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네 와 얌브레 | [주제설교] 얀네와 얌브레 19268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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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얀네와 얌브레 (딤후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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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예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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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인물:얀네, 얌브레 – 아이굿뉴스

딤후 3장8절은 이 두 술사의 이름을 ‘얀네’ ‘얌브레’로 기록한다. 얀네는 ‘조롱’이란 뜻을, 얌브레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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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6/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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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 얌브레와 성경의 권위 – 네이버 블로그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디모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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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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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와 얌브레 (8절) (딤후 3:1-9) – e-QT – 밸리한인커뮤니티교회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며 기적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게 하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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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vkcc.org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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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바울은 얀네와 얌브레를 지난 날의 악인의 모형으로서 언급하면서, 말세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이단들도 똑같이 진리를 대적한다고 했다(딤후 3:8; 출 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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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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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양향모 목사 주일낮예배 설교 – 얀네와 얌브레가 …

얀네와 얌브레 라는 이름의 뜻도 의미가 있습니다. 얀네는 아람어로 ‘유혹하는 자’라는 뜻이고 얌브레는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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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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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와 얌브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디모데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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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spark.wordpress.com

Date Published: 3/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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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8 KRV – Bible.com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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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7/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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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와 얌브레는 도대체 누구여..?? – 오늘의유머

8 :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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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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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와 얌브레 또는 시몬 마구스의 교훈 – 현대종교

탈무드와 미드라쉬 등 유대교의 관련 자료를 섭렵해보면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기 7장 11절에서 바로의 호출을 받아 모세가 아론의 지팡이로 뱀을 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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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djongkyo.co.kr

Date Published: 1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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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

얀네와 얌브레:Jannes and Jambres(인명) … 이야기는 출 7:11,12,22,8:18,19에 있는데 얀네도 얌브레도 구약성서, 또는 필론(Philon 유대교의대표적 사상사, 예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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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biblesmartphone.co.kr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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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얀네와 얌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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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얀네 와 얌브레

  • Author: MEGAS 문은석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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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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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인물:얀네, 얌브레

인간의 기술로 하나님을 대적한 술사들

대망의 출애굽을 앞두고 펼쳐진 모세와 애굽 궁중 술사들 간의 숨막히는 대결장면은 성경에서 보여지는 또 하나의 절정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당당하게 궁중 안으로 들어간 모세일행은 어쩌면, 이들 술사들 때문에 주춤했을지도 모른다.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고,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놀라운 사건들을 그대로 따라했으니 말이다.

출애굽기 9장은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모방한 것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증거하고 있다.

처음 시작은 똑같아 보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자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사실을 출애굽기는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딤후 3장8절은 이 두 술사의 이름을 ‘얀네’ ‘얌브레’로 기록한다. 얀네는 ‘조롱’이란 뜻을, 얌브레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늘 조롱거리가 될 여지가 충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죄성을 가진 인간의 지혜는 이렇게 두렷한 한계를 가진 매우 미약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두 술사들이 모세를 대적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으므로 술사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지연시키는 ‘반대편’에서 일한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가 하는 일을 늘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지 심사숙고 해야 한다.

또 하나는 인간의 기술과 능력은 늘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게 된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해 준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있고 그를 통해서 의미가 주어진다.

모든 것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간의 술수는 결과적으로 패배와 굴복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얀네와 얌브레라는 두 애굽 술사들에게서 얻는 교훈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들이 진리를 대적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그같은 것들로부터 돌아서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그 앞 절에서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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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 얌브레와 성경의 권위

-디모데후서의 핵심: 성경의 권위는 종말적이다 –

디모데후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절이 오늘 묵상 본문인 (9월6일, 화) 3:16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3:16)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증언하는 성경영감설의 기초가 되는 구절로 종종 사용된다. 자연히, 사람들은 성경이 오류와 잘못이 없다는 성경무오설로 곧장 연결시킨다. 한마디로 영감설과 무오설을 바탕으로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는 구절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앞마당 3장8절에 성경의 권위를 의심케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 얀네와 얌브레가 등장한다. 바울은 이들이 ‘모세를 대적한’ 자들이라고 했지만, 모세의 활동 무대인 출애굽기에 이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얀네와 얌브레의 출처를 바울이 언급했지만, 구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모순(?) 때문에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풀어보자.

디모데후서가 4장으로 되어 있는데, 우연이지만 각 장의 후반부에 보면 꼭 한두 명의 바울을 괴롭게 한 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1장15절에 바울을 버린 부겔로와 허모게네, 2장17절에 악성 종양 같았던 후메네오와 빌레도, 4장14절에 바울에게 해를 입혔던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였다. 3장에는 구체적인 이름이 없는 반면, 모세를 대적했다는 얀네와 얌브레로 비유되는 인물이 진리 (혹은 바울의 복음 사역)를 방해했다.

사도 바울은 이 얀네와 얌브레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로 비유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거짓 교사들인 것이다. 그들로부터 그 여자는 거짓 진리의 가르침을 자기 욕심에 끌려 배우게 되니 제대로 배울 수 있겠는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밝힌다. ‘그 여인이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렸기’ 때문이다. 어떤 죄인지는 2-5절에 조목조목 나열된 죄들이 이 여자에게 적용될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거짓 교사들은 당시에 돈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거짓 진리를 전한 대가로 여자들로부터 사례를 받았다고 한다.

얀네와 얌브레는 누구?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타굼(targum)에1) 의하면,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magicians)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10 재앙 (10 plagues)을 애굽에 내리실 때 모세에게 이적을 베풀게 해주셨다. 먼저 아론의 지팡이로 뱀이 되는 이적이다. 그런데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했다. 모세가 애굽의 하수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하자,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한다.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 온 애굽 땅에 덮도록 하자, 애굽의 술사들도 개구리 부르는 마술을 부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세가 티끌로 이(각다귀)가 되게 하자, 애굽의 술사들이 따라 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모세의 이적에 애굽 술사들이 흉내를 못내는 것은 당연하다. (출애굽기 7:11, 22, 8:7, 18 참조).

무엇인가?

애굽의 술사들인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 흉내를 어느 정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일 뿐이고 진정한 야훼의 파워에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흉내 내는 가르침을 구약의 메아리에 실어 (echoing)2) 디모데에게 편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 즉, 얀네와 얌브레 처럼 저들의 밑천이 드러나, 모세가 티끌로 이가 되게 하는 이적을 따라 할 수 없게 되는, ‘어리석음’이 노출되는 것이다.

이 편지는 바울에서부터 디모데에게로 사역 바통이 이어지는 시점임을 유의하면 쉽게 풀린다.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 날이 가까이 옴을 예측하고 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6). 그렇다고 복음 사역의 리더십이 인간 바울이 사라진다고 끊겨서야 되는가?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의 바통을 넘길 것을 바라고 있다. 이 때 복음사역의 anchor가 바로 성경 (여기서는 구약성경)임을 바울은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는 구약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바울의 주장에 힘을 싣기가 어려운 때다. 우리들의 눈으로 확인해도 그리스도니 예수니 하는 이름이 구약에 없지 않은가!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딱히 지정하는 구약에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은 이거다. 바울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15절에 천명한 거다.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의 실체 예수를 본 까닭에 예수로 통해 구약이 완성됨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수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임을 목숨 걸고 증거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다.

정리하면,

3:16을 즐겨 사용하며 성경의 권위를 변증하는 자들 (복음주의 계열의 대부분 학자들, 목사들)의 논리나, 출처가 불분명한 얀네와 얌브레 이름이 등장하는 3:8을 들이밀며 성경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자들 (과학적 이성적 역사적 비평에 충실한 소위 자유주의자들)의 논리가 허술하기는 매한가지다.

두 진영의 논리가 허술한 이유는 간단하다. 복음주의 계열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주장이 왜 여기에 기록되었는지 질문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은 얀네와 얌브레 비유가 왜 이곳에 있는지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질문은 동일한 선상에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는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편지를 문단 문단마다 짜깁기한 것으로 읽으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말세, eschaton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3:1을 유심히 읽어보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교회에 오래 다닌 한 분에게 말세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언제’냐고 묻지 않았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환난, 고통, 핍박을 받는 그 때”라고 대답했다. 훗날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의 때에 더 많은 비중을 둔 인식임이 틀림없다. 질문한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니 미흡한 대답임을 눈치 채고 부연해서 말했다. “지금 이 시간을 포함하여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라고 올바른 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정작, 말세가 언제냐 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말세에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 디모데후서를 관통하는 핵심을 찾기 위해서는 얀네와 얌브레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크게 도움을 받는다.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말세의 특징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애굽의 술사처럼 오래 가지 못한다.

3:16절은 성경의 권위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일에 반드시 단순무식 적용해야 한다는 텍스트가 아니다. 말세에 거짓 교사와 그의 가르침을 분별하라고 성경의 권위를 세우신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의 바통을 넘길 때가 되어서 더더욱 절실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는 종말적이다.

얀네와 얌브레 (8절) (딤후 3:1-9)

모세가 바로를 만나러 궁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드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출 7:10)

그 기적을 보고 바로는 놀랐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술객을 불렀습니다.

바로의 술객들도 지팡이를 가지고 뱀을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술객들이 하는 마술을 보고 바로는 안심했습니다.

모세의 기적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강팍해진 바로는 하나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때 바로의 궁에서 마술을 행하던 술객이

얀네와 얌브레 입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며 기적을 행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적을 행하게 하신 것은

신기한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습니다.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데,

얀네와 얌브레가 같은 기적을 행하므로 메시지를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신기한 마술 정도로 우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기적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실제 그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한 기적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기적을 통한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자신이 그 기적을 행하므로 주님의 메시지를 막아버립니다.

이런 일이 얀네와 얌브레가 했던 악한 행동입니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6-7)

어리석은 여자들은 하나님과 같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에 미혹되어 끌려다닙니다.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 진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

자신도 그런 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면서 미혹시키면,

하나님께서 일하신 의도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대적하는 자로 서게 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마음이 부패한 자이고,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입니다. (8)

기적을 행하려고 하기 전에,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일들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이루려는

기독교 영웅주의, 열광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립니다.

하나님을 가로막고 사람만 드러냅니다.

하나님께 열광하지 않고,

기적과 큰일을 행한 사람에게 열광합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결코 주님의 자리에 기웃거리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으며,

그 말씀의 의도대로 삶의 방향을 맞추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을 막으려는 자리에서 벗어나며

이준우 목사 올림

<적용 및 실천>

1. 주목받으려고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을 합니다.

2. 내가 주목 받으면서 하나님의 일이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주의 말씀이 높이기 원합니다. 오늘 주의 말씀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약혼(約婚, Pledge to marry) 결혼의 약속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신명기에만 약혼으로 번역되었고(신 20:7; 22:23, 28) 다른 곳에는 정혼으로 번역했다(마 1:18; 눅 1:27). 성경 시대로부터 약 AD 11세기에 이… 얀나(Jannai) 예수님의 선조 중 한 사람으로 멜기의 아버지이다(눅 3:24). … 얀네(Jannes) 모세에게 대항했던 애굽의 마술사이다. 바울은 얀네와 얌브레를 지난 날의 악인의 모형으로서 언급하면서, 말세의 위기적인 상황에서 이단들도 똑같이 진리를 대적한다고 했다(딤후 3:8; 출 7:11-12… 얄람(Jaalam) 에서의 아들로 에돔의 한 족장이다(창 36:5, 18). … 얄론(Jalon) 유다 자손으로 에스라의 아들이다(대상 4:17). … 얄르엘 가족(Jahleelites) 스불론 지파의 얄르엘에서 나온 가족들이다(민 26:26). … 얄르엘(Jahleel)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스불론의 아들이다(창 46:14). … 얌브레(Jambres) 애굽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던 남자 제사장이다(딤후 3:8). 얌브레는 얀네와 함께 실제 주문을 외워 마법을 행하면서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였다(딤후 3:8; 출 7:11-12 참고). … 얍느엘(Jabneel) 1. 욥바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유다 북쪽 경계의 한 성읍으로써 오늘날의 예브나(Jebna)에 해당된다(수 15:11). 역대하 26:6에서는 야브네로 불려졌고 그 후에는 얌니아로 불려졌다. 2… 얍복 나루(Ford of the Jabbok) 갈릴리 호수와 사해 중간에 위치한 요단 강의 동쪽 지류로서 우기에만 집중적으로 물이 흐르는 간헐천이다(창 32:22). ‘싸우다’라는 의미의 ‘아바크’(abak)에서 유래한 ‘얍복’이라는 이름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딤후 3:8-9) 딤후24

2021. 6. 2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24)

본문 : 딤후 3:8-9

제목 :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8.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인도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저의 인생길을 설계하셔서 그 설계도대로 살게 하심을 믿습니다. 저의 육신과 정신세계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왕에 나의 인생길을 설계하시려고 하셨다면 처음부터 꽃길만 걷도록 설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구원도 받고 세상 복도 받아서 돈도 마음껏 쓰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고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면서 살도록 설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으면 고생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주시면 참 좋았을 텐데 왜 이런 고생길을 함께 주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가요. 권력이 없으신가요. 돈이 없으신가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다만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고 그것을 잘 간직하고 그것을 빛나게 하시기 위해서 약간의 어려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엄청난 능력과 가치를 가진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지키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도 어쩔 수 없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로 잘살면 신앙생활도 더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도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고난이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보아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엄청난 일을 하시는데 누가 감히 방해를 합니까?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어렵게 진행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가 오늘 설교 주제이고 제목은 좀 줄여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인데 그 믿음을 통한 구원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데도 방해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런 방해를 알고 그들의 유혹을 이길 때 우리의 믿음이 더 굳건한 믿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본문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이 본문 외에 다른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모세가 활동할 당시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모세를 대적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모세 시대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외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구약성경과 유대인의 전통을 잘 배워서 아는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가진 문헌이나 전통에 의하면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의 시대에 모세가 하는 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의 바로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보내 달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말을 잘할 줄 몰라서 못가겠다고 하니까 말을 잘하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강퍅한 바로가 뭐가 아쉬워서 뭐가 안타까워서 그들을 내보내 주겠습니까? 지금 종으로 잘 부려먹고 있는데 그 좋은 일꾼들을 내보내서 손해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절대로 내보내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보이시고 재앙을 내리셔서 어쩔 수 없이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기적을 베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애굽의 요술사들이 등장해서 몇 가지 이적을 흉내 내고 따라 했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도 따라 했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개구리 재앙까지 그대로 따라 해서 바로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인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재앙은 따라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기적을 따라 하려고 했던 요술사 중에 대표적인 두 사람이 얀네와 얌브레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때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는 길을 계속 따라가면서 모세의 하는 일을 방해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다른 이유로 종살이를 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끼어서 따라 나왔습니다.

얀네와 암브레도 거기 섞여서 따라 나왔다고 합니다. 애굽의 정책에 불만이 있어서 왔다기보다는 모세가 가는 길을 방해하기 위해서 따라 나왔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갈 때 때로는 마실 물도 없는 곳을 지났고 먹을 것도 늘 같은 만나만 먹게 되어서 고기나 채소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졌습니다.

모세에게 왜 우리를 광야로 나오게 해서 먹을 것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셔서 죽게 하느냐 애굽이 그립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모세에게 반항을 하게 한 주도자가 얀네와 얌브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시간이 좀 걸리자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주동자도 얀네와 얌브레라고 생각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 라는 이름의 뜻도 의미가 있습니다. 얀네는 아람어로 ‘유혹하는 자’라는 뜻이고 얌브레는 ‘반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얀네와 얌브레는 그 이름보다는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애굽에 와서 잘살아보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애굽 사람의 종이 되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엄청난 길이요 영광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길을 가는데 이런 방해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왕 노릇을 하는 애굽의 세력이 방해를 했고 그 명령을 받은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방해했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이 그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 방해세력들 때문에 그들과 같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다시 우상을 섬기려고 했던 대다수의 기성 유대인들이 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고 훈련을 잘 받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바울 시대에도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동안 반복해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그 말씀의 핵심인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체를 방해하고 복음을 전한 후에 복음을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함으로 복음을 대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는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도 방해하는 세력이 많습니다. 불신의 세상이 죄의 종이 된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위장하고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세력들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힘들게 구원의 길을 가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시험을 통해 가라지를 걸러내고 알곡이 더 탐스럽게 자라서 그 믿음이 정금 같이 빛나게 하고 신앙인으로서 강하게 우뚝 세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금 같이 단련되고 빛나는 신앙을 가진 참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대강 적당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고 그 길은 쉽지만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를 붙잡고 그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지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시련이 없이는 그런 시험들을 이겨낸 경험들이 없이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고백하고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인인 척하고 교회에 다닐 수는 있겠지만 진실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따라 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고통 그 괴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보시면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응원해주신 우리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본문 8절 하반절에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은 그 마음 자체가 부패한 사람이고 믿음에 관하여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요”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이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 거짓된 고백 위장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의 핵심인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야 할 목회자들까지 이 구 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부패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위한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한 욕심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따르지 못합니다.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버림받았다는 말은 거절당했거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유기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우리 인간 편에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만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믿음을 고백한다고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믿음을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니까 진실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그의 고백은 결국 가짜이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마음에 세상 욕심이 가득한 부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바른 판단을 해서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그것도 작은 일에 외면을 당하고 버림을 받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 엄청난 일에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비극이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고도 그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고도 교회에 안 다니니까 평안하고 좋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좋은 일입니까?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비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것도 모르고 좋아합니까?

자유인이 됐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독한 사탄의 종 죄의 종 죽음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인으로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않고 특별히 구원받는 일에 선택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믿음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본문 9절에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할 때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 번의 기적은 따라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속임수를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로마 당국이나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박해할수록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고 거짓 복음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거짓은 금방 탄로가 나기 마련이고 진리는 결국 알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신자들 가라지들은 거두어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성경을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활용합니다. 그것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참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 짧은 세상에서 그 작은 행복을 위해서 외면하다니요.

여러분이 저를 만나서 행복하다고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만난 사람들이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목적이고 목회의 목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저를 만나 행복하십니까? 제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엄청난 비밀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고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복음을 전하는 저에게서 이 복음을 잘 배워서 바른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며 우리가 가는 이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패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구원의 길 복음의 길 믿음의 길이 최고의 길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구원의 길에 선택을 받아서 어려움을 이기고 이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얀네와 얌브레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디모데후서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장면은 어떤 것일까?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라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할 때 행한 이적을 그대로 따라한 이집트의 박수와 술객이 바로 얀네와 얌브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애굽기 7 : 9~13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하수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형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애굽기 7: 20~22

사실 얀네 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하지 않은 것 같다.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모세를 대적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하나님은 얀네와 얌브레, 그 술객들이 모세를 대적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방법으로 흉내낸 것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이것이야 말로 모세를 대적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게으름이나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 등등으로 대적한다. 그렇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너무나 분명한 거역이기 때문에 성령이 주시는 불편함을 쉽게 느낄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면 비교적 쉽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백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걱정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능력으로 흉내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나의 종교성으로, 내가 정의한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모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니… 두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이 결실을 맺건 안 맺건 그 노력자체를 주님이 인정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것이라니. 딱 우리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정도로 그리스도의 삶을 흉내내는 것, 적당한 기준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 스러운 행위는 나의 자아와 종교성, 의를 걍팍하게 하는 대적질이다. 걍팍해진 내 자아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는 신하들도 알고 고할 정도로 망한 애굽의 상태를 분별치 못할 만큼 그 마음이 걍팍하게 된다 (출 10:7)

그리스도인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 잘되면 좋은 일이고 못되도 단지 잘 하지 못한 본전치기가 아니다. “그래도 노력은 했으니…”라고 스스로 위안삼는 것으로 만족하던 나의 생각은 문제가 있다. 설사 그리스도인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 겉으로는 성공했더라도…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은 실제로 성공했다) 그것이 나의 옛 자아로 행한 것이라면 이는 얀네와 얌브레가 한 것과 같은 대적행위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은 그의 삶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내 속에서 내 인생을 사시는 삶이다.

그 삶을 흉내내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이너스 요소라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산다고 까불고 다니는 나를 주님 앞에 가만히 엎드리게 한다. 주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던 유일한 사람이셨던 주님… 그 삶을 내안에서 사시고자 내안에 거하시는 주님! 이제 주님이 사시도록 내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길 원합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실은 이것 역시 ‘이렇게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 같은 내가 가진 종교적인 이미지일 때가 많지요) 삶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이미 사셨던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려는 노력임을 고백합니다. 어쩌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사시도록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네요. 주님으로 인해서 우리 삶이 참 단순해졌음을 감사로 고백드립니다.

디모데후서 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디모데후서 3:8 KRV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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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네와 얌브레 또는 시몬 마구스의 교훈

▲차정식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진리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셨다.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한다는 말씀도 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모토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었다. 20세기 이후 상대주의 시대를 맞아 진리의 상대성이 종종 논의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즈음, 진리는 자신의 깜냥대로 자신의 주관을 세워 큰 목소리로 외치면 그냥 그대로 진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그렇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고 느낀다는 게 진리 판별의 중요한 기준이 된 것 같다. 우리가 익히 듣고 배워온 진리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나는 성서학자로서 무엇보다 성서의 말씀을 진리의 기준으로, 나아가 진리 자체로 받아들여 그 진리성을 분별하고 평가하는 일에 골몰해왔다. 굳이 이런 개념 정의를 종교적 진리, 기독교적 진리라고 그 반경을 제한한다고 해도 수긍할 수 있다.

내가 도무지 감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리를 거슬러 역행함으로써 진리값을 주장하는 무리들의 행태다. 성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을 툭하면 인용하면서 엇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싶더니 그 끝에서 희한하게 어긋난 꼴을 보이는 것, 그것이 이단이다. 이단은 끝이 다른 경우이니 끝까지 면밀하게 살피는 게 중요하다. 기성 기독교 울타리 바깥에서 이미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공인된 이단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기성 기독교 내에 성서의 진리를 앞세워 그 진리의 기준대로 행하지 않고 온갖 무리한 억설과 편향성으로 진리의 권위를 훼손하는 잠재적 이단성향도 조심해야 한다. 진리의 심연에 수많은 빛의 발광체들이 반짝거리고 있지만 적어도 진리를 거스르면서 진리값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리는 흉내의 대상이 아니라 그 검증되는 진리의 층위에 비례하여 점점 더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특징

디모데후서 3장은 진리를 대적하고 모세를 대적한 두 사람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경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나아가 비슷하게 따라하면서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유형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얀네와 얌브레다. 이 두 사람이 특별히 수상한 것은 그 이름이 성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모세를 대적했는지, 어떻게 진리를 대적했다는 건지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두 사람을 언급한 것은 신구약성서 중간기 유대교 전통 속에 이들의 이름이 꽤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탈무드와 미드라쉬 등 유대교의 관련 자료를 섭렵해보면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기 7장 11절에서 바로의 호출을 받아 모세가 아론의 지팡이로 뱀을 만들 때 자기들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신시킨 그 애굽 요술사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비슷하게 흉내 내어 뱀을 만들어냈지만 그 뱀이 아론의 지팡이가 변한 뱀에게 잡아먹히게 됨으로써 그 끝이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판명되었다. 경건의 모양은 꾸며 폼은 잡았지만 그 능력에 있어 완전히 실격자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이들은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는지 최초의 유월절 다음 날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렬에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겉으로 봐서 회개의 영이 임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자신들의 가짜 마법을 청산하고 구원의 역사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내산 광야에서 계명을 받기에 앞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채 조바심을 내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도록 부추기고 선동한 자들이 한 전승에 의하면 이들 얀느와 얌브레였다고 한다. 이들이 변화하면서 보인 행보 속의 시작은 그럴싸했는데 뒤끝이 이상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맹목적인 반(反)-진리

이단의 교주로 자처하거나 이단세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성서의 진리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보다 그 진리를 유사하게 흉내 냄으로써 어떻게 써먹을까에 골몰한다. 진리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면서 진리성을 압도하다 보니, 앞의 경우에서 보듯, 진리의 궤도에 접어들어 동행하는 듯 보이지만 그 종말은 전혀 딴판으로 드러나 오히려 진리를 거스르는 반역의 자리에 서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이단의 선구자(?) 격인 인물은 그 이름도 시사적인 시몬 마구스이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성령의 진리 자체보다 그러한 권능을 손쉽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돈을 써서 그 권능을 물건 구매하듯이 사고자 했다. 그의 마음이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 악한 마음은 그야말로 망할 징조였다. 베드로는 그런 어투로 시몬 마구스를 질타했다. 성령 체험을 목격했다면 성령의 진리값, 진리성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거늘, 그는 그 성령을 통해 뭔가를 제 몫의 성취로 챙기고 싶어 했다. 그러니 기독교 진리의 ‘도’에 아무런 관계가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베드로의 진단이 딱 맞는 격이다.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를 기대했다. 그 악독하고 불의한 마음마저 주께서 혹 긍휼을 베풀어 용서해주길 바랐다. 이러한 동정의 논평에 대한 시몬 마구스의 응답이 어떠했을까.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였다. 실소가 삐져나올 정도로 코믹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끝까지 기독교 신앙의 언어를 모방하고 있는 셈인데, 그 구석에 견고하게 똬리를 튼 심성인 즉 누구든 자기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응석받이는 이단으로 흐르거나 이단세력의 포로가 되기 쉽다. 진리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맹목적이고 유아적이므로 미혹과 자기기만에 쉽사리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진리 앞에 겸손하기

우리는 진리의 절대적 담지자가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흠결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인간으로 추구하는 진리는 늘 질문과 성찰의 자리가 필수적이다. 절대 진리로 상정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인식과 이해의 자장 가운데 육신을 얻어 납득되기까지 따져야 할 것도 많고 짚어야 할 것도 많다. 설사 납득되고 설득된 진리라 할지라도 인간과 세상이 꾸준히 변화하니까 다시 또 성찰하고 궁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리 앞에 겸손하게 묻는 훈련이 진리를 수호하고 변증하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의 지성과 소통해야 하는 진리는 채워야 할 틈새가 많기 때문이다. 성서의 진리에 대한 해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서의 구절들에 대해 수많은 분석과 해석을 해왔지만 여전히 그 진리가 마르고 닳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단이라 일컬어지는 부류는 이 틈새의 작업에 소홀하며 성마른 목표의식에 매달려 충분히 상상하지 못하고 깊이 사색하지도 못한 채당의정처럼 포장된 단 하나의 정답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 진리에 대적하는 방식으로 진리의 유아독존 식 주장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성근 알레고리의 수법으로 성서의 비유를 해석한다든지, 자신의 조직을 옹위하는 논리라면 온갖 억지와 강변을 동원해서라도 정당화하며 기계적인 단순요법을 제시하는 행태라든지 모두 설익은 수법에 불과하다.

진리 앞에 겸손하려면 그 진리가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에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성찰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릇의 쓸모는 그 한 가운데 텅 빈 공간이듯이, 진리다운 진리의 쓸모는 어쩌면 나에게 아무런 실익을 주지 않는 그 쓸모없음의 쓸모에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나의 현재 실존을 뒤집고 준엄하게 문책하며, 내가 신앙생활의 이름으로 진리를 받들고자 하는 열심마저 무로 돌리는 급진적인 전복성을 요구할 수 있다. 나의 귀에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자장가처럼 진리를 자의적으로 편취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양약이 입에 쓴 이치 그대로다. 나아가 내가 속한 조직체의 이익에 반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의 속성이고 심지어 그 조직의 해체를 요구할 수 있는 게 그 앞에 겸손하고자 할 때 우리가 받는 진리의 도전능력이다. 이단은 이 모든 지극히 당연한 틈새의 물음과 성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얀네와 얌브레처럼 눈속임으로 진리를 대적하거나 시몬 마구스처럼 진리를 팔아 무슨 이익을 도모하고 진리의 후광을 빌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한다면 기성 교단에 속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역시 언제든지 이단의 잠재적 미끼를 물 수 있다. 늘 깨어 근신하는 자만이 현명하게 이단의 미혹을 떨쳐버리고 진리 앞에 겸손히 구도자의 길을 간다. 매일 제 삶의 낯선 곳을 발견하며 진리의 초기값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만이 진리의 서늘한 초기증상을 되풀이하여 참신하게 살 수 있다.​

얀네와 얌브레:Jannes and Jambres(인명)

[그] jIavnnh” kai; jIambrh`”(Iannes kai Iambres)

[영] Jannes and Jambres

모세와 아론에게 거스린 애굽의 두 마술사(딤후 3:8). 이 이야기는 출 7:11,12,22,8:18,19에 있는데 얀네도 얌브레도 구약성서, 또는 필론(Philon 유대교의대표적 사상사, 예수와 동시대) 및 요세푸스(Josephus Flavius 37경-100경 유다의 역사가)의 기록에 보여지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아람어 역 주석인 요나단의 타르굼의 출 7:11에 [얀네 syN,y` (Yannes)]와 [얌브레 syrEB]m]y` (Yamberes)]가 전해져 있고, 이 어형에서 그리스어의 음사가 유래한다. 유대인의 법률학자의 구전,해설을 모은 탈무드(Talmud)에는, [요하-니 ynij;/y (yochani)]와 [마므레- arEm]m` (mamre`)]의 이름이 보여진다. 즉 유대인 사이에 전승으로 전해지고, 바울은 이 전승에 의해 안 것이다. 이것 이상으로 그의 이름을 규명하고 또 어떤 종류의 신화적 상징으로 하려 하는 노력은 현재에 있어서는 억설에 지나지 못한다. 사해사본의 사독문서(the Zadokite Document)에는 [얀네와 그의 형제]가 벨리알(사탄)에게 교사되어 모세와 아론에 적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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