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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주석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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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절-31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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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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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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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주석
요한복음 제 20장
=====20:1
<예수님께서 잠시 누우셨던 무덤을 기념한 교회>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
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
었던유 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튤 하루로 계산
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 ,미아)은’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 ,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 (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
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멈올 찾아갔
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
작하는 시각은 하나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
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
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
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한편 본문
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
: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
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
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듸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
습에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
를 바르는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듸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
는 고인(故人)의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동안 시신을 돌보았던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채아왔을 때 무덤입구를 막았
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
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올 합해야 겨우 옮
길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흠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
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마 28:2-7; 막 16:5-7; 눅
24:4-7)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
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
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
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콴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소
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
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
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블 수 있다.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
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 )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흠쳐갔으
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
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
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3
베드로와…무덤으로 같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
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횹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
(9절). 여기서 ‘갈새'(* ,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
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 초문의 뚱밖의 사건이었
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
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몰랐을
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
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그런데 본문은 요
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
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
(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멈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20:4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예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
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
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 할 것이다.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
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
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
의 사도적 우월성올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20:5
구푸려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 )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
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
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세아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
킨다(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
帳)(출 26:1), 귀족의 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20:6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
덤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갈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
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20:7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
그메논'(* )은’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
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
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
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
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현에
서 ‘딴'(* ,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
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
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
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
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눙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20:8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올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
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
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둥사를사
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
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제자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향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
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
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20:9
저희는 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
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
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않으나 학
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성
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 눅 24:44-47
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
음을 말씀하셨다.
=====20:10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븜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확
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
한 어느 정도의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
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눅 24:12).
=====20:11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
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
어 ‘클라이오'(* )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
하라
=====20:12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
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막 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
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
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
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둥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
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20:13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
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
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
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육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눅 24:5, 6).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
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
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
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20:14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
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
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
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
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톨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
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
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전
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
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해
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20:15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것
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
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
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
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동산지기.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
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
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
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
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
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20:16
아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
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
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
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
말씀을 연상시킨다.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 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
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
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
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뚱하는 헬라어 ‘디
다스칼레'(* )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
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
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
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
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
해 달려들었다(17절)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 )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
법 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
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
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 이다. 그러나 불트만
(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
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
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말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얘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
트'(* ,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 ‘두려워 말라’
)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
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
되는 경우에만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최동화된 이후이
건 흑행동화 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
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
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
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
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
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
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
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
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
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
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를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
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
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
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
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 전통
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
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
되는 구원사으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님이 승
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
다.
=====20:18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
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
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
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
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
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더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
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
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
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
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
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4:8-11).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20:19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계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골 2:16). 그들
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
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
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
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듸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
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 서서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눅 24:38-36)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륵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올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
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
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있
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
내 보이셨다(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
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 )는 ‘평
화’, ‘화평’,’븍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때(삼상 1:17;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
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14:27) 이해된
다. 아마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20: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
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옆구리
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
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횬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다시 만
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
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39, 40을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21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
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
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
터 보내심을 받았다는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34; 5:36,
38;6:57;7:29;8:42;11:42;17:3, 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
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
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혹자는
13: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온전
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
繼)된다.
=====20:22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
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
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하나
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
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점
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
(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
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
라어 ‘라베테'(* )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
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
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
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 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20:23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 2:6, 10). 본절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
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이끌려
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
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고다. 즉 사도들에게는 븍음 증거의 사명과 권
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듸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
를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
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
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
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20:24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뚱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
)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고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적인’의뜻인 것
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인 모
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
현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20:25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
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
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
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
찬가지였다는 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
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
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
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
수의 부활하신 몸을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
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 )은 ‘혼적’,’표'(print,
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위치’를 뜻하는 ‘토폰'(*
)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역시 추측일 뿐이다.
=====20:26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
다(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
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
었음에도 불구하고(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것은, 그들의 믿음
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
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
되지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
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
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
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
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20:27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
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
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
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예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
‘(* )는 고전 6:6;14:22과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
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
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
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
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
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
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20:28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
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
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
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
다면 ‘나의 주님, 나의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차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선
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
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하나
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
이다. 본서 마지막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1), 예수 그리스도
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되신 분이다(17:5).
=====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
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
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
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
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룻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
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욘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
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
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
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
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
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20:30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
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
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
(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
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
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륵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행 4:30).
=====2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
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
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
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
를 소개할 때(1: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49), 그리고 예수 자신이
(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
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
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
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
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헌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
다(18:36).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
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
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 요한복음 20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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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데 미아 톤 삽바톤 마리아 헤 막달레네 에르케타이 프로이 스코티아스 에티 우세스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카이 블레페이 톤 리돈 에르메논 에크 투 므네메이우
개역개정,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새번역,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우리말성경,1 그 주간의 첫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영어NIV,1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hile it was still dark, Mary Magdalene went to the tomb and saw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from the entrance.
영어NASB,1 Now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Magdalene came early to the tomb,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already taken away from the tomb.
영어MSG,1 Early in the morning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hile it was still dark, Mary Magdalene came to the tomb and saw that the stone was moved away from the entrance.
영어NRSV,1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hile it was still dark, Mary Magdalene came to the tomb and saw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from the tomb.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η δε 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 μαρια η μαγδαληνη ερχεται πρωι σκοτιας ετι ουσης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βλεπει τον λιθον ηρμενον εκ του μνημειου
라틴어Vulgate,1 una autem sabbati Maria Magdalene venit mane cum adhuc tenebrae essent ad monumentum et videt lapidem sublatum a monumento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באחד בשבת לפנות הבקר בעוד חשך ותבא מרים המגדלית אל הקבר ותרא את האבן מוסרה מעל הקבר׃
성 경: [요20: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미아)은 ‘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 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를 바르는 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의 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트레케이 운 카이 에르케타이 프로스 시모나 페트론 카이 프로스 톤 알론 마데텐 혼 에필레이 호 예수스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란 톤 퀴리온 에크 투 므네메이우 카이 우크 오이다멘 푸 에데칸 아우톤
개역개정,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새번역,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말성경,2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시신을 무덤 밖으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NIV,2 So she came running to Simon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the one Jesus loved, and said, “They have taken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have put him!”
영어NASB,2 So she ran and came to Simon Peter and to the other disciple whom Jesus loved, and said to them, “They have taken away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we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영어MSG,2 She ran at once to Simon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the one Jesus loved, breathlessly panting, “They took the Master from the tomb. We don’t know where they’ve put him.”
영어NRSV,2 So she ran and went to Simon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the one whom Jesus loved, and said to them, “They have taken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we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 τρεχει ουν και ερχεται προς σιμωνα πετρον και προς τον αλλον μαθητην ον εφιλει ο ιησους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ηραν τον κυριον εκ του μνημειου και ουκ οιδαμεν που εθηκ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2 cucurrit ergo et venit ad Simonem Petrum et ad alium discipulum quem amabat Iesus et dicit eis tulerunt Dominum de monumento et nescimus ubi posuerunt eum
히브리어Modern,2 ותרץ ותבא אל שמעון פטרוס ואל התלמיד האחר אשר חשק בו ישוע ותאמר אליהם הנה נשאו את האדון מקברו ולא ידענו איפה הניחהו׃
성 경: [요20: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마 28:2-7; 막 16:5-7; 눅 24:4-7)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관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 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으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엨셀덴 운 호 페트로스 카이 호 알로스 마데테스 카이 에르콘토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개역개정,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새번역,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우리말성경,3 그리하여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가톨릭성경,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영어NIV,3 S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started for the tomb.
영어NASB,3 S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went forth, and they were going to the tomb.
영어MSG,3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left immediately for the tomb.
영어NRSV,3 Then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set out and went toward the tomb.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ξηλθεν ουν ο πετρος και ο αλλος μαθητης και ηρχοντο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라틴어Vulgate,3 exiit ergo Petrus et ille alius discipulus et venerunt ad monumentum
히브리어Modern,3 ויצא פטרוס והתלמיד האחר וילכו אל הקבר׃
성 경: [요20: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베드로와…무덤으로 갈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9절). 여기서 ‘갈새'(*,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 초문의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몰랐을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은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덤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에트레콘 데 호이 뒤오 호무 카이 호 알로스 마데테스 프로에드라멘 타키온 투 페트루 카이 엘덴 프로토스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개역개정,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새번역,4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우리말성경,4 두 사람이 함께 달려갔는데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앞서 달려가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가톨릭성경,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영어NIV,4 Both were running,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
영어NASB,4 The two were running together; and the other disciple ran ahead faster than Peter and came to the tomb first;
영어MSG,4 They ran, neck and neck. The other disciple got to the tomb first, outrunning Peter.
영어NRSV,4 The two were running together,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
헬라어신약Stephanos,4 ετρεχον δε οι δυο ομου και ο αλλος μαθητης προεδραμεν ταχιον του πετρου και ηλθεν πρωτος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라틴어Vulgate,4 currebant autem duo simul et ille alius discipulus praecucurrit citius Petro et venit primus ad monumentum
히브리어Modern,4 וירוצו שניהם יחדו וימהר התלמיד האחר לרוץ ויעבר את פטרוס ויבא ראשונה אל הקבר׃
성 경: [요20: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에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을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카이 파라큎사스 블레페이 케이메나 타 오도니아 우 멘토이 에이셀덴
개역개정,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새번역,5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우리말성경,5 그 다른 제자가 몸을 굽혀 안을 살펴보았는데 고운 삼베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영어NIV,5 He bent over and looked in at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but did not go in.
영어NASB,5 and stooping and looking in, he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but he did not go in.
영어MSG,5 Stooping to look in, he saw the pieces of linen cloth lying there, but he didn’t go in.
영어NRSV,5 He bent down to look in and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but he did not go in.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παρακυψας βλεπει κειμενα τα οθονια ου μεντοι εισηλθεν
라틴어Vulgate,5 et cum se inclinasset videt posita linteamina non tamen introivit
히브리어Modern,5 וישקף אל תוכו וירא את התכריכין מנחים אך לא בא פנימה׃
성 경: [요20: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구푸려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세마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킨다(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帳)(출 26:1), 귀족의 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에르케타이 운 카이 시몬 페트로스 아콜루돈 아우토 카이 에이셀덴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카이 데오레이 타 오도니아 케이메나
개역개정,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새번역,6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우리말성경,6 그때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가 도착해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들어가 보니 고운 삼베가 놓여 있고
가톨릭성경,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영어NIV,6 Then Simon Peter, who was behind him, arrived and went into the tomb. He saw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영어NASB,6 And so Simon Peter also came, following him, and entered the tomb; and he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영어MSG,6 Simon Peter arrived after him, entered the tomb, observed the linen cloths lying there,
영어NRSV,6 Then Simon Peter came, following him, and went into the tomb. He saw the linen wrappings lying there,
헬라어신약Stephanos,6 ερχεται ουν σιμων πετρος ακολουθων αυτω και εισηλθεν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θεωρει τα οθονια κειμενα
라틴어Vulgate,6 venit ergo Simon Petrus sequens eum et introivit in monumentum et videt linteamina posita
히브리어Modern,6 ויבא שמעון פטרוס אחריו והוא נכנס אל הקבר וירא את התכריכין מנחים׃
성 경: [요20: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카이 토 수다리온 호 엔 에피 테스 케팔레스 아우투 우 메타 톤 오도니온 케이메논 알라 코리스 엔테튈리그메논 에이스 헤나 토폰
개역개정,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새번역,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우리말성경,7 예수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고운 삼베와 함께 있지 않고 따로 개켜져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영어NIV,7 as well as the burial cloth that had been around Jesus’ head. The cloth was folded up by itself, separate from the linen.
영어NASB,7 and the face-cloth which had been on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영어MSG,7 and the kerchief used to cover hi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cloths but separate, neatly folded by itself.
영어NRSV,7 and the cloth that had been on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το σουδαριον ο ην επι της κεφαλης αυτου ου μετα των οθονιων κειμενον αλλα χωρις εντετυλιγμενον εις ενα τοπον
라틴어Vulgate,7 et sudarium quod fuerat super caput eius non cum linteaminibus positum sed separatim involutum in unum locum
히브리어Modern,7 והסודר אשר היתה על ראשו איננה מנחת אצל התכריכין כי אם מקפלת לבדה במקומה׃
성 경: [요20: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그메논'(*)은 ‘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 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현에서 ‘딴'(*,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능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토테 운 에이셀덴 카이 호 알로스 마데테스 호 엘돈 프로토스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카이 에이덴 카이 에피스튜센
개역개정,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새번역,8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우리말성경,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도착한 그 다른 제자도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영어NIV,8 Finally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side. He saw and believed.
영어NASB,8 So the other disciple who had first come to the tomb then also entered, and he saw and believed.
영어MSG,8 Then the other disciple, the one who had gotten there first, went into the tomb, took one look at the evidence, and believed.
영어NRSV,8 Then the other disciple, who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 and he saw and believed;
헬라어신약Stephanos,8 τοτε ουν εισηλθεν και ο αλλος μαθητης ο ελθων πρωτος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ειδεν και επιστευσεν
라틴어Vulgate,8 tunc ergo introivit et ille discipulus qui venerat primus ad monumentum et vidit et credidit
히브리어Modern,8 ויבא שמה גם התלמיד האחר אשר בא ראשונה אל הקבר וירא ויאמן׃
성 경: [요20: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을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동사를 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 제자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우데포 가르 에데이산 텐 그라펜 호티 데이 아우톤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나이
개역개정,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새번역,9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9 (그들은 아직도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서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NIV,9 (They still did not understand from Scripture that Jesus had to rise from the dead.)
영어NASB,9 For as ye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영어MSG,9 No one yet knew from the Scripture that he had to rise from the dead.
영어NRSV,9 for as ye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9 ουδεπω γαρ ηδεισαν την γραφην οτι δει αυτον εκ νεκρων αναστηναι
라틴어Vulgate,9 nondum enim sciebant scripturam quia oportet eum a mortuis resurgere
히브리어Modern,9 כי לא הבינו עד עתה את הכתוב אשר קום יקום מעם המתים׃
성 경: [요20: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아들]
저희는 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성 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 눅 24:44-47 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아펠돈 운 팔린 프로스 아우투스 호이 마데타이
개역개정,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번역,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말성경,10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영어NIV,10 Then the disciples went back to their homes,
영어NASB,10 So the disciples went away again to their own homes.
영어MSG,10 The disciples then went back home.
영어NRSV,10 Then the disciples returned to their home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απηλθον ουν παλιν προς εαυτους οι μαθηται
라틴어Vulgate,10 abierunt ergo iterum ad semet ipsos discipuli
히브리어Modern,10 וישובו התלמידים וילכו אל ביתם׃
성 경: [요20:1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비어있는 무덤]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눅 24:12).
마리아 데 헤이스테케이 프로스 토 므네메이오 엨소 클라이우사 호스 운 에클라이엔 파레큎센 에이스 토 므네메이온
개역개정,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새번역,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우리말성경,11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울다가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가톨릭성경,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영어NIV,11 but Mary stood outside the tomb crying. As she wept, she bent over to look into the tomb
영어NASB,11 But Mary was standing outside the tomb weeping; and so, as she wept, she stooped and looked into the tomb;
영어MSG,11 But Mary stood outside the tomb weeping. As she wept, she knelt to look into the tomb
영어NRSV,11 But Mary stood weeping outside the tomb. As she wept, she bent over to look into the tomb;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αρια δε ειστηκει προς το μνημειον κλαιουσα εξω ως ουν εκλαιεν παρεκυψεν εις το μνημειον
라틴어Vulgate,11 Maria autem stabat ad monumentum foris plorans dum ergo fleret inclinavit se et prospexit in monumentum
히브리어Modern,11 ומרים עמדה בוכיה מחוץ לקבר ויהי בבכותה ותשקף אל תוך הקבר׃
성 경: [요20:1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하라.
카이 데오레이 뒤오 앙겔루스 엔 류코이스 카데조메누스 헤나 프로스 테 케팔레 카이 헤나 프로스 토이스 포신 호푸 에케이토 토 소마 투 예수
개역개정,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새번역,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우리말성경,12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 천사는 머리맡에, 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2 들여다 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영어NIV,12 and saw two angels in white, seated where Jesus’ body had been, one at the head and the other at the foot.
영어NASB,12 and she saw two angels in white sitting, one at the head and one at the feet, where the body of Jesus had been lying.
영어MSG,12 and saw two angels sitting there, dressed in white, one at the head, the other at the foot of where Jesus’ body had been laid.
영어NRSV,12 and she saw two angels in white, sitting where the body of Jesus had been lying, one at the head and the other at the feet.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θεωρει δυο αγγελους εν λευκοις καθεζομενους ενα προς τη κεφαλη και ενα προς τοις ποσιν οπου εκειτο το σωμα του ιησου
라틴어Vulgate,12 et vidit duos angelos in albis sedentes unum ad caput et unum ad pedes ubi positum fuerat corpus Iesu
히브리어Modern,12 ותרא שני מלאכים לבושי לבנים ישבים במקום אשר שמו שם את גופת ישוע אחד מראשותיו ואחד מרגלותיו׃
성 경: [요20:1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막 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 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카이 레구신 아우테 에케이노이 귀나이 티 클라이에이스 레게이 아우토이스 호티 에란 톤 퀴리온 무 카이 우크 오이다 푸 에데칸 아우톤
개역개정,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새번역,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말성경,13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NIV,13 They asked her, “Woman, why are you crying?” “They have taken my Lord away,” she said, “and I don’t know where they have put him.”
영어NASB,13 And they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She said to them, “Because they have taken away my Lord, and I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영어MSG,13 They said to her, “Woman, why do you weep?” “They took my Master,” she said, “and I don’t know where they put him.”
영어NRSV,13 They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She said to them, “They have taken away my Lord, and I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λεγουσιν αυτη εκεινοι γυναι τι κλαιεις λεγει αυτοις οτι ηραν τον κυριον μου και ουκ οιδα που εθηκ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3 dicunt ei illi mulier quid ploras dicit eis quia tulerunt Dominum meum et nescio ubi posuerunt eum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ו אליה אשה למה תבכי ותאמר אליהם כי נשאו מזה את אדני ולא ידעתי איפה הניחהו׃
성 경: [요20:1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눅 24:5, 6).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타우타 에이푸사 에스트라페 에이스 타 오피소 카이 데오레이 톤 예순 헤스토타 카이 우크 에데이 호티 예수스 에스틴
개역개정,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새번역,14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14 이 말을 한 후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예수께서 거기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신 줄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영어NIV,14 At this, she turned around and saw Jesus standing there, but she did not realize that it was Jesus.
영어NASB,14 When she had said this, she turned around and saw Jesus standing there, and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영어MSG,14 After she said this, she turned away and saw Jesus standing there. But she didn’t recognize him.
영어NRSV,14 When she had said this, she turned around and saw Jesus standing there, but she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ταυτα ειπουσα εστραφη εις τα οπισω και θεωρει τον ιησουν εστωτα και ουκ ηδει οτι ο ιησου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14 haec cum dixisset conversa est retrorsum et videt Iesum stantem et non sciebat quia Iesus est
히브리어Modern,14 ויהי בדברה זאת ותפן אחריה ותרא את ישוע עמד ולא ידעה כי הוא ישוע׃
성 경: [요20:1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전 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레게이 아우테 예수스 귀나이 티 클라이에이스 티나 제테이스 에케이네 도쿠사 호티 호 케푸로스 에스틴 레게이 아우토 퀴리에 에이 쉬 에바스타사스 아우톤 에이페 모이 푸 에데카스 아우톤 카고 아우톤 아로
개역개정,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새번역,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그분을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겠습니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이 정원지기인 줄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5 “Woman,” he said, “why are you crying? Who is it you are looking for?” Thinking he was the gardener, she said,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put him, and I will get him.”
영어NASB,15 Jesus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Whom are you seeking?” Supposing Him to be the gardener, she said to Him,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laid Him, and I will take Him away.”
영어MSG,15 Jesus spoke to her, “Woman, why do you weep? Who are you looking for?” She, thinking that he was the gardener, said, “Mister, if you took him, tell me where you put him so I can care for him.”
영어NRSV,15 Jesus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weeping? Whom are you looking for?” Supposing him to be the gardener, she said to him,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laid him, and I will take him away.”
헬라어신약Stephanos,15 λεγει αυτη ο ιησους γυναι τι κλαιεις τινα ζητεις εκεινη δοκουσα οτι ο κηπουρος εστιν λεγει αυτω κυριε ει συ εβαστασας αυτον ειπε μοι που αυτον εθηκας καγω αυτον αρω
라틴어Vulgate,15 dicit ei Iesus mulier quid ploras quem quaeris illa existimans quia hortulanus esset dicit ei domine si tu sustulisti eum dicito mihi ubi posuisti eum et ego eum tollam
히브리어Modern,15 ויאמר אליה ישוע אשה למה תבכי את מי תבקשי והיא חשבה כי הוא שמר הגן ותאמר אליו אדני אם אתה נשאת אתו מזה הגידה נא לי איפה הנחתו ולקחתיו משם׃
성 경: [요20:1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동산지기. –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레게이 아우테 예수스 마리암 스트라페이사 에케이네 레게이 아우토 헤브라이스티 랍부니 호 레게타이 디다스칼레
개역개정,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새번역,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 ㉠아람어를 뜻함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하시자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랍오니!”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이란 뜻입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랍부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영어NIV,16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toward him and cried out in Aramaic, “Rabboni!” (which means Teacher).
영어NASB,16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ni!” (which means, Teacher).
영어MSG,16 Jesus said, “Mary.” Turning to face him, she said in Hebrew, “Rabboni!” meaning “Teacher!”
영어NRSV,16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Hebrew, “Rabbouni!” (which means Teacher).
헬라어신약Stephanos,16 λεγει αυτη ο ιησους μαρια στραφεισα εκεινη λεγει αυτω ραββουνι ο λεγεται διδασκαλε
라틴어Vulgate,16 dicit ei Iesus Maria conversa illa dicit ei rabboni quod dicitur magister
히브리어Modern,16 ויאמר אליה ישוע מרים ותפן ותאמר אליו רבוני הוא מורה׃
성 경: [요20:1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마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말씀을 연상시킨다.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뜻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17절)
레게이 아우테 예수스 메 무 핲투 우포 가르 아나베베카 프로스 톤 파테라 포류우 데 프로스 투스 아델푸스 무 카이 에이페 아우토이스 아나바이노 프로스 톤 파테라 무 카이 파테라 휘몬 카이 데온 무 카이 데온 휘몬
개역개정,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새번역,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우리말성경,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
가톨릭성경,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영어NIV,17 Jesus said, “Do not hold on to me, for I have not yet returned to the Father. Go instead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I am returning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to my God and your God.'”
영어NASB,17 Jesus said to her, “Stop clinging to Me, 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but go to My brethren and say to them, ‘I ascend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and My God and your God.'”
영어MSG,17 Jesus said, “Don’t cling to me, 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Go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I ascend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my God and your God.'”
영어NRSV,17 Jesus said to her, “Do not hold on to me, because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But go to my brothers and say to them, ‘I am ascending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to my God and your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λεγει αυτη ο ιησους μη μου απτου ουπω γαρ αναβεβηκα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μου πορευου δε προς τους αδελφους μου και ειπε αυτοις αναβαινω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μου και πατερα υμων και θεον μου και θεον υμων
라틴어Vulgate,17 dicit ei Iesus noli me tangere nondum enim ascendi ad Patrem meum vade autem ad fratres meos et dic eis ascendo ad Patrem meum et Patrem vestrum et Deum meum et Deum vestrum
히브리어Modern,17 ויאמר אליה ישוע אל תגעי בי כי עוד לא עליתי אל אבי אך לכי נא אל אחי ואמרי אליהם אני עלה אל אבי ואביכם ואל אלהי ואלהיכם׃
성 경: [요20:1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법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이다. 그러나 불트만(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 말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에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트'(*,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두려워 말라’)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되는 경우에만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행동화된 이후이건 혹 행동화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 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의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
에르케타이 마리암 헤 막달레네 앙겔루사 토이스 마데타이스 호티 헤오라카 톤 퀴리온 카이 타우타 에이펜 아우테
개역개정,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새번역,18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우리말성경,18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는 것과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영어NIV,18 Mary Magdalene went to the disciples with the news: “I have seen the Lord!” And she told them that he had said these things to her.
영어NASB,18 Mary Magdalene came, announcing to the disciples, “I have seen the Lord,” and that He had said these things to her.
영어MSG,18 Mary Magdalene went, telling the news to the disciples: “I saw the Master!” And she told them everything he said to her.
영어NRSV,18 Mary Magdalene went and announced to the disciples, “I have seen the Lord”; and she told them that he had said these things to her.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ρχεται μαρια η μαγδαληνη απαγγελλουσα τοις μαθηταις οτι εωρακεν τον κυριον και ταυτα ειπεν αυτη
라틴어Vulgate,18 venit Maria Magdalene adnuntians discipulis quia vidi Dominum et haec dixit mihi
히브리어Modern,18 ותבא מרים המגדלית ותספר אל התלמידים כי ראתה את האדון וכזאת דבר אליה׃
성 경: [요20:1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대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4:8-11).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우세스 운 옾시아스 테 헤메라 에케이네 테 미아 삽바톤 카이 톤 뒤론 케클레이스메논 호푸 에산 호이 마데타이 디아 톤 포본 톤 유다이온 엘덴 호 예수스 카이 에스테 에이스 토 메손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이레네 휘민
개역개정,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새번역,19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우리말성경,19 그날, 곧 그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해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톨릭성경,19 그 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영어NIV,19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 when the disciples were together, with the doors locked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영어NASB,19 So when it was evening on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when the doors were shut where the disciples were,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in their midst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영어MSG,19 Later on that day, the disciples had gathered together, but, fearful of the Jews, had locked all the doors in the house. Jesus entere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to you.”
영어NRSV,19 When it was evening on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the doors of the house where the disciples had met were locked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υσης ουν οψιας τη ημερα εκεινη τη 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 και των θυρων κεκλεισμενων οπου ησαν οι μαθηται συνηγμενοι δια τον φοβον των ιουδαιων ηλθεν ο ιησους και εστη εις το μεσον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ρηνη υμιν
라틴어Vulgate,19 cum esset ergo sero die illo una sabbatorum et fores essent clausae ubi erant discipuli propter metum Iudaeorum venit Iesus et stetit in medio et dicit eis pax vobis
히브리어Modern,19 ויהי לעת ערב ביום ההוא והוא אחד בשבת כאשר נסגרו דלתות הבית אשר נקבצו שם התלמידים מיראת היהודים ויבא ישוע ויעמד ביניהם ויאמר אליהם שלום לכם׃
성 경: [요20:1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계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골 2:16). 그들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들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 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 서서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눅 24:38-36)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록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을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있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 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는 ‘평화’, ‘화평’, ‘복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때(삼상 1:17;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14:27) 이해된다. 아마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카이 투토 에이폰 에데잌센 타스 케이라스 카이 텐 플류란 아우토이스 에카레산 운 호이 마데타이 이돈테스 톤 퀴리온
개역개정,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새번역,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우리말성경,20 이렇게 말씀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가톨릭성경,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영어NIV,20 After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side. The disciples were overjoyed when they saw the Lord.
영어NASB,20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showed them both His hands and His side. The disciples then rejoiced when they saw the Lord.
영어MSG,20 Then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side. The disciples, seeing the Master with their own eyes, were exuberant.
영어NRSV,20 After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Then the disciples rejoiced when they saw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τουτο ειπων εδειξεν αυτοις τας χειρας και την πλευραν αυτου εχαρησαν ουν οι μαθηται ιδοντες τον κυριον
라틴어Vulgate,20 et hoc cum dixisset ostendit eis manus et latus gavisi sunt ergo discipuli viso Domino
히브리어Modern,20 ובדברו זאת הראה אתם את ידיו ואת צדו וישמחו התלמידים בראותם את האדון׃
성 경: [요20:2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혼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39, 40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에이펜 운 아우토이스 호 예수스 팔린 에이레네 휘민 카도스 아페스탈켄 메 호 파테르 카고 펨포 휘마스
개역개정,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새번역,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가톨릭성경,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영어NIV,21 Again Jesus said,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
영어NASB,21 So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lso send you.”
영어MSG,21 Jesus repeated his greeting: “Peace to you. Just as the Father sent me, I send you.”
영어NRSV,21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send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1 ειπεν ουν αυτοις ο ιησους παλιν ειρηνη υμιν καθως απεσταλκεν με ο πατηρ καγω πεμπω υμας
라틴어Vulgate,21 dixit ergo eis iterum pax vobis sicut misit me Pater et ego mitto vos
히브리어Modern,21 ויסף ישוע לדבר אליהם שלום לכם כאשר שלח אתי האב כן אנכי שלח אתכם׃
성 경: [요20:2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34; 5:36, 38;6:57;7:29;8:42;11:42;17:3,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혹자는 13: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繼)된다.
카이 투토 에이폰 에네퓌세센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
개역개정,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새번역,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말성경,22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가톨릭성경,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영어NIV,22 And with that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
영어NASB,22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영어MSG,22 Then he took a deep breath and breathed in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he said.
영어NRSV,22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τουτο ειπων ενεφυσησεν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λαβετε πνευμα αγιον
라틴어Vulgate,22 hoc cum dixisset insuflavit et dicit eis accipite Spiritum Sanctum
히브리어Modern,22 ויהי בדברו זאת ויפח בהם ויאמר אליהם קחו לכם את רוח הקדש׃
성 경: [요20:22]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테'(*)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 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안 티논 아페테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페온타이 아우토이스 안 티논 크라테테 케크라텐타이
개역개정,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새번역,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3 만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받을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영어NIV,23 If you forgive anyone his sins, they are forgiven; if you do not forgive them, they are not forgiven.”
영어NASB,23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ir sins have been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have been retained.”
영어MSG,23 “If you forgive someone’s sins, they’re gone for good. If you don’t forgive sins, what are you going to do with them?”
영어NRSV,23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them;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헬라어신약Stephanos,23 αν τινων αφητε τας αμαρτιας αφιενται αυτοις αν τινων κρατητε κεκρατηνται
라틴어Vulgate,23 quorum remiseritis peccata remittuntur eis quorum retinueritis detenta sunt
히브리어Modern,23 והיה כל אשר תסלחו את חטאתם ונסלח להם ואשר תאשימו יאשמו׃
성 경: [요20:23]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 2:6, 10). 본절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이끌려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즉 사도들에게는 복음 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마스 데 헤이스 에크 톤 도데카 호 레고메노스 디뒤모스 우크 엔 멭 아우톤 호테 엘덴 예수스
개역개정,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새번역,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 ㉡그, ‘디두모’
우리말성경,24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영어NIV,24 Now Thomas (called Didymus),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 disciples when Jesus came.
영어NASB,24 But Thomas, one of the twelve, called Didymus,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영어MSG,24 But Thomas, sometimes called the Twin,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영어NRSV,24 But Thomas (who was called the Twin), one of the twelve,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헬라어신약Stephanos,24 θωμας δε εις εκ των δωδεκα ο λεγομενος διδυμος ουκ ην μετ αυτων οτε ηλθεν ο ιησους
라틴어Vulgate,24 Thomas autem unus ex duodecim qui dicitur Didymus non erat cum eis quando venit Iesus
히브리어Modern,24 ותומא אחד משנים העשר הנקרא דידומוס לא היה בתוכם כבוא ישוע׃
성 경: [요20:24]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이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뜻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고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적인’의 뜻인 것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 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현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엘레곤 운 아우토 호이 알로이 마데타이 헤오라카멘 톤 퀴리온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에안 메 이도 엔 타이스 케르신 아우투 톤 튀폰 톤 헬론 카이 발로 톤 닼튈론 무 에이스 톤 튀폰 톤 헬론 카이 발로 무 텐 케이라 에이스 텐 플류란 아우투 우 메 피스튜소
개역개정,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새번역,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소!” 하고 말했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내가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며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는 한 나는 믿을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응답하였다.
영어NIV,25 So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the nail mark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where the nails were,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it.”
영어NASB,25 So the other disciples were saying to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in His hands the imprint of the nails, and put my finger into the place of the nail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영어MSG,25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saw the Master.” But he said, “Unless I see the nail holes in his hands, put my finger in the nail holes, and stick my hand in his side, I won’t believe it.”
영어NRSV,25 So the other disciples told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 the mark of the nails and my hand in his side, I will not believe.”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λεγον ουν αυτω οι αλλοι μαθηται εωρακαμεν τον κυριον ο δε ειπεν αυτοις εαν μη ιδω εν ταις χερσιν αυτου τον τυπον των ηλων και βαλω τον δακτυλον μου εις τον τυπον των ηλων και βαλω την χειρα μου εις την πλευραν αυτου ου μη πιστευσω
라틴어Vulgate,25 dixerunt ergo ei alii discipuli vidimus Dominum ille autem dixit eis nisi videro in manibus eius figuram clavorum et mittam digitum meum in locum clavorum et mittam manum meam in latus eius non credam
히브리어Modern,25 ויגידו לו התלמידים הנשארים ראה ראינו את האדון ויאמר אליהם אם לא אראה בידיו את רשם המסמרות ואשים את אצבעתי במקום המסמרות ואשים את ידי בצדו לא אאמין׃
성 경: [요20:25]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 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은 ‘혼적’,’표'(print, 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 ‘위치’를 뜻하는 ‘토폰'(*)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카이 멭 헤메라스 옼토 팔린 에산 에소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카이 도마스 멭 아우톤 에르케타이 호 예수스 톤 뒤론 케클레이스메논 카이 에스테 에이스 토 메손 카이 에이펜 에이레네 휘민
개역개정,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새번역,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우리말성경,26 8일 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모였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거기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께서 들어와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톨릭성경,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이르셨다.
영어NIV,26 A week later his disciples were in the house again, and Thomas was with them. Though the doors were locked,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영어NASB,26 After eight days His disciples were again inside, and Thomas with them. Jesus came, the doors having been shut, and stood in their midst and said, “Peace be with you.”
영어MSG,26 Eight days later, his disciples were again in the room. This time Thomas was with them. Jesus came through the locked doors,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to you.”
영어NRSV,26 A week later his disciples were again in the house, and Thomas was with them. Although the doors were shut,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μεθ ημερας οκτω παλιν ησαν εσ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και θωμας μετ αυτων ερχεται ο ιησους των θυρων κεκλεισμενων και εστη εις το μεσον και ειπεν ειρηνη υμιν
라틴어Vulgate,26 et post dies octo iterum erant discipuli eius intus et Thomas cum eis venit Iesus ianuis clausis et stetit in medio et dixit pax vobis
히브리어Modern,26 ויהי מקצה שמונת ימים ותלמידיו שנית פנימה ותומא עמהם ויבא ישוע והדלתות מסגרות ויעמד ביניהם ויאמר שלום לכם׃
성 경: [요20:26]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다(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에이타 레게이 토 도마 페레 톤 닼튈론 수 호데 카이 이데 타스 케이라스 무 카이 페레 텐 케이라 수 카이 발레 에이스 텐 플류란 무 카이 메 기누 아피스토스 알라 피스토스
개역개정,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새번역,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우리말성경,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돼라.”
가톨릭성경,27 그리고 나서 토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영어NIV,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영어NASB,27 Then He said to Thomas, “Reach here with your finger, and see My hands; and reach here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and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
영어MSG,27 Then he focused his attention on Thomas. “Take your finger and examine my hands. Take your hand and stick it in my side. Don’t be unbelieving. Believe.”
영어NRSV,27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and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 my side. Do not doubt but believe.”
헬라어신약Stephanos,27 ειτα λεγει τω θωμα φερε τον δακτυλον σου ωδε και ιδε τας χειρας μου και φερε την χειρα σου και βαλε εις την πλευραν μου και μη γινου απιστος αλλα πιστος
라틴어Vulgate,27 deinde dicit Thomae infer digitum tuum huc et vide manus meas et adfer manum tuam et mitte in latus meum et noli esse incredulus sed fidelis
히브리어Modern,27 ואחר אמר אל תומא שלח אצבעך הנה וראה את ידי ושלח את ידך הנה ושים בצדי ואל תהי חסר אמונה כי אם מאמין׃
성 경: [요20:27]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고전 6:6;14:22과 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 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아페크리데 도마스 카이 에이펜 아우토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데오스 무
개역개정,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새번역,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우리말성경,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내 주시며 내 하나님이십니다.”
가톨릭성경,28 토마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영어NIV,28 Thomas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영어NASB,28 Thomas answered and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영어MSG,28 Thomas said, “My Master! My God!”
영어NRSV,28 Thomas answered him, “My Lord and my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απεκριθη ο θωμας και ειπεν αυτω ο κυριος μου και ο θεος μου
라틴어Vulgate,28 respondit Thomas et dixit ei Dominus meus et Deus meus
히브리어Modern,28 ויען תומא ויאמר אליו אדני ואלהי׃
성 경: [요20:28]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 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신 분이다(17:5).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호티 헤오라카스 메 페피스튜카스 마카리오이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개역개정,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새번역,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29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가톨릭성경,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영어NIV,29 Then Jesus told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you have believe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영어NASB,29 Jesus said to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have you believed? Blessed are they who did not see, and yet believed.”
영어MSG,29 Jesus said, “So, you believe because you’ve seen with your own eyes. Even better blessings are in store for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영어NRSV,29 Jesus said to him, “Have you believed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yet have come to believe.”
헬라어신약Stephanos,29 λεγει αυτω ο ιησους οτι εωρακας με θωμα πεπιστευκας μακαριοι οι μη ιδοντες και πιστευσαντες
라틴어Vulgate,29 dicit ei Iesus quia vidisti me credidisti beati qui non viderunt et crediderunt
히브리어Modern,29 ויאמר אליו ישוע יען ראית אתי האמנת אשרי המאמינים ואינם ראים׃
성 경: [요20:29]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의심많은 도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폴라 멘 운 카이 알라 세메이아 에포이에센 호 예수스 에노피온 톤 마데톤 아우투 하 우크 에스틴 게그람메나 엔 토 비블리오 투토
개역개정,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새번역,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우리말성경,30 이 책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영어NIV,30 Jesus did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which are not recorded in this book.
영어NASB,30 Therefore many other signs Jesus also performed in the presence of the disciples, which are not written in this book;
영어MSG,30 Jesus provided far more God-revealing signs than are written down in this book.
영어NRSV,30 Now Jesus did many other signs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which are not written in this book.
헬라어신약Stephanos,30 πολλα μεν ουν και αλλα σημεια εποιησεν ο ιησους ενωπιον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α ουκ εστιν γεγραμμενα εν τω βιβλιω τουτω
라틴어Vulgate,30 multa quidem et alia signa fecit Iesus in conspectu discipulorum suorum quae non sunt scripta in libro hoc
히브리어Modern,30 והנה גם אתות אחרים רבים עשה ישוע לעיני תלמידיו אשר לא נכתבו בספר הזה׃
성 경: [요20:30]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본서의 기록 목적]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록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행 4:30).
타우타 데 게그랖타이 히나 피스튜세테 호티 예수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카이 히나 피스튜온테스 조엔 에케테 엔 토 오노마티 아우투
개역개정,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새번역,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는 둘 다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31 그러나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31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영어NASB,31 but these have been written so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영어MSG,31 These are written down so you will believe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in the act of believing, have real and eternal life in the way he personally revealed it.
영어NRSV,31 But these are written so that you may come to believe that Jesus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that through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31 ταυτα δε γεγραπται ινα πιστευσητε οτι ο ιησους εστιν ο χριστος ο υιος του θεου και ινα πιστευοντες ζωην εχητε εν τω ονοματ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31 haec autem scripta sunt ut credatis quia Iesus est Christus Filius Dei et ut credentes vitam habeatis in nomine eius
히브리어Modern,31 אך אלה נכתבו למען תאמינו כי ישוע הוא המשיח בן אלהים ולמען יהיו לכם המאמינים חיי עולם בשמו׃
성 경: [요20:31]
주제1: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주제2: [본서의 기록 목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를 소개할 때(1: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49), 그리고 예수 자신이(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현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18:36).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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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예수님이 부활하심(요 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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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요 20:1-31)
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2절] 안식 후 첫날[주간의 첫날](원문)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해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순서적으로 자세히 기록했다고 보인다. 주간의 첫날 즉 주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다른 여러 여자들도 같이 갔던 것 같다(마 28:1; 막 16:1; 눅 24:1, 10).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절)는 말은 다른 여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해 왔다(막 16:1; 눅 23:56; 24:1).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컸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바위에 판 그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막 16:5; 눅 24:4).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들어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21:24에 의하면 본서를 쓴 자이며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3-7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갔다. 누가복음 24:11에 의하면,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허탄한 소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무덤으로 즉시 달려갔다. 누가복음 24:12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본문은 거기에 더하여 ‘그 다른 제자,’ 아마 요한도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말한다. 그 둘이 같이 달음질하였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고 단지 그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살아나셨다. 그것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 그 몸이 다시 사셨으므로 그 세마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수건은 개켜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영적 현상이 아니었음을 증거한다.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었던 바로 그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히 몸의 부활이었다.
[8-10절]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여자들도 확인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하였다. 빈 무덤은 그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가능성은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군인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했고 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렀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장사했기 때문이다. 또 설사 그렇게 회생(回生)하셨다 하더라도 죽다 살아난 자가 무덤을 막았던 무거운 돌을 밀어 제치고 군사들의 경비(마 27:62-66)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 무덤문은 큰돌로 막혀 있었고 군사들의 경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시신을 훔쳐 숨겨두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하며 그 거짓말을 위해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의 원수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의 몸의 부활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11-16절]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그의 시신까지 분실되니 마음이 몹시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또한 불신앙의 눈물이었다. 그는 주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바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께서 그를 부르실 때도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연약한 믿음과 마음으로라도 그를 사모하며 따랐던 마리아를 찾아주셨다.
마리아는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들의 말에 그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나 그를 알지 못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말씀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고 말했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부활하신 주께서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또 그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신성(神性)의 영으로는 그가 십자가에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그 날 낙원에서 대할 수 있으셨으나, 인성(人性)으로는 아직 땅 위에 계셨다. 그는 땅 위에 계실 때에도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이셨다(요 3:13 전통본문).
그는 후에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세마포나 머리 수건을 개킬 수 있으셨고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자신의 인성(人性)을 여전히 증거하셨다. 또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아버지와 동등되신 자이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우리와 같은 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그가 주를 보았고 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확신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는 단지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다. 본문은 그의 몸의 부활의 증거로 막달라 마리아가 주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주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그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놓여 있었고, 그 무덤에서 두 천사가 나타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의 부활의 사실을 전해주었고,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이런 사실들은 주 예수의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의심치 말고 확신하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증한다. 고린도전서 15:20-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19-31절,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본문은 주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즉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셨다고 증거한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께서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셨음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체는 신비한 몸이었다. 물론 그의 몸은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었다(20절).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 몸의 회생(回生)이 아니었다. 그 몸은 변화된 몸이었다. 그의 몸은 닫힌 문을 열지 않은 채 통과하여 방 가운데로 들어오실 수 있는 몸이다. 그의 부활의 몸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가지고 누릴 것과 같은 변화된 몸이었다고 보인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원하셨다.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 불안과 근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 평안을 주셨다.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부활하신 주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되셨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몸으로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셨다. 그것은 며칠 전 유월절 식사 후에 하신 말씀의 성취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니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리라고 하셨다(요 16:17, 20, 22).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예수께서는 다시 평안을 기원하신 후에 그가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것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사명이었다. 전도는 사도들의 사명이며 신약교회의 최대의 임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병 고침이나 기적 행함이 예수님의 사명이 아니었듯이, 단지 교육 사업, 자선 사업, 구제 사업 등의 선한 일들은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그것들이 비록 선한 일이지만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주님의 사명이 영혼 구원의 전도이었듯이,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 오직 거기에 있다. 실상, 영혼 구원의 전도는 이웃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행이다. 죄로 인해 지옥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영혼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선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행 1:8).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라고 보인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되어 있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2:4).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 받은 제자들은 과연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 운동은 죄사함의 운동이다. 죄가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는 도리이다. 전도자들은 복음을 통해 죄사함을 선포하는 자들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7). 오순절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설교하였다(행 2:38). 복음 전파는 죄사함의 선포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죄사함을 받을 것이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은 죄사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엡 5:26). 교회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24-25절]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도마는 이성적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그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자들 중에 도마와 같은 교인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부활하신 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를 위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드레를 지나서”라는 말은 그 다음 주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제자들이 다시 함께 집안에 있었다. 도마도 함께 있었다. 그 날도 제자들은 집의 문들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안은 사람에게 매우 큰 복이다. 히브리말에 ‘평안’이라는 말(솰롬)은 우리말에 ‘안녕’처럼 매우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경제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또 그 다음 주일에 다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주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보인다. 주일에 성령께서도 강림하셨다(행 2:1). ‘주의 날’ 곧 주일에 사도 요한도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계 1:10). 주일은 확실히 구별되었다고 보인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주께서는 믿음 없는 도마에게 말을 건네셨고 믿음의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부활은 영이나 정신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의 사건이었다. 그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고린도전서 15:13-15,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도마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겠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요 또 증인들의 증거의 진실성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말씀하셨다(마 22:29).
[28-29절] 도마가 [그에게](원문)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의심 많았던 도마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을 것이다. 그들은 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기독교 확장의 역사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도다”라고 증거하였다(벧전 1:8).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믿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를 본 증인들의 증거의 말씀들을 담고 있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다.
[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사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을 증거한다.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또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서들을 주신 목적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특징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그의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그 손의 못 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은 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는 문들이 닫힌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올 수 있는 몸이셨다. 그 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천국에서 영생할 몸이라고 보인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안과 믿음을 주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기뻐했고, 주께서는 그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은 우리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려 함이었고 또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 함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며 주께서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의 복을 누리자.
셋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죄사함의 사역을 지시하셨다. 복음 전파는 죄사함과 영생을 전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죄사함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자. 사람들을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다.
[누가복음 2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반응형
매튜헨리주석1017-요한복음 20장
요한복음 20장
Ⅰ. 부활하신 그리스도 20:1-19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첫 번째 이유는 예수 자신이 부활을 그의 메시야됨의 결정적이고도 가장 유력한 증거로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적들은 그의 부활이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그의 과업의 성취가 이 부활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부활하신 후 자신의 산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행 10:40-41). 그러나 그의 부활에 관한 증거들은 그의 절친한 동료들을 위한 하나의 은혜로 예비되었다. 그리하여 그 증거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의 축복이 되기 위해 그들에 의해 세상에 공표 되어야만 했다.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단계, 즉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 무덤에 온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한다. 이 복음서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갔던 다른 여인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동안 그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으며 자기 재산을 바쳐 그를 섬겼다(눅 8:2,3). 그리스도의 임종 때와 그의 사후에 그녀가 보인 그에 대한 지속적인 경의의 실례들은 그녀의 사랑의 신실성을 입증한다. 만약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 사랑이 십자가를 지켰기 때문이다.
1)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그리스도의 시신을 씻어 드리기 위해 무덤에 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곳에서 곡하였고 준비한 향료를 시신에 붓기 위해 무덤으로 갔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무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특별한 애정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연약하고 겁 많은 여성이 그런 애정을 지녔다는 것은 특이할만 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과 무덤의 공포를 제거할 것이다. 우리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러한 곳에서조차 결코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다.
2)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왔다. 그녀는 안식일 직후인 그 주간의 첫날에 무덤으로 왔다. 이 날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안식일이 되었다. 이처럼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방문한 한 여인 마리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당도하였다. 그리스도를 뵙기 위하여 그를 찾는 사람들은 이른 시간에 그를 방문해야만 한다. 그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찾도록 하자. 부지런히 그를 찾도록 하자. 늦기 전에 그를 찾도록 하자. 한 날을 이렇게 시작한다면 그 날은 보다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으리라. 아직 어두울 때에도 그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더 빛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그녀는 옮겨진 돌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 돌이 무덤의 입구에서 굴러가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제 이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①그녀의 놀라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의 무덤은 구원의 샘들 중의 하나이다. 만약 우리가 신앙으로 이 무덤에 온다면, 우리는 무덤의 돌이 굴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자유로이 그곳으로 다가가서 그 구원의 무덤으로부터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일찍부터 그를 찾았던 자들은 종종 놀라운 위로로써 격려 받곤 한다. ②최초의 영광스런 발견: 비록 그녀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납득치 못했다 할지라도 주님은 부활하셨다. 가장 충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감미롭게 깨닫게 된다. 치욕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뒤따른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높임을 받으실 때 그를 최초로 만나 보게 되었던 것이다.
(2) 치워진 돌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절). 그녀는 그 앞의 돌이 옮겨진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 무덤이 비었음을 알았다. 우리는 최초로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확실히 주께서 부활하셨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 말씀에 이어서 ‘내가 다시 사흘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빈 무덤을 보고도 그가 부활하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불행한 시기에 처했을 때의 자신의 행동을 회고해 볼 때 우리는 그 당시에 우리 자신이 범했던 어리석음과 부주의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후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주를 가져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의혹이 어떠한 것이었건 간에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민과 당혹 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그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실제로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쁨이 되는 일을 자못 불평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녀는 홀로 이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사실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알렸다. 슬픔을 서로 고하는 것은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시키려는 훌륭한 방편이다. 베드로는 비록 주를 부인했지만 주님의 친구들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볼 때 그의 회개가 진실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전처럼 그와 계속적으로 교제한 것은 우리가 결점을 가졌던 자들과도 다시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납하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3,4절). 혹자는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써 누가복음24:9절의 ‘저희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들에게 고하였다’는 말씀을 들고 있다. 그러나 무덤으로 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뿐이었다. 이들은 간혹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의 특권에 있어서 남보다 더 영예를 누리는 자들이 제자 됨이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남보다 더욱 능동적이며, 고난과 역경을 보다 잘 감당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본문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마리아가 자신이 본 것을 그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직접 가서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유익을 주는 말씀을 전해 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직접 시험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친구들의 염려와 두려움에 동참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얼마나 서둘러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안전이나 위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무덤으로 갈려갔다. 선한 일을 할 때 선한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살펴보자. 제자들이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서로 뛰어나고자 노력한 사실이 얼마나 칭찬 받을 만한 경쟁의식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러 달려간 것을 좋지 못한 태도로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시기해서도 안되며, 좀 못하는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결코 경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이 경주에서 선두 주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 속에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불태우는 것은 우리의 덕성을 탁월하게 만들 것이다. 뒤에 처진 주자는 베드로였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였고 그 때문에 슬픔과 치욕에 잠겨 있었다.
[4] 무덤에 당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조사 작업에 착수한다.1)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조사한 것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덤 속을 살피고 그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았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무덤 속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온화한 사랑을 지닌 자라고 해서 언제나 가장 용감한 결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2)베드로는 최초로 무덤에 들어가 요한이 발견한 것보다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6,7절). 요한이 매우 조심스럽게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그곳에 당도하여 용기를 내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베드로의 담대함과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얼마나 다양하게 베풀어주시는가를 살펴보자. 경주에서는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렀지만 담대함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요한을 능가하였다. 날렵한 제자들이 있는 반면, 담대한 제자들도 있다. 전자는 느린 사람들을 고무하는 데 유용하며, 후자는 소심한 사람들을 담대하게 하는 데 유용하다. 열심히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자들은 근거 없는 걱정이나 어리석은 환상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곳은 그리스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체를 보거나 무덤 가운데 홀로 있을 때 느끼기 쉬운 두려움에 빠져들지 말고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우리는 담대히 무덤을 통과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을 통해 영광에 이르셨으며 우리도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 영광에 이르셨으며 우리도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과 사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 오히려 죽는 편이 훨씬 낫다. 베드로가 무덤 속에서 발견한 물건들의 상태: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자신의 수의를 남겨두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다시는 죽으시지 않을 것이므로 그 수의들을 무덤 한쪽 곁에 놓아두시었다. 나사로는 수의를 걸친 채 무덤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수의를 다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의 사망으로부터의 생명으로 부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수의를 남겨 놓아야만 하며 우리의 모든 부패함도 벗어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수의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덤 속에 남겨 놓으셨다. 그는 그 무덤이 성도들을 위한 침대로 가정하시고 미리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이부자리를 깔아 놓으셨다. 수의는 잘 정돈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 그의 시체를 훔쳐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요한을 고무하였다. 이제 그도 무덤에 들어갈 마음이 생겨 과감하게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보고 믿더라(8절). 요한은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①요한은 용기를 내서 베드로를 뒤쫓아 들어갔다. 만약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요한은 결코 무덤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선한 일을 할 때 타인의 담대함으로 담대함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난관과 위험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사람의 결단과 용기를 봄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의 민첩성이 베드로로 하여금 더 빨리 달리도록 만들었다면 이제 베드로의 담대함이 요한을 더 용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와 보조를 같이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②요한은 베드로보다 앞서 믿었다. 베드로는 보고 놀랐으나(눅 24:12), 요한은 보고 믿었다. 사고형의 인간이 행동형의 인간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증거를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더디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복음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9절).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절).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로 제자들 자신이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얼마나 주저하였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후에 그들로 하여금 확신을 갖고 그의 부활을 증거 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을 주저하였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경솔하게 결정된 것도 아니며 또한 맹목적인 신앙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어떤 기이한 일, 즉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그러나 일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처음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건을 믿는 데에 너무도 소심했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은 그들이 엄청난 확신을 갖고 증거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일 줄 모르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둘째로 그들이 더디 믿게 된 데에는 보다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더라’는 말씀은 나머지 제자들 중에서 본 복음서의 기자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3)베드로와 요한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그들의 탐구를 더이상 진척시키지
못하였다.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0절). 그 들이 돌아간 이유는 시체를 훔쳐갈 계획으로 와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또한 시체가 행방불명된 지금 그 혐의로 고소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험난하고 위험스러운 시대에는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결단력 있게 자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당황하여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또한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무슨 방도를 취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연약하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나머지 제자들은 함께 모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두 제자는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당도하기 전에 한 천사가 나타나 돌을 굴려 버리고,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여인들을 위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이 무덤을 떠나가자마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두 천사를 보게 된다(12절).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가서 그 속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그 천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시에 따라 임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곳에 있다. 천사들을 볼 수 있는 이러한 은혜는 일찍이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맨 처음에 와서 끝까지 남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그러나 잠시 들렀다 가는 삶들에게는 이러한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Ⅱ.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20:11-18
1. 주 예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지속적이고도 뜨거운 사랑(11)
[1]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이 떠난 후에도 무덤에 계속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녀의 주님이 매장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 훌륭한 여인은 비록 그리스도의 여의였지만 그를 위해 그의 무덤을 지키고자 하였다. 설사 그의 사랑이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고자 한 것이다. [2] 그녀는 거기 남아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여읜 사람들은 울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반드시 울어야만 한다. [3]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11절).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에는 그것이 마지막으로 놓여 있던 장소를 거듭 살펴보며,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울음은 결코 찾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울면서도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2. 무덤에서 그녀가 본 두 천사들(12, 13)
[1] 그녀가 본 천사들의 모습: 그들은 무덤 속의 ‘흰 옷 입은 두 천사들’로 하나는 ‘머리 편에’ 다른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① 그들의 본성: 그들은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파송된 천사, 즉 사자들이었다. ②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가 탄생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천사들은 그를 수종할 임무를 맡은 것이다. ③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알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주를 대면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④ 그들의 수효 :그들은 주의 부활을 찬양하기 위해 내려온 수많은 천군의 무리가 아니라 그것을 증거하기 위한 단 ‘두 명’이었다. ⑤ 그들의 복장: 천사들은 순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 영광을 입은 성도들이 천사들처럼 될 때, 그들은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갈 것이다. ⑥ 그들의 자세와 위치: 그들은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 앉아 있었다. 이 천사들이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우리에게 무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무덤은 우리가 하늘로 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장해도 되지 못한다. 이들 천상의 파수 군들은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을 쫓아내고 그 무덤을 지켰다. 이는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그들이 서로 마주하여 하나는 예수의 침상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은 것은 우리에게 속죄 소의 양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두 그룹을 상기시켜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위대한 속죄 소가 되신다. 그의 머리 편과 발편에 두 그룹들이 있는데,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에 이르지 못하도록 불 검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그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안내해 주는 고마운 사자들인 것이다. [2] 막달과 마리아가 슬퍼하는 이유에 대한 천사들의 동정적인 질문: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 이 물음 속에는 그녀의 울음에 대한 힐책이 담겨 있다. 즉 이 물음은 “네가 기뻐할 이 때에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흘리는 많은 눈물은 이 마리아의 경우처럼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찾기도 전에 눈물의 샘에서 말라버릴 것이다. 이 질문은 천사들이 성도들의 슬픔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서로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 또한 이 질문은 그녀의 애통을 기쁨으로 변모시키는 소식을 그녀에게 전해 주기 위한 하나의 단서로 제기된 것이다. [3] 그녀와 현재 겪고 있는 곤경에 대한 그녀 자신의 우울한 설명: 그녀는 “내가 향유를 부어드리고자 하여 와보니 사람들이 복된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 버렸고 또 그들이 그것을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첫째, 그녀의 연약한 믿음: 사람들은 간혹 상상에 불과한 곤란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하게도 스스로 당황하곤 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이러한 곤경이 오히려 참된 유익이 됨을 발견한다. 둘째, 그녀의 강인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들의 환상에 놀라 자신의 조사 작업을 중단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이 나의 주님을 데려갔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천사들의 모습이나 미소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나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의 미소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천사들의 출현은 그리스도를 찾는 그녀의 조사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실마리가 될 뿐이다. 천사들이 그녀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자, 그녀는 “내게는 우란한 충분한 이유가 있나이다. 사람들이 내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버림받은 자의 슬픔, 그것은 경험해 본 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슬픔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로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들을 상실하고 어둠 속을 걸어가게 되는 슬픔이기 때문이다.3. 그녀가 천사들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 그녀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14-17)
그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타나셨다. 이제 마리아는 주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될 것이며, 그녀의 오른편에 계신 그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뵙는 것을 진실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지체없이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되 때때로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방식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기를 갈망한 마리아가 살아 계신 그의 모습을 목격한 것을 보라. 이와 같은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1] 그리스도는 먼저 자신을 그녀로부터 숨기셨다.1)그는 보통 사람처럼 서 계셨으며, 그녀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14절). 그녀는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뒤를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으나, 그가 예수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되'(시 34:18)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그를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은 항상 그들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열심히 주님을 찾는 자들은 그를 찾는데 있어서 모든 방법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혹시 무엇을 발견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르 찾으려는 진지한 소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 가까이에 계시지만,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가 예수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2)그리스도는 그녀에게 평범한 질문을 던졌으며, 그녀는 그가 질문하는 대로 대답했다(15절).
①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던지신 질문은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절).”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말씀은 그가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슬픔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는 그의 백성들의 근심을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너희가 무엇을 바라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②그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절). 첫째, 그녀의 오해: 마리아는 우리 주 예수를 동산지기로 착각했다. 불행한 시절 속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은 종종 그리스도를 쉽게 오해하기 마련이다. 둘째, 그녀의 진실된 예정: 그녀의 심령이 그리스도를 찾는 데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는가를 보라.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찾는 일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관해 말할 때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만일 이 동산지기가 그리스도를 옮겨갔다면,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강렬한 애정의 또다른 증거는 그녀가 그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든지 그것을 옮겨오려고 한 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시체는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옮기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 이상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어떤 장애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장소에는 결코 머물지 않은 신다.
[2] 그리스도는 결국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드러내셨고 그녀에게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 주셨다.1)그리스도께서 이 선한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방법: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16절). 그는 그녀에게 늘 하셨던 대로 친절하신 태도로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음성을 바꾸사 동산지기와 같은 어투가 아닌 자신의 본연의 어투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고 있다'(요 10:4). 그리스도의 “마리아야”라는 이 한 마디 말씀은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나다”라는 말씀과 같은 성질의 말씀이었다.
2)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 경위: 그녀는 뒤로 돌이켜 랍본이여 곧”나의 선생님이시여”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서 나의 선생님이라는 경칭을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랍본이란 말을 랍비라는 말보다 더 명예로운 칭호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이 칭호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나의 위대하신 선생님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와의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허용해 주셨을지라도 그는 우리의 선생님이시다. 그녀는 감격에 벅차서 그리스도께 이 칭호를 드렸다. 그녀는 예수 님을 바라보기 위해 천사들로부터 돌이켰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 심지어 가장 총명하고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그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벗어나게 하여 그리스도께 집중시켜야 한다. 그녀가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생각했을 때 그녀는 그와 말을 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게 디자 그녀는 몸을 돌이켰다.
3)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명하신 상세한 지시들(17절):그리스도는 본문에서”나를 만지지 말라. 그리고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①이때 그리스도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17절)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와 친근한 교제를 나누며 대화를 하고 싶었던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셨다. 마리아는 그를 감격스럽게 포옹함으로써 그녀의 기쁨을 나타내려고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때 그것을 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해야 하셨기 때문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는 자기를 만져보라고 명하셨다. 그녀는 주님을 믿고 찬양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전처럼 그와의 친숙한 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체적 현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금하심으로써 그가 그의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후에 그녀와 나누어야 할 영적인 친교로 그녀를 인도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아직 승천하지 못하였으나 가서 내 형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승천하리라고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운명하시기 전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후에도 그가 승천하리라는 사실을 누누히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주님의 육체적 현현 이상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사물의 현상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더 이상 상세한 것을 묻거나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노라. 이는 내가 아직 승천하지 못했기 , 때문이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체치 말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라.” 마리아는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주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 날은 기쁜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②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의 내용을 지시해 주셨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올라간다 하라(17절). 이 메시지를 전달받을 사람: 이 소식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가라,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의 영광의 문턱에 서 계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들을 그의 형제로 여기신다. 이제까지 그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으나, 형제라고 부르신 적은 결코 오만하시지 않으시다. 그는 높아지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초라했던 관계들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으셨다. 그는 제자들이 모두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간 이후로 결코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 일을 잊으시며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으신다. 이 메시지의 전달자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 내셨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리스도의 전령이 된 것은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추종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사도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된 것이다. 메시지의 내용: 그것은’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써 하나님과도 연쇄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는 “그는 나의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곧 그는 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너희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예수 안에서 신자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그들의 존엄성을 매우 고양시켜 준다. 우리는 양자 됨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하나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나님이 곧 너희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기꺼이 인정하신 것은 그의 겸손하심을 나타내 준다. 구속 자이신 그리스도를 지원하시기 위해 그의 하나님이 되신 그 분은 구속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제는 구원받은 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늘 나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승천하리라고 그들에게 전하라고 그의 육체적 현존의 존속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내가 부활하였으나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그들 의 용무를 위해 하늘나라로 갈 것임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영적인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도 부활하여 승천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이 그들의 집이요 안식처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난자는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가 승천하니 하늘의 것만 구하노라 는 말씀을 명심해야한다. 이 말씀은 제자들과 저희를 통하여 그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다. 그가 승천하셨을 때, 그는 그의 아버지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올라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의 승천을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위해 우리의 선두 주자로 승천하셨다.
혹자는 ‘내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그의 말씀 속에는 우리의 부활에 관한 약속이 포함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내가 살았으니 너희 또한 살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4.제자들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성실한 보고 (18)
그녀는 제자들에게로 와서 그녀가 주님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고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눈물을 흐리며 주의 깊게 주님을 찾았던 그녀와 함께 머물지 않고 그녀를 그곳에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이제 그녀는 주님의 몸이 산몸이요 영광을 입으신 몸임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찾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을 발견했으며, 몸소 주님을 목격했다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때, 그 속에는 우리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경륜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녀 역시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전해져야 할 메시지인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하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Ⅲ.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20:19-25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확고한 증거는 ‘그가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행 1:3)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제자들의 모임에 최초로 모습을 나타내신 것에 관한 설명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부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셨지만,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소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사심을 눈으로 직접 목격시키기 위해 친히 그들에게로 오셨다.
1.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제정하신 세 가지 보조적 규례들이 있다. 이세 가지 보조적 규례들은 거룩한 제반 신앙 집회들, 그리고 목사직에 관한 것이다. 이 보조적 규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의 나타나심에 관해 기록된 이 본문에 명시되어 있다. 즉 첫 번째 두 규례는 19절에, 다른 하나는 21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1]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자들에 의해서 준수되고 우리 주 예수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방문하신 날은 주의 첫날이었다. 그리고 주의 첫날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로 날이나 달,그리고 해를 표시한 곳은(필자의 견해로는)신약 성경 속에서 부활에 관한 기사 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날은 신앙적으로 엄숙해야 할 날로 수차례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실상 하나님이 그 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제자들이 엄수하고 주 예수께서 승인하신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보게 된다. 아마도 제자들은 일종의 신앙 훈련, 즉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이 곳에 모였던 것 같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를 격려하며 현재의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해 모였다. 이 집회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집에서 모였으며,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문을 잠갔다. 그리고 그들은 아는 사람 외에는 결코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폭풍우 속의 양떼들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양이 군거성동물이기 때문에 다시 모이듯이 그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집회가 구석진 곳으로 몰려나거나, 강제로 광야로 추방당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골방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닫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2.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셔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20-23)
그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오셨다. 그의 이름으로 두 세명이 모인 곳에 그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 그는 문이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오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엄숙한 집회를 비밀리에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잠긴 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출현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제자들에 대한 그의 친절하고도 친근하신 인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19절). 이 말씀은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는 말씀은 ‘온갖 축복이 너희에게 임하기를 혹은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온갖 평강이 너희와 항상 함께 하기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유산으로 그의 평강을 남겨 주셨다(요 14:27). 그는 본문에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유산을 신속히 유효케 하신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너희 양심에 평강이 있으라. 너희가 서로 화목 하라. 이 모든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그러나 세상과 화목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라.” 그들 가운데로의 그리스도의 급작스런 출현은 그들에게 일종의 혼란과 당혹 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의 술렁거림을 진정시키셨다. [2]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고도 부인 할 수 없게 나타내신 그리스도(20절):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자.1)그가 부활의 진실성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취하신 방법: 그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그의 육체의 상혼보다 더 명확한 증거는 결코 없다. 주 예수의 상혼들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도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 상혼들은 부활의 진실성을 입증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이 입은 상혼을 영광으로 여기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입으신 상처들은 그가 곧 죽으신 바로 그 분임을 세상에 웅변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상처를 지니신 채로 부활하셨다. 또한 그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실 때에도 그 상혼들은 호소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상혼들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다. 그는 제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 상처 자국들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제자들은 예전의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예전의 그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된 것에 대해 기뻐했을 뿐 아니라, 상혼과 같은 그러한 특별한 흔적을 통해 더욱 확실한 증거를 대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손바닥의 상처를 보여주시기 위해 손을 펼쳐 보이셨다. 그리고 가슴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가슴을 열어 보이셨다. 영광을 입으신 구속 자는 그의 모든 신실한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위해 언제라도 자신의 손을 펼쳐 보이시고 가슴을 열어 보이실 것이다.
2)그 상혼들이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 제자들은 그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이 약했던 기간 동안에는 그들이 받은 위로가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은혜를 통해서 그 위로가 실제적이고 견실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연후에 제자들이 기뻐하였다. 본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을 어느 정도 황홀감과 승리감에 도취되어 기술한 것 같다. 제자들은 주를 보고는 너무도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겠는가! 그 사건은 그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활력소였다. 이제’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다'(요 16:22)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거두어 갔다.
[3]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교회를 세울 대행 자로 위임하심(21절).1)그들의 위임을 위한 서언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앞서 언급되었던 인사가 엄숙하게 반복되고 있다. 앞에서의 인사는 그들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킴으로써 그들로 부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킴으로써 그들로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조용히 경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사는 그들의 기쁨으로 들뜬 분위기를 무마시킴으로써 이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조용히 경청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 서언은 그가 수여하신 위임을 그들이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그들을 격려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게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그들에게 그 평화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도록 그들에게 당부하셨다.
2)위임의 내용: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실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파송하셨는가를 이해아기란 쉬운 일이다. 즉 그는 그들에게 세상에서 자신이 행하였던 사명을 계속 수행할 것을 지시 하셨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시켜 파송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도들, 곧 파송받은 자들로 불리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하신 것처럼 그가 제자들을 파송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들이 받은 위임과 권능은 그가 받으신 위임과 권능에 비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①제자들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물려주신 것을 계속 추진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파송받으셨듯이 그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파송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화해의 중보자들로서가 아니라 화해의 설교자이자, 선포자로서 파송받았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가문 중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파송하셨듯이 그리스도 역시 그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셨다. ②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하실 권한을 지니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그들을 파송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계셨으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권위로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과업을 위해서 비교할 수도 없는 권한과 형언할 수도 없는 능력을 구비하셨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과업을 위하여 그러한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한 말씀은 그의 권능이 제자들에게서 재현됨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에게 주어진 중보자로서의 권위에 힘입어 제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활동할 권위를 수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자는 곧 그를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결과가 되며, 이는 결국 그들을 파송하신 분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결과가 된다(요 13:20).
(4) 그들의 자격(22절):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1)그가 취하신 상징: 그는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셨다. 이는 그가 실제로 살아 계심을 이 생명의 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로부터 받게 될 영적인 생명과 권능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전능 자이신 하나님의 숨이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옛 세계를 시작하셨듯이, 위대하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숨도 그의 사역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새 세계를 시작하셨다. 성령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그리스도의 생기이다. 하나님의 숨은 그의 진노의 권능을 나타내지만 그리스도의 숨은 그의 은혜의 권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진노의 숨이 사랑의 숨으로 변화된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사이다. 사도들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대행 자들로서 성령을 전달하는 임무만을 담당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숨을 내쉼으로써 성령을 수여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 은사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2)그가 엄숙하게 성령을 수여하심: 서령을 받으라(22절). 첫째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성령의 도우심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신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너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이 역사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성령으로 감싸주시며 필요한 모든 능력들을 그들에게 제공해 주신다. 둘째로 여기서 그는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의 양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믿음이 생길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이제 그들이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 너희 안에서 용기가 생길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전하신다.
(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수여하신 한가지 특별한 권능이 본문에 상술되어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절). 이러한 권능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결과로써 수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특별한 판단의 영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그들은 그러한 권위를 위임받기에 적합하지 못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죄사함의 은사는 교회나 그 사역 자들에게 부여된 일반적인 특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 은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신실한 청지기들로 하여금 그들이 파송되어 전파해야 할 복음을 고수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도 구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사면의 법령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그의 복음 통지 자들을 파송하신다. 복음이 사면하는 사람들은 사면 받게 될 것이지만, 복음이 정죄하는 자는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목회의 명예를 무한히 고양시키고 목회자에게 무한한 용기를 가져다준다. 외사함에 관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다음의 두 가지 권위 있는 원칙에 의거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1) 건전한 교리에 입각한 원칙: 사도들은 복음 이외의 다른 방편으로는 결코 구원이 성취될 수 없음을 세상에 전해야할 사명을 위임받고 있다. (2) 엄격한 계율에 입각한 원칙: 복음의 보편적 규율을 특정한 개인에게 적용함으로써 죄사함을 결정한다.
3. 도마의 불신(24)
이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출현의 계기가 된다.
(1) 도마의 부재(24절): 그는 비록 현재 열 한 명이지만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때 그들은 열 한 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또 한 명이 부재중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있을 천국 총회가 열릴 때까지는 결코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할 것이다. 도마는 그때 불참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것에 대해 기쁨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2)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함(25절): 그들은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했다. 당시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잇지는 아니하였지만, 그가 그리 먼 곳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불참했다고 해서 영원한 변절자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도마는 유다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우리가 주를 뵈었소. 자네도 같이 있어서 그를 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그 자리에 없었던 자들에게 다시 들려줌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경험했던 것을 전해줌으로써 서로 상대방을 그들의 가장 거룩한 믿음 안에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뵙고 그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역사 하신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다만 오만하게 떠벌리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3) 그 증거에 대해 도마가 제기한 반론: 그는 “나는 그의 손바닥의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며 또한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그를 거칠고 까다로우며 성마르게 말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한다.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꼭같이 좋은 성격을 지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여기서 많은 과오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도마는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유의하지 않았거나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그의 동료 제자들의 증언에 각별한 경의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그들 열 한 명 모두가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보고가 사실임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의문을 품은 점은 그들의 정직함이 아니라 그들의 경솔함이었다. 즉 그는 그들이 너무 쉽게 믿어버린 점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방법으로 믿으려고 했거나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시험했다. 도마는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만져봄으로써 얻는 증거를 통해서만 믿기를 고집했다. 또한 그는 그 사실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면전에서 도마의 이러한 공개적인 공언은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또한 그들을 낙담시켰다. 한 사람 의 겁쟁이가 많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들 듯이, 한 사람의 불신자 혹은 회의론 자도 역시 그러한 영향을 끼친다. 도마는 자신의 불신을 매우 단호하게 선포하였으므로 나머지 제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Ⅳ. 그리스도의 재출현 20:26-3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출현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 이때는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1. 그리스도께서 출현하신 때(26)
그 날은 그의 부활로부터 ‘여드레 후인’날로서 ‘그 다음 주의 첫날’이었음이 분명하다.
(1)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동안 자신의 재출현을 지연시키셨다. 그것은 그가 저 세상에 속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란 사실과 때로 필요한 경우에만 이렇게 방문하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의 사역의 초기에 40일 동안 모습을 드러내시지 아니하시고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의 영광의 초기인 이 40일 동안 대부분 모습을 드러내시지 아니하시고 선한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셨다.
(2) 그는 자신의 재출현을 7일간 지연시키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도마의 불신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였다.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지는 법은 아니다. 한 번의 기회를 놓친 자는 다른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던 반면, 도마는 한 주일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재출현을 지연시키신 또 하나의 이유는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심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그들이 주를 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때 커다란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과연 그들이 확보한 기반을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하시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그의 육체적 현존으로부터 그들을 점진적으로 떼어놓으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그의 재현이 지체된 또 하나의 이유는 주일의 첫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주의 첫날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로 준수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뜻을 명백히 알리시기 위해 그의 재현을 일주일간이나 지연시키셨다. 이 날을 엄숙하게 준수하는 것은 그때부터 교회의 전 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승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신 장소와 그 과정(26)
이 방문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졌으며,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들이 닫혀 있었다. 이때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비록 그가 전에는 그 자리에 없었으나 두 번 씩이나 자리를 이탈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한 번의 기회를 놓쳤을 때, 우리는 다음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더욱더 진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그러한 손실이 우리의 갈망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을 식혀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쁜 징후일 뿐이다. 제자들은 도마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들은 그를 의문의 여지가 있는 논쟁에 끌어들이지 않고, 그가 기꺼이 와서 주를 만나 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 사이에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서야 비로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도마를 책망하셨던 사실과 그 책망 중에서도 그를 온유하게 배려해 주셨던 사실에 대하여 모든 제자들을 증인으로 삼고자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사이로 오셔서 그 한가운데 서셨다. 우리 주 예수의 겸손하심을 보라. 그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지상에 체류하시면서 가련한 제자들의 조금한 비밀 집회를 방문하사 그들 가운데 서 계신 것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인사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반복적인 말씀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엄청난 평강을 주실 것과 지속적으로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이 집회에서 그리스도와 도마 사이에 주고받은 내용(27-29)
본문은 이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1) 도마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신 겸손(27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도마를 불러내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과 못자국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1)그리스도서는 도마가 분명하게 언급한 것에 대해서 조목조목을 따져 응답하심으로써 그의 불신을 은연중에 책망하셨다. 비록 우리의 혀로 불신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또한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전혀 품지도 않았을지라도,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알고 계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의 나약함을 겸손히 받아들이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도마를 불신 가운데 내버려두시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도마의 환상과 같은 부질없는 일에까지 기꺼이 순응시키신다.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그의 손을 자신의 옆구리에 넣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가 믿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상처가 만져짐을 당하는 것조차도 감당하신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실 목적으로 하나의 의식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의식 속에서 주의 죽음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못자국 속에 우리의 손가락을 넣어보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자. 그리하면 그가 도움과 권유와 자비의 손을 우리에게 뻗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하신 최후의 말씀 곧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소망과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 도마의 믿음: 이제 그는 자신의 불신을 부끄러워하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외친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자신의 손을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넣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29절)고 말씀하셨다. 즉 도마는 그를 본 것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믿음을 통하여 승리자가 되었다.
1)이제 도마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에 관한 의구심을 완전히 해소시켰다. 믿음에 대한 그의 소극적 자세와 후퇴는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2)그러므로 도마는 그를 주님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믿었으며,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①우리는 그의 신성, 즉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는 인간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다. ②우리는 그의 중보, 즉 그는 한 분이신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중대한 관심사들을 조정하시며, 우리의 행복에 필요한 가교를 설치해 주신다.
3)도마는 그를 자기의 주님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믿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명하신 바가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이러한 고백은 생명력 있는 믿음의 행위이다.
4)도마는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향해 “당신은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했거나, 그의 동료들을 향하여 “이분은 나의 주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있는가? 우리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도마와 같이 말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승리하는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도마는 그리스도를 진심을 다해 붙잡았던 사람처럼 열렬한 애정으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3) 그리스도의 결론적인 답변(29절):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도마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29절). 그리스도는 도마를 신자로 인정하신다. 건전하고 신실한 신자들은 비록 그들이 연약하고 더디다 할 지라고 주 예수를 은혜롭게 영접할 것이다. 도마가 그리스도를 시인하자마자,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의 이전의 불신을 들어 그를 책망하신다. 도마는 믿는 데에 더디 하였으므로 그 자신의 위로에 이르는 데에도 그만큼 지연되었다.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른 자들은 후에 그들이 왜 좀더 일찍 그를 따르지 못했을까 하고 애석해 하는 많은 이유들을 갖게 된다. 도마는 순탄치 못한 과정들을 거쳐 마침내 믿음으로 인도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감각 외에는 어떠한 증거도 용납될 수 없고, 우리 자신이 목격한 것만 믿어야 한다면, 세상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어떻게 개종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크게 강조하기 위하여 도마는 마땅히 책망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다 쉬운 방법을 통해 믿는 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도마는 한 신자로서 실로 축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특히 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도 믿은 자들이 더 큰 축복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을 보지 못하고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이러한 축복은 장차 믿게 될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육체를 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은 보고 믿은 자들의 믿음보다 더 칭찬할 만한 것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훌륭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자는 믿지 않으려고 내적인 저항 의식을 일종의 강압에 의해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더욱 고귀한 자이다.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는 보다 큰 예증이 된다. 보고 믿는 자 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보다 더욱 혈육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4. 역사가가 어떤 결론을 추론해 내듯이 이 복음서 기자가 밝힌 소견(30,31)
(1) 복음서 기자는 다른 많은 일들이 행해졌으나 ‘많은 표적들이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다.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다른 표적들과 다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한 자들은 부활에 관한 증거를 찾거나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런 단편적이고도 빈약한 증거물들을 채택하거나, 추측으로 그 나머지 부분을 보완하는 데에 급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충분히 여분이 있을 정도의 증거를 갖고 있었다. 제자들은 직접 다른 표적들이 행해지는 것을 목격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엄청난 양의 증거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 표적들이 모두 기록되지 않았는가, 왜 이보다 더 많은 표적들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이것들 외의 다른 표적들을 기록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물을 필요가 없다. 이 기사가 단지 인간의 작품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논쟁의 쟁점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숱한 조서와 진술서들로 말미암아 그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으므로 필자들은 이 기사를 거룩한 보증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 기사는 기꺼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들을 확신시키고 완악한 자들을 불신 속에서 정죄하기에 충분했다. 만일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은 내용이 기록되었으도 역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신용을 얻기 위해 온갖 말을 전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주실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만일 이 기사가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라면, 이 복음서 기자는 좀더 풍부한 내용을 수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록되었고 그러한 의도에 충분히 부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복음서 기자는 우리가 접하는 본문의 기록의도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너희로 예수께서 믿게 하려 함이요(31절).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복음을 기록한 자들의 의도: 복음서 기자들은 본인에게나 다름 사람들에게 당면한 이익이 되는 어떠한 견해도 배제하고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믿도록 설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2)복음을 읽고 듣는 자들의 의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이다. ①우리가 믿어야 하는 위대한 복음의 진리는 예수는 곧 그리스 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시다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왕과 구세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받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칭함을 얻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②우리가 소망해야 할 위대한 복음의 축복은 그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방향을 지시해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생명이 우리의 기쁨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해 준다. 인간은 어떤 커다란 이익이 기대될 때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제공되는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생명의 말씀은 영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 모두를 포함한다. 이 두 생명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얻어지며, 모든 진실한 신자들은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이 두 생명을 확실히 얻게 된다.
#1-10 If Christ gave his life a ransom, and had not taken it again, it would not have appeared that his giving it was accepted as satisfaction.
It was a great trial to Mary, that the body was gone.
Weak believers often make that the matter of complaint, which is really just ground of hope, and matter of joy.
It is well when those more honoured than others with the privileges of disciples, are more active than others in the duty of disciples; more willing to take pains, and run hazards, in a good work.
We must do our best, and neither envy those who can do better, nor despise those who do as well as they can, though they come behind.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in a special manner, and who therefore in a special manner loved Jesus, was foremost.
The love of Christ will make us to abound in every duty more than any thing else.
He that was behind was Peter, who had denied Christ.
A sense of guilt hinders us in the service of God.
As yet the disciples knew not the Scripture; they Christ must rise again from the dead.
#11-18 We are likely to seek and find, when we seek with affection, and seek in tears.
But many believers complain of the clouds and darkness they are under, which are methods of grace for humbling their souls, mortifying their sins, and endearing Christ to them.
A sight of angels and their smiles, will not suffice, without a sight of Jesus, and God’s smiles in him.
None know, but those who have tasted it, the sorrows of a deserted soul, which has had comfortable evidences of the love of God in Christ, and hopes of heaven, but has now lost them, and walks in darkness; such a wounded spirit who can bear? Christ, in manifesting himself to those that seek him, often outdoes their expectations.
See how Mary’s heart was in earnest to find Jesus.
Christ’s way of making himself known to his people is by his word; his word applied to their souls, speaking to them in particular.
It might be read, Is it my Master? See with what pleasure those who love Jesus speak of his authority over them.
He forbids her to expect that his bodily presence look further, than the present state of things.
Observe the relation to God, from union with Christ.
We, partaking of a Divine nature, Christ’s Father is our Father; and he, partaking of the human nature, our God is his God.
Christ’s ascension into heaven, there to plead for us, is likewise an unspeakable comfort.
Let them not think this earth is to be their home and rest; their eye and aim, and earnest desires, must be upon another world, and this ever upon their hearts, I ascend, therefore I must seek the things which are above.
And let those who know the word of Christ, endeavour that others should get good from their knowledge.
#19-25 This was the first day of the week, and this day is afterwards often mentioned by the sacred writers; for it was evidently set apart as the Christian sabbath, in remembrance of Christ’s resurrection.
The disciples had shut the doors for fear of the Jews; and when they had no such expectation, Jesus himself came and stood in the midst of them, having miraculously, though silently, opened the doors.
It is a comfort to Christ’s disciples, when their assemblies can only be held in private, that no doors can shut out Christ’s presence.
When He manifests his love to believers by the comforts of his Spirit, he assures them that because he lives, they shall live also.
A sight of Christ will gladden the heart of a disciple at any time; and the more we see of Jesus, the more we shall rejoice.
He said, Receive ye the Holy Ghost, thus showing that their spiritual life, as well as all their ability for their work, would be derived from him, and depended upon him.
Every word of Christ which is received in the heart by faith, comes accompanied by this Divine breathing; and without this there is neither light nor life.
Nothing is seen, known, discerned, or felt of God, but through this.
After this, Christ directed the apostles to declare the only method by which sin would be forgiven.
This power did not exist at all in the apostles as a power to give judgment, but only as a power to declare the character of those whom God would accept or reject in the day of judgment.
They have clearly laid down the marks whereby a child of God may be discerned and be distinguished from a false professor; and according to what they have declared shall every case be decided in the day of judgment.
When we assemble in Christ’s name, especially on his holy day, he will meet with us, and speak peace to us.
The disciples of Christ should endeavour to build up one another in their most holy faith, both by repeating what they have heard to those that were absent, and by making known what they have experienced.
Thomas limited the Holy One of Israel, when he would be convinced by his own method or not at all.
He might justly have been left in his unbelief, after rejecting such abundant proofs.
The fears and sorrows of the disciples are often lengthened, to punish their negligence.
#26-29 That one day in seven should be religiously observed, was an appointment from the beginning.
And that, in the kingdom of the Messiah, the first day of the week should be that solemn day, was pointed out, in that Christ on that day once and again met his disciples in a religious assembly.
The religious observance of that day has come down to us through every age of the church.
There is not an unbelieving word in our tongues, nor thought in our minds, but it is known to the Lord Jesus; and he was pleased to accommodate himself even to Thomas, rather than leave him in his unbelief.
We ought thus to bear with the weak, #Ro 15:1,2|.
This warning is given to all.
If we are faithless, we are Christless and graceless, hopeless and joyless.
Thomas was ashamed of his unbelief, and cried out, My Lord and my God.
He spoke with affection, as one that took hold of Christ with all his might; “My Lord and my God.
Sound and sincere believers, though slow and weak, shall be graciously accepted of the Lord Jesus.
It is the duty of those who read and hear the gospel, to believe, to embrace the doctrine of Christ, and that record concerning him, #1Jo 5:11|.
#30,31 There were other signs and proofs of our Lord’s resurrection, but these were committed to writing, that all might believe that Jesus was the promised Messiah, the Saviour of sinners, and the Son of God; that, by this faith, they might obtain eternal life, by his mercy, truth, and power.
May we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and believing may we have life through his name.
들어가는 말
이 글의 목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부활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요한복음 20:1~29을 중심으로 본문의 의미를 살펴본 후,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교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요점만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이 글에서 요한복음 20:30~31 논의에서 제외시킨 이유는 이 두 구절이 예수님 부활과 관련되기보다는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히고 있는 30~31절은 설교자가 이 복음서를 설교하고자 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요한복음의 어떤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하든지 이 복음서의 목적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설교자의 ‘의미 주입하기’ 또는 ‘의미 지나치기’라는 덫에 걸리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1
요한복음 20:1~29의 문학적 구조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 부활 사건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에도 각각 나타난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 부활 사건은 시간과 장소를 중심으로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18절로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1절)에 예수님 무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건이다. 둘째 단락은 19~29절로 “안식 후 첫날 저녁때”(19절) 예수님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첫째 단락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20:1~18은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1~10절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두 제자 곧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등장한다. 이 부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에 와서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의 두 제자에게 보고하여 그 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한다. 둘째 부분은 11~18절로 막달라 마리아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두 천사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18절)고 증언하는 장면이다.
둘째 단락인 요한복음 20:19~29은 첫 단락처럼 등장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19~23절로 도마를 제외한 예수님의 열 제자가 모여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둘째 부분은 24~29절로 도마를 포함한 열 제자가 모여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도마가 중심 인물이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요약하면 요한복음 20:1~29의 문학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1~18절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서
1~10절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두 제자
11~18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19~29절 안식 후 첫날 저녁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집에서
19~23절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
24~29절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18의 해석
1.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두 제자(요 20:1~10)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과 시간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1절)라고 묘사한다. “안식 후 첫날”은 오늘날 일요일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과 시간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마태는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마 28:1)으로, 마가는 예수님 부활의 날을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막 16:2)로, 누가는 “안식 후 첫날 새벽”(눅 24:1)으로 각각 묘사한다.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님 부활의 날과 시간에 큰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십자가형을 받고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그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이 옮겨진 것을 확인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부활의 현장 목격자로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참조. 마 28:1; 막 16:1; 눅 24:10).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마가는 이 여인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개한다(막 16:9). 하지만 마가복음에 이 사건의 기록은 없다. 이런 사건은 누가복음 8:2에서 확인된다. 누가는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 중에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눅 8:1~2)가 포함된다고 소개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하여 침묵하지만, 마태는 지진이 일어난 것을 묘사하면서 천사들이 돌을 움직인 것으로 암시한다
(참조. 마 28:2). 마가와 누가는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이미 굴려져 있었다고 기록한다(참조. 막 16:3~4; 눅 24:2). 이것은 예수님 부활과 관련하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에서 벌어진 것을 암시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졌기 때문에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시신(屍身)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당시 가끔씩 발생했던 도굴 사건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적대자나 무덤 도굴꾼이 그 시신을 옮겨 놓은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2 그러므로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린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13:23에 등장했던 그 제자이다(참조. 요 18:15~16; 21:20).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보고하면서 2절에 “우리가 알지 못한다”(ouvk oi;damen우크 오이다멘)고 묘사한 것은 예수님 무덤에 갔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언급함으로 두 여인이 예수님 무덤에 간 것으로 기록한다(참조. 마 28:1). 마가는 마태와 달리 예수님 무덤에 갔던 사람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라고 기록하며 세 명의 여인이 있었음을 기록한다(참조. 막 16:1). 이런 보고와 전혀 다르게 누가는 여러 명의 여인들을 언급하며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인들”이라고 기록한다(참조. 눅 24:1, 10).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참조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무덤에 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 부활의 현장을 예수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두 제자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반응은 3~4절에 나타난다. 두 제자는 예수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무덤으로 달려간다. 당시 여인의 말에 대하여 증거의 신빙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본문의 두 제자는 구약성경에 언급한 증인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참조. 신 19:15). 두 사람 가운데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무덤에 도착한다. 공관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제자들은 여인들이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에 대한 증언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메시지를 듣고 그 내용을 전달했지만 믿지 않았다(참조. 마 28:8, 17; 막 16:8, 10~11, 13, 14~15; 눅 24:9~12).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 무덤에 달려온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 밖에서 예수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5절). 그 제자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와서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과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않고 따로 개켜 있는 것을 확인한다(6~7절).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은 도굴의 현장이기보다는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진 것을 베드로의 시각을 통해서 보게 한다. 만일 도굴꾼이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면 예수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정돈되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달리 보다 자세하게 빈 무덤의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현장을 보았지만 믿지 못한다. 요한복음과 달리 마태는 예수님 시신이 그를 장사지낸 무덤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로마의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시체를 움쳐 간 것으로 모의(謀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참조. 마 28:11~15).3
시몬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 즉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도 따라 들어가서 그 모든 상황을 보고 믿었다(8절).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믿은 것”은 예수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 시신이 없어지고 그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만 있는 상황을 확인하고 이해했다는 의미이다.4 그 이유는 9절이 복음서 저자의 설명적 주석으로 두 제자에 대한 상황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에 들어가서 그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지만, 성경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한다.5 그래서 두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예수님 시신이 그 무덤에서 없어진 사실만을 확인하고 실망 가운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것을 묘사한다(10절).
예수님의 두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빈 무덤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기 전에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신 말씀을 기억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참조. 막 8:31; 9:31; 10:33~34). 하지만 복음서의 독자는 예수님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인 두 남자 증인을 통해서 분명히 확신하게 되며, 빈 무덤의 의미가 예수님 부활을 무언(無言)으로 증언하는 강력한 증거인 것을 암시한다.
2.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요 20:11~18)
이 단락(11~18절)은 공관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11절의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를 의미한다(참조. 18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무덤 안에서 일어난 특별한 상황은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쪽에 다른 하나는 발 쪽에 앉아 있었다(12절). 예수님 무덤에 등장한 천사는 마태도 기록하고 있다(마 28:2~3). 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한 천사의 수(數)는 하나이다. 마가는 천사 대신 “흰 옷 입은 한 청년”(neanivsko”네아니스코스)으로 묘사한다(막 16:5). 하지만 누가는 천사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지만 요한복음과 유사하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두 천사의 역할은 앞 단락에서 두 제자의 역할처럼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두 제자뿐 아니라 두 천사도 예수님이 부활하여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을 때,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절)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이 천사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대답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한다(14절).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즉시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부활하신 모습이 생전의 모습과 달라졌기 때문인가? 마리아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않았기 때문인가? 마리아가 너무 울어서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지 못한 것인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하셨지만, 여전히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한다(15절). 오히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하고 요청하기를 만일 당신이 예수님 시신을 옮겨 놨다면 자신에게 알려 주어 그 시신을 가져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을까?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나 믿지 않았고,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상황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를 향하여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시자 그는 즉시 예수님이신 줄 인식하고 아람어로 대답하기를 “랍오니여”(“나의 선생님이여”)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대답한다(16절). 이것은 요한복음 10:3~5에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회상하게 한다. 예수께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에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실 때 즉시 예수님인 줄 알게 된 것은 그의 음성을 듣고 알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를 알아본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17절)고 말씀하신다.6 이 말의 의미는 “나에게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 승천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지만 아직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참조. 막 16:19).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7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 아버지”와 “너희 하나님”은 새 계약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참조. 요 1:12; 요일 3:1~2).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 지금까지 발생한 모든 사실을 믿게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을 처음 전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었다.
요한복음 20:19~29의 해석
1.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요 20:19~23)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이 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때”(19절)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1절)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 있었다. 제자들이 모여 있으면서 모인 장소의 문을 모두 닫았다는 설명은 스승을 잃은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을 말씀하신다(19절). 제자들이 모인 장소의 모든 문을 닫았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셨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영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곧 이어서 부활의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은 부활의 몸이 영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반응은 기쁨 그 자체였다(참조. 눅 24:36~49).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 이미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며 기도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참조. 요 13:20; 17:18). 22절은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2절에 사용된 ‘숨을 쉬다’(ejmfusavw엠후사오)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동일한 동사가 칠십인역(LXX)에서는 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기(생명)를 불어넣는 것을 묘사하면서 사용되었고(창 2:7), ② 선지자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사용되었으며(왕상 17:21), ③ 선지자 에스겔이 마른 뼈들이 모여 있는 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예언을 할 때 사용되었다(겔 37:9).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행동으로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다. 특히 창세기 2:7과 에스겔 37:9 등을 연관시켜 예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 사용된 “숨을 내쉬며”라는 표현은 당시 영지주의 사상을 배격하는 표현으로 요한복음의 반영지주의적 기독론(Anti-Docetic Christology)을 위한 저자의 의도된 묘사라고 생각된다. 이런 반영지주의적 기독론 사상은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는 표현 속에서도 나타난다. 요한복음 21:12~13에서도 이런 사상은 암시적으로 나타나는데, 이 구절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떡과 생선)을 잡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참조. 눅 24:36~43). 그렇다면 본문의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라는 표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육체를 가지신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면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일반적으로 말을 하기 전에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듯이 그렇게 숨을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실제로 그때 성령을 받은 것이며, 그 결과 성령을 받은 자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23절, 참조. 마 16:19; 18:18). 요한복음에서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미 고별 설교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참조. 요 14:16~17, 25~26; 16:7~15). 요한복음 20:23의 내용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세상을 심판하는 기능(참조. 요 16:7~13)과 예수님을 반대하거나 믿는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과 죄의 확정을 내리는 기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죄의 권한을 행사하셔서 사죄(참조. 마 9:6) 및 정죄(참조. 요 9:41, 15:22, 24)를 하셨다. 요한의 신학 사상은 제자(사도)들의 파송이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 새로운 세상을 상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의 첫 시작에서(1:1~3) 첫 창조를 언급한 사실과 요한복음의 종결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제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와 부활하신 예수님(요 20:24~29)
이 단락은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묘사한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을 설명한다(24절).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다시 살아나신] 주를 보았다”라고 증언했을 때 그는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25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과 동일한 분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일주일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가 모였을 때 처음 나타나셨던 것처럼 문을 닫았는데 오셔서 평강을 기원하셨다(26절). 26절은 19절의 내용을 거의 반복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의 요청을 모두 알고 계신 상황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가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 주시려고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27절)고 말씀하신다. 도마는 부활의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도마가 자신의 요구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확인하는 그 순간 믿음은 사라지고 불신앙만 남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부활한 자신을 보여 주시며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도록 도마에게 허락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고 하신 것은 예수님 부활을 믿는 것이 경험과 물적 증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서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28절)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초대교회 당시 전형적인 신앙 고백의 내용이다(참조. 롬 10:9; 고전 12:3).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상도 요한복음의 핵심 신학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도마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궁극적인 기독론을 선언한다.
예수께서 신앙 고백을 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이 질문은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믿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독자는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믿어야 한다. 이런 현실적 상황에서 예수께서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29절)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한복음에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참조. 눅 16:19~31).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기적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설명하지만,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눈으로 확인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반증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신의 안목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부활과 설교의 적용
요한복음의 예수님 부활을 설교하려고 할 때 먼저 설교자는 설교의 의미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을 설교자가 해석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석의하며 도출한 내용을 전달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설교자는 해석자이며 동시에 해석된 성경 말씀을 청중을 향하여 전달한다는 입장에서 전달자이다. 하지만 설교자는 단순한 기계적 전달자가 아니며, 해석하여 깨달은 메시지를 자신이 먼저 진리로 믿고 실천하며 전달한다는 면에서, 설교는 설교자의 신앙 고백적 행위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의 내용을 전달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려하기 때문에 설교학적 제반 요소가 고려되는 것이다.8 하지만 설교는 설교자가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지, 설교자 자신의 지식이나 탁월한 언변으로 청중을 사로잡거나 감동을 주려는 것이 아니기에 설교자는 겸손히 하나님의 성령의 섭리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오류를 범할 다양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설교자가 본문 해석과 관련해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해석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본문 속에 주입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설교자의 고정 관념이나 선입견, 신학 및 신앙적 선호, 취향이, 자신의 의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성경 본문은 설교자의 도구나 증거 자료로 전락한다. 둘째, 설교자가 성경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무시하거나 전혀 깨닫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설교자의 고정 관념, 선입견, 취향, 신학 및 신앙적 선호 등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현상으로 결국 본문을 있는 그대로 꼼꼼히 살피지 않은 결과이다. 이런 현상을 성경 본문 해석에 있어서 본문의 의미 ‘주입하기’와 ‘지나치기’라고 말할 수 있다.9
요한복음의 예수님 부활을 요한복음 20:1~29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 각 단락별로 설교하는 것이 지혜롭고 유익할 것이다. 본문을 각 단락별로 설교할 때, 설교자는 먼저 첫째 단락(요 20:1~10)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두 제자가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를 확인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 단락(요 20:11~18)에서 설교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한 상황을 다각적으로 살펴서 가능한 이유를 살펴보고, 어떻게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침내 인식하고 믿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한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신앙 고백과 증언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20:19~29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할 경우 제자들의 상황과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기뻐한 것을 실제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도마의 경우 불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 예로 설명하며 믿음이 무엇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기적을 근거로 믿음을 갖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29절과 함께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가는 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은 공관복음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중심이 되어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하는 모습은 요한복음의 특별한 모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부활은 몇 가지 물적 증거를 통해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영적 눈으로 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 이성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이런 점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 부활을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간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가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신앙 고백적 전달 행위라면 더욱 본문을 중심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확신을 갖고 말해야 할 것이다.
주)
1. 이 글 ‘4. 요한복음의 예수님 부활과 설교의 적용’를 참조하라.
2.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 CE 41~54)는 무덤의 봉인이나 돌문을 제거하고 도적질했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C.K. Barrett, 「요한복음 I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469를 보라.
3.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참조. 마 27:62~66).
4. 본문 8절의 “그 다른 제자”,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는 표현을 그 제자가 예수님 부활을 믿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저자의 설명인 9절과 직접적으로 상충된다. 9절의 ‘가르’(gavr)는 복음서 기자의 설명적 주석(Johannine asides or comments)이다 (참조. 2:25; 5:13; 6:6; 7:39). 이것은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및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은 것이 베드로가 눈으로 본 것과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내용임을 암시한다.
5. 9절에 언급된 “성경”이 어떤 구약성경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참조. 시 16:10; 사 53:10~12; 호 6:2).
6. 마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을 때 그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했다고 기록한다(마 28:9).
7. L.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Grand Rapids: Eerdmans, 1995, rev. edn, 1995), 743을 보라.
8. 설교학적 제반 요소란 설교에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청중에 대한 심리학적 이론, 설교자와 청중의 상황 분석 이론, 설교 장소에서 사용되는 음향 효과와 조명에 대한 여러 이론을 의미한다. 이런 여러 이론은 매우 설득력이 있고 어떤 점에서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효과를 항상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9.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115~117.
새로운 시작(요 20:19-23)
요 20:19-23 새로운 시작
“겨울에 비가 많이 왔기에 사막이나 골짜기에 다양한 색깔을 가진 꽃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이곳에 빨리 올 것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Anza-Borrego Desert State Park의 web site 앞면에 나오는 글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우기와 건기가 미국의 다른 지방보다 뚜렷합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온 들판이나 광야가 온통 누런 색깔을 띄기에 다 말라 죽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일단 비만 내리면 언제 그랬냐 싶게 금새 푸릇푸릇해집니다. 다른 겨울보다 비가 좀 더 와서 그런지 운전을 하며 지나가다 보면 야생화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펴서 들판을 덮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죽은 것 같은 대지와 자연이 살아나 생동감을 주는 계절입니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요 부활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저는 봄이 좋습니다. Liemann Brother사가 도산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는 경기침체가 일 년 반이 지났어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실업률은 여전히 10%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체했던 경기도 곧 회복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활이 없다면 착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상관없이 이 땅에 한번 살다 가면 끝입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진 여부가 영생을 좌우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생명의 부활을 선물로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평소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엄청난 슬픔과 안타까움을 가져다주었지만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면서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의 믿음 생활을 다시 한 번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유월절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바로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이날은 유대인 절기로 볼 때 초실절입니다. 초실절 아침 동이 트자마자 많은 사람이 첫 열매로 거둘 보릿단을 베러 보리밭으로 향하고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주님을 사랑하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초실절에 부활하심으로써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여인들이 무덤 앞에 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진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부활의 현장을 예수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두 제자들은 즉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에 들어가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던 것과 머리를 쌌던 수건이 개켜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몰약과 향유로 시신에 바르고 세마포와 수건으로 쌌기에 쌌던 것을 찢어 내어 풀어헤치지 않고는 시신만을 가져갈 수 없기에 예수님의 몸체가 부활과 더불어 빠져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빈 무덤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기 전에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신 말씀을 기억하지도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빈 무덤과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구약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죽은 자를 세 번이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의 호흡이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다시 죽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부활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에 서 있으면서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도리어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상황과 말씀을 연결시키는 능력입니다. 아직 제자들이나 마리아는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기 전인지라 상황과 말씀을 연결시키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믿음이 연약합니다. 그렇다 보니 가장 기뻐해야 할 시간에 기뻐하지 못하고 도리어 슬퍼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후 주님의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울며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다 흰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보고 주님의 시신이 누군가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뒤로 돌아섰을 때 다시 사신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즉시 알아보지 못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에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10:3~5) 예수께서 마리아를 향하여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시자 그제야 예수님인줄 깨달으며 “랍오니여”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영의 눈이 떠지면서 주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을 향하여 다시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여듭니다. 오는 사람마다 집 주변을 계속 살피다가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올 사람은 다 왔다 싶으니 문을 굳게 걸어 잠급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주님의 시체가 도둑을 맞았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은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았대.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제자들의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주변에 돌아가는 상황이 그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지난 삼년 동안 함께 계시던 예수님이 안계시니 허전합니다.
평안을 선포하십니다.
제자들은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몸만 숨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그들을 향한 사명도 함께 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니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말은 ‘문들을 닫았음에도’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문을 닫았지만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문은 잠겨 있으나 영광의 형체를 가지신 주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 서시자마자 “너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이제 나타났느냐” 하지 않으십니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사는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이 반가운 말씀입니다.
평강의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가 용서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에 참된 평화가 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영적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를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보고 그제야 기뻐합니다.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사형 틀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평강을 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평강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 평강은 진정한 부활의 열매입니다. 부활은 모든 싸움을 승리로 마치신 예수님이 나눠 주시는 평강입니다. 주님은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이미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우리가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앙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주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깨닫게 하심으로 다시 주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 육신으로 찾아오시지는 않습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면서 시작부터 첫 창조를 언급합니다. 이제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제시합니다. 제자들의 파송이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임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단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중요한 사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보냄을 받을 때 제자들이 비로소 사도가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구원의 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 이미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낼 것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 13:20, 17:18).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추억하며 그분의 정신을 기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으며,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죽음과 세상을 이기는 십자가의 군사들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세상을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화평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성령 충만과 죄 용서함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또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서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요 3:34)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예수님을 본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쉰다는 표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신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증명합니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특히 창 2:7과 겔 37:9등을 연관시켜 예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묘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이나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생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창 2:7).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하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며 생기입니다. 에스겔서에도 ‘생기’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니 누워있던 자들이 즉시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마른 뼈들만이 널려 있던 죽음의 골짜기, 소망이 없던 골짜기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니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 새롭게 하는 영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임을 암시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기를 제자들에게 불어넣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그리스도의 숨)을 받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50일 이후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에 대한 표징입니다. 칼빈은 요한복음 20장의 성령주심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의 관계를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의 차이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죄사함의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신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죄 사함과 영생)을 선포해야 합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값을 다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하면 사해집니다. 그러나 그냥 놔두면 죄가 그대로 있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죄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며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복음은 오로지 주님의 제자들과 교회에게 맡긴 일이며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명감을 느끼고 영혼구원에 힘쓸 것을 원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부활을 확신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그들 가운데 직접 나타나셔서 그 모습을 드러내시자 두려워합니다. 배신과 불신의 죄를 범했던 제자들에게 평안의 주님으로 다가오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음식을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은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풀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용서를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십니까?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믿음이 없는 공간에 두려움이 틈타고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불안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을 경험함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말씀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제대로 믿지 않은 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분명히 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주님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대하여 언급한 것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열린 책이 되었고 그들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믿음이 생기고 마음에 감동이 생깁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일제히 길가로 나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주변에 모입니다. 베드로는 기회를 놓칠세라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고, 듣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그저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으로만 생각했는데 베드로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들을 성령의 인도되는 대로 조리 있게 설명하며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에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직접 보거나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대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복 되도다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씌어졌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려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들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120명의 무리들을 변화시킨 성령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의 마음에도 강하게 역사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메시아를 죽였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니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회개함으로 죄 사함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너희’는 유대인들입니다. ‘너희 자녀’는 유대인의 자녀들입니다. ‘모든 먼데 사람’은 – 이방인들 다시 말하면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이 다 포함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종의 구별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까지도 성령의 선물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 부어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구원의 감격 속에 부르는 찬양, 전심을 주님을 찾고 의지하면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임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고, 속죄의 근거가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근거가 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은 주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의 날이요 살아서 맞이하는 자들에게는 부활체로 바뀌는 영광의 날입니다. 지금은 약하고 부족하나 언젠가는 온전한 모습,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1세기에도 부활의 주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인하여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낙심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은 다 주님께 맡깁시다. 이번 부활절을 계기로 부활의 복음에 대한 확신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믿음의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인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복하시고 주님만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시면서 가정과 사업과 계획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의심과 두려움에서 확신으로 – 구조 새벽예배주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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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 그리고 의심했던 도마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두려움에서 확신과 담대함으로 변화한 제자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의심과 두려움에서 확신으로
요한복음 20장의 구조 새벽설교주제 해설
요한복음 20장의 구조
1절-10절, 빈 무덤을 보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지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놀라운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 역시 무덤으로 달려 갔으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11절-18절,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마리아에게 알리셨고, 이제 나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29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과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 도마를 만나 주신 예수님을 통하여, 도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30절-31절, 요한복음의 목적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의 새벽설교 주제
1절-10절, 무덤이 비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고, 이 소식을 들었던 제자들도 무덤을 찾아 왔으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보여 주셨으며, 그녀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따라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전하며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이 사실을 증명할 사명이 있습니다.
19절-23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전했던 예수님의 부활 소식에, 제자들은 무덤을 찾았고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 오셨고, 그들에게 평강과 성령님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제 그들의 두려움은 확신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고 사죄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만나는 이들에게 복음과 사죄의 은혜를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24절-31절, 부활을 직접 확인한 도마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직접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못자국을 만져 보고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을 확신한 도마는,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직접 목격하고 믿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주의 부활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더욱 복됩니다. 비록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의 증언에 따라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가 복된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기초로, 주님의 부활과 구원을 세상에 전해야만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의 해설
1절-18절,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요한복음의 부활 사건에 나오는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사랑하는 제자의 ‘관찰'(8절에 나오는 ‘보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6절의 것과 다릅니다)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만들었을까요?(6-7절 동산지기에게 했던 마리아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 헌신의 깊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16절) 그녀가놀랐을까요?
19절-29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더 이상 도마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19절).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 받으심에 대한(25절) 도마의 현실주의적 인식론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값을 아주 가볍게 받아 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27절). 그는 복음서에서 가장 강력한 증언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28절).
29절-31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러나 현실주의는 소망과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을 증명해 보일 수 없습니다. 또한 부활이 없음도 증명해 보일 수 없습니다. 요한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표적은 믿음을 길러 주고, 예수님의 신성과 ‘이름'(성품)은 생명을 부여합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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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1절-31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장 1-31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장 되셨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에 온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놀라 제자들에게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이때 무덤 안에 있는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고 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옮겼고 그것을 알지 못하여 울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켰을 때 예수님을 보았으나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동일하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말입니다. 이에 여인은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하시며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인줄 알아보았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예수님을 붙들었으나 예수님은 붙들지 말라고 하였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오셨고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없었기에 믿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8일이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나 도마를 만나 주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부정한 시체에 접근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안식일이 되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안장하였고 안식일이 끝난 새벽에 여인들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은 다른 마리아도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왔을 때 무덤은 열려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제자들에게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찾아 갔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워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 시체를 옮겼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남자 제자들을 집으로 갔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중 무덤 속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곳에 천사 둘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어찌하여 우느냐”고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인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어딘가로 옮겼을 것이라고 여겨 알기를 원하였고 그렇지 못하기에 슬퍼했던 것입니다.
여인도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헬몬산에서부터 당신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그것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해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절망이 너무 컸고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던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여인이 뒤로 돌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천사가 물었던 질문을 그대로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이 아닌 동산지기인 줄 알고 전과 동일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여”라며 여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제야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에 너무 반가워 여인은 예수님을 붙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반가워 예수님을 붙들려 하는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있은 후 8일째 되던 날 도마를 보고는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던 주님이시기에 본문에서 여인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는 말은 많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여인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있습니다만 이도 문맥에서 이해 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왕 보고 있으니 그 뒤에 이야기도 봅시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하여 볼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들지 말라며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아직은 아버지께로 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와 더 긴밀하게 이야기하고 교제할 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제자들에게 가서 나의 부활을 알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때까지 아주 짧은 기간 밖에는 시간이 없기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다가 실망하여 흩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 자신도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글로바와 그의 아내를 만나 당신의 부활을 알리셨고 그들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붙들지 말라는 말은 자신이 아직 뭔가 부족하거나 신비한 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알리는 것 사이에서 우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곧 바로 집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자신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9절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닫고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갑자가 나타나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날 뿐 아니라 이 글이 쓰여 지고 읽혀졌던 모든 세대, 특별히 환란과 박해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력한 위로와 소망의 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당시 성도들이 가졌던 두려움과 신앙적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교회가 핍박을 받고 사역자들은 끌려가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돕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 밧모섬에서 노역을 하던 요한에게 주님은 계시하시기를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거하며 교회의 사자들을 붙들어주고 계신 분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계시록에서 그런 주님을 묘사하기를 주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며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계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서 알려주는데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여서 사망 권세 이기신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정시키신 후에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으시고 곧 바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말을 강조하고 싶었던 같습니다. 당시 교회가 박해로 인해 두려워 숨어 있던 때였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말 속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반대하고 죽이는 이들에게 보내진 것 같이 제자들도 제자들을 반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에게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숨어 있고 계속해서 숨으려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10장과 11장에서 말씀 두루마리를 먹는 것과 그것을 나가 증거 하는 두 명의 증인의 이야기를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제자 된 자들의 사명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후서 2장 2절에서는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라고 했고 4장 2절에서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초대교회 당시 가장 중요한 신앙인의 사명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에 소극적이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움츠러들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이때에 이 말씀을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보내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을 선물하셨습니다.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숨을 내쉬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지금 주님은 바로 하나님으로서 제자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다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바로 처음 인간을 만드시고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다시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아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사죄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카톨릭은 사제에게 사죄의 권한이 있어서 그가 죄를 사해주는 일을 하지만 인간에게는 누군가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죄를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바로 복음의 능력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전하면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사함을 얻을 것이며 너희가 전하지 않으면 그들의 죄는 그대로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13절과 14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나가 복음을 전했을 때 듣는 이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3,000명이나 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인 성도들은 엄청난 권세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한행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보내신 주님은 이후 8일째 되던 날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조금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도 제자들은 문 닫고 집안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의 명하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제자들에게 전과 동일하게 나타나시고 동일한 인사를 하신 후에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을 때 도마는 말하기를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라고 했었기에 주님은 도마에게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라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과 보냄을 받았으나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어 의심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에 이어진 말씀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환란과 핍박에서 건져지거나 이김이 없으므로 주님에 대해 의심하였기에 주님은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며 나아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라고 하심으로 믿음에 대해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은 마치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듯 하는 말씀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30절과 3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글이라는 것이 흐름이 있는데 요한은 마치 자신의 글을 여기에서 마치려는 듯 본 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장이 더 있음에도 말입니다. 왜 요한은 이렇게 쓴 것일까요? 그것은 글을 마치려는 것이 아니라 본 장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제자들을 보내시고 그들을 통해 죄를 사하고 그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절은 20장의 말씀 뿐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냄같이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복음 전함의 긴급성과 절대적 필요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고 도마를 대표로한 믿지 못하고 의심하자들과 복음을 듣고도 아직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된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 복음을 전함으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1-23)
성령을 받으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11-23 개역개정)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10-18)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그 몸을 보이셨다는 기록(19-24)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도망갔고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에는 무서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의 시신(Leichnam)이 없어졌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무덤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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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LIVE]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19-23)_부활 주일 2부 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404 | 요한복음 20장 23절 주석,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