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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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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고린도전서. 제 1 장. 인사와 감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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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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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 KLB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고린도전서 1. 1. 1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믿음의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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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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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KLB;KJV;NIV –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을 … 1 Paul called to be an apostle of Jesus Christ through the will of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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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8/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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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 –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 고린도전서제 1 장 인사와 감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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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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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화) \”고린도전서1:1-9\”/ 작성: 백호성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절-9절 찬송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약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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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5/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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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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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edkjy.tistory.com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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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장 4~9절(2) – 다음블로그

고린도전서1장 4~9절(2). Peter Ryu. 2010. 12. 9. 01:22 댓글수0 공감수0. 12/07/2010(화).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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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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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11 주석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선포합니다.” 15장에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선포했던”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대해 다시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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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epreaching.org

Date Published: 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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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 네이버 블로그

교회된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있는 곳은 또한 거룩합니다.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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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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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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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린도 전서 1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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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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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

인사와 감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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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믿음의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성도가 된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각처의 모든 사람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 안의 분쟁

4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5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과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일에 풍성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6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 말씀을 굳게 믿고

7 모든 영적인 축복을 누리면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은 # 1:8 원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재림하시는 날에 여러분이 흠 없는 자가 되도록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9 여러분을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부디 서로 갈라지지 말고 # 1:10 또는 ‘같은 말을 하고’ 의견을 모아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연합하십시오.

11 나는 글로에의 집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2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고 말한다니

13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누어졌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 1:13 또는 ‘침례’ 세례를 받았습니까?

14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 1:14 또는 ‘침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15 그래서 여러분은 아무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16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주긴 했지만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기억이 없습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18 십자가의 # 1:18 헬 ‘로고스’ 진리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19 성경에도 # 1:19 사29:14 “내가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없애고 총명한 사람들의 총명을 쓸모없게 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그렇다면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시대에 철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21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지혜로는 자기를 알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는 전도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22 유대인은 기적을 보기 원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며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25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고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의 연약함은 사람의 강한 것보다 강합니다.

26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여러분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 않았고 유능한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28 세상이 대단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을 형편없이 낮추려고 천한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30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 1:30 또는 ‘우리에게지혜와의로움과거룩함과구속함이되셨으니’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또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우리 죄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 KLB;KJV;NIV

Copyright © 1985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고린도전서

제 1 장

인사와 감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과 형제 소스데네 는

2 고린도 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 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 에게, 나는 아볼로 에게, 나는 게바 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 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 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의 이름으로 너희가세례를 받았느냐 헬 , 또는 침례

14 나는 그리스보 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나는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헬 , 또는 침례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헬 , 또는 침례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내가 또한집 사람에게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헬 , 또는 침례 헬 , 또는 침례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헬 , 또는 침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사 29:14 기록된 바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 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 인은 지혜를 찾으나 인은표적을 구하고인은 지혜를 찾으나 또는 이적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 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 인이나 헬라 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2015/12/01/(화) \”고린도전서1:1-9\”/ 작성: 백호성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절-9절

찬송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약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속주 중에서 ‘아가야’라는 로마 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 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습니다. 바울시대에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네 번째 큰 도시로 사실상 그리스의 중심지였는데, 당시에도 인구가 약 60만 명을 헤아리는 상업중심의 거대 도시였습니다. 거대한 상업도시들이 그러하듯이 고린도 역시 다양한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그것은 곧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기에 고린도는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한 심각한 도덕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이미 시작하여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있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지식이 풍족하며 영적인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하고 신령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오류들을 바로잡기 위해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의 서두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로 소개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내에는 여러 분파들이 있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앞장섰으며, 공공연하게 교회를 핍박했던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뒤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사도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음은 물론 지금도 역시 사도의 자격으로 편지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 편지를 통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의심하거나 훼손치 말고 그 교훈을 분명하게 지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밝히며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을 말합니다. ‘고린도’라는 지명과 나란히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이 언급된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환락의 대명사인 ‘고린도’ 와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성결한 사람들의 모임인 ‘하나님의 교회’ 란 표현을 이어 사용함으로 타락한 세속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극복하고 또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는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이며,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거룩하여 졌다 고 ‘수동태’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의 노력이나 행위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거룩함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거룩한 백성, 즉 성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먼저, 비록 자신의 편지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방종과 미성숙한 품행에 대해 질책과 책망으로 가득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성도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성도들’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며, 또 그와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성도’라는 명칭에 걸맞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바울의 감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의 편지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방종과 타락에 대한 질책과 권면을 위해 쓰인 편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표현은 조금은 생뚱맞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가능한 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자신의 책망으로 인해 혹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러한 점을 미리 감안하여 그들이 가진 신앙의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내고, 그것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신뢰의 마음을 보여주어 그들이 낙담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이고 영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참 담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이미 많은 문제로 인해 갈라져서 다투고 있었고, 윤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교회가 위치한 고린도라는 도시조차 당시에도 이미 타락과 부패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9절에서 표현한 ‘하나님의 미쁘심’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타락의 도시에서 타락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불러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미쁘시다’라는 말은 ‘신실하다’ 또는 ‘믿을만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찬양과 선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담대히 선언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을 성도로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헬라의 사교장이라 불리었을 만큼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기에 막대한 부와 사치를 누렸던 곳.., 더욱이 아프로디테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우상의 신전이 즐비하였고, 성적인 타락과 방탕이 가득했던 곳..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이러한 곳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도 과거에 이와 같은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시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불러내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을 만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만백성이 구원을 얻고 이방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 보다 더 의로웠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도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멸망 받아 마땅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성도’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러주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속에 찬양이 소멸되고 평화가 깨어지며, 긍휼과 사랑, 포용과 용서가 사라지고 대신 원망과 불만, 분열과 대립, 다툼과 미움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존재였는지에 대해 잊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결코 교만할 수 없으며, 군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에서 부터 용서와 화해와 일치의 샘이 터져 나올 것이며, 자기 의의 열매가 아닌 참된 윤리적 성화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 앞에서 확인 될 때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 바른 분별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자기 포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심령속에서 깊은 찬양과 감사가 고백되고, 용서와 포용, 이를 통한 ‘자기 내어줌’이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이 새벽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은혜의 하나님,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그렇기에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은혜의 존재이기에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은혜의 영성을 부어주시고, 분열과 분노와 원망의 길이 아니라 배려와 격려와 ‘자기 내어줌’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인간의 의가 아니라 죄악과 멸망의 존재였던 우리를 불러내신 그 사랑과 은혜의 힘으로 우리 속에, 또 우리의 이웃 속에 존재하는 죄와 어두움을 이기게 하옵시고, 그 은혜의 힘으로 거룩을 향한 싸움을 싸우고 성화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교회가 존재하는 곳이 높고 높은 산이 아니라 죄악 가득한 세상 가운데 임을 기억하고 그 세상 속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밝히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고린도교회가 위치한 곳은 어떤 곳입니까?

2.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 속에는 바울의 어떤 마음이 담겨있습니까?

4.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5. 용서와 수용, 은혜와 배려를 회복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나아가 참된 성화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작성: 백호성)

고린도전서 1장 (개역개정/쉬운성경, 자비교회 성경통독)

인사와 감사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전]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전]1: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고전]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mission200

12/07/2010(화)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묵상 4~9절(2): 8~9절의 말씀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믿음과 더불어서 소망이 담긴 말씀을 전한다. 동시에 이렇게 하시는 이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즉 우리의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써 가능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님은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믿음을 드리고 있다.

동시에 이 말씀에서는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날이란 바로 심판의 그 날을 의미하며, 주님의 은혜로 그 날에 우리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주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 날에 의로운 자로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주님은 주님께서 택하시고, 주님께서 사하시고, 주님께서 지키시고, 주님께서 의로운 자라 칭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의 존재는 오직 주님에 대한 믿음만을 고백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오직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을 들어가는 모든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견고한 믿음 또한 주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주님께 간구하는 자세만이 필요하다. 주님만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할 일이란 이것뿐인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아니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모든 세포가 주님께 온전히 스며들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교제의 기쁨을 기록하고 있다. 나는 요즘 그런 기쁨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정말 이 부분에 주님께 감사 드린다. 네 명의 못난 남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보자고 만났다. 그런데 그 기쁨이 정말 크고 크다. 얼마나 못났는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데 정말 효과적이고 정말 열심이다. 그 열성이 대단하여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못난 공동체가 아름답다. 이제 그 기쁨을 더욱 키워가고 싶다. 그래서 교회 전체가 온전한 공동체로 묶여지기를 바란다. 아니 모든 크리스천들이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란다. 이 때의 교제의 기쁨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그런 기쁨을 누리게 될 때 이 모습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천국에서 얼마나 더 큰 기쁨을 누리시고 계실까 하는 생각으로 상상만 해도 감격스럽다.

바울은 여기서도 교제의 기쁨을 얘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정말 바울답고,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늘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으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가 나의 이웃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의 입술로뿐만 아니라 나의 삶 자체로………………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 많이 힘듭니다. 이 때 나는 나에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나의 진정한 주인이 돈인지, 주님인지 물어 봅니다. 구원에 대한 기쁨보다 물질적인 고통이 더 커서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정말 누가 아니 무엇이 주인인 것인지 나 스스로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마음으로는 주님이 주인이라고 수없이 매 순간 고백하면서도, 내 마음과 얼굴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주인이신 주님! 주님만으로 기뻐하며, 주님만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행하게 하옵소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 정말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의 삶이 본을 보여 주신 주님! 내게도 그 비밀한 경륜을 보여 주시옵소서. 알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종으로, 아니 아버지의 아들다운 당당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Center for Excellence in Preaching

이번 주일 Lectionary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부활 신학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부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는, 바울이 이미 언급했던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해 명확하지 못한 이해는, 예를 들어, 그 당시 고린도 교회를 물들이고 있던 성적인 문제나,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문제나, 법정에 호소하는 문제들에 대한 오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아니, 부활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의 한 끝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는 1장과 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서술함으로 시작하고, 이제 여기서 부활에 대해 논의함으로 실제적으로는 끝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15장을 굳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전1:17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논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소식임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선포합니다.” 15장에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선포했던”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고전 1:28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가져오셨다고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한 쪽이 없다면 바울에게는 그 두 가지 사건은 모두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믿음과 영생 전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옥으로 가는 일방통행로에 자신을 내려 놓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용서를 영원히 누리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몇 가지 점들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 가운데 “선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망을 예수님의 부활 위에 두었던 것을 바울은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습니다(1절).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바울이 가르친 것을 단단히 붙들고 “굳게 지키면,” 부활의 좋은 소식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2절).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산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인 우리가 눈이 내리는 그 인생의 산을 오를 때 우리의 귀한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힘껏 붙들어야 하는 견인줄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부활의 견인줄을 잡던 손을 놓아버리면, 결국 가파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급박한 호소를 하는 것을 보면, 이미 고린도 교회 중 몇몇 사람들이 그리스도 부활 복음의 견인줄을 놓아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부르신 그 믿음을 잃어버린 채 지내온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집을 그 집의 반석인 부활로부터 떼어내어 모래 위에 세우려는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흔들리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을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울로부터 시작 된 신화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행하신 일에 대한 증언이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전체를 움직여 나가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고린도 전서 15장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부활에서 마무리 하는 방식으로 복음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3절 이후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오늘 나타났다가 내일이면 잊혀지는 뉴욕 타임즈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우리의 기억이 지속되는 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바울이 “먼저 받은 것”(3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사실 우리가 사는 한 매일 매일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 인생 전체의 헤드라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바울은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 목격자들의 상상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님을 거듭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후,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들의 리스트를 바울은 나열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 붙여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던 그들 중 몇몇은 “지금까지 살아있”(6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 중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식으로든 의심한다면, 그들은 그 살아 있는 증인들 중 한 사람을 만나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활을 설명하는 어떤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감사한 마음으로 따랐던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 자매들 안에도 믿음을 일깨워 주시도록 자신들을 은혜로 사용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진술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또 다른 믿음의 진술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들 역시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실 바울도 교회의 진술 위에 자신의 진술을 더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진술을 6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6절-8절).”

그 당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걸쳐 믿는 자들의 지경을 확장시키고 계셨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꽤 적은 선택된 증인들의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나타나서 보여주신 마지막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큰 사명이 있다고 바울이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일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열두 제자 중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비록 첫 번째 부활 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기쁨으로 바꾸셨기는 했지만, 부활 이전의 그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첫 번째 오순절 날에 내려 오셔서 충만하게 하셨던 일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초기에는 교회를 실제로 박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증인이었으며, 그 순교를 승인했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가던 도중에 그제서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8절), 즉 문자적으로는 유산된 태아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근본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메시지를 선포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바울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바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도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최선을 다하여 선포할 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그 복음 선포가 우리 본문을 규정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의 삶에 대한 아젠다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가 그들에게 “선포한”(1절) “복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오늘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 복음을 “선포”(11절)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복음 선포를 사용하셔서 은혜로 많은 다른 사람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15장 나머지 부분에서 바울은 그렇게 위대한 복음이 품고 있는 의미를 펼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복음 선포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헛된 일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야 말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한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선포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모두가 친구들과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과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부활의 복음입니다. 엄청난 절망으로 점철된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우리 이웃들과 자연 만물과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가 만들어버린 엉망이 된 상황 뿐 아니라, 세상 만물 전체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언젠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충격적인 이야기인, ‘좋은 사람은 드물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에서 Flannery O’Connor는, 이제 막 한 할머니를 죽이려 하고 있는 마음에 가책을 느끼는 살인자인 ‘부적응자’ (the misfit) 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부활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실, 그는 부활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은 자를 일으킨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부적응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에요.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흔들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 말대로 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밖에 할 게 없죠. 그런데 그 사람이 안 그러면 우리는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힘껏 즐기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다른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쁜 짓만큼 재미난 게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pp. 182f. ‘좋은 사람은 드물다,’ ‘세계문학단편선12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2014)

저자: Doug Bratt

고린도전서 1장

<싸우지 말라>

본문/ 고전 1:10-17

앞에서 인사말을 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고린도교회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첫 말은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싸움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교회는 싸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1.같은 말을 하라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숙히 권면하기를 “모두가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분쟁이 없고 같은 마음과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동의한다, 합한다)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합일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대화를 하고 회의를 합니다. 서로의 의견(서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을 도출해 냅니다. 그 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의견이 나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최종적으로 어떤 것을 결정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해야합니다. 모두가 함께 일해야합니다. 그것이 나의 의견이 아니었다 하여도 교회가 함께 어떤 일을 결정하였으면 그것은 이제 나의 의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의견과 다르다고 겉돌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정되기 전에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정되고 난 이후에는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 전에 내가 주장하던 것은 잊어 버리고 함께 한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이것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진행될 때 돕지 않습니다. 방관자가 됩니다. 일을 진행하다 조금 어려워지면 “거봐.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의견을 낸다는 것은 자기의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의견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고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되어졌을 때 순종해야합니다. 계속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은 교회를 나눕니다. 마음만 서로 상하게 만듭니다.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자기 생각대로 할 때만 돕고 움직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인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것입니다.

나의 의견과 다를 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의견과 같아야만 움직입니까? 같은 공동체는 의견이 다를 때도 결국 도출된 의견에 대해 같은 말을 해야합니다. 도출된 의견은 공동체의 의견이고 곧 나의 의견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교회는 분쟁하지 않고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2.싸우지 말라

싸우는 것은 어찌보면 가장 일반적인 현상일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파당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는 것은 무조건 나쁩니다. 싸울 때 보십시오. 싸울 때는 진리가 없습니다. 승리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다른 성도를 향하여 싸우는 마음 곧 호전적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야 합니다. 이 당시에 서로 끼리끼리 모이면서 싸움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파벌을 만들어서 싸우는 것은 무조건 잘못입니다. 끼리끼리 집단은 다른 집단이 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고 자기 집단이 하는 일은 무조던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집단이 하는 일에는 돕지 않고 자기 집단이 하는 일에만 돕습니다. 그것이 매우 잘못입니다. 교회는 어떤 집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것은 그 부류의 사람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자신을 평가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거부감이 든다면 그것은 철저히 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에 거부감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일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가 서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결코 싸우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해 가도록 서로 협력해야합니다. 조심하고 겸손히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가야합니다. 결코 그 누구를 향해서도 미운 마음이나 적대감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한 미음이요 적대감이 됩니다.

혹 교회의 일에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싸우는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조심하고 조심해야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싸우는 마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싸우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싸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이라 여겨지는 것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찾아진 것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이 아니라 할지라도 동의하고 함께 협력해야합니다. 결코 나누지 마십시오. 결코 파당을 이루어 다른 부류의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한 몸 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

본문/ 고전 1:18-31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분쟁하여 다투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분쟁 해결의 답으로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를 잘 알아야합니다.

1.교회에서 다투는 자

교회에서 다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똑똑하니 자기 잘났다고 말하며 다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독함이 진정 똑똑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헛똑똑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20절) 지혜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분명히 지혜가 아닙니다. 학식(선비)있는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학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론을 잘하니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다투는 사람은 결코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헛똑똑입니다. 지난 목회 생활을 돌이켜 보면 항상 교회에서 잘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분쟁을 만들며 다른 이들과 다툼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자칭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똑똑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연구해서 알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다른 사람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워하시기를기뻐하셨도다”(21절) 가장 중요한 자신의 구원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 의해 진행되기 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서로의 교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그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위해 싸우는 단순무식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그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싸움도 그칠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여 다투었다면 그것은 똑똑한 것이 아닙니다. 다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2.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에서는 다툼의 해결책으로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만 떼어 놓고 보면 수없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학만 말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능력을 내세우신 것이 아니라 독생자의 희생의 죽음을 주셨듯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우지 않기 위해 해야하는 것은 능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배우고,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만 사랑하고 자기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사랑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우리는 공동체 안의 문제에서 죽어야 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 구절만 떼어 암송할 때는 이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 신학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것은 본문의 의도를 너무 모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십자가의 도’를 들을 때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속 죽어야 합니다.

많이 죽었습니까?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판단과 감정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싫은데도 공동체이니 함께 운동도 하고, 같은 말을 해야합니다. 내가 드러나려하지 마십시오. 나를 죽여서 오직 공동체와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를 너무 모르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교회에서조차도 죽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괴상한 성품만 나타납니다. 교회를 파괴하는 악성이 나타납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그러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많이 죽어야 합니다. 계속 죽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죽어야 하고, 사람들을 향하여 죽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2002년 5월 26일 주일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 장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목사는 사업장으로,성도는 영화관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보험 정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들을 바로 세움으로 교회를 본질이 살아 있는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꿈과 비젼이 있습니다. 교회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가 먼저 본질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적은 수라고 그 본질을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2명 이상이면 됩니다. 교제의 포괄성과 교회의 질서를 위해 우리 교단법으로는 15인을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전하는 교회의 본질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고린도 전서 말씀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이 지금 우리 교회 모습을 본질의 모습으로 돌려 놓는 말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앞으로도 본질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속의 교회의 이름표

굴러가고 있으나 허망함과 고통만이 남는 세상

고린도는 큰 도시였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였고, 정신적으로는 철학의 본산이었으며, 향락적인면에 있어서는 쾌락의 결정체였습니다. 희랍 전설속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왕이었는데 이러한 고린도의 위상 때문이었는지 아주 거만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에게 벌을 줘서 영원히 언덕위로 무겁고 큰 돌을 굴려서 올린후 다시 언덕아래로 떨어진 그 돌을 또다시 올리는 일을 반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 세상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참으로 교만하지요. 세상은 우리들이 보기에 거만하기도 하지요.

세상은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물질과 정신과 쾌락이 어우러져 있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속의 사람들을 보십시요. 뉴욕속의 할렘가처럼 화려함의 뒤안길에 그늘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고요. 화려함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 조차도 고통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무엇을 한들 그것은 허망하게 돌을 굴려 올리는 것 밖에 그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분명 힘든 무엇인가를 했는데 다시 원점이 됩니다. 항상 굴러가고 있기는 한데 더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고통만이 남을 뿐입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들(허망과 고통과 죄(영벌)에서)

교회는 보통의 세상 사람들이 모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약자들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안에 있는 것들은 세상에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들이 더 새롭고 귀한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배당 인테리어도 세상의 것들이 낫지요. 그러나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 사람들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거룩합니다.

어느 지역에 가보면 그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주로 왕들과 연결이 되 있더군요. 어떤 왕이 지나가다 좋았다고 말하고, 어느 왕이 지나가다 마물렀다는 것이지요. 세상 왕이 잠시 머물러 간 곳도 사람들은 그들의 다른 곳과 다르게 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그곳은 얼마나 거룩하겠는지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그 거하심 때문에 가장 귀한 곳이 됩니다. 가장 거룩한 곳이 됩니다.

교회된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있는 곳은 또한 거룩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예배당이 거룩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거룩합니다. 우리의 모임이 거룩합니다. 우리의 봉사가 거룩합니다. 우리의 입술의 열매가 거룩합니다. 세상속에서 밖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더이상 허망함과 고통과 죄(영벌)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고귀함과 기쁨과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요. 이 이름을 자주 잊어 버리면 이름표라도 만들어서 가슴에 차고 다니십시요.

교회에 대해 말할 때

교회는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그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교회를 파괴적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는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썩었어도 교회는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들을 사랑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를 파괴하는 많은 잘못된 의로움?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이익을 쫓으면서도 의를 쫓는 것처럼 포장하여 교회를 파괴합니다.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 교회가 나약합니까? 그렇다면 그 교회를 박차고 나올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요. 교회가 본질을 잃어 가고 있다면 지도자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그 구성원의 하나인 나의 책임도 큽니다. 그러기에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십시요. 이 땅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허약하기 짝이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런 교회라도 세워져야 합니다. 존중되어져야 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들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요. 존경하시고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큰 교회’ ‘내 교회’ 병에 걸린 한국 교인들이 병석에서 일어나서 이 땅의 교회들을 건강하게 세우는 주역이 되는 날을 소망해 봅니다.

교회안의 하나님의 역사(감사)

교회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며 은혜로 유지되어지고 은혜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안에서 그 은혜를 볼수 있는 눈이 필요 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힘이 없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입에 담기 힘든 죄가 가득한 교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보았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절).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다면 안 됩니다. 교회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안에는 항상 이 은혜와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을 양식으로 하여 교회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으면 눈을 씻고 찾으십시요. 그래도 안 보이면 볼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교화안에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큰 불행입니다.

구원의 백성, 교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8절)”그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그 교회를 붙잡으실 것이고 주님이 오시는 날에 구원 받을 백성들입니다. ‘책망 받을 것이 없는자’란 전혀 흠 없는 자가 아닙니다. 곧 지옥에 이르는 책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은 비록 고린도 교회처럼 허물이 많을지라도 그들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 기쁨으로 그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곳에 가 보십시요. 그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곳이 아무리 뛰어난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교회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타락하고 비판받아 마땅해도 오직 교회안에만 믿음과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믿음의 권세, 구원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토록 엉터리 교회(목사님은 성경말씀을 조금하고 거의 주변 이야기만 합니다. 자신 조차도 모르고 합니다. 돈 독이 올라 있습니다. 명예욕이 올라 있습니다. 은혜가 참 없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본질도 모르고 다닙니다)에서도 구원받는 주의 백성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성경말씀(그리스도)을 전하는 한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제입니다.

이 구원이 있는 교회를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이 교회를 개혁해야 하며, 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법이 적용됩니다

세상 법에 물든 자신의 습관을 버리고

세상은 각자가 보기 좋은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그 각자가 좋은대로 행하면서 그 속의 분쟁을 해결하며 공정한 게임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는 각자가 좋은대로가 아닙니다.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어 선악을 자기 좋은데로 정하지만 교회는 선악과가 아닌 그리스도를 따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선악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분파를 나누고 자기의 사람을 만드는 그 행위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 습관을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옴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상에서는 분파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당이라는 것이 있고 합법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향대로 무리를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습관대로 교회에서도 자신의 성향에 따라 게바파와 베드로파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편의 세를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습관에 호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도 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계급과 지위고하를 내려 놓고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10절).

십자가의 도

그리스도를 믿노라 말하면서도 행동의 원칙이 세상적인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세상적인 행동원칙을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법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들의 행동의 원칙은 오늘 본분에서 특별히 ‘십자가의 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순종과 복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과 복종 그리고 섬김이 때로는 참으로 어렵지요. 세상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최고로 좋은 것으로 대접받는데 교회에서 어떻게 자기가 밥을 가져다 먹고, 또 밥을 가져다 줄수 있겠는지요? 세상에서는 대통령으로 말 한 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주일학교 교사를 한 번 해 보십시요. 때로는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데요. 구질구질 하기도 하고요. 그러기에 교회에서 교제한다는 것, 교회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울 때가 많이 있지요. 그래서 자기들의 입맛에만 맞게 신앙생활을 하고 결과적으로 교회에서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것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지요. 교회 생활을 하려면 이 십자가의 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면 그 교회는 분열과 분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알 때만이 성도의 교제를 통해 은혜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도의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본질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사단장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라고 교회에서 자기의 자리를 따로 만들고 섬김 받기를 원하며 권세 부리려고 한다면 그는 백날 다녀도 신앙이 자라가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서 신발을 정리하고, 부엌일을 하고, 섬겨 보십시요. 그러면 그는 그 어느 곳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것을 배울 것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함…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교회에서 표적이나 지혜와 같은 어리석은 것을 구하지 마십시요. 표적(큰 것)을 구해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혜(합리적인것)를 찾아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죄인으로서 참담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만이 다른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따라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모든 표적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모든 지혜를 허무는 하나님의 지혜(본질적이고 가장 지혜롭게 하는)를 볼 것입니다. 이 역설을 아십니까? 경험하여 보셨습니까? 아시길 기도합니다. 직접 경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낮아지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가장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진리, 십자가의 도라는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것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고 참 인생을 살게 하는 참 지혜를 아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당신에게 교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의 그 거룩함을 아십시요. 교회만이 가지는 기능, 구원의 놀라움을 아십시요. 교회의 역설적 법칙 ‘십자가의 도’를 아십시요. 그래서 교회를 더욱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라는 이름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과 내가 교회라는 이름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열정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지혜롭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지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시대입니다. 오늘 하루 아침에 신문에서 읽는 정보의 양은 조선시대의 몇 년에 걸쳐 얻는 지식보다 더 많습니다. 중세시대의 평생 얻는 정보와 맞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 바르게 더 지혜롭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떤 누구도 확신있게 대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더 지혜롭게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식으로 겉멋은 잔뜩 들었지만 실재적으로는 지혜가 없음으로 빈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하게 내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

본문:고전1:1-9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절)

바울은 그가 쓴 신약성경 모든 곳에서 처음 인사말을 ‘은혜와 평강’을 구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만큼 그는 ‘은혜와 평강’을 기독교인의 큰 특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성도의 특징이요, 특권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지는 것을 발견할 때 하는 말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때 자연히 우리안에 있는 좋은 마음입니다. 잔잔한 호수와 같은 평온한 마음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요. 지금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우리의 왼쪽 옆구리를 찌르면 ‘은혜’라는 말이 툭 나오고, 우리의 오른쪽 옆구리를 쿡 찌르면 ‘평강’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까? ‘은혜와 평강’이 우리안에 넘쳐 그 말을 우리의 입에 달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합니다. 우리안에 언제나 은혜와 평강이 넘쳐 우리입에 항상 달고 다니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혹 우리안에 그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어찌된 것입니까? 그것은 그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시입니다. 그러기에 빨리 회복해야 하는 것을 말해주는 나팔수가 되는 것이지요.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지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통로가 막혀있다는 것입니다. 그 통로가 막혀서는 안 됩니다. 빨리 뚫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4절)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를 왜 쓰고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안의 분쟁과 수많은 잘못들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훈계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회안에 있던 문제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새로운 어떤 사실 때문에 그 전의 많은 것들을 잃어 버립니다. 지금 고통이 있다고 그 전의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매를 맞는다고 그 때 부모님의 사랑을 잊어 버리고 매맞는 사실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잘못 때문에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까지 잊어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그는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항상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망하기에 앞서 지금 그는 고린도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9절까지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장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있는 그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도 고린도 교회의 있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의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고린도 교회의 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의 믿음을 가꾸어 가실 것을 확신하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강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약할 때도 사랑하십시요. 믿음이 약할 때 세상속에서 때로는 추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조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셔서(신실)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그 분의 형상으로 가꾸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믿음이 약하여도 이미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백성 삼으셔서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고, 거룩하게 가꾸어 가시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그의 백성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은혜와 평강을 느끼며, 누리며 그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하며(이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산자로서 삶) 살기를 바랍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가 성도가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가슴에 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입시다

본문:고전1:10-17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제중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리였습니다.

분쟁이 왜 중요한 문제입니까? 분쟁은 교회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 의견이 항상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인 곳은 항상 분쟁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분쟁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분쟁이 없는 곳어어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시작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기 때문입니다. 다른 단체처럼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있는 단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있는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들어가며 자신의 자아를 죽이며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분쟁이 있다함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그 자아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죽은줄 알았던 자아가 살아나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움직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자리가 좁아집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분쟁이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빨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분쟁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비위를 맞춤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입니다. 교회는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쟁은 복음으로 해결해야합니다. 교회의 분쟁은 분쟁의 당사자들이 복음으로 자신의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13절) 바울은 먼저 자신을 죽였습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며 자신을 죽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죽여야합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자신을 죽일 때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죽을수록 좋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죽을수록 좋습니다. 우리가 죽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믿음을 가질 때는 울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느새 죽은지 알았던 그 자아가 다시 악령처럼 살아나 자신이 드러나기를 좋아하고 대접받으려 합니다. 그 때 다시 죽여야합니다. 자신을 죽여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 때로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내가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분쟁을 만들면 그 때 또 죽어야합니다. 그 일이 선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죽는 것이 더 선한 일일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때로는 복음에 역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분쟁이 있을 때 저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분쟁 때문에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복음이 가려지고, 실족함이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말의 지혜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내 주장을 밀고 나가기 보다는 아무리 내 의견이 좋아도 그냥 내가 죽는 것이 나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분쟁은 일 때문에 복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일 때문에 복음이 가려져셔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일보다는 복음이 우선입니다. 분쟁은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분쟁은 불편해하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복음은 아무리 얄미운 사람이라도 사랑합니다. 복음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에게도 복음은 전합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일소시킵니다. 복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안에 분쟁이 없도록 기도하며 앞장섭시다. 교회가 복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도록 내가 죽읍시다.

황송한 사랑

본문:고전1:26-3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교회의 본질이요 힘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분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어떤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말없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도는 어쩌면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싸워 이기는 것도 부족한데 왜 져줍니까?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본질입니다.

사랑하여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도’가 교회의 힘의 원천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논쟁으로 분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왜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죽어야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교회는 분쟁하여 이김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로 죽을 때 힘을 발휘합니다.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자신의 똑똑함으로 이기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 그 사람이 받은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가 똑똑하여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나 문벌에 비례하는 것이라면,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더 문벌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조금 똑똑함을 믿고 그것을 말하려하면 그 사람은 구원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 똑똑함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얻음은 그 똑똑함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똑똑함으로 다른 사람을 따지며 분쟁하려고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더 옳으면 얼마나 더 옳겠습니까?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아야합니다. 복음을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27절)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의 도’가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 십자가의 도가 위대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죽어주는 것’이 위대합니다. 나의 똑똑함으로 다른 사람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복음을 알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곧 자신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구원을 알 게 되면 황송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황송합니다.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황송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황송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사람들은 그 황송한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삽니까?

내가 받은 그 황송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며 삽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황송하게 여기기까지 사랑합시다. 이러한 사랑을 꼭 하십시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그 사람이 황송하게 생각할 정도로 지극히 사랑하십시요. 내가 똑똑해도 내 똑똑함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십자가의 도처럼 철저히 낮아져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십시요. 그러면 이제 사람들은 우리의 그 아낌없이 주는 사랑에 황송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런 황송한 사랑을 하십시요. 우리가 황송한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황송한 사랑을 해보십시다.

황송한 사랑앞에 어찌 분쟁이 있겠습니까? 분쟁은 ‘십자가의 도’를 잃어 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황송한 사랑’으로 섬기십시요. 교회의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황송한 사랑이 오고가는 그런 만남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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