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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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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 – 국민일보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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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8/16/2022

View: 6465

마태복음 5:3-12 KRV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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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7/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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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 – 브런치

그렇다면 The poor in spirit(심령이 가난한 자)이라는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의 절체절명의 영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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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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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아티클 / 성경 주석 …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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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ofwork.or.kr

Date Published: 9/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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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고난주간 특새) – 동탄영락교회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았음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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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6/4/2022

View: 6141

심령이 가난한 자는/홍정식 – 벅스

심령이 가난한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 핍박받는자 천국이 저희것이라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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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usic.bugs.co.kr

Date Published: 7/22/2021

View: 5428

이동휘목사칼럼 – 팔복 해설(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해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칼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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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auri.org

Date Published: 11/9/2022

View: 2694

심령이 가난한 자 < 생각하는 영성 < 영성과 신앙 < 기사본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얻게 되는 복이 천국임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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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4/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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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심령 이 가난한 자

  • Author: 로엘뮤직Roe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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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5.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NAYLbYynlI

[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헬라어로 ‘프토코스’다. 이 말은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인가.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다는 말 자체가 실제적으로 돈과 그다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부자와 가난을 구분하는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의 구분은 물질의 소유 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현재 물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다. 반면에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로 인해 비교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아가 부서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한계와 불가능을 깨달은 자다. 이 땅을 살면서 자신이 가진 물질로도, 명예로도, 사람으로도, 권세로도 행복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심령의 가난은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나 자신에 대하여 깊은 영혼의 탄식을 하는 상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無) 사상이나 유교에서 말하는 덕(德)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내 안에 있는 것이 죄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히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왜냐하면, 팔복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겸손,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도덕적 겸양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터져 나오는 자기 부정이기 때문이다.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가. 여기까지, 바로 이 끝을 경험한 자만이 내 영혼의 깊숙한 외침으로 ‘나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단순히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읊조림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정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외치는 간절함이다.사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심령이 가난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다르다. 그들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로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복을 온전히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이 자리로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다.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만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에서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것이 팔복의 복을 온전히 누리는 열쇠다.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마태복음 5:3-12 KRV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페네스’와 ‘프토코스’로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페네스’는 저축이 없는 상태. 즉,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수준의 여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0’인 상태인 것 같다.

반면에 ‘프토코스’는 ‘-‘인 갈급함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파산을 당해서 빚이 너무 많아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의 상태. 자력으로는 살 수가 없고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겨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오늘 말씀에서 사용된 ‘가난’은 바로 그 ‘프토코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The poor in spirit(심령이 가난한 자)이라는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의 절체절명의 영적인 갈급함의 상태를 자각함을 의미할 것이다.

배가 고프면 허기져서 손이 떨려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몸이 아프면 자기 발로 병원을 찾아다닌다.

심지어 지식이 부족함을 느껴도 배움을 찾아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에 대해서는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한다.

때문에,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성경의 선포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뭔죄인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고 반응한다.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으로만 민감한 사람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인지를 한다. 하물며 완전한 선인 하나님의 빛 앞에서의 불완전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도 없다.

그런 면에서 영적인 갈급함(The poor in spirit)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몸에 병이 생긴 사람이 몸의 이상을 자각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죽음밖에 없듯이, 영적인 갈급함을 느낀다는 것은 영적인 공급을 갈급해 하기 시작하는 첫 발자국인 까닭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42:1-2)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주님의 영적인 공급에 대해 얼마나 갈급한지를 시편 42편을 통해 노래한다.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축복인 영적인 갈급함이며, 그 결핍감이 지금까지도 인류가 칭송하는 다윗왕이 다윗왕이 된 원동력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영적인 갈급함이 팔복 중 첫 번째 복이며, 그 갈급함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천국을 이 땅에서는 그 마음에 받고, 죽어서는 사후세계에서 약속받을 것이다.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수백 년 전 다윗왕의 시에 대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같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주님, 영적인 갈급함 자체가 축복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시냇물을 찾지 못해 목마른 사슴처럼, 24/7 영적인 갈급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마셔도 곧 목마른 것에는 구원이 없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예수님이 주시는 물만 바라보게 하소서

5년 뒤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눈을 뜨게 하시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에수님을 결코 앞서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겸손하게 좇아가는 저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낮은 자세로 아이들의 눈높이 맞추어 그들을 코칭할 수 있는 부모로서의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인정한다.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사람은 세리였다(눅 18:9-14).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미덕이 전혀 없는 자라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그것은 거만의 반대다.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형태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야만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충족할 수 없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해 주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창조 목적에 맞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산상수훈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런 축복된 상태를 획득할 수 있으리 라는 자기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산상수훈은 우리 안에 진짜 영적인 가난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복이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심령이 가난해지면, 우리는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력서를 부풀리거나 직책을 자랑하지 않게 된다. 부풀려진 자기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배우고 성장하고 남의 충고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일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정직해진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나무를 다듬으며 일을 시작하셨을 때 누군가의 안내와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으셨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도우실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매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힘을 추구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주 빠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마.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과, “우린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분발해서 일해야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 중에 과연 누가 끝에 가서 더 성공할 것 같은가? 거만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지도자가 겸손하고 힘을 실어 주는 지도자보다 더 위대해 보인 적이 혹시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최고의 조직에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유명한 연구에 의하면 꾸준히 위대함을 유지해 나가는 회사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그 회사에 겸손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부풀리는 구 시대적인 모습 안에 고착된 지도자와 일터도 아직 많다. 이직하는 것이 항상 가능할 순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일 수도 있다. 또 직장을 떠나는 게 가능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조직에 크리스천으로 남는 것이 선을 위해 중요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주변 사람에게 더욱더 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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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1,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고난주간 특새) – 새벽기도 설교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어제 우리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음과 동시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죄와 죽음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킬 수 없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살펴볼 터인데, 예수께서는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팔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준에 대한 말씀인데,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아주 다릅니다.

세상은 돈 많은 재벌, 유능한 학자, 유력한 정치인을 영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그 마음의 됨됨이’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팔복은 모두 ‘성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복은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가난’입니다.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가난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이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가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재산 없는 빈민 계층만을 사랑하신 분은 아니셨습니다.

부자, 고위 계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소외시키는 편파적인 분은 결코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고위 정치인인 ‘니고데모’나, 귀족인 ‘아리마대 요셉’이나 부자 ‘마가의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 어느 곳에도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돈을 부정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정죄하거나,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빈궁하고 궁핍하게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물질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는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깨끗한 부자가 되어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물질을 말할 때, 가난과 부유를 말할 때 양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풍요로움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듯이, 가난도 악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잠 30:8-9).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여기서 ‘가난한 자, ptwcoi’ 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파산되어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를 뜻합니다.

부자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구걸하면서 사는 ‘거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 선고’를 받았음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 죄인입니다”하고 인정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주 앞에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롬 7:18, 눅 5:8).

2.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배경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자신들을 영적 부자로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회개할 것 없는 하나님 나라의 특권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눅 3:7-8, 18:10-12).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리, 창기,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마 9:11).

그러므로 여러분, 참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영적 파산자’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영적으로 자신이 거지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인데, 거지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대개 부자들은 거만하지만 대부분의 거지들은 모든 사람에게 겸손합니다.

겸손하게 구걸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가진 것이 없으니 자신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형편에 처한 거지들을 긍휼히 여기고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 원하는 성도들의 성품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을 자기 백성의 기준으로 삼으셨고, 더 나아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천국의 큰 자로 삼으셨습니다(마 20:26-27).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오만하고 교만했습니다.

교권으로 권세를 누리고, 경제적으로도 ‘큰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 대신 이웃을 비판하는 생활이 습성화되었고, 타인을 정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의와 경건과 신앙지식을 자랑했습니다(마 7:1-3, 9:1-3).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는 것은 축복된 일이고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의 것들을 두 손에 가득 쥐고 있기에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쥘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물 때문에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친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일을 포기한 부자 관원처럼, 세상의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이 주신 복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눅 18:18-23).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부자와 권력자를 꿈꾸기보다는 예수님을 본받아 마음이 겸손한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마 11:29).

심령이 가난 상태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예수님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는 복음의 일꾼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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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특별기고-8복 해설(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팔복의 서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이르시되”(마 5:1-2)

설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입술은 꿀벌 집처럼 달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떨어뜨려 주신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의 하신 일은 이적이요, 그의 생활은 우리의 모범이 되며,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다. 그는 한량없는 성령을 가지셨으며, 필요할 때 어떤 말씀을 하실 것인가, 언제 겸손하실까, 언제 위로하실 것인가를 아신다. 그분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신다.

그는 권능 있는 설교자이셨다.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 7:29) 그는 그들의 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양심에다 호소하시는 설교자이시다. “마치 그분은 사람 속에 들어가 계신 것 같다.”(루터) 그분은 두 날 가진 검으로 돌 같은 마음도 찔러 쪼갤 수 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영혼을 회개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2) ‘관리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요 12:42)

그의 설교단은 산이었다. 율법을 산에서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해설하셨다. 다볼산이라 한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신다. 가난은 부를 축출하지만, 여기서는 가난이 부를 낳는다. 애통은 기쁨을 쫓아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애통이 기쁨을 낳는다. “저희가 위로를 낳을 것이요.” 물이 불꽃을 끄는 것이 상식이지만, 눈물은 기쁨의 불꽃을 불 붙인다. 핍박은 행복을 축출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핍박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 신성한 역설이다.

제1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스도의 계산서와 세상의 계산서는 맞지 않는다. 세상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뀌는 재주를 가진 자를 복 있는 자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세상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복 있다 하나 주님은 산골짜기에 있는 자를 복된 자라 하신다. 모든 성도는 십자가의 상속자들이다.(루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천국에 가 있는 것처럼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 의무와 보상을 함께 묶으셨다. 영적인 은혜는 연결되어 있고 묶여져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 하는 자이며,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이며, 온유한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다. 성령의 은혜들은 한 줄의 진주와 같이 한 줄에 매달려 있고 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장식해 준다.

심령 가난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마귀의 가난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몰지각과 악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결핍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또 구별해야 할 것은 은혜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지,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알지 못하도다.”(계 3:17) ‘가난한 심령을 가진 것과’ ‘심령이 가난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천박하고 낮은 심령을 가지고 수준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난한 심령을 가졌다고 말한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여 구두쇠로 사는 사람이다. 겉모양만 번드르르한 신앙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들 안에 아무런 선함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서 전폭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탄원하는 사람이다.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해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칼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눅 18:13) 세리의 기도다. 심령가난이 모든 것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서두로 말씀하신 것이다. 심령 가난으로 낮아지면 거룩한 슬픔의 샘물이 거기에 흐르게 된다. 헬라어의 가난에 페네스가 있다. 노동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물질의 가난이다. 또 하나의 가난은 푸트코스로 자기의 무능함을 깨닫고 무릎 꿇어 구걸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사는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은혜를 받을 능력이 없다. 스스로 탁월하다고 부풀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적합하지 않다. 손에 자갈을 쥔 채 황금을 받을 수는 없다. 먼저 비워야 한다.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그리스도가 귀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천국 문은 너무 좁아 가난한 심령으로, 적게 하고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야 들어간다.

역의 원리로, 심령이 교만하면 저주가 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생각에 감탄한다. 세상에는 너무 선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물건이 넉넉하여, 그리스도에게 은총을 입고 꾸어서 사는 자들을 경멸한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마귀가 교만으로 부풀려 놓아서 자기의 선을 늘어놓는 가운데 병은 더 깊어진다. 독선보다 더 위태로운 낭떠러지는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격이다. 벌거벗은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다. 결국 버림받아 주님의 입에서 토함을 받는다.(계 3:16) 세네카의 계집종이 장님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 했다. 집이 원래 어두운 곳이지 자기는 장님이 아니라 고집했다. “유다는 돈을 받고 그의 구원을 팔아버렸고 바리새인들은 그 돈으로 저주를 샀다.”(어거스틴) 자신이 가난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복 있는 자다. “가난이란 보석”을 가진 자다. 어떤 부를 얻기보다는 가난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 받는다. “주님! 저에게 그리스도를 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죽습니다.”라 말한다. 그는 자신과는 이혼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중심이 젖 뗀 어린아이와 같은(시 131:2) 심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충만함을 흠모한다. 그리스도 예찬론자다. 자신이 상한 것을 깨달을 때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생명수인 주의 보혈을 갈망한다. 그는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피난처로 날아간다. 그분의 피에 자신을 씻는다. 자신을 가장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여긴다. 더 많은 은혜가 없는 것을 슬퍼한다. 위선자는 언제나 그가 받은 은혜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부족한 점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악함을 슬퍼한다. 더 나아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겸손하다. 그리고 유순하다. 죄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존경받음도 거절한다.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빠른 진척을 본 것도 성령의 바람 때문이란 것을 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의 탁월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본다. 그는 기도를 쉬지 않지만 기도를 많이 했고, 눈물 흘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수고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는 천국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가지기 전에는 그 문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려한다. 더 많은 은혜를 애걸하고 영적인 자비를 간구한다. 그는 식탁에 떨어지는 조그마한 부스러기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프리카에 선교훈련을 받으러 가는 젊은이가 무슨 준비를 해가지고 가야 하는가의 질문에 선교사는 가난한 마음이면 된다고 말했다.

2) 복이 있나니

①복이 존재하지 않는 곳

행복은 어떤 화학 기술로도 뽑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한 자가 복이 있나니, 고상한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재물을 우상화하고 있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별 의견을 다 내놓았지만 모두 과녁의 변두리를 맞혔을 뿐이다. 타락으로 사람들은 그 면류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두뇌까지도 잃어버렸다. 어떤 이교 철학자가 생계수단을 넉넉히 가지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았으니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그 날 밤 주님은 그를 호출할 수 있는데.. 복의 나무는 땅의 낙원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셨다. 저주에서 복을 끌어내려고 한다. 솔로몬 왕은 가장 재물을 많이 가진 화려한 왕이었다. 호사스러운 음식, 장엄한 건물, 포도원, 물고기 연못, 황홀케 해주는 각종 음악, 기쁨의 향수를 뿌린 물에 목욕을 하였다. 그의 지혜는 세상 지혜자의 으뜸이어서 천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 예물을 싣고 와서 드렸다. 영광의 극치였으나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8)란 결론을 맺었다.

②복은 겉모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덧없는 것들은 영혼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할 수 없고.”(전 5:10) 이것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금으로 그 마음을 채우기보다는 은혜로 채워야 된다. 별들 사이에 집을 지어주어도 만족을 모르는 마음과 쉴 줄 모르는 눈은 여전히 더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은 생명 강에 목욕하고 참된 복에 도달할 때까지는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폭풍속의 마음을 잠잠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에게 복을 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외형적인 것들은 양심의 번민을 치료할 수가 없다. 왕 사울이 마음에 괴로운 상처가 있을 때 왕관의 보석들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종의 방패가 총을 막을 수 없듯이, 세상의 것들은 영혼의 괴로움에서 지켜줄 수 없다.

잠시 동안인 것은 인간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세상의 기쁨은 참새 떼가 잠시 머물며 떠들다가 후루룩 날아버리는 것과 같다.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향내를 맡는 동안에 시들어져 가는 꽃다발 같고, 손에 있는 동안에 녹는 얼음과 같다.

“나는 너를 떠나겠다.” 고함지르고 가버린다.(버나드)

괴롭히는 것과 저주 받도록 하는 것은 복 받도록 할 수 없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그 재물로 인하여 네가 교만하였도다.”(겔 28:5)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렘 5:7) 부는 올가미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딤전 6:9) 재산을 쌓아 모으려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영혼을 무너뜨렸는가? 부는 모을 때에는 가시가 되어 근심으로 찌르며,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다친다. 지상의 음료수가 낙원의 음료수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교훈이다.

③복이 있는 곳

복은 어디에 있는가? 영혼이 원천이 되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은 완전한 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도취할 만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어거스틴) 하나님의 입으로 입 맞춰 주실 때 영혼은 거룩한 황홀경에 들어가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외치게 된다. 물 몇 방울이 아니고 복락의 강물로 마시우게 하신다.(시 36:8) 복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복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이 영원성이 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④복의 실체

많은 진리들이 머릿속에서 헤엄치는데 마음으로는 내려가지 않아서 유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들에게도 금과 은을 잔뜩 실어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는 주신 자에게 감사를 잃고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지옥에 내려간다. 복된 삶을 살 때, 내려주시는 그 복을 확실히 믿으며 우리의 눈을 거기에 고정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뭇 반대 방향의 코스로 조종하고 있다. 마귀가 그들의 조종사이며 지옥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비틀거릴 것이 아니라 울면서 가야 한다. 사람이 독약에서 건강을 마실 수 없는 것 같이 죄에서 복을 뽑아낼 수 없다. 비록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행복의 항구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의 피의 바다위로 그곳을 인도하시며 성령의 강풍을 돛에 불어 주신다. 우리가 쓰러질 때에는 한 단계 높여 올려 주신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우리의 곁을 지나시며 바라보고 계시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쓴 대접 아래 놓여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잔치 집에 인도하시고 천국의 좋은 것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시는지 감격할 뿐이다.

⑤믿음이 깊은 자는 벌써 복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이도 어른과 함께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요일 3:9) 이제 시작한 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의 복을 같이 누리는 자가 되었다. 빚 장부는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지워져서 마치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같이 되고, 처음부터 아무 빚이 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이기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기분 좋은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특권을 누린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면 하나님이 총애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와 긴밀한 관계에서 산다.

하늘나라를 상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옥 상속이 면제 된 사람이다. 천국 상속권을 손에 쥐고 있다. 지상에서부터 누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서 복을 시식하고 천국을 맛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실제로 소유하기 전에 포도송이를 맛본 것처럼 성령의 비밀스러운 맛을 본다. 그들 자신이 때로는 천국에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성도들을 위한 높은 승진이 있다. 왕국에까지 올라간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복의 극치이며 영예를 갖는다. 왕들이 된다. 죄와 죽음은 완전히 정복되고 하나님의 천사와 더불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영광을 누린다.

① 성도들은 왕들로 비유된다.

왕관을 가지고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믿는 자는 죄의 용서함을 받을 뿐 아니라 면류관까지 받는다. 면류관은 아무 머리에나 맞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몫이다.

순수한 관이다. 이 왕관은 다윗의 수금과 같이 슬픔과 불안의 악령을 몰아낸다. 지옥에서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천국에선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왕들이 쓰는 왕관은 비록 순금으로 만든 것일지라도 고민거리가 생기고 두통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근심을 섞어 만든 합금이다.

이 왕관은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윗의 친 아들들은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세상의 왕관은 탈취하려는 야망을 일으킨다. 성도들이 쓸 왕관은 자기 머리에 맞는 것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 것이 더 크더라도 시기할 수 없다.

결코 쇠하지 않는 왕관이다. “장미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터틀리안) 다른 왕관들은 빨리 낡고 달아서 쓰레기 속으로 던져 버리게 된다. 이 왕관을 탐내는 많은 상속자와 후계자가 있다. 죽음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벌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받는다.(벧전 5:4)

② 왕복을 가지고 있다.

“이 일후에 내가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계 7:9) 성도들의 옷은 그들의 영광과 찬란함을 나타내고 흰 옷은 그들의 성결을 뜻한다. 그들의 옷을 얼룩지게 하거나 더럽힐 죄가 없다. 이 옷을 입으면 그들은 천사들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③ 왕의 홀을 가진다.

통치의 위대함의 표로서 왕 홀을 가진다. 손에 종려가지를 가진다. 승리와 개선의 상징이다. 죄와 지옥을 이긴 승리자들이다.

④ 왕들은 그들의 보좌를 가진다.

높은 보좌다. 땅위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는다. 이 보좌는 안전한 보좌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지금은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설지라도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된다.

⑤ 하늘의 왕국은 뛰어나다.

창건자가 뛰어나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셨다. 천국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고후 5:1) 사람도 천사도 하나도 이 건물에 돌 하나도 놓을 수 없다. 탁월하다.

⑥ 부요함에 뛰어나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계 21:19) 진주 문들이다.

⑦ 완전함에 뛰어나다.

여기에는 기쁨과 진품으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움과 지혜, 영광, 장엄함이 있다. 낙원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다. 죄와 슬픔을 찾을 수 없다. 왕국의 충만함이 있다.

⑧ 안전성에 뛰어나다.

세상 나라는 외부의 침략이나 내부의 분열을 두려워한다. 여기는 마귀는 결박하여 가두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평온하다.

⑨ 견고함에 뛰어나다. 앗수르, 헬라, 바벨론, 로마 등 세계에 명성을 날렸던 강국들은 다 뒤집혀지고 티끌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그 위에 ‘영원’이라고 써 붙였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다.(히 12:28)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계 22:5) 우리에게 이 영원한 나라를 주셨다.

⑩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수고를 가로채고 보상을 무시하는 분이 아니시다. 회개의 교훈을 듣고, 죄를 슬퍼하는 비판의 눈물에 적시며, 고행의 교훈을 듣고 마음의 오른 눈을 뽑고 죄의 왕을 목 자르게 될 때, 이 쓴 약을 삼키기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왕국이 따라오고 거기서 모든 보상을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정탐꾼들이 좋은 땅에 나쁜 보고를 한 것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방법에 헐뜯었음이 탄로 날 것이다. 벌레들이(시 22:6) 왕이 되는 셈이다. 바로 왕이 요셉에게 영예를 주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지만 왕국만은 자기가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주시고 보좌에 앉히신다. 영광으로 끝을 맺으신다. 세상의 비난을 머리 둘레에다 면류관으로 묶으라. 그들의 비난을 그들의 칭찬과 마찬가지로 경멸하라. 죄는 지옥으로 이끌지만 은혜는 면류관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왕국으로 올라가게 하는 계단이다.

⑪ 하늘에 속했는지? 정밀 검사를 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은혜의 왕국이 마음에 세워졌는가? 교만과 정욕 그리고 불신앙을 억제하는 왕인가? 은혜의 왕국이 있어야 영광의 왕국에 들어간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아랫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는 말씀대로 사는가? 용감하고 당당한 영, 거룩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의 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가? 천국이 여러분의 눈에,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이 여러분의 발아래 있는가? 왕 같은 영을 가진 사람은 높은 곳에 살게 될 것이다.

⑫ 진지한 권면

천한 정욕에 도취하여 왕국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쾌락을 핥아 먹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 마라. 죄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그 결말을 보아라. 왕국을 버리느라고 정신없이 서두를 만큼 어리석은 바보짓을 했을 때, 마지막 날에 마귀가 그 사람을 오히려 꾸짖고 비웃지 않겠는가? 그것은 인디안들이 그림 몇 장이나 유리구슬을 얻으려고 그들의 금덩이를 내 주는 것과 같다.

왕국을 얻었는가? 이제부터는 주님께 마음껏 쓰임을 받아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보여라.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얼마나 적은 것임을 깨닫고 울고 울어라.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라. 은혜 받기 알맞은 환경과 봉사의 기회를 만들라. 일을 더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영광을 더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더 봉사할수록 그의 왕국이 더 커질 것이다. 지옥의 왕국에도 등급이 있다.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눅 20:47) 그렇다면 천국의 등급에도 그럴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면류관이 더 빛나게, 왕국이 더 크게, 종려나무가지가 더 무성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투자를 하면 하나님은 비축을 하신다.

이 왕국에 어울리게 걸으라. 왕답게 살라. 거룩한 위엄이 얼굴에 나타나게 하라. 천사의 얼굴과 같아라.(행 6:15) 천사의 밝음이 스데반의 용모에 보였다. 지금 세상에 누더기 옷을 입고 산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얼마 안 되어 생명수를 마시리라. 천국이 내 것이 될 것이다.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하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

오늘부터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가 묵상하게 되는 여덟 가지의 복에 관한 말씀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복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복의 말씀을 흔히 기대합니다. “사업을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물질의 축복이 저희 것임이요. 외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신랑감을 만날 것임이요.” 그런데 우리가 묵상할 팔복의 말씀은 보통 우리가 기대하는 복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우리가 받아 누려야 할 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얻게 되는 복이 천국임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물질이 부족해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가난을 경험하는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물질적인 가난을 경험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축복입니다. 살아가면서 물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물질은 우리를 또한 근심하고 염려하게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잠가둘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영어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Blessed are they who have nothing to lock up.”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잠가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고, 소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전에는 없었던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빼앗기지 않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더 늘리고 가져야 할지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에는 단순히 물질에 대한 염려와 근심만이 아니라,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가진 재물이 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보장해 주는 중심에 서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 계속되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물질이 주인이 되는 삶’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물질에 대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이 그 삶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결국 물질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물질을 어떻게 소유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의 소유물이 나의 영혼을 소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소유물이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잘 사용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은 가난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성가들은 가난을 통해서 물질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가난을 통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더욱 놓게 되는 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물질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소유물이 나를 소유하지 않는 삶이 되고, 나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누는 삶이 될 때에,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가난한 마음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태복음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내가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건강을 잃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삶의 큰 시련을 맞이했을 때입니다. 그 속에서 나의 무기력함과 내 마음의 가난을 절망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아, 내 안에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자원이 없구나. 아, 내 안에 삶의 의미를 찾을 만한 선한 것이 없구나.’ 이러한 것들을 절망 가운데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이 오늘 마태복음이 말해 주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가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자신을 의지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자원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내 마음의 가난과 내 영혼의 비참 속에서 나를 풍요롭게 하시고, 나를 살려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 받는 복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나고 있는 곳입니다(마 12:28).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서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마음의 가난을 경험하고, 영혼의 궁핍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고,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현재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말씀에는 마음의 가난 속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복으로 받았던 사도 바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결국 육체의 가시는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오히려 이 가난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게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자신의 약함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강함이 오히려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의 가난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로운 축복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는 역설적인 축복입니다.

오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는 삶으로 나아가고, 마음의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삶에서 드러나는 복을 누리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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