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3 장 | 요한계시록 3장 143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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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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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2 너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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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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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 KLB – 사데 교회의

사데 교회 – “사데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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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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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요한계시록 3장 –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

우리는 3장에서 2장에 이어 일곱 교회 중 남은 세 교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시대별로 보면 종교개혁 시대인 사데 교회부터 재림직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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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agospel.com

Date Published: 7/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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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강해 – Daum 카페

요한계시록 3장 강해 …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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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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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정리….^^

요한계시록 3장 정리….^^ · (19)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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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phil.tistory.com

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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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계시록 (3 : 1~22) 주석

요한계시록 3장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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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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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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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계시록 3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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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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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

제3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시작하는 이야기

홀만 헌트(Holman Hunt)의 작품 중에 문 을 두드리는 손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다. 문밖에 서 계시는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 시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한참이나 감탄하며 감상하던 한 친구가 큰 발견이나 한 듯이 헌트에게 말 했다.

“여보게 훌륭한 그림인데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네 그려”그랬더니 헌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나도 안다네 그런데 손잡이는 문 안에 있다네. 밖에서는 열 수가 없지.”

그렇다 우리의 마음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지 않는 한 예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는 것 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마음 문을 열어줄 것을 호소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3장에서 2장에 이어 일곱 교회 중 남은 세 교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시대별로 보면 종교개혁 시대인 사데 교회부터 재림직전의 라오디게아 교회까지이다. 이 시대는 로마 교황권이 약화되는 개혁의 시대 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성의 공격을 받는 자유주의 시대였다.

그 반면에 19세기에는 선교적 부흥 운동이 전 세계를 진동시켰던 시대 요, 재림 직전의 무감각한 상태의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이다.

> 사데 교회에 보내는 기별 (종교개혁 시대 이후 A.D. 1517-1798)

1. 사데 교회에 편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 3:1).

다섯 번째 교회는 사데(Sardis)이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두아디라 남쪽 대로 변에 있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고대 도시 중에서는 큰 도시에 속했다. 그 이름은 항상 부귀, 호화로움 등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리디아왕은 엄청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사데를 침공했을 때 당시로는 아주 놀랄만한 거액의 황금을 발견하였다.

사데는 ‘살아 남아있는 자’ 라는 뜻으로 로마의 우편 도로에서 빌라델비아와 두아디라 사이에 망대처럼 서 있었다. 사데는 티몰루스 산맥에서 뻗어 나온 한 산등성이의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천연적인 난공 불락 의 요새였다.

오늘날 사데의 유적지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56km, 그리고 고대 서머나의 유적지로부터는 8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르트(Sart)라는 작 은 마을에 있다. 그래서 사데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성이야말로 절대 안전 지 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과 방심이야말로 사데 멸망의 주 원인이 되었다. 고레스가 사데를 포위하고 있을 때 사데는 높은 성채와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벼랑을 기어오른 고레스의 군사에게 어이없이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사데의 유적지에서 순금을 제련하는데 쓰였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 이상 발견했다.

사데의 유적 중에는 또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유명하다. 신전은 폭이 50m, 길이가 90m나 되었으며, 모두 78개의 석주가 늘어 서 있는 웅대한 것이었다.

사데 교회를 권면하시는 그리스도는“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묘사되었다. “일곱 영”이란 전술한 대로 성령의 온전한 역사를 의미한다. 사데교회 시대를 열었던 종교 개혁 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책망을 받을 만큼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일곱 별”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비록 지도력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성령으로 인도되는 참된 지도자들을 가지고 계신다.

2. 사데 교회에 보내시는 책망은 무엇인가?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1~3).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는“네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란 간결한 말로 기술되어 있다. 사데 교회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책망과 경고를 받는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형편도 사데 교회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번영하고 부흥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교회들이 화려하게 세워지고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들이 쉴 새 없이 열리고 있다. 교회의 영향력은 커가고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영적인 면은 쇠퇴해 가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다. 실로 사데 교회야말로 종교 개혁 시대 이후를 나타내는데 적절한 표상이다. 사데가 그토록 풍부하고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도시였던 것처럼 사데 교회 시대도 종교 개혁의 북소리와 함께 영광스럽게 시작되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A.D. 1483~1546)가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문에 로마 교황청의 주장을 반박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못박는 소리는 중세 교황권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A.D. 1484~1531)가 루터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일으켰다. 프랑스에서도 개혁의 바람은 핍박을 받았으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였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사데 교회는 빛을 많이 받은 부요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신선했던 종교 개혁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지 100년도 못 되어 개신 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최초의 대의 명분을 상실하고 형식주의와 교리 논쟁에 휩쓸려 그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그 동안 많은 신조들이 결정되었으나 그들이 뛰쳐나온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17세기와 18세기의 합리주의의 등장은 영적 냉담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들의 상태를“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이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데 교회에“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시고“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권면하신다.

비록 사데 시대 교회가 온전치는 못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완전히 죽었다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종교 개혁의 위대한 유산 중 그래도 남은 것들이 있었다. 아직도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무리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은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일깨우라’는 말은 각성하고 경계하라는 말이다.

3. 어떻게 회개하라고 하셨는가?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계 3:3).

사데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엄숙한 사명은 개혁을 진전 시켜 영적 암흑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높이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신 것은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래서“회개하라”는 엄숙한 말씀을 들은 것이다.

4. 사데 교회는 어떤 경고를 받았는가?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일깨우라’는 말은 잠자지 말고 깨어있어 각성하라는 말이다. 부주의하게 살고 잠들어 있으면 주인이 올 때를 알지 못한다. 사데는 부주의와 방심으로 역사상 여러 번 함락을 당했다.

B.C. 547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특공대는 험한 바위를 타고 올라가 성벽 문을 열어 사데성을 점령하였는데 그 순간에 사데의 군사들은 천연적인 이점만을 믿고 놀랍게도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B.C. 218년 안티오쿠스 대왕이 이 성을 또다시 공격해 왔을 때 사데의 군사들은 요새만 믿고 그때에도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스 군대는 야밤을 이용하여 험준한 낭떠러지 언덕을 기어올라 줄을 내려서 성내로 침입하였다. 사데의 멸망은 이 성이 난공 불락이라고 과신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인기 있는 담임목사가 있는 큰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동안 절벽을 넘어온 사단이 우리의 본거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5. 그러나 사데에는 또한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4~6).

그러나 사데 교회 시대가 모두 실망스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데 교회에는 영적 순결을 더럽히지 아니한 신실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굳게 붙잡고 또 타인을 도우며 세상으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는 참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약1:27 참조).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흰 옷은 승리를 표상한 다. 고대 로마에서도 전승 축하 행사에는 시민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승리를 축하했다. 흰 옷은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깨끗하게 된 성도의 옳은 행실(계7:14)이며, 하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의인들의 예복이다(계 19:7~9). 우리들의 구속이 성취되는 그 날에 구속을 받은 자들만 흰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계 6:11, 6:9, 7:9~17, 19:7~9 참조). 그러므로 흰옷은 우리 스스로 준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기록책의 하나로 여기에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오래지 않아 은혜의 시대가 마치고 두렵고 엄숙한 심판이 있을 것이나 그것도 생명책의 기록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는 자는 불 못에 던짐을 받고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계 20:12, 15; 출 32:32~33 참조).

> 빌라델비아 교회의 기별 (재림운동 시대, A.D. 1798-1844)

6.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인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빌라델비아는‘형제의 우애’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48km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고 주 경계에 위치하여 동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빌라델비아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가장 늦게 건설된 도시이며 지진이 많은 도시였다. A.D. 17년의 파괴적인 지진 후에 이 도시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 의해 재건되기는 했으나 그때부터 작은 도시로 남게 되었다. 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면서 시민들은 무너지는 석재들이 두려워 도시 밖으로 나가 임시로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빌라델비아는 헬라 문명을 아시아 지방에 보급하는 전초기지였으며 작은 아데네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빌라델비아는 현재 알라세히르(Allah Shehir, 신의 도시)로 불리우고 있는 인구 15만의 소도시이며 이슬람 국가인데도 주민의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도시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었지만 1923년 케말주의 투르크족(Kemalist Truks)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한 후 서머나와 같은 운명이 되었다. 오늘날 빌라델비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도시의 옛 영화를 찾아볼 길이 없고 오직 무성한 잡초와 고대 성벽의 잔해들만을 보게 된다.

역사적으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는 1798년 교황권의 세력이 꺾인 때부터 재림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불길처럼 일어나 사람들의 신앙을 분기시켰던 재림운동의 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헬라 문명을 전 아시아에 보급시켰던 빌라델비아의 이미지는 전 세계에 재림기별을 전했던 재림운동의 시대를 잘 대표하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그리스도는 먼저“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자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적인 왕의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 22장 21~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엘리야김에게 다윗 집의 열쇠가 맡겨졌다는 것은 모든“정권을 그의 손에 맡”긴다는 보증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왕의 권리와 구원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그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 하신다. 빌라델비아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써 열쇠를 관리하듯이 빌라델비아 시대에 예수께서는 지성소로 들어가 조사 심판을 시작하셨다. 2300주야의 대 예언을 마감하고 이제 마지막 시대로 들어가는 문을 여신 것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칭찬은 무엇이었는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빌라델비아는 동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빌라델비아의 문이 활짝 열리면 누구든지 통과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면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작고 능력은 미약했지만 순종 하는 교회였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었지만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복음은 “열린 문”처럼 개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알 수가 있다. 비록 이슬람 국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인터넷에 기독교나 그리스도를 치면 수많은 정보들이 뜰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 정보의 홍수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열린 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는 전도에 열성적인 시대였다. 선교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월리암 케리(William Carry, 1766~1834)가 1793년 인도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위대한 선교의 세기가 시작되었다. 선교 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아마존 유역과 아프리카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였다. 빌라델비아 시대의 교회는 또한 부지런히 예언을 연구하여 예수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한 시대였다.

1844년 당시 재림 기별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나 교회의 주류가 아니었고 크게 영향력이 없는 ‘적은 능력’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출교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신실하게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열린 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가 마칠 때 예수께서는 지성소로 들어가시고 지성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이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계 11:19)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맞는 말씀이다.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책망의 말이 없고 격려와 위로의 말씀만 있다.

그들에게 큰 권세나 조직은 없었으나 전 세계에서 헌신적인 선교 사업을 수행하였으며 박해를 무릅쓰고 재림기별을 전하였던 것이다.

8. 사단의 회는 누구인가?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단의 회”란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한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서머나 교회 시대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면서도 전혀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교회를 훼방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사단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하여 일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각 시대를 통하여 교회 안에도“사단의 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위선적이고도 거짓된 행동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림으로써 사단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도 자신들의 잘못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야 말 것이다. 발 앞에 절하게 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참회의 무릎을 꿇고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9.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계 3:10~12).

예수께서는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빌라델비아에 지진이 나면 사람들은 무너지는 거대한 석조 건물 더미에 다치지 않기 위하여 성 밖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는 사람은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고 결코 넘어짐이 없을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가 필요한 교회였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곧 오시리라고 믿었지만 바라던 그때에 기다리던 예수는 오시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험이 임했다. 실망과 조롱과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사람들은 유익을 얻었다. ‘시험의 때’에 대한 언급은 그러한 극심한 시험에서 면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스도는 ‘속히 오실 것’ 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사명이 주어졌고, 사데교회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란 경고가 주어졌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에는“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재림의 약속은 더욱 절박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 주어진 사명의 어느 부분은 종말 시대에까지 연속 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속히 오신다는 사실은 각 시대를 통하여 진리를 굳게 잡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확신에 넘쳐 외쳤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그리스도는 또한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지진이 휩쓸고 지나가면 대부분의 건물들은 무너지고 오직 기초가 든든한 성전의 기둥만 몇 개 남게 된다. 지금도 빌라델비아에 가면 다 무너져버리고 당시의 기둥만 몇 개 남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는 생생한 표현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기둥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강력한 지진 같은 외부의 공격이 우리를 흔들어도 거대한 해일 같은 고난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유유히 서 있는 기둥 같은 신앙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신다.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성 밖으로 나가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제는 결코 다시 나가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10.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을 마지막 선물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2, 13).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기둥으로 표상된 이기는 자 위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를 성전의 기둥으로 표상하였으니 그 이름들도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에서 이름은 개성과 품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과 창조주의 형상이 이기는 자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치신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았다(계 14:1).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계 22:4)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허락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고 있어서 이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 이긴 자들은 마침내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특권을 얻을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이름은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고 그의 것으로 인정받으며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렇게 엄청난 특권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사형수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어도 시간이 없어서 감옥에서 못 나가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 (심판의 시기 A.D. 1844-세상끝)

11. 라오디게아 교회와 그 시대는 어떠하였는가?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였으나 지금은 언덕 위에 유적만 남아 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이며 부유하고 사치스런 도시였다. 그들의 부는 섬유 제품의 직조 산업에서 왔다. 엄청난 수의 검은 양 떼가 사육되는 지역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는 고급 옷감과 카펫의 제조에 쓰이는 검은 양모의 산지로 유명하였으며, 그것의 수출로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았고 금과 은을 모아 놓는 은행 제도가 발달하여 금융의 중심지로도 알려졌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브루기아산 안약 제조로 명성을 떨쳤으며 의학이 발달하여 의과 대학으로도 유명하였다. 라오디게아의 부(富)에 대한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기원 후 60년에 있었던 강력한 지진으로 라오디게아와 주변 도시들이 파괴되었을 때 다른 도시들은 황제의 지원을 받았으나 자부심 많고 부유한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자신들의 재물로 그 도시를 재건하는데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이 지역은 지진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여기저기 온천수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물이 부족한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만들어 히에라볼리의 물을 끌어다 썼는데, 히에라볼리 온천의 뜨거운 물은 10km정도를 흘러 라오디게아 지역에 도착할 쯤에는 미지근한 물로 바뀌고 만다. 유황 냄새가 나는 이 미지근한 물은 사람들이 마시면 구토를 일으켰다. 라오디게아는 상당히 큰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발굴이 계속 되고 있으며 십자가가 조각되어있는 돌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비잔틴 시대에는 큰 교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히에라볼리(파묵갈레)도 상당히 큰 규모의 원형극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큰 도시였으나 일곱 교회에는 라오디게아만 들어간 것을 보아 라오디게아에 더 큰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시대적으로 생각하면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A.D. 1844부터 세상 끝에 이르는 때로써 드디어 죄악 세상의 역사가 마쳐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라오디게아란 이름은‘의로운 백성’, 혹은‘백성을 심판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실로 하늘에서 심판 할 때가 이르렀음을 경고하는 세 천사의 기별이 온 땅에 전해지고 있는 현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가장 적합하다. ‘의로운 백성’이란 이름은 일견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라오디게아 교인들 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흰 옷’을 입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재림 전 최후의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긴요한 경고로 가득 찬 엄숙한 기별인 것이다.

12.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떻게 세 가지로 묘사되었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 이신 분이시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진실로’의 뜻이다. 보통 설교나 기도의 끝부분에 화답하는 말로 많이 쓰이며 어느 나라든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멘” 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진실하신 분’ 임을 강조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이 끝나기 전 마지막 교회이다. 이제 그분의 모든 말씀들은 ‘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시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 예수께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 되시는가? 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죽음을 택하셨기 때문에 심판 날 우리의“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실 분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본” 이 되시는 분이다. 그분은 창조의 시작이 아니라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시요,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대표하는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조론은 훼방을 당하고 인기가 없었다. 반면에 다윈의 진화론은 전 세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창조의 근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13.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한 마디의 칭찬도 없다. 그렇다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배교를 하거나 이단설을 받아들여서 책망을 받아야 했거나 심각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였다. 이것은 라오디게아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관계가 깊다. 라오디게아는 10km쯤 떨어져 있는 히에라볼리의 온천물로부터 물을 공급받았다. 수로를 통하여 뜨거운 온천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물은 식어버리고 말았다. 광물질이 용해된 이 물은 목욕에는 좋을지 모르나 사람이 마시면 구토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써 예수께서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다니엘서의 2300주야의 예언이 끝나는 1844년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까지의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위의 성경 말씀은 현대 교회의 세속적이고도 무관심한 상태를 잘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덥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열정을 의미할 것이 다. 그렇다고“차지도 아니”하다는 말이 아예 관심이 없거나 냉정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실 리가 없다. 찬물은 우리를 시원하게 하고 정신이 들게 하며 청량한 느낌을 준다(잠 25:13).

특별히 라오디게아처럼 물이 부족하고 더운 지방에서는 찬물이야말로 사람들을 정신나게 하는 것이었다. 덥거나 차다는 것은 사람을 메스껍게 하지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히에라볼리 지역에서는 뜨거운 온천수를, 골로새 지역에서는 찬물을 얻을 수 있다. 물이 없었던 라오디게아는 도수관을 통하여 이 두 지역의 물을 가져다 사용했다. 뜨거운 물이든지 찬물이든지 10km나 떨어진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미지근하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도나 이단으로 정죄를 받지는 않았다. 열성을 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핍박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지근한 무관심이었다. 그들의 자부심과 모자랄 것이 없는 부유함과 자만이 그들을 그렇게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지 못했는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다.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이 도시는 황제의 원조까지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한 일이 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영적으로도 부요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자부심이 많고 부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그들이 영적으로는 심히 가난하고 벌거벗었지만 본인들은 그것을 모르는 데 있었다.

그와 같이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도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느낄 만큼 외적으로는 번영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보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강대해서 찬탄을 자아낼 것이다. 거대한 교회 건물, 장엄한 의식, 활발한 사업들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위장된 것일 뿐 영 적으로 그들은 곤고(困苦)하고 가련했다. 그리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 회 시대의 비극이었다.

15. 라오디게아 교회에 어떤 권면이 주어졌는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토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권고하신다.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불로 연단한 금”이 필요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상징적으로 믿음의 시련(벧전 1:7)을 말한다. 금은 원래 뜨거운 불과 독한 시약으로 연단되어야 순수하게 되는 것인데 라오디게아 시대는 핍박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믿음과 품성은 연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서 순수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되라고 초청하신다. 흰 옷은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구원과 의로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계 3:4~5; 6:11; 7:9, 13~14). 검은 양모의 산지로 유명한 라오디게아였지만 흰 옷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으시다. 벌거벗은 수치란 물질적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비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했지만 그들의 영적인 빈곤과 수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내게서 사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구원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은혜로만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것들을 사기로 결심을 해야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구원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나누어주는 구호 물품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값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는 하되 그 값은 무료요 은혜인 것이다.

어느 차디찬 겨울 날, 보기에도 아주 초라한 어떤 부인이 왕의 온실 옆에 서서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바라보면서‘어떻게 하면 저 한 송이 포도를 병석에 누워있는 어린 자식에게 먹일 수 있을까?’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 부인은 집에 돌아가 길쌈을 해서 얼마의 돈을 벌어 가지고 다음 날 정원지기에게 가서 포도 한 송이를 사기를 원하였으나 정원지기는 거절하고 그 부인을 내쫓아버렸다. 할 수 없이 부인은 자기 집에 돌아와 침대에 깐 담요를 전당포에 가져가 약간의 돈을 만든 다음 다시 정원지기에게 가서 돈을 내밀며 포도를 팔기를 원하였으나 정원지기는 노발대발하면서 그 부인을 내쫓으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공주가 지나가다가 정원지기의 노한 태도와 울면서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공주는 그 이유를 물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부인에게 향하여 말하기를“부인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황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포도는 팔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저 드릴 수는 있습니다”하면서 그 부인이 원하는 것 보다 넘치도록 포도를 따서 그녀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 각 사람에게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하시겠느뇨” 하였다(롬 8:32). 라오디게아 교회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도록 명령을 받았다. 고대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의과 대학이 있어서 효능이 좋은 안약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안약은 라오디게아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이 교회는 영적 식별력을 잃어 자기의 비참한 형편을 보지 못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직접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16.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그분의 약속은 무엇인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9~22).

라오디게아 같은 미지근한 교회도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신다.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징계하시는 것이다(잠 3:11~12). 그분은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희망을 보신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을 내고 회개하여야 한다.

그분의 참으심과 사랑을 이용하면서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된다. 그러면 마침내“토하여 내”침을 당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시대를 표상하기 때문에 이 교회에 주신 기별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는 표현만큼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절절한 사랑과 참으심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몇 가지 깨달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때때로 우리는 무관심하고 도망치지만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서 계신다.

둘째로,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기다리시기는 하지만 강제로 우리에게 들어오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각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해야 되겠다.

셋째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뜨뜻미지근하여 영적인 관심이 없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호소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표현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분은 상대를 가리지 않으신다. 누구든지 문을 열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은 강제로 하지도 않으시고. 문을 열 때까지 호소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분은 즉각 우리의 가장 친밀한 분이 된다.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정다운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먹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시는 것이다. 단 하나의 조건만 요구되었다. 그것은 우리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기는 자”(계 3:21)에 대한 상급과 약속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즉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보좌에 그와 같이 앉는 것이다.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다(딤후 2:12; 요 17:24; 롬 8:17 참조). 이것은 피조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2). 이 지위는 그가 죄 없는 생애로써 사단에게 승리하였으며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상에서 그 생명을 바치신 때에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일곱 교회는 모두 고난을 당하는 교회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매우 풍성하였다. 생명과를 먹는 것, 둘째 사망의 화를 받지 않는 것,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모든 백성을 치리하는 권위, 새벽 별, 흰 옷,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치 않고 아버지 앞에 진술하는 것, 성전의 기둥,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하나님 보좌에 앉는 것 등에 대한 약속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특권이며 약속이다.

17.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어떤 교훈들을 얻을 수 있는가?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에 있었던 실제의 도시들이며 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문체는 각 도시의 특징과 사정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구약의 표상들과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에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주는 권면이기도 하다.

일곱 개의 편지들은 시작과 끝이 모두 동일하다. 모든 편지들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시작되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각 교회의 특징과 상황에 맞는 책망과 권면들이 들어있다.

교회를 돌보시는 예수께서는 각 교회와 개인의 사정들을 다 아신다. 그는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버릴 것도 아시고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도 아신다. 그분은 버가모 교회가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을 잘 아시며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하는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셨으며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슬퍼하신다.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을 잘 아시며 라오디게아 교회의 뜨뜻미지근함을 통탄히 여기시고 문을 두드리시며 권면하신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의 사정도 잘 아는 분이시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 속에는 점점 심화되는 책망이 있다. 일곱 교회는 점점 더 영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처음 세 교회는 그래도 신실한 편이었으나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는 신실함과 영적 타락이 같이 있었고 나머지 세 교회는 점점 더 복음에서 떠나게 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침내“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무서운 책망까지 듣게 된다.

그러나 일곱 교회에는 약속도 점점 풍성하고 많아진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롬 5:20) 것이다.

각 교회는 그전 교회보다 더욱 강한 약속을 받는다. 에베소 교회에는 생명 나무의 과실이 약속된다. 서머나 교회에는 생명의 면류관과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버가모 교회에는 삼중의 약속, 즉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이 주어지며 두아디라 교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우리들이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을 것이라는 최고의 약속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약속들이 다“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사건들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일곱 교회는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시대적 구분도 일치하는 것을 앞으로 공부하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강해

계시록 3장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의 사자

사데(Sardis)는 두아디아에서 남쪽으로 약 48Km 지점에 있던 성읍이다. 에게해 주변 무역의 요충지로 헤르무스(Hermus)강과 트몰루스(Tmolus)산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계곡으로 지나는 도로를 끼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사데의 사람들은 여신 시벨레(cybele)를 주신으로 섬겼는데 그 신전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과 규모가 비등하다. 예언적 사데 교회는 예언 성취된 분파교회로서 종교개혁 시대이다. 사데라는 말은 개혁이란 뜻으로 종교개혁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

1)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 일곱 영은 성령이고, 일곱 별은 우주적 교회를 지키는 하늘의 일곱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천사를 동원하여 이 시대의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간다.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 외형상으로는 교회 건물을 세우고 형식상 예배는 드리나 실제로는 죽은 교회로 판정받는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임을 말한다. 이처럼 사데 교회가 생명력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은 아마도 지리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만을 믿고 안일과 부도덕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데라는 말의 뜻은 개혁으로 그 뜻대로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이후에 교회가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개혁으로서의 모범이 되지 못했다.

계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행위의 온전함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리문제를 앞세우다가 행위의 온전함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결국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바로 개혁 시대의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근본적인 것을 잘 지적하고 개혁을 시도했으나, 교리문제로 교파가 나뉘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행위부분에서는 온전함을 이루어 나가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잘 시작하였으나 행위부분이 약화되다 보니 죽은 믿음으로 끝나 버렸다. 믿음은 살았는데 행위가 죽었다(약2:14, 17, 18, 20)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1) 일깨워 – 한순간의 일깨움이 아니라, 계속적인 일깨움을 표시해 주고 있다. 어원적으로는 꺼져 가는 불씨를 되살려 계속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또 이 말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2)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사데 교회는 실상은 죽었으나 그 중 죽지 않은 자 몇 명이 남아 있으니 그 남은 자들마저 죽지 않도록 지켜 보존하라는 의미이다.

3)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여기서의 온전함이 하나님의 수준에 다다르는 절대 완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와는 대조되게 이러한 수준에 있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회개하라

1)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 – 종교개혁은 일곱 영이신 성령과 일곱 천사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말씀하시고 사역을 이룸으로 개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을 희석시키는 교파주의나 온전한 행위를 이루지 못함은 회개해야 한다.

이때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존 웨슬리는 성령을 받음으로 성령을 통한 개혁을 이루어 영국 사회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표어로 세계 선교의 길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었다.

2)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 이는 예수 재림의 임박성보다 돌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주께서 도적같이 임하겠다는 표현은 언제 임하실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도적은 예고도 없이 잠든 사이에 와서 해를 입힌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는 도둑을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깨어 있어 도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의 칭찬

이 시대에 종교개혁을 이룬 소수의 무리는 깨어 있는 무리로 변화의 주체 역할을 하였으나, 대중들은 개혁의 사역에 부응하지 못했고 따라 주지 못했다.

1)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더럽혔다는 것은 죄로 물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명이라 한 것은 소수의 무리인 종교개혁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 흰 옷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가 거룩한 성에 들어가기 위해 입은 혼인 예복이다. 그러므로 흰 옷은 성도가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결과 주님으로부터 받을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성화의 영광과 영생을 가리킨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혼인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유지한 자들이다. 예수를 믿어 예복을 받았어도 그 예복을 희게, 깨끗이 빨지 않았다면 그들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질 것이다. 이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 계속 성화의 생활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야만 믿음의 승리자가 된다. 그리고 승리자들의 이름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은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잃지 않는 자들에게는 세 가지의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 흰 옷을 입을 것이다 – 흰 옷은 그리스도의 옷으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입는 혼인 예복이다.

2)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리지 않을 것이다 – 생명책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라는 개념으로 확정된 것이다. 여기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한 번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영원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 이름이 흐려지고 지워질 수 있기에 정신을 차리고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종들인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사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헤르무스(Hermus)강과 인접한 코가미스(Cogamis)계곡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알라세히르(Alasehir), 하나님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터키의 한 성읍으로 남아 있다. 이 도시는 서머나와 서북 아시아, 브루기아를 잇는 도로를 끼고 있어 동과 서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 크게 번성하였다. 주전 2세기 경 버가모 왕조의 앗탈루스 2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그는 자기 형제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형제 사랑이라는 뜻의 필라델푸스(Philadelphus)를 이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예언적인 빌라델비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이룬 근대 선교시대이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문을 여시는데, 이 문은 선교의 문이다.

예수께서는 근대시대에 선교의 문을 열어 하늘의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길을 이루어 주신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1) 거룩하고 진실하사 – 여기서 ‘거룩하다’란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한 것은 그의 신성을 나타낸 것이다. 또 ‘진실하다’란 불완전에 대해 완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2)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 구약 성경에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며 다윗의 집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여기서 열쇠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인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열린 문

1)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 빌라델비아 교회시대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하나님의 선교 시대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2)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 네가 적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 예언 성취시대에 선교회를 조직하여 복음을 전파하였고, 예수를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나감을 말해 주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 예언 성취시대에 선교회라는 작은 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787년에 모라비안 교파 해외 선교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 창설.

1795년 런던 선교협의회 조직.

1799년 교회 선교협의회 조직.

1815년 바젤 복음주의 선교회.

1817-1818년 영국의 웨슬리 감리교 선교협의회.

1821년 덴마크 선교회와 파리 선교회.

1828년 라인강 지역 선교회.

1836년 라이프찌히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1891년 대학생 자원 해외 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년 북미주 해외 선교대회.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의 선교

자칭 유대인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면서 실상은 사단의 종 노릇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가 이방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때 믿지 않던 유대인 중에서 일부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에로 들어올 자들이 있을 것을 가리키는데 이 유대인 중에서 소수가 이방인의 발 앞에 절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사랑하는 줄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교가 이방인들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롬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엡 2:11-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인내의 말씀

마지막 때에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예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신다는 뜻은 대환난을 당하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때에 보호해 주시고 양육해 주시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이 있을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난 전 휴거는 있지 않고, 피난처로 옮겨 주시는 약속은 계시록 12장에 기록되어 있고, 부활사건은 마지막 나팔인 일곱째 나팔 불 때 한 번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1)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예언적인 말씀으로는 요한 당시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빌라델비아 선교시대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희생된 자들로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다. 더 나아가서 장차 대환난 때 다섯달 황충 환난을 이긴 성도들도 말하고 있다.

2)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 7년 대환난에서 전삼년 반 때에 성도의 인내를 통해 황충 환난을 이긴 자는 후삼년 반 때에 하나님께서 독수리 두 날개로 피난처 즉 양육처로 옮겨주실 것을 계시록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 선교시대에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일한 자들에게 각별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시험도 없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3)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계시록의 말씀은 예언적인 말씀이지만 성취되고 실현될 말씀으로, 여기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시대를 예언한 것이고, 이 시대를 거쳐 대환난 때까지 언급한 것으로 본다. 대환난은 마지막 때에 교회를 향한 시험이기에 교회는 이 시험을 이겨야 한다. 마귀는 불신자들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귀의 밥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자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린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현되었을 때, 주님은 속히 오시겠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룸으로 복음이 다 전파된 이후에 끝이 오리라 하신 말씀이 실현되는 때이기에 주님의 재림을 언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나가는 자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계속 선교를 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위로해 주는 말씀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선교이다. 이 일을 초지일관하여 굳게 잡고 이루어 나가라는 메시지이다.

2)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류관 상급을 받는 것인데, 이같이 귀하고 귀한 일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면류관 상급 받기까지 굳게 잡아 이루라는 것이다. 면류관 상급은 순교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받는 상급이고, 세마포 상급은 성도들이 받는 상급이다. 그리고 성도가 순교하여 면류관 상급을 받는다면, 그도 하나님의 형제의 반열가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

예언 성취된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김은 선교의 작은 힘으로 이김인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교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는 상급을 주신다. 여기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의 새 이름이 쓰여진 경우와 계2:17에서 흰 돌에 나의 새 이름이 쓴 것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흰 돌 위에 나의 새 이름이 기록된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어린 양의 아내(신부)로서 섬기는 일을 이루는 자이고, 이마에 예수의 새 이름이 쓰여진 자는 순교 사도로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 같은 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아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성밖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역을 이룬다.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1)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하나님 성전 안에서 그 역할과 위치가 기둥과 같이 흔들림이 없는 존재가 되고, 그의 몸도 부활체에서 변함없는 영생체로 활동함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왕 같은 제사장이 되면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쫓겨나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

라오디게아(Laodicea)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도시이다. 리쿠스(Lycus)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깊은 계곡 위에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골로새(Colossae)와 히에라볼리(Hierapoli)가 자리잡고 있었다.

예언적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성취된 종말교회요 말세시대를 말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나타나신 예수는 아멘이시오, 충성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시다. 여기서 예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교회의 근본은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인데,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로 모든 교회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을 펼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1)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 – 아멘이란 낱말은 ‘진실한’ ‘확실한’이란 뜻으로 대개 문장 끝에서 ‘그대로 될지어다’는 말로 쓰인다.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낱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한 충성된 분이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5-6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2) 창조의 근본이신 이 – 창조의 시초, 시작이신 분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뜻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첫 번째 피조물이란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란 뜻이다.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

하나님의 원하시는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교회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한다.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차가운 교회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적인 교회는 뜨거운 교회이고 세상의 문화적인 교회는 차가운 교회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교회를 뜨겁게 하지만 문화는 교회를 차갑게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됨으로 말세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

눅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신앙적인 뜨거운 교회가 되려면 말씀을 풀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말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는 성경공부로 뜨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함은 토하여 내친다

라오디게아 지방은 지역적으로 북쪽에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흘러 내려오고 있고, 동쪽에서는 골로새 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냉천수가 있다. 온천수와 냉천수가 하나가 되어 미지근한 물이 되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앙과 문화가 혼합되어 미지근한 말세교회의 모습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1) 미지근하여 – 말세교회는 차가운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와서 미지근하여 뜨거운 교회로서의 본질이 많이 희석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주님도 이러한 교회를 역겨워함으로 그 입에서 토해내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미지근함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는 악한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2) 토하여 내치리라 – 맛이 없거나 역겨운 것을 먹으면 사람은 대개 토해 버린다. 불신앙이나 가증스러운 미지근한 신앙은 주께서 가차 없이 정죄할 것을 말한다. 내침을 당한다는 것은 끝까지 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면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므로 천국 구원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칭 부자

1) 나는 부자라 – 스스로 부자 됨이요, 자칭 부자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실상은 영적인 모습인 것이다. 우리의 육적이고 외형적인 것은 허상이라면 영적이고 내적인 것은 바로 실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는 부자라고 말하지만, 주님이 진단하시는 영적인 면은 곤고함이요, 가련함이요, 가난함이요, 눈멀음이요, 벌거벗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교훈하심은, 사람을 볼 때 외형적으로 보지 말고,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2) 곤고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다, 불행하다라는 뜻으로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했기 때문에 겪는 생활의 어려움을 연상시켜 준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 해도 그 옷을 더럽히면 누더기옷과 같이 되어 곤고하고 비참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권고

1)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 금을 믿음이라 할 때, 연단된 믿음은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믿음을 말한다. 연단은 물과 바람으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불로 연단되면 존재의 근본까지 새롭게 되는 연단이다. 그것은 바로 돌 같이 버려진 우리가 금 같은 귀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2)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흰 옷은 혼인잔치 때 입고 들어가야 할 예복인데, 예복이 없다는 것은 회개의 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를 믿을 때 곧 세례를 받을 때에 구원의 표를 받는다. 그 구원의 표는 그리스도의 옷이요, 흰 옷이다. 흰 옷은 대개 의와 정결과 승리를 상징인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칭의의 옷과 선하고 의로운 행실의 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산 자가 되어 구원을 얻어 천국까지 이르렀다고 하지만 회개의 생활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져서 지워질 수 있음을 말한다. 생명책에 이름이 흐려지고 지워지는 경우는 회개를 온전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치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옷이 더러워진 자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혼인 잔치하러 들어갈 수 없고, 예복이 상실됨으로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 지방은 의학이 발달하였으며 그 중 특히 안약과 고약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신의 눈은 밝게 했을지 모르나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는 것, 육신의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육신의 눈만 위하지 말고, 성령의 신령한 은사를 받아 영적인 일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라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풍자적으로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몸의 실상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복 있는 자의 모습이다. 천년왕국이 실현되면서 그때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때는 늦는다. 자신의 모습을 영적으로 미리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 안약을 사서 발라 영안이 열어져야 함을 말한다.

사람의 몸의 등불은 눈이고, 마음인 혼의 등불은 영이고, 영의 등불은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여기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 함은 영의 등불인 성령의 기름을 사서 발라 영안을 뜨게 하라는 말이다.

마 25:8-9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계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사라’는 말씀 가운데서 값을 지불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이 말은 예수의 피값을 우리가 지불할 능력도 없고, 지불할 수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선물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해 사들일 때, 거저 산 것이 아니다. 값을 당당하게 지불하고, 우리를 피값으로 산 것이다. 그러므로 값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지불해 주시는 차원에서 행하신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값도 지불할 능력도 없고, 지불할 수도 없다. 단지 여기서 ‘사라’라고 하는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을 때 우리의 사모함과 노력의 대가가 필요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의 은혜는 우리가 값으로 살 수 없으나, 성령은 값으로 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과 힘과 정성과 사모함을 들여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찬양할 때, 성령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노력을 말해 주고 있다. 금은 믿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수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고, 흰 옷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표로서 옷을 말하기에, 이것을 얻기까지는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안약은 성령을 상징함으로 성령을 받기까지 수고가 필요하기에, 값을 지불하고 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다. 예수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책망이 없다면 그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책망을 통해 회개의 생활과 진리 안에서의 생활, 거룩함에 참예하는 생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생활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않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세이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히 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열심을 내라는 말은 뜨거워지라는 말로 성령을 받으라는 내용과 같다. 하나님의 일이란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으며 죄를 회개해야 죄용서 받고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열심과 열의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 아버지와 식사

아버지의 식사에 함께 참예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최고의 축복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식사에 참예함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축복이다. 예수께서 유월절 성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최후 승리한 자의 식사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거행되는 성만찬은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기 위한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자의 거룩한 식사로서 성도가 하나 됨을 경험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도 하나 되는 성만찬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문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지칭한다. 신실하고 충성되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던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선 주님께서 계속 찾아가실 필요없이 선교의 문만 여시면 되었으나 영적으로 죽어 있어 자신들이 계속적으로 짓고 있는 죄에 대하여 회개조차 하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친히 찾아가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는 사랑의 수고를 하셔야 했던 것이다. 사랑의 주님은 당신이 택하신 죄인을 찾아오시며 지금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결국 주님은 극진하신 사랑으로 아직 회개치 아니한 자기 백성들의 마음 문에 인내하는 자세로 서서 문을 열 때까지 죄인을 위해 끈질지게 두드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죄인이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매우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하신다. 여기서 더불어 먹는다는 표현은 그러한 때의 기쁨의 잔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연 성도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밀한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자

이기는 자는 성도로서 이기는 자가 있고 사도로서 이기는 자가 있는데, 여기서는 사도로서 이기는 자를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종이라 말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로 복음서에서 달란트나 므나를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달란트를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들은 부지런한 자들로 충성되다고 인정받는 종이 될 것이기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진다. 마태복음에서는 5달란트 사명을 잘 감당한 종에게 잘 하였다 하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므나 사명을 잘 감당한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주었다. 이 내용은 계시록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됨을 말하는데,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왕이신 예수의 분봉왕으로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아 사명을 감당함을 말한다.

성도로서 이기는 자는 열 처녀 비유의 말씀으로 알려주고 있고, 하나님의 종으로 이기는 자는 달란트와 므나 비유로 알려주고 있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눅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 여기서 보좌는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서 만국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과 교회

성령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교회는 성령의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교회가 성령의 소리를 들으면 촛대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데, 성령의 소리에 둔하고 듣지 못하면 음녀교회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의 귀가 있고 영의 눈이 있고 영의 입이 있다. 영의 귀가 열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늘 듣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영의 입이 열려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받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정리….^^

요한계시록 3장…

1. 사데교회를 향한 말씀.

<요약>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있던 루디아의 수도로서 서머나 동쪽 약 80키로 지점 트몰러스 산 북쪽 기슭 헐머스 평야 남단에 자리잡고 있다. B.C 1200년경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지대이었다.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상업 도시로 번영하였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B.C 6세기와 3세기 두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 이곳에는 여신 시빌리의 신전이 있었고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었다. 사데 교회가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자라는 경고를 받게 되었던 것도 이같은 밀의 종교의 보도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 문이다(계 3:1).지금은 서머나 빌라델비아 철도의 정거장 부근 페허에 세워진 한 촌에 그 이름이 붙어 있을 뿐이다.

주님은 사데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다고 했다. 죽게된 것을 굳게 하고, 받은 말씀을 회복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이 있는데, 주의 은혜를 누릴 것이고,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고 주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용어설명 및 주해>

1a절

(1a)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자신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계시하셨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흔히 말하는 대로 완전 수이다. 형용사로 번역하면 “모든”이라는 뜻이다. “영”이란 “육과 대비되는 말인데, 육체의 차원을 뛰어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능력과 지헤와 권세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영적 존재들을 일컫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성령과 대비해서 “영”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할 때, 아마도 성령의 권세 아래 있는 영들을 통해 교회를 섬기도록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본문에서 “영”들은 지혜라는 개념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같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든 지혜를 가지신 분이리라고 계시하고 있는 것같다. “별”에 대한 소개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미 “교회의 사자”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종이 아닌, 예수님의 권세를 따르지 않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 사역자인 것이다.

1b~3절

(1b)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셨다.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믿음은 행위로 고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데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교회가 명분은 살아있는 것같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 생명력이 없음을 말한다. “일깨워”라고 한다. 흔들어 깨우라는 말이다. 아직 남아있는 것,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마저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온전함”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온통 죄악 투성이라는 것이다. 부족한 것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칭찬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한다. 말씀의 기본,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신앙의 초심을 잃지 말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깨우다라는 말과 연관시켰다. 회개하여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둑같이 임하시는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네가 알지 못하리라.”는 말이 일깨우면 “네가 알게 된다”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심판날이 임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심판이 임하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4~6절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는 사데 교회가 빠져있는 죄에 동참하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순수함을 그대로 지킨자가 있음을 말한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이고, 주의 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에게 합당한 은총이다. 주님은 사데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서 이기는 자가 될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되면 흰 옷을 입게 될 것이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 천사들 앞에서 주님께서 시인해 주신다는 것이다. 분명한 구원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묵상>

자신의 믿음을 더럽히는 자는 비록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죽은 자일 뿐이다. 믿음의 외형을 포장하지 말고, 거룩함과 성결함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아 철저하게 돌이켜야 한다. 잠자는 신앙이 아닌 깨어있는 믿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주님이 친히 인정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2.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말씀

<요약>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의 앗탈로스(Attalus) 2세, 필라델푸스 (Philadelphus)는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합성어 로써 ‘형제애’를 의미한다.

사데에서 4키로 동쪽의 소아시아 루디아 성읍. 소아시아 고원지대와 서머나 사이의 중요한 산업도시. B.C 138년 이전에 버가모왕 아탈저스 빌라델 버스가 세운것으로 언제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의 하나로 나타난다().일찌기 순교자가 생겼고 1300년 이후 대감독 구역이 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서 그 앞에 어느 누구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얻었다. 작은 능력을 가졌지만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에 시험의 때를 면할 수 있게 된다. 빼앗을 수 없는 면류관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 이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였다.

<용어설명 및 주해>

7절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으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한다. 특히 다윗의 열쇠를 얻급하면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다”고 하셨다. 절대 주권을 의미한다.

8~11절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신다. 다윗의 열쇠로 그 문을 열어두었다는 것이다. 그 문을 통해 얼마든지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선언한다. 주님께서 친히 열어두셨으니 어느 누구도 닫을 수 없고, 그들에게 허락된 복을 빼앗을 수 없다.

작은 능력을 갖고 있지만 부인하지 않았다. 빌라델비아교회는 특히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때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거기에 사탄의 회당이라고 불려질 수 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을 통해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곤 했던 것같다. 그러나 주님은 그 유대인들 중에 몇으로 복음에 복종하게 하게 함으로 주님께서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시는가를 나타내시겠다고 한다.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다”는 것은 “인내하라는 내 말을 지켰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님을 소망하며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라는 것이 주의 명령이었기에 그 말씀을 기억하며 고난을 당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잘 견뎌왔다는 이야기이다. 주님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에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고 한다. 여기의 “시험의 때”란 언제인가? 그 시험의 때는 장차 온세상에 임하여 오는것인데,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게 되는 때라고 언급한다. 계시록에는 천년왕국과 시험에 때를 말하는데, 천년왕국에 있는 자는 시험의 때와 상관이 없음을 말한다. 아마도 그 부분을 언급하는 것같다.

주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잘 인내할 것을 당부한다. 주님은 속히 오실 것이므로 끝까지 믿음을 잘 지켜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고 한다. 이미 면류관이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즉 그들은 면류관을 이미 따놓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신앙을 끝까지 잘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 것같고, 상급을 많이 쌓은 것같아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12~13절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세에 영적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해서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주님의 새이름이 기록된다고 한다. 이것은 심히 존귀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 새 예루살렘에 속한 자, 주님께 속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높이 세우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후렴구, “귀있는 자는….” 하는 말씀을 통해 이 말씀을 꼭 기억할 것을 말씀하셨다.

<묵상>

주님께서 열린 문을 항상 열어 놓으므로 언제든지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교회는 행복할 것이다. 빌라델비아교회는 그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그렇게까지 복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것”을 갖고 있었지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이고, 환난 중에도 소망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언제나 견고한 믿음을 간직해서 하나님 나라에 기둥과 같이 세워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

<요약>

소아시아 부루기아의 수도이며 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6마일, 에베소에서180km 떨어진 지점.알렉산더가 죽은 후 SELEUCID왕가의 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성서시대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 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던 교회였다. 그래서 주님께서 토하여 버린다고 하셨다. 불론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야 했고, 흰 옷을 사서 입어 수치를 가려야 한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해야 했다. 열심이 없었고, 착각이 심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문밖에 서서 기다리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용어설명 및 주해>

14절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자신을 아멘으로,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멘이라는 말은 “참, 진짜, 동의”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성취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증인은 “목격한 사람” 그런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되며, 진실된 증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이다. 창조의 근본이란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진 것임을 뜻한다.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 주님은 이 계시를 통해서 주님께 모든 것이 있음, 주님이 가장 부요하신 분이심을 말한다.

15~19절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행위를 안다”고 하므로 신앙은 고백 뿐만 아니라 행위를 포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말은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이 그 도시에 도달하게 되면 그 상태였는데, 역겨운 맛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시청각적 효과를 보이신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풍요로운 도시였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영적 실상이 초라한 거지꼴이라고 하셨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거지꼴임을 인식해서 세상 것으로 부자되는데 급급하지 말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한다. 흰옷을 입어 벌거벗을 수치를 가리고,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고 한다. 이것은 믿음과 영적인 안목과 순결을 말하는 것이다.

18~20절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주님은 책망의 이유, 징계의 이유가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징계 받았다고, 책망들었다고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에서 탈피하라는 것이다.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 “볼찌어다”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린다”고 하신다. 아직 기회가 있고, 기회는 정말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맞아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에 열정을 품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에게로 가서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함을 뜻한다.

21~22절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서도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을 한다. 말세는 영적 싸움임을 말하는 것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복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주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신분적으로 똑같이 높아진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만큼 존귀하고 높이 세워주시겠다는 것이다.

<묵상>

칭찬 한 마디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 세상적으로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님 눈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주님 앞에 쓸데없는 것으로 부자인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지꼴의 가난함을 나타낼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없는 것을 얻고자 생명을 바쳐 수고하지 않는가? 주님께 귀한 것, 주님 앞에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는 아무런 열정을 갖지 못한 자는 아닌가? 거룩한 열정을 회복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 영적인 통찰력, 그리고 거룩함과 순결한 삶으로 풍성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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