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0 장 | 고린도전서 10장 277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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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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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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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7/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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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 KLB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옛날 – Bible Gateway

고린도전서 10. Korean Living Bible …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천사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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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0/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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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5(금) “고린도전서 10:1-13” / 작성: 정한조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 앞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삶이 고달프십니까?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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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5/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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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해석 – 다음블로그

고린도전서 10장 해석 ·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 백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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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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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9월 5일. 고린도전서 10장. – 하늘품은교회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덕을 세우는 신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으나, 그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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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poom.or.kr

Date Published: 5/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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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 벧샬롬교회

고린도전서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고린도전서 10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2-09-05. 설교본문; 음성설교; 음성다운 · 설교 내용 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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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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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린도 전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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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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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1)침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ㄱ)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021/01/15(금) “고린도전서 10:1-13” / 작성: 정한조

[본문] 고린도전서 10:1-13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다도록’

[역사적 교훈1_은혜와 징계(1-5절)]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장은 인사와 고린도 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분쟁에 대한 답변이고, 5장은 음행에 대한 답변, 6장은 성도 간의 소송 문제에 대한 답변, 7장은 결혼에 대한 답변이며, 8-10장은 우상 제물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백 년 동안 노예살이했던 애굽에서 자유하는 은총을 입었음에도 그 자유를 남용하고, 패역한 삶을 삶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권면하면서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꼭 알기를 바란다’라는 것의 강조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중요한 내용을 전할 때나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사실을 일깨워줄 때 종종 이렇게 표현하곤 합니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가리킵니다. 특히 ‘구름 아래에 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부모의 보호와 양육을 받고 자랐다’라는 것을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라고 말합니다. ‘슬하(膝下)’가 ‘무릎 아래’입니다. 그래서 ‘구름 아래’는 ‘하나님 슬하’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얼마나 많이 보호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무릎 아래’ 정도가 아니라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셔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구름 아래에 있었다는 것과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애굽에 속했던 사람이 가나안에 속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된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1절은 2절에서 이렇게 해석됩니다.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름 기둥 아래에 있다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기 전에 세례 예식을 행하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사건은 정말 세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애굽이 죄와 사망의 상징이라면, 가나안을 향하는 길은 복과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헤엄을 쳐서 스스로 가나안 땅에 닿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크고 작은 배를 타고서 힘을 써서 배를 조종했거나 노를 저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열어 주시고, 그 땅바닥을 마르게 해 주셨기 때문에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너고 나자 홍해는 다시 닫혔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는데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헤엄을 친 것도, 노를 저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들 모두가 홍해 물을 한모금씩 마셔서 그 수위를 낮추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홍해가 열리고 길이 났던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 교인이 된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세례 교인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가나안을 향하는 길만 있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고, 하나님을 목적 삼고 걷는 길만 있습니다.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신령한 음식’은 ‘만나’를 가리킵니다. 만나는 몸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럼에서 ‘육체의 양식’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땅에서 솟아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주워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를 하루분씩만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리고 다 먹지 못할 정도로 거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삶이 썩고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거두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에도 만나는 괜찮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을 위한 음식이 신령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우리의 먹는 모든 음식은 신령한 음식이 됩니다.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수도꼭지 정도가 아니라 강같이 터졌습니다. 그래야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즉 그 물이 터지게 해주신 분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터진 반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령한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384장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입니다. 이 찬송의 2절 하반부 가사가 이러합니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 앞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삶이 고달프십니까? 인생이 목이 마르십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께서 목마른 우리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심에도 그들을 그것을 몰랐습니다.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홍해를 건넘과 불기둥과 구름기둥, 반석에서 터진 물, 만나로 대표되는 은혜 베푸심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10명은 “우리는 그들 앞의 메뚜기와 같다”라고 보고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심히 아름다운 땅이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10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의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는 매해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물론 이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을 마지막으로 받으면,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역사적 교훈2_반면교사(6-11절)]

6-11절은 이런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본보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보기(튀포스)’는 ‘맞아서 생긴 자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믿는 자가 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국’과 ‘본보기’가 같은 말입니다.

혹 몸에 수술 자국이나 불에 덴 흉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더욱 조심해서 살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우리 몸에 있는 상처 자국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더욱더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내려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엘로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자기가 섬길 신을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상숭배는 자기를 섬기는 것이고, 우상 숭배자와 자기 숭배자는 동의어입니다.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싯딤에서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우상숭배하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9-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마음이 상해서, 만나도 지겹고,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아, 그것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원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이 ‘진면교사(眞面敎師)’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와 같습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진면교사를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미워하면서 닮는다’라는 말처럼, 반면교사의 삶이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 위에 조심(12-13절)]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런즉’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서 있지 못하면서 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음에도 성숙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람의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자라갑니다. 이 세상에 다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자람을 잘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쓰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바울은 본문에서 4가지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이 고린도 교회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요구받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욕망 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이고,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영과 진리로’로 정하고, 말씀 읽기와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감으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반면교사의 본보기로 삼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진정한 세례교인으로 살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자손들은 400년간의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과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보았고,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에서 터지는 물을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우상숭배하고, 정결하게 살지 않고 음행을 저질렀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고린도 교회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사판과 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은총과 역사를 베풀어주셨음을 고백합니다. 바라옵나니 이스라엘 자손들과 고린도 교회를 반면교사로 삼아, 하나님을 존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까? 거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2.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삶과 신앙에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3. 하나님은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삶과 신앙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할 길을 경험하였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4. 현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Till the day of glory ~~~~

<고린도전서 10장 구문해석>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형제들아 –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교회 전체를 하나의 몸(body)으로 이해하였다.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출애굽 사건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출애굽 사건이 지닌 참된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할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이 다 – 여기에서 ‘다'(*판테스)라는 말이 강조되어 2, 3, 4절에서 5번에 걸쳐 반복된다. 이처럼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멸망하였다(5절)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다.

구름 아래 있고 – ‘아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는 공간적으로 구름 아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출애굽하여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인도를 의미한다(출 13:21, 22;14:19, 24등).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받았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도 끊임없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覺醒) 없이는 멸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고 있다.

모세에게 속하여 – 홍해를 건너는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롤 굳게 믿음으로써 모세와 하나로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체를 이루는 것이다(롬6:3-5).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혹자는 구름과 바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들과 공간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해주는 역할이었고 동시에 모세의 권위를 높여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제자가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름과 바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을 통해 인도함을 받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체험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초자연적 능력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게 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구름 기둥과 홍해 바다’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곧’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바다’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물세례’를 상징한다(롬 6:3).

10:3-5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신령한 식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콘 브로마'(*)

에서 ‘식물’을 뜻하는 ‘브로마'(*)는 단순히 ‘고기’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음식물을 나타낸다. 본문은 ‘만나’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출 16:4, 14-18).

그런데 이 ‘만나’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1) 유형론적(類型論的, typical) 해석을 하는 자들의 견해로, 이에 따르면 ‘신령한 식물’은 보다 고상하고 미래적인 것의 모형으로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쓰여진 ‘신령한’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2) 혹자는 이를 ‘영혼을 위한 식물’이었다고 해석한다. 즉 만나는 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도 주어진 음식이라는 견해이다(Calvin). 이 견해에 따르면 ‘만나’는 곧 성만찬 때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만나는 평상적인 주식물(主食物)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

이다(느 9 : 15). 또한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영혼을 구원하는 영적인 효력이 없음을 말씀하시고 예수 자신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참 떡이심을 가르쳤다(요 6:49-58).

(3) 혹자는 만나를 ‘성령으로부터 유래된'(procceding from the Divine Spirit) 것으로 보는데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창 1:2; 시 33:6).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만나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음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공급된 초자연적인 양식이었다.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 ‘따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두세스'(*)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몇몇 주석가들은 바울이 랍비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우화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한다(Ruckert, Baur, de Wette, Meyer). 그 우화에 의하면 14피트 높이의 바위 덩어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한 전설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반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라스'(*)는 움직일 수 있는 바윗 덩어리를 가리키는 ‘페트로스'(*)와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물질적인 바위 배후에 그 물의 참된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셨으매 – 앞 문장에서의 ‘마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온'(*)은 부정 과거로 마신 것이 과거 사실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반면, 본 구절에서의 ‘마셨으매'(*에피논)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마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메마른 광야에서 계속 물을 공급받았으며 그 공급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며 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요6:31, 32).

바울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든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찬에 유추(類推, analogy)될 수 있는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먹고 마셨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에는 멸망받았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성찬’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할 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악을 즐겨하는 자 – ‘즐겨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뒤메산'(* )

은 ‘뒤모스'(* ‘영혼’)와 전치사 ‘에피'(…쪽으로’)의 합성어로 사람의 마음이 뭔가를 하고자 하여 한쪽으로 쏠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민 11:4, 5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갈망했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야채를 간절히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시기는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에 대해서는 진노로 큰 재앙을 내리셨다(민 11:32- 34).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에 대한 갈망은 곧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였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전제로 고린도 교인들이 이교도들의 희생 제물 축제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데 에이돌롤라 트라이 기네스데'(*)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상 숭배자가 되기를 멈추라’는 뜻으로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이미 우상 숭배를 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 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것(출 32 :4ff.)같이 이교도들의 관습, 즉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가함으로써 우상 숭배의 행동을 범하였다. 바울은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이미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와 고린도 교인의 우상 숭배를 비교하고 있다.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경배한 후 불경스러운 향연을 벌인 모습을 묘사한다(출 32:1-6).

1;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있는 모압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젊은청년들이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우상을 경배하였다.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처녀들과의 음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민 25 : 1-9).

따라서 우상 숭배와 간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당시의 고린도 지역도 종교적인 매춘 행위가 성행하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신 ‘비너스’를 섬겼으며 비너스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는 바알브올을 섬길 때 행해지던 음행이 그대로 재현(再現)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상 숭배와 간음죄는 하나님께 큰 죄악이므로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다.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그곳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징벌로 전염병이 돌게 하셨으며 그 일로 이만 삼천 명이나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민 25 : 1-9).

9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한편 그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민 25 : 9 (70인역), 필로(Philo), 요세푸스이(Josephus) 등에 의해 2만4천 명으로 제시되어 천명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민 25:9의 내용이 환난의 전 기간(이틀) 동안의 희생자를 언급한 데 반하여 본절에서는 당일 하루만 계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10:9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시험하다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페이라조멘'(* )은 하나님의 선하심, 능력, 지혜 등을 그릇된 동기에서 알아보려는 인간의 생각을 가리키는 동사이다(마 4:7;행 5:9;히 3: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을 시험하고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민21:4-6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였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주를 시험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한계(限界)를 벗어났다. 즉 이교도들의 우상 축제에 참여함으로 주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으며 설사 그러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관용이 있는지를 시험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상태를 경고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의미로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주를 시험할 가능성이 바울을 포함한 모두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10:10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원망하다가 – 본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네번째 잘못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었다. 본절은 고라의 반역과 그를 따르는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염병으로 멸망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민 16:1-2).(31,32)(41)(49)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

멸망시키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올로드류투'(* )는 히브리

어 ‘함마쉬히트'(*)의 인용으로(출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온 멸망 시키는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킨다.

원망하지 말라 –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을 반대하여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축세 참여에 반대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불평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경고를 하고 있다.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만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텔레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끝’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1) 유대인 시대의 끝을 뜻하기도 하며

2)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한다(Hendriksen, 마 13:39;히 1:2).

3) 또한 ‘메시야 시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Godet).

그러나 바울이 긴 세월의 ‘완성’을 뜻하는 단어 ‘운텔레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한 세월의 ‘끝’을 뜻하는 ‘타 텔레'(*)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창조 이래 지나간 모든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Lenski). 즉 그리스도가 이땅에 옴으로써 유대 민족이 율법을 통한 제한적인 구원의 길로 인도되었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시대가 열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 줄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 )는 현재 서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넘어질까 조심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이방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었다(겔 12:22).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이미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5, 8절) 믿음 가운데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는 종교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1) ‘시험’(test) 구약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Some time later God tested Abraham

신약에서는 주로

2) ‘유혹'(temptation)이나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3)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Hendriksen).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NIV)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 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10:14-15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피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퓨게테'(*)는 KJV에는 ‘달아나라'(flee)로 번역되어 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망하여 멀리 있는 것이다. 희생 제사의 축연이 곧 우상 숭배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우상 승배의 경계선까지 가는 행위였으며 또한 충분히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할 가능성이 있었다(Godet). 그러기에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우상 숭배만을 하지 말라는 것이아니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일조차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 있는 자들에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니모이스'(*)는 1:19에서 언급된 ‘지혜있는'(*소포스)과는 달리 ‘지각있는’, ‘총명한’등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지각있고 총명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양심을 속여가며 제물의 고기를 먹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分別)하라고 촉구한다.

스스로 판단하라 –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지혜가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가정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포함된다.

10: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본절부터는 ‘성만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1) 신약 시대의 성만찬은 구약 시대의 화목제사 뒤에 있었던 ‘축제’와 상응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제사를 드린 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성전 뜰에서 신성한 축제를 가졌다. 거기에는 제사장도 같이 참여하였다.

2) 제단에 드려지지 않고 남은 재물은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었는데 재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은총과 화해의 보증이 되는 행위였다(Godet).

마찬가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화해의 표식이 된다.

신약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때에 시행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성찬이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임을 확인한다. 즉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하며 주님과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자들과 서로 하나 된 지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축복의 잔은 – ‘축복'(*율로기아스) 이라는 말은 ‘찬사’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술잔을 들 때 복을 기원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월절에 마셔야 하는 네 잔 가운데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토 포테리온 테스 율로기아스)이었다.

참예함이 – ‘참예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communion)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떼는 떡은 – 여기에서 바울은 성만찬의 원래 순서와는 달리 ‘떡’보다 ‘잔’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살과 피를 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들이 떼어 먹는 떡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몸이니 –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한 몸'(* 헨소마)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유기적인 단일체'(the organic unity of the congregation)를 뜻한다고 한다(Grosheide).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Meyer, Godet, Osiander).

왜냐하면 16, 17절에서 한 떡을 떼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떡을 떼는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의 신비한 영체(靈體)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엡 5:23;골 1:18).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 – 이것은 혈통(血統)에 의한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 ‘영적인 이스라엘'(*이스라엘 카타 프뉴마)과 상반된다. 이로써 앞구절에서 언급한 성찬의식을 유대인의 의식과 대조하려 하고 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이…아니냐 –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제단 위에 태워서 드리고 남은 고기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성전 뜰에서 나누어 먹었다(레 7 : 15).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주의를 다시 구약으로 돌려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물을 먹은 것과 고린도 교인들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여 제물을 먹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 – 제물은 제단 위에 드려지는 것이므로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Hendriksen). 바울은 이에 비추어 이방 신전에서 열리는 우상의 축제에 고린도 교인들이 참여하여 같이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이방의 신(神)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0: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상’이든 ‘우상의 제물’이든 모두가 거짓임을 강조한다. 우상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8 : 4) 우상의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제사는 여전히 우상 숭배였으며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위태롭게하는 것이었다.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앞구절에서 우상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본절에서는 그 우상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귀신임을 시사한다.

우상 자체는 결코 신(神)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배후에는 살아서 활동하는 영적인 존재들이 있다(엡 2:3 ;6:12).

‘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이모니오이스'(*)는 ‘하급의 신’, ‘잡신’ 등을 의미하는 ‘다이몬'(* )에서 나온 파생어로서 바울서신에서는 본절과 딤전 4 :1에서만 나온다.

본절은 신 32:17을 그대로 바울이 인용한 것이다(시 96:5;106:3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주의 잔과 귀신의 잔 – 바울이 17절에서는 ‘떡’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잔’에 강조를 두어 ‘잔’을 앞에 두었다. 이렇게 하여 ‘잔’과 ‘떡’이 모두 중요함을 균형있게 서술하고 있다.

당시에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서 향연을 베풀 때 첫번째 술잔은 ‘쥬피터'(Jupiter)에게 두번째는 쥬피터와 ‘님프'(Nymphs)에게, 세 번째는 ‘쥬피터 소터'(Jupiter Soter)에게 바쳤다(Godet). 또한 술과 고기 등 모든 음식은 우상의 이름으로 축복되고 봉헌되었다(삼상 9:12, 13). 이러한 술잔을 드는 것은 곧 악령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 우상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노여워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젤루멘'(*)은 ‘질투하게 하다'(to provoke to jealousy)는 뜻으로 이 ‘질투’는 사랑과 신뢰에 대한 배신을 당하여 유발되는 감정으로 인간이 갖는 분노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분노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Hendriksen). 구약 시편에서도 ‘질투하다’에 해당하는 ‘카나'(*)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며(시78:58), 신 32:16, 21에서는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본절은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반어적 표현으로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므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본절의 질문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단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미 정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Grosheide). 바울의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결정한 것을 확고히 하고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0:23-25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따라서 시장에 나와 있는 음식들이 제물로 쓰여졌는지 아닌지를 가리기란 어려웠다.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여기에서의 ‘양심’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믿음이 약한자의 양심을 말한다는 견해이다. 강한 자는 고기를 먹더라도 자유함으로 인하여 양심의 거리낌을 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것은 약한 자의 양심을 가리킨 것이다(Holsten, Godet).

(2) 이 말은 특별히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의식하여 한 말이 아니고 전반적인 모든 사람들을위하여 한 말로서, 일단 시장에 나온 고기는 양심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그 고기가 제물인지 아닌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3) 나중에 제물인 것을 알게 되더라도 양심의 부담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묻지말고 먹으라는 것이다(Chrysostom, Erasmus).

이와같은 세 가지 견해 중에서 (1)의 견해가 가장 자연스럽게 문맥과 연결된다. 이는 29절의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는 언급과 잘 연결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강한 자들은 개의치 않고 사먹을 수 있겠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우상 제물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여겨서 사먹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였다.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본절은 시 24:1의 인용으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식사 전에 드리는 감사 기도의 형식이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며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임을 인정하는 고백이었다.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 ‘충만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는 땅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제물로 바쳐진 동물의 고기도 우상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제물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또한 우상 제물로 쓰여진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음식이 본래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된 것이므로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다.

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먹으라 – 본절에서는 식사에 초청받는 문제에 대해다루고 있다.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 우상의 제물들은 이미 그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한 것이므로 단순한 음식으로서의 의미 밖에는 없다.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나 이교도들에게 초청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교도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을 수 있으며 바울은 그런 자들과의 교제를 금하지 않았다(5: 9, 10).

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알게 한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 그들은 상 위에 놓여진 음식은 어떤 것이든지 양심의 가책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약한 그리스도인이 특정한 음식이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면 만일 그 말을 듣고도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 이 제물임을 가르쳐준 사람은 그 약한 믿음이 그 일로 인해 성처받아 실족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제물을 먹는 자에게 있다.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보고 우상과 교류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우상 숭배자가 아닌가 하는 등의 오해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제물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약한 자들이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판단을 받으리요 – 이에 대해

1) 혹자는 본절을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 인해 너희 자유가 제약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너희가 옳다고 생각되는 한 너희의 자유함을 온전히 유지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Meyer, de Wette).

2) 그러나 28절의 문맥과 연결시켜 볼 때 보다 적합한 해석은 ‘너희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들의 비방을 듣는다면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즉 나의 자유가 남을 죄짓게 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Godet, Hendriksen).

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비방을 받으리요 – ‘감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티'(*) 는 본래 ‘은혜'(grace)라는 의미인데 ‘감사함’의 뜻

으로도 쓰인다(딤전 1:12). 본절에서는 음식에 대한 축사로 사용된 용어로 보인다(TDNT). 바울은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집에 초청받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먹는다면 윈리적(原理的)으로는 합당한 것으로 비방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유익을 위해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자유와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최대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롬 14:21).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이라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론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은 그것이 먹는 것이든 마시는 것이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4 : 11).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라는 말 속에는 바울이 이제까지 말하였던 ‘타인의 유익’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시 133:1-3).

10:32,33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나와 같이…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본보기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의 환경에 적응시켰다(9 : 18-22). 특히 그는 9:22에 기록된 대로 약한 자들을 얻기위하여 스스로 약한 자가 되었다. 바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다(갈 1:10). 즉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Grosheide) 스스로를 순응시키는 겸손함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아 살면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중심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갈 2 : 20).

매일말씀묵상. 9월 5일. 고린도전서 10장. > 매일말씀묵상

(아래 관련 링크 클릭하여 드라마 바이블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

고린도전서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1.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사도는 , 자신이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 이제 사도는 한 부정적인 사례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사례를 듭니다. 그들은 홍해를 지나면서 세례를 받았고(사도는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에 비유한다), 신령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으며,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함께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구원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2.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 이들이 신령한 것을 먹었다는 것 보다 이들이 멸망당했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 그리고 주를 믿지 않고 시험했고 원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7~10). 이들은 고린도 교회와 모든 후대의 교회를 위한 거울이 됩니다(6,11). 이 과거의 교훈을 토대로 사도는 ‘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 ’ 즉 스스로 신앙이 괜찮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 (12). 이미 은혜를 받았으니 ,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3. 하지만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는 미쁘신 ( 신실하신 ) 분이지 ,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13). 신자가 어떻게 자유를 사용하고, 자기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려고 한다면 모든 상황에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감당할 은혜를 주실 것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피할 길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 시험을 직면하여 믿음으로 감당하려는 자들에게 견딜 수 있는 힘과 이길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 입니다.

4. 14 절에서 사도는 다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 문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와 ,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고기를 바치는 연회에 참석해도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 첫 질문에 대해, 사도는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먹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8:9~13). 이것이 사도가 자신의 경우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한 사례를 든 이유입니다.

5. 사도는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사가 드려지는 연회나 의식에 참석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 사도의 대답은 ‘ 안 된다 ’ 입니다 . 사도의 이 대답은 고린도 교회에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 축제가 보편적인 문화 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런 우상 축제(제사) 따위에 참여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불평과 원망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한 신앙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상의 제사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6. ‘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고 (14) 말한 사도는 , 지금 자신이 스스로 분별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15), 성찬 ( 주의 만찬 ) 을 예로 들어 논증합니다 (16~17). 논증의 핵심은 ‘ 참여는 친교로 이어진다 .’ 는 원리입니다 . 여기서 사도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합니다(16절에 두 번, 18절과 20절). 기독교 친교(코이노니아)의 핵심은 주의 만찬에 있습니다.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고, 떡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형벌 받아 찢기신 살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상징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적인 임재를 말합니다. 성찬은 단순히 기계적인 간접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나눔과 교제를 가지는 것이 주의 만찬의 깊은 의미입니다.

7. 우상이 참 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 속에서 영적 실재, 마귀의 실재가 작용하고, 결국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므로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 그것은 마귀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마음을 여는 행위입니다.

8. 사도가 우상 축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 참여하는 그 축제의 우상과 참여하는 자들이 동일시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고 , 그리스도와 동일시 ( 연합 ) 됨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은 , 자신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상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 사도는 우상 축제에 참여함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다 마실 수는 없습니다(21). 주보다 강한 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도는 강하게 권합니다(22).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를 그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에 참여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본문은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9. 이제 사도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의 문제를 정리합니다(23절 이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습니다(23). 먼저 일반적 원리는 ,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24).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 자기의 권리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 성도의 삶, 특히 교회의 삶에서 이 원리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10. 사도는 이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구체적 가르침을 줍니다 . 첫째 , 개인적으로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 시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를 일일이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25). 둘째 , 불신자의 초청을 받고 가서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27). 그러나 만일 누군가 이것이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을 해서 알게 되면, 그것을 말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합니다(28). 이것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말하는데, 왜 우리가 남의 양심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29~30), 사도의 대답은 31 절입니다 . “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신자는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존귀를 얻도록 하기 위해 나는 수고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범사에 이 원리를 신자들은 적용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 ,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2). 범사에 모든 사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하고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 (33). 이 말은 언제나 사도의 다른 말과 함께 읽혀져야 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범사에 참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분별과 제한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일뿐입니다.

12. 사도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생활 원리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주장 , 자기 권리를 말하고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 자기 권리와 자기 유익만 구하다가 , 교회와 성도 앞에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혹여 교회의 방해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여 내 행동과 표정과 결정과 선택이, 누군가에게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려 섬기는 사람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덕을 세우는 신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으나, 그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시고, 혹여 교회를 방해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넘어지게 하는 자리에는 서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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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찬 218)

1.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사도는 자신이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제 사도는 한 부정적인 사례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사례를 든다. 그들은 홍해를 지나면서 세례를 받았고(사도는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에 비유한다) 신령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으며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함께 먹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와 구원을 예표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광야에서 멸망 당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우상숭배와 간음 그리고 주를 믿지 않고 시험했고 원망했기 때문이다(7~10). 이들은 고린도 교회와 모든 후대의 교회를 위한 거울이다(6,11). 이 과거의 교훈을 토대로 사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스스로 신앙이 괜찮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한다(12).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는 미쁘신(신실하신) 분이지 사람을 넘어뜨리시는 분이 아니다(13). 어떻게 자유를 사용하고, 자기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려고 한다면 모든 상황에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감당할 은혜를 주실 것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다. 피할 길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뜻이라기 보다 시험을 직면하여 믿음으로 감당하려는 자들에게 견딜 힘과 이길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다.

2. 14절에서 사도는 다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로 돌아온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와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고기를 바치는 연회에 참석해도 되는가의 문제다. 첫 질문에 대해, 사도는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한다면 삼가야 한다(8:9~13). 이것이 사도가 자신의 경우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한 사례를 든 이유다. 사도는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사가 드려지는 연회나 의식에 참석해도 되는가? 사도의 대답은 ‘안 된다’이다. 사도의 이 대답은 고린도 교회에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우상 숭배 축제가 보편적인 문화에 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런 우상 축제(제사) 따위에 참여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불평과 원망이 일어났을 것이다.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14) 말한 사도는 지금 자신이 스스로 분별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하면서(15) 성찬(주의 만찬)을 예로 들어 논증한다(16~17). 논증의 핵심은 ‘참여는 친교로 이어진다’는 원리다. 여기서 사도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한다(16절에 두 번, 18절과 20절). 기독교 친교(코이노니아)의 핵심은 주의 만찬에 있다.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고 떡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형벌 받아 찢기신 살을 상징한다. 이것은 상징만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가진다. 성찬은 기계적 경험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슴이 벅차 오르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나눔과 교제를 가지는 것이 주의 만찬의 깊은 의미다. 우상들도 참 신은 아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 속에서 영적 실재, 마귀의 실재가 작용하고, 결국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므로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20). 그것은 마귀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마음을 여는 행위다. 사도가 우상 축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참여하는 그 축제의 우상과 참여하는 자들이 동일시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고 그리스도와 동일시(연합)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상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우상 축제에 참여함을 반대하는 것이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다 마실 수는 없다(21). 주보다 강한 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도는 권한다(22).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행위를 그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에 참여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본문은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다.

3. 이제 사도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의 문제를 정리한다(23절 이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다(23). 먼저 일반적 원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24).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권리를 말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다. 성도의 삶, 특히 교회의 삶에서 이 원리는 언제나 중요하다. 사도는 이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구체적 가르침을 준다. 첫째, 개인적으로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시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를 일일이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한다(25). 둘째, 불신자의 초청을 받고 가서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이다(27). 그러나 만일 누군가 이것이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을 해서 알게 되면 그것을 말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한다(28). 이것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말하는데, 왜 우리가 남의 양심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29~30), 사도의 대답은 31절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존귀를 얻도록 하기 위해 나는 수고할 수 있다. 말로만이 아니라 범사에 이 원리를 신자들은 적용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32). 범사에 모든 사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하고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33). 이 말은 언제나 사도의 다른 말과 함께 읽혀져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범사에 참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다. 이 분별과 제한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일 뿐이다.

4. 사도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생활 원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주장, 자기 권리를 말하고 챙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섬기는 사람이다.

5.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조상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벼이 여김으로 귀신과 교제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지켜주옵시고,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 동기와 목적으로 행하되 자신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구하고 행동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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