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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분당우리교회 금요기도회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1-11)
김인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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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 성구 명상 < 성경 < 신학과 신앙 < 기사본문

정용섭 목사(캔사스 연합장로교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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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7/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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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 광성교회

돈에 노예가 되거나 쾌락의 노예가 되거나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 것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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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h.net

Date Published: 1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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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 당당뉴스

* 본문 “위의 것을 찾으라”에서 ‘찾으라'(제테오)는 ‘목표로 삼다’ 또는 ‘얻으려고 노력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목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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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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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11) – 신년 메시지 (01/02/20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례를 받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 하고 말합니다(1). 또 뭐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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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8/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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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 목회자료 – 기멀전

또한 위의 것을 찾는 삶은 하늘나라의 신령함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땅의 것, 육신의 것을 무시하고 죄악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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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9/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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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 다국어 성경 Holy-Bible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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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2/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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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목사 설교] 위의 것을 찾으라 – 크리스천투데이

따라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계된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주권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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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6/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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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모음 –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다시 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말한 이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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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1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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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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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정용섭 목사(캔사스 연합장로교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1-2)

1

인간은 모두가 땅에 발을 디디고 산다. 이른 아침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땅의 것을 찾아 헤맨다. 모두가 빵을 찾아 헤맨다. 우리가 매일 듣고 보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은 모두 땅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이 세상은 땅의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땅의 것을 찾기에 골몰한다. 정치나 경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밤을 새워 가면서 법을 만들고 수출고를 올린다. 국방을 담당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도 잠을 자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연구를 한다. 그렇게 새벽부터 밤중까지 애써도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밤낮 땅의 것을 생각해도 급변하는 이 사회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데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로새서 3:1). 위의 것을 찾되 아무나 다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땅의 것에만 관심이 있고 위의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크리스천에 대한 명령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크리스천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로마서 6:3). 물이 그를 덮을 때에는 마치 죽어서 장사된 것과 같은 것이며 물에서 나올 때에는 다시 살아서 나와야 한다.

3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013. 1. 2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골17)

본문 : 골 3:1-4

제목 :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강해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골로새서 1장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분임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은 이런 예수님을 두고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나 초등학문이나 율법에 있는 음식이나 절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만 붙잡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공부하게 될 3장은 그런 진리를 알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신서들이 전반부는 교리를 말씀하고 후반부에는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도 1-2장은 교리편이고 3-4장은 실천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실천편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위의 것을 찾으며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성도들

앞서 배운 2:20절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이러고 말씀을 하고 있고

오늘 본문 2절 말씀에도 “너희가 죽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러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교회에 다니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되었는데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습니까?

우리가 언제 죽었던 적이 있습니까? 다시 산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산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도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아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로 인해서 그 죄 값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로 인해서 정죄를 받거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초등학문이나 율법이나 사람의 명령이나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거나 고행을 하거나 선행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세상의 욕망이나 쾌락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에 노예가 되거나 쾌락의 노예가 되거나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런 것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중생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다시 거듭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영혼이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우리의 영혼이 죽은 상태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은 거듭난 사람들이 다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한번 죽어서 땅에 묻힌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다시 부활할 육신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영혼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안에 산 영혼이 있는 거듭난 사람은 모두가 다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부활한 몸을 가지지 않았지만 부활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그 영원한 생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들은 많이 있습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받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것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우리의 생명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육신의 생명만 가졌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그 생명은 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형벌을 받을 육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남으로 영원히 죽이 않을 새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영원히 살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2.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명만을 가지고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까지 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생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생명만 가지고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세상의 것을 탐내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데 당연히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그 삶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땅을 바라보고 살 때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위에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 찾고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생각하고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찾는 것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을 생각하고 이 세상의 것을 찾지만 우리 성도들은 위에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위에 있는 것이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의 형벌에서 해방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찾으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행하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고 성경에 그렇게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도 나무아비타불해도 구원을 받고 알라를 찾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외쳐야 할 강단에서 헛된 철학이나 세상 사람들의 속임수와 같은 것들과 세상의 초등학문 세상 사람들의 가르침이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더 많이 외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무엇을 먹어야 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되고 어떤 날을 지켜야 하고 어떤 절기를 지켜야 하고 금식을 해야 하고 고행이나 선행을 행하여야 된다는 것을 더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헛소리를 설교라고 듣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보좌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활승천하시어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오셔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치의 병을 고쳐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모습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도 그런 흉내를 한번 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런 일보다 지금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한번 일으켜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수도 받아보고 존경도 받아보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도 많이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연약한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도 편이 되어주지 않고 아무도 힘이 되어주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힘이 되어주시고 편이 되어주셔서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 그 예수님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우리 예수님의 모습도 참 좋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되고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서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일 배워서 우리보고 하라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런 일들로 이 세상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실을 다 아시고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시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좌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이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이 세상 만물의 통치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위에 있는 것이란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배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 주신 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신령한 복을 생각하고 찾으려고 하는 것이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과 반대되는 개념이 땅에 속한 육신적인 복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땅의 것이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도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됨같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도 다 잘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 것들을 다 포기하면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찾아야 할 것이 위에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과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을 양자택일해야 할 경우라면 반드시 하늘에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그것도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그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본문 4절 말씀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앞서서 살펴본 3절의 말씀대로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지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영광중에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금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실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부활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정말로 엄청난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육신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있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보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위의 것을 생각하며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 세상의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사모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4절 위의 것을 찾으라 가. 성도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본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하여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땅의 것을 버리지 못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도는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 여기서 ‘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을 가리킨다. 즉 위는 하늘나라이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 본문 “위의 것을 찾으라”에서 ‘찾으라’(제테오)는 ‘목표로 삼다’ 또는 ‘얻으려고 노력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하여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나. 살리심을 받은 것이 끝이 아니다.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살리심을 받았으면’(쉰에게이로, 과거, 수동)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하여 성장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구원을 받으면(과거) 천국에 들어갈 줄을 믿는다(미래).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현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 살리심을 받은 것(칭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위의 것(성화)에 대해 관심이 없다. 땅의 것을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한다. 땅의 지체를 죽이지 못하고 따라가고 있다. 살리심을 받았으면 씨가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계속 성장하여야 한다. 다. 위의 것에 철저히 몰두해야 한다.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성도가 위의 것을 찾으려면 땅의 것은 거부하고 위의 것에 철저히 몰두해야 한다. 여기서 ‘생각하다’(프로네오)는 ‘마음을 기울이다’ 또는 ‘몰두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성도는 땅의 것에 몰두하던 삶을 포기하고 위의 것, 즉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에 몰두해야 한다. * 그리고 위의 것에 몰두하려면 땅의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져야 한다. 본문의 ‘위’(아노)는 ‘반대하여’(안티)에서 유래하였다. 위로 성장하려면 땅에 대하여는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체가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려면 그만한 힘의 반작용이 필요한 것과 같다. * 성경에서 ‘거듭나다’(겐네데 아노덴)는 ‘위로부터 또는 위를 향하여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철저하게 땅의 것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갖는데서 출발한다. 거듭나면 거듭날수록 땅의 것들에 대해 거부감이 커져야 한다. 성도가 버려야 할 땅의 것들은 5절과 8-9절을 참조하라. 그리고 성도가 철저하게 몰두해야 할 위(하늘)의 것들은 12-17절의 말씀을 참조하라. 라. 위의 것을 찾는 이에게 영광이 있다. 4절,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에 몰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진리의 길이요 좁은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영광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지금은 그 영광이 감추어져 있으나(3절), 때가 되어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4절). 위의 것을 찾는 이들에게 영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결국은 부활하셨고 영광스럽게 승천하셨다. 성도는 승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위를 바라보고 고상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고상하게 사는 것이 비록 힘들어 보이지만 결국은 영광을 얻는 길이다. *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라고 교훈한 것을 참조하라(딤전6:14-15).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11)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uO1kiXjdcrQ?t=2950

2022년 1월 2일 신년주일예배

✦ 신년 메시지 ✦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3장 1~11절)

[ 들어가는 말 ]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한 여자가 있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옛 애인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에 오래 사귀던 사이라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고, 헤어진 후에도 종종 만나면 아주 편한 사이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기 남편보다도 자기를 더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더 편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결혼 후에도 계속 옛 애인을 그리워하면서 남편 몰래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보내고 문자도 했습니다. 게다가 가끔씩 만나서 식사도 하며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호젓한 공원에서 함께 만나 손을 잡고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포옹을 하면서 상대방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아내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던 남편이 몰래 따라왔다가 바로 그 순간 서로 껴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며 “이거 봐, 뭐 하는 거야?”라고 소리치자 아내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어? 여보,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뭐 별 것 아니야. 잠깐 손만 잡다가 살짝 포옹한 것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난리야?”

여러분, 이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남편을 배신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바로 우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1. 위의 것을 찾으며 생각하라 (1~4 절 )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또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 처녀의 비유를 드시면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 신랑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신부로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결혼한 것으로 성경에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1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3절)

바로 앞의 2장 2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이 나오고 여기 3장 3절에도 “너희가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3장 1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었는데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식은 결혼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종종 사정이 있어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한 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랑과 신부는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식을 안 해도 법정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선서만 하면 부부가 될 수 있지만, 결혼식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축하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아직 안 받았더라도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믿었으면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우 부부가 결혼식을 통해 자신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포하듯,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믿음의 지체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세례를 통해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것이 교회로 들어오는 통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 함께 살았다는 표시입니다. 침례교인들이 여기에 대해서는 더 자부심이 강합니다. 침례교회나 순복음교회에서는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하는데, 우리 장로교에서도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의상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를 합니다. 머리 위에 물을 뿌리는 것은 물 밑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나는 죽었고 또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다는 것,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죄 속에서 살던 내가 이제 영원한 길, 생명의 길로 들어섰다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옛 애인과의 관계는 다 끝났고, 이제 예수님을 남편으로 맞아들여서 그분과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례를 받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찾으라” 하고 말합니다(1). 또 뭐라고 합니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2절)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제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고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것, 즉 이 땅에서 끝나고 마는 것들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것,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옛 애인은 끊고 남편만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위’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나라를 의미합니다(1). 하지만 이 말은 1세기 당시 헬라 철학에서 말하던 이분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 땅은 나쁘니까 천국만 생각하고 세상에서 분리된 삶을 살라는 것이나 육신은 나쁘고 영만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은 놀라운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땅의 것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이 땅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땅의 것 생각을 안 합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땅의 가치로 살지 말고 천국의 가치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사람은 3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기 전이나 세례를 받은 후나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천지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절)

우리 생명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영광 가운데 주님과 함께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로마시대 때 장군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개선장군이 되어 행진을 합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늠름한 모습으로 갈 때 그 주변으로는 그와 함께 전쟁터에서 싸운 군대도 같이 행진해 나갑니다. 굉장히 영광스러운 행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나타나시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개선장군 옆에 함께 가는 군사들처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함께 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위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의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천국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구원도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것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옥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천국으로 갑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는 ‘받은 구원’ 또는 ‘영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났을 때 태어나면 끝난 게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잘 먹고 자며 잘 자라야 합니다. 만약 10살인 아이가 1살 정도밖에 안 되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까?

영적으로도 그렇게 죽 자라가야 하는데 그 자라는 과정을 신학적 용어로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죄의 영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받는 구원’, 받아가는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격이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혼의 구원’이라고도 합니다. 영의 구원(칭의) 다음에 혼의 구원(성화) 즉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죄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지는 구원의 과정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영화’(glorification), 즉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몸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인데, 이것이 앞으로 ‘받을 구원’이고, 천국에는 죄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처럼 구원도 세 가지 시제로 있지, ‘예수 천당’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때부터가 오히려 시작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성화의 과정, 혼(인격)의 구원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매일매일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썩어질 가치를 바라보며 나아가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천국의 가치를 지닌 일을 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2. 옛 사람과 새 사람 (5~10 절 )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삶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이런 것들을 안 하는 것이 곧 위의 것을 찾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5-7절)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죽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은 성적 타락과 자기 쾌락과 유익만을 위하는 죄를 가리킵니다. 특히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이것이 다 이기적인 삶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삶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삶이 ‘땅의 것’(2)이고 ‘땅에 있는 지체’(5)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8-9절)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은 주로 언어와 관련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로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죽여야 한다, 즉 없애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없애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것을 못 보고 그러한 땅의 것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치 결혼하고도 계속 옛날 애인과 만나서 즐기는 불륜의 관계를 갖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 특히 구약에서 남편을 떠나 방탕하게 사는 여인을 이스라엘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아름답게 세워주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는 주요 통로가 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상처가 되는 말을 함으로써 다투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자녀와도, 부모님과도, 친한 사람들과도, 교회 성도들과도 치고받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주로 말로 싸웁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것은 진짜로 얻어맞아서가 아니라 말 한마디 던진 것이 비수가 되어 상처를 받는 겁니다.

인간이 동물들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가 바로 언어 구사 능력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아무리 똑똑해도 말을 못합니다. 앵무새는 훈련되어 따라하는 것이지 진짜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한 존재입니다. 짐승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요즘 문화는 자꾸 인간을 짐승처럼 되도록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5절에 나와 있는 것들(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행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인 우리가 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화내고, 뒤에서 욕하고,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옛 사람의 모습을 죽이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고 믿어서 천국에 속한 자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시 옛 사람과 그 행위가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비록 영생을 얻은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매일 치열한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 사람과 그 모든 행위를 벗어버리라.” 하고 거듭해서 말한 것입니다. 저절로 그런 것들이 다 된다면 왜 이렇게 계속 명령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도 그런 식으로 살았다는 겁니다(7). 그저 자기밖에 모르고 악한 말만 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옛날 문화는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전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된 그들은 옛 사람과 이 땅의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과 위의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옛날부터 아이들도 어른들도 좋아하는 이야기가 신데렐라입니다. 백마 탄 왕자가 신데렐라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신데렐라는 가난한 집 출신이라 아무리 아름다운 새 옷을 줘도 ‘나는 옛날 입던 누더기 옷이 편하다.’라고 하며 계속 그것만 입는다면, 왕비가 될 사람으로서 맞지가 않습니다.

결혼하고도 누더기 옷을 입겠다고 고집한다고 해서 왕자의 아내인 것이 취소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맞는 모습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기 신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하고 맞는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새로운 신분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전의 누더기가 좋다고 하거나 초라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왕자비로 맞이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됩니다.

자기 삶의 옛 방식을 새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동시에 신데렐라는 남편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도 옛 애인을 못 잊어 남편 몰래 전화하고 또 만난다면, 그것으로 인해 아내인 것, 왕비인 것이 즉시 취소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배우자를 속이는 일입니다. 부정한 짓입니다.

결혼했으면 옛 애인을 잊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았어도 과거의 일로 끝내야 합니다. 이전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다 끝내고 최선을 다해 남편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전에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이전의 삶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살았다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끝낸 다음 새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고 천국 시민이 된 후에도 왜 우리는 계속해서 옛날에 살았던 죄의 방식들대로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옛 애인에게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0절)

이 구절을 조금 더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이미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고 있는 중이다.’

전혀 쉽다고 느끼시는 표정이 아닙니다. 조금 쉽게 풀이하면 이렇다고 했는데 별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을 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지만, 그것은 한 번에 끝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두 번쨰인 ‘성화’의 과정, ‘받는 구원’의 과정, ‘인격의 구원’의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는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끔 보면 ‘내가 옛날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너무 많이 다녀서 이제는 졸업했습니다.’라는 경우가 있는데, 신앙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새롭게 됩니까? 주님을 아는 지식, 즉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10).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신앙 성장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되는 과정에서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먼저는 듣고 읽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꼭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성경을 별로 많이 안 읽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집에 가서부터라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을 먼저 갖고 와야 합니다. 그 다음에 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티브이를 틀거나 인터넷을 하는 것은 쉬운데, 성경을 가져다 펴는 게 이상하게 어렵습니다.

요즘은 성경 읽기를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YouTube를 보면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우리 모세목장에서는 <공동체 성경읽기>라는 것을 작년 1년 동안 같이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성경을 나누어서 신구약 전체를 한 번 읽게 하는데, 앞에서는 목회자들이 나와 설명해주고 뒤에는 성경을 죽 읽는데, 그림이 나오기 때문에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하루에 15분 정도면 다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는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하면서 성경을 그 정도도 읽을 시간이 왜 없습니까? 성경을 다 쓰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분들은 요한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로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나중에 하는 게 좋습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냥 읽는 것보다 펜을 들고 기록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짧은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것과 한 번에 여러 장을 읽는 통독이 다 필요합니다. 처음 읽는 분들은 일단 짧게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매일 그렇게 해보십시오. 별로 시간도 많이 안 걸립니다. 그러나 계속 해나가다 보면 자신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의 새로운 삶의 기준 (11 절 )

이처럼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삶, 새 사람을 입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구분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1절)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 ‘스구디아인’은 야만인 중에도 가장 야만적인 종족의 대표 격이었습니다. 그런 야만인 중의 야만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사람도 꺼려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안에만 계시거나 유대인만의 주님이 아니시라, 어떤 민족 출신이든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계시고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 할례를 받은 사람이냐 안 받은 사람이냐, 야만인이냐 문명인이냐, 종이냐 자유인이냐를 따지면서 끼리끼리 모이고 서로 적대시하며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세기 당시 여러 군데에 있던 교회들, 특히 이방 지역의 교회들을 보면 평민층이 많았지만 분명히 높은 사람들도 있었고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예가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들을 다 허무시고 하나가 되도록 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여전히 담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따질지 몰라도 주님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지역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나와 같은 고향이냐? 지위가 비슷하냐? 돈을 얼마나 버느냐? 어느 동네 사느냐?’ 이런 것들을 따지면서 자꾸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며 편을 가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남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거나 깔보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 그런 차별과 구분은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그런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담대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자꾸 구분을 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catholic이라고 하니까 가톨릭인 줄 아는데, 그 말은 원래 ‘보편적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톨릭이 그 말을 가져다 쓴 것이지, 그들이 곧 이 공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다 모일 수 있는 교회, 누가 와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나와 배경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이 와도, 내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와도, 내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와도, 내 전통과 다른 사람이 와도, 그 사람이 주님을 찾아 나오기만 하면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는 교회가 바로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렇게 매주 사도신경에서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오지 않기를 원하거나 미워하거나 배척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예배 때는 공교회를 믿는다고 해놓고 사실은 안 믿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오더라도, 그런 사람도 받아들여줌으로써 우리가 정말 주님의 거룩한 공교회라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거나 도저히 여기 들어와서는 안 될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만 오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상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우리만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만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시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나가는 말 ]

혹시라도 우리가 아무리 거지 옷을 계속 입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운다 해도, 아무리 이전의 죄악 된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살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확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과 불륜을 저지르며 당신께 상처를 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끝없이 용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해서, 우리가 잘나서 그런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셨고 우리는 그냥 받았습니다. 값없이 천국 시민이 되는 특권을 받고 새 사람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라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에 나옵니까? 감사해서 나오는 겁니다. 왜 성경 읽고 기도하고 사역하고 섬기고 봉사합니까? 감사해서, 구원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만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캠핑을 할 때는 텐트를 치고 잡니다. 그런데 텐트는 집처럼 편안한 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텐트가 불편하다고 집에서처럼 침대를 들여놓지 않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엄청난 돈을 들여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루 밤을 거기서 잘 잘 수 있으면 됩니다.

누구 텐트의 내부 장식이 가장 호화로운가, 누구 게 가장 비싼가를 따질 필요도 없고, 내 것은 왜 이렇게 초라하게 생겼나 상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텐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튼튼하고 안전하게 치고 하루를 자는 것입니다. 또 자고 일어나면 다시 텐트를 걷고 또 다시 갈 길을 가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진짜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한걸음씩 우리의 진정한 집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산길을 가는 등산객처럼 매일 짐을 짊어지고 수고하며 열심히 산을 타야 합니다. 집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2022년의 두 번째 날이자 첫 번째 주일입니다. 아직 363일이 남아 있습니다. 2022년의 뉴스를 보면 올해도 쉽지 않겠지만, 이 한 해 동안 매일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1. 땅만 보고 사는 사람들

지난 주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공부와 진로와 직장에 死活을 걸고 살아가고, 부모 세대들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자녀들이 결혼하면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주기 위하여 거기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거나 그것을 불리는 데 그리고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져보려고 그것에 매여서 살아가고, 연세 드신 분들은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조금 여유가 있는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서 재테크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땅만 바라보면서 사는구나!”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산다고 다 얻고 다 이루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들 땅만 세상만 보고 살다가 하나님께 드린 것 없이, 천국에 쌓은 것 없이 주님 앞에 서면 어쩌려고 저러나?”

그러면서 떠오른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든지, 그때부터 길을 갈 때면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을까 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녔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산 결과 그가 일생 동안 길에서 주운 것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천 개, 그리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땅만 쳐다보면서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나는 새,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을 달리 하며 피는 꽃 등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일생은 넝마주이로 끝나고 말았지요. 이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을 보고 사느냐’,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됨됨이가 결정되고 그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보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이 바라보아야 할 곳이 어디이고 무엇인지를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정체성과 삶

1) 골로새 교회

주후 62년경, 이미 예순을 넘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여러 경로를 거쳐 로마의 감옥으로 이송되어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골로새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골로새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이 도시는 原住民인 브루기아인, 바다 건너편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헬라 사람들, 그리고 로마 정부의 유대인 이주 정책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집단 이주하여 온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원주민, 그리스인, 유대인이 섞여 사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종적인 문제, 전통과 관습의 문제, 그리고 여타 다른 문제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골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哲學과 半神半人의 神話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 샤머니즘 즉 미신에 젖은 브루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로 구성된 골로새 교회는 자신들의 민족적인 종교 문제로 인하여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골로새 교회에 대두된 문제는 철저히 유대교를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 바울이 “세상의 초등학문”(2:8~10)이라고 했던 그리스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상, 천사 숭배, 그리고 금욕주의(2:21) 등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골로새는 한 때 상당히 번성했던 都市였다가 점차 2류, 3류 도시로 頹落하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퇴락했다는 말은 경기가 침체되면서 시민들의 삶에 경제적인 타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장사도 안 되고 먹고 살 일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시민들이 골로새를 떠나고 있었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골로새 교회는 내부적으로 이단 사상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도시의 경기가 침체되면서 교인들이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은 비록 자신이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골로새 교회였지만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어 골로새서를 기록하여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1장 13절부터 2장 마지막까지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異端 邪說보다 월등히 우월함을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자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3장 1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부분이지요.

2) 위의 것을 찾으라!

세상 그 어떤 신이나 종교나 철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즉 성도는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➀ 첫째로 성도가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가 누구인지와 연결됩니다. 성도는 누구,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성도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3)”,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1)”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에 대해 어느 성경학자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1)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2)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3)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갈 6:14).

기독신자는 원칙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시체적(屍體的) 관계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즉 “다시 살리심을 받은”성도라면 한 때 죽었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자요, 죄 가운데 살므로 진노 아래 거하던 자요, 하나님이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수중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의미나 방향이나 목적, 생의 그 어떤 소망도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감사과 감격이 인색한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벅찬 감격과 일상적 삶에 대한 희열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이요 육신의 것에 좌우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사람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값진 진주(마 13:45)나 잃어버린 어떤 것(마 18:12 눅 19:10) 등을 얻다 혹은 찾거나 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탐문하다’, ‘얻으려고 또는 찾으려고 애쓰다’, ‘얻고자 노력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다들 이렇게 말들을 합디다만, 저는 지금까지 소풍이나 체육대회에서 보물찾기 한 번 제대로 걸려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도 친구들은 학교 소풍이나 교회 소풍에서 몇 개 씩 찾는 것을 저는 하나도 못 찾았는지라, 그럴 때만 되면 傲氣 毒氣를 품고 찾고 또 찾았습니다만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따라오던 친구가 제가 지나 온 자리에서 보물을 찾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보물을 찾기 위하여 오기를 부리고 독기를 품는 것이 바로 이 “찾는다”는 말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또 다른 표현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생각하다’는 뜻 외에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는 뜻입니다. ‘위의 것만 생각 하라’는 말입니다. ‘위의 것만 바라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도가 찾고 생각해야할 “위의 것”은 무엇입니까?

➁ 1절 하반절,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즉 성도가 찾아야할 “위의 것”은 우선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역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고 떠나려 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과 확신, 그리고 위로를 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성도들은 엄청난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환경일지라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도록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아름답고 우아한 표정을 한 그리스 소녀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하루는 가난한 시골 소녀가 그 동상 앞에 서서 한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그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단정히 빗었습니다. 그 다음날 소녀는 다시 그 동상 앞에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누더기 옷을 수선했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그 소녀는 점점 우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동상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항상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게 되지요.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인간적인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한 비유들이 많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은데(마7:24~27), 그 집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 짓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은 천국에 아름다운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비유는 세상에서 쌓고 지은 것들은 결국 없어진다는 말씀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마6:19~24)”고 하셨습니다. 또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1~13)를 통하여 “인생의 다음을 준비하는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의 세상과 지금의 삶이 아닌 다음을 준비하는 자요, 영적인 가치, 신령한 일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건강, 노후문제, 자녀들과 그들의 앞날, 그리고 먹고 입고 자는 문제 등 모두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하고, 그 이상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➂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위의 것을 찾는 삶”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땅의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 오늘 본문 이후를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 3:5~9)”라고 말합니다.

즉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우선적으로 땅의 것, 곧 옛 사람과 옛 행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보면, 첫째는 성적인 죄악을 버리는 것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제한의 소유욕인 “탐심”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죄악입니다. 그리고 8, 9절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 거짓말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분해하고 노여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악의”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뜻하는데, 왜 남을 해하려고 독한 마음을 품습니까? 왜 비방합니까? 왜 그 입에 부끄러운 말을 담습니까? 결론은 아직 “옛 사람”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 골로새서 3장 5절로부터 9절의 죄가 드러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죄는 그가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땅의 것”이란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 원하는 대로 쓰고,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명품을 입고 차고 걸고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➃ “위의 것을 찾는 삶”은 네 번째로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종말과 연관됩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이 노래는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라는 노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땅에서 목숨 걸고 믿음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삶을 살면서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찾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와 함께 榮光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늘 사람의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전쟁포로였던 사람들의 건강 검진을 담당했던 의사는 그들에게서 똑 같은 정신과적인 질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증상으로 그 병명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철조망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진 수용소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증세는 다른 사람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전혀 이 ‘철조망 병’과는 관계없이 아주 밝고 쾌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당연히 이유를 물었겠지요? 그러자 그는 “저는 철조망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 세계를 바라보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철조망 너머의 세계에서 푸른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살아갈 날을 꿈꾸며 지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여러분은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보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요,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천박하고 저속하고 비열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일들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예수님과 그가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위의 것을 찾는 삶은 하늘나라의 신령함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땅의 것, 육신의 것을 무시하고 죄악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되 그 너머, 주님의 나라와 다시 오실 주님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또한 성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마치 他國에서 사는 同胞들이 고국을 향한 鄕愁에 젖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의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땅의 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위의 것, 하늘의 것에 더 우선을 두는 사람이지요.

帆船이 한창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비던 시대에 선원이 되려고 배에 오른 젊은이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맨 먼저 받는 훈련은 10에서 20미터 높이의 돛대 위에 올라가서 돛을 감든지 망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누구나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배가 흔들리면 바다가 온통 자기에게 쏟아지는 것 같고 현기증이 나서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배를 처음 탄 젊은이들이 거기에 올라가 비명을 지르면서 야단법석을 떨면 고참 선원들이 위를 향해 소리칩니다. “야! 바다를 보지 마. 하늘을 봐, 위를 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현실을 흔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흔들리지 않으려고 여러분이 붙드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이 부양하거나 책임져야할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오늘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을 봐! 위를 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여러분의 본향이고, 거기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천국을 사모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주 안에서 다시 산 자답게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부활 주일, 2020년 4월12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당신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뭔데?”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뭘까, 하고 자문해보신 적은 있을 겁니다. 대답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압축적인 대답을 알고 싶은 분은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4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텍스트는 기독교 신앙의 압축 파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그 파일을 풀어보겠습니다.

위의 것

오늘 설교 제목인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문장은 골 3:1절에 나온 것입니다. 제가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볼 테니,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살피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은 일단 우주 공간의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립니다. 죽으면 가게 될 천당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롬 8:34절에도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일 공동예배에서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님 우편을 우주 공간의 하늘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하늘 어디에도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 우주는 비어있고, 우리가 다 일지 못하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만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위’는 어딜까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일상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그 깊이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기도 합니다. 이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이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톰 라이트의 글입니다. 그가 마커스 보그와 함께 집필한 『예수의 의미』 306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우리가 한때 땅에서 도망쳤던 하늘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몇 문장을 약간 고쳐서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성서에서 하늘은 우리가 사는 우주 안의 어떤 장소(말하자면 몇 마일 상공의 어떤 장소)도 아니며 우리의 시간 속의 종착지(말하자면 최후의 사태)도 아니다. 하늘은 매일의 일상적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차원(God’s dimension of day-to-day reality)이다.”

이런 설명을 이상하다고 느끼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눅 24:50절 이하에 보면 부활의 예수가 분명히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으며, 행 1:6절 이하에서도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도 예수의 승천을 전합니다. 성경의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종교적 은유로 읽어야 합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더 참되고 궁극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의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깊이입니다. 세상을 ‘신비’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그 깊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은폐성

그렇다면 일상의 깊이가 뭘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일상의 표면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깊이입니다. 사물에도 표면과 깊이가 있습니다. 여기 해바라기 씨가 있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아주 작고 투박한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걸 심으면 거기에 정말 새로운 세계가,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립니다. 그 신천지는 씨앗 안에 숨어 있다가 어떤 순간이 오면 밖으로 드러납니다. 숨어 있는 그 세계가 바로 씨앗의 깊이이고, 성경이 말하는 하늘입니다. 이런 것은 너무 시시하게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뭐가 시시하지 않은 이야기인가요?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궁극적인 현실(reality)로 다가옵니까? 좀더 실감 나는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년 전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비교해보십시오.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십시오. 코로나19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현상이 1년 전에는 숨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작은 사물과 지구와 우주와 인간의 모든 역사에는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 깊이는 은폐되었기에 볼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있다고 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는 말은 해바라기 씨앗 안에 해바라기 꽃이 감춰져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씨앗을 단순히 씨앗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안의 해바라기 꽃을 상상하고 기다리듯이 하나님 안에 감춰진 우리의 생명을 찾고 기다립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씨앗의 겉모양만 보고 지나치는 사람과 그 씨앗의 미래인 꽃을 마음에 담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현실적인 삶을 사는 걸까요?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과 변화될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현실적인 삶을 사는 걸까요?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춰졌다는 말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어렴풋이 생각하면 생명이 감춰졌다는 말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는다는 말은 아무리 분명해도 거리가 멀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매일 죽습니다. 우리의 기억도 매일 희미해지고 사라집니다. 이게 다 죽는 과정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죽음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게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다시 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몸이 다시 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씨앗에서 나온 꽃이 씨앗과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의 생명으로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이미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미래가 그에게 이미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를 키워보신 분들이 계시지요? 아직 오지 않은 그 아기의 미래를 마음에 두는 엄마와 아빠에게 아기는 이미 훌륭한 인격체로 경험됩니다. 그 아기의 미래가 그들에게 이미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예수 잉태를 천사에게서 전달받은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영적 통찰력과 믿음 없이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근원이자 토대입니다. 신약 성경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셋째말씀’인 마 28:1-10절도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금요일과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났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그러니까 오늘의 일요일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가 묻힌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로 갔습니다. 여자들이 들여다본 무덤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천사가 이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만이 바울의 편지에도 자주 나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얄팍한 합리적 사유에 근거하여 “믿기 힘듭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물론 사람이 다시 산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산다는 성경의 표현은 지금의 삶으로 소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면 부활을 오해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 부활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씨앗은 분명히 썩고 말기에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꽃이라는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와 더불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변화된 생명의 미래가 골로새서가 말하는 ‘위의 것’이며,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입니다.

이런 설교 내용이 까다롭게 들려서 믿기 힘들다면 최소한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믿어야 하며,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경험했던 생명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처럼 사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처럼 살고 싶을 겁니다. 부자가 되거나 많은 후손을 두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까요? 각자 인생의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처럼 사는 건 어떻습니까? 선택하고 싶지 않으세요? 예수의 하나님 경험을 여러분은 원하지 않으세요? 이게 가장 의미 충만한 삶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저의 평생소원 역시 예수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성경 언어가 가리키는 하나님 안에 감춰진, 즉 일상의 깊이인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찾으라!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는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일상의 깊이에 은폐된 생명을 세밀하게 찾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보물찾기처럼 위의 것을 찾아서 그게 눈에 들어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는 이런 찾음의 영성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7:7절이 가장 유명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며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눅 15:8절 이하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자가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 13:44절에는 밭에 묻힌 보물을 찾은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찾은 이들에게 한결같이 나타나는 현상은 기쁨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골 3:2절은 좀더 풀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런 표현은 자칫 위의 것과 땅의 것을 분리하는 듯이 들립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를 드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철학은 당시의 골로새 지역에 팽배했습니다. 육체에 속한 일은 저열하니까 가능한 한 멀리하려는 경향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소멸하고, 원소로 해체될 것이며, 공기의 일종인 불이 되어 공중으로 상승하게 되고, 더 상승하면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창조론을 이어받는 기독교 신앙에는 이런 순수 이데아를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의 육체에 연관된 것들을 부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땅의 세속적인 원리에 떨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 상태로 있으면 늘 땅의 것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거를 걱정하고, 그것을 독점하려고 과도한 경쟁에 떨어집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떨어집니다. 이런 세속 원리에 충실하면 위의 것, 즉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이런 대목에서 어려움은 여전히 땅의 것에 묶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위의 것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하나님 안에 은폐되어 있을 뿐입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비유로 말씀드린 씨앗의 상태입니다.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아프고, 외롭고, 때로는 짜증이 납니다. 삶이 무료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땅의 것이 두렵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한 이런 긴장과 갈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최선인가요?

골로새서도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하지, 찾으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찾으라.”라는 말씀에서는 찾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평생에 걸쳐서 우리는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단순화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말씀과 운명을 통해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대하고, 땅에서 요구받는 것을 느슨하게 대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할까요? 여기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학생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집중한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나타날 텐데, 위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교사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땅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여기 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가 있다고 합시다. 직원들과 더불어서 상생하는 것에서 기업가로서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면 위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업을 키우는 데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위의 것을 찾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힘들어도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그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만 실제로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듯이 친구가 많고 돈이 많고 온갖 즐거운 취미활동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채우지 못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인간의 영혼은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거나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라는 말씀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 정국으로 훼손된 일상 가운데서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하신지요. 부활절 예배를 통해서 새 힘을 얻으셨는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오늘의 일상에서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마십시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며, 그 순간마다 놀라운 기쁨과 안식을 맛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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