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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또한 … – 본헤럴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Source: www.bonhd.net
Date Published: 3/14/2022
View: 6650
(에베소서 4:25-32)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더러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6/3/2022
View: 9925
[엡4:30]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 박동진 목사 – 코이네로 말하라
이는 마치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가 충복이었던 Brutus의 배반으로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은 반역의 정치상황 속에서 왕이 갖게 되는 충격적인 아픔을 …
Source: koinespirit.tistory.com
Date Published: 5/16/2022
View: 4166
성령님을 근심 혹은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은 생각으로든, 생각과 행동 모두로든 죄된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거나 근심시키게 되면 그 결과가 비슷합니다. 둘 다 경건한 …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28/2022
View: 2294
생명의 말씀 –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광성교회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는 이미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전제 …
Source: ksch.net
Date Published: 10/15/2022
View: 7353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 성령님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 · '성도와의 사랑 ...
Source: www.akbchurch.org
Date Published: 7/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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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요? – 묵상노트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케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
Source: my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6/26/2021
View: 9596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이 말속에는 기독교 신앙이 기존의 도덕적 가르침과 세상의 윤리 체계를 뛰어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
Source: www.mkfpc.org
Date Published: 5/20/2021
View: 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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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Author: 유기성목사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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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8. 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wCGyTmXYPU
【설교】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또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kai. mh. lupei/te to. pneu/ma to. a[gion tou/ qeou/ ) (카이 메이 루페이테 토 퓨뉴마 토 하기온 투 쎄우)
(to. pneu/ma mh. sbe,nnute ) (토 퓨뉴마 메이 스벤느테)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님과 관련해서 주의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할 때 원어는 (루페오)인데 그 뜻은 (고통을 주다, 슬프게 만들다. 괴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성령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날”은 구원과 심판이 완성되는 ‘주의 날’ 혹은 ‘그리스도의 날’을 가리킵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요,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는 평생, 그리고 영원히 성령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구원을 받은 날까지 인침을 받았기에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하고, 구속의 날 이후에는 영원한 새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니 성령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책망하시며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를 징계하심으로 회개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때 성령님의 책망과 징계는 거룩하신 성령님의 불과 같은 진노이기에 인간이 감당하기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나아가 신자들 중에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 있는데,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짜 신자로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1-53).
이러한 경우는 복음을 대적하는 경우로서 참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훼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몸은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처음부터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18-19).
둘째로는, 성도들은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 ‘소멸하다’로 번역된 원어 (스벤느미)는 타고 있는 불을 끄는 것을 말하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연료를 공급하지 않거나 압력 및 제약에 의해 불을 끄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소멸’이 전제하는 것은 ‘불’입니다. 어떤 불이겠습니까? 주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려는 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면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성령의 은사를 땅에 묻어 꺼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각 개인 및 자기가 속한 파의 영광을 위해 무절제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사를 주신 목적인 교회의 덕과 무관하게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보서 3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불에 의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성령의 불에 의한 열정이 아니라 인간적인 열정으로 봉사할 경우, 그 열정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여러 갈래로 나뉘게 만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열정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으로 인한 열정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 감동한 열정으로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의 봉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해야”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큰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랑과 감사의 열정을 꺼뜨리지 말고 그 열정으로 계속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마음 상태는 그리스도께 감사 드리며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합니다. 그러나 어느새 게으름과 타성, 그리고 교만과 시기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정욕이 틈타면, 성령의 불이 꺼지고 인간의 열심이 앞서게 됩니다. 인간의 열심이 앞서면 섭섭함과 낙심과 자기연민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를 향한 거룩한 불이 질투와 시기와 비뚤어진 불로 가로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사랑을 놓치는 상태가 되면 성령을 소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소멸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서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쓴 뿌리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성령의 불을 다시 지핍시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감사와 사랑을 회복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럽 교회를 보십시오. 주께서 주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의 촛대가 옮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불은 반드시 교회의 사랑과 거룩함으로 이어집니다. 그 이유는 그 열정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기에 그러합니다. 성령의 불은 반드시 영생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는 섬김이 불이 붙게 되면 교회 안에는 시기와 미움과 교만이 더욱 뿌리가 깊어질 것이고, 결국 교회는 서로 물고 뜯는 마귀의 놀이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5-16).
우리 주 예수님을 향한 충성을 잃고 내 유익과 내 명예와 영광을 구하는 자세로 나아갈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지름길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을 소멸한 각 개인과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보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가장 어처구니 없는 시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이루어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돈으로 교회를 이루어보려고 하고, 사회 경력으로, 유명세로, 정치 권력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방법이 동원될 때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잘 서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 외에는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습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될 수 없습니다. 천국 들어가는 것이 돈으로, 권력으로, 인기로 됩니까? 거룩의 능력이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인기가 있으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성과 감사만이 성령님으로 인한 불이 우리 마음 속에 타오르게 하며 그때 우리는 온 마음과 생명을 다해 주를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봉사의 정신이며, 이러한 정신은 성령의 불이 우리에게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늘의 거룩한 불을 세상의 타락한 불과 섞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는 동기로 시작한 봉사는 위태롭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식하며 섬길 때에야 성령의 불로 인한 섬김이 되면서 그 섬김은 거룩하고 영원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살전 2:5-6).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삶의 동기가 오직 나를 의롭게 하시고 나아가 거룩함의 능력을 주시는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봄으로 인한 것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25-32)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고 다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야 생명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보상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에는 많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는 성경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경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투자지 순종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동은 그것으로 구원을 받거나 그 행동이 축적되어 세상에서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평안하며 죽어서 천국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을 담보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라’는 말씀은 그런 생명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 생명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생명, 곧 구원을 얻어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 곧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순종이면 됩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요건이자 유일한 요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을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순종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 존재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볼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고 늘 말씀하였습니다. 이 생명이 없으면 성경은 지켜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100%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개 노릇을 아무리 잘해도 100% 개가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 성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태초가 성경의 첫 머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더러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말은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니 속에 깨끗한 것이 있으면 더러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의 존재 여부입니다.
또한 그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노력하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갈등이자 노력과 수고인 것이지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인하여 신앙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람이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때론 허무한 것 같은 것을 지키고 희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신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동일한 육신으로 같은 세계에 살고 이전에 자신도 가졌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을 사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본성에 충실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나, 아직 이르지 못한 천국에서의 금은보화를 위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케 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본성대로 살고자하는 것에 대한 저항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본성, 사람들이 육신으로도 자기 안에 있는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먼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충만하기를 권면 받는 이들의 말씀이라는 것과, 노력으로 보이는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이끄는 것에 순종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 속에서 힘쓰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노력이나, 성경대로 살아서 자기 안에 추구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에 자신이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제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본성에 충실한 선택을 하는 삶을 살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니 도둑질 하지 않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것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면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사는 세계에 종속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을 수 있으니 말조심하고 교회에서 근심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엡4:30]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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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본문 : 에베소서 4장30절
2018.6.24.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 : 박동진 목사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과 그 사람을 부른 하나님이 함께 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기에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일까요? 사도 바울은 4:25-5:4까지에서 여섯 가지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의 형식은 “~~ 하지 말고, (돌이켜) ~~하라!”입니다.
첫째, 거짓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참된 것을 말하라(4:25)
둘째, 화를 내지 말고, 돌이켜 너희의 분이 의로움을 확실하게 하라(4:26-27),
셋째,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수고하며 주는 자가 되라(4:28).
넷째,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선한 말을 하라(4:29-30).
다섯째, 불친절과 악독을 버리고, 돌이켜 인자하며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4:31-5:2).
여섯째, 음행과 관련된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5:3-4)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는 회개하고 이제 참된 것을 말하고, 도적질 한 사람도 회개하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남을 돕는 자가 되어라.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회개해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가운데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도덕적인 원칙을 제시하다가 갑자기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 후 다시 도덕적인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할까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올바르게 살기 위해 많이 노력합니다. 의지를 더욱 굳게 세우려고 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인격수양을 합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삶을 산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릅니다. 우리도 역시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변화를 날마다 이루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돌이켜서 회개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단순히 주어진 도덕을 잘 지킴으로, 인격 수양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좀 더 근원적인 변화가 먼저 선행합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돌이켜 변화되는 삶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이 말씀대로라면 성령께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믿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있다. 이를 한자어로 말하면 ‘내주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셔서 내주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더욱 믿음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주장하고,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내 삶이 점점 변화가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소원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주하는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과 확실한 증거와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과 변화된 삶과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벅차고도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5년, 10년, 20년이 지나게 되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내면으로부터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행동 하나 하나에 사랑이 묻어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별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시련이 닥쳐와도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잘 참고 견딥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돕고자 합니다. 혈기가 가득 하고, 게으르고, 방탕했던 사람이 온유하고, 충성스럽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에 유혹이 닥쳐와도 잘 이겨내는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부요합니다. 마치 방금 엄마 젖을 먹고 난 후 새근새근 잠든 어린아이처럼 모든 게 만족스럽고, 평온합니다. 진정한 평안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 믿는 자의 복이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이전 보다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은 헌신으로 들어갑니다. 가식 없는 진실함으로 이웃을 대하며 사랑으로 섬기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로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그 성령을 의식하지 않거나, 없는 듯이 여기며, 무시하고 살아가면 성령께서 슬퍼하십니다. 성령께 의지하고 의논하고 그 분의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내 맘대로 행동할 때 성령은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삶에 권태감이 생기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기계적이고 형식적이 됩니다. 이내 마음이 부패해져서 옛 습관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죄의 충동에 쉽게 무너지고, 패배의 삶으로 악순환이 됩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원천은 바로 성령에 있다. 나의 노력, 나의 능력, 나의 수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성령께서도 근심하시는가? 하나님도 근심하시는가? 우리는 흔히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유머도 있고, 다정다감하기도 한 분입니다.
그러면 “근심하다”란 무슨 뜻일까요? “근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루페오(lupeo)인데, 이는 ‘고통, 비관, 슬픔을 갖게 하다’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성경에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걱정과 근심 그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근심하십니까? 자녀들이 밤이 늦었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서 근심하지 않습니까? 또 내일이 카드값 갚을 날인데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경험 해보셨죠. ‘루페오’ 근심하다는 말은 이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말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 밤 중에 아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그는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ᅟᅥᆼ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작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짐작이 되십니까? 이는 마치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가 충복이었던 Brutus의 배반으로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은 반역의 정치상황 속에서 왕이 갖게 되는 충격적인 아픔을 겪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령을 마음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령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성령과 틀어진 그래서 성경을 근심하게 하는 경우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령을 거스리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말을 헬라어로 안티핍토(ωντιπιπτω)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의 뜻은 “반대하다”, “거역하다”, “저항하다” 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않고, 반대하고 거역하고, 오히려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거스리면 성령은 근심하시며 슬퍼하십니다.
2)성령을 훼방하다
훼방한다는 것은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잘 못되도록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셔서 그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마귀의 왕 사탄의 힘으로 고쳤다고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이 행한 기적들을 마귀의 일이라고 사실을 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성령이 하신 일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이를 사탄의 역사로 폄하하고, 왜곡하고, 조롱하여 결국 성령을 모독한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3)성령을 소멸하다
데살로니가전서 5:19절 말씀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멸하다”라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불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그 성령님의 불을 꺼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 이런 예화를 했습니다. 한 청년이 대학에 들어가서 한 여학생을 가슴 깊이 짝사랑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느닷없이 이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답니다. “오늘 야외로 놀러 가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순간적으로 너무 바라던 일이어서 가겠다고 하고 약속을 했답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오늘은 주일이야! 가면 안 돼.” 바로 성령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면서도 야유회를 다녀왔답니다. 돌아와서 너무 괴로워서 울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 달쯤 지나서 그 여학생이 주말마다 하는 학원에 함께 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했답니다. 또 마음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취소해라” 그러나 이 청년은 애써서 이 음성을 외면했답니다. 그런 음성이 들릴 때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려 했답니다. 주일에 교회가지 않고 학원으로 야외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계속 그 음성 때문에 시달렸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점점 그 음성이 희미해지더니 언제인가 부터는 아예 그 음성조차 들리지 않더랍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하실까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생각을 갖도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고, 때로는 큰 감동을 주시고, 때로는 큰 결단을 촉구하시고, 때로는 크게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행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님을 떠나 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소멸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무시하면 성령과 멀어지고 마치 불이 꺼지듯 우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을 잊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지 마십시다. 내 안에 계시는 그분 성령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하며 성령을 사랑하고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
구속의 날은 주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는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표식은 바로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표식입니다. 구원은 단지 한 번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을 거스리고 훼방하고 소멸하여서 어떻게 그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우리는 점점 육체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육체의 소욕에 지배되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는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그러한 사람을 공격하고 모독할 것입니다. 마귀는 더욱 비열하고 추한 생각들, 그런 죄의 소원을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마귀의 지배아래 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갈 것이며, 마침내 다시 회개할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자기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동물처럼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은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잘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항복을 잘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서 수영을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면 더 가라앉게 됩니다. 그래서 수영교사가 처음 수영을 가르칠 때 긴장을 풀고 먼저 물에 뜨는 법부터 배우게 합니다. 수영은 우리가 물과 싸우지 않을 때 자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긴장을 풀고 하나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령 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마치 아침 햇살을 맞는 꽃과 같이 생기 있게 될 것이고, 계속 내 안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시드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 감동은 우리를 뜨겁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감동입니다. 이 감동하심을 잊어버릴 때에 냉랭한 형식적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특히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성령의 감동을 기대하며, 성령의 감동이 있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듣고, 성령의 말씀으로 봉사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진실한 마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그 자리에 천국의 감동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성령은 근심케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늘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인식하고, 성령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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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근심 혹은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질문
성령님을 근심 혹은 소멸시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답변
성경에서 “소멸하다”라는 단어는 불을 진압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일부인 믿음의 방패를 가질 때 (에베소서 6:16), 그들은 사탄으로부터 날아온 불 화살의 힘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을 불이 ”소멸되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44, 46, 48). 마찬가지로, 성령은 각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신자인 우리가 우리 행동에서 성령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 또는 그릇된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할 때, 우리는 성령을 억제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께서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성령이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인격체만이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러한 감정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우리가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어떻게 근심하시게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처럼 살면서(4:17-19), 또는 거짓으로(4:25), 분노로(4:26-27), 도둑질로(4:28), 더러운 말로(4:29), 악독으로(4:31), 용서하지 않음으로(4:32), 음행으로(5:3-5)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은 생각으로든, 생각과 행동 모두로든 죄된 방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성령을 소멸시키거나 근심시키게 되면 그 결과가 비슷합니다. 둘 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둘 다 신자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자신의 세상적인 욕망을 좇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은 오직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 또 순결함으로 더 가까이 인도하고, 세상과 죄로부터 더욱 멀어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을 원치 않고, 또한 선한 것이 소멸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2005. 6. 2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78)
본문 : 엡 4:30
제목 :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사람은 원래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에 그 마음에 늘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옛날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살았습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섬김은 없어졌지만 저마다 나름대로 신을 정하고 신을 섬기면서 영적인 삶을 살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삶의 태도를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과학적인 영성에는 관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런 물질문명이 사람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이 영성을 중요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대체로 21세기가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이런 과학문명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인간의 모든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몸짓을 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서 마치 도사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별로 놀라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남겨 놓은 영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영성이 하나님을 찾아서 바르게 가야 하는데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엉뚱한 것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그럴 듯 해도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서 잘못된 영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기독교 내에서도 영성훈련이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 영성이 새로운 하나님을 찾는 것처럼 하거나 또 불교인들이 수도를 하는 것처럼 많은 고행과 깊은 묵상에 빠져야만 되는 것처럼 한다면 큰 잘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려고 하시는지는 성경말씀에 다 기록을 해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내주 동거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성훈련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다짐을 하는 것이 영성훈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와 계시는 그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속에 와 계시는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 물질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 동거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들을 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성령님을 근심하시게 하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는 이미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근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시작은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순절 날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서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기 시작한 날을 우리는 성령강림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성령님께서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을 찾아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 성령님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음성을 듣고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님과의 좋지 못한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성령님을 거스리는 사람들
사도행전 7:51절 말씀을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말을 헬라어로 안티핍토(ωντιπιπτω)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의 뜻은 “반대하다”, “거역하다”, “저항하다” 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기는 듣지만 순종하지 않고 반대하고 거역하고 오히려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늘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회개를 외치던 많은 선지자들의 말에 불순종하고 오히려 잡아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가운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성령 충만한 사역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바로 이런 상황을 성령을 거스린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거역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반대하고 거역하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거스리고 거역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진리도 알지 못하고 이 좋은 복음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행히도 그 성령님을 받아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 뜻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2)성령님을 훼방하는(모독하는) 사람들
마가복음 3:29절 말씀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훼방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블라습헤메오(βλασφηεω)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이 말은 모독한다 조롱한다 훼방한다라는 뜻으로 번역을 하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말에서 훼방이란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잘 못되도록 방해하는 것을 훼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셔서 그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고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변에 둘러서 있던 바리새인들이 극구 사탄의 힘으로 고쳤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폄하하고 조롱하여 결국 성령을 모독한 죄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구원에 관한 모든 일들은 우리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의인이 되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성령훼방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성령님을 소멸하는 사람들
데살로니가전서 5:19절 말씀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멸하다”라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불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그 성령님의 불을 꺼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때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광신적 태도가 만연했기 때문에 오히려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오히려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배격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지나친 나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인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나의 이성과 감정이 그것을 제한하거나 무시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늘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님을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 이런 예화를 했습니다.
한 청년이 대학에 들어가서 한 여학생을 가슴 깊이 짝사랑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느닷없이 이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답니다.
“오늘 야외로 놀러 가려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순간적으로 너무 바라던 일이어서 가겠다고 하고 약속을 했답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오늘은 주일이야! 가면 안 돼.” 바로 성령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면서도 야유회를 다녀왔답니다. 돌아와서 너무 괴로워서 울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 달쯤 지나서 그 여학생이 주말마다 하는 학원에 함께 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여학생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생각없이 그렇게 하자고 동의를 했답니다.
또 마음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취소해라”
그러나 이 청년은 애써서 이 음성을 외면했답니다.
그런 음성이 들릴 때면 다른 생각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려 했답니다.
주일에 교회가지 않고 학원으로 야외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계속 그 음성 때문에 시달렸는데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점점 그 음성이 희미해지더니 언제인가 부터는 아예 그 음성조차 들리지 않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마음속에 어떤 음성을 들려주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큰 감동을 주시고, 때로는 큰 결단을 촉구하시고, 때로는 크게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행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님을 떠나 살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심케 하다”는 “슬프게 하다” “마음에 고통을 느끼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할 때 우리가 진리 따라 살지 않을 때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에베소서 4장에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들을 여러 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이 일들을 우리가 행하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 슬퍼하시며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하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성령님은 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성령님께서 슬퍼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6절을 말씀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연약해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크게 탄식하신다는 것입니다.
5)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
우리가 앞으로 배우게 될 에베소서 5:18절 말씀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 나중에 자세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드린 이런 잘못된 것들 즉 성령님을 거스리지 않고 성령님을 훼방하지 않고 성령님을 소멸하지 않고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따르며 살고 성령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령님이 불같이 역사하시도록 하며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거스리지 말고 성령님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성령님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음을 알라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는 그 날까지 인을 치시면서 우리와 동행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속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부활의 몸으로 변하게 하시어서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그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임을 믿고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구속의 날까지라는 말씀은 구속의 날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의 그 날이 올 때까지 매일 매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 때거나 아니면 실패하여 낙망적인 삶을 살 때이거나 언제나 변함이 없이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해 주시고 우리가 힘이 들 때 능력을 주시고 어려움을 당할 때 지혜를 주시면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살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소유주이심을 나타내는 보증의 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범죄한다고 해도 떠나 버리지 않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확실한 보증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어쩔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하지만 성령님은 한번도 한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보증인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했을 때 그냥 떠나가 버리시는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근심을 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잘못하면 가 버리시고 얄미우면 가 버리시는 분이시라면 근심을 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의 보증이 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행할 때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서 바르게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를 들고 잘못하면 엄청난 벌을 내리고 쫓아내 버린다면 쩔쩔매면서 잘하지만 사랑으로 잘 대해주면 제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매를 드신다면 우리는 꼼짝 못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많이 참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해 주시는 그 은혜를 알고 바르게 사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근심하지 않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오셔서 함께 동행해 주시고 계십니다.
구속의 그 날까지 우리의 보증인이 되셔서 힘을 주시고 도와주시고 위로를 해 주십니다.
그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마시고 오히려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성령을 근심케 말라”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3-20-22
본문말씀: 에베소서 4:30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설교 요약]이제 4장을 마무리하면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v.30a)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집니다. 지난 2주동안 우리가 살펴 살펴본 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 성도들에게 촉구하고 나서, <29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성령을 근심케 말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 성령님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 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 (The Trinity God)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 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 (The Trinity God)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와의 사랑의 관계’: 성령이 우리와 무관한 관계라면 결코 근심 (grieve)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롬. 8:26)고 밝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v.30b)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주님의 심판 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때까지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셔서 (seal) 보증 (guarantee)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그것은
첫째, ‘ 성령을 의식하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것은 성령을 인식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을 의식조차 못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만큼 그분을 근심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 ‘ 성령을 좇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도전합니다. 성령의 뜻을 좇아 갈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 ‘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뜻을 헤아려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성령 충만한 역사는 언제나 복음의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될 때 임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행.10:44). 이 말씀에 뿌리를 내려 나갈 때,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양심’과 ‘기도’ ‘성도의 교제’ 그리고 ‘예배’를 통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범죄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대다수의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죄의식’이 정상인들에 비해 매우 약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지적으로 자신이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은 하지만, 그것 자체도 ‘자신이 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니까!’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재수가 없어서…’ 등등의 핑계를 되면서 자신의 죄 (=잘못)을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만약 내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매우 본질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기를 통해서든지 나 자신의 실상에 대해 눈뜨게 될 때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며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영적 늪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조금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비록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속의 죄성을 밝히 깨닫게 되는 은혜를 거부함으로 여전히 속사람이 강건해 나가지 못할 때 여러분과 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말라” (v.30a)고 도전한 것도 그러한 이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이해합니까? 여러분 안에 누가 거하시는 지 이해합니까? 만약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심을 인격적으로 깨닫아 나간다면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성도가 행할 본분이 결코 아닙니다!!” 라고 사도는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4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말씀은 마치 갑자기 돌출된 발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2주를 통해 우리가 살펴 본대로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22~24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촉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이해해 나갔던 것입니다. 4장의 흐름에서 볼 때, 사도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선언하고 나서, <25~29절> 곧 오늘 본문 바로 앞절까지 구체적으로 옛사람을 벗는 것이 무엇이고, 옛사람을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행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로 서로 은혜를 끼치게 하라” (v.25~29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도가 ‘성령을 근심치 말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 말이 앞의 본문의 결론임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앞으로 <에베소서 6장>까지 이어지는 남은 모든 말씀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말씀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는 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성령님이 인격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과 같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성령은 인격적 존재일 뿐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데로 성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제3위격에 해당합니다. 일부 크리스챤들이 생각하는데로, 성령은 단순히 ‘힘’ 혹은 ‘에너지’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이 그런 비인격적 존재라면 사도는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적 존재이시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무슨 관계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의 다양한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역과 성도를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며 보혜사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님이 우리 성도를 도우시는 특별한 한가지 사역에 대해서 매우 감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 자신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지 못하고 심히 연약함과 영적 방황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깊은 탄식 가운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고. 이것은 한마디로 성령의 어떠한 모습을 밝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탄식하다’ (with groan)는 표현은 아무 대상에나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나 알더라도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에 쓰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이 탄식함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안타까운 일로 인해 그 상대방이 건강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 심각한 어려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해 우리가 그를 아끼고 사랑함으로 깊은 절망감 가운데 함께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탄식은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생길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를 깊이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니, 이제 된 것입니까? 나는 문제를 만들고, 성령이 기도로 해결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15)고 거듭 거듭 선언합니다. 이것이 오늘 사도가 우리 성도를 향해 강하게 도전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는 표현을 통해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이실 뿐 아니라 우리 성도와 깊은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는데, 사도는 한걸음 더 깊이 우리가 그분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를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v.30b)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가 에베소서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아들과 딸로 확증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놀랍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성령의 인치심 (being sealed with the Holy Spirit)입니까? 우리는 지난번 1장 말씀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란 성령께서 도장을 찍듯이, 그리고 편지의 풀을 붙여서 단단히 봉투를 닫듯이 우리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확실하게 책임져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보증’ (guarantee)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약속의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도장 찍어 주시고, 두루마리에 싸서 마지막 구원의 날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이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듯이, 우리 거듭난 크리스챤들 조차도 스스로 착각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실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우 염려스럽고 위태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정확히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사도는 이것을 <25-29절>에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령을 근심시키고자 원한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 보십시요!’ (v.26-27). 누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했거나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도록 마음에 담아 둬 보세요.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은 이제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어떻게 여러분을 장악하고 죄악된 마음을 품게 하고, 미움과 원망과 쓴 뿌리를 그 마음에 심어 놓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하루가 지나도록 그 분함을 풀지 말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고, 죄가 우리의 심령을 장악하는 상태요, 이것이 성령을 근심케하는 성도의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 (How do we avoid grieving the Holy Spirit?) 이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령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 성령을 의식하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being conscious the Spirit): 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는 첫 시작은 성령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서 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은 ‘솔직히 우리는 성령님과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성령님은 우리 크리스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누누히 강조 드렸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솔직히 우리 각자가 성령에 대한 생각과 관계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해서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성령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성령을 실제적으로 나와는 무관한 존재처럼 여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죄악된 행위를 했을 때 이런 나로 인해 내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시고 깊이 탄식하실 지를 전혀 고민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도가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도전하는 그 근본적 이유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지금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함으로 그분을 실망시키거나 근심시키지 않고자 힘쓰고 있습니까?’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함으로 간구하는 성령님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분을 근심케 하는 태도가 또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내주하심을 망각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늘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 성령을 좇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walking in the Spirit): 사도가 갈라디아 성도에게 분명히 밝혔듯이 성령과 우리 육신의 소욕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원수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사도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그분을 근심케 하지 않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입니다 (갈. 5:22,23). 성령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여 좇아갈 수 있을까요?’
셋째, ‘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 ’입니다 (We may avoid it through meditating & obeying the law of Lord):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성령을 믿고 성령의 충만으로 살고자 하는 크리스챤들 가운데는 상당히 우려스러운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 중에는 어떤 ‘성령집회’라는 모임에 참석해서 누군가에게 성령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 받는다’는 식으로 성령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 받는 것을 마음이 뜨거워지고, 뭔가 감정적인 강력한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성령체험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행한 것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 10:44)라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어떤 용하다는 사람 찾아가서 받고자 할 때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음을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에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고자 할 때,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 충만하게 임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시편 1편 기자가 ‘왜 여호와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축복된 자인지?’ (시. 1:2)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를 지키시고 육체와 세상과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생명과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에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말씀하시고, 기도 가운데 우리를 강력하게 인도하시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숙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추구하는 만큼 성령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쇠사슬에 갇힌 죄수가 되었기에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에베소 성도들과 우리 각자를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합당한 부르심의 삶은 성령으로 하나 됨이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언제나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아니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거두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은 무얼 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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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케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는 감정을 가지게 하다”입니다. 보통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진”슬프게 한다”는 표현을 일상에서는 더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케 한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게 마음의 고통을 주거나 슬프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주 타인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죽거나, 친한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는 일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태도, 행동,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이나 슬픔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모님께 불순종할 때 우리는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과 성령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거나, 악의적인 말을 하거나 또는 다투고 싸울 때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당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본다고 믿지 않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때도 성령을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 것이 된다”고 칼벵(Calvin)은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십니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확증하고 보충해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이 보증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던 우리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승리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렇듯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받을 수 있는 보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슬퍼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걸고 우리를 지지해주고 보증이 되어준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심어주는 일과 비슷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22).
•} 기도:
나의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당신이 알 수 없는 미래를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코리 텐 붐/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
– Corrie ten 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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