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의 부활 의 의미 | 부활신앙은 뭐야? 너가 꼭 알아야할 예수님 부활의 진짜 의미와 부활절 215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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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주일 #부활신앙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3일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 : 전혁 목사
Camera Art Director : 김민찬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45079427108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yeram_yc_p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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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성경의 말씀에 따라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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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7/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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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왜냐하면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데, 범죄하여 하나님이 ‘정녕 죽게 하신 바로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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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4/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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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of Jesus, 復活)은 안식일 전날(현재의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안식일 다음날(현재의 일요일)에 무덤에서 되살아 난 사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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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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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성경적 의미 | NYCKCG –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성경적 의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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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yckcg.org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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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부활의 의미 – 크리스천투데이

부활은 일시적 소생과 대비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소생한 여러 사람들이 있다. 엘리사가 소생시킨, 수넴 여인의 아들이나, 예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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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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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집] 부활의 의미와 상징 – 가톨릭신문

부활은 신비다. 다시말하면 부활은 전체 구원의 신비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온갖 비참과 수모가 무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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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tholictimes.org

Date Published: 7/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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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의미(고전15:20-22) – 다음블로그

‘부활’이란 말은 인류가 받은 복된 단어입니다. 그 뜻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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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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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한다는 이러한 세속적인 관점은 사실 1세기 이후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이와 동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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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usaamen.net

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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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부활이 의미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은 그저 이전에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좀비가 무덤을 빠져나와 떼를 지어 길거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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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umc.org

Date Published: 5/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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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 – 기독신문

먼저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를 메시아로 하나님이 옳다고 인증하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성령이 기름 부으신 소명에 철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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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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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은 뭐야? 너가 꼭 알아야할 예수님 부활의 진짜 의미와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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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부활 의 의미

  • Author: 히즈피커 Hispeaker [예람워십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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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9Nt9DW02mI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위에서 주관하고 계신다면,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킬 힘이 있으십니다. 만일 그분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과 예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분만이 죽은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고, 죽음 자체의 끔찍함을 되돌릴 수 있으며,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고 무덤에서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55). 하나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예수님의 주장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그분의 부활은 그분의 사역을 입증해주는 “하늘으로부터 오는 표적”이었고 (마태복음 16:1-4), 그분이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권한까지도 가지고 계심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 2:18-22). 수백명의 증인들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린도전서 15:3-8) 그분이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성품과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결코 썩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시편 16:10),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조금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3:32-37 참조). 바울이 “이 사람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고 전할 수 있었던 근거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가장 극명하게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미리 알려준 구약의 예언들을 입증시켜 줍니다 (사도행전 17:2-3).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8:31; 9:31; 10:34).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도 부활에 대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구주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은 “쓸모 없게” 될 것이며, 복음은 완전히 무력해 질 것이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19).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갖게 되면서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5:53-57).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인 인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합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죽음을 초월한 창시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똑같이 죽음을 초월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무덤에서 끝을 마친 사람이나 선지자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무덤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오늘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리서 10:12).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확증은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5:55에 나오는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호세아 13:14 참조).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은 이제 주를 향한 우리의 섬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활에 대한 그의 담론을 마무리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부활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그러셨던 것 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과 위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0-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기꺼이 내려 놓았습니다.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성경의 말씀에 따라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합니까?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몸이 죽은 채로 남아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것을 보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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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성경적 의미 제1회 예수님은 왜 죽어야 하셨나

제2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

제3회 예수님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셨나

제4회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무엇이 다른가

제5회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제6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에 왜 또 다시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까? 그리고 우리가 부활 시에 뵙게 될 예수님의 모습에서 ‘정녕 죽음’의 흔적에 가슴이 저미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 하나님의 형상의 보존과 회복으로서 부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출생, 성장, 그리고 죽음)을 체휼하신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랍고 의미 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며, 그 부활체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데, 범죄하여 하나님이 ‘정녕 죽게 하신 바로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는 인간의 ‘처음 모습’이 하나님께서 매우 의미 있게 만드신 형상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창 1:27).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도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골 1:15, 3:10, 히 1:3). 범죄하여서 정녕 죽는 죽음 아래 있게 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자신(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낳게 하시고(창 5:2~3), 그들을 통해서 태어난 생명의 귀중함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 때문이다(창 9: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2)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영생과 영벌 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 그러나 이 부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육적인 부활체를 입게 된다(행 24:15). 그러나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의인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에 참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악인은 사단과 함께 심판을 받고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된다(요 5:29, 행 24:15).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피해서 죽기를 원해도 영생하는 부활체이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고통 중에 거하게 된다(계 9:6, 6:15~16).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오히려 저주스러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들에게는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은 불변의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표현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더 좋았을 뻔한 사람들이다(막 14: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하며,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세상에 관한 일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출생과 죽음에 관한 필연적인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자신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녕 죽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기쁜 소식(복음)’인 것을 믿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롬 1:17). 그러나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 자신이 심판의 부활로 가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5~16).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3)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명이 있음을 알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심은 모든 것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인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이란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벧후 3:13, 계 21:1~2).

중요한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된다(요 5:25~29, 행 24:15)는 사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둘째는 생명의 부활을 하여서 천국에 거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이 세상에서의 행위에 맞는 상을 주신다는 사실이다(마 5:12, 6:1, 10:41~42, 막 9:41, 눅 6:23, 35, 고전 3:8, 14, 요이 1:8, 계 11:18, 계 22:12). 여기서 말하는 상(미스도스; reward, wage)은 ‘임금, 삯, 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주시는 상이다. 이 상은 천국에서의 또 다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상은 천국에 가는 사람은 누구나 받게 되기 때문이다(계 11:18, 22:12, cf.마 20:1~16). 그러나 분명히 구별은 있다. 이 구별은 아마도 천국에서의 직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마 10:41~42, 고전 3:8, 계 22:12).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찬송하는 것이 곧 인간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어떤 직임을 맡게 되어도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계 5:12~13, 7:12, 19:5~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4) 부활체에 있는 흔적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조금은 깨달을 수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는 예수님을 알 때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 세상의 사람들이 능력이나 기술로 고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병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 그들에게 베푸는 심정으로 고치지만 예수님은 그 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지심으로 고치셨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모든 질고와 고통까지도 담당하심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마 8:17, cf.사 53:4).

둘째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성경 구절로 대신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마지막으로 부활체에도 존재하는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볼 때 그 고난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을 수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체를 보이시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다. 신령한 몸이신 부활체에까지도 그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아마도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뵈올 때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에 그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 때문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들이 신령한 몸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천국!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온전해진 하나님 나라!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모습이 예수님의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일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보는 순간 우리가 당했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하신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동으로 말미암아 흘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씻어 주실(계 7:17, 21:3~4) 하나님께서 그 감동의 눈물도 씻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이나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of Jesus, 復活)은 안식일 전날(현재의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안식일 다음날(현재의 일요일)에 무덤에서 되살아 난 사건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을 형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 난 것으로 스스로 하느님이자 인간임을 보여 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를 사하여 구원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과(罪過)를 씻기 위한 죽음이지만, 부활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하나님 스스로가 생명과 죽음의 주(主)임을 계시했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바울로도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선교(宣敎)는 헛된 일이며, 또한 여러분의 신앙도 헛된 것이다”[1]라고 말했으며, 또한 그 스스로가 부활한 그리스도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여 그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요 [ 편집 ]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한 지 사십 일이 지나 하늘에 오른 일과는 다른 것이다.[2][3]

신약성경에서 로마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는 새로운 무덤에 묻혔으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 하늘에 오르기 앞서 사십 일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봄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인 성 금요일 사흘 뒤인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축하한다. 부활절 시기는 유월절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복음서의 일화에서 예수는 그가 죽어서 부활할 것임을 예언하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기초한다고 말하였다.[4]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구원과 구속이라는 계획의 일부로 본다.[5]

성경에 기록된 예수 부활의 증거 [ 편집 ]

역사성 [ 편집 ]

문헌 비평 [ 편집 ]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후 50~58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인정되는 바울로 서신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의 고난과 사망, 부활, 그리고 언젠가 있을 재림의 모습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특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1~8절에서 바울로는 자신이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여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는데 베드로에게 나타난 뒤 열두 제자, 그리고 오백 명에게 동시에 나타난 뒤 야고보, 그리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난 뒤에 자기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적는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여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적지 않는데, 하버마스는 이것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큰 신뢰를 부여하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6개월 ~ 3년 이내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책은 기원후 70~11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다. 그러나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의 저자는 부활한 예수와 직접 만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마르코의 복음서의 초기 사본들 중에는 예수의 부활 후 이야기를 담지 않은 소위 “짧은 끝맺음” 사본이 많이 있다. 둘째로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글레오파와 베드로에게 등장한 뒤 열두 제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사도행전에서 바울로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바울로의 증언과 동일한 것이다.

갤러리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 고린도전서 15:14 ↑ J. E. L.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London: SPCK, 1989), p.66. ↑ Resurrection of Christ.” 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 Dictionary of Premillennial Theology by Mal Couch 1997 ISBN 0-8254-2410-0 127쪽 ↑ ISBN Great Preaching on the Resurrection by Curtis Hutson 2000 0-87398-319-X pages 55-56 ↑ 마가복음 ‘이라고도 불린다

부활의 성경적 의미

자료실 구약자료 신약자료 예배자료 절기자료 설교자료 일반자료 이단자료 교회행정자료 컴퓨터 공부방 절기 자료 부활의 성경적 의미 부활의 성경적 의미 성경적 의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한다. 그것은 나사로의 경우처럼(요11:38) 일시적으로 되살아 나는 때도 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날 때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성경은 또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의 몸과 영이 부활하여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마 10:28; 요 5:28,29; 행 24:15). “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 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참고: 마 22:31, 눅 20:37, 행4:21 7:32 23:6 24:21 26:23, 고전 15:12). 신자들의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이란 말이나(눅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이나(눅 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로(요5:29), “악인의 부활”이란 말로(행 24:15)표현되었다. 신앙고백문에 자주 나오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다(마 27:52, 롬 8:11,고전 15:35,42-44, 빌 3:21).초대 교부들과 신앙고백문들이 증거한 초대 교회는 “육의 부활”이란 구절을 도입하였는데, 이 귀절은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신앙고백문 속에 나온다. 교회가 이 표현을 채용한 것은 많은 이단들이 몸에 대한 영원한 미래를 부정하면서 죽은 자”란 낱말을 “죽은 영혼들”이란 뜻으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몸이 부활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죽은 자는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조하였다. 이 표현은 성경 자체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보존해야 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몸의 부활”이란 표현 속에 나오는 “몸”이란 낱말이 신체적인 몸을 배제한 “자아”나 “인격”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I. 절대 무오한 성경의 지식 이교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엡2:12,살전4:13).헬라 철학은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다.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육은 물질이므로 약하며,여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헬라 철학은 생각하였다. 헬라인들은 바울의 부활 설교를 조롱하였다(행17:32).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현대적인 영혼의 불멸성론으로 환원시켰다. 즉 인간의 참된 “자아”는 물질적이고 유령같은 영적인 몸 속에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종말은 “영원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현세의 삶을 끝낸 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Church Dogmatics III/2,698 ff. III/3,99ff. 257ff.).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혼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그 존재의 전국면에 걸쳐 “심히 좋았”으며 그 몸과 영으로 영생할 운명을 부여받았다(창3:22).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몸과 영이 죄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허용한 것이다(요6:4011:24-26,고전15:54-56). II.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마22:29,고전6:1415:38 고후1:94:14).이러한 역사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예언자와 사도들이다(왕상 17:17 ff.왕하 4:32 ff. 행20:10).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했다(요5:216:3940).예수 자신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그는 생명과 불멸성을 드러내었으며(딤후1:10), 그가 영광 가운데 부활한 것은 크리스챤의 부활은 보증하는 것이다(고전15:20-23:47-49,살전4:14 ff.)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모른채 살다 죽어 간 자들을 일으키신다 할지라도,그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사업은 본질적으로 구속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 그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5:26-30). 각자는 그의 손으로부터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후5:10). III. 구약에서 본 부활과 부활에 대한 희망 A. 역사기록

구약에 보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아들(왕상 17:17ff),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ff), 그 시체가 엘리사의 묘실로 던져진 남자 등 세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그 과부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충분한 실증을 구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 경우의 부활이 지상의 삶으로 잠정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실례들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도 있는 하나님 여호와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다. B. 부활에 대한 증거가 초기에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는 점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구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구절은 퍽 후대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강조하였으며(출 20:12),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미래가 있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오직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완전한 희망을 알지도 못했고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 신자들은 모세가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신32:39)라고 노래한 그들의 강대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즉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라고 한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양자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하였다(11:19). 한편 히브리서 11:8-16절에 보면, 족장들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기대하였으며, 가나안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원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비록 초기의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이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부활의 권능이 뚜렷이 나타났을 때 더욱 커졌던 것임에 틀림없다(III의 A)을 보라)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생을 얻은 에녹(창5:22-24,히11:5)과 엘리야(왕하 2:1112)의 “승천”도 몸과 영을 가진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적 희망의 원천을 고대 “세계의 민간 전승”이나 “일반적인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이론 및 여타 지방에서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지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IDB,I, p,41). C. 구약에 표현된 부활에 대한 희망

이 점에 관하여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구약의 주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는 우선 사무엘상 2:6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나의 노래를 고찰해 보겠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한나가 실제적인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가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항상 행하시는 바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6절은 여호와께서는 음부의 문 앞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보존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이 구절과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해석에 관해서는,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Body[1964]를 보라). 한편 욥은 말하기를(19:25-27),”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논리정연한 사상의 흐름을 보아 이른바 사후(post-mortem)해석론이 정당한 것 같다.

즉 욥은 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자(히<꼬엘>)로 일어나셔서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RSV은 ‘밉베사리'(mibbesari)란 히브리적 표현을 “나의 육으로부터”(from my flesh)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후 욥은 다시 회복된 육 바깥에서 그 자신의 눈으로 신적인 심판관이 그를 변호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정신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부활에 대한 이러한 희망이 생각될 수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성이 있다. 한편 시편 16:9-11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9절에 나오는 ‘신체기관의 평행구’는 이 세상에서 몸(또는 육체-인격)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9절 하반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는…”으로 시작되는 10절은 미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은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그의 부활시에 드러낼 영광스러운 영생을(행 2:26ff, 13:35ff).예언자적으로 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이사야 25:8절 상반절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했다.

이 구절은 행간 사이에 적어 넣는 간결한 평주가 아니며, 열국에 퍼진 탄식과 슬픔의 베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7절과는 자연스럽게 연속된다(참고. 삼하 15:30, 에 6:12, 렘14:3).이사야 25:8절 하반절은 이 상징적 베일이 없어져야 하는 까닭을 여호와가 죽음 그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민을 위하여” 마련된 종말론적인 연회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묘사한 6절의 틀 속에서 8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신 날에 죽음이 절대적으로 파괴될 것에 대하여 명확히 이야기한다(참고 고전 15:54, 계21:4). 한편 이사야 26:19절에 보면,”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고 했다.14절과 비교해 볼 때(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미래에 부활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이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19절은 의롭게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예언하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게 죽은 자들이란 13절에 나오는 “다른 주들” 아래에서 죽어 간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반적”인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코 일반적 부활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누릴 위안은 오히려 일반적 부활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참고 25:8 절 상반절). 에스겔 37:1-10절은 이미 마른 해골(뼈)골짜기의 환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뼈들은 생명을 잃은 채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성령의 강한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이것이 곧 부활을 뜻한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언이며(11-14절),이는 죽은 자가 장차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통속적인 신념을 전제한다고 한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에 대해 실증자료를 댈 수는 없다. 또한 다니엘도 12:2,3절에서 부활을 예언하였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가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선지자 다니엘은 가까운 장래에 전례 없었던 환난을 당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로하였다.(1절).이들 중 대부분은 여호와를 위하여 목숨을 내 던져야 했었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영광 속에서 육으로 부활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위로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를 부인한 자들은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입을 것이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죽은 자들 일반의 부활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다니엘이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여야 할 동포를 위로하고자 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은 종말론적인 몸의 부활 신앙에 대하여 확고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 다음 호세아 14:13절은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말투로 죽음과 무덤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했다(고전 15:55).물론 이것은 호세아 13:14절이 죽은 자의 부활을 예언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 대한 심판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14절을 자연스럽게 해석하여 보면 에브라임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러므로 죽음과 음부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여호와도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바의 결론을 내려보자. 구약은 매우 명료한 것으로부터 조금 모호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다양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지 이교 사상으로부터 채용한 것이 아니다. IV. 정경 이외의 자료에서 본 부활 고대 유대교 및 기독교 시대의 비정경 자료에도 (사해 두루마리,탈굼,탈무드.외경 및 위경) 부활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이 표방하는 개념과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이 구절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없다(T. H. Gaster, IDB,IV, pp,41-43을 보라). V. 신약에서 본 부활 A. 명사 및 동사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는 죽은 자의 영적인 부활이나(눅 2:34 참고. 엡 2:15:14) 육적인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예수와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신약 도처에 이에 관한 구절이 나와 있다). 한편 헬라어 엥게르시스(문자적으로는 깨어남”이라는 뜻)는 오직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 27:53). 이러한 명사와 상관되어 흔히 쓰여진 동사에는 아니스테미와 엥게이로가 있는데, 이 동사는 타동사로서(‘일으키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활동을 강조하며, 특히 예수의 부활이나(행 2:24,32. 3:26. 17:31), 활기를 띠게끔 자극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신약 곳곳에 나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자주 사용되었음). B.역사기록

1. 예수의 부활과 상이한 죽은 자들의 부활. 예수 자신은 야이로의 딸(막 5:35ff. 및 평행 귀절), 과부의 아들(눅 7:11ff), 나사로(요 11:11ff)등 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신 적이 있다. 예수가 사망하였을 때 죽어 있었던 성자들이 많이 일어났다(마 27:52,53). 한편 베드로는 도르가를 일으켰고(행 9:36ff.) 바울은 유두고를 일으켰다(행 20:9ff).

예수가 죽은 자를 일으키신 것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예수를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준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마 11:5, 눅 7:22, 요 11:25).잠자던 성자들이 신비스럽게도 많이 일어섰다는 기사도 이와 똑같은 방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도르가와 유두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여러 가지 치료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행 3:6, 16:18, 고후12:12, 참고 마 10:8).이 모든 부활은 예수가 갖고 있었던 부활의 권능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부활은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종말이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2. 예수의 부활은 금요일 저녁 예수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인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만인과 상이한 것처럼 여타의 부활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성육신 한 하나님이요(요 1:14), 죄 많고 잃어버린 인류를 상징하는 마지막 아담이요(롬 5:12ff, 고전 15:45ff),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유일한 중재자요(딤전 2:5), 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요(히 2:14, 요일 3:8),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딤전 1:15).

이러한 능력을 갖고 계셨던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죽으셨으며(롬 4:25),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rausom)으로 주셨으며”(딤전 2:6),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고”(롬 4:25),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셨으며(빌 3:21),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롬 6:9). 그는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는 “대제사장이며(히 7:16),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되고 영광스럽고 무궁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요 3:16; 6:56ff; 11:25,26; 14:19, 고후 13:4, 딤후 1:10, 계 1:18).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의 부활과 부활하신 주의 현현을 최초로 기록하였다(고전 15:3ff, 참고 11:23). 바울에 의하면 복음서의 설교와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될 것이라고 한다(고전 15:17).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세부적인 빈 무덤 및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 기사는 복음서에 나온다(마 28장, 막16장, 눅24장, 요20,21장). 예수의 부활에 대한 완전한 논의에 관해서는 부활(예수 그리스도의)을 보라. C. 죽은 자의 부활.

1.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모두 일으키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신약은 죽은 자 모두의 부활을 명료하게 가르친다. 즉 신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들의 업적에 따라 그들 자신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요 5:28,29; 행 17:31, 롬 14:10, 고후 5:10, 계11:18, 20:11-15).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인간이 그의 몸이 없이 존재하는 중간상태일 리가 없다(히 12:23, 계 20:4). 인간의 전체성(즉 몸과 영)은 영원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각자가 그 몸 안에서 행한 바와 관계될 것이다(고후 5:10). 그러므로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마 10:28, 25:34, 요 3:36, 5:29, 계 20:15).

비록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행 17:31)가 죽은 자를 모두 살리겠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신자들의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보증될 것이다(고전 15:20ff, 살전 4:14). 고린도전서 15:22절의 빛 안에서 보면, 22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것 같다. 성경의 본질은 구원의 복음이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서 신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저 위대한 부활장(고전 15장)은 오직 신자들의 부활만을 강조한다. 2. 그렇다면 죽은 자는 언제 부활하는 것일까?

신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전 15:51,52, 살전 4:16), 죽은 신자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 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되살아나자마자 즉시 변화될 것이다. 만세에 걸친 신자들은 모두 영광된 성자들의 연합을 구성하며, 공중에서 그들의 구속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그 아버지의 나라로 환영받아 들어간 후(마25:31-40), 이들은 불신자와 타락한 천사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 25:41ff, 고전6:23). 불신자들이 신자들과 동시에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 학자가 주장하듯이 조금 나중에 부활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주제는 부활이 하나의 일반적인(통전적인) 몸의 부활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부분적인 부활이었다가 얼마 후 나중에 가서야 몸 전체가 부활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적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동안 끝까지 신실하였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계시록 20:4절 이하를 그 전거로 내세운다.

한편 오직 몸의 부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계시록 20장을 별도로 치며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서로 구별하는 내용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시록 20:5절의 “첫째 부활”을 실신한 성자들이 죽고 난 후 즉시 중간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단계로 이해한다(참고, 빌 1:23, 히12:22). VI. 몸의 부활. A. 육적인 몸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소위 과학적인 근거에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참고 마12:24). 또한 이들은 몸을 죄의 원천이거나 죄의 본거지로 간주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으로 부활하거나 “천사와 같은” 비물질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성경(특히 바울서신)에서 “육”이란 낱말이 종종 인간의 악한 본성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육적인 몸이 악하다거나 죄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악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중심인 마음(kardiva, 카르디아)이라고 했다(창 8:21, 막 7:14ff, 롬 2:5). 육적인 몸은 윤리적으로 보면 중립적인 매체이다.

그것은 신자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고전 6:15), 성령의 전이며(고전 6:12,13).일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몸”이라는 낱말은 인간의 “자아”나 “영적인 인격”을 뜻한다고 단정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한 실증자료를 댈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 “살과 뼈”를 지닌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보증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만질 수도 있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눅 24:38-43, 행 10:41).

예수는 승천하실 때에도 이러한 육적인 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1, 빌립보서 3:21, 계시록 1:17절에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은 것이므로(고전 15:49, 빌 3:21, 요일 3:2)이들도 또한 육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참고 고전 15:35-42). 그리하여 인간은 그 전체성에 있어서 구원받을 것이며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사 65:17ff, 66:22, 마 5:5, 계 21:1-3). B. 육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

예수는 사두개 사람들에게 부활한 성자들은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 22:30, 막 12:25).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부활 이후에는 결혼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0:36절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을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구절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부활한 몸의 본성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제거된다는 뜻도 들어 있지 않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 보면,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부활한 몸이 영으로 구성된 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령한 몸”이라는 말이 보다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부활한 몸이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5:50절에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고” 라고 말했는데 학자들은 이 구절이 육적인 몸의 부활을 배제한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상 사도 바울은 이와는 전적으로 판이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혈과 육”이란 표현은 몸의 “본질”(실체)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전체성(몸과 영)이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마 16:17, 갈 1:16, 엡 6:12, 히 2:14). 이것은 고린도전서 15:50절의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평행 구절인 50절 하반절에서 사용된 “썩은 것”이란 낱말은 인간 전체가 썩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몸의 본질임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건대,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영광스럽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처음에 불멸하고 멸망당하지 않으면,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구절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셈이 된다. C. 동일성과 변화.

비록 부활한 몸이 육적인 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몸과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몸의 존재 조건에 관해서는 변모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재림할 때 아직 살고 있는 자들의 몸이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서 ‘불가불’이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변화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한 신자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5:47-49). 여기서 말하는 “새 영광”이란 그리스도의 영광과 같은 것이며(고후 3:18), 개개인의 신자가 현세에서 주에 대하여 헌신한 바에 따라 달라질 그러한 영광이다(단 12:3, 고전 3:14,15, 고후 9:6).

이러한 변화는 기적적이고 장엄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무덤 이쪽 편에서 이에 대하여 적당한 사상을 형성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하여 신뢰할 만큼 세부적으로 묘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절기 자료 .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9 부활의 성경적 의미 yookyung1 2017.08.28 8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yookyung1 2017.08.28 7 부활신앙은 상징 아닌 복음의 핵심이다 yookyung1 2017.08.28 6 사순절(Lent : 四旬節) yookyung1 2017.08.28 5 종려나무(the Palm) yookyung1 2017.08.28 4 사순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 yookyung1 2017.08.28 3 추수감사절[청교도들의 감사] yookyung1 2017.08.28 2 고난주관과 가상칠언 webmaster 2016.03.19 1 종려나무(The Palm Tree) webmaster 2016.03.19 < Prev 1 Next > 스크롤 끄기

gam-sa

예수 부활의 의미(고전15:20-22)

‘죽음’이란 단어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절망만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벅찬 기대와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다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부활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택함 받은 우리들은 그 부활의 신앙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부활’이란 말은 인류가 받은 복된 단어입니다. 그 뜻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다시 사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 부활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예수 부활의 참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영광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으로 인해..

첫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증명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20절에는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둘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자라고 하신 이유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토록 요구한 것입니다.(마26:63-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만천하에 증거하셨습니다.

셋째,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9절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복음의 절정이 되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일입니다.(요19:30)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으로,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고 하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주역들인 바울과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의 중심은 부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권주의자들은 이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싫어하여 사도들을 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은 감옥에서도 쉴새 없이 전해졌습니다.

다섯째, 성도 구원의 보장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 10절에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부활은 성도들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은 부활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으로 영화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고전15:52-54) 이 낮은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빌3: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앙과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신 영원한 생명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정복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빛이 어둠을 이기는 증거입니다.

그의 부활은 예수께서 전능자 되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요한 복음10:17~18)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작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 (요한복음5:21~29)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우너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그의 부활은 의가 불의를 이기셨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증거를 가진 성도는 어떤 역경도 굴하지 않습니다. 환란, 곤고, 시련, 헐벗음, 굶주림도 박해도 핍박도 두려워 하지 않는 확실한 승리의 증표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할 천국에 소망을 둔 성도의 성도의 상급이 되시 길 기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예수님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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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은 과연 중요한가? 사도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라고 확신했다. 그는 고린도교회를 위해 서신을 쓰는 중, 그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을 부인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직면했다. 이는 당시 그레코-로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인 관점이었다.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한다는 이러한 세속적인 관점은 사실 1세기 이후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이와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그런데 이 같은 시각이 특히 바울의 시대에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이 육신으로 부활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자신의 육체적 부활은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지적한다. 만일 크리스천이 장차 경험할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부인하는 것과 동일하다.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의 삶과 믿음은 그 본질부터 달라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시작한다. “내가 전한 그 말을 [중략]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바울은 복음이 전적으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고전 15: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뤄졌다고 말하고, 그 죽으심과 함께 복음을 완성하는 역사로 부활을 언급한다. 그리스도는 죽은 채로 계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나타나기에 앞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구속 사역을 통한 복음을 성취하셨다(고전 15:4).

우리가 정말로 복음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복음으로 흠뻑 젖은 신자라면, 과연 복음의 메시지에서 부활을 제외할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지하게 말했던 적이 없다.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자 모두의 공통된 경험일까봐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부활이 결코 그분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분리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이는 구원에 있어 부활이 가지는 위대한 가치를 전부 버리는 행위이다.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Schreiner)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 결코 분리될 수 없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중요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설교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은 지금 목회자로서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다”(고전 15:14)라고 그는 성토한다.

그가 이토록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애초에 세상에 전할 기쁜 소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은 채로 설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거할 뿐 아니라, 세상에 전할 빛이 전혀 없는 무의미한 설교를 행하는 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에 전해야 하는, 세상을 바꾸는 복음의 핵심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을 이루기 때문에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틀어 가장 냉엄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우리는 너무나 자주 구원의 통로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한하고는 한다. 물론 바울이 로마서 3장 25절과 26절에서 말하듯이, 칭의에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핵심 그 자체이다. 오직 그분이 하신 “의로운 행위”(롬 5:18), 곧 “그의 피로 인한 속죄”(롬 3:25-26)를 통해서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더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속의 죽음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 4장 24절과 25절에서 하나님이 부활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치른 대가가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은 그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확증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받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은혜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고 말한 사실을 기억하라. 그의 발언은 과언이 아니다. 부활이 없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문다면 구원의 확신 역시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은 결코 거짓도 과언도 아니다.

4.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초석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며 슬퍼하는 이에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잠들었다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18). 그들의 영혼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빌 1:23), 또한 그들은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연합함으로써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그날을 기다린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가올 위대한 수확의 첫 열매이고, 그분의 백성들은 그 부활을 따라 곧 다가올 육체의 부활을 얻게 된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 때문에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았지만,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로 인해 장차 “모두가 살아나게 될 것”(고전 15:22)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은 없다. 바울이 확실하게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더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품은 우리의 소망이 그분의 부활 없이는 고작 현재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는 초라한 열망에 그치기 때문이다(고전 15: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영원한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끝낸 방식이 특히 마음에 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수고가 전혀 무의미하거나 목적 없는 행위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복음은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고, 그 복음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된다. 부활이 없이는 우리에게 복음도, 구원도, 세상에 전할 구원의 메시지도 없으며, 무엇보다 미래의 소망도 없음을 기억하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the Resurrection Changes Everything by Matthew Barrett

번역: 무제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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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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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하기 김은홍

십자가 없는 부활이란 없다!(No Cross, No Crown!) 진부한 표어이지만,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에겐 전혀 진부하지 않다. 공허한 듯하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감내하는 공동체는 이에 실제적으로 감격한다. 매년 맞이하는 부활절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용솟음치는 생명의 원천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부활은 수난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성이 강하다. 부활은 한 개인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교리에만 제한될 수가 없다.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그 공동체를 통한 타락한 창조 세계의 변혁과 갱신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 구속 드라마의 우주적 사건이다. 예수 부활은 그리고 역사적이다.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를 초대 기독교의 창작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로는 어떻게 기독교가 생성되었으며, 왜 예수를 메시아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세계에 선포하였는지, 설명할 도리가 전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한 대답을 제시하였다.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을 평가하고 오늘날 우리를 위한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은 기독교 공동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먼저 예수의 부활을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활 사상을 부인한 사두개파와, 사후에 육체가 없이 영혼의 계속적인 존재를 신봉하였던 필로나 쿰란 공동체에 비해 바리새파의 개혁 프로그램은 몸의 부활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사후 새롭게 된 육체로 살아가되, 보다 포괄적인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셔서,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고 압제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타도하며, 이 세계를 고대하며 이전에 이미 죽어왔던 모든 의인들이 바로 이러한 새로운 날을 향유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적 생명을 회복하실 것이다. 이러한 부활 사상과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부활 구속 사상의 배경에는 에스겔 37장 1-14절과 다니엘 12장 2-3절, 이사야 26장 19절 등이 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진정한 평화와 정의의 실현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가 되신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다가 올 온전한 구속과 의의 시대를 상징하는 ‘메시아 시대’나 ‘하나님 나라’와 같은 환유적 표현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위대한 선지자가 다시 살아날 것인데 그는 바로 엘리야이다’는 대중적인 미신과 공상이 왜 예수의 사역 기간에 등장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그러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선포할 때에, 무엇을 주장하는가? 이 주장은 당시 유대인들이 위대한 지도자, 선생, 특히 잔인한 죽임을 당하였던 어떤 이가 살아났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통치가 이뤄졌다는 신념을 표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또한 성경을 믿고 약속의 성취를 갈망하던 제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대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바, 천지개벽을 통하여 모든 의인들의 부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성취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빌라도와 가야바, 헤롯은 악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여왔던 ‘다가올’ 새로운 시대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뤄졌으며, 예수는 메시아라고 선포하였다. 어떤 자칭 메시아가 이방 권세자들의 손에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영원히 신임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증인으로서 선포였다. 왜 그런가? 부활은 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은 제한된 자원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행할 수 없다. 오직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그들은 부활의 산 증인들이었다(행 2.32; 고전 15.4-8). 그들은 신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증인들이었다. 부활의 참된 성경적 증거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흔히 빈 무덤이 부활의 참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빈 무덤은 변증 신학의 발견이지, 초대 교회의 증언의 핵심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활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의 인격과 주장과 행위들을 ‘옳다고 인증(認證)’하신 사건이었다(롬 1.3-4). 따라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였다, 예수가 주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부활은 바리새인의 신학과 같이 현재와의 연속성만 주장하거나, 플라톤 철학에 바탕을 둔 필로의 주장과 같이, 현재와의 불연속성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부활 전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 포괄한다. 이는 현재의 불의하고 타락된 구조 속에 부활의 능력이 움트며, 현재를 변혁시키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된 육체의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이는 새 창조의 신호탄이자, 창조 세계가 새로워진다는 선언이다.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옳다고 인증하심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바대로 올바르게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의 행위와 주장과 인격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복하며, 비난을 받으며, 섬기며, 낮아지며, 자신을 비우되 종이되기까지 비우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를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가야바의 종교법정은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빌라도 법정은 민중 선동가로 정죄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판결을 하여 십자가 처형을 하였지만,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은 그를 옳다고 인정하시고 부활시키셨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선언한다(골 2.14-15; 고전 15.17).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활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보증만이 아니다. 역사와 종말과 관련되어져 있다. 부활은 예수가 이제 살아 계심으로 그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말은 오순절의 진리이지 부활의 메시지가 아니다. 먼저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를 메시아로 하나님이 옳다고 인증하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성령이 기름 부으신 소명에 철저하게 순복하여야 할 궁극적 이유를 제시한다. 역으로 십자가의 소명을 철저하게 지고 따르는 교회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공동체이며,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하심을 받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은 현재와의 종말론적 연속선상에서 새 시대의 도래를 실제적으로 가져오는 분기점이다. 예수 부활은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희망을 주지만 현재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제시한다.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의 현재 실존이 비록 고통과 갈등을 하더라도 무한정하게 의미가 있다. 바울에게 부활은 우리 실존과 고립되고 기이한 기적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루시는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절정을 이루고 메시아적 사역의 초점이기에, 역사의 변혁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새 창조라는 관점에서 전인적이고 우주적으로 새롭게 다시 정의하며 현재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가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새벽 여명이다. 부활절 아침에 사망 권세에 승리하신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만남, 새로운 식탁, 화해와 새로운 사명 위임이 있었다. 이는 새벽을 깨우는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이다. 새 창조는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가 폐위되고, 타락과 불의의 눈물이 씻어지고, 모든 종노릇함이 소멸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힘을 제시한다. 바로 이 소망으로 인하여, 현재 시간은 엄청난 의의를 가득 담고 있다. 부활의 의미는 결코 개인화될 수 없다. 개인적인 부활 소망은 이러한 새 창조의 소망 내에 그 정당한 자리를 차지한다.부활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교회는 하나님 아들이 가져오신 새 창조의 변혁에 참여한다. 부활은 고백하는 공동체로 하여금 변혁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참된 평화와 정의, 화해와 치유의 사역에 부활 공동체는 새 창조와 미래에의 희망을 제시하며 역동적으로 참여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 교회에게 부여한 소명이자 위임 명령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롬 8.1-11)의 영이 부활의 능력을 신앙 공동체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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