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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8회 #꼬꼬무요약 #서진 회관 17호실
1986년 8월 14일, 광복절 전날 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로 꼽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름하여,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
서울 목포파와 맘보파의 피로 물든 잔인한 싸움
이 사건으로 80년대 서울의 밤을 지배하던 전국구 조폭 시대가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데…
그날 서진 회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 세 이야기꾼이 전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8회 범죄와의 전쟁 – 서진회관 17호실 (2020.11.1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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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 나무위키:대문

198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대형 룸살롱인 서진회관에서 일어난 집단 살인 사건.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들의 사소한 시비가 희대의 패싸움 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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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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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 살롱 집단 살인사건 믿을수없는 진실 – sparkling – Tistory

사건 1986년 8월 14일 오후 10시 30분 서진회관 17호실에서 목포출신 조직폭력배인 맘보파 조직원들이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는 조직원을 축하하는자리로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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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500002.tistory.com

Date Published: 4/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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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고금석 피해자 가해자 박영진 결혼

198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대형 룸살롱인 서진회관에서 일어난 집단 살인 사건.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들의 사소한 시비가 희대의 패싸움 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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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 인스티즈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사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만26세의 나이로 죄값을 치렀습니다. 이들은 유도대(현재의 용인대학교) 출신으로 선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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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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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싸롱 사건 : 네이버 블로그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 사건 다음날 모두 자수하였지만. 사건의 주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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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사롱 살인사건 피해자들 조원섭 고용수 장경식들 이력서

서진룸살롱때 그 형사가 그러더라. 룸이 아니라 넓은곳이였다면 상황이 뒤바뀌었을꺼라고. 이 사건을 계기로 . 조직폭력배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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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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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주범들 모습 | 보배드림 베스트글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20분 강남 역삼동 최고급 룸살롱 서진 회관에는 22살의 고금석이 일행들과 함께 16호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고금석이 속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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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baedre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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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들의 칼부림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사건

룸에 들어온 맘보파 일행 중 이왕규는 목포의 중학교 선배인 룸살롱 전무를 불러 4만원을 건네주며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이 돈으로 위스키 2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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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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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룸싸롱 사건ㄷㄷㄷㄷ.jpg : MLBPARK

또 위 짤은 피해자 중에 조원섭에 집중하여 작성됐는데, 살해 당한 맘보파 조직원 중 고용수(교도소 출소로 모임이 열리게 한 장본임)만 옷이 벗겨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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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lb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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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 살인사건 정리 – 세상의 모든것

서진룸 살인사건 정리. 트러블메이킹 2021. 5. … 서진룸 살인사건 정리. 트러블메이킹 2021. 5. 18. …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198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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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rldproblem.tistory.com

Date Published: 5/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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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8회 요약] "각오했기에 떳떳하다" 최악의 조폭 살인사건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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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서진 룸 살인 사건 조원섭

  • Author: 달리 [SBS 교양 공식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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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b2fRZR9mpI

서진 룸 살롱 집단 살인사건 믿을수없는 진실

서진회관사건

서울 강남한복판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는것이 믿겨지시나요?

조직 소개

맘보파(피해측)

사건 1986년 8월 14일 오후 10시 30분 서진회관 17호실에서 목포출신 조직폭력배인 맘보파 조직원들이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는 조직원을 축하하는자리로 7명이모여 술을마시고있었고, 출소하는 조직원은 교통사고를 내고 석방하는 조직원의이름은 고용수이고 당시 28세이다.

주목해야할 인물중하나가 조원섭인데 그시대에 소문난 칼잡이이며, 실전 싸움을 아주잘했고, 복싱실력은 당시 헤비급 복싱선수급이였다고합니다. 모르는사람들이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맘보파는 주변가게를 봐주고 돈을 벌어 먹고사는식으로 생계를유지해갔으며, 청부폭력 등을 일삼으며 살았는데 평소 목포파에대해 학생들동아리정도로 심부름하는꼬마들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습니다.

목포파(가해측)

옆방 16호실 용인대학교 유도학과 출신으로 자칭 목포파라고하는 8명이 술을 마시고있었다. 목포파의 특징은 지금은 용인대학교이지만 그당시에는 용인유도대학으로 불렸던당시였는데 유도대학 출신 선후배간 으로 조직된 이름있는조직은 아니였다.

사건초반

맘보파에서 출소를 축하하고 있던 맘보파는 서빙을하던 웨이터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맘보파 조원섭 : “웨이터야 우리 룸이 너무작으니조금더 큰룸으로 바꿔주면안되나?”

웨이터 : 손님이 많아 남는룸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리가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맘보파 조원섭 : ” 어이 삼촌아 태도가 왜그렇냐 뭐가 불만이있냐 ”

조원섭은 웨이터를 폭행을하고맙니다. 이렇게되자 다른조직원들은 축하하는자리인데 이러지말자 때리지말고 보내줍시다하면서 말립니다. 이렇게 저지를시키고 종업원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목포파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던 한명이 웨이터를 보고 너왜우냐? 누가너를때렸냐? 자초지종을 말해봐라. “내가 가만두지않을것이다.”

참고로 목포파가 봐주던 가게였고 이렇게 가게를 봐준다는 의미는 가게를 지켜줌으로써, 그에해당하는 보디가드비용을 서진회관에서 목포파에게 지급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목포파가 가만히있으면 그렇게 봐주던 가게의 수입도없어지는꼴이난다. 그래서 목포파는 평소에 자신들을 조직으로생각하지도않고 하찮은 꼬마라고 생각하는것에 대해 원래 불만이 많았던터라 웨이터에게 바로 묻는다.

목포파 : “몇호실이냐!”(너희들은 오늘 잘됬다. 너희들은 내구역에 허락도없이 와서 곱게 술마시고 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와서 행패를 부려?)

웨이터 : “17호실입니다.”

하는 찰나에 목포파 와 조원섭은 맞닥들이게된다.

사건중반

중반부터는 화장실을가던 조원섭 김동술, 성길과 마주치게된다. 아무리 술에 취한 조원섭일지라도 평소 무섭게 생각하고 있던터라 이들은 무서움에 떨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서움에 떨고있다가 조원섭이 시비를걸고 머리를때리고 비틀거리며 시비를 걸자

목포파 김동술과, 성길은 가지고있던 횟칼을 꺼내들었고, 조원섭은 어디찌를려고? 찌를거면 찔러봐!를 하는순간 팔과 허벅지를 찔리고 돌아갑니다. 이후 조원섭이 속해있던 맘보파는 사태의 심각성을느낍니다.

목포파에서는 그래도 자신들보다 실전경험도많고 자신들보다 쎄다고 생각하는 조직은 확실하게 알고있었던 터라. 지금부터 더이상 술은 먹지않는다. 저기 맘보파에는 조원섭이있지만 이미 조원섭은 힘을쓸수가없다. 그대로 우리차에있는 연장들을챙겨 맘보파가 도망가기전에 쳐들어간다. 횟칼, 쇠방망이, 등 수많은무기를들고 자신들보다 더취해있다는것을 안 목포파는 17호실로 들어가게된다.

사건후반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누었지만 이모든일은 10분안에 모든것이 이뤄진다. 목포파의 작전대로 17호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조원섭부터 단체로 난자후 나머지들을 제압하는데 조원섭 포함 4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3명은 중상을 입게됩니다. 17호실을 피바다를만든 이들은 경찰을 피해 축늘어진 조원섭을포함한 4명의 시체를 등에엎고 자신들의 차에 싣습니다. 차량 2대로 나눠 시체를 트렁크에 2명씩 나눠싣었는데

인근 병원으로 갔습니다. 맘보파 조원섭, 송경식, 장경수, 고용수 이네명을 병원에 수술실앞, 화장실앞에 교통사고 환자요하고 던져놓고 떠났다고합니다. 부검결과 이 4명의 시체에 칼로찔린 자상이 40여회가 넘었다고합니다.

자수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자수하지않고 범행에가담하지않은 조직원들이 자수하게되어 사건의 혼선을주고 이들은 이후 저지른 범죄가아닌것을 알았고 이후 산속에서 은신중이던 김동술과, 장진석은 체포됩니다.

기자들앞에서의거만함

장진석과, 김동술은 심정이어떻냐는 질문에 이제 모두 다끝났다. 어머니에게 불효를저지른거같아 미안스럽다. 뭐가 그래 묻고싶은것이 많느냐, 구경났냐 우리둘잡으러오는데 전경들을다동원해서 둘러싸고있는줄알았다. 형사들만있는줄알았으면 싸워볼만했는데 아쉽다. 라고, 거만함을 놓지않고 취재를 했다.

취조실안에서

기자들앞에서는 쌘척하고 기세등등하던모습은 없어지고 검사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벌벌떨었다고, 합니다.

사형집행

김동술, 고금석은 사형, 김승길과, 장진석은 무기징역, 그리고 나머지조직원들에게는 각 가담 정도에따라 그에맞는형이 내려졌다.

이사건이후바뀐점

조폭들에게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됩니다. 이권다툼 조직간의 세력다툼등 유흥주점사업에서 합법으로 사업을 바꾸고 먹고살며 지금은 금융, 건설, 부동산등으로 종목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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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살인사건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 사건

서진룸살인사건 피해자 가해자

198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대형 룸살롱인 서진회관에서 일어난 집단 살인 사건.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들의 사소한 시비가 희대의 패싸움 집단 살인 사건으로 커져서 반대파 조직원 4명이 살해되었고 주범 2명은 사형당했다.

서울목포파(가해자): 정요섭(두목), 장진석(부두목), 김동술(행동대장), 김승길, 유원희, 박영진, 고금석, 양회룡, 강정휴, 홍성규, 김경만

맘보파(피해자): 오재홍(?), 천종갑, 고용수(사망), 조원섭(사망), 송재익(사망), 장경식(사망), 이왕규, 차권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사건 개요

1986년 8월 14일 오후 10시 30분, 서울 강남에 있는 대형 룸살롱 서진회관 17호실에서 목포 출신 조직폭력배인 맘보파 조직원 7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낸 뒤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조직원 고용수(당시 28세)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 옆방인 16호실에서는 용인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스스로를 서울 목포파로 부르던 8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한창 흥을 돋우며 조직원의 출소를 축하하던 맘보파 일행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술 시중을 들던 남자 종업원의 태도가 기분 나쁘다며 일행 중 한 명이 마구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다른 조직원들이 말린 후 종업원을 밖으로 내보냈는데, 구타당한 채 울면서 방 밖으로 나오던 종업원을 화장실에 다녀오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이 발견하고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평소 자신들을 무시하던 맘보파 일행이 자기네 구역에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와 맘 놓고 술을 마시는 것도 마땅찮은데, 동생 같은 종업원을 구타하기까지 하자 분노했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들보다 실전 경험도 많고 센 상대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주저했다.

갑론을박과 계획, 작전을 거듭한 끝에 종업원들을 통해 맘보파가 무기 없이 무방비 상태로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칼과 방망이를 꺼내들었다. 비록 오랫동안 무술 훈련을 받아온 대한유도대학 선후배들이었지만,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나이 어린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손에 무기를 들었으면서도 강적인 맘보파 조직원들이 무서웠다. 특히, 맘보파의 행동대장 조원섭은 전국의 암흑가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칼잡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마음을 다잡고 무기를 손에 든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17호 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괴성을 지르며 난입해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칼과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이 가장 무서워 한 조원섭을 향해 공격이 집중되었다.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4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다. 광복절 특사로 출소해 축하받던 고용수 역시 처참하게 피살당했다.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이미 사망한 4명의 시신을 차에 싣고 20분 거리인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한 정형외과 수술실 앞에 내려놓고는 “교통사고 환자요!”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범행 직후 도주했던 조직원들은 사건의 파장이 예상보다 커지고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하나 둘 경찰에 자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제 사건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관계도 없는 주변 인물들을 위장 자수하게 하는 등 수사에 혼선을 빚기 위한 꼼수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전북 임실에 있는 한 저수지 안 외딴섬에 숨어들어가 낚시꾼으로 위장한 채 은둔했다.법원판결문2에서는 위의 범행과정과는 차이가 있다.관련판결문8번째 시비가 붙어 양측이 홀에서 대치한 상태에서 고금석이 먼저 조원섭을 찔렀고 조원섭과 송재익은 화장실로 피했고 고용수와 장경식은 17호 방으로 피신하였다. 김동술과 고금석이 주동이 되어 먼저 화장실에서 조원섭과 송재익을 칼로 찌르고 방망이로 때려 살해했으며 그다음 17호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고용수와 장경식을 역시 살해하였다. 피해조직원 나머지는 부상당한 건 아니고 1명(이왕규)은 카운터에 있다가 도망갔고 1명(차권)은 악사대기실에 숨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1명3은 일 때문에 먼저 자리를 떠서 화를 면했다. 또한 전북 임실에 있는 한 저수지 안 외딴섬에 숨어들어가 낚시꾼으로 위장한 채 은둔한 사람은 김동술과 부두목격인 장진석이며 고금석은 그전에 자수하였다.

경찰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진 룸살롱 사건’의 정확한 실체와 연루자들을 모두 밝혀내기 위해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국 위장 자수한 자들을 솎아내고, 가담자들의 실체를 파악한 경찰은 달아난 주범 장진석과 김동술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결국 두 수배자의 위치를 알아낸 경찰은 5명의 무술 고단자 형사를 현장에 급파했다.‘독 안의 쥐’가 된 장진석과 김동술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형사들의 접근을 눈치챈 두 사람은 칼과 낚시 도구 등 흉기들을 들고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노련한 형사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검거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온 장진석과 김동술은 TV 카메라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허세는 오래 가지 못해서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엉엉 울면서 죽을 죄를 졌다고 하소연하는 등 처량한 모습으로 돌변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총 12명의 두 폭력조직 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항소와 상고를 거쳐 1987년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주범인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 김승길과 장진석은 무기징역 그리고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는 각 가담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 형이 내려졌다.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1989년 8월 4일, 처형 되었다. 김동술을 집행할 때, 버튼을 눌렀는데도 바닥이 사라지지 않아, 옆에 김동술을 내버려둔 채 교수대를 수리했다고 한다. 김동술은 45분동안 덜덜 떨면서 누워 있다가 재집행을 받고 죽었다.

장진석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3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7년 12월 22일 특별사면되어 순천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사건이 발생한 서진회관은 대학생 중심으로 이뤄진 서울 목포파에서 보호하고 관리하던 업소였다. 김태촌의 범서방파 방계 조직으로 강남3구 일대에서 세력을 과시하고 있던 맘보파 일행은 서울 목포파를 무시하고 서진회관을 축하 파티 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수사 과정에서 일부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당시 무장한 상태에서 맘보파의 옆방에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하겠다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진술했다. 오재홍은 김태촌의 부하 중 한 사람으로서 별명이 맘보로 그가 따로 관리한 조직이었다.

이사건의 나비효과로 김태촌과 고위현직검사가 연루된 뉴 송도 호텔 나이트 클럽 사건5으로 불똥이 튀어버렸고 김태촌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서진룸 사건으로 조직원을 잃는 피해를 본건 김태촌인데 많이 억울했을 것이다. 애초에 조폭으로 지낸 건 본인이라 억울할 게 뭐가 있겠냐만은.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유도대학은 조폭 양성소라는 비난을 들었으며 교명을 용인대학교로 개명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이 사건의 피해자인 조원섭은 서울과 목포에 이름난 싸움꾼으로 허영만의 만화 비트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싸움 실력이 뛰어나도 회칼, 대검,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채 다수가 덤벼들면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당할 수 밖에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싸움 장면은 쇼이고 허구일 뿐이다. 더구나 사람은 전력으로 5분 이상을 싸울 수가 없다. 권투 시합도 3분 뛰고 쉬면서 해도 막판에는 다들 기진맥진 한다.

2007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에 이 사건과 연관된 맘보파 두목 오모 씨도 연루되어 구속된 바 있다.가해 조직원이었던 박영진은 출소 후 사건 당시 동료 조직원의 누이인 장우순씨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결혼 당시 20대 아들이 있는 미혼모였다. 당시 가해측 조직원 중에 장씨는 장진석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진석의 누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건 이전에 장진석의 누이와 피해조직원으로 죽은 고용수가 서로 사귀었다는 기사도 있고, 장진석이 고용수를 형님으로 모셨다는 내용도 있다. 더구나 가해자들이 조원섭에게 공격을 집중했다고 위에서 기술했는데, 사실 부검 소견에서는 고용수가 두부에 심각한 치명상을 입고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국부가 잘리는 등 가장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 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보면 사건 당시를 기준으로 두목인 정요섭만 41살이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죄다 20대 초중반으로 나이가 많아봤자 27살이었고 사형당한 2명 중 고금석은 22살에 불과해서 성년이 되자마자 죽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김종구 당시 사건 부장검사는 판결 이외에 부모, 형제, 스승, 친구들이 이 자들에게 선과 악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점을 추가로 지적했다.

사건 당시 룸살롱에서 일하던 악사 한 분은 이 사건 발생 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후 연주 활동을 접고 산으로 들어갔으며 수십년 뒤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해서 당시 이야기를 밝혔다.당시 수사했던 경찰 중 일부의 증언으로는 언론에 의해 과장된 사건이며, 세력싸움도 아닌 단순 취중시비로 일이고 서울목포파나 맘보파라는 조직명도 경찰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해자들도 조폭이 아닌 조폭을 추종하는 체대생들이 합숙하는 패거리들이었다고 한다.하지만 당시에도 서울목포파라는 조직은 반포동 한신아파트7에서 숙식을 하고 내부에서 일본도나 표창, 야구배트등의 흉기가 수십자루가 넘게 나왔으므로 단순 조폭 추종자라는 말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원래 조폭들 단체 이름은 경검이 짓는다. 목포파나 맘보파 뿐만이 아니라 더 메이저한 양은이파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게다가 주범 김동술 고금석이 현역 여당의 국회의원들과 당 간부, 비서실 사람들과도 사진을 찍은 사진이 발굴되어 오히려 경찰이 당시 사건을 축소해서 쉬쉬하는 경향도 있다.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사건 고금석

사형을 선고받은 주범 중 한 명인 고금석은 삼중스님에 의해 교화되어 불교에 귀의하였고 영치금을 모아 시골 분교에 기부하는 등 1989년 사형될 때까지 많은 선행을 했다.

서진룸살롱 서진회관

현재의 봉은사로 신논현 마에스트로 오피스텔 자리이다. 공교롭게도 근처에 버닝썬 게이트로 유명한 버닝썬이 있던 호텔이 있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박영진 결혼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박영진 2010년 11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198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었던 박영진 씨(50)가 10일 결혼식을 올리고 새 인생을 시작했다. 박 씨는 이날 동료 조직원의 누나인 장모 씨(53)와 서울 동작구 흑석동성당에서 화촉을 밝혔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하객으로 참석한 ‘조직원’들도 이날만은 위압적인 언행 대신 축복의 박수로 박 씨의 새 앞길을 축복했다. 수많은 ‘어깨’들이 모였지만 결혼미사는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치러졌다.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1986년 8월 14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서진룸살롱에서 두 조직폭력배 간에 벌어진 집단 패싸움으로, 4명이 흉기에 찔려 살해됐다.

당시 교도소에서 가석방된 조직원의 축하연을 벌이던 맘보파 조직원 중 한 명이 술집 복도에서 서울목포파 조직원과 마주쳤다가 시비가 붙어 시작된 이 싸움은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이 휘두른 생선회칼에 맘보파 조직원 4명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면서 끝났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고 잔혹성을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26세로 서울목포파 조직원이었던 박 씨는 사건 이틀 후인 16일 동료 조직원인 고금석, 강정휴 등과 함께 서초경찰서에 자수했다. 박 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항소, 상고심에서 20년형이 확정돼 복역하던 중 장 씨를 알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장 씨가 동생의 면회를 다니면서 박 씨와 가까워졌다는 것. 복역 중 천주교에 귀의한 박 씨는 2006년 출소해 기계제조업체 직원으로 성실히 일하며 지내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박 씨가 결혼식장으로 고른 흑석동성당은 박 씨가 복역하던 중 교화에 도움을 줬던 은인이 다니던 성당으로 알려졌다.

꼬꼬무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꼬꼬무’ 장트리오가 서진룸살롱 사건과 사형수 고금석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1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이 김동현, 한지은, 이준혁에게 서진룸살롱 사건에 관해 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이날 1989년 강원도 정선. 산골 마을의 분교가 있었다. 28명뿐인 학생들은 매달 어떤 아저씨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엔 매번 학용품값 5만 원도 함께 들어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키다리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바다를 보고 싶다고 소원을 적었고, 8월에 해운대로 초대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하지만 그 이후 키다리 아저씨의 편지는 끊겼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삼중스님은 한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장트리오는 “삼중스님은 사형수의 아버지로 불리는 분이다. 50년 넘게 교도소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300명이 넘는 사형수의 마지막을 지키셨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삼중스님은 그날을 떠올리며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양주 두 병을 들이켰다. 그렇게 괴로운 적이 없었다”라고 했다. 25세 고금석의 사형이 집행된다는 전화였다. 그는 아이들의 바다여행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키다리아저씨는 어쩌다 사형수가 된 걸까. 장트리오는 “서진 룸살롱 사건 기억하냐”라고 물었다. 1986년 강남 한복판에서 4명이 잔혹하게 살인된 사건으로, 조폭들의 칼부림 사건이었다. 조폭 영화에 칼부림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이 사건 때문이라고. 당시 고금석 일행이 서진회관 16호실에서 술을 마셨다. 맞은편 20호실에도 일행이 있었다. 이들은 서울 목포파로, 목포 출신 고향 선후배 사이였다. 장도연은 “경찰 관리대상에도 오르지 않을 정도로 신출내기였다”라고 했다. 그때 서진회관에 7명이 들어왔고, 고금석 일행 옆방인 17호실로 들어가게 됐다. 취한 17호실 손님들은 웨이터에게 4만 원을 주며 위스키 2병을 사오라고 한다. 그들은 웨이터가 오지 않자 심기가 불편해졌고, 웨이터에게 방을 바꿔 달라고 하다 얼굴을 가격했다.

16호실 고금석 일행도 이를 알게 됐지만, 서울 목포파가 덤비기엔 17호실은 너무 거물이었다. 17호실 손님들의 정체는 맘보파. 장성규는 “김태촌의 범서방파 방계조직 중 하나였다”라고 밝혔다. 화장실에 갔던 고금석과 조직원은 맘보파와 마주쳤다. 조직원은 같은 목포 출신이었던 맘보파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고금석이 최두석한테 인사를 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됐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장트리오는 “맘보파 입장에선 여유로웠다. 서울 목포파를 조직이라도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목 장씨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해 있었고, 전국 조폭계를 정화한다는 목표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장도연은 “합숙하고 지옥훈련을 한다. 해남으로 전지훈련까지 갔다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맘보파, 서울 목포파의 대치 상황. 장트리오는 “서울 목포파 행동대장이 발목에 있던 칼을 꺼냈다. 맘보파는 빈손이었다”라고 했다. 이준혁이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하자 장항준은 “근데 최두석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라고 밝혔다.장항준은 “맨 앞에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던 게 고금석이었다. 훗날 법정에서 ‘피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혀서 멈출 수가 없었다’라고 한다. 장성규는 “고금석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주변 지인들은 믿지를 않았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장도연은 고금석 어린 시절에 관해 “아버지는 섬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생님이었고, 어머니도 고금석을 사랑으로 키웠다. 고금석은 돈을 벌면 어머니에게 자가용을 사드려야겠단 꿈이 있었다. 서울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들락날락거리던 고향 선후배 중에 두목 장 씨가 있었다. 고금석은 장 씨의 권유로 나이트클럽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잘못된 길을 들어서게 됐다. 검거된 두목 장 씨와 행동대장의 뻔뻔한 인터뷰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서진룸살롱 사건으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다.사형을 선고받은 고금석은 불교에 귀의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참선을 했다고. 고금석의 옥중 편지 원본을 공개했다. 장성규는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냐. 근데 깨달은 이 사람의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뭉클하다”라고 했다. 김동현은 “자기를 위한 행동으로도 느껴진다. 너무 죄책감이 커서 줄이려고 하는 건데 솔직히 바보 같다. 이렇게까지 후회할 사람이면 왜 그 순간에 컨트롤이 안 됐을까. 마냥 딱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고금석의 첫사랑 윤 씨는 고금석을 매일 면회를 왔다고. 윤 씨는 고금석이 죽기 전 옥중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한지은은 “이거 실화 맞지”라며 놀랐다. 고금석은 그 후로 면회를 거절했지만, 윤 씨는 계속 찾아갔다. 윤 씨는 어김없이 면회를 갔지만, 고금석이 사형집행당한 날이었다. 장도연은 “윤 씨는 펑펑 울었고, 교도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그러지 말았어야지”라고 했다.

이후 산골 분교 아이들은 삼중스님과 윤 씨와 함께 바다에 갔다. 아이들은 그 후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고, 한지은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산골 분교에 야외 교실이 지어졌다. 장항준은 “고금석이 죽기 전 영치금을 모아서 지어준 거다. 교실 이름은 고금석의 법명 ‘금송’을 딴 금송정이었다”라고 했다. 삼중스님은 “사형이란 죄목에 대해선 억울하니 하는 얘기를 할 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걸 배우는 거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떠날 때 보면 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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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강남구 역삼동 서진회관 (서진룸살롱)에 모두 모인 그들의 운명은 ….. 그들은 이 20분간의 액션으로

삶과 죽음을 결정 짖게 된다. 화려한 룸에서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들은 이순간 알고 있었을까

자신들에게 닥쳐올 앞날을 ………

1986년 당시 강남 역삼동의 서진빌딩의 서진회관 모습

암울했던 80년대 그당시 조폭간의 칼부림 사건은 흔한일이었을 정도로 유흥가 주변에는 칼부림 사건이 많았고 조폭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려운 삶에 칼을 휘두르고 살인을 저지르는 등 칼로인한 살인사건이 연일 신문에 안나올 때가 없을 정도로 사회의 질서도

문란 했었다.

폭력조직 간의 조직의 칼부림 뿐만 아니라 인근 고등학교 중학교등 학원가에서도 패싸움으로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심지어는 칼로 상대를 죽이는 사건들도 많았고 동내에서 이러한 학생들의 조폭을 흉내낸 패싸움은 자주 일어났고 많이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당시의 사회관념은 말그대로 폭력이라는게 곧 힘이다는 식의 사고가 만연했었다. 우리나라 이딜가도 사람을 안패는 곳은 드물었다.

군대는 더 말할 나위 없고 학교의 선생들도 마찮가지였다. 일선 초중고의 학교 선생들도 죽도나 당구 큐대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체벌 이상의 폭력을 휘들러 학생에게 상해를 입히는 경우는 아주 너무나 흔한 일들이었다.

말그대로 폭력 지상주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의 잔혹한 폭력에 억눌렸던 감정이 국민들에게 “위도 그런데 우리가 좀 폭력 좀 쓰면 어떠냐”는 식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사회의 정의가 되버린 시절이었다.

그당시 폭력수준을 현재와 비교한다면 그당시는 그래도 현재의 학원에서 단체 폭행,괴롭힘 같은 비굴한 짖거리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당시의 사회의 폭력 수위는 현재의 10배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생각해 보아라 일반적인 거리에서 학생들이 패싸움해서 도망가고 쫒아오는 패거리들이 차도를 넘어서 쓰러진 상대 고등학생을 4차선 도로 위에서 야구방망이로 치는 광경을 이런 광경은 그 당시 너무도 흔했다.

정말 이런일은 너무 흔했던 시절이라 파출소 가서도 훈방 정도로 끝날 정도였다. 이게 비정상적인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선생은 학생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학생을 주먹과 발로 패서 이빨이 부러지고 뼈가 부러지는 상해는 지금 처럼 신고도 못했다.

이런 폭력 지상만능주의 사회가 그 당시 80년대 전두환 군사폭력 정권시절의 사회 상황이었다.

이렇게 혼란의 시기에……

그날밤 이곳에서 일어난 칼부림 살인사건은 그 수위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시작

1986년 강남 역삼동 서진빌딩(현재는 영남빌딩으로 개칭) 지하의 서진회관에서는 여름밤의 흥을 돋구기 위해 한가로이 술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다음날이 8.15광복절 이기에 손님들은 많았다.

그날밤 목포파 일당들은 8시30분경에 조직원 전체가 서진룸살롱에서 2개의 룸을 얻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12호실에는 목포파의 큰형님이라는 정요섭과 3명이 옆 호실에는 20호실에는 장진석외 8명이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서방파 계열의 오재홍(별명 맘보)이 이끄는 맘보파는 고용수 출소 축하를 위해 총 7명이 9시 40분경에 서진회관 17호실로 들어왔었다. 이들은 이미 1차를 다른곳에서 하고 2차로 이 룸살롱으로 들어왔다 . 조직의 재건과 단합을 위해 모인자리이기도 하였다.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맘보파’ 7명이 동료의 출감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룸에서 술자리를 갖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양측 일행 간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왜 쳐다보냐.” “똘마니 주제에….” “너 많이 컸다.”

17호실의 맘보파 중 오재홍은 들어와서 잠시있다가 강남근방에 서방파 두목 김태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서진룸살롱을 나갔다.

이후 17호실에선 6명이 남아서 있던중에

20분이 지나도 술이 나오지 안자 이왕규가 카운터로 가보겠다고하면서 17호실을 빠져나와 카운터로 갔고 조원섭도 화장실에 같이 가자면서 나가는 중에 웨이터를 불러서 룸이 좁으니 다른호실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웨이터는 자리가 없다며 양해를 구했으나 조원섭은 자신을 무시한다며 웨이터를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순간 웨이터는 얼굴이 피투성이가되어 평소 자신과 안면이 있던 장진석 패거리가있는 16호실로 들어가서 구원을 청했다.

이에 김승길 고금석이 어떤놈이야 하면서 달려나갔고 당시 목포중학교 선배 조원섭이 김승길을 알아보고는 김승길도 인사하고 좋게 끝날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문제는 조원섭의 안하무인격의 성격으로 김승길 옆에 식씩거리고 서있던 고금석을 향해

“뭘 쌍아지없게 쳐다보야 똘마니주제에 놈아”

하면서 주먹으로 고금석의 얼굴을 후려치며 따귀를 서너대 날린다. 이소리를 듣고 17호실에 있던 맘보파 일행들이 나오면서 고금석을 단체로 구타하자 이에 김승길도 16호살로 달려가서 일행들에게 알리고 장진석은 콜라병을 들고 목포파 전체에게 다 죽여버려하고 소리질렀습니다 .

이때 상황은 밤 10시가 좀 못된 시간으로 두패들은 서로 복도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인원은 목포파의 인원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었다.

앞에있던 김동술과 김승길은 발목에 차고 있던 생선회칼과 대검을 뽑아들었고 조원섭을 향해 씩씩거렸습니다.

이에 조원섭은 “그래 그럼 어디한번 찔러봐 “하고 소리 치자마자

김동술이 잽싸게 달려들어 조원섭의 왼팔을 잡고 대검으로 아래로 내려치자 조원섭의 팔복이 거의 잘려 나갈 지경이 되어 덜렁거렸고 조원섭은 비명을 질렀다. 이때 옆에 있던 고금석은 지니고 있던 대검으로 조원섭의 허벅지를 찔렀다.

이광경에 놀란 맘보파 차권은 미리 17호실 앞의 악사대기실로 미리 들어가 숨었고 나마지 송재익,고용수,장경식 등 3명은 조원섭을 데리고 같이 17호실로 황급히 들어가 문을 잠궛다.

문밖에서 문열어 하면서 소리치면서 서진룸살롱은 말그대로 죽음의 공포의 장소로 변해 갔다.

1986년 8월15일 촬영된 서진룸살롱17호실의 처참한모습

(당시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피로인하여 마치 지옥에 온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한다.)

사건 직후 기자들이 촬영한 서진회관 17호실 앞 복도 피가 바닥에 낭자해 있다.

이때 밖에 있던 김동술은 막내였던 권모군에게 차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등을 가져오라 지시 합니다.

권군은 차에서 야구방망이와 칼을 2자루 더 가져오고 목포파 이들은 `17호실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자마자 겁에질린 그들을 향해서 김동술 고금석 김승길이 중심이 되어 칼로 4명의 다리와 팔 등을 난자하고 뒤에 있던 일당들도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등으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회칼과 흉기를 이용한 이 살인적 폭력은 10여분 동안 계속 되었다. 말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사람을 계속적으로 찌르고 야구방망이로 가격하는 잔인무도한 살인행각을 벌인 것이다.

1986년 8월 14일 여름밤 장마철이 시작 된 그 시기에 서진회관에서 벌어진 회칼에 의해서 피의 살육을 저지른 이 대형범죄 사건은….

향후 25년 동안 우리나라의

10대 강력사건으로 그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때 장진석은 마대자루를 들고 상대가 도망을 못가게 문앞 복도에서 지키고 있었다고 신문상과 진술상에는 전해진다.

카운터에서 흥정을 하고있던 이왕규는 이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도망치고 20분이 흘러서야 17호실에서의 칼부림과 흉기질은 끝이나고 4명은 말그대로 피범벅이되어 문앞 화장실 바닥 쇼파 바닥에 모두 쓰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홀안과 복도는 사방이 피로 지옥과도 같은 장소가 되버렸다.

잠깐 여기서 조원섭과 맘보파 조직원의 애기를하자면

조원섭은 전국에서 주먹으로 당할 자가 없었던 싸움꾼이라는 말이있을 정도로 싸움실력이 출중했고 같이 피살당한 고용수,송재익도 서방파에서 알아주는 주먹으로 그 이름을 새긴 자들이지만 좁은 룸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로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들 앞에서는 손쓸겨를도 없이 당했다.

(위 스틸컷은 영화의 한장면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이때 까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진석 일당들은 이들을 어깨에 둘러매고 룸싸롱 뒷문에 있는 로얄살롱 승용차와 프라이드에 피해자들을 트렁크 등에 나누어 실고 김동술은 이때 온몸이 피가 튀어 피법벅이된 손에 피가 떨어지는 회칼을 든채로 나오더니 칼을 들이데면서 가게안 종업원과 영업전무를 불러서 신고하면 다시와 죽여버린다고 협박한 뒤에 피가 흐르는 칼을 들이데며 협박했다. 홀안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것 없이 너무도 큰 충격에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17호실에 있었던 7명중 3명은 화를 면하고 송재익씨,고용수씨,조원섭씨,장경식씨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피해자였던 이들의 사진은 유족들을 위해 올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당동 정정형외과에 시체를 버리고 달아나다.

장진석,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정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들의 일당인 홍성규라는 조직원이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이들은 이병원으로 왔었다고 한다. 이들은 호성규에게도 도망가라고 애기 한뒤 서둘러 뛰어 나갔다고 한다. 홍성규는 목발을 짚고 택시를 타고 병원에서 나왔다.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당시 부검 결과 한명은 40회 이상을 찔렸다고 한다,)

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 당시 조직폭력배 4명의 피살체를 운반한 승용차.

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 당시 조직폭력배 4명의 피살체를 운반한

승용차 뒤 트렁크에서 발견된 피묻은 와이셔츠ㆍ양복등 물증들. 1986년 8월 장충동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그들…

사건 발생상황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목포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분노한 장진석은 룸으로 돌아와 콜라병 두 개를 쥐고 복도로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양측간 집단 난투극으로 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김동술과 고금석 등이 흉기를 휘두르면서 사건은 유혈사태로 번지고 만다. 이들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로 상대방의 하체 부위를 찔렀고 다른 일행들도 차량에 싣고 다니던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조원섭 등 목포맘보파 일행은 흉기를 갖고 있던 이들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사건 다음날 모두 자수하였지만

사건의 주범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도망쳤다.

이들은 다음날 장진석,김동술을 제외하고 자칭 큰형닙이라 불리는 정요섭등 모두 자수하였고

이틀 뒤 서진룸살롱에 없었던 홍성규,유회룡도 자수하였고,주범인 김승길도 자수하였다.

강정휴는 위장자수로 들통이 낫다. (강정휴는 위장자수 협위로 3년간의 형을 살았다.)

유회룡은 직접적인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나머지 사관과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경찰에 출두하였다.

서진룸살롱 지배인 종업원 까지 모두 출두한 마당에 정작 사건의 핵심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보이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였다. 하지만 이틀후 그들의 친구나 주변사람들을 심문하여 그들의 제보에 의하여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건 당시 브리핑 자료로 작성한건데 천종갑이라는 사람은 별 관련이 없고 오재홍이라는 서방파 직계의 맘보파 두목이 관련인물로서 얼마전 한화 이승연회장의 청부폭력에도 관련됬던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피해자측 맘보파의 두목은 오재홍이라는 자로서 감옥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지 얼마안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조직원들의 출감을 계기로 조직의 재건을 위해서 모인 장소가 우연찮게 조직을 파멸로 이끈 셈이었다.

다다음날 자수한 정요섭, 고금석,강정휴(위장자수),박영진

자수한 김승길

체포되어 오는 유회룡

이틀 뒤 자수한 홍성규

핵심 인물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잡히지 않은체

서진룸살인사건은 정 치인과의 마약조직과의 관계등등 수사는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사건당시 목포출신 정치인과 관련설도 나돌았고 세월이지나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나온 소문이 당시 전경환이 유도대생들 뒤를 봐주고 자신의 경호원으로 많이 대동하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는데 서진룸살롱의 목포파 유도대생들도 연관이 있지않았나 하는 관련설들도 돌았으나

확실히 검증된 사실이 아닌 추측에 불과하고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이날 목포파 이들이 누군가에게 잘보이기위해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등의 소문도 있으나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측일 뿐이다.

서진룸살롱의 주범들 주변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였지만

정작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동술은 잡히지 않았다.

생의 막장으로 치닫던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장진석,김동술)

장진석 김동술은 사건 발생 4일 만에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그들을 체포할수가 있었다.

장진석 김동술이 마자막으로 숨었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

장진석 김동술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헛간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범인들이 은신했던 헛간. 범인들은 경찰의 현상수배망을 뚫고 벼룩호수 가운데 섬까지 숨어들었다.

장진석 김동술이 숨은 위치를 파악한 형사 9명은 출동하여 낮은 포복으로 목표지점까지 기어가서 공포탄을 쏘며 자수할 것을 소리쳤으나

범인들은 회칼로 위협했고 급기야는 총성에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형사들은 재빨리 달려들어 권총으로 머리를 쳐서 쓰러트린 뒤 완력으로 이들 2명을 제압했다.

장진석 김동술은 경찰차에 타고 서울로 오면서 긴장해 있었고 장진석은 이제 속이다 후련하다며.. 포기의사를 내비쳤고

형사들에게 우린이제 끝난거죠..하면서 물어보고 김동술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요 물어보면서 불안감을 감추지는 못햇다고 한다.

이들은 오는 중에 차에서 빵과 캔맥주를 형사들이 사줘서 먹기도했다.

체포차량은 이제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서초경찰서에 도착했다.

이들이 서울서초경찰서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순간 수많은 기자들과 취재진들을 보고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이면서 애써 긴장된 모습을 보이려 하지않았다.

체포하여 경찰청으로 들어가던 중에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기 자> 현재의 심경이 어떤가

장진석> 후련하다 이제 다 끝났다.

MBC기자가 김동술에게도 질문한다.

기 자> 이번일에 후회하지 안나

김동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 후회되고 애초에 애들이랑 같이 논 우리가 잘못이다.(피식 웃는다.)

정의롭게 살고 사무라이처럼 죽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 틀려버렷다.

형님들(형사들)만 온줄 알았으면 한번 붙어봐도 승산이 있었는데….

숨어있을 때 형사들과 전경들이 다 둘러 싼줄 착각했다.(다시 피식 웃는다.)

참으로 번뻔한 대답이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힘 자랑 할 생각을 하다니…(실제로 장진석 김동술은 그리 큰 체격이 아니었다)

이러하듯 김동술은 자신이 얼마나 큰 사건을 저질렀고 자신이 이제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23살의 순진함이 이제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렇듯 횡성수설해 주위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였고 “애들이랑 논 우리가 잘못이지요”는 전국적으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컷다. 깡패들 끼리의 싸움이라 하지만 아무 목적 없이 단순한 시비 끝에 4명을 죽인사건 그것도 회칼로 사람을 수십군데를 찔러서 죽인 정말 이 어이없고도 잔인한 사건에 전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기자들이 계속 밀려오자

장진석이 기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장진석> (자들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 이 사람들이 뭐 그거 큰 구경났소 사람 처음 봐”

이렇듯 이두명은 아직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한 뻔뻔한 자세로 일관했다.

장차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이 20년이 넘게 역사의 강력범죄 10대 사건으로 기록될 일을……

기자들은 게속적으로 질문공세를 펼쳤으나 그둘은 잠시후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체포되어 서초경찰서 앞에서의 모습

이렇게 경찰서 취조실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은 니름 여유로와 보였으나

취조실에서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조사내내 울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아래 2명은 왼쪽의 장진석은 교도소에 무기로 현재에 수감중이고 오른쪽 김동술은 구속후 1년10개월 만에 사형 당했다. 나이 23세에 살인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어 25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이기도 하다. 죄값을 죽음으로 치룬 샘이 된거다.

부디 후생에서는 선한자로 다시 태어나길 빌겠다.

이사건은 발생된 동기와 결과도 끔찍했지만 그 결과도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20대 젊은이들이 4명이 살해 당하고 2명이 사형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2명이 무기징역으로 현재 까지 수감중이다.

이들의 범행에 말들이 말이 많았지만 이유는 없었다 젊은 혈기에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먼저 모욕적인 시비를 걸어온 상대를 8명이서 살해해 병원에 던저놓고 도망가버린 실로 어이없는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현장검증 사진

현장검증을 위해 버스에 태워진 칼잡이들. 범인들은 뒤늦게 후회하는듯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다.

범인들이 서진룸살롱 살해 현장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체포시와는 반대로 김동술 장진석등은 많이 살이빠져 수척해 있었다.

서진회관 입구에서는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항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경찰의 최종 수사발표

서진룸살롱의 피의자 목포파는 조직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우발적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고 경찰은 최종 발표했다.

맘보파는 서방파 직계의 계보가 있었던 조직이었던 반면에 장진석이 이끄는 목포파는 계보없이 일정 수입원을 청부폭력으로 채우는

폭력조직으로서 정요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직이었다.

아파트에서 발견된 표창

아파트,차량에서 등에서 압수한 흉기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재판과정과 죽은자들의 삶에 대한 후회….. 공판

서울 강남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의 주범 장진석등의 칼잡이들이 서울구치소로 송치되고 있다.

1986년 9월 3일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는 김동술

머리를 돌리는 장진석

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으로 들어서는 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칼잡이들.

검거당시의 뻔뻔스런 모습과는 달리 모두 고개를 숙인채 카메라를 피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의 모습

사형 판결을 받고 나오는 고금석

사형판결을 받고 돌아가는 장진석 피고인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사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만26세의 나이로 죄값을 치렀습니다. 이들은 유도대(현재의 용인대학교) 출신으로 선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신의 영혼을 팔아 악행을 저지른 그댓가를 처절히 받았습니다. 이들의 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선배인 장진석의 지시에 따라 흉악 무도한 일을 저질렀고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재판초기에는 이들은 장진석을 보호하고 자신들이 죄과를 다 뒤집어 썼습니다. 이들은 원래 부터 악한자들이었을까요 시건 종결후 이들의 동창과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덩치만 크고 힘만셌지 마음은 무척 여린 사람들이었다 하더군요 이들이 조직폭력배의 길에 들어서게 된건 가난한 집안 환경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의 약점을 유혹하는 조폭 선배들이라는 이들의 감언이설에 의해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됬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그 댓가를 죽음으로 치렀습니다. 2명이 사형수가 되기 까지에는 그들 스스로의 죄가 너무도 잔학무도 했던것이기에 당연하지만 선배라고하는 장진석(당시 26세)과 큰형님으로 통했던 정요섭(당시41세)은 자신들은 그런지시를 한적이 없었다. 그렇게 죽이라고 시키지 않았다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발뺌하기 바빴습니다. 결국 장진석은 무기수로 감형되었고 정요섭(당시41세)은 15년을 판결 받았습니다. 심지어 장진석은 자신은 죄가 없고 옆에만있었지 아무짖도 안했다 내가만약에 사형으 받는다면 재판장에서 개판을 칠것이라고 오히려 교도관들을에게 엄포를 했다고 신문기사에도 나왔습니다. 2심에서도 사형판결을 받고 돌아가는 장진석 체포시와는 반대로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죽을 죄를 저지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으로 그 무거운 업보를 값았습니다. 이미 죄값을 치르고 죽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욕하고 싶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그들에게 연민의 슬픔이 아련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그들은 너무도 단순했고 무지몽매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왼쪽에서 2번째가 고금석씨 김동술과 고금석은 자신들이 사형판결을 확정 받고서야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재판장에서 눈물반 진술반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재판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더군요 서진룸살롱 살인범들 중에 유독 덩치가 컷던 김동술 고금석씨 그들은 자신만의 안위만을 지킬려는 선배들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도 같이 애기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동술 고금석씨는 부디 후생에서는 이러한 악한 삶을 살지 않기를 빌어 봅니다. 장진석은 현재 공주교도소에서 그 죄업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무기수로 복역중이고 장진석과 같이 무기형을 받은 김승길도 옥중결혼식을 치르고 무기수로 아직도 자신의 죄과를 치르고 있습니다. 소동이 났던 서진회관은 아직도 역삼동에 그 건물이 그대로 있고요(영남빌딩) 시체를버렸던 사당동 그병원도 그당시 원장님이 그대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사건의 주범이었고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있던 홍모씨가 출소하고 원장 선생을 한번 찾아와서 뵈었다고 하더군요 고금석과 김동술씨는 자신들의 죄과를 땅을 치며 반성하고 후회했지만 이들은 판결후 3년이 좀 안되 1989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그 죄값을 치렀습니다. 김동술씨는 발판이 내려가지않아 45분후에 다시 사형이 집행됬다고 하더군요 그 공포가 온몸으로 그의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했다고 하더군요….. 김동술,고금석 이두명은 남은기간동안 많은 선행을 배풀었고 마지막엔 자신의 몸을 모두 기증하였다고 하더군요 과연 무었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래는 수사반장 안경식 경위가 화고하는 서진룸살롱 사건이야기

수사반장의 잊혀지지않는 사건 서진룸살롱 사건

1986년 8월 14일 밤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에서는 마치 조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잔인한 장면이 펼쳐졌다. 일단의 건장한 20대 청년들이 야구방망이와 회칼을 휘두르며 또 다른 한 무리의 청년들과 집단 난투극을 벌였던 것. 룸살롱 내부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이 와중에 4명이 끔찍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5공화국 말 우리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넣었던 일명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조직폭력배들의 치열한 이권다툼’ ‘복수와 응징으로 점철된 어두운 조직세계의 단면’ 등의 제목으로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다. 탈법적인 삼청교육을 강행할 만큼 ‘민생치안’을 정권의 특장으로 삼으려 했던 5공 정권에겐 곤혹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전국 경찰에 폭력배 일제 소탕령을 내렸고 주먹세계에는 거대한 검거 회오리가 치기도 했다.

‘집단탈주범 인질사건’ ‘원혜준 양 유괴살인사건’ 등과 함께 80년대를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대형 사건으로 꼽히는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과연 20여 년 전 활자화된 ‘사실’ 뒤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지난 1월 16일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안석호 경위(53·광진경찰서 수사폭력 2팀장)를 만나 기억의 편린을 들춰봤다.

안석호 경위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이따금 역삼동 그곳을 지나갈 때면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듯하다”는 말로 서진룸살롱 사건의 ‘추억’을 떠올렸다. 안 경위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근무하던 시절 이 사건을 담당했다.

당시 언론 등이 전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맘보파’ 7명이 동료의 출감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룸에서 술자리를 갖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양측 일행 간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목포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분노한 장진석은 룸으로 돌아와 콜라병 두 개를 쥐고 복도로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양측간 집단 난투극으로 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김동술과 고금석 등이 흉기를 휘두르면서 사건은 유혈사태로 번지고 만다. 이들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로 상대방의 하체 부위를 찔렀고 다른 일행들도 차량에 싣고 다니던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조원섭 등 목포맘보파 일행은 흉기를 갖고 있던 이들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피살된 4명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특히 하체 부위를 집중적으로 난자당했고 워낙 많은 피를 흘려 온몸이 피로 뒤범벅돼 있었다고 한다. 갖가지 강력사건을 맡아온 안 경위조차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강력반 형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피가 낭자하고 끔찍한 사체를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을 정도. 안 경위는 당시를 회상하며 “상처는 생명에 지장을 주는 급소와는 거리가 있는 하체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 피비린내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건 이틀 후 조직의 우두머리 격이던 정요섭 등 7명이 자수를 해왔고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 등 나머지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작은 섬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유혈 참극이 벌어진 지 4일 만에 사건이 해결된 것이다. 8월 22일 경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관련자 12명은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은 장진석 등이 중심이 된 서울목포파와 조원섭 등이 중심이 된 목포맘보파 두 조직 간의 이권다툼 끝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또 숱한 루머들과 뒷얘기들을 낳으며 오랫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안 경위는 가해자인 김동술 등을 조직폭력배로 지칭한 당시 매스컴의 보도는 과장된 면이 있다며 이 사건이 전문 조직폭력집단 간의 세력싸움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고 조직의 명칭 역시 수사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것일 뿐 실제로는 그런 조직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동향 출신으로 대학 때 상경해 합숙생활을 하며 뭉쳐다니던 패거리였을 뿐이라는 것. 당시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대부분 유도대학 재학생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는데 이 사건으로 한때 유도대학은 ‘깡패양성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안 경위에 따르면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사실 덩치만 컸지 전문 싸움꾼도 조직원도 아니었다. 이들은 체격이 큰 데다가 운동을 하면서 생긴 객기로 거들먹거리고, 조폭세계의 ‘의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조직의 생리를 추앙하던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즉 김동술 등은 소위 ‘운동 좀 했다’는 객기로 똘똘 뭉친 선후배 체대생들이었을 뿐 계보가 있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

안 경위는 “김동술 등은 당시 다른 무리들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각자 생선회칼 등을 몸에 지니고 야구방망이 등을 차에 싣고 다녔는데, 이것도 애초 살인을 계획해서가 아니라 ‘섣불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한낱 객기성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순간적인 분을 이기지 못한 김동술 등이 지니고 있던 흉기와 야구방망이를 이용해 상대편 일행에게 무차별적인 가격을 가했고 이것이 예기치 못한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게 안 경위의 설명이다.

실제로는 야구방망이와 회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한 조원섭 측이 오히려 훨씬 더 강한 상대였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중 하나. 뜨내기 체대생들은 흉기만 없었다면 사실 조원섭 측에 상대가 안 됐다는 것. 특히 조원섭은 당시 지방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으며 뒤를 봐주는 비호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회칼 앞에서는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 사건은 검사조차 논고에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당시 사회를 충격 속으로 넣기에 충분했다. 특히 김동술 등은 검거 후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며 웃음을 짓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여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이들을 직접 대면해 취조했던 안 경위는 이들에 대해 여지껏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안 경위는 주범인 김동술 등에 대해 “운동을 한 애들답게 체격이 크고 훤칠하게 생긴 건장한 청년들로 기억된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이들은 검거 직후 매스컴 앞에서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객기를 부려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막상 조사를 받을 때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죽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며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영웅심리’에 빠져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망쳐버렸다며 후회하더라는 것.

하지만 법의 심판은 냉정했다. 1987년 10월 주범 김동술·고금석은 사형, 김승길·장진석은 무기징역 등의 확정판결을 받았고,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8월 14일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어지는 안 경위의 술회.

“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분명 살인을 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고 그래서 이미 법정 최고형의 죄 값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우발적이었다는 말이다. 요즘도 운동을 하거나 힘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는 욱하는 성질과 객기에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이들이 종종 있다. 나도 젊을 적에 운동을 해서 잘 안다.

그들도 그런 생각에 몰려다니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들이 꼭 그런 꼴이었다. 폭력조직에 정식으로 몸담은 적이 없었던 그들은 ‘의리’를 운운하고 몰려다녔을 뿐 조직의 생리를 몰랐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습니다. 피를 보게 되니 눈이 뒤집혀서 그만…’이라던 그들의 절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4명을 무참히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뒷이야기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앞날이 창창한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된 두 사람은 모두 종교에 귀의,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치다 죽음을 맞았다.

고금석은 법정 사실심리에서 모든 범행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진술, 선배인 장진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치소 내에서 불교에 귀의해 27세에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자신의 영치금과 사역비를 불우한 재소자나 나병환자 등에게 내줄 정도로 거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한 교도관을 통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또 다른 주범 김동술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찰 조서에는 ‘김동술이 피해자 정 아무개를 야구방망이로 머리와 몸통을 10여 회 강타하고 생선회칼로 팔을 2회 찌르는 등 가장 주도적인 행위를 하였고… 고 아무개의 이마, 팔, 허벅지 등을 11회나 찔러 살해하는 등 무자비하고 잔혹한 가해행위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건 당시 그의 범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동술 역시 옥중에서 가톨릭에 귀의, 짧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주여, 이 몸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외치며 26세의 나이에 사형대에 올랐다.

안 경위는 “사형 소식을 듣고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며 “그렇게 후회할 것을 왜 좀 더 일찍 어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 경위는 “언론에서는 조직폭력배와 회칼 등을 들먹이며 떠들어댔지만 정작 수사를 진행한 우리들에게는 한창 피끓는 젊은이들의 객기와 영웅심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생은 사다리타기 게임과 같답니다.

사건과 진실 서진 룸싸롱 사건 더기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강남구 역삼동 서진회관(서진룸살롱)에 모두 모인 그들의 운명은 ….. 그들은 이 20분간의 액션으로 ​ 삶과 죽음을 결정 짖게 된다. 화려한 룸에서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들은 이순간 알고 있었을까 자신들에게 닥쳐올앞날을 ……… 1986년 당시 강남 역삼동의 서진빌딩의 서진회관 모습 ​ ​ 암울했던 80년대 그당시 조폭간의 칼부림 사건은 흔한일이었을 정도로 유흥가 주변에는 칼부림 사건이 많았고 조폭 뿐만 아니라 ​ 일반인들도 어려운 삶에 칼을 휘두르고 살인을 저지르는 등 칼로인한 살인사건이연일 신문에 안나올 때가 없을 정도로 사회의 질서도 문란 했었다. ​ 폭력조직 간의 조직의 칼부림 뿐만 아니라 인근 고등학교 중학교등 학원가에서도 패싸움으로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심지어는 칼로 상대를 죽이는 사건들도 많았고 동내에서 이러한 학생들의 조폭을 흉내낸 패싸움은 자주 일어났고 많이 보았던 시절이었다. ​ 이당시의 사회관념은 말그대로 폭력이라는게 곧 힘이다는 식의 사고가 만연했었다. 우리나라 어딜가도 사람을 안패는 곳은 드물었다. ​ 군대는 더 말할 나위 없고학교의 선생들도 마찮가지였다. 일선 초중고의 학교 선생들도 죽도나 당구 큐대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체벌 이상의 폭력을 휘들러 학생에게 상해를 입히는 경우는 아주 너무나 흔한 일들이었다. ​ 말그대로 폭력 지상주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의 잔혹한 폭력에 억눌렸던 감정이 국민들에게 “위도 그런데 우리가 좀 폭력 좀 쓰면 어떠냐”는 식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사회의 정의가 되버린 시절이었다. ​ 그당시 폭력수준을 현재와 비교한다면 그당시는 그래도 현재의 학원에서단체 폭행,괴롭힘 같은비굴한 짖거리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당시의 사회의 폭력 수위는 현재의 10배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 생각해 보아라 일반적인 거리에서 학생들이 패싸움해서 도망가고 쫒아오는 패거리들이 차도를 넘어서 쓰러진 상대 고등학생을 4차선 도로 위에서 야구방망이로 치는 광경을 이런 광경은 그 당시 너무도흔했다. ​ 정말 이런일은 너무 흔했던 시절이라 파출소 가서도 훈방 정도로 끝날 정도였다. 이게 비정상적인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 선생은 학생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학생을 주먹과 발로 패서 이빨이 부러지고 뼈가 부러지는 상해는 지금 처럼 신고도 못했다. ​ 이런 폭력 지상만능주의 사회가 그 당시 80년대 전두환 군사폭력 정권시절의 사회 상황이었다. 이렇게 혼란의 시기에…… ​ 그날밤 이곳에서 일어난 칼부림 살인사건은 그 수위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 ​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시작 ​ 1986년 강남 역삼동 서진빌딩(현재는 영남빌딩으로 개칭) 지하의 서진회관에서는 여름밤의 흥을 돋구기 위해 한가로이 술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다음날이 8.15광복절 이기에 손님들은 많았다. ​ 그날밤 목포파 일당들은 8시30분경에 조직원 전체가 서진룸살롱에서 2개의 룸을 얻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12호실에는 목포파의 큰형님이라는 정요섭과 3명이 옆 호실에는 20호실에는 장진석외 8명이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 시간은 흐르고 서방파 계열의 오재홍(별명 맘보)이 이끄는 맘보파는고용수 출소 축하를 위해 총 7명이 9시 40분경에 서진회관 17호실로 들어왔었다. 이들은 이미 1차를 다른곳에서 하고 2차로 이 룸살롱으로 들어왔다 . 조직의 재건과 단합을 위해 모인자리이기도 하였다. ​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맘보파’ 7명이 동료의 출감을 축하하며 술잔을기다리고 있었다. ​ 서로 다른 룸에서 술자리를 갖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양측 일행 간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 “왜 쳐다보냐.” “똘마니 주제에….” “너 많이 컸다.” ​ 17호실의 맘보파 중 오재홍은 들어와서 잠시있다가 강남근방에 서방파 두목 김태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서진룸살롱을 나갔다. ​ 이후 17호실에선 6명이 남아서 있던중에 20분이 지나도 술이 나오지 않자 이왕규가 카운터로 가보겠다고하면서 17호실을 빠져나와 카운터로 갔고 조원섭도 화장실에 같이 가자면서 나가는중에 웨이터를 불러서 룸이 좁으니 다른호실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 이에 웨이터는 자리가 없다며양해를 구했으나 조원섭은 자신을 무시한다며 웨이터를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 순간 웨이터는 얼굴이 피투성이가되어 평소 자신과 안면이 있던 장진석 패거리가있는 16호실로 들어가서 구원을 청했다. ​ 이에 김승길 고금석이 어떤놈이야 하면서 달려나갔고당시 목포중학교 선배 조원섭이 김승길을 알아보고는 김승길도 인사하고 좋게 끝날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 문제는 조원섭의 안하무인격의성격으로 김승길 옆에 식씩거리고 서있던고금석을 향해 ​ “뭘쌍아지없게 쳐다보야 똘마니주제에 놈아” 하면서 주먹으로 고금석의 얼굴을 후려치며 따귀를 서너대 날린다. 이소리를 듣고 17호실에 있던 맘보파 일행들이 나오면서 고금석을 단체로 구타하자 이에 김승길도 16호살로 달려가서일행들에게 알리고 장진석은 콜라병을 들고 목포파 전체에게 다 죽여버려하고 소리질렀습니다 . 이때 상황은 밤 10시가 좀 못된 시간으로 두패들은 서로 복도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인원은 목포파의 인원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었다. ​ 앞에있던 김동술과 김승길은 발목에 차고 있던 생선회칼과 대검을 뽑아들었고 조원섭을 향해 씩씩거렸습니다. ​ 이에 조원섭은 “그래 그럼 어디한번 찔러봐 “하고 소리 치자마자 ​ 김동술이 잽싸게 달려들어 조원섭의 왼팔을 잡고 대검으로 아래로 내려치자 조원섭의 팔목이 거의잘려 나갈 지경이 되어 덜렁거렸고 조원섭은 비명을 질렀다. ​ 이때 옆에 있던 고금석은 지니고 있던 대검으로 조원섭의 허벅지를 찔렀다. ​ 이광경에 놀란 맘보파 차권은 미리 17호실 앞의 악사대기실로 미리 들어가 숨었고 나마지 송재익,고용수,장경식 등 3명은 조원섭을 데리고같이 17호실로 황급히 들어가 문을 잠궛다. ​ 문밖에서 문열어 하면서 소리치면서 서진룸살롱은 말그대로 죽음의 공포의 장소로 변해 갔다. 1986년 8월15일 촬영된 서진룸살롱17호실의 처참한모습 (당시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피로인하여 마치 지옥에 온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한다.) ​ 사건 직후 기자들이 촬영한 서진회관 17호실 앞복도 피가 바닥에 낭자해 있다. ​ 이때 밖에 있던 김동술은 막내였던 권모군에게 차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등을 가져오라 지시 합니다. ​ 권군은 차에서 야구방망이와 칼을 2자루 더 가져오고 목포파 이들은 `17호실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자마자 겁에질린 그들을 향해서 김동술 고금석 김승길이 중심이 되어 칼로 4명의 다리와 팔 등을 난자하고 뒤에 있던 일당들도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등으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 회칼과 흉기를 이용한 이 살인적 폭력은 10여분 동안 계속 되었다.말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사람을 계속적으로 찌르고 야구방망이로 가격하는 잔인무도한 살인행각을 벌인 것이다. ​ 1986년 8월 14일 여름밤 장마철이 시작 된 그 시기에 서진회관에서 벌어진 회칼에 의해서 피의 살육을 저지른 이 대형범죄 사건은…. ​ 향후 25년 동안 우리나라의 10대 강력사건으로 그 기록을 남기게 된다. ​ 이때 장진석은 마대자루를 들고 상대가 도망을 못가게 문앞 복도에서 지키고 있었다고 신문상과 진술상에는 전해진다. ​ 카운터에서 흥정을 하고있던 이왕규는 이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도망치고 20분이 흘러서야 17호실에서의 칼부림과 흉기질은 끝이나고 4명은 말그대로 피범벅이되어 문앞 화장실 바닥 쇼파 바닥에 모두 쓰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홀안과 복도는 사방이 피로 지옥과도 같은 장소가 되버렸다. ​ 잠깐 여기서 조원섭과 맘보파 조직원의 애기를하자면 조원섭은 전국에서 주먹으로 당할 자가 없었던 싸움꾼이라는 말이있을 정도로 싸움실력이 출중했고 같이 피살당한 고용수,송재익도 서방파에서 알아주는 주먹으로 그 이름을 새긴 자들이지만 좁은 룸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로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들 앞에서는 손쓸겨를도 없이 당했다. ​ 이때 까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진석 일당들은 이들을 어깨에 둘러매고 룸싸롱 뒷문에 있는 로얄살롱 승용차와 프라이드에 피해자들을 트렁크 등에 나누어실고 ​ 김동술은 이때 온몸이 피가 튀어 피법벅이된 손에 피가 떨어지는 회칼을 든채로 나오더니 칼을 들이데면서 가게안 종업원과 영업전무를 불러서 신고하면 다시와 죽여버린다고 협박한 뒤에 피가 흐르는 칼을 들이데며 협박했다. 홀안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것 없이 너무도 큰 충격에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 17호실에 있었던 7명중3명은 화를 면하고송재익씨,고용수씨,조원섭씨,장경식씨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 사당동 정정형외과에 시체를 버리고 달아나다. ​ 장진석,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정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 이들의 일당인 홍성규라는 조직원이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이들은 이병원으로 왔었다고 한다. 이들은 호성규에게도 도망가라고 얘기 한뒤 서둘러 뛰어 나갔다고 한다. 홍성규는 목발을 짚고 택시를 타고 병원에서 나왔다. ​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당시 부검 결과 한명은 40회 이상을 찔렸다고 한다,) ​ ​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그들… ​ 사건 발생상황을 다시정리하자면 이렇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목포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분노한 장진석은 룸으로 돌아와 콜라병 두 개를 쥐고 복도로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양측간 집단 난투극으로 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김동술과 고금석 등이 흉기를 휘두르면서 사건은 유혈사태로 번지고 만다. 이들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로 상대방의 하체 부위를 찔렀고 다른 일행들도 차량에 싣고 다니던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조원섭 등 목포맘보파 일행은 흉기를 갖고 있던 이들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 사건 다음날 모두 자수하였지만 사건의 주범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도망쳤다. ​ 이들은 다음날 장진석,김동술을 제외하고 자칭 큰형닙이라 불리는 정요섭등 모두 자수하였고 이틀 뒤 서진룸살롱에 없었던 홍성규,유회룡도 자수하였고,주범인 김승길도 자수하였다. 강정휴는 위장자수로 들통이 낫다. (강정휴는 위장자수 협위로 3년간의 형을 살았다.) 유회룡은 직접적인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나머지 사관과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경찰에 출두하였다. ​ 서진룸살롱 지배인 종업원 까지 모두 출두한 마당에 정작 사건의 핵심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보이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였다.하지만 이틀후 그들의 친구나 주변사람들을 심문하여 그들의 제보에 의하여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사건 당시 브리핑 자료로 작성한건데 천종갑이라는 사람은 별 관련이 없고 오재홍이라는 서방파 직계의 맘보파 두목이 관련인물로서 얼마전 한화 이승연회장의 청부폭력에도 관련됬던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피해자측 맘보파의 두목은 오재홍이라는 자로서 감옥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지 얼마안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조직원들의 출감을 계기로 조직의 재건을 위해서 모인 장소가 우연찮게 조직을 파멸로 이끈 셈이었다. ​ 다다음날 자수한 정요섭, 고금석,강정휴(위장자수),박영진 ​ ​ 이틀 뒤 자수한 홍성규 핵심 인물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잡히지 않은체 서진룸살인사건은정치인과의 마약조직과의 관계등등 수사는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 사건당시 목포출신 정치인과 관련설도 나돌았고 세월이지나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나온 소문이 당시전경환이 유도대생들 뒤를 봐주고 자신의 경호원으로 많이 대동하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는데 서진룸살롱의 목포파 유도대생들도 연관이 있지않았나 하는 관련설들도 돌았으나 확실히 검증된 사실이 아닌 추측에 불과하고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이날 목포파 이들이 누군가에게 잘보이기위해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등의 소문도 있으나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측일 뿐이다. ​ 서진룸살롱의 주범들 주변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였지만 정작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동술은 잡히지 않았다. ​ 생의 막장으로 치닫던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장진석,김동술) ​ 장진석 김동술은 사건 발생 4일 만에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그들을 체포할수가 있었다. 장진석 김동술이 마지막으로 숨었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 ​ 범인들은 경찰의 현상수배망을 뚫고 벼룩호수 가운데 섬까지 숨어들었다. ​ 장진석 김동술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헛간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 장진석 김동술이 숨은 위치를 파악한 형사 9명은 출동하여 낮은 포복으로 목표지점까지 기어가서 공포탄을 쏘며 자수할 것을 소리쳤으나 ​ 범인들은 회칼로 위협했고 급기야는 총성에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형사들은 재빨리 달려들어 권총으로 머리를 쳐서 쓰러트린 뒤 완력으로 이들 2명을 제압했다. ​ 장진석 김동술은 경찰차에 타고 서울로 오면서 긴장해 있었고 장진석은 이제 속이다 후련하다며.. 포기의사를 내비쳤고 ​ 형사들에게 우린이제 끝난거죠..하면서 물어보고 김동술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요물어보면서 불안감을 감추지는 못햇다고 한다. ​ 이들은 오는 중에 차에서 빵과 캔맥주를 형사들이 사줘서 먹기도했다. 체포차량은 이제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서초경찰서에 도착했다. ​ 이들이 서울서초경찰서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순간 수많은 기자들과 취재진들을 보고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이면서 애써 긴장된 모습을 보이려 하지않았다. 사무라이 처럼 살다 간다|뉘우치는 기색없어 ​ 【임실=이덕령·김석현기자】결정적인 주민제보가 흉악범을 잡았다. 일본밀항을 꿈꾸던 영동 서진룸살롱 주범인 장진석씨와 칼잡이 김동술씨는 서울로 압송된 후에도 뉘우치는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뻔뻔스럽고 당당한 표정이었다. ​ 이들은 형사대가 덮치자 과도를 들고 대항, 10여분간 격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뒤로 수갑을 찬 후에도 계속 반항해 공포를 쏜 후 묶어야 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는 차속에서도 경찰관을 향해 『형님들 5명만 온 줄 알았으면 승부를 걸었을텐데 적어도 전경 30여명은 우리를 포위한 줄 알았다』 고 말하고 『사무라이처럼 살다 간다. 이젠 우린 끝났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 ◇검거=제보를 받은 서울서초경찰서 김옥식경장(40)등 형사 5명은 19일하오3시30분쯤 전북 임실군영암면옥정호 마근댐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김경장등은 제보자인 안내인과 동행하고 있었다. ​ 김경장등은 도선 「마암 6호 사공 박병옥씨(22) 에게『유람왔으니 돈은 걱정말고 서너시간만 타자』며 배를 탄 뒤 북동쪽으로 40분쯤 달려 섬 한가운데에 있는 임동하씨(45) 집에서 2km쯤 떨어진 수수밭 부근에 배를 대게 했다. ​ 김경장등이 갈대밭을 통해 임씨집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임씨집에선 부인 송순내씨(49)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으며 범인들은 안채로부터 10m쯤 떨어진 초가헛간에 누워 있었다. ​ 당시 임씨와 임씨의 동생 동원씨(33)는 마침 이날 영암장터에 나가고 없었고 세아들도 근처 강가에 나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 형사대는 발소리를 죽여 범인들이 누워있는 헛간으로 접근, 장씨등이 헛간안에 누워있는것을 확인한 뒤 한꺼번에 덮쳤다. ​ ◇반항·격투=이때 두목 장씨가 바닥에 있던 길이 15cm쯤의 과도를 오른손에 들려고 하자 형사대는 『꼼짝마라. 그대로 엎드려』 라고 소리치며 장씨의 오른손을 쳐 칼을 빼앗았다. ​ 장씨등이 형사대에 저항할 자세를 취하자 김경장과 이지운순경등 2명이 공포를2발씩 쏘며 범인들을 동시에 덮쳤고 범인들은 형사들을 떼밀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 1·5평 헛간에서 벌어진 격투로 헛간은 피가 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범인들을 덮친 형사대는 이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권총손잡이로 장씨의 왼쪽머리와 김씨의 오른쪽 이마를 한차례씩 내리쳤다. ​ 형사대가 장씨등에게 뒷수갑을 채우고 밖으로 나오자 범인들이 마당에서 또 다시 반항, 공포3발을 쏜 뒤 범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나일론줄로 묶었다. ​ ◇소지품=형사대는 범인들이 은신했던 헛간에서 소형라디오 2대, 이불 1채, 야외용 비닐돗자리 1장, 낚시용모자1개, 슬리퍼 2켤레,트레이닝복 2벌등을 압수했다. ​ ◇범인잠입=범인들은 18일 하오8시30분쯤 옥정호수 남쪽 영암면소재지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외얏날 섬에 도착, 임씨집 헛간을 빌어 은신했다. ​ 임씨에 따르면 이날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장씨등이 찾아와 『몸이 아픈데 낚시나 하며 쉬었다 가고싶다』고 말해 방2개를 식구들이 모두 쓰고 있어 헛간밖에 없다고 하자 헛간을 보여줄것을 요청, 어망들을 쌓아놓은 헛간을 확인한 뒤 『이만하면 됐다. 사흘쯤 쉬고 가겠다』 며 헛간을 사용했다는것. ​ 임씨는 장씨등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낚시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 흔히 찾아오는 낚시꾼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 장씨는 외얏날섬에 잠입하기전 도피중이던 유원희씨의 형집에서 봉고트럭을 몰고 선착장으로 가던중 기름이 모두 떨어지자 선착장에서 11km쯤 떨어진 전북임실군신평면원천리산60 산길에 봉고 트럭을 버리고 버스편으로 선착장까지 왔었다. ​ 장씨등은 임씨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19일 아침8시쯤 임씨가족들과 함께 아침식사를하고 방안에 계속 머물다가 점심때쯤 임씨의 2남 용섭군(15·중2)에게 점심을 차려줄 것을 요구, 용섭군 형제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 장씨등은 식사도 서둘러 하는 등 임씨집 가족들과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장씨등이 산길에 버린 봉고트럭안에서는 길이20cm가량의 신품 과도 1개와 휴대용 가스레인지· 버너· 코헤르·텐트·방울낚시 3개등이 발견됐다. ​ 장씨등이 은신했던 외얏날섬에는 임씨가족 이외에 2가구가 더 살고 있는데 다른 집 사람들은 장씨등이 섬에 들어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 ◇제보=범인일당중 한사람의 형이 공범인 동생이 18일 서울에서 검거된 사실을 알고 장씨등이 옥정호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것으로 판단, 장씨등이 섬에 잠입한 18일 하오11시쯤 친척을 시켜 장씨등이 외얏날섬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제보자는 19일 상오 평소 알고 지내던 서울동부경찰서 김복균순경(39)에게 장씨등의 정확한 도피장소등을 제보했다. ​ ◇도피=장씨등은 사건직후 함께 합숙훈련을 했던 서울암사동 강동아파트 81동508호로 피신했다가 15일상오 훔친 서울4나1313호 레코드로열승용차를 타고 용인 유도대앞에서 식당을 운영, 평소 알고 지내던 경기도구리시 송화영씨(35)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 이들은 16일 상오 송씨에게 칼 19자루를 맡긴 뒤 택시를 타고 경기도과천시 주공아파트313동406호 유원희씨의 애인 박모양(21)집으로 가 하룻밤을 새우고 17일 상오 유씨의 친구인 윤일규씨 (26·트럭행상·서울천호동325의12)의 서울8다9506호 봉고트럭을 타고 전주 운암낚시터에 도착, 하룻밤을 야영했다. ​ 장씨등은 18일 상오 전북완주군이서면이문리645 유씨의 형 근희씨 (35) 집에 도착, 휴식을 취하다 이날하오 근희씨로 부터 낚싯대와 텐트를 빌어 근희씨 집에서 15km 쯤 떨어진 임씨집 근처 저수지에서 낚시꾼을 가장, 행동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 [출처: 중앙일보] 너무 뻔뻔스러웠다|쇠고랑찬 「칼잡이」 장진석·김동술 ​ ​ 체포하여 경찰청으로 들어가던 중에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기 자>현재의 심경이 어떤가 장진석> 후련하다 이제 다 끝났다. MBC기자가 김동술에게도 질문한다. 기 자> 이번일에 후회하지 안나 김동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 후회되고 애초에 애들이랑 같이 논 우리가 잘못이다.(피식 웃는다.) 정의롭게 살고 사무라이처럼 죽고 싶었는데이제는 다 틀려버렷다. 형님들(형사들)만 온줄 알았으면 한번 붙어봐도 승산이 있었는데…. 숨어있을 때 형사들과 전경들이 다 둘러 싼줄 착각했다.(다시 피식웃는다.) ​ 참으로 번뻔한 대답이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힘 자랑 할 생각을 하다니…(실제로 장진석 김동술은 그리 큰 체격이 아니었다) 이러하듯 김동술은 자신이 얼마나 큰 사건을 저질렀고 자신이 이제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23살의 순진함이 이제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이렇듯 횡성수설해 주위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였고 “애들이랑 논 우리가 잘못이지요”는 전국적으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컷다. 깡패들 끼리의 싸움이라 하지만 아무 목적 없이 단순한 시비 끝에 4명을 죽인사건 그것도 회칼로 사람을 수십군데를 찔러서 죽인 정말 이 어이없고도 잔인한 사건에 전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 이때 기자들이 계속 밀려오자 ​ 장진석이 기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장진석> (기자들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 이 사람들이 뭐 그거 큰 구경났소 사람 처음 봐” ​ 이렇듯 이두명은 아직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한 뻔뻔한 자세로 일관했다. ​ 장차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이 20년이 넘게 역사의 강력범죄 10대 사건으로 기록될 일을…… 기자들은 게속적으로 질문공세를 펼쳤으나 그둘은 잠시후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 체포되어 서초경찰서 앞에서의 모습 ​ 이렇게 경찰서 취조실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은 나름 여유로와 보였으나 취조실에서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조사내내 울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 아래 2명은 왼쪽의 장진석은 교도소에 무기로 현재에 수감중이고 오른쪽 김동술은 구속후 1년10개월 만에 사형 당했다. 나이 23세에 살인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어 25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이기도 하다. 죄값을 죽음으로 치룬 샘이 된거다. 부디 후생에서는 선한자로 다시 태어나길 빌겠다. ​ 이사건은 발생된 동기와 결과도 끔찍했지만 그 결과도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20대 젊은이들이 4명이 살해 당하고 2명이 사형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2명이 무기징역으로 현재 까지 수감중이다. ​ 이들의 범행에 말들이 말이 많았지만 이유는 없었다 젊은 혈기에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먼저 모욕적인 시비를 걸어온 상대를 8명이서 살해해 병원에 던저놓고 도망가버린 실로 어이없는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 서진회관 입구에서는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항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경찰의 최종 수사발표 서진룸살롱의 피의자 목포파는 조직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우발적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고 경찰은 최종 발표했다. ​ 맘보파는 서방파 직계의 계보가 있었던 조직이었던 반면에 장진석이 이끄는 목포파는 계보없이 일정 수입원을 청부폭력으로 채우는 ​ 폭력조직으로서 정요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직이었다. 아파트에서 발견된 표창 아파트,차량에서 등에서 압수한 흉기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재판과정과 죽은자들의 삶에 대한 후회….. 공판 서울강남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의 주범 장진석등의 칼잡이들이 서울구치소로 송치되고 있다. ​ 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으로 들어서는 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칼잡이들. 검거당시의 뻔뻔스런 모습과는 달리 모두 고개를 숙인채 카메라를 피했다. ​ ​ ​ ​ ​ ​ ​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사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만26세의 나이로 죄값을 치렀습니다. ​ 이들은 유도대(현재의 용인대학교)출신으로선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신의 영혼을 팔아 악행을 저지른 그댓가를 처절히 받았습니다. 이들의 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 이들은 선배인 장진석의 지시에 따라 흉악 무도한 일을 저질렀고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 재판초기에는 이들은 장진석을 보호하고 자신들이 죄과를 다 뒤집어 썼습니다. 이들은 원래 부터 악한자들이었을까요 시건 종결후 이들의 동창과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덩치만 크고 힘만셌지 마음은 무척 여린 사람들이었다 하더군요 ​ 이들이 조직폭력배의 길에 들어서게 된건 가난한 집안 환경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의 약점을 유혹하는 조폭 선배들이라는 이들의 감언이설에 의해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됬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그 댓가를 죽음으로 치렀습니다. ​ 2명이 사형수가 되기 까지에는그들 스스로의 죄가 너무도 잔학무도 했던것이기에 당연하지만 선배라고하는 장진석(당시 26세)과 큰형님으로 통했던 정요섭(당시41세)은 자신들은 그런지시를 한적이 없었다. 그렇게 죽이라고 시키지 않았다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발뺌하기 바빴습니다. ​ 결국 장진석은 무기수로 감형되었고 정요섭(당시41세)은 15년을 판결 받았습니다. 심지어 장진석은 자신은 죄가 없고 옆에만있었지 아무짖도 안했다 내가만약에 사형을받는다면 재판장에서 개판을 칠것이라고 오히려 교도관들을에게 엄포를했다고 신문기사에도 나왔습니다. ​ 2심에서도 사형판결을 받고 돌아가는장진석 체포시와는 반대로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죽을 죄를 저지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으로 그 무거운 업보를 값았습니다. 이미 죄값을 치르고 죽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욕하고 싶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그들에게 연민의 슬픔이 아련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그들은 너무도 단순했고 무지몽매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 ​ 김동술과 고금석은 자신들이 사형판결을 확정 받고서야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재판장에서 눈물반 진술반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재판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더군요 ​ 서진룸살롱 살인범들 중에 유독 덩치가 컷던 김동술 고금석씨 그들은 자신만의 안위만을 지킬려는 선배들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도 같이 애기했습니다. ​ ​ ​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동술 고금석씨는 부디 후생에서는 이러한 악한 삶을 살지 않기를 빌어 봅니다. ​ 장진석은 현재 공주교도소에서 그 죄업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무기수로 복역중이고 ​ 장진석과 같이 무기형을 받은 김승길도 옥중결혼식을 치르고 무기수로 아직도 자신의 죄과를 치르고 있습니다. ​ 소동이 났던 서진회관은 아직도 역삼동에 그 건물이 그대로 있고요(영남빌딩) 시체를버렸던 사당동 그병원도 그당시 원장님이 그대로 운영하고 계십니다.사건의 주범이었고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있던 ​ 홍모씨가 출소하고 원장 선생을 한번 찾아와서 뵈었다고 하더군요 고금석과 김동술씨는 자신들의 죄과를 땅을 치며 반성하고 후회했지만 이들은 판결후 3년이 좀 안된 1989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그 죄값을 치렀습니다. 김동술씨는 발판이 내려가지않아 45분후에 다시 사형이 집행됬다고 하더군요 그 공포가 온몸으로 그의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했다고 하더군요….. ​ 김동술,고금석 이두명은 남은기간동안 많은 선행을 배풀었고 마지막엔 자신의 몸을 모두 기증하였다고 하더군요 과연 무었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 ​ 아래는 수사반장 안경식 경위가 회고하는 서진룸살롱 사건이야기 ​ 수사반장의 잊혀지지않는 사건 서진룸살롱 사건 ​ ​ 당시 이 사건은 장진석 등이 중심이 된 서울목포파와 조원섭 등이 중심이 된 목포맘보파 두 조직 간의 이권다툼 끝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또 숱한 루머들과 뒷얘기들을 낳으며 오랫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 ​ 하지만 안 경위는 가해자인 김동술 등을 조직폭력배로 지칭한 당시 매스컴의 보도는 과장된 면이 있다며 이 사건이 전문 조직폭력집단 간의 세력싸움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고 조직의 명칭 역시 수사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것일 뿐 실제로는 그런 조직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동향 출신으로 대학 때 상경해 합숙생활을 하며 뭉쳐다니던 패거리였을 뿐이라는 것. 당시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대부분 유도대학 재학생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는데 이 사건으로 한때 유도대학은 ‘깡패양성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 하지만 안 경위에 따르면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사실 덩치만 컸지 전문 싸움꾼도 조직원도 아니었다. 이들은 체격이 큰 데다가 운동을 하면서 생긴 객기로 거들먹거리고, 조폭세계의 ‘의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조직의 생리를 추앙하던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즉 김동술 등은 소위 ‘운동 좀 했다’는 객기로 똘똘 뭉친 선후배 체대생들이었을 뿐 계보가 있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 ​ 안 경위는 “김동술 등은 당시 다른 무리들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각자 생선회칼 등을 몸에 지니고 야구방망이 등을 차에 싣고 다녔는데, 이것도 애초 살인을 계획해서가 아니라 ‘섣불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한낱 객기성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순간적인 분을 이기지 못한 김동술 등이 지니고 있던 흉기와 야구방망이를 이용해 상대편 일행에게 무차별적인 가격을 가했고 이것이 예기치 못한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게 안 경위의 설명이다. ​ 실제로는 야구방망이와 회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한 조원섭 측이 오히려 훨씬 더 강한 상대였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중 하나. 뜨내기 체대생들은 흉기만 없었다면 사실 조원섭 측에 상대가 안 됐다는 것. 특히 조원섭은 당시 지방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으며 뒤를 봐주는 비호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회칼 앞에서는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 이 사건은 검사조차 논고에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당시 사회를 충격 속으로 넣기에 충분했다. 특히 김동술 등은 검거 후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며 웃음을 짓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여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이들을 직접 대면해 취조했던 안 경위는 이들에 대해 여지껏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 안 경위는 주범인 김동술 등에 대해 “운동을 한 애들답게 체격이 크고 훤칠하게 생긴 건장한 청년들로 기억된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이들은 검거 직후 매스컴 앞에서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객기를 부려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막상 조사를 받을 때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죽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며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영웅심리’에 빠져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망쳐버렸다며 후회하더라는 것. ​ 하지만 법의 심판은 냉정했다. 1987년 10월 주범 김동술·고금석은 사형, 김승길·장진석은 무기징역 등의 확정판결을 받았고,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8월 14일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어지는 안 경위의 술회. ​ “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분명 살인을 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고 그래서 이미 법정 최고형의 죄 값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우발적이었다는 말이다. 요즘도 운동을 하거나 힘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는 욱하는 성질과 객기에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이들이 종종 있다. 나도 젊을 적에 운동을 해서 잘 안다. ​ 그들도 그런 생각에 몰려다니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들이 꼭 그런 꼴이었다. 폭력조직에 정식으로 몸담은 적이 없었던 그들은 ‘의리’를 운운하고 몰려다녔을 뿐 조직의 생리를 몰랐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습니다. 피를 보게 되니 눈이 뒤집혀서 그만…’이라던 그들의 절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4명을 무참히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뒷이야기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앞날이 창창한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된 두 사람은 모두 종교에 귀의,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치다 죽음을 맞았다. ​ 고금석은 법정 사실심리에서 모든 범행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진술, 선배인 장진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는 구치소 내에서 불교에 귀의해 27세에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자신의 영치금과 사역비를 불우한 재소자나 나병환자 등에게 내줄 정도로 거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한 교도관을 통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 또 다른 주범 김동술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찰 조서에는 ‘김동술이 피해자 정 아무개를 야구방망이로 머리와 몸통을 10여 회 강타하고 생선회칼로 팔을 2회 찌르는 등 가장 주도적인 행위를 하였고… 고 아무개의 이마, 팔, 허벅지 등을 11회나 찔러 살해하는 등 무자비하고 잔혹한 가해행위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건 당시 그의 범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동술 역시 옥중에서 가톨릭에 귀의, 짧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주여, 이 몸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외치며 26세의 나이에 사형대에 올랐다. ​ 안 경위는 “사형 소식을 듣고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며 “그렇게 후회할 것을 왜 좀 더 일찍 어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안 경위는 “언론에서는 조직폭력배와 회칼 등을 들먹이며 떠들어댔지만 정작 수사를 진행한 우리들에게는 한창 피끓는 젊은이들의 객기와 영웅심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 ​ ​ [스브스夜] ‘꼬꼬무’ 서진 룸살롱 사건…’사형수’가 된 ‘키다리 아저씨’ 고금석 이야기 ​ 작성 : 2020-11-13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가 공개됐다. 12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 중 하나였던 서진룸살롱 사건과 사형수 고금석에 대해 조명했다. ​ 강원도 정선 산골 오지에 자리한 한 분교, 학생 수는 28명에 교실도 하나였던 학교의 아이들은 매번 5만 원과 함께 편지를 보내오는 한 아저씨를 기다렸다. ​ 그러나 선생님 조차 아이들에게 편지와 돈을 보내주는 아저씨의 정체는 몰라 모두들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다. 하루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한 번도 바다에 가 본 적이 없다며 바다에 가고 싶다고 답장을 했다. ​ 이에 키다리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8월 12일, 부산 해운대로 초대할게”라고 회신했고 아이들은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편지 후 아저씨의 편지는 뚝 끊어졌다.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고 8월 3일 해운대의 삼중 스님에게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삼중 스님은 이 전화를 받고 오열했다. 그는 50여 년을 교도소를 왔다 갔다 하며 300여 명의 사형수의 곁을 지키며 사형수의 아버지라고 불린 인물. 이에 삼중 스님은 “고금석의 사형이 내일 오전 서울 구치소에서 집행된다고 하더라. 내가 그때같이 괴로운 적이 없었다”라며 “그만큼 나는 그를 사랑하고 나보다 더 아꼈다”라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곧바로 구치소로 향한 삼중 스님. 그는 25살의 사형수 고금석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 그런 그 앞에 고금석은 삼배 절을 하고 “왜 이러십니까 하고 나보고 늘 마지막에 웃으면서 멋지게 가라고 하셨잖냐”라고 스님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의 바다 여행을 잘 치러주세요. 위험하지 않게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대로 향했다. ​ 그가 바로 산골 분교 아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키다리 아저씨였고 그는 아이들과 바다 여행을 약속한 1주일 전 사형을 당했던 것. 그리고 고금석은 바로 1986년 8월 14일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조폭들 간의 칼부림 사건 ‘서진룸살롱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이었다. ​ 조직폭력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활약했던 조폭 1기 낭만파 주먹 시대, 그리고 이승만 정권 당시 주먹과 정치가 결합해 공생했던 조폭 2기 정치 깡패 시대, 그리고 이를 지나 지방 조폭들이 상경해 서울 조폭계의 패권을 다투던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로 이어졌다. ​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의 조폭 3대 패밀리로 불리던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범서방파, 이동재의 OB파는 모두 호남 출신. 당시 영남으로 치우쳤던 국토 개발로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던 호남 출신들이 대거 상경했고 그런 이들의 서울의 밤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서진 룸살롱 사건은 조폭 3기 전국구 조폭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사건이었다. ​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20분 강남 역삼동 최고급 룸살롱 서진 회관에는 22살의 고금석이 일행들과 함께 16호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고금석이 속한 조직은 서울 목포파. 이들의 아지트였던 서진 회관에는 거구의 사내들 7명이 등장했고 그들은 17호실로 안내되었다. 이미 잔뜩 취한 상태로 서진 회관을 찾은 17호실 손님들은 웨이터를 불러 돈 4만 원을 주고 위스키를 2병 가져오고 안주는 그냥 달라며 강짜를 부렸다. 그들의 분위기와 외향에 압도당한 웨이터는 군소리 없이 자리를 떠났고 17호실 손님들은 시간이 지나도 주문한 것이 나오지 않자 웨이터를 다시 불러 불평불만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방이 왜 작냐고 시비를 걸던 17호실 손님들은 방이 없다는 웨이터의 말에 그를 폭행했고 이후 16호실에 불려 간 웨이터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리고 웨이터는 17호실 손님들이 김태촌의 이름을 언급했다고 말해 분위기는 일순 싸해졌다. 사실 17호실 손님들은 김태촌의 범서방파의 방계 조직 중 하나인 맘보파 소속들이었던 것. ​ 이후 고금석과 일행은 화장실에 다녀왔고 복도에서 17호실의 조원섭과 마주했다. 190cm 키에 100kg 거구였던 조원섭 은 헤비급 복서 출신으로 1:1 싸움으로는 김두한 이후로 최고라고 불릴 정도의 강자였고 그는 맘보파의 행동대장이었다. 그는 고금석 일행과 시비가 붙었고 그러던 그때 고금석의 일행이 조원섭 을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다. 조원섭과 고금석의 일행은 동향 선후배 사이였던 것. 그런데 이를 보던 고금석은 일면식 없는 조원섭 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고 이에 조원섭 이 고향 선배도 몰라보냐며 고금석의 따귀를 여러 차례 때렸다. ​ 고금석은 조원섭 을 노려보았고 신경전을 펼치던 둘은 결국 싸움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에 조원섭은 17호실 일행들을 소환하고 이들은 고금석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이를 보던 고금석의 일행들도 모두 나와 싸움을 벌였다. 사실 맘보 파는 이런 싸움에는 이골이 난 상태라 여유로웠다. ​ 그러나 서울 목포 파는 모두 같은 대학 유도학과 선후배 사이로 그들과는 조금 다른 마음이었다. 당시 서울 목포파 두목 장 씨는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한 상태로 사무라이, 마피아 문화를 동경하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는 전국 조폭계를 정화하겠다는 목표로 조직을 만들고 합숙, 지옥 훈련까지 했다. ​ 맘보파와 서울 목포파의 싸움이 계속되던 그때 서울 목포파 행동대장이 발목에 있던 칼을 꺼냈다. 그리고 이를 본 조원섭 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찌를 테면 찔러봐”라고 도발했다. ​ 순식간에 치킨 게임이 된 상황에서 서울 목포파 행동대장은 칼로 조원섭 의 팔을 내리치고 고금석은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맘보파 조직원들은 놀라서 조원섭 을 데리고 일부는 화장실로 도망가고 몇몇은 17호실로 대피했다. ​ 그리고 서울 목포 파는 차 트렁크에 있던 야구 방망이, 칼을 가지고 와서 무장해 맘보파를 위협했다. 일부는 화장실로 가서 공격하고 일부는 역기로 17호실 문을 열고 들어가 순식간에 칼부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가장 앞에서 칼을 휘둘렀던 이가 바로 고금석이었다. 그는 훗날 법정에서 피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혀서 멈출 수가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범죄 사실을 그의 지인들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낙도 학교 선생님으로 섬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아버지와 사랑으로 고금석을 키운 어머니 사이에서 고금석은 누구보다 바르게 자랐고 그에 대한 칭찬은 마을 내에 자자했다. 그런 그는 돈을 벌면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해 자가용을 사드리겠다는 꿈이 있었다. 이에 대학 입학 후 아르바이트도 하며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았던 고금석, 그런 그는 고향 선배 장 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를 눈여겨본 장 씨가 그에게 은밀한 제안을 해왔다. 지신을 도와주면 돈을 벌 수 쉽게 벌 수 있다는 것. 당시 100kg의 건장한 체격에 유도 유단자였던 고금석에게 장 씨는 천호동 나이트클럽 카운터를 보라고 했고 어렵지 않은 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선배의 호출로 간 곳에서 흉기를 들고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선배들을 목격한 고금석은 싸움에 휘말리고 싸움이 끝나자 큰돈을 주는 상황에 그는 조금씩 조금씩 조직 세계에 더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 사이 순수했던 섬마을 소년은 흉악한 칼잡이가 되어 갔던 것. 당시 취재 기자들은 사건 현장인 서진 회관 내부를 보고 “그곳에 들어갔을 때 마치 지옥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던 사건, 그리고 국민들은 당시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범인들의 뻔뻔함에 분노했다. ​ 당시 두목 장 씨는 25살 행동대장 김 씨는 23살로 어리다면 어린 20대 청년들이었던 그들은 4명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일말의 죄의식은 느껴지지 않았고 언론은 이들을 향해 10인의 살인 폭력배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은 검거 보름 후 진행된 현장 검증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검거 당시와 달리 죄를 뉘우치고 사죄하며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들. 그제야 자신들이 갖고 있던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서울 목포파 10인은 대부분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고금석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뜻밖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너무도 끔찍한 사건으로 조폭을 뿌리 뽑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범죄와의 전쟁 선포했던 것. 범죄와의 전쟁은 헌범이 부여한 모든 권한을 동원해 조폭을 소탕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었다. ​ 그러나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한 이등병의 양심선언으로 밝혀진 국군 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이에 비난을 면치 못한 노태우 정권은 이 사건 폭로 열흘 만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것. 당시 정부는 경찰 16000명 충원했고 이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하루 16시간 이상 근무를 했다. 이에 당시 격무에 시달리던 경찰청 형사국장 과로로 사망했고 그 외에도 당시 순직한 경찰 126명, 부상이 2000명이 넘었다. 이 범죄와의 전쟁으로 조직폭력배 조직 274개를 소탕했고 1421명을 검거했으며 1086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폭 시대의 종말이 찾아왔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목포파가 꿈꿨던 일이었던 것. 고금석은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수로 수감 생활을 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불교에 귀 이해 새벽마다 일어나 참선을 하고 참회의 절을 매일 삼천 번씩 올렸다. 삼중스님 이에 삼중 스님은 “끊임없이 참회했다.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천일 동안 기도를 했다”라고 그를 떠올렸다. 고금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옥중 편지도 남겼다. 그는 편지를 통해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철없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에 파리 모기에 시달려도 한 마리도 죽일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했다. ​ 사건 발생 3년째가 되던 1989년 8월 3일 사형을 앞둔 고금석은 삼중 스님에게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게 도와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금석이 사랑한 여인은 그의 첫사랑이었던 윤 씨.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 윤 씨는 고금석을 매일매일 면회를 왔고 그와 옥중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 윤 씨는 고금석의 사형이 확정된 줄 알면서도 옥중 결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지만 법무부는 미결수의 옥중 결혼이 불가능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윤 씨는 “사형이 집행돼도 두렵지 않아요. 여승이 되어 평생 그의 명복을 빌면서 살게요”라고 끝까지 매달렸고 결국 고금석은 윤 씨를 위해 그의 면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러나 윤 씨는 매일같이 고금석을 찾아갔다. 평소처럼 면회를 온 윤 씨, 그러나 이 날 교도관은 평소와 반응을 보였다. 교도관은 윤 씨에게 “오늘 아침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라고 고금석의 사형집행을 알렸다. ​ 이에 윤 씨는 그 자리에 앉아서 오열했고 이를 보던 교도관도 그를 안타까워했다. 고금석이 떠나고 1주일 후, 삼중 스님은 산골 분교 아이들과 해운대 여행을 했다. 그리고 곁에는 윤 씨도 함께 했다. 사랑했던 고금석의 소원을 자신이 대신했던 것. 그리고 이날 삼중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번 바다 잔치는 한 아저씨가 베풀어 준거란다, 그 아저씨는 여기 올 수 없었어. 그 아저씨 이름은 고금석이다”라고 했다. 이후 아이들은 삼중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이들은 편지에 “고금석 아저씨는 우리들을 바다에 보내주셔서 고마운 분이에요, 고금석 아저씨가 우리가 바다에 가서 놀고 있는 것을 못 보고 돌아가셨나요? 돌아가셔서 안됐어요. 그럼 몸 건강하세요”라는 진심을 담았다. 얼마 후 산골 분교에 야외 교실이 지어졌고 이 곳의 이름은 금송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금석이 모은 영치금을 지은 이 곳에 고금석의 법명을 붙인 것. 고금석이 남긴 염주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삼중 스님은 “난 금석이를 늘 만난다. 물론 그는 사형수였다. 사형이라는 죄목에 대해서는 억울하니 할 이야기는 없고, 인간은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배운다”라며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는 떠날 때 보면 안다. 고금석은 내게 그런 사람이다”라고 그를 회상했다. 고금석의 이야기를 들은 한지은은 “어떤 이유였던 사람을 죽인 것은 굉장히 잘못한 것임에 분명한데도, 내막을 들여다봤을 때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나를 복잡하게 한다”라고 했다. 또한 김동현은 “나쁜 면은 자기가 누르고 평생 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게 터져 버리면 누구나에게 독이 되어 올 수밖에 없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준혁은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라며 “나를 세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다”라며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망쳐 버린 인생에 대해 말했다. 장항준은 “조직폭력배에 대한 동경을 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에 인생은 너무 아깝다. 순간은 되돌릴 수 없다”라고 조언했다. ​ 출처 : SBS연예뉴스 ​ 나의 사견을 말 한다면 ​ 맘보파의 조원섭은 평소 하잖게 생각했던 후배 김승길 은 깍듯이 인사를 하였는데. 그 만만 했던 김승길의 친구인 듯 한 고금석 이 굽신 거리지 도 않고 노려만 보고 있으니 김승길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체면이 깍긴 듯 했을듯 하다 조원섭 생각은 고금석도 김승길 처럼 굽히고 대접 받길를 바랐는데 불만스러운 표정에 큰 목소리로 뻑뻑하게 버티니 완전 체면을 구긴듯 생각 하였는데 가해자들이 칼을 들이 데니 그는 가해자들을 더욱 하잖게 생각 한 듯 하다, ​ 가해자 들은 자기네들의 본거지 이며 또 많은 인원에 힘입어 선제 공격에 나섰으나 그러나 그 들은 아직 순진 (?)하게 운동 만 열심히 한 아직 아마추어 정도의 폭력 단체 이였으며 , 그들이 피해자들을 생각 하기 로는 자기네 보다는 더 강한 프로급 (?)의 무시 무시 한 폭력조직 이라 생각 한 듯 하다. ​ 그들은 조금이라도 방심 되면 크게 당할 듯 하여 더욱 잔인 해 진 것 같다. ​ 인쇄

서진룸사롱 살인사건 피해자들 조원섭 고용수 장경식들 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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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들의 칼부림 ‘서진 룸살롱’ 집단 살인사건

전남 신안 출신의 오재홍(33)은 폭력조직 서방파에서 활동했다.

1981년 7월 오씨는 자신의 별명을 딴 ‘맘보파’를 결성하고 세력을 확장한다. 이들은 서울 유흥업계의 노른자위로 불리는 강남구 역삼동 일대 호텔과 나이트 클럽, 룸살롱에 뿌리를 내리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1982년 10월20일 두목 오씨와 부두목 조시온(32, 별명 도지)이 경찰에 구속되면서 맘보파는 크게 위축된다.

이 기회를 틈타 1984년 11월 장진석은 고향 후배 등을 모아 ‘서울 목포파’를 결성한다. 이들은 사업가였던 정요섭을 조직의 대부(보스)로 추대하고 자금을 맡도록 했으며, 장진석은 두목, 김동술은 행동대장(훈련규율 담당), 박영진은 총무(살림살이) 등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또한 진실‧믿음‧의리, 질서와 체계는 힘의 근본, 비굴하게 사느니 용감하게 죽는다 등의 공동행동강령까지 정했다. 이후 남서울 일대의 호텔과 룸살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강남 일대의 유흥업소를 놓고 맘보파와 신흥 서울 목포파가 대결하는 양상이 됐다.

두 조직 간에 알력이 시작됐고 언젠가 피바람을 예고했다.

그러던 1986년 8월14일 맘보파 조직원 고용수(28)가 교통사고를 내고 수감생활을 하다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맘보파는 고씨가 풀려나자 축하 겸 단합대회를 연다.

그런데 하필 장소가 서울 목포파가 관리하던 강남구 역삼동 서진회관 지하 룸살롱이었다. 룸살롱 주인은 3년 전 지하 170평을 임대해 밀실 23개를 갖춰놓고 영업을 시작했다.

이날 오후 10시30분쯤, 출소한 고용수를 포함해 조원섭(24), 송재익(23), 장경식(24), 차권(25), 천종갑(44), 이왕규(29) 등 7명이 모였다. 종업원은 이들을 17호실로 안내했다.

이때 서울 목포파도 서진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요섭(41)은 목포에서 사업관계로 상경한 황씨 등 3명, 내연녀 김미희(23)와 20호실에서, 두목 장진석(25), 고금석(22), 김동술(23), 김승길(27), 김경만(19), 유원희(24), 박영진(27), 양해용(23) 등 8명은 맘보파 바로 앞방인 16호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맘보파가 비무장 상태였던 것에 반해 이들은 생선회칼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룸에 들어온 맘보파 일행 중 이왕규는 목포의 중학교 선배인 룸살롱 전무를 불러 4만원을 건네주며 “돈이 이것 밖에 없으니 이 돈으로 위스키 2병을 주고, 안주는 서비스로 달라”고 요구했다. 약 10분이 지나도 주문한 술이 나오지 않자 이왕규가 카운터로 나갔다.

조원섭은 씩씩거리며 인터폰을 눌렀고, 특번 웨이터 권씨(28)를 불러 “방이 좁으니 넓은 방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권씨가 “손님이 많아 넓은 방이 없다”고 하자 조원섭은 권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코에서 피를 흘린 권씨는 앞방인 16호실로 뛰어 들어갔다.

장진석 등은 피투성이가 된 권씨를 보고 “어떤 놈이 그랬느냐”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들 중 조원섭과 안면이 있던 김승길이 일어나 17호실 문을 두드려 조씨를 불러냈다. 조원섭과 김승길이 대화 중일 때 고금석이 전화하러 나갔다가 두 사람을 쳐다봤고, 조원섭이 인상 쓰지 마라며 고금석에게 주먹을 날린다.

이때 16호실에 있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이 복도로 몰려나오자 조원섭은 위급함을 느끼고 큰 소리로 17호실의 동료들을 불러냈다. 두 패는 좁은 복도에서 맞닥뜨렸다. 그 순간 장진석이 “야, 전부 죽여버려”라고 소리쳤고, 조직원들이 다리에 차고 있던 생선회칼을 뽑아들었다.

당황한 조원섭은 객기를 부리며 “찔러 볼테면 찔러봐”라고 큰 소리치다 고금석에게 오른쪽 팔을 찔렸다. 조씨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고 룸살롱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조원섭과 송재익은 화장실로 피했고, 고용수와 장경식은 17호실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갔다. 고금석과 김동술은 화장실로 쫓아가 조원섭과 송재익을 칼로 찌르고 방망이로 때려 살해했다.

그다음 17호실로 가서 철봉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고용수와 장경식의 온몸을 난자해 살해했다. 가까스로 홀안 악사대기실과 홀 쪽으로 피한 천종갑과 차권, 이왕규는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왼쪽부터 장진석, 김동술, 고금석.

칼부림을 끝낸 서울 맘보파 조직원들은 피 묻은 칼을 휘두르며 겁에 질린 손님과 웨이터 등을 향해 “비켜, 다 죽여” “전화 끊어” “문 잠가, 신고 못하게 해”라고 연신 외치며 전화선을 칼로 끊었다.

이들은 또 종업원들에게 “우리가 병원으로 옮겨 잘 수습하겠다. 경찰에 알리지 말라”며 시신을 한 명씩 들쳐 업고 룸살롱을 빠져나와 주차장에 있던 승용차 두 대에 싣고 8km쯤 떨어진 사당동 정형외과에 갔다.

범인들은 밤 11시30분쯤 병원에 나타나 2층 수술실과 1층 계단 사이에 버려두고 “교통사고 환자요“라고 소리치며 달아났다. 이때 이 병원 113호실에 입원해 있던 홍성규(24)도 함께 도주한다.

시체 운반에 쓰인 승용차 2대는 다음날 오전 9시와 10시 사이에 서울 강남구 방배동 레인보우호텔 주차장과 강남구 반포동 정요섭 내연녀의 아파트 앞에서 발견된다.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피해자들이 있었던 17호실 방문은 가해자들이 부숴 떨어져나가 있었고, 가운데 탁자, 옷장 등 문짝도 흉기에 긁히고 찍힌 자국이 곳곳에 나 있었다. 바닥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휴지통과 재떨이 간이의자 등 집기들도 박살 난 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서울시경 3부장을 본부장으로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다. 경찰은 사건 당시 서진룸살롱에 있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 12명에 대한 공개수배령을 내렸다. 경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서울 목포파는 대책회의를 갖는다.

정요섭 등은 15일 오후 과천에 있는 유원희의 애인 아파트에 모였다. 정씨는 ”사건이 너무 시끄러우니 일부는 자수해 시간을 벌자“고 제안했고, 두목인 장진석도 이를 받아들였다. 장씨는 사건 현장에 있던 조직의 막내 김경만을 보호하기 위해 강정휴(20)를 대신 자수시키기로 한다.

또한 언론에 유원희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자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입을 맞췄다. 이에 따라 박영진, 고금석, 강정휴, 정요섭, 홍성규, 김승길 등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순차적으로 경찰에 자수한다.

유원희의 경우 청량리에서 애인을 만나려다 애인의 신고를 받고 잠복해있던 경찰에게 검거됐다. 김경만도 수사선상에 오르자 경찰에 자수했고, 강정휴는 위장자수가 드러난 후 ”그와는 친한 사이로 평소 의리때문에 대신 자수했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도 장진석과 김동술은 도피 상태였고 경찰은 이들의 은신처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입수한다. 수사본부는 무술 경관 5명을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용운리에 급파했다.

이곳은 지난 1965년 섬진강댐 확장공사로 점차 수몰되면서 수십가구에 달하던 마을에는 단 3가구만 남아 있었다. 뱃길로만 통할 수 있는 ‘육지속의 섬’으로 천혜의 은신처라고 할 수 있었다.

장씨와 김씨는 19일 오후 5시쯤 임씨(47) 집 헛간에서 낚시꾼으로 위장하고 숨어 있다가 검거됐다. 경찰은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으나 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자 공포 7발을 쏘아 제압해 수갑을 채웠다.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살인‧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범죄단체구성)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대법원까지 간 끝에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이 확정됐고,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던 장진석은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이 참작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나머지는 상고를 기각해 원심대로 김승길 무기징역, 박영진 징역 20년, 정요섭 징역 15년, 유원희 징역 12년, 김경만 징역 3년6월, 양회룡 징역 2년, 홍성규와 강정휴는 각각 징역 1년6월이 확정됐다. 1989년 8월4일 김동술과 고금석의 사형이 집행됐다.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박영진은 2006년 출소했다. 그는 2010년 11월 51세의 나이에 한살 연상인 장진석의 누나와 결혼해 화제가 됐다.■

그리드형

서진룸 살인사건 정리

–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정리 –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198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형 룸살롱으로 알려진 서진회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전라도 목포출신 조직폭력배들의 사소한 시비로 인해 집단 패싸움으로 번져 살인사건으로 까지 이어진 사건인데요

이 일로 인해 반대파 조직원 4명이 살해당했고 이 사건의 주범 조직원 2명이 사형당하는 아주 참혹한 에피소드입니다.

전라도출신의 국회의원 및 지역유지들도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수사를 받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당시에 서로 대치되었던 조직은 서울목포파 / 맘보파 / 였습니다.

사건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1986년 8월 14일 밤 10시에 목포파의 혈기왕성한 젊은조폭들이 대장 장진석과 행동대장 김동술 등등

여러명에게 사시미와 알류미늄 방망이로 상대방 조직원 맘보파를 잔인하게 무차별하게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원래 조직폭력배간의 집단 패싸움에서는 사시미나 기타흉기로 상대방을 겁준다거나 죽지않을정도까지만 행동을 하는데

이번 사건같은 경우는 정면 싸움도 아닌 기습으로 상대방을 무참히 죽여버렸습니다.

조폭들이 아무리 겁없고 막산다고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면 얼마나 큰죄이고 그에 대한 대가는 얼마나 무거운지

잘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상대파 조직원 4명을 끔찍하게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렇게 살인이 시작 된 계기는 교통사고를 낸뒤 실형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서 출소한 맘보파 고용수의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하필 그 옆방에서 상대파 조직원 목포파 8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맘보파 일행 방에서 술시중을 들던 남자 종업원의 태도가 상당히 기분나쁘다며 조직원 한명이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고

구타 당한채로 울면서 나온 종업원의 모습을 목포파가 목격하게 되고 이유를 상세히 듣게 됩니다.

안그래도 서방파 김태촌 방계라는 족보우월주의가 강했던 맘보파는 항상 목포파를 평소에 무시하고 깔보는데

목포파 즉 자기들 구역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술집에 들어와 술먹는것도 모잘라 평소 자기구역에서 일하는 종업원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구타까지 하자 목포파는 참을수 없는 분노에 차오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여기서 목포파가 폭팔하는 트리거가 나오는 계기가 나오게 되는데요

목포파 김승길과 고금석이 화장실을 가게 되는데 맘보파 조원섭이랑 마주치게 됩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라 맘보파 조원섭이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안하게 되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조원섭이 버릇을 고쳐주겠다면서 멱살을 잡고 두사람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목포파는 맘보파 조원섭에게 모멸감과 무시를 제대로 당했기 때문에 걷잡을수 없는 분노로 차게되지만

그러나 목포파는 비록 자신들이 유도대학교를 다니고 유도를 전문적으로 했지만 상대방 맘보파의 전력에는

한참 못미쳤기에 목포파 조직원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그 이유에는 맘보파 조원섭이라는 인물때문인데요.

씨름과 유도에 능통했으며 힘이 아주 장사였다고 합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맘보파는 보잘것없는데 조원섭때문에 피한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주먹세계에서는 전라도 최고 싸움꾼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 목포파의 범행 전개 –

주저하고 있던 목포파 조직원들은 서로의 계획과 작전을 거듭하고 고민한 끝에 범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종업원을 통해서 맘보파가 자신들을 상대할 무기가 없다는것을 확인하고 술에 취해있다는 사실을 듣고

칼과 방망이 도끼 등을 꺼내들고 맘보파가 있는 방에 들어가 무자비하게 공격을 자행했습니다.

특히 맘보파의 핵심전력이었던 조원섭에게 공격이 집중이 되었습니다.

칼과 방망이 도끼로 인해 주먹으로 유명했던 조원섭도 무기앞에는 어쩔수 없었는지 그자리에서 즉사해버립니다.

이 기습으로 인해 맘보파 조직원 4명은 그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광복절 특사로 나온 고용수마저 교도소에서 나와

세상 자유의 공기를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그 현장에서 죽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목포파 직원들은 이미 사망한 맘보파 조직원 4명의 시신을 차에 싣고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한 정형외과 수술실 앞에

내려놓고 버려둔채 ” 교통사고 환자요 ” 라고 소리친뒤 도망가버렸습니다.

상대 조직원을 잔인하게 난도질한 사건으로 총 12명의 조직원들이 구속되었으며

1987년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지게 됩니다.

주범인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이 선고되고 김승길과 장진석은 무기징역을 나머지 조직원들은 가담에 따라

유기징혁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고금석과 김동술의 나이는 무려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지금 2021년 기준으로 20대초반의 얼굴이 사진과같이 나왔다는것도 충격이고 사형이 내려졌다는것도 놀랍습니다.

결국 김동술과 고금석은 1989년 8월 4일에 처형이 집행이 되었습니다.

김동술 사형 집행할때에 버튼을 눌렀는데도 바닥 시스템이 고장이 나서 옆에 내버려둔채 수리를 진행했는데

그 고치는 45분동안 김동술은 사형의 공포를 느꼈는지 계속 떨다가 재집행을 받고 사형되었습니다.

장진석은 무기징역에서 감형되어 31년 수감생활을 하고 2017년 12월 22일 특별사면되어

순천교도에서 출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로 인해 유도대에서 용인대로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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