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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시리즈
‘성도의 가정, 무엇으로 사는가?(01)’
본문: 시편 127:1-5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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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금) “시편 127:1-5”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127:1-5 찬송가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인생의 주관자 하나님(1-2절) 오늘 본문, 127편은 120-134편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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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펄젼 시편강해(127편) – 다음블로그
시 127편 전체.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왕인 솔로몬은 경험과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사람의 삶과 노동에는 헛된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한 다음,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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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127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건축자들은 헛수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지키고 서 있는 것도 헛일이다.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7/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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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7편 & 성경주석
시편 127편 & 성경주석 ·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 …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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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의 건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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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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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시편 설교, “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시편 127편 …
바로 그 노래들이 15개가 모아져 있는데 바로 시편 120-134편입니다. 시편 127편도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에 불렀던 찬송 …
Source: kosin.org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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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노승수 목사. 시편은 몇가지 장르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장르는 선택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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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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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7편 1-5절 “축복” – 목회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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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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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127 편 강해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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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2. 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u1yPEc7R_s
2018/10/12(금) “시편 127:1-5”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127:1-5
찬송가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인생의 주관자 하나님(1-2절)
오늘 본문, 127편은 120-134편에 있는 로 표제어가 붙은 ‘성전 순례시’ 15편 중에서 8번째 시편입니다. 성전 순례시 15편 중에서 10편은 누가 기록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4편은 다윗이 기록했고, 나머지 1편, 오늘 본문이 바로 솔로몬의 시입니다.
솔로몬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왕이 그 기초를 탄탄하게 만들었고, 그 위에서 영토도 더 확장하고,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도 받았고, 게다가 하나님께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일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성경이 3권이 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나눔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아가서’는 젊은 시절에 기록하였고,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이 절정에 이르렀던 중년에 기록한 것은 ‘잠언’이고, 인생을 많이 산 후에 기록한 것이 ‘전도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과 5절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이 말씀에 솔로몬의 믿음과 지혜가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집(바이트)’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는 ‘집 건물(하우스, 빌딩)’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가정(home, household)’으로도 쓰였고, ‘국가(國家)_나라의 집’로도 쓰였고, ‘성전_하나님의 집’으로도 쓰였습니다.
그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성전(솔로몬 성전)을 7년 동안 지었습니다. 그 성전은 유다가 망할 때까지 거의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고향이었고,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광장(meeting point)’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궁도 13년 동안이나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왕이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국가(나라의 집)가 경제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국가가 군사력으로도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파수꾼’으로 번역된 단어는 ‘과수원지기’로도 번역할 수 있고, 밤새 양 떼를 지키는 ‘목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과수원지기가 원두막에 앉아서 아무리 불꽃같은 눈으로 쳐다본다 할지라도 전체 과수원을 다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목자가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들에 있는 양 떼를 지킨다 할지라도 밤에 여우나 늑대, 사자와 같은 맹수가 양 떼를 물어 가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가서 6장은 솔로몬왕에게 왕비가 60명이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열왕기상 11장에는 솔로몬에게 후궁(왕비)이 700명이나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60명이든, 300명이든 그렇게 많은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면, 그 여인들에게 작은 집이라도 하나씩 다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많은 여인들이 집을 세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정략적으로 결혼한 이방나라의 공주들이었기 때문에, 그 여인들은 솔로몬의 믿음의 집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솔로몬에게 주셨음에도 그는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집(가정, 국가, 성전)을 세우지 않으면, 집을 세우는 사람이 아무리 튼튼하고, 아무리 멋있고, 아무리 화려하게 집을 세운다할지라도 그 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아무리 깨어서 지켜도 지킬 수 없습니다. 파수꾼은 졸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에서 살핀바와 같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묵상하면 떠오르는 신약의 인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 나오는 한 부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옵니다. 그는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창고로는 다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말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 부자는 자신이, 아니 자신의 재산이 자기 집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a)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아마 사람들은 2절 전반절의 내용으로 성공의 3요소를 말할 것입니다. 첫째 일찍 일어나기, 둘째 늦게 잠자리에 들기, 셋째 수고의 떡을 먹기입니다. 이것을 한자말로 표현하면, 불철주야(不撤晝夜)와 동분서주(東奔西走)입니다. 낮이고 밤이고 일하기와 여기저기에서 일하기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헛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근면, 성실, 부지런한 삶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1절에 있는 말씀처럼 아무리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지키지 아니하시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복음을 전하는 것도 헛것이고, 믿음도 헛것이며,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거짓을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헛됨이 없는 수고는 주님 안에서 하는 수고들이라고 하니다. 왜냐하면 그 수고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원한 가치로 승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2b)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욕망과 두려움으로 인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를 쓸지라도 하나님의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 세우고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세우시는 공간,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양육의 주관자 하나님(3-5절)
고대에 하나님께서 복주심의 대표적인 예가 ‘자녀’입니다. 이것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의 세우심과 지키심을 강조합니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 말씀은 가정을 꾸려가는 것도 하나님의 세우심, 하나님의 지키심의 결과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기업’은 ‘상속받은 재산’, ‘물려받은 소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유산, 상속이라는 말은 그 재산을 형성하는데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그 재산이 나에게로 왔다는 의미입니다. 자녀가 유산과 같은 존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상급’의 문자적은 의미는 ‘임금’, ‘삯’이라는 의미이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냥 상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그렇게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5)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은 젊었을 때에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은 그 부모가 늙었을 때에 다른 집의 자녀들보다 더 장성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 부모에게 힘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손’이나 ‘팔’은 ‘힘’을 의미합니다. ‘장사(장군)’의 손은 얼마나 그 힘이 억세겠습니까? 게다가 그 손에 화살(무기)까지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화살통에 화살도 가득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쉽게 건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고대에 중동에서 재판은 성문이 있는 곳에서 열리곤 했습니다. 그 재판에서 자신이 분명히 옳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을 때, 상대가 인상이 험악한 거짓증인들을 여러 명 세울 때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건장한 아들이 많은 사람들은 억울한 재판 결과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호위무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편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가졌던 솔로몬왕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지은 지혜시이기도 하고, 순례자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노래로 불렀던 시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이 당시 순례자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솔로몬과 같은 왕이 국가가 경제력으로 세워지지 않고, 국방력으로 지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재산이 많으면 가정이 세워진다고 생각하거나, 힘이 있으면 가정이 지켜진다고 착각하지 않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세우시고 지키심을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읊조리며 성전을 향해 올라갔을 것입니다.
“하나님,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다 많은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수고를 다하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우리를 세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유산과 상급으로 자녀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녀들이 손 안에 있을 때에, 이 아이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 날아가기 전에 믿음으로 잘 양육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순례자로서 매일 매일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일터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것이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워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면, 우리 쌓은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음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세워주시는 분,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우리 각자의 시편 127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왕이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성(城)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매일매일의 삶과 우리의 집(가정)을 우리가 세울 수 없고, 우리가 지킬 수 없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거나, 남들보다 더 놓은 자리에 앉기 위함이 아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 안에서 행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그것을 영원한 가치로 승화시켜주시는 것을 목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에게 기업과 상급으로 자녀와 손자.손녀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아이들이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에 믿음으로, 말씀으로 양육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 손 안에 있는 그 아이들이 장성하였을 때에 진리를 향해 날아가도록, 우리가 믿음과 말씀으로 잘 양육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 자녀를 낳기 원하지만 아직 자녀가 없는 가정에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기업과 상급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세우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집을 세우시는 분이시고, 성을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2. 당신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만약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3. 최근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기업과 상급으로 주신 자녀(손자손녀)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양육되기를 원하십니까? 또 자녀를 갖게 된다면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꿈꾸는 사람
[개 요]주제-이 시에는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거룩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성전 건축자를 기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이 머리말은 아마도, 다윗이 지혜로운 자기 아들을 위하여 썼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다윗은 그 아들을 무척 좋아했으며, 그의 이름인 여디디야, 곧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2절에 나온다. 그 이름의 뜻인 ‘솔로몬 혹은 평온함’이 매우 매력적인 이 노래 전체에 배여 있다. 솔로몬 자신이 저자라면, 주의 집을 세운 그로서는 이 시를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 각각에서 마음이 어떤 식으로 오직 여호와께만 고정되는지 주목하라. 120편부터 이 노래까지 이 시들의 첫절을 읽어 보라.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내가······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여호와께서······포로를 돌리실 때.” 오직 여호와만이 상승적인 이 노래들의 각 단계에서 찬양을 받으신다. 아, 멈춰 서는 곳마다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드리는 인생을 위한 노래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복이 그들의 큰 필요와 특권으로서 언급된다. 우리는 여기서 집과 도시, 제도와 재물, 제국과 교회를 건축하는 자들이 주님이 없이는 헛되이 수고할 뿐이며,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때 완전한 안식을 누림을 배운다. 히브리어로 ‘건축자들’로 불리는 자식들은 동일한 복을 받으면서 그 부모에게 큰 존귀와 행복을 안겨 주는 가정 건설자로 제시된다. 이는 건축자의 시이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그러므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지라.
[강 해]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헛되다는 말이 여기서 핵심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이 세 번 분명하게 언급되는 것을 본다.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그들은 온갖 재주와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임을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바벨탑을 건축하던 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창 11:4)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은 되받아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창 11:7)라고 하셨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이 그들을 대적하셨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주님을 위하여 집을 짓고자 했을 때, 문제는 아주 달랐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합력하여 큰 일을 하는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지을 때 심지어는 이교도들도 그가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솔로몬이 자기 궁전을 지을 때 그에게 복을 주셨다. 왜냐하면 1절이 온갖 종류의 집 짓기를 분명하게 언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야심찬 사람들이 큰 집을 세웠지만 환상 속의 기초 없는 구조물처럼 그 집들은 사라져 버렸고, 돌멩이 몇 개만 남아 그것들이 한때 거기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일류 궁전을 건축했던 부자들이 지상의 세계를 다시 방문할 수 있다면 이전의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 궁전의 형적을 발견하고는 당황할 것이다. 그는 헛되이 일했다. 왜냐하면 수고하여 지은 궁전은 그가 손으로 만든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이나 대사원의 건축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집채가 표시하는 삶의 방식이 주님을 힘입어 지속되지 못하게 될 때, 고대 건축의 육중한 벽들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고, 그들의 처소는 허영의 서리처럼 녹아버렸다. 여호와가 아니시면 우리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힘을 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떠나서 일했던 모든 사람은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된다. 여호와께서 대건축자가 되어 주시지 않으면 삽과 망치, 톱과 대패는 헛된 도구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성벽을 에워싸고 보초들이 계속 움직이며 걷고 있지만, 주무시지 않는 파수꾼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으면 성은 적에게 넘어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키시지 않으면 우리는 파수꾼이 있어도 안전하지 못하다. 보초가 깨어서 그 의무를 행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으면 그곳 사람들은 놀라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그것을 지킨다’는 말이 잠자지 않는 경계 부대보다 낫다. 이 시편 기자는 집을 세우는 자에게 건축하는 일을 멈추라거나, 파수꾼더러 근무를 소홀히 하라거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오히려 그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할 것을 말하며, 그런 다음 행한 일을 의지하지 말 것과 제 1원인이신 창조주께서 제 2의 원인을 유효하게 하려고 그 힘을 나타내시지 않으면 피조물의 모든 활동이 헛될 것임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성경은 크롬웰의 명령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너의 화약을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마른 화약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일하고, 두려움 없이 일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황금률을 이행하는 자는 복되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면, 하나의 경륜 혹은 체계를 집이라고 부른다. 모세는 온 집을 다스리는 종으로서 충성스러웠다. 그리고 주님이 그 집과 함께하시는 한, 그 집은 견고하게 서고 형통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집을 떠나셨을 때, 집을 짓는 자들은 어리석어졌고, 그들의 수고는 헛되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성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모든 의식과 전통을 지켰지만, 그들의 걱정은 무익했다. 모든 교회, 모든 종교적 사상 체계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교회나 체계에 의하여 존귀하게 되시지 않는다면, 전체 구조물은 곧 절망스러운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는 일하며 파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니시면 그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며, 그의 깨어 있음은 악을 막지 못한다.
2절.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대개 주님을 쉬시게 하므로, 모든 괴로운 근심이 그저 헛된 일이 되고 영혼을 괴롭히고 만다. 우리는 부지런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부지런한 태도에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부끄럽게 만들며 주님의 호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휴식을 거부한다. 그들은 아침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은 채로 일어나고, 저녁에는 하루가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린 지 한참 뒤까지도 수고한다. 그들은 삶을 회복시키는 잠을 무시함으로써 죽음의 잠에 뛰어들려 한다. 그들의 불면만이 일상적인 불안은 아니다. 그들은 식사할 때도 아까워하며, 가장 볼품없는 음식을 먹되 최소한만 먹고, 그들이 먹는 것은 근심의 짠 눈물과 더불어 씻겨 내려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의 양식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식은 애써 번 것이며 양이 얼마되지 않고 거의 양념을 치지 않은 것이며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고 황금만 유일하게 신뢰하며 그 황금을 쌓는 일 외에는 아무런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기 자녀를 그렇게 살게 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왕자처럼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하게 하시려 한다. 그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물론 참된 신자는 결코 게으르거나 사치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한다면, 이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고 비참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거나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평온함을 가져다 주며, 밤낮으로 평안을 죽이는 방해자를 추방한다.
”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주님은 믿음을 통해 택하신 자들로 근심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며 주님 안에서 쉬게 하신다. 본문은 하나님이 잠을 자는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일 수 있다. 하나님이 잠자는 솔로몬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즉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은 삶의 근심과 화나는 일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을 쉬게 하시고, 쉬는 동안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열심히 수고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쉬고 있는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잠을 주시는 것을 본다. 잠은 근심을 떨쳐버리며, 궁핍을 잊는 상태이며, 조용히 일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잠은 돈과 명예보다 낫다. 예수님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란한 바다 한가운데서도 주무신 것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아주 평온하여 큰 물결에 흔들거리면서도 주무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된다면, 예수님처럼 그런 태도를 취할 때가 많을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을 세운 자들은 천천히, 그리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확실히 그 집은 자원하지 않은 일꾼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았다. 일꾼들은 아침에 서둘러 왔다가 밤중까지 질질 끌려다니며 작업을 강요당하지 않기를 다들 바랐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충분히 쉬고 기쁨으로 식사를 하면서 꾸준히 일했다고 흔쾌히 믿고자 한다. 적어도 영적인 성전은 그렇게 세워져야 한다. 진실로 성전 벽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많은 봉사에 짓눌리기가 대단히 쉽고, 주님을 잊기가 십상이며, 자신들의 힘만으로 건물이 완성될 것이라고 꿈꿀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집을 집의 주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훨씬 행복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지키시는 주님만 신뢰한다면, 우리의 세우고 지키는 일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는 점이다.
3절. ”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 본절은 집을 세우는 다른 양태를 가리킨다. 즉 땅에서 우리의 이름과 집을 이어가도록 자손들에게 위탁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없다면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자기를 이어 집을 유지할 후손이나 권속이 없다면 어떤 목적 때문에 그는 집을 짓겠는가? 상속자가 없는데 넓은 땅을 소유해 봤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문제에서도 주님이 아니시면 사람은 무력하다. 위대한 나폴레옹은 이런 점에서 해가 될 만큼 근심했을지라도 왕조를 세울 수 없었다. 많은 부자들은 자기 몸에서 태어난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기 위하여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놓으려 했다. 자식은 분명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자식이 없는 채로 죽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집은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상급이로다. 하나님은 자녀를 형벌이나 짐으로 주시지 않고 선물로 주신다. 사람이 자녀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알고 자식을 교육하면 자식은 선한 증표가 된다. 자식이 ‘의심스러운 복’이 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의심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올바르게 질서를 갖추면, 자식을 방해물로 보지 않고 기업으로 본다. 그리고 자식은 후회하며 받는 것이 아니라 상급으로 받는다. 만일 영국에 사람이 너무 많고 인구 증가가 너무 심해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될지라도, 주님이 이 좁은 섬에 머물라고 하지 않으시고 도끼와 쟁기를 기다리는 끝없는 지역을 채우도록 하실 것임을 기억하자. 하지만 여기서도, 얼마 되지 않는 수입 때문에 곤경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가장 좋은 소유는 사랑스러운 후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찬송한다.
4절.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부모의 젊은 시절에 태어난 자녀는 하나님의 복주심에 의하여 부모의 노년에 위로가 된다. 무사는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을 날아갈 수 있는 무기를 좋아한다. 좋은 아들은 아버지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신속하게 날아가 맞추는 아버지의 화살이다. 선인은 자신의 소망을 후원하고 자기의 계획에 이바지할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으면 지극히 놀라운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자녀가 아직 어릴 때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자랄 때 그릇되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자식의 마음이 비뚤어지고 쓸모없이 되지 않도록 자식을 똑바르고 반듯하게 키워야 한다. 그래서 젊을 때 그들을 화살처럼 만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충성스럽고 순종하며 사랑스러운 자식을 선물로 주시기를 구하라. 그러면 자식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자식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힘쓰면, 자식이 우리의 위로와 기쁨이 되려고 생명을 갖고 태어났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자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비통하게 여긴다. 자녀가 몇 되지 않은 사람들은 곧 자녀들이 떠나는 것을 보게 되며, 집은 조용해지고 그들의 삶은 재미가 없어진다. 공손한 자녀를 많이 둔 사람은 대체로 아주 행복하다. 물론 자녀가 아주 많다는 것은 시련이 많음을 뜻한다. 그러나 주 안에서 믿음으로 이 시련을 맞을 때, 자녀의 많음은 사랑이 많고 기쁨이 무수함을 뜻한다. 이 주석을 쓰는 필자는 직접 목격한 사례를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필자는 열매없는 부부 생활이 불행해지는 경우를 아주 많이 보았다. 또한 필자는 훌륭한 아들 둘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이들이 둘 다 자라자, 필자의 집에는 아이가 없게 되었고, 중얼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만일 아이가 많았더라면, 아이가 많은 가정이었더라면 축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기서 표현된 시편 기자의 단정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필자는 딸 열둘과 아들 셋을 둔 가정을 알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그 부모보다 가정적인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모는 모든 자식을 좋아했고 아이들은 부모를 좋아했으며 저희들끼리도 좋아했다. 아들과 딸이 화살이라면, 그것이 가득한 전통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옹이가 많고 쓸모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다면, 적을수록 좋다. 전통이 가득 찬 사람이 복되지만, 전통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 복되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평온한 생활에는 그런 전쟁 무기가 필요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이 작아도 가득 찰 수 있다. 그럴지라도 복을 얻은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자식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들은 소송이나 전쟁에서 원수와 만날 수 있다. 용감한 아들을 많이 둔 사람을 상대하려는 사람은 없다. 시편 기자는 자기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아버지의 말을 단호하게 지지하는 아들들을 말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복이며 옛 언약의 축복이다.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그리고 이는 이런 저런 의미로 주님의 모든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주 예수님은 그의 씨로서 승리하지 않으시는가? 문자 그대로 볼 때, 이는 주님의 오심을 뜻한다. 주님의 뜻이 아니면, 집을 세우는 자식이 없을 것이며,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부모에게 힘이 될 좋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주님께 맡겨야 할 일이라면, 우리가 다른 모든 일도 주님의 손에 맡기자.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우리의 의뢰하는 활동을 형통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조용한 생활을 누리고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으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상급으로 자식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음식과 옷도 보내주실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많은 영적 자녀의 아버지가 된 자는 의심할 필요없이 복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구원받게 된 영혼들을 지시함으로써 모든 대적을 대응할 수 있다. 회심자들은 분명 주님의 기업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영적 수고의 상급이다. 이로써 성령의 능력 아래 교회라는 성은 세워지고 지켜지며, 여호와께서 그 영광을 취하신다.
[주해와 설명들]머리말.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 시의 머리말에는 솔로몬의 이름이 있는데, 성전 건축자가 주님의 도움 없이 성전 짓는 일을 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다. -비드(Bede<672-3-735>, 닐과 리틀데일에 의해 인용됨).
시 127편 전체. 기독교적 덕목의 ‘계단’ 가운데 하나라고 볼 때 일곱번째에 해당하는 이 시는 자기 의존적 태도를 반대한다. -암필드.
시 127편 전체. 이 시에서도 뚜렷하게 단계들이 표시되지만, 다른 시처럼 그렇게 규칙적이지는 않다.
1절에서 두 번 반복되는 ‘헛되다’는 2절에 대한 목표 혹은 ‘단계’로 볼 수 있다. 1절에 나오는 두 절의 상응 관계는 너무도 놀랍다. 마치 어떤 영적 활동에 접어들 때 혹은 문제의 현상태를 가리킬 때도 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도움이 아닌 다른 모든 간섭이나 도움을 헛된 것으로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헛되다’와 관련해서 우리는 특별히 활동적인 계절이나 평화로운 시절을 항상 떠올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때 우리는 이 ‘헛됨’의 올무에 떨어지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는 성공과 형통의 단계인데(3, 4절), 성공과 형통은 역시 여호와께서 돕고 보호하심으로써 시작되고 계속되게 하신 것이며, 그리하여 이제는 우리의 안녕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5절도 이를 넘어가지 않고, 완전한 안전과 영향과 능력에 대한 최고의 상징을 구약의 표상적 언어로 묵상한다. 성 어거스틴은 이를 ‘온 세상에 화살처럼 날아간 영적 자식’으로 언급한다. -알프레드 에더샤임(The Golden Diary of Heart Converse with Jesus in the Book of Psalms, 1877).
시 127편 전체.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왕인 솔로몬은 경험과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사람의 삶과 노동에는 헛된 것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한 다음, 사람이 자신의 근심과 수고를 완화시키고 자신이 행하는 일을 즐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이생에서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전도서에서 논의하는 모든 것을 이런 목적을 향하여 이끌어간다. 그와 아주 비슷한 것이 이 시편이다. 책 제목에 솔로몬을 저자로 언급한 점에 관하여 의심할 이유가 없다. 만일 모든 제목이 불확실하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면, 확실한 근거 없이 제목의 내용을 의심하거나 저자의 의미가 아닌 다른 어떤 의미를 철자 라멕(l)에 부여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시편들을 수집한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와 판단에 따라 제목을 붙인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시편을 아무런 제목 없이 내버려 둘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솔로몬의 시이며, 이 시와 비교할 수 있는 전도서와 이 주제에 관한 많은 금언으로부터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시는 솔로몬의 천재성과 형편과 잘 어울린다······그 의도는 사람들을 과도한 노동과 심한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에게 경건함과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이 시는 명백히 이 점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집안의 행복과 안정을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집안의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훨씬 가벼운 일에서도 형통함을 주신다. 자신의 수고와 근심을 줄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과 행동을 영위하며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헤르만 베네마(Hermann Venema, 1697-1787).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사실 “벤”(@b, 아들)과 “바트”(tb, 딸), 그리고 “베이트”(tyb, 집)는 “바나”(hnb, 세우다)라는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다. 돌과 목재가 ‘건물’을 형성하는 것처럼 실제로 아들과 딸이 집안을 세우고 ‘가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예배처를 잘 세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얻지 않고서는, 살 집을 평안하게 세울 수 없다. 설령 하나님의 복이 우리 자식들에게 임하지 않는다 해도, 그 집(가정)은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은 하나님의 집이기보다 사탄의 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복 아래 있지 않는 모든 부부 관계는 개인적, 공적 저주가 될 것이다. -아담 클라크.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는 집이 세워지고 도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데 주님이 동의하시고 기꺼이 하려 하시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세우지 아니하시면······지키지 아니하시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우고 지키는 일이 형통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동의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도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이 없으면, 사람이 시도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달성될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돕지 않으시면 하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세우지 않으시면, 지키지 않으시면 하고 말한다. 즉 여호와께서 친히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시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세우는 자와 지키는 자가 사소한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지킨다고 말하지 않고 아무 목적 없이 일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일과 근심의 모든 효력은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에 의존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능력과 근심과 산업은 그 자체로는 헛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므로 세우는 자가 일해도 허사라거나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므로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시편 기자가 말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집을 세우는 자가 수고해도 허사이고 성을 지키는 자가 경성해도 허사라고 말한다. 그는 주님이 세우시고 지키시기 때문에 집을 짓고 성을 지킬 때 하는 인간의 근심과 수고를 쓸모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실 때, 사람의 근심과 수고는 특별히 쓸모있고 효력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게으르고 무기력한 사람의 후원자가 아니시다. 성령은 수고하는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향하게 하신다. -볼프강 무스쿨루스(1497-1563).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영국의 많은 오래된 집의 문 상인방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Nisi Dominus frustra. 이 시편의 첫구절을 번역한 라틴어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우리가 순례하는 집’의 정문에 이 글을 새겨 놓자. 그러면 의심할 나위없이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에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다. -사무엘 콕스(The Pilgrim Psalms, 1874).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영국 국민과의 영적 전쟁을 시작하면서 위험을 느꼈을 때, 이 방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매일 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들으심을 얻고 은혜로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싸움에 참여한 우리 모두는 우리를 감독하며 돕는 섭리의 일들을 자주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장차 올 지복을 구축하는 수단을 평화롭게 살필 수 있는 우리의 이 복된 기회는 이 섭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이 강력한 친구를 잊었단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오랫동안(81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이 진리에 대한 더욱 확실한 증거를 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사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새가 하나님 몰래 땅에 떨어질 수 없다면, 한 제국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오듯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됨”을 확신했습니다. 나는 이를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시적인 도움 없이 이 정치적 건축에서 우리가 바벨탑을 세우는 자들보다 더 낫지 못할 것임을 또한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하고 편파적이고 지역적인 이익에 의하여 분열되며, 우리의 전망은 좌절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망신을 당하고 장차에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향후로 인류는 이 불행한 경우를 보고 인간의 지혜로 정부를 세우는 일을 포기하고 그것을 우연이나 전쟁이나 정복에 내팽개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매일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늘의 도움과 우리의 생각에 대한 하늘의 복을 간구하는 기도회를 가지도록 간절히 권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성직자들에게 이 봉사를 수행해 달라고 부탁할 것을 간절히 권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미국 헌법 작성대회에서 행한 연설(1787).
1절. 시편 기자가 집 짓는 것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성을 지키는 일을 보충하는 것을 주목하라. 그는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도성은 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볼프강 무스쿨루스.
1절.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파수꾼이 있어도 불이 일어날 수 있으며 폭풍우가 성을 덮칠 수 있다. 무장 집단이 성을 공격할 수도 있고 혹은 전염병이 갑자기 성에 발생하여 성의 거주지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알버트 반스(Notes on the Psalms, 1798-1870).
1절. 귀용(Guyon) 부인이 자신의 시험과 어리석음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존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말한다. “저는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하고 말한 것을 뼈저리게 확신했습니다. 오 나의 주님, 제가 주님을 뵈었을 때, 주님은 저를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제 마음을 온갖 원수에게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혼자였을 때 저는 너무도 연약했습니다. 제 원수들이 저를 참으로 쉽게 이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성실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오직 주님의 부성적 보살핌 때문에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주님 없이는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제 자신의 지혜나 활동을 마구 내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 모든 것은 주님, 나의 구원자 덕택입니다. 그리고 제가 주님을 그처럼 힘입어 사는 것은 무한한 만족의 근원입니다.” -귀용(Jeanne Marie Bouvier de la Motte Guyon, 1648-1717)의 생애에서.
1절.
하나님이 집을 세우지 않으시고
기초를 튼튼히 놓지 않으시면, 누가 세우든 상관없이
그 집은 폭풍우 치는 날에 설 수 없도다.
하나님이 성의 방패가 되지 않으신다면,
그분이 성의 빗장과 벽이 되지 않으신다면,
파수 망루와 모든 것이 허사로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 때 당신이 깨어 있더라도,
당신이 솟는 해를 막을지라도,
당신이 별 근심없이 매일 잔치를 벌이더라도,
당신의 수고는 무익하며 당신은 파멸하리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녀를 먹이고 지키실 것이며,
그 양에게 휘장을 두르실 것이로다.
-피니어스 플레처(Phineas Fletcher, 1584-1650).
2절.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일하지 않고 기도하지 말며, 기도하지 않고 일하지 말라.
근심과 안달로는,
고뇌와 두려움으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지 못하나니,
그분이 들으실 것은 기도로다.
-랑게(J. P. Lange, Commentary on James, 1862).
2절.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이 시편 기자는 우리가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과중하고 무거운 수고를 그만두라고 권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본절은 ‘일찍 일어나려고 날을 일찌감치 시작하다’와 ‘늦게 자려고 날을 늦어지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날을 인위적으로 늘임을 뜻한다. 노동의 법칙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 우리의 본성상 활동에는 제한이 있다. 인간의 진보를 위하여 행해야 하는 모든 일이 인류에 의하여 완성되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은 일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물리적 지적 능력을 넘어서, 자연이 할당하는 시간을 넘어서 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인류에게 선한 순수 결과는 어떤 쪽이든 날의 인위적 연장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고, 촛불을 밝혀 아침을 먹고 늦게까지 깨어 있는 학생의 ‘한밤중 기름’은 기만이며 올무이다. 밝을 때 일하라. 밤이 오면 쉬라.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도 이 근심하는 인류만큼 잘 산다.
“수고의 떡.” 이는 고생의 떡, 고된 활동의 떡을 뜻한다. 할 일을 행하라. 그러면 주님이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돌보실 것이다. 잠언 10: 22과 비교하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복이 부하게 하며, 수고가 거기에 도무지 덧붙을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마태복음 6:25과 비교하라. “목숨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에게는’은 원어에 없다. “그 사랑하시는 자”는 일하고 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걱정하며 과중하게 일하는 만큼, 필요한 것은 공정하게 공급될 것이다. 이 구절을 ‘자면서’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그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하늘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일을 진척시키고 계신다는 해석이다. 혹은 그들이 깨어 일하는 동안 주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시며 그들이 쉬며 잠잘 때도 그렇게 하신다는 해석이다. -찰스 딤즈(Charles F. Deems, The Study, 1879).
2절. 주님의 성전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의존하여 지어지지 않았다. 모든 인간적 지혜와 신념은 완전히 거부되었다. 그 계획은 주님이 친히 하셨다. 또한 성전의 모델은 솔로몬에게 지시하셨다. 인간의 재치나 지혜에 맡겨진 부분이 없었다. 그 선한 일을 하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으며 수고의 떡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종사하는 그런 자들에게는 은혜의 시절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에 참여할 때 당신과 나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완전한 평안 가운데 있는 일꾼들의 마음과, 성전의 웅장한 주제에 관하여 함께 나누는 그들의 많은 대화와, 그 웅장하고 찬란한 예표인 영광스러운 메시아를 가리키는 성전의 의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이 온갖 괴로운 근심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몸과 마음에 원기를 회복하며 천천히 일어났으며, 무슨 결핍이 있는 듯이 늦게 눕지 않았다. 그들은 가족을 위한 양식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로서 완전한 만족을 누렸다. 그들은 그 일에 의하여 달콤한 잠과 원기 회복을 누렸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왔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 -사무엘 아일스 피어스.
2절. “수고의 떡을 먹음.” 이는 비참과 수고의 삶을 영위하고, 실망 가운데 안달하며,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에 배 아파하며, 손해와 잘못에 너무 심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다. 어떤 사람은 그 때문에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마음이 산란해져서 정신을 잃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한, 좋은 시절을 보지 못하고 심중에 자학적인 근심과 괴로움을 여전히 안고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가지고 사람은 자신의 육신을 부스러뜨린다. -토머스 맨턴.
2절. “······헛되도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좀더 특별하고 제한적인 의미로 본다. 마치 솔로몬의 통치를 반대하는 자들의 모든 선동이 상당히 조심하고 애를 써서 벌인 일이지만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임을 다윗이 암시하는 것 같다.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야심적인 계획에 대한 근심으로 괴로워했겠지만, 하나님은 여디디야, 곧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휴식을 주셨다. 즉 그 나라가 솔로몬에게 안전하게 귀속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솔로몬은 압살롬과 아도니야처럼 백성에게 아첨하여 그들의 존경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 해석이 뜻하는 바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괴롭게 살고 자기 머리를 치고 자기 영혼을 지치게 하며 자기 양심을 괴롭게 하더라도 많은 경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산이나 재산으로 인한 즐거움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이런 괴로운 근심을 하지 않아도 만족을 누린다. 그들은 세상의 값진 것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요함과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는 평온함을 갖고서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섭리를 인정하라. ‘하나님 없는’ 수고는 ‘형통할 수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토머스 맨턴(1620-1677).
2절.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켄 이텐 리디도 쉐나”(anv wdydyl @ty @k ). 이 말은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모호하게 번역될 소지가 많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 켄 “(@k)을 대조의 불변화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아예 생략한다. 그러나 “켄”은 또한 ‘좋게’ ‘정당하게’를 뜻하기도 한다(왕하 7:9; 민 27:7). 우리는 여기서 이 말을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잘 자게 하시는도다 ‘로 번역해도 된다. 즉 하나님을 불신하면서 모든 일을 자기들이 수고한 결과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들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깨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이 은혜, 즉 여호와의 부성적 보살피심과 선하심 가운데 쉬는 은혜를 주신다. 그들은 그와 같이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잠을 충분히 누린다. 혹은 ” 참으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켄”이 “아켄”(@ka)과 같은 뜻이 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쉐나 “(hnv)는 “비쉐나”(hnvb)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참으로 여호와께서 잠 자고 있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베푸시는도다’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이런 방법에 의하여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데 디우(Louis De Dieu, 1590-1642).
2절 하반절. 이 문장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혹은 ‘잠자고 있을 때 주시는도다 ‘로 읽을 수 있다. 즉 여호와께서는 불신자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를 뜻하는 “켄”(@k)이라는 불변화사는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믿어지지 않고 가상처럼 보이는 진리를 더욱 분명히 표현할 목적으로, 즉 하나님은 그 백성이 큰 근심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음식을 주신다는 진리를 표현할 목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게으른 종들을 온화하게 대하시고 먹이시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하며 살도록 창조받은 것을 알고 있듯이, 그리고 다음 시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이 손으로 수고의 떡을 먹을 때 복된 사람으로 여김을 받는 것을 알고 있듯이, “잠”이라는 말은 게으름을 함축하는 말이 아니라 평온한 노동을 함축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참된 신자는 믿음의 순종으로 이런 노동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것이 불신자들에게는 매우 큰 열정을 불러일으켜,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소란과 법석을 떨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필요없는 근심으로 자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일도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실한 자들은 수고로운 삶을 살더라도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명을 행한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게으르지 않고, 그들의 마음은 믿음의 평온함 가운데서 마치 잠자는 듯이 쉰다. -존 칼빈(1509-1564).
2절.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는 특별한 휴식이다 . 아들들에게, 성도들에게, 후사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휴식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휴식을 주신다 ‘ 혹은 히브리어에 있듯이, 소중한 자, 끔찍히 사랑하는 자에게 근심이나 슬픔이 없는 평온한 휴식을 주신다. 히브리어 “쉐나”(anv)는 알렙(a)이 있는데, 이는 더 큰 평온함과 휴식을 표현하려고 조용한 묵음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는 흔한 일이 아니다. 이 휴식은 하나님이 성도의 머리에만 씌우시는 면류관이다. 그 자녀의 목에만 걸어 주시는 금사슬이다. 사랑하는 자의 가슴 사이에만 매달아 주시는 보석이다. 소중한 자들의 가슴에 달아 주는 꽃이다. 이 안식은 천상 나라의 주민에게 적합하고 고유한 생명 나무이다. 이는 자녀들의 떡이며 개에게 결코 주지 않으실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
2절 하반절. 주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 첫 아담이 ‘잠자고’ 있을 때 옆구리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그의 아내이며 모든 산 자의 어미인 하와를 지어 그에게 귀한 선물로 ‘주셨듯이’, 둘째 아담이며 참된 여디디야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 가운데 잠자고 계셨을 때, 하나님이 죽음 가운데 있는 그를 위하여, 그 죽음으로-그의 귀한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피로-모든 산 자의 어미이며 영적인 하와인 교회를 만들어 신부로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잠자고’ 있는 그를 위하여 교회라는 영적 성전을 ‘지으셨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2절. 조용한 잠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조용한 잠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1) 우리가 그런 잠을 잘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비가 풀을 새롭게 하듯, 조용한 잠은 이슬처럼 자연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런데 선지자가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하듯이(렘 14:22), 이렇게 말할 수 있다:땅이나 하늘에서 잠을 줄 수 있는 피조물이 있는가? 소나기를 주시는 그 하나님이 휴식 시간을 주심에 틀림없다. 평화로운 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2) 하나님이 잠을 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즉 평온함이 깃든 잠을 주신다. 히브리어 “쉐나”는 묵음 혹은 휴지(休止) 문자인 알렙이 붙어 있는데, 잠자는 시간이 아주 평온함을 뜻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평안을, 잠을 주시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인 여디디야라고 불린 솔로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지만, 70인역은 히브리어를 복수로 만들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 전체에게 사랑의 증거로서 평온한 잠을 주신다. 심지어 지극히 위험한 때에도 그렇게 하신다. 그래서 감옥에 있던 베드로는 사슬에 매여 있고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다음 날 죽게 되었을 때도, 아주 속히 잠에 골아떨어졌다(행 12:6, 7).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누워 자는데······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일으켰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며” 그 사랑하시는 자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만들도록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 두려움을 금하시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잠을 주시도록 구하는 것이 ‘우리가 드릴 기도’가 아닌가? 그리고 잠잘 때 우리를 붙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가?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4, 5).
공포에서 벗어나서 잠자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가?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4).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은 이 세상의 광야와 숲에 있을 동안 편안하게 잠들며, 사나운 짐승 같은 마귀가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겔 34:25).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통하여 이 유익을 얻는다면, 하나님께 찬송을 넘치게 돌리며 삶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조용한 잠을 주신 주께 큰 찬송을 돌린다. -필립 굿윈(Philip Goodwin, The Mystery of Dreams, 1658).
2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세상은 자신이 총애하는 자에게 권력과 부와 영예를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을 주신다. 하나님이 더 나은 것을 주실 수 없겠는가? 폭풍우가 사납게 일어날 때 잠을 주시는 것, 양심이 온갖 죄로 찌들 때 잠을 주시는 것, 악한 천사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뒤집어 놓으려고 할 때 잠을 주시는 것, 죽음이 다가오고 심판이 임박할 때 잠을 주시는 것, 이보다 더 적절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보다 하나님께 더 적합한 것이 있으며, 영혼에게 더 고귀한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선물에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쉼과 원기 회복을 뜻하는 잠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선물인 ‘의인을 위하여 남아 있는 안식’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확실히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와 비슷한 것이 이사야서에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사 26:3). 여기의 “평강”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더라도 시편에 나오는 “잠”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 전체에서, 특히 신약에서, 잠은 알다시피 종종 죽음을 표현한다. ‘그가 그 조상과 함께 잠들었다’는 말은 구약의 일반적 표현이다. ‘예수님 안에서 잔다’는 표현은 구속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죽는 자들을 말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잠”을 죽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이런 관점에서 제한시켜 이 구절을 설명해 보자. ‘확실히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이는 죽음에서 어떤 측면을 말하는가? 죽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선물로 보게 하는 측면이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보내신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옳겠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셈이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마치 하나님께서 잠을 갖다주시고 지친 기독교 군병의 눈에 얹어 놓으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음을 주셔야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은줄을 부드럽게 푸시고 온갖 인자와 온유를 사용하셔서 ‘땅에 있는 장막집'(고후 5:1)을 허실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가? 나는 이 본문의 말보다 위로를 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의인의 병실에서 말하든지 그들의 무덤 위에서 말하든지 상관없다. 이 말은 죽음에서 부끄러움을 없애듯이 병에서 고통을 없앨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로 베푸시는 것은, 분명 그분의 보살핌과 지키심과 배려와 관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특별하고 이례적인 의미에서 의인이 죽어 누워 있을 때 임재하시며, 의인이 죽어 있는 곳을 인치시며 수호하신다고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성도는 경건의 고백이 한결같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마지막 시간은 하나님이 그의 옆에 보이실 만큼 가까이 서 계시는 시간이 될 것이며,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하나님이 그 날개 그늘을 드리우시는 곳이 될 것이다. 병이 길어지고 괴로울 수 있다. ‘흙에는 흙, 재에는 재, 먼지에는 먼지’라는 말을 의식없는 사자(死者) 위에 애처롭게 읊조릴 수 있다. 그러나 늘어진 이 모든 몸부림에서, 이 모든 명백한 패배에서 아무것도 의인을 해칠 수 없다. 그러나 죽음과 이것에 동반되는 모든 것이 단지 기쁨, 즉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 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죽어가는 신자의 침상 옆에 서 있는 그대여, 눈물을 닦으라. 이별의 시간이 거의 다가왔고 차가운 물기가 그 이마에 배여 있으며 눈은 고정되었고 맥박은 너무 약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을 발휘하라. 방에는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가득 차 있다. 천사들이 몸을 떠난 영혼을 맡으려고 거기 서 있다. 어떤 인간의 손보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눈을 감기고 있다. 어떤 인간의 목소리보다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헨리 멜빌(Henry Melvill, Death the Gift of God, 1798-1871).
2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어느 날 밤 나는 휴식을 취할 수 없어, 생각의 들판에서 마구 배회하다가 이 본문을 만나 깊이 묵상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나는 꿈나라의 경계선에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는데 아마 성채에 있었던 것 같다. 육중한 벽 둘레로 깊숙한 해자가 파여 있었다. 파수꾼이 밤이고 낮이고 성벽을 돌아다녔다. 원수에게 도전적으로 보이는 멋지고 옛스런 요새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침상에 누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감기도 전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하며 나팔소리가 났다. 위험이 지나간 다음 나는 다시 누웠다. 다시 한번 ‘전투 준비’, ‘전투 준비’ 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다시 일어났다. 결코 쉴 수 없었다. 나는 무기를 메고 있다고 생각하고 갑옷을 입은 채로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한번은 원수가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었고, 또 한번은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성채 저 아래 깊은 곳 어딘가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근심은 이것을 지키려는 데 온통 쏠려 있었다. 나는 이것을 빼앗기지는 않을까하여 두렵고 무서워 떨었다. 나는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 대단히 웅장하긴 해도 이런 성에서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람이 결코 쉬지 못하는 불만의 성, 야심의 성이었다. 끊임없이 ‘전투 준비’ ‘전투 준비’라는 외침이 있었다. 원수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었으며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보호해야만 했다. 불만의 성의 도개교에는 잠이 결코 지나가지 못했다. 그런 다음 나는 또 다른 환상에 빠져 그 성에서 빠져 나오려고 생각했다. 나는 시골집에 있었다. 시인들이 말하는 아름답고 유쾌한 곳에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가슴에 반짝이는 하나의 보물 외에는 세상에 보물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으며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이 보물은 평온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빌 4:7)이었다. 나는 잠을 잤다. 만족의 집에서는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해 하며 잠을 잤기 때문이다. 너희, 도에 넘치는 수전노여! 가라. 너희, 움켜쥐는 야심에 찬 사람들이여! 가라. 나는 너희의 불안한 삶을 부러워하지 않노라. 정치가들은 중간에 잠을 깨는 경우가 많다. 수전노의 꿈은 언제나 해롭다. 이익에 혈안인 자의 잠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족함을 끼치사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C. H. S.
2절.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영혼 속 깊은 곳에 생겨난
하나님의 모든 생각들 가운데
그리고 시편 기자의 심오한 음악 가운데
이제 이보다 뛰어난 은사나 은혜가 있다면
내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엘리자베스 배렛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9-1861).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러므로 당신이 가족과 국가를 염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크고 쉴새 없는 수고에 지칠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자녀와 함께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르 블랑.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즉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현세의 재물 대신 자녀를 주신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집이나 토지나 수천의 금은을 주시나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태를 주신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집이나 토지나 금은이 그 기업이다. 가난한 사람은 땅이나 돈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자녀를 얻는다. 그러니 자녀들이 그의 기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련의 기적적인 섭리로 그 아이들을 먹이고 부양하시면서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수천 수백만 금을 자신의 존재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더 많이 가질 생각에 여섯 아이를 포기하고 지상에서 버림받고 외로운 자신 외에 아무런 뿌리나 가지를 갖지 않으려는 가련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이 많은 가정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그리고 자녀를 주신 분이 그들을 먹이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며, 이 사실 위에 세워진 준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먹을 입을 보내시는 곳마다 고기도 보내신다.’ 한 아랍인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평하지 말게. 그대 식구가 많지 않은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대를 먹이실 것임을 알게.’ -아담 클라크.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히브리어는 아이가 주님께 속한 기업이지 (대부분의 영어 독자가 이해하는 것처럼) 주님이 주신 기업이 아님을 함축하는 것 같다. 탈굼도 이와 같이 이를 지지한다. -암필드.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편 기자는 자녀가 경건하고 거룩한 부모에게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부모에게만 자녀는 하나님이 상급으로 주신 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을 명시적으로 말하면서, 자녀의 복을 최종적이고 가장 큰 복이라고 말한다. 또한 시편 기자는 자녀를 거룩하고 경건한 자가 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자녀는 그들을 낳은 자에게 상급이 아니라 저주이며 슬픔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머리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솔로몬의” 시였다. 그러므로 동일한 제목을 가진 시 72편처럼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 대하여 혹은 솔로몬을 위하여 썼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아버지를 위한 ‘하나님께서 사랑'(삼하 12:24, 25)하신 자였으며, 다윗의 확실한 언약과 자비가 다윗의 왕국과 더불어 그에게 양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시편의 앞절의 내용은 솔로몬에게 적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을 짓고 그 도성 예루살렘과 그 왕국을 평강 가운데 지키고 보존하며, 안식을 갖게 할 자, 혹은 이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3절) 주위의 모든 원수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고요한 잠을 자게 할 자가 바로 솔로몬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하여 솔로몬의 예언(대상 22:9, 10)을 여기 이 시편의 처음 석 절에서 솔로몬에게 주어진 교훈과 비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 시편이 솔로몬과 적절히 관련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토머스 굿윈.
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그러므로 가장 큰 외적인 축복 가운데 하나는 착실한 자녀들로 가득한 가정임을 주목하라 .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은 많은 은혜에 따르는 축복이다.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은 많은 재산을 갖는 것보다 더 낫다. 식탁 둘레에 (시편 기자가 일컫듯이) 이 감람 나무를 많이 갖는 것은 식탁 위에 많은 기름과 포도주를 두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죽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 없는 보물의 가치를 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보물의 가치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자녀를 둔 모든 사람이 자식을 복으로 갖는 것은 아니나, 자식은 복이며 어떤 사람은 한 아이에게서 많은 복을 얻는다. 자식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그렇다면 집과 토지, 금과 은은 주님이 그 백성에게 주신 기업이 아닌가? 물론 기업이다. 왜냐하면 땅과 그 충만한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그것을 사람의 자녀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이 주님의 것이지만, 만물이 똑같이 주님의 것은 아니다. 자식은 집과 토지보다 더욱 귀한 하나님의 것이다. -조셉 캐릴.
3절. 자녀!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을 가난 가운데 방치해 두었다. 자식들의 수와 필요는 늘어났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양식은 날마다 줄어들었다. 나의 생명이 연장된다 해도, 그들은 역시 궁핍한 자녀들이 될 것이다. 또한 병과 죽음의 징조가 내게 덮치면, 그들은 곧 무력하고 외로운 고아가 될 것이다. 물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기업을 무시하실까? 선물을 슬픔으로 변하게 하실까? 그대가 가난할지라도, 자식들의 수를 불평하지 말라. 그대에게 (먹을 것을 찾는) 사자들이 많다 해도, 주님께 구하면,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대를 먹이실 것임을 알라. 그대가 수천 개의 금은을 줘도 아이를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모든 인자의 근원이신 주님이 더욱 깊은 사랑으로 그대의 아이들을 보시며 그대가 시련을 당하는 지금 그들을 사용하여 그대로 하여금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시며 곧 그대의 의지와 자랑이 되게 하실 것임을 믿으라.
자녀!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 이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약속의 문을 열어 보이자마자, 파괴자의 호흡이 밀어 닥쳤다. 자녀들은 정말 죽음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으며, 그 웃음과 포옹에 나의 상한 마음은 다시 피를 토한다. 그렇다. 슬퍼하는 자여.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주장하시지 않겠는가? 자녀는 하나님의 것일 때 안전한 보호 가운데 있으며, 곧 좀더 나은 땅에서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곳에서는 죽음이 그대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보좌에서 부리는 천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영광을 가지고 그대를 맨 먼저 환영할 것이며 영원토록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와 함께 예배할 것이다.
자녀! 세번째로 이 말은 무척 슬프고 걱정하는 영혼의 그 마음에 비수를 꽂을 것이다. 그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의 하나님을 버렸다. 그들의 동료들은 허영되고 사악했다. 그들의 쾌락은 어리석음과 수치의 쾌락이었다. 그들의 삶은 전혀 약속이 없는 삶이었고, 그들의 영혼은 아무런 목적이 없었으며, 모든 책망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기업이다.’ 눈물 흘리는 부모여, 그대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 기업을 지킬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했는가? 정당한 생각과 기도, 주의깊고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기업에 영향을 주었는가? 가꾸는 일이 없으면 땅에서의 추수는 없다. 기도가 없으면 영혼으로부터 복이 나오지 않는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이는 때때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거의 그럴 수 없는 약속이다.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라. 그러면 예수님은 변치 않고 온유하게 그들에게 안수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복주실 것이다. -로버트 니스벳.
3절.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존 하워드 힌턴(John Howard Hinton)의 딸이 죽어가는 힌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녀에게는 경건한 부모를 모신 것보다 큰 복이 없어요.” 죽어가는 아버지는 감사의 뜻을 보이면서 “그 다음으로 부모에게는 경건한 자녀를 갖는 것보다 큰 복이 없지”라고 말했다. -Memoir in Baptist Handbook, 1875.
4절. “젊은 자의 자식.” 이는 “수중의 화살”이다. 이는 신중하게 과녁, 즉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세대에 대한 봉사라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후에 그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잘못되면, 수중에서 떠난 화살이 된다. 그때 그들을 돌리려 하면 너무 늦다. 이 “수중의 화살”이 심장에 꽂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즉 경건한 부모에게 늘 근심이 되는 자식 말이다. 부모는 백발에 슬픔을 안은 채 무덤으로 들어간다. -매튜 헨리.
4절. “젊은 자의 자식.” ‘청년의 아들’, 즉 부모가 아직 젊을 때 낳은 아들들이다(창 37:2; 사 54:6). 이는 그들의 활력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창 49:3), 부모의 노쇠기에 도움을 주는 그들의 진가를 또한 암시한다. -조셉 애디슨 알렉산더.
4절. “젊은 자의 자식.” 만일 본절을 일반적으로 올바로 해석하면, 이 시는 젊은 부부에게 큰 격려가 된다. 오늘날 아버지가 자연적으로 후손에게 명예롭고 덕망있는 습관을 형성시켜 줄 만큼 살 수 있을지 대단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혼인이 지연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이 해악은 점점 심해진다. -윌리엄 스완 플러머(Studies in the Book of Psalms, 1802-1880).
4절. “화살 같으니.” 다윗은 자녀를 “화살”이라고 적절하게 부른다. 왜냐하면 자녀를 잘 기르면, 그들이 부모의 원수들을 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녀들을 잘못 기르면, 그들이 부모를 쏘기 때문이다. -헨리 스미스(1560-1591).
4절. “화살 같으니.” 자식이 “화살”에 비유되었다. 막대기는 저절로 화살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화살로 만들어져야 한다. 원래 막대기는 옹이지고 울퉁불퉁하지만, 부드럽고 멋지게 화살로 만들어진다. 이처럼 자녀는 본질상 거칠고 비뚤어져 있지만, 교육에 의하여 세련되고 교정되며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유순하게 된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
4절. “화살 같으니.” “우리의 자식은 우리가 만드는 대로 된다.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이’ 표현되며, 화살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길을 간다.”
“화살 같으니.” ‘즐거운 역사’라고 하는 책에 추가되어 있는 중국의 속담과 격언 모음집을 보니 두 할데(Du Halde)로부터 인용된 속담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의 목적에 적합해 보인다. 내용은 이렇다:’아들이 가정에 태어나면, 문 앞에 활과 화살을 걸어둔다.’ 여기에 이런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런 관습이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 않지만, 이는 새로운 보호자가 그 가정에 생겼음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는 이 시편의 표현 “화살 같으니”와 동일하다. -제임스 메리크(James Merrick, Annotations on the Psalms, 1720-1769).
5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거스리(Guthrie) 박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자식 말고는 아무것도 부유하지 못하다.” 그는 자녀를 열한 명 두었다.
5절. “전통에 가득한.” 많은 자식은 많은 기도를 만들고, 많은 기도는 많은 복을 가지고 온다. -German Proverb.
5절. 모제스 브라운 박사는 자식이 열둘이었다. 누가 브라운에게 “목사님, 야곱만큼 자녀를 두셨군요” 하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리고 내게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야곱의 하나님이 계시답니다.” -보즈.
5절. 나는 월섬에 있는 나의 집에 찾아온 한 지체 높은 사람을 기억한다. 그는 나이와 키 순서대로 서 있는 나의 모든 자식들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들은 부자를 가난하게 만드는 녀석들이군.” 그러나 나는 그에게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주인님, 아닙니다. 이 아이들은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드는 녀석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 가운데 당신의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버릴 아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죠.” 아이 없는 사람만큼 궁색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많은 식구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주 돈을 지출해야 하는 사람은, 아이들이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내놓듯이,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운영하는 데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경험을 얻는다. 하나님이 아이들로 인한 근심을 없애시는 만큼 그들의 근심은 분명히 줄어든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 해도, 신앙으로 자신의 짐을 하나님께 맡길 때 편안함을 얻는다. 자식들은 우리의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그 짐을 맡으실 능력이 우리보다 많고 그럴 권리도 많다. 어린 까마귀를 먹이시는 분이 그분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피조물을 저버리실 리가 있겠는가?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5절. “저희가······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는 자식들 덕택에 든든하게 되어 자신을 지키고 모든 손해를 막을 능력이 충분하다. 그리고 그는 성문에서 재판관에게 심문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자식들의 호위를 받으므로 변호인이 부족함으로 인해 변론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은 그를 위하여 공정한 이유를 말할 것이다.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 David’s Harp Strung and Tuned, ?-1671).
5절. “성문에서 그 원수와.” 아마 시편 기자는 여기서 포위된 도성의 방어를 암시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문은 공격 지점이었고, 성문의 획득은 궁궐의 정복을 쉽게 만들었다(창 22:17; 24:60). -다니엘 크레스웰(1776-1844, The Psalms······with Critical and Explanatory Notes, 1843).
5절. “말할 때.” ‘멸할 때’라는 해석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여기 ‘말하다’로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단호하다. 이런 의미로 쓰인 곳으로 역대하 22:10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소송으로 언급한다. 여기서 자식들은 부모의 소송을 성공적으로 변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나 힘이 어떻게 소송 사건에서 증거의 힘을 보태 주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멸하다는 의미를 선호한다. -벤자민 부스로이드(Benjamin Boothroyd, 1768-1836).
5절.
집에서 순종하는 아이를 훈련하여,
원수의 잘못을 응징하기 위해 즉각 달려들게 하고
친구들로 아버지의 명예욕을 한껏 높이게 하는 일은
사람의 자랑과 영광이로다.
-소포클레스(Sophocles, Antigone,
포터 가 번역함).
[설교힌트]1절. (1) 하나님의 손이 없는 인간의 손은 무익하다. (2) 하나님의 눈이 없는 인간의 눈은 무익하다. 혹은 (1)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활동에서 인정받으셔야 한다. ① 그 일에 앞서 하나님의 지시를 구함으로써. ②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함으로써. ③ 그 모든 일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2) 우리의 모든 근심에서 인정받으셔야 한다. ① 우리의 단견을 인정함으로써. ② 하나님의 선견지명을 의지함으로써. -G. R.
1절 상반절. 다음에서 그 원리를 예시하라. (1) 인격을 함양함에 있어서. (2) 삶과 일의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3) 행복의 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4)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세움에 있어서. (5) 교회를 세우고 확장함에 있어서. -J. F.
1, 2절. (1) 우리가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 우리가 집을 세우거나 지키는 일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리라는 것. (2)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실패한다는 것. (3)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 조급하고 걱정하는 따위의 일. (4)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평안 가운데 쉬면서 의뢰하는 것.
2절(시편 126:2과 더불어). 율법의 수고와 대립되는 복음의 웃음.
2절. “수고의 떡.” (1) 하나님이 보내주시면 그것을 먹는 것이 선하다. (2) 우리가 그것을 요리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먹는 것이 무익하다. (3) 마귀가 그 떡을 가지고 올 때, 그것은 치명적인 음식이다.
2절 하반절. 잠잘 때 우리에게 오는 복 . (1) 몸의 건강과 활력의 회복. (2) 정신적 휴식과 원기 회복. (3) 달콤한 생각과 거룩한 목적. (4) 섭리적 선물들. 비가 내리고, 땅의 열매가 자라 익으며, 방앗간 바퀴가 돌며, 배가 여행을 떠나는 동안 우리는 잠을 잘 수 있는 것. 종종 우리 스스로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이 가장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 . -W. H. J. P.
2절 하반절. “Spurgeon’s Sermons,” No. 12., “The Peculiar Sleep of the Beloved.”
3절. 토머스 맨턴의 설교(vol. xviii. pp. 84-95. ).
3-5절. 자식 . 다음을 살펴보라. (1) 자식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업으로 받을 때의 결과들. ① 부모는 자식의 필요와 안전을 위하여 주님을 의뢰할 것이다. ② 자식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위탁물로 볼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주님께 그들을 돌본 일을 설명해야 한다. ③ 자녀로 주님을 경외하도록 훈련시킬 것이다. ④ 종종 그들에 관하여 하나님께 상의할 것이다. ⑤ 주님이 그들을 죽임으로써 데려가실 때 불평하지 않고 드릴 것이다. (2) 자식을 올바로 훈련한 결과. ①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 된다. ② 부모의 지혜에 대한 영구적 기록이다. ③ 부모의 노경에 지지와 위로가 된다. ④ 부모의 덕을 다른 세대에 전달하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잘 훈련받은 자식이 다시 지혜로운 부모가 되기 때문이다. -J. F.
4절. 자식의 영적 쓰임. (1) 자식이 어릴 때 죽어 부모를 각성하게 하는 경우. (2) 자식이 주일학교에서 감화를 받아 돌아올 경우. (3) 그들이 회심할 경우. (4) 그들이 자라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경우.
4, 5절. (1) 부모를 의존하는 자식. ① 안전을 위하여. 그들은 부모의 전통(箭筒)에 있다. ② 지도를 위하여. 그들은 부모에 의하여 보냄을 받는다. ③ 지지를 위하여. 그들은 강한 자의 수중에 있다. (2) 자식을 의존하는 부모. ① 변호를 위하여. 부모가 공격당할 때 누가 듣고 있으리요? ② 행복을 위하여. “지혜로운 아들은······”(잠 10:1). 자식은 인간 본성의 가장 고상하고 온유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전통이 가득하여 ‘나와 주님이 내게 주신 자식이 여기 있나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기독교 사역자는 복되다. -G. R.
히브리어 시편 127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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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르 함마알로트 리쉴로모 임 아도나이 로 이브네 바이트 솨웨 아믈루 보나우 보 임 아도나이 로 이쉬모르 이르 솨웨 솨카드 쇼메르
개역개정,1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새번역,1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집을 짓지 않으시면 건축자들은 헛수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지키고 서 있는 것도 헛일이다.
가톨릭성경,1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영어NIV,1 A song of ascents. Of Solomon. Unless the LORD builds the house, its builders labor in vain. Unless the LORD watches over the city, the watchmen stand guard in vain.
영어NASB,1 {A Song of Ascents, of Solomon.} Unless the LORD builds the house, They labor in vain who build it; Unless the LORD guards the city, The watchman keeps awake in vain.
영어MSG,1 A pilgrim song of Solomon. If GOD doesn’t build the house, the builders only build shacks. If GOD doesn’t guard the city, the night watchman might as well nap.
영어NRSV,1 A Song of Ascents. Of Solomon. Unless the LORD builds the house, those who build it labor in vain. Unless the LORD guards the city, the guard keeps watch in vain.
헬라어구약Septuagint,1 ωδη των αναβαθμων μακαριοι παντες οι φοβουμενοι τον κυριον οι πορευομενοι εν ταις οδο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canticum graduum beati omnes qui timent Dominum qui ambulant in viis eius
히브리어구약BHS,1 שִׁיר הַמַּעֲלֹות לִשְׁלֹמֹה אִם־יְהוָה לֹא־יִבְנֶה בַיִת שָׁוְא עָמְלוּ בֹונָיו בֹּו אִם־יְהוָה לֹא־יִשְׁמָר־עִיר שָׁוְא שָׁקַד שֹׁומֵר׃
성 경: [시127:1]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집에 관해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성전 건축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을 세우다’는 표현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는 한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정 구성원이 거주할 건물적 의미의 처소를 짓는 것이다. 사라(창 16:2)와 라헬(창 30:3)은 그들의 하녀들을 통하여 자녀들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세운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있고, 신 25:9은 가계(家計)를 잇기 위해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집을 세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1; 룻 4:11; 삼상 2:35; 삼하 7:27).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집을 세우는 일이나 성을 지키는 일과 같은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매일의 삶이 보다 더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 본 구절은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즉, 세상 만물은 진정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 및 그 행사는 하나님 없이 번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되고 만다는 의미이다.
솨웨 라켐 마쉬키메 쿰 메아하레 쉐베트 오클레 레헴 하아차빔 켄 이텐 리디도 쉐나
개역개정,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새번역,2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 ㉠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
우리말성경,2 너희가 일찍 일어나는 것도, 늦게까지 자지 않으며 고생해서 얻은 것을 먹는 것도 헛되다. 여호와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잠을 주시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2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고난의 빵을 먹음도 너희에게 헛되리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는 ?잘 때에 그만큼을 주신다.
영어NIV,2 In vain you rise early and stay up late, toiling for food to eat–for he grants sleep to those he loves.
영어NASB,2 It is vain for you to rise up early, To retire late, To eat the bread of painful labors; For He gives to His beloved even in his sleep.
영어MSG,2 It’s useless to rise early and go to bed late, and work your worried fingers to the bone. Don’t you know he enjoys giving rest to those he loves?
영어NRSV,2 It is in vain that you rise up early and go late to rest, eating the bread of anxious toil; for he gives sleep to his beloved.
헬라어구약Septuagint,2 τους πονους των καρπων σου φαγεσαι μακαριος ει και καλως σοι εσται
라틴어Vulgate,2 labores manuum tuarum *quia; manducabis beatus es et bene tibi erit
히브리어구약BHS,2 שָׁוְא לָכֶם מַשְׁכִּימֵי קוּם מְאַחֲרֵי־שֶׁבֶת אֹכְלֵי לֶחֶם הָעֲצָבִים כֵּן יִתֵּן לִידִידֹו שֵׁנָא׃
성 경: [시127:2]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움(*, 마쉬키메이 쿰 마아하레 쉐베트) – 두개의 동사 ‘마쉬케메’, ‘마아하레’가 히필형 분사임을 감안하여 직역하면 ‘일어나는 것은 이른 것으로 만들고 앉는 것을 늦은 것으로 만들며’이다. ‘만들며’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한 인간이 주체적이며, 의도적으로 아침 일찍 수고의 터로 가고 저녁 늦게 안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본문은 지금이라도 일을 더 많이 하기위해 휴식 시간이나 수면 시간까지 줄이면서 애쓰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고의 떡을 먹음’은 ‘오클레 레헴 하아차빔'(*)으로 직역하면 ‘피곤에 지친 노력의 떡을 먹는다’인데 바로 앞 구절과 연관시켜보면 본문은 인간 중심적(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노력으로 얻은 떡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인간 중심적인 노력으로 얻은 양식은 그것을 얻기 위해 지칠 정도로 수고를 했더라도 결국엔 그와 그의 가정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사 사상을 담고 있는 잠 5:10을 원문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너의 피곤에 지친 노력들은 낯선 자의 가정에 있게 될 것이다’.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하나님의 주체성과 그분의 섭리를 강조하는 1절과 본 구절을 연결하여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시고 또한 그 도성을 지키시므로 하나님의 섭리 없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며 그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안하고 활력을 제공하는 수면을 허락하신다’. 물론 이 구절의 내용이 정직한 수고의 무용성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경계하는 것은 인간적인 수고 그 자체가 성공을 부를 수가 있다고 믿고 쓸데없는 염려, 불과 같은 열정과 땀을 쏟아내는 어리석음이다. 유사 사상을 싣고 있는 잠 10:22을 원문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축복은 부를 만드나, 수고는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동일한 가르침을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베푸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34; 눅 10:41; 벧전 5:7).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해서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위대한 수고의 법칙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고한 후 그분의 지혜및 선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결과를 그분의 손에 맡길 때 수고의 쏘는 것, 고통을 제거될 것이다.
힌네 나할라트 아도나이 바님 사칼 페리 합바텐
개역개정,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새번역,3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우리말성경,3 자식들은 여호와의 유산이요 모태의 열매는 그분께 받는 상이다.
가톨릭성경,3 보라, 아들들은 주님의 선물이요 몸의 소생은 그분의 상급이다.
영어NIV,3 Sons are a heritage from the LORD, children a reward from him.
영어NASB,3 Behold, children are a gift of the LORD; The fruit of the womb is a reward.
영어MSG,3 Don’t you see that children are GOD’s best gift? the fruit of the womb his generous legacy?
영어NRSV,3 Sons are indeed a heritage from the LORD, the fruit of the womb a reward.
헬라어구약Septuagint,3 η γυνη σου ως αμπελος ευθηνουσα εν τοις κλιτεσι της οικιας σου οι υιοι σου ως νεοφυτα ελαιων κυκλω της τραπεζης σου
라틴어Vulgate,3 uxor tua sicut vitis abundans in lateribus domus tuae filii tui sicut novella olivarum in circuitu mensae tuae
히브리어구약BHS,3 הִנֵּה נַחֲלַת יְהוָה בָּנִים שָׂכָר פְּרִי הַבָּטֶן׃
성 경: [시127:3]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힌네 나할라트 예화 바님) – 직역하면 ‘보라! 아들은 여호와로부터 온 유산이다’이다. 여기서의 ‘힌테’는 어떤 특별한 사물이나 인물을 주목시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문맥에 따르면 여기서 아들은 한 집의 혈통을 이어갈, 즉 그 집의 존재를 유지시킬 존재로서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한 가족의 존속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케힟침 베야드 깁볼 켄 베네이 한네우림
개역개정,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새번역,4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우리말성경,4 젊을 때 낳은 아들들은 용사들의 손에 든 화살과 같다.
가톨릭성경,4 젊어서 얻은 아들들은? 전사의 손에 들린 화살들 같구나.
영어NIV,4 Like arrows in the hands of a warrior are sons born in one’s youth.
영어NASB,4 Like arrows in the hand of a warrior, So are the children of one’s youth.
영어MSG,4 Like a warrior’s fistful of arrows are the children of a vigorous youth.
영어NRSV,4 Like arrows in the hand of a warrior are the sons of one’s youth.
헬라어구약Septuagint,4 ιδου ουτως ευλογηθησεται ανθρωπος ο φοβουμενος τον κυριον
라틴어Vulgate,4 ecce sic benedicetur homo qui timet Dominum
히브리어구약BHS,4 כְּחִצִּים בְּיַד־גִּבֹּור כֵּן בְּנֵי הַנְּעוּרִים׃
성 경: [시127:4]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 여기 ‘젊은 자의 자식’이란 일찍 결혼하여 얻은 아들(잠 5:18; 사 54:6의 ‘젊은자의 아내’란 한 남자가 어릴 때 결혼하여 얻은 여인임을 밝히고 있다)을 가리킨다. 젊어서 난 그들은 그의 부모가 나이들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들을 돕고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가정에 물리적인 힘이 요구되는 위기가 달했을때 그 위기를 해결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한 일종의 전방의 군사와 같은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들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이라고 불리운다(애 3:13).
아쉬레 학게벨 아쉘 밀레 엩 아쉬파토 메헴 로 예보슈 키 예다베루 엩 오예빔 밧솨아르
개역개정,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새번역,5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 화살통이 화살로 가득 찬 사람은 복이 있으니 그들이 문 앞에서 적들과 싸워도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5 행복하여라, 제 화살 통을 그들로 채운 사람!? 성문에서 적들과 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영어NIV,5 Blessed is the man whose quiver is full of them. They will not be put to shame when they contend with their enemies in the gate.
영어NASB,5 How blessed is the man whose quiver is full of them; They shall not be ashamed, When they speak with their enemies in the gate.
영어MSG,5 Oh, how blessed are you parents, with your quivers full of children! Your enemies don’t stand a chance against you; you’ll sweep them right off your doorstep.
영어NRSV,5 Happy is the man who has his quiver full of them. He shall not be put to shame when he speaks with his enemies in the gate.
헬라어구약Septuagint,5 ευλογησαι σε κυριος εκ σιων και ιδοις τα αγαθα ιερουσαλημ πασας τας ημερας της ζωης σου
라틴어Vulgate,5 benedicat te Dominus ex Sion et videas bona Hierusalem omnibus diebus vitae tuae
히브리어구약BHS,5 אַשְׁרֵי הַגֶּבֶר אֲשֶׁר מִלֵּא אֶת־אַשְׁפָּתֹו מֵהֶם לֹא־יֵבֹשׁוּ כִּי־יְדַבְּרוּ אֶת־אֹויְבִים בַּשָּׁעַר׃
성 경: [시127:5]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저희가 – 이 대명사는 젊은 자의 자식들 즉 한 아버지의 아들들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문맥상으로는, 구체적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어떤 위기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 아들들의 도움과 옹호를 받아야 할 대상은 그 아들들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본 대명사가 아버지와 아들들 양측 모두를 의미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대명사를 아버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봄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편,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본 대명사가 단수(‘그 사랑하시는 자’, ‘그의 상급’)에서 복수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난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일 대상을 의미하면서도 그 대상을 단수로 썼다가 복수로 바귀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 구절인 107:43을 원문대로 변역하면 이렇다. ‘지혜있는 그는 이일을 목도하고…그들은…을 이해하라’.
성문에서 – 성경에서 이곳은 모든 공적인 행사의 장소일뿐 아니라 재판의 처소로 불리우고 있다(신 21:19; 사 29:21; 암 5:12). 문맥적으로 볼 때 자식들 둔 아버지는 비록 부당하게 고소를 당하여 볼의한 재판관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재판에 패소할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잘 키운 건강하고 용감한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도록 그냥 관망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 원수와 말한다’는 것은 재판 때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수 20:4; 삼하 19:30; 렘 12:1 참조).
헬라어구약Septuagint,6 και ιδοις υιους των υιων σου ειρηνη επι τον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6 et videas filios filiorum tuorum pax super Isra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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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7편 & 성경주석
<시편 127편 서론>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패는 하나님께 달렸다”(Man proposes but God disposes)라는 말이 시 127편의 첫째 연(聯)의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집을 세우는 사람의 일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시면 허사가 된다. 둘째 연은 아버지 됨의 기쁨을 높이 찬양한다. 언뜻 보기에 이 주제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히브리인들의 마음속에서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본시편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표제에 있는 “솔로몬을 위한”(for Solomon)이란 구절은 “솔로몬의”(of Solomon)로 번역될 수도 있다.
<시편 127편 개역한글>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127편 성경주석>
127:1 여호와께서…아니하시면.
이 절은 여호와의 축복이 우리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으면 어떤 사업을 시도하는 것도 무익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7:1 수고.
히브리어 아말(‘amal), 피로와 고생을 수반하는 노고를 강조하는 말이다.
127:2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절에서 말하는 자들은 염려스러울 정도로 일하는 자들, 즉 그들의 끊임없는 걱정 때문에 생애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늦게까지 일하고 물질적인 것들에 관하여 너무도 관심을 갖기 때문에 안락한 잠을 즐기지 못한다. 하나님을 조용히 의지하고 쉬는 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절은 게으름을 재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안달하고 걱정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다.
127:4 젊은 자의 자식.
즉 젊은 부모들의 자식.
127:4 화살 같으니.
보호와 정복 둘 다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
127:5 성문에서.
성문에 있는 빈 공간은 논쟁 중에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는 장소였다(참조 창 19:1; 사 29:21; 암 5:12). 자녀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사건을 변호하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잘못된 고발에 대하여 그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가족은 걱정거리도 있지만 그 보상도 있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6권
우리 인생의 건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7:1~5)
도육환 목사
2020.06.23. | 생명의 삶 | 도육환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의 걸음마다, 매일마다, 순간마다, 사건마다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제까지는 신명기 말씀 묵상이 끝났고, 오늘부터 다시 시편 묵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시편 120편에서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고백의 찬송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3대 절 뒤에 일년 삼차 하나님 앞에 모여야 했고,
성전에 오르며 예배하고 또 믿음을 새롭게 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오르던 그 장면들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을 사모하던 그들의 걸음, 찬송하면서 오르는 무리들, 함께 서로 간증하고 감사의 고백을 나누는
그들 행렬 곁에 우리도 함께 동행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이 시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또 감동과 감사가 함께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도 영원한 천성의 본향을 향해 매일매일 걸음을 옮기는 영적 순례자와 같죠.
우리의 순례의 길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늘 감사함으로 주와 동행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27편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의 건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7편 1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본문말씀 보기
본문말씀 접기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본문말씀 접기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지은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완료한 이후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반추(反芻)하면서 고백한 시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1절, 2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세 번의 반복적인 고백이 있지요.
헛되며 헛되도다 헛되도다
집을 세우는 사람 헛될 수 있다.
파수꾼의 경계 함 헛될 수 있다.
농산일 헛될 수 있다.
당시의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대표하는 세 가지의 행동이,
애쓰고 수고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헛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전재(前載)가 있습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들이 다 헛될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목표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또 우리의 모든 노력과 수고들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공부할 것이고, 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로 입시를 위해서 수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 애쓰기도 하고 또 일터에서 우리의 목표 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므로 수고들을 하지요.
그 모든 수고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만 하면, 주님께 맡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다 그런 뜻도 아닙니다.
수고 해야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아 갈수록 점점 더 강하게 느끼는 겁니다.
누구나 삶의 좌절도 경험하고, 내가 목표하는 것 이루지 못할 때 헛되다고 느낍니다.
애써서 달음질 하던 것이 어느날
내가 왜 이 일을 위해서 수고 했나?
그토록 달음질 하고 집중하던 이 일들이 이렇게 끝나나?
낙심할 때도 있지요. 헛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만약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라는 전제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 헛 될 일이 없는 겁니다.
집을 세우는 것도, 파수꾼의 경성함도, 애써서 수고하고 농사짓는 모든 것들도 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 우리의 모든 수고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 망한것 같고, 끝장난 것 같고 저 그동안 수고 했던 것, 내가 경험했던 것, 공부한 것들 다 의미없는 것 같아 질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를 빚으시고 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수고와 애쓰는 것들 하나도 헛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모든 과정,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이를 통해서 내 인생에 행복과 은혜도 누립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헛된 일들에서 벗어나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중의 하나가 2절 하반 절에 있는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잠 입니다
잠은 곳 안식을 의미하죠, 내 수고와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잠 입니다.
열심히 달음질 하다가 우리가 잠자리에 들면 모든 것 다 있어버리지요.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호흡과 뛰는 심장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주님이 유지시켜 주셔야만 우리의 생명이 보장 되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손을 내려 놓는 그 순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
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하는 자에 대한 복이다’라는걸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 그날에 모든 수고와 아픔들을 내려놓고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전적으로 맡기는 시간을 갔지요.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는 그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잠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의탁하는 훈련, 주님께 내어 맞김으로 누리는 평안과 안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나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만하는 인생의 모든 일들 가운데,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가정, 집을 세우는 일 아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자에 수고가 헛되다고 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집을 건축하는 것 아니라.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미래, 우리 자녀들에 대한 의미들을 다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자녀들을 세우는 일도 여호와께서 함께 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
내 몸에서 나서 우리가 양육하는 것 같지만, 부모만 잘하면 자식들 문제 없을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길러보면 점점 더 실감 하는 것은 자녀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도 아니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어느 재벌의 기업가가 “골프와 자식은 내 맘대로 안 되더라” 그런 고백 했다는데,
실제로 자녀들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지요.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한계보다 자녀들이 더 뛰어나고 위대한 일들을 하는 것들도 보게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깨닫는 건, 하나님의 손에 있구나.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가문도, 세워가는 것은 주님의 손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 든든하고 자랑스럽지만
그것은 마치 전통에 가득한 화살과 같이 장사들에 큰 무기가 된다 그랬습니다 .
성문 앞에서 단판 할 때도 자녀들이 많은 사람들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우리에게도 우리 자녀들이 형통하고 잘되고 제대로 자신의 삶을 이어가면
그게 자부심이 되고, 우리에게는 든든한 미래가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 전재, 그 출발에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함께 하실 때 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가정보다 소중한 것이 없지요.
우리의 미래,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도, 가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곧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즘 너무 자녀 생산들을 하지 않는 젊은 가정들 때문에 우리가 염려가 많이 있는데요.
가정들을 주님의 안에서 말씀 안에서 견고히 세워서, 우리 자녀들을 잘 양육하면,
그것이 그 가정에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 되기도 할겁니다.
더욱더 세월 지나 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가정들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가정, 주님 인정하는 아름다운 가정 건축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도권을 내어 드릴 일은 무엇인가요?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애씀과 노력들이 다 허사인 줄 저희가 압니다 늘 깨어 주와 동행 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우리의 삶이 주의 은혜 아래 아름답게 경영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 자녀들을 주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감염으로부터도 보호해주시고 무엇보다 인격과 삶을 지켜주셔서 요즘 같은 수많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 가정의 자랑이 되고 이 민족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귀한 일꾼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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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시편 설교, “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시편 127편)” 임경근 목사
헛수고하지 않는 삶을 위하여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성경: 시편 127:1-5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그 여행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노래들이 15개가 모아져 있는데 바로 시편 120-134편입니다.
시편 127편도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에 불렀던 찬송입니다. 그것은 시의 제목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알려주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길에서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즐겁게 합창했습니다. 또 서로 화답하면서 교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에서 성을 쌓고 논과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거나 목축업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팍팍한 그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종종 국경선 너머에서 강도들이 칼과 창을 들고 들이닥쳐 성문을 부수고 들어와 일 년 내내 농사 지어 놓은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지는 가난의 슬픔과 아픔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 갈 때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시편 127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편의 노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묻어 나온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름답게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전문가적인 목소리와 음악적 기교로 불렀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입술의 찬양입니다.
복된 삶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며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헛될 뿐이지만,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의 삶이 얼마나 복되고 행복하고 아름답고 놀라운지 고백합니다.
솔로몬의 노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네 편이 다윗의 노래라고 명시했는데, 시편 127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또 이 시가 솔로몬의 것이라는 내용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이 시편은 솔로몬이 쓴 전도서와 내용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전도서의 처음과 마지막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
‘헛되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세 번 ‘헛되다’고 말한 것은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는 말이 세 번 등장하는 것처럼, 시편 127편에도 ‘헛되다’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세 번 나옵니다. 첫째, ‘수고가 헛되며’, 둘째 ‘깨어 있음이 헛되며’, 셋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로 세 번 ‘헛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와 시편 127편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없이는 허무하고 헛될 수밖에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특별히 불의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설득도 아니고 타이름도 아닙니다. 믿음의 고백이며 당당한 선포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적실합니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과학 기술의 발달을 통한 위대함이 강조되는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는 인간적 기교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실망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란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돌직구(?)를 날립니다. 인간의 이기주의(egoism)와 이상주의(idealism)는 당장은 번성하고 유익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전도자의 결론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료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수고를 믿고 의지하지 말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것만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을 명령합니다.
인간의 수고는 위대한가?
시인 솔로몬은 하나님 없는 ‘집을 세우는 수고’가 헛되며, 하나님 없는 ‘성을 지키는 깨어있음’이 헛되며, 하나님 없는 ‘부지런한 삶’이 헛되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의 수고가 정말 헛된 것입니까?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시다.
인간의 수고와 노동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부지런히 수고하고 노동 한 결과 멋진 고속도로가 생기고, 편리한 삶을 영위하며, 저 먼 나라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비행기로 오가며, 세 끼 밥을 먹고, 의식주를 공급받는 것이 아닌가요? 열심히 하는 만큼 의미가 있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고 잠만 많이 자고 게으른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한 사람을 향해 이렇게 인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아따, 수고 했구먼요!” “욕 봤소!” 이렇게 수고는 아름답고 그 댓가를 받는 것이 정상이 아니던가요?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데 모든 정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2012년 OECD국가의 1인당 1년 평균 노동시간은 1705시간이지만, 한국 노동시간은 2092시간입니다. 네덜란드의 1334시간과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760시간 정도 더 일합니다. 한 때 한국은 세계 인력 시장에 많은 사람을 보내 노동력으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를 중동에 토목 건축가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수고한 덕분에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루어낸 것이 아닐까요?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일 인 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를 넘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수고가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은 열심히 수고합니다.
어른들이 산업전선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면,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소위 ‘열공’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까지 공부에 공부를 거듭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거의 공부 기계라고 해야 할 지경입니다. 쉴 사이도 없이 머리에 지식을 집어넣고 있으니까요! 공부벌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푸리고 앉아 책을 파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벌레’같은 모습입니다. 학교 공부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학생들은 다시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는 자가 더 좋은 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며 공부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이 됩니까? 수고스럽지만, 열심히 공부에 수고한 결과는 좋은 대학과 반듯한 직장,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결혼을 보장해 줍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의 수고를 합니다.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정말 인간의 수고는 위대해 보입니다. 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노동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과 발달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수고는 인간 타락의 결과!
그런데 이런 수고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언제부터 인간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고통스럽지만 참으면서 노동해야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 제일 처음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인간의 수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수고’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때부터 수고가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수고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수고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일’은 ‘수고’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다름 아닌,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땅, 바다와 하늘)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본래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복된 일은 ‘수고’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수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닙니다. 이 ‘수고’는 벌입니다. 창세기 3장 16-17절에 사용된 ‘수고’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꼭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수고’라는 단어는 ‘고통’ 혹은 ‘고통스런 수고’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죄로 인해 죽은 존재가 된 아담과 하와는 ‘고통의 수고’를 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품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7)
인간이 수고할 수밖에 없는 것은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으려면 땀을 흘리며 밭을 만들어 거기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다시 올라오는 잡초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겨우 곡식을 거두어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텃밭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뿌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많은 잡초들이 많이 올라오는지요. 그런 잡초들에게는 거름을 주지도 않는데 잘 자랍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수고의 땀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국 그 삶은 헛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결국 죽습니다.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 하나님 떠난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하고 헛되고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이 수고만 하다가 죽고 마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허무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니힐리즘’(nihilism)인데 ‘니힐’(nihil), 곧 ‘아무것도 없다’(nothing)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은 수고해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헛되도 헛되고 헛되다고 증언했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모든 인간은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수고하는 삶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 수고는 허무할 뿐입니다. 헛될 뿐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수고일 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진짜 좋은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복은 우리가 이 땅에서 수고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복은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하늘에서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솔로몬은 그 점을 시편 127편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먼저 솔로몬은 집을 건축하는 예를 듭니다. 집을 세우려면 건축가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지 않고 어떻게 집이 세워지겠습니까? 수고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집을 짓는 수고가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세상은 ‘더 열심히 수고’해야 헛수고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더 나은 결과를 얻는 자만이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정 반대로 선포합니다. 솔로몬은 ‘헛된 수고와 복된 수고’의 차이는 인간의 열심과 지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수고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수고는 헛될 뿐입니다.
인간이 볼 때에는 제법 근사해 보이고 현란해 보이고 부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저렇게 수고하더니 결국 성공하는구나, 라는 삶을 우리 주변에서 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삶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는 그런 삶은 결국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의 영광과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수고는 헛고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지금도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수고를 의지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수고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예는 ‘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튼튼한 성을 짓습니다. 그 성이 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성이지만, 잘 지키지 않으면 적이 와서 빼앗아 버리면 헛수고입니다. 그래서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나 도둑이 침입해 귀중한 재산과 소중한 먹을거리들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교대 근무를 서면서 적의 동태를 살핍니다. 그렇지만, 꼭 거기까지입니다. 깨어 있을 뿐이지 정말 성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파수꾼이 성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성을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고 보호하지 아니하시면 깨어 있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 번째 예는 ‘농사’와 관련한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며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한 여름의 해는 왜 이렇게도 긴지요!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제발 해가 빨리 져서 어두워지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논과 밭에서 하는 일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고 돌을 주워내고 거름을 주고, 씨앗을 심고, 비가 오지 않아 가물면 또 물을 퍼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씨가 싹을 틔웁니다. 떡잎이 난다고 끝은 아닙니다. 그 때부터 잘 관리하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기 일쑤입니다. 들짐승들이 와서 싹을 잘라 먹기도 합니다. 두더쥐가 땅 속을 파헤쳐 놓아 곡식이 자라지 못하도록 합니다. 잡초들이 식물 옆으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정말 징그럽게도 많이 올라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없애주어야 식물이 잘 자랍니다. 모두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쉬지도 않습니다. 휴가도 없습니다. 육체는 피곤하고 영도 지칩니다. 수고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삶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힘들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게 해야 겨우 나중에 수확을 해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수고의 떡’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고해 봐야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삶의 모습입니다.
수많은 사람은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고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라’고 큰 소리 칠 것입니다. 돈도 많고, 재물도 많고, 집도 좋고, 쌓아 놓은 명예도 대단하고…….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이 애쓴 수고로 이룬 것들이 아니냐고 신자를 향해 조롱합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공부한 결과 이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자랑합니다. 너희도 그렇게 열심히 수고해야 할 거라고 가르칩니다.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늦게까지 밤 잠 자지 않고 공부하고,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경쟁에 뒤처지지 않고 성공한다고……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어떤 신분과 어떤 때깔 나는 삶을 사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니,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해! 이런 말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삶이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한다고 할지라도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헛수고가 아닌 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수고이고, 고통입니다. 수고를 통해 얻게 되는 달콤함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몰핀’이나 ‘마약’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얻은 세상의 복이라는 것은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죽이는 허무한 삶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수고’ 자체에 있습니다. 수고가 그들의 삶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고만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왕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보호를 받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절)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의 뜻은 ‘그가 사랑하는 자’ 혹은 ‘그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그들은 절대로 헛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지만, 헛될 뿐입니다. 집을 세우는 수고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지만, 헛됩니다. 성을 밤 잠 자지 않고 지키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삶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삶의 독특한 모습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잠’은 쉼이고 평안을 표현하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실제 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시편 127편에서는 ‘잠’이 ‘수고’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신자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누리는 모습이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은 절대로 헛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잠’을 누린다고 합니다. 헛된 수고에 시달리지 않고 충분한 잠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복 받는 신자의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이 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는 그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삶의 처세술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기뻐하며 믿음으로 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을 돌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깨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려운 가운데서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의 백성에게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며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헛된 수고를 하지 않고 잠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거대한 배도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구명보트도, 헬기도, 해경도, 최첨단 잠수함도 1초를 다투는 재난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생명을 구해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도 우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음이 만천에 드러났습니다. 혹자는 국가가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결정과 다스리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의 생명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신자들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언약의 자녀들의 앞날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버지들의 사업을 선하게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들의 걱정을 함께 염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학생들의 학업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미혼 남녀의 결혼을 책임지십니다.
시편 23편을 읽으며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시 127편)
노승수 목사
시편은 몇가지 장르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장르는 선택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예컨대, 액션 영화의 문법과 이야기 전개와 드라마의 문법과 이야기 전개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그 장르의 이해는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화나 음악을 감상할 때 전개되는 이야기 혹은 선율과 tomif에 의해 극적 긴장감과 음악적 긴장감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 127편은 교훈시에 해당합니다. 1, 37, 49, 119, 127, 133등이 시편에서 나타나는 교훈시들입니다.
이러한 교훈시들에서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에서 율법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시편 1편 같은 경우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의인 곧 복있는 자라고 증거합니다. 시편 119편에서도 율법에 대한 사랑은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애정과 함께 묵상되는 율법은 은혜의 무진장한 근원이 됩니다. 시편 작가들은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선포하며 인과응보를 주로 다룹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통적인 가르침과 항상 들어맞지 않는 것이 보통이죠? 예컨대, 악인들이 성공하고 의인들이 실패한다든지, 악인들을 이 땅을 사는 동안 떵떵거리며 살고 죽을 때도 평온합니다. 이에 반해 의인들은 갖은 고난과 어려움과 가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의 여러가지 왜곡이 가져다 주는 불일치로 인해서 신앙인들은 마음이 괴롭습니다. 몇몇 시편의 작가들은 신앙의 위기를 거의 절망으로 몰고 가면서 고통을 통해서 연단되어서 그들의 생각과 감성을 순결케 하고 성화시켜가는 것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시편 127편은 이런 교훈시적인 배경 특히 성도가 겪는 여러가지 환난이나 좌절 그리고 절망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27편 표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의 노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70인역과 제로니모는‘계단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개역 성경은’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해서’계단’이란 의미를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편 120-134편에 이르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계단의 의미보다’return home’곧’순례의 노래’의 성격이 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 삼차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노래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순례는 하늘의 도성에 대한 성도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소망이 이 땅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올 새 예루살렘 곧 하늘의 도성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 가운데 1년 3차에 걸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추수의 절기이지만 추수는 가난에 들어가서 농경을 하면서 얻게된 의미이고 보다 본질적 의미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하여 준 절기로 유대인들은 지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교절에 출애굽하고 만 1년 만에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유하다 율법을 받아 내려왔으니, 칠칠절은 거의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전해준 날짜와 일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은 농경에 의한 추수가 없었음으로 이 율법 수여의 절기가 더 적절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또한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 곧 7월 10일 일년 일차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사죄함을 받은 후에 7월 15일부터 지내는 절기로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이에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원하신다면, 제가 한 설교”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축제입니다”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1년 3차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부르던 노래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며, 육의 양식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양식에 소망을 두는 삶을 강조하는 절기동안에 부르던 노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표제에 보면 이는’솔로몬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적인 키(Key)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내용은 본문을 살피면서 차근차근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무엇입니까?’헛되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것도 성을 지키는 것도 수고하고 고생하는 일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 헛되다는 표현을 대하면 우리는 전도서의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고 이 글의 저자 역시 솔로몬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일생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지혜와 부와 권력, 그리고 수많은 아내들,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노래하길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자는 이르기를 그러기에 노년이 속히 이르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이 시편 역시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대부분 이런 일들입니다. 자신의 집을 세우는 일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혹은 성을 지키는 것 곧 권력을 얻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밤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호와 경외함이 없이는 다 허사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자녀 교육을 위해서 무수한 노력을 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다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무위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지나치게 이런 세상일에 집착하는 것은 경건한 자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품어야 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 후반부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후반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였으니 응당 앞의 1절과 2절 상반절과 원인결과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적 추구가 헛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의 삶의 특징을 기술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두 가지를 해석해야 하는데 첫째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이고 둘째는 잠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은 솔로몬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5)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범죄함으로 그 자녀가 죽는 벌을 당하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주신 아들이 솔로몬이었고 그가 태어났을 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에 대한 계시가 주어졌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이고 그를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여디디야로 불렀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예디드는 주로 여호와의 사랑을 크게 받는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혹은 유다) 민족과, 개인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사랑은 사랑 받는 백성들에게 보호(베냐민, 신 33:12)와 번영(시 127:2)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표현은 보호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세상의 번영보다 우선한다는 표현인 셈입니다.
두번째는 잠을 주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선 문맥들 곧 1-2절 상반절의 내용과 연관해서 해석될 수 있고 둘째는 뒤의 문맥들 곧 3-5절의 내용과 연관해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앞선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잠이란 집을 세우는 수고, 성을 지키는 수고, 일찍 일어나며 늦게 누우며 고생의 떡을 먹는 수고와 고생에 반대되는 비유개념으로서의’잠’입니다. 이 경우 잠은 안식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식케 하십니다. 안식은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더더욱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구원과 관련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라는 점에서 잠은 안식으로 특별히 구원의 개념으로 더더욱 해석되어야 합니다. 안식한다는 것은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안식한다는 것은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주일성수를 구약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오늘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다른 것을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경륜을 역사속에 보이셨을까요? 안식일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골 2:16-17). 그러므로 오늘날의 안식의 의미는 일을 쉬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왜 일을 쉬어야 합니까?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대한 주제임으로 제가 다시 다른 설교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식케 하십니다. 주일은 우리가 오락을 그치고 주의 말씀을 읽으며 그날 들을 주일의 설교를 묵상하고 되샘질 하는 일들로 시간을 보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 그의 구원함을 위하여 택정하신 자들에게 안식의 잠을 주십니다.
둘째, 이 잠은 후 문맥과 연관하여 해석되어지는데 후문맥의 핵심 키워드는’자식’입니다. 3절에’자식’과 그 비유 관념인’태의 열매’가 나오고 4절에도 자식이, 5절에는 자식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이것’이 등장합니다. 비유관념과 대명사까지 포함하여 총 4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개념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수고의 헛됨과 잠을 이야기 하다가 느닷없이 자식이야기를 할까요? 문맥이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자식이야기 일까요?
이것과 잠은 그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잠은 여기에서 부부관의 은밀한 사랑의 행위에 관한 비유관념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의 결과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많은 약속의 자녀들을 허락하신다는 내용으로 읽어야 합니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네 자손의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언약이 여기에서도 유효한 것입니다. 왜 많은 자녀가 축복입니까? 거기에 언약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이루려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명예, 권력, 그런 일들의 추구가 헛됨을 말하고 참 경건한 성도들은 가정 생활에 충실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참된 기초가 부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한국 사회의 많은 가정은 가정의 기초가 부부가 아니라 엄마와 아들 혹은 엄마와 딸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어오는 기계 취급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이며 부부간에 아름다운 사랑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가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가정들은 부모 자식관계가 너무 결속이 심하여서 결혼 후에도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못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이 가정 생활의 위기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고부갈등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가정의 건강한 기초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줍니다. 동시에 많은 자녀들은 약속의 자녀임으로 이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통해서 미래를 보지 않습니까?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려서 못 먹었다면 먹는 것은 마음 껏 먹게해주려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녀들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그럼 신자들은 이 자녀들을 통해서 어떤 미래를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 시편이 순례자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자입니다. 진정한 영적 노마드 인 셈입니다. 유랑자는 그 땅에 정착할 자처럼 땅의 것에 집착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축복이 되려면 우리 안에 이러한 일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의 헛됨을 깨닫고 하늘의 소망을 두는 신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2008년 11월 19일 현산교회 수요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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