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14 25 31 |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4]보혜사를 보내리라(요한복음 14:25~31)_아름다운동행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70716 12900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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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설교4]보혜사를 보내리라(요한복음 14:25~31)
아름다운동행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
2017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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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5-31 KRV

요한복음 14:25-31 KRV.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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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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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5(목) “요한복음 14:25-31” / 작성

본문: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찬송가 187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십자가를 지셔야 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여러 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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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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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 곽선희 목사

어떤 근심이든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잠을 못 자고, 폭력을 휘두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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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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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25~31절 강해 – 에스라바이블

25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 요한복음 14장 25~31절 강해. by ezrabible 2020. 2. 15.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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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zrabible.net

Date Published: 1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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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5-31) 성령이 오신다는 것

바로 그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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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6/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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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9. 요한복음 14장 15-31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 …

본문 : 요한복음 14장 15-31절.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참 많습니다. 교인, 크리스챤, 성도, 신자, 하나님의 백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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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ngoditrust.tistory.com

Date Published: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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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요한복음 14. …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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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2/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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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5-31 (2016.03.07. 아침묵상) – 밴쿠버 새벽교회

요한복음 14장.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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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oiceofdawn.tistory.com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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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4 25 31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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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9.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PElE5VvzHKM

요한복음 14:25-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

요한복음 14:25-31 KRV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2010/08/05(목) “요한복음 14:25-31” / 작성:서지훈

본문: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찬송가 187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십자가를 지셔야 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해 여러 가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도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아버지께로 가야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가기는 가지만 제자들에게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많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히 가룟 유다 말고는- 사실 가룟 유다 마저도-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한 구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이나 제자들의 돌아섬을 굳이 변호하자면 그저 ‘진정성은 있지만 연약한 사랑’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을 애틋함을 가지고 끔찍이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동안 별 말씀 없으시다가 마지막을 통보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식사 근사하게 하고난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특별한 의식을 하시고는 말입니다. 마치 마지막 이별 의식을 하시는 것처럼 말이죠.

‘나 간다. 가야할 시간이야. 너희들 서로 사랑해 알겠지. 내가 가야 너희에게 더 좋은 거야. 너희를 위해 가는 거야. 때가 되었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고 적지 않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셈입니다. 갑자기 때 아닌 근사한 만찬과 더불어‘어 왜 우리들 발을 씻기시는 거지?’라고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이별을 통보받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상상해보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예수님의 이별 통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생각과 해석들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버리고 떠난다는 말이신가? 관계를 끊으시겠다는 거야? 아니면 잠시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시겠다는 말씀이신가? 내가 마음에 안들어 다른 사람을 쓰시겠다는 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셔야만 할 일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로서는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그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과 뭔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들과 헤어지려고 하신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불안과 근심 그리고 헤어짐에서 찾아올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상실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끼리는‘실연의 아픔’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때 찾아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실과 이별의 결과가 유익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아무 관계없이 사람의 숨통을 죄며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 겪어본 사람은 다 압니다. 폐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장까지 밀려올라오는 섬뜩하도록 차가운 기운과 그 극심한 고통…

우리가 자녀를 잃었을 때나 부모를 여위었을 때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신을 떠나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상실감이 없습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픕니다. 마음이 저며지도록…

사랑하는 연인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들 합니다.‘너 사랑해서 내가 떠나는 거야. 내가 곁에 있으면 네 마음만 더 다쳐. 그러니까 나 보내줘.’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죠. 헤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어 그래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아 마음 홀가분하다’이런 연인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한 것 아니죠. 알지만…다 알지만… 그래도 아픕니다. 참 지독하게 아픕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틀리지 않습니다.‘너를 위해서 내가 가는 것이 좋아. 가야할 길 가는 거야’

예수님 가셔야하고 또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것 맞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시니까 제자들 확 달라지지 않습니까? 비겁한 베드로 보십시오. 닭과 호흡 맞춰 예수님 부인하던 그가 사도행전에서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는 대담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사실이지만 느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제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했고,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고, 모든 것을 걸고 따라다닌 분의 갑작스런 부재를 예감했을 때 찾아드는 두려움, 상실감, 근심…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밀려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또한 무미건조하게 이런 말씀들을 예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눈물이 있으셨던 분이시고 아픔도 느끼셨던 분이십니다. 비통해 하실 줄도 아는 분이셨습니다. 마땅히 가셔야 하고 또 가시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면 다 사는 길이라는 것을 다 아셨기 때문에 담담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의 헤어짐이 가슴 아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을 상실감과 충격을 생각하면 차마 입이 잘 안 떨어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부재 시에 그들이 겪을 두려움과 근심, 상실감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 식사 제대로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 발을 씻기시는 그림들을 볼 때 마다 못내 불만입니다. 굉장히 담담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발을 씻기시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화가들의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 발 씻기실 때 걷어 올린 팔뚝으로 주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즐의 발을 잡고 닦으시면서 무슨 생각하셨을까요? ‘앞으로 내가 갈 고난의 길을 이 아이들도 이 두 발로 가야할텐데…’ 이런 생각하셨겠지요. 그러시면서 마음 아프셨을 것이고 눈물 흘리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앉아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기에 그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또 제자들 볼까하여 알아채지 못하도록 땀을 닦는 시늉도 하셨을 것이고 한 명이 끝날 때마다 모르게 눈물도 훔쳐내고 하셔서 제자들은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지만 예수님 비통한 눈물을 머금고 제자들 발 씻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장면을 그린다면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뒷모습을 그렸을 것입니다.

발을 씻기시기 위해 구부린 등 뒤로 느껴지는 주님의 슬픔, 아픔을 그려 내었을 것입니다. 비스듬히 보일 듯 말 듯 한 주님의 얼굴에 배어있는 눈물… 이런 것 말입니다.

그 심정으로 오늘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떠나지만 너희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이가 와서 나의 일을 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시죠.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고스란히 안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사랑, 눈물, 애틋함…주님 지니셨던 마음 그대로 오시는 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제자들 가르치시겠죠. 애틋한 마음으로 그 애틋함을 지니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자들, 앞 뒤 분간 못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해하며 헤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부터서야 제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의 의미’에 대해 깨닫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재 시에 제자들이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황망한 가운데 쳐할 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이제는 끝났다고 여겨질 때, 그때에도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보혜사성령님께서 가야할 길과 남은 생애 해야 할 일을 여전히 가르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찾아진 그들의 의미 있는 삶은 예수님의 가심으로 중도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심정과 마음 그대로 오실 보혜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우리의 의미 있는 삶은 여타의 어떠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파기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완성 될 것입니다. 우리의 좌절과 상실과 고통 속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할 때에도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실 것이고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주님의 방법과 마음 그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애틋함, 긍휼, 눈물 그대로 가지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 마음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안타까이 여기시는 주님은 떠나시면서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근심도, 두려움도 이겨내고 평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마음이 따로 노는 관계가 아닙니다. 특별한 관계입니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께서도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상실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밤을 보낼 때 우리 주님도 그러하십니다. 인생 가운데 우리의 두 발로 디디고 가야할 고난의 인생길을 생각하시고 이미 2000년 전 우리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우리들의 발을 씻기실 때도 무덤덤하게 닦아주시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르게 눈물 뚝뚝 흘리시며 우리의 두 발을 씼기셧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눈물 흘리시는 분은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으로 생의 의미를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다.

평안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할 길 멈추지 않고 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합니다.

성령충만은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애틋한 마음, 위로, 눈물을 우리가 온 몸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고아가 아니구나’를 자각하면서 주어진 길 평안 가운데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와 계신 성령님의 위로와 능력가운데 오늘 하루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우리의 의미 있는 인생길이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완성되게 하옵소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힘입어 우리의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 잘 감당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곽선희 목사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글짓기 시간에 쓴 글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이 어린이는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고아가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엄연히 있습니다마는 불화로 늘 티격태격합니다. 그날 아침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싸우는 바람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울면서 등교했습니다. 어린이는 번번이 이러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글 속에 이토록 충격적인 글귀가 씌어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처럼 중요한 것이 또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에는 다섯 가지의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의 적이 있어서 마음의 평안을 앗아간다는 말입니다. 첫째의 적은 탐욕(貪慾)입니다. 즉 소유욕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산에 올랐다고 칩시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야산과 들판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답구나’ —- 이렇게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 들이 내 것이었으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하고 생각해서 문제가 됩니다.

다 가질 수도 없지만, 설혹 가졌다 해도 영영히 내 것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탐욕이 마음의 평안을 앗아갑니다. 둘째는 야욕(野慾)입니다. 성취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것을 꼭 가지고야 말겠다’ —- 지나친 욕심이 마음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만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크고 넓은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무엇인가를 소리 없이 하다가 가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셋째는 질투입니다. 내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잘살아서 불만이 많습니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평안할 수 없습니다. 넷째는 분노입니다. 자기 마음 다스릴 줄 몰라서 후회가 많습니다. 하지 않아야 될 말을 하고 한 혈기를 부리고는 금방 후회하느라고 괴롭습니다. 분노에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다섯째는 교만입니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자기됨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언제나 허황된 교만에 삽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평화가 힘의 근본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살아보겠다며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온갖 노력을 경주해왔습니다. GNP만 높아지면 행복이 저절로 얻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평화롭지 못한 가운데 만들어진 생산품은 불량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업사회에도 화평이 먼저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학교—-어디에서든지 평화가 근본입니다. 이 평화가 깨어지고 나면 모든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평화가 이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이야 했겠지만 요즘처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심각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느 곳에건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가 있을 때에 창조력이 있고 지혜가 생겨납니다. 평화가 생산의 기초가 됩니다. 건강도 평화에 달려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렌 박사는 “근심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근심이든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잠을 못 자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오래 살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근심이든 거뜬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비결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긴장이 평안의 반대 의미가 됩니다. 긴장은 열 가지의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열등감, 불안정감, 역정, 당황, 염려, 짜증, 무기력, 모멸감, 고집불통, 그리고 결핍증 이 열 가지에 해당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서야 무슨 평화를 말합니까? 평화 있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있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기도도 평화로운 가운데 해야 응답이 있습니다. 먼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고요한 평화를 찾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평화와 전쟁을 대결시켜서 생각하려듭니다. 전쟁과 평화, 즉 전쟁이 없으면 평화요 전쟁의 종결은 평화로 이어진다 —- 이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경험에서 얻어진 진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조용하지만 거기에도 평안은 없습니다. 우리 땅에서 전쟁 끝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불신,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따르는 불안, 마음껏 소유할 수 없어서 오는 불만 —- 불신과 불안과 불만이 가득 차 있어서 평화가 없습니다.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 또 평안이라는 이 말은 사상적으로 둘로 나누어져서 이야기됩니다. 하나는 샬롬(shalom)이요 또하나는 팍스(Pax)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어로 성경에서 말하는 평안, 즉 히브리사람들의 사상 속에 있는 평안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영어 피스(peace)의 어원이 되는 팍스는 로마사람들의 사상, 즉 로마 철학에서의 평화를 가리킵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고 팍스는 힘에 기초합니다. 경제력이건 정치력이건 큰 힘이 작용할 때의 조용한 상태가 바로 팍스입니다. 누구도 반란을 도모하지 못합니다. 큰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로마사람들은 이 고요함을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억압 속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공동묘지의 고요함처럼 모두가 억압에 눌려 조용합니다. 아시다시피 공산 사회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이라고 하는 무서운 힘에 눌려서 온 세계가 마치 조용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거기에 평화가 있었습니까? 성경에서는 억압에 의한 조용함이나 무사함을 평화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참평안은 자유 안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때에 평안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층의 평안이 전체의 평안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몇 사람은 평안하고 몇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평안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안해야만 진정한 평안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샬롬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고 자유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는 영육의 평안을 일컫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대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27절)” —- 서로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첫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여건에 좌우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가 높아져야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해져야 합니다. 여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안은 관계에 기초합니다. 어떠한 여건에 있느냐보다는 그 여건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 —-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건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부 관계를 예로 들면 남편이 아내의 일을 하고 아내가 남편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은 남편이요 아내는 아내입니다. 그 관계의 유지,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둘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능력에 의지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약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못삽니다. 가난해도 억울하고 무식해도 억울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영적인 상태에 의존합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참평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한마디로 죄인은 어떠한 여건에서든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어떠한 여건에서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결과와 그에 따른 성취에 의존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졌으면’ ‘저것을 얻었으면’—- 바라고 원하며 오늘을 참고 견디어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과 그 과정에 기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축복으로 향한 과정입니다. 그런고로 지금 이대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충분히 평안합니다. 미래에만 평안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평안합니다.

넷째, 문제가 없어야 평안한 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 다음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고난 중에도 평안입니다. 지금의 형편 이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다섯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영원한 약속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으로 향한 오늘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하는 것도 변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식탁에 마주앉을 때에도 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루하루가 일생 중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 됩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요, 피상적이요, 거짓된 것이요, 상대적이요,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하여 즐거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습니다. 시쳇말로 출세를 한 것이어서 “축하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더니 “큰 걱정입니다” 해요.

남들은 입을 모아 축하를 해주지만 정작에 당사자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걱정이 태산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이라는 것이 다 이렇듯 맹랑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절).” 나의 평안 —-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내가 평안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내게 자유가 없으면서 남에게 자유를 부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의 평안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충만하고 내 마음이 기쁠 때에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법입니다. 나는 평안하므로 너희에게 내 기쁨을 주노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십니다.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 무서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원하고 계십니다. 죽음이요 굴욕이요 모순이요 부조리한 십자가를 눈앞에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자리입니다.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가룟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는 망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갈 작자가 지금은 주님 앞에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이렇듯 비통한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나는 평안하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절)”—-엄청난 말씀입니다. 세상 왕이 나를 잡으러 온다, 나로 십자가를 지게 하려고 잡으러 온다, 그러나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도망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지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초연한 화평입니다. 이 의미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정치적으로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상황이 거꾸로 변하든 모로 변하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만민을 구속하시는 거룩한 역사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말씀하심입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죽이는 일은 나와 상관이 없다—-이것은 절대적이요 초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은 어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을 따르고 계십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원(願)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절대순종입니다.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대답해보십시다. 내 마음에 왜 기쁨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짐짓 거역했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욕심을 따라갔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인의 갈 길이 아닌 곳을 갔기 때문에 지금 와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십니다. 그 시간에 임하여 주님께서는 평안하십니다. 불안이 없으십니다.

그 다음에 보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31절)”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사랑하시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 —- 이 사랑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피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리시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 속에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해보십시오.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잠들 때에도 나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나 하지 않나 손으로 더듬어봅니다. 사랑을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고야 잠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고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나의 마음 안에 참평안이 깃듭니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십니다.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절).” 성령이 사랑을 줍니다. 성령이 화평을 줍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 —-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여건으로도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믿을 때에 모든 고통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알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알 때에야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었던 평안을 비로소 내가 받아들이게 됩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근심이 있다면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면 아직도 완전한 사랑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아주 못된 행동을 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너무도 기특해서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남편 사랑이 극진하시네요. 도대체 어떠한 마음으로 사랑하십니까?” “성경에 씌어 있는대로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것이 부인의 대답이었습니다. 남편을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서야 되겠습니까마는 이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 마음에 가득 채워서 넘치는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십니다.

한 순교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집행관이 다가와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순교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당신의 두 손을 내밀어서 한쪽 손은 내 가슴에 대어보고 한쪽 손은 당신의 가슴에 대어보시오. 누구의 심장이 더 뛰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를 죽일 생각에 몹시 불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같이 평안하다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겨버린 이 순교자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참평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죽음과 관계없습니다. 죄와도 관계없습니다. 죽음과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약속만을 바랍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참평안과 승리가 이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5~31절 강해

25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실때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 단순한 텍스트로 존재하는 언어가 아닌, 삶과 감정과 표정, 감각등 모든것들이 동원된 말씀이었다.

– 말씀은 텍스트보다 더 큰 개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인간은 쉽게 잊어버린다.

– 그래서 생생했던 기억과 감촉 역시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린다.

– 항상 방황하고 새로운 것을 좇아가거나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옆에서 계속 도와주신다.

– 잃어버리지 않게,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게, 바른길임을 알려주는 성령님께 우리의 삶을 항시 의탁해야 한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세상은 우리에게 안락함과 좋은 기분,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돈의 힘이다.

– 돈은 나쁘고 악한것이 아니다. 잘 사용하면 우리에게 안락한 삶과 좋은것들을 많이 선사해준다.

– 그러나 돈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평안을 줄순 없다.

– 평안을 흉내낸 안락,좋은기분, 즐거움은 줄 수 있다. 그러나 평안은 그러한 것을 넘어선다.

– 괴롭고 힘든상황에서도, 고통가운데서도, 절망가운데서도 평안의 개념은 변치 않는다.

– 돈은 그러한 괴롭고 힘든, 고통가운데의 삶에서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 영혼과 고통속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그러므로 우리 믿는 신자들은 누구나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그 어떤 세상의 깊은 고난도 우리를 평안함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 성부하나님은 성자하나님보다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성자하나님은 성부하나님 품에 있을때 가장 안식하신다.

– 우리 역시 하나님 품안에 있을때 가장 안식의 순간이 된다.

– 우리가 항상 하나님 품안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29절.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절.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세상의 임금이 올것을 예수님은 예언했다.

– 분명히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이 통치하시지만, 세상의 임금에게 상당부분 통치권이 부여된것으로 보인다.

– 그것은, 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의 시스템이다.

– 이 시스템이 금방 무너지진 않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당히 힘을 발휘할 것이다.

– 그러나 잠깐 힘을 발휘하는 것에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 결국 세상과 그 너머를 통치하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분이다.

–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통치하는 세상이 곧 오게 된다.

– 하나님 나라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세상의 임금에게 우리 모든것을 굴복시켜서는 안된다.

31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

– 그것이 우리 삶을 주관하는 유일한 법이다.

– 돈의 법칙이 아닌, 사랑의 법칙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 세상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든, 중요한것은 우리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이지 않는것에 우리의 가치관을 고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요한복음 14:25-31) 성령이 오신다는 것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신앙인들)은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일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방언을 한다거나 암 환자가 치유된다거나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평소와 다르게 기도하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체험들이 성령이 오신 결정적 증거일까? 그러니까 그것이 성령이 오시는 것의 본질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본분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성령의 본질적인 본분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기계로 철을 깎으면 열이 나는데 그 열이 본질이 아니라 쇠가 깎여서 어떤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 본질이듯이.

성령을 이야기하려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가 거론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아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이 합쳐지면 또 다른 것이 되거나 둘이 합해진 만큼 질량이나 부피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말씀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운동은 몸에 좋다.’라고 아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운동하기 때문에 운동의 효과를 자기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자가 남자를 경험하였을 때 ‘남자를 안다.’라고 말한다.(마리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자기 삶으로 체휼한 사람은 삼위일체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 뜻(말씀)이 자기 삶으로 나타났고, 그렇게 삶으로 살게 된 것이 성령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주신 것이 자기의 생명이 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라는 것은 또한 작가가 쓴 책으로 비유할 수 있다. 성부는 작가의 생각과 같다.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쓰고자 하는 글의 계획이요 의며 모든 것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작가의 생각이 표현된 책이 바로 성자와 같다. 그리고 성령은 그 책을 보고서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게 하는 감동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것을 육신을 가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 보게 하니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본질로 순종하는 감동을 주는 분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성령의 잉태하심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과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것이다. 삼위일체란 그런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신 뜻과 의(말씀)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영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사람이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고, 스스로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게 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정체성인 것이다. 방언이나 기적이나 가슴 뜨거워지는 것은 성령께서 그 정체성의 본분을 따라 행하심에 따라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확정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다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인 것이다.

보혜사 성령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산상수훈을 전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 끝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 세상이라도 그것을 두기에 모자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일일이 다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문장이나 말씀하신 단어나 말로는 수없이 많은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존재로 만들었으니 그 자리를 지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행복이며 평안이라는 것, 그것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진 사람, 그 말씀을 깨달아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삶의 목적과 의미가 그것임을 알고서 육신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시는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생명만 있으면 그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은 무한할 정도로 많은 것이기 하고, 또 역설적으로 생명체가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자기가 자기 생명의 이름(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에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형상, 이미지)을 존재로 지으셨기에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내용이며 의요 진리이시고, 그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몸 가진 사람이라는 만들어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말씀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대로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어디로 오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마 16장)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 베드로가 유명한 답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이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마 16:17)이라고 하셨다.

이 대화를 잘 살펴보자. 베드로가 주라고 고백한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주 크게 칭찬하시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을 한다는 것은 고백을 하는 사람 안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안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을 고백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정체성에서,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뜻하신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성령은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하심이 이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받아 들여서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 안에서 그 하나님의 법이 깨달아지는 잉태하심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생명으로 잉태되는 거듭남이 있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봐야(보고 들어야) 한다. 결혼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받지 않고 생명을 잉태할 수 없듯 인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높이 달리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듣게 표상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는 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남자의 유전자가 여자의 몸 안에 가는 것이고,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성령께서 그 순종(믿음)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전에 자기가 알고 있었던 사람의 정체성,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았던 육신의 안목을 좇던 자기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고, 이것이 구원의 역사며, 이 역사하심으로 거듭난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우리 모든 인생)에게 유익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심에서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지 않으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있는 세계로 가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로 가셔서 달리심이 있어야 사람들이 볼 것이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예수님의 모습(말씀)이 있어야 그것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 삶으로 회복되는 역사하심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인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2020.03.29. 요한복음 14장 15-31절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한복음 50)

날짜 : 2020년 3월 29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4장 15-31절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참 많습니다. 교인, 크리스챤, 성도, 신자, 하나님의 백성 등. 무엇을 기준과 중심으로 삼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고, 각각의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도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것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런 이름들 중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은 크리스챤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아무 주저 없이 “그럼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든지 간에, 우리를 부르는 모든 이름들은 그 무게가 전부다 똑같습니다. 전부 다 온전히 예수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이 특별히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이 말의 강조점이 믿음보다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신자가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도 없습니다. 그냥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습을 흉내내며 사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제자란 본디 스승에게 배우고, 그 스승이 살아간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 주시려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지난 주일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선 제자들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자기들이 따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에 의지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세 가지 특별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나를 위한 영원한 거처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기도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기도로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힘들을 얻으며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고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신 성령님에 대한 또 다른 약속을 주시는데요.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 함께 살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충만하게 해 주시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은 15절부터 31절까지 계속되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1절까지 가는 동안 같은 말씀을 네 번 씩이나 반복하고 계시지요. 그만큼 이 두 가지가 성령을 받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님은 제자들을 제자답게 일하고 또 살아가게 해 주시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님의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원본이 있어야 사본이 괜찮은 사본인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그 원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원본은 31절에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세히 들어가 보면 그 숫자만큼이나 각각의 이유와 목적도 다양하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모든 일들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고 가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뜻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로 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빼면 껍데기 밖에 남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 있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이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동기와 힘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고요.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제일 먼저 챙기고 키워가야 할 것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인데, 자꾸 무엇을 하는 것에 치중하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신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섬김에는 기쁨이 없어지고, 우리의 순종에는 즐거움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가 내가 다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이지요. 모두 다 우리의 행위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의와 열심에서 나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고요. 그래서 사랑이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보혜사로서 주시는 특별한 복과 은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는데요. 그렇다면, 이미 보혜사가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 보혜사를 대신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고요. 그러면 그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그 보혜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 곁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이 다 보혜사의 일이었는데, 앞으로는 성령님께서 그 일을 대신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보혜사라는 말은 정말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보혜사는 우선 피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 해 주는 사람입니다. 변호사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늘 함께 하는 사람이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며, 도와주고 돌봐주고 힘을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그런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그야 말로 제자들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지요. 성령님이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은 앞으로는 성령님께서 이 역할을 대신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님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특별한 보혜사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었지만, 성령님께서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몸을 가진 예수님은 제자들과 몸으로 ‘함께’ 계시는데서 그쳤지만, 성령님은 제자들 ‘안에’ 계실 것입니다. 앞으로 성령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그런 보혜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렇게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된 일이지요.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그리고 심지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보혜사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성령의 시대인 이 시대를 역사상 가장 복된 시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런 복을 누려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이러한 보혜사 성령님 덕분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도 전부 다 보혜사 성령님 덕분입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모든 일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과 함께 사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나요?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보혜사되어 주시는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사십니까? 꼭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늘 성령님을 사모하고 이 은혜를 사모하며, 이 은혜 안에서 이 은혜의 힘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보혜사의 역할을 해 주신다는 측면에서 예수님보다 더 나은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8절부터는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바른 길을 가려고 할 때, 바른 길 자체도 쉽지 않지만 우리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길에 대해서 가지게 되는 의심과 불안,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 같은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 일 자체로도 쉽지 않지만, 그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그렇게 살려고 하면 늘 여기 저기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힘이 들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고 무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혹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기고, 깊은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 길에서 벗어나 남들이 다 가는 그 길로 가고 싶다는 유혹을 받게 되지요. 당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유혹은 정말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18절을 보면 ‘너희에게 오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9절에는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는 말씀이 있고요. 20절에는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과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는 말씀이 있고, 23절에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하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믿는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전부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또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르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며,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전부 다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행하시는 일들이고, 그래서 우리 영혼만 알고 느낄 수 있는 일들이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눈 앞에서 일어난 산사태를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생생한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시 확신을 얻어 다시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꽤 까다로운 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목회자로 부름받았을 때 참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그게 주님의 뜻이니 그저 사랑하려고 했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지요. 예전 같으면 꼴도 보기 싫을 사람들이, 화가 나서 얼굴도 마주할 수 없을 그 사람들이 밉지가 않은 겁니다. 별 불편함 없이 대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 일 자체도 너무나 놀라운 은혜이지만, 그 일 때문에 저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쓸 때, 성령님은 늘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저 자기에게는 아빠가 있다는 생각만 가지고 아버지 없이 사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아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 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느끼고, 알아가며, 하나님의 생생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첫번째 은혜라면 그 두 번째 은혜는 성령님께서 그들의 선생이 되어 주시는 것인데요.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은 첫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면, 그 일을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맡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새로운 말씀을 전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일깨워 주시지요. 그것은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신데,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말씀의 뜻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러분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딱 한 구절 때문에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었던 그런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런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진리를 아는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비춰주시면 그 말씀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적용됩니다. 그 말씀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거기까기 영향을 미치지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들은 말씀에 붙잡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를 근본부터 변화시키고,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기쁨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그런 일을 하실 때,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지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말하는 거듭남이란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속에 성령님께서 주신 새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령님과 교통하며 성령님께 배우는 사람들, 그래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이렇게 놀랍게 바꿔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에 하시는 일이지만, 이 일은 사실 예수님도 하지 못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럽고 놀라운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지만,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변화되지는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일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배처럼 여기며, 이 세상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속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기적같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지요.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평안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는 전혀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꺼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보다 더 평안한 삶이 없습니다. 분명히 어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어도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늘 성령충만하셨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그 평안이 얼마나 크고 견고했든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실 때에도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으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빌어 주실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 싶어하셨던 ‘나의 평안’,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신 ‘예수님의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이 세상에 기초를 둔 평안이 얼마나 약하고 불안한지를 정말 여과없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이 가진 예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고 진짜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허공에다 억지로 붙들어 놓은 가짜 평안이니까요. 그래서 이 평안이 흔들릴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더 심하게 요동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가짜 평안, 불안하고 위험한 평안에 의지해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진짜 평안의 비결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거하실 거처가 되라고 말이지요. 성령님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처럼 평안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충만하게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지요. 늘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들을 잊지 마시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는 삶을 사시고, 성령님께 말씀을 배우는 복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세상은 알 수 없는 참 평안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늘 성령충만하여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밴쿠버 새벽교회 :: 요한복음 14:25-31 (2016.03.07. 아침묵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제자들에게 하시는 일종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언’을 할 때에는 가장 중요한 말, 꼭 필요한 말을 남기게 되지요. 오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겨지길 바랍니다.

<말씀>

요한복음 14장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나눔>

1. 예수님께서는 25절에서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곧 어디론가 떠날 것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그 떠날 곳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나타날 일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말씀해주심으로 ‘믿음’을 세워주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아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 뜻이었구나’ 깨달았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난 뒤에 성령님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보혜사(성령님)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원 뜻은 대변자, 변호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대변해주시는 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4. 예수님께서 떠난 뒤에도 제자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홀로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예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5.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알게 되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세상이 전혀 알 수 없는 ‘평안’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7. 28절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이유,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십자가의 슬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8. 세상은 이러한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돈과 권력만을 가진 자들도 이러한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이러한 일이 어리석게만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자신이 관계없음을 선언하십니다.

9. 오늘 우리는 한 주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관계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는 지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나아가 성령님을 도우심을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한주를 시작합시다. 그래서 놀라운 평안을 누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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