 맺지 못하자 하나님은 땅이 그들에게 열매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Ⅲ. 그들은 이 예언에 잘 대처하였다. 기근이 임박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애굽인들처럼 곡식을 비축하지 않고 기독교인답게 구제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구제야말로 우리 자신의 고통과 결핍에 대한 최선의 준비책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시 41:1, 2)라고 약속되었고 또한 시편 37편 19, 21절에는 “자비를 베풀고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들은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리라”고 약속되었다. 또한 누가복음 12장 33절을 보면 곤혹한 때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준비는 이 약속을 믿고 선을 행하며 서로 돕는 데 있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절약하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서는 “무슨 재앙이 이 땅에 임할는지 알지 못하므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인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준비 방법이라고 한다(전 12:2).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들이 결정한 내용. “제사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다”(29절).
(1) 그들이 구제의 대상으로 추천받은 사람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다.” 비록 우리가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갈 6:10).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특히 하나님의 백성 중 가난한 사람들은 돌보아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첫 번 구제를 통하여 배웠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를 계속하였으므로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4:3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성도들의 교제는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안디옥 교회는 그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서 구제품을 준비한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금품을 보내는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흔히 하던 일이었던 것 같다.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들은 구제품을 수집하였다[툴리(Tully)는 그의 시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유대에는 다른 지방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혹 부자가 있다해도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기아를 면케 할 수는 없었다. 유대에 기근이 닫친 이유는 “그곳에 사는 자들의 불의로” 전에는 비옥하였던 땅이 토박하게 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민족들과 교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그 지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대다수가 가난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마 11:5 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그들은 가난한 자의 명부에서 제외되고 따라서 공적인 구제를 받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기근이 임하면 그들이 곤경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요,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단한 욕이 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기근이 다가옴을 알자, 미리 배려를 하여 그들에게 비축해 둘 곡식을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근이 닥칠 때까지 구제를 지연하고 있다가 때가 늦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2) 제자들은 이 일에 합의를 보았다. 즉 “각각 그 힘대로” 이 선한 사업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한편 다른 나라들에 있는 해외의 유대인들은 상업으로 돈을 벌었고 또 이들 부유한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풍부한 재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가난한 형제들의 곤경을 돌아보는 데”이용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자들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잘 거래하는 상인과 같다. 그리고 상인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물품을 보내어 거래를 하듯이 우리도 구제를 필요로 하는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제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 우리는 앞장서서 이를 행해야 한다. “그들 각 사람은 각각 능력에 따라” 그와 그의 가족을 부양하고 남은 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데 따라서” 많이 또는 적게 무엇이고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우리의 힘에 따라”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이 어디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바른 판다나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2. 그들이 행한 것. 그들은 그들이 결정한 대로 행하였다(30절). 그들이 “이를 실행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즉 그들은 말로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 이런 종류의 선행이 작성되고 추진되지만 실행되기는 어렵고 따라서 무위로 끝나기가 쉽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어 물품이 모이었고 그들이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도 한시의 틈도 없었지만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거기 장로들에게 물품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1) 그들은 “유대 교회에 있는 장로들” 즉 지방 교회 감독자며 사역자인 그들에게 보냈다. 왜냐하면 분배해 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것이므로 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서 장로들이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 이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갈 기회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고 그랬기에 기꺼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에 이레이트(Irates) 왕이 예루살렘의 각료들에게 개인적인 구제품을 보냈다고 하였다. 아디아베니의 여왕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곳과 인접 지방에서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구브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식량을 요청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바울이 무아경지에 들어간 시기를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쓰기 14년 전으로 계산한다(고후 12:1, 2). 그에 의하면 이 구제품과 헌금을 가지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때가 그가 황홀경에 들어갔던 때라고 본다. 즉 이 때에 그는 성전에서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였고(이 사실을 22:17 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무아경지에서 그는 “삼층천의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였고 따라서 그는 곧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본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특별한 경우에 교회 구제품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비난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속 구제 문제에 몰두한다면 더 중대한 문제를 경솔히 취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에 자신들을 드려야 함을 기억하자.
그들이 결정한 내용. “제사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다”(29절).그들이 구제의 대상으로 추천받은 사람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다.” 비록 우리가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권속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기울여야 한다(갈 6:10).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도 무시되어서는 안 되지만 특히 하나님의 백성 중 가난한 사람들은 돌보아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첫 번 구제를 통하여 배웠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제를 계속하였으므로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4:3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성도들의 교제는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안디옥 교회는 그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서 구제품을 준비한다.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금품을 보내는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흔히 하던 일이었던 것 같다.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들은 구제품을 수집하였다[툴리(Tully)는 그의 시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유대에는 다른 지방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혹 부자가 있다해도 그들이 가난한 자들의 기아를 면케 할 수는 없었다. 유대에 기근이 닫친 이유는 “그곳에 사는 자들의 불의로” 전에는 비옥하였던 땅이 토박하게 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민족들과 교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그 지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대다수가 가난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마 11:5 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그들은 가난한 자의 명부에서 제외되고 따라서 공적인 구제를 받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기근이 임하면 그들이 곤경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요,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단한 욕이 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기근이 다가옴을 알자, 미리 배려를 하여 그들에게 비축해 둘 곡식을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근이 닥칠 때까지 구제를 지연하고 있다가 때가 늦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제자들은 이 일에 합의를 보았다. 즉 “각각 그 힘대로” 이 선한 사업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한편 다른 나라들에 있는 해외의 유대인들은 상업으로 돈을 벌었고 또 이들 부유한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풍부한 재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가난한 형제들의 곤경을 돌아보는 데”이용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자들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을 잘 거래하는 상인과 같다. 그리고 상인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물품을 보내어 거래를 하듯이 우리도 구제를 필요로 하는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제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받을 때 우리는 앞장서서 이를 행해야 한다. “그들 각 사람은 각각 능력에 따라” 그와 그의 가족을 부양하고 남은 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데 따라서” 많이 또는 적게 무엇이고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우리의 힘에 따라”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이 어디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바른 판다나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그들이 행한 것. 그들은 그들이 결정한 대로 행하였다(30절). 그들이 “이를 실행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즉 그들은 말로만 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 이런 종류의 선행이 작성되고 추진되지만 실행되기는 어렵고 따라서 무위로 끝나기가 쉽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추진되어 물품이 모이었고 그들이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도 한시의 틈도 없었지만 “그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거기 장로들에게 물품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그들은 “유대 교회에 있는 장로들” 즉 지방 교회 감독자며 사역자인 그들에게 보냈다. 왜냐하면 분배해 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것이므로 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서 장로들이 직접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이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보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갈 기회가 있기를 바랐던 것 같고 그랬기에 기꺼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에 이레이트(Irates) 왕이 예루살렘의 각료들에게 개인적인 구제품을 보냈다고 하였다. 아디아베니의 여왕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그곳과 인접 지방에서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구브로와 알렉산드리아에 식량을 요청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바울이 무아경지에 들어간 시기를 바울이 고린도 후서를 쓰기 14년 전으로 계산한다(고후 12:1, 2). 그에 의하면 이 구제품과 헌금을 가지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때가 그가 황홀경에 들어갔던 때라고 본다. 즉 이 때에 그는 성전에서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였고(이 사실을 22:17 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무아경지에서 그는 “삼층천의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실 것을 말씀하였고 따라서 그는 곧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라이트푸트(Lightfoot)박사는 본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특별한 경우에 교회 구제품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비난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속 구제 문제에 몰두한다면 더 중대한 문제를 경솔히 취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에 자신들을 드려야 함을 기억하자.
사도행전11장 주석
사도행전11장
11:1-18.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그곳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임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와 그와 함께 갔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 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루살렘에 있는 소수의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행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랍비들의 유전이었다.
베드로가 욥바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랴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지시하신 일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1:17)”라고 말하였다. 베드로의 말은 초대교회가 그들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권위의 기초가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는 베드로의 대답과 이 말을 들은 교회가 보여 준 태도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 또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느냐”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얻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일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전까지만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최종 권으로 믿는다면 우리 가운데 일치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인하여 분열되어서는 안 되고 다름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겸손히 하나님을 바랄 때,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밝혀 주실 것이다. 이처럼 권위의 기초를 하나님께 둘 때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언제나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복종해야할 권위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밝혀졌을 때 그들은 잠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 “잠잠했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 중지되었다는 의미고 또한 서로 하나 되었다는 의미다.
11:19-27.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성령님은 빌립을 통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그리고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성령님은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셨다. 특별히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시작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이방 세계의 선교를 위한 기회로 작용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시간이 더해감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안디옥은 이런 관심이 구체적으로 실현 된 곳이다.
“구브로와 구례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0.21)” 여기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몇 사람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안디옥교회는 이름 없는 몇 사람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가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최초로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졌고 또한 이곳에서 세계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480㎞ 북쪽과 지중해 연안에서 32㎞ 동쪽 오론테스 강에 위치하여 오론테스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레바논과 타우러스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 안디옥은 셀류쿠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이며 1세기의 안디옥은 동서 문화가 혼합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1/7정도 되었다. 안디옥은 궤변 철학과 문화로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악덕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다프니스의 아름다운 유락 공원은 온갖 도덕적 타락의 중심지였고 Daphnic mores란 표현은 방탕한 생활에 대한 격언이 되었다. 이런 곳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몇 사람이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적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는 은혜의 기회가 주어져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곳은 영원히 타락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책임적 존재인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11:22-24)” 안디옥 교회의 소식은 예루살렘교회에 전해졌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본문은 그에 대하여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11:24)”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내어 놓음으로 가난한 자들과 나눔을 실천한 자이고(4:36,37), 또한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있을 때 그의 보증인이 되어 주었고(9:27),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추천하여 그로 하여금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중심이 되게 했다(11:25,26). 이처럼 준비된 바나바를 통하여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함으로 그곳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행한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은 사울을 교회의 일군으로 세운일일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안디옥교회는 세계 선교를 위하여 기초를 놓은 교회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교회로 초청하여 일군으로 세운 것은 사울이 회심한 이후 항상 복음 전하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한 일과 그리고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으로 초청하여 일군으로 세운 일 등은 교회가 합당한 일군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 준다. 교회는 합당한 일군을 세울 때 부흥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합당한 일군을 발굴하여 그를 일군으로 세우는 일이다. 바나바와 사울의 가르침을 통하여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11:27-30.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바나바와 사울의 지도 가운데 있는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기초를 놓은 교회로서 또는 최초로 이방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교회로서 뿐만 아니라 최초로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하여 헌금해 준 교회로서도 기억되는 교회가 되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교회에 온 선지자들 가운데 아가보라는 사람은 천하에 크게 흉년이 들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이 예언이 글라우디오 때에 이루어 졌다. 여기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황제 이름이다. 그는 AD45-54 년 동안 로마의 황제로 재위하였다. 이때 안디옥교회는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유다의 형제들을 위하여 헌금하여 그것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전달해 주었다. 이때 안디옥교회도 동일하게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형제들을 생각한 것은 바나바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초기에도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므로 가난한 자들과 나누었던 자다. 이처럼 교회의 모습은 누구에 의하여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에 전적으로 의존 되어 있는 것이다.
2020. 11. 12.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사도행전 11장 주석 성경말씀] 안디옥 교회의 설립(행 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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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에서는 고넬료가 회개하고 구원받은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행 11:1-30)
1-18절, 베드로의 보고
본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성도들 앞에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다.
[1-3절]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그와 다투어]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유대인들은 세계 복음화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지 않으셨던가?(마 28:19). 또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행 1:8).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어두웠고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기대나 인식이 도무지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이방인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4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전도함으로 이방인 신자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 동료 사도들이나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했을 때 사도적 권위로나 특히 사도들의 대표자의 권위로 말하거나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특별한 권위를 주지 않으셨다고 본다.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단지 직분 자체의 권위라기보다 그것과 더불어 진리의 바른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 진리에 일치하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품과 삶에서 나오는 권위이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교인들의 오해나 비난에 대해 그 동안 되어진 상황을 차례대로, 차근히 설명했다. 그는 후에 그의 서신에서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사도 바울도 교훈하기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라”고 하였다(딤후 2:24).
[5-12절]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또 보라, 바로 그때에](원문, KJV, NASB)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했다. 그 환상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에게 나타난 환상은 세 번 반복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요 뜻임을 나타내었다. 그가 환상을 본 직후 세 사람이 그가 우거한 집 앞에 찾아 왔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성령께서는 베드로 속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그들과 함께 가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욥바의 여섯 형제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 여섯 형제들은 베드로가 하는 이 모든 말에 대한 증인들이다. 이와 같이, 그가 이방인의 집에 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지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3-17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KJV, NIV)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고넬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런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믿는 그들에게 성령을 내려주심으로 그들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18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시끄럽던 교회는 잠잠해졌다. 다툼은 제거되었다. 온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복음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성령을 받게 하셨고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베드로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 또 서로간의 일시적 다툼은 사라졌다. 교회는 평온을 되찾았다. 온 교회가 일치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교회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만장일치가 이상적이다. 교회 안에는 때때로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런 때에도 대다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치된 생각과 이해를 위해 겸손히 인내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중요한 한 속성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일치단합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의 구원을 섭리하셨는지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과 인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하나님의 섭리에 베드로 자신도 복종하였고 또 그의 설명을 들은 다른 사도들과 형제들도 이해하며 감사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친히 확실하게 인정하신 일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단순히 권위로 대처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히 처신하자. 베드로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의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아니 우리 주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진 자이시지만, 그들은 필요한 경우 다 겸손히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였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단순히 그 직분 자체의 권위가 아니고, 그 직분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과 그의 모든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바로 실천하는 데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힘있게 사용하시는 데 있다.
셋째로,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하는 일치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자. 교회에는 때때로 어떤 문제에 대해 오해나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주 안에서 온유와 겸손, 인내와 사랑으로 기도하며 대화함으로써 일치된 생각과 판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당회원들의 사상이 성경에 일치하고 모든 교인들의 사상이 당회의 뜻과 결정들에 일치함으로써 항상 교회의 일치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19-30절, 안디옥 교회
본문은 후에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세계 복음화에 앞장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대해 증거한다.
[19-21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헬라파 유대인들](전통본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과 핍박은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 하나님의 일은 어려움 속에서 쇠잔해지지 않고 도리어 번창해졌다. 제자들은 곳곳에 흩어져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흩어진 제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다. ‘헬라파 유대인’은 이방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헬라인이기도 하다. 복음이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주님의 손이 전도자들과 함께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시 3:8).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구원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다.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요 3:36). 또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상태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따르는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살전 1:9). 이것이 구원이다.
[22-24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바나바는 그곳에서 가까운 구브로 섬 출신이었다(행 4:36). 그는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바나바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였다. ‘붙어 있다’는 표현은 신명기에서 자주 쓰인 ‘친근히 하다,’ ‘부종(附從)하다’(신 10:20; 11:22; 13:4)는 말로서 하나님을 꼭 붙잡고 가까이 따르는 태도를 나타낸다. 신앙생활은 신자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고 마음을 굳게 해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말씀 묵상과 기도로써 하나님과 밀접히 교통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었다. 그는 거기에 파송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바나바의 사역은 믿은 자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나오게 하였다.
[25-26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바나바는 사울을 불러 함께 가르치는 일을 힘썼다. 사람은 말씀을 배움으로 지식이 자라고 인격이 변화된다. 이것이 성도의 영적 성장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방법이다(엡 4:11-12).
[27-30절]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이 있었다. 한 선지자가 참 선지자인지 여부는 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여부에 달렸다.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면 참 선지자이었다. 그의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때에,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54년에 통치했던 로마 황제이었다.
안디옥 교인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 즉 선행을 실천할 기회를 얻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선하게 사는 것이다(엡 2:10; 딛 2:14; 갈 6: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구하며 열심히 전도하자. 전도는 우리의 의무이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주께서 역사하셔야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전도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구하며 하자.
둘째로, 우리는 굳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늘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하고 부종(附從)해야 한다. 그것이 경건한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자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은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자들을 교회에 계속 주시기를 기도하자.
넷째로, 우리는 구제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의 증거요 열매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자.
[에스겔 6장 성경 좋은 말씀] 이스라엘이 황폐할 것임(겔 6:1-10)반응형
사도 행전 11 장 | 사도행전 11장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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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주석, 사도행전 11장
행 11: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
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사도들과 그 형제들” 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교인
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들 중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먼저 모세의 율법을 지켜
유대인으로 귀화(歸化)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축복도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
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들(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이 그런 순서를 밟기도 전에
직접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다니, 그들은 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고, “할례자들”이란 말은 여기서는 예수 믿는 유대
인들을 가리킨다. 이 명칭이 여기 사용된 것을 보아서 사도 행전의 저자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조시켜 말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 “힐난한다”는 말(* )은 다툰다는 뜻이다. 서부 사본
(Western Text)에는 “힐난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긴 설명이 붙어 있
다. 곧,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그는 거기
서 형제들을 불러 견고케 하고 두루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가 예루살렘 신자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보고하니 할례자들이 그로 더불어 다투었다.”라
고.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랍비들의 유전에 의한 것
이었다(Weber Tudisch Theol. pp.59-50: Eder sheim, Jewish Social Life, pp.26-28).
이런 유전에 의한 유대인들의 힐난은 실상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들의 힐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 있게 답변하여 주었다.
행 11:4-9
이 부분 말씀에 대하여는 10:9-22의 해석을 참조하라.
행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 “구
원 얻을 말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육(靈肉)이 아울러 종말관적 멸망에서
구원 받아 영생함을 가리킨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받음으로 얻어진
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어 죽기 싫어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00
명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으나 허사였다. 인간은 무슨 방법으로든 제 힘으로는 영생
을 못 얻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만 얻는다.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 고넬료와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방인이 복음을 받
을 권리에 있어서 유대인과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광경
은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임하시던 광경과 같았다.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 났노라 – 여기 인용된 “주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감람산에서 그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다(1:5). 이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내포한다. (1)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의 절대적 표준인데,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과 친
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이 진리대로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이
복음을 직접 받는 데 대하여 누구든지 힐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너희는 성령으
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의 “너희”란 대명사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복음을 받을 권리에 있어서 매일반이라는 것이
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
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 “선물”은 성령을
가리킨다. 2:38 참조.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한 것 뿐이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종 된 베
드로로서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만일 그가 이 때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것
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 죄악이었을 것이다.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 이것은 유대인 기독자들이 베드로
의 논증을 듣고 확신을 발표함이다. “생명 얻는 회개”는 복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옴으
로 영생 얻는 회개를 말한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
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베니게” 지방은 지중해 연안 지방인데
두로와 시돈 등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있는 섬인데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Philo, Legad, Caium, 36). “안디옥”은 소아시아에 있는 비시디아 안
디옥이 아니고, 팔레스틴의 북쪽에 있는 수리아의 안디옥이다. 이 도시는 그 때에 인
구가 50만이나 되어 로마 제국의 제 3도시로 꼽혔었다. 이 도시에 일찌기 헬라의 실루
시아(Seleucian) 왕조의 궁전이 있었고, 그 후 로마의 통치 시대에는 수리아 총독이
주재하였다. 이 도시가 오론테스(Orontes)강 안쪽으로 있으며, 그 항구는 실루시아
(Seleucian)라고 하는데 바울이 선교 여행할 때에 이 항구로 출입하였다(Lenski). “안
디옥”은 마침내 세계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13:1-3).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여기 “도”란 말(* )은 “말씀”이라고 개역
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 때에 이방의 여러 지역
에서 “유대인에게만” 전도했다고 하니, 그 때 유대인들이 예수 믿은 후에도 이방인들
과 장벽을 두고 지낸 것이 확실하다. 순전하고 은혜 많던 초대 교회 교인들도 민족 문
제와 구약의 메시야 예언에 관하여 잘 깨닫지 못한 방면이 있었다. 이 어두움을 깨뜨
리는 데는 하나님의 직접 간섭(초자연적 간섭)이 필요하였다.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
금 고넬료를 찾아 가도록 하기 위해 계시해 주신 일들은 모두 초자연적 사건들이었으
며(10장), 이보다 앞서 빌립으로 하여금 에디오피아 내시를 찾아 가도록 하신 일도 그
러하다(8장).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
를 전파하니 – 하르낙(Harnack)은 이 때 안디옥 전도자들 중 “구브로” 출신은 바나바
이고, “구레네” 출신은 루기오(13:1)였다고 한다. 그러나 22절에 보면, 바나바가 이
일 후(20절이 말한 사실 이후)에 안디옥에 처음으로 파송된 듯하므로 하르낙의 학설은
자연스럽지 않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 )라는 칭호는 그때에 이교(異敎)에도 유
행하던 것이었다. 부셋트(Boussett)는 이 귀절에 근거하여 이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으로 예수에게 채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일찌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라고한 사실(2:36)을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부셋트의 이 학설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받았다(P. Althaus, Unser Herr Jesus neue Kirchl., Zeitschr., 26, 1915,
pp.439, 513; G.Vos, The Continuity of the Kyriostitle in the N.T., Princet
Theol. Rev., 15, 1, Jan. 1917; P.Wernle, Jesus U.Paulus, Zeitochr. f.
Theol.U.Kirche. 25, 1,2, Mat. 1915).
“주”란 칭호는 실상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70인역)에서 유래되었다. 70인역
(LXX)에 “여호와”(* )를 “주”(* )로 번역하였다. 예수님은 실상 땅에
오신 여호와시니,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그를 “주”라고 한 것은 자연스럽다. 부셋트
(Boussett)가 말한 바 “주”란 칭호가 헬라의 이교에서 유래되었다고 함은 역설이다.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여기서 “주
의 손”이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구약식 표현이다(출 0:3; 삼상 5:6; 시
80:17; 눅 1:66). 20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
리켜 “주”라고 하였다. 이렇게 초대 교회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등시 하였다
(Grosheide). 저자 누가는 이 귀절 말씀으로 이방 전도 운동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떻게 성공하는 중에 있으랴?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또 한가지 뜻은 복음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만 결실
한다는 것이다(고전 3:5-7).
행 11:22,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
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
하니 –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나타난 영적 운동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였
다. 그것은 안디옥에서 수다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은 사실이다(21절). 대중이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
다. 어떤 때엔 대중이 진정한 믿음은 없이 영적 허영심으로 움직이는 일도 있다. 그들
은 간혹 믿음 중심보다는 여러 가지 육체적 동기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본
문에 있는 대로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움직였다. 그들은 주님을
전심(全心)으로 믿었다. 그것은 바나바의 태도를 보아서 알려진다. 곧, 그는 안디옥
교회의 은혜로움을 알아보아 인정하고 기뻐하였다. 남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고 기뻐하는 자는 벌써 그 자신이 그같은 은혜를 받은 자임을 자증(自證)한다. 남들에
게 하나님의 은혜 있음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자신에게 그런 은혜
받은 체험이 없든지, 아니면 그가 은혜를 받았으되 그것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
하는 심리를 가졌을 것이다. 이런 자는 은혜를 전연 못 받은 상태와 같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붇어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이렇게 주님께 붙어 있어야 된
다는 주장을 가졌다. “굳은 마음으로”란 말(* )
은 마음에 목적을 세워 가지고라는 의미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고 함은 주님에게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시 동안
만 아니라 계속하여 주님과 함께 머무는 생활을 의미한다. 계속하여 주님과 동거하는
생활은 (1) 주님을 신앙하는 자라야 가지게 되며, (2) 주님의 계명을 계속적으로 순종
하는 자라야 그런 생활을 중단하지 않는다(요 14:23). 사람이 혹시 주님의 계명을 범
한 경우에라도 진실히 회개하면 다시 주님과 동거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진리에 대
한 이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진리에 대한 체계 정연한 지
식을 소유하는 것만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생활로써 살
아 계신 주님과 동거함이다. 이것만이 산 신앙이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
라 – 여기 “착한 사람”이란 말은,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 가지게 되는 신앙과 사랑의
덕을 가리키지 않고, 믿기 전부터라도 그 인품이 착하다는 뜻이다(Grosheide). 눅
23:50에도 역시 같은 뜻으로 이 말이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본문에 바나바
를 “착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가 그 때에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천성적으로 가장
아량이 넓은 자였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였으니
만큼,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의 소유자였다. 성령이 충많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의 분량이 풍부함을 의미한다(Calvin, Harmony of Matthew, Mark, Luke, I,
p.18). 성령 충만은 그의 믿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본문에 “성령”이란 말 다음
에 “믿음”이란 말이 나온다(Calvin, Acts of the Apostles, I, p.470).
이렇게 본래 착한 사람인 바나바로서 영적 은사까지 충만했으니 만큼 그가 목회하
는 임지에 교인들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버어마(Burma)에 초대 선교사로 갔던 저드
슨(Judson)은 토인들에게 천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만큼 그는 선량하였고 또 성령이
충만하였던 선교사였다. 그가 선교한지 7년만에야 겨우 세례 교인 한 사람 생긴 정도
로 전도하기 어려운 백성 중에서 그는 끝까지 선교하였고 그가 별세할 때에는 그곳에
7,000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저드슨의 사적은 바나바의 안디옥 선교를 회상케 한다.
바나바의 착한 성격과 성령 충만한 인격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행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칼빈(Calvin)은 사우라에게 대한 바나바의 처신을 보고 그의
단순성을 칭찬하였다. 곧, 바나바는 자기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 지도자 중 하나임에
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위대한 사울을 등용하기를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
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되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는 줄 안 것이다. 우리는 바나바가 사
울을 방문한 사건에서 또 한 가지 그의 장점을 본다. 그것은 그가 사울이 받은 영적
은혜를 참된 것이라고 식별한 지혜이다. 23절 해석을 참조하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제자들”
이란 말은 그 때의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란 말(*
)은 불신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조롱한 명칭이다. 그 당시 불신 유대인들
은 기독 신자들을 가리켜 나사렛당이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
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와 관계된 명
칭(“그리스도인”)을 생각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Zahn). 이방인들이 신자들을 조롱하는
뜻으로 부른 이 명칭은 후대에 존귀한 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이 사실은 순교자 이그나
티우스(Ignatius)와 폴리갑(Polycarp)의 서신들에게 발견된다(Rom.III:4, Magn. IX,
Eph. XI., 2; Mart. Polyc., X, XII. 1, 2). 이는 마치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가
후에 모든 신자들에게는 영광의 표지(標識)로 간주됨과 같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서 받는 능욕은 마침내 영광이 된다. 행 5:41; 벧전 4:14 참조.
행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
니라 – 이 예언과 같이 과연 흉년이 들었다. 이 사실은 세속 문학인 수도니우스
(Suetonius)의 역사와 요세보(Josephus)사기도 알려준다. 이런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
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목적은, (1) 그 예언이 이루어진 때에 신자들의 믿음
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며, (2) 사람들로 하여금 재앙이 우연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어려운
때에 회개케 하려는 것이다.
행 11:29,30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이 말씀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연보 행위를 배우게 된다. (1) 그들이 “힘대로 부조”한 것은 연보의 모본이다
(고후 9:6). (2) 그들이 그 연보를 하기로 미리 작정한 것은 그 연보가 그들의 자원
(自願)에서 된 증표니 그것도 연보하는데 고귀한 정신이다. (3) 그리고 그 연보한 물질을 믿을 만한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위탁한 것이 또한 잘 한 일이다. 교회의 재정취급을 두 사람 이상에게 맡김이 성경적이다. 6:3, 2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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